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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

'아 맞다.'

옷을 갈아입다가 가슴 앞주머니에 든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을 갈아입은 바지 주머니로 옮겨 넣은 뒤, 정복을 굴러다니던 쇼핑백에 담아 챙겼다.

'사진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내 속에 어떤 인정욕구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실실 웃으며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 이거 좀 보세요."

"...?"

"이게 무슨 사진인지 아세요?"

아버지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셨다.

그렇게 본다고 알 턱이….

"테러범 아니냐."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얼굴 안 까진 놈들인데."

"이게 어디서 났지?"

"정보원이 있어요."

아버지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셨다.

"니놈이 뭐라고 정보원이 있어?"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아셨냐구요."

찌익!

아버지는 대답 대신 한 장의 사진을 찢어버렸다.

"아앗! 그걸 왜 찢어요!"

"어쨌든 제법 쓸 만한 놈을 구했구나."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가 남은 한 장의 사진을 내게 돌려주셨다.

"그놈이 리더인 것 같다."

"...!"

그 말은 즉, 아버지는 저들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디지털 무늬라고 하기엔 조금 어색한 모양,

아버지 소매에 남은 거무튀튀한 자국이었다.

"혹시 잡았어요?"

"그놈 빼고."

"…죽였고요?"

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 있다가 전부 제거하고 상황 종료한 것으로 발표 날 게다."

하기야 그게 당연한 거지.

사건 당일, 그리 늦지 않게 현장에 도착한 아버지였다. 그 '기감(氣感)'에 놈들을 완전히 놓쳤다는 쪽이 더 말이 안 됐다.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집에선 군복 좀 벗으시고요. 세탁도 좀 하세요."

"...."

아버지가 상의를 내려다보더니 단추를 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간다고? 점심도 안 먹고?"

"훈련 때문에요. 밥은 가다가 휴게소에서 먹으면 돼요."

"도심은 전력을 시험할 데가 없긴 하지."

역시 이런 쪽은 말이 잘 통한다.

"참, 그리고 동구요."

"동구?"

"아, 늑대요. 다음 주에 저 나올 때까지 잘 좀 부탁드려요.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요."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셨다.

"그럼 연휴 내내 안 들어온다는 말이냐?"

"무리하면 들릴 수야 있는데, 시간 쫓기면 집중이 잘 안 될 거 같아서요."

"니 엄마가 화낼 텐데."

"다음 주에 잘해야죠."

아버지가 현관 앞까지 따라오며 중얼거리셨다.

"하루쯤은 있어도 되겠고만."

...어째 아버지가 붙잡는 느낌이네.

"외가에 같이 가지 그러셨어요."

"뭐?"

"혼자 있기 심심…."

"그럴 리가. 운전 조심해라."

배웅은 거기서 끝이었다.

'단호하시네.'

신발을 신는 동안, 거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오랜만입니다. 짜장면 곱빼기 하나요."

-추석 특선영화 '태극기 휘두르며'를 보내드립니다.

TV 소리도.

***

'다 떠났구나.'

도로를 따라, 가끔 보이는 가든과 주유소들이 죄다 폐건물로 남았다.

멀리 보이는 산림의 경계.

그 기슭을 둘러, 한때는 마을이었을 흔적들이 이계의 식생에 지워져 가고 있었다.

'차는 이쯤 세워놓고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

산 쪽으로 향하는 촌로, 소로 입구마다 전부 바리케이드와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졌다.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우고 내릴 때였다.

삑삐이익!

"아이 씨. 이놈의 소리는 좀 부드럽게 할 수 없나."

『긴급재난문자』

-[원주시청] 흥양교차로 인근 괴수출몰. 흥양리, 수암리 주민들은 신속히 실내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특수재난경계청] 본 문자를 수신하신 초인들은 시민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지역재난상황실(☎ 9119)

애애애애애앵!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사이렌도 울었다.

"뭐야. 가까운 덴가?"

지도 앱에 괴수출몰장소를 검색해보니 차로 6분 거리였다.

'...이 정도면 쌩까긴 그렇지.'

다시 차에 올랐다.

이 나라가 여태 이딴 식으로 버텨온 게 용했다.

지역 초인의 자발적인 협조.

타인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어달란 얘기다.

'말도 안 되는 거지.'

당연히 초인들은 재난문자를 받아도 잘 나서지 않는다. 결국, 진압 작전은 대부분 군부대에 의해 이뤄진다.

전리품 소유권의 인정과 초상자원의 거래.

이 두 가지만 허용했어도 괴수 생태지역은 지금의 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텐데….

예로부터 무엇이 건강에 좋다거나 포상금을 준다고 하면, 씨를 말리던 나라가 아닌가.

한데 사냥은 하지 말고 막아만 달란다.

그러니 이런 지역들이 점점 많아지고 또 넓어졌을 수밖에.

'그나마 다음 달에 풀린다니 다행이지….'

현장이 가까워지자, 드론캐리어의 경광등 불빛과 공중을 날아다니는 드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론캐리어는 재난상황실의 눈 역할을 하는 소방서 차량이다.

'아무도 안 왔네.'

아직 군부대는 도착하지 않은 상황.

도로는 뻥 뚫려 있었고,

주변엔 사람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괴수는…'

크와아아앙!

...저게 아머베어가 맞나?

도로 밖 100미터 부근, 한국서 갑피곰탱이라 불리는 괴수 한 마리가 드론을 올려다보며 포효하고 있었다.

'X나 크네….'

8급 괴수지만, 그것은 통계에 따른 구분일 뿐.

규격 외의 개체도 간혹 있었다.

'저놈도 마석을 품었으려나?'

게임에선 저런 놈들이 정예등급으로 분류되어 다른 개체보다 마석의 드랍률이 훨씬 높았었다.

-괴수출몰지역입니다! 접근 중인 차량은 유턴하십시오! 괴수출몰지역입니다! 경기 5885! 유턴하십시오!

드론캐리어 확성기에서 경고가 흘러나왔다.

도와주러 왔다.

소리치기도 뭐해서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불꽃을 피워올렸다.

바로 잠잠해졌다.

드론캐리어 옆에 차를 세웠다.

"수고 많으십니다."

내리며 눈을 마주친 소방대원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와주--감사--다!"

그는 방탄유리 너머로 감사를 표했다.

드론캐리어 탑승 대원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는 것이 원칙인 듯했다.

서두를 게 없었다.

내가 일찍 도착한 덕에 진짜 '재난'까지 번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장소도 아니고, 괴수가 이동 중인 것도 아니었다. 드론 조종사의 노련한 어그로 끌기도 한몫하고 있었다.

어쨌든.

'드디어!'

챙겨온 포르테늄 단검을 꺼내 들며 첫 실전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때.

부아아아앙!

붉은색 페라리 한 대가 정면에서 미친 속도로 질주해 왔다.

"뭐야?"

-괴수출몰지역입니다! 접근 중인 차량은…. 어어! 이봐요!

페라리는 소방대원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끼이익!

그리고 차를 팽개치듯 멈춰 세웠다.

곧바로 운전석에서 튀어나온 누군가 훌쩍 가드레일을 넘어 아머베어를 향해 달려갔다.

"저런 X발…."

어?

스틸이 예상되는 광경에 같이 튀어 나가던 나는, 상대의 외형을 보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호리호리하고 선이 곱지만,

언뜻 웨어울프와도 같은 반수계.

'누구지?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하지만 생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헤이스트'를 시전하고 다시금 속도를 올리자, 상대도 기척을 느끼곤 내 쪽을 돌아봤다.

움찔. 확장된 동공.

저 새끼 저거… 분명히 움찔했다.

"어이! 당신 나 알지?"

#34화, 경쟁

"어이! 당신 나 알지?"

"...!"

아는 거 맞네.

그렇다는 건 우리 학원생도라는 얘기다.

녀석은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젠장.'

마법의 힘을 더했어도, 일신의 속도로는 반수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첫 실전 상대를 놈에게 빼앗기고 말 터. 그러나….

'꼭 먼저 도착할 필요는 없는 거지.'

나는 단검에 샤프니스를 걸고 아머베어의 머리를 향해 쏘아 보냈다.

쐐애액!

정확한 타점은 눈.

섬세한 조종은 마지막 순간에 이뤄질 것이었다.

파바밧! 챙!

한데 반수계 놈이 재깍 반응했다.

그가 단검의 진로를 가로막듯 이동하더니 몸을 홱 돌려 검면을 쳐냈던 것.

'...저게 뒤통수에 눈깔이 달렸나.'

오냐. 해보자 그래.

나는 이미 노선이 틀어진 단검을 회수하는 한편, 반수계 놈을 향해 '인탱글링 바인스'를 시전했다.

수백 가닥의 칡색 넝쿨이 솟아나 녀석을 옭아 갔다.

촤아아악!

그는 거의 4족 질주를 하듯 상체를 낮추고 발톱으로 넝쿨 아래쪽을 찢어발겼다.

'좀 하네.'

그러나 놈이 맞서지 않는 이상, 나는 계속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는 위치였다.

화르륵!

그의 전방에 '파이어 월'을 피워 올렸다.

'어엇!'

이것은 일종의 스포츠였다.

당연히 상해를 입힐 생각이 없던지라 충분히 거리를 두었건만, 놈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불길로 뛰어들었다.

"야!"

불길이 그의 형상으로 사그라들었다.

'...?'

그것은 마치 일식처럼 보였다.

이미 세를 잃은 불길은, 그저 마력으로 화해 그의 검은 피모로 빨려들었다.

검은 갈기.

속성력을 흡수하는 이리형 반수계라.

'...흑랑(黑狼).'

이제야 생각났다.

그가, 아니 그녀가 누군지.

***

같은 시각.

원주시청 내 위치한 경찰, 소방합동 재난상황실.

푸근한 인상의 중년남성이 황급히 들이닥쳤다.

"시장님 오셨습니까?"

"어. 오 서장! 상황 끝났담서. 어떻게 됐어?"

"예. 외각 퇴거지역 쪽이라 당장 인명피해가 우려되지는 않습니다. 좀 전에 초인 한 명이 도착했고요."

"그래?"

시장은 오 서장의 수행을 받으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젊어 보이는데? 재난문자 나간 지 얼마나 됐지?"

오 서장이 시계를 확인하려 고개를 돌릴 때, 소방위 계급장을 단 대원 하나가 대신 대답했다.

"6분 정도 지났습니다."

"이야~ 그 정도면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든 고민도 안 하고 튀어왔다는 거야. 우리 시에 저런 청년이 있었네."

"아쉽게도 외지인입니다."

오 서장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 뭐 어쨌든 반갑구만. 내, 저 모니터로 초인을 본 게 몇 번 안 되는 거 같은데."

시장이 팔짱을 끼며 청년의 모습에 집중할 때였다.

"어? 차량 한 대가 더 접근합니다!"

모니터 요원 하나가 소리쳤다.

다른 방향의 드론 카메라로 붉은색 스포츠카가 포착됐다.

"저저저! 액셀을 얼마나 밟는 거야? 저거 경고 못 들었어?"

헤드셋 낀 요원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차가 현장에 멈춰 섰다. 그리고 거뭇한 인영 하나가 쏘아져 나왔다.

"뭐, 뭐야? 저거 사람 맞아?"

그때까지 모니터를 주시하던 오 서장이 안심하라는 투로 말했다.

"저쪽도 초인입니다. 반수계라고 육체를 괴수처럼 변형시켜서 힘을 쓰는 부류지요."

"허어, 그래. 들어는 봤네. 아무튼,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저 둘이 아무 탈 없이 버텨주면 좋겠구만."

"예. 둘 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걸 보니, 능력에 자신들이 있는가 봅니다."

상황실에 모처럼 여유가 감돌았다.

오늘은, 드론캐리어에 의존한 채 부대 도착까지 발만 구르던 평소와는 달랐다.

"...어라? 쟤들 지금 뭐 하는 거야?"

"...."

시장의 물음에도 오 서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들끼리 싸우는데요?"

한 요원이 직관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어이쿠! 저놈 새끼가 위험하게!"

불길이 치솟고 반수계 초인이 그 안으로 뛰어드는 장면에 상황실 전체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아니 쟤들 설마….'

다행히 불길이 바로 사그라들며 다치진 않은 듯했다.

"아니! 괴수 앞에 두고 왜 저 지랄들인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오 서장은 그 설마가 맞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쭉 괴수를 향해가는 거 보면은… 서로 내가 잡겠다…. 뭐 그런 거 같습니다."

"뭐어? 괴수가 장난이야?! 합심을 해야지, 합심을! 저러다가 큰코다친다고. 저… 봐! 봤다. 괴수가 봤어!"

줄곧 드론을 쫓던 괴수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인간들을 발견했다.

놈은 거창한 포효 후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상황실 사람들이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여전히 반수계 초인이 마법계 초인보다 한발 앞서는 중이었다.

마침내 초인 둘과 괴수가 한 화면에 잡혔다.

"엄청나군…."

거대한 괴수와 비교하니 초인들은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수계 초인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맹렬하게 괴수의 품을 파고들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맞부딪혔다.

격돌지점의 충격파가 흙먼지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다.

"...!"

"아…!"

잠시 후.

뿌연 먼지와 함께 그들의 우려도 깨끗이 날아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찟한 괴수의 앞발공격을, 반수계 초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에서 맞받아치고 있었다.

실로, 피가 끓는 웅장한 장면이었다.

"저거 몇 번이야. 좀 가까이 붙이든지, 줌을 더 땡겨보라고 해봐."

하지만 얼마 안 돼서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치고받는 것은 분명했지만, 양쪽의 공격 모두 서로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 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지? 저거 그거지?"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예…."

괴수의 거체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막이 둘러쳐 있었다.

괴수는 안에서, 반수계 초인은 밖에서 그 막을 두드려대고 있었던 것.

"내 살다 살다… 별 장면을 다 보네."

상황실 안의 사람들은 시장의 말에 공감했다.

마법계 초인은 여유롭게 서서 쉴드가 깨질듯하면 새로이 덧씌우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허어! 저러면 결국 마법 쓰는 녀석이 이긴 건가?"

오 서장이 고개를 저었다.

"본인도 괴수를 공격하려면 보호막을 거둬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요."

"엉? 뭔 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저런단 말이야?"

"네. 마법이란 게 대단해 보여도 다 법칙이 있습니다. 저건 그냥 깽판 놓는 거예요. 내가 아니면 너도 안 된다…. 그런 심보죠."

"허허, 징한 놈."

결국, 반수계 초인도 화가 났던지 쉴드 타격을 멈추고 돌아서 항의하는 모습이었다.

"저 친구도 뚜껑이 열린 거 같은데? 저러다 둘이 진짜로 싸우는 건 아니겠지?"

시장의 걱정스러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수계 초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마법계 초인의 시선은 계속 괴수를 향해있었다.

"어어! 싸우려는 거 같습니다!"

참다못한 반수계 초인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펑!

"...?"

"...!"

쉴드의 내벽이 빨갛게 물들었다.

***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쉴드의 마력을 흩어버리자, 내부에 맺혀있던 핏물과 살점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안팎에서 두드리는 쉴드를 유지한다는 것은 단지 두 배의 품만 드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피날레를 장식할 '블래스트 밤'을 준비하느라 아찔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Cerote!"

녀석이 화가 꽤 많이 난 모양.

아까부터 알아듣지 못할 말을 계속 씨불였다.

물론 욕설이라는 건 느낌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게라도 화를 풀라고 계속 모른 척해줬지만, 하나는 확실히 해줘야겠다.

"내가 먼저 도착했거든. 엄밀히 방해는 니가 시작했고. 나보고 너무했다기엔 너도 만만치 않게 고집을 부린 거 같은데."

"...."

...그렇지.

지가 양심이 있으면 더 할 말이 있을 리가.

그때 도로 쪽에서 차량소음이 들려왔다.

소형전술 차량 2대와 두 돈 반 트럭 4대가 줄지어 접근하고 있었다.

흑랑이 그들을 돌아보더니 초지를 걸어 나갔다.

'시간이 없네.'

나는 힐끗 드론의 위치를 확인한 뒤, 마력을 흘려 다짐육이 되어버린 아머베어의 흔적을 더듬었다.

철퍽!

곧 뒷짐 진 손아귀로 달걀 크기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축축한 이물질이 그대로 딸려왔지만, 일단 주머니로 욱여넣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도로 쪽으로 걸었다.

'...?'

앞서가던 흑랑에게서 뭔가가 툭 떨어져나왔다.

그녀가 버린 건지 흘린 건지 몰라, 그것을 지나칠 때 집어 들었다.

스마트워치였다.

'아….'

그리고 끊어진 가죽끈.

목에 걸었던 가죽끈이 불에 그을리면서 끊어진 듯했다.

많은 변이계와 반수계 생도들은 워치를 이런 식으로 착용한다.

당연히 육체의 변형 때문인데,

신체 사이즈나 특성이 드라마틱하게 변형되는 변이계와는 달리 반수계의 변신은 원래 육체의 비율을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장신구 착용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야!"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쯧. 지 물건 챙겨주는 줄도 모르고.

"아이비! 너 워치 떨궜다고."

"...!"

화들짝 놀라는 거 보소.

뭐야. 설마 내가 아직도 자기를 못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 어떻게 알았지?"

정말이네.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오다가다 봤으니까 알지. 너도 내 얼굴 알았잖아."

"나는 아카데미에서 보인 적 없다. 지금 모습."

"아... 그랬나?"

젠장. 알아보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 게임상의 이미지였구나.'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

"그냥 알겠던데. 그으, 목소리 때문인가?"

아 몰라. 대충 둘러대도 어쩔 거야.

"...방금 전까지 스빼니쉬만 했는데."

"아무튼, 이거나 받아."

나는 얼른 워치를 건네주고 그녀를 지나쳐 먼저 걸어갔다.

[인물 '아이비.M'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45]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한다.

함께하는 서브 퀘스트가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중심 스토리에서는 늘 벗어나 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뮤니티에서 확장팩 스토리의 열쇠가 될 거라는 추측도 난무했었다.

"저기. 계속 생각해도 이상하다."

뒤에서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거참 끈질기네.

"뭐가 그렇게 이상… 하다고…."

어느새 변신을 풀고 있는 모습이라 조금 놀랐다.

정체도 들킨 마당에 계속 변신을 유지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검은 머리의 히스패닉계 미녀.

피부색을 보면 백인 피도 좀 섞인 것 같다.

...사실 외국인의 외모를 그 이상 표현할 줄 모르겠다.

"어쨌든 소문에 반수계라는 건 들었으니까. 마력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떻게 알아봤든 그게 그렇게 중요해?"

"...알았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 있지?"

"너랑 같은 이유겠지."

여기서 마주친 건 우연도 아니다.

나랑 비슷한 짓을 하려는 생도도 하나쯤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뭐, 뭘 안다고."

"왜 몰라. 한국에 연고자도 없는 애가 괴수생태지역 근처를 어슬렁거리는데 뻔한 거 아니냐?"

"...."

"거 참. 어차피 공범인데 숨길 거 있냐고."

대답은 듣지 못했다.

도로 위로 올라오자, 출동부대 간부로 보이는 인물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중위였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냥 지나는 길이라."

"그럼 더 감사하죠. 보통 상황 10번 뜨면 한두 분 마주칩니다. 아, 한 분은 외국 분이시군요. 혹시 우리말 하십니까?"

"...."

아이비는 대꾸하기 싫었는지 그냥 못 알아듣는 척했다.

"하하. 다름은 아니고, 절차상 한 가지 확인하게 되어 있어서요. 그냥 형식적인 겁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하세요."

"혹시 괴수 부산물을 습득하신 게 있습니까?"

아이 씨… 뭔가 했네.

"없습니다."

설마 주머니를 뒤져보진 않겠지?

중위는 이어서 아이비에게 '영어+바디랭귀지'로 같은 질문을 건넸고 그녀가 고개를 젓자, 깔끔하게 물러났다.

"예, 끝입니다. 여기 성함과 연락처만 적어주고 가시면 됩니다."

클립보드를 받아 빈칸을 채워 돌려줬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살펴들 가십시오."

"아 네. 수고하세요."

그가 돌아서며 '사체 수거'를 외치자, 병사들이 복명복창하고 우르르 트럭을 뛰어내렸다.

몇몇이 시시덕대는 것이, 전투 없이 사체 수거만 하게 돼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사체가 곱진 않을 거다.

#35화, 동행

차에 올라 다시 처음 있던 곳을 향했다.

현장에서 꽤 달려왔을 때, 나는 전방에서 잠시 눈을 떼기 위해 도로 상황을 살폈다.

'...루트가 겹치는 건 아니겠지?'

백미러로 보이는 아이비의 페라리 말고는, 앞뒤로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핸들을 한 손으로 잡은 채, 글로브박스를 뒤져 물티슈를 찾아냈다.

그리고 아머베어한테서 챙긴 붉은 덩어리를 깨끗이 닦아냈다.

이물질과 굳은 핏자국이 벗겨지며 석회색의 단단한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

크기는 작아도 응축된 마력의 양이 적지 않았다.

'중급이라곤 못해도 D급 정도는 되겠네.'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마석의 경우, 마력측정기를 거쳐 알파벳 등급으로 세분된다.

물론 내 감각이 그 등급 기준치를 알진 못했으나, 확실히 아주 하품은 아니었다.

현재 동아리 과제보상이 대체로 C에서 D등급. 그것도 참여인원수에 한참 못 미치는 수량이니 이만하면 횡재라 하겠다.

"괴수를, 잡으러~ 산으로 갈까나~♪ 괴수를, 잡으러~ 던전에 갈까나~♬"

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흥겨운 노래는 백미러를 들여다보는 횟수와 함께 조금씩 늘어지다가 얼마 못 가서 끊어지고 말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아니, 왜 따라와?"

국도를 벗어나 소로에 접어들었건만, 아이비가 탄 차는 계속 내 차 꽁무니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디 나만의 비밀장소를 향하는 것도 아니라 괜히 멈추고 어쩌고 하기도 뭐했다.

'뭐 할 말이 남았었나?'

애초에 그리 멀지 않던 거리.

"진짜 따라온 거였네."

결국, 내 목적지에서 차 두 대가 함께 멈춰 섰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그녀는 제 차 운전석 옆에서 조금 쭈뼛거리다가 다가왔다.

"...아까 콩범이라고 한 게 무슨 뜻이지?"

"뭐? 아… 공범? 너 지금 겨우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모르는 말은 찾아본다. 그런데…."

어이없어하는 내게로 그녀가 불쑥 스마트워치를 내밀었다.

"그래. 워치로 찾아보면 되잖아. 이게 뭐…."

…고장 났네.

화면 그래픽이 완전히 깨져있었다.

풀 바닥에 한 번 떨어트렸다고 이렇게 될 리는 없고.

"그러게 불 속엔 왜 뛰어들어서는…."

본인은 멀쩡했어도 워치까지 지켜낼 순 없었던 모양.

"만약 벌점 받으면 반은 내가 감당할게. 어쨌든 내 책임도 있으니까."

스마트워치도 학원 재산 중 하나이니 그저 금전으로 때울 일은 아니었다.

'...얘는 이걸 따질 생각은 전혀 없었던 거 같고.'

성격 특이하네.

나는 고장 난 워치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냥 너나 나나 같은 입장이니 숨길 거 없다… 그런 말이잖아. 문맥상 대충 알아들었으면 됐지 뭘 여기까지 따라와."

"Camarada…."

혼자 끄덕거리는 아이비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너 수업 듣다가 모르는 거 있을 땐 어떻게 하고 있냐?"

"수업은 grabación… 아, 노금한다."

"일단 녹음했다가 모르는 거 찾아보고 그렇게?"

아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네."

이때는 듣기도 잘 안 됐었구나.

말하기 실력이야 본편 시점에도 그닥 나아지지 않았었고.

"아무튼, 알아들었으면 다른 데로 가라. 내가 이쪽에서 입산할 거니까."

그렇게 돌아서는데,

꼬르륵.

선명한 공복음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밥도 안 먹었냐?"

"안 먹었다."

그녀도 자기 배에서 난 소리에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묻는 말에는 착실히 대답했다.

"차에 먹을 건 있고?"

"...."

아이비가 고개를 저었다.

"돈도 없지?"

아이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워치를 조물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

워치 인증만으로 ATM기 인출까지 되는 세상에 따로 카드를 들고 다닐 일은 거의 없다.

"너 비위 약하냐?"

비위란 말을 모르는 것 같아 사전을 검색해서 보여줬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이었다.

"나도 당장은 줄 게 없고. 밥 먹으러 어디 왕복하자니 시간이 아까워서. 그러니까 같이 해 먹자고."

나는 사실, 식량도 산에서 직접 공수할 생각이었다.

새로운 '레시피'도 볼륨으로 인정된다기에, 요리와 연금술에 손을 대볼 계획이었던 것.

처음엔 역겹겠지만,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야 뭐든 못하겠는가.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그냥 아이비와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해 먹자'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진 모르겠지만, 아이비는 별말 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띠리리링.

워치 전원을 끄는데 아이비가 어깨를 두드렸다.

"차에 보조배터리 있다."

...배터리를 아끼려는 줄 알았나 보다.

"아니이. 위치추적 되잖아. 너 설마 그냥 들어가려고 했어?"

"...!"

얘는 아예 몰랐네.

"너도 꺼. 그거 화면이 나간 거지 완전히 맛탱이 간 건 아닌 거 같으니까."

물론 할 일 없이, 집에 간 애들을 모니터하고 있진 않을 거다.

하지만 만에 하나, 대충이라도 훑어보는데 괴수생태지역 한가운데 있다면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애네.'

***

숲처럼 좁고 시야가 한정된 공간에선 나 역시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길이 아닌 곳에 이계의 식생까지 우거지니 이동 간에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었다.

화르륵! 타닥. 타닥.

"어우! 징글징글하게 많네."

당장 눈앞의 식물과 벌레를 경계하고,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수의 기습도 주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비와의 동행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킁킁!"

적어도 괴수탐지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재능계가 반수계를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

물론 내게도 디텍트 마법이 있었지만, 이동하면서 쉼 없이 마법을 시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 이거! 잠깐만 기다려봐."

넓은 잎 식물 아래 그늘진 공간.

10여 송이 하얀 꽃이 한 뿌리에 하나씩만 곱게 피어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야전삽을 꺼내 꽃 주변을 살살 파나갔다.

"그게 뭐지?"

"아직. 확실치는 않아서…."

말하는 순간, 손으로 흙을 덜어낸 자리에서 샛노란 잔뿌리가 삐져나왔다.

"개꿀!"

세두의 수염.

세미(semi-) 엘릭서라는 별칭이 있는 강장식물이다. 꽤 희귀한 연금술 재료기도 했다.

"이게 다 몇 개냐."

원래, 나는 곳에 여러 개 모여 자라는 식물이다.

그래도 10뿌리가 넘는 건 아주 드문 경우였고, 발견 자체가 어려운 아이템이었다.

만약 아이비가 괴수경계를 전담하지 않았다면, 나도 못 보고 지나쳤을지 모른다.

"도라지인가?"

아이비가 채취가 끝난 뿌리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도라지는 어떻게 알아."

"먹어봤다."

"그래. 이것도 먹는 거야. 지구의 식물은 아니지만."

전부 다 채취하니 모두 열세 뿌리였다.

나는 그중 두 뿌리를 골라 최대한 흙을 털어낸 뒤, 식수로 씻어냈다.

"그냥 먹어도 되니까 하나 먹어보던지."

내가 잔뿌리까지 그러모아 한입에 털어 넣자, 아이비도 내가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했다.

아삭아삭.

"씹…!"

"아…!"

"뱉지 마!"

나는 아이비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웁웁!"

"눈 딱 감고 삼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조금 맺혔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꿀꺽.

"잘했어."

그녀는 삼키자마자 도리질하며 내 손을 뿌리쳤다.

"...이런 걸 왜 먹으라고 했지?"

"나도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아무튼, 몸에는 좋은 거야."

['세두의 수염'을 섭취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0.1만큼 상승합니다.]

[화염내성이 5% 증가합니다.]

[마력최대치가 10만큼 증가합니다.]

[*반복섭취 시 상승량이 대폭 감소합니다.]

역시 이건 그대로네.

모든 능력치 '0.1'의 상승.

절대로 작은 게 아니다. 두 달 넘게 훈련한 결과와 맞먹는 상승치였다.

다만 반복섭취 시 효과가 절반 이하로 떨어져서 생으로 먹는 건 한 뿌리면 족했다.

'근데 쟤도 좋은 걸 느끼려나…?'

아이비는 아직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자꾸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뜨겁다."

"정상이다."

"속이 이상하다."

"안 죽는다."

"...."

말투를 따라 하는 걸 눈치챘는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비의 인상이 조금씩 펴지더니,

의심을 담던 눈초리가 커다랗게 홉떠졌다.

'느꼈네.'

"힘이... 마력도…. 이, 이게 뭐지?"

"그렇다니까."

"...."

그녀의 눈이 남아 있는 세두의 수염을 향했다.

두 개째부터는 효과가 떨어진다고 말해봤자 믿지 않을 거 같아, 조금 다르게 둘러댔다.

"더 먹으면 설사해. 워터쉣."

그녀는 납득한 듯 시선을 거뒀다.

***

우리는 각자의 실전 감각을 위해 한 번씩 돌아가면서 괴수들을 상대했다.

그러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함을 깨닫고-아이비의 순번 때면 꼭 하찮은 놈이 나왔다-함께 처치하기로 했다.

'현실에서도 똑같네.'

파티사냥의 장점은 분명했다.

벌써 8마리나 상대했음에도 크게 피로하지 않았다.

숨을 돌려야 할 시간이 줄어들었고,

그만큼 더 이동했으며,

보다 많은 괴수를 마주칠 수 있었다.

경계를 믿고 맡길 상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정신적인 피로도 확 줄어들었다.

"이건 괜찮겠다. 너는 어때?"

"...괜찮을 거 같다."

"진짜 콜?"

아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어쩐지 체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케이. 그럼 넌 내 가방에서 조리도구만 찾아서 꺼내줘."

비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껏 마주친 놈들은….

나 역시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는 놈들이었으니까.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실물을 눈앞에 두기 전의 얘기였다.

이번엔 '펠루다'라는 놈이었는데, 몸뚱이만 놓고 보면 북아메리카에 사는 사향소처럼 생겼다.

먼저 식욕을 떨어트리는 부위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랩터를 닮은 머리를 잘라내고,

캥거루 같은 꼬리도 떼서 멀찍이 던져놨다.

"이제 좀 고깃감 같네."

한데 해체하려니 막막하다.

시야 구석을 확인했다.

"현재 보유 DP : 2,865"

꾸준히 모였음에도 넉넉하진 않았다.

우선 상태창을 열고 기술항목에 '도축'을 입력했다.

[수정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소모 DP 500]

기술 하나당 500 DP면 도축을 배우긴 아깝다.

'곧 차유라네 아버지도 만나야 하는데….'

뭐라도 해보려면 최소 2천은 남겨둬야 한다.

결국, 취소하고 요리를 입력했다.

요리는 레시피 생성과 습득을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

◈ 기술

- <요리 Lv.1>

───────────

'대충 썰어내면 되는 거지.'

단검에 샤프니스를 걸고 목부터 배를 거쳐 꼬리 절단부까지 한 번에 갈랐다.

'디크리즈 웨이트.'

절단부를 들어 올리기 위해 무게감소 마법에,

핏물이 튀는 걸 막겠다며 쉴드까지 시전하길 10여 분.

그럭저럭 먹을 만한 부위를 잘라냈다.

오?

그리고 드러난 자리에 석회색 덩어리가 박혀있었다.

이건 등급을 떠나서 정말 운이 좋은 거다.

정예 아머베어야, 원래 드랍률이 높은 데다가 이미 시체가 조각나있으니 더듬어 본 거지만, 지금껏 사냥한 괴수들은 일일이 해체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만큼 하위 등급의 일반괴수에게는 기대치가 낮다는 뜻.

"개꿀."

"개쿨?"

조리도구 세팅이 끝났던지 아이비가 등 뒤에서 기웃거렸다.

"어. 개꿀이라고."

"아, 개구리…. 개쿨개쿨."

"...그건 개굴개굴이고. 이건 개꿀!"

"개…꿀. 이것도 의성어인가?"

"그냥 좋다는 말이야."

마석을 뽑아서 가늠해보니 아까 얻은 것보다 등급이 낮음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생긴 공돈은,

설령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기분이 좋은 법이다.

"그, 그거!"

아이비가 마석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태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얼쩡댔던 모양.

"너는 외국에서 왔잖아. 마석 처음 봐?"

"괴수한테 나오는 거는."

"아아. 직접 채취하는 건 처음 본다고? 그건 나도 처음이지."

배를 채우려던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한국은 금지됐다고 들었다. 아까 군인도…."

"어차피 여기 들어온 거 자체가 불법인데 뭐. 그것도 다음 달에는 풀린다고 하더라. 자, 받아."

마석을 손에 쥐여 주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큰 도움은 안 될 퀄리티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으리라.

"왜 나를 주지?"

"같이 잡았잖아."

엄밀히 권리가 반반 있는 거지만, 나야 저 정도 마석은 욕심도 안날만큼 얻은 게 많았다.

세두의 수염 한 뿌리의 가치만 해도 하급 마석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으니까.

"이제 요리할 거야. 집중해야 하니까 딴짓하지 말고 경계 잘해."

"알았다."

아이비가 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공범 개꿀."

"...?"

#36화, 미완성

'레시피 생성은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게 아닌가?'

───────────

['재료가 잘못된' 고기 수프]

[등급] 하급 [신선도] 좋음

*레시피와 다른 재료가 들어갔습니다. 음식에서 청마향, 월공초의 향이 느껴집니다.

*(+) 섭취 시 30분간 생명력회복 증가.

*(?) 알 수 없는 효과

───────────

후루룩.

나는 완성된 요리를 보며 접근방식이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재료가 잘못된'이라는 수식어는 숙련도의 문제라거나 실패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레시피와 다른 재료를 넣을 때 나오는 결과물인 것.

즉, 기존 레시피의 바리에이션 정도로는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낼 수 없는 듯했다.

후루룩.

아까부터 후루룩대는 소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먹을 만하냐?"

"타이푸드 같다."

청마향과 월공초 냄새가 어쩌면 고수 향처럼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고기 안 질겨? 냄새도 안 나고?"

"응."

청마향은 마력회복 증가 효과가 있고,

월공초는 제독(除毒) 효과가 있으니 도움이 되겠다 싶어 넣어 본 것이었다.

둘 다 지천에 널려있기도 했고….

잘못된 재료로 분류되어 효과가 적용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누린내 잡는 역할은 한 거 같았다.

'알 수 없는 효과가 걸리긴 하는데.'

게임에선 보통, 예상 밖의 꿀버프나 경미한 디버프로 짧은 시간을 발현했었다.

죽지는 않겠지만, 현실이라서 조금 께름칙했다.

"넌 왜 안 먹지?"

"어… 곧 먹을 거야. 원래 요리하면 냄새를 많이 맡아서 조금 헛배가 부르거든."

나는 절대로 아이비를 이용해 안전성을 실험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경미한 디버프일지라도 둘이 동시에 걸리면 함께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

시간 차이를 두려는 것뿐이었다.

...아이비가 두 그릇째 퍼담을 때까지 별다른 증상이 안 보여 나도 안심하고 한 숟갈 떠먹어봤다.

후루룩.

이미 간을 볼 때 맛을 보긴 했지만, 허브향에 거부감만 없다면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이었다.

고기는 소와 양의 중간쯤 되는 거 같았다.

레시피나 완성도는 둘째치고 어쨌든 괴수 고기를 처음 접하는 식사로 이만하면 성공이지 싶다.

문득 아이비를 바라봤다.

외국인이 한국의 산속에서 괴수 수프를 흡입하는 모습은… 왠지 좀 안쓰러웠다.

"너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왔댔지?"

그녀는 그릇에서 고개를 들더니 숟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 미켈레 닮았다."

"뭐? 미켈레가 누구냐?"

"있다. 4년 전에 죽은 사람."

...이건 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해?

퐁!

그러더니 쥐고 있던 숟가락을 냄비 속에 빠트렸다.

휘청.

"어어!"

나는 냄비를 건너뛰어 옆으로 쓰러지는 아이비를 붙잡았다.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

'설마 효과가 이제 나타나는 건가?'

그러나 디버프 중에 이런 유의 증상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이비는 나를 뿌리치듯 밀어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고는 달려와서 덥석 안겼다.

"Papá!"

"야야! 왜 그래?"

빠빠? 아빠란 뜻인가?

"No te vayas!"

뭔 소린지 몰라도 정상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이거 좀 놓고. 정신 좀 차려 봐. 아이비!"

어후. 얘도 힘이 오지게 세네.

'엇!'

풀썩.

떼어내려고 힘을 써봐도 꿈쩍을 하지 않더니 어느 순간, 훅 떠밀려 바닥에 쓰러진다.

"괘, 괜찮냐?"

그러자,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 깜빡 졸았다."

"...."

어디서부터 졸았다는 거지?

순간 나도 쎄-한 기분이 들어서,

마법저항력을 높여주는 '레지스트 매직'과 일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어라우즈'를 연달아 시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떠오르는 메시지들.

[알 수 없는 기운이 당신을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듭니다.]

[당신의 마력이 상태이상 '수면'에 저항합니다.]

'수면 마법이었어?'

디버프도 저항으로 씹히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었다.

수면 마법은 저항이 가능한 종류라 걸리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60초 정도 화면이 암전되는 식이라 필드에선 꽤 위험한 디버프에 속한다.

'근데 쟤는 왜 저래?'

누가 봐도 잠이 들었다곤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었다.

"왜 거기 서 있지?"

아이비가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전혀 기억 안 나냐?"

"내가 뭐라고 했나 보다. 나는…."

알아듣는데 시간이 조금 소요됐지만, 나는 그녀가 몽유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짧은 디버프 중에도 증상을 보인다는 게 신기하네….'

참 가지가지… 아니.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만드는 녀석이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별말 안 했어. 미켈레라는 이름만 들었다."

그녀가 놀란 듯, 조금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생각 안 했는데. 많이 오래."

"누군지 물어봐도 되냐?"

"아버지다. 친아버지…."

돌아가신 친아빠.

대충 아까의 상황이 이해됐다.

그러고 나니 이젠 그냥 넘어가려던 게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보고 닮았다고 하던데…."

"누구… 미켈레?"

아이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미소도 잘 보이지 않던 애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한참 웃어댄 그녀가 말했다.

"미켈레는 잘생겼다."

왜 기분이 더럽지?

"아니이, 니가 한 말이라고."

애초에 동양인인 내가 서양인과 닮을 수가 있나?

"하지만 비슷한 냄새가 난다."

"...."

나는 조용히 팔을 들어,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아봤다.

"미켈레는 마피아였다."

"...."

"자유롭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당당하고 솔직했다. 따뜻하진 않아도 아버지 역할은 해줬다."

다른 얘기가 나올까 기다려봤지만,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에 대한 말도 마땅히 해줄 게 없었고,

그런 사람과 닮았다는 감상이기도 해서 조금 민망했다.

화제를 돌렸다.

"그럼 넌 이탈리아 사람인 건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미켈레만. 나와 어머니는 스페인 사람이다."

"스페인? 근데 왜 한국으로 왔냐? 스페인이면 에스뜨레야 뭐시기인가? 그게 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외국인이 청송에 어떻게 입학했지?"

세계 7대 초인양성기관 중 하나가 스페인에 있었다.

전 세계엔 수십여 개의 초인양성기관이 있었고, '7대'라 함은 당연히 상위 일곱 개 기관을 일컫는다.

하지만 8위 이하의 기관들이 넘볼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에스뜨레야 데 에스빠냐. 내 어머니가 거기 이사장이다."

"뭐? 그럼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모른다. 청송은 준비과정부터 주목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relationship 체결을 대가로 내 입학자격을 받았다."

"전혀 몰랐네. 그 에스뜨레야랑 자매결연 맺었을 줄은."

하긴 이제는 세계가 알고 있다.

한국은 단기간에 뭔가를 이룩하는 데는 독보적인 나라라는 것을.

아마 파격적인 지원계획도 한몫했으리라.

결과적으로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이 나라는 곧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크리스탈 게이트와 수중던전이 생성되며 헌팅의 메카, 그리고 초상자원 부국으로 거듭날 테니까.

재밌는 것은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겪는 와중에도 그렇게 된다는 거다.

"...."

대화의 무드가 바람에 쓸려간 듯, 적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배 채웠으면 일어나자.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지."

나는 남은 고기와 조리도구들을 대충 정리해서 가방에 챙겨 넣었다.

***

깊은 밤, 이름 모를 봉우리 정상의 넓적한 바위 위. 아이비는 홀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먼저 하겠다고 한 거지만, 바로 곯아떨어지는 한성준을 보니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한편으론 처음 말을 섞어본 자신의 뭘 믿고 저렇게 속 편하게 잘 수 있는지 황당하기도 했다.

만약 불침번의 실력이 형편없다면,

불시의 위험에 대처가 안 될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그가 실력 하나만큼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불현듯 식사시간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미쳤었지.'

달빛에 비친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무슨 사이라고 미켈레 얘기를.'

어쩌면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외려 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왜 닮았다는 얘기를 했을까.'

꿈결이라도 그런 말을 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서툴면서 수습해보겠다고 나오는 대로 지껄였던 것 같다.

피식.

그녀가 자조했다.

'저 사람에 대해선 뭘 안다고….'

그러고 보면.

자신이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을 뿐, 그에 관한 얘기는 끊임없이 들려왔었다.

-적응훈련 1등 프로필 봤냐? 입학성적 192등짜리야.'

-강화반에 아는 애한테 들었는데 그 새끼 독성면역이래.

-뭐야. 마법계가 왜 탱커를 해?

-미친. 저거 봤어? 하 교관을 1대1로 버틴다고?

-야야! 이나은네, 아까 길에서 한성준 팀한테 개털렸다더라.

그는 늘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곤 했었다.

왜 그리도 남에게 관심이 많나 싶었다.

하지만 곁에 있어 보니 알 것 같았다.

자신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성준은,

관심을 끄는 사람이었다.

"...그래. 확실히 닮긴 했다."

아이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꼭 쥐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달걀만 하던 마석이 벌써 알사탕 크기로 줄어있었다.

흡수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닳아 없어지는 게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

물론 오래 놔둘수록 손실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꽉 움켜쥐었다.

***

오전 2시 18분.

눈을 뜨자마자, 시야 하단의 시계를 확인했다.

시스템 시계는 원래 'IN 게임' 시간을 표시했지만, 이제 그 세계가 곧 현실을 의미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몇 시쯤 잤더라?'

아.... 11시 조금 넘었을 때였지.

거의 세 시간쯤 잔 거 같다.

'대충 한두 시간 사이에 깨우라니까.'

물론 아이비는 시간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한두' 시간이라고 짧게 잡은 건데.

'참…. 착한 건지 얼빵한 건지.'

나는 기지개를 켜며 구시렁거렸다.

괜히 미안하게. 쯧.

"더 자도 된다. 얼마 안 됐다."

기척을 느꼈던지 멀찍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안 되긴 무슨. 거의 세 시간쯤 됐…."

몸을 앞뒤로 구르며 벌떡 일어나는데,

자는 새 도착한 시스템 메시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 시간? 그 정도 안 됐다."

"자, 잠깐. 잠깐만."

나는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벤트 '제3자의 시선'이 생성됩니다. (완료) - DP 획득 700]

[인물 '아이비.M' 전용 이벤트 '기나긴 방황'이 생성됩니다. (완료) - DP 획득 15,000]

'만, 만오천…!'

충격적인 액수의 DP 보상도 놀라운데….

대뜸 생성 완료라고?

멋대로 완성된 이벤트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보고서, 보고서!'

[보고서]

- 변동된 내용 : 1건

변동….

X발, 통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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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동된 내용]

※ 인물 '아이비.M'이 '한성준'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이벤트 '제3자의 시선'

-인물 '아이비.M'이 주요 사건에 개입할 개연성이 마련됩니다.

*전용 이벤트 '기나긴 방황'

-아이비.M은 스페인의 후작위 계승자입니다. 그녀는 친부의 복수와 귀족의 삶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3자의 시선'과 '기나긴 방황'이 충돌합니다. -'기나긴 방황'의 볼륨이 '제3자의 시선' 시작 지점에 맞춰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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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이었어?'

어쨌든 보고서를 보고 나니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본편의 아이비는 어떤 무력단체의 수장이었다.

그녀가 준비하던 것이 복수였는지 그저 용병 사업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녀는 분명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었다.

'DLC용 캐릭터란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지.'

개별 스토리라인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메인 사건에서도 한발 물러나 있는 어중간한 인물.

그 말인즉, 원래 저 인물전용 이벤트는 기한이 없었다는 뜻이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로.

'...진짜 미완성 캐릭터였네.'

아이비가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해. 어지러운가?"

"어, 아니. 어, 조금."

나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거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건가?

...하기야 원래 그녀 입장에선 어떻게 봐도 남의 집 사정이었을 테지.

"그럼 더 쉬어라. 나는 아직 안 졸리다."

"아냐 이제 됐어. 안 졸려도 좀 누워 있어."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끌고 가야겠네.'

그녀의 결정이 나에게 유리하도록.

#37화, 내가 이상한 거야?

다음날. 오후 늦게 산을 내려왔다.

입이 늘어서 식수가 빨리 떨어지기도 했고, 몸도 너무 찝찝했다.

더 버티려면 버틸 순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싶었다. 물론 성과가 만족스러웠던 탓이다.

'...이만하면 기대 이상이지.'

───────

◈ 능력

힘 : 4.5

민첩: 5.3

지능: 8.1

체력: 7.3

마력: 5.4

매력: 4(-1)

행운: 1.1

───────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나흘간 0.1씩만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원래 경험치가 반 이상 찼던 능력치들은 0.2가 올랐고, 전투 의존도가 높았던 마력은 무려 0.3이 올랐으니 거의 200%에 달하는 초과달성이라 하겠다.

'세두의 수염이 컸지.'

뿐만 아니라 마석 흡수 덕분에 마력 최대치도 약간의 증진이 있었다.

차를 세워둔 곳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스마트워치의 전원을 켜는 것이었다.

부재중 전화 17건.

한 통을 제외하고는 전부 어머니다.

'점점 쫄리긴 하네….'

재난 문자가 4건.

'하루 반나절에 이 정도면 여기 부대 애들은 진짜 죽어 나가겠구나.'

그리고 톡은 세 사람에게 와 있었다.

(권하선: 야 너 큰집 갔냐? 지금 뭐 해?)

(권하선: 전화도 꺼놨네. ㅅㅂ 대체 얼마나 달린 거야)

(신용호: 너 나왔다며? 새끼가 나왔으면 형님한테 재깍재깍 전화 안 하냐?)

(차유라: 명절 잘 보내고 있나요? 연휴 끝나면 바로 물건이 도착한다네요. 그 일로 아버지께서 연휴 마지막 날이라도 잠깐 들렀으면 하세요. 혹시 시간 되는지 회신 바랍니다.)

드디어 도착하는구나. 그럼 가봐야지.

마침 DP도 넉넉해서 다행이다.

"현재 보유 DP : 18,065"

사실 포르테늄 단검을 업그레이드하고 몇 가지 특성을 추가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펑펑 쓸 수는 없다.

어머니와 성윤이의 미표시 설정을 손보는 데 DP가 얼마나 들어갈지 모르니까. 당장 급한 게 아닐 뿐이다.

옷을 털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나의 DP 생성기가… 아니, 아이비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보지?"

너무 그윽하게 봤나.

"…뭐가. 아니 너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원래 계획이 뭐였어?"

"마지막 날까지 있을 생각이었다."

"너도 참 대책 없다. 준비 하나도 안 됐던 애가 무슨 수로 저 안에서 3일을 보내."

"잠은 호텔에서 자려고 했다."

"아… 그렇겠네."

보통은 그쪽이 상식적인 계획이다.

"그럼 일단 시내로 가자. 돈은 내가 빌려줄게."

아버지께 동구 고깃값으로 땡긴 돈이 80만 원 정도 남아 있었다.

"너는?"

"나도 계획은 계속 산에 지내는 거였는데,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서. 어차피 오늘은 해가 졌으니까 쉬고 내일 가려고."

"...."

"일단 나가서 숙소 잡고 씻은 다음에 제대로 된 밥 좀 먹자."

"호텔은 잡아놨다."

"체크인했어?"

아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미리 결제한 모양.

다행이다.

아무리 싼 방도 두 개를 잡고 나면 빌려주기도 민망한 돈이 남았을 거다.

"그럼 니가 먼저 출발해. 따라갈게."

나는 차에 올라서 빠르게 메시지를 두 개를 찍었다.

하나는 차유라에게.

(시간 됨. 모레 연락하겠음)

하나는 용호에게.

(내일보자 연락할게)

갑자기 떠오른 거지만, 용호 녀석에게도 부탁할 것이 생겼다.

***

"남는 방이 아예 없어요?"

이 시국에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조금 전에 전 객실 예약이 끝났습니다. 죄송합니다."

프론트 직원의 표정도 얼떨떨한 것이 갑자기 예약이 몰린 거 같았다.

"예. 어쩔 수 없죠. 수고하세요."

차라리 잘됐다.

잠만 잘 건데 굳이 호텔에서 잘 거 뭐 있나.

멀뚱히 서 있는 아이비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씻고 쉬고 있어. 난 다른 숙소 잡고 톡…, 아, 고장 났지. 여기 프론트로 연락할게."

"안 불편하면 같이 써도 된다."

"어? 아니 그건 불편하고 안 불편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스위트룸이다. 공간은 충분하다."

"...너는 안 불편하겠어?"

"상관없다."

저렇게 말하는데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래. 그러자 그럼."

아이비는 앞장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

˙

˙

비즈니스호텔이라 스위트룸이라고 대단치는 않았다. 그래도 방과 거실이 분리됐고, 몸을 누이기 충분한 크기의 소파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 말처럼 공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정신인가?'

쓸데없이 넓은 욕실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야, 여기서 어떻게 씻냐."

"안 볼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니. 하아… 알았다. 나 먼저 씻고 밖에 나가 있을게."

"그러든지."

...내가 이상한 거야?

상황이 우스웠다.

남녀 사이에도 친구가 있고,

두 사람 다 애인이 없다면 친구끼리 한방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우린 어제 처음 말을 섞었다는 거지.'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욕실로 들어섰다.

옷을 벗다가 문득, 뭔가 빠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근데 쟤 몇 살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원앱을 켜서 아이비의 프로필을 검색했다.

'...어린 건 아니네.'

그녀는 스물다섯이었다.

***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어떻게 씻었는지도 모르겠네.'

오른쪽 귓바퀴를 훔치자 거품이 묻어나왔다.

로비 한편에 마련된 셀프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한잔 내렸다.

냅킨으로 남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입구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곧 로비로 7인의 남녀가 들어섰다.

'...초인들이네.'

일반인이 소지할 리 없는 병장기.

드러난 피부의 크고 작은 상처들.

누가 봐도 나 용병이요 하는 행색들이었다.

"아니 씨X. 귀국하자마자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는 게 맞아?"

"인마, 니 주제를 생각해. 나랑 한 팀이어서 대기업 밥 먹게 된 줄이나 알라고."

그들의 말을 들어 보니, 곧 있을 헌터의 국내 활동 허가에 앞서 발 빠른 기업들이 길드 창설 준비에 한창인 모양이었다.

'하긴….'

서 기자가 아는 시점에, 대기업들이 손을 놓고 있을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세계 각국에 스카우트들이 잔뜩 흩어져있을 터.

"대장 덕인 줄은 알겠는데, 이왕이면 수도권에 있고 싶다 그 말이지."

"거참 X나게 징징대네. 원래 위에서 멀수록 꿀자린 거다. 빨리 키나 받아와 새꺄."

리더로 보이는 괄괄한 남성이 로비 중앙에 캐리어를 눕히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다른 일행들도 그의 주변에 비슷하게 뭉개 앉았다.

그들도 분명 손님이건만,

풍기는 분위기는 남의 사업장을 점거한 깡패집단 같았다.

"마 실장이라고 했나? 그 양반 9시쯤에 도착한댔지?"

"어. 곧 도착하겠네."

일행인 여성 용병의 대답에 나는 덩달아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0분.

"그럼 아싸리 보고 올라가자고. 다시 내려오기 귀찮으니까."

"오케이. 난 커피나 마셔야겠다."

혹시 아는 길드일까 싶어 귀를 기울였던 건데, 소속을 유추할 만한 얘기는 오가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흥미를 잃고 워치를 들여다봤다.

권하선한테 늦은 답장을 쓰고 있을 때였다.

"어머! 너 그거, 혹시 포르테늄이니?"

커피를 뽑던 여성 초인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허리춤에 달린 단검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뭐."

대충 그렇다고 답하자, 이 여자가 대뜸 제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장! 이 친구도 초인인가 봐. 통짜 포르테늄 단검을 쓰네?"

'아이 씨.'

순간적으로 확 짜증이 났지만,

제 딴에 신기한 걸 보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뭐야, 진짜야? 핏덩이 같은데. 야, 너 이리 좀 와봐라."

"국내에선 쓸 일도 없었을 건데 뭐하러 들고 다녔대?"

"쯧, 어린놈의 자식이 겉멋이 단단히 들었네."

한데 그 일행의 반응까지 참긴 힘들었다.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아서 자리를 피해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애들아. 저 새끼 지금 내 말 쌩깐 거지?"

"내가 쟤라도 대장같이 생긴 아저씨가 와보라면 냅다 튈 거 같은데?"

자기들끼리 낄낄 웃어대고 난리가 났다.

띵! 1층입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아이비가 타고 있었다.

"방에 뭐 놓고 왔어?"

"아니…, 그건 아니고. 왜 벌써 내려오냐?"

"머리는 아침에 감을 거다."

"그래, 나가자."

더 기다릴 필요 없다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애써 무시하고 서둘러 로비를 지나치는데, 이 새끼들이 또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휘─익! 이야, X발 능력도 좋네. 누군 외국에서 조뺑이 까고 왔는데 어떤 놈은 여기서 외국년이랑…."

"입조심 해요."

못 들어줄 소릴 지껄일 것 같아 말을 자르며 한마디 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뭠마? X만한 놈이 눈깔 부릅뜨는 거 보소.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어?"

와 씨. 이런 일이 진짜 실화였네….

나는 드라마를 보다가도 저런 같잖은 악당이 등장하면 채널을 돌려버리던 사람이었다.

"웃어? 하, 이거 미친놈이네."

얼척이 없어서 웃었나 보다.

용병은 그 때문에 더 열이 오른 듯,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대장. 그만해. 괜히 일 키울 거 없잖아. 곧 마 실장님도 오실 건데."

동료들이 말렸지만, 대장이란 놈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또 웃어봐 어디. 다시는 강냉이 안 보이게 만들어 줄라니까."

"동료들 말 듣고 놓으시죠. 중요한 미팅 있는 거 같은데."

"너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겁니다. 그쪽은 힘으로도 안 되고 빽으로도 안 돼요."

진짜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낫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부우웅!

역시나 놈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마력을 끌어다 힘스탯을 보정했다.

작은 쉴드를 손아귀에 펼쳐 올렸다.

쾅!

대포알 같은 주먹이 쉴드를 뚫고 손바닥에 틀어박혔다. 일부러 뚫려준 게 맞다.

손이 욱신거리며 싸움꾼 특성이 발동했다.

"헉!"

"막았… 아니 잡았어?"

놈의 동료들이 대경했다.

당사자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힘으로 안 된다고 했잖아요."

"으윽…."

용병은 주먹에 가해지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멱살을 잡던 손으로 제 팔목을 움켜잡았다.

"무, 뭔 힘이…!"

힘스탯 9는 흔한 게 아니다.

현시점의 권하선이 9.5 전후쯤 될 거다.

물론 0.1의 격차도 엄청나지만, 어지간해서는 꿀리지 않는 수치란 소리였다.

"이제 빽까지 가봅시다. 억울하면 신고해요."

우드득!

"으아아아!"

재차 힘을 가하자, 용병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그쯤 했으면 이제 그만하지."

그의 동료들이 나를 제지하려고 나설 때였다.

"크하아악!"

느닷없이 변신한 아이비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웕! 시발. 아, 아니 말로 하자고… 요."

"크르르."

갑작스러운 반수계의 등장은 충분히 놀랄 만하다.

그녀가 나설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아서 나도 조금 놀랐다.

'...그로울링은 너무 오바 같은데.'

변신한다고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게 꽤나 위협적으로 보였던지 놈들은 섣불리 다가서지 않았다.

"놔! 놔! 알았으니까 제발 좀 놓으라고!"

"사과를 먼저 하셔야죠."

"X이발… 미안하다! 됐냐?"

"됐겠냐?"

놈의 팔을 잡고 주먹을 꺾어버렸다.

콰직!

순간적으로 손등이 팔목에 닿았다 떨어졌다.

"끄아아아아악!"

나는 그가 대굴대굴 구르기 좋게 주먹을 놓아줬다.

그때, 호텔 입구로 어떤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38화, 깨달음

마동욱은 대화그룹 회장비서실의 제2 실장이다.

'쯧. 내가 이런 것까지 직접 할 그게 아닌데….'

사실상 회장 최측근 중 하나인 그가 휴일, 밤낮 할 것 없이 뛰어다니는 이유는….

대화그룹 산하의 길드, 'DH 가디언즈'의 창설 준비를 떠맡았기 때문이다.

속속 귀국하는 영입 용병들을 맞아들이고,

전국의 지부별로 인원을 배치하고,

사전에 각 지자체의 눈도장을 받는 작업까지 홀로 진행해야 했다.

분명 아랫사람이 해도 될 일에 그가 직접 나서는 것은 회장님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유인즉, 창설 이전에 조금도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초인인 그가 철저히 단속하라는 것이었다.

"회장님도 참… 말로 하는 건 다 똑같지. 관리자가 초인이면 뭐 주먹으로 관리한답디까?"

그의 볼멘소리에 차량 스피커에서 제1 실장의 다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거야 그냥 하시는 말씀인 거고, 진짜 이유는 자네도 알잖나. 당신이 신경 쓰는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믿을만한 사람이 해야 마음 놓으신다는 거.

"알아도요. 알아도 이건 좀 너무합니다."

-그럼 못하겠다고 하든가. 흐흐. 이왕 하는 거 기분 좋게 해. 기분 좋게.

"얄밉네요. 송 이사님 문제도 저한테 떠넘기시고."

-이 사람 말을 이상하게 하네. 애초에 연희가 자네한테 부탁한 건데 왜 나한테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 건 정 실장님이잖습니까."

-그것도 회장님 「뚜뚜」 라니까?「뚜뚜」

그때 대기 중 전화가 걸려 왔다.

"으아아! 송 이사님한테 전화 들어와요!"

그가 건장한 체구에 맞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자네가 최연소「뚜뚜」실장 달게「뚜뚜」은인인데「뚜뚜」받아야지.「뚜뚜」끊네.

뚝 전화가 끊어졌고.

마동욱은 마지못해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마 실장님. 제가 부탁한 거 어떻게 됐어요? 아 참. 명절 잘 보내시죠?

"저 지금 일 보러 원주에 나와 있습니다."

-아버진 왜 그러신데요? 휴일에 쉬지도 못하게. 아무튼, 제가 부탁한 거요.

"그래서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아보는 건 마 실장님이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거 부탁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알아봤대요?

"죄송합니다."

-됐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뭘 또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 저도 사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중간에 껴서 저도 죽겠다니까요?"

-중간에 껴요? 뭐야. 설마 아버지가 막았어요? 그런 거야?

"네. 아, 아뇨, 그게… 저는 아무 말씀 안 드린 겁니다?"

-아이 씨. 대체 걔가 뭐라고 다들 그래, 진짜. 짜증나아아아!

송연희의 샤우팅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됐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동욱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는 약 보름 전, 송연희의 부탁으로 한성준이란 인물을 조사했었다.

보고에 필요한 서류를 출력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정 실장이 그걸 보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아직도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정 실장님도 이놈 아세요?

-어. 회장님 사윗감.

-네? 뭐요? 정략이요? 아니 왜요? 별거 없던데.

-아무튼, 그런 줄 알고. 이거 연희가 부탁한 건가?

-네… 그런데요.

-막아.

-예? 주지 말라고요? 대단한 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지 말고 버티라고. 있어 보이게. 회장님 뜻이다.

-뭔… 아니, 말 좀 해줘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납득이 안 돼서 그래요. 제가.

-천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천류….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는 마법의 단어다.

그건 딱, 정 실장까지만 알 수 있는 특급기밀의 대명사였다.

그가 아는 건 회장님이 '천류'라는 단체에 속해있으며 한성준이란 인물도 그와 관련됐을 거라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그것도 비서실의 2인자쯤 되니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후우. 별게 다, 사람을 힘들게…."

그가 구시렁거리는 와중에 목적지인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송 이사가 난리 치면 자신도 꾸사리 좀 먹겠지만, 어쨌든.

이제 자신의 손은 떠나갔다.

마동욱은 후련한 마음으로 호텔에 들어섰다.

한데 호텔 로비에서 원주지부원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웬 남녀와 대치 중이었다.

'설마…. 저것들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야?'

그는 황급히 달려가며 소리쳤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

"누구세요?"

"책임잡니다. 무슨 일인지 파악부터 하고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갑자기 등장한 근육질의 양복쟁이는, 꽤 고압적인 자세로 연유를 따져 물었다.

아까 저들이 말하던 미팅 상대이리라.

'길드 측 간부인가?'

확실히 풍기는 포스부터가 용병 나부랭이들과는 달랐다.

나는 있는 그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서 팔을 꺾었습니다. 뭐 인신공격이야 가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 사람이 먼저 제 멱살을 잡은 건 아마 CCTV에도 남았을 겁니다."

양복쟁이는 내가 설명하는 동안에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마친 지금도 눈만 껌뻑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들으셨어요?"

"네?"

이 새끼는 듣는 거야 마는 거야. 개빡치네?

"저쪽은 사과할 마음이 없는 듯하고 나는 일을 키워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라…."

"혹시… 성함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한성준입니다! 왜요?"

"헛! 죄송합니다!"

지금껏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양반이 갑자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순간 맥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훅 다가오더니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대화 그룹.」

'...?'

대화 그룹이 뭐.

어쩌라는 거지?

황당해서 잠시 정신이 멍해 있는데,

"마동욱입니다."

양복쟁이가 자신을 소개하며 내게 윙크를 날렸다.

'나를 아는 건가?'

그리고는 자기네 길드원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절대로 시민들에게 불편 끼치는 일 없게! 문제 생기는 일 없게 해달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새 포션을 까 처먹었는지 바닥에 병이 하나 굴러다녔고,

일어난 용병 놈이 팔목을 어루만지며 또다시 개소리를 시전했다.

"거, 마 실장님. 한쪽 말만 듣고 그러지 마쇼. 저 새끼가 과장해서 그렇지 나 별말 안 했습니다? 근데 애새끼가 싸가지 없이 나오니까! 어른 된 도리로 따끔하게 혼 좀 내주려는 거뿐이었소. 그것도 애초에 일반 시민이 아니라 초인인 걸 알았으니까 그런 거고."

어이가 없어서 한소리 하려 했다.

마동욱이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이, 장태식이."

그는 차분하게 커프스단추를 풀어헤쳤다.

"뭐요? 말조심하쇼. 본사 양복쟁이라 잘 모르나 본데, 나 원주'지부장' 자리 제안받고 들어온 사람…."

빠아악! 쿠웅!

마동욱은 용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귓방망이를 후려쳤다.

"커허억!"

맞은 용병이 날아가서 벽에 처박힐 정도의 강스매싱이었다.

"...!"

"...!"

귓방망이 한방이 나머지 길드원들을 각 잡고 정렬하게 만들었다.

"X발놈이… 좋게 말하면 좀 알아듣지. 누구 인생을 조져놓으려고."

나는 보았다.

그의 손바닥이 일순간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을.

그는 변이계 능력자였다.

'시원하긴 한데 왜 저러는지를 모르겠네.'

마동욱이 돌아서서 내게 말했다.

그새 미소를 장착한 얼굴이었다.

"하하! 왜 제가 맡게 됐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제가 확실히 단도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예… 사람은 좀 가려 받으셔야겠어요."

"전달하겠습니다."

"아뇨 뭐, 전달까지는."

지들 일 지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한데 실례지만, 두 분이 어떤 사이신지…."

나는 뭔 소릴 하나 싶어서 뒤를 돌아봤다.

아이비가 변신을 해제하고 서 있었다.

"실롄지 알면서 왜 묻는지 궁금하네요."

"죄송합니다."

"친구예요. …그럼."

나는 꾸벅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인물 '마동욱'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38]

'흠… 그러고 보니까 들어 본 이름인 것도 같고.'

뭐 대화그룹 소속이면 오다가다 봤었겠지.

"가자. 배고프다."

호텔 입구를 나서는데, 아이비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고맙다."

"뭐가?"

"그놈들이 나를 모욕했다. 네가 화를 냈다."

"...."

맞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닌 것도 아니었기에 알맞은 대꾸를 찾지 못했다.

"야, 아까 그거."

"뭐지?"

"크학! 크르르, 그런 거 하지 마라."

"...알았다."

***

잠이 오겠나 싶던 걱정과는 달리 나는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전일 야숙하며 불침번을 선 피로와 늦은 저녁, 반주의 취기가 어우러진 탓이다.

그리고 이른 아침.

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약간의 짜증이 담긴 눈으로 소음의 근원지를 좇던 나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헉! …쟤 땜에 돌겠네, 진짜.'

아이비가 아침부터 샤워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아침에 감을 거다.

어젯밤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전에 내가 나갈 줄 알았지.'

문화 차인지 그냥 성격의 문제진 감이 안 왔지만, 그게 무엇이든 난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허리를 굽히고, 욕실을 등지고,

가방을 챙겨서 현관으로 살금살금 이동했다.

신발에 발을 집어넣는 순간.

"지금 가?"

"어… 연휴 끝나고 보자. 조심하고."

"응."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

˙

˙

고속도로를 탈 때쯤에야 시각적 충격과 그 잔상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올 때랑 달라진 게 많네.'

능력치와 DP.

또 잠재적 조력자를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마음의 변화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요 며칠 몇 가지 일들을 겪고,

아이비의 이벤트 사건에 이르러 한 가지 깨달은 게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움츠릴 필요 없다는 거지.'

내가 만약, 한성준의 운명을 받아들였더라면.

청송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아버지는 내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그날 경찰서에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습격도 마찬가지.

아버지가 그토록 빠르게 테러 현장에 나타나고,

그들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청송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게,

내가 살기로 해서 일어난 일.

어차피 변화는 막을 수 없다.

그러니, 미래가 바뀔까 두려워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

차라리, 확실히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낫다.

조금 뜬금없긴 한데,

신용호와의 만남은 그런 적극적인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

용호는 내 불알친구다.

나는 한성준의 기억을 온전히 내 것으로 인정했고, 더 이상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

"얼굴 보기 X나 힘드네."

"한 달도 안 됐다."

"그런가? 뭔가 개 오래된 거 같은데."

"그전에도 좀 바쁘긴 했지."

녀석이 갓 제대했을 때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용호가 자주 병문안을 왔지만, 당시의 나는 혼란을 겪는 중이었고, 퇴원하고는 청송 입학 준비와 훈련으로 계속 바빴었다.

"맞다 X발. 내가 말년휴가 때부터 지극정성 보살폈더니 퇴원하자마자 쌩깐 새끼지. 얘가."

"뭘 또 쌩을 까. 청송 가는 거 준비로 훈련했었다니까."

"하, 이거 개념을 좀 챙겨야 하는데. 이제 군대도 면제된다며?"

테러 희생자의 유공자 책정 문제와 함께 얼렁뚱땅 대두되는 것을 듣기는 했었다.

"아직 몰라. 아무튼, 니가 간병한 걸로 자꾸 생색을 내니까, 내가 너한테 보답을 좀 하려고 한다."

"뭐를 한다고?"

"주문부터 해. 참, 나 돈 없다."

서윤서 기자를 알게 됐을 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비(非)초인도 인물이 될 수 있다면,

내 힘으로 인물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리고 용호의 미표시 설정을 열람해 본 결과, 일단 '삭제 대상'은 아니었다. 즉, 시민1이 될 운명이었다.

'안 될 것도 없지.'

용호가 주문을 마쳤을 때,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담 달부터 초인용병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될 거야. 우리나라도 이제 괴수를 사냥하면 그 획득물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거지."

"진짜? 그럼 이제 외국 나갈 필요 없는 거네?"

"대충 그게 돈이 된다는 건 알지?"

"알지 인마. 창수네 외삼촌도 각성하고 용병 일하면서 수억씩 번다더라."

"그래. 근데 돈을 벌려면 돈이 되는 것들을 챙기고 팔아야 하잖아?"

"…그렇지?"

"그걸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회사들이 있어. 규모가 큰 회사는 아예 가공과 유통까지 맡아서 또 한 번 차익을 남기고."

"오... 잠깐만, 갑자기 이 얘기 왜 하는 거냐?"

"들어봐 새꺄. 자, 대기업이 앞으로 너한테 물건을 사겠다고 해. 막 X나 큰 용병 길드가 너보고 대행을 좀 해달라고 해. 그럼 넌 그 사업을 해야겠어 말아야겠어?"

"나? 내가? 아는 게 X도 없는데?"

"자본금도 10억 정도 있어."

"공부해야지 그럼. 사람도 쓰고. 안 되도 되게 해야지. 들어 보니까 사업 자체가 영업 위준데 뭐."

"그치? 하자 그럼."

"...뭐?"

"내가 줄게. 10억. 일은 니가 하고 지분은 반반. 초반 밥줄도 내가 마련해주고. 이후론 니가 영업해서 키운다. 쉽지?"

용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밥값도 없는 새끼가 10억은 무슨."

어제 아이비한테 70만원 빌려주고 오다가 기름 한번 넣었더니 수중에 한 푼도 없긴 했다.

"나 바빠. 없는 시간 쪼개서 온 거야. 이거 때문에 보자고 한 거고."

용호는 내 눈을 보면서 살살 쪼개다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진짜야?"

"어. 할 거야 말 거야?"

"당연히 해야지! 근데 그만한 돈이 어디서 났냐? 아니다. 돈이 중요한 것도 아니지. 진짜 시작부터 일을 따올 수 있다고?"

"차근차근 얘기해줄게. 일단 먹자."

#39화, 차 씨 부녀

용호와 식사 후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나눴다.

녀석이 생각보다 의욕적으로 나와줬다.

세부적인 부분까지 집어보느라 꽤 긴 시간이 흘렀고, 카페를 나섰을 땐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야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잔다."

용호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만 까딱했다.

어쩌다 보니 집에 들를 짬이 생겼지만, 내일 또 나다니려면 안 들어가는 게 나을 듯했다.

"내일 복귀하는 거냐 모레 복귀하는 거냐?"

"내일. 밤 9시까진가 가야 됨."

"그럼 내일 나랑 사무실 좀 보러…."

"약속 있어. 그리고 그런 자잘한 건 니가 알아서 해라."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다. 내가 괜찮은 지역 알아보고 연락해 줄 테니까 그 문제는 좀 미뤄놔라."

자잘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업장은 이왕이면 서울에 위치해야 했고,

서울은 머잖은 미래에 지도에서 사라지는 행정구역이 존재했다.

"그래. 난 그럼 공부부터 해야겠다."

쾅! 쾅! 콰앙!

그때 저 앞 골목에서 무지막지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야이 새끼야! 너 내가 여기다 주차하지 말라고 몇 번 얘기했냐?"

흔한 주차 시비.

그러나 그 당사자 중 하나가 초인이라는 것만 달랐다. 주먹 세 방에 차가 반파되어 있었다.

"야,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용호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떠밀었다.

"사람 안 건들고 변상만 해주면야 우리가 끼어들 명분이 없는 거야."

"저런 놈이 변상은 해주겠냐?"

"그건 법으로 하는 거지. 경찰에나 연락해줘."

귀국 용병들이 점점 늘면서 앞으로 저런 일들은 비일비재할 터였다.

경찰에 신고하고 있는 용호를 보다가 테러범에 관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가지고 있던 사진을 꺼내 워치의 이미지 스캔 기능으로 담아낸 뒤, 서윤서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이 사람에 관해서만 조사해주세요. 제외한 나머지는 전원 추살. 엉뚱한 곳에 힘 빼지 마시라고 알려드립니다.)

***

JS 오파츠 사옥.

차정석 사장의 집무실은 경영자라기보단 연구자의 공간과 닮아있었다.

차 씨 부녀가 오랜만에 찻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차정석은 아까부터 자꾸만 뒷목을 주무르는 딸을 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랑 잡은 약속인데 굳이 너까지 있을 필요 있어?"

"아버지 때문에 있는 거예요. 사업 쪽으론 너무 무르시니까요."

"너도 상태를 보니까 그닥 믿음직스럽지가 않아서 그래."

"무슨 말이에요?"

"너 지금 긴장했어."

"긴장의 신체 반응 정도는 나도 알아요. 요즘 가끔 그러는 거니까 엉뚱하게 연결 짓진 마시구요."

차정석은 무감한 딸의 반응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다.

~지이잉.

(한성준: 나 도착했는데 사장님 만나러 왔다고 하면 됨?)

차유라가 워치를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도착했다네요. 데리고 올게요."

"나도 내려갈 거다."

"뭐하러요."

"네 친구를 만나는 게 아니다. 회사가 중요한 손님을 모시는 거지."

"우린 대가를 지불하고 거래를 할 거예요. 그렇게 안달 난 모습 좀 보이지 마시라구요."

차정석은 기어이 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 딸을 이렇게 긴장하게 만든 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니라고 말했어요."

"아마 세계 마공학 올림피아드 결선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하나는 확실하네요. 아버지랑 말을 섞을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맥이 빨라진다는 거요."

"하하하."

딸의 혈색을 보는 것은 차정석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을 때, 실실거리던 차정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

자신이 지시한 적 없는 최고등급의 보안 프로토콜이 가동되었던 것.

경비인력의 수부터 출입 제어장치, 검문 검사 절차 등이 전부, 극비 프로젝트가 진행 중일 때의 수준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거 있어?"

"인상도 중요한 거니까요. 내색하지 말아요."

차정석은 금속탐지기 앞에서 보안요원에게 단검을 건네고 있는 청년을 바라봤다.

'다속성 마법 재능이랬나….'

호리호리한 체형에 그 세대의 눈으로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얼굴.

그러나 현기(賢氣)가 느껴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른데?'

그는 딸이 긴장하는 것을 보며 상대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그렸었다.

'...이거 설마 다른 쪽인가?'

마침내, 모든 관문을 통과한 녀석이 꾸벅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성준입니다."

"JSO의 차정석입니다."

자연스럽게 악수를 한 손으로 받는 걸 보니 비즈니스를 아는 놈 같기도 하고….

"말씀 낮추세요. 피차 관계도 다 아는 사인데요 뭐."

그러면서도 사석인 것처럼 자신의 위치를 흐려버린다.

"…그럼 편하게 하겠네."

"네.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연구실 같은 건 따로 있습니까?"

"특수한 시설이 필요한 것 외에는 다 이 건물에서 진행하고 있어요."

대답은 차유라가 대신했다.

"아 그래? 그럼 마석은 당연히 있을 테고. 황소거미 체액 샘플도 있지?"

"판매업자가 처음에 보내준 1리터 정도요."

"충분하네. 사장님과 대화는 길어질 테니까 그거부터 끝내자. 괜찮죠?"

"어? 아,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삼엄한 출입절차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저거 타면 되나요?"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걸어가는 한성준을 보며, 차정석이 딸에게 속삭였다.

'야, 너보다 어리다며. 왜 저놈만 반말하냐.'

'각자 편한 말투를 쓰는 거뿐이에요.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시고 빨리 오기나 해요.'

차정석은 뼛속까지 학자였다.

그는 권위의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딸에 관해서만은 예외였다.

사실 말투는 문제도 아니었다.

왜 저놈은 내 딸의 반만큼도 긴장하지 않는가.

어쩐지 심통이 나는 차정석이었다.

***

'황소거미의 체액을 마석의 표면에 바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툴팁의 전부다.

대체 뭘 하려는지 궁금해하는 부녀의 시선 앞에서, 나는 툴팁의 과정을 그대로 재현했다.

"...."

"...."

1, 2, 3, 4, 5....

그렇게 10여 초가 지났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게임상에선 약병 모양의 체액 아이콘을 클릭하고 이어서 마석을 클릭하면 끝이던 작업.

〈창조적 시선〉도 별다른 추가작업을 떠올려주지 않았다.

'이게 다라는 건데….'

황소거미 체액은 무색의 반투명한 갤(gel).

체액이 발린 마석의 표면 역시 원래대로 석회색을 유지했다.

슬슬 조급해지는 마음에 마석을 더듬어볼 때였다.

'아…!'

하얀 라텍스 장갑에 묻어난 체액이 불그스름하게 변한 것을 보았다.

"하얀 헝겊이나 수건 같은 게 있을까? 버려도 상관없는 걸로."

차유라도 회사실험실은 본인 영역이 아니었던지 차 사장을 돌아보았다.

"...기다려 보게. 내가 찾아보지."

잠시 후, 차 사장이 가져다준 흰 천으로 마석에 발랐던 체액을 닦아냈다.

무색의 겔이었던 그것은 천에 묻어나면서 붉은 얼룩으로 뒤바뀌었다.

뜻하는 바는 직관적이었다.

"엇!"

이리도 간단한 걸 왜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까 싶은 수준.

가장 큰 이유는 황소거미가 마석을 드랍하는 종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색깔이…."

"예. 화속성 마석이었네요."

"뭐? 그 말은 지금, 속성감별을 했다는 소린가?"

"약식으로 감별하는 방법입니다. 전부는 아니고 원소계열 속성만 가능하지만요. 근데 또 결과가 안 나오면 몇 가지로 추려지는 거죠."

지금은 꽤 여러 단계의 실험을 거쳐야 속성을 판별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마력측정 이후 정식으로 유통되는 마석들도 속성 부분은 미감정 상태였던 것.

품이 많이 드는 것은 비용의 증가를 의미했고, 마석의 용도에 따라 속성감별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바르고 조금 있다가 닦아내면 된다고?"

"네."

"이, 이걸 뭐라고 해야 해?"

차 사장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차유라를 바라봤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정말 엄청난 발견이네요."

"사실이야. 몇 번이고 확인해봐도 되는 거니 그다음을 얘기하자고."

"솔직히 당장은 감이 안 잡혀요. 계산해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리터당 30만 원. 당연히 시세가 안정됐을 때 기준이야."

차유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이것저것 따져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할 수 있는 가격이에요."

"당연히 전 세계에 알리는 게 먼저고."

"발 빠른 기업이 물량을 한번 쓸어가고 나면. …그다음엔 공급과 수요가 얼추 비슷하게 유지되겠네요."

지금은 미국과 중국 같은 나라에서 연구목적으로 사육하는 괴수들의 사료 배합액으로 쓰인다고 했다.

"초반엔 잠시 폭등하겠지만, 구하기 힘든 부산물은 아니지."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차 사장은 다른 마석을 가져다가 직접 시도해봤다.

옅은 푸른빛, 수속성 마석이었다.

그는 이어서 기존방식의 검사키트로 감별을 시작했다.

차 사장 혼자만 분주했을 뿐, 차유라는 실험결과와 상관없이 내 말을 믿는 듯했다.

"...돈은 더 필요 없다는 말. 그게 이런 뜻이었군요."

"돈은 아직 부족하지. 쌩으로 더 달라고는 안 하겠다는 말이고."

기존방식의 속성검사는 30분이 조금 안 돼서 끝이 났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차 사장이 다가왔다.

"자네 말이 맞았군."

"고생하셨어요."

"내일모레 자네가 받을 게 72드럼이네. 리터당 30으로 계산하면... 34억이 넘는구만."

과연 차정석이다.

나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려봤지만 그게 저렇게 빨리 암산이 되는 건가 싶었다.

"아마 소분하고 유통하고 하면 로스율도 잡아야겠죠. 대충 5% 잡고, 수수료 15% 드릴게요."

내 말에 차 사장이 픽 웃었다.

"수수료는 무슨…. 됐다."

호의는 감사했지만, 나는 깔끔한 관계를 원했다.

"아뇨. 받으세요. 사장님 드리는 거 아니니까."

"뭐?"

차 사장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차유라는 재깍 알아들었다.

"일 처리해준 부서 영업이익으로 잡으란 거죠. 그렇게 할게요."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5억 가까운 돈이었다.

"다 얘기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나한테 주식을 주겠다는 차유라의 제안을 말함이다.

"그쪽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모르셨던 거죠."

차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차 사장을 돌아봤다.

'...다 보인다.'

그녀가 눈을 찡긋거리는지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어? 어, 어~ 들었지. 벌써 그렇게 내 식구 챙기는 건가? 이건 좀 감동인데? 하하하."

"공개도 JSO 이름으로 하시고, 자금 되시는 만큼 사재기도 하시고 그렇게 하세요.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릴 거잖아요?"

"그렇지."

"제가 받을 물건을 회사에서 먼저 좀 매입해주세요. 급하게 쓸데가 있어서."

"그, 그럴까 그럼?"

차 사장이 차유라를 봤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용건은 끝났습니다. 이제 사장님 말씀을 들어 보죠."

"아… 그래. 사장실로 가지."

***

차 사장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엔 먼저 보자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뚱한 눈이었다면, 지금은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나는 JSO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기회와 수익률 7,000%의 투자정보를 선물한 셈이었으니까.

어쨌든.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워서 나는 찻잔만 홀짝였다.

차를 들 시간을 줬던 건지 차 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공학의 역사를 알고 있나?"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초상시대의 역사가 올해로 17년.

당연하게도 마공학은 그보다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아티팩트 제작 재능을 가진 몇몇 초인과 그들이 만든 제작물에서 시작됐지."

뜬금없이 왜 역사를 이야기 하나 싶었지만, 나름의 양식이 될 거 같아서 잠자코 들었다.

〈창조적 시선〉은 무엇이 왜 그런지를 이해하게 해줬지만, 지난 사건들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메커니즘이었지만, 마력을 느낄 수 있다면 누구나 회로를 분석할 수 있었다네."

"처음엔 마공학을 접하려면 필수적으로 초인이야 했겠군요?"

지금이야 측정장비들이 있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하지만 차정석 또한 비전투 재능의 초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주로 감응자들이었지."

"아…."

각성의 3단계 중 두 번째인 '감응'에서 멈춘 이들. 그들은 마력을 느낄 순 있으나 비초인으로 분류됐다.

"마공학이 계속 발전하면서 제작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네. 마공학에 더 이상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굳어질 즈음, 새로운 능력이 등장했지."

"인첸터…."

"알고 있었군. 그들은 마력회로를 손보지 않고도 기능을 강화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삽입하지. 사실 나는 만나본 적도 없어. 전해지는 말만 들었네."

"수가 그렇게 적나요?"

"수도 적고. 알려진 이는 얼마 못 가서 사라진다네."

"사라져요?"

"어떤 세력이나 단체에서 데려갔는지도 모르지. 이제는 있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그런 세력들 틈에 있으면서도 생각을 못 했다.

방해된다고 제거하려 드는 놈이 있다면,

이익을 위해서 납치해 가는 놈도 있을 게 당연했다.

차 사장의 사설이 길었던 것은 결국,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나는 처음에 자네도 인첸터가 아닐까 생각했네. 한데 곧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 없는 기능의 삽입은, 인첸터들에게도 불확실한 영역이야. 그들도 결과를 보기 전에는 어떤 기능일지 알지 못하지."

"...."

"유라는… 자네가 가져간 니게리움 반지에 '필요한' 기능을 삽입했다고 말했네. 처음 우리에게 준 구리선 반지도 당연히 아티팩트가 아니었고. 그러니 이제 물어볼 수밖에."

"...."

내 능력이 저들에게 놀라움을 주리란 것은 알았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이토록 중요한 문제였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네의 재능은 정말로 지금껏 없었던 창조의 영역인가?"

그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이제 그의 질문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 그 비밀을 자신들에게 공유하겠느냐는 뜻이다.

혹,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대로 묻어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미 결정한 일.

나는 그의 배려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차 사장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군."

[인물 '차정석'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35]

#40화, 마공학자의 첫사랑

차 사장과 나는 협업을 진행할 아이템을 두고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일단 무기나 방어구, 액세서리류는 배제해 놓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왜… 임팩트 때문인가?"

"그것도 그건데, 결국 누구 한 사람의 손에 들려 밖으로 나돌아야지만 효과가 증명되는 물건 아닙니까. 안전성도 그렇고 회사 명성에 보탬 될 게 없어요."

설령 그 한 사람이 나라고 해도 세상에 하나뿐인 아티팩트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놓고 다닐 순 없다.

"기계장비나 기구 쪽은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어."

"황소거미 체액이 있는데 돈이 문제는 아니겠죠."

차 사장은 깜빡했다는 듯이 웃고 말을 이었다.

"회사가 현재 총력을 기울이는 프로젝트가 육감연동캡슐의 자체생산이네."

이때부터 매달렸구나.

적응훈련 당시 차유라가 육감연동캡슐을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제품 쪽은 제대로 기술력을 갖추고 양산해내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다.

"혹시 포탈 관련 기술도 가지고 있습니까? 포탈의 성능을 개선하면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 거 같은데. 한국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죠. 양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구요."

현재 대한민국의 포탈은 청와대를 제외하고 여의도, 세종, 부산 3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민간인도 이용은 가능하지만, 최소 한 달 전 예약에 가격도 살인적이라고 들었다.

"청와대에 국내 1호 포탈을 설치할 때, 내가 신성의 연구소장으로 있었네. 개발을 주도했었으니 기술이야 가지고 있지. 신성에 남겨진 특허를 우회하고도 만들어낼 자신이 있고."

차 사장이 신성에 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역시…."

"한데 포탈은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네. 저들의 필요에 따라 수주를 받는 게 우선이지. 대당 4,000억짜리를 그리 쉽게 늘리진 않을 걸세."

"하아."

단 하나뿐이고 독보적인….

또한, 회사의 가치를 드높여 줄 마땅한 아이템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차 사장도, 줄곧 생각에 잠겨있는 차유라도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해 토의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차 사장의 책장에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어떤 책 한 권의 제목이 눈에 딱 꽂혔다.

'마력구동 로봇 : 회로 융합설계'

...저거다!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차 사장을 돌아봤다.

"로봇! 아니 골렘 어떻습니까?"

게임에서 2챕터 이후 대형길드의 하급대원 노릇을 하던 것은 대부분 인간이 아니었다.

"골렘이라… 아주 매력적이지. 골렘 기술은 모든 마공학자에게 첫사랑과 같다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빠져들었다가 쓰디쓴 벽을 마주한다는 뜻이야."

"아… 그 벽이 뭐죠?"

"해결할 수 없는 기술적인 난제 때문이지. 그게 해결되지 않고는 절대로 골렘이 초인을 뛰어넘을 수 없거든."

그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력방어의 한계 때문이군요. 하지만 괴수를 상대로는 약점도 안 될 텐데요."

미래의 골렘 활용을 알고 있는 나로선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래. 대(對) 괴수용 골렘은 어려운 게 아니야. 괴수들이야 마력을 사용하는 놈들이 드무니까. 문제는 채산성이지. 그래도 그쪽으로 꾸준히 연구하는 기업이 있네. 최근에 메탈릭 다이나믹이라는 기업이 3기의 골렘으로 7급 괴수 사냥에 성공하는 영상을 올려 화제가 됐었지."

채산성 문제였구만….

"결국, 골렘 기술에 뛰어들었던 대부분의 기업은 대(對) 초인용 골렘을 목표로 했고, 다들 벽을 넘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거잖아요."

"맞네. 골렘의 가장 큰 잠재 수요자는 국가. 바로 군경이었으니까."

차 사장의 표정은 씁쓸했지만, 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골렘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렘은 그 특성상 초인보다 많은 마력, 그리고 높은 출력을 탑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골렘이 호신강기를 피워낼 수 있다면,

또 마력강을 이용할 수 있다면...,

국제 초인표준등급 S급 수준의 병기가 탄생할는지도 모른다.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제가 기술적인 지식이 없어서 그런데… 마력방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게 마력집적률인데 마력주입력과 압력유지장치가…."

"아뇨.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모릅니다."

차 사장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차유라가 대신 나섰다.

"초인은 자신의 신체 부위나 무기에 원하는 만큼 마력을 주입할 수 있죠. 골렘한테는 그걸 구현하는 게 어려워요. 아예 안 된다기보단 강기를 이룰 정도의 집적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죠."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나는 다시 차 사장에게 말했다.

"제가 아는 가장 복잡한 장치가 건전지로 굴러가는 장난감 자동차입니다. 그걸로 예를 들어 볼게요."

차 사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터 성능 9프로 증가, 바퀴마찰력 9프로 증가, 건전지 출력 9프로 증가. 이런 식으로 각 부품의 한계를 증가시켰을 때, 완성품의 총 성능향상도 9프로일까요?"

"...!"

차 사장이 눈을 부릅떴다.

"질문이 좀 황당한가요? 제가 정말 몰라서 여쭙는 겁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설계단계에서 그렇게 부품의 한계를 증가시킬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네."

"9프로 이상일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자네는 그게 가능하지. 나는 그쪽으론 전혀 생각을 못 해봤네. 하지만 분명히 마력집적문제도 그렇게 미세한 부품적 한계 때문에 생기는 거였어!"

굳이 9%로 예를 든 건 DP를 적게 들일 수 있는 최대 수치였기 때문이지만, 그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

그는 혼자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가능할 거야! 아니 가능해!"

눈빛이 마치 미치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아주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해요 그럼. 첫사랑, 한번 이뤄보시죠."

***

오후 9시 3분.

기숙사에 도착해 확인한 시간이다.

'아슬아슬했네. 차유라도 잘 들어왔으려나.'

각 차로 동시에 출발했는데 길이 너무 막혀 중도부터 보이지 않았었다.

"후우…."

뭔가 엄청나게 빡빡했던 나흘이었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지이잉. 지잉.

뭔가 하고 봤더니 패스 입금 알림이었다.

(알림톡: 아이비 님께서 요청하신 송금 700,000원이 한성준 님께 입금되었어요.)

'아, 얘도 들어왔겠네.'

[Web발신] 한*준(0524)

09/17 20:48 입금 700,000원 아이비/ 잔액: 2,746,498,820원

...이어진 은행 메시지를 보며 나는 잠시간 순수한 행복감을 만끽했다.

27억 4천….

아까 헤어지기 전 현장에서 차 사장이 쏴준 금액이다.

태연한 척을 하긴 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려서 죽는 줄 알았었다.

전, 현 세계를 통틀어 만져 본 적 없는 액수였으니.

그때 아이비가 따로 톡을 보내왔다.

(아이비.M: 고맙다 잘 썼다. -곰돌이가 꾸벅하는 이모티콘-)

나는 픽 웃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액정을 켜고 답을 작성했다.

(워치 새로 받은 거 같은데 벌점 어떻게 됐냐?)

(아이비.M: 저낵베상은 3점. 괜찮다)

(전액 배상이고, 기기값 반 줄게)

...답이 없었다.

뭐 돈은 많겠지.

잠들었던가.

나도 살살 눈이 감기긴 하ㄴ....

***

월요일 아침.

새로 갱신된 동아리 과제목록을 확인했다.

"오."

동아리 '홀리'가 입찰한 수렵과제 보상이 홍안늑대에서 아귀승냥이로 바뀌어있었다.

그나저나,

동구도 내가 안 와서 많이 당황하고 있겠네.

'며칠만 더 고생해라.'

나는 학원 가까운 곳에 아지트 겸 동구가 지낼만한 곳을 마련해 볼 생각이었다.

'이래서 돈돈, 빽빽하는구나.'

뒷일을 걱정할 필요 없게 깔끔이 해결된 데다가, 시기적절하게 돈도 생긴 덕이다.

나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휴식을 취해서인지 로비부터 활기가 넘쳤다.

'어? 아, 맞네.'

정훈이 끝났다는 게 잠깐 생각이 안 났다.

기숙사 입구는 이제 아주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한성준!"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나는 곧바로 쉴드를 시전했다.

쾅!

"아악! 씹…!"

"그럴 줄 알았지."

돌아보니 권하선이 잔뜩 인상을 구기고 손을 주물러대고 있었다.

"넌 뭔 놈의 인간이 그렇게 냉정하냐?"

"그냥 부르면 되잖아. 등짝 후리지 말고."

"하아… 영이는. 안 기다려?"

"정훈도 끝났는데 뭐하러. 어차피 운동장에서 다 만날 건데. 너는 가만 보면…."

분리불안 있는 강아지 같다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만 보면 뭐. 뭐어!"

"정이 참 많은 거 같다고."

"칭찬이야?"

"욕처럼 들려?"

"...아니?"

"됐네."

나는 권하선과 조금 걸어가다가 뭔가 허전함을 깨닫고 걸음 멈춰섰다.

"우리도 함께 갈 수 없을 거 같다."

"…왜 또 왜?"

"병기술이잖아."

"아 씨… 내 메이스!"

***

병기술 수업이 시작됐다.

생도들은 포지션별로 정렬하고, 각 병기, 재능계 담당교관이 돌아다니며 생도들을 교습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나는 아무도 안 봐주네.'

포지션도 대체로 병기나 재능을 따라가기에 마법 관련 교수들은 아예 탱커 그룹 쪽을 들여다보질 않았다.

'봐준다고 딱히 해줄 말도 없겠지….'

담당인 하정혁과 김정룡, 그리고 라이코 교관만이 우리 그룹을 지나다니며 생도들을 불시에 공격하고, 효과적인 막기 자세를 가르쳤다.

하 교관이 검이라도 한번 휘둘러줄까 하고 기다렸다.

"...."

그냥 지나친다.

물론 순서를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다.

멍하니 교습 중인 생도들을 구경하는데 느닷없이 큼지막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쉴드.'

쾅!

"헤이, 썽준."

라이코였다.

"네."

"너 Weapon 안 써?"

"단검이요. 근데 투척용으로 씁니다."

정확하게는 마력조종이고요.

"그래도 hold it up."

"예? 잡으라고요?"

나는 얼떨결에 단검을 쥐었다.

애초에 쥐고 쓰던 게 아니니 파지법조차 알지 못했다. 들고 선 자세 또한 어정쩡했다.

"OK. 통역업써어. 나 하고시픈말 모테. 알아 머거?"

라이코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지막지한 킥을 날렸다.

'X발.'

몸으로 알아먹으란 소리였다.

콰앙! 쾅! 쾅! 쾅!

좌우 미들킥이 연달아 네 번을 휘몰아쳤다.

철(鐵)속성의 배리어. 그것도 유지형으로 마력을 때려 박아야 했다.

초 근거리. 상대는 무려 라이코다.

쾅! 쾅! 콰앙!

쉴드 따위론 버틸 수도 없고 그 짧은 시간에 맞춰 재생성할 수도 없다.

'영역 생성도 까먹었네.'

묵직한 양반이 킥은 왜 저렇게 빠른지.

다리를 ㄱ자로 접은 그가 숨돌릴 틈을 내줬다.

"후우."

"OK. Good. 너도 공격해."

오. 그럼 좀 더 해 볼 만하지.

왼손에 화기를 모았다.

"No, no, no! 매직 아니야."

"아…."

단검만 쓰란다.

'아니 잡는 법도 모르는데 어쩌라는 거야.'

...대체 뭘 가르치려는 건지.

라이코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억!"

그는 배리어에 찰싹 달라붙더니 시퍼런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카가각!

'미친!'

그리고 넓혀진 구멍으로 두 손을 밀어 넣고 배리어를 양옆으로 찢어발겼다.

콰직! 콰지직!

나는 순간 드러난 라이코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팡!

라이코의 솥뚜껑 같은 손이 내 손등을 빠르게 후려쳤다.

"읏!"

몸이 앞으로 휘청할 충격.

다른 손에 처맞을 간격이었다.

나는 재차 단검을 쏘아 보내면서 백스탭을 밟았다.

챙!

다시 배리어.

콰앙!

'골병 나겠네.'

방어만 놓고 봐도 하정혁 교관 때와는 난이도가 다르다.

바닥에 내쳐진 단검을 회수했다.

단검이 원래 초 근접무기라지만….

쥐고 쓰는 법은 익숙지 않았고,

마력조종술로 쓰기엔 거리가 너무나 짧았다.

'아….'

당연히도 어설펐을 공격.

애초에 탱커 그룹의 교습이다.

중요한 건,

단검을 어떻게 활용할까가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의식하게 만들까였나?'

라이코가 눈썹을 까닥거렸다.

다시 가도 되겠냐는 뜻.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들어와요."

#41화, 헬 파티

성형한 배리어는 대놓고 정면을 열어뒀다.

틈을 내보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로 공격하겠다는 의미였다.

라이코 입장에선 같잖은 얘기다.

그는 당연하게도 뚫린 공간으로 쇄도했다.

나는 민첩에 마력보정을 걸고 그에게 마주 달려들었다.

'지금.'

라이코의 어깨가 젖혀진 순간,

나는 민첩 버프를 힘으로 스위칭했다.

"윽."

아주 찰나 간에 30%의 마력, 곧 생명력이 채워졌다가 빠져나갔다.

그것은 말도 못 할 고통이었다.

'후우… 그래도 연습한 보람은 있네.'

파앙!

라이코의 주먹이 왼쪽 손아귀에 틀어박혔다.

"What the…!"

"크으!"

어깨가 박살 날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충격은 몸을 우로 비트는 데 힘을 더했다.

그렇게 쭉 뻗은 단검 끝에 라이코의 명치가 닿았…

빠악!

우당탕.

...아아.

'X나 아프네.'

안면 뼈가 내려앉은 줄 알고 황급히 더듬었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처맞고 날아가는 동안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거 같다.

그러나 여전히 꼭 쥔 단검 끝에,

아주 작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누운 채 고개를 들어 보니 라이코의 셔츠 앞섶에서 500원 동전 크기의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식겁했겠지.'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있을 때, 라이코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OK.... Good, 썽준. 너는 알아머거써."

"감사합니다."

원래의 용도가 무엇이든,

무기를 든 이상 상대가 존재를 느끼도록 활용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공격의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장식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로 더욱 견고한 방어를 의미했다.

물론 탱커 교습이 아니었다면 반대로 방심을 유도하는 법을 가르쳤겠지만….

[권하선 외 23인에게 인상적인 기억 -DP 획득 186]

…라이코가 유독 요란하게 다루긴 했지.

'응? 그러고 보니….'

다른 생도들의 시선보다도,

그동안 라이코와의 '관계' 알림이 뜨지 않은 것이 신경 쓰였다.

저런 괴물도 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은 대체 얼마나 살벌한 일일까….

"누가 수업 중에 한눈을 파나?"

콰앙! 탱그렁!

"으악!"

생도 하나가 김 교관의 도끼를 잘못 막아 검을 놓쳐버렸다.

"무기를 놓쳐? 넌 5점 감점이다."

우리는 다시 교관들의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