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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 - 190-195

190화 유인

'음-.'

강렬한 충동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는 느껴본 적 있는 충동이었다.

'새로운 고통의 알-.'

마경을 줄인 게 놈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두근!

고통의 알이 거칠게 충동질했다. 당장 안에 들어가서 알을 섭취하자는 듯했다.

"뭐라도 찾았나?"

그때, 리암이 투구를 벗으며 물었다. 그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갑주에는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놈은 마경 안에 있네."

갈라하드는 마경을 가리켰다. 리암의 얼굴이 굳었다.

"마경을 줄인 놈 말인가?"

"그래, 우리를 부르고 있군."

"······마경은 위험하다."

리암이 침착하게 경고했다.

"겁이라도 나는 건가?"

가벼이 도발하니, 리암이 눈썹을 찡그렸다. 다만, 그건 찰나였다.

"그럴 리가. 바로 찾아서 좋군."

리암이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됐군."

리암이 병사들에게 향했다.

'바로 찾아서 더 좋다-.'

갈라하드는 리암의 말을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몇 번이나 중얼거리자, 그 원인을 깨달았다.

갈라하드는 대공을 피해서 성을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정한 행보에, 다른 고통의 알이 있다니-.

'우연인가?'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갈라하드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그웬."

"네!"

"통역 좀 부탁하겠네."

"알이랑요?"

갈라하드가 끄덕이자, 그웬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뾱! 그웬이 갈라하드를 가벼이 찔렀다.

"자네가 나를 인도한 건가?"

두근! 두근!

"아니래요! 무한한 힘을 걸고 진짜로!"

"그러면 갑자기 행한 동선에서 고통의 알을 마주친 게, 우연이라는 건가? 나를 길버튼으로 아는군."

두근! 두근!

"진짜 아니래요! 애초에 자신에게 그럴 힘이 있냐는데요? 방금은 무한한 힘이라며!"

두근! 두근!

"네가 자신이 움직인다고 움직일 놈이냐는데요! 아, 놈은 빼고? 놈은 취소래요!"

맞는 말이었다. 고통의 알이 충동질한다고 움직일 갈라하드가 아니었다.

저번에 놈에게 주도권을 뺏긴 이후로 갈라하드는 경계를 늦춘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통의 알이 눈치도 못 채게 본능적으로 끌었다는 건가.'

우연보다 가능성 높은 선택지였다.

'하긴 이쪽은 싸구려 알이니까.'

두근! 두근!

"네놈이 다 가져가서 그런 거 아니냐는데요! 아! 놈은 빼고?"

갈라하드는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주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고통의 알이 있었다. 명백한 기회였다.

오히려 운이 좋은 상황이었지만-.

'장소가 하필 마경이군.'

상대는 마경 안에 있었다.

마경은 위험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변수 범벅이었다.

아드리안나가 없는 상황에서 마경에 들어가는 위험했다. 고위 마족이라도 나오면 끝이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길버튼의 투박한 물음에 상념이 끊겼다. 길버튼이 검을 털었다. 붉은 피가 길게 뿌려졌다.

"마경을 좁힌 범인이 있는 것 같네."

"제대로 왔군요."

"제대로 왔지."

"근데 표정은 왜 안 좋으십니까?"

"놈의 유인에 당한 것 같군."

"대장이 그런 것도 당합니까?"

길버튼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기에 더 위험한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고민 중일세."

갈라하드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안에 있는 놈을 잡고 싶었다. 놈의 알을 흡수하고 싶었다.

다만,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했다.

남이 짠 판으로 들어가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판을 엎어야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충동질했다. 이 상황에도 침만 질질 흘리다니-. 하여튼 싸구려 알이었다.

'충동질?'

갈라하드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리암의 부대는 아주 훈련이 잘된 부대였다. 특히 대형을 이루고 있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길버튼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가 막힌 계획이 떠올랐네."

"기가 막힌 계획이 뭡니까?"

그때,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대형을 바꾸는 2대대 놈들이 보였다. 그 선두에 리암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마경을 정복한다! 마족을 섬멸한다! 북부를 위하여!"

리암이 목청을 높이며 사기를 돋웠다. 대장의 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율이 파도처럼 넘쳤다. 그에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아졌다.

'자기들끼리 들어갈 분위기군.'

물론, 리암한테 들어가자고 말한 건, 갈라하드였다. 다만, 벌써 저렇게 됐다니.

"하여튼, 무식한 북부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리암에게 향했다.

"준비 끝났다! 대공 대리!"

리암이 호탕하게 웃었다. 병사들이 환호하며 무기와 방패를 두드렸다. 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굉장한 압박감이었다.

"생각해 보니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군. 함정일 수도 있다."

갈라하드는 슬쩍 운을 띄웠다. 리암이 콧수염을 들썩거렸다.

"나는 안에 뭐가 있는지 안다."

리암이 누런 이를 가득 드러냈다. 아주 북부인스러운 미소였다.

'안에 뭐가 있는지 안다고?'

갈라하드의 의문을 읽었는지, 리암이 호탕하게 웃었다.

"마족과 마물이지!"

리암의 북부식 외침에 병사들이 다시 철을 두드렸다.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아주 사기가 대단한 부대였지만-.

"미안하지만, 마경 안으로 안 들어갈 걸세."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방금까지 환호하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리암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분명 아까 마경으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안에 놈이 있다고."

"음,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위험하더군."

리암이 눈을 가득 구겼다.

"······지금 장난치는 건가?"

분위기가 급격하게 험해졌다. 리암이 검을 빙글 돌렸다. 날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길버튼이 냉큼 갈라하드 옆으로 붙었다. 갈라하드는 '떨어지게.'라며 한 소리했다. 길버튼이 씰룩거리며 물러났다.

"장난이라니. 진심일세."

"······그러면?"

리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놈을 유인할 걸세."

······유인?

리암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

이론은 간단했다.

갈라하드가 놈에게 충동을 느끼듯, 놈도 갈라하드에게 충동을 느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충동의 강도였다.

명백하게 놈이 더 강렬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갈라하드가 느끼는 충동에 비하자면, 놈의 충동은 약할 것이다.

놈의 충동을 더 키울 방법이 필요했다.

"마물을 잡아 오게."

"······마물을?"

"많으면 많을수록 좋네."

"알겠다."

리암이 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방금까지 기세를 올리던 병사들이 흩어졌다. 그들은 사냥하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퍼졌다.

갈라하드는 램프와 금색 봉을 풀었다.

고통의 알이 먹는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생명력과 다른 알이었다.

생명력은 고통의 알 주식이었다. 고통의 알은 생명력으로 강해졌다.

다른 고통의 알을 먹는 건, 생명력과 느낌이 달랐다. 고통의 알 자체를 키우는 느낌이었다.

흑마법학회 학회장 때, 고통의 알이 쑥 커지지 않았나.

다른 알을 먹는 건 그 등급을 높이는 느낌이었다.

고통의 알이 그릇이라고 표현하면, 생명력을 먹이는 건 그릇의 내용물을 채우는 거였다.

다른 알을 먹이는 건, 그 그릇 자체를 키우는 느낌이었다.

'그 내용물을 가득 채우면 맛있게 보이겠지.'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사료를 앞에 둔 개새끼마냥 뛰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말하는 걸세. 허튼수작 부리면, 심장을 뽑는 한이 있어도 자네를 치울 걸세.'

갈라하드는 담담히 말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진심임을 느낄 것이다.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애초에 알에게 넘어갈 정도로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최근 과부하가 온 건, 체내 마나 농도를 너무 올렸기 때문이었다.

체내 마나 농도를 올리는 작업은, 최초의 마법사 마법진과 고통의 알을 동시에 사용해야 했다. 과부하가 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할 건 그냥 생명력 채우기였다.

'고통의 알만 쓰면 되지.'

애초에 갈라하드가 관여할 필요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램프를 확인했다. 램프는 여전히 회색 불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개척자의 생명력이었다.

'이걸 여기서 쓰긴 아깝지.'

굵은 회색 불 주변에 작은 불이 있었다. 마물들의 생명력이었다.

갈라하드는 조심스레 금색 봉을 작은 불에 꽂았다. 회색 불이 금색 봉을 타고 올랐다.

금색 봉의 끝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모습이 이상했지만, 고통의 알에 직접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고통의 알이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생명력만 보면 눈이 뒤집히던 때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기다리게.'

고통의 알이 꿈틀거렸다. 다만, 생명력을 두고도 안 달려들었다. 필사적으로 참았다.

갈라하드는 잠시 시간을 끌었다.

'먹게나.'

고통의 알이 냉큼 달려들었다. 생명력을 먹기 시작했다. 참으로 게걸스럽게 먹었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군.'

두근!

고통의 알 박동이 점점 커졌다.

들어온 생명력이 순전히 고통의 알에게 간 까닭에 갈라하드의 정신은 멀쩡했다. 아예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고통의 알과 이어주니까, 몸에 무리가 현저히 적었다. 갈라하드는 그저 통로였다.

이렇게 직접 먹이는 건 처음이었기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맛있나?'

두근! 두근! 그 박동이 전보다 굵었다. 아주 맛있다는 듯했다.

'그러면 더 먹게.'

생명력을 더 퍼부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열심히 생명력을 뜯었다. 신난 기색이 여실히 전해졌다.

그때, 마물들이 하나씩 잡혀 왔다. 마물들이 숨만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었다. 확실히 2대대의 능력이 대단했다.

"여기에 두게."

갈라하드 앞으로 마물이 엎어졌다. 갈라하드는 램프를 마물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

회색 불이 마물로 넘어갔고, 이내 마물이 재로 변해 휘날렸다.

그로 인해 마경이 넓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줄었던 거 아니었나.

"마경이 도로 넓어졌다-."

"진짜 이게 맞습니까?"

"크흠, 대공 대리니까."

웅성거림은 가벼이 무시했다.

램프의 회색 불이 커졌다. 갈라하드는 회색 불에 금색 봉을 꽂았다. 생명력이 타고 올랐다.

두근!

"무한한 힘을 느끼거라! 경배하래요!"

그웬이 옆에서 통역했다.

생명력이 조금 들어가니, 기세가 살아난 듯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다시 마물에 램프를 댔다. 회색 불이 커졌고, 다시 금색 봉을 꽂았다.

두근!

"힘이 넘친다! 무한한 힘이다-!"

다시 반복했다. 마물을 재로 만들고, 마경이 넓어지고, 회색 불이 커지고, 생명력이 넘어오고-.

두근?

"힘이 넘쳐서 좋기는 한데, 슬슬 배가 부르다는데요?"

갈라하드는 무시하고 금색 봉을 다시 잡았다.

"어어? 슬슬 다 찼다는 대요. 그만해도 된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직 시작도 안 했네. 벌써 지쳤나?"

두근!

가벼운 도발에 고통의 알이 생명력에 달려들었다.

다시 또 반복했다.

두근! 두근!

"배가 터질 것 같다는데요!"

"배가 없으니, 터질 일은 없다고 전해주게."

"괴롭데요!"

"고통은 성장의 증거일세."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금색 봉을 깊게 꼽았다.

회색 불이 타올랐다.

두근!

"자기가 잘못했대요!"

"아주 잘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조금만 더 힘을 내게."

두근!

"더는 못 먹겠데요!!"

"아니, 자네는 할 수 있네. 무한하지 않나."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더 깊이 꽂았다.

"자, 마음껏 먹게!"

두그으으은!

그웬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얼마나 남았습니까?"

무심한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개미 가면을 쓴 이들이 둘 있었다.

여명에서 나온 놈들이었다.

사내는 가만히 안을 확인했다. 배는 이미 가득했다.

딱-.

"한 마리 정도면 되겠군. 알이 꽉 찬."

사내는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정도면 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몇 마리를 먹였는데-."

"그만. 한 마리라. 알겠습니다."

투덜거리는 놈을 다른 놈이 말렸다.

"마침 밖에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사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향긋한 냄새가 계속 풍겼다. 참지 못할 정도로 향긋했다.

"2대대 대장과 부대가 같이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위험하다? 내가?"

사내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에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감히 대마족인 내게 건방지게 지껄이는구나."

사내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개미 가면들이 납작 엎드렸다.

"내가 직접 행하겠다."

개미 가면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사내의 눈이 이미 돌아가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내를 가득 충동질하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개미 가면이 끄덕였다.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배가 꿀렁거렸다. 이내 배가 흐트러지며, 사람의 상반신이 나왔다.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오."

사내는 여인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먼저 준비하겠습니다."

개미 가면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 오래 못 기다린다."

사내의 말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이미 잔뜩 들썩이고 있었다.

'잘못 걸렸군.'

개미 가면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옆으로 작은 개미 가면이 붙었다.

"선배, 저걸 두고 볼 거예요? 저렇게 깝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여기까지 키웠는데, 버릴 거야?"

개미 가면은 후배의 불만을 일축했다.

"그저 생명력 양동이인 실패작 새끼가-."

"말조심해라."

"아니, 제가 틀린 말 했어요? 맞잖아요. 그래서 그분도 실패작이라고 폐기했는데."

"실패작이라도 우리에게는 가장 편한 방식이잖아. 먹이기만 하면, 자기들끼리 잡아먹으면서 일정 수준까지 커지고. 우리는 수확하고. 뭐가 불만이야?"

"띠껍잖아요."

"그건-."

개미 가면은 말을 잃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알을 품은 놈들은 하나같이 띠꺼웠다.

"······어쩔 수 없지. 근본은 대마족이니까."

개미 가면은 슬쩍 혀를 찼다. 후배 개미 가면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저거 숙주 있잖아요. 부화할 때, 안 죽으면 어떻게 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괜히 고통의 알이겠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야. 숙주는 무너져."

"그러니까 만약 버티면요."

밑도 끝도 없는 우기기였다.

"진짜 부화하겠지. 조건에 따라서 외형이 바뀌고. 꽤 볼만할 것이다."

개미 가면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후배 개미 가면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까 걔는 사내잖아요? 사내지만, 낳았으니 엄마가 되는 건가?"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런 의미로 낳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낳았잖아요."

또다시 우기기였다. 개미 가면은 가벼이 끄덕였다.

"그래, 엄마가 되겠지. 낳았으니까."

엄마래-.

둘은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

'둘이 초야를 보냈다-.'

대공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이 절로 쥐어졌다. 쇠로 만든 의자가 그대로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군.'

아드리안나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 헛소문이었다. 다만, 그를 알아도 화가 안 풀렸다. 그 뻔뻔한 놈이 그럴만한 짓을 했다는 거니까.

그에 놈을 잡으려 했지만, 놈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어이가 없었다.

"함부로 떠벌리면, 입을 뽑겠다."

대공은 짤막하게 말했다. 참모들이 황급히 끄덕였다.

이제 성에서 아드리안나에 대해서 떠드는 이는 없을 것이다.

'초야-.'

그 단어가 대공을 괴롭혔다.

언젠가는 진짜로 벌어질 일이었다.

'절대로.'

대공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

생각이 다시 흘렀다.

초야라면, 혹시-.

'손녀면 좋겠군. 아드리안나만 닮은.'

대공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니, 절대 안 된다.

다시 사나워졌다.

절대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손녀라면-.

대공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191화 명품

'음-.'

앞에 펼쳐진 모습에 리암은 침음성을 흘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특무대의 하녀였다.

"할 수 있어! 힘내! 이겨내는 거야!"

하녀가 왜 갈라하드의 가슴을 보면서 응원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특무대의 다른 이들도 전부 이상했다.

어떤 병사는 솥을 꺼내더니 요리를 시작했고, 작은 소년은 그 옆에 앉아서 연신 뭔가를 먹었다. 그나마 길버튼만 혼자 경계를 섰다.

마경이 아니라 숙소에 있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때, 수하들과 눈이 마주쳤다.

"마경을 넓히고 있습니다."

수하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대공 대리, 갈라하드가 있었다.

한 올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는 그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고, 깔끔한 흑색 마물 코트와 손에 든 괴상한 금색 봉과 램프까지-.

북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족 같은 사내였다.

그 사내 앞에는 이들이 잡아 온 마물들이 엎어져 있었다.

사내가 마물에 램프를 가져다 댔다. 마물이 회색 불에 타올랐다.

사내의 고급스러운 외모 때문일까. 일련의 종교 행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숙했다.

그럴 때마다 마경이 넓어졌다.

단순히 생각하면 마경을 넓히는 것보다 좁아지는 게 좋았다. 마경은 마족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런데 갈라하드는 오히려 마경을 넓혔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에 물어보니, '안에 있는 놈을 꺼내기 위해서일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경을 좁힌 놈을 잡자고 오히려 마경을 넓힌다-?

'이해할 수 없군.'

다만, 갈라하드 대공 대리였다.

"갈라하드 대공 대리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리암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톰이라는 병사였다. 스튜가 가득 담긴 그릇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이것 좀 드시겠습니까?"

마경에서 식사라니-. 도대체 기강이 어떻게 된 모양인가.

리암은 입 끝까지 나온 욕을 애써 삼켰다. 수하가 대신 그릇을 받았다. 수하가 리암의 눈치를 보며 슬쩍 홀짝였다.

"이거 존나게 맛있습니다!"

수하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다른 수하들도 하나둘씩 그릇을 받았다.

이미 엄포를 놓은 리암은 차마 받을 수 없었다.

괜히 입맛만 다시고 있을 때, 톰이라는 병사가 다시 다가왔다.

"냄새가 마음에 안 드신 듯하여, 새로 끓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시겠습니까?"

"크흠, 어쩔 수 없군."

리암은 못 이기는 척 슬쩍 그릇을 받았다.

스튜를 홀짝인 리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최고군! 정말 맛있다!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나?"

리암의 빠른 인정에 톰은 어색하게 웃었다.

****

"주··· 죽을 거 같다는데요?"

그웬의 움츠러든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아래를 내려봤다.

두근. 두근-.

확실히 고통의 알이 전보다 미약하게 뛰었다. 다만, 아직 뛰긴 했다.

'평소에 그리 탐하더니만-. 고작 이 정도인가.'

두근! 두근!

"이런 잔인하고 무도한 놈······. 아니, 자기가 잘못했대요."

"오, 더 먹을 수 있다고?"

갈라하드는 곧장 금색 봉을 찔렀다. 회색 불이 금색 봉을 타고 퍼졌다.

고통의 알이 도망가려 했지만, 금색 봉이 고통의 알 위치를 정확하게 겨냥했다. 생명력이 가장 먼저 고통의 알에게 향했다.

두근!!! 고통의 알이 크게 뛰었다. 그 박동이 전보다 더 처절했다.

고통의 알은 생명력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히··· 힘내! 할 수 있다! 이겨야 해!"

그웬이 양 주먹을 움켜쥐고 응원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안쪽에서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다.

'슬슬 입질이 오는군.'

상대를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니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아드리안나가 없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리암이 있었다. 리암은 분명한 실력자였다.

그때, 습관적으로 뿌려둔 마나가 반응했다. 바닥이었다. 그에 고개를 내리니, 땅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아래에 있다.'

경고하려는 순간, 들썩거리던 땅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하얀색 개미 가면을 쓴 놈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오, 안녕하세요?"

놈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유로운 인사에 갈라하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최상급 마족이다.'

놈은 최소 최상급 마족이었다. 어쩌면 고위 마족일 수도 있었고-. 그 경계에 있는 듯했다.

그 개미를 그린 가면이 익숙했다. 여우 가면과 흡사했다.

'여명인가?'

애초에 갈라하드가 먹었던 고통의 알도, 코르튼이 여명에서 받은 물건이었다.

갈라하드는 안에 깊이 넣어둔, 대공에게 받았던 마족의 피를 매만졌다.

이미 생명력은 넘쳤다. 고통의 알이 마나를 발산시키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압축으로 마나 농도를 최대한 끌어 올리면-.

'잡을만하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손가락을 튕기려고 할 때-.

옆이 들썩거렸다. 땅이 울렁거리더니 새로운 구멍이 뚫리고, 다른 개미 가면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검은 개미 가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한 목소리였다.

갈라하드는 튕기려는 손가락을 멈췄다.

놈의 존재감이 상당히 강렬했다.

'······고위 마족이다.'

고위 마족의 존재감이었다.

이곳은 마경이었다. 마경에서 최상급 마족 하나와 고위 마족 하나를 동시에 마주하다니-.

'좋지 않군.'

심지어 안쪽에 다른 고통의 알까지 있었다. 만약 그 알이 최상급 이상이라면-.

'아주 좋지 않아.'

갑자기 아드리안나가 보고 싶어졌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계산을 다시 두드렸다.

최상급 마족을 갈라하드가 빠르게 잡고, 나머지로 고위 마족을 압박한다면-.

'리암이 고위 마족을 잡을 수 있나?'

고위 마족은 각기 다른 권능을 썼다. 놈이 지배자처럼 아래 것들을 조종하는 권능이라면, 이쪽의 병력은 오히려 약점이 될 것이다.

더불어 안쪽에 있는 고통의 알이 고위 마족 급이라면?

'최악이군.'

톡톡,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 먼저 나온 흰 개미 가면이 투덜거렸다.

"이거 그 갈라하드 아니에요? 수배 내려진?"

"맞는 것 같군. 북부에 저런 사내가 흔치 않으니까."

"저기 갈라하드세요?"

이내 퉁명스러운 질문이 던져졌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둘은 여명에게 수배당하는 갈라하드를 알아보고, 오히려 귀찮은 기색을 떠올렸다.

'복잡한 뭔가 있군.'

갈라하드는 슬쩍 끄덕였다.

"맞네, 내가 그 갈라하드일세. 바로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한계까지 압축한 마나를 꾹 누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왜 그쪽이 양동이··· 아니, 고통의 알을 가지고 있어요? 심지어 먹었네?"

"선물 받았네. 제법 맛있더군."

개미 가면들이 시선을 교환하고, 다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게 뭔지 알고 먹은 거예요?"

"초콜릿?"

"아하하, 듣던 대로 재밌네요. 선배도 좀 웃어요."

"음-."

선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선배라는 쪽에 선택권이 있는 듯했다.

선배라 불린 검은 개미 가면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여명에서 갈라하드님을 수배하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어쩐지 최근에 인기가 많아졌더니만."

"풉."

선배 개미가 후배 개미를 쳐다봤다.

'왜요? 웃기잖아요.'

후배가 작게 중얼거렸다. 선배 개미가 다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저희는 그쪽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 일을 처리하기도 벅차서 말입니다."

"그렇군. 충분히 이해하네."

후배 개미가 다시금 실소를 터뜨렸다. 선배 개미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 알이 그쪽을 원해서 말입니다."

선배 개미가 뒤를 쳐다봤다.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고위 마족급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래, 침 흘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니까."

"······그래서 저희가 놓아줄 수 없습니다."

"자네도 난감하겠군."

"와, 담이 장난 아닌데요?"

선배 개미가 후배 개미를 쳐다봤다. 후배 개미가 슬쩍 어깨를 들썩였다.

"저희는 알 다툼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질 좋은 알을 선택하기 위함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놈이 더 질 좋은 놈이다?"

"맞습니다."

"상당히 원초적인 비교군. 그래서 나보고 저놈과 단둘이 싸우라는 건가?"

"예,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합리적이군."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그래서 알을 키우는 건가? 키워서 어디에 쓰는 거지?"

"수확합니다."

"수확해서 볶아먹나?"

"비밀입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 자네들 사정은 알겠지만, 거절하겠네. 안 내키는군."

갈라하드의 담담한 거절에 개미 가면 둘이 뚝- 멈췄다.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제가 잘못 들었어요?"

"음-."

"맞네. 거절하겠다고 말했네."

갈라하드는 친절하게 다시 설명했다.

"아, 거절하겠대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만."

선배 개미가 조금 더 올라왔다. 그 아래는 깔끔한 정복이었다.

그때, 선배 개미 뒤로 서늘한 날이 빛났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선배 개미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잘했네. 데미안. 합리적인 제안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군."

갈라하드는 슬쩍 양손을 뻗었다. 뒤로 길버튼과 리암이 있었다. 리암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날카로운 무기를 겨눴다.

"어이쿠! 포위됐는데요!"

"장난칠 때가 아니다."

여유로운 반응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뭔가 있군.'

하긴 그러니까 들어온 거겠지. 갈라하드도 이걸로 놈들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놈들의 패를 하나라도 까기 위함이었다.

저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으니까.

"아, 제가 설명을 제대로 안 드렸군요."

선배 개미 가면이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다 죽고 잡혀가거나, 그냥 혼자 따라오거나."

데미안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그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데미안이 검을 멈추고 뒤로 뛰었다. 그웬이 있는 곳이었다. 데미안이 그웬을 밀었다.

"데미안?!"

땅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올라왔다. 가시가 방금까지 그웬이 있던 곳을 스쳤다.

"방어! 하단!"

리암이 크게 외쳤다.

땅에서 수많은 가시가 솟구쳤다. 흙으로 만든 가시였다.

길버튼의 검이 갈라하드 앞을 갈랐다. 갈라하드를 향해 올라오던 가시들이 잘렸다. 퉁, 길버튼의 갑주를 가시가 긁었다.

고작 숨 한 번 뱉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주변은 온통 굵직한 가시밭이었다.

피하지 못한 병사들 몇이 꿰뚫렸다. 실로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다만, 그래도 경계한 탓인지 치명적인 부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경고 목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갈라하드의 시선은 놈들에게 꽂혀 있었다.

'이건-.'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멸망한 마탑 중 대지 속성인 질곡의 마탑이군."

개미 가면들이 뚝 멈췄다.

"보셨듯,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선배 개미 가면이 대답 대신 협박했다.

"마경에서 대지를 사용하는 질곡의 마탑이라면, 그 위력이 확실하겠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인정했다.

물론, 저들도 이들 전부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길버튼과 리암이 반응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병사들의 피해가 클 것이다.

무엇보다-.

'실로 흥미롭군.'

알 하나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거기에 질곡의 마탑까지 더해진다니-.

'오늘이 내 생일이었나.'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웃었다.

"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선배 개미 가면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협박에 몇몇이 분노를 토했다.

"그래, 제안에 응하겠네."

갈라하드는 냉큼 끄덕였다.

"대장-. 그게 무슨-."

길버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뜨거운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아, 금방 다녀오겠네."

시원하게 웃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크게 흔들렸다. 길버튼이 다급히 뛰었다. 땅이 가득 올라왔다.

순식간에 거대한 성벽이 세워졌다.

'빌어먹을-.'

길버튼은 이를 악물며 오러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푸른 빛이 창연하게 타올랐다. 푸른 선이 성벽을 갈랐다.

그 두꺼운 벽이 가벼이 그어졌다. 그에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성벽 안에는 리암이 있었다. 리암의 검이 땅에 꽂혀 있었다. 거기에는 가면을 쓴 놈의 팔이 잘려있었다.

다만, 어디에도 갈라하드는 없었다.

"늦었다."

리암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의 피해를 생각하여, 혼자 희생한 것이다. 실로 대단하다-."

리암이 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길버튼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곳곳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늦게 들어온 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분명-.

'웃고 계셨는데?'

"희생까지-. 갈라하드, 진정한 영웅의 면모를 지녔군."

다만, 분위기가 엄숙하여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오, 흙에 지배력을 행사하는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목소리가 잔뜩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땅이 나를 밀어냈다.'

아니, 땅 자체가 움직였다. 그를 통해 갈라하드는 순식간에 이동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탄 느낌이었다.

"실로 놀라운 마법일세. 아, 자네들에게는 권능이겠군. 혹시 심연의 마탑도 여명에 있나?"

대답은 없었다. 음-. 나지막한 침음성이 전부였다.

'여우 가면이 업화는 없었다고 했으니, 나머지 셋이 여명에 있겠군.'

상당히 흥미로운 구성이었다. 당장 여명에 접수 신고하고 싶을 정도였다.

'들어가면 안 되나?'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간첩이야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었으니까.

"여명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디서 접수해야 하지?"

둘이 다시금 크게 흔들렸다. 땅이 작게 울렁거렸다. 그 일렁거림이 꽤 규칙적이었다.

"아, 대지를 통해서 대화하는 건가? 마나로 교류하는 것과 비슷하군. 생각보다 범용성이 뛰어난 모양일세."

울렁거리는 게 뚝 멈췄다. 정말 대지로 대화하고 있던 듯했다.

그때, 후배 개미 가면이 보였다. 놈의 한쪽 팔이 없었다. 잘린 듯했다.

"이런 자네, 팔을 두고 왔군. 정신이 어딨는 건가. 빨리 가서 다시 가져오게나."

슬쩍 도발했지만, 개미 가면은 넘어오지 않았다.

"······너 도대체 뭐지?"

팔이 잘렸는데, 그 목소리가 무심했다. 역시 마족이었다.

"갈라하드일세. 아까부터 나만 대답하는군. 하나를 물어보면, 하나를 대답하는 게 예의인데 말이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갈라하드는 쯧하고 혀를 찼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살벌한 충동이 느껴졌다. 아까 그 알이었다.

"너는 질 것이다. 알은 등급이 절대적이다."

후배 개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배 개미가 끄덕였다.

"오, 그런가."

갈라하드는 가벼이 감탄하며 유리병을 열었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썩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저쪽은 엄선된 알이다. 네 것은 최하급 중에서도 최하급이지. 수확할 가치조차 없어서 뿌리듯 버린 것들이다."

갈라하드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후배 개미가 말을 덧붙였다.

'이런, 자네 진짜 싸구려였군.'

하긴 애초에 싸구려가 아니라면, 코르튼 손에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두근!

고통의 알이 항변하듯 뛰었다.

"아무리 그래도 싸구려 중의 싸구려라니 말이 심하군."

"그렇게 말한 적 없는-."

"쯧."

갈라하드는 유리병을 입에 가져갔다.

짙은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 타올랐다.

순간 어지러움이 핑- 돌았다.

그때, 정면의 안개가 걷히며 상대가 등장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배에 달은 놈이었다. 자웅동체인 듯했다.

그런데 그 존재감이 실로 강렬했다.

선명한 적의가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최상급과 고위 마족의 경계군.'

이쪽 알과 차이가 극심했다.

두근! 두근!

놈을 본 고통의 알이 비명을 지르며, 심장 뒤로 숨었다.

아까는 당장 잡을 것처럼 기세등등하더니, 막상 마주하니까 숨는 고통의 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싸구려였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을 풀었다.

"뭐, 괜찮네. 내가 명품이니까."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비틀렸다.

192화 미니미

'정말 저대로 둡니까?'

후배 개미 가면이 선배를 보며 물었다.

그 주변의 땅이 들썩였다. 대지를 이용한 대화 방식이었다.

[알잖나. 놈은 여명에서도 소문이 있는 놈이다. 괜히 엮여서 좋을 게 없어.]

선배의 대답에 후배는 끄덕였다.

갈라하드가 북부에서 활개친 건 제법 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명에 이름이 올라온 건 비교적 최근이었다.

정보력이 뛰어난 여명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위쪽에서 누군가 갈라하드에 관한 정보를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에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알끼리 전투 중에 죽으면, 우리한테 책임이 돌릴 수는 없을 거다.]

맞는 말이었다. 알 수확은 여명에서도 중한 일이었다. 생명력을 공급하는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알 사이의 등급은 절대적이다.]

후배 개미 가면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정면에 당당히 걸어가는 갈라하드가 보였다.

알 사이의 등급은 절대적이었다. 놈은 꽤 강한 듯했지만, 알의 격차를 메꿀 수는 없었다.

[놈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부화한 알을 수확해서 가면 끝이야.]

후배 개미 가면은 가만히 끄덕였다.

탁-.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

'침을 질질 흘리는군.'

넘실거리는 선명한 적의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마나를 뿜어댔다.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느꼈는지, 마나가 평소보다 더 짙고 많았다.

알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마족에 기반을 둔 건 명백했다.

마족은 마법사와 같은 원리로 강함이 절대적이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마나 농도부터 맞춰야지.'

갈라하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공이 준 마족의 피가 생각보다 더 짙었다. 시야가 핑- 돌았다.

마족의 피를 마시는 건, 램프를 통해 섭취하는 생명력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대신 그만큼 반작용이 강했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이 내뱉은 마나를 다시 압축했다. 심장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그때, 짙은 재가 좌우로 찢겼다. 그리고 등장한 건, 살집이 두둑한 사내였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모습이 상당히 끔찍했다. 그 두둑한 배에 여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놈이 갈라하드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이라도 갈라하드를 먹고 싶어서 안달 난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갈라하드도 놈을 보면서 똑같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최상급과 고위 마족의 경계인가.'

갈라하드는 상급이었으니, 한 단계 반이 넘는 차이였다.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천벌이 놈에게 정확히 떨어졌다.

한계까지 압축한 마나로 구성한 천벌이었기에, 그 파괴력이 상당했다.

주변이 온통 밝은 빛으로 밝혀졌다.

정작 놈은 움찔거린 게 전부였다.

"간지럽군."

놈의 배에 달린 여인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놈의 입가가 길게 찢겼다.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귀에 닿을 정도였다. 아주 깊은 조소였다.

'마나를 가득 압축하면 찰과상 정도인가.

예상보다 격차가 조금 컸다. 그건 꽤 치명적인 차이였다.

놈이 갈라하드를 향해 뛰었다. 그 속도가 상당했다. 갈라하드는 곧장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에는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날아갔다. 놈이 쩍 벌린 입으로 얼음송곳이 빨려 들어갔다. 꿀꺽-. 얼음송곳이 사라졌다.

'마법을 먹는군.'

어느새 놈이 갈라하드 앞에 도착했다. 그 입이 쩍 벌어졌다. 갈라하드를 단숨에 삼키려는 듯했다. 바람이 갈라하드를 가득 빨아들였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둘 사이에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갈라하드를 밀었다. 갈라하드는 그를 이용하여 뒤로 굴렀다. 바로 자세를 잡고 일어났다. 가슴에서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놈은 멀쩡했다. 조금 그을린 게 전부였다. 놈의 배에 있는 여인이 키득키득 웃었다.

'바로 앞에서 명중했는데 저 정도라니-.'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생각보다 격차가 컸다.

'업화를 써야 하나?'

이미 거리가 좁혀진 뒤였다. 업화의 숙련도가 부족했기에, 그를 시전할 시간이 부족했다.

시전해도 놈이 피할 수도 있었다. 업화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놈은 농도의 절대적인 차이를 이용한다.'

참으로 무식한 전투 방식이었지만, 그런만큼 효과적이었다.

농도가 낮으면, 이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놈에게 먹힐 테니까-.

'농도를 맞춰야 한다.'

마나를 더 압축해야 했다.

'어떻게?'

갈라하드가 다루는 마나는 총 세 가지였다.

고통의 알이 뿌리는 마나, 마법진이 압축한 마나, 심장이 압축하는 마나-.

보통은 고통의 알이 뿌린 마나를 심장이 압축하거나, 아니면 고통의 알이 뿌린 마나를 마법진을 통해서 압축했다.

그것만으로도 과부하가 올 정도의 마나 농도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은 더 높은 압축이 필요했다.

'고통의 알이 뿌린 마나를 마법진으로 이차 압축하고, 심장에서 세 번째로 압축한다면-.'

이론상으로 가능했다.

문제는 심장이 버틸 수 있는가였다.

어쩌겠나.

'버텨야지. 꽉 잡게. 안 터지게.'

갈라하드는 손을 털었다. 고통의 알이 뿌린 마나를 마법진에 압축했다. 마법진이 금색 빛을 가득 뿌렸다.

본래였다면 여기서 마나를 썼을 것이다. 이번에는 마나를 심장으로 인도했다.

뿌득-. 심장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짙은 마나가 무겁게 움직였다.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심장에 붙었다. 심장을 꽉 잡았다.

심장으로 철을 제련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놈의 입이 길게 벌어졌다. 갈라하드는 이를 악물며 옆으로 뛰었다.

놈이 입을 벌리기 전에 반응했지만, 오른팔이 휘말렸다. 코트가 날아가고, 피가 거칠게 쏟아졌다. 끔찍한 통증이 올라왔다.

'피부가 그대로 벗겨졌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맛있네."

놈이 쩝쩝거렸다. 그 목소리에 여유가 가득했다. 이쪽을 가지고 노는 듯했다.

갈라하드의 정신은 온통 심장에 향해 있었다.

폭포처럼 거대한 마나가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 무게에 순간 심장이 터질 듯했다.

거센 파도가 심장을 두드렸다. 뿌드드득,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크게 부풀었다. 고통의 알이 심장을 가득 잡았다.

두근! 고통의 알이 비명을 길게 질렀다.

'나는 마법사다.'

마나는 말이었고, 갈라하드는 고삐를 쥔 마부였다.

그 마나가 거대한 파도여도, 갈라하드가 고삐를 쥐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고삐가 아주 허름하고 작다는 게 문제였지만-.

'몸의 마나는 나의 것이다.'

갈라하드는 불평 대신 고삐를 더 거칠게 잡았다.

콰아앙! 고삐가 뜯어질 것처럼 팽배해졌다. 아직 부족하다.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고삐를 당겼다.

찌지직, 끔찍한 소리가 들리며 정신이 흔들렸다. 고통의 알이 심장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콰아아아앙! 파도가 다시금 몰아쳤다. 고삐를 강제로 틀었다. 몸이 크게 흔들렸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고삐를 놓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이다.

본능이 속삭였지만, 갈라하드는 오히려 고삐를 더 거칠게 틀었다.

거친 파도 같은 마나를 심장에 밀어 넣었다. 이를 악물며 심장이 뛰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찰나였지만, 억겁 같은 힘 싸움이었다.

심장이 터지기 바로 직전-.

거대한 물줄기가 천천히 굽혀지기 시작했다. 고삐에 순응하며 부드러이 움직였다.

'그래, 그래봤자 마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엄습했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주문을 읊기도 수식을 계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장 손에 익은 마법을 써야 했다. 굳이 계산할 필요가 없는-.

'역시 얼음송곳이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송곳이 놈을 향해 쏘아졌다. 다만, 평범한 얼음송곳과 달랐다. 그에 담긴 마나는 대마법에 비견될 정도였다.

얼음송곳이 지나가는 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송곳이 공간 그 자체를 얼리며 나아갔다. 직선이 길게 그어졌다.

마치 세상의 경계를 그어놓은 듯했다.

얼음송곳은 지독할 정도로 느렸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어느새 얼음송곳은 놈 앞에 있었다. 방금까지 웃던 놈과 놈의 배에 있는 여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여인이 다급하게 놈의 배로 다시 들어갔다.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쩍 벌렸다. 무저갱처럼 어두운 공간이 길게 벌어졌다. 얼음송곳이 정확히 꽂혔다.

타다다닥. 얼음 결정 맺히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사내의 뒤로 수정처럼 투명한 결정들이 길게 뻗쳤다.

결정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놈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다. 놈은 신이 깎아 만든 듯한 동상처럼, 그대로 얼었다.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뛰며 환호했다.

정작 갈라하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얼어붙은 놈의 상체가 들썩였다. 이내 얼음결정들이 떨어지고, 그 배에서 다시 여인이 나왔다.

'여인이 본체였군.'

그럴 것이라고 대충 예상은 했다.

그에 더 농도를 높였건만-.

'왜 안 통했지?'

갈라하드는 방금의 상황을 복기했다.

여인이 본체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에 숨으면, 당장 여인까지 뚫을 생각으로 쓴 마법이었다.

실제로 명중했고-.

"그런데 왜 멀쩡하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놈의 농도보다 짙은 마나를 담은 얼음송곳이었다.

그때, 여인이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사내에 맺힌 얼음 결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대단하다. 격차를 넘고, 이 정도의 일격이라니."

사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진심 가득한 감탄이었지만, 갈라하드는 오히려 눈을 구겼다.

"왜 멀쩡하냐 물었네만. 분명히 이쪽의 마나 농도가 더 높았다. 더불어 정확히 명중했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지?"

갈라하드의 물음에 여인이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네 것은 싸구려니까."

대답이 간결했다.

'내 것은 싸구려다?'

갈라하드는 아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단순히 마나 농도와 관련된 말인 줄 알았는데-.

'알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가 있는 모양이군.'

패착이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알에서 나온 마나를 배제해야겠군. 마법진과 심장으로만 압축해야 한다.'

그걸로 놈에게 피해를 줄 수 있나?

'놈도 상태가 안 좋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움직였다. 고통의 알에서 나온 마나를 흐트러뜨렸다.

바로 마나를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

놈이 입을 다물었다.

오른쪽이 허전해졌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돌렸다. 팔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극심한 통증이 올라왔다.

'압축한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움직였다. 마법진이 금색 빛을 뿜어댔다.

이번에는 아래가 허전해졌다. 왼쪽 다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통증은 뒤늦게 올라왔다. 머릿속에 경종이 거칠게 울렸다.

'네발 마족-.'

불렀지만, 놈이 응답하지 않았다. 힘이 아직 부족한 듯했다. 아니면 간섭할 수 없는 상대거나.

재가 얼굴을 가득 덮었다. 엎어진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놈이 쩝쩝거리고 있었다. 태연한 눈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놈에게서 다시 여유가 보였다.

'다른 수단은 없다.'

갈라하드는 한계까지 집중했다.

놈이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그때에 맞춰서 갈라하드는 남은 왼손을 튕겼다.

탁, 업화가 피어올랐다.

왼손이 없어졌다. 업화가 그대로 사라졌다.

놈이 다급하게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보였다.

"그래, 지금도 맛있나?"

놈이 뭔가를 퉤- 뱉었다. 불이 붙은 살점을 전부 도려낸 것이다.

"지독한 놈-."

여인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패배다.'

패배의 요인은 하나였다. 고통의 알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 단순히 농도를 맞추는 걸로는 부족했다.

'끝까지 말썽이군.'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어떻게든 심장을 꾹꾹 눌렀다.

입을 쩍 벌리는 놈이 느리게 보였다.

왼손도 오른손도 없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주문을 읊었다.

"겨울, 칼바람, 얼음-."

어둠이 갈라하드를 삼켰다.

마족의 왕을 막겠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고작 이 꼴이라니-.

'볼품없는 최후군.'

그러자 떠오른 건, 우습게도-.

[저는 마나를 불태웁니다.]

아드리안나였다.

"얼음송곳."

사내는 미간에 박힌 얼음송곳을 털었다.

마지막까지-.

****

"······일어나게나! 일어나!"

앳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검은 머리 소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외모가 상당히 낯익었다.

'아드리안나? 아니, 너무 어리다.'

다섯 살 정도되는 아드리안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머리랑 눈동자는 나랑 같은 색이지?'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는 먹혔다네! 먹혔어!"

땍땍거리는 목소리가 상당히 익숙했다.

"싸구려 알인가?"

"싸구려라니! 나는 싸구려가 아닐세!"

"맞군."

"놈이 우리를 삼켰다! 대책이 필요하네!"

고통의 알이 소리를 꽥꽥 질렀다. 그 목소리까지 아드리안나의 어린 느낌이었다.

그런데-.

"말투가 왜 그런가?"

"내 말투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를 따라 하는 건가?"

"보고 배운 게 너니까."

생각보다 합리적인 이유였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끄덕였다.

"그래, 먹혔다고."

"먹혔다. 위험에 빠졌네."

"말투로 지적할 생각은 없지만, 그 외모에 말투가 그러니 상당히 거슬리는군."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인가? 먹혔다니까!"

"하긴 그렇군."

갈라하드는 상태를 살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힘도 없었다. 그에 다급히 고통의 알을 쳐다봤다.

여기는 놈이 키였다.

"자네, 뭐 좀 있나?"

"후후, 내가 가져왔지."

고통의 알이 고사리 같은 손을 당당히 펼쳤다.

거기에 들린 건, 작은 무언가였다. 친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생명력이군."

"그렇다. 내가 마지막까지 지켜냈지."

확실히 그 무게감이 상당했다. 개척자의 생명력을 꽁쳐 둔 듯했다. 상당한 무게감이었지만-.

"고작 이것밖에 없나?"

"고··· 고작이라니! 내가 어떻게 모은건데!"

"고작이지. 이걸로 뭐 하라는 건가?"

"이것저것 잘하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극복해 주게!"

"싸구려 알답게 참으로 뻔뻔하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그때, 위쪽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끄아아악! 놈이 온다! 놈이 와!"

고통의 알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하드 뒤로 숨었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용액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녹는 것처럼 거대한 불길이 쏟아졌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아, 소화되는 중이군."

예전 학회장의 알을 먹었을 때와 반대 상황이었다.

지금은 이쪽이 먹히고 있었다.

"그때 오히려 먹힐 뻔했지. 자네가 도와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나."

"그··· 그놈이 강적이었네!"

"강적은 무슨-. 고작 흑마법학회 학회장이었는데."

고통의 알이 크게 움찔거렸다.

갈라하드는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이쪽이 가진 건, 싸구려 알과 생명력 한 줌밖에 없었다. 이걸로 어떻게 타파한다는 말인가.

'진짜 아드리안나라도 있다면 모를까.'

아드리안나라면 가벼이 태웠을 것이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태우니까.

'마나를 태운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태워서 생명력으로 바꿨다.

'그를 반대로 한다면?'

갈라하드는 생명력을 내려봤다. 실로 하찮은 양이었지만, 개척자의 생명력이었다.

"으아아아! 온다! 와!"

고통의 알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불길이 점점 더 다가왔다.

마나에 아드리안나를 더한 게 생명력이었다. 그 과정을 거꾸로 하면 마나와 아드리안나 성질이 나올 것이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끄아아악! 거의 다 왔다! 죽는다네!"

고통의 알이 비명을 길게 질렀다.

'뭔가 빠뜨린 게 있어.'

갈라하드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불태울 때, 오러가 강해졌지. 그저 마나가 연료였기에 보이는 반응인 줄 알았네만. 그게 아니라면?"

"녹는다! 녹아! 먹힌다!"

"만약 생명력만 나오는 거라면, 일반적인 상태에서 생명력은 마나와 아드리안나의 성질로 나뉘어야 하니까."

"빨리 뭐라고 꺼내라! 인간! 살려주게!"

"그러니까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마나를 불태운다. 그로 인해 두 가지의 불순물을 얻지. 생명력과 오러. 그를 거꾸로 하려면-."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런 오러가 있어야겠군."

"오오! 답을 찾은 것이냐! 인간!"

"그래, 답은 오러였네."

"그러면 빨리 해결해 주게!"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이제 오러를 일으키면 된다.

문제는-.

'오러에는 재능이 없거늘.'

갈라하드가 유일하게 못하는 거였다.

[검을 잡았을 때, 생각이 너무 많으셨던 거 아닐까요.]

가만히 손을 쥐었다가 피며, 아드리안나의 조언을 떠올렸다.

'오러는 신념의 힘이다. 그렇다면 내 신념은?'

마족의 왕에게서 세상을 지키겠다-.

집중했다.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불길이 점점 더 다가왔다. 뜨거움이 가벼이 훑을 때쯤-.

갈라하드가 눈을 떴다.

"음, 역시 어렵군."

참으로 담백한 고백이었다.

고통의 알이 길게 비명을 터뜨렸다.

불길은 바로 위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갈라하드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생명력을-.

······!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소리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넘실거리는 화염에 닿기 직전-.

푸른 빛이 무저갱을 갈랐다.

투박하지만, 그렇기에 단단한 푸른 빛.

익숙한 오러였다.

"기사-! 길버튼-!"

내게도 오러가 있었군.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193화 구하러 왔어

'이게 무슨-.'

후배 개미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갈라하드의 알은 최하급이었다. 여명에서 씨앗 뿌리듯 뿌린 싸구려 알이었다.

그에 반해 사내가 가진 건, 곧 부화하는 알이었다.

최하급과 곧 부화를 앞둔 알, 둘 사이의 차이는 명백했다.

고통의 알은 대마족의 잔재였다. 즉, 대마족의 군체 안에 있었다.

그렇기에 등급은 절대적이었다. 여명에서 수확용으로 택한 이유였다.

등급 높은 것만 관리하면 되니까.

분명 그럴 것인데-.

'······이길 뻔했다.'

후배 개미 가면은 바싹 얼은 사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둘의 등급 차이가 얼마인데, 저게 가능한 겁니까?"

황당함에 후배 개미 가면은 목소리를 냈다. 선배도 그를 지적할 정신이 없었다.

[등급 차이를 메꾸다니-. 믿을 수 없군.]

선배 개미의 목소리에도 경악이 가득했다.

"······갈라하드를 수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배 개미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놀라운 능력이었지만-.

[그건 갈라하드의 능력이다. 갈라하드가 지닌 건 싸구려 알이다. 그렇기에 의식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겠지. 다만, 싸구려 알인 건 변하지 않아. 수확 대상이 아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싸구려 알이 아니었다면, 이미 먹혔을 테니까-.'

후배 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 먹혔다. 우리 손을 떠났어.]

선배 개미가 사내를 가리켰다. 거대한 살점으로 이루어진 사내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사내의 뒤로 얼음결정이 빼곡했다.

그 배가 연신 꿀렁였다. 소화되는 중인 듯했다.

승부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갈라하드가 보여준 게 워낙 충격적이었던 터라, 뭔가 묘하게 찜찜했다.

"······만약 이기면 어떻게 합니까."

후배 개미의 물음에 선배 개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처음으로 싸구려 알이 부화하겠지.]

"선발된 고통의 알이 아닌 것이 부화하다니-."

그때, 선배의 고개가 돌아갔다.

[귀찮아졌다.]

푸른 섬광이 재를 갈랐다. 그리고 등장한 건, 못생긴 기사였다.

거리를 꽤 벌려둔 상태였다. 심지어 이곳은 마경이었다. 추적을 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벌써?'

"이쪽에 있어요! 느껴져요!"

못생긴 기사 뒤의 병사에게 업힌 하녀가 소리쳤다.

하녀는 정확히 사내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 돼지 말이냐? 대장은 아닌 것 같은데!"

"뚱뚱한 사내 안에서 느껴져요! 먹혔나 봐요!"

"젠장! 대장을 먹다니!"

못생긴 기사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곧 부화한다. 그때까지 시간을 끈다.]

시간을 끄는 것이야 이들의 전문이었다.

둘은 동시에 대지를 움직였다.

대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요동쳤다. 사방에서 서늘한 창이 올라왔다. 사내로 이루어지는 길을 가시밭길로 만들었다.

길을 완전히 막았다.

그때-.

"기사-! 길버튼!"

못생긴 기사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그 검에서 푸른 빛이 창연하게 타올랐다.

기사는 그저 푸른 오러를 두르고 전진했다.

방어를 도외시한, 실로 무식한 전진이었다.

창이 갑주를 갈랐지만, 기사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무식함에 순간 반응이 느렸다.

어느새 기사는 사내 앞에 있었다.

기사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기사의 검이 정확히 사내의 배에 꽂혔다.

사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소화를 방해받은 것이다. 치명적이었다.

그때, 사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짙은 어둠, 무저갱이 기사를 노렸다.

근거리지만 저 정도 기사라면 충분히 피할만했다.

하지만 기사는 오히려 입을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아니! 너까지 먹히면 어떻게 해요!!!"

그웬이 비명을 질렀다.

****

"기사-! 길버튼-!"

푸른 섬광이 무저갱을 가르며 내려왔다.

새벽에 떨어지는 별똥별 같은 모습이었다.

별똥별이 떨어지던 놈의 소화액을 잘랐다.

순간 불길이 거세게 튀었다.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해일이 좌우로 퍼졌다.

실로 아름다운 모습에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대장! 구하러 왔습니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길버튼이 있었다.

왜 길버튼이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설마-.

"······자네도 먹혔나?"

"예, 제가 뛰어들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웬이 그러는데, 대장이 안에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먹힌 걸 구하자고 같이 먹혔다는 건가?"

"예! 구하려면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빠르지 않습니까. 하하!"

길버튼이 시원하게 웃으며 장담했다.

먹힌 놈을 구하자고, 같이 먹힌다는 말인가. 두통에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감동하셨습니까?"

"무척이나. 눈물이 나올 것 같군."

"하하, 제가 부대장 아닙니까."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더 깊게 눌렀다.

그때, 길버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얘는 뭡니까? 아드리안나님과 똑같이 생겼는데-."

길버튼이 싸구려 알을 가리키며 물었다. 싸구려 알이 갈라하드 뒤로 숨었다.

"말하자면 길다네.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갈라하드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갈라하드가 먹혔다는 말에 구하겠다고, 길버튼은 일부러 먹혔다.

길버튼을 제법 본 갈라하드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무식한 판단이었다.

다만, 효과적이긴 했다.

오러가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그런데 저건 뭡니까?"

길버튼이 위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늘을 수놓으며 떨어지는 불길이 있었다.

멸망이라도 닥친 듯한 아주 화려한 모습이었다.

"위액일세."

"위액이 뭡니까?"

"배에 넣은 걸 소화 시키기 위한 용액이지. 저기에 닿으면 소화될 걸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설명에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자네가 구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길버튼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필요한 건 오러였다.

문제는 이곳이 놈의 위장이라는 점이었다. 갈라하드도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오러를 일으킬 수 있을까.

"그래, 길버튼 경. 오러를 꺼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길버튼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푸른 오러가 거칠게 타올랐다.

걱정한 게 우스울 정도로 가벼운 성공이었다.

'한 치의 의심조차 없기 때문이군.'

무식하기에 강하다는 표본이었다.

"자릅니까?"

길버튼이 오러로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러가 신념의 무기기에 뭐든 가른다지만, 저건 너무 크지 않나? 검으로 하늘을 베겠다는 말과 다름없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음,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내게 기회를 주겠나?"

"알겠습니다. 이번만 봐 드리는 겁니다."

"고맙군."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길버튼도 따라서 웃었다.

"검을 땅에 꽂고, 오러를 일으키게."

"예, 뭐 하시려고 그럽니까?"

"아드리안나가 마나를 태우면, 생명력과 오러를 강하게 하는 뭔가가 나온다네. 그러면 생명력에 오러를 넣게 되면 어떻게 되겠나?"

"모르겠습니다만."

"나도 모르겠네."

"대장이 모르는 것도 있습니까?"

"있지. 지금도 먹히지 않았나."

순순히 인정하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의 눈이 커졌다. 이내 피식 웃었다.

"일단 해보는 겁니까?"

"그래, 일단 해보는 거지."

"좋군요. 사내답고. 시원하고."

"북부식이지."

둘은 마주 보며 히죽 웃었다.

"떨어지는 중일세!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인간들!"

싸구려 알이 비명을 질렀다.

"더럽게 땍땍거리는군요."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닐세. 서둘러야겠군."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으며 생명력을 잡았다.

땅에 꽂힌 푸른 오러가 투박하게 타올랐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생명력을 오러로 가져갔다.

오러에 닿자, 생명력이 길게 깎였다. 순식간에 반이나 사라졌다.

"아, 자르는 게 아니었군."

새로운 사실에 갈라하드가 작게 감탄했다.

"지금이 감탄할 때인가! 전 재산의 반이 날아갔다!"

싸구려 알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저 녀석 말투가 왜 저럽니까?"

"음, 말투가 어때서 말인가."

"상당히 재수 없습니다만."

"보통 고풍스럽고 고급스럽다고 표현하네만. 됐고, 오러를 좀 줄여주게."

"오러를 줄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오러를 키우는 것보다 힘들겠지만, 필요한 일일세."

"예, 알겠습니다."

길버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내 오러가 연해졌다.

갈라하드는 다시 생명력을 가져다 댔다.

파삭-.

"또 반이 날아갔다!! 끄아악!"

"음, 좀 더 연해야겠군."

"이것보다 더 말입니까?"

"그래, 아주 조금만 더-."

"알겠습니다."

검을 잡은 길버튼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오러가 더욱 연해졌다. 이제는 은은한 불처럼 보일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오러에 비스듬히 가져갔다.

생명력의 끄트머리가 닳으며 흩어졌다. 하얀 불이 순간 타올랐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이다.'

갈라하드는 다급히 생명력을 틀었다. 불똥이 위쪽으로 튀었다. 하얀 불이 금방 사그라들었다.

생명력이 다시 깎였고, 남은 건 정말 손톱만큼이었다.

위액- 아니, 불길은 바로 위에 있었다.

"이것보다 조금 더 약해야겠군."

갈라하드는 자세를 낮추며 부탁했다. 이제 둘은 거의 앉아 있었다.

오러의 세기를 낮추는 게, 오러를 강하게 일으키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웠으지만, 길버튼은 그저 끄덕였다.

오러가 더 연해졌다.

갈라하드는 꺼질 듯한 푸른 오러에 생명력을 아주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파삭, 생명력의 표면이 깎였다. 다시금 하얀 불이 타올랐다. 틈으로 마나가 풍겼다.

'됐다.'

갈라하드는 집중을 유지하며, 생명력을 천천히 깎아냈다.

마나가 급격하게 퍼졌다. 처음 보는 순수한 마나였다. 필사적으로 마나를 잡았지만, 그 농도가 워낙 짙은 터라 쉽지 않았다.

문제는 위액이 바로 지척까지 다다랐다는 거였다.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길버튼이 투박하게 말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연했던 오러가 활활 타올랐다. 그 크기가 전보다 더 컸다.

길버튼은 오러가 타오르는 검을 어깨에 걸치고-.

"기사-! 길버튼!!"

번쩍 일어났다.

카드득, 오러가 위액과 부딪히며, 불똥이 거칠게 튀었다.

끄윽-.

실로 거대한 무게에 길버튼의 입에서 나지막한 고통이 터졌다.

하늘을 떠받친 듯했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길버튼은 오히려 자세를 더 높였다.

쏟아지던 불지옥이 막혔다.

"오래 못 버팁니다-!"

길버튼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때, 순수한 마나가 갈라하드에게 잡혔다.

생명력을 거꾸로 돌렸기에,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나였다.

"됐네. 길버튼 경."

갈라하드는 서둘러서 마나를 움직였다.

"아니! 너무 적지 않은가! 하늘에서 불지옥이 쏟아지는데, 고작 주먹만 한 걸로 뭐하겠다고!"

싸구려 알이 위를 가리키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싸구려 알의 말대로, 하늘에서 불지옥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불지옥, 그에 반해 갈라하드가 쥔 건 한 주먹의 마나였다.

'그렇게 보이겠군.'

다만, 그건 겉모습이었다.

"지금은 놈의 안에 있으니까 마나의 크기는 상관없네. 여기서 중요한 건, 마나의 농도일세."

갈라하드는 순수한 마나를 길게 잡았다. 마나가 길쭉한 지팡이처럼 변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니까."

순수한 마나에 주변의 마나가 목줄을 잡힌 것처럼 끌려왔다. 흐름이 순식간에 변했다.

태풍이 자리한 것처럼, 주변의 마나가 온통 따라왔다.

갈라하드는 지팡이를 부드럽게 휘둘렀다.

주문이나 수식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놈의 내부였고, 지금 손에 쥔 건 순수한 마나였으니까.

지팡이를 따라서 뽀송뽀송한 눈이 휘날렸다. 아주 부드러운 눈보라였다.

사뿐히 자리한 눈보라가 바닥에서 하늘로 뿌려졌다.

아래에서 위로 휘날리는 눈보라와, 하늘을 태우며 떨어지는 불길이 충돌했다.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거칠게 타오르는 불길과, 거꾸로 몰아치는 뽀송뽀송한 눈보라-.

그 격돌의 결말은 뻔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눈보라에 닿자 불길이 가벼이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눈보라에 휩쓸렸다.

불길이 부딪히는 족족 눈보라의 크기가 커졌다.

눈보라의 영역이 빠르게 넓어졌다.

하늘을 채웠던 불지옥이 눈으로 점철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내 눈보라가 영역을 채웠다.

갈라하드는 지팡이를 고쳐 잡고 천천히 걸었다.

깊게 쌓인 눈 속, 가장 깊숙한 곳에서 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아주 거대한 알이었다.

"여기 있었군."

알의 모양새가 상당히 끔찍했다. 싸구려 알도 꽤 꺼림직한 모양새였지만, 이놈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표면에 저주가 덕지덕지 붙다 못해 넘쳐흘렀다.

그때, 뒤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싸구려 알이 연신 침을 흘리고 있었다. 아드리안나 얼굴을 하고 침을 흘다니-.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식탐은 넘쳐도 싸구려 알이었다. 아무리 끝난 상황이라도 저걸 한 번에 먹으면 체할 게 분명했다.

"기다리게."

"기다릴 수 있다네!"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에게 다가갔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도망이라도 가려는 건가. 이미 막다른 길일세."

두근! 두근!

"음, 나를 회유할 생각인가?"

두근! 두근!

"싸구려 알을 버리고 자네에게 넘어오라는 건가. 스카웃이군."

두근!

놈이 거대한 기운을 드러냈다. 확실히 싸구려 알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기세였다.

'이러니까 아까 그 고생을 했지.'

확실히 엄청난 제안이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쳐다봤다. 싸구려 알이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달싹거렸다.

아드리안나의 어린 모습이기에 꺼림직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도구였다.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지팡이를 꽂았다.

지팡이가 고통의 알에 깊게 꽂혔다.

거대한 고통의 알에 균열이 퍼졌다.

그 균열의 표리에서 뭔가 보였다.

실로 거대한 존재였다. 전에 고통의 알이 먹힐 뻔할 때, 느꼈던 시선의 주인이었다.

대공이 말한 대마족인가-.

"자네가 알들의 어미인가?"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했다.

"맛있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제야 놈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그때, 고통의 알이 부서지며, 편린이 뿌려졌다.

싸구려 알이 묘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먹게."

싸구려 알이 냅다 달려갔다. 허겁지겁 주워 먹었다. 그 뒷모습이 참 궁상맞았다.

알이 빠르게 성장했다. 그 존재감이 점차 커졌다.

"저대로 둬도 됩니까?"

길버튼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갈라하드를 노렸던 싸구려 알이었다. 다분히 위험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그때, 싸구려 알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여전히 아드리안나의 어린 모습이었지만, 그 기세가 달랐다. 흡수한 탓에 존재감이 상당했다.

만약 여기서 싸구려 알이 엇나간다면-.

'상당히 귀찮아지겠군.'

갈라하드는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틈만 나면 갈라하드를 노렸던 놈이었다. 기세가 넘어간 지금,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를 경계할 때-.

"알았다."

싸구려 알이 냉큼 끄덕였다.

예상과 달리 깔끔한 승낙이었다.

"내 무한한 힘을 따르게!"

싸구려 알이 위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공간이 꿀렁거리며 움직였다.

상당한 장관이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우웩-."

싸구려 알이 토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끝까지 싸구려군.'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갈라하드는 말을 애써 삼켰다.

그때, 정면의 공간이 열렸다. 아까 먹힐 때와 반대로 밖이 보였다. 그래봤자 마경이었기에 어두운 재만 가득했지만, 길인 건 분명했다.

"못생긴 기사부터-. 으엑."

"길버튼 경, 자네부터 가라는 군."

"저 맞습니까?"

"농담인가?"

"······알겠습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공간에 넣었다.

그때, 길이 닫혔다.

"너는 재생해야 한다."

싸구려 알이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부분으로 먹혔기 때문인 듯했다.

"좀 아플 걸세."

싸구려 알이 짙게 웃었다. 공간이 갈라하드에게 쏟아졌다.

아니, 살점이었다. 밖에서 봤던 사내의 살점들이 갈라하드를 덮었다.

형용하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이내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는 듯했다.

그때, 싸구려 알이 갈라하드에게 붙었다.

"부화한다!"

싸구려 알이 음흉하게 웃었다.

194화 부화

'이게 무슨-.'

톰은 정면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어서 땅이 깊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작게 시작한 균열이 빠르게 이리저리 퍼졌다.

균열이 갈라지며, 그 틈에서 날카로운 가시들이 빠르게 솟구쳤다. 이내 창처럼 길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땅을 촘촘히 채웠다.

벼려진 검보다 더 날카로운 예기가 서늘하게 빛났다.

땅이 다시 크게 흔들렸다. 그 너머에서 거대한 벽이 아래에서 차올랐다.

말 그대로 대지가 개벽하고 있었다.

일반 병사인 톰으로서는 엄두조차 안 나는 풍경이었다.

그때-.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길게 들렸다.

"전진한다!"

리암이 깃발을 높이 들었다. 병사들이 호탕하게 방패를 두드렸다. 대지가 일어나서 막고 있는데도, 그들은 검으로 전방을 겨눴다.

마치 막으면 모두 부수겠다는 듯-.

실로 우직한 부대였다.

"······톰!!"

그웬의 부름에 상념이 끊겼다.

고개를 돌리자, 눈물 가득한 그웬이 보였다. 그웬 옆에는 데미안도 있었다.

둘이 나란히 서서 톰을 올려보고 있었다.

"길버튼까지 먹혔어요! 어떻게 해요?!"

그웬이 비명처럼 뾰족하게 물었다. 데미안이 대답을 강구하듯 눈을 찡그렸다.

둘의 물음에 톰은 난처했다.

그웬은 천재 마법사였고, 데미안은 기사도 이기는 검사였다. 둘에 반해 톰은 일반 병사였다.

그런데 왜 자신한테 묻는다는 말인가.

[내가 부재중이면 나를 대신하는 거지.]

아-. 톰은 작게 탄식했다.

'내가 어쩌다가-.'

톰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운 좋게 갈라하드의 눈에 들어서 특무대에 뽑혔지, 자신은 평범한 병사일 뿐이었다.

그를 알기에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할 일을 찾아내고 노력했지만, 전투 능력은 여전히 일반 병사였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묻는다는 말인가-.

'내가 보좌관이니까. 대리니까.'

톰은 굳게 끄덕였다.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갈라하드님이라면 어떻게-.'

톰은 황급히 상황을 되짚었다.

그웬은 갈라하드가 살에 뒤덮인 뚱뚱한 사내에게 먹혔다고 했다. 실제로 길버튼도 사내에게 먹혔다.

부대는 사내를 향해 전진했고, 대지가 움직여 그를 막는 중이었다.

리암이 선두에서 대지를 부수며 전진했지만, 부대를 이끄는 터라 속도가 느렸다.

이쪽이 저기에 합류해도 의미가 없었다.

'대장님이 대지를 움직이는 건, 가면 놈들이라고 했다.'

놈들을 찾아야 했다. 톰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웬, 가면 쓴 놈들의 위치를 아십니까?"

"아! 저기예요!"

그웬이 한쪽을 가리켰다. 격돌 지점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저 정도 거리라면, 이쪽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놈들은 강자였다. 갈라하드와 길버튼이 없는 특무대로 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이쪽에는 데미안과 그웬이 있었다. 둘이라면 놈들을 잡을 수는 없어도-.

'주의를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해.'

톰은 끄덕이며 데미안을 쳐다봤다.

"놈들의 시선을 돌릴 겁니다. 조금만 틈을 만들어줘도 본대가 충분히 뚫을 겁니다. 데미안-."

"응."

"움직이면 이쪽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알았어."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빼야 합니다."

톰은 몇 번이나 더 강조했다.

이내 데미안이 그대로 뛰었다. 작은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웬,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그웬이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웬의 주변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잘 모르는 톰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그때, 그웬이 가리킨 방향으로 뛰던 데미안의 아래에서 가시가 올라왔다. 벼려진 창처럼 날카로운 가시가 데미안을 노렸다.

시야 밖에서 가한 공격이었지만, 데미안은 가시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데미안!"

"그웬! 집중하십쇼!"

톰의 단호한 호통에 그웬이 다시 집중했다.

데미안이 잿빛 오러를 피어 올렸다. 이내 검으로 땅을 찔렀다.

그곳에서 개미 가면을 쓴 이가 나왔다. 가시가 올라오며 막았지만, 데미안은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얼음송곳!!"

그웬이 양손을 펼쳤다. 얼음송곳이 가면 쓴 놈에게 빠르게 쏘아졌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톰은 순간 놓쳤다.

데미안이 잡아둔 상태였는데도, 얼음송곳은 상대를 맞추지 못했다.

"그웬! 맞춰야 합니다!"

"명중은 어렵다고요!"

그웬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대까지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활로도 맞출 거리였다. 그런데 마법으로 못 맞추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대장님이라면-.'

톰은 갈라하드가 그웬의 머리를 잡고 쏘던 걸 떠올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톰?!"

톰은 냉큼 그웬의 머리통을 잡았다. 그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극상이라도 당한 반응이었다.

톰은 데미안에 집중했다. 이윽고-.

"지금입니다!"

"얼음송곳!"

데미안에 신경이 쏠린 순간을 얼음송곳이 노렸다.

그때, 땅에서 가시들이 올라왔다. 얼음송곳이 가시에 막혔다. 그 틈으로 데미안의 잿빛 오러가 놈을 노렸다. 놈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데미안이 뒤로 펄쩍 뛰었다. 한 박자 늦게 땅에서 가시가 가득 올라왔다. 데미안이 가시들을 밟으며 움직였다. 실로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개미 가면이 손을 흔들었다. 가시들이 데미안을 노리며 연속으로 일어났다. 데미안이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위력이 약해.'

톰은 입술을 씹었다. 저 가시를 뚫어야 데미안을 도울 수 있었다.

'대장이라면-.'

"그웬! 미안 데-미안입니다!"

"톰?!"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그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안 데- 미안!!"

"얼음송곳!"

얼음송곳이 전보다 더 빠르게 쏘아졌다. 개미 가면 주변으로 가시들이 다시 올라왔다.

전과 달리 얼음송곳이 가시들을 가벼이 부쉈다. 놈의 어깨를 스쳤다. 그제야 놈이 이쪽을 응시했다.

순간의 틈이었지만, 데미안에게는 충분했다. 잿빛이 길게 그어졌다.

개미 가면 아래가 무너지며, 거대한 구덩이가 자리했다. 가면이 아슬아슬하게 잘렸다. 개미 가면이 구덩이로 사라졌다.

데미안은 따라서 가지 않고 뒤로 빠졌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진격하는 본대가 보였다.

그저 잠깐 시선을 끈 게 전부였지만, 전황이 워낙 팽팽했던 터라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우리도 갑시다!"

톰은 그웬과 데미안을 이끌고 본대로 합류했다.

본대는 가시를 넘고, 그 뒤의 거대한 성벽에 막힌 상태였다.

어떻게 저걸 넘어갈지 고민할 때, 리암이 검을 높이 들었다.

그 검에서 오러가 찬란하게 타올랐다. 아주 묵직한 오러였다.

리암은 그대로 성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오러가 성벽을 갈랐다. 리암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휘둘렀다.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굉음이 터졌다.

톰은 방패를 꺼내, 그웬과 데미안 앞을 막아섰다.

성벽이 거칠게 무너졌다. 그 너머에 그웬이 가리켰던 사내가 있었다.

나체에 살집이 괴상할 정도로 두둑한 사내였다. 사내는 배를 잡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대장과 길버튼이 저기 있다는 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두둑한 살집이었다.

그때, 리암이 검을 고쳐 잡았다.

"기억하겠다! 갈라하드 대공 대리! 길버튼!"

리암이 검을 높이 들며 뛰쳐나갔다.

"안 돼요! 아직 안에 있어요!"

그웬이 뾰족하게 소리치며 그를 막았다.

"안 된다니?"

리암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서슬 퍼런 눈이 그웬을 응시했다.

"아직 안에 있다고요! 죽이면 안 돼요!"

"마족에게 먹혔다. 이미 끝났다."

"아니! 안에 있다고! 이! 빡대가리야!"

그웬의 호통에 리암의 눈이 커졌다. 순간 병사들이 조용해졌다.

리암은 2대대의 대장이었다. 북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고.

그웬은 천재 마법사였지만, 아직 특무대 병사였다. 복장은 하녀 복이었고, 그런데 리암에게 빡대가리라니-.

톰의 얼굴은 푸르죽죽해졌다.

그때, 사내가 연신 꺽꺽거렸다. 그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토하려는 거 같은데?'

사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거대한 입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었다. 길버튼이 자세를 잡으며 크게 소리쳤다. 꽤 멋들어진 등장이었지만, 그 갑주에 토사물이 가득했다.

"대장! 나오십쇼!"

길버튼이 마족의 입에 대고 소리쳤다. 괴상한 모습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대장!!"

길버튼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금 소리쳤다.

그때, 사내의 살점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안에 뭔가 있는 것처럼 연신 꿀렁거렸다. 상당히 괴상한 모습이었다.

꿀렁거리던 것이 순간 멈췄다.

"대장! 이쪽입니다!!"

사내의 배가 팽창했다. 아까 길버튼이 만든 흉터가 길게 벌어졌다. 흉터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 흉터에서 기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손이 문을 여는 것처럼 흉터를 벌렸다.

흉터가 길게 찢어졌다. 뭔가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가 나오자, 사내의 거대했던 살점들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마치 전부 빨린 것처럼-.

"한결 낫군."

갈라하드가 머리를 가벼이 넘기며 웃었다.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족에게 먹혔던 이가 마족의 배를 찢고 나왔으니까.

리암도 평생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톰은 새로운 코트를 들고 황급히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

"괜찮으십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몸 상태가 좋았다. 아니, 좋다는 정도로 부족했다. 아주 쾌적했다.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좋네. 손도 제대로 있고."

갈라하드는 오른팔을 확인했다.

아까 먹혔던 오른팔이 멀쩡히 붙어 있었다. 원래 가득했던 흉터까지 없었다. 완전한 회복이었다.

"예? 원래 멀쩡하셨습니다만?"

길버튼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거긴 놈의 권능에 의한 공간이었으니까. 물리적이 아닌 정신적인 공간이었지. 놈이 아무리 뚱뚱해도 뱃속이 그렇게 넓을 리가 없지 않나?"

"아하, 그렇군요."

"이해 못 한 눈치군."

"무사히 나왔다는 거 아닙니까?"

길버튼의 당당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그때, 달려온 톰이 코트를 내밀었다.

"오, 고맙네. 톰."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코트를 둘렀다.

그때, 리암이 다가왔다. 그 눈이 전보다 더 격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이었다.

"마족에게 먹혔지만, 오히려 마족의 배를 찢고 나왔다니! 정말 대단하다! 과연 대공 전하의 대리군!"

리암이 격하게 칭찬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마족에게 먹혔지만, 마족의 배를 뚫고 나온 자!"

뒤에서 병사들이 괴상한 호칭을 연호했다. 마족의 배를 찢고 나온 것이 북부 놈들에게 멋지게 보인 듯했다.

연호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크흠-."

길버튼이 씰룩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표정이었다.

'이 괴상한 호칭이 부럽나 보군.'

하여튼 북부 놈들의 취향은 참 어려웠다.

그때, 길버튼을 본 리암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오-! 길버튼! 잘 봤다!"

길버튼의 얼굴이 더 씰룩해졌다. 아닌 척하지만,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마족에게 토해진 것도 나쁘지 않았다!"

"······?"

리암의 투박한 말에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마족의 토사물! 길버튼!"

곳곳에서 병사들이 연호하자, 길버튼의 얼굴이 더 보기 좋아졌다.

"으-, 냄새."

"이 망할 꼬맹이-."

데미안이 코를 잡고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웬이었다. 그웬이 가만히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왜 그러나 그웬?"

"그······ 나올 거 같은데요?"

"나오다니-."

"그거요!"

그웬이 갈라하드의 가슴을 가리켰다. 본래 싸구려 알이 있는 곳이었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이상함을 느꼈다.

'······고통의 알이 너무 조용하군.'

두근!

고통의 알이 전보다 더 크게 뛰었다.

두근!

박동 소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나온다!!"

그웬이 괴상한 소리를 떠들었다.

"나온다니 그게 무슨-."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갈라하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온다아아!"

"젠장! 대장 무슨 일입니까! 톰! 뭐든 해봐!"

"예?! 저는-."

"나온다아아아아!"

"톰! 빨리! 대장 가슴이 커지잖아!"

"나온다아아아아아아!"

"일단, 방해하지 맙시다! 오히려 방해입니다!"

가슴이 꿀렁였다. 사내의 배에 여인이 있던 것처럼, 아니면 갈라하드가 사내를 찢고 나올 때처럼-.

두근!

고통이 한층 더 격해졌다. 갈라하드도 신음을 흘릴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이건 버틸 수 없다.'

행여 정신이 버텨도, 육체가 못 버틸 것이다.

무너지는 건 확정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신도로다.]

네발 마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서늘함이 깃들었다. 엄습하던 고통이 약해졌다.

네발 마족이 정신 간섭으로 덜어준 듯했다. 그래도 끔찍한 고통인 건 여전했지만-.

'이 정도면 안 죽는다.'

갈라하드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아득한 생명력이 꿈틀거렸다. 마법진이 빛을 연신 뿜어댔다. 마나가 거칠게 뒤틀렸다. 내부가 가득 흔들렸다.

이윽고-.

톡.

갈라하드의 가슴에서 뭔가 떨어졌다. 크기는 달랐지만, 갈라하드에게는 익숙한 형태였다.

"······알이잖아? 대장, 지금 알을 낳은 겁니까?"

길버튼이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지만, 갈라하드의 정신은 온통 알에 꽂혀 있었다.

"여기야!!"

그웬이 싸구려 알을 잡았다.

그웬이 알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어?"

알의 진동이 점점 더 커졌다. 이윽고 알의 곳곳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타닥, 알의 윗부분이 깨졌다.

바로 옆에 있던 톰이 황급히 코트를 덮었다.

이내 온전히 알이 먼지로 변했다.

그제야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그건 싸구려 알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소녀 모습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지닌 싸구려 알.

방금까지 시끌벅적했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특히 리암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건 갈라하드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부화?'

갈라하드는 싸구려 알을 확인했다.

놈이 풍기는 존재감이 상당히 이상했다.

마나로 찔러보면 최소 최상급이었다. 어쩌면 고위 마족급이었고.

그런데 풍기는 존재감은 전혀 없었다.

마치-.

'내가 뾰족아리를 강제로 최상급에 올렸을 때처럼.'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더 심했다.

마나로 확인한 갈라하드도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리암조차 경계하지 않았다. 그저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만약 싸구려 알에게서 마족의 존재감이 풍겼으면, 리암이 저리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싸구려 알이 그웬을 밀어내고 당당히 섰다.

모두가 싸구려 알에 주목했다.

워낙 충격적인 등장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

모두의 주목 속에서-.

"부화했다네!"

싸구려 알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더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와아! 부화 축하해!"

그웬만 손뼉 치며 축하했다.

****

대공은 본디 말을 많이 하는 이가 아니었다.

대공이 했던 말보다, 직접 뽑은 머리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참모가 보고를 올려도,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그런 대공이 처음으로 재차 물었다.

"확실한가?"

테오도르는 냉큼 끄덕였다.

"예, 헛소문은 확실히 잠재웠습니다. 이제 누구도 그에 대해서 떠들지 않습니다."

테오도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보고했다.

본디 소문은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대공은 달랐다.

소문을 막을 수 없어도, 대공은 소문을 죽일 수 있었다.

대공은 그제야 끄덕였다.

그 손에 아드리안나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거기에 자세한 내막이 적혀 있었다.

'놈의 괴상한 수련법 때문이라니-.'

원래도 아드리안나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실제로 편지를 읽으니 안심이 됐다.

'놈-. 해명하지 않고 도망을 쳐?'

[해명하지 않고 일단 후퇴를 택한 건, 대공 전하의 평소 행실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본래 말을 아끼시는 분이시니까요. 현재 북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는 갈라하드입니다. 좀 더 대우 해주시는 게 맞습니다. 아빠.]

대공은 괜히 헛기침했다.

'음, 너무 몰아세웠나?'

아빠-.

'그런 것 같기도.'

오면 좀 더 잘해줘야겠군.

대공은 턱을 긁적였다.

195화 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