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쓰담쓰담
'무슨-.'
캐럿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혀 있었다.
거기에는-.
"음, 이 정도인가."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연초를 털고 있었다.
그 앞에는 눈이 뒤집힌 마족이 한 마리 있었다. 마족의 입에서는 거품이 올라왔다. 마족이 끔찍하게 뒤틀렸다.
그저 갈라하드의 손이 닿았을 뿐인데, 마족이 저 꼴이 됐다.
캐럿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는 마족의 시체가 즐비했다.
갈라하드의 짓이었다.
'마족이 저항조차 못 했다.'
이곳은 마족의 본진인 마경이었다. 마족은 몇 배나 강해지고, 인간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지는 곳이었다.
그런 마경에서 갈라하드는-.
'마족을 사냥했다.'
마경에서 마족을 사냥하다니-. 캐럿은 그 괴상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지만, 직접 본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때, 캐럿 앞에 누군가 섰다. 꼴이 엉망이 된 길버튼이었다.
길버튼이-.
"이게 특무대다."
입꼬리를 올리며 떠들었다.
'넌 뭐야.'
캐럿은 질색했다.
*
"대단하십니다."
길버튼이 어딘지 씰룩한 얼굴로 말했다.
줄곧 뻗대던 직속 부대의 기사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정작 갈라하드는 탐탁치 않았다. 실제로 하급과 중급을 잡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농도를 깎아도 상급은 잡을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이번에는 그리 대단한 건 아닐세."
길버튼의 얼굴이 더욱 씰룩해졌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배로 못생겨졌다.
"······예? 어디 아프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장이 겸손할 리 없지 않습니까."
길버튼의 진지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나는 거만한 게 아닐세. 정확한 사실을 말할 뿐이지."
"늘 대단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야 늘 대단하니까."
길버튼의 얼굴이 조금 더 못생겨졌다.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얼굴 피게.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지지 않나."
"크흠, 어떻게 하신 겁니까?"
길버튼이 옆에 누운 마족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족의 목에는 큼지막한 자국이 있었다. 얼음송곳 자국이었다.
"마족은 마나에 아주 민감하다네. 농도가 높으면 피하고, 낮으면 피해를 줄 수가 없지."
"······제국어로 해주십쇼."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마나 탐지로 마족의 위치와 농도를 확인하고, 그 농도에 맞춘 마법을 뿌리는 걸세. 음, 길버튼 경, 자네 말이 맞네."
"예? 뭐가 말입니까."
"내가 대단하다는 거. 그래, 나는 대단하네."
"젠장, 대장이 맞군."
길버튼의 투박한 반응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손을 털었다.
마나를 무리하게 운용했지만, 마나 회로의 상태는 괜찮았다.
'마경이니까.'
마경은 마나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았기에, 마법을 쓰는 게 힘들었다. 갈라하드가 처음 마경에 들어왔을 때, 괜히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마법사 대부분 마경에서 마법을 쓰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대신, 마법을 쓸 수 있으면 마경은 오히려 장점이었다.
농도 짙은 마나가 가득 있다는 거니까.
더불어-.
'그웬의 회복도 좋아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웬이 헤실거리고 있었다.
그웬의 회복이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단순히 마나만 채워지는 게 아니었다. 마나를 운용하며 생기는 마나 회로의 부하까지 씻기는 느낌이었다.
'권능이니까.'
갈라하드는 그웬을 내려봤다. 그웬이 눈을 끔벅이며 올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웬이 움츠러들었다.
"잘했네, 그웬. 최고였네."
"······정말요?!"
칭찬받은 그웬이 큰 눈을 끔벅였다.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끄덕였다.
"그래, 큰 도움이 됐어."
"와아-! 다시 말해주세요!"
그웬이 펄쩍 뛰었다. 칭찬이 상당히 좋은 듯했다.
갈라하드는 그웬의 버릇이 나빠지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그웬, 자네는 최고일세."
그웬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 몸이 들썩거렸다. 칭찬이 고픈 듯했다.
하긴 청소도 요리도 최악인 그웬이었다. 어디서 칭찬을 들었겠나.
이왕 이렇게 된 거, 갈라하드는 그웬의 머리를 두드려줬다.
"그웬, 자네는 최고일세. 특무대의 가장 유능한 하녀야."
"정말요! 와아! 들었죠?!"
그웬이 눈을 반짝이며 길버튼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길버튼이 눈을 구기니 도망쳤다.
"저는 여섯 마리 잡았어요."
이번에는 데미안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데미안의 머리도 두드려줬다.
"자네는 특무대에서 최고의 데미안일세."
"들었어요?"
데미안이 길버튼을 보며 물었다.
"뭐라는 거냐 이 꼬맹아."
"후후-."
낮게 웃은 데미안이 뒤로 물러났다.
그때, 길버튼과 시선이 마주쳤다. 길버튼의 눈이 씰룩거렸다.
"미안하지만, 사내를 쓰다듬을 생각은 없네."
"그게 무슨······. 저도 싫습니다."
"다행이군. 자네도 칭찬이 받고 싶은가 했지."
"됐습니다. 저는 기사입니다."
"그래, 길버튼 경, 자네는 훌륭한 기사일세."
"크흠."
길버튼이 못생긴 사막여우 같은 얼굴이 됐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물었다. 아드리안나의 검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마족 몇을 잡은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뭐 하고 계셨습니까?"
"칭찬하고 있었네. 사기 진작에 칭찬이 중요하지 않나."
"아, 맞습니다. 적절한 칭찬은 사기 진작에 효과적입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가 벤 마족의 수가 총 스물다섯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보고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자네도 칭찬받고 싶나?"
"······아닙니다. 정확한 보고를 올려야 판단하시기 편할 듯하여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군. 고맙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주변의 기사들이 간신히 숨을 돌리고 있었다. 다들 땀 범벅이었다. 그 얼굴에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이곳은 마경이었다. 피로가 배로 누적되는 건 당연했다.
그에 반해-.
'아직도 많이 남았군.'
완벽한 승리의 연속으로 수를 줄였지만, 애초에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더불어 제약이 많았다. 마족의 신경을 적절히 끌면서 전투를 펼쳐야 했다. 시선이 끌리는 순간 끝이었다.
한계가 뚜렷했다.
저 많은 마족을 전부 암습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애초에 갈라하드가 노린 것도 그게 아니었다.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야겠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다음 말입니까?"
"그래, 적당히 허리를 잘라뒀으니, 그 내부가 엉망이 됐을 걸세."
"아, 그래서 위치를 바꾸면서 공격하셨군요."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끄덕였다. 어차피 단순 암습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다음 작업은 내부에서 해야 하네."
"······내부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흔들어야 효과적이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백이 넘는 마족의 내부로 어떻게 잠입합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은 타당했다. 놈들은 마족이었다. 그것도 수백으로 이루어진 마족 군대-. 거기에 어떻게 잠입할까.
'인간 사이에 섞여든 마족은-.'
갈라하드는 1대대의 일을 떠올렸다.
인간에게 섞인 마족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1대대에서 괜히 난리가 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족 사이에 섞인 인간은 어떨까.
'마족은 인간을 어떻게 찾아내지?'
마족은 마나에 민감했다.
그러니까-.
'마나로 알아보겠지.'
인간은 그 피에 마나가 없었다. 마법사는 피에 마나가 미세하게 있었고-. 마나를 통해 파악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마족에게 피에 고농도의 마나를 넣은 갈라하드는 어떻게 보일까.
갈라하드는 길잡이 마족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놈의 시선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하급 마족 정도겠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예? 잠입이라고 하셨습니까?"
길버튼의 투박한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내가 내부에서 흔들겠네. 그대들이 밖에서 흔들게나. 그러면 반드시 틈이 생길 걸세."
"아니, 아직 백이 넘게 남았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잠입 하실 생각이십니까?"
길버튼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드리안나가 호응하듯 끄덕였다.
둘의 간지러운 시선에-.
"영업 비밀일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길버튼이 못생겨졌고,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다만, 말리지는 않았다.
깊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러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드리안나, 마족이 바로 알아보지 않겠나?"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 주변을 가리켰다. 실시간으로 안개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었다.
"그러면 제가 가겠습니다. 저 마족 연기할 수 있습니다."
"마족 연기? 그건 좀 궁금하군."
"예, 보십쇼."
길버튼이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무표정을 했다.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마족 특유의 무심함과 흡사했다.
"이런, 마족 어머니도 속겠군."
"후, 전장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못 생겨서 안 되네."
"······예?"
"마족은 기본적으로 잘생기지 않았나. 자네는 불가능하네."
"빌어먹을."
길버튼의 얼굴이 구겨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톰이 뭔가를 바삐 준비하고 있었다.
"톰, 준비됐나?"
갈라하드는 슬쩍 농담처럼 말했다. 아직 톰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예, 여기 있습니다."
톰이 가져다준 건, 마족의 녹슨 갑주였다. 정확히 갈라하드와 일치하는 크기였다.
갈라하드의 대화를 듣고 준비한 듯했다. 정말 대단한 준비성이었다.
"역시 톰이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말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저었다.
그리고-.
"어이, 길잡이. 출발하지."
안쪽에 있던 길잡이 마족을 불렀다.
"내가 왜?"
뾰족하게 묻는 마족에-.
"성녀님의 뜻일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길잡이 마족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
'역시 톰이군.'
갈라하드는 녹슨 갑주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표면은 여전히 녹슬었지만, 안쪽은 깨끗했다. 뭔가를 발랐는지 향기까지 났다.
"마족에게 잠입하여 내부를 흔든다니-. 성녀님이 미쳤다고 하는 이유가 있었군."
길잡이 마족이 눈을 가득 구겼다. 놈은 갑주에 닿는 게 싫은지, 연신 갑주를 흔들었다.
"이제 함께할 전우인데, 통성명이라도 하지. 나는 갈라하드일세."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물었다. 그에 길잡이 마족이 눈을 씰룩거렸다.
놈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가 내려왔다. 얼굴이 한층 구겨졌다. 네발 성녀가 명령한 듯했다.
"빙리안이다."
"오, 빙리안이라-. 멋진 이름이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걸음걸이도 투박하게 바꿨다. 정말 기사처럼-.
"빙리안, 걸리적거리면 성녀에게 청부할 걸세."
"하, 감히-."
길잡이 마족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길잡이 마족의 기세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그 기운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신계 마족이었군."
"감히 누구보고 마족이라는 거냐."
"그러면 뭐지?"
"······신도다."
길잡이 마족의 대답은 담담했다.
네발 마족이 성녀였고, 신전까지 있었다.
'결사대의 교단 쪽인가.'
제법 그럴듯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끄덕였다.
"그래, 빙리안 신도. 너무 길군. 좀 줄여야겠어. 성을 부르는 게 낫겠군. 그러니까-."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놈을 가리켰다.
"빙신도가 좋겠군."
"이 미개한 놈이-."
빙신도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정면은 안개가 전부였다. 괜히 안개를 밀어냈다가, 마족의 시선을 끌 수 있었기에 참았다.
애초에 안개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치웠던 거였다.
갈라하드는 이미 마나 탐지에 더 익숙했다. 농도가 낮은 마나를 가득 뿌렸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돌아오는 마나로 가상의 지도를 그렸다.
마족을 빨간 점으로 둔다면-.
'온통 붉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주저하지 않고 빨간 점이 가득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방에서 적나라한 적의가 느껴졌다. 마족 특유의 적의가 곳곳에서 뾰족하게 찔렀다.
점점 발소리가 늘었다. 대화는 없었다. 그저 일정한 발소리가 전부였다.
가상의 붉은 점이 점점 늘었다.
'그리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군.'
가득한 적의와 붉은 점-. 긴장이 절로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숨을 깊게 내쉬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했다. 흐름을 따라서 걸었다.
마족의 수가 더 늘었다.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녹슨 냄새와 썩은 냄새가 코를 가득 찔렀다.
갈라하드는 끝까지 집중하여, 그 빈틈을 찾으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앞의 안개가 흩어지며, 마족이 나왔다. 녹슨 갑주를 입은 무표정의 마족이 순간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저 적의로 가득 찬 망령 같은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향했다.
'상급 마족이다.'
상급 마족은 수통을 마셔야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근거리에서는 위험했다.
놈을 당장 처리해도 그 뒤가 문제였다. 수백의 마족에 둘러싸이는 상황이 될 것이다.
들키는 순간 끝이었다. 계산을 끝냈지만, 긴장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이 저릿했다. 정신의 날이 섰다.
다만, 긴장은 독이었다. 여유는 무기였고.
갈라하드는 독을 내려두고 무기를 고쳐 잡았다.
영원 같던 찰나의 정적이 지나가고-.
놈이 시선을 돌렸다.
'통하는군.'
마족을 속이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이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저린 손을 쥐었다 피며 히죽 웃었다.
등이 땀으로 축축했지만, 오히려 상쾌했다.
"······미친 인간."
갈라하드는 거침없이 안쪽으로 향했다.
*
'이놈 뭐지?'
길잡이 마족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놈은 애매했지만, 분명 인간이었다.
다른 마족에게는 그저 마족으로 보이겠지만, 빙리안에게는 아니었다.
본디 마족이 되려면,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놈에게서는 저주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저렇게 당당히 활보할 수 있지?'
주변에 수백의 마족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족이 아닌 놈이 두려움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놈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아주 거침없이 움직였다.
아니, 오히려 신난 느낌이었다.
'미친 인간이다.'
괜히 성녀님이 몇 번이나 강조한 게 아니었다.
빙리안은 권능을 최대한 일으키며 놈을 따라갔다.
놈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화려한 갑주를 입은 마족이 놈의 앞을 막았다.
'백인장이군.'
빙리안은 눈을 찡그렸다. 백인장은 최상급 마족이었다.
길잡이 마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래였다면 바로 물러났을 것이다.
다만, 성녀님이 선택한 놈이었다.
그때, 백인장이 놈을 내려봤다.
그래도 마경에서 마족을 마법으로 잡은 놈이었다. 뭔가 한 수가 있을 듯했다.
빙리안은 놈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자, 어떻게 할거냐.'
그때, 갈라하드가 천천히 손을 들고-.
"저놈, 뭔가 이상합니다."
빙리안을 가리켰다.
****
제국을 위하여!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연신 들렸다. 북소리는 사내의 심장 박동이었다. 피를 돌게 하는 박동이었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금색 파도가 끝없이 출렁였다. 끝없이 펼쳐진 영광의 대군이었다.
제국을 위하여!
둥! 둥! 둥! 둥!
사내는 등의 깃발을 뽑았다. 천 리를 나는 새의 깃털로 만든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깃발을 높게 들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게-.
제국을 위하여-!
둥! 둥! 둥! 둥!
금색 파도가 거칠게 출렁였다. 대지를 가득 흔들었다. 이내 파도가 천천히 몰아치기 시작했다.
적들은 공포에 떨었다. 금색 파도는 대륙의 끝에 닿기 전에 멈추지 않기에-.
병장기 소리는 악기요, 비명은 노래였다.
[제국을 위하여.]
사내는 투구를 깊게 눌러 썼다.
둥! 둥! 둥! 둥!
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세상을 가득 채웠던 금색 파도가 옅어졌다. 바위에 부딪힌 파도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보이는 건-.
지옥에나 어울리는 회색 잿빛이었다.
찬란한 영광의 금색 갑주는 세월에 녹슬었지만-.
사내는 여전히 굳건했다.
그저 깃발 대신 램프를 들었다.
"제국을 위하여."
개척자는 전진했다.
기다리고 있을 주군을 향하여-.
141화 그웬
본래 마족은 감정이 없었다.
마족은 마물과 달리 지성체였지만, 인간을 끊임없이 탐하는 그 근본은 같았다.
다만, 네발 마족 아래의 마족들은 미묘하게 달랐다. 놈들은 인간 흉내를 제법 잘 냈다.
그중 심복인 빙신도는 특히 차분했다.
그런 빙신도의 얼굴이-.
'보기 좋아졌군.'
아주 험하게 구겨졌다.
백인장의 고개가 빙신도를 향했다. 서늘한 존재감이 올라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인간이라면 분노하여 갈라하드를 먼저 공격했을 것이다.
다만, 놈은 마족답게 백인장을 노렸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빙신도와 백인장은 둘 다 최상급 마족이었다.
둘 중 누가 더 강할까.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떨었다. 최상급 마족 둘에 거칠게 요동쳤다.
자기보다 강한 놈은 기가 막히게 찾는 고통의 알이었다. 고통의 알에 따르면-.
'빙신도가 조금 더 강하군.'
예상대로 백인장이 그대로 멈췄다. 그 찰나의 순간에 빙신도는 정신 간섭으로 백인장을 억제했다.
"깔끔한 솜씨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며 백인장을 살폈다.
빙신도의 살벌한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음, 이렇게 해야 자네가 나설 것 아닌가. 자네가 게으른 탓일세."
빙신도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다만, 최상급 마족을 묶는 건 놈에게도 벅찬지, 별다른 압박은 없었다.
갈라하드는 백인장의 투구를 벗겼다. 백인장은 머리숱이 많은 굵직한 중년 사내였다. 그 회색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이냐-."
"협업일세."
"이런 미친···."
갈라하드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빙신도가 욕설을 터뜨렸다.
상대는 최상급 마족이었다. 정신 간섭을 시도할 급이 아니었다. 지금은 빙신도가 정신 간섭으로 제압한 상태였다.
빙신도가 문을 열어준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쉬운 건 아니었다.
빙신도의 정신 간섭을 건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허들을 낮춘 대신 그 까다로움은 배가 된 것이다.
"자, 꽉 잡게나."
갈라하드는 백인장의 머리를 잡았다.
천천히 마나를 움직였다. 중요한 건, 빙신도의 정신 간섭을 건드리지 않는 거였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끄윽."
뒤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들렸다. 까득. 뒤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하네. 생각보다 어렵군."
가벼이 사과한 갈라하드는 다시 집중했다.
확실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갈라하드도 몇 번이나 실수할 정도로-.
"끄악!"
"엄살이 심하군."
"이 개 같은 놈이-."
"오, 이런 식으로."
세 번 정도 실패한 뒤에 백인장의 초점이 흐려졌다. 백인장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자네, 이름이 뭔가."
"······백인장 크루누스."
녹슬고 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쉽지 않군.'
상대가 최상급 마족인 탓에, 한 마디에도 정신이 움푹 깎이는 느낌이었다.
"그래, 크루누스. 나는 십인장 갈라하드일세."
"십···인장?"
크루누스의 눈이 갈라하드를 훑었다. 어딘지 마땅찮은 느낌이었다.
"그래, 십인장일세. 그렇지?"
"······그렇다."
"이쪽은 내 수하 빙신이고."
"빙신."
크루누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아릿한 두통을 참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십인장 갈라하드."
"저놈은?"
"빙신."
"좋네, 기억력이 훌륭하군. 그거 아는가? 이쪽으로 쭉 가면 최상급 마물이 있네. 장군님께서 아주 좋아하실만한 마물이지."
"알았다."
백인장이 크게 끄덕였다.
그때, 뾰족한 적개심이 뒤를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빙신도가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꼴이 상당히 엉망이었다.
"자, 풀어보게."
빙신도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백인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회색 눈동자에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갈라하드를 본 백인장이-.
"십인장 수준이 낮아졌군."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빙신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빙신."
짤막하게 말했다.
'성공했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백인장이 한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저쪽으로 합류해라."
"예."
갈라하드는 냉큼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뒤로 빙신이 따라붙었다.
"죽이겠다."
빙신이 핏발 선 눈으로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거센 정신 간섭이 갈라하드를 두드렸다.
'괜히 기를 세우는군.'
갈라하드는 네발 마족과 얽힌 사이였다. 네발 마족에 비하면, 빙신의 정신 간섭은 애교였다.
더불어 방금 빙신도의 정신 간섭도 파악한 뒤였다.
"괜히 힘 빼지 말게."
빙신도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그 말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빙신도의 기세가 가득 일어났다.
그때-. 빙신도의 눈이 위쪽을 향했다.
'네발 성녀군.'
적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아-."
빙신도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꼭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격렬한 반응이었다.
"어이, 빙신. 일어나게. 갈 길이 머네."
빙신이 고개를 들었다. 적의는 여전했지만, 대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네. 안으로 들어가려면 최상급 마족을 한번은 지나쳐야 하니까."
대답은 없었다. 상당히 옹졸한 놈이었다.
백인장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하자, 거대한 마물이 보였다. 마물 주변에 마족들이 붙어 있었다.
'개척자에게 바치는 거군.'
갈라하드는 도마뱀 마물의 허리 부분에 붙었다. 시선이 살짝 몰렸지만, 금세 흩어졌다.
"미친놈."
뒤로 붙은 빙신이 나지막하게 욕했다.
"조용하게. 빙신."
"이런, 미개한-."
"성녀님 가라사대 쉿일세."
그제야 놈이 입을 닫았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감정 없는 마족들이 마물을 끌었다. 마물의 끈적이는 열기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앞뒤로 비슷한 놈들이 길게 서 있었다.
'개척자로 가는 줄이군.'
일개미 같은 모습이었다.
마족 사이에 마물의 배를 잡고 줄을 서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시간이 상당히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릿한 존재감이 갈라하드를 깊게 눌렀다. 꼭 누가 어깨를 잡고 누르는 것처럼 거대했다.
고개를 들자-.
'개척자-.'
녹슨 거대한 장군, 개척자가 있었다.
녹슬고 먼지가 가득한 갑주였지만, 여전히 화려했다. 과거에 얼마나 찬란했는지 어렴풋이 보였다.
개척자의 등에 꽂힌 깃발들이 펄럭였다. 옛 제국의 문장, 교단의 문장, 의미 모를 문장이 연신 펄럭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떨었다. 지배자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떨림이었다. 고통의 알이 느끼는 차이가 온전히 건네졌다. 압도적인 격차였다.
그때, 개척자의 시선이 마물에 향했다. 그 형형한 눈동자는 먼 곳을 보는 것처럼 초점이 없었다.
'강하군.'
멀리서 봤을 때도 강대했지만, 바로 앞에서 보니 그 압박감이 살벌했다.
강렬한 존재감에 손이 떨렸다. 등에 땀이 가득 흘렀다. 본능이 도망을 종용했다.
'웃기는군.'
갈라하드는 공포를 누르며 계산을 점검했다. 개척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개척자는 이쪽을 응시조차 안 했다.
볼 필요 없다는 듯-.
그때, 상급 마물이 몸을 거칠게 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 힘이 상당했다. 주변의 마족들이 튕기듯 밀려났다.
갈라하드는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개척자를 살폈다.
상급 마물이 제 몸을 부풀렸다. 순간 공간이 가득 차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거대했다.
개척자가 주먹을 들었다. 그 녹슨 갑주에서 비명 같은 쇳소리가 났다.
그러자-.
쿠웅. 망치를 내리친 것처럼 굉음이 터졌다. 거대한 마물이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마물의 두꺼운 가죽이 터지며 피가 가득 튀었다.
마물은 더는 반항하지 못했다. 그저 눈치를 보는 것처럼 납작 엎드렸다.
개척자가 램프를 마물에 가져갔다.
마물이 흩어지며, 재가 가득 휘날렸다.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제국을 위하여."
녹슨 목소리가 낮게 퍼졌다.
마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움직였다. 다음 마물이 끌려나왔다.
갈라하드는 저린 손을 쥐었다 피며 이성을 다잡았다.
'이게 마경의 고위 마족이군.'
멀리서 봤을 때도 대단했지만, 가까이에서 본 개척자는 괴물이었다.
기회를 봐서 처리할 수 없을까 했는데,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얻은 건 있었다.
'날 못 알아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쪽을 보지조차 않았다.
'이성이 옅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곳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건 꽤 좋은 변수였다. 새로운 계산기를 꺼내야 할 정도로-.
'마그누스 장군이라고 그랬나.'
갈라하드는 빠르게 상황을 되짚었다.
놈은 대륙을 넓히는 데 혈안이었던 장군이었다.
마족이 된 건 아마 황제의 짓이겠지. 그런데 놈은 여전히 제국을 부르짖었다.
그러면서 마경을 넓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길을 트는 중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그 답은 놈이 말한 '제국을 위하여'에 있었다.
'황제에게 향하는 중이다.'
복수를 위해서일까? 아니, 그랬다면 제국을 위하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네발 마족이 놈을 적대했다.
그 이유는 아마 네발 마족과 이해관계가 상충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황제를 지키려는 거군.'
저주받았음에도 주군으로 향하는 장군이라니-. 역사에 기록될 충성이었다.
'이성이 희박하고, 황제를 향해 나아가는 게 전부인 놈. 이쪽에 관심도 없다.'
단서를 조합하여 계산을 새로 했다. 이득과 실을 계산했다. 속단하지 않고, 몇 번이나 두드렸다.
'해볼 만하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거부했다. 그 두근거림이 아주 격렬했다.
가벼이 무시하고 개척자를 향해 걸었다.
개척자는 마물을 먼지로 만들고 있었다.
바로 앞까지 갔는데도 개척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개척자는 정면만 보고 있었다. 안개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듯 초점이 흐렸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주 발광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라고, 설득했다.
'자네, 담이 작군.'
갈라하드는 마나 조절을 풀고, 투구를 벗었다.
주변의 마족들이 우뚝 멈췄다. 개척자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이래서 어느 세월에 황제한테 가겠나!"
목소리를 높였다.
두근! 고통의 알이 뚝- 하고 멈췄다.
그제야 개척자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단지 시선을 마주했을 뿐이지만, 갈라하드는 죽음을 직감했다.
아주 지독하게 선명한 죽음이 그려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내게 좋은 방법이 있네."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방법?"
개척자가 아주 녹슨 목소리로 되물었다.
높이 든 램프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회색 불에 갈라하드는 가득 고인 침을 삼키며-.
"그래, 내 말을 따르면 마경을 넓히는 속도가 배는 빠를 걸세."
진지하게 제안했다.
****
"정말 마족이랑 보내도 되는 건가."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길버튼은 턱을 긁적였다.
수백의 마족에 잠입하여, 안에서 흔들겠다니-. 분명 미친 생각이었다.
'근데 왜 걱정이 안 되지.'
길버튼은 턱을 벅벅 긁었다.
"뭐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기사인 저희와 달리 대단히 똑똑한 마법사 아닙니까."
길버튼은 손을 휘저었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굳었다.
"길버튼, 그대와 같이 묶지 말도록."
"예? 아드리안나님도 기사 아니십니까?"
"맞다. 하지만 묶지 말도록."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에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굳었다.
"전투다."
아드리안나가 오러를 일으키며 돌아섰다. 백색의 오러가 주변의 안개를 가득 밀어냈다.
그러자 안개에 있던 마족들이 보였다. 갑주를 입은 마족들이었다.
'지랄맞군.'
방금 전투가 끝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또 전투라니-. 빌어먹을 마경이었다. 투덜거리며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재를 가득 태웠지만, 그 범위가 너무 적었다.
예전에 비하면 오러의 범위가 상당히 늘었지만, 지금은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대장이 없으니, 상당히 까다롭군.'
전투는 전과 달리 매끄럽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없기에-. 길버튼은 갈라하드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젠장! 앞이 하나도 안 보인다!"
"빌어먹을-. 끔찍하군."
곳곳에서 불평이 터졌다.
"마경이 잘 보이면 그게 마경이냐?"
하여튼 요즘 것들은-. 길버튼은 혀를 차며 오러를 일으켰다.
뒤에 특무대가 있었다. 한 마리도 보낼 수 없었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은 검을 고쳐잡았다. 어두운 안개에서 무형의 공격이 이어졌다.
예리해진 감각에 의지하여, 차례로 검을 휘둘렀다. 마족의 목이 위로 날아갔다. 붉은 피가 길버튼을 적셨다.
길버튼은 눈에 힘을 줬다. 옆에서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공격 사이였기에, 막을 수 없었다. 피하려면 물러나야 했다. 그에 길버튼은-.
'이 정도는 맞아도 되지.'
배에 힘을 줬다.
그때-.
"배고파요."
붉게 칠해진 데미안이 옆을 굴렀다. 마족 하나가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늘었구나."
"저는 성장기니까요. 더 클걸요?"
"망할 꼬맹이-."
길버튼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톰!!"
그웬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길버튼은 황급히 검을 크게 휘둘렀다. 데미안이 빠르게 검을 찔렀다.
둘의 검이 동시에 얽히며, 전방의 공백을 만들었다.
뒤로 물러나니 피를 흘리는 톰이 보였다. 손에 든 방패가 반으로 잘려있었다. 그 옆에는 그웬이 오열하고 있었다.
'그웬을 지키다가 다쳤군.'
길버튼은 눈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톰은 이미 상처를 지열 중이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저를··· 저를 지키려다가!"
"그웬님 잘못이 아닙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웬이 황급히 이것저것 꺼냈다.
"톰, 죽어요? 톰은 안 되는데."
데미안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에 길버튼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죽기는 누가 죽냐! 대장한테 무슨 잔소리를 들으라고-. 절대 안 된다."
"저도요?"
"그래, 넌 죽으면 내 손에 죽는다. 젠장, 이 망할 안개만 아니었어도-. 진짜 지랄 맞군."
길버튼은 침을 퉤- 뱉었다.
"저도 여기 베였어요. 안 보여서."
"그 정도는 상처도 아니다. 꼬맹아."
자랑하듯 자기 어깨를 보여주는 데미안에 길버튼 눈을 구겼다.
"데미안도 다쳤어?!"
"안 보여서."
안 그래도 구겨졌던 그웬의 얼굴에 절박함이 떠올랐다.
"내··· 내가 해볼게요!"
그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됐다. 무리할 필요 없다."
"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 해요!"
그웬이 진지해졌다. 톰이 슬쩍 지팡이를 내밀었다. 데미안이 꽁쳐 둔 지팡이였다. 데미안이 눈을 구겼지만, 따로 말리지는 않았다.
'내가 들면 지랄하더니만.'
길버튼은 작게 투덜거렸다.
"맞습니다. 대장님이 칭찬하신 그웬님 아닙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그웬이 두 손으로 지팡이를 받았다. 이내 지팡이를 내려보던 그웬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길버튼은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웬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단지 상대가 갈라하드일 뿐이었다.
그때, 그웬이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그 얼굴에 울음이 가득했다. 절박함이 뚝뚝 흘렀다.
그리고-.
"안개 싫어!"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길버튼이 됐다고 말하려는 순간-.
거센 바람이 불었다. 갈라하드의 것과 달랐다.
갈라하드의 바람이 안개를 부드럽게 밀어냈다면, 지금 부는 바람은-.
'안개를 찢어버리는군.'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떠야 할 정도로 거친 바람이었다.
세기가 거칠었지만, 우습게도 안개는 천천히 밀려났다.
완전히 밀어내는 것도 아니었다. 안개 중에 굵은 것들은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시야 확보는 가능했다.
그리고 그 범위는 갈라하드보다 넓었다.
그건 아주 큰 차이였다.
"그웬, 대단하군."
"쳇-."
대놓고 혀를 찬 데미안은 뒤로 굴러서 마족들 사이로 사라졌다.
"바라아아암!"
그웬이 다시금 절절하게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에 길버튼은-.
"들어는 봤나? 빡대가리 천재라고."
자랑스럽게 웃었다.
142화 폐하
'흥미는 끌었다.'
녹슨 쇠냄새가 코를 가득 찔렀다.
그에 갈라하드는 지그시 위를 올려봤다.
거대하고 녹슨 갑주가 갈라하드를 가만히 내려봤다.
단지 시선이 닿은 것인데, 어깨가 무거워졌다. 중력이 열 배는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게 마경의 고위 마족이군.'
놀라울 정도의 압박이었다.
다만-.
'대공만큼은 아니군.'
대공에 비하면, 다소 약한 감이 있었다. 그런 대공의 압박을 몇 번이나 느껴봤기에,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그때-.
"뭐야, 이건."
어디선가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개척자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흰색 뱀이 보였다. 서늘한 느낌이 풍겼다.
'최상급 마물이군.'
그 최상급 마물의 머리에 누군가 있었다. 펑퍼짐한 옷을 입은 놈이었다.
뱀처럼 생긴 창백한 인상의 사내였다. 최상급 마물에 탄 사내라-.
'마물 조련사.'
뭉쳐서 습격했던 마물들이 떠올랐다. 마물에는 진짜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저놈이 한 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마법진을 새긴 마물들을 뒀나 했더니-.
'램프용으로 준비해둔 거군.'
톡톡,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가벼이 두드렸다.
여기서 마물 조련사라니-. 개척자로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이었다.
다만, 변수가 들어오니 미심쩍었던 것들이 맞춰졌다.
'애초에 저 이성이 희미한 개척자가 네발 마족을 노렸다는 게 이상했는데, 배후가 있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너, 뭐냐고 묻잖아."
뱀처럼 생긴 놈이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여유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살폈다. 개척자의 기세가 조금 줄어 있었다. 정확히 놈이 등장하고 바뀌었다.
그렇다면-.
'개척자에게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새겨뒀나?'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마법진으로 고위 마족인 개척자를 움직였다는 건가-.
'아무리 이성이 없다고 해도 고위 마족인데.'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다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개척자의 초점 없는 눈이 다시 갈라하드를 향했다.
[제국을 위하여-.]
개척자의 노쇠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개척자의 목적은 뚜렷했다.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
'아, 개척자의 욕망을 이용했군.'
마법진으로 경계를 누르고, 황제에게 향하는 개척자의 욕망을 이용한 듯했다.
오-,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감탄했다.
"어이, 뭐냐고 묻잖아."
흰 뱀이 고개를 숙였다. 놈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뿌렸다.
"어쭈?"
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마나가 흩어졌다. 아니, 찢겼다. 확인용으로 가벼이 뿌린 마나를 눈치챘다니-.
"제법이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제법? 하, 어이없는 새끼일세."
"네가 마물 조련사인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놈-."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살폈다.
'완전히 장악한 건 아니군.'
흰 뱀이 입을 쩍 벌렸다. 수백의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갈라하드일세."
"······갈라하드? 아, 네가 갈라하드구나?"
갈라하드를 아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대는 여명이겠군. 참 상당히 부지런한 조직일세."
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꼭 먹이를 앞에 둔 뱀의 모습이었다. 손에 든 괴상하게 생긴 지팡이가 흔들렸다. 지팡이에 달린 문양이 알록달록한 빛을 풍겼다.
'마법사군. 그것도 고위계-.'
여우 가면과 느낌이 달랐다. 여우 가면은 아예 감이 안 왔지만, 놈은 그 감각이 전해졌다.
'마물을 이용해서인가.'
갈라하드는 놈 아래의 마물을 살폈다. 흰 뱀의 혀가 길게 날름거렸다. 그 혀에 뼈처럼 돌기가 오돌토돌하여 살벌했다.
'최상급 마물인가.'
최상급 마물을 말처럼 타고 다니는 놈이 있다니-.
'대공이 좋아하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공이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운이 좋군."
그때, 놈이 제 입술을 핥았다. 놈의 지팡이에서 불이 거칠게 일어났다.
불은 곧 거대한 새 형상을 했다. 독수리 모양이었는데, 그 밀집도와 세기가 제법이었다.
"오, 꽤 하는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꽤? 미친놈이-."
그때, 개척자가 주먹을 쥐었다. 화려했던 불새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열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놈이 개척자를 보며 목청을 높였다. 개척자는 놈이 아닌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그 초점 잡히지 않은 눈이 옅게 빛났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상황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방법?"
개척자의 노쇠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래, 지금보다 최소 세 배는 빠를 걸세."
개척자의 거대한 건틀릿에 비해 램프는 상당히 작았다. 위태롭게 들린 느낌이었다.
램프의 회색 불이 바람에 휘날리듯 흔들거렸다. 주변의 재가 가득했다.
"그 램프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닐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개척자가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지그시 눌렀다.
반응은 옆에서 나왔다.
"웃기는군, 지금까지 구렁텅이에 묻혀있던 성물이다. 그 사용법을 네가 안다고?"
놈이 혀를 날름거렸다. 서늘함이 목을 간질였다.
"자네, 성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가?"
개척자의 시선이 놈에게 향했다. 그에 놈이 눈을 구겼다.
"빌어먹을-. 그래, 성물은 마물을 마나로 바꾼다. 그것으로 마경을 넓히지."
놈이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군."
놈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 그래? 그러면 네놈은 아느냐?"
"음, 저걸 보고도 모르면 그게 마법사인가. 길버튼 경이지."
"······뭔 경?"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올려봤다. 개척자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성물은 마물의 생명력을 갈취하네. 피의 마나 용해도가 내려가면서, 마나가 자연적으로 퍼지지. 마물 조련사가 안 알려줬나 보군?"
"어이가 없군."
놈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흰 뱀이 입을 쩍 벌렸다. 살벌한 기세가 가득 퍼졌다.
그때-.
"그만."
개척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극히 무거운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짓눌렀다.
흰 뱀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 위에 있던 놈은 작게 흔들린 게 전부였다. 놈이 눈을 구겼다.
"그래서?"
개척자가 녹슨 목소리로 물었다.
놈은 계속해보라는 듯 팔짱 끼고 지켜봤다. 여유가 만연했다. 갈라하드에게는 기회였다.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에게 필요한 건 황제에게 향하는 길 아닌가?"
대답은 없었지만, 중압감이 조금 옅어졌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네는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영역을 넓히는 중일세. 그래서 어느 세월에 돌아가겠나? 상당히 비효율적이라는 걸세."
개척자의 녹슨 갑주가 삐꺽-소리를 냈다. 뱀 놈이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길을 내어야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놈이 가벼이 뱀에서 내렸다. 개척자의 중압감이 강한데도, 놈은 무리 없이 움직였다.
'제법이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길을 내다니,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구나. 성물을 이용하면, 영역을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길을 만드는데, 영역을 넓혀야 한다니? 자네, 멍청한가?"
갈라하드의 말에 놈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조소를 머금던 얼굴이 깨지며, 짜증이 올라왔다.
"개척자여."
놈이 지팡이를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꼭 주문을 외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개척자의 기세가 일변했다. 주변의 공기가 배로 무거워졌다.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깊게 눌렀다. 순간 휘청일 정도였다.
'장악력은 있군.'
다만, 개척자가 바로 공격하지 않는 걸 보니, 완전한 건 아닌 듯했다.
"마그누스 장군."
갈라하드는 마나를 섞어서 말했다. 개척자의 시선이 격하게 돌았다.
확실히 과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폐하가 위험합니다."
갈라하드는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중압감이 씻은 것처럼 사라졌다. 개척자의 시선이 또렷해졌다.
참으로 충직한 장군이었다.
"보겠다."
개척자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 존재감이 가득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그에 놈의 눈이 뒤틀렸다.
"멍청한 놈. 길을 만드는 방법이 있겠느냐? 성물로 만들어진 마나는 퍼지기 마련이다."
놈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성물은 마족의 생명력을 가져오는 것으로 마나를 생성하니까. 그걸 가만히 두면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안 퍼지게 만들면 되겠군."
갈라하드는 수통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리고 개척자를 올려봤다.
"자, 성물 좀 잠시 빌려주겠나?"
개척자가 램프를 천천히 내렸다. 이내 갈라하드의 앞에 램프를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영롱한 램프를 살폈다. 주변에 마나가 가득했다. 그 마나의 농도가 짙었다. 그 원인은-.
'생명력을 저장해뒀군.'
램프 중앙의 회색 불이 생명력인 듯했다.
예상대로였다. 램프의 용도는 생명체에서 생명력을 추출하는 게 맞는 듯했다.
갈라하드에게는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있었다. 그 마법진은 생명력으로 마나를 압축해줬다.
그러니 저 생명력을 이용하면, 고농도의 마나를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램프에서 생명력을 꺼내는 방법이었다. 만약 램프에 닿으면-.
'마물처럼 흩어지겠지.'
더불어 저런 종류의 생명력을 마주한 게 처음이었다.
갈라하드는 이제 막 생명력에 알아가는 단계였다. 바로 접촉하는 건 괜히 꺼림칙했다.
'도구를 써야지.'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금색 봉을 꺼냈다. 금색 봉은 그 끝이 뾰족했다. 마법진을 쓸 때 자주 이용한 이유였다.
'세트 아이템.'
본능적으로 세트 아이템인 게 느껴졌다. 그런 금색 봉으로 저걸 찌르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머리에 가득 찼다.
갈라하드는 깊게 심호흡하고, 금색 봉으로 회색 불을 쿡- 찔렀다.
회색 불이 마치 장작이라도 넣은 것처럼 커졌다. 이어서 회색 불이 금색 봉에 옮겨붙었다.
옮겨붙은 회색 불이 금색 봉을 천천히 타고 올랐다. 그 원인은 금색 봉의 양각된 부분이었다.
그 양각된 흔적이 마치 길처럼 불을 인도했다.
'세트 아이템이 맞군.'
회색 불이 금색 봉을 타고 가득 올라왔다.
이내 끝에 도달했고, 손을 타고 짜릿한 게 넘어왔다. 그 느낌이 어딘지 익숙했다.
'아드리안나 손을 잡았을 때와 비슷하군.'
그제야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잡았을 때의 고통을 이해했다.
단순히 마나가 타는 고통이 아니었다.
'생명력을 받는 고통도 있는 거군.'
갈라하드는 이를 악- 물었다.
끔찍한 격통이 퍼졌지만, 아드리안나를 잡았을 때 만큼은 아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정신을 다잡았다.
전에는 미묘하게 느껴지던 감각이 가득 살아났다. 생명력이 온몸으로 퍼졌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허겁지겁 생명력에 달려들었다.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지만, 생명력에 비하면 고통의 알이 너무 작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팔목을 털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생명력에 반응했다. 빛이 가득 뿜어졌다.
수통을 홀짝일 필요도 없었다. 거대한 생명력은 마나를 굳게 압축했다.
그 농도가 어찌나 끈적한지, 몸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피부에 혈관이 가득 일어났다. 그 꿀렁이는 게 실제로 보였다. 상당히 끔찍했지만-.
'짜릿하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웃었다.
만끽하는 것도 잠시였다. 당장 마나를 쓰지 않으면 몸이 터질 위기였다.
계산할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갈라하드가 무식하게 쌓았던 마법이 진가를 드러냈다.
"바람길."
금색 봉을 타고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길은 마경의 연기를 밀어내기 위해서 만든 마법이었다.
원래라면 재를 밀어내는 용도였지만-.
'마경보다 높은 농도의 마나로 펼치면 반대가 되지.'
이내 바람으로 이루어진 통로가 자리했다. 그건 연기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길게 펼쳐진 길에 개척자가 뚝- 하고 멈췄다.
먼 것을 보듯 초점이 흐려졌다.
"그저 불씨를 지핀 걸세. 빨리 장작을 넣게나."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마물을 마나로 바꿔서 마경을 넓히는 건 영구적이었지만, 마법으로 마나를 밀어 넣는 건 한계가 있었다.
"장작-."
개척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주 큰 장작이 필요하겠지."
그에 갈라하드는 놈이 탄 흰 뱀을 응시했다.
"놈! 감히!"
놈이 격하게 반응했지만, 이미 개척자의 눈이 돌아간 뒤였다.
"안 돼!"
흰 뱀이 무형의 힘에 끌려왔다. 개척자는 램프를 흰 뱀에 가져갔고-.
재가 가득 휘날렸다. 재는 흩어지지 않고, 갈라하드가 만든 바람길을 타고 나아갔다.
길이 길어졌다.
"제국을 위하여-."
개척자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개척자가 세 걸음이나 나아갔다.
개척자가 다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아, 장작을 넣게나."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쳐다봤다.
멍청한 갑주를 입은 마족이 가득했다.
개척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폐하가 기다리신다."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개척자의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개척자가 손을 휘두르자, 퍼져있던 마족들이 가득 끌려왔다. 애초에 마족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마물, 마족 상관없이 연속으로 램프가 터졌다.
그때,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갈라하드에게 서늘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흰 뱀 마물을 상당히 아낀 듯했다.
"음,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게."
정성껏 위로했지만, 적개심은 더 날카로워졌다.
****
"······빡대가리라뇨!"
그웬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얼굴에 분함이 가득했다. 그 상대인 길버튼은 억울했다.
"아니, 천재라니까."
"그 전에 빡대가리라고 했잖아요!"
"아니, 대장이 먼저 그렇게 불렀잖아. 왜 나한테만···."
"길버튼님한테 멍청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그웬이 뾰족하게 대답했다. 평소 착하던 그웬이 정색하고 화를 내니, 길버튼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크흠, 이번에는 길버튼님이 너무 하셨습니다."
"우-. 나빴다."
톰까지 그웬 편을 들었다. 어깨에 붕대를 감은 데미안이 야유했다.
"아니, 왜-."
이놈들은 내가 기사라는 걸 까먹은 걸까. 길버튼은 북부의 정예, 1대대 출신이었다.
"우-."
데미안이 다시금 야유했다.
"시끄럽다. 빌어먹을 꼬맹이."
"알았어요. 못생긴 아저씨."
데미안의 반격에 길버튼의 말문이 막혔다.
"휴식 끝. 다시 진입한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길버튼은 안도했다.
아드리안나가 특무대 쪽으로 다가왔다. 기사들이 지키는 그웬에게 향했다.
"그웬이여, 바라아아암! 좀 해줄 수 있겠나?"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부탁했다.
"알겠어요!"
그웬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웬 주변의 기사들이 물러났다. 길버튼은 나지막하게 흐흐- 웃었다.
갈라하드라서 딱히 걱정은 안 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혼자서 수백의 마족을 어떻게 흔들겠다는 건지-.
"안개 싫어! 바라아아아암!"
그웬이 크게 소리쳤다. 거친 바람이 그웬의 뒤로 몰아쳤다.
이어서 바람이 안개를 천천히 밀어냈다.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흐릿한 정도였다. 다만, 그건 아주 큰 차이였다.
이제 본대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았다.
다른 기사들도 오러를 일으켰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지긋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네?"
본대가 있어야 할 곳이 휑했다.
안개로 이루어진 길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
"저거 화살표냐?"
여기로 오라는 듯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
"아니, 전부 물에 넣으라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펌킨은 터지려는 욕을 꾹 참으며 말했다.
"답답하군! 자네, 길버튼인가?"
"길버튼이라니 그게 뭔 개소리십니까?"
"갈라하드가 불로 태워서 찾아내지 않았나. 남은 마족들은 불을 대비하겠지. 자, 그 약점을 노리는 걸세. 답은 물이야!"
퍼스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태초의 물-."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주문을 읊었다. 그 굵직한 손가락에서 물이 울컥 나왔다.
'주문을 왜 조용하고 빠르게 읊어?'
펌킨은 질색했다. 애초에 검에 지팡이도 넣지 않았나-.
"자, 마나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네. 그러면 마나로 만든 물은?"
"······마족에게 붙는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퍼스트가 흐흐 웃었다.
확실히 깔끔하고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단지 갈라하드랑 어떻게든 다르게, 멋있게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그 결과가 좋다는 게 더 꺼림직했다.
"먼저 확인부터 해야겠지. 자, 펌킨-."
"미친-. 꺼지십쇼."
142화 폐하
'흥미는 끌었다.'
녹슨 쇠냄새가 코를 가득 찔렀다.
그에 갈라하드는 지그시 위를 올려봤다.
거대하고 녹슨 갑주가 갈라하드를 가만히 내려봤다.
단지 시선이 닿은 것인데, 어깨가 무거워졌다. 중력이 열 배는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게 마경의 고위 마족이군.'
놀라울 정도의 압박이었다.
다만-.
'대공만큼은 아니군.'
대공에 비하면, 다소 약한 감이 있었다. 그런 대공의 압박을 몇 번이나 느껴봤기에,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그때-.
"뭐야, 이건."
어디선가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개척자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흰색 뱀이 보였다. 서늘한 느낌이 풍겼다.
'최상급 마물이군.'
그 최상급 마물의 머리에 누군가 있었다. 펑퍼짐한 옷을 입은 놈이었다.
뱀처럼 생긴 창백한 인상의 사내였다. 최상급 마물에 탄 사내라-.
'마물 조련사.'
뭉쳐서 습격했던 마물들이 떠올랐다. 마물에는 진짜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저놈이 한 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마법진을 새긴 마물들을 뒀나 했더니-.
'램프용으로 준비해둔 거군.'
톡톡,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가벼이 두드렸다.
여기서 마물 조련사라니-. 개척자로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이었다.
다만, 변수가 들어오니 미심쩍었던 것들이 맞춰졌다.
'애초에 저 이성이 희미한 개척자가 네발 마족을 노렸다는 게 이상했는데, 배후가 있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너, 뭐냐고 묻잖아."
뱀처럼 생긴 놈이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여유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살폈다. 개척자의 기세가 조금 줄어 있었다. 정확히 놈이 등장하고 바뀌었다.
그렇다면-.
'개척자에게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새겨뒀나?'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마법진으로 고위 마족인 개척자를 움직였다는 건가-.
'아무리 이성이 없다고 해도 고위 마족인데.'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다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개척자의 초점 없는 눈이 다시 갈라하드를 향했다.
[제국을 위하여-.]
개척자의 노쇠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개척자의 목적은 뚜렷했다.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
'아, 개척자의 욕망을 이용했군.'
마법진으로 경계를 누르고, 황제에게 향하는 개척자의 욕망을 이용한 듯했다.
오-,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감탄했다.
"어이, 뭐냐고 묻잖아."
흰 뱀이 고개를 숙였다. 놈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뿌렸다.
"어쭈?"
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마나가 흩어졌다. 아니, 찢겼다. 확인용으로 가벼이 뿌린 마나를 눈치챘다니-.
"제법이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제법? 하, 어이없는 새끼일세."
"네가 마물 조련사인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놈-."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살폈다.
'완전히 장악한 건 아니군.'
흰 뱀이 입을 쩍 벌렸다. 수백의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갈라하드일세."
"······갈라하드? 아, 네가 갈라하드구나?"
갈라하드를 아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대는 여명이겠군. 참 상당히 부지런한 조직일세."
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꼭 먹이를 앞에 둔 뱀의 모습이었다. 손에 든 괴상하게 생긴 지팡이가 흔들렸다. 지팡이에 달린 문양이 알록달록한 빛을 풍겼다.
'마법사군. 그것도 고위계-.'
여우 가면과 느낌이 달랐다. 여우 가면은 아예 감이 안 왔지만, 놈은 그 감각이 전해졌다.
'마물을 이용해서인가.'
갈라하드는 놈 아래의 마물을 살폈다. 흰 뱀의 혀가 길게 날름거렸다. 그 혀에 뼈처럼 돌기가 오돌토돌하여 살벌했다.
'최상급 마물인가.'
최상급 마물을 말처럼 타고 다니는 놈이 있다니-.
'대공이 좋아하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공이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운이 좋군."
그때, 놈이 제 입술을 핥았다. 놈의 지팡이에서 불이 거칠게 일어났다.
불은 곧 거대한 새 형상을 했다. 독수리 모양이었는데, 그 밀집도와 세기가 제법이었다.
"오, 꽤 하는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꽤? 미친놈이-."
그때, 개척자가 주먹을 쥐었다. 화려했던 불새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열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놈이 개척자를 보며 목청을 높였다. 개척자는 놈이 아닌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그 초점 잡히지 않은 눈이 옅게 빛났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상황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방법?"
개척자의 노쇠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래, 지금보다 최소 세 배는 빠를 걸세."
개척자의 거대한 건틀릿에 비해 램프는 상당히 작았다. 위태롭게 들린 느낌이었다.
램프의 회색 불이 바람에 휘날리듯 흔들거렸다. 주변의 재가 가득했다.
"그 램프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닐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개척자가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지그시 눌렀다.
반응은 옆에서 나왔다.
"웃기는군, 지금까지 구렁텅이에 묻혀있던 성물이다. 그 사용법을 네가 안다고?"
놈이 혀를 날름거렸다. 서늘함이 목을 간질였다.
"자네, 성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가?"
개척자의 시선이 놈에게 향했다. 그에 놈이 눈을 구겼다.
"빌어먹을-. 그래, 성물은 마물을 마나로 바꾼다. 그것으로 마경을 넓히지."
놈이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군."
놈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 그래? 그러면 네놈은 아느냐?"
"음, 저걸 보고도 모르면 그게 마법사인가. 길버튼 경이지."
"······뭔 경?"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올려봤다. 개척자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성물은 마물의 생명력을 갈취하네. 피의 마나 용해도가 내려가면서, 마나가 자연적으로 퍼지지. 마물 조련사가 안 알려줬나 보군?"
"어이가 없군."
놈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흰 뱀이 입을 쩍 벌렸다. 살벌한 기세가 가득 퍼졌다.
그때-.
"그만."
개척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극히 무거운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짓눌렀다.
흰 뱀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 위에 있던 놈은 작게 흔들린 게 전부였다. 놈이 눈을 구겼다.
"그래서?"
개척자가 녹슨 목소리로 물었다.
놈은 계속해보라는 듯 팔짱 끼고 지켜봤다. 여유가 만연했다. 갈라하드에게는 기회였다.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에게 필요한 건 황제에게 향하는 길 아닌가?"
대답은 없었지만, 중압감이 조금 옅어졌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네는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영역을 넓히는 중일세. 그래서 어느 세월에 돌아가겠나? 상당히 비효율적이라는 걸세."
개척자의 녹슨 갑주가 삐꺽-소리를 냈다. 뱀 놈이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길을 내어야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놈이 가벼이 뱀에서 내렸다. 개척자의 중압감이 강한데도, 놈은 무리 없이 움직였다.
'제법이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길을 내다니,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구나. 성물을 이용하면, 영역을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길을 만드는데, 영역을 넓혀야 한다니? 자네, 멍청한가?"
갈라하드의 말에 놈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조소를 머금던 얼굴이 깨지며, 짜증이 올라왔다.
"개척자여."
놈이 지팡이를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꼭 주문을 외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개척자의 기세가 일변했다. 주변의 공기가 배로 무거워졌다.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깊게 눌렀다. 순간 휘청일 정도였다.
'장악력은 있군.'
다만, 개척자가 바로 공격하지 않는 걸 보니, 완전한 건 아닌 듯했다.
"마그누스 장군."
갈라하드는 마나를 섞어서 말했다. 개척자의 시선이 격하게 돌았다.
확실히 과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폐하가 위험합니다."
갈라하드는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중압감이 씻은 것처럼 사라졌다. 개척자의 시선이 또렷해졌다.
참으로 충직한 장군이었다.
"보겠다."
개척자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 존재감이 가득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그에 놈의 눈이 뒤틀렸다.
"멍청한 놈. 길을 만드는 방법이 있겠느냐? 성물로 만들어진 마나는 퍼지기 마련이다."
놈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성물은 마족의 생명력을 가져오는 것으로 마나를 생성하니까. 그걸 가만히 두면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안 퍼지게 만들면 되겠군."
갈라하드는 수통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리고 개척자를 올려봤다.
"자, 성물 좀 잠시 빌려주겠나?"
개척자가 램프를 천천히 내렸다. 이내 갈라하드의 앞에 램프를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영롱한 램프를 살폈다. 주변에 마나가 가득했다. 그 마나의 농도가 짙었다. 그 원인은-.
'생명력을 저장해뒀군.'
램프 중앙의 회색 불이 생명력인 듯했다.
예상대로였다. 램프의 용도는 생명체에서 생명력을 추출하는 게 맞는 듯했다.
갈라하드에게는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있었다. 그 마법진은 생명력으로 마나를 압축해줬다.
그러니 저 생명력을 이용하면, 고농도의 마나를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램프에서 생명력을 꺼내는 방법이었다. 만약 램프에 닿으면-.
'마물처럼 흩어지겠지.'
더불어 저런 종류의 생명력을 마주한 게 처음이었다.
갈라하드는 이제 막 생명력에 알아가는 단계였다. 바로 접촉하는 건 괜히 꺼림칙했다.
'도구를 써야지.'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금색 봉을 꺼냈다. 금색 봉은 그 끝이 뾰족했다. 마법진을 쓸 때 자주 이용한 이유였다.
'세트 아이템.'
본능적으로 세트 아이템인 게 느껴졌다. 그런 금색 봉으로 저걸 찌르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머리에 가득 찼다.
갈라하드는 깊게 심호흡하고, 금색 봉으로 회색 불을 쿡- 찔렀다.
회색 불이 마치 장작이라도 넣은 것처럼 커졌다. 이어서 회색 불이 금색 봉에 옮겨붙었다.
옮겨붙은 회색 불이 금색 봉을 천천히 타고 올랐다. 그 원인은 금색 봉의 양각된 부분이었다.
그 양각된 흔적이 마치 길처럼 불을 인도했다.
'세트 아이템이 맞군.'
회색 불이 금색 봉을 타고 가득 올라왔다.
이내 끝에 도달했고, 손을 타고 짜릿한 게 넘어왔다. 그 느낌이 어딘지 익숙했다.
'아드리안나 손을 잡았을 때와 비슷하군.'
그제야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잡았을 때의 고통을 이해했다.
단순히 마나가 타는 고통이 아니었다.
'생명력을 받는 고통도 있는 거군.'
갈라하드는 이를 악- 물었다.
끔찍한 격통이 퍼졌지만, 아드리안나를 잡았을 때 만큼은 아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정신을 다잡았다.
전에는 미묘하게 느껴지던 감각이 가득 살아났다. 생명력이 온몸으로 퍼졌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허겁지겁 생명력에 달려들었다.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지만, 생명력에 비하면 고통의 알이 너무 작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팔목을 털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생명력에 반응했다. 빛이 가득 뿜어졌다.
수통을 홀짝일 필요도 없었다. 거대한 생명력은 마나를 굳게 압축했다.
그 농도가 어찌나 끈적한지, 몸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피부에 혈관이 가득 일어났다. 그 꿀렁이는 게 실제로 보였다. 상당히 끔찍했지만-.
'짜릿하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웃었다.
만끽하는 것도 잠시였다. 당장 마나를 쓰지 않으면 몸이 터질 위기였다.
계산할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갈라하드가 무식하게 쌓았던 마법이 진가를 드러냈다.
"바람길."
금색 봉을 타고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길은 마경의 연기를 밀어내기 위해서 만든 마법이었다.
원래라면 재를 밀어내는 용도였지만-.
'마경보다 높은 농도의 마나로 펼치면 반대가 되지.'
이내 바람으로 이루어진 통로가 자리했다. 그건 연기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길게 펼쳐진 길에 개척자가 뚝- 하고 멈췄다.
먼 것을 보듯 초점이 흐려졌다.
"그저 불씨를 지핀 걸세. 빨리 장작을 넣게나."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마물을 마나로 바꿔서 마경을 넓히는 건 영구적이었지만, 마법으로 마나를 밀어 넣는 건 한계가 있었다.
"장작-."
개척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주 큰 장작이 필요하겠지."
그에 갈라하드는 놈이 탄 흰 뱀을 응시했다.
"놈! 감히!"
놈이 격하게 반응했지만, 이미 개척자의 눈이 돌아간 뒤였다.
"안 돼!"
흰 뱀이 무형의 힘에 끌려왔다. 개척자는 램프를 흰 뱀에 가져갔고-.
재가 가득 휘날렸다. 재는 흩어지지 않고, 갈라하드가 만든 바람길을 타고 나아갔다.
길이 길어졌다.
"제국을 위하여-."
개척자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개척자가 세 걸음이나 나아갔다.
개척자가 다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아, 장작을 넣게나."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쳐다봤다.
멍청한 갑주를 입은 마족이 가득했다.
개척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폐하가 기다리신다."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개척자의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개척자가 손을 휘두르자, 퍼져있던 마족들이 가득 끌려왔다. 애초에 마족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마물, 마족 상관없이 연속으로 램프가 터졌다.
그때,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갈라하드에게 서늘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흰 뱀 마물을 상당히 아낀 듯했다.
"음,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게."
정성껏 위로했지만, 적개심은 더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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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대가리라뇨!"
그웬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얼굴에 분함이 가득했다. 그 상대인 길버튼은 억울했다.
"아니, 천재라니까."
"그 전에 빡대가리라고 했잖아요!"
"아니, 대장이 먼저 그렇게 불렀잖아. 왜 나한테만···."
"길버튼님한테 멍청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그웬이 뾰족하게 대답했다. 평소 착하던 그웬이 정색하고 화를 내니, 길버튼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크흠, 이번에는 길버튼님이 너무 하셨습니다."
"우-. 나빴다."
톰까지 그웬 편을 들었다. 어깨에 붕대를 감은 데미안이 야유했다.
"아니, 왜-."
이놈들은 내가 기사라는 걸 까먹은 걸까. 길버튼은 북부의 정예, 1대대 출신이었다.
"우-."
데미안이 다시금 야유했다.
"시끄럽다. 빌어먹을 꼬맹이."
"알았어요. 못생긴 아저씨."
데미안의 반격에 길버튼의 말문이 막혔다.
"휴식 끝. 다시 진입한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길버튼은 안도했다.
아드리안나가 특무대 쪽으로 다가왔다. 기사들이 지키는 그웬에게 향했다.
"그웬이여, 바라아아암! 좀 해줄 수 있겠나?"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부탁했다.
"알겠어요!"
그웬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웬 주변의 기사들이 물러났다. 길버튼은 나지막하게 흐흐- 웃었다.
갈라하드라서 딱히 걱정은 안 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혼자서 수백의 마족을 어떻게 흔들겠다는 건지-.
"안개 싫어! 바라아아아암!"
그웬이 크게 소리쳤다. 거친 바람이 그웬의 뒤로 몰아쳤다.
이어서 바람이 안개를 천천히 밀어냈다.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흐릿한 정도였다. 다만, 그건 아주 큰 차이였다.
이제 본대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았다.
다른 기사들도 오러를 일으켰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지긋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네?"
본대가 있어야 할 곳이 휑했다.
안개로 이루어진 길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
"저거 화살표냐?"
여기로 오라는 듯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
"아니, 전부 물에 넣으라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펌킨은 터지려는 욕을 꾹 참으며 말했다.
"답답하군! 자네, 길버튼인가?"
"길버튼이라니 그게 뭔 개소리십니까?"
"갈라하드가 불로 태워서 찾아내지 않았나. 남은 마족들은 불을 대비하겠지. 자, 그 약점을 노리는 걸세. 답은 물이야!"
퍼스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태초의 물-."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주문을 읊었다. 그 굵직한 손가락에서 물이 울컥 나왔다.
'주문을 왜 조용하고 빠르게 읊어?'
펌킨은 질색했다. 애초에 검에 지팡이도 넣지 않았나-.
"자, 마나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네. 그러면 마나로 만든 물은?"
"······마족에게 붙는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퍼스트가 흐흐 웃었다.
확실히 깔끔하고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단지 갈라하드랑 어떻게든 다르게, 멋있게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그 결과가 좋다는 게 더 꺼림직했다.
"먼저 확인부터 해야겠지. 자, 펌킨-."
"미친-. 꺼지십쇼."
143화 마그누스
[아, 그쪽 말로 고위 마족이 되면 감정이 하나 생겨요.]
여우 가면은 고위 마족이 되면, 한 가지 감정이 생긴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가지 욕구만 남는 듯했다.
가령 지배자는 소유욕이었고, 여우 가면은 흥미였다. 그게 각 고위 마족을 움직이는 동기였다.
개척자는-.
'황제에 대한 충성인가.'
갈라하드는 정면을 쳐다봤다.
개척자는 망설임 없이 램프로 수하들을 재로 만들었다. 재가 연신 짙어졌다.
바람길에 재가 실리며 길이 늘어났다.
개척자는 전진했다.
마물이 전부 재가 되자, 개척자는 병사를 재로 만들었다. 갈라하드의 종용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덕분이었다.
마족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재로 휘날렸다.
램프의 회색 불이 가득 타올랐다.
개척자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내 일을 대신 해주는구나."
그때, 여명 놈이 이죽거렸다. 개척자에게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새긴 놈이었다.
놈은 갈라하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방금 놈의 말처럼, 갈라하드가 마경을 효과적으로 넓혔기 때문이었다.
"감사 인사는 됐네."
"흠, 건방진 놈."
놈이 뱀처럼 입술을 핥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까 발끈한 게 연기로 보일 정도로 순순했다.
'뭔가 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마나를 뿌렸다. 잡히는 게 없었다. 그에 범위와 방향을 넓혀서 다시 뿌렸다.
'아래에 마물을 숨겨뒀군.'
상당히 치밀한 놈이었다. 심지어 최상급 마물 두 마리였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경우의 수를 가정했다.
여기서 가장 큰 위험은-.
'개척자다.'
갈라하드는 개척자로 시선을 돌렸다.
개척자는 병사 하나를 재로 만들고, 또다시 전진 중이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라도 개척자를 더 제어할 수는 없을 텐데?'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를 위한 대비를 해둬야 했다.
'일단, 좀 더 자극해봐야겠군.'
황제와 마그누스라는 이름에 반응했던 개척자였다.
그 부분을 자극하면, 마법진을 누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개척자가 램프를 갈라하드에게 내밀었다. 램프에는 어느새 회색 불이 가득했다.
마물보다 마족이 수율이 좋은 듯했다.
이번에는 바로 금색 봉을 내밀지 않았다. 적당히 중간에서 멈추고 개척자를 올려봤다.
참을성이 부족한지 개척자의 기세가 거세졌다. 숨이 턱- 막혔다. 손이 달달 떨렸다. 죽음이 목을 톡톡 두드렸다.
쯧,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이거 양심이 없군. 무릇 거래는 교환이 기본일세."
압박이 더 거세졌다. 개척자가 램프를 더 내밀었다. 램프가 갈라하드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회색 불이 위태롭게 달랑거렸다. 닿는 순간 먼지가 될 것이다. 마물조차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주 고통스럽게.
갈라하드는 램프 뒤로 보이는 개척자의 눈을 응시하며-.
"마그누스 장군."
마나를 실어 불렀다.
마그누스-.
중압감이 사라졌다.
"옛 이야기 좀 해보게나. 마그누스여."
개척자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
"마그누스."
마그누스는 고개를 들었다.
금발의 소년이 짓궂게 웃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한 미소였다.
"똑바로 잡아라."
소년이 턱을 들며 명령했다. 장난기 섞인 명령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마그누스는 어깨에 힘을 줬다. 소년이 히죽 웃으며 위쪽으로 펄쩍 뛰었다.
소년이 벽 위에 섰다. 그 뒷모습이 자그마한데도 참으로 의젓했다. 소년이 구부리고 손을 내밀었다.
마그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손을 잡았다. 소년의 힘이 상당했다. 이내 마그누스도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 밖은 활력이 넘치는 시장이었다. 소년은 거침없이 걸었다. 마그누스는 다급히 따라붙었다.
"걸리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괜찮다. 나는 영웅이 될 거니까."
"예? 왕이 아니라요?"
"응, 대륙을 구하는 영웅."
"대륙을 어떻게 구합니까?"
"마족의 왕을 잡아야지."
마족의 왕-. 북부에 명백히 존재했지만, 이곳은 남부의 끝이었다. 여기서 마족의 왕은 부모가 잠자리에서 아이들을 겁주려고 하는 이야기였다.
"예? 우리는 남쪽 끝에 있는 작은 왕국인데,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그리고 북쪽 끝에 있는 걸 어떻게 잡습니까?"
마그누스의 물음에 소년은 혀를 찼다.
"그게 영웅이니까. 왕국이야 키우면 된다."
제일 작은 왕국의 왕자가 저런 말을 하다니-. 실로 오만했지만, 마그누스는 왠지 사실처럼 들렸다.
그때-.
"왕자님! 또 도망치셨습니까!"
"이크! 눈치가 참 빠르군! 가라! 마그누스! 도망쳐!"
등을 미는 소년에 마그누스는 당황했다.
"왕자님은-."
"내가 책임져야지. 그게 윗놈의 역할이다."
소년이 시원하게 웃으며 마그누스의 등을 밀었다.
마그누스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 풍경이 흐릿해지고, 다시 또렷해졌다.
금색 파도가 거칠게 일렁였다. 비명과 함성, 병장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사이에 깔끔한 정복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됐나?]
개척자는 성물을 잡았다.
금색 파도가 더욱 짙어졌다. 길이 또렷해졌다.
이내 성물이 가득 찼다.
개척자는 다시 성물을 내밀었다.
[자, 값을 지불해야지. 마그누스여.]
개척자의 초점이 흐려졌다.
****
"마그누스, 왜 떨고 있느냐. 두렵느냐?"
금발의 청년의 물음에 마그누스는 손을 내려봤다.
목검이 아닌 굵직하고 투박한 검이 들려 있었다. 그 손이 가득 떨렸다.
"예, 두렵습니다."
마그누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소년 시절의 얼굴이 옅게 있었다.
청년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대군이 정렬해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행렬은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혔다.
"많기는 하군."
청년이 혀를 가벼이 찼다. 후-. 청년의 얼굴에도 옅은 긴장이 보였다.
청년은 미소를 지어 그를 가렸다. 이어서 검을 뽑았다. 화려한 문장이 박힌 검이었다.
"내 등만 보고 따라오거라."
청년이 검을 높이 들며 말의 배를 찼다.
"진격하라!"
대군을 향해 제일 먼저 나아가는 왕에-.
마그누스는 다급히 말을 두드렸다.
[조금 더 해주지. 야박하군.]
개척자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잿빛 길이었다.
개척자는 성물을 잡았다.
성물을 다시 가득 채웠고-.
[왕국 전쟁의 시작까지 이야기했네. 다음은 제국 설립인가? 오, 재밌겠군.]
****
와아아아아!!!
함성이 세상을 가득 울렸다. 광장에 사람이 가득 모여 있었다. 모두가 기뻐하며 왁자지껄 웃었다.
마그누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검이었다.
"왜 자네가 긴장하나?"
어엿한 사내가 된 청년이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마그누스는 대답 대신 읍- 했다.
"그래, 크기는 좀 맞나?"
사내가 마그누스의 갑주를 두드렸다. 마그누스는 아래를 내려봤다.
꼭 태양을 녹여 만든 듯한 찬란한 갑주였다. 지엄한 황제가 특별히 내려주신 갑주였다.
이제 마그누스는 장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마그누스. 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군."
사내가 마그누스의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쳤다.
사내는 길게 늘어선 장군들과 귀족들, 왕들까지 챙겼다. 하나하나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이어서 백성들까지 돌보고 나서야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에는 금을 깎아서 만든 듯한 드높은 의자가 있었다.
사내가 의자에 앉았다.
"제국을 위하여!"
환호가 거칠게 터졌다. 모두가 황제를 노래하고 칭송했다.
[오, 이어서 이야기하는 건가? 그래, 가끔 이런 서비스도 있어야지.]
마그누스는 조용히 검을 고쳐 잡았다.
*
"마그누스여, 왜 케란켈 왕국을 공격한 거지?"
황제의 호통에 마그누스는 고개를 숙였다.
"동쪽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케란켈 왕국을 가져야 합니다."
"왜 동쪽으로 영역을 넓혀야 하지?"
"제국을 위하여-. 대륙을 통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그누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국은 이제 대륙 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동쪽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케란켈 왕국을 공격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제가 지그시 마그누스를 내려봤다. 그 눈이 전과 달리 서늘했다.
"내가 대륙 통일을 명령했나?"
황제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언뜻 스쳤다. 마그누스는 한참 고민하고 나서야, 그런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내가 제국을 세운 이유를 잊었는가."
"······마족의 왕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이라는 놈들이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기에 제국을 세웠지. 그중 케란켈 왕국은 나를 도와준 왕국이다. 그런데 그대가 케란켈 왕국을 밀어버렸지. 아주 처참하게."
황제의 깊은 눈이 마그누스를 응시했다. 마그누스는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다.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면, 마족의 왕을 상대하기 더 쉽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더냐? 네 손에 묻은 피가?"
마그누스의 말문이 막혔다. 마그누스는 손을 내려봤다. 건틀릿에는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붉은 얼룩이 가득했다.
황제가 혀를 찼다.
"대륙 통일한다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눈이 뒤집혀서는-. 황제인 나보다 더 원하는 것 같군. 알아서 적당히 할 줄 알았건만······. 꼭 명령을 내리게 하는군."
대륙 통일을 앞두고 멈추자니-. 마그누스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황실에서 도는 소문이 떠올랐다. 황제가 겁쟁이가 됐다고-.
그때, 황제가 마그누스를 응시했다. 그 눈은 겁쟁이의 눈이 아니었다. 소년 때처럼 여전히 반짝였다.
"욕망 때문에 피를 흘리면, 우리가 마족과 뭐가 다른가?"
황제의 물음에 마그누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뒤쪽이 시끄러워졌다.
"북부에서 마족이 준동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마족의 소식이었지만-.
"내 검을 가져오거라."
황제는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개척자는 고개를 들었다.
금색 파도가 거칠게 출렁였다.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끝에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있었다.
그건 까마득한 검은색 절벽이었다.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군은 그저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였다.
금색이 부서진 자리에 잿빛이 가득했다.
깔끔한 사내가 개척자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 흔들림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눈이 꼭-.
폐하와 닮았군.
[황제를 닮았다니. 칭찬인가? 칭찬으로 듣겠네.]
개척자는 다시 성물에 불을 채웠다.
성물이 가득 찼고, 길이 끊겼다.
개척자는 성물을 놈에게 내밀었다.
[자, 까불다가 황제 폐하한테 혼나는 부분까지 했네. 다음은- 제마 전쟁이겠군. 맞나?]
*
마족의 준동에 제국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이제껏 대륙을 호령하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처참한 패배의 연속이었다.
거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작용했다.
첫 번째는 제국군이 대륙 통일을 위해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인간 측의 배신자가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세 번째는 마족이라는 종족 그 자체였다.
마족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더 강해졌다. 인간이 죽으면 그 피와 살점을 먹었고, 마족이 죽으면 그 시체를 재로 만들면서 강해졌다.
셋 전부 황제의 말을 듣지 않아 생긴 문제들이었지만, 황제는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윗놈이니, 내 잘못이다."
황제는 소년 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위기의 순간-.
"결사대를 소집하겠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은연중에 모았던 강자들이 떠올랐다.
황제는 검을 잡고 선두에 섰다.
그리고-.
[이런 장작이 다 떨어졌군.]
개척자는 시선을 내렸다.
깔끔하게 생긴 사내가 머리를 넘기고 있었다.
외모는 전혀 달랐지만, 곧은 자세와 흔들림 없는 눈이 황제와 비슷했다.
그때-.
"장작이라면 바로 앞에 있잖느냐?"
누군가 속삭였다.
아니, 명령했다.
개척자의 눈이 뒤틀렸다.
"쓸데없는 반항이다."
개척자의 초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
콰앙-.
갈라하드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순간 방호벽을 세워서 간신히 버틴 것이다.
개척자의 권능은 압도적인 파괴였다. 방호벽이 없었다면, 즉사할 뻔했다. 서늘함이 목을 스쳤다.
한참이나 구르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뭔가 울컥 올라왔다. 거칠게 기침하니 피가 쏟아졌다.
'아주 아작났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개척자가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겨우 잡았던 초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개척자의 기세가 깊게 가라앉았다.
"잘 속네?"
여명 놈이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 얼굴에 조소가 가득했다.
"아래에 마물 숨겨둔 게 전부인 줄 알았네만."
순간 놈의 웃음이 굳었다.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살폈다.
"완전 제어는 아니군. 이성을 더욱 희박하게 한 건가? 위력을 깎는 대신 제어가 가능하게-. 오, 영리한 방법일세."
"이놈-."
갈라하드는 갑주의 이음새를 당겼다. 구겨진 갑주가 바닥을 굴렀다. 하얀 정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뭔가 있는 놈 같아서 일단 둬봤는데, 의외로 상당히 쓸모가 있더군. 소문대로 유능하네?"
"그걸 이제 들었나? 여명은 소문이 좀 느린가 보군."
"건방진-. 됐다. 죽어라."
"아, 잠깐 기다려주겠나."
손을 흔들려던 놈이 뚝- 멈췄다. 갈라하드는 슬쩍 놈의 뒤를 쳐다봤다.
저 멀리 흰색이 보였다.
'예상보다 빠르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이 잘렸다. 얼음송곳이 놈 바로 앞에서 나타났다.
콰직-. 놈의 방호벽에 막혔다.
"이런- 야비한 새끼. 기습을 해?"
"그사이에 방호벽을 쳐두다니 치사하군."
"뭐? 하! 혼자 올 때부터 알아봤는데, 진짜 미친놈이군."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입가에서 피가 거칠게 튀었다.
"이런, 내가 혼자였나?"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동시에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놈의 눈이 탁-하고 풀렸다.
"그러니까 주의 깊게 봤어야지. 공격 한 번 막았다고 방호벽을 풀면 되겠나. 아, 그대도 제법 뛰어났네. 단지 내가 훌륭할 뿐이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놈의 뒤로 빙신도가 거만하게 나타났다.
그 꺼드럭거리는 모양새에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늦게 나타난 주제에 폼을 잡는군. 왜 이제 나오나? 내가 맞을 때까지 기다린 건 아닐 테고-."
"······닥쳐라."
빙신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설마 기다렸나?"
"완벽한 때를 본 것이다."
"이런 속 좁은 빙신을 봤나."
"놈!"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개척자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결사대라."
그때-.
툭,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명 놈이 보였다. 놈의 목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목이 터졌다. 자결용 마도구인 듯했다.
"그거 하나 똑바로 못 잡나? 진짜 빙신이군."
"아니, 이게 스스로 터졌다!"
여명 놈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건 아쉽지만, 그래 어쩔 수 없었다.
진짜 문제는-.
'놈이 개척자의 이성을 지운 상황이라는 거지.'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개척자가 갈라하드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저 무거운 존재감만 가득했다.
구구구-. 녹슨 쇳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꼭 끔찍한 비명 같았다.
개척자의 기세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중압감이 갈라하드를 깊게 눌렀다. 기세가 가득 폭주하듯 풍겼다.
개척자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부이이이인!!"
목청 높여 소리쳤다.
멀리 있던 흰색이 순간 거칠게 일어났다.
흰색 섬광이 공간을 갈랐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땅을 흔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갈라하드는 어느새 아드리안나의 품에 안겨 있었다.
평소 땀 한 방울도 안 나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땀으로 가득했다. 열심히 뛰어온 듯했다.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울컥 기침이 터졌다. 피가 가득 뿌려졌다.
아드리안나의 무표정이 깨졌다. 그 눈동자가 커졌다. 당황이 가득 떠올랐다.
"아, 별거 아닐세."
"이게 어떻게 별거 아닙니까!"
아드리안나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작게 찡그렸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다행일세."
"어찌 남 일처럼 이야기하십니까!"
"그대가 이렇게 오지 않았나. 고맙네, 덕분에 살았네."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렸다.
"내려주겠나?"
아드리안나가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갈라하드를 조심스럽게 내려줬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어느새 개척자는 저 멀리 있었다.
'그 사이에 여기까지 오다니-. 도대체 얼마나 빠른 거지.'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아드리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무심함이 깨지고 옅은 분노가 떠올랐다.
그에 갈라하드는-.
"저놈이 이랬네."
개척자를 가리켰다.
"여기 계세요."
짧게 명령한 아드리안나가 뒤돌았다.
개척자로 향하는 아드리안나에게서-.
순백의 오러가 거칠게 일어났다.
144화 개척자
'음.'
갈라하드는 정면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아드리안나에게 마나는 연료였다. 마족의 농도가 짙을수록 그 성질이 더 거칠게 타올랐다.
마족의 천적인 성질이지만, 문제는-.
'본인까지 태운다는 거지.'
갈라하드는 저 멀리 가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개척자를 마주한 아드리안나의 흰색 오러가 거칠게 타올랐다.
개척자가 손을 휘저었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검이 위쪽을 갈랐다. 허공에 순백의 선이 그어졌다.
쿵! 아드리안나의 주변이 깊게 가라앉았다. 재가 휘날렸다. 금발의 생머리가 거칠게 펄럭였다.
아드리안나가 바로 땅을 박찼다. 흰 선이 공중에 길게 그려졌다.
개척자의 녹슨 견갑이 재가 되어 휘날렸다.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아드리안나를 강타했다.
아드리안나가 거칠게 뒤로 밀려났다. 공중에 뜬 아드리안나가 땅에 검을 박아넣었다. 땅이 길게 갈라지며, 속도가 느려졌다.
아드리안나는 망설임 없이 다시 땅을 박찼다.
공방이 빠르게 이어졌다. 흰 선이 그어졌고, 개척자의 권능이 연신 두드렸다.
그때, 직속 부대의 기사들이 오러를 일으키며 각자 자리를 잡았다.
아드리안나가 개척자를 온전히 담당하고, 다른 기사들이 빈틈을 노렸다.
일종의 사냥이었다.
마경에서 고위 마족을 사냥하다니-.
'제법이군.'
아드리안나 직속 부대가 괜히 북부의 정예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길버튼이 있었다. 그 뒤로 특무대가 있었는데, 전부 꼴이 엉망이었다.
길버튼의 시선이 갈라하드의 붉은 셔츠에 닿았다.
"아니, 왜 맞고 다니십니까."
"때린 놈은 죽었네. 근데 왜 이렇게 늦었나."
"예? 최대한 빨리 온 겁니다만."
"다음부터는 더 빨리 오게나."
길버튼이 씰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톰이 마물 코트를 내밀었다. 그 코트가 깨끗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톰. 코트가 깨끗한데, 세척까지 했나?"
"예, 마물 코트는 불로 지지면 돼서 금방 합니다."
"좋군, 역시 톰일세."
우습게도 마물 코트가 뽀송뽀송했다. 코트를 입은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막대기를 까닥거렸다. 오는 길이 험했는지, 데미안의 꼴도 엉망이었다. 우습게도 그 얼굴은 마경 밖보다 좋았다.
'마경 체질이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끄덕였다.
"부탁 좀 하겠네."
"후우-. 지옥불."
데미안이 막대기를 들이밀며, 건방진 표정으로 거창한 주문을 외웠다.
주문과 달리, 막대기에서 나온 불은 연초에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고맙네. 데미안."
"후-."
데미안이 막대기를 멋들어지게 돌렸다.
연초의 상큼한 레몬 향이 가라앉은 정신을 깨웠다. 자극받은 마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시며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아드리안나에 직속 부대 기사들까지 더해지니, 승기가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아드리안나가 개척자를 연신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역시 아드리안나님입니다."
길버튼이 투박하게 감탄했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찾았다.
"그웬. 뾱일세."
"예? 저 뾱이 없어요! 다 썼어요!"
그웬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탱탱하던 볼이 홀쭉하고, 눈이 퀭했다. 마나를 다 쓴 듯했다.
"아껴 쓰지 그랬나."
"네에?! 대장님이 다 쓰셨잖아요!"
"미리미리 채워두게."
"어떻게 채워요?"
"아직도 모르나?"
"네! 몰라요! 알려주세요!"
그웬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마법에 소극적이었던 그웬의 변화였다.
다만, 그웬에게 마나를 채우는 방법을 설명하려니 까마득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저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게나."
"크게요?"
"그렇지."
갈라하드는 끄덕이며 옷깃을 고쳤다.
"뭐 하십니까?"
"부인을 도와야지."
길버튼이 대놓고 갈라하드와 저 멀리 아드리안나를 번갈아봤다.
"대장이 아드리안나님을 말입니까?"
"자네, 눈빛이 상당히 하극상일세."
백색의 오러를 찬란히 뽐내며 개척자를 몰아붙이는 아드리안나였다. 엉망인 갈라하드가 그런 아드리안나를 돕겠다는 건 다소 이상했다.
다만-.
"아드리안나가 질 걸세."
"······예?"
"개척자는 고위 마족일세. 이곳은 마족의 본진인 마경이고."
"아드리안나님도 상태가 좋지 않습니까?"
"마경이니까. 아드리안나에게 마나는 연료일세. 이곳은 연료가 넘치는 곳이고."
"······그러면 좋은 거 아닙니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쏟으면 어떻게 되겠나?"
"더 크게 타오릅니다."
"정답일세. 아드리안나는 활활 탈 걸세."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순백의 오러가 상당히 거셌다. 오러는 장작을 넣은 불처럼 점점 더 커졌다.
"마경에서 아드리안나는 마족의 마나와 마경의 마나를 동시에 받네. 마족보다 부담을 두 배로 받는 거지. 대신 견디면 배로 장점이지만-. 지금은 다소 부족하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 대장밖에 없을 겁니다."
길버튼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나가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손에 꼽히는 강자인 건 나도 알고 있네. 단지 그 상대와 환경이 안 좋은 거지."
갈라하드의 단호한 말에 길버튼이 씰룩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웬의 치료는 못 받았지만, 그래도 마법을 쓸 수는 있었다.
마족의 피도 있었고-.
"돕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길버튼이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버튼 경, 말하지 않았나. 지금 아드리안나로는-."
"저게 부족한 겁니까?"
길버튼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개척자를 향해 뛰는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아드리안나가 대포처럼 개척자를 향해 쏘아졌다.
개척자가 아드리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멀리떨어진 이쪽까지 압박감이 전해질 정도로, 상당한 압박감이었다.
그를 마주한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기름이라도 뿌린 것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위기다-.'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수통을 풀었다.
분명 버티지 못할 순간이었는데-.
아드리안나가 검을 휘둘렀다.
순백의 선이 허공을 길게 그었다. 아드리안나의 양옆으로 땅이 거칠게 솟구쳤다. 갈라진 산이 뒤로 만들어졌다.
순백의 선은 개척자의 권능을 베는 것에 멈추지 않고, 점을 이어갔다.
그리고-.
개척자의 녹슨 견갑에 흰색 선이 길게 그어졌다.
쿵! 개척자의 중심이 흔들렸다. 이내 개척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왼쪽 팔이 그대로 재가 되어 휘날렸다.
개척자의 권능을 가른 것으로 모자라서, 그 팔까지 날리다니-.
'성장했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아드리안나님이 알아서 잘하실 것 같습니다만."
길버튼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 가벼이 끄덕였다.
"이건 내 예상 밖이군. 성장이 상당히 빨라. 원인이 있나?"
"아드리안나님이 화나신 것 같던데, 그래서 강해진 거 아니겠습니까?"
길버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화가 났다. 그로 인해 성장이 빨랐다-.'
화가 난 이유는 아마 갈라하드가 다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일리가 있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여기 계십쇼. 아드리안나님도 여기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아드리안나는 예상보다 더 강했지만-.
"저거 보이나?"
"저 시체는 뭡니까?"
"마물 조련사의 제자일세. 개척자가 폭주한 이유지."
"예?"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갈라하드는 거칠게 기침했다. 피가 다시금 뿌려졌다. 상태가 좋지 않군.
"2 페이즈가 남았다는 걸세."
"2 페이즈가 뭡니까?"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나는 무릎 꿇은 개척자를 향해 전진 중이었다.
그 검에 실린 순백의 오러가 거칠었다. 아드리안나가 개척자에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아드리안나! 뒤로 빠지게!"
갈라하드가 소리쳤다.
개척자의 머리를 바로 앞에 둔 순간이었다.
무시하고 개척자의 머리를 날릴만했지만, 아드리안나는 검을 회수하고 땅을 박찼다.
아주 작은 망설임이 전부였다.
콰앙! 땅이 거칠게 터졌다. 아드리안나가 있던 곳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거기서 나온 건-.
"저거 최상급 마물 아닙니까? 최상급 마물이 왜 땅에 숨어 있습니까?!"
"마물 조련사의 제자가 숨겨둔 걸세."
튀어나온 마물들이 개척자에게 달려들었다.
"왜 자기들끼리 싸웁니까?"
"아니, 장작을 넣는 걸세."
개척자가 램프를 높이 들었다.
마치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마물들이 앞다퉈 램프에 몸을 박았다.
램프가 연신 회색 불을 뿜어댔다. 재가 가득 뿌려졌다.
아드리안나가 지웠던 재들이 짙어졌다.
전보다 더-.
콰아앙! 아드리안나가 뒤로 길게 물러났다. 순백의 오러가 전보다 더 거칠게 타올랐다.
기껏 아드리안나가 잘랐던 개척자의 팔이 다시 자라났다. 오히려 전보다 더 굵게-.
녹슨 갑주에 재가 가득 내려앉았다. 개척자의 거대한 형태가 재로 가려질 정도로 짙었다.
'램프의 생명력을 사용하는 건가.'
괜히 고위 마족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나. 2 페이즈라고."
"아니, 그게 뭔데-."
"그런 게 있네. 길버튼 경과 데미안 따라오게. 톰은 그웬을 보살피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길버튼과 데미안이 따라붙었다.
개척자가 램프를 높이 들었다. 그 주변의 재가 더욱 짙어졌다.
전보다 농도가 짙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상급 마물 세 마리가 갈려 들어갔으니까.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검을 들고 개척자와 대치 중이었다. 그 손이 작게 떨렸다.
'간신히 버티고 있나.'
그때, 개척자가 사방에 권능을 뿌렸다.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지만, 아드리안나는 후퇴하지 않았다.
떨면서도 기어이 개척자를 혼자 마주했다.
지금 핵심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었다.
'어딨을까.'
거친 바람에 재가 연신 뿌려졌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개척자를 살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어딨는지 찾아내야 하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 말입니까?"
"그래, 그 위치를 확보하면, 저 난리를 막을 수 있을 걸세."
"그걸 어떻게 찾습니까."
농도가 너무 짙고, 아드리안나까지 있기에 마나를 뿌려서 찾기는 힘들었다.
순전히 눈썰미로 찾아내야 했다.
그러니까-.
"목뒤에 있겠군."
"······예?"
"보통 마물은 배에 새기네. 주요 부위인 심장 주변에 두는 것이지. 하지만 개척자는 이성이 희박해도 존재하네. 심지어 방금 놈은 이지를 추가로 없앴지.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까워야 하네. 다만, 심장에서 멀면 효율이 떨어지지."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계산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내 끄덕였다.
"마법진은 목뒤에 있을 걸세."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마법진을 파훼해야지.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네. 개척자의 마나 농도가 너무 짙어서-."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꼴이 엉망인 데미안이 빤히 올려보고 있었다.
길버튼은 투박한 기사였다. 잠입에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데미안, 할 수 있겠나?"
"네."
그때, 굉음이 다시 터졌다. 기사들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길버튼의 눈이 씰룩거렸다.
"저런 중요한 일을 꼬맹이한테 맡기다니-.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길버튼이 걱정을 투박하게 말했다.
"길버튼 경, 자네의 검 실력이 뛰어난 건 알지만, 저건 본능적인 회피가 필요하네. 데미안이 적합하네."
길버튼이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갑옷을 벗는 중이었다.
"꼬맹이! 갑옷을 왜 벗냐!"
"어차피 차이 없을 것 같아서요."
데미안이 조금 떨어진 곳에 엎어진 기사를 가리켰다. 기사의 철갑주가 괴상하게 구겨져 있었다. 길버튼의 얼굴이 더 크게 구겨졌다.
"···제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길버튼 경, 자네는 정이 참 많군. 그건 인간으로서는 좋지만, 판단은 이성으로 내려야 하네. 데미안이 적격일세."
"맞아요. 아저씨는 술배가 나왔잖아요."
데미안이 히죽 웃었다. 길버튼은 웃지 못했다.
"데미안, 성공하면 마법 하나 알려주겠네."
"정말요?"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알았어요. 마법."
데미안이 검을 입에 물고 낮게 엎드렸다. 개 같은 자세였다.
"기회가 보이면 시작하게."
검을 입에 문 데미안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갈라하드는 걸음을 옮겼다.
"망할 꼬맹이. 다치기만 해봐라."
갈라하드는 길버튼의 말을 흘리며, 아드리안나로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연신 검을 휘둘렀다. 순백의 오러가 연속으로 선을 그었다.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버티기만 하는군.'
아드리안나는 전과 달리 개척자의 공격을 막기만 했다.
그 원인은-.
'성질을 누르기 버거워하는군.'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어느 때보다 거칠게 타올랐다.
아드리안나의 적은 개척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성질이었다.
성질이 그녀 자체를 태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드리안나는 검을 휘둘렀다.
'놀라운 정신력이군.'
그때, 아드리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맡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가득 떨렸다. 이 상황에도 자기가 맡겠다니-. 아드리안나다웠다.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었군.'
대단한 책임감이었다. 다만,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에게 원하는 건 방패가 아니었다.
마족의 왕을 찌를 검이었다.
'음, 살벌하군.'
갈라하드는 개척자를 살폈다. 개척자는 아드리안나에게 꽂혀 있었다.
갈라하드는 개척자에게 나아갔다.
개척자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마그누스여."
갈라하드는 항복한 것처럼 양손을 번쩍 들었다.
시끄럽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개척자의 손에 들린 램프가 달랑거렸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핏줄이 가득 올라온 아드리안나가 필사적으로 땅을 박찼다.
아주 조금 느렸다.
'실패군.'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앞에 누군가의 등이 나타났다. 익숙하게 무식한 뒤통수는-.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었다. 길버튼이 오러를 가득 일으킨 검을 찔러 넣었다.
저 개척자의 권능에 검을 휘두르다니-. 참으로 우둔했다.
덕분에 개척자의 권능이 아주 잠시 막혔다. 그 대가로 길버튼이 뒤로 거칠게 날아갔다.
아주 짧은 틈이었지만, 아드리안나에게는 충분했다.
아드리안나가 앞을 막아섰다. 그 잡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실핏줄이 가득했다. 이를 질끈 깨물었는지, 핏대까지 올라와 있었다.
굵직한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툭-. 개척자의 양팔이 동시에 잘렸다. 램프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 검에 개척자의 양팔을 자르다니-.
"대단한 솜씨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뒤돌았다. 그 무표정이 깨졌다. 잔뜩 얼굴을 구긴 아드리안나가 입을 뻐끔거렸다.
"진짜 무모하십니다!"
"무모하다니, 자네를 믿은 거지. 그리고 결과가 좋지 않나."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 시원한 미소에-.
"이······ 이······."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욕이라도 하고 싶은 듯했지만, 할 줄 아는 욕이 없는 듯했다.
그때, 개척자의 기세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목뒤에서 뭔가 빛났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길버튼이 쩔뚝거리며 뛰어갔다.
개척자의 초점이 돌아왔다. 마법진의 반작용일까. 초점이 전보다 명료했다.
개척자가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녹슨 눈동자에 한 줄기 의지가 있었다.
"이따 이야기하죠."
살짝 노려본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앞을 가렸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떨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맡겠네."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했다.
"부탁일세."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얼굴이 진지했다.
"왜 굳이-."
양손을 잘랐지만, 개척자는 개척자였다. 여전히 위험했다.
아드리안나가 처리해도 되는 걸, 왜 굳이 자신이 처리하겠다는지 의문이었다.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 말일세."
갈라하드가 뜻 모를 대답을 했다.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엄숙했기에 말릴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망설이는 아드리안나를 지나쳐, 개척자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냄새가 반겼다. 탄내와 피비린내, 녹슨 철 냄새-.
모두를 물리고, 개척자와 마주했다.
갈라하드는 찬찬히 개척자를 살폈다.
화려했던 영광의 갑주와 검이 전부 녹슬어 있었다. 먼지가 가득했고, 여기저기 쇠하여 부서져 있었다.
다만, 눈은 여전했다.
채 녹슬지 못한 우둔한 충성에-.
"자,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갈라하드는 램프를 내밀며 담담하게 물었다.
145화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