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착하게 살자
'······대공이 왜 여기에?'
갈라하드는 갑자기 떨어진 대공에 눈을 찡그렸다.
대공의 주변으로 땅이 깊게 파여 있었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모양새였다.
그때, 하늘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뾰족아리였다.
'저걸 타고 온 건가?'
뾰족아리가 지친 것처럼 비틀거렸다. 강제로 올린 거지만, 그래도 최상급 마물인 뾰족아리가 저렇게 비틀거리다니-.
'협약은?'
대공이 밖에 나올 때는 사냥이거나, 아드리안나를 위할 때만이었다. 갈라하드는 그 이유를 협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물에게 물려서 왔다."
대공이 투박하게 말했다.
마물을 잡아먹는 양반이 마물에게 물려서 왔다니-.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마물에게 이동 당했다는 핑계인가?'
갈라하드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협약 내용 중에 '스스로 걸어서 나오지 않는다.'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뾰족아리를 타고 온 것이군.'
우기기에 가까운 핑계였지만, 상대는 대공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거겠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적들이 내 앞에 있구나."
대공이 입꼬리를 살벌하게 올리며 말했다.
'앞에-, 적-. 조건인가.'
대공은 갈라하드에게 조건의 언질을 주는 것이었다.
즉, 요약하자면-.
'직접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고, 눈 앞에 있으면 죽일 수 있다는 건가? 황족은 예외고.'
갈라하드는 빠르게 정리했다.
'그래서 탈 것에 집착하는 건가?'
갈라하드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대공이 어깨를 가벼이 돌렸다. 굵직한 근육이 비명을 지르듯 뿌드득 소리를 냈다. 몸을 푸는 듯했다.
사방에 수십의 적들이 있었지만, 그 행동에 여유가 넘쳤다.
"그렇군요. 하필 뾰족아리에게 물려서 끌려오신 곳에 적들이 있다니-."
갈라하드는 슬쩍 설명을 덧붙였다.
대공은 가벼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정답이라는 듯했다.
"자."
대공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마족과 인간들이 흠칫 놀랐다.
"즐거운 사냥 시간이군."
대공이 살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콰앙! 대공이 땅을 박찼다. 그 아래의 땅이 뭉개지며, 대공이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대공은 어느새 가까운 마족
앞에 있었다. 마족이 반응하기도 전에 거대한 주먹이 망치처럼 마족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족이 그대로 짓이겼다. 살점과 피, 뼛조각이 거칠게 튀었다.
대공의 주먹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땅까지 두드렸다.
땅이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뒤집혔다. 주먹을 중심으로 주변의 돌이 거칠게 패였다.
"손맛이 좋군."
대공이 살벌하게 웃었다. 그 주먹에 피가 뚝뚝 흘렀다.
섬찟-.
"어?"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주변의 마족이 손을 휘둘렀다. 무형의 권능이 대공을 노렸다. 대공은 오히려 권능을 향해 움직였다.
권능이 대공을 스쳤지만, 얕은 생채기가 전부였다. 대공은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근육이 오러니까-.'
대공의 주먹이 무심하게 움직였다.
퍼억! 이번에는 마족의 머리가 그대로 터졌다. 피와 살점이 길게 뿌려졌다.
머리를 잃은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몸이 그대로 서 있었다. 대공은 그를 위아래로 잡고 그대로 뜯었다.
그 내용물이 치즈처럼 늘어나며 뿌려졌다.
"괴··· 괴물······."
인간들이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여명이 부른 놈들이었다.
여명과 일할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들이 분명했다. 그런 놈들이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어떤 놈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아래로 노란 웅덩이가 퍼졌다.
그때, 몇 놈이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고 도망쳤다. 어느새 그 옆에 나타난 대공이 낮게 읊조렸다.
"감히 허락도 안 받고."
놈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대공이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어어-. 놈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쓰러졌다.
대공은 선고자였다. 그 앞에서 어떤 변명도,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차르티엔의 머리를 뽑은 건 나름대로 신사적인 거였군.'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공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인간이 의지조차 잃었을 때, 마족은 오히려 이를 드러냈다. 그 얼굴에는 작은 공포도 없었다.
퍼억-.
터지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주민을 터뜨렸으면, 나도 터졌겠군.'
갈라하드는 몸과 마음가짐을 점검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닐세."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상황이 조금 풀리니, 피로가 올라왔다.
옆에 뒹구는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수통도 꺼내서 홀짝였다. 길버튼이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봤다.
"자네도 쉬게 길버튼 경."
"아무리 그래도······."
길버튼이 슬쩍 뒤를 보며 물었다. 대공이 머리 두 개를 동시에 터뜨리고 있었다. 광소가 여기까지 들렸다.
"즐기시게 두게나."
"알겠습니다."
길버튼이 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단두대에 앉아서 광장을 내려보는 꼴이었다. 아니, 아래가 단두대였다. 이곳이 관람석이었고.
"머리 한번 시원하게 터뜨리시는군."
길버튼이 굳게 끄덕였다. 대공을 보는 눈이 이글거렸다. 호승심이었다.
'저걸 보고도 호승심을 불태우다니-.'
역시 길버튼은 기사였다.
'군체라.'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여인이 군체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성서가 군체의 중심이다.'
군체를 구성하는 건 성서였다. 그중 가장 생명력이 많은 이가 조종하는 역할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권능이군.'
갈라하드는 성서를 매만졌다.
"그걸 왜 아직도 들고 계십니까."
"주민들을 돌려야 할 거 아닌가."
"돌릴 수 있습니까?"
길버튼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주민들이 전부 마족이 되었다는 게, 마음에 걸린 듯했다.
"글쎄. 본래 마족이었다면 불가능하겠지만, 이들은 원래 인간이었던 이들이니까 방법이 있지 않겠나?"
갈라하드는 성서를 흔들었다.
궁금했다. 마족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었다면-.
'마족을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겁니까?"
"저주?"
"예, 마족은 저주받은 놈들이니까요."
길버튼이 냉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얼굴에 절박함이 가득했다.
'저주라-. 개척자도 저주였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이게 저주를 내렸겠군."
갈라하드는 성서를 두드렸다.
"그걸 태우시는 겁니까?"
"상대는 권능일세. 단순히 태웠다가는 오히려 문제가 커질 가능성이 있네. 태우는 게 만능은 아닐세."
"그렇습니까?"
"그렇지. 그냥 태워서 끝나면 얼마나 편하겠나."
"거 더럽게 복잡하군요."
길버튼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성서를 태우면, 권능이 남아서 오히려 더 악화될 수도 있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 해결하지 못하면-."
길버튼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대공이 있었다. 대공은 잔뜩 붉었다. 도망가는 인간의 상반신이 그대로 터졌다.
그 손속에는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처리하실 겁니다."
길버튼이 꾹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대공이 썩은 살점을 도려내는 것에 망설일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하지 말게. 어려운 문제는 내 전공이니까."
갈라하드는 성서를 흔들며 웃었다.
무엇보다-.
'먹은 건 토해내야지.'
갈라하드는 성서를 꾹 잡았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열심히 뛰었다.
****
'말도 안 되는군-.'
길버튼은 대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대공에게 무기는 필요 없었다. 신체가 무기였다. 그저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걷어차고, 또 손으로 뽑았다.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언뜻 보면 그저 무식한 주먹질과 발길질이었지만, 길버튼에게는 그 실상이 보였다.
'실용적이다.'
대공의 움직임은 모두 직선이었다. 매 순간 급소만을 노렸다.
그건 데미안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데미안이 타고난 본능으로 맹수처럼 싸운다면, 대공은 수많은 실전으로 깎은 전투였다.
그 몸짓 하나에 낭비가 하나도 없었다.
실로 간결하고 정교했기에, 오히려 더 무식하게 보이는 거였다.
모든 동작이 전부 직선이었으니까.
'대단하다.'
길버튼은 대공의 모든 동작을 눈여겨봤다.
눈을 끔벅이는 것조차도 아까워서, 눈이 마를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상황이 끝나 있었다.
광장에는 붉은 피와 살점만이 가득했다.
붉게 칠해진 대공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눈빛에 길버튼의 털이 쭈뼛 섰다. 길버튼은 칼자루를 잡고 갈라하드 앞에 섰다.
"쓸만하군."
대공이 붉게 웃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대공의 기세에 길버튼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고개를 들었다.
"주민들을 모아라."
대공이 담담하게 명령했다.
'역시 처리하실 생각이다.'
길버튼은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대공은 마족이 된 주민들을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직접-.
"왜 그러십니까."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물었다.
"마족은 여지가 없다."
대공의 대답은 단단했다. 북부에 통용되는 개념이었다. 마족은 절대 악이었다.
"직접 처리하실 겁니까?"
"내 백성이니까."
"그렇군요."
"그러니 불러라."
대공이 다시금 명령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살벌한지, 길버튼의 몸이 떨릴 정도였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
대공의 기세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본래 마족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주민들은 인간에서 마족이 된 겁니다. 그것도 자기 의지가 아니고,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습니다."
갈라하드가 대공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북부의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대공과 맞서다니-.
'따를 수밖에 없다니까.'
길버튼은 칼자루를 잡고 갈라하드 옆에 섰다.
옆에서 본 대공은 그 크기가 더욱 컸다. 세상이 전부 가려질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꼿꼿하게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대공이 허- 하고 혀를 찼다.
"너는 할 수 있다? 마법사라서?"
대공이 낮게 깐 목소리로 물었다. 마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네가 유능해서?"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말장난하자는 거냐?"
대공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갈라하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는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담하게 말했다.
"포기하지 않는 다라."
대공이 그를 작게 중얼거렸다.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길버튼의 털이 쭈뼛 설 정도였으니, 갈라하드는 어떻겠나.
그런데 갈라하드는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고집 있군."
이내 대공이 한 발짝 물러섰다. 대공이 먼저 물러선 건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갈라하드가 성서를 붙잡았다.
갈라하드는 성서를 가만히 넘겼다. 성서가 연신 빛을 뿜어냈다.
장을 넘길 때마다 갈라하드는 더 초췌해졌다. 몸이 계속해서 떨렸고, 입가에서 피까지 흘렀다.
한 눈에 봐도 무리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갈라하드는 멈추지 않았다.
"쯧."
대공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눈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북부 주민을 위해 저리 무리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때, 길버튼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웃고 있어?'
갈라하드가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주민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점점 늘었다. 이내 다시 광장이 가득해졌다.
대공은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마치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듯-. 흉터에 가려진 대공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
·········!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갈라하드가 든 성서였다. 성서가 연신 뒤틀렸다. 마치 발버둥이라도 치는 모양새였다.
"가만히 있게나."
갈라하드가 성서를 붙잡으면서 읊조렸다.
·········!
성서는 계속해서 진동했다. 뾰족한 비명이 연신 터졌다. 그 빛이 박동처럼 뿜어졌다.
갈라하드는 성서를 거칠게 잡고 계속해서 읽었다. 뭐라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었다.
"잡으십쇼!"
갈라하드가 대공에게 성서를 내밀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빨리!"
갈라하드가 독촉했다. 대공이 혀를 차며 성서를 잡았다.
성서가 더욱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비명이 더욱 커졌다.
"놓치시면 안 됩니다."
갈라하드가 양손을 걷어붙였다. 이내 수통을 홀짝였다. 마족의 피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가득 풍겼다.
그 입가를 타고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심상치 않은 모양새였다. 꼭 성서가 당하는 것 같은······.
"위험하니까 떨어지게."
갈라하드가 소리쳤다. 그에 길버튼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가 빠르게 주문을 읊조렸다.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서늘한 느낌이 가득 풍겼다.
이내-.
"업화."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손가락에 자그마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무게 잡은 게 무색할 정도로 작은 불씨였다. 갈라하드가 불씨를 성서에 가져갔다.
성서에 불씨가 닿자, 성서가 거칠게 일렁거렸다. 불씨는 순식간에 성서를 가득 덮었다. 기름을 부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대공이 성서를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성서가 연신 비틀거렸다.
·········!!
끔찍한 비명이 전보다 더 길게 터졌다. 그 목소리에 신경이 흔들릴 정도였다.
'저게 무슨-.'
성서를 삼킨 불이 더욱 커졌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맹렬했다.
어두운 밤이 가득 밝혀졌다.
'해가 뜬 것 같군.'
강렬한 불길에 길버튼은 작게 중얼거렸다.
성서는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불은 그리고도 한참이나 더 일렁였다. 갈라하드가 직접 나서고 나서야 꺼졌다.
"자, 다들 일어나게."
갈라하드가 주변을 보면서 소리쳤다.
그곳에는 무표정의 주민들이 있었다. 길버튼은 주먹을 굳게 쥐며 주민들을 응시했다.
대공이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때-.
"우아아아아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무표정이 깨지며, 주민들의 표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대공을 발견한 이들이 황급히 엎드렸다.
"성공이군."
그때, 갈라하드가 거칠게 기침했다. 몸을 크게 떨었다. 길버튼은 황급히 부축했다.
"저주는 지웠으니, 다시 마족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생명력이 줄었겠지만, 대신 마나 양이 늘었으니 어느 정도 상충이 될 겁니다. 어쩌면 더 건강할 수도 있겠군요."
갈라하드는 비틀거리면서도 설명을 이어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장!"
길버튼은 숨기지 않고 감탄했다.
죽음보다 끔찍한 게 마족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성의 주민들을 구했으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대단한 건 내 장기라네."
"예, 정말 대단하십니다."
"음, 그렇게 반응하면 재미가 없네만."
길버튼의 진심 가득한 끄덕임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때-.
"잘했다."
투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이었다. 대공의 칭찬이라니. 길버튼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아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걸로 부탁드립니다."
갈라하드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의 얼굴이 순간 비틀렸다. 자세히 보니, 미소였다.
그에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둘이 마주 보며 웃는데, 옆에서 보니 묘하게 비슷했다. 닮았다.
그를 보던 길버튼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결국, 태운 거잖아?'
아까는 태운다고 말했을 때는 그렇게 뭐라 하더니만-.
"갈라하드! 내가 왔다! 너의 경쟁자-."
콰아아앙! 성문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성문이 가볍게 잘렸다. 그 틈으로 하얀빛이 쏟아졌다.
무너진 성문 사이로 백색의 말을 탄, 순백의 기사가 등장했다. 아드리안나였다.
"갈라하드! 제가 왔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급박하게 소리쳤다.
순백의 명마에 순백의 갑주를 입고, 순백의 오러를 맹렬히 내뿜는 아드리안나의 모습은 그린 듯한 영웅이었지만-.
'이미 끝났는데.'
그를 모르는 아드리안나가 순백의 오러를 가득 일으키며, 거침없이 달려왔다.
"······?"
광장에 도착한 아드리안나가 우뚝- 멈췄다.
모두가 아드리안나를 보고 있었다.
순백의 오러가 점점 작아졌고,
그 하얀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
"······왜 안 나가십니까?"
펌킨은 갑자기 멈춘 퍼스트에게 물었다.
퍼스트가 얼굴을 달싹거렸다.
이내-.
"요원은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법."
퍼스트는 담담하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꽤 멋진 말이지만-.
'······그냥 나갈 타이밍 놓친 거잖아.'
펌킨은 한숨을 내쉬며, 퍼스트에게 따라붙었다.
"그래도 대단하셨습니다. 마족의 내분을 만들고, 퇴로도 확보했고 또······."
"크흠, , 도망가는 놈들도 처리했지."
"이번에는 진짜 잘하셨습니다."
펌킨은 퍼스트의 등을 두들겨 줬다.
181화 조금만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볼의 홍조는 여전했다. 푸른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살폈다.
"괜찮네."
"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성큼 다가왔다. 그 시선이 갈라하드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거기에는 신상 흉터가 있었다.
"살짝 긁힌 걸세."
"관통상입니다만."
"지혈은 했네."
"불로 지지셨군요."
"전통적인 방식이지. 소독과 회복이 동시에 되는."
"······."
아드리안나의 눈이 매서워졌다. 도끼눈이었다.
"몸을 너무 혹사하십니다."
"걱정하지 말게. 마법사라서 회복이 빠르니까."
"그러기에는 흉터가 많습니다만."
"나이테일세."
"말을 참 잘하십니다."
"내 장기 중 하나지."
아드리안나의 눈이 더 매서워졌다.
"그래도 살아남지 않았나? 그게 중요한 거지."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겠군요."
"그건······."
아드리안나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정론적인 지적에 갈라하드는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대공이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턱으로 아드리안나를 슬쩍 가리켰다.
대공의 시선이 더 살벌해졌다. 갈라하드는 마주 눈을 찡그렸다.
쯧. 대공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해라. 놈이 성을 지켰다."
대공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 내키지 않은 듯했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대공을 향했다.
'그래도 아드리안나는 대공이라면 한 수 접어주니까.'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했다.
다만, 아드리안나의 도끼눈은 풀리지 않았다.
"대공 전하도 먼저 갈라하드부터 챙기시는 게 순서 아니십니까?"
"······음?"
대공의 눈썹이 흔들렸다.
"부상자를 돌보지 않고, 적부터 잡으신 거 아니십니까? 좋아하시는 사냥처럼."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따졌다. 그에 대공이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눈썹이 뚝- 굳었다.
"사냥이라니. 아니다."
"흔적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랑 저기. 또 저기."
아드리안나가 흔적을 가리켰다. 하나하나 지적하는 아드리안나에 대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마족을 종잇장처럼 찢고, 접던 대공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붙잡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좋지 않나. 나는 살아남았고, 마족이 됐던 주민들이 돌아왔고."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중요합니다. 결과는 과정의 산물일 뿐입니다."
"열매가 달면, 여름도 따뜻하게 기억되는 법이지."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공을 세우셨는데, 질책부터 하다니-."
아드리안나가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대공의 시선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구해줘도 난리군.'
갈라하드는 황급히 농담을 던졌다.
"괜찮네.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거 아닌가."
보통 이렇게 말하면 아드리안나가 당황하여 물러났으니까. 분위기를 풀 적당한 농담이었다.
"예, 걱정하는 마음에 선을 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대공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두꺼운 근육이 날름거리듯 꿈틀거렸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도리어 사과하는 아드리안나와, 점점 더 험악해지는 대공-.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게 치닫고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아, 어지럽군."
슬쩍 휘청였다. 이미 몸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연기랄 것도 없었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잡았다. 건틀릿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휴식하셔야 합니다."
"그래야겠군. 피를 너무 흘렸나."
"예, 보좌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꽉 잡았다. 건틀릿의 서늘한 촉감이 넘어왔다.
으드득, 뒤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대공이었다. 차르티엔이 언뜻 보였다.
"으음, 따갑군."
"대공 전하. 기세를 줄여주시겠습니까."
"사내가 고작 그거 다쳤다고-."
끄응. 대공이 침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넘겼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를 곧장 마차로 안내됐다.
영주의 마차였지만, 작은 반발도 없었다.
"특무대 대장이신 갈라하드님이 너희를 구한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마족이 되어서 죽었을 것이다!"
"길버튼 경, 적당히 하게."
"후후,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십쇼."
길버튼이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길버튼은 주민들 앞에서 갈라하드의 업적을 떠들었다.
아드리안나가 마차 문을 열었다. 투박한 마차였다.
"조심히-."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마차에 앉혔다. 갈라하드가 유리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갈라하드를 앉힌 아드리안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석에서 길버튼이 소리쳤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길버튼 경."
아드리안나가 마부석과 통하는 작은 창구를 열고 길버튼을 불렀다.
"예?"
"좀 더 부드럽게 모세요."
"마차를 말입니까?"
"예."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길버튼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말이 끄는 마차를 어떻게 부드럽게 몬다는 것인가.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지만, 어쩌겠나 그 상대가 아드리안나였다.
"······알겠습니다."
길버튼이 억울한 얼굴로 끄덕였다.
"이놈들아 천천히 걷는 것이다. 부드럽게 걷자고. 한 발씩!"
말에게 부탁하는 길버튼의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다시 마차가 출발했다. 덜컹! 아드리안나가 다시금 길버튼을 부르려 했다.
"괜찮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창구를 닫았다. 그 푸른 눈동자가 갈라하드의 곳곳을 살폈다.
"수도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음, 말하자면 기네."
"괜찮습니다. 수도는 전부터 궁금하던 곳이라."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먼저 전 직장에 갔네. 남겨두고 온 게 있어서 말이지."
갈라하드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들었다.
"황녀님을 만나셨습니까?"
"······그쪽에서 찾아왔네. 아무 일도 없었네."
"일이라면 어떤-."
"크흠, 마도 기사라는 게 있더군."
"마도 기사가 무엇입니까?"
"마도구로 두른 기사일세. 그 출력을 높이는 거지. 제국의 양산형 기사가 북부의 기사 정도 되는 수준으로 올라갈 걸세."
아드리안나의 눈이 심각해졌다. 다행히 주제가 돌아갔다.
"괜찮을 걸세. 대비하면 되니까."
"대비할 수 있습니까?"
"마도구 작동을 막는 마도구를 개발하면 되겠지."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일세. 북부의 마석은 제일이니까. 그를 이용하면 되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반짝였다. 저런 표정도 있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다음은-.
"그리고 황혼의 마탑주와 만났네. 용이더군."
"예? 용은 제마 전쟁때 멸종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아드리안나가 점점 갈라하드 쪽으로 기울었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눈의 반짝임은 숨길 수 없었다.
수도 이야기에 잔뜩 몰입하고 있는 듯했다.
그 반응에 갈라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묘사까지 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탑만 한 거대한 얼음기둥이 비행선을 향해 쏘아졌지. 나는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고-. 내가 이겼네."
"와아.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드물게 손뼉을 쳤다.
"다만, 거기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지."
"사소한 문제라면-."
"황혼의 마탑주의 마법에 꿰뚫린 비행선이 황궁에 박혔네."
"······예?!"
아드리안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이 다음이 재밌는 걸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용인 황혼의 마탑주를 만나고, 황제에게 비행선을 넣고, 최초의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아서 탈출했다-.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눈에 힘을 주고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목소리가 진지했다.
'확실히 못 믿을만하군.'
갈라하드도 다른 이가 저런 소리를 했으면, 허풍쟁이 취급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진실일세. 증인으로 길버튼 경을 채택하겠네."
갈라하드가 증명하려고 길버튼을 부르려는 순간,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군요. 용부터, 황제, 최초의 마법사라니-. 대단한 여정이었겠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이토록 다친 게 이해가 되는 군요."
아드리안나가 입을 작게 벌리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믿어주는 건가?"
"예, 진실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당연한걸 왜 묻냐는 듯 되물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또렷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여기일세. 여명에서 나한테 수배를 내린 것 같더군."
"여명은 지독한 놈들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맞네, 상당히 지독하더군."
아드리안나가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응시하다가 굳게 끄덕였다.
"당분간 제가 같이 다니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 푸른 눈에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엉큼하군."
"안전을 위한 겁니다. 불편하시면 노아드로 다니겠습니다."
슬쩍 농담을 던져도 아드리안나는 단호했다. 심지어 노아드까지 먼저 꺼내다니-.
'절대 안 물러서겠군.'
곧은 푸른 눈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당분간 아드리안나가 항상 붙어 다닌다-.
"좋군. 잠도 같이 자나?"
"······예?! 그건-."
아드리안나가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놀리시는 겁니까?"
"잘 때가 가장 무방비하지 않나."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러면 제가 불침번을 서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구체적인 계획에 갈라하드는 다시금 웃었다.
"농담일세. 피곤해서 좀 자겠네."
짙은 피곤함에 갈라하드는 눈을 감았다.
*
주변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수풀과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쭉한 나무들-.
'오랜만이군.'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연초를 찾았다. 연초는 없었다.
수풀이 갈라지며, 네발 마족이 나왔다.
네발 마족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갈라하드의 기억을 읽는 듯했다.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지만, 갈라하드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봤나? 나는 시도했네."
갈라하드는 당당하게 말했다. 황실, 그것도 황제가 기거하는 위치에 비행선을 박아 넣었다.
이 얼마나 그럴싸한 계획인가. 상당한 예산이 들었을 것이다.
갈라하드의 것이 아니기에 그 값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억만금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아직 정정하더군. 간당간당하지만 말이야."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말일세. 자네도 보지 않았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네."
갈라하드의 불평에 네발 마족이 흔들렸다.
[성물.]
"아, 그래. 그거 잘 쓰고 있네. 착실하게 쌓는 중일세. 하지만 그건 내가 자네를 도와주고 받은 거 아닌가?"
갈라하드 아래의 풀들이 자라났다. 위협하듯 발을 감쌌다.
"이런 협박은 소용없다는 걸 알 때가 되지 않았나."
풀이 다시금 흩어졌다. 이제 깨달은 듯했다.
[너는 미쳤다.]
"알고 있네. 그래서 뭘 줄 수 있나?"
네발 마족의 신형이 작게 흔들렸다. 황제를 마주했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연옥?]
"쯧, 연옥이 어떻게 보상인가. 애초에 연옥은 자네의 공격 수단 아닌가. 그저 내가 알차게 이용할 뿐이지."
네발 마족이 가만히 내려봤다. 이내 그 길쭉한 목을 끄덕였다.
[왕.]
짤막한 단어가 갈라하드를 강타했다.
거래의 기본은 포커페이스였다. 갈라하드의 장기였지만, 이번에는 숨길 수 없었다.
"그래, 그거일세."
갈라하드는 가득 웃으며 끄덕였다.
[마족의 왕은 필연적이다.]
"알고 있네. 그래도 듣기 좋은 이야기군."
[황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이번에 보니 그런 것 같더군."
[왕이 일어나면, 모든 마족은 그를 따른다.]
모든 마족은 그를 따른다-.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족의 왕이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건-.
"아, 황제가 죽기 전에 마족의 왕이 일어나면, 황제도 마족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이군."
네발 마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 또한 대답이었다.
'마족의 왕이 일어나는 것에 황제의 죽음이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거군.'
아마 본래는 황제가 마족의 왕을 막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었다.
마족의 왕이 다른 방법을 찾아냈고, 그러면 황제는 오히려 마족의 왕 쪽에 선다는 듯했다.
의문은 하나였다.
"자네는 마족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네발 마족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당연히 끌릴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정답이었다.
"황제라."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애초에 황실을 뚫는 것조차 어려웠다. 마도 기사를 양산하고 있던 황실이었다. 설령 그를 뚫어도,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황제는 강하다.'
비행선을 가벼이 자르던 황제였다. 그 무력은 갈라하드가 이제껏 봤던 이 중에 가장 강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계산기를 두들겼다.
'들어갈 경로는 3황자나 4황자 혹은 황녀를 이용하면 될 것이고-.'
경로는 어떻게든 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황제를 잡을 무력이었다.
아무리 갈라하드의 전문이라지만, 황제 정도의 강자라면 의미가 없었다.
이쪽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업화.'
업화는 모든 걸 태우는 불이었다. 대공조차도 한 발짝 물러날 정도의 공격이었다.
문제는 그 속도였다. 닿으면 무엇이든 태우지만, 닿는 게 어려웠다.
쓰기에 걸린 조건이 너무 많았다.
그를 해결할 방법은 간단했다.
'공간 마법과 같이 쓴다면.'
문제는 공간 마법도 업화 못지 않게 까다로운 마법이라는 거였다.
연옥을 이용해서 공간 마법에 시간을 부었을 때도, 고작해야 얼음송곳 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공간 마법과 업화를 같이 쓰는 건, 상상조차 힘든 난이도였다.
영겁의 시간이 있어도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단번에 될 리도 없었다.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연옥을 펼치게."
나지막하게 주문했다.
[네놈은 도대체 나를 뭐라고······.]
네발 마족이 중얼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
'정말 피곤하셨구나.'
아드리안나는 맞은편의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자는데도 그 자세가 곧았다. 허리가 꼿꼿했다.
고른 숨소리가 아니면, 눈만 감은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표정이 참으로 평온했다.
갈라하드는 평소에도 항상 만반의 준비가 된 느낌의 사내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처음으로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다.
피곤하다고 무방비해질 사내가 아니었다.
아드리안나를 믿는다는 거였으니까.
그때, 마차가 덜컹거렸다.
"죄송합니다! 돌부리가 있어서!"
길버튼이 황급히 사과했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히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돌아가 있었다.
심히 불편해 보였다. 갈라하드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불편해 보이신다.'
그래, 불편해 보였다. 안 그래도 휴식이 필요한 갈라하드였다. 저렇게 휴식했다가는 오히려 피로가 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 진정한 휴식은 편안한 자세에서 나온다. 저렇게 있다가는 담이 올 거야.'
아주 일리가 있고, 타당한 이유였다.
아드리안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길버튼이 흥얼거리는 콧노래까지 들렸다.
아드리안나는 조심스럽게 갈라하드 옆에 앉았다. 갑주를 입었는데도 작은 소리도 안 났다.
다음은 갈라하드를 어깨에 기대게 하는 거였다.
전에 갈라하드를 안거나 업은 적도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어깨를 빌려주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되지?'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작게 씹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했다.
'기대셔도 됩니다. 아니, 건방지다. 기대주십쇼-. 이건 이상하잖아.'
아드리안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길버튼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
"으음."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어깨에 기댔다. 다만, 키 차이 때문에 아드리안나의 목에 가까웠다.
그 숨결이 목을 계속해서 간질였다.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심장 소리에 갈라하드가 깨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드리안나는 숨조차 조심했다.
평생 가장 집중한 순간이었다.
기대니까 더 욕심이 났다.
아드리안나는 슬쩍 갈라하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만 더-.
그때, 창구가 열렸다.
"오우-,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계속 하십쇼."
아드리안나는 길버튼과의 대련을 다짐했다.
182화 악수
업화는 모든 걸 태웠다.
공간부터 시작하여, 주변의 마나까지 태우는 게 업화였다.
그 위력은 확실했지만, 속도가 느렸다. 상대를 결박한 게 아닌 이상 맞추기 힘들었다.
그를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공간 마법이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업화는 공간까지 태운다.'
공간을 태우는 업화를 어떻게 공간 마법으로 옮긴다는 건가.
[맞다! 맞아! 그래! 누가 불을 처음부터 크게 키우느냐! 불씨는 작아야지!]
'업화는 불씨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작은 불씨가 이리저리 흔들었다.
'개념을 바꿔야겠군.'
지금 업화로는 불가능했다.
'불씨를 아주 작게 만든다면-.'
불씨는 작을수록 위력이 강해졌다.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다.
'답이 없군.'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연초를 찾았다. 연초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방출의 조건을 넘긴다면?'
마법은 기본적으로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응집, 계산, 방출.
원시 마법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응집과 계산이 기괴할 정도로 투박하다는 거였다.
'마족을 위한 거니까.'
권능의 번역본이었다. 계산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위의 세 단계를 따른다.
'그 방출을 너머에서 한다면?'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가능하다.'
그래, 가능했다. 대신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당장 손가락에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한계까지 집중해야 하는 업화였다.
그런 업화를 신체가 아닌 외부에서 발현시킨다고?
'미친 짓이지.'
그 원리를 떠올려도, 감이 오지 않을 만큼 단단히 미친 짓이었다.
다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했다.
그렇다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갈라하드에게 필요한 건 명확했다.
'업화의 이해도를 올린다.'
업화는 지옥불의 압축 버전이었다.
애초에 지옥불 자체도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기본이 되는 지옥불도 그 정도인데, 업화는 어떻겠나.
업화의 이해도를 올리는 게 먼저였다.
'손가락만 튕겨도 업화가 펼쳐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흥미롭군.'
마법을 연습하는데, 고통스러워할 마법사가 어딨겠나? 이건 갈라하드에게 놀이이자, 휴식이었다.
이해도를 올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될 때까지 반복하는 거지.'
반복은 무엇보다 확실한 이해 쌓기였다.
확실한 대신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시간이 무식하게 든다는 거였다.
'그건 연옥이 있으니까.'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껏 마법 반복이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시간인가.
[너는 미쳤다.]
"미안하지만, 지극히 정상일세."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
"음."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는 맞은편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연옥은 그 살벌한 이름처럼 지독한 시간의 지옥이었다. 갈라하드가 용도를 바꿔서 쓸 뿐이지, 그 부작용은 여전했다.
연옥으로 인한 아득한 괴리가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평생 잠을 못잔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런데 괜찮냐니-.
"오랜만에 푹 잤군."
갈라하드는 무거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다행히 아드리안나는 눈썰미가 좋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기침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아드리안나의 상태가 묘하게 이상했다. 얼굴이 붉고 작게 들썩거렸다.
그 모습이 꼭-.
"자네, 소변 마렵나?"
"······예?!"
"걱정하지 말게. 인간의 신진대사니까. 마차를 세우겠네."
"안 마렵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드물게 격한 반응이었다.
"······그러면 왜 그러나?"
"뭐가 말입니까!?"
"볼이 붉고, 숨이 살짝 거칠며, 손가락을 까닥거리지 않나.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격하게 흔들렸다.
"오, 뭔가 저질렀군?"
"······."
아드리안나가 시선을 피했다. 흥미로운 반응이었다.
"잠깐, 말하지 말게. 내가 추리할 테니까."
"무슨 놀이도 아니고-."
"평소보다 반응이 뾰족하군. 죄를 지은 게 있다는 이야기지. 음, 범행 시간은 내가 잠든 사이겠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크게 흔들렸다.
정답이라는 신호였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살폈다.
"마차 문을 열었던 흔적은 없으니까. 밖과 관련된 건 아니군. 범행 현장은 마차 내부로 국한되겠어. 흐음, 여기서 범죄라. 오, 내 옆자리가 따뜻하군. 이런 내가 자는 동안······."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내 귀에 대고 험담이라도 했나?"
"어깨를 내어 드렸습니다!"
"음?"
아드리안나가 조금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험담이라니-. 제가 험담을 왜 합니까?"
"그렇군. 어깨였군."
"예, 경위를 말씀드리자면, 마차가 흔들려서 갈라하드 대장의 고개가 틀어졌습니다. 휴식은 그 자세가 중요한데, 잘못된 자세로 휴식을 취하면 오히려 독입니다. 머리를 받칠 도구가 마땅한 게 없었기에 어깨를 내어 드린 것뿐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이 상당히 빠르고 명확했다. 작은 막힘도 없었다.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군.'
생각보다 시시한 이유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어깨라니. 그 정도는 괜찮네."
"······괜찮습니까?"
"그래, 다른 이도 아니고. 약혼자인 자네 아닌가."
그 성질 탓에 타인과의 접촉이 일절 없던 아드리안나였다. 거리감이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쪽에서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에 적당한 거리를 계산할 때,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되는 겁니까?"
어디까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갈라하드는 순간 멈췄다.
"아, 협의하는 게 명쾌할 듯해서 말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묘하게 익숙한 말투였다. 갈라하드는 낮게 기침했다.
"······그래, 어디까지 생각하나?"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까지 있습니까?"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끔벅였다. 거리감이라는 게 없군-.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다양하게 있지. 가령 단계로 나누자면, 손잡기부터 포옹, 입맞춤 정도. 지금은 이 범위까지 가능할 걸세."
이번에는 아드리안나가 조용해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손을 잡고 싶습니다."
실로 조심스럽고 투박한 진심이었다. 갈라하드는 순간 멍해졌다.
그로 인해 반응이 잠깐 늦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끄덕였다.
"얼마든지."
갈라하드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건틀릿을 벗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성질 탓이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부드러운 바람이 계속해서 불었다. 마치 선풍기를 켜둔 것처럼-. 지극히 낮은 농도의 마나가 아드리안나를 흘렀다.
"괜찮네. 저번에 보지 않았나?"
"아, 예."
아드리안나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내 손이 닿았다. 그 길쭉한 손은 굳은살이 가득했다.
"괜찮으십니까?"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낮은 농도의 마나를 뿌려도,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남았다.
불에 손을 집어넣은 느낌이었다. 꽤 고통스러웠지만-.
"물론일세."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미세하게 구겨졌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네가 먼저 손을 달라는 건 처음이군."
"······그렇습니까. 손이 크십니다."
"그런가?"
"예, 부드러우면서 단단합니다."
아드리안나는 장난감을 처음 쥔 아이처럼 손을 주물렀다. 타인의 촉감이 새로운 듯했다.
'신났군.'
반대로 갈라하드는 점점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성질을 눌러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늘 무심했던 푸른 눈이 반짝였다. 잔뜩 신난 모습이었다.
그때, 밖이 시끄러워졌다.
"방해하지 말라니까! 열지 마라!"
"뭐를 방해하지 말라는-."
"남녀가 마차에 있는데 뭐겠냐! 이런 눈치도 없는 것들!"
길버튼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하여튼 길버튼이군."
'위험했다.'
갈라하드는 저린 손을 쥐었다 폈다.
"예, 길버튼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슬쩍 문을 응시했다. 묘하게 노려보는 듯했다.
마차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톰과 데미안, 그웬과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 기사들이었다.
묘한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아드리안나 직속 부대 기사들이 갈라하드에게 경례를 올렸다.
"대공 대리를 뵙습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고 고개를 돌렸다. 톰과 데미안, 그웬이 있었다.
"그웬, 이쪽으로 오게나."
마침 그웬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갈라하드는 그웬부터 불렀다.
데미안이 먼저 마차에 탔다. 그웬과 톰이 따라서 탔다.
아드리안나는 슬쩍 자리를 비켜줬다.
"데미안, 꼴이 엉망이군."
"검은 인간 때문에요."
"아, 에포트님과 매일 훈련 중이었습니다."
톰이 설명을 덧붙였다.
"훈련은 어떤가?"
"힘들어요. 하기 싫어요."
"인생이란 게 그렇네. 본래 좋은 것들은 가시 속에 있지."
"어휴."
데미안의 한숨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래서 좀 늘었나?"
"네."
데미안이 냉큼 지팡이를 꺼냈다. 데미안이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괴상한 주문이었다.
마법을 물어본 게 아니었지만,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주문이 추상적이네. 단순히 멋있기 위한 게 아니라, 형상화를 위한 게 주문일세. 좀 더 명확하게 하게나."
데미안이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를 지적하던 갈라하드는 문득 떠올렸다.
'아, 사탕을 안 줬군.'
*
"······."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손을 내려봤다.
아직 온기가 남은 듯했다. 실로 낯선 온기였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나 따뜻한 거였다니.
"어떻게 되신 겁니까?"
보좌관 루나비른이 마차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가르세튼 성이 마족에게 넘어갔었다. 선교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군."
"선교자라니-."
분위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선교자의 흔적이 나왔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명이 갈라하드 대장을 노린다. 당분간 나는 갈라하드 대장과 같이 움직이겠다."
아드리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반발은 없었다. 갈라하드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었다.
"추가 병력도 보내겠다. 혹시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연락 넣고."
아드리안나의 명령에 직속 부대 기사들이 끄덕였다.
그때, 보좌관 루나비른이 슬쩍 다가왔다.
"그래서 받으셨습니까?"
루나비른이 마차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뭐 말인가?"
"사탕 말입니다."
"아-. 사탕."
아드리안나는 작게 탄식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수도에서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용부터 시작해서 황제와 또 최초의 마법사까지-. 사탕을 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충분하다."
아드리안나는 손을 꽉 쥐며 대답했다. 사탕 생각이 하나도 안 났다.
"그래도 기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끄덕였다.
기대한 건 사실이었다. 수도의 사탕이 달고 맛있다는 건 아주 유명했으니까.
"무사히 돌아오신 게 더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루나비른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마차 문이 덜컹 열렸다. 갈라하드였다.
"아, 이거 주는 걸 잊고 있었군. 받게나."
갈라하드가 뭔가를 가벼이 던졌다. 아주 화려하고 이쁜 상자였다. 마차 문이 바로 다시 닫혔다.
아드리안나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보석이라도 있는 건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연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상자의 내부가 컸다. 그 큰 상자에 사탕이 가득 있었다. 정말 가득-.
'그 바쁜 상황에서도 사오셨다는 건가.'
아드리안나는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아주 달았다.
"······진짜 요물이네."
루나비른은 혀를 내둘렀다.
*
"제 선물은요?"
데미안의 당당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순간 멈췄다.
"안 사 왔어요?"
"데미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갈라하드님이 잊었을 리가 없잖아!"
그웬이 데미안을 다그쳤다.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깜박했군.'
일이 많았다. 데미안 기념품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다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가진 게-.'
갈라하드는 슬쩍 품을 뒤졌다.
'금화, 연초.'
금화는 데미안이 관심을 안 보일 것 같고, 연초는 미성년자인 데미안에게 줄 수 없었다.
"분명 엄청난 걸 가져오셨을 거야!"
그웬이 데미안을 부추겼다. 차마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 있네."
갈라하드는 슬쩍 머리를 두드렸다.
"머리요?"
"그래, 가장 값진 건 지식이지. 남들이 훔쳐 갈 수 없거든."
"대충 둘러대는 거예요?"
"크흠, 그럴 리가."
갈라하드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도 기사라는 게 있네."
"······마도 기사?"
"제국에서 억만금을 투자해서 만든 최종 병기지."
"최종 병기-."
데미안의 입이 벌어졌다. 그 눈이 반짝였다.
"자네는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이미 마법사예요."
데미안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 끝에 미약한 불씨가 있었다. 연초 붙이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그래그래, 하지만 자네의 마법에 대한 재능은 볼품없네."
"그웬은-."
"논외일세. 사람의 장기는 다 다른 법일세. 대신 자네는 누구보다 많이 먹지 않나?"
"맞아요."
데미안이 자신 있게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자네는 검을 기가 막히게 다루지. 마도 기사는 그런 자네를 위한 걸세."
"마도 기사는 기사예요?"
데미안이 다급하게 마부석을 봤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사에 마법사를 더한 것이지. 마도구로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거나, 적들을 불태울 수도, 하늘을 날 수도 있지."
"우와-."
데미안이 입을 작게 벌렸다. 그 눈이 몽롱해졌다.
'생각보다 더 그럴듯하군.'
그냥 꺼낸 말인데, 상당히 그럴듯했다.
데미안은 본능으로 싸우는 짐승이었다. 황실 기사보다 마도구를 더 잘 다룰 게 분명했다.
그때,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진정한 마법사는 마도구에 의존하면 안 돼요."
그 목소리가 실로 단호했다. 상당히 정통 마법사스러운 올바른 말이었다.
"자네는 마법사가 아닐세."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데미안이 다급하게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 지팡이 끝에 미약한 불씨가 흔들렸다.
후-.
입으로 바람을 부니, 불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 돼. 내 지옥불."
데미안이 다급하게 지팡이를 붙잡았다. 꺼진 불씨는 켜지지 않았다.
"자네는 마도 기사 체질일세."
"둘러대는 거 아니에요?"
"음, 진심일세."
"알았어요."
데미안이 힘차게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웬이었다. 그웬이 강아지 같은 눈을 반짝이며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물론, 자네 선물도 있지."
"와아! 진짜요?!"
"그럼."
갈라하드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금화가 담긴 주머니였다.
"이거면 고아 스무 명은 더 챙길 수 있겠어요!"
그웬은 기뻐서 눈물까지 흘렀다. 갈라하드는 금화를 더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홉 명 더!"
마지막으로-.
"저는 괜찮습니다."
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자네는 승진일세."
"······승진 말씀이십니까?"
톰이 슬쩍 뒤를 보며 난색을 표했다.
"기념품이 승진일 수가 있어요?"
"데미안, 자네는 조용히 하게."
그때, 창구가 벌컥 열렸다.
"부대장 길버튼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어딘지 다급한 얼굴의 길버튼이었다.
"부른 적 없네만. 톰, 자네는 이제부터 내 보좌관일세. 내가 부재중이면 나를 대신하는 거지."
길버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톰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아, 부대장보다는 직급이 낮지만, 확실히 실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겠군요. 안 그래도 이런저런 제약 때문에 고생이었는데, 감사합니다!"
톰이 빠르게 말했다. 그제야 길버튼의 얼굴이 풀렸다.
"그래, 톰. 너도 열심히 했으니까. 승진할 때가 됐지! 암! 올바른 인선 이십니다!"
길버튼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 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밋이 대장님을 찾았습니다."
"자밋이? 무슨 문제라도 있나?"
톰이 뜸을 들였다.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베아트리스 관련 이야기입니다."
갈라하드의 미소가 굳었다.
183화 사탕
'베아트리스라.'
갈라하드는 옷깃을 매만졌다.
톰이 마련해 준 새로운 옷과 코트였다. 코트가 전의 것보다 얇은데, 더 따뜻했다.
심지어 기름칠도 하여 윤기가 가득했다. 수도에서 귀족이 입는 코트 같았다.
"사탕이 정말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묘하게 올라간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볼이 열심히 오물거렸다.
"입에 맞아서 다행이군."
"입에 맞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되네. 사탕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그렇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깊게 내려갔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반응이었다.
"하루에 몇 개까지 됩니까?"
"오늘 몇 개 먹었나?"
"열여섯 개 먹었습니다."
그사이에 열여섯 개나 먹었다니. 공간 확장이 걸린 상자에 사탕을 가득 채웠지만, 저 속도라면 얼마 못 버틸 게 분명했다.
"하루에 다섯 개를 넘지 말게나."
"다섯 개-."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너무 맛있습니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사탕을 한 움큼 내밀었다. 그 눈썹이 마구 흔들렸다. 꼭 보물이라도 내어주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나면 되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사탕 하나만 챙겼다.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정보국에 갈 생각일세."
"아, 따라가겠습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금방 돌아오겠네."
아드리안나의 우물거리는 볼이 멈췄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뒤로 물러나며 끄덕였다.
"오늘은 사탕 그만 먹게."
"······예."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가득 내려갔다.
****
자밋은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갈라하드가 앉아 있었다. 갈라하드는 늘 그렇듯 깔끔하게 넘긴 머리에 깨끗한 복장이었다.
'화났네.'
자밋은 서늘한 느낌에 목을 매만졌다.
"기척이라도 내달라니까요."
"습관이라서. 그래, 할 이야기가 있다고."
"예, 베아트리스 이야기예요."
"음."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녀 살리기 임무의 투입 인원 목록이 이상해서요."
"전부 내가 뽑았네만."
"맞아요. 그 인원들 전부 베아트리스가 뽑은 인물이에요."
"내가 뽑았으니까."
갈라하드가 꾹 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갈라하드의 주변은 전부 베아트리스의 흔적이었다.
전임 국장 베아트리스는 당시에 끼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까. 특히 갈라하드의 일이라면 더더욱.
"베아트리스가 사라지고 2년이나 흐른 시기였어요. 정보국에서 2년이면 물이 두 번 바뀔 시간이죠. 당시 후보 인선에는 그 외의 이들도 있었어요."
"내 기억에는 다른 이가 없었네만."
"당시 베아트리스의 쪽이 아닌 이들은 전부 임무에 나가 있었어요. 아니면 부상이거나. 죽었거나."
자밋은 자료를 내밀었다. 당시의 행적 기록표였다. 갈라하드가 그를 빠르게 살폈다.
"이건 정황 증거일세."
"맞아요. 전부 정황 증거들뿐이죠. 그런데 어디서 많이 봤던 수법 아니에요?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정황상 증거만 남는-."
갈라하드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이내 갈라하드가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빌어먹게도-.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자밋은 그런 갈라하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갈라하드에게 베아트리스는 역린이었다. 입에 담는 것조차 껄끄러웠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안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자밋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
[이스카리옷-.]
콰아아아앙!
굉음에 갈라하드는 정신을 차렸다.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고급스러운 물품이 가득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큼지막한 방, 베아트리스의 방이었다. 갈라하드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두통이 가득 올라왔다. 익히 아는 부작용이었다.
'수면 독.'
이 정도 통증이면, 거의 치사량 직전까지 먹인 거였다.
'거의 죽을 뻔했군.'
조금만 더 마셨으면, 죽을 수도 있는 양이었다.
목숨의 위기야 요원 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넘겼다.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그 상대가 문제였다.
갈라하드가 굵직한 임무를 해결했고, 그를 축하하기 위해서 베아트리스 방에서 한잔했다.
[이스카리옷,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해줘.]
[또 말인가?]
[그래, 얼마나 달콤한데.]
방의 구석구석 살폈지만, 외부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범인은 베아트리스였다.
'······왜?'
짓궂은 장난인가? 베아트리스는 종종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다만,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어딘지 서늘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이 다시 터졌다. 충격에 테이블이 뒤집혔다. 갈라하드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베아트리스의 집은 내성에 있었다. 황실과 가까운 아주 비싼 집이었다. 그런데 저런 굉음이 들리다니-.
'무슨 일이지?'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리며 일어났다. 순간 현기증에 휘청였다.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연 갈라하드는 그대로 멈췄다. 익숙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불과 피 냄새였다.
정면에 거대한 창문이 있었다. 그 전경이 좋아서, 베아트리스가 좋아했던 창이었다.
본래는 황궁의 화려한 금색 벽과 그 주변의 건물들이 보이는 전경이었다. 지금도 똑같았다. 문제는 그 위에 덧칠된 색이었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불이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고, 바닥이 붉었다.
'반란이다.'
누가? 갈라하드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제국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제국을 제외하면, 모두가 적이라는 소리였다.
다만, 그중에 내성까지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은 몇 없었다. 심지어 반란이라면-.
'반란군을 전부 모았군.'
적의 적은 동지라는 표현은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반란군은 본래 반란군끼리도 단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끼리 이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았다. 정보국의 임무 중 하나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런 단합력이라니?
그때, 괴상한 구호가 들렸다.
"모든 이는 평등하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제국을 타파하자!"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구호였다. 동시에 너무 익숙한 구호였고.
'베아트리스. 무슨 짓을-.'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베아트리스의 짓이 분명했다. 베아트리스에게만 해준 이야기였으니까.
갈라하드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앞을 익숙한 놈들이 막아섰다. 베아트리스가 부리는 요원들이었다.
"부통령님. 대통령님께서 여기 계시라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이라니-. 순간 짓궂은 농담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만, 놈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베아트리스는 어딨지?"
"대통령께서는 외부 업무 중이십니다."
"시발."
갈라하드는 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만나야겠다. 위치를 말하도록."
"안 됩니다."
요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베아트리스는 완벽한 상사였으니까.
갈라하드도 전까지는 비슷한 얼굴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멀리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민주주의가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괴상한 구호가 터졌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표정을 고쳤다.
"아, 힘이 빠져서 그런데 좀 도와주겠나?"
"예, 부통령님 방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요원들이 다가왔다. 그 얼굴은 여전히 존경심이 가득했다. 갈라하드를 보는 눈도 비슷했다.
'부통령이라니-.'
둘은 조심스럽게 갈라하드를 양쪽에서 보좌했다.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었다. 그 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단검이 왼쪽 사내의 목을 꿰뚫었다. 꺼림직한 촉감이 넘어옴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송곳이 오른쪽 사내의 목에 꽂혔다.
작은 비명조차 없었다. 둘이 동시에 허물어졌다. 빌어먹을, 갈라하드는 욕을 중얼거리며 단검을 털었다.
"민주주의가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피는 후손을 위한 토양의 양분이 될 것입니다! 싸우십시요! 쟁취하십시요!"
구호를 자세히 들어보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베아트리스의 것이었다.
'······망했군.'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너무 많이 떠들었나?'
아니, 너무 믿었다.
'그렇다고 반란을?'
갈라하드는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반란군이 내성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성공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가. 상대는 제국이었다.
결말이 실패라는 건, 베아트리스도 알 것이다.
'도대체 왜?'
알 수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그 출생부터 나이, 모든 게 의문투성이인 여자였다. 꽤 오랜 세월을 같이하고도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은 여인이었다.
그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찾자.'
갈라하드는 눈에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베아트리스는 폭주하는 시위대의 중심에도, 반란군의 수장들이 모인 곳에도 없었다. 주요 인물이 있는 곳을 전부 뒤졌지만, 어디에도 베아트리스는 없었다.
'설마-.'
갈라하드는 마지막으로 시가지로 향했다.
베아트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였다. 주변은 온통 난리였지만, 이쪽은 조용했다. 마치 다른 세계처럼.
딸랑. 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베아트리스는 늘 있던 자리에 있었다. 잔을 홀짝이며, 앞에는 한 입도 먹지 않은 케이크가 있었다.
"늦었네?"
베아트리스가 갈라하드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포근한 웃음이었다.
너무 충격이 컸던 탓일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전혀 늙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를 만난 지 적어도 5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놀란 얼굴이네?"
"밖에 난리가 났거든."
"어때, 잘하는 거 같아?"
"별로."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직원이 갈라하드 앞에 잔을 내려줬다.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 무슨 생각이지?"
"올바른 사상을 전해줄 뿐이야. 민주주의잖아?"
"말 돌리지 말고."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을 올려뒀다. 베아트리스가 피식 웃었다.
"협박이야?"
"글쎄."
"귀엽네."
갈라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있잖아. 이스카리옷. 만약 네가 소설 속에 등장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
'아-.'
베아트리스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짙게 탄식했다.
"그것도 비중이 없는 역할이라면? 아, 솔직히 실망했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이름조차 못 남기다니."
"······너무 예전에 읽은 것이라서."
"위로라고 하는 거야?"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베아트리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미친 꼬맹이인 줄 알았어. 원래 마법사는 머리가 이상한 놈들이 많잖아? 근데 아니더라고. 오히려 그 반대였지."
갈라하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고민했어. 적어도 이름은 남기고 싶었으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더라고. 하나는 제국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안겨주는 것."
베아트리스가 밖을 가리켰다. 민주주의! 어디선가 구호가 들렸다.
꺼지지 않을 불이었다. 계속해서 회자될 게 분명했다.
"두 번째는 세상의 멸망을 막을 용사를 키워내는 것. 많이 컸네?"
베아트리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입술을 씹었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고마운걸. 하마터면 그냥 스러질 뻔했으니까."
베아트리스가 턱을 괴며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눈에 비친 갈라하드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이스카리옷, 용사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베아트리스가 열기 가득 한 목소리로 물었다.
갈라하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베아트리스가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고난과 역경이야. 고난과 역경."
베아트리스는 강조하듯, 한 번 더 반복했다.
정보국에서의 나날이 떠올랐다. 왜 항상 갈라하드의 작전만 어려웠을까. 왜 항상 갈라하드의 팀원들만 죽어 나갔을까.
왜 항상 나만-.
"너였군."
갈라하드는 베아트리스의 멱살을 잡았다. 단검을 목에 겨눴다. 베아트리스는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알아. 네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어렸을 때는 가문에서 경멸 당하고, 아카데미에서는 핍박받고, 기껏 들어온 정보국은 더한 지옥이고. 힘들었지?"
베아트리스의 물음이 상당히 따뜻했다. 순간 위로해주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부러 나를 괴롭혔다는 건가."
"용사라며? 성심성의껏 도와준 거야."
"궤변을-."
"중요한 건 결과야. 결과를 봐. 최고 요원이 됐잖아? 실력이 이렇게 빨리 늘어난 게 순전히 재능 때문인 거 같아?"
갈라하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결과야. 네가 용사가 된다면, 지금껏 겪었던 모든 역경과 고난은 씨앗에 뿌려진 빗물이지. 나는 용사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반자로 기억될 것이고."
부드러운 손길이 갈라하드의 볼을 매만졌다. 갈라하드는 손을 까닥거렸다.
"왜?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이스카리옷, 너는 날 못 죽여."
"그게 내 유일한 장기인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베아트리스는 피식 웃었다.
"너는 날 사랑하잖아."
베아트리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지금도 분노 대신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애석하게도 정답이었다.
손에 힘이 쭉 빠졌다.
"같이 가자. 더 나은 곳이 있어."
베아트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마치 강아지한테 내미는 듯한 손짓이었다.
'이걸 노렸군.'
확실히 자충수였다.
갈라하드는 주름 하나 없는 길쭉한 손을 내려봤다.
이내 손을 잡는 대신 연초를 입에 물었다.
"투정 부리는 거야?"
"아니."
"여기 남으면 힘들 텐데?"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정보국에 남으면, 갈라하드의 기반 자체가 날아가는 건 기본이고 그 목까지 위험했다.
"자네가 말했듯 역경과 고난이지. 달게 받겠네."
베아트리스의 웃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어리광 부리지 마."
"미안하지만, 나는 젊네."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베아트리스가 눈을 험하게 구겼다. 투박한 욕설이었다. 베아트리스가 갈라하드의 멱살을 잡았다.
그 얼굴이 순간 가까워졌다. 베아트리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날 사랑할 수밖에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리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작은 의심조차 없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갈라하드는 텁텁한 침을 삼켰다.
다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약속하지. 다음에 마주하면, 이걸 선물하겠네."
손가락을 타고 스파크가 연속으로 튀었다. 번개로 만든 꽃이 손에 머물렀다.
베아트리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갈라하드에게 약속이 어떤 무게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근사하네. 프로포즈야?"
갈라하드가 대답하지 못하자, 베아트리스가 까랑까랑하게 웃었다.
"좀 더 크게 만들어. 나는 알이 큰 게 좋거든."
****
'베아트리스가 황녀 살리기에 관여했다.'
눈치챈 게 늦은 이유는 하나였다.
베아트리스와 관련된 건 갈라하드가 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자밋이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만약 베아트리스가 관여했다면, 내가 고난에 빠지기를 원했기 때문일 걸세."
실제로 위험에 빠졌다. 잡혀 들어가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황궁에서 위기에 빠진 건 팀원이 아니라, 황녀 때문일세."
베아트리스의 일 처리 방식이 아니었다. 황녀의 미친 짓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갈라하드는 위기에 빠졌지만, 그건 베아트리스의 짓이 아니었다. 황녀의 것이었지.
"그러면 북부로 보내진 것도······."
자밋이 드물게 뒷말을 흐렸다.
"그녀는 황실에 없네. 정보국에도. 내가 확실히 처리했으니까. 다만,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군."
갈라하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변수는 베아트리스가 같이 가자고 했던 조직이었다. 그때는 반란군이라고 여겼지만, 반란군은 아니었다.
변수는 좋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그쪽 전담 관련 인물을 배치하는 게 좋겠군."
"누구로 합니까?"
자밋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잠시 손가락을 튕겼다.
갈라하드와 관련된 일이었다. 역시 이런 일에는-.
"퍼스트가 제격이겠군."
"나를 불렀는가!"
문이 열리며 퍼스트가 들어왔다. 그 복식이 평소보다 험했다. 어디서 구르고 온 몰골이었다.
"자네, 어디 갔다 왔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퍼스트의 얼굴이 힘껏 씰룩거렸다. 이내 담담하게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퍼스트가 꾹 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르세튼에 왔었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품을 뒤졌다.
습관적으로 연초를 꺼내는데, 손가락에 뭔가 걸렸다.
아드리안나가 준 사탕이었다.
갈라하드는 연초 대신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건 뭐지?"
"사탕일세. 연초는 슬슬 질려서."
퍼스트의 다급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순순히 대답했다.
"······멋있군."
도대체 어디가?
펌킨은 눈을 구겼다.
184화 훈수
"퍼스트, 자네가 베아트리스 쪽을 맡게."
갈라하드의 명령에 퍼스트는 눈을 찡그렸다.
퍼스트는 갈라하드에게 베아트리스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베아트리스는 갈라하드의 연인이자, 든든한 후원자, 스승이었고, 동시에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베아트리스를 맡으라니-.
"나한테 미루는 건가?"
퍼스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눈이 가늘어졌다.
"미룬다니 무슨 소리인가."
"왜 내게 넘기는 것이지? 설마 아직도 인가?"
퍼스트는 갈라하드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 굵은 눈썹이 굳게 휘어졌다.
"음, 베아트리스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은 건 내 실수가 맞네. 미숙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지."
갈라하드가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지금은 아닐세."
갈라하드의 눈이 또렷했다. 흔들림 하나 없이 올곧고, 날카로운 흡사 매 같은 눈, 평소의 갈라하드였다.
퍼스트는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왜 내게 맡기는 것이지?"
"수지타산이 안 맞기 때문일세."
"······수지타산?"
"베아트리스가 직접 방해한다면 모를까. 위치도, 존재도 확실하지 않은 쪽에 투자할 시간은 없네. 나는 바쁘다네."
그쪽에 무게를 두지 않기에, 퍼스트를 배치하겠다는 갈라하드스러운 대답이었다.
퍼스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네에게 부탁하는 건, 자네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일세. 아, 물론 나를 제외하고."
"그래, 그래야 갈라하드지."
퍼스트가 짙게 웃었다.
"만약 베아트리스를 발견한다면?"
퍼스트는 갈라하드의 눈을 보며 물었다.
"죽이게."
갈라하드는 가벼이 대답했다.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퍼스트의 얼굴에 진지함이 사라지고 예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전부터 베아트리스가 마음에 안 들었다."
"자네, 베아트리스한테 고백 열 번 넘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너와의 인기 대결이었다."
"나는 자네와 그런 대결을 한 적이 없네만."
"후후, 박빙이었지."
퍼스트는 호탕하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찾으면 연락하지. 마무리는 자네가 해."
"굳이 그럴 필요 없네만."
"아니, 네 과오니까."
퍼스트가 낮게 읊조렸다.
"그래, 약속한 것도 있으니. 알겠네. 연락하게나."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였다. 퍼스트는 만족하며 일어났다.
"퍼스트."
그때, 갈라하드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퍼스트는 가만히 내려봤다.
"조심하게."
드문 당부였다. 퍼스트는 시원하게 웃었다.
"갈라하드. 네가 아니면, 날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퍼스트는 곧장 본부를 나섰다. 펌킨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펌킨은 슬쩍 옆을 올려봤다. 퍼스트는 아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화난 얼굴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퍼스트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입김이 길게 뿌려졌다.
"순정을 이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니까."
퍼스트가 분노가 꾹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근데 왜 지가 화를 내?'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베아트리스를 어떻게 찾습니까?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정보국에 있을 때 그 완벽한 일 처리로 유명했던 여인이었다. 그런 베아트리스가 작정하고 숨었다면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쥐 새끼는 치즈 옆을 어슬렁거리는 법이지."
퍼스트가 히죽 웃었다. 살벌한 미소였다.
여기서 치즈가 뜻하는 건 명백했다.
"······갈라하드의 행적을 거슬러 쫓겠다는 겁니까?"
"그래, 쥐새끼라면 어슬렁거렸겠지."
퍼스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역시 갈라하드만 엮이면, 저 머리가 배는 빨리 굴렀다.
"갈라하드가 처음 습격당했던 가르세튼 성부터 조사하지."
퍼스트가 곧장 걸음을 옮겼다. 거길 또 간다니-. 펌킨은 혀를 차며 따라붙었다.
그러다 문득 펌킨은 아까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열 번 고백하셨습니까?"
"아니, 열한 번이다."
"아하, 열한 번."
"펌킨, 왜 노려보지?"
"오호, 열한 번."
"······펌킨?"
펌킨은 대답 대신 '열한 번'을 반복했다.
****
"작전과장이랑 이야기 해뒀네. 그쪽에서 정보 창구를 열어줄 것일세. 국장은 당분간 안 돌아올 것이고."
갈라하드는 자밋에게 지시를 내리고 일어났다.
"괜찮겠어요?"
자밋이 갈라하드를 올려보며 물었다. 그 눈이 묘했다.
오독, 갈라하드는 입의 사탕을 깨물었다. 혀가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걱정은 고맙네만, 지극히 괜찮네. 짜증 나는 정도일세. 이렇게 지저분하게 들러붙다니. 쯧."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그제야 자밋이 웃었다.
"잘생긴 탓이죠."
"그래, 내 잘못이지."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본부를 나섰다.
마탑으로 향하는데, 익숙한 이가 있었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갑주와 머리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갈라하드의 걸음이 빨라졌다.
"아니, 왜 여기 있나?"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린다는 게,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린다는 뜻이었을 줄이야. 미련했다.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었네만."
"아, 그렇습니까."
"추운데 왜 여기 있나."
"날이 따뜻하여 괜찮습니다."
따뜻하다니-. 눈보라까지는 아니지만, 살을 찌르는 칼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이래서 북부인은-.'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끄덕였다.
"이제 어디 가십니까?"
"마탑으로 갈 생각일세."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나야 고맙지."
아드리안나가 냉큼 따라붙었다.
'대형견 같군.'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자네가 준 사탕을 먹었거든."
"아! 엄청 맛있지 않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원래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네만."
눈썹이 내려갔다.
"자네가 준 사탕은 아주 맛있더군."
"아! 다행입니다."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반응이 상당히 재밌었다.
"더 드시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오늘 더 못 먹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뭔가를 꺼냈다. 보물이라도 꺼내는 듯했는데, 사탕을 담은 상자였다.
"괜찮네. 오늘은 충분하네."
"내일 것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사탕을 내밀었다.
"고맙네. 비록 내가 선물한 사탕이지만."
"예?"
"농담일세."
갈라하드는 마탑으로 향했다.
"이놈아! 그걸 또 까먹었어?!"
"너는 빡대가리도 아니다! 빡빡대가리다!"
"빡빡대가리라니-. 같은 장로끼리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마탑은 시끌벅적했다. 장로 둘이 코르튼을 둘러싸고 연신 지팡이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코르튼은 맞으면서도 빽빽거렸다.
"갈라하드다! 갈라하드!"
갈라하드를 발견한 코르튼이 소리쳤다. 장로들의 지팡이가 멈췄다.
"갈라하드!"
코르튼이 다급하게 갈라하드에게 뛰어왔다. 그에 장로들도 갈라하드에게 달려왔다.
"갈라하드! 장로들이 괴롭힌다!"
코르튼이 갈라하드에게 뛰었다. 그에 피하려는 순간, 아드리안나가 움직였다.
섬광이 반짝였다.
"억!"
아드리안나의 발이 코르튼의 명치에 정확하게 꽂혔다.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코르튼이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엎어진 코르튼이 그대로 기절했다.
아드리안나의 적나라한 발차기에, 달려오던 장로들이 엉거주춤 멈췄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음, 잘했네."
그에 칭찬하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갈라하드! 어떻게 됐느냐!"
"그래! 어떻게 됐느냐!"
장로들이 아드리안나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황혼의 마탑주를 만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괴물을 만났느냐? 만났으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는데-."
둘이 서로 말을 받았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덕분에 만났습니다."
"오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마법 대결을 했습니다."
장로 둘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얼굴이 씰룩해졌다.
""······황혼의 마탑주와 마법 대결을 했다고?"
"
둘이 동시에 경악했다.
"어째서 그런 끔찍한 짓을!"
"분명 우리가 경고하지 않았느냐!"
장로들이 연달아 소리쳤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 놈은 심연이다! 당연히 네가 질······. 응? 방금 뭐라 그랬냐?"
"이겼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누가 이겼다고?"
"제가 이겼습니다."
장로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동시에 물었다.
"진짜냐?"
"진짜야?"
"예."
갈라하드는 담담히 끄덕였다.
장로들이 주름진 눈을 몇 번이나 끔벅였다.
그리고-.
"맙소사! 황혼의 마탑주를 이기다니! 네가 대마법사다! 대마법사!"
"하하! 그 꼬맹이 콧대만 높아서 언젠가 크게 다칠 줄 알았지! 우리는 너를 믿었다! 역시 마탑주다!"
장로들이 펄쩍 뛰었다. 그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더불어 북부로 소재를 밝혔으니, 마법사들이 꽤 올 겁니다."
갈라하드가 굳이 북부의 마법사라고 소개한 이유였다. 마법사들은 홀린 듯이 올 게 분명했다.
"당연하지! 황혼의 마탑주를 이겼으니까! 잘했다! 잘했어!"
"아주 잘했다!"
장로들의 얼굴이 더욱 풀어졌다.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문서를 꺼냈다. 최초의 마법사가 개정한 얼음송곳이 적힌 종이였다.
"이건 황혼의 마탑주가 개정한 얼음송곳입니다."
"이게 말이냐?"
"아니, 어딜 봐서 이게 얼음송곳이야?"
장로들이 문서를 보면서 얼굴을 가득 구겼다.
"정오 마탑의 첫 번째 정식 마법입니다."
장로 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래도 되느냐? 놈은 황혼의 마탑주인데?"
"괜찮습니다. 제 동생이라서."
"동생?"
"그렇게 됐습니다."
장로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내 다시금 웃었다.
"그래! 놈은 어차피 마법사들과 교류하지 않으니까! 우리 것이라고 해도 믿겠군!"
"하하하! 멍청한 꼬맹이 자식! 머리만 똑똑하고! 마법만 잘쓰지! 결국 당했구나!"
그때, 장로들이 다시 정색했다.
"이건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
"그래, 우리가 봐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난 안 어지럽다!"
"이놈이!"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어 장로들을 조용히 시켰다.
"될 때까지 반복시키면 됩니다."
"······될 때까지?"
"그러면 다른 걸 못 배울 텐데."
"상관없습니다. 다른 마법 스무 개 배우는 것보다 저거 하나 배우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장로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본래 마탑은 많은 마법을 가르쳐야 더 좋은 마탑으로 취급받았다. 보여주기식이었다.
"정오의 마탑은 철저히 실용적으로 갈 겁니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실용 위주?"
"실용?"
장로 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 쓸데없이 화려한 마법 대신 철저하게 실용적인 것만 사용할 겁니다. 가령 이것처럼."
장로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제껏 마탑들과 전혀 다른 방향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되겠느냐?"
"으음,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둘의 의문은 타당했다.
"정오의 마탑에 조건을 하나 만들 겁니다."
"······조건?"
장로들이 주름진 눈을 끔벅였다.
"마탑 마법사라면, 누구든 제게 결투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긴다면-."
갈라하드는 잠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마탑주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파격적인 선언에 장로들의 얼굴이 씰룩였다. 허- 하고 혀를 찼다.
"마탑주를 이기면 마탑을 주겠다니. 마탑이 무슨 용병대도 아니고 말이야."
"북부식이군. 북부식이야."
"다만, 확실히 파격적이야."
"젊은 놈이라면 끌릴 수밖에 없지."
장로들이 크게 끄덕였다. 그 주름진 눈에 어울리지 않는 열기가 가득 찼다.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군."
"마법계가 발칵 뒤집힐 거야! 골방에서 몽둥이나 만지작거리던 놈들이 전부!"
"볼만 하겠군! 역사의 현장이다!"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먼저 나부터 해야지!"
"이놈아! 나부터다!"
장로 둘이 헐레벌떡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마탑 뒤쪽의 공터로 향했다.
거기에 그웬이 있었다. 그웬은 밖의 소란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한 상태였다.
'드디어 마법사 답군.'
전에는 갈라하드가 떠밀어서 했던 그웬이었다. 그런 그웬이 지금은 스스로 하고 있었다.
사소한 차이였지만, 동시에 큰 차이였다.
"폭풍 바람 칼날!"
그웬이 소리치며 손을 휘저었다.
'칼날 바람 폭풍이네만. 그래도 하나는 맞췄군.'
그웬의 주변을 따라서 마나가 휘몰아쳤다.
갈라하드가 보여줬던 칼날 바람 폭풍이었다. 그래,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나.
"대단하군."
"허억··· 허억···. 오셨어요?!"
그웬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인사했다.
"많이 늘었군."
"네! 열심히 했어요!"
"전에 마법사는 저주 받은 마족의 오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갈라하드는 슬쩍 농담을 던졌다. 그에 그웬이 크게 끄덕였다.
"그랬었죠!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고, 또 행복하게 먹일 수만 있다면, 오물도 상관없어요!"
그웬이 밝게 웃었다.
"음, 오물이 아니라는 뜻이었네만. 뭐 다행일세."
"헤헤-."
"보여줄 게 있으니, 뒤로 물러나게나."
여기 온 이유는 황혼의 마탑주 얼음송곳을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그웬은 마나 충전소였으니까.
그 과정에서 그웬에게 얼음송곳을 보여줄 생각이었고.
"네! 제대로 볼게요!"
그웬이 눈에 힘을 줬다.
'음, 계산식이-,'
갈라하드는 머릿속으로 주문을 되짚었다.
황혼의 마탑주 얼음송곳은 실로 복잡했다. 얼음송곳과 같은 양의 마나가 들었지만, 그 복잡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황혼의 마탑주가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개정했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계산 잘한다는 거지.'
황혼의 마탑주가 범주 외의 괴물일 뿐이지, 계산은 본래 갈라하드의 주특기였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미 주어진 식을 따라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래 걸릴 뿐이지.'
갈라하드는 계산을 점검한 뒤에,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를 세심하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크게 반작용이 올 수 있기에 집중이 필요했다.
이윽고-.
'됐군.'
화살 같은 모습의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그 표면에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한 틈까지 있었다.
'마법이 아니라 예술이군.'
갈라하드는 그 정교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직접 펼쳐보니 그 복잡도가 체감됐다. 이걸 그리 쉽게 펼쳤다니-.
'계산이 도대체 얼마나 빠른 거지?'
실로 대마법사에 어울리는 괴물이었다.
"잘 봤나? 계속 반복해 줄 테니 보게나-."
고개를 돌린 갈라하드는 그대로 굳었다.
"와아-. 너무 이뻐요!"
그웬의 손에 얼음송곳이 있었다.
그것도 완벽한 얼음송곳이-.
'어떻게?'
그웬이 전에도 한 번 보고 따라 한 적 있었다.
다만, 그때는 완벽히 따라한 게 아니었다. 열화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웬, 저쪽으로 쏴보겠나?"
"네!"
그웬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얼음송곳이 쏘아졌다.
파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벽에 얼음송곳이 박혔다. 얼음송곳을 뛰어넘는 위력이었다.
"그웬, 다시 써볼 수 있겠나?"
갈라하드는 목소리를 꾹 누르며 물었다.
그웬은 마법을 혼자 능동적으로 쓰려면, 몇백 번을 반복해야만 했다. 빡대가리인 탓이었다.
"네!"
그웬이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시 얼음송곳이 생겼다. 완벽한 얼음송곳이었다.
보여주지 않았는데, 바로 사용하다니-.
'단번에 터득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웬은 오로지 감정으로 마법을 썼다. 그에 반해 황혼의 마탑주는 이성과 이지로만 마법을 썼다. 작은 넘겨짚기조차 없는 마법의 극의였다.
그런 둘이 정반대라고 생각했는데-.
'그웬이 황혼의 마탑주 마법은 한 번에 쓴다.'
이유는 뻔했다. 황혼의 마탑주 마법은 마법의 극의였으니까.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수첩에 적힌 주요 인물에는 대마법사가 있었다. 대마법사는 황혼의 마탑주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다만, 황혼의 마탑주가 대마법사가 되어 봤자, 원래 결말의 답습이었다.
멸망을 막으려면, 상황을 어떻게든 틀어야 했다.
그런데 그웬이 황혼의 마탑주와 이런 호환을 보인다니-.
'호재군.'
갈라하드는 짙게 웃었다.
"왜··· 왜 그러세요?"
"음, 아닐세. 그웬 자네 봉급을 두 배로 올려주겠네."
"와아! 좋아요!"
그웬이 방방 뛰었다.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웃었다.
다만, 원래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이곳으로 온 건 얼음송곳을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갈라하드는 다시 집중했다.
'계산식이······.'
집중해서 더듬거리듯 마나를 움직였다.
이윽고 손가락을 튕겼다.
'나쁘지 않군.'
갈라하드는 떠오른 얼음송곳을 보며 끄덕였다.
걸리는 시간은 반복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런데-.
"그······."
"왜 그러나 그웬?"
그웬이 몸을 달싹거렸다. 뭔가 할 말 있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해도 되네 그웬."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한결 따뜻했다.
그에 그웬이-.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요!"
갈라하드의 마법을 지적했다.
갈라하드는 그대로 굳었다.
185화 빡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