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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 검술명가 격투천재 - 마늘생강 >

◈ [1화] 챔피언

경기 시작.

시합을 알리는 레퍼리의 선언이 시작되자, 상대 선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목이 뻐근해.'

류태신은 고개를 꺾으며 가볍게 굳은 몸을 풀었다.

그런 여유 탓일까, 상대 선수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상대방의 얼굴에도 류태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민머리 선수는 결국 도전자였고, 류태신은 챔피언이었다.

왕좌에 앉은 사자는 언제나 여유와 기품을 보유해야 했다.

류태신의 눈이 상대 선수를 좇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와 눈을 마주친 민머리 선수는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무슨 눈빛이....'

마치 피식자가 된 것 같은 감각에 오금이 저려왔다.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심장의 펌프질이 줄어들자 손끝 발끝부터 신호가 왔다.

몸이 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격투기 선수에게 있어 기민한 움직임은 기본 덕목이다.

손발이 묶인 격투가는 아마추어만 못하다.

류태신이 천천히 접근했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미 느껴졌으니까.

'내가 이겼어.'

옥타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류태신은 확신했다.

이미 상대는 겁을 집어먹었다.

아무리 옥타곤이 변수가 가득한 장소라고 한들, 토끼가 사자를 물어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툭.

류태신의 앞발이 상대의 발을 막았다.

'제길!'

상대 선수가 뒤늦게 당황하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류태신의 몸이 더 빨랐다.

앞발을 축으로 류태신의 허리가 꺾였다.

뻐억!

류태신의 주먹이 상대 선수의 턱에 꽂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제대로 꽂힌 스트레이트였다.

상대 선수의 몸이 허물어지며 경기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와아아아아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챔피언의 모습에 관중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류태신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옥타곤을 내려왔다.

대미지 따위는 없었다. 아무런 셋업도 없이 내지른 오른손이 상대의 턱에 꽂힌 것이다.

상대 선수가 실력이 부족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류태신이 규격 외로 강한 것이다.

40전 무패.

SFC 3체급 챔피언이자 불패의 파이터.

그것이 바로 류태신이었다.

하여 환호성은 류태신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았다.

'재미없어.'

투쟁이 좋아서 격투기를 시작했지만, 그 어떤 상대도 류태신의 투쟁심을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약했다.

상대의 움직임은 훤했으며, 어떤 전략을 들고 와도 류태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루했다.

류태신의 체급은 현재 미들급.

라이트급부터 순차대로 밟고 이 자리에 올라왔다.

심지어 미들급부터는 감량도 하지 않은 채 평소 몸 상태로 경기에 임했다.

체중 몇 킬로 따위는 류태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이상 체급을 월장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어차피 똑같을 테고.'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선수들도 류태신에게 승부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은퇴할까."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류태신의 말에 수많은 스태프와 세컨드들이 화들짝 놀랐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약 먹었어?! 뜬금없이 은퇴라니!"

대기실이 순식간에 번잡해지자 류태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그렇게 소란이 잦아들고 코치들과 다른 선수들이 류태신에게 한마디씩 조언을 내뱉었다.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에 대해서만 늘어놓는, 같잖은 내용들이다.

'기생충 같은 것들.'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자신을 동료로 보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돈벌이.

류태신이라는 전례 없는 스타성에 기대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돈 욕심이 크지 않은 류태신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최근 들어 저들은 휴대폰이나 방을 뒤지는 등 개인적인 것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거슬렸지만 구태여 자르기는 귀찮았다.

권태감.

미칠 것 같은 권태감이 류태신을 잡아먹고 있었다.

의욕이 생기지가 않았다.

명예와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다. 이 이상 벌어 봤자,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류태신은 코치진들의 말을 무시한 채 휴대폰을 들었다.

최근 들어 유일하게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는 소설이 있었다.

내용은 보잘것없는 흔한 양판소였지만, 그렇기에 별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기에는 제격이었다.

[현실에서는 왕따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용사라고?]

정말 뭣 같은 제목이어서 처음에는 선뜻 손이 안 갔다.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그럭저럭 볼만은 했다.

'주인공은 답답하지만.'

유약하고 찌질한 주인공의 성격을 류태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꾸준히 역경을 넘어 성장해 나갔다.

그러는 도중에 수많은 절세 미녀들이 주인공 주위로 모여들게 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실성 없는 스토리는 물론이고, 작품성도 없었지만 따분한 시간을 때우기에는 썩 나쁘지 않았다.

* * *

"으음...."

류태신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군.'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뭐지?"

몸이 무거웠다.

피로로 인해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피곤함 때문에 느껴지는 피로와는 전혀 달랐다.

무거운 중량감이 모래주머니처럼 느껴진다.

그 감각이 소름 돋게 생생해 무심코 팔을 바라봤다.

잘 벼린 칼처럼 단련된 자신의 팔이 아니다.

두툼하고, 토실하며, 포동포동했다.

류태신은 눈을 껌뻑거렸다.

'꿈을 꾸고 있나?'

주위를 둘러보자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난장판이군. 그건 그렇고...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머리가 깨질 것 같지?'

어이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상황은 말로만 들어봤지, 직접 겪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지방 덩어리는 뭐고.'

허....

기가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되는 일이 없었다.

류태신은 일단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몸으로는, 몸을 일으키는 단순한 행위조차 쉽지가 않았다.

쿠당탕!

테이블과 의자가 널브러졌다.

"...하하."

너무 현실성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꿈인가?

그게 가장 타당했다.

하지만 류태신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꿈은 아니야.'

꿈이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뭐지?

혼란은 해소가 되지 않고 꼬리를 물었다.

류태신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슬슬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서늘했다.

낮은 중저음의 음성이었지만, 목소리에는 가시가 있었다.

류태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도련님?"

눈앞에 있는 남자.

말끔한 턱시도를 입은 노신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을 지닌 노신사였다.

한데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가 낯이 익었다.

그 순간 갑자기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수많은 기억의 편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단 블란테? 뭐야, 이것들은?"

기억이 중구난방이다.

어질러 둔 퍼즐 같은 기억이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밀려들어 왔다.

혼란스러웠다.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류태신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부여잡았다.

"에단? 블란테?"

혼잡한 와중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현실에서는 왕따 뭐시기?

"하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렇다면 아귀가 맞기 시작한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혼잡하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갔다.

그렇다고 두통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통은 더욱 격렬해졌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고?'

그것도 양산형 개막장 소설 속으로.

류태신, 아니, 지금은 에단 블란테.

그는 갑자기 닥친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꿈이라고 우기며 현실을 도피할 바보 같은 짓을 할 여력도 없었다.

일단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런 에단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이성을 잃으신 모양이군요."

경멸의 눈초리.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동자에 담긴 미약한 감정의 흔적.

에단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네이드.'

에단의 전속 집사.

뼛속까지 오만하고 방약무인한 성격인 에단은 네이드에게 수없이 모욕적인 언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에단, 아니, 소설을 읽은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네이드는 고작 집사라는 신분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런 그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깨진 잔들과 접시들을 지르밟으며 다가오는 네이드의 분위기는 가볍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님의 명령이니 원망하지는 마시죠."

그리 말하는 네이드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고, 그걸 바라보는 에단의 눈살은 가늘어졌다.

'어떻게 해야 되지?'

이 자리에서 모든 상황 판단을 끝내는 것은 무리였다.

최소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에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네이드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네이드의 손이 에단의 목덜미를 향해 뻗었다.

에단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뻗어진 네이드의 손을 붙잡고, 에단의 육중한 몸이 네이드의 등에 걸쳐졌다.

무거운 질량은 네이드의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그 상태로 에단이 몸을 숙이자, 순간 네이드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완벽에 가까운 업어치기였다.

'이런.'

에단은 업어치기를 시도함과 동시에 후회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손끝에 느껴지는 단단한 네이드의 몸은 이런 기술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휘익―

역시나 네이드는 업어치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자 에단은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네이드가 싱긋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꽤나 놀랐습니다. 이러한 박투술은 처음 겪는군요."

네이드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놀란 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피한 거지?'

방심한 탓에 제대로 걸린 기술이었다. 이미 80프로 이상 걸린 기술은 방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네이드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에단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돌아가시죠."

네이드의 주름진 눈길에서 경멸이란 감정은 사라졌다.

"알겠어."

에단이 두 손을 들었다. 여기서 반항을 해 봤자 득 될 것이 없었다.

'어이가 없군.'

처음 겪어 봤다.

보기만 해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 * *

에단이 순순히 말에 따르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네이드였다.

평소 에단의 포악한 성정과 대비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네이드는 중간에 에단이 도망가는 것을 우려해 계속해서 신경 썼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다.

'소설 속에 들어오다니.'

삼류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유행 지난 설정이었다.

그런 상황을 지금 자신이 겪고 있었다.

'그것도 왜 하필 이 녀석이야.'

에단 블란테.

대륙에서 명망 높은 검술 명가의 둘째.

신분은 좋았다. 하지만 따라오는 호칭은 결코 좋지 못했다.

블란테의 개망나니.

가문의 수치.

검술 명가의 자제이면서도 검을 두려워하는 머저리.

두려워하는 이유조차 별다른 게 아니었다.

에단은 천성이 겁이 많고, 자신의 안위를 가장 중요시하게 여겼다.

그런 성향 탓에 에단은 검을 두려워한다.

도저히 검술 명가의 피를 이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의 비루한 재능과 성향.

그에 따라 가문 내의 평가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엑스트라 악역.'

원작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 장치.

딱 그 정도의 입지를 가진, 그런 목적으로 조형된 캐릭터였다.

입체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형적으로 만들어진, 작위적인 악역.

'그럴 수는 없지.'

류태신은 에단의 캐릭터를 그대로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포식자이며, 우두머리고, 챔피언이었으니까.

지구로 돌아가는 것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 [2화] 소설 속 망나니 (1)

근신 처벌을 받은 에단은 별채로 돌아왔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처우였다. 그간 저지른 패악과 사건들이 있으니 이 정도 처벌쯤은 달게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호화롭네.'

근신을 위해 마련된 별채였지만, 시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확실히 대륙 제일의 검술 가문이라 그런지 형벌 목적으로 건축된 건물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치스러운 물품들은 없었지만, 에단과 몇몇 시종들이 지내기에는 과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히려 다행이지.'

에단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이왕 벌어진 일이라면 최악을 피하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초반에 객사할 수는 없지.'

그따위 엑스트라가 되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에단이 비중 하나 없는 악역이라면, 이제부터는 그 비중을 키울 생각이었다.

'먼저 몸부터 만들어야겠군.'

에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살이 많다 한들 이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있으면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굴러다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계획을 실행하기 앞서 몸부터 탈바꿈시켜야 했다.

에단은 거울 앞에 섰다.

정확한 체중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추할 수는 있었다.

"키는 170 중반에 체중은 150킬로 정도인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랜 기간의 선수 생활 덕에 감량이라면 이골이 나 있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몸으로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지.'

아무리 에단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한들, 그건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처럼 평판도 바닥을 치고, 몸 상태도 엉망인 상태라면 가지고 있는 정보들도 쓸데가 없었다.

"어이, 거기."

에단이 시종 하나를 불렀다.

평소의 류태신이라면 다짜고짜 반말을 하진 않았을 테지만,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섞여서인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너 말이야."

순간, 시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저를 부르신 건가요?"

벌벌 떨면서 다가오는 눈치를 보아하니 겁에 질린 게 분명했다.

'...지랄 났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나 밥 먹듯이 패악질을 저질렀으면 반응이 이따위란 말인가.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여기 연무장이 어디지?"

"여, 연무장 말씀이신가요?"

"그래. 연무장 말이다."

시종이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순간 시종이 갑자기 넙죽거렸다.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부디 그것만은... 흑흑."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러는 거냐고."

에단의 물음에 시종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연무장에서 저를 벌하려던 거 아닌가요?"

"...내가 왜?"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드셔서...."

"...혹시 내가 평소에도 툭하면 두들겨 패고 그랬나?"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에단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 *

"갑자기 체력 단련을 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이드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묻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무언가 바뀌었다.

평소의 에단이었다면 훈련은커녕 대낮부터 술과 여자를 탐했을 것이다.

'단순한 변덕인가?'

타당한 의심이었다.

한순간에 바뀌었다고 믿기에는 그간 에단이 저지른 만행이 만만찮다 보니, 변덕으로 치부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때 그 기술....'

네이드는 난장판이 된 주점에서 에단이 펼친 기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겪은 기술이었다.

어지간한 무술과 박투술은 모두 꿰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접근해 오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은 처음 겪었다.

'한 번쯤은 믿어 봐도 괜찮겠지.'

애초에 큰 걸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네이드에게는 연무장 사용을 금할 권한이 없었다.

검술 가문의 자제가 몸을 단련한다는 것만큼 아귀가 맞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본채로 갈 생각은 안 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네이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에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따위 걱정은 하지 말고. 당분간 여기서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이 저택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면 굳이 이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에단은 지금 이 보기 힘든 몸을 탈바꿈시킬 생각이었다.

'파이트 캠프랑 비슷하군.'

시합 전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한 파이트 캠프.

생각해 보니 거기와도 크게 다를 바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폐쇄적인 환경은 익숙했다.

처한 상황이 기구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단이 발을 내디뎠다.

시작은 천천히. 근육이 놀라지 않게끔 예열을 시켜야 했다.

땀이 흐르며 몸이 어느 정도 풀리자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가던 속도는 어느덧 조깅 수준이 되었다.

'제기랄. 진짜 생각 이상이군.'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도 매우 여유로운 속도였다.

조깅을 한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

선수 시절의 류태신이라면 이 정도 달리기쯤은 온종일을 해도 거뜬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몸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몸에서 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관절이 삐걱거리며 아우성을 치고, 근육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육중한 몸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요란하게 출렁였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에단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제 고작 시작일 뿐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한다.

체계적인 훈련? 컨디션 향상?

선수 시절 경험에서 비롯한 수많은 운동 프로그램?

그딴 것들은 지금 사치였다.

일단 이 무수한 지방을 걷어 내야만 한다.

당장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데 무슨 훈련과 운동을 한단 말인가.

허억, 허억.

에단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 시작하자, 네이드가 묘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정말 운동을 시작할 줄이야.'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에단은 정말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처참하고 처절하게 뛰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애초에 그는 당장 걷는 것조차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개인 시종과 마차가 없으면 근방에도 나가지 않는 것이 바로 에단이었다.

그런 그가 달리기라니.

네이드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럼 오늘 저녁을 준비해 볼까.'

본래 식사를 담당하는 주방장이 있었지만, 네이드는 오랜만에 직접 주방에 들어설 생각이었다.

에단의 노력이 묘하게 갸륵했다.

* * *

네 시간.

장장 네 시간이었다.

에단이 쉬지 않고 달린 시간이다.

단련하지 않은 일반 성인 남성도 한 시간을 뛰면 호흡이 버거워진다.

그런데 운동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에단이 네 시간을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150킬로의 육중한 몸을 이끌고, 의지력 하나만으로 말이다.

연무장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에단이 입고 있는 옷도 땀을 비롯한 다양한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연무장에 엎어진 에단의 몸이 숨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허억, 허억."

머리가 어질거리고 당장 게워 낼 것처럼 속이 울렁였다.

고통스러웠다.

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은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앓는 소리를 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여기서 조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면 과호흡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에단은 고통을 억눌렀다.

어차피 사람은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이따위 고통은 감내할 수 있었다.

에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바닥이 미끄러웠다.

'생각보다 괜찮아.'

에단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분명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지만, 나중에 갈수록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몸은 빠르게 적응했다.

'낙오자라 한들 검술 가문의 핏줄이라 이건가.'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재능을 썩히고 이따위 몸을 만들어 놓다니.

그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이 몸을 이대로 놔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비록 지금 에단이 비루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평판과 인식도 바닥을 친다 한들 그 사실에 절망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결국 치고 올라갈 생각이었으니까.

'가지고 있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에단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작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원작에서 블란테라는 검술 가문은 멸망한다.

* * *

에단이 비틀거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물먹은 수건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경이적인 컨디션이었다.

첫 운동으로 네 시간을 달린 대가치고는 매우 싸게 먹혔다.

고작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낼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때 에단의 앞에 하녀 하나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자신 앞에 겁먹은 채 쭈뼛거리는 하녀를 바라봤다.

에단을 보며 잔뜩 겁먹은 하녀는 기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욕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허."

하녀의 대답에 기가 찬 에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다음부터 목욕 시중 같은 건 안 와도 돼."

"...정말인가요?"

"한 입으로 두말하게 하지 마."

에단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이자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봐. 아, 잠깐."

쭈뼛거리며 멀어지는 하녀를 에단이 불러 세웠다.

하녀의 표정이 순간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기색이었다.

"...목욕탕은 어디에 있지?"

별채는 상당히 넓었다.

* * *

에단이 욕탕 앞에서 옷을 벗었다.

뒤룩뒤룩 찐 살 탓에 옷을 벗는 단순한 행위도 쉽지 않았다.

땀에 푹 젖은 옷이 찰거머리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옷 꼬라지가 가관이네.'

몸은 이따위인 주제에 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보고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는 건가?

에단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옷을 집어던졌다.

'앞으로는 편한 옷을 달라고 해야겠군.'

지금부터 에단이 할 일은 훈련밖에 없었다.

화려한 장식 따위는 움직임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옷을 모두 벗은 에단은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하얗다.

처음 느낀 감상이었다.

하얀 몸에 지방이 푸짐하게 붙어 있었다.

"...."

에단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선수 시절 자신의 몸이 그리워졌다.

그 시절 류태신의 몸은 동물처럼 질겼으며, 강인했고, 탄력적이었다.

지금 에단의 토실토실한 몸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괜찮은 점은... 있군."

에단이 욕탕 앞에 설치된 거울에 다가섰다.

푸짐하게 붙어 있는 살들이 흔들렸는데,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웠지만, 객관적인 분석은 필요했다.

거울 앞에 선 에단은 찬찬히 몸을 둘러봤다.

리치와 골격, 그리고 체형.

워낙 지방이 많아 확실하게 분석하긴 어려웠으나, 대충 봐도 몸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류태신도 동양인치고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편이었다. 하지만 에단에 비하자면 손색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비만인 상태로도 이 정도라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몸이나 담가야지."

에단은 자신의 몸을 감추려는 듯 데워진 욕탕 안에 하얗고 무거운 몸을 들이밀었다.

에단이 몸을 밀어 넣자, 차 있던 물이 해일처럼 넘쳤다.

"...제기랄."

기분이 더러웠다.

◈ [3화] 소설 속 망나니 (2)

목욕을 마친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더럽게 넓네.'

이게 고작 별채라고?

얼마나 돈이 썩어 넘치면 이 정도 크기의 별채가 고작 근신용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에단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었다.

뭘 해도 의심 사지 않고, 눈총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에단에게만큼은 최적의 장소였다.

에단은 잠시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채까지 오면서 대략적인 생각은 정리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전히 정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에 들어왔다.

그것도 엑스트라 악역으로.

믿기 힘든 현실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먼저 가문 밖으로 나가야 하나.'

에단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가문 내에서 활용도가 떨어졌다.

소설은 언제나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속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블란테는 거물이었다. 단순히 명망 높은 가문 수준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무력 집단으로서 일대를 호령하는 사자였다.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권력이 가지는 이점이 얼마나 큰지를.

그렇기에 도망치듯 가문을 떠나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당장 가용하기 힘든 정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인공이 알게 되는 지식이나 주인공이 개입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블란테라는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독자적인 상황은 그다지 알지 못했다.

'가문이 멸망한다는 사실과 그 외에 사사로운 것들....'

그러나 블란테 가문의 멸문은 스토리의 중반부 이후에 벌어진다.

그 배후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당장 손쓸 수는 없는 상대였다. 그전까지는 에단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움직여야 했다.

'가문을 떠나는 방법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스토리상 에단은 주인공과 만나게 된다.

만나게 되는 장소는 대륙의 아카데미.

아카데미에 가기 전 도시에서 처음 주인공과 조우해 시비를 걸고,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깨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다른 지역으로 임무를 배정받았을 때, 별 되도 않는 수를 쓰다가 결국 주인공에게 목숨을 잃는다.

어찌 보면 주인공의 첫 살인이었다.

그동안 주인공은 우물쭈물 망설이는 성향이 짙은 캐릭터였으니까.

'그렇게 뒈질 생각은 없고.'

그딴 식으로 병신같이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큰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독차지할 필요는 없지.'

딱 필요한 만큼.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비굴해지지 않아도 될 정도의 패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

어차피 흐름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어떤 변수가 벌어질지는 알지 못했지만, 원작의 큰 흐름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단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노신사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실례했군요. 아직 도련님이 식사를 하지 않아 걱정이 돼서 말이죠."

태연한 답변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식사부터 하시지요."

네이드의 한 손에는 상이 얹혀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이제는 힘을 숨기지도 않는 건가?"

원래 스토리상 네이드는 평범한 집사를 연기하고 있었다.

네이드의 힘이 세간에 드러나는 것은 원작 소설에서도 중반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네이드를 보아하니, 힘을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힘이라뇨? 저 같은 일개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이드가 생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의자는 왜 두 개지?"

"저도 아직 밥을 못 먹어서 말이죠."

"...아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 * *

네이드가 차려 준 식사는 상당히 훌륭했다.

천성이 한국인인 류태신에게는 이국적이라고도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먹는 거를 가리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만큼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네이드가 차린 상은 영양적으로 훌륭했다.

육류와 야채의 밸런스가 적절했으며, 과하게 기름지지도 않았다.

"격리 기간은 언제까지지?"

"대답은 따로 없으셨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가주님도 상당히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한두 달 정도로 생각하면 되나?"

그 정도 기간이 딱 적절했다.

에단이 최소한의 몸을 만들기에.

"글쎄요. 저는 단지 집사일 뿐이라 가주님의 의중을 알 방도가 없네요."

네이드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에단이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누가 부르든 난 여기서 두 달 동안 박혀 있을 거니까."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살 빼야지."

지금은 이 출렁이는 살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 * *

이후 에단의 생활양식은 지극히 단순해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오전 운동을 나서면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점심을 거르는 에단의 모습에 시종들이 걱정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의 지방을 가진 몸은 고작 한 끼를 굶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식사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이 끝났을 때는 확실하게 제대로 된 영양을 챙겼다.

상당히 높은 강도의 운동을 진행하는 만큼, 그만한 영양이 보충되어야 몸이 상하지 않았다.

에단의 몸은 운동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방은 순식간에 크기를 줄여 갔으며, 빠르게 근육이 붙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지만, 에단의 육중한 몸은 티가 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몸까지 저질인 건 아니군.'

에단의 몸 자체가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다.

그간 훌륭한 몸을 썩히고 있던 것일 뿐, 반사 신경, 동체 시력, 근육의 힘과 탄력 등 그 모든 것이 보통을 넘어서 있었다.

게다가 몸을 만들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네이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에서 육수를 흘려 대자 의심을 완전히 거뒀다.

'가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군.'

가문의 망나니가 달라졌다고.

네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그 말이 사실인가?"

블란테 가문의 가주 빈센트 블란테가 되물었다.

평소 평정심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철혈에 기사였다.

그런 그가 당혹해할 정도로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네, 확실합니다. 에단 님은 달라졌습니다."

"허허...."

빈센트가 말끝을 흐렸다.

에단이 달라졌다니....

그간 에단이 가문의 망나니로서 얼마나 속을 썩여 왔는가.

검의 재능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 오만하고 포악한 성정을 죽이기 위해 엄하게 대했던 것인데, 에단은 더욱더 엇나갔다.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 영지민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에단에게 근신을 명령했다.

고작 그 정도 처벌로 에단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처벌은 그동안에도 숱하게 내렸으니.

하지만 네이드는 에단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이드는 빈센트가 가장 신용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되겠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지으며 자신하자 빈센트는 의심을 거뒀다.

"그래도 내가 직접 봐야겠군. 에단을 불러와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부디 실망시키지 않으면 좋겠군."

빈센트가 가라앉은 눈으로 네이드를 응시했다.

네이드는 빈센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봤다.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네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선 네이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놀랐으니 말이죠.'

* * *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친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복잡하군."

천장을 바라보던 에단이 중얼거렸다.

성장하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 따위는 사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조급함이 조금씩 쌓여 갔다.

아니, 생각해 보면 조급함과는 조금 달랐다.

'설레는 건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을 때도 느끼지 못한 설렘이 느껴졌다.

'네이드도 그렇고.'

잃어버린 투쟁심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당장 싸운다고 한들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래 몸이라고 해도 못 이기겠지.'

애초에 근간이 달랐다.

류태신이 아무리 극한까지 단련한 챔피언이라고 한들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소설 속이었다.

그것도 판타지 세계.

이곳에서는 '평범함'을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에단은 지금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에단의 대답과 함께 주름진 미소를 짓고 있는 네이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빈손이네?"

"식사보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할 말?"

"궁금한 점이 생겨서 말이죠."

"뭐가 궁금한데."

"언제부터인가, 아니, 별채로 근신 처분을 받은 날부터 도련님이 바뀐 것 같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이죠. 혹시 그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이드의 질문에 에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어찌 보면 예민한 질문이기도 했고.

지금 에단의 몸에는 에단과는 전혀 다른 '류태신'이라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잖아."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 노인에게 거짓으로 말하면 순식간에 간파당할 것만 같았다.

네이드의 연륜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에단의 대답에 네이드의 주름진 눈가가 조금 커졌다.

"...그렇군요."

"그래서 묻고 싶은 건 그것뿐이야?"

"그럴 리가요.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가주, 아니, 아버지가?"

당황스러웠다.

벌써 나를 찾는다고?

이건 예상이랑 다른데.

* * *

다음 날, 해가 뜨자 에단은 채비를 갖췄다. 평소 운동할 때 입던 복장이 아닌,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정복을 입었다.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죄송합니다...."

에단에게 옷을 맞춰 주던 시종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에게 맞춘 의복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즈가 조금 남는 정도가 아니었다. 헐렁해서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다.

시종이 당황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살이 많이 빠지시긴 했군요."

네이드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빠져야지. 그렇게 난리를 쳐 댔는데.'

하루 종일 뛰는 것 외에는 한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 뛰어 댔는데 몸이 그대로라면 억울했다.

시종이 허겁지겁 뛰어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이 입을 만한 복장을 준비해 왔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에단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처음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빠지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여기서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두 달도 필요 없을지도.'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을 보아, 운동 강도를 더 올린다면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체지방을 모두 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급격하게 체지방을 줄이면 몸에 가해지는 타격이 적지 않았지만, 이 몸뚱이는 그런 사소한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했다.

에단이 느끼기에는 축복받은 몸이었다.

그런 만큼 에단은 쉬지 않고 이 말랑한 몸뚱이를 사정없이 굴릴 생각이었다.

'귀찮게.'

그런데 대뜸 가주가 에단을 불렀다.

하루하루가 부족한 에단으로서는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여기서는 한번 굽혀야만 했다.

그간 벌여 놓은 일도 있었고.

'앞으로 벌일 일도 있으니까.'

아직까진 블란테라는 이름이 가지는 가호가 필요했다.

◈ [4화] 소설 속 망나니 (3)

원작 소설에는 블란테 가문에 대한 비중이 크지 않았다.

아니, 적다고 보는 게 옳았다.

좋게 쳐도 딱 중간 보스의 입지.

소설의 흐름에 간간이 떡밥이 뿌려지고, 연관된 캐릭터가 나오는 정도.

그러다 여러 상황이 맞물려 대륙 제일가는 검술 명가는 몰락하게 된다.

그런 혼란 속에서 떨어져 나온 떡고물들은 주인공의 양분이 되었다.

'그 꼴은 못 보지.'

비루먹은 몸으로 빙의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혼자 기연을 독식하는 꼴을 두고 보라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에단은 최근까지 가주의 눈에 띌 만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요 며칠간 한 것이라고는 연무장을 연신 달린 것 말고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운동하고, 먹고, 자고, 싸고.

이 행위들의 무한 반복이었다.

뼛속까지 격투기 선수인 류태신은, 에단의 배를 둘러싸고 있는 두툼한 뱃살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은 이 지방 덩어리부터 조금 지워 내야지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계획 따위는 뒤로 미뤘다.

어차피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은 드물었다.

선택과 집중.

지금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것은 체중 감량이라 판단한 것이다.

체중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복은 답답하게 몸을 조이고 있었다.

"대뜸 나를 부른 이유가 뭘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이번 일을 꾸짖으려고 부르시지 않았을까요?"

네이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딘가 묘하게 기분 나빴으나, 그걸 내색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궁금은 하네.'

현시점.

검으로만 봤을 때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

대륙의 절대자 중 한 명.

그 고명한 검술 명가의 주인이었다.

세계 최강 중 하나로 인정받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은 류태신으로서는 이 세계의 절대자라 불리는 존재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사람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단은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 생각이었다.

"그래, 바로 출발하자."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 * *

별채와 본채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거리가 생각 외로 가까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타당한 위치 선정 같았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을 시에는 근신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감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뭐 잘된 일이었다.

지금 에단은 근신이 오히려 달가운 상태였으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운동까지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가.

"시선들이 살벌하구만."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본채에 발을 딛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가시처럼 박혀 피부가 아릴 정도였다.

재밌었다.

인식이 이 정도로 개차반일 줄이야.

그래도 가문의 적통 중 하나인데 말이야.

곱지 못한 시선은 익숙했다.

격투기 선수로 세계를 누빌 때도 이런 눈길은 일상적으로 받았다.

시선으로만 끝나면 다행이었다. 류태신에게는 온갖 야유가 쏟아졌다.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었다.

격투기 선수 시절의 류태신은 발언 하나하나가 거칠었으니까.

그리고 그 발언들은 모두 시합으로 증명시켜 왔었다.

물론 거친 발언이 상대 선수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만큼이나 시시한 상대인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도발을 하거나, 자신을 꺾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가만있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타국에서 경기를 치를 때, 상대 선수가 그 국가의 자국민이면 더욱 심한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류태신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겼다.

쏟아지던 야유가, KO로 인해 정적으로 돌변하는 상황.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표정들 풀지?'

어차피 저 표정은 조만간 바뀔 예정이었다.

에단은 입가에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기사들과 하인들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한다고 해도 에단의 핏줄은 블란테 가문의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블란테 가문의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신분의 간극은 도저히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에단의 발걸음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때, 에단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나왔다.

"돼지 새끼가 여긴 무슨 일이냐?"

팔짱을 낀 채 곱지 못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보는 남자.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외모를 지녔지만, 몸은 잘 벼린 칼날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두툼한 뱃살을 지닌 에단과는 정반대의 남자가 사나운 표정으로 에단을 훑어봤다.

'뭐야.'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원작 소설에서는 서브 캐릭터에 관한 외모 묘사가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있는 묘사도 여자 캐릭터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에단으로서는 눈앞에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네가 누군데?"

"...뭐라고?"

에단의 대답을 예상 못 했는지, 남자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냐? 감히 돼지 새끼 주제에?"

남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모멸감에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에단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 네가 뭔데. 대뜸 지랄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인내심의 한계가 높지 않은 에단은 대놓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애당초 상대방이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상황 아닌가.

에단은 이 상황에서 굳이 말을 조심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상황이 과열되어 가자 네이드가 다가왔다.

"카론 도련님, 죄송합니다. 지금 에단 도련님께서...."

네이드가 상황을 중재하려 했지만, 카론이 네이드를 밀어냈다.

"너는 빠져 있어. 그리고 너, 가문에 먹칠을 일삼는 망나니 주제에 감히 나를 모욕해?!"

카론이 언성을 높여 갔다.

에단은 잠시 카론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뭔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아! 네가 내 동생이구나?"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이라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카론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자, 에단이 그 상황에 못을 박았다.

"동생 주제에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다는 소리를 하는 거잖아. 혹시 대가리에 하자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에단의 본 성격에 가까운 말투였다.

물론 류태신의 성격도 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다.

그러니 두 성격이 합쳐진 지금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시비를 건 것은 카론이었다.

에단은 이 상황 속에서 참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격투기 선수였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상대 선수가 도발성 발언을 하면 류태신은 그의 배로 돌려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거친 언행으로 인해 안티 팬도 상당히 형성되었지만, 반대로 그런 거침없는 스타성을 좋아하는 팬 또한 상당했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카론은 멍하니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네."

웃음을 멈춘 카론이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벗은 장갑을 그대로 에단에게 던지려고 한 순간.

에단의 육중한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육중한 질량에 회전이 실리고 그 힘은 그대로 카론의 턱에 적중했다.

뻐억―!

완벽하게 적중한 백스핀 블로우.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무거운 질량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격법을.

그리고 그 질량과 함께 제대로 꽂힌 백스핀 블로우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에단이 알기로는 없었다.

털썩.

카론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무리 몸을 단련시켰다고 한들, 턱까지 단련시킬 수는 없었다.

턱에 충격이 가해지면 그대로 뇌가 흔들리게 되고, 사람의 몸은 중심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짧은 순간에 카론이 바닥에 엎어지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정적을 느낀 에단이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사실 조건반사는 맞았다.

카론이 장갑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에단은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카운터를 꽂아 넣었던 것이다.

백스핀 블로우를 사용한 것도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류태신의 본능이 이 무겁기만 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격을 보여 준 것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러려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별 비중도 없는 새끼가 까부니까 이 사달이 벌어진 거 아니야.'

갑자기 대뜸 시비를 건 카론에 대한 짜증이 치밀었다.

잠깐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에단은 금방 떨쳐 냈다.

'신경 쓰지 말자.'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게 되면, 앞으로의 사건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게다가....

'애초에 망나니 새끼잖아?'

여기서 조금 더 막 나가면 어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한들 늦었다.

"카론 도련님!"

곁에 있던 기사들이 뒤늦게 카론에게 달려와 부축하기 시작했다.

"네이드, 가자."

자리를 벗어날 필요성을 느낀 에단이 네이드를 불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괜히 여기에 발이 묶일 필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징계로 끝나겠지, 뭐.'

지금껏 벌인 일이 있는 만큼, 한 소리 들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거기에 사소한 사건 몇 개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판단하기도 했고.

'...우연이 아니었군.'

네이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일전에 술집에서 겪은 반격.

당시에도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카론을 제압한 것을 보고 다시금 확신했다.

카론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마나 유저였다.

갓 입문한 것이기는 하나, 마나를 깨우친 자와 그러지 못한 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카론의 나이는 열여섯.

평균적으로 마나 유저로 입문하는 나이가 20대인 것을 감안한다면 카론의 성취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블란테 가문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카론은 에단과 마찬가지로 블란테 가문의 적통이었다.

대륙 제일가는 검술 명가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세간의 영재 수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론은 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유일한 존재를 찾아냈다.

에단.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는 망나니.

마나를 깨우치기는커녕 검을 두려워해 검조차 휘두르지 못하는 멍청이.

게으른 천성과 포악한 성격. 바닥을 치는 재능.

카론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자존감을 높이기에는 에단만 한 존재가 없었다.

그때부터 카론은 에단을 주기적으로 괴롭혀 왔다.

그리고 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아무리 에단이 악명 높은 망나니라고 한들, 무력에서 밀리는 이상 방도가 없었다.

권위로 누르자니 같은 적통이었으며,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했다.

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에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에단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문에 민폐를 끼치는 존재였으니.

한데 바뀔 일 없어 보이던 먹이사슬이 오늘 무너졌다.

비록 정식 결투도 아니었고 카론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한들, 카론은 마나 유저였고 에단은 일반인이었다.

그런데도 쓰러진 것은 카론이었다.

'이변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군.'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술집에서 겪은 공격은 네이드조차 순간 아찔한 느낌을 들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단시간에 너무 많이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블란테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 것인가.'

검의 저주를 받았다고 할 만큼 몸 쓰는 것에는 재능이 없던 에단이었다.

그런데 어떠한 일을 계기로 재능이 개화됐을까.

자타가 공인하는 검술 명가의 피 때문일까.

'허허.'

네이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일이었다.

후계자들의 경쟁은 곧 블란테의 힘을 강하게 만들 테니까.

◈ [5화] 소설 속 망나니 (4)

"...뭐라고?"

블란테 가문의 가주, 빈센트 블란테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겠지?"

빈센트의 물음에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확실합니다. 불시에 이루어진 에단 도련님의 일격에, 카론 도련님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허."

빈센트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 빈센트 앞에 서 있는 기사 첸은 빈센트가 신용하는 얼마 없는 충복이었다.

지금 상황에 첸이 거짓 보고를 할 이유도 없으니, 이 보고는 사실일 터였다.

어차피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닐 테니, 첸이 아니었더라도 빈센트의 귀에 들어올 내용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땠지?"

빈센트의 물음에 첸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입을 열었다.

"...놀라웠습니다. 마나도 깨우치지 않은 일반인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거운 체중을 최적으로 이용한 움직임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평가를 내릴 정도인가?"

첸은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검은 사자 기사단은 블란테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구성된 기사단이었다.

블란테에도 몇 없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이자, 기사단의 단장이 내린 평가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후한 평가였다.

단장으로서의 첸은 엄격하고, 박한 평가를 내리기로 악명 높았다.

"마치 그간 고의로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던 것 같더군요."

"...알겠다. 이제 나가 보도록."

첸이 가볍게 목례를 취하고 영주실을 나섰다.

영주실에 앉은 빈센트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속만 썩이던 망나니가 꽤나 재밌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 *

에단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사건의 발단은 싸가지 없는 동생이 먼저 제공했다.

아무리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는 에단이라고 한들 명색이 가문의 혈통이자, 카론의 형이었다.

에단은 꿀릴 만한 게 없었다.

대놓고 던지는 장갑 따위에 맞아 줄 생각도 없었다.

저택의 복도를 거침없이 걸으며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지만, 에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뭐지?'

걷던 도중 에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묘하게 거슬리는 감각이 에단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각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녀석 탓이군.'

앞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남자였다.

외관상 특별할 점은 없어 보였지만, 에단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해.'

이런 감각은 처음 느껴 봤다.

사람에게는 개개인의 기류가 존재했다.

미신이나 과민 반응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에단은 그 사실을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에도 자주 느꼈다.

뛰어난 기량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기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감각은 처음이었다.

'네이드랑 비슷한 정도인가.'

에단이 시선을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쟤는 누구지?"

"첸 님 말씀이신가요?"

"아."

떠올랐다.

에단의 머릿속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기억 중 하나가 꺼내졌다.

'기사단장쯤 되면 저 정도란 말이지.'

에단이 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싸우면 진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호승심의 여부 문제가 아니었다.

에단은 첸과 싸우면 필패다.

'이게 경지의 차이인가.'

미소가 지어졌다.

묘한 흥분도 들었다.

강해질 수 있다.

예전보다 더.

류태신 시절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처럼 무료하지도 않았다.

이 소설 속 세계는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득실거렸으니.

'그래도 결국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모를까.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원작 주인공이 얻어온 기연들을 에단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지나갔다.

에단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대답 없이 발을 옮겼다.

첸은 묘한 눈초리로 멀어지는 에단을 바라봤다.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먼발치에서 지켜봤을 때도 의문이 들긴 했다.

그때 에단이 보여 준 움직임은 재능이나 반사 신경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정밀했으며, 신속했다.

마치 전문적으로 수련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검술 가문에서 천박한 박투술이나 격투술 같은 것을 수련한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 * *

후우.

에단은 심호흡을 한 채 앞을 바라봤다.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벌써부터 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운과 피부를 찌르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했다.

'정말 적성에 맞는군.'

싸우고 쟁취하는 것을 좋아해서 격투기를 시작했다.

부와 명예를 얻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허무함이 엄습했다.

투지는 이미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간절함을 지니지 않아도 시합은 늘 이겨 왔다.

그런 그에게 이런 감각은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에단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네이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에단을 바라봤다.

"긴장 안 해."

긴장은 적성에 안 맞는다.

에단은 피식 웃더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에 들어가자 상당히 정갈하고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는 가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에단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

의자에 앉아 있어 체격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에단은 대략적인 눈대중으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늠했다.

'신장은 대략 180 후반에 체중은 90킬로 정도인가.'

검을 쓰기 때문인지 압도적인 거구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 수 있었다.

'더럽게 강하군.'

강자를 볼 때 맹수를 빗대어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빈센트에게 사자를 들이밀면 사자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거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빈센트는 강했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이 예절을 모르기에 조금 지도를 해 줬을 뿐입니다."

"...예절? 허, 예절이라고 했느냐?"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꺼낸 당사자가 다름 아닌 에덴이었다.

"네가 그동안 벌인 짓은 예절을 지켰다는 말이냐?"

"그때는 뭐... 잠깐 방황했다고 치죠."

"허, 뻔뻔한 것은 변함없구나. 지금은 정신 차렸다는 소리냐?"

"정확합니다."

에단이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빈센트의 눈살이 좁혀졌다.

'확실히 달라졌군.'

본래의 에단이라면 빈센트 앞에서 고개를 들기도 힘들어했다.

패악질을 일삼는 오만한 망나니였지만, 빈센트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빈센트는 그런 모습에 더 크게 분노했다.

포악한 성정을 가진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자를 두려워하고 꼬리를 마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사건을 몰고 다녔다.

결국 빈센트는 에단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끽해야 사건을 일으키면 근신 처분을 내리는 정도.

사실상 시선을 끊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에단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가장 신용하는 두 명이 내뱉은 말이었다.

'거짓이 아니었군.'

반신반의하며 한 호출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달라져 있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은 지금 빈센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빈센트는 지금 미약하게 기운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마나 유저라면 이겨 낼 만한 수준이었지만, 에단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었다.

그가 견디기에 버거운 수준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에단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보란 듯이 견뎌 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빈센트에게는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빈센트가 피식 웃더니 기세를 거뒀다.

"그 말은 이제 정신을 차렸다는 소리냐?"

"사춘기로 방황할 나이는 지났죠."

"확실히 혀는 길어졌구나. 그 말에 책임질 수는 있겠지?"

빈센트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에단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당연하죠."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는 소리겠구나."

"아니요."

"...뭐라고?"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한 말은 말장난이었다는 건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넘겨짚지 말아 주시죠."

"무슨 소리지?"

"아시다시피 저는 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허. 더 말해 봐라."

뻔뻔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기가 찼지만, 빈센트는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에단은 말을 이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단, 이 살덩이부터 떼어 버리려고요."

"헛소리를 하는구나. 수련을 하면 그깟 살쯤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될 거다."

"그거야 뭐 당연하죠. 문제는 제가 지금 이런 몸으로 기사들과 같이 수련을 한다고 따라갈 수 없다는 겁니다."

"...더 말해 봐라."

"일단 기초를 쌓는 게 먼저입니다."

"그 뒤부터 수련을 하겠다?"

"맞습니다."

에단이 히죽 웃었다. 빈센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에단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 보거라. 무슨 속셈이지?"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가문에서 제 입지는 좁다 못해 바닥에 가까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눈에 띄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네요."

"경쟁을 회피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럴 리가요.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단지 귀찮은 미래가 보이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뿐이죠. 승산 없는 싸움에 목을 매고 싶지도 않고요."

"...너 정말 에단이 맞는 거냐?"

에단은 말없이 씨익 웃었다.

* * *

영주실을 나선 에단은 조금 전의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냈다.

생각보다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에 에단이 원하는 것이 포상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얻어 내기 수월한 것도 있었다.

근신 기간의 연장.

에단이 원하는 것은 근신이 길어져 몸을 가꿀 시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서 괜히 근신이 해제된다면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에단의 머릿속에는 차곡차곡 계획이 쌓여 갔다.

'일단 영지를 나서야 한다.'

소설에서 본 정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지 밖으로 나서야 했다.

어차피 끝이 좋지 않을 가문에서 지금부터 아귀다툼을 해 봤자 득 될 게 없었다.

'마나는 얻어야겠지만.'

정석적인 기사의 수련법대로 수련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도 주인공이 얻어 가는 치트는 존재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에단이 자신의 배를 바라봤다.

여전히 푸짐한 뱃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방부터 떨쳐내야 할 텐데.'

암담했다.

◈ [6화] 소설 속 망나니 (5)

"어이, 머저리."

영주실을 나서자 난데없이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겪은 일 아닌가?'

에단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꽤나 건장한 덩치의 남성이 서 있었다.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았다.

툭툭.

에단이 네이드에게 눈치를 줬다.

작게 한숨을 내쉰 네이드가 에단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첫째 도련님인 모룬 님입니다."

"아, 그렇군."

네이드가 언질을 하고 나서야, 에단은 남자의 정체를 깨달은 듯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룬 블란테.

이 녀석 역시 비중 없는 엑스트라 악역이었다.

장자인 만큼 권력 승계 구도에서는 우위에 서 있는 녀석이었지만, 장자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 안일하게 굴다 결국에는 적들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긴다.

검술 명가라고 불리는 블란테 가문의 몰락은 모룬이 주도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룬은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능력이 없었다.

늘 시기와 질투를 달고 다니며, 타인을 폄하하는 성격을 지닌 그였다.

주변에는 믿을 만한 이가 없고,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어떠한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결국 블란테라는 거대한 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군.'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술 명가라는 블란테라는 가문이 저 머저리 하나 때문에 흔들리고 무너지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나는 아니었지만.'

모룬을 제외하고도 멍청한 새끼가 두 명이나 산재한 게 문제였다.

'이 새끼랑 동생.'

에단은 이곳으로 오며 만난 동생, 카론 블란테를 떠올렸다.

에휴.

고개가 저절로 저어졌다.

아무리 자식 농사를 못 지었다고 한들 어떻게 이렇게 흉년이란 말인가.

'애초에 그렇게 치밀한 설정의 소설도 아니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원작 자체가 크게 개연성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딱 주인공 위주로 사건이 흘러가는 킬링 타임 소설.

거기에다 대고 억지니 뭐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엑스트라 처지인 게 문제지.'

에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직도 길을 막고 있는 모룬을 바라봤다.

모룬은 입꼬리를 씩, 들어 올린 채 에단을 내려 봤다.

"어떤 수작질을 부린 거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직도 발뺌할 속셈이냐?"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짜증이 치밀었지만 여기서 대놓고 하극상을 벌일 수는 없었다.

영주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본채의 안이었다.

에단은 일단 조용히 화를 삭였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다. 수작질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허,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뻔뻔한 놈이로군. 너 같은 머저리가 카론을 이길 리가 없잖아."

'아, 그런 거였나.'

이제야 대충 눈앞에 있는 저 머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모양이군.'

가문의 장자라는 놈이, 동생들이 벌인 사소한 사건을 간섭하고 있었다.

"제가 뭐 비겁한 수라도 썼다는 소립니까?"

"그래.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모룬이 히죽 웃으며 에단을 응시했다.

"하아...."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기서 어떻게 할까.

괜히 여기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모룬은 어차피 자멸하게 될 운명이었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 무너질 녀석이라는 소리였다.

자멸하는 도중에 가문도 조금 말아먹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조금 바꾸긴 해야겠어.'

에단이 된 이상, 이용할 수 있는 요소는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지를 키울 필요성이 있겠군.'

에단이 모룬을 바라봤다.

살이 있어서 그렇지 에단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룬은 에단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증거 있어?"

하지만 에단은 기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모룬을 노려봤다.

"뭐, 뭐라고...?"

모룬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만했다.

에단은 망나니이기는 했지만,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강한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 비굴해지는 녀석이었다.

모룬은 가문의 장자.

권력으로 보나, 입지로 보나 에단보다 위에 있었다.

그런 사실 때문에 에단은 모룬에게 단 한 번도 반항을 한 적이 없었다.

모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 미친 거냐?"

"아니, 멀쩡한데? 그보다 내가 묻고 있잖아. 증거 있냐고."

에단이 모룬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자 모룬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쫄기는.'

한심했다.

그래도 장자라는 녀석이, 상대가 조금 드센 모습을 보였다고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니.

군기를 잡고, 위계질서를 유지하려 든다면 최소한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모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증거 따위 필요 없어!"

저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론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룬이 득의양양한 기세로 웃었다.

"카론이 이를 가는 모양인데?"

'진짜 한심하군.'

고작 동생 하나 왔다고 태도가 뒤바뀌는 꼴이 역겨웠지만, 에단은 내색하지 않았다.

카론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이 자식!"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뻗어 오는 카론의 손을 에단은 살짝 상체를 빼는 것으로 피해 냈다.

"...피해?"

"그럼 병신같이 잡혀 주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에단의 말에 카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는 나를 모욕했어."

"모욕이 아니라 예의를 가르친 거지."

"뭐?! 비겁한 수로 나를 쓰러트린 주제에...."

"비겁이고 뭐고가 어딨어? 시비는 지가 먼저 걸어 놓고."

카론은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너... 나랑 결투하자."

잠시 침묵하던 카론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왜... 라고?"

"내 귀중한 시간을 왜 너한테 써야 하지?"

"아니, 너는 카론이랑 결투를 해야 한다."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모룬이 앞으로 나섰다.

"너 같은 가문의 수치가 건방을 떠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

카론이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나는 차기 가주나 다름없다. 그런 내 명을 거스르겠다는 소리인가?"

"도련님...!"

그때 모룬의 곁에 있던 기사가 모룬을 말리려고 들었지만, 모룬이 손을 들어 기사를 제지했다.

"내 말은 곧 블란테 가문의 뜻이나 다름없다."

"허, 생각보다 더 머저리 같은 새끼구나."

"...뭐라고?"

"네이드."

에덴이 고개를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지금 저 발언, 아무 문제 없는 건가?"

"그럴 리가요."

네이드가 서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히 집사 따위가...!"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모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짜 심각한 수준이네.'

소설로 볼 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가고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가관이 따로 없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

"...무슨 소리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는지 모룬이 되물었다.

"너는 지금 가주님을 모욕한 거야."

"헛소리! 내가 언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지?"

"방금 네 말이 곧 가주의 말이라고 했잖아."

"그 말이 뭐가 어때... 가, 가주님?!"

"재밌는 짓을 벌이고 있구나."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만큼은 소란이 적막으로 바뀌었다.

아까 느낀 압박감은 장난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중력이 배가 된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생각보다 대단하군.'

하지만 에단은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에단을 바라보며 작은 감탄을 했다.

이 정도의 기운은 마나 유저도 쉽게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못한 에단이 견디고 있었다.

'확실히 달라졌어.'

방금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지금 그 사실이 더 확실해졌다.

에단은 바뀌었다.

이전까지 보여 주던 철없는 망나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숙련된 기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 반해 모룬과 카론은 당황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모룬과 카론이 갑작스러운 빈센트의 등장에 당황해하자,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가?"

"무, 무슨...."

"너의 말이 곧 나의 말이나 다름없다는 소리 말이다."

"그, 그것이...."

모룬이 뒤늦게 변명을 시작하려 들었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뒤였다.

"변명은 필요 없다. 너는 블란테 가문의 장자로서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단호한 어조에 모룬이 입을 다물었다.

빈센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카론과 에단을 향했다.

"경쟁심을 가지는 것은 좋다. 우리는 검술 가문인 만큼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희는 도를 넘었어."

"...죄송합니다."

카론이 고개를 숙였다.

"됐다. 고작 이런 일에 내가 끼어들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에단."

"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동생이 가진 불만이 작지 않은 것 같구나. 하지만 형제 사이에 결투는 허락할 수 없으니... 그래, 대련은 어떠냐?"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빈센트의 눈이 휘었다.

"조건?"

"제가 득 될 것이 없는 상황이니 그 정도는 들어주시죠. 그리 어려운 요구는 아닙니다."

"먼저 조건을 들어 보고 생각하마."

"정기 토벌에 참가하겠습니다."

"의외구나. 갑자기 토벌을 나가겠다고?"

"물론 단순히 토벌에 참가하려는 생각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토벌대를 꾸릴 권한을 주시죠."

"이유는?"

"아직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에단의 말에 빈센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토벌대라.

어렵다면 어려운 부탁이고, 쉽다면 쉬운 부탁이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도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세력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단에게는 네이드밖에 없었다.

게다가 네이드는 공식적으론 일개 집사에 불과했다.

기사들은 에단은 기피했고, 혐오했으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권한을 얻는다면 다시 가문 내에서 입지를 키울 수 있는 발판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좋다. 허락하마."

모룬과 카론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얼굴에 불만이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단, 대련에서 승리할 경우만이다."

빈센트의 첨언에 모룬과 카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면 에단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예측한 범위 내였기 때문이다.

'이기면 되지.'

자신은 있었다.

에단은, 아니, 류태신은 아직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내가 불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아직 몸은 완성되지 않았고, 마나는 깨우치지 못했다.

지금 급하게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고 한들, 이미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카론보다 능숙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차고 넘쳤다.

◈ [7화] 본색 (1)

'비겁한 자식.'

카론은 여유를 부리고 있는 에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번에는 안 당해 준다.'

설마 장갑을 던지려고 하는 찰나에 기습을 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사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천한 용병도 하지 않는 짓을 벌일 줄이야.

남아 있던 일말의 연민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아버님 덕에 목숨은 건진 줄 알아라.'

만일 빈센트가 대련이라고 못을 박지 않았다면, 카론은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죽이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불구로 만들 생각이었다.

후환이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망나니로 악명 높은 가문의 수치였다.

오히려 쓰레기를 치워 주는 행위가 아닌가.

하지만 대련이라는 말로 인해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팔다리 하나는 분질러 주마.'

대련이 아니니 불구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팔다리 중 하나는 부러트릴 심산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대련은 지금 바로...."

"보름 뒤."

에단이 말을 끊고 못을 박았다.

처음엔 이해를 못 해 멍하니 있던 카론의 얼굴이 이내 와락 일그러졌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기는 내 마음이지. 대련해 달라고 징징거리길래 그 요구까지 들어줬잖아. 아직도 불만이 남아 있어?"

"지, 징징?"

"어. 지금도 애새끼처럼 땡깡을 부리고 있잖아."

"에단, 설마 겁을 집어먹은 거냐?"

모룬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든가. 그건 그렇고, 장자라는 사람이 너무 사사건건 참견하는 거 아니야?"

에단이 고개를 돌려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말없이 에단의 눈을 마주쳤다.

'눈이 달라졌군.'

이전까지 에단의 눈은 혼탁했다.

온갖 더러운 욕망과 정돈되지 않은 생각이 눈빛으로 드러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에단의 눈은 진중했고, 차분했다.

"좋다. 대련은 보름 뒤로 하지."

빈센트의 말이 떨어지자 모룬과 카론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그 모습에 피식 웃더니 빈센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보름 뒤, 보상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호오, 꼭 이길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이길 거니까요."

"아무리 네가 나이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너무 건방진 생각 아니더냐? 너는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카론을 바라봤다.

"이미 한번 혼내 준 녀석입니다. 두 번째는 성심성의껏 예의범절을 주입시킬 생각입니다."

"이 자식이!"

에단의 도발에 카론이 순간 발끈했지만, 빈센트의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말은 청산유수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를 보여야 할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저택을 빠져나갔다.

'정말 바뀌었군.'

언행부터 행동거지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졌다.

'이번 대련으로 증명되겠지.'

빈센트는 카론을 바라봤다.

카론은 아직 성정이 유약하고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이였으나, 검에 대한 재능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블란테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도 아니었다.

저 정도 재능은 대륙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증명해 보거라.'

약육강식.

승자만이 모두 독식한다.

블란테의 신조였다.

* * *

"허억, 허억."

별채로 돌아온 에단은 다시 반복적인 일상으로 복귀했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구보.

감량이 최우선이다.

에단은 달리면서도 카론을 떠올렸다.

'엑스트라 녀석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에단은, 카론과 정면으로 승부하면 승산이 없었다.

애송이처럼 보인다고 한들 카론은 마나 유저.

일반인인 에단과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실제로 마나 유저와의 차이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책에서 나온 묘사만으로 어림잡아 짐작한 것이다.

정확한 파악은 아무래도 직접 경험해 봐야 알 것 같았다.

'뭐, 그것도 내 밑에 기사가 있을 때 하는 소리지.'

에단은 그간 저지른 언행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사람이 없어.'

에단을 따르는 사람은 네이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별채에 있는 하인과 하녀들조차 별채 관리를 위한 최소 인원에 불과했다.

'어쩔 수 있나. 있는 거에 만족해야지.'

승부에 대한 초조함은 느끼지 않았다.

에단은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대련 상대는 필요한데.'

에단은 고개를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땀을 폭포처럼 쏟아 내는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노인네한테 부탁하기는 그렇고.'

네이드는 대륙에 몇 없는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빈센트의 측근이기도 했다.

에단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뛰는 것에 집중했다.

시작한 운동은 제대로 끝내야 했다.

* * *

달리기를 마친 에단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달아오른 몸을 한차례 식혀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은 에단이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더럽게 무겁군.'

단순한 팔굽혀펴기였지만, 나약한 근력과 묵직한 체중이 더해지자 가벼운 맨몸 운동도 상당한 난이도로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을 참는 건 익숙하다.

에단은 불평하지 않고, 침착하게 팔굽혀펴기를 지속했다.

'하나라도 확실히.'

지금 몸 상태로 폭발적인 운동을 하기는 힘들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천천히, 확실하게 하는 게 중요했다.

얼마나 했느냐보다,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에단은 구슬땀을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중간에 팔이랑 가슴이 후들거리면 잠깐씩 쉬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팔굽혀펴기를 지속했다.

'다시 생각해도 몸은 쓸 만한 녀석이야.'

운동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거늘, 에단의 몸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에단은 알고 있었다. 지금 겪고 있는 변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약을 써도 이 정도는 힘들 텐데.'

약물을 사용하는 약물러 선수와 일체 그러한 것에 손대지 않는 내추럴 선수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에단이다.

'이것이 이 세계의 재능이라는 건가.'

검술 명가 블란테의 혈통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재능을 썩히고 있었다니.'

아직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도 체감이 됐다.

체지방을 걷어 내기 시작하자, 근육이 엄청난 속도로 붙기 시작했다.

에단은 그러한 자신의 성장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격투기 선수로서의 류태신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조금씩 스스로를 깎아 내며 가다듬었지만, 성장의 재미를 느끼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에단의 몸은 세공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비대한 지방을 봤을 때 가망이 없다고 느꼈으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 육체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렴풋이 예측이 되었다.

"네이드."

팔굽혀펴기를 모두 마친 에단이 네이드를 불렀다.

"부르셨나요, 도련님."

"목검 하나만 준비해 줘."

"목검 말씀이신가요?"

"그래. 슬슬 준비해야지."

"대련 말씀이시죠?"

"어."

슬슬 대련을 준비할 시기이다.

남은 날짜는 일주일.

촉박하다면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대련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 * *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목검을 가져왔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목검이었다.

에단은 목검을 쥐더니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에단이 평범하게 목검을 휘두르자 네이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검을 두려워하시지 않아.'

에단은 첫 대련에서 크게 다친 뒤로 검을 무서워했다.

대련에서 부상이야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블란테라는 이름을 어깨에 짊어진 이상, 검과 친해지는 것은 숙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평생을 함께할 친우를 두려워하다니.

블란테 가문의 사람들은 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에단은 엇나가기 시작했고, 검을 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쥐었다.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검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풍기지 않았다.

"네이드."

"말씀하시죠."

"검을 잡아."

"...저는 일개 집사일 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잡으라고."

에단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네이드는 그런 에단에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쥐었다.

"후우, 미리 말씀드리지만 애매하게 봐드리지는 못 합니다."

"바라던 바야."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에단은 강자와의 싸움을 즐겼다.

비록 몸 상태부터 시작해 모든 여건이 성에 차지 않았지만, 에단은 불평하지 않았다.

실전보다 더 좋은 단련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놀랍군.'

네이드는 에단의 눈빛을 바라보며 가벼운 마음을 다잡았다.

저 눈빛은 하룻강아지가 낼 수가 없는 눈빛이었다.

마치 백전노장의 눈빛.

자신의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지금 느끼는 감각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이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망나니라고만 생각하던 자신의 안목이 틀린 모양이다.

"한 수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네이드가 말하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은 상하는데, 거절하진 않겠어."

에단은 냉정하게 상황을 인식했다.

지금의 에단은 무슨 수를 써도 네이드를 이기지 못한다.

포기나 체념이 아니었다.

에단의 투지는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마나와 마력이 있고, 냉병기가 판치는 세상이다.

때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결국 올라설 거니까.'

자신이 있었다.

타인은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리고 시대를 바꿔 나갈 인물들도 알고 있었다.

'엑스트라로 죽을 생각은 없으니.'

비록 에단이 엑스트라 악역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몸에 류태신이 빙의한 이상,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걸 위한 첫 실전이다.'

에단이 목검을 꽉 쥐었다.

힘이 실린 목검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살짝 떨리는 기분도 들었다.

'육체의 기억인가?'

검으로 인한 트라우마.

막연한 공포.

에단은 웃으며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떨쳐 냈다.

공포라는 감정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에단은 몸을 숙였다.

단거리 육상 선수의 자세와도 흡사했다.

마치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에단의 허벅지가 팽창했다.

아직 미숙한 몸이었다.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의 반만 따라가도 성과는 있을 거다.

에단이 몸을 젖혔다.

그러는 동안에도 네이드는 말없이 에단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 겁니까.'

흥미가 일었다. 지금 에단이 보여 주는 모습은 평범한 기사와는 크게 달랐으니.

쑤욱!

순간, 에단의 몸이 뛰쳐나갔다.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얼마 전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던 것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는 성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실망입니다.'

바로 그때, 에단의 목검이 날아들었다.

네이드의 눈이 커졌다.

날아드는 목검을 쳐 냈고, 당연하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네이드는 순간 기가 찼다. 설마 이것을 노린 것인가?

그렇다면 더한 악수, 검사가 검을 놓게 되면 그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네이드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단이 몸을 숙여 달려들었다.

에단은 애초부터 검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 [8화] 본색 (2)

기습적인 태클.

격투기에서는 흔하게 나오는 태클이기도 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펀치 대신에 목검을 집어던졌다는 것.

애초에 에단은 검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검에 대한 조예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에 이점이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노린 것은 태클이었다.

'내가 태클을 걸게 될 줄이야.'

에단은, 아니, 류태신은 레슬러가 아니었다.

류태신은 언제나 상대 선수를 타격으로 잠재웠다.

상대는 언제나 타격을 피해 왔고, 류태신에게 레슬링 게임을 유도했다.

그러다 보니 류태신은 언제나 레슬링을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하수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니, 지금은 에단이 레슬링 게임을 시도해야 했다.

네이드는 마스터 중 한 명.

검에 통달한 강자였다.

그런 강자에게 정면에서 맨주먹으로 싸움을 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에단은 '자신'과 '자만'을 혼동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에단은 레슬링에 자신이 있었다.

네이드를 넘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아도, 변수는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에단이 다리를 향해 순간적으로 파고들자, 네이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찌할까.'

당혹스러운 반전이었다.

여기서 마력을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대련의 본질이 흐려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궁금증이었다.

여기서 어떤 공격을 할까.

예상을 벗어난 에단의 공세에 순순한 궁금증이 들었다.

네이드는 순순히 한쪽 다리를 내줬다.

에단은 네이드의 왼쪽 다리를 붙들자마자 곧바로 몸을 붙였다.

싱글 렉 태클.

체중도 제대로 실은 데다가 타이밍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네이드는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네이드가 절묘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잡아선 안 된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네이드는 쉽게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맨손인 것도 아니었다.

네이드의 손에 목검이 들려 있는 지금 상황에서 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위험했다.

에단은 곧바로 네이드의 뒤를 잡았다.

'빠르군.'

네이드는 작게 감탄했다. 무슨 짓을 벌일까 궁금해 맞춰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에단의 움직임이 체계적이고 치밀했다.

무게 중심의 이동조차 매우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위기를 감지하고 뒤를 잡은 것도 놀라웠다.

에단이 손에 날붙이라도 들고 있다면 상황은 또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 터였다.

에단이 허리에 힘을 줬다. 네이드의 몸이 지면에서 뽑히려는 찰나.

네이드가 에단의 손을 가볍게 뜯어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힘이 개입한 것이다.

마나를 끌어 올린 걸 확인한 에단은, 여기서 힘을 더 쓰는 걸 포기했다.

판단은 빨랐다.

손을 떨쳐 낸 에단은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뒤를 잡은 상황이라면 메치기나 초크 류가 정석적이었지만, 방금 전의 괴력을 보고는 다른 방향으로 튼 것이다.

상대가 마나를 사용한 이상, 레슬링 따위의 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네이드는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에단의 주먹을 피했다.

하나 에단은 리듬을 잃지 않았다. 순식간에 네이드를 따라붙어 발차기를 날렸다.

네이드가 에단의 발차기를 도중에 붙잡았다.

'이 움직임은 대체 뭐지?'

네이드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에단의 움직임과 기술.

모두 어설프게 행할 수 없는 고등한 기술이라 주의가 약해지면 일격을 허용할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둘의 역량 차이는 확실했다.

충분히 빠른 일격이었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마나를 쓰니까 다른 사람 같군.'

설마 이 정도의 반사 신경을 얻게 될 줄이야.

그러나 이조차 에단의 예상범위에 들어 있었다.

에단은 빠르게 판단하여 자신의 다리를 잡은 네이드의 팔을 뱀처럼 휘어 감았다.

선수들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플라잉 암바.

"대처 능력이 좋군요."

네이드는 꽤나 놀랐다.

빈말이 아니었다.

사실상 네이드가 마나를 사용한 이상, 그의 패배라고 봐도 좋았다.

에단의 공격은 매 순간 허를 찔렀고, 좁힐 수 없는 마나의 유무만 제외한다면 에단의 승리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이드가 마나를 사용한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에단이 이를 악물며 네이드의 팔을 꺾으려 들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지으며 잡힌 팔에 힘을 실었다.

"훌륭합니다."

뚜득.

마력을 사용하자 암바가 순식간에 풀려났다.

암바가 순식간에 풀리자 에단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네이드가 목검을 휘둘렀다. 에단의 눈이 네이드의 목검을 좇았다.

퍼억!

에단이 팔을 들어 목검을 막자, 저릿한 통증이 뇌리를 타고 올라왔다.

타닷.

에단이 지면에 발을 디뎠다.

"여기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쳇, 더럽게 아프네."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팔을 털어 냈다. 목검에 가격당한 부위가 얼얼했다.

소매를 걷어 확인해 보자 피부가 검게 죽어 있었다.

"아직 마나도 못 쓰는 상대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그만큼 도련님의 공세가 위협적이었습니다."

"아부 떨기는."

에단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네이드는 빈말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네이드가 가라앉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놀라운 움직임이군.'

정확히 말하면 네이드가 놀란 것은 에단의 격투술이었다.

기사들도 맨몸 격투를 수련하기는 한다.

다만, 그 비중이 매우 낮았다.

기사들은 검을 자신의 형제, 혹은 애인처럼 아꼈다.

전투에 있어서도 검을 지키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다.

그러한 점이 격투술을 등한시하는 이유이기도 하였지만, 가장 큰 것은 효용성의 차이었다.

맨몸인 상대와 검을 든 상대의 차이는 컸다.

맨몸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작은 날붙이라도 들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어린아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상력을 얻게 되는 거다.

그런 근본적인 효용의 차이 때문에 기사들은 격투술을 등한시했다.

그 시간에 검술을 더 단련하고, 비상시를 대비해서 단검을 착검했다.

블란테는 검술 명가였다.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술을 모두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서 파생되는 격투술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부터 존재하는 격투술, 혹은 박투술.

효용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검술과 비교할 것은 되지 못했다.

네이드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전에 에단이 보여 준 움직임을 토대로 가문 내에 존재하는 격투술이나 박투술에 대한 서적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단의 움직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극한의 효율을 좇는 움직임. 변수를 창출해 내는 창의성.

흡사 암살자의 무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던 네이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이 암살자의 무술을 배울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그 박투술은 어디서 배워 오신 겁니까?"

"어? 음... 내가 만들었는데?"

"...그 모든 것을 직접 창작하셨다는 겁니까?"

"뭐, 전부 오리지널은 아니고, 책들 몇 개 엮어서 만들었어. 아무래도 칼보다는 몸 쓰는 게 적성에 맞아서."

네이드의 입이 벌어졌다.

그 모든 것들을 직접 만들었다고?

이건 천재의 영역을 넘어선 일이었다. 에단의 나이는 아직 10대에 불과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네이드가 계속해서 물어보자, 부담을 느낀 에단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 난 이제 씻으러 간다."

에단은 그 말을 끝으로 연무장을 나섰다.

'꼬치꼬치 캐묻기는.'

에단이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 종합격투기의 근간은 결국 모든 무술의 집합체였으니까.

다양한 무술의 장점을 응집해 만든 것이 MMA였다.

물론 그 와중에 부상 위험도가 높거나 하는 것들은 반칙성 기술로 금지가 되었다.

'이제는 가릴 처지가 아니야.'

칼과 창을 쓰는 시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력까지도 사용하는 판타지 세계관이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필요에 따라서는 검도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의 숙련도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긴 것뿐이지.

시간만 주어진다면 모든 것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종합격투기의 기술이 어디까지 통용될지도 궁금하고.'

에단은 카론을 떠올렸다.

'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하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방금 직접 느끼지 않았는가.

마나를 쓰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와의 간극은 넓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거길 가기에는 명분이 부족한데....'

주인공이 얻어갈 기연 중 하나.

마음 같아서는 그걸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지금 대외적으로 에단은 별채에서 근신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전에 본채로 가게 된 것은 가주의 호출로 인해서였지, 에단의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

괜히 트집 잡힐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 녀석만 이기면 명분이 생기니까.'

에단은 조급함을 느끼지 않았다.

천천히 하면 되는 일이었다.

"볼 때마다 놀랍네."

욕탕에 들어가기 전 에단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우 짧은 시간 이뤄진 몸의 변화가 놀라웠는데, 볼 때마다 몸의 테가 달라지니 매번 신기했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앞으로 변하게 될 몸을 떠올리며 탕에 몸을 담갔다.

* * *

"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지?"

"별채에서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겁을 집어먹은 것 같습니다."

카론의 호위 기사인 아드먼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드먼은 카론의 호위 기사인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

"흥, 요행으로 이긴 주제에 건방을 떨 때부터 예상했어. 망나니 새끼가 감히...."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이가 갈렸다.

"자중하시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지. 운도 좋은 녀석. 아버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수련은 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흥, 그딴 망나니 새끼 따위 수련 없이도 상대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준비는 해야겠지."

카론이 목검을 쥐었다. 이윽고 자세를 취하자 아드먼도 가볍게 목검을 들어 올렸다.

타닷.

카론이 경쾌한 발검으로 아드먼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웅!

카론의 목검이 아드먼의 목덜미를 노렸는데, 상당히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감정이 실려 있군.'

재능은 있는 편이었지만,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일전의 사태를 떠올리며 아직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고, 그 탓에 검술에도 분노가 묻어났다.

좋지 않은 습관이었지만, 아드먼은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때로는 분노 또한 좋은 양분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가 그 망나니 녀석이라면.'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드먼은 에단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에단이 어릴 때, 그의 곁에서 수습 기사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블란테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놈이다.'

오만하고, 거만했으며, 포악했다.

그렇다고 겁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렇지도 않았다.

에단은 겁쟁이였다.

검술 명가의 자제이면서도 검에 대한 공포를 떨쳐 내지 못했다.

아드먼은 그런 에단을 마음속으로 경멸했다.

그 이후로 카론이 태어나자 아드먼은 일말의 고민 없이 카론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러고는 성심성의껏 카론을 지도했다.

아드먼은 뛰어난 기사는 되지 못하지만, 좋은 지도자는 되었다.

빈센트도 아드먼이 카론을 지도하는 것을 기꺼워했다.

'이제 증명할 때가 다가왔군.'

카론이 에단을 보기 좋게 박살 낸다면 아드먼의 위상도 덩달아 상승할 터였다.

대련이 끝난 후를 떠올린 아드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9화] 격투천재 (1)

기상과 동시에 에단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바로 하드한 운동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먼저 땀을 뺀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유산소를 뛰었다.

몸이 몰라보게 가벼워졌는데, 단기간에 빠르게 변하다 보니 체감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체중이 빠지는 속도가 가팔랐다.

원래 이 정도 속도라면 신체가 적지 않은 부담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신체의 잠재력 덕분인지 오히려 몸이 예리하게 세공되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신체 곳곳이 아려왔지만, 에단은 그 통증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성장의 쾌감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감정이지만, 에단의 몸에 들어온 뒤로는 매일같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훈련이 지루하지 않았다.

고통 따위는 찰나일 뿐이었다.

네이드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을 즐기다니. 보면서도 놀라웠다.

기사들도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구보다.

체력의 기본이자 근간이지만, 뭐든지 기본기가 어려운 법.

하지만 에단은 훈련을 시작한 뒤로 오전 구보를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에단은 왼쪽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심박수는... 안정적이네.'

이전처럼 주체 못 할 정도로 격렬히 뛰지는 않았다.

심장이 서서히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후욱, 후욱―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신체는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구보를 마친 에단은 가볍게 몸을 씻고 식사를 챙겼다.

본 훈련을 하기 전에 영양 섭취는 필수로 가져가야 했다.

이제 탄수화물도 적당히 섭취해 주고 있었다.

근력의 향상과 순간적인 폭발력을 위해서는 탄수화물은 필수적이었다.

'식단은 훌륭해서 맘에 들어.'

귀족은 귀족이다.

그것도 검술로 위세를 떨치는 가문인 만큼, 음식의 질에 있어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육류와 야채 곡물류 모두 최상급이었다.

비록 조리법은 조금 구시대적이었지만, 투박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에단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자연 친화적인 음식이 입에 맞았다.

음식을 섭취한 후에는 스트레칭으로 몸의 기능을 끌어 올렸다.

근육과 관절의 가동 범위와 유연성은 신체가 받는 대미지를 감소시키며, 신체를 더욱 치밀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끄응, 적응이 안 되는군.'

원래 스트레칭은 최대한 고통을 감수해야 진전이 있는 법이었다. 에단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스트레칭을 진행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재밌나?"

에단은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네이드를 바라봤다.

"성실하시군요."

"...비꼬는 거냐?"

"그럴 리가요. 감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이 아닌데?"

"그럴 리가요."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짓자, 에단은 한숨을 내쉬고 하던 스트레칭을 마저 끝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자 에단은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도착한 에단은 목검을 쥐었다.

"뭐 해? 어서 안 오고."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던 네이드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왜 그러시죠?"

"왜긴 왜야. 검 알려 줘야지."

"...검 말씀이신가요?"

"그럼 이건 장식이야?"

에단이 손에 쥐고 있는 목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바람을 가르는 목검의 소리가 꽤나 흉악했다.

네이드는 그런 에단을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상대가 되어드렸습니다만... 저는 결국 한낱 집사에 불과합니다."

'속 검은 노인네가.'

네이드에 말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어. 그건 알고 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 나도 그 컨셉을 지켜 주고 싶기는 하거든? 그런데 지금 내 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지나가는 하인보고 상대가 돼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허허."

에단의 말에 네이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제부터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지?'

망나니 시절에 해 온 막무가내식 패악질이 아니었다.

거침없는 언행은 그대로였지만, 이전에는 없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나도 많이 배울 생각은 없어."

검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에단도 알고 있었다.

에단이 원하는 것은 기본기였다.

'검을 알아 가는 게 먼저겠지.'

거리감, 공격 양식, 변수.

모두 승부에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대련이라는 허울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에단과 카론 모두 무기를 쥐고 싸운다.

찰나의 순간, 결판이 지어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대응책을 마련해 두는 것이 옳았다.

예상 못 한 변수로 낭패를 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럼 기본적인 것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이드는 목검을 쥐었다.

손에 쥔 목검을 바라보는 네이드의 시선이 복잡했다.

네이드는 잡념을 떨쳐 내고 에단에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없습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잘 배우니까."

"...."

에단의 오만한 대답에 네이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검을 휘둘렀다.

휘익.

세로로 휘둘러진 검.

언뜻 보면 단순하고 별거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네이드의 동작에는 작은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예비 동작 없이 수직으로 그어지는 네이드의 목검.

"이것이 세로 베기입니다."

에단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네이드의 동작을 천천히 떠올리며 곱씹었다.

그러길 잠시, 이내 에단이 눈을 뜨고 곧장 자세를 잡았다.

'보폭은 이 정도였나?'

평소 격투기 시합 때와는 조금 다른 비교적 좁은 보폭.

검을 들되, 너무 높이 들지 않고 그대로 수직으로 긋는다.

에단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상황이 그려졌다.

마치 눈앞 환영이 미래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에단은 천천히, 그렇다고 느리지 않은 속도로 검을 내리그었다.

쉬익―

방금까지 에단이 펼치던 흉악한 파공음과는 전혀 다른,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움직임을 본 네이드의 눈이 커졌다.

'...방금 뭘 한 거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검에 대해 모르는 자가 보면 평범한 세로 베기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이드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세로 베기가 아니었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완성된 베기였다.

호흡, 자세, 움직임, 모든 것이 완벽했다.

"흠, 대충 이런 식인가."

에단은 검을 바라봤다.

묘한 감흥이 들었다.

맨몸으로 싸울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검을 배우지 못한 것이 맞습니까?"

"넌 나랑 계속 붙어 있었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내가 알아서 배운다고 했잖아. 계속해."

에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네이드는 에단이 영유아 시절 때부터 곁에서 보필했다.

하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에단이 네이드의 시선을 피해서 무언가를 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네이드가 에단의 곁을 지키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사라는 신분이 있는 만큼 처리해야 할 업무도 있었고, 그렇게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에단은 곧장 사고를 치곤 했다.

그렇기에 네이드가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빨리 진행이나 하자."

"...알겠습니다."

네이드는 결국 의구심을 뒤로한 채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이어지는 일격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내려 베기, 가로 베기, 찌르기.

모두 처음 검을 잡으면 배우는 기본기였다.

가문 고유의 비전 검술 같은 것도 아니었으며, 화려한 연계 동작도 없었다.

흔한 허초도 섞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검격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그 동작들을 반복했다.

몸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 그 동작을 시도할 때 나오는 예비 동작, 검끝이 향하는 방향, 거리감 등을 익히기 위해 반복했다.

네이드는 아무런 말 없이 에단이 하는 행동을 바라만 봤다.

"네이드."

"네, 도련님."

"나한테 검을 휘둘러 봐."

"...진심입니까?"

"어."

에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이드는 별수 없다는 듯이 에단에게 다가섰다.

쉭―

네이드의 검이 바람처럼 휘둘러졌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세로 베기.

아무리 에단의 몸이 튼튼하다고 한들 이 일격을 제대로 맞으면 몸이 성치 않을 터였다.

에단은 검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내렸다.

평소라면 가벼운 스텝으로 공격을 피해 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됐다.

기본적으로 거리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컸다.

아무리 공격 한 번을 회피해 냈다고 한들, 기회는 아직 상대방에게 있다는 소리였다.

에단은 그 기회를 포착할 수는 있어도, 손에 쥘 만한 무기가 없었다.

에단의 신체 능력은 아직 볼품없었다.

체력이 많이 올라왔다고 한들 거기까지였다.

마나 유저와는 상대가 안 됐다.

승리를 위해서는 달리 접근해야 한다.

에단은 오히려 네이드가 휘두르는 목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네이드가 의아한 눈빛을 내비쳤지만, 검을 멈추지는 않았다.

탁!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단은 목검을 들어 네이드의 목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두 발짝 더 다가갔다.

부딪힌 목검을 타고 두 사람이 가까워졌고, 네이드가 뒤로 몸을 빼자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흠, 이런 식인가."

에단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감을 잡으려고 했다.

반면 네이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게... 재능인가....'

저런 대응책은 아직 시범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건 갓 검을 쥔 초심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해 볼까?"

대충 느낌이 잡혔으니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할 시간이었다.

에단은 검을 들고 네이드에게 다가섰다.

"집중하자고."

에단은 씨익 웃었고, 네이드는 한숨을 푹 쉬며 목검을 들었다.

"노인을 고생하게 만드는군요."

* * *

시간이 흘러 대련 날짜가 다가왔다.

대련이 행해지는 장소는 가문 본채에 있는 대연무장.

블란테 가문에서 가장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연무장이었다.

평소라면 기사단 단위의 훈련을 위해서 사용하는 연무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단 두 명 때문에 사용하게 되었다.

연무장을 사용하는 것은 둘이었지만, 모인 인원은 적지 않았다.

블란테 가문의 기사와 그 수행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것이다.

이 대련은 가문 내에서 꽤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화제도 화제였지만, 카론과 모룬이 주도적으로 판을 키운 탓도 있었다.

카론은 일전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모룬은 에단을 완전히 매장하기 위해.

그렇게 두 사람의 의도가 모여 더욱 사건이 커졌다.

게다가 참관인 제한이 없는 탓에 대련을 직접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덕분에 웬만한 곳에서는 도저히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겁을 집어먹고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잘도 나왔다?"

카론이 속 보이는 도발을 하자 에단은 귀를 후비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때 맞은 머리가 아직도 아픈 모양인가 봐."

에단의 심드렁한 대꾸에 카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애새끼긴 하군.'

감정의 변화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결과는 걱정도 안 되고.'

애초에 승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에단이 노리는 것은.

'어떻게 이겨서 입지를 키울 것인가.'

그것이 이번 대련의 주된 목적이었다.

◈ [10화] 격투천재 (2)

"가주님이 입장하십니다."

웅성거리던 인파가 양쪽으로 나뉘어 길을 텄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소란이 잦아들고 사람들은 침묵했다.

이것이 블란테 가문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입지였다.

'재밌네.'

흥미로웠다.

시합을 뛰던 시절 언제나 주인공은 류태신이었다.

환호든지, 원성이든지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당사자는 류태신이 분명했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자리에 수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에단이 일으킨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조차 한순간에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주라는 존재.

빈센트 블란테였다.

'먹을까?'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무너질 가문이었다.

시기를 잘 조율하고 맞물리는 상황 속에 에단이 자신의 입지와 명분을 들이민다면, 가능성은 차고도 넘쳤다.

'지금은 시기상조지.'

아직은 이 가문에 그렇게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블란테라는 가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얻어야 할 것들은 밖에 있지만, 추후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원작 주인공에겐 블란테 가문이 무너지며 생기는 혼란이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에단은 블란테 가문이 살아 있어야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여 에단은 블란테가 원작에서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블란테는 에단의 든든한 배경이 될 테니까.

가문의 몰락을 최대한 늦추며, 원하는 것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모든 걸 얻으면 그 이후로 가문은 중요치 않아.'

에단이 잡념을 지웠다.

'지금은 집중.'

자신감은 충분했지만, 자만할 수는 없었다.

에단은 분명히 불리한 입장이다.

아무리 카론이 생각 없는 애송이라고 한들 마나 유저였다.

네이드와의 대련을 통해 마나를 다루고, 다루지 못하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체감했다.

아무리 에단이 다양한 변수 창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한 번 실수하면 끝장이었다.

"큭큭, 이제야 긴장이 좀 되는 모양이지?"

"지랄한다."

카론의 도발에 에단이 태연하게 대처하자, 카론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까지다.'

대련이 시작되면 바닥을 구르는 것은 저 녀석이 될 것이다.

어찌어찌 비대한 지방은 덜어 낸 모양인데 그걸로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카론은 마나 유저였다.

에단은 아직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일반인이라는 소리였다.

'일반인은 마나 유저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은 정설이자 깨지지 않는 공식이었다.

이미 마나를 깨우친 기사급 존재들은 마음속으로 카론의 승리를 점쳤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카론은 고민했다.

'이대로 이겨봤자... 얻는 건 별로 없겠네.'

이미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승리를 점쳤다.

자신은 검을 다룰 줄 아는 마나 유저였고, 에단은 검을 제대로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일반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승리도 매력적이긴 한데....'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망나니 돼지 새끼한테 조금이라도 더 처절한 굴욕을 주고 싶었다.

"어이."

카론이 에단을 불렀다. 에단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진짜....'

속이 뒤틀릴 정도로 약이 올랐다.

카론이 에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타인은 듣기 힘들게 에단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대련. 마나는 안 쓸게."

"...호오."

"생각해 보니까 너 같은 버러지 상대로는 마나도 아깝더라고. 기껏 사람들이 모였는데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안 될 일이잖아? 마나를 쓰지 않고 잘근잘근 밟아 줄게."

"후회는 안 하고?"

에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카론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후회를 왜 해. 바닥을 기면서 나한테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건 널 텐데."

"하하, 그 말 기억해 둘게."

귀엽다.

저런 수위 낮은 도발은 감흥도 없었다.

격투기 선수 시절 서구권 선수들이 내뱉던 트래시 토크에 비교하면 애교였다.

'멍청한 녀석이군.'

아무리 상대가 자신보다 약해 보여도,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런데 저런 여유를 부리고 있다니.

'괘씸하기도 하고, 정신 좀 차리게 해야겠어.'

* * *

"이제야 에단 님에게서 해방되시겠군요."

아드먼이 네이드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네이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기회에 에단 도련님이 패배하시면 입지도 더욱 좁아지겠죠. 그러면 네이드 씨도 더 이상 에단 님 곁에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허허, 결과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네이드의 말에 아드먼이 눈을 껌뻑였다.

"...설마 에단 도련님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하지만 결과는 모르는 법이죠."

"허."

아드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네이드가 에단을 챙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보다 멍청한 노인네였군.'

가문 내에서 적지 않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자인지라 가까이 지낼 생각이었건만,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대련이 끝나면 대세는 카론 님이다.'

그렇게 되면 덩달아 자신의 위상도 높아질 것은 불 보듯 빤했다.

나이 먹은 노집사 따위는 대세에서 멀어질 것이다.

'결과가 기대되는군.'

아드먼이 장밋빛 미래를 떠올리며 에단과 카론을 바라봤다.

* * *

카론과 에단의 거리가 멀어졌다.

심판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사가 대련을 진행했다.

"그럼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패배를 외치시거나 대련의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대련이 종료됩니다."

카론이 에단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곱게 끝낼 수는 없지.'

패배를 외치기도 전에 곤죽을 내 줄 생각이었다.

위치상 에단은 카론의 형이었지만, 카론은 단 한 번도 에단이 자신의 형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늘 가문의 수치이자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망나니로 여겼다.

'검술 가문의 자제가 검을 두려워하는 게 말이 돼?'

에단을 향한 카론의 경멸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러던 와중 불시의 일격으로 굴욕을 당했다.

정당한 결투 신청을 모욕했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었다.

하여 카론은 고작 승리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울고불고 애원하게 만들어 준다.'

에단은 카론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이 다 드러나는군.'

선수 시절에도 저런 녀석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

좋지 않은 습관이다.

프로는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흥분은 눈앞을 흐리게 만들고, 기술을 무뎌지게 만든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순간의 방심으로 결과가 좌지우지된다.

"대련 시작!"

기사의 목소리가 울리자 카론은 곧장 뛰어들었다.

오랜 시간 단련된 카론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가로 베기.'

에단은 침착하게 카론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손이 향하는 방향, 그리고 보폭을 확인해 카론이 내지를 수를 읽었다.

에단의 예상처럼 카론의 목검은 에단의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거리를 벌리면 안 되겠지.'

신장은 에단이 더 컸지만, 에단은 검에 익숙하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면서 승부를 보기에는 불리했다.

그리고 애당초 에단은 검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 없기에 목검을 들어 카론의 공격을 방어해 냈다.

쾅!

이윽고 묵직한 충돌음이 퍼져 나갔다.

'이걸 막아?'

카론의 눈이 커졌다.

꽤나 힘을 실은 일격이었다. 죽지 않도록 조절했다곤 하나, 일반인이 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어렵지 않게 일격을 막아 냈다.

몸이 상당히 밀리긴 했지만, 분명히 방어를 해낸 것이다.

'관건은 속전속결.'

카론이 아직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검을 회수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 늦었다.

퍼억!

에단의 오른발이 카론의 명치에 정확히 꽂혔다.

"커헉!"

카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며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났다.

"이게 무슨?"

지켜보던 관중들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단이 행한 움직임은 검술이 아닌,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겁한...!'

그리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명치에 제대로 꽂힌 발차기 때문에 카론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는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렀다.

'확실히 빠르네.'

에단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기회가 보이면 끝내려고 했지만, 마나를 깨우친 신체답게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에단이 앞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허리가 비틀리며 오른손이 뒤로 젖혀졌다.

'설마?'

카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쉬익―!

에단이 목검을 투척했다.

힘을 실어 투척한 목검은 바람을 가르며 카론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갔다.

"멍청한 녀석!"

카론은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 발차기에 적지 않게 당황하기는 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저런 근본 없는 공격에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타닥!

카론이 지면에 자세를 잡고 목검을 쳐 냈다.

매섭게 날아든 에단의 목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겼다...!'

에단이 멍청한 짓을 한 덕에 수월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이 없는 기사가 대련을 제대로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스윽―

시야에서 목검이 사라지자마자 에단이 가까워졌다.

에단의 몸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카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목검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지만, 에단의 무릎은 카론의 사각을 노리고 정확히 꽂혔다.

빠악―!

이전에도 연습한 플라잉 니킥이 카론의 얼굴에 정확히 적중했다.

"커헉!"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카론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제대로 적중한 플라잉 니킥이다. 실신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확실히 좋긴 하군.'

검술 명가다운 튼튼한 몸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에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카론의 손을 붙잡았다.

"수고했다. 잘 가라."

휘릭.

에단은 카론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카론의 팔이 에단의 어깨에 걸쳐졌고, 이내 무게 중심이 기울어진다.

그의 체중은 이미 에단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카론의 몸이 붕 떴다가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쳐졌다.

쾅!

자비는 없었다.

제대로 된 낙법도 익히지 못한 카론이 완벽하게 걸린 업어치기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커헉!"

"오, 뭐야. 아직도 정신이 있어?"

이번에도 역시 제대로 들어간 업어치기였다. 낙법도 취하지 못한 채 온전히 충격을 전달받았음에도 카론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끄아악!"

카론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머릿속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죽여 버릴 거다!"

"새끼, 허세는. 지가 한 말도 못 지키는 새끼가."

카론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에단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마나를 쓰니까 힘이 세긴 하네.'

이 정도 근력이면 최소 중량급은 되어야만 낼 수 있는 완력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은 카론이 낼 만한 힘은 아니었다.

'뭐 상관은 없지만.'

카론은 아무 기술 없이 무턱대고 에단의 품에 파고들었다.

방법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근력이 세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무방비상태라면 무용지물이다.

에단이 카론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허리를 감아 주고, 몸을 틀어 주면.'

꽈아아악!

순식간에 엄청난 압력이 카론의 목을 압박했다.

"커, 커헉!"

카론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게 대체 뭐야...!'

처음 겪는 상황에 카론은 정신을 못 차리고서 바동거리고 있었다.

손에 든 목검은 놓친 지 오래였다.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쉽게 풀릴 건 아니라서.'

그라운드 기술에 조예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런 지식 없이 바동거리는 것만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미 대미지를 입은 상태였다. 아무리 마나 유저인 데다가 우월한 스펙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경동맥이 압박당하는 상황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기가 무섭게 카론의 몸이 축 늘어졌다.

'끝났네.'

에단은 카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판단한 뒤 초크를 풀었다.

"이, 이게 무슨...."

한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드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이 대련은 무효입니다. 검술 대련에서 저런 근본 없는 주먹질이라니...."

아드먼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이 대련이 언제부터 검술 대련이었죠?"

"...?"

"목검으로 싸워야 한다는 조항은 여태껏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

네이드의 말에 아드먼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대련 내에 그런 조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 애당초 마나 유저인 카론과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않은 에단의 대련은 성사되지 말아야 했다.

침묵하고 있는 관객들에게서 경악과 경탄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블란테는 힘을 숭상한다. 당연히 블란테의 검이라 불리는 기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에단의 전투술과 그가 대련 도중에 보여 준 움직임은 경이로운 수준이었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 주었다.

"뭐, 뭐야...?"

"저 움직임... 처음 보는 것들인데...?"

"에단 님에게 저런 재능이 있었다고?"

아드먼이 입을 다물고 다른 수행인들도 감탄만 하고 있자, 모룬이 거친 발걸음으로 에단에게 다가섰다.

"이, 이런 비겁한 새끼가!"

모룬이 다짜고짜 에단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자 에단이 자세를 갖추고 대응하려 했다.

그 순간, 우레 같은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그만!"

빈센트의 목소리였다.

그의 노호성에 순간 연무장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모룬, 지금 이게 무슨 추태지?"

빈센트의 싸늘한 눈초리에, 흥분하며 에단에게 다가서던 모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쯧."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은 빈센트가 한차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좌중을 훑었다.

"대련은 끝났다. 이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는 에단의 승리다."

"하지만... 에단은 비겁한 수를...."

모룬이 슬며시 고개를 들며 불복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빈센트는 가차 없이 묵살했다.

"실전이었다면 카론은 죽었다. 너는 전장에서도 그따위 변명을 내뱉을 셈이더냐?"

빈센트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모룬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에 드는군.'

사실 에단의 체력은 지금 한계치에 다다랐다.

마나 유저와의 스펙 차이를 통감하던 터라 속전속결을 위해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한데 이때 모룬 같은 자가 시비를 걸면 제대로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

원래도 빈센트가 중재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확실하게 중재자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제 보상의 시간이군요."

에단은 웃음을 머금고 빈센트를 바라봤다.

◈ [11화] 몬스터 토벌 (1)

"그래, 토벌대 말이더냐?"

빈센트가 피식 웃으며 묻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다. 가주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 토벌대를 꾸릴 권한을 주마. 물론 그렇게 많은 인원을 차출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많은 인원을 통솔할 생각도 없었다.

이번 대련으로 이미지 쇄신이 있었다고 한들 에단은 여전히 가문에서 버린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가문 내에서 입지가 좁은 것은 물론이요, 기가 세기로 유명한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이 순순히 에단의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에단의 밑에 들어간 순간, 좌천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다룰 자신도 없고.'

싸움에 재능이 있는 것과 통솔력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소수의 인원을 컨트롤하는 것과 소대급 인원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 또한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머리 아픈 일을 떠맡을 생각도 없고.'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에 자처해서 나설 정도로 이번 토벌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에단이 토벌에 참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죽은 나무.'

중반부에 주인공이 얻게 되는 기연.

혹은 이스터 에그.

주인공의 수많은 스펙 중 하나가 되는 가호.

에단은 그것을 가로챌 생각이었다.

'주인공이 먹게 둘 수는 없지.'

현 시점에서도 이미 주인공이 먹은 기연이 몇 가지는 될 터였다.

하니 에단은 조금이라도 주인공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런 만큼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기연 몇 개는 가로채 가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

그때, 에단의 주위에서 머뭇거리던 모룬이 소리쳤다.

"아버지!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끄럽다. 지금 대화 중인 게 안 보이더냐?"

빈센트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모룬이 멈칫했지만, 이번에는 그도 양보하기 힘들었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미 토벌대는 구성이 완성되었습니다. 갑자기 인원을 차출한다고 하시면...."

"십인대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모룬이 반대 의사를 계속해서 표출할 때 에단이 말했다.

에단은 경멸의 눈초리로 모룬을 슬며시 훑어본 후 다시 빈센트를 바라봤다.

"십인대라... 생각보다 적구나. 그 정도로 충분하겠느냐?"

"충분합니다. 다만, 인원은 제가 구성할 겁니다."

"...뭐라고?"

"그 정도 권한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가주님께서 인원을 강제로 배정시킨다고 한들 그들이 제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가주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에단의 말에 빈센트는 침묵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다. 하지만 나도 하나 조건을 걸지. 네가 뽑는 병사나 기사도 차출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강제로 차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빈센트는 입을 다물고 있는 모룬을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불안감에 젖어 있던 모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군.'

빈센트는 한심한 모룬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혀를 찬 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조금의 시간을 주시죠. 일주일 안에 제 부대를 완성해 오겠습니다."

'재밌구나.'

빈센트는 에단의 기개 어린 태도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철없던 망나니인 줄만 알았는데, 계속해서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변덕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변덕 같아 보이지 않았다.

빈센트는 에단의 눈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일말의 망설임과 부담도 없이, 자신감과 총기만이 가득했다.

'오만한 녀석이구나.'

하지만 빈센트는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오만함은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였다.

이유 없는 자만과 오만은 독이 되겠지만, 에단은 이미 한 번 결과로 증명을 해냈다.

'하지만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한 번의 증명으로는 지금껏 에단이 저지른 일들을 무마할 정도의 성과를 냈다고 보기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동생을 제압한 것뿐이었으니까.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뿐이었다.

당연히 이것을 성과라고 볼 수는 없었다.

'마나 유저를 제압한 것은 놀랍긴 하다만.'

빈센트는 묘한 눈으로 에단을 훑어봤다.

두툼하던 지방 덩어리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밀조밀한 잔 근육이 에단의 몸을 갑옷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할 테냐?"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여기서 권유해 봤자 제 밑으로 올 사람은 없을 테고요. 기껏 얻은 이점을 버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에단은 주변 인파를 둘러봤다.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관중까지. 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그들은 모두 충격과 놀라움에 물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내뱉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지만,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주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허락은 구한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에단은 빈센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표한 다음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면서 마주친 모룬을 보며 에단은 작게 중얼거렸다.

'쫄지 마.'

잠시 벙 쪄 있던 모룬이 에단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에단은 태연하게 모룬을 지나치며 네이드를 향해 손짓했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가자."

"...네."

네이드와 함께 연무장을 빠져나온 에단이 발걸음을 옮기자 수많은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마음에 드는군.'

저 눈초리들.

당혹으로 물든 눈빛.

류태신으로 살던 선수 시절, 시합이 끝날 때마다 질리도록 받아 본 눈초리였지만, 저 시선을 받을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늘 짜릿했다.

응당 질 것이라고 예상한 언더독이 일으킨 반전.

그는 그 상황을 즐기곤 했다.

'...설마 더 완벽하게 성공시킬 줄이야.'

에단을 뒤따르던 네이드가 복잡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네이드는 에단과 몇 차례 합을 맞췄다.

당연히 에단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대결에서 에단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연습과 실전은 달랐다.

에단은 실전에서 더욱더 뛰어난 움직임을 보여 줬다.

지금껏 해 온 것들은 몸 풀기에 불과하다는 듯이.

'이번 토벌에서도 또 일을 낼지도 모르겠군.'

매해 이뤄지는 정기적인 토벌이었다.

하지만 숨겨진 의도는 따로 있었다.

'자격의 판별.'

토벌대를 꾸리고, 얼만큼의 성과를 내는지를 판별하는 용도였다.

가주와 그 직속 기사단은 토벌 과정에 발을 깊게 담그지 않았다.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토벌이었지만, 세력 구도는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장남인 모룬이 가장 큰 성과를 냈고, 맡은 토벌의 규모도 가장 컸다.

'과연 다시 이변을 일으킬 수 있을까.'

네이드도 에단과 가주와의 대화를 들었다.

고작 십인대 수준의 부대다. 첨병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규모였다.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었지만.'

토벌의 성과는 규모가 전부가 아니었다.

어쩐지 이번에 에단이 한 번 더 사건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 * *

'토벌대라....'

에단은 자신의 별채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슬슬 근신이 끝날 시기였다.

하지만 에단은 이 별채가 마음에 들었다.

'외압도 없고.'

에단은 머릿속으로 모룬과 카론을 떠올렸다.

본채에서 지낸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칠 녀석들이었다.

경쟁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반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매일 귀찮은 일을 겪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자잘한 반격보다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을 원했다.

'남은 형제들은, 어디 보자....'

에단은 머릿속으로 블란테 가문의 자제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먼저 장남인 모룬, 둘째인 에단, 셋째 여동생인 리사, 그리고 막내 카론.

'이 중에 영향력 있는 녀석은....'

가문 내의 입지는 모룬이 가장 높았다. 장자인 점도 한몫했고, 가진 무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블란테 가문은 검술 가문인 만큼 약육강식을 추종한다.

'문제는 멍청하다는 거지.'

앞서 겪은 대로 모룬은 단순 무식했다.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앞을 내다보지도 못한다.

편협한 아집도 있으면서 자존심은 또 강했다.

그런 점들 때문에 모룬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도 존재했다.

'나는 뭐, 보다시피.'

가문의 문제아이자 망나니. 어찌 보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성격은 형제 중 가장 지랄 맞은 데다, 검에 재능은커녕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녀석.

'그게 지금 내 입장이란 말이지.'

남은 핏줄은.

'리사 블란테.'

검술의 재능도 출중하고 성격 또한 불같았지만, 가문 승계에 관심이 없어 아카데미로 떠났다.

'히로인 중 한 명이고.'

에단은 리사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주인공이 가문 내에서 얻어 가는 기연 대부분이 리사로 인한 것들이었다.

'이제 다 내 거지만.'

주인공 녀석이 이곳에서 가지고 갈 것은 한 톨도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걸 위해 자원한 토벌대였다.

'예정보다는 빠르지만, 상관없겠지.'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 피해 없이 기연을 얻어 갈 수 있는 상황이니.

에단은 별채를 돌아다니며 고민했다.

'어찌할까.'

대련에서 승리하여 전보다는 나아진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인력을 끌어오기가 애매했다.

실력이 있는 기사는 이미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테고, 싹수가 보이는 녀석은 에단을 따라오지 않을 테다.

'썩은 동아줄이라 그거지.'

괜히 에단을 따라갔다가 피를 볼 바에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토벌대에 불참할 게 빤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갈 수는 없고.'

이번에 얻을 계획인 '죽은 나무'는 그리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 마나를 깨우치지 못한 에단에게는 그랬다.

길을 열어 줄 녀석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에단의 말을 충실히 따를 녀석들로 토벌대를 구성해야 했다.

'기존의 토벌대에서 이탈해도 별말이 안 나올 녀석들.'

고집 세기로 유명한 기사는 당연히 제외하고.

'병사들도 쉽지 않겠네.'

블란테 가문의 기사들은 대체적으로 용맹한 편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당연히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고, 에단의 계획을 들으면 제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럼 이제 남은 녀석은....'

아직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지 못한 수습 기사, 갓 군에 들어온 말단 병사, 그리고 하인들.

'우선은 하인부터인가.'

있을 것이다.

재능을 개화시키지 못한 하인 몇 명이.

'이름이....'

원작 내에서도 입지가 적어 잘 떠오르지 않는 녀석.

결국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에단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네이드에게 물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웬만한 하인이랑 하녀들은 대충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얼굴에 긴 흉터 있는 하인 혹시 알아?"

에단의 물음에 곰곰이 고민하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자상이라.... 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이드의 말을 듣자 에단의 입가에는 긴 미소가 지어졌다.

"어 맞아."

◈ [12화] 몬스터 토벌 (2)

"갑자기 휴고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거죠?"

"그럴 이유가 있어. 그 녀석 지금 어디에 있지?"

"...휴고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마구간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안내해."

에단은 멋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휴고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오늘 보면 처음일걸?"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게 있어. 잔말 말고 길이나 안내해."

'첫 단추는 맞춰졌고.'

원래라면 주인공 파티에 함께하게 될 녀석이었지만, 자신이 먼저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야성의 휴고.'

비록 남성 캐릭터라 원작에서의 입지는 적었지만, 실력은 확실한 놈이었다.

녀석이라면 이번 토벌 작전에서도 존재감을 뽐내기에 충분했다.

* * *

블란테 가문의 마구간은 규모가 매우 컸다.

마구간의 숫자도 적지 않았지만, 각각의 크기도 컸다.

한 마구간에서 수용하는 말의 숫자도 많고, 말도 전부 명마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블란테의 마구간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하지만 휴고가 일하고 있는 마구간은 매우 조용했다.

묘하게 스산한 기운까지도 느껴졌다.

'흠, 묘하네.'

마구간에 들어섰지만, 말들은 에단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영양 상태는 괜찮은 것 같은데.'

윤기가 흐르는 털들을 보아하니 영양 쪽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에단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때, 말들은 괜찮아 보여?"

"네. 상태는 훌륭하군요. 관리를 잘한 것 같습니다. 다만, 이상한 점이... 말들이 겁을 먹고 있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말을 마친 에단이 다시 한번 주변의 말들을 둘러봤다.

'녀석의 특성 탓인가.'

야성의 휴고.

녀석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다.

휴고에게는 또 다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말들이 겁을 먹은 건가.'

짐승은 인간보다 예민한 법이다.

본능적인 감각이 인간보다 예민하면 예민했지, 결코 둔하지 않다.

그때, 저 멀리 마구간을 분주하게 정리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얼굴까지 가리고 있는 로브 탓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근처의 말들이 유독 더 겁을 먹은 걸 보니 휴고일 듯싶었다.

"맞아?"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건장한 체형은 아니네.'

얼핏 보면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체격이었다.

에단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남성에게 다가갔다.

"누, 누구...?"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몸을 돌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러다 몸에 두른 예복을 확인하고는 부랴부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예고 없이 찾아온 건 나니까 미안해할 건 없고. 휴고 맞지?"

"...네, 맞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에단이 주위를 훑어봤다.

조용했다.

이렇게 큰 규모의 마구간이건만, 일하고 있는 자는 휴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이드."

에단이 네이드를 부르자, 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네, 도련님."

"여기는 원래 이딴 식인가?"

"아닙니다."

"네가 하는 게 애들 총괄이지?"

"...그렇습니다."

"잘 좀 하자."

"주의하겠습니다."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에단은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아직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후드 좀 벗지?"

에단의 말에 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후드를 걷었다.

'흉터가 크긴 하군.'

휴고의 왼쪽 볼에는 사선으로 그어진 커다란 자상이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휴고에게는 상당히 큰 트라우마로 작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류태신으로 살던 기간까지 합치면 흉터 따위에 꺼림직함을 느낄 나이는 이미 지났다.

게다가 격투기 선수들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신에 문신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저런 흉터쯤이야.'

오히려 흉터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여긴 원래 너 혼자서 일하는 건가?"

"...네."

휴고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자 에단은 혀를 찼다.

"언제부터?"

"얼마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알고?"

"...저만 들어오면 말들이 얌전해진다고 해서...."

"네이드."

"네, 도련님."

"여기 마구간 소속 하인들 모조리 잘라."

"알겠습니다."

"인력이 부족할 일은 없잖아? 가문의 자원을 허비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한 에단은 가만히 휴고를 바라봤다.

'지금으로서는 알기 힘들군.'

예민한 감각으로는 타인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에단이었지만, 지금의 휴고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바로 불러서는 안 되겠고. 내일 내가 있는 별채로 찾아와."

"네... 네?!"

휴고가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이미 에단은 몸을 돌린 뒤였다.

뒤돌아선 에단은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마구간을 나서고 있었다.

* * *

다음 날이 되자 휴고는 에단의 별채로 찾아왔다.

"길 안 잃고 잘 찾아왔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무장으로 가자."

에단은 휴고를 이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뒤따라갔다.

'내가 연무장에는 왜 가는 거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마음 한편에서 불안감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낱 시종에 불과한 자신이 연무장에 갈 이유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에단에게 그 이유를 여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휴고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에단을 뒤따랐다.

연무장에 도착한 에단은 말없이 휴고를 바라보더니 옷가지를 던졌다.

"먼저 이걸로 갈아입어라."

"이건...."

휴고가 받아든 옷가지를 보고 멍하니 있자, 에단이 말을 붙였다.

"연무복이야."

"연무...복 말씀이신가요?"

"어. 먼저 체력부터 봐야 할 거 아니야."

휴고가 가지고 있는 기본 몸 상태.

그걸 먼저 확인해야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휴고는 에단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느라 드러난 휴고의 몸에는 오래된 흉터가 가득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에단도 절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다친 건 아닐 테고. 학대인가.'

원작에서는 그에 대한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원작에서 조명을 받는 캐릭터는 주인공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자 캐릭터였다. 휴고는 나름대로 주인공의 동료임에도 비중에 있어서는 가차 없었다.

휴고가 주섬주섬 옷을 모두 갈아입고 불안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말랐군.'

휴고의 몸은 삐쩍 말라 있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된 영양 섭취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에단이 인상을 구겼다.

"뭐야. 먹는 걸로도 차별받는 거야?"

"...."

휴고가 대답함에 어려움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자, 에단은 네이드를 불렀다.

"네이드."

"네, 도련님."

"이거 안 보여?"

에단이 휴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휴고의 앙상한 몸에 네이드도 잠시 미간을 좁혔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확실하게 해. 천하의 블란테 가문이 애들 밥 못 먹인다는 소문이 나돌면 좋겠어?"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숙인 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연무장을 나서는 네이드의 표정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뭐, 그래도 대충 몸은 움직일 수 있지?"

에단의 말에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까지 찍고 와 봐. 전력으로."

에단이 손을 뻗어 벽을 가리켰다.

어림짐작한 거리로는 대략 200미터.

벽을 찍고 온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록이 20초 중반 정도만 나와도 매우 훌륭하다.

"뭐 해, 안 뛰고."

에단이 눈을 부라리자 휴고가 화들짝 놀라며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닷.

'뭐야. 저 엉성한 자세는.'

기대에 못 미치는 출발이었다.

마치 달리기를 처음 해 보는 것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달리는 휴고의 모습에 에단은 작은 실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실망은 기우에 불과했다.

휴고의 몸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보폭이 커지며 체공 시간이 길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늦으면 꽤나 힘들어질 거야!"

에단이 호통치자, 휴고의 발이 더욱 분주해졌다.

탁!

휴고의 손이 벽을 짚었다.

그 순간, 에단의 눈이 커졌다.

휴고의 무게 중심 이동이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벽을 짚은 휴고가 마치 짐승처럼 튀어나왔다.

'탄력 좋다는 흑인도 이 정도는 아니야.'

최고의 탄력을 가진 흑인들. 그중에서도 지상 최대의 괴물들만 모여 있다는 미식축구 선수들도 이만큼의 탄력은 가지지 못했다.

이건 본능의 영역이었고, 재능의 영역이었다.

아직 몸을 다루는 것에 미숙한 휴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재능이라고 봐도 좋았다.

휴고가 순식간에 에단이 있는 자리까지 뛰어왔다.

'20초도 안 걸린 거 같은데.'

엉성한 자세로 나오리라고 믿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심지어 휴고는 호흡이 가빠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빨라졌던 호흡이 순식간에 안정되기 시작했다.

'야성의 휴고라기에 다른 건 무시했는데.'

근본적인 신체 능력 자체가 매우 훌륭했다.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너 하인 그만해라."

"네, 네?"

휴고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대뜸 휴고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뭔가 결례를 저지른 건가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울먹이는 표정으로 애원하는 휴고를 보며 에단이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인 말고 내 밑에서 직속 병사하라고. 왜, 싫어? 적어도 밥은 잘 먹게 해 줄 건데."

에단의 말에 휴고가 눈을 껌뻑거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게... 정말인가요?"

"어. 배 터질 때까지 먹여 줄게. 대신 내 말만 잘 따르면 돼."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띠던 휴고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에단이 손을 뻗어 휴고와 손을 맞잡았다.

'짐승 같은 손이군.'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휴고의 손에서 느껴지는 야성을.

"자, 그럼 밥 먹기 전에 마저 할 건 해야지?"

"...네?"

"먼저 팔굽혀펴기부터 하자."

에단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 * *

"마구간 하인을 데려갔다고? 왜?"

모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하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마구간에서 일하던 하인들은 모두 가문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에단이 쫓아냈다는 말이야? 아니, 지가 뭔데?"

기가 찬 모룬은 괘씸한 마음에 에단을 찾아갈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하인을 쓸 정도로 사람이 없나? 하긴, 이 상황에 누가 그 녀석 밑으로 들어가겠어. 눈치라는 게 있다면.'

형제 중에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자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모룬이 이내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알아서 하게 놔둬."

"예? 하지만...."

"끽해 봐야 하인이라며. 이걸로 꼬투리 잡기도 귀찮다. 우리는 이번 토벌만 제대로 준비하면, 더 이상 에단 녀석이 나대는 꼴은 안 봐도 된다고."

모룬은 일전의 일 때문에 일말의 경계심이 들었지만, 에단이 한낱 하인을 수중에 얻은 걸 보니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어디 한번 애써 보라고.'

이미 은연중에 소문은 돌고 있었다.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기사나 병사라면 절대 에단의 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터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너는 끝장이야.'

건방진 동생을 떠올린 모룬이 웃었다.

◈ [13화] 새로운 훈련 (1)

본격적인 체력 단련이 시작되었다.

기술의 체득은 체력이 밑바탕이 된 이후에 쌓아 올려도 늦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그 기술을 발현할 기반이 쌓여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단이 요구하는 체력 기준은 높았고, 그렇기에 훈련의 강도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을 혹사시키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의미가 없으니까.'

헝그리 정신 같은 고리타분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멍청한 짓을 벌이지는 않는다.

'심폐 지구력부터 올린다.'

HIT(High Intensity Training)

에단이 직접 경험한 바로, 단기간에 가장 높은 효과를 보는 훈련법이었다.

다만, 그만큼 지옥 같은 훈련법이었다.

평생을 운동에 매진해 온 운동선수들도 HIT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맥을 못 추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체력을 극한까지 몰아가야 하니까.'

원래 가진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관계가 없었다.

HIT의 요점은 심박수에 있었다.

최대 심박수의 90프로.

체력이 좋은 사람이든지, 나쁜 사람이든지 본연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바로 HIT 프로그램이었다.

단순히 100미터를 달리거나, 고중량 웨이트를 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훈련법이다.

고통과 마주하는 훈련법.

'그런데....'

휴고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에단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휴고를 바라보았다.

휴고는 짐승 같은 몸놀림을 가진 주제에 식물처럼 무럭무럭 성장했다.

충분한 영양을 주고 훈련을 시켰더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 몸뚱이도 평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검술 명가 블란테의 피를 이은 에단의 재능도 뒤지진 않았지만, 순수한 몸의 탄력만 놓고 보면 휴고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확실한 장점을 가지고 있군.'

괜히 주인공과 함께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안 되지.'

휴고는 은연중에 체력을 안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체력을 모두 소진하면 이후의 훈련이 매우 고단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꼼수를 부리고 있어.'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의 눈은 속여도 에단은 속일 수가 없었다.

'슬슬 나도 뛰어 볼까.'

에단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육중한 몸을 자랑했지만, 지금 에단의 몸은 상당히 말라 있었다.

체지방은 모두 빠지고 근육만 남은 에단의 몸은 잘 벼려진 검 같았다.

이윽고 몸을 푼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타닷!

에단이 순식간에 달리고 있던 휴고를 따라잡았다.

"어이, 휴고."

"...허억, 허억, 히익?!"

갑자기 따라붙은 에단을 바라보며 휴고가 비명을 질렀다.

"도, 도련님?"

"어쭈, 이 새끼가 대답도 하네?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야? 당장 심장이 터져 뒈질 정도로 뛰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 나를 보고 대답을 해?"

에단의 살벌한 눈으로 휴고를 훑었다.

휴고는 소름이 다리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변명하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휴고는 속도를 올렸다.

순식간에 휴고와 에단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거봐. 할 수 있으면서 엄살은."

에단이 피식 웃으며 휴고에게 따라붙었다.

에단의 손에는 투박한 채찍이 둘둘 말려 있었다.

"나한테 뒤를 잡히면 꽤나 아플 거야."

에단의 음험한 목소리가 휴고의 귀를 타고 들어가자 휴고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기 가장 좋을 때가 바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였다.

휴고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제 에단이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에단도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내색하면 안 된다.'

힘든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건 훈련일 뿐이었다. 여기서 뒤처지면 휴고에게 위압감을 심어 줄 수가 없다.

바로 뒤에는 생사를 걸고 나서는 정기 토벌이 예정되어 있었다.

겪어 본 적은 없지만 토벌은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휴고는 여려.'

휴고는 태생적으로 마음이 약하고 여렸다.

그런 그를 통제하고 성장시키려면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권위였다.

혈통이 가지고 있는 상하 관계로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에단은 휴고 앞에서 결코 지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휴고도 방금과 달리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속도 줄여!"

에단의 외침에 휴고의 속도가 확연하게 줄었다.

"30초간은 이 페이스다."

에단의 말에도 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 안 해?"

에단의 스산한 목소리에 휴고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자, 30초 지났다!"

"아, 아직 안 지난 것 같은...."

"지금 나한테 말대답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휴고가 입을 닫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쐐액!

그때 공기를 가르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휴고가 본능적으로 속도를 올리자, 뒤에서 지면을 후려치는 파공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에단이 휘두른 채찍 때문이었다.

'제,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 그건 진심으로 휘두른 것이다.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몸살로 끝나지 않을 거다.

휴고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런 휴고를 바라보며 에단이 사악하게 웃었다.

"빨리 안 달려?"

휴고의 발이 다시 빨라졌다.

'제, 제기랄.... 처음에는 천국에 온 줄 알았는데, 지옥이었어.'

맛있는 음식과 포근한 잠자리.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하인들이 없는 삶은 휴고에게 꿈만 같았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져서 동기 부여도 됐다.

하지만 훈련의 강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그런 생각도 지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 훈련은 정말 지옥 같았다.

이후의 훈련을 대비해서 어느 정도 체력을 안배하려고 하면, 에단은 지금처럼 귀신같이 눈치채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에서는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 죽을 거 같아.'

하지만 사신과도 같은 에단이 채찍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쫒아오고 있었다.

저 악귀에게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으아아악!"

휴고가 비명을 내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정말 괄목할 만한 성장이군.'

말없이 둘의 훈련을 지켜보던 네이드가 작게 감탄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검술 명가인 블란테 가문에는 독자적인 훈련 방법이 존재했다.

오랜 전통을 따른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법으로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그 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네이드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지만, 볼수록 그 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원래의 재능이 발현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성장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의 오른 네이드는 지금 에단이 진행하는 훈련법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한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훈련에 정답은 없다.

결국 성장은 재능의 몫이다.

진정한 강자는 숱한 실전 끝에서 탄생한다.

이 모든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이었다.

잘못된 훈련으로 몸을 망치는 수습 기사들은 적지 않았고, 재능이라는 벽을 마주치기 전에 좌절하는 전사들도 있었다.

숱한 실전은커녕 단 한 번의 실전에서 목숨을 잃는 병사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넘쳐 났다.

결국 실전을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를 갖춰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단의 훈련법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가문의 교관으로 초청하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

네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은 교관으로서의 재능이 넘쳐 났지만, 전사로서의 재능과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도 뒤지지 않았다.

'이번 토벌, 이변이 일어날 것 같군.'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소문이 들려왔다.

에단이 토벌대 대원 중 하나로 하인을 영입했다고.

그런데 심지어 하인을 골라도 삐쩍 곯은 볼품없는 녀석을 골랐다고.

가문의 내부에선 비아냥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혹시 카론 도련님을 이긴 것도 우연 아니야?'

'그건 아니지 않을까? 증인이 그렇게 많은데.'

'그러면 안목이 없는 거 아니야? 하필 골라도 그런 멍청이를 고르다니.'

'확실히 그렇긴 한데....'

하지만 에단은 세간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죽을 거 같네.'

고강도 트레이닝은 에단 본인에게조차 고통스러웠다.

'원래라면 며칠은 쉬어야 회복될 것도 지금은 하루 만에 회복된다.'

에단의 몸은 끝없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망치로 거칠게 두들겨도 몸이 부서지기는커녕 점점 단단해졌다.

그 사실을 느끼고 있기에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성장하는 것은 비단 에단뿐이 아니었다.

'잘 따라오는군.'

휴고도 에단에 뒤질세라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고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에 먹는 양도 엄청났다. 휴고는 성인 장정 10명분의 음식을 가볍게 해치웠다.

에단과 휴고 둘의 일상은 반복적이었다.

운동하고, 먹고, 싸고, 자고, 다시 운동하고.

이것밖에 없었다.

'슬슬 실전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전에.'

슬슬 사람을 모을 채비를 해야 했다.

휴고와 에단 둘만으로는 성과를 내기가 어려웠다.

'많은 인원은 필요 없고.'

어차피 에단의 목적은 정해져 있었다.

'자잘한 것 따위는 필요 없어. 큰 거 하나면 족하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이득까지.

"휴고, 지금부터 체력 훈련은 중단한다."

"...진짜입니까?"

휴고가 쉽사리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휴고의 건방진 눈초리를 마주하던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왜? 더 하고 싶어?"

"아닙니다."

휴고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면 기준치는 넘었어.'

삐쩍 말라 있던 휴고의 몸은 건강을 되찾았다. 아니, 건강을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온몸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지방은 끼어 있지 않고, 날렵했다.

"이제 실전 준비를 해야지."

그 말에 휴고는 올 게 왔다는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휴고도 알고 있었다.

에단이 어째서 자신을 데려왔는지.

정기 토벌.

블란테 가문의 정기적인 행사이자 과시.

웅크린 사자가 정당하게 자신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시기이자, 후계자들이 역량을 드러내고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

그 모든 것이 이 토벌에 깃들어 있었다.

에단은 자신의 첫 패로 휴고를 선택했다.

'이해가 안 돼.'

고작 하인에 불과한 자신을 토벌에 참여시키다니.

휴고 본인이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을 하진 않았다.

'나는 성장하고 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에단의 훈련은 고통스러웠지만, 확실한 성과가 있었다.

원래부터 몸을 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모든 성과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다.

'모룬 도련님은 본 적이 있어.'

건장한 체격을 가진, 얼핏 봐도 기사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런 자라면 가문을 물려받아도 맡은 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에단 도련님에는 미치지 않아.'

에단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위압감이 있었다.

배움이 짧은 휴고도 모룬보다는 에단이 뛰어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그렇기에 휴고는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하필 자신을 선택한 것일까.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기사들이나 병사들을 택해 그들로 토벌대를 꾸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뭘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생각에 잠겨 있던 휴고를 향해 에단이 말했다.

"쓸데없는 고민하지 마."

"...네."

속내를 읽힌 것 같은 감정에 휴고가 고개를 숙였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해. 그러면 재밌는 걸 보여 줄 테니까."

에단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 [14화] 새로운 훈련 (2)

추후의 대비.

에단은 그것을 택했을 뿐이다.

당장 목전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

그따위 것을 바랐다면 토벌대에 참가할 생각 따위는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휴고는 데리고 가는 게 맞아.'

원작에서 묘사된 휴고의 재능은 최상위권이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휴고는 엄청난 성장세를 올리고 있었다.

가능성 넘치는 휴고의 몸이 완성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문제는 그 외의 것들.'

신체 능력만으로는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단순 생존이라면 에단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니.'

그런 결과는 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투쟁.'

경쟁, 승리.

격투기 선수로서 전 세계를 누비던 당시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에단은 투쟁을 갈망하고 있었다.

투쟁 끝에 모든 것을 거머쥐는 것.

그것이 에단의 목표였다.

모든 것은 그것을 위한 초석일 뿐이었다.

'마나라....'

에단은 아직 마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에단이 알고 있는 마나라고 해 봐야 소설이나 만화의 설정에 불과했다.

그런 에단에게 갑자기 마나를 이해하라고 한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석으로 가면 안 돼.'

정석대로 차근차근 마나를 수련해 나가서는 너무 늦었다.

에단이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녀석은 온갖 진귀한 기회와 기연들을 모조리 습득해 버릴 테니.

'죽은 나무.'

이번 정기 토벌.

아직 온전히 성장하지 않은 주인공이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여기서 더 커 버리면 에단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시간도 부족하니.'

에단은 휴고를 흘겨봤다.

이 녀석이 이번 작전의 중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동안 더욱 혹독하게 단련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휴고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불안과 의심이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더니 다시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아직 살 만하구나?"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감과 동시에 휴고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 * *

강도 높은 훈련이 끝난 뒤, 에단은 곧바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별채의 공원으로 나왔다.

"날이 아직 쌀쌀합니다."

"난 아직 젊어서 괜찮아."

에단이 네이드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그런 훈련법들은 어떻게 고안해 내신 겁니까?"

"몰라. 그냥 감으로 하는 거지, 뭐."

"끝까지 숨기시는 겁니까?"

"숨기고 말고가 어디 있어? 훈련이 그냥 훈련이지, 뭐."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노련하게 휴고를 지도하시던데요?"

"큭큭, 내가 남들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나 봐."

에단이 웃음을 흘리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커다란 보름달이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니, 달이 더 크기도 했으니, 지구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감회가 새롭군.'

정말 소설 속에 들어와 버렸다.

이 기괴한 상황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 꽤나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기껏해야 소설 속일 뿐이고, 현실에서의 삶은 따분했으니까.

이곳에서의 죽음이 현실에서의 죽음과 연결이 돼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굳이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야심한 밤에 무슨 볼일이지?"

에단의 물음에 네이드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훈련 방식은 감탄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만일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가문의 교관으로 초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고. 본론부터."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어쩌실 계획입니까?"

"뭘 어쩌긴 어째. 몬스터 잡으러 가는데."

"장난은 그만하시죠. 아무리 도련님의 재능이 천부적이라고 한들, 도련님은 아직까지...."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심지어 나를 수호할 측근도 없고. 토벌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뒈져도 이상할 게 없겠어."

"그걸 아시면서...."

"그런데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나?"

달을 바라보던 에단의 눈이 네이드에게로 옮겨졌다.

달빛을 머금은 에단의 눈은 깊었다.

에단의 눈에는 불안감이나 걱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이드, 너는 네가 할 것을 해. 이번에도 결과로 보여 줄 테니까."

카론 때처럼.

에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또다시 시간은 흘렀다.

이제 정기 토벌대 출정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다.

정기 토벌이 가까워지자 블란테 가문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에단의 일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새벽, 오전, 오후.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휴고와 함께 미친 강도의 트레이닝을 감행했다.

범인이었다면 혈뇨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혹독한 훈련이었다.

하지만 훈련 내용의 대부분은 체력과 근력 훈련에 국한되었다.

'아니, 이제 실전 준비를 하는 거 아니었어?'

에단의 말과 달리 체력 훈련은 지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휴고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정기 토벌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휴고는 아직 검을 잡는 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에단 도련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뭐가 있지?"

에단의 태연스러운 태도에 휴고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어. 계획대로 진행 중이니까."

휴고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에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전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었다.

휴고는 자신이 하는 훈련이 단순한 체력 훈련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폭발적인 신체 능력, 그리고 도약력.'

모든 것은 하나의 동작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에단은 휴고를 바라봤다.

이 녀석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토벌은 훈련이 아니니까.

에단은 직접 겪어 보지 않았지만, 얼추 예상할 수는 있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몬스터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 터였다.

평범한 인간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악의와 살의를 대면하는 것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 제정신을 유지할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가진 병사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너는 견딜 수 있어.'

이미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아는 에단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다른 것도 준비할 때지.'

이제 추가 인원을 모집할 시기가 되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그 말에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훈련을 도중에 그만두다니.

평소의 에단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휴고의 걱정 어린 물음에 에단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뒈질래?"

에단의 살벌한 목소리에 휴고가 찔끔하며 뒤로 물러났다.

"갈 데가 있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에단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걷기 시작했다.

휴고는 그런 에단을 부랴부랴 뒤따랐다.

* * *

에단이 휴고를 데리고 향한 장소는 본가의 연무장이었다.

기사들의 연무장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훈련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수습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에단과 휴고를 보자마자 훈련을 멈추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에단 도련님이잖아? 여기는 무슨 일이지?'

'설마 토벌대원을 차출하기 위해서 온 건가?'

'진짜로? 난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데. 이제 정기 토벌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잖아.'

수습 기사들의 무례한 수군거림에도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오히려 휴고가 잔뜩 위축된 기색으로 에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야."

에단이 사나운 눈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에단의 눈길에 휴고가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 쪽팔리게 할래? 어깨 펴."

에단의 말에 휴고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폈다.

그 모습에 에단이 콧방귀를 뀌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겁을 안 먹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일개 하인에 불과했다.

하인 중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하인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재능을 인정받은 수습 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였다.

자신 같은 일개 하인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움츠린 모습을 보이면 안 돼.'

휴고는 에단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 위축되고 겁먹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에단까지 싸잡아서 욕을 먹게 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삼가야만 했다.

휴고는 최대한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은 채로 에단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가 좋겠군."

에단이 주변을 대충 훑으며 중얼거렸다.

주변의 수습 기사들은 모두 훈련을 멈춘 채 에단을 의식하고 있었다.

원하던 상황이었다.

주변을 말없이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자, 내가 여기서 한가락한다, 앞으로 나오도록."

에단의 뜬금없는 말에 수습 기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그 반응에 에단이 피식 웃더니, 한 차례 발을 굴렀다.

쾅!

"블란테 가에 몸담은 새끼들이라는 게 고작 이따위의 어중이떠중이 놈들밖에 없는 건가?"

에단의 거친 언행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굴이 붉어진 수습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이런 행패를 부려도 되는 겁니까?"

수습 기사의 말에 에단이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 따위 버러지도 꼴에 기사 지망생이라고 자존심은 있나 보군. 그런 녀석이 방금 전 호출에는 입을 다물고 있었나?"

"그런 갑작스러운 말에 모습을 드러낼 자가 어디...."

항변을 하려던 수습 기사의 말을 대충 팔을 휘저으며 끊은 에단이 입을 열었다.

"됐고. 너희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까?"

'미, 미친!'

점점 도를 넘는 에단의 언행에 휴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당혹과 공포로 물든 휴고가 에단의 옷가지를 당기며 말했다.

"도, 도련님, 어떻게 수습하시려고 이런 짓을...."

하지만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수습 기사라면 자존심이 꽤나 상했겠지? 하지만 어째. 사실인걸."

에단의 모욕적인 언사에, 주변에 있던 수습 기사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으십니까?"

분노로 떨리는 수습 기사의 목소리에 에단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저 소리 들었냐? 책임? 책임이란다. 하핫! 그럼 당연히 책임질 수 있지."

에단이 박장대소를 하며 옆에 있는 휴고를 두드리고 있었다.

휴고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에단의 손찌검을 묵묵히 받고 있었다.

'더럽게 아프네.'

장난 섞인 손찌검에도 통증이 상당했기에 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 봐라. 내 첫 번째 단원인 이 녀석도 잔뜩 화가 나 있네. 아직 시원찮은 녀석이지만, 너희들은 상대도 안 될걸?"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휴고가 당황하며 에단을 쳐다봤지만, 에단은 순간 휴고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에단이 휴고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응하지 말고 대충 눈치껏 따라와."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실...."

휴고는 에단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상당한 인파가 몰려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블란테 가문의 수습 기사들이었다.

모두 자질을 인정받은 자들이었고, 가문에 속한 그들의 자긍심은 드높았다.

하지만 에단은 그들의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조롱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망나니였던 녀석이.

'가문에 먹칠이나 하던 놈이!'

에단의 비아냥거림을 면전에서 들은 수습 기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를 주체 못 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인정을 못 하겠어?"

"...솔직히 그렇습니다."

수습 기사의 대답에 에단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래. 남자가 그 정도 자존심은 있어야지."

에단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휴고의 등을 밀었다.

"자, 그럼 네놈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마."

에단의 말에 수습 기사와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죠?"

"사내끼리 뭐 증명할 방법이 따로 있어? 당연히 이 녀석과 붙어 봐야지. 내가 카론에게 한 것처럼."

"네? 도련님?"

에단의 말에 휴고의 눈이 커졌다. 휴고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에단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닥치고 앞을 봐. 여기서 실수하면 넌 진짜 내 손에 뒈지는 거야."

"네, 넵...."

에단의 말에 휴고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