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죄송
'이성을 완전히 잃었군.'
갈라하드는 램프를 높이 들었다.
회색 불빛이 녹슨 갑주를 천천히 훑었다.
세월의 흔적에 갑주는 군데군데 부식되어 있었다.
가슴 부분에 박힌 옛 제국의 문장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 사이로 검붉은 녹이 스며 나와 있었다.
거대한 녹슨 갑주는 지쳐 보였다. 개척자의 고개가 느리게 움직였다. 비명처럼 거칠고 무거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릿한 쇠 냄새와 피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개척자의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제국을 위하여."
녹이 잔뜩 낀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상황에도 제국을 찾다니-. 미련한 충직함이었다.
저건 고위 마족이 되어, 충성심만 남은 결과인 걸까. 아니면 녹슬지 못한 충직함일까.
톡톡, 갈라하드는 램프를 두드렸다.
"생명력은 마나 용해도를 높여서, 더 높은 농도의 마나가 피에 머물 수 있게 만든다네."
"제국을 위하여."
멍청한 대답이었지만,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고위 마족의 높은 마나 농도는 그 생명력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일세. 그런 고위 마족의 생명력을 빼내면 어떻게 될까?"
갈라하드는 램프를 흔들었다. 그 안의 회색 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제국을 위하여."
개척자가 기세를 일으켰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차며, 램프에 금색 봉을 꽂았다. 그에 퍼지는 생명력을 이용하여 개척자의 어깨를 눌렀다.
아무리 개척자라고 한들, 이미 아드리안나에게 양팔을 잃은 상태였다.
생명력을 운용한 갈라하드를 이겨낼 수 없었다.
개척자의 기세가 억눌렸다. 어둠 속에서 회색 불이 달랑거렸다.
"이제 자네의 생명력을 제거할 걸세. 그러면 마나의 농도가 낮아지겠지."
"제국을 위하여."
"먼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추가로 공급해야 하네. 순환을 시켜야 한다는 거지."
갈라하드는 금색 봉으로 램프를 슬쩍 두드렸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아드리안나의 물음대로 괜히 위험을 자초하는 거니까.
다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램프의 기능도, 고위 마족이 돌아올 수 있는지도, 그리고-.
'황제가 어떤 놈인지도.'
위험하지만, 흔치 않은 기회였다.
갈라하드는 지레 겁먹어 기회를 놓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제국을 위하여."
"그래, 제국을 위한 걸세."
갈라하드는 담담히 램프를 내밀었다.
개척자는 램프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잡으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회색 불이 개척자에 옮겨붙었다. 작게 시작한 회색 불이 이내 퍼지기 시작했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금색 봉을 램프에 꽂아 넣었다.
생명력의 아릿하고 짜릿한 통증이 가득 올라왔다.
순간 정신이 흔들릴 정도였지만, 갈라하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이야기나 마저 하게. 황제가 마족과 전쟁하는 부분이었네."
개척자의 초점이 흐려졌다.
****
"마그누스!!!"
호통에 마그누스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은 지옥이었다. 찬란하던 금색 파도는 짙은 검은색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사방이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이었다.
전장의 흥분이 아무리 강렬해도, 인간은 팔이 베이면 주춤했다. 그런데 마족은 팔이 잘려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마족은 오히려 더 날뛰었다. 검으로 목을 날리기 전까지 적의를 드러냈다.
이제껏 경험했던 전장과 전혀 달랐다.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군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인 마그누스마저 명령을 내릴 생각조차 못 하고 검을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그때, 중앙에서 금빛이 차올랐다.
태양을 녹인 듯한 찬란한 금색의 오러-.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들의 황제가 여기 있다!"
그들의 주인, 황제의 오러였다.
황제가 금빛으로 찬란한 검을 높게 들었다. 어둑한 새벽처럼 짙은 어둠이 밀려났다.
황제는 기어코 부서진 금색 파도를 제 손으로 일으켰다. 이내 금색 파도가 다시 물결쳤다.
"내 등만 봐라!!"
황제가 목청 높여 소리쳤다.
어둠 속에 떠오른 태양은 뚜렷한 이정표였다. 두려움에 밀려났던 이들이 이를 질끈 깨물었다.
황제의 금빛 오러가 계속해서 물결쳤다. 마족들이 금색 물결에 휩쓸렸다.
황제의 검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날카로웠다.
금색 파도가 다시 몰아치기 시작했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었다.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나를 따르거라!!"
황제는 검을 휘두르면서, 계속해서 군대를 다독였다.
완전한 영웅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용사였다.
모두가 그저 황제의 등만 보고 전진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마그누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장한 황제였다. 황제는 온몸이 붉고, 갑주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폐하-."
"그래, 바쁘니, 무릎 꿇을 필요는 없다."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마그누스는 조금이지만 긴장이 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끝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길을 열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황제가 한쪽을 가리켰다. 지옥에서 올라온 추악한 짐승, 마물들이 뒤엉킨 곳이었다. 살점이 여기저기 뿌려졌고, 마물들이 침을 질질 흘렸다.
분명한 사지였다. 그에-.
"예, 열겠습니다."
마그누스는 끄덕였다.
"그래, 마그누스여."
황제가 마그누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그누스는 제 군대를 모았다.
"길을 연다."
마그누스는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병사들이 끄덕였다.
그들은 주저 없이 끔찍한 마물들이 즐비한 곳으로 돌진했다.
"제국을 위하여-!"
마그누스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이내 붉은 피와 꺾인 검, 부서진 금색 갑주로 이루어진 길이 열렸다.
황제가 결사대를 이끌고 길을 나아갔다.
"제국을 위하여!!"
마그누스는 목에서 피가 터질 정도로 소리치며 검을 찔러넣었다.
어떻게든 길을 다졌다.
그때-. 거대한 존재감이 마그누스를 눌렀다. 가득 짓눌렸다. 그건 전의를 일으킬 수조차 없는 존재감이었다.
시끄럽던 전장이 멈췄다. 검에 찔려 쓰러진 병사조차 신음을 흘리지 못했고, 마물조차 개새끼마냥 꼬리를 내렸다.
마그누스는 다급히 황제를 찾았다.
황제는 성녀에게 검을 꽂아 넣었다.
성녀에게서 음울한 빛이 가득 퍼졌다.
그건 아주 지독한 저주였다. 물결처럼 퍼진 저주가 결사대를 집어삼켰다.
마그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주가 마그누스를 가득 덮었다.
뒤틀리고, 엉겨 붙었으며, 잘리고, 흥분했다.
이내 격렬한 본능이 올라왔다.
그때,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건 꼭 물속에 얼굴을 박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에 고개를 들자, 물러나는 먹구름이 보였다.
찬란한 태양과 화창한 하늘이 위에 있었다. 그에 검은 물결이 뒤로 밀려났다. 마그누스는 그 밀려나는 마족들을 따랐다.
마그누스뿐만이 아니었다. 결사대 모두가 마족들을 따랐다. 그건 본능이었다.
그들은 물고기였다. 이곳은 뭍이었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마나가 짙은 곳을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한참이나 달리던 마그누스는 문득 뒤를 돌았다.
저 멀리에 황제가 있었다. 황제는 그들보다 흉측한 모양새였다. 살이 실시간으로 썩고 있었다.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황제는 그들보다 더한 저주를 받았음을-. 그건 그들의 저주를 전부 더한 저주였다.
저곳은 뭍이었다. 황제는 마그누스보다 고통이 더 심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인데-.
황제는 갑주로 썩은 살점을 가리고 이쪽이 아닌, 뭍으로 향했다.
[그래서 황제에게 돌아가려고 했군. 참으로 충직한 장군일세.]
담담한 칭찬에 마그누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사내가 마그누스를 올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전과 달리 꼴이 엉망이었다. 그 핏줄이 가득 올라왔고, 눈은 붉었다.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때, 정신이 좀 드는가?"
마그누스는 끄덕였다. 오랜만에 정신이 명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마그누스는 그대로 무너졌다.
시선을 들자, 쓰게 웃으며 내려보는 사내가 보였다.
"미안하지만, 실패일세. 성물이 생각보다 더 강했다네. 손가락질해도 좋네. 아, 자네 손가락이 없군."
사내가 손을 털었다. 사내의 팔에 얼룩진 자국이 가득했다. 방금 새겨진 상처였다.
마그누스는 제 몸을 살폈다. 회색 불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마그누스는 실시간으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미안하군, 참으로 지독한 저주일세."
개척자는 사내를 힐난하지 않았다.
그리 말하는 사내의 얼굴이 꼭 성녀를 찌르던 황제의 얼굴과 같았기에-. 사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신 개척자는 어떻게든 일어서며-.
"제국을 위하여."
낮게 읊조렸다.
회색 불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한 대 피우겠나?"
사내가 연초를 내밀었다. 개척자의 녹슨 갑주가 삐걱- 소리를 냈다.
사내가 연초를 개척자의 갑주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제 입에도 연초를 하나 물었다.
"제마 전쟁이 언제적 일인데, 아직까지 그 저주를 버티고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황제군. 자네의 충성이 이해될 정도일세."
"제국을 위하여."
"자네도 제국과 결혼했었나 보군. 나도 한 번 했었네. 차였지만."
"제국을 위하여."
"아, 황제에게 전하고 싶은 말 있나?"
"제국을······."
이내 회색 불이 개척자를 가득 덮었다.
재가 거칠게 휘날렸다.
갈라하드는 꽁초를 튕겼다. 꽁초가 흩어지며 레몬 향이 가득 풍겼다.
"마그누스 장군은 끝까지 충직했다고 전해주겠네."
갈라하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
램프를 흔드는 갈라하드에게서 묘한 엄숙함이 보였다.
왜 굳이 갈라하드가 나섰나 궁금했는데-.
그건 예우였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에게 다가왔다.
아드리안나는 성질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저 입술을 가득 씹고 버티는 게 전부였다.
"괜찮나? 무리했군. 성질이 넘치고 있어."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살피며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목덜미의 살점이 바짝 타서 흩어졌다.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났다.
"많이 고통스럽겠군."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었으며,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성질을 누를 수 있겠나? 그래, 한계인가 보군."
아드리안나가 대답하지 못하자,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나는 괜찮네. 지금 내 걱정할 땐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해하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놀랐다.
"조금만 버티게. 바로 해결할 테니까."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하며 금색 봉을 꺼냈다. 이어서 금색 봉으로 뭔가를 그렸다.
그건 엄청나게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갈라하드는 퀭한 얼굴로 집중했다. 도중에 울컥하더니 피를 옆으로 퉤- 하고 뱉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처절함까지 느껴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괜······."
갈라하드를 만류하려고 입을 열자-.
"입 닫고 성질을 누르는 것에 집중하게."
갈라하드가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아드리안나는 입을 꾹 닫았다.
갈라하드는 연신 쿨럭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금색 봉을 움직였다.
이내 아드리안나 주변에 복잡한 마법진이 여러 개 그려졌다.
"자, 됐네."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 상태로 마법진을 완성하다니-.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집중하게."
갈라하드가 모호한 말을 했다.
집중하라니-?
아드리안나는 눈을 끔벅였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거친 불길이 올라왔다. 6대대 때의 불처럼 격렬한 불이었다.
거대한 불이 아드리안나를 그대로 삼켰다.
'······도와준다더니 불을-?'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신기하게도 불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했다.
따스한 불에 닿자,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라앉는 정도가 아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함이 올라왔다.
불은 정말 적절하게 따스했다. 그런데 그 따스함이 어딘지 익숙했다.
그건 마주 잡았던 갈라하드 손의 온기와 같았다.
그 따스함을 느끼던 아드리안나는 문득-.
'이 불이 갈라하드의 손······?'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불길이 아드리안나를 가득 덮고 있었기에-.
*
"성공이군."
갈라하드는 램프를 흔들며 웃었다.
램프에 담긴 회색 불이 연신 흔들렸다. 생명력은 정말 유용했다. 이건 가치를 설명하기도 힘든 램프였다.
그때,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고개를 돌리니,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달싹거리는 직속 부대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다.
급히 달려온 길버튼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갑자기 아드리안나님을 공격하십니까?"
"공격이라니-. 길버튼 경.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군."
"저게 공격이 아닙니까?"
길버튼이 아드리안나 쪽을 가리켰다. 거친 불길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마나 농도를 희석하기 위해서 규모를 키운 탓에 불길의 규모가 상당했다. 그 화려함은 충분히 오해할만했다.
'누가 보면 아드리안나를 아주 바짝 태우는 줄 알겠군.'
갈라하드는 직속 부대 놈들이 달싹거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저건 마나 농도를 낮추기 위한 과정일세."
"음-. 그래서 불을 지른 겁니까?"
"면적이 넓어야 농도를 낮추기 쉬우니까."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길버튼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직속 부대의 기사들을 보며-.
"아드리안나님을 위해서 불 지른 거다! 이래야 안전하니까! 마나 농도! 낮추고! 엉?! 아무튼! 아드리안나님을 불로 태워야 한다고!"
괴상한 윽박을 질렀다.
"길버튼 경, 그렇게 설명하면 어떻게 하나."
갈라하드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를 태워야 한다니-. 너무 무식한 요약이었다. 오히려 반발을 일으킬만한 설명이었다.
"효과는 있는 거 같습니다만."
길버튼이 기사들을 가리켰다.
예상과 달리, 기사들은 그저 끄덕였다. 이해 못 한 얼굴이었지만, 수긍하는 듯했다.
"대장님이 유능한 건 이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후후-."
"그렇군, 근데 왜 자네가 웃나."
"후후, 제가 부대장이잖습니까."
"아, 그거 톰으로 바뀐 거 아직 말 안 했나?"
"예?! 안 됩니다! 저 길버튼입니다!"
"농담일세. 근데 자네,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하군. 설마 톰에게 부대장 자리가 넘어갈 걸 경계하고 있었나?"
길버튼이 거칠게 헛기침했다.
그때, 불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기사들이 다급히 거리를 좁혔다.
불이 완전히 꺼지고 아드리안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드리안나를 본 길버튼이-.
"아드리안나님 화난 거 같은데-. 공격하신 거 아닙니까?"
멍청하게 물었다.
우둔한 물음이었지만, 갈라하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불이 사라지고 나온 아드리안나가-.
'······왜 나를 노려보지?'
갈라하드를 가득 노려보고 있었기에.
그때,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늘 곧고 흔들림 없던 눈동자가 저리 흔들리다니-.
'실수가 있었나?'
예상치 못한 아드리안나의 격한 모습에 갈라하드는 황급히 계산을 점검했다.
분명 생명력으로 마나 농도를 극한으로 낮췄다. 그 주변의 마나가 들어오지 못하게 마나 벽을 쳤고-.
'계산은 완벽한데?'
아드리안나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혹시 모르기에 갈라하드는 다급히 아드리안나에게 다가갔다.
아드리안나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아드리안나가 물러서다니-. 뭔가 잘못됐나?
"뭐가 잘못된 건가? 성질에 반작용이라도 있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그런데 반응이 왜 그러지?"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꾹- 씹었다. 그 아드리안나가 저리 나오다니-.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합니다."
나지막하게 사과했다. 그 풍성한 정수리가 붉었다.
갑작스러운 사죄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는 다시 상황을 되짚었다. 아드리안나가 죄송할 게 없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가?"
그에 다시 물었지만-.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146화 테이밍
'개척자라-.'
갈라하드는 램프를 가벼이 흔들었다.
램프에 회색 불이 가득 타올랐다. 불이 얼마나 활활 타는지, 램프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개척자 하나를 넣은 것인데, 이 정도라니-.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램프를 흔들었다. 회색 불이 위태롭게 일렁이는 게 상당히 보기 좋았다.
'생명력을 흡수하는 성물이라.'
갈라하드에게 가장 필요한 물품이었다.
'근데 이러면-.'
갈라하드는 슬쩍 내려봤다. 두근? 고통의 알이 작게 뛰었다.
'자네를 쓸 이유가 없지 않나?'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떨었다. 황급히 심장을 꾹꾹 눌렀다. 꽁쳐뒀던 마나와 생명력을 마구 뿌렸다.
'음.'
고통의 알을 이용하면, 마족의 피에서 마나와 생명력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었다.
성물은 마족에게서 생명력만 가져왔다. 마나는 고스란히 주변으로 뿌려졌다.
대신 성물은 생명력 효율이 훨씬 좋았다. 생명력을 저장할 수도 있었고.
'흐음.'
두근! 고통의 알이 심장에 착 달라붙었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길버튼의 투박한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그리 묻는 길버튼의 꼴이 더 엉망이었다.
"자네, 괜찮나?"
"예, 북부의 기사는 원래 단단합니다."
길버튼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그 코 아래로 핏자국이 두 줄기 있었다.
"확실히 북부의 기사는 튼튼하군."
"예, 근데 조금만 더 늦었으면, 마경이 성문을 두드렸겠습니다?"
"조금 늘어난 걸로 과장이 심하군."
"예? 이게 어떻게 조금입니까."
"자네에게는 길겠지만, 내게는 짧네."
"······무슨 뜻입니까?"
잔뜩 구겨진 길버튼의 얼굴에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아니, 저기 보십쇼. 저기 성벽 보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성벽이 보인다고-. 음, 진짜 보이는군."
"마경만 늘리던 마족 놈이 왜 길을 만든 겁니까? 갑자기 똑똑해진 것도 아니고-. 조금만 늦었으면 고위 마족이 성문을 두드렸겠습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헛기침했다.
"성문을 두드리다니-. 그 정도는 아닐세. 조금 길어진 정도지."
"저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길버튼이 기사들을 가리켰다.
아드리안나와 직속 기사들이 모여서 심각하게 회의 중이었다.
"마경이 여기까지 이어지다니-. 이제 마족이 매일 성문을 두드릴 겁니다."
"이대로면 성벽이 곧 무너질 겁니다. 당장 대공 전하에게 보고를 올려야 합니다."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왜 그러십니까? 똥 마려운 것처럼."
"음, 자네다운 단어 선택이군. 그래, 늘어난 게 문제라면, 다시 줄이면 되지 않나."
"마경을 줄일 방법이 있습니까?"
"늘어났으면 줄이는 방법도 당연히 있지."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오, 역시 대장이십니다. 그 방법이 뭡니까?"
"제일 간단한 건, 역시- 아드리안나!"
아드리안나가 이쪽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시선이 마주친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됐고, 이쪽으로 와보게나."
아드리안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자네, 괜찮나?"
"덕분에 괜찮습니다. 예."
"괜찮은 거 맞나? 정확히 말하게."
진지하게 묻자, 아드리안나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예, 오히려 좋습니다."
"좋다니 다행이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드물게 올라간 아드리안나의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드리안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나는 마경을 다시 줄일 생각일세."
"예? 아, 예."
마경 이야기에 아드리안나가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다만, 여전히 눈은 안 마주쳤다.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마경을 줄일 방법이 있습니까?"
"몇 개 있네. 자네도 그중 하나고. 먼저 자네의 성질을 이용할 걸세."
"아, 마나를 태우는 겁니까?"
"그래, 아주 직관적인 방법이지."
"어떻게 이용합니까?"
"간단하네. 오러를 최대한 일으키고 뛰게."
"······네?"
아드리안나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오러를 일으키고, 양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뛰는 걸세. 해보게나."
"네? 네."
멈칫한 아드리안나가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러가 손길에 맞춰서 일렁였다.
"좋군, 그 상태로 뛰게."
"아,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뛰었다. 아드리안나의 오러는 주변의 재를 깨끗하게 지웠다.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효과는 직관적이었다.
"······정말 저게 맞습니까?"
길버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일세."
"저렇게 언제 다 지웁니까?"
"물론, 저걸로 부족하지. 자, 마경이 왜 넓어졌나?"
"그 램프 때문 아닙니까?"
길버튼이 램프를 가리켰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정답일세. 램프로 마족과 마물을 마나로 환원시키면서 늘어났지. 그러면 어떻게 줄이지?"
"모르겠습니다만?"
"당당하군. 간단하네. 역으로 마나를 마족과 마물로 환원시키는 걸세."
"예? 마나를 마족과 마물로 바꿀 수 있습니까?"
"있더군."
갈라하드는 램프를 흔들며 주변을 봤다. 직속 부대의 기사들은 갈라하드에게 모여 있었다.
"개척자는 본래 제국의 장군이었네. 저주받아서 마족이 된 거지. 대신 마나 농도가 낮아졌네.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어서, 마나 농도를 낮추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지."
기사들의 얼굴이 씰룩했다.
"······기사들을 마족으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오, 길버튼 경답지 않게 이해가 빠르군."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사들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물러나는 기사도 있었다.
"직속 부대를 마족으로 만들다니-. 아무리 마경이 넓어진 게 위험해도······."
길버튼이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들이 분분하게 시선을 피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마족으로 만들려면 저주가 필요하네. 저주는 내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지. 아쉽지만, 그 방법은 불가능하네."
기사들이 크게 안도했다. 누군가 작게 '아쉽다고?'라고 중얼거리자, 다시 얼굴이 굳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써야지."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가죽을 꺼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새겨진 가죽이었다.
"자네들 대신 마물을 쓸 걸세. 마물이 필요하네. 약하면 약할수록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네."
갈라하드의 명령에 기사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자기들끼리 구역을 나누고 빠르게 흩어졌다.
아드리안나의 명령을 받았을 때보다 빨랐다.
오는 중에 개척자가 씨를 말렸기에, 이 주변에는 마물이나 마족이 없었다. 그에 기사들은 마족의 영역으로 향했다.
그를 확인한 갈라하드는 뒤로 돌았다.
"어디 가십니까?"
"세 번째 방법을 하러 갈 걸세."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휘젓고 안쪽으로 향했다.
마경의 안개가 갈라하드를 감쌌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뿌려 주변을 확인했다. 마족이나 마물의 흔적조차 없었다.
'좋군.'
갈라하드는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생명력이 가득 담긴 램프와 마나 농도가 짙은 마경이 있었다.
이건 체내 농도를 높일 좋은 기회였다. 덩달아 주변 마나 농도를 낮출 수도 있었고-.
'일석이조군.'
마경을 넓히면서 전보다 생명력에 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생명력은 가벼운 힘이 아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심장이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이내 주저 없이 금색 봉을 램프에 부드럽게 꽂았다.
생명력이 금색 봉을 타고 거칠게 올라왔다.
'참으로 지독하다.'
과연 고위 마족의 생명력이었다. 순간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고위 마족의 생명력은 예상보다 아득히 더 무거웠다. 뭔가 터지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핏줄이 크게 부풀었다.
그때-.
두근! 고통의 알이 생명력에 달려들었다. 두근! 고통의 알이 생명력과 뒤엉켰다. 필사적으로 생명력을 뜯었다.
'생명력은 마족이 더 잘 다루는군.'
고통의 알이 생명력을 내밀었다. 뼈를 물어온 개와 같은 반응이었다.
'자네, 아직 쓸모가 있군?'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크게 끄덕였다. 생명력을 천천히 피에 담았다. 심장이 점점 무거워졌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뿌드득, 끔찍한 소리가 내부에서 들렸다.
다만-.
'아니, 아직 안 터져.'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더욱 깊이 쑤셔 넣었다.
······두근!
고통의 알이 경악했다.
****
"후! 하! 후! 하!"
요란한 숨소리에 톰은 고개를 돌렸다.
그웬이 양손을 번쩍 들고 숨을 요란하게 쉬고 있었다.
마나를 어떻게 회복하냐는 물음에, 갈라하드가 숨을 열심히 쉬라고 대답한 탓이었다.
정말 숨 쉬는 것으로 마나라는 게 회복되나? 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기절했던 데미안이 벌떡 일어났다.
"배고파요."
톰은 육포를 전부 꺼내 데미안에게 줬다. 데미안은 육포를 입 안에 가득 넣었다. 삼키지도 않고 육포를 쑤셔 넣었다.
이내 꿀꺽 삼킨 데미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눈이 다시 돌아왔다.
"기사도 멋있어."
데미안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에 톰은 작게 감동했다.
데미안은 겉으로 보기에 그냥 굶주린 꾀죄죄한 꼬마였지만, 검을 쥐면 달라졌다.
데미안은 진짜 실력자였다. 마지막에 개척자의 목을 찌른 것도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기사로 대성할 게 분명한 아이였다. 그런 데미안이 마법사를 원하기에, 톰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런 데미안이 '기사도 멋있다'는 말을 하다니-.
'아드리안나님 덕분인가.'
확실히 개척자를 혼자서 상대하던 아드리안나는 강렬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북부의 영웅이었다. 그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게 당연했다.
톰은 감동했지만, 괜히 더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데미안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때-.
"아아! 회복됐다! 바라아아암!"
그웬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뻗었다. 예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재가 가득 밀려나면서 주변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그건-.
'······아드리안나님?'
아드리안나가 양손을 흔들면서 달리고 있다는 거였다. 그 뒤에 순백의 오러가 멋지게 일렁였지만, 그렇다고 멋있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주 기사스러웠다.
"그······ 마경을 좁히기 위한 거일 겁니다."
톰은 황급히 데미안에게 설명했다. 데미안은 쩝-하고 입맛만 다셨다.
그때, 옅은 바람이 불었다. 가득했던 재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중심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한 손에는 회색 불이 일렁이는 램프, 다른 손에는 금색 봉을 든 그 모습에서 경건함을 넘어선 신성함까지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서 안개를 지우는 갈라하드와 양팔을 휘적거리며 뛰어다니는 아드리안나-.
둘의 극명한 대비에 톰은 아찔해졌다.
기껏 데미안이 마음을 잡은 상태였는데-.
"망할 꼬맹이. 혼자 다 먹었냐?"
그때, 길버튼이 투박하게 말했다.
여기서 길버튼까지 등장하다니-. 끝이었다. 톰은 절망했다.
"하나 남았어요."
데미안이 길버튼에게 육포를 내밀었다.
"오, 웬일이냐. 먹보 꼬맹이가."
"싫으면 말아요."
"이놈이! 나도 배고프다!"
길버튼이 넙죽 받아 삼켰다.
'데미안이 먹을 걸 양보한다고?'
톰은 그제야 깨달았다.
'기사도 멋있다고 한 게, 아드리안나님 때문이 아니었군.'
날아가던 데미안을 길버튼이 몸을 던져 받아냈다. 심지어 개척자의 공격까지 대신 맞았던 길버튼이었다.
그를 깨달은 톰은 작게 웃었다.
그때, 길버튼이 톰에게 다가왔다. 어딘지 껄렁한 자세였다.
그리고-.
"톰, 부대장 자리는 양보할 수 없다. 차라리 내 봉급을 가져가라. 부대장 자리는 안 돼."
괴상한 소리를 시작했다.
데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
"다 모았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땀 범벅이 된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그 숨이 거칠었다. 그 뒤로 한결 깨끗해진 마경이 보였다.
'열심히 뛰어다녔군.'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그만큼 확실했다.
그때, 심장이 묵직하게 뛰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제 몸을 내려봤다.
'중급 마족 정도 됐으려나.'
심장이 상당히 뻐근했다. 조금만 더 무리했으면, 터졌을 수도 있었다.
두근! 고통의 알이 제 존재감을 피력했다. 확실히 생명력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고통의 알이 더 적합했다.
'그래, 자네도 훌륭했네.'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 처분을 유보했다. 두근! 고통의 알이 심장을 꾹 눌렀다.
"저쪽입니다."
아드리안나가 한쪽을 가리켰다.
"꽤애애애액! 꽤애애애애액!"
거기에는 기사들이 뭉쳐 있었고, 그 사이에 하찮게 생긴 마물이 꽤 많이 잡혀 있었다.
"최하급 마족인 뾰족아리입니다."
"뾰족아리?"
"주둥이가 뾰족하여 그리 부릅니다. 시끄러운 터라, 찾기 쉬웠습니다."
갈라하드는 뾰족아리라는 마물을 살폈다. 그건 조류처럼 생긴 마물이었다. 다만, 그 크기가 다른 마물보다 작았다.
"날개가 있군. 날 수 있나?"
"아, 뾰족아리 대장은 잠시 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잠시 뾰족아리들을 살폈다. 크기가 적당했다.
'연습하기 좋겠군.'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난해하고 어려웠다. 예전 마법진이라 구조가 지금과 다르고, 대상이 마물인 탓이었다.
때마침 마경의 크기도 줄여야 했으니, 마물로 마나를 해소할 생각이었다.
"정말 마물로 됩니까?"
"길버튼 경, 아까 설명하지 않았나."
갈라하드는 가벼이 대답하며 램프를 흔들었다. 램프의 회색 불이 뾰족아리들을 훑었다.
갈라하드를 본 뾰족아리가 이를 가득 드러냈다. 마물 특유의 맹렬한 적의가 넘실거렸다.
"뒤집어주겠나?"
"예."
옆에 있던 기사가 뾰족아리를 잡았다. 뾰족아리의 배가 훤히 드러났다.
그중 적당한 여백을 찾고,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타고 튄 스파크가 뾰족아리의 배를 두드렸다.
스파크가 빠르게 마법진을 새겼다.
그 상황에도 뾰족아리는 그저 갈라하드를 뜯어먹기 위해 주둥이를 연신 움직였다. 이게 마물이었다.
마법진을 다 새긴 갈라하드는 램프를 챙겼다.
이내 마법진에 금색 봉을 대고, 램프를 금색 봉에 꽂았다. 금색 봉에 마물의 마법진과 램프가 이어졌다.
그러자-.
뾰족아리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뭔가를 삼키는 것처럼 뾰족아리가 두근거렸다. 뾰족아리의 몸속에서 뭔가 꿀렁거렸다.
쿵쿵! 그 심장박동이 북처럼 커졌다. 뾰족아리의 털이 거칠게 부풀었다. 그리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크기가 점점 더 커졌고, 주둥이는 더욱 길어졌다. 날개가 강철처럼 날카로워졌고-. 이내 거대한 마물로 변모했다.
"매애애애애액!"
뾰족아리가 길게 표효했다. 그때, 놈의 가슴이 크게 꿀렁거렸다. 그리고-.
퍼엉.
뾰족아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역시 심장이 터지는군.'
갈라하드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방금 얻은 결과를 되새겼다.
이서서 가벼이 손짓했다.
"자, 다음."
기사가 멍하니 옆으로 비켰다. 다음 기사가 뾰족아리를 들고 갈라하드 앞에 섰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고-.
펑.
"자, 다음."
두근!
고통의 알은 열심히 심장을 눌렀다.
*
생명력을 통해 마나를 강제로 늘리는 건, 상당한 부하를 줬다. 대부분 버티지 못하고 심장이 터졌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죽어도 마나는 그 피에 묶이기에, 마나 농도를 줄이는 목적은 달성이었고, 그 과정에서 갈라하드는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과 생명력의 이해도를 올릴 수 있었다. 실패해도 이득이었다.
심지어-.
'성공했군.'
·········!!
강렬한 울부짖음이 가득 울렸다. 매 형태의 거대한 마물이 거칠게 날갯짓했다. 그 날개가 여섯 개였고, 그 부리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유일하게 버텨낸 뾰족아리였다.
'최상급 마물인가.'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흔들자, 놈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길버튼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말이 됩니까?"
"쏟아 넣은 마나와 생명력이 얼만데, 안 될 건 뭔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최상급 마물을······."
길버튼이 멍청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그······ 대공 전하가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길버튼이 작게 말했다.
"음, 대공 전하가 왜 좋아하나?"
"예? 선물로 드릴 거 아니십니까? 저번에 대공 전하께서 마물 선물에 아주 좋아하셨다고-."
"아, 그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공이 마물 선물을 좋아하긴 했다.
다만-.
"함부로 주면 버릇 나빠진다네."
갈라하드는 마물을 가벼이 쓰다듬었다.
북부의 주인인 대공에게 버릇이 나빠진다니-.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아."
그때, 갈라하드가 작게 탄식했다.
그래, 대공 전하에게 주시겠지. 저번에 대공 전하가 얼마나 좋아하셨나.
성 안에서도 타고 다닌 건 유명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쁜 짓이라도 하면 모를까."
이쁜 짓?
······대공 전하가?
이해하기 힘든 길버튼은 그냥 끄덕였다.
147화 전령
'음.'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상큼한 풀 내음이 코를 가득 찔렀다. 습관처럼 연초를 찾았다.
'없군.'
풀과 무성한 나무로 가득했다. 모든 나무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았으며, 풀은 팔까지 올라왔다.
두근! 두근! 미약한 박동이 갈라하드의 정신을 다잡았다.
'힘이 돌아왔나.'
갈라하드가 평소 무의식적으로 찾는 게 연초였다. 그런 연초까지 만들지 못하다니-.
'대단하군.'
거리가 줄어든 탓일까. 실로 압도적인 정신 간섭에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그때,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풀이 납작 엎드렸다. 나무가 길을 내듯 옆으로 돌았다.
네발 마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걸음마다 꽃이 피면서, 꽃 내음이 가득 풍겼다.
여자의 기다란 발이 네 개나 달린 기괴한 형태였지만, 신기하게도 끔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함까지 느껴졌다.
'요정이자, 성녀니까.'
네발 마족이 적당한 곳에 서서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참 요란하게 등장하는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연초를 찾았지만 없었다. 톡톡, 손가락을 튕겼다.
"성물을 반납하라고 독촉할 셈인가? 미안하지만, 성물은 이미 아드리안나에게 맡겨둔 상태일세. 아드리안나에게 가게나."
혹시 모르기에, 성물은 아드리안나에게 맡겨뒀다. 아무리 네발 마족이라도, 아드리안나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전에도 말했듯, 황제가 옆집 제임스도 아니지 않나? 양심적으로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네발 마족의 투명한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너는 미쳤다.]
이내 네발 마족이 끄덕였다. 그러자 수풀과 나무가 동시에 위아래로 흔들렸다.
"화려한 동의군."
[황제를 죽여라.]
네발 마족의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알고 있네. 원래 그럴 생각이었네만-."
갈라하드는 턱을 긁적였다.
황제는 알면 알수록 모호해졌다. 현명한 영웅이었다. 그런 황제를 죽여야 할까.
무엇보다-.
'왜 가죽 수첩에 황제 이야기는 없지?'
가죽 수첩에 적어둔 중요 인물에 황제는 없었다.
그 해답은 네발 마족이 바로 제시했다.
[단단한 철도 세월에 녹스는 법이다.]
네발 마족이 무심하게 말했다. 순간 수풀과 나무가 거칠게 흔들렸다.
황제는 결사대가 받은 저주를 전부 더한 반작용을 스스로 짊어지고, 마경이 아닌 곳으로 향했다.
제마 전쟁 이후 지난 세월이 얼마인가. 아무리 지고한 영웅이라도 충분히 무너질 만했다.
"황제 스스로 무너진다는 건가?"
네발 마족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황실의 깊은 곳에서 황제가 스스로 무너졌다면, 가죽 수첩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네발 마족의 말을 믿을 수 있나?'
갈라하드는 네발 마족을 올려봤다.
고위 마족은 한 가지 감정만 남았다. 지배자는 소유욕만 남았고, 개척자는 황제를 위한 충성만 남았다.
성녀였던 네발 마족에게는 뭐가 남았을까.
"그대에게는 뭐가 남았지?"
[비밀이다.]
수풀이 거칠게 흔들렸다. 비웃음을 흉내 내는 듯했다.
"재미없군. 아, 부탁 하나 좀 하겠네."
[부탁?]
수풀이 우뚝 멈췄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아, 1대대 전임 대장이 마경에서 실종됐다는데 찾아주게."
대답 대신 풀이 갈라하드를 덮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풀이 입을 타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끔찍한 고통이 안을 쑤셨다.
그래도 입은 움직였다.
"거래는 서로 주고 받아야지. 나도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려 이렇게 노력하지 않나."
커터칼처럼 날카로운 풀이 입속을 가득 채웠다. 식도가 찢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갈라하드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찾겠다고 마경을 돌아다니면, 시간만 늦춰지는 걸세. 분업이지. 분업."
대답 대신 수풀이 거칠게 움직였다.
그에-.
"이런 호상이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미쳤다.]
수풀이 뚝- 하고 멈췄다. 갈라하드는 속을 게워냈다. 커터칼처럼 날카로운 풀과 살점,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제법 고통스러웠지만, 어차피 허상이었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웃었다.
[너는 미쳤다.]
"그래,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찾으면 연락하게."
갈라하드는 안쪽을 뒤졌다. 거기서 연초가 나왔다. 네발 마족이 멈췄다. 네발 마족의 반응을 만끽하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네발 마족이 성큼 다가왔다. 바로 앞에서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이내 다리들을 굽혔다.
그리고-.
갈라하드의 심장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두근!!
[투자다.]
고통의 알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순간 심장이 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
주변을 가득 덮은 수풀이 찬찬히 부서졌다.
[황제를 죽여라.]
무너진 세상 너머로 보이는 건-.
"괜찮으십니까?"
티 하나도 없는 푸른 눈동자였다.
아드리안나가 올려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이마를 매만졌다. 이마가 조금 얼얼했다.
"뭔가 이상한 듯하여, 말씀하신 대로 머리를 만졌습니다."
"잘했군, 고맙네."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덧붙였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심장을 확인했다.
생명력을 흡수하며 뻐근했던 심장이-.
'더 단단해졌군.'
이번에도 정확히 갈라하드에게 필요한 거였다.
'네발 마족-.'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네발 마족의 목적은 뚜렷했다. 황제의 죽음이었다.
네발 마족은 갈라하드에게 황제를 죽일 이유를 제시했다.
'황제가 스스로 무너진다.'
다만, 그건 네발 마족의 이유는 아니었다.
'더 알아봐야겠군.'
알아볼 수단은 이미 있었다.
"돌아가면 대공 전하와 사냥이라도 가야겠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중얼거렸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경을 줄일 수도 있는 겁니까?"
"가능은 하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다만, 방금 늘어난 마경을 줄이는 것과 오랜 기간 자리했던 마경을 줄이는 건 다른 문제일세. 더불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나 농도가 짙어지니, 들어가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걸세. 뾰족아리의 씨를 말려도 불가능하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다만, 자네는 가능하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마나를 태우니까."
"······하지만 제가 줄이는 영역은 너무 작습니다."
"지금으로는 불가능하겠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더 깊이 내려갔다.
"자네에게 마나는 연료일세. 불이 연료를 두려워하면 되겠나? 언젠가는 마경 전체를 태울 수도 있을 걸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마경 전체를 말입니까?"
"안될 거 뭐 있나. 마경도 결국 마나 덩어리인데."
"마나는 연료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아, 전임 대장은 따로 부탁해뒀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내 기억력은 아주 뛰어나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에 부탁하신 겁니까?"
"네발 달린 마족에게 부탁했네."
"마족에게 말입니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감사합니다. 다만, 마족과의 거래라니- 우려스럽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갈라하드 대장이 유능한 건 알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드리안나가 성큼 다가왔다. 그 눈이 심히 곧았다.
"알겠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가 끄덕이고 나서야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 사냥 말입니다.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아드리안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드리안나를 데리고 대공과 사냥이라-.
"······싫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싫다니.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지."
갈라하드는 짙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빼애애애애액!"
우렁찬 울부짖음이 들리며, 뾰족아리가 등장했다.
최하급 마물을 강제로 끌어올린 거라, 그 생김새가 다소 미묘했다. 크고 늠름한 뾰족아리였다.
온전한 최상급 마물과 비교하면 상당히 부족했다.
"하··· 한 번만 타보자! 한 번만! 살짝만!"
길버튼이 뾰족아리 입에 고삐를 물리려 했다.
"뾰족아리가 싫대요! 떨어지래요!"
"길버튼님! 이거 마물입니다! 마물!"
그웬과 톰이 다급하게 길버튼을 말리는 중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길버튼은 기어코 땅에 박혔다.
데미안이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저건 어디에 쓰실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전령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 전령-."
아드리안나가 크게 끄덕였다.
"물품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전령 관련 물품은 많이 있습니다. 전령 목걸이가 문제인데-. 여러 개를 겹치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드물게 반짝였다.
'대공은 마물이고, 아드리안나는 전령인가.'
대공의 딸이긴 하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복귀한다!"
아드리안나가 시원하게 소리쳤다.
****
"숨은 마족을 찾아내다니 대단하군."
직속 부대 기사 로버트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니까. 마나가 섞인 물은 마족에게 사라질 수밖에 없지."
"······대단하군."
"나는 갈라하드의 유일한 경쟁자, 퍼스트니까."
"갈라하드 대장의 경쟁자-."
진중한 얼굴로 끄덕이는 퍼스트에 펌킨은 이마를 짚었다.
퍼스트는 기사들을 돌면서 몇 번이나 '갈라하드의 유일한 경쟁자는 퍼스트다.'라고 말했다.
퍼스트가 개운한 얼굴로 펌킨에게 다가왔다.
"총 몇 마리 잡았지?"
"후-. 두 마리입니다."
"이런 아깝게 졌군."
짙게 웃는 퍼스트에 펌킨은 눈을 구겼다.
퍼스트가 처음에 찾은 건 한 마리였다.
갈라하드가 세 마리를 찾아냈다는 이야기에, 퍼스트는 1대대를 계속 들쑤셨다. 기어코 한 마리를 더 찾아냈다.
그래 봤자 두 마리였다.
"갈라하드, 이번에는 아깝게 졌지만, 다음에는 다르다."
"전혀 안 아깝습니다만."
"펌킨, 질투하지 말게."
그때-.
땡땡땡땡!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퍼스트의 눈이 빙글- 돌았다.
"복귀했나 보군."
퍼스트가 빠르게 움직였다. 펌킨은 황급히 따라붙었다.
성문 주변에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뿌우우우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문 사이로 짙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었다. 그 안개가 꼭 유령의 손처럼 보였다. 펌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안개가 길게 퍼졌다. 짙게 깔린 안개가 마치 카펫 같았다. 귀족의 연회장에서나 쓰는-.
갈라하드가 짙은 안개를 지려 밟으며 등장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그 걸음마다 안개가 그의 발목을 휘감아 뭉게뭉게 퍼졌다.
입에 문 연초가 주변을 밝히자, 이루 설명하기 힘든 존재감이 퍼졌다.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멋있-.
"젠장, 멋있군!"
크게 소리치는 퍼스트에 펌킨의 얼굴이 대신 뜨거워졌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저걸 소리 내어 말하다니-.
아드리안나와 기사들이 따라서 나왔다.
전쟁이라도 치른 건지, 모두 꼴이 상당히 엉망이었다. 갑주는 부서져 있었고, 피가 범벅이었다.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성문 사이로 큼지막한 무언가 나타났다.
'마물이다.'
날개가 여섯 개 달린 마물이었다. 묘하게 멍청하게 생긴 마물이었는데, 그 기세는 살벌했다. 펌킨은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를 잡았다.
"갈라하드여! 위험하다!"
퍼스트가 냅다 땅을 박찼다. 펌킨은 입술을 씹으며 그 뒤를 따랐다.
마물의 등장에 성문 주변의 병사들이 질겁하며 검을 뽑았다. 마물을 순식간에 포위했다.
"괜찮다."
아드리안나가 손을 들었다. 그에 병사들이 우뚝 멈췄다.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그때,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들었다. 마물이 뚝- 하고 멈췄다.
"내 전령일세."
갈라하드가 담담히 설명했다.
'저 마물이 전령이라고? 북부에서는 마물을 전령으로 쓰는 건가?'
펌킨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경악이 가득했다. 이곳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 듯했다.
"아······."
퍼스트가 작게 탄식했다. 퍼스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 눈이 흔들렸다.
"저 전령을 어떻게 이긴다는 말인가."
퍼스트가 허허롭게 중얼거렸다. 그 짙은 패색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전령까지 이길 필요가 있습니까?"
"멋있잖아."
담백한 대답에 펌킨은 욕을 중얼거렸다. 농담이 아닌지 퍼스트의 등이 굽었다. 괜히 짜증이 올라왔다.
"안에 들어가서 하나 잡으면 되지. 뭘 의기소침합니까. 답지 않게."
"······펌킨!"
퍼스트의 눈이 흔들렸다. 펌킨은 짜증이 울컥 솟구쳤지만, 애써 참았다.
"아니, 굳이 마물 전령은 필요 없다. 승부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선택과 집중?"
"그래, 약한 하나를 내어주고 강한 부분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퍼스트의 눈이 펌킨을 향했다. 그 눈동자가 뒤룩- 굴렀다.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신호였다.
'또 결혼 이야기하겠네.'
펌킨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다만, 펌킨은 퍼스트를 얕봤다.
"애를 낳는 걸세. 확실한 승부를 위해서-."
퍼스트가 진지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홉 정도면 충분하겠군."
펌킨의 승모근이 뒤룩- 굴렀다.
****
'사냥을 가시다니-.'
대공의 참모, 테오도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대공은 갈라하드와 사냥을 준비시켰지만, 갈라하드가 갑자기 사라지며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자 대공은 애초에 혼자 갈 생각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냥을 나섰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았지만, 누구도 입에 담지 못했다. 담는 순간 머리가 뽑힐 것이기에.
그때, 문이 무겁게 열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공의 뒤로 마물 사체가 길게 이어졌다. 사냥의 흔적이었다. 평소보다 수가 많았다.
"즐거운 사냥이었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순간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풀렸다.
'······죽는다!'
대공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그 지극한 서늘함에 테오도르는 필사적으로 기침했다. 어떻게든 웃음을 숨겼다.
"죄송합니다!"
등에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그때, 뒤의 창문이 흔들렸다. 거대한 흰 매가 들어왔다. 아드리안나의 매였다. 대공의 시선이 돌아갔다.
'살았다!'
황급히 매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었다. 테오도르는 다급히 편지를 읽었다.
그 내용은-.
"마경 내부에서 마경을 넓히던 고위 마족을 발견하여 처리했답니다. 이미 넓혀진 마경은 갈라하드 대장과 아드리안나 대장이 다시 좁혔다고 합니다!"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경이 넓어질 뻔한 걸 막았다니! 엄청난 공이었다!
갈라하드 대장! 참모진이 들썩였다.
"그리고······."
편지의 다음 내용에 테오도르의 입이 멈췄다.
하필이면-.
"그리고."
대공이 서늘하게 독촉했다. 테오도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갈라하드 대장이 아드리안나 대장과 같이 대공 전하와의 사냥을 청했습니다!"
평소였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대공의 눈이 일그러졌다.
"당분간 사냥은 없다."
대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창문으로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땡땡땡땡!!! 종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습격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습격?'
고개를 돌린 테오도르의 눈이 커졌다.
창문 너머에 거대한 마물이 있었다. 테오도르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바로 옆에 대공이 있었다. 대공의 손이 마물을 잡았다. 마물이 새처럼 대공에게 달랑 잡혔다.
'비행 마물이라니-.'
마물은 보통 땅에만 있었다. 그 영역이 낮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행 마물이 왜 여기서 나온다는 말인가.
"음-."
대공이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이 잡은 마물의 가슴에 뭔가 있었다.
'전령 목걸이?'
전령으로 사용하는 매에게 편지를 묶기 위한 목걸이였다.
'······저 마물이 전령이라고?'
어떤 미친놈이 마물을 전령으로 쓴다는 말인가.
전령 목걸이를 잡은 대공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이내 마물을 위아래로 살폈다.
마물을 보는 대공의 눈이 부드러웠다. 대공을 오랫동안 모신 테오도르는 알 수 있었다.
한참이나 마물을 보던 대공이 입을 열었다.
"음, 이번에는 공을 내릴 수밖에 없겠군. 사냥을 준비하도록."
아까 분명 더는 사냥이 없다고-.
"암, 이번 공은 너무 크지!"
"마경이 늘어날 뻔했다니! 이거 아주 큰일이 날 뻔했어! 역시 갈라하드 대장이다!"
"공을 내려야합니다! 역시 대공 전하십니다!"
참모진이 재빨리 떠들었다.
대공은 나지막하게 헛기침했다.
148화 마법사 데미안
'뻑뻑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마경에서 나오자, 숨을 쉬는 게 꽤 힘들어졌다. 피에 마나를 더 담은 탓이었다. 피가 심장을 지날 때마다 꺼림직함이 올라왔다.
'마족으로 변한 결사대가 왜 북부로 향했는지 알 것 같군.'
갈라하드가 이 정도인데, 고위 마족이었던 놈들이 받은 압박은 더 심했을 것이다.
그때, 그웬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마경 안에서 바람 마법을 썼어요!"
"오, 대단하군. 어떻게 썼나?"
"모르겠는데요!"
당당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웬이 냅다 손을 올렸다. 갈라하드는 손을 통해 마나를 확인했다.
"······자네, 마나통이 더 커졌군?"
안 그래도 거대했던 그웬의 마나통이 더 커져 있었다. 마나통이 커지다니-.
'마경에서 마나를 써서인가? 심지어 농도도 짙어졌군.'
본래 마나를 쓰고 채운다고 마나통이 늘지는 않았다. 마나가 채워지는 속도가 빨라질 뿐이었다.
마나통은 위계와 연관이 있었다. 위계가 깡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웬에게 위계가 있나?'
위계는 획이었다. 마법에 획을 하나를 더할 때마다, 그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를 위계라고 칭했다.
하지만 그웬은 위계에 구애받지 않았다.
'위계와 상관없는 감정 기복형 빡대가리 마법사라-.'
존재하면 안 되는 최악의 문장이었지만, 그렇기에 흥미로웠다.
'그웬의 부모가 누구였지?'
그웬의 아비는 알 수 없었고, 그 어미는 마녀로 몰려서 죽은 인물이었다. 그웬이 마법사가 되는 걸 처음에 거부했던 이유였다.
"어머니가 훌륭한 마법사셨나? 듣기로 누명으로 죽었다고-. 북부의 미개함 때문이겠군."
"네? 누명이 아닌데요. 불로 작업소를 태워서, 불에 타 죽으셨어요."
갈라하드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웬은 그 희생자들의 아이를 보살피는 중입니다."
"애들이 얼마나 이쁜데요!"
톰이 슬쩍 말을 돌리자, 그웬이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이 밝았다.
"······그래, 그웬. 이번에 충분한 활약을 보여줬으니, 봉급을 올려주겠네."
"와아아! 저 더 할 수 있어요!"
"맞네, 자네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어."
그웬이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출신이 전부는 아니다.'
황혼의 마탑주도 출신은 변변찮았다. 재능에 출신이 필수는 아니었다. 물론, 황족은 예외였고.
"데미안! 돌아가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
"응!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그웬보다 데미안의 봉급이 더 많을 텐데요."
"······?"
톰의 설명에 그웬이 눈을 벙끗거렸다. 데미안은 이미 입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톰이 갈라하드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러면 길버튼 님 봉급이 제일 낮습니다만."
"길버튼 경에게는 비밀로 하게나. 지금도 만족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더 줘봤자, 도박이나 하지 않나. 실력도 없으면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길버튼 경이 최고로 높다고 해주게."
톰이 크게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데미안과 다투는 그웬을 보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위계 상관없이 마법을 쓰고, 마나통은 늘어난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빡대가리인 게 문제였지만, 애초에 감정으로 마법을 펼치는 그웬이었다.
'잘 굴리면-.'
슬쩍 견적을 짜봤다. 그 특성상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정된 마법만 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없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그웬, 요즘 생활이 좀 편했지?"
"네?! 방금 죽다 살아났는데요!"
"안 죽지 않았나. 자네, 이번에 재를 밀어냈다고 했지. 내 마법을 사용한 건가?"
"네? 네!"
"그 마법의 이름은 서늘한 바람일세."
"아! 서늘한 바람!"
마법을 쓰고 나서 이름을 외운다니-.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북부 특유의 새하얀 풍경이 맞이했다. 수분을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 코를 간질였다.
그웬은 막대한 마나가 있지만, 조종 실력은 없었다. 그러니 무식하게 마나만 먹는 마법이 적격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서늘한 바람에서 응용된 걸세. 잘 보게나."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타고 마나가 성큼 빠져나갔다.
마나 주위의 얼음 결정들이 흔들렸다. 결정들이 회전하며 점점 빠르게 움직인다.
이어서 거대한 바람이 몰아쳤다. 눈밭 위에 사나운 폭풍이 자리했다. 눈송이와 얼음 결정들이 빛을 반사하며 휘몰아쳤다.
회오리가 서서히 하늘로 흩어졌다. 그를 타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뿌려졌다.
눈밭이 거칠게 난도질당했다. 서늘한 흔적이 여기저기 가득 새겨졌다.
"이름은 칼날 바람 폭풍일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주로 깔끔하고, 마나 낭비가 없는 효율적인 마법을 선호했다.
칼날 바람 폭풍은 범위가 넓은 탓에 마나 낭비가 심하기에, 선호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그웬은 갈라하드와 달랐다. 마나가 넘쳐났지만, 세밀한 조종이 부족했다. 그웬에게는 마나를 쏟아붓는 대형 마법이 적합했다.
그웬의 눈이 가득 풀렸다. 확실히 화려한 마법에 끌리는 듯했다.
"서늘한 바람을 응용한 걸세."
"······네에?! 이게 바람이랑 같다고요?! 어딜 봐서요!"
그웬이 대경실색했다.
"어차피 설명해도 못 알아듣지 않나?"
"그건 그렇죠!"
"마나나 내놓게나."
뾱!
그때, 데미안이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잡았다.
"저도."
"아, 알려주기로 했지. 음-."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데미안은 머리가 투박했다. 또 그 마나도 미약했다. 마법을 배우기에는-.
"이거요."
데미안이 뭔가를 내밀었다. 여명 놈이 쓰던 지팡이였다. 그 상황에서 이걸 챙겼다는 게 놀라웠다.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지팡이를 매만졌다. 최고급 지팡이였다. 들어간 마석도 순도가 아주 높았다.
수도로 가지고 가면, 값을 매길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급 지팡이였다.
"그래, 최고급 지팡이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데미안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지팡이 끝을 잡게."
데미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본래 타인의 마나를 강제로 움직이는 건, 상당히 위험한 방식이었다.
다만, 데미안의 마나는 워낙 콩알만 했고, 갈라하드는 마나 민감도는 아주 뛰어났기에 가능할 듯했다.
'반은 마족인데, 이렇게 마나가 적을 수 있나?'
데미안의 마나를 확인한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족의 사생아라기에는 마나가 아주 작았다. 그를 되새기던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마나가 아주 작아서 살아남은 거군.'
도출된 결론이 제법 흥미로웠다.
갈라하드는 데미안을 살폈다. 데미안의 얼굴이 아주 진지했다.
"주문은 큰 것부터 작은 거일세. 내가 짜줄 테니 외우게."
"네."
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갈라하드와 데미안의 모습이 상당히 진지했다.
심지어 아주 화려한 지팡이까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톰이 보기에도 아주 좋은 지팡이였다. 보물이라고 설명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 지팡이를 둘이 나란히 잡고 있었다. 갈라하드까지 진지하니 뭔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진짜 데미안에게 마법을 가르치시는 건가.'
갈라하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톰은 자신도 모르게 집중했다.
그때, 갈라하드의 입이 열렸다.
"산불, 불타는 집, 벽난로."
"산불, 불타는 집, 벽-."
"난로일세."
"난로일세."
"아니, 일세는 빼고."
"난로."
"그래."
화려한 지팡이가 격렬한 빛을 뿜어냈다. 데미안의 얼굴이 굳었다. 데미안의 목에 핏대가 올라왔다.
갈라하드가 데미안에게 속삭였다. 그에 데미안이 주문을 외웠다.
"불씨."
데미안의 지팡이가 번쩍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그 화려한 지팡이의 끝에-.
자그마한 불이 피어올랐다. 연초에 불을 붙이는데, 쓰기 적당한 크기의 불이었다.
"훌륭하네. 자네는 이제 마법사일세."
갈라하드가 불에 연초를 가져다 대며 칭찬했다.
데미안은-.
"후후."
뿌듯하게 웃었다.
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웬이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톰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누군가 옵니다!!"
마부석의 길버튼이 소리쳤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자-.
까마귀 가면을 쓴 이가 보였다.
*
"마석장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예, 광부··· 아니, 마법사 회원 열다섯이 사라졌습니다."
팔호가 가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배신의 가능성은?"
"워낙 근본 없는 놈들이라서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팔호가 말끝을 흐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한 군데가 아니군?"
"예, 총 세 곳입니다. 그중에 흑마법학회 소속인 놈들도 있었습니다."
흑마법학회 소속이 갈라하드를 배신할 가능성이 작았다.
"병사의 피해는 전혀 없습니다."
"음, 여명인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위쪽에 보고는 안 넣었습니다."
팔호가 차분하게 말했다. 침착한 판단이었다.
"습격당한 곳이 어디 영역이지?"
"6대대와 7대대입니다."
6대대는 불에 타서 대대가 마비된 곳, 7대대는 마경 훈련소가 있는 곳이었다.
"부실한 곳만 노렸군."
정보에 능한 놈들이었다. 여명일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여명은 정체가 모호한 집단이었다. 멸망한 마탑의 마법을 쓰는 여우 가면이 있었고, 고위 마족인 지배자를 부리던 놈들이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과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을 푼 것도 여명이었다.
더불어 미식가나 흑마법학회 같은 문제 집단 뒤에 여명이 있었다.
다만-.
'개척자도 여명이었다.'
얼마 전에 6대대를 막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척자와 마석장까지 동시에 진행한다고-?
하나가 아닌, 다수의 머리가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부서가 여러 개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여명은 하도 은밀하여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일부러 정오의 마탑의 배후를 은밀히 여명이라고 퍼뜨렸다. 여명이 무시할 수 없도록-.
"입질이 빨리 왔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팔호가 잠시 망설였다.
"왜 그러나?"
"사라진 마법사 중에 코르튼도 있습니다."
코르튼-. 갈라하드의 눈이 작게 구겨졌다. 폐급인 코르튼이 하필 그중에 있다니-. 갑자기 계산이 이상해졌다.
코르튼이라면-.
"코르튼이 멍청하게 배신했을 가능성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줄곧 명료하던 팔호가 처음으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코르튼이 워낙 폐급이기 때문이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가벼이 털었다.
"코르튼이 있던 마석장이 어디지?"
"7대대 마석장입니다."
"거기부터 가지."
팔호가 슬쩍 물러났다. 어둠 속으로 모습이 사라졌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팔호가 물러나자, 아드리안나가 성큼 다가왔다.
"마석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군. 거기로 갈 생각일세."
"대공 전하에게 보고는-."
"정보는 최대한 줄이는 게 좋네. 대공 전하가 나를 기다리기라도 하겠는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여명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만약 아드리안나가 같이 온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숨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대로 날릴 수는 없었다.
다만, 혹시 모를 상황을 생각하면, 아드리안나는 챙기는 게 좋았다.
그러니까-.
"노아드일세."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굳었다.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거린 아드리안나가 순응하듯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직속 부대도 속여야 하네. 피곤하다며 마차에 타게나. 나머지는 내가 해결하겠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까닥거렸다.
"알겠습니다."
"아, 갑주는-."
"전에 쓰던 게 있습니다."
"그걸 보관하고 있었나? 자네도 노아드 생활을 즐겼군."
"한 번 썼다고 버리는 건 낭비인 터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정색하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슬쩍 물러섰다.
아드리안나는 근검과 절약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강조하고 나서야 마차에 탔다.
"자, 다들 이쪽으로 모여주겠나."
갈라하드는 직속 부대 기사를 앞쪽으로 세웠다. 아드리안나가 1대대를 강화한 터라, 그 수가 평소보다 적었다.
"오러 풀고, 내 손가락에 집중하게나. 아드리안나는 마차에 타고 있네. 지난 여정이 피로했기 때문이지."
오러를 두르지 않은 북부의 기사들에게 정신 간섭을 펼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잠시 뒤에 아드리안나가 돌아왔다. 멍청한 투구와 두꺼운 갑주를 입은 상태였다. 쓰는 것만으로 멍청해 보이다니-. 신기한 투구였다.
"······막내가 왜 여기 있습니까?"
길버튼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 아무리 길버튼이라도 이제는 눈치채겠지.'
갈라하드는 흥미롭게 길버튼을 살피며 변명했다.
"내가 내린 비밀 임무를 끝내고 복귀한 참일세."
"막내! 고생했다! 자, 이쪽으로 와야지! 고삐 잡아라! 알려줄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성의 없는 변명이었지만, 길버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 끄덕였다.
달그락! 갈라하드는 다급히 이쪽을 보는 멍청한 투구를 외면하며 마차에 탔다.
"막내야! 고삐 그렇게 잡는 거 아니라니까! 아오! 답답한 놈!"
밖에서 들리는 호통에 톰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마차를 두드렸다.
"막내야 고삐 안 당기고 뭐 하냐!"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갈려고! 더 당겨!!"
마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전령은 왜 안 돌아오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형."
데미안이 짤막하게 갈라하드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새하얗게 질린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이 톰의 앞을 막았다. 그 다급함에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데미안의 본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갈라하드는 탐지를 펼치지 않고 마나를 빠르게 압축했다.
너무 급하게 마나를 운용한 터라, 순간 역류했다. 입가에 피가 터졌지만, 갈라하드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최대한의 크기로 방호벽을 구성했다.
곧바로-.
콰아아아아아앙!
선명한 폭발이 주변을 가득 덮었다.
방호벽이 거칠게 흔들렸다. 꽤 압축했는데, 이 정도의 압박이라니-. 상당히 짙은 농도의 마법이었다.
'마족인가?'
갈라하드는 입술을 씹었다. 속이 거칠게 진탕됐다. 입가로 피가 계속 터져 흘렀다.
"그웬! 대장님을!"
톰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그웬을 밀었다. 그웬이 갈라하드의 어깨를 잡았다. 마나가 들어왔다.
진탕된 속이 한결 가라앉았다.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마나를 운용했다.
창밖으로 화려한 불길이 보였다. 방호벽을 한참이나 두드렸다.
갈라하드는 입술을 가득 깨물며 소리쳤다.
"나서지 말게!"
"알겠습니다!"
길버튼이 대답했다. 길버튼에게 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정정할 여력이 없었다.
화염의 폭풍은 한참이나 몰아쳤다. 그웬이 없었다면, 위험했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이내 화염 폭풍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갈라하드는 거칠게 기침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위험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나에 민감했는데, 마나의 흐름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갈라하드는 옷깃을 세우며 밖으로 나왔다.
아래에 붉고 진득한 마법진이 있었다.
'마족의 피로 새겼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그 폭이 정확히 마차에 일치했다.
"아까는 없었습니다."
길버튼의 보고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마법진을 숨기기 위한 마법진까지 설치했군. 아주 까다로운 놈일세."
마법진을 그린 이의 솜씨가 상당했다. 마법진을 그린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곳을 지날 것을 정확히 예측했군."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사방은 그저 새하얀 눈밭이었다.
상대는 이 넓은 눈밭에서 갈라하드가 이쪽을 지나갈 것을 예측했다.
'마석장 습격도 이를 위함인가.'
새로 마주한 난제에-.
"완벽한 계산이군."
갈라하드는 짙게 웃었다.
****
대공의 사냥 준비 명령에 참모진은 아주 바빴다.
대공과 아드리안나, 갈라하드 셋이 가는 사냥이었다. 그 셋이 같이 움직이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갈라하드의 요청이었다.
왜 사라졌나 했더니, 마경이 넓어지는 걸 막았다니! 그 갈라하드가 보상으로 요구한 사냥이었다.
최고로 준비할 생각이었다. 쓰지도 않던 팔두마차를 두 개나 꺼냈다. 심지어 요리사까지 챙겼다.
문제는-.
'······좀 늦네.'
지금쯤 도착했어야 했는데-.
테오도르는 슬쩍 대공을 올려봤다.
대공은 발버둥 치는 마물을 잡고 가만히 쓰다듬었다. 최상급 마물인데, 대공에게 잡히니 일반 새처럼 보였다.
'왜 늦지? 설마······.'
······갈라하드가 바로 사냥하러 가겠다고 했었나?
중얼거리던 테오도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대공을 두 번이나 바람맞힐 리가 없지 않나.
"음, 이름은 버드가 좋겠군."
······제발.
149화 똑똑한
'하, 답답하네-.'
여우 가면은 짜증스레 고개를 까닥거렸다.
지배자를 잃은 죄로, 여우 가면은 운신이 제한당한 상태였다.
심지어-.
'저 재미 없는 놈이랑 묶이다니.'
여우 가면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무표정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주변에는 구슬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구슬은 각 계획의 결과를 나타내는 거였다. 초록색이면 성공, 붉은색이면 실패였다.
색을 띤 구슬은 전부 초록색이었다. 사내가 진행하는 일이 전부 성공적이라는 신호였다.
'괜히 완벽하다고 불리는 게 아니지.'
사내의 별명은 '완벽함'이었다.
최근까지는-.
"너인가?"
사내가 여우 가면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물었다. 감정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어머, 뭐가요?"
"여명에서 놈의 기록을 막은 것 말이다."
"아, 갈라하드요?"
사내가 가만히 끄덕였다.
"어머,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 애초에 저한테 그런 권한은 없는데요?"
"너는 워낙 말 안 듣는 존재니까."
"칭찬은 고맙지만, 저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군."
"저도 궁금해요. 그쪽도 모를 정도면, 더 높이 있는 존재라는 건데-. 그런 존재가 갈라하드를 왜 숨겼을까요?"
사내는 대답 대신 구슬을 살폈다. 여우 가면은 구슬을 슬쩍 매만졌다.
"위쪽의 누군가가 보호하는 갈라하드를 건드려도 되겠어요?"
"놈은 여명을 건드렸다."
"고작 마탑을 세우고 여명의 이름을 판 거요?"
"고작?"
사내의 시선이 여우 가면을 응시했다. 그 눈이 살짝 일렁였다.
"어머, 민감한 부분이었나?"
"설계는 끝났다."
사내가 선고를 내리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 구슬이 빼곡했다.
갈라하드를 위한 계획이었다.
그때, 사내가 응시하는 구슬이 붉은색을 띠었다.
"밟았군."
붉은색은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신호였지만, 사내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사내의 계획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옭아매는 거미줄이었으니까-.
당장 위기를 피하는 건, 함정으로 더 깊게 들어가는 거였다. 여우 가면은 낮게 혀를 찼다.
사내의 함정을 안 밟았다면 모를까. 밟은 순간부터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 갈라하드였다.
'이번에도 재밌게 해줄래?'
여우 가면은 구슬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
"분명히 아까는 없었습니다."
길버튼이 투박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바닥의 마법진을 살폈다.
"마법진이 두 겹일세. 하나는 가리기 위한 마법진이군. 그 때문에 짙은 마법진을 파악하지 못한 걸세. 그 가리기 위한 마법진에는 물리적인 함정까지 더해뒀군. 아주 치밀한 놈일세.""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차며 연초를 물었다.
"나를 노린 걸세."
"누가 대장을 노립니까?"
"나도 의문이군. 청렴결백하게 살았건만."
"······너무 많아서 찾기 힘들겠군요."
"길버튼 경."
"하하, 농담입니다."
"저쪽으로 뛰어보게."
갈라하드는 옆을 가리켰다. 갈라하드의 명령에 길버튼이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격렬한 폭발이 길버튼을 가득 덮었다.
"우와-."
"그웬, 저건 일그러지는 폭발이라는 마법일세."
"길버튼 님은······."
"괜찮을 걸세. 워낙 단단한 기사 아닌가."
거칠게 솟구친 폭발이 연기를 머금었다. 뿌연 연기 사이로-.
"기사-! 길버튼!"
가득 그을린 길버튼이 뛰어나왔다.
"오, 역시 길버튼 경일세."
갈라하드가 박수치니, 그웬과 톰이 따라서 박수쳤다. 박수 갈채에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저를 뚫을 수 없습니다."
"그래, 예상대로군."
"······예?"
"원래라면 내가 향했을 곳에 다음 함정을 준비했군. 놈은 나를 계산하고 있네. 건방지게-."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러니까 저곳에 함정이 있을 걸 아셨다는 겁니까?"
"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제까지 마주했던 상대는 갈라하드의 계산 아래 움직였던 놈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상대는 오히려 갈라하드를 유도하여 함정에 빠뜨렸다.
'여명인가?'
마석장으로 이어진 계획이었다. 여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달그락-.
멍청한 투구를 쓴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마경도 태우는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를 꺼내면 일이 간편할 것이다. 다만, 아드리안나를 꺼내면 놈이 내뺄 가능성이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최후에 꺼내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라-."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셨다.
한 수였지만, 쉬운 놈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놈은 나를 정확히 파악했네. 아주 유능하고 냉철한 마법사로 맞춰서 함정을 세웠겠지."
"그걸 자기 입으로······."
"사방이 설산이군. 함정을 숨기기 아주 좋은 환경이야. 심지어 나를 파악하여 겨냥했고-. 이거 위기군."
갈라하드의 담담한 선언에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작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물음에 톰과 그웬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래, 톰 말해보게."
"예상과 반대로 움직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저도 저거 말하려고 했어요!"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자네가 말한 수는 내가 검토한 수일세. 내가 그런 판단을 내릴 경우도 예상했다면?"
"그건 그렇군요."
톰이 끄덕였다.
"자, 내가 내릴 판단이 아닌 수를 둬야 하네."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갈라하드가 내리지 않을 수라면-.
그때, 특무대의 면면이 보였다.
'그게 있었군.'
갈라하드의 올라간 입꼬리에 특무대 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자, 나는 판단에서 아예 빠지겠네."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번에는 자네들이 결정하는 걸세. 간단하게 말하자면, 특무대 의회지. 축하하네. 자네들은 이제 의회일세."
갈라하드는 특무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특무대가 서로를 마주 봤다.
"······의회가 뭡니까?"
"그대들이 결정권자라는 걸세. 자, 목표는 7대대의 마석장일세. 자네들이 계획을 짜보게나. 아, 톰은 제외일세."
"예? 톰은 왜 제외입니까?"
"톰이니까. 자, 그대들의 유능함을 마음껏 보여주게."
톰이 헛기침하며 슬쩍 빠졌다.
덩그러니 남은 그웬과 길버튼, 데미안이 서로를 마주 봤다.
"어이, 막내! 거기서 뭐 해! 기사는 이쪽이다!"
"저는 마법사인데요!"
달그락?
"아, 자네도 저쪽일세."
멍청한 투구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내 포기한 듯 특무대 쪽으로 합류했다.
"7대대는 이쪽이다! 일로 가야 해!"
길버튼이 마차의 정면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함정이 있었잖아요! 돌아서 가야죠!"
"멍청한-. 대장이 돌아가는 것도 위험하다고 했잖아!"
"지금 저한테 멍청하다고 했어요?!"
"······노아드! 너도 말 좀 해봐!"
달그락. 달그락.
"노아드는 말 못 한다고 몇 번을 말해요! 진짜!"
회의가 아닌 다툼이 이어졌다.
그때, 데미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꼬맹이는 빠져라."
"데미안도 의외거든요! 데미안 말해!"
그웬이 데미안을 두둔했다.
"살짝 돌아가면 되죠."
데미안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일직선으로 가는 게 위험하고, 돌아가는 것도 위험하니까 살짝 돌아가자고-?
'무슨 말장난도 아니고.'
참으로 순수한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문제는-.
"역시 데미안이야! 똑똑해!"
"크흠, 꼬맹이 성장했군. 나도 저렇게 말하려 했다."
달그락.
다른 대원들의 찬성이었다.
그에 데미안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어딘가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톰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살짝 돌아갑니까?"
톰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답답함이 조금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웬이 손을 들었다.
"아까도 데미안이 눈치챘잖아요? 데미안한테 맡기면 되지 않을까요?"
"음. 꼬맹이가 감 하나는 좋으니까. 일리가 있군."
달그락.
모두의 시선이 다시 데미안에게 향했다.
가득 쏠린 시선에 데미안은-.
"맞아요. 저는 마법사니까."
당당하게 지팡이를 들었다.
특무대 의회가 괴상한 근거와 논리로 내린 첫 결정은-.
"데미안을 선두에 세워서 살짝만 돌아가자!"
였다.
'도대체 어떻게 살짝만 돌아가겠다는 거지?'
갈라하드는 입 끝까지 올라온 반박을 삼켰다.
그들은 데미안을 선두에 세웠다.
지팡이를 든 데미안이 먼저 걷다가, 뜬금없이 옆으로 걸었다. 어떤 규칙도 없었다. 순전히 데미안의 본능이 전부였다.
문제는-.
'통하는군.'
그게 아주 잘 통했다는 거였다.
핵심은 데미안의 본능이었다. 데미안은 본능적으로 함정을 피했다.
거기에-.
"지금 한 번 뒤로 갈까요! 예측하지 못하게!"
그웬이 괴상한 발언을 더 했다.
굳이 지났던 곳을 다시 돌아간다니, 그게 무슨 멍청한······.
"오, 현명한 생각이다. 그래, 한 번씩 변화를 줘야 예상을 못 하지."
달그락.
깊게 동의하는 길버튼과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입 끝까지 올라온 반발을 꾹 참았다.
'진짜 돌아가는군.'
그들은 기어코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리고 굳이 방금 확인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하나는 확실했다.
'예상은 절대 못 하겠군.'
갈라하드가 둘 리가 없는 아주 멍청하고 낭비가 가득한 수였으니까.
콰아아아아앙!
"함정! 함정을 또 발견했어요!"
"데미안 또 찾았군!"
대원들의 칭찬에 데미안이 지팡이를 높이 들며, 잔뜩 뻗댔다.
"함정을 찾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아마 알 겁니다."
톰이 찜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갈라하드는 반발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대원들을 따랐다.
우습게도 함정의 빈도가 점점 줄었다.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고 있군.'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보죠!"
"거기 아까 함정 있지 않았나?"
"그러면 지금은 없겠네요!"
"그것도 그렇군. 그웬, 제법 똑똑하잖아."
"후후, 길버튼님도요."
이걸 예측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도 불가능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군말 없이 따라가자니-.
'머리가 아프군.'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음?"
사내의 입에서 처음으로 침음성이 나왔다. 여우 가면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색이었던 구슬이 초록색이 됐다. 본래라면, 다음 구슬이 밝혀졌어야 했다.
다음 구슬이 아니라, 전에 있던 붉은색이 초록색으로 변했다는 건-.
"다시 돌아가서 함정을 밟았다는 건가? 왜?"
사내의 여유가 깨졌다. 그 눈이 가득 구겨졌다.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진지함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구슬의 흐름이 요상했다. 구슬이 초록색이었다가 붉었다가, 다시 돌아갔다가 갑자기 뛰어넘었다가, 아예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사내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사내는 구슬을 쫓으며 그 의미를 파악했다.
"내 의도를 알아낸 건가-. 이런 소문대로 기발하고 영리한 놈이군."
사내가 처음으로 상대를 인정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부드러이 움직였다.
구슬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빠르게 재배치했다. 사내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자, 이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사내가 짙게 웃었다.
그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왜 거기서 거기로-.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군."
사내는 끊임없이 혼잣말하며, 구슬을 배치했다.
그건 엄청난 수 싸움처럼 보였지만-.
'뭔가 이상한데?'
여우 가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상대가 갈라하드였으니 무슨 의도가 있을 것이다.
다만, 멀리서 보면 저건 그냥-.
'······좆대로 하는 거 같은데?'
그때, 구석의 구슬에서 붉은빛이 떠올랐다.
'저긴 마석장 쪽 아닌가? 갈라하드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왜 붉은색이지?'
여우 가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래에 코르튼이라는 글자가 붉게 떠올랐다.
****
'휑하군.'
정보국 부국장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부국장 사무실인데, 먼지만 가득했다. 부국장은 자밋이 청소도 잘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때는 국장 자리까지 넘봤던 부국장이었지만, 이제는 가라앉는 배 신세였다.
갈라하드를 북부로 보낸 게 신호탄이었다. 발버둥 쳤지만, 가라앉는 배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에 자밋을 갈라하드에게 보냈다.
자밋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부국장은 거절했다.
부국장은 늙었지만 선장이었다. 선장이 배를 두고 어디 간다는 말인가.
"널찍하니 좋군."
부국장은 연초를 털었다. 독한 연초 냄새가 가득 풍겼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부국장! 내가 오라고 했을 텐데!"
국장이 얼굴을 가득 구기며 등장했다. 그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
"미안하군. 처리할 일이 많아서."
"처리할 일?"
부국장은 위에 놓인 서류를 들었다. 서류에는 '화장실 자재 결제'라고 적혀 있었다.
"화장실 자재 채우느라 아주 바빳나 보군. 국장인 내 지시를 무시할 정도로?"
"화장실 자재는 국장님 특별 지시 아니었나? 그리고 화장실이 얼마나 중요한데. 혹시라도 귀빈이 방문했을 때, 똥 냄새라도 나면 정보국 체면이 말이 아니지."
"하! 끝까지 뻗대는군. 그래, 체면! 체면이라고 했나!"
국장이 서류 뭉치를 던졌다. 부국장이 가득 뿌려지는 서류를 훑었다.
"갈라하드 은퇴팀의 실패로 인한 피해 보고서군."
"그래, 자네가 그리 애지중지하는 그 갈라하드-. 놈 때문에 정보국의 피해가 얼마인지 아는가?!"
"모르지 나야. 화장실 자재 채우는데 바빴으니까."
국장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그 숨이 거칠어졌다. 화가 잔뜩 난 모습에 부국장은 히죽 웃었다.
늙은 패배자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경고했네. 괜히 쑤시다가 손 부서진다고. 아니, 이 정도면 팔 부러진 건가?"
부국장의 이죽거림에 국장이 부들부들 떨었다. 부국장은 연초를 깊게 마시며 웃었다.
다만, 그게 끝이었다.
국장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북부로 간 놈을 건드려서 뭐 하겠나. 안 그래도 줄 끊긴 놈인데. 그렇지? 내가 그냥 두라고 했잖나. 부국장. 꼭 문제를 만드는군."
국장이 부국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혀를 찼다. 부국장의 지시로 돌리겠다는 이야기였다. 국장이라면 가능했다.
다만-.
"자네, 아직도 갈라하드를 모르는군."
부국장의 물음에 국장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부국장은 국장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끝을 정하는 건, 갈라하드일세."
국장의 얼굴이 씰룩였다. 그 얼굴에 언뜻 두려움이 스쳤다. 다만, 금세 다시 돌아왔다.
"어차피 북부에 있는 놈이 끝을 정하기는."
국장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국장, 미리 짐이나 싸두게. 업무 효율이 있지 않나."
"미안하지만, 의자에 엉덩이가 붙어서 말이지. 쫓아낼 거면, 내 허리를 잘라야 할 걸세."
부국장은 마주 웃었다.
"그래, 얼마든지."
국장이 나가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직도 찾아오는 이가 있나 보군."
국장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건만, 어떤 멍청한 놈이-.'
이번에는 부국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떤 멍청한 놈일까-."
국장이 입꼬리를 비틀며 문을 열었다. 국장과 부국장이 동시에 굳었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예상에 없던 인물이었기에-.
"누가 부국장이지?"
황녀의 화려한 미소에 국장은 황급히 옆으로 비켰다.
국장이 도망치듯 사라지자, 부국장은 황녀와 단둘이 남았다.
'황녀가 왜-.'
부국장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황녀는 황족답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만개한 꽃처럼 웃으며-.
"전임 국장에 대해서 궁금한데."
정보국에서 가장 무거운 말을 가벼이 뿌렸다.
순간 부국장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임 국장을 입에 담는 건, 단순히 은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정보국의 금기입니다.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황녀라도 대답할 수 없었다.
단호하게 말했지만, 황녀는 표정의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전임 국장의 이름이-."
황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지엄한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베아트리스라고."
그 이름을 어떻게-.
부국장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정보국 전임 국장은 아무리 황녀라도 위험한 이야기였다.
굳이 황족이 그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궁금한 게 무엇일까.
황녀는 짙게 웃으며-.
"어디에 있지?"
괴상한 질문을 던졌다.
150화 플랜 갈라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