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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 160-165

160화 북부의 방식

'좋군.'

갈라하드는 쓰러진 3대장을 보며 끄덕였다.

대장의 수준이 갈라하드의 예상보다 높았다. 

교육을 통한 검술이라 절제된 제국 기사와 달리, 북부의 대장은 투박했다.

3대장은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계속 전진했다.

검이 닿지 않았는데도, 아릿할 정도로 강렬한 투지였다.

'황실 기사 단장 바로 아랫급이겠군.'

본디 검은 투박할수록 더 빠르고 날카로운 법이었다.

전선에 평생을 있었던 이들의 검이, 수도 기사의 검보다 예리한 건 당연했다.

갈라하드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봤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제대로 본보기군.'

갈라하드는 본보기를 확실히 보일 생각으로, 일부러 힘을 아끼지 않고 상대했다.

그들에게 갈라하드는 제국에서 온 마법사였다. 그에 반해 상대는 북부의 대장이었다.

이렇게 많은 구경꾼 앞에서 갈라하드가 대장을 쥐어팼으니, 위축되는 게 당연했다. 

올라와서 지는 순간, 개망신을 당하는 거니까. 본디 사람은 가진 게 많으면 더 조심하는 법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갈라하드의 앞에 거대한 창이 박혔다. 창에 담긴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창대가 좌우로 휘었다.

고개를 들자, 결투장에 올라오는 사내가 보였다.

"4대대 대장 벨호프만이오. 도전하겠소."

부리부리한 인상의 사내가 갈라하드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내의 눈은 호승심으로 잔뜩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3대장이 개처럼 맞은 상황이었다. 지는 순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험한 꼴을 당할 텐데, 저리 당당하게 올라오다니-.

'상남자군.'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 북부답지.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그때-.

"2대대 대장, 리암이다. 나도 도전하겠다."

"그다음은 나요."

"후우, 들끓는군."

대장들이 분분히 호승심을 드러냈다. 갈라하드를 보는 눈이 전보다 더 뜨거웠다.

'전투에 미친놈들이군.'

그때, 쓰러져 있던 3대장이 정신을 차렸다. 

3대장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도전해도 되는가?"

재도전을 외쳤다. 얼굴에 패배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이글거리는 승부욕이 전부였다.

갈라하드는 북부를 얕봤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줄 서게."

갈라하드는 수통을 홀짝이며 끄덕였다.

대장들은 몸을 풀며 줄을 섰다.

'긴 하루가 되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미친.'

펌킨은 결투장을 올려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결투장은 붉은 피로 가득했다. 갈라하드는 그 중심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8대대 대장 베니존스요."

다음으로 올라온 사내가 피떡이 되어 쓰러진 사내를 옆으로 밀어서 치웠다.

이제 결투가 아니라 갈라하드에게 도전이었다.

지는 순간, 주변에 가득한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금색 봉으로 두들겨 맞을 것이다. 

대장급에게는 치명적일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대장들은 좋다고 달려들었다.

도대체 여기 놈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군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못생긴 기사가 있었다. 길버튼이었다.

펌킨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지면 대장급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습니까? 왜 스스로 나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하하. 아직 북부를 모르시는군요."

길버튼의 느끼한 웃음에 펌킨은 구겨지려는 눈을 애써 참았다.

"북부에서 강자에게 지는 건, 수치가 아닙니다.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않는 게 수치지요."

"저렇게 두들겨 맞는 것도 괜찮다고요?"

펌킨은 결투장을 가리켰다. 베니존스라는 대장이 어느새 엎어져서 갈라하드에게 맞는 중이었다.

"예, 그래도 도전했잖습니까?"

길버튼은 슬쩍 구경꾼들을 가리켰다.

"오래 버텼다! 대단하다!"

구경꾼들은 비난 대신 환호하고 있었다.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왁자지껄 떠들며, 방금 대장이 몇 초 버텼는지 내기했다.

'뭐 이딴 곳이-.'

펌킨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기 퍼스트란 사내와는 연인이십니까?"

길버튼이 느끼한 얼굴로 뜬금없는 소리를 던졌다. 그에 펌킨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인은 무슨-. 그런 거 아닙니다."

펌킨은 마치 벌레라도 붙은 것처럼 팔을 털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 어디 갔어?'

어느새 또 사라진 퍼스트에 펌킨은 욕을 중얼거렸다.

그때-.

"아, 다행입니다. 그러면······."

길버튼이 성큼 가까워졌다. 그 우수에 찬 눈에 펌킨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업이군.'

사내의 작업은 펌킨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펌킨은 적당한 변명을 떠올렸다. 

이럴 때는 퍼스트가 있으면 편한데-.

'미친, 내가 무슨 생각을.'

펌킨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길버튼이 입이 열렸다. 펌킨은 다급히 변명했다.

"죄송하지만, 결혼을 약속한 이가 있어서-."

"아,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예상외로 빠른 납득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뭐지 이 새끼?

그때, 길버튼이 손을 내밀며-.

"그······ 검 좀 만져볼 수 있습니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길버튼의 시선은 펌킨의 얼굴이 아닌 칼자루를 향해 있었다. 

그 눈이 잔뜩 끈적했다.

"싫어요."

펌킨은 질색하며 검을 돌렸다. 왠지 주면 검이 더러워질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검이라서-. 한 번만 만지면 안 되겠습니까?"

"싫다고요."

"아니, 한 번만······."

그때, 누군가 펌킨의 어깨를 잡았다. 익숙한 두꺼운 손, 퍼스트였다. 

퍼스트가 펌킨을 뒤로 부드럽게 당겼다.

펌킨을 뒤로 숨긴 퍼스트가-.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예약했네."

길버튼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예? 그러면 먼저 만지고 주셔도 됩니다."

"음, 그건 곤란하네만."

"왜 곤란합니까? 살짝만 만지겠습니다."

"절대 안 되네."

"아니, 만진다고 검이 닳는 것도 아니고-."

"아, 검 이야기였나? 난 펌킨의 승모근에 매료된 줄 알았네. 펌킨, 한 번 시원하게 보여주게!"

"크흠, 한 번만 만지겠습니다."

두 사내의 뜨거운 시선에-.

'난 왜 이런 것들만······.'

펌킨은 우울해졌다.

****

'전부 빠짐없이 수준급이군.'

갈라하드는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대장들의 검은 허례허식이 없었다. 지극히 실전적인 검술이었다. 

전선에서 벼린 검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법사를 상대할 줄 알았다면, 만만치 않았겠군.'

갈라하드는 코트를 가볍게 털었다.

"인정하겠다! 강하군!"

승복은 깔끔했다. 

이제 갈라하드에게 반발하는 대장은 없었다.

'진작 팰 걸 그랬군.'

역시 북부에서는 북부의 방식을 따르는 게 맞았다.

"다들 오게나."

대장들이 몸을 털면서 갈라하드의 주변으로 모였다. 대장들은 전부 멀쩡했다. 다음에는 강도를 좀 높여야 할 듯했다.

갈라하드의 앞에 대장들이 섰다. 그 눈에 여전히 호승심이 이글거렸다. 징한 놈들이었다.

"자, 나는 대공 전하의 대리일세."

담담하게 선언했지만, 전과 달리 불만은 없었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금색 봉을 매만졌다.

"뭐 내가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건 아닐세. 대공 전하가 워낙 내향적인 터라,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일들이 많지 않나? 그 부분을 메꾸겠다는 걸세."

내형적-?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입을 털었다.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가겠네. 지금 중요한 건 마석장일세. 북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사업이지. 그런데 최근 7대대 마석장이 습격당하는 일이 있었네. 소중한 일꾼들이 죽을 뻔했지."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졌다. 대부분의 마석장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듯했다. 

"마석장은 아주 중요한 사업일세. 사업을 펼치는 시기인데, 문제가 발생하면 상당히 치명적일 걸세. 아주 말이지."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그 마석장을 일일히 관리할 수는 없었다.

북부의 대장들에게 마석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건, 원숭이들에게 돈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었다.

원숭이들에게 돈을 알려주려면, 돈이 아니라-.

"이제부터 재정은 마석 할당제네. 마석장에서 나온 마석에 맞춰서 예산이 편성될 걸세. 가령 마석을 많이 캔 대대는 더욱 많은 예산을, 덜 캔 대대는 적은 예산을 받을 걸세."

돈의 가치를 바나나로 설명해줘야했다.

대장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에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높이 들었다. 금세 조용해졌다.

"하나씩 말하게. 자, 자네부터."

"돌멩이로 예산을 편성한다니 너무한 것 아니오!"

"그래, 너무하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에 의견을 제시한 3대장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테오도르, 가져오게나."

"예, 여기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냉큼 뛰어나와서 문서를 내밀었다. 그 뒤로 참모들이 쪼르르- 섰다. 갈라하드는 문서를 잘 보이도록 돌렸다.

"자, 이건 현재 북부의 재정일세. 알아보기 쉽게 표시했으니 확인해보게."

그때, 3대장이 손을 들었다.

"저는 글을 모릅니다만."

대장들이 따라서 우후죽순 손을 들었다.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북부에서는 글이 검을 느려지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좌관을 붙여두는 겁니다."

테오도르의 자그마한 보고에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게 북부였다.

"그래, 간단히 말하자면 북부의 재정은 곧 바닥나네."

담담하게 선언하자, 대장들의 얼굴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물론, 바닥나도 달라질 건 없을 걸세. 애초에 그대들은 무기를 직접 만들고, 마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지 않나. 식량도 직접 수급하니 굶어 죽을 일도 없겠지."

이어진 갈라하드의 설명에 대장들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단지 그대들 예산이 줄 뿐일세."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제야 대장들의 얼굴에 심각성이 떠올랐다.

"지금 얼마 되지도 않는 예산을 더 줄이겠다는 것이오! 망할! 술은 어떻게 마시라고!"

그들의 분노는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갈라하드는 한 발짝 나서며, 벌벌 떠는 테오도르를 슬쩍 뒤로 숨겼다.

"그대들의 노고는 알지만, 어쩌겠나 돈이 없는데."

그제야 대장들의 얼굴에 심각성이 떠올랐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이제 마석으로 예산을 책정하겠다고. 마석장 세 개만 유지해도 그대들이 지금 받는 예산보다 많을 걸세. 그런데 그 수가 더 늘어나면-?"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금색 봉을 빙글 돌렸다.

대장들의 시선이 금색 봉에 따라붙었다. 그들의 고개가 둥글게 움직였다.

그를 보며 갈라하드는-.

"이런, 자네들 부자가 되겠군."

담담하게 속삭였다.

대장들의 눈이 크게 타올랐다.

이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시선이 느껴진 갈라하드는 고개를 돌렸다.

성의 높은 곳에 있는 창문에 대공이 있었다. 대공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화려하게 하셨던데요?"

자밋이 다리를 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으며 연초를 털었다.

"원체 말을 안 듣는 놈들이라서. 제법 정리를 잘해뒀군."

저번에 왔을 때 휑했던 본부가 이제는 빼곡했다. 

예전 정보국에 있을 때, 자밋의 사무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원래 하던 일인데요. 그리고 톰도 있고."

자밋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톰은 한쪽에서 서류를 정리 중이었다. 그 눈이 살짝 부드러웠다.

"톰은 특무대일세."

갈라하드는 재빨리 경고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입맛을 다시는 자밋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러자 자밋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군. 고백은 하지 말게. 나는 결혼할 몸이니까."

"미안하지만, 저도 연하가 좋아요."

"그것 참 다행이군."

자밋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류를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서류를 받아서 빠르게 살폈다.

제국의 정세에 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딱히 눈길이 가는 건 없었다.

"황실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나?"

갈라하드의 요청에 자밋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황실이요? 지금은 불가능해요. 정보원이 없어서요."

"그렇겠군."

아무리 자밋이라도 없는 정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정보원이 있어야 정보가 모이는 법이었다.

"알아볼 경로는?"

"정보국 쪽을 회유하거나, 불법적인 경로를 찾아야겠죠."

"음-."

"최근 대형 계획이 실패했으니, 정보국은 더 단단히 잠글 테니, 후자가 나을 거예요."

"음, 굳이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나."

"······그러면요?"

자밋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연초의 불빛이 갈라하드의 얼굴을 밝혔다.

갈라하드는 상황을 차분히 되짚었다.

최근 여명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상대는 세밀한 계획을 짜는 놈이었으니, 당장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더불어 마석장도 단단히 관리했고, 그 기본적인 바탕도 마련했다.

그러니까-.

'자리를 좀 비워도 되겠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입을 열었다.

"수도에 좀 다녀오겠네."

깊게 풍기는 레몬 향에 자밋은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현재 정보국의 은퇴 대상 1순위에 올라 있을 것이다. 그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갈라하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보국 본부가 있는 수도에 자기 발로 가겠다니. 

상당히 무모한 행보였지만-.

'갈라하드니까.'

자밋은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밋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갈라하드가 간다면-.

"톰은 두고 가요!"

자밋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걱정하지 말게. 다 두고 갈 거니까."

갈라하드가 텁텁하게 웃었다.

자밋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갈라하드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얼빵한 두 놈이 있었다. 빗자루를 든 제임스와 걸레를 든 핸섬이었다.

"아, 저 둘은 데리고 가도 되나?"

"톰만 두고 가면요."

자밋은 냉큼 끄덕였다.

****

최근 정보국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최대 규모로 꾸린 은퇴 팀이 실패한 탓이었다.

정보국도 매번 성공하는 게 아니었기에, 실패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건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최대 규모로 꾸린 팀에서 돌아온 요원이 하나도 없었다.

'건방진 감찰실 놈들 뻗대더니-.'

작전과의 헤넷트는 눈을 찡그렸다.

감찰실의 실패였기에, 작전과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었다.

감찰실은 독자적인 부서였기에, 작전과가 관여하지 못했다. 작전과는 용품들 조달 작전 세운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작전과에는 실책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과에는 기회였다. 건방진 감찰실이 크게 고꾸라졌으니, 작전과가 치고 나갈 기회였다.

호재가 분명한데도, 작전과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그 원인은-.

"진짜 과장님은 왜 문을 막으라는 거야. 답답해서 화장실을 갈 수 없다고."

요란 떠는 작전과장 때문이었다.

감찰실의 실패한 소식에 작전과장은 화를 버럭버럭 냈다.

[그러니까! 갈라하드는 그냥 두라니까! 미친! 왜 못 찔러서 안달이야!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젠장! 이 멍청한 새끼들! 국장 이 새끼 어딨어!]

국장 멱살을 잡겠다고 날뛰는 것도, 세 명이나 붙어서야 겨우 말린 상황이었다.

"아니, 도대체 갈라하드라는 요원이 뭐길래-."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헤넷트는 투덩거리는 동료를 다급히 조용히 시켰다. 

다만, 이미 늦었다.

"아아아아악!!"

과장실 안쪽에서 길게 비명이 터졌다. 

헤넷트의 안색이 하얘졌다. 다른 동료들이 거친 욕설을 하며 동료를 노려봤다.

과장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기사처럼 중장갑을 입은 작전과장이 뛰어나왔다. 손에는 그 비싸다는 마도 방패까지 들려 있었다.

작전과장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 갈라하드가 온다! 갈라하드가 와!!"

공포가 가득 담긴 외침에 괜히 서늘해졌다.

161화 출발

'수도로 가기 전에 준비 좀 해야겠군.'

갈라하드는 끄덕이며 머리를 넘겼다.

"에포트는?"

자밋이 안쪽을 가리켰다.

"톰, 데미안 좀 불러주겠나?"

"예,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톰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재빨리 움직였다. 자밋이 뾰족한 눈으로 톰을 봤다.

"톰은 특무대라니까."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본부의 깊은 방에서 여인의 교성이 터졌다. 

'버릇 못 버렸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문 앞에서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갈라하드일세."

교성이 뚝- 끊겼다. 여인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왔나."

문이 재빨리 열렸다. 발가벗은 에포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꺼림직한 땀 냄새가 가득 풍겼다. 뒹구는 여인들이 보였다. 총 셋이었다.

"자리 좀 비켜주겠나?"

갈라하드의 요청에 여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꺼지라고!"

에포트가 소리를 버럭 질러 여인들을 쫓아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무슨 잘못 있다고."

"크흠, 맞다. 잘못은 아니지. 그렇지?"

갈라하드가 옆으로 비켰다. 여인들이 욕을 중얼거리며 문으로 나갔다.

여인이 완전히 나가자 갈라하드는 옷깃을 가벼이 털고, 에포트를 응시했다.

"그래, 이해하네. 자네는 발정 난 개새끼니까."

에포트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그러니까 이 방식이 맞지."

"아니, 말로 해도 알아들을-."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금색 봉을 휘둘렀다. 에포트는 피하려다가 움찔 멈췄다.

역시 본능이 뛰어난 놈이었다.

"피하면 배로 늘어날 걸세."

"······빌어먹을."

에포트는 군말 없이 몸을 말았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무심하게 휘둘렀다.

퍽퍽, 경쾌한 소리가 리듬에 맞춰서 터졌다.

"아파! 아프다!"

"매는 아픈 법일세."

한참이나 두들기고 나서야 갈라하드는 매를 멈췄다.

에포트는 그대로 엎어졌다. 에포트가 한결 순해진 눈으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확실히 짐승에게는 매가 약이었다. 

"근무 시간에는 근무만 하게."

"알겠다. 알겠어-."

"아, 그리고 자네와 비슷한 종류의 아이가 있네. 그 아이를 훈련시키게."

"훈련이라니-. 맹수에게 필요한 건 암컷과 술, 고기뿐이다."

에포트가 으르렁거리며 웃었다.

"그렇군."

"그렇다."

"그래, 덜 맞았군."

"아니, 그게 아니라-."

금색 봉이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아악! 알았다! 알았어!"

에포트가 납작 엎드려서 손만 번쩍 들었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겼다.

"다음은 없네."

에포트의 눈이 끔벅였다. 이내 천천히 끄덕였다. 

"데려왔습니다."

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데미안이 뚱한 눈으로 올려보고 있었다.

"자, 데미안. 이쪽은 에포트라고 하네. 에포트, 이쪽이 데미안일세."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에포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를 보는 맹수와 같은 모양새였다.

하얗고 작은 짐승과 검고 거대한 짐승-.

그때, 데미안이 에포트를 가리키며-.

"구웠어요?"

상당히 불순한 발언을 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 그건 인종 차별일세."

"왜요?"

"그런 게 있네. 아무튼, 에포트, 데미안은 자네와 비슷한 계열일세."

"여자처럼 생겨서 재수 없게 허약한 놈이 나와 같은 과라고? 어이가 없군."

"저는 하얗고 잘 생겼어요."

에포트가 이를 드러냈다. 데미안은 아무렇지 않게 칼자루를 잡았다.

'확실히 짐승들은 상대를 바로 파악하는군.'

에포트가 먼저 뛰었다. 그 몸놀림은 기사보다 맹수에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데미안은 자연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둘은 칼을 발톱처럼 휘둘렀다. 검술보다 맹수들의 싸움에 가까웠다.

"너 물이 잘못 들었구나. 맹수가 사람 흉내를 내다니-. 어이가 없군."

에포트의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이 가득했다.

그에 데미안은-.

"저는 마법사가 될 거라서요."

비스듬히 검을 휘둘렀다. 간발의 차이로 피한 에포트가 재밌다는 듯 끌끌 웃었다.

"짐승이 마법사라니-. 듣던 개가 웃겠군."

"개는 웃지 못해요."

둘이 다시금 뒤엉켰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되겠군.'

에포트의 얼굴에 활력이 가득했다. 동족을 만났다고 느낀 듯했다. 

물론, 데미안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지만.

콰아아앙! 데미안이 비스듬히 뛰었다. 에포트의 검이 벽을 길게 갈랐다.

벽이 두부처럼 썰리며 가벼이 무너졌다. 그 너머로-.

서류를 정리하던 자밋이 보였다. 

자밋의 고운 이마가 구겨졌다.

"나가서 싸워요."

자밋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에포트와 데미안이 뚝- 하고 멈췄다.

"하하, 갈라하드의 부탁이라서 말이지."

에포트가 데미안의 어깨를 잡으며 웃었다.

"이거 묻는 거 아니에요?"

데미안이 에포트의 손이 닿은 어깨를 털며 물었다.

"데미안, 그건 인종 차별일세.""땀이요?"

"음, 아닐세."

갈라하드는 슬쩍 물러났다.

둘이 으르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다음은 그웬인가.'

갈라하드는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은 전보다 더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곳곳에 마탑 특유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걸 이해 못 한다고? 네가 그러고도 마법사냐! 똥 덩어리지!"

"맞다! 똥이 아깝군!"

장로들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있었다. 그 대상은-.

"자네들이 못 가르치는 거 아닌가!"

잔뜩 맞았는지, 얼굴 곳곳이 터진 코르튼이었다.

"자네들? 이놈이 지금 자네들이라고 한 거냐?"

"거- 같은 장로끼리 너무한 거 아니오!"

"같은 장로?! 하! 이런 미친 똥을 봤나!"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장로들이 기가 찬 듯 허허 웃었다. 코르튼도 따라서 허허 웃었다. 장로들의 웃음이 싹- 멈췄다.

그때-.

"저도 모르겠는데요!"

그웬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처음부터 알 수 없지! 어디를 모르겠느냐?"

"한 번 천천히 이야기해보거라."

"나한테는 똥이라더니!"

코르튼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 올라왔다. 장로들은 코르튼을 무시하고 그웬에게 붙었다.

"전부 다요!"

"이런, 우리가 못 가르쳤나 보다."

"맞다. 원리가 뭐 중요하겠느냐? 결국,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과정인데."

장로 둘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웬을 다독였다.

"나한테는 똥이라며! 쟤는 왜 칭찬하는 것이오!"

코르튼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장로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우우우울-!"

"아니, 주문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허허, 주문이 뭐가 중요하겠느냐. 마법을 쓰는데."

"그래, 우리가 구시대의 늙다리인 것이지."

장로들의 이마에 핏줄이 올라왔지만, 장로들은 금세 다시 웃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갈라하드다! 갈라하드-!"

"늦었구나! 마법사가 마법 연구는 안 하고 어디를 다니는 것이냐!"

장로들이 떽떽거리면서 다가왔다.

"그래, 생명력은 좀 느꼈습니까?"

"아니, 도통 어렵더구나. 무엇보다 마족의 피라는 거 너무 독하더군."

"그래, 이놈은 마시다가 기절까지 했다."

장로들의 표정이 진지했다.

"음, 마족의 피가 조금 따갑지만, 그 정도는 아닐 텐데."

"그 정도는 아니라니-. 죽다 살았다니까?"

"안 죽었잖습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장로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아드리안나를 잡았을 때와 비교하면 그 정도는 고통도 아니었다.

"크흠, 나는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한 적 없다. 이 벌건 놈이 유난 떤 거지."

"뭐라?! 더 마시다가 죽을 수도 있다며 멈춘 건 네놈이잖아!"

"내가 언제!"

금세 또 투닥거리는 둘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장로들을 잡아줄 필요는 없었다. 더불어 그웬을 굳이 부탁할 필요도 없을 듯했으니-.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갈라하드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도움? 뭐든지 말하거라. 원한다면 내 금고도 줄 수 있다!"

"나는 금고에 내 손녀도!"

"너 결혼 했었냐?"

"아니!"

"진짜 염병하네!"

갈라하드는 손을 휘저어 장로들을 조용히 시켰다.

"잠시 수도에 다녀올 건데. 황혼의 마탑주를 만나고 싶습니다."

장로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마치 끔찍한 이야기라도 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그 괴물을 말이냐?"

"으흠, 좋지 않은 생각이다."

둘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능한 반응이었다.

황혼의 마탑주는-.

"놈을 만났다가 폐인이 된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 놈은 심연이야!"

마법사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이니까.

황혼의 마탑주를 마주하고 폐인이 된 마법사들 이야기는 제법 유명했다.

[음, 네 건 천박해. 내 취향 아니야.]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나겠다는 것이냐?"

"예, 알아볼 게 있어서."

장로들이 침음성을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을 가지고 가서 장로회에 요청해라."

"내 것도 가지고 가라."

둘이 동시에 팬던트를 내밀었다. 각각 마탑의 문장이 새겨진 팬던트였다.

'장로회라.'

이 정도면 황혼의 마탑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조심해라. 놈은 심연이니까."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 절대 놈과 대립하지 말거라."

장로가 다시금 경고했다. 갈라하드도 황혼의 마탑주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예, 뭐 좀 물어볼 생각입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도대체 뭐가 궁금하길래 놈을 만나는 거냐?"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웃었다.

****

"······수도로 말입니까?!"

아드리안나가 드물게 높은 목소리를 냈다.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말일세."

"얼마나 걸리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다급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북부에서 갈라하드 대장은 중역이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우신다고 하셔서, 당황했을 뿐입니다."

"그렇군. 해가 열 번 뜨면 올 걸세."

"열 번.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음, 전 직장에 확인할 게 있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아드리안나는 뭔가 집중하는 얼굴이었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중요한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편지하겠습니다."

"편지 말인가?"

"예, 레드 버드는 대륙을 누빌 수 있습니다."

레드 버드-. 처참한 작명을 보니, 대공이 준 붉은 매의 이름일 듯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휘파람을 불었다.

붉은 매가 하늘에서 내려와 자연스럽게 갈라하드의 어깨에 앉았다.

'이렇게 멋들어진 매에게 레드 버드라니 최악이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네, 편지하겠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혹시······."

아드리안나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아드리안나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무슨 질문을 하려고 저리 망설이는지-.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드리안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사탕 좀 사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은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였다.

붉어진 얼굴과 손떼 가득 묻은 주머니.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니, 수도의 사탕이 그리 맛있다고 하여서. 그 혹시 부담되시면 괜찮습니다······."

깊게 내려간 눈썹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겠네."

"주머니는-."

"괜찮네, 사탕 그거 얼마 안 하니까."

갈라하드는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만 챙겼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주머니를 다시금 내밀었다.

"이렇게 많이 필요 없다니까."

"그게 아니라-. 최대한 많이 사다주셨으면······."

갈라하드는 잠시 주머니를 보다가, 금화를 하나 챙겼다.

"······이거면 될 걸세."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활짝 웃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갑자기 웃지 말게. 반칙일세."

"예?"

그때-.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

퍼스트였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는 얼굴의 퍼스트가 다가왔다.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래, 퍼스트."

"수도로 간다고 들었다."

"맞네, 정보를 좀 이을 필요가 있어서."

퍼스트가 성큼 가까워졌다. 일그러진 얼굴에 떠오른 건 분노였다.

"갈라하드, 왜 내가 아닌 놈들을 선택한 거지? 설마 네놈 나를 얕보는 거냐?"

퍼스트가 가득 누른 목소리로 따졌다. 그에 갈라하는 고개를 저었다.

"국장이 자리를 비우면 부국장은 상주해야지."

"핑계는 필요 없다. 내가 고작 혈연에 의존하여, 흐린 판단을 내릴 것 같나?"

퍼스트의 맹렬한 분노가 갈라하드를 압박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세."

"그러면 도대체 왜 내가 아닌 놈과 같이 가는 거냐!"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순간 귀가 먹먹했다.

아무래도 모욕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 국장인 내가 자리를 비우면 부국장은 자리해야 하기 때문일세."

"그딴 핑계-."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기다려 주겠나? 아, 고맙네. 먼저 나는 대륙 정보국을 진짜 정보국으로 만들 생각일세. 이건 장난이 아닐세."

갈라하드는 퍼스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퍼스트가 이를 갈았다. 빠드득, 살벌한 소리가 들렸지만, 말을 끊지는 않았다.

"본부는 중요하네. 믿을 만한 이가 하나는 지키고 있어야지. 그러니 자네를 남겨둔 걸세."

일그러졌던 퍼스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이내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그래, 자네가 믿을 만한 건, 영원한 경쟁자인 나밖에 없지. 암, 내가 본부를 지켜야지! 합리적인 판단이군! 역시 갈라하드일세!"

퍼스트가 호방하게 웃으며 갈라하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나만 믿고 편히 다녀오게나."

퍼스트가 두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반대쪽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저도 있습니다."

가늘게 눈을 뜬 아드리안나였다.

왠지 노려보는 둘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손 떼게."

갈라하드는 퍼스트의 손을 떨어뜨렸다.

"왜 나만-!"

퍼스트가 잔뜩 서운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드리안나의 턱이 조금 올라갔다.

"자네도."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진짜 이대로 갑니까?"

길버튼은 갈라하드를 위아래로 보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검은색 말에 타서 그저 가방 하나 든 상태였다. 말 옆에 달린 짐도 톰이 겨우 챙겨준 거였다.

심지어 마차조차 끌지 않았다. 갈라하드의 신분에 비하면 지나치게 단출했다.

"적당히 놀릴만한 기사 하나, 며칠 치 식량과 갈아입을 옷, 금화가 담긴 주머니. 뭐가 더 필요한가?"

길버튼은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있을 건 다 있군요."

"그렇지. 필요 이상의 물건은 짐일세. 자, 출발하지. 갈 길이 멀다네."

갈라하드가 고삐를 잡으며 웃었다. 그 뒤로 어벙한 기사 둘이 끄덕였다.

'어리버리한 것 보니, 적당히 놀릴만하군.'

길버튼은 후후- 웃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한테 보고는 올리셨습니까?"

"음, 대공 전하한테 보고를 왜 올리나? 내가 대공 대리인데."

"······예?"

"내가 승인했네."

갈라하드는 금색 잔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대공 대리니까 대공 전하한테 보고 올릴 필요 없이 본인이 승인했다는 건가?'

조금 이상하지 않나? 그래도 보고는 올려야 하지 않나-. 

의문이 들었지만,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모든 걸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자, 출발하지. 갈 길이 머네."

갈라하드가 말을 두드렸다.

검은 말이 거침없이 눈발을 달렸다.

명마답게 그 속도가 순식간이었다.

"너무 빠릅니다! 젠장!"

길버튼이 불평하며 따라붙었다.

뒤로 제임스와 핸섬이 다급히 따랐다.

****

"구닥다리 마법은 재미없다니까."

큰 로브를 입은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그를 따라서 주변으로 화려한 불빛이 터졌다. 마치, 청년의 고갯짓에 마나가 반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앞에는 수염이 지긋하게 난 노인이 있었다. 눈에 주름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노인은 가만히 소년을 응시했다.

"원시 마법을 구닥다리라고 부르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구닥다리 맞잖아? 결국, 실패한 마법이고."

"그래서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너한테 온 거 아니냐. 황혼의 마탑주여."

노인의 질책에 소년은 가벼이 혀를 내밀었다. 그에 노인의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마탑주여- 그 말투도 짜증 나. 무슨 책에서 나온 거야? 아니,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건가?"

소년이 입꼬리를 올리며-.

"최초의 마법사여-."

이죽거렸다.

그에 노인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노인 주변으로 공간이 크게 일렁였다.

"해보자는 건가?"

청년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뒤로 마나가 거칠게 일어났다. 그건 이제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었지.

'대마법사-.'

최초의 마법사는 침침한 눈으로 혀를 찼다.

왜 하필 저런 무식한 재능이 저런 놈에게-.

"원시 마법은 그냥 무식한 마법이라니까. 이해하는 걸 떠나서, 그냥 시간을 가득 퍼부어야 하는 그런 쓰레기 같은 마법이라고. 비효율적이야."

청년의 담담한 선언에 최초의 마법사는 침음성을 흘렸다.

애석하지만 사실이었다.

"물론, 내 재능이 있다면 시간을 단축하겠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바빠서. 다른 사람 찾아봐-."

소년이 뒤로 벌러덩 엎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최초의 마법사는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162화 간통

북부를 벗어나니, 기후가 급격하게 변했다.

늘 쏟아지던 눈보라 대신 푸릇푸릇한 초록색이 가득했다.

"······뭐가 이렇게 덥습니까?"

길버튼이 땀을 가득 흘리며 투덜거렸다.

"더운 게 아니라, 따뜻한 걸세."

"겁나 덥습니다만."

갑주 안쪽에 내장재를 덧댄 탓인지, 그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아, 저번에는 겨울에 왔었지. 지금은 여름이겠군."

수도가 있는 중앙은 사계절 내내 적당히 따뜻하고 선선했다. 날씨가 좋아서 황제가 수도로 정했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푸릇한 초록이 가득한 곳 저 멀리에 수도가 보였다.

수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괜히 대륙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북부의 벽만큼은 아니지만, 거대한 성벽이 끝에서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그 안쪽으로 건물이 수없이 가득했다. 멀리서 보면 꽉꽉 눌러담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황실이 있는 내성은 금으로 된 성벽으로 막혀서 보이지도 않았다.

"돈이 참 많나 봅니다."

"많지. 셀 수도 없이 많을 걸세. 대륙의 주인인 제국이니까."

길버튼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담담히 끄덕였다.

"슬슬 준비하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에서 내렸다. 뒤에 있던 제임스와 핸섬이 공손하게 가방을 내밀었다.

부탁한 적 없지만, 가방에는 깔끔한 정장과 가짜 수염, 붙이는 살점이 있었다. 자밋이 준비해 둔 거였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마법으로 얼굴을 씻은 뒤에 살점과 수염을 붙였다.

"······마법입니까?"

길버튼의 경악한 반응을 보니, 제대로 한 듯했다. 

핸섬과 제임스도 그때쯤 준비가 끝났다.

갈라하드는 가방을 확인했다. 가방 안에 정장이 하나 더 있었다. 톰이 준비한 듯했다.

"길버튼 경, 덥다고 그랬나?"

"예, 죽을 것 같습니다."

길버튼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가방을 길버튼에게 던졌다.

"갈아입게."

길버튼은 재빨리 가방을 챙겼다. 상당히 더웠던 듯했다.

길버튼이 환복할 동안 다른 요원들은 말의 복장을 점검했다. 이내 길버튼이 갑주를 벗고 정장을 입었다. 

"저는 그거 안 주십니까?"

길버튼이 갈라하드의 수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변장을 위한 걸세. 자네는 얼굴이 알려진 게 아니니까."

"크흠, 그래도 하나만 주시면 안 됩니까?"

갈라하드는 남은 수염을 건넸다. 

길버튼이 신나서 수염을 붙였다. 얄쌍한 길버튼의 염소수염이 제법 그럴듯하게 가려졌다.

'저거 때문이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차며,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변장이야 갈라하드의 전문이었다. 핸섬과 제임스도 그래도 정보국 요원이었기에 그럴듯하게 해냈고.

길버튼이 조금 문제였지만-.

'촌티 나게 생겨서 오히려 의심받지 않겠군.'

히죽 웃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들고 수도로 상경한 청년 모양새였다. 마도구 산업이 떠오르면서, 수도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하만 도시에서 상경한 청년들일세. 부모들은 하만 도시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고, 마도구가 돈이 된다는 말에 수도로 온 걸세. 자, 그러면 대륙의 심장으로 가볼까."

갈라하드는 먼저 고삐를 당겼다. 말이 천천히 전진했다.

수도의 성문은 각 방향을 따라서 총 네 개였다. 수도의 그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그 수가 지극히 적었다.

성문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도의 검문은 의외로 널널했다.

애초에 신분을 증명할 게 그리 많은 시대도 아니었고, 유동 인구가 넘쳐나는 수도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건 내성에 있으니까.'

외성과 반대로 내성으로 들어가는 검문은 상당히 빡빡했다. 마도구까지 이용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탓에 외성은 깔끔하게만 입어도 통과할 수 있었다. 단지-.

"음, 조금 의심스러운데?"

대놓고 돈을 요구할 뿐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경비대가 번뜩이는 눈으로 갈라하드를 응시하며 입맛을 다셨다.

노골적인 뇌물 압박이었다. 경비대가 합법적 깡패라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경비대는 인센티브제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아이고, 의심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임스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제임스는 익숙하게 경비대의 손을 잡으며 매달렸다. 그 사이로 은화가 반짝였다.

"크흠, 내가 오해했군. 잘생긴 청년들이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나."

히죽 웃던 경비대가 길버튼을 쳐다봤다. 경비대의 눈이 씰룩였다. 거기에 핸섬까지 보자-.

"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길버튼과 핸섬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못생긴 죄로 은화를 하나 더 내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비가 통행비를 받다니-. 말이 됩니까?"

길버튼이 격한 목소리로 불평했다. 저번에 갈라하드를 데리러 수도까지 왔을 때는 대공 문장이 박힌 마차를 탄 터라 안 당한 듯했다.

"관행일세."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한다니-. 위쪽에서 뭐라 안 합니까?"

"왜 뭐라 하겠나. 그 위쪽으로 올라가는 돈인데."

"너무 썩은 거 아닙니까?"

"전통일세. 저들은 박봉이라서. 너무 뭐라하지 말게. 경비대는 열심히 지키는 이들이니까."

성문을 통과하자, 안쪽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바닥에는 대리석이 길게 깔려 있었고, 하수도도 있었으며, 곳곳에 마도구 가로등까지 있었다.

'대단하군.'

오랜만에 온 수도는 상당히 쾌적했다. 거리에서 향기까지 나는 느낌이었다.

정작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나 농도가 올라갔다.'

갈라하드가 있을 때보다 마나 농도가 올라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마나 화살이 떠올랐다. 그 크기로 보면-.

'1.3배 정도인가.'

북부에서 온 갈라하드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마나 농도였지만, 그 농도가 전보다 분명히 올라갔다.

수도의 농도가 올라갈 건 예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마도구가 모이면 농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다만-.

'예상보다 빠르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하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들자, 비행 중인 물체가 보였다.

그건 좌우로 늘린 풍선처럼 생긴 거였는데, 그 크기가 웬만한 집만 했다.

'······비행선?'

갈라하드도 처음 보는 물체였다. 그 제일 아래에 그려진 문장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황혼의 마탑 것이군.'

어쩐지 규격을 넘어선 마도구더니만, 황혼 쪽 물건인 듯했다.

아직 시제품은 아닌지,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그저 공중에 뜬 게 전부인 듯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저건 뭡니까?"

길버튼이 입을 쩍 벌렸다.

"비행 마도구인 것 같군."

"수도에는 원래 저런 게 있습니까?"

"그래, 정신 바짝 차리게. 수도는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이는 곳이니까."

"에이, 농담하지 마십쇼."

"농담을 즐겨하지만, 이건 농담이 아닐세."

갈라하드가 진지하게 끄덕이자, 길버튼의 안색이 굳었다.

"자네들은 흩어져서 뻐꾸기들을 찾게나.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게."

갈라하드는 핸섬과 제임스에게 말했다. 그에 둘이 굳은 얼굴로 끄덕이고 멀어졌다. 둘은 금세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라졌다.

어딘가 얼빵하지만, 그들은 정보국 요원이었다.

"이쪽일세."

갈라하드는 앞장서서 걸었다.

수도의 사람들은 북부와 전혀 달랐다. 그 얼굴은 기름이 번지르르했고, 복장은 깔끔했다.

시끄럽게 싸우는 이들도 없었다. 다들 목소리가 조용했지만, 우습게도 갈라하드는 묘한 껄끄러움을 느꼈다.

이내 도착한 곳은 깔끔한 저택이었다.

갈라하드는 둥근 마도구를 하나 꺼냈다. 마도구를 문에 대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안쪽으로 관리가 잘된 정원이 보였다.

"들어오게나."

"여긴 어디입니까?"

"혹시 몰라서 준비해 둔 곳일세."

"······혹시 몰라서 수도에 이런 저택을 준비했다는 겁니까?"

길버튼의 질린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안쪽에서 여인 하나가 나왔다. 갈라하드를 발견한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활짝 웃으며 다가온 여인이 갈라하드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여보, 왜 이렇게 늦었어요?"

부드럽게 투정을 부렸다.

"일이 많았네. 일단, 들어가지."

"네~."

갈라하드와 여인이 익숙하게 저택으로 들어갔다. 

길버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북부에서 간통은 사형입니다."

저택에 들어선 길버튼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버튼 경,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 미인이 여보라고 부른 거 아닙니까?"

길버튼이 여인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여인은 그때쯤 의자를 빼주고 있었다.

"쯧, 자네가 설명하게."

갈라하드는 여인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여인이 길버튼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갈라하드님의 비밀 안가를 담당하는 집사, 베넷트입니다."

"······집사? 아니, 분명 여보라고-."

"여보라는 호칭이 경계를 누그러뜨린다는 연구 결과에 기인한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베넷트의 차분한 설명에 길버튼의 눈이 씰룩거렸다.

"길버튼 경은 한번 말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네."

"아, 그렇군요. 북부인들의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연구도 있었습니다. 저 짧은 문장의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셨습니까?"

베넷트의 차분한 물음에 길버튼의 얼굴이 연신 씰룩거렸다.

"그러니까 집사랑 결혼했다는 겁니까? 그것도 간통입니다!"

"역시 이해 못 했군."

"호오- 흥미로운 이해력입니다."

베넷트가 길버튼을 흥미로운 눈으로 봤다. 길버튼은 한껏 진지했다.

"그러면 북부인의 낮은 이해력에 맞춰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저.는.갈.라.하.드.님.의.비.밀.안.가.를-."

"젠장! 말이 빠른 게 문제가 아니라-."

"아하, 그러면 어느 부분에서 이해가 안 되셨습니까?"

"그쪽이 대장을 여보라고 불렀잖습니까."

"아, 그렇군요. 여보라고 부르면 전부 부부입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하, 여보." 

"예? 아니, 왜 나한테-."

"제가 그쪽을 여보라고 불렀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부부겠군요."

"그게 무슨 개 같은······."

"자, 재산을 공유합시다. 여보는 재산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대장, 이 여자 도대체 뭡니까."

길버튼의 질린 얼굴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베넷트, 그만 놀리게. 베넷트는 내 비밀 안가를 관리하는 집사일세. 위장으로 여보라는 호칭을 쓰는 것뿐이지."

"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저는 대장을 믿었습니다."

길버튼의 안도한 모습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테이블에 놓인 보고서를 확인했다.

저택의 자금 사용 내역이 적힌 보고서였다. 딱히 특이할 건 없었다.

간혹 '사랑스러운 베넷트 간식'이나 '사랑스러운 베넷트의 일탈'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용인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간식 좀 늘었군."

"아무래도 성장기라서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고 보니 좀 큰 거 같군."

"열심히 먹었습니다."

베넷트가 뻔뻔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보고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길버튼이 뒤로 따라붙었다.

"젠장, 저 여인 도대체 뭡니까?"

"베넷트일세. 돈에 환장한 여인이지."

"······예? 그런 여인에게 이렇게 좋은 저택을 맡겨둬도 됩니까?"

"동기가 뚜렷한 이는 다루기 쉽다네. 돈만 잘 챙겨주면 되니까."

갈라하드는 제일 안쪽의 방으로 향했다. 서책이 빼꼭하게 꽂힌 방이었다. 책장을 살폈다. 손댄 흔적은 없었다.

"길버튼 경, 문 닫고 오게."

갈라하드의 명령에 길버튼은 방의 문을 닫았다. 다행히 베넷트라는 여인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안심하고 고개를 돌리니, 갈라하드는 책장 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책장이 거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려났다.

책장이 완전히 물러나고 보인 건, 괴상한 그림이 가득 새겨진 거대한 벽이었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벽을 매만졌다.

벽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안쪽이 드러났다.

요란했던 방식과 달리 안쪽은 별다를 게 없었다.

벽에 날붙이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서적들, 중간에 테이블이 전부였다.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간소한 방이었다.

갈라하드는 서적들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서적들을 뒤지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날붙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품질이 좋네.'

벽에는 검과 창, 단검 같은 것들이 종류별로 걸려 있었다.

길버튼은 슬쩍 갈라하드의 눈치를 봤다. 갈라하드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썩은 서책을 보는 중이었다.

그에 길버튼은 날붙이들을 만져봤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전부 최상품이었다.

'이것들은 뭐지?'

길버튼은 이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주머니들을 살폈다. 주머니들이 전부 크기와 모양이 같았다.

그중 하나를 들어서 슬쩍 열었다. 주머니에 담긴 건 금화였다.

'미친-.'

놀란 길버튼은 황급히 다른 주머니를 살폈다. 또 금화였다. 그러면 이 주머니들이 전부-.

"대장, 부자셨습니까?"

"보면 모르겠나."

갈라하드가 서적을 덮으며 말했다. 묘하게 표정이 좋아 보였다.

"주머니 세 개만 챙기게."

길버튼은 끙- 소리를 내며 주머니를 세 개 챙겼다.

갈라하드는 꼼꼼하게 벽을 닫고, 책장을 닫았다. 감쪽같은 서재였다. 안에 들어갔던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어서 향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갈라하드는 주머니 세 개 중 하나를 베넷트라는 여인에게 건넸다.

"연장일세."

"야호."

베넷트가 무심한 얼굴로 뻔뻔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갈라하드는 그를 지나쳐서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길쭉한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위에 과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고기 하나 없는 식사에 길버튼은 참지 못하고 불평했다.

"아니, 왜 과일밖에 없습니까?"

"고기를 먹는 건, 살생하는 겁니다.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취하겠다니-. 참으로 북부식 사고군요."

베넷트라는 여인이 톡- 쏘아붙였다. 어려운 말들의 향연에 길버튼은 입을 씰룩거렸다.

"베넷트가 요리를 못하네. 장담하는데, 과일을 먹는 게 나을 걸세."

갈라하드가 길쭉한 과일을 까먹으며 말했다.

그냥 요리를 못하는 거면서, 무슨 살생이 어쩌고······.

어이가 없어서, 베넷트를 쳐다보자-.

"호호."

베넷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가식적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대충 흉내 낸 웃음이었다.

요리를 못하는 집사라니-.

'이래서 대장이 그웬에 당황하지 않았군.'

길버튼은 톰이 챙겨준 육포나 뜯었다.

그러다 문득-.

"······아니, 그래서 간통이 아니라는 겁니까?"

투박하게 물었다.

"추가금만 주신다면. 우-."

베넷트가 무표정에서 입술만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

'······피곤해.'

아드리안나는 갑주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늘 가던 마족의 영역이었다.

오늘은 마주친 마족이나 마물도 적었다. 그런데도 아드리안나는 피곤함을 느꼈다-.

'왜지?'

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똑똑, 누군가 창문을 두들겼다. 붉은 매였다.

아드리안나는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붉은 매가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부리를 비볐다.

'갈라하드 대장에게 부비던-.'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려."

아드리안나는 큼지막한 고기 하나를 매에게 먹이고, 책상으로 향했다.

갈라하드에게 약속했던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아드리안나는 신중히 종이를 골랐다.

'이건 끝이 조금 구겨졌어. 이건-.'

그중 제일 깨끗하고 펴진 종이를 찾아냈다. 그 후에 양손으로 펜을 잡고 종이에 글씨를 연습했다.

연습까지 끝낸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종이를 노려봤다.

심호흡을 길게 하며 평정을 되찾은 아드리안나는 펜을 천천히 움직였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입니다. 저는 무사히 1대대에 도착했습니다. 마족의 영역으로······.]

'······너무 딱딱한가?'

아드리안나의 펜이 멈췄다. 

이렇게 보냈다가는 너무 딱딱하게 느낄 가능성이 있었다. 그에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아드리안나는 또 한참이나 종이를 노려봤다.

그리고-.

[저예요.]

붉은 매를 사용했으니 아드리안나라는 걸 알 것이다. 갈라하드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다만-.

'아니, 건방진 것 같잖아.'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종이를 구겼다.

다시 종이를 꺼냈고-.

[저는 아드리안나입니다.]

구기고.

[저예요. 아드리안나.]

구기고.

[아드리안나다.]

황급히 구기고-.

똑똑.

"아드리안나님, 업무 시간입니다."

보좌관의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163화 큰뿌리

'겨우 진정했네.'

작전과 요원 볼트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괴상한 갑주를 입은 상태였지만, 작전과장은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은 상태였다.

최근에는 일도 시작했다.

문제는-.

"······갈라하드가 온다."

여전히 괴상한 중얼거림을 한다는 거였다.

"보안을 특별히 강화했습니다. 이번에는 국장님도 동의하셨습니다. 체계 자체를 바꿨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놈은 갈라하드다."

작전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꾹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갈라하드가 전설적인 요원인 건 볼트도 알았다. 

다만-.

"정보국 본부는 내성 안에 있잖습니까. 최근 내성 경계가 강화되었고, 보안 체계도 바꿨으니, 절대 뚫을 수 없을 겁니다."

"너는 갈라하드를 모르는구나."

"도대체 갈라하드가 뭡니까?"

작전과장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꼭 들어서 안 될 이름을 들은 것처럼-.

"전임 작전과장이 어떻게 은퇴했는지 아냐?"

"모릅니다."

"그래, 모르겠지. 전임과장은 공금을 횡령하다가 걸렸다. 그에 은퇴 선고가 내려졌어. 그에 전임과장은 의회의 도움을 받아서 병력을 꾸렸지. 버티기만 하면 의회에서 정보국에 압박을 넣어서 무죄가 될 거였으니까." 

의회? 볼트는 눈을 찡그렸다.

"기사로 된 철옹성이었다. 기사들이 병사들처럼 지키는데, 어떻게 뚫리겠어-."

작전과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때, 갑자기 기사가 하나 사라졌다. 기사는 목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죽어 있었다. 뭐로 당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어."

작전과장이 몸을 거칠게 떨었다. 볼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부터 기사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조로 묶어서 움직여도 소용없었다. 기사라고 잠도 안 자겠나? 화장실을 안 가겠어? 아주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작전과장이 제 목을 두드렸다. 켁. 작은 소리가 났다.

"이윽고 마지막 기사까지 쓰러지자-. 놈이 나타났다. 삐쩍 마른 꼬맹이였어.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우리를 사냥한 거지."

그 지독한 독기에 볼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참 과장도-."

"과장이라니! 내가 이 눈으로 직접 똑똑히 봤단 말이다!"

작전과장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 떠올랐다.

"갈라하드가 온다. 갈라하드가-."

화들짝 놀란 작전과장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

볼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작전과장이 일을 다시 하는 이유가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갈라하드에게 줄 정보를 모으는 중이구나.'

얼마나 지독한 공포가 각인되었길래-.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내성 쪽 경비도 강화되었고, 또 정보국 자체도 경계를 최고 수준으로 올렸으니까-."

작전과장이 피식 웃었다.

"전임 작전과장이랑 똑같이 말하는군."

괜히 서늘해진 볼트는 슬쩍 과장에게 붙었다.

과장의 시선에-.

"혹시 모르니까요."

볼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

'화려하군.'

갈라하드는 커튼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틈으로 수도의 전경이 보였다.

수도의 밤은 낮보다 밝았다. 건물 여기저기에 붙은 마도 간판들과 가로등들이 빛을 연신 뿌리는 중이었다.

그 알록달록한 빛 넘어서 저 멀리에 거대한 황금색 벽이 있었다.

황실과 5대 마탑들, 그리고 정보국 본부가 있는 내성이었다.

목표가 전부 저 안에 있었다.

'내가 내성을 뚫을 생각을 할 줄이야.'

본래 내성은 갈라하드에게 집으로 향하는 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내성을 이제는 뚫어야 한다니-.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군.'

"내성으로 가시게요?"

어느새 옆에 온 베넷트가 물었다.

"발소리 내고 다니게."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커튼을 쳤다.

"발소리는 옵션입니다."

"그럼 됐네."

"쳇."

베넷트가 내밀었던 손을 오므렸다.

"내성으로 갈 생각일세."

"힘들 걸요. 최근 보안이 더 강화돼서요."

돌아다니는 병력도 전보다 배는 많았다. 전보다 보안이 강해진 건, 베넷트의 설명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보안 체계도 바뀌었을 것이다. 

다만, 이쪽에는 카드가 하나 있었다. 

참 껄끄러운 카드였지만.

"9구역의 '큰뿌리'는 여전한가?"

"거기야 늘 최고지요."

"그래, 9구역으로 가야겠군."

수도의 구역은 숫자가 낮을수록 그 질이 높아졌다. 1구역은 내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곳이었다. 

반대로 9구역은-.

'수도의 짬통이지.'

아무리 깨끗한 도시라도 쓰레기는 필연적이었다. 그런 쓰레기들이 모인 곳이 9구역이었다. 

9구역은 경비대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저 나오지 못하도록 막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인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되기에, 위쪽 분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9구역은 수도의 배설장이었다.

갈라하드는 거울을 보면서 수염을 뗐다. 붙였던 모조 살점을 옮겼다. 이내 선이 부드러운 미남으로 변모했다.

얼굴을 다시 점검한 갈라하드는 바로 움직였다.

길버튼은 문 옆에 앉아서 검을 닦고 있었다. 경비 설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고집이 상당했다.

"가지."

길버튼이 멍청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누구십니까?"

"길버튼 경 다운 물음이군."

"아, 대장이셨습니까. 근데 어디로 갑니까?"

"9구역의 술집으로 갈 걸세."

"예? 술도 안 마시는 분이 술집에 왜 가십니까?"

"술집에 술 마시러가나."

"······술집에 술이 아니면, 뭐 하러 갑니까?"

"큰뿌리 술집은 직원들이 전부 미남이라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죠."

베넷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천박한 손짓을 했다.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아니, 왜 남창 술집을-"

"남창이라니. 직원들이 미남들로 구성된 것뿐일세."

"······끄응. 알겠습니다."

길버튼이 떨떠름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 걱정 어린 얼굴에 갈라하드는-.

"길버튼 경,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남자에게도 인기 없을 얼굴이니까."

담담하게 위로했다.

길버튼이 참으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못생긴 티벳 여우 같은 얼굴이었다.

"동감입니다."

"베넷트, 자네도 같이 가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금화를 튕겼다.

"오예, 눈 호강 좀 하겠군요."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저택을 나섰다.

마나까지 돌려 살폈지만, 따라붙는 눈은 없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기침하며 문을 닫았다. 해가 저문 밤이었지만, 수도는 낮보다 밝았다.

"저 번잡스러운 게 다 뭡니까?"

"간판일세."

"아니, 간판에서 왜 불빛이 납니까."

"마도 간판이니까."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차가 지나갔다. 안에 탄 여인이 부채를 우아하게 흔들었다.

"아니, 저건 또 뭡니까? 사람이 있었는데."

"마력차일세. 마나석으로 움직이는 동력기관이지."

"말이라는 겁니까?"

"비슷하네. 더 빨리 달리고, 지치지도 않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대답하며 길을 건넜다. 길버튼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이게 죄다 마법이라는 겁니까?"

"아니, 저것들은 마법이 아닐세. 그저 마석을 이용하여 만든 도구일 뿐이지. 저런 멍청한 도구를 마법이라 부르는 건 모욕일세."

갈라하드의 격렬한 반응에 길버튼은 볼을 긁적였다.

"······마도구를 싫어하시나 봅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마도구가 나온 뒤로 마법사들은 탐구를 멈추고, 망치랑 정을 잡았네. 마법이 몰락한다면, 마도구 때문일 걸세."

갈라하드는 눈을 구기며 손을 들었다. 앞에 노란 마력차가 멈춰 섰다.

문을 열려고 할 때, 문이 저절로 열렸다.

새로 추가된 기능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언제 마족의 왕이 나올지 모르는 세상인데, 마법사들이 차 문이 저절로 열리게 하는 거나 개발한다니-.

'지랄 맞군.'

갈라하드는 욕을 중얼거리며 뒷좌석에 앉았다. 

길버튼은 히죽 웃으며 탔다. 그 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그 옆으로 베넷트가 탔다.

"어디로 가십니까?"

"9구역으로 부탁하네."

"9구역은 추가금이 붙습니다."

"알고 있네."

"예."

사내가 짧게 대답하며 길쭉한 막대를 당겼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보셨습니까?! 문이 저절로 닫혔습니다!"

길버튼의 격한 반응에 운전기사가 피식하며 웃었다.

"이거 밥은 어떻게 줍니까?"

"밥이라니-. 마석만 교환하면 됩니다. 최신 모델이라 마석 사용량이 절반으로 줄었죠."

"우와-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전 모델보다 출력이 올라갔거든요."

길버튼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운전기사가 곧잘 대답했다.

"물도 안 마시고 밥 대신 돌을 먹으면서 이렇게 빠르다니-. 이거 완벽한 거 아닙니까?"

길버튼의 격한 감탄에 운전기사가 크게 웃었다.

"아, 조심하게. 처음 타는 이들은 멀미하니까."

"예? 멀미라니 그게 무슨-."

그때, 길버튼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 얼굴이 씰룩거렸다. 길버튼의 볼이 빵빵해졌다.

"참으십쇼! 산 지 얼마 안 됐다고!"

운전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토하면 추가 금액입니다. 할증으로."

베넷트가 엄하게 덧붙였다.

"더 밟게나. 그리 오래 못 버틸 거 같으니까."

"젠장!"

운전기사가 다급해졌다. 마력차가 더욱 빨리 움직였다. 마력차 특유의 우웅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길버튼은 마력차에서 내리자마자 속을 게워 냈다.

"우웨에에에에엑!" 

"은화 한 개, 두 개, 세 개-."

베넷트가 옆에 붙어서 등을 두드렸다.

"9구역은 오랜만이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다른 구역들과 달리, 9구역은 어두컴컴했다. 듬성듬성 놓인 화로들이 전부였다.

어두운데, 오히려 다른 구역보다 시끄러웠다. 여인의 교성, 사내의 호탕한 목소리, 비명이 뒤섞인 소음이 가득했다.

주변으로 무장한 경비대원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갈라하드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며 9구역으로 향했다.

경비대원들은 갈라하드를 막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 뿐이었다.

철벅.

9구역에 들어서자 묽은 진흙이 반겼다.

"이제야 사람 냄새가 나는군요."

길버튼이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구린내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니-.

사방에서 시선이 꽂혔다. 수도에서는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9구역에 들어오기에는 다소 화려한 복장인 탓이었다.

"길버튼 경, 9구역에서는 세 가지를 조심하면 되네."

"세 가지 말입니까?"

"노인, 꼬마 그리고 자네 좋다는 여자일세."

"예? 노인을 왜 조심합니까?"

"노인은 이런 지독한 곳에서 그 나이까지 살아남았다는 거니까."

"그러면 꼬마는-."

"자라나는 새싹이니까."

"그게 무슨-. 아니, 저 좋다는 여자는 왜 조심합니까?"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을 테니까."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농담은 아닐세."

그때, 정면에서 사내 둘이 껄렁거리며 다가왔다. 

사내 둘은 서로를 보며 웃고 떠들었지만, 그 눈은 갈라하드를 향해 있었다.

그중 큰 쪽이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갈라하드 쪽으로 걸었다.

마주친 사내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사내는 마치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휘둘렀다.

'여기는 여전하군.'

느닷없는 칼질이었지만, 길버튼은 익숙하게 검을 뽑아 막았다. 검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상대의 검보다 더 망설임 없었다.

"이것들 뭡니까?"

순식간에 사내 둘을 벤 길버튼이 검을 털며 물었다.

"강도일세, 우리가 있어 보였나 보군."

"예? 보통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않습니까? 무슨 칼질부터 합니까?"

"여기 전통일세."

갈라하드는 사내들을 가벼이 지나쳤다. 베넷트는 냉큼 쪼그려 앉아서 사내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길버튼이 질색하며 갈라하드에게 따라붙었다.

방금 실력을 보여준 탓인지 더 덤벼드는 놈들은 없었다. 갈라하드는 시궁창 같은 곳을 거침없이 걸었다.

도착한 곳은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큰뿌리. 잘생기고 따뜻한 남자들 상시 대기 중!]

거대하게 적힌 문구에 길버튼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술집 주변으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여인이었지만, 그중에는 귀족처럼 입은 사내도 소수 있었다.

"아니, 사내들이 왜 있습니까?"

길버튼의 경악한 물음을 뒤로 하고 술집으로 향했다. 따끔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줄 서요! 아침부터 기다렸다고!"

여인들이 뾰족하게 소리쳤지만,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커졌다. 천장에 달린 아주 화려한 샹들리에가 가장 먼저 시선을 다잡았다.

홀에는 여인들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는데, 그 사이로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콧소리 섞인 웃음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음악 소리를 복돋았다.

술집보다 귀족의 연회장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놈, 새치기했어요!"

"저 새끼!"

그때, 뒤쪽에서 여인들이 갈라하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청년이 난감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막아섰다.

"손님, 줄을 서셔야 합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갈라하드는 중절모를 벗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일세, 잭슨."

잭슨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헤프너!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잭슨이 활짝 웃으며 달려들었다. 갈라하드는 잭슨의 명치를 발로 찼다. 잭슨이 그대로 뒤로 굴렀다. 그 표정은 활짝 웃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다들 여기 좀 봐! 우리 가게 에이스가 돌아왔다!!"

잭슨이 뒤를 보며 크게 소리쳤다.

순간 음악이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가벼이 손을 흔들자, 청년들이 거칠게 호응했다. 

길버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장?"

"이야기하자면 길다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대답했다.

"근데 헤프너 이건 뭐야?"

잭슨이 길버튼을 가리키며 물었다.

"꼭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네."

"아니, 누가 하고 싶다고······."

갈라하드는 눈에 힘을 줬다.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기에는 얼굴이······."

"부탁 좀 하겠네."

"그래, 가끔 특이한 걸 찾는 분들도 있으니까. 한 번 해보자."

이내 잭슨이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안도하던 길버튼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길버튼은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잘생긴 사내들이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대장이 여기서 일했다고?'

이게 괜찮은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때, 어디선가 동전이 날아왔다. 동전은 정확히 길버튼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베넷트의 짓이었다.

"어이, 추남. 흔들어봐."

베넷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천박한 손짓을 했다.

무시하자 잭슨이 다가왔다.

"일하고 싶다고 해서 써준 건데, 이렇게 뻣뻣하게 굴 거야? 헤프너를 믿고 쓴 건데."

길버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쓰던 방이 여전히 있군."

"당연하지, 우리 가게 에이스인데."

"남들이 오해할 소리는 적당히 하게."

"네가 아니었다면, 놈들한테 가게가 밀렸을 텐데 당연히 네가 에이스지."

덕분에 일이 편해졌으면 편해졌지, 더 불편해질 건 없었기에 갈라하드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분만?"

잭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알겠어. 아까 같이 온 그 못생긴 사내는?"

"의심받지 않도록 적당한 곳에 두게나. 어차피 지명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방을 둘러보다가, 문에 방범용 마법진을 간단히 새겼다.

그를 점검한 뒤에, 갈라하드는 의자를 창문과 문 사이의 벽에 대고 앉았다.

문을 응시하며 마나를 천천히 돌렸다.

습관에 가까운 수련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밖의 웃음소리가 옅어질 때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건-.

"아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엉엉 우는 황녀였다.

황녀는 내성으로 들어갈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왜 면사포를?'

동시에 가장 위험한 방법이라는 점이었다.

164화 정부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황녀가 다리를 까닥거렸다.

거만하고, 고고한 황족의 자세였다.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러웠다.

"내성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바로 본론이라니. 서운하구나."

황녀의 투정에 갈라하드는 입 끝까지 올라온 욕을 애써 삼켰다.

"일단, 한 잔 받거라."

"임무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갈라하드는 황녀가 내민 술병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임무라니- 참 고약한 놈이로다."

황녀는 짙게 웃으며 술병을 입에 털어 넣었다.

황녀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응시했다.

"여기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너에게는 참으로 많은 걸 배웠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만."

"내게는 좋은 기억이다."

황녀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로 어두컴컴한 풍경이 보였다.

"아주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지. 너는 꼭 비 맞은 생쥐 꼴이었다."

황녀가 콧노래를 불렀다.

****

쏴아아아아-.

'비 한 번 거하게 오는군.'

거친 빗소리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털었다.

"선배, 연초 그렇게 많이 피면 안 좋습니다."

그때, 옆에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의 팀원 엘레강스였다. 그녀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는 순박한 미소가 가득했다.

"됐다. 다른 팀원들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연초를 깊게 마셨다. 상큼한 레몬 향이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자네, 묘하게 신난 얼굴이군."

"갈라하드 선배와의 임무니까요. 그것도 갈라하드 선배가 직접 지목하셨고, 그에 다들 들뜬 상태입니다."

엘레강스의 반짝이는 눈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내가 뭐라고."

"에이, 그 갈라하드 아닙니까. 정보국의 유일한 특수 요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정보국에서 한 일이라고는 죽이고, 또 죽인 것밖에 없었다.

살인에 감흥을 느끼기에는 진작에 무뎌졌지만, 그렇다고 살인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뻔뻔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이었다.

대의에 필요한 작업이었고.

"특수 요원은 무슨."

"내숭은 여전하십니다-."

"시끄럽다."

갈라하드는 꽁초를 비벼 끄고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아-. 문을 열자, 빗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구린내와 물비린내가 코를 가득 찔렀다. 묽은 진흙이 갈라하드의 구두를 붙잡았다.

팀원들은 정면에 모여있었다. 

이번 임무는 상당히 중요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그 목록을 직접 뽑았다. 

갈라하드는 팀원들을 둘러봤다. 꽤 굵직한 임무인데, 그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황실에 관련된 일이다. 삐끗하면 목이 날아가니, 평소보다 더 조심해라."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특수 요원이랑 함께하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뻔뻔하게 생긴 놈의 말에 다들 왁자지껄 웃었다. 

"네 목숨은 네가 책임지는 거다."

"또 튕기신다. 저번에 저 지키려고 불에 직접 뛰어드셨으면서!"

엘레강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난 말했다. 시작한다."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하자 웃음이 뚝- 그쳤다.

그들의 얼굴에 진지함이 떠올랐다.

"주변 병력의 규모가 상당합니다. 최소 1급 암살자가 오십 명 배치되었습니다. 아예 작정한 듯합니다."

"배후는?"

"모릅니다. 황실 쪽이라는 것밖에는-. 위험합니다."

엘레강스가 웃음기를 지운 목소리로 보고했다.

'1급 암살자 오십이라-.'

황녀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실은 수치를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왜 9구역에 온 거지? 위험할 걸 몰랐나?'

갈라하드는 빗물로 세수했다.

다만, 이쪽에게는 기회였다.

"내가 먼저 진입하겠다. 이목이 쏠리면, 후미를 공략하도록."

"위험합니다! 상대는 미친년, 황녀입니다."

팀원 중 터틀이 다급하게 경고했다. 그 얼굴에 질린 기색이 가득했다.

"각자 위치로."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손을 휘저었다. 반발은 없었다.

다들 조용히 흩어졌다.

빗소리만 가득한 적막 속에서, 갈라하드는 걸음을 옮기며 대상의 정보를 복기했다.

'황녀, 통칭 미친년. 역모에 휩쓸려 제 어미가 사지 뽑혀 죽는 걸 본 뒤로 정신이 나갔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인인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족이니까.

황실은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매일 목이 날아가고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전장에서 죽으면 시체라도 남는데, 황실은 죽으면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살아남으려면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도대체 얼마나 미쳤길래, 정보마다 미쳤다는 이야기가 있지?'

갈라하드는 젖은 옷깃을 털며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평소처럼 화려했다. 음악 소리도 여전했지만, 평소와 달리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더불어-.

'술냄새가 가득하군.'

본래 큰뿌리는 술을 마시러 오는 곳이 아니었다. 적적한 여인들이 잘생긴 미남과 대화하러 오는 곳이었지-.

그렇기에 원래는 향기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독한 술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원인은 중앙에 있었다. 

홀의 중앙에는 그날 가장 돈을 많이 쓴 손님을 위한 거대한 의자가 있었다. 왕좌라고 부를 정도로 화려한 의자였는데, 황녀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황녀의 첫인상은 '붉은 장미'였다.

꼭 피에 담근 것처럼 붉은 머리칼과 뱀의 피부처럼 딱 붙은 붉은 갑주까지-. 붉은색으로 온전히 칠해진 여인이었다.

그 주변으로 빈 술통이 뒹굴고 있었다. 독한 술 냄새의 근원이었다.

직원들은 황녀의 주변에 죄다 몰려 있었다. 어떤 놈은 춤을 췄고, 어떤 놈은 노래를 불렀다. 또 어떤 놈은 재밌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전부 필사적이었다. 꼭 목에 검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그때, 황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아름답군.'

황녀는 아주 고급스러운 보석 같았다. 아주 아름답지만, 생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조각된 느낌이었다.

황녀의 입꼬리는 가득 올라가 있었다. 그 입이 벌어지며, 까랑까랑한 웃음이 터졌다.

황녀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닿았다. 그 붉은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훑었다.

"처음 보는 놈이구나."

"예, 이번에 들어온 헤프너입니다!"

황녀 옆에 붙은 청년이 황급히 설명했다. 갈라하드는 겁에 질린 연기를 하며 조아렸다.

"제법 반반하구나. 몸도 단단하고. 거기는 크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갈라하드는 머뭇거리지 않고 끄덕였다.

"예, 큽니다."

"이리로 와보거라."

황녀가 손짓했다. 설마-.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옆에 있는 청년이 다급하게 고갯짓했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황녀에게 다가갔다.

"자, 거기 서거라."

황녀는 갈라하드를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웠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지금 뭐 하는-.'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던 황녀가 끄덕였다.

"크구나."

갈라하드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역시 황녀님이십니다!"

"바지를 뚫고 보다니!"

청년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바지를 뚫어보는 황녀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그에 맞춰서 춤을 췄다.

황녀는 다시 술통을 들었다. 제 몸보다 큰 술통을 입에 물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시시하다."

술통을 비운 황녀가 대뜸 선언했다. 그에 청년들이 그대로 멈췄다. 긴장이 가득 찼다.

"너와 너. 바꿔서 해라. 너도."

황녀가 청년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악기를 든 이에는 춤을 시켰고, 춤을 추던 이에게는 노래를, 술을 내오던 이에는 샹들리에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연주하던 이가 춤을 잘출 리가 없었다. 춤을 추던 놈이 노래를 잘할 리도 없었고-.

연회장은 금세 엉망이 됐다.

끔찍한 노래가 울렸고, 악기가 비명을 지르듯 낑깡거렸다. 춤보다 몸부림에 가까운 행위까지 더해지자, 아주 난장판으로 변했다.

끔찍한 결과물이었지만-.

"훨씬 좋구나."

황녀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마치 조율하듯 손까지 흔들었다.

그럴수록 더 엉망이 됐고, 황녀는 더 만족스러워했다.

'진짜 미쳤군.'

그제야 갈라하드는 왜 황녀의 평가에 '미쳤다'가 적혀 있었는지 이해했다.

"자, 큰놈. 일로 와서 한 잔 받거라."

그때, 황녀가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리며 황녀에게 향했다.

황녀가 술통을 갈라하드에게 내밀었다. 한 입만 마셔도 정신이 나갈 정도로 독한 술 냄새가 코를 가득 찔렀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겨 가벼이 마나를 뿌렸다.

"저는 정보국의 요원입니다."

"호오-, 그냥 큰 놈이 아니었구나."

"오십에 달하는 1급 암살자가 주변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갈라하드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본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은 생존이었다. 갈라하드는 그를 건드려, 황녀와 거래할 생각이었다.

다만, 황녀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많이도 왔구나. 내 연회를 크게 연 보람이 있군."

황녀는 오히려 짙게 웃었다. 정말 즐겁다는 듯-.

예상외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막기 위해서는 황실 기사 둘로는 부족합니다."

"아, 그래. 황실 기사가 있었지. 어이, 이쪽으로 와보거라."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황실 기사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같이 술을 마시고 있던 황실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밖에 암살자가 오십이나 있단다."

"······이런!"

"들은 적 없습니다만."

황실 기사 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구나. 역시 몰랐군."

황녀는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황실 기사 둘의 목이 동시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목을 잃고 쓰러진 몸들이 피를 분수처럼 뿌렸다. 갈라하드는 그를 고스란히 맞았다.

"차라리 여기 놈들에게 검을 쥐여주는 게 낫겠다. 잘 생기기라도 했으니까. 자, 하나씩 쥐거라."

황녀가 검으로 황실 기사 시체를 가리켰다. 청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어서."

황녀의 나지막한 명령에 청년들이 기사의 검을 뺏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암살자가 오십이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황실 기사들의 목을 친 황녀에 갈라하드는 상황도 잊고 물었다.

"일을 못 하는 개는 치워야지. 그게 황실의 법도다."

황녀는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 

언뜻 당당한 태도였지만, 상황이 상당히 미묘했다. 

암살자가 주변에 가득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황실 기사의 목을 친다고?

"자, 잘생긴 청년들이여. 다들 나를 지키거라."

황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검 대신 술병을 잡고 홀짝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깨달았다.

"죽고 싶은 거였군."

황녀가 든 술병이 뚝- 하고 멈췄다.

"그래, 나는 고통스러운 죽음이 두렵다."

황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고통스러운 죽음이 두려워서 죽고 싶다니-. 참으로 괴상한 문장이었다.

"오십명을 잡으면, 다음엔 백명이 될 뿐이니까요."

황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포기였군.'

생각보다 황녀의 상태가 더 안 좋았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죽을 수 없네."

담담한 선언에 황녀의 웃음이 뚝- 하고 멈췄다.

파식.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맡았으니까."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웃었다.

그때, 천장이 갈라졌다. 그 틈에서 검은 두건을 쓴 놈들이 떨어졌다. 검에 검은색으로 칠까지 한 전문적인 놈들이었는데, 그 수가 상당했다.

부서진 천장에서 쏟아진 빗방울이 갈라하드의 이마를 두드렸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튕겼다.

자그마한 스파크가 연신 크기를 키웠고, 이내 지긋한 어둠을 찢어발겼다.

떨어지던 암살자 둘이 그대로 번개에 휩쓸렸다. 그런데도 암살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중 하나의 단검이 황녀를 노렸다. 붉은 갑주를 보니 괜찮을 듯했지만-.

갈라하드는 황녀를 노린 단검을 손으로 잡았다.

짜릿한 고통과 함께 피가 튀었다. 황녀의 눈이 커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방의 벽이 무너지며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많군."

갈라하드는 담담히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뒤를 요원들이 노렸다.

비명은 없었다. 거친 빗소리와 숨이 흐려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시체들 사이에 선 갈라하드가 거칠게 기침했다.

갈라하드는 황녀를 살폈다. 황녀는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검조차 잡지 않았다.

황녀에게 무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차고 넘쳤다. 단지 의지가 없을 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암살자 오십을 죽이면, 백이 올 뿐이니까.

그렇다면-.

"백을 죽이면 되는 걸세."

갈라하드는 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황녀는 한참이나 멍하니 손을 응시하다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다급하게 손을 잡았다.

황녀의 웃음이 그제야 멈췄다.

****

"내게 잘 어울린다고 하더구나. 네가 보기에도 그러느냐?"

황녀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그에 고개를 들자, 황녀가 면사포를 흔들고 있었다. 

면사포에 달린 작은 보석들이 깨끗한 소리를 냈다.

그 얼굴에는 황족 특유의 거만함이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면사포라기에는 너무 화려하군요."

"그래? 만든 놈의 눈을 뽑아야겠다."

"그래도 외모가 워낙 화려하시니 잘 어울리십니다."

"상을 내려야겠구나."

황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성으로 들어갈 계획입니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본론을 꺼냈다. 황녀의 콧노래가 멈췄다.

"그래, 내성?"

"예, 일이 좀 있어서."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면-."

"나도 너와 약혼하고 싶다."

황녀가 면사포를 흔들며 담담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득 구겼다.

"농담이다."

"황녀님은 유머 감각이 끔찍하시니, 웬만해서 농담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래, 약혼이 안 되면 나를 안거라."

"농담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황녀를 지그시 노려봤다.

"사실 농담이었다. 그러면 손을 잡거라."

황녀가 손을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그 손을 지그시 응시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두드렸다. 만약 황녀가 없이 내성을 들어가려면,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약혼한 몸일세."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녀가 까랑까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방이 울릴 정도로 격렬한 웃음이었다.

"약혼도 안 되고, 안는 것도 안 되고, 손잡는 것도 안 된다니-. 참으로 잔인하구나."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상냥하게 대하고 있는 걸세."

진심이었다. 갈라하드는 황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보는 황녀에 갈라하드는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황녀가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의회가 뭔 짓을 하는지, 내성의 경비가 강화되었다. 더불어 3황자가 나를 노리고 있으니, 너를 들이기 위해서 적당한 핑계가 필요하다."

"······적당한?"

묘하게 불안한 어감이었다. 그에 황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음, 파혼을 두 번이나 당하여 방만해진 황녀가 새로 들인 정부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느냐?"

황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었다.

애석하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때, 뿌려둔 마나에 뭔가 잡혔다.

그건-.

"꼬리 달고 오셨습니까?"

"아, 꼬리가 있었느냐?"

황녀는 오히려 되물었다. 그 표정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황녀가 모를 리 없었으니까.

일부러 달고 온 것이다.

"이번에는 천 명을 죽일 차례였나?"

황녀의 들뜸 가득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을 풀었다.

****

'젠장 맞을-.'

길버튼은 나지막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큰뿌리 술집은 손님으로 아주 붐볐다.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청년들이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왜 아무도?'

길버튼은 명예로운 북부의 기사였다.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무관심이 계속되니 기분이 미묘했다.

'내가 진짜 못생겼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저런 사내구실도 못 할 것 같은 호리호리한 놈들보다 못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자리 때문인 듯했다. 구석진 곳에 있어서 안 보였겠지. 길버튼은 슬쩍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여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길버튼은 괜히 수염을 매만졌다.

"왜 경비가 여기까지 들어오는 거야?"

여인들의 불평에 잭슨이 길버튼을 잡았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쪽에 있어 주겠어? 여기가 네 자리야."

길버튼은 결국, 더 구석진 곳으로 밀려났다.

'애초에 이런 찝찝한 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기사 길버튼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술집이었다.

"어머."

앞에서 나지막한 감탄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이제 여인만 봐도 괜히 껄끄러웠다. 그에 시선을 피하려고 할때-.

"잘 생기셨다."

여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길버튼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이분은 얼마예요?"

여인이 길버튼을 가리키며 잭슨에게 물었다.

"예? 얼마 받으시겠어요?"

"네? 제가 받아요?"

"저희도 그렇게 많이는 못 드려요."

둘의 헛도는 대화에 길버튼은 작게 헛기침했다.

"이 아리따운 여성분이 나를 사고 싶다는군."

"······진짜요?"

"네, 얼마에요?"

"그······ 동전 하나만 주세요."

"네? 말똥보다 싸네요?"

말똥보다-. 길버튼의 입이 쩍 벌어졌다. 

길버튼은 여인에게 정신없이 끌려갔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여인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참 잘 생겼네요. 정말 멋있어요."

여인이 길버튼의 팔뚝을 쓸었다. 벌써 쓰다듬다니-.

'이것이 제국의 개방적인 성관념!'

길버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여인이 입술을 내밀고 다가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부끄럽게 눈뜨고 있을 거예요?"

길버튼은 냉큼 눈을 감았다.

'제국의 여인과 결혼하면, 어디서 지내야 하지? 북부로 불러야 하나? 내 봉급 정도면 수도에서도 고연봉이지. 애는 몇 명이나 낳아야 하지?'

상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자네 좋다는 여인은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을 테니까.]

그 확신에 찬 재수 없는 목소리에 길버튼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단검을 들이미는 여인이 보였다.

'젠장.'

그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전문적인 암살자가 분명했다.

길버튼은 투덜거리며 칼자루를 잡았다.

그때, 여인의 목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꼬챙이가 길게 나왔다. 붉은 피가 길버튼의 얼굴을 가득 덮었다.

이내 꼬챙이가 뒤로 빠지며, 여인의 신형이 길버튼 쪽으로 무너졌다.

"추남, 설렜어?"

베넷트가 꼬챙이를 털며 물었다.

"전혀."

길버튼은 여인의 시체를 밀며 칼자루를 뽑았다.

'대장을 노린 건가?'

길버튼은 곧장 위로 올라갔다.

복도에는 이미 시체가 가득했다.

그 너머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황녀와 같이-.

"가자, 이곳 침대는 너무 딱딱하다."

갈라하드를 챙기는 황녀에-.

'젠장.'

길버튼은 눈가에 묻은 붉은 피를 닦았다.

165화 수도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