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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 135-140

135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마물 조련사라-.'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리며 웃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대단했다. 대신 갈라하드도 바로 완벽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건 마물에 관한 이해도가 있어야 풀 수 있는 난제였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파헤칠 수 없었지만, 따라 그리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전에 마물 조련사의 열화판 마법진을 개정했던 덕분이었다.

'단순히 마법진이 아니라, 마물과 연결된 느낌이군.'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연결이었다. 마물과 연결되는 건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열화판이 마물에게 단순한 행동을 명령하는 게 전부였다면, 진짜 마법진인 지금은 더 밀접한 느낌이었다.

'마법보다는 권능에 가까운 느낌이야.'

마물 조련사는 오대 악인이었다. 다른 오대 악인인 최초의 마법사 마법도 권능에 가까웠던 걸 생각해보면-.

'오대 악인에게 뭔가 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튼,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확실했다.

인간을 향한 적의가 전부인 마물이 입에 들어온 인간을 삼키지 않을 정도로-.

다만, 아직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완벽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위기가 있었지만-.

"굉이가 못 참겠대요! 참아야 착한 마족이지! 굉이야!"

그웬이 메꿔줬다. 그웬이 마물의 혓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 마물이 크게 울컥했다. 안쪽에서 침이 가득 흘러나왔다. 끈적한 액체가 발목까지 적셨다.

"으악! 나쁜 굉이!"

갈라하드는 가죽 장화를 신은 것에 안심하며, 마법진에 마나를 추가로 넣었다. 마물의 침이 멈췄다.

"굉이가 조용해졌어요! 착한 굉이!"

"다행이군. 이상 증상을 보이면 말하게나."

상급 마물인 터라 위태로웠지만, 이 정도면 내려갈 때까지는 버틸 듯했다.

뿌우우우-

쇠한 뿔피리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전장에서 들릴 법한 불길한 소리였다.

쿠웅! 마물이 거칠게 흔들렸다. 고인 침이 홍수라도 난 것처럼 몰아쳤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방호벽을 세웠다. 진득한 침이 방호벽을 따라서 흘렀다.

다른 기사들은 침에 가득 적셔져서 뒹굴었다.

'끔찍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굉이가 아프대요! 아니! 괜찮아! 굉이야!"

그웬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갈라하드는 벽으로 향했다. 아가미 같은 게 있었는데, 마물이 워낙 큰 터라 충분히 나갈 수 있었다.

아가미의 구멍을 타고 밖으로 나가자, 위쪽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지독한 놈들이군."

무표정의 마족들이 이쪽을 향해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때, 날카로운 권능이 마물의 아가미를 길게 그었다. 붉은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분수처럼 보였다.

버티지 못한 아가미 한쪽이 뜯겨서 너덜거렸다.

"굉이의 보조개가! 안 돼! 매력적이었는데!"

안쪽이 훤히 드러났다. 아가미가 뜯기며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졸지에 노출된 기사들의 얼굴에 얼떨떨함이 떠올랐다.

수십의 마족이 쏟는 권능을 그대로 두면, 착지하기 전에 마물이 먼저 죽을 듯했다.

"그웬! 합체일세!"

"네?! 여기서요?!"

"뾱! 말일세! 뾱!"

"아하! 뾱!"

그웬이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끄아아악! 그웬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웬의 뒤쪽에서 자그마한 폭발이 터졌다. 그웬이 그대로 갈라하드에게 날아왔다.

갈라하드는 그웬의 뒷덜미를 잡아 단단히 세웠다. 아래에 있는 돌기가 그웬의 다리를 잡았다.

위쪽에서 다시 권능이 쏟아졌다. 마물이 크게 흔들렸다. 흡사 전쟁터였다.

"나쁜 마족들이 굉이를 괴롭혀요!"

그웬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굉이도 마물이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애써 삼켰다.

마족 사이로 흰색 선이 길게 그어졌다. 먼지가 눈처럼 뿌려졌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절벽을 뛰어다니면서 떨어지는 마족들을 처리했다.

신기에 가까운 무용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마족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웬! 뾱! 일세!"

"네!"

그웬이 갈라하드의 등을 양손으로 내려쳤다. 짝! 경쾌한 소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꼭 내려칠 필요가 있나?"

"아!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서요!"

"그렇군."

마나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가득했던 피로가 밀려갔다. 머리가 명쾌해졌다. 숲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또렷해졌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압축하며 위쪽을 응시했다. 무장한 마족들 수십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표정의 마족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다시금 수십의 권능이 떨어졌다. 옅어진 재에 권능의 형태가 언뜻 보였다.

'화살과 투창이군.'

가만히 뒀다가는 마물이 위험했다.

방호벽으로 막기에는 면적이 너무 넓었다. 저들의 권능은 화살과 창처럼 점 공격이었다. 그걸 면 형태인 방호벽을 넓게 펼쳐 막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갈라하드는 거친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며 경로를 계산했다.

상대는 수십이었고, 이쪽이 쓸 수 있는 건 양손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스파크가 손가락을 타면서 크기를 부풀렸다.

"하앗!"

"시끄럽네. 그웬."

그웬이 입을 꾹 닫았다.

*

"지독한 마족 놈들!"

길버튼이 거칠게 욕하며 검을 뽑았다. 격하게 흔들리는 중이었지만, 그 중심은 완벽했다.

다른 기사들도 오러를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수십의 오러가 일렁이는 건 제법 장관이었다.

기사들은 떨어지는 마물에서 중심을 잡고 위를 올려봤다.

데미안의 눈이 반짝였다.

'확실히 기사는 멋있지.'

톰은 데미안을 보며 쓰게 웃었다.

북부의 기사는 전장의 전사였다. 신념이 검인 기사는 북부에서 모든 이가 선망하고 꿈꾸는 명예였다.

단지 그 비교 상대가 갈라하드였기에 부족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더불어-.

"조를 나눠서 번갈아 뛴다."

"뛰었다가 어떻게 돌아옵니까?"

"몸에 힘을 주면 가라앉는다. 아니면 망토를 펼쳐."

"······똑똑하군."

기사도 결국 칼밥 먹는 이들이었기에, 상당히 투박했다.

"······."

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때, 위쪽에서 백색의 빛이 터졌다. 아드리안나가 까마득한 절벽을 밟으며 뛰어다녔다.

아드리안나의 검을 타고 흰색 선이 길게 그어졌다.

마족들이 막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졌다. 아드리안나는 가득 휘날리는 재 사이를 그대로 통과하여, 바로 다음 마족으로 향했다.

절벽을 달리며 떨어지는 마족들을 베다니-.

전설에나 나올 법한 무용이었다.

거기에 아드리안나의 외형까지 더해지니 굉장했다.

"와-."

기사에 회의적이었던 데미안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기사에 관심을 보이는구나.'

톰은 작게 안도했다.

데미안은 갈라하드를 동경하여 마법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톰이 보기에 데미안이 마법사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데미안은 천직이 기사였다.

그런 데미안이 드디어 기사에 관심을 보였다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의 눈이 아드리안나를 따라서 바쁘게 움직였다.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가 아닙니다. 아드리안나님은 북부의 영웅으로 불리십니다. 모든 이가 존경하고 동경하는 존재지요."

톰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데미안의 입이 점차 벌어졌다.

'거의 다 넘어왔다-.'

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한쪽이 밝아졌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갈라하드가 마물 머리 위에 고고히 서 있었다. 거친 바람에 단정한 머리가 거칠게 휘날렸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위에서는 이쪽을 노리고 수십의 마족이 따라붙는데, 여유 있게 웃다니-.

'역시 대장이다.'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기다란 손가락을 타고 스파크가 튀었다. 순식간에 크기를 부풀린 스파크가 위쪽으로 쏘아졌다.

땅에서 하늘로-, 역으로 솟구치는 번개였다.

찬란한 번개가 안개를 찢어발기며 올라갔다.

중간에서 번개가 갈라졌다. 거대한 줄기가 찢긴 것처럼 펼쳐졌다. 수많은 갈래가 거칠게 뻗어나가며 공중을 채웠다.

그 모습이 어찌나 화려한지, 상황도 잊고 감탄이 나왔다.

그때-.

카득, 뭔가를 씹는 듯한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안개 사이에 있던 무언가가 번개에 관통 당하여 흩어졌다.

역으로 솟구친 수천 갈래의 번개가 빼곡하게 자리했다.

더는 마물이 흔들리지 않았다. 톰은 그제야 저 번개가 마족들의 공격을 파훼했음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군.'

양손에서 번개 줄기를 뻗는 갈라하드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마족을 잡는 건 위쪽의 아드리안나였지만, 거기까지 시선이 닿지 않았다.

갈라하드의 마법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멋있었기에-.

"역시 마법이지."

지팡이를 굳게 잡는 데미안에 톰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너무 강력했다.

****

쿠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물이 바르르- 떨었다.

드디어 바닥에 도달한 것이다. 마물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사이로 묽은 액체가 뿌려졌다.

"우웩-."

기사들이 구역질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굉이야! 괜찮아?! 그래, 괜찮아! 구멍 좀 뚫렸지만, 이 정도면 긁힌 거지!"

"그웬, 비켜주겠나."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도달한 바닥은 마경과 또 사뭇 달랐다.

'붉군.'

주변은 가득 붉었다. 검은색과 회색이 전부였던 마경과 달랐다.

안개도 붉었고, 바닥도 붉었다. 심지어 바닥에는 정체 모를 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무덤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중에는 아직 썩지 못한 살점도 있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살점 하나가 추가됐다.

'위에서 떨어진 것들이군.'

그때, 흰색 선이 그어졌다. 아드리안나가 가벼이 착지했다.

소드 마스터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건 알았지만, 정말로 절벽을 타고 내려올 줄이야-.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는 오히려 갈라하드에게 물었다.

"괜찮네. 자네는?"

"예, 괜찮습니다. 잠깐-."

아드리안나가 뒤쪽에 손짓했다. 주변의 기사들이 모였다. 기사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는 그들을 살폈다.

"엄살이 심하군."

갈라하드는 특무대를 확인했다.

데미안은 눈이 반쯤 돌아갔고, 톰이 그런 데미안을 챙겼다. 그웬은 마물을 두드리고 있었다.

길버튼은-.

"잘하면 될 거 같은데."

위쪽을 보며 검을 비스듬하게 들고 있었다.

그때, 마족 하나가 떨어졌다. 길버튼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마족이 반으로 잘렸다. 가득 뿌려진 피에 길버튼이 붉게 칠해졌다.

"보셨습니까? 한 번에 자른 거?"

길버튼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물었다.

"가만히 놔뒀으면 떨어져서 죽었을 것 같네만."

"그래도 잘랐잖습니까?"

"그건 그렇군. 아주 멋졌네."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갈라하드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붉은 안개 너머로 강렬한 신호가 느껴졌다.

그 신호가 위에 있을 때보다 더욱 짙었다.

네발 마족, 놈이 여기에 있었다.

'흥미롭군.'

구렁텅이라는 명칭과 위에서 버려진 게 분명한 뼈들-. 그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유배지인가.'

그것도 그냥 유배지가 아니었다. 마족도 떨어져서 죽을 정도로 끔찍한 곳이었다.

아니, 유배지보다 무덤이 더 어울렸다.

고위 마족인 놈이 왜 이런 곳에 있을까-.

"아, 전부 무사합니다. 마물을 이용할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가벼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나도 확인해볼 기회가 있어서 좋았네."

"확인이라면-."

"이론과 실전은 다르니까. 확실히 엇나가는 부분이 제법 있더군. 그웬이 없었으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었네."

"······그러니까 확인해보신 거라는 겁니까?"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이자,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씰룩해졌다. 그 입술을 작게 움찔거렸다.

숨을 길게 내쉰 아드리안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그 마족이 여기에 있습니까?"

"있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깊은 곳에서 놈의 신호가 넘어오는 중이었다. 네발 마족은 강렬하게 갈라하드를 부르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다시 강조했다. 그 눈에 불안이 떠올랐다.

붉은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다. 확실히 불길했지만-.

"위보다는 마나 농도가 옅네. 이 정도라면 마족의 영역보다 적겠군."

갈라하드의 손가락 위에 마나 화살이 떠올랐다.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지만, 마나 농도만 따지자면 마경 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옅었다.

'그러니 떨어져 죽은 거겠지.'

마나 농도가 옅으면 마족도 약해진다. 안 그래도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그에 버티지 못하고 죽은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 있는 놈들은 진짜라는 거군.'

이 옅은 농도에서도 저 까마득한 절벽을 버텼다는 거였으니까.

혹여 살아남았다면, 강한 놈일 수밖에 없었다.

"저쪽일세."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한쪽을 가리켰다.

아드리안나가 가벼이 끄덕이며 뒤에 손짓했다.

"진입한다."

명령을 내린 아드리안나가 성큼 나아갔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뭔가 이상했다-.

"진입한다!"

아드리안나는 다시금 소리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을 거역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모두가 굳어 있었다.

어떤 이는 어깨를 풀던 자세로-, 어떤 이는 검을 잡은 상태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 빠릿빠릿하던 기사들이 멍하게 있었다.

직속 부대만이 아니었다. 특무대도 다들 멍하니 있었다. 누군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다들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길버튼까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버튼까지 당하다니-.

"길버튼 경."

갈라하드는 다급히 길버튼을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당한 게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길버튼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 다들 이상합니다."

길버튼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모두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유는 뻔했다.

"정신계 마족일세."

"······아무런 징조도 없이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도착했다고 안심한 순간을 노렸겠지."

"그러면 길버튼은-."

"저 길버튼입니다. 저는 방심하지 않습니다."

길버튼이 히죽 웃으며 꽤 멋들어지게 말했다.

"떨어지는 마족 자르겠다고 오러를 돌린 덕분일세."

길버튼의 입이 꾹 닫혔다. 검에서 피가 뚝- 떨어졌다.

그때-.

"오는군."

한쪽에서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짙은 마나가 가득 풍겼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충동이 가득 일어났다. 고통의 알이 군침을 삼켰다. 이내 갈라하드의 눈치를 보더니 조용해졌다.

길버튼과 아드리안나가 칼자루를 잡았다. 둘이 갈라하드 앞에 섰다.

"내가 맡겠네."

갈라하드는 둘을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그때, 붉은 안개가 길을 내듯 옆으로 퍼졌다.

'최고급 마족이군.'

지배자 정도는 아니었지만, 최고급 마족은 충분히 거물이었다.

등장한 건 귀족처럼 번듯하게 입고 머리까지 깔끔히 넘긴 미남자였다.

마족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네놈이군."

마족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거기에 떠오른 건, 명백한 증오와 분노였다.

"맞네, 내가 그 갈라하드일세."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었다.

놈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서늘함이 줄기처럼 뻗쳤다. 순간 등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게 최고급 마족-.'

마중 나온 놈이 이 정도라면, 네발 마족은 어떻겠나. 갈라하드는 고인 침을 애써 삼켰다.

"나를 찾아온 거 아닌가?"

그리 묻자 놈이 화를 참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흉내 내기였다. 혹은 습관이거나.

"그래, 기다리고 계신다."

마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발 마족이 보낸 게 맞는 듯했다. 길 안내까지 보내주다니 상당히 친절한 마족이었다.

다만, 이어진 마족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상당히-.

"성녀님은 이쪽에 계신다."

성녀? 묘한 호칭에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놈을 보낸 건, 분명 네발 마족일 것이다. 지금도 강렬하게 신호가 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성녀라니-.

'네발 마족이 성녀?'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성녀면 여자 아닙니까?"

길버튼이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136화 이유

"······성녀?"

갈라하드의 되물음에 마족의 눈이 구겨졌다.

"미천한 입에 감히 담지 마라."

마족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신성 모독이라도 당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 반응이 뜻하는 건-.

'네발 마족을 진짜 성녀로 취급하는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녀라는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성녀는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였다. 교단의 심볼이며 동시에 근간이었다.

그렇기에 성녀는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대의 성녀는 교단의 본당에 있었다.

그런데 네발 마족이 성녀라니-.

'제마 전쟁 당시의 성녀겠군.'

갈라하드는 텁텁하게 중얼거렸다.

"따라오도록."

그때, 마족이 짧게 말하고 뒤돌았다. 이 자리에 있는 게 싫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잠깐, 굳은 이들의 안전은 보장되나?"

갈라하드는 굳은 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모든 건 그분의 허락 아래에 존재한다."

그에 마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안전하다는 이야기군.'

네발 마족이 굳이 이쪽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놈이 관심 있는 건 갈라하드였으니까.

그때-.

"빌어먹을. 안전하다는 거야. 안 안전하다는 거야."

길버튼이 투박하게 욕설했다. 마족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미개한······. 안전할 것이다."

마족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 잠시도 있기 싫은 눈치였다.

"안전하다는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길버튼 경이 지키고 있게나."

"예, 알겠습니다."

"오러는 계속 돌리고. 아드리안나, 자네는 나와 같이 가지."

길버튼이 굳게 끄덕였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뒤로 붙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괜찮네. 자네가 있지 않나."

"아······."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내 칼자루를 단단히 잡았다.

밖에서 지배자도 잡았던 아드리안나였다. 이 마나 농도에서 놈이 아드리안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불어-.

'애초에 그럴 리도 없고.'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다만, 변수가 있었다.

'놈은 정신계 고위 마족이다.'

지금은 약해진 듯했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네발 마족의 장악력도 강해질 것이다. 대비할 수단이 필요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머리를 만져주게."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에게 당부했다.

"······머리를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그 눈썹이 크게 흔들렸다.

"놈은 정신계 고위 마족일세. 내가 정신 간섭을 당할 가능성도 있네."

"아, 이해했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결연이 떠올랐다. 혹 전쟁에 나가는 듯한 진지함이었다.

"그······."

"왜 그러나."

"어떻게 쓰다듬습니까? 이렇게 하면 목의 부상 위험이 있으니, 이렇게······?"

아드리안나가 손을 붕붕 휘둘렀다. 손에 어찌나 힘을 줬는지, 공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부드럽게 쓰다듬겠나?"

"아, 이해했습니다. 부드럽게."

부웅-. 아드리안나의 부드러움은 개념이 조금 다른 듯했다.

다만, 이건 아드리안나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안에 있는 네발 마족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헛수작 부려도 소용없다고-.

갈라하드는 벌써 멀어진 마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나가 주변을 경계하며 따라왔다.

걸음마다 끈적한 게 따라붙었다. 바닥에 쌓인 붉은 재가 발을 붙잡았다.

'신기한 곳이군.'

붉은 안개가 더욱 자욱해졌다. 붉은 안개는 피부에 닿으면 송골송골 맺혔다. 꼭 피 같은 형태였는데, 슬쩍 맛보니 피는 아니었다.

그때, 주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곳곳에 마족이 있었다. 풍기는 존재감이 심상치 않았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뿌렸다. 압축한 마나인데도 그대로 사라졌다.

'최상급 마족이군.'

최하가 최상급 마족인 놈들이 곳곳에 있었다. 놈들은 경계하듯 이쪽을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의 기세가 살벌했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다. 아드리안나가 칼자루를 꽉- 잡았다.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경고했다. 아드리안나도 긴장할 정도로 마족들의 기세가 강렬했다.

경고가 가득 올라왔다. 등이 서늘하고 목이 간지러웠지만-.

"괜찮을 걸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앞에서 길 안내하는 놈의 기세가 이중 제일이었다. 그런 놈이 성녀라고 부르는 네발 마족이었다.

네발 마족의 목적은 뚜렷했다. 황제의 죽음-. 그를 위해서는 갈라하드가 이곳을 무사히 나가야만 했다.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해할 가능성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눈으로 끄덕였다. 슬쩍 갈라하드 앞에 섰다.

마족을 따라서 도착한 곳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건-.

"신전이군."

아주 거대한 흰색 신전이었다. 그 위용이 상당했다. 교단의 본당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대단하군.'

감탄하던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주변은 온통 붉은색 일변도였다. 바닥에 뒹구는 돌도 옆에 선 까마득한 절벽도.

그런데 저 신전을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해졌다. 그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뼈로 만들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뼛가루로 지은 신전이라니, 마족에 어울리는군.'

신전에 다가가자 주변의 적개심이 더욱 뾰족해졌다. 이제는 피부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신전 앞에 마족 두 마리가 있었다. 둘 다 여인이었는데,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작았다. 공통점은 수녀복 같은 옷을 입었다는 거였다.

이쪽을 발견한 둘이 동시에 얼굴을 구겼다. 선명한 적의였다.

"성지에 인간을 들이겠다는 거냐?"

그중 작은 마족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키 큰 여인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수준 높은 정신 간섭이었다.

다만-.

"같잖군."

네발 마족으로 단련된 갈라하드였다. 방비로 압축한 마나를 머리에 가득 두른 상태였다.

상대가 최상급이라도 접촉 없이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지그시 웃자, 둘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온화한 여인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작은 여인이 까랑까랑하게 웃었다.

"감히 같잖다니-."

"재밌는 인간이구나! 아니, 인간이 맞나?"

둘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때, 인도했던 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그분의 뜻이다."

"아아-."

여인 둘이 동시에 물러났다. 둘을 무른 마족이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그 얼굴에 마땅찮음이 가득했다. 참으로 건방진 얼굴이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도록."

마족이 갈라하드에게 명령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구겨졌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아드리안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나를 불태우는 아드리안나는 마족의 천적이었으니까.

다만-.

"우리는 방금 약혼한 사이일세. 한창 좋은 시기지. 떨어지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렇지 않나?"

마족의 미간이 가벼이 구겨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지?"

"같이 들어간다는 이야기일 걸세."

"불가하다. 저런 존재를 들일 수 없다."

마족의 대답이 단단했다. 그 눈에 작은 여지조차 없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격하군.'

갈라하드는 신전을 응시했다. 그 거대한 신전 입구 사이로 짙은 어둠이 보였다.

강렬한 신호가 나왔다. 네발 마족이 거기에 있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에게 했던 말을 경계하는 건지, 아니면 그 힘이 생각보다 더 약해진 건지 수작을 부리지는 않았다.

"내 말을 오해했나 보군."

갈라하드는 담담히 말하며 아드리안나의 견갑을 당겼다. 어? 아드리안나가 그대로 굳었다.

"이건 제안이나 협상이 아닐세."

마족들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지독한 적의가 새어 나왔다.

"통보지."

갈라하드는 음미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주제를 모르는구나."

순식간에 긴장이 가득 팽배했다. 아드리안나가 뚝딱거리며 칼자루를 잡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미개하기는 자네가 더 미개하네만. 애초에 그 복식이 얼마나 우스운 줄은 아는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마족이 움찔거렸다. 그 어깨가 살짝 뒤틀렸다. 당장이라도 권능을 뿌릴 듯한 자세였다.

그때, 마족의 몸이 흔들렸다.

"하, 꺼져라."

이내 마족이 코웃음 쳤다.

'내가 굽힐 거라 생각하는군.'

합당한 추론이었다. 마경의 구렁텅이까지 찾아왔으니까. 실제로 제법 급하기도 했다.

다만, 협상에서 중요한 건 기세였다.

"들리나? 꺼지라는군."

갈라하드는 안쪽에 소리쳤다. 그에 마족들이 질색하며 기세를 일으켰다. 아드리안나가 검으로 갈라하드 앞을 막았다.

기세가 순식간에 뭉개졌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아쉽게 됐군. 그러면 꺼지겠네!"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아드리안나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히려 올 때보다 걸음이 더 빨랐다. 아드리안나가 바로 옆에 붙었다.

아드리안나가 올려봤다. 그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돌아가도 괜찮냐고 묻는 듯했다.

걱정할 만했다. 이쪽도 급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당장 마경이 늘어난 이유도 알아내야 했고, 마족의 왕에 관한 단서도 있었다.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 마경의 구렁텅이까지 온 게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나가는 길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고위 마족이 더 있지 않겠나?"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당황이 가득 떠올랐다. 아드리안나는 묻지 않고 끄덕였다.

그렇게 돌아가자-.

"······벌써 끝나셨습니까?"

오러를 가득 일으킨 길버튼과 다시 마주했다.

아직 신호가 없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준비하게. 올라갈 테니까."

"이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길버튼이 1대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해결하겠네."

갈라하드는 손을 풀었다.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전과 달리 그 보폭이 좁았다.

'왔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안개가 걷어지고 얼굴이 잔뜩 구겨진 마족이 나타났다. 그 얼굴에 드리운 건 짙은 패배감이었다.

"······성녀님께서 허하셨다."

마족이 이를 질끈 깨물며 말했다. 자제하지 못한 적개심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제법 살벌한 기세였지만-.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한 거지?"

갈라하드는 대놓고 이죽거렸다.

뿌드득-, 마족이 이를 크게 갈았다. 그때, 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 눈이 풀렸다.

이내-.

"결례를 용서해주십쇼."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땅이 크게 울렸다. 피가 튀었다. 격한 사죄였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아량이 넓으니까. 아, 안내는 필요 없네. 여기서 길버튼 경 말동무나 좀 해주게나."

갈라하드는 마족을 가벼이 지나쳤다.

아드리안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마족과 갈라하드를 번갈아보다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이게 무슨-.'

길버튼은 눈을 끔벅였다. 그 건방졌던 마족이 갑자기 머리를 찍으면서 사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역시 대장이군.'

길버튼은 중얼거리며 오러나 일으켰다.

데미안에게 하도 뜯어먹힌 탓에, 오러 실력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길버튼은 특무대 앞에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박은 마족이 보였다.

"어이, 마족. 놀지 말고 너는 이쪽 지켜라."

마족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

신전 안은 온통 하얬다. 밖과 달리 안개는 없었다. 그저 휑했다.

신전은 생각보다 더 컸다.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에 두개골을 쌓아 만든 제단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두개골이 쌓인 제단에는 짙은 재가 가득했다.

마치 마경처럼-.

'제단으로 마경을 만들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짙은 재가 갈라지며 뭔가가 나타났다.

그 강렬한 존재감에 마주한 순간 고위 마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뱀처럼 찢어진 금색 눈동자와 수풀처럼 치렁거리는 초록 머리-. 네발 마족이었다.

'검이 꽂혀있군.'

놈의 명치에 기다란 검이 꽂혀 있었다.

세월이 오래 지났는지 녹슬고 풍화된 검이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세기의 명검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기다란 검이 놈의 가슴에 깊게 꽂혀 있었다. 검 주변으로 기다란 쇠사슬이 뻗어 있었는데, 검과 달리 전혀 녹슬지 않았다.

'물리적인 게 아니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네발 마족의 덩치가 상당히 작다는 점이었다. 그웬보다 더 자그마한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아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성인의 얼굴이었다.

그게 뜻하는 건 명백했다.

"너, 요정이었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위 마족인 놈이 사실 요정이었고, 또 성녀라니-.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그때, 놈이 고개를 들었다. 신성함과 불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노란색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고-.

"왔구나. 나의 사도여."

문제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딸꾹질했다.

"······사도라니?"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너는 내 사도다."

네발 마족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만."

"네 맹세로 맹약이 세워졌다. 너는 사도다."

놈이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를 죽이겠다고 말한 게, 놈에게 다르게 작용한 듯했다.

그 이후에 놈의 영향력이 늘어난 게 떠올랐다. 계약으로 작용했다고 여겼는데, 놈에게는 맹약인 듯했다.

'사도라-.'

찝찝한 호칭이지만, 결국 호칭이었다. 야만인 연기도 했었는데, 고작 사도라는 호칭이 문제겠나.

중요한 건-.

"그래, 마족인 네가 성녀라고. 요정에다가."

놈의 정체였다.

마족이 성녀라는 것도 놀라운데, 그 본신이 요정이라니-.

"맞다. 나는 요정으로 태어났고, 성녀로 선택받았으며, 마족으로 저주받았다."

놈이 순순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요정에서 마족이 되었다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머리가 둔하구나. 기사인가?"

"······예, 기사입니다."

"그럴 것 같았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구겨졌다.

놈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그 노란 눈동자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제마 전쟁 당시의 성녀일 것이다. 교단은 제마 전쟁 당시에 제국 못지 않게 강대했던 집단이었다. 따로 교국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 이후로 교단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이제는 북부나 왕국 연합과 다름없는 신세였다.

"어떻게 요정이 성녀가 될 수 있지?"

갈라하드는 가장 의문인 점을 꺼냈다.

"종교는 종족에 상관없다."

대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놈이 그렇다니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다만-.

"그렇다기에는 지금은 마족이지 않나? 교단은 마족에 적대적일 텐데."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휘청였다. 갈라하드의 시야가 점멸했다.

그리고 보이는 건-.

셀 수 없이 무수한 시체와 짙은 썩은 내, 기쁨에 몸서리치는 살찐 까마귀, 쇠한 신음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숨소리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금발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의 갑주는 화려했다. 만연한 황금이었고, 그 투구는 왕관의 형상이었다.

누가 봐도 용사였다.

또한-.

황제였고.

그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가득했다.

그건-.

[이게 최선이야.]

짙은 패배감이었다.

사내는 용사이자, 황제였다. 모든 것의 위에 선 자였다.

그런 자가 도대체 무엇에 패배감을 느꼈다는 말인가-.

용사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너머에-.

'마족의 왕.'

절대적인 존재가 있었다. 아득히 멀리 있는지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손발이 절로 떨리고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용사의 얼굴에 드리운 절망적인 패배감이 이해됐다.

그를 끝으로 시야가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손이 이마를 짚었다. 격한 두통이 올라왔다. 아드리안나가 깨운 듯했다.

방금 그 기억은 분명 네발 마족의 것이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네발 마족을 응시했다.

네발 마족은 지그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는-.

"······너는 미쳤다."

환히 웃고 있었다.

"있군. 그래, 역시 있었어."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갈라하드와 어울리지 않는 광소에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갈라하드는 몸까지 흔들며 웃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그 웃음이 묘하게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드럽게-.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풀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내 빙의는 이유가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는 다시 손을 풀었다.

137화 엄마

'마족의 왕은 존재한다.'

갈라하드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 마족의 왕은 존재한다.'

안쪽 주머니를 매만졌다. 해진 가죽 수첩의 감촉이 올라왔다. 그 가죽에 오돌토돌함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마족의 왕은 존재한다.'

그러니까-.

'헛되지 않았다.'

숨이 탁-하고 트였다.

그때, 푸른 눈이 보였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갈라하드는 숨을 길게 내쉬며 애써 진정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래, 흥분할 필요 없다.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시원하게 웃었다.

'황제가 배신했다. 아니, 그건 배신이 아니다.'

마족의 왕을 마주한 황제는 깊게 절망했다. 황제는 마족의 왕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황제는 성녀를 마족으로 만들었다. 성녀뿐만이 아니었다. 위에서 봤던 제국군 복장의 마족부터, 이 주변에 있던 마족들까지-. 꽤 많은 이들을 마족으로 바꿨다.

그 이유는-.

'마족의 왕을 막기 위해서.'

마족으로 바꿔서 어떻게 마족의 왕을 막지?

'마나 농도를 낮춘다.'

갈라하드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길 수 없었다.

"마족은 피에 짙은 마나가 흐르니까-. 마족으로 만들어 중앙의 마나 농도를 낮췄군. 마나 농도가 낮으면, 마족의 왕이 진격할 수 없으니까! 오! 정말 영특한 방법일세!"

갈라하드는 박수치며 칭찬했다. 네발 마족의 눈이 구겨졌지만,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대륙의 마나 농도가 낮았던 거군. 오, 이제야 말이 되는군."

북부의 마나 농도가 높은 게 아니었다. 중앙의 농도가 낮아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마족으로 바꾼 거지? 아, 이 검이 작용한 건가."

갈라하드는 네발 마족의 명치에 꽂힌 화려한 검을 살폈다. 회상에서 봤던 황제의 검이었다.

곳곳이 녹슬고 쇠한 검은 그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다만, 그 본래의 화려함은 세월에도 녹슬지 않았다. 손잡이가 영롱한 붉은색이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졌다.

검을 보는 것만으로 섬찟함이 가득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뿌렸다. 마나가 그대로 사라졌다.

'엄청난 마나 농도군.'

스치는 순간 사라질 정도로 지극한 마나가 흘렀다.

'마법은 아니다.'

네발 마족은 저주라고 말했다.

'만지면-.'

칼자루를 잡으려는 순간, 네발 마족이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어느새 아드리안나 옆에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놀란 눈으로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갈라하드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간 이동은 아니었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정신 간섭이었을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갈라하드는 다시 네발 마족 앞에 섰다.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금색 눈동자에 웃는 갈라하드가 비쳤다.

갈라하드는 손을 탁탁 튕기며 상황을 정리했다.

마족의 왕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황제는 저주의 검으로 성녀를 마족으로 만들었다.

다만, 저주는 칼자루 없는 칼이었다.

이런 지독한 저주를 이토록 오래 유지하려면, 그 대가를 누군가 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황제를 죽여라.]

황제일 것이다.

"이거 불세출의 영웅이군."

갈라하드는 다시 감탄했다.

네발 마족이 눈을 더욱 찡그렸다.

"너는 미쳤다."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 황제를 죽이려는 건가? 아니면 복수? 뭐가 됐든 옹졸하군."

"옹졸?"

갈라하드의 머리가 쪼개졌다. 조각으로 나뉘었다. 그 정신이 가득 뿌려졌다. 거대한 존재 앞의 미생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이마가 시원했다. 아드리안나의 손이 황급히 떨어졌다. 두통이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이마를 매만졌다. 머리는 멀쩡했다. 기분 좋은 서늘함의 여운이 감돌았다.

네발 마족은 가만히 서서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최대로 압축한 마나를 머리에 두른 상태였다. 그런데 접촉도 없이 이런 정신 간섭이라니, 엄청난 수준이었다.

다만-.

"약해졌군."

그 거리를 뚫고 정신 간섭을 펼쳤던 거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네발 마족이 순순히 끄덕였다.

"네 탓이다. 사도여."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건 서로의 목표가 부합한 걸세. 그대의 능력이 부족한 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말게."

"······내 능력이 부족하다?"

네발 마족이 코웃음 쳤다. 존재감이 가득 펼쳐졌다. 참으로 아득한 존재감이었지만-.

"뒤로 오십쇼."

아드리안나가 나서며 마주했다. 그 뒤에 있으니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아드리안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슬슬 부하가 오는군.'

네발 마족은 분명히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네발 마족을 마주한 것으로 아드리안나가 흔들리다니-.

'고위 마족이라고 다 같은 고위 마족이 아니군.'

갈라하드는 네발 마족의 명치에 있는 검을 아드리안나에게 잡게 할 계획을 폐기했다.

약해진 네발 마족도 못 버티는 아드리안나였다. 검을 잡았다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아직 네발 마족을 완전히 파악한 게 아니었다. 성녀에서 마족이 되었어도, 결국 마족이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당겼다. 윽-. 아드리안나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뒤로 끌려왔다.

"뒤에 있게."

갈라하드는 옷깃을 고치며 네발 마족을 마주했다.

네발 마족은 황제를 죽이고 싶어 했다. 복수와 저주를 풀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닐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발 마족이 황제를 죽이려던 이유는-.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순간 입이 막혔다. 움직이지 않았다. 더 묻지 말라는 듯했다. 단순히 입이 막힌 게 아니었다. 아예 입이라는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수준의 정신 간섭이었다.

'자유자재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제야 입이 열렸다.

순간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 압도적인 정신 간섭에 갈라하드는 감탄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해보겠나? 상당히 흥미롭군."

그리 묻자 네발 마족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너는 미쳤다."

"이런, 사도라더니-. 참 야박하군."

도발했지만, 네발 마족은 넘어오지 않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 왕이 뭘 어쨌다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네발 마족의 표정이 사라졌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네발 마족이 손을 휘저었다. 주변이 급격하게 뒤틀렸다.

갈라하드는 어느새 네발 마족과 단둘이 마주 보고 있었다. 놀라운 정신 간섭이었다.

'이런 느낌-.'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조금만 더 해보면 알 것 같은데-.

그때, 네발 마족의 입이 움직였다.

이어진 말이-.

"왕이 눈을 뜨려고 한다."

갈라하드의 정신을 가득 붙잡았다.

그게 끝이었다. 어느새 다시 아드리안나가 옆에 있었다.

네발 마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개척자가 움직였다."

'굉장히 조심하는군.'

더 물어보면 오히려 상황이 틀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개척자?"

갈라하드는 애써 흥분을 누르며, 네발 마족의 말을 받았다.

"개척자가 움직였다."

"지배자 같은 고위 마족인가?"

"지배자들과 다르다."

지배자'들'?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한 어감이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개척자였다.

"마경이 넓어진 게 개척자의 짓인가?"

"그게 개척자의 일이다."

"네 힘이 약해진 것도?"

네발 마족의 검을 묶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 사이로 아릿한 마나가 풍겼다.

'개척자라-.'

왜 개척자가 네발 마족을 묶었을까.

아니, 애초에-.

'네발 마족은 뭘 원하는 걸까.'

네발 마족이 가만히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금색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개척자를 처리해라."

짤막한 명령이었다.

굳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경이 넓어진 게 개척자라는 마족 때문이라면, 이쪽에서 찾던 이유였다.

네발 마족은 오히려 답을 준 것이다.

다만-.

"그래, 대가는?"

거래는 똑바로 해야 했다.

네발 마족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혐오가 적나라하게 떠올랐다.

"이쪽도 부담이 상당하다는 걸 알아주게나. 여기는 마경 아닌가. 오는 길이 어찌나 험한지는 아나?"

네발 마족의 구겨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 꿰뚫린 검에서 피가 똑똑 떨어졌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끄덕였다.

가장 궁금한 건 저 검이었다. 다만, 검은 지금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쉬운 대로-.

"이것 좀 들고 있게. 그 아래에."

갈라하드는 수통을 내밀었다. 네발 마족이 수통을 지그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가득 구겼다. 갈라하드의 생각을 읽은 듯했다.

"너는 미쳤다."

"어차피 그냥 떨어지는 피 아닌가. 그대에게도 손해 볼 게 없거늘. 아니면 다른 줄 게 있나? 오면서 보니까 휑하던데."

갈라하드의 적나라한 말에 네발 마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는 미쳤다."

"알았으니까. 제대로 받치게."

네발 마족은 의외로 순순히 수통을 가져다 댔다.

'진짜 줄 게 없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마족의 왕은 있다.'

그 어떤 것보다 값진 보상이었다.

더불어 개척자라는 마물이 마경이 넓어진 이유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쪽에서 찾던 걸 의뢰로 걸어준 것이다.

'이래서 불렀군.'

네발 마족은 갈라하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개척자를 잡아주리라는 것도, 황제를 향해 나아가리라는 것도-. 확실히 합당한 거래였다.

다만, 이쪽을 좀 얕봤다.

"아, 하나만 더 걸지."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네발 마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옥 자유 이용권도 주게."

보상을 추가했다.

"너는 미쳤다."

네발 마족의 담담한 선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사도한테 그 정도도 못 해주나?"

"미친 사도구나. 알겠다."

"고맙군. 역시 성녀답게 포부가 크군."

고위 마족과 웃으면서 떠드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갈라하드는 가죽 수첩을 떠올렸다.

거기에 분명히-.

[세상은 마족의 왕에게 멸망한다. 중요 인물 : 금발의 소드 마스터, 무슨 대마법사, 요정의 어머니, 도끼를 쓰는 야만인, 반마족······.]

요정의 어머니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췄다.

놈은 고위 마족이었다. 그것도 진짜 고위 마족.

출신이 요정일 뿐이었지만, 확인해볼 가치가 있었다.

"자네, 요정이라 그랬나."

"그래, 요정으로 태어났다."

마족의 대답에 갈라하드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딘지 주저하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집중했다.

갈라하드가 마족을 보며-.

"어머니?"

미세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

아드리안나는 다급하게 갈라하드의 이마를 때렸다.

****

"건방진 인간."

작은 여인 마족, 보니가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큰 여인 마족, 바니가 고개를 저었다.

"나올 때는 온순해졌을 거야."

바니의 말에 보니는 끄덕였다. 신전에 들어가서 성녀님을 만났으니, 감화돼서 나올 것이다.

"제물을 들여보내는 게 맞았을까?"

"성녀님께서 허락하셨으니까."

바니의 차분한 말에 보니는 끄덕였다.

그때,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쇠 발소리였다.

"나왔구나."

보니는 안쪽을 응시했다. 예의 두 놈이 나오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내 이마가 만지고 싶었나?"

"이상하면 쓰다듬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이상했나."

"아니! 마족한테 어머니라고 부르셨습니다."

"부른 게 아니라 물어본 걸세."

"······예, 죄송합니다."

"아닐세, 내 이마가 탐스러운 게 잘못이지."

그들의 예상과 달리, 두 놈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이 아니었다.

"······근데 진짜 어머니십니까?"

"아니, 그게 무슨 길버튼 같은 소리인가."

"어찌 그런 말을!"

"농담일세. 자네도 듣지 않았나. 자식이 없다고."

놈은 들어갈 때보다 더 얼굴이 좋았다.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

"자네들은 왜 구렁텅이에 있나? 순혈이 아니라고, 다른 마족에게 배척이라도 당하는 건가?"

그들의 심경까지 긁었다. 바니와 보니는 얼굴을 가득 구겼다.

"우리는 결사대다. 저주받았다고 한들,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런 불결한 마족과 비교하지 마라."

보니가 손을 풀었다. 바니가 눈을 찡그렸다. 원래였다면, 저 건방진 인간의 목을 당장 뽑았을 것이다. 신전이라 참는 것이다.

"오, 결사대라서. 마족이 아니라는 거군. 이해했네. 그러면 인간을 혐오하는 건 본능인가? 아, 민감한 부분이군."

놈은 멈추지 않고 지껄였다. 감히-.

안쪽에서 성녀님이 의지를 전했다. 그냥 보내라고-.

둘은 애써 분노를 참으며 물러났다.

"흠, 그래. 육체는 저주받아도 그대들의 영혼까지 저주받은 건 아니니까. 응원하겠네."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번 더 지껄이고는 사라졌다.

"미친 인간이군."

"겁을 상실한 놈이야."

바니와 보니는 중얼거리며 신전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성녀님은 무사했다. 기세가 더 쇠약해졌지만, 늘 그렇듯 기도하고 있었다.

"부디 평온한 죽음을."

저주받은 마족의 몸으로, 기도를 올리는 모습에서는 형용하기 힘든 신성함이 느껴졌다.

그를 보던 보니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성녀님은 평소와 같았지만-.

'저 수통은 뭐지?'

성녀님의 손에 못 보던 수통이 있었다.

****

"그만 궁시렁거리고 경비 똑바로 서라!"

"이런 미개한 놈이 누구한테 큰 소리냐!"

길버튼의 호통에 마족이 적개심을 가득 드러냈다.

마족 특유의 적나라한 적의였다. 상당한 존재감이었지만-.

"한 판 해?"

길버튼은 칼자루를 두드렸다. 그 오러가 전보다 더욱 거칠게 일었다.

더러운 마족과 같이 있으려니, 안 그래도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길버튼의 검이 아래를 겨눴다. 거기에 잘린 마족의 사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감히-!"

마족이 이를 잔뜩 드러냈다. 마족의 본성이었다. 그에 길버튼은 검을 고쳐잡았다.

그때-.

"잘 놀고 있었군."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번듯한 이마가 잔뜩 붉었다. 손자국이었다.

"이마가 왜 붉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따가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길버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은 해결하셨습니까."

"그래, 풀어줄 걸세. 그렇지?"

"어디에 말합니까?"

"이런 튕기는군."

갈라하드가 혼자 끌끌 웃었다. 마족이 이를 가득 드러냈다.

"감히 성녀님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이 새끼가 감히 대장님에게."

길버튼이 분노하며 마족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자 마족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소였다.

그때-.

"다들 괜찮으십니까! 데미안! 그웬!"

톰 목소리가 들렸다.

굳어있던 이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기사들은 다급하게 아드리안나를 찾았고, 그웬은 데미안을 챙겼다. 데미안은 톰에게 받은 육포를 씹었고-.

모두가 깨어났다.

직속 부대의 반응은 빨랐다. 정신을 차린 직속 부대는 검을 뽑아 마족에게 겨눴다.

수십의 오러가 마족을 겨누자, 방금까지 적의를 드러내던 마족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죽이지 말게. 길잡이니까."

갈라하드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아니면 명령을 듣지 않는 직속 부대가 검을 멈췄다. 그들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누가 미개한 네놈들의 길잡이를-!"

"성녀님이 시켰네. 설마 성녀님의 말을 거부하는 건가? 이런, 아멘이군."

"무슨······."

소리치던 마족이 입을 꾹 닫았다.

아드리안나가 직속 부대를 모았다. 그에 길버튼은 갈라하드에게 다가갔다.

갈라하드의 표정이 평소보다 좋았다.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길버튼이 묻자, 갈라하드가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길버튼 경, 그거 아는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갈라하드의 입이 잠시 달싹거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 나왔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못생긴 것도 이유가 있을 거라는 말일세."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털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손을 들었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다음은 개척자라는 마족이 목표일세. 마경을 넓히는 아주 못된 마족이지. 아까 내려오면서 봤던 제국군 마족의 본대와 같이 있다는군."

본대와 같이 있는 마족이 목표라는 건, 본대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즉-.

"자, 전쟁일세."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웃었다.

북부의 기사들이 따라 웃었다.

전쟁은 그들의 전문 분야였기에-.

138화 등산

"마족의 길 안내를 받아도 되는 겁니까?"

길버튼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눈빛에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다른 기사들도 어딘지 탐탁지 않은 느낌이 가득했다.

평생을 마족과 싸웠던 북부인들이었다. 그런 북부인이 마족을 따라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저들은 결사대에서 마족이 된 이들이라고 상황을 설명할까 고민했지만-.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지.'

오히려 더욱 어지러워질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마족일세."

"예? 마족이랑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더군."

"예, 대장 판단이니 옳겠지요."

길버튼이 더 생각하기 싫다는 듯 끄덕였다. 그러다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주 재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시니까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마족은 마족입니다. 믿을 수 없는 놈들입니다."

길버튼이 투박하게 경고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맞는 말이었다. 마족은 마족이었다. 결사대에서 저주를 받아 마족이 되었어도, 결국 마족이었다.

이들은 마족과 자신들을 분류하는 듯했지만, 인간을 적대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미개하다는 괴상한 핑계로 돌리지만.'

길잡이 마족은 적의를 드러내면서도, 의외로 온순했다. 일부러 긁어봐도 기세를 일으킬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네발 마족이 교육을 잘했군.'

다만, 그렇다고 본성이 변하지는 않았다. 놈은 마족이었다.

길잡이 마족의 옆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당장 베어버릴 기세였다.

마족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 순순하게 안내했다.

놈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의외의 것이 있었다.

그건-.

"통로?"

위쪽으로 이어진 큼지막한 통로였다.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지만, 분명히 통로였다.

"놈이 짓고 간 것이다."

"놈?"

"개척자."

마족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마경의 땅은 그 마나 농도 때문에 유난히 단단했다. 그런 땅을 저렇게 넉넉하게 파두다니-.

"개척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군."

마족이 적의를 드러내며 한 발짝 물러섰다. 갈라하드는 그를 무시하고 통로를 살폈다.

통로의 모습이 다소 신기했다. 꼭 망치로 두드린 것 같은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 아래에 큼지막한 발자국이 있었다.

'덩치가 상당히 크군. 대공과 비슷하겠어.'

흔적을 살피던 갈라하드는 다시금 감탄했다.

"개척자가 혼자 만든 통로군. 개척자 하나한테 전부 밀렸다는 건가?"

"성녀님이 약해졌을 때를 노린 것이다!"

마족이 적개심을 가득 드러냈다. 정답인 듯했다. 개척자는 구렁텅이에 혼자 내려와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그러면-.

"개척자가 왜 굳이 구렁텅이까지 왔지? 여기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마족이 대답하지 않았다. 무응답은 대답이었다. 갈라하드는 마족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갈라하드는 마족의 눈을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뒤에 있을 네발 마족을 주시했다.

개척자가 굳이 여기까지 내려왔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개척자가 내려올 이유가 있었다.

즉-.

"네발 마족에게 뭔가 있었군. 개척자가 손수 내려와서 가져가야 했을 정도로 값진 뭔가가-. 맞나?"

마족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답도 없었다.

갈라하드도 대답을 구한 게 아니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정답이군. 네발 마족이 가진 무언가가 마경을 넓히는데, 쓰는 물건인가? 이런 섭섭한데."

길잡이 마족의 기세가 달라졌다.

"미친 인간."

네발 마족의 대답이었다.

'정답이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이 새끼 말버릇이!"

길버튼이 냅다 마족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마족의 눈이 돌아갔다.

방금 마족은 네발 마족과 이어진 상태였다. 그 뒤통수를 때렸다는 건-.

'네발 마족의 뒤통수를 때렸군.'

마족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네발 마족이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성녀였던 네발 마족이 어디서 뒤통수를 맞아봤겠는가.

이내 마족의 눈이 돌아왔다.

"새끼,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길버튼이 손을 털며 이죽거렸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감탄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닐세. 잘했네. 역시 길버튼 경이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털었다. 길버튼은 히죽 웃었다.

"여기로 올라가면 된다."

길잡이 마족이 통로를 가리키며 한 발짝 물러섰다.

"여기 어디에 개척자가 있나? 나는 안 보이는데. 길버튼 경은 보이나?"

"어? 마족은 이놈밖에 없습니다. 이놈이 개척자입니까?"

길버튼의 진심이 담긴 물음에 마족의 눈이 흔들렸다.

길버튼이 검을 마족의 목에 겨눴다. 오러를 일으킨 검이 목을 겨눠도, 마족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알았다. 성녀님의 명령이니까."

마족이 곱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았다.

통로는 어두웠다. 음산한 안개가 가득했다. 그 안에 뭐가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자, 그러면 가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예, 선두에 서겠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을 최우선으로-."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명령했다. 그에 대형이 빠르게 잡혔다.

그때, 그웬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굉이는요!"

"굉이?"

"타고 내려왔던 마물입니다!"

훌쩍이는 그웬 대신 톰이 대답했다.

"아, 굉이는 여기서 맡아줄 걸세. 그렇지?"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잡이 마족이 눈을 구겼다.

****

통로는 굉장히 길었다. 까마득한 절벽을 올라가야 했으니 당연했다.

그웬이 더 못 걷겠다며 쓰러졌고, 데미안이 배고프다며 비틀거렸다. 길버튼이 투덜거리며 둘을 챙겼다.

갈라하드는 마나 화살을 계속 운용했다. 마나 농도를 계속해서 확인했다.

올라갈수록 마나 농도가 짙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건-.

"통로가 일정하군."

"예?"

아드리안나가 작게 반문했다. 아드리안나는 땀 한 방울조차 없었다. 놀라운 체력이었다.

"마나 농도가 실시간으로 변하는데, 통로의 너비는 일정하네. 상당한 제어 능력일세."

"아, 그렇군요."

"실로 대단한 놈이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정말 개척자라는 마족이 마경을 넓힌 겁니까?"

"놈이 굳이 거짓말할 것 같지는 않네만."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마족과 무슨 사이십니까?"

예상한 질문이었다. 고위 마족인 네발 마족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의문을 품는 건 당연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아드리안나는 유일하게 마족의 왕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살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투명한 벽이 조금 떨어져서 그들을 둘렀다.

"예전에 마족의 왕을 상대하기 위한 결사대가 있던 모양일세. 네발 마족은 성녀였고."

"······결사대 말입니까?"

"황제는 마족의 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네. 자신과 결사대를 바침으로써 마족의 왕을 막아냈고."

"아-."

"네발 마족은 황제의 죽음을 원하네."

담백한 선언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면, 황제는 마족의 왕을 막은 영웅 아닙니까?"

"맞네, 불세출의 영웅이지."

"그런데 왜 황제를 죽이겠다는-."

합당한 의문이었다. 황제는 마족의 왕을 막아내고, 지금까지 그 짐을 기꺼이 지는 영웅이었다.

다만-.

"황제는 중앙의 마나 농도를 낮춰서 마족의 왕을 막았지. 마나 농도는 한 번 낮아지면, 자연적으로 높아지지 않으니까. 꽤 효과적인 방법일세."

"······아, 농도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니까요."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당시에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다만-.

"중앙의 마도구 의존은 점점 높아지는 중일세. 마석이 시시각각 수도로 모이고 있지. 흑마법학회가 마석으로 마경을 열었던 거 기억나나? 그 마석이 중앙으로 모이고 있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마도구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전기의 맛을 본 이들에게 전기를 뺏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황제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황제의 방법은 임시방편이었네. 지금 그 끝이 도래하는 중이고."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마석을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막을 건가? 마족의 왕이 나타난다고? 내 확신하는데 소용없을 걸세."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달싹였다.

"······최소한 북부의 마석을 유통하는 것만이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부에서 마석을 풀기 전에도 중앙은 마도구 천지였네."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늘 그렇듯 확신이 가득했다.

"마도구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일세. 그러면 이용이라도 해야지."

아드리안나의 입이 달싹거렸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평소보다 더 깊게 웃고 있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황제의 처리는 아직 확실하지 않네. 정보가 부족하니까.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갈라하드가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상대는 황제였다. 감히 입에 담는 것조차 무거운 제국의 황제-. 그런 황제를 저리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왜 자신이 불안한지, 아드리안나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갈라하드가 황제를 죽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갈라하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런 기다리고 있었군."

갈라하드의 시선은 통로 너머의 어둠에 꽂혀 있었다.

"제법 많군."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주둔한 마족들이 보였다.

마족들은 군인처럼 수비적인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녹슨 갑주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깊어졌다.

제국군이었던, 대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이었다.

옆으로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강렬하고 화려한 번개가 마족에게 향했다. 번개는 마족의 중심에 정확히 꽂혔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중앙에 떨어진 번개가 퍼지듯 화려하게 폈다.

그 밝은 빛에 마족들의 형태가 정확히 보였다. 적나라한 적의가 전부였다.

"지금은 마족일세."

푸른 빛에 갈라하드의 담담한 얼굴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됐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상대가 마족이면 망설이지 말게. 설령 그게 나라도."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음, 내 모습을 흉내 내는 마족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담담하게 말하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사내는 뭐가 농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모습을 흉내 내도 저는 알아볼 겁니다."

갈라하드의 웃음이 멈췄다.

"갈라하드 대장의 성격까지 흉내 내지 못할 테니까요."

그를 끝으로 아드리안나는 투구를 내리고 뛰었다.

갈라하드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새겼다.

그러니까-.

"맞습니다. 대장님처럼 재수 없는 성격은 흉내도 못 냅니다."

"······길버튼 경."

"예?"

"가서 마족이나 잡게."

"예! 기사-! 길버튼-!"

****

'강한 마족일수록, 마나 농도에 더 큰 영향을 받는군.'

이내 통로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통로를 나왔지만, 오히려 더 깜깜했다. 예의 마경이 그들을 반겼다.

"고작 이 정도로 힘들 다니-. 미개하군."

길잡이 마족의 혈색이 좋았다. 완전한 최상급 마족의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이놈이-."

길잡이 마족이 길버튼을 응시했다. 길버튼의 손이 작게 떨렸다.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안내나 하게. 길잡이."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차며 손짓했다.

"······쯧, 이쪽이다."

마경에 돌아왔기 때문일까. 길잡이 마족의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안정된 느낌이었다.

최상급 마족을 길잡이로 두니 편한 점도 있었다. 그 기세 때문에 마물이나 마족의 습격이 현저하게 줄었다.

"그대가 있으니 습격이 적군."

"당연한 말을 하는군. 마족은 자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에게는 덤비지 않는다."

길잡이 마족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렇군. 마족은 마나 농도에 따르니까. 자기보다 강한 마족에게는 절대적으로 약하겠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그때, 길버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자기보다 강한 놈한테 안 덤빈다니-. 낭만이 없군."

"너는 기사구나."

"······무슨 뜻이지?"

"그걸 물어보는 걸 보니 기사가 맞군."

"이거 시비 거는 겁니까?"

길버튼이 마족을 가리키며 갈라하드에게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저었다.

마족이 길버튼을 슬쩍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마경에서 나오자 길잡이 마족의 걸음이 빨라졌다. 마족은 어두운 안개 속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기다."

마족이 한쪽을 가리켰다. 거리가 상당한 터라, 마경의 자욱한 안개에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미풍, 질풍, 돌풍-."

갈라하드는 주문을 외우며 마나를 압축했다. 잔뜩 신난 고통의 알이 짙은 마나를 뿌렸다. 그를 마법진을 통해 생명력으로 덧씌웠다.

한계까지 압축한 뒤에, 손가락을 튕기자 강한 바람이 짙은 재를 가득 밀어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이런, 진짜 군대였군."

빼곡한 마족들이었다. 녹슨 갑주를 입은 마족 수백이 군인처럼 도열해 있었다. 개미 떼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중심에 거대한 갑주를 입은 놈이 있었다. 마치 장군인 듯 유난히 화려하고 단단한 갑주였다. 놈은 등에 길쭉한 깃발을 세 개나 꼽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옛 제국의 문장이었고, 하나는 교단의 것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뭔지 알 수 없었다.

수백의 마족 사이에 있는데도, 존재감이 가득 넘쳐서 흘렀다. 오히려 다른 마족 전부를 압도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개척자다.'

놈이 개척자임을-. 놈의 존재감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그때, 큼지막한 울음이 들렸다. 개척자의 앞에 거대한 마물이 있었다.

아까 오면서 잡았던 마물과 같은 종류였는데, 크기가 두 배는 컸다.

그 거대한 마물이 온몸을 비틀었다. 덩치가 큰 터라 땅이 뒤집히며 난리가 났다. 힘이 여실히 느껴졌다.

개척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벌레를 쫓는 것처럼 가벼운 손짓이었다.

퍼억. 마물의 머리가 땅에 박혔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망치로 내려친 듯한 모습이었다.

'권능이군.'

그건 다른 마족이 쓰던 것과 비슷했다. 짙은 마나로 이루어진 무형의 힘이었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건 같았지만, 문제는 그 범위와 위력이었다.

단 한 수에 거대했던 마물이 납작 퍼졌다.

그때, 개척자가 무언가를 높이 들었다.

금색으로 이루어진 램프였다. 그 중심에 타오르는 회색 불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경의 짙은 안개가 밀려나듯 퍼졌다.

"······성물이다."

길잡이 마족이 꾹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네발 마족의 것이군.'

성물이라-. 묘한 단어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개척자가 램프를 마물에게 가져갔다.

마물의 머리에 램프가 닿았다. 그러자 마물의 이마로 램프의 불이 옮겨붙었다. 뒹굴면 꺼질 것처럼 자그마한 불이었다.

다만, 완벽히 제압당한 마물은 거부할 수 없었다. 옮겨붙은 불이 이내 거칠게 타올랐다. 회색 불이 마물을 덮었다.

그리고-.

'재다.'

마물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마치 마경에 가득한 연기처럼-.

개척자는 아무렇지 않게 손짓했다. 갑주를 입은 마족들이 다음 마물을 끌고 왔다. 그 주변에는 마족이나 마물이 가득했다. 마치 제물처럼-.

'마경이 넓어진 이유가 성물 때문이라.'

짙어진 안개에 시야가 다시 가려졌다.

*

'미친-.'

직속 부대의 기사 캐럿은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마족이 저렇게 많이 모여있다니-. 심지어 다들 갑주를 입은 상태였다. 마치 군대처럼. 저런 건 처음 봤다.

수많은 마족도 문제였지만, 그 중심에 있는 마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군처럼 입은 마족이 풍기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다.

캐럿은 제 손을 내려봤다. 칼자루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이 가득 올라왔다.

상대는 적어도 수백의 마족과 괴물 같은 고위 마족인데, 이쪽은 서른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차였다. 그를 느낀 건 캐럿뿐만이 아니었다. 북부의 기사들이 말을 잃었다.

캐럿은 자신도 모르게 선두를 살폈다.

우습게도 캐럿이 찾은 건 아드리안나가 아니었다.

모두가 전의를 잃은 상황에서 갈라하드는-.

"세트 아이템이었군."

금색 봉을 매만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본 것처럼-.

'미친.'

캐럿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모두가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음을-.

139화 탁탁탁

'램프라.'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개척자가 든 램프에 달은 마물이 재가 됐다.

'마물을 마나로 환원시켰다.'

마물의 피에 고농도의 마나가 흘렀다.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는 피 자체의 마나 용해도를 낮춰야 했다.

그런데 램프는 마물을 바로 마나로 만들었다.

'생명력을 건드렸군.'

피에 마나를 담기 위해서 생명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피에서 마나를 빼기 위해서는 뭐를 해야 할까.

'피에 담긴 생명력을 빼내야지.'

램프의 기능은 피에 담긴 생명력을 건드리는 게 분명했다.

성물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기능이었다. 당장 가져오고 싶었다.

무엇보다-.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금색 봉과 느낌이 묘하게 비슷했다.

둘 다 완전한 금으로 이루어진 것도, 또-.

'고위 마족이 들고 있던 것도.'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빙글- 돌렸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성큼 다가왔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눈썹이 깊게 내려가 있었다. 그에 주변을 둘러봤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직속 부대 기사들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이들은 북부의 정예였다. 두려움과 거리가 먼 전사들이었다.

단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군.'

갈라하드는 방금 본 걸 떠올렸다.

이제껏 마주한 마족은 많이 뭉쳐 다녀도 열 마리 이하였다.

그런데 방금 본 마족은 수백 단위였다.

'제국군에서 변한 것이라, 군대와 흡사한 지휘 체계를 뒀군.'

심지어 이곳은 마족의 본진인 마경이었다. 패배를 직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연초를 털었다.

"마족은 군체를 이룬다고 그랬나."

"예, 상급부터 군체를 이룹니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수가 모인 건 처음 봤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결연했다.

'혼자 가겠다고 하겠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개척자 때문일 걸세."

"개척자 말입니까?"

"그 복장이 특이하지 않았나?"

"예, 혼자만 무장이 화려했습니다. 더불어 뒤에 깃발도 있고-."

아드리안나의 말처럼 개척자만 유달리 갑주가 화려했다. 더불어 뒤에 깃발까지 꽂았다는 건-.

"놈은 장군이 맞을 걸세. 그렇지 않나?"

갈라하드는 길잡이 마족을 보며 물었다. 길잡이 마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끄덕였다.

"맞다. 놈은 장군 마그누스다."

길잡이 마족이 꼭 대단한 것처럼 말했지만-.

"처음 듣는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저주받아 마족이 된 자들이었다.

애초에 문장까지 바꾼 제국이 기록을 남겼을 리 없었다.

"마그누스를 모르다니-."

길잡이 마족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었다.

"개척자는 제마 전쟁 때의 장군일세. 옛 제국의 지휘 체계를 쓰는 듯하네. 상급 마족을 십인장으로 두고-. 저 많은 수를 움직일 수 있는 이유지."

"······진짜 군대군요."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봤자 흔적만 남은 존재들일세."

"······흔적만 남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까 슬쩍 찔러봤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더군."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찔러봤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마족은 마나에 민감하네. 고위 마족은 더더욱 민감하지. 그에 마나 압축을 했는데, 개척자는 시선조차 주지 않더군."

개척자를 마주했을 때, 갈라하드는 마나를 움직였다.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는 건, 견적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개척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정면만 보고 있었다.

"마그누스는 어떤 장군이었지?"

갈라하드는 길잡이 마족을 보며 물었다.

"대륙 통일에 환장한 놈이었다. 잠도 안 자고 오로지 정복 전쟁만 하던 놈이지."

길잡이 마족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아, 그쪽 말로 고위 마족이 되면 감정이 하나 생겨요.]

여우 가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배자는 소유욕에 눈이 멀어 있었고, 여우 가면을 쓴 놈은 오로지 흥미로만 움직였다.

개척자는 오로지 정면만 응시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뒤를 공략할 걸세."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계획을 점검했다.

목표는 개척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놈이 들고 있는 램프가 최종 목표였다.

다만, 램프를 달라고 개척자가 줄 리가 없었으니, 개척자도 처리해야 했다.

개척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데, 심지어 그 주변에 두른 마족의 수가 많았다.

일단, 제국군 마족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그를 위해서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었다.

"자네가 있으면 마족이나 마물이 안 까분다고-."

"그렇다."

슬쩍 운을 띄우니, 길잡이 마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에 자네보다 강한 마족이 개척자 말고 또 있나?"

"감히. 나를 저런 놈들과 비교하는 거냐."

"없군. 좋네, 이쪽으로 오게나."

"내가 맡은 건 인도였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내가 나를 위해서 이러나? 그쪽이 개척자 하나 못 막아서 벌어진 일을 치우는 중인데."

가벼이 말하자 길잡이 마족이 멈췄다. 그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선명한 적개심이 드러났다.

'네발 마족이 역린이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길잡이 마족의 목에 검이 겨눠졌다. 아드리안나와 길버튼이었다.

길잡이 마족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내가 나 좋자고 이러나? 성녀님 부탁 아닌가."

이내 놈이 적개심을 지웠다. 훈련이 잘된 놈이었다.

"쯧."

혀를 찬 놈이 앞으로 나섰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빙글 돌렸다.

안개를 밀어내던 걸 멈췄다. 그러자 짙은 안개가 금세 주변을 채웠다.

계획은 간단했다. 최상급 마족인 길잡이 마족을 앞에 두고 뒤쪽에서 공격한다-.

혹여 놈들이 눈치채고 전투가 시작되면, 빠르게 후퇴한다.

그리고-.

'반복이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군대의 형태지만, 놈들은 결국 마족이었다. 더불어 그 지휘관인 개척자가 정면만을 보고 있으니, 약점은 뚜렷했다.

그저 마경이라는 환경과 그 압도적인 숫자에 위축되어 차마 습격할 생각을 못 할 뿐이었다.

아마 밖이었으면, 아드리안나가 아니라 직속 부대의 기사들도 충분히 세울만한 계획이었다.

이곳이 마경이라서, 위축되었을 뿐이었다.

애석하게도 갈라하드는 오히려 밖에 있을 때보다 머리가 명쾌했다.

마족만큼은 아니지만, 마경이기에 마법의 위력도 강력해졌다.

"가겠다."

길잡이 마족이 짤막하게 말하고 걸었다.

최상급 마족인 길잡이 마족을 세워도, 약간의 눈속임일 뿐이었다.

통로에서 마주쳤던 제국군 마족은 공격을 망설이지 않았다. 시선을 끌면, 공격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관건은-.

'마나에 민감한 마족을 속이는 것이지.'

은밀함은 갈라하드의 전문이었지만, 이번 상대는 마족이었다.

마족은 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더불어 그 마나의 민감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짙은 농도의 마나로 이루어진 존재들이었기에, 마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족을-.

'마경에서 마법으로 암살이라.'

갈라하드는 연초 연기를 깊게 뱉었다.

사실상 성립하기 힘든 문장이었다.

그렇기에-.

'재밌겠군.'

갈라하드 취향은 어려운 문제였다.

그때, 푸른 눈이 끔벅였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별다른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걸어!"

"이 미개한 놈이-."

길버튼이 길잡이 마족의 등을 밀었다.

*

'이건-.'

직속 부대의 기사 캐럿은 주변을 둘러봤다.

마경 특유의 짙은 재가 시야를 가득 가렸다. 바로 옆에 있는 기사들도 겨우 보일 정도로 짙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함이 올라왔다. 숨소리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때-.

······!

어디선가 마물의 비명이 터졌다. 땅을 울릴 정도로 거대한 비명에는 짙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 떨어진 곳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개척자의 아릿한 존재감까지 더해지니, 상당한 압박감이었다.

마족의 본진인 마경에서, 주변에 수백의 마족과 고위 마족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북부의 정예라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에 등이 축축했다. 손에 땀이 가득 올라왔다.

'아무리 갈라하드지만-.'

캐럿은 작게 중얼거렸다.

상대는 수백의 마족에 고위 마족까지 있었다. 심지어 이곳은 마족의 본진인 마경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습격하겠다니-.

북부의 용맹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미친 계획이었다.

아니, 그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습격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나 있나?

다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개척자가 마물을 재로 만드는 걸 본 상황이었다.

마경이 넓어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를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갈라하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습격하겠다는 거지.'

캐럿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때-.

탁.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 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니 지레 놀랐다.

'분명 마법을 쓸 때 손가락을 튕기던데-.'

갈라하드가 손가락 튕기는 걸로 마법을 쓰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 소리조차 아주 작았다.

마법을 펼쳤으면 작은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 거 아닌가-.

탁.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일정한 박자라도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들리는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캐럿은 검을 굳게 잡았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다른 기사들도 비슷했다.

잔뜩 결연함이 깃든 얼굴에 검을 쥔 게 전부였다.

탁-. 탁-. 탁-.

작은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때-.

"그웬, 뾱."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옅은 불이 피어오르고 갈라하드의 얼굴이 보였다.

갈라하드는 짙게 웃고 있었다. 아주 재밌는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웃음이 전에 없을 정도로 서늘했다.

이내 연초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다시-.

탁, 탁, 탁.

일련의 소리가 퍼졌다.

"움직이지."

담담한 목소리와 향긋한 레몬 향이 등을 밀었다.

"이쪽일세."

그 건조한 목소리를 따라서 이동했다.

'뭐하는 거지-.'

캐럿은 저린 손을 쥐었다 피며 중얼거렸다.

습격한다더니, 가만히 손가락이나 튕기다가 움직인다니-.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일련의 행동은 반복됐다.

긴장감에 숨이 턱- 막힐 정도 쯤에-.

"음, 걸렸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걸렸다니?'

캐럿은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준비하게. 빠지면서 전투할 걸세. 전투의 지휘는 아드리안나가 맡게."

"예, 알겠습니다. 준비-."

갈라하드가 여유롭지만 빠르게 명령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검을 고쳐잡던 캐럿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원래 아드리안나님 부대잖아?'

그런데 갈라하다는 자연스럽게 지휘권을 아드리안나에게 넘겼다.

그 일련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유난한 직속 부대 기사들도, 아드리안나도-.

선선한 바람이 안개를 밀어냈다. 죽음의 안개가 천천히 밀려났다. 그제야 숨통이 제대로 트였다.

주변의 전경이 겨우 보였다. 기쁘게 숨을 들이쉬던 캐럿은 주변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곳곳에 마족의 사체가 있었다. 모두 목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엇으로 죽였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이상함을 느꼈다. 마족의 표정이 일정했다.

그건-.

'마족이 죽는 순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캐럿의 눈이 커졌다. 마족이 반응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마족이 죽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암습이라니-.

'······이게 마법?'

캐럿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감탄보다는 경악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마법이 자신을 겨눴으면, 자신은 막을 수 있을까.

"자, 준비하게."

갈라하드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둥둥! 묵직한 북소리가 들렸다. 짙은 안개 사이로 마족이 달려 나왔다.

"갈라하드 대장을 최우선으로-."

아드리안나가 익숙한 명령을 내렸다.

갈라하드를 최우선으로 지켜라-. 전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시야를 확보하고, 마족을 파악하는 갈라하드의 능력이 중요한 건 명백했으니까.

다만, 지금은 의문이 들었다.

'수십을 혼자서 처리한 저 인간을 지키라고?'

아니, 애초에 지킬 필요가 있나?

고개를 돌리자, 수통을 홀짝이는 갈라하드가 보였다.

갈라하드는-.

"마나 농도가 문제였나? 마지막 순간에 틀었는데 말이야. 좀 더 압축해야겠군."

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며, 수통을 홀짝였다.

캐럿은 입술을 씹으며 검을 고쳐잡았다.

"북부를 위하여-!"

곳곳에서 외침이 터졌다. 오러가 가득 일어났다.

늘 그렇듯 선두는 아드리안나였다.

전투는 의외로 수월했다. 갈라하드가 시야를 확보해준 것도 컸지만-.

'수가 생각보다 적다.'

분명 수백의 군대가 옆에 있었는데, 달려드는 건 서른 마리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보니까 지휘 체계가 엉켜있더군. 그를 잘라뒀으니, 추가 병력은 없을 걸세."

갈라하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걸 언제 파악했지?'

심지어 그 연결점까지 잘라뒀다니-. 캐럿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자, 그러면 바로 움직이겠네."

그때, 갈라하드가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아드리안나가 명령하기도 전에, 다들 움직였다.

모두가 작은 반발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갈라하드의 명령을 따랐다.

아드리안나는 열었던 입술을 꾹 닫았다.

괜히 입꼬리가 간지러웠다.

****

"마족 찾기 승부라-. 갈라하드, 드디어 나를 인정했군."

퍼스트는 입꼬리를 가득 올리며 웃었다.

'인정은 염병-.'

펌킨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펌킨, 마족이 뭔지 아는가?"

"뭐긴, 인류의······."

"맞네. 인류의 오랜 적이지. 그런데 왜 마족이 인간의 적일까?"

뜬금없이 시작된 문답에 펌킨은 눈을 가득 구겼다.

되지도 않는 갈라하드 흉내였다.

왜 되지도 않냐면-.

"그야······."

"마족은 인간을 먹기 때문일세."

퍼스트는 자기가 답을 꺼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거면 왜 물어봅니까."

"자, 여기서 문제. 마족은 왜 인간을 먹을까?"

"이런, 씨부럴-."

"그건 의미가 없는 질문일세. 인간에게 고기를 왜 먹냐고 묻는 것과 같지."

"아니, 네가 물었잖아."

퍼스트는 듣지도 않고 어깨를 빙글- 돌렸다. 그 거대한 근육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퍼스트가 진지한 얼굴이 됐다.

"자, 그러면 진짜 문제일세. 인간의 틈에 숨은 마족을 어떻게 찾아낼까?"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마족을 어떻게 찾아내냐니-. 펌킨은 작게 중얼거렸다.

마족은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정보국에서 마족과 관련된 임무에 기사를 보내는 이유였다.

갈라하드를 보면, 의미는 없는 것 같지만-.

'······단순히 마법사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

아무튼, 마족은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마법으로 지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마족에게는 마법 안 통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펌킨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런 펌킨! 그러니까 자네가 기사인 거야! 이 많은 인원을 마법으로 지져서 찾아낸다니! 마나가 얼마나 드는지는 아나? 하하하!"

퍼스트는 배까지 잡으며 웃었다. 펌킨의 눈이 점점 구겨졌지만, 퍼스트는 웃느라 보지 못했다.

그때, 직속 부대의 기사가 나왔다.

"직속 부대의 기사 로버트라고 한다."

"오, 그 유명한 아드리안나 직속 부대군. 나는 갈라하드의 영원한 경쟁자, 운명의 숙적, 퍼스트일세."

로버트라는 사내가 슬쩍 한 발짝 물러났다.

"그래, 갈라하드가 숨은 마족을 찾아냈다고 들었네. 어떤 방식이었지?"

퍼스트가 뜨거운 콧김을 뿜으면서 물었다.

"······다 모아두고 불을 질렀다. 안 타는 놈이 마족이라고-."

로버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말이 맞잖아.'

펌킨이 말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그에 퍼스트는-.

"전부 모아두고 불을 지르다니······. 역시 갈라하드답군! 과감하면서도 획기적이야! 그래, 그래야 내 경쟁자답지!"

펌킨은 신설된 대륙 정보국의 지침에 '상사를 검으로 찌르면 안 된다'라는 항목이 있었는지 검토했다.

140화 쓰담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