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YERNODUQUENORTE / Chapter 30 - 195-200

Chapter 30 - 195-200

195화 낳다

백을 넘는 인원이 있었지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들 말을 까먹은 듯한 분위기였다.

워낙 충격적인 장면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는-.

"부화했다네!"

싸구려 알이 있었다.

"잠깐 저희끼리 회의 좀 하겠습니다!"

톰이 손을 번쩍 들었다.

갈라하드는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반투명한 막이 그 주변을 둘렀다. 막이 소리와 모습 둘 다 가렸다.

싸구려 알은 아직도 양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엄청 이쁘고 귀엽게 생겼구나!"

"당연한 걸세. 나니까."

그웬의 칭찬에 싸구려 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단, 고생하셨습니다."

길버튼이 슬쩍 말을 건넸다. 그 시선은 싸구려 알에 꽂혀 있었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네. 어떻게 된 건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싸구려 알이 다시 양손을 번쩍 들었다.

"부화했다!"

"와아-! 축하해!"

그웬이 냉큼 칭찬했고,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놈을 먹어서 부화한 거겠지.'

그래, 싸구려 알이 부화한 건, 안에 있던 놈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아드리안나의 외모를 하고 있지?'

갈라하드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아드리안나를 처리하는 조건으로 코르튼에게 받았었지.'

고통의 알을 먹을 때, 코르튼이 원하면 아드리안나를 처리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 때문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아드리안나의 영향을 받았던가.'

이제까지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제법 겪었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결론이었다.

'부화했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서 나를 경배하게!"

싸구려 알이 소리쳤다.

"우리 알, 너무 귀엽지 않아요?"

"크흠, 아드리안나님을 닮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아니, 안 귀여워."

"이런 꼬맹아, 질투하는 거냐?"

"전혀. 아저씨."

싸구려 알에 대한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당연했다.

'아드리안나를 닮았으니까.'

심지어 그 아드리안나의 꼬맹이 버전이었다. 갈라하드조차 간질거릴 정도로 압도적인 귀여움인데,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겠나.

갈라하드는 가만히 상황을 정리했다.

싸구려 알이 놈을 잡아먹고 부화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가 없군."

갈라하드는 담담히 말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경악한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그웬은 울 것 같은 눈이었고, 길버튼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만 냉큼 끄덕였다.

"쓸모가 없다니! 내 쓸모는 무한하네!"

"무한히 쓸모가 있다?"

"그렇다네! 내 쓸모는 무한하지! 잘 보게나!"

싸구려 알이 자신만만하게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그러자-.

두근!

심장 옆에서 익숙한 박동이 느껴졌다.

'고통의 알? 분명히 나갔는데? 아니, 미묘하게 다르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껍데기일세! 특별히 놓고 왔지!"

'껍데기?'

갈라하드는 내부를 천천히 관조했다. 심장 옆에 알이 남아있었다. 그건 전에 있던 것과 같았지만, 느낌이 꽤 달랐다.

무엇보다-.

'내 뜻대로 움직이는군.'

인식하자 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마법진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나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을 걸세."

싸구려 알이 짐짓 뒷짐을 지며 말했다.

갈라하드는 차분히 집중했다. 알의 박동을 천천히 조절했다. 알의 박동에 마나가 새어 나왔다. 농도 짙은 마나였다.

"생명력이 가득 있군?"

"내가 넣어두고 나왔네만."

"넣어두다니-. 못 먹어서 버려둔 거겠지."

싸구려 알이 입을 꾹 닫았다. 정답인 듯했다.

알을 움직이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순간 박동이 엇나갔다. 심장이 터질 뻔했다. 갈라하드는 가슴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대장! 이놈이-!"

"내가 한 거 아니다!"

"아니래잖아요!"

갈라하드는 소란을 무사하고 계속 집중했다. 박동을 움직이는 게 생각보다 재밌었다.

'마법진과 비슷하군.'

그렇기에 적응이 생각보다 빨랐다. 이내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반투명한 막이 더욱 짙어졌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원한다면 도와줄 수도 있······ 어떻게 벌써?"

싸구려 알이 눈을 끔벅였다.

"마법진과 비슷하군. 심장 옆이라 더 직접적이고. 확실히 효과적이군. 인정하겠네."

"후후, 내 무한한 쓸모다!"

싸구려 알이 웃음을 흘리며 양손을 번쩍 들었다.

"와아! 무한한 쓸모 축하해!"

그웬이 열심히 박수쳤다. 데미안이 눈을 찡그렸다.

"근데 자네, 생각보다 더 많이 흘리고 있었군? 생명력과 마나를 구분해서 한 번 할 일을 두 번- 아니, 세 번 했으니, 그리 효율이 떨어졌지."

갈라하드의 신랄한 지적에 싸구려 알이 눈을 끔벅였다.

확실히 효율적이었다. 다만-.

"이건 어차피 내장된 거 아닌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싸구려 알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끝이 아닐세! 더 있네!"

"오, 기대되는군."

싸구려 알이 손가락을 튕겼다. 어디서 많이 본 자세였다.

"따라 하지 마."

"꼬맹아, 질투하지 마라."

그때, 알에서 뭔가 퍼졌다. 익숙한 기운-. 생명력이었다.

그에 반해 싸구려 알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순간 퀭해졌다.

"오, 생명력을 원격으로 주는 건가?"

"어떤가! 대단하지! 쓸모있지!"

싸구려 알이 잔뜩 헐떡거렸다. 그거 주고 잔뜩 지치다니-.

"그래, 쓸모가 있군."

이 정도면 가치가 있었다.

"후후, 나를 경배하게나."

"와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싸구려 알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웬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다만, 끝이 아니었다.

싸구려 알의 정체가 뭔지 모르지만, 그 뿌리는 마족이었다.

마족에게는 한 가지 맹목적인 욕구가 남았다.

가령 지배자는 모든 걸 지배하려고 들었고, 개척자는 황제에게 향하기 위해 오로지 개척만 추구했다.

그러면-.

"자네의 목적은 무엇이지?"

갈라하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긴장감이 잔뜩 팽배했다. 그웬이 침을 꿀꺽 삼켰다. 데미안은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 긴장 속에서-.

"부화일세!"

싸구려 알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와! 부화 축하해!"

멍청한 광경에 갈라하느는 눈을 찡그렸다.

'목적을 이룬 마족이라는 건가?'

목적은 동기이자, 동시에 족쇄였다. 그런데 그 목적이 부화라면, 꼭 처음부터 동기를 지우는 것 같지 않나-.

싸구려 알에게 물어도 똑같은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개미 가면들에게 물어봐야겠군.'

개미 가면을 떠올린 갈라하드는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가 빠르게 퍼져서 주변을 훑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도망쳤군.'

아니면 지원군을 부르러 갔거나. 갈라하드는 입맛을 다셨다.

"일단 마경에서 나가지."

"근데 얘도 데리고 가요?"

데미안이 싸구려 알을 가리키며 물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제발-. 그웬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살았다! 살았어! 축하해!"

그웬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데미안이 쳇-하고 혀를 찼다. 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뭐라고 말합니까?"

길버튼이 반투명한 막을 가리켰다. 리암과 병사들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음-.'

모두에게 괴상한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난처한 상황이었다.

갈라하드는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주변을 둘렀던 반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리암과 그 부대가 멀뚱멀뚱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답을 요구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에-.

"마법일세."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뒤로 화려한 불꽃과 번개가 터졌다. 보는 이들의 혼을 쏙 빼는 화려한 마법이었다.

톰은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북부라도 저 변명은 너무 성의가-.

"오오, 역시 마법사! 아드리안나를 낳은 대공 대리!"

"아드리안나를 낳은 대공 대리!!"

리암을 필두로 병사들이 환호했다.

"아, 마법이었군. 음. 그럴 줄 알았지!"

길버튼까지 끄덕이는 모습에-.

톰은 북부가 부끄러워졌다.

****

'같이 갔어야 했는데-.'

성벽 위에 선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여명에서 갈라하드를 노리는 중이었다.

여명이 얼마나 지독한지 아드리안나도 잘 알았다.

1대대 전임 대장이 마경에서 실종된 것도, 아드리안나가 마경을 헤맨 것도 놈들의 짓이었으니까.

'너무 늦으신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갈까-. 아드리안나는 칼자루를 매만졌다.

뿌우우우-.

그때, 저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바람이 재를 가득 밀어냈다. 그러자 2대대 병사들이 보였다. 그 몰골이 형편없었다.

"문을 열어라!"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아드리안나는 병사들을 살폈다.

대형이 묘하게 이상했다.

본래 2대대는 창처럼 뾰족한 대형을 선호했다. 전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둥글게 말아 있었다. 마치 귀빈을 지키는 듯이-.

그 중심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무사했다. 입고 나갔던 코트와 옷이 바뀌었지만, 부상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작게 안도했다.

갈라하드가 누군가와 웃으며 떠들었다. 갈라하드가 대화하는 상대로 시선을 옮긴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거기에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외형이 상당히 낯익었다.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었다.

'······나?'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을 닮은 소녀가 여전히 있었다.

'나한테 동생이 있었나?'

불가능했다. 그녀의 어미는 아드리안나를 낳고 죽었고, 이후로 대공은 누구도 들인 적 없었다.

그러면 저 갈라하드 옆에 있는 소녀는 누구란 말인가.

'······마족?'

마족 중에는 모습을 변하는 마족도 있었다. 피해를 입은 사례도 꽤 많았다.

'갈라하드가 마족에 넘어갈 리가 없는데?'

의문이 들었지만, 아드리안나는 일단 뛰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렸다. 성벽은 높았지만, 아드리안나는 가벼이 착지했다. 빠르게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아드리안나! 나오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리암은 가벼이 무시했다. 그에 리암의 얼굴이 씰룩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곧장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그 주변에 특무대가 모여 있었다. 험한 일이 있었는지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소녀가 자신과 더 똑같았다. 그웬의 품에 안긴 소녀가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마족인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칼자루를 매만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먼저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아드리안나, 잠깐을 못 기다리고 마중 나오다니-.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나?"

평소의 갈라하드였다. 아드리안나는 작게 안도했다.

"뭔가 이상하여 왔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눈짓으로 소녀를 가리켰다. 소녀는 여전히 이를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아, 그래, 자네가 당황할 만하군."

"예. 무슨 일입니까?"

"내가 낳았네."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가벼이 끄덕였다.

"아, 낳으셨군요."

"그래, 꽤 아프더군."

끄덕이던 아드리안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예?!!!"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쉿, 목소리 줄이게. 자네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낳··· 았다니-."

"말 그대로일세. 내가 낳았네."

아드리안나의 무표정이 깨졌다. 늘 올곧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농담이라는 걸 깨달은 아드리안나는 얼굴을 굳혔다.

"농담이 심하십니다."

"농담이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농담이 아닐세."

"······그게 무슨?"

아드리안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드리안나가 저런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내 심장 옆에 있던 것 말일세."

"예? 예."

"그게 나왔네. 짜잔."

짜잔-? 아드리안나는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적의를 가득 드러냈다.

'그러니까 진짜 낳았다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길버튼이 슬쩍 다가왔다.

"진짜 낳으신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쇼."

길버튼의 괴상한 충고에 아드리안나는 더 복잡해졌다.

"그게 나온 거라는 겁니까?"

"맞네. 이해가 빠르군."

"근데 왜 모습이 접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다만, 순간이었다. 갈라하드는 금세 여유롭게 웃었다.

"음, 아무래도 자네 생각을 너무 많이 했나."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아드리안나의 앞머리가 순간 들렸다. 얕게 언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무표정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이내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볼이 뜨거워졌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더는 의문이 없었다. 무사히 넘어간 듯하여,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했습니다."

"음? 뭐를 말인가."

"생각 말입니다. 많이."

갑자기 쑥 좁혀진 거리감에, 이번에는 갈라하드가 굳었다.

그때,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아드리안나의 한쪽 입꼬리가 보였다.

"······늘었군."

"배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뿌듯한 듯했다.

"아주 제대로 배웠어."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마족입니까?"

아드리안나가 싸구려 알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잘 모르겠습니다. 안에 있을 때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저건-."

아드리안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적당한 단어를 찾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내 아드리안나의 입이 열렸다.

"마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마족일 수도 있겠지만-."

"마법적인 느낌?"

"예."

모호한 대답이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법적인 느낌이라니-.

'하긴 최초의 마법사가 실패작이라고 했었지.'

머릿속이 오히려 복잡해졌다.

"위험한 느낌은 안 듭니다. 최하급 마족보다 더-."

아드리안나가 건틀릿 낀 손을 내밀었다.

싸구려 알이 적의를 가득 드러냈지만, 까불지는 않았다. 아드리안나가 강한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착하구나."

"건방진 인간이군. 나는 무한한 최강일세."

"말투가 갈라하드랑 똑같군요."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때, 길버튼이 슬쩍 껴들었다. 눈썹을 씰룩거리는 게 상당히 불안했다.

"흐흐, 머리색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나중에 두 분이 애를 낳으면 이렇지 않겠습니까?"

대뜸 짓껄인 개소리에 아드리안나가 그대로 굳었다.

'또 대련당하겠군.'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크흠-. 갈라하드는 낮게 헛기침했다.

순간 묘한 분위기가 됐다.

'멍청한 길버튼 경-.'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싸구려 알이 입을 열었다.

"아니! 내 엄마는 여기일세!"

당당하게 가리킨 곳에는 그웬이 있었다.

그웬이 기쁘다며 웃었다.

뿌득-.

아드리안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리 묻는 아드리안나에게서-.

왠지 모르게 차르티엔이 보였다.

****

2대대 대장 리암은 규칙을 준수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선에서 규칙은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규율이 바로 서야, 통제가 올바르게 되는 법이었다.

'복귀하면 보고부터-.'

리암은 씻지도 않고, 펜과 종이부터 꺼냈다.

보고가 우선이었다.

리암의 펜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 닮은 소녀를 낳았다.]

음, 훌륭해.

리암은 호탕하게 웃었다.

196화 타르트

"방금 엄마라고······?"

아드리안나가 낮게 읊조렸다.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가 유난히 서늘했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은 그웬과 작은 아드리안나에게 향해 있었다.

'큰일 났다!'

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 소녀는 갈라하드에게서 나왔다. 그런 소녀가 그웬에게 엄마라고 불렀다.

약혼자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톰은 황급히 그웬에게 시선을 돌렸다.

"맞다네! 내 엄마일세!"

"와아! 맞아요! 제가 엄마예요!"

소녀와 그웬이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그웬은 엄마라는 소리가 좋은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안 돼, 멈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흠, 이제 보니까 그웬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길버튼이 길버튼 같은 말을 떠들었다.

소녀는 아드리안나의 다섯 살 정도 되는 모습이었다. 그웬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웬을 닮았다니-.

그때, 아드리안나의 손이 칼자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서늘하게 물었다.

'진짜 큰일 났다!'

톰의 등에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갈라하드는 여유로웠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게 분명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명하실 생각이지?'

이해하기에도 머리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걸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톰은 기대하며 갈라하드를 살폈다.

"간통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아까 분명 말하지 않았나."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오히려 아드리안나를 타박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평소였으면, 물러났을 아드리안나가 되물었다.

칼자루에 올라간 손과 무심한 목소리-.

톰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낳았다고."

아드리안나가 눈을 찡그렸다.

"그거는 들었습니다만."

"근데 뭐가 문제인가?"

"그웬을 엄마라고-."

"아니, 논리적으로 그웬은 엄마가 될 수 없네. 내가 낳았으니, 내가 어미지."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문제를 풀 듯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내용이 이해되는 게 살짝 느릴 정도로-.

"······예?"

아드리안나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그 눈썹이 마구 흔들렸다. 단단히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아드리안나 뿐만이 아니었다.

톰도 표정 관리를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안 돼요! 제가 엄마라는데요!"

"그웬, 자네가 낳았나?"

"그건 아니지만-."

그웬의 말문도 가벼이 막혔다.

그때, 충격에 굳었던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장난하시는 겁니까?"

"장난이라니-. 여기 있는 이들에게 물어보게. 길버튼 경?"

"아! 저도 봤습니다. 대장님이 가슴으로 낳았습니다."

길버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닫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 대장이 낳았으니까.'

논리적으로 갈라하드가 어미였다. 그걸 갈라하드가 자기 입으로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벙끗거렸다.

문제가 있냐니? 모든 게 문제 아닌가?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왜 그웬을 엄마라고 부릅니까?"

"자기 마음이겠지. 엄마라고 부른다고 엄마가 되는 거면, 내가 길버튼 엄마가 될 수 있겠군."

"제 어머니는 따로 있습니다만."

"그래, 정정하신가?"

"예, 정정하십니다."

둘의 대화에 아드리안나가 침음성을 흘렸다.

"알··· 겠습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오히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네."

갈라하드는 사과를 가벼이 받았다. 아드리안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길버튼의 입이 슬쩍 열렸다. 그를 본 갈라하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길버튼 경. 닥치게."

"예?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명령일세."

길버튼이 씰룩거리며 입을 닫았다.

"그런데 어떻게 갈라하드가 어미입니까?"

아드리안나가 마지막 숨을 짜내듯 힘겹게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일세."

"아하."

아드리안나가 쉽게 끄덕였다.

그제야 톰은 사람들이 마법이라는 핑계에 쉽게 넘어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그냥 마법이라는 걸로 넘기고 싶은 거였구나.'

"일단, 좀 쉬어야겠군."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를 끝으로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2대대에서 숙소를 내주기로 했고, 톰은 미리 가서 치울 생각으로 움직였다.

그때, 길버튼이 옆으로 붙었다. 그 얼굴이 여전히 씰룩거렸다. 그를 보고 있으니, 톰은 괜히 궁금해졌다.

"길버튼님, 아까 대장님에게 물어보려던 게 뭡니까?"

"아, 별거 아니다."

길버튼이 대뜸 진지한 얼굴을 했다.

"대장이 엄마라면 아빠가 누군지 궁금해서. 흠."

톰은 깊게 탄식했다.

****

"나를 경배하게나!"

식탁에 올라간 싸구려 알이 냉큼 양손을 번쩍 들었다.

"네가 뭔데."

"데미안! 동생한테 말 그렇게 할래?!"

"나 동생 없어."

"사이좋게 지내야지!"

"싫어."

"데미안!"

"그웬, 데미안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톰의 중재에 데미안과 그웬이 다툼을 멈췄다.

'특무대가 더 시끄러워졌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묘한 눈으로 싸구려 알을 보고 있었다.

"마법적인 느낌이 든다고 했나?"

"아, 예. 마족보다 마법적인 느낌에 가깝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분명 고위 마족의 물건이라고 했는데 말이야."

"고위 마족 말입니까?"

음-.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래, 마법적인 느낌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건가? 마법진? 마도구?"

"그것보다는 갈라하드님이 가끔 쓰는 기이한 불과 비슷했습니다."

원시 마법 이야기군. 아무래도 최초의 마법사와 연관된 존재가 맞는 듯했다.

'고위 마족의 물건에 장난질한 건가? 왜?'

갈라하드는 최초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최초의 마법사는 괴팍한 노인네였다. 이중인격이었는데, 그 각 성격의 성향이 너무 달랐다.

하나는 미친 괴팍한 노인네였고, 다른 하나는 진중한 노인이었다.

단순히 미친 걸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인격이 마족이라면?'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최초의 마법사는 분명한 마족이었다. 그런데 진중한 노인일 때는 마족보다는 마법사에 가까웠다.

'인격을 나눠서 마족을 봉인한 건가?'

그러면 원시 마법을 쉽게 다루던 것도 이해가 됐다. 노인은 온전한 마족, 심지어 고위 마족이었으니까.

'인격을 어떻게 나눴지?'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누구의 동생이 아닐세. 특히 미천한 인간들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지."

그때, 싸구려 알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멍청한 모습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노인에게 고통의 알이 있다면?'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노인은 고통의 알을 '실패작'이라고 했으니까.

'최초의 마법사도 고통의 알을 먹었다.'

싸구려 알과 달리, 진짜 고통의 알을 먹었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마족의 인격을 이기지 못했고-.

'따로 봉인했다.'

꽤 그럴듯한 추리였다. 자신도 응당 그렇게 했을 것이니까.

'최초의 마법사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었군.'

다만, 갈라하드는 최초의 마법사와 사정이 달랐다.

코르튼이 준 고통의 알은 최하 등급이었고, 덕분에 에고가 어리숙했다.

"엄마, 너도 어서 경배하거라."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아니, 멍청했다.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최초의 마법사가 만든 물건인 것 같군."

"최초의 마법사-."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떨렸다. 최초의 마법사 악명 때문이었다.

최초의 마법사는 동시에 인류 최초, 최악의 배신자였으니까.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가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위험하다-. 맞는 말이었다. 최초의 마법사도 그런 꼴이 됐으니까.

갈라하드는 싸구려 알로 시선을 돌렸다.

"한번 해보자는 것인가!"

싸구려 알이 데미안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덤벼."

데미안이 냉큼 끄덕였다.

"도대체 둘이 왜 싸우는 거야!"

"무한한 힘에 짓눌리게나!"

싸구려 알이 데미안에게 냉큼 달려들었다. 뭐라도 있나 갈라하드는 순간 긴장했다.

그 순간-.

"으엑."

데미안의 주먹이 싸구려 알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싸구려 알이 널찍한 식탁에 대 자로 엎어졌다.

단 한 방이었다.

"······진짜 형편없잖아?"

칼을 뽑으려던 데미안이 오히려 당황했다.

"데미안!! 애를 때리면 어떻게 해!"

"나도 애잖아."

"그건······ 그렇네? 아무튼, 그래도!"

그웬이 싸구려 알에게 향했다. 싸구려 알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쌍코피였다.

"저게 위험하다는 건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래도 정체를 모르지 않습니까."

"이제 알아봐야지."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그 푸른 눈에 걱정이 언뜻 보였다.

원래 아드리안나의 눈은 무심하여,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좀 읽히는군.'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긁적였다.

"걱정할 일은 없을 걸세. 그래도 조심하겠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차분하게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싸구려 알에게 향했다. 싸구려 알은 그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름이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라-.

"없네."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름은-."

"그웬. 거기까지일세."

뭐라 말하려던 그웬이 입을 꾹 닫았다.

서늘한 분위기가 식탁에 감돌았다. 갈라하드는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면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톰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웬이 싸구려 알을 챙겼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방금 떠올린 가설을 되짚느라 바빴다.

"이름 하나 지어주는 게 어떻습니까?"

길버튼이 정적을 깨고 투박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계속 꼬맹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데리고 다니실 거 같은데-."

길버튼이 그웬을 눈짓했다. 싸구려 알을 안은 그웬이 의기소침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도 하나 주는 게 좋아 보입니다."

아드리안나까지 합세했다.

'하여튼 북부 놈들. 정은 많아서-.'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그래, 이름은 타르트일세."

"와! 타르트라니! 이쁜 이름이에요!"

"멋진 이름입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작명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내 전공 중 하나일세."

곧 톰이 스튜와 고기를 내왔다. 식탁이 순식간에 음식으로 채워졌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마구 찔렀다.

"역시 톰일세."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리암이었다.

"식사하러 왔다! 요리사의 실력이 아주 끝내주더군."

"톰은 요리사가 아니라, 내 보좌관일세."

"그래? 자네 보좌관 요리 실력이 아주 끝내주더군!"

리암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늘 그렇듯 데미안이 식사의 시작을 알렸다.

"그웬이라고 했나?"

리암이 그웬을 보며 말했다. 그에 그웬이 찔끔 놀랐다.

"빡대가리라고 한 건 죄송해요! 그때는 너무 급해서!"

그웬의 외침에 갈라하드는 허- 하고 혀를 찼다. 대장인 리암에게 빡대가리라니-.

'많이 급했나보군.'

갈라하드가 중재하려는 순간, 리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훌륭한 판단이었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아주 좋은 판단이었어. 자네가 옳았다."

리암은 그웬을 보며 엄지를 올렸다.

리암은 2대대의 대장이었다. 실질적으로 북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권력가였다.

그런데 하녀 복을 입은 그웬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하다니-.

'속이 참 좋군.'

감탄하던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리암은 부대에 오자마자 사라졌다. 그에 정비하러 갔나 했더니, 복장이 그대로였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자네, 꼴이 그대로군?"

"아. 대공 전하께 보고하러 갔다 왔네. 복귀 후 보고가 순서니까."

"보고?"

"음, 규율에 따라 자세한 사건 경위와 결과를 적는 행위지."

"그래, 보고의 의미는 나도 알고 있네. 보고에 어떤 걸 적었지?"

갈라하드는 황급히 되물었다. 왠지 목이 따끔거렸다.

"있었던 일들을 정확하게 나열했다."

"어떤 일들 말인가."

"아, 내가 공을 속였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말게나. 자네의 공을 정확히 나열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정확히 말해보게."

갈라하드의 다그침에 리암은 눈을 찡그렸다.

"있었던 일을 적었다. 고위 마족과 최상급 마족을 만나자, 자네가 우리를 대신하여 스스로 인질로 붙잡힌 것이나-."

"······인질로 붙잡히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음, 멀쩡하지 않나. 별일 없었네."

"스스로 인질이 되신 건 맞군요."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시에 제일 합리적인 판단을 한 걸세."

"예, 그렇겠지요."

"자네, 지금 비꼬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이 또렷했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제 제가 무조건 붙어 있겠습니다."

"무조건이 추가됐군."

"예, 진심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에 진심이 가득했다. 그 대답이 강경했다.

'귀찮아졌군. 이 북부 같은 놈.'

갈라하드는 원인인 리암을 노려봤다.

리암은 호탕하게 스튜를 손으로 퍼먹고 있었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불안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모든 걸 보고했다면-.

"자네, 설마 이것도 보고를 올렸나?"

갈라하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싸구려 알을 가리켰다.

"당연한 거 아닌가. 보고는 자세하고 정확해야 하는 법일세."

"······뭐라고 올렸나?"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낳았다고 올렸네."

리암이 호탕하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올라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내가 아드리안나를 낳았다고-.'

다행히 괴상할 정도로 투박한 문장이었다. 대공도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 괴상한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그래, 안 믿을 거다.'

애초에 믿는다 한들 문제가 될 문장이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대공이었다.

늘 뒤에 있다가, 아드리안나만 관련되면 대뜸 일어나는 대공-. 그런 대공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뽑히나?'

갈라하드는 목을 매만졌다.

자세한 경위를 설명하면, 대공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아드리안나에게 피해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순전히 갈라하드 혼자 낳은 것이다.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 아닌가.

문제는-.

'대공이 변명할 시간을 줄까?'

아무리 전망을 좋게 봐도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아드리안나가 필요했다.

"아드리안나, 이제 무조건 안 떨어지겠다고 했지?"

"예? 예-."

"약속 꼭 지키게. 내가 씻거나 잘 때도 같이 있는 걸세."

"아니, 그건······."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가?"

"알겠······습니다."

힘겹게 끄덕이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안도했다.

다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저번에 대공은 아드리안나를 배제하는 치사한 수법을 썼다.

또 어떤 치사한 방법으로 아드리안나를 떨어뜨릴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더 필요한데-.'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대가 대공이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하하, 쓰러뜨린 줄 알았는가! 나는 무한하다!"

싸구려 알이 벌떡 일어났다. 막아뒀던 코에서 피가 다시 흘렀다. 상당히 볼품없고 엉망인 모습이었다.

어찌 아드리안나의 얼굴을 하고서, 저런 형편없는 꼴을-.

'잠깐.'

문득 영특한 생각을 떠올랐다.

"타르트."

"음? 나는 지올레콘타르티에누스다."

"그래, 타르트. 이쪽으로 와보게."

갈라하드의 손짓에 싸구려 알이 냉큼 다가왔다. 갈라하드는 싸구려 알을 위아래로 살폈다.

'아드리안나가 다섯 살 정도 되는 모습이군.'

대륙 제일의 미인인 아드리안나였다. 그런 아드리안나의 소녀 버전이니, 귀엽다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귀여움의 농축액이었다.

"그래, 드디어 나를 경배할 생각이 든 건가?"

저 까불거리는 행동도 거슬리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에 원체 무뚝뚝한 아드리안나였다. 그에 반해 싸구려 알은 표정이 다양했다. 심지어 쌍코피까지 흘렸다.

이걸 대공이 본다면-?

견적이 완벽하게 잡혔다.

"자, 따라 하게나. 하라부지."

"내가 왜-."

"자네, 타르트가 되고 싶은 건가?"

싸구려 알이 눈을 끔벅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불안했다. 싸구려 알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다행일세. 자, 따라 하게. 하라부지."

"할아버지?"

"아니. 하라부지- 일세."

"왜 그런 멍청한 발음을 하라는 건가?"

"톰, 여기에 오븐 있나? 아, 있다고."

"하라부지. 하라부지."

"훌륭하네. 다만, 끝을 좀 더 늘리게."

"하라부지-."

"좋아, 이번에는 웃으면서."

"하라부지-."

싸구려 알이 활짝 웃었다.

대공이 이걸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기다려라. 대공.

쾌락 없는 책임이 간다-.

197화 손녀

'음-.'

대공의 보좌관 테오도르는 슬쩍 대공을 확인했다.

대공은 늘 있던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험상궂은 외모와 그 위에 새겨진 흉터에 보이지 않았지만, 대공을 오랜 시간 보좌한 테오도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전하께서 진정하셨다.'

아드리안나의 편지 덕분이었다.

그때, 거대한 매가 날아왔다. 리암의 매였다. 매의 발에 걸린 두꺼운 종이 뭉치에 테오도르는 눈을 찡그렸다.

'축약해서 필요한 내용만 쓰라니까. 또 길게 썼군.'

리암의 보고는 그 내용이 너무 자세했다. 평소에는 그리 말이 많지 않은 리암인데, 그 보고서는 너무 길고 자세했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일어나서 매에 묶인 종이 뭉치를 챙겼다.

[2대대 대장 리암이다. 갈라하드 대공 대리가 2대대에 방문했다. 마경이 좁아진 것에 관한 보고를 받고 왔는데, 오히려 그게 공이 아니라 문제라고 하는 것 아니겠나? 처음에는 의심했다. 전선에서 수십 년을 지낸 내 판단으로는 마경이 좁아지는 것은 호재였으니까. 그건 내가 처음 전선에 왔을 때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눈이 엄청나게 오는 날이었다······.]

'쓸데없는 것 좀 쓰지 말라니까.'

테오도르는 빠르게 편지를 훑었다. 갈라하드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만 읽었다.

"음, 마경이 좁아진 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갈라하드 대공 대리가 리암의 부대와 마경으로 들어갔답니다. 아드리안나 대장은 같이 들어가지 않았답니다."

테오도르는 종이를 넘겼다.

"마경에서 고위 마족과 최상급 마족을 마주쳤답니다. 위기였는데, 갈라하드 대공 대리가 나섰답니다. 자신을 데려가라면서."

오- 갈라하드 대공 대리! 참모들이 울먹였다.

"리암이 부대를 이끌고 다시 전진했는데, 갈라하드는 이미 먹힌 상황이었답니다."

히익! 참모들이 비명을 질렀다. 깊은 절망이 퍼졌다. 그럴 리가 없다! 안 돼! 순간 시끄러워졌다.

"뭐라고?"

대공이 드물게 되물었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마족에게 먹힌 갈라하드 대공 대리가 오히려 마족의 배를 찢고 나왔답니다!"

역시 갈라하드! 참모들이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이어서 읽었다.

[그리고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낳았다.]

'음?'

분명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됐다. 테오도르는 옆에 있는 참모에게 내밀었다.

옆의 참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가 또 옆으로 넘어갔다. 다음 참모도 갸웃거렸다.

"뭐지?"

대공의 명령에, 편지를 들고 있던 참모가 멍청하게 대답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낳았답니다!"

대공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테오도르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낳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대공이 드물게 길게 물었다. 그에 참모들이 다급해졌지만, 이들도 이해 못 한 상황이었다.

절로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테오도르였다.

대공의 압박과 참모들의 기대, 테오도르는 황급히 보고를 다시 읽었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갈라하드를 닮은 아이를 낳았다는······."

무심결에 말하던 테오도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만, 주요 내용은 나온 뒤였다.

"놈."

대공이 낮게 읊조리며 일어났다.

철 덩어리로 만든 의자가 가벼이 부서졌다.

"놈에게 마차를 보내도록."

마차라니-.

'큰일 났다!'

테오도르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갈라하드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봤다.

거기에는 미니 아드리안나, 싸구려 알이 있었다.

싸구려 알이 갈라하드의 눈치를 봤다. 그 검 눈동자에 어울리지 않는 얍삽한 기색이 가득했다.

싸구려 알은 대놓고 강약약강이었다.

위아래를 확실히 해야 했다.

"왜 그러나. 타르트가 되고 싶은 건가?"

싸구려 알이 냉큼 눈을 깔았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열린 성문으로 일련의 병사들이 들어왔다. 그 복장이 북부답지 않게 깔끔했다. 어딘지 서늘한 느낌이 강했다.

그 선두의 기사가 제일이었다. 검은 갑주로 온몸을 두른 기사였는데, 그 손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사람만큼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대공의 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뒤에 병사들이 호위하듯 빙 둘러선 거대한 마차가 상당히 특이했다.

검은색 철로 통짜로 만든 마차였는데, 흔한 창문도 없었다. 그저 투박한 문이 전부였다. 심지어 문에는 걸쇠까지 있었다.

마치,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처럼-.

'호위가 아니라 호송이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음!"

곳곳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격한 반응이었다.

"저건 대공 전하의 부름입니다."

길버튼이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대공 전하의 부름?"

"예, 대공 전하가 특별히 마차를 보내는 겁니다. 저 마차를 거부하면 즉시 북부 공적이 됩니다."

"참 살벌한 부름이군."

"마차를 타면 곧장 대공 전하와 직면하는데, 음-."

길버튼이 뒷말을 삼켰다. 이내 슬쩍 돌려서 말했다.

"대공 전하의 부름은 북부 최고의 형벌이라고 불립니다."

북부 최고의 형벌?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어떤 미친놈이 대공 전하의 심기를 거슬렀나 봅니다. 간이 아주 부은 놈이군."

길버튼이 염소수염을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불구경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기사가 갈라하드를 발견했다. 이내 고삐를 돌렸다.

"어? 왜 이쪽으로-. 대장?"

길버튼이 씰룩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기사가 가까워질수록, 길버튼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창백해졌다.

기사가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대공의 기사답게 그 덩치와 눈빛이 상당했다.

"대공 전하의 명령이오."

기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사의 선언에 모두가 무릎을 굽혔다.

리암과 아드리안나까지-. 대공의 깃발 앞에 모두가 조아렸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기사를 올려봤다.

기사가 양피지를 길게 펼쳤다. 양피지에는 건너편에서도 보일 정도로 붉은 문장이 깊게 찍혀 있었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는 당장 맡은 접경 지역으로 돌아간다. 접 지역을 맡은 대장이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명백한 나태다. 부대에서 이에 대한 처분을 기다리도록."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잔뜩 흔들렸다. 심히 당황한 듯했다.

아드리안나에게 접 지역과 부대를 걸면서 명령을 내리다니-.

'대공, 또 치사한 수법을 쓰는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때, 기사의 서슬 퍼런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 대공 대리는 마차에 타도록. 대공 전하의 명이다."

기사의 목소리가 사형수를 부르는 것처럼 서늘했다.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내부에 빛 하나 없이, 숨 막히는 어둠이 가득했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히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푸른 눈이 잔뜩 흔들렸다.

대공이 접 지역까지 꺼내며 명령했으니, 아드리안나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대공, 참으로 치사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가 답답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괜찮네. 이해할 수 있네."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아드리안나에게는 상당히 격한 표현이었다.

갈라하드는 진심이었다.

'싸구려 알이 있으니까.'

싸구려 알이 기사를 보며 눈짓하고 있었다. 자기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재는 듯했다. 하여튼 주제도 모르는 놈이었다.

'기다려라. 대공.'

갈라하드는 웃음을 참으며, 마차에 탔다. 바로 뒤로 길버튼이 따라 탔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장 덕분에 대공 전하의 마차도 타보고-. 이거 출세했습니다?"

"그래, 고마운 줄 알게나."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좀 비켜."

"자네나 비키게!"

"너네 왜 또 싸우니!"

데미안과 싸구려 알이 다시 투닥거렸다. 싸구려 알은 그웬의 뒤에 숨어서 큰 소리만 쳤다. 데미안이 눈을 찡그리며 갈라하드 옆에 냉큼 앉았다.

얼굴에 마땅찮음이 가득했다.

"하하, 데미안. 여기 육포 있습니다."

톰이 그런 데미안에게 육포를 건넸다. 마차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기사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잡았다.

아드리안나였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전처럼 곧았다.

"대공의 명령은?"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약속을 지킬 뿐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이 단단했다.

아드리안나가 대공의 명령을 거스르겠다니-.

'대공의 충격이 상당하겠군.'

다만, 갈라하드에게는 호재였다. 싸구려 알에 아드리안나까지 있으면 필승이었다.

"······싫으십니까?"

"아니, 싫을 리가. 어서 타게. 길버튼 경, 저기로 가게나."

"예? 제가 왜-."

"명령일세."

갈라하드는 옆 자리를 두드렸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굳은 걸음으로 마차에 탔다.

그때, 문을 닫던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출발하지."

갈라하드의 재촉에 기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쿵!

문이 거칠게 닫혔다.

"지옥불."

데미안이 기다렸다는 듯 작은 불씨를 켰다.

데미안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풉, 싸구려 알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데미안은 잠시도 참지 않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마차는 금세 난장판이 됐다.

****

"곧 도착이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창문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길버튼이 멍청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퍼뜨린 것과 초를 계산한 것을 말하려다가 삼켰다.

"음, 대충 도착할 시간이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근데 진짜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대공 전하의 부름은 전부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대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길버튼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 뒤의 톰이 끄덕였다. 톰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마차 초대가 북부 최고의 형벌이라-.'

도대체 대공은 어떤 인생을 산 걸까.

"괜찮네. 아니, 오히려 좋지."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웬과 싸구려 알, 그리고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줄곧 싸구려 알 주변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는 듯했지만, 싸구려 알은 아드리안나만 보면 이를 드러냈다.

물론, 달려들지는 않았다. 싸구려 알은 대놓고 강약약강이었다.

"왜 나만-."

"그 좀 웃어보실래요?! 아이들은 웃는 얼굴을 좋아해서요!"

그웬의 조언에 아드리안나가 진지해졌다. 이내 눈썹을 마구 들썩였다.

"아니! 눈썹만 올리지 말고! 입꼬리도 올려야 해요!"

"입꼬리-."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미세하게. 아드리안나로서는 최선이었지만, 그웬은 냉혹했다.

"음, 웃는 것에는 재능이 없으시네요! 괜찮아요! 모든 것에 재능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드리안나님은 마족을 잘 써시잖아요!"

그웬의 괴상한 칭찬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축- 쳐졌다.

"타르트."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싸구려 알이 황급하게 달려왔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자-.

"하라부지-!"

싸구려 알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완벽하게 멍청한 미소였다. 따로 교정할 필요가 없었다.

"잘했네. 그렇게만 하게."

"후후, 나만 믿게나."

음흉하게 웃은 싸구려 알이 그웬에게 돌아갔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눈썹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 뭐라 조언이라도 해주려는데-.

"형!"

데미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공포에 가득 질려서, 꿈쩍조차 하지 못했다.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마나가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휘몰아쳤다.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옆에 뭔가 떨어진 듯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게 무슨-."

갈라하드는 위를 쳐다봤다. 마차의 지붕이 살짝 흔들렸다.

우드득. 거친 소리가 나면서, 철로 만든 마차의 천장이 그대로 뜯겼다. 그 두께가 상당한 철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이내 천장이 가벼이 뜯겼다. 그 너머로 보인 건-.

단단히 화난 대공이었다.

안 그래도 흉포했던 눈동자가 지금은 더 살벌했다.

마주한 것만으로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등이 순간 서늘해졌다.

어찌 저런 흉포한 기세를 풍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쪽에는 아드리안가 있었다.

"대공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눈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대공의 시선이 아드리안나로 향했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살벌한 기세가 다소 뭉그러졌다. 대공의 험상궂은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뺨이라도 맞은 듯한 반응이었다.

"아드리안나. 네가 왜 여기에-."

대공은 심지어 말을 끝마치지도 못했다.

"여명이 갈라하드를 노리는 상황입니다. 1대대는 따로 보충 인원까지 보내서 병력이 충분합니다. 갈라하드를 지키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내 명을 어겼다?"

대공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흉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지옥의 왕이 있다면, 저런 몰골이 아닐까. 갈라하드는 확신했다.

아드리안나가 굳게 끄덕였다.

"허-."

대공의 입에서 숨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거대한 덩치가 순간 흔들렸다. 강철을 종잇장처럼 찢은 손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이내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안 그래도 살벌했던 눈이 더욱 구겨졌다.

"놈."

대공이 맹수의 목을 틀어쥔 듯한 소리를 냈다. 대공의 근육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참으로 살벌했다.

그 적의가 적나라하다 못해, 목을 틀어쥔 듯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앞에 섰다.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방금까지 마경에 있던 갈라하드에게 마차까지 보내셨습니까?"

아드리안나는 오히려 대공을 쏘아붙였다. 그에 대공이 다시금 흔들렸다. 갈라하드를 찌르던 기세가 흩어졌다.

다만, 대공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드리안나 대장은 빠지도록. 명령이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아드리안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공의 눈이 실시간으로 구겨졌다. 아드리안나를 피해서 갈라하드를 압박했다.

'음, 이 정도면 되겠군.'

아드리안나가 한 차례 대공을 막은 상황이었다. 당장 목을 뽑지는 않을 테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드리안나."

"예."

"나는 괜찮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뒤로 물러났다. 그를 본 대공의 그 험상궂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놈-."

대공의 분노가 갈라하드를 향했다. 당장 목이 틀어쥔 것만 같았다. 차르티엔이 언뜻 보였다.

아드리안나에게 거절당하고 왜 이쪽에 푸는지-.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타르트."

갈라하드의 부름에 싸구려 알이 뛰어왔다.

대공의 시선이 싸구려 알로 향했다. 본래 대공의 눈은 흉터로 가득했다. 그 속을 읽을 수 없었다.

그 험상궂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대공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목을 틀어쥐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대로 통했군.'

갈라하드는 슬쩍 끄덕였다.

그러자-.

"하라부지!"

싸구려 알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대공의 얼굴이 사르륵 녹았다.

대공이 헤벌쭉 웃었다.

맹세코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끔찍했다.

대공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얼굴이 전보다 더욱 구겨졌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대공의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진짜 낳은 것이냐?"

대공이 아드리안나를 보며 목을 비튼 것처럼 간신히 물었다.

"예?! 그게 무슨 길버튼 같은 소리십니까."

"그러면 저것은 무엇이냐?"

대공의 시선이 싸구려 알에게 향했다.

"하라부지-."

싸구려 알이 냉큼 활짝 웃었다.

대공의 얼굴이 다시 녹았다. 헤벌쭉 웃었다. 끔찍했다.

"제가 안 낳았습니다! 그런 것도 없었고!"

아드리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대체-."

대공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갈라하드는 손을 들었다.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헤벌쭉 웃던 대공의 얼굴이 굳어지며, 격렬한 적의가 감돌았다.

진짜 지랄이군.

"제가 혼자 낳았습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대공이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싸구려 알은 대공을 가만히 위아래로 살폈다.

······내 밑인데?

싸구려 알은 음흉하게 웃었다.

198화 하라부지

대공은 정말 험악하게 생겼다.

꽤 많은 것들을 경험한 갈라하드도 처음에 보고 놀랐을 정도의 외모였다.

성인 사내의 세 배를 넘는 덩치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 거기에 얼굴의 흉악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외모인데, 심지어 그 위에 흉터까지 빼곡했다.

일반인이라면 그 외모 하나만으로 충성을 맹세할 정도였다.

그런 대공이-.

해벌쭉.

환하게 웃었다.

성문에서 마주하고, 내성의 연회장에 올 때까지 줄곧 저 상태였다.

'진짜 끔찍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질색했다.

싸구려 알이 대공에게 효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크흠."

갈라하드가 헛기침하자, 그제야 대공이 시선을 돌렸다.

갈라하드를 본 대공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지옥의 왕 같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낳았습니다."

"네가?"

"예, 마법으로."

"지금 그걸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냐?"

대공이 눈을 구겼다. 다른 북부 놈들은 간단히 믿었는데-. 갈라하드는 오히려 혀를 찼다.

"그러면 아드리안나가 낳았겠습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놈."

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도끼라도 댄 듯 목이 서늘해졌다. 아무래도 선을 넘은 듯했다.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압박감이 심했지만, 전과 달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하라부지-!"

대공이 용암에 던진 얼음처럼 그냥 녹아내렸다. 어울리지 않는 눈웃음에 입꼬리는 잔뜩 올라갔다. 실로 끔찍했다.

압박이 가벼이 사라졌다.

"크흠."

대공이 기침하며 표정을 굳혔다. 예의 살벌한 얼굴로 돌아갔지만, 더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그에 대공의 시선이 아드리안나로 향했다. 얼굴이 다시 풀어졌다.

"그래, 이치에 맞지 않지."

대공이 천천히 끄덕였다.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통했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대공의 얼굴이 다시 험하게 구겨졌다.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서 마법으로 낳았다?"

"예, 상당히 아팠습니다.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갈라하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네발 마족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쇼크사했을 것이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빤히 응시했다. 속을 파헤치는 듯한 눈이었다. 갈라하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공이 허- 하고 혀를 찼다.

"진실이군."

"예, 목격자도 많습니다."

끄응-. 대공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내 얼굴을 다시 험악하게 구겼다.

"마족인가?"

대공이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서늘한 물음이었다.

"어떤 거 같습니까?"

갈라하드는 오히려 되물었다.

대공이 싸구려 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헤벌쭉. 다시 녹아내렸다.

'끔찍하군.'

대공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갈라하드를 보자,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

'무슨 콩트도 아니고.'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모르겠다. 네놈이 혼자 낳았다고?"

대공이 오히려 되물었다. 함축적인 질문이었다.

'아드리안나가 관련됐냐고 묻는 거군.'

"아니, 혼자는 아닙니다. 아드리안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리 부화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 외모를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하라부지-!"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기지도 않았는데, 싸구려 알이 활짝 웃었다.

헤벌쭉-. 대공이 다시 녹았다.

싸구려 알이 눈을 빛내며, 슬쩍 대공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이리 같은 눈빛이었다.

대공은 여전히 허허 웃었다.

그에 눈치를 보던 싸구려 알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나를 경배하게나!"

싸구려 알이 예의 개소리를 지껄였다.

순간 대공의 얼굴이 굳었다.

"말투가······."

대공의 입술이 비틀리며, 희미한 숨소리가 터졌다. 그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격한 반응이었다.

"말투가 왜 저 꼴이지?"

대공이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전보다 더 격한 분노였다.

다만, 이제는 기별도 안 왔다.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우니 좋지 않습니까?"

"후후, 나는 무한하게 고급스럽다네."

싸구려 알이 갈라하드를 따라서 웃었다.

"이런-."

대공이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마물과 싸워도 꿈쩍않던 대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싸구려 알이 눈치를 보며 슬쩍 다가갔다.

톡, 싸구려 알이 대공의 근육을 꾹 찔렀다. 대공이 그제야 손을 내렸다. 다시 표정이 풀어졌다.

싸구려 알이 히죽 웃었다. 대공이 낮게 신음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이냐?"

대공이 힘겹게 아드리안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갈라하드의 의견에 따를 것입니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일단, 데리고 다닐 생각입니다. 제법 도움이 되기도 해서."

"나는 무한하게 도움이 된다네!"

싸구려 알은 어느새 대공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올라갔지? 대공은 침음성을 흘릴 뿐 막지 않았다.

"소문이 돌 것이다."

대공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맹수의 것처럼 낮고 굵직했다. 예의 대공이었다.

무슨 소문을 말하는지 명백했다.

'싸구려 알에 관한 소문이겠지.'

초야 이야기도 있었으니, 아드리안나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 것이다. 마법이라고 말했지만, 무식한 놈들이 그걸 알겠는가.

"사실이 아니기에, 상관없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관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노려보며 굵직하게 말했다. 그 눈이 전보다 더 매서웠다.

당장 목이 뽑힐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대공이 입을 열었다.

"결혼을 서두르도록."

작은 틈도 없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예상하지 못한 명령이었다. 아드리안나도 마찬가지인지, 무표정이 깨지고 당황이 떠올랐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히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갈라하드는 대공을 살폈다. 마땅찮은 느낌이 가득했다.

대공은 갈라하드가 당연히 응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약혼자와 정식 혼인은 의미가 달랐으니까.

실보다 득이 큰 제안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결혼은 아직 아닙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뭐라?"

대공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아드리안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표정이 묘해졌다.

"아직 결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다시 말했다.

분위기가 돌변했다. 위에서 누른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싸구려 알이 황급히 할아부지-를 외쳤지만, 대공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갈라하드를 직시했다.

"왜지?"

투박한 물음이었다. 그렇기에 더 살벌했다.

"원래였으면 받았을 겁니다. 대공 전하의 하나뿐인 사위가 되는 기회니까. 실로 대단한 기회입니다."

"그래, 너는 이리 같은 놈이니. 근데 왜?"

대공이 주먹을 쥐었다. 뿌드득, 살벌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오면, 저 주먹이 머리를 두드릴 게 분명했다.

'왜?'

갈라하드는 중얼거렸다.

왜 거절했을까.

위에도 말했듯 본래의 갈라하드라면, 당장 받았을 것이다.

갈라하드가 지금도 북부에 충분히 권력을 행사했지만, 아드리안나와 실제로 혼인하는 건 궤가 다른 이야기였다.

받는 게 이득이었다.

애초에 북부로 온 순간부터 각오한 일 아닌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공도 그를 알기에 저리 장담하듯 물은 것이다.

분명 그랬는데-.

'안 내키는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왜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드리안나라서."

"놈, 감히."

대공이 벌떡 일어났다. 아래에 있던 식탁이 가벼이 부서졌다. 숨이 턱- 막혔다.

대공의 주먹이 움직였다. 머리만큼 거대한 주먹이었다. 굳은 살이 마치 망치의 정처럼 또렷했다.

'이건 죽는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앞을 막았다. 대공의 주먹이 우뚝 멈췄다. 바람이 갈라하드를 스쳤다.

'무슨 주먹이-.'

갈라하드는 서늘함에 목을 매만졌다.

"비켜라."

"싫습니다."

"아드리안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심했다.

'저 표정이 방패였군.'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나가 떠밀려서 결혼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늘 곧았던 푸른 눈이 흔들렸다.

"나는 그대가 하고 싶을때 하고 싶네. 그대에게는 중요한 일 아닌가."

갈라하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드리안나의 무표정이 온전히 깨졌다. 그 방패가 사라지고 드러난 건, 실로 어색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드리안나가 환하게 웃었다. 실로 어색하지만 순수한 웃음이었다.

헤벌쭉-.

대공의 얼굴이 또 녹았다.

'진짜 좀.'

전보다 더 짙은 웃음이었다. 갈라하드의 시선에 대공이 얼굴을 굳혔다.

"입만 산 놈."

대공이 구시렁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다가 멈췄다. 의자가 이미 부서져 있었기에.

싸구려 알이 대공의 허리를 오르고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대공을 향했다. 그 눈이 날카로웠다.

"대공 전하."

"······음?"

아드리안나의 서늘한 부름에 대공의 눈썹이 들썩였다.

"이야기도 듣지 않고 주먹부터 드는 건, 나쁜 습관입니다."

"습관?"

"예, 매번 주먹부터 드시지 않습니까."

아드리안나의 서늘한 지적에 대공의 눈이 씰룩해졌다. 마물에 물려도 꿈적도 하지 않던 대공이 흔들렸다.

"이야기를 듣지 않고, 압박부터 하는 건 고약하고 나쁜 습관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대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드리안나는 멈추지 않았다.

"갈라하드에게 사과하시죠."

"내가?"

"예, 잘못에 위아래가 없다는 건, 대공 전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곧은 눈으로 대공을 응시했다. 그 눈에는 작은 타협도 없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불같이 기세가 일어났다.

"어서."

아드리안나가 그를 막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대공이 끙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대공을 압박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의지가 보였다.

대공이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가-.

"······미안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면, 놓쳤을 정도로 작았다.

대공이 진짜 사과했다는 것에 갈라하드는 놀랐다.

"하하, 아닙니다. 오해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뿌드득, 대공의 이가 살벌한 소리를 냈지만, 전혀 압박이 되지 않았다.

그때, 싸구려 알이 대공의 어깨에 올라갔다.

'기어코 어깨까지 올라가다니-.'

대공의 시선이 싸구려 알을 향했다.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하라부지-!"

싸구려 알이 더 활짝 웃었다. 그 발음이 더 뭉개졌다.

대공의 얼굴이 가벼이 풀렸다.

싸구려 알이 냉큼 대공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경배하게나!"

머리를 팡팡 두드렸다.

대공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황녀의 정면에 잘 차려입은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이 선했지만, 그렇다고 유약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강직함, 4황자였다.

"찾았느냐?"

황녀의 물음에 4황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같은 황족이었다. 가벼운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였는데, 대뜸 용건부터 던지다니-.

'황녀 답군.'

4황자는 쓰게 웃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찾았냐고 물었다."

"요리사가 새로 왔다던데, 그 솜씨가 일품이더군요. 동쪽의 음식이 맛있다는 옛말이 옳나 봅니다."

"못 찾았군."

황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4황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마리는 찾았습니다."

황녀가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정보국 국장이었던 인물이라 그런지, 그 행적을 숨기는 게 상당하더군요. 저도 겨우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딨지?"

"음, 식사를 안 하셨다던데,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싫다. 어딨는지나 말하도록."

황녀의 단단한 거절에 4황자는 쓰게 웃었다.

4황자는 슬쩍 손짓했다. 황녀의 뒤로 기사들이 섰다.

앰버르탄 백작이 검을 잡고 그들을 응시했다. 황녀를 지키는 모양새였다. 4황자는 눈을 찡그렸다.

앰버르탄 백작은 4황자의 사람이었다. 충신이었는데, 황녀의 편에 서다니-.

'황녀가 그만큼 잘 해줬나?'

4황자는 황녀에게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베아트리스는 여명에 있습니다."

황녀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묘한 반응이었다.

"여명은 꽤 오래전부터 있던 조직인데, 그 이름이 올라온 건 최근입니다. 규모가 큰 데, 제국이 안 움직이는 걸 보면-."

어느새 황녀의 뒤로 기사들이 섰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작게 터졌다.

"의회 혹은 황족과 연관이 있는 것 같더군요."

기사의 서늘한 검이 황녀의 목을 겨눴다.

"약속과 다르잖소!"

앰버르탄 백작이 거칠게 외치며 검을 뽑았다. 형형한 오러가 일렁거리는 검으로 기사들을 겨눴다.

"아버님, 조용해야죠."

황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앰버르탄 백작이 뒤로 물러났다.

황녀는 제 목을 겨눈 검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목에 검이 겨눠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누이가 말했듯 황족이니까요."

4황자의 대답에 황녀가 까랑까랑하게 웃었다.

"그래. 재밌구나."

황녀는 오히려 검에 목을 들이밀었다. 그 하얀 목덜미에 붉은 줄이 새겨졌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황녀는 멈추지 않았다. 핏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기사들이 4황자를 쳐다봤다. 그 눈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저 가벼운 압박이었거늘.'

4황자는 눈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기사들이 황급히 검을 물렀다.

"시원했는데, 왜 치우느냐?"

황녀가 손으로 목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이 붉어졌다.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참 어렵게 가십니다."

4황자는 쓰게 웃었다.

황녀는 대답 대신 손을 움직였다. 그 손에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기사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지만, 황녀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검술 실력이 늘었다.'

본래 황녀는 검에 흥미가 없었다. 그저 죽지 못해서 사는 인물이었는데, 그 검술 실력이 전보다 날카로웠다.

'다시 검을 잡은 건가?'

어쩌면 북부의 결투에서 졌다는 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듯했다.

'아드리안나였나.'

"그래서 어딨다고?"

황녀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북부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녀의 웃음이 멈췄다.

'몰랐군.'

저건 꾸며낼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럴 인물도 아니었고.

4황자는 작게 안도했다.

"북부에 갈 조사대를 꾸렸다고 들었다."

"예, 갑자기 3황자가 참여했더군요."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의 주동자가 북부에서 온 마법사, 코르튼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에 북부로 조사대가 꾸려졌다.

3황자가 갑자기 참여를 밝혔고-. 다만, 4황자의 생각은 달랐다.

'황혼의 마탑주가 했겠지.'

황혼의 마탑주는 황실이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그에 책임을 돌릴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나도 간다."

황녀가 붉게 웃었다. 아주 위험한 미소였다.

4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던지."

황녀는 가벼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그이 선물 고르러 가요."

앰버르탄 백작이 황급히 끄덕였다.

199화 대마두

"배고프다네!"

싸구려 알이 대공의 머리를 두드렸다.

물론, 대공에게는 기별도 안 가는 듯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왜 나를 보는 건지-.'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싸구려 알을 살폈다.

싸구려 알이 배고프다면, 필요한 건 명백했다.

"이게 필요한가?"

갈라하드는 마족의 피를 담은 수통을 꺼내 흔들었다.

싸구려 알이 펄쩍 뛰었다. 대공의 어깨와 팔을 미끄럼틀 타듯 미끄러졌다. 이내 식탁을 가로 질러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대공이 허망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싸구려 알은 갈라하드의 앞에 있었다.

"배고프다네!"

싸구려 알에게 수통을 건네줬다. 싸구려 알이 털썩 주저앉아서, 수통을 두 손으로 잡고 입에 가져갔다.

꿀꺽-.

한 입 마신 싸구려 알이 눈을 찡그렸다.

"맛없다!"

최하급 마족의 피라서 그런 듯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편식은 좋지 않네."

"하지만 맛이 없다네!"

"먹기 싫으면 말게나. 내가 마실 테니까."

갈라하드가 수통을 가져가려 하자, 싸구려 알이 황급히 수통을 챙겼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성격이 참 급하군!"

싸구려 알은 냉큼 다시 수통을 입에 물었다. 꿀꺽, 꿀꺽-. 시원한 소리가 연신 들렸다.

그럴 때마다 묘한 감촉이 넘어왔다. 생명력이었다. 싸구려 알이 두고 간 알에서 생명력이 퍼졌다.

'생명력이 넘어오는군.'

"크으-. 맛없다!"

싸구려 알이 수통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참으로 싹수가 없는 놈이었다.

수통을 통째로 비운 싸구려 알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졸리다네."

먹자마자 졸리다니. 짐승과 다름없군.

그때, 싸구려 알이 대뜸 갈라하드를 향해 뛰었다.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그를 손으로 쳐내려고 하는 순간,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

'살벌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손을 내렸다.

싸구려 알이 머리를 그대로 갈라하드의 가슴에 박았다.

"뭐 하는······."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갈라하드의 가슴에 부딪힌 싸구려 알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가슴으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아래를 내려봤다. 가슴에서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두근!

대답이라도 하듯 박동이 거칠게 뛰었다. 싸구려 알이 다시 가슴에 들어왔다.

'탈부착이었나?'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어디 갔지?"

대공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험악한 분위기가 넘실거렸지만, 전처럼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방금 못 보셨습니까? 들어갔습니다."

갈라하드는 가슴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두근! 싸구려 알이 대답하듯 뛰었다.

대공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이내 길게 침음성을 흘렸다.

"다시 나오느냐?"

"아마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음-."

대공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갈라하드의 얼굴도 복잡했다. 피곤하다고 다시 들어올 줄이야-.

'일단, 그웬에게 가봐야겠군.'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드리안나가 따라서 일어났다.

"식사하고 가도록."

그때, 대공이 나지막한 명령을 내렸다. 맹수의 으르렁거림처럼 사나운 목소리였다.

갈라하드는 슬쩍 다시 앉았다. 아드리안나도 따라서 앉았다.

식사는 늘 그렇듯 고기 뜯는 소리밖에 안 났다.

아드리안나는 먹는 소리도 내지 않고 먹었으며, 대공은 갈라하드의 가슴을 보며 고기를 뜯었다.

'참으로 과묵한 부녀군.'

결국, 갈라하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2대대의 마경은 1대대와 다르더군."

"어떤 것이 다릅니까?"

"1대대 쪽보다 더 연했다네. 가령 마경의 중심이 있다면, 1대대 쪽에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었지. 더불어 마물이나 마족도 더 약했고."

"그걸 알아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감탄했다.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으며, 다른 말들을 떠들었다.

그제야 대화가 좀 흘렀다.

그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황실에서 북부 조사대를 구성했다."

'조사대라-.'

전에 들었던 이야기였다. 조사대라고 한들, 문제 될 건 없었다.

고작해야 북부의 마법사 코르튼이 독단으로 벌인 짓이었다.

갈라하드는 조사대의 일 처리를 알고 있었다. 직접 당해봤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비해 둔 상태였다.

조사대가 와도 걸릴 건 없었다.

"세 번째 개새끼가 꼈다는군."

이어진 대공의 말에 갈라하드의 미간이 굳었다.

세 번째 개새끼는 아마 3황자일 것이다.

'3황자가 북부 조사대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3황자는 저번에 왔을 때, 된통 당하고 돌아갔다.

대공과 북부, 갈라하드에 관한 반감이 상당할 것이다. 그런 3황자가 조사대에 포함됐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4황자에게 3황자를 잡을 목줄을 줬다.

4황자는 3황자를 옥죄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3황자가 북부 조사대에 합류했다는 건-.

'구실을 잡을 생각이군.'

북부와 전쟁을 일으켜 공을 세울 생각일 것이다. 그게 이제껏 3황자의 방식이었으니까.

만약 3황자가 작정하고 나온다면-.

'꽤 까다로울지도.'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잘 처리하도록."

"예, 그게 제 전문입니다."

쯧, 대공이 혀를 찼다.

"아, 그에 관해서 저한테 일임하신 게 맞습니까?"

갈라하드는 굳이 재차 물었다.

대공이 끄덕이자,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음."

갈라하드는 곧장 돌아 나섰다.

이번에는 대공도 잡지 않았다.

"어디 가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정보국에 갈 생각일세. 아무래도 처리할 일이 늘어서 말이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목소리에 언뜻 진심이 보였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네. 마법사는 튼튼하니까."

갈라하드는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허전하여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선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저번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머리 위로 눈이 차차 쌓였다.

"자네, 안 오고 뭐 하나?"

"아,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대형견 같았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도 다행이군."

"뭐가 말입니까?"

"이렇게 넣을 수 있다면, 굳이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나?"

갈라하드는 슬쩍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니 부담가지지 말게나."

갈라하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아드리안나가 조금 늦게 따라왔다.

****

톡.

자밋은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며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눈이 많이 오는군."

갈라하드가 혀를 차며 어깨를 털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흩어졌다.

그 뒤로 아드리안나가 따라 들어왔다. 자밋을 본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투박한 인사였다.

"이쪽으로 앉게나."

"예."

"핸섬, 간식 좀 내오게."

갈라하드가 슬쩍 손짓하자, 핸섬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면 카페인 줄 알겠어요."

"카페나 정보국이나. 하는 일은 비슷하지 않나. 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또 그걸 전해주는 거니까."

"말은 참 잘하시네요."

"내 장기니까. 아, 여기 두게."

핸섬이 간식을 가득 가지고 나왔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아드리안나 앞으로 밀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 무표정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신나 보였다.

"재밌는 소문이 돌던데요?"

자밋은 슬쩍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자밋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소문은 가공되지 않은 정보 아니었어요?"

자밋은 슬쩍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아드리안나의 볼이 살짝 빵빵했다. 진지한 무표정에 볼만 열심히 움직였다.

"가공한다고 모두 보석이 되지는 않지."

갈라하드의 단호한 대답에 자밋은 더는 묻지 않았다.

"작전과장이 정보를 보냈어요. 아주 진심이던데요?"

자밋은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종이들이 쌓여 있었다. 정보국의 작전과장이 보낸 것들이었다.

"역시 작전과장이군."

"네, 필요한 정보들은 이미 넘어왔고, 갱신되는 것들은 추가로 보내기로 했어요. 아, 뻐꾸기들도 연결됐고요."

자밋은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핸섬과 제임스가 기합이 잔뜩 들어 있었다.

"둘이 수도에서 연결했어요."

"잘했네. 몸은 좀 괜찮나?"

"예! 영광입니다!"

"그래, 고생했군. 봉급 좀 더 챙겨주게나."

"알았어요. 3황자 때문에 왔죠?"

자밋의 추측에 갈라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대에 포함되었다는군."

"맞아요. 3황자가 아주 단단히 화가 났다는데요."

"참 속이 좁은 놈일세."

"그러게요."

자밋은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3황자의 정보가 적힌 종이였다.

그를 빠르게 훑은 갈라하드의 얼굴이 굳었다.

"단단히 준비한 것 같아요. 3황자는 군부 쪽과 연관이 깊잖아요. 이번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이 움직인다더군요."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제국군의 대장군은 총 다섯이었다. 다만, 대장군은 그리 가벼이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대장군이 이렇게 빨리 움직였다는 건-.

"이미 준비하고 있었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게 아니더라도, 다른 구실을 만들었을 거예요. 놈이 늘 하는 짓이니까요."

"그래, 그게 놈의 장기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에서 온 마법사 코르튼이 아니었어도, 3황자는 다른 구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갈라하드는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볼이 열심히 움직였다. 아드리안나 앞에 쌓인 간식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좀 드시겠습니까?"

아드리안나가 하나 남은 쿠키를 내밀며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군을 위시한 3황자의 진격은 막을 수 없었다. 놈은 어떻게든 북부와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의회의 승인이 떨어졌나?'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의회는 늘 위장한 평화를 꿈꾸는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3황자의 마지막 발악이군."

자밋이 가벼이 끄덕였다.

"문제는 그 발악이 상당히 강하다는 거고."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연초를 꺼내려는데, 그 위에 사탕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사탕을 꺼내서 입에 넣었다.

'나쁘지 않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자밋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3황자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목표는 아마 북부의 마법사 '코르튼'일 것이다.

그 코르튼을 이용해야 했다.

"아무래도 코르튼은 출세할 운명을 타고난 것 같군."

자밋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

"나보고 흑마법학회 학회장을 하라고? 갑자기?"

코르튼이 벌떡 일어났다. 그 살집 두둑한 눈에 의심이 떠올랐다.

'의심하는군.'

당연한 이야기였다. 대뜸 흑마법학회의 학회장을 준다는데, 아무리 코르튼이라도 의심할만했다.

'애초에 미끼가 맞기도 하고.'

갈라하드는 코르튼을 설득하기 위한 것들을 떠올렸다.

"자네 열심히 하지 않았나. 저번에도 자의는 아니었지만, 공을 세우기도 했고."

"내가? 난 열심히 산 적이 없는데?"

참으로 당당한 코르튼의 대답에 갈라하드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음, 아닐세. 자네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네. 그저 타고난 인품이나 재능이 안타까울 뿐이지. 주어진 것에서는 열심히 했다고 볼 수 있지."

"······그런가?"

코르튼이 갸우뚱거렸다.

"동문 좋다는 게 뭔가. 챙겨줘야지."

"갑자기?"

"음, 그냥 주는 건 아닐세."

갈라하드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사람이라는 게, 그런 법이었다. 그냥 주는 것보다 조건을 걸고 받으면, 더 잘 믿었다.

"그냥이 아니라면?"

"그래, 고통의 알 기억하나?"

"그게 뭔데."

코르튼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시에는 그리 무게를 잡고 주더니-.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예전에 조건을 걸고 나한테 먹인 것 말일세."

"아, 그 끔찍하게 생긴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거?"

"그 정도는 아니었네만-. 아무튼, 그때 걸었던 조건 기억하나?"

"까먹었다."

"그럴 줄 알았다네. 그 조건을 지워주는 대신 자네에게 학회장 자리를 주는 걸세. 어떤가?"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코르튼이라면 당연히 받을 것이다. 출세에 눈이 먼 놈이었으니까. 그를 위해서 이렇게 꾸미지 않았나.

다만, 코르튼은 갈라하드의 손을 잡지 않았다.

'눈치가 생겼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때-.

"학회장이 높나? 장로가 높나?"

코르튼이 멍청한 질문을 던졌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코르튼이 망설인 이유를 깨달았다.

'둘 중 높은 걸 고르려는 거군.'

실로 적나라한 욕망이었다. 코르튼은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음, 장로는 명예직일세. 학회장은 실질적인 직위지. 둘을 동시에 할 수 있지."

"······그러면 마탑의 장로이면서, 흑마법학회의 학회장까지 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지."

코르튼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나 개 쩌는군!"

코르튼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그래, 동문 좋다는 게 뭔가. 챙겨야지."

"정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네가 나를 일회용 방패 정도로 생각하는 줄 알았건만! 감동이군!"

"크흠, 오해일세. 동문인데, 어찌 그러겠나."

"그렇지! 으하하하!"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자, 이제부터 흑마법학회를 본격적으로 키울 생각일세. 한때 여명 산하로 일했던 조직 아닌가? 그 가능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 이제 흑마법학회는 북부의 흑막, 여명의 전진기지가 되는 걸세."

코르튼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너무 대놓고 말했나?'

그때-.

"좋다! 좋아! 노력 없이 출세할 수 없다고 했던 놈들 보았느냐! 나는 될 놈이다! 으하하하하!"

코르튼이 호탕하게 웃었다.

"자, 북부를 불바다로 만드는 걸세!"

갈라하드도 따라 웃었다.

둘은 한참이나 웃었다.

****

"팔호."

오랜만의 호출이었다.

팔호는 까마귀 가면을 고쳐 쓰고 고개를 들었다.

가면 너머로 무심한 갈라하드가 보였다.

"예."

"이제 코르튼이 흑마법학회 학회장일세."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정오의 마탑을 세운 뒤로 흑마법학회는 사실상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 내부 인원이 전부 마탑에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코르튼이 흑마법학회 학회장이라니?

의문이 들었지만, 팔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그리고 북부에서 있었던 일들 말일세. 가령 가르세튼 성의 일이라던가, 마경이 넓어지거나 좁아진 것들 말이야."

"여명과 관련된 것들 말입니까?"

"그래, 그것들."

"예."

"전부 코르튼이 뒤에서 벌인 짓이더군."

갈라하드가 가벼이 말했다.

모든 걸 코르튼의 짓으로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왜 갑자기 코르튼을?'

"심지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수도에 가서 황궁까지 습격했더군. 아주 지독한 놈일세."

이어진 설명에 팔호는 작게 탄식했다.

'모든 걸, 코르튼이 벌인 짓으로 돌리려는 거군.'

"예, 이해했습니다."

"역시 팔호군. 참모진에는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자네는 항간에 소문을 퍼뜨리게."

"예."

소문을 만드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다. 더불어 북부 놈들은 순박하여, 금방 사실이라고 믿었다.

당장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낳았다는 괴상한 소문이 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애초에 코르튼은 흑마법학회 출신이었다. 실제로 계속 여명에게 비볐었고.

갈라하드가 참모진을 설득한다면, 그 성공 확률은 더욱 올라갔다.

다만, 그렇게 되면-.

'코르튼은 희대의 대마두가 되겠군.'

······그 코르튼이?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마석 좀 있나?"

"예, 어느 정도 말씀 이십니까?"

"화염의 폭풍을 펼칠 정도면 되겠군."

화염의 폭풍은 7위계의 대마법이었다. 공성전에서나 쓰는 마법인데, 그를 펼칠 마석이 왜 필요하지?

서늘한 불안감이 올라왔다.

"황제에게 공격을 가한 놈이 대공에게는 아무 짓도 안 한 게 이상하지 않나?"

갈라하드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대공의 성이 있었다.

"음, 예물을 줬었나?"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200화 불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