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ONOFVILL / Chapter 3 - 3

Chapter 3 - 3

#20화, 사이코패스

기숙사 로비는 생도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시간 많이 잡아먹혔네. 들어갔다 나올 거야?"

권하선이 워치를 확인하며 물었다.

11시 48분. 곧 점심시간이었다.

오전부터 하 교관과 이나은들을 상대했더니 만사가 귀찮다.

"난 점심 패스. 그냥 매점에서 때울래."

지난 금요일부터 매점을 오픈하면서 로비 한편의 카페테리아 공간이 활성화됐다.

"그럼 매점 가야지."

"왜. 너 많이 배고프면 식당 가."

"그 근육 돼지랑 한바탕하니까 나도 좀 지치네. 오늘은 혼자 다닐 엄두가 안 나."

"영이는?"

"저도 매점 가야죠."

"아니, 의견을 말하라고. 내가 선택권을 뺏은 거 같잖아."

"아~ 됐어. 그냥 니가 쏜다고 하면 될 걸 뭔 세심한 척이야."

"...내가 산다."

"나이스!"

매점 줄을 기다리다가 문득 필요한 게 생각났다.

"매점에서 절연테이프 같은 것도 팔려나? 아니면 스카치테이프라도."

"나 스카치테이프 방에 있는데 갖다줘?"

"그래? 어차피 기다릴 거 지금 좀 가져와라. 너 먹고 싶은 거 말하고."

"컵라면, 핫도그, 소시지, 감자칩, 초코칩, 콜라. 혹시 크림 들어간 빵 있으면 그거랑 딸기 우유도."

"넌 그냥 식당 가라."

"헤헷. 갔다 올게."

권하선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하다가 층수를 확인하고는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알만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중앙 로비에 있던 일부 생도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동서쪽 비상계단으로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뭐냐 저거?"

"…글쎄요."

매점 줄에서도 이탈이 발생했다.

"좀 있다가 다시 오자."

"기껏 줄 서 놓고 뭔 소리야."

"보면 모르냐. 이나은 뜬 거잖아."

"X발…. 가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섭고 더러워서 피하는 건 알겠는데, 안전 구역 안에서까지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기 줄이 짧아져서 땡큐긴 한데….

우리만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동요 없이 자리를 지키는 앞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요."

"…네?"

다부진 체형의 보이시한 여생도였다.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아시나 해서요."

"아~ 그거요? 이나은 따까리들 때문이에요."

대번에 두 사람이 떠올랐지만,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거나 하면 밖으로 끌고 나가서 점수를 갈취한다고 하더라구요."

"끌고 나가요?"

"네. 강제로 데리고 나간다고… 꼴에 여자는 안 건든다던데요. 뭐 저도 소문만 들었어요."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신박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네.

이나은 스타일은 아니고, 도지훈이 김판웅을 꼬드겨 벌인 일일 확률이 높았다.

가영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완전히 막 나가네요. 벌써 소문 다 났으면 교관님들이 아는 것도 시간문제 같은데."

"이미 알고 있을걸."

"근데 아무런 조치를 안 한다고요? 설마요. 아무리 빽이 좋아도 그렇지."

"아니. 잘못한 게 없으니까. 이유 없이 괴롭힌 것도 아니고, 데려다가 '삥'을 뜯은 것도 아니고."

"그, 그래도 안전 구역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건…."

"그러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잖아. 물론 당하는 놈은 좀 억울하겠지."

마침내 이나은 일당이 로비로 들어섰다.

뚜벅뚜벅.

공간 전체에 그들의 전투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누구 하나만 걸려보라는 표정들이네."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요."

모든 생도가 비상계단으로 대피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나은 일당이 뿜어내는 독기 서린 아우라에 하나같이 길을 비켜서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재밌게 돌아가네."

"뭐가요?"

"벌써 계급이 나뉜 거 같잖아."

무조건 피하고 보는 이들과 긴장하되 자리를 지키는 이들.

그리고 이나은 일행은 마치 최상위의 포식자 같았다.

"원래부터 다른 세상 사람인 건 맞죠. 형, 우리 차례예요."

매점 쇼핑을 마치고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내리고 타라. 못 배운 새끼야."

"뭐 이 새끼야?!"

남자 숙소 엘리베이터 앞에서 험악한 고성이 들렸다.

막 내리려는 생도와 탑승하려는 생도 사이에서 시비가 생긴 듯했다.

"...아."

도지훈과 최범균. 조용히 지나치는 게 더 이상한 조합이었다.

시비 자체를 즐기는 최범균과는 달리, 도지훈은 벌써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뭘 못 들은 척해. 븅신아."

"이런 X새끼가!"

도지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최범균이 낄낄거리며 자리에서 사라졌고,

턱!

그의 뒤에 있던 생도가 주먹을 대신 받아냈다.

"최범균!"

강선호였다. 그가 화난 얼굴로 소리치자, 어느새 도지훈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최범균이 알았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미안합니다. 보다시피 저 친구는 저게 다 장난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쟤도 참 답답하네.'

강선호가 사과하는 동안에도 도지훈은 여전히 주먹을 붙들린 상태였다. 당연히 그게 더 녀석을 자극하지 않겠나.

"이익… X발!"

"아!"

"뭐해 새끼들아. 가만히 있을래?"

도지훈이 발작하자 강선호가 아차 하고 손을 놔줬지만, 이미 얌전히 끝내기는 틀린 상황이었다.

김판웅을 포함해 세 명의 생도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파바밧!

강선호는 방어와 회피 동작으로만 그들을 상대했다.

"일단 진정들 하시고…."

"그만!!!"

멀찍이 동쪽 엘리베이터 앞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한마디 외침에 강선호를 상대하던 3인이 로봇처럼 멈춰 섰다.

"내가 괜한 일로 소란 피우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이나은이 피곤하다는 얼굴로 다가오자, 김판웅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나, 나는 지훈이가…."

퍽! 퍼버벅!

그 와중에도 도지훈과 최범균은 여전히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도지훈!"

이나은의 신경질적인 부름에도 도지훈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눈에 뵈는 것도 없을 테지만, 지금은 다른 데 정신을 팔 수 있는 형편이 아닐 것이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초고속 공방전. 확실히 둘 다 '민첩계'라 구경하는 맛은 있었다.

휘이잉!

'어?'

실내에 느닷없는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아니, 마력의 움직임이었다.

언뜻 빙결의 술식처럼 보였는데, 또 단순히 빙결로 보기엔 동원된 마력이 너무 많았다.

'좀 위험한 수준인데…?'

최범균과 도지훈의 신형이 점점 느려지더니 전투복 위로 새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최범균이 잽싸게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아, 나은아…."

"...."

홀로 남은 도지훈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나왔다. 그의 두 다리는 벌써 얼음에 갇힌 상태였다.

"저 새끼가 먼저- 어어, 그만해! 잘못했어!"

얼음의 결정화는 다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쩌저적!

"내, 내가 잘못했다니까! 다시는…."

얼음 결정은 생물처럼 순식간에 증식하더니 도지훈을 머리끝까지 집어삼켰다.

"미친…!"

눈으로 본 것이 너무 충격적이라 뇌에 갑작스레 부하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이나은은 그대로 돌아섰다.

엘리베이터에서 권하선이 내리고 이나은이 올라탔다. 그때까지도 로비의 생도들은 전부 정지된 상태였다.

나조차도 조금 멍했으니까.

"...."

"와, 예쁘다. 얼음 동상은 언제 갖다 놨대?"

권하선의 해맑은 멘트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곧장 '얼음 동상'으로 달려가 화 속성 마력으로 얼음을 녹여냈다.

화르륵!

강선호도 손끝에 강기막을 씌우고 거들었다. 그는 얼음이 두껍게 덮인 아래쪽을 공략했다.

이윽고, 도지훈의 얼굴이 얼음 밖으로 드러났다.

"야! 숨 쉬어, 숨!"

"컥! 후 하아-! 안 그럴 게에…."

"휴우…."

미친 연놈들.

도지훈은 마지막 챕터까지 살아있던 인물이다. 내가 아니라도 강선호나 다른 누군가가 늦지 않게 구했을 것이다.

만약 뭔가 틀어질 거 같으면 '보고서' 항목에 알림이 떴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이게 원래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저런 성격인 애랑 수년을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정신이 아니네."

강선호의 혼잣말이었다.

'첫인상은 여기서 조져버린 건가.'

훗날 이나은이 강선호에게 연심을 품게 된다는 걸 당사자들도 모를 때였다.

***

"후회 안 하냐?"

"뭐를."

"사이코패스랑 척진 거."

"아~ 우리 팀에도 하나 있거든. 걔가 지켜줄 거야."

"야! 나는 정당방위였다니까!"

"아오 씨. 입에 있는 건 좀 삼키고 말해라."

매점 음식으로 한창 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뭐…."

나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가 강선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맞은 편 권하선의 옆자리에 최범균이 앉고 있었으니까.

"성준 씨는 좀 갑작스럽겠지만…."

"잠깐. 그전에…."

"네 말씀하세요."

아직 어색한 사이인 건 맞지만, 강선호 특유의 정중한 말투를 듣자니 더 불편해서 미칠 거 같았다.

"우리 동갑이야. 적응훈련 때 이미 말을 놨었고…."

그날 전투 지휘를 하면서 내가 일방적으로 말을 놨었다. 그게 강선호와의 유일한 소통(?)이었고.

"하하… 그랬었나?"

"아 X바, 답답해 뒈지겠네. 야, 우리 동아리 들어와라. 이 한마디 하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최범균이 불쑥 끼어들며 용건을 오픈했다.

어떻게 엮일까 고민했었는데 먼저 제안해올 줄은 몰랐다.

"이야~ 한성준 인기 많네?"

권하선의 비꼬는 말에, 나는 픽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결정할 사람은 여기 없는 거 같은데."

"곧 내려올 거야. 널 받아들이는 건 이미 투표가 끝난 일이고."

"투표?"

"내가 추천했고, 다른 애들도 다 동의했어."

"말은 바로 해라. 다는 아니지."

"3표 받았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새끼 표정 띠껍네?"

...저 인간, 진짜 맥락 없이 들이대는구나.

[인물 '최범균'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45]

"범균아, 적당히 좀 하자."

강선호가 지친다는 듯이 타이르자 최범균이 히죽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미안하다. 아무튼, 우리 결정은 그런데… 생각 있어?"

"내 팀원까지 포함한 제안이겠지?"

"물론이지. 다 합해서 일곱 명. 그걸로 더는 받지 않을 계획이야."

"나쁘지 않지."

규모를 키우는 게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니다.

보상을 나눌 인원이 늘어나면 몫도 줄어드는 게 당연한 이치. 물론 규모와 활동 영역을 함께 키워서 더 많은 보상을 얻는 방법도 있지만, 그만큼 운영에도 많은 시간을 뺏기게 된다.

"빨리도 불러냈다."

마침내 등장한 송연희의 첫마디였다. 옆에는 차유라도 함께 있었다.

"아, 내가 성준이네 어떻냐고 물어볼 때 이미 로비에 같이 있었거든."

"그럼 얘기도 다 했겠네?"

"같이 하자는 얘기만. 너 기다리고 있었어."

"잠깐 나 좀 봐."

"...?"

송연희는 강선호의 말에 대꾸도 없이 나를 보더니, 대뜸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돌아섰다.

무슨 일인지 그녀의 팀원들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카페테리아를 벗어나 말없이 앞서 걷던 송연희는 복도 끝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홱 돌아서며 말했다.

"너 나 좋아해?"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지?

#21화, 동아리 결성

"나 좋아하냐고."

"X나 당황스럽네."

"대답해."

"미쳤냐고 되묻고 싶다."

"전부터 나 알고 있었어?"

로코33 캐릭터로서의 정보가 아니라면 '한성준'은 그녀를 알고 있었을까?

"...아니."

대화 그룹에 대한 정보조차 오롯이'김성준'의 것이었다.

송연희가 재벌 집 자제인 건 맞지만, 이나은처럼 언론매체에 노출된 인물은 아니었다.

청송 안에서야 그 미모와 특유의 아우라로, 또 강선호 그룹의 실질적 리더로 벌써 유명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소문이나 소개 없이 개인적인 정보를 알 길은 없었다.

"대답이 느렸어. 아 소름 끼쳐."

"대체 무슨 오해를 해야 그딴 소리가 나올지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청송에서 본 게 다라는 거지?"

"그래."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뒤에서 그딴 수작을 부렸다?"

"제발 알아듣게 좀 얘기해라."

"너야말로 모르는 척 좀 그만해! 니가 너희 집에 내 얘기했잖아."

"내가?"

이 세계는 반대로 말하는 대화법이 유행인가? 아버지 귀에 내 소식이 전해진 거야말로 송연희의 입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너 따위랑 약혼을? 미쳤냐?"

"…!"

"울 아빠가 무시 못 할 대단한 집안인 건 알겠어. 근데 그렇다고 니 뜻대로 될 거란 착각은 하지 마라."

슬슬 개소리의 줄거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약혼이라니…. 너무 어이없는 단어가 튀어나오니 끓어오르던 화도 훅 꺼져버렸다.

"나랑 상관없는 얘기야. 난 니 이름 한 글자도 꺼낸 적 없다."

"너네 집에서 푸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빠가 그런 얘길 했다고?"

"글쎄 왜 그러셨는지는 나도 모르겠고, 한 가지만 물어보자. 혹시 입학하기 한 달 전쯤 주말에… 너희 아버지가 점심 먹자고 삼성동으로 나오라고 했다가 취소하신 적 있냐?"

"하! 그게 너였어?"

...그날 식사 자리의 의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나도 그게 너였다는 건 지금 알았어. 그냥 두 분 사이에서 오고 간 얘기란 거지. 내가 전화 드려서 못 박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송연희는 혼자 급발진한 게 민망했던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그런 오해를 했으면서 동아리에 들어오란 건 신기하네."

"공사 구분은 하니까. 그래서… 할 거야?"

"이게 따지고 보면 스카웃인 거잖아. 그치?"

"그게 뭐."

"창설 비용 뿜빠이는 니네 팀원끼리 하라고."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 그거면 돼?"

"활동 분야는 정했냐?"

"하나는. 마석을 얻으려면 한 가지는 당연하잖아."

"알아서 하는데 수렵과목만 추가해줘."

"수렵? 그건 등록비 낭비야. 실습 과제가 있을 수 없는 과목이잖아. 이론과제만 할 바에야 더 편한 과목도 많고."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활동 분야는 기본 1과목에 추가로 등록할 때마다 50점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수렵과목은 말 그대로 괴수를 사냥하는 방법이니 괴수가 없다면 실습도 불가능할 수밖에.

고로 송연희의 반응은 상식적인 것이지만….

"그건 니 뇌피셜이고. 정보가 있으니까 내 말대로 해."

"생도들끼리 하는 동아리 활동에 수렵 실습을 허용한다고? 아! 그것도 XR 장비로 대체하려나?"

"아무튼, 등록비는 우리도 부담할게."

한국엽술학교 관련 퀘스트를 하면서 주워들은 얘기가 있다. 많은 생도가 수렵 실습을 하다가 죽고 다쳤었다는 내용.

본편 시점에선 잡다한 구전 설정 중 하나였지만, 나에겐 청송의 실습 강도를 예단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였다.

복도를 돌아 나오던 중 송연희가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한 씨 집안은 TK뿐인데… 혹시 너희 아버지가…."

"재벌 집 아니다."

송연희는 나를 대단한 집 자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재계 30위권 재벌 눈에 군인 집안이 대단할 리 없다. 당연히 송 회장도 그 기묘한 커넥션을 딸에게 설명할 수 없었으리라.

"그럼 정계 쪽?"

"그런 거 아냐. 그냥 친분이 있으신 거겠지."

"그러니까 아빠랑 친분이 있을 만한…."

다시 카페테리아에 들어서면서 송연희의 추궁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멤버들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송연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함인지 빠른 진행으로 팀원들에게 점수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동아리를 창설했다.

"일곱 명이니까 동아리명은 그냥 '세븐'으로 한다?"

저들끼리는 벌써 얘기가 됐었는지 송연희네 팀원이 전부 나를 쳐다봤다.

"상관없어."

"전부 14.3점씩 더… 그냥 15점씩 보내줘."

"추가등록?"

"어. 추가 2과목에 100점."

보상이 수행과제와 관련된 것이라는 설명에 따라, 기본 활동 분야를 '초상자원과 에너지'로 정하고, '전술'과 '수렵' 2개 과목을 추가로 등록했다.

"근데 과제 입찰할 운영비도 있어야 하거든? 기분 좋게 기부해주실 용자님 계실까?"

송연희가 노골적으로 나를 보며 하는 소리였다.

현재 내가 가진 점수는 151점.

15점의 지출이 있었지만, 100점의 적응훈련 보상 덕에 가장 넉넉한 형편이었다.

"과제 입찰할 때 다시 상의하는 걸로. 우리 식사 중이었어."

나는 입속에 빵을 쑤셔 넣으며 그만 가달라는 손짓을 했다.

***

"나는 니가 직접 운영할 생각인 줄 알았는데."

"골치 아프게 뭐하러. 왜, 맘에 안 들어?"

"아니, 잘 생각했다고. 쟤들 정도면 훌륭한 멤버지. 반도 같고. 최범균은 좀 거슬리지만…. 후우, 배부르다."

"대단하다, 진짜."

내가 캔커피와 빵 하나를 먹는 동안 권하선은 여덟 가지의 음식을 전부 해치웠다.

"원래 아침, 점심은 황제처럼 먹는 거야. 이제 뭐 할 생각?"

"3시 수업이니까 그전까지 정련관에 있으려고."

탱커를 선택한 이상 꾸준한 체력단련은 필수였다.

"그럼 같이 가자. 영이는 어떡할래?"

"저는 방에 있을래요."

"맞다. 가기 전에 스틱 좀 줘봐. 권하선 너도."

"스틱? 왜?"

가영과 권하선의 스틱을 받아 나란히 붙여 놓고, 먼저 받아두었던 스카치테이프로 두 개를 칭칭 감았다.

"야야, 지금 뭐 하는 거야!"

권하선이 기겁하고 손을 뻗었다.

"기다려봐."

나는 의자를 뒤로 빼면서 기어이 작업을 마무리했다.

만년필 크기의 장비지만, 두 개를 겹쳐서 고정하니 제법 묵직했다.

"자."

권하선은 완성품(?)을 보더니 눈썹을 긁적였다. 의미는 눈치챈 모양.

"이래도 돼?"

"안 된다는 규칙 있어?"

정훈의 규칙 중 스틱의 양도를 금지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거 완전히 사기잖아."

"니가 들고 있으면 사기긴 하지."

권하선과 맞붙는 놈들은 앞으로 3점 털릴 거 6점씩 털리게 될 것이다.

"근데 남들은 알아도 그 방법 못 써."

스틱은 공격용인 동시에 방어 도구이기도 했다. 당장 나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멈추려면 먼저 점수를 내는 방법뿐이었으니까.

대체로 비슷한 실력끼리 뭉쳐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줄을 타인에게 맡기고 싶은 생도가 몇이나 되겠나.

이건 권하선과 가영처럼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에 이득을 따지지 않는 관계여야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형이 생각해둔 방법이란 게 이거였어요?"

"어. 너는 그냥 정훈 끝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권하선이 니 아바타라고 하니까 X나 든든하지 않냐?"

"큭큭."

"쯧, 하여간 잔 대가리 하나는 알아줘야 해."

권하선은 투덜거리면서도 재밌겠다는 표정이었다. 상대의 어이없는 반응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

정련관은 지하 2층, 지상 5층의 널찍한 건축물로- 최신식 피트니스 기구와 마력 단련실, 방어/회피 훈련장, 사격장을 갖춘 개인 훈련 시설의 총체다.

적응훈련을 진행했던 XR 장비급은 아니지만, 각종 버츄얼 기구까지 넉넉히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라커룸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항상 깨끗한 트레이닝복이 넉넉히 걸려있어 목욕탕 수건처럼 쓰고 던져두면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매일 두세 번씩 땀을 빼는 생도들에겐 정말 고마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축축한 걸 싫어하는 나는 조금 얌체 같은 사치를 부리곤 했다.

"뭐야, 땀 얼마나 뺐다고 또 갈아입어! 세탁비도 다 국민들 세금이야."

트레이닝복을 새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권하선이 화장실에서 손을 털며 나오다가 핀잔을 줬다.

"웨이트는 그만할 거야. 이따가 메시지 보내."

"야, 그거 해서 운동이 되겠냐? 20세트씩만 더해. 내가 보조해 줄게."

"...나는 마법계다."

팔다리도 분명 나보다 가늘건만.

내가 마법을 쓰는 일보다 권하선의 지치지 않는 괴력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도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권하선을 겨우 벗어나 사격장으로 향했다.

아직 병기 지급은 되지 않았지만, 사격장 내부의 잠금보관함에 웬만한 원거리 무기와 투척용 무기는 구비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벌써 많은 생도가 사로를 채우고 있었다.

"...자리가 없으려나."

빈자리를 찾다가 거의 마지막 사로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용중'이라 표시된 사로 부스의 유리로 번쩍거리는 전광이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전화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니 차유라가 캐스팅을 취소하고 무빙타겟을 종료시켰다.

"무슨 일이죠?"

"아침에 누나가 하려던 얘기."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귓불이 벌게진 것이, 병기술 시간에 줄을 잘못 섰던 일을 떠올린 듯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화끈하시구만."

당연히 그래야지. 그게 얼마짜린데.

일전에 차유라의 반응이 꽤 좋았던지라 비슷한 옵션으로 반지 아티팩트의 거래가격을 알아봤었다.

플레이어일 때는 잡템 취급도 안 한 쓰레기 옵션이 우리 돈으로 무려 3억 원.

상대적 가치로 JS오파츠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었지, 값이 그만큼 나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뭐 미리 알았더라도 제값에 팔아먹진 않았겠지만.'

애초에 관계를 트기 위한 용도였으니까.

나는 반의반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했다.

"급하게 5천 정도 필요하다고 전해줘."

"...만약 형편이 어렵다면… 아,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그쪽이 처한 상황을 알면 근본적인 해결을 도울 수도 있다는 얘길 하는 거예요."

"...."

돌려 말하기는.

대뜸 현금을 요구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5천만 원은 차유라에게 결코 큰 액수가 아니다. 다만, 나의 이런 요구가 '시작'이라는 점이 걸렸으리라.

"뒷조사 같은 것도 안 해보셨대?"

"우리 아버진 그런 짓 안 해요."

"형편 때문은 아니라고. 내가 개인적으로 쓸 거야."

"사용처를 물어봐도 될까요?"

"알 수밖에 없어. 자금 집행도 누나네 아버지가 대신해주셔야 하니까."

"그게 무슨…."

"잠깐만."

나는 스마트워치에 브라우저를 띄우고 국제초상자원 시세표를 검색했다.

'뭐가 좋을까….'

말도 안 되는 거품이 끼어있거나 반대로 저평가된 시세들. 그중 조금 빨리 띄워도 파급이 적을 만한 것이어야 했다.

'오~ 이거 그건데….'

[Fluid of Bull-Spider]

영문 리스트임에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황소 거미의 체액. 마석의 표면에 발라 속성을 약식으로 감정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시세를 보아하니 아직 쓰임이 밝혀지지 않은 듯했다.

화면을 그대로 캡처해서 차유라에게 보내줬다.

"이게 뭐죠?"

"황소 거미 체액. 그걸 5천 한도 내에서 최대한 구해달라고 말씀드려."

"폐기물이나 다름없는 걸 무슨 5천만 원어치나…."

"이유는 물건을 구한 다음에 설명해 줄 테니까 잔소리는 넘어가자."

"혹시 매매를 원하는 거였다면 지금이라도 얘기해요. 충분한 값을 치를 테니까요."

"이거랑 바꾼 거잖아. 돈은 그 이상 필요 없어."

나는 니게리움 반지를 내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알겠어요. 배럴당 420달러. 대충 50만 원이 조금 안 되는데, 그쪽도 알다시피 한국에서 구하려면 60에서 80까지 생각해야 할 거예요."

지금 그렇게라도 구할 수 있는 건 마공학 관련 기업과 연구기관뿐이다.

"보관비까지 빼도 좋고. 아무튼, 돈 되는대로 구해만 줘."

배럴(158.9ℓ)당 80만 원이던 게 리터당 30만 원을 넘어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네.

아, 쟤는 변화가 없겠구나….

"저기."

용건이 끝나 돌아서려는데 이번에는 차유라가 할 얘기가 있는듯했다.

"그런 거 또 구할 수 있어요?"

"그런 거?"

"나한테 준 반지요."

"...왜?"

"혹시나 해서요.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게 아티팩트잖아요."

이상했다.

왜 '그런 거'라는 지칭 대명사가 특별한 무엇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아티팩트 구하는 게 어디 쉽나."

"아티팩트를 니게리움 12g하고 바꿀 사람은 어디 흔하던가요?"

"...."

가치를 알고 나니 대답할 말이 없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미친놈인 상황이다.

"그건 어디서 났는데요?"

"그냥 어쩌다."

"설령 불법적인 루트라도 상관없어요. 반드시 비밀은 지켜드리죠."

"불법적인 건 아닌데…."

"당연히 정보에 대한 대가도 치를 거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차유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무빙타겟의 스위치를 눌렀다.

위이잉. 절그럭! 절그럭!

포르테늄 철갑을 두른 마네킹들이 사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마네킹의 무감한 움직임에서 이질적인 느낌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전 차유라의 표정.

그녀의 포커페이스가 넌지시, 여유를 연기하고 있었다.

'뭔가 있네.'

나는 차유라의 등에 대고 말했다.

"내가 만들었다."

"...."

탁!

다시 무빙타겟이 종료됐다.

#22화, 교보재생물(1)

숨길 이유가 없었다.

차유라는 신뢰할 만한 성품의 캐릭터이고, 내가 파트너로 선택한 상대였다.

다만 아직 그녀의 입장이 나와 같을 순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차유라는 귓불이 벌게진 채로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확인도 못 시켜 줄 거짓말은 해서 뭐하게."

나는 대답과 동시에 원래 그녀의 것이었던 니게리움 반지를 던졌다.

반지를 받아든 그녀가 안쪽을 확인하더니 급하게 손가락에 끼웠다.

옵션을 부여할 때 알았는데 반지 안쪽에 차유라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더라.

"이게 어떻게…."

나처럼 옵션을 눈으로 보진 못한다 해도 최하급의 구리반지를 알아본 그녀였다. 무려 2가지 옵션의 9% 증가를 느끼지 못할 리가.

"왜 그래?"

차유라가 갑자기 눈을 감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별거 아니에요. 한 번씩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어요."

"아."

놀람, 흥분 따위의 신체 반응이리라. 귓불 이외의 신체 반응은 게임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근접전이 가능한 전투마법사에 아티펙트를 자유자재로 창조하는 재능이라니."

"자유자재는 아니고. 뭐랄까… 은근 까다로운 조건이 있어."

"조건이 뭐든 이만한 결과물이라면 감내해야겠죠. 이건 정말…."

"일단 반지는 돌려주시고."

차유라는 마력 총량의 증가 때문에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는 '1% 회복 불가' 옵션 상실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과활성마력종〉때문에 슬슬 통증이 밀려왔던 것.

...휴우.

그녀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서 계속 눈을 떼지 못했다.

"나중에 선물할게. 어차피 누나 이니셜도 새겨진 거니까. 근데 당분간은 내가 꼭 필요하거든."

그제야 시선을 거둔 차유라가 다시 한번 가슴을 붙잡았다.

이번엔 기대, 설렘 정도이려나.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래야 누나도 솔직해질 거 같아서."

"...?"

"구리반지의 출처를 물었던 이유. 단순히 아티팩트 수급 때문만은 아니었잖아."

"다 알고 대답한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쪽이 확인해줬잖아요. 제작이 아니라 '창조'라고."

"...아."

아티팩트를 자유자재로 창조하는 재능. 반 혼잣말인 데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떠보는 말인 줄도 몰랐다.

"만들어졌으나, 마공학의 산물은 아니라는 게 분석 결과였어요. 알다시피 마공학 기술은 아티팩트의 물리적 크기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쪽이 가진 재능은 최소한 마공학과는 다른 제약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의 아티팩트에 두 가지 기술을 접목시키자?"

"맞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조건이 좀 까다로워. 양산은 불가능해."

"하나면 충분해요."

단 하나의 아티팩트. 그것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독보적인 '무엇'이라면 만들어낸 기업의 위상 또한 마찬가지가 된다.

양산이 불가한 조건은 수십 가지나 되지만, 하나뿐이라고 해서 만들어낸 기업의 이름값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거 엄밀히 따지면 실적위조고 주가조작이야."

"우리가 '보유'할 수 있게 주식 좀 가져가든가요."

"...뭐 그렇다면야."

'사망자'가 되기 전에 가영에게 양도해 두면 주식도 든든한 밑천이 될 터였다.

'원래 잘되는 기업인데 조금 빨리 성장한다고 무슨 일 있겠어?'

"까다로운 조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고 준비되면 아버지를 한번 만나 주세요."

"알았어."

"훈련할 거면 여기서 해요."

차유라는 먼저 부스 문을 잡으며 내게 사로를 양보했다.

"오, 땡큐."

"수고해요."

"꺄아아악!"

차유라가 문을 여는 순간, 밖에서 웬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는 시선을 마주치곤 곧장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

사격장 앞 복도.

저 멀리 벌써 많은 생도가 모여있었다.

"죄송해요. 처, 처음이라 너무 놀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비명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생도가 누군가에게 연신 사과를 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놀라게 해서 제가 미안하죠….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와, 이걸 보네.'

권하선의 괴력보다도 비현실적인 장면이랄까.

사과를 받는 남생도는 얼굴 전체에 청록빛 비늘이 뒤덮인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반수(半獸)계 생도의 갑작스러운 변신에 지나가던 여생도가 자지러진 상황이었다.

"변신한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대부분 그런 것 같네."

별일이 아니었음에도 생도들이 해산하지 않는 이유이리라.

'반수계로 각성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

'인터넷에서 봤던 외국헌터는 봐줄 만하던데.'

'반수계도 종류가 다 다르거든. 쟤는 좀 재수가 없었던 거지.'

'으, 징그러워.'

나쁜 새끼들….

좀 안 들리게 말하던가.

상처 될 말을 아무렇지 않게 수군대는 생도들 사이에서 반수계 생도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라고 대신 지랄 떨어 줄만큼의 오지랖은 없는지라 그저 조금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나갑시다!"

생도들 틈을 해치고 들어간 나는 얼을 빼놓고 있는 반수계 생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원래 일행이었던 양, 함께 반대쪽으로 빠져나왔다.

복도를 다 지나 계단에 이르자, 그 친구가 멈춰서 꾸벅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그, 원래대로 돌아오는 법 몰라요?"

"아는데… 뜻대로 안 돼요. 변신 도 제 의지가 아니었거든요. 갑자기 역한 냄새가 나면서…."

"...설마."

"네?"

나는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올랐다.

같이 있던 차유라와 반수계 생도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붙었다.

'까먹고 있었네.'

초기의 반수계는 근방에 선공 몬스터가 나타나면 자동으로 변신된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변신의 등급이 오르면 원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적을 인지하기에 바로 떠올릴 만큼 기억에 남진 않았던 것.

'괴수가 등장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는데.'

가까운 곳에 균열이 발생했다면 뜬금없는 괴수의 등장도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괴수가 접근하는데 학원 측에서 모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건물 옥상. 내부에서 볼 수 없던 동서 방향을 유심히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괴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저기 좀 보세요."

그때 반수계 생도가 기숙사 방향을 가리켰다.

꽤 먼 곳이었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충분히 알아볼 거리였다.

"어, 저기도…."

캠퍼스 곳곳에서 조금 전 복도에서 본 것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유 교관님. 저 트럭들 다 뭐에요?"

"어제 직접 결제하셨지 않습니까."

"그, 그래요?"

함성아는 줄지어 들어오는 군용 11.5톤 트럭과 관계가 있을 만한 사안을 잠시 생각해보다가 빠르게 두 손을 모았다.

"미안해요! 전혀 모르겠어요."

"후우, 제발 서류 좀 보고 사인을 하시라니까요…. 교보재생물 지원이랑 경계병력파견에 관한 공문이었습니다."

"엥? 교보재생물 지원은 2학기 시작될 때쯤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공식적인 지원 일정은 그대론데, 이건 일종의 기부랍니다."

"그게 가능해요?"

"괴수 취급인가는 벌써 처리된 상태잖아요. 결국 기부자한테 그만한 권한이 있냐는 건데… 그것도 뭐, 없는데 했겠습니까."

"그렇겠죠? 주는 건 감사히 받아야지. 근데 경계 병력은 무슨… 아니다, 그냥 제가 공문을 볼게요."

유 교관이 서류를 클립보드에 끼워서 건네주자, 함성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저거 인수부터 해야죠."

"벌써 하 교관, 박 교관이 나갔습니다. 라이코 교관도요."

함성아는 배시시 웃고 창가에 기대공문을 살폈다.

"제6공세작전군단장 한상철이라…. 여기가 6군단 지역이에요?"

"그건 아니랍니다."

"초상인재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인가 보네요."

"우리랑 관련이 깊어서겠죠. 원래 공식지원도 그 양반 소관이에요. 박 교관이 알아보니까 6군단 위수지역이 현재 균열이 가장 활발한 곳이랍니다."

"그래요?"

"예. 경계 병력도 그쪽 예하 사단에서 보내는 거 보면 아마 관리 편의상 묶인 거 같습니다."

함성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국가보안시설 경계계획서]

대상 : 청송학원(가급)

이라는 타이틀이 적힌 공문은, 다음의 사건 개요로 시작됐다.

'7일 03시경, 태안해안에서 밀입국 흔적 발견. 중국어를 사용하는 초인 일행이라는 목격자의 신고가 있었음. 파악된 것만 8인 이상….'

"이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래?"

"초인 여덟이면 적 테러부대가 침투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원장님이 얼마나 중요한 시설을 책임지고 있는지는 자각 좀 하시죠."

"누가 그걸 모른댔어요? 군부대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 그런 말이지."

"방금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가만 보면 유 교관님은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

"아니라고 안 하시네?"

"좋아합니다."

"어머, 저두요."

"하아…."

유 교관이 의자를 돌려버리자, 함성아는 배를 잡고 깔깔댔다.

"아무튼, 남의 손에만 맡길 수 없으니까 오늘부터 교관 당직을 두 배로 늘려서 근무표 짜주세요. 야간에 순찰이라도 돌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

요 며칠 생도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였던 것은 바로 얼마 전 들여온 교보재생물과 반수계 생도들의 변신 사건이었다.

무려 11.5톤 트럭 9대를 채운 괴수의 입고(?) 소식에 생도들은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반수계 생도들은 안타깝게도 수인의 모습을 한 채 생활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목요일 수렵시간.

우리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괴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철창으로 둘러싸인 거대 옥타곤.

격투장을 연상시키는 저 케이지가 바로 수렵교육장이다.

생도들은 둥글게 둘러친 관중석에 앉아 케이지 안에 시선을 집중했다.

"홍안늑대는 9급으로 분류되지만, 한 개체씩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스무 마리 이상씩 무리를 지을 때도 있지."

유호영 교관은 케이지 중앙에 사슬로 묶인 홍안늑대를 앞에 두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홍안늑대는 내가 펫으로 가장 선호했었던 만큼 내게는 아주 익숙한 괴수였다.

저렇게 실재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동구'라 이름 붙여 키우던 그 녀석이 새삼 그리워졌다.

'확실히 실물은 포스가 다르긴 하네.'

가슴까지 오는 체고에 충혈된 듯한 붉은 눈은 딱 봐도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이놈들은 매우 집요하고 영리하지. 잘 봐라."

유호영 교관은 수업용 지시봉으로 홍안늑대를 쿡쿡 찔러 자극했다.

크르르르.

"와아아."

생도들이 단체로 탄성을 내뱉었다. 과연 보통의 야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특이점을 말해볼 수 있는 생도…."

유 교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댓 명의 생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 갈색 머리 여생도."

호명된 사람은 송연희였다.

"몸을 찌르는데도 도구에 시선을 뺏기지 않습니다. 쓸데없이 흥분하지 않고 도구를 든 사람만 노려보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허실과 우선순위를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지. 너희가 만약 이놈들을 마주쳤다면, 따돌려 보겠다는 생각 따윈 버리는 게 좋다. 그럼 수렵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그는 말꼬리를 늘이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푹!

깨갱깽!

"...!"

느닷없이 홍안늑대의 앞가슴에 단검을 쑤셔 박는 그의 행동에 생도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생긴 거랑은 딴판이네.'

유 교관은 젊은 학자 같은 지적인 이미지였는데, 수렵과목 외에도 전술/병기술에서 어쌔신 계열을 맡아 전부터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용병 출신이라는 거겠지.'

괴수의 생명 존중을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한 사람과는 감상이 다를 수밖에.

죽을 때까지 난도질당할 '교보재'의 운명을 실감한 생도들은 찜찜한 얼굴이었다.

나도 순간 동구가 겹쳐 보였고….

물론 괴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원래 감정에 둔하거나, 싸가지가 없는 몇 사람은 예외였다.

유 교관은 무감하게 피 묻은 단검을 보이며 말했다.

"방금 공격의 문제점에 대해서 말해볼 사람."

이번에는 손을 드는 생도가 없었다.

"흐음… 너희가 강화반이지? 적응훈련 1등 일어나봐."

#23화, 교보재생물(2)

나는 생도들의 시선을 받으며 뭉그적뭉그적 일어섰다.

"이름이 뭐더라?"

"한성준입니다."

"그래. 적응훈련 때 네놈 영상을 얼핏 보니까 이것저것 아는 게 제법 많더군."

젠장.

초중고 12년, 군 생활 6년을 통해 배우고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실.

윗사람들 눈에 띄면 좋을 게 없다.

"...."

여기서 정답을 맞히는 것도 눈도장을 더 강하게 찍힐 일이라,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벙어리야?"

"문제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든 틀려도 좋으니 네가 느낀 걸 말해."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는데요."

"아니이. 내가 물은 건 조금 전 공격에 대해서… 가만, 내 모습이 어떤데?"

에이 씨. 그냥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부드럽고 선한 느낌이랄까."

"근데 지금 보니까 안 부드럽고, 안 착하다?"

"아, 아뇨."

웃기 시작하는 건 생도들뿐이었다.

"그럼?"

"괴수를 대하는 시각에서 경험자와의 차이를 새삼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랬군. 혹시 내 수업방식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나?"

"네. 진짜 보여줄 게 아니었다면 설명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가 아니었다라…."

유 교관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고 나는 금방 실수를 깨달았다.

"너는 알고 있다는 얘기군. 교관을 기만했으니 훈렴점수 10점을 차감하겠다."

하아... 'X발.'

"뭔발?"

속으로 해야 할 말이 작게 튀어나와 버렸다.

"잘못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쯧.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교관님은 가장 피해야 할 곳을 공격하셨습니다."

"좋아. 점수 차감은 없던 일로 하지. 이유를 설명하면 상점을 얻을 수 있다."

"마석이 형성될 만한 자리는 공격하면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꽤 짜증 나는 설정이었지.

게임에서 몰이사냥을 하다 보면 한 번씩 랜덤하게 터지는데, 전투 중 체내에서 마석이 파괴된 괴수는 공격과 방어력이 두 배 이상 증가하곤 했다. 당연히 드랍해야 할 마석도 증발한다.

"그렇다. 괴수 대부분은 우리가 아는 주요 장기 부위가 급소도 아니거니와, 마석을 잘못 건드리면 폭주를 유발할 수 있다."

~지이잉.

(교관 유호영 → +20점, 상점)

유 교관은 추가설명을 이어가면서 화끈하게 점수를 쏴줬다.

"또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수렵은 엄밀히 다르다. 수렵은 대부분 채집임무를 포함하지. 그 말인즉…."

'몇 점 받았냐?'

자리에 앉자마자 권하선이 속삭이길래 액정을 그대로 보여줬다.

'대박. 야, 혹시 나한테 뭐 물어보면 니가 살짝 알려줘. 반띵할게.'

...무시하고 케이지로 고개를 돌리는데, 진동이 또 한 번 울렸다.

(차유라 : 수렵지식까지 갖췄을 줄은 몰랐네요. -박수 이모티콘- 다름이 아니고, 방금 거래가 성사됐다는 연락이 왔어요. 인수까지는 보름쯤 걸릴 거예요.)

나는 혹시 권하선이 볼까, 손목을 배꼽 아래에 두고는 보지 않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ㅇㅇ 그리고 캠핑용품 좀 구해줘. 혼자 짊어질 거니까 최대한 콤팩트한 것들로.'

눈으론 차유라를 찾았다.

곧 케이지 너머 맞은편 자리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차유라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나를 보고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 맘에 들었다.

사사로운 부분에 괜한 궁금증이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이 좋았다.

그런데 차유라 뒤에서 주먹 쥔 손 하나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강선호네.'

아마도 자기랑 눈이 마주친 줄 착각한 모양이다.

동아리로 엮인 며칠 새, 강선호와는 제법 말을 섞는 사이로 발전했다. 원체 말수가 없는 녀석이라 식사 안부나 묻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나에게 호의적인 텐션이었고, 입장 문제로 나는 여전히 불편한 중이다.

대충 미소로 답한 뒤 수업으로 관심을 돌렸을 때였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점들을 종합해서 자신이 한번 직접 공격해 보겠다는 생도가 있으면 케이지로 올라와라."

유 교관은 회복포션 하나를 열어 홍안늑대에게 뿌리고는 애병의 날을 잡아 자루를 생도들에게 향하도록 했다.

"갑니다!"

그가 한 바퀴를 둘러보기도 전에 최범균이 옥타곤을 훌쩍 넘어 들어갔다.

"적극적인 자세 마음에 든다."

"죽여도 되는 거죠?"

유 교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최범균은 유 교관이 건네는 50cm길이의 단검을 받아쥐고선, 눈 깜짝할 사이에 홍안늑대의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카가각! 촤르륵!

홍안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칼날이 아랫배를 갈랐지만, 녀석은 짐승의 털가죽이 낼 수 없는 소리만 남기고 펄쩍 뛰어올랐다.

"어…?"

힘 빠진 소리와 이내 바닥을 씹을 듯 달려드는 홍안늑대의 반격.

그리고 최범균이 다시 유 교관의 뒤에서 솟아나기까지 고작 1,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니, 가죽이 뭔…. 하, 한 번만 다시 할게요."

"한 번 뜻 모르나?"

유 교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검을 회수하자, 최범균은 인상을 팍 구기며 케이지를 나왔다.

'최범균이 저걸 못 느꼈다고?'

아마도 내가 유달리 마력 흐름에 민감한 듯했다.

그게 비정형 마법재능의 효용인지 덕지덕지 붙여둔 페널티 특성의 숨은 이점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안늑대의 가죽은 언뜻 날붙이에 취약해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녀석은 품은 마력을 털끝 한 올 한 올까지 뿜어 보내고 있었다.

그건 호신강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홍안늑대가 마력을 운용할 리는 없고 아마도 종(種)이 가진 본능의 영역이겠지.

유 교관이나 되니까 마력 사용 없이도 찌르고, 마석-혹시 있을지 모르는-을 건드리지 않게 조절이 가능했던 거지 웬만한 생도들은 마력을 쏟아붓지 않고선 상처 하나 내기 힘든 것이다.

'...무리로 마주치면 나도 좀 고전하려나?'

나는 '로코33' 9급 괴수에 대한 인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끼곤 꽤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균열 너머였다면 방금 저 생도는 벌써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으면 묶여있는 대상 하나 베지 못할 만큼 최범균의 수준이 낮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발끈했다.

"거, 비약이 좀 심하시네. 계속했으면 저따위쯤은 제 상대가…."

"한 마리를 상대하는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냐. 아~ 네 재능이라면 잘 숨어서 버틸 순 있겠구나."

유 교관의 농담에도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범균의 시비를 걱정해서라기보단 다들 나와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명만 더 받겠다. 또 도전해보고 싶은 생도는 앞으로 나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생도가 있었으니, 너무도 뻔한 인물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그를 불러세웠다.

"서범진."

녀석이 나를 바라봤고, 나는 정말 하고 싶냐는 눈빛을 담아 보냈다.

단순히 불쌍해서라기보다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학기 초지만, 내가 아는 청송의 실전훈련은 이딴 게 아니었다.

"...."

뜻이 전해진 걸까. 서범진은 잠깐 머뭇거리다 자리로 돌아갔다.

적응훈련 때도 느낀 건데 진짜 괜찮은 놈일지 모르겠다.

"니들 뭐하냐."

유 교관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한번은 의미가 있었습니다만, 더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 게 있으니 누가 됐든 전력을 다하지 않겠나.

"마주하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경험이다. 모두에게 다 줄 수도 없는 기회고."

"그럼 사슬을 풀어주시죠."

"안 돼."

"자신 있습니다."

그래,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버리자.

찌르고 베고 또 치료해 가며 다섯 반을 순회시키는 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아니. 강화반은 이제 기회 없다. 내가 니 속셈을 모를까. …근데 이 새끼가. 나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그렇게 쏴붙이는 유 교관에게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는 외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용병 출신이라고 괴수를 다른 시각으로 볼 거라는 것도 네 편견이야. 저놈들은 본능을 따를 뿐이고, 아픔이 꼭 증오로만 남는 건 아니거든. 이건 다만, 우리의 역할이 너희들에게 필요한 걸 준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는 않습니다."

나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뭐 너희들의 그런 생각, 나쁘게 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정식지원 전이라 괴수가 부족해. 그래서 조금 무리한…."

유 교관이 뭐라 말을 이었지만, 어느 샌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이 자식아. 나보고 어쩌라고.'

홍안늑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사납지 않은 눈으로.

***

서울 중심. 마천루의 머리라는 신성그룹 사옥 최상층.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소파 상석에 앉아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

"들어와."

각 잡힌 거구의 중년 사내가 성큼 들어서서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외 극비정보팀 말단 팀원들한테 사고가 있었습니다."

"내가 알아야 할 것만 얘기해."

"한상철 자택의 감시를 맡았던 친구들입니다."

노인은 한상철이라는 이름에 반쯤 감긴 눈을 뜨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가 놈이 뭘 좀 알아냈을까?"

"아는 것도 없는 애들입니다."

"그럼 됐지. 사람 손실 난 것까지 일일이 보고하지 말라니까."

노인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찻잔을 잡았다.

"그 친구들의 실종 당일 위치 정보를 추적해 인근의 CCTV를 샅샅이 뒤져봤는데, 한상철의 아들을 쫓던 중 경찰이 개입한 것 같았습니다."

"쯧, 뒈질 만했네. 자식을 건드렸으니 한상철이 열 좀 받았겠구나."

"그… 아들 녀석 때문에 경찰이 출동한 겁니다. 그놈도 초인이었더군요."

"한가놈 자식인데 놀랄 일도 아니지. 그 사단이 괜히 났을 리는 없고…, 그놈이 지애비 배달부 노릇이라도 했던 게로구만."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가만. 전에 아들이 많이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딸이던가?"

"아들이 맞습니다. 건강히 퇴원했고, 얼마 전 초인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청송에 있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렇겠지…."

노인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송 민영화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그게… 초대부가 자리 잡기 전까진 국방부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굳어지는 모양샙니다."

"개놈의 자식들. 내 돈을 1,000억 넘게 갖다 쓰고 고작 이사 자리 하나로 입을 닦아?"

"계속 만들어 보겠습니다."

"천류회 손에 들어간 일이야. 밑을 흔들 수 없으면 꼭대기를 밀어야겠지."

"마침 계획도 준비가 끝난 상태입니다."

"...한가놈 아들 말이야."

"예."

"이번 일에 사진 한 장 얹어보라고."

"좋은 생각이십니다. 한상철의 더듬이를 잘라내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노인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휴미더에서 시가를 꺼내 들었다.

"준비가 끝났다고?"

"지금 포천 안가에서 대기 중입니다. 먼저 들어온 넷에, 엊그제 추가로 여덟이 밀입국해서 총 열두 명입니다."

"실행해."

"알겠습니다."

사내가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참."

"아, 네. 말씀하시지요."

"내 강아지 다치는 일 없게 주의해야 할 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24화, 아니면 마는 거지

이른 아침, 정련관.

나는 개인 훈련실에서 전투마법사를 위한 마지막 준비에 돌입하고 있었다.

"후우. 어렵네."

이나은 팀과의 일전 때 빠른 근접 압박을 받으면 방어 이외에 다른 대응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격마법이 일부 제한된 탓도 있었지만, 일단 거리가 가까워지면 무조건 물리적 능력치가 달리는 쪽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마력이든 염동이든 순간적인 반응 면에 있어서는 힘, 민첩계를 넘을 수 없다.

최범균, 도지훈같이 재빠른 놈들이나, 무지막지한 탱킹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대에게는 공격과 방어, 양자 중 택일(擇一)을 강요당한다.

당연히 대책은 두 능력치의 성능 중 하나라도 따라가는 방법뿐. 이미 가지고는 있었다.

───────

◈ 능력

힘 : 5.8(+1.5)

민첩: 5.1

지능: 8

체력: 7.4

마력: 5.1

매력: 4(-1)

행운: 1

───────

마력 총량의 30%의 마력을 제한한 대가로 1.5의 힘 증가 효과를 받은 결과다.

'5.8….'

조금 아쉽지만, 싸움꾼 특성의 피해 버프를 더하면 무려 8.8.

1챕터 기준으로 강선호, 권하선급이 10~11였던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수치다.

'문제는 안정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거지.'

이 능력은 〈마력해방〉의 영역생성 옵션 중 '마력을 할당한 만큼 물리 능력치가 강화된다'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마법사(물리) 밈에서 착안한 설정이 맞다.

영역 안에서 힘, 민첩, 체력 중 1개 능력치에 마력을 투자해 버프를 받는 식으로 구현된 것.

마력 10%당 0.5의 증가면 가성비도 나쁘지 않게 뽑혔다.

한데 발동과 해제의 과정이 쉽지 않다.

'빠른 스위칭만 숙달되면 쓸만할 텐데.'

도움이 될 만한 효과를 받으려면 최소 30%의 마력이 필요하다.

마법사에게 그만한 마력의 봉인은 권사가 한 손으로 싸우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심단격리장애〉로 마력과 생명력이 동기화된 나에겐 줄어든 마력은 그만큼 불안한 목숨을 의미했다.

지금 내가 하는 훈련은 능력치 강화를 순간순간 유동적으로 쓰고 풀어버리기 위함이었다.

"아오 씨."

감이 잡힐 듯 말 듯.

어쩌다 빠른 발동이 걸리면 해제에서 꼬이고, 결국 성공해도 그다음 발동에서 헤매길 수백 번.

"진짜 못해 먹겠네."

그래도 10번 발동에 7번 성공, 다시 해제까지 완벽한 게 3, 4번 수준까진 올라왔다.

조금만 쉬고 하자는 생각에 훈련실을 벗어났다.

[인물 '이금환'에게 인상적인 기억 - DP 획득 15]

들어보긴 한 이름인데.

"...아침부터 대체 뭔 얘기들을 옮겨대는지."

얼마 전부터 뜬금없는 순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볼륨을 만들어내곤 했다.

정황상 '소문' 따위가 아닐까 생각된다.

설령 뒷담화라 하더라도 DP를 벌어주니 고마운 일이지만, 무슨 얘길 할지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한성준. 일찍 나왔네?"

강선호였다. 계단에서 올라오는 걸 보니 방금 도착한 모양.

"아. 어쩌다 보니."

"권하선은 같이 안 왔어?"

근력운동에 있어서만큼은 두 사람이 최적의 파트너였다.

"같이 왔어. 아직 체단장에 있을걸."

"어. 참! 너 그 얘기 들었어?"

강선호는 그대로 한층 더 오르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

"뭔 얘기."

"수렵 수업 말이야. 아까 로비에서 송연희한테 들었는데 우리 반 수업 이후로는 모피전갈로 진행했다더라."

"그래?"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대로 진행하기도 힘들지."

모피전갈은 생김새만 전갈을 닮은 9급의 괴수 종. 체장 2미터에 절지동물도 갑각류도 아닌 모호한 생명체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안도감.

두 번째는 부끄러움이었다.

"이중잣대 오져버렸네. 모피전갈이라니까 괜찮은 건 또 뭐냐."

동물애호가에게 치킨은 왜 먹냐고 비아냥대는 네티즌의 댓글이 떠올랐다.

강선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어떠냐. 그날 느낀 건 대부분 비슷했어."

"고맙다."

강선호와 헤어지고 라커룸에서 트레이닝복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홍안늑대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날 이후로 눈만 감으면 그 녀석이 계속 떠올랐었다.

"하아."

위기를 넘겼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아마도 그 눈빛 때문인 듯했다.

측은지심 따위의 감성적 이유가 아니다.

내가 녀석의 눈을 보고 느낀 건 분명 반가움이었다.

"미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동구일 리가 없다.

시간, 장소도 전혀 다른 데다가 길들이기 과정 없이 나를 알아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니면 마는 거지.'

그런데도 나는 확인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

아침 트레이닝이 마무리될 즈음 방송으로 운동장 집합이 고지됐다. 이유인즉 병기 제작이 완료됐다는 것.

대운동장에 반별로 모인 생도들은 호명하는 대로 나가서 자신의 무기를 받아들었다.

"박선아!"

"네!"

"…KC01068!"

"이종재!"

"예."

"…KC01124!"

호명된 생도들은 하나같이 설렘 가득한 얼굴로 달려 나갔다.

"한성준!"

"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직접 재원을 적고, 디자인한 무기의 실물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으니.

"KC01146!"

고유 넘버를 확인하고 대장을 작성하는 작업이 함께 진행됐다.

군대의 총기수여식과 비슷하지만, 뭐랄까….

'쩐다.'

감상은 전혀 달랐다.

처음 가지는 나만의 무기였고, 물질적 가치가 주는 만족감도 한몫했다.

무려 포르테늄으로 제작된 수천만 원짜리 물건이 아닌가.

당장은 학원 재산으로 분류되나, 맞춤 제작이니만큼 졸업 시 그대로 소유권이 인정된다고 했다.

...사이즈를 좀 더 크게 잡을 걸 그랬나?

"이 시간부터 너희들은 법령상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권한이 아니라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알겠나?"

"네에!"

"관리부실로 인한 파손, 분실, 사고에 대한 책임은 소지자 본인에게 있다는 거 반드시 명심하고. 항상 안전관리에 유의할 수 있도록. 이상. 얼른 아침 식사하고 수업 준비들 해라."

하 교관은 그렇게 손을 휘젓고 돌아섰다.

"뭐, 뭐냐."

"그냥 이렇게 해산이라고?"

"이래도 돼?"

대부분 황당한 반응이었다.

미성년자를 포함하는 어린 생도들에게 살상 무기를 이렇게 아무런 통제 없이 소지하라니….

생도들이 생각해도 뭔가 어색한 것이다.

'그랬지. 원래 그렇긴 한데.'

나도 좀 당황스럽네.

게임에선 무기의 소지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점에 있었다.

"겁나 불안하네요."

가영이 제 팔을 쓸어내리며 몸서리쳤다.

온 운동장에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가득하다.

"뭐 익숙해지겠지."

"이제 무슨 일 터지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잖아요."

"재수 없는 얘긴 그만하고. 그거야?"

"아, 네."

가영의 손에 든 완드를 가리키자, 나에게 건네줬다.

생긴 건 그냥 다듬은 나뭇가지에 마감재를 바른 모양새였다.

"오…!"

그러나 손에 쥔 순간, 주변 대기의 마력이 유동을 멈췄다.

만약 마력에도 눈이 달렸다면, 모두가 완드의 끝을 주목하고 있으리라.

"괜히 성마목, 성마목 하는 게 아니네."

"와아. 형은 그냥 잡자마자 느껴버리네요."

이런 상태라면 마법의 발현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서브로 하나 장만해야겠네.'

가영에게 완드를 돌려주다가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저기. 쟤 좀 봐라."

"아하하!"

운동장 가장자리의 계단 위.

어깨에 메이스를 걸친 권하선이 짝다리를 짚고 의기양양한 자세로 서 있었다.

생긴 건 보통의 플랜지드 메이스처럼 생겼는데, 철편부의 크기가 무슨 수박을 달아놓은 듯했다.

"저거 한 30㎏정도 되려나?"

"강남 집 한 채네요."

"입이 찢어질 만도 하다."

권하선은 얼른 자랑하고 싶었는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계단을 내려와 뛰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벗어나던 생도들은 움찔 놀라며 좌우로 갈라섰다.

***

...삐리릭! 삐리릭!

아… 죽겠네.

새벽 3시 15분.

반복되는 알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괴수 사육장은 생도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몰래 잠입해서 홍안늑대를 살펴보고 나올 생각이었다.

청송학원은 취침 통제를 하지 않기에 새벽 2시까지는 자지 않는 사람이 제법 많고, 4시가 넘으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슬슬 활동을 시작한다.

나는 전투복을 걸치며 창밖을 확인했다. 캠퍼스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딱이네."

혹시 도구가 필요할지 몰라 단검을 챙겨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미리 주변 좀 둘러볼 걸 그랬나.'

자물쇠나 비전자식 잠금장치라면 마법으로 해결하겠지만, 디지털 보안설비가 되어 있다면 문을 통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찾아보면 방법이 있겠지.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 버튼을 눌렀다.

-띵! 6층입니다.

그런데 바로 아래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렸다.

"엘베가 7층으로 가길래 이 시간에 누군가 했다. 어디 가냐?"

최범균이 닫힘 버튼을 연타하며 물었다.

"어, 그냥 바람 좀 쐬려고."

"멍 때릴 거면 옥상이 나을 건데. 딱 너 같은 놈만 노리는 새끼들이 있어."

최범균은 막상 동아리로 엮이고 나니 의외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래도 피아식별은 확실해서 다행이다.

"지금 시간엔 아무도 없을걸."

최범균은 모르는 소리 한다는 듯이 픽 웃었다.

"뭔 깨달음이 왔는지 새벽에 혼자 정련관 가는 애들이 의외로 많아. 그래서 아예 밖에서 쪽잠 자면서 매복하는 놈들이 생겼더라니까."

"미친… 열정이 대단들 하네. 설마 너도 그 짓 하려고 나가는 거?"

"아니, 나는 걔들만 얼른 털어먹고 와서 더 잘 거야."

"아…."

매복한 놈을 역으로 기습하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못 한다.

하긴, 밤이란 지구의 그림자니 최범균에겐 홈그라운드나 다름없겠다.

"먼저 간다."

최범균은 로비를 벗어나자마자 어둠으로 흩어졌다.

"...."

순간 최범균을 상대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봤다.

녀석이 뻗어나간 방향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결국, 마력의 흐름으로 감지해야겠구만….

재능이란 곧 고유한 방식의 마력응용이니까.

지금 연습 중인 능력치 버프의 빠른 스위칭만 마스터한다면 어렵지 않을 듯했다.

나는 일부러 최범균과 다른 경로로 걸음을 옮겼다.

***

청송학원의 캠퍼스 안에는 약도에도 용도가 표시되지 않은 건물이 많이 있다.

괴수 사육장도 내가 부르는 이름일 뿐 그런 건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위치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괴수를 실은 트럭이 들어왔던 날, 정련관 옥상에서 케이지를 하차한 장소를 봤었기 때문이다.

"여기였던 거 같은데…. 에이 씨!"

입구에 CCTV와 전자보안장치가 떡하니 달려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왜 어릴 적 학교시설의 잠금장치는 대부분 사슬을 두르고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었나.

입구에서 살짝 떨어져 건물 벽면을 둘러봤지만, 창도 별로 없고 그마저도 쇠창살이 처져 있다.

어쩔 수 없이 플라이 마법으로 몸을 띄워 옥상을 향했다.

어떤 아줌마 말처럼 막 날아다니는 마법은 아니고 와이어로 끌어올리듯이 부양해 횡 이동이나 조금 가능한 수준이다. 전투에서 사용했다간 딱 표적이나 되기 좋은 마법.

"X발. 개 느려."

게다가 현실의 나는 고소공포증까지 있다. 눈을 감고 벽을 짚어가며 옥상에 도착했다.

...여기도 카드키네.

그때 미지근한 바람이, 아니 역겨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환풍구….

내키지 않았지만, 고민을 오래 한들 다른 수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바로 환풍구에 몸을 밀어 넣고 수직 공간을 천천히 내려갔다.

후우… 후우….

더운 여름날, 상한 고등어와 코끼리 똥이 있는 밀폐된 곳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수평으로 뻗은 통로가 나왔다. 이름 모를 괴수들의 그로울링과 코 고는 소리도 들렸다.

'이거 층마다 계속 기어서 돌아다녀야 하나?'

보안 센서가 가동 중이면 복도로 돌아다니는 것도 피해야 할 거 같은데.

또 나뉜 공간마다 잠금장치가 따로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우우우!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환풍관을 기어들어 가는데 느닷없이 아래쪽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진짜 왜 저러냐…."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 분명했다.

#25화, 연결된 존재

"쉿! 왔다, 이놈아."

녀석은 천장의 환풍창 틈으로 나를 발견하고서야 하울링을 멈췄다.

아르르! 아욱 아욱!

하지만 녀석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아래로 내려서자, 다른 놈들이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나름 근연종끼리 분류해둔 듯, 홍안늑대 두 마리와 아귀승냥이 네 마리가 마주 보는 우리에 갇혀있었다.

아귀승냥이는 홍안늑대보다 몸집은 작았지만, 하관이 빠진 것 같은 큰 입을 가지고 있어 더 섬뜩해 보였다.

"쫏쫏쫏!"

멋모르고 강아지 어르는 소리를 냈더니 아귀승냥이들이 더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야, 니가 어떻게 좀 해봐."

쾅!

"워 씨! 놀래라."

"크르르."

내 눈총을 받은 홍안늑대가 갑자기 철창을 들이받으며 거칠게 을렀고, 아귀승냥이들은 언제 이빨을 드러냈냐는 듯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뭐야, 니가 방장이었어?"

홍안늑대는 철창 사이로 주둥이를 내밀고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헥헥헥."

"...."

그 순둥한 모습에 홀린 나는, 어느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동구냐."

"끼우웅."

말이 통할 리도 없고,

무작정 꼬리를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정확한 사실확인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나,

나는 기억에 남은 동구의 이미지를 기워가며 나름 꼼꼼히 뜯어봤다.

은빛과 잿빛을 오가는 털가죽.

눈매와 콧등의 길이….

외형은 매우 흡사했지만, 그건 옆에 멀거니 앉은 다른 놈도 마찬가지였다.

'뭐 가장 흔한 색이었으니.'

애초에 올블랙 개체를 노리던 내가 동구를 계속 키우게 된 이유는 오로지 등급 때문이었다.

'로코33'의 펫 시스템은 길들이기 작업이 뽑기나 다름없었기에, 플레이어들은 최소 A등급, 최종적으로는 S등급의 펫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동구는 희귀한 외형은 아니지만, S등급의 펫이었고.

"아, 가만히 좀 있어 봐!"

"끼이잉, 낑. 아오올."

녀석이 똥 마려운 것처럼 움직여대는 통에 자세히 살피기도 쉽지 않았다. 아마도 철창을 벗어나고 싶다는 몸짓 같았다.

계속 본다고 구별할 수나 있나….

"잠깐 기다려."

다행히 우리의 문은 보통의 자물쇠(그래도 재질은 무려 포르테늄이다)로 잠겨있었다.

언락(Unlock) 마법으로 자물쇠를 풀자, 놈은 곧장 철창문을 밀치며 튀어나왔다.

"야이 씹! 으어어."

그리고 범만한 덩치로 나를 덮쳤다.

할짝할짝할짝.

이런 행동을 단순한 호감이나 보은 때문이라고 해석하긴 힘들지 않나.

"...진짜 동구냐?"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의 체온을 느끼고 교감할수록 점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맞구나 너."

"끼웅, 끼웅! 헥헥헥."

그저 그래픽으로 '소유'했던 주제에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반갑다."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로코33은 다른 시간대에 이곳을 경험한 아무개의 작품인가,

아니면 로코33을 모티브로 이 세계가 창조된 것인가-하는.

전자는 어쩌면 우연한 경험의 기록이며 후자는 초월적인 제공자가 있다는 뜻.

더 믿기 쉬운 쪽은 전자지만, 나는 후자이길 바랐다.

그저 이 모든 게 우연인 것보단 원망할 대상이 있는 편이 더 정신건강에 좋았으니까.

'시공간이 비틀려도 이어지는 관계는....'

아마도 후자에 더 힘을 싣는 현상이 아닐까.

물론 어느 것도 확신할 순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동구의 등장으로 내가 조금은 위안을 얻었다는 것.

녀석은 비록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아바타였을지언정 원 세계의 '나'와 연결된 존재였다.

나는 침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아내고 일어났다.

"꾸우웅."

떠나려는 기색을 읽었는지 동구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머리를 비벼댔다.

"또 올게. 계속 갇혀있게 안 할 거야. 조금만 참고 기다려."

내 마음도 건물에 들어오기 전과는 180도로 달라져 있었다.

설령 퇴학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또 필요하다면 DP를 써서라도 반드시 빼낼 생각이었다.

그 순간.

['홍안늑대'가 당신을 영혼의 동반자로 인식합니다.]

['홍안늑대'의 길들이기에 성공합니다.]

"헐."

시스템을 잊은 건 아니었다. 구할 길 없는 재료 탓에 엄두도 못 냈을 뿐….

정식으로 '길들이기'를 마치려면 검각사슴의 선도 높은 생간과 A등급 이상의 마석가루가 필요하다.

'대박이네.'

검각사슴은 무려 5급.

필드의 홍안늑대도 1대1은 어림없는 살벌한 괴수종이었고, 혹시나 어디서 발견한다고 해도 간을 '선도 높은' 상태로 공수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시스템은 마치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듯 그 과정을 생략해 준 것이다.

"...고맙다곤 안 한다."

개자식아.

나는 존재도 모르는 초월자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펫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동구'를 적어넣었다.

***

월요일 점심. 오전 통합수업이 끝나고 동아리 '세븐'의 멤버가 운동장 한편에 모였다.

조금 전 모두의 스마트워치에 한 줄의 알림이 도착한 탓이다.

「동아리 과제 입찰이 시작되었습니다.」

총 15개의 공고 중 우리가 입찰할 수 있는 과목은 먼저 등록해둔 세 가지.

────────────

『초상자원과 에너지』

◈ 초상광물 채굴

-목표: 지정된 초상환경(XR)에서 10kg의 초상광물 확보.

*참여 가능 인원 : 8인 이하

※보상: 미확인 마석(D등급) x5

『전술』

◈ 딜레마

-목표: 소멸징후가 포착된 게이트(XR)에서 제한 시간 내 탈출.

-AI 범죄자 1인과 요인 1인 호송·호위 임무 완수.

*참여 가능 인원 : 8인 이하

※보상: 미확인 마석(C급) x1, 점수 600P

『수렵』

◈ 사냥꾼은 누구인가

-성공요건: 홍안늑대(XR) 무리의 포위로부터 생존.

(참여 인원의 50% 이상)

-10개 이상의 수렵 채집물 확보.

*참여 가능 인원 : 10인 이하

※보상: 교보재생물(홍안늑대 2개체)

────────────

'보상이 홍안늑대라고?'

당연히 내 관심을 끄는 건 수렵과제였다.

"이건 당연히 수렵…."

"다 필요 없고, 우리 냉정하게 보상만 보자."

송연희가 예상했다는 듯이 내 말을 잘라먹었다.

"나도 보상 보고 하는 얘기야."

"넌 그날 할 도리를 다 했어. 나도 동감했고. 그래서 자격을 얻은 애들한테만 제대로 실전 기회를 주겠다는 거잖아. 그럼 됐지 꼭 니 손으로 죽일 필요 있어?"

"아니.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

"하!"

송연희는 무슨 미친놈 보는 얼굴을 하다가 갑자기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벌써 물어본 사람이 있네. 봐봐."

곧 그녀가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링크는 학원앱 Q&A에 올라온 질문 글로 연결됐다.

────────────

[Q: 동아리 수렵과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보상이 홍안늑대던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완전한 소유권인지 활용 권한인지 궁금합니다.]

└교관 유호영: 교보재생물의 운용목적은 오로지 실전훈련에 있다. 검증된 대표를 선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성자: 만약 실전훈련이 처치로 끝나고 마석이 발견되면 그 권리는 인정되나요?

└교관 유호영: 오.. 그건 사전에 고려한 부분이 아니지만 인정하마.

────────────

'쯧! 떳떳한 방법이 있나 했더니만….'

누가 따내든 처형식은 확정이란 얘기다.

어쩔 수 없다.

보상이 지급되기 전까지 빼돌리는 수밖에.

혹시 입찰한 동아리가 실패한다면 시간이 더 생길지도 모른다.

"봤지? 결국엔 그냥 실전경험 보상이라는 건데 2학기부턴 기회도 많을 거고..., 하아."

송연희는 내 똥 씹은 표정을 오해했는지 한숨을 쉬고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정 수렵과제가 하고 싶으면…."

"아니, 그런 거 아냐. 수렵은 과제 자체가 실전화 되기 전에는 할 필요 없어."

사실 괴수 처치는 다른 과목의 과제에도 기본적으로 포함된 일이고, XR(확장현실)로 진행되는 이상 차별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럼 초상자원이랑 전술 중에 투표로 정하자. 나는 초상자원 과제가 가장 괜찮다고 생각해. 가치야 D등급 다섯 개보다 C등급 마석 하나가 훨씬 높다지만, 어차피 속성은 미확인이고 난이도 면에서도...."

멤버들은 만장일치로 송연희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가장 예민한 사안이 남았다.

바로 입찰에 들어가는 비용.

나는 살짝 긴장했다.

우리 중 훈련점수는 내가 가장 많았고, 은근히 기부압력을 넣던 송연희에게 과제입찰 때 얘기하자며 미룬 일도 있었으니까.

"얼마…쯤 필요하려나?"

"글쎄. 시작은 한 300점 정도면 되지 않을까?"

"뭐?"

"아, 물론 최종적으로는 1,000점까지 생각하고 있어."

"아니 미친.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걸 전부 합해도 7, 8백이 될까 말깐데 뭔 소리야."

현재 내 점수가 196점. 그중 130이 정훈 외 수입이었으니 보통은 내 점수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송연희가 픽 웃으며 말했다.

"너보고 달란 얘기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네. 운영비 부분은 그냥 나랑 유라 언니가 충당하기로 했어. 그럼 그렇게 입찰한다?"

점수를 걷지도 않겠단다.

"그니까 무슨 수로…."

~지이잉!

「동아리 '세븐'이 '◈ 초상광물 채굴' 과제를 입찰했습니다. 입찰가-300P」

"...!"

~지잉, 지잉, 지이잉!

더 놀라운 건 그때부터 계속 이어지는 알림들이었다.

「동아리 '홀리'가 '◈ 초상광물 채굴' 과제를 입찰했습니다. 입찰가-350P」

「동아리 '엔조이'가 '◈ 초상광물 채굴' 과제를 입찰했습니다. 입찰가-400P」

「동아리 '홀리'가 '◈ 초상광물 채굴' 과제를 입찰했습니다. 입찰가-500P」

"초반부터 너무 치열하네. 벌써 이러면 1,000점이 넘어갈지도 모르겠는데? 언니, 여유 얼마나 있어?"

"350점 정도."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니들 뭐냐? 점수복사 버그라도 터졌냐?"

다른 멤버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니 더욱 벙찌는 상황.

"거래."

결국, 지켜보던 강선호가 답을 던져줬다.

"아…."

나는 바로 학원앱을 띄우고 시장 탭을 눌렀다.

────────────

[해피니스상품권 1만 원권 10장ㅍ]

[0.1비트로 30점 구해봅니다.-완]

[26년식 BMW5 4만8천Km 무사고. 180점 팜. (할부거래 가능)]

[초상법규, 현상원리, 마공학개론 필기대행/노트 지속관리/주당 3점]

[7개월 남은 청담살롱V 회원권 40점에 넘겨요.]

[팔로우해주실 분... 친구비 있어요...]

────────────

...지랄 났네.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동구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요 며칠 사이, 온갖 것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현질 했냐?"

"내가 팀원들한테 약속한 역할이 결국 이런 거라서."

송연희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다시 스마트워치로 눈을 돌렸다.

'...나한테도 잘된 일이긴 한데.'

그런데도 뭔가 김이 새는 느낌이다.

'이 새끼들은 뭐가 중요한지를 전혀 모르는구만.'

아무리 갖고 싶은 게 많을 나이라지만, 힘들게 번 점수를 고작 돈 몇 푼에 넘기는 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학원 측의 제재가 없는 건 이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많이도 팔았네.'

3일 전 최초의 현금성 거래 이후 대충 훑어봐도 수천 점의 점수가 거래됐다.

응?

"야 송연희. 잠깐만. 다시 입찰하지 말아봐."

"왜."

"이번 입찰은 빠지자."

"무슨 소리야. 초반이 얼마나 중요한데."

"너처럼 현질한 애들 돈이 다 어디로 가겠냐?"

"동아리 운영자금으로 쓰겠지. 방금 다른 동아리들 배팅하는 거 봤잖아."

"그러니까. 아직 개인적으로 쓸데는 없지. 그래서 팔아치운 거고. 결과적으로 학원 전체에 풀린 양에 비해 동아리로 쏠린 점수가 너무 많아졌어."

모든 생도가 전부 100점을 획득했다고 계산해도 유통된 점수는 고작 2만 점.

그중 20퍼센트가 넘는 점수를 몇몇 동아리들이 쥐고 있는 상황이다.

"그게 어쨌다는 얘기야."

"지금은 점수 가치에 대한 감각이 잘못된 상태란 얘기군요. 그대로 말도 안 되는 시세를 만들고 있구요."

차유라는 역시 단박에 알아들었다.

"어. 그렇지."

"일리 있는 얘기네요. …아니, 동감해요."

차유라가 고개를 끄덕였고, 송연희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둘 다 내가 아니어도 알아챘을 인물들이다. 쉽게 사들였기에 바로 체감하지 못했을 뿐.

"그럼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말잔 얘기야?"

"아니. 점수를 써도 가격이 정해진 곳에 쓰자고. 예를 들면…."

"동아리 전용시설."

뒷말은 차유라가 받았다.

"어. 있을 때 마련해두는 편이 좋지."

가장 작은 동아리방 가격이 1,000점이었다.

앞으로 개인적인 사용처가 업데이트되면 팔려는 사람이 줄고 점수의 현금 가치는 폭등할 터.

사실, 팔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팔았다고 봐야 했다.

권하선이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깐족였다.

"역시~! 성능 확실하구만."

한데 그 소리가 누군가에겐 꼬여서 들렸던 모양. 순간 송연희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동아리 합류 이후 멤버들은 대체로 잘 어우러졌는데, 유독 송연희와 권하선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몇몇 개성을 제외하면 두 사람 다 모난 편은 아니어서 조금 의외였다.

어쨌든.

송연희가 눈을 저렇게 뜨면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결론 난거지?"

"...."

"...그럼 난 들어간다."

"일단 들어가서 씻죠. 동아리방은 어차피 가서 보고 정할 거 아니에요?"

가영도 눈치껏 나를 도왔다.

#26화, 고기파티

~지이잉.

[Web발신] 한*준(0524)

09/17 20:48 입금 1,000,000원 한상철 / 잔액: 1,023,400원

"후우."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흔쾌히 보내주셨다.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아버지께 따로 돈을 부탁한 것은 처음이다.

원래 내 삶에선 개념조차 없던 지원이었고, 매달 받는 용돈도 적지 않았기 때문.

한데 요즘은 동구놈 고깃값 때문에 지갑에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황소거미 체액이 빨리 들어와야 할 텐데.'

(아버지: 그검ㆍㅣㄴㄷㆍㅡ)

(??)

~지이잉.

메시지가 답답하셨던 모양.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그거면 되는 거냐?

"아, 네. 충분해요."

-알았다. 니 엄마한테 전화 좀 자주 하고.

"네. 그리고요."

띠리링.

...끊어버리셨네.

송연희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야겠다.

'아무튼 리스펙트.'

그러고 보니 갑자기 돈이 왜 필요한지도 묻지 않았다.

"이건 언제 다 정리하냐."

한가득 쌓여 있는 종이, 스티로폼 박스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생육과 차유라에게 부탁한 캠핑 장비가 한 번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쓸 일 없는 캠핑 장비들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고깃덩어리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그대로 냉장고에 적재하고, 일부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비닐에 담았다.

똑똑.

"에이 씨…."

하필 손이 핏물과 기름 범벅일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만요. 나가요."

대충 손을 닦고 문을 열자, 20분 전에 헤어진 그녀가 씩 웃으며 서 있었다.

"뭐냐, 말도 없이."

"같이 먹어야 맛있지."

권하선은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넘겨주며 뻔뻔하게 밀고 들어왔다.

"먹긴 뭘 먹… 엌!"

가방의 무게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묵직함.

안을 들여다보니 온통 소주와 캔맥주로 가득했다.

"사람 새끼냐?"

"그냥 센스 죽인다고 해."

학원 내의 매점에선 주류를 취급하지 않는다. 고로 택배로 받아서 비축해왔다는 얘기.

"너희 아버지는 너 이러는 거 아시니?"

"확 씨! 그냥 갈까?"

"앉으시게."

간만에 영롱한 소주를 보니 입맛이 돋긴 했다.

"오, 딱 준비하고 있었네. 근데 고기를 왜 이따위로 잘랐어?"

"...스타일이야. 고기 냄새는 어떻게 맡았냐?"

"아까 택배 송장 보고."

아….

손이 부족해서 권하선과 가영이 지하 택배실부터 나르는 걸 도왔었다.

"마저 준비할 테니까 영이도 불러."

동구 때문에 주문한 거지만, 애들 고기 한번 먹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안 그래도 오면서 연락했는데 훈련모드더라."

"그래? 그럼 놔둬. 내가 따로 챙길게."

워치를 '훈련모드'로 설정하면 학원 공지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수신이 차단된다.

즉, 방해받고 싶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나는 새로 마블링이 좋은 부위를 골라서 '사람'이 먹기 좋게 잘랐다.

"쌈채랑 김치 없는데 괜찮아?"

"소고기지?"

"어."

"소금은?"

"있어."

"됐네."

"...."

"왜 쪼개?"

"내가 언제."

가끔 권하선이 웬만한 군 동기보다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었다."

우리는 소맥을 반찬 삼아 프라이팬째 고기를 흡입했다.

팬을 세 번 비우고서야 느끼함에 물려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술을 붓기 시작했다.

"너 그거 생각나?"

"뭐."

"우리 둘이서 무슨 어린이뮤지컬 보러 가겠다고 버스 탔다가 종점에 내렸던 거."

"아아, 둘 다 부모님한테 말도 없이 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

"어. 나 그날은 아직도 생생해."

그녀는 이곳에서 만나고 처음으로 옛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아련한 즐거움 느끼며 권하선이 조잘대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빠 근무지 때문에 이사 간다는 얘긴 한참 전에 들었거든? 근데 이해를 잘못했던 거지. 난 그때 당연히 오빠도 같이 가는 줄 알았잖아."

"야 너 딱 걸렸다. 맞네~ 그때는 오빠라고 했었네."

"아니?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가 방금 분명히 오빠라고…."

"그 오빠 너 아닌데? 나랑 친했던 오빠가 한둘인 줄 아시나."

"너 개 징징거리던 스타일이라 놀아준 사람이 나밖에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왜곡이 심하시네. 그 당시 군인아파트 초딩들은 전부 나 쫓아다녔어."

"아주 입만 열면 그짓말이네. 그런 것도 다 명예훼손이야."

"닥쳐."

웃고 떠들다 문득, 추억을 자연스럽게 '내 것'으로 여기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가 자꾸만 경계를 허무는 탓이다.

'그냥 받아들일 때도 됐지.'

이제 어찌 됐든 내가 둘인 것도 아니다.

의식적인 구분을 내려놓자, 마음에 그간 갖지 못한 여유가 찾아왔다.

[인물 '한상철'에 대한 친밀도가 조금 증가합니다.]

[인물 '권하선'에 대한 친밀도가 조금 증가합니다.]

'타이밍 뜬금없네.'

그러나 어렴풋하게 의미를 알 거 같기도 했다.

"...줘. 야!"

"어?"

"가방에서 술 좀 더 꺼내달라고. 다 마셨어."

"괜찮겠어?"

"방에 더 있어. 모자라면 또 가져올게."

"...그래."

괜찮겠냐는 말을 술 걱정으로 듣는 너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냐.

***

"야야, 일어나. 권하선!"

"으응…."

"니 방 가서 자야지."

"어어… 왔어…."

깨워서 될 때는 이미 지난 듯했다.

"하아."

아깐 괜찮았는데....

대화의 공백에 둘 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사이 술기운이 더 오른 모양.

업어서 옮기자니, 괜히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가십거리가 될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도 애매했다.

새벽 1시 56분.

'어차피 더 자긴 글렀네.'

곧 동구한테 가봐야 하니 일단 내 방에서 재우고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오, 진상…."

바닥에 널브러진 권하선을 들어 침대로 옮기는데, 너무 가벼워서 살짝 놀랐다.

사실 눈으로도 알 수 있는 거지만, 그녀의 괴력을 보고 나면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

술 냄새를 뚫고 다른 종류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꿀꺽.

"너는 내 동생이었으면 진짜…."

뭔가 혼자 민망해서 괜히 구시렁거렸다.

쿵쿵쿵!

"엌!"

예정 없던 방문자의 등장에 나는 권하선을 침대로 던지듯 내려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는 척, 아니 없는 척할까?

쿵쿵쿵쿵쿵쿵쿵!

하지만 상대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어떤 새끼가 이 시간에!

"동무~!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문 열어."

…젠장!

나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나, 나가요."

나는 권하선을 이불로 덮어 가리고 불을 끈 다음, 빼꼼 문을 열었다.

"원장님이 무슨 일로…."

"잤어?"

"잤죠. 시간이 몇 신데요."

"요놈 요거 순진하게 봤더니."

"예?"

"성준아. 혼숙은 교칙 위반이다."

"!"

X발.

알고 찾아온 거였다.

맞다… 병신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워치'를 차고 있다면, 생도들의 위치쯤은 실시간으로 파악이 될 터였다.

"그,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됐어. 벌주려고 온 건 아니니까. 다 큰 성인남녀가 그럴 수도 있지. 다만 너무 늦지 않게 돌려보내라는 거다."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구요."

"뭐 그렇다고 치자고. 지금 그게 중요해?"

"...죄송합니다."

"내가 당직인 걸 다행인 줄 알아. 고지식한 교수들이었으면 그냥 안 넘어갔어."

"네."

함성아는 바닥의 술병들과 곤히 잠든 권하선을 보더니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 딴엔 저 친구를 배려한 거 같은데, 만약 그러다 징계받으면 더 곤란해졌겠지?"

"그러네요."

그녀는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게 여분의 담요로 권하선을 감쌌다. 그러곤 마력을 이용해 손도 안 대고 둘러업었다.

"썸은 맞지?"

"아니에요."

"동무. 나 못 믿어?"

"믿든 안 믿든 아니라고요."

"쳇, 잘 자라."

"고생하세요."

나는 문을 닫자마자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권하선에게 감사했다.

오늘 일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 워치를 차고 사육장을 들락거렸을 테니까.

"휴우…."

***

가영의 방.

가영은 차원문을 마주한 채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청광의 공허는 마력을 빨아들이며 고요히 유지될 뿐이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공간 너머의 기물을 느꼈다.

희미한 감각이었으나, 존재만큼은 분명히 확인했던 것이다.

정신의 영역에서 공간을 더듬어가길 수 시간. 마침내 하나의 형체를 제대로 포착했다.

"아…!"

떠올리는 건 수월했다. 집어넣은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뚜렷한 이미지가 그려지자, 장막 같던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곧 4인용 식탁 하나가 차원문 밖으로 토해졌다.

부모님께 각성 사실을 처음 알린 그 날.

재능을 선보이다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저녁 밥상이었다.

모든 식기와 반찬까지 온전히 유지된 상태였다.

"...지, 진짜였어."

이번에도 '그'의 조언이 맞았음이라.

'형, 드디어 성공했어!'

가영은 빨리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시간도 잊고 방을 뛰쳐나갔다.

"!"

'ㄴ'자 복도를 돌던 가영이 얼떨결에 코너 뒤로 몸을 숨겼다.

성준의 방 앞에 먼저 온 손님 두 명이 서 있었던 것.

'...누구지? 성준이 형 방이 맞는데.'

복장부터 학원의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본능적으로 몸을 숨길만큼 인상들이 좋지 못했다.

'몇 신데 외부인이 기숙사를….'

...벌써 3시가 넘었었네.

시간이 이렇게 됐을 줄은 몰랐다. 저들이 더욱 수상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 와중에도 현관문에 귀를 대보고 자기들끼리 사인을 주고받는 것이, 아무리 봐도 약속된 방문 같진 않았다.

가영은 콕팟을 꼽고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전화 좀 받아!'

통화음이 한참을 울려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쩌지?'

분명 선의를 가진 방문은 아닌듯했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도 안 하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그들 중 작은 키의 남자가 현관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치이익!

남자의 손이 시뻘건 빛을 발했다.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융열(融熱).

"...!"

금속 손잡이와 연결부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사내들이 성준의 방으로 들어서자, 가영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없는데?」

「어디 갔어, 이 새끼. X발. 술병 봐라.」

숨을 죽인 채 접근하던 가영은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중국어?'

어디서 내세운 적 없지만, 가영은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중국어도 그중 하나.

일단 성준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정련관에 갔나 보네.'

성준에게 상황을 전할 때를 대비해 침입자들의 목적은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영은 문 앞까지 바짝 접근해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 딴방 가서 2차 하는 거 아냐? 한국 놈들 2차, 3차 좋아하던데. 큭큭.」

「잡소리 하지 말고 빨리 니엔젠한테나 연락해봐. 어떻게 할지.」

콕팟을 쓰지 않았는지 희미한 연결음 뒤에 상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리했어?

「아직. 그놈이 방에 없어.」

-...방은 맞게 찾았고?

「썅! 709호라며. 설마 방도 못 찾았을까.」

-그럼 기다려. 밖에서도 따로 찾아볼 테니까. 메인이 끝나면 즈쉬앤이 경계 병력을 흔들기 시작할 거야. 만약 옵션이 그때까지 안 나타나면 그냥 빠져나와.

「그게 언젠지 여기서 어떻게 아냐.」

-총성이 들릴 거다.

「...알았어.」

「잠깐, 니엔젠. 나도 밖에서 찾아볼게. 애초에 애새끼 하나 제거하는 일에 둘씩이나 붙어있을 필요 있어? 여기는 천쉰이 남고….」

-이곳엔 애들만 있는 게 아니야. 긴장 풀지 마라.

띠리링.

「X발 놈. 맨날 잘난 척은.」

가영은 충격에 휩싸였다.

저들의 대화를 종합하면 불순한 목적 정도가 아니라, '테러'에 가까웠으므로.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은 성준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빨리 형을 찾아야 해.'

가영이 서둘러 몸을 돌리는 그때.

쾅!

문을 박차며 융열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왔니."

가영은 너무 놀라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응? 너는 누기니."

「야이 병신아. 일단 데리고 들어와.」

#27화, 테러(책임)

"스읍! 동구야 그건 친구 거잖아."

동구만 챙기기 미안해서 몇 조각 던져줬지만, 다른 녀석은 고기에 입을 대지 않았다.

애초에 검각사슴의 생간이 아니면 우호적인 접근이 어려운 짐승이다.

혹시 내가 자리를 뜨면 먹을까 했더니 동구가 그것들도 모조리 삼켜버렸다.

"그래. 많이 먹어라."

당연히 사육장에서도 사료를 급여한다.

다만 생리적 포만감이 시스템적인 상태에 영향을 주지 못할 뿐이다.

그게 내가 생육을 공수해야 하는 이유였고.

──────────

[동구]

「홍안늑대(S)」

Lv: 1(67.8%) ♂

생명력: 360 / 마력: 30

공격: 33 / 방어: 25

특성: 우두머리

상태: 배부름

──────────

'67퍼라…, 이틀이면 레벨업하겠네.'

"헥헥헥!"

킁킁.

['동구'가 아쉬워합니다.]

"오늘은 더 없어. 그리고 너 지금 배불러 자식아."

"끼우웅."

아…. 그 뜻이 아닌가?

"좀만 더 참아.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니까."

나를 위해서도 빠른 대책이 필요한 상황.

이번엔 워치를 풀어놓고 나왔지만, 사실 외출 시 미착용하는 것부터가 벌점감이다.

...근래 잠도 너무 부족하고.

그렇다고 거를 수도 없는 것이, 배고픔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성장 경험치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건 동구가 마음껏 사냥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빼돌린 뒤에도 계속 먹이를 챙겨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차유라랑 상의해 봐야겠다.'

미쳤다고 하겠지만, 나한테 기대하는 게 있는 만큼 무조건 거절하진 않으리라.

***

킁킁.

사육장 환풍구를 왕복하고 나면, 훈련복에도 한동안 누린내가 남았다.

"아이 씨, 드럽게 안 빠지네…."

양팔을 파닥이며 정련관 건물 옆을 지나갈 때였다.

멀리 길 한가운데 두 사람의 인영이 아른거렸다.

'...뭐 하는 거야.'

자세히 보니, 장신의 남자가 상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 모습이다.

'저거 미친 새끼 아냐.'

승부가 벌써 났을 싸움에서 목을 조르는 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야, 거기-! 그만해!"

내가 사태를 파악하고 소리치는 동안, 목을 졸린 쪽의 발버둥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만하라고오!"

전속력으로 달려가며 재차 외쳐봤지만,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쐐애액!

나는 장신의 손목을 노리고 단검을 쏘아 보냈다.

털썩.

단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둘을 떨어트리는 데는 성공했다. 목을 졸리던 사내는 힘없이 바닥에 꼬꾸라졌다.

'젠장.'

단검을 회수할 즘에 장신 사내의 앞에 도착했다.

"혼자니."

난데없는 조선족 컨셉질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야 너는 X발. 지금 이 상황에 장난이 나와?"

"뭐이라니. 장난은 누기가…."

"비켜 병신아. 진짜 뭔 일 나기 전에."

나는 황급히 쓰러져있는 생도에게 다가가 호흡을 확인…!

"쌔스개 같은 새끼가."

"!"

관자놀이로 뻗어오는 마력을 느끼고 곧바로 쉴드를 펼쳤다.

쾅!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했다.

'아니 씹. 진짜로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쯤 되니 화가 나기보단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놈의 뒤로 빠져나가 거리를 벌렸다.

월광을 등지던 장신이 돌아섰을 때, 그의 검은 옷이 훈련복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 마법재가 제법 팔팔하구나야."

...아무래도 콘셉트가 아닌 것 같다.

"누구냐. 너."

"말하믄 아니?"

"...."

그건 그렇네.

'그냥 X 된 건가.'

정체고 목적이고 살아남은 뒤에나 생각할 문제다.

아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마주하고 보니 놈이 은연히 풍기는 기세에 심후한 마력이 담겨있었다.

냉정히 판단해서…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겠지….'

두려웠다. 지금껏 경험한 어떤 시련도 눈앞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진 않았으니까.

시간을 끌어봤자 몸만 더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움직였다.

영역을 시전하고, 곧장 놈에게 돌진했다.

"너 어쩌자고 그러니."

장신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자신감이든, 비웃음이든, 나에겐 좋은 징조다. 그가 방심하는 이 짧은 순간이.

그나마 해볼 만한 순간이리라.

'배리어.'

화르르!

시동은 방어마법이지만, 화속성의 마력을 두른 육탄공격이었다. 상대의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한 시험공격이기도 했다.

놈은 피하지 않고 수도를 찔러왔다. 손끝이 흑색으로 물들더니 팔 전체가 마치 나무껍질처럼 변했다.

'변이계.'

퍽!

"윽!"

각화(角化)된 장신의 수도가 화염벽을 뚫고 크로스 가드를 강타했다.

치이익.

불붙은 장신의 팔에서 하얀 수액 같은 것이 흘러내리며 불길이 진화됐다.

"상성은 우에일텐데 아수하갔구나."

뭐라는 진 모르겠지만, 대충 내 속성에 관한 얘기 같았다.

'불 법사로 봐주면 나야 고맙지.'

녀석이 민첩캐가 아닌 것도 다행이었다.

민첩은 부족분을 버프로 채워 넣는다고 해도 당장 공격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주공격수단이 마법이었으니까.

나는 보란 듯이 화염구를 날려 보내고 그 뒤를 바짝 쫓아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어째 불안하네.'

장신이 그사이 전신의 각화를 마치고 수액을 흥건히 뿜어냈다.

놈은 이번에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화염구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30%의 마력을 봉인해 힘 버프를 가동했다.

"쿨럭!"

같은 비율의 생명력이 깎여나갔다.

화르륵!

놈의 손짓 한 번에 둘 사이를 가리던 화염구가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카각!

단검이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아니… 힘을 줄수록 칼끝이 옆으로 밀렸다.

8.8의 힘 스탯도 놈의 표피를 뚫기는 역부족이었다.

"커헉!"

장신이 내 목을 감아쥐었다.

'목 조르는 거 X나 좋아하네. 뭔 놈의 손이….'

울대부터 목덜미까지 휘감는 완벽한 조르기였다.

콱! 까각!

놈의 팔뚝을 단검으로 계속 찍어댔지만, 마치 통나무를 찌르는 느낌이다.

"으읍…."

다른 한 손은 숨통을 트기 위해 놈의 손아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어우야, 이거 힘 좀 보라. 마법재 맞니. 짜팬친 거 아이니."

하지만 이미 사람 손이 아닌 그것은 더욱 강하게 조여들었다.

목뼈가 으스러지는 걸 겨우 막는 수준.

30%의 마력버프로는 힘에서 놈을 당해낼 수 없었다.

"끄으…."

버티기 힘들 만큼 괴로웠다.

'아직 아니야….'

전혀 방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었다.

어떤 식으로 허를 찌르든,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다.

최적의 순간을 기다려야 했다.

"너무 원망치 말라."

"...."

"다음 생에는 남 일에 너덜대지도 말고."

타닥, 탁. 츠츠츠….

턱 아래, 놈의 손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수 갈래 줄기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전신을 휘감았다.

지이익. 드드득.

그리고 이어지는 압박에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했다.

'으아아아악!'

작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은 개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타이밍이다.

나는 버프를 풀어 불안한 생명력부터 복구했다. 그래도 연습한 보람은 있는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정상적으로 해제됐다.

그리고 곧장 나를 압박하는 줄기 속으로 불의 기운을 흘려보냈다.

줄기를 달군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쌔를 쓴다."

태연한 척했지만, 그가 당황하고 있음을 알았다.

반발력 때문에 처음보다 화기를 주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압박이 조금 느슨해진 느낌도 들었다.

나는 더 많은 양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발악이었다.

수액이 말라붙어 갈라지고 놈의 몸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이… 씨바랑게가."

장신이 다른 쪽 손에서 또 다른 줄기를 뻗어왔다.

"어디 계속해보라."

푹.

"끅!"

그것은 내 양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고통보다도 탈력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치이익.

그는 내 피로 부족한 수분을 채우고 있었다.

"웃어? 이거 진짜 싸구재 아니니."

내가 그랬냐?

나는 생을 유지할 한 톨의 마력만 남기고, 모든 마력을 동원했다.

'라이트닝.'

백광이 번쩍했다.

파지지지직!

그리고 무수한 떨림이 시작됐다.

놈은 경직된 와중에도 계속 내게서 멀어지려 꿈틀댔다.

하지만 쉽게 떨쳐내기엔 이미 서로가 너무 많이 결속되어 있었다.

이윽고 주변의 뇌기 섞인 마력이 모두 사라졌다. 놈은 눈을 홉뜬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았….'

팟!

안도하려던 순간, 등 뒤에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쯔깡. 지금부터 옵션을 찾는 데 집중하라는 니엔젠의 명령이다.」

"...."

중국어….

저놈도 이놈과 한패이리라.

「뭐해, 내 말 안 들려?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끝내.」

놈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굳어버린 장신 사내와 마주 선 자세로 복부가 꿰여 있었다.

「...쯔깡?」

이놈 이름인가?

등 뒤의 사내가 뭔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듯했다. 동시에 그의 호흡이 한걸음 뒤에서 느껴졌다.

다시 차오르고는 있지만, 당장 마법을 사용하기엔 부담이 너무 컸다.

'...모 아니면 도네.'

나는 급작스럽게 돌아서며 단검을 크게 그었다. 상대가 전투능력자라면 어림없는 공격.

시커멓게 타버린 장신의 껍질 재가 흩날렸다.

팟!

검날이 허공을 갈랐고…

놈은 사라졌다.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나는 놈의 모습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뒤를 점하는 기척.

'블링크…!'

어쩐지…, 나타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이번에야말로 X이 됐음을 느꼈다.

상태가 온전하다고 해도 까다로울 상대. 그나마 곧장 반격해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병신같은 새끼. 저런 어린놈한테 당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응?」

놈은 바닥에 쓰러진 제 동료를 향해 중얼거리더니 나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네가 한청쭌이냐?」

그가 대뜸 말을 걸었다.

'...?'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중국말로 씨부리면 내가 알아듣냐? 너는 한국말 못해?"

"...."

"못하는구나…. 캔유 스핔 잉글리쉬?"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한-성-준."

"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나를 알고 또 적대적일 외부인이라면....

역시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아버지 서류를 노리던 의문의 세력.

「맞나 보군.」

스릉.

놈은 더 이상 시간 끌 생각이 없다는 듯 검을 빼 들었다.

"개 X 같네… 진짜."

무차별 살생이라도 빠져나가기 어려울 판에, 정해진 타켓이 나라면 말 다 한 거다.

암담한 상황에도 무의식은 생존을 갈구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백스탭을 밟으며 전방에 화염구를 날렸다.

화르륵!

팟!

놈은 화염구를 넘어 공간을 점프해 들어왔다.

그간 차오른 마력의 20%를 봉인해 민첩 버프를 발동했다. 6.1의 민첩. 몸놀림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윽!"

목젖으로 들어오던 검 끝에 왼쪽 어깨가 꿰뚫렸다. 버프로 얻을 수 있는 요행은 딱 한 번뿐.

애초에 블링크 능력을 가진 검사에게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뼈를 주고 살이라도 베겠다는 마음으로 재차 쇄도하는 검격에 몸을 던졌다. 영역 전체를 휩쓸 라이트닝 스톰을 캐스팅하며.

"뒤져 이 개새끼야아아아!"

검에 꿰뚫릴지라도, 마력이 바닥날지라도, 저놈 멱살은 붙잡고 가겠다는 각오였다.

날카로운 것이 훈련복을 뚫고 살갗에 닿는 순간,

팅! 콰직!

피육이 낼 수 없는 소리와 함께 후드사내의 검이 우그러졌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마력풍이 몰아쳤다.

쿵! 우드득.

오직 후드사내를 향한 광풍은 가까스로 버티던 그를 기어코 나무기둥에 처박고 우그러뜨렸다.

"끄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놈의 몸을 쥐고 짜는 듯 섬뜩한 파육음이 이어졌다.

염동(念動)이라 불리는 마력의 흐름이었다.

나는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고개는 마력이 갈무리되는 곳을 좇았다.

월광 아래 가녀린 체형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묶었던 모양이 그대로 남은 짧은 머리를 휘날리며.

저 여자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늦게까지 술 처먹었으면 일찍 자빠져 잘 것이지 뭐하러 기어 나와?"

"그보다 저놈부터 확실하게…."

팟!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드사내가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런 씨… 그냥 죽여버렸어야 하는데."

"아!"

나는 벌떡 일어나 먼저 쓰러져있던 생도에게 달려갔다. 호흡을 확인하고 맥을 짚어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벌써 죽었다."

"하아…."

함성아쯤 되면 멀리서도 생명 반응을 느낄 수 있는 모양.

그러고 보니 늘 장난기 어렸던 그녀의 얼굴에 살기가 그득했다.

"…가자. 의무실에 데려다줄게."

"아뇨. 기숙사로 가면 돼요."

어깨와 양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지만, 마력의 회복에 맞춰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럼."

"...!"

돌아선 그녀의 상의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깨에서 등까지 내려오는 길게 베인 상처도 보였다.

나와 마주치기 전에 또 다른 전투가 있었던 모양.

함성아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면 상대 역시 무지막지한 괴물이라는 뜻이다.

'충분히 대비했어야 하는데….'

어리석었다.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꼭 변변찮은 상대인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사기적인 권한을 얻었다고 은근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크나큰 자만이었다.

"다 내 책임이다."

"...네?"

함성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미리 경고된 상황이었다. 더 철저히 대비했어야 했어."

"...."

어떻게 경고된 상황이란 건진 모르겠지만, 저들의 타겟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동기의 죽음은 네 책임이 아니라고."

"...네."

나 때문인 것도 맞다.

어쨌든 그녀의 입장에서 해주는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기숙사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타다당! 탕! 탕!

멀리 캠퍼스 외곽 쪽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한두 정이 내뿜는 소리가 아니었다.

"염병… 가지가지 하네. 빨리 들어가라."

함성아는 총성이 울린 방향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떠올랐고,

'맞다, 워치….'

곧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28화, 테러(타겟)

"이거 총소리 맞죠? 무슨 일이래요?"

"저도 지금 막 일어나서…."

소란에 부스스 잠을 깬 생도들이 하나둘 복도로 나오고 있었다.

"으악!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나를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들어 질문을 쏟아냈다.

"미안해요. 나중에."

일일이 대꾸할 때가 아니라 그냥 지나치는데,

삐익!

마침 스피커에서 마이크 하울링이 흘러나왔다.

-아아! 교무실에서 전파한다. 정체불명의 테러 조직이 생도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원내 교관진들과 외곽경계를 맡은 군부대가 합동 진압 중이므로 생도들은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절대 기숙사를 벗어나지 말고 방에서 대기하도록. 실제상황이다. 반드시 통제에 따라주길 바란다."

덕분에 저들끼리 웅성거리는 생도들을 헤치고 무사히 내 방에 도착했다.

"...!"

사라진 문손잡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게다가 침입자가 아직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

잠깐 다른 생도들에게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뒤져도 나 혼자 뒤져야지.'

아까 죽은 생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는 상관없는 이들이 피해를 입어선 안 됐다.

다행히 복도로 나왔던 생도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금속을 녹일 정도의 극 화(火)속성….'

바닥의 금속 덩어리(아마도 손잡이였을)로 적의 능력을 유추할 수 있었다.

놈처럼 한 가지 속성이 극성일 경우, 같은 속성은 물론이고 상극이라도 상대의 수준이 낮다면 면역에 가까운 것이 보통이다.

순수 전투계열을 제외하면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재능이 염동력이나 전격 마법으로 한정된다는 뜻이다.

"후우…."

나름의 대비와 각오를 다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젠장.'

벌써 빠져나갔기를 바랐건만.

어두컴컴한 방 안, 침대 위에 시커먼 인영이 앉아있었다.

"얼마 받고 일하냐? 따따블로 주면 갈아탈래?"

두려운 마음을 숨길 겸 반쯤 진심을 담아 농담을 던졌다.

"형…."

한데 전혀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 영이냐?"

탁!

나는 형광등을 켜자마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야이 씨, 개쫄았잖아! 니가 왜 여기 와있어?"

가영은 빛 때문인지 한참 눈을 껌뻑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아…! 미안해요. 내가 빨리 형한테 알렸어야 하는데. 그놈들이 형을 죽인다고 하는데 형은 전화도 안 받고…, 아니 그래도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 그놈들이 갑자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야야, 진정하고 알아듣게 좀 차근차근히 말해봐."

"모, 몸은 괜찮은 거예요?"

영이도 내 상태를 보고 많이 놀란 거 같았다.

"어, 그냥 좀 쓰라린 정도. 가만. 그게 뭔 소리야. 그놈들이라니?"

어찌 된 일인지 가영은 그들의 '타겟'까지 알고 있었다.

"너 혹시 그놈들 마주친 거야? 내 방에 언제부터 있었어?"

"...."

"...뭐야. 왜 말을 안 해? 야."

녀석은 내 성화에도 자꾸만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혀엉~ 제가 사, 사람을 죽였어요."

***

찬란한 푸른빛이 명멸하고, 그 자리에서 공허의 어둠이 입을 벌렸다.

"와…."

내 입도 떡 벌어졌다.

아공간 게이트. 바로 전 세계 귀품 경매를 장악할 가영의 권능이다.

그러고 보니 XR장비 속에서를 제외하면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릴 적 IMAX로 인X스텔라를 봤을 때 느꼈던 감동 이상이랄까.

하지만 그런 감상도 내 방... 바닥에 널브러진 두 구의 시체를 보는 순간 전부 날아갔다.

'이제 여기서 못 자겠네….'

속마음이야 어쨌든 나는 가영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짜식. 성공했구나!"

"...."

녀석도 퉁퉁 부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다시 말하지만, 넌 살인을 한 게 아니야."

나 역시 오늘 한목숨을 빼앗았다.

원래 나란 놈이 그런 건지 〈창조적 시선>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담담히 받아들여졌다.

"이건… 수렵이나 마찬가지야."

먼저 목숨을 노린 자들에 대한 보복심도, 합리화도 아니었다.

현행법상 강력범죄를 저지른 초인은 '괴수'와 똑같이 취급됐다.

모든 초인은 초상대응에 있어서 공무적 권한을 가지며, '괴수'대응의 1원칙은 즉살이다.

비(非) 초인의 안전을 위해 마련된 법이지만… 어쨌든.

영이나 나나 과잉방위도, 살인죄도 적용받지 않는다.

"저도 알고는 있는데…."

"알아. 그래도 뭣 같지. 근데 앞으로 니가 뭘 해 먹고 살든 이런 일은 계속 마주치게 될 거다."

"설마요. 저는 절대로 적을 만드는 짓은 안 할 거예요."

가영의 미래를 안다고 해도 그 안의 삶까지 알진 못한다.

그러나 카이옥션의 수장이라면 분명 국제범죄단체와의 마찰도 수없이 겪었을 터. 오늘의 경험은 시작에 불과하리라.

"그래 뭐… 그렇게 살면 좋지."

그게 니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세상인 거다.

"...아까부터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는데요."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놈들이 나를 노렸냐고?"

"어, 네."

"대충 그런 거야. 내가 뭘 해서라기보단… 이놈들이 하는 일에 누가 방해되느냐의 문제랄까. 암튼, 내키진 않지만 좀 뒤져봐야겠다."

"우욱!"

주머니를 뒤지기 위해 사체를 돌려 눕히자, 가영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섬뜩하긴 하네…."

눈을 뜨고 있어서 눈꺼풀부터 감겨주었다. 아공간의 효용인지 싸늘하거나 경직된 느낌은 아니었다.

거기다 그들이 원래 품고 있던 마력도 아직 흩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가영의 능력을 전혀 몰랐으니 망정이지 둘 다 웬만한 교관들은 쌈 싸 먹을 강자들이었다.

'이놈들도 어이가 없겠네.'

만약 영혼이 있다면 아직도 근처에 멍하니 앉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 좀 나왔어요?"

"...잡다한 것들밖에 없다."

중국 담배, 라이터, 돈 몇 푼.

더 마른 쪽이 차고 있던 장검 하나와 알 수 없는 내용이 빽빽이 적힌 쪽지가 전부였다.

"다 하셨으면 다시 좀 뒤집어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은 감겨놨으니까 그냥 나와. 이거 좀 봐봐라. 숫자랑 알파벳인데 단어 몇 개 말고는 무슨 암호 같네."

가영이 그제야 화장실을 나와 쪽지를 받아 갔다.

"이거 느낌이 복원코드 같은데요. 지갑 주소랑."

"아… 코인?"

"네."

"그걸로 돈을 처받았나…. 뭐 단서는 안 되겠네."

"워치를 확인해야죠."

"안 차고 있던데?"

"없을 리가 없죠. 제가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그렇지. 그럼 어딘가 있겠지."

샅샅이 더듬다 보니 가슴께서 잡히는 것이 있었다.

"목에 걸고 있었네. 이놈이 손잡이를 녹인 놈이랬지?"

"네."

아마도 그 능력에 망가질 것을 대비한 듯했다.

"저장 안 된 통화목록 하나…. 대포번호겠지. 이것도 마찬가지고. 역시 뭐 아무것도 없네."

당장 전화를 걸어본들 내 선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다. 괜히 이쪽의 상황만 일찍 알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잠깐 줘봐요."

가영이 워치를 뺏듯이 가져갔다.

"그거 알아요? 컴퓨터 휴지통은 종종 비워도 스마트워치는 새 걸로 바꿀 때까지 한 번도 안 비우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거."

"워치 OS에 휴지통이 있었어?"

있는지도 몰랐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앗, 이 사람…."

"왜, 뭔데?"

휴지통에는 두 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하나는 예상대로 내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나은?'

얘랑은 무슨 연결고리가 없는데?

"영아, 이놈들이 나를 옵션이라고 했다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는 얘기다.

"맥락상이요. 아! 그럼 그, 신성가 누나가 메인이었던 걸까요?"

"...글쎄. 아니, 아마 그건 아닐 거 같다."

정말 천류회를 적대하는 세력이 이들을 보낸 거라면, 또 다른 타겟이 송회장 딸내미(송연희)인 편이 더 납득이 간다.

물론 신성그룹이 별개의 사건에서 그놈들과 척을 졌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놈들의 목적과 타겟의 우선순위를 함께 놓고 생각하면 썩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다.

만약 저 밖의 소란과 이름 모를 생도의 희생이 모두 메인 임무의 연장이라면....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나란히 있다고 해서 꼭 둘 다 타겟이란 법은 없지.'

어쩌면 다른 하나는 보호 대상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형!"

"어?"

"전화요."

나는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손에 쥔 워치는 잠잠했다.

"...?"

"그거 말고 형 거요. 아까 말한다는 게 깜빡했는데, 형 없을 때부터 꽤 여러 통 왔었어요."

"아!"

아버지께 연락한다는 걸 녀석의 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발신자는 마침 아버지였다.

다행히 끊어지기 전이라 얼른 콕팟을 뽑았다.

"여보세요?"

-대체 $#% #@다가 지금 #@거냐!

"네? 어디세요?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뭐라고 하시는지 잘 안 들려요!"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성이 쏟아졌지만, 더 큰 소음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면 됐다! $@#왔어.

그리곤 뚝 끊어지는 전화.

아니, 아들이 지금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아시나?

"...근데 뭐가 왔다는…."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때, 멀리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헬기도 떴나 본데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굉음이 되어 창밖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거대한 군용 수송 헬기였다.

마침내 운동장에 착륙한 헬기에서 2개 분대의 병력이 쏟아지듯 나와 산개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당당한 실루엣의 사내가 내려섰다.

'하하….'

조금 전 전화 너머로 들리던 소음의 정체였다.

처음 소총 소리를 듣고, 근방의 군부대가 출동했다면─ 청송에 자식을 보낸 장성들은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저래도 되나? 관할지역도 아닐 텐데.'

걱정 아닌 걱정 속에서 묘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그 어색함으로부터 도망치듯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영아. 부탁 하나만 하자."

"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이 일은 우리끼리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

"예? 설마 학원 측에도 알리지 말잔 얘기에요?"

"그래."

"...그래도 돼요? 저희가 죄지은 건 없다면서요."

"이걸 알리면 타겟이 나라는 것도 밝힐 수밖에 없잖아. 이들이 왜 나를 노렸는가에 대해선 당장은 설명하기가 곤란해. 학원이나 수사기관에서 그쪽에 관심을 가지면, 우리가 '메인'을 알아내는 일도 점점 멀어질 거고."

"그, 그럼 설마 저보고 이 시신들을 계속 가지고 있으라는...."

"아냐 아냐. 시신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원래의 계획은 그게 맞았지만, 이제 시신의 처리도 아버지 쪽에서 도맡을 것이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내 현관문만 아공간에 넣어줘."

"현관문이요?"

"침입의 흔적이니까. 미안하지만, 아침에 시설관리실에 니가 실수로 없애버렸다고 말 좀 해주고."

"아… 그 정도야 뭐. 알겠어요."

혹시 복도를 지나는 이가 볼지 몰라 시신들을 이불로 덮었다.

#29화, 테러(상처)

예상대로 가영을 돌려보내고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특이하게도 병(兵)처럼 젊은 놈들이 하나같이 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아…!'

창살부대. 전원 초인들로 이뤄진 아버지의 수족들이다.

훗날 아주 악명 높을 그들이지만, 벌써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

아무 말 없이 들이닥쳐 도열해 버리니, 뜻하지 않은 눈싸움이 벌어졌다.

"...."

"오바들 하지 말고 나와. 내 아들 방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들, 군홧발로....

"오셨어요?"

"현관문이 왜 없…, 무슨 일이냐."

아버지는 문틀을 툭툭 차다가 나를 보더니, 차게 식은 얼굴로 돌변했다.

"아…. 다친 건 다 나았어요."

훈련복이 여기저기 꿰뚫리고 피떡이 눌어붙은 상태였으니 놀라시는 게 당연하다.

"그놈들을 마주친 거냐?"

"상황은 알고 계시는 거 같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타겟이 저였어요."

"...어떻게 확인했지?"

"제 이름,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주머니 속의 스마트워치를 쥐고 잠시 보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혹시나 잘못된 판단이나 오해 하나가 스토리를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도 진실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쪽은 아버지였다.

"결정적으로 놈들이 가지고 있던 워치에서도 제 사진이 나왔어요."

나는 결국 아버지께 워치를 건넸다.

"...다른 사진도 여기 있는 아이냐."

"네. 신성그룹 이 씨예요."

아버지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는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당신의 생각이 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구나."

역시나 속을 내비치지 않으셨지만, 나와 비슷한 추측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걱정인 게 다른 놈한테서 사진이 또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알았으니 됐다. 워치의 주인은?"

"죽었죠. 안 그래도 그 부분에 정리가 좀 필요한데...."

나는 말끝을 늘이며 시신을 덮었던 이불을 들춰 보였다.

"네가 그런 게냐?"

"예, 뭐…."

처음부터 가영에 대한 것은 숨길 생각이었다.

내 교우관계를 파보면야 존재도 모를 건 아니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관심 둬서 좋을 게 없는 사이였다.

"네, 네가 이 두 놈을 상대했다고? 어떻게?"

아버지는 시신의 명치쯤에 손을 대보시더니 드물게 말까지 더듬으셨다.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그렇게 됐어요. 아무튼, 이놈들이 제 방에 찾아온 것 하나로 숨길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목격자가 있을 가능성은?"

"대놓고 들어왔으면 로비와 엘리베이터 CCTV엔 잡혔겠죠. 문짝을 치운 것도 침입 흔적 때문이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더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지금 전부 얘기하거라."

"밖에서도 한 놈을 마주쳤어요. 어쩌다 보니 제가 그놈을 죽였고요. 하나가 더 튀어나왔는데 마침 원장님이 나타나서 구해주셨죠."

"잠깐, 그러니까… 총 세 놈을 죽였다고?"

"공식적으로는 하나고요."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으셨다.

"원장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불특정 다수를 노린 테러라고 생각하세요. ...놈들이 무고한 생도한테도 손을 댔거든요."

"알았다."

아버지의 손짓에 입구에 대기하던 우람한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는 두 구의 시신을 포개어 들쳐메고는 들어선 걸음대로 가볍게 퇴장했다.

"저것들도 챙겨가세요. 단서가 될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다른 부하를 시켜 죽은 이들의 소지품을 챙긴 뒤, 그대로 방을 나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혹여나 동기들의 죽음에 죄책감 같은 건 갖지 말아라. 죄를 지은 건 놈들이니까. 그리고 하나 확실히 하자면 이 일의 타겟은 네가 아니라 나였다."

그게 그거 아닌가?

"뭐가 달라요?"

"놈들은 처음부터 청송에서 묻지 마 테러를 자행할 생각이었던 거다."

"...!"

애초에 청송에 대한 테러 자체가 '메인' 목표였다면 내가 '옵션'인 것은 충분히 말이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걸렸다.

"청송에 대한 테러 행위가 아버지랑 무슨 상관인데요?"

"관리 책임이 나한테 있기 때문이다."

"예? 아니… 그걸 왜 지금 얘기해요!"

"내 일 얘기를 왜 니놈한테 해?"

"그건... 그렇네요."

아버지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돌아서셨다.

처음 손에 피를 묻히고,

거의 죽을 뻔했던 자식과의 대화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담담했지만....

현관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

오전 10시가 넘어서 상황종료를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모든 교육진이 피해 수습에 매달리느라 수업은 전면 연기됐고, 우리는 별다른 통제 없이 기숙사에 방치됐다.

"다 됐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현관문 설치 건으로 시설과 직원들과 동행했던 가영이, 나 대신 그들을 배웅했다.

"형, 새 카드키요."

"어. 탁자에 놔둬. ...참, 벌점 줘야지. 몇 점 깎였냐?"

기물파손의 경우, 고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액에 따라 벌점이 부여될 수 있다.

"벌점 안 받았어요. 그냥 직원분들밖에 없던데요. 그, 마공학 이윤철 교수님이 시설과장이잖아요."

"하긴.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겠지. 암튼 나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했네. 매점이라도 가자."

"그보다 동아리 단톡방에 대꾸 좀 해줘요. 확인도 안 한다고 연희 누나가 뭐라고 하던데."

"단톡을 알림으로 해놓는 사람이 어딨어. ...전화도 했었네."

송연희, 권하선에게 부재중 전화가 9통이나 와있었다.

─────────

(송연희: 울멤버들 무사한지 확인 좀 할게. 메시지 확인하는 대로 대답해줘.)

(가영: 무사해요.)

(차유라: -OK 이모티콘-)

(강선호: 확인)

(권하선: 확인)

(최범균: ㅎㅇ)

(송연희: 한성준 얘 전화도 안 받는데 남자들 중에 누가 가서 확인 좀 해봐)

(가영: 아 성준이형 방금 전까지 저랑 같이 있었어요.)

(송연희: 근데 걔는 왜 대답을 안 해 전화도 쌩까고)

(가영: 형이 지금 개인적인 일로 좀 바빠요)

(송연희: 시끄러 니가 대변인이야?)

(최범균: ㅋㅋ)

(가영: 전달하겠습니다.)

(권하선: 그래서 걔 지금 뭐함?)

(가영: 지금은 몰라요. 제가 밖이라.)

(권하선: 넌 밖에서 뭐하는데)

(가영: 시설과에 들렸다 오는 길이에요.)

(권하선: 시설과는 왜)

(가영: 제가 성준이형 방문을 날려먹어서;;)

(권하선: 뭔 개소리야 한성준이 시켰냐?)

(권하선: 씹어?)

─────────

"아… 그렇지. 이건 송연희가 잘했네."

확실히 그녀가 리더의 자질은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 피해 상황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으니, 생도들 입장에선 연락이 안 되는 동료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저도 힘들었어요."

"너한테는 죄가 많다."

"많이 고를 거예요."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

어쨌든 누군가 내 안위를 챙기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기숙사 로비.

삼삼오오 모인 생도들이 전부 간밤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카페테리아는 팀원과 연락이 되지 않는지 다급해 보이는 생도들,

벌써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눈물 바람인 생도들로 침중한 풍경이었다.

"...그냥 올라갈까요?"

우리 단톡방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나도 조금 당황했다.

매점 앞이 휑하고, 카페테리아에도 음식물이 펼쳐진 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좀 그렇지? 나중에 다시 오자. …아 잠깐만."

암울한 기운이 느껴지는 테이블 중에 이나은 패거리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그녀 주변에, 일전의 싸움 때 상대했던 호위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X발….'

그래도 얼굴을 아는 녀석이라고 안타까움이 더 컸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나은이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눈길을 맞받으며 작게 읊조렸다.

'내가 잘못 짚었길 바란다.'

신성이 배후더라도 그녀가 알고 있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 신성을 거머쥘 그녀가 끝까지 모를 일은 없다.

그건 다시 말해서, 내가 아는 본편의 진실이 뒤바뀌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선역의 한 축으로 분류된 신성 그룹과 악당으로 불리던 아버지.

'뭐가 악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 추측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나는 기꺼이 저들이 말하는 악당이 되어주리라.

내 시선을 멋대로 오해했는지 그녀는 곧 경멸 섞인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별안간 로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니 한 무리의 낯선 사람들이 로비로 들어서고 있었다.

외부인에 특히 예민할 시기. 생도들의 경계심이 바짝 서 있는 가운데, 때를 맞춘 듯이 방송이 흘러나왔다.

-훅! 사감실에서 전파한다. 강화반 한성준, 강선호. 이상 2인은 방송을 듣는 즉시 로비로 내려오길 바란다.

"수사기관에서 나온 거 같지?"

"딱 생김새부터가 그쪽이긴 하네요. 근데… 그런 거면 선호 형은 왜 불렀을까요?"

"그러니까. 나도 지금 그 생각하는 중이다."

잠시 후, 방송 마이크를 잡았던 유 교관이 로비로 나와 낯선 이들을 맞았다.

"도착해 계셨네요. 유호영입니다."

"대테러보안국 황태석입니다. 황 과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마침내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생도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등장은 자연스러운 상황이나, 조금 전 방송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함이리라.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언젠간 밝혀지겠지만, 꼭 이렇게 공개적으로 불러내서 모두가 알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벌써 내 얼굴을 아는 생도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덕분에 유 교관도 곧 나를 발견했다.

"아, 저 친구가 한성준입니다. 이쪽으로 오거라."

"...."

"반갑다."

황 과장이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악수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유 교관에게 두고 말했다.

"찾아온 시점에 이미, 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계신다는 건데… 너무 배려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황 과장에게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얘가 조금 건방지긴 해도 틀린 소리는 안 합니다."

하지만 사과도 잊지 않았다.

"내 생각이 짧았다."

"하하, 주관이 있는 친구네요. 내가 서두른 탓이니 나도 사과하마. 협조 좀 부탁한다."

"예… 뭐 별거 없긴 한데, 제가 기억하는 건 전부 말씀드리죠."

적어도 '쯔깡'이라 불린 놈에 대해선 숨길 이유가 없긴 했다.

그나저나 강선호도 습격을 당했다는 얘긴가?

"이제 희망은 너희뿐이다."

"뭘 희망씩이나…."

유 교관이 설명을 거들었다.

"교관진 중에는 당직이었던 함원장님과 순찰조였던 라이코, 박상기 교관만 놈들과 전투를 치렀지. 나 포함 다른 교관들도 연락을 받고 뒤늦게 투입됐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네…. 교관님들이랑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었나 보네요."

"그리고 간밤에 놈들을 마주친 사람 중, 함원장님과 라이코 교관을 제외하면 생존자는 너희 둘이 전부다."

"역시 강선호도… 네?! 그럼 박 교관님은...."

"순직하셨다."

생도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는 XR장비실 책임자로 적응훈련을 진행했던 인물이다. 내게 꽤 호감을 보이던 분이라 나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띵!

"저기 다른 친구도 도착했네요. 그럼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맡겨 주십쇼."

유 교관이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마땅한 인사말을 찾지 못했다.

술렁임이 점점 커지는 게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아이고… 쯧쯧."

황 과장이 뜻 모를 탄식을 내뱉었다.

뒤를 돌아보자 강선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를 아로새긴 채.

#30화, 테러(회복)

쯔깡이란 놈이 어느 생도의 목을 조르는 것을 목격한 시점부터,

블링크 검사의 출현. 그리고 함성아의 등장까지. 있는 그대로를 진술했다.

밖을 싸돌아다닌 이유에 대해서만 술을 깨기 위함이었다고 답했다.

"협조해줘서 고맙다."

"예. 그럼." / "아닙니다. 고생하셨어요."

…참 다르다.

운동 때문에 나다닌 어떤 녀석과는 조금 다른 시선을 느꼈다.

뭐 어떤가.

황과장이 강선호와 악수를 나누는 틈에 나는 소회의실을 빠져나왔다.

'2층은 엘리베이터가 안 섰지 참.'

1층 로비로 내려가기 위해 돌아섰을 때, 강선호도 소회의실을 나왔다.

"한성준! 같이 가."

"엉. …괜찮냐?"

"나는 뭐 괜찮지."

"그럼 됐지."

"보긴 좀 흉한가?"

"아니. 전보다 낫다."

"낫다고?"

강선호는 웃었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원래 흉터가 있어도 잘생기게 디자인된 캐릭터 아닌가.

솔직히 반갑기까지 했다.

지금 모습이 더 익숙했고,

내 개입과 무관하게 일어날 일이었다는 확실한 증거였으니까.

"눈 좀 붙이고 아침에 거울을 보는데, 솔직히 나쁘지는 않더라고."

"…본인도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런 거 있잖아. 왠지 세수 안 해도 괜찮을 거 같고. 머리가 헝클어져도 상관없을 거 같은 기분."

이제 흠이 생겼으니 조금 내려놔도 되겠다… 그런 뜻인가? 그건 좀 재수 없는데….

"모르지. 나 같은 애들은 항상 꽃단장을 해야 봐줄 만해서."

웃긴 얘기도 아니었는데 강선호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웃어댔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말이 많은 놈도 아니다.

"뭔데. 넌 왜 기분이 좋냐?"

"아, 미안. 웃을 때가 아닌데…."

"뭐라는 게 아니라 왜 좋냐고."

"좋기는. 그냥 긴장 풀려서 그래. …살았으니까."

"그건 뭐… 그럴 수 있지."

비상계단에서 1층으로 나가는 철문을 열어젖히자, 다시금 우울한 공기가 얼굴로 불어닥쳤다.

"희생자 전부가 안타깝지."

로비로 나서면서 강선호가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파병 생활을 조금 했었거든…."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우리 둘에게 생도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긴 얘긴데… 간단히 말하면. 이제 나한텐 넓게 살필 멘탈이 남아 있지 않더라고."

너무 많은 사람을 잃어봤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니 말은. 멤버들 무사해서 좋다는 거 아냐. 그게 뭐가 어떻다고 개폼을 잡아."

"맞아. 그러니까 다음에도 죽지 말라고."

지금 느끼지만.

나는 남이 주는 마음에 알러지가 있는 것 같다.

-띵! 1층입니다.

마침 탈출구가 열리기에.

"너나 조심해 새꺄. 라이코가 살려준 주제에."

면박을 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도 원장님께 꼭 감사 인사드려라."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야아아아아!"

로비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한성준! 강선호!"

송연희가 제대로 빡친 얼굴로 우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탁탁탁!

나는 황급히 닫힘 버튼을 갈겼다.

***

목요일.

이틀이 지났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하다.

[軍 테러조직원 2명 추살에 성공]

[테러조직원 사망 5, 현재 7人 도주 중]

[군경 합동 대테러 프로세스 가동]

[수색 60시간 경과. 발견된 흔적 없어…]

'결국 이렇게 돌렸구나.'

내 방에서 나온 시신 두 구는 추격부대가 외부에서 제거한 것으로 처리됐다.

피해 사망자는 총 스물한 명.

생도 7명과 교관 1명이 희생됐고,

군인은 13명이 전사, 회복이 불확실한 중상자가 9명이었다.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매체가 이번 사건과 관련된 소식으로 도배됐고, 주가는 연일 바닥을 쳤으며, 국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괴수에 의한 희생은 날마다 있어왔지만, 초인에 의한 테러 사건은 처음이었기에.

또 그 대상이 어린 생도와 군인들이었기에 충격이 더욱 컸으리라.

"누구 말대로 과제입찰 안 하길 잘했지. 전부 다 미뤄졌는데 점수만 묶일 뻔했잖아."

나는 보던 뉴스 페이지를 끄고 멤버들을 돌아봤다.

권하선의 말에 송연희가 또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본관 5층. 12평 남짓한 크기에 웬만한 집기들을 다 갖춘 휴게 겸 회의공간.

우리는 예정대로 동아리방을 마련했다. 덕분에 우중충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조금 분리될 수 있었다.

"지금 동아리방 있는 건 우리밖에 없을걸?"

"홀리였던가? 걔네도 아침에 샀다던데요."

가영도 그날 일에서 벗어난 듯했고.

"거기 이나은네 동아리지?"

"아마 맞을걸요."

"걔들이야 뭐…."

~지이잉!

(청송학원 → +1점, 장소 효과)

"어우. 동아리방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네. 이게 개꿀이야 진짜. 여~ 브레인!"

팡팡!

최범균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이유는,

결제 이전엔 알 수 없던 동아리방의 기본효과 때문이다.

자리만 지켜도 시간당 1점의 점수 획득. 하루 두 시간이면 한 달에 60점을 먹고 들어간다.

물론 다른 동아리들도 결국엔 하나둘 장만할 테지만, 먼저 시작할수록 이득인 게 당연했다.

똑똑.

"배달이요!"

"와 이게 얼마 만이냐."

권하선이 냉큼 달려나가 음식 꾸러미를 받아왔다. 곧 실내가 중화요리 냄새로 가득 찼다.

분위기 핑계로 식당에 가기 싫다는 애들을 위해 송연희가 시켜준 것이다.

"잘 먹을게."

"나도."

가영이 젓가락을 건넸지만, 송연희는 손을 내저었다.

"난 안 먹어."

"왜요? 중국 음식 싫으시면 아까 얘기하시지."

"아니 난 원래 배달음식 자체를 안 먹어. 너나 맛있게 먹어."

"쟤는 입학 첫날에도 조리실 위생상태 확인하고 밥 먹은 애야."

최범균의 말에 권하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 야이 씨! 동작 그만!"

우당탕!

권하선이 벽에 세워둔 메이스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쟤는 갑자기 왜….

진짜로 휘두를 거 같은 살기에 최범균이 소스 그릇을 든 채 엉거주춤 멈춰 섰다.

'아.'

"뒈지기 싫으면. 그릇 당장 내려놔라."

"지랄 노. 탕수육의 근본은 부먹이다. 무식한 것아."

"부먹같은 소리하네! 대가리 터지면 니 뇌수로 실컷 하시겠네요."

살벌한 협박에 움찔한 최범균은 주위를 둘러봤다.

"하 X발. 야! 부먹 손들어."

강선호, 차유라가 조용히 손을 들었고, 권하선이 깔깔깔 웃어젖혔다.

"4대 3이다. 이제 내려놔라."

"아 정신 사납게 뭐 하는 짓이야! 반절만 부으면 되잖아."

송연희의 신경질을, 최범균이 덥석 물었다.

"반반 콜?"

"4대 3인데 왜 반반이야. 딱 30퍼센트만 부어라."

기적의 계산법.

그대로 하려던 최범균도 뒤늦게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멈칫했다.

"…아니지. 4대 3이 왜 7대 3으로 변하냐?"

"다, 다수결이 원래 그런 거야!"

"킹받네? 심보를 곱게 썼어야지."

최범균이 그 말과 동시에 소스 그릇을 확 뒤집었다.

"야아아아아아!"

권하선이 반사적으로 메이스를 휘둘렀고.

최범균은 잽싸게 짬뽕 아래로 숨어들었다.

'에휴.'

하는 짓들이 한심했지만, 저대로 튀김옷이 적셔지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곧장 섭물의 마력을 소스로 뻗어 보냈다.

소스는 쏟아지던 형상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

"...!"

"나이스!"

권하선이 '좋아요'를 날려보냈다.

"도로 주워 담는 건 안 될 거 같은데?"

걸쭉해도 액체인지라 공중에 잡아두는 것 이상은 쉽지 않았다.

우선 소스 그릇만 잡아당겼다.

"아니 X발. 강선호 너는 뭐하고 자빠졌냐! 누나도 좀 도와줘!"

짬뽕 그릇의 외침에 권하선이 홱 강선호를 돌아봤다. 그리곤 재빨리 탕수육 접시에 손을 뻗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차유라에게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파츠츠츠츠!

탕수육 접시 주위로 모여든 뇌기가 푸드커버 같은 결계를 형성했다.

'라이트닝 웹'을 저렇게 쓸 줄이야.

"으악!"

권하선이 화들짝 손을 뗐다.

"와, 우와! 지금 이거. 진짜로 해보자는 거지?"

그녀의 양손에 하얀 강기막이 어렸다.

덥석!

그대로 뇌기를 뚫으려는 권하선의 손목을 또 다른 손이 낚아챘다.

마찬가지로 푸른 강기를 두른 강선호였다.

"이거 놓지?"

"손을 든 책임은 져야 해서…."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취향 정말 실망이다."

"하하…. 그게 쉽게 안 바뀌더라고."

둘의 힘 씨름이 격해지며 맞닿은 강기막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금방 마력풍까지 몰아칠 기세라 나는 바로 '리버스 그래비티'를 시전했다.

묶어둔 소스가 천장 아래까지 치솟았다.

그 순간.

고오오오.

테이블 한쪽에 투명 장막이 내려앉았다.

"범균이 형 나오세요."

가영의 경고.

"뭐, 뭐 하는 거야!"

장막은 짜장면과 볶음밥, 깐쇼새우를 지나 테이블을 통째로 삼켜나갔다.

"빨리요."

짬뽕 그릇 그림자가 쭈욱 늘어나 가영의 그림자로 흘러들었다.

곧 완전히 모습을 감춘 테이블.

"야이 미친 새끼야! 그걸 왜 처넣어! 찍먹 아니면 차라리 굶겠다는 심보냐?"

가영의 뒤에서 솟아난 최범균이 헤드락을 걸었다.

"켁켁! 아니, 그게, 아니고…."

탕수육도 사라졌건만 서로 맞잡은 강선호와 권하선은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다.

"강선호 너까지 진짜! 그만들 안 할래?!"

결국, 뚜껑 열린 송연희가 소리쳤다.

어느새 활까지 집어 든 그녀는 마력화살을 잰 채 강선호, 권하선 둘 사이를 겨눴다.

"야야, 그건 아니지!"

빗나가도 벽 무너진다.

내가 식겁해서 말리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두 사람도 화들짝 강기를 거두고 떨어졌다.

"...."

"...어? 이게 뭐야! 다 어디 갔어!"

강선호가 가영을 가리켰다.

털썩.

권하선이 망연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그만해. 끝났어. 범균아."

강선호가 만류했지만, 최범균은 눈이 뒤집혔다.

"이 새끼 때문에…."

"면이…, 불을까 봐, 그랬, 다니깐요… 다시 꺼낼 수, 있어요…."

"뭐? 다시 꺼내?"

그러고 보니 쟤들은 모르지 참.

"성공했구나?"

강선호만 뭔가 알았던지 가영에게 미소를 보냈다.

잠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테이블 앞에서,

멤버들은 한동안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된다고?"

"니 능력 쩐다."

쿵쿵쿵!

최범균이 테이블을 두드렸고.

"우와아아아악!"

권하선은 괴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가만! 근데 소스는?"

나는 소스 그릇을 들고 테이블 중앙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스의 마력을 거둬들인 뒤, 후두둑 쏟아지는 그것에 '페더 폴'을 걸었다.

"어엇!"

"아...!"

탕수육 소스는 함박눈처럼 천천히. 그릇 위로 내려앉았다.

"오늘은 찍먹이다. 불만 있는 놈은 간장이랑 먹든가."

"...!"

"...!"

"그럼 먹자."

탕수육은 여전히 따뜻했고, 바삭했다.

***

같은 시간. 경기도 포천 외곽의 폐건물.

지나치기도 싫을 거 같은 그 건물 지하엔 제법 갖춰진 생활 공간이 마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원흉들이 숨어있다.

곰 같은 거한이 홀 중앙을 서성거렸다.

"이 새끼들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니엔젠. 설마 천쉰과 꾸안민이 군바리들한테 뒈졌다는 걸 믿는 건 아니지?"

"홍타오. 정신 사납다."

거한이 의자를 끌어다 앉자, 니엔젠이라 불린 사내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60시간이 넘었다. 살아있다면 벌써 소식이 있었겠지."

"좋다 이거야. 그러니까 누구한테 당했을 거 같냐고."

"알면 뭐. 복수라도 하게?"

거한의 맞은편. 붉은 머리의 사내가 라이플 총구에 턱을 괸 채 빈정댔다.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원장한테 야친하고 하이윤이 죽었다며. 웨이치는 죽다 살았고. 또 누구냐. 하오란이 깨진 애."

"그래 그 양놈 새끼. 니가 신호 주기 전까지 그놈이랑 원장년 둘 다 밖에 있었어. 천쉰과 꾸안민 팀이라고! 나머지 교관 놈들이 전부 몰려갔대도 당할 조합이냐?"

"그 시간. 그 장소에 마주칠 놈이 한성준 걔밖에 더 있어?"

"그놈이 쯔깡을 죽였다며. 걔도 밖에 있었던 거잖아."

"니엔젠이 천쉰네 전화를 받은 시각부터 내가 처음 방아쇠를 당긴 시각까지가 대충 1시간. 웨이치가 쯔깡을 찾아간 시간은 그중 40분 이상이 지났을 때다. 천쉰이 전화를 끊자마자 놈이 방으로 돌아갔었을지 누가 알아. 40분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지."

"그건 너무 끼워 맞추기 아냐?"

"아무도 예상 못 했지만. 어쨌든 놈이 쯔깡을 죽인 건 사실이다. 근데 또 그만한 변수가 그리 흔한 건 아니란 말이지."

"하아…. 웨이치! 그 새끼 얘기 좀 해봐."

블링크 검사. 그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전부 얘기했잖아. 쯔깡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고… 그놈이 쓴 것도 화속성 마법이었다고."

"아니 X팔! 그날은 니가 반병신 된 상태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줄 알았지. 쯔깡이 화속성한테 당했다면 누가 믿냐고."

"그래. 녀석은 천쉰이 내뿜는 융열 정도가 아니면 피해를 받지 않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도 안 믿겨. 근데 그땐 그냥 그 병신이 방심했겠거니 생각했어. 애송이로 보였지. 이미 탈진한 상태이기도 했고."

"젠장. 미치고 팔딱 뛰겠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니엔젠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기다릴 만큼 기다린 거 같고. 다 떠들었으면, 이제 그만 철수해라."

거한이 벌떡 일어났다.

"진짜로 하는 소리야? 그냥 이대로 빠지라고?"

"메인 달성. 옵션 실패. 돈은 벌써 받았고. 복수는 내가 한다. 됐지?"

"너 혼자 한국에 남겠다고?"

"...."

"얘기하다 말고 뭔 생각해?"

대답은 붉은 머리가 대신했다.

"뭐 어때. 니엔젠은 얼굴도 안 팔렸고, 원래 한국인인데. 우리만 아니면 나돌아다녀도 문제 될 게 없지."

"그렇긴 하겠지만. ...니엔젠?"

"...."

조금 전부터 그의 행동이 이상했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

그러다 대뜸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뭔 소리야?"

"꼬리가 잡혔다."

"뭐? 포위된 거야? 그럼 뚫어야지!"

니엔젠이 고개를 저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도망쳐라."

그의 왼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부신 빛무리를 내뿜었다.

"아니 잠깐! 갑자기 그게 무슨…."

팟!

니엔젠의 모습이 사라진 그 순간.

쿠르르릉! 콰가가가가각!

굉음과 함께 천장이 뜯겨나갔다.

#31화, 무시할 수 있는 오류

"미친…!"

거한, 홍타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것은 조금 전 니엔젠의 경고를 들은 다른 둘도 마찬가지였다.

지상 5층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던 1남 2녀가 벌떡 일어났다. 전부 큰 부상의 흔적이 역력한, 포션에 취한 이들이었다.

홍타오가 말했다.

"X 됐으니까 빨리 정신 차려라."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곤 깜짝 놀랐다.

그중 앳된 얼굴의 여인이 소리쳤다.

"무, 뭐야! 무슨 일이야?"

분명 지하층에 있었건만,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뿐이었다.

"설명할 시간 없어. 내가 총을 쏘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붉은 머리의 사내, 즈쉬앤이 빠르게 말했다.

그는 무조건 도망치라는 니엔젠의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신들의 리더는 늘 확실한 길만을 선택해왔다.

"니엔젠은 어디 갔어?"

즈쉬앤은 대꾸도 없이 라이플을 들어 올렸다.

'원장이란 여자 이상이다.'

그는 사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멀쩡한 건물을 원하는 만큼 잡아 뜯는 것은.

무너트리고, 그 잔해를 들어 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지라는 걸.

마침내.

지상으로 그 일을 해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탕!

즈쉬앤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라이플에 응축된 마력이 총신 내부를 타고 돌며 마탄과 함께 뿜어졌다.

파바밧!

동시에 다섯 개의 기척이 양방 오선으로 뻗어 나갔다. 그 자신도 강력한 반동에 몸을 실어 괴물 사내로부터 멀어졌다.

그가 아직 체공 중일 때.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사수의 눈은,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뒤로 한 걸음.

조금 욕심부리면 3초 정도만 벌길 원했다.

무려 니게리움이 들어간 마탄에,

자신의 마력 7할을 담아냈으니.

한데 저 괴물 같은 놈은 그저 파리 쫓듯 쳐내버렸다.

쿠르르르르르!

사내의 머리 위를 중심으로 먹 같은 어둠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하늘을 가린 검은 천장은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을 앞서나가더니, 그들 전부를 뒤덮는 거대한 돔으로 뒤바뀌었다.

다음은 빛 한 점 없는 암흑이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컥!"

갑자기 마력이 통제를 벗어나 들끓었다.

기혈이 엉망이라, 사수의 눈도 무소용이었다.

쿵.

그리고 등에 바닥이 닿았다.

'...누가 들려준 얘기면 절대로 안 믿었겠네.'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게 라이플 반동에 몸을 실은 뒤, 처음 땅에 닿기까지 벌어진 일이었다.

"하나는 먼저 새 나갔군."

"...!"

즈쉬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는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임 상사. 그것 좀 가져와 보게."

"어디 계신지 안 보입니다."

"아 그렇지 참."

전조도 없이 어둠이 걷혔다.

'윽.'

눈이 빛에 적응했을 때,

즈쉬앤은 동료들을 보았다.

"...."

"...!"

흩어졌던 동료 전원의 시선이 한데 얽혔다.

'어떻게...'

그곳은 자신이 방아쇠를 당긴 그 자리.

이제 구덩이나 다름없는 지하 공간이었다.

군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홀 중앙에 서 있다.

저항도 포기하게 만든 상대.

즈쉬앤이 떠듬떠듬 그의 명찰을 읽었다.

'한… 상, 철. 한국 군부에 핵무기가 있었군.'

까무잡잡한 단신의 부하가 그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펄럭!

한상철은 주머니를 털어 안에 든 것을 흩뿌렸다.

'풀?'

거무튀튀한 잔디 이파리가 돌개바람을 탄 듯 허공을 떠돌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웨이치에게 날아갔다.

웨이치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한상철… 한…성준.'

즈쉬앤은 풀에 묻은 것이 아마도 한성준과 마주쳤을 때 흘린 웨이치의 '피'일 거라 직감했다.

팟!

본능이었으리라. 그가 블링크를 시도한 것은.

한상철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크헉!"

웨이치는 목표한 지점조차 당도하지 못했다.

퍼석!

한성철의 손아귀에서 웨이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즈쉬앤은, 아니 그들은, 동료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말 할 줄 아는 놈이 누구지?"

한상철이 부하가 건넨 손수건에 손을 닦으며 물었다.

"...."

"...."

"조선족이 있다 들었는데?"

"...."

"...전부 죽었다. 나만 조금 한다."

결국, 즈쉬앤이 입을 열었다.

"사주한 놈이 누구냐."

"모른다."

"...그래. 그렇겠지."

너무 쉽게 믿어주니 오히려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정, 정말 모른다. 여기 없는 하나가 리더고! 매번 지시만 받았다!"

"...."

한상철이 손을 내밀었다.

즈쉬앤은 얼떨결에 라이플을 내밀었다.

그가 라이플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멋을 아는 놈이로군. ...탄."

즈쉬앤이 탄띠를 벗어 두 손에 받쳐 들었다.

철컥.

한상철은 장전한 라이플을 그대로 돌려줬다.

원래 자신의 것이건만, 손끝이 덜덜 떨렸다.

"전부 다 죽어 마땅하지만. 너희들을 쓸데가 떠올랐다. …한데 딱, 넷만 필요하군."

"...!"

"가장 악랄한 놈을 죽여라. 아무래도 같이 생활해봤으니 잘 알겠지."

그의 시선에 따라 동료들이 눈이 흔들렸다.

알아듣지 못해도 상황은 짐작했으리라.

덜그럭.

즈쉬앤은 결국 라이플을 떨어트렸다.

"모, 못하겠다."

"넌 그 라이플로 내 병사들을 쐈다. 내가 고르면 아마 네놈이 되지 싶은데."

눈앞에 있는 사내는 반드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터.

어차피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내가 한다."

즈쉬앤이 다시 라이플을 집어 총구를 제 턱에 겨눴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방아쇠에 닿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떨림이 멎는 순간, 한상철의 발이 움직였다.

퍽! 탕!

즈쉬앤이 뒤로 넘어지며, 탄환이 빗나갔다.

한상철이 입을 열었다.

"챙겨라."

지상에 대기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마취총을 발사했다.

퓩! 푸슉! 퓩! 퓩! 퓩!

테러조직원, 다섯의 몸에 금속제 주사기가 틀어박혔다. 주사기는 푸른빛의 약물을 빠르게 비워냈다.

모두 5초를 버티지 못하고 늘어졌다.

"이들을 정말 쓰실 생각이십니까?"

임 상사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저놈들 입장에선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궂은일이 많지 않은가. 보아하니 조금 기다리면 그 리더란 놈도 접촉해 올 거 같고."

"바탕이 더러운 놈들입니다. 뭐든 맡기기엔…."

"말은. 다 거기서 거긴 거다. 수를 두는 놈이 문제지."

"알겠습니다."

***

금요일 이른 아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아아. 원장이다. 너희들을 볼 낯이 없어 방송으로 대신하니 이해하길 바란다. 동기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남아 있던 잠과 짜증이 달아났다.

'...계속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네.'

직무상 책임이 그녀에게 있는 건 맞지만, 그녀가 느끼는 죄책감은 그 색이 달랐다.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나는 스피커의 침묵에 집중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두려움, 무력감, 슬픔, 분노…. 하지만 무엇을 느꼈든 그것이 만성이 되어선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야 할 것은 오직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또 그 안에서 맡은 역할뿐이다.

-앞으로 초인 테러집단에 맞설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이다.

-아파도. 우리는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러니 스스로 해결할 힘을 기를 수밖에.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길어지면 또 지루하니까. 요지는 전달됐을 거라 생각하고 줄이겠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여러분과는 상관없을 연휴지만.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학원은 학원대로 교육환경을 정비하여 생도들을 맞을 예정이다.

-현 시간부로 정신력 강화훈련을 종료한다. 집에 다녀올 사람은 다녀와도 좋다.

-추석 잘들 보내라. 이상.

삐이이이이이익-!

-으악! 이거 왜 이래.

-아니 그걸 왜 만져요! 맨 오른쪽 거라니까.

뚝.

정신이 하나도 없네.

함성아의 방송도 방송이고, 자는 새 와 있는 시스템 메시지까지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나저나 추석이었구나.

포털사이트만 들어가도 진작 알았겠지만, 필터링 된 기사만 봐왔으니 알 턱이 없다.

[이벤트 '거사'의 시작요건이 갱신되었습니다. (1/5)]

...꼬박꼬박 알려주는 건 좋은데,

가끔 무슨 의민지 전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보고서 알림도?'

[보고서]

- 무시할 수 있는 오류 : 1건

아. 무시해도 되는 거면 뭐...

──────────

[무시할 수 있는 오류]

※ 이벤트 '거사'의 시작 요건이 예정보다 빠르게 충족되고 있습니다.

- 계속 이대로 진행될 경우, 다음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인물 '한상철'의 계획 준비단계 상승.

└영향: 한상철의 기반이 더욱 공고해집니다.

*인물 '한상철'의 활동력 상승.

└영향: 한상철의 종합능력 10% 증가.

* 「한성준의 죽음이 가장될 만한 사건」의 생성 제한시간 감소.

──────────

'미친 시스템아. 이게 무시해도 되는 내용이냐?'

저 이벤트 '거사'가 설마하니 내가 아는 그 '거사(擧事)'였을 줄이야.

국가 위기 상황이라는 타이밍이 꼭 필요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결국엔 가진 힘이 문제겠지.'

이제 1/5이 완료라면 다른 요건을 지연시킴으로 원래와 같게 할 순 있겠지만, 나는 그 요건이란 게 뭔지도 모른다.

"...."

아니 근데.

요 며칠 드는 생각으로는.

오히려 잘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정말 신성이 나를 노린다면, 내가 설 곳은 정해진 셈.

게다가.

'애초에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원수 포지션이 될 수많은 네임드들이지 아버지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는 게 맞네.'

'잠적'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젠데.

요건이 4개나 남았으니 그것도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고.

그렇게 정리하고 침대를 벗어났다.

고대하던 외출이 아닌가.

나는 구석에 몰아 둔 캠핑장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

녹색 창에 '마경'을 검색하면 국내 괴수 생태가 형성된 지역을 쉽게 알 수 있다.

공식 행정용어는 아니지만, 지도 앱에서 따로 표시설정이 있을 정도.

아무래도 부동산 시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기 때문이겠지.

'여기가… 가까운 곳 중에는 제일 넓고 오래됐네.'

나는 이번 수련 답사지역으로 치악산 일대를 선택했다. 14년 전 국립공원의 타이틀을 잃고, 괴수들의 온상지로 탈바꿈된 곳이다.

'집에 얼굴 비추고 영동고속도로 타면 한 2시쯤 되려나?'

~지이잉, 지이잉.

배낭을 짊어지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번혼데.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한동일보의 서윤서 기잡니다. 이번 테러 사건과 관련해서 인터뷰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되거든요. 제가 지금….

"제 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아 그게, 조카도 거기 생도라서 연락망을….

"조카 이름이 어떻게 돼요?"

어떤 놈인지 한번 제대로 지랄을 해줘야겠다.

-홍…, 아니 저도 잘. 하핫! 사, 사실은 조카 친구의 사촌쯤 되는 녀석이라.

눈치챘네.

지금 1분 1초가 아까운데.

종료 버튼 꾹. 곧바로 차단을 박아 버렸다.

간만에 기숙사 전체에 생기가 돌았다.

복도는 짐 때문에 밀리는 엘리베이터 대기자들로 시끌벅적했다.

"형, 집에 가요?"

막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가영과 마주쳤다.

"가야지. ...근데 왜 다들 정복 차림이냐."

나만 입학식 때 입고 온 사복 차림이었다.

"나갈 거면 형도 갈아입어야 해요. 외출은 무조건 정복이 규정이래요."

그런 규정이 있었나?

"아이 씨. 쪽팔리게… 어차피 바로 나갈 건데 상관없지 않을까?"

"집에 안 가고 남는 애들도 있어서 밑에서 체크 한대요."

"알았다…. 너 뭐 타고 가? 잠깐 기다리면 터미널이나 지하철까지 태워줄게."

"택시 불렀어요."

"그래 그럼. 잘 다녀오고."

"네. 먼저 가요."

나는 방으로 돌아와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웜 그레이가 배색된 백색의 전투복.

상상이 가는가?

"...X발. 이건 뭐 아이돌도 아니고."

#32화, 인재

주차장을 걷다가 어머니께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또 잠깐 들렸다가 어딜 간다고 하면 등짝을 얻어맞을지도.'

욕을 미리 좀 들어두겠다는 생각에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아들! 이제야 전화를 주시네? 목소리 잊어버리겠어.

-오빠야? 나 바꿔줘 봐.

-가만히 있어 봐. 이제 받았다!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이래저래 적응 좀 하느라고요."

-그래그래. 정신없었겠지. 니 아빠가 보고 와서 다행이지. 엄마 그날, 뉴스 속보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니. 그전에도 몇 번이나 전화 좀 해보자는 걸 니 아빠가 애 집중하는 데 방해된다고~ 인상 팍 쓰고 말려서. 난 매일 전화통 붙잡고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거야. 얘가 전화를 할 때가 됐는데 됐는데 하다가 무슨 일 있나 애가 타고. 막상 또 전화해보려니까 엄청 힘든 훈련 한다는 데에~ 내가 전화해서 단잠을 깨우면 어쩌나 싶고. 근데 너이노무 자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주 동안 어떻게 엄마 생각을 한 번을 안 할 수가 있어! 안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들 새끼 키워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더니. 우리 아들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엄마 너무 서운하다 서운해.

-엄마 무슨 랩 해? 그만하고 빨리 빼! 아 나 좀 바꿔주라고오!

딕션이 좋긴 하시네.

나는 동생이 만들어준 틈으로 얼른 끼어들었다.

"앞으로 자주 연락할게요. 그리고 저 지금 출발하니까 집에서 얘기해요."

-아 정말? 나왔어? 어떡하니~ 엄마 방금 성윤이 데리고 외가에 왔는데. 내일 저녁에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오늘은 니 아빠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 그래.

"아... 그래요? 하하… 내일은 제가 없을 거 같은데…."

-뭐? 왜애~, 꼴랑 하루 내보내 준 거야? 무슨 놈의 학교가 그러니? 남의 애 데리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아뇨. 그게 아니라 할 일이… 아니,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도 이제 매주 나올 수…."

-선약? 너 지금 선약이라고 했니? 선야아악?"

"어이쿠. 밧때리가."

띠리링.

"...."

애초에 욕으로 때울 수 있는 게 아니었지.

어쩔 수 없다.

당장의 자식 노릇보다, 모두 살아서 '등장'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니까.

"어?"

"안녕하세요. 한성준 씨죠?"

내 차 운전석 문 앞에, 웬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아까 전화 드렸던 서윤서 기자예요."

…어째 출발하기 전에 힘을 다 빼는 거 같네.

면전이라 그냥 무시하기도 뭐했다.

"전화하기 전부터 무작정 와있던 거네요?"

"작정하고 왔죠. 오케이 하시면 바로 뵙고, 거절하시면 한 번 더 매달리고. 잠깐이면 된댔잖아요."

"이게 내 차인 줄은 또 어떻게 아시고."

그녀는 조금 비켜서 내 차 앞 유리를 가리켰다.

'주차증 전화번호를 일일이 확인했다고?'

차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주차장에는 여전히 100대가 넘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노력이 가상하지 않아요?"

가상하다.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할 뻔했다.

"가성비가 별로 같은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얘기는 대단치가 않아서."

"시간은 내주신다는 거네요?"

"차 가져왔어요?"

"아뇨. 이럴 줄 알고 안 가져왔죠."

서윤서는 후다닥 반대편으로 돌아가 조수석 옆에 섰다.

***

서윤서 기자는,

딱딱한 차림새와는 달리 여유가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열정이 넘치지만,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고,

끈질김에도 구차하지 않았다.

직종을 떠나서 진짜 일 잘하는 사람의 표본 같달까.

"지금 입으신 게 청송 유니폼인 거죠?"

"네. 정복이요."

"와… 뭔가 아이돌 같아요."

칭찬 센스는 형편없었다.

"저 쫌 세게 밟을 거라 시간이 많지 않으실 거예요."

"아…, 넵. 뭐 질문도 많지 않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테러범 한 명을 직접 처치하셨죠?"

'...!'

외부에 밝히지 않은 사실인데?

나와 강선호에 대한 것은 오직, '피해 생도 중 생존한 2인'이란 보도뿐이다.

그게 학원의 방침이었고, 따라서 내가 '쯔깡'을 죽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교관들과 황 과장, 그리고 강선호뿐이었다.

"어디서 무슨 소릴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요. 떠보기식 질문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국정원 대테러보안국에서 정보가 샜을 린 없고.

강선호가 함부로 떠벌릴 놈도 아니었다.

"떠보기라뇨. 열심히 조사한 내용인데."

이 여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잘못된 조사네요. 본인도 확신을 못 하시니까."

"출처가 궁금해서 저를 자극하는 거 같은데, 안 통해요."

"네. 그래요. 내가 처치했어요."

"어라? 생각보다 더 쿨하시네."

"…라는 대답이 나왔다고 칩시다."

"아 뭐야."

"그리고 다음 질문이 '어떻게 죽였는가'였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하. 너무 개성 없는데. 그러면요?"

"기자님 혹시 녹음기 켰어요?"

"아뇨."

"그럼 형식도 중요하지 않은데, 본인이 확신이 있었다면 첫 질문으로 바로 어떻게 죽였는지 물어봤겠죠."

"처음엔 당연히 대답을 회피할 테니까요. 제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공식적으로 숨긴 사실을 바로 대답해 줄 거라 믿었겠어요?"

"떠보기가 아니고 노크였다?"

"그렇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왜 굳이 '한성준 씨'를 찾아왔을지."

"...?"

아.

공개된 정보만 봤을 때, 나와 강선호는 차별점이 없다. 오히려….

"강선호 씨는 얼굴에 흉이 남았다던데."

흥미를 끄는 쪽은 강선호다.

"게다가 수석 입학이라죠?"

"...그만 해요. 알았으니까."

서윤서가 나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있지 않았다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란 얘기다.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아뇨. 그만합시다."

"또! 왜요!"

깜짝 놀랐네….

"기자님이 원하는 대답은 제가 허락한 범위가 아니에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숨긴 사실을 내가 쉽게 대답해주겠냐고. 기자님이 뭘 알고 계신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요? 내가 왜요. 무슨 득이 있다고?"

일부러 조금 깐족댔지만,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좋아요. 내 욕심이었네요. 그럼 우리 거래합시다."

그녀는 브리프케이스에서 사진 몇 장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운전 중이시니까… 제가 한 장씩 보여드릴게요. 보시고 아는 얼굴이 있으면…."

끼이익!

"으아아악!"

너무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

"아, 미안해요."

"...반응을 화끈하게 해주시네. 뒤에 차 와요."

나는 차를 갓길에 대고 그녀에게서 사진을 받아들었다.

"...."

사진은 전부 4장.

그중 내가 처음 본 사진은 가영에게 죽은 테러범 중 하나였다.

또 다른 한 장은 내가 죽인 쯔깡,

다른 두 장은 나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 여자 대체 뭐야. FBI야?'

황 과장에게 듣기로, 어디에도 테러범들의 신원을 파악할 만큼 선명한 사진은 남지 않았다고 했었다.

시체로 남은 범인들이야 얼굴확인이 가능했지만, 쯔깡 같은 경우는 아주 잿더미가 되지 않았나.

한데 서윤서가 건넨 사진은 아주 선명한 증명사진이었다.

"...그러니까. 서 기자님은 테러범들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고. 그놈들이 맞는지 나를 통해 확인하고 싶은 거네요?"

"맞다는 거죠? 이미 티를 내주시긴 했지만."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게 왜 거래예요?"

"내가 아는 정보를 공개하면 테러범 잡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불안하잖아요. 혹시 그놈들이 복수라도 하지 않을까."

"아.... 전혀 아닌데."

수사에는 도움이 될 거다.

나도 얼굴은 모르지만, 두 장의 사진은 아마도 아직 도주 중인 놈들일 테니까.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설령 놈들이 복수를 도모한대도, 그게 도주 중은 아닐 터.

나는 그전에 자위력을 갖출 예정이었다.

"거래할 거리가 못 되네요."

서 기자는 내 반응에 조금 당황한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국은 북한이나 중국의 소행으로 보고 있어요. 초인 양성기관이란 건 20년 전으로 치면 핵 개발시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라요."

"제3의 세력일 거란 말입니까?"

"외국의 견제가 아니라 이 나라 내부의 세력다툼으로 보고 있어요. 증거도 꽤 가지고 있구요. 그러니 애국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걸 미친 정보력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우연히 들어맞은 망상으로 봐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케이. 거래합시다."

언젠가 그녀가 필요할 날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니지. 거래는 정 없고. 우리 깐부하죠."

"…뭐지? 이 갑작스러운 스탠스 변화는."

"도와달라면서요. 서로 돕고 살자고요. 아, 이거 두 장은 제가 챙깁니다? 공개는 안 해요. 언젠가 접근할지도 몰라서."

나는 내가 모르는 얼굴의 사진 2장을 가슴 앞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하. 좋아요. 좋은데 왜 사기당하는 기분이 들까요."

"제가 애국청년처럼은 안 생겼나 보죠."

남은 2장의 사진은 쯔깡이 보이게 해서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차를 다시 출발했다.

"그놈이에요. 제가 죽인 놈. 변이계. 나무처럼 변하는 능력자였죠. 뇌기로 죽여서 잿더미로 변했고요."

"얼굴은 우리 둘만 아는 거네요. 아래 사진도 돌려주셨다는 건 이미 아는 얼굴이란 거겠죠?"

뜨끔했다. 저것도 챙길걸.

"멀리서 보기만 했어요."

그 순간 떠오른 메시지.

[인물 '서윤서'와 관계를 맺음. - DP 획득 15]

게임이 워낙 방대하니 내가 모르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비(非) 초인이 무려 '인물'이라.'

내가 언젠가 등장의 범위를 넘어섰듯,

모두가 인물로 분류되진 않는다.

그만한 비중 있는 인재라는 얘기.

결국, 내가 먼저라도 붙잡았어야 했던 셈이다.

"왜 혼자 웃어요?"

…그걸 봤네.

"유능한 기자님을 알게 되어서요."

"찝찝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세요."

"더 궁금한 건 없어요?"

"깐부하자면서요. 따로 시간 잡아요. 오늘은 왠지 바쁘신 거 같아서 괜히 불편했는데."

"사회부 기자님이신 거죠?"

"저는 올라운더예요."

"…그러시군요."

"안 믿으시네."

"증명할 만한 정보를 하나 줘보시든지."

서윤서는 픽 웃으며 내가 한번 속아준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달 중으로 초상자원 관련 민간사업자등록이 가능해질 거예요."

역시.

그녀는 물건이 맞다.

이제 국내기업도 부산물을 사고팔 수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공급자- 즉 용병의 활동이 합법화된다는 말이었다.

"잘됐네요. 진작 그렇게 돼야 했는데."

"별로 안 놀라시네. 아직 어려서 이런 쪽은 관심이 없나? 주식 안 해요?"

"안 하긴 하는데, 증명은 됐네요. 그러고 보니 서 기자님 조카가 제 동기면 저한테도 이모님뻘이네요?"

"하! 어리다고 한마디 했다고 바로 이렇게 몰아가시나. 저 아직 이십 대예요. 제가 늦둥이라 그래요."

말속에 답이 있었다.

스물아홉이구나.

"어디서 세워드리는 게 좋을까요. 제가 동부간선도로 탈 거라서."

"길 건널 수 있는 곳이면 돼요."

"서울로 가는 거 아니에요?"

"다시 청송으로 가야 해요."

"예?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 근데 거긴 왜 또 가요?"

"차가 거기 있거든요."

"…아니, 아까는 차 안 가져왔다고…."

"그래서 유익한 시간 보냈잖아요."

"정말 훌륭한 기자님이시네요."

마침 횡단보도가 보여 바로 인도 쪽에 차를 댔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잠시만요. 명함 드릴게요."

"명함은 아껴두세요. 아까 전화한 그 번호 맞죠?"

"네."

"저장할게요."

최근에 한 통화라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아… 그건 어디서 하더라?

문을 여는 서윤서를 다시 붙잡았다.

"그, 혹시. 차단 푸는 법 알아요?"

"...."

"아, 아니다. 제가 집에 가서 할게요."

"줘봐요."

서윤서가 손목을 채갔다.

그리고 워치 화면을 몇 번 터치했다.

"풀었어요. 예상했어도 기분 더럽네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그런 말도 있잖아요."

#33화, 아버지

'집에 계셨네.'

현관에 아버지의 사제 전투화만 덩그러니 벗어져 있었다.

기척이 들렸는지 곧 아버지가 복도를 내다보셨다.

"웬일이냐."

"명절이잖아요."

"니 엄마는 성윤이 데리고 친정 갔다."

"통화했어요. 뭐 하세요?"

아버지는 명절선물처럼 보이는 상자를 들고 지하로 내려가셨다.

"그걸 왜 뜯지도 않고 창고에 넣어요."

"명절 끝나면 사람 시켜서 정리할 거다."

"명절선물 정리하는데 무슨 사람을…. 헉! 이게 다 뭐예요?"

나는 창고로 들어서자마자 헛바람을 들이켰다.

창고를 가득 채운 선물더미.

무슨 광장에 있는 크리스마스 조형물 같았다.

"니가 할 테냐?"

"...저 바빠요."

아버지는 픽 웃으며 창고를 나가셨다.

근데 썩는 물건 없으려나?

창고 불을 켜고, 개중 작은 상자의 보자기를 벗겨 봤다.

'…누군지 참 개념 없네.'

주고도 욕먹는다고 명절선물로 비타600은 진짜 아니지 않….

툭.

놀라서 떨궈버린 상자 밖으로, 싯누런 돈다발이 쏟아져 나왔다.

'미친.'

설마 이게 다 이런 식인 건가?

또 다른 상자를 벗겨냈다.

'석함?'

돌로 만든 함 안에는,

물컹.

'뭐야 이거.'

실리콘으로 밀봉된 묵직한 덩어리가 놓여있었다.

"마석이구나."

어느새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창조적 시선〉이 그 뜻을 알아챘다.

마석은 괴수나 수목, 광물 내부에서 응축된 마력의 결석(結石)이다.

각성자와 접촉하면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점차 녹아 없어지는데, 유통 과정 중 여러 사람 손을 타며 손실이 있을 수 있기에 밀봉이 권장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만한 패키지를 갖추는 건….

'상급 이상의 마석.'

아버지가 펜 꼽은 장부 하나를 건네주셨다.

"뜯은 건 보낸 사람 이름이랑 같이 잘 적어놔라. 현금은 다 돌려보낼 거니까 다시 담아두고."

"아버지. 이거 다 제가 할게요."

"바쁘다며."

"며칠만 놔두세요."

"그러든지."

그래. 이게 풍성한 한가위지.

아버지 눈치를 보아하니 저 상급 마석은 내 차지가 될듯했다.

당장이라도 전부 까보고 싶었지만, 들어온 선물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나저나. 괜찮으세요?"

"뭐가 말이냐."

"책임소재 같은 거요."

"그쪽 사단장 선에서 마무리됐다. 듣자 하니 함 원장도 사임한다고 하고."

"예? 그게 어디 원장님 잘못인가요?"

"본인 선택이라더라. 청송엔 남을 거다. 하여튼 덕분에 책임을 나눠진 그림이 나와줬지."

...그렇게 됐구나.

내가 알고 있던 한국엽술학교의 장이 달랐던 것은 이런 이유였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뭐를요?"

"진짜로 내가 걱정돼서 물어본 게 아니지 않느냐."

귀신이다.

"걱정되죠. 그런 말이 어딨어요?"

물론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셨다.

"시간 끌어봐야 말 꺼내기만 더 힘들어지는 게다."

이 양반과의 대화는,

언제나 정면돌파가 답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부탁이 있는 건 맞는데요. 또 걱정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니까요?"

다만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부탁이었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

"...알았으니 말해라."

"청송에 들어간 교보재생물 중 홍안늑대가 2마리 있어요."

"그게 왜."

"걔들 좀 회수해주세요. 다른 개체로 바꾸든지 아니면…."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럴 줄 알았다.

거 이유라도 좀 들어 보시지.

곧 귓방망이가 날아올 분위기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박입니다!"

"뭐?"

"제가 쓸데없이 이런 부탁드리겠어요?"

아버지가 기숙사에 찾아왔던 날.

나는 교보재 생물을 수송한 부대도 아버지 예하 부대였음을 깨달았다.

그 뒤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보다 깔끔한 방법이 없었다.

"홍안늑대를 길들일 방법이 있다면요?"

어차피 2, 3년 뒤면 누구나 알게 되는 정보다.

"계속 헛소리할 거면 방에 들어가라."

아버지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리모컨을 집어 드셨다.

이렇게 신뢰가 없었단 말인가.

"벌써 길들였다면요."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셨다.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저 특별한 경우이거나, 일시적인 것일지 모르지. 애당초 그놈들은 우리에 갇힌 상태 아니냐? 살려고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엔 들으라는 듯,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 진짜 답답하시네. 공부 좀 하셔야겠어요."

"뭐 인마?"

"묶어놓고 칼로 찔러도!"

"...!"

"기가 안 꺾이는 괴숩니다. 홍안늑대는요. 명색이 대 괴수 작전, 최다 지역의 군단장님이신데 그 정도는 아셔야죠."

"...."

"…확인이라도 해보시라고요."

"...."

넘어오나?

"제 말이 사실이면 아버지가 군 최초. 아니 세계 최초로 괴수군견을 도입한 장군이 되는 겁니다."

"…두 놈이 다 길들여졌다고?"

넘어왔다.

"하나요."

"아까 두 마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없으면 어떤 놈인지 모르잖아요. 물론 다른 녀석도 길들일 순 있어요. 비용이 발생해서 그렇지."

"일단 알았다."

믿어보기로 하니 갑자기 흥미가 돋으신 모양.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신보안. 본부근무대장….

"어. 난데."

-북진!

"11사 당직사령 나한테 전화하라 그래."

-알겠습니다.

빨간 날.

수송 임무로 고생할 장병과 선탑 근무를 떠맡을 간부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