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수도 데이트
"아니, 이놈들은 뭡니까."
길버튼이 바닥의 시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큰뿌리는 단체 손님을 받지 않으니 암살자겠지."
"암살자인 건 저도 압니다만."
"그러면 왜 물었나?"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손을 털었다.
"황녀를 노린 암살자일세."
"아니, 황녀님이 왜 여깄습니까?"
길버튼이 기억났다는 듯 소리쳤다.
"내성에 들어가려면 황녀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래, 나는 황녀의 정부로 내성으로 들어갈 걸세."
"예? 그거 불륜 아닙니까?"
"위장일세."
"아, 그렇군요."
길버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깊게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길버튼 경, 자네는 내 하인일세."
"예? 저는 기사입니다만."
"위장 하인일세."
"저는 하인에 안 어울리는 외모입니다만."
"아니, 자네는 정확히 돌쇠 같네. 염소수염이 난 돌쇠."
"예? 돌쇠가 뭡니까?"
그때, 베넷트가 손을 내밀었다.
"추가금 주셔야 합니다."
"추가금?"
"예, '말똥보다 저렴한' 길버튼이 여자에 홀랑 넘어간 걸 구해줬습니다."
"넘어가다니! 안 넘어갔다!"
"사실이잖아. '말똥보다 저렴한' 길버튼."
"······자꾸 이명처럼 붙이지 마라!"
길버튼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반응을 보니까-.
"이뻤나?"
"크흠, 이쁘긴 했습니다."
길버튼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이해하네. 일생 이성이 없었던 자네니까. 매력적인 이성에게는 약할 수밖에 없지. 평생 더운 지역에 살던 이에게 추위를 잘 탄다고 뭐라할 수는 없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길버튼 경, 자네 좋다는 여인은 주의하게나. 높은 확률로 암살자거나, 사기꾼일 테니까."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베넷트에게 금화를 던졌다.
"아싸, 다음에도 부탁해. 말똥보다 저렴한 길버튼."
"제길-."
길버튼의 눈가에 붉은 피가 길게 흘렀다.
그때, 황녀가 돌아왔다.
그런데 황녀의 손에 피가 뚝뚝 흘렀다.
암살자가 덮쳤을 때, 황녀는 검도 뽑지 않았다.
저건 암살자의 피가 아니었다.
아마-.
'황녀를 호위하던 황실 기사겠지.'
그 사이에 황실 기사들의 목을 베고 온 듯했다.
암살자는 상대하지 않고, 황실 기사나 베다니-.
'버릇을 잘못 들였어.'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돌아가자. 내 정부야."
황녀가 나긋하게 손짓했다.
황녀의 정부 흉내라니-.
'골치 아파지겠군.'
다만, 황녀의 정부는 내성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다.
황족이나 귀족이나, 정부가 보편화된 시대였으니까.
더불어 한 번도 정부를 들인 적 없던 황녀였으니, 더 효과적일 게 분명했다.
그저 껄끄러울 뿐이지-.
[자, 요원의 첫 번째 규칙이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판단할 것.]
"좋지요."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황녀의 허리를 감았다.
황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깊게 파고들었다. 얼마나 깊게 달려드는지, 가만히 뒀다가는 피부까지 벗겨낼 기세였다.
"하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러면 전부 뽑아야겠구나."
황녀가 이해했다는 듯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정부가 할 법한 아부를 떠올렸다.
"그러면 황녀님의 이 아름다운 외모를 못 보지 않습니까.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그건 또 그렇구나. 네가 그리 말하니 봐줘야겠다."
황녀가 가벼이 끄덕이며 갈라하드의 목을 쓸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황녀의 손은 검을 댄 것보다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둘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갈라하드는 자꾸만 파고드는 황녀의 손을 막느라 바빴다.
그러다 잭슨과 눈이 마주쳤다.
잭슨은-.
'역시 에이스야!'
라고 벙끗거렸다. 뒤의 청년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큰뿌리에 전설로 기록되겠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표정을 바꿨다.
술집에서 황녀의 눈에 들어 기세등등해진 정부처럼-.
활짝 웃었다.
****
'······흉내 맞지?'
길버튼은 정면을 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황녀와 갈라하드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황녀는 반쯤 갈라하드에게 안겨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이 저래도 되나?'
미리 들어서 연기라는 걸 알아도, 헷갈릴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둘은 전혀 거리낌 없었다.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엄하신 황녀님이시다! 어딜 감히 고개를 드느냐!"
갈라하드가 연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리느라 바빴다.
황녀보다 소리치는 갈라하드에게 따가운 시선이 쏠렸지만, 갈라하드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졌다. 진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정부처럼-.
"아, 좋군요."
"네가 좋다니 나도 좋다."
둘을 막는 이는 없었다. 암살자도 더는 없었다.
둘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춘 건, 내성 앞에서였다.
금을 입힌 듯 금색의 내성벽은 그 크기가 상당히 거대했다.
너비는 북부의 벽보다 짧았지만, 그 높이는 북부의 벽 못지 않았다.
금색 성벽 주변에 금색 갑주를 입은 황실 기사들이 가득했다.
그 기세 하나하나가 강렬했다. 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이게 황실 기사-.'
길버튼은 괜히 손이 간지러웠다.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지엄하신 분을 뵙습니다."
콧수염이 두꺼운 황실 기사가 황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영광으로 생각하거라."
황녀는 당연하다는 듯 인사를 받았다.
"예, 이쪽 분들은-."
황실 기사가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나는 헤프너라고 하오."
갈라하드가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참으로 건방진 행동에 황실 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정부다."
황녀가 갈라하드의 허리를 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곳곳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황실 기사들의 눈에 혐오가 떠올랐다.
다만, 황실 기사들은 곱게 물러났다.
둘은 그 사이를 당당하게 걸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이렇게 대놓고 들어가도 되는 건가?'
길버튼과 베넷트는 뒤늦게 따라붙었다.
외성도 대단했는데, 내성은 그 이상이었다. 길버튼이 처음 보는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길버튼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곳곳에 뾰족하고 거대한 탑들이 있었는데, 그 위에 그려진 문양들이 상당히 화려했다.
더불어 마력차라는 괴상한 물체들이 연신 바쁘게 다녔고, 복장이 전부 화려했다. 귀족들의 세상 같았다.
사방이 별천지였다.
길버튼은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때-.
"옷이 좀 사고 싶은데요. 이건 너무 해졌어."
갈라하드가 멀쩡한 옷을 만지며 투덜거렸다. 정말 노골적인 요구였다.
"좋다, 뭐든 골라라."
황녀의 눈꼬리가 깊게 내려갔다.
향한 곳은 깔끔한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였다. 길버튼이 봐도 비쌀 것 같은 것들이 유리 너머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기가 절로 죽는 곳인데-.
"이거랑 저거랑-."
갈라하드는 거침없이 물품을 골랐다.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게의 직원들이 허겁지겁 물품을 가져왔다.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러운 정장부터, 보석이 박힌 반지나 목걸이까지-.
짐은 길버튼에게 고스란히 넘어왔다.
길버튼은 정장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그 숫자가-.
"은화 50개? 뭔 옷이 은화 50개나 해?"
길버튼은 혀를 내둘렀다. 고 봉급의 길버튼도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역시 수도의 물가가 비싸다더니만-.
그때, 베넷트가 길버튼에게 슬쩍 귓속말했다.
"그거 금화야."
길버튼은 입을 쩍 벌렸다. 옷 한 벌에 금화 50개라고? 길버튼은 황급히 두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50이 아니라 70이고."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렸다."
"도대체 어디가?"
"0이."
베넷트의 찌푸린 눈에 길버튼은 작게 헛기침했다.
"이것도 잘 어울리겠군."
"저것도 입어 보거라."
길버튼에게 비싼 것들이 계속해서 쌓였다.
길버튼은 두 개부터 계산을 멈췄다.
옷이나 장신구라 전혀 무겁지 않았는데, 동시에 굉장히 무거웠다.
'이게 다 얼마-.'
길버튼의 등에 땀이 흘렀다.
정작 그것들을 고른 갈라하드나 황녀는 개운하다는 얼굴이었다.
"배가 고픕니다."
"식사를 해야겠구나."
"예. 어이, 가장 비싸고 맛있는 식당으로 안내해라."
갈라하드가 앞에 있는 황실 기사에게 말했다.
건방진 말투에 황실 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무섭습니다."
황녀의 뒤로 슬쩍 숨었다.
"내 정부를 핍박하는 거냐."
황녀가 검을 뽑았다. 붉은 오러가 넘실거렸다. 황실 기사가 이를 질끈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진작 말 좀 듣지."
황실 기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도착한 곳은 식당이 아닌 저택이였다. 분수부터 시작하여 정원까지 있었다.
'저게 식당?'
길버튼은 입을 쩍 벌렸다.
석상이 진열된 정문 앞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전부 나와서 맞이했다.
안내된 곳에는 사람 스물은 앉을 법한 식탁이 있었다. 그 거대한 식탁에 산해진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겹치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음식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연회라도 여는 건가?'
연회가 아니었다.
그저 갈라하드 하나를 위한 상이었다.
"아-."
갈라하드가 스튜를 떠서 황녀에게 내밀었다. 받아먹은 황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황녀는 계속해서 입을 벌렸다. 잠시 멈칫거린 갈라하드가 웃으며 계속 먹여줬다.
"안 먹어?"
어느새 자리에 앉은 베넷트가 물었다. 그에 길버튼은 슬쩍 앉았다.
'······맛이 없겠지.'
길버튼은 인상을 쓰며 가장 가까운 음식을 집어 먹었다.
입에 넣자, 고기가 그대로 녹았다.
생전 처음 먹어본 맛이 혀를 부드럽게 감았다.
'······톰 못지않다. 아니, 이것만 맛있겠지.'
길버튼은 제일 맛없어 보이는 채소볶음을 입에 넣었다.
'젠장-.'
부인할 수 없는 맛이었다. 어떻게 채소를 볶아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내가 먹여주겠다. 아, 하거라."
"······아."
황녀와 갈라하드는 서로 먹여줬다. 보던 직원들도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식사가 끝나자, 둘은 가벼이 일어났다.
'이걸 다 남긴다니-.'
이럴 때, 데미안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길버튼은 묘한 아쉬움을 달래며 둘을 따라갔다.
볼이 빵빵한 베넷트가 보였다. 그 주머니에 고기나 빵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은 음식을 가져온 것이다.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모른다. 구경하고 싶으냐?"
"예, 궁금하군요."
갈라하드와 황녀가 아무 건물이나 들어갔다. 그 앞을 지키는 황실 기사가 당황했다.
"이곳은 무기 창고입니다. 관계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황녀님도 안되는 곳이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곳인가 봅니다."
"아니, 황녀님은 가능하시지만-."
"네가 감히 나를 막는 것이냐?"
황녀가 황실 기사의 목을 검으로 겨눴다.
"아무리 그래도 관계자만-."
"내 정부니 관계자다."
황녀의 억지에 황실 기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황실 기사의 안내라니, 끝내주는군. 역시 황녀님이십니다!"
참으로 가증스럽게 웃었다.
보는 길버튼도 얄미울 정도인데, 황실 기사는 어떻겠는가-.
"망할 남창 새끼."
나지막하게 욕한 황실 기사가 뒤로 돌았다.
"제국의 무기 창고라니 기대됩니다. 기념품도 챙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얼마든지 챙기거라."
둘의 대화에 황실 기사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다만, 황실 기사는 불만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미친년으로 소문난 황녀와 미래도 모르고 기세등등한 남창 놈이었다.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여겼건만-.
"하하, 검을 두 개 들었으니, 제가 이길 겁니다."
"참으로 똑똑하구나."
제국의 검을 들고 노는 둘을 보니, 화를 참는 게 참 어려웠다.
"기념품으로 가지고 싶습니다만-."
"그래그래."
"자, 다음은 또 어디로 놀러 갈까요."
"저기로 가보자꾸나."
신나게 떠들며 나서는 둘에 황실 기사는 생각했다.
'오늘 다들 골머리 좀 앓겠군.'
미친 황녀가 남창 하나를 끼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고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황족을 막을 수는 없지만, 외부인을 들이는 건 원칙상 불가했다.
다만, 상대는 미친 황녀였다.
굳이 남창 하나를 들이지 않기 위해서, 미친 황녀와 대립할 놈이 있을까?
'그럴 리가.'
황실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황족은 제국의 주인이었다. 황녀가 아닌 황자였다면, 이렇게 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은 옆의 방어구 창고로 향했다. 잠시 입씨름이 있었고-.
이내 둘이 방어구 창고로 들어갔다.
그쪽 황실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끄덕였다.
참으로 좆 같은 곳이었다.
****
"황녀가 지금 내성에서 정부를 끼고 돌아다닌단다."
정보국 요원 타이트는 끌끌 웃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황녀가 제 정부 구경 시켜주겠다고 시설이란 시설은 다 쑤시는 중이라고. 무기 창고에서 기념품이라고 검을 챙겼다는 군-. 흐하하!"
소리 내어 웃는 타이트와 달리, 후임 파울은 눈을 가득 찡그렸다.
"황족이야 어디든 방문할 수 있지만, 외부인 동행은 허락되지 않을 텐데요?"
파울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 잘난체하는 모습에 타이트는 혀를 찼다.
"그걸 누가 모르냐? 남창 하나 안 들이겠다고 그 미친 황녀랑 싸우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건 싸우는 게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겁니다. 응당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오, 이 빡빡한 새끼. 그래, 니 똥 굵다."
"제 똥은 안 굵습니다만?"
파울의 진심 어린 반문에 타이트는 답답함에 가슴을 꾹꾹 눌렀다.
"아무튼, 여기도 오려나? 황녀가 그렇게 이쁘다는데. 궁금하군."
"오면 안 됩니다. 정보국은 극비 시설입니다."
"나도 안다고 이 새끼야."
그때, 정문이 열렸다. 경비를 서던 요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들어왔다.
그리고-.
"여기가 정보국이다. 제국을 관리하는 곳이지."
아주 화사한 여인이 들어왔다. 만개한 꽃 같은 여인이었다. 그 옆에는 딱 봐도 남창처럼 생긴 놈이 있었다.
웃긴 건 놈의 복장이었다. 어색하게 꽂은 검부터, 제국의 문장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방패와 고삐까지-.
공통점은 하나였다.
제국 문장이 찍혀 있다는 것-.
'진짜 기념품으로 챙겼군.'
타이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뒤에는 짐을 잔뜩 든 딱 봐도 하인인 놈과 몸종처럼 보이는 여인까지 있었다.
눈이 마주친 파울이 고개를 굳게 저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확실히 들이는 건 위험했다. 다만-.
'보급소도 다 열어줬는데?'
굳이 이쪽만 튕겨서 문제 일으킬 필요가 있나?
하지만 보급소와 정보국 본부는 경우가 달랐다.
정보국 본부는 극비 시설이었다.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기념품 좀 추천해 주실 수 있습니까?"
타이트를 보며 히히덕 웃었다.
그 한심한 모습을 보니 회의감이 올라왔다.
기념품을 운운하는 놈을 막기 위해서 미친 황녀랑 대척하자고?
더불어-.
"황녀님은 저번에도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재밌었다."
저번에도 왔다지 않나.
타이트는 슬쩍 옆으로 비켰다.
"절대 안 돼-."
"하하, 폐급이라서 그렇습니다. 들어가시지요."
타이트는 파울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웃었다.
애초에 정보국 본부의 구조는 복잡했다. 숙련된 요원들도 곧잘 길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들여보내도 금방 길을 잃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굳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 없지.
"아, 혹시 두목도 있나?"
정보국에서 두목이라니-.
사내의 물음에 타이트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국장님은 안 계신다."
"알겠네. 고맙네."
순간 사내의 음성이 다르게 느껴졌지만-.
'기분 탓이겠지.'
타이트는 발악하는 파울을 굳게 잡았다.
아오, 이 폐급 새끼-.
166화 진짜로
'경비가 강해졌군.'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보국은 제국의 그림자였다. 제국이 대놓고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을 수면 아래에서 처리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니 보안이 삼엄한 건 당연했다.
다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이렇게 걸으니 좋구나."
황족이었다.
황족은 제국의 주인이었다. 제국에서 황족이 갈 수 없는 곳은 없었다.
다만, 허락된 건 오로지 황족에게만이었다. 외부인의 동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지.'
그 원칙을 무너뜨린 게 현 국장이었다. 현 국장은 대놓고 황족을 들인 적이 많았다.
덕분에 한결 수월했다.
거기에 황녀의 악명이 크게 작용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요원들이 필사적으로 황녀와 갈라하드를 외면했다.
그로 인해 본부에 들어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지금이야 초입이었기에 놔두는 거였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막아설 게 분명했다.
'보안실장이 문제지.'
보안실장은 깐깐한 여인이었다. 국장의 허락이 아니라면, 황녀의 정부라도 막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틀어야겠군.'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조금 더 들어가자, 차갑게 생긴 여인이 그들을 막아섰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칼 단발과 뾰족한 눈매가 그 깐깐한 성품을 온전히 보여줬다.
보안실장, 슬럿이었다.
"여기부터는 보안 구역입니다. 황녀님을 제외한 비인가 인원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요원이 가득 서 있었다. 어떻게든 막겠다는 의지가 또렷했다.
'빡빡한 건, 여전하군.'
다만, 슬럿의 약점은 알고 있었다.
"으음, 쉴 곳이 있나?"
"쉴 곳?"
황녀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황녀의 허리를 감으며-.
"뜨거운 감정을 속삭일 곳 말입니다."
노골적으로 끈적하게 말했다.
슬럿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약점도 여전하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나는 여기도 좋다."
황녀가 대뜸 자기 옷을 찢었다. 휘날리는 천 쪼가리들에 갈라하드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다행히 그 안에 붉은 갑주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깊게 안도했다.
갈라하드도 놀랐는데, 슬럿은 어떻겠나.
"그- 급하시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터질 것처럼 붉어진 슬럿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사실 과한 요구도 아니었다. 보안 지역이 아닌, 적당한 방을 내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안내된 방은 휴게실로 쓰는 공간이었다.
정확히 갈라하드가 예상한 곳이었다.
"침대도 있구나. 좋다."
황녀의 촉촉한 목소리에 슬럿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차갑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만 들어가죠. 좋은 시간을-."
"좋다!"
갈라하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녀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길버튼과 베넷트에게 눈짓했다. 길버튼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베넷트가 끄덕였다.
베넷트가 대충 이해한 듯했다.
"방해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갈라하드는 슬럿을 보며 일부러 끈적하게 말했다.
그에 슬럿이 격하게 끄덕였다.
'절대 안 들어오겠군.'
갈라하드는 만족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뭐 하십니까?"
검으로 제 붉은 갑주를 긁는 황녀였다.
"안 벗겨진다."
"황실의 보물이니까요."
"팔을 자르면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독한 농담이군-. 중얼거리던 갈라하드는 검에 일렁이는 오러에 농담이 아닌 걸 깨달았다.
갈라하드는 다급히 황녀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오러가 갑주를 찌를 뻔했다.
"용의 껍질로 만든 갑주 아닙니까. 어차피 오러로 못 자릅니다.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소드 마스터를 요청해라."
"그만."
황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입가로 피가 흘렀다. 황녀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아주 짙은 실소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시간 좀 끌어주십쇼."
갈라하드는 황녀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잔인하구나. 너도, 이 쓰레기도."
황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인하다? 웃기는군."
갈라하드는 이죽거리며, 캐비넷으로 향했다.
캐비넷에는 정교한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갈라하드는 가벼이 열었다. 안에는 적당한 크기의 정복이 있었다.
익숙하게 옷을 벗었다.
"아팠겠구나."
갈라하드는 대답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정보국 정복은 상당히 까슬했다.
황녀는 언제 가져갔는지 갈라하드의 옷에 얼굴을 박은 상태였다.
"시간 좀 끌고 있게. 그리 오래 안 걸릴 테니까."
갈라하드는 벽에 마나를 흘렸다. 벽이 가볍게 밀렸다.
그 건너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제임스가 작전과의 갈라하드라고 했었나.'
자밋의 장난스러운 안배였다.
갈라하드가 갈라하드라는 이름을 쓸 거라고는 생각 못 할 테니까-.
기억을 되짚으며,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젠장.'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길버튼은 침을 삼켰다.
길버튼은 갈라하드와 황녀가 들어간 방을 지키는 중이었다.
맞은 편에는 무장한 병력이 가득했다. 그들의 기세가 상당했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였다.
그때, 안쪽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확인하려는 순간-.
"안 돼."
베넷트가 길버튼의 손을 잡았다.
그때, 안쪽에서 다시 신음이 터졌다. 그런데 그 소리가 다소 이상했다. 상당히 들뜬······.
"잘하나 봐."
베넷트가 무표정으로 천박한 손짓을 했다.
싸늘하게 생긴 여인이 다급하게 물러났다.
'설마-.'
길버튼의 안색이 씰룩해졌다.
확실히 오늘 황녀가 보여준 게 너무 컸다.
그 값진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줬으며, 산해진미로 가득 채운 식사도 했고, 같이 다니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황족의 위력을 여실히 체감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쪽은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근데 아드리안나님의 봉급이 얼마였더라?'
북부의 영웅이니까 그 봉급도 많을 것이다.
그때, 안쪽에서 소리가 또 들렸다.
전보다 더 뾰족하고 높았다.
"존나 잘하나 봐."
베넷트가 무표정하게 양 엄지를 들었다.
길버튼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싸늘하게 생긴 여인이 다급하게 더 물러났다.
****
최근 조용하던 정보국이 시끌벅적해졌다.
그 이유는-.
"황녀가 휴게실에서 정부와 질펀하게 즐기고 있답니다. 그 신음이 복도를 꽉 채우고 있다는데요."
정보국에서 정부와 방을 잡은 황녀 때문이었다.
'원래 괴팍한 건 알았지만, 정말 상상 이상이군.'
황녀가 온다는 소식에, 경계를 올렸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그만. 전시 급으로 경계를 올리라는 국장님 지시가 있었으니까.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헤어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떠들던 요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건 다들 알고 있었다.
"각자 자리 지키도록."
헤어풀이 짧게 명령하자,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앞쪽에서 머리가 덥수룩한 놈이 나타났다. 그 숱이 얼마나 많은지 눈이 살짝 가릴 정도였다.
"넌 뭐야?"
헤어풀의 목소리가 절로 뾰족해졌다. 놈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구역 청소하다가 늦었습니다!"
정보국은 보안 때문에, 청소를 따로 고용하지 않았다. 청소는 막내들 담당이었다. 막내인 듯했다.
헤어풀은 날카로운 눈으로 놈을 살폈다. 소매에 적당히 묻은 물과 얼굴에 맺힌 땀까지-. 짬 당한 막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빨리빨리 다녀야지."
"······죄송합니다!!"
놈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숱 많은 것치고 제법 싹싹한 놈이었다. 헤어풀은 괜히 헛기침했다.
"소속이랑 요원명은?"
"작전과의 갈라하드입니다."
"아, 그 얼빠진 놈?"
"······예? 예."
둥근 눈으로 보는 걸 보니, 진짜 어리바리해 보였다.
"근데 작전과 놈이 왜 여기 있냐?"
헤어풀의 눈이 가늘어졌다.
"딸꾹! 그···! 그게! B-32구역 청소를··· 딸꾹! 하고 들어가는데, 왜 거기만 닦냐고 물으셔서! 거기는 제 구역이 아니라고 했다가···. 혼나고 A-12구역도 청소하다 보니 여기였습니다!"
놈이 딸꾹질까지 하며 다급하게 설명했다.
"아, 거기-. 헷갈리지. 그리고 구역이 아니어도, 자기 구역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냐?"
"죄송합니다. 그렇게 들어서······."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그래, 어깨 펴라. 막내 때야 다 힘들지. 나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리 때는 혼자 5구역은 청소해야 했다니까."
"와,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머리숱도 많은 놈이-."
헤어풀은 놈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빨리 가봐라. 아, 저 앞쪽 놈들 조심해라. 마도구로 검문하는 놈들이니까."
"아! 감사합니다!"
"그래."
머리숱만은 놈답지 않게 싹싹한 태도에 헤어풀은 끄덕였다.
어차피 다음 장소는 마도구로 검문하는 곳이었다.
어설픈 걸음으로 걷던 놈은 당연히 또 붙잡혔다.
"음? 처음 보는 새끼인데?"
"아, 청소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븅신 같은 이유군. 지나가라."
"예? 그냥 보냅니까?"
"그래, 새끼야. 어차피 마도구가 쫙 깔렸는데, 굳이 심문할 필요 있냐?"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니미, 혹시 모르긴-. 앞에 마도구가 쫙 깔렸다니까? 이해 못 해? 빡대가리야?"
"······그렇군요. 어이, 지나가라!"
어리바리한 놈이 마도구가 있는 곳 앞에서 머뭇거렸다.
"저 새끼, 왜 미적거려? 야, 준비해라."
"예!"
"어이! 뭐해! 새끼야!"
그때, 놈이 전진했다.
잠시 긴장했지만,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지랄, 이상하긴. 마도구 통과했으면, 인가 인원이라는 소리다. 저 마도구는 말이야. 농도에 맞춰서 반응하는 거라고. 그 인증 마도구가 없으면 바로 경보가 울려요."
"마도구를 파훼하면 어떻게 합니까?"
"파훼해도 경보가 울린다고 새끼야. 쟤가 무슨 황혼의 마탑주야? 아오, 이 답답한 새끼."
"시발."
"뭐? 너 욕했냐?"
"그래, 개새끼야."
"······잘하네."
****
'빡빡하군.'
갈라하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경비가 강화된 게 느껴졌다. 병력이나 배치된 마도구가 전보다 몇 배는 많았다.
다만, 이곳은 갈라하드의 전 직장이었다.
경비를 강화해도 갈라하드를 막을 수는 없었다.
'까다롭긴 했어.'
갈라하드는 옷깃을 털며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기다란 복도가 있었다. 기다란 복도에는 종이나 쓰지 않는 책상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예전에는 요원들이 가장 많이 왕래했던 곳인데, 지금은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끝에 큼지막한 문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부국장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쯧-.'
갈라하드는 끝의 문으로 향했다. 그 숱하게 있던 방범 마도구가 하나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문 위에 자리한 거미줄을 손으로 치우고, 문을 가벼이 두드렸다.
안쪽에서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졌고-.
"오지 말라니까."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사이에 더 늙은 부국장이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너는 또 누구냐? 방문하지 말라고 명령했을 텐데."
부국장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인적이 없었군.'
국장의 눈 밖에 났지만, 본래 인망이 두터웠던 부국장이었다. 왜 인적이 없나 했더니, 부국장이 막은 듯했다.
국장의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는 거겠지.
"오지랖은 여전하십니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부국장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미련한 놈. 파혼이라도 당했냐?"
"그럴 리가요. 약혼식도 했습니다."
부국장이 끌끌 웃었다.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물러났다.
"들어와라."
안은 깔끔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산처럼 쌓였던 서류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안색이 좋아졌구나. 북부 물이 입에 맞나보군."
"예, 아주 시원하더군요."
부국장이 침까지 튀기며 웃었다.
"차 마시겠나?"
"부국장님 차는 떫지 않습니까."
"늘었다. 누가 자밋을 가져가서."
"그러면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부국장이 뒤쪽으로 향했다. 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향이 퍼졌다.
"국장이 보면 놀라겠군. 너 하나 막겠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나름 빡빡했습니다."
"빡빡이라-."
부국장이 차를 내왔다. 갈라하드는 차를 가만히 홀짝였다.
"떫습니다."
"사내가 불평이 그리 많아서야."
정작 부국장은 차를 마시지 않고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래서 대공녀는 소문대로 이쁘더냐?"
"소문이 실물보다 못하더군요."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이쁜가 보군."
"대륙 제일입니다."
부국장이 다시금 웃었다. 웃음이 많아진 듯했다.
둘은 가만히 연초를 빨았다. 갈라하드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부국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편해 보이십니다?"
"마음에 안 드는 눈치구나."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연초를 털었다.
"정보국 하나 만들었습니다. 같이 가시죠."
"정보국이 무슨 동네 술집이냐?"
"못 만들건 뭡니까."
"그것도 그렇군."
"원하시면 국장 시켜드리겠습니다. 국장하고 싶어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부국장은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나는 너무 늙었다."
"그건 압니다."
"호로 새끼-."
부국장이 허허롭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웃지 않았다.
"본디 새 술은 새 부대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늙은이를 끼면 이도 저도 안 돼."
"고집은 여전하십니다."
"네놈만 하겠느냐. 내 수염 다 태워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그건 묻어두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나? 기억이 오락가락하는군."
부국장이 다시금 웃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좋아 보이는군."
"저보다 부국장님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만."
"요즘 일이 없어서. 유급 휴가지."
으득-. 갈라하드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정작 부국장은 여유롭게 웃었다.
"아내가 오이를 싫어한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부국장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끄덕였다.
"웃긴 일이지. 대륙의 대소사를 전부 아는 정보국의 부국장이 정작 제 아내가 뭐를 못 먹는지도 몰랐다는 게."
부국장 눈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너무 바삐 달렸던 거지.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갈라하드는 부국장을 지그시 살폈다. 그 주름이 전보다 더 늘어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레몬 향이 다시금 깊어졌다.
정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최근에 황녀가 베아트리스에 대해서 물었다."
부국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보국에 남아있는 정도로 줬는데,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더구나."
"아마 끝까지 파헤칠 겁니다."
그때, 부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은퇴시켰어야 했다. 크게 돌아올 것이야."
부국장의 담담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민주주의가 옳은 거잖아?]
"은퇴시켰습니다."
"그래, 은퇴긴 하지. 정보국에서 기록이 말살되고, 금기가 되었으니까."
부국장이 연초를 털었다. 매캐한 연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첫사랑이 그런 법이지. 나도 아직 엠마가 생각나거든. 아주 따뜻하고 이쁘장한 여인이었지."
"나중에 사모님한테 이를 겁니다."
"이 호로 새끼."
부국장이 연초 대신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눈을 가득 구겼다.
"떫군."
"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갈라하드는 꽁초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정이 많아서 문제다."
부국장의 덤덤한 말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그때-.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갈라하드는 부국장을 쳐다봤다. 부국장이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숨을 죽였다.
"부국장! 나요! 작전과장! 문 좀 열어보십쇼!"
작전과장? 부국장이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라는 뜻이었다.
정보국 본부의 깊숙한 곳이었다. 여기서 정체가 발각되면, 갇히는 거였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힘들겠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정보국은 갈라하드가 가장 잘 알았다. 틀어지면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괜히 잠입한 게 아니었다.
쿵쿵쿵!
"열어보십쇼! 갈라하드에게 줄 정보가 있으니까!"
갈라하드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부국장이 옆으로 비키며 문을 열었다.
"문을 왜 이렇게 안 열어! 자, 갈라하드에게 줄-."
엉성한 갑주를 입은 작전과장이었다. 그 옆에는 종이가 쌓인 수레가 있었다.
"응? 그쪽은 누구-."
갈라하드를 본 작전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오랜만일세. 작전과장."
마나를 돌리며 가벼이 인사했다.
레몬 향이 풍기자, 작전과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순식간에 푸르러졌다가, 하얘졌다.
그리고-.
"나는 반대했다! 하지 말라고 했어! 진짜로!"
양손을 번쩍 들었다.
167화 아앙
"한 잔 들겠나?"
여유롭게 잔을 내미는 갈라하드에-.
'보안이 강화되긴 개뿔.'
작전과장은 터지려는 욕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내가 건들지 말라니까······. 진짜.'
"자네, 표정이 왜 그렇나?"
"아니,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서 그랬나."
작전과장은 속마음을 숨기고 헤헤- 웃었다.
"앉게."
갈라하드가 의자를 가리켰다. 문과 거리가 가장 멀고, 등을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절대 앉기 싫은 의자였지만-.
"참 세심하군! 마침 다리가 아프던 참인데!"
작전과장은 황급히 의자에 앉았다.
갈라하드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작전과장을 응시했다. 가라앉은 갈라하드의 눈동자는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작전과장은 일단 눈을 깔았다.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갈라하드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작전과장은 작전을 계획하는 역할이었다. 현장에서 뭐가 중요한지 어떻게 알겠는가. 전혀 관심 없었다!
다만, 본능은 솔직했다.
"음, 아무래도 정보 아니겠나? 상대의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견적이 쉽게 나오는 법이니까."
작전과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대답했다.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면 실력? 상대의 목에 검을 꽂아 넣을 정확한 실력이겠군!"
갈라하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발. 도대체 뭔데!'
작전과장의 피가 바짝 말랐다.
그때, 갈라하드가 연초로 작전과장을 가리켰다.
"피아식별일세."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피아식별?"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거지. 그래야 손이 느려지지 않거든."
끝이 붉게 타오르는 연초에 작전과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는 적인가?"
갈라하드가 차분하게 물었다.
노선을 정하라는 뜻이었다.
'아니-, 그걸 왜 저렇게 살벌하게 물어봐.'
북부로 망명된 갈라하드와 국장. 이성적으로는 국장을 선택하는 게 맞았다.
다만-.
'갈라하드인데?'
작전과장은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술집에 있는 것처럼 정말 여유롭게 연초를 피고 있었다.
문제는 이곳은 동네 술집이 아니라, 보안이 강화된 정보국의 부국장실이라는 점이었다.
저 갈라하드가 자신을 은퇴시키려 한다면, 피할 수 있을까?
고민은 짧았다.
"하하, 적이라니!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내가 이 자리에 앉은 것도 자네의 덕인데!"
"그랬나?"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래! 나는 절대 반대했네. 자네가 북부로 간 것도 항의했어! 어찌 자네를 보낼 수 있나! 누구보다 열심히, 잘 근무했던 자네를!"
"그래?"
갈라하드의 물음은 담담했다. 그렇기에 더 서늘했다.
"그렇다니까! 그런데 국장- 아니지, 국장이 아니라 개 쉽할 호로 쉐끼지! 그 개 쉽할 호로 쉐끼가 분수도 모르고 감히 대 갈라하드 요원을! 북부로 보내다니! 내 강경하게 반대했네! 진짜로!"
"그렇군."
갈라하드가 가만히 끄덕였다.
작전과장은 최대한 눈을 착하게 뜨며,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억겁처럼 긴 시간이 지나가고-.
"적이 아니라니 다행일세."
갈라하드가 가만히 끄덕였다.
작게 안도한 작전과장은 황급히 수레를 가져왔다.
"자네를 위해서 준비한 작전 목록일세! 국장······ 아니, 개 쉽할 호로 쉐끼가 연관되었던 작전들!"
"많군."
작전과장이 몇 날 며칠 동안 모은 자료들이었다. 그런데 많다니-. 이 개샊···.
"하긴 너무 많지! 저걸 언제 다 읽나? 내가 직접 요약하겠네! 국장 새끼가 내렸던 명령했던 작전의 공통점은 하나일세."
갈라하드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국장은 의회에서 꽂았네."
의회는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그런 의회가 정보국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건,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의외군."
갈라하드의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
"나는 황태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작전과장은 빠르게 상황을 되짚었다.
그리고-.
"황태자일 가능성도 있네. 황태자가 의회와 이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무거운 결과를 도출했다.
의회와 승계 서열 1위인 황태자가 손을 잡았다는 건, 그리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연초만 까닥거렸고, 작전과장은 최대한 웃었다.
"죽여 봤자겠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작전과장은 냉큼 끄덕였다.
"죽이면 오히려 더 까다로운 놈이 올 수도 있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겠지. 지금 국장은 그나마 멍청하지 않나. 차라리 놈이 낫지."
"그래, 정보국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작전과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보국을 무너뜨릴 생각이 아니었나?'
그때, 갈라하드가 말을 이었다.
"내가 북부에 정보국을 하나 세웠네."
북부에 정보국을 세웠다니. 정보국이 무슨 식당도 아니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 대단하군! 그래! 자네는 남 밑에 있을 그릇이 아니었지!"
작전과장은 황급히 박수치며 칭찬했다.
"손이 가는 게 이것저것 많더군. 특히 정보 수급이 어려워."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뻔했다.
'도우라는 거군.'
아무리 그래도 북부에 새로 세운 정보국을 도우라니-. 들키면 바로 은퇴였다.
그것도 단순한 은퇴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하하!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나! 나는 언제든지 준비됐으니까! 부당하게 당한 자네를 돕는 건 언제든 환영이지! 하하!"
작전과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 황실에 관한 정보도 가능하겠나? 내가 여기로 오기에는 좀 멀어서."
황실 정보는 정보국에서도 극비로 취급하는 거였다. 심지어 그걸 북부로 보내달란다-. 아주 그냥 떠먹여 달라는 개샊······.
"하하! 당연하지. 최근 북부 쪽 작전이 늘어났으니, 거기 편으로 보내겠네."
"든든하군."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그에 작전과장은 갈라하드의 계획을 파악했다.
'북부에 계속 있을 생각이군.'
정보국은 알아서 돌아가게 두고, 그 맛있는 부분만 먹겠다는 이야기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당한 요구였다.
그에 작전과장은-.
"그러면 지원실장도 회유할 필요가 있겠군. 아, 정보 분석과장도 회유하면 좋을 걸세. 놈 약점은 내가 꽉- 쥐고 있거든!"
냉큼 떠벌렸다. 갈라하드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아, 근데 자네 요원 명이 뭐였지?"
뜬금없는 물음에 작전과장은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나? 로얄일세."
"그렇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털었다.
"그래, 로얄. 작전 한 번 짜보게나."
"작전?"
"자네가 짜준 작전은 제법 괜찮았으니까."
갈라하드의 요구에 작전과장은 냉큼 끄덕였다.
"그래, 목표는?"
"국장실 침입과 정보국 주요 인력 회유 정도겠군."
······국장실 침입? 순간 작전과장의 얼굴이 굳었다. 이내 활짝 웃었다.
"그렇군. 기간은?"
"슬럿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애정 행위를 하는 방의 문을 여는 시간 정도."
"······인원은?"
"나 혼자일세."
작전과장은 갈라하드의 요구를 되짚었다.
그러니까-.
'국장실에 침입하고 정보국의 고위직을 회유하는데, 투입 인원은 갈라하드 하나고, 허락된 시간은 슬럿이 부끄러움을 이기는 정도라-.'
미친놈인가?
"충분하군."
작전과장은 활짝 웃었다.
"가지."
"······나도 같이 가나?"
"싫은가?"
"아니, 같이 가야지! 하하하!"
굳이 현장까지 데려가겠다니-. 입이 절로 말랐다.
그에 작전과장은 황급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를 마신 작전과장은 그대로 굳었다.
'떫다-.'
어떻게 차가 떫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욕이 절로 나왔지만-.
"맛있······군."
작전과장은 애써 웃었다.
****
작전과장 로얄은 갈라하드의 작전을 몇 번 짠 적 있었다.
갈라하드가 특수 요원이 되기 전, 로얄이 작전과장을 맡기 전의 이야기였다.
로얄의 직급이 낮을 때라서, 작전의 지원이 형편없었다.
로얄이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서 작전을 짜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한 번의 실패도 하지 않았다.
작전을 짠 로얄도 당황할 정도였다. 실제로 갈라하드의 덕을 많이 봤다.
다만, 이번에 갈라하드가 요구한 작전은 전의 것들보다 훨씬 어려웠다.
주어진 시간이 짧았고, 투입 인원은 갈라하드 하나였으며, 그에 비해 목표는 너무 어려웠다.
갈라하드를 최고 수준으로 잡아도 어려운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게 되네?'
로얄은 눈을 끔벅였다.
그를 가능케 한 건 순전히-.
'지독하게 유능하다.'
갈라하드의 능력이었다.
"역시 자네 작전은 깔끔하군."
갈라하드가 머리를 넘기며 가벼이 칭찬했다.
도리어 칭찬하는 갈라하드에 로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력이 더 늘었다.'
북부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다만, 이제 시작이었다.
"국장이 최근 보안 수준을 극도로 올렸네. 이 앞부터는 내 키도 사용하지 못하네."
작전과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경로는?"
"직진, 열여섯 걸음의 복도에 감찰실 요원 넷과 마도구 셋, 다음 우회전, 열넷 걸음의 복도에 감찰실 요원 셋과 마도구 여섯, 그리고 좌회전하면 국장실일세. 감찰실 요원 여섯이 교대 근무하고, 마도구는 하나일세. 최고 수준의 보안 마도구지."
작전과장은 빠르게 작전을 설명했다.
"백을 세고 오게나."
가벼이 끄덕인 갈라하드가 손을 풀며 사라졌다.
'······백을 세라고?'
로얄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일, 이, 삼.'
화들짝 놀란 로얄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정확히 백을 센 로얄은 걸음을 옮겼다.
'이게 무슨-.'
마도구는 전부 돌아가 있었고, 요원들은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그 얼굴이 전부 평온했다. 마치 눈치조차 못 챘다는 듯-.
완벽한 제압이었다.
다음 복도도 똑같았다. 요원들은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쓰러져 있었고, 마도구는 전부 돌아가 있었다.
마지막 복도를 돌자-.
"늦었군."
국장실 앞에 갈라하드가 보였다.
갈라하드는 가벼운 운동을 한 것처럼, 조금 흐트러진 게 전부였다.
"그··· 확인하느라 늦었네."
로얄은 어색하게 웃었다.
갈라하드가 문을 여기저기 만졌다.
"아, 국장이 가져온 최고급 보안 마도구일세. 황실에 들어가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뚫기 힘들 걸세. 열려면 키가 있어야 할 걸세. 그 키를 구하려면 감찰실을-."
"역시 그랬었군. 익숙하더라니."
······익숙하다니?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도대체 어떻게?'
황실에 들어가는 최고급 보안문인데-.
그때,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얄은 황급히 따라갔다.
국장실은 화려했다. 곳곳에 괴상한 상패가 즐비했고, 각종 무기들이 꽂혀 있었다.
전혀 안 읽어봤는지 손때가 묻지 않은 문서가 높이 쌓여 있었다.
'일도 안 하면서······.'
그때, 갈라하드가 제일 안쪽의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의 여기저기를 만지더니-.
책장이 옆으로 비키면서 숨겨진 곳이 드러났다.
'······비밀 공간?'
저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안에는 금화가 가득했다. 국장의 비자금 창고인 듯했다.
'많이도 해 먹었군.'
로얄은 혀를 내둘렀다. 금화만 쌓아둔 게, 국장의 성품을 보였다.
갈라하드는 금화가 아닌 뒤쪽의 벽을 살폈다.
벽에는 수평의 직선이 아래부터 위쪽으로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작대기들의 옆에 글이 적혀 있었다.
그건-.
'······세상을 지킬 용사님의 성장 기록소?'
로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람이 불며 작대기들 위로 굵직한 자국을 새겼다.
[부재중이군요. 다시 오겠습니다. 갈라하드.]
벽면을 가득 채운 글귀였다.
'국장이 보면 기겁하겠군.'
로얄은 괜히 서늘해져서 손을 쓸었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금화들을 챙겼다. 한두 번 털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때-.
"누구냐."
무심한 얼굴의 사내가 들어왔다. 두꺼운 갑주로 무장한 사내였다.
'감찰실장-. 왜 감찰실장이 여기에?'
감찰실장은 본래 국장이랑 같이 움직여야 했다.
그런 감찰실장이 여기 있다니.
변수였다.
"보면 모르겠나."
갈라하드가 담담히 말했다. 감찰실장이 자세를 잡았다.
"도둑일세."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감찰실장이 검을 뽑았다. 서늘한 오러가 뿜어졌다. 잘 벼린 검처럼 압축된 오러였다.
그때, 감찰실장의 목뒤로 얼음송곳이 나타났다.
반응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그때, 감찰실장의 발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감찰실장을 밀면서, 얼음송곳이 빗나갔다.
'저게 무슨······.'
폭발에 속도를 얻은 감찰실장이 순식간에 갈라하드에게 쇄도했다.
탁,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투명한 방호벽이 떠올랐다.
감찰실장의 오러가 방호벽은 간단히 베어냈다. 그 틈으로 얼음송곳이 감찰실장을 노렸다.
얼음송곳이 절묘한 시기의 완벽한 위치를 노렸다.
그때, 감찰실장의 어깨에서 불이 뿜어졌다. 감찰실장이 뒤로 물러났다. 범주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마법? 아니, 저건-.
'마도구다.'
감찰실장이 입은 괴상한 갑주가 불을 뿜어내며, 기이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마도 기사!'
황실에서 기사에게 마도구를 입혀서 마도 기사라는 걸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소문인 줄 알았다.
기사에게 마도구를 입히다니-. 제국다운 돈지랄이었다.
다만, 그 효과는 진짜였다.
안 그래도 기사는 전투에 특화된 이들에게, 저런 마도구를 더하다니-.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본래도 강자인 감찰실장이 저런 마도구를 입다니-.
'이건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로얄은 황급히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아주 재밌는 걸 만들었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아주 환하게-.
****
'······죽었나?'
길버튼은 슬쩍 뒤를 살폈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이어지던 황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끝났나 보군요."
저 멀리 있던 슬럿이라는 여인이 그제야 다가왔다. 그 얼굴이 당근처럼 가득 붉었다.
슬럿이 휴게실로 향하려고 하자, 베넷트가 앞을 막아섰다.
"뭡니까?"
슬럿이라는 여인이 애써 눈에 힘을 주며 베넷트를 노려봤다.
"저희가 먼저 확인할게요. 혹시 모르니까-."
베넷트가 '혹시' 부분에 들뜬 숨을 섞으며 말했다. 그 뜨거운 숨결에 슬럿이 화들짝 놀라서 물러섰다.
베넷트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안을 봤다. 금세 다시 닫았다.
"둘 다 질펀하게 즐겼는지, 사랑의 흔적이 여실합니다. 아주 낯부끄러운 상황이군요."
베넷트가 무표정으로 천박한 손짓을 했다.
슬럿이 놀라서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 그렇게 기다려 줄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겠지요. 여기가 무슨 여관도 아니고. 저희가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어이, 말똥 추남."
"이상하게 줄이지 말······."
"빨리."
베넷트의 단호한 말에 길버튼은 조심스레 끄덕였다.
길버튼은 베넷트를 따라서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대장님이 없······."
짝.
베넷트가 냅다 길버튼의 입을 때렸다. 길버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넷트가 길버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길버튼은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고용주가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간 듯한데. 황녀가 기절했으니, 이제 우리가 시간을 끌어야 한다."
'역시 대장이 황녀랑 즐긴 게 아니었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길버튼은 작게 안도했다.
"근데 시간을······."
길버튼은 베넷트에게 다시 입을 얻어맞았다. 길버튼의 입이 씰룩거렸다.
"밖의 여자는 음탕한 쪽에 약한 것 같으니까. 그걸 공략하는 거야."
베넷트가 다시 귓속말했다.
······어떻게? 길버튼이 의문을 말하기도 전에, 베넷트가 간드러진 소리를 냈다.
"호우! 이걸 보니 흥분이 되는데! 추남! 우리도 즐길까!"
베넷트가 무표정으로 낯부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는 여관이 아닙니다! 당장 여세요!"
슬럿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쑥맥에게 내성이 생겼군."
"그러면 어떻게-."
"내성이 없는 걸 공략해야지."
"······내성이 없는 거라니?"
베넷트가 길버튼을 가리켰다.
길버튼은 그 길쭉한 손가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 추남. 신음 좀 내봐."
길버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신음이라니-. 나는 기사다."
"기사는 신음 못 내냐?"
"아니, 나는 기사 길버튼-."
쾅쾅쾅!
"당장 문 여세요! 무슨 일입니까!"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그래, 그러면 다 같이 죽지 뭐. 그래, 고용주도, 나도. 못생겼는데, 뻗대는 기사가 신음 내지 못해서 죽었다고 묘비에 써 줘. 세기의 멍청한 죽음으로 기록될 테니까. 아참, 너도 죽겠군. 멍청한 죽음 경쟁자였구나."
"아니, 그게 무슨······."
"고용주도 경쟁자겠네. 그 묘비에 충직한 줄 알았던 부하 기사가 신음 한 번 안 내서 죽었음. 이라고 적힐 테니까. 이런 경쟁자가 너무 늘었어."
쾅쾅쾅!
"부수겠습니다! 진입합니다!"
길버튼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빨리! 나는 살아야 한다고!"
베넷트의 무표정이 지워졌다.
베넷트의 절박한 얼굴에-.
"······아앙!"
길버튼은 크게 소리쳤다.
더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만이 자리했다.
168화 현장직
'기사-.'
기사는 날붙이를 들고, 두꺼운 쇠를 둘렀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사를 판가름하는 가장 큰 기준은 오러였다.
신념의 힘이라 불리는 오러를 다룰 수 있어야 기사라고 불렸다.
오러는 신념이기에 벨 수 없는 것이 없었고, 그 신체 또한 몇 배나 강해졌다.
기사는 인간 병기였다.
그런 기사에게 마도구를 둘렀다니-.
'진짜 병기를 만들었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정면에는 두꺼운 갑주를 두른 사내가 있었다. 갑주가 얼마나 두꺼운지,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갑주보다는 로봇에 가까운 모양새군.'
이음새가 있어야 할 곳에 둥근 철이 있었다. 자동차의 머플러 같은 모양의 마도구였다. 거기서 일어난 폭발이 움직임을 가속했다.
"갈라하드-."
그때, 놈이 갈라하드를 알아봤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감찰실장이었군. 알아보다니 영광일세."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마법사는 뻔하지."
"잘 찾아보면 더 있을 걸세."
"말장난도 여전하군."
"그대의 괴상한 콧수염도."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경보를 울리는 버튼은 들어오는 쪽에 있었지만, 감찰실장은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마법사 한 마리 잡자고, 경보를 울릴 필요까지 있나."
갈라하드의 시선에 놈이 피식 웃었다. 조소였다.
"전부터 의문이었다. 마법사인 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갈라하드- 갈라하드- 거리는 지 말이야."
"이런 질투였군. 인기가 많으면 고달프다니까."
"질투라니. 경멸이지."
감찰실장의 대답은 담담했다.
놈은 갈라하드와의 승부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럴만하지.'
감찰실장은 원래도 실력이 좋았다. 정보국 내에서 무력이 강한 감찰실의 장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감찰실장이 마도구까지 입었으니,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위협적이고.'
갈라하드의 손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 찰나에 베였다.
그때-.
"이제 지켜줄 누나가 없어서 어쩌나?"
놈이 이죽거렸다. 갈라하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 큰 가슴에 안겨서 깐족거릴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진작 버릇을 고쳐줘야 했는데 말이야."
"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다네."
"······비슷하다?"
"그 수염을 진작 뽑아버리고 싶었거든. 차라리 길버튼 경 수염이 낫지."
놈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두꺼운 갑주가 '푸슉-'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댔다.
"하, 그 얄미운 입은 여전하군."
"그래, 자네도 고생이 많겠어. 감찰실 요원들을 다시 뽑아야 하지 않나."
"놈-!"
감찰실장의 눈이 굳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콰앙. 폭발과 동시에 감찰실장이 갈라하드에게 쏘아졌다.
검격이 빠르게 이어졌다. 순간 놓칠 뻔할 정도로 빨랐다. 갈라하드는 준비한 방호벽을 펼쳤다. 방호벽은 힘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졌다.
갈라하드의 앞섬이 크게 베였다. 피가 거칠게 튀며,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말도 안 되는 속도군.'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새 놈의 검이 갈라하드를 찌르고 있었다.
마법이 뒤늦게 터졌다. 정확하게 노렸기에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때, 놈의 가슴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놈이 뒤로 물러났다.
놈은 원래 있던 곳에 서 있었다. 그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이런 놈을 천재라고 감쌌다니. 베아트리스, 멍청한 년."
놈이 투박하게 비웃었다.
'마도구가 움직임을 가속한다.'
갈라하드는 가슴의 상처를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검술은 기본적으로 어깨에서 나오기에, 기사를 상대할 때는 어깨를 보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마도구가 괴이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어깨를 보면, 반응이 이미 늦었다.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기사가 마도구를 이용한다고.'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흥미로운 건 사실이었다.
마도구는 기본적으로 높은 농도의 마나를 담은 마법으로 부수면 된다.
문제는-.
'마도구가 그럴듯하다는 것이지. 또 놈이 덩치에 맞지 않게 날래고.'
톡톡, 갈라하드는 빠르게 견적을 냈다.
필요한 건, 도발이었다. 갈라하드의 전문이었다.
"베아트리스, 나를 거절하고 저런 놈을 택하다니."
"미안하지만, 자네는 못생기지 않았나. 특히 수염이 최악일세."
갈라하드는 마나를 뿌리며 손짓했다.
"하, 같잖은 수를 쓰는군. 국장님이 보고 싶어 하시니, 사지만 잘라주겠다."
"이런 감동이군. 미안하지만, 나는 살려둘 생각 없네. 일이 귀찮아져서 말일세."
감찰실장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졌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얼음송곳이 놈의 어깨를 노렸다.
쾅! 폭발이 일어나면서 순간 놈의 신형이 전진했다.
갈라하드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스파크가 빠르게 튀며 크기를 부풀렸다.
감찰실장은 어느새 두 걸음 앞에 있었다. 스파크가 감찰실장을 향해 쏘아졌다.
갈무리된 오러가 스파크를 갈랐다. 스파크가 찢어지면서 오히려 감찰실장을 덮쳤다.
이번 건 피할 수 없었다. 다만, 번개는 갑주를 뚫지 못했다.
'역시 보호 마법도 있군.'
참으로 제국스러운 돈지랄이었다.
저걸 뚫을 정도의 영역 마법을 주문하면 간단하지만-.
'그럴 시간을 줄 리가.'
그때, 뿌려둔 마나가 반응했다. 놈의 허리 부근의 마나가 응축했다. 왼쪽 허리에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허리에 폭발을 일으킨다는 건-.
'찌르기군.'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몸을 틀었다.
콰앙! 폭발이 조금 늦게 터졌다. 놈의 검이 깊숙하게 찔렀다.
미리 알고 움직였지만, 그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허리가 깊게 베였다.
화끈한 통증이 허리를 감쌌다.
해답지를 가졌음에도 완전히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겠군.'
사선의 짜릿한 긴장감이 등을 간질였다.
갈라하드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역시 너는 현장 체질이라니까.]
애석하게도 정답이었다.
*
'마도 기사라니-!'
로얄은 터지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안 그래도 정보국의 실력자인 감찰실장이었다. 그런 감찰실장이 마도구를 저렇게 둘렀다. 저건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피하고 있다.'
마법사인 갈라하드의 움직임은 분명히 느렸다. 그런데도 치명상은 피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박자 먼저 움직인다.'
검이 움직이기 전에 갈라하드는 이미 피하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감찰실장의 얼굴에는 어느새 여유가 사라졌다.
"마도구가 아직 익숙하지 않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물었다. 감찰실장이 작게 움찔거렸다.
"닥쳐라."
감찰실장의 검이 순간 빠르게 그었다. 갈라하드의 어깨가 깊게 베이며 피가 튀었다.
감찰실장의 얼굴은 굳었고, 갈라하드의 미소는 짙어졌다.
"아직 부분적으로 사용하는군. 찌르기에 팔꿈치를 밀어주는 정도인가? 그런데도 이 속도라니-. 자네, 적응력이 형편없군."
"지랄-."
감찰실장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직선이 연속으로 그려졌다.
이번에도 갈라하드가 먼저 움직였다. 그 상체에 붉은 선이 늘었지만, 깊이는 전보다 얕았다.
"마도구가 아깝기는 처음이군."
갈라하드는 상처를 가리키며 웃었다. 감찰실장의 어깨에서 연기가 길게 뿜어졌다. 화끈한 열기가 감돌았다.
"자, 집중해주게. 이대로면 내가 낸 세금이 아깝지 않나."
감찰실장은 입을 꾹 다물고 검을 휘둘렀다. 마도구가 불을 뿜었고,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실시간으로 갈라하드의 흉터가 늘었다. 그에 반해 감찰실장은 멀쩡한 상태였다.
근데 왠지 갈라하드가 감찰실장을 가르치는 듯했다.
"아니지, 팔꿈치의 힘을 빼야지. 마도구가 터지고 나서 힘을 넣어야지. 집중하게."
피가 튀고, 갈라하드의 상처가 늘었다. 하지만 갈라하드는 오히려 감찰실장의 자세를 지적했다.
"힘을 빼라고!"
갈라하드가 윽박질렀다. 감찰실장의 얼굴이 가득 일그러졌다.
검이 더 빨라졌다. 그 자세가 점점 안정화되었다.
"그렇지. 이제야 말을 좀 듣는군."
갈라하드가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게 감찰실장의 심기를 깊게 긁었다.
"감히 마법사가-."
감찰실장의 검이 전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서로의 공격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원래였다면, 피하고 공격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니까 베아트리스가 거절했지."
으득, 약이 바짝 오른 감찰실장은 공격을 강행했다.
어차피 이쪽은 마도 갑주를 입은 상태였다.
갈라하드의 가슴 부근에 사선의 붉은 선이 그려졌다. 깊게 찢어진 천이 펄럭였다.
전보다 깊은 상처였다. 동시에 감찰실장의 팔목에 얼음송곳이 박혔다. 그래봤자 갑주가 파인 정도였다.
쿨럭-. 갈라하드가 피를 길게 토해냈다.
"마법사가 나를 상대로 이 정도까지 오다니-. 베아트리스가 아낄만했군."
여유를 되찾은 감찰실장은 가벼이 웃었다.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 자네, 설마 베아트리스를 좋아했나?"
"그녀를 안 좋아한 이가 있을까?"
"그것도 그렇군."
갈라하드는 담담히 끄덕였다.
"장담하는데, 그 겉모습에 속지 말게나. 아주 나쁜 년이니까."
감찰실장이 눈을 찡그렸다.
"이제 끝내야겠군."
갈라하드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선언했다.
감찰실장은 대놓고 비웃었다.
"끝까지 있는 척을 하는군."
"그런가?"
갈라하드가 반문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짙은 서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지독한 한기가 담긴 서리였다.
"고작 이것을 믿은 거냐?"
감찰실장은 피식 웃으며, 땅을 박찼다. 콰앙. 폭발이 감찰실장을 밀었다.
그때, 퍼져있던 안개와 닿았다. 그러자-.
'마도구가 멈췄어?'
마도구가 그대로 멈췄다. 그 굵은 갑주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이게 무슨······."
당황한 감찰실장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인간의 신념이란 참으로 단단한 무기일세. 갓 기사가 된 이도 대마법사의 마법을 잘라낼 수 있지. 그렇기에 기사가 인류의 검이라 불리는 걸세. 참으로 까다롭지."
갈라하드가 연초를 깊게 빨며 천천히 다가왔다.
"머저리 같은 마법사 놈들-."
감찰실장은 이를 질끈 깨물며 몸에 힘을 줬다. 갑주가 무거워도, 감찰실장은 기사였다. 얼어붙은 갑주가 비명을 지르며 움직였다.
"보게나. 신념이 있으면 저 무식한 마도구 갑주도 움직일 수 있지. 그런 무기를 지녔으면서도, 왜 자꾸 기사들은-."
가라앉은 눈이 감찰실장을 직시했다. 분명히 위독한 상태인데도, 갈라하드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다른 것에 의지하는지 나는 참 의문일세. 기사라면 멍청해야지. 길버튼 경처럼."
감찰실장은 아래를 내려봤다. 갑주에서 붉은빛이 가득 뿜어졌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 자네의 사인은 마도구 의존일세."
갈라하드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콰앙.
갑주 안쪽에서 폭발이 크게 일어났다.
밖으로 새어 나온 건, 옅은 열기가 전부였다.
"통풍이 좋지 않군."
담담히 평가하는 갈라하드에-.
로얄은 충성을 맹세했다.
"흠, 이런 식이군."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갑주를 뒤적거렸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엎어졌던 갑주가 스스로 일어났다.
"자, 이쪽으로."
갈라하드의 손짓에 맞춰서 갑주가 안쪽의 창고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창고를 닫았다.
"선물도 남겼으니, 이제 진짜 가야겠군. 나머지는 자네가 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담담한 물음에 로얄은 냉큼 끄덕였다.
"알겠네. 나는 먼저 가보겠네."
로얄은 경례까지 올렸다.
****
"······아앙?"
베넷트의 가늘어진 눈에 길버튼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젠장!'
길버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다 이런 실수를-.
"황녀 탓이다! 아까부터 그 이상한 소리를 자꾸 들었는데, 또 네가 독촉하고! 밖에서는 압박하고!"
길버튼은 황급히 변명했다.
"그럴만했네. 확실히 황녀의 신음을 꽤 오래 들었으니까. 무의식에 자리할 만해. 심지어 압박도 심했으니까."
"그··· 그렇지! 정확히 그거야!"
길버튼은 다급하게 끄덕였다. 놀릴 줄 알았는데, 이해하다니 의외의 면이-.
"그래, 괜차아앙."
길버튼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뭐라고······."
"응? 괜찮다고. 추남."
"그··· 그래. 고맙다."
"에이, 우리 사이에엥."
"······."
길버튼의 찢어진 눈이 더 가늘어졌다. 베넷트는 풉- 하고 웃었다.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베넷트야 상관없지만-.
'이걸 대장이 들었다가는-.'
길버튼은 창백해졌다. 황급히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가진 돈을 전부 베넷트에게 내밀었다.
"비밀로 하자."
"음?"
주머니를 본 베넷트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베넷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주머니를 확인했다.
"······이걸로는 부족하지."
"내 전 재산이다! 제발!"
"이게?"
베넷트가 주머니를 흔들었다. 길버튼은 격하게 끄덕였다.
"아니, 대장에게만이라도!"
"흐음, 알았어."
베넷트가 냉큼 주머니를 챙겼다. 길버튼은 깊게 안도했다.
그때-.
쿵쿵쿵!
"이제 끝나셨습니까? 더는 안 됩니다!"
다시 압박이 들어왔다.
"한 번 더?"
베넷트가 천박한 손짓을 하며 물었다. 그에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농담이야. 어차피 이제 안 통할 걸."
베넷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시간을 끌을만큼 끌었다. 더 지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지랄 맞군.'
길버튼은 검을 뽑고 문 앞에 섰다.
"추남, 뭐해?"
"황녀님 챙겨서, 뒤로 가라. 대장이 사라진 걸 보면, 통로가 있겠지."
"······뭐? 밖에 몇 명인지 까먹었어?"
베넷트는 눈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모른다. 숫자에 약해서."
길버튼은 몸을 풀며 대답했다.
"······뭐?"
"관심 없다고."
베넷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용주가 버리고 간 거라면?"
"대장이 그럴 리가 없다. 사정이 있겠지."
단단한 대답에, 베넷트는 짜증이 가득 올라왔다.
"아앙-거려 놓고 이제 와서 멋진 척이라니-."
"크흠, 그··· 그건 실수였다."
"그래? 궁금한데?"
성큼 다가온 베넷트에 길버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어떤 신음을 내는지 궁금하다고."
베넷트의 눈이 길버튼을 직시했다. 길버튼은 그 눈이 꼭 이리처럼 생겼다고 느꼈다.
그에 길버튼은 진지하게-.
"너 나 좋아하냐?"
질문했다.
베넷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아주 독한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뭔 개 좆 같은 소리일까. 도망가면 고용주한테 죽으니까. 그런 거지."
"······그렇다고 욕할 것까지는."
"아앙 추남 주제에."
베넷트는 깔깔 웃으며 뒤에 섰다. 정확히 길버튼의 사각이었다.
쿵쿵쿵!
"연다!"
밖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꿀꺽. 길버튼은 검이나 고쳐 잡았다.
그때-.
"제법 사이가 좋아졌군."
뒤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태연한 목소리에 길버튼은 순간 화가 올라왔다.
"도대체 뭐 하다가······. 아니, 꼴이 그게 뭡니까?"
갈라하드를 본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그야말로 넝마였다.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고, 어깨에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가 있었다.
"오다가 좀 긁혔네."
"긁히다니-."
그때,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런 성미가 급하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연초를 털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길버튼은 묘하게 안심되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 꼴을 보면 의심할 겁니다. 어떻게 합니까?"
문을 열었는데, 저런 꼴이 된 걸 보면 의심할 게 분명했다.
"길버튼 경, 세상에는 다양한 성향이 있다는 거 알고 있나."
갈라하드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는 알아요."
베넷트가 냉큼 손을 들었다. 길버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제발-.
"자, 그만 자고 일어나게."
갈라하드가 나지막하게 말하니, 황녀가 눈을 번쩍 떴다.
'······들었나?'
길버튼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엽니다."
슬럿은 검을 길게 휘둘렀다. 문이 가벼이 조각나며 무너졌다.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헐벗고 있었다. 얼마나 상처가 심한지 곳곳에 뼈가 보일 정도였다.
'무슨 짓을-.'
슬럿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군요."
사내가 황녀를 안으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즐거운 시간이라니?'
슬럿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문득 공부했던 걸 떠올렸다. 귀족 중에는 가학적인 변태들이 이가 있다고, 더불어 맞는 걸 좋아하는 이도 있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뼈가 드러날 정도로?'
그때, 황녀가 사내를 안으며 깔깔깔 웃었다.
부정할 수 없는 아주 짙은 웃음에-.
"······죄송합니다!"
슬럿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169화 황녀
'많이도 왔군.'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작은 공간에 요원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황녀가 정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소식에 전부 모인 듯했다.
의도치 않게 포위가 된 상황이었다.
'들키면 끝이겠군.'
다만, 요원들의 반응이 미묘했다.
그것도 그럴 게, 그들은 황녀가 정부와 좋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을 열어보니, 정부는 검상에 넝마가 되어 있었다.
황녀는 그런 정부를 붙잡고 미친 듯이 웃고 있었고, 그 손에는 어느새 검까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슬럿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뒤의 요원들은 사색이 됐다.
'통했군.'
한시름 넘겼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그들에게 다른 생각이 떠오를 틈을 주면 안 됐다.
그들의 정신을 계속 혼미하게 만들어야 했다.
"누가 그랬느냐?"
그때, 황녀가 갈라하드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딴에는 걱정이겠지만, 문제는 황녀의 표현이 고장 났다는 점이었다.
황녀는 터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갈라하드의 흉터를 매만졌다.
갈라하드가 작게 신음하자, 황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상처를 누가 했냐고 묻는 악질 중의 악질로 보이겠지.'
질린 기색이 곳곳에서 떠올랐다. 슬럿과 요원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황녀가 뭔가를 꺼냈다. 금을 녹인 것보다 비싼 최상급 포션이었다. 황녀는 그 비싼 포션을 주저 없이 갈라하드에게 부었다.
포션의 치유는 기적의 물약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문제는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거였다. 흉터를 소금으로 간을 하고 불로 지지는 느낌과 흡사했다.
"으음-!"
갈라하드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루 설명하기 힘든 고통이 정신을 흔들었다.
"아프냐."
황녀가 더 짙게 웃으며 물었다. 그 까랑까랑한 웃음에 요원들이 성큼 더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요원들이 더 멀어졌다.
길이 열렸다. 황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감히 내 것을 함부로 보다니. 눈을 전부 뽑아야겠다."
살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요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확실하군.'
역시 이런 부분에서는 황녀를 따를 게 없었다.
"괜찮습니다.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갈까요."
갈라하드는 슬쩍 운을 띄웠다.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슬럿이 황급히 말했다. 골칫거리가 나가준다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가만히 있어라."
황녀가 갈라하드를 안았다는 거였다. 엉겁결에 황녀에게 들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걸을 수 있습니다만."
"내가 싫다."
황녀의 대답은 완강했다. 그를 지적하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더불어-.
'괜히 건드리면 사고를 치겠군.'
황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당히-. 건드렸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이쪽입니다."
슬럿은 다급하게 앞장 섰다.
****
'미치겠군.'
작전과장, 로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로얄은 남아서 국장실의 흔적을 지웠다. 한 번 더 확인한 로얄은 조심스럽게 국장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로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쓰러진 요원들이 곳곳에 있었다.
'젠장, 젠장.'
저들 사이를 지나야 했다.
'하나라도 깼다가는-.'
로얄은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까치발까지 했다.
금방이라도 요원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걸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벽에 기댄 요원들은 뒤척일 뿐 일어나지 않았다.
거의 벗어났을 때쯤-.
"으음."
나지막한 신음이 들렸다. 로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정신을 차리는 요원이 보였다.
'조졌다-.'
로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처리할까? 로얄은 칼자루를 두드렸다.
그때, 요원이 로얄을 쳐다봤다.
순간 정적이 이어졌다.
로얄의 눈동자와 요원의 눈동자가 서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요원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얼굴에 낭패가 가득했다.
'졸았다고 생각하나 보군.'
단순히 기절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졸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니-.
흔적을 아예 남기지 않는 갈라하드의 솜씨에 경외심까지 들었다.
"아니다. 고생이 많군. 못 본 걸로 해주겠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로얄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로얄은 작전과장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문이 부서지면서, 감찰실 요원들이 들어올 것 같았다.
그에 한참이나 긴장한 상태로 있었지만-.
'보고가 없다.'
어떤 반응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은퇴 최우선 순위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정보국의 국장실의 비밀 창고를 털고, 감찰실장까지 은퇴시켰는데도-.
'아무도 모른다니.'
그 은밀함이 로얄의 목을 간질였다.
언제든지 또 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지원실장 좀 불러와 봐!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아니지! 내가 직접 간다! 공문 넣어!"
로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국장을 꽂은 게, 의회와 황태자일 수도 있다.'
갈라하드는 정보국에서 얻은 정보들을 되새겼다.
겁이 많은 국장에게 경고를 남겼으니, 국장은 당분간 정보국에 있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갈라하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정보국으로 안 돌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자밋이 요청했던 정보 공유는 작전과장이 해결할 것이고, 무엇보다-.
'마도 기사라. 재밌는 것을 만들고 있었군.'
"어떤 놈이 그랬느냐?"
황녀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고개를 들자, 짙은 웃음을 머금은 황녀가 보였다. 그 입가에서 실소가 흘렀다.
'단단히 화났군.'
갈라하드는 텁텁한 침을 삼켰다.
"죽었습니다."
"그래, 잘했구나. 목을 뽑았느냐?"
"터뜨렸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잘했다. 잘했어."
황녀의 칭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마도 기사를 아십니까?"
"아, 의회가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황태자나 2황자도 관여하고 있고. 놈이 마도 기사였느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어땠느냐."
"그럴듯하더군요. 그 값은 못 하겠지만."
"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쓸만한가 보구나."
황녀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마도 기사는 쓸만했다. 다만, 그 들어간 값에 비하자면, 쓸만한 정도라는 건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문제는-.
'제국은 돈이 넘쳐난다는 거지.'
제국이 전부터 원하던 건, 기사의 양산화였다. 막대한 자본을 사용할 방도를 찾았다.
지금까지 기사의 양산화는 실패했다. 그 부작용으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제국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마도 기사까지 만들어 냈군.'
그게 호재인지, 악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직 황제를 모르니까.
"황제 폐하는 어떤 분이십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황녀의 표정이 굳었다.
"모른다. 마주한 적도 없다."
황녀가 답답하게 대답했다. 전에도 들었기에 예상한 대답이었다.
'여기까지.'
황녀와의 볼일은 끝났다. 이제 정산할 시간이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황녀가 눈을 찡그렸다.
"내 과오를 갚는 것이다."
과오를 갚다-. 그 단어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건 별개의 문제일세. 이건 산수가 아니야."
짧아진 말에 황녀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 그러면 약혼이다."
"농담하지 말게."
"그렇다면 진짜 내 정부가 되거라."
황녀의 목소리가 꽉 막혀 있었다. 꼭 떼를 쓰는 아이처럼-.
"루시엔느."
황녀가 우뚝 멈췄다. 그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황녀에게서 황족 특유의 거만함이 지워졌다. 그리고 떠오른 건, 연약한 얼굴이었다.
황녀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다.
'겁쟁이라는 것이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저 미친 황녀라고만 여겼는데, 단순하게 미친 것이 아니었다. 황녀는 복잡하게 고장 난 여인이었다.
"그런 얼굴은 황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네만."
"지금은 둘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분명 존댓말 한 번만 더 하면 입을 찢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
입을 벌린 황녀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없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갈라하드의 말이 다시 정중해지자, 황녀도 예의 황족스러운 거만한 얼굴로 돌아왔다.
"네 팀원의 이름을 알려주거라."
황녀의 당당한 요청에 갈라하드는 허- 하고 숨을 내쉬었다. 손이 가득 근질거렸다.
"지금 나를 도발하는 건가?"
"도발이라니. 네가 팀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여 화가 난 것 같으니까. 정보국에 찾아보니, 그때 정보가 없더구나. 이번에는 단단히 외우겠다."
황녀의 진심 가득한 대답에 허탈해졌다.
그게 이유라고 생각한다니-.
'그래, 미친 여인과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말인가.'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엘레강스, 주근깨 때문에 촌스러웠던 여인이지. 나보다 2년 후배였고. 창을 제법 잘 다뤘지. 여동생이 둘 있고, 그중 하나는 목수와 결혼했는데, 목수의 손버릇이 나쁘다고 걱정이 많았지."
"엘레강스-."
그때, 황녀가 눈을 가득 찡그렸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반응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리가 아프다."
"왜 죄책감이라도 드는가? 이제 와서?"
황녀의 눈과 마주했다. 황녀의 눈에 드리운 건, 죄책감이 아닌 분노였다.
"그래, 그래야지."
갈라하드는 습관처럼 연초를 물었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레몬 향에 황녀의 초점이 돌아왔다. 미소가 한결 더 짙어졌다.
"그래, 베아트리스라고."
황녀가 갑자기 주제를 돌렸다.
그래, 이게 황녀지. 갈라하드도 이쪽이 더 편했다.
"맞네, 전임 국장이었지. 이제는 아니지만."
황녀의 눈이 더욱 둥근 호선을 그렸다. 참으로 만개한 꽃 같은 미소였다. 대신 향기가 전혀 없는-.
갈라하드는 황녀가 무슨 질문을 할지 궁금해졌다.
황녀는-.
"잤느냐?"
다급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레몬 향이 연신 뿌려졌다. 황녀가 벌떡 일어났다.
"잤구나."
황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멍청한 물음인가."
"안 잤느냐?"
재촉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면서 일어났다. 황녀가 갈라하드의 팔을 잡았다. 그 눈이 진지했다.
"또 괴상한 질문을 할 거라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황녀가 갈라하드의 말을 잘랐다.
갈라하드는 황녀의 눈을 응시했다. 황족 반, 겁쟁이 반의 눈이었다.
무슨 의도일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른다."
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갈라하드는 황녀의 손을 밀어냈다. 그 손이 쉽게 밀렸다.
"그거면 됐다."
황녀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갈라하드는 소매를 털었다. 아까 사둔 고급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러면 얌전히 4황자한테 붙어 계십쇼. 그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갈라하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황녀는 멀어지는 갈라하드를 멍하니 쳐다봤다.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응시했지만-.
갈라하드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참으로 야속한 놈이로다."
황녀는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며 중얼거렸다.
관자놀이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욱씬거렸다.
황녀가 익히 아는 통증이었다. 그녀의 지독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배웠던 기술이니까.
왠지 기억이 안 난다 싶더니만-.
'내가 직접 지웠구나.'
황녀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왜 자신이 자신의 기억을 지웠을까.
그건 아마도-.
"즐거운 데이트였다. 생에 가장 좋은 날이었어."
황녀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하하, 갈라하드 선배가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괜찮으십니까?"
길버튼의 뚱한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상념이 끊겼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흔들어, 상념의 찌꺼기를 털었다.
"괜찮네."
포션 덕분에 몸 상태는 좋았지만, 오히려 더 피곤했다. 포션의 반작용 때문이었다.
'그웬이 있으면 좋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을 털었다.
"그러면 일은 끝난 겁니까?"
"아니, 아직 남았네."
"예? 아직도 남았습니까?"
"길버튼 경, 당장 돌아가고 싶은 눈치군."
"아니, 전혀 아닙니다만."
정색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길버튼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베넷트로 시선을 돌렸다.
"베넷트, 무슨 일 있었나?"
베넷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정작 길버튼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시선이 다급했다.
"시간을 끄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추가금이 필요합니다."
베넷트가 손을 동그랗게 말았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안쪽에서 금화를 꺼냈다. 국장실에서 가져온 금화였다.
"이용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베넷트가 냉큼 꾸벅 숙였다. 길버튼이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넷트가 나를 속이다니. 희한한 일이군.'
다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베넷트는 돈에 환장한 여인이었으니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베넷트는 어느새 문 옆에 있었다. 안가의 집사답게 베넷트는 문 위쪽의 거울로 확인했다.
"얼빵한 제국 놈 둘입니다."
"아, 들이게나."
그에 베넷트가 문을 열자, 핸섬과 제임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있었다.
베넷트는 둘을 지나쳐서, 정원으로 나섰다. 꼬리가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베넷트가 고개를 저었다. 꼬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꼬리가 안 붙었다는 건, 저 둘의 능력이 좋다기 보다-.
'황녀한테 이목이 쏠렸던 탓이겠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들어오게나."
"아, 예."
핸섬과 제임스가 황급히 안쪽으로 들어왔다.
"뻐꾸기 세 마리를 구했습니다."
뻐꾸기는 정보 통로를 뜻하는 은어였다. 갈라하드는 둘에게 따로 정보 통로를 뚫을 것을 명령했다.
세 마리면 나쁘지 않았다.
"금액은?"
"최고 수준으로 각자 금화 세 개씩입니다."
핸섬과 제임스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둘의 행색이 엉망인 걸 보니, 꽤 험난한 뻐꾸기 사냥이었던 듯했다.
다만-.
"덤터기군."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평가했다. 그에 베넷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도 저 정도면 양심적이군요."
"동감일세."
핸섬과 제임스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예? 동향 사람이라고 저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자네, 고향을 먼저 말했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 그래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둘 다 고생했네."
어차피 드는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쓰임새였다.
"근데 뻐꾸기는 왜 고용하십니까?"
굳이 뻐꾸기를 구한 이유는 하나였다.
다음 목표는 황혼의 마탑주였다. 다만, 황혼의 마탑주는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황혼의 마탑주를 만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장로회를 소집하는 거지.'
갈라하드는 장로들에게 받은 팬던트들을 만졌다.
적색과 흰색의 팬던트였다. 장로회를 소집하기에는 충분했다. 문제는 갈라하드의 신분이었다.
갈라하드라는 걸 밝히면 문제가 터질 것이다. 그에 새로운 신분이 필요했다.
장로들이 군침 흘리게 할 그런 신분.
북부에 관해서 정보가 많지 않았으니, 깊게 짤 필요도 없었다.
이름은-.
"이제 내 이름은 코르튼일세."
"예? 예."
냉큼 끄덕이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지. 자네들은 그 호위 병력이고. 철저하게 북부식으로 행동해야 하네."
"북부식은 좀 어렵습니다. 추가금-."
베넷트의 요청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확실히 북부식은 어려웠다.
그때-.
"······북부식이 무슨 뜻입니까?"
길버튼이 투박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가리키며 끄덕였다.
"훌륭하네."
"······예?"
길버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를 뻐꾸기에게 흘리게나."
갈라하드의 뜻을 알았다는 듯, 핸섬과 제임스가 굳게 끄덕였다.
그때-.
"아니, 그런데 제국은 뻐꾸기가 그렇게 비쌉니까?"
길버튼이 투박하게 물었다.
"이게 재능······?"
베넷트가 박수치며 감탄했다.
이어서 제임스와 핸섬까지 감탄하자-.
길버튼의 표정이 괜히 으쓱해졌다.
170화 노인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