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기술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하 교관이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어… 15분쯤 남았는데… 마치기 전에 파티를 구성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주중에 있을 생존과 공략, 두 개 과목의 실기수업이 파티단위로 진행될 예정이다."
운동장이 순식간에 시장통으로 돌변했다.
사전에 파티를 맞춰둔 생도들이 서로의 이름 부르며 손을 흔들어댔다.
하 교관은 아랑곳없이 목청을 키워 말을 이었다.
"파티구성과 팀장선정 모두 생도들 자율에 맡긴다. 통합수업으로 진행될 것이니 구성원의 반이 달라도 상관없다. 앞에 계신 교관분들께 구성원명단을 제출하면 바로 들어가도 좋다. 이상."
대충 예상했던 방식이다.
미리 다른 파티원을 내정하지 못한 건,
'올 리가 없으니까…지.'
다른 이유는 없다.
구성이 개망이기 때문이었다.
권하선과 가영이 바로 나를 찾았다.
"트리플 탱커 진짜 할 거야?"
"쫄리면 빠지시던가."
"누가 쫄린대? 그냥 확인한 거지."
"만약 5명이 안 되면 어떻게 해요?"
"남는 사람이랑 묶어주겠지. 그리고 어차피 4인인 팀도 나올 수밖에 없어. 그건 뭐 나중에 평가 때 감안해주던가 하겠지."
처음 트리플 탱커 구성을 떠올렸을 때, 나는 전술적으로 나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목적이 평가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생각이었다.
파티원은 결국 각자 역할에 따른 개별점수를 얻어내야 했고, 포지션이 겹치면 불리한 게 당연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셋한테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거다.
"근데 솔직히 원거리계열한텐 우리 팀 매력 있지 않나? 탱커가 셋인데."
"영이는 근접이 아니니까. 나 역시 남들 눈에는 손발을 어떻게 맞출지 애매한 타입이고. 탱커 없이 가는 파티도 근접이 둘 이상은 나오니 특별할 것도 없지."
트리플 탱커도 실상은 이름뿐이었다.
"남들 눈에는… 헬 파티다 이거고만."
괜히 기죽을까 봐 말은 안 꺼냈지만,
가영한테는 다른 파티나 보스를 상대할 때 데미지딜링을 기대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니까 보내줄 때 가라. 나랑 영이는 알아서 할게."
"뭐?"
"빨리 강선호한테 가보라고. 거기 넷에 딱 탱커만 없잖아. 니가 끼면 최강팀 탄생이다."
권하선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그게 뭔… 아, 아니다."
깜빡했다.
얘는 배려 같은 걸 해주면 안 된다.
"아니긴. 지금…."
"저기요."
권하선이 말 같잖은 불만을 쏟아내려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어? 그때 그…."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모른다.
"이태용…입니다. 한성준…씨 맞죠?"
"네."
그는 교보재생물이 들어오던 날, 정련관 복도에서 곤란을 겪었던 반수계 생도였다.
청록빛 비늘이 얼굴까지 덮고 있었으니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그으, 저… 아직 파티가 다 안 찼으면… 저라도."
오….
탱커 그룹은 총 서른두 명.
적어도 그를 그룹 내에서 본적은 없었다.
"저희야 환영인데… 구성이 좀 그래서요. 그쪽이 괜찮으실지."
그는 권하선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탱커가 두 분이시네요. 두 분 다 워낙 유명하셔서… 저는 좋습니다."
"셋이에요. …탱커가."
"...아."
비늘 때문에 표정을 읽지 못하겠다.
"역시 탱커 셋은 좀 그렇죠?"
"아니요.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괜찮습니다."
그도 시미터를 차고 있는 것을 보아 근접딜러였다.
"혹시 전투 스타일 좀 확인해봐도 될까요?"
"아! 당연하죠."
상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에,
내 쪽에서도 확인은 필수였다.
이태용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나서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스스스!
포르테늄 검신이 녹빛 연무에 휩싸였다.
'...독인가?'
나쁘지 않다.
독공은 유지시간 동안 퍼센트 데미지가 들어가서 면역인 보스만 아니라면 꽤 좋은 DPS(초당 데미지)가 나온다.
"가볍게 들어와 볼래요?"
어디까지나 테스트 목적이었기에 영역은 생성하지 않았다.
이태용이 횡 베기의 준비 자세로 빠르게 쏘아졌다.
독무를 피하기 위해 쉴드를 시전하고,
라이코 교관을 상대했을 때처럼 정면만 조금 열어두었다.
양 측면이 막혀 있어 베기로는 각이 안 보였을 터. 그가 재빠르게 시미터를 치켜들었다.
나는 그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며 파이어 볼을 날렸다.
화르륵!
이태용은 장풍을 쏘듯 손바닥을 펼쳐 불을 막아냈다.
'응?'
그리고 그대로 거리를 좁혀왔다.
"됐어요."
대충 닥치고 돌격하는 타입.
...이라는 건 알겠다.
근데 그전에...,
시미터를 검집에 넣으며 내 눈치를 살피는 이태용.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서 예고 없이 배때기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엇!"
그가 뒤늦게 헛바람 들이켰다.
틱!
그러나 단검은 마치 단단한 방패에 막힌 듯 금속음과 함께 튕겨 나왔다.
"용 비늘이었네요?"
"...하하."
그게 멋쩍게 웃었다.
"왜 그랬어요."
이태용의 비늘은 용린갑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의 적성은 누가 봐도 탱커였던 것.
"...탱커는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하셔서."
"아니이! 그 좋은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 자신이 없을 수가 있나. 참 이해가 안 되네."
"둔기는 아파요, 저도. 그래서 저도 모르게 피해지더라고요. 탱커는 쫄아버리면 안 되잖아요…."
"하."
어이가 없지만, 말은 맞는 말이다.
"뭐 그래요.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니까."
어쨌든 그의 포지션이 딜러로 등록된 이상, 우리에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아니, 굳이 보호할 필요가 없으니 외려 잘된 일일지도.
"4명이면 제출해도 될 거 같은데. 그냥 넷이 해도 괜찮죠?"
"네, 네. 저는 뭐."
엄밀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태용은 마치 약점 잡힌 사람처럼 행동했다.
파티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걸 굳이 바로 잡을 필요는 못 느꼈고.
"가자."
"오케이!"
권하선이 텐션 좋게 소리치며 이태용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내가 대 둔기 방어훈련 좀 시켜 줄까?"
"괘, 괜찮습니다."
"앗! 근데 몇 살이세요?"
벌써 말을 깐 주제에 권하선이 다시 존댓말로 나이를 물었다.
"스물둘이요."
나랑 동갑이었네.
"친구 맞네에!"
팡팡!
"...!"
권하선이 등짝을 두드리자, 용린을 가진 놈이 오징어처럼 몸을 비틀었다.
'친구 좋아하네.'
하도 우겨대서 내 기억이 왜곡된 줄 알았었다.
프로필 확인 결과 권하선은 스물하나였다.
단상 앞.
미리 맞춰둔 파티들이 몰려있어 벌써 복잡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아이비가 세 명의 생도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검?'
그녀는 '에페' 스타일의 찌르기용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변신하지 않았을 때는 검을 썼던 모양.
그녀가 학원 내에서는 한 번도 변신한 적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
함께 있던 생도들과 한 파티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는지 곧 아이비가 따로 떨어져 나왔다.
누굴 찾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는 그녀.
결국,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뭐야 설마.'
아이비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미친.
이제는 속성마법 면역이라.
...생존력 하나는 끝장나는 파티였다.
***
"Kvragu."
라이코가 셔츠를 펄럭거리며 본관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물로 문지른 듯 젖은 앞섶엔 작은 혈흔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던전 짬이 얼만데 핏자국 하나 못 지워?」
함성아의 입에서 크로아티아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얼래. 너 여기 있었냐? 봤어?」
「크크. 봤지 그럼.」
「X팔. 쪽팔리게…. 그걸 또 보고 그러냐.」
「변명 한번 들어보자.」
「살살 치긴 했는데, 그걸 손으로 받아버릴 줄은 몰랐네. 그래서 잠깐 머리가 하얗게 됐던 거지.」
함성아가 난간에 엎드려 깔깔댔다.
그녀가 옆으로 얼굴을 괴고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걔.」
「썽준? 생각은 뭔 생각. 난 그런 거 안 해. 세상은 넓어. 그냥 이런 놈 있으면 저런 놈도 있는 거다.」
「그래 너답다.」
「근데, 확실히 지켜보는 맛이 있지 저런 놈은. …너처럼.」
「나? 내가 뭐.」
「웬 동양인이 많고 많은 지중해 요리 집 사이에 가게를 차리고서 달랑 슈트루클리 하나만 처 팔고 있었지. 그때 넌 딱 미친 여자 같았어.」
찰싹!
함성아가 라이코의 팔뚝을 후려쳤다.
"야이 씨. 왜 또 그 얘길 꺼내고 그래. 눈물 나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누가 알았냐고. 그 흔해 빠진 슈트루클리가 그렇게 맛있을 줄은.」
「하 진짜. 한성준이 그 맛을 알아야 하는데. 걘 내 슈트루클리랑 비교된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를 거 아냐.」
느물거리는 말투에서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
「아아 그립다. Pula.」
「...괜찮냐?」
「괜찮지 그럼. …원래 나랑 맞는 자리도 아니었고.」
「좀 웃기긴 했지.」
찰싹!
습기도, 웃음기도 가신 자리에서, 둘은 말없이 대운동장을 바라봤다.
한참 만에,
라이코가 입을 열었다.
「언젠간… 예전처럼 돌아갈 날이 올까?」
함성아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적어도 쟤들 입에서 그 말이 나오게 하지는 말아야지.」
#42화, 업그레이드
점심 식사 후, 나는 동아리방에 가자는 권하선의 제의를 마다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병기술 수업의 피로도가 꽤 컸지만, 드러눕기엔 처리할 게 많았다.
용호에게 사무실 자리를 정해줘야 했고,
학원 근처에서 동구를 돌볼 땅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단검도 업그레이드해야지.'
원래도 옵션 추가 계획은 있었지만, 라이코의 가르침 덕에 명확해졌다.
투척용으로만 쓰기에 능력치 증가 같은 고급 옵션은 사실상 DP 낭비 같다는 생각을 조금 하고 있었다.
엄밀히 내 몸에 소지하고 있을 때만 효과가 적용되는 것이었으니까.
단검이 아직 완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불안감도 한몫했다.
졸업하기 전까진 소유권이 학원에 있었기 때문.
잠적할 때야 당연히 가지고 튈 생각이었지만, 부득이하게 퇴학을 당하면 그대로 압수였다.
'그게 이유라긴 좀 오버지만.'
어쨌든.
단검에 옵션을 부여하고 단검술도 익혀두면 좋겠다는 게 결론이다.
단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됐을 경우, 오히려 마력조종과 같은 부 사용법이 더욱 위력을 갖게 되리란 생각도 들었다.
'사무실 자리부터 빨리 정해주자.'
간단한 것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에,
워치 화면을 홀로그램으로 띄워 놓고 지도 앱을 펼쳤다.
게임상에서 자주 다니던 지리 중에 멀쩡했던 지역들을 우선 선정,
블록 단위로 로드뷰를 눌러가며 면밀하게 살펴봤다.
기억과 가장 차이가 없는 곳이 곧 가장 무탈한 지역을 의미했다.
'돈이 더 생기면 부동산 투자도 좀 해볼까?'
단기 수익을 볼 수 없어서 고려하지 않았었지만, 언젠가 복귀는 할 테니까.
나는 여러 후보 지역 중 용호의 접근성 등을 고려해 잠실 쪽을 선택했다.
정확한 블록을 캡처하고, 직접 라인까지 그려준 뒤, 용호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했다.
(5000/300 아래로 해서 구해봐. ※무조건 지정해준 라인 안에서 구할 것.)
답은 재깍 날아왔다.
십수 년간 이렇게 빠른 적이 없던 놈인데.
(신용호: ㅇㅇ 근데 이렇게까지 디테일할 이유가?)
(여러 가지 따져본 거야. 설명하긴 복잡한데 니가 거기서 2, 3년 지내면 깨달을 거다. 암튼 '무조건'이다?)
(신용호: ㅇㅋ 나야 범위를 좁혀주니까 편하지)
다시 지도 앱에서 현 위치를 중심으로 부동산 탭을 눌러보았다.
한데 아지트 문제는 사무실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알아보고 계약하는 일까지 직접 해야 했고,
그보다도 지목(地目)이니 용도니 하는 것들이 너무 복잡했다.
아예 몰랐으면 아무 생각 없이 행동부터 했겠지만….
'이런 거 대신해줄 사람 없나…?'
...염치가 좀 없어서 그렇지 없진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차유라에게 톡을 날렸다.
(학원 근처에 땅을 좀 사고 싶은데. 이동식 주택 하나 가져다 놓고, 창고도 하나 짓고, 땅 경계에 높은 울타리도 두를 생각이거든? 근데 좀 복잡하네.)
잠시 후 답이 왔다.
(차유라: 크기는요?)
(한 500평)
(차유라: 알아보고 연락 줄게요.)
역시 시원시원하다.
감사 인사를 남겨놓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전에 시험해 봤지만,
능력치 보정은 사기 수준의 효율을 가진 만큼 많은 DP를 요구한다.
현재 비(非)버프 상태의 힘이 4점대.
여기에 0.1을 추가하려면 400DP가 들어가지만,
5점대인 민첩은 800, 8점대의 지능은 무려 6,400DP가 소모된다.
그러나 아이템에 넣는 옵션은 할증 구간이 달랐다.
어떤 능력치든 0.1의 증가 옵션이 200DP로 균일했고, 최대 1을 초과하는 순간, 비용이 10배로 치솟았다.
가성비로 볼 때,
언제고 최대 1까지는 챙겨가는 게 좋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능력치 하나당 2,000DP네….'
한 번에 15,000DP 이상을 벌어들였지만, 그건 '아이비'란 존재의 특수성과 '전용' 이벤트 보상이라는 희귀성이 만든 기연이었다.
앞으로도 필요에 맞춰 수급되어주리란 보장이 없다.
'지능과 마력은 나중에 챙기자.'
주 능력치를 미뤄두는 상황이 우습지만, 당장 물리 전투계열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건- 힘과 민첩이었다.
4,000DP를 투자해서 힘, 민첩 1 증가 옵션을 삽입했다.
그리고…
'마력회복속도. 당연히 챙겨야지.'
나에겐 생명력 회복과도 같은 의미다.
마지막으로 마력 총량 증가를 입력했다가 식겁해서 취소를 눌렀다.
'이건 아닌 거 같다.'
단검이 손을 떠날 때마다 증가분이 깎여나가는 고통을 느낄 터.
'...패스.'
대신 마법공격력 증가를 삽입했다.
어디까지나 주공(主攻)은 마법이었으니….
'이게 마력 총량보다 DP가 더 드는 옵션이었네.'
그래도 450DP 차이면 뭐.
"끝."
〈신경과민〉의 옵션과 더해지면 마법공격력이 17% 상승한다.
정형마법일 경우, 내 마법재능이 다른 재능들의 위력에 비해 25% 정도 떨어진다고 알고 있었다.
이제 영역 밖이라도 고작 8%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많이 따라잡았네."
한번 볼까….
총 5,350DP를 쏟아부은 결과,
'장인'의 수식어가 붙은 아이템이 탄생했다.
"오─!"
───────────
['장인'의 포르테늄 단검]
[등급] 상급 [내구도] 200/200
*포르테늄 고유특성 : 마력전도율이 높아 스킬/마법 시전속도가 10% 증가합니다.
*(+) 착용 시 힘, 민첩 1 증가.
*(+) 착용 시 마력 회복속도 9% 증가.
*(+) 착용 시 마법공격력 9% 증가.
───────────
손에 쥐자마자 확연한 고양감이 전신에 충만했다.
'체감 지리네….'
하기야 힘과 민첩이 1씩이나 올랐으니.
무려 1이다.
~지이잉.
산통을 깨는 진동음.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안녕하십니까. 원주에서 뵀던 마동욱입니다. 불쑥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이 양반이 왜?
***
동아리 '홀리'의 전용실.
"그래서 라이코 교관님이 딱! 왼손으로 쨉을 날렸어. 걔는 그거 맞고 날아갔고. 근데 라이코 교관님 가슴팍에…."
도지훈이 어이없어하며 김판웅의 말을 잘랐다.
"야이 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진짜라니까. 내가 바로 뒤에 있었는데…."
"진쫘라뉘까~ 이 지랄."
도지훈이 어눌한 말투를 따라하며 놀리자, 김판웅이 울상을 지었다.
"마! 또 삐지지 말고 니가 생각을 해봐. 쨉에 사람이 날아가는 괴물이야 그 양반이. 나도 그건 안다고. 근데 니가 그 앞에 뭐라고 했어. 라이코 주먹을 맨손으로 막아? 마법계가? 니가 생각해도 좀 앞뒤가 안 맞지 않냐?"
"진짠데…. 그리고 라이코 교관님 가슴에 상처도 났는데."
"뭐어? 푸핫! 너 병기술 시간에 잤냐? 뭔 소설을 쓰고 앉았…."
탁!
이나은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조용히 좀 해. 도지훈. 그딴 식으로 들을 거면 뭐하러 물어본 거야?"
"아, 아니. 이 새끼가 어이없는...."
도지훈은 이나은의 눈빛이 풀어지지 않자, 변명도 다 못하고 중간에 주워 삼켰다.
김판웅이 그 틈에 불퉁거렸다.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 그럼. 탱커 그룹 애들은 전부 다 봤으니까."
애초에 도지훈이 길가는 생도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와서 자세한 사정을 물어본 거였다.
이나은이 김판웅을 달랬다.
"...알았어. 니 말 믿으니까 서 있지 좀 말고 앉아."
2미터가 넘는 김판웅이다.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정신이 사나웠다.
김판웅이 자리에 앉자, 이나은이 한쪽 구석을 돌아봤다.
"선주 넌 어떻게 생각해?"
바보들뿐인 팀원 중에 그나마 말이 통하는 멤버였다.
숏컷의 여생도가 보던 책을 덮고 입을 열었다.
"걔 전부터 말이 많았잖아. 정훈 때 우리랑 일도 그렇고. 생각해봤는데… 나는 걔가 한계 각성이 아닐까 싶어."
한계 각성은, 각성 단계부터 모든 잠재력을 개방하는 케이스였다.
감응 단계에서 멈추는 이가 있듯이, 소수지만 한번에 가능한 최대 성장치에 도달하는 초인들도 존재했다.
이나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이미 한성준에 대한 뒷조사는 끝난 상태.
그의 감정평가 등위는 9등급이었다.
"그런가? 하긴 그랬으면 입학 순위가 192등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 근데 그게 아니래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야. 다속성 마법재능은 모 아니면 도잖아. 마력이 조루이거나…."
이나은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대마법사가 될 재능이지."
"그러니까. 그것도 그 순위는 말이 안 돼."
"결국, 남는 건 두 가지뿐이네."
"다른 게 두 가지나 있다고?"
이나은이 대답 없이 워치를 들여다봤다.
『영입 우선순위 대상자』
…라는 타이틀과 그 아래 순위대로 나열된 10여 개의 프로필.
그녀는 맨 마지막, 한성준의 이름에 커서를 올린 채 고심하고 있었다.
순위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삭제냐 1순위냐인데….'
눈치만 보던 도지훈이 슬금슬금 이나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탓에 상념이 깨진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자, 도지훈이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궁금해서 그래. 두 가지가 뭔데?"
이나은은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입을 열었다.
"적성에 맞는 최상급 아티팩트. 그리고… 이중 각성."
""이중 각성?""
도지훈과 심선주가 동시에 소리치고 서로를 돌아봤다.
이중 각성은 말 그대로 각성을 두 번 하는 경우를 말했다.
그들은 두 개 이상의 재능을 습득하거나, 시너지효과로 특수한 능력변화를 맞이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도지훈이 중얼거렸다.
"...그거 X 되는 거 아니냐?"
"맞아. 이중 각성자는 필연적으로 마력 폭주를 일으키지."
바로 기간이 한정적이라는 것.
마력 폭주의 결과는 높은 확률로 광인, 혹은 폐인. 다음 확률로는 사망이었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였다.
아티팩트를 소유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것 역시 능력의 일부로 봤지만, 이중 각성이라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문제는.
'마법계 교수나 교관들이 그걸 몰라볼 리가 없다는 거야.'
이중 각성이란 현상 자체가 매우 드물긴 해도, 국내에 전례가 없진 않았다.
그리고 그 몇몇 사건 이후로 초인의 마력 폭주는 재난으로 취급됐다.
'...스스로 드러내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나댈 리도 없고.'
그들은 감시와 관리의 대상이었다.
이중 각성자라면 당연히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할 터.
'역시 아티팩트인가…?'
하지만.
나름 논리적으로 좁힌 결론임에도 어딘가 개운치가 않았다.
"후우."
답답했다.
이나은은 바람을 쐬어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동아리방을 나섰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마주치네.'
한성준. 그러고 보니 그가 속한 동아리도 같은 층의 전용실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
그는 위쪽을 힐끗 보더니, 한쪽으로 붙어서 그녀를 지나쳤다.
'하!'
이나은은 무시를 당한 기분이었다.
"저기요."
"...?"
그가 걸음 멈추고,
세 계단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런 눈높이는 너무나 불쾌한 것이라 그녀는 도로 세 계단을 올라갔다.
"아는 척은 좀 하죠?"
...그래. 차라리 관계를 맺어보면 단서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그, 우리가 인사할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요."
"차라리 인사를 하란 뜻이에요. 저번처럼 몰래 쳐다볼 거면."
한성준은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만 껌뻑거렸다.
"나, 보고 있었잖아요. 테러사건 다음날. 카페테리아에서."
"아… 그거…. 그쪽 얼굴에 뭐가 묻었길래."
"그걸 지금… 하!"
이나은은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해달라고 하시니까. 다음부턴 인사할게요. 저는 그럼."
"해, 해달라긴 누가 해달라고 해! 야! 너 거기 안 서?"
그는 계단을 다 오르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가 다시 자신을 내려본다.
"오케이. 말도 까는 걸로."
#43화, 소문
'뭔… 별걸 다 트집이네.'
언제는 아는 척했다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짐작이 간다.
마동욱이 내게 연락한 이유랑 비슷하겠지.
'영입.'
시기상으로 볼 때, 그거 말곤 다른 이유가 없다.
해외용병 출신들뿐만이 아니라, 국내서도 '떡잎 고르기'가 시작된 것.
날 영입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여전히 테러 사건의 배후를 모르고 있는 게 맞다.
물론 나 역시도 확인은 못 했지만.
'그나저나 그 양반.'
루키를 대하는 거 치곤 너무 깍듯하던데….
원주에서도 그렇고.
마동욱은, 내가 지부장급 인사를 제압한 걸 직접 봤었으니 안 찔러볼 리가 없긴 했다.
일단 거절은 했으나, 포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계속 귀찮게는 안 했으면 좋겠네.'
철컥.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멤버들이 일순 대화를 멈추고 내 쪽을 돌아봤다.
"...!"
"...."
"뭐지 이 적막은?"
권하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왔냐? 아깐 안 온다며."
"볼일이 빨리 끝나서."
"그래? 잘됐다. 어서 앉으렴."
"어서 앉으렴?"
모른 척해 줄래도 티가 너무 난다.
"너 내 뒷담 깠냐?"
"뒤, 뒷담은 무, 무슨."
"뭔데.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말해."
그때 가영이 대신 나섰다.
"뒷담화는 아니구요. 하선 누나가 병기술 시간에 있던 일 얘기해주고 있던 거예요."
"아… 그런 얘길 뭐하러. 내가 처맞은 게 그렇게 좋디?"
"아니, 내가 한 게 아니라 애들이 물어본 거야. 야, 너! 그렇게만 말하면 어떡해."
권하선이 억울하다는 듯이 가영을 타박했다.
혼자 소파에 앉아있던 송연희가 말했다.
"내가 가영한테 물어봤어. 대답은 권하선이 한 거고."
어디서 주워듣고 온 모양이다.
"그래서 궁금한 건 해결됐고?"
"전부터 이해가 안 가긴 했는데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보자."
나는 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능.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그건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다."
"지금 밖에서 너를 두고 온갖 얘기가 오고 가고 있어. 아이템빨이다 비약빨이다 등등. 오늘 일은 그런 얘기가 나올 만하다고 생각하고…. 해줄 수 있는 얘기면 전부 듣고 싶은데."
그런 얘기까지 나왔을 줄은 몰랐다.
'라이코의 주먹을 받아낸 거 때문인가?'
마법 재능으로 뛰어난 거야 대충 눈탱이 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육체적인 능력 부분은 설명할 길이 없기는 했다.
그나마 떠올려 볼 수 있는 게 강화마법인데, 그걸로 뭉개기에는 능력치의 갭이 너무 컸다.
그러나, 뭐든 말을 만들기 나름 아니겠는가.
나는 잠시간 말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글쎄다. 그걸 니들 상식으로 이해하려니까 말이 안 되는 거지. 벌써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애초에 난 마법계가 아니야."
"그 얘기도 이해가 안 됐어. 마법계가 아닌데 어떻게 마법을 쓰지? 그것도 여러 속성을 전부."
"너 마공학을 누가 발전시켰는 줄 아냐?"
나는 차유라를 힐끔 보고선 말을 이었다.
"마공학이 초인들이 만든 아티팩트에서 시작됐다는 건 너도 알 거다. 근데 그걸 분석하고 학문으로 발전시킨 건 감응자들이었어."
"그게 지금 하던 얘기랑 무슨 관련이 있어."
"똑같다는 거야. 마법도 마법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수식만 이해하면 누구든지 쓸 수 있다는 거다."
엄밀히 다는 아니고 체외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계통 한정이었지만.
"...그러니까 네 말은. 너는 염동계라서 신체 능력도 쓸만하고. 마법재능이 아닌데 마법 이해도도 너무 좋아서. 염동력 놔두고 마법을 써도. 웬만한 마법사는 씹어 먹는다. 나는 천재다. 이 말이네?"
"마지막 말은 안 했는데. 쑥스럽구만."
장난스럽게 날린 멘튼데 웃는 놈이 없다.
"...."
"됐잖아. 사실인데 뭐 어쩌라고."
대충 그렇게 정리하려는데 송연희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어째 소문보다 더 황당한 얘기 같지만, 네가 그렇다니까 일단 믿을게. 그래도 납득이 안 가는 건 네 입학성적이야. 그것 때문에 우리끼리도 이중 각성이 아닐까 하는 얘기까지 나왔어."
사실 그것이 소문의 진짜 원인이리라.
애초에 상위권이었던 놈이 그랬다면 그냥 그러려니 할 일까지 말이다.
"내가 이중 각성자였으면 굳이 여기서 뺑이 깔 이유가 있을까? 빨리 남은 삶을 즐겨야지."
"...얘기만 나왔다고. 아무튼, 192등이라는 건 감정평가가 좋지 않았다는 얘긴데. 염동계를 마법계로 판단한 거야 오류라고 쳐도 지금 네가 가진 재능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는 생각 안 들어?"
언젠가 하 교관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감정평가서가 모든 잠재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사실 격려의 의미가 컸지.'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높은 잠재력이 낮게 평가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그럼에도 나는 하 교관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평가가 잘못됐다기보단,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었지."
"그게 뭔데?"
"사용자의 센스."
"...."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들.
"지랄. 싸고 있네."
한마디 없던 최범균의 말이었다.
[강선호 외 5인에게 인상적인 기억 -DP 획득 48]
그래도 납득은 한 것 같네.
***
"...앞으로 여러분과 더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게 됐다는 소리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라. 그럼 새롭게 청송을 이끌어주실 황재천 원장님을 소개하겠다."
화요일 아침, 들었던 대로 함성아가 물러났다.
그녀 말처럼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생도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좀 벙벙한 정신으로 새로운 원장을 바라봤다.
황재천. 5, 60대로 보이는 거구의 신사.
내가 기억하는 본편 시점의 학교장이다.
'생긴 것도 그대로네.'
달라진 것 없는 인사(人事)라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도들이 충실히 학원 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며...."
그는 의례적인 취임사를 이어가며 한 번씩 인자한 얼굴로 생도들을 둘러봤다.
전체적인 인상보다 푸근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바라봤다.
'...!'
아주 찰나의 시간.
왜인지 소름이 돋았다.
그가 나를 특별히 빤히 보거나 전과 다른 눈빛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뭔가 쎄함을 느낀 것은 나의 무의식이다.
나는 곧 묘한 걸림의 원인을 깨달았다.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지.'
지금은 청송에 내가 있었다.
아버지를 노린 세력의 의도는 사실상 실패했다.
그 여파라고 할 만한 게 함성아의 학원장직 사임뿐인 지금, 새로 그 자리를 차지할 이가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검증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만약 황재천이 그 세력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면….'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는 워치를 두드렸다.
수신자는 아버지. 짧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청송학원장 인사는 누가 관여합니까?)
한편으론 조금 과한 걱정이고 망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일이 벌어진 다음엔 되돌릴 수 없는 법.
'조심은 백번 해도 과하지 않지.'
몇 분 뒤, 답이 왔다.
(아버지: 함원장 때는 초인양성TF팀이 국정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었다. 한데 이제 TF팀은 해체됐고 학원 자체 이사진이 구성됐지.)
황재천 취임은 이사 회의에서 결정했다는 얘기다.
(혹시 이사 중에 우리 쪽 사람도 있어요?)
보내놓고 나니 '우리 쪽' 사람이란 말이 조금 걸렸다.
아직 아버지가 내게 천류회에 관한 것을 확실히 오픈하진 않았기 때문.
하지만 모든 걸 건너뛰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그러고 보니 신성 측 인사가 한 자리 가져갔었구나. 그리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알아보마.)
'알아보마…. 크으.'
단 네 글자가 그렇게 든든하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나는 픽 웃으며 인터넷 창을 띄웠다.
황재천을 검색하자, 그의 약력이 적힌 프로필 카드가 상단에 떠올랐다.
사설 경비회사의 대표를 몇 년 했고,
'괴수피해가족재단'이란 비영리단체의 이사장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밖의 몇 가지 이력들을 보면서,
나는 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치초인.'
방금 만든 말이다.
그러나 내가 받은 느낌을 그보다 잘 표현할 단어가 없어 보였다.
뭐가 나오기도 전에 색안경을 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원 역사고 나발이고…'
방해될 양반이면 바로바로 치워야지.
***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화가 한복판.
"이게 다 AI라고?"
권하선이 대뜸 지나가는 남자를 잡아 세웠다.
"뭡니까?"
"악! 아니에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꾸벅 사과했다.
"와, 개 놀랐네. 이건 너무 진짜 같잖아."
권하선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게. 세상 좋아졌네."
내가 살던 세상엔 없던 기술이다.
적응훈련 때도 놀라긴 했지만, NPC까지 진짜 사람처럼 구현해 놨을 줄이야.
이곳은 가상 공간.
우리는 육감연동캡슐 안에서 이제 막 생존 실기수업을 시작하는 참이었다.
'에이 씨... 가짠데도 쪽팔리네.'
분명 훈련 복장으로 캡슐에 누웠는데, 전부 다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백색 옷의 5인은 단연 눈에 띄는 구성이었지만, 다행히 NPC들이 힐끔거리거나 비웃지는 않았다.
그 정도 디테일은 무리였을지도.
"근데 다른 파티랑 경쟁하고 그런 건 아닌가 봐요? 억!"
가영이 사람들 틈으로 쓸려가기에 냉큼 붙잡아서 끌어당겼다.
"휴, 고마워요. 다른 팀은 안 보이네요?"
"아직 모르지 뭐. 있어도 보이겠냐?"
거리는 불금의 대학로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태용아!"
"네?"
"너도 넋 놓지 말고 붙으라고."
"예, 아니, 알았어."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진이 다 빠질 지경이라, 나는 가까운 카페를 가리켰다.
"야, 일단 저기로 좀 들어가자."
"그래도 돼?"
"안 되면 입장도 안 되겠지."
카페 입구부터 진한 커피 향이 밀려왔다.
"어서 오세요!"
예상대로 건물 내부며 카페 종업원까지 전부 상호작용이 가능했다.
"그… 이거 근데 여기 있으려면 주문도 해야 할 거 같은데."
"맞네."
나는 이태용의 말에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더듬다 멋쩍게 웃어버렸다.
혹시나 해서 인벤토리를 열어봤다.
'오…!'
인벤토리 하단 '₩'표시 옆에 100,000이란 숫자가 찍혀 있었다.
"야, 인벤토리에 돈 있다. 니네 뭐 마실래?"
나는 습관적으로 물었다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각자 계산하자."
미션은 시작도 하기 전이고, 현금이 나중에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
아무도 뭐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가 살짝 쪽팔렸다.
그만큼 이 상황이, 또 이 공간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각자 주문을 마친 후, 테이블.
아이비가 마지막으로 음료를 받으러 갔을 때,
권하선이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저 언니 진짜 말이 없네."
"말이 서투르니까."
"근데 너는 어떻게 친해졌냐?"
"안 친해."
친해지긴 해야 하지만.
"너한테 같이하자고 먼저 찾아왔잖아."
"그냥 한자리 비어 보이니까 왔겠지."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 있으니 아이비가 자리로 돌아왔다. 권하선도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음료를 홀짝이며 창밖의 사람들(NPC)을 구경했다.
모든 감각이 구현되어 있으니 커피 맛도, 목 넘김도 그대로 느껴졌다.
"왜 아무 지령이 없을까요?"
"내 말이. 10초마다 한 번씩 훈련 중인 걸 까먹고 있어 지금. 가상인 것도."
"그러라고 시간을 주는 거 같은데."
익숙한 공간, 평화로운 시간.
현실에서도 재난은, 그런 일상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아… 역시. 저, 정말 이러다 갑자기 재난경보가 울면서 상황을 던져줄지도 모르겠다."
나는 딱 이태용의 말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어?"
테이블과 함께 음료 잔이 흔들리고,
창밖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전까진.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네.'
"꺄아아악!"
코앞에다 크랙을 터트려버릴 줄이야.
공간이 갈라지며 강력한 흡력이 발생했다.
"으아아아─!"
"사람 살─!"
거리를 걷던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거뭇한 음영 속으로 빨려들었다.
"──!"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거리에서,
아귀를 한계까지 수축시킨 음영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아… 저, 저거!"
이태용의 비늘이 꼿꼿이 들고일어났다.
"어어! 씨."
권하선이 원형 테이블 다리를 방패처럼 들고 섰다.
"그걸로 되겠냐."
나는 파티 전체를 두르는 앱솔루트 배리어를 시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쨍끄랑!
움푹 꺼졌던 공간이 입구를 순식간에 확장하며 삼킨 것들을 밀어냈다.
콰아아아앙─!
파괴적인 폭발압력이 몰아닥쳤다.
#44화, 생존 실기
앱솔루트 배리어는 최상위 방어결계다.
거기다 불과 10여 미터 거리에서 크랙 생성 여파를 직격으로 받으니 마력이 쭉쭉 빨려 나갔다.
'크윽.'
생명력이 깎이는 것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후우."
삑삐이익! 삑삑삑!
한숨 돌리자마자, 재난 알림이 신명 나게 울어댔다.
우당탕!
권하선이 테이블을 집어 던지며 공중에 대고 소리쳤다.
"미친 거 아냐? 시작도 하기 전에 죽일 셈이냐?"
"누나 그러다 감점당해요."
나는 재난문자부터 확인했다.
'역시….'
문자는 눈앞의 크랙을 포함해서 총 8개.
동시에 접속한 파티의 수와 같았다.
"우리가 재수 없었던 건 아니네."
이제 보니 시간을 줬던 게 아니라, 모든 파티가 다 한자리에 멈추길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쓸데없이 리얼해."
권하선의 말에 주위를 돌아봤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슬래셔 무비 촬영장과도 같은 붉은빛 천지.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처음 흡력에 빨려들었던 이들의 잔해까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라 가영을 돌아봤다.
"괜찮냐?"
"진짜가 아니잖아요. 라고 계속 되뇌고 있어요…."
"어! 떴다."
마침내, 허공에 메시지가 그려졌다.
[1. 균열(Crack)에 입장하여 핵을 파괴하라.]
[2. 균열이 제거되면 다른 상황 지역을 지원하라.]
[3. 공략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다른 파티와 연합하라.]
[4. 모든 과정 중 생존하라.]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보였다.
'일반적인 임무 수준이네.'
그때, 함성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규칙은 보이는 대로 네 가지뿐이다. 단, 우선순위에 유념해야 한다는 거. 그리고 이미 발견한 친구도 있겠지만, 인벤토리에 현금 시스템이 새롭게 추가됐다. 10만 원 당 훈련점수 1점으로 환전할 수 있으니 잘 모아서 활용하도록. 이상. ...아! 권하선 너는 태도 불량. 3점 감점이다.
"안 돼애─!"
권하선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원래 생존담당은 라이코인데, 이제 함성아가 함께 하는 모양.
"딴 데도 지원하라는 거 보면 타임어택 성격이 있네."
당연히 4번 항목이 가장 중요할 터.
생존이 어려울 것 같으면 무리하지 말고 3번을 택하라는 의미다.
물론 우리 파티가 맡은 몫도 해내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권하선이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렸다.
"지원을 가면 추가점이 있는 건 당연할 거고…. 근데 만약 연합을 바라지 않았는데도 공략이 늦어서 다른 파티가 도착하면? 점수가 깎이나?"
"지원 온 쪽이 기여한 만큼 가산점을 가져갈 테니, 아무래도 지원받은 파티는 제 몫을 다한 파티보단 손해를 보지 않겠냐."
"그럼 개 빡칠 거 같은데?"
"그러니까 타임어택이라고."
"어어! 이해했어. 가자 빨리!"
권하선이 깨진 창문으로 뛰쳐나갔고,
우리도 뒤따라 균열에 입장했다.
***
균열 내부는 수림이 우거진 노천형 던전이었다.
얼핏 치악산 일대의 괴수생태지역과도 비슷한 느낌.
차이가 있다면 이쪽에는 지구의 식생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앞에 괴수 냄새…."
아이비가 출현을 알리면,
"내가내가!"
권하선이 쏜살같이 튀어 나간다.
상대는 9급 괴수종, '쿠카'라는 직립형 악어 괴수2 마리였다.
퍽! 퍽!
"케륵!"
"크각!"
퍽! 퍽! 퍽! 퍽....
"벌써 죽었어. 그만해."
"어 그래그래. 가자가자. 빨리빨리!"
권하선이 허벅지에 붙은 괴수의 살점을 털어내며 일행을 재촉했다.
"괴수는 그렇다 쳐도 함정 때문에 이 이상 속도는 못 올려. 시야 확보가 안 되는 지형이라."
"내가 몸빵하면 되잖아."
"몸빵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함정이 뭔 뜻인지 몰라? 한 방에 훅 간다니까."
"...."
권하선이 입을 삐죽거렸다.
"너 원래 그렇게 성적에 연연하는 애였냐?"
"적응훈련 때 나만 탑텐 못 들어갔잖아. 그러고 보니까 탑텐이 여기 또 있었네."
아이비를 말함이다.
그녀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거."
아이비가 권하선의 발밑 쪽을 가리켰다.
「쿠카의 송곳니」
지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잿빛의 텍스트 홀로그램이 둥둥 떠 있었다.
"응? 뭐가요. 어라, 뭐가 나왔네."
권하선이 쿠카의 송곳니를 주워들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는 듯 잠시 허공을 보던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이스!"
"뭔데?"
"3점 복구!"
"훈련점수?"
"어. 그냥 쓰레긴 줄 알았는데 가격이 표시되네. 이거 34만 원짜리야."
"오오… 그런 식이구만."
정훈이 끝났으니 점수를 수급할 다른 수단을 줄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난 상관없는데, 다른 애들은 기회 좀 줘라."
"아, 알았어."
다시 가고 있을 때, 낯익은 식물이 눈에 띄었다.
'월공초네.'
원주에서 음식에 넣었다가 개 망한 흔한 약초다.
문득 저것도 돈이 될까 궁금했다.
"잠깐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월공초를 채집했다.
"그게 뭔데요?"
"워르곤초다."
엉뚱하게도 대답이 아이비에게서 나왔다.
알려줬던 걸 잊지 않았던 모양.
"어, 월공초. 약촌데 혹시 돈이 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뿌리까지 들어내자, 월공초가 손아귀에서 사라졌다.
인벤토리에서 아이콘으로 변한 월공초를 확인하고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왜요? 그건 가격 안 나와요?"
"5천원."
"오오! 그거 여기 지천인데요?"
영이 말처럼 널리고 널리긴 했다.
"20뿌리에 1점은 너무 노가다 아니냐. 시간 아까워. 가자."
그때 갑자기 이태용이 소리쳤다.
"뒤, 뒤로 물러나요!"
그가 왔던 방향을 가리키며 일행들을 밀쳐냈다.
"왜! 뭔데?"
권하선이 달려들 기세로 돌아섰고,
스릉.
아이비도 말없이 에페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이태용이 그 둘을 가로막았다.
"아니요. 아니, 벌써 여기 있어."
그의 등 뒤편에서,
작고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파삭, 파삭, 파사삭!
마치 딱딱한 곤충류가 터지는 듯한....
"아악!"
권하선의 비명.
그녀의 정강이 부근이 뻘겋게 젖어 들었다.
'산탄벌레!'
과연, 존재를 특정하고 보니 바닥의 풀 사이 빠르게 기어 다니는 갑충들이 눈에 띄었다.
"권하선, 이태용! 영이 데리고 뒤로 빠져!"
"억…!"
권하선이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로 가영을 들고 뛰었다.
이태용이 한 박자 늦게 허겁지겁 뒤따랐고,
아이비가 돌아섰다가 갸웃하고 멈춰 섰다.
'파이어 필드.'
화르륵!
나를 중심으로 반경 3미터 바닥에 얕은 불길이 번져나갔다. 아이비는 속성 마법에 면역이라서 피해를 받지 않았다.
"아."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는 무슨."
나는 아이비를 확 끌어당기며 쉴드를 시전했다.
"앗."
타닥, 타닥, 파사삭! 타다닥.
산탄벌레, 아니 정확히는 산탄벌레 유충들이 불길에 닿으며 폭사했다.
티디딕. 티디딕.
눈에 보이지 않는 침과 파편들이 쉴드를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자폭하면서 저런 걸 날리는 벌레야. 불에 닿아도 터지고, 그냥 죽을 거 같으면 그 자리에서 막 터져."
"그럼 어떡하지?"
"그냥 노답이야. 근처에 못 오게 하면서 모체를 죽여야 하는데...."
아이비가 집중해서 듣다가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모체가 뭐지?"
"어미. 엄마. 암튼, 그거 안 죽이면 계속해서 몰려온다. 마법계가 없는 파티는... X 되는 거지."
나도 말하다 보니까 생도들이 겪을 고난이 새삼 그려졌다. 저 벌레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모체부터 찾아야 한다는 거 자체를 모를 테니까.
원래 내 기억엔 하찮은 존재였지만.
'그것도 포션이 있을 때 얘기지.'
뭐 다른 파티들 사정이야 알 바도 아니다.
"후우. 잘 보이지도 않는 걸 어떻게 죽이냐?"
어느새 다가온 권하선이다.
열을 좀 받았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원래는 쌩까고 모체만 찾으면 돼."
"그동안 피 질질 흘리면서?"
"어. 다리는 괜찮냐?"
"따끔한 정도. 생명력만 찔끔 달고 차고 그러네."
권하선은 체력이 높은 데다가, 출혈이 중첩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5중첩이 넘어가면 녹아버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피가 빠진다.
"또, 또 온다!"
모체가 그새 유충들을 재생산한 듯했다.
이태용이 내 앞을 스쳐 달려갔다.
그는 맨몸으로 유충의 폭사를 버티며 마구 바닥을 밟아댔다.
팍! 팍! 파사삭!
"오오."
그러고 보니 이태용은 출혈 피해를 입지 않았다.
'디텍트.'
시야가 열화상카메라처럼 변하며 주변의 모든 생명체가 포착됐다.
"태용아, 그건 그냥 놔두고. 모체는 우측 대각선 방향이다."
"어? 어."
이태용이 방향을 가늠하고 수풀로 뛰어들었고,
나는 그가 있던 자리에 파이어 볼을 날려 불을 지폈다.
"...맞네."
바닥에 깔린 수많은 텍스트.
「키틴질」「키틴질」「키틴질」「키틴질」
「키틴질」「키틴질」「키틴질」「키틴질」...
원래도 이놈들은 키틴질 노가다용이었다.
고작 하급 연금술 재료였기에, 초반 연금기술 렙업 용도로 쓰였다.
어쨌든 지금은 이것도 다 돈이 아닐까.
"멍때리지 말고 이거나 줍자."
가영이 나를 따라 허리를 굽혔고,
권하선, 아이비 순으로 줍줍에 동참했다.
'하나에 3만 원이면.'
그래도 뭐 나쁘지 않...,
"이태용─! 멈춰─!"
"깜짝이야. 뭐야 왜 그래?"
"잠깐. 니들은 마저 줍고 있어."
이태용이 대답했다.
"왜애─!"
"잡았냐─?"
"아직─!"
다행이다.
"잡지 말고 돌아와─!"
"찾았는데─!"
"일단 오라고─!"
내가 주운 키틴질의 개수가 14개.
"니들 지금까지 몇 개 주웠는지 불러봐. 빨리!"
모체가 또 한 사이클을 생산하기 전에 계산을 끝내야 했다.
"나? 23개."
"저 25개요."
"21개다."
총… 83개인가?
개당 3만 원이면… 249만 원.
'점수로 환산하면 거의 25점이다.'
유충이 두 사이클 생산됐으니 한 사이클에 12, 13점 정도. 난이도와 5인 파티인 것을 생각하면 적당한 보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 대비 수익으로 봤을 땐 얘기가 다르다.
오케이.
"잘 들어. 1등 보상이 100점인데, 1등은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하지. 근데 성적을 포기하면 1인당 200점 이상 가져갈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할래?"
"뭐? 나 잘 이해 못 한 듯."
"아니 말 그대로야. 성적을 내려놓으면 점수 200점 이상 가져갈 수 있다고. 해, 말아. 그것만 얘기해."
"어? 어어, 해, 해!"
"저도요."
"한다."
그때 이태용이 돌아왔다.
"들었어?"
"어. 왜 그런지는 모르고…."
"찬성?"
"찬성…."
"됐어 그럼. 너네들끼리 가라."
"어딜 가라고. 포기한다며?"
권하선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조금 내려놓자고. 밑바닥이 어딘지 모르는데 아예 포기할 수는 없지."
빨리 이해시키느라 극단적으로 얘기했지만,
내가 빠져도 파티성적이 그렇게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개인 성적은 확실히 조지겠지.'
다만 남들도 크랙이 코앞에서 터지고 산탄벌레를 겪었다면, 파티원 손실이 난 곳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가. 유충 나오기 전에. 만약 산탄벌레가 또 있으면 그땐 태용이가 후딱 처리하고."
나는 멤버들을 떠밀어 보내고,
홀로 산탄벌레 모체를 향해 수풀로 들어섰다.
'...조마조마했네.'
내가 서둘러서 그렇지 쟤들이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단어는 내 입으로 말할 수도 없었고,
쟤들 입에서 나와서도 안 됐다.
'어뷰징.'
나도 변명할 거리는 남겨놔야지.
첫 사이클부터 한 3분쯤 지났던가?
재생산 텀이 1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바로 앞에서 조지면 시간당 5, 60 사이클을 돌릴 수 있을지도.
'여깄네.'
나는 산탄벌레 모체와 단둘이 마주했다.
"잘 부탁한다."
사사사삭.
녀석은 내 인사에 반응하듯 허겁지겁 유충들을 쏟아냈다.
"잘 한다 잘 한다 잘 한다~."
#45화, 어뷰징
육감연동캡슐에 관리자 모드로 접속할 경우,
따로 아바타가 생성되지 않고 전지적인 1인칭 시점만 갖게 된다. 마치 영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함성아와 라이코가 그런 상태였다.
-「썽아. 3파티 쪽 한번 봐봐.」
「왜? 권하선이 또 욕하디?」
-「말고 썽준. 저놈 재밌는 짓 하고 있다.」
함성아가 화면 전환을 의도하자, 시야가 홱홱 바뀌며 여러 파티가 지나쳤다.
곧 5분할 된 화면이 3파티 전원의 모습을 비췄다. 그녀가 그중 한 화면을 확장했다.
"뭐야. 쟤는 왜 혼자... 하!"
한성준… 그가 이번 실기의 '킬러문제'로 야심 차게 준비한 산탄벌레를....
'뭐라고 하지 저걸?'
그는 산탄벌레 모체를 발로 툭툭 차며,
-렉걸렸냐? 몇 초씩 계속 밀리잖아. 빨리빨리! 할 수 있어. 그렇지이! 또 생산해. 바로바로!
따위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저 징그럽게 생긴 벌레가 다 불쌍해 보일 지경.
"야, 너는 봤으면 뭐라고 해야지 저걸 왜 보고만 있어!"
그녀는 어찌나 어이가 없었던지 라이코를 한국말로 나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이코도 대충은 알아들었다.
-「뭐라고 해 저걸… 아니, 그보다 쟤 상태를 보라고.」
그제야 함성아의 시선이 한성준의 머리 위를 향했다.
'미친…. 대체 회복력이 얼마나 빠른 거야.'
마력과 생명력의 쉴 새 없는 등락.
그는 출혈 3중첩 상태였음에도 95% 전후의 생명력을 유지했다.
"적응훈련 영상에서도 보긴 했었는데, 저게 저 속도로도 가능할 줄은 몰랐네."
-「쟤가 자기는 마법계가 아니고 염동계라 그랬다며?」
「어. 내가 흘린 마력을 저 녀석이 조종했었으니까. 그런 식의 마력간섭이 가능한 건 염동계 재능이 맞아.」
-「마법은 술식에 대한 이해로 가능하다 치고… 마력을 태워서 생명력을 회복하는 건 무슨 능력으로 봐야 해?」
정확히는 마력과 생명력이 연동되는 거였지만,
육감 리딩기술도 그것까진 완벽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마력과 생명력 게이지가 한 템포 다르게 움직이니 마치 마력을 소모해 자가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함성아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글쎄다... 확실한 건 비약빨로 되는 것도 아니란 거지.」
-「비약? 갑자기 비약은 뭔.」
「하 교관 말이 한성준이 수업 직전에 도핑하는 거 같다는 생도들 제보가 있었대.」
-「하하. 비약도 이중 각성도 다 말이 안 돼. 그 두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이 마력흐름이 튄다는 건데… 썽준을 봐. 저렇게 등락이 심한데도 흐름은 안정적이야.」
「그래. 정말 말도 안 된다. 지금 드는 생각인데... 저 녀석 염동계도 아닌 거 같아.」
-「그럼 니가 확인한 건 뭐고.」
「그런 게 가능하니 자기 나름의 해석도 염동계였겠지. 근데 쟤는… 마력응용과 관련된 특수계로 보는 게 맞지 싶다.」
-「오우! 그거면 납득이 가네. 마력으로 되는 거라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냥 내 추측인 거지 진짜 그런 재능이 있는지는 몰라. 아니 근데 씨! 지금 우리끼리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괜히 라이코한테 버럭 소리를 지른 함성아가 서둘러 지정 통신기능을 활성화했다.
"야, 한성준!"
***
'후… 한 단계 줄었다.'
나는 노가다 시작 30분 만에 출혈 4중첩을 맛봤었다.
유충의 재생산 텀이 초 단위까지 정확하진 않았고, 내가 키틴질을 수확하는 시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
4중첩부턴 미친 회복력도 따라가지 못했다.
'3단계가 맥스구만….'
출혈의 유지시간은 1분.
하지만 출혈이 무서운 점은, 유지시간이 다해도 모든 중첩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4중첩에서 1분이 지나면 3중첩으로 하락하고, 완전히 벗어나려면 3분이 더 소요된다는 뜻.
'만약 단검을 들고 있었으면 버텼을지도 모르는데.'
육감연동캡슐은 아티팩트로 인한 변화까지 대상의 능력으로 리딩한다.
적응훈련 때 니게리움 반지의 효과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
하지만 캡슐 이용수칙 상 개인 병기까지 가지고 들어올 순 없었다.
바닥의 키틴질을 모두 수거한 뒤, 다시 쉴드를 시전했다.
파사삭. 파삭파삭! 티디딕. 틱틱!
어우 씨. 몇 초만 늦었으면 중첩이 또 오를뻔했다. 단순노동임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얼마나 모였지?'
...1,328개라.
이제 30분 남짓 지났으니 페이스는 나쁘지 않다.
근데 오지게 지루하네.
구현을 어떻게 해놨을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균열 하나를 완주하는데 3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다시 쉴드를 풀고 줍줍을 시전할 때였다.
-야, 한성준!
"억! 와 씨."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긴 했지만, 올 것이 온 것뿐이다.
-뭐? 씨이?
"아뇨. 놀란 맘에."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성적 포기할 거야?
"예. 그래야죠. 이렇게 다른 선택지를 주셨는데."
-하! 선택지는 무슨. 너 그거 어뷰징이야. 그 짓거리 해서 번 점수를, 내가 그냥 놔둘 거 같아?
나왔다…!
나는 저 말이 함성아 입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어뷰징이요? 저는 그냥 적응훈련 할 때 보상 주머니처럼 함정 문제인 줄 알았는데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하고 이제라도 빨리 네 파티 뒤쫓아 가.
"에이… 이제 와서 어떻게 찾아요. 갈림길이 몇 갠데."
-찾든 못 찾든 그건 니 사정이고. 어쨌든, 시간 낭비는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만요. 그럼 제가 지금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는 거잖아요. 잘못은 교관님들이 했는데."
-뭐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해?
"그렇잖아요. 어뷰징 어쩌고 하신 걸 보면 이번 훈련준비가 완전하지 않았다는 건데. 제가 피해자죠."
-얘, 얘 좀 봐라? 그게 왜 훈련준비의 문제야. 니가 이상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게 문젠 거지!
"뭐가 이상한 방식이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누가 산탄벌레 모체를 발견하고도 안 죽이고,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키틴질을 쓸어 담냐고.
"저도 제거할 생각이었죠. 근데 잠깐만. 3만 원? 계산기를 두드려 볼 수밖에 없잖아요. 이게 제 잘못이에요?"
-그거야….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못 했다. 뭐 그런 얘기 하시려는 건가요?"
-....
"설마 맞아요? 그럼 훈련준비에 구멍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네요."
여기서 함성아가 인정해버리면 내가 피해자란 사실도 받아들이겠단 얘기다.
그럼 성적에서 약간의 보정을 받을 순 있겠지만....
나는 겨우 그딴 걸 바라지 않았다.
-구, 구멍 같은 소리 하네! 생존 훈련의 취지와 너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잖아.
그렇지. 계속 그렇게 우겨주세요.
"네. 훈련 취지와 동떨어진 만큼 성적이 좋지 않을 거란 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바쁜데."
말 좀 그만 시키란 얘기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또 한 무리의 유충들이 폭사해 있었다.
나는 얼른 키틴질을 쓸어 담았다.
-야! 진짜 그렇게 나올래?
"확실한 대안을 내놓으실 거 아니면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너 지금 다 알고 그러는 거지?
그녀가 책임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는 거 같았다.
만약 '구멍'을 인정하고 자율성을 통제한다면,
어떤 식이든 산탄벌레에게 피해를 본 파티 전부가 내 경우를 들어 형평성을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는 척할 필욘 없다.
"뭐를요?"
함성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됐다. 적당히 해라.
"넵!"
적당히 해라. 즉, 상관 안 하겠다는 말이다.
퍽! 퍽!
나는 텐션을 올려 산탄벌레를 걷어찼다.
"쭉-쭉 쭉, 쭉쭉! 언제까지 발길질을 하게 할 거야!"
***
산탄벌레와 함께한 지 3시간하고도 45분이 지났다.
'좀 늦네.'
핵이 파괴되면 균열 내 어디서든 징후를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많을수록 이득인 상황이지만, 나도 슬슬 지겨움이 밀려왔다.
"...그만할까?"
하지만 막상 그만두려니 아쉬운 것.
그게 어뷰징이지.
분당 10여 점을 획득할 기회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1,215개니까 요거 2천 개만 채워보자.'
키틴질이 2,000개가 넘으면 '무거움' 상태가 된다.
다행히 인벤토리 상에서 판매와 환전이 모두 가능했는데, 네 차례 판매 후 아직 환전은 하지 않았다.
[ ₩ 240,156,000 ]
이번에 2천 개를 채우면 딱 3억 찍는다.
'점수로 환산하면 3천.'
애들 250점씩 나눠주면 1,000점이니까, 깔끔하게 2천 남겠네.
그리 멀지 않은 목표를 정하니 지겨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또 한차례 키틴질을 주워 담을 때였다.
멀리서 여럿의 기척과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속도 좀 더 올린다. 성일아, 넌 길 서치만 해."
다른 파티의 도착.
한데 리드하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저거 서범진인데.'
순간 고민했다.
저들을 막을 명분도 없는 상황.
그러나 다른 파티 도움 없이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 좀 끌어?'
생각은 잠시.
결정을 내리자마자 저들의 경로를 향해 달려갔다.
곧 패스파인더로 짐작되는 생도가 보이지도 않는 위치에서 소리쳤다.
"앞에 사람 있다!"
"뭐? 사람 맞아?"
핵이 파괴되지도 않았건만 초입과 가까운 곳에서 사람이 나타나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저쪽이 쓸데없는 경계를 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들려줬다.
"서범진!"
"어? 한성준?"
잠시 후, 서범진 파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왜 여기 있냐?"
"사정이 있어서 파티랑 떨어졌다."
힐끗 파티구성을 살피니 전원 다 딜러로 이뤄져 있었다.
"뭔 사정이 있었길래. 암튼, 니네 연합 필요한 상황 맞지?"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한시라도 빨리 지나치려는 서범진의 팔을 잡고, 그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왜 뭔데? 그냥 얘기해."
나는 굳이 그를 파티원과 떨어트린 뒤,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다 얘기하긴 긴데, 나 때문에 조금 늦어진 거고 연합할 상황은 아니야."
서범진이 픽 웃었다.
"어차피 니넨 선택권이 없는데 뭐 어쩌라고. 사정 좀 봐 달라는 거냐?"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 이 새끼는 저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지금 권하선이 개빡친 상태란 거야."
권하선 이름이 튀어나오자, 서범진이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당황하질 말든가 아닌 척을 말든가….
"훈련 끝나면 다 내 탓이라고 아마 지랄할 텐데. 이제 니네가 나타나서 점수까지 뺏어가면 그 원망이 누구한테 갈 거 같냐?"
"무, 뭔… 개수작을. 내가 권하선을 모르냐? 걔는 그런 걸로…."
"아무튼. 니 말대로 니들 막을 권리 없으니까 알아서 해. 나는 그냥 너 생각해서 해준 말이니까."
나는 서범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그쯤에서 물러났다.
"어, 어디가? 너 혼자 뭐 하고 다니는데?"
"나? 생존."
산탄벌레 유충들이 때마침 도착했다.
파삭, 파사삭. 티디디딕!
"꺄아악! 버, 벌레다!"
"끄악! 범진아! 아까 그놈이다!"
"이런 씨! 아니 X발. 이 새끼네는 저게 왜 아직도 있냐?"
서범진이 허겁지겁 장검을 빼 들고 숲으로 뛰어들었다.
처치방법은 학습이 된 모양.
하지만, 디텍트 가능한 인원이 없는 구성이라 애 좀 먹을 듯했다.
"아악! 주, 중첩이…! 저는 안 될 거 같아요."
저런….
나는 속으로 애도를 표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쉽지만.
'어뷰징은 여기까지네.'
#46화, 파티장의 역할
본관 동문 앞.
서범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멈춰서자, 파티원 하나가 그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미, 미안해요. 좀 더 버텨보려고 했는데…."
"어? 아아, 유정이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상념에서 깨어난 서범진이 손사래를 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맡은 균열을 빠르게 클리어했지만, 지원 간 균열에서 기여도는 챙기지 못하고 파티원이 한 명이 사망해 버렸다.
결국, 지원을 안 나가느니만 못한 성적이 되어버린 것.
"제가 죽지만 않았어도…."
"애초에 빨리 처리 못 한 내 잘못이지. 그런 생각하지 마."
속이 쓰린 건 사실이지만, 그는 정말로 책임이 죽은 파티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뭔가… 찜찜해서 그래."
"그 파티는 벌레를 처리 안 하고 지나쳤다는 건데… 걔는 왜 혼자 거기 있었을까?"
길잡이 역할을 맡았던 양호성이 서범진의 찜찜함에 동조했다.
"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이상하더라고."
"너랑 따로 얘기하던데. 그때 뭐랬어?"
"그, 그건 별말 아니었고…."
당황한 서범진이 대충 얼버무리려는데, 동문 계단을 내려오는 한성준이 눈에 띄었다.
"아, 잠깐만. 확인 좀 해봐야겠다."
서범진은 일행을 놔두고 한성준에게 직진했다.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혼자서 길목에 버티고 서있던 것부터,
산탄벌레의 등장까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을 붙잡고 나눈 대화조차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팀, 동아리, 파티할 것 없이 늘 한발 빠르게 권하선을 낚아채 가는 녀석.
두 사람이 소꿉친구였다는 걸 알고 자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얄미운 건 사실이다.
그런 놈이, 자신이 권하선에게 관심을 가진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릴 방해한 게 사실이면 얌전히 넘어가지 않을 거다.'
그저 그런 성적일 게 뻔한데도 놈은 뭐가 좋은지 파티원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야, 한…."
"범진 오빠."
서범진이 한성준을 부르기도 전에 권하선이 먼저 그를 발견했다.
"아, 하선아… 하하. 수고했어. 한성준, 너 잠깐 나 좀 보자."
그러나 권하선이 그를 붙잡았다.
"우리 쪽에 왔던 게 오빠네 파티라면서요?"
"어…? …그랬지?"
"얘기 들었어요. 오빠가 도와주셔서 살았다고."
"뭐? 내, 내가? 누굴…."
그때 한성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우. 범진이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지. 가뜩이나 느렸는데 나까지 죽었으면 우리 진짜 X 망했을 거다. 고맙다."
그러면서 손까지 내밀었다.
얼떨결에 악수를 받았던 서범진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 산탄벌레가 왜…."
"저도 감사드려요. 크게 신세 졌네요."
"하핫! 그게 뭐라고 하선이가 신세를 져."
"왜요. 다 파티점수에 영향이 있는 건데요."
서범진은 뭔가 사실과 다른 상황임을 인지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밥 한번 살게."
한성준이 어깨를 툭 치면서 은밀한 윙크를 건넸다.
'뭐야, 저 새끼. 진짜로 나 도와주려는 거였어?'
한성준 일행이 멀어지는 동안, 서범진은 뒤늦은 당혹에 빠졌다.
그의 파티원들이 몰려들었다.
"확인했어? 뭐래?"
"어… 그냥 고맙다고."
"그게 뭔 소리야?"
양호성의 되물음에 서범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오해라고. 한성준 쟤가 꼼수 쓰고 그럴 애는 아니더라."
***
본관 옥상.
와그작! 까드득.
함성아가 분을 토하듯 입안에 든 것을 마구 씹어댔다.
"스읍! 하아! 하아!"
매워 죽겠다면서도 목캔디를 8개째 털어 넣는 함성아를 보며 라이코가 고개를 내둘렀다.
「차라리 담배를 피워.」
함성아가 말이라고 하냐는 듯 잠시 노려봤다. 라이코는 마치 막냇동생을 대하는 눈으로 맞받았다.
「썽준한테 진 게 그렇게 억울해? 뭐가 그렇게 분에 겨울 일이라고….」
함성아가 라이코를 떠밀었다.
「기름 붓지 말고 내려가라?」
끼익.
라이코가 껄껄 웃으며 돌아설 때,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인물이 옥상에 발을 들였다.
"Oh, professor."
마공학의 백남호 교수였다.
"아. 계신지 몰랐습니다."
백 교수가 난간 옆의 함성아를 힐끔 보고는 라이코에게 말했다.
"No, no. 겐차나."
함성아도 소리를 듣고 돌아서 백 교수를 맞았다.
"바람 쐬셔요. 백 교수님을 옥상에서 다 뵙네요."
"하하. 어떤 친구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말이죠."
백 교수가 작게 웃으며 손에 든 태블릿PC를 흔들어 보였다.
함성아가 의아한 얼굴로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생각할 거리요…?"
교수, 교관들이 과목 채점에 사용하는 프로그램 화면.
아직 정규 필기시험을 치르진 않았지만, 쪽지시험 등은 각 과목 담당의 재량이었다.
한데 화면을 훑던 함성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열려있는 페이지가 한성준의 답안이었던 것.
"이게 왜요? 얘가 뭐 잘못했어요? 아! 장난으로 써냈다. 그렇죠?"
마치 잘못했길 바라는 듯한 함성아의 추궁에 백 교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Sorry."
라이코가 함성아의 뒷덜미를 잡아당기자, 백 교수가 말을 이었다.
"잘못하긴요. 불러다 상이라도 주고 싶은데요."
"맞았으면 맞은 거지 무슨 상씩이나요."
함성아가 안타깝단 듯이 입맛을 다셨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마공학에 대한 생도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한 논술문제였지요."
"네…."
함성아는 그제야 한성준이 적어낸 글을 눈으로 읽어갔다.
"가까운 미래에 마공학이 초인과 비 초인의 경제를 나누게 될 거라는 비관적인 주장은, 작년 국제 마공학 포럼에서 세계적인 마공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딜런 잭슨이 처음 발표한 것이죠."
"…뭐 어디서 그런 얘기를 주워들었나 보죠."
"딜런 잭슨의 발표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 친구처럼 설득력이 있지 못했거든요."
"...."
"한번 잘 읽어보십시오. 꼭 그런 미래를 살아본 것처럼 생생하지 않습니까?"
함성아는 말없이 태블릿을 라이코에게 넘기더니, 더욱 분통 터지는 표정으로 목캔디를 까기 시작했다.
***
획득한 점수는 총 2,778점.
서범진 파티의 등장으로 3천점은 찍지 못했지만,
계획했던 대로 넷에게 250점씩 나눠줬다.
[ 총 점수 : 1982.0 ]
'오우… 든든하네.'
정상적으로 모으려면 몇 주 혹은 몇 달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점수다.
권하선이 뒤쪽을 힐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시키는 대로는 했다만, 왜 그런 거야?"
"방해한 거 눈치까면 서범진이 가만히 있겠냐? 원래 거부권이 없는 건데."
"그러니까 뭔 짓을 어떻게 했냐구."
"그냥 모르는 척하고 서범진한테 말 걸은 거밖에 없어."
"산탄벌레가 있다는 걸 숨기고?"
"어."
"와아."
권하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땀 좀 뺐겠네요. 그때까지 거기에 그게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을 거 아니에요."
"피차 운이 없었던 거지. 핵 제거하고 빠져나왔을 때부터 훈련종료까지 20분 정도 걸렸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늦은 편은 아니거든. 다른 쪽으로 갔으면 아마 8개 파티 중엔 쟤들이 1등 했을지도."
나도 3천점을 찍었을 거고.
"일단 제 몫을 빨리 끝낸 거 자체로도 가산점이 있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우리 쪽 산탄벌레도 그 파티가 제거한 거고요."
결과적으로 산탄벌레 모체를 제거한 공로는 서범진 파티가 가져간 거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파티원 전부 살린 것보단 손해가 클걸?"
"설마 파티원도 죽었어요? 산탄벌레 때문에?"
"어."
가영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왜? 아, 그 얘긴 안 했었나? 당황해서 대처가 늦었지. 애초에 그 팀 구성으론 운빨도 있어야 했으니까."
패스파인더의 비전(vision)류 스킬은 장애물을 넘어 멀리 볼뿐이지 수림 속의 생명체를 감지하는 디텍트 계열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권하선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난 가끔 이나은보다 쟤가 더 싸패 같더라니까."
"나는 파티장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야. 지킬 수 있으면 지켜야지. 안 그러냐 태용아?"
이태용은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근데 좀 무섭긴 해."
"와 씨! 이것들이 누구 덕에 꿀 빨았는지도 모르고…."
뭔가 좀 억울해지는 순간.
"나는 알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모두가 화들짝 뒤를 돌아봤다.
아이비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우리는 공범이다."
***
목요일 아침.
'8시 46분….'
좀 더 자도 되겠다 싶어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정규수업이 따로 없고, 파티별로 공략 실기의 차례만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
──!
방음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건물 전체가 묘하게 소란스러운 느낌.
"뭐야 또…."
창 쪽으로 굴러 밖을 확인했다가 뭐가 없어서 결국 몸을 일으켰다.
철컥.
현관문을 열자 쓰윽! 하고 문 뒤로 묵직한 게 밀려났다.
복도를 둘러보니 문 앞의 상자와 똑같은 것이 다른 방문 앞에도 보였다.
'택배?'
연상되는 게 그것뿐이지만, 애초에 모든 우편물은 지하 택배실에서 직접 수령하는 시스템이었다.
일단 상자를 주워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박스 속에는 완충 스티로폼과 백색의 패키지박스가 들어있었다.
'노트북? 주문한 적 없는데….'
애초에 배송장 같은 것도 본 적이 없던지라 다시 박스만 이리저리 살피는데.
팔랑.
카드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헐…."
"신성전자가 생도님들의 무사 성장과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냥 선물이야?
보아하니 생도 전체에게 돌린 것 같았다.
"최고사양이네."
안 그래도 하나 장만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는 거니 잘 쓰긴 하겠다만.'
뭔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위치 포함 수많은 기자재가 신성그룹의 지원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이건 주는 방법이나 시기가 조금 매끄럽지 않은 느낌.
혹시 영문을 알 수 있을까 해서 워치를 확인하니, 동아리 단톡방에 실시간으로 톡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영: 와 신성 통 크네요. 제거 4년 돼서 바꾸고 싶었는데)
(최범균: ㄹㅇ 400만 원짜리를 전단지처럼 뿌려버리누ㅋㅋ)
(권하선: 잠결에 생일인가 했닼ㅋㅋ)
(최범균: 근데 신성은 이거 왜 주는 거냐? 학원에서 주는 건가?)
주로 저 셋이 떠드는 거였지만, 숫자 표시가 안 뜨는 걸 보니 그 외 3인도 보고 있는 듯했다.
'이유는 다들 모르나 보네.'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
송연희가 이미지 한 장을 전송했다.
캡처 된 워치 화면.
확대해 보니 학원앱 알림 게시판의 한 게시글이었다.
「2029학년도 생도대표 선거 안내」
'아….'
제목만 봐도 답이 나왔다.
(송연희: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줬겠니? 진짜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야?)
이후로 송연희의 불만이 다다다 쏟아지길래, 화면을 닫고 워치를 착용했다.
'잠은 다 깨버렸네.'
송연희가 저토록 흥분하는 이유는, 자신이 출마할 예정이라서다.
'다 쓸데없는 짓이지.'
돈 지랄이나, 신경질이나.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
동아리 세븐의 전용실.
송연희와 차유라의 맞은편에 강선호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다 모이면 얘기할게."
"아, 그래."
권하선이 벌컥 들어섰다.
"굿모닝!"
"어. 좋은 아침."
소리 내 인사를 받아주는 건 강선호뿐이다.
권하선이 입을 삐죽이며 강선호 옆에 앉았다.
"뭔데?"
"다 모이면 얘기해 준대."
권하선이 의자를 드륵 밀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아아. 그러시구나아."
"...."
별것 아닌 한마디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강선호는 곤란한 표정으로 자꾸만 문 쪽을 돌아봤다.
철컥.
"안녕하세요."
"어. 어서 와."
강선호는 가영의 등장이 반가웠다.
분위기를 주도하진 못해도, 두루 잘 지내는 막내였다.
"성준이는?"
"전 먼저 나간 줄 알았어요. 나올 때 두드려봤는데 방에 없던데요."
"그래?"
강선호는 반사적으로 송연희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워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오 씨! 얘 또 확인 안 하네. 이거 100% 한성준이야."
송연희의 짜증에 다른 멤버들도 단톡방을 띄워봤다. 동아리방으로 모여달라는 메시지부터 숫자 1이 붙어있다.
권하선이 중얼거렸다.
"최범균도 안 왔구만."
"아, 범균이 형은 오다가 봤…."
별생각 없이 대답하던 가영이 아차 하고 말을 흐렸다.
"근데 걘 왜 안 와?"
바로 치고 들어오는 송연희였다.
"그으, 다른 반 사람들이랑 시비가 붙은 거 같던데…. 하하."
송연희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보고도 그냥 왔다고?"
"어… 범균이형이 제가 말린다고 듣겠어요?"
"그건 맞지. 영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닌데."
권하선이 가영의 말에 맞장구치자, 강선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데려올게. 영아, 앞장서라."
"네."
"잠깐만. 한 번에 하자."
"...?"
일어나던 가영과 멤버들이 전부 송연희를 돌아봤다.
잠시간 워치를 두드리던 그녀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얘는 왜 여기까지 가 있는 거야."
강선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 한성준?"
송연희는 대답 대신 강선호에게 이미지 한 장을 전송했다.
~지이잉.
(학원 지도 위에 표시된 붉은 점 하나.)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거 설마 위치추적이야?"
"뭐?"
강선호의 되물음에 권하선의 눈이 커졌다.
송연희가 픽 웃으며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 그냥 동아리장 권한일 뿐이니까. 사용할 수 있는 장소도 여기 동아리방 한정이고."
다행히 소름 돋을 이유는 아니었다.
"아… 알았어. 둘 다 데려오란 거지?"
강선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동아리방을 나왔다.
'후우.'
송연희와 권하선이 함께 있을 땐, 한성준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가영이 강선호를 따라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본관을 벗어났을 때, 가영이 강선호에게 말을 붙였다.
"형."
"어?"
강선호가 가영과 걸음을 맞췄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범균이형이요. 어떻게 같은 팀이 됐는지…."
강선호가 피식 웃었다.
"왜? 범균이가 좀 달라서?"
"아무래도… 형이나 다른 누나들이랑은 잘 매치가 안 되잖아요."
"나도 몰라. 그냥 송연희가 실력보고 뽑았다는 거밖에. 근데 지내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나쁜 애는 아니야."
가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이유 불문하고 먼저 시비 거는 걸 잘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뭐… 자기보다 약한 애들한테 그러지는 않더라고."
"아."
최범균의 상대는 언제나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제법 유명한 이들이었다.
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47화, 방문자
캠퍼스 외곽.
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의 공사현장에 나와 있다.
이제 대부분의 건물이 방진막을 벗고 실내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안녕하세요."
잠시 숨을 돌리는 작업자 아저씨께 인사를 건넸다.
"어이. 여그 생도 아닌감?"
"예."
"뭔일이여?"
"그냥 지나는 길인데 완공이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해서요."
"어어, 인자 다 끝났어. 한 사오 일이믄 청소까정 끝날겨."
"아, 그렇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뭐얼. 다 돈 받고 허는 일인디."
말씀과는 달리 빙긋이 웃는 아저씨께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 건물이 맞는 거 같네.'
아마 초상자원 유통 허가와 동시에 오픈할 예정인 듯했다.
한 번인가 지나쳤던 장소.
그런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일일이 다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생도대표 선거와 관련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고 나니 그 정보를 얻던 날 지나쳤던 풍경까지 어렴풋이 그려졌던 것.
그 기억대로라면.
'이곳에 상점이 들어서겠지.'
플레이어가 자주 이용하는 사설 잡화상점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외부방문객을 대상으로는 현금거래를 했었지만, 생도들에겐 점수로 판매하지 않을까 예상 중이다.
물론 아직은 점수의 사용처를 예상하다 떠올린 뇌피셜일 뿐이다.
'이쯤에 실내체육관 같은 것도 있었던 거 같은데….'
게임에서 학원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건 딱 한 번, 퀘스트 진행 때문이었다.
생도대표와 관련된 이야기도 그 과정 중 NPC에게 들은 부수 정보였는데, 1회 졸업생의 대표는 3년 내내 송연희가 차지했다고 한다.
직접 보니 이유는 뻔했다.
'이나은 표는 그 패거리가 다 깎아 먹었다고 봐야지.'
아니, 도지훈 때문이다. 김판웅은 도지훈에게 끌려다니는 순둥이일 뿐이었으니까.
아오 씹… 그나저나.
더럽게 거슬리네, 저것들.
'진짜 날 따라다니는 건가?'
아까부터 남생도 3명이 3, 40미터 거리를 두고 어슬렁댔다.
공사구역이라도 블록과 길 정비는 끝난 상태.
출입이 제한된 것도 아니다.
누구라도 산책 삼아 지나다닐 수 있다는 얘기지만, 동선이 겹치는 데다가 자꾸만 힐끔거리는 게 문제였다.
"...."
나는 저들을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개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녀석이 내 눈빛을 맞받았다.
낯이 익은 놈이다.
'박태광.'
태광 길드장 박대근의 아들.
길드명을 자식 이름으로 지었다고 해서 꼭 구멍가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본편 기준으로 국내 탑3에 드는 길드였고,
현시점에도 해외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젠 귀국했을지도.
'어쨌든… 볼일이 있는 건 맞는 거 같네.'
왠지 풍기는 느낌부터 좋은 의도는 아닐 듯했다.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한성준."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셋 중 하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딱히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좋은 거 있으면 나눠 먹자."
...얼탱이가 없네.
"안 가지고 나왔어?"
아마도 어디서 비약빨이란 소문을 주워들은 모양.
"...."
"X발. 사람이 물으면 대꾸를 해라."
"질문하러 왔냐?"
영역을 생성하고,
"개새끼가."
달려드는 놈을 향해 매직 미사일을 날려 보냈다.
퍼버벅!
박태광이 얻어맞고 휘청이는 녀석을 옆으로 밀쳐냈다.
"벌레 같은 새끼."
스릉─!
"칼을 왜…."
이거 미친놈이네.
클레이모어를 뽑아 드는 박태광을 보고 나는 무작정 거리를 벌렸….
부우웅! 핏!
"아."
거대한 검 끝이 왼쪽 눈 아래 뺨을 스쳐 갔다.
황망한 중에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개연성 없는 증오의 시작이 무엇인지.
부정행위를 했다는 오해도, 말대답도 아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 들까.
그의 일격엔 분명 살의가 담겨있었다.
"야이 씨! 진짜 미쳤냐? 잠깐 진정 좀 해봐!"
박태광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야! 니들이 말려봐. 이 새끼 헤까닥 한 거 안 보여?"
하지만 다른 두 놈도 상태가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표정이 점점 사라진다 싶더니, 박태광과 마찬가지로 눈깔에 핏발을 세웠다.
"...감히 나를 무시해?"
매직 미사일에 맞았던 놈이 뇌까린 말이다.
"내, 내가 언제 무시했어. 미친놈아. 정신 차려!"
콰─앙! 쾅쾅쾅!
전투계 세 놈이 쉴 새 없이 몰아치니, 쉴드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X발. 이건 버틸 게 아니지.'
죽이려 드는 상대지만, 나는 그럴 수 없으니 당연했다.
마력으로 민첩을 보정하고 헤이스트(가속마법)까지 시전한 뒤 조금씩 물러났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나에 대한 반감이야 원래 있던 것이라 쳐도 저들은 분명한 심신미약 상태였다.
파지지직!
낮은 출력의 뇌전 마법을 뿌려 보았다.
"씹."
그마저도 잠깐의 경직만 보일 뿐.
'통각까지 상실했네.'
물러서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지만, 워낙 깊이 들어왔던 터라 막막하기만 했다.
쾅! 쾅쾅!
철 속성의 쉴드가 한 방에 한 뼘씩 우그러졌다.
'근데 박태광 이 새끼가 이 정도였나?'
냉정히 판단했을 때, 셋을 상대로 방어만 해서는 길게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인탱글링 바인스.'
츠츠츠.
보도블럭을 뚫고 수백 줄의 넝쿨이 솟아났다.
박태광쯤 되면 일 검에 탈출할 수 있을 터.
처음부터 가장 처지는 녀석으로 대상을 한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박태광의 옆을 파고들었다.
거검을 다루는 녀석답게 근거리의 대처가 느리다.
옆구리를 지나쳐 뒤로 빠진 뒤, 넝쿨에 갇힌 놈을 힘껏 후려갈겼다.
빠각!
순간적으로 힘을 보정했음은 물론이다.
'으으.'
안면 골격이 함몰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놈은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곧 넝쿨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부웅─ 쾅!
이어진 박태광의 공격을 막고 자리를 피했다.
같은 방법으로 또 하나를 허물어트리자,
박태광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파지지직!
경직 타이밍에 맞춰 박태광에게도 공격을 가해봤지만, 녀석은 앞의 둘과는 내구도부터가 달랐다.
"후우. X나 딴딴하네."
결국, 때려눕히는 것을 포기하고 뒷걸음칠 때였다.
"이 똘아이 새낀 뭐냐?"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박태광의 뒤에서 인영이 솟아났다.
"최범균?"
그가 그림자에서 뽑아 올린 거대한 사이드(낫)가 박태광의 검을 걸어챘다.
챙!
그리고 내 옆을 바람처럼 스친 또 하나의 신형이 박태광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퍼버벅! 퍽! 퍽!
"어… 어떻게…."
미친 속도로 박태광을 두들기던 강선호가 외려 당황해서 물러났다.
맨주먹이긴 했지만, 타격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
"와씨 힘 X라 쎄! 강선호 뭐하냐? 계속 두들겨!"
최범균이 놈의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목을 졸랐다.
최범균의 팔을 쉽게 풀어내던 박태광은, 다시 달려드는 강선호를 두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목이 졸려 기절했다.
"와 X바. 이 새끼가 청송 탑이었냐?"
"...."
만약 조금 전 모습이 정상적인 기량이었다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근처에 쓰러져있는 생도들을 보더니 최범균이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저런 놈들을 상대로 혼자 버텼다고?"
"말 그대로 버티기만 했어. 니들 아니었으면 개고생할 뻔했다."
[강선호 외 1인에게 인상적인 기억 -DP 획득 20]
"눈빛부터가 정상이 아닌 거 같던데 대체 무슨 일이냐, 성준아."
강선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먼저 쓰러진 녀석이 몸을 들썩거렸다.
"...!"
"구웨에엑!"
그는 의식이 없는 채로 초록색 액체를 게워냈다.
"억! 씹… X나 드럽네. 저거 뭐냐?"
그걸 보자마자 퍼뜩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디텍션!'
시야가 어둡게 반전하며 일행의 모습이 온색(溫色)으로 빛났다.
곧 범위를 넓힌 탐색망이 수십의 인부들을 담아냈다.
비슷비슷한 형상 가운데 유독 호리호리한 형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자?'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온색의 형상 가슴에 보이는 푸른 반점 때문이었다.
'찾았….'
미친.
정체불명의 그녀가 디텍션의 마력을 느꼈던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모습을 지워버렸다.
서둘러 시야를 정상화시키고 몸을 날렸다.
"한성준!"
"마! 어디가!"
강선호와 최범균이 따라붙었다.
"한 명은 남아서 쟤들 등 좀 두드려줘라. 전부 다 토해내야 해."
"어우 X팔. 나는 못 한다."
자연히 강선호가 달리기를 멈췄다.
처음 탐지한 위치라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멀어진 실루엣조차 남지 않았다.
달리는 것을 멈추진 않았지만, 벌써 놓쳤음을 느끼고 있었다.
"후우. 개 열 받네."
허탈하고 분했다.
이건 명백한 암살시도였으니까.
그 여자가 사용한 것은 '사령고(使令蠱)'가 분명했다.
대상의 사념(邪念)을 자극하는 기생충으로, 주로 주술계나 흑마법을 쓰는 이들이 다룬다.
사념에 매몰된 이후로는 손쉽게 조종이 가능하기 때문.
수컷 사령고는 암컷 사령고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힘을 잃는데, 디텍션 시야에서 그 여자가 품은 푸른 반점이 아마도 암컷 사령고로 추정됐다.
"…젠장."
길을 따라 한참을 더 달리고 또 탐색을 해봤지만, 더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뭔 일이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아니, 뭔 씹… 뭐가 그러게나야. 저 새끼들은 왜 저러고 너는 또 갑자기 왜 달렸냐는데."
"범균아."
"뭐."
"일과시간엔 외부인 출입금지지?"
"그랬나…? 아마 그럴걸?"
최범균에게 정확한 정보를 바란 건 아니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
내부인이거나 침입자이거나….
"우리 학원에 주술계가 있었던가?"
"어, 주술계 있어. 내가 오가다 들은 놈만 두어 명 된다."
"교관은?"
"주술교관? 따로 없는 걸로 아는데."
그래. 드문 계열이지.
더구나 생도의 수준도 아니었다.
흑마법사라면 더 높은 경지가 요구되고,
생도 중에 있을 리도 없었다.
결국, 내부인은 아니란 건데….
'깡도 좋네.'
아무리 잠행이라지만, 주술계 주제에 단신으로….
"아!"
"왜왜?"
"나중에."
나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목적지는 본관 건물.
침입이 아니라, 허가된 방문자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 여자가 주술계임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암살에 성공했더라도 의심받을 일이 전혀 없다.
살인자는 박태광이 되었을 테니까.
단숨에 계단을 달려 교무실로 직행했다.
"헤이! 썽준…."
"파인땡큐."
"?"
그대로 라이코를 지나쳐 교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교관과 교수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냅다 소리쳤다.
"혹시 원내 방문 중인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황당한, 또는 싸늘한 눈빛.
...무례하긴 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좀 알 수 없을까요?"
그래도 담임이라고 조금 가까운 하 교관을 찾아 둘러봤지만, 자리에 없는 모양.
"오늘…."
긴 적막 끝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공식 방문자는 없었다. 예정도 없고."
유호영 교관이었다.
"비공식 방문도 있습니까?"
"그야 관계자가 업무 외적인 일로 방문할 수는 있지."
"일과시간에도요?"
"원장님의 허가를 받았다면?"
"...!"
나는 그대로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물증도 필요 없다.'
심증에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복도를 달려가는데 최범균이 중얼거렸다.
"X나 미친놈 같네."
아직 더 미친 짓이 남아 있었다.
나는 원장실 앞에 멈춰 섰다.
"너 설마- 야이 씨!"
벌컥.
만류하는 최범균을 밀치고 원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정면의 중역 책상에서, 황재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 죄송합니다. 노크를 깜빡했네요. 손님이 계시니 다음에 오겠습니다."
내 시선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괜찮으니 용건이 있으면 들어오게."
언뜻 인자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
그러나 그 안엔 사람을 짓누르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씹.'
마기(魔氣)다.
등을 보인 여자가 어떤 수작질을 준비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저들도 놀라고 당황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급히 물러나려 했으나, 황재천의 마력이 두 다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붙들었다. 아니, 의지에 반해 원장실로 걸어 들어갈 기세였다.
'야, 최범균….'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 새끼는 벽에 딱 붙어서 나를 뜨악한 눈으로 쳐다 볼뿐.
그때,
"썽주운~ 너 manner 업써. 왜 그래애."
라이코의 목소리에 다리를 옥죄던 황재천의 마력이 급하게 자취를 감췄다.
'와아. 진짜 X 될 뻔….'
"쏘리쏘리땡큐."
나는 진심을 담아 라이코에게 감사를 전하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황재천 암살시도 위급)
#48화, 너밖에 없다
"이제 이 일을 어쩔 셈인가!"
황재천이 원장실 문을 닫고 돌아오며 흑발의 여인을 다그쳤다.
"놀랍군요.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태평하게 감상이나 나불거릴 땐가? 대체 일 처리를 어찌했기에…."
그녀가 말을 자르듯이 한 손을 내뻗었다.
"이게 저한테 언성을 높일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뭐?"
"애초에 그런 방식은 제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드렸을 뿐, 성공 여부는 제 소관이 아닌 겁니다."
"누가 그걸 뭐라는가! 뒤를 잡힌 걸 말하는 걸세."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이사장, 아니 황 원장님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구나 싶은데요."
"...!"
"그게 아니라면 절대로 이곳을 찾아오진 못했을 겁니다."
한성준이 원장실에 들이닥친 배경에 그녀의 실책은 티끌만큼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 자신할 수 있나?"
"신뢰도 없이 일을 맡기셨습니까?"
황재천은 여인을 잠시 노려보다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네."
그녀 말처럼 한성준 그놈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면, 벌써 배후까지도 짐작하고 있을 거란 뜻이었으니.
"흔적은?"
여인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쓰러지는 숙주를 보고 곧바로 디텍트를 펼쳤던 한성준의 모습.
'분명 감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지.'
하지만.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사령고는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 아직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물건인 데다가, 그녀는 공식적으로 특수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알았네. 수습은 내가 할 테니 자넨 이만 가보지."
"또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아, 니엔젠."
"유신."
"뭐?"
"한국 이름은 유, 신입니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경거망동하지 말게."
"무슨 말입니까?"
"이번 일 말이네. 꼭 돈 때문에 맡았다고 볼 순 없지 않겠나. 아마 자네의 개인적인 볼일과도 맞아떨어졌을 거라고 생각되네만."
"혹시… '복수'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유신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
황재천은 유들거리는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쓸데없이 매혹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돌아서는 유신의 뒤태를 새삼 훑어보다가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게 자네의 진짜 모습인가?"
전에 봤을 때 그녀는, 분명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짜 모습이라...."
문고리를 돌리던 유신이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없다고 봐야겠죠. 이곳에는."
"…?"
"그럼."
황재천은 말의 의미를 곱씹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그러니까… 아까 그 새끼들이 주술에 당해서 너를 죽이려고 했고. 그 짓거리를 한 범인이 원장실에 앉아있었다는 말이냐?"
"어."
최범균이 하도 이유를 캐묻기에 대충 얘기해줬다.
딱히 숨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조차 귀찮았을 뿐이지만.
"그럼 원장이랑도 연관이 있다는 소리네?"
"증거는 없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와, 이 새끼 진짜 똘아이네. 취임한 지 3일 된 원장이, 자기 생도 목을 따려고 사람을 썼다고?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차피 믿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다 얘기한 거니까 믿든지 말든지는 니가 알아서 하고… 야, 나 전화 들어온다."
아버지였다.
얼른 콕팟을 끼고 최범균을 밀어 앞세웠다.
"여보세요."
그리고 걸음을 늦춰 거리를 벌렸다.
-황재천이 확실하냐?
"예. 사람을 썼고요."
-확신하는 이유는.
"누군가 사령고를 사용해서 저를 노렸는데…."
-사령고라고?
"예, 사령고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다. 계속하거라.
알면 안 되는 건가?
용도부터가 음험한 것이니만큼,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네… 아무튼, 수준이 상당한 놈이어서 추적은 실패했어요. 혹시 하는 생각에 원장실에 들이닥쳤고, 황재천이 저를 습격한 여자와 함께 있는 걸 확인했어요."
-...무모한 짓을 했구나.
"그 덕에 확실히 알게 됐죠."
한참을 말씀이 없으셔서 워치를 들여다봤다.
끊어진 건 아닌데?
"여보세요?"
"너는."
"…!"
콕팟 너머에서 조금 거친, 그러나 정돈된 호흡이 느껴졌다.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바로 내게 연락을 했어야 했다."
'아....'
아버지는 화를 다스리고 있었다.
"상대를 추적할 게 아니라."
그것은 걱정이기도 했다.
"네 행동이 상황을 더 위험하게 만든 것이다."
복면이 벗겨진 강도는, 더 이상 몸을 사리지 않는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서둘러 메시지를 남긴 이유였고.
"앞으론 조심할게요."
아버지는 긴 한숨으로 남은 화기를 걷어냈다.
-오늘 일과가 끝나기 전까진 되도록 공개된 장소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있거라.
"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연결이 끊어졌다.
'...열 받네.'
당연히 통화를 두고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혼자 감당하지 못할 위협에 대한 감상이다.
지금의 나는 분명 뒤처지지 않는 힘을 가졌고,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지만.
벌써 수년 전에 각성한 수장급 네임드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형편없이 약했다.
'당연한 거긴 한데….'
나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지.
생도들 수준에서 조금 뛰어난 정도론 부족하다.
하루빨리 방법을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말로 이중 각성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주어진 이상 아버지의 존재 역시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 당신의 도움을 바라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에 의존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갔다 온 거야?"
상념에 잠긴 사이, 싸움이 있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너도 봤어야 하는데. 아니 저 새끼가 글쎄...."
강선호는 최범균에게 맡겨두고 나는 박태광 일당을 먼저 살폈다.
주변의 흔적들로 보아 사령고의 잔해는 모두 게워낸 듯했지만, 세 사람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괜찮냐?"
"...."
최범균에게 자초지종을 듣던 강선호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나도 계속 깨워봤는데 못 일어나더라."
그럴 리가.
나는 박태광 일당을 툭툭 차며 말했다.
"머리 깨지게 생각해봤자 답 안 나오니까 쑈하지 말고 그만들 일어나."
"...."
내 말에 하나둘씩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헐."
강선호가 황당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박태광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하아… X발.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나도 정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믿어."
박태광이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가 잡고 몸을 일으켰다.
"믿는다고?"
"니들은 주술에 당한 거다. 그러니까 쪽팔려 할 거 없어. 나한테 미안할 것도 없고."
사령고에 지배당한 이들은 그간의 일들을 모두 기억한다.
'만약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미치고 팔짝 뛰는 거지.'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사령고를 섭취했는지, 또 주술자와 언제 접촉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는 물론 플레이어로서는 알 수 없던 디테일이지만, 〈창조적 시선〉이 그렇다고 했다.
"주술? 어떤 쳐죽일 놈이…!"
대뜸 욕지거리를 하는 박태광의 어깨를 두드려 달랬다.
"일단 진정하고 들어봐라."
나는 박태광 일당에게 현재 벌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최범균은 한번 들었던 얘기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디테한 설명을 곁들였기에 다 같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원장이 왜 그런 짓을 하겠냐고."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
"그거야 본인만 알겠지. '왜'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니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게 되냐?"
"원장실에 있던 게 그 주술사년인 건 확실한 거지?"
"그래. 니들 상태 보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토하는 거 보고 바로 탐지마법을 펼쳤다니까."
사령고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았는데, 다들 주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녹색 빛의 액체가 곧 주술의 흔적이라는 설명 정도로 납득하는 듯했다.
그것이 용해된 '벌레'라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니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면. 빨리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
"직접 겪은 너도 긴가민가하는 걸 누구한테?"
박태광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원장이랑 관련 있다는 건 둘째치고 증거가 여기 있잖아!"
그가 바닥의 토사물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니들이 언제 어떻게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증거가 될 수 없다."
범인도 지목하지 못하는 채로 일을 키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씹! 그럼 그냥 이대로 넘어가자고?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래서 말인데, 일단은 우리끼리라도 뭉쳐있어야 할 거 같다."
반대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제 분에 거친 숨을 내쉬던 박태광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럼 결국, 해결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이잖아. 언제까지 몰려다닐 건데."
"오늘만이야. 오늘 안에 대책을 마련해 볼게."
[인물 '박태광'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30]
***
"계속 찜찜하더라니…."
통화를 마친 이금환이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며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되지 않아 비서실장이 회장실로 들어섰다.
"네, 회장님."
"지금 즉시 황 원장과 관계된 자료는 남김없이 폐기해. 이것도."
탁.
비서실장은 이 회장이 테이블 위로 던져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며 되물었다.
"황 원장이라면… 그, 예전 사외정보실장 황 이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한상철이 알게 된 이상 후환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됐다.
증거는 곧 명분이고, 명분을 가진 자의 손속은 더욱 거침이 없을 테니 말이다.
***
"만났으면 빨리 데려오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송연희가 워치에서 눈을 떼며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다.
톡. 톡. 톡.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권하선 때문이다.
"손 좀 가만 놔두면 안 돼?"
"지루하게 하질 말던가. 바쁜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건지…."
권하선의 심드렁한 말에 송연희는 결국 뚜껑이 열려버렸다.
"야! 너 그거 안 고쳐? 은근슬쩍 반말하면서 싸가지 없게. 한성준이 오냐오냐해주니까 전부 니 아래 같아?"
"네에 네, 수령님. 이제 혼잣말도 못 하겠네요."
"저게 진짜!"
송연희가 벌떡 일어나자, 줄곧 눈치만 보던 가영이 재빨리 권하선 앞을 막아섰다.
"어어! 왜들 그래요오."
가영은 십수 분 전의 자신을 저주했다.
최범균을 만난 뒤, 두 사람의 속도를 늦출 뿐이라며 홀로 돌아섰던 그였다.
"비켜봐, 영아. 어쩌나 한번 보자고."
"보긴 뭘 봐요. 그만하시라니까."
가영이 그나마 조금 편한 권하선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유라 누나. 좀 말려봐요."
차유라는 그와 중에도 홀로그램을 띄워 놓고 독서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가영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나도 하선 씨 의견에 동감해."
"언니!"
믿었던 그녀의 반응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런 송연희의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차유라가 말을 이었다.
"네가 비협조적인 멤버한테 얻은 스트레스로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고 있는 건 사실이야. 여기 있는 건 어쨌든 네 부름에 응한 사람들이고. 계획이 뭐였던 양해도 없이 계속 시간을 뺏는 건 부당하다고 봐."
구구절절 맞는 얘기.
"...."
머리가 식자,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송연희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호흡을 골랐다.
엄밀히 따졌을 때, 권하선과의 관계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가 동아리에 합류한 다음 날,
반갑게 엉겨 붙는 그녀를 홱 밀어내면서부터였으니까. 권하선이 자신의 결벽을 모르고 그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을 테지만, 왜인지 권하선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었다.
'왜 그렇게 싫었는지 이제 알겠네.'
권하선은 오래전의 자신과 닮은 성격이었다.
그래서 거슬렸다.
그녀가 한성준과 함께 있는 모습이, 행복했던 한 남매를 자꾸만 떠올리게 했기에.
'...그게 쟤 잘못은 아니지.'
송연희는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차유라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유라가 다시 홀로그램으로 눈을 돌렸다.
이윽고, 송연희가 정돈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정해. 감정적으로 굴었던 거 사과할게."
권하선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눈을 껌벅거렸다.
"나도, 아니… 저도 잘한 건 아니네요."
송연희가 작게 몸서리를 쳤다.
"...?"
권하선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송연희가 양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니. 그냥 원래 말투가 좋겠다고."
"...거 참, 까다롭네."
조금씩 녹아가는 분위기에 가영도 기 빨린 몸을 의자에 앉혔다.
송연희가 다시 한번 워치를 확인하고는,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생도대표에 출마할 생각이야."
"겨우 그런 얘기였으면…."
권하선이 김이 샌 반응을 보이자, 송연희가 재빨리 덧붙였다.
"혹시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지만, 내 일이기만 했으면 이런 식으로 불러 모으진 않았을 거야."
"결국은 도와달라는 거 아냐?"
"함께하자는 거야."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송연희는 다시금 피가 끓는 걸 느꼈지만, 꾹 참고 말을 이었다.
"생도대표가 되면, 부대표를 제외한 10명의 임원을 직접 선발할 수 있게 돼."
"그럼 임원 자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으면 되겠네. 난 그런 거 관심 없는데."
송연희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 하지만 관심을 가져야 해. 의무만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 전혀 감이 안 오거든."
"소수의 인원을 선발하는 프로그램에 생도회 임원들은 항상 포함돼. 해외 교환 프로그램이나, 각종 연수에도. 그뿐 아니라, 생도들과 조율이 필요한 학원 정책에도…."
"오케이! 알았어. 한마디로 해외여행 갈 때 꼭 데려간다는 거잖아."
권하선이 나름의 방식으로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송연희는 꼭 기도가 막힌 듯이 답답했다.
"생도회 혜택이 그런 거라면 동아리장들은 전부 다 생도대표 자릴 노리겠네요."
다행히 가영이 맥을 짚어줬다.
"맞아. 그 인사권은 결국 자기 사람들에게 쓰일 테니까."
"이건 다 같이 하는 게 맞아요, 누나."
"나, 나도 알아들었거든!"
"어쨌든… 지금 상태론 얘기를 더 진행하기 힘드니까, 오후에 시간 날 때 다시 모이는 걸로 하자."
모인 사람을 그냥 가랄 수 없어 우선 얘기를 꺼냈지만, 셋이나 빠진 상태로 회의를 진행할 순 없었다.
"네."
"알았어."
권하선과 가영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지잉. 지이잉.
송연희의 워치가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이제야 연락을 주시네."
발신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일어나던 두 사람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송연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쌓인 불만을 쏟아냈다.
"너 내가 톡방 좀 확인하라고 몇 번을─"
-잔소리는 나중에.
"야! 이게 잔소리야? 너 단체생활…."
-왜 불렀는지는 알겠는데….
"알긴 뭘 알아 니가!"
-생도대표 나가겠다, 도와줘라. 그거 아니었냐?
"어…? 그걸 어떻게."
송연희가 힐끔 차유라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이곳에 오면서 얘기한 것이었다.
"...맞긴 한데 도와달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뭐 어쨌든. 그런 일로 나 찾지 말라고.
"뭐...허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말을 툭툭 잘라먹으며 제 말만 하는 것도 열 받는데, 하는 말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니가 될 거야.
"...!"
-그렇게 안달복달 안 해도 너밖에 없다고.
"이, 이게 또 무슨 개수작을…. 누굴 바보로 아나! 너 지금 대충 둘러대고 빠져나가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솔직히 너도 신경 쓰는 상대가 이나은뿐이잖아. 근데 걔는 멤버들이 쒯이라 안 돼. 이나은이 당선되면 걔들이 다 임원 될 건데. 지금이야 선거개요까지 자세히 읽어 본 애들이 몇 안 되겠지만, 며칠 지나면 다 소문나지 않겠냐?
"...."
-같은 이유로 내가 앞에 나서봐야 도움이 안 될 거다. 요즘 나만큼 뒷말 많은 애도 없잖아.
"...뭐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선거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모르는 거야. 머리라도 같이 맞대 줄 순 있는 거잖아."
-그런 자세는 좋은데. 난 100프로 확신하는 데다가 시간 낭비하는 거 딱 질색이라서.
"확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그냥 귀찮아서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어쨌든 나는 얘기했다. 아, 그리고 선호랑 범균이도 찾지 마라. 오늘만.
"아니 걔들 또 왜!"
─띠리링.
끊어버렸다.
"개자식."
송연희는 욕설을 뱉어놓고 혼자 움찔했다.
좁은 실내라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들렸기 때문.
다들 숨을 죽이고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성준이지? 걔가 또 뭐라는데?"
권하선의 물음에 대꾸하려니… 머릿속이 잘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냥."
분명 이기적이고 반 조직적인 언행인데, 그 안에서 은근한 칭찬과 무한한 신뢰를 느꼈다고 할까.
'...뭐지?'
화는 나는데 또 한편으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뭐?"
"몰라… 자기 찾지 말라고. 잠깐만."
~지이잉.
액정에 뜬 것은 학원앱의 알림 표시였다.
(한성준 ← 거래 +100점)
'100? 100점? 이걸 왜….'
그리고 이어진 그의 메시지.
(한성준: 당선되면 돌려줘라.)
"하!"
자기 생각에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겠지.
역시 그놈은 재수가 없었다.
#49화, 나름의 주의
"완전 개판. 진짜 정신없었다."
"좀 병신 같긴 했지."
권하선의 말마따나 공략 실기는 난장판이었다.
거대등급의 블루홀 던전을 8개 파티가 연합해서 공략하는 임무였는데, 파티 별 목표가 뚜렷했던 생존과는 다르게 연합작전의 구성원이라는 개념이라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
문제는 '공대'의 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
때문에 서로 튀려는 파티들끼리 자꾸만 마찰이 빚어졌고, 결국 보스 레이드에서 절반 가까이 죽어 나갔다.
"잘한 건지 어쩐 건지도 감이 안 잡히네요."
"우린 그냥 무난했어. 죽은 사람도 없고."
추측이지만, 평가 포인트는 아마 각 파티가 공대 속에서 어떻게 어우러져 최적화된 역할을 찾아가느냐였던 것 같다.
"어쨌든 다들 수고했다. 맞다, 태용이 너 동아리 가입했냐?"
두 번의 파티 실기를 통해 이태용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인재라는 걸 알게 됐다.
"어? 나? 응, 어제."
"어제 가입했다고? 어디?"
하루만 더 빨리 물어볼걸.
이태용의 시선이 아이비를 향했다.
"비스트라는 동아린데…, 아이비 누나 덕분에 들어가게 됐어."
아... 젠장.
그러고 보니 아이비한테도 물어보질 않았다.
"너도 비스트고?"
아이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부터 딱 반수계가 주축인 거 같긴 하다만….
'아쉽네.'
입맛을 다시는데 이태용이 조금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가 비스트에 들어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왜. 거기가 그렇게 대단해?"
"대단하다기보다는… 다들 인원 제한 같은 것도 있고, 들어가고 싶다고 다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너는 모르겠지만, 반수계 애들한테는 비스트가 탑이거든. 아이비 누나가 거의 우상이나 마찬가지라서."
"워어. 그건 몰랐네…."
'아이비가 인싸였어?'
무뚝뚝한 그녀와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사실이다.
'하긴. 원내 반수계 중 유일하게 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가까이하고 싶기도 하겠다.
"너 정도면 뭐… 아이비 추천빨이 아니라도 들어갔을 거다."
라고 말은 해줬지만, 애들이 이태용을 꺼렸던 게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아이비가 내 말에 동의했다.
"맞다. 내가 스카우트했다."
"그래, 잘했어. 거기 동아리장도 사람 보는 눈은 있었나 보네."
"그, 동아리장이 아이비 누나인 건데…."
"뭐?"
"네?"
이태용의 말에 일행 전부가 아이비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 봐?"
"아니… 동아리장이 자기 멤버들 다 놔두고 우리 파티에 들어왔다는 거잖아요, 지금."
권하선의 설명에도 아이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왜 문제가 되지?"
"문제라는 게 아니라… 멤버들이 서운해할 것 같다구요."
파티는 최대 5인이니 짝이 안 맞아서 나뉠 순 있다지만, 동아리장이 자기 멤버들을 떼어 놓고 다니는 건 확실히 황당하긴 했다.
"나는 안 한다고 말했다. 부탁해서 들어줬을 뿐이다."
그 두 마디로 모든 상황이 그려졌다.
'자기들끼리 추종하고 들러붙은 거겠지.'
아이비는 끝내 거절하지 못한 거고.
이태용의 일을 보면, 그러면서도 결정권은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뭐 왕이네.'
꼴리는 대로 행동해도 뭐랄 사람이 없다.
추종자들은 간판이 되어준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을 터였다.
잘됐네.
이태용을 뺏기긴 했지만, 상대가 아이비라니 배가 좀 덜 아픈 느낌이었다.
불현듯 좋은 계획이 떠오르기도 했고.
"근데 언니는 왜 변신 안 해요? 실기시험 때는 좀 하면 좋은데."
권하선의 물음에 또 한 번 아이비에게 시선이 쏠렸다.
파티원들 입장에선 불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해내는 아이비지만, 반수계가 변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하선에게 공격적인 의도는 없어 보였고, 그녀의 진면목을 아는 나로서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
아이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조금 지내봤다고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대충 얘기해도 괜찮아. 찰떡같이 알아들을 테니까."
그녀는, 마땅한 표현을 찾는 중이었다.
마침내 아이비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나지만… 내가 아니다."
서툰 말에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
어쩌면 당연한 얘기.
저들은 아직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낯선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숙연해진 가운데, 아이비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유롭다."
"...?"
"내가 아니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나라는 걸 알면 의미가 없다. 똑같이 부끄러울 테니까."
그러면서 나를 힐끔 보는 아이비.
문득 원주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나한텐 이미 들켰으니까 계속했던 거고?'
그러니까 쟤는...
수인화(獸人化)를 무슨 변장쯤으로 생각하네.
"하하…. 생각지도 못한 이유네요."
황당한 건 다들 마찬가진 듯했다.
이태용만이 아직 공감 못 할 경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XR 장비실을 벗어나자, 복도 끝에서 강선호와 최범균, 박태광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케 잘 붙어있네.'
수업공간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장소였기에, 공략 실기 투입 시간이 다른 사람을 교대로 기다리며 나름 서로를 경호하는 것이다.
"야, 나 먼저 간다."
"어디?"
나는 대꾸 없이 손 인사를 날리고, 서문 방향에서 강선호들과 합류했다.
"괜찮게 했냐?"
"그럭저럭. 별일 없었지?"
박태광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어. 이게… 우리끼리 너무 오바하는 거 같기도 하고…."
"오바지. X나 개오바야. 아니, 나는 무슨 상관이냐고."
최범균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퉁거렸다.
강선호나 최범균은 사실 무관한 것이 맞긴 했다.
'박태광도 마찬가지지.'
저들은 그저 이용됐을 뿐, 굳이 멸구(滅口)할 만한 증인도 되지 못했다.
나조차도 황재천이 바로 또 무슨 짓을 벌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숨어있을 때야 마음껏 공작을 벌일 수 있었지만, 정체가 탄로 난 시점부턴, 그들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이제는 공작이 아니라 전면전이기 때문이다.
예상은 그렇더라도.
'목숨은 하나지.'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미안하지만 힘 좀 빌리자.
박태광 쫄병들은 제외하고도, 이렇게 넷이면 일전의 '쯔깡'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전력이었다.
"조금만 참아. 4시… 8분이니까 1시간도 안 남았다."
아버진 분명, '일과가 끝나기 전까지'라고 말했다.
"5시 땡─ 하면 뭐가 달라져?"
"땡─ 하고 바로 찢어지자는 건 아니고…, 일단 원장은 퇴근하잖아."
"...너 진짜 그딴 논리로 했던 소리냐?"
최범균이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랬겠냐? 그냥 좀 기다려봐.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없다.
'일과 이후가 더 위험하다는 게 논리적인 생각이지.'
애초에 황재천이 직접 손을 쓰진 않을 테니 그의 퇴근은 외려 책임회피의 명분이 될 뿐이다.
'어떻게든 해주시겠지.'
아마 두 세력 간에 어떤 협상이 이뤄지리라고 생각됐다.
나는 아버지를 믿고 다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일단 어디라도 가서 좀 앉자."
이중 각성의 메커니즘부터 DP 사용의 가성비까지, 실험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 동아리방으로 가던가.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
"너네도 동아리방 있었냐?"
"엊그제 장만했다."
박태광이 뿌듯한 미소를 보이곤 앞서 걸었다.
***
동아리 크리티컬의 전용실.
박태광이 벌컥 문을 열자, 안에 있던 크리티컬 멤버 다섯이 대화를 멈추고 돌아봤다.
"야, 니네 1시간만 다른 데 좀 가 있어라."
그의 한마디에 다섯 명의 생도가 군소리 없이 자리를 비켜줬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해."
"아아, 괜찮아."
이 새끼 허세가 좀 있네.
어쨌든 주인집 식구를 쫓아내고 죽치게 됐다.
"내가 라면 X라 잘 끓인다. 편하게들 있어."
불과 반나절 전에는 죽일 놈 보듯 했던 녀석이 제법 살갑게 굴었다.
사령고에 지배당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비약빨 어쩌고 했던 것은 원래 그의 생각이었을 터였다.
'그것도 다 기억은 날 텐데.'
뭐…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도.
"막내야, 라면 몇 개 남아있냐."
"어… 열다섯 개요."
"오! 딱이네. 다 가져와."
"네."
이놈들은 무슨 가스버너에 육수 낼 때나 쓰는 대형 들통까지 갖춰 뒀다.
최범균은 3인용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고, 강선호는 라면 봉지 까는 것을 도왔다.
나는 의자를 구석에 갖다 놓고 앉아서, 상태창을 띄웠다.
이중 각성의 방법은 두 가지.
상태창에서 원하는 '재능'을 추가하는 것, 그리고 〈이중 각성〉 '특성'을 추가하는 것이다.
즉, 각성은 재능과 특성을 각각 1개씩 습득하는 것이므로 특성에 〈이중 각성〉을 추가하면 재능만 하나 더 습득하고, 반대로 재능을 추가하면 〈이중 각성〉 특성이 자동으로 부여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재능을 원하는 것으로 하고 싶지만....
[재능 '용의 심장'을 추가하시겠습니까? -소모 DP 42,600]
'이럴 줄 알았다.'
[재능 '심공의 방랑자'를 추가하시겠습니까? -소모 DP 31,200]
쓸만한 것들은 죄다 이 모양이다.
하급 재능 몇 가지를 입력해 보니 3천에서 5천 대도 있긴 했다.
게임에서조차 잡스럽다고 생각했던 능력들….
'그럴 바에야 안 하고 말지.'
나는 착잡함을 느끼며 특성탭에 이중 각성을 입력했다.
[특성 '이중 각성'을 추가하시겠습니까? -획득 DP 11,500]
이중 각성은 당연히 페널티 특성으로 분류됐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주네.'
문제는 이쪽을 선택하면 재능이 완전히 랜덤으로 습득된다는 거다.
하급이 뜨더라도 DP를 챙기면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페널티를 감당할 가치가 있느냐는 거지.'
〈과활성마력종〉이 2천몇백의 페널티 보상을 줬었는데, 1만 단위의 페널티는 얼마나 강력할지 상상도 안 됐다.
'그래도 굳이 이중 각성을 해야겠다면 선택지는 이거뿐인가?'
최악의 경우라도 저 1만 DP를 페널티 수정에 때려 박으면 될 것도 같았다.
"야, 한성준!"
"어? 아… 생각 좀 하느라고. 왜?"
"와 씨! 뭔 생각하는데 눈깔을 그렇게 뜨고 있냐. 주술 걸린 줄 알고 개 쫄았네."
박태광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태창에 초점을 맞추는 게 쟤들 시선에선 조금 이상해 보인 모양.
그러고 보니 전부가 무기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이 미친놈들. 그렇다고 칼을 잡아?"
"트라우마야, 트라우마. 라면 다 됐다고."
"...."
과연 박태광의 장담대로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들통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잘 먹었다."
하나둘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
띠리리~ 띠리링~♪
스피커에서 단음의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과시간 종료.
일행의 시선이 스피커로 모였다.
-아아, 원장이다. 오늘도 수고들 많았다.
'안 빼먹네.'
황재천은 취임 후 매일 일과시간이 끝나면 저런 인사와 함께 학원 이슈나 알림을 직접 전하고 있었다.
-최근, 일부 길드와 PHC가 생도들에게 접촉하는 것을 알고 있다. 진로선택은 각자의 자유지만, 졸업 전까지 너희들의 소속은 어디까지나 청송학원이다. 어떤 계약상의 의무나 책임도 학원 규칙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걸 반드시 명심하기 바란다. 또한....
"벌써 길드 스카우트 받은 애가 있다고?"
박태광이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그저 감탄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분위기가 재밌게 돌아갔다.
강선호와 최범균이 어색하게 웃는 것이 이유였다.
"뭐야, 니들도 제의받았어?"
그들은 아마 송연희에게서 DH가디언즈의 입단제의를 받았을 터였다.
현시점의 접촉이라면 대부분 관계된 이의 보고에 기반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뭐… 받긴 했는데 아직 결정은 못 했어. 어딘지는 말 못 해. 미안."
강선호의 대답이다.
"와아… 수석 입학생이라 그렇다 쳐도 X라 빠르네. 사실 나는…."
박태광이 말을 하다말고 워치를 들여다봤다.
그리곤 놀란 듯 벙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아니, 우리 아빠가 지금 와있다는데."
"...."
"...."
이 새끼 설마, 오전에 있었던 일을 집에 얘기했나?
그럼 문제가 복잡해지는데....
"그 눈빛들 뭐냐? 아니야, 나 말 안 했어!"
최범균이 비웃었다.
"야이 씨. 이건 타이밍이 누가 봐도…."
"진짜 말 안 했다고 X발놈들아. 나는 귀국한 줄도 몰랐는데."
태광 길드는 이제 들어온 모양이네.
물론 아직 국내 길드가 그렇게 유명하진 않을 때고, 강선호나 최범균도 박태광의 배경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때,
~지이잉.
내게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차유라: 부탁한 부동산 관련해서 법무팀 직원이 찾아왔다네요. 지금 접견동으로 나와요.)
...어차피 나도 나가야 했네.
"그래서, 진짜로 말은 안 했다는 거지?"
"안 했다니까. 같이 가보면 될 거 아냐."
정말 억울한 얼굴이다.
"알았어. 믿는데, 일단은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 가자."
'어떨지 궁금하긴 하네.'
'그' 박대근의 실물을 보게 되다니.
#50화, 아버지가 선택한 것
정훈이 종료된 뒤로 일과시간을 마치면 외출도 가능했다.
다만 복귀 시간은 9시로 정해져 있어 멀리 다녀오긴 애매했다.
손님이 찾아와도 마찬가지.
주말을 제외하면 학부형이라 해도 내부출입이 통제되기에, 정문 밖에는 따로 방문객들을 위한 접견동이 마련되어 있었다.
접견동 입구.
문득 드는 생각에 차유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호랑 범균이도 같이 있어. 미팅룸 잡아야 할 듯)
차유라와 누굴 만나는 모습을 보이면 귀찮은 질문이 뒤따를 게 당연했다.
두 걸음을 채 내딛기 전에 답이 왔다.
(차유라: 207호)
벌써 잡아놨었네.
접견장 내부는 한산했다.
내일 저녁부터 주말이라 굳이 찾아올 타이밍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어우 씨ㅂ…."
최범균의 필터링 없는 감탄처럼 거대한 존재감이 넓은 접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들!"
"아니, 한국 들어오면 온다고 미리 좀 얘기하시지."
박태광과 달리 작고 탄탄한 체형에,
전혀 닮지 않은 준수한 외모.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다만 그래픽으론 알 수 없던 아우라를 느꼈다.
...미쳤네.
그는 넘치는 마력을 그대로 사방에 흘려대고 있었다.
누굴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야전 생활로 전혀 갈무리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덕분에 최정상과의 격차를 제대로 실감했다.
"야, 쟤네 아빠 뭐 하시는 분 같냐? 아까 귀국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용병인 거 같긴 한데."
"아니면 뭐겠냐."
애초에 저런 마력 괴물한테 다른 직업이 있을 리 없지 않나.
"뭔데 라이코보다 세 보이냐."
라이코는 '힘숨'해서 티가 안 나는 거다.
라이코의 진면목을 체감할 일이 없긴 했지만, 생도들은 하나같이 그를 (아는 사람 중) 최강자로 인식했다.
나 역시도 처음 라이코의 교관 프로필을 열어보곤 꽤 충격을 받았는데,
그가 국제표준등급 S급에, 전년도 세계 랭킹에서 36위인가에 랭크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함성아가 280위 정도고 박대근도 아마 300위권 전후였을 거다.
어쨌든 랭킹은 실적이 반영되는 것이라 순위의 높음이 꼭 실력의 우위를 뜻하진 않는다.
어쨌든 박대근은 국내 순수 전투계열 중에선 1석을 차지하는 인물.
"근데 저 새낀 어째 자기 아버지 보다 늙어 보이냐."
지금의 박대근이 마흔 중반쯤이니 또래 아버지보다 젊은 편이긴 했다.
그래도.
"동안이시긴 하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간단한 해후를 마친 박태광이 이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인사할 타이밍이라고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태광이 친구들이라고?"
박대근이 우측부터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강선호라고 합니다."
"읍! ...최범균입니다."
앞서 둘의 반응만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할만했다.
"안녕하…세요. 한성준입니다."
박대근의 손을 잡는 순간, 그의 마력이 장심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 참….'
꼰대들은 왜 이렇게 시험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막아볼까 하다가 그대로 들여보냈다.
격의 차이가 심한 경우, 억지로 입구를 틀어막는 것보다, 마음껏 휘젓지 못하게 하는 편이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박대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을 잘 사귀었구나."
"어? 뭐… 그런가?"
박태광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 시간 전에 처음 말을 섞은 놈들을 '잘 사귄' 친구들이라 했으니.
[인물 '박대근'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52]
[박대근에게 인상적인 기억 -DP 획득 11]
얻을 건 얻었고….
"어서들 앉아라. 넉넉하게 사 왔으니까 같이들 나눠 먹어."
박대근이 테이블 위의 치킨 상자를 가리키며 상석에 앉았다.
"아아, 방금 라면 먹고 왔는데. 한 마리만 먹고 나머지는 애들 갖다줘야겠다."
박태광이 치킨 상자를 풀어헤쳤고, 강선호와 최범균은 예의상 한 조각씩 집어 들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나는 그쯤에서 일어났다.
"...."
그러나 말없이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악수를 나눈 뒤로 박대근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던 탓이다.
"저 잠깐 실례 좀. 급하게 통화할 곳이 생겨서요."
아예 간다고는 못하고 대충 둘러댔다.
"어, 그래그래. 편하게 해, 편하게. 근데 자네. 한...."
"성준입니다."
"어, 성준이. 마법곈가?"
"네… 맞는데요."
말이 길어질 거 같아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니, 원래 이쪽이 진실이기도 했고.
"갑자기 이런 걸 물어서 미안한데, 그, 혹시… 어디 아픈 데 없나?"
"예…? 없는데요. 왜 그러시는지."
"아니, 아프다는 게, 뭐랄까...오래된 지병 같은 걸 말하는 건데. 하, 이것도 이상하네."
박대근이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빤 뭐 그런 걸 물어. 쟤 쌩쌩해."
"가만있어봐."
그가 끼어드는 박태광을 제지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러니까… 마력적인 면에서 어떤 이상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증상 말이네."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글쎄요…. 딱히 불편한 건 없습니다."
"...그렇군. 참, 급하다고 했는데. 일단 다녀와서 얘기하지."
본인이 불편한 게 없다는 데도, 그는 수긍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네… 그럼."
돌아서 접견실을 나왔지만, 뭔가 볼일을 다 못 본 듯이 찝찝했다.
아마도 그가 느낀 건 〈과활성마력종〉이었으리라.
현실적으로 마력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으니까.
범인(凡人)은 아마 느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나, 그쯤은 박대근이라는 이름 석 자로 납득이 됐다.
근데 왜?
그만한 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아차렸을 터....
'가만.'
그래서였나?
그가 아는 누군가 같은 병을 앓고 있고, 그래서 알아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해결할 방도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맞는 거 같네.'
과활성마력종은 이 세계에서도 아주 희귀한 병이었고,
아무리 박대근이라도 비슷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면 바로 알아채진 못했을 테니까.
'일단 얘기나 들어봐야지.'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에 득실을 따질 건 아니지만, 태광에 빚 하나쯤 지워놓는 것도 나쁠 건 없으리라.
나는 조금 개운해진 기분으로 207호의 문을 열었다.
***
"법무팀 김우영입니다."
남자가 악수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따로 직급은 없고 JSO 로고와 소속만 적혀 있었다.
"예, 한성준입니다. 저는 명함이 없네요."
"하하, 제가 가져왔습니다. 차 이사님이 같이 부탁하셔서."
"...?"
뭔 소린가 했더니 그가 브리프케이스에서 명함 한 갑을 꺼내 밀었다.
투명 케이스 안에 마찬가지로 JSO 로고가 박힌 명함의 전면이 비췄다.
"이사...한성준?"
차유라가 말했다.
"소속감을 좀 느껴 보란 의미에서."
"난 왜 구속감 같지…."
"그렇게 생각하면 더 좋고요."
번듯한 신분이 하나쯤 있는 건 좋지만, 드러낼 일이 아니라 딱히 사용할 기회는 없을 듯했다.
"아무튼, 고맙네…."
그녀는 미세하게 끄덕이고 김우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작하죠."
김우영은 500평 전후의 토지매물을 5개 정도 열거했다.
주변 전경과 현재 사용상태 등을 볼 수 있는 사진도 함께 곁들였다.
"평당 86만에서 100만 원 아래 매물들인데 가격 따라 접근성이나 환경의 차이가 좀 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단 가격이 있네요. 난 그냥 펜스치고 작은 이동식 주택 하나 갖다 놓을 수 있으면 논밭도 상관없는데."
"말씀하신 용도는 농지로도 충분한데 1,000㎥를 넘어가면 농지취득자격이 필요합니다. 실제 사용도 농업 관련으로 하셔야 하고...."
김우영이 이어서 각 매물의 특장점들을 설명했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지도앱에 매물의 주소를 입력해 대략적인 거리를 확인했다.
"여기가 좋겠네요."
내가 선택한 건 570여 평에 5억 남짓한 매물이었다.
'가까운 게 최고지.'
차로 5분 거리에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 이거요? 직접 한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아뇨. 굳이 보러 갈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다녀올 시간까진 없었다.
애초에 거지 같은 땅을 리스트에 넣어놓진 않았으리라.
"그냥 이걸로 계약해 주세요. 그리고 펜스 공사를 바로 했으면 좋겠는데."
대답은 차유라가 대신했다.
"그건 김 변호사님이 해주실 일이 아니고, 내가 따로 섭외해 놨어요."
"아… 그럼, 최대한 빨리 작업할 수 있게 준비 좀 해줘."
차유라가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펜을 들었다.
"작업이야 인부를 많이 쓰면 하루 만에도 끝나요. 원하는 높이나 펜스 재질, 모르겠으면 어떤 목적인지라도 말해줘요."
"그냥 외부인이 무단으로 출입할 수 없게 막는 용도지. 그으… 테니스장 같은데 쓰는 정도면 되겠네. 거기에 밖에서 들여다볼 수 없게 방수천을 두르고."
동구는 명령에 따르는 녀석이라 동구를 기준으로 하는 내구성까진 필요 없었다.
"...대체 거기서 뭘 하려는 거예요?"
내 편이라곤 해도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불법을 말할 순 없었다.
"어… 나중에 직접 와서 보던지."
"일단 이렇게 해서 견적 내볼게요."
"오케이. 다 됐나?"
안타깝게도 김우영이 또 다른 서류 뭉텅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주식양도 관련 서류들인데...."
그나마 이쪽은 깊이 신경 쓸 부분이 없었다.
저쪽 입장에선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일지만, 나한텐 그냥 공짜 주식을 받는 일이었으니까.
사인하란 곳에 사인하고 설명은 대충 끄덕이며 들어줬다.
그때, 김우영 뒤편의 창밖에서 검은색 제너시스 한 대가 도로를 따라 지나갔다.
'이제 시작이네.'
학원 정문 쪽에서 나올 검은 차량은 황재천뿐이었다.
***
박대근의 차 안.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단둘이 자리를 만들었다.
예상대로 그는 과활성마력종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친우이자, 태광의 부길드장이기도 한 동료의 자식이 그 병을 앓고 있다는 사연.
"저도 그 병에 걸렸던 게 맞습니다."
나는 빙빙 돌리지 않고 사실을 인정했다.
마이너스 옵션이라 DP가 거의 들지도 않을뿐더러, 고통을 겪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반지에 삽입된 1% '회복 불가' 옵션과 〈심단격리장애〉의 효과가 아니었으면, 나조차도 벌써 자다가 죽어버렸을지 모르는 무서운 페널티 특성.
'아니, 고통 때문에 아예 잠을 자지도 못했겠지.'
박대근은 나에게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마력의 방출이 없이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서 긴가민가했다고 말했다.
"역시…. 내 그 기묘한 느낌을 잊을 리 없네. 그런데 정말 놀랍군.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었는데…. 그걸 혼자서 극복하다니."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었는데 운이 좋았죠. 십수 년간 연금술만 판 연금술사도 딱 원하는 효과를 얻는 건 힘든 일이잖아요."
아이템 제작 능력을 공개할 순 없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연금이었다.
'영구'효과를 가지는 비약을 제작해 주면 되는 일.
과정과 결과는 같다.
"그냥 운이 아니야. 내가 자네한테 느낀 또 한 가지는 치우치지 않은 마력의 밸런스네. 필시 속성에 대한 이해도 뛰어날 테지. 내가 연금이나 마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자네의 그런 재능이 큰 바탕이 됐다고 생각하네."
이 양반…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참 많은 걸 간파했다.
"네. 감사한 말씀입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제가 학원에 있는 몸이라 재료를 수급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그건 당연히 내가 구해다 줘야지. 뭐 그런 걸 걱정하나."
정해진 재료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연금술이라고 알린 이상 재료 정도는 요구해야 했다.
재료목록은 내가 필요한 것들로 구성해볼 생각이었다.
"네. 그럼 그건 따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참, 이 일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태광이한테도요."
"어어, 그렇게 하지. 정말 고맙네."
"누구라도 했을 일인데요."
박대근이 부담스러울 만큼 대견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네 혹시 우리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나?"
내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그때, 여러 대의 트럭 엔진음이 박대근의 말소리를 묻으며 시선을 끌었다.
"…!"
여섯 대의 군용트럭이 주도를 따라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뭔 씨. 갑자기 땅개 새끼들이…."
~지이잉.
그리고 울리는 진동음.
'뭐지?'
나는 이 전화가 갑자기 나타난 저 군용트럭과 관계가 있다고 직감했다.
"저 전화 좀 받겠습니다."
"어어, 오케이."
박대근이 나보다 먼저 차 문을 열고 자리를 비켜줬다.
"여보세요?"
-공하균입니다. 일전에 경찰서에서 만났던.
당연히 알고 있다.
"네. 근데 무슨...."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학원 주차장인데…."
-정차! '치이익─!' 4, 5, 6차량 그대로 진입한다.
나는 콕팟 너머의 목소리를 통해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수송 따위의 평시 임무가 아니라는 것.
'아니 양반이 또 뭔 짓을.'
아버지가 선택한 건 협상이 아니었다.
#51화, 고생하셨소
공하균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동행을 요구했다.
"무슨 일입니까?"
"보안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저랑."
"당신 뭐야! 이유도 말 안 하고 그렇게 사람을 막 데려가도 되는 거야?!"
지켜보던 박대근 입장에선 저렇게 오해할 수도 있었다.
'하긴, 저 양반이 있는 데서 물을 것도 아니었지.'
나는 흥분한 그를 막아서서 진정시켰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저씨.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아는 분이에요."
그러나 목소리 키운 김에 할 말은 다 해야겠던지 기어이 으름장을 놓았다.
"나 태광의 박대근이요. 만약 이놈한테 뭔 짓 했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그날로 진돗개 하나 떨어지는 거라고 알아두쇼."
국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단다.
공하균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학원 관리자 요청에 의한 일입니다. 인터넷상에 보안 정보의 유출 사고가 있어 생도들에게 간단한 교육과 설문을 진행하려는 것입니다."
너무 방금 만들어 낸 얘기 같지 않나?
"아… 그, 그렇습니까?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하하. 저기 접견동에 제 자식놈이 있는데 걔들은...."
이걸 믿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이후 방송통제에 따라 들여보내 주십시오."
"이 친구도 그럼…?"
박대근이 은근슬쩍 붙잡으려기에 내가 직접 나섰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이분하고 할 얘기도 있고요."
"아, 그럴래?"
"제가 아까 부탁드린 거, 꼭 좀 지켜주시고요."
"그래. 알았다."
박대근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몇 번 흔들다 접견동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공하균이 입을 열었다.
"임무와 별개로 상황종료까지 한성준 씨를 경호하라는 군단장님의 명령입니다. 말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경호 때문이란 건 나를 찾은 시점에 벌써 알 수 있었던 거고.
내가 궁금한 건 그 '임무'라는 것이 뭐냐는 것이었다.
군의 움직임에는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했고, 그건 박대근에게 한 것처럼 둘러대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성품상 더 캐물은들 말을 해줄 거 같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검은 세단.
뒷좌석에 앉은 황재천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처음 계획부터 실행까지 모두 그가 주도하고 감수했다.
대체 어디서 눈치를 챈 걸까.
그 바닥에선 최고라고 정평이 난 청부집단.
맡은 의뢰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런 놈들이 두 번을 실패했다는 것도 웃기군.'
물론 첫 의뢰의 목적은 이뤘고, 그 덕에 자신이 청송의 키를 잡았다.
하지만, 한상철의 아들놈은 용케도 두 번의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그에 대해 조사된 바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
황재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날 사용된 히트맨 12인 중 자신과 접촉한 사람은 오늘 본 '니엔젠'뿐.
설령 그 범죄자 놈들이 죽기 전 생포됐다 하더라도, 모르는 것을 발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득 니엔젠이 배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오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후우."
답답함을 느낀 황재천이 차창을 조금 내렸다.
열린 창틈으로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몰아쳤다.
"오 실장."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즉각 반응했다.
"예, 이사님."
"왜 그렇게 밟아대나."
오 실장이 바로 속도를 줄였다.
그는 전방에 고개를 꾸벅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멋대로 이사님 안색을 읽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태청저로 가실 때는 보통 중한 일이고, 또 이사님 표정으로 보아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청저(太淸邸)'는 이금환 회장의 자택을 뜻했다.
황재천이 픽 웃으며 말했다.
"과속할 필요는 없네. 주인보다 먼저 도착할 순 없지 않나."
"예."
황재천은 잠시 그런 오 실장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래전의 자신이 떠오른 탓이다.
25년 전.
지금은 기록조차 남지 않았지만, 그도 운전기사로 이 회장을 처음 만났다.
지금의 오 실장처럼….
자신도 그분의 복심을 헤아리고, 암중의 일들을 묵묵히 처리하며 결국 이 자리에 올라왔다.
'이제껏 이런 큰 실수는 한 번도 없었건만. 하기야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지….'
맡은 일이 무거울수록, 실책의 크기도 함께 커지는 법이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황재천은 무의식적으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이내 다른 전화임을 깨닫고, 워치를 확인했다.
"…?"
청송의 번호로 걸려온 전화.
"네."
-원장님. 유 교관입니다.
"아,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지금 학원으로 갑자기 군대가 들이닥쳤는데, 지휘관이 하는 말이 테러가 예고됐답니다. 그러니 경계체제에 필요한 운영통제권을 자기들이 가져가겠다고요.
"테러…예고라고요?"
-예. 원장님께는 바로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거야 뭐 어쩌겠습니까. 협조해 주세요."
-네. 며칠이나 됐다고 또 이 난린지….
"일단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은 황재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얘기….
청송이 중요시설인 건 맞지만, 테러란 단어가 이렇게 자주 튀어나올 나라가 아니다.
이전의 사건 역시 자신이 꾸민 일 아니던가.
'한상철…. 무슨 수작을 벌이는 거냐.'
그때,
"저, 저!"
오 실장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무슨…."
몸을 기울여 정면을 바라본 황재천의 망막에,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는 SUV 한대가 크게 맺혔다.
오 실장이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끼이익!
차량이 우로 회전하며 미끄러졌다.
순간 황재천의 피부가 황동 빛으로 번쩍였다.
콰─앙!
SUV가 그대로 세단의 측면을 덮쳤다.
˙
˙
˙
쥐 죽은 듯 조용한 도로 위.
앞이 우그러진 SUV에서 문 네 개가 동시에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다섯의 복면인이 내려섰다.
그들은 반파된 세단을 에워싼 채 말없이 기다렸다.
잠시 후.
콰직. 콰각.
세단의 움푹 꺼진 면이 안에서부터 부풀었다.
쾅!
문 한 짝이 튕기듯이 떨어져 나갔다.
"아주 전통적인 방식을 택하셨구만."
사고 차량에서 빠져나온 황재천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을 제외한 신체 모든 부위가 노을 속 햇빛을 벌겋게 반사 시켰다.
마치 구리로 빚은 로봇 같은 모습.
"...이 황재천이를 뭐로 보고."
금(金) 속성 변이계.
그도 엄연히 상급의 초인이었다.
황재천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가장 큰 체구의 복면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쇄도했다.
황재천은 방어도 무시한 채 바로 응수했다.
탱탱탱! 퍽! 퍼벅! 탱!
아이 머리통만 한 주먹이 황재천의 몸을 여러 번 두들겼다.
그러나 울림조차 없는 묵직한 금속음을 남길 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
그런데도 당황한 것은 황재천 쪽이었다.
탱탱! 쾅! 쾅! 탱!
분명 살과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건만....
타격이 없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뭐 저런 괴물 같은…!'
또한, 공방이 거듭될수록 자신이 밀려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I can hear the sound of a heart-beat before it goes out…♪"
한 복면인은 그 와중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여성의 목소리.
황재천에겐 그 소리가 꼭 사신의 귓속말처럼 들렸다.
"...빌어먹을."
황재천의 얼굴색이 원래의 피부 빛으로 점멸하듯 깜빡였다.
변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던 것.
퍼걱!
"크헉!"
결국, 괴물의 무지막지한 주먹을 맨몸에 허용하고 말았다.
허리가 꺾인 황재천의 오른쪽 어깨로 거한의 다섯 손가락이 우악스럽게 파고들었다.
빠드득!
"끄아악."
거한은 황재천의 견갑골과 쇄골을 한 손에 움켜잡고 아래로 짓눌렀다.
털썩.
황재천은 그 힘을 떨쳐내지 못해 무릎을 꿇었다.
불과 30여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황재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볼 전력이 아니었다.
저들은 최소 A1등급의 초인들.
넷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튀어나왔지?'
황재천은, 그들이 자기가 불러들인 재앙이란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접점'을 없애려 노력한 결과였다.
황재천이 곰 같은 사내를 올려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내 목숨인가?"
대답은 없었다.
"...말수들이 없군. 얼른 가져가던지, 다른 게 있으면 말을 하던지."
기척은 뒤쪽에서 들렸다.
긴 악기 가방 같은 것을 멘 복면인이 구형 폴더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연결이 된 건지 그가 전화를 들고 다가왔다.
"받아라."
어깨뼈를 잡힌 황재천이 오른팔을 쓸 수 없었기에, 복면인은 그의 왼쪽 귀에 전화기를 갖다 댔다.
-나 한상철이요.
황재천이 제 손으로 전화기를 붙잡았다.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했소."
-역시 나를 알고 있군. 얘기가 쉬워지겠소.
"글쎄 쉬울지 어떨지... 협조하면 살려주시겠소?"
-당신은 오늘 죽을 거요.
황재천이 낮게 웃었다.
"쉽지 않으시겠군."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나를 잘 아는 것 같소.
"무슨 말이오?"
-자식도 있는 양반이, 남의 자식을 죽이려 해놓고 느물대니 하는 말이요.
"...."
황재천은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만약 오늘, 내 아들이 죽었다고 해도 나는 당신 자식을 해치지 않았을 거요. 죄는 당신이 저지른 거니까. 복수도 당신에게서 끝났을 테지. 그걸 알고 그러나 했는데... 아닌가 보군.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라, 나는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란 소리요. 연좌제는 내 정의가 아니지만, 내 정의를 위해서 당신 자식을 찢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하니 경고하건대, 더 이상 내 시간을 뺏지 마시오.
"부, 부디 가족들은…."
-그런 말은 할 필요도 없는 거요. 선택하시오. 이 자리에서 끝낼지, 아니면 계속 나를 자극할 건지.
"...."
늘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하고, 또 이루게 만들어 준 은인.
'그분이라면… 벌써 대책을 세우셨을 테지.'
합리화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도 자식들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이윽고 황재천이 입을 열었다.
"...이금환."
-고생하셨소.
그것은 한을 남긴 삶에 대한 위로였다.
그의 말이 무섭도록 사무쳤다.
미련이 몰려왔다.
"잠깐! 잠시만 내 말을...."
황재천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통화는 그대로 종료됐다.
"…!"
"...."
찰나의 적막.
복면인들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발악하듯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I think it's time to say goodbye~♬"
또다시 들리는 노랫소리.
"컥!"
마력이 역류했다.
황급히 귀를 틀어막으려 했지만, 오른팔은 들 수도 없는 상황.
쇄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황재천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빠각!
결국, 뼈가 부러졌다.
"으아아─ 그르륵."
고통에 절규하던 그의 목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
해가 완전히 진 늦은 저녁.
창밖에 펼쳐진 어이없는 '쑈(show)'를 감상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감시등과 순찰조 병사들의 손전등 불빛.
거의 낮이나 다름없는 시야가 확보됐다.
'보니까 일반 병사들이고만….'
비 초인 병사들이 이곳에서 대체 누굴 지켜내겠는가.
저건 그냥 요식행위에 불과하단 얘기였다.
그래도 경호 쪽은 믿을만했다.
공하균은 교무실을 통제실 삼아 눌러앉았지만, 대신 임태성 상사와 그의 부하들이 7층 복도를 감시하고 있었다.
"뭘 어쩌겠다고 말 좀 해주면 덧나나?"
아직 아버지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지잉. 지징.
워치를 열어보니 이놈들이 멋대로 단톡방에 초대했다.
(박태광: 야 한성준)
(박태광: 저 군인들 아까 낮에 있던 일이랑 상관있냐? 저기 너 아는 사람 있다며)
(최범균: 이거 저 새끼가 어디다 찌른 거였음?)
'쯧. 괜히 내가 해결하겠다는 말을 해서….'
물론 그때는, 멋대로 일을 키우는 걸 막으려면 다른 방도가 없긴 했다.
녀석들은 스스로 관련자라고 생각하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물어댈 터.
슬슬 발을 빼야 할 거 같았다.
(원장이 꾸미던 짓이 드러난 거 같음. 나도 그게 뭔지는 모름)
(우리 일과 연관성도 모름. 그냥 어떻게 풀리는지 지켜보면 될 듯)
대충 그렇게 말해주고 단톡 알림을 꺼버렸다.
"후우."
복잡하게 처리할 게 없는 건데.
나를 노릴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이 드러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정체만 명확하면, 자연히 억지력이 생기는 거지.'
당장 이곳엔 이나은도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답답한 기다림을 잊고자 노트북으로 라이브뉴스를 틀었을 때였다.
─속봅니다. 청송학원장 황재천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잘못들은 줄 알았다.
─오늘 저녁 5시 30분경,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동 인근 379번 도로에서....
'참… 중간이 없으시네.'
#52화, 이중 각성
하긴, 어느 부모가 자식을 해치려던 놈을 그냥 둘까.
'그렇다고 다 죽여버리는 것도 좀 아니지만….'
이로써 또 한 번 흐름이 달라졌다.
나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됐다.
내 일에 계속 아버지를 끌어들였다간 전혀 다른 세상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게임 속에선 황재천이 계속 존재했었기에, 나는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게 맞는 거긴 하지.'
어떤 합의가 있었더라도 2년 넘게 마주쳐야 하는 상황은 신경을 좀 먹는 일이었으리라.
건물이 소란스러워졌다.
문을 여닫는 소리,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벽면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마침 뉴스를 보던 생도가 얼마나 있었겠냐만,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일 터였다.
하지만 창밖, 군인들의 동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전화였다.
"네….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겠네요."
-아니, 그 반대가 될 게다.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저는 사람이 죽은 걸 얘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안 시끄러워요. 학원장이 취임 3일 만에 죽었는데."
-나도 같은 얘길 하는 게다. 지금의 청송은 너무 물러. 초인은 항시 전쟁 중인데 말이다.
"예...?"
-전쟁 중에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런 여론과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청송 내부에서 할 일이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저 학원 분위기가 어수선하겠다는 얘길 한 거뿐인데.'
이 양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서, 전사 양성소답게 청송의 체질을 개선할 계획이다.
"혹시 그게 병사들을 보낸 거랑 관련 있어요?"
-그래. 오늘 일을 계기로 내가 청송에 대한 전권을 가져오게 될 거다.
"아니, 이게 무슨... 나와바리도 아니고…. 갖고 싶다고 마음대로 갖는 거예요?"
-청송은 끊임없이 테러에 시달리고 있다.
"네? 뭔 테러요… 그건 황재천이...."
-황재천이는 테러희생자로 결론이 날 거야.
"아…."
-테러의 위협에서, 청송을 지켜줄 수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없죠."
병사들을 보고도 느꼈듯, 초인을 지킬 수 있는 공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송은 계륵이야. 연달아 사고가 있었으니 이제 어느 부처든 맡기가 부담스러울 게다.
"...그렇겠네요."
-뜻대로 되게 만드는 것. 네가 어서 깨우쳐야 하는 게 그런 것들이다.
전 그런 쪽으로 머리 쓰고 싶지가 않아서….
그렇게 대꾸는 못 했다.
"…네."
-그 아이와 관계는 어떠냐?
"누구요."
순간 송연희가 떠올랐다.
-왜 전에 사진으로 본, 신성이씨 아이 말이다.
"아아. 뭐 그냥 그렇죠. 맞다. 앞으로 어쩌실 거예요? 신성."
-1년 안에 끌어내릴 생각이다.
"신성을요?"
-신성은 없애지 못한다. 없애서도 안 되고. 그러니 그 아이를 굳이 적대하진 말 거라.
세대교체를 시켜버리겠단 얘기.
'그것도 엄청난 변화겠네.'
이 회장은 1챕터 종료 후 엔딩까지 왕과 같은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 이나은의 역할이 빨리 커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 얘기 다 했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끊으마.
"저, 내일 저녁에 집에 가요. 주말 간에 동구… 아니 그, 늑대 보러 갈 시간 좀 비워주세요."
"알았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이나은은 동아리 멤버들에게 집합하란 메시지를 보내고 기숙사를 나섰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금 그녀에겐 선거 준비가 가장 중요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이나은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후우."
그녀는 밤새 잠을 설쳤다.
어젯밤, 할아버지와의 통화 때문이다.
황 원장이 자신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심복이었다는 사실도,
그가 신성을 적대시하는 비밀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도 그리 놀랍진 않았다.
이 회장이 모든 걸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신성의 일원인 그녀 역시 그런 암중의 일에 어느 정도 내성이 쌓여 있었다.
문제는 일전의 테러 사건.
그 일이 할아버지의 지시로 벌어졌다는 사실에 벌컥 화가 났다.
미리 얘기하지 않아서,
자신의 '것'이 피해를 입었기에.
이어서 한성준의 이름이 나왔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머리가 멍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전원 A1급으로 이루어진 청부집단.
S급으로 추정되는 우두머리.
...한성준은 그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두 번의 습격.
그것은 운이 아니었다.
'보통 재능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바탕이 좋은 걸 떠나,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이야기는 그가 언제부턴지 모르게 벌써 배후를 알고 있었다는 것.
할아버지가 이제라도 사정을 알린 것은 경계하란 의미였지만,
그런 상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나은은 기본적으로 누군가 '감히' 자신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 농락당한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겠어.'
주제도 모르던 그 건방진 언행들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는 그러면서도 적개심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
…음흉한 자식.
"굿모닝."
이나은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어느덧 다다른 본관 동쪽 입구에서, '그놈'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너…."
그는 기자재실을 다녀오는지 시험관, 비커 따위가 가득 든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니,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나은은 인상을 확 구기며 쏘아붙였다.
"뭔데 친한 척?"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인사 좀 해달라며."
"해달라긴 누가 해달랬다고!"
"됐다. 그럼 다시 안 하는 걸로."
한성준은 제 말만 하고 홱 지나쳤다.
"저게…!"
열이 뻗쳐서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뒤통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때, 그 얄미운 뒤통수가 돌아갔다.
"맞다…. 너 헛돈 썼더라?"
헛돈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또 무슨 헛소릴….
"노트북. 어쨌든 잘 쓰고 있다고."
이나은은 냅다 마법을 날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
방에 돌아와 연금술 도구상자를 내려놨다.
턱! 달그락.
"좋네."
인터넷으로 주문할까 고민하다가 혹시나 해서 기자재실에 문의하니, 대여도 가능하다더라.
이게 그냥 유리 비커처럼 보여도, 마법처리가 된 특수 유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금은 '가열'이란 간단한 공정조차 마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일반 유리는 내구성이 약할뿐더러 전도율도 낮기 때문이다.
'경호 인력은 빠졌나 보네.'
복도에 임 상사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학원 안엔 여전히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가짜' 상황이니만큼 끝낼 사람은 아버지뿐일 터.
어제 하는 말로 봐선 이대로 쭉 갈 것도 같았다.
'어우. 신경 꺼야지.'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하면 되는 거다.
연금술 도구들을 꺼내어 늘어놓고, 테이블 위에 둔 약초 뭉치를 펼쳤다.
전에 원주서 캐온 걸 잘 말려 신문지로 싸둔 것들이다.
약초는 세두의 수염, 청마향, 월공초, 린드부름그라스로 모두 4종이었다.
린드부름그라스는 부정효과고, 세두의 수염은 여기에 쓰긴 아까우니까....
'결국, 청마향이랑 월공초네.'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조합이지만, 레시피(recipe)대로 하는 거라 별문제가 없을 듯했다.
나는 이중 각성을 시도하기에 앞서, 하급 포션을 제작할 생각이었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페널티의 여파가 클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긍정효과를 가진 약초 2종과 마력이 깃든 물, 그리고 OO의 혈액을 넣어 끓이면 하급 회복포션이 만들어진다.
마력이 깃든 물은 뭐 거창한 게 아니다.
정석은 마석을 물에 하루 동안 담가두는 거지만....
'워터볼.'
마력으로 만들면 마력이 깃든 물이다.
손바닥 위에 생겨난 작은 물방울이 꾸물꾸물 덩어리로 불어났다.
적당한 크기에서 멈춰 비커 안에 밀어 넣었다.
찰랑.
비커의 물을 다시 입구가 좁은 플라스크에 따라 넣은 뒤, 그 안에 마른 월공초와 청마향을 욱여넣었다.
제일 중요한 재료가 남았다.
OO의 혈액.
'...되긴 하겠지.'
당연히 괴수의 혈액을 말하는 거지만, 괴수 피나 초인 피나 아마 기작(機作)은 같을 거다.
"윽."
나는 단검으로 손바닥을 긋고, 시험관을 들어 흐르는 핏물을 받아냈다.
"...X발."
가벼운 상처다 보니 너무 빨리 아물었다.
시험관 하나를 채우는데 세 번이나 다시 긋기를 반복해야 했다.
마침내 모든 재료가 취합된 플라스크 바닥을 손으로 받치고 불꽃을 피워 올렸다.
"제발… 한방에."
나는 지금 연금기술을 습득하지 않은 상태라 실패확률이 높다.
시도 한 번에 시험관 하나 분량의 피가 들어가니, 성공을 염원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했다.
약물이 부글부글 끓고부터, 물먹은 약초가 조금씩 녹아들더니 속이 비치던 붉은빛이 진한 핏빛으로 뒤바뀌었다.
[연금술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레시피 볼륨 증가 – DP 획득 100]
"됐…! 뭐지?"
일단 성공인 건 같은데....
회복 포션에 이름이 붙어있었다.
───────────
['한성준'의 하급 회복 포션]
*사용자 맞춤형 회복 포션입니다.
*(+) 섭취 시 30초간 생명력 30% 회복.
*(+) 명명된 인물 사용 시 20% 추가 회복.
───────────
"오…. 이런 식이구나."
말이 되는 조합부터 조금씩 변화를 주는 쪽으로 레시피를 발견해나가면 될 것 같았다.
뭔가 느낌이 좋네.
중급 효과와 다름없는 포션도 준비됐겠다, 나는 여세를 몰아 바로 이중 각성을 때려 넣었다.
[추가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획득 DP 11,500]
"예스예스."
[각성하였습니다.]
[재능 '아흐리만의 심안'을 습득합니다.]
[특성 '이중 각성'의 페널티로 DP 11,500이 보상 지급됩니다.]
왠지 모를 고양감이 전신을 휘돌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
당장 페널티의 체감효과가 없다는 안도와 함께, 싸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 생긴 재능의 이름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재능을 내가 전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것일수록 많이 회자 되는 법.
'듣보잡'은 말 그대로 잡것일 확률이 컸다.
"하아…."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상세버튼을 눌렀다.
───────────
◈ 재능
〈마력 해방〉 ▷상세
〈아흐리만의 심안〉 ▽상세
[Lv: 1] *근접무기에 특화된 전투 재능. 마력 총량에 비례하여 기본 민첩이 최대 3만큼 증가한다. (현재 증가: 2)
-「심:약점간파」
-방어 무시 확률 5%.
-치명타 확률 30% 증가.
───────────
"씨ㅂ… 뭔데? 음… 오…."
종합적으로 보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니, 곱씹을수록 좋은 면들이 보였다.
일단 근접무기용 재능이라는 것.
정확히는 어쌔신 계열이다.
염동계나 기공계가 걸렸다면 최상이겠지만, 마법 재능이 중복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다.
민첩이 2나 올라서 7.3을 찍었다.
단검 효과가 있으니 무려 8.3인 것이다.
모든 능력치 상승이 아닌 건 아쉽지만, 최대증가 '3'짜리는 상급이 맞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방어 무시 확률 5%.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탄탄한 방어라도 20번 공격하면 1번은 그냥 뚫어버린다는 뜻이다.
적은 수치 같지만, 매 공격마다 적용되는 확률이라 실 효과는 훨씬 크다.
'…그냥 약점간파는 알겠는데.'
단어의 의미야 명확하지만, 실제 어떤 식으로 적용될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특성 항목으로 눈을 돌렸다.
"어우 씨."
이렇게 보니까 특성 리스트가 가관이었다.
───────────
◈ 특성
〈싸움꾼〉 ▷상세
〈근시안〉 ▷상세
〈신경과민〉 ▷상세
〈과활성마력종〉 ▷상세
〈심단격리장애〉 ▷상세
〈창조적 시선〉 ▷상세
〈이중 각성〉 ▽상세
[Lv: -] *축복을 가장한 저주. 마력 폭주의 위험을 안고 있다.
-마력 총량 20% 증가.
-마력 사용 시 폭주확률 0.001%.
───────────
'아… 어쩐지.'
마력이 늘어난 거 같더라니.
아까 느낀 고양감의 정체가 그것인 듯했다.
민첩이 2씩이나 오른 것도, 저 옵션 덕분일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다행이네.
느낀 대로 체감 영향이 있는 페널티는 아니었다.
'마력 폭주가 확률 옵션이었구나.'
10만분의 1이란 건 생각보다 높은 확률이다.
대충 1,000분의 1짜리 뽑기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매일 수십 번 뽑을 기회가 있다면 당첨 확률이 어떻겠는가.
초인에게 마력 사용은 거의 숨 쉬듯 하는 것이니, 무조건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해당 옵션을 삭제하려고 했더니 받은 DP가 그대로 들어갔다.
'하긴, 페널티는 이게 다니까... 취소.'
확률을 더 낮추는 것도 비슷할 것 같기에, 단어를 살짝 바꿔봤다.
마력 '고갈' 시 폭주확률 0.001%.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소모 DP 250]
"예스예스!"
#53화, 새로운 능력
현상원리 수업 10분 전.
"수업하는 거 맞냐?"
"전 타임 때 준비반 애들도 수업했다더라."
"원장이 죽었는데 뭐가 이렇게 조용하냐."
강의실에 모인 생도들도 학원의 대처가 황당한 듯했다.
'어쩌겠냐. 앞으로도 수없이 죽어 나갈 텐데.'
내가 알기로 1회 졸업생은 150명이 채 안 됐다.
당장 내년에 들어올 신입생들은 또 몇이나 살아남을지 모른다.
죽음을 당연하게 보는 시각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말처럼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죽을 때마다 일정이 어그러지면 학원이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새낀 나보다 더한 새끼네."
"뭔 소리야?"
최범균이었다.
"자꾸 혼자 쏘다니니까 하는 말 아니냐. 톡방은 확인도 안 하고."
강선호가 반대쪽 의자를 빼고 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얼굴이었다.
"아니지?"
강선호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넌 또 왜 이래. 뭐가 아니야?"
"그냥 개소리라니까?"
최범균이 답답하다는 듯이 강선호를 타박했다.
"뭔 얘긴지를 알아야 개 소린지 아닌지 판별을 해줄 거 아냐."
"아니, 박태광 그 새끼가 어젯밤에 톡방에다 병신같은 소설을 써놨는데, 강선호가 아까 그걸 읽더니 자기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는 거야."
"단톡?"
워치를 열어 확인했다.
'뭔 남자 새끼들이 수다를....'
'300+'의 메시지 표시가 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지점부터 스크롤 내려보니,
내 이름에 @를 붙여 불러댄 것만 수십 번.
황재천의 사망 소식을 주워들은 시간쯤부턴 그와 관련된 온갖 뇌피셜들을 써 재껴놨다.
'...미친놈.'
박태광의 소설을 요약하면, 황재천을 살해한 세력과 내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개소리는 아니었다.
증거랄 수도 없는 오직 추측만으로 구성된 빈약한 논리였는데, 그걸 '당사자'가 있는 방에 풀어놨다는 게 어이없었다.
'이걸 웃을 수도 없고….'
하지만 정작 그 글을 쓴 박태광도, 말미에 아침 메뉴를 고민하는 등 진심으로 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너는 이게 진짜 같아서 묻는 거냐?"
"진짜 같다기보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거지. 엄밀히 보면 어제 그 일로 실제적인 위험을 겪은 건 너뿐이고, 우리 중 누구보다 범인을 확신하는 사람도 너였어."
"...."
"그런데 가장 침착한 사람도 너였지. 해결책을 알아볼 테니 기다리라면서. 니가 워낙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까 조금 동화됐던 것도 같은데, 다시 생각하면 그 일이 그렇게 우리끼리 입 다물고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닌 거 같거든. 어쨌든 네 말대로 기다렸는데 원… 아니, 범인이... 그렇게 됐으니까."
뭐 결국, 박태광이 하는 말과 비슷했다.
이게 다 우연이라기엔 조금 쎄한 기분이라는 그런 얘기다.
문제는 딱히 해줄 얘기가 없다는 거였다.
"여기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하냐?"
최범균이 낄낄댔다.
"이거 그거라니까. 맞다는 증거를 가져와! 아니라는 증거를 가져와! 하, 진짜 이 음모론충들."
"니가 아니라고 하면 믿지. 아무 말 안 하길래 혹시나 해본 거고…."
사람 불편하게 하네.
"...내가 무슨, 그런 힘이 있겠냐."
갈수록 거짓말이 필수인 삶이 되는 것 같다.
"야, 너네 계속 붙어 다닌다?"
"안녕하세요."
권하선과 가영이 강의실로 들어섰다.
우연이겠지만, 송연희와 차유라도 함께였다.
"비켜. 내 자리야."
"걍 아무 데나 앉아. 자리가 어딨냐?"
"꺼지라고. 교수님이 나한테 질문하면 니가 책임질 거야?"
그걸 왜 남이 책임지냐….
권하선은 기어이 최범균을 밀어내고 내 옆에 앉았다.
"...미친놈인가?"
중얼거리며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는 최범균을 보다가 문득 새로 얻은 스킬이 생각났다.
최범균의 재능 자체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종류라, 시스템이 말하는 약점이 궁금하긴 했다.
나는 앞에 앉는 그를 상대로 「심:약점간파」를 사용했다.
심상에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다.
'뭐지…?'
마치 거대한 책장을 넘기듯 수많은 이미지가 빠르게 지나쳤다.
그 안에 교복을 입은 최범균이 보였다.
지금보다 작고 어린 모습.
특정된 이미지가 영상처럼 재생됐다.
그는 동급생으로부터 갈취를 당하고 있었다.
'아니 설마.'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이상한 이미지들을 날려버린 뒤, 다시 강선호에게 걸어봤다.
"...."
마찬가지로 이미지가 펼쳐졌다.
작고 허름한 집 안.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여자아이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초췌한 중년여성의 모습.
'이런 씨….'
다시!
이번엔 권하선....
컴퓨터 앞에 앉은 권하선의 뒷모습.
모니터 화면에는 '모쏠녀 특.txt'이라는 제목의 글이 띄워져 있다.
권하선은 댓글에… 쌍욕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 이건 아니지."
내가 아는 그 약점이 아니었다.
"뭐라고?"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정숙해진 강의실 중앙에서 교수가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다음 주 국무회의 안건입니다."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결제 파일을 건넸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60대 노인.
그가 21대 대통령 홍성문이다.
파일을 펼친 홍성문이 내용을 훑다가 입을 열었다.
"아, 대장 심사…. 편제 개편 문제는 합의됐나?"
"예. 순서가 바뀐 면이 좀 있습니다만… 사실상 뭐 더하고 뺄 것 없이 초상작전권만 분리하는 개념이지 않습니까."
"중앙작전사령관 입장에선 그게 그렇지가 않을 텐데?"
"원래 권정규 대장이 온건하기로 유명합니다. 초인부대 창설은 군 전체로 보면 증강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더랍니다. 한 중장이 권 대장보다 한 기수 선배기도 하고요."
홍성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 간 갈등은 없고?"
"초인부대야 명분이 뚜렷한 데다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일인데요. 그보다 초대부랑 행안부가 초상경비대 관할 문제를 두고 아직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엽인협회를 초대부 산하에 두고 초상경비대는 경찰이 가져가는 게 맞지. 치안 유지 조직을 둘로 나누는 건 또 다른 혼선을 가져올 거네."
"예. 그건 명백한데 엽인협회는 초상대응 라이센스를 관리하고, 또 일선에서 직접 초인들을 상대하는 기관이다 보니 또 그만큼 독립적이고 신속한 집행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필요하지. 그래도 체계상 그게 맞네. 필수 인력 파견 형식으로 가야지. 초대부가 지들 초상인력 늘려 달라고 떼쓰는 건데… 지금 구상만큼도 초상인력이 수급될지 장담할 수 없어."
"그렇죠. 사실 저도 회의적입니다.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해도 잘 먹고, 잘 살 사람들인데.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초인이 얼마나 될지…."
"유 장관한테 얘기해. 고집 그만 피우고 현실 좀 보라고."
"네. 그리고 바로 국정원장 들어올 겁니다."
"박 원장? 같이 들어오지 왜."
비서실이나 국정원이나 다 대통령 직속 기관이라, 어지간하면 내외할 사안이 없었다.
"그렇게 말했는데, 먼저 들어가 보라던데요. 따로 할 얘기가 있으신 거겠죠."
"알았네."
비서실장이 문을 나서고 곧 국정원장이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홍성문보다도 대여섯은 많아 보이는 노인이 가볍게 묵례를 하고 들어섰다.
고집스러운 입매며 절도 있는 몸짓이 깐깐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안 실장이 먼저 와계셨다고 하던데…."
비서실장은 열 살이나 아래에 오랜 정치동반자라 편하게 대했지만, 박양춘 국정원장은 그보다 연상인데다가 임명 전까지 별 접점이 없던 사람이었다.
"예. 공식적인 얘기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박 원장에게 소파 자리를 권한 뒤, 홍성문도 자리를 옮겼다.
"6군단장 한상철에 대한 얘깁니다. 초상작전사령관 내정자인."
"네, 압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박 원장은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제가 아직 군에 있을 때, 군내 사조직 문제가 터진 적이 있었습니다."
"아아. 기억납니다. 용… 뭐라고 했더라, 용성회!"
"맞습니다. 그들이 친목 모임이라고 주장하고 내사 결과로도 큰 사익 추구나 인사개입 정황이 드러나지 않아 흐지부지 마무리가 됐었지요."
"한 중장이 그 조직과 관련 있다는 말입니까?"
박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조직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수사에 착수할 만큼 뚜렷한 정보도 아닙니다. 제가 먼저 용성회 사태를 언급한 건, 사조직 문제는 절대로 실체를 밝혀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조직화를 금한다고 하지만 커뮤니티까지 차단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허어…, 그럼 그 말씀을 꼭 지금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대체자도 없고, 증거도 없는 시점에 그게 뭐 중요한 얘기냐는 뜻이다.
사조직의 위험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공정한 인사를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거야 언제라도 드러날 때 책임을 묻고 징계하면 되는 일이었다.
"현시점에 초상작전사령관의 적임자는 한 중장뿐이지요. 그를 배제하라는 의미에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대한 지원을 해주자는 뜻이지요. 이를테면 특별 인사권 같은 것 말입니다."
서론과는 전혀 다른 얘기에 홍성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별안간 눈을 홉떴다.
"…혹시 미끼를 놓고 그를 사찰이라도 하자는 말씀입니까?"
"예. 저는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홍성문은 박 원장의 단호한 대답에 기가 막힌 듯이 입을 벌렸다.
박 원장이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대통령님. 세상이 변했어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 집약적인 무력이 늘 가까이에 있습니다. 군은 지난 17년간 초상자원을 관리하며 그런 초인들을 통제할 만한 힘을 모았지요."
박 원장이 짐짓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참모총장일 땐 그것이 우리의 국방력이라며 자부심을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밖에서 보니 알겠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민주 정부가 유지되는 게 기적일지 모른다는 것을요."
"…!"
"그리고 한상철은, 절대로 쓸데없이 친목이나 다질 사람이 아닙니다."
***
오전 오후 수업을 모두 마친 뒤,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주말 간 할 일들을 정리했다.
그대로 하지도 못할 스케줄을 굳이 시간 단위로 적어보았는데, 뭐라도 정신을 팔아보겠다는 이유였다.
오전에 있던 일로 머릿속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새로 얻은 재능.
그러니까… 〈아흐리만의 심안〉은, 정보수집 계통의 NPC가 가졌을 법한 재능이었다.
'그것도 뒷세계에 있는….'
남의 정신적인 약점을 들여다본다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나, 가장 신경 쓰는 것들일 터.
짧은 시간 아주 단편적인 것을 보았지만, 녀석들이 그 일로 느꼈을 아픔, 근심, 생각들이 그대로 전해졌었다.
'남의 약점을 알아서 뭐하겠나.'
결국, 모든 활용법이 정신적 가학이나 협박으로 귀결됐다.
...꼭 악당이나 쓸 거 같은 능력.
'아버지가 알면 좋아하겠네.'
정치적인 용도로는 쓰임이 무궁무진할 테니까.
당연히 말할 생각은 없다.
'뭐 그렇다고 나쁘게만 볼 건 아니지….'
유용성만 따지자면 분명 훌륭한 스킬이다.
적을 상대로야 거리낄 게 없을 테고 그렇게 얻은 정보는 위기를 벗어날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 정신세계는 한번 들여다보고 싶네.'
약점이 있긴 할까?
─띠리리~ 띠리링~♪
일과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고작 3일이었지만, 황재천의 목소리가 이어지지 않는 것이 잠깐 어색했다.
아니,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가 건물 전체에서 느껴졌다.
"...애들 몰리기 전에 빨리 나가자."
나는 서둘러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주는 괴수를 잡으러 갈 것도 아니어서 딱히 챙길 게 없었다.
1층으로 내려와 사감실 앞의 외출방명록을 작성한 뒤 가뿐하게 로비를 나섰다.
오늘 날짜로는 내가 처음이다.
기숙사에서 제법 멀어졌을 때에야 로비가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1층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비였다.
그녀가 잘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냥 쉬기로 했나?'
지난 주말에도 아이비와 함께 사냥을 다녀왔었다.
당일치기였고 별 소득은 없었지만.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못가서 발이 멈췄다.
나는 돌아서 아이비에게 나와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의아한 표정을 보이던 그녀가 이내 창가에서 사라진다. 아이비는 곧 기숙사 입구로 달려 나왔다.
"왜. 이번 주는 안 간다면서."
오늘 오전에 아이비가 이번 주도 갈 거냐고 묻는 말에 못 간다고 대답했었다.
더는 집에 가는 걸 미룰 수 없었으니까.
"어. 그거 때문이 아니고…."
"무슨 할 말이 있다?"
"아니, 혼자라도 갈 줄 알았더니 그냥 있길래. 그냥 쉴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하뻡이 얼마 안 남았다."
"하뻡? 아…."
합법.
아마 초상활동법 개정안 시행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주말 동안 다른 스케줄 없다는 거지?"
"그렇다."
"그럼 너, 홈스테이 안 할래?"
#54화, 사이
갑자기 아이비를 데려가게 된 건 별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친해지긴 해야겠는데 딱히 방법은 모르겠고, 그래도 자꾸 곁에 두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하는 생각 정도.
남들 다 집에 갈 준비로 바쁜 와중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다.
"음악이라도 틀어 줄까?"
"나 때문이면 괜찮다."
"오케이. 잠 오면 자도 된다."
원주에서부터 여러 번 느꼈지만, 그녀와 동행은 조금도 피로감을 주지 않았다.
나는 '말'이라는 것에 꽤 에너지가 소모되는 타입인데, 아이비는 내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잘 없었기 때문.
그런 그녀의 성격이 벌써 익숙한 덕분에 나는 괜한 대화거리를 만든다든가 하는 수고 없이 편안하게 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막이 길어지니 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편함 때문에 그냥 방치하는 건가 싶은.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서울시를 거의 관통했을 즈음이었다.
"안 지루해?"
물으면서 힐끔 보니 말똥한 눈으로 전방 유리만 바라보고 있다.
"지루하다."
"어?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난 니가 조용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지."
아이비가 나를 돌아봤다.
"엔진 소리가 너무 작다. 속도도 너무 느리고."
"뭐? 아니 그거야 규정 속도가…."
그러고 보니 아이비가 차를 좀 거칠게 몰았던 게 기억났다.
차도 페라리였지 아마?
"...내 차가 후져서 그래."
"그래도 조금 더 밟았으면 좋겠다."
아니라곤 안 하네.
나는 오기로 액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됐냐?"
아이비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놈의 자식.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 어머! 소, 손님이 있었네."
사나운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던 신선애 여사가 아이비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오….
'한바탕 잔소리를 각오했었는데.'
이건 뜻하지 않은 효과였다.
"다녀왔습니다."
"누구… 아니다, 내 정신 좀 봐. 어서 들어와요."
어머니는 내 팔뚝을 찰싹 때리며 소곤댔다.
'손님이 오면 온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지!'
"친군데 뭐 어때요. 용호랑 올 때도 언제 말했었나요."
아악.
어머니는 내 옆구릴 꼬집고는 아이비를 향해 돌아섰다.
"저녁 같이 들어요. 누가 오는 줄 알았으면 맛있는 것 좀 준비했을 텐데."
도착할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 집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아이비가 전투화를 벗고 고개를 들자, 어머니가 또 한 번 어깨를 들썩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비가 검은 머리라 현관 밖에선 외국인인 줄 모르셨던 눈치였다.
"아 그, 우리말은 할 줄 알까…?"
"잘은 못 한다."
아이비가 직접 대답했다.
"...."
나도 좀 당황했다.
설마하니 존댓말 시늉도 못 할 줄이야.
그래도 어머니는 당황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셨다.
"아하하…. 그래요. 우리 말이 어렵지. 손 씻게 니가 화장실 좀 안내해줘. 거의 다 됐으니까 바로 주방으로 오고."
"네."
어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가시며 2층에 대고 소리쳤다.
"성윤아, 오빠왔다아! 아빠도 내려오시라고 해."
쿵쾅쿵쾅.
얼마 안 있어 한성윤이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왔고, 처음 어머니가 그랬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 가족이 모인 저녁 식탁.
따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한 건 아니지만, 간만에 아들이 온다고 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상차림이 훌륭했다.
식사가 시작되고도 세 쌍의 시선이 줄곧 아이비를 향했다.
"음식이 입에 맞니?"
어머니의 물음에 아이비가 입 안의 것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맛이 좋다."
"다행이네. 많이 먹어."
아이비는 고개를 끄덕하고 다시 갈비찜에 손을 뻗었다.
아버지가 그런 그녀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냥 동기 사이는 아닌 거지?"
한성윤이 실실 웃으며 이상한 소릴 하길래 바로 못을 박았다.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나랑 같은 파티… 그러니까 조원 같은 거야."
"흐음~ 그렇게 만났구나아."
하지만 멋대로 상상하는 모양.
어머니 표정도 꼭 한성윤과 판 박은 듯 똑같았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식사를 마친 뒤 한성윤이 아이비를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나도 그 틈에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방을 나왔을 때, 손님방에서 성윤과 아이비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둘이 놔둬도 되겠네.'
성윤이 워낙 낯을 안 가리는(뻔뻔할 정도로) 녀석이라 처음 보는 아이비에게도 곧잘 말을 걸었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 서재 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어 문을 살짝 열어보니 서재와 연결된 테라스에서 담배를 태우고 계셨다.
그대로 조금 기다리자, 아버지가 테라스를 나오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무슨 바람이냐?"
"뭐가요?"
"집에 여자를 데려온 건 처음 아니냐."
"여자가 아니라 동기라니까요."
"그래 뭐든."
"그냥 오다가 보이길래 데려왔어요. 남들 다 집에 가는데 혼자 멀뚱멀뚱 앉아 있어서."
아버지는 입매로만 웃으셨다.
"그… 송 회장 딸은 어떻더냐?"
"...사람이요? 그냥 성실해요. 아...."
몇 번이나 물어보려다 까먹은 얘기가 생각났다.
"송 회장님하고 무슨 얘기를 하셨던 거예요? 걔가 자기네 집에서 말도 안 되는 얘길 들었다는 거 같던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버지는 그냥 이런 상황이 재밌는 듯, 은은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너 입학하고 얼마 있다가 송 회장이랑 다시 같이 밥을 먹게 됐다. 어쩌다 청송 얘기가 나와서 자연스럽게 니들 얘기로 넘어갔는데, 그날 송 회장이 너를 사위 삼아도 되겠냐고 물었었지."
"갑자기…요?"
"남의 자식 추켜세우다 보면 으레 하는 말이니까. 한데 난 그 집 딸이 어떤지 잘 모르거든. 그 양반은 너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물어보니 청송 교수 중 하나가 대화 그룹 고문 출신이라더라."
"누군데요?"
"장… 누구랬는데 글쎄. 어쨌든 그 양반이 너를 좋게 본 거겠지. 또 송 회장이 원래 마법 쪽에 관심이 많아."
'장운석 교수네.'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마법 이론 담당 교수뿐이었다.
그는 병기지급신청서 문제로 교무실에 불려갔을 때, 나를 설득하려던 양반이기도 했다.
뭐 결론은 아버지가 푸쉬한 건 아니란 거네.
"그게 전부면 다행이고요."
"네 얘길 들어보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군."
"그러거나 말거나요."
돌아서는데 아버지가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다른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냐?"
"맞다, 테이밍이요. 준비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길래."
"네가 말한 건 다 준비되어 있으니, 내일 아침이라도 가면 된다."
"검각사슴을 잡았어요?"
"원래 있었다. 이 나라에서 발견된 괴수종은 다 두엇씩은 가지고 있지. 그것보다… 미리 일러두지만, 만약 네 말을 증명하지 못했을 땐 당연히 거래도 깨진다는 걸 명심해라."
동구를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으르는 듯한 내용과는 달리 아버지의 표정, 그리고 어조는 훈시에 가까웠다.
인제 보니....
"처음부터 제 말을 안 믿으셨던 거네요."
"관심은 간다. 믿고도 싶고. 다만, 기대를 하지 않는 게지."
...어차피 말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럼 내일 아침으로 알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