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심의 주상복합 오피스텔 라운지.
막 도착한 마동욱이 자리에 앉으며 멋쩍게 웃었다.
"찔리겠습니다. 눈에 힘 좀 푸세요."
탁.
"달라고 할 때 줬으면 좋았잖아요."
송연희가 마동욱이 내미는 서류 봉투를 고양이처럼 받아 챘다.
"제 입장 뻔히 아시면서 너무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벌써 몇 주째 쥐고 있던 서류지만, 위에서 주지 말라는 걸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송연희가 지난 한 주간 난리를 피운 끝에 결국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제가 아는 건 마 실장님이 누구 편인지 자꾸 헷갈리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송 이사님 사람이란 건 회장님도 아십니다. 그래도 그걸 대놓고 티 내서 좋을 게 뭐 있어요. 까놓고 말해서, 제가 자리를 지켜야 이사님도 보람이 있는 거 아닙니까."
봉투 속에서 서류를 꺼내 들던 송연희가 황당하다는 듯이 콧바람을 내뿜었다.
"이거 봐. 마 실장님은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건지 모르겠네. 저도 그만한 눈치는 있어요. 제가 설마 마 실장님 통인 걸 뻔히 알만한 얘길 아버지 앞에서 하겠어요?"
"…제가 잘못했네요."
마동욱이 살살 웃으며 송연희를 달랬다.
그는 어쨌거나 줄곧 골머리 썩던 일을 떳떳하게(?) 놓게 되어 속이 시원했다.
송연희는 잠시 눈을 흘긴 뒤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6군단장?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가 했는데….'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재벌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입법, 행정, 사법 중 어느 한 군데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인 줄 알았다.
한편으론 아버지와의 연결고리가 쉽게 이해됐다.
방산업이 주력이니만큼 군 장성들과 친분을 다져두면 손해가 되진 않을 테니까.
사안에 따라서는 로비도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일개 군단장한테 아쉬울 일이 뭐가 있냐고...'
정략혼을 고려할 만큼 장기적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이제는 아버지가 그놈의 재능을 알아버린 이유도 있었지만.
'꼴에 한국대생이었네.'
서류에는 한성준의 학력부터 교우 관계, 생활패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비교적 최근에 원인 모를 병으로 입원했었다는 기록만큼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고?'
팔락.
"...뭐야, 이게."
마지막 장을 넘긴 송연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서류 봉투를 뒤집어 털었다.
"이게 끝이에요?"
"예… 처음에 부탁하신 자료는 그게 답니다."
"아니! 진짜 계속 이럴래요?"
"그렇게 반응하실 줄 알았는데, 정말입니다. 뭐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숨긴 거예요, 그냥. 회장님이… 그래야 더 관심을 가질 거라고 그러셨다네요."
"하!"
마동욱이 벌떡 일어나는 송연희에게 손을 뻗었다.
"이,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앉아보세요. 이후로 추가된 정보가 있으니까."
송연희는 너무 화가 났지만, 추가된 정보라는 말에 머리를 쓸어넘기고 자리에 앉았다.
"조사 당시랑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한성준 씨 아버지가 바로 이번에 초상작전사령관으로 임명되는 그 양반이더군요."
"초상작전사령관이라면... 그!"
가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역이니만큼 송연희도 군의 동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네. 앞으로 던전민영화 작업의 실권자가 되는 겁니다."
민간기업이 입찰한 게이트나 지역의 행정적인 감독은 협회가 맡게 되지만, 아직 모든 던전을 군에서 쥐고 있었기에 그들의 구획배분 '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다.
즉, 누구에게 더 비옥한 땅을 줄지 결정할 수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초상사업을 계획하는 기업한테는 왕이나 다름없겠네요."
그 기업들에는 당연히 대화 그룹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내다보셨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마동욱이 말끝을 늘이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송 이사님 '편'이라서 말하는 겁니다."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얘기란 뜻이었다.
"참나… 알았어요. 내 편."
"회장님이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딱 정 실장님까지만 아는 기밀이죠. 제가 아는 것은 그 모임과 한 장군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마 같은 일원이겠죠."
어쩌면 '예상'을 넘어서 함께 '판'을 만들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마 실장님한테까지 숨길 정도라면… 목적이 뭐든 작은 일은 아니겠네요."
"예… 저도 정 실장님한테 처음 한성준 씨 얘길 듣고 많이 황당했었는데, 뭐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조금씩 납득해 가는 중입니다."
"뭐를 납득해요?"
"그으, 회장님이 왜 송 이사님 짝으로...."
"아이 씨, 짝은 무슨! 그걸 왜 마 실장님이 납득해요! 걔에 대해서 뭘 안다고!"
송연희가 씩씩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보세요."
"아직 드릴 말씀이 더 있는데."
"말해요."
"...."
마동욱은 원주에서 한성준을 만났던 일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안 하는 게 좋겠군.'
지금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하는 건 불 난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 같았다.
성격이 좀 다르지만, 함께 있던 여자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게 아니네요."
"하….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둘 다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마동욱은 송연희가 먼저 갈 수 있게 기다렸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동욱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반응이 꼭… 그건데."
#55화, 내기
토요일 아침.
차가 거의 도착했다는 얘길 듣고 지하로 내려갔다.
'뭐야. 다 정리해 버렸네.'
창고를 가득 채웠던 물건(뇌물)들이 절반가량 줄어있었다.
돌려보낼 것도 있다더니 시간을 끌 수가 없었던 모양.
'잘됐네.'
남기지 못할 것에 욕심이 생겼으면 마음만 심란했을 터.
어쨌든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나는 저번 주에 열어본 석함을 찾아 상급 마석을 챙겨 나왔다.
"그건 왜?"
아버지가 실리콘에 싸인 마석 덩어리를 보고 물었다.
"테이밍에 필요해서요."
"그럼 수지가 안 맞는데?"
홍안늑대 정도를 테이밍해서 얻는 이득이 상급 마석의 가치에는 못 미칠 거란 얘기다.
"가루 조금이면 돼요."
아버지는 알아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 가루는 금방 흡수되거나 흩어지기 때문에, 게임에서도 15분의 소멸 시간을 가졌었다.
마당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다른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였기에 아버지와 나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북진!"
운전병이 뒷좌석 문을 열어두고 경례를 올렸다.
"111대대로 간다."
"그, 남양주에 있는 6방재여단 말씀이십니까?"
"맞다."
나조차도 장군차 운전병은 꿀보직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주말이 없는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 아이는. 그냥 뒀어?"
아이비를 말함이다.
"제 카드 주고 성윤이한테 반나절만 놀아달라고 했어요."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성윤이 잘 돌봤(?)을 테지만, 신경 쓴 티를 내려고 아이비가 보는 데서 카드를 넘겨줬었다.
"한성윤한테 카드를 줘?"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하셨다.
"...."
사람 불안하게….
그러고 보니 내게 남은 예전 기억에, 성윤이 돈 문제로 어머니께 등짝을 두들겨 맞는 장면이 여럿 스쳐 지나갔다.
'반나절인데 뭐….'
신용카드도 아닌 데다가 성윤은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
써 봐야 얼마나 쓰겠나 싶었다.
그나저나 쓰는 건 참 금방이네.
땅값만 5억에, 공사비랑 이동식주택까지 계산하면 또 1억은 들어갈 테고....
용호한텐 10억 예산을 말했지만, 넉넉하게 15억 정도를 따로 떼어놨다.
결국, 여유자금은 이제 6억 남짓뿐인 셈.
그것도 이전 세계에선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이지만, 앞으로 들어갈 일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차유라에게 양도받은 주식은 앞으로 수배가 뛸 터이니 당장 현금화할 수도 없다.
'맞다. 얼마나 되는지도 안 알아봤네.'
10만 주를 받았는데, 그제는 황재천에게 정신을 파느라 주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워치로 홀로그램을 띄워 JSO를 검색했다.
───────────
JS오파츠
27,850
전일대비▲1,400 5.28%
───────────
'오….'
액면가가 예상보다 괜찮았다.
10만 주면 얼마야... 27억 8,500만원.
공교롭게도 또 27억이다.
대략 계산해 보니, 0.45%쯤 되는 지분.
먼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만하면 괜찮은 성의라고 생각했다.
"주식?"
옆을 돌아보니 고개를 살짝 젖힌 아버지가 내가 띄운 홀로그램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아…, 그냥 어떤 회산지 보는 거예요."
"갑자기 돈을 달라고 하더라니."
무슨 소린가 했다.
'...그건가?'
동구 고깃값으로 돈을 탔던 걸 주식투자 때문으로 오해하신듯했다.
하지만 나무라는 눈치는 아니어서 굳이 해명하진 않았다.
주주인 건 사실이기도 했고.
"JSO 정도면 꽤 유망한 기업 아닌가요?"
아버지는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JSO는 좋은 투자처가 아니다."
예상과 다른 대답에 조금 당황했다.
"아버지도 주식 하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흐름 정도는 볼 줄 알지."
"차정석 대표가 가진 기술가치만 해도 얼만데요. 이 정도면 저평가되고 있는 거죠."
"차 대표가 대단한 사람인 건 맞다. 지금의 신성PTI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니까. 그래서 더 힘든 게다."
신성PTI(초상기술공업).
국내 시총 1위를 차지하는 초거대 상장사다.
차정석이 12년간 그곳의 최고기술책임자로 있으면서 지금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신이라는 것은, 딱히 기업역사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도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대단해서 더 힘들다고요?"
"생각해봐라. 그 양반은 자기가 쌓아 올린 아성에 맨몸으로 부딪히는 상황 아니냐. 싸움보다 성을 쌓는 일이 더 익숙한 기술자가 말이지. 게다가 네가 아는 차 대표의 가치를 그 전 주인이 모를 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하려 들 게다."
"뭐 꼭 신성하고 경쟁할 필요가 있나요? 차정석 대표도 생각이 있을 텐데요. 지금껏 신성PTI의 돈줄을 만들었듯이 또 다른 성을 쌓으면 되는 거죠."
"그래. 딱 너처럼 생각하는 놈들이 JSO의 주식을 사들이는 거다. 근거 없는 기대감 하나로, 도박처럼. 천억도 안 되는 기업을 사들여서 고작 4년이 지났지. 지금 얼마냐?"
"...6천억이요."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코인도 아니고…. 너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말이다."
"...."
반박할 수가 없다.
팩트이긴 했으니까.
JSO는 내가 아니어도 원래 눈부시게 성장할 기업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내세울 게 오직 대표 한 사람의 이력뿐이었다.
"표정을 보니 고집대로 할 모양이군."
아버지는 픽 웃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랄까… 딱 그런 느낌이었다.
'고집부리고 후회하는 것도 다 경험이지'라는.
슬슬 오기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를 이겨 먹겠다는 생각보다는... 저런 애 취급에서는 벗어나고자 하는 자존심이었다.
"고집이 아니라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판단이에요. 제가 분석한 걸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할 뿐이죠…."
"오늘 네놈이 돈 쓰는 일에 있어서 성윤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구나."
...이건 정말 모욕적이네.
"내기하실래요?"
아버지가 홱 돌아보며 표정을 굳혔다.
"건방 떨지 마라."
살짝 쫄았지만, 나도 이미 작정한 상태였다.
"어쨌든 결과가 나올 일잖아요. 대가를 치르겠다는 얘기죠. 조건은 뭐든 아버지 뜻대로 하시구요."
"도박이나 다름없는 투자를 놓고 또 다른 도박이라… 이놈 이거, 그냥 두면 안 되는 수준이네."
나를 무슨 심각한 도박중독자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너의 경솔함을 후회하게 될 거다. 오늘 종가를 기준으로 매달 말일에 수익률만큼 용돈을 증감하는 걸로 하지. 단, 열 배의 레버리지를 건다."
"...열 배요?"
이건 뭐 도박쟁이 놈을 도박으로 망하게 하겠다… 그런 의민가?
그러니까 이달 말일에 주가가 10%만 하락해도 용돈이 100% 사라진다는 뜻이다.
10%가 오르면 용돈이 두 배로 증가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번 '0'이 되면 다음은 없다.
"청산 당하면 계속 안 주시겠다는 거죠?"
"왜, 싫으냐?"
그럴 리가요.
사실 학원 생활 특성상 용돈을 거부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어서 그렇지, 나야 이제는 용돈이 필요한 형편도 아니었다.
"기한은… 청산될 때까지겠죠?"
아버지가 이걸 받으면 상한도 없다는 말이 된다.
"중간에 빼는 건 없다."
이쯤 되니 아버지도 이 자존심 싸움에 진심인 모양.
"나중에 딴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는 서로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며 미소를 나눴다.
'감당할 수 있으시려나….'
***
크하학! 캭캭! 푸르릉.
거대한 회색지대가 온갖 괴수들이 내는 소리와 누린내로 가득했다.
청송에서 본 사육동이 부농의 축사 정도라면,
이곳은 다큐에서나 보던 미국 축산기업의 도축공장 같은 느낌이다.
군 특유의 페인트칠 하나 없는 콘크리트 벽과 바닥, 군데군데 거뭇하게 남은 핏자국, 또 괴수들이 내뿜는 살기와 무감한 병사들의 냉기가 뒤섞여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뭔 놈에 눈빛들이….'
우리가 내린 곳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간부 무리가 있었다.
제대 선봉에서 대령이 경례를 올려붙였다.
"박멸!"
여긴 경례구호가 또 달랐다.
아마도 대대장이겠지.
그는 대령치고는 꽤 젊은 편이었는데, 함께 대동한 간부들이 더 눈에 띄었다.
죄다 2, 30대의 준위들이다. 원래도 흔치 않은 계급이지만, 저들은 전부가 초인들이기도 했다.
습격이 있던 날, 아버지를 따르던 놈들과 같은….
'얘들도 창살부대야?'
그때도 계급장 때문에 바로 알아봤지만, 지금 생각하니 어색한 것이 바로 부대마크였다.
둘 다 내가 아는 창살부대의 마크와는 달랐던 것.
전에 봤던 놈들은 아버지와 같은 6군단 마크를 달고 있었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여기 준위들은 또 다른 마크를 달고 있었다.
'6방재여단이랬나….'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진 않았나 보네.
아….
나는 건물 외벽에 써진 이곳 이름(제111대대)을 보고 그 네이밍의 힌트를 찾아냈다.
그 창살 마크가 숫자 '111'이었을 줄이야.
나중에 그들을 이곳에 모아 독립부대로 증편하는 것이리라.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어. 일은 아니고…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자네는 왜 주말에 부대에 나와 있나?"
"춘천에서 4급종 하나가 수송 중이어서 작전 통제 중입니다."
"4급? 트롤이라도 되나?"
"아이언 멘티스라고 합니다."
"신경을 좀 써야겠구만."
"예. 그런데 옆에는 아드님이십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 뻔한 '옛' 관등성명을 삼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군 생활 버릇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너무 잘생겼네. 딱 아버지를...."
"대대장은 이럴 때가 아닌 거 같은데. 그만 가보지."
아버지는 대대장의 말을 잘라냈다.
내가 다 무안할 정도다.
"아… 하하, 네. 필요하신 걸 말씀해주시면 조치해 두고 가겠습니다."
"전에 청송에서 다시 들여온 홍안늑대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신경 써서 관리하라고…"
"거기로 갈 건데 그쪽으로 검각사슴 한 개체만 실어 보내."
"검각사슴을… 말씀이십니까…?"
되물음도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
하지만 아버지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
이유를 차마 말로 못 할 게 당연했다.
아버지가 표정 없는 얼굴로 팔짱을 끼자, 그 뜻을 알아챈 대대장이 바로 뒤돌아서 명령을 지시했다.
나는 아버지의 손짓에 먼저 차에 올랐다.
대대장 무리에 있던 준위 중 하나가 아버지를 수행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다시 영내의 도로를 따라 얼마간 더 들어갔을 때였다.
['동구'가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동구의 상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도 시스템 인식 거리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별생각 다 했겠네.'
마음이 급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래도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마침 길을 안내하던 준위가 운전병에게 회색 단층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차가 멈추자마자 튀어 나가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길게 뻗은 중앙 통로 좌우로 철창살만 가득한 옥사였다.
쾅! 쾅!
"이 새끼가 돌았나."
"야, 꽉 잡아!"
내부는 충격음과 고성으로 매우 소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통로 중간쯤에 병사 둘이서 올가미로 보이는 긴 장대를 잡고, 철창 안쪽의 괴수를 제압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동구'가 극도로 허기진 상태입니다.]
['동구'의 스트레스가 매우 높습니다.]
나는 그것이 동구일 거라고 확신했다.
"동구야!"
"어? 누구…,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오오오!
역시.
쾅! 쾅! 쾅!
동구가 더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아니, X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장대를 잡은 병사들의 몸이 마구 들썩거렸다.
"올가미를 놓으세요."
"아니 그게, 놔두면 크게 상처가 날 상황이라."
"이제 안 그럴 테니 놓으시라구요."
병사들은 더 이상 내가 누군지를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긴가민가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던 병사들이 곧 올가미를 풀고 장대를 회수했다.
나는 얼른 철창으로 다가가 동구와 눈을 맞췄다.
"늦어서 미안하다."
재차 머리를 들이받으려던 동구의 콧등을 감쌌다.
"어엇!"
철창 안으로 손을 넣는 순간 놀란 병사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꾸우웅…."
동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비볐다.
주름 잡힌 콧등도 사나운 눈빛도 곧 온순하게 돌아왔다.
"열쇠 가지고 있어요?"
"이게... 아니, 어떻게…."
병사들은 얼빠진 얼굴로 동구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열쇠 있냐고요."
병사는 곧 말뜻을 알아듣고 허리춤을 잡으며 물러났다.
"안 됩니다."
"알았어요."
나는 수긍하고 자물통에 '언락'을 걸었다.
철컹!
"으악!"
"미, 미친!"
병사들이 대경해서 몸을 틀었다.
마침 아버지와 준위가 도착했는데도 그들은 그대로 빗겨서 도망쳤다.
준위도 내가 잠금장치를 여는 것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지만, 아버지가 가만히 있으니 제지하진 않았다.
끼이익─.
철창이 열리자, 동구가 튀어나와 내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아버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런 동구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놈이냐?"
"네. 동구요."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개군."
"이제 믿으시겠어요?"
"네가 주인인 걸 증명해봐라."
#56화, 테이밍
주인인 걸 증명하라니….
동구가 하는 행동을 보고도 못 믿으면 어쩌란 건가 싶었다.
"뭘 더 확인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네요."
"공격성이 없기는 저놈도 마찬가지 아니냐."
아버지는 턱으로 동구가 있던 철창 안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또 다른 홍안늑대 한 마리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송에서부터 동구와 함께 있던 녀석.
오늘 테이밍할 대상이기도 했다.
"아… 그건 이 녀석 때문인데…."
펫의 특성까지 설명하긴 복잡해서, 나는 동구를 데리고 우리에서 조금 떨어졌다.
실제 적용 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고,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동구의 우두머리 특성을 '비활성화'했다.
크르르!
반응은 재깍 왔다.
우리에 남아있던 녀석이 곧바로 공격 자세를 취하며 이빨을 드러냈다.
철컹.
그 모습을 본 준위가 반쯤 열려있던 철창문을 닫고 다시 자물쇠를 걸었다.
"갑자기 돌변하는군. 왜 그런 게냐?"
"저 친구는 아직 길들어진 게 아니니까요. 다만 쟤들도 사회적인 관계가 있어서 동구랑 같이 있을 땐 영향을 받았던 거죠."
나는 다시 아버지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준위를 보고 멈칫했다.
그가 동구의 접근에 긴장하며 검 자루에 손을 올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준위를 흘끗 보며 말했다.
"자넨 밖에 있다가 검각사슴이 오면 이리 넣어주게."
"저는 군단장님의 안전을…."
"내 아들이면 충분하네."
"...그럼. 박멸!"
준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경례를 붙이고 건물을 나갔다.
실내에 우리 부자만 남자, 아버지가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 쪽으로 펴 보였다.
"...?"
마치 장풍을 쏘는 모양새였….
'쉴드!'
콰앙!
푸르게 응축된 마력구가 쉴드 정면을 강타하고 흩어졌다.
"와 씨, 갑자기 뭐예요!"
크르륵, 크확!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만했다.
마력구가 쉴드면에 닿는 순간, 동구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
동구는 거체를 세워 아버지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크륵, 아르르!
동구가 머리를 흔드는 대로 아버지의 상체가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잠깐 아버지가 그대로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지.'
아버지의 형상은 마치 티어링(tearing) 현상을 겪는 그래픽처럼 찢겨 졌다가 원상태로 돌아오길 반복할 뿐이었다.
"동구야, 그만해."
동구는 즉각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러나 낮은 그로울링과 함께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놀랍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못 막았으면 어쩔뻔했어요."
"그럼 내가 여태 들은 네 소문이 다 거짓이란 얘기겠지. 한데, 너야말로 애비가 목을 물어뜯기는 데도 담담하더구나."
"동구한테 당할 정도면 아버지가 말한 '준비'도 다 허황한 꿈일 테니까요."
약간의 빡침이 가미된 말대꾸였지만, 아버지는 재밌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그나저나 신기한 능력이네요."
라고 말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려나.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던데?"
"제가 원래 리액션이 좀 약해요."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일 뿐, 나야 아버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역천(逆天)의 장막'이라는 당신의 영역 안에서 '전능'하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그 영역이란 것도 자유자재로 켜고 끌 수 있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1챕터의 보스가 모든 챕터를 통틀어 가장 사기캐로 통하는 이유지.'
"어쨌든… 네 말처럼 '테이밍'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구나."
"아버지도 리액션이 좀 약하시네요. 이거 진짜 엄청난 건데."
"건방은…."
사라진 아버지의 분신과 본신의 등장으로 혼란을 겪는 동구를 쓰다듬으며 잠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건물 밖에서 중차량의 엔진소리가 들렸다.
"도착했나 보네요. 차에 다녀올게요. 동구 너는 여기서 기다려."
급히 뛰쳐나오느라 마석을 차에 두고 내렸다.
건물 밖으로 나와보니 거대한 케이지가 실린 5톤 트럭과 유압차, 지게차가 줄줄이 도착해 있었다.
'어우… 살벌하네.'
케이지 살 너머로 보이는 검각사슴의 모습은 모니터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슴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애초에 초식성의 괴수가 아니다. 단순히 뿔의 형상이 사슴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
그 뿔의 강도는 포르테늄으로 만든 검에 필적하고, 대형 고양잇과 짐승의 이빨과 황소의 두 배가 넘는 덩치를 가지고 있는 놈이다.
검각사슴은 이동을 위해 마취된 듯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그 모습이 불안해서 잠시 지켜봤다.
하지만 이내 트럭 위의 병사들이 특이하게 생긴(아마도 마취총일) 총을 견착한 것을 보고 마석을 챙겨서 돌아갔다.
"넌 이런 것들을 어떻게 구했느냐?"
아버지가 상급 마석을 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테이밍의 재료가 이렇다면 동구 때도 같은 재료가 필요했을 테니까.
"저를 팔았죠."
"벌써 계약이라도 한 게냐?"
"그냥 후원을 좀 받게 됐어요. 장학생 같은 개념으로."
"…결국 같은 말이다. 거기가 어디지?"
JSO 주가를 두고 내기도 한 마당에 계약관계까지 밝힐 마음은 없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도 묶는 것과 밀어주는 것쯤은 구분할 줄 알아요."
"세상일이…."
끼이이─!
아버지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소음에 묻혀 이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드나든 보조 문이 '문틀'째로 열렸다.
입구 쪽 벽면 전체가 하나의 대형철문이었던 것.
그곳으로 검각사슴을 실은 지게차가 들어섰다.
['동구'가 사냥감을 발견했습니다.]
동구와 진구(이 시점에 맘대로 이름을 정했다)가 끙끙대기 시작했다.
마치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강아지 같은 눈빛.
'웃긴 놈들이네.'
홍안늑대보다 검각사슴이 훨씬 더 상위포식자다.
하지만 무리 사냥을 하던 기억 탓인지 놈들은 겁을 상실한 반응을 보였다.
"입사시킵니까?"
준위의 물음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쯤에 내려놓지."
지게차 운전병이 케이지를 놓고 빠지자, 아버지가 다시 준위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그만 가봐."
그사이 케이지에 접근했던 나는, 검각사슴의 옆구리에 박힌 금속 주사기를 발견했다.
대여섯 개의 주사기 중 완전히 비워지지 않은 주사액 하나가 푸른색 빛을 발했다.
'아… 저거….'
생각났다.
군부가 그토록 강력할 수 있던 이유.
창살부대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까지 쓸모(?) 있게 만든 것이 바로 저 푸른 빛의 약물이었다.
마취제의 역할은 작은 부가 기능이고, 저 약물의 진면목은 마력 증발 효과에 있었다.
'개 짜증 났었지….'
고작 마취총이니 쉴드나 강기, 피부경화 등의 방어를 뚫진 못하지만, 불시에 수십 발씩 쏟아지면 얘기가 달랐다.
문제는, 그중 한 발만 스쳐도 마력이 고갈되어버린다는 것.
그게 대체 뭔지 또 무슨 원린지 전혀 알지 못했다.
덕분에 마력 회복제 값 벌기도 빡셌었다는 기억뿐.
'그러고 보니 1챕터 끝난 뒤로는 아예 안 보였었네.'
애초에 플레이어가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도 아닌 데다가, 군부의 몰락과 함께 모습을 감췄기에 딱히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현실에서는 위협이 될 모든 것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끼이익─ 쿠궁!
"이제 해 보거라."
철문이 닫히고 다시 우리 부자만 남았다.
나는 케이지를 열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 근데 얘가 죽은 게 아니라서…."
벌써 경험이 있었기에 괴수의 복부를 가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취된 녀석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어쩐지 거북스럽다.
아버지가 픽 웃으며 검각사슴을 향해 오른손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검각사슴의 표피로 거뭇한 음영이 번져나갔다.
마치 사진을 검은 매직으로 칠한 듯한 기이한 광경.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징후도 없이 음영이 걷혔다.
"됐다."
당연히(?) 검각사슴은 숨이 멎었다.
'개 무섭네.'
소름 끼치는 능력 아닌가.
"...많이도 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검각사슴의 복부에서 주사기들을 먼저 뽑아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쪽으로 치우는 과정에서 푸른 액체가 남은 주사기 하나를 소매에 감춰 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JSO로 가져가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적어도 자연 상태의 초상 물질인지 연금술의 산물인지 정도는 판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은 어려울 게 없었다.
검각사슴의 배를 갈라 간을 적출 한 뒤, 마석의 실리콘을 벗기고 표면을 칼로 긁어 그 위에 뿌렸다.
"헥헥헥!"
동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지만, 일부러 녀석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아버지께 간을 건넸다.
"...."
"저놈한테 직접 주시면 돼요."
아버지는 말없이 간을 받아 들고 철창으로 다가갔다.
***
제 6방재여단 111대대 위병소.
임태성이 위병조장실 앞을 서성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말씀도 안 하시고 111대대는 왜 오셨지?'
자신이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인데다가 주말이기도 했지만, 언제고 무슨 볼일이 생기면 그부터 찾는 군단장님이었다.
임태성 역시 따로 지시가 없어도 군단장을 수행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실제로 한 중장의 비공식적인 일정 대부분은 그가 보좌했다.
때문에, 군단 본부대의 병사와 간부들은 소령계급인 비서실장과 임태성을 거의 동일시할 정도였다.
"135사동에 계신답니다!"
이윽고, 지휘통제실과 연락을 마친 위병조장이 창문 너머로 소리쳤다.
"여기서 어떻게 가지?"
대답은 밖에 있던 위병근무자가 대신했다.
"저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시면 됩니다. 그 뒤로는 갈림길마다 표지판이 있습니다."
"고맙다."
"박! 멸!"
임태성은 고개로 경례를 받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달리고 얼마 후, '135'가 적힌 괴수 사동을 발견했다.
건물 옆에 별 세 개가 박힌 검은색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새로운 괴수 종이라도 발견된 건가?'
건물 앞에서 철수를 준비 중인 중차량들을 보니, 조금 전에 괴수가 수송된 듯 보였다.
"북진. 오셨습니까?"
차에서 내리는 임태성을 향해 장군차운전병이 경례를 붙였다.
"어, 영규. 고생이 많다."
"상병 전영규. 아닙니다."
같은 분을 모시다 보니 둘은 조금 편한 사이였다.
애초에 그가 군단장님의 동선을 파악하려면 주로 운전병을 통해야 했다.
둘의 기척에 수송팀 병사들을 지휘하던 간부가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본부대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군단장님은 건물 안에 계십니다."
임태성이 꾸벅하고 건물을 향하는데 방금 말을 걸었던 준위가 구부정한 자세로 달려왔다.
"혹시…! 임태성 교관님?"
"...맞습니다."
"와아! 여기서 뵙네요. 저 7기 교육생이었습니다. 지금은 군단 본부로 가셨군요."
"원래 소속이 본부고 매년 선발시즌에만 파견 가는 겁니다."
준위 계급장을 단 초인간부들은 장기복무 의사가 있는 하사나 중사 계급의 지원자 중에서 선발된다.
임태성은 그 초인 부사관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선임 교관이었던 것.
"오, 그렇군요. 이제 임 교관님이 교육 안 하신다고 하셨으면 조금 억울할 뻔했습니다. 하하."
임태성이 쓰게 웃었다.
나타났다 하면 재수가 없다고 교육생들 사이에선 '까마귀'로 통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
임태성은 원래 사담을 잘 못 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어색하게 뜸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아, 예예. 일 보십시오. 박멸!"
준위가 상사에게 먼저 경례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임태성은 다시 한번 쓰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원래 준사관(준위)은 짬과 전문성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일선 초인간부의 특수한 위치를 나타내는 계급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임태성은 교관이니만큼 초인 준위가 될 자격은 진작에 갖췄다고 볼 수 있었으나, 그 자신이 현 체제상의 계급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끼익!
"…!"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임태성이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홍안늑대 두 마리가 통로 중앙에 풀어져 있었기 때문.
놈들은 다른 괴수였던 것(?)을 허겁지겁 뜯어먹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놈들이 옆에 있는 군단장 부자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벌써 땅을 제공 받았다고? 그럼 그놈들도 이걸 다 알고 있다는 말 아니냐?"
"아뇨. 용도는 말 안 했어요. 설령 알게 된다고 해도 방법은 얘기 안 할 거고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누군가가 또 발견해 내겠죠."
그들 부자는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 앞에서 무언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체 어떤 단체랑 계약한 건지 나도 좀 알아야겠다."
"계약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먼저 도움을 좀 줘서 그 대가로…."
임태성이 기척을 내며 다가가자, 그들 부자가 동시에 돌아봤다.
"북진."
한상철이 픽 웃으며 말했다.
"본부 실세 정보 한번 빠르군. 뭘 굳이 왔나?"
"제가 그게 편합니다. 한데 이게 어떻게…."
임태성이 늑대들을 둘러보며 말끝을 늘였다.
"안녕하세요."
"예…, 같이 계셨네요."
둘은 어제까지도 청송에서 여러 번 마주쳤었다.
그가 잠시 미소를 건네고 제 아버지를 돌아봤다.
"아무튼, 그렇게 해주세요. 주소는 따로 보내드릴 테니. 아버지도 웬만하면 진구랑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보시구요."
"징구?"
"아. 진구요. 제가 지은 이름인데 부르기 좋잖아요. 동구랑 진구."
하지만 한상철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성…근. 이게 좋겠군. 성근이로 할 생각이다."
"아니! 왜 저랑 같은 항렬자를 써요."
"내가 키우면 같은 항렬이 맞는 게지."
그때 식사를 마친 늑대들이 각각 한상철과 한성준의 옆에 몸을 뉘었다.
'이게 무슨….'
임태성은 혼란스러웠다.
이해하기 쉬운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저 개 같은 늑대들도,
그 이름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도.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감히 군단장을 재촉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꼭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그…."
부자가 다시 임태성을 돌아봤다.
""...?""
임태성은 한상철 옆에 앉아 있는 홍안늑대를 가리켰다.
"지금 말씀하시는 친구가 저 친구 맞습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진구요."/ "성근이?"
"예… 그 친구는…, 암컷입니다."
한성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그럴 리가 없는데. 아버지, 진구 좀 뒤집어 보세요. …주인 말고는 손을 못 대요."
한성준의 말에 한상철이 늑대의 배가 보이도록 반쯤 굴렸다.
임태성은 그 장면에 또 한 번 입을 벌렸다.
"...임 상사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러네요. …이상하네. 학원에서 봤을 때는 ㅈ…, 저게 저렇게 안 컸었는데."
"아마 임신해서 그럴 겁니다."
"임신이요?"
"확실한가?"
"예. 제가 볼 줄 압니다. 저희 시골집에 큰 개가 일곱 마리라."
"하, 동구야…."
임태성은 동구라는 홍안늑대를 돌아봤다.
녀석이 좌중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한성준이 두 손으로 늑대의 볼을 움켜쥐며 진짜 개를 다루듯이 쓰다듬었다.
"뭐 어쨌든 축하할 일이죠. 아버지가 새끼들까지 잘 키워 주세요."
"...."
졸지에 n마리의 늑대를 추가로 떠안게 된 한상철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동구야, 이제 3일만 참아라."
한성준이 철창을 열어 늑대를 들여보냈다.
조금의 반항도 없이 인도에 따른다는 것이 놀라웠다.
"저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아, 네…."
임태성은 잠시 넋을 놓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테이밍이라고 하네."
한상철의 말에 임태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잘…못 들었습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길들이기야."
"그러니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그걸 찾아낸 게야. 저놈이."
앞뒤를 다 자른 말이었지만, 요지는 명확했다.
"허… 이건 대단한 발견입니다!"
"도움이 될 테지."
"되다 뿐입니까? 줄곧 학원에 있었으면서 언제 또 그런걸… 처음 경찰서에서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원래 잘 흥분하는 법이 없던 임태성의 반응에 한상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9등급이었네."
"네? 그게 무슨…."
"감정평가서 말일세."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핏 느껴지는 마력량부터가 9등급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 몇 달 새 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지. 비정형 계통이니만큼 타고난 이해나 감각의 영향도 컸을 거라고 보네."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자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군."
임태성이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뭐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남다른 데가 있는 건 사실이지. 그래서인지 벌써 여기저기서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야."
임태성은 비로소 건물에 들어섰을 때 그들이 나누던 대화의 맥락을 이해했다.
"하면… 제가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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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내역이 14건이나 와 있다.
4시간도 안 돼서 대충 50만 원이 긁혔다.
"저는 저 앞 횡단보도에서 내릴게요."
"알겠습니다."
운전병이 깜빡이를 올릴 때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왜?"
"성윤이랑 그 친구가 서울에 있는 거 같아서요."
"슬슬 마음 급할 때가 됐지."
"아뇨, 뭐 각오했던 것보다는…."
실제로 생각보다는 양호했다.
성윤이는 그러니까… 사치스럽다기보단 조금 충동적으로 소비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이 녀석이 쇼핑에만 정신 팔려서 아이비를 힘들게 하진 아닐까 걱정됐다.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성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하…."
이것 봐라…?
이번엔 아이비에게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연결됐다.
"너네 지금 어디…."
-어… 받아졌다. / 뭐야 오빠야? 받지 말라니까? / 잘못 눌렀다. / 끊어끊어. 빨리. / 아니 그래도….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아이비다.
다행히 그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내 동생이 힘들게 하는 거면 버튼을 한번 눌러봐."
피식했는지 콧바람이 들렸다.
-잘 있다. 성윤이 재밌다.
"아, 그래?"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럼 다 놀고 전화해."
-알았다.
'이런 상황은 의외네.'
둘이 코드가 전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용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강남 서초의 한 허름한 건물 앞.
"실력 있는 변호사 확실해? 여긴 아무리 봐도 좀…."
"확실해."
"실력이 있는데… 사무실이 이런 건물에 있다고?"
"몰라. 없을 수도 있고…."
용호가 이것저것 알아봐 가면서 열심히는 하는데, 속도가 너무 더뎌서 변호사를 고용하기로 했다.
다시 차유라의 도움을 받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안 그래도 숟가락을 얹을 계획인데 설립부터 떠먹여 주길 바라는 건 너무 염치가 없지 않나.
그러다 생각난 것이....
'오, 있네.'
"고창만 변호사 사무실"
외부 간판도 없는 건물 4층. 낡은 철문 위에 현판 하나만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고창만.
그는 로코33의 악덕 변호사 NPC다.
'악덕'이란 건 세계관 내의 평이 그렇다는 거고, 플레이어들에겐 굉장히 사랑(?)받았던 캐릭터였다.
자유도 높은 게임이 으레 그렇듯 각종 범법행위도 한 번쯤 해보기 마련이고, 그게 문제가 될 때마다 고창만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돈을 좀 밝히지만, 돈값을 하는 변호라고 할까?
물론 디테일하게 따지고 들면 전문분야가 다를 수 있겠지만, 계산 빠르고 명석하다는 설정이니 기본은 해주리란 생각이었다.
똑똑.
반응은 없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살짝 문을 열어보니, 한 의뢰인이 먼저 상담 중이었다.
의뢰인 보호도 안 되는 구조지만, 고창만은 나를 발견하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는 계속 의뢰인과 대화를 나눴고 우리는 조용히 대기석에 앉았다.
"아니 몇 번을 말합니까. 이 정도 증거로는 각이 안 나온다니까요. 고생고생해서 이겨봤자 얼마 못 뜯어내요."
"저는 돈 뜯는 게 목적이 아니라구요."
"거 참 답답한 소리를 하시네. 돈 뜯을 생각 없으면 소송을 왜 합니까?"
의뢰인은 거칠게 핸드백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변호사를 알아보겠어요."
"예. 그러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
쾅!
문이 거세게 닫히며 대비되는 적막을 만들었다.
고창만이 씩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
용호가 여긴 아닌 것 같다며 벌써 여러 번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지만, 나는 고창만의 테이블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게 법인을 하나 설립할 생각입니다."
"흐음… 법인설립 대행을 맡기고 싶다는 거죠?"
"…은 아무나 다하는 거고. 계속 저희 회사 법률자문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이거 좀 당황스럽네. 어디서 소개를 받으셨나?"
"비슷해요. 유능하면서도 유연하신 분을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고, 고 변호사님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예… 그건 뭐 영광이긴 한데… 저도 정보가 좀 있어야 하니까. 일단 차근차근 얘기를 들어봅시다."
"자본금은 10억. 초상자원 채집 대행 및 유통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가공까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창만이 김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하던 얘길 멈추고 그의 생각을 짚었다.
"초상사업은 뭐 아무나 하나… 그런 생각 하고 계시겠죠."
고창만은 노골적인 말에 조금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아뇨. 이해합니다."
나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고창만에게 건넸다.
차유라가 만들어 준 JSO의 이사 명함이었다.
'...이렇게 빨리 쓸 줄은 몰랐네.'
명함을 들여다보던 고창만의 눈이 점점 커졌다.
"너무 젊어 보여서… 아직 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뒤로 젖혀뒀던 의자를 90도로 세우며 자세를 고쳤다.
"학생은… 맞습니다. 배우는 건 조금 다르지만."
"혹시, 초인이십니까?"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옅게 웃었다.
"청송학원 생도셨군요."
과연 눈치가 빨랐다.
"그림은 그려지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딱 2년. 그 안에 웬만한 중견 기업 전속 로펌만큼 벌게 해드리죠."
"이거이거, 제가 귀인을 몰라뵙고."
고창만이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았다.
역시 말귀도 빠르다.
단순히 직함 때문만이 아니라,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고창만은 아마도 기업 임원이 차명으로 하청 회사를 운영해 크게 해 처먹는 그림을 떠올린 것일 테지만….
그의 눈빛은 설령 그런 일이라도 문제없이 처리하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 얘기는 주로 저 친구랑 하게 될 겁니다."
나는 용호의 표정을 보고 쓰게 웃었다.
그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고창만은 누가 봐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인상이었으니까.
한번 믿어보라는 눈짓을 몇 번이나 보내고서야 녀석은 쭈뼛거리며 고창만과 악수를 나눴다.
용호와 고창만이 깊은 얘기로 빠져드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서 건물을 나왔다.
오후 4시 42분.
점심을 걸러선지 허기가 졌다.
'용호도 밥은 먹고 왔다고 하고…. 근데 얘네들이 조용하네.'
워치를 열어보니 마지막 결제내역이 영화관으로 찍혀있었다.
'근처로 가 있을까?'
신사동 쪽인 것 같은데, 그리로 가서 밥이라도 먹고 있으면 얼추 영화 끝날 시간과 맞을 듯했다.
용호에게 먼저 간다는 문자를 남기고 택시를 잡아탔다.
***
"여기 음식 잘해요."
"네…."
가격표를 보니 잘해야만 하겠다.
나는 서윤서 기자와 함께 청담동의 한 고급 일식집에 와 있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곳인데 자주는 못 와요. 혼자 오긴 좀 그래서. 사케 괜찮죠?"
"저 근데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빨리 먹죠, 뭐."
택시에서 내릴 때쯤 서윤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대로변의 소음을 듣더니 어딘지 물었고, 내 상황을 말하자 자기도 강남이라며 잠시 보자고 했다.
서윤서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능숙하게 주문을 마쳤다.
"몇 시까지 보기로 했어요? 동생분."
"시간을 정한 건 아니고 연락 대기 중이요. 그래도 1시간 정돈 여유 있어요."
"아, 그럼 가야 할 때 편하게 얘기해요."
"예. 그건 그렇고… 뭐가 좀 나왔어요?"
"만족스럽진 않지만요. 그래도 알 수 있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브리프케이스에서 두툼한 파일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뭘까요."
죄다 영문으로 된 서류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수사자료들이에요. 그 테러범들로 추정되는 단체에 대한."
"수사자료를… 그것도 다른 나라 자료를 어떻게 구했어요?"
"제가 세계적으로 인맥이 좀 있어요."
장난스럽게 우쭐거리는 말이었지만, 일전의 '사진'들만 봐도 완전히 농담 같지는 않았다.
읽지도 못할 서류를 뒤적이는 것은 그만뒀다.
"...그래서 뭐 하던 놈들이래요?"
"보이는 대로죠. 조금 특이한 건 일관된 신념이 있는 단체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철저히 대가에 따라 움직이는 '청부테러'조직이죠. 북미와 유럽의 14국에선 게잇트래커스란 이름으로 활동했더군요."
"게이… 추적자들?"
"풋! 아뇨. 게이트, 트래커스."
아….
"생각보다 글로벌한 놈들이었네요."
"맞아요. 그만큼 신출귀몰하죠. 저 많은 자료가 가리키는 건 고작 총인원, 그리고 몇몇의 특징과 추측뿐이었어요."
"신원이 파악된 건 없어요?"
"네. 그나마 얼굴이라도 남은 게 넷인데. 그, 네 사람도 저번에 보여준 사진과 같아요."
"...그거면 됐죠, 뭐. 어차피 이제 활동도 못 하게 됐는데."
"맞다. 그거 얘기 안 해줄 거죠?"
"뭘요."
"저번 날이요. 어떻게 추살된 사실을 성준 씨가 언론보다 먼저 알 수 있었는지."
"공유만 하죠. 다 오픈할 수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잖아요."
서윤서가 잠깐 눈을 흘기다 픽 웃었다.
"덕분에 제 기사가 제일 먼저 나갔어요. 어쨌든 게잇트래커스에 대한 조사는 계속해야 했죠."
그때 음식이 들어와서 서윤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종업원이 음식을 깔아 놓고 물러나자, 서윤서는 사케병을 들고 눈짓으로 내 앞의 잔을 가리켰다.
잔을 들자, 서윤서는 술을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배후를 추적하려면 접촉방법과 최근의 동선을 아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문제는 아직 남은 한 사람. 그에게 포커스를 맞추니 기껏 끌어모은 정보에 혼선이 생기더라는 거예요."
"혼선이라면."
"일단 들어보세요. 그들이 세계적으로 활동하긴 했지만, 본거지는 분명 중국이죠. 하지만 중국 내의 활동기록이 전혀 없었어요."
그들도 생각이 있으면 방 안에다 똥을 싸진 않았겠지.
"저는 중국 내의 모든 범죄단체, 무력집단 리스트를 놓고 역으로 범위를 좁혀나갔죠."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는….
"그리고 결국 게잇트래커스의 특징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단체를 찾아냈어요."
"찾았다고요?"
"네. 12인의 구성부터 각국에서 보고된 멤버들의 특징까지 99프로 일치했어요. 심지어 '추해관(追解關)'이라는 단체명도 게잇트래커스와 의미가 상통하죠."
추해관!
분명... 들어본 적이 있다.
'히든 퀘스트의 실마리라는 얘기가 있었지.'
이 방대한 게임에 구석구석 숨은 퀘스트가 한두 개였겠냐만....
워낙에 꼭꼭 숨겨 놓은 터라 도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일부 퀘스트는 여러 개의 정보 조각을 모은 하나의 단서로부터 시작되는데,
'추해관'은 어떤 퀘스트의 시작 조건 8개 중 1개일 뿐이었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네.'
"저는 그 둘이 같은 단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추해관의 여성 멤버가 다섯이라는 거예요."
"그게 왜요?"
"게잇트레커스와 관련된 기록들은 전부 여성 멤버를 넷으로 파악했어요."
"조직원 하나쯤이야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요."
서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두 단체에서 공통된 특징의 멤버들을 지워보면… 그 다른 하나가 두 쪽 모두에서 리더로 묘사돼요."
"아, 혼선이라는 게…."
"네. 그리고 지난주에 성준 씨가 보내준 사진. 그가 리더죠."
'...!'
남은 하나가 리더라는 것은 아버지께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추해관의 리더가 여성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현듯 한 여인의 뒷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런 유의 능력이 얼마든지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겉으로 보이는 성별쯤은 환술계 능력으로도 바꿀 수 있죠."
서윤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혼자 골치 썩을 일도 아니었네요."
아무래도 일반인이 수많은 초상계 능력을 알고 있기란 어려울 터였다.
서윤서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잔을 내밀었다.
나는 잔을 부딪쳐주고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만약 배후를 알게 됐을 때요. 서 기자님이 원하시는 게 뭐죠? 그들의 목적을 저지하는 거? 아니면 단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폭로일까요?"
배후를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선 서윤서가 답을 얻었을 때 어떻게 나올지,
또 어디까지 파고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윤서는 잔을 비우고 회를 한 점 씹어 삼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거기까지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다만, 꼭 필요한 일이라는 본능적인 느낌이 있다고 할까."
"기자의 감인가요?"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이런 얘길 해주셨죠. 음… 완성된 음모는 밝혀낼 수 없다. 진실을 알려거든 그것과 발맞춰 걸어가라."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요. 더 심오한 뜻이 있는 거 같지만."
어쩌면 서윤서가 내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뻔뻔한' 악당이 되거나, '억울한' 악당은 되지 않게 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윤서가 자작해서 또 한잔 들이켰다.
너무 달리는 거 같은데….
"크으.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술자리 아니면 대답 안 해줄 거 같은 거."
나는 또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있어요. 서 기자님 조카가 누군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관계의 얽힘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아하하. 그게 계속 궁금했구나. 짐작도 안 해봤어요?"
서 씨라서 잠깐 서범진을 떠올리긴 했었다.
"그 친구가 저를 안다고 해요? 제가 발이 그렇게...."
끼기긱, 쿠웅!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소란에 서윤서와 나는 동그란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초인.'
난동.
두 단어로 상황이 설명됐다.
"제가 나가봐야 할 거 같네요."
룸을 나서는데 서윤서가 같이 나와서 구두를 신었다.
"어딜 가시게요. 여기 있어요."
"저 기자예요."
#58화, 난동
밖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콰앙! 끼기긱!
왕복 6차선의 대로 중앙에서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손에 걸리는 모든 차량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냥 미친놈인가?'
대상이 없는 분풀이처럼 보였다.
아니면 마력 폭주?
행인들은 벌써 가까운 건물 안으로 피신했는지 보도가 휑했다.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완전히 우그러져 갓길로 밀려난 승용차 안.
미처 탈출하지 못한 운전자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 문을 열기 위해 버둥거렸다.
나는 그 운전자를 돕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광인이 기척에 반응하듯 몸을 돌렸다.
그의 장심에서 용암 같은 불덩이가 쏘아졌다.
"저런 씨."
자리를 박차고 몸을 뒤로 뺐다.
화르륵!
차량이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이 얼마나 강렬한지 운전자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황급히 수(水) 속성의 마력을 손끝에 모았을 때.
콰아앙!
불붙은 차량이 폭발을 일으켰다.
'...젠장.'
광인은 처음부터 내가 목표였던 듯, 곧장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재킷 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그를 향해 쇄도했다.
몸놀림이 가볍다.
단검의 옵션과 아흐리만의 심안 덕에 민첩이 무려 8.3을 찍었기 때문.
그뿐 아니라 별다른 수련이 없었음에도 단검 활용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한 느낌이었다.
벌써 코앞에 다다른 화염구를 가볍게 피해냈다.
'마법이 아니야?'
시전속도가 빠르다 싶었더니 광인은 기공(氣功)계열의 능력자였다.
마력 투사형 공격에 있어서, 기공사는 마법사의 상위호환이다.
불덩이가 연달아 쏘아지며 접근을 방해했다.
거리가 좁혀진 만큼 회피가 쉽지 않았다.
"웃!"
마력 30%를 삭감해 민첩을 보정했다.
민첩이 9.8에 이르는 순간,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9점대의 감각인가?'
공간, 거리, 속도가 모두 계산 안에 있는 듯한 기분.
광인의 숨통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들어왔다.
강화된 시각이 고속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의 눈빛을 똑똑히 읽어냈다.
술 냄새를 맡긴 했지만, 단순히 주취자로 보기도 어려운 눈빛.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데….'
하지만 초인에게는 '심신미약'이라는 참작 조건이 적용되지 않았다.
시민이 사망한 시점부터,
그는 이유 불문하고 즉결처형의 대상이었다.
자위적 상황도 아니고 내가 개입한 것이지만,
죄 없는 피해자가 늘어나는 걸 지켜볼 수만도 없는 일.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휘둘렀다.
광인이 공격에 반응해 손을 펼쳤으나, 시간적 우위는 내 쪽에 있었다.
'엇...!'
그때, 그의 앞섶에서 원 모양의 펜던트가 붉은빛을 발했다. 동시에 어렴풋한 기억 하나가 경고를 날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목을 비틀었다.
핏!
광인의 턱밑을 지나던 단검 끝이 목걸이 줄을 가르고 쇄골 아래로 비켜 갔다.
'필라 오브 파이어.'
화르륵! 퍽!
나는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시에 광인의 가슴을 걷어찼다.
광인의 목숨을 끊지 못한 관계로 바로 앞에서 쏘아진 화염구를 피하지 못했다.
본능적인 기지로 타격은 받지 않았다.
'후우… X 될 뻔….'
마력이 모여드는 찰나의 순간 동안은, 동일 속성의 마력에 면역이 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만이다.
마법이 발현됐거나, 타이밍이 조금만 엇나갔어도 직격을 면하지 못했으리라.
이 경우는 내 쪽의 시전속도가 느렸던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광인은 저만치 날아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물론 고작 발길질에 기절한 것은 아니고, 어떤 '상태'에서 벗어난 후유증 같은 거였다.
나는 발아래 떨어진 펜던트를 주워들었다.
───────────
[수르트의 사자 목걸이]
[등급] 유일 [내구도] 136/150
*「수르트의 가호」: 생명력이 5% 이하로 떨어지면 수르트가 착용자의 몸에 빙의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15분간 지속)
-가호 효과 중 착용자를 위협하는 대상에 메테오 스트라이크 발동.
※ 가호 효과가 사라지면 70%의 생명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절상태에 빠집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6일 23시간 59분 / 7일)
*(+) 착용 시 「화」속성 저항력 25% 증가.
───────────
'...맞네.'
수르트의 가호.
써본 적은 없었지만, 분명 커뮤니티에서 봤던 아이템이다.
나는 내 기억력을 칭찬했다.
만약 그대로 광인의 목을 그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니까.
...단검을 쥔 손이 땀에 젖어있었다.
'아티팩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용병 출신이겠지.'
그는 속성저항력증가의 효능밖에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수르트의 가호는 분명 목숨을 보전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이지를 상실하기 때문에 상시 착용하고 다닐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피아를 가리지 못할뿐더러 친인이고 가족이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
'근데 이게 왜 발동된 거지?'
다른 누군가와 싸우던 것도 아니고, 주변엔 그의 생명력이 갑자기 5% 이하로 떨어질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였다 하더라도,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초인의 육체가 약하지 않았다.
'...다른 데서 독 같은 거에라도 당한 건가?'
잠복기가 있는 독이라면 당한 줄도 모를 수 있지 않나?
남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가갈 때였다.
두두두두두두!
"헬기가 떴네."
하기야 장갑차가 접근할 도로 상황이 아니었다.
기체 가득 방어 마법진이 그려진 공격헬기 두 대가 좌우 상공으로 접근했다.
헬기에서 쏘아진 녹색 빛의 레이저가 나를 스캔하듯이 훑어갔다.
저건 그거다. 초인과 비초인을 식별하는....
퉁퉁퉁퉁퉁퉁!
"이런 씹…."
두 대의 기관포가 느닷없이 불을 뿜었다.
쯧, 상황 파악도 안 하고….
타당타당타다다당!
당연히 쉴드로 방어되는 수준이었지만, 계속 표적지처럼 서 있다간 꽤 고달플 터였다.
"...."
아니나 다를까 총탄이 잠시 멎어 드는 듯싶더니 헬기 측면의 로켓탄이 돌아갔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격중지! 사격중지!"
누군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니 미쳤나....
서윤서였다.
"오지 마세요!"
그러나 그녀는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한 채 기어이 내 앞을 막아섰다.
다행히 로켓은 발사되지 않았다.
"뭐 그렇게 겁이 없어요?"
대꾸는 없었다.
레이저가 또 한 번 번쩍이며 서윤서를 스캔했다.
그녀는 그제야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문제는 기사로 꼭 다뤄야겠어요."
"아. 기분이 좋진 않은데…. 또 대응절차를 까다롭게 하면 군경 사상자가 늘어날 수 있어요."
한때 일반인이었고, 또 군인이었던 입장에서 저들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 독기가 서린 것이,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쩌면 누구 하나는 징계를 면치 못할지도….'
헬기는 주변 건물의 옥상 위로 여섯 명의 대원을 내려보냈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대원들에게 서윤서가 상황을 설명했고 선임자가 내게 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현장에 봉사자가 있다는 내용을 전달받지 못해서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예 뭐… 전 괜찮습니다. 다친 것도 아닌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 범인은 죽은 겁니까?"
"아뇨. 잠시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
딸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임자는 쓰러진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거의 동시라고 할 만큼 빠르게 총을 겨눴다.
"해마(解魔)."
퓨퓨퓻!
선임자의 명령에 금속발사체가 은빛 선을 그리며 난동자의 몸을 두드렸다.
'마력을 해제한다…라. 딱 맞는 말이네.'
금속발사체의 정체는 지금 내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은 주사기였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총기를 바꿔 들고 다시 남자를 겨눴다.
"사살."
"아니, 잠시만요. 저 사람은…."
타다다당! 타당타당! 타다당!
내 말은 총성에 휩쓸려 닿지 않았고,
난동자의 몸이 쉴 새 없이 들썩였다.
"...."
사격은 탄창을 모두 비우고서야 끝이 났다.
***
누구도 의도치 않은 사고지만,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광인은,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내내 씁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손님. 다 왔어요."
"아, 여기요."
"앱에서 다 결제된 겁니다."
"맞다…. 하하.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택시에서 내린 나는, 바로 걸음을 떼지 못했다.
멍하니 주머니에 든 수르트의 사자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서윤서에게 보내는 문자를 작성했다.
(아까 난동자요. 혹시 가능하면 그 사람 가족관계 좀 알아봐 주세요.)
보내놓고 생각하니 서윤서가 무슨 심부름센터 취급을 받는다고 느낄까 걱정됐다.
(서윤서: -토닥토닥 이모티콘- 알았어요. 말리고 싶지만… 똑똑한 사람이니 걱정은 안 할게요.)
그녀의 오해처럼 무슨 죄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목걸이가 걸렸다.
어찌 보면 유품이랄 수 있는 물건을 그냥 꿀꺽하자니 조금 찝찝했달까.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한 걸 돌려줄 순 없으니….'
고가의 아티팩트인 만큼 적당한 값이라도 치를 생각이었다.
밤이 깊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비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는데 연락도 못 해보고 집에 왔다.
"...들어왔으려나."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쪽에서 웬 탄성이 들렸다.
"어머어머, 웬일이니."
"와 대박! 아빠 맞아?"
어머니와 성윤의 목소리.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녀왔...!"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거실 가득한 쇼핑백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아버지의 옷차림이었다.
언제나 군복 바람. 사복도 공장장 스타일의 재킷만 고수하던 아버지가 배우 뺨치게 차려입고 있었던 것.
상황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이비 잘 맞는다. 상철, 이것도 입어봐라."
아이비가 쇼핑백을 뒤적이며 아버지께 또 한 벌의 옷을 건넸다.
"...나머진 천천히 입어보지."
아버진 조금 지친 얼굴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인제 보니 벌써 한쪽에 쌓인 옷이 상당했다.
아이비가 아버지 무릎에 옷을 올리며 말했다.
"몇 개 안 남았다."
"맞는지 안 맞는지 입어봐야 알지. 말 들어요. 얼른. 안 맞으면 낼이라도 가서 바꿔오게."
어머니의 거듦에 아버지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그 시선에 성윤이가 내 쪽을 돌아봤다.
"어? 오, 오빠 왔네. 이건 아이비 언니가 사준 거야."
녀석은 그제야 뒷일이 걱정됐던지 변명이 불필요한 일에 선을 그었다.
그래….
니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아마 성윤의 미친 쇼핑을(제 것만) 보다 못한 아이비가 어머니, 아버지를 대신 챙긴 것이리라.
나는 씩 웃으며 아버지께 말했다.
"진작에 옷 좀 신경 써드릴 걸 그랬네요."
"...."
아버지는 이마의 힘줄을 씰룩이며 방으로 향했고,
나는 성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뭐, 뭐야아. 왜 이래."
"대체 뭘 사느라 이백, 사십, 팔만원을 썼는지 한번 보자."
나의 작은 속삭임에 성윤은 어머니를 힐끗 보고 얌전히 앞장섰다.
#59화, 후원
이튿날 아침.
차유라 연락을 받고 일어나 비몽사몽 간에 돈을 부쳤다.
~지이잉.
1층에 내려와 물을 마시는데 토지계약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그냥 물건 사는 거나 똑같네.'
이제 내 땅,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지만, 남의 손에 맡겨선지 별로 실감이 되진 않았다.
돈이 나가는 건 생생한데 말이다.
[잔액: 649,512,070원]
공사비에 이동식주택과 부대비용을 포함하니 6억 가까운 돈이 빠져나갔다.
법인설립에 들어갈 자금은 따로 떼어놨으니 이제 이게 남은 현금의 전부였다.
"...덕분에 잠은 확 깼네."
꼬박 날을 새고 눈을 붙인 지 한 시간 남짓 된 것 같았다.
어젯밤, 방으로 돌아오니 테이블 위에 테이밍에 쓰고 남은 마석이 놓여있었다.
들고 다닐 수 없어 차에 두고 내린 걸 아버지께서 갖다 놓으신 것이다.
실리콘을 벗긴 이상 놔둘수록 손해였던지라, 미루지 않고 흡수를 시작했었다.
그게 해가 뜨고서야 끝이 났던 것.
'상급이 다르긴 하네.'
효과는 대단했다.
마력의 양적 향상은 물론 체력과 건강의 증진이 체감될 정도였다.
어떤 재능이건 초인의 바탕은 결국 마력이기 때문이겠지.
──[캐릭터 정보]──
이름: 한성준(22)
◈ 능력
힘 : 5.5(+1)
민첩: 9.3(+4)
지능: 8.1
체력: 7.3
마력: 5.4
매력: 4(-1)
행운: 1.1
──────────
참고로 스탯창의 마력 능력치는 마력의 양에도 영향을 주긴 하지만, 정확히는 위력과 효율을 의미했다.
어쨌든 마력이 꽤 늘어난 덕분에 아흐리만의 심안 효과도 최대치인 3을 찍었다.
단검의 옵션과 더해 다른 버프 없이도 무려 '9.3'에 달하는 민첩 스탯을 갖게 된 것.
'이제 어디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네.'
어제, 현실에서는 민첩이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 스탯의 장단이 다르겠지만, 어제 광인을 상대하면서 몸소 체감한 부분이다.
목걸이의 가호 효과가 위험했던 거지 전투 자체는 너무도 수월하다고 느꼈으니까.
"오라버니. 기침하셨사옵니까."
"...."
상태창을 닫고 돌아보니,
눈곱도 안 뗀 성윤이 활짝 웃는 낯으로 서 있었다.
"물 한잔 올리오리까?"
"...됐으니까 세수나 해."
"예이. 소녀 세안하고 뵙겠나이다."
어제 별말 안 하고 넘어갔더니 저 지랄이다.
18살짜리가 하루에 248만 원을 긁은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나… 사 온 것들을 보니까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내가 뭘 알아야지….'
계절 옷과 속옷 몇 벌, 기초화장품, 그리 비싸지 않은 액세서리… 지갑 하나가 전부였고,
그것들은 내가 보기에도 다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250에 말 잘 듣는 동생을 얻었으면 싸게 친 건가?'
얼마나 갈진 모르지만.
나는 손님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난데. 일어났냐?"
깨어있었던지 바로 기척이 들려왔다.
철컥.
"일어났다."
아이비가 잠옷 바람으로 문을 열었다.
당근패턴....
성윤에게 얻어 입은 모양.
2박 만에 완전히 가족이 되어버린 그녀였다.
"왜?"
"아니… 오늘 뭐 하고 싶은 거 없냐고."
성윤이한테 맡겼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둘이 보낼 생각을 하니 쟤랑 둘이 뭘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이비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그러냐? 뭐 그럼 내가 생각해볼게."
용호한테 물어봐야 하나.
돌아서려는데 아이비가 입을 뗐다.
"근데… 이거 너다?"
"뭐가."
아이비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위치 화면을 홀로그램으로 전환 시켰다.
너튜브 영상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다.
"…!"
멀리서 찍힌 어제 참변의 영상.
"어제 전화를 못 받은 게...."
"잠깐만."
나는 너무 놀라서 아이비의 손목을 잡고 스크롤을 내려봤다.
벌써 15만 뷰를 달성한 영상 아래로 각도만 조금씩 다른 영상이 십 수 개가 올라와 있었다.
아마도 주변 건물로 대피한 시민들의 촬영물인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리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
"너… 난 줄 어떻게 알았어?"
"어제 아침에 입었던 옷. 단검."
"아…. 일단 오케이."
사실 내가 불안한 건 신원이 밝혀지는 일보다는 목걸이를 습득하는 장면이 찍혔을까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청담 난동 사건'의 키워드로 검색된 모든 뉴스와 영상을 자세히 돌려봤다.
"미쳤네."
3자의 눈으로… 아니, 카메라 렌즈로 본 내 모습은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60프레임의 영상은 움직임을 다 담을 수도 없었다.
어떤 영상이든 '슉!' 붙었다가 '팟!' 떨어지는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아무튼, 다행이네.'
그 뒤로 내가 허리를 굽히는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그게 난동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펜던트를 줍는 장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러면 진짜 곤란하겠네.'
내가 아니라 출동한 부대원들을 말함이다.
영상에는 그들의 묻지마식 기관포 세례도 그대로 담겨있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서윤서 이름으로 벌써 군의 대응문제를 꼬집는 칼럼이 올라와 있었다.
사건 자체를 다룬 기사 중 조회수가 가장 높은 것도 그녀의 기사였으니 참 부지런하다 싶었다.
~지이잉.
'얼래?'
양반집 딸은 아닌가.
서윤서였다.
"네."
-기사 봤어요?
"방금요. 영상까지 퍼져서 누구 하나 옷 벗겠어요. 저는 괜찮다니까…."
-고칠 건 고쳐야죠. 그보다 위에서 너무 밀어붙여서 신원을 다 가리진 못했어요. 아무래도 청송 재학생의 활약이 드러난 건 처음이다 보니.
"아, 그거…."
어제 서 기자에게 신원을 유추할만한 얘긴 쓰지 말아 달라고 했었다.
다시 확인해 보니 '청송학원에 재학 중인 H군'이라고 쓰여 있다.
"뭐 괜찮아요. 그 정도로 바로 특정될 거 같진 않아서. 그거 땜에 전화했어요?"
-아뇨. 어제 부탁하신 일로요.
***
난동자의 이름은 추상진.
42세. 부모 형제도 없는 미혼남이라고 했다.
그런데 후원하던 고아가 한 명 있었단다.
그걸 그냥 흘려넘길 수 없어서,
나는 바로 차를 몰아 그 친구가 있다는 시설을 찾아왔다.
"나 찾은 게 아저씨예요, 저 누나예요?"
날이 선 인상에 비쩍 마른 체형의 남학생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물어왔다.
18살이면 성윤이랑 동갑인데,
왜… 나는 아저씨고 아이비는 누나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비가 내 쪽을 가리켰다.
"니가 선웅이니?"
"나를 아니까 찾았을 거고. 내가 나왔으니까 맞겠죠. 뭔데요."
"너를 후원해 주던 분이 어제…."
"네. 상진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요. 혹시… '심강'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말을 자르며 되묻는 녀석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심강? 그게 뭔데."
"아니면 됐고요."
"...혹시 길드 이름이야? 추상진 씨가 몸담았던."
선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아저씨 길드는 아니고…. 암튼 그 얘긴 됐다고요."
하, 이 새끼….
까칠해서 대화가 쉽지 않다.
"아무튼… 그분이랑 네가 어떤 관곈지 내가 알아야 할 거 같아서."
분명 법적인 유가족은 아니지만, 그들의 관계를 내가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선웅이 갑자기 픽 웃으며 내 얼굴을 가리켰다.
"아아. 이제 알겠네! 아저씨가 상진 아저씨 죽인 사람이죠? 너튜브 영상에 나온."
엄밀히 그를 죽인 건 내가 아니다.
그러나 영상을 본 사람한텐 결국 같은 말일 것이다.
나는 거리를 벌렸을 뿐이지만, 보이는 건 뭣 때문인지도 모르는 공격에 그가 나가떨어진 모습이니까.
이후의 총격을 확인 사살쯤으로 봤을 테지.
"...뭐 그렇게 됐다."
오해를 포함해도 떳떳하기에 굳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녀석과 더 대화를 이어갈 필요가 없음을 느끼기도 했다.
후원자의 죽음을 말하는 그가 너무도 덤덤했기 때문.
"그래서 뭐… 상진 아저씨를 대신해서 후원이라도 해주시게요? 예이,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가 왜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센 척, 쿨한 척 느물거리는 모습에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저런 식의 방어기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전 세계의 나 역시 시설에서 자랐으니까.
"...잘못해서 그러겠다는 거 아니고. 무조건 그러겠다는 것도 아니야. 아직 대답 안 했다. 추상진 씨가 너한테 어떤 사람인지."
선웅은 내가 정색한 것을 보고 짜증 난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냥… 불쌍한 사람이죠. 그 아저씬 나한테 미안했던 거 같지만."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어?"
"...목격자예요."
"뭐…?"
"내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
"...."
나는 섣불리 뭐라고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은 길드원들한테 살해당했어요. 아, 부모님은 두 분 다 용병이었거든요. 그 일이 있던 곳도 한국이 아니었고. 아무튼, 그날 나도 숨은 채 그 자리에 있었죠. 범인들은 아저씨를 보지 못했고, 아저씨는 나를 보지 못했어요."
전후 맥락으로 보아 범인을 알면서도 잡지는 못했단 소리 같았다.
"범인들은 왜…"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당시에 저는 고작 10살이었고, 아무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았죠. 상진 아저씨가 처음 날 찾아온 건 3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였어요."
그러니까 추상진은 외인으로서 그 일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고,
어쩌면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가 죄책감에 뒤늦게 선웅을 찾아온 것 같았다.
"개X 같은 스토리네…."
가감 없는 나의 감상에 선웅이 웃음을 터트렸다.
"X나 고구마긴 하죠."
"솔직히 얘기해줘서 고맙다."
이런 얘길 들었다고 내가 나서서 진실을 밝힌다거나 어떤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와서 없는 증거가 만들어지진 않을 테니까.
다만 추상진의 입장도 이해가 됐고,
선웅이 그에게 가졌을 감정도 짐작할만했다.
아마도 원망에 덧입혀진 동병상련이 아니었을까.
"뭔가 필요하거나 꼭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연락해라."
나는 선웅에게 명함을 건넸다.
물론 내가 가진 명함은 한 종류뿐이었다.
"와 씨, 지리네. 금수저였네요. 신기하니까 받아는 둘게요. 연락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연락해. 죽은 사람 원일 거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괜히 자존심 부리지 말고."
"...."
어설프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보단 적당히 선을 이어가다 꼭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이 녀석에게 더 부담이 없고 도움이 되지 싶었다.
아이비에게 그만 가자고 눈짓을 보내는데 선웅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 각성하는 방법 같은 게 있어요? 확률을 높이는 법이라든지."
"...없다."
잠깐 각성석이 머리를 스쳤지만,
현 상황에 현실적인 방법도 아닐뿐더러, 녀석의 의도를 생각할 때 말을 안 꺼내는 게 좋을 듯했다.
"아니, X바. 그냥 없다고 하지 말고 머리 좀 빌려줘 봐요."
"뭐 임마?"
"한국에 와서 상진 아저씨 말곤 처음 만나는 초인이에요. 형이. 아저씨한테도 이런 걸 묻진 못했어요. 피차 우울해질 뿐이니까. 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왜 이런 얘길 했겠어요."
"그거야…."
"꼭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면서요. 나 그 새끼들 내 손으로 조지고 싶어요."
막상 그냥 보내려니 기회를 놓치는 심정이었나보다.
숨겼던 속마음이 터져 나오는지 선웅은 아주 절절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나조차도 현시점에 각성석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냥 운이다.
"차라리 공부를 해. 한국은 곧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용병들이 활동하기 좋은 나라가 될 거다. 한국인이라면 더군다나."
"그게 공부랑…."
"설령 그놈들이 아직 해외에 있더라도, 한국에 무조건 들어오게 될 거란 얘기지. 근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 나라의 공권력은 초인보다 우위에 있어."
아버지의 '난(亂)' 이전에도, 이후에도 따지고 보면 늘 그랬다.
그 주체만 달랐을 뿐.
"짭새가 뭔 수로 초인을 조져요."
"헌터… 엽인협회라는 게 준비 중이야. 모든 초인의 영리 행위가 협회의 감시하에서 이뤄지게 될 거다. 할 소리는 아니다만…, 길드 하나 조지는 데는 너 혼자 각성하는 것보다 협회 소속 공무원이 되는 쪽이 더 수월하다는 거지."
"...."
"라는 게, 내 생각이다. 됐지? 난 간다."
대꾸도 없길래 돌아보니 녀석은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
"착하다."
피식.
차에 오른 아이비의 첫마디다.
어색한 억양이 더해지니 개라도 어르는 듯했다.
찝찝함을 덜기 위한 마무리였을 뿐 선행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미안하다. 말도 없이 개인적인 일에 끌고 와서. 이제 뭐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 한중일양식 뭐 좋아하냐?"
"국밥."
"컥."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대꾸에 콧물이 튀어나왔다.
"...국밥?"
"순대국밥. 아, 소머리곰탕도 좋다."
"...그래. 그거 먹자."
그러고 보니 둘 다 성윤이 못 먹는 음식이네.
"좀 더 밟자."
"안 그래도 밟으려고 했어."
#60화, 또 알 수 없음
"어? 파라니드다."
"뭐?"
나는 깜짝 놀라 아이비의 시선을 좇았다.
맞다. 헌팅샵 파라니드.
로코33의 상점 프랜차이즈다.
초인전용 백화점쯤으로 보면 되는데, 내가 놀란 건 이제 막 생긴 것을 얘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것.
"스페인에도 있다."
"아."
그랬나.
그냥 국산 프랜차이즈로 알았는데 글로벌기업이었나보다.
어쨌든 잘됐네.
벌써 생길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하긴, 애초에 모든 초상사업자가 준비를 끝내고 날짜만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우리는 당연한 듯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매장 문을 빼꼼 열고 카운터 직원에게 물었다.
"오픈했어요?"
"네네. 가오픈 영업 중입니다. 지하층의 마석과 미가공 자원 코너는 오는 10일 정식오픈 뒤에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3일 뒤면 합법적인 괴수사냥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다른 건 판매도 한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고객님. 다만 일부 위험품목은 초인 신분증이 있어야 구매 가능하십니다."
매매금지법은 벌써 대부분 해제된 모양.
"영업한대."
아이비에게 고갯짓을 하곤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수천 수백 번을 이용했었기에 파라니드용 쇼핑리스트는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다.
'어…! 이건 사야지.'
그러나 게임과 현실의 차이가 필요한 것의 종류를 꽤 늘려놨다.
웜(warm) 마법이 탑재된 담요라든지… 살균, 제독 기능의 반찬통 따위는 캐릭터를 운전하는 플레이어 입장에선 하등 불필요한 것들이었으니까.
"너도 혹시 모르니까 이런 거 하나 가지고 다녀."
마력만 주입하면 불꽃이 피어오르는 무연소 라이터.
나야 굳이 필요 없지만, 비(非) 마법계열한테는 야숙이나 던전임무에서 유용할 물건이다.
황동 스틱에 마력회로 좀 새겨 넣고 180만 원이나 받는 건 열 받지만….
아이비는 내가 준 라이터를 잠시 살피다 내려놓더니 그 옆의 다른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크롬 도금 바디라 그게 더 예쁘긴 했다.
챙!
"!"
아이비가 무슨 버튼을 누른 건지 불이 나오는 곳 반대로 칼날 하나가 튀어나왔다.
...라이터+나이프 버전이네.
"어… 넌 그게 더 낫겠다. 에페로 뭘 자르고 하긴 힘들겠지."
아이비도 맘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사줄게. 부모님 옷도 선물 받았으니까."
"아니다. 괜찮다."
나는 아이비가 손에 든 걸 뺏어 내 바구니에 담았다.
"내가 안 괜찮아."
슬쩍 가격표를 확인....
'천백육십만 원?'
...옘병.
그 작은 칼날이 포르테늄인 듯했다.
그래 뭐… 이 정도야….
"이제 2층에 가보자."
1층엔 마공학 상품이 대부분이었고,
2층은 연금제품이 주를 이뤘다.
파라니드는 지점이 달라도 배치가 거의 비슷했다.
나는 내 집 마당처럼 쏘다니며 생명력과 마력용 회복포션, 해독포션, 그리고 효과 시간이 짧은 저가의 비약들을 몇 개씩 주워 담았다.
학원 내에서는 사제품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사냥 나갈 때를 위해 차 트렁크에 적재해 둘 생각이었다.
'응…?'
쇼핑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시스템 메시지 두 줄이 시야를 가렸다.
[이벤트 '아들'의 명칭이 '염원의 계승자'로 변경됩니다.]
[이벤트 '염원의 계승자'가 생성됩니다. (완료) - DP 획득 8,800]
기억났다.
'오늘이 10월… 7일…인가.'
딱 30일이 지났구나.
내가 만들어낸 최초의 이벤트임에도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바뀌지 않고 볼륨만 추가된 것인지 '보고서'도 다른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
'상관없지.'
불효자식 또는 내놓은 자식 같은 타이틀이 아니면 된 거 아닌가?
나는 오직 DP 획득만 눈에 들어왔다.
DP야말로 억만금을 줘도 못사는 귀물이었으니까.
막말로 현질이 가능했으면 돈이 되는 족족 때려 박았을 거다.
"현재 보유 DP : 33,315"
'오….'
쇼핑 바구니에 든 물건이 전부 다 공짜가 된 듯한 기분에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계산대 앞.
"2,876만 3천 원입니다. 할부로 하시겠습니까?"
대충 암산해봤던 금액과 거의 일치했다.
"체크카드예요."
결제를 마치고 한발 물러나 아이비의 계산을 지켜보는데… 뭐가 참 많다.
총액이 쉼 없이 올라갔다.
"다 해서 3,415만 8천 원입니다. 할부...."
"잠깐만요…."
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 쇼핑백을 끌어당겨 내용물을 확인했다.
내가 산 물건 중 아이비에게 줄 나이프보다 비싼 물건이 없었다. 즉, 웬만해선 나보다 많이 나올 일이 없는 것이다.
계산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소모품도 아닌 걸 왜 전부 두 개씩 사?"
아이비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성윤이 주려고."
미친.
"야이 씨. 그건 돈지랄… 아니, 낭비야. 걔가 이런 걸 어디다 쓴다고."
"주는 건 내 맘이다. 각성하면 쓰라는 거고."
"그게 뭔… 각성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그딴 얘기가 어딨어."
"벌써 개안 단계를 넘었던데…."
"뭐?"
"성윤, 곧 각성한다."
"…!"
이게 뭔 소리야.
"...나는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아이비가 덥석 내 팔뚝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으로 유휴 마력의 일부가 천천히 움직였다.
정확히는 원소 속성을 띈 마력이 아이비의 '흡(吸)' 속성에 반응하는 현상.
'진짜였네….'
그러니까 아이비는 몸이 닿으면 알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어… 사는 건 알아서 하는데…, 주는 건 잠시 미루자. 일단 아는 티도 내지 말고."
아이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
새 주의 시작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화요일 오후.
─당신이 4번! 뽑아준다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짜짜라 짜라짜라 짠짠짠!
"기호 4번! 서범진! 기호 4번! 서범진!"
성윤이 일로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어딜 가도 저 난리 통이다.
어제는 또 '청담 난동사건'의 일로 생도들이 하도 아는 체를 해대서 곤욕을 겪었었다.
'내가 멍청했지.'
알고 보니 학원 내 'H' 성씨를 가진 사람이 고작 4명뿐. 그중 남자는 둘, 다시 단검을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랬다.
뭐 거기까지 생각했다 해도 막을 수 없던 일이지만.
"후우."
나는 서범진 홍보송이 안 들리는 곳에 이르러 벤치에 주저앉았다.
'도통 뭔질 모르겠네….'
─[미표시 설정 정보]─
「이름: 알 수 없음(6650)」
「생성일: 2012.04.15」
「능력/재능/특성/기술설정 : 모두 켜짐」
「성격: 비지정형-성장 환경에 따름」
「그룹: 한상철, 알 수 없음(6648), 한성준- 가족 그룹」
「범주: 미등장-기타사망」
「역할설정: 트리거§이벤트(석연치 않은 죽음), 트리거§한상철(엇나간 증오), 트리거§한상철(가족의 상실)」
「상태: -」
─────────
3일째 십수 번 들여다보고 있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랑 같은 설정일 줄 알았는데….'
진작 들여다보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한데 인제 보니 성윤의 능력설정은 켜져 있었고,
사망 범주와 연관 트리거가 나와는 전혀 달랐다.
석연치 않은 죽음, 그리고 엇나간 증오….
똑같은 트리거가 어머니의 설정에도 있는 것으로 봐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 내지 사고가 모녀에게 일어날 예정이란 말이다.
내가 아는 우리 가족의 미래는,
『한상철 장군은 괴수의 습격으로 처자식을 모두 잃었다.』
…라는 한 줄의 문장뿐.
'괴수의 습격'으로 뭉뚱그려졌으나 나와는 다른 사건이었다는 거다.
석연치 않다는 말은 곧 사고로 위장된 사건이란 뜻일 테고.
당연히 삭제도 시도해 봤지만,
[직접 삭제할 수 없는 항목입니다. 원인, 또는 원흉을 먼저 제거하십시오.]
…불가능했다.
문제는 시간, 장소, 관련자 무엇하나 모르는 상황에 원흉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엇나간 증오'는 어쩌면 아버지도 끝내 원흉을 알지 못한다는 말처럼 해석됐다.
신성은…, 아니리라.
우선 떠오르는 원흉이 그놈들뿐이라, 그래서 아닐 확률이 높았다.
"저기…."
...상념을 깨고 보니 낯선 생도 둘이 앞에 서 있었다.
"네… 왜요?"
"저희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두 분이요?"
"아니요. 그쪽이랑 같이."
어제로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확 짜증이 치밀었다.
"...왜요?"
"어… 그야… 지금 인터넷에서 핫하시니까요. 기념 삼아…."
"뭘 기념해요? 사람 죽인 게 자랑이 아닌데."
"아니, 저, 저는 그런 뜻이…."
"사람 죽이고 핫한 놈이랑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린다는 게, 그 뜻 맞는데."
내게 말을 건넸던 생도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함께 있던 친구는 가자미눈을 뜨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
알고 있다.
답답하고 꼬인 심사를 엄한데 풀어버린 것을.
"굳이 안티를 만들 건 없지 않아요?"
떠난 생도들의 반대쪽에서 무감한 힐난이 들려왔다.
"어?"
차유라였다.
"...안 그래도 보자고 한다는 게 자꾸 까먹었네."
"어제부터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어요."
"조금 그런 상태긴 하지. 어디 가는 길 아냐?"
"연희한테 물어서 찾아온 거예요."
"아."
그 기능, 은근히 신경 쓰이네.
"이거 주려고요."
차유라가 옆에 앉으며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건넸다.
"오, 땡큐. 다 끝난 거지?"
"어젯밤에요."
일 처리 깔끔하다.
이따가 동구까지 들어오면 아지트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이다.
"잠깐. 나도 줄 거 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주사기였던 것을 꺼냈다.
찔리지 않게 바늘은 제거한 상태였다.
"...이거 혹시."
"맞아. 군에서 쓰는 거."
차유라는 주사기 안에 든 푸른 액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참… 재주도 좋네요…."
귓불이 붉어진 것이,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던 모양.
"근데 구하려면 다들 구할 수 있지 않나? 큰 현장 나가면 수백 수십 발씩 쏴대는데."
"군대 안 갔다 왔댔죠?"
"아니…."
뜬금없는 미필 취급에 울컥했으나 반박할 수도 없다.
"뒤처리를 직접 하기 때문에 사용된 양만큼 전부 회수하고 철수해요. 모르긴 몰라도 이거 없어진 부대는 난리 났을걸요?"
그랬으려나…?
근데 무슨 사격훈련 탄피 회수도 아니고 실전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또 사용방식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듯했다.
사거리가 짧고 확실한 타겟을 대상으로만 사용되기 때문.
"물론 그래도 완벽할 순 없죠. 아마 암암리에 풀린 건 꽤 많을 거예요."
"뭐야 그럼, 그게 뭔지도 벌써 밝혀졌어?"
차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밝혀진 건 하나에요. 이게 무엇이든 기술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그런 소리는 나도 하지. 애초에 이 세상 물질이 아니잖아."
"가공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그게 그 말이... 아니네?
"원재료!"
"맞아요. 원상태 그대로 이렇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것. 그게 유일한 단서인데… 누구도 그걸 찾아내지 못한 게 미스터리죠."
진짜 미스터리다.
게이트 너머에서 얻어지는 수많은 자원들.
플레이어는 최소한 그것들의 반을 습득해 봤으며 나머지 반은 정보공유를 통해 알고 있었다.
군수품으로 쓰일 만큼 '많은 양'임에도 그 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설명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그건 해외자료에서 본 얘기들일 뿐이고. 한번 분석해 봐야죠."
뭔 기대를 못 하게 얘기해놔서 할 말을 까먹었다.
...맞다.
"이게 자연 상태서 어떤 장소에 어떤 형태로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 알 순 없나?"
"아마 지금껏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걸 연구하고 있을걸요?"
어렵단 얘기다. 알아낸들 공유할 리도 없겠지만.
"중화시킬 수 있는 법은?"
"가능, 불가능을 아는 것조차 시간과의 싸움일 거예요."
씨발…. 건질 게 없네.
저 물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실에서는 내가 겪은 것보다 치명적인 쓰임이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군용 다트야 미리 경계하면 큰 위협이 아닐 테지만, 총기나 궁술 재능을 가진 초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꼭 원거리 계열이 아니더라도, 검신에 홈을 파 저 액체를 머금게 한다면 스치기만 해도 큰 위기에 처할 터였다.
"그럼 지금 군에서 그걸 쓰고 있는 나라가 어디 어딘지라도 알아봐 줘."
"몇 개국 안 됐던 거 같아요. 한번 정확히 알아볼게요."
만약 직접 찾아볼 생각이 들었을 땐 그래도 확실히 '존재'하는 지역을 파악하고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싶었다.
차유라가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말해줄 때까지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뭘."
"그 땅이요. 대체 거기서 뭘 하려는 거예요?"
"말로 하기는 좀…. 같이 가보던지."
#61화, 어떤 감정
세븐 전용실.
선거운동 준비로 너저분해진 공간에서 송연희와 최범균 둘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른 멤버들과 구역을 나눠서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간이었다.
"넌 뭘 그렇게 넋 놓고 봐?"
최범균이 뭘 하던 별 관심 없는 송연희지만, 아까부터 입을 벌리고 빠져있는 모습에 슬며시 궁금증이 일었다.
"어...? 나? 동… 영상인데, 아니 이게…."
"너 설마…."
최범균의 얼빠진 대꾸에 불현듯 불쾌한 생각이 떠오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더럽게 여기서 야동 같은 걸 보고 있었다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리라.
그러나 홀로그램 속에 비친 영상은 송연희의 상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드론으로 촬영된 영상.
두 명의 초인이 8급 괴수… 아니, 7급 이상으로 측정될 만한 아머베어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한성준?'
각도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사수의 눈썰미는 한번 본 체형과 움직임을 정확히 기억했다.
"이건 또 뭐야? 어디래?"
"너도 그 새끼 맞는 거 같지? 원주시청 SNS에 올라왔다는 영상인데… 내가 한 20번 돌려보니까 확실한 거 같음. 영상 속 날짜 보니까…."
"조용히 해봐."
...알아보고 말고를 떠나서 영상 제목부터가 '원주시에 다녀간 H군'이다.
송연희는 공개된 7분가량의 영상을 정속으로 시청한 뒤, 스크롤을 내려 댓글까지 확인했다.
"어…."
최범균은 계속 불편한 자세로 팔목을 내주어야 했으나, 그녀의 결벽을 알고 있기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댓글 732개 ────
이현민: H쿤~ 믿고 있었다구
또날두: 맞네 그 사람. 해외포럼 싹 다 뒤져봐도 단검 쓰는 마법계는 흔치 않음
┗헌덕이다: ㄴㄴ다른 사람임. 청담난동 영상은 마법계 아님. 거긴 프레임이 못 따라가는데 이쪽은 반수계 움직임이랑 갭이 X나 큼
┗헌덕이다: 글고 전자는 애초에 전투스타일부터 마법계라고 볼 수도 없고 이쪽은 그냥 100% 마법계임
┗또날두: 괴수사냥할 땐 설렁설렁 움직였나 보지ㅋㅋ 청담 영상에서도 쉴드 쓰는 거 못 봄? 눈깔 ㅇㄷ
┗헌덕이다: 쉴드 정도는 아티팩트로 보는 게 더 현실적인거다 멍청한 새기야
K_Hunter: ㅋㅋㅋㅋㅂㅅ들 원주시청은 신상을 알고 있을 거 아니냐 동일인이 맞으니까 유입 빨려고 영상 공개한 거고
각성N수생: 근데 누구고 자시고 간에 저 반수계는 진짜 개빡쳤을 듯 ㅋㅋㅋ
┗dudgh88: ㄹㅇ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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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 인물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댓글창이 뜨거웠다.
뭔가 건질 게 있는 논쟁은 아니다.
대신,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성장한 거야.'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전력을 다했으니까.
먼저 청담난동 영상을 봤을 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프레임'이 따라가지 못하는 움직임쯤은 자신도 가능한 영역이었으므로.
물론 그가 민첩성과 무관한 계열이니만큼 조금… 놀라기는 했다.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다시 한번 영상으로 돌아가 한쪽 구석의 촬영일시를 확인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송연희가 최범균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만 나가자."
"어…? 벌써?"
"나 전화 좀 하고 따라갈 테니까 먼저 나가."
"어어, 알았어. 나간다고."
송연희는 최범균을 쫓아내듯 문밖으로 밀어낸 뒤 곧바로 콕팟을 꽂았다.
그리곤 그제야 깨달은 듯 손바닥을 내려보며 팍 인상을 찌푸렸다.
손 소독제를 듬뿍 짜서 비비는 동안 통화가 연결됐다.
-네, 송 이사님.
"전에 드린 명단이요."
-청송 우선 접촉자 명단 말씀이죠?
"맞아요. 거기 빠트린 사람이 하나 있어서요."
유치한 감정에 휘말려 큰 실수를 했다.
아무리 얄밉고 꼴 보기가 싫어도….
그런 인재를 코앞에 두고 놓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
-네네. 이름만 불러주시면 이쪽에서....
"한성준."
"한…성… 아아, 한성준 씨요? 하하하."
마 실장의 웃음소리가 어쩐지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왜 웃죠?"
송연희가 날을 세웠다.
-아뇨 그게… 벌써 접촉을 해봤습니다만. 거절하더군요.
"언제… 아니! 왜 그걸 지금 얘기해요!"
-거, 화 좀 내지 마세요. 지난주에 뵀을 때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날도 갑자기 화를 내시고 그만 가보라고 하셨죠.
"...."
송연희도 그날 일이 떠올라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어쨌든, 다시 조건을 만들어보고 있긴 합니다. 회장님이 DH가디언즈의 전권을 주셨으니 파격에 파격도 가능하죠. 그래서 배팅은 한번 해볼 생각인데....
마 실장이 말끝을 늘이자, 송연희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생각인데, 뭐요."
-영입 가능성을 크게 보진 않습니다. 사실 제 느낌이긴 한데 돈으로 움직일 친구 같지가 않았거든요.
"일을 맡은 사람이 실패할 걸 먼저 생각하고 있는데 잘 될 리가 있겠어요? 그럼 원하는 걸 파악하는 게 순서 아닌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송 이사님. 그 친구랑 사이 별로죠?
"...!"
***
"...."
차유라는 말문이 막혔다.
한성준과 함께 찾은 '그' 용도 불명의 땅.
공사 마무리 확인차 지난밤 잠시 들렸을 때 그대로다.
다만 하나… 다른 것은, 흥분해서 뛰어다니는 저 늑대였다.
"오래 갇혀 있다가 나오니 신났나 보네."
한성준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혹시 저 친구… 전에 수렵시간에 교보재로 나왔던..."
"오, 그걸 알아보네?"
알아봐서가 아니다.
첫 동아리 과제입찰 때, 홍안늑대 보상을 보고 키우면 안 되겠냐던 그의 철없는 소리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
후에 과제의 보상이 아귀승냥이로 변경됐다는 얘길 듣기도 했었다.
"결국... 뜻을 이뤘군요."
"뭐? 아아, 그렇지."
집착? 아니… 집념인가.
대체 얼마나 크고 강력한 의지를 갖춰야 이런 일이 가능할까.
무슨 수로 빼돌린 건지, 어째서 군용트럭이 '배달'까지 해줬는지는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과정이 절대로 녹록하지는 않았으리란 것이었다.
차유라는 심장이 뛰고 목이 메는 듯한 증상을 느꼈다.
"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에요. 잠시만."
증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기분을 느꼈다.
짧지만 강렬한….
"보통… 이럴 때 느끼는 감정은 뭘까요."
"어? 이럴 때가 어떤 땐데."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끝내 상봉한 상황?"
"아. 고난과 역경… 까진 아닌데. 아무튼, 뭐 좋지. 반갑고."
"지켜보는 3자 입장이요."
"글쎄…. 같이 흐뭇하지 않나? 감동일 수도 있고."
"아는 거랑 다르지 않네요."
"그건 왜?"
"학습한 거예요."
한성준이 싱겁다는 듯이 픽 웃고는 여기저기 마킹(소변) 중인 늑대를 향해 걸어갔다.
"저기가 네 집이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오는 거 같으면 소리 내지 말고 저기로 들어가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주문이다.
"알았어? 누가 오면 어떻게 하라고?"
"그런다고 알아들 리가…."
갑자기 늑대가 창고를 향해 몸을 날렸다.
녀석은 조금 열린 문틈을 잽싸게 비집고 들어가더니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잘했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
차유라는 그때까지도 테이밍에 대한 얘기는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과정 가운데 둘 사이에 어떤 유대가 생겼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한 일인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어차피 벌써 몇 번이나 상식을 깨트린 사람이었다.
"괴수도… 은혜는 아는 걸까요?"
괴수란 오직 본능뿐인 흉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물론 애초에 혐오를 느끼지 못하는 차유라였으니, 별생각이 없었다는 편이 맞으리라.
소시지 껍질 벗기던 한성준이 돌아보며 대꾸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 동구야 간식 먹자아."
하기야 유독 높은 지능을 가진 괴수가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의 눈에, 꼬리를 흔들며 다시 창고를 나오는 늑대가 들어왔다.
어째선지 또 한 번 가슴이 울렁거렸다.
"...열쇠 좀 줘봐요."
소시지를 한입에 털어 먹히자 한성준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갑자기 열쇠는 왜."
차유라는 한성준이 건넨 열쇠 꾸러미를 받아 스페어키를 빼냈다.
"내 집 열쇠 챙겨가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하루가 급했던 건 알겠는데, 저 친구를 여기 두긴 너무 허술해요. ...열악하고."
"그거야 차차 맞춰가야지."
"우선 내가 좀 맞춰주겠다는 거예요. 청구는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에이… 그걸 왜 누나가…."
"어쨌거나 이건 불법이니. 물릴 게 아니면 완벽하기라도 해야죠. 그쪽은 우리 회사 관계자이기도 하니까요."
***
많은 이들이 기다렸을 수요일 아침.
우리도 간만에 대운동장에 모였다.
조례의 주제는 역시나 합법적 초상 활동 개시에 대한 고지.
그리고 포인트 상점 오픈에 대한 안내였다.
중요한 얘기지만, 조례 이전에 생도들도 벌써 다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근데 저 군인들은 언제까지 있는 거냐?"
"원장 죽인 놈들이 아직 안 잡혔다잖아. 뭐라도 결판이 나야 가겠지."
"암튼 함성아가 다시 원장 하는 거임?"
"몰라. 아니면 누가 없긴 하지."
누군가의 잡담처럼 학원은 다시 함성아 체제로 돌아갔다.
다만 아직 생도들은 저 군인들과 쭉 함께하게 될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운영방침을 좌우하는 것도 원장 권한이 아니겠지.
만약 함성아가 다시 원장직을 맡게 된다면, 과연 그 성격에 바지(?)원장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맡지를 않으려나.'
단상에 선 함성아의 표정에선 어떠한 분위기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막 한 단락의 말을 끝맺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앞으로 내보였다.
신분증 크기의 작은 카드.
먼 거리에 비해 아주 작았지만, 초인들의 시력은 일반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잡담하거나 한눈을 팔던 생도들도 일순간 단상을 주목했다.
"청송학원은 대한민국 초인양성의 심장 기관으로서 생도들의 자격과 소양이 이미 검증된바, 다른 절차 없이 초상대응활동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 귀찮게 발급받으러 갈 필요 없겠네.
누군가 나랑 같은 생각을 했던지 작은 환호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당장 개별 검증이 어려운 만큼 등급은 일괄적으로 책정되었으니 향후 각자의 노력으로 승급해 나가기 바란다. 조회 끝나고 각 반 담임 교관을 통해 수령해 가도록."
얼추 전달은 다 끝난 느낌인데, 함성아는 단상을 내려가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워치를 확인하고, 단상 뒤편의 교직원과 사인을 주고받길 수차례.
마침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곧, 재미있는 기능이 업데이트된다고 하니 그것만 같이 확인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함성아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워치를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이백여 대의 워치가 묵직한 진동음을 만들었다.
'...뭐지?'
순간 함성아의 미소가 나를 향했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학원앱의 업데이트 알림.
생도들이 일시에 워치를 두드렸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뜬 메인화면의 메뉴를 보는 순간,
조금 전 느낀 것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훈련점수 순위}
...나는 굳이 아이콘을 누르지 않았다.
"순위 공개의 목적은...."
함성아가 취지를 설명했지만, 그딴 건 하나도 안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생도들이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뒤따를 피곤한 상황들이 눈에 선했다.
#62화, 무장
꾸준히 현질(?)을 해왔던지 이나은, 송연희가 2,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유라는 동아리 창설 때 한번 하고 말았던지 10위에 머물렀고.
"근데 어떻게 니가 젤로 부자냐고."
당연히 사정을 아는 사람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보유한 점수까진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으… 상점을 많이 받았잖아. 교수들이 가만두질 않아서. 전에 적응보상도 있고."
"와아, 그게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난다고?"
최근 생존 실기에서 300점 가까이 획득한 권하선도 고작 21위였다.
숫자에 약한 권하선은 대충 수긍하고 넘어갔지만,
영민한 가영이나 여기 없는 파티원들은 벌써 눈치를 챘을지도 몰랐다.
티는 안 내지만.
'에이 씨. 겁나 불편하네….'
어뷰징을 주도한 사람이 나였으니 분배의 차등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래도 리스크는 다 같이 안았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렇게 뻔뻔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와서 나 혼자 1,500점 넘게 먹었노라고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가격선에서 한턱내는 것으로 양심을 세탁할 작정이었다.
"어우 씨. 구경이나 하겠냐 어디."
권하선의 푸념처럼, 포인트 상점 앞은 생도들로 가득했다.
"이제 막 오픈했으니 몰리는 게 당연하지. 나중에 다시 오자."
가영이 까치발을 들더니 상점 쪽을 가리켰다.
"근데 저 앞쪽은 비었는데요?"
"비었다고…?"
자세히 보니 상점 바로 앞은 외려 휑하니 비어있었고, 거리를 두고 선 생도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영이 폴짝폴짝 뛰며 주변을 탐색하다가 또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주문방법."
상점 한편의 임시로 만든 듯한 입간판에는,
한 URL-주소와 함께 앱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아…."
어차피 훈련점수로 결제하니까?
한마디로 앱으로 주문하고 물건만 받아 가라는 얘기였다.
로코33에서 외부인으로 방문했을 땐, 그냥 보통의 상점처럼 이용했기에 전혀 생각을 못 한 방법이었다.
잠시 뒤, 우리도 다른 생도들처럼 워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본적인 소모품부터 각종 연금재료와 마공학제품들까지 제법 구색을 갖춰놨다.
마석(D): 미확인 *1 - 120P
마석(D): 속성 선택 *1 - 220P
마석(C): 미확인 *1 – 600P
마석(C): 속성 선택 *1 – 850P
마석(B): 미확인 *1 – 3,000P
가장 인기가 많을 마석은 딱 다섯 가지만 취급됐는데, 가성비로 볼 때 C등급 정도가 한계이지 싶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네.'
최하급 생명력 포션이 14포인트였으니 파라니드의 판매가격에 대입하면 얼추 1점당 10만 원 정도밖에 안 쳐준다는 얘기다.
물론 실제로 훈련점수가 재화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니 공짜인 건 변함이 없지만,
최근 점수거래 시세(현질)가 1점당 20~30만 원 사이를 오갔던 걸 생각하면 확 낮아진 가치였다.
'나야 뭐 현질을 안 했으니까….'
D등급의 미확인 마석에 수량 4개를 입력했다.
...480점.
막상 한턱내려니 조금, …많이 아깝다.
또 그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포션 따위로 때우기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480점이 차감됩니다.]
[구매가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 총 점수 : 1402.0 ]
'아.'
구매 버튼을 터치하고서 내 눈을 잡아끈 것은 차감 메시지가 아니었다.
구매와 동시에 넘어간 내역 창에서 판매 버튼이 활성화됐던 것.
매입을 해준다는 것이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특이점은 생도와 상점 간의 통화(通貨)가 점수라는 데 있었다.
판매 버튼 누르자, 방금 구매한 4개의 D등급 마석의 가격으로 432점이 책정됐다.
'오, 10%만 빼먹네…?'
나는 판매를 취소하고 상점을 향해 걸어갔다.
생도들이 고갤 들어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여태 상품을 구매하고 물건을 수령한 생도가 아무도 없었다.
'그럴 거면 방에 들어가서 골라라….'
훈련점수의 의의는 생도 개인의 발전기금이지만, 학기말 평가에도 일부 반영된다.
즉, 순위 공개는 소비를 고심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상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노인이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1번이겠네. 그쟈?"
"...네?"
"개시부터 마석 4개라… 방귀 좀 뀌는 놈인가 보네. 그쟈?"
"그냥 뭐…."
"어디다 뒀더라…."
듣지도 않을 걸 그냥 묻는 듯, 노인은 물건을 찾으러 상점 안을 돌아다녔다.
한참 만에 종이백에 담긴 마석 네 개를 건네받았다.
"저기 혹시 이곳 상점에서 구입하지 않은 것도 매입하시나요?"
"하지."
역시 그런 의미였나?
"여기 없는 물품은 가격책정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시세표준이 있지 않나. 물론 내 감정 결과에 따라 가감은 있을 거네."
왜 학원상점에 노인을 앉혀놨나 했더니, 감정 전문가인 듯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생도들은 외부활동을 통해서도 합법적인 아이템 획득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이곳 상점에서 필요물품으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족족 다 쓰지 않는다면 외부활동도 간접적으로 성적에 반영해 주겠다는 의미기도 했고.
상점은 고작 점수로 물품을 확보하는 셈이니 재정적 차원의 노림수로도 보였다.
'어쨌든 그편이 생도들한테도 이득이겠지.'
직접 밖에서 현금화해 물건을 구입하면 세금으로 깎여 나갈 액수가 상당하기 때문.
"자…, 이거 하나씩들 받아라."
"뭐야뭐야. 진짜 주는 거야? 대박!"
권하선은 순수하게 기뻐했지만, 문제는 가영이다.
"너도…."
녀석한테 마석을 건넬 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가영은 안타깝다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슬쩍 다가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형이 얼마를 해 드셨어도 완전 괜찮은데요… 이건 역효과죠."
"...무슨 말이야?"
"480점을 지르고도 1위니까요."
***
아이비와 이태용, 두 사람 다 내게 따지고 들 성격들은 아니지만, 마주치기가 민망해서 온종일 주위를 살피면서 다녔다.
일과시간 종료 후.
택배 문자를 받고 지하 택배실에 들렀다.
박대근이 보낸 연금재료들이었다.
'어떻게 바로 구했나 보네.'
구색 맞추기를 위해 제법 비싼 재료들을 불렀었다.
나는 택배 상자를 안고 바로 주차장을 향했다.
왕복 시간을 제외하면 고작 3시간 남짓뿐이지만, 이제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일 아지트에서 여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어제 동구를 살피면서 스트레스가 성장 속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원 축사에 갇혀 있을 당시와 비교했을 때 먹이 급여로 오르는 경험치가 눈에 띄게 많아졌던 것.
전투경험 없는 성장은 한계가 있지만, '펫'으로 인정받을 때까진 먹이와 환경을 신경 써주는 방법뿐이다.
시내의 마트에 들러 동구 줄 생육과 내 간식거리를 조금 샀다.
아지트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우 씨… 뭐지…?"
진입로부터 입구까지 덤프트럭과 중장비차량들로 가득했다.
나는 잘못 찾아온 줄 알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앞 한쪽에 세워진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서야 이게 다 차유라가 벌인 짓임을 깨달았다.
활짝 열린 입구 안쪽으로 십수 명의 사람들이 땅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왔어요?"
"동구는?"
"진짜로 창고에 들어가 있던데요. 혹시 몰라서 밖에서 고리만 걸어놨어요."
"아니…, 들키면 어쩌려고 사람을 들여."
"우리 보안설비팀하고 연구소 보수하시는 분들이에요. 벌써 동구 존재도 알고 있구요."
"아. 근데 이상하게 생각 안 해?"
"애초에 회사 시설로 알고들 계세요. 잠깐. 들어가기 전에 이거부터 등록하고 들어가요."
차유라가 붙잡아 끄는 쪽을 보니, 벌써 문짝에 새로운 잠금장치를 달아놨다.
"뭘 이런 것까지…."
삐빅 삑.
"지금 대요. 아니, 홍채요."
나는 뻘쭘하게 엄지를 회수하고 눈알을 갖다 댔다.
"그래서… 지금 뭐 하는 건데."
"외벽보강이랑 환경 풍부화 작업을 할 거예요."
"풍부화…?"
"홍안늑대가 살던 곳과 비슷한 여건을 마련해주는 거죠."
"좋아하겠네."
다시 보니 한쪽에 눕혀 늘어놓은 것들이 죄다 이계의 나무들이다.
어…?
"저거 엘븐트리 아냐?"
"알아보네요. 한그루 어렵게 구했어요."
엘븐트리는 한마디로 세미(semi) 세계수쯤 되는 나무다.
"개 비쌀 텐데…."
대지의 마력을 끌어모아 주변의 마력농도를 짙게 만드는 데다가, 초인 한정이지만 약한 치유의 효능까지 가졌기 때문이다.
"달라고 안 한다니까요."
"...그렇다니까 일단 알았어. 난 들어가 있어도 되지? 할 게 많아서."
차유라는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나는 창고로 가 동구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좀 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몇몇 작업자들이 잠시 손을 멈추고 동구를 바라봤지만,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
헛웃음이 나왔다.
'혹시라도 분실처리 됐으면 어쩌려고.'
택배 상자를 열고 보니 문득 비현실적인 초상자원의 값어치가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또 그 엄청난 가치의 물건을 달랑 뾱뾱이에 싸서 택배로 주고받은 게 우스웠기 때문이다.
자잘한 약초들은 차치하고,
20㎖ 작은 병에 든 오우거의 피가 2천 5백만 원.
섹타토륨이라는 리퀴드 금속은 50g에 무려 7천만 원이 넘어간… 얼래? 잠깐.
분명히 50g이라고 했는데?
손에 들린 주괴는 50g이라기엔 너무 묵직했다.
'아니… 여기 500g이라고 찍혀있네.'
나는 바로 박대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아저씨. 저 성준인데요."
-어어, 택배 잘 받았다고?
"네네. 근데 섹타토륨이요. 저 그거 50g만 필요하다고 적어드렸는데… 500g짜리가 와서요."
-어. 난 그거 처음 들어서 알아보니까 마법계한테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더라고. 남으면 너 두고두고 쓰라고. 마음 같아서는 몇 킬로 더 사주고 싶은데 아저씨가 현금이 많이 없었어.
...허세가 좀 심하시네.
500g만 해도 자그마치 7억이 넘는다.
"아뇨. 말씀은 감사한데 이거는 제가 많이 부담스럽죠. 아직 치료가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까이껄로 부담은 무슨. 내가 꼭 부탁 때문에 주는 것도 아니고… 아 그냥 사는 김에 산 거니까 잘 써줘. 암튼, 나 지금 화장실이야. 끊어.
...뭐 그렇단 말이지.
부담스럽다는 건 예의상 한 말이다.
능력이 되니까 주는 거고, 받을만하니까 받는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 나는 이 뜻밖의 선물이 기꺼웠다.
애초에 재료도 아닌 섹타토륨 50g을 적어넣은 것이, 당장 내 돈 주고 살 형편이 안 되니 맛이나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크르르."
택배 상자 주변을 기웃대던 동구가 별안간 이빨을 드러냈다.
"어, 그거 안 돼."
아마도 오우거 피 냄새를 맡았던 모양.
얼른 상자를 뺏어 내용물을 서랍 속에 털어 넣었다.
"대신 신기한 걸 보여줄게."
섹타토륨에 마력을 불어넣자, 주괴가 형태를 잃고 은빛 액체로 후두두 흘러내렸다.
동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와서 발로 머리를 밀어냈다.
"먹는 거 아니니까 거기 앉아서 봐라."
나는 액체상태의 금속에 손을 갖다 대고 계속해서 마력을 주입했다.
일종의 각인작업.
이윽고, 한계까지 마력을 빨아들인 섹타토륨이 광택을 잃고 잿빛을 띠었다.
'됐다.'
섹타토륨은 마력이 주입되면 액체 상태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각인된 액화 섹타토륨은 오직 각인자의 마력에만 반응하게 되는데, 모양과 움직임조차 각인자의 의지로 제어가 가능했다.
나는 단검을 검집째 꺼내 들고 섹타토륨의 마력을 조종했다.
마치 무중력실의 액체처럼 두둥실 떠오른 섹타토륨이 가죽으로 된 단검 집을 얇게 감싸 안았다.
그대로 마력을 거두자, 그럴듯한 금속 검집이 완성됐다.
'딱이네.'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니고 다니다가 유사시 다른 형태로 만들어 쓸 수도, 암기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섹타토륨이 마법계한테 유용하다는 말은, 마법사가 지닐 만한 유일한 금속 무장이기 때문이었다.
나한테는 추가 무장이라 더 든든했다.
기분이 좋아진 채로 박대근에게 줄 치료제를 제작했다.
찐 재료는...
이중각성 때 혹시나 해서 만들어 둔 한성준표 회복포션과 잠시 치워놨던 약초 몇 가지.
그렇게 만든 용액에, DP를 들여 [마력 1% 영구회복 불가] 옵션을 삽입했다.
'영구'라는 수식어를 붙이니 마이너스 옵션임에도 300DP나 소모됐다.
"이러면 되려나?"
...아.
문득, DP로 제작하는 방식이라면 무색무취에 해독이 불가능한 독극물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키는 방법은 아니지만.'
언젠가 쓸 일이 생길진 모르겠네.
#63화, 운 좋은 미친놈
복귀가 가까워진 시각.
비로소 성윤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아버지께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성윤이가 곧 각성할 거 같아요.)
집에 계실 시간이라 그런지 숫자가 바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답이 왔다.
(아버지: 확인해 보마)
...이제 지켜보면 답이 나오겠지.
아버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희소식…이라 할 수 있겠으나, 또 당신은 그와 별개로 남녀의 역할 구분에 깨나 보수적인 양반이셨다.
쉽게 말해 아버지가 성윤이에겐 청송 입학을 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고.
만약 그것이 원래의 역사라면, 녀석을 청송에 끌어들이는 일이 사망 사건의 원인을 뒤흔들 변화가 되진 않을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맞다. 나비효과….
그러니, 원래의 흐름을 파악할 때까진 오히려 절대로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게 내 결론이다.
'후우….'
어쨌거나 집안의 결정과 반대로 끌고 가는 일이 결코, 순탄치 않을 테지만.
어질러진 것을 대충 치우고 일어났다.
"동구야 나가자."
"아우우우!"
"그래그래. 내일도 온다."
~지잉 지잉.
집을 나서는데, 송연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혹시 유라 언니랑 같이 있어?
"아니… 누나를 왜 나한테 찾냐."
굳이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얼떨결에 그렇게 되더라.
-두 사람 다 학원 내에 없는 거로 나와서.
아….
"야, 자꾸 사람 추적하는 거. 그 짓 좀 안 하면 안 되냐?"
순간 식겁했는데, 학원 외부까진 표시가 안 되는 모양.
-언니가 연락을 안 받아서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어쨌든 불쾌하다면… 안 하도록 노력해볼게.
...한마디도 안 져야 할 녀석이 웬일인지 고분고분하다.
할 말이 없어져 버린 나는 원래 묻지 않았을 얘길 꺼냈다.
"선거유세는 잘하고 있냐?"
-빨리도 물어본다…. 너 내일이 투표인 건 알고 있지?
"알…지 그럼."
그랬구나.
-내가 몇 번인 줄은 알고?
"...4번은 아닐 거야."
4번은 서범진이었지 아마?
-....
어차피 투표용지에 나오잖아… 라는 말은 못 하겠다.
"내가…."
너무 무관심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려는데,
"이제 가야죠. 복귀 시간...."
차유라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쉬, 쉬잇!'
나는 황급히 검지를 들어 입을 가렸다.
하지만 한발 늦었음을 직감했다.
-하! 누가 뭐란다고....
송연희는 열이 확 오른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중요한… 통화 중이었어요?"
"아니 송연희. 누나 찾는데 내가 모른다고 했거든."
차유라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잘 얘기할게요."
***
[개표결과]
① 이나은: 49표 〈부대표〉
② 송연희: 62표 "대표 당선"
③ 유재현: 30표
④ 서범진: 22표
⑤ 홍소희: 27표
※ 무효: 4표
"와아악!"
동아리 세븐 전용실.
모니터 화면에 개표결과가 뜨는 순간 환성이 터져 나왔다.
송연희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의연함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멤버 하나하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다들 고생해준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설마하니 송연희가 먼저 손을 내밀 줄은 전혀 예상 못 했기에 강선호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너도 고생했다."
항상 묵묵히 제 몫을 다해줬던 강선호.
"완전 축하해!"
좋다 할 수 없는 감정일 텐데도 잘 협조해준 권하선.
"캬아, 개고생한 보람이 있어."
오늘만큼은 최범균의 생색도 보기 싫지 않았다.
"축하해요 누나."
막내 가영.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해줬다.
그놈과 한패라고 매번 구박만 했던 게 미안할 지경.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
"아냐. 언니한텐 늘 고마워."
멘탈을 다잡는 데 차유라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송연희다.
어제 연락이 되지 않은 건 조금 서운했지만.
그리고... 그 일의 원흉이었을 한성준.
송연희의 감동은 딱 거기서 식어버렸다.
홀로 비협조적인 것도 모자라 중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사람을 빼내 간 내부의 적.
...물론 차유라로부터 그가 JSO의 일을 돕고 있단 얘길 듣긴 했다.
"내 말이 맞잖아."
"참... 고맙네."
그의 뻔뻔한 말에 송연희는 비틀린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왜 이 인간만 보면 평정 유지가 안 되는 거야.'
마지못한 악수를 끝으로 소독제를 펴 바르는데, 가영이 손을 들며 말했다.
"회식 같은 거 안 해요?"
"오오! 회식! 회식!"
권하선과 최범균이 호응했고,
송연희는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근데 음식은 정문에서 받아와야 해."
군이 주둔한 뒤로 배달원의 내부출입이 불가해졌기 때문.
최범균이 주먹을 치켜들며 말했다.
"몇 명이 가냐?"
권하선이 마주 주먹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둘… 아니, 셋은 가야겠다."
"오케이. 가위바위…."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나머지도 주먹을 준비했다.
돈을 내는 송연희는 자연스럽게 제외됐다.
"보!"
"어억!"
"아하하."
먼저 가위바위보를 주도한 최범균이 첫판에 당첨됐고, 차유라와 가영이 연이어 배달그룹에 합류했다.
주문을 마치고 얼마 뒤 배달팀이 방을 나섰을 때, 권하선이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맞다. 음료수도 사와야 하는데?"
"그건 내가 사 올게."
강선호가 나섰으나 권하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위바위보로 해. 두 명."
한성준은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셋밖에 없는데 뭔… 그럴 거면 다 같이 가든가."
"아냐. 그럼 연희가 혼자 남잖아. 아 빨리! 가위바위…."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멤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송연희는 권하선의 쓸데없는 배려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보! ...에이 씨."
더 불편한 결과를 마주했다.
그 밉상이, 아니 한성준이 중얼거렸다.
"운이 좋군."
"갔다 올게."
송연희는 열이 오르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래.'
증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슴도 뛰고 가벼운 현기증이 있을 정도.
왜인지 한성준과 단둘이 있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겨우 저딴 놈이 뭐가….'
그래, 그거다.
또 어떤 말로 사람 속을 뒤집을까.
학습에 의한 본능이 지레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겠지.
게다가 그를 회유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신은 성질대로 할 수도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녀의 긴장과 각오가 무색하게,
한성준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워 워치를 들여다봤다.
잠시 후, 그가 켠 홀로그램으로 익숙한 레이아웃의 포털 사이트가 좌우 반전되어 떠올랐다.
"...."
뉴스에 집중하는 한성준의 모습에 송연희는 어쩐지 김이 새는 느낌을 받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워치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오전에 투표가 끝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읽었던 현상원리 과목 e북이 띄워져 있다.
[예제 4. : 초상현상 발생지 A로부터 1㎞ 떨어진 지점의 마력 측정기에서 '13.4Kmp'의 마력이 감지됐다. 이때 A에 발생한 초상현상의 종류와 마력 방출 값을 도출하시오.]
...분명히 공식을 외웠던 문제건만 풀릴 듯 말 듯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집중이 잘 안 되네.'
못 푸는 건 아니다.
송연희는 이따금 한성준을 힐끔거렸다.
'나 지금 뭐하니….'
문득 그런 자신을 자각함과 동시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쉽고 궁금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송연희는 JSO가 한성준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차유라와 아무리 가깝다지만 '회사 일'이라면 서로 캐묻지 않는 것이 매너였으므로.
또 JSO는 길드를 운영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마 실장의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도 직접 묻고 싶었다.
'하아….'
하지만, 어떤 질문도 뜬금없고 지나친 관심이다.
물론 자신이 제안의 주체자로 나서면 되는 일이나... 아직은 아니다.
어째선지 한성준에게만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 참. 이걸 뉴스로 아네."
조용한 실내에 한성준의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송연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였지만, 사수의 발달한 시력이 깨알 같은 글자를 금세 읽어냈다.
...자기 아버지의 진급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된 모양.
'뭐야. 부모님이랑 사이가 별론가?'
송연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성준이 살짝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바라봤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친 송연희는, 순간적인 기지로 초점을 풀어버렸다.
쳐다본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긴 것이라는.
"맞다. 깜빡했네. 너 나한테 할 얘기 있지 않냐?"
그런데 한성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뭐? 무, 무슨 할 얘기. 난 없는데?"
"없어? 받을 생각이 없긴 했는데… 입을 싹 닦아버리니까 좀 당황스럽네."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송연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거! 아니, 내가 할 말 없다는 건…."
"욕심이 나긴 했겠지. 100점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무슨… 누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야! 가져가."
내기고 자시고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
그날 바로 돌려주지 않은 건, 만약 자신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나올지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조차도 선거 때문에 정신없어서 깜빡했을 뿐.
너무 화나고 억울했다.
그때 한성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 장난이고…, 그거 내가 그냥 빠지기 뭐해서 내기 핑계로 보탠 거야. 어쨌든 개인 플레이하겠다는 놈이 그냥 주면 당연히 안 받을 거 같아서. 암튼 미안했다."
진짜 미친놈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아직 억울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았건만 갑자기 진심 어린 사과라니.
수그러들지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이상한 기분에 송연희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뭐 그건 알겠고. 아무튼, 점수는 안 받아."
한시라도 빨리 점수를 보내버리기 위해 워치를 두드렸다.
"잠깐."
한성준이 어느새 다가와 송연희의 워치를 덮었다.
"치워. 빨리 주고 끝내게."
"왤케 화가 났냐.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화 안 났으니까 손 치우라고."
한성준이 손을 뗐을 땐, 송연희도 평정을 되찾은 다음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를 회유해야 할 처지임을 되뇌지 않았던가.
"...니 뜻 알았고, 사과 잘 받았고, 화난 것도 풀렸어. 그래도 점수는 받을 이유가 없는 거 같다."
"이나은 잡아야지."
송연희가 움찔했다.
"포인트 상점 오픈해서 이제 거래 매물도 말랐어. 지금 둘 차이가 어느 정돈진 몰라도 거기서 100점 더 벌어지면 쭉 잡기 힘들다고 봐야지."
그 말이 결정타였다.
송연희는 끝내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둘 다 똑같이 자존심이 걸린 일.
하지만 한쪽은 대승적 차원의 경쟁이기도 했다.
그녀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 쓸게."
뭔가 한 꺼풀 벗겨져 나간 기분.
그래선지 생각난 것이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
"근데 넌 점수가 어떻게 그래?"
"생존 실기. 그으, 히든 보상 같은 건데… 그냥 뭐 운이 좋았지."
"지금 몇 점… 아, 이건 말 안 해주겠지."
"말해도 될지 안 될진 니 점수를 들어봐야 알겠다."
"그래. 너무 차이난다 싶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마. …난 980."
"...."
"뭐야. 진짜 많이 나는가 보네. 그럼 하지 마."
정말 기운 빠질까 싶어 알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한성준은 소파로 돌아갔고,
송연희는 잠시 멍을 때렸다.
'...나 왜 이렇게 피곤하지?'
~지이잉.
틈을 기다렸다는 듯이 도착한 문자.
또 뭐야….
마동욱이었다.
(마실장: 회장실발 실시간 소식입니다. 장 고문님이랑 회장님이 조금 전 통화를 마쳤는데, 첫마디가 '계산하지 말고 자금 생각 말고 무조건 잡아'였습니다. 아 물론 대상은 한성준 씨고요. ps. 저 지금 통화는 못 합니다.)
'장 고문님?'
마법이론의 장운석 교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 좀 굴려보려던 그때, 스피커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아, 강화반 한성준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교무실로 오기 바란다.
#64화, 영웅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난데없는 박수와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연유를 묻자 하는 말이 내가 '영웅'으로 선정됐단다.
"영웅이요?"
"하하. 듣기 좀 부담스럽긴 할 테지. 일단 미국에선 그렇게들 부르니까. 우리도 그렇게 부를진 아직 모르겠다. 아무튼, 축하한다."
물론 '영웅제도' 자체를 모르진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과 유럽권에서 시행되는 제도였으니까.
영웅은 국가가 임명하는 명예직으로 현대판 기사 작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로코33의 한국 영웅들은 전부 1챕터 이후에 생겨났었다.
'혼란스럽네.'
하 교관은 흐뭇한 표정으로 어깰 두드리곤 안쪽의 회의실을 가리켰다.
"자세한 건 저 안에서 설명해 주실 거다."
그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우선 들어봐야 알겠지….
회의실로 들어서자, 교수 3인방(장운석, 이윤철, 백남호)과 함성아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꾸벅 인사하고 의자 하나를 잡아당기는데, 함성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요즘 핫하더라?"
"왜 그렇게 호들갑들인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 일도 그거랑 관련 있어요?"
"선정과정이야 우리도 모르지만, 관련이 없다고는 못하지."
마공학 담당인 백 교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영상들이 아니면 협회가 자네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지 않았겠나. 지금 우리도 얘기를 나눠봤는데 시기나 분위기로 볼 때 자네가 가장 적합해 보이긴 하네."
"시기라면…."
"엽인협회가 업무는 시작했는데, 아직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어. 한데 요새 뉴스 보면 알겠지만, 초인에 의한 민간인 피해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지. 보도되는 게 그 정도면 현실은 훨씬 심각하단 얘기고. 이제 초인들의 평판이 곧 협회 이미지가 될 테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야."
급한 불을 끄려고 머리를 굴린 결과라는 얘기.
그쯤은 나도 추측할 수 있는 범위였다.
영웅제도가 초인범죄율을 낮추는데 효과가 크다는 것도.
'그럼 원래도 영웅제도는 이때 시작됐었다는 건가?'
음.... 그리고 아버지 정권 아래에서 전부 제거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계엄통치 중엔 영웅의 존재도 유명무실할 테니까.
"근데 왜… 저냐는 거죠. 제 수준은 아직 영웅 기준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랄 텐데요."
자격도 뭣도 없이 화제성으로 뽑아 앉힌다면 다른 어떤 나라도 한국의 영웅을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대부분의 나라가 영웅 자격 기준을 A3 진입으로 두고 있네."
국제 표준등급은 S등급 이하 A부터 G등급으로 나뉜다. 그중 오직 A등급만 다시 A1~A3로 세분하는데, 위로 갈수록 작은 차이로도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니까요…."
"자네가 영상에서 제압한 남자가 올해 1월에 프랑스에서 A3를 달았다더군."
"네?"
그 광인… 아니, 추상진 씨가 그 정도였을 줄이야.
지금 보니 추상진 씨가 이지를 상실한 상태였기에 제압할 수 있었던 거였다.
수르트의 가호는 파괴적이지만, 가호 대상이 피격을 받아야 진정한 힘이 발휘되는 방어적 효과였다.
'만약 그 사람이 맨정신에 제 실력을 보였으면....'
나는 아마 나서지도 못했을 거다.
"그러니 자격은 충분하다고 판단했겠지. 게다가 봉사 정신과 이타심도 두 영상에서 드러난 거나 마찬가지고. 지금 상황에선 자네보다 나은 인물도 없을 걸세."
"...."
다 착각이고 오해였다.
지금 내 수준은 이중 각성과 아이템빨로 겨우 B등급에 도달한 정도.
온갖 잡기를 동원해야 A3등급을 상대로 잠시 버틸 수 있는 수준일까?
전에 쯔깡이란 놈도 A등급의 강자였던 걸로 추정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방심이 초래한 결과였을 뿐이다.
"우리도 놀랐어. 설마하니 생도 중에 벌써 그 수준의 녀석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함성아까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S급의 눈썰미조차도 '영상을 통해서는' 프레임이 가린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여기 협회가 보낸 공문이네. 한번 직접 읽어보고 사인하게."
안쪽에 있던 장 교수가 파일 하나를 테이블로 쭉 밀어 건넸다.
"안 합니다."
"그래. 이건 학원 입장에서도… 뭐?"
"안 한다고?"
"제정신인가?"
"너 사춘기니?"
함성아와 교수들이 황당한 얼굴로 한마디씩 던졌다.
"예, 어… 제정신 맞는데요."
"일단 혜택들이라도 보고 말해. 네가 영웅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영웅이라고 해서 강제되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없어. 반면 누리는 것들은...."
나도 그런 것들을 모르진 않았다.
함성아의 설명처럼 영웅은 의무나 책임 따위가 강요되는 자리가 아니라, 많은 권한과 혜택이 주어지는 초상사회의 귀족이다.
범죄율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실상은 그들의 활약 덕이 아니라 동경 때문일 정도.
물론 모범이 되어야 하니만큼 준법과 도덕적인 생활이 요구되지만, 그거야 모든 공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요건이다.
한마디로 임명되는 것이 어렵지 한번 되고 나면 꿀 빠는 자리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 자리를 원치 않는 건,
영웅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매체에도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얼굴이 널리 알려지면 '죽음을 가장하는' 이벤트에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금혜택은 기본이고 국유 시설을 무료로 이용, 징발할 수 있어. 포탈이 프리패스라구. 그뿐인 줄 아니? 초상 안전과 관련된 사안에 공무적 집행권을 가질 수 있고 그 안에 벌인 일들에 대해선 면책특권도 주어지지."
포탈 프리패스…는 조금 아쉽다.
"네…, 좋네요. 근데 안 한다니까요."
"너 이…!"
열변을 토하던 함성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속이 답답한지 회의실 창문을 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
"조금 늦었습니다."
공하균 소령.
'...그랬지 참.'
아직 본격적인 건 아니지만, 이제 그도 학원운영자 중 하나였다.
공 소령이 나와 눈을 마주치곤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웅 건으로 공문이 왔다는 생도가… 이 친굽니까?"
창가에 서 있던 함성아가 한숨을 푹 쉬며 대꾸했다.
"네. 근데 저 녀석이 글쎄…."
급히 함성아의 말을 잘랐다.
"아니!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진 건데요."
"뭐? 방금 니가…."
"아직 다 못 읽었어요."
나는 테이블에 펼쳐진 '영웅서약서'와 약관을 가리켰다.
"하! 나 참...."
그렇게 시간을 벌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공 소령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상기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지….'
영웅임명을 거절한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생각 없는 '멍청한 자식' 취급을 면하지 못할 터였다.
아버지가 훗날 영웅제도를 어떻게 보는지와 별개로, 현재로선 거부할 이유 없는 영광이었으니까.
더 이상의 기대도 사양이지만,
내 판단력에 대한 신뢰를 잃어선 자유가 줄어들 수 있었다.
자식의 포지션이란 건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에이 씨... 그냥 해?'
잠적에 걸림돌이 되는 일은 웬만해선 피해야 하지만, 꼭 해결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선정은 협회가 하지만, 임명권자는 대통령입니다. 영웅의 활동 권한은, 초상대응에 한해서 장관급 무게를 갖습니다."
앞뒤 없는 공 소령의 발언.
"...."
내가 시침을 떼긴 했지만, 그도 들어오기 전의 상황을 대충은 읽었을 터.
놓칠 게 아니라는 부연이었다.
나한텐 압박이기도 했고.
'가만… 장관급 권한이라고?'
어우. 그럼 초상대응에 있어선 내 권한이 아버지보다 높다는 건데…?
물론 한국에선 대장도 장관급 대우를 받는 데다가 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법적 우선권은 나에게 있단 얘기였다.
'하, 저 양반 저거.'
인제 보니 공 소령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 부자 사이 있을 재밌는 장면을 기대하는 거겠지.
나는 마주 웃어준 뒤, 펜을 들어 빈칸에 사인을 채워 넣었다.
"이거만 하면 되나요?"
함성아가 나랑 장난하냐는 듯한 눈으로 노려봤지만, 손은 잽싸게 파일을 챙겼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교수들을 향해 꾸벅하고 공 소령을 2초쯤 쳐다보다 회의실을 나섰다.
잠깐 보자는 뜻인데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교무실 밖 복도에서 1분쯤 기다리니, 공 소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잘 생각하셨고요."
"예…, 뭐. 그으, 이거 아버지껜 보고하지 말아 주세요."
아버지도 내 기분을 한번 느껴봐야지.
공 소령이 고개를 갸웃하고 대꾸했다.
"음.... 뭐든 보고하는 게 제 일입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을 전할 기회는 흔치 않지요."
"그러니까 가족의 기쁨을 빼앗지 말아달란 얘기잖아요. 제가 직접 알릴게요."
"아…, 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물론 아버지는 뉴스로 알게 될 것이다.
***
동아리방에선 이미 전투적인 회식이 시작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멤버들의 물음에 그냥 어떤 교수님이 찾았노라고 대충 둘러댔다.
애초에 먹는 데 집중하느라 나한테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집에서 못 먹고 살 얘들이 아님에도 녀석들은 점점 더 먹는 것에 환장했다.
물론 청송의 급식 수준은 충분히 훌륭했다.
하지만 건강 위주의 식단은 자극적인 것에 길들어진 10대, 20대 입맛엔 조금 밋밋했던 모양.
'...?'
뭐든 잘 먹지 않는 송연희만 홀로 관심이 있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안 쳐다본 척 초점을 풀어버린다.
'저거 또 저러네….'
나는 모른 척하고 테이블을 기웃거렸다.
캔맥주가 보이길래 하나 집어 들었다.
"너는 대체 방에다 술을 얼마나 쌓아놓은 거냐."
권하선이 왜 자길 그렇게 보냐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쌓아놓긴 뭘 쌓아놔. 그냥… 없으면 주문하는 거지."
맥주를 까서 들이키는데 송연희가 입을 열었다.
"다 모였으니까 물어볼게."
좌중의 시선이 모이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먹으면서 들어. 알다시피 이제 10명의 임원을 뽑아야 해. 나랑 이나은을 제외하면 너희들 말고도 네 자리가 남는 건데, 누구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얘기해줘."
...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뭐야. 아무도 없어?"
"난 니들 말고는 말 섞는 새끼도 없어."
"그거야 다들 비슷하지."
"저도요."
최범균의 대꾸에 하나둘씩 동의를 표했다.
"친분으로 추천하란 얘기가 아니잖아."
송연희가 머리 짚자, 차유라가 입을 뗐다.
"원하는 기준이 뭔데?"
"그야 당연히 생도회에 도움이 될만한…."
"그 도움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말이야."
"...아무래도 협조적이면서도 모범이 되는 사람이 좋겠지. 실력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할 테고."
"그럼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들부터 안는 걸 추천해. 생도회로 볼 땐 모든 생도의 표를 다 가진 게 되는 거니까. 다들 동아리장이니 관리력도 있을 테고."
"...."
"오…."
"난 왜 저런 생각을 못 하지?"
송연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멤버들도 다들 수긍하는 듯했다.
송연희는 리더쉽이 있고 야무지지만, 머리 역할은 역시 차유라였다.
"유재현, 서범진, 홍소희. 세 사람을 더하면, 한자리 남네."
송연희는 그러면서 나를 돌아봤다.
"넌."
"뭐."
"의견 없냐구. 남은 한자리라든지."
하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했다.
아니, 둘.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낫지.
"어… 나도 유라 누나 얘기에 동의하는데, 지지층이 큰 사람이 여럿이면 내부에서 분열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야."
"오 X발. 저 말도 맞는 거 같네."
최범균의 방정에 송연희가 '쓰읍'하는 소릴 내고 돌아봤다.
"그게 동의야 반대야. 결국, 그 세 사람은 아니라는 거잖아."
"아니. 이나은은 자동으로 부대표니까 어쩔 수 없고, 유재현 정도만 빼면 될 거 같네. 서범진은 우리 반이니까 단합하기 쉽고 홍소희는… 너도 알지?"
홍소희는 이나은이랑 같은 반인데, 둘이 앙숙으로 유명했다.
물론 이나은과 으르렁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실력이나 배경에서 빠지지 않는단 얘기였고.
"너어… 진짜 못됐구나."
송연희가 하는 말과 다르게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나은을 완전히 고립시키겠다는 얘기였으니까.
"오케이. 그럼 두 자리 남네. 혹시 추천할 사람도 있어?"
"어. 박태광이랑 아이비."
#65화, 골렘의 팔
금요일에는 엽인협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일종의 청문회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진행 자체가 약식인 데다가 형식적인 느낌이라 불편한 질문 같은 건 없었다.
'결국, 생도 중에서 뽑을 수밖에 없었네.'
다소 급하게 뽑는 상황이긴 했지만, 영웅이 가진 권한만큼 선정 조건 자체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우선 기본으로 출신이 명확하고 과거 행적을 추적할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함성아, 박대근 등 기존 S급 인사들은 영웅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
줄곧 해외에서 용병 생활을 해 온 그들의 사상이나 행적, 타국과의 관계성 등을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며 범법 기록이 없는 A급 이상의 초인은 사실 그 수 자체가 많지 않았다.
내가 영웅으로 선정된 것은 그런 배경과 몇 가지 타이밍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토요일 아침에 대한민국 '최초의 영웅'이란 거창한 타이틀로 첫 뉴스가 나갔고,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로부터 '너는 어쩜 그렇게 하는 짓이 니 아버지랑 똑같니'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30분간 들어야 했다.
"...죄송해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알고 보니 어머니도 아버지의 진급 소식을 아버지 후배 부인의 축하 전화로 알게 되셨단다.
어머니의 험담에도 못 들은 척 TV에 시선을 두던 아버지는,
"장하다."
한마디 하시고 다시 고개를 돌리셨다.
...내가 무엇보다 기대했던 반응은 그게 다였다.
***
(서윤서: 첫 인터뷰는 저랑 하는 거 알죠?)
(그건 뭐 당연한데.. 가능한 좀 천천히 하죠.)
(서윤서: 저야 좋죠. 성준 씨가 오래 버텨줄수록 기사의 가치가 올라간답니다♡)
"...."
초중고 동창, 대학 동기,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까지 죄다 전화가 걸려 왔다.
뿐만 아니라 박대근을 만나 치료제를 전달하고,
성용자원 개업식에 참석하는 동안에도 누굴 만날 때마다 지겨울 만큼 축하에 시달려야 했다.
'아직 얼굴이 안 팔린 게 다행이지.'
아…. '성용자원'은 용호가 내 이름과 자기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우리 법인명이다.
복귀 날 저녁.
차정석 대표의 연락을 받고 JSO 사옥에 들렀다.
"대표님 만나러 왔는데요. 한성준…. 전에도 왔었는데 기억하시려나."
"아앗. 네. 잠시만요."
안내데스크 직원이 급하게 서랍을 뒤졌다.
그녀는 미리 언질을 받았던지 별다른 확인 없이 출입 카드를 건넸다.
"대표님께서 4층에 계신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아, 네. 수고하세요. 어…?"
나는 꾸벅하고 데스크를 벗어나다가 다시 돌아섰다.
"이건 반납하는 거 아니네요?"
출입 카드에 내 이름이 한글과 영문으로 박혀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사님."
허….
점점 옭아지는 느낌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리자, 또 다른 보안 게이트가 통로를 가로막았다.
전에 황소거미체액을 테스트했던 실험실 층과는 또 다른 분위기.
출입 카드를 갖다 대니 육중한 자동식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와아…."
내부 풍경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아마도 해당 층 전체를 통으로 쓰는 듯 드넓은 공간에서 수백여 명의 연구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장관인 것은 일반인의 눈에도 대단해 보이는 수많은 첨단장비, 그리고 프로토타입 제품들의 시연이었다.
"누구시죠?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넋을 놓고 구경 중일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30대로 보이는 안경 쓴 여성연구원이었다.
나는 출입 카드를 내보이며 대꾸했다.
"대표님을 좀 뵈러 왔는데요."
"이건... 혹시 새로 오신 수석님?"
"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보인 출입 카드… 직급도 뭣도 없이 이름뿐이지만, 아마 뭔가 저들이 알아볼 수 있는 보안등급 같은 게 있는듯했다.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 한 본부장. 이쪽이야. 거기 강 선임이 안내 좀 해주게.
순간, 공간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하 씨…. 이젠 또 본부장이야?'
뭔가 나보다 똑똑한 다수의 시선은 조금 숨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차 대표가 말한 '이쪽'을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본부장…님이셨군요. 처음 뵙는데… 아니, 처음 뵙겠습니다."
"예…, 저도."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녀가 방향을 잡자 비로소 차 대표가 통유리 안쪽에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몇 개의 층이 연결된 듯 천장이 사라지는 지점에 마치 컨트롤타워처럼 높은 연구실이 우뚝 솟아있었다.
"실례지만 하나 여쭤볼게요."
반보 앞서 걷던 연구원이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너무나 동안이셔서."
"이십 대… 초반입니다."
대답하면서도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거 타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고 돌아서던 연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황당하겠지….'
어떤 현타 같은 게 왔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
"?"
"혹시, 어제 영웅으로 선정되신…."
"어… 그렇게 됐습니다."
"어머!"
리액션이 점점 더 확장될 분위기라 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면이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는, 수백 연구진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천천히 움직였다.
딱 천장 높이만큼 오른 차 대표의 연구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투덜거렸다.
"본부장은 또 무슨 소립니까."
"하하. 그건 직위고, 자네 직책은 기술개발본부장일세."
"아니, 저 그냥 사외이사 아니었어요?"
"나도 몰라. 그런 건 유라랑 얘기하게. 나는 어제 그 녀석이 시키는 대로 처리했을 뿐이니까."
"하아…."
어쩌면 차유라도 영웅선정 기사를 보고 괜히 오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얘긴 또 안 한 거 같고.'
이번 주말 간 만난 사람 중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지 않은 건 차 대표가 유일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연구실을 안 떠난 사람처럼 꾀죄죄한 행색이었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보게."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본다고 뭐 아나요. 어우, 복잡하네요."
"아직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단계도 아니네만, 이게 바로 골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은, 한편에 거치된 골렘의 팔과 금속와이어 수십 가닥으로 연결된 기계장치였다.
"여기 이렇게 마정석을 꽂으면…."
마정석은 천연의 마석과 다른 인공적인 마력 배터리를 총칭했다.
부르르. 위이이이잉.
"오."
뭔가 가속되는 소리와 함께 장치 일부가 푸르게 빛났다.
"이곳 코일에서 증폭된 마력이, 이쪽 길을 따라 탱크로 주입되는 거네. 그럼 탱크의 압력장치가 마력을 응축시켜서 여기 작은 관으로 밀어 넣는 거지."
차 대표가 하나씩 짚어 설명해 주니 대략의 원리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관 입구에서 병목현상이 생기겠는데요."
"바로 그거야. 그 저항을 뚫어낼 만큼 강한 압력이 필요한 걸세. 그렇게 관으로 주입된 마력이라야 비로소 강기를 이룰 수 있네."
"아… 결국 사람의 운용법과 비슷하네요. 여기 연결된 니게리움 와이어들은 혈관 같은 거구요."
"맞네."
이어서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장치가 다량의 마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순환하며 점점 증폭된 마력은 탱크를 가득 채운 뒤 최종관문으로 집중됐다.
끼기기기긱. 파츳!
그러나 탱크에서 뭔가 무리하는 듯한 굉음이 나더니, 거치된 골렘의 팔이 '파닥'하고는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이 너무 볼품없어서 나는 픽 웃어버렸다.
차 대표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대충 이런 원리라는 거지. 지금 연결된 와이어 수로는 동력전달도 어렵거든."
"이거 분해해도 되는 건가요?"
"어? 오, 오늘도 가능한 건가?"
차 대표는 바로 말뜻을 알아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단계에서 테스트를 해봐야 둘 다 감을 잡죠."
차 대표는 신나서 공구함을 집어 들었다.
"그렇지! 금방 되네. 어, 저기 앉아서 기다려."
그가 권한 자리는 본인 책상의 중역 의자.
원래 접객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서인지 의자가 그것뿐이었다.
이젠 차 대표가 제법 편해져서 사양 없이 앉았다.
다리를 꼬고 의자를 돌리던 나는, 유리 밖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씨… 뭐야. 설마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는 거야?'
아래, 수백의 연구진들이 미동도 없이 이곳 연구실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
나는 뻘쭘해서 일어났다.
대표가 기름때 묻혀가며 끙끙거리는데 다리 꼬고 앉은 폼이 좋게 보이겠는가.
그리고 일러바쳤다.
"저기, 저 사람들 일 안 하고 계속 쳐다보는데요."
"하하. 자네가 궁금한가 보지. 늘 기대보다 더 해주는 직원들이라네."
에이 씨….
다시 앉기도 뭐해서 차 대표 뒤에 서서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황소거미체액이요. 얼마나 사셨어요?"
"어…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60만 배럴 정도 됐었지."
잘 가늠이 안 돼서 워치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히익…! 4,800억이요?"
"유라가 그러는데 우리가 공격적으로 사들이니까 뭔지도 모르고 시세가 점점 뛰더래. 뭐 지금도 사료원료로 쓰이고 있으니까. 7천억 조금 넘게 들어갔다더라고."
"아니, 어떻게 시총보다 돈을 더 써요?"
"하하하. 회산 아직 가난해. 당연히 대부분 사비로 샀지."
"...그만한 사비가 더 놀랍네요."
"신성 주식을 좀 넘겼어. 이제 더 들고 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차 대표는 회사 규모와 별개로 이미 재벌에 속했는데, 그가 신성PTI의 대주주 중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다 됐다."
차 대표가 테이블 위에 주요 부품들을 늘어놓았다.
"당장 와이어를 늘릴 순 없으니, 테스트해볼 수 있는 건… 탱크 강화정도겠지. 만약 성공하면 관 입구부터 선명한 빛이 어릴 걸세."
"결국, 탱크는 집적 능력이 문제죠? 지금 마력이 역류하지 않을 최대치가 응축돼도 강기를 이루기엔 부족하다는 얘기니까요."
"제대로 이해했군. 그렇다고 탱크의 물리적 크기를 늘리면 내구성이 떨어지고 압력장치도 덩달아 커져야 하네. 근데 그걸 감수해도 관입량이 적으면 마력이 역류해버리지."
"오케이. 그럼 니게리움 관의 수용량도 높여야겠네요."
차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해당 부품에 옵션을 입력했다.
'마력집적력 증가 정도로 쓰면 되려나? ...얼래?'
9%를 적긴 했지만, 어째선지 DP가 15밖에 들지 않았다.
그대로 확인을 누르자 탱크가 아이템으로 뒤바뀌었다.
─────────────
[가공된 포르테늄 탱크]
[종류] 기타/잡동사니
[내구도] 218/218
*기계장치에 사용될 것 같은 부품입니다. 내부에 마력집적회로가 새겨져 있습니다.
(※장착 및 착용 불가 아이템)
*(+) 마력집적력 9% 증가.
─────────────
'이거 잡템으로 분류되네?'
그러니까 어차피 플레이어가 쓸 수 없는 옵션이니 싸게 쳐주는 것 같았다.
그럼 조금 더 써서….
니게리움 관에는 마력 수용량 및 내구도 증가 2개 옵션에 19%를 삽입해봤다.
300DP.
조금 세긴 했지만, 원래 부품 두 개에 이쯤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었다.
'예쓰.'
"한번 해보세요."
"뭐…? 다 됐다고? 벌써 끝난 건가?"
"보이는 것처럼 간단한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구요."
"아… 그, 그렇겠지."
긴장되는지 부품을 받는 차 대표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조립은 분해보다 빨리 끝났다.
"자, 이제 시작하네."
마정석이 장착되고,
아까와 똑같은 시동 과정이 진행됐다.
그리고 차 대표가 리모콘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강력한 마력 공명이 느껴졌다.
파츠츠츠츳!
탱크는 무리 없이 니게리움 관으로 마력을 주입했다.
차 대표가 말한 대로 관을 따라 강한 빛이 일렁였다.
퍼렇다 못해 새하얀 빛이 수십 가닥의 와이어를 타고 골렘의 팔로 이어졌다.
키이이잉! 끼긱끼긱!
일자로 곧게 뻗은 골렘의 팔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움직이며 거치 장치를 흔들었다.
"어어…!"
차 대표의 반응에 나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쿵! 쿠쿵! 쿠쿵!
결국, 바닥에 떨어진 골렘 팔은 무슨 가물치처럼 펄떡대며 바닥 타일을 죄다 깨부쉈다.
"어우 씨. 저거 못 멈춰요?"
"잠깐만."
차 대표가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듯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불길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차 대표를 낚아채듯 붙잡고 연구실 밖으로 뛰어내렸다.
쨍그랑! 콰아아아앙!
나와 차 대표가 아직 체공 중일 때, 연구실 바닥이 두부처럼 터져나갔다.
'X발 X됐다.'
밸런스를 맞췄어야 했나?
괜히 무리해서 '19%'를 때려 넣었기 때문일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차 대표는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일어나지도 못한 채 멍하니 연구실을 올려봤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저기... 중요한 거 많이 있었어요?"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차 대표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리곤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하..."
그는 적막 속에 홀로 한참을 웃다가 소리쳤다.
"성공이다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수백의 연구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환호했다.
#66화, 밤손님
대로변에 위치한 카페 주차장.
한 남자가 길 건너를 주시했다.
그가 보는 곳 멀리 JSO 사옥이 자리해 있었다.
왕복 8차선 도로와 JSO의 외부주자창을 포함하면 거의 100M가 훌쩍 넘는 거리.
남자는 그곳에서 나올 누군갈 기다리듯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건물 입구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툭.
남자도 담뱃불을 날리고 세워둔 차를 향해 걸었다. 시선은 그대로 청년을 좇았다.
철컥.
청년이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올 즘, 남자도 운전석에 올랐다.
"즈쉬앤."
"...!"
남자가 놀라서 뒷좌석을 돌아봤다.
웬 낯선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염색했네? 붉은색도 나쁘지 않았던 거 같은데."
모국의 말…,
칠흑 같은 눈,
그 눈 밑의 작은 점.
즈쉬앤은 금방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애초에 이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동료들뿐이었다.
"니엔젠…?"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아직 한국에 있었어?"
"일단 출발해. 미행 중인 거 같은데."
니엔젠의 턱짓에 즈쉬앤이 좇던 차를 돌아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담배 빼 물었다.
"오늘은 그만 됐어. 그보다 어떻게 찾았어?"
"죽은 줄 알았대도. 네가 보인 거뿐이야. 나도 방금 그 친구를 좀 알아보고 있었거든."
"한성준을? 진짜 복수라도 할 생각이었던 거냐?"
즈쉬앤은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픽 웃고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연히 아니겠지만, 녀석을 어떻게 할 생각은 그만둬."
니엔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나머지 녀석들은?"
"…웨이치만 죽었어."
"그렇게 된 거였나…? 그럼 황재천을 죽인 것도 너희들이겠군."
~지잉. 지잉.
즈쉬앤이 워치를 확인하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임태성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지금 그의 상사는 뒤에 앉은 녀석이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 없네."
"아주 개가 다됐군."
"유기한 놈이 할 소린 아니지."
한상철을 마주쳤던 날, 혼자 몸을 피해버린 니엔젠을 탓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 어디에도 원망은 담겨있지 않았다.
니엔젠에게 책임까지 바랄 순 없었다.
적어도 즈쉬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니엔젠에게 삶을 구원받았고, 그 뒤론 멋대로 쫓아다녔을 뿐이니까.
"너희를 어떻게 묶었지?"
즈쉬앤은 옛 생각에 잠시 빠져들다 니엔젠의 질문에 현재로 돌아왔다.
"아… 이게, 보이려나?"
즈쉬앤이 셔츠 앞섶을 조금 풀더니 백미러를 움직여 가슴께를 비췄다.
그의 왼쪽 쇄골 아래가 까만 음영에 덮여 일렁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괴이한 현상.
"흠...."
니엔젠은 느껴지는 마력의 성질을 읽어냈다.
가장 강력한 수준의 낙인.
혹은 금제(禁制)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이다."
"당하는 순간, 이건 너라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확실히. 아직은."
어떤 계획도 공유한 적 없는 니엔젠이다.
하지만 즈쉬앤이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지금껏 니엔젠이 해온 모든 일들이 그의 힘을 되찾는 일과 관련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힘을 '되찾는'다는 게 무슨 의민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니엔젠이 쉽게 인정하니, 살짝 씁쓸한 느낌.
그건 곧 작별을 뜻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니엔젠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문을 열고 내려섰다.
"추해관은 청송에 잠입했던 날 이미 해산된 거다."
"그건 그렇지."
6명이나 죽었으니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한상철을 만나기 전까진 니엔젠과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감정이 조금 북받쳤다.
그러나 곧 정수리가 찌릿하며 북받쳤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즈쉬앤은 머리를 더듬으며 쓰게 웃었다.
그에겐 특정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니엔젠의 술법이 걸려있었다.
힐끔 돌아본 니엔젠이 생각났다는 듯 즈쉬앤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이젠 필요 없겠지."
즈쉬앤이 머리를 털며 물러났다.
"아니야. 그가 알고 있다."
술법이 풀리면 니엔젠과 접촉한 사실을 한상철이 알아챌 수 있었다.
"한상철 정도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텐데?"
"계속 필요할 거라더군."
농담에도 잘 웃지 않는 니엔젠이 한참을 소리 내 웃었다.
"잘 지내란 말은 못 하겠네."
"의외로 그렇게 나쁘지 않아."
어차피 낙엽처럼 살아온 인생.
바람이 바뀐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다만 하나.
니엔젠과의 차이라면,
한상철은 목표를 심어준다는 것이었다.
차에 오르려던 즈쉬앤은 방금 니엔젠이 놓고 내린 듯한 신문을 발견했다.
바로 보이는 1면에 '대한민국 최초의 영웅'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아까 다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또는 걱정.
"니엔젠!"
황급히 불러 세우자, 저만큼 가던 그가 고개만 돌려 바라봤다.
"대답해. 한성준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걱정하지 마. 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 테니까. 난 녀석과 좋은 관계를 원한다."
"…!"
***
계획에 없던 영웅선정은 보름이 넘는 시간을 눈 깜짝할 새 빼앗아가 버렸다.
임명 초기라 꼭 참석해야 할 자리가 많았고, 수업은 수업대로 빠질 수 없으니 짬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또 쏟아지는 관심이 피로를 배가시켰다.
이젠 번화가를 걸으면 제법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
자격수여식과 함께 한번은 거쳐야 했을 기자회견으로 얼굴이 꽤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두 번의 주말이 지나며 생도들의 관심은 겨우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가장 편한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혹은, 혼자 있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과 있거나.
'근데… 둘 다 너무 제집처럼 드나드네.'
차유라와 아이비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정원에 들어섰다.
저 둘은 거의 매일 같이 이곳에 들렀다.
외부출입문의 보안장치에 홍채등록까지 마쳤다는 얘기다.
물론 (지나가는 말로) 내가 그러라고 하긴 했었다.
둘의 공통점이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570여 평의 아지트 공간은,
차유라가 주도한 풍부화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수려한 풍경으로 변신했다.
야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천연미와 적당한 인공미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대정원.
비록 내 집은 여전히 6+5평의 이동식 주택이지만, 2층 테라스에 앉아 있으면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계의 수종(樹種) 중 유익한 것들만 모아 놓은 터라 문자 그대로의 힐링효과가 있기도 했다.
"어."
아이비가 왔다고 손짓하기에 대충 손을 들어줬다.
두 사람은 초입에 마련된 정자에서 쉬거나, 정원로를 걷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기다 시간 맞춰 돌아간다.
사실 내가 따로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동구한테도 저 둘은 '다른 사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가르쳐뒀다.
'응…?'
웬일로 아이비와 차유라가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서로 생도회에서 인사를 나누긴 했으나, 필요한 말만 하는 둘의 특성상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민첩이 9.3에 이르며 오감이 많이 향상된 결과다.
"여기선 집도 하루 만에 만들어?"
"정확히는 다른 곳에서 모듈형으로 만들어서 합치는 거예요. 아무튼, 아이비 씨는 정원 쪽으로 난 창문만 있으면 된다는 거죠?"
"응. 그런데 성준이 허락 안 할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얘기해볼게요."
웬 집 얘기지?
내 이름이 들려서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허락 안 해?"
두 사람이 이쪽을 올려봤다.
"들었어요? 집을 새로 크게 짓죠. 그거 치워버리고. 처음엔 뭘 할지 몰라서 놔뒀는데, 거긴 너무 좁아요."
내 집 얘기였어?
"번거롭게 또 뭘 해. 난 괜찮음."
"거의 매일 오는데 한 번도 집에 초대한 적 없잖아요."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쥐똥만 한 집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니까 좁다고요. 우리도 쉴 곳은 있어야죠. 점점 날도 추워질 텐데."
순간 이게 상식에 맞는 얘긴가 잠깐 뇌정지가 왔다.
추워지면 안 오는 게 맞지 않나?
남의 집을 넓힐 게 아니라….
그러나 차유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운동기구나 간단한 훈련시설도 있으면 좋겠죠. 짓는 김에 손님방도 두어 개 만들구요."
그제야 아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이해됐다.
지금 내 집에 자기들 방을 만들겠단 얘기다.
물론 하루 3, 4시간 들르는 곳이니 집이라기보단 쉼터에 가까웠지만.
"됐어. 9시 이후에 정련관 가도 되는 거고. 정 공간이 필요하면 여기 옆에다 한 채 더 갖다 놓으면 되잖아."
"후회하게 안 해요. 어느 날 바뀌어 있을 테니 번거로울 것도 없죠."
"...."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녀의 고집.
…이라기보단 뻔뻔함인가?
이곳을 알게 된 뒤로 차유라의 행동이 조금 달라진 것도 같다.
아니면 영웅이 된 것 때문인지, 골렘 일 때문인지.
어쨌든. 사실 나한텐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정원 일로 보듯, 차유라 스케일이면 또 한 번 입이 떡 벌어지겠지.
다만 계속 걸리는 건....
자꾸만 가까워지는 거리.
이건 오로지 내 문제인데.
관계를 쌓는 것은 내가 원한 일이지만,
'정'이 쌓이는 건 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허락한 거죠?"
하지만 결국 거절하진 못했다.
더는 이유가 없어서.
"...공간 분리는 확실히 해줘."
***
저녁 8시 40분.
학원 복귀를 위해 각자의 차에 올랐다.
주차된 순서에 따라 아이비, 차유라 순으로 차를 빼 떠났고 내가 막 핸들을 돌릴 때였다.
"씹…."
뭔가 허전하더라니.
왼쪽 손목이 비어있었다.
바로 출발하기 좋게 차만 돌려놓고 다시 집으로 달려갔다.
'불도 안 끄고 나왔, …아닌데 분명 껐는데?'
확실히 한 것도 기억 못 할 정신머린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갈 때까지 정자에 누워있던 동구가 모습을 감췄다.
나는 현관 손잡이에서 손을 거두며 동구의 상태창을 열었다.
〈방어태세〉를 〈공격태세〉로 설정하자, 창고에 있던 녀석이 바로 튀어놨다.
"크르르."
동구는 집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누가 있는 건 확실했다.
나는 다시 동구의 설정 바꿔 진정시킨 뒤, 조용히 단검을 뽑아 들었다.
JSO 시설팀에 의해 보강된 방벽은, 절대로 좀도둑 따위가 쉽게 넘을 수 없는 구조였다.
'저놈도 초인일 확률이 높다는 거지.'
디텍션으로 시야를 전환하자, 1층과 2층 사이 높이에 마른 남자의 형상이 뚜렷하게 비쳤다.
'이 새끼도 눈치 깠네.'
놈은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조지지?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들어서는 놈이 불리한 입장이라, 벽을 때려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집도 새로 짓는다고 했겠다 조금 부서질 것을 걱정할 필욘 없었다.
먼저 마력을 링크시켜두고 적절한 마법을 고르는 그때, 안에서 다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자, 잠깐! 멈춰, 나간다."
나는 그 말에 더 긴장해서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내 마력을 느꼈다는 뜻이므로.
"...."
잠시 후, 2층 테라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쳐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도적이 아니다."
조금은 어색한 발음.
한번은 본 듯한 얼굴.
나는 곧 정체를 눈치챘다.
'아버지가 뭔 짓을 시킨 건가?'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물었다.
"안에서 뭘 하고 있었지?"
"...."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내리고 품속을 더듬었다.
"말로 해라.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모르는 척하기 위함이지 이놈이 나를 해칠 생각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나보다 아래가 아니란 것도.
"아니… 이걸…."
내 손끝에 화기가 모이자, 놈은 다른 손을 내뻗으며 기어코 뭔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67화, 숟가락 얹기
"뭐야 그게…."
...쪽지?
그가 아래로 던진 것은 딱지처럼 접힌 쪽지였다.
그것은 마치 민들레 씨앗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어우...'
이 대목에서 조금 쫄았는데, 종이 쪼가리에 마력을 담아 '천천히' 날리는 건 상당히 높은 경지에 있어야 할 수 있는 기예였다.
쪽지를 받아 펼치자 삐뚠 글씨로 딱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바라는 것을 묻거든 아무것도 없다고 하라.〉
"누가 보낸 거지?"
"...나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 한 문장을 전하려고 내 집에 침입했다는 소리였다.
'아버지랑 상관없는 일인가?'
연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직접 만났으니 더 알아듣게 설명해줘."
나는 마법을 흩어버리며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돌아서 한마디를 추가했다.
"당신 추해관이지?"
"…!"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누군지 감 잡았으니까 내뺄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그는 정말 도망치려 했던 듯 한숨을 푹 쉬고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정말 소름 끼치는 부자군."
"뭐가."
"부자가 서로 숨기는 것이 많다는 얘기다. 추해관은… 네 아버지한테도 말한 적 없는 이름이다."
"어쨌든 내 목숨을 노린 놈들인데, 나도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얘길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몰래 숨어들어야 했던 이유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쪽을 만난 적이 없는 걸로."
"그래 주면 더 좋고. 정확히는… 쪽지만 내 개인적인 판단이었다는 거다."
...나한테 붙여둔 건 아버지가 맞다는 얘기네.
"알았어."
남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긴 얘기를 시작했다.
너무 거슬러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든 정보가 될 것이기에 잠자코 들어줬다.
그는 부모도 모르는 고아 출신으로, 어느 외진 마을의 노예로 살았다고 했다.
자연히 지독한 노동갈취와 학대라는 클리셰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 이상의 추악함에 듣는 내내 인상을 펴지 못했다.
"...14살 여름이었나. 주인 부부가 잠깐 자리를 비워서 숨을 돌리는데, 웬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 순간 간절히 바라는 게 뭐냐고…. 난 족쇄를 풀고 싶다고 말했다."
"족쇄까지 채웠어?"
"안 그럼 진작 도망쳤겠지."
미친… 이게 21세기에 일어난 일이 맞나 싶었다.
"어쨌든 그 남자가 족쇄를 풀어줬겠네."
"그리고 그날, 마을 사람 백스물다섯 명이 모두 죽었다."
"...!"
죽어도 싼 놈들이긴 한데, 그 남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당시의 난, 그가 신처럼 보였다. 그와 함께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꼈지. 그래서 그를 따라다녔다."
"그게 추해관의 리더란 말이지?"
"맞다. 니엔젠."
거기서 의문이 하나 들었다.
앞에 있는 남자가 30대 초반쯤으로 보였기 때문.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란 얘긴데… 그럼 그 니엔젠이란 사람은 지금 몇 살이지?"
적어도 40대쯤은 됐다는 얘긴데….
내가 사진으로 봤던 니엔젠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20대였다.
"나도 모른다. 니엔젠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이 사람도 진짜 모습은 못 본 거 아냐?
"일단 계속해."
내가 본 사진도 그저 수많은 모습 중 하나라는 얘기겠지.
"그가 같은 질문을 할 때마다 멤버가 하나씩 늘었지."
"아. 바라는 거…."
"그래.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나… 또 모두가 제 발로 그를 따라나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니엔젠이 선택한 것이었다는 걸. 녀석은 언제나 다른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물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뭐야. 지가 지니야?'
상대가 뭘 바랄 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야말로 광오한 자신감이고, 전부 이뤄줬다면 무서운 능력이었다.
"당신,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즈쉬앤… 아니 이제 주자헌이다."
"주자헌 씨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나를 선택했다는 거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주자헌을 마주치지 않고 쪽지만 발견했을 때를 가정해 보자....
아마 니엔젠이 쪽지가 말한 '누군가'라는 것은 충분히 눈치챘겠지.
그럼 적어도 그를 경계했을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어. 근데 '왜'라는 의문이 생기네. 주자헌 씨가 니엔젠의 의중을 알았다는 건, 최근에도 그와 접촉했다는 말인데…. 또 나한텐 그를 경계하라니. 이건 뭐 어떻게 해석해야 해?"
주자헌은 강제로 붙잡힌 몸.
내 입장에선 그가 여전히 니엔젠과 한편이라 보는 쪽이 합리적이다.
"그건... 양쪽 모두를 위해서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군."
"양쪽이 누굴 말하는 거지?"
"한 장군님과 니엔젠. 나는 두 사람이 계속 엮이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의 대답은 조금 충격이었다.
동료에 대한 걱정이라면 이해가 됐을 텐데.
"...니엔젠이 아버지와 비슷할 정도인가?"
"지금은 네 아버지를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도 성치는 못할 거다."
"…!"
로코33의 세계관을 꿰고 있던 나로선 납득할 수 없는 얘기였다.
아버지는 단순히 1챕터의 보스가 아니라, 세계관 최강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제거될 수 있었던 건,
플레이어가 수백 수십 번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패턴'을 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진행 편의적인 조력자의 등장까지….
현실에서 한상철은,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 본적도 없는 인물이 그 정도라고?'
하지만 곧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추해관이 히든 퀘스트의 조각이라면...
결국, 모든 조각이 가리키는 것이 니엔젠 그 자체일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쯤 되는 존재라면 납득할 만한데….'
이거 참.
대충 의문이 풀렸음에도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선택권이 없었다지만, 십수 년을 함께한 조직의 리더가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저렇게 쉽게 갈아타지는 건가 싶었다.
'내키지는 않는다만.'
나는 주자헌에게 「심:약점간파」를 시도했다.
방대한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스킬은 기본적으로 대상자의 기억 전반을 관찰자 시점에서 뒤져본다.
워낙 많은 장면이 빠르게 스쳐 가서 다 알아보지 못할 뿐.
그중 대상자가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것, 또는 걱정하는 것을 찾아 비춰주는 식이었다.
'...뭐야 이거.'
무엇도 특정되지 않고 뒤죽박죽 겹쳐진 이미지.
여러 개의 장면은 시간대도 선명도도 모두 달랐다.
여성의 등.
또, 남성의 등.
각각 다른 연령의 주자헌과 함께 보이는 건 전부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아버지?'
알아볼 수 있는 건 딱 한 사람.
그러나 거기서 보이는 표정도 두려움은 아니다.
'어…!'
나는 마지막 남은 이미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바로 내 집 앞마당, 나와 함께 서 있는 장면이었으니까.
그가 나를 두려워할 린 없었다.
'지금 상황을 뜻하는 건가?'
나는 주자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지?"
"무, 무슨… 누가...."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답을 찾을 수도 있고."
주자헌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꾸했다.
"이미 얘기한 것이다. 두려운 것이…아니라 걱정될 뿐이고."
"뭐… 나로 인해서 니엔젠이 아버지랑 부딪히는 거?"
"...그렇다."
단순히 옛 동료에 대한 걱정이라면 내가 본 장면들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동시에 강제로 붙잡아둔 아버지를 함께 걱정한다는 것도 우스운...
'아….'
그러니까 주자헌은,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 버린 거다.
이런 걸 가리키는 뭐 유식한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아무튼.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어린 시절이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가장 편한 삶이 된 것이었다.
'따를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한 거겠지.'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일이다.
아버진 절대로 좋은 주인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아버지가 당신한테 주로 시키는 일이 뭐지?"
"...."
"꾹 다물어봐야 소용없어. 내가 당신을 만난 걸 숨기면 당신이 한 얘기도 숨기는 거고, 내가 입을 열면 아무 말 안 해도 한 게 되는 거니까."
"...미행, 감시, 납치, 협박 같은 일이 대부분이고, 가끔 암살이나 사체 처리…"
"그만 됐다."
가족이라 그런지 자꾸만 잊는다.
아버지는… 악당이 맞다.
"주자헌 씨는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나?"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뭐 싸이코패스야?"
주자헌이 픽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자신의 정수리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술법이다. 첫 의뢰 때 니엔젠이 시킨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도움을 받았지."
그곳엔 못의 머리처럼 생긴 철심이 박혀있었다.
"잠깐만."
나는 주자헌이 바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목 뒤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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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게리움 주술 대못]
[등급] 최상급 [내구도] 150/150
*정신계 술법에 이용되는 보조도구입니다.
*주술「봉악(奉惡)」의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 피술자의 양심, 사랑, 연민이 억제됩니다.
(술사: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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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니엔젠의 본명인가?
"그만 들여다보지."
"신기해서 그래."
나는 재빨리 한 줄의 문장을 삽입했다.
'피술자가 지정된 대상에게 충성합니다.'
[대상을 함께 입력하십시오.]
내 이름을 적어넣었다.
1,250 DP나 소모됐지만 그대로 진행하고 물러났다.
'적용이 되려나?'
겉보기엔 달라진 게 없었다.
주자헌이 멋쩍게 웃고 말했다.
"질문은 다 끝난 건가?"
"오늘은. 아… 내 번호는 알겠지?"
그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 워치를 확인하니 복귀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난 빨리 들어가 봐야 하니까 주자헌 씨는 지금까지 날 미행해서 아버지께 보고한 것들을 싹 정리해서 문자로 남겨줘."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