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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156-162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6 >

일꾼이라고 만만히 봐선 안 되는 라직스였다.

스스알이라 마력도 웬만큼 보유하고 있었고, 생활 노동으로 단련한 근육과 코어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스킬이라고 없을까?

채광은 스킬이 아니야?

바위를 쪼개는 기술인데?

지금 이 순간 라직스에게 있어 아포피스의 대가리는 상급 마정석이 꽉꽉 들어찬 노다지 광맥이었다.

콰직, 콰직, 콰직!

연신 떨어지는 장대 곡괭이.

"호우우!!!"

이미 두려움 따윈 저 멀리.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뱀 똬리에 온몸이 칭칭 감긴 채, 도발의 포효로 아포피스의 어그로를 홀로 끌고 있는 고방.

견달래의 구속부와 벽마부, 집요하게 급소를 노리는 광마와 코사크, 바르딘, 견제사격으로 괴롭히는 베 상사, 정신공격을 가하는 디아마트와 제페트,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혈랑....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다.

바로 옆에 소환사님도 계신다.

누적 피해가 벌써 절반이 넘었다.

[라직스가 아포피스를 상대로 최소한 총 생명력의 10%의 피해를 입히기 6%/10%]

툭!

라직스는 장대 곡괭이를 땅에 버렸다.

손맛이 별로다.

무기는 사용하던 걸 써야지.

아공간 배낭에서 꺼낸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곡괭이.

이거지.

채광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아이템.

굳이 멀리서 공격할 필요가 있나?

지금부터는 초근접전이다.

데굴데굴 굴러가.

와다다닷!

고방의 머리 위에 올라간 후.

"호우우우우! 뚝배기...."

콱콱콱콱!

아포피스 대가리에 직접 곡괭이질.

내려찍을 때마다 씰룩거리는 라직스의 엉덩이.

"어우야! 치명적인 엉덩이 뒤태."

"우리 라직스 우주대머슴 라직스, 실로 장하십니다."

"정말 무공을 익혀도 되겠구나. 근골은 그리 좋지 못하다만, 투지가 있어."

"존경스럽습니다. 보급관님, 짬밥에서 나오는 곡괭이질!"

"아아아, 남자의 박력 있는 곡괭이질은 여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요."

"머슴과 마님의 애틋한 사랑은 이미 고전 아임까? 오늘부터 라직스 머슴 밥상에 고기반찬 올리십쇼."

주혁은 임무 달성도를 확인하는 중.

마침내.

[라직스가 아포피스를 상대로 최소한 총 생명력의 10%의 피해를 입히기 10%/10%]

히든 임무 완료.

남은 건?

"빨리 끝내죠. 마무리 들어갑시다."

지이잉!

광마의 흑색 강기.

지잉, 지잉.

코사크의 쌍 단검에 깃든 오러 블레이드.

철컥!

베 상사가 대형탄을 장착하고, 절그럭, 바르딘이 광휘의 도리깨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호에에? …멈춰요."

곡괭이질 하다 말고 소리를 짹 지르는 라직스.

"왜요?"

"호에, 가죽요."

"무슨 가죽?"

"몸통 때리면 상해요."

"아!"

"호에, 산 채로 벗겨요."

기특하다.

이런 것까지 챙기다니.

전에 미처 벗기지 못했던 아포피스 통가죽을 벗기려는 의도.

뼛속까지 일꾼.

"흠, 자체 가죽 재생 능력도 있는 놈 같은데."

"그냥 라직스 씨 말 들어요."

"예압!"

빈사 상태에 빠진 아포피스.

이미 저항 불가능 상태.

어느새 황금 무두칼을 꺼낸 라직스.

요기 썰고, 조기 썰더니.

"호엥."

"알겠다. 일꾼, 믿고 맡겨라. 이번엔 완벽하게 벗기겠다."

광마, 코사크, 제페트, 베 상사가 아포피스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해서 잡았고, 혈랑, 바르딘, 디아마트는 꼬리 끝을 잡고 줄다리기처럼 쭉 당겼다.

머리에서 살짝 벗긴 가죽을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꼬리 쪽으로 이동하는 거대화 고방.

"끄응!"

쫘아아아악!

가죽이 통째로 벗겨지기 시작했다.

"호우!"

아포피스 가죽이라.

뱀도 바실리스크처럼 파충류.

'괜찮네.'

아포피스 가죽 빛깔을 보니 바실리스크보다 더 아름답고 품질이 뛰어나다.

게다가 엄청난 크기이고.

여기저기 쓸모도 많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바실리스크, 와이번 가죽 납품 안 한 지도 꽤 됐다.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베헤모스 가죽도 벗길 걸 그랬나?'

보기는 그리 좋지 않지만 그것도 가공해서 팔면 팔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80층대는 거대괴수 구간.

아포피스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가죽을 가진 놈들이 출몰할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내서 회사나 찾아가 봐야지.'

라직스 물산.

자신 소유의 회사인데 한 번도 들러보지 못했다.

쫘아아악!

아직도 가죽이 벗겨지는 아포피스.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거대 뱀 아포피스 1/1]

[82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공략 성공.

그래도 가죽 벗기기는 계속.

쫘아아악!

[보상 : 상급 마정석 10t/ 카탈로그 확장권/ 랜덤 룬]

보상 아이템을 토해냈다.

무려 3개.

[아이템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적용 대상은 상급 마정석 보상입니다.]

[인벤토리로 상급 마정석 90t을 지급합니다.]

"…와!"

단번에 9배, 90t.

상급 마정석이 인벤토리가 거의 가득 찰 지경.

재빨리 꺼내서 땅에 내려놓으니.

스슷, 스슷, 스슷.

라직스가 자신의 아공간 가방으로 옮겼다.

히든 임무는?

그것도 보상 줘야지.

[82층 히든 임무 : 거대 뱀 아포피스에 대한 피소환인 라직스의 복수(완료)]

[보상 : 상급 마정석 10t/ 랜덤 룬]

이것 또한.

[아이템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적용 대상은 상급 마정석 보상입니다.]

[인벤토리로 상급 마정석 80t을 지급합니다.]

추가 획득 적용.

이번엔 8배.

"아아아."

감격스럽다.

그럴 수밖에.

82층까지 등반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보상들을 받아본 적이 있나?

기본 상급 마정석 보상 20톤.

추가로 획득한 170톤.

합쳐서 190톤.

더불어 카탈로그 확장권 한 장에 미확인 랜덤 룬 2개.

그런데 랜덤 룬이 뭔지는 안 알려 주네.

'직접 확인해봐야 하나?'

이제 막 끝난 가죽 벗기기.

재빨리 아공간 배낭으로.

그리고 마지막.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2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배지까지.

초초 대박이었다.

랜덤 룬만 제대로 뜨면 화룡점정.

제발 특성 강화 룬 하나만 뜨자.

*

집으로 귀환한 주혁과 일행들.

먼저 일괄 소환 해제를 하고 나서.

주혁은 백색 탑 17층으로 들어갔다.

큰일을 치렀다.

평소처럼 보낼 수 있나.

"호에에에? 노, 높아요."

이미 피소환인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라직스.

"후에? 호에? 후에에에...."

복슬복슬 털 뭉치가 하늘 까마득하게 날아갔다가 다시 떨어진다.

모두 다 라직스를 축하해줬다.

그의 트라우마 극복을.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도 가담했다.

차르르르, 호문쿨루스를 대신 보내 헹가래 대열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라직스는 저대로 내버려 두고.

결산해야지.

이번 공략으로 얻어낸 보상들.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인벤토리에서 카탈로그 확장권을 꺼내.

<카탈로그 확장권>

효과 : 찢어서 사용하면 상태창 카탈로그 목록에 5개의 슬롯을 추가합니다.

장당 늘어나는 슬롯이 5개.

찌이익!

당장 찢어서 사용하고.

[카탈로그 목록이 확장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특전.

이전 누적 배지 128개에서 1번 탑, 2번 탑을 연달아 공략했으니 4개를 더해서 총 132개, 실물 배지도 17개.

'그럼 특전은?'

[플래티넘 배지 13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카탈로그 확장권을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흠.'

확실히 확률 조정된 거 맞다.

안 줘도 되는데 또 나온다.

뭐, 특전에 대한 기대야 접은 지 오래.

찌이익!

이것도 찢어서 슬롯 5개 추가.

총 10명 더 무작위 소환할 수 있다.

이제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랜덤 룬 2개.

과연 뭐가 인벤토리로 들어왔을까?

일단 하나를 꺼내서.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정보 확인하니.

<피소환인 등급 돌파의 룬>

"…에이."

스스알 피소환인을 르스스알로 돌파시켜주는 룬.

살짝 실망했지만.

'괜찮아. 좋은 거잖아.'

그렇다.

게다가 이 룬은 누가 사용해야 하는지 조건도 달려 있지 않다.

따라서 스스알이면 누구나 다 돌파가 가능하단 의미.

'현재 누구누구가 스스알이지?'

라직스, 베 상사, 바르딘, 제페트, 그리고 디아마트.

이 중 디아마트는 제외.

왜?

전향 귀순자니까.

승급도 별도의 룬이니, 돌파도 별도의 룬이 필요할 터.

'그럼 4명인데.'

라직스는 이미 18개의 배지를 받았다.

이번에도 배지가 확정되어 있으니 무조건 20개를 넘을 것이고.

즉, 금방 25개를 달성한다.

돌파 룬이 없어도 된다.

어차피 돌파 룬은 배지를 한꺼번에 몰아줘서 시간을 단축해주는 주는 용도.

그럼?

'베 상사 줘야지.'

지금 당장은 안 되고.

라직스 LSSR로 승급하고 배지가 모이면.

그녀도 진급할 때가 됐다.

이번에 돌파하면 계급이 뭘까?

준위 정도 되려나?

아무튼 다음 랜덤 룬.

제발!

운빨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럼 터져줘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가즈아!

운빨 코인에 올라타 보자.

과연 뭘까요?

<특성 강화의 룬>

"...."

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보를 확인해보고, 또 한 번 확인해보고.

'흠.'

꿈인지 아닌지, 눈을 비볐다가 허벅지도 꼬집어 보고.

'후우.'

크게 심호흡하고 난 후에 아직도 라직스한테 헹가래를 하는 피소환인들에게 다가가서.

"잠깐 멈춰 주실래요?"

"넴?"

그제서야 땅을 밟은 라직스.

"호에호에, 호에에...."

술 취한 듯 비틀거리다가 땅에 주저앉았다.

"라직스 씨는 그만하고 절 헹가래 쳐주세요."

무슨?

고개를 갸웃하는 피소환인들.

소환사님이야 원하시면 언제든지 해 드릴 수 있지만, 성격상 이런 거 원하지 않는 분이신데....

주혁은 특성 강화의 룬을 든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잘 보이게끔 가까이, 한 바퀴 빙 돌면서.

"헐!"

코사크가 제일 먼저 알아챘다.

"트, 특강룬 아임까!"

"어머?"

"와!"

"호에?"

"역시!"

"소환사! 감축드리오."

"이번에도 역시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

덥석.

고방이 주혁을 들어 안았다.

그리고 높이 던져 올리니.

"으힉!"

헹가래 시작.

차르르르르.

마리의 호문쿨루스가 몸을 감싸왔다.

따뜻했다.

"풍악을 울리십쇼! 에헤라디야!"

기분 최고다.

'무작위 소환은 나중에 해도 되겠지?'

신나게 놀고 나서.

그리고 82층 성공했으니 관련 자료들 전광일 청장님에게 보내주고.

*

<세계 최고 플레이어, 대한민국 검은 탑 1번, 2번 82층 잇달아 성공.>

<과연 82층의 몬스터는?>

<한국 각성 관리청, 80층대는 거대괴수 구간일 거라고 추측.>

<한숨만 나온다. 거대괴수라니, 과연 공략할 수 있을까?>

이미 81층의 베헤모스 영상은 공개됐다.

그걸 본 플레이어들의 소감.

거대함에 압도당했다고나 할까.

고층 빌딩 한 채가 가로로 누운 채, 4개의 발로 쿵쿵 걸어 다니는 식이다.

저걸 공략하라고?

말이 되나?

언데드 구간은 쉬운 편이었다.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

└ 70층 대는 꽃길이었는데.

└ 나도 베헤모스 영상 봤지만, 크크크, 저걸 어떻게 잡아?

└ 밟히면 끝나는 거지.

└ 치고 빠지면 안 되냐?

└ 데미지는 어떻게 입히려고? 피를 깎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 베헤모스는 그렇다 치고, 80층은?

80층도 쉬운 게 아니었다.

악몽의 흑마 나이트메어.

그놈이 어떤 몬스터인지 그 전에 공개됐었다.

<전문가들, 81층, 82층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문제는 80층 나이트메어>

<세계 최고 플레이어의 경고, 대비하지 않는 한 꿈꾸다가 당해.>

<각성 관리청, 80층 나이트메어 대비책 있다.>

<곧 플레이어 샵을 통해 저항 키트 판매할 예정.>

└ 역시 최고 플레이어밖에 없네.

└ 맞아. 먼저 올라가서 정보도 전달해주고, 대비책도 마련해주고.

└ 차라리 최고 플레이어보고 전 세계 탑 싹 다 공략해달라고 하면 안 되냐?

└ 무슨 수로?

└ 북한 탑 가져간 것처럼 우리 탑도 가져가라고 해.

└ 되겠냐? 국가들 자존심이 있지.

그러다가 영상 하나가 또 공개됐다.

82층의 몬스터, 거대괴수 아포피스.

<충격! 소름 끼치는 거대 뱀 아포피스의 위용.>

<탑에서 기차가 운행되는 줄 알았다.>

<최고 플레이어가 저걸 잡았다고? 어떻게?>

<플레이어들 모두 한목소리로 말해, 정상적인 공략으론 불가능.>

└ 아포피스는 베헤모스보다 더 힘들겠군. 그래도 베헤모스는 느리기라도 하지.

└ 독뱀인가?

└ 저렇게 큰데 독이 필요하겠냐? 플레이어 따위 한입에 삼키면 그만이야.

└ 삼키다가 이빨 사이에 끼겠다.

└ 딱 봐도 견적 나온다. 81층 거대괴수 구간은 절대 안 돼.

└ 공략했잖아. 최고 플레이어가.

└ 그건 그 양반이니까 가능한 거고.

└ 저거 잡으려면 플레이어들 최소 15명은 있어야겠다. 혼자선 어림도 없어. 공격대 구성해야 해.

└ 난 30명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 아니, 공격대는 무슨! 애초에 구성 자체가 안 되는데.

└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솔플은 너무 가혹하다.

└ 진짜 공격대 구성 아이템 같은 건 안 나오나?

└ 이거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 무슨 고민?

└ 최고 플레이어에게 탑 넘겨주는 거.

└ 동의해. 난 탑 정도는 넘겨줄 수 있다고 봐.

└ 그래, 플레이어들도 상태창 소속만 바뀌는 거니까.

└ 그런데 최고 플레이어가 왜 탑을 가지고 가? 다른 나라 탑 보유해 봐야 뭐하겠다고?

└ 북한 탑은 명분이라도 있었지. 원래 한 나라였잖아.

└ 탑 하나 가져가는데, 1조 달러 준다고 하면?

└ 탑이 세워진 땅을 통째로 묶어서 넘겨주는 건 어때?

└ 가만히 생각해보니 실현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플레이어, 혹은 일반인들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최고 플레이어님.

강탈해가세요.

북한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 탑이 붕괴하기 전에.

*

무한의 감옥, 영혼의 세상에서도 아주 가끔 공지가 울리곤 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공지 : NO. 975 지구 검은 탑 붕괴가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세상과 탑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멸망의 시작을 선언하는 공지.

[공지 : NO. 442 지구가 아포칼립스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멸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공지.

[공지 : NO. 183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했습니다.]

멸망을 알리는 공지.

그래서 공지가 울리는 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공지 : NO. 1001 지구 검은 탑의 관리자들이 교체되었습니다. 동시에 불법 확률 조정이 정상화되었습니다.]

NO. 1001 지구라면?

그 소환사의 세상 아닌가.

검은 탑에서 핵을 터뜨리고 82층대를 등반 중인 기적의 소환사가 사는 세상.

너무 강한 나머지 관리자들이 불법으로 개입해서 농간을 부릴 수밖에 없었던 그 플레이어.

관리자들이 교체되고 카탈로그 확장권 확률 조정이 정상화되었다면....

『만세!』

『흐흐흐, 오래 있다 보니 관리자 교체되는 것도 다 보네.』

『저 새끼들, 그냥 교체로는 부족해. 영혼까지 소멸시켜버려야 해.』

『네가 말했지? 영차영차하면 된다고.』

『영차!』

『여엉차!』

순간!

어떤 영혼의 한마디.

『그럼 곧 무작위 소환이겠군.』

그러자.

『아!』

『으음.』

『어.』

『....』

『....』

시끌벅적했던 무한의 공간이 서서히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회가 왔어. 우리 이번에 무작위 소환에 당첨되도록 다 같이 힘내 보자고. 응? 자자, 영!!!』

하지만.

『응? 다들 뭐 해? 영! 이라고 했잖아.』

조용했다.

『영!!!』

『…영?』

누구도 장단을 맞춰주지 않았다.

『뭐야? 왜 아무 말 없어? 너희들 기도라도 하고 있냐?』

그랬다.

모두 기도 중이었다.

곧 있을 무작위 소환에 자신이 당첨되길.

『지금부터는 각자도생이구나. …씨발.』

나가면 바로 백색 탑 17층으로 이사한다.

그들에게 있어 무작위 소환은 영혼 해방이나 다름없었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7 >

백색 탑 17층을 분양받아 좋은 점 중 하나.

주혁과 피소환인들만의 매우 프라이빗한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

그래서 눈치 보지 않고 풍악을 울리며 시끌벅적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는 행위가 가능해졌다.

층간소음이니, 소음공해니 하면서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제대로 놀아보자.

소리 꽥꽥 지르고 이벤트도 개최하면서.

피소환인들의 의견을 받아 노래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

간이 무대도 뚝딱 만들었다.

노래방 기계와 대형 스피커도 설치했고.

대회니까 경쟁심도 유도해야지.

우승상품은 플래티넘 배지 하나.

아무리 배지가 모자라더라도 우승상품으로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 

견달래가 심사를 맡기로 했다.

배지 욕심이 없는 듯.

혹은 노래에 자신이 없거나,

시작된 노래 대회.

먼저 스타트를 끊은 사람은 역시 코사크.

"한류의 기대주, 음반 차트를 일렬로 줄 세우는 국민 가수, 통일의 꽃 인민무력부장, 보천보 전자 악단 단장, 반갑슴메다, 어젯밤에도 울었네, 휘파람 코사크임다."

마이크를 잡고.

원하는 번호를 쿡쿡 누르니.

흘러나오는 반주.

발라드였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어찌함까? 어떻게 할검까? 감히 제가, 감히 그녀를···, 싸아랑함다."

노래 끝.

노래방 기기 점수는 80점.

어정쩡한 점수.

"흠, 마음에 안 드는 점수지만 선방했슴다."

하지만 견달래의 의견은,

"탈락입니다."

"···넴? 아니 왜?"

"분위기에 맞지도 않고, 발음이 좋지 않아 가사 전달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

"불만 있습니까? 건방지게 노래방 금지곡을 부르다니, 잘 부르면 또 몰라."

두 번째 인간성검 바르딘.

번호 쿡쿡쿡쿡.

"빛이여!!!"

화아악!

스스로 알아서 무대 조명도.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실로아암···,"

성기사의 성가.

광휘의 찬양.

빰, 빠바바 빰!

노래방 기기 점수 100점.

하지만.

"탈락!"

"헉!"

가차 없는 견달래.

"왜요?"

"생뚱맞게 찬송가는 왜 부르십니까? 자신이 믿는 신도 아니면서,"

"어음,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

"어쨌든 탈락입니다."

디아마트도 노래자랑에 나왔다.

언제 구했는지 하얀색 셔츠에 산들산들한 파란색 치마를 입고 나와.

"주인님께 바치는 노래에요. 요즘 유행하는 걸로 준비해봤어요."

쿡쿡쿡쿡.

번호를 누르고.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한 손은 마이크, 한 손은 쭉 뻗어서 상큼발랄한 음색과 율동으로.

"아, 와타시노 코이와, 미나미노 카제니 놋테 하시루와, 아, 아오이···,"

빰, 빠바바 빰! 100점.

견달래의 점수는?

"탈락!"

"왜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디아마트.

"본녀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

"그니까 왜 기분이···," 

"쓰읍! 넌 다음부턴 마이크 잡지도 말 거라."

물론 다른 사람들은 디아마트가 탈락한 이유를 안다.

일본 노래를 불렀으니까.

근데 견달래 폼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으면 네 이년! 어디 왜놈 노래를!

불호령이 떨어졌을 텐데.

뭐, 일본 노래 좀 부를 수 있지.

요즘 일본에서도 한국 노래 유행한다던데.

하지만 국뽕은 진리.

어느 매체에서나 통용된다.

1등하고 싶었으면 국뽕 노래를 불렀어야 했다.

심사위원의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실수.

라직스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호에에, 호에, 호에에에엣! 호오···,"

"탈락."

"후엥."

불쌍한 라직스.

화면에 가사가 나오는데도 따라 하지 않고 호에만 하고 있으니 당연히 탈락이지.

다음으로 베 상사, 제페트, 심지어 고방까지 마이크를 잡았다.

하지만 우승은?

아는 노래라고는 군가밖에 없는 베 상사가 1등.

"피, 필승!!!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감사합니다."

배지 하나 달아주고.

이로써 그녀의 배지는 총 7개.

"봉 소환사님도 노래 한 곡 하십쇼."

"안 할 건데요."

"에이, 그러지 말고···,"

"쉿! 절대 시키지 마세요."

"예압!"

노래 권유 금지.

노래하면 안 된다.

심각한 음치이기 때문에.

주혁도 예전 코인노래방 혼자서 몇 번 갔었다.

최고 점수가 40점대.

이런데 어떻게 노래를 불러?

그렇게 노래자랑 대회도 성황리에 끝나고 잔치는 쭉 이어졌다.

주혁은 문득 궁금했다.

우리 방구석 연금술사님은 뭐 하시나?

태블릿으로,

<상남자> : 마리 씨? 심심하지 않나요? 같이 와서 놀래요?

<마리> : 아뇨,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요♪♪♬

하긴.

그럴 것 같다.

워낙 잘들 노니까.

<상남자> : 다음번엔 꼭 같이 놀아요. 노래도 부르고,

<마리> : 네♡♡♡

주혁은 광마와 함께 술판을 벌였다.

그동안 모아뒀던 술을 모조리 꺼냈다.

마리가 만든 약초 담금주도.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고급 술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좋네요."

"노부도 그렇소."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17층에서 놀자.

그러고 나서 할 일 해야지.

먼저 무작위 소환.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시간.

나중에 환영식도 해야 하고.

아포피스 가죽도 전광일 청장에게 보여줘야 한다.

과연 상품성이 있는지.

있으면 벗겨다가 공급하고.

"아무튼 81층, 82층 굴곡이 많은 공략이었소."

"그렇죠. 정신없을 정도로."

단 2개 층이었다.

그런데 진짜 파란만장 스펙타클했다.

81층에서 난이도 급상승한 초 거대괴수 타이탄 베헤모스를 핵으로 터트려 죽이고, 보상으로 코사크 아버지의 영혼을 해방했다.

82층에선 관리자 월권 및 확률 조정에 대한 사과 차원으로 공략 보상을 받았는데, 그게 라직스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임무, 훌륭하게 이겨냈다. 그에 따른 보상도 어마어마했고.

좋지 않은 일일 줄 알았는데, 해결할 수 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결국 모두 긍정적인 결과, 엄청난 행운으로 돌아왔다.

이게 럭키 비키가 아니면 뭔데?

결과를 봐봐.

카탈로그 확장권에 초초 대량의 상급 마정석, 심지어 특성 강화의 룬까지.

전임, 신임 관리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

"다 소환사 덕분이요."

"에이, 또 이러신다. 그게 어디 제가 잘나서 그런 건가요? 뭘 한 것도 없는데."

"하하하, 천만에! 공치사가 아니오."

광마는 약초 담금주 한잔을 쭉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핵 공략 발상을 누가 처음 생각해냈소? 바로 소환사 아니신가?"

뭐, 그건 그렇지만.

"또한 82층에서도 탑 공략 리셋 티켓을 사용해서 완벽 공략을 위한 시간도 벌었고."

음.

81층, 82층 통틀어 2장 사용했지.

그래서 지금은 한 장도 없다.

"소환사가 빠른 결정을 해줘서 그런 것이 아니겠소, 허허허."

"아유, 뭘요. 제가 여러분들 없으면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좋은 말 들었으니 한잔 따라주고,

쪼르륵.

"어이쿠, 노부도 따라드리리다."

한잔 받고.

"넵!"

사실 광마 말대로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의 역할이 매우 컸다.

아니면 S+++ 등급 공략 배지도 못 받았을 것이고 히든 임무도 포기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다 써버렸으니···,

어디 티켓 수급할 때 없나?

특전은 이미 김이 팍 식어서 기대 안 하는 것이 낫고.

바로 그 순간!

데굴데굴.

황금 빗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우주대머슴.

그를 보니 기억이 떠오른다.

과거 티켓하고 룬이 부족했을 때 라직스 조각 맞추기로 쏠쏠하게 재미 많이 봤는데,

심지어 특성 강화의 룬도 만들어냈다.

'이젠 조각 수집 안 하나?'

한번 물어보자.

"라직스 씨!"

"호엥!"

주혁이 부르자,

데구르르.

굴러와서.

"우리, 날 잡아서 티켓하고 조각 탐색 좀 해요. 가죽도 채집하고, 광석도 캐고."

그러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라직스.

응?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있나?

"호에, 많아요."

"···네?"

무슨 말이지?

뭐가 많아?

"호에."

주혁 앞에 손을 뻗는 라직스.

순간!

좌라라라라락!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의 종잇조각 돌조각 등, 잡동사니 쓰레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많이 모았어요, 조각. 호에."

"···."

이게 다 뭐야?

전부 룬, 티켓 조각이라고?

아니, 이걸 언제 다 모았대.

"그동안 왜 얘기를 안 했어···, 음."

하긴!

그동안 한 번도 안 물어봤으니까.

좌라라라라락!

조각들이 쌓이고 또 쌓였다.

그리고.

스르륵, 탁! 스르륵, 탁! 스르륵, 탁···,

마치 자석처럼 서로 붙기 시작했다.

[조각이 합쳐졌습니다.]

설마?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을 획득했습니다.]

[아이템 추가 획득의 티켓을 획득했습니다.]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획득했습니다.]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을 획득했습니다.]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획득했습니다.]

.

.

.

정신없이 떠오르는 메시지.

"헐."

미쳤다.

막 붙어서 나온다.

티켓뿐인가?

룬도.

스르륵, 철컥! 스르륵, 철컥! 스르륵, 철컥···,

[피소환인 등급 상승의 룬을 획득했습니다.]

[플레이어 각성의 룬을 획득했습니다.]

[랜덤 스킬 룬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업의 룬을 획득했습니다.]

[플레이어 각성의 룬을 획득했습니다.]

.

.

.

세상에!

어이가 없다.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다물 수가 없었다.

아아, 라직스 씨.

너무 큰 사고를 치셨어요.

이 큰 죄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하남자 심장 터지겠네요.

"라직스 선생님."

"호에?"

"배지? 몇 개나 필요하세요? 몇 개면 될까요?"

"후에에···,"

특전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라직스가 특전이고 업적이다.

※ ※ ※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심정이 이럴까?

인벤토리에 티켓과 룬이 가득 들어있는데.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특성 강화의 룬은 없다는 것,

뭐, 너무 욕심부리는 것도 좋지 않다.

아무튼 기세를 탔다.

끊지 않고 쭉 이어서 간다.

'곧바로 무작위 소환으로!'

주혁은 펜트하우스에서 피소환인들을 불러냈다.

마리까지 불렀다.

이번에도 혈랑 빼고 10명만.

혈랑은 17층 안에서 뛰어놀라고 하고.

어쩔 수 없다.

제일 만만한 게 혈랑 아닌가.

애견인들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사람이 먼저지.

특성 강화의 룬은 이미 먹었다.

그래서,

[특성] : 소환(동시 소환 : 11)

한자리 비워뒀으니까 바로 무작위 소환하면 될 터.

과연 누가 올까?

"설마 꽝은 없겠죠?"

"없사옵니다. 다만 제정신 아닌 영혼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소. 본래 무한의 감옥은 평범한 이들도 미쳐버리게 만드는 곳이라."

뭐, 괜찮다.

아무나 오면 어때?

"하하하. 그래도 전 운이 좋았나 봐요. 훌륭한 영혼들만 골라서 뽑은 느낌이랄까. 항상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안 하는 피소환인들.

"···아닌가요?"

"큼!"

"험!"

"그, 그게···,"

"쩝."

하긴!

대답 못 할 만도 하지.

나오자마자 사채업자 머리에 리본을 달아버린 코사크, 우둔한 고방, 호통의 견달래, 짜리몽땅 수인족 라직스, 미친 광마, 졸면서 나온 베 상사, 광신도 인간성검 바르딘, 대인기피증 마리, 흡혈귀 제페트, 귀순 용사 디아마트···,

하지만 어때서?

결과론적이지만 다들 훌륭했다.

지금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의 피소환인들이 됐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걱정하지 않았다.

누가 와도 상관없다.

사람이 좀 엉뚱하면 어때?

'자, 이제 시작해보자.'

어우, 오랜만에 무작위 소환하려니까 조금 떨린다.

"자, 잠깐! 기다려주십쇼."

"왜요?"

"···어어어, 카탈로그 확장한 거 확실함까?"

코사크는 불안한 기색.

확장 없이 무작위 소환하면 제일 오래된 항목부터 삭제된다고 했으니까.

"확장했어요, 그것도 2번이나."

"네, 네엠."

그럼 이제.

"무작위 소환!"

[무작위 소환을 시작합니다.]

화아아아앗!

찬란한 빛이 떠올랐다.

밝기나 색깔을 보면 안다.

등급이 낮을수록 빛의 세기가 약하다.

반면 세기가 강하거나 빛의 색깔이 다채로우면?

최소 스스알, 혹은 르스스알.

그런데 이번 빛은 눈이 부실 정도.

심지어 다채롭다.

그렇다면···,

화아앗!

한순간에 사라지는 빛.

나타났다.

바로 앞에 있었다.

겉모습은 광마님처럼 머리 하얗게 센 노인.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으고 중얼중얼 혼잣말하며.

"제발, 이번 순서는 나다. 나여야만 해! 내가 나간다! 신이시여! 영차! 영차!! 영차!!!"

엥?

이분 나오자마자 왜 이래?

'···카탈로그 정보는?'

<카탈로그 : 루비 마탑의 마탑주, 인정욕구 충만한, 극 외향의 9서클 관종 마법사>

- 이름 : 매켄지 드로낙

- 등급 : LSSR(레전드 스폐셜 슈퍼 레어)

- 유형 : 마법사(인간)

- 현신 기한 : 5시간

- 만족도 평가 : 없음.

- 재소환 대기 시간: 3시간(소환 해제 후 적용)

아! 마법사시구나.

- 매켄지는 태어날 때부터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의 관심에 목말라했다. 매켄지가 마법사의 길로 간 이유도 이 때문, 또한 그의 마법도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 매우 화려한 이펙트를 자랑한다.

- 그런 성격답게 랜들베니아 대륙에서 매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대륙 최고의 스타 마법사, 분위기 메이커에, 친화력도 뛰어났고.

- 그의 최후도 환상적이었다. 나이가 들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거창한 장례식을 열기로 결심했다. 외로운 장소에서 쓸쓸히 죽기보다는 화려하고 멋들어진 죽음을.

- 죽음을 위한 준비, 루비 마탑의 각 지부를 통해 대륙의 대도시마다 거대한 통신용 영상 수정구를 설치하고, 자신의 최후를 사람들에게 생중계하기로 마음먹은 것.

- 대륙의 넓디넓은 사막에서 송출용 통신용 수정구 하나를 띄운 채, 늙은 9서클 관종 대마법사 매켄지 드로낙은 운석 소환 마법을 실행했다. 자신을 목표로 말이다. 그리고 운석이 떨어졌다. 죽는 순간까지도 매켄지는 매우 만족했다.

'···.'

자기 죽음을 생중계했다니.

심지어 운석을 떨어뜨려서.

'이 양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

그때였다.

뭔가 달라진 환경을 느낀 듯.

황급하게 고개를 든 새로운 피소환인 메켄지 드로낙.

"···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광마의 얼굴을 보고,

"오!"

코사크, 베로니카, 견달래, 라직스···, 등등 모두와 눈을 마주치면서.

"오오!"

마지막으로 주혁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오오오!"

오른손 올려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바로 그 순간!

스우웅.

갑자기 어두워지는 거실.

동시에.

펑펑, 펑펑펑펑!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형형색색의 소형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그뿐이 아니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찌익 찢은 매켄지.

팟팟!

하얀 광원이 허공에서 생성됐다.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 집중조명.

하나는 주혁에게, 또 하나는 매켄지 자신에게.

장미꽃잎도 조명을 타고 휘날렸다.

9서클 관종 마법사 매켄지가 주혁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따라 비췄다.

뭐야?

무슨 콘서트 현장인가?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8 >

매켄지 드로낙.

루비 마탑의 마탑주, 인정욕구 충만한, 극 외향의 9서클 관종 마법사.

맞다.

관종.

지극히 어울리는 카탈로그 호칭.

첫 소환으로 증명했다.

거실을 어둡게 만들고, 소형 불꽃놀이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후,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를 띄워서.

쇼는 계속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주혁과 매켄지.

나머지는 들러리.

꽉!

멀뚱히 서 있는 주혁을 부둥켜안은 매켄지.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하나로 합쳐졌다.

동시에 흘러나오는 웅장한 배경음악.

짠짠! 짜자자자잔···, 짜짠!

실로 완벽한 무대.

환영 마법으로 불러일으킨 장미꽃잎이 온 거실을 뒤덮었다.

장관이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아니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하오. 날 지옥에서 끌어내 주다니."

"아, 네네."

"우린 진짜 천생연분이오. 만나자마자 느꼈지. 소환사도 그렇지 않소?"

천생연분은 좀···,

진심이 담긴 강한 포옹.

그 모습에 눈꼴이 시렸는지 결국 한마디 하는 광마.

"망할 관종 새끼, 걱정된다. 걱정돼."

그러자 싸늘한 표정으로 광마를 노려보는 매켄지.

"뭐냐? 질투냐?"

"질투는 무슨, 본좌가 너 따위에게 질투를 느낄까?"

"그럼 왜 시비야?"

"한마디만 하마. 이번에도 탑 밖에서 운석 소환 지랄 떨면 넌 내 손에 죽는다."

"···."

아픈 곳을 건드렸을까?

메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화아앗!

그의 등 뒤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염.

파칙, 파치치직!

곤두선 머리카락 끝에서 튀는 전기 스파크.

뭐지?

위협적이지 않다.

뜨겁지도 않다.

다만 자신이 분노했다는 걸 표현하는 시각적인 효과일 뿐.

'···살아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구나.'

매켄지의 감정선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마법인 듯.

"제기랄! 그 얘긴 왜?"

화르륵! 파치직!

"나대지 마라. 운석 소환 마법 기미라도 보이면 즉시 목이 날아갈 테니까."

"···흥! 네 주제에 감히? 가능할 것 같냐?"

"본좌가 언제 혼자서 한다고 했지?"

"혼자가 아니면···,"

순간!

매켄지는 자기를 노려보는 또 다른 놈들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쑤우욱!

거대화로 몸을 키우는 고방.

슈슛, 슈슈슛!

입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경망스러운 스텝을 밟는 코사크.

스슷!

품에서 꺼낸 부적을 손가락에 끼운 견달래.

촤르르륵!

어느 틈에 자신의 하체를 휘감아오는 알리아마리의 호문쿨로스.

'흠.'

피시식!

등 뒤의 화염의 시각효과가 줄어들었다.

스파크를 일으키며 세워져 있던 머리카락도 눕혀졌고.

꿀꺽.

침 한번 삼키고는,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할 것 같아서. 그러니 제발 설치고 다녀라. 깔끔하게 해치울 수 있게."

"날 죽여? 가능하긴 한가? 소환사께서도 가만히 있지도 않을 테고."

"3원칙 3항!"

"···씨발,"

스우웅.

칙칙해지는 매켄지의 신형.

화려한 시각효과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시커메졌다.

마치 검은색으로 덧칠한 듯했다.

'와!'

볼수록 재미있다.

감정마다 색다른 특수 효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피소환인이라니.

진정한 만찢남.

'귀한 분이시네.'

매켄지의 배경 설명.

- 그의 마법도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 매우 화려한 이펙트를 자랑한다.

'이런 의미였구나.'

지금도 매켄지는 까맣게 물들어갔다.

비유가 아닌 진짜 까만색.

"지구를 만만히 보지 마라. 특히 여긴!"

"···."

"다시 말하지만 탑 밖에서 운석 소환은 절대 안 돼."

"···."

"대답!"

"···알았다고."

주혁은 가만히 지켜만 봤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광마와 메켄지, 서로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알아서 풀겠지.'

그나저나 운석 소환이라니.

탑 안에서도 가능할까?

"그럼 메켄지씨도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백색 탑 17층 입주권을···,"

"자, 잠깐!"

응?

번쩍 손을 든 메켄지.

화아앗!

빛나는 광채.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

어우, 정신 사납게.

까매졌다가, 빛났다가.

"부탁이 있소, 소환사."

뭔지 알 것 같다.

"지금 소환 해제해주시오."

맞네.

"한 10시간만 주시오. 빠듯하긴 하지만 빨리 자랑하고 오겠소이다."

이해한다.

관심 고픈, 인정에 목마른 영혼이 자랑질을 놓칠 수 있나.

'그런데 대체 얼마나 자랑질을 하려고 10시간이 빠듯한 거야?'

하는 수 없다.

소원을 들어줘야지.

"네, 그렇게 해드리죠. 자랑하고 오세요."

"고맙소. 하하하하하!"

하늘로 붕 떠오르는 매켄지.

위이이이잉!

온몸에 빛나는 아홉 개의 둥근 고리가 훌라후프처럼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

틈만 나면 특수 효과.

탑 안에선 어떤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인 건 틀림없다.

"메켄지 드로낙, 소환 해제."

"하하하하하!"

스팟!

그리하여 매켄지는 무작위 소환되자마자 다시 무한의 감옥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사라져서 하는 말이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레전드 등급인데, 죽이니 마니 하는 건 좀,"

"천만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요. 방심하다간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오."

아니, 그렇게 안 좋나?

사람은 괜찮아 보이는데.

저렇게 특수효과로 자신의 감정을 시시각각 동시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인데.

띠링!

<마리> : 허튼짓하면 제가 호문이로 터트려버릴게요.

심지어 마리도 잔뜩 경계하는 것 같다.

"희한한 명분으로 3원칙 3항을 실천하는 놈이라···, 힘내시오. 소환사."

"전사가 옆에서 잘 감시하겠다."

"한시라도 방심해선 아니 되옵니다."

지들은?

개구리 되니까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은 모양.

전광일 청장님이나 만나러 가자.

물어봐야 할 것도 몇 가지 있다.

'참! 라직스씨, 배지 수여식 해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다 모여서 하는 걸로 하고.

※ ※ ※

중국은 대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륙 위기관리 본부 폭발 테러.

워낙에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전에 일어났던 전임 주석 사망 사건.

다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린차오밍은 심장마비, 왕위안은 바이룽에 의해.

하지만 이번 류자오 주석 및 상무위원 폭사 사건은 오리무중이었다.

범행의 목적, 방법, 용의자···, 심지어 시체도 찾지 못했다.

사망한 자들 모두 중국 각 정치 계파의 수장들.

그들의 부재는 곳곳에서 권력 암투를 불러일으켰다.

뿐인가?

중국 플레이어들의 불만도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실 중국 플레이어들의 처우는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

중국 내에선 걸핏하면 동네북 신세.

플레이어 숫자가 제일 많은 국가임에도 그렇다.

이번 사건에도 테러범을 색출한답시고 공안들이 달려들어 인벤토리를 모두 까라니, 폭발 당시 알리바이가 어떻게 되니, 공산당 정부에 불순한 사상을 품고 있는지, 매일매일 플레이어들을 괴롭혀댔다.

국가 육성 플레이어들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중국 일반 플레이어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몇몇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가칭 '중국 플레이어 협회'를 창설했다.

SNS를 통해 회원 가입을 유도하고 급속하게 세력을 불렸다.

중국 플레이어 협회의 첫 행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플레이어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급 마정석 중국 판매 거부, 심지어 탑 등반 중단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중국 정부가 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였을까?

어림도 없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 플레이어 협회를 반란 단체로 규정하고 엄격한 수사와 처벌을 천명, 즉시 지도부 색출에 나섰다.

이러다 진짜 탑 공략이나 제대로 될까?

물론 국가 육성 플레이어만 신경 쓴다면 붕괴할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탑에서 뽑아내는 자원.

중국 탑 재료 시장에 빨간 불이 커졌다.

중국 일반 플레이어들이 탑 등반을 거부했다.

등반했더라도 정부에 상급 마정석을 팔지 않았다.

갈등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

반면 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중.

검은 탑 70층 대에서 인류는 혁명을 맞이했다.

상급 마정석 덕분에 산업 전반에서 일어나는 변화.

검은 탑도 애물단지가 아닌 보물창고로 인식됐고.

붕괴의 걱정만 없다면 탑은 상급 마정석 광산 아닌가.

하지만 다 순조로운 건 아니다.

한국 각성 관리청에 의해 알려진 80층 보스의 정체.

악몽의 흑마 나이트메어.

매우 위험한 몬스터.

플레이어를 잠들게 하는 스킬.

꿈에 빠지면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한다.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대책은?

과거 언데드 구간의 열쇠였던 성검 같은 아이템은 없나?

왜 없어!

당연히 있지.

한국 각성 관리청 홈페이지.

들어가자마자 큼지막한 배너 하나가 떴다.

앞으로 플레이어 샵에서 판매 예정인 아이템.

바로 80층 보스 몬스터 악몽의 흑마 나이트메어 공략을 위한 꿈 저항 키트.

상품 구성은 <현자가 제조한 수면 제어의 비약> 한 병과 척사부(斥邪符) 한 장.

두 개가 한 세트.

가격은 한 세트에 백만 달러, 13억.

국가 육성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판매되는 상품.

어차피 80층이다.

일반 플레이어들은 올라가지도 못한다.

배너에 뜨자마자 예약 주문이 밀어닥쳤다.

70층 대를 공략 중인 거의 모든 국가가 각성 관리청으로 문의해왔다.

미국은 안토니오 국장이 직접 전화를 해와.

- 안녕하세요. 전 청장님.

"하하하, 잘 지내셨죠? 국장님."

- 나야 뭐 늘 한가하죠. 그나저나 전 청장님은 바쁘시겠어요. 플레이어로서 레벨 올려야 하고, 청장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그렇지 않아도 플레이어 각성이 후회스러울 지경이에요."

- 하하하, 엄살도 심하시네요. 재능도 뛰어나시면서.

재능은 무슨.

- 아무튼 꿈 저항 키트 예약하려는데.

"얼마 나요?"

- 일단 30세트, 물량이 될까요?

"되긴 되는데 조금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아직은 예약만 받고 있어서."

-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드리죠."

- 참! 평양 테러 시도 사건 말입니다.

"···네, 그건 왜?"

- 배후가 중국이란 소문이 있던데,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북한 정부가 알겠죠."

- 그럼 베이징 폭발 사건과도 연관이 없는 건가요?

"이야기해드렸잖습니까. 아는 바 없다고, 그리고 그것 또한 중국 정부가 밝힐 일이고."

- 아!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뚝!

전광일 청장은 전화를 끊었다.

"어디서 약을 팔아?"

물론 전광일은 눈치채고 있었다.

중국 베이징 대륙 위기관리 본부 폭발 사건이 누구와 관련되었는지.

미국도 그런 것 같고.

하지만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알아서도 안 된다.

솔직히 고작 7명 죽은 걸로는 모자라다.

아무리 그들이 최고 권력자라 하더라도.

'개 같은 중국 놈들.'

생각 같아선 중국 중난하이 전체를 날려버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순간!

띠링!

울려오는 스마트폰 메시지 알림음,

확인해보니.

"오!"

봉 플레이어에게서 온 것이다.

- 오늘 각성 관리청 방문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시죠? -

무조건 괜찮지.

일정 모두 캔슬해서라도 만나야지.

전광일은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 편하실 때 언제라도 방문해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

무한의 감옥.

남아있는 사람들의 슬픔.

소환되지 않는 것도 서러운 판에.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영차! 만 하고 있었다니까, 근데 웬걸?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에 오감이 막 살아나는 거야. 그래서 눈 떠보니 광마처럼 생긴 늙은이 하고 햄스터 수인족에다, 마도 제국 마총사가 떡! 하니 보이는데···.』

『···.』

『···.』

『···.』

『지구 소환사를 처음 본 느낌은···, 뭐랄까, 내 영혼의 단짝? 동전의 양면? 자석의 양극? 자네들도 알지 않나?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

『···백색 탑은?』

『거긴 안 들어갔어?』

『입주권 받으면 여길 다시 못 오잖아. 그래서 바로 소환 해제해달라고 부탁했지. 너희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가라.』

『빨리 가!』

『닥쳐.』

『이제 그만해.』

『후, 견디기 힘드니까 꺼져.』

『씨발, 새끼.』

『아니 왜들 이러나? 난 자네 기도할 때 영차영차 얼마나 외쳤는데. 그게 통했어. 하하하하!』

이 죽일 놈의 관종 마법사.

영혼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

무려 10시간 동안 자랑질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부러움, 질투, 실망, 분노로 조용해진 영혼의 세상에서 누군가 텔레파시를 보냈다.

『···영.』

동시에.

『차.』

『영.』

『차.』

『영.』

『차.』

강한 외침은 아니었지만 매우 절실했다.

※ ※ ※

한국 각성 관리청 탑 재료 창고.

주혁은 전광일 청장과 만났다.

그동안 서로 바빠서 전화 통화만 했었는데.

"봉 플레이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안녕하셨어요? 레벨은 많이 올리셨나 모르겠네요."

"으음, 탑 들어갈 시간이 없어서요."

"저런!"

생각 같아선 함께 탑 입장해서 버스라도 태워주고 싶지만.

탑 공략의 원칙이 솔플이라 마땅한 방법도 없고.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80층 공략용 꿈 저항 키트 공급이라든지, 81층 이상 거대괴수 구간 공략 방법이라든지, 탑 재료 공급이라든지.

"청장님."

"네."

전광일은 자신에 대해 알 거 다 아는 사이.

그런 이유로 17층의 존재도 알려줘야지.

확인할 것도 있고.

"제가 분양받은 장소가 하나 있어요."

"분양이라면? 아파트입니까? 어디를···,"

"백색 탑 17층인데."

"···네?"

대체 무슨 말이지?

백색 탑이란 아파트도 있었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안 바쁘시면···,"

"아아, 바, 바쁘지 않습니다."

"그럼 여기, 이거 받으세요."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전광일에게 건넸다.

백색 탑 17층에서 발급받은 것.

<1일 체험권>

영구 입주권이 카드인 데 반해 1일 체험권은 잘못 다루면 쉽게 찢어질 정도로 얇은 종이.

비용도 얼마 들지 않았다.

겨우 상급 마정석 1kg.

어리둥절한 표정의 전광일.

주혁이 건넨 종이를 받아드니.

순간!

츠츠츠측!

종이에 글자가 새겨졌다.

'무슨?'

- 백색 탑 방문객 : 전광일 -

동시에,

띠링.

그의 뇌리에 울리는 메시지.

[범용 스킬에 임시 스킬이 등록되었습니다.]

"···어어,"

전광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태창이 변했다니.

주혁은 그동안 궁금했다.

피소환인들에게 입주권을 주면 완전히 이사하게 된다.

그럼 플레이어들은?

그들에게 입주권을 부여하면?

"혹시 달라진 게 있나요?"

"이, 있습니다."

"뭐가···?"

"범용 스킬에 추가된 항목이···."

전광일의 상태창이 변했단다.

이렇게.

[범용 스킬] : 탑 입장(1일 1회)/ 탑 전용 인벤토리/ 백색 탑 17층 입장 및 퇴장(24시간 유효).

플레이어들은 상태창에 스킬로 등록되는 듯.

1일 체험이라 24시간 동안만.

"한번 들어가 보실래요?"

"어딜요? 17층요?"

"네."

하라는데 해야지.

궁금하기도 하고.

전광일은 조용히 17층 입장 스킬을 읊조렸다.

'백색 탑 17층 입장.'

순간!

스팟!

눈 깜짝할 새 변하는 환경,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각성 관리청 창고 안에 있었는데.

'여기가···, 백색 탑?'

맞겠지.

시스템 상태창 범용 스킬로 들어온 곳이니까.

'아아아.'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곳곳에 세워진 주택.

그 사이로 깔린 아스팔트 도로.

저 멀리엔 통신 탑처럼 생긴 것도 보이고, 그 옆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축물도 있었다.

세상에!

여기가 무슨 탑이야?

바로 그때!

"호에?"

어느새 나타난 한 사람, 아니 수인족.

커다란 붉은 대형견을 탄 라직스가 앞에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호엥!"

"컹컹!"

마치 사원증처럼 가슴에 카드 목걸이를 걸고 있는 라직스.

힐끗 보니 '백색 탑 17층 입주권'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게다가 개도 목줄 부분에 짧게 카드 목걸이를 달았다.

'라직스님은 입주권이구나. 개도···,'

자신은 그저 1일 체험권인데.

"호에에에."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는 라직스.

전광일은 빠르게 뛰어 붉은 개를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몸에서 힘이 넘친다.

백색 탑 안에서도 플레이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

이윽고,

저 멀리서 모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는 듯.

"오! 전 청장!"

"어서 오시지요."

"그대도 입주권을 받으셨소?"

전광일은 주혁에게 받은 종이 쪼가리를 보여줬다.

"···입주권은 아니고, 1일 체험권입니다만."

"쯧쯧, 그렇군. 우린 영구 입주권이지."

자랑하듯 자신에게 목에 걸린 플라스틱 카드를 보여주는 사람들.

"앞으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군. 영구 입주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언젠가는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이, 입주권 아무나 막 주는 거 아임다."

"전 청장이 아무나는 아니잖아."

"그래도 살짝 부족한 감이 있슴다."

"호에!"

전광일은 기분이 묘했다.

왠지 따돌림받는 기분.

'영구 입주권이라,'

그거 받으려면 어떡해야 하지?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9 >

스팟!

전광일 청장은 백색 탑 17층에 들어간 지 약 10분 만에 다시 각성 관리청 탑 재료 창고로 나왔다.

입장한 곳에서 퇴장.

검은 탑의 방식과 유사했다.

아직도 얼떨떨한 전광일.

"제, 제가 들어갔다 나온 곳이 진짜 어, 어딥니까? 탑이 맞긴 한 겁니까?"

"네, 앞서 말했듯이 검은 탑은 아니고 백색 탑."

"대체···,"

"사람들 못 봤어요? 거기 다 있었을 텐데."

"보, 보긴 했지만."

영구 입주민 아니라고 무시당했었지.

"퇴장도 스킬로 하셨죠?"

"마,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플레이어들에게 특화된 백색 탑.

피소환인들에겐 대기실과 같은 곳이라 자기 마음대로 나올 수 없지만, 플레이어들은 스킬 등록으로 자유롭게 출입.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피소환인도 아니고 플레이어도 아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백색 탑 주민이 될까?

'뭐, 나중에 1일 체험권 부여해서 알아보면 되고.'

일단 주혁은 그에게 백색 탑이 어떤 곳인지 대충 설명해줬다,

검은 탑을 공략하다가 업적을 세웠는데, 탑 층을 분양해 주더라. 안전 쉘터 같은 느낌인데 다른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다.

딱 이 정도만.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차차 알아 가보는 게 나을 듯해서.

어쨌거나 주혁에겐 전광일을 만나러 온 또 다른 용건이 있다.

"저기, 요즘 상급 마정석 시세가 어떻게 되죠?"

"100g당 150달러 선입니다. 한화로 21만 원."

가격이 꽤 많이 올랐다.

100g 21만 원, 1kg에 210만 원, 1톤이면 21억, 100톤 2,100억.

'일반 마정석이 100g에 5만 원이었던가?'

약 4배 정도의 가격.

아마 상급 마정석 소재 산업이 본격화되면 더 오를 수도.

'입주권도 비싸구나.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이야.'

상마 1톤 연성해야 최마 1kg.

입주권 한 장에 21억이라는 말.

마리의 연성 인건비도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더 되겠지.

그러고 보면 1일 체험권도 매우 비싸다. 월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차라리 영구 입주권이 싸게 먹힐 정도.

'입주권에, 게다가 17층 꾸미려면 상마가 매우 많이 소모될 텐데.'

76층 광맥이 거의 고갈된 지금 빠르게 상마를 확보하려면?

"제가 개인적으로 상급 마정석 구매할 방법이 있을까요?"

"···어."

난색을 보이는 전광일.

"상급 마정석은 국가에서 전부 매입해서 민간에 공급하기 때문에 매입, 판매, 유통, 공급, 모든 과정이 기록으로 남습니다."

당연하다.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정부에 보고해야 해서···,"

맞다.

현재 가장 중요한 산업 자원을 아무렇게나 내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고 백색 탑 꾸미기 위해 상마를 구매한다는 걸 밝힐 순 없으니.

"···다른 경로는 없을까요?"

"으흠, 최근 중국 플레이어 보따리 장사들이 국외로 상급 마정석 판매를 시도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요?"

"네, 러시아나 인도, 베트남, 혹은 북한 국경 근처 지역에서 브로커들과 접선해 시세보다 싸게 판다고···,"

"아!"

이유도 들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는 플레이어 탄압 정책에 저항하는 차원이란다.

그래서 중국 정부가 아닌 다른 곳에 상마를 판다는 것.

'쯧쯧.'

불쌍한 중국 플레이어들.

탄압당하는 것도 모자라 목숨 걸고 보상받은 상마를 헐값에 넘기다니.

'우리 인민무력부장 동지에게 한번 알아보라고 해야겠네.'

제값 주고 사야지.

중국 플레이어들도 돕고 자신은 백색 탑 운영을 위한 상마 확보하고.

그러려면 총알이 있어야 한다.

계좌 탈탈 털자.

"참! 요즘 가죽 재료 재고 어때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현재 재고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수고를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안 그래도 새로운 가죽 가져왔는데,"

"···새 가죽이요?"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샘플로 잘라 온 아포피스 가죽을 꺼냈다.

"어때요? 괜찮아 보이나요?"

깜짝 놀란 전광일.

바실리스크 가죽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아니고.

자세히 보니 뱀 가죽 같은데,

뱀이라, 뱀···, 뱀?

"···이거 설마, 82층?"

"네, 맞아요. 아포피스 가죽, 샘플입니다."

"아아아."

아포피스 가죽도 벗겼다고?

그 큰걸?

"통짜 가죽도 있어요. 라직스 씨 아공간 배낭에."

"···."

"이걸 공급하고자 하는데,"

요즘 공략 불가능의 거대괴수로 알려진 아포피스.

그러나 봉 플레이어에겐 그저 가죽 셔틀.

전광일은 아포피스 가죽을 자세히 살펴봤다.

아름답고 괜찮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두껍습니다. 크기에 비해 매우 무겁고요."

"그렇죠?"

그래서 라직스가 벗기지 못하고 거대화 고방이 벗겼다.

바실리스크와 와이번은 라직스 혼자서 척척 벗겼지만.

"그리고 무늬와 패턴도 상당히 큼지막하고."

"거대괴수니까요."

"가죽의 강도 또한 가죽 세공 칼로는 어림도 없었을 같습니다. 탑 금속으로 제작한 기계 절삭기가 필요하겠군요."

흠.

"세밀한 가공이 어려울지도,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감정받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전문가라면?

"정동훈 대표에게 문의해보겠습니다."

"아! 라직스 물산 대표님?"

"네, 사실 어제도 전화가 왔었습니다. 가죽 공급 문제로요."

"그래요?"

가죽이 모자라긴 하는구나.

스스로 벌인 사업, 신경 써서 챙겼어야 했는데.

사실 주혁도 논 건 아니다.

한두 달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

"제가 한번 직접 찾아가 봐도 될까요?"

"그럼요! 무척 반가워할 겁니다."

한번은 만나봐야 한다.

낯선 사람 만나기 껄끄럽긴 해도.

"언제 방문하실지만 알려주십시오. 약속을 잡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안되고, 제가 시간 날 때 직접 들러볼게요."

"알겠습니다. 제가 정대표에게 미리 통보는 해두겠습니다."

용건도 끝났고.

"전 이만 가볼게요."

"아! 벌써?"

주혁은 전광일과 악수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백색 탑 17층, 하루 동안은 휴양지 개념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구경해보세요. 원하시면 제가 한 달 월세권 끊어드릴 테니."

"···월세요?"

"입주권은 드리지 못해도 월세권은 끊어 드릴 수 있으니까."

월세권.

말 그대로 한 달 동안 그곳을 출입할 수 있는 권리.

전광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다.

1일 체험권보다는 훨씬 낫다.

신분 상승한 느낌도 들고.

'전세권은 없나?'

원래 자가 다음이 전세인데.

※ ※ ※

집으로 돌아온 주혁.

앞으로 할 일이 정해졌다.

입주권과 백색 탑 17층 내부 꾸미기를 위한 상급 마정석 확보.

공략 임무 보상으로 받는 상마는 한계가 있다.

광맥도 고갈됐고.

외부에서 구해야지.

중국 플레이어 보따리상들이 상마를 팔고 있다고 하니 매입을 위한 총알 준비.

당분간 가죽 공급에 전념해보자.

아포피스 가죽에, 바실리스크와 와이번까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베헤모스 가죽은 별로다.

시커멓기만 한 가죽이 뭐가 예쁘다고?

그래서 베헤모스는 탈락.

충분히 가죽 공급하고 나서 상층 등반도 진행할 예정.

80층 대는 거대괴수 구간.

올라가 보면 볼 수 있을지도.

레인보우 바실리스크 뺨치는 가죽을 소유하고 있는 거대괴수 말이다.

더불어 80층 대에서 상급 마정석 광맥이 존재하는 지도 탐색해야 한다.

일단 펜트하우스에서 백색 탑에서 쉬고 있는 피소환인들을 전부 불러낸 후.

"메켄지 드로낙 지정 소환."

스팟!

펑펑!

샤라라랏!

하늘에서 터지는 폭죽, 휘날리는 형형색색의 꽃가루.

동시에 만세 하듯 두 팔을 하늘로 뻗은 채 나타난 매켄지.

"나 매켄지 드로낙, 9서클 마법사 등장!"

소환 한번 참 요란하다.

매번 이렇게 나타나나?

"자랑은 잘하고 오셨어요?"

"소환사 덕분에, 너무 만족했소. 낄낄낄, 그놈들 참, 부러워서 미쳐버리더군."

확실히 기분은 좋아 보인다.

몸 자체가 블링블링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그 마음 다 안다는 듯, 씩 웃으며 물어보는 경험자 코사크.

"시원하심까?"

"아주 만족한다."

"후환이 두렵지는 않은 지 모르겠슴다. 님도 본인 만나면 죽여버린다고 한 거 같은데."

"그랬지. 하지만 이젠 나도 그대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아니, 자랑질을 어떻게 참아!"

광마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쯧, 하는 짓이 영···,"

사실 광마도 후회하고 있던 참.

너무 빨리 입주권을 받아 자랑질을 못 했으니.

"매켄지씨?"

"소환사님, 말씀하시지요."

"입주권 드릴게요."

"오오오!"

화아아앗!

또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

'···.'

어지럽지만 적응하자.

천성이 저런 분인데.

주혁은 딱 하나 남은 입주권 목걸이를 매켄지에게 걸어줬다.

스슥, 스스스슥, 스슥,

- 백색 탑 입주민 : 메켄지 드로낙 -

짝짝짝짝!

완전한 한 가족이 된 것에 대한 축하 박수.

다음 차례.

"라직스씨, 앞으로."

"호에?"

주혁의 지시에 앞으로 나오는 라직스.

이어지는 배지 수여식.

"귀하는 비전투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82층에서 만난 뱀 새끼 아포피스의 뚝배기를 곡괭이로 깨부숨으로써 자신의 트라우마를 훌륭하게 극복해냈기에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호에에에."

짝짝짝짝!

헤벌쭉 입을 벌리는 라직스.

아직 더 남았다.

"귀하는 봉주혁 사단의 보급관으로서 다량의 룬 조각과 티켓 조각을 수집하여 모자란 군수물자를 훌륭하게 보급해 냈기에 플래티넘 배지 3개를 재차 수여합니다."

"호엥?"

뭘 놀라?

받을 자격 있지.

라직스씨, 어서어서 배지 받아서 르스스알로 올라가세요.

"후에."

옳지!

가슴을 쭉 내민다.

스스로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듯.

짝짝짝짝!

이로써 라직스의 누적 배지는 23개.

앞으로 2개만 더 받으면 르스스알 돌파다.

그런데?

"으흠."

배지 수여 광경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메켄지.

그의 눈빛에 어린 숨길 수 없는 탐욕.

"저, 저어기, 소환사님."

"네?"

"프, 플래티넘 배지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 배지요?"

"나도 하나 받았으면 해서."

무척 갖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어쩌나?

그냥 하나 달아줘?

광마가 대신 대답했다.

"소환사를 위해 공을 세워야지. 염치없이 공짜로 달라니!"

"공을 세워야 한다고?

메켄지 바로 눈앞에서 가슴을 쭉 내밀면서,

"본좌의 가슴을 보아라. 무려 6개다. 공을 6번 이상 세웠단 말이다."

"아!"

"넌 못하겠지만."

"내가 왜 못해?"

광마가 픽! 비웃음을 날렸다.

"불꽃놀이와 스포트라이트, 치장 마법에만 신경 쓰는 마법사가 뭘 하겠다고? 본좌는 이미 소환사에게 인정받은 몸이다. 심지어 저 경망스러운 암살자도."

화르륵!

불타오르는 매켄지.

"이, 이놈이!"

"자랑질 당해보니 어떠냐? 역지사지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부들부들.

매켄지의 전신이 빨갛게 변했다.

분노를 표현하는 시각효과.

어디선가 조막만 한 구름이 날아오더니 쿠쿵! 쿵쿵!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작은 번개를 떨어뜨렸다.

"흥! 공을 세우면 배지를 받는다···, 뭐, 어렵지 않지. 앞으로 나,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 드로낙은 소환사의 배지를 모조리 독점하겠다."

콰광! 짜잔! 짜라잔잔!

선언과 동시에 울리는 웅장한 배경음악.

대단한 각오였다.

앞으로 80층 대는 걱정할 일 없겠네.

"자, 오늘 첫 등반은 82층 아포피스 반복 공략입니다. 준비되셨죠?"

궁금하다.

관종이긴 해도 9서클 대마법사 아닌가?

그가 보여줄 마법의 위력은?

※ ※ ※

[대한민국 검은 탑(NO.1) 82층에 입장합니다.]

아포피스 반복 공략.

임무를 받고.

컴컴한 미궁의 지하통로를 걸어가니.

스사사사사사···,

나타나는 아포피스.

"후엥!"

트라우마를 극복한 라직스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아포피스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번들번들 날이 선 황금 무두칼을 꺼냈다.

우리 우주대머슴에게 가죽 셔틀로 전락한 미궁의 거대괴수.

장하다! 라직스.

"자, 그럼···,"

"잠깐 기다리시오. 소환사."

또 스포트라이트.

어두운 미궁에서 홀로 빛나는 메켄지가 자신에 찬 어조로 주혁에게 말했다.

"저놈은 나한테 맡기시오. 혼자서 처리하지."

"···가능하겠어요?"

활짝 웃으며 답하는 매켄지.

"하하하, 비록 소환사 그대에게 보여준 마법은 겉만 번지레한 껍데기밖에 없었지만, 나도 하나의 마탑을 책임졌던 탑주, 9서클을 개척한 대마법사, 저깟 뱀 새끼 따위야 요깃거리에 불과하오만."

오!

자신감 만땅!

좋다.

믿고 맡겨보자.

잘하면 플래티넘 배지 하나 드리고.

"부탁드릴게요."

"감사하오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메켄지 드로낙.

여전히 그를 따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입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주문.

"불은 자연을 구성하는 순수 원소, 어둠을 비추는 광명, 더러운 것을 태우는 성스러운 뜨거움, 불을 깨달은 자로서 명한다."

매켄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이 덩어리가 되어 비처럼 내릴지어다. 파이어 레인!"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우···,

지하 공동 저 높은 허공에서 생겨난 뜨거운 기운.

붉은 구름이었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농축된 불의 구름.

후둑, 후두두두둑.

하나둘씩 떨어지는 주먹만 한 불덩어리.

그리고,

후두두두두두두두두···,

마치 소나기처럼, 열대기후의 스콜처럼, 엄청난 숫자의 불덩어리가 아포피스를 향해 내렸다.

파이어 레인, 불의 비.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

"배리어!"

매켄지가 주혁에게 다가오는 열기를 차단해줬다.

"캬아아아아악!"

아포피스가 몸부림쳤다.

땅을 파고들어 숨으려고 했지만 내린 불비는 땅에 고여 시뻘건 용암으로 변했다.

피할 곳이 없었다.

"이것이 9서클 마법사의 화염 주문이오. 꺼지지 않은 불비, 거대괴수 아포피스는 재생도 못 하고 새까맣게 타버릴 것이오."

···뭐?

아니, 어떻게 된다고?

재생이 안 돼?

그러면···,

툭!

놀란 라직스가 손에 들고 있는 황금 무두칼을 땅에 떨어트렸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다른 피소환인들,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아!"

"어어,"

"하아."

"에휴,"

"허허."

.

.

.

하지만 호탕하게 웃는 매켄지.

"으하하하하! 봤느냐? 이것이 바로 화염의 지배자, 메켄지 드로낙의 마법이다. 다들 놀라서 말을 잊어버렸군. 이제 내가 말한 대로 플래티넘 배지는···, 음, 어···, 왜?"

매켄지라고 눈치가 없을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소환사의 표정을 보니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그러고는 광마를 보며.

"내, 내가 잘못했나?"

"했지. 그것도 매우 큰 잘못을."

"무슨?"

"우리가 저놈 하나 죽이지 못해 11명이나 모였을까?"

"그럼 왜?"

"가죽 때문이지. 저거 통째로 벗겨서 팔면 돈이 되거든. 마침 소환사께선 돈이 필요하시고. 그런데 네놈이 모조리 태워 먹었구나."

"아아···,"

그때였다.

"후에에에에엑!"

잔뜩 성난 라직스의 포효.

기어코 매켄지는 우주대머슴의 분노와 마주해야만 했다.

"후에엑! 후엑!"

"미, 미안하다."

"후에에엑!"

결국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 매켄지.

그걸 포착한 승냥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아니, 다 태워버리면 어쩌겠다는 거야?"

"가죽에 상처 날까 봐 칼질도 조심스럽게 하는 판에."

"딱 보면 모르나? 우리가 왜 82층 반복 공략 왔는지?"

"9서클 대마법사라더니, 쓸모가 없군."

"입주권 괜히 부여한 것 같슴다."

"하! 꼴에 배지를 받겠다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분이 상황판단이 그리 안 되십니까? 참으로 한심하군요."

"늙다리 노인네가 아직도 불장난이야!"

"밤에 오줌싸겠네. 기저귀 채워줘야겠군."

"처벌이 필요합니다. 백색 탑에 영창이나 감방 하나 복사해서 붙이면 안 되겠습니까?"

"컹컹컹컹!"

비난이 쏟아졌다.

"화염 속성 마법 말고 다른 건 쓸 줄 암까?"

"있긴 한데 위력이 썩···,"

"지 겉모습 꾸미는 마법만 알겠지."

"에휴, 어르신, 그냥 집에서 쉬십쇼. 밖으로 나오지 말고."

"백색 탑에서 농사나 지으라고 해!"

"농사 만만히 보나? 농작물 싹 불태우려고?"

매킨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60 >

매켄지 드로낙, 9서클 대마법사는 영혼이 탈탈 털렸다.

도저히 공략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환 해제.

백색 탑 17층으로.

그토록 소망했던 새로운 집으로 왔지만 매켄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낙원이라고 해도 말이다.

"일단 쉬고 계세요. 우린 가죽이나 채취하고 돌아올게요."

"으음, 미안하오. 소환사 볼 면목이 없소."

"하하하, 괜찮아요. 그깟 가죽 태워 먹은 데 무슨 대수라고."

약점을 잡힌 게 실수였지.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

하긴!

10명이 1명을 동시에 조지는 판에, 견딜 재간이 있을까?

자비 없는 약육강식의 현장, 심지어 광마도 약한 모습 보이면 물어 뜯긴다.

결국 메켄지는 9서클 대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선발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저쪽 집에 들어가면 TV도 있고, 냉장고에 간단한 요깃거리도 있으니, 심심하진 않을 겁니다."

"으음, 아, 알겠소이다."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매켄지.

"그리고 저 집은 마리씨가 살고 있으니 웬만하면 가까이 가지 마시고요."

"···그 욕쟁이 엘프?"

"으음, 욕은 잘하시지만, 건드리지만 않으면 뭐,"

"한번 대화를 나눠봐도 될는지."

"아이고, 아예 말도 못 붙이게 할걸요? 정 하고 싶으시면 이걸로···,"

주혁은 매켄지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이건···,"

"써보셨어요?"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만져봤소이다."

"그럼 사용법은 아시겠네요."

"메시지 주고받는 것 정도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혁은 간단하게 사용 방법을 설명해주고 나서.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

그러나 이미 기세가 꺾였다.

회복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

메켄지의 정체성이나 다름없었던 치장 마법은 발현되지도 않았다.

심심하면 불꽃놀이에, 스포트라이트 마법에, 장미꽃잎에.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행동하던 양반이 한순간에 변방으로 유배되어 밀려난 신세.

그 모습이 얼마나 측은한지.

주혁도 마음이 아프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층 등반할 때 꼭 불러드릴게요."

"아."

"그럼 전 이만!"

"자, 잠깐···,"

스팟!

"···."

매켄지는 홀로 남겨졌다.

조용한 17층.

지구의 작은 마을을 그대로 이식시킨 듯한 풍경.

천천히 둘러보며 구경도 하고.

주택단지의 집에 들어가 TV도 보고.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맥주도 한 캔 하고.

그런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육체를 가져 오감이 돌아왔는데도 입맛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

상층 등반을 위한 공략이라도 참여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당분간은 반복 공략만 한다고 하니.

"후우."

이게 뭐람?

큰 꿈을 안고 나왔는데.

피소환인의 기본 역할이 뭔가?

소환사와 함께 탑을 등반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문득 자신과 똑같은 신세의 피소환인이 떠올랐다.

LSSR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17층에서 대기만 하는 후보 말이다.

태블릿을 들고 메신저 프로그램을 실행하니 떠오르는 친구 목록.

대화명도 바꾸고, 친구 목록에서 마리를 터치해서, 대화방으로 초대.

그리고.

<대마법사 드로낙> : 똑똑? 욕쟁이 엘프야.

띠링!

<마리> : @#%&! 너 뭐야? 재수 없게, 일 안 나고 뭐 해? 사고 쳤어?

<대마법사 드로낙> : 그렇게 됐다. 마법이 너무 강하다고 쫓겨났다.

<마리> : 하! 관종 새끼, 안 들어도 알겠다. 불이나 피울 줄 알지.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

<대마법사 드로낙> : 너도 나하고 비슷한 신세이지 않으냐?

<마리> : 착각하지 마라. 내가 너 같은 백수 새끼하고 똑같은 줄 알아? 포션 제조에, 최마 연성에, 소환사님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나야!

<대마법사 드로낙> : 그건 좀···.

<마리> : 어디서 깜도 안 되는 게, $%@#!

<대마법사 드로낙> : 저기 그러지 말고 소외된 사람끼리···,

띠링!

- <대마법사 드로낙>이 차단되었습니다.

'망할 년.'

사람 마음을 아주 후벼파는구나.

메켄지는 외로웠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 ※ ※

다음날도 계속되는 가죽 채집 작업.

주혁은 백색 탑 17층에 입장했다.

스팟!

그가 나타나자 우르르 몰려드는 피소환인들.

인력시장 개장.

"가죽 채집 인원 모집합니다. 탱커 하나, 일꾼 필수···, 나머지 시간 되시면 모두 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요! 를 외치는 피소환인들.

특히 신입사원들의 참여 욕구가 거세다.

소환사 눈에 들어 어서어서 공을 세워야지.

매켄지도 발을 동동 구르며 번쩍 손을 들었다.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해보려는 목적.

하지만 그런 메켄지를 외면하는 주혁.

벌을 주려는 게 아니다.

다 그를 위해서다.

그렇지 않아도 피소환인 사이에서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또 실수하면?

이번엔 거꾸로 매달려 조리돌림을 당할 수도.

아직은 잠시 쉬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익히면서.

"···그리고, 제페트씨와, 디아마트, 그래, 혈랑도 가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절망하는 메켄지.

이젠 개한테도 밀렸다.

스팟! 스팟! 스팟!

오늘도 보람찬 하루 일을 위해 백색 탑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

다시 적막해진 백색 탑 17층.

우두커니 홀로 남은 매켄지.

한참을 고민하더니,

뭔가 결심한 듯.

'이래선 안 되겠어.'

저벅저벅, 주택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 집 문 앞에 멈춰서서.

"알리아마리, 연금술사 엘프여, 도와다오."

매켄지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 자존감이 떨어져서 미칠 지경이구나."

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제발 부탁한다. 너라면 방법이 있을 거 아니냐? 나도 소환사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여전히 조용했다.

"후우, 차라리 무한의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

그때였다.

띠링!

매켄지가 가지고 있는 태블릿에서 울린 메시지 알림음.

"응?"

서둘러 확인해보니.

<마리> : 알았어. 도와줄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 소환사님을 위해서야.

톡톡톡.

재빠르게 태블릿을 터치해서 답장.

<대마법사 드로낙> : 기회를 줘서 고맙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다.

<마리> : 너 인챈트 마법 할 줄 알아?

<대마법사 드로낙> : 조금은···,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지인들에게 아티팩트를 선물할 목적으로 몇 개 배워둔 것이 있다.

<마리> : 그래? 그럼···,

스웅!

마리가 톡 대화창에 링크 하나를 보냈다.

신문 기사였다.

눌러서 읽어봤는데.

- 전 세계 비만 인구가 10억 명을 넘어, 전 세계 인구에서 8명 중 한 명은 비만···, 특히 소아비만은 성인 비만보다 위험해, 당뇨, 고혈압 등 각종 대사질환의 주범으로 손꼽혀, 글로벌 제약사들은 비만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

뜬금없이 비만이라니?

<대마법사 드로낙> : 이 기사는 왜? 너 살쪘냐?

<마리>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엘프가 살찌는 거 봤어?

그런데 왜 비만 문제를···,

<마리> : 소환사님께선 지금 돈이 필요하셔. 상급 마정석을 사들이셔야 하거든.

<대마법사 드로낙> :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마리> : 탑 등반 공략으로 인정 받는 건 포기해. 어차피 지랄 똥을 싸도 라직스에겐 안 돼.

구구절절 옳은 말.

오죽하면 다른 피소환인들이 그를 우주대머슴이라 부를까.

<마리> : 아이템을 만들어 팔아.

<대마법사 드로낙> : 뭐?

<마리> : 인챈트 마법을 응용해 비만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라고, 팔찌나 목걸이 같은 걸로.

오!

<마리> : 아주 잘 팔릴 거야. 이 시대엔 비만이 매우 큰 문제거든. 망하지 않은 풍요로운 세상이잖아. 그렇다고 너무 성능을 좋게 만들지는 말고, 적당한 선에서.

인챈트 마법.

원리라든가, 간단한 마법 수식 정도는 매켄지도 안다.

'비만 치료용 인챈트 아티팩트라···,'

팟!

매켄지의 머리 위에 전구 모양의 빛이 떠올랐다.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이거 할 수 있겠는데?'

재료만 충분하면 말이다.

<대마법사 드로낙> : 탑 금속이 있느냐?

<마리> : 저쪽에, 라직스가 물건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대마법사 드로낙> : 마정석은?

<마리> : 그것도 창고에, 상급 마정석은 절대 건들지 마. 일반 마정석으로만 해.

<대마법사 드로낙> : 알았다. 하나 더, 마정석 정제 가루가 필요하다. 연금술로 만들어줄 수 있느냐?

<마리> : 해줄게.

<대마법사 드로낙> : 고맙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으마.

<마리> : 다시 말하지만 너 따위가 걱정돼서 하는 건 아니야. 오해 말도록.

매켄지는 즉시 아티팩트 개발에 착수 했다.

비만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아티팩트.

들어가는 수식이 많을 수도 있으니 작은 반지보다는 커다란 팔찌에 새기면 좋을 듯.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만드는 마법 수식은 필수겠고,'

슥슥슥슥.

태블릿에 펜슬로 문자 수식, 그리고 문양을 그려보는 메켄지.

'몸속의 노폐물을 제거해주는 정화 기능도, 더불어 해독 마법, 식욕 억제 기능도 들어가면 좋겠지?'

성공한다면 건강에 무리 없이, 아니 살을 빼면서도 더 건강해질 것이다.

사실 생각보다 어려운 인챈트 마법이다.

차라리 전투용 마법 수식이 훨씬 더 쉽다.

하지만 그는 대마법사.

무려 9서클.

노력도 노력이지만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벌써 밑그림이 그려졌다.

매켄지는 백색 탑 17층 재료 창고로 가서 오리할콘 주괴 하나를 꺼냈다.

"파이어 핸드."

화르륵!

달궈진 손으로 주괴를 녹이고는, 길게 늘여서 팔찌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낸 후, 안쪽에 음각으로 마법 수식을 새겼다.

보석 대용으로 일반 마정석을 박고, 음각 부분에 마정석 정제 가루를 집어넣어서, 인챈트 마법 주문을 읊으면 비로소 하나의 아티팩트가 완성되겠지.

물론 여러 번의 실패를 거쳐야 할 것이다.

자신은 인챈트 전문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래도 매켄지는 히죽 웃었다.

마침내 자신의 쓸모를 발견한 기분.

이것만 제대로 만들어 내면 그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대머슴이 부러워하고, 암살자가 입을 떡 벌리며, 광마가 질투하고, 소환사는 흐뭇한 미소를 짓겠지.

어두운 창고 안.

팟!

마침내 매켄지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 마법이 발현됐다.

※ ※ ※

오늘도 주혁은 검은 탑을 등반했다.

하루에 3번 탑 입장.

한번은 아포피스, 한번은 바실리스크, 한번은 와이번.

아포피스 건너뛰고 와이번 2번 돌 때도 있었다.

알차게 채집했다.

제법 많이 모았다.

이 정도면 충분할 듯.

그런데 요즘 메켄지씨가 조용하다.

백색 탑 17층 창고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리에게 물어보니 무슨 아티팩트를 제작한다고

갑자기 무슨 아이템?

창고에 가면 발에 채이는 게 아이템인데.

뭐, 심심하니까 소일거리 삼아서 하는 거겠지.

주혁은 오늘은 오랜만에 외출할 계획.

아포피스 가죽을 감정받아보려고.

전광일 청장에게 대신 부탁하면 되지만 직접 가보기로 했다.

라직스 물산을 책임지고 경영하는 정동훈 대표 얼굴은 봐야지.

그냥 모른 채 지나가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알고 보면 그도 한 식구 아닌가.

혼자 외출하진 않았다.

피소환인들의 성화로 베로니카가 주혁의 옆에서 수행하는 중.

전투용 타이츠 복장 대신 평범한 옷을 입었다.

물론 평범한 옷도 베 상사가 입으면 너무나 특별해지지만.

주혁은 베 상사와 함께 차를 타고 강남대로에 위치한 자신의 소유 61층 빌딩으로 갔다.

1층은 로비와 카폐, 은행, 편의점 등, 그 위층으로는 식당이나 병원, 약국, 각종 회사 사무실, 그리고 박물관과 미술관이 입점했으며, 라직스 물산의 본사는 꼭대기 층에.

정동훈 대표는 아포피스 가죽을 어떻게 평가할까?

부디 상품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전에,

'복사.'

61층 빌딩 복사해두고.

백색 탑에 저거 복사해서 붙이면 좋겠다.

무려 조 단위의 돈을 투입해서 구입한 건물,

백색 탑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붙여넣기 비용은 얼마나 할까.

'상마 100톤, 막 이러는 거 아냐?'

비싸면 곤란한데.

"베 상사님, 들어가 볼까요?"

"네! 지휘관님."

"···저기, 지휘관님보다는 그냥 주혁 씨라고,"

"알겠습니다. 필승!"

주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라직스 물산 본사로 가려면 로비 끝에 있는 무인 출입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출입증이 있어야 한다.

'전화해 보면 되지.'

연락처도 받아뒀다.

번호를 눌러서 정동훈 대표에게 직통 전화.

"안녕하세요. 정동훈 대표님 맞습니까?"

- 어, 네네, 실례지만 누구···?

"봉주혁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라직스 물산 지금 1층 로비에 와 있거든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전화기 너머로 화다닥!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 이힉?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으아아, 바로 뛰어 내려가겠습니다.

'···.'

라직스 물산 대표라는 사람이···,

'어째 살짝 가벼운 느낌이네.'

아무튼 기다려보자.

로비를 이리저리 거닐며 구경하고 있었는데.

순간!

옆쪽에서 풍겨오는 진한 향수 냄새.

그리고.

"···주혁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긴 생머리에 타이트한 청바지, 흰색 셔츠를 입은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더라?

그녀의 목에 걸린 사원증.

<라직스 물산 총무과 : 사원 오진숙.>

"어머? 주혁이 맞네. 어떻게 이런 데서 다 보니?"

"지, 진숙···, 이니?"

아아아.

고등학교 때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진숙이.

그 진숙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일진이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고, 그저 좀 노는 애에 속했던 그녀였다.

남자가 왜 그렇게 소심하냐면서, 서너 번 머리 툭툭 치면서 지나갔던 기억들.

그렇게 시작된 짝사랑이다.

하지만 이젠 지나간 이야기.

뭐, 꿈에서 몇 번 나오긴 했지만,

그런데 진숙이를 현실에서 만날 줄이야.

그것도 라직스 물산 사원이라니.

공부 못해서 대학은 못 다녔을 텐데.

고졸 특채 같은 건가?

"우와, 너 키가 많이 큰 것 같아. 얼굴도 잘생겨진 것 같고."

"···그, 그래?"

뭐, 광마님이 전수해진 무공 덕분에 키도 커지고 피부도 반들반들해지긴 했지만.

"여긴 어쩐 일로 왔어? 커피 마시러?"

"으음, 누, 누구 만날 일이 있어서."

"누굴? 아! 혹시 저 여자분? 혹시 여친?"

"아니, 여친은 아니야."

바로 그때!

주혁의 뒤에서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베 상사.

'지휘관님.'

'왜요?'

'저분이 오진숙 씨?'

'으음, 맞아요.'

그러면서 오진숙의 위아래를 스윽 훑어보더니.

피식,

'훗! 별거 아니네요.'

'···쉿! 듣겠어요.'

하지만 주혁도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

솔직히 별거 아닌 건 맞는 말이지.

베 상사에 비하면 말이다.

베 상사를 누가 이겨.

사실 그녀 때문에 주혁의 눈도 너무 높아졌다.

걸그룹 센터가 와도 눈도 깜짝 안 할 만큼.

몽마 디아마트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판에.

"근데 주혁이 너, 많이 달라지긴 했다. 스쳐 지나가면 몰라봤을 수도."

진숙이 너도.

고등학교 시절 날티나는 모습은 사라졌네.

'···근데 아직도 담배 피니?'

피는구나.

하지만 끊어야지.

너도 건강 생각해야지.

주혁은 후각이 좋다.

무공을 수련했기 때문이다.

향수 냄새에 섞인 담배 쩐내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더더욱 아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61 >

북한 평양.

개인 집무실에서 업무에 몰두 중인 김인중 위원장.

요즘 매우 바쁘다.

검은 탑 강점 후, 하나의 국적 탑으로 통합한 뒤, 실질적인 국가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

그래서인지 국가 사정도 매우 나아졌다.

특히 남한 기업들의 투자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세울 계획이었던 한국 대기업들의 생산 공장들이 북한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한 기업 입장에서 북한은 공장을 설립하기에 최적의 조건.

인건비도 싸고, 말도 통하는 노동자들.

물론 정치적 안정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김인중 위원장도 환영의 뜻을 표했다.

대한민국 정권이 바뀌든 말든, 북한에 들어온 남한 기업들의 이익과 안전은 반드시 보장해 주겠다고.

탈북민들도 부쩍 줄었다.

평양도 그렇고, 시골도 그렇고, 북한 전역에 활기가 흘러넘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통일을 서두르면 안 된다.

남쪽 정부도 알고 자신도 안다.

천천히, 단계적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이질감을 줄여나가야 한다.

최소 5년 이상은 족히 걸릴 터.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중국의 주석이나 상무위원들처럼 벙커 안에서 핵폭발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

오래오래 살아서, 죽기 전에 북남 통일을 완수한 지도자라는 타이틀은 달고 죽어야지.

바로 그때!

벌컥!

집무실 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는 한 남자.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무려 4개나 끌고 왔다.

"위원장 동무. 잘 지냈소? 내레 그동안 격조했구만 기래."

"고, 고사극 동지!"

인민무력부장이었다.

"잘 오셨슴메다. 자주 좀 방문해주시라요."

"요즘 바빠서 기렇디. 다른 에미나이들도 그렇고."

"아!"

코사크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내레 위원장 동무에게 부탁이 있지 않카서."

"뭐든 말씀하시라요. 최우선으로 처리하겠슴메다."

"요즘 중국 플레이어 아새끼들이 신의주 접경 지역에서 상급 마정석을 밀거래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기렇디 않아도 보고드리려고 했슴메다. 보위부 동무들을 보내 단번에 소탕하갔시오."

그러자 코사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소탕하라는 뜻이 아니야."

"그럼?"

"싹 사들이라우!"

"뭘···, 어어, 상급 마정석 말임메까?"

"기래. 가격이 좀 비싸도 무조건 사라는 말이디. 빳빳한 현찰을 줘서라도."

그러면서 가지고 온 캐리어를 열어 보여주더니.

"이게 다 달러야. 모자라면 언제든지 요청하고."

"필요없슴메다. 공화국 예산으로 사면···,"

순간 버럭 화를 내는 코사크.

"위원장 동무! 정신이 나갔네? 공화국 예산은 공화국 린민들을 위해서 써야디, 쌀밥에 고깃국 안 멕일 기야?"

"아, 알갔슴메다."

그제야 코사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즘 불편한 점 없디?"

"어, 없슴메다."

"좋군. 이렇게만 해. 천수를 누리며 살 거야. 내 약속하디."

김인중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저, 그분께도 잘 말씀해 주시라요. 열심히 하고 있다고."

"흐흐흐, 걱정 말라우. 내레 무조건 보고드리고 있으니까니."

"감사함메다."

벌떡 일어서서 양손을 하늘로 치켜드는 김인중.

"주혁 만세!"

화답하는 코사크.

"주혁 만세!"

그리하여 북한 정부 차원에서 은밀하게 상급 마정석 매입이 시작됐다.

※ ※ ※

라직스 물산 본사.

61층 빌딩에서 마주친 진숙이.

주혁은 조금 어색한 기분.

오랜만에 만났지만 할 말도 없고.

진숙이도 그런 듯.

"나, 라직스 물산 다녀. 이름 들어봤지? 탑 재료 가죽 브랜드 회사."

당연히 들어봤지.

내 회사인데.

"넌 어때? 뭐 하고 살아? 취직했어?"

"아니?"

"그럼?"

"자영업···,"

바로 그때!

"보, 봉 플레이어님?"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정동훈.

자신의 대표를 보고 황급하게 인사하는 오진숙.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아, 네네, ···오진숙 사원? 제가 지금 바빠서."

정동훈이 주혁을 보며 고개를 땅에 닿을 듯 숙였다.

"아이고, 봉 플레이어님, 저, 정동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봉주혁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오신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언제 오시는지 몰라서···,"

"아유, 약속도 안 잡고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제가 잘못한 거죠. 아! 이쪽은 저와 함께 온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고개를 까딱! 하며 정동훈에게 인사하는 베로니카.

"어이쿠, 모델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오진숙은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정동훈 대표.

그가 누군가?

일성 그룹 재벌 3세 출신으로 일성 어패럴을 계열 분리해, 라직스 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세계 최고의 탑 가죽 생산 유통 전문기업으로 성장시킨 입지전적인 인물.

그래서 라직스 물산 취직은 대기업 입사와 동급이다.

아니, 그보다 더 어렵다.

오진숙도 기적적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덜컥! 붙어버린 것.

고졸 특채에 면접 점수가 좋아서.

라직스 물산 입사는 오진숙 인생 최대의 업적.

그래서 목에 건 사원증은 그녀의 자부심이었는데.

그런데 그 라직스 물산 정동훈 대표가 봉주혁에게 저렇게 굽실거리며 쩔쩔매고 있다.

심지어 플레이어라고?

그 봉주혁이?

'와!'

플레이어.

전문직 중의 전문직.

상급 마정석 보상이 나온 후로 떼돈을 벌고 있다는 최고의 직업.

숫자도 얼마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약 1만 명 남짓?

그중에 하나가 봉주혁이라니.

'아까워.'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조금 더 친해지는 건데.

그건 그렇고 저 여자는?

진짜 주혁이 여자친구?

사람 같지가 않다.

얼굴이며 피부며, 천상계에서 내려온 듯한 미모와 몸매.

진짜 여자친구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담배 땡기네.'

밖에 나가서 한 대 피우고 와야지.

※ ※ ※

라직스 물산 대표이사 집무실.

정동훈은 바짝 긴장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인물을 만났다.

바실리스크 가죽과 와이번 가죽의 공급자.

라직스 물산의 지분을 90% 이상 소유한 진짜 주인.

봉주혁 플레이어.

큰아버지인 일성 그룹 정성태 회장도 그에게 수작을 부리다 한국 각성 관리청의 경고를 받고 납작 엎드렸다.

게다가 성검 소유주, 탑 금속 공급자, 심지어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로 추측되는 사람.

그 봉주혁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 경호원과 함께.

당연히 떨릴 수밖에.

한편 주혁은 정동훈 대표가 마음에 들었다.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생김새.

왠지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상남자와는 정반대 느낌의, 소심하고, 눈치 많이 보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래서인지 대하기 편했다.

일단은 용건부터.

"바실리스크 가죽와 와이번 가죽은 내일이라도 공급 될 겁니다. 충분한 양을 작업했거든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제품 만들어 팔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로운 가죽을 하나 가져왔는데."

"···네? 새로운 가죽이라면,"

"여기."

쑤욱!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오는 샘플용 뱀 가죽.

"이건···?"

"아포피스 가죽이에요. 아시죠? 검은 탑 82층 몬스터."

"어어."

아포피스라니.

이제야 확실해졌다.

이 사람이다.

세계 최고 플레이어가 확실하다.

떨리는 손으로 가죽 샘플을 받아 든 정동훈.

아름답다.

색깔도, 무늬패턴도 기가 막힌다.

그러나.

"상당히 두껍습니다만, 그래서 무겁고요."

그럴 것이다.

거대괴수니까.

"가방이나 생활용품으론 썩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가요?"

에이!

헛고생한 거야?

괜히 반복 공략했네.

"대신 소파, 혹은 의자 등 가구 제작에 사용하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아니면 자동차 내외장재라든지, 두꺼운 것이 장점이 될 수 있거든요."

괜찮다.

당장 자동차 가죽 시트에 쓰인다고 가정해도 수요가 엄청날 테고.

"알겠습니다. 아포피스 가죽도 대량으로 공급해드리죠."

"네! 철저하게 연구해서 상품화에 성공하겠습니다."

마음에 든다.

재벌 3세라던데 의외로 소탈해 보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는데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서로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가?

'백색 탑 17층 1일 체험권 줘 볼까?'

아니다.

그건 좀 더 친해지고 나서.

"참! 아까 로비에서 만났던 여직원과는 무슨 관계이신지, 고졸 특채로 들어온 직원인데, 혹시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습니까?"

진숙이를 말하는 듯.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아, 네네."

"괜찮은 친구예요. 잘 보살펴 주세요."

"하하하, 그럼요. 봉 플레이어님 친구분이라면 잘 해드려야죠."

진숙아.

만나서 반가웠다.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고.

얘기 잘 해뒀다.

아마 정대표님이 잘해주실 거야.

한때나마 널 짝사랑했던 하남자의 순정이다.

※ ※ ※

다음 날.

주혁은 백색 탑 17층으로 왔다.

여전히 편하게 쉬고 있는 피소환인들.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소환 해제해도 무한의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여기서 오감을 가진 육체로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는 피소환인들.

'그런데 사망하면 어떻게 되지?'

100일 동안 소환 불가 페널티.

그동안 다시 무한의 감옥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여기서 대기할까.

뭐, 그것도 죽어봐야 안다.

그럴 일 만들어서도 안 되고.

'자, 이제 뭘 한다···,'

여태까지 가죽만 채집했다.

그것도 반복 공략만.

오늘은 색다르게 상층이나 등반할까?

83층으로.

그리고 이번엔.

"메켄지 씨."

"말씀하시오, 소환사."

"함께 상층 등반하러 가시죠."

슬슬 끼워줄 때가 됐다.

다른 피소환인들도 처음의 실수를 잊은 듯 보이고.

그런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 의사를 밝히는 매켄지.

"아니오. 마음을 써주시는 건 고마우나,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어차피 사냥에 도움이 안 되니,"

아! 아티팩트 제작한다고 했지?

아이템은 창고에 널렸는데.

그래도 9서클 대마법사가 제작한 거라면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기대되는 마음도 있고.

"그럼 쉬고 계세요."

나머지 사람들은 83층 찍먹하러 출발.

[대한민국 검은 탑(NO.1) 83층에 입장합니다.]

환경은 뜨거운 열대 밀림.

나무가 우거져 빛도 잘 안 들어오는 어두운 숲속.

주혁과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도 거대괴수가 출현할까?

될 수 있으면 가죽 벗길 수 있는 놈이면 좋겠다.

깊숙이 들어가자 말라죽은 나무들이 보인다.

동시에 나무들을 뒤덮은 하얀색 빨랫줄 같은 것도.

'저건 뭐지?'

손으로 툭! 건드려 보니.

찌지직,

"으···,"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빨랫줄.

찐득하다니.

'이거 설마.'

그리고 떠오르는 임무.

[83층 임무 :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 0/1]

"거미?"

"거미군."

"거미네요."

"거미입니다만? 친구라도 될걸 그랬슴다."

무슨 소리야?

'···거미는 싫은데.'

가죽도 없을 테고.

괜히 왔다.

그래도 배지는 벌어가야지.

"베 상사 대형탄 몇 발 쏘고 정리하면 됨다."

그럴까?

계속해서 걸어가니 하얀색 밧줄, 아니 거미줄이 밀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쩌적, 쩌적, 발에 달라붙어 걸음을 옮기기도 불편할 지경.

온 사방에 가득 찬 거미줄,

무슨 거미줄 굵기가 빨랫줄만 해?

주혁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83층의 환경을 영상으로 찍었다.

순간!

스스슷!

빼꼼 고개를 내미는 거미 한 마리.

'응?'

이상하다.

분명 거대거미라는데 크기가 고작 강아지만 했다.

"의외로 작네요."

"작군."

"작사옵니다."

"작아요."

"작슴다."

바로 그때!

스슷, 스스슷, 스슷. 슷, 슷···,

거미줄 사이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거미들.

앞에도, 뒤에도, 양옆에도.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밀림을 까맣게 뒤덮었다.

게다가 나오자마자 뒤꽁무니에서 추륵, 추륵, 거미줄을 여기저기 뿌려대니.

"아오!"

"으힉! 징그럽슴다."

"···하아, 하필 거미라니."

그때였다.

스우우우우웅!

스각, 스각, 스각!

두꺼운 거미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기둥만 한 절지동물의 다리.

동시에 저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몸체의 실루엣.

"미친!"

거대거미였다.

임무 대상인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

어마어마한 몸체에 굵은 다리, 숭숭 나 있는 털.

사람처럼 생긴 얼굴에 무수하게 박힌 눈알들.

이건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정말이지 저렇게 징그러운 놈은 역병 트롤 이후로 처음.

'작은놈들은 새끼 거미구나.'

주혁은 무심결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끈적, 쩌어억, 쩌저적.

이미 발밑에 쫙 깔린 찐득한 거미줄.

피소환인들도 마뜩잖다는 표정.

이거 잘못하면 S+++ 등급 공략이 힘들지도.

움직임마저 제한된 이곳.

거대 여왕 거미도 그렇지만 제일 큰 문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새끼 거미들.

자칫 방심하면 소환사가 위험해진다.

그럼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된 공략이 어렵다.

주혁도 난감한 표정.

'임무 리셋 마렵네.'

이걸 잡으라고 임무를 준 거야?

그러나.

'뭐, 잡아주지.'

어떻게 잡느냐고?

'사람 부르면 돼.'

현재 동시 소환 가능 숫자 11명.

탑에 들어온 피소환인은 10명.

한 자리 비니까.

"매켄지 드로낙 지정 소환."

스팟!

쪼그려 앉은 채 뭔가 손에 들고 열심히 작업 중인 매켄지.

"인챈트 마법, 영차! 성공하면 떼돈, 영차!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영차! 플래티넘 배지도, 영···,"

그러다 멈칫!

뭔가 환경이 달라졌다는 걸 감지한 매켄지.

고개를 들고.

"응?"

주위를 둘러보더니,

"오!"

전방에 있는 거대거미와 새끼 거미들을 확인한 후,

"오오!"

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오오!"

벌떡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껏 녹이세요. 그냥 무조건 태워버려요."

주혁의 지시에 매켄지는 감격한 어조로 답했다.

"진정한 불장난이 어떤 것인지 소환사께 보여드리리다."

손을 들어 올려서.

"파이어 레인!"

화르르륵!

떨어져 내리는 불덩어리.

한 번 더,

"플레어 스톰!"

밀림에 나타난 화염 폭풍.

또,

"헬파이어!"

발밑에서 올라오는 지옥불.

열대 밀림이 불타올랐다.

시뻘건 화염으로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꾸에에에에에···,"

무수한 새끼거미가 화염에 휩싸이고, 진득한 거미줄도 녹고, 거대거미 아라크로이드도 활활 타고.

하지만 이쪽으론 열기 한점 없었다.

매켄지가 미리 배리어 마법으로 보호막을 쳤으니까.

짝짝짝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피소환인들의 태세 전환은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예전엔 비난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멋진 불 장난임다. 밤에 오줌 싸도 됨다. 이불은 제가 빨겠슴다."

"장관이야. 과연 9서클, 명불허전이로구나."

"소녀, 감탄했나이다. 르스스알의 참모습입니다."

"화력 끝장납니다."

"대단하다! 마법사. 빛이여!!!"

"뜨거워요. 그래서 좋아요."

"전에 욕했던 거 취소."

"호에에에!"

"컹컹컹!"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3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스팟!

메켄지의 머리 위로 다시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비췄다.

그동안의 설움이 눈 녹듯 싹 사라졌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62 >

화려한 공략이었다.

밀림 전체가 불타올랐다.

탈진해버린 매켄지.

그도 그럴 것이.

무시무시한 광역 화염 마법 3개를 너무 급하게, 연속적으로 펼치느라 마나를 영혼까지 끌어 써버렸기 때문이다.

펜트하우스로 다 함께 돌아왔지만 매켄지는 대자로 뻗어 거실에 드러누워 있었다.

'무리했구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짜내 마법을 펼쳤겠지.

백색 탑에서 편히 쉬게끔 일괄 소환 해제.

스팟! 스팟! 스팟···,

잠시 시간이 흐르고.

백색 탑에서 메켄지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아이고, 공략 두 번 하다간 사람 잡겠네. 하여간 수고 많으셨어요."

"벼, 별말씀을."

"핵폭발보다 더 강력하던데요?"

"설마 핵에 비할까요. 한낱 불장난일 뿐이오만.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주혁의 칭찬에 잔뜩 고무된 매켄지, 자연스럽게 자신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다른 피소환인들도 계속 칭찬 세례.

"화끈하셔! 상남자야, 상남자!"

"수고했다. ···오늘 술 한잔 같이하겠느냐?"

"매켄지 님, 큰 공을 세우셨군요. 앞으로도 기대가 무척 큽니다."

"계속 같이 갑시다. 영차!"

매켄지도 화답했다.

"영차!"

마침내 이루어진 재평가.

이제야 편안해진 마음.

동시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자신감.

마리 년이 뭐랬더라?

뭐, 등반 공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인정받았는데?

해보니까 되던데?

시작일 뿐이다.

비록 화염 마법 특성상 가죽 채집 공략엔 불리하지만, 83층처럼 대량 살상 공략 임무에선 자신이 독보적.

자리 하나 완전하게 차지했다.

이제 소외되는 일은 없을 터.

"그건 그렇고, 아까 소환되실 때 뭘 만들고 계셨어요?"

씨익, 웃는 매켄지.

그러고 보니 공을 세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티팩트입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주혁.

대체 어떤 아티팩트이길래.

좀 전에도 소환된 줄도 모르고 몰두하고 있던데.

"혹시 어떤?"

"우리 패밀리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시장에 팔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품에서 두 개의 팔찌를 꺼내 들면서.

"일명 비만 탈출의 팔찌!"

짜잔!

음악과 함께 둥실 떠오르는 팔찌들.

팔찌 두 개 중 하나는 은빛, 하나는 거무칙칙한 검회색빛.

둘 다 허공에서 천천히 회전하면서 반짝반짝 빛난다.

하다 하다, 이젠 자신이 만들어 낸 아티팩트에도 특수효과를 부여하는 매켄지.

"손목에 차고 있으면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여 천천히 살을 빼게 해주는 아이템!"

홈쇼핑 쇼호스트 같았다.

"오리할콘 금속으로 만들어 비싸냐고요? 아닙니다!"

거무스름한 팔찌가 툭 튀어나오더니.

"이건 아다만트로 만든 팔찌죠. 오리할콘과 성능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아다만트라면 탑 금속 중 가장 흔한 것.

백색 탑 창고에도 널렸다.

"게다가 일반 마정석으로 충분한 효과를 보이니, 생산비도 절감 효과도 있어서 매우 쌉니다."

대단하다.

역시 9서클 마법사다.

"···이걸 시장에 팔자는 말씀이시죠?"

"네, 건강 팔찌로. 의약품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계획이다.

오히려 가죽 장사보다 더 큰돈을 벌 수도.

"허나 단점도 있긴 하지만."

"뭐죠?"

"일반 마정석이라 인챈트 지속 유효기간이 3개월 정도입니다."

더 좋은데?

3개월마다 한 번씩 팔찌를 새로 사야 하니까.

전 세계 비만 인구가 몇 명인가?

어마어마한 숫자.

단순히 살만 빼는 게 아니다.

당뇨, 고혈압, 콜레스테롤···, 사람이 건강해진다.

목숨을 살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야 하는데···,'

매켄지도 그 점을 알고 있는 듯.

"몸체가 되는 팔찌는 외부에서 주문 제작해서 대량으로 가지고 오면 됩니다."

인챈트 마법은 어렵지 않단다.

마정석이 들어갈 홈과, 가루를 채워 넣을 음각 부분만 만들어져 있으면.

"누가 수식을 그대로 베껴서 만들면요?"

"수식만 그린다고 작동하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연금술사가 정제한 고순도 마정석 가루.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식을 활성화하는 인챈트 마법 주문.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아무런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그럼 몸체는 플레이어 샵 공방에 의뢰할까?

거기서 주문해서 가져오면···,

바로 그때!

"호에,"

수줍게 손을 든 라직스.

"왜요?"

"팔찌 만들어요. 호에."

"응?"

"많이 만들 수 있어요. 후에에에,"

맞다.

라직스가 가진 스킬엔 대장 수리도 있었다.

성검을 수리한 경험도 있고.

"진짜 대량 생산 가능해요?"

"호엥!"

"아유, 우리 머슴님은 못 하는 게 없어."

"후에."

"공방부터 만들어 보죠."

백색 탑에서 공장을 돌려 팔찌 생산.

이러면 탑 전용이라는 수식어를 뗀 아이템을 마음껏 찍어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 모습에 매켄지는 씁쓸한 심정.

라직스가 대장 제작도 한다고?

진짜 못 하는 게 없다.

만능일꾼에 우주대머슴.

당분간 이기는 건 단념하자.

라직스는 현재 붙박이 1인자의 지위.

그래서 매켄지가 노리는 건 넘버투.

'2인자로도 충분해.'

밑에 10명 깔고 가는 셈이니까.

한편 주혁은 더없이 만족했다.

역시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무슨 일이든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

하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

9서클 마법사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진짜로 되는지 실험이 필요한데···.'

유사 과학이라 오해받을지도.

게르마늄 팔찌, 음이온 발생기, 육각수, 전자파 차단 스티커 같은 것들.

'플레이어 말고 일반인 대상으로.'

그러자 코사크가.

"두 개 중 하나는 저 주십쇼."

"네?"

"주변에 잘 아는 비만인 한 명 있슴다. 실험대상으론 최적임다."

"아!"

누군지 알겠다.

"건강해야 함다. 최소한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잘됐다.

하나는 김인중 위원장에게 줘서 실험해보고,

나머지 하나는?

주혁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오래오래 자신의 회사를 경영해줬으면 하는 인물.

'정동훈 대표님 줘야겠네.'

그건 그렇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매켄지 드로낙 대마법사님!"

"음? 왜···."

"앞으로 오세요."

"어어···, 설마?"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플래티넘 배지 하나를 꺼냈다.

"헉!"

후다닥!

달려와서 꼿꼿하게 선 매켄지.

"귀하는 83층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를 훌륭하게 처리하고, 백색 탑 17층의 운영 자금 조달을 위해 비만 탈출 아티팩트 제작에 힘쓴바, 이에 대한 공로로 플래티넘 배지를 수여합니다."

동시에 웅장하게 울리는 배경음악,

짠, 짜라잔잔, 짠짠라라라,

펑펑!

허공에선 소형 불꽃놀이.

매켄지가 가슴을 쑥 내밀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플래티넘 배지.

짝짝짝짝짝짝!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피소환인들.

"자, 파티합시다."

마음껏 놀아보자.

그리고,

"매켄지 님. 혹시 술 드시나요?"

"말술이라오."

아싸!

술친구 한 명 더 늘었다.

사실 노인네 두 명이지만.

뭐, 그게 어때서.

고기도 굽고,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일광욕도 즐기고, 영화볼 사람 영화도 보고.

쪼르륵.

주혁은 오늘의 주인공 매켄지에게 한잔 먼저 따라주었다.

"어이쿠, 이렇게 황송할 데가."

그리고 광마에게도.

쪼르륵.

확실히 3명이 함께 마시니 술맛이 더 좋다.

안주가 없어도 되겠다.

매켄지는 행복했다.

소환사의 칭찬에, 배지에, 게다가 그가 직접 따라주는 술까지.

이 정도면 자격 충분하지 않나?

넘버쓰리쯤은 되는 것 같은데.

2인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져야지.

그렇다면 누굴 제쳐야 할까.

'광마?'

아니다.

그도 들은 이야기가 있다.

광마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소환사의 심기를 매우 언짢게 했다고, 그래서 최하 별점에 몇 번 나와보지도 못했다고.

광마는 위협 대상이 아니다.

충분히 이긴다.

'저 공주 선녀는···,'

신묘한 부적술을 사용하지만 자신만 못하다.

더불어 힘만 센 야만 전사도, 방구석에서 안 나오는 욕쟁이 엘프도, 대단한 비주얼의 마총사도.

그럼 한 명 남는다.

암살자 코사크.

공략 때마다 소환사 옆에 딱 붙어서 갖은 알랑방귀를 다 뀌어대는 놈.

그놈이 소환사의 심복이자 현 2인자다.

코사크를 제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1인자 우주대머슴 다음, 2인자인 우주대마법사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놈을 발아래 둘 수 있을까?

그처럼 화려한 말주변을 구사하는 건 어려운데.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찰라!

"보, 봉 소환사님."

수영하다 말고 코사크가 술자리로 헐레벌떡 뛰어와서,

"왜요?"

실실 웃으며 슬며시 속삭이는 말로.

"진숙이 만났슴까?"

"···."

주혁은 흠칫 놀랐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설마?'

휙! 고개를 돌려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는 그녀.

베 상사구나.

"베 상사에게 다 들었슴다."

"···그, 그거야 우연히."

"세상에 우연이 어딨슴까? 다 운명임다."

무슨 소리야?

운명은 무슨! 

"···세상 생각보다 좁아요. 어쩌다 보니 만난 거지."

하지만 코사크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실제로 진숙이 보니 어땠슴까?"

"···베 상사보다 못하던데요?"

"당연한 말 아임까! 베 상사를 누가 이김까? 베 상사 기준으로 눈높이 정하면 큰일남다."

"···그렇긴 하죠."

어디 베 상사뿐인가?

몽마 출신 디아마트도 그렇고, 요즘 선녀로 격상해서 부쩍 성숙해진 견달래도 그렇고,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태생이 엘프인 마리도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진숙이 진지하게 만나보는 게 어떻슴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결혼을 하라는 게 아임다. 저도 진숙이는 싸모님으로 반대임다. 그래도 상남자로 태어나서 연애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슴까?"

"···."

솔직히 그녀와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해봤다.

아이도 5명이나 낳았다.

유치원도 보내고, 학교도 졸업시키고, 취직도 시켜서 손주까지 봤다.

물론 다 상상 속에서.

그건 그렇고.

지금 누구에게 연애 상담을 해.

"뭐, 그렇다고 해도 모태솔로 조언은 듣고 싶지 않네요."

"아유, 봉 소환사님 모르셨구나? 제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무슨?

"제가 평양 시내에 나타나면 여자들이 질질 눈물을 흘리며 인민무력부장 동지! 하면서 막 달려듬다. 안아달라고 난리임다. 앞으로 걸어가지도 못할 정도임다."

"···."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자랑질이야?

확! 소환 해제해버릴까?

"제가 진숙이 전화번호 따드림까?"

"거참! 내가 지금 연애할 상황입니까? 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 17층도 꾸며야 하고, 상층 등반도 해야 하고, 비만 탈출 팔찌 만들어 팔 생각에, 머리가 얼마나 복잡한데, 어? 어!"

"···죄, 죄송함다."

누구는 연애 안 하고 싶은 줄 아나.

다만 눈이 너무 높아졌고, 여자와 말해보려면 특유의 하남자 근성이 나와서 버벅대기만 하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에이 씨, 술맛 떨어지게.'

말이 아닌 눈빛으로 코사크를 비난하는 주혁.

눈치 빠른 피소환인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우르르 달려와서 코사크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어이가 없군. 지가 무슨 연애 전문가인 것처럼 나대니."

"주제에 인기는 무슨, 인민무력부장이니 배경 믿고 달려드는 거지."

"여자나 사귀어 봤겠습니까? 말끝마다 슴다, 임다 하는데, 누가 좋아할까요."

"아주 매를 벌어요. 매를."

"전사는 암살자가 한심하다."

"카탈로그 확장하지 않고 무작위 소환을 해야 했어."

"맞아. 그럼 삭제되었을 텐데."

"이 기회에 코사크님 입을 꿰매야 하옵니다. 만악의 근원이옵니다."

"꿰매기는 무슨, 입에 수류탄 집어넣고 터뜨려 버리지."

"호에에액!"

"컹컹! 크르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코사크.

"아, 아, 아임다. 오해임다. 내가 말한 뜻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변명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애를 썼지만 될 리가 있나?

주혁은 가만히 있었다.

욕 먹어도 싸다.

순간!

띠링!

테블릿으로 도착한 메시지.

열어서 확인해보니.

마리에게서 온 메시지.

그러나 자신에게 온 건 아니다.

코사크에게 대신 전해달라며 왔다.

"어우."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들.

당사자에게 보여줘야지.

"코사크씨?"

"네, 네넴?"

"마리 씨에게서 온 메시지입니다. 읽어보세요."

코사크도 어떤 내용인지 눈치챈 듯.

"···안 읽어보면 안 되겠슴까?"

"여기요."

실눈을 뜨며 태블릿 대화창을 읽었는데.

"어우."

코사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투성이.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이참에 코사크의 목을 베어 소환 불가 100일 동안 어디서 머무르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코사크.

꿀꺽.

그걸 보고 있는 매켄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술이 확 깬다.

명실상부한 피소환인 2인자가 말실수로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

자신보다 더 심하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좋아해야 하나?

천만에!

자신도 언제든지 코사크처럼 될 수 있다.

경험도 해봤고.

이곳은 마굴이다.

백번 잘하다가도 한번 삐끗하면 그 길로 조리돌림,

'살얼음판이야.'

바짝 긴장해야 한다

욕심 같은 거 버리자.

2인자는 무슨!

저 밑으로 미끄러지지만 않으면 선방하는 거지.

바로 그 순간!

스팟!

백색 탑 17층에 나타난 한 사람.

"오! 전 청장!"

"월세 거주민 왔다."

"호에!"

전광일이었다.

요즘 하루에 한두 번씩 꼭 찾아온다.

주혁이 월세권을 끊어줬기 때문이다.

"어음, 제가 잘못 왔나요?"

"아유, 아임다. 제때 왔슴다. 우리 전 청장님!"

코사크가 재빠르게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

전광일이 와서 인해 비난 세례가 멈췄으니.

주혁도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어서 오세요. 이리 와서 한잔해요."

"···저기, 차를 타고 가야 해서."

"대리 부르면 되죠."

또 한 사람의 술친구.

4명이 모인 술자리.

분위기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술이 막 들어간다.

은근하게 올라오는 술기운.

광마가 진기를 운행해 취기를 몰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줬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 아깝게 왜 깨?

마시다가 뻗는 한이 있어도.

잔광일도 기분이 좋은 모양.

"어르신들, 제가 소맥 한잔 멋지게 말아 올리겠습니다."

"허허허, 소맥은 공무원들이 잘 말지."

"나랏일 하느라, 우리 소환사 뒷일 봐주느라. 고생이 많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뭘!"

이젠 피소환인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전광일.

그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오늘 술맛 제대론데?'

이게 다 프라이빗한 백색 층 17층이 있기 때문이다.

아련한 눈초리를 주위를 둘러보는 주혁.

현재 만들고 있는 공간, 자신의 도시.

'흠.'

뭔가 살짝 모자라다.

이곳을 대표할 만한 무언가가 없을까?

문득 정동훈 대표를 만나러 갔다가 복사 해온 강남대로 61층 빌딩이 떠올랐다.

1조짜리 빌딩.

사놓고도 몇 번 가보지도 못했다.

'복사도 해왔으니까.'

저쪽에 붙여넣기 하면 좋겠는데.

'해봐?'

[해당 건축물 붙여넣기에 드는 비용은 상급 마정석 50t입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

50톤.

많다.

상급 마정석 시세로 환산하면 1,000억이 넘는 돈.

'이걸 붙여, 말아?'

사실 백색 탑 17층 꾸미기도 꾸미기지만, 엘리베이터 건설해보려고 계획 중이었다.

설치에 드는 비용은 상급 마정석 300톤.

현재 모은 상마는 200톤 조금 넘는다.

'솔직히 궁금하긴 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디로 이동하는지.

진짜 다른 평행우주 차원?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백색 탑 수직이동?

'그런데 여기에 50톤을 써버리면···,'

엘리베이터 설치가 지연되겠지.

붙여넣기 가치가 있을까?

'못 할 게 뭐 있어? 언제 가치 따지면서 움직였나?'

까짓거 50톤, 금방 모은다.

내가 누군데?

백색 탑의 상남자 아닌가!

벅차오르는 주혁.

웅장해지는 가슴.

"어이쿠, 광마님 술잔이 비었군요."

"전 청장이 따라주는 술이 유독 맛나는군."

"하하하, 그럼 제가 한잔 더 따라드려야죠,"

"나는?"

"매켄지님도 바로 따라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술 마시게 내버려 두고,

주혁은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갔다.

손을 들어 위치를 가늠하고,

"붙여넣기 간다!"

무슨 소리야?

술 먹다 말고 주혁을 바라보는 사람들.

"솟아나라! 허이짜!!!"

그때였다.

우우우웅!

진동하는 백색 탑 17층의 지면.

차차착! 차착!

워낙 커서 밑부분부터 붙여지기 시작하는 마천루 빌딩.

차차차차차착! 차차차차착!

마치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하늘 위로 쑥쑥 올라갔다.

빌딩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평평한 공간에 별안간 초대형 빌딩이 세워지고 있었다.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이 기막힌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피소환인들.

저게 뭐야?

그들도 복사와 붙여넣기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덜덜덜덜.

광마의 잔에 술을 따르던 전광일의 두 손이 떨렸다.

주르르륵.

자신의 잔이 넘치는 것도 모르는 광마.

띠링!

매켄지의 머리 위엔 물음표 모양의 시각효과가,

코사크도, 고방도, 견달래도, 바르딘, 베 상사, 제페트, 디아마트, 라직스, 혈랑, 그리고 창문 틈으로 눈만 빼곡 내민 마리도.

"···어?"

"헐!"

"마, 맙소사."

"저, 저게?"

"허허,"

"미쳤군."

"···."

"와."

.

.

.

장관이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창조였다.

신의 권능에 비견되는.

스파파파팟!

그리하여 백색 탑 17층에 1조 2천억짜리 61층짜리 빌딩 복사판이 생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