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스승님
······!
사방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시끄러웠다. 곳곳에서 고함이 터지고, 기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바로 옆에 갈라하드가 있었지만, 기사들은 갈라하드를 지나쳤다.
'이쪽을 인지 못 한다.'
상대는 황실 기사들이었다. 황실 기사조차 인지하지 못하다니-.
'이게 최초의 마법사인가.'
갈라하드는 정면을 쳐다봤다.
"······내 제자?"
쭈글쭈글한 노인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위 마족이군.'
네발 마족보다 더 격한 존재감을 풍겼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열심히 뛰었다. 반갑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노인이 갈라하드 앞에 나타났다. 주름 사이에 자그마한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나는 네 놈을 처음 보는데."
노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내 갈라하드를 가득 덮었다. 익숙한 전개였다.
'정신 간섭이군.'
곧장 갈라하드의 기억을 읽을 생각인 듯했다. 확실히 말보다 정신 간섭이 빠르긴 했다.
그때-.
"음?"
정신 간섭이 가벼이 깨졌다. 노인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네발 성녀인가.'
네발 성녀가 정신에 방비를 해둔 듯했다.
갑자기 노인의 고개가 뿌드득- 소리를 냈다.
"이런."
노인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뚜둑, 목이 한 바퀴 돌았다. 상당히 유연했다.
"아! 오랜만이구나!"
노인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뾰족하고 뒤틀린 목소리였다. 기세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래! 잘 지내시냐? 뽀얀 살결은 여전하시고?"
노인의 눈은 초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했다.
"아주 고왔는데 말이야!"
노인이 끌끌 웃었다. 그 웃음이 갈라하드의 신경을 가득 긁었다.
길버튼이 허물어졌다. 입가에서 피가 거칠게 쏟아졌다. 거기에 쓸 정신은 없었다.
'까닥하면 죽는다.'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소매를 걷었다. 팔뚝의 마법진에 노인의 눈이 커졌다.
"호오! 마법진도! 알도 있네! 허무도 쓰고! 실패작만 알뜰하게 모았구나. 끌끌! 짬통이나 다름없군!"
'실패작들?'
두근?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노인이 성큼 다가왔다. 그 주름진 손가락으로 갈라하드를 두드렸다.
"자, 아직 부족해! 더 없나? 더!"
노인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보채는 모양새였다.
'지랄 맞군-.'
갈라하드는 다급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두근. 고통의 알이 눈치를 보듯 마나를 뿌렸다.
팔뚝의 마법진이 빛을 발휘했다. 갈라하드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이내 마나가 한계까지 압축되었고-.
"지옥불."
강렬한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열기가 얼마나 강한지, 주변을 전부 잡아먹듯 태워버렸다.
"오호! 업화? 분명 내가 다 태웠는데? 일단 재밌다! 재밌어!"
노인이 카랑카랑하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무거운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올렸다.
"자네가 남긴 문서로 연구한 걸세. 제자가 별건가? 교육이 전해졌으면 제자지."
갈라하드는 팔뚝과 지옥불을 동시에 내밀었다.
노인 입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썩어 문드러진 이빨이 보였다.
노인이 끌끌 웃었다. 노쇠한 웃음이 점점 번지며 커졌다. 이내 까랑까랑한 웃음이 진동했다.
세상이 거칠게 흔들렸다. 갈라하드의 마나가 뒤틀렸다. 고통의 알이 호응하듯 뛰었다.
'이런-.'
입가에서 피가 길게 흘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노인이 지옥불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끌끌! 이 쓰레기가 업화라고?"
노인의 주름진 손이 지옥불을 잡았다. 지옥불이 거칠게 타올랐다. 일렁임이 가득 올라왔지만, 노인은 손을 더욱 굳게 쥐었다.
'지옥불을 손으로?'
그때, 지옥불이 점차 작아졌다.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반발이 갈라하드의 속을 가득 뒤집었다. 갈라하드의 입에서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나머지 무릎이 절로 꿇렸다.
'맨손으로 지옥불을 지웠다.'
어떻게? 보고도 믿기지 않았지만, 갈라하드는 그 답을 강구했다.
노인의 손바닥에 있었다.
"이게 업화다!"
노인의 주름진 손 위로 불이 떠올랐다.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가득 덮었다.
노인 아래의 땅이 녹아서 흘러내렸다. 그 공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나까지 녹아내린다-.'
노인의 말이 맞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진짜였다. 갈라하드가 펼친 건 그저 모조품이었다.
다만, 황혼의 마탑주 마법과 그 느낌이 달랐다.
황혼의 마탑주가 펼친 마법은 경이롭고 아름다웠지만, 노인이 펼친 업화는 그저 강렬했다. 태운다는 그 원초의 목적만 있는 불이었다.
아름답지도, 황홀하지도 않았다. 그저 투박하고 확실했다.
노인이 자랑하듯 손을 휘저었다. 노인의 손에 있던 불이 나풀거리며 퍼졌다.
그건 공간 자체를 태우며 크기를 부풀렸다. 산길이 번지듯 불이 금세 퍼졌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휘말렸다.
그에 닿은 기사들이 녹았다. 비명조차 없었다. 닿는 순간 기사들이 녹아 사라졌다.
······!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불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기를 부풀렸다. 기사들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졌다.
삐이이이이-! 경고음이 더욱 날카롭게 울렸다. 기사들이 더 몰려왔다.
주변을 불바다로 만든 노인은 키득키득 웃었다.
"자! 해보거라!"
그 주름진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속이 진탕이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장 해보라니-.
'해야지.'
갈라하드는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방금 상황을 복기했다. 노인과 달랐던 건-.
"불씨였군."
"맞다! 맞아! 그래! 누가 불을 처음부터 크게 키우느냐! 불씨는 작아야지!"
압축한 마나를 출력시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마나를 발현 지점까지 압축한다.'
한계에 도달한 마나 압축에 심장이 뻐근해졌다.
여기서 방출하는 부분까지 집중하라는 건, 한계까지 든 무게를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내려놓으라는 것과 흡사했다.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압축된 마나를 꽉 조였다.
가득 터질 것 같은 상태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방출 부분을 최대한 작게 유지했다.
뿌드득. 안쪽에서 끔찍한 소리가 터졌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팔의 마법진이 격한 불빛을 뿜어댔다.
더 버틸 수 없을 때쯤,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 마디만 한 불이 갈라하드의 손가락에 피어올랐다. 본래 축구공만 했던 것보다 상당히 작았지만, 그 열기는 더 강렬했다.
'이게 업화.'
손이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노인이 갈라하드의 업화를 냉큼 잡았다. 그리고 제 입으로 넣었다.
쩝쩝-. 꺼림직한 소리가 연신 들렸다. 이윽고 노인이 꿀꺽- 삼켰다.
노인이 길게 트림했다. 갈라하드는 구겨지는 눈썹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 짬통치고 나쁘지 않구나!"
노인이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끄덕였다. 노인의 주름이 깊어질 때-.
노인의 고개가 갑자기 돌아갔다. 뚜둑, 아까와 반대로 한 바퀴 돌아갔다.
"들어가라."
노인의 목소리가 점잖아졌다. 노인이 제 목을 꾹 눌렀다. 마치 막듯이-.
길게 숨을 내쉰 노인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래,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게 전부다. 그건 개정이 아닌 열화다."
신랄한 평가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개정이 목적이군.'
그렇다면 황혼의 마탑주와 있던 것도 이해가 됐다. 황혼의 마탑주는 세기의 천재였으니까.
"개정을 위해서, 황혼의 마탑주를 이용한다는 건가."
"꼬맹이는 세기의 천재니까."
"황혼의 마탑주가 인간에게 맞춰 개정할 리가 없는데?"
"상관없다. 개정만 된다면."
노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인간을 위한 개정이 아니었군.'
노인은 '원시 마법 개정'에 의의를 두는 듯했다.
애초에 최초의 마법사는 제마 전쟁때 인류 최초의 배신자로 꼽히는 이였다.
'단단히 어긋났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서 너는 의미가 없다."
노인의 주름 가득한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결국, 답습이니."
노인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답습?'
끝으로 노인이 뒤로 돌았다.
사방이 난리였다. 진압하지 못한 불이 계속 커졌고,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노인이 그냥 사라지면, 결과는 뻔했다.
"스승님."
갈라하드는 다급히 노인을 불렀다. 노인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제자가 위험에 빠졌는데, 어찌 스승이 그냥 가십니까?"
"누가 네 스승이냐?"
"가르침을 주셨으니 스승님이지요. 가르침에 길고 짧음이 어디 있습니까."
"허-."
노인이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이 황혼의 마탑주에게 원하는 건, 원시 마법 개정이었다. 다만, 원시 마법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무식하고 투박하여, 엄청난 반복 작업이 필수인 그런 마법이었다. 황혼의 마탑주가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황혼의 마탑주 흥미를 끌어주지 않았습니까? 보니까 일이 잘 안 풀렸던 것 같은데."
갈라하드는 노인의 고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합당하군. 그래, 수도에서 빼주마."
노인이 뒤로 돌았다. 따라오라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쓰러진 길버튼을 챙겼다.
'더럽게 무겁군.'
노인은 수많은 사람 사이를 걸었다. 꼭 세계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상당히 빨랐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부축하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기사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이쪽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 어떤 가게가 보였다. 사탕 모습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가게였다. 약속이 떠올랐다.
본래는 이렇게 일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여유롭게 살 생각이었지만, 어쩌겠나 인생이 그런 걸.
"아, 스승님."
"뭐냐?"
"사탕 좀 사겠습니다."
노인의 눈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노인의 고개가 뿌득- 소리를 냈다.
"금방 삽니다. 어차피 가는 길 아닙니까."
갈라하드는 다급히 덧붙였다.
"그래, 그렇군. 알았다."
노인이 묘한 승낙을 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걸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에 사탕이 가득한 아주 아기자기한 가게였다.
'아드리안나가 오면 좋아하겠군.'
어쩌면 새로운 표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종을 울렸다.
"어서오세······."
펑퍼짐한 옷을 입은 여인이 나오다가 그대로 멈췄다.
이쪽 행색이 그다지 좋지 않은 까닭이었다. 길버튼은 검을 세 개 꽂힌 상태였고, 갈라하드도 단검 하나가 복부에 박혀 있었다.
"음, 손님일세. 비명은 지르지 말아주게. 이미 일이 많아서 피곤하니까."
갈라하드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역효과였는지, 여인의 입이 벌어졌다.
"사탕만 사고 나갈걸세. 자네, 주머니는 아주 두둑해지고, 나는 사탕을 사서 좋으니 서로 좋은 일일 걸세. 내 장담하지."
갈라하드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여인의 얼굴이 복잡했다. 그 시선이 주머니를 따라서 움직였다.
"부탁하네."
"······알았어요."
"고맙군. 진심일세."
갈라하드는 주머니를 던졌다.
여인이 주머니를 아슬아슬하게 받았다. 피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다가 주머니를 여니, 방긋 웃었다. 금화의 효능이었다.
"이··· 이걸 전부 사탕으로요?"
"그래, 최대한 많이."
"알았어요. 공간 확장 마도구에 담아 드릴게요."
"자네, 아주 현명하군."
여인은 다급하게 사탕을 챙겼다. 그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쁘게 포장 해주겠나. 약혼자한테 줄 거라서."
여인은 떨면서도 곧잘 움직였다.
"약혼자가 좋아하겠어요."
자기가 말하고도 놀랐는지, 여인이 작게 떨었다.
"좋아할 걸세. 단 걸 아주 좋아하거든."
"그··· 그렇군요."
이내 여인이 이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최대한 사탕을 넣었어요."
"고맙네, 이건 바닥을 더럽힌 값일세."
갈라하드는 남은 금화를 여인에게 건넸다.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아주 즐거운 웃음이었다.
"좋은 하루 보내게."
"덕분에요!"
여인의 반가운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드립니까?"
노인은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내성을 벗어나고, 외성을 나설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수도를 벗어나서 나서야 노인이 멈췄다.
노인이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답습하지 마라."
노인은 의문 모를 경고를 끝으로, 그대로 사라졌다.
'단단히 미친 노인이군.'
갈라하드는 기절한 길버튼을 흔들어 깨웠다.
"기사-! 길버튼! 제 뒤로 오십쇼!"
"끝났네."
"어? 어떻게 나왔습니까? 분명······."
"됐네, 기념품이나 뽑지."
갈라하드는 길버튼 어깨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반대편은 이미 잘려있었다.
"후, 이 정도야. 뭐."
갈라하드는 냉큼 손잡이를 당겼다.
"윽!"
길버튼이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아! 말씀하시고 뽑으십쇼!"
"꾀병이 심하군."
"아니, 검에 뚫렸는데 꾀병이라니-."
갈라하드는 낄낄 웃으며, 길버튼의 등허리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에는 말씀하십쇼!"
"알았네. 자, 하나-. 둘-."
"악! 아니! 누가 둘에 뽑습니까!"
"수도에서는 둘에 뽑는다네. 셋까지 셀 정도로 시간이 넘치지 않거든."
"······젠장."
마지막 단검은 길버튼이 직접 뽑았다.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포션을 꺼냈다. 전에 받아 챙겨둔 것이었다.
"저는 됐습니다. 대장님 쓰십쇼."
"나는 꾀병이 심하지 않아서 괜찮네."
"꾀병이라니-."
"자, 하나, 둘-. 셋."
"으윽!"
포션을 부으니 길버튼이 몸을 파닥파닥 떨었다.
"아니, 왜 이번에는 둘에 안 합니까!"
"자네가 불평하길래 셋에 맞춰준 거 아닌가. 불만이 참 많군."
"······포션 남는 거 없습니까?"
"음, 그게 마지막이었네."
길버튼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었다.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검은 말이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뒤에 다른 말도 있었다. 검은 말이 데려온 듯했다.
"똑똑한 놈이구나."
말이 타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탔다.
"말이 무슨 다른 말도 데려옵니까?"
"새로 사귄 여자친구라는군."
말이 가벼이 투레질했다.
"오, 자네가 길버튼 경보다 낫군."
"아무리 그래도 말이랑······."
길버튼이 투덜거리며 다른 말에 탔다.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수도는 난리도 아니었다. 아직도 불을 못 잡았는지, 불이 가득 피어올랐고 황궁에서는 예의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왔다.
"아주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방명록을 깜박했군."
둘은 서로 보며 낄낄 웃었다.
"돌아가지."
갈라하드는 말의 배를 가벼이 찼다. 말이 천천히 움직였다.
"음, 뭔가 잊은 기분입니다."
길버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별거 아닐걸세."
갈라하드는 짧게 일축했다.
****
'이··· 이게 무슨······.'
핸섬은 엉망이 된 수도에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수도의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황궁이 습격당했는데, 그 주동자가 코르튼이란다.
'코르튼이라면, 갈라하드님이 쓰던 이름이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왜 안 오시지?'
여기서 만나기로 한 갈라하드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깨달았습니다!"
그때, 제임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이야! 핸섬은 욕을 중얼거렸다.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시는 겁니다."
"······능력 시험?"
"예, 엉망이 된 수도에서 탈출 및 귀환. 요원의 능력을 보이기에 아주 적임입니다."
제임스 눈에 열기가 가득 했다.
"······그런 이야기는 없으셨는데?"
"어휴, 미리 말하면 그게 시험입니까? 그냥 임무지."
제임스의 한숨에 핸섬은 입을 꾹 다물었다. 듣다 보니 묘하게 그럴듯했다.
"시험이었군!"
"예! 전설과 함께하기 위한 능력을 보이는 겁니다."
"그렇군! 때가 왔구나!"
"맞습니다! 저희 듀오의 능력을 보이는 겁니다!"
둘이 의기를 다졌다.
그때,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십쇼."
베넷트가 짤막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뭐, 시험?"
핸섬은 제임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의 얼굴이 벌게졌다.
176화 가르세튼
추격을 대비하여, 갈라하드는 말을 쉬지 않고 몰았다.
황실의 집요함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북부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했다.
중앙의 따뜻한 바람이 아닌, 북부 특유의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나서야 멈췄다.
"시원하군."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전에는 춥다고 투덜거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추웠네."
"아, 그렇습니까. 근데 이러니까 예전 생각 나지 않습니까?"
"못생겼는데, 싹수까지 없던 때 말인가."
"은근히 속이 좁으십니다?"
"기억력이 좋은 걸세."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뒤를 살폈다.
추격은 없었다.
'목적은 달성했다.'
아니, 목적 이상을 얻었다.
단순히 작전과장을 회유하는 걸 넘어서, 국장에게 경고까지 넘겼다.
'감찰실장까지 넣어뒀으니, 한동안 정보국에 얼씬도 안 하겠군.'
국장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 갈라하드가 죽기 전까지 정보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작전과장이 한결 편할 것이고, 정보의 질이 더 좋아질 것이다.
다음으로 황혼의 마탑주도 있었다. 원래 황혼의 마탑주와 수준을 비교하고, 마족과 마나에 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아우로 만들었지.'
용은 약속을 무조건 지킨다는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황혼의 마탑주는 고분고분 형이라고 불렀다. 황혼의 마탑주가 만든 정교한 얼음송곳은 덤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성과도 있었다. 최초의 마법사였다.
'답습하지 마라.'
최초의 마법사는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었다.
'자아가 두 개였다.'
괴팍한 자아와 신사처럼 점잖은 자아가 공존했다. 그 주름진 목이 꺾이며 자아가 바뀌었다.
둘 중 무엇이 진짜 자아일지 알 수 없지만, 하나는 명확했다.
최초의 마법사는 고위 마족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한 고위 마족-.
갈라하드는 습관처럼 가죽 노트를 꺼냈다. 가죽 노트에 적힌 건 많지 않았다. 뒤늦게 기억을 되짚어 썼기 때문이었다.
'뭔가 더 있었던 거 같은데.'
"대장, 쉬었다 가시는 거 어떻습니까?"
길버튼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그 가리키는 방향에 낯익은 성이 있었다.
"가르세튼 성이군."
"오, 기억하십니까."
"그 흉한 꼴을 봤는데, 어찌 잊겠나."
가르세튼은 영주가 딸의 치마를 입고 갈라하드를 습격했던 성이었다.
[덜렁-.]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들르고 싶은 성은 아니지만, 해가 지고 있었다.
추적을 떨쳤으니 쉴 필요가 있었다.
"알겠네. 이번에는 경비 똑바로 서게나."
"크흠,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그렇게 된 겁니다."
"잠깐 갔다 왔다니-. 자네, 변비인가?"
"······전장에서 배를 찔린 적이 있어서."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길버튼의 얼굴이 격하게 씰룩거렸다.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당근을 많이 먹게. 배에 좋다네."
"······진짜입니까?"
"진짜일세."
둘은 나란히 성으로 향했다. 성문은 닫는 중이었다. 이쪽을 본 병사들이 경계했다.
'몰골이 좋지 않군.'
둘의 몰골이 아주 엉망이었다.
곳곳에 핏자국이 가득했고, 옷도 군데군데 찢겼다. 길버튼의 갑주는 부서져서 전부 버렸고, 갈라하드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도망친 죄수로 생각하겠군."
"제가 맡겠습니다. 저 길버튼입니다."
길버튼이 으스대며 앞으로 나섰다.
"누구냐!"
병사들이 거칠게 소리쳤다.
"나는 길버튼이다."
길버튼이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병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길버튼이 뭐냐?"
"들어본 적 없는데?"
"기사 길버튼이다!"
"기사? 도대체 어떤 기사가 이렇게 입고 다녀?"
"도적인가 보군! 안 속는다!"
병사들이 쇠뇌를 겨눴다. 길버튼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기사! 길버튼! 이걸 모른다고?"
"기사는 무슨!"
병사들의 경계가 더욱 심해졌다. 검을 뽑으려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앞으로 나섰다.
"나는 갈라하드일세. 영주 좀 불러주겠나?"
병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병사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어떤 놈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격렬한 반응이었다.
"가··· 갈라하드 님이십니까?"
"맞네. 나를 아는가?"
"아니! 대공 전하의 대리이신 갈라하드님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맞네, 내가 그 갈라하드일세. 영주 좀 불러오게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병사가 마물이 쫓아오는 것처럼 다급하게 뛰었다.
남은 병사들은 냅다 무릎을 꿇었다. 상당히 격한 환영이었다. 황제라도 알현한 느낌이었다.
"아니, 왜 나는 모르고-."
길버튼이 씰룩거리는 얼굴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이제 북부에서도 내가 더 유명하군."
길버튼의 구겨진 얼굴에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안쪽에서 영주로 보이는 인물이 나왔다. 단순히 영주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전부 모았는지, 우르르- 몰려나왔다.
"오셨습니까!"
영주가 냅다 머리를 박았다. 아무리 대공 대리라지만, 꽤 과한 반응이었다.
"저희는 모두 인간입니다! 인간! 마족이 아닙니다!"
이어진 말에 갈라하드는 상황을 깨달았다.
'아, 저번 방문 때 영주부터 싹 다 죽여서 그렇군.'
정확히 말하면 길버튼이 처리했지만, 갈라하드가 기록에 남았을 것이다. 격한 반응은 그로 인한 공포 때문인 듯했다.
"그런가? 믿겠네."
갈라하드는 끄덕이며 마나를 뿌렸다. 이상은 없었다.
"그래? 푹신한 침대가 있나?"
"예? 예! 제 침대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농담일세. 전에 쓰던 방을 쓰겠네."
"알겠습니다!"
대접이 상당히 극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에게 갈라하드는 전 영주를 그 가족까지 갈아치운 놈이었으니까.
"식사는 방에서 하겠네. 아무도 들이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아, 당근 좀 많이 넣어주게."
영주가 바닥에 머리를 찧고 물러났다. 황제라도 된 기분이었다.
"크흠, 아니. 일은 내가 했는데-."
길버튼의 불평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꺼냈다.
그때, 창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대공에게 받은 붉은 매였다.
창문을 열어주니, 매가 발에 쥔 걸 내밀었다. 편지를 넣는 투박한 나무통이었다.
'아, 아드리안나가 편지한다고 했지.'
나무통을 열어보니, 곱게 접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드리안나입니다. 저는 무사히 1대대에 도착했습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수도는 무사히 도착하셨는지요. 저는 갈라하드를 믿습니다. 아드리안나.]
참으로 담백한 편지였다. 다만, 좀 거슬리는 문장이 있었다.
'무사히 1대대에 도착했다고?'
갈라하드가 북부를 떠난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1대대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있다니-.
'편지를 늦게 보냈나.'
아니면 수도에 있어서 매가 늦었거나. 내용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 당근이 제법 맛있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도 안 좋다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편지에 쓸 종이랑 펜 좀 받을 생각일세. 먹고 있게나."
"같이 가겠습니다."
"됐네, 어차피 시종한테 시킬 것인데."
갈라하드는 밖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시종을 죄다 붙여뒀군.'
앞에 시종이 길게 서 있었다. 시종이란 시종은 전부 이쪽으로 붙인 듯했다.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마나를 뿌렸다.
"무슨 일 이십니까?"
제일 앞에 있는 시종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종이와 펜 좀 가져다주겠나?"
"아! 알겠습니다! 종이와 펜을 원하신다!"
시종들이 빠르게 뛰었다.
"아, 다리가 보이는군."
슬쩍 장난을 덧붙이니, 시종이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농담일세."
종이와 펜은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종이가 좀 눅눅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있겠나.
"고맙네."
"아닙니다!"
"아, 한 명만 있겠나? 거슬려서 말일세. 명령일세."
"알겠습니다!"
시종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쑥덕거렸다. 이내 한 명만 남기고 남은 시종들이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종이를 둘둘 말고, 방으로 들어갔다.
"좀 떨어져라! 이건 내 거다!"
삐야아아악!
"매 새끼가! 감히 기사한테!"
"길버튼 경, 왜 매랑 싸우고 그러나."
"아니, 이놈이 고기란 고기는 다 먹지 않습니까."
갈라하드는 매를 슬쩍 쓰다듬었다. 매가 늠름하게 길버튼을 노려봤다.
"길버튼 경, 자네는 당근이나 먹게."
갈라하드는 당근을 던져주고, 길버튼 맞은편에 앉았다.
'음.'
갈라하드는 종이를 펼치고 고민했다. 고민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눈을 찡그렸다.
'멍청해졌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펜을 잡았다.
"아, 여기 있습니다."
길버튼이 갈라하드가 꺼내둔 연초를 내밀었다.
"됐네. 자네 얼굴 보니, 필 맛이 뚝 떨어졌네."
길버튼의 얼굴이 한층 더 씰룩해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펜을 움직였다.
일단, 소개문부터-.
[특무대의 대장, 그대의 약혼자, 대공 대리 갈라하드일세.]
'나쁘지 않군.'
펜이 이어서 움직였다.
[수도에 무사히 갔다가 왔네. 지금은 북부의 경계인 가르세튼 성일세. 전에 방문했다가 습격당한 적 있던 성이지. 야밤에 영주가 자기 딸의 옷을 입고 덤벼들었다네. 엄청난 정신 공격이었지.]
"근데 저건 뭡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길버튼이 올려둔 상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탕 상자일세."
"사탕이면, 애들이나 먹는 거 아닙니까?"
길버튼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눈을 씰룩거렸다.
"오, 그런가."
갈라하드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고, 슬쩍 펜을 움직였다.
[아, 길버튼 경이 사탕은 애들이나 먹는 거라는군. 또-.]
"예. 사탕은 아이들이나 좋아하지. 북부에서 사내가 저런 걸 먹었다가는 손가락질당합니다. 어휴, 큰일 날 뻔하신 겁니다."
"그러면 만약 성인 여인이 사탕을 아주 좋아하면 어떻게 하나. 기사일세."
"기사가 사탕을 좋아하다니! 끔찍하군! 어떤 놈입니까?"
"아, 노아드일세."
"하! 노아드! 처음 봤을 때부터 답답했습니다. 아니, 기사가 그릇 하나 혼자 못 씻는 게 말이 됩니까? 근데 뭐 적으시는 겁니까?"
"아, 기사가 그릇 하나- 부분부터 다시 해주겠나?"
"그러니까 그 노아드라는 놈, 어찌나 손이 많이 가는 지······."
길버튼은 막힘없이 이야기했고, 갈라하드의 펜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근데 진짜로 남창이셨습니까?"
갈라하드는 펜을 다급히 멈췄다.
"······길버튼 경,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갑자기 생각나서-. 근데 황녀님이랑은 무슨 사이 셨습니까?"
"일로 얽힌 게 전부일세."
갈라하드는 편지에 적힌 '남창'을 슬쩍 '남쪽창문'으로 바꿨다.
[남쪽창문을 보니 그대가 떠오르는군.]
'나쁘지 않군.'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그런데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하신 겁니까?"
갈라하드가 고개를 들자, 길버튼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무심코 나온 겁니다."
실수했다는 얼굴이었다. 길버튼이 저렇게 반응할 정도라니. 내가 그렇게 숨겼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제국을 위해서 일했네."
"예? 아, 예."
"정보국이라는 조직이 있네. 이번에 들어갔던 곳이 내 전 직장일세."
"거기가 정보국이었습니까?!"
"그럼 뭔 줄 알았나? 아무튼, 거기서 일했네."
갈라하드는 펜을 내려놓고 밀어뒀던 연초를 만지작거렸다.
"아주 열심히 일했지. 그때는 제국을 강하게 만들면, 대륙에 평화가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상당히 텁텁했기에, 길버튼은 가만히 끄덕였다.
"요원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더군. 현장 체질이었지. 일을 아주 잘했어. 매번 1등을 갱신했지. 라인도 잘 탔고."
"그렇습니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근데 썩은 동아줄이더군. 아니, 내가 썩게 만든 걸지도. 그게 맞겠군. 내가 괜한 것들을 떠들었거든."
"그때도 말이 많았군요."
"······아무튼 줄이 그대로 떨어졌네. 죽을 뻔했지. 그래도 살아남았고, 다시 올라갔네. 부국장님의 도움이 컸지. 결국, 또 끊겼지만."
"그래도 덕분에 북부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둘은 잠시 건조하게 웃었다.
"그중에 황녀는 굵직한 일로 만난 사이일세. 물론, 그것도 실패했지만. 이렇게 보니, 나는 여복이 없군."
"에이, 아드리안나님이 있지 않습니까."
"아, 아드리안나."
갈라하드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나머지는 도착해서 이야기하겠네. 내일 도착이니까. 그대의 약혼자. 갈라하드가. 추신, 만나는 날이 기다려지는군.]
갈라하드는 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었지만,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편지를 다 썼다는 걸 알았는지, 매가 먼저 다가왔다. 갈라하드는 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갑니다? 수도라고 해서 걱정 많았는데 말입니다."
길버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직 도착한 건 아닐세."
"에이, 경계인데 뭐 잘 못 되겠습니까."
"입조심하게. 부정 탈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믿으십니까?"
"안 믿네."
길버튼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매의 다리에 종이를 묶었다. 매는 거침없이 창으로 날아갔다.
갈라하드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성이 너무 조용하군."
"밤이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해가 졌으니, 잘 시간입니다."
말과 달리 길버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가 길게 뿌려졌다.
"길버튼 경."
갈라하드의 부름에 길버튼의 안색이 굳었다.
"몇 마리입니까?"
"자네, 여기 인구가 몇인지 아나?"
"제법 될 겁니다."
"그 정도겠군."
"전부 말입니까?"
"그래."
"······그게 말이 됩니까?"
"나도 궁금하던 참일세."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앞에 창백한 이들이 있었다. 아까 있던 시종들이었다.
"이상하군.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이 성에 좋은 기억이 없는 갈라하드는 몇 번이나 확인했다.
분명 이들은 마족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족이 됐지?"
갈라하드의 물음에 시종들이 동시에 웃었다.
그들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마치 하나처럼-.
"밤이니까."
서늘한 대답이 사방에서 들렸다.
천장과 바닥, 양쪽 벽, 창문까지. 아니, 그를 넘어서-.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로 빼곡히 모인 이들이 보였다.
밤이 어두운데도, 횃불 하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런, 늦는다고 쓸 걸 그랬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
"잘했어. 퍼스트. 대단해."
자밋은 본래 칭찬을 잘하지 않았다. 그런 자밋이 진심으로 퍼스트를 칭찬했다.
펌킨이 보기에도 이번에 퍼스트는 상당히 뛰어난 실적을 보였다.
문제는 그 원인이었다.
"갈라하드가 유일하게 믿는 나니까. 당연한 성과다."
퍼스트가 히죽 웃었다. 펌킨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나를 인정한 갈라하드는?"
퍼스트는 바로 갈라하드부터 찾았다.
"아직 안 왔어."
"이상하군."
"이상하다니? 아직 기한이 남았는데."
"자밋, 너는 갈라하드를 모르는군."
퍼스트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자밋을 보며 말했다.
펌킨이 다급하게 말렸지만, 퍼스트는 듣는 시늉도 안했다.
"호오, 그래?"
자밋의 눈썹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펌킨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갈라하드는 기한보다 하루 먼저 마무리하는 습관이 있다.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기 위함이지. 이건 기본인 것을-. 쯧."
"아니, 왜 이상한 걸로 뻗댑니까. 제발."
"펌킨, 나와줄래?"
자밋의 부드러운 요청에 펌킨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변수야 늘 있는 건데."
자밋이 퍼스트를 올려보며 물었다.
"너는 정말로 갈라하드를 모르는군."
퍼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펌킨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 변수까지 통제하는 게 갈라하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아마 연락조차 못 할 상황이겠지."
퍼스트가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아직 기한이 남았어. 확실한 증거도 없고, 갈라하드의 요청도 없는 상황이야. 괜히 끼어들면 갈라하드가 싫어할 텐데?"
자밋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증거는 있다."
퍼스트가 단단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자밋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없잖아! 증거!'
내내 붙어 있던 펌킨이 모를 리가 없었다. 펌킨은 창백해졌다.
그때, 퍼스트의 눈이 뒤룩- 굴렀다.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신호였다. 막아야 했다.
"증거?"
자밋의 뾰족한 눈에 차마 막을 수 없었다.
퍼스트가 담담하게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당당했다.
'진짜 있나?'
펌킨도 헷갈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느껴진다."
퍼스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177화 지원 요청
먹구름이 가득 껴서 달빛조차 들지 않아서, 해가 죽은 것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거대한 방에는 편지 쓰기 위해서 킨 양초가 전부였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양초가 주변을 밝혔다.
사방에 창백한 놈들이 가득했다. 문은 이미 놈들로 가득했고, 그 너머에도 몇 겹으로 있었다.
심지어-.
'창문도 가득하군.'
길버튼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창문에 창백한 놈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창문에 붙은 놈들이 히죽 웃었다.
'빌어먹을-.'
길버튼은 욕을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가르세튼 성은 이미 한 번 정리했던 곳이었다. 영주부터 시작하여, 연관된 인원들을 전부 치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 전체가 마족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대장은-.'
길버튼은 다급히 갈라하드를 살폈다.
길버튼의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갈라하드는 길버튼보다 최악이었다.
길버튼은 그나마 포션이라도 받았지, 갈라하드는 제 복부의 상처를 그저 불로 지진 게 전부였다. 그 상태로 가르세튼 성까지 강행군한 상태였다.
갈라하드의 상태는 대충 봐도 최악이었다. 그 깔끔하던 머리가 너저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족들의 성에 들어오다니-. 최악이었다.
"이런, 늦는다고 쓸 걸 그랬군."
갈라하드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농담하실 때입니까. 제 뒤로 오십쇼. 뚫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뒤에도 있네."
갈라하드가 뒤를 가리켰다. 창가에 가득한 놈들이 히죽 웃었다.
'빌어먹을 마족
놈들.'
길버튼은 칼자루를 굳게 잡았다.
"그래."
갈라하드는 오히려 마족들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밤이 된 것이 이유라고 했나? 아주 흥미롭군."
마족에게 질문하는 갈라하드의 모습에 길버튼은 경악했다.
마족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드러내며 킬킬거릴 뿐이었다.
"이런 다들 미소가 끔찍하군. 되도록 입을 가리고 웃어주게."
마족들의 웃음이 뚝- 그쳤다. 이내 아까 나섰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여유를 가장하는구나."
"사실 좀 조급하다네."
갈라하드가 순순히 끄덕였다. 마족이 킬킬 웃었다.
"잘 시간이거든. 용무만 빠르게 해주겠나? 좀 피곤해서 말일세."
이어진 말에 마족들의 웃음이 멈췄다.
'도대체 담이 얼마나 큰 거야.'
마족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갈라하드는 오히려 도발했다. 길버튼만 애간장이 탔다.
그때, 마족이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마족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마족으로 이루어진 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마족들에게 포위되는 상황이었다.
"자, 가지."
길버튼은 냉큼 걸음을 내딛는 갈라하드를 다급하게 잡았다.
"왜 그러나?"
"위험합니다."
"길버튼 경, 자네는 당연하게 걸 그럴듯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네. 그러면 여기 있을 건가?"
갈라하드가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사이에 창문 너머 마족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나. 낮에는 인간이고, 밤에는 마족이라니-. 무슨 수수께끼 같군."
갈라하드의 목소리에 흥미가 가득했다. 도대체-. 길버튼은 일단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갈라하드는 거침없이 걸었다. 길버튼은 칼자루를 꼭 쥐고 그 뒤에 붙었다.
마족들의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하나하나의 기세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이거 이제 마족들이 성까지 차리는군. 내가 잠시 자리 좀 비웠다고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지. 너무 본격적이야."
갈라하드가 옆에 있는 마족을 두드렸다. 캭! 마족이 입을 쩍- 벌렸다.
"성질이 아주 고약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에 묻은 침을 털었다.
"어찌 그리 태평하십니까."
"흥분은 독일세. 침착은 무기고. 이들은 공격 대신 나를 초대했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겠지. 맞나?"
갈라하드가 슬쩍 옆에 마족에게 물었다. 캬학-! 마족이 이를 가득 드러냈다.
"정답이라는군."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마족으로 이루어진 길은 점점 더 두께가 늘어났다. 성 밖으로 이어졌고, 이내 트인 공간에 도착했다.
"광장이군."
갈라하드는 중얼거리면서 손을 풀었다.
성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나왔는지 광장은 빼곡했다.
밀도가 너무 높아서 마나를 뿌려도 소용이 없었다. 탐지할 수 있는 밀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사방의 숨소리가 전부 일정했다. 마치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특이하군.'
갈라하드는 애써 저린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지배자 때랑 달랐다. 지배자는 마족들을 아래에 두고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그에 반해 이쪽은-.
'이성이 있는 느낌인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딱히 선택지도 없었지만,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위험합니다."
길버튼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 시선이 연신 좌우를 확인했다.
광장은 다양한 문화 공간이었다. 가장 큰 이벤트인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고, 영주가 말을 전하거나, 시장이 열리거나 하는 문화 복합 센터나 다름 없었다.
그런 광장이 마족으로 빼곡했다.
양쪽의 마족들이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갈라하드는 단서를 조합하기에 바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나갈 통로를 계산했다.
'어렵겠군.'
마족의 수가 너무 많았고, 이쪽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때, 양쪽의 마족들이 들썩거렸다. 그 끝에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영주."
아까 갈라하드를 보며 머리를 땅에 찧은 영주였다.
"왔군."
영주는 아까와 달리 담담한 표정으로 갈라하드를 맞이했다.
'그게 연기였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의 눈은 정확했다. 아까 영주가 보였던 모습은 연기로 나올 수 없었다.
그저 마족이 되면서 공포가 사라진 것일 뿐이었다.
"반갑네. 아까보다 훨씬 기개 있고 좋군. 그래, 성을 다스리는 영주면 이 정도 기세는 있어야지."
"그런가?"
영주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이성이 또렷하군.'
아까의 일도 기억하는 듯했다. 흥미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래, 무슨 용무인가. 본래 부르기 전에 용무를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 예의가 없군."
갈라하드의 불평에 영주는 피식 웃었다. 자연스러운 조소였다.
"너를 보고자 하는 분이 계셔서."
"오, 누구인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영주가 옆으로 비켰다.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늘씬한 미녀였다.
문제는 그 복장이었다.
'교단의 복식이군.'
교단은 남부에서 세를 펼쳤다. 북부는 교단의 영향이 가장 적은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교단이 나오고, 심지어 마족으로 변한 영주가 존칭을 한다?
'좋지 않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녕하세요?"
여인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네. 교단에서 나온 건가?"
"일단은요. 아, 갈라하드님 맞나요?"
"일단은."
"재밌는 분이시네요."
"많이 듣는 이야기일세. 반하지는 말게나. 임자가 있는 몸이니까."
"죄송하지만, 교단에 몸과 마음을 바쳐서요."
"숭고한 분이셨군."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따뜻한 미소였다. 이건 좋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속마음을 숨기고 웃었다.
"그래, 북부로 포교하러 온 건가? 하긴 남부에 국한되기에 너무 아깝긴 하지. 힘들었겠군. 북부인들은 교양이 너무 없는데 말이지."
"에이, 순수하신 거죠."
"북부인들이 순박한 감이 있지."
갈라하드는 슬쩍 길버튼의 어깨를 두드렸다. 길버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용건은 뭔가. 조금 피곤해서 말이지. 되도록 빨리 쉬고 싶다네."
"아, 그러시군요. 포션이라도 좀 드릴까요?"
여인이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포션이었다. 포션 특유의 옅은 체리 색까지 똑같았다.
"오, 좋지."
"여기요."
여인이 포션을 옆에 내밀었다. 영주가 공손하게 포션을 받았다. 이내 영주가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고맙네."
갈라하드는 영주에게 받은 포션을 흔들었다.
'진짜 포션과 똑같군.'
정확히 상급 포션과 똑같은 농도와 색, 향이었다.
포션은 교단에서만 만들었다. 여인이 진짜 교단의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에요. 저희 교리가 베품과 사랑이잖아요."
여인이 다시금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라고?"
"위쪽에서 명령이 내려와서요."
여인이 위를 가리켰다. 갈라하드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떤 명령인가?"
"그쪽을 죽이라고요. 전체 명령이에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묘한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미안하지만, 나는 장수할 생각일세."
"수명은 우리 뜻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가?"
"예, 아무튼 명령이 내려왔어요. 하지만 살생은 안 내켜서요. 교리에 어긋나기도 하고."
"그래, 교리는 중요하지."
"맞아요. 기회를 드리고자 제일 먼저 왔어요."
전체 명령, 기회-. 갈라하드는 그 텁텁한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아하, 고맙네. 어떤 기회인가?"
"개종하실래요?"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그마한 책을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양장본이었다. 그 위에는 '성서'라고 거만하게 적혀 있었다.
'성서라-.'
최악의 상황이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읽어보고 결정해도 되나?"
"네? 성서를요?"
"교리가 나와 잘 맞는지도 확인해 봐야지."
"아, 제가 읽어드릴까요?"
"구미가 당기지만, 나는 읽는 걸 더 선호한다네."
"아, 그렇군요. 알았어요."
여인이 성서를 내밀었다. 영주가 당황한 얼굴로 여인을 올려봤다.
"어서요."
영주가 성서를 챙겨서 갈라하드에게 가져왔다.
"고맙네."
갈라하드는 성서를 받아서 살폈다. 손때가 묻은 탓에 헤졌지만, 고서는 아니었다.
'초판은 아니군.'
갈라하드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성서를 열었다.
성서는 첫 문장부터 강렬했다.
[그대들은 악에 물든 상태이다. 끊이지 않는 고통과 굶주림이 증거다. 선택을 받으면, 고통도 슬픔도 없다.]
'선택이라.'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마족을 뜻하는 거군.'
공교롭지만 맞는 말이었다. 마족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음,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성서를 다시 덮었다.
슬쩍 여인을 살폈다. 여인은 차분히 갈라하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톡톡, 갈라하드는 눈썹을 찡그렸다.
"여기서는 집중이 안 되는군. 이 친구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
갈라하드는 옆의 마족을 가리켰다. 마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숨 좀 참아주시겠어요?"
여인의 부드러운 요청에 마족이 끄덕였다. 곧 마족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내 픽- 쓰러졌다.
몸이 격하게 진동했다. 이내 움직임이 멈췄다. 그 얼굴은 평온했다.
"됐나요?"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참으로 살벌한 광경이었지만-.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 친구가 아니라. 이 친구였군. 미안하네."
"장난치시는 건가요?"
"아닐세. 내가 원래 책을 읽을 때는 좀 예민하거든. 어디 조용한 공간 없나?"
여인이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기가 좋겠네요."
여인이 가리킨 방향에는 큼지막한 단두대가 있었다. 정확히는 단두대 옆의 자그마한 나무 판잣집이었다.
사형수 대기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형수 대기실에서 읽으라니-.
"집중 잘 되겠군."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
"들어가!"
영주가 큰소리쳤다.
사형수 대기실은 상당히 음침했다.
"위생이 엉망이군."
갈라하드는 늘러붙는 구두에 작게 혀를 찼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도대체 뭡니까?"
길버튼이 당황하여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사형수 대기실의 곳곳에 구멍이 있었다. 사형수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곳에 지금은 마족들의 눈이 있었다.
'사방에 붙어있군.'
틈으로 눈들이 보였다. 마족들이 전부 붙어서 감시 중이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가 주변을 두르며, 소리를 막았다. 대신 소리가 한계였다.
"고개를 숙이고 말하게."
"무슨 상황입니까."
"다 듣지 않았나. 성서라고."
갈라하드는 성서를 두드렸다. 책이 작게 펄럭였다.
"성서면 교단 아닙니까? 교단이 왜 마족이랑 같이 있습니까?"
"음, 자네 오대 악인에 대해서 알고 있나?"
"예, 당연히 압니다."
"오대 악인에 누가 있지?"
"최초의 마법사, 마물 조련사, 검귀, 인간 상인, 선교자 아닙니까."
길버튼이 왜 당연한걸 묻냐는 듯 반응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최초의 마법사는 성을 하나 날린 것으로 유명하고, 마물 조련사는 마물로 만든 군대를 이끈 것으로 유명하지. 우리와도 제법 연이 있고."
"그런 농담하지 마십쇼-."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성서를 펼쳤다.
"검귀는 기사들의 검으로 산을 쌓았고. 인간 상인은 금화로 저주를 내린 것으로 유명하지. 자, 그러면 선교자는?"
"잘 모릅니다."
"정답일세."
"예?"
"놈은 교단의 추기경이었던 인물일세. 교단의 가장 치부인 터라, 교단이 그 악명을 지웠지."
"교단이라면-."
길버튼의 시선이 갈라하드가 든 성서로 향했다. 길버튼이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이내-.
"아까 그 미인이 선교자라는 겁니까?"
"미인이라니-. 여자라면 그냥 환장하는군."
길버튼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애석하지만, 선교자는 아닐세. 아무튼, 선교자는 마족을 선이라고 여기던 인물일세. 그 지향점이 마족이었지."
"마족이 된다니-. 미친놈 아닙니까?"
"당시에는 제법 뜨거웠다는군. 특히 성서는 말이야."
갈라하드는 성서를 매만졌다. 일반적인 서적이었지만, 묘한 힘이 느껴졌다.
"이 구하기 어려운 걸 여기서 만나는군."
갈라하드의 중얼거림에 길버튼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합니까?"
길버튼이 주변을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그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족들에게 둘러싸인 사형수 대기실에 앉아 있었으니까.
"문제는 저 여인이 아닐세."
"예?"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저 여인은 전체 명령이라고 그랬네. 그리고 일부러 제일 먼저 왔다고 했지. 아마 나를 쫓는 이들이 많은 것 같군."
"도대체 어떤 놈들입니까?"
"나도 의문이군. 나처럼 청렴하게 산 이가 어딨다고."
길버튼이 낄낄 웃었다. 갈라하드는 지그시 쳐다봤다. 길버튼의 웃음이 천천히 멈췄다.
"······농담 아니었습니까?"
"아무튼, 적이 더 있을 가능성이 많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지금 길버튼과 갈라하드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단순히 탈출하는 것도 위험했다.
그러니까-.
"지원을 요청해야겠군."
"지원을 어떻게 요청합니까?"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다소 부담스러운 선택지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애초에 그쪽 잘못도 있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관리 좀 하지.'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
테오도르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웬일로 아드리안나가 먼저 대공을 찾아왔다.
대공과 아드리안나가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자리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처음 사무적인 보고 이후로 한 마디도 없었다.
삭막한 분위기였지만, 크나큰 발전이었다.
테오도르의 눈이 찡할 정도였다. 아니, 살짝 눈물이 흘렀다.
그때, 창문에서 붉은 매가 날아왔다. 붉은 매를 본 아드리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줄곧 무심했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풀어졌다. 미소였다. 대공의 얼굴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놈이냐?"
"예."
대공의 얼굴이 금세 다시 험악해졌다.
아드리안나는 편지를 한참 동안 읽었다. 분명 한 장인데, 계속해서 편지를 잡고 있었다.
"남쪽창문-. 남쪽창문-?"
대공이 나지막하게 헛기침했지만, 아드리안나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내 포기한 대공이 새 마물로 시선을 돌렸다. 마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물이 손을 마구 쪼아먹었지만, 대공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때-.
마물이 돌연 깃털을 꼿꼿하게 세웠다. 파드득-! 날개를 연신 퍼덕였다. 처음 보이는 거친 반응에 대공의 손이 방황했다.
아드리안나도 편지에서 시선을 떼고 마물을 쳐다봤다.
마물의 부리가 쩍 벌어졌다.
그리고-.
"도움!"
마물이 어눌하게 소리쳤다.
아드리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순백의 오러가 가득 휘몰아쳤다.
"대공 전하!"
아드리안나의 다급한 부름에-.
"망할 놈."
대공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
178화 전술핵
"으음."
갈라하드는 거칠게 피를 토해냈다.
"왜 그러십니까!"
길버튼의 다급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피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원을 요청했네."
"······예? 어떻게 말입니까."
"내 뾰족아리로."
"예?"
개척자로 넓어진 마경을 줄이기 위해서 쓴 게 뾰족아리였다.
그 과정에서 마물 조련사 마법진의 숙련도가 자연스럽게 올랐고, 덕분에 최상급 뾰족아리를 만들 수 있었다.
마물 조련사는 오대 악인이었다. 거대한 마물을 타고 다니며, 마물 군단을 부린 인물이었다.
뾰족아리에게 새긴 건, 그런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었다. 그 대단한 마법진의 용도는 단순히 온순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손짓으로 부를 수도, 공격을 명령할 수도, 부리에 입을 넣고 기다려-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본래 뾰족아리를 전령으로 쓸 생각이었다. 전령에게 가장 중요한 건, 주인에게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대공에게 뺏겼지만, 그 마법진에 이어진 건 여전히 갈라하드였다.
문제는 대공의 성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 거리를 이으려면, 정확한 방향과 상당한 마나가 필요했다.
'성공이군.'
갈라하드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웃었다.
"누구한테 지원 요청하셨습니까? 아드리안나님?"
"대공한테 했네."
"······예?"
"대공한테 했다고."
"왜 하필-."
길버튼이 침음성을 흘렸다. 마족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갈라하드도 괜히 찝찝해졌다.
"대공이 직접 오지는 않겠지. 아드리안나를 보낼 걸세. 편지에 위치를 적어뒀으니, 그리 오래 안 걸리겠지."
"아, 그렇습니까."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면 되네."
"시간을 어떻게 끕니까?"
길버튼이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긴장한 듯했다. 하긴 마족으로 둘러싸인 사형수 대기실이었다.
"이걸로 끌 걸세."
갈라하드는 성서를 두드렸다. 길버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선교자의 성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네, 아주 흥미로운 물건이지."
"예? 선교자는 오대 악인입니다."
"오, 처음 알았군."
길버튼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위험한 물건 아닙니까?"
"초판은 아니지만, 위험하겠지. 이름부터 성서 아닌가."
"그런데 그걸 왜 읽습니까."
"아까 듣지 않았나. 여인은 내게 개종할 기회를 줬네. 아주 신실하던데, 개종으로 시간을 끌 수 있을 걸세."
갈라하드는 슬쩍 나무 벽을 가리켰다. 큼지막한 구멍에 낯익은 눈동자가 있었다. 여인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개종하시면 안 됩니다. 선교자는 오대 악인입니다."
"나는 무교일세."
길버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교자의 성서라.'
갈라하드는 성서로 시선을 내렸다. 초판이 아닌 게 아쉽지만, 충분히 흥미로웠다.
[나약함은 악이니라. 네 고통과 굶주림이 그 증거이니라. 어찌하여 배가 고픈가. 어찌하여 고통스러운가. 이는 네가 나약하기 때문이요, 이는 네가 악하기 때문이니라. 악의 반대는 선이라. 그러므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선한 자니라.]
글을 읽으니 갑자기 정신이 울렁거렸다. 순간 안쪽이 찌릿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심장을 꾹꾹 눌렀다.
'글에 뭔가 있군.'
읽는 것만으로 이런 영향력이라니-.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귀족조차 글을 모르는 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서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주민들을 꼬드겼다는 말인가.
그를 확인하려면-.
"길버튼 경."
"예."
"자네 글 읽을 줄 아는가?"
"읽을 줄 압니다."
"한 번 읽어보게."
"주십쇼."
길버튼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성서를 가져갔다.
"나약······ 함은 악이니라. 네 고······ 고통과 굶? 굶? 이게 뭔 단어입니까?"
"굶주림일세."
"아, 굶주림이 그 증거이니라. 어찌하여 배가 고픈가-. 음."
"또 어려운 단어가 있나?"
그때, 길버튼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길버튼의 이마를 타고 땀이 길게 흘렀다. 콧잔등에 맺힌 땀이 톡- 하고 떨어졌다.
그 다음 단어를 알려주려고 할 때-.
"어찌하여 고통스러운가. 이는 네가 나약하기 때문이요, 이는 네가 악하기 때문이니라. 악의 반대는 선이라. 그러므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선한 자니라. 선한 자는 고통스럽지 아니하며, 악한 자로 배를 채우-."
길버튼의 입이 전과 달리 빠르게 움직였다. 숨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길버튼의 이마를 잡았다. 마나를 흘려 넣는 순간, 길버튼의 몸이 거칠게 떨렸다.
"어떤 기분인가? 길버튼 경? 내 말은 들리나? 혹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리나?"
대답은 없었다. 길버튼의 눈이 뒤집히려고 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길버튼의 뒤통수를 때렸다.
길버튼이 특유의 멍청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뭡니까?"
"길버튼 경이군. 아닐세."
갈라하드는 성서를 다시 가져왔다.
'글을 몰라도, 읽게 만드는군.'
글을 모르는데, 읽게 만들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힘이었다.
극단적인 문맹률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영특한 발명 아닌가.
'선교자의 권능인가.'
뭐가 됐든, 더 흥미로웠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뚜렷한 경고였다.
'흥미롭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무시하고 성서를 읽었다.
****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길버튼은 옆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사형수 대기실이었다. 심지어 사방에 마족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무 틈으로 눈동자가 가득했다.
전선에서 살았던 길버튼도 털이 쭈뼛- 서는 상황이었는데, 갈라하드는 평온하게 성서를 읽고 있었다.
'도대체 담이 얼마나 큰 거지?'
길버튼은 혀를 내둘렀다.
그때, 문이 달그락거렸다. 문이 열리고 예의 여인이 들어왔다. 갈라하드가 고개를 들었다.
"어때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일세."
여인의 물음에 갈라하드가 가벼이 말했다.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미소였다.
"성서예요."
"그래, 흥미로운 성서일세.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더군. 고통과 굶주림이 악이라-."
"악이지요."
"왜 악인가?"
갈라하드가 성서를 두드리며 물었다.
"고통은 곧 불행의 근원이니까요."
"음, 모든 고통이 불행인 건 아닐세. 가령 성장통이 있지."
"고통이 없으면 성장만 있겠네요."
"일리가 있군."
갈라하드가 순순히 끄덕였다.
"고통은 악한 거예요. 불행의 근원이고, 나약함의 상징이죠. 저희는 악에서 해방되는 걸 도와드리지요."
"그렇군. 어떻게 해방시켜주나?"
"개종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 묻는 걸세. 자네, 머리가 조금 선하군."
여인의 부드러운 미소가 순간 멈췄다. 이내 금방 다시 웃었다.
"성서를 끝까지 읽으면 돼요."
"아, 그런 식이군. 이들도 다 읽은 건가? 아주 선해 보이는데."
갈라하드가 뒤를 가리켰다. 뒤의 구멍에 있던 마족이 캭! 하고 이를 드러냈다.
"예."
"호오, 성서가 제법 많나 보군."
여인은 대답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갈라하드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그래서 개종하실 거예요? 여유가 많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다 읽어보고 생각하겠네."
"성서를요? 개종하신다는 거네요."
"음, 일단 읽어보겠네."
"성서를 다 읽으면 개종 되실 텐데요?"
여인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성서를 두드렸다.
"좋을 대로 생각하게."
"모호한 대답이네요."
여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때, 밖이 시끄러워졌다.
"아, 방해꾼이 나타났네요."
퍼엉, 사형수 대기실이 그대로 날아갔다. 주변에 있던 마족들이 나뒹굴었다.
"안 끝내고 뭐 하는 거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최소 상급 마족이다.'
새로 나타난 마족에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족
신도들과 그 기세가 달랐다. 적이 더 있을 거라는 갈라하드의 예상이 맞았다.
문제는-.
'하나가 아니다.'
곳곳에서 마족들이 등장했다.
"아, 개종 논의 중일세."
갈라하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었다.
"개종? 명령은 죽이는 거였다."
"예, 모든 이들은 개종의 기회가 있으니까요. 교리입니다."
"명령은 사살이다."
"명령 위에 교리가 있습니다."
여인의 대답은 단단했다.
"아니, 명령이 우선이다. 처리해야 한다."
마족이 이를 드러냈다. 기세가 살벌했다.
"나는 꼭 개종하고 싶네만."
"정말요?"
"그렇다네. 아직 다 못 읽었거든."
갈라하드의 대답에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켜라."
마족이 성큼 다가왔다. 그 기세가 살벌했다.
"안 됩니다. 개종이 안 되면 그때 하세요."
여인이 오히려 한 발짝 나섰다. 꼭 갈라하드를 지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마족들끼리 대립하는 구조가 됐다.
"명령이 우선이다."
마족의 손이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그러지 마세요."
여인이 부탁했지만, 마족은 대답 대신 손을 휘저었다.
그때-.
"순교하세요."
여인이 덤덤하게 명령했다.
마족들 옆에 있던 신도들이 양손을 모았다.
그리고-.
퍼어엉! 신도가 그대로 폭발했다. 뼈와 살점이 암기처럼 뾰족하게 튀었다. 갈라하드를 노리던 마족이 휩쓸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주변의 신도들이 차례로 터졌다. 뼈와 살점이 맹렬하게 튀었다.
굉음이 끝난 뒤에, 마족이 있던 곳에는 붉은 피와 마족의 조각들이 전부였다.
'······터졌어?'
본래 광장에 있는 신도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을 뿐, 하나하나의 급은 높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위력이라니-.
광장 빼곡한 신도들에 길버튼의 등이 서늘해졌다.
"아, 영광스러운 순교여."
여인이 양손을 모으며 꾸벅였다.
"오, 신기하군. 어떤 형식으로 터지는 건가? 순교라고 부르는 건가?"
갈라하드가 평소와 달리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순교입니다."
"그래, 순교. 순교는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 거지?"
"······믿음의 결정체로 작용하는 겁니다."
"자네가 지정하는 건가?"
"그저 말을 전해줄 뿐입니다."
"자네가 지정하는 거군. 오, 왜 쓸데없이 하급과 최하급을 모아뒀나 했더니, 이런 쓰임새가 있었군. 아주 영특한 방법일세."
갈라하드의 칭찬에 여인의 웃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래서 개종할 생각이 바뀌었나요?"
여인이 무표정으로 물었다. 주변 빽빽한 마족들의 고개가 순간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길버튼은 어이가 없었다. 순교라며 몸을 터뜨린 걸 보여준 직후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개종할 마음이 들 리가-.
"그럴 리가. 더 매력적일세."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으며 성서를 매만졌다.
그때, 여기저기서 적들이 나타났다. 각자 다른 복색을 한 놈들이었다.
방금의 모습을 본 탓인지, 그들은 다가오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 멈췄다.
모두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살기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더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신도 마족
수백 마리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갈라하드는-.
"마저 읽어도 되나?"
성서를 펼쳤다.
****
"경로상으로 보면, 저 성이겠군."
퍼스트가 진지한 얼굴로 정면을 살폈다. 그 방향에는 불 하나 없는 성이 있었다.
"저기 맞습니까?"
"맞네, 갈라하드의 성격에 직선 경로에 있는 성 중에서 들르겠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굳이 중간에 쉬지 않았을 것이니까-."
퍼스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상당히 타당했기에 펌킨은 끄덕였다.
"전에 한 번 마족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곳이니. 그 안정성을 높게 쳤을 걸세. 그리고 무엇보다-."
퍼스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에 펌킨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집중했다. 이내 퍼스트가 끄덕였다.
"갈라하드의 냄새가 난다."
"이런 미친."
펌킨은 한숨을 내쉬면서 장비를 점검했다.
퍼스트는 갈라하드 바로 다음일 정도로 유능했다. 갈라하드와 차이가 제법 컸지만, 그래도 2등이었다.
원래도 유능한 퍼스트는 갈라하드가 엮이면, 능력이 한층 더 올라갔다. 그러니 퍼스트의 추정이 사실일 것이다.
킁킁.
좆같은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가지."
퍼스트가 앞장섰다. 둘은 최대한 기척을 줄이고 움직였다. 성문은 닫혀 있었고, 경비는 성벽 위에 있었다.
퍼스트가 펌킨에게 손짓했다.
'둘, 마족, 자신이 처리.'
펌킨이 끄덕이자, 퍼스트가 검을 입에 물고 성벽을 타기 시작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기민한 동작이었다.
잠시 뒤에 성문이 열렸다. 퍼스트가 손짓했다.
둘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성에는 작은 불도 없었다. 어둠만이 가득했다.
'곳곳에 마족. 경비.'
퍼스트가 옆을 가리켰다. 펌킨에게 맡으라는 거였다.
펌킨은 슬쩍 벽을 타고 움직였다. 정확히 마족의 등이 있었다. 마족은 멍하니 서 있었다.
검이 놈의 목을 잘랐다. 마족은 반응하지 못했다. 펌킨은 떠오른 놈의 머리를 손으로 받고, 넘어지는 몸은 발로 잡았다. 조심히 내려뒀다.
께르륵, 괴상한 벌레 소리가 들렸다. 퍼스트의 신호였다.
펌킨은 방향을 잡고 전진했다. 다시 만난 퍼스트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명이란 곳에서 갈라하드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모두에게 내렸다. 듣기로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서, 단순히 마족들만 온 게 아니고, 그와 협력하는 놈들도 모였다는군."
퍼스트가 손을 털며 말했다. 그 손에서 익은 살점이 떨어졌다.
"지원 요청부터 합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늦는다."
"그러면-."
"펌킨."
퍼스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불렀다.
"예."
"돌아가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번 건 위험하다. 상대가 너무 많아."
"그래서요?"
"정식 임무도 아니고, 네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너는 돌아가라."
퍼스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펌킨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자기만 믿으라고 대륙 정보국으로 끌고 오더니, 이제는 가라는 게 무슨 좆 같은 경우입니까? 개새끼야."
"아니, 왜 갑자기 욕을-."
"됐고, 작전이나 짜십쇼. 어려운 임무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퍼스트의 눈이 흔들렸다. 이내 퍼스트가 끄덕였다. 그 눈이 한층 더 뜨거워졌다.
이내-.
"자네는 최고의 부사수일세."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진심 가득한 목소리에 펌킨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 갈라하드가 내 부사수가 될 경우를 빼고."
퍼스트가 중요하다는 듯 덧붙였다.
****
대공을 오랫동안 모셨던 테오도르는 별별 꼴을 다봤다.
마물을 산채로 뜯어먹는 건 대공의 일반적인 식사였고, 마물을 벽에 걸어놓는 건 대공의 취미였다.
이제 전시된 마물 머리를 봐도 놀라지 않는 테오도르였다.
그런 테오도르조차 지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발단은 갈라하드가 대공에게 선물한 최상급 마물의 발작이었다.
대공은 늘 그렇듯 익숙하게 최상급 마물의 다리를 잡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평소였으면 멈췄을 최상급 마물이 이번에는 눈이 뒤집혀서 날갯짓했다. 그 거대한 날개가 연신 펄럭였다. 태풍처럼 바람이 휘몰아쳤다.
"버드."
대공이 나지막하게 불렀지만, 버드는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벽을 날려버렸다.
시원한 칼바람이 대공 내실에 휘몰아쳤다. 버드가 날갯짓을 더 거칠게 했다. 왜 갑자기 버드가-.
"아무래도 놈한테 가려나 보군."
대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갈라하드한테 말입니까?"
"갈라하드-?"
대공의 눈썹이 뒤틀렸다.
"놈이 걱정이라도 되느냐?"
"예."
대공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잠시 아드리안나를 보던 대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쯧, 천천히 와라. 뛰다가 다친다."
대공이 중간의 가죽끈을 풀었다. 등에 멘 거대한 도끼가 쿵! 하고 떨어졌다. 견갑과 각반도 벗었다.
가죽으로 하체만 간신히 가린 모양새가 된 대공이 버드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대공이 버드의 털을 당겼다.
·········!
버드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벽 너머로 뛰었다.
거대한 날개가 좌우로 펼쳐졌다. 철처럼 날카로운 깃털이 길게 뻗었다.
'과연 최상급 마물-.'
그 엄청난 자태에 테오도르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그때, 버드가 순간 흔들렸다. 잠시 떨어졌다가, 날갯짓하며 어떻게든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또 떨어졌다가, 힘겹게 올라갔다가-.
이내 멀어졌다.
으하하하!
광소가 멀리서 흐릿하게 들렸다.
"아아!"
아드리안나가 다급히 성에서 뛰어내렸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테오도르는 눈을 끔벅였다.
테오도르는 잠시 상황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음······.
'빨리 가긴 하겠네.'
테오도르는 벽을 메꿔야 하는지나 고민했다.
179화 성서
"마족들만 부른 게 아니다. 부랑자나 미식가들 같은 해결사들도 꼬였어."
퍼스트가 피 묻은 손을 털며 말했다.
"부랑자가 낫겠군요."
"우리 통했군."
"쓸데없는 농담하지 마십쇼."
평소와 달리 대화는 건조했다. 긴장감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부랑자로 갈아입은 둘은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광장은 예상보다 더 밀도가 높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거대한 광장에 주민들이 빽빽했다.
"마족이다."
"저게 전부 말입니까?"
"그래, 표정이 없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추위를 타는 놈도 없고. 옷도 얇아."
퍼스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저기 있군."
광장의 중심, 단두대가 있는 단상 위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대충 봐도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구도가 묘하군."
퍼스트의 말처럼 분위기가 상당히 미묘했다.
광장에 빼곡한 주민들의 중심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그리고 광장 주변으로 해결사로 보이는 이들과 마족들이 있었다.
"대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꼭 갈라하드를 두고 대치하는 것 같군."
퍼스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해. 갈라하드가 이렇게 마족이 많은 곳에 들어갈 리가 없다. 본래 평범한 성이었을 것이다. 갈라하드의 눈을 속일 정도로."
"저 많은 주민이 말입니까?"
퍼스트가 끄덕였다. 말을 빠르게 이었다.
"갈라하드가 뭔가를 읽고 있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걸 보니, 아직 계산이 나오지 않은 것 같고. 옆에 있는 여인을 경계하는군. 저 마족이 주민들을 저리 만든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그렇겠지. 왜 여인이 갈라하드를 지키고 있을까. 놈도 분명 여명일 텐데. 그 단서는-."
퍼스트가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갈라하드가 손에 든 낡은 책을 가리켰다.
"저 괴상한 책이겠군."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갈라하드-. 퍼스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펌킨은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퍼스트가 끄덕였다.
"퇴로를 확보하고 틈을 만든다. 그러면 나머지는 갈라하드가 알아서 하겠지."
퍼스트가 빠르게 판단했다.
*****
'많군.'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당장 광장에 있는 주민들을 제외해도, 실시간으로 마족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놈들도 있었다. 깔끔한 옷에 허리춤에는 포크와 나이프를 묶은 놈들-.
'미식가들까지?'
미식가들은 돈이 되면 뭐든 하는 놈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상황을 깨달았다.
'여명에서 내게 현상금이라도 걸었나 보군.'
갈라하드가 여명의 심기를 상당히 거슬린 듯했다.
"안 읽으세요?"
여인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 무심한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훑었다.
"흥미로워서 아껴 읽는 중일세."
"그렇군요. 그래도 빨리 읽어주시겠어요? 해가 뜨기 전까지."
여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간 끌지 말라는 경고였다.
'눈치가 빠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어쩔 수 없었다. 현장에서 변수는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에 맞춰서 유동적인 수정이 필수였다.
톡톡,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안 읽어요?"
여인이 다시금 물었다.
"자네, 성서에 집착하는군."
"개종하신다면서요."
"한다고는 안 했네만."
"그래요?"
여인이 슬쩍 손짓했다. 주변의 놈들이 성큼 다가왔다. 협박이었다.
"음, 성서가 아니라 개종에 집착하는 거였군. 처음에는 그저 포교에 미친 종교인인 줄 알았네만, 뭔가 더 있군?"
여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읽으세요."
"그래, 내가 성서를 읽으면, 자네에게 뭔가 돌아가는 시스템인가? 전도 스티커는 아닐 것이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면 좋지요."
"그렇다기에는 유난히 집착하는 모습인데."
여인의 침묵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는 상황을 빠르게 되짚었다. 여인은 갈라하드를 개종시키고 싶어 했다.
왜?
'끝까지 읽으면 손짓에 터지는 마족이 되니까.'
아주 유용한 폭탄 마족이 되니까.
'어떻게 마족으로 만드는 거지?'
마족을 만들 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최하급 뾰족아리를 최상급으로 만들었던 갈라하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족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생명력이었다.
'그 단서는 성서에 있겠지.'
갈라하드는 성서를 내려봤다. 성서가 생명력에 작용하는 게 분명했다.
인간에게도 당연히 생명력이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생명력과 마족의 생명력은 달랐다.
갈라하드가 괜히 마족이 뱉은 생명력을 이용하여, 피의 농도를 올린 게 아니었다.
인간을 마족으로 바꾸려면-.
"아, 읽는 이의 생명력을 가져가고, 마나가 함유된 생명력으로 바꾸는 거군. 맞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여인의 입꼬리가 굳었다.
"정답이군. 그 과정에서 성서가 수수료라도 챙기나? 오, 성서가 아니라, 아주 지독한 마도서군."
"감히."
여인의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주변이 고요했다.
갈라하드는 방금의 가설을 되짚느라 바빴다.
여인이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개종하기 싫다고?"
"말이 짧아진 걸 보니 정답인가 보군."
여인이 손짓했다. 신도들이 갈라하드 주변으로 성큼 다가왔다. 양손을 모았다.
"아무튼, 그래서 자네가 여유로웠군. 이건 자네 것이 아니라, 선교자의 것이니까. 자신이 있었겠지."
"그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알겠네. 조심하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아직 원리를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니지만, 대강 여인의 노림수는 알아냈다.
갈라하드는 성서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안 읽을 거예요?"
여인이 손을 휘저었다. 신도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대장!"
길버튼이 다급하게 갈라하드의 앞을 막아섰다.
"비키게 길버튼 경. 여기서 터지면 어차피 끝이니까."
"하지만-."
"괜찮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밀고, 여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내가 언제 안 한다고 했나. 성질 참 급하군."
갈라하드가 성서를 다시 잡자, 여인은 빙긋 웃으며 손을 물렸다. 주민들이 성큼 멀어졌다.
갈라하드는 주민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들도 당한 거군.'
마족이 되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마족으로 한 번 뒤집혔던 성이었다. 마족을 경계할 것인데, 무지하니 쉽게 당한 것이다.
차라리 자기 의지로 마족이 되었다면 깔끔하겠건만-.
'귀찮아졌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결국 전과 같았다. 답은 성서에 있었다.
'선교자의 성서라.'
갈라하드는 성서를 내려봤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렬하게 경고했다.
갈라하드는 경고를 무시하고 성서를 읽었다.
글자마다 묘한 탈력감이 올라왔다.
'생명력을 빨아간다.'
그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역시 생명력을 다시 넣는군.'
성서가 다시 생명력을 주는데, 단순히 짙은 마나만 담긴 게 아니었다.
'이게 놈의 권능이군.'
아주 탁한 게 함유되어 있었다.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로 탁했다. 위험했다.
'먹게.'
고통의 알이 잠시 머뭇거렸다. 왜 자신한테 미냐고 항변하는 듯했다.
'편식은 좋지 않네.'
이내 고통의 알이 탁한 생명력에 달려들었다. 안에서 거친 싸움이 일어났다. 심장이 뻐근해졌다.
'되긴 되는군.'
상당한 압박감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정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갈라하드는 어떻게든 집중을 유지했다.
'글자를 모르는 이도 읽을 수 있다.'
길버튼도 막힘없이 읽었던 성서였다. 뭔가 다른 수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성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이내 뭔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아, 글이 아니었군.'
글자가 아닌 그 여백의 배치가 묘하게 규칙적이고 익숙했다.
'마법진인가?'
여백이 마법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그 형태가 상당히 낯설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물 조련사처럼 원시의 마법진이었으니까.
단순히 마법진뿐만이 아니었다.
'권능이 섞여 있다.'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먼저 결과론적으로 접근했다.
'이를 읽으면 밤에는 마족이 된다. 여인의 명령을 듣고-.'
명령을 듣는 부분에 집중했다. 마족의 영역에서 봤던 마족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군체였군. 성서를 읽으면 군체에 들어가는 건가? 하긴 죄다 최하급에서 하급 정도니까. 무리는 없겠군.'
거기서 의문이 들었다.
'누가 군체의 대장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마족은 군체에서 가장 강한 놈이 우두머리였다. 그러니까-.
'더 강한 놈이 명령을 내리는 건가?'
강한 걸 어떻게 판단할까. 성서가 임명할 리는 없었으니까-.
'바친 생명력의 양이겠군.'
성서라더니, 아주 무서운 마도서였다.
새로운 궁금증이 떠올랐다.
만약 갈라하드의 생명력이 여인보다 높다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겠지.'
다만, 여인이 갈라하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누가 시선 좀 돌려주면 좋겠는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뛰어난 마법사라고.'
여인은 성서를 읽는 갈라하드에 입꼬리를 올렸다.
일반 인간이 성서를 읽어봤자, 쌓이는 생명력은 현저히 적었다. 수지가 안 맞을 정도였다.
인간이 하등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평범한 마법사도 그 하나가 인간 열보다 더 값어치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놈은 뛰어난 마법사란다. 생명력이 엄청나게 쌓일 게 분명했다.
위쪽에서 명령이 내려왔을 때, 여인이 한걸음에 달려온 이유였다.
'값어치가 있다.'
여인은 갈라하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놈에게서는 아주 달콤한 향이 났다. 자꾸만 입에서 침이 돌았다.
그때, 놈이 장을 넘겼다. 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서가 영롱한 빛을 뿜어댔다. 온전히 생명력을 가져왔다는 증거였다.
여인은 방심하지 않고 놈에게 집중했다. 놈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조금이라도 허튼 수를 부리면, 바로 잡을 생각이었다.
장을 넘길 때마다 놈의 상태가 악화되었다. 놈의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고, 그 피부는 급격하게 쭈그러들었다. 그 몸이 계속해서 떨렸다.
경지가 높은 터라, 반발력이 강한 듯했다.
여인은 더욱 짙게 웃었다.
'아주 맛있겠어.'
여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리 같은 놈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여명에서 내린 현상금 때문이었다.
'굵직한 놈들은 없지만.'
멍청한 인간들과 달리 마족은 이성적이었다.
여인이 힘의 차이를 보여줬으니, 굳이 먼저 달려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여인은 개종이 실패하면, 갈라하드를 넘긴다고 했으니까.
그때, 마족
사이에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부랑자 복장을 한 인간이었다. 멍청한 인간이 그사이를 못 참고 불평하는 듯했다.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었기에, 여인은 가벼이 무시했다.
그러자-.
"배신하는 거 아니야? 혼자만 다 먹으려고?"
"에이, 마족인데 그러겠습니까."
"아니, 이상하잖아. 저렇게 상태가 안 좋은데, 뭘 기다리는 거야?"
"배신이야. 배신이 분명해."
인간이 괴상한 소리를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그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인간 사이에서 퍼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아까 터지는 거 못 봤어?"
"아니,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눈이 사방에 달렸겠어? 퍼지는 거지. 틈을 만들라고! 자, 너는 이쪽!"
종장에는 지휘까지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뜨리는 모양새에 여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인간들이 움직이자, 마족들까지 자리를 옮겼다.
사방에 마족들과 인간들이 퍼졌다.
여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확인했다. 슬쩍 다가오는 놈도 있었다.
'이리 같은 놈들.'
그때-.
"아오, 답답해. 내가 먼저 간다!"
제일 먼저 말을 꺼냈던 놈이 달려들었다.
"순교하세요."
여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앞에 있던 인간이 순교했다. 그 파편이 놈을 노렸지만-.
놈은 어느새 뒤로 빠져 있었다.
"느린데? 피할만해!"
놈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인간들이 여인의 신경을 긁었다.
그에 갈라하드를 살필 틈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가-.
"그래, 그렇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한층 창백해진 갈라하드가 보였다.
갈라하드가 성서를 조심히 덮었다.
'다 읽었나?'
여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서가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득이군.'
역시 노력을 기울인 값어치가 있었다.
"개종해보니 어때요?"
여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이미 개종이 끝났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무교일세."
그런데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서의 반응을 보면 끝까지 읽은 건 분명했다.
"어째서? 아니, 상관없지. 성서 반납하고 순교하세요."
여인은 짤막하게 명령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굳이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갈라하드가 다가왔다. 그 성서를 천천히 내밀었다. 역시-. 여인은 성서를 잡았다.
그런데 갈라하드가 성서를 놓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장수할 계획이어서. 그대가 대신 순교해주게. 아, 저쪽으로 부탁하네."
"그게 무슨-."
여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여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아, 내가 좀 그릇이 커서 말일세."
뒤로 도는 여인에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
콰아아앙!
여인의 거대한 폭발에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갈라하드가 크게 휘청였다. 길버튼은 황급히 갈라하드를 챙겼다.
"괜찮으십니까!"
"음, 안 괜찮네."
갈라하드가 담담히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갈라하드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안 좋았다.
"아니, 어떻게 하신 겁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가 이겼네. 군체의 주도권을 가져왔지."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은 미묘해졌다.
상급 마족부터 군체를 이뤘다. 그런 군체를 가져왔다는 건 갈라하드가-.
"마족은 아닐세."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자네는 얼굴에 드러나네."
길버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많군."
갈라하드가 주변을 보며 중얼거렸다.
길버튼은 무거운 걱정이 떠올랐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갈라하드가 여인처럼-.
"주민들을 사방으로 퍼지게 할 걸세. 아침이 되면, 다시 인간이 될 걸세. 마족들의 목표는 나니까. 따로 안 건드리겠지."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길버튼의 눈이 흔들렸다.
"왜 그러나? 설마 내가 주민들을 터뜨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크흠. 아닙니다."
"내가 무슨 마족도 아니고 주민들을 터뜨리나. 차라리 길버튼 경을 터뜨리지."
길버튼은 끌끌 웃으며 칼자루를 잡았다.
"명령만 주십소 뚫겠습니다."
"이제야 길버튼 경 답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주민들을 터뜨리는 게 더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너는 정이 많아서 문제다.]
쯧,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을 풀었다.
"퍼뜨리겠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명령했다.
주민들이 사방으로 뛰었다. 아마 태양이 뜨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다음은 그때 생각해야지.
지금은 이쪽도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었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목청을 크게 높이며 오러를 일으켰다.
갈라하드는 가죽 가방에서 램프를 잡았다.
문제는-.
"너무 많군."
주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몰랐지만, 포위한 마족과 해결사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허-.'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주민들을 터뜨렸어야 했나?
"갈라하드 이쪽이다!"
그때-.
쿠우우우웅!
뭔가 땅에 착지했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순간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그곳에 대공이 있었다.
"망할 놈."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기분 탓인지-.
"잘했다."
그 험상궂은 눈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부드러웠다.
'진짜 죽을 뻔했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180화 착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