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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162-168

162화

화려한 공략이었다.

밀림 전체가 불타올랐다.

탈진해 버린 매켄지.

그도 그럴 것이.

무시무시한 광역 화염 마법 3개를 너무 급하게, 연속적으로 펼치느라 마나를 영혼까지 끌어 써버렸기 때문이다.

펜트하우스로 다 함께 돌아왔지만 매켄지는 대자로 뻗어 거실에 드러누워 있었다.

'무리했구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짜내 마법을 펼쳤겠지.

백색 탑에서 편히 쉬게끔 일괄 소환 해제.

스팟! 스팟! 스팟....

잠시 시간이 흐르고.

백색 탑에서 메켄지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아이고, 공략 두 번 하다간 사람 잡겠네. 하여간 수고 많으셨어요."

"벼, 별말씀을."

"핵폭발보다 더 강력하던데요?"

"설마 핵에 비할까요. 한낱 불장난일 뿐이오만.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주혁의 칭찬에 잔뜩 고무된 매켄지, 자연스럽게 자신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다른 피소환인들도 계속 칭찬 세례.

"화끈하셔! 상남자야, 상남자!"

"수고했다. …오늘 술 한잔 같이하겠느냐?"

"매켄지 님, 큰 공을 세우셨군요. 앞으로도 기대가 무척 큽니다."

"계속 같이 갑시다. 영차!"

매켄지도 화답했다.

"영차!"

마침내 이루어진 재평가.

이제야 편안해진 마음.

동시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자신감.

마리 년이 뭐랬더라?

뭐, 등반 공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인정받았는데?

해보니까 되던데?

시작일 뿐이다.

비록 화염 마법 특성상 가죽 채집 공략엔 불리하지만, 83층처럼 대량 살상 공략 임무에선 자신이 독보적.

자리 하나 완전하게 차지했다.

이제 소외되는 일은 없을 터.

"그건 그렇고, 아까 소환되실 때 뭘 만들고 계셨어요?"

씨익, 웃는 매켄지.

그러고 보니 공을 세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티팩트입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주혁.

대체 어떤 아티팩트이길래.

좀 전에도 소환된 줄도 모르고 몰두하고 있던데.

"혹시 어떤?"

"우리 패밀리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시장에 팔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품에서 두 개의 팔찌를 꺼내 들면서.

"일명 비만 탈출의 팔찌!"

짜잔!

음악과 함께 둥실 떠오르는 팔찌들.

팔찌 두 개 중 하나는 은빛, 하나는 거무칙칙한 검회색빛.

둘 다 허공에서 천천히 회전하면서 반짝반짝 빛난다.

하다 하다, 이젠 자신이 만들어 낸 아티팩트에도 특수효과를 부여하는 매켄지.

"손목에 차고 있으면 몸의 균형을 잡아 주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여 천천히 살을 빼게 해 주는 아이템!"

홈쇼핑 쇼호스트 같았다.

"오리할콘 금속으로 만들어 비싸냐고요? 아닙니다!"

거무스름한 팔찌가 툭 튀어나오더니.

"이건 아다만트로 만든 팔찌죠. 오리할콘과 성능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아다만트라면 탑 금속 중 가장 흔한 것.

백색 탑 창고에도 널렸다.

"게다가 일반 마정석으로 충분한 효과를 보이니, 생산비 절감 효과도 있어서 매우 쌉니다."

대단하다.

역시 9서클 마법사다.

"…이걸 시장에 팔자는 말씀이시죠?"

"네, 건강 팔찌로. 의약품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계획이다.

오히려 가죽 장사보다 더 큰돈을 벌 수도.

"하나 단점도 있긴 하지만."

"뭐죠?"

"일반 마정석이라 인챈트 지속 유효기간이 3개월 정도입니다."

더 좋은데?

3개월마다 한 번씩 팔찌를 새로 사야 하니까.

전 세계 비만 인구가 몇 명인가?

어마어마한 숫자.

단순히 살만 빼는 게 아니다.

당뇨, 고혈압, 콜레스테롤… 사람이 건강해진다.

목숨을 살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야 하는데....'

매켄지도 그 점을 알고 있는 듯.

"몸체가 되는 팔찌는 외부에서 주문 제작해서 대량으로 가지고 오면 됩니다."

인챈트 마법은 어렵지 않단다.

마정석이 들어갈 홈과, 가루를 채워 넣을 음각 부분만 만들어져 있으면.

"누가 수식을 그대로 베껴서 만들면요?"

"수식만 그린다고 작동하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연금술사가 정제한 고순도 마정석 가루.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식을 활성화하는 인챈트 마법 주문.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아무런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그럼 몸체는 플레이어 샵 공방에 의뢰할까?

거기서 주문해서 가져오면....

바로 그때!

"호에,"

수줍게 손을 든 라직스.

"왜요?"

"팔찌 만들어요. 호에."

"응?"

"많이 만들 수 있어요. 후에에에."

맞다.

라직스가 가진 스킬엔 대장 수리도 있었다.

성검을 수리한 경험도 있고.

"진짜 대량 생산 가능해요?"

"호엥!"

"아유, 우리 머슴님은 못 하는 게 없어."

"후에."

"공방부터 만들어 보죠."

백색 탑에서 공장을 돌려 팔찌 생산.

이러면 탑 전용이라는 수식어를 뗀 아이템을 마음껏 찍어 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 모습에 매켄지는 씁쓸한 심정.

라직스가 대장 제작도 한다고?

진짜 못 하는 게 없다.

만능일꾼에 우주대머슴.

당분간 이기는 건 단념하자.

라직스는 현재 붙박이 1인자의 지위.

그래서 매켄지가 노리는 건 넘버투.

'2인자로도 충분해.'

밑에 10명은 깔고 가는 셈이니까.

한편 주혁은 더없이 만족했다.

역시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무슨 일이든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

하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

9서클 마법사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진짜로 되는지 실험이 필요한데....'

유사 과학이라 오해받을지도.

게르마늄 팔찌, 음이온 발생기, 육각수, 전자파 차단 스티커 같은 것들.

'플레이어 말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러자 코사크가.

"두 개 중 하나는 저 주십쇼."

"네?"

"주변에 잘 아는 비만인 한 명 있슴다. 실험 대상으론 최적임다."

"아!"

누군지 알겠다.

"건강해야 함다. 최소한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잘됐다.

하나는 김인중 위원장에게 줘서 실험해 보고.

나머지 하나는?

주혁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오래오래 자신의 회사를 경영해 줬으면 하는 인물.

'정동훈 대표님한테 줘야겠네.'

그건 그렇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매켄지 드로낙 대마법사님!"

"음? 왜...."

"앞으로 오세요."

"어어… 설마?"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플래티넘 배지 하나를 꺼냈다.

"헉!"

후다닥!

달려와서 꼿꼿하게 선 매켄지.

"귀하는 83층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를 훌륭하게 처리하고, 백색 탑 17층의 운영 자금 조달을 위해 비만 탈출 아티팩트 제작에 힘쓴바, 이에 대한 공로로 플래티넘 배지를 수여합니다."

동시에 웅장하게 울리는 배경 음악.

짠, 짜라잔잔, 짠짠라라라.

펑펑!

허공에선 소형 불꽃놀이.

매켄지가 가슴을 쑥 내밀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플래티넘 배지.

짝짝짝짝짝짝!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피소환인들.

"자, 파티합시다."

마음껏 놀아 보자.

그리고.

"매켄지 님. 혹시 술 드시나요?"

"말술이라오."

아싸!

술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

사실 노인네 두 명이지만.

뭐, 그게 어때서.

고기도 굽고,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일광욕도 즐기고, 영화 볼 사람은 영화도 보고.

쪼르륵.

주혁은 오늘의 주인공 매켄지에게 한잔 먼저 따라 주었다.

"어이쿠, 이렇게 황송할 데가."

그리고 광마에게도.

쪼르륵.

확실히 3명이 함께 마시니 술맛이 더 좋다.

안주가 없어도 되겠다.

매켄지는 행복했다.

소환사의 칭찬에, 배지에, 게다가 그가 직접 따라 주는 술까지.

이 정도면 자격은 충분하지 않나?

넘버 쓰리쯤은 되는 것 같은데.

2인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져야지.

그렇다면 누굴 제쳐야 할까.

'광마?'

아니다.

그도 들은 이야기가 있다.

광마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소환사의 심기를 매우 언짢게 했다고, 그래서 최하 별점에 몇 번 나와 보지도 못했다고.

광마는 위협 대상이 아니다.

충분히 이긴다.

'저 공주 선녀는....'

신묘한 부적술을 사용하지만 자신만 못하다.

더불어 힘만 센 야만 전사도, 방구석에서 안 나오는 욕쟁이 엘프도, 대단한 비주얼의 마총사도.

그럼 한 명 남는다.

암살자 코사크.

공략 때마다 소환사 옆에 딱 붙어서 갖은 알랑방귀를 다 뀌어 대는 놈.

그놈이 소환사의 심복이자 현 2인자다.

코사크를 제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1인자 우주대머슴 다음, 2인자인 우주대마법사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놈을 발아래 둘 수 있을까?

그처럼 화려한 말주변을 구사하는 건 어려운데.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보, 봉 소환사님."

수영하다 말고 코사크가 술자리로 헐레벌떡 뛰어와서.

"왜요?"

실실 웃으며 슬며시 속삭이는 말로.

"진숙이 만났슴까?"

"...."

주혁은 흠칫 놀랐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설마?'

휙! 고개를 돌려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는 그녀.

베 상사구나.

"베 상사에게 다 들었슴다."

"…그, 그거야 우연히."

"세상에 우연이 어딨슴까? 다 운명임다."

무슨 소리야?

운명은 무슨!

"…세상 생각보다 좁아요. 어쩌다 보니 만난 거지."

하지만 코사크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실제로 진숙이 보니 어땠슴까?"

"…베 상사보다 못하던데요?"

"당연한 말 아임까! 베 상사를 누가 이김까? 베 상사 기준으로 눈높이 정하면 큰일남다."

"…그렇긴 하죠."

어디 베 상사뿐인가?

몽마 출신 디아마트도 그렇고, 요즘 선녀로 격상해서 부쩍 성숙해진 견달래도 그렇고,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태생이 엘프인 마리도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진숙이 진지하게 만나보는 게 어떻슴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결혼을 하라는 게 아임다. 저도 진숙이는 싸모님으로 반대임다. 그래도 상남자로 태어나서 연애 정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슴까?"

"...."

솔직히 그녀와 연애도 해 보고 결혼도 해 봤다.

아이도 5명이나 낳았다.

유치원도 보내고, 학교도 졸업시키고, 취직도 시켜서 손주까지 봤다.

물론 다 상상 속에서.

그건 그렇고.

지금 누구에게 연애 상담을 해.

"뭐, 그렇다고 해도 모태솔로 조언은 듣고 싶지 않네요."

"아유, 봉 소환사님 모르셨구나? 제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무슨?

"제가 평양 시내에 나타나면 여자들이 질질 눈물을 흘리며 인민무력부장 동지! 하면서 막 달려듬다. 안아달라고 난리임다. 앞으로 걸어가지도 못할 정도임다."

"...."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자랑질이야?

확! 소환 해제해 버릴까?

"제가 진숙이 전화번호 따드림까?"

"거참! 내가 지금 연애할 상황입니까? 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 17층도 꾸며야 하고, 상층 등반도 해야 하고, 비만 탈출 팔찌도 만들어 팔 생각에, 머리가 얼마나 복잡한데, 어? 어!"

"…죄, 죄송함다."

누구는 연애 안 하고 싶은 줄 아나.

다만 눈이 너무 높아졌고, 여자와 말해 보려면 특유의 하남자 근성이 나와서 버벅대기만 하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에이 씨, 술맛 떨어지게.'

말이 아닌 눈빛으로 코사크를 비난하는 주혁.

눈치 빠른 피소환인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우르르 달려와서 코사크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어이가 없군. 지가 무슨 연애 전문가인 것처럼 나대니."

"주제에 인기는 무슨, 인민무력부장이니 배경 믿고 달려드는 거지."

"여자나 사귀어 봤겠습니까? 말끝마다 슴다, 임다 하는데, 누가 좋아할까요."

"아주 매를 벌어요. 매를."

"전사는 암살자가 한심하다."

"카탈로그 확장하지 않고 무작위 소환을 해야 했어."

"맞아. 그럼 삭제되었을 텐데."

"이 기회에 코사크 님 입을 꿰매야 하옵니다. 만악의 근원이옵니다."

"꿰매기는 무슨, 입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터뜨려 버리지."

"호에에액!"

"컹컹! 크르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코사크.

"아, 아, 아임다. 오해임다. 내가 말한 뜻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변명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애를 썼지만 될 리가 있나?

주혁은 가만히 있었다.

욕 먹어도 싸다.

순간!

띠링!

테블릿으로 도착한 메시지.

열어서 확인해 보니.

마리에게서 온 메시지.

그러나 자신에게 온 건 아니다.

코사크에게 대신 전해 달라며 왔다.

"어우."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들.

당사자에게 보여 줘야지.

"코사크 씨?"

"네, 네넴?"

"마리 씨에게서 온 메시지입니다. 읽어 보세요."

코사크도 어떤 내용인지 눈치챈 듯.

"…안 읽어 보면 안 되겠슴까?"

"여기요."

실눈을 뜨며 태블릿 대화창을 읽었는데.

"어우."

코사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투성이.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이참에 코사크의 목을 베어 소환 불가 100일 동안 어디서 머무르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코사크.

꿀꺽.

그걸 보고 있는 매켄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술이 확 깬다.

명실상부한 피소환인 2인자가 말실수로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

자신보다 더 심하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좋아해야 하나?

천만에!

자신도 언제든지 코사크처럼 될 수 있다.

경험도 해봤고.

이곳은 마굴이다.

백번 잘하다가도 한번 삐끗하면 그 길로 조리돌림,

'살얼음판이야.'

바짝 긴장해야 한다

욕심 같은 거 버리자.

2인자는 무슨!

저 밑으로 미끄러지지만 않으면 선방하는 거지.

바로 그 순간!

스팟!

백색 탑 17층에 나타난 한 사람.

"오! 전 청장!"

"월세 거주민 왔다."

"호에!"

전광일이었다.

요즘 하루에 한두 번씩 꼭 찾아온다.

주혁이 월세권을 끊어 줬기 때문이다.

"어음, 제가 잘못 왔나요?"

"아유, 아임다. 제때 왔슴다. 우리 전 청장님!"

코사크가 재빠르게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

전광일 청장 덕분에 비난 세례가 멈췄으니.

주혁도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어서 오세요. 이리 와서 한잔해요."

"…저기, 차를 타고 가야 해서."

"대리 부르면 되죠."

또 한 사람의 술친구.

4명이 모인 술자리.

분위기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술이 막 들어간다.

은근하게 올라오는 술기운.

광마가 진기를 운행해 취기를 몰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줬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 아깝게 왜 깨?

마시다가 뻗는 한이 있어도.

잔광일도 기분이 좋은 모양.

"어르신들, 제가 소맥 한잔 멋지게 말아 올리겠습니다."

"허허허, 소맥은 공무원들이 잘 말지."

"나랏일 하느라, 우리 소환사 뒷일 봐주느라. 고생이 많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뭘!"

이젠 피소환인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전광일.

그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오늘 술맛 제대론데?'

이게 다 프라이빗한 백색 층 17층이 있기 때문이다.

아련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는 주혁.

현재 만들고 있는 공간, 자신의 도시.

'흠.'

뭔가 살짝 모자라다.

이곳을 대표할 만한 무언가가 없을까?

문득 정동훈 대표를 만나러 갔다가 복사해 온 강남대로 61층 빌딩이 떠올랐다.

1조짜리 빌딩.

사 놓고도 몇 번 가 보지도 못했다.

'복사도 해 왔으니까.'

저쪽에 붙여넣기 하면 좋겠는데.

'해 봐?'

[해당 건축물 붙여넣기에 드는 비용은 상급 마정석 50t입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

50톤.

많다.

상급 마정석 시세로 환산하면 1,000억이 넘는 돈.

'이걸 붙여, 말아?'

사실 백색 탑 17층 꾸미기도 꾸미기지만, 엘리베이터를 건설해 보려고 계획 중이었다.

설치에 드는 비용은 상급 마정석 300톤.

현재 모은 상마는 200톤 조금 넘는다.

'솔직히 궁금하긴 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디로 이동하는지.

진짜 다른 평행우주 차원?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백색 탑 수직이동?

'그런데 여기에 50톤을 써버리면....'

엘리베이터 설치가 지연되겠지.

붙여넣기 가치가 있을까?

'못 할 게 뭐 있어? 언제는 가치를 따지면서 움직였나?'

까짓거 50톤, 금방 모은다.

내가 누군데?

백색 탑의 상남자 아닌가!

벅차오르는 주혁.

웅장해지는 가슴.

"어이쿠, 광마 님 술잔이 비었군요."

"전 청장이 따라 주는 술이 유독 맛나는군."

"하하하, 그럼 제가 한잔 더 따라드려야죠,"

"나는?"

"매켄지 님도 바로 따라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술 마시게 내버려 두고.

주혁은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갔다.

손을 들어 위치를 가늠하고.

"붙여넣기 간다!"

무슨 소리야?

술을 먹다 말고 주혁을 바라보는 사람들.

"솟아나라! 허이짜!!!"

그때였다.

우우우웅!

진동하는 백색 탑 17층의 지면.

차차착! 차착!

워낙 커서 밑부분부터 붙여지기 시작하는 마천루 빌딩.

차차차차차착! 차차차차착!

마치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하늘 위로 쑥쑥 올라갔다.

빌딩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평평한 공간에 별안간 초대형 빌딩이 세워지고 있었다.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이 기막힌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피소환인들.

저게 뭐야?

그들도 복사와 붙여넣기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덜덜덜덜.

광마의 잔에 술을 따르던 전광일의 두 손이 떨렸다.

주르르륵.

자신의 잔이 넘치는 것도 모르는 광마.

띠링!

매켄지의 머리 위엔 물음표 모양의 시각 효과가.

코사크도, 고방도, 견달래도, 바르딘, 베 상사, 제페트, 디아마트, 라직스, 혈랑, 그리고 창문 틈으로 눈만 빼곡 내민 마리도.

"…어?"

"헐!"

"마, 맙소사."

"저, 저게?"

"허허."

"미쳤군."

"...."

"와."

.

.

.

장관이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창조였다.

신의 권능에 비견되는.

스파파파팟!

그리하여 백색 탑 17층에 1조 2천억짜리 61층짜리 빌딩 복사판이 생성됐다.

163화

차차착! 차차차착!!!

솟아난다. 빌딩, 빌딩.

쑥쑥, 쑥쑥쑥!

주택단지 맞은편에.

그냥도 아니고 61층짜리 빌딩이 생겼다.

해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솔직히 '될까?' 의심은 했었다.

단층짜리 주택도 아니고, 5층, 10층짜리도 아니고.

그런데 됐다.

현실과 똑같은 빌딩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어우.'

술이 확 깬다.

즉시 밀려오는 후회.

'…환불 안 되나?'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지?

상마 50톤.

아마 창고 안에 보관한 상급 마정석의 25%가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미쳤구나. 봉주혁, 미쳤어.

날아간 돈만 1,000억.

하아.

피소환인들이 뭐라고 하면 어떡하나.

백색 탑 17층 엘리베이터 설치 비용 상급 마정석 1,000톤.

그거 모은다고 북한에서도 마정석 매입하고, 광맥 캐내고, 아이템 추가 획득권도 쓰고, 생쇼를 다했는데.

'술김에 50톤을 써 버렸네.'

보는 눈이 곱지 않을 것이다.

별 필요도 없는 건물을 왜 붙여넣기 했냐고.

정신이 있느냐고 없느냐고.

피땀 흘려 모은 상마 50톤,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서 기분 좋으냐고.

주혁도 목격한 바 있다.

매켄지와 코사크가 실수 하나 때문에 조리돌림 당하는걸.

물론 자신에겐 그렇게 심하게 뭐라 하진 않겠지만....

- 소환사, 실수하셨소.

- 공자님, 경솔한 행동이시옵니다.

- 으잉? 봉 소환사님, 너무 나가셨슴다.

- 전사는 소환사의 무절제가 안타깝다.

- <마리> : 낭비가 심한 것 같아요. 실망이에요.

.

.

.

이 정도 소린 충분히 들을 것 같은데.

'이제 내가 욕먹을 차례인가?'

그런 것 같다.

우르르르.

주혁이 서 있는 쪽을 향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

그래.

시원하게 욕먹자.

뭐, 감수해야지.

그럴 짓 했으니까.

"봉 소환사님!!!"

코사크가 부른다.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천진난만하게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는.

"…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코사크.

"머, 멋짐다. 환상적임다. 우리 17층도 이제 시골 촌구석 아임다. 도시임다."

아아아.

개국공신 코사크.

어떻게 저렇게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할까.

"집값 떡상하는 소리가 들림다. 앞으로 일세권, 월세권도 2배 받아야 함다. 역시 봉 소환사님임다."

뒤를 이어 다른 피소환인들도.

"실로 놀라움 따름이오.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소."

"소환사, 이건 마법을 넘어선 무언가요. 권능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소녀도 기절할 뻔했나이다."

"빌딩 준공, 축하드립니다. 지휘관님."

"저, 저기, 들어가서 구경해도 됩니까?"

"청소… 호에!"

<마리> : 최고예요. 멋지세요♥♡♬♬♪♪

휴우.

다행히 욕은 안 먹는구나.

그런데!

띠링!

뭔가 울렸다.

설마?

[업적 : 백색 탑 17층에서 랜드마크 등급의 대형 건축물을 붙여넣었습니다.]

오! 업적!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뭐지?

또 백색 탑 관련 보상인가?

[백색 탑 17층 배치 메뉴에서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배치 메뉴라면 복사와 붙여넣기인데.

뭐가 달라진 거지?

메뉴를 확인해 보니.

<건축물 일괄 복사>

최대 1㎢ 면적에 위치한 모든 건축물을 일괄 복사합니다. 외부에서도 복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건축물 일괄 붙여넣기>

일괄 복사한 건축물을 붙여넣어 배치합니다. 면적과 크기, 가치에 비례해 상급 마정석 비용이 발생합니다. 원하지 않는 건축물은 붙여넣기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

지역 하나를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말.

1㎢라면 서울의 작은 동(洞) 하나 되는 면적.

대치동이나 행운동 같은 곳.

뭐, 꽝은 아니네.

술김에 세웠는데, 그래도 업적 하나 달성했구나.

그럼.

"들어가 봅시다. 안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우르르르.

빌딩 쪽으로 뛰어가는 사람들.

"지하 주차장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원 빌딩이 지하 6층에 지상 61층이니까.

빌딩 주변엔 아무것도 없어서 황량했지만 내부는 깨끗했다.

딱 새로 준공된 그 모습 그대로.

복사된 건 건물의 기초시설물과 필수 인테리어.

"엘리베이터도 있사옵니다."

건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말하는 모양.

백색 탑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화장실 보십쇼. 다 깨끗함다, 물 콸콸 나오고 쑥쑥 잘 내려감다."

상하수도 시설도 완비.

어디서 물이 오고, 어디로 물이 내려가는 걸까?

이상한 것도 없다.

애초에 복사 붙여넣기 자체가 신비한 현상인데.

그나저나 이곳은 어떻게 활용하지?

'에이, 모르겠다.'

일단 놔둬 보자.

어딘가 쓸데 있겠지.

*

다음 날.

한국 각성 관리청.

전광일은 자신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어제는 너무 과음했다.

그러나 멀쩡했다.

오히려 술 마시기 전보다 더.

효과 끝내주는 숙취 해소 음료 덕분에.

<현자가 제조한 정화의 포션>

백색 탑 17층 연금술사님께서 하사하신 물약.

마시자마자 숙취가 싹 사라졌다.

"후우."

의자에 깊숙이 등을 대고 앉아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는 전광일.

진짜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아직도 꿈만 같다.

그 큰 건물이 마치 마법처럼 만들어지는 광경을 직접 보다니.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17층을 꾸민 거구나.'

마치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누군가에게 말해 주면 믿어 주기나 할까?

물론 말할 생각도 없지만.

봉주혁 플레이어.

그가 보기엔 적어도 백색 탑 17층 안에선 신(神)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북붙이지,'

이건 창조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피소환인들도 식겁하고 놀랐지.

'봉 플레이어가 상급 마정석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알겠군.'

대체 17층은 어떤 곳일까?

세상이 망해도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

순간!

똑똑.

"청장님, 들어가도 돼요?"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민아 팀장.

"무슨 일인데?"

"탑 재료 창고에 쌓인 가죽 공급했어요. 라직스 물산과 HG 패션에."

"그래? 별말은 없었고?"

"HG 고연하 사장이 불만이 많던데요? 자기네들 공급량이 라직스 물산보다 적다고."

그 말에 코웃음 치는 전광일.

"그나마 공급해 주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해. 생각 같아선 완전히 자르고 싶은데."

"네! 확실하게 경고하겠습니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할 것이지.

앞으로도 HG 패션엔 공급을 점점 줄여 나갈 생각.

마침 이민아 팀장도 왔고.

전광일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리 와 봐. 보여 줄 게 있어."

"뭔데요?"

"이거, 83층 공략 영상이야."

"아! 어제 2번 탑 공략됐죠?"

전광일이 건네준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시청하는 이민아.

열대 밀림 같은 환경에 사방에 쳐진 거미줄.

그리고 나타난 거미들.

"으으으으...."

"징그럽지?"

"그렇긴 한데, 좀 작아요. 거대괴수라면서,"

"계속 봐."

그리고 나타난 거대 거미.

영상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다리 하나가 높게 솟은 나무보다 더 길었다.

"…미쳤다."

"그치?"

"아니, 이걸 어떻게 잡아요?"

"잡았는데?"

"…에? 아! 맞다. 봉 플레이어님 영상이지."

거대 거미가 나타나고, 새끼 거미들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쯤.

공략이 시작됐다.

후두두두두두둑!

스마트폰 영상에서 내리는 화려한 불비.

"어머나! 세상에나."

동시에 화염 폭풍, 지면에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 분출까지.

거미가 불탄다.

아예 녹고 있었다.

그전에 봉 플레이어가 가져온 영상은 그저 거대괴수의 생김새, 크기 등의 단순 정보였는데....

"이번엔 공략 영상도 찍혔네요. 근데 봉 플레이어님은 마법 특성? 소환 특성 아니셨나?"

알려진 바로는 그렇다.

소환 특성의 봉 플레이어.

"소환 특성 맞아."

"…그럼? 아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민아.

"정령 소환 특성이구나, 불의 정령! 그렇죠?"

완전히 틀렸지만 굳이 바로 잡아 줄 생각은 없다.

"비슷해."

"소환 정령의 등급이 뭐예요? 상급, 최상급? 혹은 불의 정령왕?"

"그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이 영상은 뒷부분 편집해서 세계 각국 탑 등반 부서에 보내 줘."

"네."

"불에 약할 것 같다는 코멘트도 첨부해서."

"알겠습니다."

거미가 불타는 부분은 뺀다.

아라크로이드 정보만 알려 주면 되지 굳이 공략 영상까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보여 주면 어쩌라고?

따라 할 수는 있나?

공략에 참고할 부분도 없을 텐데.

"참! 이 팀장?"

"네?"

"요즘도 다이어트해?"

"그럼요! 다이어트는 평생 해야죠. …혹시 저 살쪄 보이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저렇게 날씬한데도 맨날 다이어트 타령.

뭐, 이민아만 그런가?

남가은 플레이어도 헬스장 죽순이다.

"이 팀장, 혹시 가만히 있어도 살을 빼주는 아이템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어머? 그런 것도 있어요?"

"있다고 치자고."

"사야죠. 무조건."

"탑 아이템 같은 건데 매우 비싸다면?"

"대출 땡깁니다. 안 되면 사채도 쓸 거예요."

"그래? 알았어."

"전 이만 가볼게요. 영상 편집하러."

이민아가 나간 후.

전광일은 품에서 동그란 원형의 팔찌 하나를 꺼냈다.

비만 탈출의 팔찌.

어제 봉 플레이어에게서 받아 온 물건.

하지만 자신이 사용할 게 아니다.

이걸 쓸 사람은 따로 있다.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쿡쿡 누르자.

뚜르르, 신호음이 가고.

"여보세요. 정동훈 대표님?"

- 아! 청장님.

"가죽은 잘 받으셨죠?"

- 덕분에 잘 받았습니다. 아포피스 가죽도요. 봉 플레이어님께 감사하다고 대신 전해 주십시오.

"네네, 그래요. 전해드리죠."

- 가죽 대금은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름이 아니라 봉 플레이어님이 정동훈 대표에게 선물을 보내 오셨어요."

- 네? 서, 선물이라니,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하는데.

"하하하, 그건 나중에 알아서 하시고, 아무튼 선물이 건강 팔찌라서...."

- 건강 팔찌요?

"네, 건강 팔찌. 일단 착용해 보시고 달라진 점 있으면 즉시 피드백해 주세요. 예를 들어 체중 변화라든가."

- 혹시 탑 보상 아이템입니까?

"흐음,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어쨌든 탑 재료로 만든 아이템은 맞지만 탑 보상은 아닙니다."

- 아,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져다드릴까요?"

- 천만에요. 지금 바로 각성 관리청으로 달려가겠습니다.

대상자는 경도 비만의 정동훈 라직스 물산 대표.

팔찌가 진짜 효과가 있다면?

'떼돈 벌겠군.'

다이어트 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하다.

의료, 식품, 운동....

비만 팔찌가 시장에 풀리면 그 여파는 엄청날 것이다.

발기부전 혹은 발모제도 못 따라간다.

주위를 보라.

비만인이 많나? 탈모인이 많나?

또한 굳이 비만인이 아니더라도 살을 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법.

이민아 팀장처럼 말이다.

*

주혁의 펜트하우스.

오늘도 탑 공략부터.

17층 인력시장에서 사람들을 모집했다.

뭐, 마리만 제외하고 다 데려왔지만.

"등반하러 갑시다."

[대한민국 검은 탑(NO.2) 83층에 입장합니다.]

1번 탑 공략했으니 2번 탑도 공략해야지.

임무는 똑같았다.

[83층 임무 :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 1마리를 처치하세요.]

찐득한 거미줄에, 떼로 나타난 새끼 거미, 거대한 여왕 거미도.

그래서 공략도 똑같이.

화르르르르르… 활활, 콰콰콰콰콰!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 드로낙의 광역 화염 마법.

'흠.'

화끈한 건 좋지만....

'이번에도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털썩!

매켄지는 결국 또 뻗어 버렸다.

쉬엄쉬엄하시지.

너무 욕심 부리시네.

저번에 받았던 관심과 칭찬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

그래서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상황을 기대한 것 같은데.

그래 봤자 박수 못 받는다.

피소환인들은 냉정하다.

이미 한번 경험한 퍼포먼스에 두 번 반응하진 않았다.

심드렁한 피소환인들.

심지어 박수도 없었다.

기대했지만, 원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급 실망한 매켄지.

"쳇!"

팟!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세계 공지 : 검은 탑 NO.2(한국)의 83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우르르 흩어지는 피소환인들.

그들도 나름 할 일이 많다.

일단 비만 탈출의 팔찌 본체 제작을 위한 설비를 마련하는 게 첫 번째 할 일.

'그나저나....'

1번 탑 2번 탑 83층, 모두 S+++ 등급으로 공략했으니 총 4개의 플래티넘 배지 획득.

그래서 누적 배지 136개, 현물 14개.

누적 특전을 받을 수 있다.

'확인!'

[플래티넘 배지 13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별거 안 주겠지?'

[특전 : 신(新) 럭키 랜덤 박스를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응?'

럭키 랜덤 박스.

이런 거 전에 한번 받아 본 것 같은데.

그래서 신(新)이라고 붙은 듯.

'오!'

럭키라면 좋은 게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인벤토리를 열어 보니.

크기가 케이크 박스만 한 나무 상자.

위쪽으로 상자를 열 수 있는 뚜껑도 달렸다.

정보 확인.

<럭키 랜덤 박스>

특징 : 개봉 시 정해진 5종류의 아이템 중 1개가 랜덤으로 나옵니다.

종류 : 다국적 탑 이용 티켓, 특성 강화의 룬, 상급 마정석(200t) 교환권, 최상급 마정석(20kg) 교환권, 플래티넘 배지 50개 교환권(누적 배지에 포함 안 됨. 특전 획득 불가).

"헐!"

이게 뭐냐?

예전에 받았던 <랜덤 박스>는 탑 보상 아이템이 3개가 나왔는데.

이건 딱 1개만 나온다.

그런데 다들 예사롭지 않다.

상마 200톤, 최마 20kg 교환권에, 특강룬, 다국적 탑 이용 티켓, 그리고....

'플래티넘 배지 50개 교환권이라고?'

배지 50개면 검은 탑 미공략 25개 층을 S+++등급으로 공략해야 받을 수 있는 것.

누적 배지에 포함이 안 되는 한계가 있긴 했지만.

즉, 50개를 획득해도 따로 특전은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래도 그게 어딘가?

'좋은 거네.'

우리 피소환인들한테 배지를 막 나눠 줄 수 있다.

안 그래도 고작 14개만 남아서 걱정했는데.

'이거 받으면 우리 베 상사, 등급 돌파 보낼 수도 있고.'

아무튼 '럭키'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하다.

뭐가 나와도 좋은 것들.

물론 특성 강화의 룬이 최고지만.

그러나 지뢰가 하나 섞였다.

바로 다국적 탑 이용 티켓.

이거 밟으면 망한다.

'5분의 1 확률로 똥을 밟을 수 있다는 건가?'

하나만 비껴 가면 된다.

나머지는 다 좋은 것들뿐이다.

'흥, 행운? 그까짓 거....'

행운 하면 자신, 봉주혁 아닌가.

이번에도 최상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덥석 뚜껑을 잡아서, 과감하게 상자를 열려고 했지만.

"...."

희한하다.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폭망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거, 다국적 탑 이용 티켓 나올 것 같은데.'

불길하다.

여느 때와는 다르다.

사실 지금까지는 매우 운이 좋았다.

시도했던 일들이 모두 대박 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좋을 거란 보장은 없다.

운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늘 좋다가도 한번은 무조건 삐끗하기 마련.

그때가 지금인 것 같고.

'…다른 사람 시켜 볼까?'

그럼 망해도 욕은 안 먹겠지.

내 행운이 안 먹힐 것 같으면 남의 행운으로.

그래.

'해 보자.'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면서.

"비상! 비상입니다. 다들 모이세요."

주혁의 외침에 우르르르, 달려오는 피소환인들.

"코사크 왔슴다, 무슨 일임까?"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완전 군장 쌉니까?"

"무슨 일이오. 소환사."

"공자님, 소녀 대령했나이다."

"전사도 왔다."

주혁은 상자를 꺼내 두 손으로 들고 코사크에게 쑥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한번 열어 보세요. 빨리빨리!"

반색하는 코사크.

"오! 선물임까? 아유, 뭐 이런 걸 다...."

코사크가 나무상자 윗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려는 순간!

멈칫!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거 혹시 랜덤 박스 같은 거 아임까? 열면 특전 나오는?"

어떻게 알았지?

"어음, 아, 안 열고 싶슴다. …고방 시키면 안 되겠슴까?"

안 속네.

눈치는 빨라 가지고서는.

164화

어쨌거나 떠넘기기 실패.

칫! 이래서 눈치 빠른 피소환인은 곤란하다니까.

'에이, 그냥 열어 보지.'

지뢰 밟으면 비난을 듣겠지만, 그동안 수많은 욕으로 맷집을 단련한 코사크 아닌가?

또 무조건 지뢰 밟으라는 법 있나?

오히려 그럴 확률이 낮은데.

좋은 거 뽑아내면 칭찬받을 기회고.

"저, 절대 안 염다. 제발...."

"책임지라고 안 할게요. 나 못 믿어요?"

"딴 피소환인들이 가만히 안 있을 검다. 저 번들번들한 눈빛 보십쇼. 이번에도 욕먹으면 저 트라우마 걸림다."

쩝.

주혁도 인정하는 바다.

한두 번 겪어 보나?

사실 강제로 열게 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의지를 담으면 절대복종 원칙이 발동되겠지.

하지만 상자 여는 걸로 절대복종 요구는 괜히 쩨쩨하고 졸렬한 것 같고.

"봉 소환사님은 왜 안 여시는 검까?"

"예감이 좋지 않아서."

"저도 마찬가지임다."

그래? 그럼....

"우리 믿음직한 고방 씨는?"

"소환사."

"네."

"살려 달라."

"...."

어쩔 수 있나?

살려 달라는데 살려 줘야지.

"광마님께선?"

"…노, 노부가 손목 터널 증후군이 와서 손가락을 펼 수가 없소."

"아, 네네."

시산혈해 고금무적 광마가 손목 터널 증후군은 개뿔.

다음은 견달래.

선녀로서 방법이 없을까?

"어쩌면 당연하옵니다. 그동안 공자님께선 대길의 운을 타고 오셨사옵나이다. 허나 대길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대운의 방향이 잠시 틀어졌습니다. 불운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현명하실 터, 더 나은 행운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여기시면 되옵니다."

그니까 지금은 불운을 받아라?

그래야 다음에 대길이 찾아올 것이다?

"행운 부적을 왕창 붙이면요?"

"으음, 부적뿐만이 아니라 기원굿으로도 힘들어 보여서… 흐름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나이다."

기다리라니.

그러니까 그게 언제쯤이냐고요?

빨리 열고 싶은데.

하남자에겐 미래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달래 선녀님께서 직접 열어 주셔야겠어요. 선녀가 열면 뭐가 달라도...."

순간!

견달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아흑, 갑자기 현기증이...."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달래 공주님!!! 이걸 어째!"

옆에 있던 베로니카가 냉큼 부축해서 둘러업었다.

"제가 부축해서 집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

바르딘도 짐짓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헉! 제,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빛이여!!!"

"...."

세 명이 한꺼번에 도망쳤다.

쯧쯧쯧, 아주 손발이 착착 맞는구나.

그럼 남은 사람은?

나서기 좋아하는 극 외향의 마탑주님.

얼마나 관심이 고프실까?

성공하면 모두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실 테니 스포트라이트 비추고 열어 봅시다.

하지만....

없네?

"매켄지 님은 어디 가셨죠?"

"이미 튀었소. 블링크 마법으로."

"...."

아니, 팟팟 소리도 없이 튀어?

무소음 블링크인가?

관심받을 기회인데 왜?

매켄지뿐만 아니다.

제페트도, 디아마트도 도망갔다.

하여간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다.

제가 까 보겠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면 얼마나 좋아.

띠링!

마침 태블릿 메시지 알림음.

그래!

마리 씨가 있었지.

<마리>: 제발 저한테는 오지 마세요.

'....'

후우,

물론 도망치지 않은 자도 있다.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 혀 내밀고 헥헥거리는 혈랑.

'개한테 시켜 볼까?"

주혁의 눈이 향하자 혈랑이 끼이잉, 꼬리를 말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개도 안 하겠다네.

그 와중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주혁을 바라보는 라직스.

"호에?"

오! 우리 우주대머슴.

그러나,

'…라직스 씨는 안 돼.'

그에겐 때를 묻히고 싶지 않다.

잘못 뽑아 욕이라도 들으면 어떻게 해?

하는 수 없다.

직접 여는 수밖에.

주혁은 상자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좋지 않은 예감.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지금 열면 무조건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이다.

'…일단 보류.'

다행히 언제까지 열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으니까.

천천히 개봉하자.

지금은 팔찌 제작이나 신경 써야지.

아직 효과가 없나?

김인중 위원장과 정동훈 대표 말이다.

* * *

미국 국토 안보부 탑 등반국.

맥밀란 장관과 안토니오 국장, 그리고 제랄드 플레이어는 한국 각성 관리청에서 보내온 83층 몬스터 정보 영상을 함께 시청하는 중.

"이젠 하다 하다 거대 거미까지… 이번엔 부하들도 있군."

"제기랄! 한 놈만 나와도 답이 없는 판에."

슬쩍 제랄드의 눈치를 보며 질문하는 안토니오.

"제랄드, 어때?"

"뭘요?"

"83층 아라크로이드 말이야."

"크네요. 징그럽고, 그리고 새끼 거미들도 있고."

"소감이 그것뿐이야?"

제랄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럼 그거 말고 무슨 말을 더해야 하죠? 어차피 83층이 공략 불가능하다는 건 정해져 있는데."

현재 제랄드의 레벨은 81LV.

즉, 80층 몬스터 악몽의 흑마 나이트메어를 공략했다는 뜻.

비교적 쉬운 70층대를 모조리 돌파하고 한국 각성 관리청에서 구매한 꿈 저항 키트를 사용해서 얻어 낸 결과였다.

그렇게 공략한 80층.

흑마 나이트메어가 가진 최고 고유 능력이 플레이어를 꿈에 빠지게 만드는 것인데, 그것이 처음부터 차단됐으니,

80층 공략 이후 제랄드는 자신감이 생겼었다.

부푼 마음으로 81층에 입장,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퇴장했다.

81층 거대 괴수 베헤모스.

놈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멘탈이 무너졌다.

애초에 공략이라는 걸 떠올릴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체구.

세상에!

어느 정도 비슷해야 달려들어 보기라도 하지.

베헤모스 앞에서 자신의 칼은 이쑤시개만큼 초라했고, 마법은 반딧불이처럼 미약했다.

"81층도 불가능해요. 마찬가지로 82층도, 그건 저뿐만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에게 다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자조적인 제랄드의 음성.

"오직 그분, 제 생명의 은인이자 세계 최고 플레이어님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맥밀란과 안토니오는 침묵했다.

굳이 제랄드의 확인 사살이 없었더라고 충분히 느끼고 있는 바였으니까.

"보통 플레이어들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80층까지라는 말이군."

"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하아,"

71층부터 시작해서 80층까지.

모두 10개 층.

다 공략한다고 치면 중첩되는 붕괴 시한은 60개월.

5년이다.

5년 이후엔 전 세계 탑이 차례대로 붕괴할지도,

한국 탑 2개 빼고.

* * *

시제품으로 만든 비만 탈출 팔찌는 2개.

하나는 북한 김인중 위원장이 착용했고, 또 하나는 전광일 편으로 정동훈 라직스 물산 대표에게 전달됐다.

어느덧 이틀 정도 지났다.

매켄지가 말하길, 하루만 착용해도 몸의 변화를 알 수 있다던데.

'아직 너무 이른가?'

바로 그때!

"봉 소환사님!"

북한에 있다가 자동 소환 해제되어 백색 탑에 나타난 코사크.

"어서 와요."

"김 위원장, 살빠졌슴다. 저울에 달아 보니 이틀 새 600g 넘게 빠졌슴다."

"오! 그래요?"

이틀에 600g.

뭐, 많이 뺀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팔찌만 차고 아무 일도 안 했다는 것.

그럼에도 빠졌다는 것.

정동훈 대표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김인중보다는 경도 비만.

'고도비만일수록 효과가 좋다던데,'

경도 비만이라 아직 효과를 보지 못했나?

순간!

지이잉!

백색 탑 안에서 울리는 스마트폰.

전화를 받아 보니.

- 여, 여보세요? 정동훈입니다.

"봉주혁입니다. 정 대표님, 잘 계셨어요?"

- 네네, 더, 덕분에, 사실은 전 청장님께 먼저 연락했는데, 청장님이 봉 플레이어님에게 직접 전화를 드리라고 해서.

"아! 그러시구나."

이어지는 정동훈의 말.

- 그 팔찌,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틀 사이에 약 300g 정도의 체중 변화가 있었습니다.

"살을 빼려는 시도는 하지 않으셨고요?"

점점 고조되는 정동훈의 음성.

- 안 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밤에 배가 고파서 야식을 시켜 먹었는걸요.

좋네.

효과가 있다면 기다릴 필요 없지.

"라직스 물산에서 귀금속이나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유통 부서가 있습니까?"

- 당연하죠. 물산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주요 부문은 패션 계열이니까요.

잘됐다.

생산 시작하자.

그 전에.

"대표님,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우리 집으로 오실래요? 긴히 말씀드릴 것도 있고."

- 당장 가겠습니다.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다.

라직스 물산.

우리 우주대머슴의 이름을 딴 회사.

그곳을 경영하는 대표라면 회사의 뿌리가 어디서 연유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물론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겸사겸사 확인해 볼 것도 있고.

* * *

전화를 받은 정동훈 대표는 빠르게 주혁의 집으로 도착했다.

"보, 봉 플레이어님, 죄송하지만 급하게 오느라 빈손으로 왔습니다."

"어휴, 괜찮아요. 한 가족끼리 무슨."

한 가족?

주혁의 말에 기분이 묘해지는 정동훈.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라직스 물산의 주인이자 세계 최고 플레이어에게.

그래서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저기, 여쭈어볼 곳이 있는데."

"네, 물어보세요."

"이 팔찌, 탑 보상 아이템입니까?"

"아뇨."

"그, 그럼?"

"제작 아이템입니다. 이름은 비만 탈출의 팔찌고요."

"아!"

제작 아이템.

그럴 줄 알았다.

전광일 청장이 이 팔찌를 건네줄 때 했던 말.

아이템은 맞지만 탑 보상은 아니라고, 착용해 보고 달라진 점 있으면 즉시 피드백해 달라고, 특히 체중 변화를.

그리고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

제작 아이템이라면 판매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이 기상천외한 대박 팔찌를 말이다.

아아아.

착용하고만 있어도 체중 조절이 가능한 팔찌라니.

수요가 얼마나 될 것인지 감히 예측조차 못 하겠다.

이건 탑 가죽 제품보다 훨씬 임팩트가 강하다.

대량 유통만 가능하다면 라직스 물산은 세계 최고의 대기업 반열에 올라설 것이다.

"어, 어떤 식으로 제작을...."

몸이 달아오른 정동훈.

"그걸 보여 드리려면 절차가 필요해서요."

"절차라면?"

"보안도 유지해야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저 입 무거운 놈입니다."

"흠."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백색 탑 17층 1일 체험권.

"이건?"

"받으세요, 그럼 알게 되실 거예요."

정동훈은 어리둥절한 표정.

저 얇은 종이에 뭐가 적혀 있길래.

아무튼 받아 보니.

츠츠츠측!

종이에 새겨지는 글씨.

"헉!"

- 백색 탑 방문객: 정동훈 -

띠링.

동시에 그의 뇌리로 마치 세계 공지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방문객 대상자는 일반인입니다.]

[임시 스킬 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24시간 동안 유효합니다.]

'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정동훈.

그러자.

[임시 스킬]: 백색 탑 17층 입장 및 퇴장(24시간 유효).

"달라진 게 있나요?"

주혁도 궁금했다.

1일 체험권을 발급받은 최초의 일반인 아닌가?

"이, 있습니다, 임시 스킬 창이 생겼는데...."

정동훈은 자신에게 들린 메시지와 임시로 생긴 스킬 창에 대해 말해 줬다.

'아하.'

이런 식이었구나.

일반인도 스킬 창이 활성화됐다.

플레이어와는 다르게 딱 하나의 스킬 항목만.

그것도 24시간 동안만 유지되는 임시 스킬.

'그럼 가족들도?'

백색 탑 17층으로 초대가 가능해졌다.

'입주권 드려야겠네.'

세상이 망해도 안전한 곳이니까.

'하지만....'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

자신의 진실한 정체와 그리고 피소환인들의 존재.

'밝히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이젠 비밀도 아니다.

웬만한 사람 다 알고 있다.

당연히 가족들도 알고 있어야지.

언제 한번 날 잡아서 밝히자.

피소환인들도 소개해 드리고.

주혁은 다시 정동훈을 보며.

"입장해 볼까요?"

"…어, 어딜요?"

"임시 스킬 창에 나와 있다면서요. 백색 탑 17층."

"아, 백색 탑 17층 입장이라고 외치면 됩니까?"

"네. 퇴장도 그렇게 하시면 될 겁니다."

그리하여.

"백색 탑 17층 입장!"

스팟!

정동훈은 백색 탑에 입장했다.

들어오자마자 정동훈의 눈에 보이는 하나의 건축물.

하늘로 쭉 솟은 거대한 고층 빌딩.

"어?"

저게 뭐야?

많이 보던 건데?

출근하면서 말이다.

'여기는 강남인가?'

아닌데?

백색 탑 17층이란 곳에서 저처럼 높은 빌딩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죄다 전원주택들.

그리고 저쪽에 통신탑처럼 보이는 시설물.

"놀라셨죠?"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봉 플레이어.

당연히 놀라지, 어떻게 태연할 수가.

"저, 저거 혹시?"

"맞아요. 라직스 물산 본사 건물이죠. …쌍둥이 빌딩이라고 여기시면 되겠네요. 하나는 강남에, 다른 하나는 여기 백색 탑에."

바로 그 순간!

스파파팟!

"충! 봉 소환사님, 오셨슴까?"

그림자 발걸음으로 재빠르게 나타난 코사크.

"아! 인사하세요. 정동훈 대표님이라고."

"오! 그렇슴까? 전 청장에게서 얘기 많이 들었슴다. 나 코사크임다."

"…네네."

누구지?

이 사람도 방문객인가?

가슴에 걸린 사원증 비슷한 걸 보니 입주권이라 적힌 것 같은데.

궁금증은 계속 늘어만 갔다.

"우리 우주대머슴은?"

"청소하고 있슴다. 저기 보십쇼. 61층부터 거꾸로 청소해서 내려오고 있슴다. 이제 로비만 남았슴다."

"역시 르스스알 청소 스킬이네요."

"아마 우리 머슴 청소 실력 따라올 사람 없을 검다."

머슴이라,

중세도 아니고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혹시 염전 노예처럼 사람 납치해서 부리는 곳인가.

그리고,

빌딩을 보며 크게 소리치는 주혁.

"라직스 씨!!!"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정동훈.

'누, 누구?'

라직스라고?

분명히 들었다.

라직스라고 했다.

"라직스 머슴님, 잠깐만 와 보세요."

바로 그때!

"호에에에에...."

데구르르르르르.

저 먼 건물의 로비에서부터 미친 듯이 이쪽으로 굴러오는 하얀색 솜뭉치.

"...."

반쯤 넋이 나간 정동훈.

마침내.

"호엥!"

그의 앞에 솜뭉치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햄스터? 아니, 사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 평양 테러 현장 실시간 생중계였던가?

이어지는 주혁의 말.

"정 대표님, 인사하세요. 우리 라직스 물산의 근본이자 창시자, 정신적 지주, 최고 존엄, 우주대머슴 라직스 씨입니다."

드디어 정동훈은 자신이 경영하는 라직스 물산의 그 '라직스'와 마주하게 됐다.

* * *

원래 검은 탑의 관리자는 셋.

설계자 디자이너, 시스템의 엔지니어, 아이템의 메이커.

그중에서 디자이너의 지위가 가장 높다.

그래서 이번에 교체된 관리자도 디자이너 한 명만.

엔지니어와 메이커는 그대로 유임.

[매켄지 드로낙까지 뽑았습니다. 이젠 막을 수 없어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미 연금술사도 나가 있는 상황에서, 9서클 마법사 매켄지까지 합류했으니.]

[시너지 효과가 상상을 초월하겠군.]

[맞습니다. 곧 탑 공략에 영향을 주는 제작 아이템들이 급속하게 풀릴지도.]

마법사와 연금술사.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둘이 협력하면 엄청난 상승 효과가 나타난다.

[그래도 매켄지의 속성은 인챈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효과는 미미할 겁니다.]

[아니, 매켄지는 천재야. 그깟 인챈트 마법이야 금방 독파할걸.]

[으음.]

[설마 이러다 마도 공학자까지 합류하면....]

[닥쳐! 재수 없는 소리 하지도 마. 잘리고 싶어? 마, 마도 공학자는 무슨!]

[....]

진짜 마도 공학자까지 뽑으면?

손을 쓸 수도 없을 텐데.

비로소 신임 관리자는 깨달았다.

전임 관리자가 왜 그런 무리수를 뒀는지.

어쩔 수 없다.

자신도 뭔가 하긴 해야 한다.

[아이템을 조정해야겠군.]

[네? 그, 그건 인과율에....]

[걱정하지 마. 확률에 관여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어떻게?]

[보상의 방향을 조정하겠다. 특정 탑에 몰아주는 식으로, 전체 아이템 보상 확률엔 변화가 없을 테니까.]

[아!]

[정부와 플레이어 간의 갈등이 심한 국가들 있지?]

[적지만 몇몇 있습니다.]

[그쪽으로 보상 아이템들을 집중시켜.]

[어떤 아이템으로?]

[해방의 룬 목걸이와 탑 전용 수식어가 없는 아이템들, 일반 플레이어들도 충분히 가질 수 있게끔.]

의도는 알겠지만,

[하지만 해방의 룬 목걸이는 71층 이상에서만 나오는 아이템이라 일반 플레이어들은 접근이 어려울 텐데요.]

[맞습니다. 71레벨 이상 플레이어들은 주로 국가가 육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정부에 협조적이라 해방의 룬 목걸이가 나오면 반드시 국가에 반납할 겁니다.]

[저층에서도 나오게 만들면 되지. 30레벨부터 70레벨까지 구간에서도, 그럼 일반 플레이어들도 보상 획득이 가능해.]

[…문제없겠습니까?]

[탑을 관리하다 보면 그 정도 오류는 왕왕 일어나잖아. 괜찮아. 충분히 수용 가능한 범위야. 인과율에도 상관이 없고.]

[알겠습니다.]

한번 지켜보자.

뿌린 씨앗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165화

정동훈은 백색 탑 17층에서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 사명의 비밀을 깨닫고야 말았다.

사람처럼 생긴 햄스터, 혹은 햄스터처럼 생긴 사람.

더불어 만능일꾼, 우주대머슴으로 불리는 존재.

라직스 물산의 그 라직스.

회사의 근본이자 정신적 지주.

"바실리스크, 와이번, 아포피스 가죽도 라직스 씨가 직접 벗기시죠."

"대단합니다."

"호엥!"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둥글둥글한 얼굴을 한껏 치켜들고.

"심지어 탑에서 나는 금속 광석도 곡괭이로 콱콱!"

"다재다능하시군요."

"호엥!"

둥그런 가슴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으면서.

"한마디로 말해 우리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일꾼이십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호엥!"

짧은 한쪽 팔을 번쩍 치켜들고 V 자를 그리는 라직스.

'하아.'

근본, 만능, 최고, 우주....

솔직히 이런 수식어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 한 가지.

귀여움이었다.

치명적인 깜찍함.

안아보고 싶다.

복슬복슬한 털에 얼굴을 비비고 싶다.

그러나 라직스 물산의 창업자님께 실례를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현재 정동훈이 있는 곳은 비만 탈출 팔찌를 제작하는 작업장.

그곳에서 라직스가 구슬땀을 흘리며 팔찌 본체를 만들고 있었다.

먼저 작업장 안에 놓인 전기용해로, 거기에 아다만트 광석을 녹여 주괴로 만든다.

만들어진 주괴를 라직스가 집게로 집자, 몸집 큰 거인이 기계적으로 망치질.

깡깡깡깡!

주괴를 늘이는 과정.

그것을 긴 띠 형태로 만들고, 팔찌 길이에 맞게 탁탁 잘라서 1차 작업 완료.

그다음 잘린 금속 띠를 작은 황금 망치로 톡톡 두들기면서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다듬고, 안쪽엔 음각 문양과 수식을 새겨서 넣으면서....

정동훈은 그 모든 과정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아.'

어떻게 저 조막만 한 손으로 조물조물 물건을 만들어 내는지 신기할 따름.

그러나 안타깝기도 했다.

"힘들게 작업하시네요. 쉬운 방법도 있는데."

그건 맞지.

"장인정신이 투철한 분이셔서 그런가요? 손수 수작업으로 퀄리티 높은 제품만을 제작하시려는 마음이신 것 같아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글쎄.

장인정신이라기보다는 할 수 있어서 하는 거다.

"쉬운 길을 가지 않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시겠다는 숭고한 정신, 장인이라면 마땅히 배워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저기, 쉬운 방법은 뭐죠?"

"아! 로스트왁스 공법이라고 있습니다, 보통 귀금속 액세서리를 제작하는 방식인데...."

이어지는 정동훈의 설명.

먼저 왁스로 원본 모형을 만든다.

요즘 3D 프린터도 있어서 왁스 원본 만들기도 쉬워졌단다.

수십 개의 왁스 원본을 트리 형태로 이어서 원통 안에 넣고 고정한다.

그 안에 석고를 넣어 굳힌 후, 이를 가열하면 내부의 왁스가 녹아서 사라지는데, 그 빈 공간에 녹인 금속물을 부으면 완성.

너튜브에도 나오는 왁스 주물 제작 방식.

주혁도 극한의 직업이란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난다.

보통 다 그렇게 제작한다.

시간도 빠르고, 양산도 가능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라직스의 생산 능력이 주물 공정과 비교해 떨어지나?

천만에!

그렇지는 않다.

이 양반들이 어디 보통 노동력인가?

망치 몇 방이면 주괴가 쭉 늘어나고, 금세 팔찌 재료로 변하며, 조각칼로 한번 슥, 그으면 어느새 세공이 끝난다.

오히려 주물보다 더 빠르다.

이건 선택의 차이.

처음부터 끝까지 라직스의 수작업으로 가느냐? 아니면 팔찌 본체는 왁스 주물 공장 생산 방식을 선택하느냐.

처음엔 라직스가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하겠다고 자원도 했고.

그러나 보면 볼수록 안쓰럽다.

이 낙원에서 하루 종일 팔찌나 제작하고 있어야 해?

물론 라직스는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워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

피소환인들의 품이 너무 많이 든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팔찌 본체는 외부에서 만들어 와야겠다.

정제 마정석 가루와 인챈트 작업은 여기서 하고.

그래서.

"라직스 물산에도 액세서리 공장이 있습니까?"

"주로 하청으로 해결합니다."

"우리 팔찌도 제작 가능한가요?"

"가능하긴 합니다만 디자인이 노출될 위험성이...."

"아! 그건 괜찮습니다."

팔찌 본체만으론 작동하지 않는다.

마정석 가루를 갈아서 집어넣는다고 해도.

연금술로 정제한 마정석 가루와 인챈트 마법 주문 시동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부탁드릴게요."

"네, 의뢰해 보겠습니다. 샘플이 있으니 3D 프린터 도면을 작업해서 넘겨 주면 빠르게 생산할 수 있을 겁니다."

외부 제작 결정.

그리고.

"판매 방법으로 보증금을 걸고 구독 형식으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구독요?"

괜찮을까?

개나 소나 다 구독 서비스 한다고 욕먹을지도.

"팔찌 유효 기간이 있으니까 구독이 적합합니다. 3개월마다 기존 팔찌를 반납하고 새 팔찌를 받아 가는 식으로."

…괜찮은데?

"유효 기간이 지난 팔찌는 수거해서 재활용하면 되고요. 구독 중지하면 팔찌 돌려받고 보증금 주면 끝나는 거죠."

듣고 보니 좋은 방법.

구독 방식이면 가격도 떨어뜨릴 수 있고, 기한이 다한 팔찌도 새롭게 인챈트하면 된다는 말이니.

확실히 정 대표를 부르길 잘했다.

역시 업계 전문가는 보는 눈이 달라.

"앞으로 자주자주 찾아오세요. 제가 당장 월세권 끊어드리죠."

"…월세권이라면?"

"한 달 동안 자유롭게 여길 드나들 수 있을 거예요. 기간이 지나면 다시 갱신하면 되고."

"아, 가, 감사합니다."

또 한 사람의 외부인 합류.

확실히 사람을 잘 들여야 한다.

하남자가 믿을 건 그것 말고는 없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 대표님."

"아, 아닙니다."

주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 참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계시니까."

정동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운이라면 제가 훨씬 더 크죠. 솔직히 라직스 물산 대표 맡으면서 인생이 너무 잘 풀리고 있습니다."

"그러세요?"

"말해 뭐 합니까? 사업이 잘되는 건 둘째 치고, 눈치 볼 일도 없고, 스트레스도 안 받고, 그래서 건강도 좋아지고,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도 직접 뵙고...."

환한 미소로 웃는 정동훈.

"하하하, 정말 전 행운아라고 항상 생각합니다. 저보다 더 운이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요즘 제 운이 뻗치고 있어요."

"…진짜요?"

"그럼요. 절대 빈말 아닙니다."

흠.

운이 뻗쳐 나가는 남자 정동훈.

진심으로 하는 말 같고.

그래, 결정했다.

정 대표님.

지금 당신의 운이 필요합니다.

그 운빨로 대신 뭔가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나도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행운을 훔쳐서 죄송하지만 입주 신고식은 하셔야죠.

대박 터지면 은혜 갚을게요.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럭키 랜덤 박스를 꺼냈다.

스슷!

양손으로 잡고.

"정 대표님?"

"네?"

"이 상자 뚜껑 좀 열어 주실래요? 제가 두 손으로 잡고 있어서."

"아! 네네."

순간!

우뚝, 멈칫, 슬쩍.

하던 일을 멈추고 주혁과 정동훈 대표를 곁눈질로 훔쳐보는 피소환인들.

한 명의 희생양이 탄생할 것인가.

아니면 영웅이 될 것인가?

드디어 박스 개봉.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꿀꺽.

주혁도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고 상자에 손을 뻗은 정동훈.

"열면 됩니까?"

"그, 그래요. 시원하게 벌컥!"

그리고,

개봉, 딸깍!

[럭키 랜덤 박스를 개봉합니다.]

뭐냐?

[럭키! 플래티넘 배지 50개를 획득합니다.]

으잉?

"떴다!!! 플래티넘 배지 50개!!!"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공자님, 대박이옵니다."

"감축드리오."

"아싸!"

"허허허, 역시!"

"만세!"

"주혁 만세!"

"정동훈 만세!"

"역시 정 대표야! 아주 훌륭해!"

어리둥절한 정동훈.

아니, 뭘 했다고 만세를 불러?

주혁은 더없이 만족했다.

신의 한 수였다.

하남자의 선택.

남의 손을 빌려 가챠 뽑기.

뭐, 다들 하지 않나?

가챠 게임 뽑기 버튼 누를 때 고양이나 강아지 발로 대신 누르는 거.

"아유, 우리 정 대표님, 확실히 운빨이 넘치시네요."

"그, 그런가요?"

"제가 월세권도 드리고, 몸에 좋은 약도 많이 많이 챙겨 드릴게요. 참! 혹시 플레이어로 각성할 생각은 있으세요?"

"…네?"

"언제든 말만 하세요. 각성시켜 드리죠."

"어어, 그, 그건 좀...."

매우 만족스럽다.

이로써 현물 배지는 무려 64개.

넉넉하다.

특전은 못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제 부담 없이 배지 수여식을 할 수 있다.

이왕 배지 왕창 받은 김에.

"정동훈 대표님, 배지 하나 받으실래요?"

"네? 무, 무슨 배지를...."

배지라면 저건가.

다른 사람 가슴 위에 달린 반짝반짝 금속의 장신구.

"제가 하나 드릴게요."

"…그, 음, 네네."

"이거 수여식도 해야 하는데."

우르르르.

두 사람 주위로 몰려오는 피소환인들.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배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귀하는 기막힌 행운으로 럭키 랜덤 박스를 개봉하여 플래티넘 배지를 무려 50개나 획득하는 공을 세웠으므로 이에 플래티넘 배지 하나를 수여합니다."

정동훈의 가슴에 배지를 달아 주는 주혁.

짝짝짝짝짝짝!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

정동훈은 기분이 좋았다.

왠지 모르지만 말이다.

*

외부 하청 작업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3D 프린터를 위한 도면만 제작하면 끝.

귀금속 제작 전문 업체에서 밤을 새워 가며 로스트왁스 공법으로 음각까지 새겨진 본체 팔찌를 찍어 냈다.

그렇게 만들어 낸 팔찌를 17층 안으로 공수, 정제된 마정석 가루를 꼼꼼하게 채워 넣고, 마지막으로 매켄지가 인챈트 마법 주문을 시전하면 끝.

그렇게 충분한 물량을 갖춘 후에.

라직스 물산 홈페이지에 배너 광고가 하나 떴다.

<비만 탈출 건강 팔찌, 구독 개시. 1차분 선착순 3,000명.>

<보증금 500만 원에, 월 49만 9천 900원, 석 달이면 당신의 몸이 달라집니다.>

<석 달마다 새 팔찌로 무료 교체 서비스.>

<효과가 없으면 즉시 환불 가능.>

<못생기고 뚱뚱하십니까? 이젠 못생기기만 하세요.>

<살을 빼보세요. 혹시 모르죠. 당신이 긁지 않은 복권일 수도.>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라직스 물산, 듣보잡 회사는 아니다.

중견기업이지만 대기업보다 더 튼실한 회사.

탑에서 나오는 가죽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다.

비슷한 업종인 HG 패션보다 매출이 더 높다.

그런데 건강 팔찌를 판다고?

액세서리 제품도 있다고는 하지만....

└ 너무 뜬금없는데? 회사 사정이 안 좋아? 본격적으로 사기 치려 하네.

└ 증권가 찌라시로는 가죽 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던데.

└ 아니, 그거 해소됐어. 충분한 양의 가죽이 공급되고 있대.

└ 맞아, 나 아는 사람도 라직스 물산 다녀. 새로운 가죽도 들어와서 신제품 개발에 들어갔다고.

└ 근데 왜 이런 뻔한 사기를?

└ 크크크, 분명히 이상한 자석 하나 박아놓고 파는 걸걸? 제2의 게르마늄 팔찌 말이야.

└ 제품 상세 설명 읽어 봐, 아다만트 금속 재질에 일반 마정석 박았단다.

└ 오! 재료는 좋은 거 썼네.

└ 좋기는 무슨, 아다만트 금속은 흔해 빠졌는데.

└ 그렇지. 일반 마정석 가격도 거의 폭락 수준이잖아.

└ 심지어 구독제야, 보증금 500에 월 50만 원.

└ 악랄하다, 악랄해. 쪽쪽 빨아먹겠다는 거네.

└ 저거 사는 사람 있을까?

└ 돈이 썩어나는 사람은 사겠지.

└ 솔직히 효과 있었으면 좋겠다.

└ 아무튼 누가 한 달 써보고 후기나 빨리 써줘.

시민들의 반응은 그리 곱지 않았다.

지금까지 저 비슷한 제품들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결국 유사 과학, 즉 사기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비만 탈출 팔찌의 효과가 밝혀지기까지 말이다.

*

7급 행정직 공무원 김혜영은 각성 관리청에 근무하고 있다.

근무부서는 엘리트 플레이어 관리 및 지원부서.

김혜영의 고민은 또래 여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이어트, 즉 살 빼기.

통통한 겉모습을 봐도 그럴 필요성은 충분했다.

살이 쪄서 이성에게 인기도 없고, 연애도 물 건너갔고.

그러나 살 빼는 일이 어디 쉽나?

매번 실패, 좀 빠지다가도 어김없이 요요가 찾아왔다.

헬스장에 등록해 월 80만 원을 주고 개인 PT도 해봤지만 별소용이 없었다.

포기하자.

이번 생은 그냥 살자.

먹을 거 마음대로 먹고, 살이야 찌든지 말든지.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상관인 이민아 팀장에게 보고를 하러 간 김혜영.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이민아의 노트북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라직스 물산에서 비만 탈출 팔찌 구독을 개시한다는 광고.

이민아 팀장은 벌써 회원가입하고 보증금 입금에 구독 결제까지 하는 중.

"팀장님도 다이어트에 관심 있으세요?"

"당연하죠. 요즘 군살 때문에 걱정이에요."

망할 년.

저 몸에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엘리트 플레이어에, 직장 상사치고는 매우 괜찮은 사람이지만 이럴 땐 얄미워 죽겠다.

하루만 저 몸으로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착용만 해도 살이 빠진다니, 누가 속는다고...."

그러자 이민아가 묘한 눈빛으로 김혜영을 바라보더니.

"혜영 씨."

"네?"

"내가 정보 하나 알려 줄게요."

"…무슨 정보요?"

"이거 사요. 선착순 3,000명, 종료되기 전에 빨리 회원가입하고 결제해요."

"...."

김혜영은 당황했다.

딱 봐도 사기 같은데, 이걸 사라고?

사는 사람이 있기나 해?

"우리 엘리트 플레이어들도 지금 다 결제 버튼 누르고 있을걸요?"

뭐지?

이민아 팀장이 거짓말할 사람은 아닌데.

설마 효과가 있는 걸까?

"늦기 전에 당장 사세요. 머뭇거리다간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알겠죠?"

"…네네."

뭔가 있다.

라직스 물산은 관리청에서 공급하는 가죽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회사.

이민아는 그쪽 대표와 친분이 있고.

그렇다면?

김혜영은 서둘러 홈페이지로 들어가 회원가입하고 팔찌 구독 결제까지 마쳤다.

배송은 다음 날 바로 왔다.

생각보다 얇은 팔찌였다.

진짜 효과가 있을까?

김혜영은 평소대로 살기로 했다.

먹을 거 마음껏 먹고, 퇴근하고 밤에 야식도 시키고.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200g이 빠졌다.

이상하네.

저울이 고장 났나?

그다음 날.

이번엔 300g 감량.

어?

이거 심상치 않다.

김혜영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고작 4일 만에 빠진 살이 무려 1kg.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운동도 안 했는데.

그냥 팔찌만 착용했는데.

"세, 세상에!"

병이라도 걸렸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 느낌.

심지어 고질병이던 변비가 사라졌다.

화장실 변기가 막힐 정도로 큰놈을 밖으로 무사히 내보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이래?'

반응을 보기 위해 라직스 물산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그러나 들어가지지 않았다.

서버가 다운된 듯.

그럼 다른 사이트에선?

그녀가 회원으로 있는 유명 다이어트 카페에 접속해 보니.

이미 비만 탈출의 팔찌 후기가 넘쳐흘렀다.

누구는 700g 빠졌다. 또 누구는 운동과 병행해서 1kg 이상 빠졌다.

SNS 게시물도 폭발적이었다.

대부분 후회의 감정을 토로하는 내용들.

나는 왜 못 샀지?

의심하지 말고 지르는 건데.

언제 또 판매를 시작해?

다음엔 꼭 사야지.

김혜영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카페에 나흘 만에 1kg 빠졌다는 게시물을 작성하고 인증사진을 올렸다.

그러자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축하한다고.

부럽다고.

'대박!'

아아아, 우리 이민아 팀장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팀장님 말 안 들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한우 선물 세트 하나 사서 보내드려야지.

대한민국이 난리가 났다.

입소문이 널리 퍼졌다.

온통 비만 탈출 팔찌 얘기뿐이었다.

166화

비만 탈출 팔찌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판매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되는 시점이었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에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는 간증이 쏟아졌다.

└ 배너 광고 뜨자마자 구입한 내가 승리자.

└ 어제 라면 먹고 잤는데도 얼굴이 안 부어.

└ 몸도 가벼워지고, 피로도 줄어들고.

└ 이거 운동과 병행하면 효과가 극대화되더라.

└ 아니,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살이 빠져?

└ 응, 빠져.

└ 팩트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거임.

└ 맞아. 살짝 겁이 나 병원 가서 검사했는데 다 정상이더라고.

└ 고백합니다. 저 안 믿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믿을게요. 제발 서버 열어 주세요. 다시 팔아 주세요.

└ 불신자에겐 치솟아 오르는 체중과 고혈압, 공복 고혈당만이 남을 것이다. 라직스 물산 만세!

└ 감사합니다. 라직스 물산님.

└ 그래, 알았어. 사야 한다는 거, 그런데 왜 아직도 서버 다운이야?

└ 씨발, 3,000개밖에 못 만들어? 탑 금속이 부족해서 그런가?

└ 아다만트는 흔한 금속이잖아.

└ 나도 복권 좀 긁어 보자. 살 빼서 클럽이나 들어가 보게.

└ 아니, 살 뺀다고 본판이 달라지겠어?

└ 아무튼 내 돈 가져가라고! 월 50이 아니라 100이라도 산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다.

대박 히트였다.

실시간 반응은 백색 탑 17층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인터넷이 되니까.

여러 유명 인터넷 사이트와 SNS를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매켄지.

"허허허, 요지경이로구나."

처음 방구석 연금술사 알리아 마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기대 안 했다.

고작 초급 수준의 인챈트 마법.

그것도 효과를 매우 약하게 한 것이다.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게끔.

더구나 살을 뺀다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매켄지가 살던 세상에서 비만은 질병이 아니었다.

살 좀 찌면 어때서?

오히려 잘 먹고 잘산다는 방증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망하기 전의 풍요로운 지구.

과학 기술의 발달로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

굶주려 죽는 사람보다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훨씬 많은 사회.

그런데 마침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물건이 떡 하니 나왔으니.

이렇게 열광해 주니,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자신이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매켄지는 비교적 사람들이 많은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 직접 글을 남겼다.

- 이 팔찌 내가 만든 거임. 허접쓰레기인데 왜 그렇게 난리를 떠는지 모르겠음. 너희들 다 너무 하찮고 불쌍해 보임, 근데 나도 하나 차고 있음. -

└ 응, 알았어. 밤이 늦었다. 씻고 자라.

└ 거짓말 아님. 이거 특별 수제 제작품임.

└ 됐고. 너 관종인 거 아니까 여기서 분탕질 치지 말고 썩 꺼지렴.

└ 정말 내가 만들었다고!

└ 증명해 봐.

하아, 이 새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과정이라도 보여 줘야 하나?

매켄지는 슬며시 스마트폰 카메라를 실행했다.

적절한 장소에 거치해서 아다만트 주괴 하나를 꺼낸 후 마법을 발현하려고 했는데.

"…으음."

녹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았다.

찍어서 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관두자.'

찍어서 올렸다는 게 들키면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저놈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생각이 없니, 영상 찍어 관종 짓거리하려고 나왔냐느니, 소환사에게 과연 도움이 되는 행동이냐느니… 하면서 온갖 비난을 다 쏟아낼 텐데.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언젠가 이 지구에 자신의 족적을 남길 날이 오겠지.

바로 그때!

"어이, 노가다 매 씨, 지금 뭐 하심까? 작업량이 밀렸슴다. 일이나 하십쇼."

노가다 매 씨?

저저저, 입을 확 지져 버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

'제기랄!'

일이 밀린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9서클 마법사가 매일 인챈트 마법에만 매달려야 한다니, 이게 무슨 낭비인가?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쓸 만한 놈 어디 없나?'

인챈트 마법 주문 발동이야 쉽다.

1서클이면 된다.

그리고 1서클 정도는 수련할 필요 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가만!'

한 명 떠오른다.

업계 관련자이자 최근에 들어온 월세권자 말이다.

아직 플레이어로 각성하지 않아서 최적의 조건이기도 하고.

한번 물어나 볼까?

*

라직스 물산.

정동훈 대표는 비만 탈출 팔찌 완판에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첫 개시일 때는 반응이 미미했는데, 입소문이 퍼지고 나니 준비했던 수량이 반나절도 안 돼 동이 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서버를 다시 열어서 추가 판매를 해야 하는데, 충분한 물량이 모였는지 모르겠다.

팔찌 본체는 외부에서 하청 제작.

그걸 전광일 청장에게 넘겨주면 백색 탑 17층 작업장으로 납품해서, 그곳의 거주민들이 최종 공정을 마무리하는 식.

'한번 갔다 올까?'

꼭 일 관련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흥겹고 기분이 좋다.

얼마 전 봉 플레이어에게 배지도 받았다.

박수와 환호성도.

뭔가를 잘 뽑아 준 공로라던데.

지금도 양복 가슴 부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배지.

더불어 월세권도 받았고.

정동훈은 인터폰으로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어서 와요. 오 비서."

이번에 총무과에서 비서실로 인사 발령한 오진숙 사원.

꼭 봉 플레이어의 청탁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인사과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

빠릿빠릿하고 일 잘하기로.

분위기 메이커로도 유명하고.

"오늘 일정은 없죠?"

"아! 실은 HG 패션 측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오늘 안으로 만났으면 한다고."

만나기는 무슨.

가죽 공급량이 비교되니까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바쁘다고 하시고, 당분간은 다른 일정 잡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은 퇴근해도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정동훈도 퇴근했다.

혼자 사는 자신의 아파트에 들어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백색 탑 17층 입장."

스팟!

여전히 우뚝 솟아난 라직스 물산 본사 쌍둥이 건물.

그때였다.

"여어, 정 씨!"

"네네."

"왔으면 이리 와서 일 좀 해. 일손이 모자라."

"아, 알겠습니다."

라직스의 작업장.

각자 팔찌 하나씩 잡고 정제 마정석 공정 작업 중.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일반인인 정동훈으로선.

손도 늦고, 가루도 질질 흘리고.

아직 숙달되지 않아서 매우 서툴렀다.

"쯧쯧. 정 씨, 이러면 밥 먹고 살겠어?"

"정 씨는 마정석 팔찌나 나르라고 해. 전 씨는? 일 잘하던데."

"전 씨도 연락했슴다. 바쁜 업무만 처리하고 바로 오겠다고 했슴다."

정 씨는 자신인데, 전 씨는 누구야?

순간!

스팟!

"오! 전 씨 왔다."

백색 탑에 나타난 전광일 청장.

"조금 늦었습니다. 오! 정 대표도 있었네요."

"아, 안녕하십니까. 청장님."

"그래요. 같이 일해 봅시다."

오자마자 작업에 들어가는 전광일.

몇 번 해 봤는지 매우 능숙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플레이어 능력이 그대로 발현되는 백색 탑 17층.

신체 능력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

"아유, 우리 베테랑 노가다 전 씨, 아주 일 잘함다. 정 씨와는 차원이 틀림다."

"하하하, 그런가요?"

"나중에 새참이라도 든든하게 챙겨드림다."

"쭉 이렇게 하시면 곧 영구 입주권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일 끝나고 노부와 술 한잔 어떻소?"

"좋죠."

칭찬받는 전광일.

반면 정동훈은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왠지 소외된 느낌.

같은 월세권자인데 누구는 칭찬받고, 누구는 일 못한다고 구박받고.

'아니, 랜덤 박스 잘 열어서 가챠 잘 띄운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만세도 불렀으면서.'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나?

해도 해도 너무한다.

문득 봉 플레이어와의 대화가 떠올렸다.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플레이어가 되면 적어도 이곳에선 신체 능력이 좋아지겠지?'

인벤토리도 활용할 수 있고.

그럼 탑에 들어가야 하는데....

할까, 말까?

'5층까지는 쉽잖아.'

공격도 못 하는 구더기 때려잡기.

그러나.

'아냐. 난 안 돼.'

분수를 알아야 한다.

6층부터 공격형 몬스터가 출현하면 도망 다니기 바쁠 것이다.

10층 이상은 꿈도 꾸지 못하겠지.

포기하자.

내 주제에 플레이어는 무슨.

그런데!

자신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온 누군가.

"정 대표.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아! 네네."

마법사 매켄지.

이번 비만 탈출 팔찌의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매켄지는 정동훈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서는.

"자네… 혹시 마법 배워 볼 생각은 없나?"

"네?"

이게 무슨 소리?

"1서클 마법만 익히면 저렇게 정제 가루를 집어넣는 일 대신에, 마법 주문 읊어 대는 고급 엘리트 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어.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해."

"…어."

마법이라고?

손에서 막 번쩍번쩍 빛나는 그거?

"저딴 단순 노가다 백날 해서 뭘 하나? 엘리트 마법 기술자가 주문을 외워야 완성되는데, 이게 꿀 빠는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귀가 솔깃하다.

하지만.

"전 마법이 뭔지도 모르는데요."

"어렵지 않아. 1서클이야 내가 만들어 줄 테고, 주문도 딱 하나만 배우면 돼."

"그, 그래도...."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네. 그러면 내가 다 알아서 해주지."

"...."

정동훈은 깊게 고민했다.

아마 매켄지가 가르쳐 주려는 마법은 팔찌의 인챈트를 활성화시키는 마법 같은데.

"빨리 결정하게. 나도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허락이라면?"

"우리 소환사님의 결재 말이야. 그게 제일 중요한 관문이고."

"아!"

어떡하지?

마법을 배우면 편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워볼까?'

정동훈의 마음이 점점 한쪽으로 쏠리는 와중에.

순간!

스팟!

백색 탑에 나타난 봉주혁 플레이어.

"아이고, 정 대표님, 전 청장님, 제가 일 시키려고 월세권 끊어 드린 것 같네요."

"에이, 별말씀을!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요."

"저, 저도 괜찮습니다."

"같이 해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피소환인들.

"안 됨다. 지지임다. 봉 소환사님은 옷 버리니까 구경만 하십쇼."

"공자님. 일은 천한 머슴들이 하는 것이고 대감마님은 감독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소환사는 이따 같이 노부와 같이 술만 마셔 주면 되오."

"전사가 소환사 몫까지 다 한다."

"주인님, 제 옆에만 계셔 주세요."

"후엑!"

사실 진정한 차별 대우는 따로 있었다.

*

중국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베이징 대륙 위기관리 본부 폭발 테러 수사로 촉발된 정부와 플레이어 간의 갈등.

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갈 일이 아니었다.

적당한 선에서 봉합하면 끝날 일.

하지만 일반 플레이어들은 상급 마정석을 중국에 공급하지 않는 식으로 정부에 저항했고, 그런 플레이어들을 중국 정부는 가만히 둘 리도 없고.

가장 큰 문제는 컨트롤 타워의 부재.

책임지고 결정을 내릴 지도자가 없다는 것.

물러설 수 없는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점점 골이 깊어졌다.

레벨 58의 일반 플레이어 하오렌은 역시 같은 일반 플레이어인 레벨 61의 장웬시와 만났다.

둘 다 중국 플레이어 협회의 핵심 회원들.

"장웬시, 내가 어제 탑에서 이걸 보상받은 게 있는데."

"뭔데?"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돼."

"알았어. 입 꾹 닫고 있을 테니까."

"…해방의 룬 목걸이."

"응? 그건 71층 이상에서만 나오는 거잖아. 넌 58레벨인데 어떻게?"

"몰라. 53층에서 나오더라고, 처음 보상 메시지를 들었을 때 나도 놀랐어."

"설마, 제한이 풀렸나?"

"아마도."

해방의 룬 목걸이라.

플레이어의 능력을 현실에서도 발현하게 해주는 아이템.

이게 저층에서도 나온다면?

"일단 남들에게 알리지 말고 인벤토리에 넣어 둬."

"그래. 고작 하나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협회 회원들에게도 알리자고. 만약 해방 목걸이가 나오면 꼭 비밀로 하라고."

장웬시의 또 다른 신분.

암시장 길드의 중국 담당책.

알려진 레벨보다 훨씬 더 높다.

'해방의 룬 목걸이가 중국 탑 저층에서도 나온단 말이지?'

그리하여 이 사실은 은밀하게 암시장 길드원들에게 전파됐다.

이후에도 매우 많은 숫자의 해방의 룬 목걸이가 보상으로 나왔다.

심지어 탑 전용이란 수식어가 달리지 않은 무기와 장비까지.

*

피소환인들의 노력으로 다시 판매 가능한 수량이 만들어졌다.

전처럼 똑같이 3,000개.

그러나 주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이렇게 죽자고 일해?

이거 문제가 있다.

심지어 전광일 청장과 정동훈 대표도 일꾼으로 불려오는 판국이다.

놀고먹는 게 우선이지, 일하는 건 심심할 때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주혁은 피소환인들 한곳에 불러놓은 후.

"앞으로 노동 시간을 엄격하게 제한합니다. 팔찌 제작은 하루 3시간만, 야근도 잔업도 없어요. 딱 3시간 일하고 퇴근입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아니, 3시간으로 뭐 함까? 최소 8시간 노동은 해야 함다."

"코사크 님 말이 맞사옵니다. 머슴들은 놀리는 게 아닙니다. 부려야 하옵니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소. 3시간은 좀...."

"전사는 더 높은 강도의 노동을 요구한다."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병력들 탱자탱자 내버려 두면 군기가 빠질 겁니다."

"호엑!"

어쭈?

"절대복종! 3시간만 해요. 어? 사람이 놀고먹어야지. 맨날 일만 하면 그게 사람인가, 어? 기계지."

강하게 푸시했지만....

"거부함다."

엥?

거부라니.

"3원칙 3항에 입각해서 계속 일할 검다."

"그러하옵니다. 공자님을 위한 길에 게으름이란 있을 수 없지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 겁니다. 보급이 승리의 지름길입니다."

"후에!"

참나.

별 이상한 곳에다 3항을 갖다 붙여?

비만 탈출 팔찌의 인기에 피소환인들도 잔뜩 고무됐다.

물들어 올 때 노를 젓자.

열심히 만들어 소환사님께 돈 걱정을 덜어주자.

그때!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주혁의 주위를 맴도는 매켄지.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매켄지의 머리 위에 커다란 노란색 느낌표가 하나 떠 있었다.

'게임 NPC인가?'

퀘스트를 주려고?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세요?"

"아! 소환사, 허락을 구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뭔데요?"

"글쎄, 정 대표가 아까부터 자꾸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내가 안 된다고 했지만 1서클 인챈트 주문이라도 가르쳐달라고 괴롭히는 바람에."

흠.

그 반대겠지.

자기의 일을 정 대표에게 떠넘기려는 수작.

어떻게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매켄지의 노력.

마음에 든다.

매우 바람직하다.

"정 대표님이 배우겠대요?"

"그, 그렇소이다."

주혁도 그 전에 정 대표에게 플레이어 각성을 권유했었다.

하지만 싫단다.

무섭다나?

각성해 봐야 결국 탑에 들어가지 않게 될 테고, 그러면 플레이어 각성도 취소될 테고, 아깝다는 이유에서인데.

마법사는?

탑에 들어갈 필요가 없긴 하다.

여기 가만히 앉아서 인챈트 마법 주문이나 외우면 되니까.

"잘 가르쳐 드리세요."

"오! 고맙소. 쓸 만한 1서클 인챈트 마법사 하나 만들어 보겠소."

스슷!

매켄지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물음표로 바뀌더니, 픽! 사라졌다.

퀘스트 완료인가?

언제나 보는 재미가 있는 분.

어쨌든 전 청장은 플레이어.

정 대표는 인챈트 전문 마법사.

이래도 될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충분한 물량을 확보한 라직스 물산은 다시 비만 탈출의 팔찌 구독 판매를 재개했다.

<비만 탈출 건강 팔찌, 재구독 개시, 선착순 3,000명.>

서버는 10초 만에 다운됐다.

F5 키를 연타해도 화면은 움직이지 않았다.

└ 아싸! 구독 성공.

└ 씨발! 무슨 팔찌 하나 사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워?

└ 그냥 팔찌냐? 비만 탈출 건강 팔찌인데.

└ 인간적으로 100kg 이하는 마우스에서 손 떼라. 나도 좀 살자.

└ 비쩍 마른 새끼들, 팔찌 차고 돌아다니다가 내 눈에 걸리면 뒈진다.

기존 구독자든, 새 구독자든 누구나 만족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살이 빠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운동과 병행해야 조금 더 빠지고.

그래도 가장 좋은 점.

절대로 다시 찌는 일은 없었다.

먹고 자고 마셔도 현상 유지.

이것만 해도 어딘가?

167화

비만 탈출 팔찌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서버만 열면 접속이 폭주했다.

뜨자마자 완판.

아직 팔찌의 효과를 믿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쩌라고.

실제로 효과가 드러나고 있는데.

물론 일부러 살 찌려고 칼로리 높은 음식을 마구마구 먹어 댄다거나, 먹자마자 잔다거나, 누워서 손도 까딱하지 않는다거나, 이러면 살이 찌기는 했다.

그러다가 평상시처럼 생활하면 다시 빠지고.

이렇게나 사람들이 열광하니 17층 공방도 바쁘게 돌아갔다.

"좀 쉬었다가 하죠? 주말인데."

"물량 밀렸슴다. 주말 특근임다. 저리 가십쇼."

"거참! 밀리면 안 팔면 되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함다."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초반이라 그런 검다. 1차 목표는 구독자 100만 명! 그러면 한 달에 들어오는 돈만 5천 억임다."

이 양반이 미쳤나?

"…팔찌 100만 개를 만들어 내겠다고?"

"못 할 거 없슴다. 안 되면 되게 함다."

그러고는 다른 피소환인들을 보면서.

"동무들! 할 수 있슴메까?"

"육신이 으스러지도록 만들겠습니다. 빛이여!!!"

"전사는 해내고야 만다."

"호에에엑!"

"좋슴다. 고난의 행군 시작임다. 주혁 만세!"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견달래마저.

"곧 있으면 1만 개 돌파이옵니다. 이걸 백 번만 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참나.

무슨 인형 눈깔 붙이기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눈이 회까닥 돌았다.

돈이 이렇게 무섭다.

백색 탑 17층에서 팔찌만 만들다 늙어 죽으려고?

그깟 팔찌 만들려고 불려 나왔어?

생각해 보면 이거 다 매켄지 드로낙 때문이다.

딴엔 좋은 생각이라며 배지까지 줬는데.

'괜히 하자고 해서....'

주혁은 찌릿! 매켄지를 노려봤다.

심상찮은 눈빛에 움찔, 슬며시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 매켄지.

"매켄지 씨?"

"으음, 마, 말씀하시지요."

"고급 인력들, 계속 앉아서 마정석 가루만 채워 넣어야 하나요?"

"그, 그게...."

"마법으로 대량생산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단추만 쿡 누르면 착착착착, 컨베이어 벨트로 완성품이 줄줄줄줄 나오는 거.

"…공장식 생산 방식을 말씀하시는 건지?"

"네, 정확합니다."

"하아."

매켄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공돌이를, 아니, 마도 공학자를 초빙해 오면 가능할 것 같소만."

마도 공학자?

마도라면 우리 베 상사 출신지가 마도 제국인데.

"인챈트나 연금술과는 또 다른 마법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법의 힘과 기술을 혼합해서 기계식 아티팩트를 만드는 학문인데, 그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동화 생산 설비지요"

오!

자동화 생산 설비.

듣기만 해도 좋은데?

"영혼의 세상에 마도 공학자가 있나요?"

"그, 글쎄올시다. 아주 오래전 과거에 한 번 이야기 나눈 적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요?"

"최근엔 보지 못해서...."

다른 피소환인들에게 물어볼까?

비슷했다.

한 번도 대화해 보지 못했다는 대답, 매켄지처럼 예전에 한 번 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는 대답.

띠링.

마리도.

<마리> : 마도 공학자라면 영혼의 세상에서 딱 한 명 있었어요. 그런데 소환사를 잃고 미쳐 버려서 영혼이 붕괴했다는 소문이 들린 이후로....

사라졌단다.

행방을 모르겠단다.

안타깝다.

뽑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아니라 소환사를 잃고 절망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난 오래 살아야겠다.'

피소환인들과는 달리 죽으면 끝장이니까.

어쨌거나 영혼의 세상에서 마도 공학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럼?

기대하지 말아야지.

잔뜩 기대했다가 다른 직업의 사람이 불려 나오면 실망할 수도 있으니.

뭐,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지면 수작업으로도 충분히 돌릴 수 있잖아?

그때까지는 천천히 쉬엄쉬엄 돌려야지.

한 번에 3,000개 판매도 많다.

1,000개로 줄이자.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혁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집중하는 피소환인들.

"일하러 갑시다."

"지금 일하고 있슴다."

"그거 말고 탑 공략, 미공략 상층으로."

탑이나 올라가야겠다.

팔찌 제작 집어치우고.

순간 기가 죽어 눈치만 보던 매켄지가 화다닥 일어나면서.

"소, 소환사, 84층이오?"

"네, 팔찌 제작보다는 재미있겠죠?"

"이 한 몸 불사르겠소이다!"

쿠궁! 쿠구구구구궁! 짜잔!

왠지 비장한 배경음악.

화르륵!

온몸이 불타오르는 시각효과의 매켄지.

'풋!'

진짜 재미있어.

미워할 수 없다니까.

84층을 공략한다고 하자 피소환인들이 작업을 멈추고 빠르게 모였다.

"대기하세요. 밖에서 소환할 테니까."

주혁이 밖으로 나가고 잠시 후.

대기하던 피소환인들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스팟! 스팟! 스팟! 스팟....

적막해진 백색 탑 17층.

그런데.

스팟!

누군가 나타났다.

'…아무도 없나?'

정동훈이었다.

요즘 한가할 때마다 이곳을 찾는 그였다.

여기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고.

'탑이라도 가셨나 보네.'

작업장에도 없는 걸 보면.

뭐, 이왕 온 김에 일이나 하고 가야지.

정동훈은 팔찌 하나를 잡고 마법 주문을 외웠다.

각인 활성.

"인그리디 액토."

화아아… 피시싯!

매캐한 연기.

실패였다.

아직 숙련되지 않아 인챈트 성공률은 50% 정도.

실패한 건 따로 빼두고.

스승님이 실패를 두려워 말고 계속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실력이 늘 거라고.

바로 그때!

스팟!

"정 대표님?"

"아! 청장님 오셨어요?"

전광일 청장도 왔다.

주말이라 한가한 모양.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 여기 와보니 아무도 없던데요?"

"아! 그래요? 그럼… 같이 작업이나 하시죠."

전광일은 작업장 한쪽에 놓인 커다란 자루를 한 손으로 들고 정동훈 옆에 앉았다.

아직 인챈트 되지 않은 비만 탈출의 팔찌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를 말이다.

'무거울 텐데....'

하지만 전광일은 플레이어.

그리고 이곳은 플레이어의 능력이 발현되는 장소.

알고 보니 전광일 청장도 봉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아 각성했단다.

하지만 부럽지 않다

자신은 마법사니까.

"인그리디 액토."

화앗!

이번엔 인챈트 성공.

*

이번 공략은 1번 탑부터.

맨날 2번 탑을 먼저 공략한다고 말들이 나오니까.

[대한민국 검은 탑(NO.1) 84층에 입장합니다.]

배경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설원지대.

"어우, 춥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여!!!"

"파이어 히터!"

동시에 주문을 외치는 바르딘과 매켄지.

덕분에 따듯해졌다.

자, 이번엔 뭘까?

거대괴수 구간이니, 뭔가 거대한 것이 나오겠지?

"베헤모스도 따지고 보면 포유류 아니겠슴까? 아포피스는 파충류 뱀 새끼고."

"그렇죠."

"거대 거미는 곤충에 속하니까...."

"무슨 거미가 곤충인가? 나무 위키나 좀 읽게. "

"…뭐, 그렇다치고, 포유류, 파충류, 곤충, 다음은 양서류일지도 모름다."

"양서류면 개구리나 도롱뇽?"

"거대 개구리 같슴다. 개굴!"

"쯧! 이 추운 데서 무슨 개구리!"

그런데?

"호에?"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는 라직스.

그러면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호엥!"

뭔가 발견했다는 듯 혈랑의 등 위에 풀쩍 올라타서.

"호에에에엑!"

황금 곡괭이를 꺼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컹컹!"

다다다다다닥!

달려 나가는 혈랑.

쟤들은 또 왜 저래?

뭔가 냄새 제대로 맡은 모양인데.

"라직스 씨!"

"호에!"

"어디 가요? 빨리 돌아와...."

순간!

스으으으으.

하늘에 구름이라도 낀 듯 어두워지는 주위.

띠링!

동시에 떠오르는 임무.

[84층 임무 :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0/1]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조류, 대형 새다.

그래.

나올 때도 됐지.

지금까지 죄다 육상 거대 몬스터였으니까.

한번은 나올 줄 알았다.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하늘을 올려봤다.

말 그대로 거대했다.

주위가 어두워질 정도로

거대한 날개를 좌우로 뻗은 채 하늘을 활강하는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스사사아아앗!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냥 날개를 쭉 편 채 하늘에 뜬 비행선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크고 느리다....

생각보다 쉬울지도.

그런데 저건 뭐지?

콜로서스 콘도르 주위를 날고 있는 날파리 같은 것들.

너무 많아서 콘도르 몸체가 잘 안 보일 지경.

"저건?"

"얼음으로 이루어진 새 같소. …매 인가?"

얼음 매.

거대 콘도르도 여왕 거미처럼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는 듯.

그 와중에 혈랑과 함께 눈보라를 뚫고 설원을 달려 나가는 라직스.

콜로서스 콘도르 바로 밑.

괜찮을까?

아무리 높이 있어도 들키면....

바로 그때!

촤라라랏!

콜로서스 콘도르를 맴돌며 날던 일부의 얼음 매들이 지상으로 빠르게 내리꽂혔다.

쐐애애애액!

사냥감을 포착한 것처럼.

그리고 그 사냥감은 라직스.

"라직스 씨!!!"

"후에에엑!"

떨어지는 얼음 매.

콰콰콰콰콰콰콰콱!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얼음 매가 폭격하듯 라직스를 덮쳐왔다.

"젠장!"

스파파파팟!

주혁은 반사적으로 그림자 발걸음을 시전했다.

동시에 그를 따르는 피소환인들.

콰콰콰콰콱!

얼음 매는 다연장 미사일이었다.

무시무시한 빠르기.

콰콰콰콰콰콰콰콱!

"후, 후에에에에에...."

혈랑과 라직스는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콰콰콰콰콱!

그 뒤를 따라 떨어지는 얼음 매.

주혁도 미친 듯이 달렸다.

라직스와 혈랑이 아슬아슬 용케 피하고는 있지만, 위험하다.

저러다 얼음 매에 맞으면?

그때!

타악!

잘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혈랑.

설원 위로 데굴데굴 굴러 대자로 뻗은 라직스.

동시에.

쐐애애애애액!

쓰러진 라직스의 머리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는 얼음 매.

"헉! 이런...."

저건 못 피한다.

"안 돼!!!"

쐐애애액!

파바바박! 파박!

"씨바알!!!"

퍼어억!

"깨갱, 깽!"

피 분수가 터졌다.

빨간 살점이 흩날렸다.

혈랑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혈랑이 몸을 던져 라직스의 앞을 막았다.

"호에에에에엑!!!"

[카탈로그 소속 소환수 혈랑이 사망했습니다.]

[사망으로 인해 100일 동안 혈랑의 지정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아아아아!

혈랑이 죽었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후에, 후에, 후에에에...."

통곡하는 라직스.

"이 개 같은 새 새끼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

라직스만이라도 살려야지.

스팟!

주혁은 앞으로 뛰쳐나가 라직스를 안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얼음 매는 끊임없이 떨어졌고.

쑤욱!

몸을 키운 거대화 고방이 주혁과 라직스를 감싸안았다.

"그레이트 배리어!"

피소환인 전체를 막아 주는 매켄지의 거대 보호막.

퍼버버버벅!

보호막을 직격하는 얼음 매.

순간!

우우우우우우웅!

강렬한 기의 폭풍.

스웅!

광마가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손 위로 생성된 수십 개의 초승달 강기.

츠피피피핏! 츠피피피피핏!

빛살 같은 속도로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를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촤라라라락!

파팍! 팍팍팍! 파파파파파팍!

얼음 매들이 날아오는 초승달 강기를 막았다.

마치 항공기에서 미사일을 교란하기 위해 뿜어 대는 채프처럼.

퍽, 퍼퍼퍽!

물론 몇몇 강기는 얼음 매를 피해 거대 본체에 적중했지만....

그럼에도 결코 비행을 멈추지 않은 콜로서스 콘도르.

'와, 저 새끼....'

광마의 강기를 견딘다는 건 저놈이 르스스알과 최소한 동급,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뜻.

무엇보다 특이한 점.

지금까지 비행 몬스터는 풀링하면 지상으로 내려온다.

지면 가까운 곳에서 부리나 발톱으로 플레이어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저놈은 몇 대 맞아도 내려오지 않았다.

원거리로만 공격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고방, 코사크, 바르딘 등 근접 계열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여전히 주혁과 피소환인들에게 날아오는 수많은 얼음 매.

쐐액! 쐐애애액!

퍼버벅! 퍼버버벅!

"이놈!"

화르르륵!

온몸이 불타오르는 매켄지.

스웅, 스웅, 스웅, 스응....

그의 등 뒤에서 떠 오른 수백 개의 불의 창.

이글이글.

"모든 것을 꿰뚫고 불태워 버릴지어다. 파이어 스피어."

파슛! 파슛! 파슛! 파슈슈슈슈슈슛!

불의 창이 콜로서스 콘도르를 향해 줄지어 쏘아졌다.

하지만.

콰앙! 콰앙! 콰앙!

또 방어하듯 화염 창을 들이받는 얼음 매.

광마의 초승달 강기과 비슷한 양상.

초승달 강기와 화염창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콜로서스 콘도르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유유히 하늘을 비행했다.

꿀꺽.

주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공중전함이네. …저걸 어떻게 잡아?'

바로 그때!

둥둥, 두둥, 두둥, 둥둥둥둥, 두두둥!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

예민해지는 감각, 솟아오르는 힘과 용기.

견달래의 굿 버프가 피소환인들에게 전해졌다.

파라라라라락!

부적이 날아올랐다.

얼음 매들이 부적에 맞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찌이이이잉!

서서쏴 자세로 콜로서스 콘도르를 겨냥하는 베 상사.

부적이 길을 열렸다.

파주주주죽!

출렁!

콰아아앙!

강력한 마력의 대형 유도탄이 콜로서스 콘도르의 본체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꾸엑!"

파닥!

날개를 펄럭이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놈.

'음?'

효과가 있다.

화염 창과 강기에도 끄덕하지 않았던 콘도르가 스스알 베상사의 대형탄에 타격을 입었다.

두 발째.

파주주주죽!

출렁!

콰아아앙!

"꾸에엑!"

마정석의 충격파에 하늘까지 진동한다.

비명과 함께 하늘에서 잠시 비틀하는 놈.

세 발째 대형탄.

파주주주죽!

출렁!

콰아아앙!

확실하게 타격을 입었다.

콜로서스 콘도르가 연신 날개를 퍼덕이며 위로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형탄을 3발이나 맞혔는데도 추락시키는 데 실패.

"베 상사님, 여분의 대형탄은?"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다 소모했습니다."

"그래요?"

베 상사 마총의 대형탄 최대 발사 횟수는 3발까지.

그럼....

"광마 님."

"말씀하시오"

"저거 잡을 수 있나요? "

"하루 종일 때리다 보면 언젠간...."

"네, 알겠습니다."

안 된다는 말.

하긴.

밑으로 내려와야지 뭐라도 해 보지.

이번에도 포기.

하남자의 공략은 압도적이어야 한다.

시간에 쫓기면서 조금씩 생명력을 깎으며 간신히 잡는 공략은 실패나 다름없다.

"으어, 춥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거지 같아?

"에이 씨,"

라직스는 구했지만....

'우리 불쌍한 혈랑이.'

100일 후에 돌아오면 개껌 많이 많이 사 줄게.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찌이익!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탑에서 퇴장합니다.]

다음에 다시 보자, 이 새 새끼야!

반드시 후라이트 치킨 콤보로 만들어 주마!

스팟!

*

아쉽게도 공략 리셋.

어째 80층대에선 매번 리셋 티켓을 사용하고 있다.

어쩔 수 있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그러나 방법이 보인다.

다음 공략에선 S+++ 등급으로 조질 수 있을 듯.

일단 그전에.

"혈랑 지정 소환!"

조용.

안 된다.

이미 사망해 버린 혈랑,

상태창 카탈로그에도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카탈로그] : 혈랑(소환 불가 100일)

아아아!

불쌍한 우리 혈랑,

자신의 몸을 던져 라직스를 구하고 죽어 버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피소환인 부활의 룬을 사용할 새도 없었다.

얼음 매에 직격당해 몸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버렸으니.

"우리 혈랑을 위해 묵념하죠."

"후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라직스.

아이템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한 우주대머슴이다.

냄새를 맡으면 바로 뛰쳐나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러나 꼬옥 안아 주면서.

"다음번엔 절대 혼자 나가지 마요.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호에에...."

"혈랑은 100일만 참아 봅시다. 그럼 다시 볼 수 있을 테니."

"후에,"

"그래요. 나도 가슴이 아파요."

다음으로.

"베 상사님."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등급 돌파하면 콘도르 잡을 수 있나요?"

"한 발에 끝내겠습니다."

씩씩하다.

진급시키자.

현재 베 상사가 받은 플래티넘 배지의 총 개수는 7개.

돌파 룬과 18개의 배지를 손에 꼭 쥐여 주면서.

"한 2주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꼭 돌파하고 다시 만나요."

"필승!"

84층에서 확인한 베 상사의 가능성.

스스알인데도 불구하고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다.

베 상사가 등급을 돌파해서 르스스알로 돌아온다면?

놈을 상대할 방법이 생길 터.

"파이팅!"

"반드시 진급 성공하겠습니다."

그래요.

기다릴게요.

"소환 해제."

스팟!

"우리도 쉬러 가죠."

일괄 소환 해제.

스팟! 스팟! 스팟! 스팟....

백색 탑 17층으로.

그런데?

"어?"

"응?"

"왜?"

"헐!"

"음...."

"아!"

17층에서 멀뚱하게 서 있는 베로니카.

그리고 바로 옆에서 바람개비처럼 꼬리를 흔들며 일행을 반기는 희미한 유령 개.

[컹컹! 커겅, 컹컹!]

"후에에엑?"

아니, 이게 뭐야?

왜 여기에....

'아, 맞다!'

영혼의 세상으로 못 돌아가지?

백색 탑 17층이 대기실이었지?

그래서 소환 해제도 여기.

등급 돌파 장소도 여기.

죽어도 100일 동안 대기해야 하는 곳도 여기.

'흠.'

이거 뻘쭘하네.

작별 인사와 묵념까지 했는데.

이러면 죽으나 사나 마찬가지 아닌가?

심지어 부활의 룬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확실히 진짜 사기적이다.

백색 탑 17층 말이다.

16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