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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 155-160

155화. 대화가 필요해

싸늘하다.

아니, 서늘했다.

대공의 얼굴에 가득한 흉터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이 더 끔찍해졌다.

차르티엔이 자꾸만 짙어졌다.

아드리안나는-.

'······상태가 더 안 좋군.'

늘 무심했던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깨졌다. 눈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눈썹이 거의 닿을 것처럼 내려갔다.

역린을 제대로 찌른 듯했다.

너무 깊게 던진 감도 있었지만-.

'잘못 아문 상처는 깊이 째야 제대로 붙지.'

그래도 서늘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목을 매만지며 대공을 살폈다.

흉터가 가득하고, 광기가 그득한 대공의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떨렸다.

대공이 왜 아드리안나를 못 쳐다보나 했는데-.

'아드리안나의 어머니에 관한 문제가 있군.'

분위기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배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리고-.

"아, 생각해 보니 포도주가 있었군."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

'망할 놈.'

그대로 내빼는 놈에 대공은 눈을 찡그렸다.

다만, 중요한 건 놈이 아니었다.

'아드리안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대공은 눈을 찡그리며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아드리안나가 굳게 끄덕였다. 대공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어머니가 그렇게 되신 건, 제 성질 때문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네 탓이 아니다."

"하지만······."

"아니."

대공은 아드리안나의 말을 잘랐다.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태양을 녹인 듯한 찬란한 금발과 여름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 그녀와 너무 닮았다.

그렇기에 눈을 마주하기 쉽지 않았다.

다만, 아드리안나가 그냥 둘 수 없었다.

"세실리아는-."

대공은 깊게 묻어둔 이름을 꺼냈다. 단순히 입에 담았을 뿐인데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수백의 마물 사이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대공이었다.

그런데 아드리안나를 마주하니 우습게도 두려움이 올라왔다.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너를 낳기 전부터 내게 약속을 요구했다."

대공은 무거운 입술을 애써 움직였다.

"약속이라면-."

"항상 너를 최우선으로 여겨 달라고. 설령 자신이 위험하더라도. 약속을 몇 번이나 요구했지."

대공의 눈이 깊어졌다. 그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아니, 알았을 것이야. 지혜로운 여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죽였다."

대공은 담담하게 말하며 눈을 찡그렸다.

멀리 있는 걸 보듯-.

*

"세실리아가 위험하다니!"

대공의 외침에 노파가 작게 떨었다. 그 주변의 방이 가득 떨렸다.

"아기가 저주받은 듯합니다."

노파가 대공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주? 감히-."

"아이가 산모를 태우고 있습니다."

대공의 눈이 작게 떨렸다.

세실리아는 원래도 몸이 약했다. 임신하며 더 유약해져서 걱정했는데-.

'저주라니.'

대공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노파가 안쪽을 가리켰다. 대공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죽음의 냄새였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세실리아."

대공은 목소리를 최대한 누르며 그녀 앞에 무릎 꿇었다. 그 굵은 다리가 휘청였다.

세실리아의 눈동자가 대공을 응시했다. 여름 하늘처럼 푸르렀던 눈동자가 탁했다.

"아-."

메마른 목소리가 작게 터졌다. 대공은 황급히 끄덕였다.

"그래, 내가 왔다."

대공은 내밀던 손을 참았다. 전장에서 곧장 온 터라, 손에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옆의 천에 손을 닦았지만, 아무리 닦아도 피는 남아 있었다.

"이겼어요?"

세실리아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이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다니-. 대공은 입술을 씹으며 끄덕였다.

"······당연하지. 알잖나. 나는 지지 않는다. 마물 백 마리의 머리를 뽑고 왔다."

대공은 입꼬리에 힘을 줬다. 험악한 인상을 어떻게든 부드럽게 만들었다.

대공은 부인을 살폈다. 배 주변에서 먼지가 가득 일어났다. 타는 냄새가 풍겼다.

아이가 제 어미를 태우고 있었다.

'저주-.'

저게 저주가 아니면, 뭐라는 말인가.

그의 우선순위는 세실리아였다. 아니, 세실리아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세실리아가 대공의 손을 잡았다.

"안 돼요."

그 목소리가 단호했다.

"내겐 네가 중요하다. 아니, 너만이 중요하다."

대공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설령 그녀가 저주하더라도, 잃을 수 없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담담한 목소리에 대공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약속했잖아요."

그녀의 속삭임에 대공은 입술을 가득 씹었다.

약속을 목숨처럼 지키는 대공이었지만-.

"약속 따위."

"마물 포식자로 유명한 대공이 거짓말쟁이라고 놀릴걸요?"

"모두가 놀려도 상관없다. 너만 있다면."

그때, 그녀의 눈이 엄해졌다.

"베카르탄."

그 투박한 명칭에 대공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떼 좀 그만 부려."

목소리가 단호했다. 대공은 입술을 씹었다.

"나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나 대공비야. 제국도 두려워하는 대공의 아내라고."

세실리아가 히죽 웃었다. 싱그러운 봄 같은 미소였다. 다만, 그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늘 대공에게 맞춰주는 여인이었지만, 저렇게 고집을 부릴 때면 이길 수 없었다.

이번에도 대공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손을 길게 뻗었다. 그 가냘픈 팔에 대공은 눈을 구겼다.

"왜 울어요. 좋은 날."

눈가를 매만지는 손가락에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 마물과 싸울 때도 떨리지 않았던 손이 가득 떨렸다.

"떨려요? 노래 불러줄게요. 여름이 오고 있어요-."

칼은 필요 없었다. 대공의 손이 칼보다 예리했다. 세실리아가 노래를 시작했다.

늘 불러주던 노래였다. 대공은 들뜬 숨을 억지로 눌렀다.

모든 집중을 쏟았다.

이윽고-. 대공의 손이 배를 깊숙하게 찔렀다.

"큰 소리로 노래해요-."

"씨앗이 자라고-."

노래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작은 신음조차 없었다.

손을 타고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공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홀로 이걸 견뎠다는 건가-.

"따뜻한 여름을······."

대공은 이를 질끈 깨물며 아이를 꺼냈다.

아기가 온전히 드러났다. 날붙이도 뚫지 못했던 대공의 피부가 타올랐다.

왜 그녀가 이렇게 낳고 싶어 했는지, 아이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함이었다.

대공은 아이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고통은 상관 없었다. 그저 이 소중한 게 부서질까 걱정될 뿐이었다.

"아."

쇠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아이를 보여줬다.

"딸이오. 그대를 닮았군."

그녀가 힘겹게 손을 내밀었다. 그 창백한 얼굴로 더없이 활짝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천만다행이지. 나를 닮은 딸이라니. 얼마나 원망하겠소?"

"베카르탄도 귀여워요."

"수하들이 들으면 웃겠군."

그녀가 아이를 받았다. 대공은 그 가녀린 손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죽음의 냄새가 짙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웃었다. 더없이 활짝. 대공은 그 웃음을 기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고마워요."

목소리가 먼지로 흩어졌다. 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를 받쳤다.

대공은 아이를 안으며-.

"내가 더 고맙소."

필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좋은 날이니까.

똑똑.

"대공 전하! 황제가-."

*

대공은 천천히 눈을 떴다.

완전히 큰 아드리안나는 그녀와 아주 닮았다.

다만, 그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그 무표정은 대공을 닮았다. 그렇기에 저렇게 미련한 거겠지.

"내가 죽였으니 네 탓이 아니다."

대공은 담담히 사실을 고백했다.

"나를 원망해도 좋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닙니다. 대공 전하는 어머니의 약속을 들어주신 거 아닙니까. 제 저주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참으로 미련한 대답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닮은 듯했다.

세실리아를 닮았으면 좋았을걸, 왜 하필 못난 나를-.

대공은 나지막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죽였다."

"하지만 어머니를 태운 건······."

"그만."

그리 말해도, 아드리안나의 눈은 여전했다.

참으로 고집불통이었다. 대공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닮았군.'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끝까지 죄책감을 떨치지 못할 것을-.

대공도 그럴 것이기에.

"먹자."

대공은 다시 고기로 시선을 돌렸다. 다 식은 고기였지만, 맛이 제법이었다.

'요리는 쓸만하군.'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 뒤에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세실리아는-."

대공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할 말이 너무 많았기에, 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배울 게 많은 여인이었다. 따스한 여유와 기품이 넘쳤다. 삭막한 북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지. 귀족처럼 행동했지만, 그렇다고 북부인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나하나를 존중했다."

대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늘 자신감에 가득 찬 여인이었다. 그 가녀린 몸으로 내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강단을 지녔던, 영혼이 강한 여인이었지."

대공은 괜히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또 뭔가에 꽂히면, 아주 빠져서 다른 건 쳐다도 안 보고-."

그때,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아, 갈라하드 대장 같은 분이셨군요."

아드리안나의 입에서 괴상한 말이 나왔다.

대공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그녀와 닮았다니-.

한 번도 아드리안나에게 화를 낸 적 없던 대공이 벌떡 일어날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 듣다 보니 닮은 듯하여······. 죄송합니다."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아드리안나에 대공은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애초에 그녀를 본 적 없는 아드리안나였다. 이쪽이 설명을 잘못했겠지.

그때-.

"아, 이야기 잘 나누고 계셨습니까?"

놈이 돌아왔다. 그 여유로운 낯짝을 보니, 괜히 화가 올라왔다.

도대체 저 뻔뻔한 놈의 어디가 그녀와 닮았다는 건가?

아드리안나는 모든 게 완벽했지만, 사람 보는 눈은 없는 듯했다.

그때-.

"자, 그래서 화해했습니까?"

놈이 뻔뻔하게 웃었다.

대공은 얼굴을 가득 구겼다.

절대 안 닮았다.

*

'실패인가?'

갈라하드는 굳은 둘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대공이 오히려 전보다 더 살벌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 아드리안나는-.

'괜찮은데.'

아드리안나는 예의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 눈이 조금 풀렸다. 저걸 보면, 화해한 것 같기는 한데-.

'애매하군.'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꼬는 텄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실제로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좋았다.

대공은-.

"죽고 싶나 보군."

오히려 더 사나워졌지만.

"저는 장수할 계획입니다."

"세상이 계획대로 되나?"

"하하, 농담도-."

"농담?"

농담이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 음식은 입에 좀 맞나."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 쪽으로 붙었다. 대공은 아드리안나에게 약하니까.

"예, 무척 맛있습니다. 요리도 잘 하시군요."

"그럼. 나는 못 하는 걸 빼면 다 잘한다네."

"대단하십니다."

다만, 대공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아드리안나에게 붙자 오히려 압력이 거세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물러났다.

"맛없다."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박하게 말했다. 그 깔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이건 위험하군.'

갈라하드는 말을 애써 삼켰다.

"사냥이다."

밥을 먹자마자 사냥이라니-. 참으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다만, 갈라하드가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황제에 관한 정보를 묻기 위해서, 대공에게 사냥을 요청한 거니까.

'그냥 대답하지 않겠지.'

저번에는 마물을 잡을 때마다 대답했다.

이번에는 아드리안나까지 있었으니, 질문의 기회가 더 적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하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대공의 걸음이 뚝- 멈췄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냥도 배웠겠다-."

대공의 입이 살벌하게 올라갔다.

"······내기 말입니까?"

"그래, 저번에 대공 전하와 문답을 걸고 내기를 했는데, 제법 재밌었다네."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대공이 끄덕였다.

"말은 무게를 지닌다. 듣는 귀가 어디에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곳에는 귀가 없다. 마물의 무덤이기에."

대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듣는 귀가 어디에도 있다?'

제국의 정보국은 그 정보력이 상당했지만, 북부에는 다소 약했다.

어디에도 귀가 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를 모를 리가 없는 대공이 저리 말하는 건-.

'정보국이 아닌, 뭔가 더 있군.'

대공이 황제와 맺은 협약의 일환일 가능성이 컸다.

"해가 지기 전까지 마물을 제일 많이 잡은 이가 질문할 기회를 얻는다. 나에게 두 개, 다른 이에게 한 개로 하지."

대공이 내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긴 이가 대공에게 질문 두 번, 패배한 이에게 한 번, 총 세 개의 질문을 얻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저와 아드리안나가 내기하는 겁니까?"

"불만 있나?"

"아니, 있겠습니까."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갈라하드는 당연히 대공과의 내기를 상정했다. 그런데 상대가 대공이 아니라 아드리안나라니-.

아드리안나는 강자였지만, 마물 사냥은 영역이 달랐다. 아까 대공에게 배우는 것만 봐도 서투른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호재였다.

'좋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가벼이 물었다.

"자신하는 얼굴이군."

대공이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한 번 해보지 않았습니까."

대공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묘하게 서늘했다.

"아드리안나는 천재다."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재능은 갈라하드가 더 잘 알았다.

다만-.

"저도 천재 소리 좀 들었습니다."

대공이 꼭 마물의 숨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자세히 보니, 조소였다.

"시작이다."

대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나를 뿌리려는 순간-.

옆에서 순백의 오러가 격렬하게 타올랐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곧장 땅을 박찼다. 그를 본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아드리안나가 향하는 곳에, 주변에서 가장 강한 마물이 있었기에-.

그때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어떻게?'

갈라하드가 하나를 잡기도 전에, 아드리안나는 세 마리를 먼지로 만들었다.

아드리안나가 강한 건 이미 알았지만, 마물 사냥은 다른 이야기였다.

"대단하군."

"예전에 갈라하드 대장이 알려줬던 방법을 응용했습니다."

"아, 마법 탐지 말인가."

"예, 덕분에 탐지가 쉬워졌습니다."

확실히 그 방법을 이용하면, 마족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거리가 멀었는데?"

"아, 개척자를 상대한 뒤부터 힘이 넘쳐서 말입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빙글 돌렸다. 먼지가 가득 휘날렸다. 그 오러가 더욱 타올랐다.

'그새 또 성장했군.'

마경에서 개척자를 잡은 덕분에, 더욱 성장한 듯했다.

'역시 아드리안나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그리고 대공 전하에게 받은 가르침도 도움이 됐습니다. 심장 소리-."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대공의 얼굴이 끔찍해졌다. 자세히 보니 함박웃음이었다.

'끔찍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상황을 계산했다.

이겨서 질문을 가져오는 것도 중요했지만, 아드리안나의 성장이 더 중요했다. 가벼이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기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연초를 입에 물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풍겼다.

잠시 뒤에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먼저 대공 전하에게는 어머니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주 바람직하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갈라하드 대장에게는-."

뜸 들이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까닥거렸다.

'이쪽에게 질문을 따로 대답해주고, 하나 더 받는다면?'

대공한테 할 질문을 하나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아드리안나 기도 세우고, 이쪽 실리도 챙기고, 대공도 기분이 좋으니, 모두에게 좋았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크게 끄덕였다.

그 입에서 나온 질문에-.

"어쩌다 연초를 피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갈라하드는 피던 연초를 떨어뜨렸다.156화 레몬 연초

'연초를 피우는 이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놓쳤다. 연초가 바닥을 뒹굴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아드리안나는 무심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레몬을 싫어하신다고 하셨는데, 레몬 향 연초를 피는 게 궁금했습니다. 혹시 민감한 부분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감한 부분보다는 어릴 적부터 핀 거라서 말일세."

아드리안나가 작게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항상 선을 지키는 이였다. 적당한 거리감을 중시하는 여인이었으니, 이 정도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궁금합니다."

예상과 달리 아드리안나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또렷한 눈동자에 갈라하드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연초를 처음 핀 게······.

****

정보국에서 첫 임무는 아주 중요했다. 

첫 임무에서 실수하면, 안가 요원으로 보내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안가 요원은 요원의 무덤이었다. 차라리 은퇴가 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안가로 보낸다니-.

그 정도로 첫 임무는 아주 중요했다.

갈라하드는 첫 임무서를 천천히 읽었다.

예상대로 불법 마법사 사냥이었다. 

마법사는 전투용이 아니라, 공돌이나 보조 용이었다. 마법사 사냥은 보통 신입에게 내려지는 임무였다.

문제는-.

'내가 보조?'

가장 중요하다는 첫 임무에서 보조로 빠지다니-. 상당히 좋지 않았다.

'마족의 왕을 찾아야 하는데.'

언제 마족의 왕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지체할 틈이 없는데, 이런······.

"뭐야? 꼬맹아. 표정이 왜 그러냐?"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못생긴 놈이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갈라하드의 정보국 동기였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거 같군."

"뭐가 말이냐?"

"왜 연수원에서 턱걸이였던 그대가 주 인원이고, 연수원 최고 성적인 내가 왜 보조지?"

갈라하드의 신랄한 말에 놈이 얼굴을 구겼다. 다시 조소를 머금었다.

"나는 기사니까. 너는 마법사고."

마법사 차별이군. 갈라하드는 낮게 탄식했다.

어이가 없지만, 문제를 일으키면 상황을 나쁘게 만들 뿐이었다.

"재수 없는 꼬맹이."

이죽거림은 가벼이 무시했다. 저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기에, 갈라하드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때, 조장이 그들을 불러 모았다. 

총인원은 넷이었다. 갈라하드를 제외한 이들은 전부 기사였다.

'마법사는 보조나 사무직으로 빠진다는 게 진짜군.'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너와 너는 후문으로, 나는 정문으로 간다."

기사답게 계획은 간단했다. 문제는-.

"저는 어디로 갑니까?"

갈라하드는 아예 지정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너는 뒤에 빠져서 도망치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소리쳐라."

대놓고 무시였다. 임무에서 빼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른 기사가 끄덕였고, 못생긴 동기가 조소를 머금었다. 

갈라하드는 다시 손을 들었다.

"뭐냐?"

"표적에는 두 번이나 도망쳤던 4위계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로 도주로를 파뒀을 가능성이 큽니다."

갈라하드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그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마법사가 도망을 가봤자지."

기사들의 진득한 웃음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전에 두 번이나 놓쳤던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명치를 걷어차인 갈라하드는 바닥을 그대로 굴렀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래? 이제 어떻게 생각하냐?"

명치를 걷어찬 놈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또 놓치겠네요."

담담하게 말했다. 발길질이 쏟아졌다.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 이미 기사들은 사라진 뒤였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정면을 살폈다. 술집이 소란스러웠다.

'시작했군.'

망할 기사 놈들-. 갈라하드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무슨 일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 있었다. 그를 보자, 순간 울렁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망할 사춘기.'

사춘기의 소년에게는 자극적인 외모였다. 갈라하드는 애써 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임무 시작은 조금 뒤일 텐데요."

이어진 여인의 말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늑대는."

"병아리."

"백 마디 말이."

"적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소속이 어디 십니까?"

"사무국이에요."

"사무국이 왜 현장에 계십니까?"

"아주 유명한 이가 들어왔다고 해서 구경 왔어요."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순간 안기고 싶어지는 따스한 미소였다. 갈라하드는 충동을 누르고 가벼이 끄덕였다.

"당연하게 그쪽이라고 생각하네요?"

"예. 아닙니까?"

"맞아요. 마법사가 연수원에서 최고 성적을 받은 게 처음이라서 궁금했어요."

"보조 업무라서. 구경할 거리는 없을 겁니다."

"보조 업무요?"

"예, 밖에서 보다가 도망치는 놈 있으면 소리 지르기입니다. 아아-."

여인이 시선을 돌렸다. 술집을 본 여인이 물었다.

"성공할 거 같아요?"

"아니요. 놓칠 겁니다."

"왜요? 제법 경력이 있는 요원일 텐데요."

"마법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 그렇군요."

아직 외형이 객관적으로 꼬맹이인 갈라하드였다. 그렇기에 무시당하기 일쑤였는데, 여인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음, 그래서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예요?"

여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 숨결이 귀를 간질일 정도의 거리였다.

"상황 끝나면, 들어가서 통로 찾아서 알려줄 생각입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어깨에서 자그마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여인이 턱을 올린 것이다.

레몬 향이 짙어졌다. 성장기 소년에게는 치명적인 향기였다.

"적당한 방법이네요. 하지만 그래서는 정보국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마법사는 더욱. "

갈라하드는 여인의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걸음을 내딛자, 여인이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여인을 올려봤다. 여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키도 크군.'

순간 얼굴이 안 보일 정도였다. 여인이 자세를 숙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여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를 보던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혹시 저한테 반하셨습니까?"

갈라하드의 당당한 질문에 여인의 미소가 순간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직 성장 중이지만, 저는 잘생겼으니까요.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도 그렇고-. 또 소년을 좋아하는 여인들도 있으니까요."

여인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아, 농담입니다."

여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갈라하드는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의 창문이 부서지고 사내 하나가 던져졌다. 갈라하드는 그 얼굴을 확인했다. 목표가 아니었다.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난장판이었다. 곳곳이 피로 가득했고, 살점이 뿌려져 있었다. 선명한 붉은색과 피비린내에 정신이 핑- 하고 돌았다.

갈라하드는 구역질을 참으면서 장내를 살폈다. 기사들이 그을려 있었다. 마법 함정을 밟은 듯했다.

그때, 조장과 눈이 마주쳤다. 조장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밖에서 망보라고 했을 텐데."

조장이 검을 빙글 돌렸다.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명백한 적의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때-.

"표적이 없습니다!!"

못생긴 동기가 소리쳤다. 조장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그들이 바삐 움직였다.

갈라하드는 술집 곳곳을 살폈다. 자신이라면 어디에 설치했을지 고민했다.

그때, 누군가가 갈라하드의 멱살을 잡았다. 갈라하드는 공중에 데롱데롱 매달렸다. 못생긴 동기였다.

"너 새끼가 제대로 밖에서 안 봐서잖아! 이 새끼야!"

동기가 슬쩍 눈을 돌렸다. 조장과 다른 기사도 동조하는 느낌이었다.

'책임을 떠넘기는군.'

멍청한 놈들이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굴렀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조장을 쳐다봤다. 조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에게 시간을 주시면 찾아내겠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저는 마법사니까요."

조장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격렬한 스파크가 멱살 잡은 놈의 손을 타고 퍼졌다.

"끄아악!"

놈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엎어졌다. 

그때, 서늘한 검이 목을 겨눴다. 조장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 눈에 경악이 미세하게 서려 있었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저한테 떠넘겨도, 가장 쉬운 임무인 마법사 사냥을 실패한 건 치명적일 텐데요."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협박하는 놈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흔적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갈라하드가 가리키자, 오러가 바닥을 갈랐다. 손가락 옆을 스친 서늘함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문이 잘리고,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가 드러났다.

갈라하드는 슬쩍 물러났다. 조장과 기사가 망설임 없이 통로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그리고-.

콰아아앙!

'셋.'

통로 안쪽에서 폭발이 거칠게 일어났다. 불길이 통로를 가득 덮었다. 열기가 아주 화끈했다.

"역시 함정이 있네."

담담하게 중얼거린 갈라하드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사다리가 있었다. 다리가 짧아서 조금 힘들었지만, 금방 내려갈 수 있었다.

아래에 도착하니, 엉망이 된 기사 둘이 뒹굴고 있었다. 둘 앞에 후드를 쓴 놈이 있었다. 

얼굴이 반쯤 녹아내린 놈이었다. 자기 마법에 자신이 휘말리다니-.

'저것도 마법사라고.'

자신을 겨눈 지팡이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망할 놈들! 지식을 탐구하는 게 무슨 잘못이라는 거냐!"

마법사가 울분에 가득 찬 외침을 터뜨렸다. 갈라하드는 볼을 긁적였다.

"그쪽은 마법 연구가 아니라, 마법 연구에 애들을 사용한 게 문제인데요."

"돈을 주고 정당하게 구매한 건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핑계 대지 마라! 마법을 불법으로 알려준 것 때문이잖나!"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여기 놈들의 사고방식이 괴상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불에 타 죽어!"

그때, 놈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를 타고 거친 불길이 뿜어졌다. 

갈라하드는 옆으로 구르며 손가락을 튕겼다. 날카로운 불화살이 쏘아졌다.

구른 덕분에 불길을 피한 갈라하드는 상대를 확인했다.

마법사의 심장에 정확히 불화살이 꽂혀 있었다. 지팡이를 맹신한 게 놈의 패인이었다.

마법사가 벌겋게 타올랐다. 고기 굽는 냄새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갈라하드는 기침하며 손을 휘저었다.

'끔찍하군.'

마법사는 바짝 탄 상태였다. 

그 끔찍한 시체 앞에서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가져갈까.'

뭐를 제출할지 고민했다.

그때, 뒤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조장과 기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벌써 회복하다니-. 역시 기사였다.

"잡았습니다."

갈라하드는 바짝 탄 놈을 가리켰다.

칭찬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적어도-.

'검을 겨눌 줄은 몰랐군.'

갈라하드는 목을 겨눈 조장에 눈을 찡그렸다. 

아주 호로 새끼들이었다.

"너, 함정이 있는 거 알고 있었지?"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기사였다.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예상은 했습니다."

"시발! 왜 말 안 했지?"

"말릴 틈이 없었잖습니까? 성격이 워낙 급하셔서."

"이 개새끼가-."

거칠게 튄 침에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충 마법에 휘말려서 죽고, 내가 혼자 잡은 걸로-.'

나쁘지 않은 계산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가관이네요."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사무국 여인이 부드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까지 검을 겨누던 조장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사무국이 까다로워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조장의 격한 반응에 갈라하드는 의문이 들었다.

"국장님이 여기는 무슨 일로······."

'······저 여인이 국장?'

여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국장이라는 무거운 호칭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짐 싸두세요."

안가로 보내겠다는 이야기였다. 요원 생활 끝이라는 이야기였지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진짜 국장이군.'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갈라하드 앞에 선 여인이 연초를 내밀었다. 

"마나 연초예요. 마나를 돌려주고, 정신을 개운하게 해줘요."

여인은 다 안다는 듯 갈라하드를 보며 설명했다.

확실히 급하게 움직인 탓에 마나가 꼬인 상태였다. 

물론, 갈라하드에게 이 정도는 견딜만한 상처였지만, 상대는 국장이었다.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냅다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레몬 향이 깊게 풍기며, 마나가 빠르게 돌았다.

'연기 형태로 마나를 돌리는 거군.'

그때, 여인이 갈라하드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많이 펴봤나 봐요?"

"천재라 금방 배웁니다."

"그래요?"

여인이 손가락을 내밀어서, 갈라하드가 문 연초를 가져갔다.

줬다가 뺐다니-.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연초를 입에 물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음-. 앰버르탄 백작 가의 셋째 아들, 어미는 낳고 한 해 뒤에 죽었고, 가문에서는 버려진 것과 다름없지. 지원 없이···." 

여인이 갈라하드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아니, 오히려 방해 요소가 많은 상황에서 혼자 마법을 배워 아카데미를 최연소 합격, 최연소 졸업, 정보국 최연소 입사까지-. 너무 순탄해요. 마치, 누군가 짠 것처럼."

갈라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인은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사 해봤는데, 전부 사실이더군요. 조력자는커녕 친구도 없고-. 그렇다면 혼자서 이걸 전부 해냈다는 건데."

여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그래, 천재라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정보국에 천재 아닌 이가 얼마나 있겠어요?"

여인은 이제 바로 앞에 있었다. 갈라하드의 눈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근데 왜 꼬맹이한테서 관록이 보이지? 그건 타고날 수 없는 건데-. 특히, 그 눈."

여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도대체 뭐야?"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의심하고 있었군.'

아무리 그래도 국장이 현장까지 직접 나오다니-. 

상대는 국장이었다.

'삐끗하는 순간 끝이다.'

치명적인 위기였다. 

동시에 천금 같은 기회였고.

그러니까-.

"저는 세상을 구할 용사입니다."

갈라하드는 여인의 연초를 다시 뺏어 입에 물었다.

축축한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여인은-.

"시발, 골 때리는 게 들어왔네."

거칠게 웃었다.

****

'음······.'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어느새 또 연초를 피고 있었다. 습관이었다. 

이건 마나 연초였다. 마나를 돌리기 위한 용도였다. 물론, 고양감도 있지만, 그건 마나 순환의 효과일 뿐이었다.

그저 습관이었다. 문제는 이를 아드리안나가 궁금해한다는 거였다. 

이걸 피게 된 이유를 요약하자면-.

'연상의 미인이 물려주고, 또 나눠서 폈다 정도인가.'

음.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걸 대공이 듣는다면-.

'무조건 뽑힌다.'

아드리안나가 궁금해하면, 후에 따로 이야기하는 게 나았다. 

대공이 있는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이겨야 했다.

문제는-.

"열아홉 마리."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마물 하나를 먼지로 만든 아드리안나가 검을 높이 들고 있었다.

'점점 더 빨라지는군.'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드리안나는 어느 때보다 열성적이었다. 안 그래도 빨랐던 사냥이 점점 더 빨라지는 중이었다.

대공은 마물을 잡으면, 그걸 먹는다고 시간이라도 썼지, 아드리안나는 바로 다음으로 이동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대공에게 어머니 질문이 그토록 절실한 걸까.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승부는 공정해야지.'

일부러 져주는 건, 아드리안나도 안 좋아할 것이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쪽도 최선을 보이는 게 예의였다.

다행인 건, 마물의 질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그 숫자로 대결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갈라하드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광역기지.'

원래라면 안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체내 마나 농도를 중급 마족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마족이 마법사의 천적인 것처럼, 지금 갈라하드는 중급 마족 이하의 놈들에게 천적이었다.

그러니까-.

'할만하다.'

갈라하드는 마법진을 그렸다.

긴장이 정신을 더 예리하게 만들었다. 빠르게 환경을 확인했다.

'눈이 멈췄다. 번개 치기 좋은 날씨지.'

이윽고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능히 역작이라 부를만했지만, 갈라하드는 검토하느라 바빴다.

차분하게 마법진을 다시 살폈다. 몇 번이나 검토를 마치고, 수통을 있는 대로 다 꺼내서 마법진에 부었다. 

거대한 마법진이 금세 붉게 흥건해졌다.

저번에 아드리안의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서, 천 번 넘게 깎은 천벌이었다.

'내놓게나.'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두근! 고통의 알이 저항하지 않고 마나를 내뿜었다.

이윽고 마나가 가득 팽창했다.

정신이 날카롭게 섰다.

가득 찬 마나를 움직이며-.

"천벌 지옥."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주문을 읊었다.

자그마한 스파크가 하늘로 올라갔다.

157화 승

'저주라.'

아드리안나가 휘두른 검에 마물이 그대로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능히 저주라 칭할 만했다. 평생 타인의 온기를 느껴보지 못한 아드리안나였으니까. 심지어 제 어미도······.

아드리안나가 검을 흔들며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은 끄덕였다.

"마흔다섯 마리다. 대단하구나."

"아, 감사합니다."

"네 또래에는 너와 견줄 이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마법도 통하지 않았으니, 아드리안나를 상대할 수 있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탓에 아드리안나는 보지 못했다. 대공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는 걸-.

'너무 빠르게 크는구나.'

그 귀엽던 것이 얼마 전인 듯한데, 벌써 저리 장성하다니-. 대공은 텁텁한 침을 삼켰다.

"그런데 마물의 심장 소리 말입니다."

"음."

조심스럽게 묻는 아드리안나에 대공은 가만히 끄덕였다. 

"마물이 인간을 발견했을 때, 그 심장이 빨리 뜁니다."

"맞다. 심장은 거짓말 못 하는 입이다. 흥분했을 때, 빨리 뛰지. 그 사이에 그걸 알아내다니 대단하구나."

단순히 심장 소리를 듣는 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자라면 가능했다. 

물론, 대공이 말하는 경지는 최소 소드 마스터였다. 소드 마스터라면, 집중하여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심장 소리를 분석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대공도 수많은 심장을 뽑으며 알아낸 건데, 아드리안나는 채 하루도 되지 않아서 깨닫다니-. 

역시 아드리안나였다.

"그 심장 소리를 인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크기만큼 심장도 거대한 마물과는 달리 인간의 심장 소리는 쉽지 않다."

마물은 그 크기가 거대한 만큼 심장도 컸다. 그런 탓에 심장 소리가 아주 커서, 듣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 마물과 달리 인간은 심장 소리가 아주 미세했다. 듣기 쉽지 않았다.

"만약 질문을 받았을 때, 심장이 빨리 뛴다면 무슨 뜻입니까?"

"거짓이거나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대공의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에는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그리는 중이었다. 

이쪽이 마흔 마리 넘게 잡는 동안, 놈이 잡은 건 고작 다섯 마리였다. 그런데 여전히 저러고 있다니-.

"······포기하신 걸까요."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대공은 작게 웃었다.

'놈이 포기?'

깔끔하게 입고, 머리까지 넘긴 놈은 완벽한 귀족이었지만, 그건 그저 외적인 모습이었다.

놈은 대공과 같은 부류였다. 제 목이 뽑히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이를 박아 놓는 마물 같은 지독한 부류였다.

그런 놈이 포기?

"포기한 건 아닐 거다."

"그렇다면······."

"양보겠지. 건방진 오지랖이군. 쯧."

대공은 수염을 긁적였다. 

"오지랖-."

아드리안나는 중얼거렸다. 

대공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승부는 해가 지기 전까지였다.

건방진 오지랖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쯧.'

혀를 찬 대공은 아드리안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상당히 무거웠다.

"세실리아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든 그냥 물어봐도 된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많이 궁금했구나.'

하긴 제 어미를 궁금해 하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세실리아는 북부에서 가장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공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건, 아드리안나의 배려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저와 닮았나요?"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똑같이 생겼다."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작게 풀렸다. 그 모습에 대공은 수염을 벅벅 긁었다. 

"저처럼 금발이었나요?"

"태양을 녹인 듯한 금발이었지. 어찌나 밝았는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마구 흔들렸다.

"눈도 푸른색이지. 세실리아는 자신을 닮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를 닮았으면 원망했을 거라더군."

풉-. 아드리안나가 작게 웃었다. 대공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대공은 한없이 곱씹어서 맛도 안나는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를 하나씩 풀어냈다. 투박하게 전하는 게 전부였지만,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무표정이 점점 부서지고, 순진한 얼굴이 떠올랐다. 세실리아를 더욱 닮았다.

"······네가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가졌다는 걸 알면, 세실리아는 무척 슬퍼할 것이다. 눈물이 많은 여인이었으니까. 펑펑 울겠지."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대공은 그런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정말 그러실까요."

"그래."

"알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웃었다. 

대공은 세상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갈라하드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놈에게 감사해야 한다니-. 평소라면 콧방귀도 안 뀌었겠지만, 아드리안나의 미소를 본 대공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명백히 놈 덕분이었다.

그때-.

"천벌 지옥."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금색 봉을 높이 드는 놈이 보였다.

그 금색 봉 끝에서 자그마한 스파크가 하늘로 올라갔다.

'양보한 게 아니었나?'

심상치 않은 느낌에 대공은 눈을 찡그렸다.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옅게 갈라졌다. 

번개가 어둠을 찢으며 내려쳤다. 설산이 순간 밝아지며, 산의 윤곽이 드러났다.

······!!

번개가 꽂힌 곳에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르르릉! 뒤늦은 천둥소리가 마물의 울음소리를 가벼이 지웠다.

인간이 번개를 내리다니-. 확실히 제법이었지만, 그래봤자 한 마리였다.

그때, 먹구름이 거칠게 일렁였다. 

이내 먹구름이 수십 갈래로 거칠게 찢어졌다. 

그 틈으로-.

수십 개의 번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수십의 번개가 동시에 날카로운 창처럼 내리꽂혔다.

수십의 번개가 동시에 떨어지자, 하늘과 땅이 노란색 선으로 이어진 듯했다. 상당히 장엄한 모습이었다.

이어진 천둥소리가 귀를 울렸다. 마물의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터졌다.

'진짜 지옥이군.'

대공은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에게도 떨어졌다. 대공은 손을 휘저어 번개를 털었다.

화려했지만, 그 위력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따끔거리는 정도였다.

다만, 이 정도면-.

'약한 마물은 그대로 죽겠군.'

대공은 침음성을 흘렸다.

개벽하는 세상에 대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드리안나에게 양보한 줄 알았더니-.

'양보한 게 아니었군.'

힘을 모으고 있던 거였다.

그에 대공은 오히려 웃었다.

번개 세례가 끝난 설산은 다시 고요해졌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에 간신히 기대어 있었다. 그 단정한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었다.

잔뜩 무리했는지 그 몸이 연신 떨렸다. 

대충 봐도 상태가 안 좋았지만, 그 얼굴은 가득 웃고 있었다.

대공에게는 들렸다. 

연신 두근거리는 놈의 심장이-.

'그래, 사내라면 그래야지.'

대공은 더 짙게 웃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승부는 끝났다."

대공은 가벼이 고개를 저으며 위쪽을 가리켰다. 해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까지 계산했군.'

대공은 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제가 이겼을 겁니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은 순순히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

'아슬아슬했군.'

갈라하드는 저릿한 손을 풀며 입꼬리를 올렸다.

백에 달하는 천벌을 단번에 쓰는 건, 갈라하드에게도 상당히 무리한 작업이었다.

그를 위해서 마족의 피, 마법진까지 전부 이용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마나 탈진까지 겪을 정도로 마나까지 퍼부어야 했다.

램프를 제외하고, 가진 전부를 쏟아부은 상태였다.

'시원하군.'

몸이 타는 기분이 들었지만, 마나 탈진의 고통은 익숙했다.

'몇 마리나 잡았으려나.'

백 개의 천벌에 표적까지 일일히 설정하는 건, 지금 단계에서는 불가능했다.

그에 저번 사냥에서 펼쳤던 '서늘한 안개'를 이용했다. 그 원리만 조금 바꿔서, 번개가 농도를 따라서 움직이도록 지정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압축하지 않은 갈라하드의 천벌은 중급 마물 이하에게만 통했다. 혹여 상급 마물이 맞았으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백 개의 천벌이었다. 그 명중률이 완벽할 수 없었다.

그런 둘을 더하면-.

'아슬아슬하겠는데.'

갈라하드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조금 까닥하면 쓰러질 듯했다. 

휘청이는 갈라하드를 누군가 잡아줬다. 아드리안나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원래 대단하다고. 대단한 건 내 전문일세."

"그러시군요."

"자네, 말투가 조금······."

"갈라하드 대장은 여기 계세요. 제가 수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갈라하드를 자리에 앉혀줬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아드리안나가 곧장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대공과 덩그러니 남겨졌다. 자신을 내려보는 살벌한 눈에 갈라하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잔재주가 대단하군."

백 개의 천벌을 한 번에 내렸는데 잔재주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대공의 손에 일렁이는 스파크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대공의 입장에서 잔재주겠군.'

순순히 끄덕였다. 무식한 대공은 마법의 위대함을 모를 만했다.

"질문은 총 세 개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번에 남은 질문이 한 개, 이번 승부가 두 개였다.

갈라하드도 몇 마리 잡았는지 모르는데, 대공이 어찌 아는지 신기했다. 

갈라하드는 이겼다는데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대공을 보며 잠시 질문을 고민했다.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황제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갈라하드는 대공의 얼굴에 집중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순간 대공의 입꼬리가 굳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인 듯했다.

"······황제를 죽일 생각이냐?"

대공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건방지구나."

대공이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맹수의 목을 틀어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대공의 웃음소리였다. 머리가 가득 울렸다. 꼭 정신 간섭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정신이 울렁였다.

'마나 탈진 때문에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갈라하드는 투덜거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한참 웃던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건 두 개짜리다."

황제 질문은 두 개짜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황제를 죽이면-."

대공의 입가에서 연기가 휘날렸다. 

"제국이 무너진다."

대공이 선언하듯 말했다.

'황제를 죽이면 제국이 무너진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제는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제국이 의회로 굴러간 지 오래였다. 황제가 죽는다고 제국이 무너질 리가 없었다.

'저주와 관련 있나?'

황제는 결사대를 더한 것보다 더 짙은 저주를 품었다. 그 대가로 마나를 상당히 많이 품었을 것이다.

그런 황제가 죽는다면? 

'수도가 마경이 되겠군.'

수도는 제국의 중심이었다. 수도가 무너지면, 확실히 제국에 치명적일 것이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수도가 마경이 되는 건, 끔찍한 이야기였다.

다만-.

'황제의 죽음이 확정이라면?'

네발 마족은 [단단한 철도 세월에 녹스는 법이다.]라며 황제가 스스로 무너질 것을 암시했다. 

실제로 갈라하드의 노트에는 황제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다.

원인이 외부든, 세월에 무너지는 것이든 황제의 붕괴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시기의 문제였다.

만약 마족의 왕이 준동하여 마족들이 내려올 때, 수도가 붕괴하면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미리 터뜨려야지.'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때, 대공이 말을 이었다.

"대신 목줄이 풀리겠지."

대공은 제 목을 긁으며 말했다. 

"목줄이 답답하신가 보군요."

"목줄 묶인 개새끼가 어찌 침입자를 물겠느냐?"

대공이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그 거대한 송곳니가 온전히 드러났다.

"하나 남았다."

대공의 선언에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대공은 마족의 왕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족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격한 반응을 보였다. 길버튼도 갈라하드에게 화를 낼 정도였다.

오직 아드리안나만이 그를 무시하지 않고 이해해 줬다.

하지만 대공은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런 대공은 마족의 왕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갈라하드는 대공을 올려봤다.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만약 대공이 화를 낸다면-.'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램프를 돌렸다.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긴장에 털이 쭈뼛 섰다.

준비를 마친 갈라하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족의 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흉터 가득한 눈에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대공의 입이 달싹거렸다. 그 굵직한 근육들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긴장이 등을 가득 적셨다. 털이 쭈뼛 섰다.

이내 대공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마족의 왕은 죽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대공은 화를 내지도, 반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하게 선언했다.

'마족의 왕이 죽었다?'

대공의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왕이 언제 죽었습니까?"

"음, 질문이 끝났군."

대공은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갈라하드는 조급해졌다. 그에 말을 덧붙였다.

"마족의 왕이 안 죽었다면, 혹은 부활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순간 대공의 얼굴이 구겨졌다.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질문은 끝났다."

대공의 대답은 단호했다.

'개념을 지울 수 없는 강자에게는 죽었다는 걸로 작용하는 건가.'

갈라하드는 묻지 않고 끄덕였다.

"값진 문답이었습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돌아왔다. 그런데 아드리안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늘 올곧던 눈이 작게 흔들렸고, 걸음걸이가 어딘지 불안했다.

아드리안나는 곧장 대공에게 향했다. 이미 대공이 승부 결과를 공언한 상황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보고를 들을 필요가 없었지만, 대공은 가만히 경청했다.

"총······."

아드리안나는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끄덕이며-.

"서른아홉 마리였습니다."

대공에게 보고를 올렸다.

'서른아홉? 내가 잡은 게 다섯이었으니까-.'

총 마흔네 마리였다. 아드리안나는 마흔다섯이었고-. 

갈라하드의 패배였다.

'대공은 내가 이겼다고 했는데?'

실제로 내기의 상품인 문답까지 이미 진행했다. 착오가 있었나-.

'대공이 실수했군.'

이미 문답은 끝낸 상황이었다. 갈라하드가 얻으려 했던 정보는 다 얻었다.

문제는-.

'이러면 아드리안나가 질문을······.'

갈라하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얼굴이 아주 무시무시했다.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군. 아드리안나의 승리다."

"······아, 네."

아드리안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아드리안나와 왠지 흉신악살처럼 구겨진 대공의 얼굴-.

뚜렷한 위기에 갈라하드의 머리가 바빠졌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앞에 섰다. 

아드리안나는 본래 항상 사람의 눈을 응시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어딘지 찜찜한 반응이었다. 

다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 아드리안나가 연초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면-.

'끝이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살길을 모색했다. 

어떻게 잘 포장하면-.

'직장 선임이 연초를 권했고, 그를 거부하지 못해서 피게 됐다. 레몬 연초를 피는 건, 습관이 남은 것일뿐. 아무 의미가 없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에 갈라하드는 문장을 다섯 번이나 점검했다.

거짓 없는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연초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그 질문은 갈라하드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갈라하드는 주머니 안쪽을 뒤졌다.

북부로 올 때, 꽤 많이 챙겼는데, 하도 핀 탓에 이제 거의 빈 곽이었다.

갈라하드는 허전한 곽을 매만지며-.

"아직 좀 남았네."

쓰게 웃었다.

158화 피 묻은 손가락

'눈빛으로 죽이겠군.'

자신을 노려보는 대공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이제 터질 듯했다.

그때-.

"잠시 다녀오겠다."

대공이 그대로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뒤를 확인한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갈라하드 대장이 잡은 건 마흔 마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바로 고백했다. 그리고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면 동점이 되는데, 대공 전하는 무승부를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승부 자체를 없애실 겁니다. 그에 수를 하나 줄였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대공 전하에게 질문이 있는 듯하여서-. 수를 속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답지 않게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죄였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이상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거짓말했다고 그런 거였군.'

그녀의 말대로, 대공이 무승부를 인정하고 질문 하나씩 나눠줄 리 없었다. 김이 샜다며, 없던 걸로 하고 내려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법 머리를 썼군.'

덕분에 결과적으로 대공에게 두 가지 질문을 추가로 얻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훌륭한 판단이었네."

"하지만 거짓을······."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었다. 늘 올곧던 눈이 가득 흔들렸고, 눈썹의 끝이 내려갔다. 상당한 죄책감이 보였다.

'첫 거짓말인가?'

그대로 두면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을 열었다.

"피 묻은 손가락이라는 꽃이 있네."

"······예?"

"피 묻은 손가락이라는 꽃은 적당한 양을 쓰면, 심장에 좋은 효과를 보이네. 약초지."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잘못 쓰면 독으로 작용하여 사망까지 이르게 하네. 거짓은 그 꽃과 같네. 적절한 곳에 쓰면 부드럽고 윤택하게 만들지만, 오용하면 독으로 작용하지."

"아-."

아드리안나가 깊게 탄식했다. 

그때-.

······!!

멀리서 마물의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산이 울릴 정도로 거대한 울부짖음이었다. 

대공의 짓이 분명했다.

'마물에게 화풀이하는 건가?'

마물은 공포를 느끼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인간을 탐하는 괴물이었다.

그런 마물이 저렇게 고통스럽게 울부짖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갈라하드는 다급히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이번은 적절한 사용이었네. 덕분에 상을 두 배로 받을 수 있었고, 시간도 줄일 수 있었지. 약초로 작용한 걸세."

"약초-. 아, 이해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굳게 끄덕였다. 그 눈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위로가 적절하게 통한 듯했지만, 주의는 확실히 줘야만 했다.

"아까도 말했듯 거짓은 오용하면 독일세. 사용 시에는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네. 알겠나?"

"예, 꼭 명심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임무에 나서는 결사대 같은 얼굴이었다.

걱정은 딱히 되지 않았다. 

오러의 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오러는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성품은 절대적인 선이었다. 고작 거짓말 좀 배웠다고, 엇나갈 리는 없었다.

다만-.

'대공은 아드리안나가 거짓을 말한 걸 알고 있다.'

아드리안나가 그리 유별난 반응을 보였는데, 어떻게 모르겠나. 

마물에게 화풀이까지 하는 대공에게 갈라하드가 대신 질문하면-.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서늘한 목을 매만졌다.

"질문은 자네가 쓰게."

"예? 아니, 갈라하드 대장이 쓰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차르티엔 될 걸세."

"그게 무슨 뜻······. 절대 안 됩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써야 합니다."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단호했다. 그 단단한 고집에 갈라하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 질문을 자네가 대신한다고 느끼면, 대공 전하의 기분이 아주 안 좋아지실 걸세. 안 그래도 자네가 거짓말한 상황 아닌가."

"대공 전하는 제 거짓말을 모르지 않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자신이 한 거짓말이 티가 안 났다고 생각하나 보군.'

그리 쭈뼛거리고 대놓고 드러냈는데,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공 전하를 달래기 위한 게 필요하네."

"무슨 뜻입니까?"

"그거 한 번만 더해주게."

"뭐 말입니까?"

"아빠라고 부르는 것 말일세."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이내 고개를 완강하게 저었다.

"안 됩니다. 저는 성인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반감을 드러냈다. 

고작 아빠라고 부르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갈라하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나도 질문하지 않을 걸세."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결국, 아드리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얄궂으십니다."

아드리안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끄덕였다.

"대신 질문은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엄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라고 부르는 대신, 질문 하나 빼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름대로 복수인가.'

아드리안나 딴에는 복수인 듯했지만, 애초에 갈라하드에게는 서비스 질문이었다. 딱히 상관없었다.

다만, 아드리안나가 진지했기에, 갈라하드는 괜히 침음성을 내며 끄덕였다.

"매정하군."

"어쩔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조그맣게 흔들렸다.

'이건 위험하군.'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괜히 기침이 나왔다.

"그러면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마족의 왕이 어디서 죽었는지 물어보게나. 끝에 아빠라고 꼭 붙여주고."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 동점인 게 문제라면-.

"내가 이긴 것으로 해도 되지 않았나?"

질문을 받은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아, 오십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달리 대공은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상당히-.

'음, 마물의 속에 들어갔다 온 건가?'

끔찍했다.

안 그래도 흉측한 외형의 대공인데, 지금은 피와 살점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마물의 속에 들어가서 한바탕 휘젓고 온 모습이었다.

대공의 살벌한 모습에 아드리안나에게 부탁한 질문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아드리안나는 이미 대공의 앞에 있었다.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대공의 긍정에 아드리안나가 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족의 왕이 언제 죽었습니까?"

바로 질문을 던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전보다 대공의 반응이 격렬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드리안나의 질문인데, 그 반응이 예상외로 격렬했다.

'감정을 이용하는 건가?'

대공 같은 강자에게는 개념을 지울 수 없으니, 감정을 종용하여 작용하는 듯했다.

"감히."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무형의 뭔가가 목을 틀어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숨 쉬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상황이 순식간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때-.

"아빠."

아드리안나가 투박하게 내뱉었다. 귀여움이 전혀 없는 건조한 부름이었다. 두 번째라고 전보다 익숙해진 듯했다.

갈라하드의 예상에 없던 적응력이었다. 

저렇게 건조하게 부르면, 그 효과가······.

"그래, 아드리안나."

대공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렸다.

'있군.'

아주 확실한 효과였다. 갈라하드는 얼얼한 목을 매만졌다.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입을 열었다.

"마족의 왕은 제마 전쟁 당시에 북부에서 죽었다. 마족의 왕이 죽으며 퍼뜨린 먼지가 마경이다."

대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마 전쟁 당시에 북부에서 죽었다고?'

거짓이었다. 개척자의 기억과 네발 마족의 발언까지-. 갈라하드는 이를 질끈 물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족의 왕은 인간의 공포에 기인한다. 그 이름을 높일수록 힘이 더욱 강해졌다는군."

대공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공포에 기인한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빠."

대공의 눈이 다시 풀어졌다.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환기됐다.

갈라하드는 상황을 복기했다. 마족의 왕은 대공에게 죽었다는 것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명백한 증거를 보이면?'

제법 흥미로운 가설이었다. 문제는 아직 증거가 없다는 거였지만-.

"그래. 다음 질문하거라."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슬쩍 돌아봤다. 갈라하드는 방금 들은 내용을 되새기느라 바빴다.

그를 확인한 아드리안나는 대공에게 속삭였다.

대공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잠시 아드리안나를 보던 대공이 힘없이 끄덕였다.

"끝이다."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상념이 깨졌다. 

고개를 돌자, 묘한 표정의 대공이 보였다. 

끝이라는 걸 보니, 갈라하드가 상념에 빠졌을 때, 아드리안나가 따로 질문한 듯했다.

'도대체 무슨 질문을 했길래 저런 얼굴이지?'

대공의 오묘한 얼굴에 갈라하드는 궁금해졌다.

"준비해라. 내려가겠다."

대공이 한쪽으로 향했다.

"무슨 질문 했나?"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에게 붙어서 물었다. 

"피 묻은 손가락입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지를 입에 대며 대답했다. 

한쪽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응용력이 좋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그때, 대공이 돌아왔다. 대공은 거대한 새 마물을 들고 있었다. 마물이 발버둥 쳤지만,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전령으로 보냈던 최상급 마물이었다.

'아무리 강제로 등급을 올렸어도 최상급인데-.'

앵무새처럼 가벼이 다루는 대공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무엇보다 마물을 쓰다듬는 걸 보니-.

'정말 선물이라고 생각하는군.'

"대공 전하."

대공이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갈라하드는 저 마물을 준다고 한 적 없었다. 대공이 선물이라고 멋대로 생각한 거였다.

"그 마물 말입니다."

그에 다시 받을 생각이었다. 이쪽도 전령이 필요했다.

"버드 말이냐?"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물이 거칠게 대공의 손을 쪼았다. 그에 피가 거칠게 튀었다. 

대공은 마물의 목덜미를 잡아 틀었다. 최상급 마물이 애처롭게 울었다.

'······설마 버드가 이름?'

최상급 마물을 가벼이 다루며, 나름대로 다정하게 이름까지 붙이는 대공에-.

"예, 마음에 드십니까? 대공 전하와 딱 어울릴 것 같았는데,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갈라하드는 활짝 웃었다.

굳이 최상급 마물을 전령으로 쓸 필요가 있겠나. 낭비였다.

"제법 까탈스럽지만, 본디 마물은 그런 맛이지."

대공이 히죽 웃었다.

결국, 선물로 넘겼지만-.

"뾰족아리는 최하급 마물 아닙니까. 대공 전하에게는 다소 너무 약한 듯하여, 그에 걸맞게 노력을 좀 기울였습니다. 수백 마리가 넘는 뾰족아리를······."

그 값은 제대로 받을 생각이었다.

갈라하드는 버드를 만드는데, 들어간 노력을 길게 설명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마석장 습격을 막았습니다. 이를 가만히 뒀다가는 마석장이······."

"돌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라."

대공의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확실히 보상은 확실한 대공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대장들이 말을 너무 안 들어서 말입니다. 이번 마석장 일도 그래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제게 권한을 제법 주셨는데도, 대장들이 무시하니 상당히 귀찮습니다. 크흠, 생각보다 북부의 기강이 참······."

대공의 얼굴이 뒤틀렸다.

"말을 안 들으니, 명확한 직책이라도 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 뒤로 슬쩍 숨으며-.

"장인어른."

한 마디 덧붙였다.

****

테오도르는 발을 달싹였다. 그 주변에는 참모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본래 참모는 회의실을 잘 벗어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문에서 밖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눈보라 몰아치는 날씨에 여기까지 나온 이유는-.

"갈라하드 대장 무사하겠죠?"

"아무리 갈라하드 대장이라도 이번에는······."

"그게 무슨 모독 발언이오! 지금 갈라하드 대장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아니까 여기 있지!"

대공을 따라서 나선 갈라하드 때문이었다.

"수석 참모, 상황이 어떤 거 같소?"

테오도르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에 테오도르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을 두 번이나 바람을 맞힌 갈라하드였다. 대공을 바람맞히다니-. 황제조차 그런 짓을 한 적 없는데, 갈라하드는 그런 짓을 두 번이나 벌였다.

심지어 향한 곳이 마물의 무덤이었다.

"······갈라하드 대장이라면, 이겨낼 것이오."

테오도르는 그들의 불안을 일축했다. 

그때, 눈보라가 옅어졌다. 아니, 눈보라가 밀려났다. 

가벼이 흩어진 눈보사 사이로 대공이 보였다. 대공은 다리에 불을 내뿜는 마물을 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새가 추가됐다.'

그 어깨에 새가 앉아서 까랑까랑하게 울부짖었다.

어디 괴담에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테오도르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대공의 조금 떨어진 곳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멀쩡했다.

"사··· 살아있소! 다리와 손 두 개씩! 전부 붙어있소! 머리도!"

"갈라하드 대장이 또 이겨냈다!"

참모들이 요란법석을 떨었다.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갈라하드 대장은 중요 인물이었으니까.

"내려갑시다!"

테오도르를 따라서 참모들은 쪼르르- 내려갔다. 이내 성문 앞에서 기다렸다. 

뿌우우우우!

경쾌한 뿔피리 소리에 성문이 거칠게 열리기 시작했다. 눈이 튀고, 외침이 터졌다.

그 중간에 성문이 뚝- 하고 멈췄다. 성문에 연결된 도르래가 떨어진 것이다.

"멍청한! 성문 관리를 어떻게 한 것이냐!"

참모들이 윽박질렀다. 그 주변을 지키던 병사들이 사색이 됐다. 대공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그때, 성문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멈춰있던 성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건-.

'대공 전하.'

대공이 손으로 직접 열고 있었다.

최소 소 네 마리와 병사들이 붙어야 하는 성문을 대공은 맨손으로 밀었다. 경악스러운 힘이었다.

모두의 감탄 속에서 성문이 완전히 열렸다.

대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털며 들어왔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문지기를 담당했던 기사가 머리를 땅에 찧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피가 거칠게 튀었다.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쇼!"

병사들이 황급히 뒤에 같이 조아렸다. 

"다음은 없다."

대공은 낮게 경고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처벌을 내리지 않는 대공에 모두가 얼떨떨해졌다.

'대공 전하의 기분이 매우 좋으시구나!'

테오도르는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래도 사냥이 굉장히 즐거웠던 듯했다.

이어서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참모들이 쪼르르 붙었다. 

이내 참모들이 갈라하드 주변으로 빙 둘러섰다. 갈라하드가 유독 키가 컸고, 참모들은 전체적으로 덩치가 작았기에 올려보는 꼴이 됐다.

"사냥은 즐거우셨습니까."

"아주 즐거웠다네. 얻은 것도 많고."

"와아-.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음, 보여주는 게 더 빠르겠군."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으며 코트 안쪽에 손을 넣었다.

갈라하드가 꺼낸 건, 대공의 문장이 투박하게 양각된 잔이었다.

그를 본 참모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그건 대공 전하의 잔 아닙니까?"

북부에서 가장 명예로운 대공의 잔이기 때문이었다.

"맞네. 대공 전하께서 내게 하사하셨지."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잔을 흔들었다. 참모들의 시선이 그 잔을 따라서 움직였다. 

대공 전하가 잔을 내렸다는 건-.

"이제 나는 대공 대리일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선언에 참모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대공 대리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직책이었다.

북부의 지배자인 대공이었다. 심지어 대공 전하는 성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대공의 대리라니-.

"대장들 다 모이라고 하게. 아니지."

갈라하드가 손을 흔들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붉은 매가 내려와서, 갈라하드의 어깨에 앉았다.

그건 대공 전하의 매였다. 

"내가 부르는 게 빠르겠군."

갈라하드가 붉은 매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 대리가 되자마자, 대장들을 전부 호출한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뻗대던 대장 놈들 고생 좀 하겠군!'

참모들은 음흉하게 웃었다.

159화 너무해

"이건 대공 전하의 잔 아닙니까?"

길버튼이 금색 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 대공 전하의 문장 있지 않나."

갈라하드의 긍정에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진짜 대공 전하의 대리가 되신 겁니까?"

"그렇다네, 길버튼 경."

"대공 전하의 대리가 원래 있었습니까? 처음 듣는데."

"만들면 있지."

"그건 그렇군요."

길버튼이 가벼이 끄덕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대공 전하 대리면 뭐 하는 겁니까?"

"대공 전하를 대리하는 거지."

"그것도 그렇군요."

"그렇지."

길버튼의 눈이 모였다. 못생긴 사막여우 같은 얼굴이었다. 

갈라하드는 잔을 홀짝였다. 잔에는 최하급 마족의 피가 담겨 있었다. 하도 마신 탓에 이제 최하급 마족의 피는 차처럼 마실 수 있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조심스럽게 마족의 피를 가져갔다.

"근데 뭘 대리합니까?"

"대공 전하가 하지 않는 것들."

"대공 전하는 딱히 하는 게 없지 않습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대공은 웬만하면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냥이나 가는 게 전부였다. 협약에 의한 칩거겠지만,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일을 안 하는 것으로 보일만했다.

"그래, 그러니까 일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한 거지."

"대공 전하가 대장이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갈라하드는 대공을 떠올렸다. 갈라하드를 보는 대공의 눈빛은 늘 살벌했다. 그런데 갈라하드가 마음에 들었다니-.

"그 반대일걸."

"에이- 그게 아니라면, 이제까지 비어뒀던 자리를 대장에게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군."

"이야, 출세하셨습니다. 아드리안나 님을 모시던 제가 괜히 특무대로 온 게 아닙니다."

길버튼이 제 눈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자네, 처음 특무대에 왔을 때는 잔뜩 심술 났었는데?"

"크흠. 그건 과거 아닙니까."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길버튼이 따라 웃었다. 

"그 잔에 술 마시면 참 맛있을 거 같습니다."

길버튼이 금색 잔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대공이 인정을 내리는 잔을 그저 술잔처럼 이야기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왜 한 잔 받고 싶나?"

"크흠. 마셔도 됩니까?""안될 건 뭔가. 이제 내 건데."

"이야-. 멋지십니다."

"어울리지 않는 아부 말게."

"흐흐-."

갈라하드는 술병을 들어서 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길버튼에게 내밀었다. 

길버튼은 냉큼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흐-. 여기에 마시니 더 맛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가?"

"대장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 안 하시지."

"줘보게나."

갈라하드는 잔을 받아서 손가락을 튕겼다. 물이 거칠게 잔을 닦았다. 박박-.

"······너무 열심히 닦는 거 아니십니까?"

"위생은 중요하니까. 자, 따르게."

길버튼이 씰룩한 얼굴로 술을 따랐다. 

갈라하드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불을 삼킨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절로 기침이 나왔다.

"하하, 대장도 못 하는 게 있긴 하군요."

"내가 술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북부의 술이 무식하게 센 걸세."

"에이, 이 정도면 달구만. 마족의 피도 마시는 분이 고작 이걸로 그럽니까?"

"그래? 자네도 한 잔 마시게나."

그리 말하며 잔에 마족의 피를 가득 담자,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겁이라도 나나?"

"저 기사 길버튼입니다. 주십쇼."

길버튼이 잔을 가져갔다. 잠시 망설이던 길버튼이 눈을 질끈 감고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웁-!"

길버튼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푸르죽죽해졌다가 새하얘졌다. 구역질이 올라오는지 연신 꿀렁였지만, 길버튼은 끝까지 버텼다.

이내-.

꿀꺽.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음, 먹을만합니다."

길버튼이 표정 관리하며 끄덕였다.

"한 잔 더 마시겠나?"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군요."

질색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다시 잔을 닦고 마족의 피를 채우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예의 순백 갑주로 돌아간 아드리안나였다. 길버튼이 화들짝 일어나서 경례를 올렸다.

"대장들이 전부 모였습니다."

아드리안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의외로 빨리 모였군."

"대공 대리라는 소리에 눈이 뒤집혔을 겁니다."

"그렇겠지. 북부식 교육이 필요하겠군."

"북부식 교육이 뭡니까?"

"비밀일세."

갈라하드는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튼이 칼자루를 돌리며 붙었다.

"아, 아드리안나. 오늘은 나서지 말게."

갈라하드가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대장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그런데 아드리안나에게 나서지 말라는 건, 대장들을 말리지 말라는 건가. 

아니면 갈라하드 대장을 말리지 말라는 건가-.

아드리안나는 일단 끄덕였다.

"고맙네."

왠지 후자일 것 같았다.

****

'······대공 대리?'

5대대 대장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생전 처음 듣는 직위였다. 대공은 대리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대공 대리라는 직위로, 대장들의 소집을 명령했다.

그리고-.

"대장들이 다 모였군."

마크는 회의장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대장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대장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대공이 유일했다.

그런 대장들이 갈라하드의 명령에 의해 전부 모였다.

"동맹이 아니라 아래로 들어갈 걸 그랬군."

농담처럼 하던 말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텁텁했다.

"아직도 밑으로 안 들어갔나? 젊은 놈이 느리군."

노쇠한 목소리가 들렸다.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이었다.

갈라하드와 동맹인 마크와 달리, 갈라하드의 밑으로 들어간 벨로그라임이었다.

다만-.

"그냥 갈라하드 대장에게 구해져서 밑으로 들어간 거 아닙니까."

"크흠, 성에 안 차는 놈이었다면,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싹수가 보이기에 따른 거지. 늙은이의 혜안이다."

작게 헛기침한 벨로그라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때, 회의장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대공 대리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3대대 대장 가르틴이 큰소리를 쳤다. 그를 시작으로 불만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반발이었다.

갈라하드가 대공 대리가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들어왔다. 그 뒤에 갈라하드와 길버튼이 있었다.

'이번에도 아드리안나를 이용하여 불만을 잠재울 생각인가.'

확실히 아드리안나를 세우는 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중대했다. 아드리안나를 이용하면, 당장 불만은 잠재울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그때,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였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뒤에 서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저번에 대공과 아드리안나를 뒤에 세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그에 대장들의 머리가 바빠졌다.

'아드리안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드리안나 없이 대장들의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생각이지?

"아, 다들 제때 왔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여유로운 목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3대대 대장 가르틴이었다.

"갈라하드 대장, 그대가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이오?"

"명령서에 적었을 텐데. 자네, 혹시 글을 못 읽나?"

갈라하드의 진지한 물음에 가르틴이 미간을 가득 구겼다.

"대장은 서로 명령을 내릴 수 없소."

"거기에 대공 대리라고 적혀 있을 걸세. 이런 자네는 글을 모르는 게 확실하군. 다음에는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겠네."

갈라하드의 차분한 도발에 가르틴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일단, 자리에 앉아주겠나? 하나하나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갈라하드의 정중한 명령에 가르틴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일단 들어보지."

2대대 대장 리암이 끄덕였다. 그러자 가르틴이 애매해졌다. 가르틴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고맙군. 자, 명령서에도 써놨듯, 대공 전하께서 나를 대공 대리로 임명하셨네."

갈라하드가 종이를 흔들었다. 

거기에 적힌 건-.

[갈라하드를 대리로 임명한다.]

짤막한 문장이 전부였다. 그 아래에 찍힌 문장은 분명 대공 전하의 것이었다.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대장들 몇이 벌떡 일어났다.

"대공 전하에게 직접 듣지 못했다.""그렇군."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였다.

그리고-.

"그래서?"

짤막하게 되물었다. 대장들이 눈을 가득 구겼다. 그를 반발하기도 전, 갈라하드가 말을 이었다.

"설마 대공 전하가 그대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어진 적나라한 물음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런, 그대들은 차르티엔을 보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군."

갈라하드가 가벼이 혀를 찼다. 그에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이들은 북부의 대장이었다. 대장의 목이 뽑히는 걸 봤다고, 두려워할 이들이 아니었다. 분노한 대장들이 일어났다. 

리암, 아드리안나, 마크, 벨로그라임을 제외한 절반의 대장이 일어났다.

그 격렬한 반발에 갈라하드는 슬쩍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그래서 어쩔 건가? 대공 전하가 인정했는데."

대놓고 이죽거렸다. 당당한 태도가 안 그래도 불편했던 대장들의 심기를 긁었다. 

대장들이 더는 숨기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네놈은 아직 북부를 모르는군."

가르틴이 검을 뽑아서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그 눈에 진득한 분노가 가득했다.

"설사 대공 전하라도 도전할 수 있는 게 북부다."

비틀린 입꼬리 사이로 짙은 목소리가 나왔다.

맞는 말이었다. 북부에서는 그 상대가 누구든 도전할 수 있었다. 설령 대공이라도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러니 대공 대리라는 건 방패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족쇄지. 결투를 거절할 수 없으니까.'

갈라하드는 대공 대리였다. 여기서 결투를 피하면 대공의 명예를 실추하는 거였다.

그를 대공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대장의 적의가 담긴 검은 아주 서늘했다.

갈라하드는 그 살벌한 검을 앞에 두고-.

"더 있나? 있으면 손 들게나."

여유롭게 대장들을 둘러봤다.

****

"대장들과 대결이라니 대장들은 북부의 강자들입니다."

"길버튼 경, 자네는 당연하게 걸 진지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네."

갈라하드의 가벼운 대답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북부니까 북부식으로 해야겠지."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고쳐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결투장에 있었다. 북부에서 결투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였기에, 결투장 시설이 굉장히 잘 되어 있었다.

결투장 위에는 3대대 대장이 있었다. 그 얼굴이 진지했다. 고위 마족을 잡은 갈라하드였기에-.

'많이도 모였군.'

결투장 주변으로는 병사부터 시작하여 대장들, 참모들까지 있었다. 참모들은 모여서 갈라하드 응원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결투장이 가득 찰 정도였다.

심지어-.

'대공 전하도 보고 계신다.'

길버튼은 저택을 올려봤다. 가장 높은 층의 창가에 대공이 있었다.

그때-.

"갈라하드는 잠시도 쉬지 않는군. 역시 내 경쟁자답다."

"젠장, 속으로 말하십쇼."

퍼스트가 나타났다. 늘 같이 다니는 미인도 있었다. 투닥거리는 둘에 길버튼은 괜히 옆구리를 긁었다.

그때, 갈라하드와 3대장이 마주 섰다.

"선공을 양보하겠다."

3대대 대장이 검을 눕히며 말했다. 자세가 이미 잡혀 있는 걸 보니, 방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수를 한 번 읽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거절하지 않겠네."

갈라하드가 기다렸다는 듯 끄덕였다. 

3대장이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푸른 빛의 오러가 3대대 대장을 가득 덮었다.

'대단하군. 역시 대장이다.'

넘실거리는 오러에 길버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확실히 대장급의 강자였다.

"왜 그러나? 갈라하드가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퍼스트가 씰룩거리며 얼굴을 들이댔다. 뜨거운 콧김을 잔뜩 뿌렸다. 

'걱정이라-.'

길버튼은 작게 중얼거렸다. 갈라하드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상대도 분명한 강자였다.

만전의 기사와 정면 대결은 마법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갈라하드가 소드 마스터가 아닌 기사에게 질 일은 없으니까. 저 기사가 굉장히 강한 건 사실이지만, 소드 마스터는 아니니까."

퍼스트의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왜지?"

"그거 아나? 갈라하드는 검술 명가라 불리는 앰버르탄 백작 가문의 자제일세."

검술 명가-?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몰랐나 보군. 괜찮네. 나는 갈라하드와 오랜 세월을 경쟁한 사이라서 그의 면모를 조목조목 아는 거니까. 그래, 갈라하드는 검술에도 상당한 천재였다네."

"그러면 왜 검술을 안 쓰시지?"

"그는 오러를 못 일으키거든."

퍼스트가 짙게 웃었다. 

"그렇기에 소드 마스터 급이 아니라면, 갈라하드를 이길 수 없다네. 그는 오러를 쓰지 못할 뿐이지, 검술 실력은 뛰어나니까. 검을 읽을 수 있거든."

퍼스트가 머리를 두드리며 웃었다.

'검을 읽는다-.'

길버튼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가 마법을 배운 걸세. 단순히 검 하나로는 갈라하드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이쪽도 마법을 배워야지."

"······마법보다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게 빠르지 않나?"

"음, 검은 손이고 마법은 머리니까. 동시에 둘 다 할 수 있다네."

"그것도 그렇군."

그때, 시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3대장의 등 바로 뒤에서 얼음송곳이 나타났다. 기척도, 징조도 없는 공격이었다.

바로 뒤에서 나타났기에, 아주 짧은 틈밖에 없었지만-.

3대장은 반응했다. 검이 얼음송곳을 잘라냈다.

"엄청난 반응이군. 확실히 북부의 대장일세."

퍼스트가 진지하게 감탄했다. 그에 길버튼은 히죽 웃었다.

"그래봤자지만."

"그게 무슨-."

이번에는 얼음송곳이 어깨 바로 옆에서 나타났다.

등을 막기 위해 검을 돌린 자세에서 가장 껄끄러운 부위였다. 그런데도 3대장은 검을 휘둘러 막았다. 

저 까다로운 공격을 막다니-. 길버튼의 눈이 커졌다.

"아, 너무 깔끔한 반응이군. 예상하기 좋게."

퍼스트가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다음 얼음송곳은 더 막기 어려운 위치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 속도가 전보다 빨랐다.

'3대장이 전의 공격을 막기 전에 다음 얼음송곳이 나타났다.'

3대장이 그렇게 움직일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얼음송곳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 간격은 점점 더 짧아지고, 예리해지고, 까다로워졌다.

"완전히 파악하고 서서히 더 조이는군. 역시 갈라하드다."

그때, 3대장이 검을 고쳐잡았다. 3대장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내 숨을 내쉰 3대장이 땅을 거칠게 박찼다. 오러를 일으킨 3대장은 굉장히 빨랐다. 마치 선이 그어진 듯했다.

얼음송곳이 그 경로를 노렸지만, 3대장은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버텨서 수세를 뒤집겠다는 의도였다. 마물 코트와 두꺼운 갑주가 있었으니 그럴 듯했다.

다만-.

"이런 최악의 수를 택했군."

얼음송곳은 마물 코트와 갑주를 가벼이 부수고 박혔다. 

피가 거칠게 뿌려지고, 박힌 얼음송곳이 늘었지만, 3대장의 신형은 흔들리지 않았다.

엄청난 투지였다. 

문제는 갈라하드의 마법이 더욱 촘촘하게 옭아맸다는 거였다.

결국, 3대장은 거미줄의 중심으로 몸을 들이민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3대장은 전진했고-.

이내 갈라하드의 바로 앞에 검을 들이 밀었다.

그게 전부였지만.

"확실히 북부답군."

쿠웅.

3대장이 그대로 쓰러졌다.

"나쁘지 않았네. 투지도, 의지력도."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3대장을 인정했다.

실제로 조금만 더 버텼다면, 검이 닿을 뻔했다.

그때, 퍼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걸 보고 있으니 몸이 뜨겁다. 못 참겠어. 나도 올라가야겠다."

"아니, 그게 무슨 좆 같은... 그리고 대장끼리 하는 결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대장이다."

"······그건 여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기가 줄인가 보군."

그때-.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고쳐 잡으며 쓰러진 3대장에게 향했다.

3대장을 일으키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자, 꽉 깨물게나."

금색 봉으로 3대장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살벌한 소리가 연속으로 터졌다.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정작 갈라하드의 얼굴은 무심했다. 감정 하나 없이 그저 담담하게 3대장을 두들겼다. 

그렇기에 더욱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북부를 잘못 이해한 거 같은데.'

길버튼은 괜히 목을 매만졌다.

3대장이 완전히 정신을 잃고 나서야, 갈라하드는 매질을 멈췄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기며-.

"자, 다음 나오게."

시원하게 웃었다.

대답은 없었다.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보는 중이었다. 

저기 올라갔다가 저런 꼴을 당하기라도 하면-.

'실로 끔찍하군.'

열을 내던 대장들조차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무도 안 나가는 건가? 그러면 내가 나가겠다!"

으하하하하!

퍼스트가 대소를 터뜨리며 결투장으로 뛰어 올라왔다.

"퍼스트 미안하지만, 대장들이 대상일세. 내려가게나."

"정말 너무하는군!"

투덜거리며 내려오는 퍼스트에-.

펌킨은 뜨거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160화 북부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