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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2

***

생존 수업은 서범진의 희생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 탓에 나는 남은 수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바로 특성〈창조적 시선〉의 효과를 알게 된 것이다.

전말은 이랬다.

독성중화실험이 끝난 뒤, 그를 응용한 야전 연금술과 초상원소에 관한 이론강의가 이어졌다.

한데 문득 깨달은 것이 내가 그 복잡한 내용을 너무도 쉽게 알아듣고 있더란 거였다.

기실 알아듣는 걸 넘어서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설정이 아무리 많다 한들, 현실의 모든 분야를 망라할 순 없는 법. 특히나 학문적 디테일로 들어가면 그 끝을 알 수 없다.

당연히 나로선 들어본 적도 없는 개념들이었으나,〈창조적 시선〉은 세계가 만들어낸 그 디테일을 '최초의 설정'부터 물 흐르듯이 통찰하는 능력이었다.

그 말은 즉.

'머리 터지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그야말로 학원 생활에 최적화된 특성이라 하겠다.

"왜 혼자 쪼개고 앉아있어. 안 갈 거야?"

권하선이 툭 치며 강의실 입구를 가리켰다. 생도들이 반 이상 빠져나간 상태였다.

"영이 데리고 내려가 있어. 나 조용한 데서 통화 좀 하고 내려갈게."

"오래 걸리는 거면 그냥 기숙사 가서 하지?"

"금방 가."

마침 차유라가 강의실을 벗어나고 있었기에 권하선을 떠밀며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학원 연락망을 뒤져 차유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4층 동쪽계단에서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라고 썼다가 '잠깐'의 뒷부분을 '보자'로 고쳐서 전송했다.

나름 근거 있는 판단이었다.

그녀는 예측 불가능하고 자극적인 것들에 흥미를 느꼈으니까.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차유라가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곧, 두어 걸음 앞서가던 일행이 돌아섰고 뭔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일행의 면면이 놀라웠다.

송연희, 최범균… 강선호?

강의실을 나설 땐 다른 생도들과 섞여 있어 저렇게 한편을 먹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었다.

'밸붕팀이 벌써 나왔네.'

내가 아는 저들의 정보를 토대로 대충 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유추할 수 있었지만, 강선호는 의외였다.

순간 강선호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얘기가 끝났는지 먼저 떠났고, 나는 차유라가 돌아서는 걸 확인한 뒤 반대편 계단을 향했다.

***

"뭐야, 한성준 걔 진짜 유라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넌 어떻게 생각해?"

"그럴지도, 아닐지도."

강선호의 미지근한 반응에 송연희가 데시벨을 키웠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직 통성명도 안 한 남자가 따로 보자고 할 일이 그거 말고 더 있어?"

"그래서 한성준이 누군데."

뒤처져 걷던 최범균이 특유의 권태로운 말투로 물었다.

"아까 그 독성면역."

"아… 그 새끼? X나 비리비리하던데 되겠냐. 유라 누나는 안 그래도 불감증인가 뭔가 그건데."

"감정표현불능증이고. 아, 상스럽다 정말."

송연희는 더 말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맞다. 너는 아프리카에서 산독멧돼지도 실제로 봤겠네?"

강선호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 천착풍뎅이로 해독하는 것도 알았어?"

"...어."

강선호는 생도 중 거의 유일하게 괴수 수렵 경험이 있는 파병군 출신이었고, 그게 송연희가 그를 가장 먼저 포섭한 이유였다.

그러나 강선호에게 파병 생활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기에 이런 질문이 있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예민해지곤 했다.

"으으! 해독제가 그거뿐인 상황이면 난 그냥 버티다 죽을래. 아까 토할 거 같아서 죽는 줄 알았다."

"...."

강선호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그녀가 기어코 끔찍했던 순간 하나를 끄집어낸 것이다.

"나는 웃참하느라 뒈지는 줄. 아까 서범진인가? X나 당당하게 나서 가지고 게거품 물고 바닥을 구르는데 개 터질 뻔했다. 아, 그 빡통새끼."

최범균의 낄낄거리는 웃음이 더해지자, 강선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서범진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 독에 중독되고 이성을 유지할 수 없어. 그걸 알려주는 게 수업의 목적이었고. 배웠으면 비웃지 말고 감사해라."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으나, 마치 맹수의 경고처럼 들렸다. 그래서인지 그 최범균도 조소를 멈췄다.

강선호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비위가 어떻든, 그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벌레보다 더한 것도 찾게 될 거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 때… 그 독으로 죽어간 이들 중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의 목격담이고, 죽은 이들은 그의 동료들이었으리라.

송연희는 그렇게 짐작하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미안. 내가 좀 경솔한 얘길 한 거 같다."

강선호도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누구나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자신이 남다른 입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가벼운 독이 아니란 걸 말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직접 느낀 것이 아니라서 공포가 더 큰지도 모른다.

소대원 절반을 떠나보내고, 민간인 수백 명의 죽음을 지켜봤기에.

강선호는 독물이 가장 두려웠다.

그 자신이 독성면역임에도.

...또한,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놈이 독성면역이 아니란 사실을.

처음 봤다.

그 고통을 참는,

참을 만하다는 미친놈은.

#10화, 용녀

굳이 더 오를 것도 없이 동쪽 계단은 인적 없이 조용했다. 3층과 4층 사이에 멈춰 잠시 기다리자, 곧 차유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사를 나눈 기억도 없는 거 같은데요."

그녀는 네 계단 아래쯤 멈춰 서서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현실에서 그녀를 만나고 가장 가까운 거리다.

표정이 없는 얼굴 중에 가장 완벽한 얼굴이 아닐까 싶다.

"꼭 알아야 용건이 생기는 건 아니지."

"…그럼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 용건이겠네요."

"맞아. 그러니까 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차유라의 귓불 한쪽이 붉어졌다.

컨셉을 잘못 잡았나 고민했는데, 시작이 좋다.

귓불의 혈색은 그녀의 유일한 감정 창구로 희로애락을 구분하지 않는다.

"말해봐요, 그 용건. 이렇게 무례한 이유는 알아야겠으니까."

이렇듯 말의 뉘앙스로 노기(怒氣)일 거란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그딴 건 전혀 중요치 않다.

그녀 스스로가 지난 감정을 일일이 알지 못함으로.

'이걸 몰라서 수백 시간을 까먹었었지.'

호불호를 알 수 없는 최고 난이도의 친밀도 작업. 뒤늦게 밝혀진 차유라의 공략법은 그저 많은 동요(動搖).

귓불을 물들이는 일이었다.

"일행이 기다려요."

차유라의 재촉에 번뜩 또 다른 사실이 떠올랐다.

"아! 일행들한텐 뭐라고 하고 왔어?"

"뭘 뭐라고 해요. 한성준 씨가 보자고 했다고 하죠."

...그녀는 거짓말을 못 했다.

"왜 메시지로 보자고 했는지는 생각 안 해봤나?"

"둘러댈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 안 해요."

수업 시간의 일도 그렇고 쓸데없는 오해가 더 커질 것 같다.

뭐, 저런 부분이 '용녀(龍女)'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기도 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차유라의 반지를 색인에 지정해봤으나 비용이 들지 않았다. 아이템이 아니란 뜻이다.

"지금 끼고 있는 그 반지, 혹시 의미가 있는 반진가?"

물어보긴 하지만, 그냥 액세서리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다.

유독 창백한 차유라의 피부에는 꽤 눈에 띄는 반지였고, 중요한 물건이라면 본편에서 못 봤을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쪽이었네요.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그러고는 돌아서 계단을 내려가는 게 아닌가.

잠깐 뇌정지가 왔다가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차유라는 그러니까, 질문의 의미를 '혹시 남친 있니?' 정도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하, 너야말로 무슨 자신감이냐. 기다려봐."

나는 주머니에서 여분으로 챙겨둔 구리선 반지를 꺼내 빠르게 옵션을 입력했다.

[대상에 추가된 설정을 저장합니다. -소모 DP 55]

55 DP면 감당할 만했다.

[아이템이 생성되었습니다.]

───────────

[구리선을 꼬아 만든 '마력' 링]

[등급] 최하급 [내구도] 3/3

*(+) 착용 시 마력 총량 3% 증가.

───────────

3%뿐이지만, 마법계인 차유라라면 차이를 느끼겠지.

나는 3층에 멈춰 기다리던 차유라에게 구리선 반지를 던져줬다.

"바꾸자는 얘기야. 난 니게리움 반지가 필요하고, 아마 넌 그게 맘에 들 거거든."

차유라는 반지를 낚아채 이리저리 살피다가 맥락 없이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그쪽이랑 장난할 시간 없어요."

...그런 거였나.

"끼워나 보고 얘기해라."

그녀는 구리선 반지에 손가락을 넣고 들어 보였다.

"됐나요? 지금 저보고 이런 전선 쪼가리를, 아...."

말을 잃은 차유라의 양 귓불에 새빨간 불이 켜졌다.

"거봐. 맘에 들 거라니까."

유물일 수 없는 물건에서 마력 증가 효과를 느꼈다? 그건 단순히 성능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건넨 건 하나의 표본이었고, 연구성과에 따라 제작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티팩트 제작 기술은 모든 마공학자들에게 비전(祕傳)으로 취급됐다.

"이걸 주겠다고요. 왜죠?"

다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았다.

아마 이 시점의 JS오파츠(JSO)는 걸음마 수준이기 때문이겠지.

"거래라니까."

"균형이 맞지 않는 거래죠."

"그러면… 너희 아버지께 장학생 한번 키워보지 않겠냐고 여쭤봐. 균형은 차차 맞추지 뭐."

차유라의 아버지는 이 나라 최고의 마공학자이자 사업가였고, 그녀도 아는 가치를 몰라볼 리 없었다.

차유라가 니게리움 반지를 빼 쥐고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조심해요."

반지를 건네며 하는 말로는 이상하다 느꼈지만, 이유는 받아든 다음에 깨달았다.

"...!"

니게리움은 마력흡수율이 좋은 금속이었고, 차유라는 뇌(雷)속성 마법재능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서 신음 흘리는 추태는 겨우 면했다.

그사이 나보다 한 계단 더 올라선 차유라가 손을 내밀었다. 딱 맞는 눈높이였다.

"만족스러운 용건이었어요."

나도 마주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은 계속 올라갔다. 그리곤 뇌기 때문에 쭈뼛 서 있던 내 머리털을 정리했다.

...그 완벽한 무표정으로.

당황스럽네.

"어… 고마워."

"마지막으로 확실히 할 게 있어요."

"말해."

그녀는 스마트워치로 내 생도 프로필 홀로그램을 띄웠다.

"내가 누나예요. 너라고 하지 마세요."

[인물 '차유라'와 관계를 맺음 - DP 획득 55]

***

───────────

[니게리움 '마력' 반지]

[등급] 중급 [내구도] 100/100

*니게리움 고유특성 : 착용자의 잉여 마력 일부를 저장합니다.

*(+) 착용 시 마력 총량 9% 증가.

*(+) 착용 시 마력 회복속도 9% 증가.

*(-) 착용 시 마력 총량의 1% 회복 불가.

───────────

10%를 넘어서면 DP 소모량이 치솟기에 이 정도로 만족했다. 그래도 원재료 빨이 있어서인지 886 DP를 들인 거치곤 가성비가 좋았다.

마력 탈진이 곧 생명력 제로를 뜻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마력 관련 옵션 몰빵이 최선이다.

어쨌든 준비는 이쯤 했으면 됐다.

나는 니게리움 반지를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우고 벗어둔 훈련복 상의를 입었다.

「오후 9시 16분」

저녁 먹고 들어와서 옵션 조율 좀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직도 사람 많으려나.'

개인적으로 청송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정규수업이 하루 1~2개 선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기상을 제외하고는 자율, 취침 시간에 따로 제한이나 점호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마 통제가 널널한 건 생도들의 위치 파악이 실시간으로 가능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스마트워치로 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련관 갈 건데 너도 답답하면 나와)

답장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영 : 저는 익숙한 좌표에 있겠습니다)

피식.

내 조언대로 연습 중이던 모양이다.

사실 조언은 별거랄 게 없었다.

대상은 공간 너머로 밀려난 게 아닐까. 또 공간 너머로 밀려난 것은 다시 넘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 정도.

그 스스로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생각이나, 나는 〈창조적 시선〉의 이해력을 빌어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좌표'를 의식해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상의 이미지를 고유화하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가영으로서는 대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개념만 잡아도 큰 진전일 터였다.

(운동가자 나 경호 좀)

이번엔 권하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은 이왕 주기로 한 점수니 오늘 뽕을 뽑아야 했다.

(권하선 : 씻었어 귀찮 개피곤)

(가자 운동하고 또 씻자 초상시대에 사람 구실 하려면 부지런해야지.)

(권하선 : 응 너나 많이 부지런하세요)

(님 아까 점심저녁에 6000칼로리쯤 뿌시던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구나... 그래 피곤하면 쉬어야지. 지방합성도 같이 쉬었으면 좋겠는데.)

(권하선 : 아 이ㄱㅅㄲ진짜 너 나와 직므당자ㅇ)

***

3일 차 오전의 초상환경 적응훈련 시간.

우리는 스마트워치의 안내에 따라 본관 지하층에 마련된 XR(확장현실)장비실을 찾아갔다.

중앙의 관리자 캡슐을 기준으로 양 벽면에 각각 20대의 캡슐이 늘어서 있는─ 그야말로 오직 가상체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와 이게 다 얼마냐."

"캡슐 하나가 거의 차 한 대 값이던데."

차가 아니라 집 한 채 값일 것이다.

저 생도가 알고 있는 캡슐은 TV 광고에 나오는 오감 연동 캡슐이고, 이건 마력 신호까지 읽어 들이는 육감 연동 캡슐이었으니까.

마력 리딩기술은 마공학의 영역인데, 아직 국내에선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

저 장비의 국내 최초개발과 보급은 차유라 아버지의 JSO가 선도한다고 알고 있다.

멀찍이 서 있는 차유라를 살폈다. 그녀 또한 아버지 못지않은 마공학 덕후였기에.

역시 덤덤한 표정이나 귓불이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뭐랄까, 역사적 위인의 옛 기억 한편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여러분이 아는 일반적인 캡슐과는 다르게 초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특수장비다. 매우 예민하고 귀한 자산이니만큼 매뉴얼을 완전히 숙지하고 반드시 따르도록 한다.

만약 매뉴얼을 벗어난 행동으로 기기 오작동을 일으키면 해당 생도는 바로 영점 처리하겠다."

교관이 으르듯 말한 뒤 정면의 빈 벽에 빔 화면을 띄웠다.

12항목의 꽤 많은 글이 적혀 있었지만,〈창조적 시선〉앞에 매뉴얼 또한 설정의 가지일 뿐이었다.

"다 숙지한 인원들은 캡슐 앞에 한 명씩 서라."

절차에 따라 캡슐 안으로 들어가고 약 2분 뒤, 40명의 생도들은 널찍한 실내공간에서 다시 마주했다.

"그냥 똑같네?"

"진짜. 이거 자다 깨면 현실이랑 구분 못 하겠다."

생도들의 말에 나도 동감하고 있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가 뜨니 원래의 XR장비실에서 캡슐만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생도들은 각자 몸을 움직여보고 능력을 구현해보며 동화율에 감탄했다. 그러다 돌연, 다 같이 동작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1조] 강선호, 정슬기, 황서희, 가영

[2조] 서범진, 송연희, 김해나, 「한성준」

...

[5조] 권하선, 차유라, 이성재, 양호성

[6조] 최범균, 박창호, 오라희, 박태린

...

10개의 조가 한 줄씩 구성, 정렬되며 시야 중앙에 떠올랐다.

-조별 평가훈련이 아니다. 괜히 누군지 관심 갖지 말고 지금 보고 있는 조 순서대로만 정렬한다.

교관의 말은 시스템 음성처럼 또렷했다. 생도들은 바로 움직였고 나도 두 번째 줄에 가서 섰다.

모두 정렬을 마치자 교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UI에서 인벤토리를 확인해보도록.

시스템 세상 속의 시스템이라니, 묘한 기분이다.

"미쳤네."

"와…!"

"대박."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인벤토리 속은 무슨 장사꾼 계정인 양 온갖 병기들로 가득했다.

-현존하는 병기는 거의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초상환경에서 손에 맞는 무기는 필수라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허나 아직 많은 생도들이 자신에게 맞는 병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병기 지급신청서 작성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번외로 준비한 것이니, 훈련 중에 다양한 병기를 만져보고 꼭 맞는 것을 찾길 바란다.

본 교과목의 목적은 적응에 있으므로 전투 능력을 평가하진 않겠다. 개별 적응 능력 평가이며 시간은 사망 시까지다.

그럼... 1조부터 입장!

교관의 외침에 앞 열이 사라졌다.

#11화, 적응훈련(1)

"후… 온도가 갈수록 더 오르는 거 같네요."

서범진의 말에 숨을 고른 송연희가 대꾸했다.

"전 냄새가 더 죽겠네요."

우리는 어두운 지저동굴을 헤매고 있었다.

매캐한 공기에 온도까지 높으니 호흡도 힘들고 땀이 줄줄 흘렀다.

그 와중에도 신기한 점은 캡슐에 누운 현실의 육체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동굴 안에 있는 '내'가 오롯이 그 더위를 느끼고 있었다.

앞서가던 서범진이 내 어깨너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쉬었다 가죠."

서범진, 송연희 다음으로 내가 걷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김해나가 꽤 뒤처진 거리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매너가 몸에 밴 녀석인데….

호감이 아닌 게 참 이상하다.

심호흡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범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성준 씨랑 송연희 씨는 저랑 동갑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은 편하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같이 움직이려면 그게 편할 거 같은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범진이 송연희를 돌아봤다.

"상관없는데, 계속 같이 움직이게?"

"굳이 갈라질 이유는 없지 않나?"

송연희는 대답 대신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앞에는 온통 어둠뿐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앞에 갈림길이 있어."

"너는 그게 보이고?"

서범진이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을 때, 김해나가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사과하는 김해나에게 서범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다 동기들인데 해나도 좀 편하게 대해. 너무 딱딱하다."

"네…."

그런 얘길 해준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어이구, 얘는 18살이네.

시스템 창에서 김해나의 이름을 클릭하니 생년월일을 포함한 나이, 재능계열, 현재 순위 정도가 표시됐다.

김해나가 준비됐음을 확인하고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100미터가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하니 송연희 말대로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범진이 양방향의 입구를 오가며 킁킁거리고는 왼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자."

"그걸 왜 니가 정해."

"확실해. 매캐한 냄새는 오른쪽에서 올라와. 그렇게 올라온 공기가 왼쪽 길로 빠지는 느낌이고. 미미하지만 우리가 내려온 방향하고 비교해도 공기 흐름이 큰 거 같거든."

"네 생각은 잘 들었고. 내 갈 길은 내가 선택해."

서범진은 뜻대로 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송연희가 지나치자 뒷목을 주물렀다.

갈림길 앞에 선 송연희의 머리 주위로 녹광(綠光)이 어렸다.

'〈영록안〉이네.'

어둠과 지형 일부를 꿰뚫어 보는 사수의 특성 중 하나다.

재밌는 건 그렇게 눈으로 확인한 송연희도 결국 왼쪽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서범진이 픽 웃고는 김해나에게 물었다.

"해나는 어떻게 할래?"

"저는, 저도… 왼쪽으로 갈게요."

"그래. 그럼 가자."

근데 이 새끼가 나한텐 안 물어보네.

구현을 어떤 식으로 했는진 모르지만 내가 아는 던전에 막다른 길은 없었다.

과정에서 어떤 요소를 마주치느냐의 문제일 뿐, 어디로 가든 다 만나게 된다는 얘기다.

내가 지금껏 조용했던 이유는 '적응'의 평가 포인트가 어디에 있느냐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방금 내린 결론은 저들과 좀 달랐다.

"수고들 해라. 난 오른쪽으로 간다."

서범진이 이번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내 얘기 못 들었어?"

"들었어. 나쁘지 않은 판단이고. 근데 나는 생각이 달라서."

"그래서 혼자 가겠다는 거냐? 난 조별로 투입 시킨 이유가 꼭 있을 거라고 보는데."

"그렇더라도 판단은 각자가 하는 거지."

"...맘대로 해라."

서범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섰고, 김해나는 잠시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떠나갔다.

사망 시까지 이어지는 훈련.

그러나 주어진 임무도 없다. 언뜻 생각하기에 버틸 만한 곳에서 오래 버티는 것이 장땡 같기도 했다.

'근데 또 살아남으란 얘기는 안 했단 말이지.'

이게 맞는 판단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나는 결국 나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나는 성장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이 훈련을 통해 꼭 필요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어떤 지식을 가졌든, 또 사기적 특성을 가졌든지 모든 것은 오직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분의 목숨을 가진 육감(六感) 체험은, 그 자체로 평가보다 우위여야 했다.

'맞다, 나도 무기를 고르긴 해야지.'

인벤토리에서 쓸만한 단검류를 하나씩 쥐어보며 걷고 있을 때였다.

"한성준!"

동굴을 울리는 외침과 함께 송연희가 달려왔다. 생각이 바뀐 건가.

"왜 왔냐."

"그냥. 생각해보니까 기회가 아깝더라고."

그녀도 나와 생각이 같은 듯했다.

***

"하아, 하아. 저는… 더 못 가겠어요."

"...저도요."

마법계 여생도가 하나가 주저앉았고, 그 모습을 본 가영이 조심스럽게 동조했다.

"쉬는 정도론 안 되겠습니까?"

강선호가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어요. 생명력도 벌써 반 이하로 떨어졌고요. 더 버티려면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여생도의 푸념에 강선호는 UI의 생명력 바를 확인했다. 자신도 8%가 깎여나간 상태였다.

"제가 길을 잘못 잡은 모양이네요. 미안합니다."

"강선호 씨가 미안할 일이 아니죠. 애초에 저희가 따라온 건데요. 괜찮으니까 두고 가세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강선호는 이미 전 반을 통틀어 1위로 유명했고, 그 때문에 함께 진입한 생도들이 맹목적으로 그를 따라온 것이다.

"조 평가 아니잖아요. 가세요."

"네, 그럼… 조심하세요. 아, 그 정...."

이름이 뭐였더라. 또 다른 생도의 의향을 묻기 위해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창백한 얼굴의 그녀가 뭔가 말할 듯 입을 뻐끔거리다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주먹 크기로 패인 상처가 남아 있었고, 싯누런 삼두사가 등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꺄아아악!"

바닥에 앉아있던 여생도가 비명을 질러댔다.

강선호는 쓸데없이 리얼한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촤아악!

비명의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클로를 장착한 강선호가 삼두사를 찢어발겼다.

그는 혹시 숨어있는 다른 개체가 있는지 주변을 확인한 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이 주변엔 더 없는 거 같네요."

"...."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강선호가 두 생도의 시선을 쫓자, 죽은 생도의 시체가 있던 곳에 작은 가죽 주머니 한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글자는.

「적응훈련 보상 주머니」

강선호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훈련점수 10점 획득]

[중급 생명력 회복 물약 1개 획득]

"이게 무슨…."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른 생도들을 돌아봤다.

"이거 그… 뱀한테 나온 거죠?"

여생도가 벌떡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영이 그런 여생도를 바라보다 덤덤히 말했다.

"아까 그 누나한테 나왔어요."

***

우리는 처음 한마디 대화를 끝으로 묵묵히 길을 따라 내려갔다.

냄새가 심해 호흡이 힘든 탓도 있고, 마력 방사로 어둠을 더듬느라 내 쪽이 괴로운 이유도 있었다.

그러던 중 송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이 힘든 건 참겠는데. 상태 바라고 하나? 이거 빨간 거 계속 내려가는데 괜찮으려나."

"생명력. 얼마나 까였는데."

송연희는 혼자 정색하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말 못 하지. 너 먼저 말하면 알려줄게."

"안 궁금해. 니가 말 꺼낸 거지."

나는 96~99%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육체의 마력 흐름을 읽어 구현됐기 때문에 가상세계의 상태 그래프 또한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기술적인 문제인지 마력, 생명력의 등락이 가끔 렉 걸린 듯 따로 놀긴 했다.

한 5분쯤 더 지나자, 송연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갈수록 점점 빨라지는데."

"그게… 끝에 도달하면 끝나."

지저동굴의 상태 이상 효과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심해지는데, 일종의 방어 결계 효과라 최저층에 도달하면 사라진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물어보면 할 말이 없긴 하다.

송연희는 한 발 더 나간 얘길 중얼거렸다.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긴 하지."

회복 포션이 있으면 별것 아닌데, 지금은 그냥 깡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지저동굴 공략이 목표는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송연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당장은 험난해 보여도 서범진이 가는 길보단 짧은 루트임이 틀림없었으니까.

"너는 좀 여유가 있나 보다? 남 일이라고 반응이 좀 그렇네."

"니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

"...칠십삼 프로."

진짜 불안했는지 결국 털어놨다.

"까였다고?"

"남았다고."

"그럼 충분할 거야."

"충분하다고?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원론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냥 이 방면으로 덕후라고 생각해. 후우, 말은 그만하자. 숨 찬다."

"해외커뮤니티에서 좀 놀았나?"

송연희는 한번 터진 입을 닫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다행인지, 마력 파장 끝에 생명 반응이 포착됐다.

"!"

내가 팔을 뻗어 송연희를 멈춰 세우자, 그녀가 내 팔뚝을 붙잡고 말했다.

"어! 이거 유라 언니 반진데?"

"야이 씨."

같이 스캔되나 보네.

어쨌든 지금 그게 문제냐?

내가 아까 골라둔 단검 하나를 꺼내 쥐자, 송연희도 얼른 활을 뽑아 들었다.

가상이긴 하지만 첫 실전 기회를 그녀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윈드' 마법을 시전하며 달려나갔다.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육신의 각력이 더해지면 어설픈 '대쉬기' 효과를 낸다.

"앗, 멈춰!"

뒤에서 들려오는 송연희의 외침과 함께 어둠 속의 흐릿한 생명체가 몸을 웅크렸다.

"꺅!"

"어엇!"

나는 황급히 단검을 거두고 몸을 비틀었다.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근시안〉.

"괜찮아요?"

달려온 송연희가 여생도를 일으키며 물었다.

여생도는 무언가 체념한 듯한 얼굴로 손을 내젓더니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1조 아니었어요? 왜 혼자 있어요?"

"그쪽은 왜 둘이에요?"

"갈림길에서 나뉘었어요."

대답 대신 질문을 건넨 여생도가 고개 끄덕이더니 말했다.

"난 어차피 곧 죽어요."

우리가 왔던 길도 한참이다. 생명력 때문에 돌아 나왔다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울먹이는 투로 말을 이었다.

"대체 이런 훈련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얘기해봐요."

"사람을, 생도를… 죽여야 점수를 주는 거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나 여생도는 송연희의 품에 안겨 계속 울었고, 조금 진정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곧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응훈련 보상 주머니」

송연희와 내 시선이 마주했다.

#12화, 적응훈련(2)

"너는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아악!"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송연희를 홱 잡아당겼다.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그녀 앞에 떨어져 있던 보상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훈련점수 10점 획득]

[중급 생명력 회복 물약 1개 획득]

'이런 거였어?'

적응훈련의 진의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이 또한 〈창조적 시선〉의 효험인지도 모른다. 넓게 보면 청송의 커리큘럼 자체가 설정의 디테일 아닌가.

"내가 살다 살다… 아, 어이없어. 이런 인간은 또 처음이네."

"그런 인간 아니고…."

나는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에 송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치워. 이거 어떡할 거야! 아, 어쩔 거냐고."

그녀는 혼자 힘으로 일어나더니 더러워진 손바닥을 내보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콘텐츠 속 인물이라 하면 특징적 결핍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고,

"그… 이건 실제가 아니잖냐. 세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송연희는 늘 손 소독제를 지니고 다니는 결벽증 환자였다.

"그걸 누가 몰라? 아아, 짜증 나, 짜증 나."

너무도 생생한 촉각 탓에 특유의 불쾌감은 그대로인 듯했다.

동동거리는 몸짓으로 짜증을 맘껏 표출하던 그녀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물었다.

"너 어떻게 알았어? 말도 오늘 처음 섞었는데."

"어… 오가다 봤지. 시도 때도 없이 소독제 짜서 손 비벼대는 거."

"남들 앞에선 잘 안 그랬는데… 어쨌든, 너 참 대단하다?"

"뭐가."

"훈련 중이고 내가 남녀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은 아닌데, 방금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바로 팽개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주 대단한 판단력이고 순발력이야."

명백히 비꼬는 '대단함'이었다.

"...."

전에 권하선 때도 느꼈지만, 어떤 판단에 매몰되면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행동이 나가버리곤 했다.

아마도 원래의 내 성격에 한성준의 성격이 결합되면서 생긴 변화 같았다.

나는 변명하는 대신 인벤토리에서 회복포션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뭔데."

"생명력 차는 포션이야. 아까 그 보상 주머니에서 나왔고."

"근데 왜 날 줘. 아니, 몇 개나 나왔는데?"

"한 개."

송연희가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한 개뿐인데 날 준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그거랑 훈련점수 10점 나왔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너도 나중에 알게 될 테니까."

"...점수가 나왔단 말이지. 적응훈련 보상이래서 설마 했는데. 그럼 아까 여생도가 한 말이."

순간 송연희가 눈을 홉뜨더니 빠른 뒷걸음질로 나와 거리를 벌렸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배틀로얄 아니야."

"아니라고?"

"생각해봐라. 그게 '적응'훈련일 수가 없잖아."

"그럼 점수는 뭔데."

"점수는 그냥 점수지. 교관은 분명 '평가'라고 말했다."

"...미끼구나."

송연희는 바로 알아들었다.

"동시에 진짜 보상일 수도 있고."

훈련의 의미를 착각하든, 알고도 노리든지 간에 점수획득은 진짜였으니.

"결국, 선택의 문제다? ...살벌하네."

던전 안에서 어떤 범죄가 일어난다고 해도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 전부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플레이어들도 얼마나 많은 NPC를 죽여댔던가.

걸음이 느리다고, 생긴 게 재수 없다고, 보상이 맘에 안 든다고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곳이 던전이라면 수배도 되지 않았다.

현실이라고 다를까.

내 보급품은 다 떨어지고 파티원은 남았다면.

보상은 하나뿐인데 남은 인원이 둘이라면.

이 훈련이 말하는 적응은 던전 내 생태환경에 대한 대응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집단환경, 분위기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리라.

"정신력 강화훈련도 그렇고 이 학원은 동기애 뭐 그런 건 가르칠 생각이 없는 건가."

"그 와중에도 팀을 이루고들 있잖아."

내 대답에 송연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계약, 또는 이해관계에 따른 협력.

썩 아름다운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바로 초상사회의 현실이다.

그리고 시작과 다른 색깔의 유대가 쌓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살려면 빨리 내려가야지. 다시 누구를 마주칠 때쯤이면 다른 생도의 죽음을 한 번쯤 봤을 거야. 조심해야지."

"조별로 투입한 이유가 그거구나."

"그래. 그런 환경에서 협동 생존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게 평가 포인트 같다."

[인물 '송연희'와 관계를 맺음 - DP 획득 50]

***

날카로운 종유석 천장의 지하공동.

"다 왔다."

"어우, 냄새."

"근원지가 여기니까."

형태는 각양각색이나 대체로 최저층의 입구는 이런 공동이다.

바닥에는 썩다 남은 괴수의 사체까지 구현되어 있었다.

"오, 생명력 감소는 진짜 멈췄네."

"쉿!"

'왜?'

송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어차피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나는 송연희의 질문을 무시하고 얼른 발밑을 살폈다.

청각에 잡히는 작고 기묘한 숨소리.

둘 이상 함께 있다면 서로의 것이라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소리였으나.

'사운드까지 똑같을 줄이야.'

내가 속기에는 너무 익숙한 거지.

...내 발밑은 아니네.

나는 그런 확신이 들자마자 송연희를 힘껏 밀었다.

"악!"

어찌나 가벼운지, 그녀는 나도 아차 싶게 날아가서 바닥을 굴렀다.

당연히 낙법을 펼쳤지만, 옷이 엉망이 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아 진짜! 너 미쳤…!"

벌떡 일어난 송연희가 분을 터트림과 동시에 원래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시커먼 괴수가 솟아올랐다.

예상대로 탈파니언(직립형 두더지 괴수)이었다.

먼저 대비하고 있던 나는 곧바로 물러나며 화염구를 날렸다.

화르륵!

"크에에엑!"

놈은 불을 꺼보려 몸부림치다 이내 불붙은 채로 돌진해 왔다.

퍽!

들고 있던 단검으로 놈의 미간을 겨눴으나, 손을 떠나기 직전에 딱 내가 겨눴던 자리가 뒤에서부터 꿰뚫렸다.

앞으로 꼬꾸라지는 탈파니언 뒤에서 송연희가 활을 거두며 말했다.

"뭐야, 너 마법계였어?"

"어."

"단검은?"

"그냥."

내가 탈파니언의 실물을(역시 가상이나, 게임보다는 사실적인) 만지고 있자, 송연희가 극혐이라는 듯이 진저리를 치고 물었다.

"근데 넌 저게 나올 줄 어떻게 알았어?"

"숨소리가 났어."

"숨소리? 그게 너만 들렸다고?"

"내 귀가 더 예민한가 보지."

"말도 안 돼. 아니… 내가 사순데."

사수인 그녀가 감각면에서 마법계인 나보다 못하다는 게 인정하기 힘든 모양이다.

마침 탈파니언의 시체가 사라지면서 다시 시선을 뺏었다. 시체가 있던 자리엔 작은 약병만 남아 있었다.

「탈파니언의 피」

"탈파니언 피에 이런 효과가 있구나. 지금 나와봐야 쓸모가 없네. 아까 나왔어도 나는 못 먹었겠지만."

툴팁을 확인했는지 송연희가 중얼거렸다.

탈파니언의 피 아이템은 지저동굴 상태이상의 페이즈를 하락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녀 말처럼 맛과 향도 실제처럼 느끼는데 괴수 피를 마실 생도가 얼마나 있을진 의문이다.

"타이밍을 떠나서 너무 안 나오긴 했지."

실제 지저던전에서는 개미처럼 득실거리는 놈이다. 아마도 프로그램에서 개체 수를 조절한 모양.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 생기든 갑자기 밀고 잡아당기는 것 좀 그만하지?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가만 안 놔둔다. 니가 나서지 않아도 기습 정도는 내가 알아서 대처해."

생김새랑 이름 정도는 그녀도 알았던 눈치지만, 저건 공격패턴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자리에 뒀으면 넌 지금 땅 밑에 있을걸?"

"뭐?"

전사계열은 몰라도 사수나 마법계는 땅으로 끌려 들어가면 끝이다.

"인사받을 생각은 없는데, 내가 너 살린 거라고."

"...?"

송연희는 말뜻을 뒤늦게 이해했는지 갑자기 뜨끔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우, 우리밖에 없는 거 같은데. 제일 먼저 도착했나?"

"이런 공동이 여러 개 있어. 저기 저런 구멍들을 통해서 다 연결되어 있고…."

괜히 설명하고 아차 싶었는데, 이런 지식도 해외의 초인커뮤니티에서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근데 난이도를 떠나서 훈련에 내용이 너무 없는 거 같은데."

"우리한텐 그렇지."

어쩌다 보니 둘씩 갈라지게 됐다. 또 어느 지점에 이르면 상태 이상이 끝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별것 아닌 이유로 우리가 지옥을 벗어날 수 있던 것이다.

"다 니 덕이란 소리네."

"내 입으로 그런 건 아니고."

"...."

송연희가 얄밉다는 표정으로 잠시 노려봤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누구 찾아다녀 봐야 좋은 꼴 보겠어?"

어차피 훈련의 엔딩은 정해져 있다.

동굴의 모든 생존자가 최하층에 도달하면 아마도 어디선가 괴수들이 쏟아지기 시작할 터. 그건 난이도와 상관없는 보스 방 오픈 관문이다.

당연히 지금의 생도전력으로 어림없는 싸움이나, 생도들이 원래 바랐을 이벤트기도 했다.

송연희의 잡다한 질문에 한참을 시달릴 때였다.

"결국엔 만나네."

공동의 반대편 입구 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울렸다.

서범진이었다.

"...."

"...."

어쨌든 한 조에서 갈라졌으니 반겨줄 법도 한데 우리는 둘 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는 여기저기 찢어진 옷 사이로 베인 상처투성이였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해나는?"

송연희가 물었다.

"죽었다. 여기는… 피가 안 닳네."

서범진은 가까운 종유석 기둥을 붙잡고 숨을 고르다 말을 이었다.

"아, 오해하지 마라. 해나는 못 버텨서 죽었어. 이건 다른 놈한테 공격당해서 그런 거다."

"그래. 아까도 많이 힘들어했으니."

당연한 얘기다.

김해나의 죽음 이전엔 그도 보상에 대한 건 몰랐을 테니까.

다만 그의 접근을 허용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반응 보니까 너네도 상황은 아는 거 같은데, 완전 멀쩡하네."

그리고 그건 녀석의 생각도 같았는지 더 다가오진 않았다.

"어. 공격은 안 당했다."

서로가 느끼는 불신. 원래도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는 확실히 거북했다.

나는 믿든 안 믿든 본전이란 생각으로 훈련의 진의에 대해 느낀 것을 설명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맞겠다. 근데 우리가 같이 있을 때 그 얘길 했으면 듣지도 않았겠지. 처음 주머니를 본 순간에는 뵈는 게 없으니까. 뭔 훈련이 이따위냐."

서범진의 반응은 예상외로 긍정적이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베이면 진짜 아프냐?"

"어. 졸라 아프다. 근데 실제로 이만큼 베여보진 않아서 비교는 못 해."

그러곤 피식 웃길래 나도 웃었다.

"몇 사람이나 마주쳤어?"

이번엔 송연희가 물었다.

"둘. 각각 따로였다."

"혹시 이름도 아는 애였어?"

"하나는 아는데 다른 하나는… 흡!"

서범진이 별안간 돌아서며 장검을 휘둘렸다.

스삭. 푹!

"끄윽."

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핏물이 뿌려졌고, 동시에 서범진의 어깨에도 커다란 사이드(Scythe)가 내리꽂혔다.

서범진 근처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씨. 이 새끼 조빱인 줄 알았는데...."

곧 검은 인영이 일렁이다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이 사선으로 갈라진 최범균이 씩 웃다가 꼬꾸라졌다.

"깜짝이야… X발놈이."

"아, 저 미친놈 진짜."

서범진과 송연희의 말이었다.

최범균의 재능은 그림자밟기 뭐 그런 유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든 목적은 이해할 만하나, 이런 훈련이 끝나면 생도들의 정신건강은 따로 챙겨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서범진이 최범균이었던 것의 자리에서 보상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가 회복포션을 들이키고 말했다.

"결국엔 다 여기로 모이는 건가."

"다는 아니고 아마 이런 곳이 네댓 개쯤 있을 거다."

내가 아는 것을 말해주자, 서범진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여기서 다른데도 갈 수 있나?"

"저기랑 저기로 다 연결되어 있어."

나는 다른 출구들을 가리켰다.

"그러냐. 그럼 난 좀 돌아보고 올게."

"뭐? 뭐하러."

송연희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 좀 찾으러."

"누구?"

"그냥 있어."

하고 그가 돌아섰다.

"갈 거면 같이 가."

송연희가 끈질기게 붙잡았다.

점수 때문이겠지.

다시 만난 이상 서범진의 존재도 평가에 반영될 수 있다.

"왜…."

"뭐가 왜야. 아까 설명 들었잖아. 혼자 가고 싶어?"

"...그건 아닌데."

"그럼 다 같이 움직이자."

저 새끼 저거 권하선 찾으려는 거 같은데.

어쩐지 상황이 우스웠다.

#13화, 적응훈련(3)

같은 시간 다른 공동.

"무작정 돌아다니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강선호는 벌써 이런 공동을 두 개나 지나쳐왔지만, 또 비슷한 장소가 나타나자 고개를 흔들었다.

"후우… 네."

"아직도 많이 힘드냐?"

"아뇨. 이젠 냄새만."

강선호는 소매로 코를 가리고 있는 앳된 생도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훈련의 역겨운 실체를 알고서도 가벼운 동요조차 없던 녀석. 그는 유약했지만, 꽤 흥미로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까 그 두더지 닮은 괴수한테 니가 썼던 능력 말인데…."

"네."

"사라진 괴수는 어떻게 되는 거냐."

조금 전 탈파니언을 마주쳤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감지하고 돌아섰을 때, 가영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고 탈파니언은 그대로 공간에 삼켜졌다.

아지랑이 같던 공간의 왜곡.

마술처럼 사라진 괴수.

그 간결한 장면은 참혹한 전투에 익숙했던 강선호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없어진 건지 어딘가 갇힌 건지. 또 어딘가 있다면 거기서 생물이 살 순 있는지. 근데 성준이형이 다시 불러내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해서 그 방면으로 노력 중이에요."

"한성준?"

"아, 네. 아시네요."

"…이름만."

사실 생존 수업이 끝나고 학원앱에서 그의 프로필을 열람해봤다.

'어이가 없었지.'

200명 중 192등 수준의 마법재능.

그런데도 왠지 당당한 느낌의 독종.

그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전혀 다른 계열한테는 함부로 조언을 하는 게 아닌데.'

그러나 녀석이 한성준이란 놈을 제법 따르는 눈치여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괜찮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만약 그 친구 말이 맞다면 내가 증명해 줄 수 있다."

바꿔말하면 틀렸다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어떻게요."

"내가 신호를 주면 니 능력을 나한테 한번 사용해봐."

"네? 그건...."

"진짜도 아닌데 뭐 어때. 내가 궁금해서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훈련은요."

"생도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아서. 딱히 다른 목표도 없는데 이만하면 오래 버텼지."

"...그럼. 알겠어요."

강선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손의 클로를 바닥에 박아넣었다.

마력을 얼마나 응축했는지 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돌바닥에 틀어박히면서도 작은 소음하나 나지 않았다.

이내 그와 바닥의 접촉면에서도 푸른 마력광이 발하기 시작했다.

"준비됐다."

가영은 침을 꿀꺽 삼기고 강선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맺힌 그의 이미지를 어둠에 덮자, 강선호를 중심으로 전조 없는 공간의 일그러짐이 발생했다.

팟! 파츳! 파츠츠!

가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강선호 주변의 그래픽이 깨지는 듯한 현상.

또 그의 신체 일부가 마치 투명망토에 싸였다가 다시 드러나는 것 같은 기괴한 광경이었다.

지금껏 능력을 사용하면서 이런 '저항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선호는 바닥과 하나가 된 듯 견고했다.

공간 너머의 흡력도, 무(無)의 세계가 발하는 충족의 아우성도 공간 자체를 집어삼키진 못했다.

'공간 너머. 무의 세계.'

확실하게 느꼈다.

가영은 자기 의지로 차원의 문을 닫았다.

지금껏 과정 한번 볼 수 없던 능력이었으니, 중도에 취소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푸학!

강선호가 참던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친구 말이 맞는 거 같네."

그는 입가의 피를 훔치고 덧붙였다.

"아무것도 보진 못했지만… 분명 어떤 공간이었어. 네가 열고 밀어 넣었다면 꺼내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 느낌이 어땠어요?"

"하나는 확실하다. 만약 버티지 못했다면 자력으로 나올 수도 없었을 거라는 거."

"고맙습니다."

"감사는 한성준한테 해. 나는 내 호기심이었을 뿐이니까."

가영은 지금 느낀 감각들을 캡슐을 나가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래서 복기하기 시작했고 곧 완전히 빠져들었다.

강선호는 그걸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양방향 어딘지 모를 입구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강선호의 직관처럼 양쪽에서 동시에 손님이 도착했다.

***

"싫은데, 거지 같은데, 혐오스러운데, 개빡치는데! 뭔가… 스릴 있어. 언니, 나 좀 미친 거 같죠?"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그, 그런 거죠? 저는 제가 사이코패슨가 했네요."

"사이코패스가 뭐 나쁜 건가요."

"...?"

권하선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차유라 특유의 무감한 말투는 만사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녀 덕분이었다.

조원 중 하나가 쓰러지고「적응훈련 보상 주머니」가 처음 나타났을 때, 권하선은 사고가 정지되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녀가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성재라는 남생도가 검을 뽑아 들었고, 차유라가 전격 마법으로 그를 지져버렸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됐을 때, 차유라가 말했다.

'적응은 이런 상황에서의 적응을 뜻한 겁니다. 앞으로 마주치는 생도들은 방금처럼 덤벼들겠죠.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당합니다. 계속할 생각이 있으면 이만 일어나세요.'

그녀의 말은 명쾌했고 사리에 맞는 듯했다.

담담한 목소리에 권하선은 홀린 듯이 일어났다.

이후로 그녀는 세 명의 뚝배기를 깨부쉈다.

좀전의 '스릴'은 그런 권하선의 감상이었던 것이다.

"어! 생명력 떨어지던 게 멈췄어요."

"그러네요. 훈련이 거의 끝물이란 뜻이겠죠."

'포션은 아직 안 마셔도 될 거 같은데.'

UI를 확인하던 권하선의 눈앞에 널따란 공동이 펼쳐졌다.

"와..."

"다른 사람도 있네요."

"어디!"

종유석 천장을 보며 감탄하던 권하선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메이스와 방패를 움켜쥐었다.

맞은편 입구에서 이제 막 들어서는 생도 둘과 그녀의 시선이 얽혔다.

권하선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며 크게 소리쳤다.

"훈련은 훈련이니까요. 미안해요오오오!"

***

파지지지직!

"끼야아아!"

차유라가 불러낸 번개가 화염구를 캐스팅하던 여생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고.

콰직!

제법 선전하던 남생도도 결국 권하선이 휘두른 메이스를 정수리에 허용하고 말았다.

"쏘리요. 밖에서 봐요."

그 참혹한 결과에 질끈 눈을 감았던 권하선은 시체 그래픽이 사라지자, 덩그러니 남은 보상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강선호와 가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이 여기 있었네."

온통 피를 뒤집어쓴 권하선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자못 공포스러워서 가영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 1등! 나 영이는 안 건드릴 생각인데 이쪽으로 좀 오지?"

일련의 상황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강선호가 권하선을 향해 걸어갔다. 걸려온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았다.

가상이지만 동기들과 생사결을 펼쳐야 한다는 게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때 차유라가 나서줬다.

"저 친구는 먼저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네?"

"그냥 그런 사람이니 굳이 싸울 필요 없어요."

"…알겠어요."

권하선은 차유라의 말에 메이스를 내렸으나, 왠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강선호는 차유라에게 고맙다는 의미의 눈인사를 건넸다. 그걸 본 권하선이 차유라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원래 아는 사이에요?"

"정훈에서 같은 팀이에요."

'정훈'은 정신력 강화훈련을 생도들이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와, 그 팀 대박이네."

한성준은 진작 죽었겠지?

권하선은 문득 이 자리에 없는 진상 고용주가 떠올랐다.

'아까 보니까 서범진 그 인간이랑 팀이던데.'

비무장 박투에 다대일 상황인 것도 있었지만, 일전의 싸움 때 느끼기로 서범진은 상당한 강자였다.

권하선은 한성준의 안타까운 운명에 고개를 저었다.

***

공동의 연결통로를 한창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쿠르릉!

"뭐야."

"어머, 갑자기 왜 이래?"

지진이라도 난 듯 통로가 심하게 흔들렸다.

'시작됐네.'

모든 생존자가 최저층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보스 방 오픈 이벤트의 시작이기도 했다.

"딱 봐도 훈련 엔딩 느낌 아니냐. 그냥 계속 가."

서범진과 송연희도 그렇게 납득한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앞의 공동에 누가 있던 괴수가 부족할 일은 없겠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이제 곧 괴수의 파도가 몰려올 터, 그 루트는 상층으로 통하는 입구지 이런 연결통로가 아니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나는 리얼사운드의 감동을 만끽하며 머릿속으로 싸울 방법을 정리했다.

'근접전은 고민할 사항이 아니고.'

장거리 마법에 페널티가 있는 내가 찾은 대안은 단검을 투사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염동계의 어검술과 같다고 보면 된다.

보통 염동계를 마법계와 구분하지만, 비정형마법의 마력조종은 염동술과 맥이 같다.

염동계가 출력에 장점이 있다면 내 마력조종은 좀 더 섬세하다는 차이 정도.

나는 비정형 마법에 특화된 마법재능이니 발전시키기에 따라 꽤 쓸만한 원거리 보완 무기가 될 것이다.

단검의 무게감을 익히고 마력 출력을 조절하는 사이, 통로가 점차 넓어지며 괴수들의 흉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왔...."

앞서가던 서범진이 도착을 알리다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검을 치켜들고 달려 나갔다.

"하선아아아!"

***

쿠르릉! 쿵! 쿵!

"어어."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유라가 말했다.

"조심해요."

조심하란 소리가 저렇게 박진감 없을 수 있나?

그녀의 동물적인 감각도 위험을 감지하던 참이었다.

쾅!

권하선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종유석을 방패로 막아냈다.

"무슨 일이지?"

두두두두두두두두.

지진 자체는 분명 멎었는데 지축을 흔드는 또 다른 울림이 이어졌다.

울림은 조금씩 커지더니 공동의 출입구로 집중됐다.

"아…, 드디어!"

울림을 따라 입구를 향하던 권하선이 소리쳤다.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려오는 것은 수를 헤아리기 힘든 괴수 무리였다.

"…마무리는 마음에 드네요."

강선호의 말이었다. 그는 훈련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미소를 내보였다.

"내 쪽으로는 오지 마세요. 전력을 시험해 보고 싶으니까."

차유라가 그렇게 말하고 우측으로 거리를 벌렸다.

고대하던 실전 체험이 그렇게 시작됐다.

10분.

권하선이 체감하기로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확실히 유익하고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퍽! 쾅! 퍽! 쾅!

"아아악! 이 괴수새끼가!"

그러나 찢기고, 잘리고, 함몰되고, 타들어 간 괴수의 사체가 쌓여갈수록 알 수 없는 불안이 조금씩 자라났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달려드는 괴수의 눈 속에서 그 불안의 정체를 발견했다.

이곳엔 자신이 각오한 장렬한 죽음 따윈 없을 것이라는.

무지성의 식탐만 가득한 괴수의 눈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칼 맞아 죽고 싶다.

찔려죽고 싶다.

아니, 도끼, 창이라도!

"X바아알!"

투신이 강림한 듯했던 강선호의 몸에도 셀 수 없는 상처가 그득했고.

뇌신의 딸 같던 차유라의 광범위 벼락 세례도 폭이 많이 줄어들었다.

맞다. 영이....

"...!"

걱정했던 막내는 예상외로 가장 안정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저걸 싸움이라고 볼 수 있나.

가영에게 접근하는 괴수들은 마치 투명의 장막 안으로 기어들어 가듯 그냥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크르르.

"으아악!"

쿵! 퍽!

내 앞가림이나 잘했어야 했다.

한눈을 판 사이 홍안의 늑대 한 마리가 다리를 물고 늘어졌고, 중심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막을 수 있던 갑피 곰탱이의 펀치를 얻어맞았다.

권하선은 이제 틀렸음을 직감했다.

"아흐, 진짜 싫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괴수들의 린치와 만찬이 이어지리라.

"하선아아아!"

'서범진?'

퍽!

소름 끼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뜬 그녀는 곰탱이의 미간에 박힌 단검을 발견했다.

권하선은 곰탱이의 미간이 제 것인 양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 저 인간한테 도움받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한데 그 순간, 단검이 귀신이 씌운 것처럼 홀로 뽑혀 날아가는 게 아닌가.

그녀의 시선이 단검의 경로를 좇았고 저 멀리서 받아드는 한 남자에 이르렀다.

"어어, 너!"

쟤가 어떻게....

그는 39등의 진상 고용주였다.

#14화, 업데이트

'나쁘지 않네.'

7급 이하의 괴수라 위력을 평가할 정돈 아니나, 정확도는 만족스러웠다.

단검을 회수하는 순간,

"어어, 너!"

권하선이 나를 가리키며 토끼 눈을 떴다.

"죽을 거 살려줬으면 한눈팔지 마라."

쾅!

그녀는 퍼뜩 고개를 돌리고 날아드는 공격을 방패로 막아냈다.

"하선아! 금방 간다. 조금만 버텨!"

그사이 서범진이 괴수들을 가르며 그녀에게 전진했고,

"훈련 안 끝났어요. 그 이상 다가오면 공격합니다!"

권하선은 질색하며 소리쳤다.

과연 네임드 탱커다운 철벽이었다.

'나라도 저 새끼 싫어하지 말아야겠다.'

여기 오게 된 경위를 아는 사람으로서 뻘쭘하게 멈춰선 서범진의 뒤통수가 조금 안타까웠다.

크르륵!

슬슬 내 쪽에도 괴수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력 해방〉의 영역을 발동하고 괴수들을 맞아들였다.

쐐액! 쐐액! 쐑! 펑펑펑!

송연희의 마력화살이 좌우를 마구 스쳐 날아갔다.

이런 씨....

그냥 마력화살도 살벌한데 그녀의 속성은 무려 '폭(爆)'이다.

훗날 송연희는 쾌속기동을 갖춘 MLRS(다연장 로켓시스템)가 되지만, 아직 이동하면서 속사는 무리인 모양.

'그렇다고 나를 울타리로 쓰면 안 되지.'

나는 장내를 둘러 그녀가 안전할 만한 곳을 물색했고 금방 적당한 위치를 찾아냈다.

가영이 대 괴수전 한정으로 쓸모가 있으리란 생각은 했었지만, 예상보다도 훌륭하게 한 사람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력 소모가 큰 수단인 만큼 벌써 많이 창백한 상태였고, 송연희가 그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듯했다.

"넌 저기 영이 옆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다."

"쟤? 왜 난 지금 괜찮은데."

"내가 정신 사나워서 안 되겠는데."

"하! 너 지원하고 있는 거잖아."

"니가 재채기라도 하면 내 대가리가 터질 수도 있지. 쟤랑 나란히 싸워."

송연희가 꺼리는 게 괴수의 접근과 파편 따위가 튀는 것이니, 장막과도 같은 가영의 능력은 그녀에게도 나쁘지 않은 조합이리라.

송연희가 입을 삐죽이곤 가영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나저나 미친 라인업이네.'

강선호, 차유라, 권하선, 송연희, 서범진. 이들 5인이 한자리에 모인 건 본편에서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거기에 가영까지.

예상보다 훈련이 길어질지 모르겠다.

"아이 씨! 다가오지 말라고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여전히 서범진의 접근을 철저히 경계하는 권하선의 외침이었다.

둘의 관계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힘이 닿는 대로 '저항'해보고 죽겠다면 힘을 합치는 게 유리했다.

"야 권하선! 상황 파악이 안 돼? 설령 뒤통수를 맞아도 괴물한테 씹히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 그만 튕기고 같이 싸워."

대꾸는 없었으나 권하선은 곧 서범진에게 등을 보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쩐 일로 말귀를 한 번에 알아먹네.'

조금 전 외침 때문인지 강선호와도 눈이 마주쳤다. 따로 인사 한번 한 적 없이 시선 교환만 두 번째다.

대충 알아들었겠지.

나는 그대로 강선호를 향해 걸어 나갔고, 녀석은 말없이 주 견제 범위를 180도 회전하며 나에게 등을 맡겼다.

[인물 '강선호'와 관계를 맺음 - DP 획득 70]

불쑥불쑥 달려드는 괴수들에게 초 근거리에서 마법을 적중시키며 아슬아슬한 전투를 이어나가던 나는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영역을 생성했다.

그리고 모두가 들으라고 소리쳤다.

"죽어라 싸우는 건 좋은데 전력을 다하지는 마세요!"

말이 이상한가.

"그게 뭔 개소리야!"

아니나 다를까 권하선이 지적했고, 나는 장기전이 될 것이란 걸 그녀의 눈높이로 설명했다.

"딱! 여기 있는 괴수의 다섯 배 더 있다고 생각해. 그럼 어쩌란 얘긴지 알 거다."

"아니, 무슨! 너 그거 구라지? 니가 어떻게 알아!"

"구조가 그래. 여기만 들어차 있는 게 아니거든."

"X바아알!"

권하선의 절규를 끝으로 모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힐끔 돌아보니 강선호도 마찬가지.

젠장. 생존을 위한 발버둥에 조절할 페이스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게 맞다.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고!"

모두가 잘 버텨줬으면 하는 마음에 계획에 없는 지휘까지 하게 됐다.

나는 이 기회를 오래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조금씩 붙어서 우리끼리 사이를 좁혀야 해."

나는 권하선과 차유라에게 가영 쪽으로 붙으란 신호를 주고, 강선호와 함께 그들의 중앙쯤 되는 위치로 서서히 이동했다.

화르륵! 파직! 쩡! 콰드득!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괴수들에게 마법을 난사하며 공간을 사수했다.

속성을 가리지 않는 화려한 마법의 향연에 괴수들이 영역 밖에서 주춤거렸다.

경계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나 괴수들의 동물적 본능은 내 '영역'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영역이 괴수들을 덮쳤다.

그리고 벼락이, 화염 장벽이, 얼음송곳이 놈들을 휘감았다.

어느새 우리는 딱 서로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로 대형을 갖췄다.

그렇게 처음보다 안정적인 싸움을 이어나갔다.

우연한 시선의 흐름 속에 차유라와 눈이 맞았다.

조금 지쳐 보이는, 그럼에도 무감한 그녀의 두 눈은 내 마법재능에 경악하고 있었다. 아니, 귓불이.

"누나, 뒤!"

왜인지 차유라가 부르르 떨며 돌아섰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나는 공격을 한 대도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빌어먹을 특성 탓이었다.

***

송연희는 눈을 뜨자마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후우."

죽는 순간까지 괴롭혔던 지독한 냄새가 사라졌다.

통각(痛覺) 연동 레벨은 확실히 실제보다 낮게 설정되어 있었지만, '죽음'의 순간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물론 비교 가능한 경험이 없긴 했다.

그 말인즉 아주 더러웠다.

'이런 걸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까.'

의식의 점멸, 암전을 거쳐 다시 캡슐의 육신을 느끼기까지 '육감의 분리'를 잠깐 경험했는데, 그 과정 또한 유체이탈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절차대로 캡슐을 벗어났다.

"대체 뭐하길래 아직도 안 나오냐."

"시간이 몇 시야."

"이럴 거면 관전 기능이라도 만들어주든지."

"어, 나온다!"

캡슐 뚜껑이 열리자마자 시끌시끌한 소음이 쏟아졌다. 먼저 사망한 생도들이 통제 없이 떠들어대고 있음이리라.

그러나 XR 장비실에는 다른 손님도 와 있었다.

교관들이었는데, 소란에 한몫하고 있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중엔 담임교관인 하정혁도 보였다.

"저기, 안에서 뭔 일 있었어요?"

캡슐 근처에 서 있던 여생도 하나가 송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통성명도 안 한 생도였다.

"그냥 죽을 때까지 있다가 나온 거예요."

"아… 근데 왜 다 같이 나와요?"

"다 한방에 쓸려서요."

"네? 무슨 말이에요?"

이번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물어본 생도의 주의가 돌아갔다.

막 적응훈련 담당교관이 관리자 캡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박 교관님.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다들 어쩐 일로?"

"점심이 한참 지났는데도 수업이 안 끝나니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왔지요."

그 말에 박 교관이 스마트위치를 확인했다.

"허허, 시간이."

「오후 1시 28분.」

송연희도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고 저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훈련이 4시간이 넘게 계속된 것이다.

박 교관은 마치 꿈을 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글쎄 이놈들이 최종관문을 열어버리는 게 아닙니까."

"뭐요?"

"...보스룸 말입니까?"

"예. 열자마자 끝나긴 했지만, 열었습니다."

"...."

"그게…."

"허…."

교관들은 하나같이 얼이 빠진 모습이었고,

생도들은 무슨 얘긴지도 모르는 듯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송연희가 생각하기에 자신도 저들과 같은 처지였어야 했다.

...만약 저 남자와 한 팀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지금 상황엔 관심도 없는 듯, 가영이라는 꼬맹이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체가 뭐야 대체.'

한성준은 해외의 초상현상 커뮤니티에서 얻은 정보라 말했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어색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녀가 느끼기로 그가 가진 것은 정보가 아니라 경험이었다.

글이나 말로는 아무리 배웠다고 한들 그가 보인 것들... 그 여유, 판단, 지휘는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강화반이 하 교관님 반이지요?"

"네. 하하, 제가 맡고 있습니다."

"훌륭한 인재가 참 많은 거 같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영상기록으로 확인하시고, 저는 수업부터 마무리 좀 하겠습니다."

"아, 그러시죠."

"결과는 상태변화, 환경파악능력, 상황적응력 등을 종합평가해 추후에 학원앱에 게시하겠다.

어…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는데, 바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시간은 오후 수업 교관님께 양해를 구해 조율해보겠다. 변동된 시간은 스마트워치로 고지될 거다. 고생 많았다. 이상."

송연희는 장비실을 빠져나가면서도 한성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그러다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는 한 손을 들어 엄지를 세웠다.

'뭐야, 같은 조 한번 한 거로 왜 저렇게 친한 척이야.'

입을 샐쭉하던 그녀는 한성준의 소지를 보고 퍼뜩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

'맞다. 반지!'

송연희는 두리번거리며 차유라를 찾기 시작했다.

***

달달달!

협탁에 올려둔 스마트워치가 짜증 나는 소음을 만들었다.

단잠이 깨졌다.

"…아이 씨."

누가 매너 없이 주말 아침에 메시지를 날리나.

오늘은 주말 첫날이다.

스마트워치를 확인하니 메시지는 아니었다.

「1건의 업데이트가 있습니다.」

'뭐지?'

다른 앱이라면 그냥 미루겠는데 학원앱의 알림이다.

나는 업데이트 수락을 누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이런 씨.

이번엔 메시지가 맞다.

(권하선 : 야 학원앱 업뎃 했음?)

(권하선 : 시장 확인함?)

(권하선 : 이거 점수가 그냥 점수가 아니었네)

(권하선 : 너 그제부터 나 점수 안 준거 알지?)

(권하선 : 아니지 수욜부터니까 3일치)

(권하선 : 30점 쏴라 지금)

(권하선 : 빨리)

(권하선 : 당장)

(권하선 : 어서 롸잇나우)

(확인하게 좀 닥쳐봐)

(권하선 : ㅇㅇㅋㅋ)

학원앱을 실행하자, 연락망 탭 옆으로 못 보던 항목 두 개가 추가됐다.

하나는 권하선이 말한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리'라는 탭이다.

시장 UI를 대충 둘러보니 생도가 직접 물품을 등록하고 판매할 수도 있는듯했다.

통용되는 화폐는,

[ 총 점수 : 37.0 ]

점수...

─ 훈련 점수 합계 : 37

그러니까 외부 위젯에 표기되는 '정훈' 점수와 같은 것을 뜻하는 거 같았다.

(이거 정훈 점수랑 같은 거? 확인해봄?)

(권하선 : ㅇㅇ 영이한테 1점 날려 봄. 맞대)

(점수를 날려?)

(권하선 : 생도 이름 클릭하면 바로 보낼 수 있음. 메신저에서도 가능함)

(일단 ㅇㅋ)

바로 권하선의 이름을 누르자, 프로필과 연락처뿐이던 메뉴에 거래, 초대 항목이 생성됐다.

'거래 관련은 알겠고.'

다음은 동아리.

이건 안 봐도 알겠다만.

클럽, 써클, 부. 뭐라 부르던 비슷한 개념이겠지.

탭을 클릭하자 설명이 떠올랐다.

────────────

「아직 소속된 동아리가 없습니다.」

[가입요청]

[창설] ※100점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동아리 활동 과목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기본 1과목 외 추가등록비용 발생.)

-활동 실적에 따라 점수를 지원받습니다.

*동아리 전용과제 입찰에 참여하고 낙찰받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완료 시 보상이 지급됩니다.

*동아리의 구성원들은 정규수업을 제외한 모든 야전훈련 간 아군으로 인식됩니다.

*동아리 전용시설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

이거 완전히....

"길드네."

이 부분, 저 부분에서 느끼긴 했다.

그리고 취합된 그림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초상사회를 선도해 나갈 미래 동량. 그들이 배우는 시스템.

그건 이미 연습이 아니라 시작을 뜻했고, 이곳에서 생도들이 만들어가는 구조가 이 나라의 시스템으로 굳어질 것이었다.

"컨셉 확실하구만."

~지이잉.

(권하선 : 파악 다 했으면 빨리 30점 보내라)

근데 이 자식은 아까부터 자꾸 되지도 않는 소릴 하고 있어.

(30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매일 협상하기로 하지 않았냐)

(너 3일 내내 수업 때 말곤 기숙사에 처박혀 있었는데 30점 소리가 나옴?)

(권하선 : 부르지도 않았잖아)

(니가 PTSD니 뭐니 징징대서 놔뒀지)

애초에 PTSD는 자기가 아니라 머리통 깨진 생도들이 생기는 거 아닌가?

적응훈련 직후 식당에서 권하선을 마주친 남생도 하나가 경기를 일으켰는데, 그때부터 그녀는 생도들 보기가 미안하다고 외출을 삼갔던 것이다.

권하선이 잠깐의 텀을 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권하선 : 그럼 얼마줌)

(거의 놀았으니 하루 1점씩. 그리고 적응훈련 때 내가 너 살렸으니 -10점. 합이 -7점.)

(권하선 : 아이씨 그게 어케 되는 건데;;)

(나한테 7점 보내라고.)

#15화, 병기지급신청서

개소리하지 말라며 버티던 권하선은, '이번 한 번 봐준다.'라는 말에 곧장 점수를 보내왔다.

────────────

(권하선 ← 거래 +10점)

─ 훈련 점수 합계 : 47

────────────

피식. 그것도 10점으로.

참 파악이 쉬운 성격이다.

자존심이 얼마나 높은지 그녀는 '봐준다, 내가 참는다.' 같은 유의 말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권하선 : 됐냐? 이제 빚 같은 거 없다)

(권하선 : 글고 거래는 공격 제한 횟수에 안 들어가니까 협상은 다섯 번 그대로 남은 거임.)

(ㅇㅇ 근데 너 쫌 고정관념이 있는 거 같다)

그녀를 고용했던 이유는 첫날 한정으로 내 준비가 덜 됐었기 때문이고.

(권하선 : ?? 뭐가)

이제 정훈 같은 비무장 훈련에서만큼은 내게 점수를 뺏을 수 있는 생도는 없다고 봐야 했다.

'강선호는 좀 힘들려나....'

그놈은 클로가 주무기라 비무장의 전투력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용협상이 꼭 내가 널 고용하는 걸 뜻하는 건 아니지)

(권하선 : 갑자기 그건 또 뭔 개솔ㄹㅣ야)

(나 필요하면 말하라고. 남은 3주 통틀어서 30점에 해줄라니까.)

(권하선 : ㅈㄹ 내가 미쳤냐)

(그냥 그런 선택지도 있다는 거다. 난 좀 더 잔다.)

(권하선 : 너 나랑 있을 때 뒤통수가 두렵지 않겠냐)

(권하선 : 니가 안주면 내가 못 가져갈까? 어?)

얘는 보니까 동아리 관련 설명은 읽어보지도 않았네.

같은 동아리원은 아군으로 인식된다고 하니, 이제 한편을 먹을 의사만 있다면 공격 횟수 제한과 무관하게 뒤통수 걱정은 사라진다.

직접 운영하는 총대를 메긴 싫지만, 앞으로 청송이 나눌 과실을 온전히 받아먹으려면 동아리 활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차유라랑 같은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지켜보지 뭐.

권하선한텐 더 잔다고 했으나, 막상 잠이 다 깬 상태였다.

'밀린 뉴스나 검색해 봐야겠다.'

나는 노트북을 배 위에 올리고 뉴스 포털에 접속했다.

키워드를 '초상'으로 설정하자, 뉴스목록이 필터링됐다.

[유정필 초대부장관 "초상인재 유출 막으려면 활동 환경 조성해야"]

[초상에너지개발 부속 법안 승인, 민간기업 진출 길 열려]

[과기부, 초상기술혁신부로 개편]

[특수재난경계청 '초상대응활동면허' 발급 추진]

[초인용병 국내 활동기반마련 시동]

[가국현 초기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D-4]

[전경련, 초상산업발전에 던전민영화 뒤따라야]

[정부, '단계적' 던전민영화 로드맵 있다]

....

'얼씨구.'

뭐가 이렇게 많냐. 거기다 내용도 기가 막혔다. 청송학원 개원 전후로 지지부진하던 법안들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생각보다 게이트 통제가 빨리 풀어질지도 모르겠다.

'근데....'

아니겠지-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아)

(가영 : 네 형)

(쫌 실례되는 질문인데.. 너희 아부지 뭐 하시노)

(가영 : 아버지요? 그냥 교수하시는데요.)

(혹시 가국현 교수님..?)

(가영 : ㄷㄷ 어떻게 아셨어요?)

(맞구나... 뉴스 보고 알았다)

(가영 : 뉴스요??)

가씨 성이 눈에 띄어서 설마 했는데.

(너 이 새끼 아부지한테 관심 좀 가져라)

그나저나 초기부장관이면 대통령권한대행 4순위. 국가의전서열로 따져도 국방장관보다 7위나 높다.

평시엔 알 필요도 없는 종이 체계일 뿐이지만, 닥칠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조금 식겁한 사항이다.

영이랑은 절대로 원수가 되어선 안 됐으니까.

녀석한테는 '잠적'의 비밀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도움도 받을 계획이었다.

...뭐 내각은 여러 번 개편 되니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보다.

이번에 적응훈련에서 느낀 건데 깡스탯의 성장플랜이 시급했다.

분명 감각 향상에는 도움이 됐으나 어디까지나 가상이었기에 경험치 상승 폭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꾸준한 트레이닝과 학원의 물적 지원을 감안해도 1년에 1업이나 겨우 할까다.

'이런 속도를 믿고 있기엔 아무래도 불안하지.'

레벨이 따로 없는 로코33에선 5스탯(힘, 민, 체, 지, 마) 상승에 경험치가 필요하며 그 합으로 플레이어의 등위를 결정짓는다.

빠른 방법으로 아이템 보정이 있지만, 그만한 DP가 없고 현재의 DP 수급 속도에서 능력치 추가는 가성비도 좋지 않았다.

니게리움 반지의 옵션이 최선이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결국.... 진짜 실전이 필요하네.'

국내 활동법안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해도 발효까지 얼마가 걸릴진 모른다.

실전 문제는 청송 입학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뭐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모든 게이트는 출입 통제 구역이지만, 인적 없는 산지나 섬 따위에 발생해 때를 놓쳐버린- 위험구역에는 풀려난 괴수들의 생태계가 만들어져 있으니.

물론 그곳 역시 출입이 금지되고 수렵도 불법이나....

'안 들키면 되는 거지.'

아니 무조건 안 들켜야 한다.

불법이란 얘기는 곧 걸리면 퇴학이란 뜻이었으니까.

'7급, 아니 6급까지는 혼자 감당할 수 있으려나.'

아주 공무원스러운 이 등급 시스템은- 괴수, 초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수준까지 같게 봤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괴수 9급은 9급의 초인 한 파티(4~5인)가 '안전'하게 사냥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남은 정훈기간 동안 좀 더 철저히 준비해둬야겠다.

6급을 넘보는 것도 순전히 게임 속 경험에 기반한 뇌내 시뮬레이션일 뿐이니까.

다시 뉴스 기사로 신경을 돌렸을 때였다.

-훅! 아, 아.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침대 위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강선호, 이나은, 한성준 이상 3인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교무실로 오기 바란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스마트워치가 두 번 울렸다.

(가영 : 형 무슨 일 있어요?)

(권하선 : 너 뭔 사고쳤냐)

'이런 거 오랜만이네.'

잘못한 게 없음에도 교무실 호출이란 게 느낌이 그렇다.

그러나 같이 부른 두 사람을 보니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

강선호는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 부지런하네.'

방송을 듣고 바로 움직였음에도 기숙사 근처에서 마주치지 않았다는 건 녀석이 정련관에서 오는 길이란 뜻이다.

우리는 교무실 문 앞에 거의 동시에 도착했고 눈도 마주쳤으나, 이번에도 대화는 없었다.

녀석이 원래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고 나는 나대로 강선호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이다.

그저 나란히 교무실에 들어섰다.

이나은은 먼저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제 돈 주고 제가 쓸 장비를 만드는 게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용단반 담임교관과 설전 중이었다.

"학원 방침이…."

"통상, 학원이 제작 지급하겠다는 방침이지 직접 제작을 금지하는 방침인가요?"

"그렇지. 아무래도 그게 형평성 문제도 있고…."

"그러니까 제가 형평성에 어긋날 만큼 고사양의 장비를 원하는 게 아니라구요. 저는 다만 완벽한 맞춤을 원하는 겁니다. 학원이 대행하면 제작과정에 관여하기 어렵고요."

역시 그거 때문이었나.

쟤는 백지로 냈나 보네.

"아, 너희는 이쪽으로 와라. 주말에 불러서 미안하다. 병기 지급신청서 문제로 확인할 게 있어서."

하정혁 교관이 나와 강선호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한번 불릴 건 예상했다. 이나은, 강선호와 같이 불려서 다른 일인 줄 알았다.

"선호는 어떤 무기든 훌륭히 소화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백병전에 유리한 무기는 거의 정해져 있지. 좋은 재능을 두고 굳이 비주류 무기를 선택했기에 한번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걱정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클로는 이미 실전에서 오래 써온 무기고 이제 와서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냐. 알았다."

"...."

"선호는 가봐도 좋다."

"…예."

강선호는 가보라는 말에도 뭉그적대다 돌아섰다. 그 와중에 나를 슬쩍 보는 게 내 문제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강선호가 남 일에 관심 가지는 건 좀 의외네.

"성준이는 따라오너라."

하정혁은 굳이 자리를 옮겨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단검의 재원을 적어놨더구나."

"네."

"나도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알겠다만. 그래도 마법계는 내 분야가 아니라서 다른 분들을 모셨다."

하정혁이 교무회의실 문을 열자, 안에는 마법이론의 장운석 교수와 함성아가 미리 자리해 있었다.

"헤이, 동무. 잘 지냈어?"

함성아는 돗대(마지막 담배)를 양보했으면 다 준거라며 나를 동무라고 불렀다.

"예, 안녕하세요."

"반갑다. 앉지."

장 교수는 그런 함성아가- 익숙한지 별 반응 없이 자리를 권했다.

함성아는 멀찍이 정면에, 하정혁이 그 좌측에, 그리고 장 교수가 나와 가까운 우측에 앉았다.

"혹시 생도들에게 지급될 병기의 재료를 알고 있나?"

장 교수가 내게 물었다.

"아뇨. 모릅니다."

"무구에는 포르테늄을, 마법보조구에는 성마목(醒魔木)을 사용할 예정이라네."

"200명분 전부 다요?"

장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최상의 재료다.

아마도 한 사람분의 재료비만 수천에서 수억 원.

그러니 병기제작에만 수백억의 예산이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성마목의 효용을 모르진 않는 눈친데… 마법계인 자네가 단검을 선택한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나?"

나는 저들이 쉽게 납득할 만한 대답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전투마법사를 지향하며 원거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는 건 입으로 할 얘기가 아니었다. 저들에게 내 약점을 까발릴 필요도 없을뿐더러 특성까지 설명할 생각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아마 함성아까지 자리한 이유는 훈련 영상을 봤기 때문이겠지.

〈창조적 시선〉이 저들이 짐작할 만한 것들을 차례로 뜯어봤다.

그리고 설득이 불필요한 원론적인 대답을 만들어냈다.

"저를 마법계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 교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반박은 하정혁이 대신했다.

"그게 무슨…, 너는 분명히 마법재능이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다 속성 재능!"

마법에 조예가 없는 이라도 영상을 봤으면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영역'이 없었다면 변변찮은 비정형 마법임을 한눈에 알아봤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함성아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굳이 한쪽으로 정의하자면 저는 염동계에 가까울 겁니다."

"...."

함성아가 대놓고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녀가 아직 학원에서 자신의 능력을 공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우린 자네가 적응훈련에서 보인 능력을 이미 확인한 상태네. 자네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 테지?"

그제야 다시 입을 연, 장 교수가 설명을 요구했고.

나는 말 대신 마력을 함성아에게 뻗어갔다.

"...."

"...."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워낙 격의 차이가 큰 만큼 '뭘 하려나 보다'하고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내 마력이 테이블을 반쯤 건넜을 때, 함성아에게서 패도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거센 기운은 회의실을 한차례 휘돌고 나서야 정적상태에 접어들었다.

함성아가 눈썹을 찡긋했다.

이제 어떻게 해 줄까- 라고 묻는 느낌.

나는 그대로 있으란 의미로 양 손바닥을 내보인 뒤 그녀 마력의 끝자락을 붙잡고 서서히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력의 흐름이 술식의 형상을 갖췄다.

화르륵!

테이블 위 허공에 주먹만 한 불꽃이 피었다.

들어간 마력은 온전히 함성아의 것이었다.

"오우, X발. 마, 마법! 내가 했어!"

"...!"

"...!"

함성아가 흥분하는 바람에 불꽃은 금방 사라졌지만, 세 사람은 한동안 불꽃이 있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어떻게 설명이 좀 됐을까요?"

퍼뜩 정신을 차린 정 교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함성아가 소리쳤다.

"조용!"

그녀는 감각을 잊기 전에 다시 해보려는 듯 마력을 천천히 조종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정혁과 정 교수의 고개도 다시 함성아를 향하길래 나는 조용히 회의실을 벗어났다.

의미는 잘 전해졌으리라.

이걸로 나보고 완드나 스태프를 들란 얘기는 안 하겠지.

실상 비정형 마법으로 염동계를 흉내 냈지만,

반대로 염동계가 마법계에 좀 걸쳐있다고 말한 셈이다.

-따르르르르르르릉!

본관을 막 벗어났을 때 화재경보가 울렸다.

...저렇듯, 염동계는 출력 면에서 조절이 까다롭다는 차이가 있지만.

"어?"

[인물 '함성아'에게 매우 인상적인 기억. - DP 획득 125]

[인물 '한성준'의 존재감이 단순 '등장'의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새로운 이벤트 생성 기준이 충족됩니다.]

못 보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16화, 인물 한성준

다시 정련관으로 향하던 강선호는 본관 쪽에서 들려오는 화재경보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멀리 보이는 건물 2층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

2층은 교무실.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소방 시스템을 떠나 웬만한 화재쯤은 마법계 교수 한 명이면 쉽게 진압할 수 있을 터였다.

걱정할 필요 없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팀원들을 발견했다.

그제야 아차 싶은 강선호가 머리를 긁었다.

"야, 강선호! 너 자꾸 개인행동 할래?"

"교무실 건은 개인적인 일이라서...."

"넌 메시지 확인도 안 하냐? 우리도 방송 듣자마자 바로 1층에 모였어."

송연희의 면박에 허전한 손목을 더듬어본 강선호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까 정련관에서 운동할 때 풀어두고 깜빡했어."

"애가 둔한 거야, 아니면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니가 아무리 강해도 여럿이 작정하고 덤비면 장사 없다니까?"

"워치를 풀어놨다잖냐. 잔소리 좀 그만해라."

최범균이 툭 던진 말에 송연희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잔소리? 너 지금 잔소리라고 했어?"

"아, 아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송연희가 여전히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최범균이 얼른 강선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앞서 걸었다.

"솔직히 이 새끼는 벌써 유명해서 혼자 다녀도 건드릴 애들이 없을걸? 그 용단반에 이나영인가? 신성그룹 손녀."

"이나은이다."

"어. 걔네 패거리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사실 송연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이나은이었고, 다른 종류의 접근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팀 구성에 배경을 동원했듯, 더 큰 배경을 업은 이나은이라면 팀원들을 충분히 흔들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까 아까 방송에서 이나은 걔랑 그 새끼도 같이 부르지 않았냐?"

"한성준."

"한성준?"

강선호의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본 최범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송연희는 물론이고, 없는 듯 뒤따르던 차유라까지. 그놈 이름 하나에 주목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딴 X밥새끼한테 저렇게 지대한 관심들을 두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아까 송연희의 잔소리 때문에 하지 못한 질문이 떠올랐다.

"교무실에서 왜 부른 거냐?"

"병기지급신청서 때문에."

"아."

강선호의 독특한 병기 취향을 이미 알고 있던 팀원들은 바로 알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곧바로 송연희가 물었다.

"이나은이야 보나 마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을 테고…, 한성준은 왜 불렀대?"

"먼저 나와서 못 들었어."

"안 봐도 알겠네. 병신이 지 주제 파악 못 하고 재능에 안 맞는 허세용 무기를 골랐다거나…."

최범균이 뻔하다는 듯이 빈정대는데 송연희가 돌연 소리쳤다.

"맞다, 걔…! 마법계였어."

"…!"

강선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느닷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얘 왜 웃어? 아니, 너는 또 표정이 왜 그러냐."

"...."

최범균을 제외한 세 사람은 적응훈련에서 한성준과 함께 전투를 치렀으니 당연히 그가 마법계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고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단검이었음을.

"아, 뭐냐고. 그 새끼가 마법계인 게 어쨌다는 건데."

최범균이 닦달하자, 송연희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마법을 난사하면서 보조구를 안 들고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마법계 능력자의 병기는 마력의 응축이나 증폭에 도움을 주는 3종의 보조구(스태프, 완드, 룬스톤 계열)뿐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랬어? 하, 같잖은 새끼. 거봐, 내 말이 맞네. 허세충이라니까."

송연희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안 되는 능력을 내비치려는 게 허세다. 멍청아.

그런 의미에서 한성준이 보인 것은 여유에 가까웠다.

'만약 그날 그의 손에 적합한 보조구까지 들려있었다면....'

~지이잉.

진동 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워치를 확인했으나, 착신자는 차유라였다.

(아버지: 네가 보내준 반지 분석이 끝났다.)

메시지를 확인한 차유라가 팀원들에게 통화 좀 하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송연희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나도! 주말이니까 니들도 집에 전화 한 통씩 돌리든지."

***

(권하선: 야 근데 너 혼자 갔어?)

(권하선: 아직 교무실임?)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한참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기숙사다.)

(권하선: 난 또 어디서 얻어터지고 있는 줄)

(아쉽게 됐네ㅋㅋ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 밖에 사람이 없었음)

(권하선: 아무튼 포인트 달란 소리 안 할 테니까 또 어디 가면 불러. 아깐 생각을 못했다.)

적응훈련 이후로 권하선의 약자 취급은 사라졌지만, 마법계가 보호 대상이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일대일, 다대다 할 것 없이 정훈에서 마법계가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비살상 마법으로 한정되는 스킬에 위력조절도 필수였기 때문.

물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나한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아무튼 고마운 얘기.

(오ㅋㅋ 알았다)

(권하선: 너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니가 처맞고 다니면 내가 쪽팔려서 그래.)

(권하선: 이제 너랑 나 같은 팀인 줄 다 아니까)

피식.

나는 스마트워치를 풀어놓고 새로 업데이트된 알림 메시지를 탐구했다.

[인물 '한성준'의 존재감이 단순 '등장'의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새로운 이벤트 생성 기준이 충족됩니다.]

두 개의 메시지는 인과(因果)로서 결국 한 문장이나 다름없다.

즉, '넌 이제 단순히 등장하는 것 이상의 존재이니 무슨 일을 벌이면 진행에 영향을 줄 거야.'라는 뜻이다.

'이제야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건가.'

시민 NPC가 등장하나 인물이 아니었듯….

나는 '알 수 없음'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 왔다.

DP의 수급을 위해 볼륨 증가는 꼭 필요하지만, 알고 있는 미래를 뒤트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 착각하고 있었네.

'지금까지는' 괜한 걱정을 했었다는 소리다.

개발자 UI를 샅샅이 뒤져봤다.

직접 이벤트를 생성/편집할 수 있는 메뉴 같은 건 추가되지 않았다.

'자연히 생성될 거란 얘긴데….'

게임에서 보통 이벤트라는 것은─

사건, 관계, 그리고 결과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시퀀스를 말한다.

다른 볼륨 인정조건들인 〈기록될 사건, 기억, 관계도〉 따위와 일부 중복되지만, 명백한 구분이 바로 본편에 미치는 영향의 유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편 시점에 이벤트가 아닌 사건은 일부러 파고들어야 알 수 있는 부가정보 정도라고 하겠다.

'가능하면 이벤트 생성을 피하고 다른 것들로 볼륨을 채우는 게 최선이겠네.'

잠깐은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벤트를 제외한 나머지가 중심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게 확실해졌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

탁자를 긁는 진동 소리에 눈이 떠졌다.

"에이 씨."

쉬게 놔두질 않네.

체감하기로 다시 눈을 붙인 지 10분이 채 안 되는 거 같다.

나는 짜증스럽게 액정을 확인하다가 퍼뜩 콕팟을 빼 귀에 꽂았다.

"네,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네 엄마가 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많길래 전화했다.

"아, 안 그래도 오늘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솔직히 전혀 생각 못 했다.

-내가 일러두고 싶은 얘기도 있고.

"네… 말씀하세요."

-....

말을 하고 나도 아차 싶었다.

빨리 용건만 말씀하시란 뜻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다.

사실 이런 응대 자체가 아버지의 평소 성격에서 기인한 거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

뭐랄까.

-…학교생활은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네. 뭐 그럭저럭."

대답하고 하고 보니 이상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도 한 번도 청송 얘길 한 적이 없다. 애초에 입학 후 처음 하는 통화이지 않은가.

-지인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그분이 제 얘기를 해요? 누군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학원 관계자 중 아버지와 연결고리가 있을 만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쉽게 말해 함성아를 제외하면 전부 '급'이 안 맞는다.

-누구라고 하면 네가 아느냐.

"몰라도 알아야죠. 아버지한테 제 소식을 전할 분이면 저도 알아두는 게 맞죠."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진짜로 뭘 잘못 드셨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송영근이라고 기업인인데, 너는 처음 들어 볼 수도....

"대화그룹 회장이요?"

-알고 있구나.

모를 수가 있나.

현시점의 대화는 신성그룹처럼 전 국민이 다 아는 기업은 아니다. 주력이 방위산업이었으므로.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눈치챘다.

송연희가 왜 자기 아버지한테 내 얘길 했는지는(그것도 칭찬을) 의문이지만.

아마도 <자녀분 재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쯤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겠지.

어쨌든.

'아버지가 대단한 건지, 송회장 안목이 대단한 건지.'

훗날 대화그룹이 군부의 편에 서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두 사람의 커넥션이 벌써 이뤄져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직 아버지는 삼성장군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더구나. 그 양반도 들은 얘길 텐데 어찌나 자세히 전하던지.

"딱히 눈에 띌 일도 없었는데, 그 친구가… 과장한 부분도 있을 거예요."

-내 앞에서까지 겸손할 필요는 없다. 보조구도 없이 다 속성 마법을 난사했다면서?

"...."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처음 감정평가서를 봤을 때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나… 범한테는 범이 나오는 법이지.

흐뭇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처음 느끼는 간지러운 분위기.

나는 이 불편한 순간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 하실 말씀 있다고…."

-그래. 너도 웬만큼 눈치챘겠지만, 청송은 이 나라 지도층의 눈과 귀가 전부 모인 곳이다.

"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 열심히 할게요."

-아니지. 그들을 모두 네 걸로 만들라는 얘기다.

"예?"

-내가 '눈과 귀'를 단순히 보고 듣는 이들이란 뜻으로 썼다고 생각하느냐?

"...."

-눈과 귀란 것은 기실 머리의 전부 아니냐.

소름이 돋았다.

-청송을 품으면 이 나라를 갖는 것이다.

후대의 동량지재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에이… 아직 애들인데요."

청송이 곧 대한민국이다.

…는 것은 판을 짠 세력의 계획보다 더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생각이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는 내가 청송에 들어와서 깨달은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준비된 자가 주도하는 세상. 네 입으로 얘기하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다른 것은 없다. 초상시대의 준비란 오로지 무력뿐이야.

"예."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이 50, 60대의 기성세대이면서 당장 쟁쟁한 유력가들을 제쳐두고, 갓 스물 전후한 그들의 자식 세대를 견제하는 게 상식적인 일인지.

하지만 불과 3년 뒤, 실제로 아버지의 대적자는 지금 이 생도들이 된다.

이게 귀신같은 통찰력인지, 현세대의 '머리'들은 벌써 문제 될 것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인지는 모르겠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어요."

-그래. 너라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리라고 믿는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눈 대화가 문제는 아니었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다. 또한, 어떤 식으로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획대로 성장하다가 죽은 자식이 되면 그만이었으니.

그런데도 마음이 불안한 것은....

[이벤트「아들」이 생성됩니다.]

"X발…."

역시, 변화.

그 자체였다.

보고서 항목에 '①'이 표시되기에 바로 확인했다.

──────────

[생성 중인 이벤트]

-「아들」

※ 완성까지 남은 시간: 30일

※ 완성된 내용에 따라 이벤트 명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최종 볼륨에 비례하는 DP가 지급됩니다.

──────────

"...꼭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네."

아마 저 30일간의 사건을 종합해 내용과 볼륨이 결정되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시스템에 휘둘리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거고.'

이 이벤트가 어떤 식으로든 본편에 영향을 미친다면....

나는 긍정적인 영향이 되도록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악당이 죽었다고 믿게 될 자식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지.

#17화, 파티포지션

차유라는 뜬 눈으로 월요일 아침을 맞고 있었다.

한성준에게 받은 구리반지 때문이었다. 분석 결과는 요약하면 세 가지.

첫째, 재질이 정말로 피복을 벗긴 전선이었다. 둘째, 그럼에도 아티팩트가 확실했다.

둘은 분석이라기도 민망했지만, 세 번째 분석이 더해지며 충격적인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건 바로 마공학 기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분석이었다.

이 땅에서 제작된 아티팩트라는 명백한 증거. 그리고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증거가 공존하는- '모순'.

일반적으로 반지형 아티팩트는 링 안쪽이나 보석 자리에 마력 회로(각인 또는 장치)가 세팅되는데, 겉으로 보이는 장치가 없어 독특한 물건이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래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아버지와의 통화내용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수십 가닥의 전선이 회로의 역할을 하는 줄 알았지.

-아니었어. 반지의 형태로 구부린 것 외에는 아무런 성형의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력 흐름은 보여.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야. 이런 게 가능하려면… 그래, 차라리 어떤 권능이라면 이해를 하겠구나. 설명할 수도, 필요도 없을 테니까.

-만약 이게 정말 능력이든 내가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기술이든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기술확보의 문제가 아니야. 마공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대 사건이 될 게다. 그 친구가 뭘 요구하든 다 들어줘도 좋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출처를 알아내거라. 널 믿으마.

그렇게 흥분한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일이라는 것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꼭 아버지처럼 안달 난 기색을 내비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가치를 모르고 있었어.'

정확히는 마공학적인 관점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애초에 이쪽으로 기우는 거래라는 걸 짚어준 게 자신이었으니까.

괜히 먼저 연락할 필요도 없다.

'우연히 마주친 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트면 돼.'

아직 장학지원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으니 대화거리는 준비됐다.

마침 오늘 첫 시간이 병기술. 포지션 그룹별 수업을 진행하는 과목이라고 들었다.

한성준도 자신처럼 마법계였으니 같은 그룹에서 수업을 듣게 될 것이었다.

'...?'

순간 뒷목과 어깨 근육이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차유라는 침대를 벗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고,

띠링띠링! 띠리링!

조금 뒤 알람이 울리자, 밤을 샌 사람 같지 않은 또렷한 눈으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

병기술 시간.

열 명이 넘는 교관들과 전 생도가 대운동장에 모였다.

전문화 교육훈련들은 다섯 반 통합수업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이게 맞지.'

한 반을 계열별로 나누면 어떤 재능계의 경우는 고작 두세 명밖에 안 되기도 했다.

교육 인력의 낭비고, 생도들 입장에서도 경쟁 대상이 너무 적어진다.

어쨌든, 나에게 통합수업은 다른 반에 있는 등장인물을 관찰할 기회이기도 했다.

사열대 위에서 정렬 상태를 점검하던 하정혁 교관이 입을 열었다.

"아직 병기 제작이 완료되지 않은 관계로 금일 교육은 파티 전술훈련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훈련에 앞서 원장님께서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니 잠시 대기하도록."

하 교관이 한쪽으로 비켜서고 곧 뒤편에서 함성아가 올라왔다.

"교육 인원 179, 부상 열외 21명입니다."

사열대 아래의 교관이 보고하자, 함성아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그리고 느닷없이 소리쳤다.

"들었어?! 열심히 하는 거랑 물불 안 가리는 거랑은 다른 거야 새끼들아!!!"

생도들이 깜짝 놀란 듯 술렁였다.

나도 좀 놀랐다.

스물한 명. 한 반에 네다섯은 병실에 누워있어야 하는 숫자다.

"내가 훈련하라고 했지, 쌈박질하라고 했어?!"

나름 대인 전투 훈련 중인데 부상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웬만한 골절쯤은 바로 그날 완치된다.

청송학원은 전문의급 인력을 포함한 11명의 의료진과 2명의 치유계 능력자가 상주하는 의무팀을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교육 참여가 불가능할 지경이라는 건….

'작정하고 밟은 거지.'

"후우, 남은 기간 동안 다신 이런 일이 없길 바란다. 부상자들 로그만 확인해도 어떤 새끼들인지 다 나와.

이번 일로 책임을 묻지 않는 건, 중복되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패거리의 만행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앞으로 부상자의 상태가 이해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면 이유를 불문하고 관련자 모두 점수를 100점씩 차감할 방침이다. 또한 고의성이 짙다고 판단될 시에는 퇴소 조치하겠다. 점수가 발생하는 즉시 대결이 끝난 거라는 거 명심해라. 이상."

함성아가 사열대를 떠나면서 생도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형은 알았어요?"

옆 열에 서 있던 가영이 앞뒤를 살펴보며 물었다. 우리 반 열외인원을 체크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몰랐지."

아직 대부분이 팀원끼리만 소통하는 상황이다. 같은 반이라고 해도 주말에 소식이 전파될 리 없었다.

"지난주 내내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왜 주말에 갑자기 폭증했을까요?"

"업데이트 때문 아닐까? 그냥 까라고 해서 까다가 이제 지가 필요해서 까니까 죽탱이에 힘이 실렸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점수를 '쓸 곳'이 생겼으니, 가치가 상승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감정도 더 상했을 테고. 그러다가 참을성 없는 몇몇이 이성을 잃었으리라.

"우리도 이제 슬슬 벌어야지."

"예…."

"주눅 들지 말고 인마.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까."

"조용히들 해라!"

그때 하 교관이 주의를 다잡았다.

"지금부터 파티포지션에 따라 그룹을 나눌 테니, 잘 듣고 자신이 어느 포지션인지 헷갈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설마. 이미 지정이 끝났다는 소린가?

"먼저 탱커 그룹에는 백병 전투계열 중 변이, 증강, 강화, 재생계가 해당된다. 그러나 위의 재능을 가졌더라도 인내심이 부족한 생도는 지원하지 않을 것을 추천한다."

아 다행이다.

재능 따라가라는 가이드였으니 교육진이 임의로 배정을 끝낸 건 아닌 듯했다.

"데미지 딜러는 백병 전투계열과 사수, 공격마법을 지향하는 마법계가 모두 포함된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만큼 백병과 원거리, 마법계를 따로 구분한다.

마지막으로 서포터 그룹. 치유계, 정신계 그리고 지원에 특화된 마법계와 특수계가 속한다."

그렇다고 선택권을 주는 것도 아니네.

사실상 '이렇게 하라'는 매뉴얼이었다.

"혹시 아직도 내 재능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인원은 앞에 계신 교관님들께 상담받아볼 수 있도록. 그럼 좌측부터 탱커, 딜러, 서포터 순으로 각각 4열씩 정렬해서 다시 모인다. 이동."

생도들이 우르르 뒤섞여 좌우로 움직였다.

가영이 바짝 붙으며 물었다.

"전 특수계지만 지원할 만한 게 없는데 어쩌죠? 교관님한테 물어봐야겠죠?"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역시 그게 제일 낫나?

"확실히 서포터는 아니야."

"그럼 딜러요? 그걸 공격 스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설명해줄게. 일단 따라와. 아, 그러고 보니까 너 병기는 뭐로 신청했냐?"

"저 완드요."

"완드?"

"뜬금없긴 하죠."

"너도 뭐 따지고 보면 마력에 집중하는 쪽이니까…. 담임 교관이 별말 안 했고?"

"네. 신청서 받은 다음 날 바로 상담했었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 같대요."

"오…."

이게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하 교관이 의외로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서 있으면 되겠다."

"네."

아직 고민하거나 상담 중인 생도들이 꽤 있던 탓에 바로 정렬을 시작하진 않았다.

"형 근데, 저 진짜 딜러는 아닌 거 같은데요."

"너 지난번 적응훈련 때…."

"찾았다!"

내 말을 잘라먹으며 권하선이 등장했다.

"니네 왜 나만 빼고 둘이 다니냐. 심심했잖아."

"아침에 니가 늦게 나왔다."

"그러니까 왜 안 기다렸냐고. 나오라고 말도 안 해줬으면서."

"어차피 교육시간인데 뭐하러 붙어 다녀."

"둘은 붙어 있잖아."

"이제 너도 붙었네."

"아오 얄미워! 근데 어차피 포지션이 다 달라서… 응? 영이는 저쪽 끝으로 가야 하는 거 아냐? 서포터잖아."

"아 그게… 성준이 형이 서포터는 아니래요."

"뭐? 그럼 딜러? 말이 돼? 아니지… 적응훈련 때처럼 하면 안 될 것도 없나."

"딜러도 안 돼. 달려들지 않는 대상한테는 쓰기 힘든 기술이니까."

"그, 그렇겠죠?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역시 서포터밖에…."

"아니. 탱커하라고."

"...."

"...."

딱!

권하선이 대뜸 내 머리통을 갈겼다.

"아!"

이 자식이…!

확 기분 나빠지려는데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더 눈을 부라렸다.

"진짜 못 됐네. 안 그래도 고민 많을 애한테 왜 장난을 쳐!"

"후우… 들어라…."

"뭐?"

"모르면 얌전히 들으라고. 방금 막 설명하려는데 니가 끼어들었다."

권하선이 잠깐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금방 또 가는 눈을 했다. 자길 납득시키지 못하면 각오하라는 투였다.

"...간단한 얘기야. 이유는 아까도 다 나왔고. 공격에 쓰기는 힘들지만, 방어에 쓰는 건 쉽잖아. 괴수 대신 마력구나 화살이 달려든다고 생각해봐."

"...!"

"아…."

"물론 전사계열이나 수준급의 사수라면 쉽게 뒤를 잡을 거야. 완벽하진 않지. 그래도 파티원 하나가 영이의 안전을 책임지면 영이는 파티 전체의 방패가 될 수 있는 거야. 사실상 방패 성능 하나는 무적이잖냐."

"분명 개소린데 왜 그럴듯하냐?"

"된다니까."

어차피 권하선의 생각은 중요치 않다.

"말도 안 돼! 내가 탱커라니."

가영은 벌써 넘어온 눈치였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자신은 없는데… 형 얘기 듣고 나니까 이제 다른 포지션은 하기 싫네요."

"너만의 센스를 찾을 때까진 많이 힘들 거야."

"그건 당연하죠. 근데 누가 저랑 파티를 하려고 할까요?"

"한 번 경험하면 서로 모셔가려고 할 거다. 만약 5인 이상 파티를 구성하면 나도 무조건 너를 서브 탱커로 쓸 거야."

"메인 탱커는 물론 나겠지?"

권하선이 제 얼굴을 가리키며 눈을 빛냈다.

그녀도 탱커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공격력까지 갖춘 사기급의 탱커.

그래도 그녀를 메인 탱커로 쓸 수는 없었다.

"아니. 메인 탱커는 나다."

"와... 야, 그냥 싫다고 해. 개 서운하네. 아니 갑자기 X나 열받네. 내가 이런 취급받을 사람이 아닌데 진짜!"

"에이. 그냥 드립이죠. 뭘 또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장난이야?"

"...."

이해는 된다.

내가 무지막지한 마법 난사를 선보이긴 했지만, 그건 탱커의 소양이 아니었으니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파티 전술에는 해당 없는 얘기였다.

"어… 니가 메인해라."

메인 타이틀이 뭐가 중요하겠냐. 파티 구성권이 나한테 있으면 어차피 권하선도 포함시킬 거였다.

'트리플 탱커'라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만, 권하선과 나는 딜러를 겸할 수 있다.

"맞게 찾았으면 빨리빨리 정렬해라!"

이윽고, 모든 생도들이 제 포지션에 자리했다.

열을 맞추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가영과 권하선을 차례로 돌려세우고 바로 뒤에 섰다.

그제야 눈이 동그래진 두 녀석이 무슨 미친 생각이냐고 캐물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줄 간격을 벌렸다.

툭.

"아."

"엌! 미안해요."

큰 걸음으로 앞뒤 간격을 맞추다가 뒷사람의 발을 밟고 말았던 것.

"어?"

사과부터 하고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누나가 왜 여기 있어?"

"그게 무슨 소리죠?"

"왜 내 뒤에 있냐고."

"왜겠어요. 저도 딜러니까죠. 참, 아버지께서 답을 주셨는데-."

"그게 아니라 여기까지 탱커줄, 딜러는 옆줄부터인데."

차유라는 그래도 이해를 못 한 듯 천천히 주변을 살피다가 점점 고갯짓이 빨라졌다.

"그쪽은 왜 여기…."

"그건 나중에 들어도 되지 않을까?"

어느새 정렬이 끝나, 줄을 바꿔서 껴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아."

차유라는 황급히 돌아서 맨 뒤로 달려 나갔다.

"아직도 자기 자리를 못 찾는 모지리가 있나!"

교관 하나가 빽 소리를 질렀고, 차유라의 귓불이 벌겋게 물들었다.

절대 얼타는 인물이 아닌데 희한한 일이었다.

#18화, 제가 정하겠습니다

하정혁은 탱커 그룹 생도들 사이를 거닐며 등록작업을 하고 있었다.

삑!

작은 단말기를 훈련복 옷깃에 가져다 대면 곧장 전산에 등록되는 방식이었다.

삑!

그가 한 생도 앞에서 발을 멈췄다.

"가영 생도… 내가 깜빡했군."

"예?"

"담임 교관으로서 네 포지션 문제를 고민해봤었다. 교관도 탱커를 추천해볼 생각이었는데 총 진행을 맡아서 잠시 잊었다. 그래도 맞게 찾아와서 다행이군. 어느 교관님께 상담했지?"

"교관님이 아닙니다."

의외의 대답에 하정혁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자 내린 결정인가?"

"아, 그건 아닙니다. 조언이 있었습니다."

"누구지?"

"한성준 생도입니다."

잘 알고 있는 이름. 자신이 맡은 반 생도이자, 엊그제 교무실 화재와도 관련 있는 녀석이다.

"음…."

마법 이해가 뛰어난 염동계 능력자. 범상치 않은 생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계열 전투응용에 대한 혜안까지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걸 받아들인 너도 대단한 거야. 열심히 한 번 해보도록."

"감사합니다."

하정혁은 가영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삑!

권하선. 역시 담임 반 생도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친구다.

'포텐이 기대되는 녀석이지. 잘 됐군.'

여생도라서 어쩌면 딜러 포지션을 지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초인에게 성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지만, 그래도 본능적 성향의 차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탱커는 아무리 적성 능력이 뛰어나도 쉽게 선택하거나, 남이 억지로 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리고 다음 생도의 옷깃에 단말기를 가져가다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 한성준?"

삑!

그러거나 말거나 인식 거리에 든 단말기가 프로필을 불러왔다.

하정혁은 액정과 앞에 선 생도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제가 지원한 포지션이니까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을까.

"마법계인 네가 무슨 수로 탱커를 맡느냔 말이다. 아니, 염동계에 가깝다고 했나? 그래도 마찬가지다. 파티 포지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양이구나."

염동계 중 국내 최강자라는 함성아 원장도 탱커를 맡아 작전에 나갈 순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못 한다."

가영 생도에게 탱커를 권했다기에 분석력도 높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합니다."

"안 돼."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국대급 축구선수가 야구 좀 한다고 야구 대표로 선발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하아… 제가 뭘 할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허. 싹퉁머리 보게.'

하정혁은 어이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지언정 사내놈에겐 이만한 고집과 용기도 필요했다.

"훈련은 게임이 아니다. 하고 싶은 역할이 아니라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제 몫을 하겠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무슨 수로!"

"그걸 말로는 설명하기가 힘들어서요. 그냥 두고 보시죠."

이놈의 자식이….

말이 안 통하니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따라와라."

"...?"

하정혁은 한성준을 데리고 열을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다른 생도들은 여전히 열을 유지했으나 전부 그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함께 탱커그룹을 맡은 김 교관과 눈이 마주쳤다. 손을 들어 잠시 양해를 구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지 콧대를 붙잡고 꺾는 시늉을 했다.

"저… 왜 그러시는지."

하정혁은 말없이 검집을 풀고 바닥에 원을 그렸다. 직경이 3미터쯤 되는 넉넉한 원이었다.

"이 원을 벗어나지 않고 1분만 버텨내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아… 시험입니까?"

"배려 같은 건 기대하지 마라. 네가 마법계나 염동계라고 해서 해야 할 몫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니. 혹시 그런 생각이었다면 지금 포기하는 게…."

한성준이 성큼 원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됐습니다."

"...."

어찌 된 녀석인지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

'차라리 잘됐네.'

예상보다 일이 커졌지만, 뒤에 있을 파티구성까지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증명은 필요했다.

사실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말한다고 믿지도 않을 테니까.

내가 굳이 탱커를 고집하는 이유는 훗날 솔플이 주가 될 것을 대비한 것이다. 홀로 감당하는 실전에서는 공격보다 방어가 훨씬 중요한 법.

'안전하게 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횐데 놓치면 등신이지.'

스르릉!

하 교관이 검을 뽑아서 내게 건넸다.

"네가 신청한 병기는 아니지만, 이거라도 들어라. 맨손으로 막을 순 없을 테니."

그리고 자신은 검집을 움켜쥐었다.

어째 맘 놓고 휘두르겠다는 예고처럼 들렸다.

'제대로 할 생각인가 보네.'

왠지 좀 화난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시작하겠다."

"잠시만요."

"왜? 생각이 바뀌었나?"

"아뇨. 1분이라면서요. 딱 시간 재야죠."

"...."

스마트워치에서 타이머 기능을 찾아 1분을 세팅했다.

'Start'를 누르고 검을 들어 올리자, 하 교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나는 하 교관의 실력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이 순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만약 하정혁이 본편에 등장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을 거라는 걸.

그만큼 그가 내뿜는 기세는 대단했다.

그의 검집이 밀어내는 거대한 공기의 압력이 돌풍처럼 몰아닥쳤다.

나는 압력에 저항하며 침착하게 쉴드를 시전했다.

퍼버벅! 챙!

세 겹의 쉴드가 거의 동시에 터져나가며 검집과 검이 충돌했다.

'으윽…!'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같은 게 아니네.'

검 자루 끝에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나마 한 걸음으로 그칠 수 있었던 것은 피해를 입으면서 싸움꾼 특성이 발동된 덕이다.

"…쉴드?"

"예? 아, 네."

"너 고작 쉴드 따위로 탱커를…!"

하 교관은 호통을 이어가지 못했다. 뭐 어쨌거나 막아낸 상황이었으니까. 아마 머리가 복잡할 거다.

'이해하기 힘들겠지.'

진짜로 쉴드 하나 믿고 탱커를 지원한 것도, 그걸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것도.

나라고 다른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법계한테 방어 수단이 쉴드 빼면 뭐 있겠나.

물론 상위 마법인 배리어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뚫릴 것을 예상했을 때 마력 가성비가 좋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데도 내가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마력해방〉이라는 재능이 가진 특이점 때문이다.

하 교관이 고개를 흔들고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의 주위로 모래가 날리며 가시적인 기류가 형성됐다.

당연히 이전 공격보다 강하거나,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연계 공격이 될 터였다.

나는 영역을 생성한 뒤, 대놓고 쉴드로 벽을 치기 시작했다.

비정형의 마법의 성질을 이용해 오로지 전방을 향하도록 압축한,

철(鐵) 속성을 부여한,

자체 지속성을 가진 쉴드였다.

쉴드는 마력으로 '유지'하는 마법이나, 내가 만들어내는 쉴드는 지속성을 부여하는 순간 마력체로서 '존재'한다. 때문에 연속적인 주문이 가능했다.

방어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지만, 철 속성으로 일부 보완하고 양으로 밀어붙이는 식이다.

'이런 걸 설명할 수가 없잖아요.'

쇄도하던 하 교관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럴 만도 한 게, 그의 눈에는 더블, 트리플을 넘어서 쿼드러플 이상의 캐스팅처럼 보였으리라.

쾅! 콰직! 콰드득!

과연 철 속성을 담아내니 충격음도 달라졌다. 찌그러지고 뚫리는 건 마찬가지. 그러나 한번 방해를 받은 검격은 내가 받아내기 충분했다.

캉! 캉! 챙!

서너 번 공격이 막히자, 하 교관이 속도를 끌어올렸다.

'으아….'

점점 힘이 부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검격을 막으면서도 먼저 뚫린 곳에 새로 쉴드를 깔아둬야 했기 때문.

'지금의 나보단 민첩도 훨씬 높겠지.'

그의 페이스에 끌려가면 끝이 훤했다. 나는 불 속성 마력을 끌어모아 검 끝으로 쏘아냈다.

시뻘건 불새가 하 교관에게 달려들었다.

화르륵! 펑!

화염이 원래 실체를 가졌던 것처럼 검집 한 방에 터져나갔다.

조금의 피해도 주지 못했지만, 덕분에 한 호흡은 벌 수 있었다.

그 틈에 메운 쉴드벽 위로 곧장 라이트닝을 시전했다.

마력 흐름을 감지한 듯 하 교관이 멈칫했다.

파지직! 치직!

뇌전을 잔뜩 머금은 다섯 개의 철 속성 쉴드가 넘치는 전기를 주고받으며 그물을 생성했다.

상상한 그대로였다.

'이거 쓰면 쓸수록 괜찮네.'

〈마력해방〉. 게임에서는 진짜 콘셉트대로 쓸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다.

조작만 다채롭고, 실제로는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리스트 중 적합한 변형이 임의로 발현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100% 시전자가 원하는 구현이 가능했다.

위력이 약하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활용 면에서는 가히 '마법의 조종'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깡! 깡! 챙챙챙!

하 교관이 강기막을 두르고 뇌기의 침습을 차단했다.

검격에 쓰일 마력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받아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제 시간이 얼추 다 됐을 건데….'

하 교관도 느꼈던지 통하지 않는 공세를 접고 원 밖으로 물러섰다.

충분하다는 건가?

줄곧 경악에 차 있던 하 교관의 눈은 어느새 잔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마….'

어디서 본 듯한 눈.

본능이 위험신호를 울렸다. 그리고 곧, 하 교관의 검집이 검푸른 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 인간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그제야 눈빛의 정체가 떠올랐다. 구도(求道)의 열망. 상대에겐 그저 광기인 그것이다.

나는 앞뒤 재지 않고 철 속성의 배리어를 연달아 둘러썼다. 내가 본 그는 이미 잔상이었을 테니.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핏물이 끓었다.

콰과광!

검집은 세 겹의 배리어를 박살 내고 네 번째 배리어에 틀어박혔다.

나는 다섯 번째 배리어를 '유지'한 채 상단 막기 자세를 취했다.

쩡!

결국, 네 번째도 파고든 검집이 마지막 배리어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가장 정적인 상태로 마주하는 순간.

이제 뚫리고 안 뚫리고는 순수한 마력 싸움이 될 것이었다.

"생도를 상대로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담임은 자기 제자를 제대로 파악할 의무가 있거든."

"지금 교관님 눈이 어떤지 알면 좀 더 납득할만한 얘기를 해주셨을 텐데요."

"건방 떠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나는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다.

하 교관의 강기가 더 진하게 피어올랐다. 마력이 조금 전보다 빠른 속도로 소모됐다. 그래도 버틸 만했다.

내 영역 안이었고, 소모량의 감소는 유지형 마법에도 적용되는 것이기에.

그리고 마침내.

삐리릭! 삐리릭!

"끝났네요."

하 교관이 강기를 거둬들이며 머리를 저었다.

"퀸튜플(quintuple) 캐스팅이라니…. 보고도 못 믿겠군."

"이제 저 탱커합니다?"

"알았으니 더 말이 안 되는 거야. 그냥 할 수 있는 거랑 잘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잘하는 걸 해야지. 그런 미친 마법 재능을 두고 탱커는 얼어 죽을…."

"두말하지 마시구요."

"후우…. 내가 조건을 너무 쉽게 잡았어. 실전에서 탱커의 역할은 일신의 방어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파티 평가 10위권 내에 못 들면 언제라도 딜러로 전환시킬 거다."

"아깐 없었던 얘긴데요."

"그건 너 때문이고. 그 정도 각오 아니면 나도 저 사람들 설득 못 시켜 준다."

하 교관이 엄지를 눕혀 가리킨 쪽에서… 마법 관련 교수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X발.

"부탁드립니다."

"알았다. 자리로 돌아가."

[강선호 외 121인에게 인상적인 기억 -DP 획득 1,032]

오, 이것도 통합수업의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어우."

...백 수십 쌍의 부담스러운 시선은 덤이었다.

#19화, 미친 짓

"와, 난 니들이 탱커라는 게 아직도 입력이 안 된다."

"저는 겨우 사람 구실 할 포지션을 찾은 거죠. 성준이 형이 진짜 충격이었어요."

"그러니까. 야, 아직도 놀랄 거 남았으면 지금 다 얘기해라."

"없어 이제."

"근데 마법으로 벌써 교관님을 상대할 정도면 더 그쪽을 파야 하는 거 아니에요?"

"테스트해본 정도로 상대는 무슨. 그리고 네 말대로 그것도 다 마법이야. 탱커한다고 마법 접는 거 아니다."

"우리 팀 구성 어떻게 하냐. 탱커 셋이 말이 돼?"

"아까 교육시간에 못 들었어? 탱커 행동 수칙 5번, 전황 판단에 능한 파티원에게 리드를 양보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해당 파티원의 호위를 중점적으로 수행한다."

"그게 뭐 어쨌다고."

"포지션 구성이 어떻든 잘하는 걸 하면 된다고. 너랑 나는 쓰는 부위가 달라서 안 겹쳐."

"...뭔가 기분 나쁜데."

~지이잉!

진동음이 서라운드로 울렸다. 우리는 셋 다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봤다.

역시나 학원 앱의 알림이었다.

"저번 주 적응훈련 점수네."

"오, 대박! A다."

"뭐? 니가 A라고?"

"뭘 놀라. 영이도 받을만했지."

"아니, 그건 그런데…."

나는 'A+'였다.

'전체 1등.'

점수야 예상했지만, 석차가 표시될 줄은 몰랐다. 보이는 등급 외에도 소수점 단위의 평가가 매겨졌다는 뜻.

기분이 나쁘진 않네.

두 세계의 삶을 통틀어서 뭔가에 1등을 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와악! 형, 저 9등 했어요!"

"너 그날 잘했어."

'1/200'로 표시된 석차 항목을 누르자, 전체 순위가 주르륵 표시됐다.

───────────

001. 한성준(강화c)/A+(+100P)

002. 차유라(강화c)/A+(+90P)

003. 이나은(용단c)/A(+80P)

004. 아이비.M(생존c)/A(+70P)

005. 강선호(강화c)/A(+60P)

006. 송연희(강화c)/A(+50P)

007. 홍소희(용단c)/A(+40P)

008. 박태광(경계c)/A(+30P)

009. 가영(강화c)/A(+20P)

010. 서범진(강화c)/A-(+10P)

...

───────────

"와, 성준이 형이 1등!"

TOP10에서 여섯이 우리 반이네.

'어?'

그 아이비 마르티네즈가 맞나?

이때부터 한국에 있었다니.

검은 머리의 히스패닉계… 음, 국적은 모른다. 어쨌든 글로벌한 무력집단의 수장으로 나오는 인물.

이 시점의 청송에 어떻게 외국인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 배경을 한번 알아봐야겠다.

홍소희, 박태광도 있었지….

고작 한 과목. 그것도 훈련 하나의 성적을 놓고 능력을 평가할 순 없지만, 보스방 멤버를 제치고 TOP10을 차지한 인물들만큼은 '찐'이라고 봐야 했다.

"야, 나만 'B+'인데 이거 뭔가 잘못된 거 맞지?"

그러고 보니 TOP10에서 권하선만 쏙 빠졌다.

"다른 생도 뚝배기 깬 거 때문에 감점된 거야."

"그건 정당방위잖아."

"영이 얘기 들어보니까 니가 돌격해서 깠다던데."

"모, 목적이 그랬다는 거지."

서범진이 최범균을 반으로 가른 일이야말로 분명한 정당방위였지만, 영이보다 아래인 순위로 보아 그도 감점을 면하진 못한 듯했다.

"니 목적은 의미 없고. 너 그날 4킬 했댔나?"

"어."

"전체 7위 보상이 40점이다. 넌 그걸로 40점 먹었으면 됐지."

"형! 형! 앞에…."

"뭐, 왜."

가영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리자,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여섯 명의 생도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어후.... 빡세겠네.'

단순히 머릿수 문제가 아니라 이나은 패거리였다. 권하선이 스틱을 꺼내 들며 구시렁댔다.

"에이 씨! 쟤네가 지금 정훈 깡패라던데…. 그래도 본전은 해야지."

"반반 맡자. 아마 이나은이 빙결류 속박으로 지원할 거야. 그거만 조심하고."

이나은은 빙(氷) 속성의 마력 괴물이지만, 정훈에서만큼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그녀의 좌우로 버티고 선 두 녀석이 문제였다. 2미터 탱커 김판웅과 어쌔신 타입의 도지훈. 본편에서도 이나은의 심복으로 유명한 놈들이다.

"오른쪽? 왼쪽?"

"니가 덩치부터 왼쪽. 내가 이나은 이랑 멸치 쪽 맡는다."

"바꾸면 안 됨? 쟤 땀내 날 거 같은데."

"어차피 스위칭해야 끝나는 거 모르냐?"

셋씩 맡더라도 바꿔서 한 번 더 상대해야 모든 점수가 발생한다.

"아… 맞네."

"거봐. 너랑 나는 쓰는 부위가 다르다니까."

"...."

"영이는 그냥 여기 있어."

"네."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는 아가리를 벌리는 진형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후방에 영이를 두고 있었기에 먼저 뛰어들지 않았다.

"흐아아압!"

결국, 김판웅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나는 권하선이 놈과 뒤엉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나은을 향해 돌진했다.

내 뒤를 노리고 크게 돌던 도지훈이 급하게 방향을 바꿔서 우측으로 쇄도했다.

쉴드를 이름처럼 큰 방패 형태로 뽑아 녀석의 진로를 차단했다.

이나은과의 거리를 불과 3미터 정도로 좁혔을 때였다.

휘이잉!

불알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하체가 또렷이 느끼는 차가운 마력.

'빙결!'

얼른 두 다리로 화기를 끌어 보냈다. 그러나 바닥을 얼린 냉기는 빙결보다 복잡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쩌정! 쩡!

"억!"

뾰족한 얼음 기둥이 턱을 꿰뚫을 기세로 솟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기둥을 박차고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X발! 미친 거 아냐?'

조금만 늦었으면 진짜 뒈질 뻔했다.

정훈에서 마법계가 불리한 이유가 뭐였던가.

한번 발현된 마법은 살상력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룰로서 사용 가능한 마법 종류가 규정된 건 아니지만, 상대가 피하지 못했을 때를 가정하면 사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나은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살상마법을 시전했다.

만약 다른 생도였다면 위기의 순간에 튀어나온 반사적 행동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쟤는 아니었다.

'후우…. 내가 방심한 거지.'

사이코패스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잠깐 뇌 정지를 겪는 사이, 이름 모를 남생도 하나가 이나은의 앞을 막아섰다.

도지훈도 빠르게 틈을 파고들고 있었다.

타이트한 3대 1의 상황.

아무리 나라도 점수를 따기만 하는 건 무리지 않겠나.

한데 개 같은 일을 겪고 나니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상대가 안전하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미친 짓을 해도 된다는….

그리고 내 재능이 바로 그 미친 짓에 특화된 재능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 교관에게 써먹었던 대로 철 속성 쉴드를 만들고 라이트닝을 때려 박았다.

"왁 씨!"

생각 없이 달려들던 도지훈이 식겁해서 물러났다.

영역을 생성함과 동시에 딱 절반의 마력을 뽑아 화(火) 속성을 부여했다.

'크으…!'

공중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마력을 빨아들이며 순식간에 거대한 불덩어리로 성장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헬파이어는…."

도지훈이 열기를 못 이기고 뒷걸음질 쳤다.

이나은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마주친 그녀의 눈이 '성깔은 좀 있나 보네?'라며 비아냥대고 있었다.

나도 웃을 수밖에.

그 와중에도 불덩어리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차오르는 마력을 족족 받아먹으며 계속 몸집을 부풀렸다.

내가 입꼬리를 내리기도 전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

니가 상상한 헬파이어가 아니었겠지.

이나은 앞에 있던 생도가 삿대질을 시작했고.

"뭐, 뭐야! 너 진짜 미쳤어?"

"야, 니네 팀이잖아. 얘 좀 말려봐!"

"지들이 덤벼놓고 뭘 말리라 마라…. 히익! 야 한성준! 너, 너, 너!"

멀리서 권하선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타켓을 지정했다.

화르르르!

직경 5미터에 달하는 거대 불덩어리가 이나은을 향해 내리꽂혔다.

"어어, 저 새끼 진짜 던졌어!"

"으아악!"

호위무사 같던 남생도가 황급히 바닥을 굴렀고, 이나은만 망연한 얼굴로 불덩어리에 삼켜졌다.

"대체 무슨 짓을…"

털썩!

도지훈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얼른 가서 스틱을 갖다 댔다.

~지이잉.

바닥에 널브러진 호위무사와 권하선이 상대하던 생도들까지.

~지잉. 지이잉.

다들 넋들이 나갔는지 움직이는 이가 나뿐이었다.

권하선도 타오르는 불기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권하선."

"...?"

한참 만에 껌뻑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나는 스틱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뭐해. 빨리 찍어."

"...."

미동도 안 했다. 당연한가….

에이 씨, 힘들어 죽겠구만.

나는 아직도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영역 밖의 불기둥을 유지하는 마력은 영역 안에서 캐스팅하는 마력에 비할 게 아니었다.

잘 보라는 듯 입을 가리키며 뻥긋거렸다.

...'뻥카'라고.

거대 불덩어리의 정체는 헬파이어가 맞았다. 공갈빵처럼 겉을 키우는 데만 마력을 쓴.

"여, 역시. 그런 거지?"

그제야 권하선의 혈색이 돌아왔다.

"나은아아아아!"

'아.'

김판웅이 정신을 차렸는지 울면서 불기둥으로 달려들었다.

"잡아!"

빡!

다행히 가까이 있던 권하선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김판웅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비로소 정리가 끝난 듯해 불기둥으로 향하던 마력을 일거에 차단했다.

그러자 오로지 마력으로 유지되던 불길은 연소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에 아이스 배리어를 두른 이나은이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어… 나은아!"

그녀가 멀쩡히 나타나자, 넋이 나갔던 녀석들이 하나씩 정신을 차리고 곁으로 달려갔다.

이나은은 자신의 무사를 확인하는 팀원들을 물리며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

그러나 뭐라고 따질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공갈파이어'를 내리꽂는 순간, 원통형으로 성형했다. 그 변화까지도 그녀는 똑똑히 지켜봤을 터였다.

"많이 더웠나 보네요."

"미친 새끼가 뒈질라고."

"껴들지 마."

아이스 배리어를 비꼰 것인데 정작 본인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노려보던 눈을 풀고, 나서는 도지훈을 제지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그냥 재능 종류가 다른 거라고 하죠. 변이계랑 반수(半獸)계가 서로 이해 못 하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

"서로 남은 감정 없는 걸로 정리하죠."

"이 새끼 진짜 제정신 아니네! 이거 그냥 넘어갈 일 아니야."

"내 문제다. 도지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뭐 더 할 얘기도 없는 거 같고…. 그럼 통합수업 때 봅시다."

권하선에게 손짓하자, 그녀가 돌아서 가영을 불렀다.

"잠깐."

돌아서는데 이나은이 붙잡았다.

"...?"

"아직 동아리 계획 없으면 같이하죠."

"지금 그런 얘기할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당장 이나은 추종자들이 누가 봐도 불만이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왜요. 지금 좋은데? 그쪽이 남은 감정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없어요."

니 기분은 원래 상식과 다르게 움직이는 거고….

거절도 눈높이로 해줘야 하나.

"활동 분야, 구성원, 규칙, 운영비 모두 내가 정하고 관리한다. 내 조건은 이거 하나뿐이니까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굳이 척을 지려고 하시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인물 '이나은'과 관계를 맺음 - DP 획득 50]

권하선이 옆에 붙어서 물었다.

"너 직접 동아리 만들려고? 난 쟤들이랑 같이 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인데."

"난 절대로 아니라는 생각이야."

"그럼 생각해둔 애들 있어? 말해봐. 내가 사람은 좀 볼 줄 알 거든."

"내가 오늘 세 번째 말하는데 우리는 쓰는 부위가 다르다니까?"

"아이 씨. 그래서 내가 뭔데!"

"나는 머리. 그럼 너는 뭐겠어."

"...마음?"

"근육이지."

"개새끼가."

"우리 각자 잘하는 거 하자."

#20화, 사이코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