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약혼식
'음-.'
갈라하드는 손에 들린 마물 가죽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단단한 마물 가죽이 형체도 안 보일 정도로 넝마가 되어 있었다.
아드리안나까지의 거리가 제법 멀었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 도끼를 던져 마물 가죽에 흠집을 내다니-.
'대공의 딸이 맞군.'
갈라하드는 괜히 옷깃을 고쳤다.
아드리안나는 축제를 좋아했다. 그 움직이지 않던 입꼬리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피곤한 정신을 붙잡고 아드리안나를 따라서 돌아다녔다.
피곤이 올라오기에는 북부의 놀이가 너무 강렬했다.
"이쪽입니다. 이건 눈감고 머리 깨기입니다."
"왜 눈을 감고 깨지?"
"눈을 뜨고 깨면, 너무 쉽지 않습니까?"
"오, 그런 문제였군."
다행히 서로의 머리를 깨는 건 아니었다. 마물의 머리를 위로 던지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깨는 거였다.
"후후, 다음은 불 목욕입니다. 몸에 불을 붙여서 추위를 이겨내는 전통적인 놀이입니다."
"화장이 전통이었군."
"예?"
"아닐세."
"안쪽에 마물 가죽을 대서 안전합니다."
"······북부는 안전의 개념이 좀 다르군."
둘은 불을 붙이고 나란히 뛰었다. 확실히 따뜻하기는 했다. 너무 따뜻한 게 문제였지-.
"후후후-. 다음은 마물 오래 버티기입니다."
"이건 뭔지 알 것 같군. 마물에 타서 오래 버티는 건가?"
"아, 비슷합니다."
"비슷하다······?"
아드리안나가 가리키는 곳에 지렁이 같은 마물이 꿈틀거렸다. 저기서 버티는 거였군.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후후후후-. 이번에는 북부 축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맨손으로 마물 잡기입니다. 아주 재밌습니다."
"맨손으로 마물을 잡으라니-. 인기가 많을 만하군."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전합니다."
아드리안나의 들뜬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정면에 늑대처럼 생긴 마물이 있었다. 갈라하드를 본 놈이 주둥이를 쩍 벌렸다.
거대한 송곳니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람 머리를 통째로 씹을 정도로 건치였다. 어디에 안전이 있는지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먼저 하시겠습니까?"
"좋네. 아, 내기하겠나?"
"저 마물 잡기 기록 보유자입니다. 불리하실 겁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나한테 이점을 줘야지."
"당당하시군요."
"합당한 요구인데, 당당하지 못할 건 뭔가."
"좋습니다. 줄 하나만큼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옆에 있는 걸 가리켰다. 거기에는 꼰 밧줄들이 뒹굴고 있었다. 불을 붙여 시간을 재는 듯했다.
"좋군, 지는 이가 이기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하지."
"소원 말입니까? 좋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자신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법이군요······."
번개에 바짝 탄 마물 앞에 선 아드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이 상당히 심각했다.
밧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갈라하드에게 밧줄 하나 분량을 더 주겠다고 했으니, 아무리 빨리 해도 아드리안나의 패배였다.
"맨손일세."
"일리가 있습니다. 북부의 놀이에는 마법에 관한 기준이 없으니까요. 제 패배입니다."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승리에 깔끔하게 승복했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손을 털며 다가왔다. 그 눈썹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아주 신난 모습이었다. 입꼬리도 살짝 풀어져 있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감사를 표하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어울리다니. 나도 즐거웠네. 자네 말대로 북부 축제는 북부 축제만의 매력이 있군."
"아, 그렇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쭉 올라갔다. 그 입꼬리가 살살 움직였다.
"혹시 어떤 게 가장 재밌으셨습니까? 도끼 피하기? 불 목욕? 아니면 역시 맨손으로 마물 잡기입니까?"
아드리안나가 전에 없이 길게 말했다. 성큼 다가온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맨손으로 마물 잡기가 재밌더군. 마물의 마나 농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니까."
"아하, 역시 그런 이유군요."
"이해 못 했군."
"예."
아드리안나가 당당하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나중에 제국 축제도 같이 가지."
아드리안나가 잠시 굳었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두 번 연속 끄덕였다.
"제국의 축제는 어떻습니까? 머리 깨기 같은 게 있습니까?"
"그런 건 없네. 아, 그래도 결투는 있네. 북부처럼 격렬하지는 않지만."
"재밌겠군요! 기대됩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또렷해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조용하던 아침이 일어나고 있었다. 슬슬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이제 시작이군."
"······예."
"긴장되나?"
"예. 약혼은 처음이라서."
"나도 처음일세."
"아, 그렇군요."
아드리안나의 무심한 반응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별일 없을 걸세."
"예,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갑자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아, 소원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조금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원이라-.'
갈라하드는 잠시 중얼거렸다.
문득 처리하지 못한 문제가 떠올랐다. 그건 어쩔 수 없기에 놔뒀던 문제인데-.
'아드리안나라면······.'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찬찬히 살폈다.
아드리안나는 평소와 달리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완벽하군.'
그에 갈라하드는 웃으며-.
"좀 벗어주겠나?"
정중하게 권유했다.
"······?!"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자밋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라면 마탑 쪽을 처리하고 있을 갈라하드였다.
그런데 왜 다시 본부로 왔는지 의문이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뒤를 보며 손짓했다.
"들어오게."
"아, 실례하겠습니다."
갈라하드의 뒤로 흰색 갑주를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순간 어둡던 장내가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익숙하게 본부로 들어왔다. 자밋은 아드리안나가 본부로 온 게 처음이 아님을 직감했다.
둘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자밋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고-.
"톰, 달콤한 간식 좀 있나?"
"아, 내오겠습니다."
톰은 익숙하게 뒤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아드리안나는 정자세로 앉아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톰을 따라갔다.
'달콤한 걸 좋아한다더니.'
자밋은 아드리안나의 얼굴을 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이 얼굴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여분의 드레스가 있나?"
"드레스요?"
뜬금없는 물음에 자밋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녀는 기필코 드레스를 입을 걸세. 괜히 막으려다가는 문제가 더 커질 거야. 약혼식에서 드레스라니-. 그건 꽤 큰 문제일세."
갈라하드가 담담히 말했다.
자밋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를 괜히 잘못 건드리면 문제가 커질 요소가 다분했다. 차라리 배제하는 쪽이 낫다.
그런데 드레스가 있냐니-.
"아, 드레스를 입히겠다는 거군요."
황녀를 아드리안나로 누르겠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아드리안나라면 충분히 누를 만했다.
"정답일세. 요원용 드레스 있지 않나?"
자밋은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요원은 다양한 복식을 들고 다녔다.
다만-.
"요원용이라 수수할 텐데요."
"괜찮네. 아드리안나니까."
그때, 톰이 달콤한 사탕과 쿠키를 내왔다. 감사를 표한 아드리안나가 하나씩 조심스럽게 먹었다.
아드리안나는 쿠키를 한 입 씹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음미하는 거야?'
확실히 저런 외모라면 수수한 게 더 나을 듯했다.
"안에 드레스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 혹시 몰라서 제가 따로 준비해뒀습니다."
"역시 톰이군."
혹시 몰라서 드레스를 준비해뒀다니? 그게 말이 되나? 자밋의 시선에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대장님 약혼식이니까요."
톰의 듬직한 말에 자밋은 혀를 내둘렀다.
"가져오겠습니다."
톰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아드리안나를 구경했다.
정신없이 쿠키와 사탕을 먹던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빤히 쳐다보는 갈라하드와 자밋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북부에서는 단 걸 먹을 일이 많지 않아서-."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네. 많이 먹게나. 앞으로도 더 구해줄 테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이 어느 때보다 크게 흔들렸다.
'치사하게 먹을 걸로-.'
자밋은 작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오실래요?"
아드리안나는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면서 일어났다.
안쪽으로 사라진 둘에 갈라하드는 찻잔을 홀짝였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톰."
"아, 이거······."
톰이 뭔가를 내밀었다. 백합이 가득 묶인 꽃다발이었다.
"혹시 몰라서 준비했습니다."
당장 귀족의 연회장에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지런한 꽃다발이었다.
"톰, 봉급을 2배로 올리게. 길버튼 경은 좀 깎고."
"예? 저는 충분합니다."
"아니, 명령일세."
단호하게 말하자 톰은 그제야 끄덕였다.
그때, 안쪽이 시끄러워졌다.
"갑옷은 기사의 피부입니다! 벗을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빼꼼 열렸다. 잔뜩 구겨진 자밋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거 황소고집인데요?"
자밋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내기에서 지지 않았나. 설마 기사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가."
"······윽!"
아드리안나가 조용해졌다. 눈을 찡긋한 자밋이 다시 들어갔다.
안에서 자밋의 감탄사가 연달아서 들렸다. 아드리안나가 연신 침음성을 흘렸다.
잠시 뒤에, 문이 열리고 자밋이 먼저 나왔다.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부럽네요."
자밋이 괴상한 소리를 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 이상합니까?!"
평소 막힘 없던 갈라하드가 조용했다.
이내 아드리안나는 자밋에 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이상하군."
갈라하드는 낮게 읊조렸다.
****
참모진은 밤새 잠을 못 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약혼식과 전야제의 문제도 산더미였으니까.
더불어-.
'3황자가 황실 기사로 왕국 연합의 왕을 습격하려 했다니!'
북부와 왕국 연합을 이간질하는 건, 상당히 치명적인 계획이었다. 겨우 맞춰진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그 계획은 중간에 막혔다.
이번에도 역시 갈라하드였다.
약혼식 직전이라 정신도 없었을 텐데, 이를 나서서 처리하다니-. 참모진은 다 같이 갈라하드를 연호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갈라하드의 이름부터 외치는 참모도 있을 정도였다.
'근데 어떻게 그리 빠르게 반응할 수 있지? 계획을 직접 꾸민 게 아닌 이상······.'
중얼거리던 테오도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불경한 생각이었다.
본래 북부에는 약혼식이라는 게 없었다. 그냥 바로 뒹굴면 결혼인데, 약혼을 왜 한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대공의 특별 지시였다. 원래였다면, 식탁에 고기와 술을 가득 채우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북부에서는 고기와 술의 양이 훌륭함의 척도였으니까.
다만, 갈라하드의 약혼식이었다. 갈라하드의 약혼안 개 대공의 지시보다 크게 작용했다.
최근 갈라하드를 탐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에 참모들은 없는 예산을 쥐어짜서 전부 투자했다.
다만, 평소에 안 하던 이들이 예산을 넣는다고 뭘 할 줄 알겠는가. 더 맛있는 고기와 더 넘치는 술을 준비할 뿐이었다.
덕분에 식탁 위에 고기가 산더미였다. 북부인들이 보기에는 끝내주는 약혼식이었다.
그때, 특무대의 톰이라는 병사가 어디서 구했는지 백합을 가득 가져와서 회의장을 화려하게 꾸몄다.
그때, 식장에 사람들이 속속 모였다. 기다란 식탁의 곳곳이 채워졌다.
마탑의 마법사들부터, 왕국 연합의 왕, 3황자까지-. 북부에서 열렸다기에는 그 면면이 상당히 화려했다.
'감히 갈라하드를 노리는 도둑놈들이지.'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이들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대부분 갈라하드를 노리는 도둑놈들이었다.
문제를 일으킬 요소가 다분했다.
대장들도 도착했다. 식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누군가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갈라하드 대장이 북부를 선택했다.'
그래, 이쪽은 아드리안나였다. 대륙 제일의 미인인 아드리안나-.
테오도르는 애써 불안함을 눌렀다.
그때, 식장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아니, 빨려 들어갔다고 하는 게 맞았다. 시선이 강제로 끌려갔다.
그 상대는-.
"참 변변찮구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황녀였다.
황녀의 외모는 본래 화려했다. 만개한 꽃 같은 외모였다. 그런 황녀가 드레스까지 입으니 더욱 살아났다.
그건 치명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불에 달려드는 벌레처럼, 시선이 절로 끌려갔다.
보고만 있어도 괜히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맙소사.'
황녀의 화려한 등장에 테오도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드리안나는 절대적인 외모를 지녔지만, 갑주만 입는 기사였다.
그와 달리 황녀는 화려하게 꾸민, 만개한 꽃이었다.
갑주를 입은 아드리안나와 화려한 황녀, 누가 봐도 황녀가 약혼식의 주인이었다.
나지막한 침음성이 들렸다. 대공이었다. 대공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황녀는 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상상하지도 못한 방해였다. 협약을 저런 식으로 사용할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그렇기에 더 치명적이었다.
모든 시선을 끌어당긴 황녀는 가벼이 걸었다. 황족이기에 대공 다음 상석이었다. 영락없는 약혼식의 주인이었다.
심지어 그 옆에 앰버르탄 백작까지 있었다.
'앰버르탄 백작이 왜 황녀 옆에······.'
대공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그 근육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장례식-.'
대공의 분노에 참모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 문이 열렸다. 깔끔하게 입은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평소에도 깔끔했던 갈라하드지만, 지금은 더 깔끔했다. 머리를 한 올도 빠짐없이 뒤로 넘겼는데, 그 외모가 훤칠했다.
상황의 위급성을 모르는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장내를 둘러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인 이들의 시선이 여전히 황녀에게 끌려있다는 점이었다.
더 문제는 갈라하드의 시선도 황녀에게 닿았다는 것이었다.
갈라하드와 마주한 황녀가 더없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곳곳에서 탄식과 신음이 터졌다.
대공이 살벌한 침음성을 흘렸다. 갈라하드의 시선이 대공에게 향했다.
갈라하드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의 눈이 잔뜩 구겨졌다. 살벌한 소리가 연신 터졌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모인 이들이 크게 흔들렸다.
그때-.
"들어오게."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했다.
문이 전과 달리 활짝 열렸다.
거기에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그날-.
"······."
오랜 기간 대공을 모셨던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대공이 환히 웃는 얼굴을 봤다.
*
'역시 이상하지 않은가.'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가득 씹었다.
두꺼운 갑주가 없으니, 세상에 훤히 드러난 것 같았다. 당장 갑주를 입고 싶었다. 투구까지 쓰고 싶었다.
버티기 힘들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을 내밀었다.
언제 꼈는지, 검은색 장갑이 끼어져 있었다.
"······역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아름답네.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처음 듣는 긴장한 목소리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나를 믿게."
담담한 말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참으로 따스했다.
128화 커플 댄스
'다들 모였군.'
갈라하드는 장내를 둘러봤다.
장내에 자리한 이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지만, 모두 침묵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한 곳에 꽂혀 있었다.
"으윽······."
갑주가 아닌 드레스를 입은 아드리안나였다.
고위 마족을 상대할 때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아드리안나였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지금은 잔뜩 긴장한 느낌이었다.
손은 잔뜩 떨고, 볼은 붉었으며, 늘 당당하던 시선은 깊이 내리깔았다. 드레스가 어색한지, 고장 난 것처럼 걸었다.
최전선에서 이끌던 영웅의 면모는 조금도 없었다.
보편적으로 외모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갈라하드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드리안나는 달랐다.
아드리안나는-.
'절대적인 외모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외모였다.
늘 입던 두꺼운 갑주가 애써 그 외모를 가리고 있던 것이다. 갈라하드조차 숨이 턱- 막혔을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내에 침묵만 가득했다. 모두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가장 중요한 건 대공이었다. 대공을 확인한 갈라하드는 놀랐다.
대공이-.
'함박웃음이군.'
정말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마물에 가까운 외모가 부드럽게 보일 정도였다.
'저 외모로 부드럽게 웃을 수가 있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으며 아드리안나를 당겼다. 아드리안나가 힘없이 끌려왔다.
"자네, 걸음과 손이 같이 나가는데?"
"······으에?"
"아닐세."
아드리안나의 멍청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버티는 게 아드리안나의 최선인 듯했다.
자리는 대공의 앞쪽에 있었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아드리안나의 의자를 빼줬다. 아드리안나가 고장 난 것처럼 삐꺽거렸다.
"앉게."
"······예."
갈라하드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슬쩍 황녀를 살폈다.
황녀는 멍하니 있었다. 늘 머금던 화려한 미소는 없었다. 황녀에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얼굴이었다. 황녀의 본모습이었다.
그때,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황녀가 입술을 씹었다. 그 입술 사이로 피가 터져 흘렀다. 안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욱 붉어졌다.
황녀의 드레스는 굉장히 화려했다. 이제껏 갈라하드에게 보여줬던 드레스가 준비용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곳곳에 보석이 달렸고, 그 천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러웠다. 대충 봐도 굉장히 비쌀 것 같은 드레스였다.
'단단히 준비했군.'
다만, 아무리 옷이 뛰어나도 본판은 이길 수 없었다.
그때, 황녀가 눈에 힘을 주며 제 드레스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뜯었다. 값비싼 드레스가 단번에 뜯겨 흩어졌다.
몸에 딱 붙은 붉은 갑주가 드러났다. 꼭 파충류의 껍질 같은 갑주 차림이 된 황녀가 활짝 웃었다.
'징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대공은 여전히 아드리안나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뒀다가는 종일 저러고 있을 듯했다.
"시작하시죠."
갈라하드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대공의 웃음이 멈췄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웃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혼식을 시작하겠다."
대공이 선언하자,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렸다. 전쟁에서 기세를 올리기 위해 쓸 것만 같은 웅장한 북소리였다.
'약혼식을 알리는 것에 저런 북을 쓰다니-. 북부답군.'
대공이 앞에 놓인 거대한 마물 다리를 잡았다. 그건 굽지도, 털조차 뽑지 않은 끔찍한 고기였다.
"먹고 마셔라."
대공이 고개를 거칠게 뜯었다.
가득 뿌려진 붉은 피가 약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북부의 약혼식은 투박했다. 흔한 반지 교환도 없었다. 그저 먹고 마시는 게 전부였다.
"······굉장히 이쁩니다."
아드리안나가 장내에 가득한 백합을 보며 말했다. 그 눈이 잔뜩 반짝였다.
백합에는 갈라하드도 놀랐다. 톰이 백합을 모은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많이 모았을 줄은 몰랐다.
북부의 백합이 그리 찾기 어렵다는데, 도대체 이걸 어디서 찾은 건지 신기했다.
"자네가 백합이 좋다고 하지 않았나."
"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나는 기억력이 좋다네."
그때, 투박한 북소리 사이로 익숙한 악기 소리가 들렸다. 연주하는 톰이 보였다.
그 주변에는 뚱한 표정의 길버튼과 열심히 먹는 데미안이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먹는지, 그 앞에 쌓인 고기들이 실시간으로 사라졌다.
원래라면 마법사들 사이에 있어야 할 장로들이 특무대와 같이 있었다.
"모른다니까요! 몰라요! 저는!"
"모르는데 도대체 마법을 어떻게 쓰는 거냐!"
"그냥 써진다니까요!"
"아니, 그냥 써진다니 이게 뭔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개가 풀을 뜯어 먹어요?"
"하이고! 내 생전 빡대가리 천재를 볼 줄이야!"
"아니! 북부에서는 빡대가리가 아니라 길버튼이라고 표현하더군!"
장로들은 연신 화를 내면서도 그웬에게 붙었다. 장로들의 노쇠한 눈이 가득 반짝였다.
'역시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때, 북부 놈들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참으로 급진적인 전개였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인 듯 금세 퍼졌다.
본격적인 놀자판이었다. 춤추고 고기 뜯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약혼식보다 승전 축하 연회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참으로 미개한 약혼식이군."
가장 먼저 일어난 건 3황자였다. 3황자는 갈라하드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대공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어서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라하드에게 시선을 준 황녀도 자리를 벗어났다. 앰버르탄 백작이 목줄이라도 잡힌 것처럼 끌려갔다.
황녀가 깔끔하게 물러나다니-.
'더 불안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황족 둘이 자리를 비우자, 분위기가 좀 더 가벼워졌다.
그때, 왕국 연합의 왕 파르한스타가 다가왔다.
"케르켁아, 야만인은 여자를-."
"잠깐! 이쪽에서 이야기하시죠."
"놔라! 케르켁과 이야기를-."
"이쪽으로!"
그런 파르한스타를 테오도르가 막아섰다. 왜 주변에 참모들이 뭉쳤나 했더니만-.
'나를 지킬 생각이었군.'
참모들은 갈라하드에게 오는 이들을 하나씩 잡아서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덕분에 갈라하드는 제법 쾌적했다.
"······약혼식이 문제없이 끝나다니, 신기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보며 말했다.
약혼식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한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원래라면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원들이 모였으니까.
갈라하드가 괜히 밤새 뛰어다닌 게 아니었다.
"자네의 아름다움에 그럴 생각이 안 들었나 보군."
"아, 그렇군요."
쉽게 끄덕이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직 안 끝났네. 그런 말 하면 부정 타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하게나."
"아, 그렇습니까? 조심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가장 문제였던 황족 둘이 자리를 비웠다. 이제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때-.
"흐흐, 축하드립니다."
길버튼이 못생긴 사막여우 같은 얼굴로 흐흐··· 웃었다.
"아, 길버튼 경."
"신나는 약혼식인데, 당사자들이 이렇게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있나."
"나가서 춤을 춰야지 말입니다!"
길버튼이 단단하게 주장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아드리안나가 도끼눈으로 길버튼을 응시했다.
"예, 아드리안나님. 제가 신나는 음악으로 해달라고 톰에게 요청해뒀습니다! 하하!"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말하지 않았나. 부정 탄다고."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진짜 위기에 몰린 듯한 표정이었다.
갈라하드는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나가 머뭇거렸다.
"저 춤 못 춥니다."
"괜찮네, 내가 잘 추니까."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질끈 씹으며 손을 잡았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 장갑을 타고 넘어왔다.
아드리안나가 가볍게 끌려왔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허리를 감았다. 아드리안나가 그대로 굳었다.
"힘을 빼게."
"하지만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낮게 말했다. 자기 성질을 걱정하는 듯했다.
"괜찮네. 날 믿어보게."
"알겠습니다."
그때, 시끄럽던 북소리가 조용해졌다. 이어서 잔잔한 악기 연주가 흘러나왔다. 역시 톰이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내려봤다. 갑주를 입지 않은 아드리안나는 생각보다 작았다.
"긴장할 필요 없네. 검술이라고 생각하게. 어차피 몸을 쓰는 건 매한가지니까."
"······하지만 검이 없습니다."
진지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눈에 힘을 줬다.
"팔을 검이라고 생각하게. 이렇게-."
갈라하드의 발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아드리안나의 굳은 허리를 누르자 따라왔다.
"검술. 검술-."
"누가 검술을 펼칠 때, 자신의 검을 보는가? 상대의 어깨를 보지."
"아, 어깨. 어깨."
"그래, 이런 경우에는 눈을 보는 걸세. 눈은 마음의 창이란 말이 있지 않나?"
"······눈."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에 비친 갈라하드는 웃고 있었다.
"춤도 검술과 마찬가지로 상대와의 호흡일세.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아, 이렇게."
"아니, 이렇게."
"아, 이해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열심히 갈라하드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문제는-.
'정말 춤에 소질이 없군.'
아드리안나의 춤 실력이 상당히 엉망이라는 점이었다.
본인도 그를 느꼈는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실시간으로 내려갔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춤을 못 춘다고 사과하는 모습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괜찮네. 말하지 않았나. 내가 잘 춘다고."
"······예?"
"몸에 힘을 빼게. 아예."
아드리안나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슬쩍 당겼다. 아드리안나의 몸이 가벼이 끌려왔다.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나를 느끼게."
"······예에?!"
"조용."
갈라하드는 차분히 아드리안나를 인도했다. 움직이기 전에 살짝 당겨서 아드리안나의 반응을 유도했다.
아예 움직임을 유도하니 아드리안나가 손쉽게 따라왔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실시간으로 커졌다.
춤이 끝날 때쯤, 아드리안나는 웃고 있었다. 여전히 어색한 미소였지만, 저번보다 조금 자연스러웠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음, 이제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가 됐군. 다음은 결혼인가?"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굳었다.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변했다. 역린을 찔린 듯한 반응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약혼만입니다."
미소가 사라지고, 예의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드리안나의 갑주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감정은 지독한 혐오였다. 아드리안나가 혐오하는 대상은 우습게도 자신이었다.
'성질 탓인가.'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저주라고 여겼다.
그럴 만도 했다.
갈라하드에게는 눈을 뒤집힐 정도로 매력적인 성질이었지만, 닿는 이에게 지독한 고통을 주고 심지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성질이었으니까.
다만-.
"자네, 약혼식 때도 그렇게 말했었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자신감 가득한 미소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장담하지. 우리는 결혼할 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 실로 담담한 선언에-.
"아-."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도망쳤다.
살벌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다시 고위 마물이 된 대공이 보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부끄러움이 참 많습니다."
가벼이 웃었다.
****
"솔직히 진짜로 약혼하실 줄 몰랐습니다."
길버튼은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약혼식을 끝내고 특무대 숙소로 돌아왔다. 내성 안에 마련해준 특무대 숙소는 아주 쾌적했다. 앞에 경비를 서는 병사도 있었다.
데미안과 그웬은 자러 올라갔고, 톰은 백합을 말리겠다며 사라졌다.
"괜찮네, 자네는 길버튼 경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 마법을 워낙 배척하는 북부 아닙니까."
"자네도 그랬지. 마법사가 사라져도 모르겠다면서-."
낮은 목소리를 흉내 내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때는 잘 모르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해하네."
갈라하드가 작게 웃으며 연초 연기를 뱉었다. 그에 길버튼은 코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말인가. 못생긴 건 괜찮네. 자네, 잘못이 아니지 않나."
"아니, 전에 버릇없이 대했던 거 말입니다."
"아, 그거 괜찮네. 지금 보니 북부인치고는 상당히 점잖은 편이더군."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튼, 죄송합니다."
"말로만?"
"예? 그러면 뭐 합니까?"
"노래라도 해보게."
"에이, 노래는 무슨-."
"진심이 아니었군."
"······예? 진짜 합니까?"
갈라하드의 가벼운 미소에 길버튼은 목을 풀었다. 노래라면 제법 자신이 있었다.
"나는 기사가 될-."
길버튼은 노래를 시작했다. 이내 흥이 올라서 발로 박자까지 맞췄다.
노래를 끝낸 길버튼은 박수를 기대했다. 다만, 박수는 없었다.
갈라하드는 입에 연초를 물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게 아니라,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갈라하드는 절대 편히 자지 않았다.
'피곤하셨군.'
길버튼은 칼자루를 잡고 자리를 지켰다.
****
'잠깐 눈도 못 붙이게 하는군.'
눈 앞에 펼쳐진 푸르른 초원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존재감을 표출했다. 그 박동이 갈라하드의 정신을 붙잡았다.
그에 정신을 차린 갈라하드는 품에서 연초를 찾았다. 연초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푸른 수풀은 네발 마족이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연초를 찾았다는 건-.
'놈의 힘이 약해졌군.'
물론, 갈라하드의 마나 농도가 올라간 것도 효과가 있겠지만, 놈은 정신계 고위 마족이었다.
더불어 네발 마족이 계약 비슷한 것까지 하여, 영향력을 올린 상태였다. 단순히 마나 농도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때, 앞의 수풀이 가득 짙어졌다. 떨어진 수풀 하나에서 연속으로 푸름이 일어났다.
이어서 익숙한 숲으로 변했다.
"자신을 그분이라 칭하면서 이렇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그때, 수풀이 갈라졌다. 거기서 네발 마족이 천천히 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자네, 작아졌군?"
전에는 사슴 같은 하체에 성인 여인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어린아이의 형태였다.
갈라하드는 네발 마족을 살폈다. 확실히 전보다 옅어진 느낌이었다. 작아진 영향력과 변한 외형-.
"힘을 잃었나?"
그리 묻자-.
[도와다오.]
네발 마족이 도움을 청했다.
'도와달라?'
뜬금없는 요청에 갈라하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네발 마족의 힘이 약해졌다면, 필요가 없었다. 황제를 처리한다는 뜻은 일치했지만, 일단 놈은 마족이었으니까.
마족과 손을 잡는 건 달갑지 않았다. 하물며 능력 없는 마족과는 더더욱.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가 담담히 물었다. 그러자 네발 마족의 얼굴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네놈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냐.]
네발 마족의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울렸다.
'나를 돕다가 힘을 잃은 건가.'
확실히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여러 차례 도와주기는 했다.
다만-.
"그래서?"
[······?]
"말은 바로 하게. 자네가 나를 도운 건 자네의 목적을 위해서지 나를 위해서가 아닐세."
[놈.]
"고작 그거 도와줬다고 힘을 잃을 정도면, 더 이야기할 것도 없군."
네발 마족이 그대로 굳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가벼이 흔들었다.
"마족 주제에 호소하지 말고, 거래 조건을 정확히 제시하게."
그때, 네발 마족이 뒤를 돌아봤다. 푸른 수풀이 멀리서부터 흩어졌다. 아니, 찢겼다. 갈가리 찢겨나갔다.
세상이 찢겼다.
"손님이 왔나 보군."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네발 마족은 마족이었다. 놈이 잘못돼도 갈라하드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놈이 처리되면 좋았다.
밤에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네발 마족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왕이-.]
"자네, 지금 뭐라 그랬나?"
네발 마족이 그대로 찢겼다. 네발 마족의 살점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살점마다 눈이 보였다.
칠흑처럼 검은 눈이었다.
수많은 검은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를 끝으로 공간이 무너졌다.
거칠게 일어 난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갈라하드가 거칠게 기침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이마와 몸이 땀 범벅이었다.
그 꼴이 상당히 엉망이었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마경으로 가야겠네."
그 입꼬리가 가득 올라가 있다는 것이었다.
악몽이 아니라, 끝내주는 꿈을 꾼 것처럼-.
"어이, 톰!"
129화 약혼식 마무리
자밋은 가벼이 찻잔을 흔들었다.
어쩌다 정보국을 세웠다. 실제로 체계도 설립되는 중이었다.
'부국장님이 아시면 섭섭해하시겠네.'
그때, 레몬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고개를 들자, 갈라하드가 앉아 있었다.
"소리 좀 내고 다니라니까요."
"습관이라서."
갈라하드의 담담한 대답에 자밋은 작게 웃었다.
"얼굴이 좋네요. 푹 잤나 봐요?"
"좋은 꿈을 꿨거든. 아, 잠시 자리를 비울 거야."
"지금요?"
자밋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약혼식을 끝냈기에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정보국 초기였다.
"시기가 좋지 않은데요."
"괜찮네. 자밋이 있으니까."
뻔뻔한 갈라하드의 말에 자밋은 작게 웃었다.
"큰일인가 봐요?"
"상당히 큰일이지."
자밋은 더 추궁하지 않고 끄덕였다.
"마탑은 장로 둘에게 맡기면 될 거야. 마석은 퍼스트를 통해 왕국 연합 쪽으로 유통하고. 참모 테오도르와 까마귀랑 논의하면 될 걸세. 코르튼은 되도록 끼지 말고."
"코르튼이요?"
"까마귀한테 말하면 알 걸세."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에 자밋은 머릿속으로 기억하며 끄덕였다.
"은퇴 팀을 처리했으니, 정보국은 당분간 못 움직이겠지."
"에포트도 있으니, 본부는 괜찮을 거예요."
"여명은 대공의 눈치를 보니, 대공의 성에서 안 벗어나면 될 걸세. 되도록 성안에서 생활하게나."
갈라하드의 계획은 늘 그렇듯 철저했다. 갈라하드가 자리를 비워도 공백이 없을 듯했다.
자밋은 갈라하드를 살폈다. 그 얼굴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자밋은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갈라하드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말인가.
"무슨 일인데요?"
자밋의 물음에 갈라하드의 입술이 잠시 멈췄다. 이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비밀일세."
자밋은 더 캐묻지 않았다.
연초 하나를 다 핀 갈라하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밋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갈라하드가 간다면-.
"······톰은요?"
"톰은 특무대일세. 같이 가야지."
이제껏 평온하던 자밋의 얼굴이 구겨졌다.
갈라하드가 자리를 비우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톰은 안 돼요. 톰은 두고 가요."
톰은 보낼 수 없었다.
"음, 톰은 특무대일세. 같이 가야지."
"톰을 데려가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제 요원 제법 많지 않나. 퍼스트, 펌킨, 핸섬, 제임스까지. 생각보다 많군."
"전부 똥덩··· 아니, 현장 요원이잖아요. 차라리 네 명을 데려가고 톰을 놓고 가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밋의 격렬한 반응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북부에서 톰 없이 어떻게 생활하라고요."
"미안하지만, 이쪽도 톰이 필요해서."
자밋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주름 생긴다고 얼굴에 힘을 주지 않던 자밋이었는데-.
"걱정하지 말게. 금방 돌아오겠네."
갈라하드는 황급히 자리를 나섰다.
"톰은 두고 가!"
자밋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갈라하드는 본부 문을 다급히 밀어 닫았다.
자밋의 저항이 저리 강할 줄이야. 생각보다 톰의 중독성이 심한 듯했다.
'까마귀라도 붙여줘야겠군.'
까마귀는 제법 머리가 빠릿빠릿했으니까. 까마귀를 붙여주면 그나마 괜찮을 듯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달콤하면서 어딘지 톡 쏘는 향기-.
고개를 돌리자, 고고하게 서 있는 황녀가 보였다. 황녀는 조금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녀가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때마침 왔군.'
안 그래도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먼저 오다니-.
'앰버르탄 백작도 데리고 왔군.'
확실히 눈치가 있는 여인이었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살폈다. 본부 주변이라 인기척이 적었다. 보는 이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황녀에게 다가갔다. 황녀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황녀가 활짝 웃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할까?"
황녀가 당연하다는 듯 답을 구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내 삶은 네 책임이니까."
그 목소리에 작은 틈도 없었다. 단단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아니면 나를 죽이거라. 네 손에 죽으면, 그것대로 행복할 테니."
황녀가 제 목을 들었다. 하얗고 가는 목이 훤히 드러났다. 꼭 투정을 부리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본래 미친 여인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집착이 더 심해지는 듯했다.
황녀를 죽여봤자, 친위대의 추격을 받는 게 전부였다. 친위대는 얽히지 않는 게 좋았다.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었다. 황녀는 황실에 이어진 유일한 끈이었다.
황녀는 살려두는 게 맞았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돌아가서 4황자랑 붙으시죠. 4황자도 급한 상황이니 반길 겁니다."
"알겠다."
황녀가 환히 웃으며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앰버르탄 백작으로 시선을 돌렸다. 앰버르탄 백작이 구겨진 얼굴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아버님, 착한 눈."
앰버르탄 백작은 웃지 않았다. 고집 있는 사내였다. 갈라하드는 앰버르탄 백작을 내려봤다.
앰버르탄 백작의 눈에 혐오가 떠올랐다. 친부에게 어울리는 눈빛이 아니었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더러운 마법 쟁이."
적의 가득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멸칭이었다.
갈라하드는 앰버르탄 백작의 눈을 직시했다.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흔들렸다.
"4황자에게 전하시죠. 기회 똑바로 잡으라고."
갈라하드는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건넸다. 왕국 연합 왕자의 손가락과 반지가 담긴 상자였다.
4황자는 3황자와 대립하는 인물이었다. 성군의 기질을 타고난 4황자와 폭군 유망주인 3황자였기에-.
"대공과 왕국 연합이 3황자에 관한 불만을 제기할 겁니다. 3황자의 입지가 좁아질 테니, 4황자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앰버르탄 백작은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한 쪽에 가까웠다. 이 손가락의 가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앰버르탄 백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유가 뭐지?"
"4황자가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요. 투자라고 봅시다."
진실이었다. 4황자는 성군의 기질이 만연했다. 만약 갈라하드가 다음 황제를 고를 수 있다면, 4황자로 정했을 것이다.
으드득, 황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왜지?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원하는 건?"
앰버르탄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4황자에게 아주 필요한 카드였으니까.
"4황자가 황녀님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손을 잡아야 한다?"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순간에도 계산을 따지는 듯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겁니다. 3황자가 앰버르탄 백작가를 부술 거라고 했으니까요."
"3황자가?! 왜지?"
앰버르탄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기보다 가문을 더 중시하는 앰버르탄 백작이었다. 갈라하드를 내쳤던 이유도 가문의 정통성 때문이었다.
"도대체 3황자가 우리 가문을 왜? 아무런 접점도 없었거늘-."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앰버르탄 백작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네··· 네놈 3황자를 건드린 것이냐?!"
"아버님, 말 이쁘게."
"끄윽-."
앰버르탄 백작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갈라하드는 시선을 돌렸다. 황녀는 뭔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황실로 같이 가는 걸 기대하겠지-.
황제 때문에 황실을 방문할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실에 얌전히 있게. 다음에는 내가 가겠네."
"기다릴게요."
앰버르탄 백작은 미련 없이 떠나는 갈라하드를 멍하니 쳐다봤다.
다음에 자기가 가겠다는 갈라하드의 말이 왠지 모르게 서늘했다. 상당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때-.
"아버님?"
황녀의 나지막한 부름에 앰버르탄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잘 들어봐요."
황녀는 늘 하던 이야기를 또 시작했다. 갈라하드와 왜 틀어졌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이가 저한테 왜 화가 났을까요?"
이유를 물었다. 앰버르탄 백작은 입술을 씹었다.
이제는 외울 정도로 들은 이야기였지만-.
"나도 모르겠다."
진심이었다.
"자, 다시 말할게요. 잘 들어요. 아버님."
소용없었다.
****
"마경 말입니까?"
갑주 차림으로 돌아온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마경을 들어가야겠네."
"마경은 위험한 곳입니다."
"알고 있네.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 장소 아닌가."
"그건 데이트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엄해졌다.
"그래, 아니었지. 이런 기억이 자꾸 깜박깜박하는군. 아무튼, 마경을 좀 들어가야겠네."
"······이유가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그 올곧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고민했다.
갈라하드가 마경에 가는 이유를 요약하면, 고위 마족이 위험에 빠져서였다.
그걸 아무리 좋게 말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일이 괜히 더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와 약속하지 않았나. 마경에서 사라진 전임 1대대 대장을 찾아주겠다고."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는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도와주시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드물게 올라갔다. 그 무표정이 깨지고 간절함이 새어 나왔다. 전임 1대대 대장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듯했다.
"당연하지. 이제 약혼한 사이 아닌가."
거짓은 아니었다. 가는 길에 같이 찾으면 되니까. 선후 관계의 문제였다.
더불어 전임 1대대 대장도 궁금했다. 아드리안나가 이제껏 찾는거면 그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 정말-."
기뻐하던 아드리안나가 입을 꾹 닫았다. 흔들리던 눈썹이 멈췄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마경은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절실한 와중에도 다른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는 게 참으로 아드리안나다웠다.
"괜찮네. 자네가 지켜줄 것 아닌가?"
"하지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갈등하는 눈치였다.
"나는 자네를 믿네. 자네가 나를 믿어주듯."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그 눈썹이 올라갔다. 이내 결심한 듯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아드리안나의 눈이 진지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갈라하드는 코를 찡그렸다.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족의 왕에 관한 단서도 찾을 생각일세. 마족의 왕이라면 마경에 있을 테니까."
"아, 확실히 일리가 있군요. 마경 안에는 뭐가 있을지 아직 안 밝혀졌으니까요."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깊게 들어가야겠군요. 정예로만 모집하겠습니다."
"좋네, 나도 정예만 데려가겠네."
"······정예 말씀이십니까?"
"특무대 이야기일세."
"아, 특무대."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그러면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지."
"아, 저희 쪽은 원래 1대대로 돌아갈 계획이라서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아까 끝났네만."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었다. 확인하지 않았지만, 톰이 있으니까 준비가 끝났을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바로 출발하시죠."
"좋군, 오랜만에 마경 나들이라니."
"마경은 위험한 곳입니다. 장난스레 말할 곳이 아닙니다."
"알았네. 알았어."
아드리안나가 잠시 멈췄다. 진지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정수리를 슬쩍 찔렀다.
"······!"
토끼 눈이 된 아드리안나가 제 정수리를 잡았다.
"전부터 한 번 찔러 보고 싶었네."
"······예?!"
"가지."
갈라하드는 걸음을 옮겼다. 준비가 끝낸 아드리안나 부대를 끌고, 특무대 쪽으로 향했다.
톰이 이미 준비를 끝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예상이 틀렸다.
톰이 늦은 건 아니었다.
멍청한 원인이 있었을 뿐.
"이···! 이 개 같은 말이 나한테 침을!"
"길버튼님! 참으십쇼! 왜 말이랑 싸웁니까!"
"건방진 말이 나한테 침을 뱉잖아!"
"그러니까 왜 대장님 말을 건드리십니까."
"그냥 한 번만 앉아 보겠다는 건데! 이 망할 말이! 어어?! 방금도 나 깔아봤다! 톰! 방금 봤지?!"
"왜 말이랑 싸우십니까-. 다들 쳐다봅니다."
"이리 와라! 놈!"
길버튼이 갈라하드의 말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톰이 말리면서 준비가 늦어진 듯했다.
길버튼을 본 데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지팡이를 번쩍 들었다. 왜 지팡이를 검처럼 잡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웬은 박수까지 치며 데미안을 칭찬했다.
"정예······. 아니, 특무대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원래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고민됐다.
다만, 대륙을 구하기 위한 부대였다. 언젠가 마족의 왕과 싸워야 했다.
미리미리 경험시킬 필요가 있었다.
"먼저 출발하게. 바로 따라갈 테니까."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길버튼에게 향했다.
그때쯤 길버튼은 말과 진지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길버튼 경. 뭐 하는 건가."
"건방진 말 길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런 건 초장에 잡아야 타기 편합니다."
길버튼이 말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길버튼은 진심으로 말을 길들이는 중이었다.
"길을 왜 들이나."
"북부에서는 다 이렇게 길들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타기 편하게-."
갈라하드는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던 말이 자세를 낮췄다. 마치 편하게 타라는 듯-.
길버튼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얼굴에 지독한 패배감이 차올랐다.
갈라하드는 말의 목을 가벼이 두드렸다.
"똑똑한 아이한테 왜 뭐라 그러나. 그저 못생긴 사람이 싫은 건데. 그렇지?"
말이 길게 투레질했다. 길버튼이 나지막하게 '빌어먹을 말'이라며 중얼거렸다.
"바로 출발할 걸세. 다들 타게나. 목적지는 마경일세."
갈라하드의 선언에 길버튼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내 날카로운 얼굴이 됐다.
"전부 데리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네. 특무대 아닌가."
"하지만 그웬과 톰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길버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톰이 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큼지막한 방패가 있었다.
마물 가죽을 엮은 건지, 그 방패의 형태가 단단했다.
"괜찮습니다! 마물 가죽으로 엮은 방패가 있으니, 공격은 못 해도 막을 수는 있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톰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톰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그렇다는군."
"하지만 그웬은-."
길버튼이 그웬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몰리자 그웬이 울상이 됐다.
"저도 갈 거예요! 제가 있어야 갈라하드님이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저 천재래요!"
그웬이 논리적으로 말했다. 길버튼이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내 뒤에 있어라."
결연한 얼굴이 된 길버튼이 칼을 단단히 매며 말했다.
책임감이 많은 기사였다.
다들 마차에 타서 마경으로 갈 준비를 했다.
평소와 달리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근데 마경이 뭐예요?"
그웬이 조그맣게 물었다.
****
약혼식이 끝났지만, 참모진은 오히려 더 바빠졌다.
모인 이들의 돌아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함도 있었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마석장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갈라하드 대장과 사냥이라니.'
약혼식이 끝난 뒤에 대공은 참모진에게 갈라하드 대장과의 사냥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갈라하드 대장이 6대대를 구한 보상으로 요청한 사냥을 가려는 듯했다.
본래 대공은 사냥 갈 때 도끼만 들고 갔다. 그런 대공이 준비하라고 한 건 상당한 변화였다.
'갈라하드 대장을 신경 쓴다는 거니까.'
테오도르는 약혼식 때 봤던 대공의 미소를 떠올렸다.
실제로 저번에 갈라하드 대장과 사냥을 갔다 왔을 때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었다. 그건 미세한 차이였지만, 테오도르는 알 수 있었다.
그 명령에 참모들은 웃으며 준비했다. 외적에게서 갈라하드를 무사히 지켜내지 않았나. 거기에 대공이 한 번 더 쐐기를 박겠다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연회에서 남은 것들을 가득 담아서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했다.
준비하던 테오도르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갈라하드 대장에게 말했나?'
이번에는 약혼식 때문에 오래 있었지만, 평소 갈라하드 대장은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에이, 설마-.'
대공 전하가 준비까지 명령하셨는데, 갈라하드 대장이 없다니-.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어?'
안쪽에서 대공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기대하는 듯했다.
북부 대공의 미친 데릴사위 130화
새로운 문제
"정말 특무대와 마경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보좌관 루나비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은 직속 부대원들도 힘든 곳입니다. 심지어 저번 마경때, 상급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곳을 특무대와 간다는 건 위험합니다."
루나비른이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경은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에게도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 마경에 얼마 전에 신설된 특무대와 가는 건 상당히 위험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아드리안나도 고민했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특무대가 만만한 이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불어-.
"갈라하드 대장이 같이 간다. 괜찮다."
갈라하드는 고위 마족인 지배자를 잡았다. 마경이 아니었고 퍼스트와 함께였지만, 그 무력은 보장할 수 있었다.
"음······ 갈라하드 대장이라면···."
갈라하드의 이름이 나오자 루나비른이 중얼거렸다. 루나비른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갈라하드가 웃으며 지배자의 피를 챙기는 걸, 모두에게 보인 탓이었다. 그 후로 갈라하드에 관한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물 대신에 마족의 피를 마신다는 이야기였다. 그로 인해 다른 의미로 갈라하드를 꺼렸다.
"······알겠습니다. 근데 갈라하드 대장은 왜 같이 가는 겁니까?"
"마족의 왕에 관한 단서를 찾겠다더군."
순간 정적이 흘렀다. 루나비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드리안나를 볼 때면 늘 따뜻하던 눈이 싸늘해지고, 선명한 불쾌함이 드러났다.
"마족의 왕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해괴한 소리를 하다니. 그놈, 정상이 아니군요."
늘 아드리안나의 편이었던 루나비른이 격렬한 반발을 터뜨렸다.
그 격렬한 부정은 오히려 존재의 증명이었다.
정말 대륙 전체의 인간을 누르는 마족의 왕이 있다는 증거-.
아드리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미지의 억압에 관한 두려움이 올라왔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루나비른의 얼굴이 풀렸다.
"직속 부대의 수를 평소보다 늘리겠습니다."
루나비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짙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이걸 평생 겪었다는 건가.'
예정된 파멸의 존재를 모두에게 부정당하는 건, 상당히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걸 평생-.
그때,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웃었다.
"같이 점심 먹겠나? 톰이 스튜를 끓였는데 말이지."
저 여유로운 웃음이 신기했다. 어찌 웃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아드리안나님!!"
한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갈라하드의 웃음이 그쳤다.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군."
갈라하드가 슬쩍 물러났다.
거기에는 엉망이 된 병사가 있었다.
"1대대가 습격당했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
'습격이라.'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1대대는 다른 대대보다 그 규모가 컸다. 1.5배에서 최대 2배 정도였다.
더불어 그 무장 정도와 병사의 질은 다른 부대보다 더 뛰어났다. 애초에 뛰어난 북부의 병사 중에서도 정예였다.
그런 1대대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곳곳에서 불길이 올라왔고, 비명이 들렸다.
누가 봐도 습격당한 꼴이었다.
"새벽에 마족의 공격이 있었답니다."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보고했다.
"오늘 새벽?"
"예, 새벽에 마족들이 성문을 공격했답니다. 성문에 조금 균열이 생겼고, 그 사이로 마물과 마족이 들어와서 있었답니다."
길버튼이 뒤쪽을 가리켰다. 굳은 표정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저번에 봤던 성문은 몇 겹으로 방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성문이 뚫린 게 이해되지 않았다.
"무너질 성문처럼은 안 보였는데?"
"정신계 마족이 나타났답니다. 성문 주변에 있던 병사들 몇 명이 홀려서 날뛰었고 문이 열렸답니다."
정신계 마족이라-.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정신계 마족이 성문을 두드린 게 우연일까.
"원래도 이런 습격이 자주 있나?"
"마족의 공격이야 주기적으로 있습니다. 성문이 열릴 정도의 공격은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아드리안나님이 없기도 했고···."
길버튼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갔다.
"아드리안나님이 자리를 오래 비운 탓에 마족의 영역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드리안나님이 없어도 마족의 영역은 청소하지만, 아드리안나님이 있을 때와 그 양이 다르니 말입니다."
길버튼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거였다.
'아드리안나가 자리를 비운 탓이다.'
갈라하드는 그 미묘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는 본래 매일 마족의 영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족을 청소했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자리를 비웠으니, 마족이 쌓여서 공격했다는 건 제법 합당한 이야기였다.
다만-.
"아드리안나가 복귀하는 날 새벽에 공격하다니. 시기가 상당히 공교롭군."
"우연 아니겠습니까?"
"우연일 수도 있지. 하지만-."
갈라하드는 연초 연기를 깊게 뱉었다. 길버튼이 진지하게 응시했다.
"나는 우연을 믿지 않네. 우연은 논리가 없는 이들의 방패일세."
"······그러면 누군가 일부러 꾸몄다는 겁니까?"
"아직 모르지. 만약 누군가 꾸몄다면 의도가 있겠지. 가령 이 경우에는-."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중대장 사이에서 보고받고 있었다. 예의 무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선명한 죄책감이 떠올랐다.
"아드리안나에게 말하는 거겠지. 네가 이곳을 비워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네 책임이라고."
아주 고전적인 수법을 쓰는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게 왜 아드리안나님 잘못입니까?"
길버튼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길버튼 경도 아는 걸 아드리안나가 모르는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아드리안나를 왜 묶어두려고 했을까. 본래 아드리안나가 뭘 하려고 했었는지가 중요했다.
아드리안나는-.
'나와 마경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아드리안나를 묶었다는 건-.
'아드리안나가 마경에 들어가는 걸 막는 거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다는 건, 아드리안나와 최대한 빨리 마경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바로 갈 리가 없지.'
아드리안나는 현 상황에 죄책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그런 아드리안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1대대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해결하면 되겠군.'
결론은 명쾌했다. 놈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유능함은 갈라하드의 전공이었다.
갈라하드는 톰으로 시선을 돌렸다. 톰은 어느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톰,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두게. 넉넉하게."
"예, 알겠습니다."
톰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걸음을 옮겼다. 길버튼은 황급히 따라붙었다.
"1대대는 다른 대대들과 다릅니다."
"다르다?"
"예, 1대대는 아드리안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부대입니다. 애초에 대공 전하가 명령을 안 내리신 까닭도 있지만, 다른 대대들과 조금 다른 독립적인 부대입니다."
"자네는 쉬운 말을 어렵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군. 그러니까 버릇없는 부대라는 거 아닌가."
길버튼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이어서 길버튼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아드리안나님만 연관되면 눈이 돌아버린다는 겁니다."
"나는 아드리안나의 약혼자라서 밉보였으니,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정답입니다."
"음, 그렇군. 난처하겠어."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이며 아드리안나에게 향했다. 길버튼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따라붙었다.
"아드리안나."
중대장들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갈라하드를 본 중대장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아드리안나의 구겨진 눈썹이 꽤 거슬렸다.
"예, 갈라하드 대장."
"바로 출발하겠나?"
"죄송합니다. 대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먼저 이쪽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사과했다. 그에 갈라하드가 대놓고 혀를 찼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자네답군. 내가 바로 해결할 테니, 출발할 준비나 해두게."
갈라하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얼마나 평온한지, 그 거만한 내용이 담백하게 들릴 정도였다.
"타 부대의 놈이 뭘 안다고 껴드냐!"
기사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에 슬쩍 물러났지만, 그 날카로운 기세는 여전했다.
"성문이 뚫린 자네들보다는 많이 알 것 같은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도발했다.
중대장들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가 됐다.
'사람 긁는 건 최고라니까.'
길버튼은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잡고 갈라하드 옆에 섰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이다니-. 분위기가 더 날카로워졌다.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갈라하드는-.
"괜찮네. 우리는 이제 약혼한 사이 아닌가. 자네 부대가 내 부대나 다름없지. 해가 저물기 전에 출발하지."
아주 시원하게 저질렀다.
가득 구겨진 중대장들의 얼굴에-.
'시원하긴 하네.'
길버튼은 허허 웃으며 칼자루를 잡았다.
****
'진짜 미치겠네.'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 소속 기사, 캐럿은 이마를 박박 긁었다.
앞에 있는 여유로운 잘생긴 놈, 갈라하드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1대대에서 인식이 좋지 않은 갈라하드였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갈라하드는 대뜸 1대대의 구멍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직속 부대의 기사인 캐럿을 붙여준 것이다. 덕분에 캐럿은 다른 기사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성문부터 가보지."
"예, 이쪽입니다."
캐럿은 냉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상대는 갈라하드 대장이었다.
북부에서 아주 유명한 그 갈라하드-. 이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 보폭이 워낙 큰 탓에 캐럿은 뛰듯이 움직여야 했다.
가는 곳마다 날카로운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갈라하드는 오히려 손까지 흔들어줬다.
"이거 아주 엉망이군."
성문에 도착한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성문은 아직 수습하지 못한 상태였다. 주변에는 피와 살점이 가득했고, 시체도 널브러져 있었다. 처참한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꼭 밖으로 말해야 해?'
주변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캐럿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정신계라. 너무 두꺼운데 말이지."
그때, 갈라하드의 앞을 병사들이 막아섰다. 갈라하드가 캐럿을 돌아봤다. 캐럿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아드리안나 대장님의 허가를 받으셨다. 대공 전하의 명령을 행하시는 중이고. 비켜라."
굵직한 이름 두 개를 뱉으니, 병사들이 얼굴을 구기며 물러났다.
"고맙네."
갈라하드는 병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쳤다.
성문은 더 엉망이었다. 굵직한 철이 휘어져 있었고, 끔찍한 살점이 여기저기 있었다.
갈라하드가 그 흔적을 살피려는데, 거대한 기사가 막아섰다. 문지기 에르달이었다.
"더는 다가갈 수 없소."
"아드리안나의 허락을 받았고, 대공 전하의 명령을 이행하는 중이네만."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말했다. 다만, 그 상대가 좋지 않았다.
"통행이 허가된 건 아드리안나밖에 없소."
갈라하드가 캐럿을 돌아봤다.
"어쩔 수 없습니다. 문지기 기사 에르달은 참으로 강직한 인물이라서요."
"강직한 인물이라. 문지기에 어울리는 성품이군. 이렇게 보니, 문지기 상이기도 해. 이보게 에르달, 문을 지킨 지 얼마나 됐지?"
"스무 해가 넘었소."
에르달이 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 대단하군. 스무 해가 넘도록 성문을 지키다니. 불편한 점은 없었나?"
"없소."
"천직이군. 딱 맞는 직업을 일찍 찾은 건 축복일세. 습격 때도 성문을 지키고 있었나?"
"문지기는 성문을 떠나지 않소."
"길게 대답하는군. 그래, 당시 상황을 좀 말해주겠나?"
에르달이 크게 끄덕였다.
"평소와 같았소.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찌르더군."
에르달이 옆을 가리켰다. 성문 구석에 시체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밟힌 탓에 형체가 끔찍했다.
"문을 지키는 소대의 병사요."
"그렇군, 원래 사이가 나빴나?"
"아니, 좋은 편이었소."
"확실한가?"
"그렇소. 가끔 술도 마셨으니까."
에르달의 목소리는 강직했다. 그에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였다.
"그렇군. 성문은 어떻게 열린 거지? 복잡해 보이던데."
"소를 이용했소. 전체를 열지는 못했지만, 무거운 성문을 열 수 있었지."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그렇군. 성실하게 대답해줘서 고맙네."
"별말씀을."
"아.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에르달이 굳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벼이 물었다.
"오늘 새벽에 문을 왜 연 건가?"
에르달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저게 무슨-.'
에르달은 그 강직한 성품으로 타고난 문지기로 불리는 이였다.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문을 열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런 에르달이 문을 열었다니-.
이게 뭔 개소리인가.
"대답하게.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갈라하드가 손가락으로 에르달을 가리켰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서늘함이 올라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그때-.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이런, 기억하지 못하는군."
"나는-."
"길버튼 경, 꿇리게."
길버튼이 바로 움직였다. 길버튼의 검이 에르달을 두드렸다.
캐럿은 길버튼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길버튼은 뛰어난 기사라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길버튼의 검이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좀 더 날카로워졌어.'
에르달은 문지기였다. 문지기는 아무나 할 수 없었다. 강직한 심성은 기본이었고, 뛰어난 실력은 필수였다.
길버튼은 그런 에르달을 가벼이 제압했다.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캐럿의 눈이 커졌다.
"뭐 하는 짓인가!!"
그때, 뒤에서 호통이 들렸다. 주변을 정리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검을 뽑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새벽의 전투에 날이 서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강제로 밀고 들어 온 갈라하드가 문지기를 제압까지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포위됐다.
사방에 깔린 날카로운 검에 캐럿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잘 잡게 길버튼 경."
"예, 가만히 있어!"
정작 둘은 주변 상황이 안 보이는 듯했다.
그에 포위가 성큼 다가왔다.
그때, 갈라하드가 에르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꼭 참수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갈라하드는 건드리면 안 된다.'
캐럿은 욕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대공 전하의 명을 행하는 중이시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허락한 거라고! 다 물러서!"
당당하게 소리치자 포위한 이들이 잠시 멈췄다.
뒤에서 나지막한 비명이 터졌다. 그에 슬쩍 돌아본 캐럿은 욕을 참을 수 없었다.
에르달의 눈이 뒤집혀 있었다. 그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저걸 허락하셨다고?"
날이 선 물음에 캐럿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미개한 인간들! 얌전히 먹혀라!"
에르달의 입에서 끔찍한 호통이 터졌다.
포위하던 이들의 눈이 씰룩해졌다. 그들을 막고 있던 캐럿도 어리둥절한데, 그들은 어떻겠나.
'정말 에르달이 마족에게 당했다고?'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정신계 마족이 들어온 것 같군."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털며 말했다.
정신계 마족의 침입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흔적 없이 소대를 무너뜨리는 게 정신계 마족이었다.
정신계 마족을 찾으려면 그 하나하나 심문해야 했는데, 그렇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모두가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정적과 경악 속에서-.
"마족 찾기라-. 재밌겠군."
갈라하드 혼자 웃었다.
*
"정말 정신계 마족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관계자의 수가 상당할 겁니다만."
길버튼은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이 수많은 사람 속에서 정신계 마족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갈라하드였으니 생각이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마족의 피는 마나 농도가 짙네. 아, 길버튼 경이니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군."
갈라하드의 말에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다 모아두고 불을 지르면 되네. 후속 처리는 퍼스트를 부르면 되겠군."
길버튼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북부 대공의 미친 데릴사위 131화
마경온난화
"뭐? 해가 지기 전까지 끝낸다고? 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
뾰족한 목소리가 터졌다. 아드리안나 직속 부대의 마르디안이었다.
"마르디안. 갈라하드 대장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마르디안."
아드리안나가 마르디안을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낮았다. 그에 마르디안이 울상이 됐다.
부대장 필릭스에게 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필릭스는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갈라하드 대장이 유능한 인물이라는 건 알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릅니다. 1대대의 일을 그가 해결한다는 건 월권입니다."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움직였다.
본래 아드리안나는 감정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난 것 같군.'
필릭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1대대의 성문이 열렸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갈라하드 대장의 도움을 감사해야지, 견제할 것이 아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가 해가 지기 전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필릭스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갈라하드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 뒤로 길버튼과 캐럿이 들어왔다.
갈라하드가 회의장을 둘러봤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아, 마침 다들 모여 있었군."
저리 여유롭게 행동하다니, 확실히 보통 담력이 아니었다.
"성문이 열린 게 정신계 마족 때문이라는 건 다들 알 걸세. 그때, 정신계 마족이 섞여서 들어온 것 같더군."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정신계 마족이 섞여 들어왔다고?'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정신계 마족은 무력이 다른 마족보다 떨어졌지만, 그 권능이 문제였다.
놈들은 거대한 나무 안에 들어온 벌레처럼, 보이지 않는 속부터 썩게 했다.
그런 정신계 마족이 잠입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성문은 마족이 몰래 침입할 수 없는 구조다!"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갈라하드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만, 그렇다고 반발을 잠재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다들 조용."
아드리안나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보는 아드리안나의 모습에 다들 당황했다.
"고맙군. 캐럿, 말하게."
갈라하드가 캐럿의 등을 살짝 밀었다.
"······문지기 에르달이 정신계 마족에 당한 게 확인되었습니다. 공격 이후 수습할 때를 노려 잠입한 듯합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캐럿의 보고에 회의장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정말로 정신계 마족이 침투했다면-.
"당장 대대를 닫고, 대면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아드리안나가 손을 들었다.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정신계 마족을 찾을 방법이 있습니까?"
갈라하드에게 묻는 아드리안나에 필릭스는 눈을 찡그렸다.
최전선을 담당하는 1대대였다. 1대대보다 마족과 많이 부딪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런 1대대의 대장이 왜 제국에서 온 마법사에게 답을 묻는다는 말인가. 여기저기서 불만이 올라왔다.
"물론일세."
갈라하드의 자신감 가득한 대답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말 알고 있다는 건가-?
"아, 1대대에서는 정신계 마족을 어떻게 구분하지?"
'그러면 그렇지-.'
도리어 묻는 갈라하드에 몇몇이 조소를 머금었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졌다.
"먼저 대대를 잠급니다. 정신계 마족은 주변 병사들에 원래 있었던 인물로 인식되기에 찾기 쉽지 않습니다. 오러를 일으킬 수 있는 기사들이 면담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면담이라면?"
"마족은 고통을 느끼지 않기에 돌로 내려치거나 몽둥이로 두들겨서 그 반응을 살핍니다."
아드리안나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계 마족을 찾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그때-.
"참으로 무식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이군."
갈라하드가 신랄하게 평가했다.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 마족과 직접 부딪히는 건 우리다! 우리가 쌓은 방식을 무시하다니-!"
마르디안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꼬챙이를 뾰족 세웠다.
"마르디안."
"하지만 놈이 무시하잖습니까! 뭣도 모르면서!"
"입 닫으세요."
아드리안나의 투박한 명령에 마르디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저런 말을-?'
필릭스의 눈이 커졌다.
정작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다른 방법이 있다?'
최전선인 1대대에서도 까다로운 게 정신계 마족이었다. 그런 정신계 마족을 찾아낼 방도가 있다니?
그 상대가 갈라하드인 터라 다들 묘한 표정을 했다.
정말 갈라하드가 해결한다면-.
모두가 입을 닫고 갈라하드에게 집중했다.
"마나로 일으킨 불로 태워보면 되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불로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그제야 필릭스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맞네, 잘 타면 인간이고 안 타면 마족일세."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불에 타면 인간이고 안 타면 마족이라고?'
돌로 내려치는 게 무식하다면서, 불로 태운다니-.
이게 무슨 끔찍한 방법인가.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마르디안조차 입을 벙끗거렸다.
그때-.
"아, 먼저 여기부터 시작하지."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마르디안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르디안이 불에 탔다.
"음, 마족이 아니었군. 쫑알대길래 마족인 줄 알았네만."
"아, 그렇군요."
차분하게 끄덕이는 아드리안나에 필릭스는 뭔가 잘못된 걸 느꼈다.
****
"갈라하드 대장이라면 로버트 자네가 같이 갔지 않았나?"
동료의 말에 직속 부대 로버트는 끄덕였다. 로버트는 저번 마경 때 갈라하드와 같이 들어갔던 기사였다.
"갈라하드 대장님은 이상하지만, 확실히 유능하다고."
"이상하다니?"
동료의 물음에 로버트는 잠시 고민했다.
마족의 피를 즐겁게 마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러니까-.
"······조금 미친 것 같기도."
"미쳤다고?"
"아무튼, 유능하긴 해."
"뭐라는 거야."
뭐라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로버트는 손을 젓고 소집 장소로 향했다. 공터에는 이미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모았지?"
그때, 한쪽에서 호통이 들렸다.
"좀 더 들어가! 붙어라! 딱 붙어! 양손은 번쩍 들고!"
왠지 까맣게 탄 마르디안이었다. 원래도 꼬불꼬불했던 머리가 바짝 구워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가 수통을 흔들며 웃었다.
"다들 반갑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아주 뛰어난 마법사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계산은 완벽하니, 실수는 없을 걸세."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계산? 실수?'
묘하게 불안한 단어였다.
그때,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 이거 뭐야?"
동료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에 고개를 내린 로버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래에서 불길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건 이윽고 거대한 불길로 변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불로 가득 찼다. 모아서 불을 지르다니? 예상도 못한 상황에 다들 반응하지 못했다.
"불이다!"
"미친-."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동료가 불에 삼켜서 사라졌다.
로버트도 불에 휩싸였다. 온몸을 덮은 불에 로버트는 질겁했다. 그런데 불의 느낌이 묘했다.
'······뜨겁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불 목욕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불이 사라졌다. 로버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그을렸지만, 다들 멀쩡했다. 모두 어리둥절할 때-.
"저놈일세."
갈라하드가 지목했다.
거기에 거뭇한 놈이 있었다. 놈은 다른 이와 달리 재가 가득 묻어 있었다.
"길버튼 경."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검을 빙글 돌렸다. 찬란한 오러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병사의 팔이 잘렸다. 피가 뿌려졌다. 길버튼이 병사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병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얼굴에 고통은 없었다. 적의만 있을 뿐-.
"미개한 놈들이."
마족 특유의 꺼림직한 힘이 풍겼다. 주변 병사들이 들썩였다. 병사들의 눈이 흔들렸다.
병사들이 검을 뽑아서 길버튼을 향해 찔렀다.
그때, 하늘이 번쩍했다. 마족에게 정확히 번개가 떨어졌다. 병사들이 멈췄다. 길버튼이 잠깐 움찔했다.
"저도 좀 따갑습니다만."
"엄살부리지 말고 꽉 잡게. 이번 놈은 반드시 살려야 하니까."
"예. 가만히 있어!"
갈라하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길을 비켰다.
"반갑네."
갈라하드가 마족의 머리를 잡았다. 마족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볼이 길게 찢어졌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마족의 얼굴이 뒤틀렸다. 눈동자가 삐꺽거렸고, 입가로 피가 거칠게 튀었다.
"아, 정신 방벽을 사용할 생각이군."
갈라하드가 마족의 머리를 뒤로 꺾었다. 마족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혀를 씹은 듯했다.
끔찍한 모습인데,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겼다.
그리고-.
"말하게. 왜 이쪽으로 왔지?"
속삭이듯 물었다.
마족의 입이 쩍 벌어졌다. 거부하는 듯 피부가 가득 꿀렁였다.
갈라하드가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명령일세."
정중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마족의 입이 움직였다. 뭐라고 속삭였다. 갈라하드의 얼굴이 굳었다.
이내 마족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재밌군."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털었다. 그 손에서 피가 튀었다.
"정리하게나."
"끝났다! 다들 물러나라!"
길버튼이 크게 소리쳤다. 그에 중대장들이 따라서 명령했다.
로버트와 동료들은 떠밀리듯 움직였다. 모두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내 멈춘 동료들이 로버트를 쳐다봤다. 그 얼굴이 거뭇거뭇했다. 경악이 가득했다. 로버트를 보는 시선에 많은 게 담겨 있었다.
그에-.
"마족을 잡긴 했잖아? 유능하다니까."
조금 미쳤지만-.
...아니, 많이.
로버트는 뒷말을 삼켰다.
****
'정신 방벽이 단단하군.'
갈라하드는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정신계 마족의 정신 방벽은 상당히 강력했다.
첫 번째 놈은 잡는 순간 정신 방벽으로 머리를 터뜨렸다. 두 번째 놈을 잡을 때는 더 주의를 기울였다.
정신 방벽이 워낙 단단한 터라, 문답 하나가 최대였다.
그리고 그 문답은-.
[아드리안나가 위험하다.]
짧고 강렬했다.
'아드리안나가 위험하다?'
갈라하드는 놈들이 나온 이유를 물었다. 그에 관한 대답이 저거라면-.
'마경에 들어가면 위험해서 아드리안나를 붙잡는 건가?'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예의 무표정이었지만, 어딘지 멍한 얼굴이었다. 정신계 마족을 잡은 것에 놀란 듯했다.
이론은 간단했다.
마족의 피는 마나 농도가 짙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니 마족에게는 웬만한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마족에 애를 먹은 이유였다.
그를 거꾸로 이용했다.
그러니까-.
'마나 농도가 낮은 마법이 안 통하면 마족이라는 거지.'
그웬을 이용하면 간단한 문제였다. 오히려 하품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별거 아닐세."
"아닙니다. 정신계 마족은 한 번 잠입하면 잡아내기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그를 뒀다가는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갈라하드를 칭찬했다.
"고맙나?"
"예? 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한 번 웃어주겠나?"
"······예?"
"자네, 웃는 게 상당히 귀여워서 말일세. 고마우면 웃어주게."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 무표정이 깨지고 당혹이 떠올랐다. 웃어달라는 게 상당히 힘든 부탁인 듯했다.
그에 농담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드리안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드리안나는 웃을 때, 조금 멍청해졌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지."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심한 얼굴이 된 아드리안나가 말했다. 후속 처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합당한 의문이었다. 다만, 그걸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건 놈들의 의도였다.
"아, 퍼스트를 불렀네. 마족이 숨어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걸세."
"아···."
아드리안나가 순순히 끄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였으니까.
그에 추가로 설득하려고 할 때-.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너무 순순한 승낙에 갈라하드는 목을 매만졌다.
*
둥둥둥! 묵직한 북소리가 연신 들렸다. 열어!!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소가 힘겹게 움직였다. 쇠사슬이 거칠게 움직이며 눈이 가득 튀었다.
무거운 성문이 차례로 올라갔다. 성문 사이에 끼어있던 살점이 툭- 하고 떨어졌다. 으악! 그웬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마지막 성문까지 열렸다. 그 너머의 공간은 회색 재로 가득했다.
너덜너덜한 성문 너머의 잿빛 공간은 꼭 지옥으로 향하는 문 같았다.
아드리안나가 창연한 오러를 뿜어댔다. 짙어진 마나 농도에 그 성질이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주변의 재가 오러에 닿아 사라졌다.
"내 뒤에 있어라. 절대 앞으로 나오지 말고."
길버튼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주변에는 특무대가 있었다. 그웬은 열심히 끄덕이며 데미안을 챙겼고, 데미안은 길게 하품했다.
톰은 뭔가를 잔뜩 담은 거대한 가방을 메고 방패를 고쳐 잡았다.
특무대는 제일 안쪽이었다. 그 주변으로 직속 부대원들이 호위하듯 있었다.
정예인 직속 부대였지만, 특무대를 호위하는 것에 딱히 불만은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자꾸만 갈라하드의 눈을 피했다.
"진입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 걸음에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등이 거대하게 보였다.
부정할 수 없는 영웅의 뒷모습이었다.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쿵!
뒤에서 성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재로 가득했다.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죽은 것처럼 적막했다.
"와아-. 여기가 마경이에요?"
그웬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있을 때보다 편한 얼굴이었다.
'마법사니까.'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닐세. 마경은 마족의 영역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하네."
"아, 진짜요? 많이 들어가야 해요?"
"반나절은 걸어야 할 걸세."
"진짜 머네요."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직속 부대의 기사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경은 마족의 것이니, 멀면 멀수록 좋지."
"그건 그렇네요."
그웬이 이해했다는 듯 끄덕였다. 길버튼은 그저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도 오랜만이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마나를 돌렸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오랜만에 마족의 영역에 들어와서 신난 듯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가벼운 바람이 재를 멀리 밀어냈다. 전보다 농도가 짙어진 덕분에 그 범위가 넓었다.
눈에 보이는 곳은 전부 드러날 정도였다. 훤히 드러난 마족의 영역은 황량한 회색 사막이었다.
"와아-."
"이게 무슨...?"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뚝- 하고 멈췄다.
"왜 그러나?"
아드리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늘 곧았던 푸른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를 따라서 시선을 돌린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성문을 나와서 조금 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선명한 짙은 회색이 있었다.
'마경-.'
원래라면 한참이나 더 가야 마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마주했다는 건-.
'마경이 커졌군.'
그것도 아주 많이.
****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퍼스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잔뜩 굳은 얼굴에 진심이 가득했다.
심지어 퍼스트는 무릎까지 꿇은 상태였다.
무릎 꿇고 진지한 얼굴로 올려봤다.
그 가득한 진심에 펌킨은-.
"미친. 결혼이라도 이기게 해달라는 게 무슨 좆 같은 소리입니까. 진짜 시발."
참지 못한 욕을 터뜨렸다.
"나는 진심이다. 펌킨, 자네밖에 없어. 자네의 승모근이 필요하네."
"지랄하지 마십쇼. 진짜."
"아니, 왜 안 된다는 건가? 논리적으로 말해보게."
"논리는 지랄... 제발, 닥치십쇼."
그때, 한쪽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명령서였다.
퍼스트가 무릎 꿇은 상태로 움직였다. 펌킨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내 명령서를 뜯은 퍼스트가-.
"마족 찾기 승부라. 도전을 받아들이지."
가득 웃었다.
펌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북부 대공의 미친 데릴사위 132화
쉽다 쉬워
'음-.'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침음성을 흘렸다.
저 너머에 짙은 재로 이루어져, 다른 공간으로 분리된 곳이었다.
마족의 본진, 마경이었다.
'마경이 넓어졌군.'
텁텁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본래 마경은 더 깊숙한 곳에 있었다. 반나절은 걸어야 나왔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가까웠다.
마경은 마족의 본진이었다. 그런 마경이 넓어지는 건 상당히 큰일이었다.
"마경이 넓어지다니-.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안쪽에 지원을 더 요청해야······."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직속 부대원들이 다급하게 의견을 올렸다. 북부의 정예인 직속 부대원들조차도 동요 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경이 넓어졌다는 건, 위기가 성큼 다가왔다는 거니까.
그때,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늘 올곧았던 푸른 눈이 흔들렸다.
"마경이 넓어졌습니다. 혹시 이에 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의견을 구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전에도 이런 적 있나?"
"아닙니다. 마경은 늘어난 적은 제마 전쟁 이후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마 전쟁이라. 그 묵직한 단어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안쪽에서 뭔가 변화가 있었군.'
하필 네발 마족이 도움을 요청한 시기라니, 참으로 공교로웠다.
네발 마족이 말했던 '왕'이 다시금 떠올랐다. 충동이 더욱 올라왔다.
안쪽에서 뭔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마족의 왕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그녀답지 않게 재촉했다.
"흉내 내기지만, 흑마법학회도 열었던 게 마경이었네. 여명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지만. 열 수 있으니 크기를 늘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작게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입꼬리가 올라갔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마법사라 어쩔 수 없었다. 마경이 넓어졌다는데, 어찌 흥미롭지 않겠나.
"이 정도로 넓히려면 들어가는 마나가 상상 이상일 텐데-. 어디서 공수했는지 궁금하군."
"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드리안나가 다시금 재촉했다. 다른 부대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답은 간단했다.
"밖에서는 알 수가 없네.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야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 안에 들어가야 알 수 있었다.
"마침 다행이군. 꽤 병력을 많이 데려왔으니까."
마경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규모가 상당했다. 직속 부대원만 스물이 넘었고, 특무대까지 있었다. 병력은 충분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위험하겠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한 터라 부탁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물론일세."
오히려 갈라하드가 부탁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썹이 올라갔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굳게 끄덕였다.
"예,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하여, 묘하게 불안해졌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표정을 다잡았다.
원래 무표정이었기에, 눈썹이 정상 위치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목표를 바꾸겠습니다. 마경의 이상 현상을 확인하는 것으로."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부대원들이 굳게 끄덕였다.
"갈라하드 대장을 최우선으로 보호한다. 정신계 상급 마족이 갈라하드 대장을 노렸던 적이 있다. 마경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오러를 계속 돌린다."
아드리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 대부분은 '갈라하드 대장을 최우선으로 보호해라'였다.
'네발 마족.'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생각을 정리했다.
네발 마족이 힘을 잃자, 마경이 넓어졌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갈라하드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지배자는 네발 마족에게 '구렁텅이'에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구렁텅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감이 좋지 않았다.
'유배지인가.'
네발 마족을 찾아내면, 이 현상을 해결할 방안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배치를 바꿨다. 특무대를 안쪽으로 두고, 밖으로 호위를 두 겹 세웠다.
그러다 보니 아드리안나가 혼자 선두에 떨어진 형태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반발이 올라왔다.
"대장님이 혼자 위험에 노출되십니다. 대장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갈라하드를 과보호하기 위해서 아드리안나가 온전히 노출된 상태였으니, 반발은 당연했다.
이들은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였다. 오로지 아드리안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친 이들이었다.
말주변 없는 아드리안나가 그런 부대원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궁금해졌다.
아드리안나는-.
"명령이다."
단호하게 말했다.
반발하던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홀짝였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마족의 피가 몸을 가득 돌았다. 팔목의 마법진이 빛을 뿜어댔다.
이어서-.
"산뜻한 바람."
주문을 읊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가벼운 바람이 손가락을 타고 퍼졌다.
바람에 재가 밀려났다. 바람은 마족의 영역을 넘어서, 그 앞의 마경을 두드렸다. 농도가 얼마나 높은지 안개가 아니라, 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내 짙은 연기가 뒤로 밀려났다. 마경 특유의 검은 바닥이 보였다. 비가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는 땅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바로 진입하겠다."
아드리안나가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찬란한 순백의 오러가 선두에 섰다.
마경의 바닥은 썩은 것처럼 검은 땅이었는데, 오랫동안 가뭄을 앓은 것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더불어 어딘가에서 풍기는 고약한 유황 냄새까지-.
'완벽한 지옥이군.'
그린 듯한 지옥의 모습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밖에 있다가 드디어 물에 돌아온 물고기처럼 짙은 안락함을 느꼈다.
"와아- 너무 포근한데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인데요! 막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쉬는 느낌이 들어요!"
그웬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빡대가리지만,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니까 당연한 반응일세. 마경은 마나 농도가 짙으니까. 괜히 마법사들의 눈이 뒤집히는 게 아니지."
"힘이 넘치는 거 같아요!"
늘 울상이던 그웬이 방긋 웃었다. 마나통이 워낙에 크니 영향을 더 크게 받는 듯했다. 그때-.
"후후."
"데미안, 자네는 왜 웃나?"
"기분이 좋아서요. 포근하고."
"자네는 마나통이 작아서 그럴 리가 없는데?"
데미안의 웃음이 멈췄다.
"어이, 데미안. 검이나 잡아."
길버튼이 투박하게 나무랬다. 그에 데미안은 톰에게 지팡이를 주고 검을 잡았다. 톰은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등에 멨다.
그때, 갈라하드는 묘한 충동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연결된 것에서 넘어오는 신호-.
'네발 마족이군.'
갈라하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채 밀지 못한 안개 너머에서 신호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네발 마족이 보내는 게 분명했다.
'아직 살아있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갈라하드는 중얼거리며 수통을 홀짝였다. 이내 마나를 퍼뜨려서 탐지를 시작했다.
탐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준비하게. 공격일세."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공격이다. 준비해."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말하며 전진했다. 순백의 오러가 더욱 거칠게 일어났다.
"갈라하드 대장을 최우선으로."
명령을 내리자, 직속 부대원들이 기세를 올렸다. 배치를 더욱 단단히 했다. 순식간이었다. 확실히 정예였다.
짙은 안개 너머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대지가 거세게 흔들렸다. 안개 너머로 나타난 건 갑각을 뒤집어쓴 마물이었다. 그 덩치가 곰만 했다. 송곳니가 사내의 팔뚝만큼 굵고 길었다.
"무쇠껍질늑대 마물입니다! 중급 마물입니다!"
톰이 소리쳤다. 마경인 탓에, 중급 마물답지 않은 살벌한 기세와 존재감이었다.
다만, 이쪽은 직속 부대원들이었다. 마경이라도 중급 마물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문제는-.
"서른 마리일세."
그 수가 많다는 점이었다.
갈라하드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뿌린 바람에 한 겹 덧씌웠다. 안개가 좀 더 밀려났다.
주변을 두르고 있던 마물들이 온전히 드러났다. 서른의 중급 마물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맹수가 포위하다니!"
"서른 마리입니다!"
곳곳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포위라-.'
마물은 맹수와 다름없었다. 맹수보다 더 본능적이었다. 그런 마물이 서른 마리가 모여서 포위한다니-.
"마물 조련사겠군."
"이런 젠장 맞을-. 마물 조련사 마법진은 누가 흘려서-."
길버튼이 투박하게 투덜거렸다.
'마물 조련사라.'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제법 많이 마주했다. 그를 응용하여 대공에게 마물 선물을 했을 정도니까.
다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네."
"예? 당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저번은 땅강아지였지만, 이놈은 무쇠껍질늑대 마물입니다."
길버튼이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마경에서 서른에 달하는 중급 마족을 조종한다? 전에 내가 봤던 마법진으로는 불가능하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글쎄.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갈라하드는 끝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사방에서 오러가 피어올랐다.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는 북부의 정예였다.
"이번은 열화판이 아니라는 거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튕기며 웃었다.
"데미안, 자네는 원하는 대로 날뛰게. 길버튼 경은 자리를 지키고, 그웬은 마법을 쓰지 못할 테니, 내게 마나를 줄 준비를 하게. 그리고 톰은······. 하고 싶은 거 하게나."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가득 일어났다. 달려들던 마물 하나가 반으로 갈렸다. 그 사체에서 뿌려진 먼지가 주변을 가득 덮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게."
갈라하드는 당부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
'미친, 초장부터 중급 서른 마리라니.'
직속 부대의 기사 캐럿은 입술을 씹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사방에서 거대한 마물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주둥이 사이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전에도 마경에 몇 번 들어온 적 있었던 캐럿이었다. 그때마다 험난한 전투를 거쳤지만, 이런 꼴은 본 적 없었다.
마경에서 마물은 몇 배나 더 강해졌다. 마경의 중급 마물이면 북부의 상급 마물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그러니까 상급 마물 삼십 마리에 둘러싸인 것과 다름없었다.
들어오자마자-.
'재수 존나 없네.'
캐럿은 투박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검을 잡았다.
아드리안나가 순백의 오러를 뿜으며 마물을 받아냈다. 마물 하나가 그대로 잘려 먼지로 변했다.
전투가 시작됐다.
"북부를 위하여-!"
전투는 처절했다. 오러가 마물의 견갑을 갈랐지만, 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제 목이 날아가도 인간의 머리를 탐하는 게 마물이었다.
이곳은 마족의 본진인 마경이었다.
인간에게는 불리하고, 마족에게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었다.
직속 부대도 긴장해야 하는 곳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쉽다.'
캐럿은 검을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전투가 쉬웠다. 아니, 쾌적했다.
가장 큰 원인은-.
'마경의 안개를 밀어냈다.'
갈라하드가 마경의 안개를 치워준 덕분이었다.
마경의 안개는 죽음의 안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지독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짙은 안개에서 싸우는 건, 상당히 위험하고 부담스러웠다.
아드리안나조차 제 주변의 것들을 밀어내는 게 전부였다.
갈라하드는 그런 마경의 안개를 손을 튕기는 것으로 밀어냈다.
시야가 온전히 확보된 건 아니었다. 주위를 포위한 마경의 앞발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니, 넘쳤다.
더불어-.
"이런, 내가 인기가 많군."
마물들이 무작정 갈라하드에게 달려들었다. 마물들은 제 몸이 베여도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수비를 고수하면 되니, 전투가 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물들의 공세 속에서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중간중간 마법까지 사용했다.
그 마법이 상당히 시기적절한 터라, 전투가 상상 이상으로 쾌적했다.
그렇게-.
"······끝났군."
전투가 끝났다. 북부를 위하여! 라고 소리쳤던 놈이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뭔가 기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분명 어렵고 위험해야 할 전투가 너무도 싱겁게 끝난 탓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그 원인은-.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갈라하드 대장.'
갈라하드는 제 옷깃을 털며 수통을 홀짝였다. 아드리안나 다음으로 마물을 많이 잡았을 텐데, 갈라하드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전투의 흔적이 전혀 없는 깔끔한 자태로 수통을 홀짝였다.
갈라하드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의 특무대도 뭔가 이상했다.
"저! 저 마법 썼어요! 명중했어요!"
"이런, 어떻게 썼나?"
"집중하니까 되던데요! 으음! 하니까!"
마치 심부름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웃으며 자랑하는 하녀와-.
"검을 그렇게 쓰지 말라니까. 피는 제때 닦아야 검이 안 상한다고 말했잖느냐."
"마법이면 한 번에 씻어요."
"데미안, 너는 기사라고. 마법사가 아니라."
"저는 그냥 데미안인데요."
괴상한 걸로 싸우는 길버튼과 데미안까지-.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중 제일은-.
"이번 놈은 수율이 안 좋습니다. 피가 너무 옅습니다."
톰이라는 병사였다. 톰은 수통을 익숙하게 마물의 시체에 대며 평가했다.
"그런가? 한 번 확인해보겠네."
"여기 있습니다."
"음, 맛이 별로군."
"아, 혹시 몰라서 벌꿀을 가져왔습니다. 타서 마셔보시겠습니까?"
"오, 훨씬 낫군."
"하하. 그러면 식사는-."
"두 번 정도 더 하고 먹도록 하지."
둘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갈라하드 대장이 마물의 피를 마신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방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 마물의 피를 마시며 품평하는 건, 그 무게가 달랐다.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거기에-.
'······아드리안나님은 왜?'
쭈그려 앉아서 조심조심 피를 챙기는 아드리안나까지 더해지자, 상황이 상당히 미묘해졌다.
"다들 수통에 피를 챙기도록."
쭈그려 앉은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명령했다.
그 고귀한 아드리안나가 마물의 피를 먼저 받고 있었고, 갈라하드의 능력을 본 터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전투 이후로 다들 미묘한 분위기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물의 사체에 붙었다.
캐럿은 마물의 피를 수통에 담으며 참으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마물이 꼭······.
'사냥감이 된 것 같군.'
설명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느낌이었다.
"왜 마물의 피를 받고 계십니까!"
불만을 제기하는 놈도 있었다. 그래봤자 차라리 자기가 받겠다며 가져가는 게 전부였지만-.
"1대대는 대장 말을 안 듣네요."
데미안이라는 꼬맹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1대대 놈들이 원래 그렇다. 아드리안나님에게 과하게 충성하는 놈들이 많아서, 말을 안 들을 때가 많지. 아주 골칫거리야. 아드리안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신경 안 쓰거든."
길버튼이 혀를 차며 끄덕였다.
'······너도 1대대였잖아.'
길버튼은 아드리안나의 최측근이었다. 직속 부대 중에서도 제일 유별났던 놈이었다. 그런 길버튼이 저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캐럿은 입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그들은 그저 수통에 마물의 피를 챙겼다.
"마물 조련사의 흔적이라고 하셨습니까?"
마물 조련사라니-. 그 무거운 이름에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물 조련사가 저지른 짓은 아직도 전설처럼 내려왔다. 최근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으로 인한 피해도 있었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일세. 지금까지처럼 열화된 조악한 마법진이 아니라, 마물 조련사의 진짜 마법진."
고개를 돌리자, 마물의 뱃가죽을 통째로 뜯은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활짝 웃고 있었다. 웃음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걸 보게나. 이런 정교한 마법진이라니-. 마물에 관한 지식이 해박함을 넘어섰군. 이건 단순한 마법진이 아닐세. 예술품이지. 완벽하군. 대단해. 가져가서 본부에 전시해야겠어."
갈라하드가 마물 조련사의 흔적을 보며 대놓고 기뻐했지만,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마물의 가죽을 흔들며, 활짝 웃는 갈라하드에게서 묘하게-.
"자, 전부 뱃가죽 뜯어오게."
대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133화 지금의
"환상적이군."
갈라하드는 톰이 닦아서 건넨 가죽을 흔들었다.
가죽에 새겨진 마법진이 시선을 끌었다. 이건 단순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예술이자 작품이었다.
"정말 마물 조련사의 것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시선을 돌리자, 잔뜩 굳은 얼굴의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맞네, 이건 진짜 마물 조련사의 걸세."
"마물 조련사가 살아 있다는 겁니까?"
"마물 조련사 본인인지 아니면 제자일지 알 수 없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라는 건 명백하지만."
갈라하드는 가죽을 길게 폈다.
"저 큰 마물을 움직이는데, 마법진은 사람 머리 크기일세. 구시대의 마법진에 경량화라니-. 실로 놀랍군. 마물에 관한 이해도가 대단하네. 부모 중 하나가 마물인가?"
갈라하드는 진심 어린 찬사를 쏟아냈다.
"대장님, 왜 자꾸 마물 조련사를 칭찬하십니까."
길버튼이 질색하며 뒤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자,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이 미묘했다.
"마물 조련사는 오대 악인 중 하나 아닙니까."
길버튼이 슬쩍 덧붙였다.
오대 악인은 제마 전쟁 때 마족의 편에 섰던 전설적인 악인들이었다.
제마 전쟁 자체가 워낙 까마득한 일이라 제국에서는 오래된 옛날이야기 취급인데, 마족와 직접 맞닿은 북부는 다른 듯했다.
"오대 악인이 무슨 상관인가. 가치는 물건 자체로 존재하는 걸세."
"아니, 그래도 오대 악인은 좀..."
길버튼이 다시금 질색했다.
"자네, 오대 악인인 검귀를 만난다면 어떻겠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이 순간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하듯 눈을 가득 구기더니 이내 끄덕였다.
"궁금하긴 하군요. 검귀의 검이라니."
"매한가지일세. 중요한 건 칼이 아니라, 칼자루를 쥔 사람인 거지."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이건 지금의 마법진과 방식이 다르네. 그냥 보고 그대로 따라 해도 못 했겠지. 왜 열화판이 있는지 이제야 알겠군."
전에는 일부러 열화판을 뿌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지금 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전혀 다른 방식과 믿기지 않는 복잡도와 정밀함-. 진짜를 옆에 두고 그려도 열화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장님은 그릴 수 있습니까?"
"길버튼 경,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열화판이라도 개정한 적 있는 나일세. 따라 그리는 것 정도는 가뿐하지. 개정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갈라하드의 장담에 길버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마물 조련사가 되신다는 겁니까?"
"길버튼 경, 자네가 마족의 검을 뺏어서 사용하면, 마족이 되나?"
"에이,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입니까."
"괜찮네, 자네는 길버튼이니까."
길버튼이 눈을 끔벅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슬쩍 들었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마법진에 정신이 쏠린 갈라하드는 보지 못했다.
"마물을 잡아서 쓸 수는 없지만-. 이를 응용할 수는 있지."
"응용을 한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길버튼 경, 자네는 꾸준히 노력하는군."
"욕입니까?"
"칭찬일세."
마법진은 그저 마나의 흐름을 유도하는 용도였다.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했다.
보통은 마석을 사용했다. 다만, 이들은 마경 속의 마물이었다. 마석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뭐를 매개체로 쓸까. 마법진이 붉었다. 진득한 마족의 피로 그린 것이었다.
"음."
갈라하드는 그 피의 냄새를 진지하게 맡았다.
이 정도라면-.
"중급 마족의 피를 썼군. 그것도 신선한 놈으로."
같은 급이라도 마족의 피가 더 짙은 걸 이용한 듯했다. 상당히 효율적이었다.
"크흠-."
길버튼이 나지막하게 헛기침했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어딘지 질린 얼굴의 기사들이 보였다.
"이 마법진은 중급 마족의 피를 썼네. 마법진의 크기가 작아서 노리기도 쉽지 않으니, 괜찮은 방식이지. 다만-."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왔군. 마물일세!"
"다들 대형을 똑바로!"
아드리안나가 바로 소리쳤다.
"공격이다!"
"젠장, 쉴 틈을 안 주는군."
직속 부대답게 반응이 상당히 빨랐다. 갈라하드와 특무대를 둘러쌌다.
전보다 그 방어 형태가 견고했다. 특히 갈라하드를 중심으로 두는 건, 귀빈을 보호하는 듯한 형태였다.
갈라하드에게 과하게 집중한 탓에 아드리안나가 아예 동떨어져 버렸다. 흡사 버려진 형태였다.
"갈라하드 대장을 중심으로!"
아드리안나는 방비를 더 철저히 하라고 명령했다.
갈라하드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갈라하드는 마법진을 자세히 파헤쳤다.
'12겹의 마법진이라니, 정말 대단하군.'
이 마법진은 현재의 마법진 방식과 달랐다. 상당히 투박하고 직관적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하기에 더 복잡했다.
주변에서 고함이 터지고 병장기 소리가 들렸지만, 갈라하드의 시선은 마법진에 꽂혀 있었다.
마법진을 살피던 갈라하드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매개체가 중급 마족의 피라면-.'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깊게 올라갔다.
*
'시발, 존나게 많군!'
직속 부대의 기사 캐럿은 욕을 중얼거렸다. 사방에서 마물이 쏟아졌다.
마경이 마족의 본진이라지만, 유독 더 많이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공격하는 것처럼-.
'마물 조련사라 그랬나.'
캐럿은 안쪽의 갈라하드를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사방에서 갈라하드를 노리고 마물이 달려들었다. 그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갈라하드는 평온했다. 책을 읽듯 가죽을 살피는 중이었다.
속이 꼬일 만한 모습이었지만, 전과 달리 불평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갈라하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 가치를 모를 정도로 멍청한 이는 없었다.
갈라하드가 대놓고 잠을 자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이를 악물고 갈라하드를 지켰다.
다만, 꼬인 놈은 늘 하나씩 있었다.
"아주 혼자만 편하군."
누군가 낮게 불평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그마한 혼잣말이었다. 그에 캐럿은 놈을 노려봤다.
그때-,
"아, 잠시만."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줄곧 풍기던 바람이 뚝- 하고 멈췄다. 밀어냈던 재가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내 죽음의 안개가 주변을 가득 덮었다. 마경이 다시 찾아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빨리 안개를-!"
"아무것도 안 보인다!"
"어떤 놈이 불평했어! 이런 십팔!"
곳곳에서 큰 소리가 터졌다. 이번 직속 부대는 마경에 들어와 본 적 있는 이들로만 구성됐다. 그런 직속 부대가 크게 흔들렸다.
있다가 없으니까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 탓이었다. 불평한 놈에게 욕설이 쏟아졌다. 불평했던 놈이 큰 소리로 사죄했다.
그때, 캐럿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그웬, 위쪽으로 던지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폭-발-화-구-!"
"길버튼님, 왼쪽이 약간 빈 것 같습니다!"
"기사- 길버튼!"
"배고파요."
"데미안, 여기 있습니다!"
'얘네는 왜 익숙해?'
분명 특무대는 마경에 들어가 본 적 없을 것인데, 심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심지어 꼬맹이는 육포까지 뜯었다. 짐을 멘 병사조차 당황하지 않았다.
직속 부대보다 마경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시야가 가려진 것뿐입니다!"
톰이라는 병사는 오히려 주변의 기사들을 격려까지 했다.
"쯧,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하다니. 1대대라는 이름이 아깝군!"
이게 무슨-.
그때, 한쪽에서 흰색 오러가 뿜어졌다. 기사들이 흩어졌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아드리안나님이 선두를 안 지키다니-.'
캐럿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가득 일어난 오러에 재가 가벼이 지워졌다. 그제야 갈라하드가 보였다.
갈라하드는-.
'웃고 있어?'
전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쥔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확인할 게 있었네."
"예?"
"생명체를 조종하는 건 쉽지 않네. 괜히 정신 간섭이 고등 마법으로 분류되는 게 아니지. 마물은 맹수보다 본능에 충실하여 좀 더 용이하지만, 대신 짙은 농도의 마나가 필요하지."
아드리안나는 쏟아지는 말에 눈을 끔벅였다.
"이 마법진은 놀라운 정교함을 지녔지만, 완벽할 수는 없지. 완벽은 닿을 수 없는 이상이니까."
갈라하드가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
한쪽에서 끔찍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 울부짖음이 전염되듯 사방으로 퍼졌다. 이내 둔탁한 충격음이 연속으로 들렸다.
안개 사이로 뭔가 날아왔다.
"가령 이렇게 살짝만 건드려도 어긋나지."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손을 휘저었다. 이내 바람이 재를 밀어냈다.
그러자 보이는 건-.
'······마물이 서로 싸우고 있어?'
서로 목덜미를 물어뜯는 마물이었다. 마물들이 서로를 잘근잘근 씹었다. 제 목이 잘려도 신경 쓰지 않고 공격했다.
마물의 전투는 처절했다.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뜯어먹었다. 피가 가득 튀고 살점이 뿌려졌다.
달려들던 마물들이 자기끼리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살점까지 튀기면서-.
왜 마물들이 뒤엉켜서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마물은 원래 자기들끼리 싸웠다. 이들이 괜히 마족을 군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이 마물들은 방금까지 이쪽을 포위했던 괴상한 마물들 아닌가.
왜 갑자기 본래의 마물로 돌아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다들 시선을 돌렸다. 그 방향은 또 갈라하드였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지. 그 법칙을 응용한 걸세."
갈라하드는 가죽을 흔들며 환히 웃었다. 꼭 자식을 내보일 때 부모가 지을듯한 미소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이 마법진은 기본적으로 12겹의 수식을 쓰고 있네. 마물의 짙은 마나 농도를 이용하기 위해-. 아니지. 자, 냄새 한 번 맡아보게나."
갈라하드가 가죽을 내밀자, 다들 한 걸음 물러섰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냄새를 맡았다.
"어떤가?"
"고약합니다."
"맞네, 마족의 피를 썼으니까."
아드리안나의 코가 조금 구겨졌다. 이내 아드안나가 끄덕였다.
"원래 중급 마족의 피라면 충분할 걸세. 애초에 마경의 마나 농도가 아무리 짙어도 마족의 피만큼 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순간적으로 중급 마족의 마나 농도 이상의 마나를 뿌린다면?"
갈라하드가 가죽을 흔들었다. 그 가죽에 새겨졌던 마법진이 녹아서 흘러내렸다.
"망가질 수밖에 없지. 마나는 농도가 높은 곳으로 흐르니까."
갈라하드가 녹아내린 가죽을 뒤로 던지며 히죽 웃었다.
캐럿은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어디 외국어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이해한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어색한 박수를 쳤다. 그에 다들 뒤늦게 따라서 박수를 쳤다.
"아, 이 부분이 가장 재밌는 건데-."
이어서 설명하는 갈라하드에 다들 시선을 돌렸다.
혼자 집중하던 데미안은 꾸벅 졸았다.
****
"그러니까 마물 조련사를 이기신 겁니까?"
길버튼이 투박하게 물었다. 고개를 들자, 주변의 시선이 보였다. 다들 경악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하긴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겠군.'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정교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할 수는 없었다. 갈라하드는 정확히 그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그걸 이겼다고 보기에는 모호했다. 마법진을 새긴 놈은 이 마물을 버려둔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이건 지고 이기고가 아닐세. 마법진이 완벽할 수 없는 부분을 노려서 파훼한 걸세."
"그러면 졌습니까?"
"세상에 꼭 이긴 것과 진 것만 있나?"
"아닙니까?"
길버튼이 코를 찡그렸다. 참으로 길버튼스러운 얼굴이엇다.
"정 따지자면 이긴 거지. 상대의 약점을 내가 파훼한 거니까."
"역시 대장, 대단하시군요. 마물 조련사도 이기시다니."
하하, 시원하게 웃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부정을 포기했다.
전투는 마무리 단계였다. 마물들끼리 물어뜯은 덕분이었다. 남은 마물들을 다른 기사들이 정리했다.
여태 툴툴거리던 기사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중에는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치면 경례를 올리는 놈도 있었다.
"상태가 좋은 것들만 모아뒀습니다. 혹여 더 필요하시면 챙겨두겠습니다."
톰이 가죽 뭉치를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그 가죽을 하나씩 확인했다. 마법진 부분만 피해서 깔끔하게 닦여 있었다.
역시 톰이었다.
마무리는 금방 끝났다.
가죽을 갈무리한 갈라하드는 손을 튕겼다.
바람이 휘날리며 재를 밀어냈다.
마치, 이곳이 길이라는 것처럼-.
네발 마족의 신호가 오는 쪽이었다.
아드리안나가 선두에 섰다.
마경은 마족의 본진답게, 마물과 마족이 끊임없이 나왔다.
시끄럽게 달려드는 마물은 그나마 나았지만, 땅속에서 나오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물도 있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달고 있으면, 갈라하드가 해산시킬 수 있었지만, 점차 날 것의 마물이나 마족들이 나타났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마족 탐지와 시야 확보를 유지해야 했다.
마경의 마나 농도는 지독했다. 최소 하급 마물 이상의 농도가 필요했다.
그런 마경에서 탐지와 시야 확보를 동시에 유지하는 건, 갈라하드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마족을 탐지하고 시야까지 확보하니, 직속 부대가 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당연히 좋지. 이렇게 마법을 마음껏 연습할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길버튼은 질색하며 물러났다.
다만, 늘 그렇듯 변수는 순탄함 사이에서 발생했다.
괴상하게 생긴 중급 마물의 습격을 막는 중이었다. 그때, 묘한 서늘함이 엄습했다.
마물이 자꾸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기에, 혹시 몰라서 뿌려둔 마나에 뭔가가 걸렸다.
탁, 갈라하드는 탐지를 풀고 방호벽을 세웠다. 이내 반투명한 방호벽이 떠올랐다. 투명한 무언가가 방호벽을 강타했다.
화살처럼 뾰족한 무형의 고농도 마나였다.
'권능이군.'
마물과 전투 중인데, 권능으로 암습을 하다니-. 갈라하드는 바람을 풀고 탐지를 세웠다. 방호벽을 단단히 했다.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마족들을 찾아냈다. 상급 마족 하나와 중급 마족들이었다.
'군체군.'
마족은 상급부터 군체를 이룬다는 아드리안나의 설명이 떠올랐다.
당시 아드리안나는 고위 마족은 서로 반목하여, 왕이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런 마족들이 마물과 같이 움직이는 건 제법 신기한 일이었다. 심지어 마물을 앞에 두고, 뒤에서 권능을 뿌리기까지 했다.
다만, 그 정도야 충분히 범주 안의 일이었다.
특이한 건 놈들의 복장이었다. 마족들이 마치 병사처럼 무장한 상태였다.
무장이라고 해도 다 녹슨 철갑옷이 전부였지만, 문제는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하, 마족 새끼들이 병사라도 되는 것처럼 입고 있네.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길버튼은 혀를 차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쪽의 수가 많았다. 마족이 마물과 같이 습격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갈라하드의 대답이 없었다. 그에 고개를 돌린 길버튼은 흠칫 놀랐다.
갈라하드의 얼굴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흡사 보면 안 될 걸 본 것처럼-.
늘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던 갈라하드가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길버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족을 살폈다.
특이한 점은 그 투박한 무장밖에 없었다. 무장 위에 문장이 있었지만,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음, 저건 제국의 문장인데. 이건 좀 놀랍군."
갈라하드의 텁텁한 중얼거림에 길버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제국의 문장은 저게 아니지 않습니까?"
"길버튼 답지 않군. 정답일세. 지금의 제국은 아니지."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금의 제국?'
길버튼은 데미안을 깨우고 검이나 잡았다.
데미안도 검을 잡았다.
134화 착한 아이
'과거 제국의 문장이군.'
제국은 제마 전쟁 이후에 문장을 바꿨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는 이가 없었지만, 정보국의 국장 전용 비고에는 그 기록이 있었다.
'왜 마족이 제국의 예전 문장이 새겨진 갑주를?'
그때,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상급 마족이었다. 마경의 상급 마족은 밖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 상급 마족의 어깨에 묘한 표식이 있었다.
'십인장이군.'
상급 마족이 십인장, 주변으로 중급과 하급 마족들이 있다니-. 묘한 구성이었다.
그때, 마족들이 대형을 갖췄다. 선두의 마족들이 방패를 들 듯 팔을 세웠다. 뒤의 놈들이 화살을 쏘듯, 손을 휘저었다.
'진짜 병사처럼 싸우는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방호벽이 주변을 가렸다. 투명한 뭔가가 방호벽을 두드렸다.
뾰족한 화살처럼 된 권능이었다.
'농도가 생각보다 더 짙군.'
물론, 방호벽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드리안나는 이미 마족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마족들이 뒤엉키며 팔을 내밀었다.
'권능을 방패처럼 쓰는군.'
마족들이 방패병처럼 권능을 겹쳤다. 그럴듯했지만, 애석하게도 상대가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권능과 마족들을 한 번에 갈랐다. 상급 마족이 창을 쓰는 것처럼 손을 찔렀다.
상급 마족의 팔과 목이 동시에 날아갔다. 그 틈에 다른 마족이 아드리안나의 뒤를 노렸다.
완벽한 허점처럼 보였지만, 아드리안나의 흰색 오러는 검이자 갑주였다. 공격한 마족이 오히려 먼지로 화했다.
'마족의 천적이군.'
마족을 순식간에 해치운 아드리안나가 검을 털며 돌아왔다. 검에서 먼지가 가득 뿌려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저 마족을 본 적 있나?"
"예, 전에 마경에서 마주했던 마족들입니다."
아드리안나가 가벼이 끄덕였다.
"저 갑주에 새겨진 문장이 뭔지 아나?"
"마족의 것 아닙니까?"
"아닐세, 저 문장은 제마 전쟁 당시 제국이 썼던 문장이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그대로 굳었다.
"제국은 제마 전쟁이 끝나고 문장을 바꿨네. 방금 마족이 입은 갑주에 새겨진 문장은 바꾸기 전 제국의 문장일세."
"제국이 문장을 바꿨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길버튼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국의 고결성 때문이지. 지고한 제국이 문장을 바꿨다는 건, 맥 빠지는 일이니까."
"그러면 대장은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비밀일세."
"꼭 대답하기 곤란한 것만······."
길버튼이 작게 궁시렁거렸다. 아드리안나가 앞으로 나섰다.
"마족이 왜 예전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갑주를 입고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무심한 얼굴이 작게 흔들렸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지."
갈라하드는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첫 번째는 저 마족들이 제마 전쟁 병사의 갑주를 훔쳐 입고 돌아다니는 거지. 음, 저렇게 녹슬었는데도 입고 다닐 정도라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군."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길버튼이 투박하게 호응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맞네, 첫 번째일 가능성은 희박하지. 자, 두 번째는 저 마족들이 제마 전쟁 당시의 제국군인 걸세. 그래서 당시의 갑주를 그대로 입은 거지."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얼굴이 가득 굳었다. 그제야 길버튼도 심각해졌다.
"아니면 당시 제국군에 잠입했던 마족일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대답과 달리 아드리안나는 이해한 얼굴이 아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인간이 마족이 됐다는 건 쉽게 넘길 이야기가 아니니까. 심지어 예전 제국군이라면 더더욱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그 복잡함에-.
"뭐가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
길버튼이 당당하게 질문했다.
"제마 전쟁 때 사라진 제국군이 마족이 됐을 수도 있다는 거지.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길버튼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배신자들이 많다는 거군요."
참으로 명쾌한 요약이었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아직 모르지. 강제로 된 걸 수도 있고. 중요한 건 방금 잡은 게 십인대라는 걸세. 대대에서 떨어진 십인대가 뭘 하고 있었겠나?"
피가 듬뿍 묻은 데미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데미안. 말하게."
"식사요."
"멍청한 꼬맹이. 식사라니. 딱 봐도 순찰이잖아."
길버튼의 지적에 데미안이 씰룩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모욕을 당한 얼굴이었다.
"음, 이 경우에는 척후일 걸세."
"척후잖아요."
"순찰이나 척후나. 그게 그 뜻이다."
톰이 슬쩍 둘을 당겨서 중재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돌렸다.
마경은 들어갈수록 그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회색 안개가 더욱 짙어져서, 이제는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만약 척후라면, 다음은 본대겠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며 말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서두르는 게 좋겠군. 자, 이쪽일세."
갈라하드는 안개가 유난히 짙은 곳을 가리켰다.
*
얼마나 걸었을까, 자그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옆 사람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한 마경이라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고아가 있나 봐요!"
그웬이 들썩이며 소리쳤다. 그웬의 말대로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이곳은 마경일세."
"아, 그러면 고아 마족······?"
"그건 모르지."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바람을 집중하니, 정면의 안개가 걷혔다.
거기에 자그마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썩은 것처럼 검고 황량한 땅에 쪼그려 앉은 흰색 아이-.
뚜렷한 이질감에 선명한 서늘함이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마나로 탐지를 펼쳤다. 아이의 농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급이었다.
마경에서는 하급도 방심할 수 없지만, 단순히 하급이라기에는 뭔가 찝찝했다. 천천히 더 신중하게 마나를 뿌렸다.
"왜 그러십니까? 별로 안 위험해 보이는데."
길버튼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족을 제법 겪은 탓인지, 마족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했다.
실제로 아이 형태를 한 마족은 하급에 불과했다.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묘하게 찝찝했다.
그때, 울고 있는 아이의 아래에 뭔가 잡혔다.
"개미지옥이군."
"예? 개미지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때, 아드리안나가 정면으로 뛰었다. 잡을 틈도 없었다. 흰색 선이 허공에 그려졌다. 마족의 목이 그대로 잘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마족의 머리가 빙글- 돌았다.
먼지로 흩어지는 그 얼굴은-.
'웃고 있군.'
콰아아앙!
굉음이 터지며 땅이 흔들렸다. 땅이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뒤집혔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건, 고래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의 주둥이였다. 표면에 붉은 눈이 수십 개 박혀 있었다.
얼마나 거대한지 작은 산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아드리안나가 그대로 먹혔다.
"아드리안나님!!"
직속 부대가 오러를 가득 일으키며 땅을 박찼다.
그때, 끝까지 올라온 거대한 주둥이가 뚝- 하고 멈췄다.
흰 선이 세로로 길게 그려졌다. 그 선을 타고 재가 뿌려졌다. 선은 마른 풀에 붙은 불처럼 빠르게 퍼졌다.
거대한 마물이 전부 재로 변하여 휘날렸다. 폭설처럼 뿌려지는 재 사이로 아드리안나가 걸어 나왔다.
'미끼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마경에서 마족만 강해지는 게 아니니까.'
마나 농도가 짙어질수록, 아드리안나의 성질도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다만, 마족과는 달랐다. 편안함을 느낄 마족과는 반대로, 아드리안나는 고통을 느낄 게 분명했다.
그녀의 성질은 그녀까지 태우는 불이었으니까.
"고생했네."
"아닙니다. 전에도 경험한 적 있는 마족입니다. 그 아래에 본체를 숨겨두고 방심을 유도하는 놈이죠."
아드리안나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미끼라는 걸 알고 있었군.'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미끼든 본체든 그저 베어버리면 되니까.
그때-.
으아아아아앙!
괴상한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문제는 그 울음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낮잠 시간이 끝났나 보군."
사방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리 이쪽으로 와달라는 듯 거친 울음이 들렸다.
지옥이었다. 직속 부대 기사들도 얼굴이 굳었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서 갈라하드는-.
"이쪽일세."
다시 안내했다.
아드리안나는 그 확신에 찬 등을 응시했다.
*
마경은 지독했다. 곳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왔다. 갑자기 마물이 들이닥쳤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집요한 습격이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농도가 진해졌기에, 탐지와 시야 확보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와 반대로 마족과 마물들은 점차 강해졌다.
시야 확보나 탐지 둘 중 하나도 멈출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계속 수통을 홀짝였다. 고통의 알은 연신 두근거렸고, 정신은 한껏 고양됐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절벽 아닙니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였다.
"꽤 깊군."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이내 상황을 깨달은 직속 부대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방향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낭떠러지라니!"
"부상자가 상당합니다.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마족과 마물을 뚫고 따라왔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였으니, 격렬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용."
아드리안나도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이제 마경에 두 번째 들어온 거 아닙니까? 어째서 갈라하드 대장을 믿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격한 대화가 오갔지만, 당사자인 갈라하드는 절벽을 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봤다. 네발 마족의 신호는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빨리 내려오라고 재촉했다.
네발 마족을 본 지배자는 '구렁텅이에 있어야 할 것이 감히 내 영토에 나타나?'라고 했었다. 구렁텅이가 비유인 줄 알았는데-.
'진짜 구렁텅이군.'
아래에서 서늘한 바람이 올라왔다. 갈라하드의 머리가 거칠게 휘날렸다.
네발 마족은 갈라하드를 부르고 있었다.
네발 마족은 그저 '왕'이라는 단어를 말했을 뿐이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했지만-.
'처음으로 접한 단서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게 마족의 왕이었다. 그런 마족의 왕에 관해서 처음으로 나온 단서였다.
놓칠 수 없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마경이 늘어난 원인을 알 가능성이 높다.'
오면서 마경이 늘어난 원인을 찾았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오히려 옛 제국 흔적이 나오며 더 복잡해졌다.
네발 마족은 진짜 고위 마족이었다. 더불어 시기까지 공교로웠으니, 이에 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네발 마족을 믿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갈라하드는 남을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네발 마족의 동기를 이용할 뿐이었다.
'황제를 죽이는 것에 매몰된 놈이니까.'
네발 마족은 자기 힘을 깎을 정도로 황제를 죽인다는 목적이 뚜렷했다. 그렇기에 이용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방향이야 새로 잡으면 됩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괴상한 말에 고개를 돌리니, 갈라하드의 주변으로 길버튼과 특무대가 지키듯 서 있었다.
직속 부대의 기사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무대와 직속 부대가 대치하는 형태였다.
'내가 잘못 안내했다고 생각하는군.'
충분히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 고생을 하고 도착한 곳이 낭떠러지였으니까.
심지어 마경이 넓어지는 위급한 상황이었으니-.
"괜찮습니다. 돌아가서 정비하고 다시 와도 충분합니다."
"아드리안나, 나는 실수라는 걸 하지 않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갈라하드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이 아래에 답이 있을 걸세."
절벽을 가리키자 아드리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그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요구에 갈라하드는 말을 골랐다.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지만-.
'그러면 괜히 일을 벌이는 거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지배자에게서 우리를 도와줬던 마족 기억 나는가?"
"예? 예. 기억납니다."
"놈이 저기 아래에 있네."
아드리안나의 무표정이 흔들렸다. 당황이 떠올랐다.
"······고위 마족을 찾아오셨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위아래로 진동했다. 그 입이 달싹거렸다.
"마족을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마족을 믿지 않네."
"그러면-."
"잘 보게나."
갈라하드는 마나를 압축했다. 빠르게 주문을 읊었다. 이내 손가락 위에 자그마한 지옥불이 떠올랐다.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물러섰다.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절벽 아래로 던졌다.
"크기를 보게."
갈라하드의 진지한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집중했다.
지옥불이 주변의 안개까지 잡아먹으며 천천히 하강했다. 덕분에 지옥불이 멀어져도 보였다.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군요."
"맞네, 저쪽의 농도가 이쪽보다 약하다는 거지. 마족은 농도 짙은 곳을 좋아하니, 가는 길이 위험하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정 안되면 고위 마족 하나 처리한다고 생각하게나. 마나 농도가 약하니 잡기 쉽겠지."
"우리를 구해줬던 마족이라고-."
"그래봤자 마족이지.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건져가야 하지 않겠나?"
갈라하드의 당당한 대답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벙끗거렸다.
내려가서 수틀리면 고위 마족을 잡고, 아니면 정보를 얻겠다는 건가-.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다만-.
'아무리 마족이라도 우리를 도와줬는데······.'
아니, 마족이니까 상관없지. 그래도 도와준 마족이라면···.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때,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믿게."
담담하게 말했다.
뻔뻔하게 믿음을 요구하는 게 참으로 얄미웠다.
아무리 그래도 마경에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절벽을 어떻게 내려가고 올라오실 생각이십니까?"
모든 건 절벽을 내려가거나 올라갈 수단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절벽을 내려가는 건, 아드리안나와 직속 부대에게는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갈라하드와 특무대는 불가능했다.
"그대가 안아주면 되지 않겠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아준다면-. 이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농담일세,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자네, 얼굴이 붉은데."
"······죄송합니다."
"농담이었네만. 아무튼, 방법은 있지. 절벽을 편하게 오르고 내리는 아주 멋진 방법-."
갈라하드가 가죽을 두드렸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새겨진 가죽이었다.
으아아아아앙!
그때,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 마침 있군."
시원하게 웃는 갈라하드가 왠지 불안했다.
아드리안나는 슬쩍 투구를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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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캐럿은 욕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들 비슷한 얼굴이었다. 어딘지 혼이 쏙 빠진 얼굴-.
그 원인은 정면에 있었다.
물고기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이 입을 가득 벌리고 있었고-.
"하나씩 들어가게. 그리 넓지 않으니까 딱 붙어서 서고."
그 위에 선 갈라하드가 손짓했다.
"안심하고 타도 되네. 나처럼 마나 민감도가 높은 마법사가 건드리는 게 아니라면, 풀릴 리는 없으니까. 의외로 푹신하다네."
갈라하드가 마물의 피부를 두드리며 말했다.
확실히 푹신해 보였지만-.
'그 문제가 아니지 않나?!'
상대는 마물이었다. 그런 마물의 입에 들어가라니-. 캐럿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1대대라더니. 마물에 먹히는 건, 겁이라도 나는가 봅니다."
그때, 길버튼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마물에 먹히는 건 다 두렵지 않나? 그리고 너도 1대대였잖아.'
캐럿은 입 끝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그때-.
뿌우우우우.
어디선가 노쇠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오러로 날카로워진 신경에 뭔가가 걸렸다.
그건-.
"이런, 본대가 왔군. 자, 빨리 타게나."
군대였다.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본대라니-. 마물의 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왜 마경에서 마물의 입에 스스로 먹히고 있는지.
또 왜-.
"아드리안나, 자네는 뛰어서 내려오게. 마물이 아파하니까."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묘하게 섭섭해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 출발일세."
갈라하드가 웃으며 마물을 두드렸다.
그때, 그웬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응? 배고프다고? 굉이가 배고프다는 대요!"
"굉이가 누군가?"
"아, 이 친구예요. 조금만 참으렴. 우리는 먹으면 안 돼! 먹으면 나쁜 아이야! 옳지! 침이 고인다고-?"
활짝 웃으며 아래를 가리키는 그웬에-.
"이런 시발."
캐럿은 참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135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