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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FV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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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프롤로그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라진 무릎부상, 낯선 집, 그리고 내게 없던 가족들.

갑자기 찾아온 변화였다.

이 모든 것에 의문을 품을 여유도 없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때를 가리지 않는 발작, 블랙아웃,

극심한 두통과 근육경련이 나를 괴롭혔다.

어떤 사고(思考)도 불가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흐름조차 알 수 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한 줄의 메시지.

그리고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김성준은 한성준이 됐고,

나는 20년간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의 기억을 흡수했다.

˙

˙

˙

˙

˙

마력, 초인 그리고 괴수가 존재하는 세계.

한데 그 모든 것들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이곳은 내가 근 2년간 매일 즐겨 하던 '게임', 그 자체였으니까.

구현된 가상현실인지, 평행우주의 또 다른 세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억' 때문에라도 이곳 또한 살아있는 세계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왜'라는 의문은 남지만 일단 받아들였다.

아니,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시간이 아까웠다. 살아남는 것이 모든 의문에 우선해야 했다.

한상철....

씹사기제너럴, 암장군, 진입장벽 등 여러 별명으로 불리며, 수많은 플레이어의 키보드를 박살 낸 '극강의 빌런'.

그가 내 아버지였고,

내가 그의 가족 배경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단 한 줄의 문장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상철 장군은 괴수의 습격으로 처자식을 모두 잃었다.』

게임의 시작 시점에,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1화, 오류

로스트 코리아 2033.

통칭 '로코33'이라 불리는 이 ARPG(액션 RPG)는 개발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그동안 ARPG의 주류를 차지하던 중세판타지나, SF가 아니라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또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은 확실히 전에 없던 시도였다.

업계는 큰 우려를 표했다.

신선하지만 시기상조다. 해외시장은 고려도 하지 않는 것이냐 하는 지적들이었다.

그러나 로코33은 꿋꿋이 상남자다운 타이틀을 달고 2033년 4월 14일 출시, 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했다.

동년 초.

부사관으로 군 복무 중이던 나는 훈련 중 십자 인대 파열로 의병 전역했고, 그 실의 속에서 운명처럼 로코33에 빠져들었다.

출시 첫날부터 2년간 자그마치 9,000시간을 갈아 넣었으니 로코33에 대해선 분명 빠삭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 UI가 생겼을 땐, 어떤 위기도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동기화'라는 것을 마친 뒤, 드러난 변화는 시야 구석에 생긴 익숙한 인터페이스였다.

당연히 가장 먼저 확인했던 정보창.

──[캐릭터 정보]──

이름: 알 수 없음(6649)

※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능력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재능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특성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기술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

"아니, 이럴 거면 UI는 왜 줬냐고!"

내가 내 이름을 모르지 않건만, 이름조차 표시되지 않는 정보창.

별짓을 다 해 봤지만, 벌써 2주째 아무 변화 없는 UI다.

종료는 있지도 않았고,

[정상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게임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해당 메뉴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씨….'

퀘스트, 맵, 인벤토리 등 어떤 메뉴도 사용할 수 없었다.

...등장인물도 아니다, 플레이어도 아니다.

시스템도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미리 구분해놨다는 건가.

그래 좋다.

꼭 시스템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어떻게든 힘을 키워서 살아남으면 되는 거다.

이 세상에는 지금도 적지 않은 초인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뭐부터 해야 할까.

국내에도 균열과 게이트가 존재하지만, 군의 통제로 민간인의 출입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

초인 대부분이 해외에서 용병처럼 활동하는 실정이다.

한국은 나름 자위력이 갖춰진 편인데다가 아직 제도적인 이유로 초인들이 활동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유학이라도 가면 좋겠지만....

그것도 당연히 각성부터 하는 게 먼저다.

게임에서는 캐릭터 생성과 동시에 해결됐던 문제가 지금 내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 세계관에서 각성의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자연각성으로,

마나를 느끼는 '개안',

육체가 마력을 품고 변화하는 '감응',

재능을 자각하고 운용이 가능해지는 '득력'.

총 3단계로 이뤄져 있다.

당연히 낮은 확률이며 타고난 체질, 잠재력 따위가 결정하는 일이다.

보통 마력에 노출되어야지만 '개안'의 가능성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데,

일반인 중 70%는 마력에 장시간 노출되기만 해도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이 생기고, 심한 경우 심정지까지 올 수 있다고 한다.

로코33에서 게이트 주변의 시민 NPC들이 가끔 픽픽 쓰러지거나 기어 다니는 걸 보긴 했었는데, 그땐 자세히 몰랐던 내용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각성석'을 흡수하는 방법이다.

해외에서나 가끔 발견 소식이 들리는 귀물로, 흡수하면 일반인을 바로 초인으로 만들 수 있는 마력석의 한 종류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가격이고, 현재는 어느 나라건 국외 반출이 금지된 자원이다.

"…X발."

아무튼, 현실적으로 두 가지 다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것이 자연각성.

멀쩡한 놈 데려다가 떨어뜨려 놨으면 재능 정도는 주지 않았을까.

더구나 지금 내 아버지는, 무려 한상철이었다.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TV로 신경을 돌렸다.

***

-지난달 정부조직법 개편안이 통과되며 신설된 초상보재청이 내달부터 공식 출범합니다. 초상보재청은 초상대책부 산하 외청으로 국내외 유물의 발굴과 등록, 관리를 전담하는....

벌컥.

"아, 배고파…. 뭐야, 또 뉴스야? 내놔."

거실로 나온 동생이 리모컨을 뺏어 들고 소파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

한성윤.

이 세계에서 생긴 네 살 터울 동생이다.

...확실히 닮긴 했다.

누가 봐도 남매라고 생각할 만큼.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너 오늘 씻지도 않았지? 아빠 오실 시간인데 세수라도 해. 괜히 또 욕 처먹지 말고."

벌써 그렇게 됐나?

집에서도 흐트러지는 꼴을 못 보시는 장군님의 퇴근 시간.

"뭐야… 요새 반응이 재미없네. 아직도 어디 안 좋아?"

"아냐, 뭐 좀 생각하느라."

나는 어색하게 웃어 주고 욕실로 향했다.

***

쏴아아─.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다.

...조금 어려지긴 했나?

이곳은 2029년.

내가 있던 세계와 비교하면 무려 6년 전이니 당연한 걸지도.

또 거기선 군 생활을 오래 해서 좀 찌들기도 했었다.

아무튼, 나(젖을 떼자마자 보육원 앞에 버려졌던 김성준)와 이 세계의 나(한성준)는 유전적으로 같았다.

그 때문에 가족을 대하는 마음이 좀 복잡했다.

기억까지 공존하니 그냥 자연스럽다가도 문득, 나를 버린 부모도 진짜 저들처럼 생겼을까. 만약 그렇다면 성윤이도 태어났을까. 그 녀석은 부모님과 살고 있을까.

...와 같은 잡생각이 드는 식이다.

쿵.

아래층에서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구만."

나는 후다닥 매무새를 다듬고 계단을 내려갔다.

***

네 식구가 함께 자리한 저녁 식탁.

아버지는 원래 과묵한 성격이시고,

성윤이는 그 또래 여자아이가 으레 그렇듯 부모와 멀어질 시기다.

나도 뭐 살갑기 힘든 입장이고.

오직 어머니, 신선애 여사만 가끔 이건 맛이 어떠냐 물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인데 굳이 같이 먹을 필요 있을까 싶은 한편,

그냥 당연한 일상이라는 게 왠지 모르게 다사로웠다.

적막을 반찬 삼아 마지막 한술을 떴을 때, 먼저 숟가락을 놓은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

한성준은 삼수 끝에 한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내가 넘어올 때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휴학한 상태였다.

"이제 괜찮아졌으니… 복학해야겠죠."

어차피 다음 학기까지 시간은 좀 남았으니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몸 추슬렀으면 이참에 군대나 다녀오거라."

"에? 어, 아…니."

뜬금없는 군대 얘기에 순간적으로 기가 막혀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부사관 생활 6년 하고 사병으로 재입대하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지.

…라고 내뱉지는 못해 뻐끔거릴 때.

그런 내 모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아버지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혹여나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다면 어림없다."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요. 원래 식사 끝나고 다른 일로 상의드릴 게 있었거든요."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군대에 가더라도 각성은 하고 가야 했다.

만약 각성을 마친 상태로 입대한다면, 국내에서는 게이트 통제 작전을 군부대가 담당하니 군대가 오히려 더 나은 환경일지도 모른다.

"상의?"

"네."

"말해 봐라."

"…따로 말씀드릴게요."

"가족끼리 있는데 따로 할 게 뭐 있어?"

어머니가 서운한 듯 눈을 흘겼지만, 아버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라."

아버지를 따라 서재로 이동한 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해 보라는 아버지의 눈짓에,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요."

어지간하면 변화를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눈이 어이없다는 듯이 크게 떠졌다.

"아니... 내가 그렇게 육사 가라고 할 때는 네놈 앞길은 알아서 하겠다면서 바락바락 대들더니, 인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냐."

순간 '육사'가 왜 나오나 싶었는데, 내 말을 오해하신 듯하다.

한성준은 진로 때문에 아버지와 크게 다툰 전적이 있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저 엄격한 양반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손을 들었었다.

"아뇨. 장교 말고 초인이요."

"뭐?"

이번엔 진짜 놀랐다는 반응.

그러나 곧 심각한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저한테도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기회 좀 만들어주세요."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는 내가 알아챈 것이 자못 충격인 듯했다.

게임 시작 시점으로부터 고작 4년 전인 지금, 당신이 범인(凡人)이라면 그 강함은 설명이 안 되거든요.

로코33의 스타팅 날짜는 출시일과 같은 2033년 4월 14일.

게임은 군부 독재에 맞서는 초인저항군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괴수를 사냥해 성장해 나가는 한편, 군정(軍政) 핵심 인사의 제거 임무를 받게 된다.

플레이어가 독재자 처단 퀘스트를 완료하면 1챕터가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그 헬 난이도의 악당(독재자)이 한상철, 바로 내 아버지 되시겠다.

아무튼,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이상한 느낌 같은 거죠."

"혹시 그 얘길 다른 누군가에게 했느냐?"

아마도 언젠가 있을 거사의 순간까지 비밀로 하셨을 테지.

"아뇨, 사실 말하면서도 긴가민가했어요."

그제야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네 말대로라면 재능은 있는 모양이구나."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이미 '개안'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오해를 하시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마력에 노출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

톡톡톡.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나를 바라보셨다.

"…아버지?"

괜히 긴장돼서 한번 불러 봤다.

아버지는 그제야 손가락을 멈추더니, 책상 서랍을 뒤지며 물었다.

"왜 초인이 되려 하느냐?"

뭐든 가볍게 물을 위인이 아니기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순 없었으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필요하다고 느껴서예요."

참고로 한상철 장군의 마지막 대사가 '전부 필요한 일이었다'였다.

"균열은 아직 진행형이고 분명 언젠가 한국에도 재앙에 가까운 게이트가 발생할 겁니다. 1년 뒤냐 10년 뒤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지금까지의 추이를 지켜봤으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지금 우리나라의 인식과 대처는 안일해 보입니다. 닥치고 나서 준비하면 늦는데요.

아버지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국방을 믿고 있기엔 예정된 위기가 너무 큰 거죠.

재능이 있다면 각자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재앙과 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힘이 같이 나타났다면 취할 것은 취해서 대비하는 게 당연한 거죠.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을 때, 세상은 준비된 사람이 주도하는 사회로 뒤바뀔 겁니다."

초상능력자, 초인, 영웅, 헌터.

뭐라 부르든 현시대에 꼭 필요한- 우러름을 받는 사람을 뜻하지만,

그들과 같은 삶을 살겠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보통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얻는다고 한들 매일 목숨 걸고 괴수의 피를 뒤집어쓰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무인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초인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은 조금 미묘했다.

그들의 자기희생에 대한 존경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반반씩 섞였다고 할까?

분명 동경할 만한 힘이지만,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나 섣부른 영웅심으로 꿈꿀 일은 아니라는 것.

적어도 아직까진 그랬다.

사람들은 향후 경제 생태계에서, 아니 사회 전반에서 초인들이 차지할 위상을 몰랐으니까.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의문은 당연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아마도 당신이 바라는 정답이었을 것이다.

"제법이구나."

과연 아버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준비하는 게 당연한 시기지. 이걸 읽어 보거라."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

"네놈이 내 얘기라면 거품을 물고 싫다 하니 군대 문제로 협상해볼까 생각 중이었다."

한성준의 기억에 아버지에게 반항한 적은 한 번뿐이었다. 그게 좀 세게 남으셨나.

아버지께 받아 든 종이는,

「청송 APRD(Academy for Paranormal Research and Defense) 초상인재 모집 안내」

라는 타이틀의 공고문이었다.

내가 눈으로 공고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아버지가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인 양성기관이 될 거다. 정부와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예정이지."

"마력석이라도 지원한대요?"

"자질만 충분하다면. 속성석에 유물까지 전부 지원할 게다."

"예? 그, 그게 뭔, 뭐 학비가 수백억이래요?"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거다. 생각이 있느냐?"

줘도 못 먹으면 병신이다.

"당연히 가야죠. 아! 근데 이거…"

「지원 자격

- 만 18세 이상 25세 이하의 남녀.

- '득력' 단계 이상의 마력각성자」

열 받네.

나는 안내문을 아버지 쪽으로 돌리며 '지원 자격' 항목을 손으로 짚어 드렸다.

"개안이나 감응도 아니고 처음부터 각성자를 뽑는데요? 모집 마감이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그건 걱정할 거 없다."

아버지는 뒤돌아 금고를 열더니 큐브보다 조금 큰 목함 하나를 건네주셨다.

"이게 뭔데요… 어엇!"

목함 속에는, 게임 속에서나 보던 각성석이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지, 이게 악당이지.

플레이어는 각성석을 쓸 필요가 없었지만, 펫(PET)을 강화하는 데도 사용되기에 꽤 귀한 아이템이었다.

"그게 뭔지 알고 있느냐."

"네? 네. 인터넷에서 봤어요."

"...그럼 어떤 의미인지도 알겠구나."

"네, 그야 뭐…."

배임, 횡령이죠.

현시점에서 각성석은 돈이 있어도 개인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말로 하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쓰게 웃으셨다.

당신의 신념에 따른 결정이었을 테지만, 자식한테 드러내 놓고 해 줄 마땅한 변명은 떠오르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필요한 일인데요, 뭘."

내가 무심한 투로 얘기하자, 아버지는 피식하고 다른 종류의 웃음을 흘리셨다.

"그래, 필요한 일이지."

한성준의 기억을 통틀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네 엄마한테는 심부름 보냈다고 할 테니, 너는 지하에 내려가서 할 일을 하거라. 나머진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네."

아버지가 서재를 나서는 순간이었다.

[게임에 영향을 주는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강제로 진행할 경우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바로잡을 수 있는 루트를 탐색 중입니다….]

#2화, 알 수 없음

"뭔 소리야?"

갑자기 시야가 흑백으로 전환되고 모래시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차분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시스템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그게 뜻하는 바를 파악하긴 힘들었다.

뭐가 어쨌다는 거야….

그때, 다시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며 새로운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완료 : 1개의 루트가 발견되었습니다.]

['알 수 없음(6649)'님에게 개발자 권한이 부여됩니다.]

[개발 기여도 포인트 10,000 DP가 기본 지급됩니다.]

여전히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먹통'인 상태에서의 변화는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UI를 자세히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메뉴바 위에서 못 보던 아이콘 하나를 발견했다.

『개발자 모드』

망설임 없이 아이콘을 누르자, 익숙하기'만'했던 UI가 전부 사라지며 새로운 메뉴 아이콘 네 개가 덩그러니 남았다.

추가, 수정, 색인, 보고서라....

이 얼마나 상서로운 단어들인가.

나는 서둘러 툴팁을 확인했다.

[추가]

- 월드, 또는 대상에 새 설정을 추가합니다.

- 균형 알고리즘에 따라 DP를 소모/획득합니다.

[수정]

- 대상의 설정을 수정합니다.

- 진행과 상충 되는 수정은 불가합니다.

- 기존 이벤트, 퀘스트와 연동된 대상은 수정할 수 없습니다.

- 균형 알고리즘에 따라 DP를 소모/획득합니다.

[색인]

- 월드 내 모든 정보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 열람 시 가치 규모에 따라 DP를 소모합니다.

[보고서]

- 발생할 수 있는 오류 : 1건

"와…."

죽으라고 던져 놓지는 않았네.

제대로 된 활용법까지는 몰라도 당장 이해하기 힘든 내용은 없었다. 활로를 열어 줄 열쇠라는 확신이 들었다.

얼른 사용해 보고 싶어 마음이 급했지만, 계속 각성석을 들고 서재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까부터 시선을 잡아끌던 보고서 항목만 먼저 확인해보기로 했다.

──────────

[발생할 수 있는 오류]

※ '알 수 없음(6649)'이 청송학원에 입학하려 합니다.

- 148명의 등장인물이 '알 수 없음(6649)'과 관계를 맺음.

- [한국엽술학교의 졸업생들] 퀘스트에 오류 발생.

──────────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의 고유명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한국엽술학교.

이건 모를 수가 없다.

본편에 등장하는 네임드들 중 젊은 축에 속한다 싶으면 죄다 거기 출신이었으니까.

'국내 최초의 초인 양성기관이라고 할 때 알아챘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청송학원이 한국엽술학교의 전신인 것이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자칫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뻔했다.

***

지하 창고로 내려온 나는 목함을 창고 구석에 내려놓고, 공구상자를 끌어다 깔고 앉았다.

앞이 깜깜한 상황일 때야 각성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으나, 상황이 달라진 지금은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저 오류 보고서를 보고 나니, '존재'의 오류를 바로잡지 않은 채로는 각성석 흡수가 정상적으로 이뤄질지도 의문이다.

"음…."

현실에서 각성석 흡수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먼저 처리할 게 있다 하고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스마트워치에서 메신저 어플을 띄웠다.

오늘은 이대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피부를 통한 자연 흡수이니만큼 원래 뚝딱 끝나는 작업은 아닐 테지.

홀로그램 화면에서 아버지를 클릭했다.

(창고에서 날 샐 거 같은데 문제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 알겟ㅅㄷ ㅏ)

피식.

칼답하시는 건 조금 의외였다.

"이제 시작해 보자."

나는 손목을 털어 홀로그램을 날려버리고, 실마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사용할 열쇠는 추가와 수정 중 하나, 아니면 둘 다가 되겠지.

문제는 보고서를 제외한 모든 기능이 DP를 소모한다는 것이다.

"현재 보유 DP : 10,000"

▶ DP(개발 기여도 포인트)

- 게임의 볼륨을 증가시키면 DP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볼륨 증가 인정 항목들 : 기록될 사건, 기억, 관계도, 제작법, 이벤트, 퀘스트.

- 권한 캐릭터에 페널티 특성을 추가하거나 능력치를 삭감하여 DP를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 현재 캐릭터 정보가 없어 사용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획득 방법을 살펴보니 당장은 수급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저 10,000 DP가 전부라는 얘긴데.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황.

만약 해결을 보기 전에 전부 소진해버리면 노답 상태에 빠진다는 뜻이다.

청송학원은 반드시 가야 하는 게 맞지만....

아무것도 모를 때면 모를까, 보고서를 보고 나니 오류를 무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솔직히 시험해 볼 용기가 없다.

"후우...."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시스템은 분명 바로잡을 수 있는 루트라고 했었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서 시행착오를 줄이면 된다.

나는 모든 기능의 툴팁과 오류 보고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한쪽에 정보창을 띄웠다.

──[캐릭터 정보]──

이름: 알 수 없음(6649)

※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능력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재능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특성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기술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

이제 수정 기능을 사용하면 저곳의 이름을 바꿔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이 오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심심하면 두들겨 패던 시민 NPC들은 본편에 '등장'하면서도 이름이 없었으니까.

또 DP의 툴팁이 말해주듯이 새로운 관계가 게임의 볼륨 증가로 인정된다면 내 개입 자체가 오류의 원인은 아니라는 거다.

내 경우는 결국,

본편 이전에 예정된 '죽음' 때문이겠지.

수정할 항목은… 보다 근본적인 사건이나 장치이리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색인을 선택하고 검색창을 띄웠다.

그리고 '알 수 없음'을 입력했다.

[41,325,677건의 설정 정보가 검색되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소모 DP 413,256,770]

...미쳤나.

무슨 정보가 4천만 개씩이나 되며, 4억 DP는 뉘 집 개….

그러고 보니 '알 수 없음'이란 이름의 캐릭터는 수없이 많겠구나.

풀네임 '알 수 없음(6649)'을 입력하고 다시 검색을 눌렀다.

[1건의 설정 정보가 검색되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소모 DP 10]

10 DP. 소모량 산정방식에 따르면 내가 고작 그만한 가치의 존재라는 뜻이다.

열람을 누르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미표시 설정 정보]─

「이름: 알 수 없음(6649)」

「생성일: 2008.05.30」

「능력/재능/특성/기술설정 : 모두 꺼짐-습득 불가」

「성격: 비지정형-성장 환경에 따름」

「그룹: 한상철, 알 수 없음(6648), 알 수 없음(6650)- 가족 그룹」

「범주: 미등장-사망A」

「역할설정: 트리거§한상철(죽은 아들), 트리거§한상철(가족의 상실)」

「상태: 예약삭제('미등장-사망A'범주에 속함.)」

─────────

"아...."

바로 찾았네.

이 가려진 설정에는 짧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재능습득이 꺼진 상태로 각성석을 흡수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연속된 번호의 '알 수 없음'들은 어머니와 성윤이를 가리킬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나중에 그 둘도 등장시킬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역할설정과 상태.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시스템이 없었더라면, 강해져서 살아남겠다는 나의 계획은 아마도 헛된 몸부림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안도하며 항목들을 하나씩 수정해 나갔다.

문제를 찾았으니 이름도 넣어줬고, 능력 관련 설정은 '모두 켜짐'으로 수정했다.

범주를 '등장'으로 바꾸자, 예약삭제는 자동으로 해제됐다.

[경고 : 역할설정 항목의 오류로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실 수 없습니다.]

그때 떠오른 메시지.

예상했던 경고였다. 어려운 메커니즘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역할설정 항목의 '트리거'들을 삭제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해당 항목은 게임 시작의 필수요소로 삭제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씨, 도대체 살라는 거야, 죽으라는 거야."

아버지의 성격이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장치처럼 보이긴 했다. 그게 삭제가 안 될 만큼 큰 비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죽은 아들.

그놈의 죽은 아들!

답답함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안을 왔다 갔다 하던 중.

얕은꾀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같은 효과를 내는 장치면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트리거를 조금 수정해봤다.

'트리거§한상철(죽었다고 믿는 아들)'

그리고 잠깐 시스템의 눈치를 살폈으나, 태클은 걸지 않았다.

"...."

그럼 저장.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소모 DP 4,250]

바로 수락한 뒤, 얼른 보고서를 확인했다.

─────────

[필요한 이벤트]

※ 한성준의 죽음이 가장될 만한 사건.

- 제한시간 2년 318일 14시간 33분 57초

─────────

성공이었다.

***

별 탈 없이 각성석 흡수를 마치고 다음 날 보건소에 방문해 '초상능력 감정평가서'를 발급받았다.

인바디 측정표 같은 세세한 평가소견 가운데 유독 한 줄이 눈에 띄었다.

분류 : 마법계(9급)

"...."

각성 후 초기 스펙이 좋지 않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각성 후 비로소 빽빽해진 정보창.

──[캐릭터 정보]──

이름: 한성준(22)

◈ 능력

힘 : 4

민첩: 5

지능: 8

체력: 7

마력: 5

매력: 5

행운: 1

◈ 재능

〈마력 해방〉 ▷상세

◈ 특성

〈싸움꾼〉 ▷상세

◈ 기술

- 미습득

───────────

플레이어는 캐릭터 생성 시 기본 1포인트인 일곱 가지 능력치에 28포인트를 추가 분배할 수 있다. 총합이 35인 셈.

처음 각 능력치의 한도는 9포인트.

대부분 원하는 3개 능력치에 8을 투자하고 남는 4포인트는 행운에 준다.

주가 아닌 능력치를 버리는 대신 강점을 확실히 하는 식이다.

당연히 미투자 항목은 1포인트에 불과하지만, 지능이 1이든 매력이 1이든 개연성은 플레이어의 컨트롤과 노가다로 채워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분배 권한이 없었지.'

아마 각성 후 내 실제 상태를 반영한 거겠지만.

덕분에 능력치에 따라 정해지는 재능, 특성이 각각 마법계열과 탱커용으로 갈리고 말았다.

재능은 캐릭터가 무기로 삼아 성장해 나갈 방향이며, 특성은 고유의 차별점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한마디로 똥잡캐라는 건데,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나는 상성을 꿰뚫고 있는 고인물인 데다가 추가, 수정이라는 사기급 권한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9급이 뭐냐, 9급이."

다만 종이 쪼가리 한 장이 등급을 낙인찍는 현실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어쨌든 감정평가서 제출 이후의 지원절차는 아버지가 대신 처리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마력 활용과 기본능력치 상승을 위한 개인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며칠 뒤.

지원자들에 대한 인적성검사가 온라인으로 치러졌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열 페이지 분량의 커리큘럼 안내 팸플릿과 서약서 한 장이 우편으로 도착했다.

서약서는 교육훈련사고의 책임을 학원 측에 묻지 않으며, 학칙 위반이나 범죄행위로 인한 강제 퇴교 시에는 그간 지원된 교육비용을 전액 부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은 내가 몰랐나 싶었는데-

청송학원에 대한 소식은 합격자발표가 끝나고도 보름이 지나서야 처음 언론에 공개됐다.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중반이라는 지원 자격은 젊은 의기(義氣)로 포장됐고,

입학자라는 이유만으로 갸륵한 애국청년으로 추켜세워지며 각종 매체에 오르내렸다.

당사자로서 꽤 낯부끄러운 수준의 '영웅화'였다.

지난 17년간 초인은 계속 있었지만, 이 어린 초인들의 목적성을 정부가 대변했다는 점만이 달랐다.

"오빠오빠! 이번 주말에 다른 약속 없으면 내 친구들 한번 만나주면 안 돼? 어?"

늘 시비조였던 성윤의 태도까지 180도로 변할 정도였으니 언론의 금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약속 있어."

"그럼 다음 주는?"

"있었던 거 같다."

"아무 때나 괜찮아. 오늘 나 학원 끝날 때 어때?"

"...."

~지이잉.

마침 울리는 스마트워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생겨버렸다."

성윤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졌지만, 뒤이어 나온 소리는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아잉."

"...."

"오빠아."

순간, 뇌정지가 왔다.

한성준의 본능이 시키는 반응은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과격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볼게. 학원 늦는다."

"생각해 본다고 했다? 엄마, 나 학원가!"

~지이잉. 지이잉.

"하. 정용호 이 새끼."

용호는 한성준의 15년 지기다.

(기억도 기억이지만, 내가 병원에 있을 때도 자주 다녀갔던 터라 어색함도 전혀 없다.)

근래 중고등학교 동창들로부터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 빗발치는데 그게 다 용호 놈이 입을 턴 탓이다.

전역 후 복학을 앞둔 용호가 여름에 배낭여행 가자고 하도 졸라 청송 입학 사실을 녀석에게만 말해줬었다.

거절도 상당히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위치를 들여다봤다.

"…?"

「아버지」

예상 밖의 발신자였다.

#3화, 천류

"별일이네…."

나는 얼른 워치에서 콕팟(워치에 내장된 통화용 블루투스 이어폰)을 뽑아 귀에 꽂았다.

"네, 아버지."

-집이냐?

"네."

-스케줄이 어떻게 돼.

"오늘 민증 재발급 나오는 날이라 주민센터가요."

초인은 주민등록증을 다시 발급받아야 한단다. 배경 색이 푸르고 문양에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아마도 사법, 행정 관리 차원에서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리라.

-그리고.

"집에서 점심 먹고 훈련하다가 저녁에 약속요."

-갈 필요 없겠어. 나가봐.

-북진!

부하와 함께 계셨던 듯 다른 이를 향한 말소리와 먼 경례가 들렸다.

"...스케줄은 왜요?"

-아. 점심 같이 하자꾸나.

"점심이요? 부대에서요?"

점점 더 놀랄 일이다.

-강남에서. 소개할 사람이 있다. 장소는 메시지로 보내주마. 나올 때 내 서재에서 서류 하나만 챙겨서 나오거라. 책상 첫 번째 서랍, 맨 위에 봉랍된 걸 들고 오면 된다.

"알겠어요. 근데 누구를…."

"단정하게 하고 나와라."

─뚝.

"...."

뭐 그렇게 의아한 상황이냐 할 수 있겠지만, 이 집안에선 그랬다.

한성준이 처음 스마트폰을 가졌던 15살 무렵부터 지금껏 아버지는 먼저 전화를 거신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동안 그 흔한 귀가 확인이나 심부름조차도 어머니를 통해 전해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이런 변화 배경에는 나의 각성밖에 없었다.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네.'

나는 아버지 서재로 가서 서류를 먼저 챙겨 나왔다.

시대와 문화에 맞지 않게 서류 봉투에는 '川流'라는 붉은 봉랍인이 찍혀 있었다.

"천류…."

아주 익숙한 글자다.

천류회.

게임 본편에서 아버지의 독재정권 수립을 가능케 한 막후의 비밀조직.

언뜻 내가 살던 세계의 수십 년 전 신군부 사조직이 연상되지만, 그 규모는 감히 비교가 우스울 정도다.

천류회는 군경뿐만이 아니라 삼권(입법, 행정, 사법부)의 고위층, 재계의 인사까지 포함된 거대 세력이었으니까.

'잠깐. 소개시켜 준다는 인물이 천류회 멤버인가?'

천류회 문건을 가져가는 자리라면 소개할 이도 천류회 멤버일 거라는 게 당연한 추리였다.

"설마."

하나 한편으론 말이 안 되는 얘기기도 했다.

정황상 즉흥적인 자리인 거 같지만, 아직 세상은 존재조차 모르는 은밀한 커넥션이다.

분명 상대도 한자리하는 인물일 터.

아버지는 그런 회동에서 고작 자식 자랑이나 할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연스러운 그림은,

그쪽이 요청한 경우거나 상대방도 2세를 동반하는 자리가 아닐까?

...맞선 같은 건 아니겠지?

"대충이라도 말을 좀 해주든가. 뭐 입고 나가냐…."

***

"초인, 괴수에 의한 유사시 대처행위에 한해서 공무로 인정되며, 모든 범법행위는 특수로 적용. 가중처벌을 받게 됩니다."

"네."

"여기 적힌 상세내용 확인하시고 아래 서명해주세요. 그리고 이건...."

일반적인 재발급 수령을 생각했는데 작성하라는 게 왜 그리 많은지.

"총각이 초인인가벼?"

"네? …네."

거기다 대기하던 아줌마들의 관심도 예상 밖이었다.

"그럼 수퍼맨처럼 불도 쏘고 널러대니고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있긴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사실 마법계 재능인 내가 그쪽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귀찮아질 일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 좀 받아놔야 쓰겄네."

"그래그래. 울 동네에 그 괴상스런 것들 나타나면 이 총각한테 연락하면 되겠네."

"어… 따로 전화 안 하셔도 재난문자가 먼저 올 겁니다."

후에도 계속 사진 찍자는 아줌마들을 떼어내고 겨우 빠져나왔다.

"후…."

「오전 10 : 56」

약속 시간은 12시 반.

집이 용인이라 여유 있게 나왔건만 남는 시간은 다 잡아먹었다.

급한 마음으로 주차해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내 차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밝은 시간 유동도 많은 주차장.

모자 좀 눌러쓴 남자 하나가 뭐 그렇게 수상하겠냐마는.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빈자리도 많은데 굳이 내 차 옆을 지나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성인 남자가 지레 경계할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운전석 문을 열었다.

파밧! 탁탁탁!

동시에 들려오는 재빠른 기척들.

"...."

의식하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다.

지나치는 듯했던 남자가 등 뒤로 재빠르게 붙으며 내 목을 휘감았고,

다른 하나가 조수석 쪽으로 달려왔다.

"억."

나를 붙잡은 남자가 내 입을 틀어막으며 운전석으로 밀어 넣었고,

먼저 조수석에 올라탄 남자는 입을 검지로 가리며 칼을 들이밀었다.

그사이 나를 놓아준 남자가 뒷좌석에 올라타 뒷목에 칼끝을 갖다 댄다.

여러 번 해본 느낌.

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나 돈 없는데… 아!"

뒷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죽고 싶어?!"

뒷좌석의 남자가 긴장감 없는 반응에 성이 난 듯 을러댔다.

조수석의 남자는 내비에 경기도 광주의 어느 읍리 주소를 입력하고 말했다.

"찍어준 주소로 이동한다. 협조만 잘하면 죽이진 않겠다."

그러더니 급히 올라타느라 깔고 앉았던 서류 봉투를 집어 뒷자리의 동료에게 건넸다.

'…노리는 게 그거였나?'

아버지가 부탁한 서류.

놈들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천류회의 반대 세력이겠지.'

하지만 게임 본편에선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 세력이다.

그건 결국, 끝내 천류회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로선 끝까지 알 턱 없는 존재들이란 얘기다.

"출발 안 하고 뭐 하냐."

"이 새끼 얼었나 본데?"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허술함이다.

"하나만 물어볼게."

"하, 이 새끼 좀 모자란가. 상황 파악 못 하고 반말을 찍찍하네."

"그으… 말 잘 들으면 그 서류는 돌려줄 수 있어? 아빠 심부름인데."

조수석 남자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거 진짜 어디 안 좋은 애 같은데."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뒤에 있던 놈이 대신했다.

"그 애비 때문에 지금 니가 이 꼴을 당하는 거다. 자식아."

오, 확인.

얘들은 그냥 정보가 없었던 거다.

초인을 노리면서 일반인을 보낼 리는 없었으니까.

어쩌면 감시만 하던 놈들이 천류회 인장이 찍힌 서류를 보고 급조한 계획일지 모른다.

그건 그렇고….

그간 꾸준히 훈련은 해왔지만.

나는 사람을 상대로 마법을 써본 경험이 없다.

'설마 죽진 않겠지.'

마법이라고 해서 머리로 하는 어떤 연산이 필요한 건 아니다.

재능 자체가 사용설명서라고 할까.

물론 각 마법을 처음 습득할 때는 '이미지화'라는 중요한 조건이 선행된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게임을 통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접한 바 있었다.

팍!

"아!"

"출발하라고─ 새끼야!"

후우. 아무튼…

슬슬 끓어오르는 짜증에도 나는 신중하게 마력 사용량을 조절했다.

'쉴드.'

…를 시전함과 동시에 조수석 남자에게 마력구를 날렸다.

응축된 푸른 기운이 반 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날아가 남자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빠각!

"컥!"

"마, 마법?!"

"딩동댕."

"튀어!"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다.

갈빗대가 나간 것이 분명하건만 문 열고 튀는 동작이 아주 민첩했다.

캉! 캉! 캉!

그 틈에 뒤에 있던 놈은 내 어깻죽지에 칼을 찔러댔다.

"X발."

전부 쉴드에 가로막히자, 뒷놈도 미련 없이 뛰쳐나갔다.

나는 섭물의 운용으로 먼저 도망친 놈을 붙잡….

콰드득!

"끄아아악!"

서류를 들고 도망치던 남자의 어깨가 괴이한 각도로 뒤틀렸다.

아직 과하다.

...처음이니까.

반대쪽으로 달리던 놈에게는 가볍게 속박마법만….

빠득!

"끅!"

왜 발목이 꺾여버렸을까.

"으어어어!"

"고의는 아니었다."

"개이 씨이…."

…근데 이것도 원래 있었던 일인가?

내가 아닌 한성준이라면 100% 당했을 상황.

만약 저들의 존재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들이 대(對) 초인 작전을 들고나왔다면 나라도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두 놈을 끌어다 한데 모으는데.

경광등 불을 번쩍이며 경찰차 두 대가 주차장으로 빠르게 들이닥쳤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멀찍이 입을 가린 구경꾼 몇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엔 아까 사진 찍자던 아줌마도 있었다.

'하아… 개 꼬였네.'

초인은 무조건 특수폭행이 적용된다는 얘길 들은 게 불과 10분 전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오는 길이냐.

"저 못 갈 거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일사불란하게 내려선 경찰들이 나에게 총을 겨눴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라는 상황이라서요."

***

"지구대장 강정배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김경사, 뭐하나. 얼른 수갑부터 풀어드려."

경찰에 체포되어 지구대에 도착한 지 15분쯤 지났을까.

지구대장이 직접 나와 모든 상황을 '오해'로 정리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지구대로 들어섰다.

개중 둘은 낯익은 인물이었다.

소령 공하균과 상사 임태성.

아버지의 심복들로 게임에서는 별도의 제거 임무까지 있던 네임드들이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네. 없어요."

공하균은 잠시 나를 훑어보더니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지구대장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법적으론 내가 엿 된 상황이 분명했으나… 너무도 쉽게 마무리되는 모양새였다.

'...빽이 좋긴 좋네.'

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복작대는 지구대로 또 한 그룹의 사람들이 들어섰고, 나는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미쳤네…."

천류회라는 초법적 조직의 힘을 절감했달까.

바로 병원에 실려 갔던 피해자(경찰의 입장에서) 둘이 응급처치만 받은 채 다시 지구대로 끌려온 것이다.

"...!"

"...!"

경찰의 부축을 받던 그들은 군인들을 보자마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임태성의 손짓에 대기 중이던 병력이 두 사람을 인계받아 지구대 밖으로 끌고 나갔다.

"군인들은 뭡니까. 우, 우리가 피해잔데 어딜 데려가는 겁니까! 이봐요, 경찰이 이래도 됩니까! 놔! 놓으라고 개새끼들아!"

"여기서 조사받게 해주세요. 살려주세요! 끌려가면 죽는다고! 야 이 짭새 새끼들아!"

난동은 점점 멀어지더니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구대 안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잉. 지이잉.

...타이밍도 어찌나 완벽하신지.

진동 소리하나에 온 시선이 집중될 정도였다.

이쯤 되면 지구대 안의 사람들은 이 전화의 발신자가 이 모든 상황의 배후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을지도.

나는 콕팟을 끼고 통화를 눌렀다.

"네, 아버지."

-서류는.

"멀쩡해요."

-다친 데는 없고?

"예. 그보다 점심 약속은 괜찮아요? 중요한 자리 아니었어요?"

-아까 전화 받고 미리 일러뒀으니 신경 쓸 거 없다. 어차피 입학하면 자연스럽게 볼 사이기도 하고. 다친 데 없으면 됐다.

어떤 자리였는지는 내 추측이 맞았던 모양.

그 집 자식도 청송학원 입학생인가 보네.

"아! 아버지."

호흡이 또, 뚝 하고 끊길 타이밍이라 급하게 불렀다.

-말해라.

"그… 어떻게 하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앞뒤를 다 자른 말이었음에도, 아버지는 그렇게 못 박았다.

"...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나와 통화할 때는. 네가 하는 말, 목소리, 표정에서 무엇도 드러나지 않게 주의해라.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지구대 안의 모든 사람이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 집에서 봬요."

태연히 대답했지만,

조금 전 끌려 나간 놈들의 마지막 외침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4화, 입학

2029년 9월 3일.

예비소집도 없이 청송학원의 입학일이 밝았다.

입학식부터 교육생 본인 외 출입이 제한된다는 사전 안내가 있었기에 나는 홀로 집을 나섰다.

동두천시에 위치한 68,000여 평 규모의 초인양성학교.

위치 때문에 퀘스트할 때 말고는 찾은 적 없던 곳이다.

"와, 이게 진짜로 있네."

어쨌든 게임 속 장소를 실제로 보는 첫 느낌은 일단 반가움이었다.

차량 진입로 주변을 포함해 부지 곳곳에서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저 중앙 부채꼴 형태의 대형 건축물은 게임에서 보던 한국엽술학교의 본관 모습 그대로였다.

외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08 : 42」

집에서 2시간 가까이 걸렸다.

입학식 18분 전.

'여유 있게 안 나왔으면 늦을 뻔했네.'

담배 한 대 빨고 강당까지 걸어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듯했다.

뒷좌석에서 캐리어를 꺼낸 뒤, 주차장 끝 구석의 쓰레기통 앞에서 담배 하나를 빼 물었다.

사실 나는 하사 때 담배를 끊었다.

문제는 한성준의 몸이 니코틴에 심하게 절여져 있다는 것.

뭐,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남은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넣고 한 모금 빨아들이는데,

남색 포르쉐 한 대가 텅텅 비어있는 공간을 놔두고 굳이 내 옆까지 와서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내린 한 여인이 껄렁하게 나를 불렀다.

"어이!"

얇은 항공 점퍼에 블랙진, 민낯에 검은 단발을 하나로 묶은 머리.

그 털털한 차림도 그녀의 외모를 가리지 못했다.

색인 기능에 그녀를 대상으로 지정해보니 소모 DP가 940.

당연히 열람은 하지 않았지만, 중요 인물이 확실하다는 얘기다.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텐데….'

누굴까 생각하는 사이, 그녀가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안 들려?"

"들려."

"흡연은 학칙 위반이거든?"

"아직 입학 전이라."

"그러니까. 나도 하나만 주라."

그러곤 장난스럽게 웃어버리는데, 그 모습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잊을 만큼 아찔했다.

"뭐?"

"나도 한 대만 달라고."

"버렸는데."

"아… X발. 그럼 같이 피자."

뭐 이런....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입에 물린 담배를 뽑아서 제 주둥이로 가져갔다.

"아오, 한 달을 어떻게 참냐."

세 번을 연달아 뻐끔거린 그녀가 다시 담배를 내밀길래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한 달은 왜?"

"원내에서는 금연이고,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맞다, 근데 너 왜 말이 짧냐."

"하하."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어버렸다.

먼저 대뜸 반말해서 동기끼리 뭐 어떠냐는 생각으로 받았더니… 이건 무슨 경우냐 대체.

문득, '만 18세부터 25세'라는 지원 자격이 떠올랐다.

자기 나이가 더 많다는 건가?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말을 높여서 물어줬다.

"그쪽은 스물다섯 살인가 봐요?"

"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깔깔 웃어젖혔다.

"아,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부다다당!

그때 할리데이비슨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진입로에 들어섰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외국인이었다.

그놈도 굳이 우리 쪽까지 와서 멈춰 서고는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Hey, director. 뭐해애~ We are late."

***

같은 인종 안에서 흠잡기 힘든 외모라는 것은.

그런 인물이 여럿일 때 외려 특징을 기억하기 쉽지 않다.

그래픽과 실제의 차이에 4년의 시간 차까지 더해지면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하다.

게임 속에서처럼 복장, 헤어스타일이 하나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라는 이유로 나는 그 '함성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네.'

'우리'는 흡연에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뺏긴 탓에 9시 6분에 강당에 도착했다.

200여 명의 입학생들이 벌써 도열하고,

수십여 명의 교관이 발을 동동 구르는 그 현장에,

함성아는 나와 어깨동무를 한 채 입장했다.

수많은 눈총 속에서 나는 황망히 열 끝으로 달려가 자리를 채웠고.

그녀는 태평한 걸음으로 중앙 통로를 걸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아, 아. 나는 청송학원의 원장을 맡은 함성아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다."

마이크를 타고 그녀의 인사가 울려 퍼지면서 학생들이 나를 두고 수군댔다.

그게 5분 전까지의 상황.

식순(式順)도 따로 없는 이 입학식은 함성아의 단독진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저게 어떻게 30대야.'

게임에서 서른 중반쯤이었으니, 지금은 초반이란 얘기다.

그녀는 2챕터부터 등장하는 '대한엽인협회'의 부회장으로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하지만 함성아가 이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이라는 사실은 나도 몰랐었던 부분이다.

본편에서 한국엽술학교의 장(長)은 다른 인물이었으므로.

…어쨌든.

[인물 '함성아'와 관계를 맺음 - DP 획득 55]

네임드 캐릭터가 하나라도 더 많다는 건 내게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되진 않을 일이다.

나는 또 아는 인물이 없나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맨 끝 열인지라 죄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서울에 미국 댈러스사태와 같은 대형 마나럼프가 터진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국군의 전력이 우수하니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건 개소리… 아니, 그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함성아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시선을 끌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간의 국내 실정이 꽤 답답했던 모양.

그래서 저 자리를 맡았을 테지.

"우리나라는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은 초인들 대부분이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 일이 터졌을 때 가장 빠르게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적어도 시간을 벌어볼 수 있는 인력은 지금 이 자리의 여러분들뿐이라는 얘기다.

지원자격으로도 알 수 있듯, 청송의 입학생들은 이미 준비된 인재들이지.

따라서 모든 교육훈련은 실전에 준하는, 그리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본 원장이 주창하는 청송학원의 이념은 상시준비태세다.

하여… 생도들의 빠른 적응을 돕기 위해 바로 오늘부터 정신력 강화훈련을 실시하도록 하겠다."

얌전히 듣고 있던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입학하는 날 훈련을 시작한다고?

아니나 다를까, 생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용! 훈련 기간,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학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된다. 당연히 주말 외출도 불가하다는 점 미리 알고 있길 바란다.

자세한 사항은 기숙사 배정 후, 각 반 담임 교관이 전달할 테니 교관 통제를 따르면 되겠다.

아, 훈련기간 동안 본 원장을 포함해 모든 교관진 또한 원내에서 함께 생활할 계획이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도록."

함성아가 담배 피울 때 말한 '한 달'의 의미가 저거인 듯했다.

확실히 아카데미의 성격답게 군사훈련소나 사관학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야 그게 더 익숙하지.'

운영이 조금 급진적인 감은 있지만, 그건 순전히 함성아 탓일 테고.

교관들이 반 이름이 적힌 팻말을 치켜들고 생도들을 불러 모으면서 강당 한복판이 시장통처럼 어수선해졌다.

'강화반이랬나?'

40명씩 5개의 반이 편성됐는데 이름은 각각 준비, 경계, 강화, 용단, 생존이었다.

대괴수 시대의 다섯 가지 기본소양이라는 건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서로를 헤쳐 이동하는 틈에 생김새만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인물들을 여럿 마주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면전에서 손가락질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강화반 생도무리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야, 한성준. 맞나?"

"...권하선?"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특유의 웨이브진 포니테일도 그대로지만, 무엇보다도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눈에 띄었다.

"오랜만이네."

얘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우리가 아는 사인가?"

"한눈에 알아봐 놓고 뭔 소리야."

"그거야…."

니가 게임 시작 화면에도 있는 캐릭터니까.

"뭐야 너 혹시 내 SNS 찾아봤어? 그럼 친추하지 그랬냐. 나는 니가 올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바로 못 알아보겠던데. 근데 또 가까이서 보니까 어릴 때랑 별로 안 변했네."

'어릴 때'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한성준의 기억도 그녀를 찾아냈다. 초등학교 1, 2학년쯤 되는 여자아이의 얼굴로.

이게 이렇게 연결되네.

그 '인도 소녀'가 권하선과 동일인이라니.

그녀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비교적 최근 기억에서도 찾아졌다.

권정규 대장.

아버지 부대의 상급부대 사령관이다.

이 세계의 군 편제와 명칭은 내가 살던 곳과 조금 다르다.

굳이 비교하면 아버지가 제7기동군단장, 권하선의 아버지가 지상작전사령관쯤 되는 위치.

어쨌든 두 사람이 아직 영관급이던 시절 같은 사단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그때 어린 권하선과 한성준이 자주 어울렸었다.

잠깐, 근데....

"내가 올 거 같았다고?"

"그야 너희 아버지도 장군님이시니까."

"...?"

…어렵지 않은 문장이 왜 이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장군인 거랑 내가 여기 오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그… 너희 아버지가 아무 말씀 안 하셨어?"

"어."

그러자, 권하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뭐 좋은 얘기는 아니야. 여기서 입 밖에 내기도 그렇고…."

그때, 강화반 팻말을 든 교관이 우리 쪽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둘! 강화반이면 똑바로 붙어서라."

"네."

어느새 반별로 정렬이 끝나있었고 입구에 가까운 반부터 강당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근데 너도 강화반?"

"어, 아무튼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나는 문득 청송학원의 폐쇄적인 모집 방법이 떠올랐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인물 '권하선'과의 관계가 갱신됨. - DP 획득 75]

#5화, 뒷사정

"와, 혼자 쓰기에 이 정도면 괜찮지."

이 교육사업의 규모와 미래를 알고 있었어도 1인실은 의외였다.

6평 남짓한 크기.

욕실도 딸려 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통창 덕분에 답답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첫 입주니만큼 아주 깨끗했고,

냉장고, 인덕션, 빌트인 세탁기까지 갖춰져 있어 편의 면에서도 만족스러웠다.

'정리는 자기 전에 할까.'

캐리어는 열지도 않은 채, 나는 먼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정보창을 띄웠다.

──[캐릭터 정보]──

이름: 한성준(22)

◈ 능력

힘 : 4.18

민첩: 5.09

지능: 8

체력: 7.22

마력: 5.14

매력: 5

행운: 1

◈ 재능

〈마력 해방〉 ▽상세

[Lv: 1] *특화된 속성이 없는 대신 자유자재로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마법 재능. 정형(定型) 마법의 위력은 일반 마법 재능에 비해 떨어진다.

-마력에 원하는 속성형질을 부여.

-성형된 마력체에 30분간 지속성을 부여.

◈ 특성

〈싸움꾼〉 ▽상세

[Lv: 1] *주위에 5개체 이상의 적이 있을 시 공격력이 30% 증가.

-피해를 받으면 3분 동안 힘, 체력 3만큼 증가. (재사용 대기시간 : 30분)

-체력이 절반 이하인 동안, 받는 피해 30% 감소.

◈ 기술

- 미습득

───────────

지난 50여 일간의 피땀이 소수점 이하의 변화뿐이라 멘탈이 좀 갈리긴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재능에 맞춰 특성을 수정할 것이냐, 그 반대로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

한번 수정하면 사용한 DP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 훈련 경과와 청송의 분위기를 보고 결정하려고 지금껏 유예 중이었다.

"장기적으로 원거리 마법계열이 마음 편하기는 한데."

대인전은 전사계열이 낫겠고.

이게 눈앞의 아카데미 생활을 편하게 하느냐, 당장 좀 고생하더라도 미래의 안전이 보장된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 같기도 했다.

...그럼 답이 나온 건가.

진짜 중요한 건 본편이 시작된 이후니까.

-훅! 아, 아.

깜짝이야.

-기숙사 내에 있는 생도들에게 전파한다. 현재시간 10시 13분. 생도들은 훈련 복장으로 환복하고 10시 30분까지 본관 앞 운동장으로 집합한다. 훈련 복장은 흑색 전투복이다. 이상.

다 좋은데 스피커가 침대 위에 달린 건 좀 아니지 않냐.

어쨌든 수정작업은 점심시간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

집합한 200여 명의 생도들은 반별로 담임교관의 인원 체크를 거친 뒤 강의동 건물로 이동했다.

아직 같은 반 생도들끼리도 낯선 시기지만 기숙사 배정 전보다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아마도 통일된 복장 덕에, 이곳 소속이 됐다는 게 이제 좀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급된 전투복은 두 종류.

흑색이 훈련용이고 화이트에 웜그레이가 배색된 전투복이 정복이다.

정복은 유사시 대괴수 전투복이 되기도 하는데, 괴수 대부분의 시각이 빛 노출이 많은 흑백사진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비주얼적인 면에선 훈련복이 더 나아 보였다는 얘기다.

군복과 색은 달라도 전투복 디자인이 다 거기서 거긴지라,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잘 어울리네."

고갤 들어보니 권하선이었다.

운동장에선 나온 순서대로 줄을 채우느라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뒷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참, 너 군대는 갔다 왔냐?"

"아니, 삼수했다."

"꿀이네."

"뭐가."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여기 졸업할 때쯤이면 합법적으로 면제될 수도 있다더라."

"넌 뭐 아는 게 많네."

"그냥 어쩌다 보니… 아 씨, 눈 마주쳤네."

"뭐?"

나는 정면을 보고 있던 터라 금방 그녀가 말하는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앞에서 느끼한 미소로 다가오는 한 남자. 근데 저놈도 어쩐지 낯이 익다.

"누군데."

"있어, 서범진이라고."

아, 그러네. 이때는 턱수염이 없었구나.

그는 3챕터에서 세계 최대 PHC(민간헌터기업)의 한국지부장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곧 내 옆에 멈춰선 서범진이 권하선에게 말했다.

"이쪽은 누구? 하선이 아는 분이면 나도 소개시켜 줘야지."

"어릴 때 친구예요. 한성준."

권하선이 그렇게 소개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서범진이라고 합니다."

손을 내밀길래 나도 대충 받아줬다.

"네. 반갑네…요."

서범진이 손뼈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움켜잡는 바람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도 그 순간 싸움꾼 특성의 힘, 체력증가 버프가 활성화됐다.

"혹시 나이가?"

하! 이 새끼 보게?

시침을 뚝 떼고 대화를 잇는다.

"스물둘이요."

서범진은 전투계열로 나보다 우월한 근력을 가졌지만, 버프가 지속되는 동안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버티는 거론 만족 못 하지.

나는 맞잡은 손으로 뇌(雷)속성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동갑…! …이네. 앞으로 잘… 지내보죠."

"그래요."

흠칫한 떨림이 느껴졌다.

놈은 온 힘을 다해 태연함을 연기했다.

그러나 스스로 당했다고 느꼈던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이내 제 얼굴색을 찾은 서범진은 돌아서 권하선에게 '점심 같이 하자'는 말을 남기고 빈자리를 찾아갔다.

[인물 '서범진'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50]

"에이 씨, 벌써 밥맛 떨어지네."

실제로 보는 서범진은 권하선이 왜 저렇게 싫어할까 의아할 만큼 표정 하나까지 젠틀했다.

한데 시비를 차치하고서도 분명 왠지 모르게 재수 없는 느낌이었다.

눈깔이 문젠가?

"쟤는 반말하던데 너는 왜 존댓말 하냐?"

"거리 두기지. 그리고 쟤가 한 살 많아."

아까 서범진이 나랑 동갑이랬는데. 그러고 보니…

"너 어릴 때는 나한테 오빠라고 하지 않았었냐?"

"글쎄, 그건 기억 안 나는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튼. 그렇게 싫으면 상대를 하지 말든가."

"어른들 관계 때문에 그것도 복잡해."

"뭔 관계?"

"쟤 서 장관 아들이거든. 서 장관이 울아빠 선배고…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 가족끼리 밥 먹는 사이라."

"서 장관이면 서광영?"

"어."

서광영은 현 국방부 장관이다.

강당에서부터 이상하다고 느끼던 게 더 뚜렷해졌다.

"야 혹시 아까 못한 얘기, 그거 군 고위층… 이랑 관계있냐?"

뒷말은 생략했지만,

관계가 있다면 의미는 뻔하다.

특혜 혹은 비리.

권하선이 의자 등받이에 바짝 붙은 듯 목덜미로 호흡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이는 내용은, 내게 조금 충격적인 현실 하나를 일깨웠다.

삼군(육해공)의 고위층뿐만 아니라 정·재계의 유력가들이 담합한 입학비리.

나랏돈으로 온갖 지원을 제공하면서 기회는 자기들끼리 돌려먹었으니 설립 목적부터가 그들 계획의 일환이란 소리다.

답답해 보였던 지금까지의 초인정책 역시 잘 통제되고 있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고.

그렇게 벌어둔 시간 동안 물밑에서 다가올 초상시대 기반을 선점해 나가겠다는 의도다.

그러니까, 이 시기의 힘 있는 놈들은 전부 다 아닌 척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위기에 이 젊은 지도층 자제들의 활약은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포장되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뒷사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비난할 입장도 아닐뿐더러, 그 부패 경쟁의 예정된 승자가 바로 내 아버지였으니.

내가 권하선의 얘기를 듣고 놀란 포인트는, 간과하고 있던 사실 하나와 결합한 내 '처지' 때문이었다.

차세대 주류사회를 구성할 이 인맥의 바다에서,

나는 저들에게 '악당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정권 장악은 수정할 수 없는 시작 설정이었으므로.

본편의 기록에 따르면 거사는 국가재난 사태 속에 이뤄졌다.

그러나 만약 권하선의 아버지가 사고에 희생된 게 아니라면....

"…성준, 충격받았냐?"

나는 그녀에게도 원수의 아들이 되는 셈이었다.

"뭐…. 그래서 여기 있는 애들은 전부 대단한 집 자식이란 거네."

"그건 아냐. 진짜 재능이 넘사여서 뽑힌 쪽이 더 많지."

그런 애들도 결국 어떤 세력의 '장학생'이 되겠지.

아버지가 악당인 건 변함없지만, 이렇게 되면 저항군의 이념도 숭고하다고만 볼 순 없겠다.

저항군의 주축이 이곳 출신들인 만큼, 밥그릇 뺏긴 자의 울분도 분명 들어갔을 테니까.

"모두 자리에 앉아라."

생각은 담임교관의 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접어뒀다.

어차피 어떤 문제도 내 예정된 '잠적' 이후에나 감당할 일들이었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나는 1년 동안 강화반 담임교관을 맡은 하정혁이라고 한다.

23년부터 콜롬비아 남부방어선에서 자유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올해 초 이곳 교관직을 제안받고 귀국했다.

담당 과목은 괴수생태 이론교육과 병기술내 검술파트지만, 어떤 고민이든 1차로 본 교관에게 상담하면 해결을 돕도록 하겠다."

담임교관은 그 경력을 증명하듯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오래된 흉터가 여럿 새겨 있었다.

"소개는 이쯤하고… 지금부터 호명하는 순서대로 앞에 나와서 스마트워치와 병기 지급신청서를 받아 가도록."

이어서 교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들은 하나같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중요도를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 하나둘도 아니고 계속해서 튀어나왔으니까.

아직 면면을 확인할 기회도 없었고 앞서 경험한 대로 기억하는 모습과 다른 것이 이유였다.

당장 강선호에게도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창상(創傷)이 없었다.

'쟤랑 같은 반이라니.'

로코33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며, 이제는 나와 관련이 있기도 한 인물.

사실 헬난이도로 평가받는 '독재자 처단 임무'의 완료 조건은 1페이즈(Phase)까지로 플레이어가 아등바등 한상철을 쓰러트리면 컷신이 재생된다.

더욱 강력해진 한상철을 감당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그로기상태가 되고, 그때 극적으로 나타난 강선호가 한상철의 심장을 꿰뚫는다.

아버지를 '죽일' 원수란 얘기지만, 어쨌든 그는 선역의 캐릭터고 본편의 미래까진 지금 생각할 범위가 아니다.

그 밖에도 최범균, 송연희, 차유라 등 이제야 매치가 가능해진 인물들을 훔쳐보고 있을 때, 내 이름이 호명됐다.

"…한성준, 가영."

스마트워치와 병기 지급신청서를 받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방금 호명된 순서가 입학성적순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기 지급신청서」

이름: 한성준

석차: 39/40(192/200)

재능: 마법계

병기 지급신청서에 미리 출력된 양식 중 석차가 표기되어 있었고, 내 뒤로 호명된 생도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39등?"

내 어깨 위로 권하선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

"와아, 혹시 팀 짜는 거 있으면 너랑 하려고 했는데…. 39등은 좀 어렵겠다."

그러면서 절레절레하는데,

...이게 은근히 열 받는다.

감정평가서와는 다르게 9급이라는 표시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급신청서에 표기된 석차는 단순히 지원 시 제출한 초상능력감정평가서에 기반한 것으로 실제 여러분이 가진 잠재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석차 얘기로 술렁이자 교관이 한마디 얹었지만, 학생들의 화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내가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편임에도 조금 억울해지는 순간이다.

아직 손을 보지 않은 건 둘째치고, 비정형으로 특화하면 내 마법 재능은 꽤 좋은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담임교관은 뭘 좀 아는 양반이네.'

재능 감정의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나, 그동안 확인해본 결과 다른 사람들은 정보창을 보지 못한다.

기계로 측정이 가능한 것은 마력뿐이니, 현 시스템상으론 마력 총량이 많다거나 파괴적인 신체 능력처럼 드러나는 재능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겠지.

"신청서에는 본인이 사용하고자 하는 병기의 제원과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상세히 적어서 내면 된다. 제출은 금요일이니 충분히 고민해서 적어라.

또한 지급된 스마트워치에는 학원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생도 식별코드가 내장되어있으니 이 시간 이후로 원내에서는 항상 착용할 수 있도록. 여기까지 질문 있나?"

교육용으로 지급된 스마트워치조차 내가 쓰던 것보다 고가의 최신형 제품이었다.

"오…."

멀티-USIM까지 가능해서 굳이 원래의 스마트워치를 함께 쓸 필요도 없었다.

다들 스마트워치를 바꿔 차느라 부산스러운 가운데 교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부터 실시되는 정신력 강화훈련의 개요를 설명하겠다."

그제야 동작을 멈춘 생도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교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6화, 훈련의 의미

먼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같았다.

훈련 장비를 이용하여 전 생도를 상대로 공격포인트를 획득하라는 것.

훈련 장비는 지금 입고 있는 흑색 전투복과 지급된 스마트워치, 그리고 담임교관이 들어 보이는 만년필 크기의 스틱이 전부였다.

"이걸 스마트워치에 연동하면 각자의 스틱에도 고유코드가 부여된다. 스틱이 몸에 닿는 순간 어디서든 바로 판정이 이뤄진다는 뜻이지."

스틱을 상대의 몸에 터치해 점수를 얻는 게임이라고 보면 되겠다.

"판정이 제한되는 장소는 본관과 이곳 강의동. 그리고 식당과 기숙사뿐이며, 따로 시간제한은 없다."

"악!"

말뜻을 알아들은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어떤 생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온종일 긴장을 놓을 수 없다는 얘기였으니까.

그게 언뜻 재밌는 게임처럼 보이는 이 훈련이 '정신력' 강화훈련으로 명명된 이유겠지.

"스틱을 날리든, 쥐고 휘두르든, 방법은 각자의 자유다. 배점 방식은...."

상대의 몸에 터치 시 유효부위에 따라 1~3점을. 접촉을 5초간 유지하면 '제압'으로 판정, 10점을 획득한다.

당연히 당한 쪽은 같은 점수가 차감되고.

동일 대상 간 점수 발생은 증감에 상관없이 24시간 내 1회.

한 달간 총 7회의 제한이 있다.

…라는 데, 막 입학한 생도들한테 너무 가혹한 룰이 아닌가 싶다.

'이거 함성아 그 여자 생각인가?'

동일 대상 간의 점수획득 제한이 일견 약자를 보호하는 조치처럼 보이지만….

만약 5명이 하나를 완전히 제압하면, 30초도 안 되는 시간에 50점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멘탈 나가는 애들 많겠네.'

생도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덤덤한 놈,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놈,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놈 등.

빠릿한 몇몇은 벌써 귓속말로 작당을 시작하기도 했다.

'지금 머리 굴려 봤자지.'

강자는 정체 구간을 맞이하면서, 약자는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온갖 배신과 음모가 난무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머나먼 이국땅.

생존과 이권 뒤엔 늘 차별과 배신이 뒤따랐을 아수라장에서, 동양인 용병들이 겪은 경험이란 결국 이런 것들이었을 테니까.

"…대상이 다른 반 생도라면 유효, 제압 모두 1점의 가산점이 붙는다. 꼭 같은 반 생도끼리 경쟁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

훈련 장비나 기물의 파손 시 쌍방 모두에게 벌점이 부과되니 주의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모든 훈련 간 발생하는 점수는 곧 여러분의 '권리'라는 점,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

건물 전체에 긴장이 감돌았다.

'하긴.'

서로에 대한 정보도 신뢰도 없는 지금, 대부분의 생도들에겐 팀 구성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강의동 입구.

생도들은 섣불리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로비 안쪽에서 경계와 탐색의 시선만 주고받았다.

약간의 시간차로 다른 강의실에서도 생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로비는 곧 미어터질 듯 가득 찼다.

"어어, 밀지 마."

"아 X발, 누구야!"

"앞에서 안 빠져요. 밀지 마세요!"

당연히 난장판이 벌어졌고.

교관들도 통제할 생각이 없다는 듯 방관할 뿐이었다.

점심 전까지 원내 견학과 개별 행정업무를 볼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그건 결국 의도된 상황이란 얘기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주차등록 문제로 행정실에 가야 했기에 그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중이었다.

"아직 공격하지 말기로 약속하고 일단 좀 나가서 흩어지는 게 어떻습니까? 준비가 필요한 분들은 강의실로 돌아가시고요. 이렇게 서 있는 건 답이 없을 거 같은데요."

누군가의 제안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다 같이 약속하면 어기는 사람이 공적이 될 테니, 나쁘지 않은 방법 같네요."

"그렇게 하죠."

그대로 정리되나 싶던 찰나였다.

"매번 이럴 건가. 훈련의 목적이 합의는 아닐 텐데."

인해(人海)를 가르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한마디.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그러나 웬만한 담으론 말 붙일 엄두도 안 날 만큼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있었다.

'이나은.'

강화반은 아니었으나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재계 정점, 신성가(家)의 4세로 1챕터 시작부터 후반까지 변함없이 공고한 배경을 가진 인물.

나는 그녀를 알아본 즉시 입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 얘기는 아직 준비들이 미흡하니 이번에만...."

"그것도 훈련과정이죠. 규칙에 없는 약속까지 만들어서 제대로 할 사람 방해는 하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지나갈게요."

흐름은 예상대로였다.

그 이나은이라면 벌써 무리를 일궈 놓았을 터.

'그들이 입구를 나서는 순간, 얌전한 탈출은 힘들어지겠지.'

먼저 움직인 덕에 이나은 패거리가 로비를 지나기 전에 입구에 도착했다.

출발 전.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시는데 누군가 덥석 어깨를 잡으며 달라붙었다.

"야, 39등. 내가 지켜줄까?"

권하선….

상대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녀 귀에 대고 한마디만 속삭였다.

"눈치 게임이다."

곧장 입구를 뛰쳐나와 등 뒤로 반쪽짜리 쉴드를 시전했다.

바로 뒤를 잇는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은 단 하나를 제외하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건 말 그대로 눈치 게임이었다.

계획 없이 난장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누굴 노릴 시간에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

다들 머리론 알아도 확신할 수는 없으니 뒤를 걱정하던 것이고.

내가 빨랐던 점은 '이나은'이라는 더 큰 위험을 먼저 알아챈 것이다.

돌아본 강의동 입구 앞 광경은 역시나.

이나은 패거리를 포함, 팀을 이룬 여러 무리가 뒤늦은 생도들을 사냥하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뒤따르던 권하선이 픽 웃으며 말했다.

"개판이네. 그만 뛰어도 되겠… 어억!"

내가 갑자기 멈추고 돌아서자, 권하선은 그대로 안겨버렸다.

~지이잉!

~지이잉!

나와 그녀의 스마트워치가 동시에 울었다.

나는 그녀의 복부에서 스틱을 떼면서 물러섰다.

"...."

권하선이 멍한 표정으로 스마트워치를 확인했고, 이내 야차가 되어 소리쳤다.

"이런 개자식을 봤나!"

"흥분하지 말고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봐."

"와, 나,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냐? 좋은 맘으로 도와주려고 왔다가 뒤통수 처맞았는데!"

"덕분에 우리는 24시간 동안 믿어도 되는 사인 거지."

말을 뱉어놓고도 순서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하선이 주먹을 날릴 듯이 다가섰다.

"뭐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나는 짐짓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다. 근데 내가 밑도 끝도 없이 널 믿을 수는 없는 거 아냐. 너는 나 믿냐?"

"당연히...."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대단한 믿음을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십수 년 만에 만나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웃긴 얘기니까.

"너는 날 믿어서 따라온 게 아니라, 니 실력에 자신 있어서 따라온 거야. 나랑은 입장이 다른 거지."

"...어쨌든 선빵은 니가 날린 거다. 넌 내일부터 죽었다고 생각해라."

그녀도 부정할 순 없었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으르고 돌아섰다.

그녀가 세 번째인가로 '호명'됐었던 만큼, 당장 지금은 나를 압도하는 힘을 가졌음이 명백했다.

"기다려봐. 싸우자는 게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따먹었잖아, 지금!"

"야야, 얘가 말을 좀 이상하게 하네. 그… 이유나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선이 샐쭉한 얼굴로 지껄여 보라는 듯이 팔짱을 꼈다.

"인제 와서 팀 먹자는 개소리는 하지 마라. 진짜 계획이 있었으면 통수를 치기 전에 말했어야 하는 거야."

"...니 말이 맞지. 맞는데, 만약 니가 나를 노리고 따라왔고 나를 제압한 다음이었다면 내 얘기를 들었을까?"

"나는 진짜 너 도와주러 왔다고. 그리고 내가 먼저 공격했다고 해도 뒤통수 맞은 지금보다는 귀가 열려있었겠지."

"물론 지금은 니 말을 믿어. 고맙게 생각하고."

"...."

"근데 얘기했듯이 내 입장은 너랑 달랐고, 내 생각에 사람은 보통 자기가 우위에 있을 때 남 얘길 잘 안 듣는다는 거야. 아까 내 행동은 그런 반사적인 판단이었다."

이빨을 까는 게 아니었다.

강의동 앞을 돌아보며 권하선이 눈에 잡힌 순간 바로 스틱을 움켜잡았고, 그 판단은 무의식중에 이뤄졌다.

나도 방금 말하면서 문득 나 자신이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게 정확히 성격인지 사고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성은 느꼈는지 권하선의 눈매가 살짝 풀어졌다.

"그래서 니 계획이 뭔데."

나는 스마트워치를 확인하며 말했다.

(권하선 → +3점, 훈련획득)

◇ 훈련점수 합계 : 3

"먼저… 니가 오늘 3점을 썼으니까 내일 내가 너한테 3점을 돌려주는 식으로 매일 반복하는 거지."

동일 대상 간 점수 발생이 최대 7회이니, '-3+3-3+3-3+1+2' 같은 방식으로 일주일만 주고받으면 점수의 득실 없이 안전한 관계가 성립된다.

"뭐 그다음부터는… 뒤통수 걱정할 필요가 없긴 하겠네."

말로 이루어진 동맹은 온전한 신뢰를 주기 힘들다.

한 달은 아주 긴 시간이니까.

"그런데 말이다. 내가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남은 6일 동안 너한테 60점을 뺏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잖아. 그다음에 내가 손 내밀면 삐져서 거절하려나?"

그녀 말처럼 꼭 공정한 거래가 될 필요는 없다.

결국, 더 많은 점수를 지불하는 쪽은 내가 아닐 테지만.

"그럼 아마 계속 널 쫓아다니면서 니 반대편에 손을 보태겠지."

권하선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건 좀 찌질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농담이고, 내 말은 그거야. 고용거래. 니 가치가 진짜 60점이면 내가 자발적으로 지불하겠다는 거지. 다만, 그 협상은 앞으로 6일간 매일 하는 거고."

"내 가치에 따라 점수를 지불하겠다?"

"그렇지. 오늘 하루 니가 날 지켜줘. 내일도 니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10점을 내줄게. 시원찮다 싶으면 3점만 돌려주고. 어때."

사실 아무리 그녀라도 1대1 싸움에서 10점을 뺏는 건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 기절시키거나 결박한 경우가 아니면 5초의 접촉 유지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권하선이 잠시 눈썹을 매만지다가 대답했다.

"좋아."

"오케이. 그럼 행정실까지 경호 좀 부탁한다."

그녀는 뭔가 맘에 안 드는 눈으로 나를 흘겨봤지만, 내가 걸음을 옮기자 금방 따라붙었다.

***

남녀 기숙사는 지하와 1, 2층을 공유하는 쌍둥이 건물이다.

숙소는 분리된 동서 건물의 3층부터였고 엘리베이터도 따로 이용하게 되어있었다.

그 1층 중앙의 로비에서 권하선이 짜증을 부렸다.

"기숙사에 처박혀서 뭐 하겠다는 거야. 캠퍼스 구경도 하고 점수도 따고 하자니까."

"할 게 좀 있어서. 그리고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벌써 힘 뺄 필요 없어."

"아, 몰라. 난 혼자라도 갈 테니까 니 맘대로 해."

답답하다는 듯이 투덜거린 권하선이 돌아서 입구를 향했다.

행정실에 들렀다 기숙사로 오는 동안 우리도 한 번의 습격을 받았었다.

3인조의 다른 반 생도들이었는데, 권하선이 가뿐히 상대했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9점의 유효점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게 권하선을 자신만만하게 만든 모양인데, 아무리 그녀라도 혼자서는 손해 보는 싸움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오래 안 걸리니까 괜히 객기부리지 말고 들어가 있어. 나올 때 연락할게."

뚱하게 돌아보는 그녀에게 스마트워치를 들어 보이는데, 기숙사 입구 밖에서 소동이 일었다.

한눈에 봐도 지친 모습의 생도들이 기숙사로 몰려들고 있었다.

상황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쫓는 사냥꾼 무리와 안전구역인 기숙사로 피신하는 생도들의 추격전.

도주에 성공한 생도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널브러지는 가운데, 밖에 붙잡혀 점수를 약탈당하는 생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데 조금 이상한 게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대주는 모양새였다.

마치 점수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그는 더 이상 붙잡는 상대가 없자, 덤덤한 얼굴로 로비에 들어섰다.

'가…영이라고 했던가.'

분명 강화반 생도였다.

나 다음으로 호명됐었던.

그때, 바람 같은 인영 하나가 가영을 스쳐 입구 밖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희희낙락하던 사냥팀 생도 하나가 뻑!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어디 멀리 가진 않겠네.'

인영의 정체는 권하선이었다.

#7화, 세팅

남자기숙사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가영이란 생도와 나, 둘뿐이었고 목적지도 같은 7층이다.

말을 걸어봄직도 한데, 조금 전의 상황 때문에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딱히 우울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사연이 있어 보인달까.

괜한 호기심이 생긴 나는, 가영을 색인으로 검색했다가 넋이 나가고 말았다.

"...."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과 이름이라 당연히 엑스트라 인물군에 속하는 줄 알았다.

한데 색인 기능이 말해준 가영의 정보열람 비용은 무려 18,200 DP. 일전의 함성아와 비교해도 20배에 달하는 가치였다.

수차례 엔딩을 본 내가 그만큼 중요한 캐릭터를 모른다고?

"저기…."

"아."

너무 빤히 보고 있었다.

"성준이형 맞죠? 같은 반."

"맞는데… 나이가?"

작은 키도 그렇고 녀석이 많이 앳돼 보이긴 했다.

"열아홉이요."

"아… 그래. 영이지? 반갑다."

[인물 '가영'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260]

'!'

관계 보상도 여타 인물과는 비교 불가다.

"...."

"...."

어쩌다 말은 트게 됐으나, 아직 대화를 이어나갈 정신이 없었다.

내가 그대로 생각에 잠기자, 녀석도 더 말을 걸진 않았다.

가영. 게임 속에선 본 적 없는 이름이다.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수염이며 흉터를 이리저리 붙여봤음에도 매치되는 인물이 전혀 없었다.

등장은 하되, 전면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란 건가?

-띵! 7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따 뵐게요."

제 방문 앞에 도착하고서야 가영이 인사를 건넸다.

"아, 영아."

"네?"

나는 일단 녀석을 붙잡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궁금증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대뜸 물을 수 있는 게 없다. 뭘 물어야 정체를 짐작할만한지도 모르겠고.

"그… 나랑 팀 먹을래?"

"...저랑요?"

"너 아까 입구에서 보니까 훈련점수 신경 안 쓰는 거 같던데. 내가 볼 땐 이거, 그냥 평가를 위한 점수는 아닌 거 같거든."

"제의는 고마운데 저는 아무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대인전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될까."

"특수계 재능인데… 대상을 완전히 지워버려요. 사람한테는 못 쓰는 게 당연하죠."

아…!

문뜩 머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지워버린다는 게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거지? 흔적도 없이."

"아마도요."

인물이 아닌 서비스로,

스토리가 아닌 시스템 위에 있던 이름.

'카이...!'

세계 최대의 경매기업.

좌표만 입력하면 어디서든 낙찰한 물품을 즉시 받아 볼 수 있는 초공간 운송 서비스.

플레이어 입장에선 시스템 기능 일부나 다름없지만, 설정상 분명 기업의 서비스였다.

아직 본인 재능의 절반만 이해하는 시기라고 보면….

퍼즐이 맞춰진다.

만약 가영이 그 카이옥션의 창립자라면 미쳐버린 열람 비용도 충분히 설명된다.

함성아가 아무리 대단한들 시스템의 한 축을 차지한 인물에 비할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카이(KY)가 가영의 이니셜이었네.'

재능 개화를 조금 앞당기는 것쯤은 내가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내 숙제도 함께 해결될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유는 잘 들었고. 그렇다고 포기하면 쓰나. 훈련기간 동안은 나랑 같이 다녀."

"왜요? 저 진짜 도움 안 될 건데…."

"야이 씨, 사람을 도움받으려고 사귀냐. 사귀다 보면 도움받기도 하고 다 그런 거지. 그냥 넌 앞으로 형만 따라다니면 돼."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이지만, 오글거려서 죽을 거 같았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가영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그래. 그럼 이따 보자."

나는 서둘러 내 방을 향했다.

***

재능, 특성의 상세 정보를 띄워놓고 침대에 누워서 고민에 잠겼다.

아까는 장기적 관점에서 결론을 내렸으나, 훈련내용을 보고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청송에 발을 들인 궁극적인 목표는 성장에 있었으므로.

대충 수업만 따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적당히 하다간 시간 낭비로 끝날 분위기다.

내가 느낀 청송의 방침은 기회를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경쟁의 장이었다.

다시 말해, 훗날 조금 유리한 정도는 2년 반의 노력 여하에 따라 티끌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고로, 내가 우선 나아갈 방향은 「아카데미 깡패」였다.

'깔짝깔짝 치고 빠지는 쪽은 원래 성미에 안 맞긴 하지.'

나는 근접전에 특화된 전투마법사를 구상했다.

게임에서도 강화마법특화로 비슷한 포지션의 육성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때보다 능력치가 어중간하고, 마법 재능도-강화마법은 정형마법에 속한다-별로였지만… 개발자 권한 덕에 가능한 빌드는 훨씬 다양하다.

나는 〈싸움꾼〉특성을 먼저 내 능력치에 맞게 수정했다.

[5개의 수정내역이 존재합니다.]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소모 DP 1,250]

부분당 250 DP 수준.

특성의 포텐셜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수정하니 소모되는 DP가 그리 크진 않았다.

───────────

〈싸움꾼 : 수정됨〉 ▽상세

[Lv: 1] *주위의 적 1개체당 6%씩 마법공격력 증가. (최대 30%)

-피격 시 3분 동안 힘, 마력 3만큼 증가. (재사용 대기시간 : 30분)

-마력이 절반 이하인 동안, 마력 소모 30% 감소.

───────────

지능은 쓸만하니 힘 버프는 그대로 두고 체력을 마력으로 수정, 싸움꾼의 특성을 마법사에 맞게 설계했다.

이걸로 웬만해선 상대보다 마력이 먼저 고갈될 일은 없지 싶다.

"현재 보유 DP : 5,030"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본래 가진 포텐셜을 상회하는 경우에는 DP 소모 값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평범한 마법 재능을 괜찮은 전투마법 재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꽤 많은 DP가 소모될 터.

DP 벌이를 위해 페널티를 조금 감수할 작정이었다.

게임에서도 곳곳에 숨은 이벤트를 통해 페널티 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페널티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데, 컨트롤과 아이템 조합으로 디버프 요소만 잘 상쇄할 수 있다면 외려 독보적인 무기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 감당을 모두 내 몸뚱이로 해야 한다는 것.

더는 모니터 너머의 사정이 아니었다.

지금 〈만성피로〉나 〈허약체질〉을 달았다간 뭘 해보겠다는 의욕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추가할 페널티 특성들은 감당할 수 있는 '순한 맛'들이어야 했다.

내가 고르고 고른 특성은,

[특성 '근시안'의 페널티로 DP 900이 보상 지급됩니다.]

[특성 '신경과민'의 페널티로 DP 1,200이 보상 지급됩니다.]

[특성 '과활성마력종'의 페널티로 DP 2,400이 보상 지급됩니다.]

[특성 '심단격리장애'의 페널티로 DP 2,100이 보상 지급됩니다.]

모두 4가지였다.

───────────

◈ 특성

〈싸움꾼 : 수정됨〉 ▷상세

〈근시안〉 ▽상세

[Lv: -] *전투 중 인지 범위 감소.

-원거리 명중률 25% 감소.

-물리공격력 10% 증가.

〈신경과민〉 ▽상세

[Lv: -] *매력이 1만큼 하락하고 체력회복속도가 줄어든다.

-집중력 감소로 마법 재사용 시간 10% 증가.

-마법공격력 8% 증가.

〈과활성마력종〉 ▽상세

[Lv: -] *마력이 충만한 상태에서 생명력이 조금씩 감소한다. 장시간 마력 소모가 없을 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마력회복속도 대폭 증가.

〈심단격리장애〉 ▽상세

[Lv: -] *마력 흐름이 불안정하여 혈액순환에 영향을 미치는 장애증. 마력과 생명력의 증감이 연동된다.

───────────

"와 씨."

체감 빠른 것 좀 보게.

은근한 통증과 함께 심박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약간의 흥분? 아니, 짜증은 덤이었다.

나는 캐스팅 없이 내재 된 마력 일부를 외부로 방출했다.

그것만으로도 명을 깎는 듯한 탈력감이 들었으나, 통증은 사라지고 이내 묘한 청량감이 명치와 심장 근처를 휘감았다.

〈근시안〉과 〈신경과민〉은 조금 수정해 싼 맛에 쓰려는 버프 용도였고, 내가 구상한 메커니즘의 주력은 역시 〈과활성마력종〉과 〈심단격리장애〉였다.

마력 충만 상태에서 깊은 잠이 들면 골로 갈 수도 있고, 마력을 쓰는 만큼 유리 몸이 된다는 페널티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으나─

두 특성을 함께 가졌을 땐 위험이 상쇄된다.

건강 상태의 등락을 계속 느껴야 한다는 단점은 그대로지만…

그보다.

"후우, 씹."

성격이 먼저 파탄 나겠는데.

〈신경과민〉의 영향이 생각보다 컸다. 옵션이야 수정이 가능해도 해당 특성의 체감 영향까지는 바꿀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DP가 넘쳐나기 전엔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페널티 보상으로 보유 DP는 11,630이 됐다.

나는 재능의 상세 정보를 띄우고 아랫부분에 생각해둔 옵션 두 개를 추가로 작성했다.

───────────

〈마력 해방〉 ▽상세

[Lv: 1] *특화된 속성이 없는 대신 자유자재로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마법 재능. 정형(定型) 마법의 위력은 속성 마법 재능에 비해 떨어진다.

-마력에 원하는 속성형질을 부여.

-성형된 마력체에 30분간 지속성을 부여.

-시전자 반경 5m에 영역을 생성. (영역 내 대상에 한하여 마법 위력이 감소하지 않으며, 마력을 할당한 만큼 물리 능력치가 강화된다.)

-영역 내 대상 한정 마력 소모 30% 감소.

───────────

[2개의 수정 내역이 존재합니다.]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소모 DP 16,500]

"오…."

예상대로 요구 DP가 그리 크진 않았다. 언뜻 사기적인 옵션이나, 보통 마법사에게 너무 가까운 영역 버프는 메리트가 없었으니까.

나는 영역반경을 4m로 줄인 뒤, DP 값을 다시 확인했다.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소모 DP 13,000]

다음엔 마력 소모 감소 퍼센트를 줄였고,

25%, 24%, 23%...

18%에서 9,250 DP에 타결했다.

"음."

조금 아쉽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싸움꾼〉효과와 중첩되면 절반 이하의 마력부터는 48%를 절감할 수 있다.

"다 됐나? 아, 마지막…."

500 DP를 사용해〈근시안〉의 근접공격력 버프를 마법공격력으로 바꿔줬고,

"현재 보유 DP : 1,880"

DP를 적당히 남긴 채 마무리했다. 이만하면 현시점의 학원 내에선 깡패 같은 능력을 갖춘 셈이다.

"벌써 이렇게 됐나."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것은 아마도 페널티 적응 탓이리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권하선 : 야 언제 나와)

(권하선 : 언제 나올 거냐고)

(권하선 : 야 한성준)

(권하선 : -주먹 쥔 고양이가 불타는 이모티콘-)

(권하선 : 설마 자냐?)

(권하선 : ㅅㅂ)

...잔뜩 꼴 받았겠네.

(나간다 밖이냐?)

#8화, 보완

훈련의 색깔과는 다르게 캠퍼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평온했다.

넓은 부지에 비해 생도 수가 적은 탓도 있었지만, 체력들이 다해서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권하선도 정련관 앞에 이르러 슬슬 힘에 부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 씨, 개고생하고 이게 뭐야."

─ 훈련점수 합계 : 14

한성준과 헤어질 때 6점이었으니 십수 명 상대한 것 치고는 소득이 시원찮았다.

기숙사 앞에서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한번 삐끗하는 바람에 퇴로를 차단당했다. 점수를 지키려고 멀리 도망쳐 나왔지만, 그때부터 계속 손해 보는 싸움만 이어지고 있었다.

매복해있던 생도들이 가끔 방심한 사이에 튀어나오거나 스틱을 날려댔던 것.

"아니 근데, 이 자식은 도대체 뭐 하냐고!"

조금 전에 확인한 스마트워치를 다시 들여다보지만,

이 얄미운 놈은 여전히 대꾸가 없다.

"...얘랑 괜히 엮였나."

14년 전.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소년은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소녀에게 항상 져주는 오빠였고.

그와 함께한 단편적인 추억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미소를 자아내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뀌어 소년과 헤어지던 날에는 밥도 안 먹고 온종일 울기만 했었다.

뭘 좀 알 나이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그 또한 애정이었으리라.

그래서일까.

완전히 잊고 산 옅은 추억임에도 그를 다시 마주한 순간, 시간이 거슬러졌다.

친근하고, 괜히 장난치고 싶고, 조건 없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그랬는데, 그 새끼는....

"생각할수록 열 받네."

그 옛날 든든한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계산만 빠른 밉상이 되어있었다.

전투화 끝으로 땅을 차던 권하선은,

내가 지 따까리야?

고작 그 점수 먹자고 39등이랑 어울려주는 줄 아나.

뭐, 머리는 좀 돌아가는 거 같다만.

말렸어, 말렸어.

손절해버릴까.

따위의 말들을 중얼거리며 기숙사를 향했다.

그렇게 100미터쯤 걸었을 때,

권하선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전방의 화단을 응시했다.

벌써 여러 번 당했기에 감각은 닫아놓지 않았었고, 그 감각이 어떤 시선을 잡아낸 것이다.

권하선이 스틱을 움켜쥐며 준비를 마치자, 나무 뒤에서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하선이 눈치가 제법인데."

아오, 서범진….

권하선은 비틀리려는 입매를 끌어내리고 만들어진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주위를 훑고 있었다.

"아, 걱정할 거 없어. 나오세요. 제가 아는 동생입니다."

서범진이 좌우로 손짓하며 일행을 불러냈고, 남생도 둘에 여생도 하나가 화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넷이 팀인데, 너도 같이하자."

4대1….

싫은데, 거절하기 애매한 상황이다.

권하선이 우물거리는 사이 서범진은 팀원들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좋죠. 그렇게 해요."

"저희는 환영이죠. 아까 보니 입학성적도 훌륭하신 거 같던데."

"아.... 저는."

훈련만 놓고 봤을 때, 서범진의 팀은 분명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와 종일 붙어 다닐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들 나누시죠. 여기 동생은...."

~지잉.

저들끼리 합류를 단정 짓고 모여드는데, 권하선의 스마트워치가 짧게 떨었다.

(한성준 : 나간다 밖이냐?)

개새끼. 빨리도 대꾸한다.

권하선은 두어 걸음 물러나며 서범진에게 말했다.

"스틱 들어요."

"응?"

"저는 먼저 엮인 거래가 있어서요."

"아, 팀 제안… 거절하는 건가?"

"네. 망신당하기 싫으면 긴장하세요. 아는 건 아는 거고, 훈련은 훈련이니까요."

X발, 점수 개 털리겠네.

그녀는 기어이 도발까지 건네고서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봐주고 배려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새끼랑 밥은 안 먹어도 되겠다.'

서범진에게 달려드는 권하선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

기숙사 1층 로비.

"너, 꼬라지가… 혼자 전쟁했냐?"

"...."

빨리 안 나오냐고 닦달하던 권하선은, 밥때가 다 돼서야 나타났다.

여기저기 흙먼지 자국에 산발한 모습으로.

그녀는 대꾸할 힘도 없었는지 벽을 기대고 서서 노려보기만 했다.

딱 봐도 다구리 맞은 모양인데.

"쯧, 그러게 내가 객기부리지 말고 기다리라니까."

"…한마디만 더 씨부려라."

전 세계인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I told you'랬나.

권하선의 눈빛이 너무 살벌해서 더 입을 열진 않았다.

긴 날숨 후 눈알에 힘을 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근데 쟤는 왜 같이 있어?"

"어, 얘도 우리 팀이야."

내 뒤편에 서 있던 가영이 꾸벅하며 앞으로 나섰다.

"가영입니다. 외자예요."

"그래, 기억나. 근데 갑자기?"

권하선의 말끝이 나를 향했다.

"그냥. 맘에 드는 친구라."

"내가 미친다. 39등이랑 놀아주니까 40등까지 거둬 먹이라고 하네."

"너무 대놓고 말했다."

"팀 구성은 나랑 상의해야지."

"고객은 많을수록 좋잖아. 영아, 이 누나한테 10점 내줘라."

"네."

바로 입구를 나설 듯 움직이는 가영을 권하선이 붙잡았다.

"하… 됐다. 밥이나 먹자."

기숙사를 나선 뒤에도 권하선은 가영의 점수를 가져가지 않았다. 외려 보호하기 쉽게 잡아당기며 은근히 챙겨주는 모습을 보였다.

"뭐야 왜 그딴 눈으로 봐."

"너 쫌 누나 같아서."

"X발. 왜 또 시비야."

말은 좀 거칠어도 역시 선역의 캐릭터다웠다.

***

식당은 본관 우측의 2층 건물로 기숙사로부터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들 배고파서 그런가. 어째 얌전하네."

식당으로 연결된 네 갈래의 길 위에 생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걷고 있었으나, 권하선의 말처럼 서로를 못 본 척했다.

"내가 말했잖아. 장장 한 달인데 벌써 힘 뺄 거 없다고. 뇌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하겠지."

"마지막 말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니가 들어버렸네."

"이 새끼가."

물론 속으론 긴장을 놓지 않고 경계 중이겠지만, 오전의 난리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적극적 공격포지션이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이 훈련의 점수 득실은 싸움의 승패와 무관하게도 발생한다.

즉, 난전에는 장사가 없다. 이젠 혼자 다니는 생도를 찾아볼 수 없기도 했고.

완벽히 압도할 수 있는 상대,

그리고 확실한 순간만 노릴 생각이겠지.

밸런스를 깨트릴 만한 그룹이 나오기 전까진 이런 분위기가 유지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 외출 금지는 진짜 개오바야. 안 그러냐, 가영아?"

"네. 거의 한 학기의 반이니까요."

"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조올라 기네."

해외 교환프로그램 때문인지 청송의 커리큘럼은 10주씩 4학기제로 짜여있다. 각 학기 간 2주의 휴강 텀을 두고 바로 다음 학기가 이어지는 식이다.

"그래 봤자 한 달이야. 훈련이 아니라 그냥 여기 분위기라고 생각…."

"어어! 야, 너…."

권하선이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 호들갑에 돌아본 가영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륵.

그제야 느껴지는 뜨뜻한 촉감. 코피다.

...깜빡했네.

나는 서둘러 한 뭉텅이 마력을 체외로 방출했다.

울컥.

이어진 각혈.

"그웨엑!"

블록 바닥에 검붉은 핏자국이 뿌려졌다.

"꺅, 너 왜 그래!"

"어어, 성준이 형!"

덕분에 길 가던 생도들의 시선도 한데 모였다. 나는 얼른 입을 훔치고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별거 아니야. 이제 괜찮아."

"코피는 그렇다 쳐도 피 토한 게 어떻게 별게 아니야."

"맞아요. 괜찮을 리가 없죠."

"마력 훈련 부작용 같은 거야. 낫고 있고. 진짜 괜찮아."

"의무실부터 가자."

"배고파."

"밥 먹고 의무실 가."

"어."

내가 진지한 얼굴로 몇 번이나 더 알겠다고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주위의 생도들도 눈길을 거뒀다.

잠깐 우리 일행 모두가 완벽한 무방비상태였으나, 그 틈을 노릴 만큼 쓰레기는 없었다.

방금 상황을 설명하면 〈과활성마력종〉과 〈심단격리장애〉의 콜라보였다.

어느새 다시 충만하게 차오른 마력이 생명력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던 것.

물론 괴랄한 마력회복 속도와 〈심단격리장애〉의 연동 특성 덕에 방치해도 큰 지장은 없다. 100%에서 99%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랄까.

현실에서 인간의 생명력이란 게 워낙 복합적인 건강 상태를 포괄하는 만큼,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생명력 감소 효과는 그때그때 다른 모양이다.

마력방출 때문에 각혈까지 하긴 했지만, 대충 80%에서 회복세인 쪽이 100에서 99되는 순간보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더 곤란한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방편을 마련해야겠다.

의식하지 않아도 상시 99%의 마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아이템 같은.

추가 기능으로 옵션을 설정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재료가 문젠데….'

이왕 만드는 거니 '포르테늄'이나 '니게리움' 쯤은 됐으면 했다.

금보다 비싼 금속이라도 고작 반지 정도 만드는 거라 감당 못 할 비용이 들진 않는다. 하지만 거래 자체가 어려운 금속이고 한 달간 외출할 수도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와, 대박. 그냥 급식이 아니네."

권하선이 상념을 깨트렸다.

생도 식당은 3가지 다른 스타일로 구역이 나뉜 선택적 뷔페 형태였다.

구분기준이 음식 종류라기보단 영양 밸런스인 듯, 각 코스의 입구에는 영양 정보가 세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걸 따져 먹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그냥 권하선이 줄 서는 대로 따라갔다.

차례를 기다리며 앉을 곳을 훑어보다가 식사 중인 한 생도에게 시선이 멎었다.

'오….'

차유라. 과연 주연급 캐릭터답게 눈에 띄는 미모였으나, 정확히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포크를 쥔 그녀의 손가락이었다.

왼손 검지에 끼워진 묵색 반지.

'저거면 되겠다.'

모든 빛을 잡아먹을 듯 검으면서도 은은한 청광을 뽐내는 기묘한 금속. 니게리움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권하선과 가영의 성화에 못 이겨 본관 건물로 끌려왔다.

의무실이 있는 2층 계단 앞에서, 검사가 끝나면 연락하겠다며 두 사람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쳐 반대쪽 출구로 빠져나왔다.

부지 외곽,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건축 현장.

나는 폐기물 더미를 뒤져 손바닥 길이만 한 전선 조각 몇 개를 주워 모았다. 제작 테스트 용도였다.

마력 칼날의 도움으로 피복을 벗기고 구리선을 꼬아 손가락에 감았다.

옵션을 대충 이렇게 하면....

[대상에 추가된 설정을 저장합니다. -소모 DP 6]

기실 마이너스 옵션인지라 생성에 필요한 DP도 거저 수준이었다.

[아이템이 생성되었습니다.]

───────────

[구리선을 꼬아 만든 링]

[등급] 최하급 [내구도] 1/1

*(-) 착용 시 마력 총량의 1% 회복 불가.

───────────

"진짜 되네."

아무것도 아닌 사물을 아이템으로 만드는 능력.

가능하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확인하는 기쁨은 또 다른 것이다.

[권한의 모든 기능을 이해하여 개발자 고유 특성이 해금됩니다.]

그때 떠오른 느닷없는 메시지.

[특성 〈창조적 시선〉 획득.]

바로 정보창을 확인했다.

───────────

〈창조적 시선〉▽상세

[Lv: -] *월드의 모든 현상 원리를 설정 단계의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작은 버프 효과 하나 없는 간결한 옵션.

뭐... 좋은 얘기겠지.

따로 실험해 볼 수도 없는 패시브 옵션이니 일단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나는 남은 구리선으로 똑같은 모양의 링을 하나 더 감아 챙긴 뒤 자리를 떠났다.

#9화, 생존법 교육

오후의 '생존법' 교육 시간.

담당 교육관은 라이코 그릴리치.

아침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남자였다.

그는 크로아티아 사람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수업은 영어로 진행했다.

언어가 달라도 유쾌하고 느물거리는 그의 성격을 느낄 수 있었지만, 통역사를 거쳐 나오는 말들은 한없이 딱딱했다.

"한국엔 아직 없지만 크리스탈 게이트 투입 작전 시 최소 보름, 길게는 반년씩도 차원 너머에서 생활합니다. 개인 구비 품목들은 물론 보급도 반드시 바닥을 보게 되는 것이죠."

크리스탈 게이트는 그 이름처럼 '빛나는 유리막' 형태의 게이트로 이계의 필드(아마도 행성 그 자체)와 연결되어 있다.

"크랙과 블루홀 작전이라고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초상환경에서 늘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이하죠."

플레이어는 통칭 무슨 무슨-보통 지명이나 등급-게이트라 부르지만, 설정상 게이트는 분류명이 존재한다.

균열(Crack)은 불시에 발생하는 1회성 던전, 블루홀은 마력의 힘이 다할 때까지 계속 다른 공간을 생성하는 다회성 던전을 말한다.

참고로 입학식 연설에서 함성아가 말한 마나럼프(럼프게이트)는 조금 다른데, 강력한 마력응집 '현상'으로 폭발과 대규모 괴수 출현을 동반하는 재앙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괴수뿐만 아니라 식량부족, 괴질, 중독으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본 과목을 통해 초상환경에서의 식량 확보, 응급처치, 해독 및 그에 필요한 기초 연금지식을 체득해 나갈 것입니다."

라이코 교관은 통역사의 말이 끝나기 전부터 교탁 아래를 뒤지더니, 각각 다른 '것'이 담긴 유리병 두 개를 꺼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산독멧돼지의 독낭입니다. 산독멧돼지는 크랙 이상의 사태를 경험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목격되고 있는 8급 괴수종이죠.

그러나 위험관리 차원에서라도 최소 6급 이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논란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놈들이 뿜어내는 독은..."

나는 라이코 교관이 지금 들고 있는 병이 아닌 다른 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착풍뎅이?'

주먹 반만 한 크기의 살인 갑충. 사람이나 짐승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 속을 파먹는 극혐의 해충이다.

생물은 어떻게 구했는지 그 지랄 맞은 곤충이 병 안에서 발광하고 있었다.

산독멧돼지 독낭에 천착풍뎅이라....

나는 라이코 교관이 오늘 수업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실험 때문이었나?

안 그래도 과학실 같은 수업공간이 과목의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천착풍뎅이의 진액을 활용한 해독 실험.

천착풍뎅이의 진액은 거의 모든 중독에 탁월한 해독제로, 게임에서도 천착풍뎅이 사체는 꼭 대여섯 개씩 들고 다녔다.

"천착풍뎅이는 무등급의 소형곤충류이지만, 수십에서 수백 단위가 한 번에 출몰하는..."

...다 아는 내용이어서인지 나는 수업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초점을 풀고 'UI멍'을 때리다 문득, 잠적 이후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돈을 미리 좀 모아둬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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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이벤트]

※ 한성준의 죽음이 가장될 만한 사건.

- 제한 시간 2년 264일 22시간 52분 32초

──────────

계산해보면 2032년 5월 24일쯤 된다.

본편이 시작되기까지 11개월, 그리고 아직 아버지와 마주쳐선 안 될 얼마간의 시간을 더하면 최소 2년.

그간의 생활자금 정도는 마련해 둬야 한단 얘기였다.

'돈 버는 건 일도 아닌데.'

로코33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등 사회 전반을 다루는 방대한 게임이고, 나는 전 분야의 주목할 만한 사건들에 대해 얕지만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내게 자금이 필요한 시점이 게임 시작보다 한참 전이라는 것.

게임 시작 시점의 배경만으로도 금방 떡상할 주식들이 눈에 보였지만, 그 역시 얼마간의 밑천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땡겨쓰는 수밖에 없나.'

차용 또는 후원. 먼저 쓰고 본편 이후에 갚는 점은 같다.

상대는 송연희나 차유라가 되겠지. 이나은은 반도 다른 데다가 성격이 너무 지랄 맞다.

본편 기준으로 송연희의 집안인 대화그룹과 차유라 아버지가 설립한 JS오파츠는 신성그룹의 위상에 뒤처지지 않는다.

'그 둘도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껄끄러운 부분도 존재한다.

...여튼, 반지거래도 있고 하니 차유라를 공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썽준. knock, knock. 썽준!"

탁탁탁!

"어… 예?"

어느새 다가온 라이코 교관이 나를 부르며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썽준, 내 Class 노잼이야?"

"아닙니다."

아침에 그도 함께 걸어오긴 했지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한국말도 하네….

"그럼 쟤 조아해? 콴심 있어?"

"네? 그게 무슨… 아니요."

라이코가 내 맞은편 테이블을 가리켰고, 생도들이 단체로 '오오~'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차유라가 앉아있었다.

"I saw that you 계속 보는 거~"

이 아저씨가 뭐라는 거야.

"그냥 딴생각 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상황을 얼른 끝내고 싶어 정중히 사과했다. 그 틈에 힐끔 차유라를 살폈으나, 언제나 그렇듯 드러난 표정 같은 건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감정표현 불능증(Alexithymia)이라는 설정이었으니까.

"OK, 썽준. I forgive you. but, 나 쫌 도와줘."

라이코는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나에게 산독멧돼지의 독낭이 든 병을 건넸다.

"Inhale it."

"뭐…요?"

"들이켜~."

미친....

생도한테 지금 독을 들이키라고?

지켜보던 생도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It is Okay."

라이코가 생도들을 진정시킨 뒤 통역사에게 빠른 영어로 말했다.

"생존 교육에서는 체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실제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오히려 당황, 불안을 유발하기도 하죠. 그것은 빠른 판단이 필요한 현장에선 실패를 의미합니다.

자, 해독포션과 회복포션이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교관을 한번 믿어보세요."

"...."

테이블 별로 독낭을 나눠주고 천착풍뎅이 진액으로 중화시켜보는 실험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어쨌든 원래 준비된 과정이지, 괜히 엿 먹이려는 수작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라이코가 씩 웃는 얼굴로 하늘빛 물약이 든 유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고급 해독포션이었다.

'먼저 독성체험만 하는 건가 보네.'

솔직히 독낭을 흡입하는 것보다 천착풍뎅이를 씹어야 한다는 거부감이 더 컸었다.

게임에서야 마우스 우클릭에 '와그작' 효과음이 전부였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따로 해독포션이 있으면 피할 이유가 없지.

중독과 해독의 반복은 독 내성 증가에도 도움이 된다.

─딸깍.

스읍... 나는 병뚜껑을 열고 코를 들이박은 채 병 속의 공기를 흡입했다.

[중독되어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매캐한 냄새가 머릿속 어딘가를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처음 담배를 배울 때 같은… 엌!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두통이 몽롱한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으아 씹…."

교관 앞이었음에도 욕설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맑은 공기를 빨아들이려 빠른 들숨을 계속했지만, 호흡기가 타들어 가는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

주륵.

오늘 두 번째 코피였다.

너무도 조용한 반응에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니, 생도들이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내 컨디션을 오해하는 권하선과 가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중이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났다.

확실히 생도들의 집중을 유도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었으니.

특성의 작용으로 회복이 시작되면서 고통은 어느 정도 상쇄됐다.

하지만 전신에 퍼지는 거북한 기운은 고스란히 느끼며 라이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해독포션을 달라는 몸짓이었다.

"엇…!"

라이코가 포션을 건네다가 내 손끝 앞에서 병을 놓쳐버렸다.

쨍그랑.

"끼악!"

심하게 몰입했는지 여생도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Oh, shit!"

한 박자 느린 라이코의 탄식.

빌어먹을… 저 양반 일부러 그랬다.

역시나 라이코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작전 중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통역사의 밋밋한 말투를 거치니 더 얄밉게 느껴졌다.

'이게 다 저 멘트를 날리기 위한 연출이었겠지.'

그래. 그쯤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벌레 궁둥이를 씹어 먹는 건 다른 문제였고, 나는 절대로 그 장단만은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라이코가 천착풍뎅이의 효능을 설명하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꾹 참고, 작전을 수행합니다."

"What? No, no, no! 그럼 개죽음이야~"

"아뇨. 죽겠다는 게 아니라, 참을 만해서 그러는데요."

객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중독에 의한 생명력 감소는 〈과활성마력종〉의 마력 회복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생명력 연동 특성 덕에 나는 거의 '만피'를 유지 중이었다.

중독상태라는 것과 그로 인한 불쾌감은 그대로였지만 그쯤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충분히 해결 가능했다.

"No way, What the...!"

라이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짝 내 안색을 확인하더니 머리, 가슴을 짚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이제 진짜 괜찮아진 거 같은데 자리로 돌아가도 될까요?"

"Wait, wait. 썽준, 너 혹시 Poison immunity야?"

"네?"

"독성면역이냐고 물어보시네요."

실랑이를 각오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검사를 안 받아봐서 모르겠는데요."

"...OK."

라이코가 주머니에서 멀쩡한 해독포션을 꺼내 건네며 뭐라 말했다.

"상태를 확실히 모르니 마셔두라고 하세요."

"아, 네."

오, 여유분이 있었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라이코가 'Shit'과 'Next Class'란 단어가 들어간 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국제 시세로 병당 1,000불이 넘는 가격인데 수업마다 몇 병씩 깔 수는 없으리라.

[중독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해독포션을 들이키고 자리로 돌아왔다.

"야, 너 괜찮아?"

"우와, 형 진짜 독성면역이에요?"

"괜찮아. 그건 나도 모른다니까."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권하선과 가영이 작게 속삭였을 뿐, 실내엔 멍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에 더해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강선호도, 송연희도, 차유라까지....

[강선호 외 32인에게 인상적인 기억 -DP 획득 165]

나도 간부 짬밥이 있어서 주목받는 게 어색하진 않다만, 지금의 공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라이코가 수업을 재개해야 끝날 텐데, 그도 수습을 어찌할지 고민 중인듯했다.

'괜히 미안하네.'

나는 벌레 똥을 먹기 싫었을 뿐인데 결과적으론 수업을 꼬이게 만든 것이다.

라이코는 깨진 포션 병 파편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었다. 한참 만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다시 독성체험을 해볼 용기 있는 생도가 있습니까?"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제 라이코의 계획과 해독제의 대체품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챘을 터.

지원자가 있을 리….

"제가 해보겠습니다."

굳이 내 쪽을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든 그는 서범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