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빡빡
'음.'
갈라하드는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웬이 갈라하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그랬나?"
갈라하드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요!"
그웬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웬은 갈라하드의 마법을 지적했다.
다시 말하자면, 갈라하드는 그웬에게 마법을 지적당했다.
'그웬에게 마법을-?'
갈라하드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뒤늦게 이성이 떠올랐다.
'그웬은 황혼의 마탑주 마법을 한 번에 배웠다.'
바로 쓰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웬의 지적은 온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그웬에게 마법을 지적 당했다고.'
갈라하드는 입술을 씹었다.
본래 자존심을 세우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웬이라는 점이 갈라하드를 꾹꾹 눌렀다.
그웬은 길버튼까지 인정한 빡대가리였다. 그런 그웬에게 마법을 지적당했다고?
'믿기지가 않는군.'
다만, 판단은 이성으로 해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갈라하드는 목소리를 누르며 물었다.
"이렇게요! 짜잔!"
그웬이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거기에 선명한 얼음송곳이 있었다. 완벽한 얼음송곳이었다.
황혼의 마탑주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혼의 마탑주는 대기의 마나를 사용했고, 그웬은 순수 자신의 마나로 구성했으니까.
그 밀도 차이가 당연히 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렇게? 짜잔?'
이걸 설명이라고 하는 건가?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살폈다. 그웬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웬은 진심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래, 그웬이니까.'
"미안하지만, 설명이 잘 이해가 안 가는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겠나?"
"이게 이해가 안 돼요? 왜요?"
그웬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음,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보여줬잖아요?"
"보여준다고 펼칠 수 있으면, 세상 모두가 마법사가 됐겠지. 데미안도 대마법사가 됐을 걸세."
"아, 그렇구나! 그러면 어떻게 알려주지?"
그웬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하드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대는 마법을 계산으로 쓰는 게 아니니까. 내 마법에서 어디 부분이 잘못된 지 지적하는 게 빠를 걸세."
갈라하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하! 그렇군요! 하긴 보여줘도 모르니까!"
"그렇······네. 다시 펼칠 테니, 어느 부분이 잘못됐는지 지적하겠나?"
"좋아요! 저만 믿으세요!"
그웬이 설거지라도 하는 것처럼, 소매를 걷어 올렸다. 왜 마법을 가르치는데 소매를 걷지? 지적하고 싶었지만, 갈라하드는 애써 참았다.
'이건 기회다.'
만약 그웬에게 배울 수 있다면, 시간을 굉장히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집중했다. 마나를 움직이니 차분해졌다. 계산을 점검했다.
이윽고 손가락을 튕겼다.
갈라하드 앞에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전보다 더 정교하고, 더 실용적인 얼음송곳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갈라하드는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자였다. 황혼의 마탑주 정도의 천재는 아니었지만, 최상위 인재인 건 분명했다.
"어디가 잘못됐지?"
갈라하드는 그웬에게 얼음송곳을 당당히 내밀었다.
그때, 그웬이 입을 열었다.
"전부 다요!"
갈라하드의 집중력이 뚝 끊겼다. 얼음송곳이 흐트러졌다. 마법이 흩어진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 정도로 평정이 흔들렸다.
"······지금 전부라고 했나?"
"네! 시작부터 틀렸어요!"
"확실한가?"
"네!"
대답이 상당히 활기찼다. 갈라하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작의 어느 부분이?"
"그러니까 너무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갑갑해요!"
그웬이 제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너무 추상적일세."
"그러니까! 마법이! 답답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게나."
"막! 여기가 꾹 눌린 느낌? 꽉 막힌 느낌?"
열심히 설명하는 그웬에 괜히 두통이 올라왔다.
그 지적이 너무 추상적이었다. 심각한 문제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웬은 빡대가리니까.
어쩌겠나. 이쪽에서 알아서 해석해야지.
"그래, 답답한 느낌이라고?"
"네. 완전 꽉 막힌 느낌!"
"시작 부분에서 그랬나?"
"손가락 튕기기 전에요!"
마나의 배분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마나를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지금은 어떤가?"
"와! 전보다 더 나아졌어요! 근데 뭔가 지금은 또 너무 비실비실 느낌?"
"그렇군. 지금은?"
"비실비실!"
"부족하다는 뜻이군."
"아니요! 비실비실이라니까요!"
"······그래."
갈라하드는 그웬의 언어를 번역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리고-.
"오, 그거예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웬이 박수치며 칭찬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다만, 그웬의 말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한결 더 자연스러웠기에.
'원래라면 백 번은 넘게 부딪혀야 알아낼 부분이다.'
그런데 그웬은 단번에 찾아냈다. 그 괴상한 주문이 어려웠지만, 효율적인 건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새삼스럽게 그웬을 쳐다봤다.
"대단하군. 그웬."
그웬이 헤헤 웃었다. 칭찬이 좋은 듯, 그 얼굴이 풀어졌다.
'아주 대단해.'
그웬의 언어가 상당히 모호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건 갈라하드가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자, 다음으로 넘어가지. 그래, 다음 문제는 어디인가?"
"음, 다시 써보세요!"
"그건 명령조 아닌가? 음, 그건 중요하지 않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젓고 마나에 집중했다.
마족인 최초의 마법사에게도 제자를 자처했던 갈라하드였다.
마법을 위해서라면, 그웬에게 배우는 건 문제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하! 참! 답답하네!"
아무 문제 없-.
"너무 밍밍해요! 조금 더 짭쪼름하게!"
아무 문제-.
"이게 왜 안 되지? 빡대가리인 나도 되는데? 설마 빡빡······."
······아무 문제 없었다.
"화나셨어요?"
잔뜩 겁먹은 얼굴이 된 그웬에-.
"그럴 리가. 다시 한번 해보겠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올렸다.
그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
'이거였군.'
갈라하드는 얼음송곳을 살폈다.
얼음송곳의 모습이 전보다 정교했다. 공기 저항을 줄이는 틈이 확실했다.
최소 수천 번은 써야할 완성도였는데, 하루 만에 끝냈다.
그웬 덕분이었다.
마나가 밍밍하다거나, 힘이 없다거나, 답답하다거나 같은 괴상한 훈수는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황혼의 마탑주 얼음송곳이 기이할 정도로 복잡한 걸 고려하면, 획기적으로 줄인 거였다.
"와! 이제 볼만해요!"
"볼만하다니-."
갈라하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웬, 정말 대단하군."
"헤헤."
"진심일세. 정말 훌륭해."
"진짜요?"
갈라하드는 굳게 끄덕였다. 그웬의 얼굴이 더욱 풀어졌다.
'놀랍군. 정말로.'
감성으로 마법을 쓴다는 게, 이런 이점을 보일 줄이야.
'왜 그웬이 수첩에 없었던 거지?'
아니, 없는 게 당연하지. 애초에 그웬은 마법을 혐오하는 하녀였다. 그 모친이 마녀였기 때문이었다.
그웬이 마법을 쓰는 데까지 갈라하드가 기울인 노력이 얼마인가.
만약 갈라하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웬은 그저 하녀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게 죽었겠지.'
그런데 그웬은 갈라하드로 인해서 마법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흐름을 비튼 것이다.
호재였다.
그리고 그 흐름을 더욱 키우려면-.
'황혼의 마탑주가 필요하다.'
황혼의 마탑주는 이론적인 마법의 극의에 이른 놈이었다. 덕분에 그 마법이 극도로 아름다웠고, 감성으로 마법을 쓰는 그웬에 통했다.
'그웬을 황혼의 마탑주와 붙여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종이와 펜 좀 부탁하네."
갈라하드의 명령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곧 갈라하드 앞에 종이와 펜이 놓였다.
황혼의 마탑주가 적은 식은 아주 깔끔했다. 원래 계산을 잘하는 놈의 식은 깔끔하고 간결했다. 황혼의 마탑주는 최고로 계산을 잘하는 놈이었고.
다만, 그건 범재에게 어울리는 설명이 아니었다.
아까 장로들이 괜히 지레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그를 가르치려면, 범재들을 위한 해설집이 필요했다.
'일단, 계산부터-.'
갈라하드는 머릿속에 있는 수식을 정리했다. 펜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펜이 멈췄다. 쌓인 종이가 얇은 책 정도의 두께였다.
황혼의 마탑주가 준 계산식이 개정판이라면, 이 책은 그것의 해설집이었다. 사족이 잔뜩 붙은, 꽤 친절한 해설집.
"자, 그웬. 고생했네."
"이게 뭔데요?"
"얼음송곳의 수식일세."
수식? 그웬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네가 한 것과 다름없네. 나는 그저 수식화하여 정리했을 뿐이지. 이건 혁신일세. 배우는 이로 하여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걸세."
"네? 제가요? 아닌데요! 저 숫자 몰라요!"
그웬이 꼭 범행을 부인하듯 자백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가 숫자를 모른다니-.
'그래, 그웬이니까.'
감성 마법사 아닌가. 오히려 숫자에 약한 게 강점이었다.
"괜찮네. 어찌 사람이 완벽할 수 있겠나."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아무튼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그웬이 헤벌레 웃었다.
"도움 정도겠나. 오늘은 자네가 톰보다 유능했네."
"평소에는 아니었어요?!"
"양심이 없군."
그웬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양심이 없는 거지?
"갈라하드 님에게 도움도 되고! 보람찬 하루였어요."
그웬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꼭 정리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마나 아직 남았지?"
"네? 남았어요. 왜요?"
"왜냐니. 이제 시작해야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풀었다.
"꽤 오래 하지 않았어요? 밥도 안 먹었는데."
"걱정하지 말게. 마법사는 튼튼해서 며칠은 안 자도 되네."
"하지만 이미······."
"괜찮네. 고작 하루야."
그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저는 피곤한데요!"
"마법을 쓰는데 왜 피곤한가? 그건 마법사가 아닐세. 마법사에게 마법은 각성제일세. 자네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이게 아닌데-."
그웬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자, 시작하지."
짙게 웃는 갈라하드에 그웬은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
"꽥."
그웬이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그웬?"
"더··· 더는 못해요! 저는 한 톨의 힘도 없어요!"
"음, 그래?"
갈라하드는 슬쩍 그웬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마나를 넘겼다.
"아직 남았군."
"네?!"
그웬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죄송해요! 안 까불게요!"
"까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데. 자, 말할 시간에 일어나게. 딱 한 번만 더하지."
"아까도 그러셨잖아요!"
"자네도 아까 더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자, 결과를 보게나. 더 할 수 있었지? 지금도 마찬가지일세. 마나 탈진이 올 수도 있지만, 마법사라면 한 번은 겪어봐야지."
"······마나 탈진은 죽는 것보다 아프다던데요?"
"죽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눈망울이 촉촉해지더니-.
"꽥."
고개가 뒤로 꺾였다. 기절한 것이다. 갈라하드는 혹시 몰라서 그 이마를 두드렸다.
'진짜 기절했군.'
갈라하드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일어났다.
얼음송곳을 너무 많이 반복한 탓에 손이 얼얼했다.
다만, 성과는 있었다.
갈라하드는 잠시 집중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정교한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아직 실전에 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큰 성과군.'
그웬 덕분이었다. 마나 보조 배터리 역할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기절하여 더 쓸 수는 없을 듯했다.
그웬보다 갈라하드가 더 혹사한 상황이었다. 그에 정신이 어지러웠지만-.
'다음은 마나 농도 올리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시간은 여유롭지 않았다. 있을 때 최대한 알차게 써야만 했다.
'체내 농도를 올린다.'
갈라하드는 램프를 매만졌다.
체내 마나 농도 올리는 건 조심해야 했다.
실수하면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족의 피에 높은 농도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마족과 인간의 뚜렷한 차이는 피에 흐르는 짙은 농도의 마나였으니까. 피에 짙은 마나 농도를 넣는 건 괜히 찝찝했다.
다만, 지금은 달랐다.
'마족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저주다.'
이번 성서 사건으로 인해 확실해졌다. 마족이 되기 위해서는 '저주'가 필요했다.
저주가 위험했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쪽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으니까.'
"······왜 그러십니까?"
"거기 계속 있었나?"
"예, 열심히 하시더군요."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았다. 갈라하드는 잠시 손을 풀었다.
"마법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마법에 입문하는 거라면 누구든 할 수 있지. 그 데미안도 이제 작은 불씨는 만들지 않나. 진짜 마법사가 되는 건 다른 이야기지만."
"아, 그렇습니다. 음."
아드리안나가 작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뒤늦게 덧붙였다.
"자네만 제외하고."
"······예?"
"자네는 마나를 태우지 않나."
"아-."
아드리안나가 탄식했다. 묘하게 아쉬워하는 반응이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나?"
"궁금했습니다. 워낙 좋아하시니까."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익숙한 인물이 뛰어왔다. 참모인 테오도르였다. 그 걸음이 상당히 조급했다.
참모가 저렇게 다급하게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나?'
테오도르가 갈라하드 앞에 도착했다. 얼마나 다급하게 왔는지 그 숨이 거의 넘어갈 듯했다.
"왜 그러나? 천천히 숨을 쉬게."
"······예."
테오도르가 숨을 천천히 돌렸다.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했다.
'도대체 무슨-.'
갈라하드는 경우의 수를 따졌다.
그때,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잘못하셨습니까?"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잘못이라니?
"무슨 잘못 말인가?"
"대공 전하의 심기를 건드릴 잘못 말입니다."
테오도르가 아드리안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 잘못?'
갈라하드는 빠르게 행적을 되짚었다. 너무 많았다. 물론, 대부분 해소했지만-.
"범위가 너무 넓네만."
"예? 있긴 하시다는-."
"일단,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테오도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얼굴에 조급함이 가득했다. 그 차분했던 테오도르가 저런 모습이라니.
"도대체 대공 전하가 어떻길래 그런가?"
테오도르가 입을 달싹거렸다. 말을 고르다가 이내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 굉장히 화나셨습니다."
'대공이 굉장히 화났다?'
참으로 살벌한 문장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했던 짓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대공을 굉장히 화나게 할만한 일은 없었는데?
"잘못 본 거 아닌가? 대공 전하 얼굴은 원래 흉악하다네. 나도 종종 고위 마물로 오해하지. 하지만 원래 인상이 흉한 거더군."
"······예?"
"잘못 보지 않았냐는 거지."
"아닙니다. 화나신 거 맞습니다."
테오도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테오도르는 대공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참모였다. 그런 테오도르가 저리 말할 정도면 화난 건 분명했다.
"그렇군. 근데 그 화난 이유가 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갈라하드는 타당한 의문을 던졌다.
"······대공 전하께서 갈라하드 대공 대리를 부르셨습니다. 당장 오라고-."
테오도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굉장히 화난 대공이 당장 불렀다.
'이건 위험하다.'
갈라하드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옆에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아드리안나! 대공 전하께서 부른다는군. 같이 가지."
"아,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시원치 않았지만, 일단 끄덕였으니 괜찮았다.
'아드리안나가 있어서 다행이군.'
아드리안나는 대공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아무리 화났어도 아드리안나만 있으면, 억누를 수 있었다.
갈라하드는 깊게 안도했다.
그때-.
"아, 혼자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테오도르가 선고했다.
사형수를 호출하는 간수 같은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186화 장인어른
"······진짜 잘못한 게 없으십니까?"
테오도르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눈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대공이 왜-.'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은 아드리안나에게 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뒤에 숨는 걸 막은 것이다.
심지어 대공이 '명령'으로 못 박았기에, 아드리안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대공이 왜 화났지?'
입이 바짝 말랐다.
머리가 바쁘게 회전했다. 갈라하드는 다급히 했던 일들을 점검했다.
'내가 마물을 부린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대공이 뾰족아리에 붙어서 온 거지만, 갈라하드가 마물을 부른 건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갈라하드가 대공을 부른 거였다.
'기분 좋아 보였는데?'
뾰족아리를 타고 내려오던 대공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때,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테오도르의 뒤에는 참모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대공 전하가 왜 화났는지는 나도 의문일세. 나는 방금 가르세튼 성을 구하고 왔는데 말이야."
"맞습니다! 갈라하드 대공 대리가 잘못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잘하면 모를까!"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대공 전하에게 한 번 더······."
참모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마음은 고맙네만, 오히려 역효과일 걸세. 아드리안나까지 막았으니까."
참모들이 일제히 침음성을 흘렸다.
계단을 오르자, 대공의 방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전보다 더 커졌군.'
마물이 편하게 드나들게 하기 위함인 듯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병사들이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이 전부 푸르죽죽했다. 안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안쪽에서 거친 기세가 몰아쳤다.
'무슨 인간이 단순 기세만으로-.'
갈라하드는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참모들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갈라하드는 테오도르를 잡아줬다.
"아! 감사합니다."
"아닐세. 단단히 토라지셨군."
"예. 아주."
테오도르가 갈라하드를 보며 끄덕였다.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저희 참모진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참모들이 다시 떠들었다. 작은놈들이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지-.
"마음은 고맙지만, 대공 전하께서 부르셨으니 내가 가야지."
갈라하드는 무거운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갈라하드 대공 대리! 용감하십니다!"
"그 용맹함! 저희가 기억하겠습니다!"
참모들이 어설픈 경례를 올렸다. 갈라하드는 대충 받아주고 걸음을 옮겼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곳에서 갈라하드가 제일 먼저 마주한 건, 벽에 걸린 거대한 마물의 목이었다.
'한결같군.'
갈라하드는 마나를 계속해서 돌리며 걸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자 대공이 보였다. 대공은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공의 옆에는 발에 불이 이글거리는 말 마물이 있었다. 마물 발의 불이 방의 유일한 빛이었다.
대공의 얼굴이 연신 일렁거렸다. 음영에 굵직한 흉터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최근에 대공과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적의가 더 심해졌군.'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어찌나 형형한지, 마주한 것만으로 눈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차르티엔.'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방이 더 어두워졌다.
톡톡,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연속으로 튕겼다.
두근! 두근! 두근! 마나가 연신 퍼졌다.
대공의 피부는 고위 마물의 것과 다름없었고, 그 근육은 오러였다. 뼈는 아직 본 적조차 없었다.
'잡을 수 있나?'
갈라하드는 빠르게 견적을 두드렸다.
'답이 없는데?'
마법으로 그 피부를 뚫는 것도 어려운데, 심지어 그 아래에는 오러가 있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는다는 말인가.
'업화는 통하겠지.'
업화는 모든 걸 태우는 불이었다. 피부가 질기고 근육이 오러여도, 업화는 통할 것이다.
최대한 압축한 마나를 넣어서 업화를 쓴다면-.
그때,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층고가 높았는데, 대공이 우뚝 서니 낮은 느낌이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갈라하드는 눈에 힘을 주고 집중했다.
대공이 주먹을 쥐었다.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미리 준비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업화였다. 업화의 성능은 확실했지만, 어떻게 맞추느냐가 문제였다. 업화는 너무 느리고 작았다.
'대공이 안 피하지 않을까?'
대공은 그야말로 무식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서 부수는 스타일이었다.
만약 업화를 던진다면, 안 피할 가능성이 있었다.
"재밌는 불이군."
대공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갈라하드는 곧장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불씨인 업화가 하늘거리며 날아갔다.
업화를 본 대공이 입가를 비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예상대로 대공은 업화에 다가갔다.
갈라하드는 이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스파크가 연속으로 튀며 커졌고, 번개가 대공에게 쏘아졌다.
화려한 번개가 대공의 시선을 가렸다.
대공은 번개를 무시하고, 업화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퍼엉, 공기 터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업화의 크기가 순간 작아졌다.
'업화를 주먹으로 부순다고?'
아니, 착각이었다. 작아졌던 업화가 대공의 손에 붙었다. 불씨가 순식간에 부풀었다.
"음."
대공은 미련 없이 손을 움직였다. 서늘한 소리와 함께 업화가 떨어졌다.
'피부를 뜯었군.'
대공의 주먹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업화는 통한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참으로 이리 같은 놈이다."
대공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늑대라고 합니다."
"아니, 너는 이리다."
"대공께서 그렇다니 그렇겠군요."
"입은 살았군."
갈라하드는 태평하게 말을 받았다. 다만, 속은 여유롭지 못했다. 대공의 존재감이 계속해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기가 불편하신 이유가 혹시 제가 마물을 마음대로 불러서 그런 겁니까? 그거라면, 제가 마법진을 새겼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공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오답이군.'
갈라하드는 텁텁하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와 손을 잡은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제가 아니라 아드리안나가 부탁한 겁니다."
대공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안 그래도 거셌던 압박감이 더욱 살벌해졌다. 오히려 더 화를 돋군 듯한 반응이었다.
'치명적인 오답이군.'
"손을 잡았다?"
"음, 아드리안나가 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탁하게 했다?"
분위기가 더 서늘해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저는 떳떳합니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떳떳하다?"
"예, 제 모든 행동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지른 일은 있나 보군."
"어찌 사내가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겠습니까."
"열어서, 확인하면 되겠지."
뭐를 연다고-. 그때, 대공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앙! 폭탄 터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바닥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갈라하드와 대공이 동시에 떨어졌다. 대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주먹을 계속 휘둘렀다.
쾅! 바닥이 연속으로 무너졌다. 꽤 높은 곳에 있었는데,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뭐지?'
대공의 주먹이 멈추자, 주변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대충 봐도 쓰지 않는 창고였다.
"음."
대공이 주먹을 털며 눈을 돌렸다.
찰나였지만, 갈라하드는 놓치지 않았다.
'뭔가를 의식한다. 누군가 있는 건가?'
[여기는 조용하다. 마물이 쥐와 새를 전부 먹었기에.]
마물의 무덤에서 대공이 했던 말이었다. 쥐와 새는 간자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압축했던 마나를 이용했다.
"침묵의 막."
손가락을 튕기자, 짙은 마나가 사방으로 퍼졌다. 보이지 않는 벽이 주변을 둘렀다.
"방음이 될 겁니다."
"눈치는 빠르군."
"처세에 능하지요."
대공이 끄덕이며 손을 풀었다. 갈라하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황궁을 공격했다고."
그때, 대공이 본론을 꺼냈다. 대공의 험상궂은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나라고 확신하고 있군.'
발뺌하는 건 좋지 않았다. 역효과를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갈라하드는 냉큼 인정했다. 대공의 눈썹이 흔들렸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어쩌다가 황궁을 공격하지?"
"인생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왜 그랬지?"
대공이 갈라하드의 말을 잘랐다.
"황제가 궁금했습니다."
갈라하드는 순순히 고백했다.
"황제가 궁금해서, 황궁에 마법을 떨어뜨렸다?"
대공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번에는 흉터도 가리지 못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들었다.
"일단, 첫 번째 마법이 아니라 비행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 것이 아니라. 황혼의 마탑주 것이고. 놈이 실수한 겁니다. 저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떨어지는 걸 막은 겁니다."
"그래서 황궁에 떨궜군."
"대신 수백의 제국민을 살렸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남이 알아주길 바래서 한 선행은 아닙니다."
대공이 허허 웃었다. 뭐 이런 놈이 있냐는 반응이었다. 이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그게 전부냐?"
"덤으로 황제가 죽으면 좋기도 하고."
대공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눈치를 봤다.
잠시 뒤에 대공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광소가 터졌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장막이 흔들릴 정도였다.
'무슨 사람 웃음소리가-.'
마나를 가득 부어 만든 장막이 이렇게 흔들리다니. 갈라하드는 질색하며 집중했다.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대공은 한참이나 웃었다.
이윽고 웃음이 뚝- 멈췄다.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미친놈이군."
투박한 평가였다.
"그 반대입니다. 실로 이성적인 겁니다. 결국, 황제도, 제국민도 무사하지 않습니까?"
쯧, 대공이 가벼이 혀를 찼다.
이내 천천히 끄덕였다.
"황제는 자신을 위협할 정도의 강자가 나타나면 협약을 제안한다."
"겁이 많군요."
"아니, 멍청해서다."
"어쩐지 멍청하게 생겼더니만."
대공은 갈라하드의 말을 무시하고 설명을 이었다.
"협약의 조건은 간단하다. 머무는 곳에서 나오지 말 것. 황족은 건드리지 말 것. 세세한 항목이 있지만, 대략적으로는 저 두 개지."
"목줄을 채우는 거군요."
"목줄이라-. 맞는 말이다."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비틀렸다. 목줄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마음에 든 듯했다.
'확실히 실력자들이 죄다 안에만 있었군.'
황혼의 마탑주도 마탑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외에 이름을 알린 실력자들도 전부 각 진영에만 있었다.
"개도 목줄을 두르면 밥을 주는데, 황제는 뭘 줬습니까?"
"개? 대신 황제가 가만히 있는다. 황제가 움직이지만 않으면, 마족들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마족의 왕은 죽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의 눈이 험해졌다.
"마족의 왕은 죽었다. 대신 놈의 신하라고 불리는 대마족들은 살아있지. 황제가 대마족들을 막는다."
대마족이라-. 새로운 단어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럴듯하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대공은 마물을 뜯어먹는 포식자였다. 마족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협박이 통할리도 없었고.
그런 대공이 왜 협약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왜 협약을 받았습니까?"
대공의 눈이 순간 깊어졌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갈라하드는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드리안나가 어렸다."
대공의 대답은 담담했다.
'아드리안나가 약점이라는 걸, 황제도 알았군.'
그를 통해 협약을 압박한 듯했다.
"황제를 죽이면 제마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대공이 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평화가 깨지고, 온 대륙에 마족이 들끓을 것이다. 대륙이 피로 가득 물들고, 수많은 이가 죽겠지. 너는 역사에 최악의 이로 등록될 것이다."
대공은 사실을 전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탓에 그 내용이 더욱 사실적으로 와닿았다.
"그래도 죽일 것이냐?"
대공의 눈이 갈라하드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꼭 속이 파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공의 말은 사실이었다. 굳이 제마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번에 황제를 봤는데 말입니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주가 목까지 올라왔더군요. 오래 못 버틸 거 같습니다."
슬쩍 목을 매만졌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히 뒀다가 저주가 터지면 덧날 겁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고생하셨으니, 폐하도 편히 쉴 때 되셨지요."
갈라하드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리고 제마 전쟁 때와 다릅니다."
"다르다?"
"마족의 왕은 죽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이 가벼이 끄덕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끄덕임이었다.
"마족은 전보다 더 약할 겁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 겁니까? 마족에게 시달리고, 제국에게 시달리고. 이대로면 얼마 못 버팁니다."
대공의 눈이 비틀렸다.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아드리안나도 이제 다 크지 않았습니까?"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무거운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이내 대공이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군."
갈라하드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실에서 조사단이 나올 것이다. 의회 놈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자신 있느냐?"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자신은 언제나 있습니다."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대공의 눈은 오히려 구겨졌다. 쯧, 대공이 혀를 찼다.
"그래, 네가 치워라."
"알겠습니다."
갈라하드를 잡으러 나온 조사대를 오히려 갈라하드가 담당한다니-.
'상당히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대공을 살폈다.
황제를 죽인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대공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협약 탓일 가능성이 컸다.
'목줄이라-.'
갈라하드는 대공의 굵직한 목을 사렸다.
"목줄이 풀리면 뭐부터 하실 겁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대공이 가만히 위를 올려봤다.
그 흉터 가득한 눈이 조금이지만 부드러워졌다.
"리브나에 갈 것이다."
대공이 텁텁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브나?'
리브나는 중부에 있는 평범한 성이었다. 거기를 왜 가겠다는 거지?
"리브나-. 좋은 성입니다. 노란 꽃이 일품이고, 그 게 요리가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렇군."
대공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눈이 묘하게 부드러웠다.
'조금 더 친해진 느낌이군.'
여전히 살 떨리기는 했지만,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기회였다.
"만약 제가 목줄을 풀어드린다면-."
흉터에 가려진 깊은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저도 한 번 도와주시겠습니까?"
"무엇을?"
"그건 비밀입니다."
대공이 다시금 광소를 터뜨렸다. 갈라하드도 따라 웃었다.
한참 웃은 대공이 끄덕였다.
"좋다."
갈라하드는 활짝 웃었다. 참으로 살벌한 웃음이었다.
그때, 위쪽에서 뭔가 떨어졌다. 순백에 금발,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곧장 갈라하드와 대공 사이에 떨어졌다.
쿵. 묵직한 소리에 주변이 흔들렸다. 창고의 물품들이 쓰러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갈라하드를 빠르게 훑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는 활짝 웃고 있었다.
다만, 꼴은 엉망이었다. 바닥을 뚫어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오지 말라고 명했을 텐데."
대공이 짐짓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갈라하드 대장을 두들겨 팬다는 소문이 돌길래 왔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음, 물어볼 게 있었다."
"꼭 이렇게 물어보셔야 하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뻥 뚫린 천장과 쓰러진 물품들까지 하나하나 가리켰다.
"사안이 중대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따가운 시선에 갈라하드는 슬쩍 나섰다.
"나는 괜찮네. 아주 멀쩡하지."
대공과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기회였다.
문제는 아드리안나의 눈이 풀리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러면 놀이로 성을 이렇게 부순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위를 가리켰다. 대공의 방은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이곳은 지하에 있는 창고였고.
성을 반토막 냈다는 이야기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매서웠다.
"음, 아프군."
갈라하드는 팔을 매만지며 물러났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다시 대공을 향했다.
대공의 흉터가 씰룩거렸다.
"갈라하드에게 공을 주지는 못할망정 어찌 벌을 내리십니까?"
"애초에 놈이 먼저 불을 날렸다."
갈라하드는 냉큼 아드리안나 뒤로 숨었다.
"아드리안나, 나는 정말 무서웠다네."
대공은 말을 잃었다.
187화 안았다
'황제를 죽이면 목줄이 풀린다.'
갈라하드는 대공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었다.
대공은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누군가에게 숙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대공이 황제와 협약을 맺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아드리안나 때문이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네."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 뭐 하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끄덕이면 재밌을 듯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저 작은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어떤 오해 말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북부 마법사에게 공격을 받았더군. 대공이 나로 오해했네."
"······오해?"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네가 했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황실에서 조사대가 나올 것인데, 내가 맡아서 처리하라고 하시더군. 조사대가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고 할 테니까 말이야."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걸세. 황실 조사대와 안면도 있으니까."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굳었다가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곧장 특무대 숙소로 향했다.
"식사하십니까?"
숙소에 들어가자 톰이 맞이했다. 톰은 자밋과 일하지만, 필요할 때면 항상 숙소에 있었다.
"들겠나?"
"예. 좋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이 묘하게 빨랐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톰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참모들이 갈라하드에게 특별히 마련해준 숙소였기에, 쾌적하고 넓었다.
그때, 밖에서 기합 소리가 들렸다. 뒤로 나가니, 데미안과 검을 섞는 길버튼이 보였다. 둘은 이미 땀과 흙범벅이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빠르게 터졌다. 데미안이 공격을 몰아치고, 길버튼이 받았다.
데미안의 몸놀림이 전보다 빨랐다.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니었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사라졌다.
데미안이 한 손을 바닥에 짚고 검을 휘둘렀다. 기사보다 맹수에 가까웠다.
'에포트를 붙여준 게 효과가 있었군.'
데미안은 본능으로 싸우는 맹수였다. 그런 데미안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건 오히려 독이었다.
그에 에포트를 붙여줬는데, 효과를 제대로 보인 듯했다. 데미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음!"
길버튼이 기합을 넣으며 검을 휘둘렀다.
길버튼의 검은 정석적이었다. 길버튼의 성격처럼 올곧고, 투박했다. 그런 검술로 맹수를 상대하려니 상당히 까다로운 듯했다.
"저 소년, 대단합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감탄했다.
"특무대니까."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때, 길버튼의 발이 데미안의 명치에 꽂혔다. 데미안이 뒤로 통통 튕겼다. 이내 대자로 뻗었다.
"아깝다."
"아깝기는-. 백 년은 이르다 꼬맹아."
길버튼이 호탕하게 웃었다.
"음, 금방 잡을 거 같은데요?"
데미안이 검으로 길버튼의 목을 가리켰다. 그 목에 붉은 선이 있었다. 그 순간에 데미안이 그은 것이다.
"망할 꼬맹이."
길버튼의 웃음이 멈췄다.
"일어나라, 아직 더 할 수 있잖아."
"못 해요."
"엄살은-."
길버튼이 혀를 차면서 손수건을 데미안에게 건넸다.
"아저씨가 손수건은 왜 들고 있어요?"
"나는 손수건 들고 있으면 안 되냐?"
"네, 안 어울려요."
"그럼 쓰지 말던가."
"애한테 화내는 거예요?"
길버튼의 얼굴에 힘줄이 올라왔다. 데미안이 키득 웃으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때, 길버튼이 아드리안나를 확인했다.
"아, 오랜만에 한 수 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길버튼의 요청에 아드리안나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앞으로 나갔다.
"좋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더."
길버튼과 아드리안나가 마주 봤다. 데미안이 데굴데굴 굴러서 옆으로 비켰다.
"가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 길버튼은 당연하다는 듯 먼저 공격했다.
길버튼이 검을 먼저 휘둘렀지만, 아드리안나의 검이 더 빨리 쇄도했다. 챙! 불똥이 튀었다. 길버튼의 검이 뒤틀렸다.
"검이 바뀌었구나. 더 예리해졌지만, 대신 느려졌다."
아드리안나가 무심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검면이 길버튼의 어깨를 후려쳤다. 길버튼은 흔들렸지만,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검이 다시 겹쳤다. 길버튼은 필사적으로 휘둘렀지만, 아드리안나는 그저 가벼이 받아냈다.
아드리안나가 발로 길버튼의 복부를 때렸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길버튼이 흔들렸다.
"검에서 혼란이 느껴진다."
아드리안나는 차분히 지적했다. 길버튼이 진지하게 끄덕였다.
길버튼도 수위를 다루는 기사였다. 그런 길버튼을 저리 가볍게 상대하다니-.
'역시 최연소 소드 마스터군.'
갈라하드는 새삼 감탄했다.
마나를 태우는 성질을 떠나서도, 아드리안나는 명백히 강자였다.
"일어나거라."
"예."
다시 검이 섞였고-. 길버튼이 두들겨 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일어나거라."
"예."
길버튼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일어났다.
"단단히 찍혔나 봐요."
데미안이 말했다. 데미안은 어느새 육포를 먹고 있었다. 제 몸만 한 대형 육포였다.
"아드리안나가 그럴 인물은 아닐세. 데미안, 많이 늘었더군."
"네, 열심히 했어요."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올려보며 끄덕였다. 그 탁한 눈이 끔벅였다.
아무리 에포트를 붙여줬어도, 실력이 그냥 늘 수는 없었다. 데미안도 열심히 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저도 데리고 가요."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두고 가서 불안했나 보군.'
어쩌면 버려졌다고 생각한 건가.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당연한 걸 말하는군. 자네 봉급이 얼마인데, 그냥 쉬게 두겠는가?"
"맞아요. 아저씨보다 많이 받아요."
"그런가? 비밀일세."
데미안이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검이 난잡해졌다."
길버튼이 다시 바닥을 굴렀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빙글 돌렸다.
"일어나도록."
길버튼은 슬쩍 목을 매만졌다. 아까 데미안에게 긁힌 곳이었다.
"예."
투정 부릴 만도 한데, 길버튼은 묵묵하게 일어났다.
"미련해요."
데미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드문 감정표현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게 길버튼 경의 무기일세."
길버튼은 다섯 번 더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검을 넣었다.
"확실히 강해졌다. 저 아이 덕분이군."
아드리안나가 데미안을 가리켰다. 데미안은 눈을 찡그렸다.
그때, 길버튼이 검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 다리가 후들거렸다.
"더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더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무리다. 너는 더 할 수 없다."
"아닙니다. 검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길버튼이 검을 내밀며 투박하게 웃었다. 억지로 지은 웃음이었다.
목의 상처 때문일 게 분명했다.
'따라잡힐까 불안한가 보군.'
데미안의 성장에는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줄어든 격차에는 불안해하다니. 실로 길버튼스러운 미련함이었다.
"그렇군."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끄덕였다. 검이 인정사정없이 움직였다.
칼자루에 명치를 맞은 길버튼이 그대로 엎어졌다. 그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투지도 좋지만,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아드리안나가 싸늘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무심한 얼굴이 더해지니, 확실히 차가웠다.
눈이 마주치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풀렸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 톰이 식사를 불렀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데미안이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식사하고 있게나."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길버튼에게 향했다. 길버튼은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그 손에는 여전히 검이 있었다.
"길버튼 경, 살아있나?"
"예."
갈라하드는 길버튼 앞에 가벼이 앉았다. 길버튼이 일어나려다가 픽- 쓰러졌다.
"그냥 누워있게나."
길버튼이 고개만 들었다. 꼴이 엉망이었지만, 눈은 여전히 우둔한 기색이 가득했다.
"열심이군."
"잡히지 않으려면 열심히 뛰어야지 않겠습니까?"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데미안 때문에 조급함을 느낀게 맞는 듯했다.
"원래 앞물은 뒷물에 밀리는 법일세."
"무슨 뜻입니까?"
"아닐세."
길버튼이 낄낄 웃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저 기사 길버튼입니다. 직속 부대 출신. 북부의 정예 기사입니다."
"그리고 특무대 부대장이지."
길버튼이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입 안이 터졌는지 붉은 피가 흘렀다.
"예, 부대장입니다."
"자네는 충분히 잘해주고 있네. 솔직히 내 기대 이상일세."
"뭘 기대하셨습니까?"
"못생긴 추남 기사?"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네. 자네는 훌륭한 기사가 될 자질이 있어. 내가 보증하지."
"알겠습니다."
"식사 하겠나?"
"조금만 더 잡고 들어가겠습니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무슨 검을 휘두르겠다고-.
"그래, 식사는 따로 남겨두겠네. 아, 물론 데미안이 있으니 확신은 못 하지만."
갈라하드는 미련 없이 일어나서 숙소로 향했다.
문을 닫기 전 고개를 돌리니, 길버튼은 어떻게든 일어나서 검을 잡고 있었다.
참으로 미련한 기사였다.
"그가 내 거-."
아드리안나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나 앞에 놓인 고기와 스튜를 데미안이 휩쓸고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뒤늦게 잡은 빵이 남은 전부였다. 아드리안나 눈썹이 깊게 내려갔다.
"아, 여기 있습니다."
톰이 재빨리 식탁을 채워줬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풀렸다. 데미안이 다시 뛰었다.
"이건-."
톰이 아드리안나의 고기에 달려드는 데미안을 다급히 잡았다. 다만, 데미안이 더 빨랐다.
데미안은 한쪽에 놓인 길버튼 것은 손도 대지 않고, 아드리안나 것만 공략했다.
"왜 내 것만-."
아드리안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네, 미움 받고 있나 보군."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 옆에 앉았다.
"제가 뭘 했다고-."
톰이 다급하게 데미안에게 향했다.
"그웬, 데미안 좀 잡고 있어 주시겠습니까?"
"알았어요! 데미안!"
데미안은 다람쥐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그웬이 그걸 잡겠다고 뛰어다녔고, 식사 자리는 금세 엉망진창이 되었다.
"먹게."
"아, 감사합니다."
갈라하드는 고기 하나를 집어서 아드리안나에게 줬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맛있었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정중한 감사에 톰이 당황했다.
갈라하드는 허리의 램프를 톡톡 두드렸다.
'체내 마나 농도를 올려야 한다.'
램프의 생명력을 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체내 마나 농도를 높이는 건, 급을 올리는 느낌이었다.
가장 큰 위험은 역시 마족이 되는 거였다. 다만, 단순히 마나 농도가 높다고 마족이 되는 게 아니었다.
마족이 되려면 저주가 필요했다.
'마나가 재료라면, 촉매는 저주다.'
저주만 받지 않으면 마나를 아무리 쌓아도 마족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찝찝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답습하지 마라.]
'아드리안나가 있으니까.'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데미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드리안나."
"예."
"방으로 가지."
"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둘에-.
'······?'
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래, 둘은 약혼자고, 성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전개가 될 가능성이 컸다.
톰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데미안! 왜 자꾸 도망쳐!"
"느려."
"너! 말버릇이!"
방해꾼을 치워야했다.
"그웬님! 음식이 좀 남았는데, 아이들에게 주고 오시겠습니까? 아, 혹시 모르니 데미안도 도와주시죠!"
톰은 황급히 그웬과 데미안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식사를 챙겨서 길버튼에게 가져다줬다.
"식탁에서 먹을 건데-."
"여기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톰은 들어가려는 길버튼을 막았다.
****
'······?'
아드리안나는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은 평범한 방이었다. 짐이랄 게 전혀 없었다. 그저 큼지막한 네모난 가죽 가방이 전부였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단출한 방이었다. 실로 갈라하드랑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갈라하드의 방에?'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 방에 있었다.
그것도 단둘이-.
"자네, 괜찮나?"
"에? 에."
갈라하드는 평소의 갈라하드였다. 느긋하며 여유롭지만, 건조한 그런 갈라하드.
그에 아드리안나는 안도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윗옷을 벗었다. 흉터 가득한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자, 바로 시작하겠네."
"예?! 뭐를- 말입니까!"
늘 무심했던 목소리가 뾰족
올라갔다. 그에 갈라하드가 작게 탄식했다.
"아, 설명을 안 했군."
"예! 안 하셨습니다!"
"체내의 마나 농도를 올릴 걸세."
"······마나까지 이해했습니다."
"음, 기사로 표현하자면, 오러 담금질을 할 걸세."
오러 담금질이라면, 오러를 지속적으로 일으켜서 근육의 탄력이나 힘을 올리는 작업이었다.
"그렇군요."
아드리안나는 작게 안도했다.
"자네, 아쉬운 얼굴이군?"
"예? 전혀 아닙니다."
"농담일세."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어찌 저렇게 얄미울 수가-.
"아무튼, 내가 이상하면 여기를 꾹 누르게."
갈라하드가 제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 조금 옆이었다. 거기에 아주 굵은 흉터가 있었다.
"자네, 왜 손을 푸나?"
"연습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마족이 될 것 같으면 이상한 걸세."
뜻밖의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굳었다.
"마족이 되신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 가정일세. 아무튼, 잘 부탁하네. 자네를 믿고 맡기는 거니까."
믿고-. 그 단어에 잠시 반응하지 못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금색 램프와 봉을 꺼냈다. 램프에 봉을 꽂자, 봉을 타고 회색 불이 타올랐다.
회색 불이 갈라하드로 넘어왔다. 그 불이 묘하게 친숙했다.
'나와 비슷하다.'
갈라하드가 말하던 생명력이라는 힘일 것이다.
동시에 마족
특유의 느낌도 풍겼다.
그때, 회색 불이 갈라하드를 덮었다. 불길이 거칠게 일렁였는데,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뽑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회색 불이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갈라하드의 심장 박동이 크게 들렸다. 그 사이로 언뜻 다른 박동이 들렸다.
'심장이 두 개?'
아드리안나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집중했다.
원래 갈라하드의 박동은 차분하고 규칙적으로 뛰었다. 뭔가 이상할 때는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정도였다.
그런데 다른 박동은 정신없이 거칠게 뛰었다. 그 거친 박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치 경쟁하듯-.
'위험하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박동이 크게 들리는 부분을 꾹 눌렀다.
두그으으으으은!
박동이 비명 지르듯 크게 뛰었다.
갈라하드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아드리안나는 행여나 닿지 않도록 손을 길게 뻗었다.
안아버렸다-.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방금의 감각을 떠올렸다.
모든 건 순조로웠다. 고통의 알은 열심히 생명력을 녹였고, 갈라하드는 피에 생명력을 담으며 마나를 넣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나아갔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고통의 알 존재감이 너무 커진 것이다. 저번에 주도권이 넘어갔을 때는 몰랐지만, 이번에는 확실했다.
'자네, 저주가 있었군.'
두근. 고통의 알이 순간 멈췄다. 숨이라도 참는 모양새였다.
'조용해진 걸 보니 정답인가 보군.'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황급히 뛰었다.
자신도 몰랐다고, 진짜 몰랐다고 항변하는 듯한 자세였다.
'저주가 있다라-.'
고통의 알에는 저주가 내장되어 있었다. 폭탄을 심장 옆에 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당장 제거하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뛰었다. 심장을 꾹꾹 눌렀다. 가진 생명력을 토해냈다. 야금야금 꽁친 양이 제법이었다.
보통은 당장 고통의 알을 제거하겠지만, 갈라하드는 달랐다.
고통의 알이 저주라면, 놈을 품고 있을 때는-.
'다른 저주는 안 받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근?
고통의 알은 뱉었던 생명력을 슬쩍 다시 가져갔다.
****
삐걱.
데미안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톰이 길버튼을 맡은 사이에, 기어코 올라간 것이다.
다만, 톰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였다.
그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나.
'그래, 너무 자연스럽게 올라가서 당황한 것 뿐이다.'
톰은 가만히 끄덕였다.
"꼬맹아, 뭐 하고 왔냐?"
"둘이 뭐 하는지 보고 왔어요."
"둘이? 아, 아드리안나님과 대장? 방에서 뭐하더냐?"
병사들이 경례했다. 숙소 보안을 맡은 병사들이었다. 톰은 그들에게 남은 육포를 하나씩 챙겨줬다.
그때-.
데미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발가벗고 부둥켜안고 있던데요."
톰은 육포를 떨어뜨렸다.
188화 초야
'마나 농도가 단번에 올라갔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본래 체내 마나 농도를 높이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웠다.
고통의 알과 최초의 마법사 마법진을 동시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그를 믿고 생명력을 위험 수준 넘어서 들이부었다.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선을 넘어야, 어디에 선이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에 조금 위험했지만, 결과적으로 마나 농도를 단번에 높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상급 마족은 되겠군.'
중급 마족
정도까지 올리는데 들었던 걸 생각하면 상당한 발전이었다.
그만큼 위험했지만-.
'자네, 저주를 숨기고 있었군.'
두근.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뛰었다. 자신도 몰랐다고 항변하는 듯했다.
'이래서 성서를 읽고도 마족이 안 됐던 거군.'
고통의 알이 저주를 품고 있었기에, 성서의 저주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원본이 아니라도, 성서는 오대 악인인 선교자의 물건이었다. 그런 성서를 이기다니-.
'생각보다 더 강한 저주일 수도.'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금세 또 기세를 되찾았다. 대충 '무한한 힘을 주겠다-.'라고 떠들고 있지 않을까.
'근데 왜 최초의 마법사가 실패작이라고 했지?'
······두근?
아무튼, 이번에 느낀 건 명백했다.
'알을 더 키워야 한다.'
알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효율적이었다. 더 키울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키우냐는 것인데-.
"괜찮으십니까!"
그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행여 손이 닿을까 걱정했는지, 아드리안나는 만세를 하고 있었다.
"음. 괜찮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일어났다. 아드리안나가 그제야 손을 내렸다.
"위험하셨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자네를 믿은 걸세."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아드리안나가 뒷말을 흐렸다.
"마족이 될 뻔했다는 건가?"
갈라하드가 말을 받자, 아드리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푸른 눈이 또렷했다.
갈라하드는 친절하게 손가락을 펼쳤다.
"마족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네. 하나는 높은 농도의 마나고, 다른 하나는 저주일세. 나는 높은 농도의 마나를 지니고 있네. 자네의 성질을 연구해서 얻은 결과 덕분이지."
갈라하드는 슬쩍 램프를 두드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기본적인 조건은 되었지만,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지. 그게 저주일세. 그런데 알고 봤더니, 여기에 저주가 있더군."
갈라하드는 제 가슴을 가리켰다. 고통의 알이 있는 위치였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가슴을 향했다가 황급히 돌아갔다.
"제가 지워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손을 풀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심장에 매달렸다.
"성의는 고맙지만, 거절하겠네."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마족이 되실 생각입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농담이라 생각하여 웃었지만, 아드리안나의 눈썹은 굳어 있었다.
'농담이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나는 마족이 될 생각이 없네. 마족의 왕을 잡을 생각인데, 왜 마족이 되겠나?"
갈라하드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풀렸다.
"그러면 어찌 그걸 가만히 두십니까?"
가만 놔둘 생각 없었다. 오히려 더 키울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주는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닐세. 마법보다 신비에 가깝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라는 걸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통제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게 낫네."
"저주를 막고자, 저주를 심장 옆에 두시겠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미친 짓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내 전문일세."
갈라하드는 담담히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말문이 막혔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도끼눈으로 바뀌었다.
"조급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조급하다-.'
확실히 조급한 감이 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족의 왕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최선을 다해야 하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거지."
갈라하드의 눈이 또렷해졌다. 그 목소리가 낮았다.
″어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아드리안나의 투명한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직시했다.
"마족의 왕에 관해 모두가 개념을 금지당했네. 또 개척자의 기억을 통해서 전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충분한 근거 아닌가?"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뭔가 더 있는 듯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담담히 말했다.
갈라하드는 가죽 수첩을 톡톡 두드렸다.
솔직함은 때론 독이었다. 이 경우에는 극독이었고.
"그냥 알 수 있네."
갈라하드가 가장 싫어하는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득 찡그렸다.
그때-.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가만히 끄덕였다.
"······믿어주는 건가?"
"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다만, 제가 없는 곳에서는 하시면 안 됩니다."
"알겠네. 아니,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군. 매일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이내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방금 얻은 사실을 되새기기 바빴다.
"······마족으로 변할 가능성은 없으신 겁니까?"
그때,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대한 노력하고 경계하겠지만, 만 개중 일의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네."
갈라하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때가 되면 자네가 구해주게나."
갈라하드의 요청에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었다.
이내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겠네."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애초에 마족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를 경계하기에 이렇게 따로 아드리안나를 부른 거였다.
앞으로도 경계를 늦출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마족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가벼이 던진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마족이 되었다면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주를 풀어야지.'
성서에 당한 주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마족이 된다면, 그 저주를 해주 함으로써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너무 늦지 않아야겠지만.
그러면 저주를 어떻게 해주 하는가-.
그를 중얼거리던 갈라하드는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입을 맞추면 되네."
"아, 입을-. 예?!"
아드리안나의 무표정이 깨졌다. 토끼 눈이 됐다.
"머리부터 해주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입을 맞추는 걸세. 숨결을 이용하는 거지. 입 맞춤으로 해주하는 게 클리셰인 이유일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설명에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아드리안나가 심각한 얼굴이 됐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 반응에 갈라하드는 끅끅 웃었다.
"······?"
아드리안나가 멍하니 내려봤다. 서서히 눈썹이 구겨졌다.
그에 농담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쿵쿵!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대장님! 톰입니다!"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하얗게 질린 톰이 보였다. 톰의 눈이 갈라하드와 안쪽을 살폈다. 이내 톰이 깊게 안도했다.
"무슨 일인가 톰."
"그게-."
"대장! 축하합니다!"
톰 어깨 위로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축하는 무슨 축하-."
"대장님과 아드리안나님이 초야를 보냈다고-. 흐흐. 저 길버튼 정말 기쁩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병사들에게 한 잔 전부 쫙 돌렸습니다."
길버튼이 엄지를 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뭐?"
톰이 뒷덜미를 잡힌 데미안을 가리켰다.
"맞잖아요. 발가벗고 뒹굴었잖아요?"
데롱데롱
붙잡힌 데미안이 뭐가 잘못됐냐는 듯 물었다.
"뒹굴지 않았습니다. 그냥 쓰러지는 걸 받은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형을 안고 몰래 웃는 거 봤어요."
데미안의 지적에 아드리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안 웃었습니다만."
"웃었잖아요."
그 투닥거림에 갈라하드는 상황을 깨달았다.
"······소문이 어디까지 났지?"
"그게 최대한 막으려고 했는데, 하필 병사 교대 시간이었던 터라-."
톰이 뒷말을 흐렸다.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가 발가벗고 뒹굴었다는 소문이 성에 퍼진다. 만약 그걸 대공이 들으면-.
"튀어야겠군."
갈라하드는 빠르게 판단했다.
"준비해 뒀습니다."
톰이 재빨리 끄덕였다.
"역시 톰일세. 바로 가지."
"예? 어디로 갑니까?"
길버튼이 투박하게 물었다.
어차피 대공의 성에서 할 일은 끝났다. 조사대 파견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더불어 최대한 멀리 가는 게 좋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경으로 갈 걸세."
갈라하드는 냉큼 끄덕였다.
"예? 마경을 갑자기 왜 갑니까?"
길버튼이 멍청하게 물었다.
그야 거기가 북부에서 대공과 가장 머니까-.
대답은 톰이 대신했다.
"아! 최근 2대대에서 발생했던 마경 이상 현상을 조사하시려는 거군요!"
"그래, 그거일세."
갈라하드는 냉큼 끄덕였다.
"자, 빨리 출발하지! 특무대 출격일세!"
갈라하드는 셔츠조차 제대로 잠그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옆집 누나랑 뒹굴던 형이 저랬는데, 다음날 다리가 부러져서-."
톰은 데미안의 입을 막았다.
****
노오오오오오옴!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대공의 성은 저 멀리에 있었다.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갈라하드는 안도했다. 톰이 미리 준비를 끝내둔 게 다행이었다.
'협약 무시하고 뛰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대공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성이 안 보일 정도가 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대공 전하께 제가 직접 해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아드리안나가 물었다. 그에 가벼이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대공이었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아드리안나가 설명하기 전에, 차르티엔과 먼저 악수할 가능성이 컸다.
"대공 전하는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걸세."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2대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 뭔가?"
"저도 처음 듣습니다만."
아드리안나와 갈라하드는 톰을 쳐다봤다. 톰은 육포를 뜯어서 데미안에게 주고 있었다.
"아, 오늘 2대대 쪽에서 온 보고입니다."
"보고가 왔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드리안나의 말에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2대대에 정보국 지부를 세웠는데, 그쪽에서 올린 보고입니다."
"그쪽 보고가 정식 보고보다 빠르다는 건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들은 거라서."
톰이 슬쩍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갈라하드로 향했다.
"애초에 이쪽은 정보를 다루던 이들일세. 속도가 생명이지. 이쪽이 더 빠른 건 당연한 걸세."
"······그렇군요."
아드리안나가 천천히 끄덕였다.
"2대대에서 무슨 이상 현상이 발생한 건가? 마경이 넓어지기라도 했나?"
"아,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
"마경이 작아졌답니다."
"아하하! 잘 됐습니다! 마경이 줄어들었다니! 저희가 갈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톰의 보고에 길버튼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정작 갈라하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경이 넓어졌냐고 물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굳어 있었다.
"얼마나 줄었다던가?"
"눈에 보일 정도로 확 줄었답니다. 2대대가 그를 축하하기 위한 축제를 열었을 정도로-."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눈이 가득 구겨졌다.
"왜 그러십니까? 마경이 줄었다는데-."
"길버튼 경, 마경은 실로 짙은 마나의 집합체일세. 자연현상처럼 크기가 줄고 늘어나지 않는다네."
"예? 저번에 직접 마경을 줄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거는 방금 만들어진 마경이었잖나."
"그게 다릅니까?"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다르다네."
"······뭔가 축약하신 거 같습니다만."
"어차피 설명해도 못 알아듣지 않나. 다르다는 것만 알고 있게. 고정된 마경을 지우는 게 몇 배는 더 어렵다네."
"그렇군요."
길버튼이 시원하게 끄덕였다.
그제야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톰은 다급하게 뭔가를 받아 적었다.
"그래서 무슨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길버튼이 당당하게 물었다.
"거기 안에 마경을 퍼먹는 놈이 있다는 거지."
"······그게 문제가 됩니까?"
"뾰족아리가 원래 무슨 등급이었나?"
"최하급 마족
아닙니까."
"그때 마경을 줄이기 위해서 내가 만든 뾰족아리는?"
"최상급 마족급이었죠. 겉만이지만."
"그렇군."
"예?"
"다시 되짚어 보게."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이내 길버튼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제야 이해했군.'
다소 늦었지만, 그래도 이해한 게 어디인가.
이 정도면 길버튼치고 선방이었다.
그때, 길버튼이 입을 열었다.
"거기에 뾰족아리 둥지가 있군요!"
길버튼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음, 비슷하네."
갈라하드는 포기하고 끄덕였다.
****
'어디입니까?'
창백한 여인은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꺼냈다.
지팡이 끝에 거대한 알이 달려 있었다. 두근! 알이 심장처럼 뛰었다. 알이 순간 흔들렸다.
[여기다.]
"알겠습니다."
여인은 공손하게 지팡이를 잡았다. 지팡이가 방향을 잡아줬다. 짙은 재로 가득한 곳이었다.
'마경이라 그랬나. 상당히 친숙한 분위기군.'
[다른 알을 먹거라. 그러면 무한한 힘을 주겠다.]
알이 낮게 읊조렸다. 실로 오만한 말투였지만, 여인은 의심하지 않았다.
'굵직한 놈이면 좋겠군.'
알은 알을 먹으면 강해진다. 알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앞이다.]
그 숨소리를 낮추고, 발걸음 소리를 지웠다.
여인은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이내 적당한 거리에서 지팡이를 내밀었다. 지팡이 끝에 달린 알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순간 주변의 재가 밀렸다.
'대단해!'
정면의 재가 열리며 상대가 보였다.
상대는 뚱뚱한 사내였다. 사내의 터질 듯한 옷에 기름기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지팡이가 없는데?'
알은 지팡이에 꽂아서 쓰는 게 정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알에 먹히기 일쑤였다.
분명 알은 저 사내를 가리키고 있는데, 지팡이가 없었다.
그때, 여인이 쏜 파동이 사내에게 근접했다.
'끝이다.'
여인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이건 위계를 넘어선 권능이었다. 이 힘을 만들기 위해서 먹인 알이 몇 개인가.
사내가 입을 쩍 벌렸다. 사람 머리도 먹을 정도로 거대한 입이었는데, 그 안에 알이 있었다.
여인이 쏜 파동이 사내의 입으로 들어갔다. 꿀꺽. 그저 깔끔한 소리가 전부였다.
'6 위계의 위력인데, 그걸 삼켰다고?'
여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내의 수준이 아득히 높았다.
도대체 알을 몇 개나 먹은 거지?
여인이 사냥꾼이라면 저 사내는-.
'포식자다.'
꺼억-. 그때, 사내가 거칠게 트림했다.
'도망친다.'
여인은 빠르게 판단하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킁킁! 킁킁!
사내가 거칠게 냄새를 맡았다.
그 킁킁거리는 소리에 여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맛있는 냄새-."
이내 사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내의 살집 가득한 눈이 여인을 응시했다.
그런데 눈에 초점이 있었다.
"이··· 이성이 있어? 알을 먹었는데 어떻게······."
여인의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다.
꺼억-.
"직접 물어봐."
사내는 배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반찬을 먹었으니, 이제 밥을 먹을 차례였다.
잿더미가 사내의 입으로 빨려 들어왔다.
189화 2대대
'음-.'
갈라하드는 창문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눈보라가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북부는 원래도 날씨가 거칠었지만, 2대대는 특히 더 거칠었다. 눈보라에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였다.
"2대대가 맡은 전선은 날씨가 가장 험하기로 유명합니다. 2대대를 눈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기색을 읽은 톰이 슬쩍 말했다.
"진짜 눈 지옥이군."
"예, 그래서 북부에서는 2대대 병사들이 가장 거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물론 1대대가 최고입니다만."
톰이 아드리안나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2대대 대장 리암을 떠올렸다. 갈라하드가 봤던 리암은 충직하고 우직한 대장이었다.
"리암은 어떤 대장인가?"
"오직 북부만을 생각하는 대장입니다."
'북부만을 생각하는 참된 대장-.'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데미안이 벌떡 일어났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가 길게 뿌려졌다. 사방의 흔적을 쫓았다.
"매복이 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매복 말입니까?"
"그렇네. 아마 여명이겠지."
슬쩍 창문을 확인했다. 거친 눈보라에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데미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할게요."
그 똘망똘망한 눈에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이내 끄덕였다. 데미안이면 충분할 듯했다.
"알겠네. 조심하게나."
"데미안! 그러면 저도 도울게요!"
"오, 그래."
하긴 그웬도 연습이 필요했다. 그웬은 그저 무식한 마법만 펼칠 뿐이었으니까.
"습격입니까."
그때, 아드리안나가 검을 잡았다. 확실히 아드리안나가 나서면 금방 끝날 것이다. 다만, 지금 필요한 건 경험치였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까지 나설 필요는 없네."
"예?"
"자, 데미안 준비하게나."
"끝났어요."
"그래."
갈라하드는 웃으면서 마차 문을 열었다.
거친 눈보라가 몰아쳤다. 어둑한 밤에 눈보라까지 몰아치니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였다.
저쪽에서야 이쪽 마차에 달린 등불을 보겠지만-.
데미안이 곧장 뛰어내렸다. 탁! 데구르르. 고양이처럼 착지한 데미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람이 너무 강한데요!"
그웬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눈보라에 마차까지 달리는데! 이리로 오게나!"
갈라하드는 그웬의 뒷덜미를 잡아서 내밀었다. 으아아악! 마차 끝에 달린 그웬이 비명을 길게 질렀다.
"만만한 상대가 아닐세! 여명에서 나를 잡고자 보낸 아주 진득한 해결사들이지! 데미안이 그런 해결사들을 잡겠다고 나간 걸세."
"네?! 그러면 데미안이 위험하잖아요!"
"정답일세!"
갈라하드는 짙게 웃었다. 그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단발이 바람에 거칠게 흔들렸다.
데미안은 이제 제법 강했다. 특히 이런 난전에서는 더더욱 효과를 발휘했다.
데미안이 고작 해결사들에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웬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돕지 않으면, 미안 데미안일세!"
"안 돼! 데미안!"
"데미안을 살리고 싶나? 집중하게!"
"데미아아안!"
"이런 식이면 데미안이 싸늘하게 식을 걸세!"
"안 돼애!"
그웬의 눈이 또렷해졌다. 확실히 데미안을 다룰 때, 효과가 좋았다.
"자, 전방에 저기일세."
갈라하드는 그웬의 작은 머리통을 잡아서 표적으로 돌려줬다.
"사··· 상황이 안 좋아요! 집중을 할 수가-!"
"그웬, 자네가 언제 마법을 머리로 썼나? 그냥 쓰게!"
"아하! 얼음송곳!"
그웬의 손에서 뚜렷한 얼음송곳이 날아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쏘는 순간 사라졌다.
윽-!
"명중일세! 자! 다음!"
갈라하드는 그웬의 머리통을 돌렸다.
"얼음송곳!!"
"빗나갔네! 집중하게!"
"얼음송곳!!"
"다시!"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데미안을 대처하기도 어려운데, 심지어 그웬이 얼음송곳까지 날려댔으니까.
이내 데미안이 돌아왔다. 붉은 피로 흠뻑 칠해져 있었다.
"데미안!"
"떨어져."
"너··· 말버릇이······."
그웬을 가볍게 피한 데미안이 갈라하드에게 왔다.
"주웠어요."
데미안이 내민 건 양피지였다. 거기에는 갈라하드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여명의 수배지였다.
"음, 실물이 낫군."
"여명입니까?"
눈썹이 내려간 아드리안나가 물었다.
"그런 것 같군. 내가 밉보인 모양일세."
"지독한 놈들입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양피지를 챙겼다.
"길버튼 경. 얼마나 왔지?"
"예! 거의 다 왔습니다."
마부석의 길버튼이 검을 털며 말했다. 그 사이에 마부석으로 달려든 놈도 있던 듯했다.
"다행이군."
더 없나? 습격을 기대했지만, 더는 없었다.
휘유우웅-. 살벌하게 차가운 바람이 갈라하드를 마구 두드렸다.
2대대의 성은 검은 돌로 지어진 터라, 그 위용이 상당했다. 거대한 횃불들이 눈보라 속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주변을 밝혔다.
그때, 성문에서 기사들이 나왔다. 그 선두에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2대대 대장 리암이었다.
리암은 말이 아닌 늑대에 타 있었다. 늑대의 입가로 침이 길게 흘렀다. 특유의 노린내가 가득 풍겼다.
"갈라하드 대장. 아니, 이제 대공 대리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하!"
리암이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대공 대리라고 부르게나."
"꼴이 엉망이군. 야반도주라도 한 모양새인데!"
야반도주라니-.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오는 길이 험하더군."
"2대대는 북부에서 가장 험지에 있지. 오! 아드리안나 대장도 있군! 정말 야반도주했나?"
아드리안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까닥거렸다. 그 손에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마경이 줄었다고 들었네."
갈라하드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리암의 반응이 상당히 격렬했다. 리암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했다.
"매를 방금 날렸다! 설마 벌써 보고를 받았나?"
그 격한 반응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새로 도입한 보고 체계 덕분일세."
"호오- 대단하군. 역시 갈라하드 대공 대리다! 봤느냐?"
리암이 뒤에 손짓했다. 중대장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다 같이 환호했다.
"그래! 마경이 줄었다! 최근 마족
사냥을 많이 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아주 큰 공이지!"
"마족을 잡았다고 마경이 줄 일은 없네만."
"많이 잡았다!"
리암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설명해도 안 통할 것이다. 북부 놈이었으니까.
"자, 일단 들어가지! 마침 축제 중이었으니까! 잘 왔다!"
"축제?"
"마경을 줄인 공을 치하하는 축제다!"
리암이 뒤를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2대대의 성은 투박하고, 더럽고, 미개하며, 시끄러웠다.
코트를 입어도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중이었다. 그 사이를 헐벗은 놈들이 뛰어다녔다.
"나는 전사다-!"
벗은 놈들이 괴상한 구호를 외치며 눈으로 뛰어들었다. 그중에는-.
"저거 어깨에 도끼 박힌 거 아닌가?"
"아, 축제니까! 으하하! 놈! 상남자군!"
리암이 더 호탕하게 웃었다. 박힌 도끼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곳곳에서 박수를 쳤다.
북부가 야만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곳은 더 심한 듯했다.
'이래서 북부에서 제일 거칠다는 거군.'
축제는 단순했다. 도끼를 던지거나, 피하거나, 검을 던지거나, 피하거나였다. 그게 아니라면 주먹을 던지고 받았고.
"음음."
자꾸만 들썩이는 아드리안나와 길버튼은 애써 무시했다.
이내 안내된 곳은 응접실인지, 병기고인지 헷갈리는 방이었다.
벽에 병장기가 놓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응접실의 유일한 증거는 기다란 식탁이었는데, 그 위에도 거대한 도끼가 있었다.
"축제하고 있었군요."
아드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음, 난감하게 됐군."
"왜 난감하십니까?"
"마경이 줄어든 걸 공이라 생각하여 축제까지 열지 않았나. 그걸 지적해야 하니까."
"아-."
2대대는 축제까지 열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런 공을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해야 했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겁니다."
"괜찮다?"
"리암 대장은 잘못된 걸 지적했다고 화를 낼 이가 아닙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자! 2대대 특제 돼지 고기다!"
리암이 호탕하게 웃으며 쇳덩어리를 밀었다. 잔뜩 달궈진 쇳덩어리 위에는 거대한 돼지가 있었다.
피도 제대로 안 뺐는지,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통돼지였다.
"내가 아끼던 돼지다! 좋은 날 왔으니, 내 대접해야겠지!"
리암이 호탕하게 돼지를 두드렸다. 기름이 찰박찰박 튀었다.
"자, 많이들 들게나!"
갈라하드는 앞에 놓인 고기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방금 도축한 걸 증명하려는지, 피가 흥건했다. 접시에 가득 고였을 정도였다.
심지어 비치된 나이프는 그냥 단검이었다. 기름기가 듬뿍 묻은-.
입맛이 절로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안 먹나?"
"입맛이 없어서. 그래, 마경이 넓어졌다고."
"엄청나게 넓어졌지!"
리암이 히죽 웃었다.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미소였다.
"마경이 좁아진 건, 좋은 신호가 아닐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선고했다. 바로 말할 줄 몰랐는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리암의 미소가 사라졌다. 호랑이 같은 눈이 구겨졌다.
"마족의 본진인 마경이 좁아졌는데, 어째서 좋은 신호가 아니지?"
"마경은 마나의 집합체일세. 밀물과 썰물처럼 자연적으로 크기가 작아질 일이 없지. 그를 행한 무언가가 안에 있을 걸세."
"추정이군."
리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근거에 의한 추론일세."
리암은 가만히 고기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질겅질겅, 그 입가를 타고 붉은 피가 흘렀다.
축제까지 벌인 2대대였다. 그런 2대대에게 그게 공이 아닌 실이라고 말했으니,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풀었다. 아드리안나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때-.
"그러면 마경을 줄인 놈을 잡으면 공이 두 배로 커지겠군!"
리암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갈라하드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끄덕였다.
"그래, 바로 부대를 구성하겠네. 아, 같이 갈 건가?"
"그러고 싶네만."
"좋다! 대공 대리의 솜씨가 그렇게 좋다는데, 구경해 볼 수 있겠군."
리암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우우-.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들어왔다. 술을 거하게 마신 듯 얼굴이 붉은 놈들이었다. 다만, 눈은 형형했다.
"출정이다!"
리암이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호방하긴 하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뿔피리-."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
1대대는 성에서 마족의 영역까지 거리가 제법 있었다. 몇 단계에 걸쳐서 방어진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2대대는 마족의 영역과 이어진 성문이 바로 있었다.
어차피 성문이 뚫리면 끝이니까. 가까이에 두는 게 낫다는 단단한 논리였다. 제법 일리가 있었다.
2대대 대장 리암은 바로 부대를 구성했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어느새 갈라하드는 마족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성문 앞에 있었다.
'상당히 빠르군.'
1대대에서 마족의 영역에 들어갈 때마다 걸렸던 시간을 생각하면, 상당한 단축이었다.
성문에는 벗은 사내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땀 냄새가 가득 풍겼다. 이내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마족의 영역 특유의 재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 농도가 조금 옅었다.
"1대대 쪽보다 연하군."
"예, 1대대가 맡은 쪽이 최전선입니다. 2대대가 맡은 곳은 그보다 아래고."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마족의 영역이 좀 더 연한 느낌이 강했다.
또 1대대와 다른 점이 있었다. 1대대는 아드리안나를 선두로, 정예들만 모여서 소수로 움직였다.
그런데 2대대는 달랐다.
리암이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섰고, 그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길게 섰다.
'진짜 출정이군.'
소수로 움직이는 1대대와 정반대였다.
그때, 리암이 다가왔다. 예의 늑대를 탄 상태였다. 늑대의 입가로 김이 거칠게 뿜어졌다. 잔뜩 흥분한 듯했다. 산책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고맙네."
갈라하드는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갈라하드의 말을 믿고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인 거였으니까.
"고맙기는. 그대는 대공 대리 아닌가. 명령만 내리게나."
리암이 시원하게 웃었다.
명령이라니-. 2대대 대장이면 대공과 아드리안나 다음 가는 북부의 권력자인데, 상당히 시원시원했다.
그때, 리암이 아드리안나를 가리켰다.
"아, 아드리안나 대장. 그대는 갈 수 없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뾰족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자네와 내가 동시에 마경으로 들어가는 건, 규칙에 어긋난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그 눈썹이 흔들리는 걸 보니, 리암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하긴 둘이 동시에 당하면, 북부가 위험하겠군.'
각각 최전방을 맡은 대장들이었다. 둘이 동시에 사라지면, 북부 전체가 위험했다.
타당한 논리였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물러날 걸 예상했다. 아드리안나는 정론적인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그저 규칙이다."
아드리안나가 물러나질 않았다. 리암의 눈이 구겨졌다.
"규칙일 뿐이라니. 대장으로서 북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그대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다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가겠다. 리암 대장은 이곳을 지키도록."
"이곳은 2대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리암이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 얼굴에 불쾌함까지 떠올랐다.
리암과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둘의 시선이 상반됐다. 대공 대리라는 신분을 이용한다면, 아드리안나도 넣을 수 있겠지만-.
'그러면 리암이 반발하겠지.'
상황이 악화될 게 분명했다.
더불어 대공까지 생각한다면-.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여기 있게."
"하지만-."
"규칙이라니까 어쩔 수 없지."
"언제부터 규칙을 지키셨다고-."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렸다.
"좋은 선택이다."
리암이 시원하게 웃으며 뿔피리를 건넸다. 마물의 상아라도 뽑은 건지, 참으로 거대한 뿔피리였다.
입을 대는 곳에 뭔가 끈적거렸다.
"길버튼 경. 자네가 하게나."
"이런 영광을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그래, 자네는 부대장 아닌가."
길버튼의 얼굴에 감동이 떠올랐다. 이내 길버튼이 결연한 얼굴로 뿔피리를 잡았다.
뿌우우우우우-!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출정이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부대가 천천히 전진했다.
"금방 다녀오겠네."
"같이 가겠습니다. 위험합니다."
"어쩌겠나 규칙인데. 별일 없을 걸세. 그리고 2대대도 있지 않나."
갈라하드는 슬쩍 양피지를 건넸다. 아드리안나가 그를 받았다.
"금방 오겠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풀렸다.
곧장 대대를 따라 움직였다. 1대대보다 옅지만, 재는 여전히 시야를 방해했다.
"그웬, 먼지 좀 치우게나."
"네. 바라아아아암!"
그웬을 중심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이내 재가 밀려났다. 재들이 먼지처럼 가볍게 밀렸다.
"오오-! 이것이 마법인가!"
"대단하군!"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투박한 칭찬이 쏟아졌다. 그웬은 헤헤 웃었다. 전보다 꽤 당당한 자세였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마물의 등장이었다. 곰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이었는데, 붉은 눈이 여섯 개나 달려 있었다.
"방어대형으로!"
리암이 거칠게 소리치며 검을 뽑았다. 이내 병력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거대한 방패를 든 이들이 선두에 섰다. 그 등을 다른 병사들이 받쳤다. 이내 마물의 공격이 방패를 두들겼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들렸지만, 대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찔러-!"
방패 뒤에 있던 병사들이 창을 깊게 찔렀다. 그 창의 모양이 특이했다.
"마물의 뼈로 만든 창입니다. 마물에 철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톰이 빠르게 설명했다. 오,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찔러-!"
창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물이 힘을 못 쓰고 쓰러졌다. 그 멱을 오러를 머금은 기사들이 그었다.
붉은 피와 함께 마물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사냥이군.'
매끄러운 마물 사냥에 갈라하드는 감탄했다.
"정리-!"
쓰러진 마물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피가 튀고, 가죽이 찢겼다. 아주 매끄러운 뒤 처리였다.
마물 하나를 순식간에 쓰러뜨렸지만, 그들은 쉬지도 않고 다시 전진했다.
몇 번이나 마물과 마족을 만났지만, 그 대처가 훌륭했다.
"이곳이 본래 마경이었던 곳이다."
리암이 투구를 털며 말했다. 그 투구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리암이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확실히 깔린 재의 색이 달랐다.
"진짜 줄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줄었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만약 그것으로 대왕 뾰족아리가 생겼다면?"
"뾰족아리야 뭐-."
"자, 그게 뾰족아리가 아니라면?"
길버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도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때, 마경 안쪽에서 묘한 충동이 느껴졌다.
두근! 고통의 알이 격렬하게 뛰었다.
느껴본 적 있는 충동이었다.
'흑마법사 학회장을 잡았을 때.'
아니, 정확히는 놈의 지팡이에 달린 다른 고통의 알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충동이었다.
'저기에 자네 친구가 있군.'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놈이 이쪽을 부르고 있었다.
두근!
고통의 알이 힘차게 박동했다.
'아주 맛있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새로운 먹이가 온 것이다.
"부화까지 한 마리 남았는데."
운이 좋군.
사내는 짙게 웃었다.
190화 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