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플랜 갈라하드
"······어째서?"
사내의 나지막한 물음에 여우 가면은 킥- 하고 웃었다.
늘 무표정했던 사내의 얼굴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사내의 위에는 수많은 구슬이 가득 있었다. 그 각각의 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뒤엉켰다.
사내의 설계는 치밀하고 확실하며, 완벽했다.
그런데 저런 결과라니-.
"어머, 당했네요?"
사내가 여우 가면을 응시했다. 그 서늘한 시선에 여우 가면은 양손을 들었다.
"또 저를 의심하려고요? 저는 계속 여기 있었어요."
"내가 받은 정보와 다르군. 본래 이런 성격은 이런 막무가내식으로 움직일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사내가 표정을 지우고 옷깃을 가다듬었다.
"인정하겠다. 대단한 놈이다."
저 사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어머, 그쪽이 상대를 인정할 줄도 알아요?"
슬쩍 도발해봤지만, 사내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구슬을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을 파악하고 설계했다는 걸 바로 파악했다. 놈은 자신이 내리지 않을 판단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이 정도로 머리를 쓰는 인간이 있다니-. 대단하군."
사내는 눈을 찡그리며 감탄했다.
구슬이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시 붉은색으로 변했다. 함정을 피했다가 밟고, 다시 또 밟았다는 이야기였다.
"제대로 해보자는 건가."
사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 정도면 그냥 놀리는 거 아닌가?'
여우 가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이러다 벗어나겠는데요?"
여우 가면은 슬쩍 구슬을 가리켰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슬이 끝을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래, 인정하겠다. 호적수다."
사내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구슬이 그를 따라서 움직였다. 사내의 권능이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권능이란 게 그런 법이지만, 사내의 권능은 그중에서도 유독 특이했다.
괜히 '완벽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었다.
"오거라. 호적수여."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구슬이 뚝- 멈췄다.
"음, 벌써 눈치챈 건가?"
강적이군-.
****
"좀만 쉬죠! 데미안도 고생했는데!"
"배고파요."
"자고로 쉬어야 전진할 힘이 있는 법이지."
달그락.
톰은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이곳은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알 수 없는 함정의 한복판이었다. 그런 곳에서 식사하자니-. 톰은 경악했다.
데미안이나 그웬, 길버튼은 이해가 됐지만-.
'왜 아드리안나님까지······.'
아드리안나는 멍청하게 생긴 투구를 쓰고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있었다. 위화감이 없었다.
톰은 슬쩍 갈라하드를 살폈다.
뒤에 빠져 있었건만, 갈라하드의 안색은 전보다 더 좋지 않았다. 어딘지 멀미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갈라하드는 찡그리며 방금 있었던 마법진을 가리켰다.
"저건 꿰뚫는 불일세. 그전에 있던 함정은 녹아내리는 불이었지. 녹아내리는 불의 늦은 속도를 피하고자 전진하면, 꿰뚫는 불에 뚫렸을 걸세. 그다음에는 화살 함정까지 있었고, 아주 치밀한 설계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저 함정들은 아주 까다로우며 연쇄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다시금 강조했다.
톰이 끄덕이자, 갈라하드가 낮게 헛기침했다.
"톰, 머리를 쓰는 놈에게 가장 까다로운 놈이 뭔지 아나?"
"더 머리를 잘 쓰는 놈입니까?"
"머리를 잘 쓰는 건 상대적인 걸세. 물론, 절대적인 지능이 존재하지만······."
갈라하드가 정면을 보며 뒷말을 흐렸다.
"머리가 더 좋아도 상대가 판을 짜둔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네. 정보의 격차가 너무 벌어졌으니까."
"그러면······."
"정답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이들일세. 예측할 수가 없거든."
갈라하드가 피던 연초를 비스듬히 들었다. 얼굴이 묘하게 피곤해 보였다.
"놈은 나를 대상으로 함정을 짰네. 아주 치밀한 함정이지.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멧돼지들이었던 거지."
멧돼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대는 지금쯤 머리가 터질 걸세. 멧돼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할 테니까."
갈라하드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그때-.
"톰! 데미안이 배고프대요!"
"자네를 부르는군."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그에 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특무대로 향했다.
"배고파요."
"아, 여기 있습니다."
"나는 목마르다."
"길버튼님 수통은 여기-."
톰은 데미안에게 육포를 건네고, 길버튼에게 수통을 챙겨줬다. 둘이 동시에 뜯고 마셨다.
"저는 너무 추워요!"
"금방 불 피워드리겠습니다."
이어서 춥다는 그웬을 위해서 불을 피우려는데, 데미안이 앞으로 나섰다.
"굳이 안 도와주셔도-."
"벽난로, 산불, 불타는 집-."
데미안이 화려한 지팡이를 요란스럽게 돌리며 괴상한 주문을 외웠다.
톰이 막대기를 까닥하면 불을 붙일 수 있지만, 진지한 데미안의 모습에 기다렸다.
"지옥불."
이내 데미안의 지팡이 끝에 미세한 불이 타올랐다.
톰은 황급히 지푸라기를 뿌려서 불씨를 키웠다.
그웬의 추위까지 해결한 톰은 마지막으로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달그락. 멍청하게 큰 투구가 흔들렸다. 슬쩍 아드리안나를 보는 길버튼에 톰은 황급히 나섰다.
"아, 이것 좀 갈라하드님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달그락. 육포를 들고 갈라하드에게 향하는 아드리안나에 톰은 안도했다.
"너 다시 봤다.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군."
"저도요! 길버튼님이 완전 길버튼님은 아니었어요!"
"······뭐라고?"
특무대는 사이좋게 서로를 칭찬했다.
결성된 뒤로 실전만 겪었던 특무대였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휴식은 짧았다.
"다시 가볼까."
"데미안! 조심해!"
달그락.
특무대가 다시 전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특무대가 처음으로 멈췄다.
"위험해요."
데미안이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서 가야겠다!"
"옆에도 있어요."
데미안이 양옆을 가리켰다. 그에 길버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금과 다르군. 안전한 곳은?"
길버튼의 물음에 데미안이 뒤를 가리켰다.
그에 갈라하드가 혀를 찼다. 톰은 슬쩍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어딘지 시원한 얼굴이었다.
"완전히 막혔나 보군."
"예상을 벗어나게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막힐 수가···."
"놈은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중일세. 이쪽을 파악했겠지."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특무대가 시끌벅적해졌다.
"뒤로 돌아가야 하나?"
길버튼의 물음에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웬이 손을 들었다.
한참 걷다가 갑자기 돌아가는걸 주장하던 그웬이었다.
톰은 그웬이 뒤로 돌아가자고 주장할 걸 예상했다.
그런데 그웬은-.
"저도 돌아가는건 내키지 않아요! 돌아가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요!"
갑자기 반대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아무 이유 없이 뒤로 가자고 주장한 그웬이었다. 정작 돌아가야 하는 지금은 뒤로 가기 싫다니-. 다소 이상했다.
문제는-.
"그건 그래.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돌아가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뒤도 별로예요."
달그락.
나머지 대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동의한다는 거였다.
"의외 모여라."
길버튼이 진지하게 명령했다. 그러자 넷이 한곳으로 모였다.
머리를 맞댄 넷은 한참이나 뭔가를 쑥덕거렸다.
'왜 굳이 저렇게 숨어서?'
톰은 눈을 씰룩였다.
"그래,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군."
넷이 동시에 끄덕였다. 그 얼굴들이 어느때보다 진지했다.
'저걸 뚫을 방법이 있다고?'
정면과 양옆이 전부 막힌 상황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던 '적당히 돌아가자'가 불가능한데, 이를 어떻게 뚫을지 궁금했다.
"만장일치다."
다시금 끄덕인 넷이 이쪽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대장, 도와주십쇼."
"대장님!"
"형."
달그락.
진지하게 갈라하드를 불렀다.
'······방법이 갈라하드 대장?'
그럴 거면 왜 회의를 한 거지? 어이가 없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것 같았으니까.
"현명한 생각일세."
머리를 넘기며 나서는 갈라하드의 얼굴이 묘하게 상쾌해 보였다.
*
"데미안이 앞에 뭐가 있는 거 같답니다."
길버튼의 투박한 설명에 갈라하드는 마나를 가득 뿌렸다.
마법진으로 숨겨뒀는지,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뭐 좀 있습니까?"
"마법진으로 겹쳐서 마나로는 탐지가 안 되네."
"그러면 눈을 녹이면 안 됩니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법한 생각일세, 그에 대한 대책이 있을 걸세. 데미안, 어떤 느낌인가?"
"위험한 느낌이요."
"더 자세한 건?"
"아주 위험해요."
"음, 아주 위험하군."
정확한 건 파악 못 하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감각이었지만, 함정을 해체하는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꿰뚫는 불이랑 녹아내리는 불······. 그것 또한 매번 바꾸고-. 함정 전문가 수준이군.'
갈라하드는 오면서 봤던 함정들을 복기했다.
"마법으로 날리면 안 됩니까?"
"길버튼 경, 뭘 말인가?"
"함정들 말입니다."
길버튼이 정면을 가리켰다. 그 정면은 하얀 설산이었다. 눈이 발목까지 올라올 정도로 소복하게 쌓인 설산-.
"저거를 다 날리라는 건가?"
"예, 마법으로."
"자네, 마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폭발?"
길버튼의 반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황혼의 마탑주라면 산 전체를 날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황혼의 마탑주가 아닐세. 애초에 그런 낭비를 할 생각도 없고."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갈라하드는 얹힌 속이 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길버튼 경, 마법사들이 왜 마법진을 애용하는지 아나?"
"모릅니다만-."
"계산을 미리 해둘 수 있기 때문일세. 지팡이도 크게 보면 마법진이지. 아주 빠르게 반응할 수 있지. 방금처럼-."
길게 설명하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눈을 끔벅였다.
"예? 제국어로 해주십쇼."
"음, 준비된 암살자들이 아래에 있다는 걸세. 길버튼 경, 만약 암살자들이 사방에서 노리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나."
"비겁하게 뒤를 노리다니-. 전부 베어 버릴 겁니다."
"어떻게?"
검으로-라고 대답하려던 길버튼은 슬쩍 볼을 긁적였다.
"암살자는 기척을 파악하기 쉽지 않으니까. 공격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바로 그거일세."
느닷없는 칭찬에 길버튼은 눈을 끔벅였다.
"놈이 사방에 함정을 뿌려뒀네. 자기가 짠 판에서 나가지 말라는 거겠지. 저 설산이 전부 암살자 밭일세."
갈라하드가 정면을 가리켰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수북한 눈밭이 보였다.
'저게 전부 암살자······.'
괜히 등 꼴이 오싹해졌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암살자를 상대할 때는 일부러 허점을 보여서 공격을 유도했다. 그런데 지금 상대는 마법 함정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자, 조금 떨어져서 오게나."
수통을 홀짝이며 나서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함정을 밟으시겠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길버튼은 눈을 씰룩였다.
"아니, 함정을 왜 밟습니까?"
"그래야 발동하니까."
"그건······. 그렇군요."
끄덕이는 길버튼에 갈라하드가 끌끌 웃었다.
"아, 그 방패 같은 걸 두르시겠다는 겁니까? 근데 아까 한 번 막았다가 피 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급하게 마나를 끌어올린 부작용일세. 그리고 방호벽을 쓸 생각은 없네.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
······재미?
이제껏 밟았던 함정은 그 속도가 정말 빨랐다. 오러를 일으킨 길버튼에게도 까다로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피하면, 더 큰 함정이 도사린 곳이었다.
그런 곳을 앞장서 걷겠다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길버튼은 일단 끄덕였다.
다른 특무대 대원들도 재빨리 진형을 갖췄다.
홀로 나선 갈라하드가 가만히 손을 풀었다.
"마법진과 속도 싸움이라-. 재밌겠군."
갈라하드가 깊은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갈라하드는 어디에 뭐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눈밭을 길쭉한 다리로 가벼이 걸었다.
평소와 달리, 그 손가락을 계속해서 까닥거렸다.
마치 암습에 대비하여 칼자루를 두들기는 기사처럼-.
그때-.
"위험."
데미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동시에 갈라하드 아래에 거대한 마법진이 빛을 뿜어댔다.
'함정이다!'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진에서 불이 올라오기 직전, 얼음송곳이 땅에 박혔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올라오던 빛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그게 끝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함정을 한 수에 뭉갠 것이다.
언뜻 보면 그저 마법진에 마법을 꽂은 것이지만-.
'정확히 중심을 노렸다.'
함정을 이기겠다며 검을 휘둘렀던 길버튼은 알 수 있었다.
함정은 오러로 그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함정이 저 작은 얼음송곳에 막혔다는 건, 그 핵심을 정확히 노렸다는 뜻이었다.
'그 찰나에 핵심을 찾아내고, 동시에 파괴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길버튼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슬아슬했군."
갈라하드가 코트를 털며 웃었다.
갈라하드의 올라간 입꼬리에 길버튼은 알 수 있었다.
'함정들과 마법 대결을 하는 거야?'
함정이 왜 함정인가. 그걸 일부러 밟고, 바로 처리한다니-.
아주 미친 짓이지만-.
'대장이 이기겠네.'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갈라하드가 마법에서 질 리가 없으니까.
****
"걸렸군."
사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반짝이는 구슬 주변에 구슬이 가득했다.
사내가 손가락을 돌렸다. 그 손가락 끝이 옆으로 꺾였다. 구슬들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제 완전히 파악했다. 이제 전과 다를 것이다. 너만 변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흐름을 그사이에 맞추다니-.'
여우 가면은 진지하게 감탄했다.
반짝이던 구슬이 가장 빼곡한 곳으로 향했다.
"전과 달리 빠지지 않는군. 눈치챘나? 물론, 그래봤자다."
그때-.
반짝이는 구슬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실패했다는 신호였다.
그건 지금까지 봤던 색이었지만, 이번에는 사내의 반응이 달랐다.
"······어?"
사내가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문제는 붉은색이 떠오른 속도였다. 전과 달리, 구슬이 흔들리자마자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상대가 바로 파괴했다는 이야기였다.
'저게 가능하나?'
여우 가면도 속으로 감탄했다.
그건 시작을 알리는 거였다.
첫 붉은색 구슬에서 곧장 붉은색이 이어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전보다 더 빨라졌다.'
사내가 손가락을 다급하게 까닥거렸다.
그때부터였다.
타닥.
붉은색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퍼진 구슬은 직선으로 움직이는 구슬을 막을 수 없었다.
붉은 구슬이 직선으로 이어졌다.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연속으로 밝혀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빠르기에 사내는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전의 움직임에 맞춰서, 다시 짠 판을 곧장 뚫어버렸으니까.
그렇게 붉은색이 끝에 도달했다.
"이런 십-."
사내의 입에서 순간 거친 말이 나왔다.
다만, 사내는 금방 숨을 내쉬고 평정을 되찾았다.
"대단한 놈이군."
사내가 손을 휘저었다. 구슬이 양옆으로 흩어졌다.
"어머, 포기한 거예요? 완벽함이?"
"그래, 이번은 내 패배다. 정보가 부족했다."
완벽한 사내가 패배를 시인하다니-. 너무 의외였던 터라, 여우 가면의 반응이 늦었다.
"하지만 이번에 정보를 얻었으니 다음은 다를 것이다."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장 큰 구슬이 움직였다.
"그래도 쉽게 끝낼 수는 없지."
사내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오히려 그 눈이 전보다 더 깊었다.
사내를 보던 여우 가면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우 가면의 진지한 물음에 사내가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던 사내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구석진 곳에 붉은색이 모여 있었다.
놈과의 승부에 집중한 탓에 뒤늦게 확인했다.
"코르튼? 저건 또 뭐야?"
사내가 짜증스레 눈을 구겼다.
151화 압도적인 재능
"아, 이쪽은 거의 끝났다."
케인은 손을 털면서 말했다. 그 아래에는 붉은 마법진이 있었다. 마족의 피로 그린 마법진이었다.
그건 단순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그를 그린 케인이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 설계자기 때문이었다.
이건 하나의 예술이었다.
"나도."
그의 동료가 손을 들며 말했다.
"자, 마무리하자고. 제일 큰 거니까."
둘은 가져온 마석을 동시에 쏟아부었다. 이건 그들의 스승인 영감이 특별히 도안까지 그려준 마법진이었다.
물론, 영감은 스승이라고 인정 안 하겠지만.
완성된 마법진이 순식간에 아래로 사라졌다. 그에 둘은 동시에 감탄했다.
"움직이는 마법진이라니-. 신기하군."
"그 까다로운 영감의 눈이 괜히 돌아갔겠나."
케인은 수통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동료가 기지개를 길게 켰다.
"그것도 그렇지. 근데 여기에 얼마나 있었지? 감도 안 오는군."
"그러게. 마법진을 세는 것도 포기했잖아. 이렇게 많은 마법진이 왜 필요하지?"
"음, 제국군이라도 올라왔나."
"궁금하지 않나? 이 정도로 투자한 상대가 누구일지?"
동료가 슬쩍 운을 띄웠다. 그에 케인은 눈을 찡그렸다.
"우리는 설계자야. 나서는 건 금기라고."
케인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에 동료가 눈썹을 까닥거렸다.
"살짝만 보자는 거지. 누가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고 그랬나? 그리고 설계자라면 설계가 정확했는지 확인해야지."
케인이 침음성을 흘리자, 동료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맡은 설계 중에서는 최고 규모인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지 않겠나?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수 있다고."
"······괜히 문제 일어나는 거 아니야?"
케인은 슬쩍 위쪽을 확인했다.
"저쪽은 어차피 마법사들 회유하느라 정신없잖아."
"그래, 구경쯤이야."
솔직히 케인도 상대가 궁금했기에 금방 끄덕였다.
둘은 최대한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어, 저기 있다."
저 멀리에 사내 하나가 보였다.
마물 가죽으로 된 코트를 입은 길쭉한 사내였다.
왼쪽 허리에는 회색 불을 뿜어대는 램프가 대롱거렸고, 손에는 금색 봉을 들고 있었다. 설산에 혼자 있으니, 수도자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 풍겼다.
"잘 생겼군. 열심히 설치했지?"
"그래, 확실하게 했다."
둘은 가벼이 낄낄 웃었다.
그때,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저거 우리 쳐다본 거야?"
"에이, 잘못 봤겠지."
케인은 고개를 저었다.
사내가 가벼이 걸음을 옮겼다.
"오- 들어온다."
"저걸 그냥 들어오네. 멍청하군."
마법진이 즐비한 곳에 저렇게 무방비하게 들어오다니-.
"밟았다."
"끝이군."
생각보다 싱거운 느낌에 케인은 눈을 찡그렸다.
설령 황실 기사라도 저렇게 밟으면 피하기 힘들었다.
마법진에서 끈적이는 불이 올라왔다. 속도는 느렸지만, 그 위력은 확실했다. 무엇보다 그 연계가-.
"음, 왜 사라졌지?"
"그러게. 분명 발동했는데."
둘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이내 케인은 낮게 욕을 중얼거렸다.
"너, 제대로 설치 안 하냐?"
"난 제대로 했다고. 그냥 불량 아니야?"
"불량인가? 하긴 불량은 고질병이니까."
둘은 동시에 끄덕였다.
"어, 또 밟았다."
"이번에는 꿰뚫는 불이야. 끝이군."
전보다 빠른 속도의 불이 쏘아졌다. 그건 농축된 불화살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또 사라졌는데?"
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불량이 두 번 연속 일어날 리가 없었다.
저건 케인이 설치한 마법진이었다. 실수했을 리도 없었다.
그때, 사내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마법진이 빛을 뿜었고-.
갑자기 사라졌다.
"뭔가··· 뭔가 이상하다."
"저기-."
동료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마법진에 얼음송곳이 꽂혀 있었다. 정확히 핵심 부분이었다. 그렇다는 건-.
"······불량이 아니라 마법진의 핵을 파괴한 거라고? 하지만 마법진의 핵은 발현되어야 나타날 텐데?"
"지금 저 사내의 마법이 설치된 마법진보다 빠르다는 건가?"
둘은 서로 묻기만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그때,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마법진이 사그라들었다.
"······전보다 빨라졌다."
동료의 허망한 중얼거림에 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내의 반응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점점-.
탁. 이제는 마법진이 빛을 내자마자 사라졌다.
짙은 무력감이 그들을 가득 눌렀다.
"튀자."
동료가 작게 속삭였다. 마치 저 멀리에 있는 사내가 들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순간 끄덕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설계자인 케인이었다. 이곳은 오랜 기간 준비한 마법진으로 가득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아니, 아직 남았다."
케인은 황급히 뒤쪽을 쳐다봤다. 가장 공을 오래 들였던 마법진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건 영감이 직접 설계한 거였다.
그를 본 동료가 꺼림직한 얼굴로 끄덕였다.
이내 필사의 함정이 사내의 앞에 자리했다.
사내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눈치챘나?'
영감의 설계였다. 설령 마탑주가 와도 눈치 못 챌 것이다.
사내는 자리에서 가만히 연초를 폈다.
연초 불이 비춘 사내는-.
'웃고 있어?'
그것도 아주 짙은 웃음이었다.
마치 재밌는 일을 앞둔 사람처럼-.
형용하기 힘든 오싹함이 올라왔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마법진은 바로 발동하지 않았다. 치밀한 덫처럼 사내가 깊숙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내가 중간을 지나자, 마법진이 거칠게 뛰었다. 불길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그 테두리를 타고 온갖 불이 쏟아졌다.
'이건 끝이다!'
영감의 치밀한 설계가 더해진 마법진은 그 겹이 교묘했다. 핵을 파악할 수 없도록 사중으로 보안이 되어 있었다.
마법진을 넘어선 예술이었다.
그때-.
탁, 얼음송곳 하나가 정확히 핵을 꿰뚫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불길이 사내를 덮었지만, 사내는 차분히 손가락을 튕겼다.
탁, 탁, 탁-.
마법진이 빛을 잃었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코트에 붙은 불을 가벼이 털었다.
'무······ 무슨.'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영감의 설계였다. 영감의 설계를 아는 게 아니라면, 저렇게 순식간에 파괴할 수 없었다.
"······시발. 그냥 빠지자니까."
동료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케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이라도 튀-.
그때, 사내가 금색 봉으로 케인을 가리켰다.
그를 마주하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완벽한 패배였기에.
사내는 연초를 털며 여유롭게 다가왔다.
둘 앞에 선 사내가-.
"끝인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케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함정을 밟고 파훼하는 미친 짓이 사내에게는 놀이였다는 걸-.
"그래, 재밌었네. 특히 마법진에 보안을 더하는 건, 가히 예술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더군."
사내가 담담하게 칭찬했다.
자신의 설계를 품평하다니. 평소였다면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그저 가만히 경청했다.
"하지만 핵 부분이 아쉽더군. 함정마다 핵의 위치가 정해져 있어. 그래도 마법진의 약점인데,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사내의 물음에 케인은 터지려는 욕을 꾹 참았다.
마법진의 핵은 마법진이 발동할 때 드러났다. 마법진의 중심이었으니까. 그를 알고도 핵의 위치를 안 바꾸는 건-.
'핵 위치를 알아내겠다고, 마법진을 일부러 밟는 미친놈이 있을 줄 몰랐으니까!'
사냥꾼이 새로운 덫이라고 손을 넣었다 빼면서, 감탄하는 꼴이었다.
그런 미친놈이 있을 거라고 어떻게 예상하나.
그때, 사내가 앞머리를 넘기며-.
"그래, 노인은 어딨지?"
텁텁하게 물었다.
'영감을 알고 있어?'
둘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
"영감님은 다른 곳에 계십니다! 저희는 영감님의 애제자입니다! 애제자!"
"맞습니다! 완전 애제자입니다!"
납작 엎드린 사내 둘이 빌었다.
'노인이라.'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전에 흑마법학회 지부에서 노인의 흔적을 발견한 적 있었다. 그에 노인이 북부에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노인이 여명 쪽에 합류했나?"
"아뇨! 외주입니다! 외주!"
"예! 외주!!"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은퇴한다더니만.'
갈라하드가 노인을 굳이 찾지 않은 이유였다.
'하긴 은퇴가 어렵지.'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노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여명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말을 번복할 바에야 죽는 걸 선택하는 꼬장꼬장한 노인이니까.
문제는 외주를 왜 받았냐는 건데-.
'여명이 재밌는 걸 보여줬나 보군.'
당장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움직이는 마법진이라니-. 노인이 환장할 게 분명했다.
"그래, 마법진은 어떻게 움직였지?"
"아, 그건 여명 쪽에서 한 겁니다!"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에 더 물었지만, 둘은 입만 씰룩거렸다. 아는 게 없는 눈치였다.
'마법진을 움직인다-.'
갈라하드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마법진은 고정된 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그에 파생된 게 지팡이와 주문서였다. 다만, 둘도 마법진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었다.
그런 마법진을 옮겼다니 어떻게-.
"아, 마족의 피를 이용했군."
"······예?"
"마법진을 마족의 피로 새겼지? 그 마족의 피는 여명 쪽에서 준 것이고."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영감님에게 들으셨습니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마족은 군체를 이루니까. 군체의 피에 영향을 주는 권능이 있을 수 있겠군. 다만, 그걸 마법진으로 이용할 생각을 한 건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저 아랫놈들과 떼로 밀어붙이던 지배자와 달리 아주 기발한 활용 방법이었다.
"그래도 마법진을 자체적으로 터뜨리지는 못하나 보군. 주변에 모아두고 한 번에 터뜨리는 게 더 효과적일 텐데."
갈라하드는 연신 끄덕이는 둘을 보며 연초를 털었다.
"자네들이 보고를 올릴 수단은 없는 것 같으니까-. 마법진을 통해서 확인하는 수단도 따로 있고."
아주 재밌는 권능과 활용 방안이었다.
핵심은 그 마법진의 유기적인 관계였다. 머리를 제법 잘 쓰는 마족이었다.
더불어-.
"승복도 깔끔하고."
갈라하드는 뒤를 쳐다봤다. 특무대가 바삐 달려오고 있었다.
멍청한 투구를 쓴 아드리안나의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갈라하드가 정체를 숨기라고 당부한 탓이었다.
아드리안나가 마법진을 건드렸다가, 그 정체가 탄로 나면 여명에서 도망갈 수도 있었으니까.
"이놈들입니까?"
길버튼이 엎어진 놈들에게 검을 겨눴다. 선명한 오러에 둘이 벌벌 떨었다.
"이놈들은 하청일세. 자네들, 광부들은 어디 뒀나?"
"······예? 광부요?"
"아, 곡괭이 든 마법사들 말일세."
"그거······."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뒤쪽을 보는 둘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저기에 뭐가 있나 보군."
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 갈라하드가 회유를 하려고 할 때-.
"이것들이 대답을 안 해?!"
"아악!"
길버튼이 칼자루로 놈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맞은 놈이 그대로 엎어졌다. 그러자 다른 놈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여명 쪽에서 나와 있습니다. 다만, 이미 늦었을 겁니다."
나머지 하나가 필사적으로 정보를 쥐어짰다.
"늦었다?"
"예. 여명이랑 접촉한 마법사는 넘어갈 수밖에······."
말끝을 흐리는 놈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왜지?"
"여명은 마법의 시대를······."
순간 놈의 입이 뒤틀렸다. 눈이 뒤룩- 굴렀다.
'금제군.'
참으로 치밀한 놈들이었다.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놈의 머리를 잡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여명의 목표를 말하게나."
"여명의 목표는······"
놈의 입이 뒤틀렸다. 금제의 강도가 강했다.
다만, 정신 간섭의 수준이 높아진 갈라하드였다.
"재밌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놈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내 그 입이 벌어지며-.
"마법의 신시대입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말이 나왔다.
'마법의 신시대라.'
갈라하드는 손을 털면서 중얼거렸다.
"······새겨진 금제를 강제로 푼 겁니까?"
길버튼에게 맞아 엎어진 놈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새겨진 금제는 강력하지만, 결국 정신 간섭일세. 해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그러면 뇌가 녹을 텐데-. 멀쩡합니다!"
놈이 쓰러진 사내를 건드리면서 다시 감탄했다. 그 눈이 엄청나게 반짝였다.
"정신 간섭으로 뇌를 막으면서 동시에 금제를 해제하면 되네. 물론, 좀 까다롭지만."
"그러면 조금만 엇나가도 머리가 터질 텐데요?"
"괜찮네. 내 것이 아니니까."
놈의 얼굴이 씰룩였다.
"대장."
그때, 길버튼이 묵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 목소리가 상당히 심각했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심각한 얼굴의 길버튼이 보였다. 길버튼이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렸다. 이내 입술을 씹으며-.
"여명으로 가실 겁니까?"
개소리를 지껄였다.
문제는 길버튼 뿐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달그락.
이쪽을 주시하는 멍청한 투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내가 여명으로 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대장은 마법이라면 눈 뒤집히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법의 신시대라니까-."
"눈이 뒤집힌다니. 나는 그저 마법의 매력을 정확히 아는 것 뿐일세."
"정말 안 넘어갑니까?"
길버튼의 진지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달그락. 달그락. 멍청한 투구가 연신 흔들렸다.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명의 목표가 마법의 신시대를 여는 거라고 내가 넘어가겠나?"
갈라하드의 신랄한 말에 길버튼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여명은 명백히 마족의 집단일세. 아무리 마법을 중시해도, 마족이 연 신시대는 관심 없다네. 내가 열어야지."
혀를 차는 갈라하드에 웃던 길버튼은 그 내용에 다시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대장이 여명을 직접 만드신다는 겁니까?"
갈라하드는 눈을 가득 구겼다.
"조용히 해주게. 길버튼 경. 오늘치 멍청 멀미는 다 했으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봤다.
여기서 좀 더 가야 있는 게 광산이었다.
'마법의 신시대라니-. 다른 마법사라면 넘어가겠군.'
가뜩이나 광부가 귀한 시기였다. 여기서 여명으로 넘어가면-.
'귀찮아지는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마법의 신시대라니-."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그들이 북부에서 받았던 대접이 어땠나. 그런데 마법으로 신시대를 열겠다니 혹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중심이-.
"마법사다. 이제 모든 건 마법으로 시작해서 마법으로 끝난다. 핍박은 더 없을 것이다."
담담한 설명에 마법사들이 다시금 동요했다.
곡괭이를 하도 잡아 손에 물집이 잡힌 그들에게는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당연히 넘어가야만 했다.
그때-.
"잠깐!"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마족의 제안에 제일 먼저 따라나선 뚱뚱한 놈이었다.
"그러면 정오의 마탑에서 쌓은 실적도 넘겨주는 것이오?"
실적? 괴상한 물음에 마족은 눈을 찡그렸다.
"무슨 실적?"
"내가 이번 달 최고 실적을 올렸는데, 이게 보존되냐는 것이오!"
"정오의 마탑에는 실적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급을 나누고 올려줍니다."
다른 마법사의 설명에 마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야 하지? 그냥 다 나눠주면 되지 않은가?"
마법사들이 작게 환호했다.
다만, 물어본 놈의 표정은 오히려 더 구겨졌다.
"아니! 내 실적이 보존되냐고!"
"멍청한 인간, 신시대에 실적은 필요 없다."
"그러면 뭐로 차등을 두는 것이오?"
"차등을 왜 둬야 하지?"
"모두가 마법사면 차등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마족은 눈을 구겼다.
"마나에 적합한 놈이 올라가겠지."
"그건 불공평하오!!"
"······불공평?"
마족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나의 재능에 따른 대우를 해주겠다는데, 뭐가 불공평이 하다는 말인가?
"마나에 재능 있는 놈이 올라간다는 거 아니오! 재능이 없는 놈은 어떻게 하라고!"
"쓸모가 없으면 연료가 되어야지."
마족의 발언에 순간 마법사들이 크게 흔들렸다. 그에 마족은 눈을 찡그렸다.
"이게 그대들이 원하던 평등 아닌가?"
"전혀!"
당당한 사내에 마족은 눈을 찡그렸다. 사내가 곡괭이를 높이 들었다.
"여기서는 광질이라도 열심히 하면 올라갈 수 있지! 그런데 재능으로 나눈다고?! 아니, 애초에 재능 있는 놈이 여기서 광질이나 하고 있겠소? 재능이 쓰레기니까 여기 있지! 염병!"
사내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방금까지 들떴던 마법사들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다-.
"마법의 신시대가 오면, 우리는 농노가 되겠지! 재능이 없으니까! 우우!"
기세등등해진 놈이 말을 이었다. 그에 마법사들까지 호응했다.
마족은 눈을 가득 구겼다.
"그러니까 재능 상관없이 대접받고 싶다는 건가?"
마족의 물음에-.
"정확하다! 노력 없는 출세를 보장하라!"
코르튼이 당당하게 외쳤다.
152화 출세
'마법의 신시대라.'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마법사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특히 이들은 북부에서 멸시당한 이들 아닌가.
그런 놈들에게 '여명'이 마법의 신시대를 속삭이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왜 마법사들만 사라졌나 했더니-.'
마법의 신시대라는 건,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여명은 제마 전쟁의 잔재를 뿌리는 놈들이었다. 실제로 개척자를 통해서 마경을 넓히려고 했던 놈들이고-.
그런 여명이 말하는 신시대는 뻔했다.
'마족의 왕이 나오겠지.'
신시대긴 하겠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넘어갔으면 다시 잡아 오면 되지 않습니까?"
길버튼이 칼자루를 두들기며 말했다. 어디 사채업자 같은 모습이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고집과 성격은 물리적으로 다듬을 수 있지만, 이념은 다르다네. 특히 마법사는 더 다루기 힘들지."
"예?"
"마법사는 단순히 공포로 다뤄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세. 내가 괜히 마법까지 보여주며 꼬드긴 줄 아나."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길버튼이 눈을 끔벅였다. 이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뭐, 어쩔 수 없지."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연초를 밟아 껐다. 레몬 향이 잘리듯 희미해졌다.
"알겠습니다."
길버튼이 검을 고쳐 잡았다.
"근데 왜 이쪽 마법사들을 건드린 겁니까?"
"나를 꿰어내기 위한 함정일세. 더불어 혹시나 실패하면, 독이라도 심겠다는 고약한 심보겠지."
"독-."
갈라하드는 연초를 가벼이 던졌다. 눈밭에 연초가 가라앉았다.
"아주 똑똑하고 고약한 놈일세."
갈라하드는 옷깃을 털고 걸음을 옮겼다.
함정은 더는 없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있었던 마법진이 끝인 듯했다. 확실히 마지막 노인이 설계한 함정은 위험했다.
'아쉽군. 재밌었는데.'
갈라하드는 입맛을 다시며 위쪽으로 올라갔다.
위에는 큼지막한 동굴이 있었다. 그 앞에 경비는 없었다.
"자신감이 대단한 놈인가 봅니다?"
"상관없다는 거겠지. 마법사들이 도망칠 리도 없고."
갈라하드는 램프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램프의 회색 불이 동굴을 밝혔다.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됐네, 뒤로 빠지게나."
"예."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물리고, 안쪽으로 향했다. 손가락을 가벼이 풀었다.
"여기는 마석장이 아닐세. 좋지 않군."
"예? 마석장이 아니면 다행인 거 아닙니까?"
"반대일세. 다른 마석장에 사라진 마법사들도 같이 있다는 거니까."
이제 마석장을 굴리는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더불어 이번에 얽힌 게 흑마법학회 쪽 마법사들이었다. 전부터 마석을 캐던 놈들이기에, 더욱 소중한 일손이었다.
그런 놈들을 전부 처리해야 한다니-.
'좋지 않아.'
다만, 놔뒀다가는 문제만 커질 뿐이었다. 요원 경험으로 얻은 팁이었다.
그때-.
"보장하라! 보장하라!"
안쪽에서 큰 소리가 터졌다.
'보장하라?'
뜬금없는 문구였지만, 저리 큰 소리가 난다는 건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동굴 끝에 있는 공동에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갈라하드의 예상대로, 사라진 마법사들을 모아뒀는지 그 수가 많았다.
다만, 그 분위기가 상당히 미묘했다.
마법사들은 열을 내며 주먹을 흔들고 있었다. 시위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그 중심에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고생했는지 전보다 살이 조금 빠졌지만, 저건 분명-.
'코르튼?'
폐급 중의 폐급 코르튼이 분명했다.
그때, 코르튼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노력 없는 출세를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괴상한 구호가 울려 퍼졌다.
'진짜 시위군.'
그 정면에 마족이 있었다. 마족이 눈을 가득 구겼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멍청한 인간 놈들. 뭐를 원한다고?"
마족이 낮게 읊조렸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른 마법사들이 슬쩍 물러났지만, 코르튼은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재능이 없지만 출세는 하고 싶다! 대우해달라고!"
코르튼이 당당하게 외쳤다.
마족 앞에서 저런 구호를 외치다니-.
'열사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상황이 빠르게 그려졌다. 마족이 마법사를 '마법의 신시대'로 회유했지만, 거기에 코르튼이 있던 것이다.
늘 그렇듯 코르튼이 코르튼했고-.
'이 사달이 났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처럼 쓰레기 인간은 필요 없다."
마족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족에게서 저런 적나라한 감정 표현을 끌어내다니-.
'인재였네.'
그때, 마족이 적개심을 가득 드러냈다. 갈라하드는 땅을 박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족이 곧장 코르튼을 노리고 손을 움직였다. 손톱이 가득 길어졌다.
"으아아악!"
코르튼이 길게 비명을 터뜨렸다.
단검처럼 날카로운 마족의 손톱이 코르튼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를 멈춘 건, 마족의 등에 박힌 얼음송곳이었다.
마족이 코르튼에 집중한 탓에 반응하지 못했다.
마족이 그대로 쓰러졌다. 갈라하드는 쓰러지는 마족의 목덜미를 강제로 잡아서 틀었다.
마족의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심장을 정확히 꿰뚫렸는데도 그 눈에는 작은 감정도 없었다.
이번 일을 설계한 놈은 아주 치밀한 놈이었다. 이 상황을 뒤에서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에-.
"반갑네."
갈라하드는 놈의 눈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놈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쯧."
놈이 짧게 혀를 찼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동시에 마족의 머리가 순식간에 부풀었다. 갈라하드는 다급히 마나를 돌렸다.
그 순간 마족의 머리가 그대로 터졌다. 거기서 뿌려지는 붉은 피가 뾰족했다. 흡사 수류탄이라도 터진 듯한 모습이었다.
'지독하군.'
갈라하드의 앞으로 방호벽이 떠올랐다.
이런 근거리에서 마족의 피로 뿌려진 공격이라니-.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다른 마법사라면 바로 당했을 것이다.
다만, 체내 농도를 올린 갈라하드였다.
급하게 펼친 방호벽이 피를 훌륭하게 막아냈다. 방호벽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중 유독 뾰족한 게 갈라하드의 미간을 가벼이 찔렀다. 예고하는 것처럼.
미간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아주 획기적인 공격이군."
갈라하드는 짙게 웃었다.
피가 뚝- 하고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길버튼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 뒤에는 달그락거리는 아드리안나도 있었다.
"괜찮네. 아니, 오히려 좋지."
갈라하드는 손가락으로 이마의 피를 쓸어 맛을 봤다.
"하급이었군."
하급으로 이런 위력을 보이다니-. 갈라하드는 다시금 감탄했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곡괭이를 든 마법사들이 질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전부 무사하군.'
소중한 일꾼들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코르튼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죄지은 놈이 잡혔을 때 얼굴이었다.
상황을 보니 제일 먼저 넘어간 듯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도움이 됐다.
"잘했네, 코르튼. 자네 덕분에 음흉한 수를 막을 수 있었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칭찬하자, 눈치를 보던 코르튼이 금세 히죽 웃었다.
"하하하하! 그래! 이걸 의도한 거지! 나쁜 마족! 마나의 재능으로 판가름한다니!"
코르튼이 마족의 사체를 걷어찼다. 그러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그런 코르튼의 모습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코르튼의 쓰임새를 깨달았다.
"자, 다들 모여보게."
흩어진 마법사들을 한곳에 모았다. 마법사들이 미묘한 얼굴이었다. 마법의 신시대라는 단어의 파급력 때문이었다.
확실히 매력적인 단어였다.
그러니까-.
"나는 마법의 신시대를 열 걸세."
이쪽에서도 써야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들 크게 동요했다.
달그락, 달그락. 아드리안나가 연신 달그락거렸다.
갈라하드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만, 저들이 말한 것과는 다를 걸세. 그대들은 먼저 땅을 일군 아주 참된 마법사들 아닌가? 그런데 실적 상관없이 그저 재능으로 판가름 된다니-. 이 얼마나 부당한가."
"그렇다! 역시! 갈라하드다!"
코르튼이 크게 호응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금세 동조했다. 코르튼의 선동 실력은 일품이었다.
"그대들은 초대 인원 아닌가? 신시대를 열면, 더 대접을 해줘야지."
"옳소!!"
코르튼이 곡괭이를 높이 들며 호응했다.
"그대들은 재능이 없지 않나? 일은 유능하고 명석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들은 마석만 열심히 캐게나."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씰룩였다. 좋게 말했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은 듯했다.
이럴 때는 당근을 내밀어야 했다.
"오, 코르튼 이번에 많이 캤군."
갈라하드는 코르튼의 어깨를 두드렸다. 코르튼이 히죽 웃으며 제 주머니를 전부 털었다. 마석이 가득 쏟아졌다.
뛰어난 마법사는 마석을 탐지할 수 있지만, 그건 갈라하드 정도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에게 마석은 운의 영역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어디서 훔쳤는지 코르튼의 마석은 유독 많았다.
'그래서 실적을 운운했군.'
갈라하드는 슬쩍 마법사들을 둘러봤다. 얼굴에 검은 그을음이 가득한 광부 꼴이었다.
이럴 때는 상을 보여야 했다. 더불어-.
'코르튼도 적절하게 쓰고.'
실권은 없지만, 밖에서 보기에 아주 그럴듯한 자리에 코르튼을 두면, 적들은 코르튼을 가장 먼저 회유하려고 들 것이고-.
'코르튼을 떠안겠지.'
아주 명쾌한 계획이었다.
"이렇게나 많이 캐다니! 코르튼 정말 대단하군."
칭찬에 코르튼이 제 코를 슥슥 그었다.
"더불어 불온한 세력도 막아냈으니-. 자네의 공이 매우 크네. 특진일세."
"······특진!!"
코르튼이 코를 벌렁거렸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실권은 없지만, 밖에서 보기에 그럴듯한 직위는-.
"자네는 이제 마탑의 장로일세."
마법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마탑의 장로라는 직위는 아주 그럴듯했으니까.
"어험,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코르튼이 가슴을 가득 펴며 헛기침했다. 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법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저 무능한 코르튼이 장로까지 올라가다니! 확실한 당근이자, 동기 부여였다.
분위기가 점점 들썩였다.
"자네들은 마석만 열심히 캐면 되네."
갈라하드는 슬쩍 웃었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깡! 곡괭이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마법사가 벌써-.
'여기는 마석장도 아닌데?'
천천히 고개를 돌린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석에서 데미안이 곡괭이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기에-.
톰이 다급하게 데미안을 말렸다.
****
"의외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길버튼 경, 싱겁다니. 전혀 싱겁지 않았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갈라하드에 맞춰서 함정을 몇 겹이나 준비한 놈이었다. 그를 이렇게 넘길 수 있는 이유는-.
"자네들 덕분이지."
갈라하드는 특무대를 보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상대는 갈라하드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서 촘촘하고 첨예한 함정을 짰다.
갈라하드가 맞이했다면, 상당히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
온전히 그 예상 밖에 있던 특무대에게 맡겨서 쉽게 돌파했을 뿐이었다.
"후후, 그렇군요."
길버튼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웬도 따라 웃었다. 달그락-.
화기애애한 특무대에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털었다.
"이건 전초전일세."
"······전초전 말입니까?"
"정보를 모으고 치밀하게 설계하는 놈일세. 이번에 직접 경험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에는 더욱 정교한 설계로 나를 함정으로 몰걸세."
갈라하드의 설명에 길버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내 길버튼이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의외니까."
"맞아요! 또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달그락.
특무대가 금세 의기를 일으켰다. 상당히 끈끈하고 열기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무슨 소리인가. 다음에는 내가 상대할 걸세."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
"정보에 민감한 놈일세. 이번 일을 겪은 놈은 자네들로 계획을 새로 짜겠지. 그걸 내가 상대하면? 아주 볼만할 걸세."
갈라하드는 짓궂게 웃었다.
상대의 얼굴도 모르지만, 놈이 뒤집힐 게 선하게 보였다.
"그러면 의외는-."
"무기한 휴정일세. 그리고 의외가 아니라 의회일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저는 의회라고 했는데, 그웬이 자꾸 의외라고 그래서-."
"아니, 왜 제 탓을 해요!"
길버튼과 그웬이 서로 손가락질했다. 톰이 그걸 말렸고, 데미안은 어디서 구했는지 마석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달그락거렸다. 자기는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그때-.
뿌우우우우우!!
저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대공의 성이 보였다.
"빠르군."
열린 성문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참모 테오도르였다. 테오도르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차분했던 테오도르가 저리 다급하다니-.
갈라하드의 앞까지 뛰어온 테오도르가 거친 숨을 애써 다잡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대공··· 대공 전하께서······."
테오도르가 말을 더듬었다. 그 목소리가 가득 떨렸다. 이내 숨을 크게 내쉰 테오도르가-.
"금방 사냥을 나가셨습니다. 혼자."
뜬금없는 말을 진지하게 했다.
테오도르의 모습에 제국의 습격까지 생각했던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대공 전하는 원래 사냥을 나가지 않나? 왜 요란인가."
테오도르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크게 끄덕인 테오도르가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는 사냥을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그리 자주 나가시지는 않습니다. 한 번 나가면 해가 백 번 넘게 떠오를 때까지는 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나가도 보통 단신으로 준비 없이 가십니다."
"알고 있는 내용일세."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 최근에 한 번 사냥을 다녀오신 적 있습니다. 원래는 갈라하드 대장과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일이 생기셔서 말입니다."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목을 긁적였다.
"들은 적이 없네만."
"예, 대공 전하의 말을 전하기도 전에 급하게 나가셔서. 갈라하드 대장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군.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테오도르가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최근 갈라하드 대장이 전령 선물과 함께 사냥 요청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대공 전하가 사냥에서 돌아오고 직후에 받았습니다. 그에 대공 전하가 사냥 준비를 전보다 크게 명령하셨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일단, 전령은 대공 전하에게 드리는 선물이 아닐세."
"······예?"
테오도르의 얼굴이 씰룩였다. 그 안색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그 투명한 반응에 갈라하드도 덩달아 서늘해졌다.
"그리고 나는 바로 간다고 하지 않았네. 사냥 요청만 했지."
"북부에서 약속은 '바로'를 의미합니다."
테오도르가 갈라하드의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그제야 뭔가 어긋났음을 느꼈다. 그를 본 테오도르는 진지하게 말했다.
"대공 전하가 이틀을 기다리시다가 혼자 출발하셨습니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대공 전하가 삐졌다는 건가?"
테오도르가 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역모라도 들은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살핀 테오도르가 아주 작게 끄덕이면서-.
"대공 전하의 심기가 상당히······."
뒷말을 흐렸다.
차르티엔이 흐릿하게 보였다.
차르티엔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부······ 부인!"
다급하게 아드리안나를 찾았다.
달그락?
****
"내가 누구?"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팔호는 눈을 가득 구겼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마탑의 장로 코르튼."
혼자 대답하고 히히- 웃는 코르튼이 있었다.
'저 폐급 새끼한테 장로를-?'
그를 곱씹던 팔호는 감탄했다.
마탑에서 장로는 명예직이었다. 높은 직위처럼 보였지만, 그건 그 자리에 앉은 이가 전 시대의 실력자라서였다. 장로라는 직위 때문이 아니었다.
코르튼을 장로로 앉혀두면, 밖에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장로니까.
다만, 그 속에는 실권은 전혀 없었다. 조금 대접받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코르튼을 장로에 앉힌 건-.
'외부 회유 막기용이구나.'
팔호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저 폐급 코르튼을 이런 용도로 쓰다니-. 실로 놀라운 용인술이었다.
다만-.
"장로가 도착했는데, 반응이 썰렁하구나!"
꺼드럭거리는 코르튼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마탑의 문이 열렸다. 거기서 나온 이들에 팔호의 눈이 커졌다.
그건-.
"누가 장로라고?"
"신참이 들어왔어?"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든 장로들이었다.
그 흉흉한 분위기에-.
"나다. 마탑의 장로, 코르튼."
코르튼이 당당하게 외쳤다.
장로 둘이 몽둥이를 고쳐잡으며 히죽 웃었다.
153화 동승
대공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얼굴은 흉터로 가득하고, 눈에는 광기가 그득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을 수 없었다.
갈라하드가 괜히 고위 마물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대공을-.
'두 번이나 바람 맞힌 건가.'
갈라하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북부에서 약속은 다음을 기약하는 게 아니라, 당장을 뜻한다니.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작은 오해였지만, 그 상대가 대공이었다.
마물을 생으로 씹어 먹고, 수 틀리면 대장 머리도 뽑는 대공-.
갈라하드는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검은 말이 빠르게 달려왔다. 갈라하드는 말에 타서 고삐를 잡았다.
급해진 갈라하드에 특무대가 멀뚱히 올려봤다.
"다들 고생했네. 가서 마음껏 먹고 쉬게나. 나는 대공 전하와 사냥 좀 다녀오겠네. 아, 노아드 자네는 같이 가지."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면서 손짓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달그락거리며 나섰다.
"저도 사냥 잘합니다."
"길버튼 경, 가서 술이나 마시게."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하고 말의 갈퀴를 쓰다듬었다. 말이 뒷발을 접으면서 우아하게 자세를 낮췄다. 아드리안나가 멀뚱히 올려봤다.
"뭐 하나 안 타고."
달그락.
"빨리."
갈라하드의 독촉에 아드리안나가 말에 탔다. 갑주의 무게가 제법 나갈 것인데, 말은 가뿐하게 일어섰다.
"다들 쉬고 있게."
갈라하드는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말이 곧장 땅을 박찼다.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톰은 슬쩍 길버튼을 살폈다. 길버튼의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했다.
"나도 사냥 잘하는데. 왜 막내를-."
자신이 아닌 막내를 데리고 간 게, 서운한 듯했다.
"일이 많았으니, 길버튼님을 쉬게 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함정을 무사히 돌파한 것도 길버튼님의 덕분이고-. 대장님이 길버튼님을 배려해주신 것일 겁니다."
"······크흠, 그런가? 나는 체력이 넘치는데."
길버튼이 송충이 같은 눈썹을 씰룩거렸다.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길버튼님이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휴식이 중요하다고. 특무대의 중요 병력이자, 부대장이시니 대장님이 특별히 신경 써주시는 게 분명합니다."
"크흠, 뭘 또 그렇게까지-. 그래, 대장이 자리를 비우면 부대장이 남아 있어야지. 지휘 체계가 올바른 거지."
길버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내 길버튼이 크게 헛기침하며 대원들을 불렀다.
"자, 다들 고생했다. 위기가 많았는데, 다들 훌륭히 넘겼다. 특히 의회 활동이 아주 대단했다. 대장에게 가려져 있던 우리의 유능함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줬지. 대장도 놀랐을 것이다."
데미안이 길게 하품했다.
"데미안! 아무리 지루해도 좀 참아야지!"
길버튼의 눈썹이 씰룩였다. 길버튼이 헛기침하며 웃었다.
"다들 고생했으니 회식이다. 마음껏 먹고 즐겨라. 부대장인 내가 살 테니까."
"정말요?"
"꼬맹이, 너는 일단 검부터 섞자."
"오러로 배 채우려고요?"
"크흠, 오늘은 마음껏 먹어라."
그웬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이들도 데려와도 되나요!"
"당연하지. 마음껏 먹으라고 그래라."
길버튼이 시원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당당하게 주머니를 흔드는 길버튼에 톰은 속으로 다짐했다.
길버튼이 특무대에서 봉급을 제일 적게 받는 건 끝까지 숨겨야겠다고-.
그때,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 둘이 있었다.
"톰! 톰!"
"젠장! 드디어 왔다!"
정보국의 제임스와 핸섬이었다. 그런데 둘의 얼굴에 고달픔이 가득했다.
"자밋이 찾는다!"
그들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
대공에게 받은 말은 정말 빨랐다. 바람이라는 이름이 안 아까울 정도였다.
다만, 갈라하드는 만족하지 못하고 고삐를 더욱 당겼다.
검은 바람이 속도를 더욱 높였다. 걸음마다 성큼성큼 나아갔다. 눈이 거칠게 튀었다.
"그······ 저도 말이 있습니다만!"
뒤에 앉은 아드리안나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리니, 끝에 간신히 붙어 앉은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저런 자세로 어떻게 버티는지-.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다.
"1대대에서 가져가지 않았나. 그걸 언제 찾아오나. 바쁘다네."
"바쁘다니-."
"대공 전하가 삐졌다고 하지 않나."
"전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대답하는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미묘했다.
'뭔가 있군.'
다른 대장보다 사이가 더 서먹서먹한 대공과 아드리안나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의 시선에 아드리안나가 조금 더 물러났다.
자꾸만 거리를 유지하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아예 돌아앉았다.
"위험합니다!"
정면으로 마주 앉은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검은 바람이 아무리 명마라도 고삐는 잡으셔야 합니다!"
"그런가?"
"예! 당연한 겁니다."
"그렇군."
단호한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고삐를 가벼이 던졌다.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고삐를 받았다. 고삐를 받으려니, 아드리안나가 어쩔 수 없이 가까워졌다.
"이게 무슨-."
"자네가 더 잘 모니까. 자네가 몰게."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성큼 가까워진 아드리안나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묶지 못한 금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외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새삼스럽지만, 아름답군."
"예."
아드리안나가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그 뻔뻔함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아드리안나. 이야기 좀 해보게나."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같은 것들 말일세."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그 금발이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예의 무표정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재미 없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네. 재미있는 이야기는 충분히 많이 알거든."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다소 날카로웠다. 민감한 부분인 듯했다.
"자네에 대해서 궁금하네."
갈라하드는 다가가며 속삭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그리고 필요한 일일세. 잊었나? 나는 자네의 성질을 연구 중이라는 걸."
"아-."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눈썹이 계속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아드리안나의 얼굴이나 구경했다. 그 완벽한 외모는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정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숨을 내쉬었다.
"어떤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책을 첫 장부터 읽는 다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다시금 흔들렸다.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저는-."
아드리안나가 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를 태우고 나왔습니다."
강렬한 도입부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드리안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제 저주 때문입니다. 저를 낳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불에 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에 대공 전하가 직접 배를 가르고 저를 꺼내셨습니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흉터를 떠올렸다. 그 가슴 주변으로 강렬한 흉터가 있었다. 태운 것처럼-.
아드리안나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를 보며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그건 자네 잘못이 아닐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무표정이 깨지고 일그러졌다.
"무엇을 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목소리에 차분한 분노가 넘실거렸다.
"제 어머니는 북부의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있을 때 북부는 따뜻한 눈이 내렸고, 제국과의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대공 전하도 매일 웃으셨다고-. 그녀는 북부의 태양이었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가득 흔들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차리던 아드리안나가 저리 까칠한 반응을 보이다니-.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왜 저주라고 부르나 했더니만-.
'이래서였군.'
꽤 가혹한 이야기였다. 다만-.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가? 자네가 죽였다고 생각하여?"
적나라한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었다. 얼마나 세게 씹었는지, 그 입가를 타고 피가 길게 흘렀다.
"예."
아드리안나가 굳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자네도 길버튼 경 못지 않게 멍청하군."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에서 격한 감정이 보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드리안나는 아드리안나였다.
화풀이할 성품이 아니었다. 그를 알아도 소드 마스터인 아드리안나의 분노를 정면에서 마주하니 서늘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의 성질은 마나를 태울수록 강해진다네. 배 속에 있을 때는 자네의 성질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을 걸세. 그런데도 죽음까지 이르렀다는 건, 자네 어머니의 마나가 뛰어났다는 이야기겠지."
괴상한 이야기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게, 아드리안나의 탓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이들은 많았다.
다만, 그런 무책임한 위로는 아드리안나에게 도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갈라하드까지 저런 위로를 할 줄은-.
아드리안나의 눈이 점점 구겨졌지만,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나가 그토록 뛰어나면, 민감도도 높을걸세. 특히 배 안에 있다면 더더욱 느꼈겠지. 자네를 낳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본능적으로 알았을 걸세."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 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더없이 싸늘했지만, 갈라하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신랄하게 찔렀다.
"그대의 어머니는 선택하셨다는 걸세. 제 몸이 불타도 아이를 낳겠다고. 그건 아주 숭고한 결정이지. 그런데 자네는 그 숭고한 선택을 모욕하는군."
갈라하드의 말은 늘 그렇듯 거침없었다. 날카롭게 아드리안나를 찔렀다.
그건 무책임한 위로가 아니었다. 신랄한 힐난이었지.
"숭고한 결정을 욕보이지 말게나."
아주 신랄한 힐난이었지만-,
우습게도 위로보다 와닿았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자네, 지금 우는 건가?"
늘 감돌았던 갈라하드의 여유가 깨졌다.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떠올랐다. 갈라하드가 손을 내밀었다가 황급히 회수했다.
"생각해보니, 자네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군. 하지만 이런 관점도 있다- 라고 말해준 것뿐일세. 자네를 탓하거나 힐난한 건 아닐세. 미안하네, 내가 위로가 서툴러서-."
어울리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갈라하드에-.
"못하시는 것도 있으셨군요."
아드리안나는 작게 웃었다.
"······운 게 아니었군."
"예, 저는 기사입니다. 피는 흘려도 눈물은 흘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방금 그건 뭔가?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지 않았나."
"얄미워서, 한 대만 때릴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갈라하드는 헛기침하며 옷깃을 고쳤다.
"자네는 마나를 태우지 않나? 나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니, 자네한테 맞으면 위험하네."
"괜찮습니다. 건틀릿을 끼고 때릴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지적인 사람일세."
"살살 때리겠습니다."
"음-."
갈라하드가 가만히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아드리안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옅은 갈색이 깃든 검은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웃고 있었다. 갈라하드의 말처럼, 멍청하게-.
"알았네. 살살 때리게."
갈라하드가 가만히 끄덕였다.
자세를 곧게 한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손을 내밀었다.
*
"음-."
갈라하드는 제 허리를 잡은 건틀릿을 내려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달리는 말 위에서는 위험합니다. 앞을 보십쇼."
아드리안나의 단호한 말에 갈라하드는 정면을 쳐다봤다. 그 등에서 서늘한 단단함이 느껴졌다.
"못하시는 게 또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당연한 걸 묻는군. 나는 대부분 뛰어나지만, 인간이라 완벽할 수 없네. 못하는 게 당연히 있지."
"뭐가 있으십니까?"
"많지. 먼저-."
갈라하드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끄덕였다.
"나는 오러를 못 쓰네."
"오러를 말입니까? 왜 못 쓰십니까?"
그 당연한 걸 왜 못쓰냐는 듯 묻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길버튼 경이 나한테 재수 없다고 하는 게 이런 기분이었군."
"예?"
"아무것도 아닐세. 오러는 도저히 감이 안 오더군. 그래서 포기했네. 애초에 마법이 더 재밌기도 했고."
갈라하드는 연초를 꺼내려다가, 슬쩍 손을 털었다.
"아-. 오러는 신념의 힘입니다. 검을 잡았을 때, 생각이 너무 많으셨던 거 아닐까요."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오러는 신념의 힘이었다. 생각이 많을수록 그 힘이 분산되어 오러를 쓰지 못한다-.
"그럴듯하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예, 혹여 오러를 수련하시고 싶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네, 나는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니까. 이제 와서 굳이 오러는 필요 없네. 행여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모를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쯤-.
"도착했군."
거대한 설산, 마물의 무덤이 그들을 맞이했다. 앙상하고 뾰족한 나무가 빼곡하여 그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음산했다.
괜히 마물의 무덤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때, 6대대의 병사들이 나왔다. 병사들이 갈라지며 8대대 대장이 다가왔다.
8대대 대장은 갈라하드에게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8대대 대장이 어딘지 안쓰러운 눈으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크흠, 대공 전하는 먼저 들어가셨네."
8대대 대장이 군말 없이 길을 열어줬다.
그 안쪽에서-.
······!!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마물이 저리 고통에 찬 괴성을 터뜨리다니-. 갈라하드는 삐진 대공을 떠올렸다.
갈라하드는 빠르게 고민했다.
대공의 화를 풀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내 적당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드리안나, 부탁 하나만 하겠네."
"예, 가능한 거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갈라하드의 부탁을 들은 아드리안나가-.
"······절대 안 됩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 번만 부탁하겠네.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나."
"어려운 겁니다. 그것도 무척."
"그게 뭐가 어렵나. 오히려 쉽지."
"아니-. 애초에 왜 그런 걸-."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한참이나 부탁하자, 아드리안나가 힘겹게 끄덕였다.
눈과 뾰족한 나무로 가득 덮인 설산이었지만, 길은 찾기 쉬웠다.
입구부터 붉은 피로 친절하게 그려져 있었기에-.
'아주 곤죽을 내놓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위쪽으로 향했다.
한참이나 올라가자, 짐들이 보였다. 전과 달리 술이나 고기, 식탁까지 있었다. 단단히 준비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듯했다.
다만-.
'하나도 안 풀어져 있군.'
모든 게 짐처럼 한쪽에 쌓여 있었다. 목록을 살피던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준비가 제법 잘 되어 있었다.
아드리안나나 대공은 안 쓰겠지만, 갈라하드는 달랐다.
'톰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조금 아쉬웠지만, 요원 생활을 오래 했던 갈라하드였다. 이런 건 기본이었다.
'아주 호강시켜야겠군.'
괜히 수도의 귀족들이 마법사를 찾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 대공과 아드리안나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도끼는 정확히 갈라하드의 앞에 박혔다.
도끼 끝에 박힌 마물의 머리에서 피가 꿀렁이며 쏟아졌다. 반으로 짓이겨진 마물이 속삭이는 듯했다.
도망치라고-.
쿵,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대공이었다. 그 굵직한 손에는 목이 뽑힌 마물이 들려 있었다. 제 몸보다 열 배는 큰 마물이 가벼이 끌려왔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늦었군."
마물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갈라하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오는 길에 마석장에서 헛짓하는 놈들을 발견해서 말입니다. 북부를 지키고 오느라-."
대공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그 상어처럼 뾰족한 송곳니에 살점이 달랑거렸다.
살벌한 존재감이 갈라하드를 꾹 눌렀다.
'단단히 삐졌군.'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아드리안나를 슬쩍 밀었다.
아드리안나가 나서자 대공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분위기가 오히려 더 살벌해졌다. 아드리안나의 뒤에 숨는 것도 면역이 생긴 듯했다.
"비키도록. 놈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어서!'
갈라하드는 눈에 힘을 줬다.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당장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실제로 공기도 무거워졌다.
어찌 인간이 저런 존재감을 표출할 수 있는지-.
'인간은 맞나?'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침음성을 흘렸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드리안나가 한숨을 내쉬면서 대공을 응시했다.
"명령이다."
대공이 강하게 나왔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아빠."
짤막하게 대공을 불렀다.
짓누르던 살벌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깊게 안도했다.
154화 친해지길
계획은 성공했다.
애초에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의 유일한 약점은 아드리안나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슬쩍 한발 물러섰다.
자연스럽게 대공과 아드리안나가 마주 봤다.
그렇게 둘만 두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둘 다 말주변이 없군.'
아드리안나는 말을 내뱉기 전에 몇 번이나 곱씹는 신중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아드리안나는 아버지보다 대공으로 대했다.
그런 아드리안나도 대공에 비하면 약과였다.
대공은 그저 말이 없었다. 심지어 아드리안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도-.
'왜 나를 보는 거지?'
대공의 강렬한 시선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둘이 부녀였으니, 저 불편한 어색함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대공이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았다. 뇌수가 가득 뿌려졌다.
"가지."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기다렸다는 듯 끄덕였다.
방금 도착했는데, 바로 사냥이라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아드리안나 옆으로 붙었다.
"전에 사냥 나온 적 있나?"
"어릴 적에는 몇 번 나왔지만, 1대대로 간 뒤부터는 못 갔습니다."
"그렇군, 아쉬웠겠어."
대공의 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뭐가 말입니까?"
"사냥 말일세. 저번에 대공 전하랑 해봤는데, 아주 재밌더군. 대공 전하의 사냥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갈라하드는 빠르게 대공을 칭찬했다. 대공의 등 근육이 꿀렁거렸다. 사내는 등으로 말한다더니-.
"오랜만에 사냥을 나왔으면, 사냥법을 까맣게 잊었겠군?"
"예? 아, 사냥은 1대대에서도 많이 했습니다."
"아니, 1대대의 마물과 마물의 무덤에 있는 마물들은 다르다네. 여기는 마물만으로 가득 찬 곳 아닌가. 더불어 1대대에서 하던 건 토벌이고, 이거는 사냥이니까. 아예 다르지."
"아, 그렇군요."
아드리안나가 순수하게 끄덕였다. 대공의 등이 다시 꿀렁였다.
"대공 전하에게 배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겠군. 대공 전하의 마물 사냥 솜씨는 대륙 제일이시니까."
"예? 예."
대공이 슬쩍 돌아봤다. 갈라하드를 보는 그 시선이 참으로 강렬했다. 개수작하지 말라는 듯했지만-.
"대공 전하, 저와 갈라하드 대장에게 사냥하는 방법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정중하게 부탁하니-.
"음, 사냥의 첫 단계는 탐색이다."
대공이 바로 굵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마물은 심장 소리가 크고 우렁차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지."
대공이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심장 소리를 듣는다고?'
두근.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아, 확실히 마물의 심장 소리가 크기는 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깊게 끄덕였다. 그들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마족과 달리, 마물은 그 덩치에 비례해서 강해진다. 심장 소리가 크면 더욱 맛있는 놈이지."
대공이 설명을 이어갔다. 주제가 사냥이 되자, 말이 많아졌다.
문제는-.
'······왜 나를 보고 말하지?'
분명 아드리안나에게 하는 말인데, 대공의 눈은 갈라하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대공은 아드리안나를 못 보는군.'
정확하게 말하면, 대공은 아드리안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쪽도 뭔가 있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다만, 심장 소리는 범위가 좁다. 가까이에서 놈의 상태를 파악하는 용도지. 찾기 위해서는 심장 소리가 아니라, 발소리를 들어야 한다."
대공이 땅에 가벼이 앉았다. 덩치가 워낙 큰 터라 앉아도 거대했다.
"마물은 덩치가 크고 무거워서 발소리가 무겁다. 더불어 가만히 있지도 않지. 그렇기에-."
대공이 땅에 귀를 댔다. 숙련된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아드리안나는 그런 대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에 갈라하드는 대공을 따라 앉았다.
"자네도 해보게나."
"예."
아드리안나에게 권유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드리안나가 따라서 쭈그려 앉았다. 천천히 땅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드리안나가 따라 하자, 대공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신기하게도 웃는데 인상이 더 흉악해졌다.
'뭐가 들린다는 거지?'
땅에 귀를 댔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발소리가 들립니다."
"놈의 발소리에 집중해라. 발소리는 놈의 상태와 덩치를 알려주니까."
"예-."
둘이 뭔가를 떠들었다. 갈라하드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뒤에 둘이 일어났다.
"다음은 뭡니까?"
"다음은 추적이다. 마물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에 추적이 까다롭다."
대공이 도끼를 빙글 돌렸다. 묻어있던 피와 살점이 둥글게 뿌려졌다.
"맹수와 다른 점이다. 마물은 쉬지도, 자지도 않고 늘 인간을 찾아서 돌아다니지. 그러니 발소리를 찾았으면-."
도끼가 한쪽을 가리켰다. 나무가 무성한 곳이었다.
"그쪽에 집중해야 한다."
대공이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 흔적이 여기저기 남겨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공이 우뚝 멈췄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마물은 도망간다."
갈라하드가 북부에서 마주했던 마물은 뇌가 망가진 맹수였다. 인간을 발견하면, 달려들지 도망치지 않았다.
그런 마물이 도망친다니-.
'어이가 없군.'
갈라하드는 마나를 뿌렸다. 멀리에 마물이 잡혔다.
"마물은 목을 날리면 죽는다."
대공이 당연한 소리를 그럴듯하게 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대공이 도끼를 높이 들었다. 그 굵직한 근육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팽창했다.
그 거대한 근육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저 근육이 오러라니.'
심지어 그 피부는 고위 마물처럼 질겨서, 웬만한 마법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피부 아래 근육은 오러라니-.
'부모가 마물인가?'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하긴 데미안은 반마족이니까. 그럴 가능성도-.'
그때, 대공이 도끼를 던졌다. 살벌하게 날아가는 도끼에 갈라하드는 의문을 삼켰다.
······!
멀리서 마물의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대공은 손을 풀며, 천천히 걸었다.
도착한 곳에는 뱀처럼 생긴 마물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머리가 성인 여성만 했는데, 그 목에 정확히 도끼가 박혀 있었다. 한 번에 못 잡은 건가 싶었는데-.
"사냥의 묘미는 뼈를 자르는 순간이다. 손맛이지."
대공이 도끼를 잡으며 살벌하게 웃었다.
'일부러 놔둔 거군.'
우득.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물의 머리가 힘을 잃고 떨어졌다.
"좋군."
대공은 마물의 머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그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피와 뇌수가 거칠게 튀었다.
'······누가 마물이지?'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마물의 머리는 힘을 준다."
대공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에 살점이 덜렁거렸다.
'마물의 머리가 힘을 준다?'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마물의 피에는 생명력과 마나가 있으니까.'
특히 머리에 그 함유량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마물의 머리를 먹으면, 생명력과 마나를 얻을 수도 있었다.
다만-.
'몸이 견디지 못할 텐데?'
고통의 알과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으로 희석하여 써도, 고통스러운 게 생명력이라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걸 그냥 씹어 먹어서 축적한다고-.
'몸이 얼마나 단단한 거지?'
그때,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아드리안나에게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설마 아드리안나도-.
"저는 익힌 고기가 좋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공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그에 갈라하드가 나섰다.
그렇다고 대공처럼 무식하게 살점을 뜯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문명인답게-.
"피만 마시겠습니다. 목이 좀 말라서."
갈라하드는 슬쩍 마물의 머리에 수통을 댔다. 대공이 눈을 구겼지만, 신경 쓰지 않고 피를 받았다.
"편식하는군."
"미식입니다만."
대공이 머리를 다시금 씹었다. 뿌드득, 뼈 부서지는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홀짝였다.
대공은 남은 머리를 미련 없이 뒤로 던졌다.
"탐지, 추적, 사냥. 이게 마물 사냥의 기본이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면서 말했다. 왜 자꾸 이쪽을 보는지-. 갈라하드는 괜스레 목을 긁적였다.
"이번에는 직접 해보거라."
대공이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아드리안나는 정석적으로 바로 땅에 귀를 가져다 댔다. 확실히 모범생이었다.
그때,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이 묻는 듯했다. 넌 왜 안 하냐고.
"저는 제 방식이 있어서."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대공의 눈이 구겨졌다.
무시하고 마나를 뿌렸다. 가까운 곳에 마물이 잡혔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 방향이 갈라하드가 찾은 쪽이었다.
이 거리를 발소리로 듣다니-. 확실히 대단했다.
다만, 조금 느렸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물론, 대공처럼 그 사이에 있는 나무를 전부 꿰뚫을 힘은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지.'
······!
마물의 비명이 멀리서 들렸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걸음을 옮겼다.
멧돼지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이었다. 놈의 가슴에 큼지막한 얼음송곳이 박혀 있었다.
마물이 씩씩거리며 갈라하드를 향해 뛰었다. 그 기세가 상당히 살벌했다.
아드리안나가 앞으로 나설 정도였다.
"내 걸세."
아드리안나를 물린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송곳이 빠르게 연속으로 쏘아졌다. 마물의 무릎과 관절, 목과 미간에 얼음송곳이 연속으로 꽂혔다.
이내 마물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래도 중급 마물인데, 상당히 허무한 최후였다.
그 이유는 마법사가 마족을 상대하기 힘든 것과 같았다.
갈라하드는 체내의 마나 농도를 높였다. 아마 중급 마족쯤 될 것이다.
그를 다시 말하면-.
'중급 미만 놈에게는 역으로 상성이지.'
마물은 동급에서 마족보다 농도가 낮으니, 저리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와아,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문제는 그 뒤의 고위 마물이었다.
'다음에는 져줘야겠군.'
강렬한 시선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잠시 쉬시죠."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했다.
뭘 했다고 쉬냐는 듯, 대공이 눈에 힘을 줬다. 거센 압박이 갈라하드를 짓눌렀다.
"아,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끄덕이니,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준비된 것들이 제법 있던데, 거기로 가시죠."
갈라하드는 먼저 걸었다. 뒤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가득 쌓인 물품에는 다양한 것들이 가득했다. 식탁부터 시작하여, 앉을 수 있는 의자, 고기, 술 등등-.
'연회라도 열 생각이었나?'
진짜 단단히 준비했군.
"제가 옮기겠습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의자를 잡았다. 대공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목이 서늘했다.
"아, 괜찮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람이 의자와 식탁을 밀었다. 이내 식탁과 의자가 세팅됐다.
"와아, 정말 대단합니다."
"나는 마법사니까. 가서 앉아있게나."
"아, 저도 돕겠습니다."
시선이 다시 뜨거워졌다.
"괜찮네. 물 한 방울 묻히게 할 수 없지."
마물의 심장 소리도 듣는 대공이었다. 일부러 크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시선이 누그러졌다.
"······예?"
"방해하지 말고 가서 앉아있게."
아드리안나가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짐을 빠르게 뒤졌다.
'많이도 넣었군.'
웃긴 건, 손질이 하나도 안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대로 먹었지.'
톰 덕분에 북부의 끔찍한 요리를 잠시 잊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럴 때 마법은 간편했다. 귀족들이 괜히 마법사에게 목을 매는 게 아니었다.
재료들이 빠르게 손질됐다. 적당한 크기로 썰렸고, 불이 가득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 풍겼다.
슬쩍 대공과 아드리안나 쪽을 본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앉아서 대화 좀 하라고 보냈는데, 마주 앉은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법은 정말 대단하군요."
요리로 가득 찬 식탁에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감탄했다. 아까 마물을 잡았을 때보다 진한 반응이었다.
"수도에서 혼수로 가장 인기 있는 게 마법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마법사라고 다 가능한 건 아닐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아드리안나가 작게 기침했다.
대공이 고기를 거침없이 뜯었다. 아드리안나는 그래도 식기를 써서 식사했다.
식탁에는 고기 뜯는 소리가 전부였다.
'쉽지 않군.'
가벼이 혀를 찬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마경에서 개척자라는 고위 마족을 마주했는데, 아드리안나가 아주 훌륭하게 상대했습니다. 그렇지 않나?"
"예? 갈라하드 대장이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음, 그 전을 이야기하는 걸세. 자네가 힘을 다 빼놓은걸, 내가 마무리만 한 거지."
"아, 예. 개척자를 정면으로 상대하긴 했습니다. 무척 강한 상대였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대공을 쳐다봤다.
물꼬를 텄으니, 대공이 받을 차례였다.
대공은-.
"잘했다."
투박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이게 끝이야?'
작게 혀를 찬 갈라하드는 대공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 대공 전하께서도 고위 마족을 상대하신 적 있으십니까?"
"많다."
"······그렇군요. 그러면 고위 마족을 상대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목을 자르면 된다."
대공의 단호한 대답에 갈라하드의 말문이 막혔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크게 끄덕였다.
'쉽지 않겠어.'
갈라하드는 강적을 만났음을 깨달았다.
다만, 난제는 갈라하드의 전문이었다.
대공은 아드리안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둘 관계가 어색한 가장 큰 이유였다.
왜 눈을 못 마주칠까. 갈라하드는 상황을 되짚었다.
'아드리안나는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여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아드리안나의 말이 떠올랐다.
[저를 낳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불에 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에 대공 전하가 직접 배를 가르고 저를 꺼내셨습니다.]
'대공 전하가 직접 배를 갈랐다.'
대공이 제 부인을 매우 아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대공은 부인이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 사랑했던 여인의 배를 갈라, 딸을 꺼내는 심정은 어땠을까.
갈라하드는 가만히 아드리안나와 대공을 살폈다.
둘은 묘하게 닮았다.
그러니까-.
"대공 전하."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눈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서늘함이 가득 올라왔다.
목이 칼칼하고, 혀에 바늘이라도 돋은 기분이었다.
다만, 어중간한 건 오히려 반발을 일으킬 뿐이었다.
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 했다.
"아드리안나가 그러는데, 대공비 전하가 돌아가신 이유가 자기 때문이랍니다. 대공 전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갈라하드는 확실히 깊이 찔렀다.
****
앰버르탄 백작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황녀가 앉아있었다. 황녀는 가만히 손에 든 종이를 읽는 중이었다.
평소 일삼는 미친 짓보다는 나았지만-.
'아니, 저게 진짜 미친 짓이지.'
황녀는 4황자를 불러두고, 저 종이만 계속 읽고 있었다.
4황자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이었지만, 4황자는 그러지 않았다.
4황자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황족답지 않은 인내심과 참을성이었다.
4황자는 성군의 기질을 타고난 진정한 군주의 상이었다. 앰버르탄 백작을 비롯한 정통파 귀족들이 괜히 따르는 게 아니었다.
한참이 지나도 황녀는 여전히 종이만 뚫어져라 봤다. 심지어 눈도 깜박이지 않아, 그 눈이 붉었다.
결국, 4황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할 일이 쌓여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4황자는 화도 내지 않고 오히려 양해를 구했다. 그제야 황녀의 시선이 올라왔다.
"아, 네가 있었지."
"예, 누이께서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명백한 무시였지만, 4황자는 여전히 차분했다.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제안은 그대로야. 일단은-. 잠깐만."
그때, 황녀가 앰버르탄 백작을 가리켰다.
"아버님, 이쪽으로."
"앰버르탄 백작은 귀족입니다. 예의를-."
"빨리. 아버님."
황녀가 4황자의 말을 잘랐다.
앰버르탄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벌써 일어나서 황녀에게 향했다.
'젠장!'
주변의 시선에 앰버르탄 백작은 입술을 씹었다.
"아버님, 이것 좀 봐봐요."
그때, 황녀가 종이를 내밀었다. 도대체 뭔 내용이길래 황녀가 저리-.
[전임 국장 베아트리스. 보조 업무로 빠질 뻔한 갈라하드를 첫 임무에서 발견하여, 직속으로 발탁함. ······후에 %$#%로 은퇴를 진행. 갈라하드가 직접 맡았다. 실패. 이후 행방불명.]
황녀의 손가락은 중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에는-.
[특이 사항. 레몬을 좋아함.]
괴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 조건 하나만 추가할게."
그때, 황녀가 입꼬리를 가득 올리며-.
"이거 어디 있는지 찾아."
씹어뱉듯이 말했다.
155화 대화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