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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 109-118

109화 약장례식

꾸욱, 꾸욱, 꾸욱,

고통의 알이 계속해서 존재감을 표시했다.

필사적이었지만, 압수수색 당한 터라 그 영향력이 형편없었다.

아니, 하찮았다.

압박감은커녕 오히려 심장이 시원했다.

고통의 알이 심장 마사지를 했지만, 지금 갈라하드는 그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그 원인은-.

"약혼식이 한 달 남았다."

갈라하드를 지그시 보는 대공 때문이었다.

대공은 갑자기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를 불렀다.

갇혀있다가 처음 나와서 마주한 게 대공이라니-.

'그때와 같군.'

대공의 입이 이어서 움직였다.

"장례식도."

순간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굳었다.

"하하, 무슨 그런 살벌한 농담을 하십니까."

"농담?"

대공의 반문에 갈라하드의 웃음이 멈췄다.

"하겠습니다."

다행히 아드리안나가 대답했다. 대공의 시선이 돌아갔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이 풀렸다.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했다.

"장례식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하하."

"그건 모르는 거지."

대공이 다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이 전보다 더 서슬 퍼렜다.

'아드리안나가 약혼식을 한다고 했는데, 왜 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공이 뭔가를 던졌다. 아드리안나가 그를 낚아챘다. 그건 뭉친 종이였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에게 건네줬다.

'약혼식 참가 목록?'

가지런한 글씨로 정리된 목록이었다. 거기에 다양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건-.

'······이 미친 여자가.'

황녀였다. 갈라하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분명 잘 타일러서 보냈는데, 왜 또 온다는 말인가-.

갈라하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녀의 광적인 집착은 갈라하드가 가장 잘 알았다. 갈라하드의 조언을 무시할 여인은 아니었다.

그런 황녀가 다시 북부로 오는 건-.

'혼인이 실패했군.'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왕국 연합 쪽에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놈들이 왜?'

놈들에게도 좋은 선택지였을 텐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애석하게도 약혼식 초대 목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아래로 목록이 길게 이어졌다.

'왕국 연합? 이놈들이 왜-.'

황녀를 거절한 놈들이 왜 아드리안나의 약혼식에 온다는 말인가.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난리가 날 텐데.'

단순히 황녀의 문제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왕국 연합에서 갈라하드를 아는 이가 있으면, 문제가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심지어 목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탑들까지?'

흰색 마탑부터 적색 마탑 그리고 다른 잡다한 마탑들까지 참석을 표했다.

수도에서 웬만해서 벗어나질 않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굳이 북부까지 오는 이유는 뻔했다.

[우리 마탑에 들어오게! 최상의 대우를 약속하겠네!]

[아니! 우리 마탑으로! 차기 마탑주 어떤가?]

'······내 이름을 들었군.'

어지러운 목소리들에 갈라하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탑의 집착은 황녀보다는 덜 했지만, 그래도 분명한 방해였다. 놈들이 갈라하드의 약혼식을 축하하려고 굳이 북부까지 올 이유가 없었으니-.

그 제일 아래에 적힌 이름이 갈라하드의 신경을 긁었다.

'앰버르탄 백작.'

이 몸의 아비였다.

왜 앰버르탄 백작이 약혼식에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조졌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약혼식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갈라하드의 귀를 긁었다.

고개를 들자, 서슬 퍼런 눈이 보였다.

대공이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아니, 깊은 게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넘치게 담겨서 깊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꿀꺽-.

"장례식이다."

대공의 말은 짤막했다.

약혼식에 문제가 생기면 장례식이라니-. 술자리에서 말해도 아무도 웃지 않을 괴상한 농담이었다.

애석하게도-.

'농담이 아니군.'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이 아드리안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를 모욕했다는 것만으로 황태자가 데려온 이들을 전부 짓이긴 대공이었다.

그런 아드리안나의 약혼식이 엉망이 되면-.

'진짜 죽을 수도.'

서늘함이 갈라하드의 등을 가득 긁었다.

약혼식 초대 목록에 적힌 이들 하나하나 전부 문제였다. 그중 작은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당장 이걸 약혼식 초대 목록이 아니라, 갈라하드의 사인으로 바꿔도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명백하고 선명한 위기에 갈라하드는-.

"아주 멋진 약혼식이 될 겁니다."

오히려 활짝 웃었다.

대공이 같잖다는 듯 코를 찡긋거렸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그러니까 약혼식은-.

'아주 큰 기회군.'

단순한 기회도 아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약혼식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서는-.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건-.

'마탑의 늙은이들부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드리안나가 따라서 일어났다. 그에 갈라하드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대공의 눈이 찡그렸다.

"장인어른-."

갈라하드는 최대한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애매하지만-.

'미소군.'

****

"소집이라니-. 어이가 없군."

4대대 대장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다른 대장들도 대놓고 불만을 표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장들을 소집하다니-. 갈라하드 대장,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5대대 대장 마크는 작게 중얼거렸다.

갈라하드가 대공의 인정을 받은 것도 맞고, 이번에 대장들 앞에서 고위 마족을 잡아 실력을 증명한 것도 맞았다.

대장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장 전체를 소집하는 건 아예 다른 이야기였다.

대장은 오직 대공의 명령만 받는다-. 설령 아드리안나라도 대장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갈라하드가 대뜸 대장들을 전부 소집했다.

'반감이 더 심해질 텐데.'

마크는 의문을 품었다.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고, 고위 마족 좀 잡았다고. 우리를 자기 수하로 보나 보군."

대장 하나가 이죽거렸다. 그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에 침음성을 흘리던 마크는 문득 상황을 깨달았다.

모두가 불만 가득하고 툴툴거렸지만-.

'전부 모였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장 회의에 들어온 것으로도 반발이 나왔던 갈라하드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이제는 대장들을 소집했다. 심지어 대장들이 전부 모였다.

'대단하군.'

마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갈라하드였다. 안색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창백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닌 듯했다.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들어오자, 터질 듯한 분위기가 더 날카로워졌다. 대장들의 기세가 가득 쏟아졌다.

압박이 상당할 텐데도,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끄덕였다.

"다들 모여 있었군."

심기를 긁는 말에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졌다.

4대대 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네가 우리를 소집한 거냐?"

분노에 가득한 목소리에 다른 대장들이 동조하듯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현명한 이였다. 이런 반발은 예상했을 게 분명했다.

마크는 갈라하드가 상황을 어떻게 풀 것인지 기대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대처는 예상 밖이었다.

"자네는 글을 못 읽나? 거기 적혀 있을 텐데."

명백한 도발이었다.

적나라한 지적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4대대 대장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왜 오히려 도발을-.'

북부인은 인내심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들의 대표인 대장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뒤늦게 4대대 대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눈이 가득 구겨졌다. 선명한 분노가 떠올랐다.

"감히-."

4대대 대장이 무기를 잡았다.

"아, 들어오게."

갈라하드가 뒤를 보며 말했다.

순간 회의장이 환해졌다. 태양 빛을 머금은 듯한 금발이 찰랑였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의 등장에 순간 분위기가 흔들렸다.

작게 고개를 숙인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 않게 갈라하드의 뒤에 섰다. 보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갈라하드의 연초에 불까지 붙여줬다. 대장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아드리안나를 데려온 건 꽤 효과적이었다.

다만-.

'대장들을 아드리안나로 누를 수는 없을 텐데.'

아드리안나는 대장들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쪽이었다. 돕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설령 돕더라도 다른 대장들을 누를 수는 없었다.

결국, 같은 대장이었기에.

"하! 아드리안나 대장을 믿고 일을 벌였구나. 하지만-."

"아, 잠깐만 기다리게."

갈라하드의 가벼운 만류에 4대대 대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4대대 대장이 다시 화를 내려는 순간-.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이 가벼이 부서졌다. 대공이었다. 문이 비좁았는지 대공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대장들을 둘러본 대공이 갈라하드의 뒤에 섰다.

그렇게 되자, 모습이 상당히 미묘했다.

갈라하드의 왼쪽에는 대공이, 오른쪽에는 아드리안나가 선 모양새였다.

아드리안나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었는데-.

'······대공 전하는 왜?'

그때, 갈라하드가 손뼉을 작게 쳤다.

"한 자리가 비었군-. 아, 차르티엔이지. 다들 명복을 빌어주게."

갈라하드가 짧게 목례했다. 그에 대공이 6대대 차르티엔의 목을 뽑는 모습이 떠올랐다. 엉거주춤하게 있던 4대대 대장이 조심스럽게 앉았다.

"자, 불만 있는 사람 있나?"

갈라하드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과 달리 작은 반발도 없었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 대공과 아드리안나가 있었으니까.

"없군."

대공과 아드리안나를 뒤에 세운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이제부터 마석장 사업은 합법일세."

갈라하드가 꺼낸 충격적인 발언에 대장들이 어수선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석을 다루는 건가.'

북부에서 마석은 마족과 관련된 저주 받은 물건으로 취급했다. 더불어 북부의 마석이 알려진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계산이 빠른 이들은 뒤로 마석을 취급했지만, 전반적으로 반감이 심했다.

"마석은 마족의 물건 아닌가! 그런 마석을 다루겠다니!"

2대대 대장 리암이 반발했다. 당연한 반발이었다.

대장들은 각기 다른 표정이었다. 어떤 이는 찔리는 얼굴이었고, 어떤 이는 분노, 또 어떤 이는 관심 없는 눈치였다.

마크는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래, 마석은 마족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네."

갈라하드가 순순히 인정하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를 만끽하듯 잠시 기다린 갈라하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있나?"

"문제라니-. 마족의 물건을 다루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건가?"

"마족과 관련된 게 문제군. 자, 그대의 코트는 마물의 가죽으로 만든 코트 아닌가?"

"마석이 마물의 가죽과 같다는 건가?"

"다른 건 뭐지?"

"마석은 저주 받은 물건이다."

리암의 말에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제국으로 팔겠다는 걸세."

"제국 놈들에게 저주를 돈 받고 팔겠다는 건가?"

"정답일세."

"오, 끝내주는군."

리암이 호탕하게 웃었다. 빠른 납득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엇보다-.

'······갈라하드가 제국 놈 아닌가?'

4대대 대장이 손을 들었다. 4대대 대장은 어설프게 대공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석을 팔면, 제국의 마법사 무장을 도와주는 꼴이 되는 거 아닌가."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대장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론이었다.

이걸 어떻게-.

그때, 갈라하드가 기다란 검지로 4대대 대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마법을 두려워하는 건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대장들의 반응이 묘했다. 본래 북부에서 마법은 멸시받았다. 마족의 오물이라 불리며 무시당했다.

마족을 상대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고, 마물 코트만 두르고 있어도 무력해지는 게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무시하던 마법인데-.

'어느새 인정하고 있었군.'

대장의 입에서 마법을 경계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원인은 분명했다. 갈라하드였다. 그들은 은연 중에 갈라하드를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를 깨달은 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됐다.

"걱정하지 말게. 제국에게 넘길 건 등급이 낮은 마석일 것이니까. 그것들로는 마물의 코트를 절대 뚫을 수 없을 걸세. 마석에 의존하면, 오히려 전력이 약화될 걸세."

질문한 대장이 자리에 앉았다. 그에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만, 워낙 문제가 많았던 마석 아닌가. 그걸 각 대장에게 맡겨두는 건 다소 위험하다고 판단했네. 마석장 사업은 대공 전하 직속으로 운영될 걸세."

"대공 전하 직속?"

"안 그래도 일이 많지 않나. 전선을 신경 쓰는 것도 힘든데, 어찌 마석장까지 맡기겠나."

모두가 대공의 눈치를 봤다. 대공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대공 전하를 어떻게-. 마크는 작게 경악했다.

"아, 걱정하지 말게. 각 대대의 마석 생산량에 따른 이익이 돌아갈 테니까. 그건 그대들이 지금까지 버는 금액보다 적지는 않을 걸세."

갈라하드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자, 이의 있는 사람 있나?"

이번에는 대장들이 대공이 아닌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불만은 없었다.

지극히 합리적이었기에.

****

"대단하십니다. 대장들의 동의를 얻어내시다니."

아드리안나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제안은 받을 수밖에 없어야 하네."

"······받을 수밖에 없다?"

작게 중얼거리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거절할 여지가 없는 제안을 해야 깔끔하니까."

아드리안나는 그 말을 진지하게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만, 그걸 실제로 만드는 게 어려울 뿐.

지금처럼-.

갈라하드는 대장들에게 지금보다 더 큰 수익을 약속했다. 심지어 합법화로 대공 전하의 눈치를 안 봐도 되니, 대장들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수익이 오히려 증진되는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아, 그건 그들이 마석의 값을 몰라서 그런 걸세. 전에도 후려치던 값에 받고 있었으니까. 물론, 대장들에게는 그것도 거금이었겠지."

"아-."

아드리안나는 작게 탄식했다.

"공급망만 구축하면, 더 나은 값에 팔 수 있을 걸세. 그중 대부분을 먹어도 대장에게는 더 많이 돌아가겠지."

갈라하드의 말은 늘 그렇듯 막힘이 없었다.

감탄하던 아드리안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벌써 공급망을 구축한 겁니까?"

지금까지 틈도 없이 달렸던 갈라하드였다. 그런데 또 어느새 공급망까지 구축했다는 건가.

갈라하드가 특유의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북부에 벌써 공급망을-.'

아드리안나는 다시금 감탄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공급망은 구축할 필요가 없네."

"······예? 하지만 방금은 공급망을 구축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갈라하드가 가벼이 끄덕이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를 보자마자 아드리안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동작이 완벽하여 갈라하드가 연초를 무는 순간 불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고맙네."

갈라하드가 미묘한 얼굴로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지팡이를 챙겼다.

"공급망이 알아서 올 걸세."

아드리안나는 작게 갸웃거렸다. 공급망이 알아서 온다니-.

"꼬장꼬장하지만, 확실한 노인들이니까."

갈라하드는 텁텁하게 손을 털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평소보다 복잡해보였다.

****

"아버님-, 어릴 적 그이는 어땠어요?"

그리 묻는 목소리는 설탕이라도 섞은 듯한 달콤한 목소리였다.

다만, 당사자인 앰버르탄 백작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도대체 몇 번이나 묻는 것이냐.'

앰버르탄 백작은 얼굴을 구겼다.

"어머, 안 들려요?"

부드러운 독촉에 앰버르탄 백작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놈은 어릴 때부터 이상···."

서늘함에 앰버르탄 백작은 황급히 단어를 바꿨다.

"······비범했다. 태어났을 때 울지 않았고,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입이 트였지. 저주··· 아니, 특별했다."

"그이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구나-."

"······."

"그래서요?"

"그··· 그리고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혼자 몸을 단련하더군. 기특하여 따로 검까지 내렸다. 그런데-."

으드득, 앰버르탄은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순간 황녀도 잊을 정도로 분노했다.

"검이 재미없다더군. 감히 앰버르탄 가문에서 검이 재미없다니. 용서할 수 없다. 불길하더니만. 기어코-."

말하던 앰버르탄의 입이 멈췄다. 향기가 짙어졌기에-.

활짝 웃는 황녀가 보였다.

"아··· 아니, 실수했다! 잠깐-."

잠시 뒤에, 앰버르탄은 꺽꺽거리며 숨을 토해냈다.

그를 보며 황녀는-.

"아버님-, 어릴 적 그이는 어땠어요?"

활짝 웃었다.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거냐!"

앰버르탄 백작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황녀는 더 활짝 웃었다.

"그걸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계속 말해봐요."

110화 벗어

'쯧-.'

갈라하드는 손에 들린 종이를 다시 읽었다.

거기에는 '약혼식 초대 목록'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상은 '예상 사인 요소 목록'이었다.

'문제가 많군.'

초대를 보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많은 인물이 참석을 요구할 줄이야-.

그중 가장 큰 문제 요소는 아무래도 황녀였다.

황녀가 약혼식을 뒤집을 가능성은-.

'꽤 높군.'

갈라하드는 텁텁한 침을 삼켰다.

황녀는 미친 여인이었기에, 행보를 예상할 수 없었다.

약혼식을 엎을 수도, 오히려 박수치면서 행복을 빌어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같이 하자면서 뛰어들 수도-.

'그건 반드시 막아야 한다.'

황녀는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상대였지만,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문제가 많을 때는 당장 처리할 수 있는 것부터 다뤄야 했다.

이 중에서는-.

'마탑의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노인네들은 갈라하드가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접근했다. 갈라하드는 아카데미 최연소 입학생이었으니까.

갈라하드가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이 확정되는 시기와 황혼의 마탑주가 독보적으로 떠오른 시기가 겹치자, 노인네들의 집착이 심해졌다.

갈라하드를 황혼의 마탑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로 봤기 때문이었다.

차기 마탑주 자리를 약속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전부 거절했다. 마족의 왕에게 멸망하는 게 확정된 세계선인데, 그 음침한 곳에서 몽둥이나 만지작거릴 시간이 없었다.

'상당히 질척이겠군.'

갈라하드가 정보국 요원인 걸 모르는 노인네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황혼의 마탑주와 견줄 수 있는 세기의 천재가 정치 싸움에 얽혀, 마법 불모지에 버려진 걸로 보일 것이다.

'데려가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다른 건 몰라도 마법에는 진심인 이들이었다.

어떻게든 갈라하드를 챙기려 할 게 분명했다.

상당히 골치 아팠지만, 그렇다고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석의 공급망을 확보할 기회다.'

제국의 대북 제재는 상당히 강력했다. 수도에 터를 둔 정규 마탑으로서 북부의 마석을 유통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를 회유하는 건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대북 제재라.'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정면을 쳐다봤다.

"이쪽으로! 올려!"

"올립니다!"

탑의 형태를 한 구조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갈라하드가 요청한 마탑이었다.

'엄청난 속도군.'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형태가 잡히는 중이었다. 북부의 공사가 뛰어나다고 자랑하더니 확실히 빨랐다.

그 내부는 상관없다고 한 것도 컸다.

그저 그럴듯하게만 보이라고 했으니까.

애초에 목적이 그거였다.

'마석 세탁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탑은 대북 제재를 피하기 위한 첫 단추였다.

그때, 갈라하드 앞에 까마귀 가면을 쓴 이가 부복했다. 팔호였다.

흑마법학회-. 세탁의 두 번째 단계였다. 갈라하드의 마탑에 소집된 마법사들은 전부 흑마법학회처럼 각기 다른 단체를 지녔었다. 그 단체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미 마탑 소속이 되었기에 전부 없는 단체였지만-.

'이름은 존재하지.'

고전적인 세탁 방식이었다.

"명령하신 대로 유통망을 다시 잇는 중입니다. ······정말 그 이름을 쓰실 겁니까."

팔호가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마석 세탁의 마지막 단계는-.

'여명.'

여명의 이름을 쓰면,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갈라하드가 정보국에 있을 때는 취급하지도 않던 여명이었다.

그런 여명이 이렇게 큰 규모의 조직이었다는 건, 여명에서 정보국에 손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명의 이름을 쓰게 되면 놈들 쪽에서 어떻게든 막으려 노력할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걸리면-.

'제국이 여명을 경계하겠지.'

정보국 수뇌에 여명이 있다고 한들, 이렇게 크게 벌인 일을 지울 수 없을 테니까. 제국 측에서 여명을 압박할 게 분명했다.

이름을 막아줄 테니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혹여 걸려도 여명이 뒤집어쓸 게 분명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여명을 자극하여 놈들이 나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완벽한 계획이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은-.

'미끼.'

마탑의 노인네들을 낚을 미끼를 만들어야 했다.

노인네들은 자글자글한 주름만큼 조심성 넘쳤다. 함부로 아무거나 물지 않았다.

아주 맛있고 달콤한 미끼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미끼는-.

'또 아드리안나군.'

갈라하드는 손을 털었다.

****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드리안나를 대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면서 두려워하거나-. 보통 둘 중 하나였다.

갈라하드는 그에 속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두려워하지도, 경외하지도 않았다.

그저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괴상한 요구를 할 뿐이었다.

다만, 그것도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맡겨둔 듯 손을 달라는 것도, 짓궂은 농담을 하는 것도 이제 좀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드리안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되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벗으라고 했네."

담담하게 요청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불타는 눈으로 갑자기 불러내길래 손이라도 잡자는 줄 알았다. 그에 손을 씻고 나온 아드리안나였다.

그런데 대뜸-.

'······벗으라고?'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상황에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의식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숨 쉬게. 왜 그러나, 무리한 부탁도 아닌데."

무리한 부탁이 아닌가? 그런가? 아드리안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연달아 떴다.

제국의 귀족은 북부와 다르다고 들었다. 수도의 귀족은 아주 문란하기 짝이 없다고 했으니까.

'갈라하드 대장은 그동안 북부에 맞춰줬잖은가.'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갈라하드는 북부의 양식에 맞춰줬다. 그러면 이번에는 맞춰주는 게 맞나?

'······그런 건가?!'

아드리안나는 다급히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의 눈은 늘 그렇듯 담백한 뜨거움이 가득했다. 뜨거운 감정이 일렁였지만, 신기하게도 작은 음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상체를 본 적 있었다.

공평하려면-.

'······공평?!'

아드리안나의 입이 벙끗거렸다. 상념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무리입니다!"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눈썹이 마구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비집고 들어오는 사내였기에. 작은 틈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까지 줬다.

이건 진짜 위험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가 눈을 구겼다.

"음, 갑옷이 상할 수도 있네만. 그 갑주 값이 제법 나가는 것 같은데, 괜찮겠나?"

"무··· 무슨······ 갑옷이 왜 상합니까!"

토끼 눈이 된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나. 자네의 성질에서 확인해볼 게 있다고. 그 갑주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걸로 갈아입으라고 했네만."

갈라하드의 신랄한 말에 아드리안나는 눈을 끔벅였다. 생각해보니 갈라하드가 뭔가 말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끝의 '벗게나.'가 너무 충격적이라 전부 지워졌을 뿐-.

"자네, 무슨 생각을 한 건가?"

갈라하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그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하게 투구를 썼다.

달그락.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아니, 투구는 왜 갑자기 쓰나."

"아무 생각 안 했다고 했습니다."

"투구를 왜 썼냐고 물었네만."

"이상한 생각 안 했습니다."

"갑자기 오러는 왜 일으키나."

"됐습니다. 하시죠."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뱉은 아드리안나가 놀랄 정도였지만-.

"고맙네. 자, 저쪽으로 가서 서게."

갈라하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멍청이-. 작게 중얼거린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속으로 사과했다.

*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마나를 불태웠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마나를 태우는 걸 다시 말하자면-.

'마나에 상응하는 성질이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건 밝혀지지 않은 마나의 성질이었다.

괜히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성질에 꽂힌 게 아니었다.

마법에서 마나는 불변이었다. 획으로 성질을 바꿔도 절대적인 마나는 사라지지 않는 불변의 것이었다.

그런 절대적인 마나가 타서 사라지다니-.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마법계를 뒤흔들만한 존재였다.

'늙은이들의 흥미를 끌어낼 주제고.'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늙은이들을 아주 단단히 꿰어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불어 그게 마나의 성질이라면-.

'마법으로 만들 수 있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나를 불태우는 그 성질을 알아내서 다룰 수 있다면, 멸망한 4대 마탑의 마법보다 혁신적일 게 분명했다.

아니,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건 마법 역사를 통 틀어도 전례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게 불러올 파장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탑의 노인네들이 눈 뒤집힐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북부로 넘어온다고 할 수도 있겠군.'

과장이 아니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이제껏 마법의 근간이었던 마나의 개념 자체를 부수는 거였으니까.

다만,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까다롭고 어려웠다.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손을 잡았던 갈라하드조차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였다.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했다.

'때로는 무식한 게 가장 빠른 길이니까.'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예의 퀭한 마법사 둘이 옆에 섰다. 그 뒤로 진지한 얼굴의 그웬이 자리했다.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친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실험."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가리키고-.

"천벌."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앙!

번개가 가득 내려쳤다.

아드리안나의 투구가 달그락거렸다.

길버튼은 상황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갈라하드라지만, 아드리안나에게 웃으며 마법을 퍼붓다니-.

잠시 고민하던 길버튼은 괜히 몸이 쑤셔서, 지팡이를 든 데미안의 목을 잡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

'······.'

아드리안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주변은 엉망이었다. 불에 탄 흔적과 뾰족한 뭔가 박힌 흔적, 뒤엎어진 곳까지-. 엉망이라는 설명으로 부족할 정도였다.

그 원인은-.

"마흔두 번째 실험, 천벌."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건너편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평소와 달리 활짝 웃고 있었다.

정말 즐거워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연구하는 중이라는 건 이해했다.

다만-.

'이게 무슨······.'

앞에 떨어지는 번개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연구하겠다고 마법을 연신 떨어뜨렸다.

그중 어떤 것도 아드리안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지만-.

'저렇게 환히 웃을 수 있었다니.'

자신에게 마법을 퍼부으면서, 저리 환하게 웃다니-.

'너무······.'

아드리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모··· 못해요! 이제 끝!"

갈라하드는 그웬이 울먹이며 엎어지고 나서야 멈췄다. 갈라하드는 곧장 옆의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결과는?"

"말씀하신 대로 기록했습니다-."

갈라하드가 마법사들이 건네준 종이를 확인했다.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오러를 가벼이 일으켰다. 얼마 없던 온기가 가벼이 흩어졌다.

갈라하드는 최선을 다해서 아드리안나의 저주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아드리안나가 겪었던 일에는 더한 대우도 있었다.

[저주 받은 년!]

아드리안나는 괜히 투구를 매만졌다.

그때, 갈라하드가 성큼 다가왔다. 시원한 미소가 가득했다. 갈라하드가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뭔가를 내밀었다.

괴상한 문자가 가득 적힌 종이였다. 아드리안나는 투구를 뒤로 넘기고 종이를 살폈다.

진지하게 읽었지만-.

"모르겠습니다."

"아, 자네 성질의 작용에 관해 연구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성질은 마나가 강할수록 더 강하게 작용하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생각했네. 만약 마나 농도가 약해진다면?"

"······제 성질도 약해진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대단하군."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여기서 문제. 자네의 성질이 마나의 농도에 영향을 받는 게 뭘 뜻하겠나?"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아드리안나를 가리켰다.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눈썹이 구겨질 정도로 숙고했다.

다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모르겠습니다."

"답은 간단하네. 마나도 자네의 성질에 작용한다는 거지."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가벼운 바람이 아드리안나의 머리를 스쳤다.

"자네는 불이고, 마나는 장작일세. 자네의 성질이 강한 건 이곳이 농도가 짙은 북부기 때문이지. 이곳보다 배는 농도가 낮은 중앙으로 가면, 자네의 성질은 반으로 줄 걸세. 그러면 남부는? 아예 없는 것과 다름없겠지."

갈라하드의 설명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남부로 가면 저주가 약해진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가득 올라갔다. 그 무표정이 깨지며, 절박함이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아드리안나의 평생을 괴롭힌 저주였다. 그녀만의 고통이라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을 불태우는 저주였다.

그런데 남부에 가면 저주를 없앨 수 있다니-.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절박함이 자리했다.

그때, 갈라하드의 미소가 사라졌다.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미소 대신 자리한 노한 기색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싸늘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찔끔 놀랐다. 그렇다. 괜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 저주가 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닙니다."

아드리안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 눈썹이 가득 내려갔다. 눈이 흔들렸다.

갈라하드가 성큼 다가왔다. 다리가 긴 갈라하드의 보폭은 길었다. 아드리안나의 뒷걸음질을 가뿐히 잡을 정도로.

갈라하득 성큼 가까워졌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갑주를 잡았다.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갈라하드의 눈동자가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자네의 성질은 저주가 아닐세."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아드리안나의 평생을 괴롭힌 성질이었다.

그런데 저주가 아니라니-.

"뭘 아신다고···!"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에 갈라하드가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사람은 자신에 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네. 타인보다 자신에 무심하지. 오죽하면, 자신을 알라는 말이 유명하겠나."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아드리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네는 자네의 성질이 저주라고 했지만, 그건 저주가 아닐세."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너무나 단단하여,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불이고, 마나는 장작이라고. 장작이 없어지면, 불이 어떻게 되겠는가?"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연초의 불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성질과 자네를 분리하지 말게. 자네는 마나가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는 물고기일세."

갈라하드의 확신이 아드리안나를 깊게 찔렀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차라리 저주라고 하는 게 더 나았다. 저주는 작은 희망이라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곧 아드리안나라니-.

애써 가지고 있던 작은 희망까지 짓밟는 말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주먹이 작게 떨렸다.

잔뜩 흔들리는 아드리안나와 반대로 갈라하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주 얄미울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저주라니. 어찌 그런 망발을 하나. 자네의 성질은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고, 놀랍네. 사랑스럽다는 단어로도 부족할 정도지. 단언컨대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하며, 또 값지지."

갑자기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아드리안나의 입이 벌어졌다.

방금 성질과 아드리안나가 같다고-.

그때, 갈라하드가 다시 성큼 다가왔다. 너무 가까웠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반드시 자네의 성질, 그 구석구석,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파악할 테니까."

목소리가 너무 단단했다. 작은 틈도 없었다.

눈이 너무 또렷하고 뜨거웠기에, 아드리안나는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스킨십을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시원한 바람이 아드리안나를 가득 두드렸다.

왜 갑자기 바람을-.

그때-.

볼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마나 농도를 극도로 낮춰 마법을 사용하면 자네의 성질이 약해지네. 응용하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갈라하드의 손이 아드리안나의 볼을 가벼이 꼬집었다.

"자네, 볼이 상당히 부드럽군."

성큼 다가온 거친 온기에-.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111화 큰 선물

'나쁘지 않군.'

북부로 온 뒤로 자제했지만, 갈라하드는 본래 마나를 매일 비웠다.

그건 여러 가지가 중첩된 일종의 강박증이었다.

처음에는 마법이 미친 듯이 재밌어서 한계까지 썼다. 그 방식이 무식하지만, 마법을 늘리는데 효율적이라는 걸 깨닫고 이내 습관으로 자리했다.

더불어 예정된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 비우기는 그런 것들이 뒤섞인 강박증이었다.

하지만 북부로 오면서 사정이 변했다. 갈라하드는 북부에서 마나를 비우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다.

'마족의 피.'

마족의 피에 농축된 마나는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갈라하드는 마족의 피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놓게.'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두근, 두근-. 예전이었으면 저항했을 고통의 알이 냉큼 생명력을 토해냈다.

'조금 부족한데. 이러면 재미가 없네만.'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고개를 젓듯 작게 뛰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저번 사건 이후로 고통의 알은 상당히 빠릿빠릿해졌다.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전부 뺏겼기 때문이었다.

그 꼴을 보고도 야망을 아직 포기 못 했는지, 아주 조금씩 꽁쳤다. 아기 손으로 훔친 것처럼 정말 조그마한 양이었지만-.

'자네, 또 장난질인가?'

고통의 알이 황급히 두근거렸다. 심장을 꾹꾹 눌렀다. 결백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저번에 고통의 알이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전부 꺼냈던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는 그를 바탕으로 마족의 피에서 나오는 생명력을 대략 계산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건 단순한 계산이었으니까.

'이것보다 더 나와야 하는데?'

고통의 알이 그대로 멈췄다. 작게 떠는 게 꼭 진저리를 치는 듯했다.

'이거 안 되겠군. 아드리안나에게 만져달라고 해야겠어.'

갈라하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통의 알이 황급히 심장을 꾹 잡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가져갈 양은 이제 내가 정한다고. 그런데 벌써 이렇게 장난치다니-. 우리 관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참 슬프군.'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흔들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세.'

진심이었다. 쓰임새 때문에 뒀지만, 통제가 되지 않으면 둘 필요가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다시 생명력을 뿜어댔다. 반성하는 걸 증명하려는지 필사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나머지는 자네 가지게나.'

원래 고통의 알에게 약속했던 것보다 반은 적은 양이었지만, 고통의 알은 작게 떨었다. 감동한 듯했다.

'그간의 정으로 봐준 걸세. 또 이러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열심히 심장을 눌렀다.

갈라하드는 생명력에 집중했다. 마나를 한계까지 압축하고-. 오른팔의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그에 압축된 마나가 생명력을 타고 피에 섞였다.

묘한 무게감이 심장을 타고 퍼졌다.

'성공했군.'

갈라하드는 눈을 천천히 떴다. 묘한 서늘함이 몸에 감돌았다.

피에 고농도의 마나를 섞는 건, 느낌이 상당히 묘했다. 단순히 마나가 짙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건-.

'마나와 가까워진 것 같군.'

갈라하드는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몸에 힘이 넘쳤다.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어서 마나를 움직였다. 안 그래도 빨랐던 마나의 흐름이 수월했다.

'마나를 다루는 게 더 쉬워졌다.'

마나 삽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큰 차이는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다루는 게 더 쉬워졌음을 분명히 느꼈다.

'이건 또 신기한 느낌이군.'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가득했다.

마나 삽입을 끝낸 갈라하드는 바로 보고서를 살폈다.

약혼식은 이 시간에도 다가오고 있었다. 쉴 시간이 없었다.

그 보고서는 아드리안나의 성질 연구 보고서였다.

아드리안나에게 백 번이 넘는 천벌을 떨어뜨린 결과물이었다.

천벌을 사용하는 이유는 눈에 잘 보이고, 농도를 원하는 대로 조절하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실로 놀라웠다. 이제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들면 더 새롭고 흥미로운 게 나왔다.

끝이 없는 난제의 향연이었다.

백 번 넘는 천벌을 사용한 결과는 의외로 단출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나를 불태우는 아드리안나를 마법으로 연구하는 것이니, 그저 무식하게 많은 표본으로 승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농도가 짙어지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단순히 그 농도에 맞춰서 정비례하는 게 아니었다. 특정 농도를 넘어가면 그 성질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지배자를 마주한 아드리안나가 폭주한 이유일 것이다.

'미끼로 쓸 정도의 정보를 만들려면, 천 번은 해야겠군.'

다행히 약혼식에는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듯했다.

천 번의 반복을 단순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갈라하드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웬이 탈진하는 것만 아니라면, 몰아서 할 수도 있었다.

지금도 하고 싶어서 몸이 달을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상황이 우습군.'

갈라하드는 매일 꾸준히 피의 마나 농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농도가 짙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그런 둘이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니-.

'싸구려 신파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군.'

답이 보이지 않는 관계였지만-.

갈라하드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좋았다.

'재밌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웃었다.

****

이곳에서 혼인은 큰 중대사였다. 동맹 중 가장 강력한 게 혈연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디 성 하나 가지고 있는 귀족들의 행사도 난리가 나는 마당이었다. 그 대상이 북부 대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번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의 약혼식은 성대할 예정이었다. 당장 북적이는 대공의 성과 그 초대 목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녀, 마탑, 왕국 연합, 다른 귀족들 그리고······.

'3황자가 온다고?'

뒤늦게 더해진 목록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와 3황자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이려다 실패한 놈이지.'

3황자는 그 성품이 포악한 자였다. 전장의 피로 공을 세우기에 평화를 혐오하는 이였다. 분란을 만들지 못해 안달난 이였다.

그런 3황자는 마족의 왕을 막는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니, 오히려 방해될 게 분명한 놈이었다.

그에 처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런 3황자가 북부로 온다니, 그것도 갈라하드의 약혼식에-.

'황녀 짓이군.'

갈라하드는 텁텁하게 중얼거렸다.

저번 선물로 갈라하드가 안 넘어오자, 새로운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갈라하드는 안쪽 주머니를 살폈다. 제일 깊은 주머니에서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황녀가 선물해준 손가락이 있었다. 3황자를 잡을 수 있는 무기였다.

물론, 이걸 3황자에게 내민다고 인정할 리는 없었다. 애초에 입증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건 갈라하드가 할 일이 아니었다.

황실은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매일 사람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고, 그 자리가 식기도 전에 새로운 이들이 들어오는 지옥이었다.

3황자의 목을 노리는 놈들이 많았다. 심지어 3황자의 인선에도 3황자를 노리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주 강력한 변수의 등장으로 계산이 어그러졌다. 그에 맞는 새로운 계산이 필요했다.

그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실을 떠난 지 제법 되었기에, 지금 상황은 몰랐다.

예전으로 가늠한다면, 저 손가락을 가장 알차게 쓰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2황자나 4황자.'

둘 중 누구에게 주든 깔끔하게 사용할 것이다.

다만, 갈라하드는 북부에 있었다.

당장 둘에게 접근할 수단이 없었다.

'아니, 여기 있군.'

갈라하드는 손에 들린 약혼식 초대 목록을 살폈다.

'왕국 연합? 그럴듯하지만, 다소 부족하다.'

오히려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허투루 쓰일 가능성이 있었다.

황녀가 제시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앰버르탄 백작이군.'

앰버르탄 백작은 4 황자의 줄이었다.

왜 앰버르탄 백작이 약혼식에 오나 해더니-.

'황녀 짓이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황녀는 아주 멋들어진 상을 차리고, 갈라하드에게 포크를 내밀고 있었다.

와서 한 입하고-.

사이좋게 황실로 돌아가자고.

순간 갈라하드의 흥미가 일어날 정도로 화려한 상이었다.

'지랄맞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삐뚤어졌다.

다만-.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그 모두를 더해도, 아드리안나보다 부족했다.

제국이나 황실, 권력 그런 것들도 중요했지만, 마족의 왕을 막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가장 중요한 건-.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실로 정직한 두드림에서 성품이 보였다.

'마침 왔군.'

문을 열자 예상대로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조금 가벼운 갑주를 입은 상태였다. 며칠 간의 실험에 복장이 변했다.

갈라하드와 마주한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올라갔다.

"아, 약속하신 시간이 됐는데 안 오시길래, 무슨 일이 있나 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중요한 건 아드리안나다.'

아드리안나를 연구할수록 확신이 더 커졌다.

다른 건 부수적일 뿐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부수적인 것들이 안 중요하다는 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네."

"······예? 아, 알겠습니다."

"고맙네."

곧바로 닫힌 문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벙끗거렸다.

장난인가 싶었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낯부끄러운 말을 잔뜩 하더니-, 오늘은 문전박대였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내였다.

'많이 바쁘신가 보구나.'

아드리안나는 조금 더 서 있다가 뒤로 돌았다.

****

"오늘은 혼자군."

퍼스트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감한 일이라서."

갈라하드의 대답에 비스듬하게 있던 퍼스트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 얼굴이 진지해졌다.

"자리 좀 비켜주게, 펌킨. 사내들의 대화니까."

퍼스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펌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갈라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음? 총각 연회를 논의하려고 한 거 아닌가?"

"총각 연회라니?"

"아드리안나와 같이 못 듣는 민감한 이야기-. 당연히 총각 연회 아닌가?"

"음, 기대한 듯하여 미안하지만 오답일세."

"그렇군."

추잡한 추리를 해놓고도 담담한 퍼스트에 펌킨의 얼굴이 대신 붉어졌다.

"약혼식 목록 입수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퍼스트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퍼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답지 않게 간을 보는군."

퍼스트는 잔뜩 신난 얼굴이었다. 갈라하드가 망설이는 것에서 뭔가 있음을 직감한 듯했다.

"자네, 내가 맡았던 임무 중에 가장 큰 게 뭔지 아나?"

퍼스트는 갈라하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끄덕였다.

"황녀 살리기였지."

퍼스트의 당당한 긍정에-.

'그걸 네가 안다고 하면 안 되지!'

펌킨은 이마를 착! 하고 쳤다.

원칙적으로 요원의 임무는 극비였다. 같은 요원이라도 절대 열람할 수 없었다. 거기에 갈라하드는 최상위 요원이었다.

갈라하드의 임무는 극비 중의 극비라는 이야기였다.

그를 알고 있다는 건, 아비인 국장에게 갈라하드에 관한 정보를 받았다고 실토한 셈이었다. 왜 저리 당당한지-.

"그러면 설명이 쉽겠군."

다행히 갈라하드는 지적하지 않고 고개만 까닥였다.

"나도 황태자의 호위를 맡은 적 있다."

"오, 대단하군.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황녀 살리기는 말 그대로 황녀를 살리는 게 목표였네."

갈라하드의 담담한 설명에 퍼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으로 구하는 건 그리 오래 안 걸렸네. 문제는 그래봤자 결국 죽은 목숨이라는 거였지. 황실은 끈이 없으면 쓸리는 급류니까."

갈라하드가 연초 연기를 길게 뱉었다.

"급류에 쓸려나가지 않도록 제법 많은 투자가 있었네. 그 과정에서 정보국의 생각이 변했지."

"탐이 났겠군. 투자에는 실적이 따라야 하니까."

"그래, 황녀를 실세로 올리면, 정보국의 권력이 좀 더 강해질 걸 노렸지. 혹은 더 높이 올라가거나."

'더 높이-?'

황녀보다 높은 곳은 몇 없었다. 펌킨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갈라하드와 퍼스트는 담담히 대화 중이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정보국이 반란을 꾀했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큰 비사였다.

"성공을 목전에 뒀었네. 의자에 앉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로 향하는 계단을 밟은 수준까지는 갈 수 있었지."

황제가 의자라면, 계단은 승계 순위일 것이다. 실제로 황녀는 꽤 높이 올라갔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왜 실패했지?"

퍼스트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척하더니만-. 하긴 반란에 관한 정보를 남겼을 리가 없었다.

"황녀가 겁이 많았네. 목전에서 포기했지."

갈라하드의 대답은 담담했다. 반란에 관한 이야기를 어찌 저리 침착하게 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신기하군. 겁이 많은 여인으로는 안 보였는데."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국장이 바뀌었군."

갈라하드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순간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퍼스트가 실수했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뭐지? 자랑인가? 나도 황태자의 호위를 맡은 적 있다."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최근 왕국 연합과 제국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알고 있나?"

"황녀의 약혼자가 살해당해서지."

"정답일세. 왕자를 누가 죽였는지는?"

전보다 더한 정적이 자리했다.

퍼스트의 눈이 깊어졌다. 펌킨은 귀를 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3황자겠군."

"정답일세."

3황자-. 펌킨은 작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퍼스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꼭 맛있는 먹이를 본 맹수처럼-.

"3황자를 잡을 무기가 있나 보군."

갈라하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연합과의 관계도 돌릴 수단이지."

갈라하드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그마한 상자였다. 아주 귀중한 게 들은 게 분명한-.

상자에 든 건 보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가락이었다. 무슨 처리를 했는지 썩지 않은-.

"이런."

퍼스트가 작게 탄식했다. 그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가 있었다.

"황실의 똥 같은 새끼."

퍼스트의 거친 욕설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그냥 손가락인데, 왜 저런 격한 반응을-.

"그래, 참 똥 같은 놈이지."

그때, 갈라하드가 끌끌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똥이 황제가 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퍼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3황자를 직접 처리할 수는 없지만, 조금 밀 수는 있지. 그걸로 정보국의 영향력을 키울 수도 있겠고."

갈라하드가 까닥거렸다. 퍼스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대화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다만, 나는 북부에 묶인 몸이라서 말일세."

"음? 이걸로 다시 정보국에 갈 생각이 아니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약혼식을 앞둔 몸일세."

갈라하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군. 대가는?"

"나중에 나와 일 하나 같이 하지."

퍼스트가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얼마든지."

"좋군."

둘이 가벼이 손을 잡았다. 갈라하드는 방금의 대화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차를 홀짝였다.

펌킨만 달달 떨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 꼭 황제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퍼스트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람 일은 모르지 않나."

"그렇지."

퍼스트는 끄덕였지만, 펌킨은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무엇보다 저 부탁이라는 게 불안했다.

퍼스트는 갈라하드에게 환장한 놈이었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수준으로 환장했다. 갈라하드가 어떤 부탁을 해도 경쟁이라며 들어줄 것이다.

그런 퍼스트에게 굳이 부탁을 맡기다니-.

괜히 서늘했다.

"원래 여기 반지가 껴 있었나? 오, 리본도 했었군."

퍼스트가 손가락을 여기저기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아, 반지."

갈라하드가 연초를 떨어뜨렸다.

****

"아버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활짝 웃는 황녀에 앰버르탄 백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녀의 손에 들린 건 고운 천이었다.

이제 목을 매라는 건가-.

'그분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앰버르탄 백작은 입술을 씹었다.

그때, 황녀가 손을 부드러이 움직였다.

"이렇게."

제 가슴을 본 앰버르탄은 눈을 찡그렸다.

왜 자신에게 리본을-?

"와, 어울리네요."

112화 자밋

대공의 참모진은 성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북부의 예산은 부족했다. 북부의 날씨처럼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그 없는 재정으로 북부를 먹여 살려야 했기에, 대장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일을 잘할수록 오히려 더 욕을 먹었다. 그러니 참모진의 성깔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대장은 참모를 '괴팍하고 쪼잔한 계산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 참모진이 지금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약혼식까지 치른다면, 갈라하드 대장이 확실히 이쪽으로 온 거겠지요?"

"당연하지! 혼인은 중대사 아닌가! 후후."

곳곳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약혼식 예산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남는 예산 다 부어야지! 최대한 화려하게 해!"

"맞네! 우리의 진심을 보여······. 아니, 북부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지!"

"제국 측과 왕국 연합이 오니까. 확실히 해야 한다."

참모진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등장했다.

"내가 좀 늦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우리가 빨리 도착한 거지요!"

머리가 벗겨진 참모의 넉살에 다른 참모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맙네."

갈라하드는 자연스레 상석에 앉았다. 본래 대공이 앉는 자리였지만,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빈 자리가 거기밖에 없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마석양이 확연하게 늘었소."

참모 하나가 돌멩이를 내밀며 웃었다. 테오도르에게는 그저 빛나는 돌멩이였다.

'저게 그렇게 비싸다니-.'

이제 마석의 가치를 알았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마석은 마법사가 캐야 그 가치가 보존됐다. 마법사를 배척했던 북부였다. 운용할 마법사가 없었다.

설령 마법사를 구해도 문제는 남았다.

"물량이 꽤 쌓였습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마석의 처리였다. 제국의 대북 제재를 뚫고 마석을 팔아줄 간 큰 놈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처리하기에는 양이 많았다. 또 제대로 된 값을 못 받을 게 분명했다.

"약혼식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올 걸세. 그들을 통해 유통할 생각이네."

약혼식을 이용하다니-. 참모진이 작게 놀랐다.

"마탑은 저희와 거래하지 않으려 할 겁니다."

"맞는 말일세. 제국의 제재에 북부와 직접 거래하는 건 그들에게도 부담스럽지."

"그렇다면-."

"그들은 정오의 마탑과 거래하는 걸세. 제국은 마탑에 관대하네. 세금 감면 혜택도 있고, 다양한 편의를 봐주지. 물론, 정오의 마탑과 바로 거래하는 건 아니지."

"정오의 마탑과 거래하는 게 아닙니까?"

"북부를 어지럽혔던 놈들 있지 않나? 그들과 거래하는 걸세."

아래에 한 단계를 더 두겠다는 이야기였다. 제법 그럴듯했다.

"그들을 묶은 단체가 하나 있네. 그 이름이······."

갈라하드가 슬쩍 뜸을 들였다. 참모진이 숨도 조심히 쉬면서 기다렸다.

"여명이었군."

여명? 참모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반대로 테오도르의 얼굴은 굳었다.

"아는 눈치군."

갈라하드의 눈이 테오도르를 응시했다. 테오도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명이 정오의 마탑을 세워서,북부를 현혹한 걸세. 마석의 가치를 모르는 북부에게 마석을 헐값에 구하여 비싸게 팔고 모은 재산으로 북부의 혼란을 기하는 놈들이지. 이해되나?"

갈라하드의 말이 부드럽게 끝났다. 참모진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마석을 모르는 북부를 속여서 저렴한 값에 마석을 가져와, 제국에 넘긴다-. 그렇게 축적한 돈으로 북부의 혼란을 노린다니.

"제국은 마석에 혈안이 되어있네. 품질이 뛰어난 북부의 마석을 헐값에 가져와서 제국에 공급하고 그 돈으로는 북부의 혼란을 의도한다? 이런 명분이라면 장담컨대 제국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걸세. 놈들은 반동분자도 알뜰살뜰 이용하거든."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웃었다.

설명을 들었는데도 복잡했다. 다만, 이해를 못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그럴듯하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북부에 혼란을 가져오실 겁니까?"

바보 같은 질문인 걸 알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길버튼 경 같은 소리인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거라고."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미소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길버튼 경?'

뜬금없는 이름에 참모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제국의 눈을 피해야 하니 값을 바로 줄 수 없네. 그를 세탁하는 과정도 필요하지. 그건 추후에 논의하겠네."

이어진 갈라하드의 말에 참모진의 눈이 커졌다.

칼자루를 갈라하드가 쥐고 있겠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상당히 건방진 발언이었지만-.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자력으로는 마석의 판로를 뚫을 수 없었다.

애초에 갈라하드가 제시한 금액조차 절실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어차피 결혼할 사이니까.'

그게 그들을 안심시켰다.

"좋군, 마탑이 빨리 완성되는 게 관건일세. 약혼식 때까지는 그럴듯한 모습이 나와야 하네."

갈라하드가 뭔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거대한 자루였다.

자루를 열어본 테오도르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자루 안에 금색이 가득했다. 전부 금화였다.

"이건 계약금일세."

정확히 연초 하나를 다 핀 갈라하드는 방을 떠났다.

정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레몬 향이 옅어질 때쯤, 참모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마탑의 건설에 집중하자는 쪽과 약혼식이 더 화려해야 한다는 쪽이 대립했다.

그에 테오도르는-.

"둘 다 하는 것이오. 우리에게는 금화가 있으니까."

테오도르는 자루를 흔들며 웃었다.

참모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

"······여명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격하게 떨렸다.

"자네, 여명에게 습격당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에 관해 말해줄 수 있나?"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아드리안나의 입이 잠시 벙끗거리다가 열렸다.

"······예. 여명은 저를 공격했던 단체 중 하나입니다. 제가 부대장으로 있을 때, 마경에서 습격 당했습니다. 그에 전임 1대대 대장이 마경에서 사라졌고-."

아드리안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의 설명을 떠올렸다.

[전임 1대대 대장이 마경에서 실종됐습니다. 아드리안나님이 부모처럼 따르던 이였다더군요.]

'반감이 크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와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여명은 아드리안나의 죽음을 원하는 게 아닌가?'

여명이 이번에 6대대 아래에서 벌였던 일의 목적은 북부의 마나 농도 증진이었다. 마족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에 반해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지녔다. 여명이라면 응당 아드리안나의 죽음을 원할 가능성이 컸다.

다만, 이번 지배자 때도, 여우 가면도 아드리안나를 직접적으로 노리지 않았다.

심지어 마경에서도 전임 대장이 실종되고 아드리안나 혼자 생존한 거 아닌가.

그건 결과적으로-.

'덕분에 아드리안나가 대장이 됐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모든 일의 의도는 그 결과를 보면 유추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드리안나가 승진했다.

"마경에서 혼자 헤맨 게 그때인가?"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썹이 눈에 닿을 정도로 내려갔다. 눈이 작게 흔들렸다.

"힘들었겠군."

아드리안나는 대답 대신 칼자루를 잡았다. 그 손이 떨렸다. 흰색 오러가 일렁였다. 그건-.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분노였다. 아드리안나는 좌절 대신 타올랐다.

"전임 1대대 대장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나?"

"예. 살아있으실 겁니다."

음-. 마경에서 그 오랜 기간 있다면, 높은 확률로 죽었을 텐데···. 아니, 살아있으면 그게 더 문제였다.

갈라하드는 입 끝까지 올라온 반박을 애써 삼켰다.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이 반짝였기에.

"그래서 주기적으로 마경을 들어가는 건가?"

아드리안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끄덕이는 목이 굳은 것처럼 뻣뻣했다. 힘든 이야기인 듯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찾아줄 테니. 나는 모든 걸 다 잘하지만, 사람 찾는 건 특히 잘한다네."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눈썹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씹었다.

"······마경은 위험합니다."

본인이 절실해도 타인에게는 전가하지 않다니-. 참으로 정직한 이였다.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자네와 같이 갈 텐데 뭐가 위험한가. 마경보다 자네 없는 이곳이 더 위험하네."

진심이었다. 혹시라도 아드리안나가 잘못되면 북부에서 이제껏 쌓은 게 전부 물거품이 된다. 마족의 왕을 막을 수도 없었고-.

차라리 아드리안나와 같이 마경에 들어가는 게 더 안전했다.

"나만 믿게."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속삭였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잠시 굳었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예."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그 눈이 반짝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 다시 가서 서게."

뒤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에 아드리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주변에 흔적이 가득했다. 하도 천벌을 떨어뜨린 까닭이었다.

"삼백열두 번째 실험."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천-."

"대장님!"

그때, 옆에서 길버튼이 뛰어왔다. 길버튼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가득했다.

"대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자밋이라는 여인인데, 상당한 미인입니다."

길버튼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자밋이 직접?'

자밋은 현장 요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밋이 여기까지 직접 오다니-. 그 이유는 뻔했다.

'이런···. 정보국이 날 완전히 버렸군.'

갈라하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앞에 있던 길버튼은 의문이 들었다. 여인의 이름을 듣고 갈라하드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니-.

'아하.'

길버튼은 작게 탄식했다.

"전에 만났던 여인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네."

갈라하드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진짜 전 애인인가?"

길버튼은 작게 중얼거렸다.

"길버튼 경."

"예, 아드리안나님."

"대련하겠다."

"지금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아드리안나가 묘하게 서늘했지만, 길버튼은 냉큼 검을 뽑았다.

"기사-! 길버······."

길버튼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닥을 굴렀다.

"아니, 아직 시작한다는 말도-. 으윽!"

****

자밋은 모닥불 앞에 정자세로 앉았다. 등 받침에 등을 기대지 않고 손에는 잔을 비스듬히 들었다. 주황색이 자밋의 얼굴을 훑었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또각또각. 여유로우면서도 일정한 보폭에서는 품위까지 풍겼다. 보지 않아도 그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자밋, 오랜만이군."

갈라하드가 어깨의 눈을 털며 말했다.

북부로 간지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갈라하드는 그대로였다.

깔끔한 정복에 가지런히 넘긴 머리, 곧은 자세까지-. 북부의 추위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듯 고고했다.

"오랜만이에요."

자밋은 입꼬리를 올렸다. 갈라하드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밋의 뒤쪽에 멈췄다.

"요원 갈! 아니, 제임스입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제임스가 힘찬 경례를 올렸다.

"살아남았군."

"예! 충고 덕분입니다!"

갈라하드의 시선이 빠르게 훑었다. 제임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습관이었다.

갈라하드는 자밋의 앞에 앉았다. 자밋은 그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갈라하드의 눈은 부드러웠지만, 서늘했다. 깊어서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살이 좀 빠지셨네요."

"북부의 음식이 입에 안 맞더군."

갈라하드가 연초를 입에 물었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내 은퇴 계획이 잡혔나?"

자밋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갈라하드는 상황을 파악했다. 자밋은 순순히 끄덕였다.

"예, 팀까지 꾸렸어요. 은퇴 목적으로는 역대 최고 규모예요."

"역대 최고 규모의 은퇴 팀이라. 화려하군."

갈라하드가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약혼식에 세력이 몰리니, 그 앞에서 쐐기를 박을 생각인가 봐요."

"그래, 국장답군. 부국장님 몸은 성하신가?"

"예, 뭐 담배 뻑뻑 피고 화내고-. 평소랑 같죠."

"이런- 나이 생각하셔야지."

"그러니까요. 나이 들어서 이렇게 먼 곳까지는 못 오신대요. 제가 대신 왔어요."

자밋이 손짓했다. 그에 제임스가 큼지막한 가방을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갈라하드의 눈이 커졌다. 꾸민 것이 아닌 진짜 반응이었다. 자밋은 입꼬리를 올렸다.

"선물이에요."

갈라하드가 익숙하게 가방의 윗부분을 매만졌다.

"아, 마도구를 대야 열려서요. 정보국에서 이번에 도입한 보안 체계인데-."

딸깍, 자밋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방이 열렸다.

"확실히 전보다 까다로워졌군."

갈라하드의 농담에 자밋은 쓰게 웃었다. 꺼내던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큼지막한 가방에 담긴 건 빼곡한 문서들이었다. 부국장과 자밋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집약한 문서였다.

그러니까 저건-.

"작은 정보국이군."

갈라하드가 작게 탄식했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 가방의 가치는 갈라하드가 가장 잘 알았다.

"엄청난 선물이군."

갈라하드가 꾸밈없이 웃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대한 사내가 제 어깨에 눈을 털며 들어왔다. 퍼스트와 펌킨이었다.

"자밋이군."

"오랜만입니다. 자밋."

퍼스트 뒤의 펌킨이 손을 흔들었다. 자밋은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자밋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퍼스트가 눈을 찡그렸다. 순간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었다. 펌킨이 칼자루를 잡았다.

"휴가인가?"

퍼스트의 뭉뚱그린 물음에 자밋은 작게 끄덕였다.

"확실히 북부는 매력이 있지."

퍼스트가 빈자리에 앉았다. 가방에 담긴 문서를 본 퍼스트의 눈이 커졌다.

갈라하드가 가방을 닫았다. 가방을 옆에 두고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여전히 여유로움이 보였다.

"은퇴인가?"

퍼스트가 텁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는군."

"이런 망할 것들이-."

퍼스트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퍼스트의 손을 타고 오러가 뻗쳤다. 주변 공기가 뜨거워졌다.

"감히."

퍼스트가 가득 분노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보국 요원의 은퇴는 단순한 은퇴가 아니었기에-.

요원의 은퇴는 완벽한 인멸이었다.

갈라하드의 모든 흔적이 지워질 것이다. 아니, 은퇴 팀이 꾸려졌으니, 이미 지워졌을 것이다.

갈라하드가 쌓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작 갈라하드는 여유로웠다.

오히려 옅게 웃고 있었다.

마치 올 게 왔다는 듯-.

이해할 수 없었다. 은퇴 팀이 꾸려진 상황이었다. 더불어 이 가방은 부국장의 마지막 도움이자, 이제 그를 도울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완전히 끈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렇게 웃다니-.

"어째서 웃는 거지! 분하지도 않나! 갈라하드!"

퍼스트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배해졌다.

자밋 앞을 제임스가 어설프게 막아섰다.

"분하다니?"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에 퍼스트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네 모든 기록이 지워질 것이다. 네가 정보국에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겠지. 그간 네가 세웠던 공로와 업적, 모두가 부정 당할 것이다."

"알고 있네. 내가 하던 일 아닌가."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한 대답에 퍼스트의 어깨 위로 불이 가득 일렁였다.

"그런데 어찌!!"

"그러니까 이제 요원이 아니라는 거군."

"······다른 계획이 있군."

냉정을 찾은 퍼스트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에 갈라하드가 작게 끄덕였다.

"나는 요원 생활을 관둘 생각이 없네."

"당연하지. 나와 승부를 끝내야 관둘 수 있다."

"내가 전승이지 않나? 뭐, 아무튼."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작게 튕겼다.

"이미 은퇴 당했지만, 나는 아직 요원을 관둘 생각이 없으니-. 이거 어쩔 수 없군."

내용과 달리 갈라하드는 하나도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옅게 웃고 있었다.

"정보국을 새로 하나 만들어야겠어."

정보국이 무슨 가게도 아니고 새로 만들겠다니···.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문제는 말한 사람이 갈라하드라는 거였다.

그때, 퍼스트가 벌떡 일어났다. 퍼스트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를 본 펌킨은 비명을 질렀다. 저 입을 막아야 했다.

다만, 퍼스트의 지랄은 펌킨의 손보다 빨랐다.

"부국장은 나다!!!"

퍼스트가 우렁차게 외쳤다.

113화 개업

"부국장은 나다!!!"

퍼스트가 우렁차게 외쳤다.

"자··· 잠깐!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펌킨은 황급히 소리쳤다.

퍼스트의 지랄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번 건 이야기가 달랐다.

갈라하드가 새로 차리는 정보국의 부국장이 되겠다니-.

명백한 항명이었다. 정보국에 대한 반란이었다. 은퇴 당할 게 분명했다.

간단히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펌킨은 다급히 퍼스트를 질질 끌었다. 퍼스트가 뜨거운 콧김을 뿜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부국장 자리는 양보할 수 없다."

"뭔- 시발, 미쳤습니까?"

"미치다니. 나는 지극히 정상일세."

펌킨의 눈이 와락 구겨졌다.

"정보국을 새로 차린다니-. 정보국이 무슨 용병대입니까? 걸리면 무조건 은퇴당합니다."

"은퇴? 갈라하드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은퇴시킬 수 있지?"

퍼스트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펌킨을 보며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북부에 와서 더 강해진 퍼스트였다. 갈라하드가 아니라면 정보국에서 퍼스트가 제일일 게 분명했다.

다만-.

"아니, 그러면 나는- 시발."

"내가 책임지겠다."

퍼스트의 단단한 대답에 펌킨의 눈이 씰룩해졌다.

"내 연금은-. 조금 유행이 지난 마도구를 싸게 구해서 꽉 채운 내 이층집은! 해가 중간에 걸릴 때쯤 늦게 일어나서 집 앞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하는 평안한 노후는!"

"꿈이 상당히 구체적이군. 호봉은 옮겨줄 걸세. 그렇지 않나?"

퍼스트의 물음에 갈라하드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봉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은퇴 팀을 계속 보낼 텐데, 이제 평생을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펌킨의 말에 퍼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삐뚤어진 입꼬리가 불안했다.

퍼스트가 성큼 다가왔다. 그 눈을 타고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퍼스트가 속삭였다.

"정보국에 남으면? 갈라하드 은퇴에 동원될 텐데, 갈라하드의 은퇴 작전에 투입될 생각인가?"

퍼스트의 목소리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맞는 말이었다. 북부에 있으면, 갈라하드의 은퇴에 동원될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를 은퇴시킨다-?'

갈라하드는 후환을 남기지 않았다. 엮인 자는 모두 처리했다. 요원들이 괜히 갈라하드 이름에 벌벌 떠는 게 아니었다.

갈라하드와 같이 편에 서느냐, 갈라하드의 적이 되느냐-.

정보국과 갈라하드의 싸움이었다. 일대 단체였으니 그 결과가 뻔해야 했다.

정보국을 선택하는 게 당연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적이 되라고?'

죽어도 선택하기 싫은 선택지였다.

그렇다고 갈라하드의 편에서 정보국과 전쟁을 한다?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왜 이런 좆같은 선택을-.'

펌킨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퍼스트를 노려봤다.

"진짜 정보국을 세우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펌킨, 정보국이라는 게 뭐지?"

퍼스트의 물음에 펌킨은 눈을 구겼다.

"제국의 영광에 드리운 그림자입니다."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정보국은 제국의 영광에 드리운 그림자였다. 명예도 이름도 남지 않았다. 그저 제국의 영광을 지킬 뿐이었다.

그때, 퍼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퍼스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니라고?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정보국은-."

퍼스트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어서 갈라하드를 가리키며-.

"나와 갈라하드가 있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정보국이다."

단호하게 말했다.

꽤 멋있는 대답이었지만-.

'······너는 왜?'

물론, 퍼스트는 유능한 요원이었다. 갈라하드 다음 가는 요원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그 궤가 달랐다.

갈라하드는 요원 사이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마도구 만드는 게 전부였던 마법사로서 현장에서의 쓸모를 증명했다.

아무리 퍼스트가 뛰어나도 갈라하드와 묶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왜 자기 이름을 앞에 넣어?'

펌킨은 질색했다.

그때, 퍼스트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걱정하지 말게. 정보국 전체와 싸우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펌킨의 물음에 퍼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상당히 띠꺼운 미소였다.

"국장과의 전쟁이지."

퍼스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상당히 합리적인 말이었다.

위쪽에서 낙하산으로 꽂은 국장이었다. 국장은 정보국이 더는 독립적인 단체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거기에 국장은 현장에 대해 모르면서 실적 압박만 넣었다. 요원들 사이에 국장에 관한 반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국장이 당신 아버지잖아.'

펌킨은 입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아, 은퇴 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죽기 전까지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테니."

갈라하드가 가만히 연초를 털며 말했다.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국장의 목표는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가 죽기 전까지, 다른 곳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갈라하드가 은퇴당할 경우였다.

'······그 갈라하드가 은퇴당한다고?'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네의 선택일세."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말했다.

펌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밋조차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담담한 건-.

"부국장은 나다."

퍼스트였다.

펌킨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내 겨우 진정한 펌킨은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멤버가 화려하군.'

모인 이들의 면면이 상당했다.

갈라하드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퍼스트도 있으니, 현장 능력은 확보된 거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자밋도 있다.'

자밋은 신입의 요원 명을 정해주는 이였다. 그렇기에 신입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이가 자밋이었다.

혹자는 자밋이 그저 신입 이름이나 지어주는 이로 알지만, 실상은 달랐다.

자밋은 부국장의 측근이자, 정보국의 참모이며 내실이었다.

'정말 정보국이잖아.'

펌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새로 지은 정보국 이름은 뭔가?"

퍼스트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었다.

"이왕 할 거면 크게 하는 게 좋겠지."

"당연한 말을!"

퍼스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 즐거움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음, 대륙 정보국일세."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선언했다.

대륙 정보국이라니-. 고작 이 인원으로 말하기에 상당히 큰 단어였다. 정작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부국장인 나도 동의하네."

"맞아요. 정보국을 유지하는 게, 명분으로 좋으니까요."

"그러면 대륙 정보국으로 하지."

대륙 정보국이 신설됐다.

'······이렇게 쉽게?'

펌킨이 입을 벙끗거릴 동안에도, 셋의 대화는 막힘 없이 이어졌다.

"대공 산하로 들어갈 건가?"

"아니, 대륙 정보국은 독자적인 집단일세."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거네요."

"하하! 그렇게 하면 왕국 연합 쪽도 건드려볼 수 있겠군! 그래! 제국은 너무 작았다!"

퍼스트의 호탕한 웃음에 펌킨은 정신을 차렸다.

"자, 첫 임무를 내리겠네."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모두가 갈라하드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륙 정보국이 신설된 듯했다.

첫 임무는 상당히 중요했다.

앞으로 조직의 성질을 결정지을 테니까. 첫 임무는 역사적으로 기록될 게 분명했다.

"첫 임무는-."

갈라하드의 목소리에 다들 집중했다.

"내 약혼식일세."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첫 임무가 약혼식?'

펌킨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해 못했지만, 다른 이들이 끄덕였기에 펌킨도 따라서 끄덕였다.

이러면 최소한 반은 가니까.

*

"여기. 초대 목록에 올라온 이들의 정보예요."

자밋이 내민 종이에는 갈라하드에게 필요한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자밋이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방금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정보를 정리한 것이다.

부국장이 괜히 자밋을 아끼는 게 아니었다.

그런 자밋을 갈라하드에게 보냈다는 건-.

'부국장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겠지.'

갈라하드는 텁텁한 입맛을 다셨다.

"임무 목표는?"

퍼스트가 짤막하게 물었다.

이런저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얽힌 약혼식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약혼식을 무사히 끝마치는 게 최우선 목표일세."

갈라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쉽지 않겠군."

퍼스트가 자밋이 건네준 종이를 살피며 말했다. 갈라하드가 끄덕이자, 퍼스트가 말을 이었다.

"먼저 왕국 연합부터-. 여기 자네가 장기 임무 했던 곳이지? 아직 자네를 찾고 있군. 심지어 정보국에도 접근했다. 집착이 대단해."

"제가 확인했어요. 임무 때는 가명을 써서 아직 이름을 확인 못 한 거 같지만-. 그것도 곧이죠."

퍼스트의 말을 자밋이 보충했다. 그에 퍼스트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탑은 말할 것도 없지. 자네를 데려가려고 혈안이 됐을 걸세. 그들에게는 북부로 망명 당한 세기의 천재로 보일 테니까."

"마탑에 관해 정리한 부분을 참고하시면 돼요."

자밋의 말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였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앰버르탄 백작과 황녀지."

"앰버르탄 백작을 움직인 게 황녀 같아요. 3황자는 왕국 연합 참가 소식에 따라온 것 같아요. 분란 못 일으켜서 안달 났으니까요."

"일 리가 있군."

자밋의 추리에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쉽지 않은 약혼식이겠군."

퍼스트가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둘의 반응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성공적인 약혼식이 주된 목표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 외에도 해야 할 게 있네."

갈라하드는 둘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마탑과 마석 판로를 뚫어야 하네. 거기에 왕국 연합 측과 정보국 협약을 맺고, 3황자도 기를 꺾을 필요가 있지."

모두의 얼굴이 묘해졌다.

단순히 약혼식을 무사히 치르기도 어려운데, 추가적인 목표가 있다니 당황할만했다.

묘한 정적 속에서-.

"끝-내주는군!"

퍼스트가 광소를 터뜨렸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네요."

자밋은 다시 자료를 정리했다. 퍼스트는 펌킨을 데리고 바로 일어났다.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기에, 뭔가 지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할 일을 정확히 알았다.

그때-.

"저······ 저희는···?"

어수룩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석에 두 명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핸섬과 제임스였다. 둘 다 얼굴이 푸르죽죽했다.

"아, 자네들도 들어오겠나?"

"여··· 영광입니다!"

둘은 울먹이며 끄덕였다.

****

'새로운 정보국이라니.'

핸섬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정보국이란 게 세우겠다고 세워지는 건가?

혼자 안가에 있어서 적적했던 핸섬이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걸 원한 건 아니었다.

그때, 제임스가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얼굴이 아직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숨을 천천히 내쉬게."

"후우-. 후우-. 후우!"

긴장한 신입 제임스를 보니, 핸섬은 괜히 침착해졌다.

"저- 정말 정보국을 신설한 거예요?"

"그런 것 같군."

"끄윽-. 저 작전과장님한테 허락 못 받았는데······."

허락이라니-. 지금 허락이 문제인가?

"허락은 필요 없지. 이미 새로운 정보국인데."

"아, 정보국 신설했지. 이거 반역 아니에요?"

"반역이지."

둘이 동시에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핸섬의 얼굴이 천천히 창백해졌다. 이어서 제임스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맙소사-."

둘은 동시에 마른 세수를 했다.

"저 아직 막내예요. 아직 폐급이라고 구박 받는다고요······."

제임스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핸섬은 그런 제임스를 위로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나는 안가 요원이다. 안가에 배치됐다는 건, 요원 생활 끝났다는 뜻인 거 알지?"

"예. 알아요."

냉큼 끄덕이는 제임스에 핸섬의 눈이 구겨졌다.

뭐 이딴 새끼가-.

"정보국 신설이라니. 이제 어떻게 해요?"

제임스가 다시 울먹거렸다.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상황이 상당히 어지러웠다. 다만, 어리숙한 애가 있으니 핸섬은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됐다.

"최선을 다해야지. 죽기 싫으면."

"최선··· 최선······. 알겠어요."

작게 중얼거리던 제임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눈이 다시 반짝였다.

이내 제임스가 호기롭게 말했다.

"또 알아요? 성공하면 우리도 과장 할 수 있을지?"

"그래, 그러면 우리가 창립 인원이 되는 거지."

"초고속 승진이에요. 좋았어! 열심히 해봐요!"

제임스가 안심하자, 이번에는 핸섬이 불안해졌다.

"감찰실에서 은퇴 팀을 꾸렸다는데, 괜찮을까?"

감찰실은 핸섬도 알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감찰실에서 팀을 꾸렸다니-.

갈라하드가 얼마나 대단한 요원인지 와닿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됐다.

"괜찮을 거예요. 저희 작전과장님이 매일 말버릇처럼 말했어요. 갈라하드님은 감찰실 요원도 두려워하는 특별한 요원이라고."

감찰실에서 두려워한다니-.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핸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자기 앞에서 감찰실 요원들을 처리한 적 있다고 했어요. 무기 없이-. 그저 손가락 튕기는 걸로. 저만 보면 맨날 그 소리 하세요."

겨우 진정한 제임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이들은 이미 다 떠나고 없었다. 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뭐 하죠?"

제임스의 물음에 핸섬은 잠시 고민했다.

"하던 거 하라고 했으니까-."

핸섬이 원래 하던 거라면-.

"보급으로 나온 달콤한 간식 모아두는 거랑 술집 가기인데, 뭐부터 하지?"

핸섬의 대답에 제임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괜히 안가로 보내진 게 아니네-.'

둘은 서로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

"북부라. 야만인에 걸맞은 황폐한 땅이군."

금색 망토를 둘러쓴 3황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방문을 원치 않는 듯 눈보라가 거칠게 휘몰아쳤지만, 그의 일렁이는 금색 오러를 뚫지 못했다.

"황자님-."

노인이 조심스레 3황자를 불렀다. 노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형님과 다르다."

3황자를 따라서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기사들이 기립하고 있었다.

제국의 검, 황실 기사였다. 그 뒤에는 제국군이 길게 나열해 있었다.

전쟁이라도 벌일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대 병력을 끌 수 있던 건, 전에 황태자가 험한 꼴을 본 덕분이었다.

3황자는 피에 굶주린 늑대였지, 호기에 눈이 돌아간 멧돼지가 아니었다.

"피를 흘리겠다면, 언제나 환영이다."

3황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노인은 뒤로 물러났다.

가까운 곳에 있던 마차의 문이 열리고, 화려한 미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향기가 없는 꽃, 황녀였다.

황녀는 원래 죽어야 했던 여인이었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안에 있거라. 네 목숨은 소중하니까."

3황자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황녀는 제국을 거역한 건방진 왕국 연합의 멱을 끊을 명분이었으니까.

"아, 드릴 선물이 있어요."

"선물?"

지긋이 웃는 황녀에 3황자는 눈을 찡그렸다.

같이 가겠다는 황녀를 받아준 건, 그 쓸모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물이라니-. 3황자의 손이 근질거렸다.

그때, 황녀가 뭔가 내밀었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그건 금으로 된 멋들어진 브로치였다.

번쩍이는 금이라는 게, 3황자의 마음에 들었다. 3황자는 금을 특히 좋아했다.

3황자는 브로치를 망토의 이음새에 찼다.

그 모양이 다소 특이했다.

'리본 모양?'

신기한 브로치군.

3황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진군한다."

3황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114화 싫어

"진짜 괜찮으신 겁니까?"

퍼스트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온 걸 확인한 펌킨은 슬쩍 물었다.

"괜찮다?"

"정보국 신설 말입니다. 그 상대가 국장님이지 않습니까."

"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진지하게 되묻는 퍼스트에 펌킨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잖습니까."

"아버지라."

퍼스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꼭 누가 배를 누른 듯한 소리가 났다.

이내 퍼스트가 제 머리를 뒤로 가득 넘겼다. 굵직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퍼스트의 호랑이 같은 눈이 펌킨을 응시했다.

"그래서?"

퍼스트의 반문에 펌킨은 잠시 입을 달싹거렸다.

상대가 아비인 게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퍼스트와 국장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한 적 없었다. 그저 사이가 안 좋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펌킨, 공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늙고 부식하여 썩는 걸 막기 위해서는 말이야. 그리고 국장은-."

다만, 지금 퍼스트의 눈에 떠오른 감정은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공정하지 못한 자다."

혐오였다. 그것도 지극한 혐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라는 말이 입 끝까지 올라왔지만, 펌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끄덕였다.

"자, 그러면 마석 작업부터 시작해볼까. 대륙 정보국의 자금줄이 될 것이니 제일 중요한 일이지!"

예의 허허로운 얼굴로 돌아간 퍼스트가 펌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펌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갈라하드가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까?"

"물론, 힘들겠지. 갈라하드 혼자라면-."

퍼스트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됐습니다. 뒷말 안 들어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퍼스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펌킨은 그런 퍼스트를 지그시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겠나. 사수 잘못 만난 내 탓이지-. 깊게 한숨을 내쉬던 펌킨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국장이 아니라 부국장을 한다고 한 겁니까?"

경쟁이라면 애초에 국장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게 맞지 않나?

그리 묻자 퍼스트가 입꼬리를 사납게 올렸다.

"나는 뒤에서 쫓는 게 체질이라."

퍼스트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하, 그래서 만년 2등이신 겁니까? 체질상?"

"펌킨!!"

터질 것처럼 붉어진 퍼스트에 펌킨은 황급히 뛰었다.

****

'마석 쪽은 퍼스트가 담당한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가벼이 중얼거렸다.

정보국 신설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정보국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은퇴 팀이 꾸려진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더불어 이곳이 북부라는 게 한몫했다. 제국의 손이 안 닿는 가장 깊숙한 곳이었으니까.

당장 갈라하드가 정보국을 차려도, 정리할 요원들 보내는 게 전부일 것이다.

북부로 버려진 게 오히려 좋게 작용했다.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저 환경을 잘 활용했을 뿐이었다.

"저는 그냥 휴가차 온 거였는데, 너무 당연하게 넣는 거 아니에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자밋이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거짓이었다. 갈라하드에게 정보 가방을 넘긴 순간부터 자밋은 돌아갈 수 없었다. 갈라하드가 정보국을 신설한 이유 중에 자밋도 포함이었다.

"부탁 좀 하겠네. 자네, 날 좋아하지 않나."

"그건 옛날에 끝났어요."

"이런 사랑이 어떻게 변하나. 서운하군."

"곧 약혼식 할 남자가 할 말은 아닌데요."

"식장에 들어갈 때까지는 모르는 법이지."

"어머, 능글 맞아라."

자밋이 빙글- 웃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미안하지만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차기 대공의 정적이 될 생각은 없거든요. 저는 길고 가는게 좋아서요."

"이런 아쉽게 됐군."

자밋의 투덜거림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여기 갈··· 제임스랑 핸섬은 현장 요원 체질이라서요. 사람이 좀 필요해요. 믿고 맡길 수 있는데, 머리 좀 굴러가는 인물로. 글자도 좀 알고, 숫자도 다룰 수 있으면서-."

자밋은 작게 손뼉을 쳤다.

"아, 요리도 잘하면 좋겠네요. 여기 요리가 너무 별로라서. 청소도 잘했으면 좋겠네요. 여기 너무 더럽지 않아요? 이것도 안가라고-."

갈라하드가 끌끌 웃자 자밋이 눈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에요. 그냥 머리 좀 굴러가는 놈으로-."

"아니, 마침 한 명 있네만."

갈라하드의 대답에 자밋은 눈을 찡그렸다.

뒷부분은 그저 농담하려고 던진 말이었다.

숫자도 다루고, 글도 알면서, 청소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인물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아, 악기도 잘 다룬다네."

갈라하드의 미소에 자밋은 눈을 찡그렸다.

****

약혼식 준비로 대공의 성에 머물게 되면서 톰은 괜히 복잡해졌다.

데미안은 길버튼과 매일 훈련했고, 그웬은 갈라하드의 연구를 도왔다. 톰만 붕 뜬 느낌이었다.

일이 없는 톰은 제국의 약혼식을 조사했다.

제국의 약혼식은 북부와 달리 화려했다. 백합으로 하겠다는 갈라하드의 말에 톰은 자기 봉급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북부는 꽃이 드물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매일 춥고 눈이 내리는 곳은 꽃에게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대신 살아남은 꽃은 수수하지만, 더 없이 강하고 질겼다.

꽃 싫어하는 여자 없다-. 톰의 아버지가 늘 했던 말이었다.

톰은 제 봉급으로 사람들을 고용해서 꽃을 모으게 했다. 지금은 모은 꽃으로 장식하는 방법을 연습 중이었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조금 피곤한 기색의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겨 어깨에 묻은 눈을 털었다. 언제 봐도 놀라운 마법이었다.

"여기에요?"

갈라하드의 뒤로 검은 머리의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들어왔다. 길쭉한 키와 깔끔한 정장, 갈라하드와 비슷한 느낌의 여인이었다.

"아, 톰. 마침 있었군. 여기는 자밋일세."

갈라하드의 소개에 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은 톰일세. 특무대의 중심을 맡고 있지."

"안녕."

"톰입니다!"

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대원들은?"

"데미안은 길버튼 경과 훈련 중이고, 그웬은 기절 상태입니다."

"그렇군, 그건 뭔가?"

갈라하드가 자리에 앉으며 톰이 든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북부의 백합입니다. 대장님이 말했던 게 생각나서 모으고 있었습니다."

"오- 역시 톰이군. 특무대 경비에서 처리하게. 자네는 봉급의 반을 더 받고. 길버튼 경은 좀 줄여."

"예? 예."

"농담일세."

자밋이라는 여인은 갈라하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톰이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갈라하드가 불렀다.

"톰, 와서 앉게."

"예."

톰은 갈라하드와 자밋 사이에 앉았다. 자밋의 뾰족한 눈이 톰을 응시했다. 꼭 뱀 같은 눈에 톰은 바짝 얼었다.

"자밋은 아주 뛰어난 인물일세. 특히 정보 처리 능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 내가 장담하겠네."

갈라하드가 장담하다니-. 톰은 작게 감탄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갈라하드가 저런 여인을 소개해주는 걸까. 갈라하드와 비슷한 여인이었다.

갈라하드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일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인의 눈이 톰을 살폈다. 굳이 소개해준다-. 더불어 저렇게 살피는 눈이라니-.

'뭔가 가르쳐주시려는 거구나.'

톰은 황급히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뾰족한 여인의 눈에 톰은 작게 떨었다.

"잘 부탁드린다니?"

"아, 뭔가 가르쳐주시려는 거 아니십니까?"

"뭐를?"

여인의 싸늘한 물음에 톰은 여인을 살폈다. 근육이 있는 건 아니었다. 허리에 검도 없었다. 마법사인가? 갈라하드가 굳이 톰의 마법 교육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렇다면-.

"회계 쪽입니까?"

"회계? 왜 그렇게 생각했지?"

여인이 코를 작게 구기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계속해보라는 듯 슬쩍 뒤로 기댔다.

"체형이 늘씬하신 걸 보니, 검을 다루시는 것 같지는 않고, 대장님이 마법을 굳이 다른 이에게 부탁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

여인이 코웃음쳤다. 그에 톰은 찔끔 놀랐다. 괜히 나불거린 걸까-.

"재밌네. 그래, 글을 쓸 줄 안다고."

여인이 취조하는 것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부대 명부를 짬처리 당하면서 배웠습니다."

"숫자도?"

"예, 장부 작성하는 수준이지만-."

"얘가 병사라고요?"

여인이 갈라하드에게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가 끌끌 웃었다.

"그것 뿐이겠나. 요리 실력도 최고일세. 자, 먹어보게."

갈라하드가 톰이 끓여둔 스튜를 여인에게 내밀었다.

우아하게 스튜를 떠 먹은 여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꼭-.

'이 새끼 뭐지?' 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톰의 등을 두드렸다.

"톰! 연주도 보여주게!"

묘하게 신난 듯한 갈라하드에 톰은 뒤에 메고 있던 악기를 앞으로 돌렸다.

악기를 퉁퉁치자-.

"너 뭐야?"

여인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톰일세."

갈라하드가 톰의 어깨를 두르며 웃었다.

"아, 톰은 특무대니 넘보지는 말게."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진지했다.

****

"칠백아흔 번째."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타고 스파크가 튀었다. 스파크는 하늘로 향했고, 곧바로 거대한 번개가 떨어졌다.

수백 번을 반복한 덕분에 천벌이 익숙해졌다.

본래 천벌은 그 마나 소모량이 큰 탓에 반복하기 어려운 마법이었다.

다만, 지금은 그웬이 있었다. 그웬의 거대한 마나통 덕분에, 천벌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그 결과 천벌의 이해도가 얼음송곳 정도로 높아졌다.

단순히 빨라진 것만이 아니었다.

목적은 아드리안나의 성질 연구였지만, 그렇다고 마법을 무식하게 뿌리지는 않았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천벌을 깎았다. 마나가 손실되는 부분을 고치고, 마나를 더 담을 수 있는 법을 연구했다.

덕분에 천벌이 전보다 빠르고, 그 위력도 증가했지만-.

'털끝도 못 건드리는군.'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위력을 아무리 늘려도 천벌은 아드리안나를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다. 가까이 가는 순간 가벼이 흩어졌다.

애초에 목적이 그거였지만, 수백 번을 쏟아내도 멀쩡한··· 아니, 심지어 작게 하품까지 하는 아드리안나에 괜히 오기가 생겼다.

'언젠가 꼭 마법을 꽂아주지.'

갈라하드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만,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예상하신 결과로 나왔습니다."

조수 둘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 얼굴에 희열이 가득했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팔백에 가까운 천벌로 인해 알아낸 건-.

"마나는 가연성이 있다."

의외로 담백한 결과였지만, 이제까지 없던 개념이었다.

마나에 가연성이라니. 철이 공중에 떠오른다-. 같은 이야기였다.

갑자기 생긴 성질은 아니었다.

단지-.

'아드리안나가 유일한 존재기에, 아무도 몰랐을 뿐.'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아드리안나는 불이었다.

세상에 처음 내려온 불이자, 유일한 불-.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군. 아니, 신화지.'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문제는-.

'원리를 설명할 수가 없어.'

수백 번에 이르는 실험으로 아드리안나의 성질 표까지 만들었다. 어느 농도에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계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만 해도 마탑의 노인네들의 눈을 뒤집을 수 있겠지만, 갈라하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뭔가 빠져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부족한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조금만 더 가면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제자리걸음 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얼빵하게 생긴 놈 둘이 달려왔다. 제임스와 핸섬이었다.

"왕국 연합 쪽에서 도착했습니다."

갈라하드의 눈이 살짝 굳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끄덕이고 실험을 마무리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생이라니. 고생은 자네가 했지."

"예? 저는 멀쩡합니다만."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오히려 더 활력이 넘칩니다."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피부에 주름은커녕 잡티도 없었다. 방금 태어난 것처럼 피부가 뽀송뽀송했다.

'말이 되나?'

소드 마스터의 노화가 느린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최연소 소드 마스터였으니, 노화가 상당히 이른 시절에 멈췄을 것이다.

그를 감안해도 피부가 심할 정도로 좋았다. 아마 성질도 관련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슬쩍 물러나며 물었다.

성질의 영향인지, 소드 마스터의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죽을 때까지 이 모습일 수도 있겠군."

"아, 그렇습니까."

이런 완벽한 외모에 노화가 없다는 이야기인데도, 아드리안나는 심드렁했다. 외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듯했다.

그때, 참모 테오도르가 뛰어왔다.

"왕국 연합의 왕이 도착했습니다. 그에 대공 전하께서 식사 자리를 명하셨습니다."

갈라하드는 옷깃을 고쳤다.

테오도르가 아드리안나와 갈라하드를 불렀다.

"아, 훈련 중이셨으면 씻고 오셔도 됩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땀 한 방울도 안 났습니다. 괜찮습니다."

"음, 한 방울은 나지 않았겠나?"

"예? 아닙니다. 한 방울도 안 났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나는 씻고 정비해서 가겠네."

"예? 멀쩡하십니다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땀이 좀 났네."

"아, 알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내 둘이 사라졌다.

'음, 왕국 연합이라.'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안개가 가벼이 스치자 갈라하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다.

'왕국 연합은 잡아야 한다.'

왕국 연합은 필요한 끈이었다.

문제는-.

'파르한스타가 오다니.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군.'

파르한스타는 살해 당한 황녀 약혼자의 아버지였다.

파르한스타가 황녀를 마주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황녀가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할 테니까.

갈라하드는 원래 파르한스타와 사이가 좋았다. 그의 왕국을 일으켜준 게 갈라하드였기에. 하지만 지금은 갈라하드가 제시한 결혼으로 그의 아들이 죽은 상황이었다.

지금도 갈라하드를 믿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날 찾는 걸 보면 믿을 거 같기는 한데.'

아무튼, 왕국 연합과 대공은 손잡기 좋은 조합이었다.

갈라하드는 높은 확률로 대공이 왕국 연합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국 연합과 갈라하드, 둘의 차이는 명백했다. 갈라하드야 대장으로 돌려도 되니까.

문제는 그 손잡는 계기가 아드리안나의 결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단단히 꼬였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걸음을 옮겼다.

****

'······왕국 연합이라.'

대공의 앞에는 화려한 복장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왕국 연합의 왕 중 하나였다. 그 옆으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가득 있었다.

대공은 혼자였다. 대공이 병력을 무른 까닭이었다.

물론, 대공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아, 참모진은 걱정했다.

대공이 화를 못 참고 왕의 머리를 뽑을까 봐-.

"마나가 적은 이를 데려왔소. 대공녀의 성질을 받을 수 있을 거요. 그 저주라 불리던 것을 견딜 수 있을 것이오."

왕의 제안에도 대공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드리안나가 들어왔다.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갑주를 입은 상태였다.

갑주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외모가 시선을 가득 끌어, 갑주까지 시선이 내려가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는 대공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놈은?"

"아, 갈라하드 대장은 방금까지 훈련한 터라 정비하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건방진 놈."

"아닙니다. 대공에게 예를 표하려 노력하는 겁니다."

대공이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왕국 연합의 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나가 없다는 놈을 데려왔다고 한다. 만나겠느냐?"

'아드리안나에게 선택지를 준 거구나.'

테오도르는 작게 탄식했다.

왕국 연합의 왕 파르한스타는 아드리안나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드리안나의 과거를 조사했기에, 그녀가 얼마나 고독한지 알고 있었다.

저주라 부르는 여인이었다.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파르한스타는 확신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싫습니다."

깔끔하게 거절했다.

"이런, 싫다는군."

대공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꼭 놀리는 것처럼.

115화 야만인

'거절할 걸 알고 계셨군.'

테오도르는 대공의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굳이 이 자리를 왜 만드신 거지?'

고민하던 테오도르는 대공이 갈라하드도 불렀다는 걸 떠올렸다.

굳이 거절할 걸 알면서도 자리를 만든 건-.

'갈라하드에게 왕국 연합도 아드리안나를 원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군.'

왕국 연합은 제국 다음으로 북부와 같이 꼽히는 세력이었다.

그런 왕국 연합이 아드리안나에 맞춰서 마나가 적은 이까지 구했다.

왕국 연합의 적극적인 행보를 갈라하드에게 보여주면, 상당한 압박이 될 것이다.

그건 대공이 두기에는 꽤 얄팍한 수지만-.

'아드리안나가 관계된 일이니까.'

왕국 연합도 원하는 아드리안나다. 알아서 잘해라-. 정도의 경고가 아닐까.

명석한 갈라하드에게는 꽤 효과적일 것이다.

"아니, 이런-."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거절할 줄 몰랐는지, 왕국 연합의 왕, 파르한스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북부는 제국에게 지원도 못 받고 혼자 마족을 막아내는 상황이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제국은 아드리안나를 짝으로 백작의 셋째 아들이자 마법사인 놈을 지정했다. 반발은 당연했다.

실제로 처음에는 반발이 거셌다.

그걸 이겨낸 건 단순히-.

'갈라하드의 능력이지.'

테오도르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했다.

"제국과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소? 이제 지원도 끊겼다고 들었소. 그런 멍청한 제국과 달리 왕국 연합은 마족에게서 대륙을 지키는 북부를 존중한다오. 제국의 눈만 아니었다면, 지원도 했을 것이오."

파르한스타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대공의 나지막하게 웃었다. 회의장이 작게 떨렸다. 병사들 몇이 휘청이며 흔들렸다.

단지 웃는 것으로 저런 존재감이라니-. 기사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네놈들은 제국과 다른가?"

대공이 파르한스타를 보며 물었다.

파르한스타의 지긋한 흰 수염이 파들파들 떨렸다.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배해졌다.

"쯧."

대공이 혀를 차자,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르한스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더군."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파르한스타는 뭔가를 찾는 것처럼 북부의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다. 대공은 그를 지적한 것이다.

"찾는 이가 있소."

파르한스타가 예상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대공의 눈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왕국 연합의 왕이 북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북부에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소."

테오도르는 그 상대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왕국 연합의 왕이 찾으러 직접 북부까지 온다는 말인가.

"누구지?"

대공이 묻자, 파르한스타의 얼굴에 고민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하던 파르한스타가 끄덕였다.

"케르켁이라는 사내요."

케르켁? 범상치 않은 이름에 테오도르는 눈을 찡그렸다.

"멸망한 야만족의 전사인데, 그 실력이 아주 뛰어났지. 용맹함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고-."

파르한스타의 눈에 회한이 깃들었다. 그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파르한스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공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에 파르한스타가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와는 평원에서 처음 마주했다오. 적나라한 야만인에 처음에는 당황했지. 어디서 이런 야만인이 나타난 건지-. 그런데 실력이 엄청난 것 아니겠소? 그 실력을 높이 사서 데려왔지. 그런데 단순히 실력만 좋은 게 아니었소. 얼마나 명석한지, 말을 바로 배우더군."

파르한스타가 작게 기침했다. 노쇠하여 말을 길게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듯했다.

다만, 파르한스타의 눈은 반짝였다.

"야만인의 전설인 대족장의 핏줄이라고 생각했다오. 야만인들이 흔히 떠드는 이야기거든.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그의 총명함은 날이 갈수록 더 빛났지."

파르한스타가 거칠게 기침했다. 그 옆에 있는 의사로 보이는 이가 황급히 파르한스타를 부축했다. 파르한스타는 그 손을 밀어냈다.

'저런 노쇠한 몸으로 찾으러 올 정도라니-.'

도대체 누구길래-. 테오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케르켁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이였고, 둘을 말하면 백을 내다보는 이였소. 야만족답게 용맹하고, 별의 지혜를 받아 영특했지. 그는 다른 왕국의 수를 모두 꿰뚫어 봤소. 그가 막은 수작만 백 개가 넘지."

파르한스타가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 노쇠한 목소리로 말하니, 꼭 전설의 단편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 내용이 대공의 흥미를 자극했는지, 대공이 끄덕였다.

대공으로서 드문 반응이었다.

"케르켁 덕분에 우리 왕국이 왕국 연합의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었지. 그에 성대한 연회를 열었는데, 그날 밤 갑자기 사라졌소. 나타났을 때처럼 흔적도 없이-. 아닌 밤의 신기루처럼."

"사냥이 끝난 개처럼 버린 게 아니고?"

대공의 물음에 파르한스타가 얼굴을 가득 구겼다. 꼭 모욕이라도 당한 얼굴이었다.

"버리다니! 케르켁은 누군가에게 속할 영혼이 아니오! 여자로도, 재물로도, 명예로도 묶을 수 없는 자유로운 평원의 영혼이오!"

파르한스타의 대답이 단호했다. 그에 대공이 끌끌 웃었다.

"자유로운 평원의 영혼을 왜 찾는 거지?"

파르한스타가 입을 꾹- 닫았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그가 필요하니까."

파르한스타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케르켁이라."

대공이 드물게 관심을 표했다.

야만인처럼 거칠지만, 밤하늘의 별처럼 명석하면서, 재물이나 여자, 명예에 얽히지 않는 사내라-.

설명대로라면 북부에서 제일로 치는 사내였으니까.

"그래서 케르켁을 어디에 뒀소?"

파르한스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나도 만나보고 싶군."

"최근 북부 상황이 빠르게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케르켁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지."

파르한스타의 말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확실히 북부의 상황이 좋아진 건, 갈라하드 덕분이었다. 묘하게 왕국 연합과 비슷했다.

설마-.

"케르켁이라는 놈이 어떻다고?"

"야만인 출신답게 아주 용맹하오. 그 행색이 상당히 거칠지만, 얼굴은 멀끔하게 잘생겼지. 술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고, 여자가 없으면 잠을 자지 않았지! 케르켁과 잤던 여인에 따르면, 안기는 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정력이 대단하다더군!"

아주 적나라한 설명에 테오도르는 작게 안도했다.

뛰어나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확히 갈라하드와 반대의 인물 아닌가.

그리고 이름은 케르켁이 뭔가. 꼭 목 막힌 소리 같은 이름이었다.

그때,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머리를 깔끔히 넘긴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쏠렸다.

갈라하드가 장내를 둘러봤다.

대공과 왕국 연합의 왕, 그리고 아드리안나가 둘러앉아 있었다. 이 상황이 보여주는 건 뻔했다.

갈라하드는 영특한 사내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을 이해했을 것이다.

'왕국 연합도 아드리안나를 원한다-.'

왕국 연합의 가치는 갈라하드가 잘 알 것이다. 꽤 큰 압박일 게 분명했다.

실제로 방에 들어온 갈라하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찜찜한 얼굴이었다.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그때, 갈라하드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그 방향도 이상했다. 대공을 향한 인사가 아니었다.

'왕국 연합의 왕?'

갈라하드는 파르한스타에게 말했다.

"오랜만-?"

중얼거리던 파르한스타의 눈이 커졌다. 주름이 가득한 눈이 반짝였다. 노쇠한 입이 쩍- 벌어졌다. 파르한스타가 벌떡 일어났다.

"아아, 케르켁이여."

오랜 친우를 만난 듯한 환희가 얼굴에 떠올랐다. 파르한스타가 헐레벌떡 달려갔다. 신발 하나가 벗겨져 바닥을 뒹굴었다.

"어··· 어디 있었느냐! 행색이 참으로 말끔해졌구나! 도대체 무슨 거친 일을 겪은 거냐! 야만인의 별, 케르켁이여!"

파르한스타가 갈라하드의 손을 잡았다.

오랜 회포를 푸는 듯한 둘의 모습에-.

대공의 입꼬리가 굳었다.

'······갈라하드가 야만인 케르켁?'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직 파르한스타만이 환하게 웃었다.

*

갈라하드가 맡았던 임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임무는 황녀 살리기였다.

가장 기간이 길었던 임무는 왕국 연합 나누기였다.

왕국 연합 나누기는 단독 임무였다. 왕국 연합에 접근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게 임무 목표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왕국 연합 중 가장 규모가 작았던 왕국에 접근했다.

다른 왕국보다 어려운 길이었지만, 갈라하드가 보기에 왕국 연합의 왕국은 죄다 거기서 거기였다.

오히려 규모가 작아서 운신이 더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었다.

문제는 제국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야만인으로 위장했다. 왕국 연합 주변에는 야만인 무리가 제법 많았고, 가장 의심을 덜 받는 신분이었으니까.

과거를 굳이 지어낼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어눌한 척하고 고기를 생으로 뜯어 먹으면 야만인으로 쳐줬다.

갈라하드는 왕국 연합에서 가장 작았던 왕국을 왕국 연합의 대표까지 올렸다.

순전히 갈라하드의 능력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왕국의 능력이 좋았던 것도 한몫했다.

애초에 그 규모가 제일 작았기에, 다른 왕국의 견제가 가장 덜한 것도 있었다.

그 과정에 발생한 마찰과 다툼으로 왕국 연합이 크게 흔들렸고, 임무는 성공으로 끝났다.

임무를 끝낸 갈라하드는 늘 그렇듯 흔적을 모두 지우고 복귀했다.

그렇게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왕국 연합의 중심까지 올라간 이들이었다.

본래 사냥이 끝난 개는 잡아먹듯, 갈라하드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직도 찾을 줄은 몰랐군.'

갈라하드는 옆에 앉은 파르한스타를 보며 혀를 찼다. 심지어 직접 찾아왔다니-.

"잔느 왕국에서 최근 불만을 제기했다. 왕국 연합이 가져가는 것보다 이익이 적다는군. 몇 해 전에 가뭄이 왔을 때, 우리가 도와준 게 얼마인데! 어찌해야 하겠느냐?"

파르한스타는 옛날처럼 갈라하드에게 질문했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잔느 왕국이 지원받은 수치를 최근 가장 많이 돈을 낸 왕국 쪽에 흘리시지요."

"오, 그렇구나! 그러면 서로 견제하겠지! 역시 케르켁이다!"

"케르켁?"

나지막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대공이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파르한스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게 말하는 듯했지만, 상대는 대공과 아드리안나였다. 안 들릴 리가 없었다.

"네가 제국을 위해 일했어도 상관없다. 같이 가자."

파르한스타의 제안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정보국 출신인 걸 알아냈군.'

무슨 목적을 위해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니-.

'왕국 연합에 문제가 생겼군. 그것도 왕이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로 큰 문제가-.'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추정할만한 이유는 꽤 있었다. 그중 현재 가장 굵직한 건-.

'왕자가 죽었으니까.'

3황자가 노렸던 게 이거일 수도 있겠군.

그때, 살벌한 느낌이 들었다. 꼭 맹수의 아가리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고개를 드니 대공··· 아니, 고위 마물이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게 경각심을 줄 생각이었나.'

갈라하드는 작금의 상황을 빠르게 유추했다.

대공은 갈라하드에게 경각심을 줄 생각이었던 듯했다.

파르한스타가 갈라하드를 오히려 환영하면서 대공의 사소한 계획이 어그러졌고-.

'오히려 좋군.'

그 내부 사정이 어찌 됐건, 파르한스타는 왕국 연합의 대표로서 참여한 거였다.

몸값은 올릴 수 있을 때 올리는 게 좋았다.

"자세히 이야기해보시겠습니까?"

갈라하드는 슬쩍 파르한스타 쪽으로 돌아앉았다.

갈라하드는 사내답게 등으로 말했다.

나, 왕국 연합 갈 수도 있다?

"오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가 떠난 이후로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겠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있어야 할 곳으로 가자꾸나!"

한창 파르한스타가 떠들 때-.

으드득,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대공이었다.

"식사는 끝났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저 아직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습니다만······."

슬쩍 숟가락을 흔들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다 나가도록."

대공이 짧게 명령했다.

틈도 없는 단단한 명령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일어났다. 다른 이들은 이미 자리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파르한스타는 반대로 갈라하드에게 뛰어왔다.

"케르켁아, 그동안 일이 많았다. 참으로 많았어. 왕국 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곳만 벌써-."

떠벌리는 파르한스타에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왕국 연합의 이야기는 여기서 할 게 아니었다.

파르한스타의 노쇠한 눈이 회한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위태로운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겪은 일이 많았을 테니까.

'이래서 나를 찾았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그때-.

"너는 남고."

대공의 살벌한 목소리가 갈라하드의 뒷덜미를 잡았다.

무거운 목을 돌리니, 대공의 포악스러운 눈이 갈라하드를 지목하고 있었다.

"안 된다! 케르켁!! 안 돼! 어떻게 찾았는데!"

파르한스타가 절절하게 떠들었다. 파르한스타는 저항했지만, 왕국 연합의 다른 이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들은 우습게도 대공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대공의 짤막한 명령에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결국, 갈라하드만 홀로 남아 대공과 마주했다.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눈이 사나운 걸 넘어서 포악했다.

가만히 노려볼 뿐인데도 공기가 무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야만인?"

대공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파르한스타가 죄다 불었군.'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누구나 과거 하나쯤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라."

대공이 끌끌 웃었다. 웃을 때마다 바닥이 흔들렸다.

"너를 애타게 찾는 거 같더군."

대공이 고기를 뜯었다. 고기에서 피가 거칠게 튀었다. 고약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마물 고기였다. 식사가 끝났다더니만-.

"제가 워낙 유능한 터라."

갈라하드는 가벼이 대답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대공의 거칠게 고기 뜯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대공이 굳이 갈라하드를 따로 남겼다.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넘어갈까 걱정하는 건가.'

대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아드리안나가 약점이니까.'

파르한스타가 대공을 자극한 건 분명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아드리안나 옆에 있을 생각입니다."

대공의 입꼬리가 거칠게 올라갔다. 자세히 보니 미소였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대공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그 입가로 붉은 피가 흘렀다. 거칠게 난 수염을 적셨다.

"다 죽였기에."

대공의 입이 가득 올라갔다. 거대한 송곳니에 살점이 박혀 있었다.

'치실 좀 쓰지.'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다만, 걱정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갈라하드를 따로 남기지 않았겠지.

음-.

갈라하드는 고기를 입에 넣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아직 올 손님이 많이 남았거늘-.

심지어 파르한스타는 그중 약체였다.

"야만인이라고."

대공이 다시 중얼거렸다.

갈라하드는 대공이 왜 자꾸 야만인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젠장! 운전을 어떻게 하길래 또 빠졌냐! 이 시뻘건 노인네야!"

흰색 로브를 쓴 노인이 지팡이를 붕붕 휘두르며 화를 냈다. 빨갱이 소리를 들은 붉은 로브를 입은 노인이 눈을 가득 구겼다.

"눈이 이렇게 쌓인 곳에서는 마력차가 쓸모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냐! 갈 수 있다고 고집부린 건 네놈 아니냐! 이 노망난 놈아!"

"눈이야 불로 녹이면 되지! 적색을 받았으면서! 그럴 거면 적색 반납해라! 똥색이나 해!"

"뭐?! 똥색?! 이 씨부랄 놈아! 네가 해 봐!"

노인들은 지팡이까지 휘두르며 흉흉하게 싸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청년은 눈을 찡그렸다.

마탑의 장로라는 거물들이 저런 사소한 걸로 싸우다니-.

'왜 4대 마탑의 장로들이 북부까지?'

청년의 마탑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제국의 의뢰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지만-.

[갈라하드가 매물로 나왔다고?! 반드시 잡아야 한다! 반드시!!]

마탑주는 청년에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어떤 조건이 나오더라도 갈라하드는 꼭 잡으라고-.

'도대체 갈라하드라는 놈이 뭐길래.'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 전부 아닌가? 그 뒤로 경력이 끊긴 마법사인데 왜 다들 야단인지, 청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잘봐라! 이게 적색이다!!"

그때, 거친 열기가 느껴졌다. 노인이 지팡이에서 불을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그 불이 얼마나 거센지, 잔뜩 쌓인 눈이 녹아서 물로 흘렀다.

청년은 입을 쩍 벌렸다.

"적색은 염병! 고작 그 정도 오줌발로 적색을 가져간 거냐?!"

"뭐 오줌발?!"

노인들은 계속해서 싸웠다.

"갈라하드는 나한테 오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먼저 침 발랐다! 이 노망난 노인네야!"

마치 서로 견제하듯-.

116화 인기

'젠장 맞을 노인네들. 더럽게 시끄럽네.'

청색 마탑의 마법사, 로엔은 눈을 가득 찡그렸다.

흰색 로브를 입은 노인과 적색 로브를 입은 노인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두 노인의 다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망할 새끼야! 떨어져라! 내 거라고!"

"마나에 주인이 어딨느냐! 왜 붙어서 지랄이야!"

지금은 대기의 마나가 서로 자기 거라며 언성을 높였다.

우스운 다툼이었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확실히 마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마나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 지팡이가 없으면 마법쓰는 게 힘들 정도였다.

'지팡이는 참으로 위대한 발명이다.'

로엔은 지팡이를 만지며 히죽 웃었다. 로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지팡이에 의지하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쉬운 길만 가려고 하고. 저러니까 요즘 마탑 꼴이 그 모양이지. 죄다 어두침침한 곳에서 몽둥이만 만지작- 만지작-."

갑자기 노인들의 거친 욕설이 쏟아졌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다투던 노인들이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로엔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로엔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지팡이에 기대?! 그러니까 청색 마탑이 4대 마탑에서 떨어졌지! 근본도 없는 놈들!"

"청색 놈들! 마도구 잘 만진다고 뻗대더니! 꼴 좋다! 씨부랄 것들!"

"뭔······."

노인들의 거친 욕설은 로엔이 말할 틈도 없이 이어졌다.

"마도구는 그저 도구일 뿐이거늘! 마도구만 만드는 놈들이 대장장이랑 다를 게 뭐야! 아카데미는 왜 가! 그냥 대장간에서 망치나 휘두르지!"

"대장장이를 모욕하지 말게나! 대장장이는 땀이라도 흘리지! 요놈들은 그저 펜으로 딸깍거리는 게 전부인데!"

"마법사 나고 지팡이 났지! 지팡이 나고 마법사 났냐?!"

노인들은 입에서 침까지 튀기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로엔 뒤의 다른 마법사들이 뚱한 얼굴을 했다. 오는 길에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로엔은 달랐다. 청색 마탑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 갈라하드도 젊은 마법사 아닙니까?"

로엔은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노인들이 지팡이를 고쳐잡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로엔은 불안해졌다.

"하, 감히 갈라하드를 입에 담아?"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태울까?"

"아니, 패서 죽이자."

적색 노인이 지팡이를 길게 잡았다. 흰색 노인이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순식간에 흉흉해진 분위기에 로엔은 다급해졌다.

"······아니, 맞잖습니까! 최연소로 졸업했으니까! 젊겠지!"

"맞다!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야!"

"그래, 맞는 말이군!"

노인 둘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엔은 작게 안도했다. 그때, 팔뚝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로엔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처맞는 말이지!"

"아주 처맞는 말!"

합이라도 맞췄는지, 노인 둘이 연달아 지팡이로 로엔을 두드렸다. 로엔이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주기에는 노인 둘의 위치가 너무 지고했다.

"갈라하드는 말이야! 마도구를 마법사의 수치로 생각하는 아주! 올바른 꼬맹이다! 매일 마나를 다 쓰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는! 아주 성실한 마법사지! 조금 건방진 꼬맹이지만!"

"또 명석하기는 얼마나 명석한데! 네놈들이 쓰는 수식들! 놈이 정리한 게 몇 개인지는 아느냐?! 물론, 상당히 건방지지만!"

"근데 뭐?! 같은 마법사?! 갈라하드는 네놈들처럼 막대기나 주물럭거리는 놈이 아니라-!"

"건방지지만 진짜 마법사다! 진짜!"

"진짜 중에서도 진짜지! 건방지지만!"

"그래, 건방진 꼬맹이지!"

"넌 건방진 갈라하드한테 주먹으로도 질 거다! 이놈아!"

'도대체 갈라하드라는 놈이 어떤 놈이길래-.'

하나는 명확했다.

아주 건방지다는 것-.

로엔은 한참이나 맞았다.

****

"천백아흔아홉 번째."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에 관한 표 작성은 이미 끝났다.

마탑의 노인네들에게 보여줄 자료는 준비된 상황이었다.

초기 목표는 달성했지만, 갈라하드는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횟수를 올렸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에 관한 실마리가 잡힐 것 같았기에-.

갈라하드는 자다가도 아드리안나를 깨워서 천벌을 꽂았다.

아드리안나가 이건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음.'

갈라하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팔에 새겨진 마법진이 격렬한 빛을 뿜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꿀렁거렸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태운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원리가 중요했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태워서 생명력으로 바꾼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생명력으로 바꿨다. 그 생명력은 아드리안나에게 축적된다.

고위 마족을 만났을 때, 아드리안나가 버티지 못했던 이유였다.

'생명력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넘쳤기에.'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오히려 생기가 넘칩니다.]

아드리안나의 아기 피부 비결이었다.

'음.'

갈라하드는 마나를 생명력을 통해 피에 저장했다. 그런데 고위 마족의 피에는 고농도의 마나가 있다.

그건 고위 마족의 피에 고농도의 생명력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바꿔 말하자면-.

'고위 마족에게는 고농도의 생명력이 필요하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마족의 왕에게는 얼마나 많은 생명력이 필요할까.

고위 마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생명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하필 아드리안나에게-.

'고농도의 생명력이 있군.'

아드리안나는 끊임없이 마족을 태울 테니, 아드리안나의 생명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게 분명했다.

여명이 아드리안나를 살려둔 것이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아드리안나가 마족의 왕에게 필요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면.'

제법 그럴싸했다.

'마족의 왕을 위한 그릇.'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갈라하드는 그 투명한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눈이었다.

'검과 그릇.'

둘 중 하나였다. 혹은 둘 다거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아드리안나가 가장 중요하다.'

그릇과 검. 둘 중 무엇이든, 아드리안나는 마족의 왕을 상대하는 핵심일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다시금 묻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몸은 괜찮나?"

"예? 예, 오히려 개운합니다. 이걸 안 하는 날이 찌뿌둥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런, 이제 내가 매일 필요하다는 건가. 자네, 꽤 하는군."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꺼냈다가, 입에 물고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넣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다시금 물었다.

"일단, 그대의 성질에 관한 연구를 끝냈네."

"아, 끝나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내려갔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의 성질은 마나를 생명력으로 바꾸는 걸세.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를 태워서 생명력으로 만드는 거지. 거기서 나온 생명력은 자네에게 저장되고."

"생명력이라고 하셨습니까?"

"이해했나?"

"이해 못 했습니다."

"당당하군."

"부끄러울 건 아니니까요."

당당한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네는 죽을 때까지 젊고 아름다울 거라는 걸세. 축하하네."

"아, 저번에 하셨던 이야기 아닙니까?"

"그때는 가정이었고, 지금은 확신일세."

"다행이군요.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을 테니."

아드리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 완벽한 외모로 평생 젊을 수 있다는데,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니-.

조금이라도 피부를 탱탱하게 만들기 위해서, 갖은 짓을 다 하는 수도의 귀족들이 들으면 눈이 뒤집힐 소리였다.

다만, 참으로 아드리안나스러운 대답이었다.

"나도 피부 관리를 열심히 해야겠군. 나중에 도둑놈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갈라하드 대장이 왜 도둑놈 소리를 듣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심각해졌다.

'왜 도둑이라는 단어에 민감하지?'

갈라하드는 농담을 설명하는 끔찍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튼 고생했네."

"제가 도움이 됐습니까?"

"도움이 되는 정도겠나. 자네는 마법계의 혁신일세. 이렇게 마법을 마음껏 탐구할 수 있다니-. 참 꿈만 같은 시간이었네."

진심이 듬뿍 담긴 감사에 아드리안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미소였다.

아드리안나의 미소는 참으로 어색했다.

'부녀가 비슷한 부분도 있군.'

"자네, 웃을 때는 조금 못생겼군."

"아, 그렇습니까?"

"귀엽다는 이야기였네."

아드리안나가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었다.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직접 보여주겠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왼손을 흔들었다.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뿜어댔다.

'제법 그럴싸하군.'

아드리안나의 성질처럼 마나를 생명력으로 바꿔 저장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 고유의 성질이었다.

'아예 못 닿을 것 같지는 않지만-.'

모든 것에는 이유와 원리가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도 그 원리가 있을 것이다.

너무 복잡하여 아직 이해 못할 뿐-.

'생명력을 더 모은다면 될지도.'

아무튼, 지금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건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잘 보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가벼이 튕겼다. 굵직한 얼음송곳이 갈라하드 앞으로 떠올랐다.

찔리면 아플 듯한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갈라하드에게 쏘아졌다.

"······!"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나서려 했지만, 갈라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갈라하드는 얼음송곳을 향해 왼손을 펼쳤다.

갈라하드의 손은 길고 단단했지만, 얼음송곳이 너무 날카로웠다.

당장 손이 뚫릴 듯했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얼음송곳을 향해 손을 더 내밀었다.

이윽고 얼음송곳과 갈라하드의 손이 부딪혔고-.

'······!'

얼음송곳이 그대로 부서졌다. 얼음송곳이 거칠게 부서졌지만, 몇 개는 갈라하드의 손에 박혔다.

"음, 아직 미숙하군."

갈라하드는 얼얼한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무슨 짓이십니까?!"

"자네에게서 얻어낸 원리일세. 생명력이 마나보다 높다면, 이런 식으로 응용할 수 있지."

"다치셨습니다."

"처음이니까. 원래 이론대로 안 되는 법이라네."

갈라하드의 차분한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구겨졌다.

자기가 마법을 쏘고 거기에 손을 넣었다. 당당해서 뭔가 있나 했더니,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마치 즐겁다는 것처럼.

아드리안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잘 보게. 이번에는 꼭 잡을 테니까."

아드리안나는 차마 말릴 틈도 없이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또 피가 튀었다.

"이제 감 잡았네."

손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지는데, 갈라하드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일단, 치료부터 하시고-."

"괜찮네."

갈라하드의 거절이 서늘하여 아드리안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하려고-.'

갈라하드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전보다 더 큰 얼음송곳이었다.

얼음송곳이 갈라하드를 겨눴다. 아드리안나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위험합니다!"

"괜찮네. 나는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서. 물러나주겠나?"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와 전보다 더 굵은 얼음송곳-.

막아야 했지만,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얼음송곳이 쏘아졌다. 속도가 전보다 더 빨랐다.

그리고-.

파삭. 갈라하드의 손에 닿은 얼음송곳이 그대로 흩어졌다.

부서진 게 아니었다.

흩어졌다.

마치 아드리안나에게 닿은 마법처럼-.

"나쁘지 않군."

갈라하드가 피가 흐르는 손을 털며 시원하게 웃었다.

반대로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굳었다.

'내 저주를-.'

아드리안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 흉내만 낸 걸세. 자네 성질의 핵심은 마나를 태우는 게 아니라, 마나를 태워서 생명력으로 저장하는 걸세. 버틸 수만 있다면 무한동력이지. 나는 첫 단계를 흉내 낸 것뿐일세."

갈라하드가 담담하게 손을 손수건에 닦았다. 꼭 손을 씻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 마법사는 주먹으로도 때려잡겠군."

갈라하드가 혼자 끌끌 웃었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케르켁이여! 케르켁!"

병사들에게 붙잡힌 왕국 연합의 왕이 보였다. 그 모습이 상당히 절절했다.

"먼저 가보겠네."

갈라하드가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내 저주를-.'

평생 아드리안나가 앓았던 저주를-.

아드리안나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

오늘은 참모진의 정기 결산 날이었다.

결산은 분기마다 대공의 앞에서 실적을 발표했다.

결산 날은 본래 참모진이 가장 꺼리는 날이었다.

북부는 꺼져가던 불이었기에, 좋은 실적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건 참모진의 잘못이 아니었다. 대공도 그걸로 압박한 적 없지만, 그래도 대공 앞에서 형편없는 실적을 발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실적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고, 특히 그 전망 예측이 상당히 좋았다.

순전히 갈라하드 덕분이었다.

긍정적인 실적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걸 발표하는 건 신나는 일이었지만, 회의장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원인도 갈라하드였다.

'도대체 파르한스타를 왜 놔두는 거지!'

테오도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파르한스타는 대놓고 갈라하드에게 들러붙고 있었다. 얼마나 대놓고냐면, 갈라하드가 왕국 연합의 왕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왕국 연합과의 관계 개선의 청신호인 줄 알았던 참모진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갈라하드가 야만인이었다니.'

북부에서 야만인 출신이라는 건 상당한 호감 요소였다.

지금까지 갈라하드의 신사적인 행동들이 '제국의 재수 없는 귀족'이 아니라 '야만인의 예의'로 바뀌는 순간이었기에.

그런 상황인데, 대공은 파르한스타를 제지하지 않았다.

원래 대공은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협약에 묶였으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괜히 참모진만 안달 나는 상황이었다.

이러다가 갈라하드가 왕국 연합으로 홀랑 넘어가면 어쩌려고!

실제로 북부에서 섭섭하게 대한 건 사실 아닌가.

참모진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할 때였다.

"6대대가 밀렸지만, 6대대에서 나오는 열로 인하여 주변 대지가 따듯해졌습니다.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데, 그 크기가 상당합니다. 갈라하드 대장은 단순히 고위 마족의 계획을 막은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환경으로 개선까지 시켰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추진했던 마석이 합법이 되며, 숨어있던 잔존 세력들이 매일 잡히는 중입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임시로 내준 경로로 판 마석들의 값이 지급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재정이 회복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참모들이 무차별적으로 갈라하드의 이름을 쏟아냈다. 참모가 대공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쯧."

대공이 작게 혀를 찼다.

그에 참모들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대공은 참모들을 둘러봤다. 난쟁이 같은 참모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방금의 보고가 저들 최대의 용기였다.

그들의 걱정은 알고 있었다. 갈라하드가 왕국 연합에 넘어갈 것을 걱정하는 거겠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이라니-.'

상당히 건방진 놈이었다.

놈의 행보야 상관없지만, 참모진을 놔뒀다가는 계속 떠들 것 같았기에 대공은 입을 열었다.

"약혼식은 그대로 진행한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들바들 떨던 참모들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대공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기에-.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도착했습니다!"

병사가 우렁차게 보고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들 놀랐다.

이제 북부도 마법사를 배척할 생각이 없었다. 갈라하드로 마법사의 쓸모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관계를 이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탑의 방문 요청을 응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약혼식 초대 목록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병사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테오도르는 대공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목소리를 냈다.

"갈라하드 대장에게 갔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을 서로 데려가겠다면서 소란을 피우는 중입니다! 그중에는 마차 가득 보화를 가져온 이도······."

대공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117화 노인들

"케르켁아, 돌아가자 구나. 왕국 연합이 널 필요로 한다. 아니, 내가."

갈라하드는 주름 가득한 파르한스타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파르한스타는 갈라하드가 정보국 임무를 받아 접근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매달렸다.

'왕국 연합이 많이 위태로운가 보군.'

본래 갈라하드는 제국을 강대하게 만들어, 마족의 왕을 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것도 북부로 쫓겨날 정도로 처참하게-.

제국의 수뇌부에 여명이나 마족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제 상황이 변했다.

왕국 연합이 무너지면 안 된다.

"왕국 연합에 무슨 일 있습니까?"

파르한스타의 노쇠한 눈이 파르르- 떨렸다.

"페르난도의 죽음 이후로 상황이 급변했다. 왕국 연합은 제국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자는 쪽과 그냥 넘어가자는 쪽으로 나뉘어 다투는 중이다. 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왕국도 있고-."

갑자기 시작된 대립과 분열-. 갈라하드에게 익숙한 수법이었다.

'정보국 짓이군.'

왕국 연합을 완전히 분열시킬 속셈인가.

갈라하드의 임무는 왕국 연합의 적당한 분열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보국은 왕국 연합의 완벽한 분열을 원하는 듯했다.

'이상하군, 북부로 나를 보낸 것도 그렇고-.'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대륙을 먹겠다는 건가.'

제국은 전에도 대륙 통일을 시도한 적 있었다. 우습게도 그건 제마 전쟁이 일어나며 막혔다.

제마 전쟁 이후로 제국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좋지 않군.'

왕국 연합이 와해 되는 건 막아야 했다.

"케르켁이여, 어찌해야겠느냐?"

"괜찮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오, 케르켁이여. 별처럼 빛나는 지혜를 발휘해다오-."

파르한스타가 갈라하드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왕국 연합의 와해를 막을 방법은 간단했다.

"왕국 연합이 생긴 이유를 상기시켜주면 됩니다."

"왕국 연합의 이유? 제국을 말하는 거냐?"

"예, 제국 맞습니다. 왕국 연합이 왜 생겼습니까. 제국에 위기를 느낀 왕국들이 뭉친 거 아닙니까."

파르한스타가 눈을 끔벅였다.

위기는 기회였다. 약혼식은 굉장히 뚜렷한 위기였다. 다시 말하자면, 상당한 기회라는 뜻이었다.

그 기회는-.

"긴장 한 번 줍시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긴장?"

"제국이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적당한 긴장감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떻게? 지혜로운 케르켁아, 좀 더 설명해다오."

"황녀가 제 약혼식에 옵니다."

파르한스타의 노쇠한 눈이 번쩍였다. 수염이 파들파들 떨렸다. 기세가 줄기줄기 뻗어졌다.

정정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페르난도를 죽인 건 황녀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페르난도를 죽였다는 말인가-!"

파르한스타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3황자입니다."

파르한스타의 눈이 커졌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쇠함이 다시 떠올랐다.

3황자의 이름에 파르한스타의 눈이 급격히 빛을 잃었다. 3황자는 황녀와 달리 기반이 확실하고, 그 세력도 강대했기에-.

갈라하드는 파르한스타를 비웃지 않았다. 파르한스타는 겁이 많은 게 아니라, 현명한 거였다.

"저는 페르난도의 복수를 할 생각입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페르난도는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3황자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에 올릴 정도로.

"아아, 케르켁이여-. 그게 가능하겠느냐? 상대는 3황자다."

파르한스타의 목소리가 더 절절해졌다.

"가능합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파르한스타의 눈이 흔들렸다. 노쇠함과 믿음, 자식을 잃은 분노가 힘을 겨뤘다.

그중 승리한 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믿음과 손잡은 분노였다.

갈라하드는 또렷해진 파르한스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3황자 멱살 한 번 잡으시죠."

3황자의 멱살을 잡는다-. 3황자는 오히려 반길 것이다. 3황자는 왕국 연합과의 전쟁 구실을 호시탐탐 노렸으니까.

'아니, 제국은 아직 안 움직인다.'

갈라하드는 제국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보국이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국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왕국 연합이 완벽히 와해 된 게 아니니까.'

더불어-.

'이쪽에 3황자를 잡을 무기가 있다.'

조건이 제법 괜찮았다.

아니, 상당히 좋았다.

"좋다, 별의 지혜와 용기를 지닌 케르켁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느냐!"

파르한스타의 정정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대신 함께하는 것이다."

그때-.

"건방진 꼬맹이야! 여기 있느냐!"

"비켜라! 이 흰 놈아! 내가 먼저라고 하지 않았느냐!"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저는 일이 있어서."

갈라하드는 가벼이 일어났다.

파르한스타가 다급히 잡으려 했지만, 갈라하드는 이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케르켁아-."

파르한스타는 황급히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케르켁!"

*

"건방진 놈, 많이 컸구나!"

"이제 꼬맹이라고 못 부르겠군!"

노인 둘이 쌍으로 떠들었다.

흰 로브를 입은 노인은 흰색 마탑의 장로 에디림이었고, 붉은 로브를 입은 노인은 적색 마탑의 장로 크라잔이었다.

"그러는 어르신들은 더 쪼그라드셨습니다."

"건방진 걸 보니 갈라하드가 맞구나!"

"건방진 꼬맹이가 커서 건방진 키다리가 됐다!"

갈라하드가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끈덕지게 달라붙던 노인들이었다.

"저것들 봐라. 젊은 놈들이 벌써 지팡이부터 목걸이까지-. 마도구로 몸을 칭칭 감았다. 저게 마법사냐? 옷걸이지?!"

"저러니 요즘 마법계가 그 모양이지! 모이면 누구 지팡이가 더 뛰어난지 같은 개소리나 하고 있고!"

노인들이 갈라하드에게 유독 매달린 건, 갈라하드가 마도구를 쓰지 않는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둘은 마도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정통파였다. 둘의 제안에, 혹했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 뒷방 늙은이지.'

제국의 마탑들은 마도구 제작 공장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선선한 곳에서 길쭉한 몽둥이나 만지작거리면 최상의 대우를 받는데, 누가 밖으로 나오겠는가.

마도구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모두가 마도구로 진로를 정하는 시대였다. 마도구 없이 아카데미를 최연소 졸업한 갈라하드는 그들에게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노인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마도구나 만지작거리는 간악한 놈들에 의해 북부로 쫓겨났다고 들었다! 이런 통탄할 일이 일어나다니!"

"멍청한 놈들이 진짜를 못 알아보고! 오히려 쫓아내다니! 용납할 수 없다! 이대로면 마법은 사장될 것이다!"

둘은 갈라하드가 북부로 온 게, 마탑의 음모에 휘말린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나와 같이 가자! 내가 마탑주의 골통을 부숴주겠다! 상위 층을 약속하마!"

"아니! 나와 같이 가자! 적색 마탑은 온풍기라는 마도구만 만드는 한심한 마탑이다!"

"뭐?! 이 망할 노인네가?!"

노인들이 다시금 시끄럽게 싸웠다. 갈라하드는 자그마한 노인의 싸움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전보다 조건이 조금 약해졌군.'

아카데미 졸업 이후로 갈라하드의 경력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그동안 노인들의 권력이 줄어든 것도 있는 듯했다.

"저희 청색 마탑은 최고의 대우를 약속해드립니다! 차기 마탑주 자리입니다! 임금도 두 배!"

뒤쪽에서 뻔뻔하게 생긴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 차기 마탑주라니. 흥미롭군."

제법 강한 조건이었다. 황혼 마탑에 밀려 4대 마탑에서 떨어진 청색 마탑이지만,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장로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청년이 황급히 숨었다.

"일단 들어봅시다."

갈라하드의 말에 노인 둘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싫으면 가시던가."

노인 둘이 눈을 벙끗거렸다.

"건방진 놈! 참으로 건방지다!"

"건방진 건 여전하군."

노인들이 거칠게 소리쳤다. 우습게도 그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럴만하지!"

"그렇긴 해! 너는 거만해도 된다!"

두 노인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마법사들을 둘러봤다.

'수가 제법 많군. 황혼의 마탑 때문인가.'

마법사 수가 예상보다 많았다. 독주하는 황혼의 마탑이 영향을 끼친 듯했다.

'마탑 중에서 황혼이 거의 1강이니까. 나머지 셋은 좀 떨어지고.'

갈라하드가 괜히 황혼의 마탑주를 대마법사 후보로 꼽은 게 아니었다.

황혼의 마탑주는 천재였다. 제 입맛에 맞춰서 마법을 만들어내는 세기의 천재-.

그 본신의 재능으로 황혼의 마탑을 4대 마탑에 넣고, 황혼의 마탑을 독보적인 1강으로 만든 독보적인 천재였다.

'지금은-.'

갈라하드는 북부로 온 뒤로 상당히 성장했다.

멸망한 마탑의 마법도 배웠고, 피에 농도 짙은 마나도 실었다. 마족의 피도 있었다.

'할만하겠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모인 마법사들이었다.

"자, 나는 갈라하드일세. 아카데미의 최연소 입학자이자, 최연소 졸업자지. 황혼의 마탑주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고."

갈라하드의 소개에 몇 명이 조소를 지었다.

대놓고 웃은 놈도 있었다. 청색 마탑이라고 했던 청년이었다.

"어떤 새끼가 웃었어?!"

"또 저 새끼네! 청색 놈!"

"네가 덜 맞았구나!"

노인 둘이 청색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그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청년은 막지도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았다. 마법사보다 봉잡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괴팍한 성질은 여전하군.'

"그만하시죠."

갈라하드의 나지막한 말에 노인들이 떨어졌다.

마석 판매에 마탑은 주요 고객이었다. 4대 마탑인 흰색과 적색이 적격이었다.

문제는-.

'마석에 관한 노인들의 반감이 여전하다는 거군.'

큰 문제는 아니었다. 대책은 이미 마련해뒀다.

아니, 대책 수준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날이 되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눈이 여전히 총명하군."

흰색 마탑의 장로 에디림은 흡족하게 끄덕였다.

사실 걱정하는 마음이 꽤 있었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 사라졌던 갈라하드였다. 그리고 갑자기 북부에서 나타났으니,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오랜만에 본 갈라하드는 그들의 기대보다 더 뛰어났다.

"여전히라니-. 갈라하드는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됐다. 저 기세가 안 보이냐? 늙은아."

"그건 나도 안다! 이 뻘건 노인네야! 눈도 안 좋으면서 아는 척하기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카데미 시절이라, 갈라하드가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내지 못했을 때였다.

장성한 갈라하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수염이 희연 그들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

에디림의 눈이 단호해졌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이야기하겠네."

갈라하드는 자연스럽게 뒤로 돌았다.

"비비지 마! 이 뻘건 놈아!"

"내가 먼저 왔다!"

에디림은 황급히 따라붙었다.

갈라하드를 따라서 도착한 곳에는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

그건-.

"······마탑?"

너무 투박하여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분명히 마탑이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정오의 마탑이라니-.'

북부에 마탑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불법 마탑?'

제국의 처벌은 마법에 유독 엄했다. 불법 마탑 정도면 연관된 이들의 목이 전부 날아갈 게 분명했다,

"허··· 허가는 받았느냐?"

그 불같은 크라잔도 더듬거리며 물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비슷합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비슷하다? 묘한 대답에 입을 벙끗거렸다. 불법 마탑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

갈라하드가 건방진 건 알았다. 그런 건방짐은 실력이 있으니 합당한 권리였다.

하지만 불법 마탑은 궤가 다른 이야기였다.

"아, 가지고 와보게."

갈라하드가 마탑의 입구 주변의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었는데, 그 행색이 마법사보다는 광부에 가까웠다. 심지어 눈도 어둡고 퀭했다. 음침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들이 가져온 건 대충 봐도 품질이 좋은 마석이었다.

"다들 북부의 마석이 품질이 좋은 건 알고 있나? 북부의 하급 마석이 중앙의 중급 마석보다 질이 좋네."

갈라하드가 마석을 흔들며 말했다.

번쩍이는 마석에 마법사들의 눈이 번들거렸다.

수도에서는 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게 마석이었다. 그런 마석이 무슨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다니-. 침을 흘리는 놈도 있었다.

그들과 반대로 노인들의 눈은 가득 구겨졌다.

"마석?!"

"지금 내 눈이 제대로 된 거 맞나?"

"맞네! 저건 마석이다!"

사라진 동안 뭐 했나 했더니, 북부에서 마석이나 주물렀다는 건가!

"노오오옴! 어찌 그 축복받은 재능을 썩힐 수 있느냐!"

"북부에서 마석이나 판매나 하고 있다니!"

"장사치가 다 됐구나! 마법의 수치다!"

노인 둘이 연달아 소리쳤다.

갈라하드는 썩어가는 마법계에서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 갈라하드가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마석 판매하는 짓거리나 하고 있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왔다.

노인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정신 좀 차리게 해줄까?'

'좋다. 머리가 녹은 게 분명하니까!'

둘은 동시에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가 가득 휘몰아쳤다. 주변의 눈이 일어날 정도로 거셌다.

다른 마법사들이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정작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기다렸다.

마치 해보라는 듯-.

"건방지구나!"

"건방져!"

노인 둘의 입가가 비틀렸다.

정신 차릴 수 있도록 겁을 좀 줄 생각이었다. 노인들은 주문을 빠르게 외웠다. 지팡이가 없는데도 둘의 마법은 순식간이었다.

이내 거대한 불과 날카로운 바람이 자리했다.

마법사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졌다.

"후학을 올바른 길로 지도하는 것도-."

"어른의 덕목이지."

갈라하드는 소중한 놈이었다. 노인들은 갈라하드가 다치지 않도록 집중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윽고 형상화 된 거센 불이 갈라하드를 향해 날아갔다.

날카로운 바람이 대장간의 풀무질처럼 불을 더욱 키웠다. 단순히 크기만 키우는 게 아니었다. 그 갈래를 깎아 불을 형상화했다.

이윽고 공중에 불로 된 거대한 용이 자리했다.

"어찌 저런 마법을 지팡이 없이-!"

마법사들의 입에서 경악이 터졌다.

모르는 소리였다. 지팡이가 없기에, 이런 거대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였다. 도구에 의지하는 마법사는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갈라하드를 높게 친 것인데-.

'마석이나 주물럭거리다니!'

노인들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역시 멋지군."

갈라하드가 마법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어서 거대한 불의 용을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저런-!'

겁만 줄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나오다니-.

노인들의 눈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쏘아진 마법을 되돌릴 수 없었다.

'막아! 적색 마탑의 보물이다! 다치면 안 된다!'

'적색 마탑은 무슨-! 흰색 마탑이다!'

노인들이 빠르게 마나를 움직였다. 연달아 마법을 뿌려서 위력을 줄일 생각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오히려 앞으로 나왔다.

'미친!'

'돌았군!'

갈라하드의 왼손이 거대한 불의 용에 닿았다.

불의 용이 갈라하드를 당장이라도 태울 듯했다.

그때-.

손에 닿은 불의 용이 그대로 흩어졌다.

마법으로 파훼한 게 아니었다.

'마법이 사라졌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

믿기지 않는 모습에 노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갈라하드는 그들의 경악을 만끽하며-.

"마나의 새로운 성질을 발견했습니다."

담담하게 말했다.

마나의 새로운 성질이라니-. 실로 광오한 말에 마법사들이 코웃음 쳤다.

그런데 정작 열을 올리던 노인들이 조용해졌다.

노인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의 눈에 자리한 경악에, 방금 들은 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나의 새로운 성질이라니-.

노인들은 앞다퉈 갈라하드에게 달려갔다.

"흰색 마탑으로 가자! 마탑주를 주겠다! 놈의 골통이라도 부숴서 앉혀주겠다!"

"아니! 마나의 새로운 성질을 발견했다면 충분하다! 정오의 마탑이라고 했나? 장로가 필요하지? 내가 적격이다!"

"미친 노인네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안 할 거면 빠져라! 마나의 새로운 성질! 이건 역사의 현장이다! 얼마 남지 않은 생 역사와 함께하겠다!"

"······내가 더 장로 잘한다! 이놈은 아무것도 몰라!"

"뭐라?! 나는 임금 없어도 된다!"

"나는 임금을 내겠다!"

"미친 노인네가?!"

4대 마탑의 장로 둘이 갈라하드에게 달라붙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나는 두 배!!"

****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찾아간 건, 참모진의 '갈라하드가 위험하다는' 괴상한 독촉 때문이었다.

마탑에서 마법사가 나왔는데, 갈라하드가 왜 위험하다는 말인가-.

의문은 갈라하드에게 도착한 순간 풀렸다.

"비켜라! 야만인의 별, 케르켁은 왕국 연합과 함께하기로 했다!"

"감히 정오의 마탑주님에게 야만인이라니! 이 노인은 뭐야! 떨어져!"

"왕국 연합의 왕입니다."

"왕국 연합의 왕? 왕이면 지팡이 안 들어가냐?"

"무··· 무슨!"

갈라하드에게 붙어서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노인 셋에-.

'인기가 참 많으시구나.'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118화 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