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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

기숙사에 돌아왔을 땐 10시가 다 되어있었다.

10분 초과 시마다 벌점 10점이라 무려 50점을 때려 맞았다. 상점에서의 가치로 계산하면 500만 원이 털린 셈.

하지만 거기에 쓸 정신은 없었다.

'유신이라고 했지?'

나는 훈련복을 벗는 것도 잊은 채, 색인 기능에 유신을 검색했다.

[접근할 수 없는 정보입니다. 다른 대상을 입력하세요.]

"뭐?"

뭘 검색하든 먼저 소모 DP가 표시되던 것과 다르게 '유신'의 정보는 아예 접근을 거부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세계관 안에 개발자가 접근 못 할 정보란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시스템에 가까운 가영의 정보도 거부된 적 없는 색인 기능이었다.

'더 상위의 권한이 있을지도.'

애초에 나는 권한을 부여받은 '가짜'일 뿐이었으니까.

히든 퀘스트는 진짜 개발자가 만든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그놈과 십수 년을 함께했던 동료가 이제 우리 쪽에 있었다.

'그나저나 업글용도가 아니어도 DP는 항상 넉넉해야 하겠네.'

내가 한 거라곤 고작 숟가락 얹기뿐이지만,

주술 도구를 이용한 술법은 손쉽게 파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도구를 통한 술법 적용은 나도 가능하단 얘기겠지.

물론 사람 머리에 물리적 피해 없이 못을 박는 건 주술 재능 없인 불가능하겠지만….

그때 주자헌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 이 아저씨가…. 미행 붙은 지가 꽤 됐었네."

아무튼.

이제 처지가 바뀌었네요. 아버지.

#68화, 생도회

본관 동쪽 계단.

생도회실로 향하는 이나은의 발걸음이 무겁다.

'꼬여도 더럽게 꼬였어. 진짜….'

살면서 이렇게 존재감 없던 적이 있었나 싶다.

이건 뭐 말만 부대표지 매번 회의 때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만 차지하다가 나오기 일쑤였다.

지금의 생도회는 그냥 적지나 다름없었으니까.

더럽고 치사하다고 사퇴할 수도 없었다.

직접 경험한 생도회의 권한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막강했기 때문이다.

3층 계단을 지날 때쯤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영아. 근데 한성준 요즘 우리랑 거리 두는 거 같지 않냐?"

권하선의 목소리.

이나은은 가장 신경 쓰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뭔 그런 생각을 해요. 형이 왜."

"아니 그렇잖아. 요새 톡도 자주 씹고 우리랑 잘 어울리지도 않고. 영웅된 뒤로 확실히 변했는데?"

"오오. 안티가 이렇게 생기는 거구나. 아! 아파요."

"너 내가 비꼬지 말랬지. 이것도 처음엔 안 그랬는데 말투가 점점 한성준 따라가."

"비꼬는 게 아니라 요즘 형 욕하는 사람을 많이 봐서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넌 뭐 잘 알고?"

"같은 층이라 오가다 가끔 마주치잖아요. 근데 딱 봐도 엄청 바빠 보였어요. 생각도 많고. 글고, 영웅이 되고부터가 아니라 꽤 됐어요."

"지가 바쁠 게 뭐 있어. 스케줄 다 똑같은데."

"청송 일만 일인가요. 길드랑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집안…."

"길드? 길드 들어갔대?"

"그거야 모르죠.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하긴…. 벌써 계약했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나도 제의받지 않았어요?"

"받긴 했는데 다 거절했어. 난 졸업하고 장교 할 거라서."

"군인이요? 그거 완전, 어울리네요."

"칭찬이냐?"

"네."

'길드라면… 역시 DH인가?'

이나은도 한때 한성준의 우선 영입을 두고 고민했던 만큼 송연희가 그를 놓쳤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젠 영웅이란 타이틀까지 얻었으니.

원수임을 알게 된 이상 아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적과 적이 손을 잡는 상황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근데 대체 계약조건이 어땠길래….'

영입 전이야 길드도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지만,

도장을 찍었으면 길드의 체계에 따르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요즘 송연희와 한성준을 보면 상하가 바뀐 느낌이었다.

이나은이 저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5층 복도에 이르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가영이 이나은을 발견했다.

"어? 안녕하세요."

한 줌의 가식 없는 순수한 미소 앞에,

이나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안녕."

능력이 '급(級)'이고 집안이 '격(格)'이라 생각하는 이나은에게 가영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지금 생도회에서 이나은을 사람 취급하는 임원은 가영뿐이었다.

***

한편 생도회실.

늘 그렇듯 송연희와 차유라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송연희는 마동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벌써 2주가 넘게 지났는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마실장: 준비 때문에 이래저래 바빴습니다. 오는 토요일에 접촉할 생각이고요.)

(마실장: 제대로 하려는 거니까 너무 닦달하지 마세요.)

(그러다 닭 쫓던 개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다른 길드가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건데 선 접촉, 후 조율이 맞지 않아요?)

(마실장: 인사차 연락해서 한 번 더 슬쩍 떠봤는데 DH뿐 아니라 그 어떤 길드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더군요. 솔직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영웅한테 길드가 굳이 필요할까 싶거든요.)

'대체 영입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마실장: 암튼 금방 어디 들어갈 사람은 아니니 괜히 심기 거스르지 않도록 이사님이나 잘하고 계십시오.)

"하! 말하는 것 좀 봐. 기가 막혀서…."

그때 최범균과 강선호가 회의실로 들어섰다.

"내가 X발… 너무 오래 살았다."

"야! 너 내가 회의실에서 욕하지 말랬지!"

송연희는 끓던 화를 그대로 최범균에게 쏟아냈다.

최범균은 입구에 얼어붙었고, 강선호는 슬그머니 자리를 찾아갔다.

"아, 안에서 한 거 아니잖아. 나 지금 막 들어왔어…."

"비켜봐 좀. 넌 또 뭘 잘못해서 혼나고 있냐?"

변명 중인 최범균을 밀치며 홍소희가 들어섰다.

"에이 씨…."

앞으로 휘청한 최범균이 또 욕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홍소희와 송연희가 동시에 그를 돌아봤기 때문.

"아, 아니. 안 했음."

홍소희는 최범균의 또 다른 상위포식자다.

최범균이 대체로 여자를 어려워하지만, 짙은 스모키 화장에 훈련복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친 그녀는 유독 대하기 어려운 포스가 있었다.

"그건 뭐냐? 니가 받았…을 리는 없고."

홍소희가 최범균이 손에 든 것을 가리켰다.

곱게 포장된 선물상자였다.

"어…. 내가 이거 땜에 빡쳐서…. 기숙사 로비에서 웬 여자애가 전해주라더라."

"전해줘?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한성준이지."

"아항. 왕자님은 인정이지."

홍소희 말에 송연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성준을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반쯤 비꼬는 말임은 알고 있지만… 참 듣기 거북스럽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생도회 상황을 풍자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당장 나부터도 한성준 눈치를 보는 처지니까….'

슬슬 또 배알이 꼬이려는데,

권하선과 가영, 이나은이 연달아 들어섰다.

송연희의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내려갔다.

요즘 생도회 회의가 유일한 낙일 만큼, 이나은의 입지는 열악했다.

'내가 이거 때문에 참지.'

재벌 3, 4세들의 모임에서 송연희는 지금의 이나은과 같은 취급을 수년간 받아왔다.

언제나 모임의 리더 격을 맡았던 게 바로 이나은이었기 때문이다.

"거기 자리 있어요."

"아…. 그랬지."

송연희가 방금 대화의 현장을 돌아보니 서범진이 권하선 옆에 앉으려다 머쓱하게 손을 뗐다.

'쟤도 참 딱하네.'

권하선과 한 칸 벌려 의자를 꺼내려던 서범진은 먼저 붙잡은 손이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비였다.

"아, 앉으세요."

서범진은 자리를 양보하고 끝자리로 걸어갔다.

"어머. 왕자님 왔어?"

홍소희의 말에 모두가 입구를 돌아봤다.

송연희는 쓰게 웃었다.

박태광과 들어서는 한성준의 모습이 정말 기사의 호위를 받는 왕자님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돌아가는 '꼴'이 그렇다는 얘기다.

"뭐야. 지금 내 인사 씹은 거야?"

"내가 그 소리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냐?"

"왜~ 나쁜 별명도 아닌데."

"알아 처 들을 때까진 말 안 섞는 거로."

한성준은 당연한 듯 권하선이 잡아둔 자리에 앉았다.

박태광은 서범진과 함께 말석에 앉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어째선지 박태광은 한성준이 보스인 양 따랐다.

또 어째선지 아이비는 강아지처럼 한성준을 따랐다.

'추천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서범진은 권하선을 발정 난 개처럼 따랐다.

권하선과 가영은 한성준과 남매처럼 지내고,

차유라는 대체로 한성준과 의견이 비슷하다.

이 생도회에서, 한성준의 발언은 7표의 무게가 있는 것이다.

'나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우습게도, 그가 곧 생도회였다.

송연희는 길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다 모였으니 시작할게요."

***

"연금과제는 알파, 초상법규는 식스센스, 초상사회사는 마나프리. 이번 회차 참여 의사 밝힌 동아리는 이게 전부죠?"

"네."

"그게 다네요."

"그럼…. 여기 계신 동아리장님들 중 참여하실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먼저 공략."

"이번 공략과제는 화랑이 해보고 싶습니다."

"화랑은 바로 전에도 A급 가져가지 않았나?"

"마공학개론이었다. A급은 아니지."

"회의 중엔 존댓말 사용해주세요. 공략은 화랑. 다음은 마법이론. ...없으면…."

"마법이론은 홀리가 해볼게요."

이나은의 말에 좌중이 잠시 침묵했다…기보다는 의외라는 듯이 바라봤다.

'오… 나름의 적응법인가?'

마법이론은 비인기 과목이다.

이나은은, 논쟁─대부분 일방적인 린치에 가깝다─하기 싫어서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송연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진행을 재개했다.

"마법이론은 홀리. 다음은..."

생도회가 처음으로 한 일은,

동아리 과제입찰을 분배방식으로 개선한 것이었다.

물론 18개 동아리장 모두가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매방식의 시스템상 입찰에 많은 훈련점수를 배팅해야 했고, 어렵게 입찰에 성공한다 해도 실패율이 꽤 높았다.

때문에 재정파탄(?)에 이른 동아리도 한둘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생도회는 각 동아리의 규모, 순번, 과제의 등급 등을 정리해 분배를 주도하기로 했다.

사실상 협회 역할이나 다름없는 것.

'말이 안 되는 구조긴 하지.'

생도회에만 동아리장이 여섯이었으니까.

그건 곧 생도회의 권력이 됐고,

완벽한 공정성 따윈 없는 게 당연했다.

거기까지도 현실의 축소판인 것은, 엽인협회 역시 기업의 장학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로비가 판을 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경매의 본질을 파괴하는 행위이지만, 늘 그렇듯 학원 측은 생도회의 방식을 제재하지 않았다.

"동아리 과제는 마무리됐으니 다음 안건으로…."

~지이잉.

아.

임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회의 중에는 무음으로 해두시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을 텐데요."

"죄송…."

나는 얼른 화면을 열어 알림모드를 변경했다.

"…합니다만, 다들 알림을 한번 보셔야겠는데요."

내 말에 하나둘 워치를 들여다봤다.

"어…?"

"와 씨, 이게 뭐냐."

"이러면… 이번 입찰은 참여할 동아리가 없을 거 같은데?"

새로운 과제의 추가 알림이었다.

문제는 방식까지 새로웠다는 것이다.

──────────────

『종합과제』

◈ 내부의 적

-목표: 물품을 찾아 지정된 대상에게 전달.

(1. 참가한 동아리 전체의 공동 임무이지만, 무작위 1개 동아리에는 방해 임무가 주어집니다.

2. 참가한 동아리는 협동, 색출의 균형을 이루며 목표 완수를 위해 경쟁해 나가야 합니다.)

*참여 가능 인원 : 제한 없음

*참여 방식: 200점의 훈련점수로 지원(동아리별)

*보상대상: 목표를 직접 완수한 동아리, 또는 방해 임무에 성공한 동아리.

※보상: 마석(C) 속성 선택 ×(보상자 수), 점수 최대 20,000P(보상받을 동아리의 생존비에 따라 차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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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전부 다 참여할 수 있다고?"

"보상이 2만? 말이 됨?"

"참가비 200점이면 참여 안 할 동아리가 없지. 무려 100배짜린데. 아니, 마석 포함이면 100배가 뭐야 150배는 되겠다."

"이거 무조건 한 팀은 우승팀이 나오는 건가?"

송연희조차 존댓말을 집어치웠다.

"난 왠지 미끼 같아."

"아마도."

나는 차유라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건 그러니까… 뻔히 보이는 낚시였다.

'학원 측의 반격이겠지.'

분배를 통해 과목당 입찰자를 1팀으로 제한하고 있으니 입찰비용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학원 입장에선 당연히 잘 되던 점수 회수가 막혔으니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으리라.

"그래도 이건 참여할 수밖에 없잖아."

권하선이 웬일로 맞는 얘길 했다.

"그건 그렇지."

그냥 넘기기에는 유혹이 너무 컸다.

#69화, 망한 게임

"이거… 일과시간 안에 못 끝낼 삘인데?"

"와우. 그래도 꽉 막힌 던전 아닌 게 어디야."

캡슐에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최범균과 권하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맵 사이즈부터 스펙터클하긴 하네."

어딘지도 모를 숲속이었다.

송연희가 부스스 일어나며 말했다.

"18개 동아리가 다 들어와 있으니까."

"진짜 다 참여할 줄은 몰랐다."

"전 캡슐을 이렇게 많이 들여왔을지 상상도 못 했어요."

"어. 놀랍긴 하더라."

가영을 끝으로 모든 멤버가 눈을 떴다.

내가 로코33에서 봤던 체육관 같은 건물은,

수백 대의 육감연동캡슐로 채워진 XR장비실의 확장 버전이었다.

생산공정에 수작업이 들어가는 장비이니만큼 생산물량이 적어 개학식 이전에 다 들여오지 못했었다고.

"다들 인벤토리 확인해봐."

송연희의 말에 모두가 허공을 응시했다.

"회복포션 하나뿐이네."

"그럼 단서는 이거뿐인 거 같다."

송연희의 손끝에서 누런 종이 쪼가리가 생성됐다.

"...?"

아, 동아리장 인벤토리에만 넣어놨나 보네.

"흐음… 이거 우리가 '그거'인 거 같은데?"

"뭐? 줘봐."

나는 송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북쪽의 격전지에서 '여의주'를 찾아 아리아나에게 전달하세요. 아리아나는 동쪽 끝 숲의 경계에 있습니다. ※ 당신들은 변절세력입니다. 여의주를 탈취하거나 아리아나를 살해하십시오.]

"아오! 하필."

나는 내용을 보자마자 바닥을 걷어찼다.

"왜? 별로야?"

쪽지를 강선호에게 건네고 송연희의 물음에 답했다.

"그냥 망한 거야."

"방해하는 쪽이 그렇게 불리한 건가?"

"이게 궁극적으론 쟁탈전인데 우리한텐 그거잖아. 마피아 게임… 단체 버전."

"그러니까 그게 뭐 어때...가 아니구나. 하아."

송연희는 곧 상황을 인지하고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

모든 멤버가 쪽지를 확인하자, 쪽지는 가영의 손위에서 부스러졌다.

"뭐가 망했다는 거야. 가서 여의주를 뺏던지 아리아난지 뭐시긴지 죽여버리면 되는 아님?"

"17대 1인데 그렇게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니?"

송연희가 최범균을 면박 주고 나를 돌아봤다.

대신 좀 설명해달라는 뜻.

"기본적으로 우리 역할은, 정체를 숨기면서 방해하는 역이야. 여러 동아리가 모이면 서로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겠지. 이건 뭐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아마 상황 자체가 어떤 구간에서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게끔 설계됐을 거다. 어쨌든, 우리의 문제는 너희들이야."

"뭐?"

"…?"

"우리?"

"그래. 너넨 다 숨기는 게 안 되잖아. 거짓말도 못 하고. 이런 게임에선 완전 폐급이야."

권하선이 픽 웃었다.

"에이. 난 또 무슨 대단한 약점이 있는가 했네. 그게 뭐 어렵다고."

"해 봐."

"뭘."

"아무거나 말해보라고. 내가 맞춰볼 테니까."

"...좋아.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사실."

"나는 48킬로다."

"거짓."

"야, 이건 너무 쉬웠다. 다시다시."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용 문제가 아니라 넌 얼굴에 다 드러나. 영아, 너 권하선이 거짓말하면 모르냐?"

"알죠."

"뭐야! 내가 그 정도였다고?"

"어. 강선호도 마찬가지. 쟤도 송연희가 뭐 꼬치꼬치 물어보면 맨날 다 털리잖아."

강선호가 멋쩍게 웃었다.

차유라는 티는 안 날 텐데… 거짓말이 필요한 상황에 아예 입을 안 여는 쪽일 것이다.

친하지 않으면 모른다 치더라도 제일 똑똑한 사람이 말이 없으면 의심을 살 수밖에.

최범균은… 그냥 생각이 없고.

그나마 똘똘한 게 가영인데….

"저도 자신 없긴 해요. 대꾸 정도야 하겠지만, 먼저 말을 지어내야 하는 상황이면 막 버벅거릴걸요?"

"그래. 우리는 이런 상황을 ㅈ망이라고 부르지."

"...."

한 번씩 객관화를 시켜주자, 멤버들은 상황을 인지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킬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최범균이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네.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먼저 죽여버리자."

"그 수밖에 없긴 해."

최범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자기 말에 동의할 줄은 몰랐던 거다.

"그건 너무 미친 생각 아니야? 17대 1이라니까?"

송연희 말대로 승산 제로인 싸움이다.

그래도 선빵이 낫다.

"눈치 보고 시간 끌다가 여러 동아리가 모인 데서 들키면 그냥 다구리야. 차라리 대놓고 수상해도 따로 놀면서 마주치는 족족 끊어내야지."

"...."

"그렇다고 해도 결국, 말라 죽을 수밖에 없긴 해. 여의주를 획득하려면 동선이 겹칠 테니까. 그래서 도박을 한번 해보려고 한다."

***

우리는 동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찢어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게 낫다니까."

내가 말한 도박이란, 한마디로 약삭빠르지 못한 멤버들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나랑 송연희만 둘이 떨어져나온 거다.

우리의 목적은 아리아나의 제거였다.

"괜히 더 의심받는 거 아냐?"

"우리가 변절세력이 아니었다고 생각해봐. 그럼 넌 어디로 갔겠냐?"

"...아리아나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절반은 될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거기서 누굴 마주친다고 의심받을 이유는 안 되지."

인수자인 아리아나가 죽는 순간, 게임이 끝나는 것이기에 다른 동아리의 입장에선 인수자 보호 역시 중요했다.

"게다가 전달자가 우승하는 게임이니 마지막엔 자기들끼리도 싸울 거 아냐. 힘 안 빼고 꿀꺽하려고 처음부터 아리아나 근처에서 매복하는 얌체들도 많을 거다."

"하긴…."

어찌 보면 변절세력만 혼자인 것은 아니다.

여의주를 가진 동아리도 결국 17대 1이 될 테니까.

"근데 그럼 무조건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하는 거 아냐? 다른 동아리랑 합류하면 그만큼 운신의 폭도 좁아질 거고."

"그렇긴 한데… 실제로 얌체 짓에 성공하는 건 몇 안 될 거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왜."

"교관들이 게임을 그렇게 쉽게 만들진 않았겠지."

"아… 무사히 도착하려면 서로 힘을 합쳐야 할 거다?"

"아마도."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냐? 고작 둘인데."

"너랑 내 조합은 웬만해선 쌩까고 가는 게 가능해."

"어떻게?"

"플라이. 대신 날아오는 것들은 니가 요격해야지."

오직 수직수평 이동만 가능하고 시전 중 더블캐스팅도 어려운 병신 마법이지만, 어쨌든 어지간한 범위는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단점은 지상에서 쏘아진 공격이나 비행 괴수들로부터 완전히 무방비라는 건데, 그 부분을 송연희에게 맡길 참이었다.

"그거 1인용 마법 아냐?"

"내가 목말 태워야지."

"무, 뭐, 미쳤어? 내가 니 목에 올라타게?"

"그럼 그냥 지금 죽던가."

***

***

타다다당! 타다당! 콰아앙!

점점 커지던 총성은 이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괴수 무리를 저지하는 AI병사들의 전투현장.

세븐의 멤버들은 전장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의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권하선이 차유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말 그대로 격전지네. 이제 어떡해? 더 가요?"

"아뇨. 일단은 멈추고… 주변을 조금 돌아봤으면 좋겠는데…."

이번엔 차유라가 최범균을 돌아봤다.

"아… 롸저(Roger)."

최범균이 나무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뒤, 권하선이 강선호에게 으르듯이 말했다.

"가뜩이나 숫자도 딸리는데, 니가 독하게 안 하면 얼마 못 버틴다."

"알아들었다니까…."

강선호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튼, 지켜보겠어."

강선호는 대(對) 생도 간의 싸움에서 본 실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유인즉 어떻게 동기를 때리고 죽이냐는 것.

'쯧. 겉은 멀쩡해가지고.'

그런 강선호 때문에 한성준은 권하선에게 선봉을 맡겼다.

그리고 판단은 차유라가 하게 했다.

'근데 걔는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권하선은 뒤늦게 기분이 나빴다.

"언니."

"네."

"...남자가요. 넌 머리는 쓰지 말고 힘만 써라. 막 이런 얘길 대놓고 할 정도면 아예 여자 취급도 안 하는 거죠?"

뒤에서 듣고 있던 가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거 완전 성ㅈ…."

"닥쳐."

가영은 살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차유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걸 내가 단정할 수 없을 거 같네요. 저보단 남자들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요?"

권하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엔 스님(강선호)과 꼬맹이(가영)뿐이었으니까.

로봇(차유라)한테 물었던 것도 별 기대는 없었다.

"됐어요…. 언니는 뭐 고민 같은 거 없어요?"

"모든 고민에는 해답이 있죠."

"아. 네."

권하선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끔은… 없는 것도 있더군요."

권하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있어요?! 뭔데뭔데?"

"최근 자꾸 꿈을 꿔요."

"꿈…을 꾸시는구나…."

"매일 똑같은 꿈이죠."

김이 샜던 권하선은 다시 조금 흥미가 돋았다.

반복되는 꿈은 근심이라지 않던가.

"무슨 꿈인데요?"

"감옥에 갇혀 있는 꿈. 아니, 감옥이라기보단 우리에 가깝겠네요. 가끔은 괴수들과 함께 있기도 하고…, 어떨 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학대를 당해요."

"악몽이네요…. 어쩌다가요?"

차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꿈속에서도 혼자 생각하죠.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무슨 클리닉 같은 델 가봐야 하나. 그런 꿈을 매일 꾸면 피로도 안 풀릴 거 같은데."

"그거…."

잠자코 듣고 있던 가영이 입을 뗐다.

차유라와 권하선이 뒤를 돌아봤다.

"어… 아니, 그냥 든 생각인데… 탈출을 해야 끝나지 않을까요?"

"꿈속의 내가 움직일 생각을 않더군요."

"그럼 누가 와서 꺼내주든가요. 잠들기 전에 막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려 보세요. 다른 등장인물이 생기면 뭐라도 변화가 생기겠죠."

차유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볼…."

파팟! 부웅!

권하선이 솟구치듯 일어나 메이스를 휘둘렀다.

"어 씹! 나야 나!"

메이스는 최범균의 정수리와 딱 1㎝ 간격을 두고 멈춰 섰다.

휘두른 속도를 생각하면 멈춘 것이 물리법칙에 어긋날 정도.

"놀래라…. 넌 뭐 짐승이냐? 억!"

권하선이 최범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갈 때야 그렇다 치고, 그러게 누가 그따위로 나타나래?"

"아아아…씨이. 수고하고 온 사람한테."

최범균이 정강이를 문지르다가 말을 이었다.

"크라켄, 핑크래빗, 홀리."

"근방에 세 팀이나 있어? 걔들 총원이 몇 명씩이더라?"

"크라켄이 10명, 핑크래빗 13명, 홀리가 7명."

"핑크래빗은 피해야겠네."

"핑크래빗이 제일 가까움. 우리 기준으로 동쪽. 크라켄은 서쪽, 홀리가 서북쪽으로 제일 멀고. 근데 그보다, 숲 군데군데에 부상 당한 AI가 있더라."

"병사?"

"어. 애들이 부상병한테 여의주에 대해서 묻는데, 보니까 말들이 조금씩 다 달라."

차유라가 말했다.

"그렇게 모은 힌트를 조합해서 찾는 식이겠죠."

"오… 수고했어. 그럼 어디로 갈까요?"

권하선이 최범균의 어깨를 두드리고 차유라에 물었다.

"서쪽으로 가요. 가능한 접촉을 피하면서 힌트 먼저 수집해 보죠."

"맞다. 너도 들었다며 힌트. 기억나는 거 있으면 말해봐."

"...몰라. 다 뒤죽박죽 섞여서 하나도 기억 안 나."

"어휴, 저 멍청이 같으니."

"이건 X나 억울한 순간인데… 아무튼, 홀리가 지나간 쪽은 갈 필요 없어."

"왜."

"이나은 걔는 힌트를 듣고 나면 다 죽여버리더라."

***

'난감하네.'

늪에 빠졌다.

눈에는 푸른 초지로 보이고 딛는 느낌마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환영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땐 벌써 두 다리가 반쯤 잠긴 뒤였다.

'탈출이 어려운 건 아닌데.'

문제는 송연희의 고집이다.

"빨리 손잡으라고!"

"아아아악! 짜증나 짜증나!"

이해는 한다.

원래 저렇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네 손 내 손 할 것 없이 온통 '썩은' 진흙투성인데 정신이 온전하겠는가.

그러나 허리 위까지 잠기면 나도 방법이 없어진다.

먼저 탈출해서 도구라도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럼 진정하고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 테니까."

'플라… 뭐야. 쟤 왜 저래?'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연희가 갑자기 부들부들 떨더니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곤 눈물을 글썽였다.

"야. 금방 온다고. 통나무 같은 거라도 가지고…."

어째 말을 걸수록 상태가 심각해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초점을 잃은 것이 신경 쓰였다.

"송연희!"

"...."

이지를 상실했나 싶어 손을 휘저어보는데 송연희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 가지마. 오빠…."

"뭐?"

#70화, 눈빛만 봐도

당연히 나한테 하는 게 아닐 말을, 나를 보며 하고 있다.

"오빠 제발, 제발 가지 마."

'좀 무섭네.'

어쨌든 더 시간을 끌 순 없었던지라, 일단 날아올랐다.

부력은 진흙의 저항에 부딪혀 두 배 이상의 마력을 빨아먹었다.

"가지마아아! 오빠아악…."

송연희는 무슨 절규를 하듯이 소리치다가 그대로 까무러쳤다.

'하아. 가지가지 한다 진짜.'

등이 바닥에 닿았으니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왔던 곳으로 부지런히 날아갔다.

'진짜 개똥 같은 마법이네.'

유용하게 쓰면서도 절대로 만족은 못 하는 마법.

속도 조절도 안 된다.

마른 땅에 내려서서는 곧장 길고 두꺼운 나무를 통으로 베어냈다.

윈드커터로 적당히 편(片)으로 재단한 뒤, 디크리즈 웨이트(무게감소)를 걸고 송연희에게 돌아갔다.

"와 씨…. 못 찾을 뻔."

송연희는 그새 '이마'를 제외하곤 모두 잠겨있었다.

통나무 판을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송연희를 잡아당겼다.

"흐으읍!"

마력보정으로 힘을 올려도 비전투 중이라 7이 고작이다.

상체를 겨우 끌어올린 시점에 플라이를 시전했다.

이번엔 거의 네 배에 달하는 마력이 털려 나갔다.

송연희가 정신을 잃은 채로는 늪을 다 건널 수 없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엔,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

결국, 다시 초입으로 돌아왔다.

"어…? 젠장."

송연희의 코와 입이 여전히 진흙에 틀어막혀 있었다.

비비고, 털고, 짜낸 다음, 회복포션을 조금 부어 얼굴을 씻겼다.

'숨 쉬어, 숨!'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콜록. 컥…."

"...괜찮냐?"

"오빠야?"

"안 괜찮네."

송연희는 눈을 뜨자마자 내 소매를 움켜잡았다.

'늪지에 적용됐던 환영은 정신계통이 아닌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송연희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

'공포와 불안증세였으니 원인이 보이겠지.'

대체 왜 이러는지를 알아야 고치든 대응을 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곳곳에 빗물이 고인 젖은 골목.

10세 전후의 송연희가 그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빠지겠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깡충거리더니 결국 철퍼덕 넘어진다.

하필 웅덩이로.

옷이 다 버린 송연희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급하게 달려온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아이가 그녀를 붙잡아 일으켰다.

-에이, 촐싹거리지 말랬잖아. 닦을 거 좀 사 올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금방 갔다 올게.

영상은 그대로 끝이 났다.

다음 장면은… 조금 전 그 남학생의 영정사진이었다.

송태준이란 이름의.

'...죽은 형제가 있었구나.'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트라우마 비슷한 게 촉발된 모양.

이거 참.

원인은 알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긴 어디야?"

송연희가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캡슐 안…. 동아리 과제 중이잖아."

"그게 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

돌겠네.

신기하게도 진흙 범벅인 것에는 더이상 발광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상태론 제 몫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 것.

'여기서 끝이네.'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늪지를 크게 돌아 걷기 시작했다.

"오빠."

"...왜."

"나 다리아파."

"그럴 수가 없는데…."

육체 능력까지 퇴화했을 리가 없잖아.

"업어줘."

***

탑티어 일행은 막막한 얼굴로 눈앞의 절벽을 올려다봤다.

"더 돌아가 봤자 소용없을 거 같다."

동아리장 유재현의 말에 멤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더 나은 루트를 찾고자 꽤 오랜 시간을 둘러봤기 때문.

그나마 이곳의 절벽이 다른 쪽보다 조금 더 낮고 장애가 적어 보였다.

"꼬라지 보니까 먼저 간 동아리도 없겠는데?"

한 멤버의 말에 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우리가 제일 동쪽이었나 보지. 저것만 넘으면 앞서가는 거다."

절벽 위쪽의 창공에 와이번 한 마리가 자적한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멀어서 어그로는 안 끌려. 일단 절벽 위쪽에 뭐가 있는지 내가 한번 가볼게."

민첩하기론 유재현 다음가는 멤버였다.

"그럴래?"

"누가 온다!"

유재현이 뒤를 돌아보니 후방경계를 맡았던 멤버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디냐?"

"크리티컬."

"거기 9명이었던가?"

"맞아. 보이는 건 8명뿐인데 걔들도 정찰 뒀겠지 뭐."

탑티어는 모두 11명.

전혀 꿀릴 게 없었다.

잠시 후 크리티컬 멤버 8인이 절벽 앞 개활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 유재현이. 격전지는 안 갔나 봐?"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둘이 오가며 인사는 하는 사이였는데, 박태광이 한 살 많았다.

"하하. 미리 힘쓸 거 있냐. 그나저나 여긴 좀 넘을 만하겠네. 너네도 방금 왔냐?"

박태광이 절벽을 올려보며 말했다.

"예… 지금 막 선발로 한 명 올려보내려던 참이에요."

유재현은 자신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 박태광의 모습에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정체도 모르면서 너무 편하게 다가오시네요. 의심스럽게?"

"야야. 괜히 머리 굴리지 말자. 변절세력이든 아니든 여의주 안 가졌으면 싸울 이유가 없는 거 아니냐? 일단 저거나 넘자고. 우린 아직 한 명 안 왔으니까, 니들 올라갈 때 저놈 어그로 끌리면 밑에서 엄호해 줄게."

박태광이 와이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위에 뭐가 있는지 확인은 해야죠. 정우야, 출발해."

"어? 아, 오키."

벌써 준비를 마쳐둔 정우라는 멤버가 곧장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가볍게 도약한 그는 마치 거미처럼 수직 절벽을 잘도 기어 올라갔다.

모두가 그 모습에 시선을 모으던 그때,

숲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태광이 형!"

크리티컬의 마지막 멤버였다.

"왜. 또 누가 와?"

"네. 근데 이상한 게 달랑 둘이네요."

"둘?"

그 말을 들은 일동이 의아해하는 사이, 서남 방향의 숲속에서 의문의 주인공이 걸어 나왔다.

"어라… 성준이네?"

한성준이 누군갈 업고 있었다.

박태광은 반갑고도 궁금한 마음에 그에게 마주 다가갔다.

"대체 뭔 일이 있던 거냐. 다른 애들은?"

"환영진에 당했어. 출구를 찾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워어 씨… 재수가 없었구만. 환영진까지 깔아놨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근데 뒤에는 누구… 아, 송연희네. 기절했냐?"

"어. 그렇게 됐다. 너네는 왜 모여있어?"

"그게…."

박태광은 절벽을 따라 한참을 돌아봤지만, 여기보다 나은 길목은 찾기 힘들었음을 설명했다.

"결국, 절벽이랑 늪지뿐이란 거네…."

한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절벽을 올려봤다.

"더 아래쪽은 또 늪이었나 보지?"

"어...?"

"왜?"

한성준의 반응에 박태광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쿵!

절벽 위에서 비명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선발대로 절벽을 기어오른 탑티어 멤버가 수직으로 땅에 처박혔다.

박태광은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게 뭐냐?"

모든 눈이 절벽 위를 향했다.

절벽 위를 빽빽이 메운 수많은 인영.

아니, 사람의 것이라기엔 조금 괴상한 체형의 무리였다.

놈들의 등장과 머릿수가 너무 충격적인 탓에 탑티어조차 동료를 잃은 것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검치원숭이네…."

"아…."

"그러네."

한성준의 말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거렸다.

괴수생태 시간에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

피지컬 원툴의 9급 괴수종.

"특이점이… 도구를 쓰는 거랬나?"

박태광이 한성준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맞아. 그러니까… 저길 넘는 건 공성전이나 마찬가질 거다."

"X이발. 난이도 X 같네. 그럼 이제 어떡하냐?"

"글쎄다. 일단은…! 다들 절벽에서 물러서!"

한성준이 대꾸하다 말고 느닷없이 소리쳤다.

동시에 바닥을 가득 메운 수백 개의 작은 그림자.

크리티컬과 탑티어의 멤버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거나 방어기술을 펼쳤다.

쿠과과과과과과강!

수박만 한 돌덩어리들이 우박처럼 내리꽂혔다.

파바바밧! 피비비빗!

투석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생도들에게는 조악한 화살까지 날아들었다.

"이 지랄 할 거란 얘기네."

안전거리 밖으로 물러난 일행은 자연스럽게 한성준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박태광의 영향이었다.

그가 한성준의 부관처럼 서 있으니 크리티컬 멤버들이 모이는 건 당연했고, 힘을 합쳐야 하는 상황이라 탑티어도 별수 없었다.

유재현은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족보부터가 이상했다.

한성준은 그보다도 한 살이 어린데 박태광과 반말하는 사이였으니까.

또한, 생도회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다.

대표선거 후보 5인 중에 자신만 임원 제안을 받지 못했기 때문.

유재현은 혼잣말인양 중얼거렸다.

"연합이 필요한 상황이긴 한데… 세븐은 좀 그렇네. 우리가 택시도 아니고."

한 명뿐인 전투원. 그마저도 전투 불능의 동료를 업고 있으니, 있으나 마나라는 말이었다.

"아… 하하. 그런가요?"

한성준이 멋쩍게 웃고 있자, 박태광이 대신 나서 두둔했다.

"야, 그래도 성준이는 나라가 인정한 A급 전력 아니냐. 너 같으면 동료를 그냥 버려? 어쩔 수 없을 때는 서로 좀 돕고…."

한성준이 그런 박태광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얘긴 필요 없고…. 그럼 이렇게 하죠."

모두가 주목한 가운데, 한성준은 한 가지 작전을 제안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생도들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었으니까.

자신이 플라이로 절벽을 넘어, 반대편에서 지원하겠다는 얘기였다.

"야이 씨…, 그건 자살이지. 하지 마."

결국, 박태광이 반대하고 나섰다.

유재현도 동감했다.

"그래…. 나도 뭐 그런 희생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무의미하고."

그러나 한성준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희생할 생각은 없어요. 근데 정면돌파야말로 이 인원으론 부족해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겁니다. 애초에 중간과정은 18개 동아리가 힘을 합치게 만든 게임이니까요. 올라가 보고 턱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내려올게요."

"네 뜻은 알겠다만 여기 마법계가 너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 마법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야. 표적지나 다름없잖아, 그거. 아까 그, 활 사거리 안에만 들어가도 살아서 내려올 확률은 0%야."

"네. 위험하죠. 근데 밑에서 어그로 확실히 끌어주고 한 사람만 저랑 같이 올라가 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같이?"

"실력 좋은 사수 한 명을 제가 목에 태우고 가는 거죠. 알다시피 혼자선 눈먼 화살 하나 막기 힘들 테니."

"미친. 공중에서 하체도 못 움직이는 채로 그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유재현이 말하다 잠깐 한성준의 어깨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랬다.

"그렇겠죠…? 아니면 마법계라도."

한성준이 지원자를 찾아 주위를 훑어봤으나, 눈이 마주치는 족족 다들 피하기 바빴다.

"그럼 나랑 가자."

박태광이 손을 들었다.

"너는 근접이잖아."

"내가 앞에서 끌어안고 호신강기를 펼치면 훌륭한 고기방패가 되지 않겠냐?"

"...내키진 않는데 괜찮긴 하겠네."

박태광이 낄낄 웃었다.

한성준은 평평하고 부드러운 자리를 고른 다음 박태광에게 도움을 청했다.

"얘 좀 내려놓게 도와줘."

"아, 오케이."

박태광이 다가서 송연희의 머리와 등을 받치는데, 한성준의 허리가 120도가 되도록 송연희가 떨어지지 않았다.

"뭐하냐? 팔을 풀어야지."

"어… 음."

그러나 낑낑대던 한성준이 도로 몸을 일으켰다.

"뭐하냐니까?"

"아니다. 그냥 이대로 가야겠어."

"기절한 얘를 업고 동반 자살하겠다고?"

"대충 알아들어라."

한성준은 그 말을 끝으로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어어."

"야야! 한성준!"

지상의 인원들이 모두 만류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고도를 높였다.

그렇게 30m쯤 올라갔을 때였다.

등에 업혀 있던 송연희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한성준의 어깨를 타고 올라갔다.

박태광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정신 차렸던 거였네."

자존심 센 송연희라면 여러 사람 앞에서 깨어나기가 민망하기도 하였으리라.

"어그로!"

한성준의 외침에 박태광이 유재현을 돌아봤다.

"우리가 몸빵? 와이번?"

"저희가 몸빵할게요."

"그래 그럼. 흐읍!"

박태광이 사자후(獅子吼)를 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원거리에서 와이번을 도발하기 위함이었다.

쾅! 콰광! 콰과광!

"켁, 켁! 콜록콜록. 아, X바 사레 걸렸네. 또 뭐야?"

별안간 위에서 들려온 폭발음에 모두가 공중을 올려봤다.

송연희가 귀신같은 속사를 펼치며 그들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요격하고 있었다.

"...!"

문제는 공격이 후방, 그러니까 저 절벽의 괴수들과 반대쪽에서 날아오고 있다는 것.

박태광이 상황을 파악할 때쯤, 그들이 지나온 숲 쪽에서 6인의 생도들이 튀어나왔다.

크라켄 멤버들이었다.

그들은 계속 한성준을 향해 공격을 날리며 소리쳤다.

"세븐이 변절세력이다! 잡아라!"

"뭐어?"

박태광은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저만큼 앞에 있던 탑티어도 걸음을 돌렸다.

"뭐해? 저 새끼들이 변절세력이라니깐?"

"아니, 그렇게 다짜고짜 몰아가면 되나. 알아듣게 설명을 해야지."

박태광의 말에 크라켄 동아리장, 성지훈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세븐한테 묻따 공격당했다고! 백퍼 확실하다니까?"

크라켄 멤버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역력했다.

인원도 넷이나 줄어있고.

"일단 멈춰봐. 어차피 저 상태론 도망도 못가니까."

박태광의 말에 크라켄 멤버들이 공격을 멈췄다.

송연희의 요격이 꽤 대단하긴 했으나, 플라이 상태로 도망칠 수 없음은 그들도 잘 알았다.

박태광은 말없이 공중을 올려봤다.

자신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한성준을 잘 알았다.

아버지가 그랬다.

한성준과 꼭 붙어 다니라고.

청송에서 남는 건 그것뿐이라고 했다.

당신이 한번 본 친구에 대해 그렇게 말할 정도면 필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그는 영웅으로 선정됐다.

또 자신을 잊지 않고 생도회에 꽂아줬다.

아버진 녀석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박태광은 한성준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계속 관찰했다.

'이젠 딱 눈빛만 봐도 알지.'

한성준과 눈이 마주쳤다.

박태광은 그의 눈빛을 읽어냈다.

"...그렇게 된 거였군."

"뭔 소리예요?"

유재현이 뜬금없다는 듯이 물었다.

"크라켄이네. 이 새끼들이 변절세력이다."

"뭐? 아니, 이 미친놈이 지금까지 뭐 들었나!"

크라켄 멤버들이 반발했지만, 박태광은 단호하게 말했다.

"응. 어림없죠? 야, 조져!"

#71화, 제일 큰 구멍

박태광의 도움(?) 덕에 나와 송연희는 무사히 절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와… 타이밍… 들킨 줄 알았다. 아무튼, 권하선네도 나름 잘 버티고 있나 보네. 어억! 야, 야!"

아직 땅에 발이 닿기도 전, 송연희가 내 어깨를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녀는 사뿐히 착지하고는, 이제 허옇게 말라버린 진흙을 탈탈 털며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널 업고 있었는지를 묻는 거냐, 아니면 니가 어쩌다 정신을 잃었는지를 묻는 거냐?"

"...."

송연희는 입을 뻥긋하다가 금방 다물었다.

전자는 후자 때문이고, 후자는 질문자가 뒤바뀐 느낌이기 때문이겠지.

송연희도 내가 손을 잡으라던 순간까지는 기억하고 있을 터.

자기가 정신을 잃은 것에 다른 외부요인이 없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난 그냥 두고 올 수 없어서 업고 온 거뿐이야."

"나한테 뭔 짓 안 했지?"

"버리고 올 걸 그랬나…. 사람을 뭐로 보고 그딴 소릴 하냐 넌. 나중에 영상을 돌려보던지."

"아… 미안.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그냥… 내 것이 아닌 마력이 조금 느껴져서."

슬립(Sleep) 마법의 흔적을 조금 느끼긴 한 모양이다.

'어린' 송연희가 자꾸 말을 붙이기에 마법을 걸어 재웠었다.

정신이 온전했다면 당연히 실패했을 테지만, 그때의 그녀는 저항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걸 설명하려면 당시의 상황까지 말해줘야 했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렴풋한 기억은 있는 건지 송연희는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내가 뭐라고 했어?"

"아니.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 정도…. 근데 너 언제부터 깨어있었냐?"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송연희는 그제야 조금 민망했던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박태광이랑 만났을 때."

와우, 정신이 돌아와서 다행이지….

만약 눈뜨고도 오빠를 찾았으면 송연희에겐 두고두고 망신이었으리라.

그런 건 나 역시 바라지 않던 결과여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뭐, 왜. 비웃냐?"

"...?"

뭔 소린가 했는데 바람 새는 소리를 웃음으로 오해한 모양.

굳이 해명할 필요를 못 느껴서 조금 꼽을 줬다.

"목말을 타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애잖아 니가. 근데 거기서 일어나는 게 더 싫었나 봐?"

"불필요한 관심이 쏠릴 게 뻔하니까. 니가 마침 박태광한테 기절했다고 하기도 했고. ...그러는 넌, 거짓말이 그냥 술술 나오더라? 하면서 심박도 전혀 변화가 없는 게 완전 프로수준이야."

이런 게임이 X 같은 건 잘한다는 게 절대로 칭찬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잘 생각해봐라. 난 걔들 속인 거 없어. 전부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후방지원? 언제까지 하겠다는 말은 안 했잖아."

우리가 검치원숭이 무리의 머리 위를 지나면서 절벽 아래를 향한 어그로도 어느 정도 분산됐다.

그럼 됐지.

"그래. 뻔뻔한 건 이미 아는 거고."

"...빨리 가기나 하자."

***

동쪽 어디 숲과 초원의 경계쯤.

한 여인이 수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쿠르르르르!

일정 범위 안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중앙의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콰직! 콰지직!

이윽고, 한데 뭉친 생나무들은 마치 종이처럼 무참히 구겨졌다.

"음… 대충 이 정도네."

여인은 이름은 아리아나 함.

다른 누가 아니고 그냥 함성아였다.

나름 재밌자고 정체를 숨긴 거지만, 아리아나는 실제로 그녀가 해외에서 쓰던 이름이었다.

"괜히 빨리 접속했나?"

그녀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는데,

'말이 되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스캔된 그녀의 능력을 A2등급 기준으로 다운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한때 지나온 경지였기에, 적응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녀석이 오긴 하려나? 아냐 아냐…. 기대하면 안 돼.'

그럼 티가 나게 되어 있다.

NPC로 충분했을 역할을 굳이 직접 맡은 건, A3등급으로 인정받은 한성준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개인적 호기심에서였다.

물론 '세븐'이 변절세력에 당첨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당연히 그 모든 일은 반드시 비밀이어야 했다.

만약 한성준이 알게 된다면 공정성, 형평성 따위를 들먹이며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으니까.

'맞아. 걔는 그러고도 남지.'

그러니 룰에 맞게 그녀는 변절세력을 알지 못해야 하고, 아는 걸 들켜서도 안 됐다.

하지만 주목적이 훈련점수의 회수였던 만큼, 아예 마주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이 과제의 설계자가 그녀였다.

18개의 동아리는 각기 다른 생각으로 움직이더라도 대부분 마주칠 것이며, 힘을 합쳐야만 이곳에 이를 수 있다.

만약 조금 일찍 쟁탈전에 눈이 멀거나, 자기 동아리의 힘을 과신한다면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오히려, 함성아는 그 작은 확률을 자꾸만 기대했다.

'아오…. 궁금해 죽겠네.'

그녀는 관리자 캡슐이 아닌 일반 캡슐을 통해 접속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생도들을 모니터링할 수 없었다.

다만 설계자로서, 시간상 생도들의 대략적인 위치는 예측할 수 있었다.

"쯧!"

...빨라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겠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숲속에서 한 무리의 인원이 걸어 나왔다.

'무, 뭐야… 벌써?'

그러나 면면을 보자마자 쓰게 웃고 말았다.

그들은 멤버 전원이 반수계로 이뤄진 동아리, 비스트였으니까.

함성아는 단순히 생도들의 수준만 따져보다 놓친 부분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수나 패스파인더의 시각 능력은 물론이고, 디텍션 마법보다도 훨씬 넓은 범위의 탐지능력이 바로 반수계의 후각이었다.

야생에 특화된 피지컬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돌파가 아니라 우회를 택한다면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팀이었다.

'어쨌거나 여의주가 못 오면 얘들도 말짱 꽝이지.'

함성아는 활짝 웃으며 생도들을 맞이했다.

한편, 더 당황한 것은 비스트 쪽이었다.

14명의 멤버 중 혼자 멀쩡한 인간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아이비였다.

"함 교관님이 왜 여깄지?"

"왜 여기 계시느냐고 해야지."

"아. 왜 여기 계시느냐."

"그게 아니… 됐다."

함성아는 굳이 정정하는 걸 그만두고 왼쪽 가슴의 명찰을 가리켰다.

그녀는 과제의 설정대로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격전지에서 찾아야 하는 여의주는 군에서 전략물자로 쓰이는 고농축의 마정석을 뜻했다.

"...함 교관님이 아리아나였다?"

"그래. 너희는 빈손이구나."

"우리는 아리아나를 지키러 왔다."

"다른 팀이 가져오는 여의주도 노릴 거고. 그렇지? 그럼 숲에 숨어 길목 지키는 게 나을 거야."

함성아는 문득 드는 생각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고로 이곳의 나는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란다."

조금 우습지만, 그녀가 참여해버린 이상 반드시 알려야 하는 정보였다.

'누가 변절세력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데, 만약 너희들이 변절세력이라도 이건 사기가 아니야. 할만해.' 정도의 메시지라 하겠다.

"...?"

아이비는 그게 뭔 소리냐는 듯한 눈으로 함성아를 바라보다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이번엔 함성아가 의문을 품었다.

거의 동시라 싶게 다른 비스트 멤버들도 숲 쪽을 돌아봤기 때문.

그들은 단체로 고개를 살짝 쳐들며 킁킁거렸다.

'아니 설마…. 누가 또 온다고?'

비스트 멤버들이 서로에게 물었다.

"아는 냄새냐?"

"아니. 난 모름."

"나는… 좀 맡아본 거 같긴 한데…. 확실히는 모르겠어."

"다른 잡내가 심하긴 해."

"맞아. 뭔 흙냄새랑 썩은 물 냄새도 나는 거 같고."

육감 연동은 가상 세계 안에 모든 감각이 구현되는 것임과 동시에, 현실의 모든 걸 그대로 읽어오는 것(스캔)이기도 했다.

"제가 보고 올게요."

표범을 닮은 멤버 하나가 허락을 구하듯 아이비를 돌아봤다.

그러나 아이비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기웃하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확신을 가진 듯 밝아졌다.

"성준 냄새다."

"성준? 한성준?"

함성아가 저도 모르게 아이비를 돌려세웠다.

"...왜 좋아하지?"

함성아는 뜨끔해서 표정을 관리했다.

"조, 좋아하긴 누가 좋아해. 하하…, 신기해서 그래."

아이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함성아를 살피다가 멤버들에게 말했다.

"가보자."

아이비가 바람처럼 자리를 박찼고, 비스트 멤버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휘유, 놀랐네…. 근데 쟤는 무슨… 사람 냄새를 일일이 구분해?"

함성아는 슬쩍 팔을 들고 코를 킁킁댔다.

***

"나는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란다."

"그거야 양심이 있으면 당연한 거죠. 근데 그래도 엉망이긴 하네요."

아이비에게 아리아나의 정체를 들었을 때, 나는 욕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는 했었지만, 가능은 하게 만들어야지.

"또 뭐가. 뭘 엉망이라고까지 하냐…."

함성아가 입을 삐죽였다.

"그렇잖아요. 계속할 맛이 나겠어요? 만약 제가 변절세력이었으면 함 교관님이 아리아나라는 걸 아는 순간, 그 자리에서 로그아웃했을 거예요."

아무리 능력을 봉인해도 함성아는 함성아다.

고작 송연희랑 둘뿐인 상황에서 암살은 불가능했다.

다행인 건, 그녀와 마주치기 전에 미리 알게 됐다는 거다.

"변절세력이… 아니라면서. 너무 이입하는 거 아냐?"

"전반적으로 개판이라 그래요. 구멍도 많고. 대체 설계를 누가 한 건지…."

"야! 불평불만은 과제 끝나고 하고. 너도 여의주 노릴 거면 자리나 잡아!"

생존실기 때도 느꼈지만, 그녀는 자기가 준비한 교육훈련에 자부심이 강한 편이었다.

"아뇨. 저는 여기 있으려구요. 걔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꼭 봐야겠네요."

"걔들이 누군데…."

"누구긴 누구예요, 변절세력이지. 딱 여기서 지켜보면 표정만 봐도 정체를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안 그러냐?"

송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알게 된 순간만은 티가 나겠지."

"그렇지. NPC가 아닌 이상에야 눈치를 챌 수밖에 없어. 그때부터는 교관님이 변절세력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당연히 계속 주시할 거고…. 거봐, 개판이라니까. 이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냐고."

"...."

함성아는 분해서 죽겠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답답하기도 하겠지.'

내심 기습을 바라고 있을 테지만, 나는 그녀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 과제를 헐뜯었다.

그녀의 반응은, 이미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녀는 아는 티를 내지 못한다.

먼저 공격할 수도 없고.

아리아나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자위적으로 시작되어야 했으니까.

"아니, 얘들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왜 너만 그렇게 유난이야?"

함성아가 비스트 멤버들을 가리키며 분한 마음을 토해냈다.

이쯤 하면 됐다.

"그야 저쪽은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런 거고요."

내 대꾸에 함성아가 씨익 웃으며 돌변했다.

"너, 그 말은 자백이나 다름없는 건데? 이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 아냐?"

"확신하시면 공격하세요."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들어갑니다."

나는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영역을 시전하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자포자기야? 그럼 그렇지. 지들이 꼴랑 두 명 남으니까, 괜히 교관을 물고 넘어져서 투덜댄 거야."

"괜히가 아니라 엉망인 건 팩트라니까요."

"시끄럽고. 얼른 덤비기나 해."

나는 결심한 듯이 걸음을 멈췄다.

"아뇨, 이건 아셔야 해요. 제일 큰 구멍이 뭔지 알아요?"

"...뭔데?"

"지금."

"지금이 뭔… 커헉!"

함성아의 목으로 가늘고 긴 검신이 튀어나왔다.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을 못 하셨다는 거죠."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엉거주춤 뒤를 돌아봤다.

아이비가 에페를 회수하며 말했다.

"미안. 우린 공범이다."

#72화, 금요일 저녁

쾅!

얼어붙은 검치원숭이가 김판웅의 도끼에 산산이 깨져나갔다.

일대의 검치원숭이 사체들이 전부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는 얼음 조각이었다.

"끝났어."

김판웅의 말에 이나은이 전장을 둘러봤다.

오직 그녀의 호흡만이 냉기와 동화된 듯 김이 서리지 않는다.

빙(氷) 속성의 마력이 주인에게 갈무리되며 주변이 원래의 기온으로 돌아갈 즈음, 무리를 헤아리던 이나은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홉… 우리까지 열."

절벽 위의 고원.

드넓은 전장에는, 아직도 남은 검치원숭이와 전투 중인 동아리가 여럿 있었다.

"열 팀? 하, 요런 양아치 쉐끼들…. 다섯 팀은 벌써 날랐다는 거 아냐."

도지훈이 허벅지에 쿠크리를 닦아내며 구시렁댔다.

"식스센스랑 유니콘은 싸우다가 전멸했어."

심선주가 도지훈의 말을 정정했다.

"그럼 세 팀이네."

절벽을 오르기 전 15개의 동아리가 연합했으니 3개의 동아리는 틈을 봐서 빠져나간 것이리라.

"일단 알았어. 지금은 여기에 집중한다."

이나은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박태광과 유재현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오 씨. 이렇게 많은 줄도 모르고 밑에서 그 지랄을 하고 있었으니…."

박태광이 투덜거렸다.

"제 말이요."

유재현이 맞장구쳤다.

그들은 다른 동아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되지도 않을 싸움을 계속해왔다.

그 탓에 크리티컬은 4명, 탑티어는 5명으로 인원이 줄어있었다.

"이제 어떡하면 됨?"

박태광이 이나은에게 물었다.

슬슬 전투를 끝낸 동아리들이 하나같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김판웅이 한쪽 어깨에 이고 있는 나무상자가 바로 여의주였기 때문.

"최대한 빠르게 치고 나갈 테니 크리티컬이랑 탑티어가 양 날개를 맡아줘요."

이나은은 절벽을 오르기 전 크리티컬과 탑티어를 매수했다.

이미 타격이 큰 두 동아리로선, 보상의 나눔을 전제로 하는 계약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출발하면 따라갈게."

"쟤들도 움직인다."

도지훈의 말에 일동이 고개를 돌렸다.

줄곧 이쪽 동태를 살피던 동아리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있었다.

유재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여있을 때는 오히려 못 노리지. 기껏 뺏어봤자 자기들로 타겟이 바뀌는데."

"그럼 마력 좀 채우고 갈게요."

"어. 오케이."

이나은이 명상마법을 펼치자, 박태광이 한발 물러나서 바닥에 앉았다.

"밑에서부터 아예 안 보였던 게 세븐이랑 비스트, 크라켄이죠?"

심선주가 크리티컬과 탑티어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아… 그러네. 비스트를 못 봤네. 크라켄은 변절세력이라 우리가 죽였음."

"어, 그랬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아직 여의주가 없을 때라 가만히만 있으면 됐거든. 멍청한 놈들이 괜히 무리해서 성준이를 몰아가다가 딱 걸린 거지."

"한성준? 세븐도 봤어요?"

마력을 충전하던 이나은이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섰다.

"깜짝이야…. 어, 성준이랑 송연희만. 다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다고 그러더라. 그러고 보니 걔들 다 죽었을 리는 없는데 안 오네."

"한성준은 어떻게 됐는데요?"

"너네 오기 전에 어그로 분산시킨다고 송연희랑 플라이로 먼저 넘었는데… 나중엔 뭐 우리도 정신없어서 신경 못 썼지. 아마 죽었을걸?"

"출발하죠."

이나은은 찜찜한 기분이 들어 서두르기 시작했다.

박태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니가 세븐 애들 의식하는 건 잘 아는데, 우리는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어. 변절세력도 없겠다, 여의주도 우리한테 있겠다. 기어가도 게임을 끝내는 건 우리야."

"글쎄 저는…, 크라켄이 변절세력이라는 확신은 금물이라고 봐요."

이나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모두의 시야에 메시지가 연달아서 떠올랐다.

['아리아나'가 사망했습니다.]

['세븐'이 목표를 달성합니다.]

[60초 후에 접속이 종료됩니다.]

"어어…? 이, 이게 왜…."

박태광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고,

그런 그에게 이나은이 확 얼굴을 구기며 뇌까렸다.

"...등신."

***

캡슐을 벗어났을 때는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돌아보면 대충 이동 거리만 20㎞ 정도 되는 거 같다.

'제대로 끝났으면 9시도 넘었겠네.'

기쁨을 만끽하고 자시고 할 틈 없이, 나는 곧장 체험관을 빠져나와 기숙사를 향했다.

같은 멤버들에게조차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는 너무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둑하고 조용한 캠퍼스.

당연히 나와 같은 이유로 벌써 체험관을 나온 사람은 없었다.

포인트 상점 앞을 지날 때였다.

아아아아아악! 열받아아아악!

어디선가 굉장히 짜증스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근데 자꾸 저러면 그것도 큰일인가?'

함성아가 오기를 가지면 나만 골치 아플 일이다.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박태광의 푸념과 멤버들이 찾는 메시지가 하나둘 날아왔다.

나는 워치를 훈련모드로 바꾸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다음날 생도회실.

회의가 있는 건 아니고, 보상수령문제로 우리와 비스트만 모였다.

과제보상은 C급 마석 교환권 7장과 17,200점.

2만 점이 아닌 이유를 듣자니 아쉽게도 가영이 죽어서 그렇다고 했다.

권하선은 그게 다 강선호 탓이라는데, 상황은 몰라도 대충 짐작은 됐다.

어쨌든.

송연희는 아이비와 합의한 대로 8,600점과 마석 교환권 3장을 넘겨줬다.

"1,000점씩 나누고 나머진 공금으로 둘게. 마석 교환권은 4장인데 어떻게 할까?"

송연희의 물음에 멤버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나는 딱히 집중을 안 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비스트도 비슷한 문제를 논의 중이었다.

'저쪽은 14명이라 600점 정도 돌아가겠네.'

그만큼 전력은 위협적이나, 확실히 수가 많을수록 몫은 작아진다.

"어떻게 해. 팔아서 나눠?"

아무도 대꾸가 없자, 송연희가 재차 물었다.

차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사려면 3,200점이 들어. 팔면 수수료로 320점을 버리는 거고. 순번을 정해서 그냥 현물을 나누는 게 나아."

"그건 언니 말이 맞네. 그렇게 하자. 보상은 또 생길 테니까. 먼저 받고 싶은 사람?"

"...."

"...."

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대충 이유가 보이긴 했다.

망했다고 쓸모없는 취급을 당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보상을 받게 되니 얼떨떨하긴 할 것이다.

답답해서 내가 나섰다.

"왜 이렇게 눈치들을 보냐."

"아니, 우리도 염치가 있지. 한 것도 없는데 똑같이 나누니까 조금 미안해서 그래."

권하선의 말이었다.

"별소릴 다 하네…. 니들이 못 버텼으면 5,000점도 못 받았겠지. 아, 그냥 대충 생일 순으로 돌리던가. 어차피 순서일 뿐이라니까."

"그, 그래. 그러자. 그럼 밑에서부터…."

송연희도 이상하게 자꾸만 내 눈치를 봤다.

그녀가 다른 애들과 다른 점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는 쪽이라는 것.

'아….'

영상을 돌려본 건가?

본인 XR 계정의 녹화영상은, 워치를 통해서도 열람이 가능했다.

아니 그냥 안 본 척을 하든지….

저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싶었다.

가영, 권하선, 최범균, 나 이렇게 넷이 마석 교환권을 나눠 받고 자리가 마무리됐다.

내가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줘야겠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회의실을 나왔다.

***

금요일 오후.

외출준비를 하던 중 마동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아 나, 이 아저씨 참 끈질기네. ...여보세요?"

-DH 마동욱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무슨 말씀하실지 뻔히 알고 저도 여러 번 대답한 거로 아는데…."

-예, 압니다. 이해하고요. 또 제 입장도 이해하시니까 전화는 받아주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럼 제가 송 회장님께 직접 거절 의사를 전해야 마 실장님이 곤란하지 않으시겠네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근데 그전에 저한테도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주시고, 그래도 싫으면 회장님께도 싫다고 하시면 됩니다. 내일이 마침 좋은 기회잖습니까?

"내일…이 무슨 날인데요?"

-어이쿠…, 이런. 제가 미리 확인 전화를 드렸어야 했는데. 혹시, 지난주에 통화할 때 제가 초대장 보내드린다고 한 거 기억하십니까?

"아,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나는 테이블 위에 쌓아둔 우편물을 뒤졌다.

영웅이 된 뒤로 기관, 단체, 개인한테서 오는 우편물이 너무 많아 확인 자체를 포기했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바쁘실 텐데요.

"잠시만요."

한참 만에 'DH가디언즈' 로고가 금박으로 찍힌 우편물을 찾아냈다.

봉투를 뜯어보니 현판식(懸板式) 파티의 초대장이었다.

"파티…네요."

하아. 개 가기 싫다.

-시간만 되신다면 꼭 좀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오셔서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축하만 해주십시오. 저희 그래도 그간 통화한 정이 깊지 않습니까?

"...네. 가야죠."

저렇게까지 말하면 안 간다고 할 수가 없다.

-차량을 보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뇨. 제가 나갈게요."

어차피 서울은 들를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고 바로 방을 나섰다.

'자격이 생겼는데도 사냥을 계속 못 하네.'

주말 간 괴수생태지역에 다녀오는 생도들이 슬슬 늘어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불법일 때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이번 주 안에 성룡자원 밥줄만 해결해 놓고 나한테만 집중할 생각이다.

'가만. DH가디언즈도... 아니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쪽 제안은 거절하면서 무슨 염치로 영업질을 하겠나.

게다가 당당히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입 협상을 자기들 창업파티에서 하자는 것도 웃긴 그림이네.'

오픈 날 거절 받으면 뭔가 재수 옴 붙는 기분일 텐데.

외출명부를 적고 로비를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 왜?"

조금 놀랐다.

요 며칠 계속 피해만 다니던 송연희였기 때문.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집에 가?"

"어."

"용인이랬나?"

"본가는. 거기 가는 건 아니고."

이번 주는 용인엔 안 갈 생각이다.

매주 갈 거리는 아니라고, 달에 한 번쯤 들르겠다 말씀드려 놨다.

"아… 따로 사나 보네."

"근데 내가 어디 산다고 말했었나?"

"어, 아니, 그, 들었어. 권하선한테."

얘도 당황하면 어쩔 수 없구만.

뭐 송연희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나에 대해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뭐 할 말 있어?"

...있네.

"뭔데."

송연희는 무슨 돈을 빌리러 온 사람처럼 뜸을 들였다.

빨리해라. 불안하게 하지 말고.

"고마워."

"뭐? …뭐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그날 모른 척해준 거. 얘기는 해야 할 거 같아서."

"어…. 그냥 내가 그게 편해서."

참 적응 안 되네.

"사실은...."

어어, 하지 마라.

송연희가 사정을 설명하려는 듯했다.

"미쳤다고 생각 안 해."

나는 얼른 말을 막았다.

"…?"

"굳이 얘기 안 해도 된다고."

"내가 왜 그랬는지 안 궁금해?"

사정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또 그런 얘길 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짐작은 해. 그러니까 안 들을래."

송연희가 피식 웃었다.

"그래. 금요일 저녁이니까."

"어. 맞아. 그것도 그렇고. 주말 잘 보내라."

"너도."

휴우. 살았다.

돌아서 몇 걸음 걷고서야 비로소 머리로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음…? 내일 쟤도 오는 건가?

#73화, 일타쌍피

-...바쁘신 와중에도 찾아와 축하해주신 귀빈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말씀 전하며 그만 마이크를 놓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럼, 유익한 시간 보내십시오.

짝짝짝짝짝짝짝!

마동욱이 팔을 쓰는 멋들어진 인사로 예를 표하자, 내빈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과 함께 담소가 시작됐다.

"마 실장님!"

막 단상을 내려온 마동욱에게 송연희가 잰걸음으로 달려들었다.

"아…, 오셨어요?"

"오셨… 하! 내가 우리 현판식 파티를 당일에 알아야 해요?"

"우리라뇨. 엄연히 DH가디언즈는 별개의 법인입니다. 송 이사님은 아직 길드 명부에 이름도 없고요."

"마 실장님이 왜 이렇게 됐지? 라인 갈아탔어요?"

"그게 아니라, 솔직히 이번 일엔 딱히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그럽니다."

"이번 일이요?"

"한성준 씨 영입이요. 이사님이 어떻게 관계를 좀 개선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땐 영…"

"시끄럽고요. 오늘 파티 얘기 중인데 갑자기 한성준 얘기가 왜 나와요?"

"오늘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거든요."

"앗."

송연희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안 왔어요. 들어오면 입구에서 연락이 왔을 겁니다."

마동욱이 귀에 꽂힌 인이어를 가리켰다.

"아니 중요한 영입제안을 누가 파티 자리에서 해요?"

"오히려 좋죠. 우리 DH의 시설, 규모, 내빈들의 면면…, 이런 게 다 협상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겁니다. 딱딱하지 않고. 또 제가 실패하더라도 회장님이 한 번 더 말을 해볼 수 있는 자리잖습니까?"

"아빠도 오신대요?"

"막바지에 잠깐 들르신답니다."

"일단 알았어요."

송연희가 한숨을 푹 쉬고 돌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저쪽에 친구분들도 와있는데."

마동욱이 가리킨 곳에선 강선호와 최범균이 태광의 길드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도 DH가디언즈 소속이니 초대장이 나갔으리라.

'근데 저것들도 나한테 아무 얘기 없었네.'

송연희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결과나 알려줘요. 위층에 가 있을 테니."

"도움 안 된다고 해서 그래요? 뭐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냥 계세요. 드레스도 예쁜데요. 아, 아니, 오늘 아름다우십니다."

"됐어요. 그냥… 제가 마주치기가 좀 그래요."

"왜요. 설마 두 분 관계가 더 안 좋아진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그때 마동욱의 인이어로 무전이 들어왔다.

"아. 잠시만…."

-치이익. 한성준 님 초대권 확인됐습니다. 지금 입장하십니다.

송연희는 마동욱이 인이어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서 쪽문으로 달려갔다.

***

하아…. 벌써 힘드네.

이제 막 DH가디언즈의 사옥에 들어섰을 뿐이나, 지금 입고 있는 옷이며 멀리서 작게 들리는 음악까지 벌써 나와는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표정 좀 풀어요."

차유라가 말했다.

"어…."

파티니 드레스코드니 전혀 감을 못 잡던 나는, 결국 차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차유라도 차 대표를 대신해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그녀 덕분에 홀로 화분 따위를 사 들고 오는 망신은 면했다.

하지만 내가 영 적응을 못 하는 데는 차유라도 한몫하고 있었다.

풀-메이크업에 블랙 시스루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함께 걷는 것조차 어색할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TV 속 시상식장이 아니고선 이런 차림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차유라가 쓱 팔짱을 끼고 들어왔다.

"뭐… 왜…."

"그냥 이렇게 하는 거니까 허리나 펴요."

파티장 문 앞에 서 있던 남자 둘이 우리의 걸음에 맞춰 양 문을 열어젖혔다.

"와주셨군요."

마동욱이 기다렸던 것처럼 서 있었다.

"예…. 오겠다고 했으니까요."

파티장 안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몇몇이 나를 알아보고 일행들에게 설명하는 눈치였다.

'쟤들도 와 있었네.'

강선호와 최범균도 보였다.

녀석들은 여기서 나를 볼 줄 몰랐던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어… 아무튼, 귀사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미 영업하고 있는 마당이니 현판식은 그저 길일을 받는 의미고, 이런 교류의 자리 자체가 진짜 목적이지요. 업계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셨으니 성준 씨께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실 겁니다."

"아… 네."

속 모르는 소리를 대충 받아주자, 마동욱은 차유라와도 인사를 나눴다.

"함께 오신 분이 또 반가운 분이네요. 차 대표님도 건강하시지요?"

두 사람도 안면이 있나 보네.

"네. 오랜만에 뵙네요. 연희는요?"

"어… 이사님은 아까… 아니, 아직인가 봅니다."

마동욱은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소개해 들릴 분이 많습니다. 제 얘긴 조금 있다 들으시죠."

용건만 끝내고 튀려고 했더니….

"네."

마동욱이 길을 트며 앞장서는데, 누군가 그를 비켜서 불쑥 다가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어? 안녕하세요."

박대근이다.

하긴 이 업계 주요 인사라면 그가 빠질 수 없다.

박대근은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잘됐다 잘됐어."

그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양반이 호스트 격인 마동욱을 제쳐버렸기 때문인지 지금껏 지켜만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이, 정권!"

박대근은 내 손을 꼭 붙든 채, 큰소리로 누군가를 찾았다.

곧 박대근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저씨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아, 설마….'

"이 친구가 좀 만나자는 걸 그렇게 거절했다며."

젠장. 맞네….

저 아저씨는 자식이 '과활성마력종'을 앓았다던 태광의 부길드장이리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저씨의 눈에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와락.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아니, 저… 인사는 충분하다니까요. 제발…."

울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꺽꺽 울어댔다.

밀쳐내진 못하겠고, 영문 모르는 사람들은 쑥덕대고....

'돌아버리겠네.'

박대근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자, 그가 껄껄 웃다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아아, 뭐 이상한 상황 아니니까 걱정들 하지 마세요. 이 친구 아들이 심한 병에 걸렸었는데, 우리 한성준 영웅님께서 정말 구하기 힘든 약초를 구해다 주셔서 씻은 듯이 나았거든요. 뭐 그런 사연입니다."

아니…, 그걸 말한 게 아니잖아. 이 양반아.

그래도 비밀은 지킨다고 '약초' 정도로 각색은 했다.

갑자기 박수가 쏟아졌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그 틈에 마동욱이 나섰다.

마동욱은 부길드장 아저씨를 떼어내며 말했다.

"자자, 일단 진정하시고. 하실 얘기가 많으실 텐데 이쪽으로 오시지요. 우리 영웅님은 잠시 양보합시다."

"그 영웅님 소리 좀…."

마동욱이 씩 웃고는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

우리는 연회 홀과 연결된 내실로 안내됐다.

회의실 같기도 하고 고급레스토랑의 룸(Room) 같기도 한 공간.

어쩌다 보니 차유라도 함께 쓸려왔고, 마동욱은 눈치를 보다 구석에 눌러앉았다.

'저건 좀 매너 없는 거 아닌가?'

마동욱의 입장도 이해는 됐다.

나와 태광 길드장의 관계를 확인한 상황에서, 어떤 목적의 경쟁자로서 엉뚱한 상상이 들기도 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당사자인 태광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그의 동석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나는 허정권의 말이 끝나감을 느끼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니 없다고만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보답할 길을 알려주시게."

"후우…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면을 벗어던졌다.

뭐 본색을 드러내는 정돈 아니고, 그냥 예의를 차리는 데 지쳐버린 거다.

은혜를 다 갚을 순 없지만, 뭐라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음만 받겠다. 안 된다. 진짜 괜찮다....

이런 실랑이가 10분째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조금 뻔뻔한 게 낫지.'

대충 요구할 거 요구하고 자리를 끝내고 싶었다.

태광의 두 아저씨는 물론이고 차유라와 마동욱까지 집중한 채 내 얘길 기다렸다.

나는 차유라를 슬쩍 보고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 전에 창업을 했거든요. 어떤 일이냐면...."

태광 길드는 이미 해외에서 용병 활동을 해왔던 만큼, 채집대행이나 에이전시 사업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허정권은 내 입에서 부탁이 나오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계약하지."

"...."

내가 스스로 뻔뻔해지겠다 한 것은, 이런 건 공적인 영역이라 개인의 보은으로 성사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너무 쉽게 계약하겠단 말이 나와서 조금 얼떨떨했다.

박대근을 바라보니, 어깨만 으쓱한다.

허정권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안살림은 원래 내 소관이라네. 아직 계약한 곳이 없어서 다행이군. 해외에선 우리가 외국인이라 단기 계약만 했었지."

"저희가 이제 시작이라 태광을 감당하기엔 조금 미숙할 순 있습니다. 조건은…"

"그야 맞춰가면 되는 거고. 한국은 대기업조차도 첫걸음 뗀 건 마찬가지지. 자네가 한다면 무조건 잘 될 거야. 다만 미리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린 완전한 에이전시를 원한다는 거네. 그리고 태광이 쏟아낼 물량은 자네가 상상한 것 이상일 거야."

물건만 수거해주는 채집대행보다, 판매와 정산까지 맡는 에이전시 계약이 우리한테도 이득이었다.

"납품할 기업을 먼저 준비해 둬야 할 거란 말씀이시군요."

"맞아. 그게 준비가 안 되면… 아, 물론 우리야 조금 늦어도 기다려주면 되는 거지만, 자네 회사 업무가 마비될 걸세."

적은 양이면 시장을 통해 처리가 가능하지만, 태광처럼 던전 공략에 미친 길드가 쏟아내는 획득물들은 기업이 아니면 못 받는단 얘기였다.

애초에 가공이 필요한 부산물이나 산업용 등급의 마석 같은 건 일반 시장에서는 매매가 되지도 않았고.

"네. 그건 당연히 준비해 둬야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물건 좀 받아줘."

말끝은 차유라를 향했다.

이쪽은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던 터라, 뻔뻔함의 정도가 달랐다.

"뭐?"

"아니, 그걸…."

앞에 있던 태광의 아저씨들이 외려 놀랄 정도.

그러나 당연하게도 차유라는 덤덤했다.

"그래야죠."

그녀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들은 거기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렸다.

"하나만 여쭤볼게요. 들쑥날쑥할 테지만 산업용 마석만 놓고 봤을 때, 태광의 연간 채집량이 얼마죠?"

차유라가 허정권에게 물었다.

허정권이 급하게 워치를 두드려보곤 대답했다.

"아, 어… 그게… 그러니까 최근 3년간 24, 36, 27톤이군."

"나쁘지 않네요. 50톤은 어려울까요?"

"50? 어휴, 이것도 연중 120일 이상 투입했을 땐데 당장 두 배는...."

허정권이 절레절레하며 난색을 보였다.

"이왕 할 거면 한곳이랑 했으면 좋겠는데."

이건 나한테 하는 소리였다.

JSO에 공급하고 싶으면 태광 하나의 물량만으론 부족하다는 뜻.

'그렇게 많이 필요하다고?'

"그거야 우리가 또 다른 데랑 계약해서 차차...."

응?

한데 차유라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담화의 주인공들이 전부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입구 쪽 구석 자리.

턱을 괴고 있던 마동욱이 움찔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어…. 그렇죠. 합니다! DH도 계약하겠습니다!"

"...!"

나는 마음으로 차유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74화, 계약

"계약서 보낼 때 또 얘기하지. 아니다, 신 대표라고 했나? 그 친구랑 잘 진행해 볼게."

"네네. 감사합니다."

"아니야. 이건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나는 아직 해준 게 없는 거라고."

허정권이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가 돌아섰다. 박대근은 말없이 씩 웃어주고 그를 뒤따랐다.

두 사람이 내실을 나서고 마동욱이 입을 열었다.

"파티는 못 즐기고 일 얘기만 하게 되시네요. 이렇게 된 거, 저도 지금 말씀드릴까 하는데…."

"네.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다.

마동욱이 내실 한구석에서 브리프케이스를 챙겨 들고 내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들어올 땐 들고 있지 않았던 가방인 거로 봐서, 허정권의 일이 아니었대도 이곳으로 안내될 예정이었던 같았다.

"...."

마동욱이 테이블 위에 브리프케이스를 올려두고 잠시 뜸을 들였다.

차유라를 힐끔 보는 게 왜 그런지 알만했다.

내가 차유라를 돌아보자, 그녀가 마동욱에게 말했다.

"어떤 자린지 알아서 있는 거예요. 우린 길드 계획이 없지만, 한성준 씨는 현재 JSO 소속이기도 합니다."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근데 숨길 생각도 없고 어쩐지 보모(保姆) 같은 모양새라 그냥 웃음이 나왔다.

"아... 그건 몰랐네요."

마동욱이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녀 말이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 예,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동욱은 서류뭉치를 꺼내 내가 보기 좋게 밀어줬다.

그리고 DH가디언즈에 대해 소개를 시작했다.

총자본금, 지분구조, 부동산, 지금까지의 지부 설치 상황, 길드원 수 등등....

마치 길드를 팔러 나온 사람처럼 세세한 설명이 한참 이어졌지만, 지겨운 티를 내지 않고 참을성 있게 들어줬다.

'거절해도 싸가지는 지켜야지.'

이제 길드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나한텐 고객이기도 했으니까.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래서 이게 저희가 준비한 조건입니다."

마동욱이 따로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니, 수표구나. 결국, 돈인가.'

나는 액수를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10억이든 20억이든 생각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잘 들었습니다. 우선, 몇 번이나 이렇게까지 제안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DH는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제 계획이랄까…. 장래에 대해선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어떤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당연히 이해합니다. 따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다만, 저는 실패하더라도 최선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하하. 사실, 이 백지수표 한 장을 준비하기 위해서...."

"백지수표요?"

"아. 어라? 혹시 확인을 안 하셨습니까?"

마동욱이 집어 들었던 것을 도로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처음 봤다.

당좌수표라고 적힌 종이에,

'금(金)'자 뒷부분이 깔끔하게 비어있었다.

"...."

나라고 돈 욕심이 없지는 않다. 우선순위가 아닐 뿐.

지금은 조금 신선한 충격이라… 신기해서 만져보는 거다.

...정말이다.

마동욱이 조용히 덧붙였다.

"보통 백지수표는 돈을 아끼는 전략입니다. 대부분이 회사가 각오한 한계치보단 적은 금액을 써넣죠. 발행인이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니까요."

하긴.

잠깐 상상만 해봤는데, 만약 지금 펜을 든다면 얼마를 적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적어 넣으면 한 100억?'

물론 100억을 준대도 거절했을 테지만, 부르는 입장이 되면 그쯤이 한계 같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수표를 다시 테이블 중앙으로 돌려놓으며 물었다.

"근데 어째서 그게 최선이라는 겁니까?"

"저희는 그런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한성준 씨는 이 계좌에서 2,856억까지 출금하실 수 있습니다."

"아… 네? 얼마요?"

나는 마동욱이 농담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눈치는 아니네.

"진짜예요?"

2,856억. 미친 거다.

나도 해외 어떤 유명 헌터가 수천억에 이적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그건 길드가 길드한테 주는 돈이지 개인이 받아먹는 돈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다 빼가시면 다른 조건이 붙습니다. 아니, 조건이라기보다는… 세트 제안 정도가 맞겠네요."

이쯤 되니 나도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세트 제안이라면...."

"길드장까지 맡아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

마동욱의 논리는 이거였다.

원래 있던 용병단체가 아닌 만큼 길드장급 인사의 외부영입이 중요한 과제였는데,

다른 인물을 추가 영입하는 건 자기들로서도 무리고, 누구에게도 나보다 좋은 조건을 줄 수 없으니 위계(位階)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는 것.

"작정했네요. 그런 제안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게."

그래서 결국,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온 참이다.

솔직히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돈보다도 길드장 자리가 컸다.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려던 건, 필요도 없는데 제약만 생기기 때문이었다.

'길드장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DH가디언즈의 인프라와 정보력을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정보력은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근데 계약금을 굳이 그렇게나 깎을 필요 있었어요?"

나는 수표에 대충 10%쯤인 280억을 적어 넣었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다.

단지 '먹튀'할 돈이라 그냥 좀 미안했을 뿐.

"그게 다 부담이야. 자기들이 쓴 돈 만큼 기대를 할 거란 말이지."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기로 한 건 졸업 후다.

그러니까 안 한다는 말이다.

졸업할 때까진 지금처럼 마동욱이나 그의 후임이 길드장 대행으로 일하며 나와 소통하기로 했다.

물론 혜택을 누리는 건 지금부터다.

아마 직위에 따른 권한만 다르지 그 부분은 강선호나 최범균도 마찬가질 거다.

"이제 다리 걸친 회사가 몇 개예요."

"내 말이. 그거 문제는 없나?"

"성룡자원은 공동대표를 내려놓는 게 좋아요. 지분은 상관없고… 우리 쪽은 뭐 '고문' 정도로 바꿔놓으면 되겠네요."

"어."

"그나저나 사업하는 건 미리 얘기 좀 해주지 그랬어요."

"채집대행이라도 먼저 하나 따내고 나서 말하는 게 순서에 맞는 거 같아서."

"처음 뵙겠습니다. K헌터스의 조진국입니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돌아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온 사람이 한 무리였다.

"한성준입니다."

"이쪽은 귀천단의 단장님이신...."

참석한 이상 한번은 겪어야 했을 관심이다.

생각보다 귀찮고 싫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인물 '조진국'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18]

[인물 '염지창'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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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깨달은 것은, 현시점에 대단한 사람─그래서 나조차도 매체에서 들어본 이름─들은 오히려 등장인물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저런 1세대 초인들은 국가적 위기의 '그날'에 대부분 사라질 거란 얘기겠지.

"좋은 일 하셨습니다. 영웅이 되신 것도 축하드리고요."

"감사합니다."

삼촌, 아버지뻘 되는 분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나는 이곳이 내가 살던 곳과 다르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겉으로만 예의(禮儀)를 차리는 게 아니라,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존중했다.

고작 스물두 살짜리가 단체의 장을 맡고,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도,

초인이라면, 또 하는 일이 초인들의 영역이라면 오로지 능력만으로 인정하는 사회.

아니… 좋은 의미가 아니라서 조금 미묘한데 정확히 말하자면 재능으로 평가받는 사회였다.

경험조차도 타고난 재능을 넘을 수 없기 때문.

주변이 겨우 정리되자, 강선호와 최범균이 다가왔다.

"갑자기 니가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나도 내가 이런데 올 줄은 몰랐다."

"...쉬쉬했는데 결국 걸려버렸네."

나는 알고 있었지만, 강선호는 길드 가입 여부를 숨긴 게 민망했던 모양이다.

"와, 오늘 누나 장난 아니네. 여자는 진짜 화장이랑 의상빨이 중요하구나."

"혹시 연희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뺨 맞을지도 몰라요."

최범균은 차유라의 담담한 지적에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어… 땡큐. 근데 송연희는 안 온 듯."

걔가 안 온 건 좀 이상하긴 하네.

"야, 맞다. 아까 그 일은 뭐가 어떻게 된 거냐."

허정권의 일을 묻는 듯했다.

"그냥 니가 들은 게 다야."

"MVP가 너한테 잘하는 게 그거 때문인가 보네."

MVP는 최범균이 박태광을 놀리는 별명이다.

우리가 종합과제에서 우승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비꼼이었다.

"박태광은 알지도 못하는 일이야. 괜히 학원에 소문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디 가서 니 미담 얘기하고 다닐 놈으로 보이냐?"

걱정할 필요 없겠기에 피식했다.

***

잠깐 연회 홀을 나와 용호와 고 변호사에게 좋은 소식을 알렸다.

'술이 좀 오르나. 덥네.'

바람 좀 쐬고 들어갈 겸 아예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쓸데없이 크네.'

고작…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암튼 일개 길드 사옥 주제에 건물 크기가 무슨 구청 건물만 했다.

대충 10여 층 높이에 옆으로도 넓은 최신식 건물.

공사 기간을 생각하면 꽤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니 얼굴에 있던 열기가 조금 가라앉는 거 같았다.

'가만.'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 이젠 그만 가도 되는 거 아닌가?'

계약을 해버렸으니 굳이 송 회장을 만날 이유도 없었고, 사람들과 인사도 나눴으니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차유라한텐 얘기해야지.'

메시지를 보내려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콕팟을 귀에 꽂는 그때, 나는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치고 심장이 덜컥했다.

오픈 테라스 형태의 DH 건물 2층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와 씨. 귀신인 줄….'

그녀도 나를 봤던지 황급히 돌아서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왜 저래?"

투명 강화유리 난간이라 쭈그려 앉은 모습이 고스란히 비췄다.

〈근시안〉이 여전히 조금 깎아 먹고 있긴 해도, 이제 민첩이 9.3에 달하는 나는 벌써 그녀를 알아보았다.

-여보세요? 간다고 전화했죠? 잠깐 기다려요. 나도 나갈 테니.

어느새 연결된 콕팟 너머에서 차유라가 말했다.

"아냐. 잘못 눌렀어. 다시 전화할게."

나는 그렇게 통화를 종료하고 다시 건물로 들어섰다. 그리고 중앙 계단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왔으면 들어오지 거기서 혼자 뭐 하냐?"

여태 쭈그리고 앉아 있던 송연희가 당황한 듯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 그,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

"파티장에 있었다고? 얘들이 너 온 줄도 모르던데."

"나, 나도 못 봤지. 이상하네…. 왜 못 만났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하는 걸 보니, 줄곧 여기 있었던 것 같다.

'뭐야. 나보기 쪽팔려서 그러나?'

그보다 콕팟을 끼고 있는 게, 조금 전까지 통화 중이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너 방금 마동욱 씨랑 통화했지?"

"...."

송연희는 정곡을 찔린 듯 귀를 더듬어 콕팟을 뽑아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꿔서 미소 지었다.

"맞아."

"뭐냐. 무섭게…."

마치 돋보기로 개미를 태우는 어린아이의 미소 같았다.

"입단 계약서에 사인했다며?"

"어. 그렇게 됐다."

문득, 그동안 학원에서 송연희가 고분고분했던 게 다 영입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송연희가 전혀 몰랐을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날 영입하겠다는 의지는 마동욱과 송 회장의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론 나한테 잘 좀 해야 할 거야."

"…?"

"얘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영 상황판단을 못 하네."

송연희가 답답하다는 듯이 검지를 흔들었다.

"글쎄… 니가 좀 신난 건 알겠는데 왜 그런진 모르겠다."

"졸업하면 나도 가디언즈에서 일하게 될 거야. 우리가 동기지만, 동시에 직장 상사와 부하이기도 하다는 말이지."

"아아… 이해했다."

마동욱이 아직 얘기를 다 안 한 모양이네.

"나는 나중에 서울 지부 중 하나를 맡게 될 거야. 우린 계속 합을 맞췄으니 너도 아마 같은 지부에 배속될 거고."

"...그러니까 지부장 대접을 해달라는 말이지?"

"그 정도까진 안 바래. 사회생활의 지혜를 발휘해보라는 거지."

"그래.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아직도 숨어다니는 꼴을 보고, 그러지 좀 말란 얘기를 하러 왔던 건데....

이제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돌아서 계단을 내려가니 뒤따르는 발소리가 경쾌하다.

그런데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아래층이 소란스러웠다.

1층으로 내려오자 보안요원들과 턱시도 차림의 남자 몇몇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녔다.

'뭐지?'

누군가 의문에 대꾸하듯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치익─. 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75화, 송 회장

송영근 회장이 로비로 들어섰다.

언제 달려 나갔는지 마동욱도 다른 중년 남자와 함께 송 회장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결국은 만나고 가네.'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그의 모습은 아주 평범했다.

대기업 회장의 포스라는 건 전혀 없고, 옆집 아저씨 같은 흔한 인상이라는 거다.

'물론 겉모습이 그럴 뿐이지.'

천류회에 몸담은 것부터가 절대로 범상(凡常)할 수 없다는 얘기였으니까.

스윽.

"…?"

작은 옷자락 소리에 뒤를 보니, 송연희가 고개를 숙이고 내 등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뭐하냐?"

"쉿!"

송연희랑 같이 있으니 당연히 인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자기 아버지를 왜 피하는진 모르겠지만, 의미 없는 짓인 건 분명했다.

벌써 마동욱이 나를 발견하고 송 회장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었기 때문.

"안녕하세요."

'악! 인사를 왜 해!'

송 회장에게 인사를 건네니 뒤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눈이 마주친 걸 어떡하냐.

"오오! 반갑네."

말뿐인 반색이 아니라 송 회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주 다가서진 못했다.

송연희가 내 수트 뒷자락을 움켜잡고 있었다.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이제야 뵙네요."

"하하, 그래. 일부러 서두르지 않았지.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니까. 이제 앞으론 자주 볼 테고."

"…앞으로요?"

"마 실장한테 얘기 들었네. 한 식구가 됐다며?"

"아. 거절할 수가 없게 판을 짜 놓으셨던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그랬나? 한데 그건 전적으로 마 실장 생각이었네. 나도 듣고 좀 놀랐어. 그리고 무릎을 탁! 쳤지. Why not?"

…얼래?

"회장님 지시가 아니었다고요?"

마동욱을 돌아보자, 그가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직접 지시하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잡아라. 나는 전권을 다 줬으니 실패하면 네가 거기까지인 거다. 라고 하셨죠."

"아하. 그래서 욱하신 거군요."

"우, 욱하다뇨. 아니요. 아닙니다, 회장님."

마동욱이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항변했다.

"하하하하."

송 회장은 그게 재밌다는 듯이 화통하게 웃어젖혔다.

"자네, 유머 감각은 아버지를 안 닮았군. 다행이야."

장난을 좀 친 건 맞는데 유머라고 할 정돈가 싶다.

"일단 들어가지. 쭉 자네랑 얘기하고 싶네만, 손님들께 인사는 해야 하니."

"네."

송 회장이 몸을 돌리다 멈칫하고 돌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회장님."

송 회장은 중년 남자의 말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젓더니 내 아래쪽을 바라봤다.

"…?"

고개를 숙여보니 내 다리 사이로 송연희의 드레스 자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걸렸네.'

나름 잘 가려지긴 했지만, 사람 뒤에 몸을 숨긴다는 게 처음부터 말이 안 됐다.

내가 스모선수도 아니고….

아마 마동욱은 알고도 못 본 척했겠지.

"뒤에 숙녀분은… 함께 온 파트너인가?"

송연희가 움찔했는지 상의 뒷자락이 가볍게 당겨졌다.

"아뇨. 파트너는 아닌데... 걸렸잖아. 그냥 나와."

"하아, 씨."

송연희는 입을 삐죽하며 옆으로 걸어 나왔다.

"음? 너…."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송 회장을 손가락으로 재빠르게 가리켰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진짜 화낼 거니까."

'...?'

대뜸 왜 저러는지 의아해하는 동안, 송 회장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흠흠. 그럼 천천히 있다 들어오시게. 아니, 이대로 사라져도 찾지 않겠네."

"아빠!"

송연희가 버럭 소리쳤다.

'아…. 저 양반이 자꾸 엮으려고 한다고 그랬지.'

나는 그제야 그녀가 몸을 숨긴 이유를 깨달았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송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만큼 가던 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부딪쳤다.

"아! 한 대표. 내가 축하하는 의미에서 작은 선물을 하나 할까 하는데 그건 받고 가게나."

"선물이요?"

"대표라뇨?"

거의 동시에 송연희가 다른 걸 되물었다.

송 회장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마 실장이 아직 얘길 못했군. 잘 모셔. 네 옆에 있는 친구가 바로 DH가디언즈의 초대 길드장이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스라친 송연희가 목을 뻣뻣이 돌리고는 내게 확인을 요구했다.

"설마. ...진짜야?"

"어. 그렇게 됐다."

털썩.

송연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

"어, 왔네? 안 오는 줄 알았다."

"...."

송연희는 최범균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차유라에게 눈인사를 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한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웨이터가 들고 있던 쟁반에서 샴페인 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이어서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에 강선호가 중얼거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 본데?"

최범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뭔가 쎄하다. 닥치고 있어야지."

그때, 차유라가 나를 쳐다보기에 '맞다'는 뜻으로 눈만 깜빡해줬다.

그녀는 그걸로 저간의 사정을 모두 이해했다.

-...그럼, 진행은 우리 마 대표에게 넘기고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송 회장이 간단한 인사말을 전하고 마동욱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어우….'

단상에 오른 마 실장을 보니 새삼 길드장 자리의 무게가 실감 됐다.

뭔가 포스라는 게 그렇다.

연배, 사회 경험, 또 그런 것들에서 나오는 분위기는 능력과 별개의 문제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진짜 길드장으로 활동하게 될 것도 아니고, 졸업 전까진 공식 발표도 하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 걱정할 부분은 아니었다.

이어서 빙고 게임이 진행됐다.

흔한 게임이라도 호응이 제법 좋았다.

걸린 상품의 가치가 수천만 원에서 억대를 호가하는 것들이었기 때문.

사실상 송 회장의 참석 의의가 상품제공자 역할 같았다.

-아머베어. ...없습니까?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말이죠.

괴수 이름으로 하는 빙고다.

'두 개만 더.'

-그리고… 쿠카!

누군가가 빙고를 외쳤다.

"하. 운빨 존망겜."

최범균이 카드를 구기며 구시렁댔다.

"미친 새끼…."

최범균의 언행이 뭔가 자리와 동떨어져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내 반응에 뒤늦게 움찔한 녀석이 주변을 살피고 안도했다. 혹시 송연희가 들었나 싶은가보다.

"근데 뭐 진짜 심각한 일인가?"

최범균이 송연희 쪽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술기운 탓인지 울화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진 송연희가 열변을 토하고, 차유라가 담담히 들어주고 있었다.

"심각한 일이면 굳이 여기 있겠냐?"

"그건 그렇네…."

근데 얘가 누굴 걱정하기도 하네.

그러고 보니까…

쥐 잡듯 갈굼을 당하는 모습에 자꾸 까먹지만, 강선호가 적(籍)을 옮긴 뒤에도 끝까지 송연희 곁에 남는 건 최범균 뿐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너 혹시 막 리더쉽 있고 똑 부러진 스타일 좋아하냐?"

"갑자기 뭔…, 여자?"

"어."

"그럴 리가. 난 조용하고… 부드러운… 타입이…."

송연희랑은 전혀 상관없는 타입을 말하는데, 스스로도 이게 맞나 하는 표정이다.

"아, 몰라. 그냥 다 싫어. 여자는."

최범균은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털어버렸다.

아직 아닌 건지 아예 아닌 건진 모르겠지만,

대화 그룹이 친군부의 길을 걸어도 송연희 곁에 남았으니 의심해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누가 불쑥 고개를 숙여서 쳐다보니 인이어를 낀 보안요원이었다.

"네."

그는 다른 말 없이 홀 뒤편을 가리켰다.

송 회장이 잔 두 개를 들고 건배하듯 들어 올렸다.

말 상대 좀 해달란 뜻이다.

"이야. 영웅 새끼는 다이렉트로 회장이랑 노는구나."

사정은커녕 같은 길드 소속이라는 것도 모르는 최범균은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그래서 넌 이게 좋아 보이냐?"

"X 같다고 해도 공감 안 되니까 그냥 가라."

나는 픽 웃고 송 회장에게 다가갔다.

송 회장 옆에 있던 아저씨가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이게 뭐죠?"

"아까 말한 선물이네. 내가 골라서 슬쩍 빼놨어."

송 회장이 장난스럽게 뒷말을 속삭였다.

"열어봐도 돼요?"

"아냐 아냐, 나중에. 이거나 받게."

그가 들고 있던 언더락잔을 건넸다.

"술은 좀 하는가?"

"실수 안 하게 조절만 하는 정돕니다."

송 회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루살카의 묘약이라는 술이네. 요정이 인간이 되기 위해 마셨다는 전설을 따왔지."

"아. 들어는 봤습니다."

게임에서 봤다.

'개 비싼 술이었네.'

후반부 퀘스트를 위한 친밀도 작업에 필요한 술이었는데 1병에 2천만 원 정도 했던 거로 기억한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솔직히 술맛은 잘 모른다.

[중독되어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

탁!

"헛!"

나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송 회장의 잔을 쳐냈다.

송 회장은 향을 좀 더 즐기다 이제 막 입에 대려던 참이었다.

쨍그랑!

날아간 언더락잔이 깨지며 일순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표정, 행동, 움직임….

딱히 수상한 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무슨 짓입니까!"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나를 꾸짖었다.

송 회장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뭐 때문에 그러나?"

꽤 당황스러울 텐데도 송 회장은 차분하게 물었다.

"독이 들어있었습니다."

송 회장이 그제야 눈을 홉뜨며 소리쳤다.

"자네는…! 마셨지 않은가! 어서 해독제를 가져오게!"

옆에 있던 아저씨가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게임도 중단됐다.

나는 송 회장에게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독성면역이거든요."

"오오! 그게 정말인가? 자넨 알면 알수록…."

"아니, 그보다 저 술은 누가 서빙했습니까?"

"어. 그냥 웨이터네. 얼굴을 다시 보면 알 테지만...."

범인이 파티장을 떠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곧장 디텍션(탐지마법)을 펼쳤다.

다들 생각이 비슷했던지 곳곳에서 디텍션의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늦었나?'

범위를 최대범위로 넓혀도 수상한 인영을 찾지 못했다.

파티장 안에는 나보다 강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도 있을 테지만 누구도 어떤 흔적을 찾았다는 말이 없었다.

주변 탐색에 집중하는 동안, 마동욱과 송연희, 차유라가 모여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한 대표가 먼저 알아채고 막아줬네."

마동욱은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내빈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인원 통제를 안 하기도 뭐하지만, 크게 의미는 없을 거다.

사주한 자가 이 안에 있대도 어차피 찾을 방법이 없다.

웨이터처럼 근무자 중에 섞여 있었다면 아예 정체를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서비스 근무 중인 사람들은 어디 소속입니까?"

"외부업체입니다. 행사지원만 전문적으로 하는."

"그쪽에 오늘 보낸 인원 명단 요청해서 비교부터 해보죠."

마동욱이 바로 콕팟을 꽂았고,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자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 회장 무리에서 조금 떨어졌을 때 전화가 연결됐다.

-...갑자기 전화하는 건 위험하다.

"알아. 급한 일이라. 혹시 퇴근했어?"

-안 했다.

아직 내 주변에 있단 얘기다.

그는 계속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지만, 보고할 내용은 내 검수를 받고 있었다.

"3분, 아니 한 5분 전에 내가 있는 건물을 급하게 나가는 사람을 봤나 해서."

-...아마도. 그게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라면 지금 보고 있다.

#76화, 부탁

"보고 있다고?"

주자헌의 시야에 있을 정도면 디텍션에도 탐지가 되어야 했다.

-지금 옥상인데… 길이 아닌 곳으로 가기에 이상해서 보고 있었다.

'아….'

DH 사옥 주변은 정면 방향을 제외하고는 들과 야산뿐인 곳이었다.

옥상이라면 사수의 눈이 디텍션보다 훨씬 먼 거리를 보는 게 당연했다.

"그놈 잡아. 무조건."

-잡기는 좀 멀다. 어림잡아도 1.2㎞쯤 되는 거리야. 맞추는 거야 쉽겠지만….

"그럼 쏴. 죽이진 말고."

-총소리가 나면 관계의 노출을 피할 수 없을 거다.

"내가 해결…."

띠링.

누구한테 배운 버릇인지 알만했다.

...한시가 급하긴 하지.

나는 손짓으로 마동욱을 부르고 송 회장 곁으로 다가갔다.

"곧 총성이 들릴 겁니다."

"…범인을 찾은 건가?"

"어디서 말입니까?"

"네."

"총성은 무슨…."

송 회장의 질문에 대답해준 뒤 마동욱의 말을 잘랐다.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총기를 구해서 우리 쪽에서 오발한 것으로 얘기 좀 맞춰주시고, 손님들께는 지금 상황을 최대한 축소해서 잘 해결된 거로 전달해 주세요."

타앙!

말을 마치자마자 총성이 울려왔다.

덩달아 홀 안의 술렁임도 커졌다.

"아, 알겠습니다."

마동욱이 황급히 단상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마동욱이 막 마이크를 잡았을 때, 아까 뛰어갔던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여, 여기 해독제입니다."

"아. 한 대표는 독성…."

송 회장이 됐다고 손을 내젓는 걸 얼른 끼어들어 낚아챘다.

"아뇨. 그래도 도움이 됩니다. 속이 안 좋은 건 똑같거든요."

"어이쿠. 그랬나?"

퐁!

꿀꺽꿀꺽.

[중독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후우.'

전에 생존시간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만큼 티 안 내고 참기도 힘들었으리라.

다행인 건 산독멧돼지의 독보다 더하지는 않더라는 거였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주위를 둘러보다 강선호와 눈이 마주쳤다.

"...."

걱정스러운 눈빛.

살짝 뜨끔했다.

저 녀석이야말로 진짜 독성면역이었으니까.

독성면역은 사실… 자신이 독을 마신 줄도 모르는 수준이어야 했다.

'괜찮아.'

대충 입 모양으로 그리 말하고 송 회장을 돌아봤다.

"회장님."

"어."

"조용히 얘기 좀 하시죠."

"아… 그럴까?"

나는 송 회장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강선호뿐만 아니라 애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

웬만큼 거리를 벌렸을 때 워치가 짧게 울었다.

(주자헌: 잡았다. 먼저 적당한 곳에 가두고 주소를 보내주지. 곧 퇴근해야 해서)

액정을 닫고 송 회장에게 물었다.

"누굴 노렸던 건진 알고 계시죠?"

송 회장이 술을 누구랑 마실진 흉수도 알 수 없었을 터. 초인을 노리기에는 수법도 빈약했다.

해독제조차도 독이 되는 비(非) 초인이라야 사리에 맞다.

"그야 물론이네. 자네 덕에 내가 살았지."

"예. 생색내려고 여쭤본 게 아니고요. 범인이 가장 궁금할 사람이 회장님이란 건 저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근데… 안타깝게도 범인을 그냥 넘겨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은 안 된다…. 조건이 있군."

그는 황당할 수 있는 말에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한 가지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내용이 있어야 약속을 할 것 아닌가."

"그냥 모른 척해주시는 겁니다. 내용을 들으시는 순간 원치 않는 일에 개입하게 되실 수 있습니다."

"누구의?"

"제 일이요. 개인적인."

송 회장이 빙긋 웃었다.

"그럼 조금 개입해보고 싶군."

"난처해지실 수 있습니다."

송 회장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을 추궁한들 끝내 사주한 자를 밝힐 수 없을지 모릅니다. 정말 모르는 놈일 수도 있구요."

"그야 그렇겠지."

신성그룹이 머리를 스치지만, 아닐 확률이 높다.

신성은 아버지가 초상작전사령관이 된 후로 방귀도 마음대로 못 뀌는 처지였으니까.

또한, 송 회장에게 개인적 원한을 품은 자일 확률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럼 회장님께서는 이제 생각하실 겁니다. 이게 '나'를 노린 것인가, 아니면 '천류'를 노린 것인가."

송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천류를… 아는가? 혹, 자네 아버지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런 게 있다는 거랑 아버지와 회장님의 연결고리라는 거 정도. 다만, 저도 몇 번의 위험을 겪어서 천류를 적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건 알게 됐죠."

"그랬군…. 맞네. 나는 이 일을 파헤치고 회(會)에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어. 소동 자체는 소문이 날 테니."

"네. 하셔야죠. 하지만 적당한 각색이 필요합니다."

"그건… 조금 곤란하군. 회에는 거짓을 보고할 수 없다네."

"거짓이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모른 척이라고."

"...말해보게."

"흉수가 회장님을 노리고 산독(散毒)했으나, 함께 있던 DH 인물이 먼저 음독하여 피해는 없었다. 범인은 곧 잡혔다. 제 말에 거짓이 있습니까?"

"모른 척이란 건?"

"그 DH 인물이 누군지입니다. 사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관심도 없을 부분이죠."

"흠…. 결국 자네는,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걸 숨기고 싶은 거로군."

"맞습니다."

송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모로서 자식의 활약은 무엇보다 듣기 좋은 소식일 걸세. 굳이 숨길 필요가…"

"더해서 제가 DH와 계약한 것도 말씀 안 하셨으면 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그냥…, 이제 스스로 사냥할 나인데 자꾸만 먹이를 입에 넣어주십니다."

송 회장이 껄껄 웃었다.

"품을 떠난 자식도 부모에겐 영원히 어린아이지."

"압니다. 하지만 성장에 방해가 되겠죠. 거리를 조금 두려고 합니다."

"훌륭하군. 그러니까… 원치 않는 개입이라는 게 자네 부자 사이였군."

"저랑 비밀을 가졌으니 저희 아버지 대하시기가 조금 껄끄러우실 수 있죠. 입이 간질간질하시다거나."

송 회장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하. 확실히. 입은 좀 간지럽겠네."

~지잉.

워치를 흘끔 보니 주자헌이 보낸 주소였다.

근거리 공유기능을 켜고 송 회장에게 바로 주소를 복사해 날렸다.

"범인을 가둬놓은 장솝니다."

송 회장이 잠깐 워치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놈을 잡은 친구는 누군가?"

나는 잠깐 고민하다 대꾸했다.

"아버지가 저한테 붙인 미행입니다."

"저런. 그 정도였나? 이제 자네가 왜 그러는지 확실히 알겠네."

송 회장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가만. 자네가 알아챈 건 그렇다 치고. 어째서 그 친구가…."

"이제 제 사람이니까요."

송 회장이 손뼉을 짝 치면서 감탄했다.

"한 대장이 정말 부럽군. 나도 자네 같은 자식이 있으면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할 텐데 말이야."

송 회장은 생뚱맞게도 우리 부자의 첩보전(?)을 부러워했다.

나는 나름 심각한 얘길 해야 하는데.

"아무튼…, 그래서 총성이 오발이어야 하는 거고요."

"그래그래. 그것도 이해했네. 범인을 잡은 게 그 친구면 들킬 테니까. 재밌다. 재밌어."

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말씀하시면…."

"그 친구는 죽겠지. 알았다니까."

"...."

아버지를 확실히 알긴 하는구나.

나는 할 얘기가 끝났다는 의미로 몸을 반쯤 돌렸다.

송 회장이 상념을 깨고 내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나도 부탁 하나 함세."

"아하, 그런 식으로 나오시는 겁니까?"

조금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송 회장의 눈빛은 진지했다.

"조건을 거는 게 아니네. 진짜 부탁이야."

나는 웃음기를 빼고 말했다.

"예. 가능한 거라면요."

"자네가 겪었다던 위험 말이야. 나도 오늘 일을 겪으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게 됐네."

"송연… 따님 말씀이시군요."

송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 사람이 자네뿐이네. 내 나름도 조치를 하겠지만, 학원 내라면 방도가 없지 않나. 자네가 잘 좀 지켜주게."

짐작한 얘기지만 조금 당황스럽다.

어찌 보면 부탁이라고 할 것도 없고, 다르게 보면 함부로 할 약속이 아니었다.

"그거야… 같이 있을 때는 당연히 뭐… 저도 최선을 다해서… 그러겠지요. 동아리 때문에 대부분 붙어있긴 하니까요…."

"남자답게 확실히 얘기해 주게. 나한텐 이제 하나 남은 자식이야."

'이제 하나 남은'이라는 말이 결정타였다.

나는 송 회장의 짠한 표정에 어쩔 수 없이 끄덕였다.

"입으로."

"제가 지킬 수 있는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보겠습니다."

"누구를. 다시."

아이 씨.

"...가능한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송연희를, 꼭 지키겠습니다. 됐어요?"

송 회장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케이. 잘 부탁하네."

***

초상작전사령부 청사 인근의 오래된 2층 주택.

구(舊) 추해관 멤버 5인의 보금자리다.

쓰윽. 쓰윽.

주자헌이 어두운 마당 평상에 앉아 총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밖에서 뭐 해. 왔으면 들어오지."

2층 창문에서 홍타오가 큰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다들 들어왔냐?"

"밍지에랑 훼이천은 아직이다."

"명이랑 혜성이다."

"입에 잘 안 붙어. 우리끼리 있을 땐…."

"자꾸 써야 붙는 거다. 홍도야."

"X팔. 장홍도… 장홍도. 발음 이상해."

"한국말도 빨리 배우고."

"...넌 속이 편하냐? 저 새낀 뭐 저렇게 순응이 빨라."

앞에서 대거리 좀 해야겠던지 장홍도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쿵!

주자헌은 그를 쳐다도 안 보고 말했다.

"집 꺼진다. 곰 같은 놈아. 3, 40년은 된 집이라 조심해야 해."

"잡소리 하지 말고.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하자. 계속 이렇게 개처럼 있을 거야?"

"떠돌이 개보단 집 있고 밥 있는 개가 낫지 않냐?"

"장난하는 거 아냐. 애들도 다 너 보고… 어라?"

장홍도는 말을 하다 말고 코를 킁킁거렸다.

주자헌의 라이플에서 은은한 화약 냄새가 올라왔던 것.

"너 총 쐈냐?"

"어."

"오늘도 그 새끼 미행하다 온 거 아니었어?"

"어. 했어."

장홍도가 잠깐 눈을 껌뻑거렸다.

"아니, 근데 총을 왜 쐈냐고…. 이 꼴통 새끼 이거 사고 친 거 아냐?!"

드르륵.

"왜 이렇게 시끄러워…. 누가 사고 쳤다고?"

1층 창문이 열리며 연한 갈색 머리의 여인이 구시렁댔다.

그녀는 잠에서 깬 듯 거슴츠레한 눈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 색처럼 밝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오란, 너도 나와봐. 미행 임무 중인 얘가 총 쏠 일이면 사고 아니냐?"

"진호연."

주자헌이 조용히 이름을 정정했다.

"아니, 씹. 지금 그게…."

"뭔가 일이 벌어진 거 같긴 하네."

진호연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창문을 넘어 마당으로 나왔다.

"너희 들어갈 때 발 꼭 씻어라."

장홍도는 주자헌이 자꾸 딴소리만 하는 통에 울화통이 터졌다.

"이런 개…! 속 터지게 하지 말고 말 좀 해보라고!"

짝!

진호연이 방방 뛰는 장홍도의 등짝을 후려쳤다.

"가만히 있어. 쟤는 너 열받으라고 일부러 더 그러는 거 아직도 몰라?"

"아니, 저 새끼가…."

"스읍!"

진호연이 눈을 부라리자, 장홍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잠시 침묵을 유지하자, 주자헌이 입을 열었다.

"추해관은 해산했다."

"...."

"...."

"너희들도 짐작은 했겠지. 내 말은… 니엔젠이 직접 말했다는 뜻이다."

"만났어…?"

"언제! 오늘?"

"좀 됐어."

"야이 씨! 그럼 왜 이제 얘기해!"

장홍도가 버럭 소리쳤다.

주자헌은 그러거나 말거나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 녀석은 우릴 구하지 못해. 당연히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고…."

장홍도가 피식 웃었다.

그 역시도 그걸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한상철이 니엔젠의 계획에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면, 우리의 희생이 녀석을 지켜낸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라는. 물론 자발적인 희생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주자헌이 쓰게 웃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러니... 더 이상 빚은 없다."

"…!"

"…!"

진호연과 장홍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희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 개처럼 살기 싫으면 알아서 방법을 찾아보든지."

진호연이 평상 한편에 대자로 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는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네."

장홍도는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서 생각에 잠겼다.

스윽. 지익─.

손질을 끝낸 주자헌이 라이플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말 잘 듣는 개가 되기로 한 거냐?"

장홍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나는 늘 말 잘 듣는 개였지."

"병신 새끼. 자랑이다."

주자헌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장홍도였다.

"그런데."

"…?"

"내가 주인을 선택한 건 처음이더라."

"뭔 소리야? 한상철한테도 잡힌 거지 네가 선택한 건…."

"나는 한성준을 선택했다."

"무, 뭐?"

장홍도가 입을 쩍 벌렸고,

"방금 뭐라고 했어?"

진호연도 벌떡 일어났다.

"너 애 보기가 취향이었어?"

진호연의 말에 주자헌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애 보기라…. 니엔젠이 새 동료로 한성준을 찍었던데."

""...!""

#77화, 선물

이금환 회장이 신문을 테이블 위로 던져놓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고 보면…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게 다 저놈이 나타나고부터였어."

반만 펼쳐진 새 신문 1면 구석에는 한성준의 사진과 함께 단독인터뷰라는 타이틀이 찍혀있다.

금력으로 좌지우지되던 이 나라가, 세계가… 언제부턴가 문자 그대로의 '힘'을 더 두려워하고 떠받들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싸워온 결과, 세상의 변화에도 신성은 굳건하게 왕위를 지켜올 수 있었다.

"쉽지 않은 부자야…."

똑똑.

노크에 홀로 껄껄대던 자조가 멎자, 문밖에서 잠시 사이를 두고 일정을 아뢰는 집사의 말이 들려왔다.

"회장님. 채비하셔야 합니다."

검찰에 출두할 시간이었다.

멎었던 웃음이 다시 터졌다.

처지가 우스웠던 탓이다.

한상철은 그의 예상보다 점잖은 대응을 해왔다.

오직 자신 하나만 물어뜯는 것에 그쳤기 때문.

그러나 그만큼 집요하고 철저했다,

"허나 나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

시퀀스 평가주간이 시작됐다.

학기의 마지막 주차에 그간 배운 것을 시험하는 건데,

홀수 학기에는 이론시험으로, 짝수 학기에는 실기시험으로 진행된단다.

[이벤트「숙적」이 생성됩니다.]

'이건 또 뭐야….'

직접 어떤 행동을 하던 중이 아니었기에 조금 황당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제 일일이 긴장하고 걱정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나였다.

어쨌든 볼륨 증가는 반길 일이니까.

"20분 남았다."

첫째 날 3교시, 오늘의 마지막 시험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 풀었나?"

"예? 아, 네."

"전송했으면 나가도 좋다."

"네."

시험은 태블릿PC로 치러졌기에 따로 답지를 적을 필요는 없었다.

'하아…. 지치네.'

한 과목 시험에 무려 180분이 배정됐다.

문제 수도 그만큼 많았다.

문 쪽으로 걸어 나갈 때 조용히 의자 옮기는 소리와 함께 차유라가 일어섰다.

'역시 차유라가 1등이려나?'

공부를 안 해서 나도 1등은 어려울 거다.

〈창조적 시선〉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과목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초상사회사'는 이 땅에 초상현상이 나타난 뒤 일어난 세계역사를 다루는 과목인데, 국외의 사소한 사건들은 〈창조적 시선〉의 영향 밖이었다.

"잘 봤어요?"

굳이 기다리지 않고 복도를 나가는데 차유라가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뭐 적당히."

"이론 박사님이 적당히 봤으면 잘 본 거네요."

나는 대꾸 없이 웃었다.

"어디 갈 거예요?"

"이 시간에 가긴 어딜 가. 기숙사나 가야지."

미친 시험시간 덕분에 벌써 저녁 8시였다.

"그럼 동구는…."

"내일이나 잠깐 들러서 양껏 먹여주려고."

어차피 내일 마지막 시험이 초상사회사였으니 대충 찍고 한 30분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다.

"근데 그건 왜. 뭐 할 말 있어?"

"할 말도 있고 전할 소식도 몇 개 있어요. 바쁘면 정리해서 문자로 보내줄게요."

"아니 바쁜 건 아닌데…. 가면서 하면 되잖아."

"나는 생도회실로 갈 거라서요."

아, 거기서 시험공부 할 모양이네.

"그쪽으로 가 그럼."

차유라가 잠깐 워치 화면을 두드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줄 것도 있는데 락이 안 풀렸네요."

"아직 시험 안 끝났으니까."

컨닝 방지를 위해 시험시간 동안은 인터넷과 메신저 따위의 워치 기능이 잠겼다.

차유라는 생도회실에 가는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길을 걷는 사람이 우리 둘뿐이지만, 차분히 할 얘긴가 해서 나도 재촉하진 않았다.

생도회실에 들어서자, 차유라가 불을 켜며 물었다.

"제 얘기부터 할까요, 소식부터 전해줄까요?"

...순서는 상관없는데.

그래도 의자에 앉는 동안 생각하고 대꾸했다.

"할 얘기부터 해."

"그러죠."

차유라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계속 반복되는 기이한 꿈에 관한 내용이었다.

"...결국, 성준 씨가 나타났죠."

"나? 내가?"

차유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루프(loop)가 깨졌어요. 그리고 분리를 경험했죠. 꿈속의 내가 느끼는 것에 공감하지 못해서요."

"그래서…?"

솔직히 차유라가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긴 힘들었다.

왜 이런 얘길 하는지도.

그래도 그냥 들었다.

"나를 관찰자 시점으로 보게 됐어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웃고, 화를 내는 걸 지켜봤죠. 왜 그랬는지는 기억 안 나요. 하지만 연관된 감정이 뭔지는 이해했죠."

"뭔데?"

"애정이요."

나는 잠깐 머리가 굳었다.

그러나 이내 꿈에 관한 얘기임을 떠올렸다.

'이것도 무슨 감정학습 같은 건가?'

"...그러니까 잘 결론이 났다는 소리지?"

"결론은 아직 없어요. 이성적 추측일 뿐 경험데이터는 전혀 없으니까요."

"내가 이해력이 딸리나…?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을 도무지 모르겠음."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한번 사귀어보자고요."

"…!"

***

송연희는 한성준이 생도회실을 나서는 걸 보고 재빠르게 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아예 한층 더 위로 도망쳤다.

'하아….'

겨우 창피함을 잊을 만하니 졸지에 그를 상사로 모시게 생겼다.

말도 안 되는 인사에 분노할 새도 없이, 그는 회장의 목숨을 지켜냄으로써 노련한 대응능력을 각인시키기까지 했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일.

송연희가 다시 한성준을 피하는 건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쟤는 왜 아빠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한 거야.'

바로 오늘 아침, 송 회장이 보내온 1개의 녹음파일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송연희를, 꼭 지키겠습니다.

송연희는 그 녹음파일 속 목소리가 온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맹세라도 하듯 단호한 음성.

'...미쳤나 봐 진짜.'

아무런 티도 안 내더니 대뜸 아빠한테 가서 그런 소릴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기가 뭔데 나를 지켜.'

뚜벅뚜벅뚜벅…

"...."

송연희는 아래층에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하고야 슬그머니 계단을 내려갔다.

생도회실에 들어서자, 책더미를 뒤지던 차유라가 문가를 돌아봤다.

"왔어?"

"어…. 바로 와 있었구나."

둘은 여기서 함께 공부하기로 미리 약속했었다.

세븐은 동아리방을 팔아치웠는데, 멤버 전부가 생도회 임원이라 활용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생도회실은 세븐만의 전용공간이 아니라는 게 흠이지만, 동아리방을 3단계로 업그레이드해야 얻을 수 있는 수준의 효과가 적용되어 있었다.

"시험 어땠어?"

차유라의 물음에 송연희가 울상을 지었다.

"완전 망했어."

엄살이 아니었다.

문제의 녹음파일을 듣고 1교시 시험을 치르느라 시간 부족으로 8문제나 못 풀었다.

"내일 만회해야겠네."

"그래서 될 게 아니야. 근데… 한성준도 같이 왔었어?"

"아, 응.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일 얘기?"

"아니. 개인적인."

송연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일 얘긴 묻지 못하겠지만, 아니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차유라는 웬만해선 숨기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개인적인 얘기도 해? 한성준이랑?"

"별건 아니고…."

"응."

"사귀자고 했어."

"그랬… 뭐? 누가? 언니가?"

송연희가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뛰어넘었다.

"그래.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언니는 그렇지….'

차유라만이 그게 별일 아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안. 아무튼, 언니가 먼저 그런 얘길 했다고?"

"응."

"뭐래?"

"거절했어."

"아악!"

송연희는 너무 이입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다시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을 텐데도, 차유라는 전혀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쓴다고 해도 티가 안 날 테지만.'

근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성준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야?"

"그걸 몰라서 얘기한 거야."

"흐음...."

송연희는 차유라를 10년 이상 봐왔기에, 어렴풋이는 이해했다.

"걔가 뭐라고 하면서 거절했는데?"

"바쁘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다고."

"딱 그렇게만 말해?"

"응."

송연희는 못 쓰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핑계다. 그것도 아주 성의 없는.

하지만, 동시에 한성준이 왜 그랬는지도 알 것 같았다.

'...참 여러 가지로 사람 곤란하게 하네.'

송연희는 차유라의 호기심(?)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

아오, 개 놀랐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프러포즈였다.

차유라니까 이해되는 일이지만,

또 차유라라서 다행이었다.

거절해도 서로 불편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었고, 제안(?) 자체도 진짜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

'아마 친밀도 탓이겠지.'

수치를 확인할 순 없지만, 이미 많은 동요(動搖)를 안겨줬으니 지금쯤 우리 사이의 친밀도가 꽤 높을 건 자명한 일이다.

친밀도는 시스템이 주관하는 인물 사이의 거리인 만큼, 당연히 무감증 위에 적용될 터.

충분히 애정, 애착 같은 감정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리라.

침대에 걸터앉아, 아까 차유라가 보내준 영문 기사를 다시 띄웠다.

익숙한 단어로 뭐에 관한 소식인진 대충 눈치챘지만, 번역기를 돌려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같이 있을 땐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었다.

'오…! 한 방에 터트렸구나.'

[한국의 마법공학 회사 JSO는 황소거미 체액의 새로운 활용법을 공개했다.]

[2029 코펜하겐 마법공학 심포지엄, JSO의 CEO 차는 '인공 마력강 생성장치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국내 언론이 다시 뉴스로 내보내고 나면 주가도 많이 뛰겠지.

'지금이 얼마더라?'

...37,050원!

포털에 JSO를 검색해보니 오늘 벌써 상한가로 마감했다.

하긴, 보통 이쪽이 기사보다 빠르다.

워치를 닫고 훈련복을 벗다가 책상 꼴이 눈에 들어왔다.

'씹….'

쌓기만 한 우편물을 이제 좀 정리할 때가 됐음을 깨달았다.

'바닥에 앉아서 천천히 하지 뭐.'

일단 싹 다 쓸어 아래로 떨궜다.

후두두둑. 툭!

"억."

조금 묵직한 것이 발등을 때렸다.

"아… 이거."

선물 포장된 납작한 상자.

얼마 전, 최범균이 누가 전해주랬다며 들고 온 물건이다.

그날 일이 떠올라 살짝 짜증이 돋았다.

"쯧…. 그 새낀 누가 줬는지도 기억 못 할 걸 왜 넙죽 받아와서는."

간혹, 팬심이라며 선물을 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게 상당히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받으면 뭐라도 보답해야 할 것 같아 그동안 전부 다 거절했었다.

아무튼.

'이건 돌려줄 사람을 모르니 어쩔 수 없지.'

선물 포장을 뜯었다.

막상 선물상자를 열게 되니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엥? 뭐야 이게."

상자 속에는 접시만 한 둥근 나무 판때기가 들어있었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나무현판 비슷한 건데.

그런 거다. 원목 판에 우드버닝으로 명언 따위가 새겨진… 장식품.

여기에도,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조금 무서운데.'

지리산 같은 데서 기념품으로 팔거나, 등산 좋아하시는 할아버지 댁 벽에 걸려 있을 거 같은 물건이지 '소녀'의 선물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물건이었다.

'어…? 미친.'

문제는, 그런 쓸데없는 장식품이 무려 성마목(醒魔木)으로 만들어졌다는 거였다.

"선물은 선물이네."

누군진 몰라도 잘 쓰겠습니다.

나중에 다른 재료로 쓰면 되는 거니까.

글씨가 새겨진 게 아쉬워서 한번 쓱쓱 문질러봤다.

당연히 버닝(burning)으로 음각된 글씨가 지워질 린 없었다.

그때.

슥슥. 스각스각.

"…!"

우드버닝 문구 아래로 또 다른 글씨가 새겨졌다.

아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써나가듯 눈앞에서 한 글자씩 그려졌다.

[받았나]

...아티팩트였다.

'별…병신 같은….'

온갖 모바일 기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웬 원시적인 통신기구인가 싶었다.

'같은 생도라면 연락처도 알 텐데?'

어쨌든 누군가 말을 건 상황.

스각스각. 슥슥슥.

황당해하는 사이, 좀 전에 쓰인 글씨가 지워지고 또 다른 글씨가 새겨졌다.

[받았으면 대답 좀 하지]

나는 나무판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어보다 마력을 조금 주입했다.

손가락 끝이 닿은 곳에 작은 점이 남았다.

[이제 알았나 보군]

나는 글씨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첫 마디를 적었다.

[누구냐]

대답이 가관이었다.

[목판의 요정쯤이라 해두지]

문득, 나무판 상단의 우드버닝 글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니엔젠… 아니, 유신이겠군.'

그러니까 최범균이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유신이 생도로 위장했던 거였다.

나는 그가 또 말을 잇기 전에 잽싸게 한 줄 휘갈겨 썼다.

[지랄말고 전화해 010X560X6X6]

#78화, 옳게 된 흐름

"...."

잠시 후 전화 대신 또 주절주절 글이 적혔다.

[불편해도 어쩔 수 없어. 지금 게이트 안쪽이라]

'던전이라고?'

그게… 돼?

그렇다면 원시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귀물이다.

현존하는 어떤 첨단통신기기도, 게이트 안과 밖을 연결할 순 없기 때문.

'이거 탐나네.'

지금 저 녀석이 들고 있을 한 장까지 세트로 가질 수 있다면, 꽤 유용하게 쓰일 아이템이었다.

어쨌든,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 그럼 할 말 해라]

[반응을 보니 내가 누군지 짐작하는 모양이야]

아. 너무 담담하긴 했지 내가.

녀석도 제 전 동료들의 처지를 알 테니 굳이 숨길 이유가 없기도 했다.

빨리 용건을 적으라고 대꾸는 하지 않았다.

[너와 거래할 생각이다]

[뭐랑 뭐를]

[나를 돕는다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

'주자헌한테 들었던 거랑 다르네.'

먼저 빚을 지우려고 할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기브앤테이크로 가자는 식이었다.

하기야 곤란에 처해 있는 게 아니라면 이유도 모를 호의를 덥석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다.

[먼저 니가 원하는 걸 말해]

그의 뜻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왜 나를 선택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게이트. 그리고 시간이 필요해]

[시간?]

[현장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아…."

던전의 단독작전권을 말하는 건가?

단독작전권은 길드가 분양받은 게이트에 갖는 독점적 지위를 뜻했다.

다시 말해, 국내 정식 등록된 길드 단위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의외로 별건 아니네.'

추해관의 과거 행적 탓에 무슨 범죄행위의 동참을 요구할 줄 알았다.

[그게 전부면 굳이 나일 필요가 있나?]

사실 내가 가장 적합하기는 했다.

영웅의 권한을 이용하면 아직 배당되지 않은 던전에도 임시 통제권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DH가디언즈의 인프라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원래 신성그룹을 써먹을까 했는데 너희 부자가 망쳐놨지]

'먼저 죽이려고 했던 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쯧.'

나는 아쉬울 게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근데 어쩌냐 내가 딱히 필요한 게 없어서]

주도권은 가져와야지.

개인적인 감정 외에도 주자헌의 경고가 있었지만, 놈이 히든 퀘스트와 관련된 인물인 만큼 쉽게 결정하긴 어려웠다.

어울려 주자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 같지 않고,

무시하자니 중요한 걸 놓치는 듯 찝찝한 상황.

[시간을 주지. 언제든 원하는 게 생기면 그곳에 적어라]

'어라?'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

...아니지.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무판을 보내놓은 걸 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놈의 의도대로 흐를 확률이 높아진다.

당장은 원하는 게 없는 형편이라도, 언제고 쓸 수 있는 소원권을 갖고 있으면 급할 때 손이 가기 마련이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고.

'그건 나라도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수는 뻔히 보이는데….

당장 거절하고 나무판 내다 버릴 수도 없다.

어쨌거나 아직 '선택지'인 채로는 득이 되는 게 크기 때문이다.

[일단 알았다]

...또 수고가 아깝지 않을 만큼 절실한 게 생길지도 모르지.

잠시 나무판을 지켜보다 더 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우편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