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YERNODUQUENORTE / Chapter 25 - 170-175

Chapter 25 - 170-175

170화 노인공격

'황혼의 마탑주.'

갈라하드가 수도까지 굳이 온 마지막 이유였다.

황혼의 마탑주는 마법을 먹는 괴물이었고, 마법사들에게 좌절은 안겨주는 천재였다.

만나기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황혼의 마탑주는 대마법사 유력 후보였다. 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왔는지도 궁금하고.'

현재 갈라하드는 북부에서 급격하게 강해진 상태였다.

지금은 격차가 얼마나 줄었을지, 아니면 뛰어넘었을지 궁금했다.

"황혼의 마탑주를 어떻게 만나실 겁니까? 황혼의 마탑주는 웬만해서 모습을 안 드러내지 않습니까?"

제임스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맞네, 황혼의 마탑은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황녀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

갈라하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떻게 만납니까?"

"황혼의 마탑주가 환장하는 게 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황혼의 마탑주는 대륙에서 제일 위계가 높은 마법사일세. 그런 황혼의 마탑주가 무엇을 좋아하겠나?"

제임스가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했다.

갈라하드는 제임스를 두고 변장을 이어갔다.

마탑주들과는 그 인연이 조금 있었다. 최연소 졸업 당시에 마탑주들이 상당히 귀찮게 했었다.

변장의 기본은 연관점을 지우는 거였다.

가령 당시의 갈라하드는 '까칠하고 고고한 천재'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반대로-.

'대공 정도면 되겠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때, 제임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정답은 마법일세. 황혼의 마탑주는 새로운 마법에 환장한다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지."

"그러면 북부에서 왔다는 천재 마법사 이야기는-."

"놈을 꾀어낼 먹이지."

"그렇군요."

"다만, 고작 그 정도 소문으로는 안 움직일 걸세."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실력을 보여야지."

갈라하드는 장로들에게 받은 펜던트를 흔들었다.

펜던트는 장로회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였다.

"북부의 천재 마법사가 장로들을 전부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 정도는 있어야지."

재밌는 농담이라 생각한 제임스는 '하하-' 웃었다.

애석하게도 갈라하드는 따라 웃지 않았다.

제임스의 웃음이 천천히 멈췄다.

****

"망할. 또 일이 줄었군."

녹색 로브의 노인이 수염을 만지며 투덜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청색 노인이 눈을 끔벅였다.

"내 맞춰보지. 황혼 놈한테 뺏겼지?"

"니미럴. 거기까지 소문이 난 것이냐?"

"소문이야 진작에 퍼졌지. 녹색 마탑이 일거리를 전부 뺏기고 있다고."

녹색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맞다. 놈들이 또 단가를 낮췄다는군. 거기서 또 단가를 낮추다니-. 다 같이 죽자는 거야?"

청색 노인이 낄낄 웃었다.

"녹색 놈이 황혼에게 일을 또 뺏겼다는군!"

청색 노인이 손을 휘저으면서 소리쳤다.

"녹색도 뺏겼냐? 우리도 뺏겼다!"

"망할 호로 천재 새끼!"

곳곳에서 불평이 터졌다. 청색 노인이 낄낄 웃었다. 그에 녹색 노인의 눈이 구겨졌다.

"자네 청색 마탑은 사대 마탑에서 떨어지지 않았나?"

녹색 노인이 청색 노인을 보며 이죽거렸다.

"청색 마탑은 4대 마탑이다."

"떨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군."

"그래, 청색 마탑은 떨어졌지. 그래도 4대 마탑일세."

"자네, 노망이라도 났나?"

청색 노인은 슬쩍 둘러봤다. 그리고-.

"자네들도 떨어졌을 뿐이지."

"그게 무슨-."

"황혼의 마탑이 1강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못 들었나? 우리 다시 4대 마탑이야."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망할 천재 놈."

"빌어먹을 천재 년."

"왜 년인가? 놈이지."

"자네, 실제로 본 적 없나? 황혼의 마탑주는 길쭉한 미인이라네."

"노망이라도 났나. 소년이잖나."

"아니, 소녀였어!"

"전부 눈이 삐었군. 할매였다. 솔직히 이쁘더군!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노인들이 황혼의 마탑주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었다.

소년, 소녀, 숙녀, 청년,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까지-. 다양한 목격담이 쏟아졌다.

"죄다 노망났군."

청색 노인은 대놓고 혀를 찼다.

청색 노인은 황혼의 마탑주를 실제로 본 적 있었다.

황혼의 마탑주는-.

"용이었어."

청색 노인의 선언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노망 났군."

"노망 났네."

청색 노인은 억울했다. 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노란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막내."

"형님들-!"

노란색 노인이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적색과 흰색 팬던트를 지닌 북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막내의 보고에 노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색과 흰색 펜던트는 북부로 갔던 장로들 것이었다.

펜던트는 장로의 상징이었다. 그런 펜던트를 넘겼다는 건, 자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혹은-.

'강탈했던가.'

노인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뭐 하는 놈인데?"

"그··· 그게 북부의 천재 마법사랍니다."

"북부의 천재 마법사?"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는 배까지 잡으며 켈켈거렸다.

야만의 땅이라 불리는 북부였다. 북부는 마법을 배척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북부에서 천재 마법사가 나오다니-.

"개 같은 농담이군."

"아주 괴상한 장난이야."

노인들이 끌끌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막내의 물음에 노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뭘 어떻게 해! 펜던트가 있으니 들여보내야지!"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인상이 굵고 험하게 생긴 사내였다.

복장이 다소 특이했다. 마법사처럼 로브를 입었지만, 팔 부분이 뜯겨있었다. 마치 야만인처럼.

드러난 팔에는 흉터가 빼곡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전사의 모습이었다.

'저게 마법사라고?'

확실히 북부의 마법사다운 외모였다.

"여기에 강한 늙은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사내가 투박한 제국어로 말했다. 그 발음이 상당히 각졌다. 북부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재밌는 애송이군."

호전적인 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덩치가 거대한 노인이었다. 손에 든 지팡이는 흡사 몽둥이처럼 두꺼웠다.

"네놈이 여기서 가장 강한가?"

사내가 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노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법 강하지."

"뭐 좋다."

사내가 주먹을 말며 자세를 잡았다. 마법사의 자세에 제한이 없다지만, 저건-.

'시정잡배 같지 않은가.'

사내의 호전적인 자세에 다들 웃음을 흘렸다.

"이게 북부식 마법 자세인가?"

"제국 마법사는 입으로 싸우는가?"

"보통 입으로 주문을 외우지."

"입으로 싸우는군."

투박한 도발에 노인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선공을 양보하겠네. 마음껏 해보게나."

노인이 지팡이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말이 끝나기 전에 사내가 땅을 박찼다.

쿵! 그 속도가 상당했다. 바로 달려들 줄 몰랐는지, 노인이 다급하게 방호벽을 세웠다.

노인은 장로였다. 노인은 곧장 방호벽을 둘렀다. 그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장로, 아직 안 죽었구만!"

"그래, 핏덩이 버릇 좀 고쳐줘!"

장로들이 환호했다.

사내는 방호벽이 안 보이는지 주먹을 그대로 내질렀다.

'멍청하긴.'

반투명한 방호벽은 약해 보이지만, 그 강도는 철보다 단단했다.

주먹에 오러를 두른 게 아니라면, 저걸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폭발화구!"

사내의 주먹에 폭발화구가 떠올랐다.

'주문이 저렇게 빠르다니-.'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솜씨였다. 장로들이 경악했다.

'그런데 마법을 왜 주먹에?'

의문은 바로 풀렸다. 사내가 폭발화구를 두른 주먹으로 방호벽을 때렸다.

콰아아앙.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방호벽이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노인이 뒤로 뒹굴었다.

"맙소사. 방호벽이 한 번에 깨지다니!"

"마나 농도가 얼마나 높은 거지?"

"봤나? 주먹에 펼치면서 주문 속도를 최단으로 당겼다."

마법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장악하는 게 어려웠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거리를 줄이면, 장악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를 알아도 저렇게 안 펼치는 이유는-.

"피해를 본인도 입을 텐데?"

본인조차 마법에 휘말리기 때문이었다. 괜히 마법사들이 멀리에서 마법을 던지는 게 아니었다.

사내의 자리에 연기가 가득했다. 장로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연기가 흩어지며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혀 방비가 안 되어 있잖아.'

사내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흉터는 없었지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사내는 오히려 웃었다.

"시원하군."

사내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주먹을 털었다.

'그냥 맷집이 좋은 거잖아.'

노인들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저게 마법 천재라고?'

강한 건 확실했다. 방금 보여준 수는 진짜였으니까.

다만, 천재라고 부르기에는 미묘했다.

검술 대결에서 거인이 거대한 검으로 밀어붙이면, 거인이 당연히 이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술 천재는 아니지 않나?

그때, 사내가 쓰러진 노인에게 다가갔다. 품을 뒤져서 펜던트를 챙겼다.

마치 전리품처럼-.

"자, 다음."

펜던트를 챙긴 사내가 건방지게 손짓했다.

도발에 노인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군. 방금 당한 건, 멍청하게 방심했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분개하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해졌지만, 사내는 오히려 험악하게 웃었다.

"머리를 고쳐야겠군."

갈라하드는 대공처럼 대답했다.

****

'이··· 이게 무슨.'

제임스는 입을 쩍- 벌렸다.

장로들이 곳곳에 쓰러져서 골골거리고 있었다.

장로가 어떤 존재인가. 마탑에서 끝까지 버틴 이들이 마지막에 받는 직위였다.

지금 장로들은 마탑들이 마도구에 매몰되기 전 시대의 마법사였기에, 그 실력이 확실했다.

분명한 실력자들이었다. 장로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각자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갈라하드와 싸웠다.

다만, 결과는 똑같았다.

방호벽을 세워도, 먼저 공격해도 소용없었다.

장로들은 갈라하드의 무식한 전진과 주먹질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마나 농도가 지독하게 높다.'

갈라하드가 아주 뛰어난 천재 마법사라는 건, 제임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보국에서 갈라하드를 마주한 뒤로, 갈라하드를 선망하면서 노력했던 제임스였으니까.

그런데 주먹에 불을 두르고 달려들어서 쥐어패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었다.

제임스도 당황스러울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장로들은 어떻겠나.

"이게 무슨 마법이냐! 주먹질이지!"

"북부식 마법이다."

"그게 무슨 개소-. 아아악!"

"북부 펀치."

장로들이 반항했지만, 갈라하드는 무자비했다. 그저 두드려 팰 뿐이었다.

"북부식이다."

그 핑계조차 투박했다. 그저 북부식이라며 둘러대는 게 전부였지만-.

"북부의 마나 농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마 거기서 생긴 괴물 아닐까-."

"그렇겠지. 그러니 저런 괴물이 나왔겠지."

핑계가 단순했기에 오히려 믿는 눈치였다.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저렇게 대놓고 증거로 때리는데, 어떻게 안 믿겠나.

갈라하드는 기어코 장로들을 한 번씩 두드려 팼다.

한참이나 뒤에 정신을 차린 장로들이 그들끼리 모였다. 그 표정이 진지했다.

"북부식이라니-. 무식한 신체를 이용하여, 오히려 마법을 간소화했군. 확실히 대단하다."

"북부의 농도가 짙으니,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다고 수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야."

"수없이 반복했는지, 마법이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

"실전을 위해서 깎아냈겠지."

장로들이 진지하게 토론했다. 상당히 전문적이었지만, 문제는 그들의 몰골이었다.

곳곳에 멍이 든 노인들이라, 모습이 상당히 볼품 없었다.

다만, 멍은 그들의 눈을 가리지 못했다. 그 눈들은 전보다 더 형형했다.

"기본적인 마법으로 이 정도라니! 나한테 마법을 배우자! 그러면 더 강해질 것이다!"

"아니, 나한테 배워라! 네가 쓰는 불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장로들은 갈라하드를 데려가려고 들러붙었다.

어찌나 진심인지, 서로 몸 다툼까지 했다.

갈라하드가 손을 크게 휘둘렀다. 노인들이 뒤로 엎어졌다.

"북부에서는 나보다 약한 놈에게는 배우지 않는다."

갈라하드가 투박하게 말했다.

"······역시 북부는 야만적이군."

"그래서 마법도 그렇게 무식한 건가?"

장로들이 금방 납득했다.

'저렇게 말해도 되나?'

북부인이 듣기에는 상당히 불편할 수도-.

제임스는 슬쩍 길버튼을 살폈다.

여기서 유일한 북부인인 길버튼은-.

"시원하군."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북부는 도대체······.'

제임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

콰아앙! 벽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틈으로 자그마한 신형이 튀어나왔다.

데미안이었다. 그 뒤를 에포트가 쫓았다.

둘이 검을 연속으로 교환했다.

톰에게는 그저 번쩍이는 정도밖에 안 보였다.

갈라하드가 데미안의 훈련을 에포트에게 맡긴 뒤부터 저러고 있었다.

문제는-.

"밖에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꾸만 실내에서 싸운다는 점이었다.

그때, 데미안이 톰의 뒤로 숨었다. 검을 찔러넣던 에포트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검게 탄 사람이 자꾸 건드려요."

"난 타지 않았다. 그리고 습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지. 그게 야생이야."

"난 짐승이 아니야. 야생 필요 없어."

"아니, 너는 짐승이다. 따뜻한 집과 스튜는 너를 약하게 만들 뿐이다."

"톰!"

데미안의 외침에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에포트의 살벌한 시선이 톰을 향했다.

그저 마주하는 것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기세가 상당했다.

"밖에서 안 하시면 자밋님이 화낼 겁니다."

에포트의 기세가 금세 누그러졌다.

"크흠, 그래 오늘은 제법 많이 뒹굴었으니까."

"휴-."

데미안이 대놓고 안도했다. 데미안은 곧장 검을 넣고 지팡이를 꺼냈다.

"짐승이 마법사라니-."

"나는 짐승 아니야. 너가 짐승이지."

"후후, 언젠가 받아들일 것이다."

에포트가 슬쩍 물러났다. 데미안은 그 방향에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나는 멋지고 점잖은 마법사가 될 거야."

멋지고 점잖은 마법사-.

'갈라하드 대장이 마냥 그렇지는 않을 텐데.'

톰은 어색하게 웃었다. 데미안에게 육포를 준 톰은 헝클어진 자료를 정리했다.

그러다가-.

'갈라하드 대장.'

대장 서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제일 안쪽에 숨겨뒀는데, 둘이 싸우면서 온통 헝클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정리하지 않고 그냥 넣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괜찮겠지.'

톰은 최대한 보지 않고 자료를 정리했다.

'······황녀 살리기?'

톰은 홀린 듯이 읽었다.

"뭐해?"

서늘한 목소리에 톰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어느새 자밋이 있었다.

"뭐야?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어?"

자밋의 눈이 서늘해졌다.

"아, 자료 정리하다가 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정 싫었으면 갈라하드가 지웠을 테니까. 놔둔 거면 상관없다는 뜻이지."

자밋은 가벼이 손을 저었다.

그에 톰이 입을 달싹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해."

평소 그 빠릿빠릿하던 톰이 한참이나 망설였다.

"짜증 나게 할래?"

"아, 그냥 뭔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뭐가?"

"사실 별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안 좋아서-."

"빙빙 돌리지 말고. 내가 판단할 테니까."

잠시 망설인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살리기의 엘레강스라는 요원 말입니다."

"응, 갈라하드가 꽤 아꼈던 요원이었지. 팀을 꾸릴 때 가장 먼저 부를 정도로. 근데 왜?"

"전임 국장이 뽑은 인물입니다."

톰의 진지한 목소리에 자밋은 피식 웃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전임 국장이 워낙에 열성적이라서, 당시에는 웬만하면 다 전임 국장이 뽑았거든."

"아,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톰이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황녀 살리기의 다른 팀원들이 전부 전임 국장이 뽑은 인물인 것도 그것 때문이었군요. 하하, 제가 외부자라서-."

톰은 말끝을 흐렸다.

자밋이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이 빌어먹을 년이."

171화 대면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그웬은 눈을 질끈 감으며 집중했다.

[서늘한 바람에서 응용된 걸세. 잘 보게나.]

머리를 깔끔히 넘긴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손가락을 타고 보석 같은 얼음 결정들이 흔들렸다.

결정들이 서로 부딪치며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건 곧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수천 개의 결정들이 휘몰아치며 세상을 할퀴었다.

[참 쉽지?]

'쉽기는-!'

[자네는 빡대가리일세. 이해하려고 하지 말게나.]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래,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그웬은 그 감각에 집중했다. 갈라하드가 마법 쓰는 모습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갈라하드가 반복해서 보여준 덕분에 기억은 또렷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되새겼을까.

손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이내 한계에 다다랐고-.

'나도 할 수 있다!'

그웬은 냉큼 손을 펼쳤다. 손을 타고 마나가 성큼 움직였다.

얼음 결정들이 빠르게 뿌려졌다. 꼭 폭설처럼 반짝거렸다. 눈밭에 셀 수 없는 상처들이 새겨졌다.

"칼날 바람 폭풍을 쓰다니!"

"맙소사! 저 나이에? 이게 말이 되나!"

"천재다! 천재!"

장로들이 기겁하며 경악했다.

거친 탈력감에 그웬이 순간 휘청였다. 장로들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장로들이 그웬을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았다.

그웬은 눈을 끔벅였다. 주름진 노인들이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마법에 입문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칼날 바람 폭풍을 쓰는 천재는 너밖에 없을 것이다."

"그 갈라하드도 이렇게 못 할 것이야."

"너는 천재다."

"그래, 진짜 천재야."

둘의 연속된 칭찬에 그웬은 멋쩍게 웃었다.

일생 뭔가를 잘해본 적 없던 그웬은 칭찬이 낯설기만 했다.

"다시 해볼게요!"

"아니, 이미 충분히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마나 탈진이라도 오면 큰일이야."

"갈라하드님이 마나 탈진은 마법사의 기본이라고 했는데요?"

"지독한 놈······. 소중한 그웬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 오늘은 끝이다. 끝."

장로들의 만류에 그웬은 씰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냉큼 쓰러졌다.

"크흑, 마지막 한 줌까지 불살랐다."

냉큼 쓰러진 코르튼이 장로들의 눈치를 봤다.

따뜻했던 장로들의 얼굴이 금세 흉악해졌다.

"이놈이 얼마나 했다고 벌써 퍼져!"

"아니! 나도 열심히 했다고!"

"이 새끼 말은 또 왜 짧아?"

"같은 장로끼리. 나이 많이 먹은 게 자랑이야?! 나도 먹을 만큼 먹었다!"

"호로 새끼!"

장로 둘이 지팡이를 드는 모습에 그웬은 다급하게 말렸다.

"그래도 오늘 많이 하셨잖아요."

그웬을 본 장로 둘의 눈이 뭉클해졌다.

"저런 쓰레기도 헤아리다니-. 이런 착한 아이가 또 있을꼬."

"쓰레기라니! 같은 장로끼리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그래, 쓰레기한테 너무 심했다."

장로들은 코르튼의 말을 무시하고 끄덕였다.

"오늘은 그만이다!"

"그래! 무리는 좋지 않아!"

장로들은 그웬에게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코르튼은 그대로 축 처졌다. 그를 보니, 그웬은 괜히 마음이 쓰였다.

"망할 노인네들. 같은 장로끼리 이래도 되는 거야?"

"몸은 괜찮으세요?"

"안 괜찮다! 쑤시고 아파!"

코르튼이 제 허리를 잡으면서 투덜거렸다.

"너는 좋겠다."

그때, 코르튼이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천재라잖아."

코르튼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잘하는 게 없던 그웬이었다. 매일 구박 받기 일쑤였던 그웬은 그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각자 잘하는 게 다른 거죠. 저도 그릇 닦으면 깨 먹기 일쑤고, 청소하면 오히려 더 어지럽히는데요. 하녀일 때는 매일 혼났어요."

그웬은 최선을 다해서 조언했다. 이 진심이 조금이라도 닿아서, 기운을 차리면-.

"하긴 청소 못 하긴 하더라."

그웬의 웃음이 살짝 멈췄다.

코르튼은 켕- 하고 코를 풀었다. 피가 섞인 콧물이 길게 늘어졌다. 망할 늙은이들.

"아, 출세하고 싶다."

"장로님들이 열심히 도와주시잖아요?"

"교육 방식이 나랑 안 맞아."

코르튼의 대답에 그웬의 눈이 동그래졌다.

장로들은 유명한 마법사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교육 방식이 안 맞다니-.

"한 방에 요약해서 머리에 딱 넣어줘야지. 복잡하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내가 무슨 갈라하드야? 나는 코르튼이라고. 노인네들은 내 멍청함을 고려하지 않아."

"그건······ 그렇네요."

"그렇다니까."

"그래도 일단,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래?"

"······아, 알고 있어요? 근데 그래요?"

"그렇다. 놀면서 위계가 올라가고 싶다."

코르튼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 다들 저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아, 노력 없이 유명해지고 싶다."

길게 기지개를 켜는 코르튼에 그웬은 슬쩍 거리를 벌렸다.

더 연습할 생각이었다.

****

"북부의 마법사 코르튼!"

"코르튼!"

"코르튼!"

장로들이 연신 코르튼을 연호했다.

그 격렬한 호응에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잠시만-."

장로들이 둥글게 모였다. 회의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갈라하드는 방금의 교전을 복기하는 중이었다. 순수 마법사들과 전투는 오랜만이라, 꽤 재밌었다.

'확실히 강해졌다.'

북부로 가기 전의 갈라하드는 정교함을 무기로 썼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마나의 순환을 빠르게 키운 것이지, 본래 갈라하드는 그웬처럼 마나통이 크지 않았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 마법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운 다음에 마법 시전 속도를 줄인 것이다.

마법으로 은퇴시키기로는 최고였지만, 순수 정통 마법적인 측면에서 갈라하드는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북부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검술로 따지자면, 이제 피지컬이 늘어난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장로들을 정면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하긴 그 고비를 넘겼는데.'

갈라하드는 수통을 매만졌다.

그때, 장로 중에서 가장 주름이 많은 이가 앞으로 나섰다.

"자네는 강하네. 이건 부정할 수 없군."

"당연하다."

갈라하드가 냉큼 끄덕이자, 노인의 표정이 순간 씰룩해졌다.

노인은 금방 방끗 웃었다.

"하지만 정교함이 부족하네. 그건 마법사보다는 전사에 어울리는 전투 방식이야. 지금도 강한 자네인데, 마법을 배우면 어떻게 되겠나?"

장로들의 얼굴이 몽롱해졌다.

정교함이 부족하다니-. 순간 웃음을 못 참을 뻔했다.

"더 강해진다는 건가."

"그래! 북부인치고 이해가 빠르군!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 장로회가 모두 붙어서 알려주겠네. 우리와 같이 가겠나?"

장로들이 전부 붙어서 알려주겠다는 건,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상당히 흥미가 당기는 제안이지만, 갈라하드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곳은 수도였다. 길게 머물면 꼬리가 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 번 뜨기 전에 간다고 했으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약한 놈에게는 배울 게 없다."

단호한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주겠나? 우리 마탑에 제법 쓸만한 놈들이 있어서 말이지."

장로들의 제안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나를 이기는 놈에게 가겠다."

갈라하드의 대답에 장로들이 다급해졌다.

갈라하드는 제임스에게 눈짓했다. 제임스가 핸섬을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뻐꾸기를 찾으러 간 것이다.

'황혼의 마탑주를 만나기 전에, 몸 좀 제대로 풀겠군.'

갈라하드는 주먹을 쥐었다.

****

"그렉! 빨리 가자!"

녹색 마탑의 그렉은 갑자기 나타난 장로에 눈을 찡그렸다.

"급하다! 급해!"

"뭐가 말입니까."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가 있다! 놈을 이겨야 한다!"

"그게 무슨······."

"빨리! 지팡이 챙겨!"

그렉은 반대도 못 하고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장로들이 매일 모여 있는 장로회였다.

곳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전부 그렉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에 붙은 장로들만 심각했다.

"놈의 주먹을 조심해라."

"······예?"

"마나를 최대한 압축해. 주먹을 조심해."

"아니, 그게 무슨-."

그때, 무표정의 여인이 중앙으로 나왔다.

"자, 도전하실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참가비는 은화 두 개입니다."

······참가비? 그렉은 독촉에 자신도 모르게 줄을 섰다.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 그의 주먹은 불보다 뜨겁고, 마법을 오롯이 부순다! 코- 르- 튼-!"

여인이 무표정으로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참으로 뻔뻔했다.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

험한 복장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가 올라왔다.

"저게 마법사라고?"

"전사 아니야?"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문제는-.

"꼭 이겨야 한다. 그래야 북부의 천재를 우리 마탑으로 데려올 수 있으니까."

장로들은 진지했다는 거였다. 그렉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마나 농도가 아주 높다. 최대한 고위계 마법으로 상대해야 한다."

"······예? 아니, 마나 농도가 높을 수가 있습니까?"

"북부 마법사니까. 주먹을 조심해."

"아까부터 왜 자꾸 주먹을-."

그때, 반대에서 마법사가 올라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다르나도 끌려왔군.'

청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였다.

"방심하지 마라. 북부의 천재 마법사 코르튼이니까!"

"코르튼의 주먹을 조심해라!"

장로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왜 자꾸 주먹을 조심하라고?'

다르다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청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 다르다입니다."

"코르튼이다."

사내는 지팡이도 없었다. 그저 주먹을 풀 뿐이었다.

'······코르튼? 처음 듣는 이름인데?'

다르다가 지팡이를 찍었다. 다르다의 앞에 얼음송곳이 두 개나 나타났다.

'그새 또 늘었군.'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거대한 얼음송곳 두 개가 연속으로 쏘아졌다. 그 속도와 위력이 상당했다.

마법사 대결에서 선공은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지팡이도 없을 때는 더욱-.

'끝이다.'

그때, 사내가 양 주먹을 부딪쳤다. 그러자 주먹에서 불이 거칠게 타올랐다. 불이 사내를 가득 덮었다.

'······왜 자기 마법에 자신이?'

사내가 곧장 다르다를 향해서 뛰었다. 그 걸음마다 불길이 일렁였다.

사내가 다가오는 얼음송곳에 주먹을 휘둘렀다. 불이 손을 따라서 뿌려졌다.

"얼음송곳에 주먹을 휘두르다니!"

"미쳤군."

곳곳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모두가 사내의 패배를 예상했다.

그때-.

불 주먹이 얼음송곳을 가벼이 부쉈다. 얼음송곳이 힘도 쓰지 못하고 흩어졌다.

'주먹으로 얼음송곳을 부쉈어?'

다르다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지팡이가 빠르게 땅을 찍었다. 땅에서 굵직한 돌이 올라왔다.

깔끔한 돌 방벽이었다. 그 틈으로 다시 마법을 주문했다. 완벽한 대처였지만-.

콰아앙! 돌이 부서지며 사내가 등장했다. 완성된 얼음송곳들이 다시 사내를 노렸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주먹이 다르다의 뺨을 날렸다. 다르다는 그대로 뒤로 뒹굴었다.

"주먹을 조심하라니까!"

"아이고! 주먹을 조심하라고!"

곳곳에서 탄식이 터졌다.

'저게 조심하라고 되는 건가?'

사내는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최근에는 귀족보다 귀한 대접 받는 상급 마법사가 두들겨 맞았다.

"코르튼! 코르튼!"

"북부의 코르튼!"

장로들이 오히려 환호했다.

그렉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그렉의 등을 잡았다. 장로들이었다.

"자, 다음은 너다!"

"그렉! 주먹을 조심해!"

저걸 어떻게 조심하라는 거야-.

그렉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술꾼 켄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술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친구들은 전부 모여 있었다.

"자네, 그거 들었나?"

켄이 안기도 전에 친구가 입을 열었다.

"뭐 말인가?"

"북부에서 천재 마법사가 내려왔다는군."

"······북부에서?"

북부에 관한 이야기는 꽤 많았다. 마족을 주식으로 먹으며, 도끼를 던지고 논다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북부에서 마법사가 내려왔는데, 지팡이 대신 주먹을 쓴다는군."

"참으로 북부답군."

"굉장히 강하다는군! 마탑의 장로부터 시작해서 상위 마법사들까지 줄줄이 박살 났다고 소문이 쫙 퍼졌어!"

지팡이가 아닌 주먹을 쓰는데, 장로부터 상위 마법사까지 잡았다니-.

"크으-. 역시 북부답군. 진짜인가?"

"그렇다니까! 오는 길에 봤는데, 얼굴에 멍든 마법사가 있었다네!"

"역시 북부는 북부군."

켄은 잔을 내려놓으며 히죽 웃었다.

"아, 자네들 그거 아는가? 북부에서는 문을 안 잠근다는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북부 농담으로 흘러갔다.

"문을 안 잠근다니?"

"문 대신 곰 덫을 앞에 둔다는군!"

"오! 북부스럽군!"

웃음이 가볍게 터졌다. 북부 농담은 켄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였다. 켄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북부에서는 애한테 젖을 안 먹인다는군."

"젖을 안 먹인다고? 그러면 애가 뭐를 먹지?"

"맥주를 마시지!"

와하하하! 웃음이 크게 터졌다.

켄은 만족스럽게 잔을 들었다. 그런데 잔이 안 움직였다. 잔을 누군가 잡고 있었다.

'무슨-.'

험악하고 못생긴 북부인이 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사나운지, 켄은 절로 쪼그라들었다.

"곰 덫을 둬도 문은 잠그지. 요즘 곰들이 영리해져서 곰 덫을 피하거든."

"예?"

"그리고 맥주는 걸음마를 하고 나서 마실 수 있다고. 북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길버튼 경."

"갑니다. 가요."

사내가 슬쩍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갔다.

"왜 다른 이들한테 화풀이인가."

"아니, 북부에 관해서 잘못된 정보가 퍼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정했습니다."

정보가 아니라 농담이었는데-.

켄은 다시금 북부에 관한 농담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이제 끝난 겁니까?"

길버튼의 투박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미끼는 던졌지."

"그냥 노인네들이나 쥐어팬 거 아닙니까?"

"말을 그렇게 하면 오해하지 않나."

"음, 아닙니까?"

"마법 강습이었네."

머리를 긁적이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그래서 이제 뭐 합니까?"

"뭐하긴. 미끼를 던졌으니 기다려야지."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쯤이면 황혼의 마탑주도 들었을 것이다.

북부에서 온 마법사가 장로와 상위 마법사들을 이겼다는 걸-.

'얼마나 강해졌으려나.'

갈라하드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대장, 긴장하셨습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길버튼의 눈이 커졌다.

"대장이 긴장도 합니까?"

"길버튼 경이 할 법한 질문이군."

"아니, 그게 아니라-. 워낙 여유로우신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이 긴장하셨다니까 조금 놀랐습니다."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상대가 그리 대단한 놈입니까?"

"대단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네. 놈은 진짜 천재라네."

"대장이 천재 아니었습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네."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갈라하드도 본인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마법을 독학했고,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입학하여 최연소로 졸업했다.

천재라 판단하기에 합당한 근거들이었다.

그렇기에 천재라고 자신했지만-.

"범재더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마나를 계속해서 돌리는 중이었다. 심장이 뻐근해졌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있지 않습니까."

"참 든든하군."

갈라하드는 수통을 흔들었다. 그때, 수통에 담긴 마족의 피가 들끓었다. 마치 뜨거운 물에 들어간 것처럼-.

"왔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우직,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거대한 술집의 지붕이 그대로 뜯겼다. 거대한 손이 뜯은 것처럼-.

그러면 응당 집기들이 휘날려야 하는데, 집기들은 멀쩡했다. 술을 마시던 이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떠들 뿐이었다.

공중에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주변으로 마나가 가득 휘몰아쳤다. 그건 단순히 마나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나의 태풍이었다. 청년은 그 태풍을 일으키는 핵이었고-.

'황혼의 마탑주-.'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갈라하드는 상대를 단번에 알아챘다.

황혼의 마탑주가 외형을 제 마음대로 바꾸는 건 유명했다.

무엇보다-.

'저런 무식한 마법사는 황혼의 마탑주 말고는 없지.'

북부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갈라하드였기에, 이제 할만하다고 예상했다.

아주 오판이었다.

저 괴물은 갈라하드가 북부에서 구르며 강해진 것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어이가 없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수통을 꺼냈다.

청년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그 눈에 드리운 건-.

"놈, 역겨운 냄새가 더 짙어졌군."

짙은 혐오감이었다.

'여전하군.'

"감히."

길버튼이 오러를 뽑으며 분개했다.

꼭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듯한 반응이었다.

"길버튼 경, 뒤로 빠지게."

단호한 명령에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어서."

길버튼은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의 얼굴에 여유가 하나도 없었기에-.

172화 내기

황혼의 마탑주를 처음 만났을 때, 갈라하드는 꽤 당황했다.

'황혼의 마탑주가 소녀였다니.'

그 유명한 황혼의 마탑주가 작은 소녀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깜찍한 외형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괴물이군.'

그때, 황혼의 마탑주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어째서 그렇게 끔찍할 수가 있지?"

뜬금없는 욕설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끔찍하다니? 첫 만남에 말이 심하군."

"끔찍하다. 네 마나 회로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강제로 늘린 것이냐?"

황혼의 마탑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나 탈진 이야기군.'

마법을 독학한 갈라하드는 마나 탈진을 많이 겪었다. 그 흔적이 보이는 듯했다.

"오, 그런 것도 보이나? 눈이 좋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가 있지?"

황혼의 마탑주가 경멸을 대놓고 드러냈다.

"나야말로 의문이군. 마법을 안 쓰고 참을 수가 있나?"

"마법을 제대로 아는 놈이네."

놈의 눈이 조금 풀렸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원래 찢어져야 느는 법일세."

"······찢어져야 늘어난다고?"

"근육처럼 마나도 마나 탈진을 겪을수록 마나 회로가 점점 더 단단하고 굵어진다네."

"미친."

그때, 의회 문장이 큼지막하게 박힌 기다란 모자를 쓴 노인이 거칠게 기침했다. 노인이 그제야 눈을 떴다.

"그대들을 부른 건, 황실 보안 강화를 위함일세. 자, 여기 보안 전문가 맥일세."

의회 노인이 특유의 거만한 목소리로 말하며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 수염이 지긋하지만, 팔뚝은 굵은 노인이 있었다.

"맥이다."

"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보안 쪽에서 알아주더군요."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니, 너는 도둑놈이겠구나."

맥 노인의 말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그래. 자, 전문가 셋을 모았으니, 황실 보안을 완벽하게 설계할 수 있겠지."

"이 끔찍한 놈은 뭐지?"

황혼의 마탑주가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황제 폐하가 있는 내성을 뚫은 유일한 요원이다. 끝에서 막혔지만."

의회 노인이 갈라하드를 보면서 떨떠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들이 모인 건 갈라하드 때문이었으니까.

시작은 정기적인 훈련이었다. 대충 황제 폐하가 계신 곳을 뚫어봐라- 하면서 흉내 내는 훈련인데, 갈라하드가 실제로 뚫어버렸다.

그로 인해 황실이 난리가 났고, 이렇게 보안을 강화하는 일까지 벌어진 거였다.

"도둑놈이 맞았군."

맥 노인이 끌끌 웃었다.

"시작해라."

의회 노인이 짧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황실 보안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문을 기사들이 교대하는 쪽에 두는 게 좋습니다. 교대하는 지점을 노리기가 까다로우니까요."

처음에는 갈라하드의 역할이 컸다. 실제로 보안을 뚫었던 것도 갈라하드였고, 계산 쪽은 갈라하드의 전문이었으니까.

다만, 그건 잠시였다.

"그것보다 이게 낫다."

황혼의 마탑주가 새로운 계산식을 내밀었다.

방금 알려준 계산식을 최적화한 것이다.

'천재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훨씬 나은 식이야."

"네놈이 멍청한 거지."

황혼의 마탑주가 가벼이 말했다. 의회 노인이 슬쩍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의회 노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쓸모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게 황실이었다.

물론, 정보국 특수 요원인 갈라하드를 처리하지는 않겠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뺄 게 분명했다.

나중을 대비하여, 황실 보안 프로젝트에 끝까지 붙어 있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지 못한 위기였다.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방책을 마련했다.

"자네, 요즘 마법계에서 유행하는 놀이 알고 있나?"

"놀이?"

"같은 마법을 누가 먼저 쓰는지 대결하는 걸세. 누구의 계산이 빠른지 가리는 거지. 아주 인기가 있다네."

"그건 좀 재밌겠네."

황혼의 마탑주가 눈을 반짝였다.

"자네, 계산이 좀 빠른 것 같은데 나와 한 번 해보겠나?"

"네가 내 상대가 되겠냐?"

순수한 반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건 해봐야 알지."

"멍청하네."

황혼의 마탑주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갈라하드 옆에 섰다.

"표적은 아까 만들다 실패한 보안 문으로 하지."

의회 놈이 이번에는 잔소리하지 않고 구경했다.

'쫓아낼 생각 중이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마법은?"

"얼음송곳으로 하지."

"괜찮네. 얼음송곳은 3위계치고 계산식이 까다로우니까. 계산 실력을 가리기 좋겠어."

황혼의 마탑주는 신난 얼굴로 눈까지 찡그리며 집중했다.

'승부욕이 상당하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풀었다.

얼음송곳은 계산이 상당히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들어간 획들이 난도가 높은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갈라하드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맥 노인이 손을 내렸다. 신호였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송곳이 빠르게 날아가서 꽂혔다.

바로 뒤로 황혼의 마탑주 얼음송곳이 꽂혔다.

"말도 안 되는 속도군."

황혼의 마탑주가 갈라하드를 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습게도 갈라하드도 똑같은 생각 중이었다.

얼음송곳은 상당히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갈라하드는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 방향과 거리, 농도에 따른 수식을 외우고 체득했기에 속도가 빠른 거였다.

그런데 황혼의 마탑주는 순수하게 계산하여 저 속도가 나온 것이다.

'계산으로 이 속도가 나온다고?'

"또 하자."

황혼의 마탑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날부터 황혼의 마탑주는 계속해서 대결을 요청했다.

승부를 거듭할 때마다. 안 그래도 빨랐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젠장, 비겼다. 이게 최대였는데?"

황혼의 마탑주가 기어코 갈라하드와 동등한 속도를 냈다.

'미친 재능이군.'

암기와 같은 속도의 계산이라니 말이 되나?

표면적으로는 비겼지만, 갈라하드의 처참한 패배였다.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끝이군.'

황실 보안 프로젝트는 완성된 상태였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대단하다. 인간. 인정하겠다."

황혼의 마탑주가 감탄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마법 계산에는 빠른 네가 왜 보안 쪽 계산은 느리지? 앞뒤가 안 맞는군."

황혼의 마탑주 성격을 보면, 의문이 남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

'어차피 프로젝트도 끝났고.'

갈라하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외웠다네."

황혼의 마탑주가 그대로 굳었다. 그 커다란 눈이 천천히 끔벅였다.

"통째로."

갈라하드가 추가적으로 설명하자, 황혼의 마탑주가 얼굴을 구겼다.

"계산 실력을 대결하는 것인데, 암기하여 승부하다니······. 반칙이다."

타당한 반론에-.

"그래, 자네가 이겼네."

갈라하드는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

'그때도 괴물이었는데, 더 성장했다니-.'

갈라하드는 찡그린 눈으로 올려봤다.

황혼의 마탑주는 저번과 달리 미청년의 모습이었다.

놈 주변에 마나가 가득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건 마나로 이루어진 태풍이었다.

'마나의 경계가 없다.'

마법은 본래 체내 마나를 정제하고 그를 통해, 대기의 마나를 응집하여 쓰는 것이다.

체내 마나가 대기의 마나보다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놈은 대기와 체내의 경계가 없었다. 놈 자체가 거대한 마나였다.

실로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작태였다.

"오랜만이군. 황혼의 마탑주."

갈라하드의 인사에 놈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마나를 뿜어댔다. 갈라하드의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북부에서 왔다더니, 왜 네가 있지?"

놈이 경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여전히 소식이 느리군. 나는 북부로 이사 갔네."

"어쩐지 요즘 수도가 깨끗하더니."

애초에 놈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혐오했지만, 그중에서도 갈라하드를 특히 싫어했다.

"자네, 아직도 삐져있나?"

놈의 움직임이 뚝- 하고 그쳤다.

"하-."

놈이 혀를 차자, 바람이 휘몰아쳤다. 술집에 있던 이들이 태풍에 휩쓸리듯 밀렸다.

"대장-!"

길버튼이 땅에 검을 박고 버텼다. 그 얼굴이 가득 굳어 있었다. 상대의 무력을 느낀 듯했다.

압박이 심해졌다. 온 마나가 갈라하드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저릿해졌다.

"너는 더 역겨워졌구나."

놈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훑었다. 그 눈에 혐오감이 가득했다.

"자네는······ 키가 좀 컸나?"

"역겨운 농담도 여전하군."

놈이 천천히 내려왔다. 마나가 놈을 떠받들었다.

'저릿하군.'

놈이 가까워질수록 압박감이 강해졌다.

"감히 내 앞에 나타나?"

"미안하지만, 자네가 찾아온 걸세."

"역겨운 혀는 여전하군."

놈이 가벼이 발을 내디뎠다.

쿵! 그 걸음을 중심으로 마나가 거칠게 뿌려졌다. 주변 집기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술집이 통째로 흩어졌다.

앉아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떠밀렸다.

갈라하드의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마나가 들끓으며 속이 진창이 됐다. 피가 역류하여 입꼬리를 타고 흘렀다.

'더 강해졌군.'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농도 짙은 마나를 뿌렸다. 갈라하드는 그를 바탕으로 자세를 잡았다.

이내 갈라하드의 허리가 곧게 섰다.

"왜 화를 내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군."

놈의 얼굴이 뒤틀렸다. 순간 사내의 얼굴이 사라지고,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래, 네놈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그냥 죽어라."

놈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손짓에 대기가 요동쳤다. 대기의 마나가 뒤틀리며 움직였다. 유형적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흐름이었다.

그건 마족의 권능과 흡사했지만, 명백하게 달랐다.

그때-.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갈라하드의 앞을 막았다. 그 오러가 길게 뽑혔다.

길버튼의 오러가 다가오는 마법을 길게 갈랐다. 오러가 그은 선에 거대한 마법이 잘렸다.

"길버튼 경, 빠지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저 아니었으면 위험하셨습니다."

"위험이라니, 이건 경고일세."

갈라하드가 슬쩍 바닥을 가리켰다.

길버튼을 중심으로 흔적이 좌우로 깊게 흩어졌다. 경고성 마법이었다.

"······예? 이게 경고라니-."

길버튼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러나게."

"알겠습니다. 위험하면 부르십쇼."

길버튼이 뒤로 성큼 물러났다.

황혼의 마탑주는 가만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놈이 원하는 건 명백했다.

"다시 붙자."

예상대로 황혼의 마탑주는 대결을 요구했다. 그에 의문이 들었다.

갈라하드는 마법식을 외운 상태였다. 놈의 계산이 아무리 빨라도 동점일 수밖에 없었다.

'놈도 분명 그를 알텐데-.'

그때, 황혼의 마탑주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 손가락을 타고 얼음송곳이 뿌려졌다.

'빠르다.'

얼음송곳의 속도가 아니었다. 번개 계열과 흡사한 속도였다.

그건 쏘아진 순간, 갈라하드 앞에 꽂혀있었다.

'이 정도면 천벌보다 빠르겠군.'

갈라하드는 꽂힌 얼음송곳을 살폈다.

그 형태가 원래 얼음송곳과 달랐다.

본래 얼음송곳은 뭉툭한 형태였는데, 이건 화살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그 곳곳에 작은 틈까지 있었다.

'공기저항을 최소화했군. 거기에 식 자체를 바꾼 건가?'

근본은 분명 3위계 얼음송곳이었다.

안 그래도 실용적인 얼음송곳을 또 최적화시키다니-. 확실히 천재는 달랐다.

'탐나는군.'

갈라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무식하게 승부한다고, 나까지 어울릴 필요 없지."

놈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자신감을 가질만했다.

"승부다. 이 역겨운 놈아."

놈이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갈라하드의 주변으로 마나가 거칠게 압박했다.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에 막힌 기분이 들었다.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군.'

물론, 이쪽도 아직 최선을 꺼낸 건 아니었지만, 실로 압도적인 차이였다.

"패배하면 너는 죽는다."

놈이 혐오 가득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갈라하드가 지면, 놈은 갈라하드를 죽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승부였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지.'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털었다.

"내가 이기면?"

"하하하하하! 네가 나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냐?"

"해봐야 알지."

갈라하드의 대답에 놈의 웃음이 멈췄다.

"그래, 승부는 공정해야지. 뭐를 원하느냐? 돈? 마법? 직위?"

놈이 거만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내가 이기면."

가장 중요한 건, 놈과의 관계를 잇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를 형이라고 부르게."

갈라하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놈의 얼굴이 벙쪘다. 실로 표정이 다양했다. 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진짜 미쳤구나. 그래, 좋다. 멍청한 인간 놈."

놈은 금방 승낙했다. 제 승리를 완벽하게 자신하고 있는 탓이었다.

'저 얼음송곳이라면, 확실히 그럴만하지.'

놈의 자신감은 근거가 분명했다.

"아, 그런데 불공평하군."

"······뭐가 말이냐?"

"계산 대결인데, 다른 마법을 쓰면 그건 계산 대결이 아니지 않나?"

"다른 마법이 아니라 얼음송곳이다."

"어쨌든, 계산식이 다르지 않나."

"네놈이 그런 말을···."

놈이 잠시 씰룩거리다가 끄덕였다.

"타당하네. 그래, 여기 계산식이다."

놈은 아무렇지 않게 종이를 내밀었다. 간결하게 계산식과 답만 적힌 종이였다. 아무 상관 없다는 거겠지.

"고맙네."

"빨리 읽어라. 멍청해도 그 정도 이해력은 있을 테니."

갈라하드는 슬쩍 종이를 읽었다. 정신을 놓을 뻔할 정도로, 매력적인 수식이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되게 꼬았군.'

속도를 높이기 위해, 오히려 계산식을 복잡하게 만들었다니-.

'차라리 계산이 더 빠르다는 건가.'

당장 쓰기는 어려울 듯하여 일단, 종이를 챙겼다.

"자, 목표는 저기 있는 비행선이다."

황혼의 마탑주가 공중을 가리켰다. 떨어진 곳에 비행선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적당한 거리와 움직이는 대상이었다. 전보다 의심이 많은 놈이었다.

"잠깐."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들었다.

"또 뭐야?"

"규칙을 확인하고 싶네만."

"얼음송곳을 저기에 먼저 꽂는 놈이 이기는 거다. 여기에 어려울 게 있나? 멍청한 인간."

"수단이나 방법 말일세."

"수단? 또 무슨 개짓을 하려고?"

놈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를 들어, 내가 터지는 불꽃으로 얼음송곳을 밀어서 더 빠르게 하면? 괜찮나?"

"그러면 오히려 속도가 느려질 텐데. 아주 멍청한 질문이군."

"그래서 안 되나?"

놈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속으로 수만 가지 경우를 계산하는 듯했다.

'의심이 많아졌군.'

순수하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이내 황혼의 마탑주가 끄덕였다.

"상관없다. 동시에 시작하여, 먼저 얼음송곳을 꽂는 놈이 이기는 것이다."

갈라하드가 무슨 수를 써도, 본인이 이긴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다만, 실전에 완벽한 계산은 없었다.

변수는 항상 있기 마련이니까. 가령 얼음송곳이 날아가지 않고 공간을 넘는다든지-.

"자네, 입으로 말한 거네."

아우가 하나 생겼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나.'

보좌관 루나비른은 아드리안나의 옆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조금 퀭했다. 아주 사소했지만, 아드리안나였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아드리안나의 일과는 반복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몸 풀고, 부대 상황 확인한 뒤에 순찰 돌고, 바로 마족의 영역으로 간다.

그런데 요즘 그 일과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왜 아침마다 해가 뜨는 걸 보고 계시지.'

지금도 아드리안나는 성벽 위에서 해가 뜨는 걸 보고 있었다. 이제 일과의 하나였다.

"일곱 번째다."

"······네?"

"아니다. 준비는."

"아, 끝났습니다."

"잘했다. 네가 내 톰이다."

"네?"

"아니다."

루나비른은 이 이상한 일과가 시작된 지점을 떠올렸다.

정확히 갈라하드 대장이 수도로 떠나고 나서였다.

"아, 갈라하드 대장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입이 멈췄다.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루나비른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음, 갈라하드 대장이 수도의 사탕을 잔뜩 사 오기로 했다."

"그··· 그렇군요."

"수도의 사탕은 대륙에서 제일 사탕으로 유명하다. 전부터 수도의 사탕은 꼭 먹고 싶었다."

"······아하."

"그런데 갈라하드 대장이 수도로 간다고 하여서, 부탁한 것뿐이다."

"그러시군요."

"그래, 수도의 사탕은 제일이니까."

아드리안나의 격양된 반응에 루나비른은 터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갈라하드 대장은 통이 크지 않습니까? 사탕으로 마차를 채우면 어떻게 합니까?"

순간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풀렸다. 눈썹이 쭉- 올라갔다.

"······바쁘신 분이다. 그럴 시간은 없으실 거다."

"바빠서 안 사 오시면-."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이다. ······다만,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축- 내려갔다.

"무사히 돌아오시면 상관없다."

아드리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그러면 사탕은 상관이 없군요."

루나비른의 무의식적인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실수했다!'

루나비른이 황급히 사죄하려고 할 때-.

"그래,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구나."

아드리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사 오면 내가 죽인다.'

루나비른은 다짐했다.

173화 코르튼

수도의 내성 안에는 뾰족한 마탑들이 있었다.

현재 수도에서 가장 뜨거운 산업, 마도의 결정체인 마탑들은 그 하나하나의 위용이 상당했다.

황실의 금색 성벽을 중심으로, 마탑들이 둥글게 뾰족

솟은 모양이었는데, 그중 유난히 거대하고 높은 마탑이 있었다.

황혼의 마탑이었다. 마탑 중 1강으로 불리는 위용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자리를 옮기지."

황혼의 마탑주가 황혼의 마탑을 가리켰다.

"공정한 승부를 위한 완벽한 경기장이 있다."

그러니까 승부를 위해서 황혼의 마탑에 준비를 해뒀다는 건가?

'그때 당한 게 상당히 컸나.'

갈라하드는 슬쩍 끄덕였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황혼의 마탑주가 갈라하드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마나가 갈라하드를 꽉 잡았다. 사방이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망칠 생각은 없네만."

"네 역겨운 혓바닥은 안 믿는다."

"서운하군."

"닥쳐라."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소문이 무성한 황혼의 마탑에 들어갈 기회였으니까.

"따라와."

황혼의 마탑주가 다시 공중에 떠올랐다.

갈라하드 옆으로 길버튼과 베넷트가 다급하게 붙었다.

"어디 가십니까?"

"따라오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길버튼이 뒷말을 흐렸다. 그 시선이 멀리 가는 황혼의 마탑주를 향했다. 눈에 질린 기색이 가득했다.

"왜? 내가 질 것 같나?"

"저놈이 너무 괴물 아닙니까."

"맞네, 괴물이지. 혹자는 용이라고도 부르더군.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그런 놈과 대결이라니-. 심지어 지면 죽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기면 되겠군."

"아하, 그렇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길버튼 경, 나는 지는 승부는 하지 않네."

"이길 수 있습니까?"

"내가 질 것 같나?"

연초를 입에 물며 가벼이 묻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빨리 와라."

그때, 황혼의 마탑주가 독촉했다. 순간 마나가 뒤를 밀었다. 셋은 동시에 앞으로 떠올랐다.

"으익!"

"왜 야단이야."

"나는 높은 곳이 무섭다고!"

"진짜 지랄은-."

베넷트와 길버튼이 투닥거렸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사람 넷이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건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황혼의 마탑주는 숨길 마음도 없는 듯했다.

"황혼의 마탑주님 아니야?"

"공중에서 날아다니다니-. 새로운 마도구인가?"

"그런데 뒤에 있는 이들은 뭐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지금 갈라하드는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 코르튼'이었다. 갈라하드는 얼굴을 험하게 구겼다.

"참 험하게 생겼군. 북부인인가?"

"아, 소문 들었어.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가 마탑 장로들과 상위 마법사들을 두들겨 팼다고-."

"역시 북부는 무식하군."

갈라하드가 노력했지만, 시선은 길버튼에게 꽂혀있었다.

길버튼은 검을 뽑고 공중에 휘두르는 중이었다. 베넷트가 그를 뜯어말렸고-.

'천부적인 재능은 이길 수가 없군.'

황혼의 마탑까지 가는 동안 구경꾼들은 계속 따라붙었다. 내성에 있는 이들이 이런 이벤트를 놓칠 리가 없었다.

황혼의 마탑에 도착할 때쯤에는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황혼의 마탑주와 북부의 마법사 코르튼이 승부를 펼친다는군!"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

"여기부터는 너만이다."

그때, 마탑 앞에 선 황혼의 마탑주가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꼭 이기십쇼."

길버튼이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혼의 마탑주는 바닥에 서 있었다.

"여기부터는 마법 감지가 깔려 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생각보다 친절하군."

"입도 닫고."

내부는 오히려 밖보다 더 화려했다. 벽면에 마법진이 가득했는데, 하나하나가 굉장히 정교했다.

그 마법진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또 구성하는 구조였다.

'대단하군.'

그저 보는 것만으로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안쪽에 더 마도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철로 이루어진 마도구들은 기존의 보조 마도구와 흡사하면서도 묘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마도구가 마도구를 만들고 있어?'

어쩐지 마탑 중에서 생산량이 압도적이더만,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진짜 마도구 공장이었군.'

황혼의 마탑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쳤다.

중앙에 둥글고 투명한 원형 기둥이 있었다. 황혼의 마탑주는 그 문에 섰다.

감시형 마도구가 있었는데, 그 뒤에 살벌한 총구가 있었다.

'혼자만 다른 시대에 살고 있군.'

갈라하드는 걸음의 방향과 수를 기억했다. 그리고 감시 마도구의 반응 속도도 기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이었다. 가령, 언젠가 황혼의 마탑을 털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타라."

황혼의 마탑주가 짤막하게 명령했다. 갈라하드가 타자, 승강기가 위쪽으로 올라갔다.

'승차감은 별로군.'

벽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탑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도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것들도 있었다. 투박하고 거대한 갑주-.

"마도 기사도 네가 만든 건가?"

"불만 있냐?"

"출력이 좀 아쉽던데."

"하, 양산품 봤나 보군."

"수제작도 했나?"

"닥쳐라."

'했군.'

그게 양산품이면, 진짜는 어느 성능을 보일지 감도 안 왔다. 승강기 소음이 안을 채웠다.

갈라하드는 황혼의 마탑주를 만나려고 했던 목적을 상기했다.

그 실력을 비교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마족의 피에는 고농도의 마나가 흐르고 있다네."

황혼의 마탑주가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했다.

"알아."

"마법사의 피에도 마나가 담겨있다는 것도?"

"마법을 쓰는데 당연하지. 멍청하네."

삐딱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말을 골랐다.

"피에 마나를 담는 매개체가 뭔지 아나?"

마나의 새로운 성질, 장로들의 눈이 뒤집혔던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황혼의 마탑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다.

황혼의 마탑주는-.

"왜 피에 마나를 담아야 하지?"

짜증스레 반문했다.

황혼의 마탑주는 마나와 경계 자체가 없었다. 그런 황혼의 마탑주에게 피에 마나를 담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저 경지라면, 마나의 압축이 더 자유로울 테니까. 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족이 마나 농도에 영향을 받는 것도 알고 있나?"

"그래서?"

"최근 마도구로 인해, 수도의 마나 농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네만."

풉. 황혼의 마탑주가 조소를 머금었다.

"설마 마족이 두려운 거냐?"

황혼의 마탑주가 대놓고 비웃었다. 거만한 자세였지만, 그 존재감이 근거였다.

"그 찌꺼기들이 두렵다니. 참 인간다운 발상이군."

적나라한 조롱에 갈라하드는 할 말을 골랐다.

가장 궁금한 건, 역시-.

"마족의 왕이 있다면?"

갈라하드는 황혼의 마탑주 반응을 살폈다.

황혼의 마탑주는-.

"푸하하하하! 마족의 왕이라니!"

배까지 잡고 웃었다.

그에 갈라하드가 뭐라 덧붙이려고 하자, 황혼의 마탑주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계산이 느린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이론상 마족의 왕은 존재할 수 없어."

"이론상?"

"그래, 마나의 법칙을 따르면-. 됐다, 인간한테 말해서 뭐 하겠냐."

황혼의 마탑주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에 뭐라 덧붙이려는 순간, 승강기가 도달했다.

문이 열리자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탑의 꼭대기였다.

"네가 이기면 알려줄게. 왜 존재할 수 없는지."

황혼의 마탑주가 이죽거리며 내렸다.

"약속 지키게나."

황혼의 마탑주가 다시 크게 웃었다.

도착한 곳에는 두 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단단히 준비했군.'

마법 대결이라지만, 본래 마법사들끼리 가볍게 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본격적이었다. '얼음송곳 날리기'가 국제 경기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 이런 광경이지 않을까.

- 양 선수는 각자 자리로 위치하세요.

'심판이었군.'

무심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들어가."

황혼의 마탑주가 자리를 가리킨 뒤에, 자기 자리로 향했다.

- 1번 영역 황혼의 마탑주 확인되었습니다. 2번 영역······.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 코르튼이라네."

- 북부에서 온 코르튼 확인되었습니다.

황혼의 마탑주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외관도 마음대로 바꾸는 놈이었으니 당연했다.

- 양 선수 자리에 서주세요.

자리는 상당히 쾌적했다.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마도구까지 배치한 모양이었다.

'상당히 본격적이네.'

저 멀리 비행선이 있었다.

아래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위에서 보니 비행선의 크기가 상당히 거대했다.

'단단하겠어.'

혹시나 떨어질 가능성은 없을 듯했다.

여기는 내성이었다. 저 거대한 비행선이 떨어지면 참사였다. 최악에는 황실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놈, 더러운 수를 쓸 수 없을 것이다."

황혼의 마탑주가 이죽거렸다. 잔뜩 신난 모양새였다.

'속이 좁군.'

갈라하드는 손을 가벼이 풀었다.

- 승부는 다섯 판이고, 삼 점을 먼저 올리면 승리입니다.

무심한 목소리가 울렸다.

'5판 3선이라.'

혹시 모를 '만에 하나'까지 지울 생각인 듯했다.

일단은-.

'실력 좀 봐야겠군.'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손을 털었다.

구경꾼도 많으니까.

- 시작하겠습니다.

****

길버튼은 고개를 들었다. 탑이 상당히 높았지만, 그 끝에 자리가 있어서 모습이 보였다.

- 황혼의 마탑주와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 코르튼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붉은 불이 점등하면 황혼의 마탑주 득점, 초록 불이면 코르튼 득점입니다.

"진짜 황혼의 마탑주와 마법 대결을 한다고? 미쳤군."

"북부 놈이라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거겠지."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이것들이."

주먹을 쥐는 길버튼을 베넷트가 잡았다.

"추남, 여기는 내성이야 문제 일으키면 끝이야."

베넷트의 얼굴이 진지하여, 길버튼은 주먹을 풀었다.

"그래, 착하지. 아앙 추남 기사."

"이상한 별명 만들지 마."

모두가 황혼의 마탑주가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반대는 한 명도 없었다.

"멍청한 놈들."

"황혼의 마탑주는 마법사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인물이야. 업적과 실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최강의 마법사라고."

"똥이 아주 굵은 놈이군."

길버튼의 투박한 요약에 베넷트의 코가 씰룩거렸다. 길버튼은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장이 이긴다고 했으니까."

시원한 대답에 베넷트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다들 황혼 쪽에 걸면, 내기가 안 되잖나!"

한창 내기가 진행 중이었다. 그를 본 길버튼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길버튼은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돈이 하나도 없었다.

'얘한테 다 줬지!'

베넷트에게 전부 준 탓이었다. 길버튼은 다급하게 베넷트를 불렀다.

"그······ 돈 좀 빌려주겠나?"

"안녕하세요. 길버튼 고객님. 월 이자율은 백할이며, 상환 방식은 원리금 균등 분할 상환 또는 원금 자유 상환 방식 중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갚지 못하면 고객님의 신체 소유권이 제게로 이전됩니다."

"뭐라는 거야?"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래, 동의!"

"여기 있습니다. 길버튼 고객님."

길버튼은 주머니를 흔들었다. 아까 줬던 돈이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고맙다!"

길버튼은 '북부의 천재 마법사 코르튼' 쪽에 전부 걸었다. 베넷트가 말릴 틈도 없었다.

"이런 극악한 약세에 걸다니! 남자군! 남자야!"

"생김새부터 아주 상남자일세!"

사람들이 신나서 길버튼을 칭찬했다.

"후후, 나는 이제 부자다."

그때, 경기가 시작됐다.

- 첫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하늘을 올려봤다. 괴상한 불빛이 떠올랐다. 신호였다.

동시에 얼음송곳이 비행선에 쏘아졌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베넷트 눈에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저게 마법이라고?'

뒤에 다른 얼음송곳이 붙었지만, 이미 비행선에 꽂힌 뒤였다.

비행선이 붉은빛을 띄웠다.

첫 대결은 황혼의 마탑주 승리였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너무 압도적인데?'

- 두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비행선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신호가 떨어졌고, 마법들이 쏘아졌다.

'붉은색!'

그 격차가 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붉었다.

연속으로 황혼의 마탑주가 점수를 가져갔다.

'무리였나?'

하긴 갈라하드라도, 황혼의 마탑주를 마법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베넷트는 길버튼을 살폈다. 사채까지 끌어서 투자한 길버튼이었다.

길버튼이 연속된 패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됐다.

"후후."

길버튼은 오히려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연속으로 점수가 난 상황에서도 저런 굳건한 모습이라니-.

'믿음이 상당하네.'

베넷트는 묘하게 뾰족한 느낌이 들었다.

- 세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다시 신호가 터졌고, 마법이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끝이야.'

의아한 점은 갈라하드의 마법이 안 보였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비행선에 뜬 색은 초록색이었다.

'초록색?'

분명 황혼의 마탑주 마법이 먼저 꽂혔다. 그런데 왜 초록색이?

"이노오오오옴!"

위에서 뾰족한 소리가 터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뭔가 오류가 있었노라고 떠들었다. 길버튼도 끄덕였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얘는 왜?'

드디어 승리했는데, 길버튼의 반응이 상당히 태연했다.

- 네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승부를 알렸다.

안 그래도 빨랐던 마법이 더 빨라졌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허공에 선이 그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결과는-.

'초록색!'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여유롭게 웃던 이들이 다급해졌다. 당당하던 모습이 깨지는 것을 보니, 조소가 새어 나왔다.

길버튼은-.

"젠장, 대장!"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왜 그래?"

"이런 건 후반에 점수 내는 놈이 이긴다고! 기세라는 거지! 하필 후반에 몰리다니!"

그제야 베넷트는 깨달았다.

"추남, 우리가 무슨 색이지?"

"그걸 모르냐! 붉은색이지!"

"아니, 우리 초록색이야."

"음? 아까 분명 붉은색이라고 했는데?"

"응, 초록색이야."

길버튼의 얼굴이 격하게 씰룩거렸다.

그리고-.

"으하하하하! 역시 대장이다! 끝내버리십쇼!"

호탕하게 웃었다.

'참 편하게 사네.'

베넷트는 그런 길버튼이 부러웠다.

- 다섯 번째 마지막 경기입니다.

"끝내버려! 기세를 잡았다고!"

길버튼이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그때, 위쪽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탑으로 구름이 가득 끌려왔다.

그 중심에 황혼의 마탑주가 있었다. 예의 청년의 모습이 아닌, 소녀의 모습이었다.

'······꼬리?'

묘한 게 뒤에 달려 있었다.

"감히! 또 개수작을!"

그때, 황혼의 마탑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멀리 있는 이곳까지 그 존재감이 느껴졌다.

"대장-!"

길버튼이 검을 뽑아, 탑으로 뛰었다. 베넷트는 다급히 길버튼을 잡았다.

"지금 저기로 가겠다는 거야?"

"그렇다."

"위험해!"

"그러니까 가는 거지."

실로 투박한 대답에 베넷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는지-.

"이미 시작했어. 지금 가도 늦었어."

"젠장, 대장! 뭣하면 뛰어내리십쇼! 받을 테니까!"

길버튼이 검을 던지고, 양손을 번쩍 들었다.

"멍청한 아앙 추남 기사."

황혼의 마탑주 뒤로 마법진이 펼쳐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마법진이 찬란함을 뽐내며 공중에 자리했다.

가득 모였던 구름이 마법진에 빨려 들어갔다.

그 장엄한 모습에 모두가 공포도 잊고 멍하니 쳐다봤다. 꿀꺽-. 수많은 이가 모였지만,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황혼의 마탑주 로브가 거칠게 휘날렸다. 괴상한 꼬리가 연신 좌우로 움직였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 시작합니다.

무심한 목소리가 마지막 경기를 알렸다.

신호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빛을 뿜어댔다. 이제껏 봤던 어떤 것들보다 화려했다.

거대한 얼음송곳이 쏘아졌다. 그건 더는 얼음송곳이 아니었다. 얼음기둥이었다.ㄴ

그건 신호가 떨어진 순간, 비행선을 뚫었다.

그 거대한 비행선에 큼지막한 얼음기둥이 박혔다. 꼭 신이 던진 얼음창 같은 모습이었다.

황혼의 마탑주가 비틀거렸다. 그 주변으로 마나가 일렁였다.

그런데 정작 상대인 갈라하드는 손가락만 튕겼다.

탁-.

전과 달리 결과가 조금 늦게 떴다.

"초록불이다!"

비행선에 떠오른 건, 초록색이었다.

"나는 이제 부자다!"

길버튼이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그 황혼의 마법사가 졌다고? 심지어 그런 모습까지 보이고?

정작 그 상대는 멀쩡했다. 손가락 튕기는 게 전부였다.

그때-.

"어어, 저거 떨어지는데?"

누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대한 비행선이 힘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저 거대한 얼음기둥이 박혔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늘에 있어서 몰랐지만, 그 크기가 상당했다.

아니,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그런데 그 방향이-.

"어어? 화··· 황실로 간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 승자는 북부에서 온 천재 마법사 코르튼입니다.

무심한 목소리가 범인을 지목했다.

****

"아, 유명해지고 싶다-."

코르튼은 육포를 뜯으며 흥얼거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엉덩이도 씰룩였다.

174화 이종

계획은 간단했다.

공간 마법으로 얼음송곳을 비행선에 이동시키는 거였다.

황혼의 마탑주 마법이 빨라도 공간 마법보다 빠를 수 없었으니, 깔끔한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정석 대결로 승부에 임했다. 놈과의 차이를 느끼기 위함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어이가 없군.'

놈은 마나와 경계가 없었다. 그게 어찌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놈은 대기의 마나가 자신의 마나였다.

그건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었다. 대기의 마나가 아예 없다면? 놈은 마나 자체가 없을 것이다.

'그웬과 정반대다.'

그웬은 대기의 마나를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계산을 하지 못하니까.

대신 그웬은 그 마나통이 압도적으로 컸다. 심지어 더 커지는 중이었고.

지금은 황혼의 마탑주와 상대가 안 되겠지만, 만약 그웬의 마나통이 계속해서 커진다면-.

'그웬이 더······.'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전히 형편없군."

두 번 연속 이긴 황혼의 마탑주는 대놓고 이죽거렸다. 방심한 눈은 아니었다.

"그런가?"

갈라하드는 손을 풀었다.

세 번째 승부였다. 이제부터 승부를 가져올 차례였다.

이어서 신호가 터졌다. 갈라하드는 공간 마법을 이용했다. 승리는 당연했다.

"노오오오옴!"

황혼의 마탑주가 격한 호통을 터뜨렸다.

그 반응이 예상외였다.

'공간 마법을 알아봤군.'

"자네, 원시 마법을 알고 있군?"

갈라하드의 물음에 황혼의 마탑주가 입술을 씹었다. 그 시선이 갈라하드가 아닌 다른 곳을 향했다.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려?"

황혼의 마탑주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반응이 없었지만, 황혼의 마탑주는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가 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나를 뿌렸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반응을 보니, 뭔가 있는 건 분명했다.

'원시 마법을 이야기했는데, 곧장 누군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그때, 황혼의 마탑주가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적의 가득한 시선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다른 마법을 써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마법이 아니다. 마법이 아닌 역겨운 마족

놈들이 쓰는 권능을 해석한 것이지. 본인조차 포기한 실패작이다."

황혼의 마탑주가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본인조차?'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그때, 황혼의 마탑주가 서늘하게 노려봤다. 그 눈이 어울리지 않게 투명했다.

"자네, 질 것 같아서 그런가?"

황혼의 마탑주가 얼굴을 가득 구겼다. 그 입이 달싹거렸다.

"추하군."

한 마디 덧붙이자, 그 기세가 험해졌다. 당장 터질 듯한 느낌이었지만, 놈은 승부에 진심이었다.

"그래, 지금 마법의 정의를 논하는 건 어리석지. 알겠다."

황혼의 마탑주가 끄덕였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마나가 거칠게 휘몰아쳤다.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군.'

이어서 네 번째 승부가 시작됐다.

황혼의 마탑주가 마나를 거칠게 뿜어댔다. 안 그래도 빨랐던 얼음송곳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실로 놀라운 속도였지만-.

"음, 쉽군."

이제 2대2 동점이었다. 마지막 승부였다.

갈라하드는 공간 마법을 쓰는 중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공간 마법보다 빠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혼의 마탑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을 온전히 드러냈다.

주변 마나가 황혼의 마탑주에게 끌려왔다. 그에 구름까지 끌려오며 어두컴컴해졌다.

'괴물이군.'

그 막대한 마나에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본래 마나 압축은 심장을 통해서 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황혼의 마탑주는 그 자체로 압축했다.

실로 대마법사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갈라하드의 시선에 뭔가 보였다. 그건-.

'······꼬리?'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은 제마 전쟁 때 전부 죽었을 텐데?'

영광스러운 종족이자, 수호자인 용들은 마족이 일어섰을 때, 가장 먼저 그 앞을 막았다.

그리고 멸종했다. 이건 확실했다.

'황혼의 마탑주가 용이라고?'

황급히 수첩을 꺼내려던 갈라하드는 애써 참았다.

지금 중요한 건 승부였다.

황혼의 마탑주는 진심이었다. 방심할 수 없었다.

이쪽도 최대로 상대해야만 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탁.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비행선이 초록 불을 띄웠다.

이어서 황혼의 마탑주가 날린 거대한 얼음기둥이 비행선을 꿰뚫었다.

'실로 아름답군.'

갈라하드는 입을 벌렸다.

이런 멋진 마법이라니-. 이제껏 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저건 마법학의 집약체였다.

그때, 비행선이 기울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저 마법을 맞고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비행선이 떨어지면-.

'외성 쪽이다.'

내성과 달리 외성은 방비가 약했다. 밀집도도 높았다. 저게 떨어지는 순간, 역사적인 재해가 될 게 분명했다.

'외성은 안 된다. 차라리······.'

갈라하드는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에 금색 성벽이 보였다. 계산은 빨랐다. 황혼의 마탑주에게 향했다.

황혼의 마탑주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아우."

부름에 황혼의 마탑주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가득 일그러진 얼굴이 상당히 보기 좋았다.

다만, 그건 잠시였다. 이내 황혼의 마탑주가 끄덕였다.

"내가 졌다."

"그래, 아우."

으득-.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그때, 발에 뭔가 밟혔다. 꼬리였다.

"악!"

비명을 지른 황혼의 마탑주가 꼬리를 황급히 돌리려 했다.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더 깊게 밟았다.

"······내 꼬리를!"

황혼의 마탑주가 충격받은 눈으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꼬리가 약점이군.'

그를 깨달은 갈라하드는 꽉 밟았다. 황혼의 마탑주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꼬리가 밟히자, 황혼의 마탑주가 저항하지 못했다.

"그만! 그만 밟아라!"

"음, 촉감이 좋군."

"그··· 그게 무슨!"

황혼의 마탑주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

"비행선 조종은 어떻게 하지?"

"조종구를 통해서 한다. 발 치워!"

"어딨지?"

"여기!"

황혼의 마탑주가 손짓하자, 조종구가 갈라하드에게 날아왔다.

마력차의 핸들과 같은 모양새였다. 갈라하드는 냉큼 조종구를 움직였다.

설계가 얼마나 뛰어난지, 비행선은 떨어지는 중에도 움직였다.

"대단한 설계군."

"당연하지. 그만 밟아라!"

"이건 뭔가?"

"누르면 추진을 강화한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붉은 버튼을 냉큼 눌렀다. 비행선의 뒤에서 불이 길게 뿜어졌다.

안 그래도 빨랐던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인간! 조종 잘하는구나!"

"2종일세."

황혼의 마탑주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갈라하드의 신경은 비행선에 가득 쏠려 있었다.

비행선이 금색 벽을 아슬아슬하게 넘었다.

"대단한 조종 실력이다!"

황혼의 마탑주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거기는 황궁인데?"

"아하, 그렇군."

비행선이 정확히 황궁으로 향했다.

비행선이 박히기 바로 직전-.

황궁의 깊숙한 곳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그건 금색의 선이었다.

제국에 어울리는 찬란한 금색으로 된 선. 그 금색 선이 세상을 양단했다.

떨어지던 거대한 비행선이 작은 저항조차 없이 그대로 잘렸다. 금색 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뒤의 하늘조차 갈랐다.

가득했던 먹구름이 잘리며, 가려졌던 해가 떠올랐다.

찬란한 해가 다시 수도를 내리쬈다.

'말도 안 되는 검격이군.'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화려한 검격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을 때, 갈라하드는 그 너머에 있는 걸 봤다.

황실의 가장 깊은 곳, 거기에 방금의 기적 같은 검격을 휘두른 이가 있었다. 황제였다.

'단단히 썩었네.'

황제는 온몸이 검게 썩어 있었다.

구더기 같은 것들이 들끓듯, 온몸에서 볼록거렸고, 괴상한 쇠사슬이 몸을 묶고 있었다. 몸 곳곳에 뚫린 구멍에서 검게 썩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남은 건 얼굴밖에 없었다. 그 얼굴조차 간당간당했다. 저주가 목을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니, 인내하는 표정이었다.

아주 먼 거리인데, 황제가 정확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황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조각난 비행선이 황궁에 떨어졌다. 황궁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콰앙! 폭발이 황궁을 가렸다. 황제가 다시 사라졌다.

"자네, 제법이군. 잘 썼네."

갈라하드는 조종구를 황혼의 마탑주에게 건네줬다. 황혼의 마탑주는 제 손에 들린 조종구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나를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공격할 수 없으니까."

"협약인가?"

"말할 수 없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꼬리를 더욱 세게 밟았다.

"자네, 꼬리찜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나?"

"······잔악무도한!"

황혼의 마탑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 눈망울에 충격이 떠올랐다.

놈에게는 꼬리가 상당히 중요한 듯했다.

"자, 약속대로 대답하게. 마족의 왕이 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황혼의 마탑주는 순순히 끄덕였다. 역시 승복은 빨랐다.

"마나가 퍼졌으니까."

"마나가 퍼졌다?"

"그렇다. 왕을 형성하기에 마나는 너무 퍼진 상태다. 그게 내 일이지."

황혼의 마탑주가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을 타고 마나가 거칠게 뿌려졌다. 마치 파도치듯-.

'마탑이 아니라, 등대였군.'

그때-.

삐이이이이이! 경고음이 뾰족하게 울려 퍼졌다. 금색으로 무장한 황실 기사들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날아다니는 놈들도 있었다. 마도 기사였다. 마도 기사들이 벌 떼처럼 퍼졌다.

그 반응이 갈라하드의 예상보다 빨랐다. 상당히.

"자, 시간이 없군. 형이라고 불러보게."

"형."

황혼의 마탑주가 저항 없이 불렀다. 상당히 순순했다.

"용은 약속을 지킨다는 게 사실이었군."

"······나는 용이 아니다."

"그래, 자네도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이야기하지."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까 황혼의 마탑주가 응시한 곳이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아, 최대한 돕게나."

갈라하드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까마득한 높이가 갈라하드를 맞이했다. 순간 아찔함이 가득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빠르게 떨어졌다. 그때, 마나가 갈라하드를 감쌌다. 황혼의 마탑주였다.

마나가 갈라하드를 부드럽게 내려줬다.

아래는 혼란으로 가득했다. 금색 벽에 가로막혀, 황궁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들에게는 황궁에 떨어진 걸로 보이겠군.'

사람들은 헐레벌떡 도망가기 바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중 도망치지 않는 멍청한 놈이 하나 있었다.

"이쪽으로 떨어지십쇼!"

길버튼이 양손을 뻗고 소리쳤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착지했다. 길버튼이 내민 손을 머쓱하게 내렸다.

"설마 받겠다고 양손을 뻗고 있었던 건가?"

"예."

당당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중력 가속도에 관해서 설명하려다가 참았다. 이쪽 손해였다.

"마음은 고맙네. 길버튼 경."

"별말씀을. 무사하십니까?"

"무사하다네. 바로 가지."

갈라하드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길버튼이 뒤를 돌아봤다.

"빨리 안 오고 뭐 하나? 한시가 급하네."

"아니, 그게 돈을······."

"돈? 자네, 또 도박했나? 저번에 그렇게 잃고도?"

"크흠, 이번엔 땄습니다."

"그래? 그러면 돈은?"

"그러니까-."

길버튼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사람들은 혼란으로 가득하여 도망치기 바빴다.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길버튼 경, 수도에서 사람을 믿은 건가? 생각보다 독실하군."

"아니, 그래도-."

"교육비로 생각하게. 꽤 비싸게 치렀지만, 자네는 길버튼 경이니 대충 수지가 맞을 걸세."

"아, 베넷트는-."

"그녀가 할 일을 하겠지."

갈라하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길버튼이 입을 꾹 닫고 따라왔다.

다만, 그 걸음은 얼마 못 갔다.

"용의자 발견했습니다."

쿵! 갈라하드의 앞에 거대한 마도 기사들이 떨어졌다. 로봇 같은 모습이었다. 그 기세가 흉흉했다.

"등장 참 요란하군."

"뒤에도 있습니다."

길버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뒤로 꽉 막힌 상황이었다.

"앞으로 뚫지. 보조하겠네. 전진하게. 뒤는 보지 말고."

마도 기사 셋이 앞을 막은 상황이었다. 무리한 명령이었지만-.

"예."

길버튼의 대답은 단단했다.

길버튼은 오러를 뽑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 오러가 명료하게 타올랐다.

"마침 몸이 쑤시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길버튼이 곧장 앞으로 뛰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서늘한 안개가 길게 퍼졌다. 마도 기사가 빠르게 쇄도했다. 길버튼과 마도 기사가 검을 섞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길버튼의 몸이 흔들렸다. 크흑, 길버튼이 나지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힘에 밀린 것이다.

다만, 그건 찰나였다. 애초에 마물과 싸우던 길버튼이었다. 이 정도 힘에 당황할 짬이 아니었다.

길버튼의 검이 투박하게 움직이며, 마도 기사의 어깨를 노렸다. 마도 기사가 빠르게 기동하며 피했지만, 살짝 스쳤다.

그 갈라진 틈으로 안개가 스며들었다. 마도 기사가 작동을 멈췄다.

"좋은 승부였다."

길버튼은 투박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마도 기사의 머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도 기사 하나가 쓰러진 자리에 둘이 밀고 들어왔다.

"기사-!"

오러 두 개가 동시에 쇄도했다. 길버튼의 근육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그 빈틈을 얼음송곳이 노렸다. 마도 기사가 어깨를 움직여 피했다. 순간 중심이 흔들렸다. 길버튼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검이 마도 갑주를 길게 긁었다. 틈이 길게 벌어졌다. 안개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마도 기사가 다시 멈췄다.

길버튼은 눈에 힘을 주며 검을 휘둘렀다. 마도 기사의 머리가 떠올랐다. 마도 기사 하나가 쓰러졌고, 그 자리에 마도 기사 둘이 더 나타났다.

'제국 놈들 우라지게 많군!'

전장에서 지냈던 길버튼은 알고 있었다. 적진에서 걸음을 멈추면 끝이라는 걸. 길버튼은 걸음을 내디뎠다.

쏟아지는 검이 점점 더 많아졌다.

'늘었다.'

길버튼은 제 검이 더욱 예리해졌음을 느꼈다. 아마 그 빌어먹을 꼬맹이들 덕분이겠지.

어깨에서 뾰족한 통증이 올라왔다. 놈의 검이 어깨를 찔렀다.

'망할 꼬맹이들. 밥은 잘 먹고 있으려나.'

길버튼은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대장은 무사히 보내야만 했다.

그러니까-.

"기사! 길버튼!"

길버튼은 이를 악물며 전진했다. 일부러 어깨에 힘을 줬다. 어깨에 박힌 검에서 피가 거칠게 튀었다. 그를 정면에서 맞은 마도 기사가 당황한 듯 눈이 흔들렸다.

"네놈들 연약하군."

길버튼은 이죽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마도 기사의 갑주에서 불이 뿜어졌다. 길버튼은 피하지 않고 다시 전진했다.

길을 만들어야 했다.

"아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존재감이 주변을 짓눌렀다. 아니, 주변만이 아니었다. 내성 전체가 휘청였다.

둥. 묵직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마도 기사들이 그대로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자네, 어깨 장식이 멋있군."

갈라하드가 길버튼 어깨에 꽂힌 검을 보며 물었다. 그에 길버튼은 히죽 웃었다.

"기념품입니다."

"그렇군, 값은 제대로 지불했나?"

"예, 아주 제대로 줬죠."

둘은 낄낄 웃었다. 길버튼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갑시다."

"그래, 이쪽일세."

갈라하드가 앞장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버튼이 기념품을 세 개 정도 챙기고, 갈라하드도 하나 챙겼을 때쯤-.

"음, 상당히 집요하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둘은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도 갑주를 벗은 기사들이었다.

갈라하드는 상황을 복기했다.

'변수가 너무 많았군.'

첫째 황제가 직접 나설 줄 몰랐다는 것, 두 번째 비행선이 너무 쉽게 막혔다는 것, 세 번째 마도 기사의 수준이 높았다는 게 문제였다.

변수 하나도 위험한데, 그게 세 개나 쌓였으니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황혼의 마탑주도 더는 나설 수 없는 것 같고.'

애초에 형으로 부르는 게 조건이었다. 놈은 내성 안의 모든 마도 기사를 멈췄다. 이 정도면 상당히 인심 아니, 용심이 후한 거였다.

이번에는 다른 변수를 꺼내야 했다.

"그래, 계속 구경할 텐가?"

갈라하드는 위를 보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장, 정신 차리십쇼. 피를 많이 흘리면, 헛것들이 보이는데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길버튼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그만 구경하고 나오게나."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는 무시하고 덧붙였다.

"최초의 마법사여."

순간 공간이 얼어붙었다.

허공이 일그러지며, 노인이 나왔다.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눈도 안 보이는 노인이었다.

"네놈, 도대체 뭐냐?"

노쇠한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그런데 그 두근거림이 평소와 달랐다.

고통의 알이 주인 만난 개처럼 뛰었다.

"자네의 제자일세."

내 제자?

노인의 주름이 한결 더 깊어졌다.

175화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