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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 118-127

118화 선제

흰색 마탑의 장로 에디림과 적색 마탑의 장로 크라잔은 '정통파' 마법사였다.

정통파는 마도구를 부정하고 온전한 실력을 쌓는 걸 중시했다.

그들이 보기에 갈라하드는 정통파였다. 갈라하드는 마도구를 혐오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정통파도 아닌, 진성 정통파였다.

그들이 갈라하드에게 목을 매는 이유였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갈라하드는 정통파가 아니었다.

정통파는 마법을 끝없이 탐구할 진리로 여겼다. 갈라하드도 비슷했지만, 갈라하드에게 마법은 기본적으로 무기였다.

언젠가 나타날 마족의 왕을 태울 무기-.

그건 사소하지만, 큰 차이였다.

마법을 진리로 여기는 그들은 더 화려한 마법, 더 복잡한 마법을 추구했지만, 마법을 무기로 대하는 갈라하드는 마법을 깎았다.

검을 갈 듯, 더욱 날카롭고 빠르게 만들었다.

갈라하드에게 정통파도 겉멋에 빠진 놈들일 뿐이었다.

물론, 마도구를 만지작거리는 놈들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았다.

장로들의 호의는 예상했지만-.

'정오의 마탑에 들어온다고 할 줄은 몰랐군.'

마탑의 장로는 가벼운 지위가 아니었다. 장로를 버리고 갈라하드의 마탑으로 오겠다는 건,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장로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실제로 보여준 게 컸군.'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흉내 낸 까닭이었다.

마법 자체를 지우는 건, 마법사로서 넘길 수 없었다. 갈라하드여도 노인처럼 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 둘을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마석에 눈이 팔려있었다.

진짜 마법사와 마도구나 만지작거리는 놈들의 차이였다.

"이놈보다 내가 나을 것이다! 이놈은 성격이 더러워서, 아랫놈들 갈구기만 한다!"

"뭐?! 이 망할 노인네가 누구 성질이 더럽다는 거냐! 씨부랄!"

"저 천박한 욕 들었느냐?"

"크흠-. 나는 아주 고상한 사람이다."

시끄럽게 떠드는 노인들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만하시죠."

굳이 싸울 필요 없었다.

"두 분 다 오시죠. 임금은 전보다 더 드리겠습니다."

마탑의 장로를 포섭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둘 다 잡아야 했다.

"임금은 필요 없다니까?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삶이다!"

"나는 오히려 내겠다!"

노인들이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오히려 더 내겠다고 했지만, 갈라하드는 거절했다.

이런 건 깔끔해야 했다.

얼마를 주든, 갈라하드는 그 이상을 뽑아낼 자신이 있었다.

"진짜 들어오실 겁니까?"

갈라하드가 진지하게 묻자, 노인 둘이 웃음기를 지웠다.

"네가 진정 마나의 성질을 발견했다면-."

"들어가겠다."

노인들이 예의 장난기를 지운 얼굴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주름진 눈이 가득 반짝거렸다.

갈라하드는 잠시 말을 골랐다.

"마나는 생명력과 호흡합니다."

"······생명력?"

"그게 뭐냐?"

둘의 고개가 동시에 굳었다. 둘이 서로를 쳐다봤다가 다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임시로 지칭한 단어입니다. 생명력을 직접 느끼시기는 힘드실 겁니다."

노인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내 가득 일그러졌다.

"우리가 늙어서?! 아직 한창이다!"

"맞다! 아직 팔팔하다!"

격렬한 반발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생명력은 기본적으로 지녔기에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속의 피를 느낄 수 있으십니까?"

"아하, 이해했다!"

"그러면 생명력을 어떻게 느끼느냐?"

갈라하드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랑 고통의 알.'

생명력을 느끼게 된 건 그 둘이 발단이었다. 다만, 그건 갈라하드가 생명력의 존재를 모를 때 이야기였다.

이제 생명력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니, 방법을 달리할 수 있었다.

훨씬 더 간편하고 깔끔한 방법이 있었다.

"이걸 마셔 보시죠."

갈라하드는 최하급 마족의 피가 담긴 수통을 꺼내 건넸다.

"이건 뭐냐?"

"술이야?"

"마족의 피입니다."

"마족의 피?!"

"오오, 마족이라니! 몸에 좋나?"

적색 노인이 냉큼 수통을 가져갔다. 뚜껑을 열자 마족의 피 특유의 끔찍한 냄새가 풍겼다. 노인 둘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마족의 피에는 고농도의 마나와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 마나가 아닌 게 생명력입니다."

"크흠, 너부터 마셔라."

"흰색 놈답게 겁은 많아서-. 쯧."

붉은 노인이 수통을 홀짝였다.

꽤 과감했지만-.

"끄으윽······. 끄윽······."

붉은 노인이 몸을 비틀었다. 그 눈이 붉어졌고, 손과 발이 달달 떨렸다. 독이라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흰색 노인이 갈라하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마족의 피에 담긴 고농도의 마나로 인한 작용입니다."

"고작 마나도 못 버텨서 저런다는 건가?! 하, 뻗대더니만-. 이리 내라!"

흰색 노인이 적색 노인의 손에 있는 수통을 뺏었다.

"흰색이 적색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마."

흰색 노인이 호기롭게 마셨다.

그리고-.

"끄으윽-! 끄윽-!"

"으으으······."

"끄윽!"

둘은 서로 기대어 몸을 뒤틀었다.

갈라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정도로... 엄살이 심하십니다."

노인들이 숨을 헐떡였다.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 주름이 좀 늘어난 듯했다.

"고- 고작?"

"이게 고작이라니!"

둘의 격렬한 반발에 갈라하드는 수통을 가져왔다. 손가락을 튕겨 입구를 닦고 입에 털어 넣었다.

"무······ 무슨!"

"한 번에 다 마셨다! 미쳤군!"

"미친 게 분명하다!"

둘이 격하게 반응했다.

고위 마족의 피도 마신 갈라하드였다. 이제 최하급은 기미도 안 왔다. 미지근한 따뜻함이 전부였다.

고통의 알도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갈라하드가 멀쩡하자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멀쩡한 것이냐? 이게 괜찮다고?"

"말도 안 된다!"

"저··· 젊어서 그런 거다! 나도 삼십일 년만 젊었어도 괜찮았다!"

진심 어린 경악에 갈라하드는 수통을 하나 더 꺼냈다.

"생명력을 느끼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수통을 받은 노인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가득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슬쩍 덧붙였다.

"마시다 보면 제법 맛이 있습니다."

"맛-?"

"맛?"

노인들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잠시 방황하던 노인들이 갈라하드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크흠, 젊었으면 그냥 마셨겠지만-."

"어쩔 수 있나. 세월 앞에는 소드 마스터도 없는 법이니까."

"이거 술이라도 담가야겠군."

"그게 좋겠다. 뱀으로 담그자!"

노인이 웃음을 지우고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마나의 새로운 성질을 공표할 거라면, 수도에서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맞다. 마탑을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합당한 이야기였다. 마탑들은 수도에 몰려 있었으니까. 마나의 새로운 성질을 발표할 거면, 수도에서 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다만-.

"북부에서 성질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발견할 게 더 남았고-."

정식 마탑으로 인정받을 방법은 따로 있었다.

"그랬구나! 마족! 그래서 북부에 있었군!"

"마법을 위해서 이런 불모지까지 오다니! 참된 자세다!"

갈라하드는 슬쩍 연초를 털었다.

노인들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혹시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노인들의 눈이 주름과 어울리지 않게 번들거렸다.

뒷방 늙은이라고 한들, 한때 이름을 날린 이들이었다.

장로인 이들의 인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인맥의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이겠지만, 살아남은 노인들은 대부분 한자리했다.

"예, 알겠습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그때, 적색 노인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근데 말이다. 이놈보다 내가 먼저 들어가지 않았느냐?"

적색 노인이 흰색 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뜬금없는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먼저 말했으니-.

"내가 선배지. 이놈!"

"선배는 무슨-. 염병하네!"

"염병?!"

둘이 다시 다퉜다.

'장로 둘이라. 일이 더 쉬워졌군.'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석 구경에 여념이 없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갈라하드를 데려가기 위해서 온 이들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금화가 상당했다.

'마석부터.'

갈라하드는 순진한 마법사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를 본 노인들이 싸움을 멈췄다.

"임금을 안 받는다고 했으니, 일이라도 해야지!"

"저런 핏덩어리들은 일도 아니지!"

노인들이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

'이렇게 품질이 좋은 마석이 있다니-.'

청색 마탑의 로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처음에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마탑이라고 소개한 탑이 그저 무식하게 크기만 했기에-. 조소를 머금었다.

그 조소는 마석을 본 순간 사라졌다.

수도에서 마석은 상당히 귀했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게 마석이었다.

그런데 갈라하드가 준 마석은 수도에 있는 것보다 품질이 훨씬 뛰어났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문제는-.

"자, 들어오게."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짓했다. 괴상한 마법진이 가득 그려진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으로 보이는 모습에 로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탑 안에는-.

'저게 다 마석이야?'

마석이 가득했다.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품질 좋은 마석이 돌처럼 굴러다녔다. 마탑이 아니라 마석 저장고였다.

'이게 다 마석?'

마법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마음껏 둘러보게."

갈라하드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마법사들을 밀었다.

마법사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마석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진짜 마석이었다.

'상품이다.'

로엔은 혀를 내둘렀다. 수도에 있는 마석들이 똥으로 느껴질 정도의 품질이었다.

이걸 가져간다면-. 로엔의 입에 침이 가득 돌았다.

다만-.

'이건 북부의 물건이야.'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북부의 것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제국에게 걸리면 마탑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걸 가져갈 수가 없다니!'

말이나 되는가-. 로엔은 침통함을 느꼈다.

"이건 정오의 마탑이 직접 캔 마석들일세. 대공의 눈을 피해서 몰래 캔 것들이지. 문제는 대공의 눈을 피하는 것이지만, 그건 이쪽에서 해결할 걸세."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탑······?'

불법 마탑은 중죄였다. 어쩌면 북부와 교류하는 것보다 더 심한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불법 마탑 관계자에 한해서였다.

불법 마탑과 거래한 마탑까지 처벌하지 않았다.

더불어 정오의 마탑은 북부의 마석을 빼돌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북부와 거래하는 게 아니지.'

이 정도라면 설령 문제가 생겨도, 마탑에서 무마할 수 있었다.

로엔의 눈이 커졌다. 마석은 마탑의 경쟁력이었다.

이 정도 품질의 마석이라면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북부와 거래는 조금···.'

솔직히 욕심이 났지만, 북부와 거래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제국의 시선이 문제였다.

그때-.

"내가 사겠다! 내가 전부 사겠다! 여기 돈!"

"아니! 이 못돼먹은 노인네가! 욕심만 많아서! 나도 살 거다!"

"늦었어! 내가 먼저 다 샀다!"

노인들이 투덕거렸다. 지팡이까지 휘두르면서 거칠게 싸웠다. 그 다툼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저래 봬도 4대 마탑인 흰색 마탑과 적색 마탑의 장로들이었다.

그런 거물들이 서로 사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괜히 조바심이 올라왔다.

그때-.

"정 불안하면, 왕국 연합 쪽으로 돌려서 받는 경로도 있다네. 물론, 값은 더 나가지만."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왕국 연합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니-!

"가··· 가격은!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이 호로 새끼! 내가 산다고 했다!"

"사겠습니다! 저 돈 많습니다!"

노인의 호통에 로엔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다른 마법사들도 다급해졌다.

"가격이라-."

갈라하드는 그 순진한 눈들을 둘러보며-.

"제시해보게."

입꼬리를 올렸다.

****

"큰일 났습니다! 큰일!"

테오도르는 다급한 보고에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창백한 참모가 숨을 헐떡였다.

"큰일이라니?"

"3황자가 병력을 이끌고 북부의 벽에 도착했답니다! 대병력이랍니다!"

"병력을 끌고?"

테오도르는 눈을 가득 구겼다. 약혼식에 초대해줬더니, 왜 병력을 끌고 왔다는 말인가-.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하지만 3황자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맞네, 전쟁은 아닐 걸세. 그 병력으로는 북부의 벽도 뚫지 못해."

참모들이 빠르게 말을 받았다. 그 목소리가 차분했다.

"거부할 수도 없지 않소? 정식으로 약혼식에 참여하겠다고 온 것인데."

맞는 말이었다. 거부했다가는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애초에 거부할 필요도 없었다.

3황자가 대 병력을 끌고 왔다고 한들, 황태자나 2황자가 아닌 이상 북부에 위협이 될 리가 없었다.

문제는-.

'일이 더 커지는 것이지.'

3황자는 협약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제 목숨을 바쳐서 구실을 만들 속셈일 수도 있었다.

"일단, 대공 전하에게 보고부터 올립시다."

참모들이 차분히 끄덕였다.

그때-.

"큰일입니다! 큰일!"

병사 하나가 더 뛰어왔다.

'뭐지?'

참모진에 의문이 떠올랐다. 방금 3황자의 소식을 들은 터였다. 또 큰일이 날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전력으로 달려온 병사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꼭 전해야 하는 소식이라는 듯-.

"마··· 마법사들이 앞다퉈서 갈라하드 대장에게 금화를 바치고 있답니다!"

"뭣이!"

충격적인 소식에 참모진이 들썩였다. 참모들의 눈이 가득 흔들렸다.

"다들 갈라하드 대장을 포섭하려고 안달 나 있답니다! 왕국 연합의 왕부터, 각 마탑의 장로들, 마법사까지! 금화를 바치고! 매달리고!"

"아드리안나의 약혼식에 참여하려는 게 아니라. 갈라하드 대장을 잡으러 온 거구나! 이런 못된 놈들!"

참모들이 비명을 질렀다. 방금의 냉정이 사라졌다. 분위기가 크게 요동쳤다.

"마탑의 포섭이라니! 큰일 아니오!"

"갈라하드 대장은 마법을 특히 좋아하지 않나! 아주 큰일이다!"

참모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목소리에 동요가 가득했다.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그들과 달리 이쪽에서는 갈라하드에게 제시한 게 딱히 없었다.

약혼식이 유일했는데, 그 약혼식도 아드리안나가 거부하다가 마지막에서야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라도 넘어가겠다!'

테오도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른 참모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들바들 떨었다. 어떤 참모는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우··· 우리도 금화를 줍시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거지입니다! 거지! 오히려 갈라하드 대장이 주는 처지 아닙니까!"

"아뿔싸! 그러면 다른 거라도!"

"다른 거?! 뭐를 줍니까!"

참모진은 깊게 고민했다.

그들이 갈라하드에게 줄 수 있는 거라면-.

"없는데?"

으아아! 참모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때-.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스산한 서늘함이 열린 틈을 타고 퍼졌다.

무거워진 공기가 시끄럽던 참모들을 가벼이 눌렀다.

대공이었다.

참모들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은 납작 엎드린 참모진을 둘러봤다.

쯧-.

대공이 혀를 차자, 참모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마중을 나가겠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가 왔을 때도 성에서 나가지 않았던 대공이었다.

그런 대공이 3황자를 마중 나간다니-.

'······왜지?'

테오도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갈라하드도 간다."

대공이 명령했다.

테오도르는 속으로 탄식했다.

대공 전하는 3황자를 마중 나가는 게 아니라-.

'갈라하드 대장을 챙기는 거구나.'

대공 전하가 아드리안나가 아닌 이를 챙기다니-.

'우리에게는 대공 전하가 있다!'

테오도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잡았다.

****

톰은 자밋에게 다양한 것들을 배우면서, 매우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밋은 친절한 여인이 아니었다. 까탈스럽고 불친절했다.

하지만 북부의 말단 병사인 톰에게는 이 정도면 아주 친절한 거였다.

자밋은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여 요약하는 걸 먼저 가르쳤다.

병사 때 짬처리 당했던 경험을 지닌, 톰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

자밋은 입술을 가득 씹었다.

너무 빨리 늘기에, 일부러 어려운 일을 맡겼다.

이번 건 정보국 요원들에게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톰은 그를 끝낸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 매운 거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자밋은 깔끔히 정리된 책상을 보며-.

'괴물이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119화 명마

'마석 판매의 가닥이 잡혔군.'

장로 둘이 합류한 게 크게 작용했다. 노인 둘의 바람잡이 실력은 상당했다.

'파르한스타의 도움도 컸고.'

파르한스타가 도와주겠다며, 왕국 연합 경로 개척이 크게 작용했다.

"대장, 어르신들한테 인기가 많습니다."

길버튼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고개를 들자, 길버튼이 뚱한 표정으로 있었다.

"윗사람 공경을 잘하는 덕분이지."

"······윗사람 공경을 잘하십니까?"

길버튼이 못생긴 사막여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지니까."

"저 안 못생겼습니다. 인기 많습니다."

"그래, 자네는 북부의 투박함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있네. 혹 누가 북부에 오고 싶다면 자네의 얼굴을 보여주면 될 정도일세."

"······칭찬입니까?"

"모든 말은 받아들이는 이에게 달렸지."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무튼, 꼬맹이 말입니다."

"데미안 말인가?"

"예, 꼬맹이."

길버튼이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최근 길버튼은 데미안을 전담해서 가르치고 있었다.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놈, 도대체 뭡니까?"

길버튼이 진지하게 물었다.

'데미안-.'

프록셀 가문이라는 마족의 말에 따르면, 데미안은 마족의 사생아였다.

'유일한 사생아랬지.'

특이한 건 데미안의 오러였다. 데미안의 회색 오러는 다른 오러를 잡아먹었다.

말 그대로 잡아먹었다. 다른 오러를 먹어 제 덩치를 키웠다.

들어본 적 없는 오러였다. 오러는 갈라하드의 전문 분야가 아니고, 최근 계속해서 바빴기에 일단 길버튼에게 맡겨뒀다.

길버튼이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데미안이 누구냐니. 참으로 길버튼 경다운 질문이군. 데미안은 데미안일세. 특무대에서 식비를 담당하고 있지."

"그건 저도 압니다만."

"이런, 알고 있었나? 길버튼 경, 성장했군."

"놀리는 겁니까?"

"오, 또 성장했군."

길버튼이 눈을 구겼다. 이내 한숨을 내쉰 길버튼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늘기는커녕, 더 삐뚤어집니다."

"그 아이는 맹수일세. 맹수가 검을 배우겠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정보국 시절에 데미안과 비슷한 놈이 있었다. 놈이 말하기를 맹수에게 필요한 건-.

"대결이나 계속하게."

발톱을 날카롭게 벼릴 전투였다. 가르침 같은 게 아니었다.

길버튼이 얼굴을 구겼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나름 재밌습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검이 바로 날아와서-."

길버튼이 슬쩍 코트를 내렸다. 목에 옅은 흉터가 몇 개 새겨져 있었다. 전에 없던 것들이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길버튼 경, 곧 따라잡히겠군."

"십 년은 이릅니다. 근데 그웬은 어디 갔습니까?"

"아, 새로운 스승들이 와서 말이지. 붙여줬네."

"새로운 스승들 말입니까?"

그때, 문이 열렸다. 예의 무심한 얼굴의 아드리안나였다. 길버튼이 짧게 경례를 올렸다.

"대공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갈라하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를? 왜?"

"갈라하드 대장에게 3황자의 마중을 명하셨습니다."

음-.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내렸다.

"대공 전하가 대장을 많이 이뻐하시나 봅니다."

길버튼이 얄궂게 낄낄 웃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뛰어난 이는 어디서든 관심을 받는 법일세."

"예, 뭐-."

길버튼은 눈을 찡그리며 갈라하드를 따라나섰다.

*

'음-.'

대공을 마주한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지, 거대한 상체를 가득 드러낸 상태였다.

'하긴 가죽이 두꺼우니까.'

갈라하드의 마법도 튕겨냈던, 대공의 굵직한 근육들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근육마다 자아가 있는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였다.

대공 자체의 외형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인데, 마물을 탄 게 그 포악함을 배로 불렸다.

네 발에 불이 가득 타오르는 마물에 탄 대공은, 마경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방금 나왔다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이 상태로 마중을 나간다니-.'

3황자의 반응이 궁금할 정도였다.

"부르셨습니까."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대공은 대답 대신 손짓했다. 테오도르가 뭔가를 끌고 왔다.

그건 검은색 말이었다. 단순히 말이라고 설명하기에 미안할 정도의 말이었다.

검은색 털은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윤기 있고 매끄러웠다. 햇빛을 받으니 푸르스름한 색이 옅게 떠올라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말의 갈색 눈에는 꼿꼿함이 가득했다. 말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건방진 눈이었다.

병사가 고삐를 당겼지만, 말은 고삐에 끌려가지 않았다. 어울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명마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오, 검은 바람입니다. 검은 바람은 대공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명마의 핏줄입니다. 먹지 않고 삼 일을 뛰어도 지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길버튼이 빠르게 말했다. 그 얼굴이 벌겋고 입에서 침이 튀었다. 잔뜩 흥분한 듯했다.

매번 마부석에 앉더니 말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했다. 참으로 기사스러웠다.

그때, 말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말 주제에 그 눈빛이 상당히 건방졌다.

'말이랑 눈싸움이라니.'

말에게 질 생각은 없었기에 피하지 않았다.

말이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오오-, 옵니다! 온다-!"

길버튼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길버튼은 손바닥에 침을 뱉고 그걸로 머리를 가득 넘겼다.

침으로 멋을 부린 길버튼이 슬쩍 앞으로 나갔는데, 말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꼿꼿하게 걸음을 옮긴 말이 갈라하드 앞에 섰다.

자신을 내려보는 시선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높다."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말하자, 꼭 알아들은 것처럼 말이 천천히 숙였다.

만지라는 듯했다. 아니, 네가 만지지 않고 버틸 수 있냐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건방진 말이군.'

머리를 쓰다듬었다. 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고급 천보다 더 부드러웠다.

"검은 바람이 손길을 허락하다니······! 근데 왜 대장에게?"

길버튼이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잘생긴 걸 좋아하나 보군."

"젠장."

길버튼이 정직한 욕을 중얼거렸다. 순백의 말을 탄 아드리안나가 다가왔다.

"제 말과 쌍둥이인데, 이 아이는 워낙 성격이 까탈스러워서 탈 수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라하드 대장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아드리안나의 설명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까탈스러운 게 아닐세."

"···예?"

"자기 가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지."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길버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침 말이 필요했는데, 아주 멋들어진 선물이었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누가 준다느냐?"

대공의 반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드리안나도, 대공도 말이 있었다. 굳이 말을 끌고 왔다는 건, 갈라하드를 주려는 게 분명했다.

"부끄러움이 많으십니다?"

"놈-."

"예? 갈라하드 대장에게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순진한 물음에 대공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대공의 시퍼런 눈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 뒤로 움직였다.

"쯧."

대공이 못마땅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갈라하드는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명마였다. 대공이 그런 명마를 갈라하드에게 내린 이유는 뻔했다.

'똥줄이 좀 탔나.'

파르한스타나 장로들이 갈라하드에게 구애한 게 제법 위협적으로 작용한 듯했다.

'이래서 사람은 몸값을 올려야 한다니까.'

대공이 협박이 아닌 보상으로 달래다니, 장족의 발전...

"장례식에 손님이 많군."

바로 이어진 협박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고삐를 당겼다.

말이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말 주제에 무게를 잡는군.'

말에 올라타자, 부드러운 안장이 갈라하드를 받았다. 부드러운 털 아래의 단단한 근육이 온전히 느껴졌다.

"잘 어울리십니다."

아드리안나의 칭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나한테 어울리는 멋진 말일세."

말이 맞다는 듯 투레질했다. 갈라하드는 그 목덜미를 두드려줬다.

"하···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됩니까?"

길버튼이 절절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말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길버튼이 흐흐- 웃으며 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말이-.

퉤.

길버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길버튼의 얼굴에 침이 뚝뚝- 흘렀다.

"못생겨서 싫다는군."

말이 투레질했다. 길버튼이 허허- 웃었다. 실로 메마른 웃음이었다.

그때-.

쿵! 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대공이 저 멀리에 있었다. 대공이 탄 마물이 끔찍한 소리를 뱉으며 땅을 박찼다.

"대공 전하가 부끄럼이 많군."

"······예?"

아드리안나의 경악에 갈라하드는 웃으며 고삐를 당겼다.

말이 부드럽게 뛰었다. 찬 바람이 갈라하드의 머리를 길게 헤집었다.

"좋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제껏 수많은 말과 마력차를 타봤지만, 그중에 제일이었다.

건방지지만, 확실히 뛰어난 말이었다.

"3황자가 병력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지. 피를 볼 구실만 찾는 놈이니까."

"3황자와 아는 사이입니까?"

아드리안나의 질문에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할까. 그 3황자가 갈라하드를 기억할까? 못할 가능성이 컸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좀 들었네."

"아, 그렇습니까."

왠지 모르겠지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가득 내려갔다.

"반지는 어떻게 됐나."

"아, 가져왔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가벼이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내밀던 아드리안나가 잠시 멈칫거렸다.

"어디에 쓰실 겁니까?"

"비밀일세."

갈라하드는 짙게 웃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고삐를 잡을 필요도 없었다. 말이 알아서 대공을 따라서 움직였다.

뭔가 잊은 듯했는데······.

"잠깐 저는-!"

저 멀리서 길버튼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

'명마군.'

꼬박 반나절을 쉬지도 않고 움직였는데, 말은 지치기는커녕 더 달리지 못해서 아쉽다는 눈치였다.

'대단하구나.'

갈라하드는 말의 목을 두드려줬다. 말이 작게 투레질했다.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북부의 벽-.'

사방이 흰색이었다. 북부의 벽은 언뜻 보기에 그저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보였다.

그 높이가 너무 높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기 때문이었다. 꼭 눈보라가 분단한 세상 같았다.

확실히 북부는 건축은 상당히 뛰어났다. 덩치와 근력이 뛰어나고, 일단 하고 보는 그 무식한 성격이 작용한 듯했다.

북부의 벽 주변으로 병사들이 급히 뛰어다녔다. 곳곳에서 고성이 터졌다. 묘한 긴장감이 팽배했다.

"음."

대공이 나지막한 숨을 흘렸다.

대공의 존재감이 다른 것들을 전부 지워냈다. 그에 시끄럽던 소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대공을 보며 조아렸다.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병사가 부복하는 건 장관이었다.

"열어라."

대공이 짧게 명령했다.

3황자가 병력을 끌고 앞에 주둔한 상황이었다. 그 건너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고 열라니-.

우습게도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열어라! 열어!"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거대한 성문 주변으로 붙었다.

대공은 등에 멘 도끼를 풀어 손에 쥐었다. 그 등에서 뿌드득- 뿌드득- 소리가 연신 퍼졌다.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마중이라더니, 왜 도끼부터···.'

북부에서는 마중의 뜻이 다른 듯했다.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문 사이의 눈들이 길게 뿌려졌다. 거센 눈보라가 그 안으로 몰아쳤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연초를 깊게 빨았다.

눈보라가 한차례 몰아치자, 시야가 확보됐다.

성문 너머에는 금색의 향연이었다.

금색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서 있었다. 수가 얼마인지 감도 안 올 정도였다. 제국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그 병사들의 선두에 짙은 황색이 찬란했다. 제국의 검, 황실 기사들이었다.

황실 기사들 사이에 유달리 번쩍이는 갑주를 입은 이가 있었다. 금을 가득 덮었는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황족의 피가 그렇듯, 그 외모는 출중했다. 다만, 그 눈에 깊이가 없고, 광기가 넘실거렸다.

3황자였다.

'여전하군. 아니, 더 심해졌나.'

사냥감을 찾는 듯한 적의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3황자는 거대한 검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그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의 주인은 그 앞에 있었다. 토막난 시체가 뒹굴었다.

제국의 죄수일 것이다. 3황자는 피를 보지 않고 견디지 못했다. 그런 탓에 피가 고플 때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늘 죄수를 데리고 다녔다. 3황자의 도시락이었다.

'피에 미친 소드 마스터.'

3황자의 이명이었다. 명예로운 이명이 아니지만, 3황자는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

갈라하드가 괜히 3황자를 처리하려는 게 아니었다.

3황자는 광인 중의 광인이었다.

그때-.

대공의 등이 거칠게 꿀렁거렸다. 근육 뒤틀리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근육이 움직이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사람의 몸에서 김이 피어오르다니-.

"······!!"

대공이 탄 마물이 거칠게 표효했다. 마물의 발에 일렁이는 불이 눈을 녹였다.

대공이 대군을 향해 홀로 나섰다.

단신으로 나서는데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닭이 수백 마리 있다고, 호랑이를 걱정하겠는가.

대군 앞에 홀로 섰지만, 대공의 존재감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병사들이 동요했다.

대공이 천천히 둘러봤다.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병사들이 크게 움찔거렸다.

대공의 시선이 3황자에게 닿았다.

"세 번째 개새끼가 왔군."

그 굵직한 입꼬리가 사납게 비틀렸다. 누렇고 거대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다.

대공이 나지막한 숨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풍기던 대공의 기세가 순간 확장됐다.

그건 오러가 아니었다. 그저 기세였다. 대공의 거칠고 야만적인 기세가 가득 퍼졌다. 눈보라가 대공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연해졌다.

대자연을 누르는 존재라니-.

모두가 경악했다. 병사들이 크게 휘청였다. 그중에는 뒤로 물러나는 이도 있었다. 수백의 병사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정작 기세를 정면에서 맞이한 3황자는-.

"그대가 대공이겠군."

입꼬리를 올리며 대공에게 검을 겨눴다. 대검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3황자의 눈에 호승심이 일렁였다. 아니, 그건 탐욕이었다.

대공이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광인이군.'

저런 존재감을 뿜어내는 대공이나, 그를 마주하고 웃는 3황자나-. 괜히 광인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두 광인의 대립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모두가 둘에게 집중했지만, 갈라하드는 둘을 보고 있지 않았다.

3황자의 망토에 있는 리본 모양 브로치가 계속해서 속삭였기에-.

광인은 둘이 아니라고. 진짜 광인이 하나 더 있고, 그게 가장 큰 문제가 될 거라고-.

그 문제는 3황자의 조금 뒤에 있었다.

무장한 수백의 금색 사이에, 고고한 흰색이 나풀거렸다.

황녀였다. 황녀는 정확히 갈라하드를 보며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그래, 황녀의 분노는 예상했다.

문제는 황녀의 복장이었다.

황녀는 아주 화려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 곳곳에 주렁주렁 달린 보석들 보다, 그 중앙에 있는 거대한 리본이 시선을 끌었다.

저건 누가 봐도 약혼식에 초대 받은 이의 복장이 아니었다.

약혼식 당사자였지.

'동반 약혼이었군.'

최악의 패가 아주 화려하게 폈다.

120화 3황자

"역시 자밋이야. 참으로 훌륭한 정리군."

퍼스트의 감탄에 자밋은 혀를 찼다.

"내가 한 게 아닌데."

"음? 그러면 누가 했다는 거지?"

자밋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테이블을 닦는 톰이 있었다.

어째 쟤는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듯했다.

"저 병사가 했다는 건가? 이런 수준급의 정리를?"

"아, 자밋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보조가 전부였습니다."

"겸양은 적당히."

"아하하-."

자밋의 질책에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톰의 능력은 자밋이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퍼스트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대, 소속이-."

"갈라하드가 건드리지 말랬어. 자기 것이라고."

"음."

퍼스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톰을 노려봤다. 그 뜨거운 눈빛에 펌킨이 질색했다.

"바쁘니까 본론으로 넘어갈게. 약혼식이 내일이야. 여기 임무 명령서."

자밋은 손을 휘저어 분위기를 바꿨다. 퍼스트는 그를 받아서 임무 명령서를 살폈다.

"왕국 연합을 도우라고?"

"그걸 말로 뱉으면 암호화한 의미가 없지?"

"어차피 보안 마법을 걸어둔 상태다. 새어나갈 수 없다. 갈라하드가 아니라면."

퍼스트의 단호한 대답에 자밋은 작게 혀를 찼다.

"그래, 왕국 연합과 3황자의 갈등을 유발할 거야."

"전쟁을 일으킬 생각인가?"

"아니, 그 전까지."

"적당한 수준이라. 그래, 내 전문이지."

퍼스트는 곧장 임무 명령서를 굳게 움켜쥐었다. 불길이 타올랐다. 이내 재가 흩날렸다.

"톰."

"아, 여기 있습니다."

톰이 거대한 가방을 내밀었다. 퍼스트는 톰을 노려보면서 가방을 확인했다.

"왕국 연합의 갑옷이군."

퍼스트의 눈이 깊어졌다. 이내 퍼스트가 이해했다는 듯 끄덕였다.

유능한 요원이랑 일하는 건 확실히 편했다.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왕국 연합과 제국의 갈등 유발, 마탑과 마석 사업까지-. 최고로 복잡한 약혼식이군."

"그럼, 누구의 약혼식인데."

자밋의 긍정에 퍼스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퍼스트의 뜨거운 시선에 펌킨은 욕을 중얼거렸다.

"펌킨, 걱정하지 말게. 우리의 약혼식은 더 화려할 테니까."

"미친-.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화려하려면 제마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이십니까. 염병-."

뿌드득. 퍼스트의 눈이 빙글 돌았다.

"제···마···전···쟁···."

중얼거리는 퍼스트에 펌킨은 비명을 질렀다.

"농담입니다! 농담이라고! 시발!"

"제···마···전···쟁!"

"으아악! 미친!"

펌킨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퍼스트가 네 발로 땅을 짚으며 뒤를 따라갔다. 닫힌 문 사이로 펌킨의 비명이 흩날렸다.

'싫다고는 안 하네.'

자밋은 차를 홀짝였다.

"다른 두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핸섬이랑 제임스라고-."

어느새 자료를 정리하던 톰이 물었다. 그에 자밋은 빙긋 웃었다.

"아, 잠입시켰어."

톰은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정보국에서 나오는 은퇴 팀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톰의 물음에-.

"그건 갈라하드 전문이라서."

자밋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대공과 3황자. 둘의 대치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헐벗은 거대한 마물 대공과 금색의 갑주를 입은 3황자-. 둘은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실상은 3황자가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광인이지만, 겉모습만 보면 대공이 악역이었다.

고위 마물과 대치하는 세기의 용사 같은 느낌이었다.

눈보라가 거칠게 휘몰아쳤다. 세상이 하얀색으로 가득 찼다.

제국의 상징인 금색이 빼곡했지만, 우습게도 속에 있는 하얀색이 시선을 잡았다.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너무 붉어서 피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황녀가 갈라하드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음, 좋지 않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굳었다. 황녀가 미친 짓을 할 건 예상했지만,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갈라하드가 주선했던 왕국 연합과의 혼인이 실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갈라하드가 약혼한다는 소식에 화가 난 걸까. 감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황녀는 미친 여인이었다. 미친 여인에게 이유를 묻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었다.

뿌드득, 경쾌한 소리에 상념이 끊겼다. 대공의 등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근육이 숨을 쉬는 것처럼 꿀렁였다. 저게 어찌 사람 몸인가.

대공이 3황자를 내려봤다. 둘의 대치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3황자 덕분에 대공은 아직 황녀를 보지 못했다.

저번에 갈라하드를 데려가려고 했던 황녀였다. 그런 황녀가 약혼식에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건, 의미가 명백했다.

대공이 저 꼴을 보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좋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약혼식과 장례식, 갈림길에 선 순간이었다.

그때,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황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대공의 주의를 끌고, 황녀를 환복시켜야 했다.

"나무 기둥처럼 큰 목이군. 사람이 맞나? 한 번에 베기 힘들겠어."

3황자가 대검으로 대공의 목을 겨눴다. 대공의 목에 검을 겨누다니, 미친 게 분명한 깡다구였다.

갈라하드에게는 호재였다. 3황자가 대공의 주의를 마음껏 끌어주고 있었으니까.

두 번째, 황녀의 환복은 간단했다.

황녀와 시선을 마주하고-.

'벗어.'

짧게 명령했다.

황녀의 웃음이 그쳤다. 그 입꼬리가 내려갔다. 울상이 되었다.

황녀는 주저 없이 드레스의 옷깃을 잡고 그대로 당겼다. 하얀 천이 여실히 나풀거렸다. 그 안의 딱 붙은 붉은 갑주가 드러났다.

'애초에 이걸 노렸군.'

잔뜩 울상이 된 황녀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미친 황녀는 화가 나면 웃고, 기쁠 때 울었다. 그러니까 저건-.

'함박웃음이군.'

그 반응이 상당히 찜찜했지만, 그래도 환복은 시켰다.

다음은-.

'3황자.'

3황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황족이라는 게 그랬다. 모든 걸 갖춘 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들, 거기에 억만금을 쏟아부은 게 황족이었다.

그중 살아남은 이가 고결한 황족이 되는 것이었다. 죽은 이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고-.

그게 황족의 고결성이었다.

3황자는 그런 황족 중에서도 수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대공만큼은 아니지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 만만하지 않지.'

3황자는 피에 미친 자였다. 조금이라도 피를 보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자였다.

그리고-.

'실력자를 좋아하지.'

3황자가 원하는 실력자는 다른 이들과 기준이 달랐다.

3황자의 실력자 기준은 간단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가.'

황족은 전부 이렇게 맛 간 놈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국이 이 모양이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며 손을 털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호응했다. 마법진이 빛을 뿜어댔다. 마나를 빠르게 압축했다. 생명력을 섞었다.

이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천 번 깎은 천벌이었기에 주문은 필요 없었다.

징조도 없었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번개가 떨어졌다.

3황자가 천벌에 맞는 건, 튕기는 순간에 정해진 결과였다.

찰나의 순간 3황자가 검을 비틀었다. 붉은 오러가 넘실거렸다. 그 짧은 순간에 오러가 천벌을 잘랐다.

'저걸 반응하다니-.'

역시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였다. 피에 미친 소드 마스터답게 그 감각이 예리했다.

붉은 오러가 천벌을 잘랐다. 꽤 허무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다.

'한 번 더-.'

갈라하드는 공간 마법으로 흩어지는 것들의 중심을 잡아줬다. 갈라진 번개가 다시 모였다.

번개로 이루어진 공이 3황자를 감쌌다. 번개가 갑주를 타고 흘렀다. 순간이어야 할 번개가 머물며 황자를 연신 두들겼다.

"황자님!"

황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선명한 오러가 가득 일어났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황실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기세가 모이니 상당히 살벌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동시에 대군이 진군했다.

그때-.

3황자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 검을 타고 새빨간 오러가 불길처럼 넘실거렸다.

머물던 번개가 붉은 오러에 찢겨 흩어졌다. 3황자가 번개를 뭉개며 나왔다.

3황자는 곳곳이 타고 핏줄이 일어났지만, 오히려 웃고 있었다.

아주 즐겁다는 듯-.

"누구냐."

3황자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말을 작게 두드렸다. 투레질한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3황자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네놈 짓이군."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시선은 완벽히 끌었다.

갈라하드는 3황자를 보며 손을 털었다.

"감히 대공 전하에게 검을 겨눴는데, 내가 어찌 참을 수 있겠나? 천벌 받아 마땅하기에, 천벌을 내려준 걸세."

갈라하드를 보는 대공의 얼굴이 구겨졌다. 꼭-.

'이 새끼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얼굴이군.'

"놈!"

"감히-!"

황실 기사들이 격하게 반발했다. 푸른 오러가 차례로 일어났는데,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황족에게 마법을 퍼붓고 이죽거리다니-. 당장 목이 매달려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상대는 3황자였다.

"누가 나서라고 했지?"

3황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기사들이 황급히 오러를 삭였다.

3황자가 다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갈라하드의 목을 마구 간질였다.

3황자는 대공과 달랐다.

대공이 군림하는 절대자라면, 이놈은 피에 굶주린 맹수였다.

"훌륭하다. 내게 마법으로 이런 위력을 보이다니-. 그래, 그대가 그 갈라하드인가?"

3황자는 오히려 호의를 드러냈다. 갈라하드의 마법이 아주 적절했던 탓이었다.

"맞네, 내가 그 갈라하드일세."

갈라하드의 짤막한 대답에 3황자의 눈이 뒤틀렸다.

기세를 죽였던 기사들이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병사들의 활이 이쪽을 겨눴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배해졌지만-.

이쪽에는 고위 마물이 있었다.

"음."

대공이 발을 크게 굴렀다. 그러자 대공이 발을 딛은 곳을 중심으로 파동이 퍼지듯 힘이 퍼졌다.

순간 눈보라가 터지듯 뿌려졌다. 단순히 발을 굴렀을 뿐인데, 눈보라가 흩어지고 땅이 흔들리다니-.

그 말도 안 되는 힘에 황실 기사들이 다급히 오러를 일으켰다.

푸른 오러가 일제히 떠올랐다. 눈보라 사이로 오러가 일어나는 건, 상당한 장관이었다. 그 뒤의 병사들이 황급히 자세를 다잡았다.

정작 정면에서 마주한 3황자는 흔들리지도 않았다.

3황자는 대공을 보며 오히려 웃었다.

"하하하! 좋다! 아주 좋아! 끝내주는 약혼식이겠군!"

3황자의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지독한 호승심이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병사는 들여보내지 않는 게 좋았다.

시비가 붙어서 대공이 병사들의 머리를 뽑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었으니까.

"병사들은 여기에 두지."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공과 3황자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3황자가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유치한 도발이었다. 다만, 그렇기에 까다로웠다.

거절하면 병력에 겁을 먹은 꼴이 되니까.

"북부는 돈이 부족한 터라. 저들까지 다 먹이기 부담스럽네."

갈라하드는 둘러서 제국의 지원이 끊긴 걸 지적했다. 그에 3황자의 눈썹이 뒤틀렸다.

"음, 너 상당히 재밌군."

"재밌긴. 왕국 연합도 최소한의 병력만 두고 왔네. 설마 겁이라도 나는 건가?"

갈라하드는 3황자가 노리는 왕국 연합을 당근처럼 내밀었다. 그에 3황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기사만 붙고 나머지는 대기한다. 미개한 북부의 사정을 이해해줘야지."

3황자의 짤막한 명령에 병사들이 물러나고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병사들이 빠졌다고 한들, 황실 기사가 본체였기에 그 압박은 그대로였다.

갈라하드는 슬쩍 황녀를 확인했다. 황녀 뒤에 작게 열린 마차 사이로 내부가 언뜻 보였다. 거기에 펄럭이는 흰색이 가득했다.

'한 벌만 준비한 게 아니었군.'

흰색 사이로 퀭한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앰버르탄 백작.'

더 퀭해진 얼굴이었다. 갈라하드는 간지러운 손가락을 애써 참으며 말을 두드렸다.

말이 대공을 따라 움직였다.

초대 목록이 전부 모였다.

'시작이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작게 털었다.

그때, 대공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대공의 눈은 흉터로 가려진 터라, 뭐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일이 좋은 날 아닙니까. 좋게 가는 게 좋지요."

좋게 흘러갈 가능성이 현저히 적었지만, 그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공이 눈을 찡그리며 살벌한 입을 움직였다.

"저들을 다 먹일 정도는 된다."

'돈이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나 보군.'

"예, 압니다. 그래도 제국 놈들에게 먹이기 아깝지 않습니까."

"크흠."

대공이 크게 기침했다. 그 기침 소리가 조금 인위적이었다.

"지금 웃으신 겁니까?"

대공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하하, 농담입니다."

언뜻 보인 차르티엔에 갈라하드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

성의 한 편에 세워진 허름한 창고에 인원들이 하나씩 모였다. 각기 다른 복장에 그 행동이 자연스러웠기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창고의 내부는 컸다. 지하로 공간을 넓혀둔 까닭이었다.

서른이 넘는 이들이 모였는데, 누구도 떠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무기를 손질했다.

묘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갈라하드를 은퇴시키라니.'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갈라하드의 은퇴 팀이었으니까.

터틀은 마른침을 삼켰다. 감찰실에서 갈라하드는 유명했다. 아니, 단순히 유명한 정도가 아니었다.

'전설이지.'

갈라하드는 감찰실이 아니었지만, 업무 특성상 감찰실과 자주 얽혔다. 그로 인해 감찰실에는 갈라하드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돌았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요원은 적었다.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다만, 그를 감안해도 갈라하드의 상징성은 특별했다.

그런 갈라하드의 은퇴 팀이라니-. 감찰실 요원들이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감찰실 요원들을 이렇게 보는 건 또 처음이군.'

본래 감찰실은 요원을 대상으로 작업하기에, 그 신분을 철저히 숨겼다. 감찰실 요원끼리도 모르기 십상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마주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때, 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들어온 인물은 거대한 흑인이었다. 이번 팀을 맡은 에포트였다.

'저게 그 에포트군.'

에포트도 갈라하드 못지않게 유명했다. 특유의 맹수 같은 전투 방식 때문이었다.

"다 모였군."

에포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수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게으른 성정 탓이었다.

다만,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번은 극비 임무였다. 새어나갔을 가능성은 없었다.

"대상은 갈라하드. 시기는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자유고, 방법 상관없다. 질문 있나?"

에포트의 굵직한 목소리에 모두가 침을 삼켰다.

그때, 구석에 있는 한 놈이 손을 들었다. 꼭 당근처럼 생긴 놈이었다.

'감찰실에 저런 얼빵한 놈이 있었나?'

"각개전투인 겁니까?"

"그렇다."

"왜 그런 겁니까? 분명 임무서에는 확실하게 처리하라고 적혀 있었는데-."

에포트의 눈이 구겨졌다. 얼빵한 놈이 찔끔 놀라서 뒷걸음쳤다. 옆에 있는 못생긴 놈이 슬쩍 멀어졌다.

"계획은 놈의 영역이다."

에포트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다들 작게 끄덕일 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서를 맞춰서 사라졌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조금의 막힘도 없었다.

이곳에 모인 요원들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 와중에 삐꺽거리며 한 박자 늦게 나간 이들이 있었다.

핸섬과 제임스는 밖으로 나오고도 한참이나 더 가서야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등에 땀이 가득했다.

그 에포트라는 놈. 눈이 얼마나 살벌한지 핸섬은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보고는 뭐라 올립니까?"

제임스의 물음에 핸섬은 눈을 찡그렸다.

자밋의 지시를 따라서 잠복까지 했지만, 딱히 얻은 게 없었다.

계획이 없다는데, 무슨 보고를 올리겠나. 그렇다고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해가 뜨기 전까지 조심해라?"

핸섬을 보는 제임스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121화 아버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북부에서 열린 약혼식인데, 그 초대 목록이 화려했다.

우습게도 그중에 진정으로 약혼식을 축하해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3황자는 왕국 연합과 전쟁의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서 왔고-.

왕국 연합이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갈라하드를 데려가기 위해서 왔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약혼식이 어긋나기만을 원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은······.

'황녀지.'

갈라하드는 정면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황녀는 어디서 꺼냈는지 또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몇 벌을 챙겨온 걸까. 갈라하드는 문득 궁금해졌다.

"오랜만이다. 얼굴이 좋구나."

"예, 황녀님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나야 늘 최상이지. 황족이니까."

황녀의 눈꼬리가 슬쩍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혼인은 왕국 연합에서 거절했다."

"들었습니다. 왕국 연합이 시끄러운 탓이더군요."

"그러느냐? 거기 놈들도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어디든 다 비슷하지요."

"북부도?"

"여기는 대공이 워낙 든든하게 있는 터라 좀 괜찮습니다."

"그래? 살기 좋겠구나."

갈라하드의 눈이 잠시 구겨졌다.

"추워서 피부가 상하실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피부는 작은 티도 없던데."

"그쪽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러느냐. 최근에 나도 검을 열심히 잡았다."

황녀의 말은 의외였다. 황녀가 검을 잡았던 건, 그저 황족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살아남은 지금은 굳이 검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아드리안나에게 졌던 게 작용한 듯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아드리안나는 안될 텐데.'

갈라하드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중년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독수리처럼 생긴 사내였는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탄탄함이 느껴졌다.

'앰버르탄 백작.'

이 몸의 아비였다.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니, 나쁘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기사는 보통 마법사를 공돌이 정도로 생각했다. 마법사가 만든 마도구는 쓰지만, 마법사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앰버르탄 백작가는 명문 기사 가문이었다. 실제로 황실 기사를 꾸준히 배출했을 정도니, 그 자부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남은 작위를 물려받고 나머지 자식들은 기사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갈라하드는 앰버르탄 가문의 첫 마법사였다.

앰버르탄 백작가에 형용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갈라하드는 호적에서 파인 것보다 더한 신세였다.

만약 가문에 살생부가 있다면 그 제일 위에 갈라하드가 있을 것이다.

그런 앰버르탄 백작이 갈라하드의 약혼식에 오다니-.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선물은 마음에 드느냐?"

황녀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사람에게 리본을 묶어 두고 선물이라니-. 참으로 황녀다운 행보였다.

어이가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의 선물은 갈라하드의 마음에 들었다.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앰버르탄 백작을 응시했다.

"4황자님은 잘 지내십니까?"

앰버르탄 백작이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이내 앰버르탄 백작이 꾹꾹 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께서 이를 용납할 것 같은가?"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사나웠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식을 보는 눈은 아니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갈라하드도 아비를 보는 눈은 아니었으니까.

"용납 못 할 건 또 뭡니까. 자식 결혼식에 오겠다는데."

"네놈······."

앰버르탄 백작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황녀의 눈치를 봤다.

갈라하드를 볼 때면 늘 험한 소리를 하던 앰버르탄 백작이었다. 그런 앰버르탄 백작이 저리 순하다니-.

"아버님이 버릇이 없으시더구나."

앰버르탄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저는 3황자를 치울 겁니다."

앰버르탄 백작의 표정이 변했다. 그 얼굴에 경악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황족 시해죄가 얼마나 중죄인지 모르느냐!"

"압니다. 제가 3황자를 죽이면, 앰버르탄 백작가는 물론이고 연관된 모든 피가 마르겠죠. 삼대가 아닌 전체가-. 맞습니까?"

갈라하드의 단조로운 물음에 앰버르탄 백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앰버르탄 백작이 제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게 가문이었다. 그 가문이 통째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격렬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3황자는 소드 마스터다! 기사의 정점에 오른 인물인데, 하찮은 마법사인 네가 어찌 죽이겠다는 거냐!"

"어머, 아버님 말버릇이-."

황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괜찮네."

갈라하드는 황녀를 말렸다.

"3황자를 죽이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죠. 저도 가문에 그래도 정이 있는 터라-."

"감히 그 입에 가문을 담지 마라! 망할 놈!"

"어머, 아버님. 진짜 안 되겠네요."

황녀가 짙게 웃었다. 앰버르탄 백작이 바들바들 떨었다. 갈라하드는 한숨을 내쉬며 황녀를 뒤로 물렸다.

갈라하드는 안쪽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를 열자, 반지를 낀 손가락이 있었다.

"이건 3황자가 왕국 연합의 왕자를 죽였다는 증거입니다. 4황자라면 요긴하게 쓸 수 있겠죠."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내 그 반지를 알아봤는지 작게 탄식했다.

"증명할 수 있나?"

"황혼의 마법사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설령 증명이 된다고 한들 3황자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다."

"그렇겠죠, 아직은."

앰버르탄 백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3황자는 북부에서 대공과 왕국 연합에게 동시에 선전포고를 할 겁니다."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이미 일어난 사실을 말하듯-.

앰버르탄 백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허, 피에 눈이 먼 3황자라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럽니까?"

앰버르탄 백작은 대답 대신 눈을 찡그렸다. 앰버르탄 백작은 궁정백이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버님, 대답하셔야죠?"

화들짝 놀란 앰버르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갈라하드는 황녀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은 왜 왔지?"

"보고 싶었다."

"지랄하지 말고."

황녀의 웃음이 멈췄다. 앰버르탄 백작이 미쳤냐는 듯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황녀가 제 입술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살렸다. 그러니까 너는-."

황녀의 손가락이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나를 책임져야 한다."

황녀의 목소리는 작은 틈도 없이 단단했다. 살려줬으니 책임지라는 아주 뻔뻔한 논리였지만, 황녀는 당당했다.

'단단히 물렸군.'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나도 하고 싶다."

"뭐를 말입니까."

"약혼식."

"지랄."

황녀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갈라하드의 머리는 더없이 복잡해졌다.

"네 아비도 동의했다. 아버님?"

앰버르탄 백작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북부에서 간통은 사형일세. 불가하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황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같이하면 간통이 아니지 않느냐?"

진지하게 물었다.

갈라하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갈라하드의 얼굴에 떠오른 건 명백한 혐오였다. 반대로 황녀는 웃었다.

"농담이다."

황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똑똑.

"대공 전하께서 모두 모이시랍니다."

밖에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미련없이 일어났다.

돌아선 갈라하드를 황녀가 붙잡았다.

"어떻게 하면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내가 황제라도 될까-."

여전한 황녀에 갈라하드는 차오른 욕을 애써 삼켰다.

"내 팀원들의 이름을 기억하나?"

"모른다. 관심 없다."

"그렇겠지, 그러니 불가일세."

갈라하드는 미련 없이 자리를 나섰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황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

'많이도 모였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기며 장내를 둘러봤다.

규모가 가장 큰 건, 3황자 쪽이었다. 황실 기사를 잔뜩 대동한 3황자는 여유롭게 잔을 홀짝였다. 잔에는 붉은 액체가 가득했다.

3황자의 시선은 한쪽에 꽂혀 있었다. 거기에는 왕국 연합, 파르한스타가 있었다.

파르한스타 주변으로 왕국 연합의 기사들이 있었는데, 그 수가 3황자 못지않았다. 문제는 기사의 수가 아니었다. 그 질이었지.

왕국 연합에서 고른 정예 기사들이지만, 황실 기사랑 비교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 기사는 정예 중의 정예였으니까.

그런 두 진영 사이에 시끄러운 노인들이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런! 피가 뚝뚝 흐르는데! 이게 북부의 방식인가!"

"이렇게 먹으면 정력에 좋다는군!"

"오오-, 참 놀라운 방식이군!"

노인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그 시끄러움이 장내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완화했다.

뒤늦게 황녀와 앰버르탄 백작이 들어왔다. 황녀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갈라하드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평소보다 더 가벼운 갑옷 차림이었다.

물론, 갑옷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평소의 두꺼운 갑옷에 비해 얇고 가벼웠다.

갈라하드는 오히려 아드리안나에게 반문했다.

"자네, 표정이 안 좋군."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아드리안나가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이런 자리에 익숙한 이가 어딨겠나."

"갈라하드 대장은 익숙한 것 같습니다만."

"익숙할 리가. 여유로운 척하는 거지."

"여유로운 척······."

"여유는 무기일세. 설령 막다른 길에 몰린 상황에서도 여유를 보이면, 상대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마련이지."

"아-. 이해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슬쩍 등을 젖혔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평소 아드리안나가 워낙 곧은 자세였기에 알 수 있었다.

"등을 기대라는 건 아니었네만."

"······압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역시 훌륭한 기사였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파르한스타에게 향하는 3황자가 보였다. 파르한스타의 수염이 바들바들 떨렸다.

"오랜만이군. 파르한스타."

3황자가 파르한스타를 내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왕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독살이라지? 마침 황녀가 여기에 있군."

3황자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황녀가 있었다. 파르한스타가 따라서 황녀를 쳐다봤다.

뻔한 수작질이었다. 파르한스타는 그런 수에 넘어갈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노회한 왕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오?"

파르한스타는 황녀를 보면서 수염까지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연기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3황자가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내가 죽이지 않았다. 나는 기억력이 좋으니 확실하다."

황녀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대답했다.

"그러면 자기가 죽였다고 하겠나?"

3황자가 이죽거렸다. 그에 파르한스타가 입술을 씹었다. 파르한스타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었다.

3황자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파르한스타가 갈라하드를 본 건 찰나였는데, 그를 잡아낸 것이다.

'예리하군.'

3황자가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4황자 쪽이었나?"

3황자의 물음은 제법 합당했다.

갈라하드의 아비인 앰버르탄 백작이 4황자 쪽 인물이었다. 4황자는 왕국 연합과 동맹을 주장했으니, 갈라하드를 4황자쪽 인물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 겁쟁이에게 이런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군. 좋다, 내 아래로 들어와라."

3황자가 시원하게 제안했다. 아니, 원래 마음에 들면 백정도 아래에 두는 인물이었다.

3황자 아래에 불을 다루는 개차반 마법사가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의 사위한테 자기 아래로 들어오라니-.

'이것도 나쁘지 않군.'

새로운 선택지에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대공이 들어왔다. 대공은 등장만으로 모든 집중을 끌어왔다.

3황자는 자리로 돌아갔다.

대공이 모인 인원을 둘러봤다. 그 덩치가 워낙 컸기에 자연스레 내려보는 형태가 됐다.

문제가 발생할 요소가 전부 모였다. 그런 이들을 전부 모아두고 대공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달싹거리는 불씨들 앞에서 대공은-.

"전야제를 열겠다."

아예 기름을 부었다.

"내일 약혼식까지."

모인 이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명만 빼고-.

'전야제에는 어떤 갑주를 입어야 하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

'전야제라.'

준비를 미리 했는지, 나오자마자 화려한 불빛이 보였다.

곳곳에 있는 썩은 짚이 타올랐다. 거센 불길 앞에 사람들이 신나게 웃으며 춤췄다.

'애초에 준비할 것도 없었군.'

평소보다 더 활발한 북부일 뿐이었다. 곳곳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고함이 터졌다.

대공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

'알아서 해보라는 거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은 늘 그렇듯 기회를 준 것이다.

"재정이 좋지 않은데, 전야제라니-. 옳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북부의 얼어붙은 꽃이자 영웅인 그대와 떠오르는 북부의 영웅인 나의 약혼식 아닌가. 전야제를 열 만하지."

"그걸 본인 입으로 말씀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북부의 축제라니 흥미롭군."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그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조금 휘어져 있었다.

"아, 북부의 축제는 잘 모르시겠군요."

"하나는 알 것 같네만."

갈라하드는 아래를 가리켰다. 몸에 불을 붙인 사내들이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북부식 화형인가 싶었지만, 사내들은 웃고 있었다.

"저건 불 목욕입니다. 추위를 이겨내는데 좋습니다."

"음, 추위가 무조건 지겠군."

"불 목욕 말고도 즐길 거리가 많습니다. 불 결투, 눈 감고 머리 깨기, 도끼 피하기, 맨손으로 마물 잡기 등등-."

하나같이 살벌한 이름이었다. 올라간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연신 흔들렸다.

'잔뜩 신났군.'

툴툴거리더니 속으로는 전야제가 좋은 듯했다.

"이름만 들어도 재밌을 것 같군."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제가 알려드립니까?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역시, 맨손으로 마물 잡기입니다. 제가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턱을 치켜들었다. 음,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거 재밌겠군. 나도 마물 잘 잡는데 말이야."

"갈라하드 대장이 뛰어난 건 알지만, 제 기록을 깨는 건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푸른 눈동자가 확장되어 있었다. 잔뜩 신난 듯했다.

"그러면 제가 전야제를 안내해드립니까?"

아드리안나가 손을 내밀었다. 건틀릿을 꼈는데도 쭈뼛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못생긴 놈과 얼빵한 놈이 보였다.

'왔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미안하지만, 바빠서 먼저 가보겠네. 내일 약혼식에서 보지."

갈라하드는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겨진 아드리안나는 내민 손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역시 처음이니까, 도끼 피하기가 나았나?'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

"해가 뜰 때까지라고 그랬나."

"예! 맞습니다!"

제임스는 갈라하드를 황급히 따라붙으며 대답했다.

갈라하드의 다리가 얼마나 긴지 그 걸음이 성큼성큼이었다.

"계획이 없다고? 에포트가 왔나 보군. 번거로운 놈이 왔어. 총 몇 명이지?"

"마흔 언저리입니다!"

"마흔이라. 많이도 불렀군."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레몬 향에 제임스와 핸섬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병력 소집합니까?"

핸섬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감찰실은 요원 처리자, 청소부 등등 살벌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 감찰실에서 사십이 넘는 인원을 보냈으니, 당장 병력을 소집해야 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됐네, 셋이면 충분하지."

"······예?"

핸섬과 제임스가 동시에 반문했다.

갈라하드는 그 멍청한 얼굴들을 보며 양쪽 손가락을 튕겼다.

뒤에 있던 그림자에서 붉은 피가 가득 튀었다. 울컥-. 그림자에서 정복을 입은 요원이 튀어나왔다.

두꺼운 얼음송곳이 어깨에 박혔는데도 요원의 표정은 무심했다.

요원의 검에 갈무리된 오러가 일어났다. 은밀함이 중요한 감찰실 요원의 오러는 정제되어 있었다.

'제법이군.'

갈라하드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제법인 요원이었지만, 공간을 뚫는 얼음송곳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얼음송곳이 요원의 목을 뚫었다. 그 와중에도 요원은 갈라하드를 노렸다.

검이 갈라하드의 앞을 스쳤다.

그게 전부였다.

갈라하드는 입에 문 연초를 가벼이 털었다.

레몬 향이 비릿한 피 냄새를 밀어냈다.

무슨-. 제임스는 눈을 끔벅였다.

그 악명이 자자한 감찰실 요원을-.

'손가락 몇 번 튕기는 걸로 끝냈어?'

심지어 옷에 피조차 묻지 않았다.

그때, 갈라하드가 앞머리를 넘겼다.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경악하는 둘을 보며-.

"자, 전설이 될 시간일세."

입꼬리를 올렸다.

제임스와 핸섬은 일단 끄덕였다.

122화 사냥꾼

"정말 오랜만의 축제군."

길버튼은 도끼를 빙글 돌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데미안은 입에 뭔가를 잔뜩 넣은 상태였다.

"하나씩 먹어라. 하나씩."

열심히 씹는 데미안에 길버튼은 혀를 찼다.

"오해마이에여?"

"그래, 오랜만이지."

본래 북부는 축제를 좋아했다. 마족에 병사가 죽으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축제를 열고, 마족을 잡으면 축하하기 위하여 축제를 열었다.

축제를 사랑했던 북부였지만, 사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며 축제가 사라졌다.

마지막 축제는-.

'황태자 때였지.'

황태자가 아드리안나를 찾아왔을 때였다.

제국 놈에게 아드리안나를 준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지만, 북부의 상황도 있고 상대도 황태자였기에 의견이 나뉘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개판을 쳤고-.

'엉망이 됐지.'

"형은 어딨어요?"

"형? 대장님 말이냐."

데미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에 길버튼은 코를 긁적였다.

"너 데리고 축제 즐기라고 하던데. 필요하면 부르겠다고. 일이 많으시다더군."

"일이요?""그래, 내일이 약혼식이니까. 당연히 할 게 많겠지."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저씨는 여자 없잖아요."

길버튼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나 인기 많다."

"설마요."

"뭐? 설마? 이 꼬맹이가. 내가 검에 인생을 바쳐서 그렇지. 접근했던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냐?"

"간첩이었던 거 아니에요?"

데미안의 질문에 길버튼은 헛기침했다.

"······전부 간첩은 아니었다."

"그러면요?"

"이 꼬맹이 놈이 말끝마다 따박따박!"

"없었구나."

크흠! 버릇없는 꼬맹이-. 길버튼은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순수하게 질문하는 터라, 쥐어박기도 애매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아저씨는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그러냐?"

길버튼의 눈썹이 슬쩍 흔들렸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이 벌잖아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남자가 돈이 많으면, 인기가 많아진다고. 곧 인기 많아지실 거예요."

"······그게 더 기분 나쁘다. 새끼야."

픽-. 데미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요즘 들어 저런 웃음을 자주 지었다. 감정이 없던 예전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양쪽 입꼬리를 다 올리면 안 되냐? 왜 자꾸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거냐?"

"비웃음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거라 그랬어요."

"젠장 맞을 꼬맹이."

"농담이에요.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여자 만날 거예요."

길버튼의 눈이 다시 풀어졌다. 크흠! 길버튼은 애써 기침했다.

"오히려 제가 걱정이죠."

데미안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길버튼의 눈이 가라앉았다.

데미안도 결국 애였다. 고아에다가 연고조차 없는 아이였으니, 자기 처지를 비관할 만했다.

길버튼은 다급하게 말을 골랐다. 말재주가 부족한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신중한 탓에 데미안의 입이 먼저 열렸다.

"잘 생겨서 여자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고르지."

데미안의 진지한 고민에 길버튼의 말문이 막혔다. 이내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데미안의 얼굴이 상당히 진지했기에,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데미안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데미안은 꼬맹이인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재수 없는 꼬맹이."

그때, 한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늘이 밝아졌다. 화려한 불빛이 하늘을 가득 칠했다.

큰머리반딧불 마물의 머리는 불을 붙이면 화려하게 터졌다. 그 모습이 멋들어져서 북부에서는 축제 때 썼다.

마물 머리에 불을 붙이고 하늘로 던지면, 저리 멋지게 하늘을 채웠다.

"대장은 아드리안나님이랑 있으려나."

"아닐걸요. 형 아까 혼자 가던데."

"그러냐?"

고개를 끄덕이던 길버튼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근데 대장은 형이고 난 왜 아저씨냐?"

"형은 잘생겼고 아저씨는 못생겼잖아요."

피유우우웅-.

"······망할 꼬맹이."

폭발에서 뿌려진 화려한 빛이 길버튼의 얼굴을 칠했다.

펑!

*

퍼어엉!

폭발음에 제임스는 입술을 가득 씹었다.

달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무너진 벽, 그 아래에 고인 구정물에 불이 반사되었다.

화려하지 않은 간결한 빛이었다. 붉은 피가 튀었다. 벽에 있던 눈이 붉게 칠해졌다. 김이 피어올랐다. 피 냄새가 오물 냄새를 밀어냈다.

"큭-."

검을 든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쓰러졌다. 악명 높은 감찰실 요원이 남긴 건 단말마가 전부였다.

철퍼덕. 요원이 바닥에 엎어지며 구정물이 튀었다.

탁,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후우-. 숨을 깊게 빨아들이는 소리. 연초에 불이 붙었다. 연초의 불씨에 갈라하드의 얼굴이 보였다.

갈라하드의 얼굴에는 작은 감정도 없었다. 무표정이었다. 식당 주인이 스튜를 휘저을 때처럼-.

'이게 그 갈라하드-.'

제임스는 '갈라하드'에 대해서 귀가 따갑게 들었다. 요원 명이 갈라하드인 탓이었다.

작전과장이 가장 심했다. 작전과장은 틈만 나면 갈라하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물인지 설명했다.

그중 가장 강조하는 건, 갈라하드가 무기도 없이 수십을 죽였다는 이야기였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건 갈라하드를 선망하는 제임스라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마법사는 전투에 어울리는 직군이 아니었다. 주문을 외워야 하고 복잡한 수식도 계산해야 하므로-.

그를 해결해주는 게 마도구였다. 지팡이는 수식의 과정을 간단하게 단축했다.

그런 마도구 없이 수십을 죽였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연초를 피며 앞머리를 넘기는 갈라하드에 제임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임스는 이제 작전과장이 '표정 하나 없이' 수십을 죽인 걸 왜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마법 실력보다, 저 무표정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자네."

"······예!"

갈라하드의 지목에 제임스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마법에 불필요한 허가 너무 많군. 기사에게 펼쳤다가는 주문을 외우기 전에 목이 떨어질 걸세."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평가했다. 혹평이었지만, 제임스는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닐세. 정진하게."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가벼이 말했다. 제임스에게는 깊게 새겨졌다.

피유우우우웅!

퍼엉!

멀리서 거대한 불꽃이 터졌다. 어두웠던 공간이 환해졌다.

시체 사이의 갈라하드가 그를 올려봤다. 멀리서 웃음소리와 고함이 들렸다. 거리가 먼 탓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옷깃을 턴 갈라하드가 걸음을 옮겼다.

갈라하드는 화려한 불빛의 반대 방향으로,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핸섬과 제임스는 시선을 교환했다. 갈라하드와 달리 둘의 꼴은 엉망이었다. 피와 진흙 범벅이었다.

셋이면 충분하다는 갈라하드의 말은 거짓이었다.

셋까지 필요 없었다.

갈라하드 혼자 충분했다.

갈라하드가 그들에게 맡긴 건 하나였다.

'시체처리-.'

건물 잔해 속에 넣거나, 묻거나, 시체를 어떻게든 처리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탁. 안쪽에서 작은 불빛이 떠올랐다.

이어진 단말마가 그들을 독촉했다.

따라오라고.

둘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감찰실 요원은 다른 부서의 요원과 달랐다.

요원은 기본적으로 감정의 배제를 훈련받지만, 감찰실은 그 강도가 강했다. 같은 요원을 은퇴시키는 게 주 업무기 때문이었다.

임무에 참여한 감찰실 요원은 그저 쏘아진 화살이었다.

상대를 은퇴시키거나, 그들이 은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갈라하드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죽거나, 죽이거나.

갈라하드는 후자를 선호했다.

연초를 빨려는 순간, 구정물이 흔들렸다. 구정물을 가르며 기다란 창이 튀어나왔다. 작은 장식도 없는 철 덩어리였다. 상대의 심장을 꿰뚫겠다는 목적에 충실한-.

'이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오러를 상대할 때는 막으려고 하면 안 된다. 오러는 마법을 가른다.

갈라하드는 몸을 비틀었다. 창이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왼쪽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뒤에도 다른 놈이 있었다.

'나를 파악하고 있군.'

감찰실 놈들이 이래서 까다로웠다. 놈들은 철저히 은퇴에 맞춰진 놈들이었다.

놈들은 하나씩 던지며 탐색하고 있었다. 이쪽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알아내며 견적을 짜는 것이다.

'내 견적을 낸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며 손가락을 튕겼다.

'많이 건방져졌군.'

갈라하드의 뒤를 노리던 검이 뒤틀렸다. 그 오러가 비틀리며 빨라졌다. 검이 창을 걷어냈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불똥이 거칠게 튀었다. 창을 든 요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 눈동자에 뒤의 요원이 보였다.

뒤에 있는 요원의 손에 정확히 얼음송곳이 박혀 있었다.

"어떻게-."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창을 든 요원의 팔꿈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창이 깊게 찔렀다.

푸욱-.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창에 심장이 찔렸는데도, 검은 멈추지 않고 갈라하드를 노렸다.

'여전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창을 잡은 요원의 손을 당겼다. 서늘한 손을 타고 꺼림직한 저항감이 올라왔다. 검이 멈췄다.

요원이 창을 회수했다. 방금 동료를 찔렀는데도 아주 빠른 회복이었지만-.

사선에서는 찰나도 길었다.

탁, 창이 멈췄다. 갈라하드는 손을 놓았다. 요원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움직여 피했다.

앞뒤로 요원이 나란히 엎어졌다. 구정물이 허벅지를 적셨다.

주변은 회색 일변도였다. 그사이에 흰색의 눈과 붉은 흔적이 언뜻 자리해 있었다.

최소 서른 명이 이상이 따라오고 있을 텐데, 작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요원이 죽어도 미세한 반응조차 없었다. 그저 숨어서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갈라하드가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쏘아질 것이다.

찌릿한 긴장감이 등을 간질였다.

피유우우우웅!

퍼어엉!

'약혼식 한 번 하기 참 힘들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며-.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탁.

*

'맙소사.'

제임스는 경악에 찬 중얼거림을 뱉었다.

하나둘씩 나오던 요원들의 수가 갑자기 늘었다. 감찰실 요원들이 공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갈라하드는 요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갈라하드의 몸에도 서서히 상처가 늘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여전히 굳건했다. 대신 감찰실 요원의 시체가 쌓였다.

마법사는 기사를 이길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신념의 힘인 오러는 마법을 가르니까.

다만, 그건 갈라하드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검을 피해서 마법을 박아 넣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괴상한 마법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갈라하드의 전투법이 괴상했다. 갈라하드는 검이 닿을 수 없는 곳을 집요하게 노렸다.

마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건 전투가 아니었다.

사냥이었지.

'마법사가 기사를 사냥한다-.'

아니, 저거를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법을 쓰는 기사 아닐까?

제임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섯의 요원이 동시에 떨어졌다. 감찰실 요원은 정예였다. 그런 요원들의 검이 공중에서 뒤엉켰다.

감찰실 요원이 할 리가 없는 실수였다.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관절을 노린다-.'

갈라하드의 마법이 기사의 관절을 노렸다. 정확한 순간에 팔목이나 무릎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아무리 기사라도 모든 곳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특히 오러를 갈무리하는 감찰실 요원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갈라하드는 그 틈을 정확히 노렸다.

검이 얽힌 곳에 정확히 번개가 떨어졌다. 갈라하드의 마법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방금의 번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저건-.

'움직임을 전부 계산하고 있다.'

예측과 계산에 따른 전투였다. 갈라하드는 검을 예상하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움직임에 작은 군더더기도 없는 이유였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애초에 종자가 달랐다. 노력한다고 저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갈라하드의 전투를 보고 있으니, 뭔가 간질거렸다. 왜 제임스의 마법에 허가 많다고 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핸섬이 경악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임스도 갈라하드가 정보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작전과장이 가끔 하던 말이 있었다.

"작전과장님이 말해줬는데. 아니, 이제 님이 아니지. 작전 과장이 말했는데-."

제임스는 갈라하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은퇴시키는 업무였답니다."

"그게 감찰실이잖아?"

핸섬의 반문에 제임스는 혀를 찼다. 이렇게 멍청해서야-.

"감찰실은 요원 대상이잖습니까. 그 윗급, 과장, 팀장, 실장, 더 나아가서-."

제임스는 뒷말을 삼켰다.

"크흠 아무튼, 감찰실 실장도 은퇴시키는 그런 요원이었답니다."

제임스의 설명에 핸섬의 얼굴이 굳었다.

'감찰실도 은퇴시키는 요원이라니-.'

무슨 정보국 괴담 같지 않은가.

근데-.

"왜 네가 잘난 척이야?"

핸섬의 지적에 제임스의 얼굴이 삐쭉해졌다.

그때, 갈라하드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검이 등을 가르며 붉은 흉터가 새겨졌다. 피가 길게 뿌려졌다.

검을 휘두른 요원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목이 날아갔는데도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 지독함에 둘은 몸을 작게 떨었다.

쌓인 시체 위에서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연초의 작은 불빛이 그 얼굴을 밝혔다.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하나는 확실했다.

감찰실 요원이 약한 게 아니었다.

상대가 갈라하드였기에, 약하게 보이는 것이지-.

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치울 시체가 너무 많았다-.

*

'많이도 왔군.'

갈라하드는 눈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피로가 꽤 쌓였다. 상처도 제법 늘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감찰실 요원은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기에-.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 다시금 폭죽이 터졌다.

퍼어엉.

주변이 환해졌다. 붉은색으로 가득한 길의 끝에 익숙한 놈이 있었다.

그건 검은색의 짐승이었다. 양쪽에는 나체의 여인들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술병이 뒹굴었다.

검보다는 도끼에 가까운 특이한 형태의 검이 놈의 발아래에 있었다.

사방이 빈틈인 놈이었지만, 그건 빈틈이 아니었다.

놈의 주둥이였지.

"에포트."

에포트는 대답 대신 그르렁거렸다.

계획을 짜지 않았다. 몰린 느낌도 없었다. 애초에 갈라하드가 몰린다고 몰릴 리가 없었다. 철저히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놈은 갈라하드가 향한 곳에 정확히 있었다.

그건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놈의 지독한 본능이었다.

갈라하드를 본 에포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탄탄한 검은 근육이 꿈틀거렸다.

"오랜만이다."

짧게 인사를 건넨 놈이 음미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어서 놈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스카리옷."

도발했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굳었다.

"아, 요원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나?"

이죽거리는 에포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런, 매를 안 맞으니 다시 짐승으로 돌아갔군."

이번에는 놈의 입꼬리가 굳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 직장 동료 좋다는 게 뭔가?"

갈라하드는 연초를 물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아주 제대로 교육해주겠네."

검은 짐승이 참지 못하고 포효했다.

갈라하드는 연초에 불을 붙였다.

123화 매가 약

에포트는 짐승이었다.

에포트는 훈련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요원과 맞지 않았다.

에포트는 오로지 은퇴 작전에만 투입됐다. 그런 탓에 실적은 형편없지만, 실력은 진짜였다.

'까다로운 놈이지.'

에포트는 오로지 본능으로 움직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규칙도 법칙도 없었다.

'데미안처럼.'

갈라하드가 데미안이 싸우는 걸 처음 봤을 때, 에포트를 떠올린 이유였다. 데미안은 에포트와 비슷했다.

물론-.

'데미안이 더 뛰어나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에포트가 몸을 천천히 풀었다. 놈은 급하지 않았다. 노련한 맹수였다.

"아, 이스카리옷은 지운 이름이었나?"

유치한 도발이지만, 갈라하드에게는 제법 효과적이었다. 그 이름을 저리 나불거리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워진 이름일세. 정보국 금기라는 거 벌써 잊었나?"

"괜찮다. 공이 더 클테니."

놈이 팔을 길게 뻗었다. 뿌드득- 소리가 나며 탄력 가득한 근육이 흔들렸다.

몸을 푼 놈이 검을 들었다. 그건 푸줏간에서나 쓸 듯한 거대하고 투박한 검이었다.

"무기를 바꿨군."

"전에 쓰던 게 부러져서."

"길버튼 경이 들으면 거품 물겠군."

"길버튼?"

놈이 검으로 갈라하드를 겨눴다. 갈라하드는 허리춤을 매만졌다. 놈은 짐승이지 마족이 아니었다. 수통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수통 대신 허리 뒤에 챙겼던 금색 봉을 꺼냈다. 손에 착 감기는 금색 봉에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뭐지?"

"짐승 잡는 몽둥이일세."

놈이 입꼬리를 비틀며 자세를 낮췄다. 탄탄한 근육이 한계까지 당겨졌다.

갈라하드는 기다리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놈의 뒤에서 얼음송곳이 튀어나왔다.

공간 마법을 이용했기에 소리도 징조도 없었다. 마나에 민감한 마족이라면 반응할 수 있겠지만, 놈은 마족이 아니었다.

그런데 놈이 몸을 뒤틀었다. 얼음송곳이 스쳤다.

'공간 마법도 피할 줄은 몰랐는데.'

본능이 뛰어난 건 알았지만, 공간 마법을 이용한 것까지 피할 줄이야.

'귀찮게 됐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상한 걸 배웠군."

놈이 눈을 찡그렸다. 놈의 표정이 묘했다. 위험은 귀신같이 느끼는 놈이었다.

"본능이 도망가라고 하는가?"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구겨진 얼굴을 보니 정답인 듯했다.

'역시 감이 좋군.'

갈라하드는 슬쩍 위를 올려봤다. 달이 기울었다.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다만, 성급함은 독이었다. 여유는 무기였고.

'하나씩. 천천히.'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금색 봉이 땅을 긁었다.

오러의 서늘함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요원들이 더는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상대는 에포트 하나가 아니었다. 열 명의 요원이 주변에 있었다.

에포트와 요원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상당히 귀찮은 작업이었다.

어쩌면 위기라고 볼 수도 있었다.

뚜렷한 위기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항복할 사람은 지금 말하게."

항복을 권유했다.

둘러싸인 놈이 오히려 항복을 권유하다니-.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요원들이 피식 웃었다. 미쳤군. 자그마한 속삭임이 들렸다.

갈라하드의 제안이 농담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웃지 않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없군. 바로 시작하지. 내가 좀 바쁘다네."

갈라하드는 굳은 얼굴의 에포트를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콰앙-, 갈라하드를 중심으로 불이 길게 뿌려졌다.

신호탄이었다. 사방에서 서늘함이 엄습했다. 주변의 요원들이 갈라하드를 향해 뛰었다.

그 속에서-.

갈라하드는 에포트를 응시했다.

놈은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감이 좋군.'

갈라하드는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뒤쪽에서 단말마가 들렸다. 서늘함이 조금 옅어졌다. 챙! 검이 엉킨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놈들이 갈라하드의 견적을 냈듯, 갈라하드도 놈들의 견적을 냈다.

물론, 갈라하드의 견적은 놈들 것보다 훌륭했다.

변수는 하나였다.

창을 지르는 요원 뒤로 땅을 박차는 놈이 보였다. 거리가 순식간에 줄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놈의 어깨 바로 위에서 얼음송곳이 튀어나왔다. 징조도 없었는데도 놈은 몸을 틀었다. 얼음송곳이 스쳤다.

'잘 피하는군.'

갈라하드는 덤덤하게 감탄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 자리에 창이 꽂혔다. 요원의 경악한 얼굴이 보였다.

그때, 요원의 입이 쩍 벌어졌다. 푹-. 요원의 입이 갈라지며 투박한 검이 튀어나왔다. 뿌려지는 피보다 검이 빨랐다.

갈라하드는 한 발짝 더 물러섰다. 뒤에서 갈라하드를 노리던 오러 섞인 검이 투박한 검과 부딪혔다.

챙! 불똥이 가득 튀었다. 주변이 밝아졌다. 반으로 잘린 요원 너머에 에포트가 있었다.

에포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엉킨 검을 타고 움직였다. 꼭 살아있는 것처럼-.

'여전하군.'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검을 찌르던 에포트가 뚝-하고 멈추며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바로 옆에 있던 요원이 메꿨다. 참으로 유능한 요원이었다. 콰아아앙! 번개가 거칠게 떨어졌다.

에포트 대신 자리를 메꾼 유능한 요원이 번개에 직격당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래를 봤다.

번개 맞은 요원의 검이 목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이내 검이 툭- 하고 떨어졌다.

뚜렷한 사선의 경계였다.

긴장감에 등이 저릿했고, 정신이 가득 고양됐다.

[너는 현장 체질이야.]

애석하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다시 에포트에게 집중했다.

에포트의 움직임은 확실히 까다로웠다.

놈은 본능적으로 최적의 경로를 찾아냈다. 최선의 움직임을 행했다.

그러니까-.

'피할 수 없게 만들면 되겠군.'

깔끔한 결론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

'이게 무슨-.'

제임스는 눈을 끔벅였다.

요원의 전투는 화려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처절했다.

서늘한 검 소리와 살이 찢기는 소리,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기합이나 비명 같은 건 없었다.

오죽하면 갈라하드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잘 들릴 정도였다.

갈라하드가 연달아 손가락을 튕겼다. 연신 얼음송곳이 쏘아졌다. 에포트는 가벼이 피하지만, 요원들은 좀처럼 피하지 못했다.

"기사를 상대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군."

핸섬이 경악에 찬 중얼거림을 뱉었다.

갈라하드는 요원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에포트를 견제했다. 얼음송곳이 빠르게 쏘아졌다.

어두운 공간이었다. 투명한 얼음송곳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에포트는 날아오는 얼음송곳을 공중에서 피했다. 검술보다는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저게 인간이 맞나?"

핸섬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 경악이 자리했다.

얼음송곳을 가벼이 피한 에포트가 요원 사이를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투박한 검이 갈라하드의 뒤를 노렸다.

탁.

갈라하드의 뒤로 투명한 방호벽이 떠올랐다. 투박한 검이 방호벽을 긁었다. 오러가 없는데도 방호벽이 부서졌다.

투박한 검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갈라하드의 등이 베였다. 그 순간 갈라하드가 피했기에, 흉터는 깊지 않았다.

붉은 피가 튀었다. 갈라하드는 피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공중에서 피를 타고 불길이 거칠게 타올랐다.

에포트는 이미 뒤로 물러난 뒤였다. 에포트는 자세를 숙이고 갈라하드의 주변을 돌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다. 갈라하드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요원들이 쓰러졌다. 에포트는 침착했다. 흥분하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이제껏 물러난 적 없던 갈라하드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도와야겠다!"

핸섬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때, 제임스의 눈에 뭔가 보였다.

요원들에 둘러싸여 연신 후퇴하는 갈라하드의 아래에 선이 있었다. 금색 봉의 끝이 그린 선이었다.

그 선이 일정했다. 마치 일부러 그린 것처럼-.

"자··· 잠깐."

"뭐냐!"

제임스는 갈라하드의 아래를 가리켰다.

그 선이 마치-.

'······마법진?'

제임스의 눈이 커졌다. 제임스는 황급히 다시 확인했다.

마법진이 맞았다.

'이 상황에서 마법진을 그렸다고?'

열에 달하는 요원과 에포트와 교전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진을 그렸다니-.

그러려면 저 후퇴까지 계산되어야 했다.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니, 가능하면 안 됐다.

그때,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내려쳤다.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순간 에포트가 뒤로 뛰었다. 그 속도가 달려들 때보다 배는 빨랐다.

그때-.

"이것도 피해 보게."

갈라하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래의 마법진이 거친 빛을 뿜어댔다.

마나의 거대한 움직임에 제임스는 입을 쩍 벌렸다.

갈라하드의 손가락에서 작은 불씨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작은 불씨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떨어졌다.

그 미약한 불씨가 마법진에 떨어지자-.

순식간에 거친 불이 타올랐다. 마법진을 타고 거센 불이 가득 일어났다. 마치 기름에 불씨를 던진 것처럼-.

순식간에 퍼진 불이 공간을 가득 잠식했다.

'지독하다.'

떨어져 있는 제임스에게도 열기가 전해질 정도로 지독한 불이었다.

이런 거센 불이라니-. 마나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요원들이 다급하게 오러를 일으켰다. 그 정제된 오러가 불을 밀어냈다.

오러는 마법을 갈랐다. 그건 상식이었다. 다만, 지금 펼쳐진 불은 단편적인 게 아니었다. 영역을 가득 채운 불길이었다.

오러로 밀어내며 버티는 게 전부였다.

다만, 감찰실의 요원들인데, 오러가 약한 느낌이 들었다.

"오러의 절제가 오히려 독이 됐군."

핸섬의 설명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실 요원의 오러는 암습이나 암살에 최적화 되어 있었다. 그 대신-.

'넓은 공격에 약하다.'

제임스의 눈이 커졌다.

감찰실 요원들의 특성을 정확히 꿰뚫은 수였다.

백번 양보해서 그 약점을 파악한 건 그럴수 있었다. 다만, 그를 행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오러를 압박할 정도의 범위 마법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거친 불길의 중심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이제 좀 따뜻하군."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빙글 돌리며 여유롭게 웃었다.

요원들 사이로 뭔가 쏘아졌다. 에포트였다. 갈라하드를 보는 에포트의 눈이 낮게 빛났다.

범위 마법을 펼친 갈라하드에게서 기회를 본 듯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이런 마법을 펼친 상태에서 또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탁.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에포트 아래에서 불이 거칠게 터졌다.

에포트는 몸을 웅크렸다. 살짝만 어긋났어도 폭발에 먹혔을 것인데, 에포트의 움직임은 절묘했다.

오히려 폭발의 반동을 이용했다.

탁.

불길이 뾰족하게 일어났다. 불로 만들어진 창이 쏘아졌다. 에포트의 투박한 검이 빗겨냈다. 공중에서 저런 움직임이라니-.

기사보다는 맹수나 짐승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저게 무슨······."

핸섬이 경악할 정도로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에포트는 불길 속에서도 길을 찾아냈다. 본능을 따라서 움직였다.

이내 에포트는 갈라하드 앞에 도달했다.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그 모습에 에포트는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인 놈이 자신과 근접전을 하겠다는 건가-.

'내 승리다.'

에포트는 가득 웃었다.

그때, 눈이 마주친 갈라하드가 마주 웃었다. 그 웃음이 에포트보다 더 짙었다.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다. 당장 뒤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평소였다면 에포트는 본능을 따랐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마법사인 놈과 정면에 마주한 상황이었다.

갈라하드가 뛰어난 건 알지만, 그래봤자 마법사였다.

자신이 마법사한테 근접전에서 밀릴 리 없지 않은가. 에포트는 본능을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때-.

탁. 에포트의 등에 서늘함이 엄습했다. 에포트는 황급히 허리를 비틀었다. 오른쪽 허리를 불로 된 화살이 스쳤다.

순간 금색 봉이 짓쳐 들었다. 확실히 마법사치고 뛰어난 속도였지만-.

'고작 그 정도다.'

에포트는 금색 봉과 놈의 손까지 한 번에 자를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때, 뒤에서 다시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 위치가 너무 절묘한 터라, 에포트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막지 못한 금색 봉이 에포트의 가슴을 두드렸다.

쿵, 금색 봉에 실린 힘이 제법이었다. 에포트의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놈-!"

마법사한테 봉으로 맞다니-. 에포트의 눈이 뒤집혔다.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다시 서늘함이 느껴졌다.

전보다 더 강렬했다.

이건 피해야 했다.

에포트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자 복부에서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금색 봉이었다. 금색 봉이 정확히 에포트의 복부를 두드렸다.

이상했다.

에포트는 분명 뒤의 공격을 피하려고 움직였다. 그런데 왜 금색 봉이 여기에-.

'이런-.'

에포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 움직임을 계산했다.'

갈라하드가 에포트의 본능까지 계산했음을-.

아니, 단순한 계산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에포트의 움직임을 유도했다.

지독한···.

"말하지 않았나. 짐승에게는 매가 약이라고."

담담한 갈라하드에 에포트는 본능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갈라하드는 에포트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뒤늦게 깨달은 에포트는-.

"항복 제안, 아직 유효한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라."

갈라하드가 마주 웃었다.

"일단, 좀 맞게."

정중한 목소리와 달리,

금색 봉은 무자비하게 다가왔다.

****

'요원 이름은 정반대의 느낌으로 지어준다-.'

톰은 방금 자밋이 알려준 이야기를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다들 이름이 이상했다. 그 뛰어난 미인이 펌킨이라는 것도, 핸섬도-.

"확실히 효과적이겠군요."

"원래 간단한 게 효과적인 법이니까."

자밋의 대답에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자밋은 무슨 뜻입니까?"

퍼스트나 펌킨, 핸섬 같은 이름은 뜻을 대충 알 것 같은데, 자밋은 좀처럼 감이 안 왔다.

"그냥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 지은 건데?"

자밋의 당당한 대답에 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만, 당황은 찰나였다.

"역시 어쩐지 입에 착 감겼습니다."

톰의 재빠른 칭찬에 자밋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자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자료를 정리하던 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대장님의 요원 명은 뭡니까?"

자밋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까닥거리던 다리가 멈췄다.

톰은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톰은 황급히 사과했다.

자밋은 금세 예의 옅은 미소로 돌아왔다.

"아니, 충분히 궁금할 만하지. 갈라하드는 자기 요원 명을 두 개 다 싫어해서-."

'두 개-?'

톰은 그 미묘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요원 명이 두 개나 있다는 건가? 역시 대장이었다. 비범했다.

"뭐,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알고 있어야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기니까."

고개를 가벼이 끄덕인 자밋이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지해진 자밋에 톰은 마른 침을 삼켰다.

중요한 비밀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런 건 질색이었다. 톰은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일에 필요하다니 애써 참았다.

"갈라하드의 요원 명은 두 개야. 하나는 전 국장이 지어준 건데, 전 국장은······. 음. 아무튼, 이제는 금지된 이름이야. 이스카리옷이라고."

"이스카리옷?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몰라. 내가 지어준 건 두 번째라서."

"아, 그렇군요."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국장이랑 연관된 탓에 첫 번째 이름이 금지됐어. 그래서 내가 새로운 요원 명을 지어줬지. 그건······."

거침없이 말하던 자밋이 입을 멈췄다. 옅은 미소가 깨지며,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자밋이-.

"해피야."

애써 웃었다.

'해피라니-. 꼭 개 이름 같네.'

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124화 왕을 죽여라

'이게 무슨-.'

적나라한 모습에 핸섬은 말을 잃었다.

에포트는 강자였다. 대인원이 투입되는 작전을 담당한 게 그를 증명했다.

그런 에포트가-.

'두들겨 맞는군.'

갈라하드가 엎어진 에포트를 향해 금색 봉을 연신 휘둘렀다. 살벌한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에포트가 몸을 뒤틀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갈라하드는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금색 봉을 휘둘렀다.

더 무서운 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면서도 갈라하드는 무표정이라는 거였다.

그저 해야 하는 일처럼-.

적나라한 폭력에 핸섬은 입을 쩍 벌렸다. 에포트는 그저 납작 엎드려서 몸을 둥그렇게 마는 게 전부였다.

일정한 리듬마저 느껴지는 무자비한 폭력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항복! 진짜 항복!"

에포트가 순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제야 금색 봉이 멈췄다.

갈라하드가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겼다. 특유의 옅은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역시 자네는 손맛이 좋군."

갈라하드의 가벼운 평가에 핸섬과 제임스가 몸을 떨었다.

갈라하드가 금색 봉으로 에포트를 가리켰다.

"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네. 첫 번째는 새로 만든 대륙 정보국에 들어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첫 번째로 하겠다."

"역시 감이 좋군. 나도 첫 번째를 추천하네. 봉급은 전과 같을 걸세. 대신 정보국처럼 임무로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인가?"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아, 그랬지."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빙글 돌리며 웃었다. 에포트가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새로 만든 정보국이라니?"

"하나 만들었네."

"오, 축하한다."

"고맙네. 자네도 이직 축하하네."

에포트가 거칠게 기침했다. 그 사이로 이빨이 후두둑 떨어졌다. 에포트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이런, 이 꽉 깨물라고 하지 않았나."

에포트가 슬쩍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정말 임무를 안 해도 되나?"

"그래, 아, 본부만 잘 지키면 되네. 나머지는 자네 자유고."

"더할 나위 없이 좋군."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네. 자, 그러면 다시 가지."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그에 에포트의 눈이 씰룩였다.

"······끝난 거 아니었나?"

에포트의 반문에 갈라하드가 가벼이 혀를 찼다.

"내가 자네를 모르겠나. 아직 부족하지?"

"이 개새끼-."

에포트가 주먹을 황급히 휘둘렀지만, 그보다 금색 봉이 먼저 에포트의 얼굴을 두드렸다.

"묽은 스튜만 먹기 싫으면 이 꽉 깨물게나."

친절한 조언에 에포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핸섬과 제임스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절대 까불지 말죠.'

'당연한 소리를.'

둘은 충성을 굳게 다짐했다.

아주 튼튼한 다짐이었다.

*

'은퇴 팀은 끝났고.'

갈라하드는 저린 손을 털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조금 까다로웠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에 감찰실은 갈라하드가 정보국에 있을 때, 잡던 놈들이었다.

에포트가 좀 까다로웠지만, 결국 그 정도였다.

'데미안의 교육을 같이 맡겨야겠군.'

둘은 성질이 비슷하니, 제법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에포트는 본부의 경비로 쓸 생각이었다. 에포트의 성능은 확실했으니까.

도망갈 우려는 없었다. 사십의 요원들을 끌고 실패한 놈이었다. 돌아가면 국장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었다.

에포트는 본래 임무에 시큰둥한 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임무를 받아서 움직이는 거였다.

놈에게 한 곳에서 가만히 지키기만 하라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놈의 습성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회유였다.

회유는 갈라하드의 장기였다.

"정보국 상황은 어떤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물었다. 에포트가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어우어하댜."

"뭐라고 하는 건가."

"어쑤썬하다."

"어수선하다고? 자네, 발음이 상당히 안 좋군."

에포트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그 굵은 입술 사이로 휑한 이가 보였다.

"그러니까 이 꽉 깨물라고 했잖나."

갈라하드가 혀를 차자, 에포트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 근육이 꿈틀거렸다.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잡자, 에포트가 활짝 웃었다.

'역시 몽둥이가 약이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혀를 찼다. 그 뒤로 핸섬과 제임스가 바삐 움직였다.

에포트가 넘어왔지만, 남은 요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감찰실 요원들은 회유가 가능한 놈들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도 그를 알기에 놈들을 회유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에포트가 특이한 거지.'

시선이 마주친 에포트가 더 활짝 웃었다. 이가 듬성듬성 빠져 있어 웃음이 상당히 순박했다.

약혼식 전까지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무사히 끝냈다. 남은 두 개에 비하면 가장 쉬운 편이었다.

'다음은······'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3황자군.'

3황자가 약혼식에 참여한 이유는 명료했다.

'왕국 연합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서.'

3황자가 원하는 건 전쟁이었다. 놈은 어떻게든 왕국 연합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단순히 왕국 연합뿐만이 아닐 것이다.

'북부도 노리겠지.'

마석 덕분에 최근에는 왕국 연합보다 북부의 가치가 더 올라갔다.

지금 상황에서 놈에게 북부와 왕국 연합이라는 두 가지 치즈를 내밀면 뭐를 택할까.

'북부를 택하겠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피 냄새를 밀어냈다.

갈라하드가 놈에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3황자가 대공과 왕국 연합을 동시에 도발한다.'

3황자가 그런 실책을 저지른다면, 그 입지가 낮아질 것이다. 거기에 손가락과 반지를 주면, 4황자가 3황자를 처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3황자가 그런 짓을 할 멍청한 놈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를 유도해야 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 우뚝 솟은 마탑이 보였다.

미끼는 이미 던져졌다.

갈라하드는 놈이 물 것을 장담했다.

3황자의 인내심은 깊지 않았다. 아까 도발이 실패했으니, 내일까지 안 기다릴 것이다.

피유우우우웅-.

퍼어엉!

화려한 불빛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마무리하고 본부로 가 있게나."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했다. 그에 핸섬과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짧고 할 일은 많았다.

약혼식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갈라하드는 옷깃을 털고 걸음을 옮겼다.

****

"이게 정말이냐?"

3황자는 손에 들린 보고서를 보며 잔뜩 올라간 목소리로 물었다.

"예, 방금 정보국에서 올라온 정보입니다."

"정보국이라. 그래, 여기도 지부가 있다고 했었지."

"예,"

3황자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확실히 오는 길에 이상한 게 보이긴 했다. 너무 투박하여 그저 괴상한 탑인줄 알았는데-.

'불법 마탑이었군.'

3황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본래 목적은 왕국 연합이었다. 그런데 왕국 연합이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그에 다른 방법을 구상 중이었는데-.

'여기서 대공이 틈을 보이는군.'

대공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협약이 대공의 힘을 증명했다.

협약은 제국에 위협이 될 정도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횡재가 있나.'

북부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중이었다. 왕국 연합보다는 북부가 더 먹음직했다.

불법 마탑이 대공의 성에 떡하니 있다는 건 의미가 상당히 컸다. 제국이 가장 엄하게 다스리는 게 마탑이었으니까.

다만-.

'살짝 약한데.'

3황자의 눈이 가득 번들거렸다. 이 미개한 놈들을 쓸어버릴 기회가 바로 앞에 온 상황이었다.

이걸 어떻게 참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 놈이 있지.'

명분은 하나 더 있었다. 제국이 정해준 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문인 갈라하드였다.

'약혼식 전에 놈이 죽는다면?'

여기는 대공의 성이었다. 충분히 대공의 짓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 불법 마탑을 엮는다면-.

'깔끔하군.'

정말 깔끔했다. 마치 누가 준비라도 해준 것처럼-.

3황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불법 마탑을 지은 게 놈이라고?"

"예, 갈라하드라는 놈이 지은 거랍니다."

3황자는 잠시 고민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갈라하드에게 사주하여 마탑을 짓고, 독식하려고 갈라하드를 처리했다-로 꾸며야겠군.'

이 정도면 충분할 게 분명했다.

핵심은 간단했다.

'갈라하드가 죽어야 한다.'

갈라하드가 죽으면, 나머지 것들은 충분히 꾸밀 수 있었다.

"갈라하드를 데려와라."

황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일이 잘못돼도, 딱히 문제는 없었다.

자신은 3황자였으니까. 지고한 황족에게 이 정도는 사소했다.

"그렇지?"

3황자는 아래를 보며 웃었다. 거기에는 묶인 죄수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3황자는 그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검을 타고 느껴지는 두근거림에 3황자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박동을 만끽하던 황자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누가 정리했는지. 참 깔끔하군-.'

정보국에서 올렸다는 보고서가 상당히 깔끔했다.

그때, 방을 나서던 황실 기사들이 우뚝 멈췄다. 황실 기사들이 고장이라도 난 듯 우뚝 멈춰서 3황자를 돌아봤다.

그 답답한 모습에 3황자가 눈을 찡그렸다. 검에 피를 더 먹이려는 순간-.

"잠깐만 비켜주겠나? 용무가 있어서 말일세. 아, 고맙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실 기사들이 어정쩡하게 물러났다. 그들 사이로 등장한 인물에 3황자는 황실 기사가 멈춘 이유를 깨달았다.

거기에는-.

"아, 딱 맞춰서 온 것 같군."

갈라하드가 활짝 웃고 있었다. 놈의 꼴은 엉망이었다.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놈은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밌네."

3황자의 입꼬리가 가득 비틀렸다.

"나도 무척 재밌다네. 아, 좀 앉아도 되겠나? 고맙군."

3황자가 허락하기도 전에 이미 앉은 놈이 감사를 표했다.

"차 한 잔만 주겠나? 시원한 걸로."

놈이 뒤에 선 황실 기사에게 손짓했다.

황실 기사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는 미친놈이라니!

3황자는 진심으로 놈이 마음에 들었다. 3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가득 구겨진 황실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그래, 왜 왔지?"

3황자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날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내가 오면 서로 시간도 아낄 수 있어서 좋지. 내가 제법 바쁜 몸이라서."

갈라하드가 옷깃을 털며 대답했다. 그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뭔가 있군. 3황자는 슬쩍 끄덕였다.

"맞다. 널 찾고 있었다. 내가 왜 찾았는지 그 이유는 아나?"

"알지. 남색이 취향은 아닐 것이고, 황족인 그대가 내게 예법을 배울 리도 없으니, 내 목을 노리는 거 아니겠나?"

"똑똑하군. 맞다, 네 목이 필요하다."

"하나밖에 없어서 주는 건 좀 곤란하군. 정중히 거절하겠네."

3황자가 크게 웃었다. 황실 기사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때, 3황자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 눈동자가 가득 번들거렸다.

"허락이 필요할 것 같나?"

3황자가 검으로 갈라하드를 겨눴다. 3황자의 검은 손잡이부터 검날까지 전부 붉었다.

"그런가?"

갈라하드는 가벼이 웃었다. 그에 3황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대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있나?"

"그냥 말하면 재미없지 않나? 머리를 좀 써보게."

생전 처음 듣는 모욕에 3황자의 눈이 커졌다. 신기했다. 이렇게 미친놈이 있다니-.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미안하지만, 지극히 정상일세. 아니, 오히려 너무 뛰어나서 문제지. 생각을 끊을 수 없거든."

3황자는 눈을 찡그렸다. 그저 머리가 이상한 놈이었나-.

"자, 우선 그대가 나를 죽이려는 이유부터 짚어보지. 제국이 북부와 전쟁할 명분을 위해서겠지. 맞나?"

3황자는 가만히 끄덕였다.

"나를 죽이면 전쟁을 열 수 있을 것 같나? 내 목숨이 상당히 귀하지만, 그런 용도로는 좀 부족할 걸세."

"불법 마탑도 있다."

"그래, 불법 마탑! 아주 지엄한 범죄지. 그런데 정말 불법 마탑인가?"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3황자의 눈이 구겨졌다.

"북부에는 허가 받은 마탑이 없다. 괴상한 소리를 하는군."

"마탑의 허가는 어디서 내리지?"

"의회에서 내린다."

"그래, 의회에 물어봤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3황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이야기를 들었다. 물어볼 시간이 어딨겠나.

"들은 적 없으니까 불법 마탑이 맞다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말아주게."

3황자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불법 마탑이 아니다?"

"어떨 거 같나?"

"그저 살려고 발악하는 놈 같군."

3황자는 슬쩍 검을 밀었다. 검이 놈의 목을 살짝 찔렀다. 검면을 타고 붉은 피가 방울져서 떨어졌다.

목에 검을 겨누는 건, 엄청난 압박이었다. 심지어 검을 든 이가 3황자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놈은 작은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살려고 발악하는 놈이라면 여기에 왔겠나? 저기 대공의 뒤에 숨었겠지. 꽤 안락하다네."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다. 3황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걸세. 당장 내가 죽는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네. 불법 마탑도 마찬가지고. 그저 북부를 더 압박할 수단이지."

3황자는 대답 대신 검을 더욱 밀어넣었다.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3황자의 검은 고통의 가시라 불리는 마검이었다. 살짝만 찔려도 그 고통이 엄청날 것인데, 놈은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진짜 미친놈이었다.

"그래서-."

"이런 길버튼이었군."

길버튼이 뭐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어감이 상당히 불쾌했다. 3황자의 눈이 가득 구겨지려는 찰나-.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걸세. 확실히 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놈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어떻게?"

갈라하드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 웃음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제국이 왜 수비적인가? 북부와 왕국 연합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나머지 하나는 진작 먹혔을 걸세."

맞는 말이었다. 제국 의회가 수비적인 건, 북부와 왕국 연합이 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북부와 왕국 연합의 사이를 완전히 틀어버리는 걸세."

만약 둘 사이가 틀어져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의회도 움직이겠지.'

3황자의 눈이 커졌다.

다만-.

"어떻게?"

"이런 다 떠 먹여줘야 하는군."

놈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황실 기사였어도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3황자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두근거렸다. 저 미친놈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됐다.

"간단하네. 지금 당장 왕국 연합의 왕을 죽이게."

갈라하드의 말은 간단했다. 3황자는 눈을 찡그렸다. 고작 왕을 죽이는 걸로-.

"그리고 대공에게 시비를 걸게. 대공이 참을 수 없도록. 그러면 대공이 황실 기사의 머리를 전부 뽑겠지. 자네만 제외하고. 협약이니까."

3황자는 고개를 다시금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다 죽이고 나만 살아서 대공의 짓인 것처럼 퍼뜨려라?"

"정답일세."

가벼이 끄덕이는 갈라하드에 3황자의 눈썹이 굳었다.

왕국 연합 쪽을 전부 죽이고, 대공에게 시비를 걸어서 이쪽의 병력도 처리한다.

상당히 적나라하고 붉은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군."

3황자의 마음에 쏙 드는 계획이었다. 전에 있던 계획들이 쓰레기로 보일 정도로-.

갈라하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 대공이 눈치챌 수 있으니, 병력을 나누게. 어차피 왕국 연합의 기사 수준은 말할 것도 없지 않나? 황실 기사 한두 명만 보내도 늙은 왕의 목을 따기에 충분할 걸세."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마음에 드는군."

진심이었다. 후에 처리해야 한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결혼할 여인이 있는 몸일세. 아, 차는 아직 멀었나?"

재촉에 3황자는 끌끌 웃었다.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황실 기사가 찻잔을 갈라하드에게 내밀었다. 황실 기사가 차를 직접 내리다니. 상당히 꼴이 우스웠다.

그러자 갈라하드는-.

"이런, 식었잖나."

찻잔을 그대로 엎었다.

가득 구겨진 황실 기사의 얼굴에-.

3황자는 배까지 잡고 웃었다.

****

"진짜 가만히 좀 있으십쇼."

"답답한데."

"왜 갑자기 투정입니까."

"답답하니까. 펌킨, 자네는 작아서 안 답답한 거지."

"작기는 뭐가 작습니까!!!"

"아니, 왜 갑자기 소리를······."

연신 투덕거리는 기사들에 왕국 연합의 왕, 파르한스타는 눈을 찡그렸다.

저 얼빵한 놈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케르켁의 말이었다.

별과 같은 지혜를 지닌 케르켁이었다. 케르켁은 파르한스타를 위해 안배한 게 분명했다.

'케르켁이여-.'

파르한스타는 야만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초원과 같은 평화를 느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펌킨, 방귀 뀌었나?"

"지랄하지 마십쇼. 진짜."

······지긋한 평화를 느꼈다.

125화 동업

원래 계획은 간단할수록 좋았다. 그래야 변수가 나올 확률이 낮고, 변수가 나와도 대처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번 계획도 간단했다. 목표는 3황자가 대공과 왕국 연합, 양쪽에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갈라하드는 3황자에게 북부와 왕국 연합의 갈등 조성을 제안했다.

대공에 관한 소문은 좋지 않았다. 사람 머리를 뽑고 마물을 씹어먹는 대공이었다. 소문이 좋을 리가 없었다.

폭군 중의 폭군으로 소문난 대공의 성에서 주최된 약혼식이었다.

초대받은 왕국 연합 측이 전부 죽고, 3황자의 기사들이 대공에게 죽는다면, 대공의 짓으로 꾸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왕국 연합에 도발이 먹히지 않았던 3황자에게 아주 적절한 미끼였다.

무엇보다-.

'실패에 관한 부담이 없겠지.'

3황자는 황족이었다. 대공은 3황자를 죽일 수 없었다. 황태자를 돌려보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실패해봤자 3황자는 황실 기사를 잃는 게 전부였다. 그것조차 전쟁을 위한 빌미로 쓸 것이다.

3황자에게는 그저 주사위 놀이였다. 낮은 수가 나오면 운수가 없다며 투덜거리고 다시 던지는 그런 놀이-.

'왕자의 손가락이 있는지 모르니까.'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3황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하며, 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혀로 핥았다.

"그래서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목소리에 흥분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만약 그대가 왕국 연합 측을 공격했다는 걸 알면, 대공은 의도대로 안 움직일 걸세."

"안 움직이면?"

3황자가 짙게 웃었다. 서늘한 붉은 검이 옆의 황실 기사를 가리켰다.

"황실 기사의 목을 직접 뽑을 생각인가? 글쎄······. 황실에 자네처럼 거친 사내들만 있나? 반전쟁파에서 의문을 제기할 충분할 근거가 될 걸세."

갈라하드의 차분한 설명에 3황자의 웃음이 굳었다. 이내 짜증이 떠올랐다.

"겁쟁이 새끼들."

퉤-. 3황자가 침을 뱉었다. 그 붉은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웃기지 않나? 피로 세워진 게 제국인데, 이제는 피를 꺼리는 게?"

맞는 말이었다. 제국의 강대함은 땀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피는 한 번이라도 마시면, 죽을 때까지 마실 수밖에 없는 것도 모르고-. 그렇지 않나?"

3황자가 호의 가득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갈라하드가 대답하지 않자, 3황자는 피식 웃었다.

"내가 왜 갑자기 찾아온 너를 의심하지 않는 줄 아느냐?"

"내 계획이 타당해서."

3황자가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너에게는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짙은 피 냄새가 나. 아주 향긋한."

3황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대업은 피 냄새가 자욱한 이들이 해야지. 자, 한잔해라. 아주 좋은 술이다."

3황자가 화려한 그림이 양각된 잔을 내밀었다. 잔에는 붉은 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냄새가 향긋했다. 군침이 돌 정도로 끝내주는 냄새였지만-.

"나는 이걸 마시겠네."

갈라하드는 수통을 꺼냈다.

"오, 좋은 술이라도 있나?"

"아주 좋은 술이지."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으며 수통의 뚜껑을 땄다. 마족의 피 특유의 끔찍한 향기가 가득 퍼졌다.

3황자의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혐오가 가득 떠올랐다. 꼭 오물 먹는 놈을 보는 표정이었다.

"끔찍하군."

적나라한 평가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수통을 홀짝였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끔찍한 놈이었군."

3황자는 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주 좋구나. 넷을 보내서 왕국 연합 쪽 정리해라. 깔끔하게."

3황자가 황실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갈라하드는 둘 정도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애초에 상대는 왕국 연합이었다. 굳이 넷이나 보낼 필요는 없었다.

3황자의 번들거리는 눈이 호선을 그렸다.

"혹시 모르니까."

3황자의 조소에 갈라하드는 입술을 씹었다.

갈라하드의 조언을 무시하고 넷을 보내다니, 확실히 감이 좋은 놈이었다.

다만-.

'여섯은 보낼 줄 알았는데.'

3황자가 의외로 사람을 잘 믿는 듯했다. 아니면 갈라하드가 진짜로 마음에 들었거나. 생글생글 웃는 걸 보니 후자인 것 같았다.

'황족에게 인기가 많군.'

갈라하드는 여섯을 가정하고 배치했다. 넷 정도면 퍼스트로 충분했다.

황실 기사는 분명 정예 기사들이었지만, 퍼스트는 최정예였다. 더불어 황실 기사와 그 분야가 달랐다.

"그래, 대공을 도발할 방법은 있나?"

"확실한 걸로 준비해뒀네."

"오, 뭐지?"

"비밀일세."

꽤 건방진 대답이었지만-.

"그래, 선물을 미리 까면 재미없지."

3황자의 웃음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재미가 없다니-. 확실히 광인이었다.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거나.

'둘 다겠군.'

갈라하드는 3황자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3황자였다면 어떻게 할까.

'나를 처리하겠지.'

이유는 단순했다. 갈라하드를 처리하는 게 더 깔끔하고 확실하니까.

어쩌면 대공 도발하기 위해 갈라하드의 머리를 날릴 수도 있었다.

"잘 선택했네. 제국민은 제국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돌아갈 때 같이 가지. 내 마력차가 아주 끝내주니까."

3황자가 서늘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내 머리를 날릴 생각이군.'

하여튼 제국 놈은 이래서 문제였다. 대업을 같이 행하자면서, 뒤로는 처리할 계획을 세우는 앞과 뒤가 아주 다른 놈들이었다.

차라리 무식한 길버튼이 낫지-.

"든든하군."

갈라하드는 속마음을 숨기며 수통을 마주 내밀었다.

잔과 수통이 작은 소리를 냈다.

둘은 각자의 수통과 잔을 한 번에 비웠다.

그때, 문이 열리고 황실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왕국 연합의 병력이 확인됐습니다. 전과 마찬가지입니다."

뒤로 아까 보냈던 황실 기사들이 있었다. 참으로 의심이 깊은 놈이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3황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예, 뭐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이자, 3황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사내라면 그릇이 커야지. 자, 그러면 큰일을 하러 가볼까. 너희 넷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그제야 3황자는 검을 뽑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왕국 연합이 확인되었으니, 일이 꼬여도 무조건 이득을 볼 것이라고 계산할 만했다.

갈라하드도 마주 웃었다.

애석하지만, 갈라하드도 제국 놈이었다.

****

'음······.'

대공은 침음성을 흘렸다.

용암이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잠은커녕 눈도 감기지 않았다.

'아드리안나가 약혼이라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솟구쳤다. 마물에게 물려도 멀쩡한 대공인데, 속이 가득 뒤틀렸다.

'아드리안나가 선택한 것이다.'

아드리안나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약혼식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 그나마 놈이 낫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지만, 다른 시커먼 놈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갈라하드가 마음에 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놈이 제국의 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귀족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제국의 귀족은 대공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그렇기에 좀처럼 내키지 않았는데-.

'야만인이었다고.'

어쩐지 행동에 거침이 없더라니. 제국의 귀족에서 야만인이라니까 괜히 마음이 흔들렸다.

약혼식도 이렇게 속이 뒤틀리는데, 결혼식은-.

[장인어른.]

그때, 급하게 병사가 들어왔다. 병사의 얼굴이 미묘했다.

"갈라하드 대장이 찾아왔습니다."

약혼식 전에 인사하려고 온 듯했다. 귀족답게 예의 차리는 건 제대로였다.

"그게······ 3황자랑 같이 왔습니다. 황실 기사들도 있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에 대공이 손을 흔들자, 병사가 문을 열었다.

거기에 놈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3황자가 있었다. 그 뒤에 황실 기사들까지-.

'습격이라도 하러 온 모습이군.'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놈의 행색이 상당히 엉망이었다. 전야제를 제대로 즐긴 듯했다.

"대공 전하."

놈이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자-."

갈라하드가 앞으로 나서며 주의를 끌었다. 3황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모습이 꼭-.

'대리인이라도 된 것 같군.'

조금 있으면 약혼식을 치를 놈이었다. 그런 놈이 왜 갑자기 3황자의 대리인 행세를 하는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놈을 보고 있으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3황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3황자가 왕국 연합의 왕을 노립니다. 왕국 연합의 왕을 죽인 뒤에, 왕국 연합과 북부를 이간질할 속셈입니다. 이미 황실 기사 넷을 보냈습니다!"

담담하게 고발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무엇보다 저게 사실이라면-.

'왜 같이 왔지?'

대공은 3황자를 살폈다. 3황자는 꼭 뱀처럼 웃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기세가 넘실거렸다.

"어이가 없군."

3황자의 어깨가 비틀렸다. 붉은 검이 빠르게 뽑혔다. 살기가 상당히 짙었다. 그 검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갈라하드는 대공을 쳐다보며-.

"어, 과부 됩니다?"

뻔뻔하게 말했다.

그에 대공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

'빠르군.'

갈라하드는 제 앞에 있는 거대한 등을 보며 감탄했다.

대공이 어느새 갈라하드의 앞에 있었다. 공간 마법이 의심될 정도로 빨랐다.

대공은 붉은 오러가 넘실거리는 3황자의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콰드득!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오러와 사람 손이 부딪쳤는데 불똥이 튀었다.

대공은 맨손으로 오러를 잡았다. 손의 살가죽이 찢겨 피가 흘렀지만, 굳건하게 버텼다.

'오러를 손으로 잡다니?'

대공이 유사 마물인 건 알았지만, 오러를 손으로 잡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너-."

3황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몸 전체가 오러였군."

3황자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몸 전체가 오러-.'

갈라하드는 상황도 잊고 가죽 수첩을 꺼냈다. 마족의 왕을 막는 영웅 목록을 살폈다. 거기에-.

[도끼를 쓰는 야만인은 오러를 제 몸처럼 다룬다.]

갈라하드가 대공의 도끼를 보고도 도끼를 든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유였다.

대공은 야만인이 분명했고 또 도끼도 썼지만, 오러를 쓰지는 않았다.

'몸처럼 다룬다는 게 진짜 근육이었나.'

그때, 대공 너머의 3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3황자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다지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감당할 수 있겠느냐?"

3황자의 목소리가 끈적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배신이라니. 나는 약속을 지켰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3황자가 눈을 찡그렸다.

"제대로 도발하지 않았나."

갈라하드는 대공을 가리키며 웃었다.

"재밌군."

3황자가 피식 웃었다. 붉은 오러가 거칠게 움직였다.

불처럼 일어나는 다른 오러와 달리, 3황자의 오러는 뚝뚝 떨어졌다. 마치 끈적한 피처럼 흘러내렸다.

끈적한 오러가 대공의 손을 가득 적셨다. 대공의 손에서 피가 거칠게 튀었다.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전에 대공에게 마법을 썼을 때, 갈라하드가 느꼈던 건 오러가 아니었다.

'마물의 가죽 같은 느낌이었는데.'

갈라하드는 슬쩍 손가락을 튕겼다.

대공의 등을 얼음송곳이 쿡- 찔렀다.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오러와 반응이 달랐다.

'아, 피부는 고위 마물의 가죽이군.'

그러면-.

'피부는 마물 가죽이고 그 근육은 오러로 되어 있다는 건가? 이게 생명체는 맞나?'

갈라하드는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고개를 드니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아, 별거 아닙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혀를 찬 대공이 3황자로 시선을 돌렸다. 3황자는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비켜라. 협약에 묶인 개새끼여."

이 상황에 대공에게 개새끼라고 하다니-. 아주 용감하군. 갈라하드는 3황자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래, 나는 네 목을 뽑을 수 없다."

대공이 검을 더욱 깊게 잡았다. 피가 거칠게 튀었지만, 대공의 입꼬리는 더 깊어졌다.

"황태자가 왜 그냥 돌아갔는지 아는가?"

3황자의 눈이 굳었다. 대공이 양손으로 황태자의 검을 잡았다.

대공의 근육이 거친 소리를 냈다. 꾸드득! 인간의 몸에서 나면 안 될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3황자가 오러를 더욱 일으켰다.

붉은 오러가 대공의 손을 넘어서 팔뚝까지 타고 올랐다. 피부가 전부 갈라져서 피가 흥건했지만, 대공은 멈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컸던 대공의 근육이 더욱 부풀었고-.

검이 뚝 부러졌다.

오러가 부러졌다.

3황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여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당황이 메꿨다.

"끄윽-."

3황자가 나지막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몸이 달달 떨렸다. 오러가 부러진 부작용인 듯했다.

'마나 탈진과 비슷하지만, 또 다르군.'

흥미를 느낀 갈라하드는 3황자를 살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이지? 칼로 찌르는 듯한가? 아니면 몸속에서 불이 날뛰는 통증? 대답 좀 해보게나."

3황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갈라하드를 노려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왕국 연합은."

대공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헛기침했다.

"아, 지금쯤이면 정리가 끝났을 겁니다."

"빠르군. 준비라도 한 것처럼."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좀 유능하지 않습니까."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대공은 작게 혀를 찼다.

그때, 3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놈의 눈이 살벌했다.

여기서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걸 아는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자네, 그릇이 좀 작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황실 기사 케릭은 검을 고쳐 잡았다. 왕국 연합의 왕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황실 기사는 찌르라면 찌르고, 베라면 베는 제국의 검이었다. 명령이 내려졌으면 의문은 필요 없었다.

이내 왕국 연합의 기사들과 마주했다.

상대는 총 둘이었다. 벽에 기대어 고개를 까닥거리는 모습에 케릭은 눈을 구겼다.

'졸고 있군.'

아무리 새벽이라도 졸고 있다니, 기사라는 칭호가 아까울 정도였다.

케릭은 슬쩍 수신호를 보냈다. 황실 기사 둘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서늘한 소리가 퍼졌다.

일부러 소리를 낸 것이다. 검을 맞대고 영광스럽게 죽으라고-.

다만, 둘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실 기사들 얼굴에 혐오가 떠올랐다. 앞으로 나선 황실 기사들이 검을 찔렀다. 오러가 섞인 검이 갑옷을 가벼이 잘랐다.

그때, 갑옷에서 거친 빛이 뿜어졌다. 마법 함정이었다. 시야가 가득 가려졌다.

'마법 함정이라니-. 왕국 연합에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다는 건가?'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지만, 황실 기사의 갑주에는 마법 방어가 걸려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문득 서늘함이 엄습했다. 케릭은 다급하게 검을 뽑았다.

챙! 어스름한 시야 속에서 덩치가 보였다.

"기사가 암습을 하다니-! 이런 치사한 놈!"

케릭은 분노에 가득 찬 소리를 질렀다. 검이 연속으로 교차했다. 시야가 막힌 탓에 바로 수세에 몰렸다.

"나는 기사 따위가 아닐세."

순간 아래가 뜨거워졌다. 발 아래에 마법진이 있었다. 자그마한 스파크가 튀었다.

아주 미세한 경직이었지만, 사선에서는 충분히 큰 빈틈이었다. 퍼스트는 그를 놓칠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케릭의 어깨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갑주가 오러에 썰렸다. 불의의 일격을 연속으로 당했지만, 케릭은 황실 기사였다.

이를 악물고 검을 움직였다. 상대의 검술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다는 게 문제였다. 최소 황실 기사급의 검술 실력이었다.

'이런 검술 실력을 지닌 놈이 암습을-.'

더불어 놈의 오러가 이상했다. 검을 섞을 때마다 놈의 오러에 일렁이는 불길이 시야를 가렸다. 열기가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준비된 함정들까지 더해지자, 케릭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황실 기사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최후였다.

"나는 기사 따위가 아니라-."

퍼스트는 가벼이 검을 털며 웃었다.

"부국장이다."

멋진 대사를 읊듯 자세를 잡는 퍼스트에 펌킨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뒷정리했다.

"자, 여기 황실 기사가 습격하려고 했습니다. 제대로 확인하셨습니까?"

펌킨은 황실 기사의 시체를 들이밀며 물었다.

오, 케르켁이여-.

파르한스타는 멍하니 끄덕였다.

****

아드리안나는 앰버르탄 백작이 머무는 방 앞에 있었다. 약혼식 전에 찾아가는 게 예의라 생각했기에-.

아드리안나는 담담히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아드리안나입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문이 열렸다.

퀭한 중년의 사내였다. 묘하게 갈라하드가 보였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갈라하드 대장과 약혼식을 올리게 된 아드리안나입니다. 아무래도······."

아드리안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앰버르탄 백작이라고 부르기에는 관계가 애매했다. 그렇다고 그대나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장인어른.]

일단, 약혼한 상태니까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게 정론이었다.

그러니까-.

아드리안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좀처럼 입이 안 떨어졌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갈라하드도 이제껏 대공 전하에게 잘하지 않았나.

아드리안나에게도 의무가 있었다.

"아버님을 찾아뵙는 게 예의인 듯하여 왔습니다."

아드리안나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말했다.

'성공했다.'

조금 뿌듯해진 아드리안나는 앰버르탄 백작을 살폈다.

앰버르탄 백작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사이로 숨소리가 옅게 새어 나왔다.

꼭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

"누······ 누가 네 아버님이냐! 나는 아버님이 아니다!"

앰버르탄 백작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발작하는 앰버르탄 백작에 아드리안나는 당황했다.

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한 걸까.

그때-.

"아버님, 밤에는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요."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어머-."

아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황녀가 있었다.

"아버님, 손님이 왔으면 이야기를 하셔야죠."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가득 흔들렸다.

126화 도끼 피하기

'아버님?'

또 들리는 지독한 단어에 앰버르탄 백작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아버님이라고 부르십니까?"

"내가 그리 부르고 싶으니까."

황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만개한 꽃 같은 미소였다. 앰버르탄 백작은 작게 떨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압적인 말투였다. 황녀였기에 더 효과를 발휘했다.

그 상대인 아드리안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장성한 여인이 외간 사내에게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 옳지 않습니다."

황녀를 지적했다.

황족에게 잔소리라니-.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황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앰버르탄 백작은 비명을 참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황족이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취할 수 있고, 무엇이든 행할 수 있다."

황녀가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드리안나의 키가 큰 터라 황녀가 올려보는 꼴이 됐다.

둘이 마주 서니 그 대비가 적나라했다.

"권리와 책임은 비례합니다. 신분이 높을수록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입니다."

"고작 변방의 대공녀가 신분을 운운하는 것이 웃기는구나."

"옳음과 그릇됨은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습니다."

황녀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에 반해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오히려 앰버르탄 백작의 가슴이 철렁였다.

"그리고 저는 대공녀가 아니라, 1대대 대장입니다."

황녀의 입꼬리가 끝에 닿을 정도로 올라간 상태였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이게 북부와 제국의 갈등이군.'

살벌한 긴장감에 앰버르탄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황녀가 먼저 물러섰다. 저 황녀가 물러나다니-. 앰버르탄 백작의 눈이 커졌다.

"그이가 고생 좀 하겠구나."

"그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잔소리가 상당하네."

"잔소리가 아니라······."

아드리안나가 말끝을 흐렸다. 입꼬리를 삐쭉 올린 황녀가 화려하게 뒤로 돌았다. 드레스가 펄럭였다.

"졸리다. 자야겠다."

저 미친년을 이기다니-. 앰버르탄 백작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잠깐-."

그때, 아드리안나가 돌아선 황녀를 불렀다. 황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한계다.'

저게 황녀의 마지막 선이라는 걸, 앰버르탄 백작은 알 수 있었다. 저 황녀를 건드렸다가는 어떤 꼴을 볼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전야제가 아직 진행 중입니다. 북부의 축제는 도끼 피하기처럼 재밌는 놀이가 많습니다. 안내를 원하시면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축제를 즐기자니-. 아주 지독한 도발이었다. 앰버르탄 백작은 사달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다.

예상과 달리 황녀의 반응이 미묘했다. 황녀는 웃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싫다."

"재밌으실 겁니다. 특히 도끼 피하기 경우에는······."

"아니, 나는 네가 싫다."

황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적의가 넘쳤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축제는 한 번 즐기시는 걸 추천합니다. 특히 도끼 피하기가-."

"참으로 시끄럽다."

눈을 구긴 황녀가 안으로 사라졌다.

저 황녀를 밀어내다니-. 앰버르탄 백작은 진지하게 감탄했다.

"괜찮으십니까?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아드리안나가 앰버르탄 백작을 보며 물었다. 그 목소리가 무심했지만, 앰버르탄 백작은 눈물이 핑- 돌았다. 천천히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대공녀가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저 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실제로 보니 소문이 부족한 감이 있었다.

더불어-.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고.'

새벽인 지금도 중무장한 상태였다. 그 정신이 얼마나 견고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북부에 있다는 게 너무 아깝군.'

앰버르탄 백작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듣기로는 마나를 태우는 저주에 걸려서 닿지조차 못한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기사거늘.

"아버님."

그때, 아드리안나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으음······."

앰버르탄 백작은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다만, 손이 떨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무심한 물음에 앰버르탄은 눈물이 핑- 돌았다.

본래 앰버르탄 백작은 갈라하드의 짝이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있었다.

"······괜찮다."

앰버르탄 백작은 긴장을 누르고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드리안나는-.

"그런데 외간 여인이 아버님이라 부르는데, 어찌 가만히 계십니까?"

담담하게 잔소리했다.

앰버르탄 백작은 입을 벙끗거렸다.

갈라하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

"감당할 수 있겠느냐?"

3황자가 붉은 눈동자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에 분노가 뚝뚝 흘러넘쳤다.

'살기가 진득하군.'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차르티엔 당한 황실 기사들이 뒹굴고 있었다. 감히 대공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그 덕분에 방이 온통 붉은데도, 3황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를 드러냈다.

'자기를 못 죽인다는 걸 알고 있군.'

맞는 말이었다. 황족은 함부로 죽일 수 없다. 여기서 죽였다가는 제국에게 구실을 주는 거였다.

더불어-.

'친위대가 움직이겠지.'

3황자의 목을 비트는 건, 득보다 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놈을 살리는 게 더 쓸모 있었다.

"왜 나한테 성을 내나. 약속한 대로 도발했거늘."

"도발이라, 재밌는 놈이군."

"내가 원래 그런 말을 많이 듣지."

3황자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북부에 있다고 너무 안심하는 거 아니냐? 네 가문은 수도에 있는데."

3황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맞는 말이지만, 갈라하드에게는 효과적인 협박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가문에서 쫓겨난 입장일세."

"보통 그리 말하지. 저택이 불타기 전까지는."

3황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안 믿는 듯했다. 갈라하드도 마주 웃었다.

"오러 부러진 놈이 꺼드럭거리는군."

3황자의 얼굴이 굳었다.

오러는 기사의 자존심이자, 신념이었다. 그런 오러가 부러졌다는 건 의미가 남달랐다.

"놈."

3황자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 본성이 온전히 드러났다.

놈은 맹수였다. 광견병 걸린 맹수-.

3황자가 반토막 난 검을 비틀었다.

그때-.

"그만."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금까지 열을 내던 3황자가 작게 떨었다. 3황자는 대공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제대로 교육이 된 듯했다.

"이번 일은 황실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대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갈라하드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아주 적절한 발언이었다.

"······쯧."

3황자가 손에 든 검을 떨어뜨렸다. 반토막 난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갈라하드라. 기억하지."

3황자가 갈라하드를 보며 짧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겠네."

3황자의 얼굴이 순간 가득 구겨졌다. 3황자는 쯧-하고 혀를 차고 방을 나갔다.

"음."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에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만만한 놈이 아니다."

대공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자신이 넘치는군."

"정 안되면 장인어른이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공이 맹수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대공의 웃음소리였다.

"그러면 이따 뵙겠습니다."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갈라하드에 대공은 어이가 없었다.

"네놈,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머리 따개?"

뜻 모를 대답을 한 놈이 슬쩍 방을 나갔다.

'머리 따개라-.'

어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

"사십에 달하는 은퇴 팀 처리, 경비견 마련, 왕국 연합 회유, 3황자 도발, 거기에······. 이거 정말 하룻밤에 다 할 수 있습니까?"

계획서를 본 제임스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은퇴 팀을 처리하는 것도 업적으로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남은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걸 하룻밤에 전부 하겠다니-.

"그가 한다고 했으니까. 할 거야."

자밋이 가벼이 대답했다. 제임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은퇴 팀을 처리하던 갈라하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때, 핸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걸 다 몰아서 할 필요가 있습니까? 몇 개는 약혼식에서 해도 되지 않습니까?"

합당한 의문이었다. 제임스도 따라서 끄덕였다. 자밋이 대놓고 혀를 찼다.

"약혼식이잖아. 갈라하드는 세심하거든."

세심한 것과 무슨 상관이지? 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밋의 구겨진 눈썹에 꾹 참았다.

안쪽에서 코 고는 소리가 큼지막하게 들렸다. 에포트였다. 에포트는 의외로 순순했다.

"에포트가 왔으니, 이제 본부가 습격당할 걱정은 없네."

자밋의 말에 핸섬과 제임스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자밋은 대답 대신 차를 홀짝였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갈라하드가 거칠게 기침하며 들어왔다. 그 모습이 평소와 달리 엉망이었다.

늘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옷에는 긁힌 자국과 굳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 엉망인 꼴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들 일찍 일어났군."

갈라하드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제야 제임스와 핸섬이 경례를 올렸다. 그 경례가 평소보다 더 깍듯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흔들고 자밋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 얼굴에 여유로 가리지 못한 피곤이 가득했다.

"일은요?"

"중요한 건 다 끝냈네."

갈라하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톰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튜를 건넸다.

"아, 톰 고맙네. 퍼스트는?"

"무사히 대피시킨 거 확인했어요."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스튜의 향기로운 냄새에 제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밤사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일만 한 탓이었다.

톰은 둘에게도 스튜를 챙겨줬다. 제임스와 핸섬은 헐레벌떡 그릇을 비웠다.

"잘 먹었네. 자네, 요리 실력이 더 늘었군."

"감사합니다."

갈라하드는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작게 기침하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튕겨 연초에 불을 붙이자, 상큼한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갈라하드는 눈을 감고 연초를 깊게 마셨다.

제임스는 반짝이는 눈으로 갈라하드를 봤다.

평소와 달리 엉망인 몰골이었다. 그 헝클어진 머리와 여기저기 베인 흔적이 간밤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나타냈다.

믿기지 않을 일들을 혼자 해낸 갈라하드였다.

그를 자랑처럼 떠들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연초나 피다니-.

'······진짜 개 멋있다.'

제임스의 눈이 선망으로 가득 찼다.

제임스가 꿈꾸던 요원······ 아니, 갈라하드에게는 그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연초 두 개를 연속으로 피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충분하네."

"여기요."

"고맙군. 아주 멋들어진 정장이군. 역시 자밋이야."

자밋이 준비해둔 정장을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정장을 챙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 갈라하드는 멀끔한 자태였다. 얼마나 깔끔한지, 밤중에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의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가 연초를 입에 물며 여유롭게 웃었다.

"약혼식 두 번은 못 하겠군."

갈라하드의 농담에 아무도 웃지 못했다.

그를 끝으로 갈라하드는 본부를 나섰다.

잠시 눈치를 보던 제임스는 슬쩍 갈라하드가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제임스는 그 자리에 앉아 연초를 물었다. 연초에 불을 붙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너희 둘 뭐해?"

자밋의 뾰족한 목소리에 제임스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둘?'

옆을 보니 핸섬이 앉아 있었다.

"빨리 안 움직여?"

둘은 황급히 일어났다.

****

'하루가 길군.'

문을 열고 나가자 새벽 특유의 상쾌한 공기가 갈라하드를 반겼다.

피범벅이 된 북부 놈들이 여기저기 엎어져 있었다.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곳곳에 놓인 도끼와 맥주잔이 전야제의 흔적이라는 걸 증명했다.

'참 폭력적인 전야제군.'

마지막 남은 건, 마법사들을 다독이는 거였다. 그 괴팍한 장로 둘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탑으로 걷는데,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렸다.

'아직도 즐기는 놈이 있다니-.'

해가 뜨는 새벽이었다. 이 시간까지 놀다니-. 아주 글러 먹은 놈일 게 분명했다.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금발이 보였다. 태양을 녹인 것처럼 찬란한 금발은 흔치 않았다.

'······아드리안나였군.'

눈썹이 잔뜩 올라간 아드리안나였다. 그 정면에 사내 하나가 있었는데, 거의 반쯤 졸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익숙하게 도끼를 잡아서 빙글- 돌렸다.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맞은 편에는 이미 너덜너덜한 표적들이 있었다.

자세를 잡은 아드리안나가 도끼를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도끼가 표적을 정확히 명중했다.

졸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서 열렬히 박수쳤다.

"역시 아드리안님입니다! 신기록입니다!"

입가의 침도 닦지 않은 사내의 칭찬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갈라하드는 잠시 마탑을 보다가, 아드리안나에게 향했다.

"실력이 제법이군."

"아, 보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묘하게 뿌듯함이 보였다. 축제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왜 다들 있을 때 안 놀고 지금 혼자 즐기나?"

"제가 있으면 마음껏 못 즐기지 않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담담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자의식 과잉이군."

"······예?"

아드리안나가 눈을 끔벅였다. 갈라하드는 널브러진 도끼를 쥐었다. 허리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가벼이 무시했다.

"바쁘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올려봤다. 그 푸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는 상당히 퀭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피곤함이 가려졌다.

"괜찮네. 굵직한 건 처리했으니까. 자네랑 놀아줄 시간 정도는 있네."

"······예?"

갈라하드는 도끼를 던졌다. 그 도끼가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표적의 끄트머리에 스쳤다.

무식한 북부 놈들이 표적을 너무 멀리 둔 까닭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자네, 웃고 있네."

아드리안나가 슬쩍 제 입꼬리를 만졌다. 입꼬리는 일자였다.

"솔직해지게. 나랑 축제를 즐기고 싶지 않나."

갈라하드는 가벼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북부의 축제가 얼마나 재밌는지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자네, 홍보 대사인가?"

"예? 아, 도끼 던지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도끼를 이렇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던질 때는 손목을 꺾어서 힘을 줘야 정확히 명중합니다."

아드리안나가 자세까지 하나하나 알려줬다. 그 진심인 모습에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빤히 쳐다봤다.

"어떻게 던지라고?"

"이렇게 잡아서-. 손목을 돌려야 합니다. 그 시기가 중요한데, 도끼가 손에서 나갈 정도에-."

"음, 잘 모르겠군."

"제가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아드리안나가 도끼를 던졌다. 그 도끼가 무슨 화살처럼 일자로 날아갔다.

'대단하군.'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보셨습니까?"

"봐도 모르겠네. 어떻게 잡으라고?"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나가 건틀릿을 끼고 진지하게 갈라하드의 자세를 잡아줬다.

바로 앞에서 진지하게 설명하는 아드리안나에 참지 못하고 웃자-.

"······장난치시는 겁니까?"

도끼눈으로 변한 아드리안나가 뒤로 성큼 물러났다.

"음, 이제 좀 알 것 같군."

갈라하드는 도끼를 힘껏 던졌다. 전보다 더 빨라진 도끼가 표적에 명중했다. 도끼눈이 풀렸다.

"훌륭하십니다."

"그게 내 전문일세."

"다만, 아직 손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시겠습니까?"

"시작이라니?"

"도끼 피하기와 도끼 던지기는 한 묶음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도끼 피하기?"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드리안나가 가리킨 곳은 표적 옆이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넝마가 된 표적들이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저 멀리에 아드리안나가 도끼를 쥐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도끼 피하기라니-.'

참으로 북부스러운 명칭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규칙은 간단했다. 한쪽은 도끼를 던지고 다른 한쪽은 피하는 거였다. 나름대로 보호구도 줬다.

'이게 보호구가 맞나?'

보호구는 원래 무슨 형체였는지 짐작되지 않는 마물의 가죽이었다. 만지기조차 찜찜한 모습이었다.

'아드리안나니까 괜찮겠지.'

그때,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아까 황녀님을 만났습니다."

묘한 불안함이 올라왔다. 아드리안나가 도끼를 뒤로 힘껏 당겼다.

조금 전과 그 자세가 달랐다.

진심이 보였다.

잠깐-.

"황녀님이 앰버르탄 백작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더군요."

아드리안나의 담담한 목소리에-.

[북부에서 간통은 사형입니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마물 가죽을 잡았다.

127화 약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