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평민 교수 (1)
음식을 받아 온 에밀라가 에단의 앞에 앉았다.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고, 에밀라도 수저를 들었다.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음식을 밀어 넣는 에단에게서는 기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접시 위에 가득 쌓여 있던 음식이 비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에단이 자리를 일어났지만, 에밀라의 식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밀라의 눈이 에단을 따라가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왜? 너 밥 먹는 것도 기다려 줄까?"
"...히허어스니다."
음식을 머금고 있는 에밀라의 발음이 뭉개졌다. 순간 에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 내 방은 몇 번이지?"
계단을 오르던 에단이 물었다. 입에 머금은 음식을 삼킨 에밀라가 말했다.
"...4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다 삼키고 말해."
"당신...!"
에밀라가 발끈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에단은 무시하고 방으로 향했다.
숙소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호화스럽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웬만한 여관보다는 나았다.
에단이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으니까.
대강 짐을 정리한 에단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군.'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주인공도 슬슬 활동할 시기였다.
지금껏 머릿속으로 세운 계획을 정리할 때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원작 주인공과의 접점을 만들고, 사건 속에서 에단이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었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안일하게 있을 수는 없지.'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에단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에단도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주인공이 가져가는 기연들이 줄어든다는 건데....'
원작 스토리는 주인공의 원맨쇼나 다름없었다.
전형적인 이세계물의 스토리.
주인공은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이자, 용사였다.
하지만 에단이 개입한 이상, 주인공의 성장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내가 뒈질 수는 없으니까.'
양보나 희생 따위는 가정해 두지도 않았다. 설사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에단은 자신의 사람들을 챙겨 끝까지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주인공에게 협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가져갈 힘이 줄어든 만큼, 에단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어디 한번 보자고.'
답답하게 굴면 가만 있지 않을 생각이다.
에단이 눈을 감았다. 밤이 깊어졌다.
* * *
크러쉬는 자신의 방에 누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결같이 아름다운 에밀라.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평민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그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을 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에단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불결해, 천박하고, 상스러워.'
에밀라 옆에 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감히 평민 따위가 에밀라 씨 옆에 서? 그녀의 옆에 서려면 블라디미르 가문 정도는 돼야지. 나 정도는 되어야....'
블라디미르 가문의 삼남인 크러쉬.
그의 가문은 마법 가문이었다. 하지만 크러쉬의 말과는 다르게 블라디미르 가문 자체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가문의 역사는 깊었지만, 대마법사를 배출하지 못한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마탑은 우후죽순 생겨났고,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마법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뛰어난 마법사는 어딜 가서든지 대접을 받았지만, 크러쉬는 그 정도로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마법사가 못 되었다.
그런 크러쉬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지도할 생각은 없습니까?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저명한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바쁜데 교수 노릇이라니!
'그때 수락하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이 훌륭한 재능을 썩힐 뻔했잖아. 게다가 에밀라 씨도 못 봤을 테고.'
형제들과 비교해도 그저 그런 재능을 가진 크러쉬는 그렇게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마법사로서의 역량과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같지 않았다. 비록 마법 재능은 출중하지 않더라도, 크러쉬는 교육자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삶에 회의적이던 크러쉬의 생각도 바뀌었다.
아카데미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크러쉬의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자연스레 거만한 성격이 되었다.
크러쉬는 평민을 혐오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성향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평민을 혐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 빌어먹을 평민 놈...!'
유례없는 재능으로 대륙에 지대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평민 마법사. 수많은 마탑과 국가에서도 그를 영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크러쉬는 그를 실제로 마주한 경험이 있었다.
'당신이 소문의 그 마법사입니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귀족인 자신이 먼저 손을 뻗어 인사를 청했지만, 그 평민 마법사는 말없이 크러쉬의 얼굴을 응시하다 자리를 떠났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한 행위였지만, 크러쉬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그날 당한 모욕을 크러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감히 평민 따위가. 평민은 예의 없고 더러운 종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차에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
아카데미의 특성상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크러쉬는 그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물론 그 불만을 대놓고 토로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에는 귀족가의 자제도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의 교칙상 학생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신분의 차이로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나 규정이 모든 변수를 방지할 수는 없었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형성한 카르텔은 아카데미 내에 엄연히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다져 온 사교 활동과 부모님들의 교류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크러쉬는 평민을 혐오했고, 당연하게도 신분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는 교수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에밀라....'
에밀라의 신분은 비록 평민이었지만, 모든 학생이 에밀라를 존경했고 그만큼 잘 따랐다.
아름답고 고고한 외모와 출중한 실력.
아카데미의 꽃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았다. 늘 고고하게 행동하는 에밀라의 모습에 크러쉬의 마음도 흔들렸다.
평민은 미천하다는 신조가 흔들릴 뻔했지만, 그는 자신을 합리화해 문제를 해결했다.
'에밀라 정도의 실력와 인성이라면 어딜 가도 작위를 수여받을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 예로 대륙을 주름잡는 고위 귀족들도 앞다퉈 에밀라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에밀라는 어디서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모습에 크러쉬는 더욱더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녀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여자야.'
비록 평민이라는 점이 흠이기는 했지만, 에밀라는 언제든지 귀족의 반열에 들 수 있는 특별한 평민이었다.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에밀라를 향한 감정이 생긴 후로, 크러쉬는 에밀라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러쉬의 구애에도 에밀라는 언제나 공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물론 크러쉬는 그걸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후후, 부끄러움만 없었으면 벌써 내 여자가 됐을 텐데. 그러면 조금 전 그 평민 놈 옆에 있지도 않았을 테고.'
일이 끝난 후, 방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건 그의 행복이었다. 한데 오늘은 에단이라는 평민이 신경을 거슬렀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들어와 버렸군.'
크러쉬의 머릿속에 각인된 에단은, 얼굴과 복장까지 모두 천했다.
혹시나 몰라 예를 갖추고 손을 뻗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하찮은 평민이었다.
'제기랄, 더러운 기억이 떠오르는군.'
평민 마법사에게 악수를 청한 순간이 생각났다.
크러쉬는 냉수를 단번에 들이켜며 분을 삭였다.
'그런 버러지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니. 에밀라 씨가 불쌍하군.'
에밀라를 향한 동정심까지 들었다.
'초반부터 기를 잡아 둬야겠군. 직위는 같을지 몰라도 신분의 차이는 확실하니까 말이야.'
귀족임을 밝혔음에도 건방을 떨던 에단의 모습을 상기하자 절로 짜증이 났다.
'내일 제대로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겠어.'
크러쉬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아침 해가 뜨자마자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으로 향했다.
일 층으로 향한 에단은 곧장 음식을 배식받았다.
아침은 걸러서는 안 되는 끼니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굉장히 부지런하시네요."
배식원의 말에 에단이 주변을 둘러보니, 일 층에는 자신 혼자만 있었다.
에단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은 근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런가요?"
"네. 보통 아침은 거르시는 분이 많으니까요. 아, 한 분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분이 계시긴 한데...."
"그게 누구죠?"
"마침 내려오시네요."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아침임에도 완벽하게 준비된 에밀라가 계단을 내려왔다.
"...."
에밀라가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에밀라가 에단의 곁에 다가와 음식을 받았다.
아침은 소박했다. 따뜻한 빵과 고기가 들어간 수프였다.
이번에도 역시 단백질이 부족한 식단이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수프의 풍미는 그윽했고, 빵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의외로 끼니는 잘 챙겨 먹네?"
"...불만입니까?"
어제 일을 의식해서인지 에밀라가 입 안에 든 음식을 모두 삼킨 뒤 대답했다.
"그럴 리가. 끼니를 챙기는 건 중요하지. 잘하고 있어."
"당신에게 칭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칭찬은 아닌데? 그래도 넌 나한테 졌잖아."
"...."
에밀라가 뾰족한 시선으로 노려봤으나, 에단은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빠르게 식사를 끝낸 에단이 에밀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뭘 하면 되지?"
"처음인 만큼 사수 곁에서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배울 겁니다. 말로 설명한다고 한들 실제로 보는 것에는 못 미칠 테니까요."
"뭐, 좋아. 그래서 내 사수가 누구지?"
"아직 정해지진 않았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제가 맡을 확률이...."
"제가 맡도록 하죠."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밀라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기름을 바른 것만 같은 특유의 목소리.
크러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에밀라의 앞까지 온 크러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때론 여인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것도 귀족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크러쉬의 그윽한 시선이 에밀라를 향했다. 에밀라는 크러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구태여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해도 상관은...."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평민 교수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고한 신분을 가진 저, 블라디미르 크러쉬가 아니겠습니까?"
― 저 새끼, 그냥 죽이면 안 되겠느냐?
'저도 고민 중입니다.'
처음에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북함이 느껴졌다.
"설마 에단 씨가 제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죠?"
"뭐, 그러도록 하죠."
어디까지 하는지 볼 생각으로 크러쉬의 말에 답했다.
이윽고 에밀라는 먼저 따로 이동했고, 크러쉬와 에단은 같이 움직였다.
"제 수업에 참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죠?"
에단의 발언에 크러쉬가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 겁니까? 하, 우둔한 평민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귀족의 의무 중 하나겠죠."
크러쉬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었다. 당연히 에단은 크러쉬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오늘 중에 만나 보겠군.'
에단이 요청한 사항 중 하나가 바로 여동생이 있는 학급에 배정받는 것이었다.
지금은 크러쉬의 수업을 따라다니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늘 내에 주인공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만나 보면 알겠지.'
대략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생각해 뒀다.
크러쉬가 한참 동안 떠드는 걸 흘려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이 있는 본관 앞에 도착했다.
"이해하셨습니까?"
"네, 뭐."
"우둔한 평민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앞으로 잘 보고 배우면 되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제 수업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느끼는 것은 있을 테니까요."
"네, 노력은 하죠."
에단이 웃음을 삼키며 크러쉬를 뒤따랐다.
◈ [58화] 평민 교수 (2)
크러쉬는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에단은 감탄 섞인 휘파람을 불며 주위를 둘러봤다.
학교의 내부는 정갈하고 고급스러웠다. 확실히 돈을 바른 태가 났다.
에단의 휘파람 소리가 거슬렸는지 크러쉬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크흠, 적당히 하시죠. 봐드리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아, 예."
― ...저 건방진 놈을 가만히 둘 생각이더냐?
오히려 페온이 분이 치미는지 에단을 닦달했다. 에단은 별다른 반응 없이 크러쉬의 뒤를 따라 강의실 문 앞에 섰다.
'반이 많군.'
에단이 느낀 감상이었다.
'성적별로 나눠 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아카데미에도 비리가 존재했다.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평민들은 본인의 실력보다 낮은 반에 배정받았다.
반대로 본인의 실력보다 과분한 대우를 받는 고위 자제도 존재했다.
'난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주인공이 해결할 문제였다.
정의감 넘치는 평등주의자 주인공은 그런 차별을 묵과하지 않았고, 반대로 에단은 귀찮은 일에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강의실 앞에 서자 학생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러쉬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제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들의 태도가 아니군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크러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와 함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지며 침묵이 강의실에 내려앉았다. 정적이 깔린 강의실 내부를 주시하던 크러쉬가 입을 열었다.
"수업 전에 떠들고 있더군요. 마음 같아서는 벌을 주고 싶지만...."
크러쉬가 힐긋 에단을 바라봤으나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고 앞만 보고 있었다.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개중에는 에밀라와 함께 걷던 모습을 떠올렸는지 소곤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조용."
그런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크러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은 새로 온 교수입니다. 비록 귀족이 아닌 천한 신분이라 수업을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 배우도록."
크러쉬는 별다른 말도 없이 에단을 평민이라고 소개했고, 학생들의 얼굴에는 작은 조소가 떠올랐다.
"뭐야, 평민이야?"
"수준 떨어지네. 평민이 뭘 알려 준다고."
"그러게 말이야. 큭큭."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에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시선이 바뀌는 데에는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터.
'언제나 그랬으니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격투기 선수로 활동할 때도.
망나니라며 가문에서 천대받을 때도.
실력으로 뒤집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기분 나빠 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후의 일을 떠올리자 기대감이 들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반갑다."
태연자약한 행동에 크러쉬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기가 죽기는커녕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수업을 보면 어차피 좌절할 게 빤하지.'
크러쉬는 자신 있었다.
자신은 유서 깊은 마법 가문의 자제였으며, 마법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 또한 마탑의 마법사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마."
크러쉬가 부양 마법으로 두꺼운 책을 꺼내 펼치며 수업을 시작했다.
'지루하군.'
수업을 시작한 직후부터 에단은 연신 눈을 끔뻑였다.
크러쉬의 수업은 지루했다. 교육이 아닌 자기 피력에 가까웠다.
어려운 단어를 복잡하게 늘어놓다가 결국은 자신의 자랑으로 귀결된다.
심기가 불편하기는 페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페온이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에단은 별다른 반응 없이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루함은 그대로였는지라, 에단의 자세가 점점 삐딱해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런고로 마법은 고귀한 혈통의 전유물...."
크러쉬가 흘깃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팔장을 낀 채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심지어 몸을 벽에 슬며시 기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죠?"
"보면 몰라요? 수업 참관 중이죠."
"지금 그게 수업을 듣는 태도입니까?"
크러쉬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하지만 에단은 콧방귀를 뀌었다.
"수업이 너무 지루해서 말이죠."
"지루...하다고?"
크러쉬의 말이 평대로 바뀌었다.
"감히... 하찮은 평민 따위가 내 수업을 모욕해?"
크러쉬는 살벌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분노한 그의 주위로 마나가 넘실거렸다. 에단이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야."
"...뭐라고?"
"말은 자기가 먼저 놨으면서 왜 과민 반응이야? 내가 학생이냐? 같은 교수인데 누구 앞에서 권위를 세우고 있어?"
"...하."
학생들이 숨을 들이마셨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다들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평민인 교수가 귀족의 신분을 가진 교수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학생들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에단은 크러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심기가 불편한 이는 비단 크러쉬뿐만이 아니었다.
에단 역시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레벨린에게도 무데뽀로 들이박았던 자신이었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압도감이 흘러내렸다.
블랙 오우거의 피어였다.
크러쉬는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위축되었지만 그 감정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일개 평민에 불과한 에단에게서 위압감을 느낀다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꼭 뭣도 없는 놈들이 후환 타령을 하더라."
에단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학생들을 둘러봤다. 이 반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주인공 얼굴도 모르고.'
뭐, 설마 여기에 원작 주인공이 있지는 않겠지.
원작 주인공은 에단과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에 흑발을 지닌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서 질러 버려도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야, 마법이 그렇게 잘났어?"
"허, 미천한 신분이라 그런지 하찮은 질문을 하는군. 당연한 것 아닌가? 무식한 검술에 비해 마법은 고고한...."
"아, 그래? 근데 에밀라는 검술 교수가 아니었나? 에밀라가 그렇게 무식하고 미천해?"
그 순간, 크러쉬의 눈빛이 바뀌었다.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던 크러쉬가 입을 열었다.
"...감히 에밀라 씨와 너 따위를 비교하는 건가?"
"왜? 걔도 평민인 건 매한가지잖아."
"에밀라 씨는 너 따위와 비교될 수 없는...."
"너 앵무새냐? 같은 말만 반복하게."
학생들은 바짝 얼어 있는 채로 에단과 크러쉬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향해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오늘 부임하게 된 교수다. 다시 내 소개를 하지."
크러쉬의 반응을 무시한 채, 에단이 한 걸음 나아갔다.
"검술과 체술이 내 담당 과목이다. 이 머저리가 방금 말했지? 마법이 월등하고 검술 따위는 열등하다고."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보여 줄게. 검술이 과연 열등한지 말이야. 수업을 듣는 너희들에게도 객관적인 결과가 필요할 거 아니야."
"지금 멋대로 무슨 짓을...."
에단이 몸을 돌려 크러쉬를 바라봤다. 크러쉬는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때? 너도 자존심이 있으면 증명하고 싶을 거 아니야. 이번 기회에 네 말을 증명해 봐."
"...."
"미천한 평민 따위는 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어떻게 말이지?"
"방법이 뭐가 있겠어. 당연히 결과를 보여 줘야지. 왜, 쫄려?"
에단이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에단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 * *
크러쉬는 에단의 횡포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오늘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겠어. 아니, 이대로 죽여도 괜찮겠지.'
감히 갓 부임한 평민 교수 주제에 에밀라와 스스로를 비견한 것부터 중죄였다.
'거기다가 내 수업도 망쳐 놨지.'
수업은 평소처럼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귀족 자제들은 알아서 잘 따라왔을 테지만, 저열한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평민 따위가 지고한 마법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에단은 크러쉬의 수업 방침을 면전에서 조롱했다. 크러쉬에게는 견딜 수가 없는 모욕이었다.
'교수라고는 하지만 평민 하나 죽는 일이니 아무 문제 없겠지.'
역량의 차이를 실감시킨 뒤,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아주 비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물론 대놓고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수를 가장할 생각이었다.
크러쉬와 에단은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둘만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학생들도 이끌고 갔다. 크러쉬도 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학생들 앞에서 입은 자존심의 상처를 회복할 생각이었다.
에단과 크러쉬는 연무장 앞에 마주 섰다.
"흥, 이제 와서 울며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혀가 더럽게 길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지랄."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학생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스러운 모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건 없지.'
그렇기에 격투기 챔피언이었던 류태신 시절, 그만한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판단은 너희들이 해라. 과연 이 새끼가 말한 것처럼 귀족 마법사가 월등한지."
"흥, 너 따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보여 줄 생각이다. 검을 들어라. 수준 차이를 실감시켜 주지."
"검? 그건 너한테는 사치지."
"뭐라고?"
"내가 말했잖아. 나는 '검술'과 '체술'을 담당한다고."
에단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너는 맨손으로도 충분해."
"좋다. 후회하게 해 주마!"
크러쉬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자 결국 폭발했다.
'어떻게 아카데미에 발을 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게 해 주마!'
"매직 미사일!"
크러쉬의 머리 위에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마나가 모여 형성된 마법의 화살.
그 숫자는 적지 않았다. 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매직 미사일.
"이제야 겁을 집어먹었나?"
벌써부터 승리라는 감정에 도취했는지 크러쉬는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섰다.
"그 대사 안 질리냐?"
에단의 말에 크러쉬가 이를 갈았다.
"죽어라!"
공중에 떠 있던 마법의 화살이 일제히 쏘아졌다.
맹렬한 기세로 쇄도하는 화살 세례에 에단이 슬며시 몸을 웅크렸다.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가 준비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에단의 허벅지에 마나가 깃들더니, 에단의 몸이 마치 쏘아지듯 뛰쳐나갔다.
◈ [59화] 평민 교수 (3)
에단은 단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여행 도중에도 지속적인 마나 컨트롤을 숙달하려 노력했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소홀하게 한 적이 없었다.
에단의 움직임은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크러쉬는 에단을 너무 얕잡아 봤다.
하여 방심이라는 독약을 삼키고 말았다.
에단이 크러쉬의 눈앞에 이동하고 나서야 크러쉬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이, 이게 무슨...!"
크러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의 몸놀림을 감히 쫓을 수도 없었다.
크러쉬가 몸을 돌린 건 나름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보기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의 다급한 행동은 에단에게 딱히 의미가 없었다. 에단의 손에 푸른 마나가 깃들었다.
쾅!
이윽고 귀가 멀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에단의 주먹이 크러쉬의 실드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에단의 주먹이 일으킨 충격에 지면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크러쉬가 볼품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에게선 더 이상 권위와 품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히, 히익...!"
크러쉬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대처하는 것도, 지금의 크러쉬에게는 무리였다.
"시, 실드!"
그는 남은 한 줌의 마나를 쥐어짜 실드를 만들어 냈지만, 그 행위가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꽤나 빠르게 드러났다.
"후우."
에단이 심호흡을 했다.
반투명한 마력의 보호막을 보며 간만에 호승심을 느꼈다.
에단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들 아직 실드를 완전히 깨부수기는 쉽지 않았다.
역량의 차이가 심한 블랙 오우거를 사냥했을 때도 약점 부위를 집요하게 공략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승산이 희박했을 터였다.
'자신이 없지는 않은데.'
에단이 오른손을 힐긋 바라봤다.
충만한 기운 속에서 복합적인 힘들이 느껴졌다.
신체의 재능, 블랙 오우거의 힘, 그리고 흡수한 마나.
에단이 허리를 젖혔다.
누구도 당해 주지 않을 과장된 동작처럼 보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상대를 노리는 비수가 아닌, 눈앞의 푸른 벽을 부숴 버릴 망치였으니까.
뒷발을 축으로 에단의 허리가 뒤틀렸다. 신체에 회전력이 실렸고, 오른손이 큰 포물선을 그렸다.
이윽고.
디딤 축으로 사용한 다리가 있는 자리가 움푹 파였다.
마나가 깃든 에단의 주먹이 휘둘러지며 바람이 뭉개지는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후웅!
주먹을 뻗는 순간, 에단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이건 부쉈다.'
콰앙!
에단의 오버 핸드가 거칠게 꽂혔고, 동시에 크러쉬의 실드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커헉!"
실드가 깨지며 그 반작용이 크러쉬를 직격했다.
"안녕?"
에단이 다가왔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꿈틀거렸다.
"귀족답지 않게 왜 그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러쉬의 코앞에 멈춰 선 에단이,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바들바들.
공포에 질린 크러쉬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이, 이거 놔!"
크러쉬가 에단의 손을 떨쳐 내려는 듯 반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에단이 반대 손을 들었다. 크러쉬의 눈이 흔들렸다.
"왜? 대충 감이 와?"
"무, 무슨...."
찰싹!
에단의 손이 크러쉬의 뺨을 거칠게 갈기자, 크러쉬의 고개가 홱 하고 넘어갔다.
학생들은 침묵했다.
승부의 결과가 예상을 벗어난 것도 있지만, 에단의 행동 자체가 경악스러웠기 때문이다.
동료 교수, 그것도 선배, 심지어 귀족의 뺨을 때리다니.
가볍게 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에단의 손이 크러쉬의 뽀얀 뺨에 부딪히는 순간, 크러쉬의 살이 터져 나갔다.
그의 볼이 거무튀튀하게 죽었다. 에단이 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야, 벌써부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넌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러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에단을 지켜보던 페온이 고개를 저었다.
건방을 떨던 크러쉬가 얄미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지워질 정도로 에단의 손속은 잔혹했다.
에단의 손은 그것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쫘악!
섬뜩한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학생들의 침음 소리가 뒤따랐다.
몇몇은 고개를 피했다.
그간 크러쉬의 차별 행위와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수업 방식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잔혹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보기는 힘들었다.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에단이 풍기는 위압감에 다리가 벌벌 떨릴 지경이었으니.
크러쉬는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었다. 전방위적인 지식과 교육에 관해서는 괜찮은 편이었으나, 일신의 무력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고위 마법사와 비교했을 때의 말이다. 크러쉬는 아카데미 교수였고, 5서클의 마법사였다.
웬만한 전투 마법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경지에 들어선 마법사라는 소리다.
에단은 그런 크러쉬를 꺾었다.
그것도 힘겨운 혈투가 아닌,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꺾듯이 아주 손쉽게.
하니 당연하게도 에단의 흉흉한 기세를 뚫고 결투를 만류할 사람은 없었다.
크러쉬의 몸이 축 늘어져, 실이 끊어진 인형 같은 꼴이 되었다.
에단이 크러쉬의 몸을 짤랑거리며 흔들었다.
'설마...?'
크러쉬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에단이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조금 과한가?'
하지만 괘씸함 때문에라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이 대결의 시발점은 에단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에단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크러쉬의 손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 거다.
이런 잔챙이 따위에게....
에단은 기가 찼고, 화가 났다.
류태신은 원래도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에단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감정적인 대응이 더욱 극심해졌다. 망나니의 본성이 어딜 가진 않은 것이다.
크러쉬의 입과 코에서 붉은 피와 침이 줄줄 떨어졌고, 동시에 아랫도리도 축축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만하세요!"
에단의 손이 휘둘러지기 직전, 순식간에 학생들을 뛰어넘어 등장한 에밀라가 에단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에단은 언성을 높이는 에밀라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교육. 아, 이건 좀 이상한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타인의 목숨을 앗아 갈 짓을 벌였다면 응당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게 에단의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에밀라가 보기에는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했다.
"당장 크러쉬 교수님을 내려놓으세요!"
에밀라의 고압적인 태도에 에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그건 권유입니까? 협박입니까?"
"당신...!"
에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당장 검을 뽑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두려움.
두 번의 압도적인 패배로 인해, 에밀라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각인되었다.
한번 각인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수많은 학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에밀라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그와 함께 크러쉬의 몸이 볼썽사납게 바닥에 떨어졌다.
"레벨린한테 혼 좀 났나 본데?"
에단이 씨익 웃더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학생들이 길을 터 줬다.
"첫 수업에 못 볼 꼴 보여 줘서 미안."
에단은 학생들에게 손을 휘저어 보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에밀라는 복잡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 * *
―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였구나.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 ...때리는 것에도 정도를 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
"글쎄요."
에단이 씨익 웃자, 페온이 포기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일을 벌여도 괜찮은 게냐?
"어차피 아카데미에서의 목적은 크게 없습니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치솟는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블란테에 비할 바가 아니죠."
― 그걸 아는 놈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사달을 벌여?
"재밌지 않습니까."
― ...미친놈.
사실 재미를 떠나서 주인공과의 끈을 잇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컸다.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게 유리할까.'
에단의 지식은 제한적이었다. 원작을 모두 읽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은 곳까지만 봐도 대륙의 절대자가 된 주인공은 끝없는 혈투를 벌였고, 동료들은 모두 죽어 나갔다.
'녀석을 그 이상으로 성장시킬 수가 있나?'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에단이 얻은 기연들도 모두 주인공이 가져가야만 했다.
이미 인과는 뒤틀렸다고 봐도 좋았다. 모든 기연과 성장을 주인공에게 몰아주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개죽음당해서는 소용없지.'
에단은 살기 위해서, 또 강해지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주인공의 실수, 그리고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건들에 손을 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당한 조력자의 위치에 서 있으면 되겠군.'
과한 신용은 불필요했다. 적당히 선을 지키며 조력자에 위치에 있으면 된다.
모든 것을 뺏어 갈 생각은 없다.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세계를 구원하는 데에는 크게 관심 없어.'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자잘한 이벤트들은 어차피 주인공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였다.
* * *
에단이 부임한 첫날부터 사건이 발생했다.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있었지만, 설마 첫날부터 일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크러쉬의 상태는 보기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에단의 손속 없는 손짓에 뺨이 터지긴 하였지만, 이 정도면 마법과 포션으로 금세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교수 사이에 폭행이 있었고, 명분 또한 에단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크러쉬는 대외적으로 귀족가의 자제였고, 소문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른 것이 소문이다.
블라디미르 가문은 결코 이 사건을 묵시하지 않을 터. 게다가 크러쉬도 여기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에단에게 징계를 내릴 수도 없었다.
에단이 정말 평범한 평민에 불과했다면 교수직에서 제명하면 그만이겠지만, 에단의 가문은 블란테였다.
지금은 몸을 웅크리고 있으나, 에단이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 자고 있던 사자가 몸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욱씬.
에밀라는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쩌다가.'
에밀라는 오전부터 레벨린에게 불려 갔다. 핀잔이나 타박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레벨린을 봐 온 에밀라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신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에밀라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불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레벨린과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크러쉬의 일은 또 어찌해야 할까.
눈을 질끈 감은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 [60화] 평민 교수 (4)
에단이 부임한 첫날부터 사건이 벌어진 탓에, 아카데미 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맴돌았다.
소문은 부풀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에단의 신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평민에 불과한 에단이 귀족의 피가 흐르는 크러쉬를 박살 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구성원의 대다수는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생을 귀족의 일원으로서 고고한 자존심을 키워 온 그들에게 이번 사건은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문에 점차 살이 붙기 시작했다. 결투가 벌어진 계기도 만들어졌다.
― 초임 교수가 크러쉬 교수님을 모함했다더라.
―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더라.
―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으며 비꼬았다더라.
소문은 썩 그럴듯했지만, 자연히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악의적인 소문을 주도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에게 대들어?'
로만은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배움을 구하는 학생이기에 앞서, 권위 의식과 선민사상에 찌든 귀족이었다.
하지만 거만함과는 달리 로만 가문의 위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 평범한 재산, 모든 것이 평범했지만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마크.'
아카데미의 학장인 마크는 로만의 아버지였다.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가문이 엄청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로만은 떵떵거리며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었다.
로만도 바보는 아니었다. 대놓고 학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연중에 내색하기 마련이었고, 로만의 성격이 그랬다.
자연스레 로만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평민을 차별하고 귀족의 위신을 드높이는 무리가 형성된 것이다.
그 카르텔에는 교수인 크러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감히 평민 따위가...?'
그런데 최근 부임한 평민 교수인 에단이 반역이라 부를 만한 일을 일으켰다.
'그 평민에게 뭐가 있는 건 아니겠지?'
로만은 거만한 성격과는 별개로 겁이 많은 편이었기에, 자신에게 위험이 될 만한 행동은 자중했다.
'배경이라도 있으면 위험한데....'
그 예가 바로 에밀라였다.
마크는 로만에게 신신당부했다. 사소한 사건은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에밀라한테만큼은 대들지 말라고.
로만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일도 있는 법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로만의 직감은 곧잘 적중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로만은 마크에게 찾아가 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진정되지 않았던지, 마크는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넘어갔다.
― 그 녀석은 신경 쓰지 마.
― 왜요? 감히 귀족을, 그것도 선배 교수를 건드린 것 아닌가요? 혹시 녀석이 귀족이라도 되는 겁니까?
― ...그건 아니다. 내가 알아서 징계를 내리든 할 테니,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는 말도록.
하지만 이번만큼은 로만도 넘어갈 수 없었다. 귀족이 아니라는 확답은 들었으니 행동에 나서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로만은 자신의 카르텔을 중심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로만이 결투 장면을 직접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소문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그 내용을 바꿀 수 있었다.
크러쉬는 학생을 지키다가 비열한 수에 당한 선역으로.
에단은 갓 부임한 주제에 크러쉬를 속여 다치게 만든 인면수심의 교수로.
물론 결투 장면을 지켜본 학생들은 그 소문을 부정하곤 했지만, 이미 대다수의 학생은 로만이 퍼트린 소문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이제, 자기 발로 이곳에서 나가게만 만들면 돼.'
애초에 아무런 근본도 없는 평민이 귀족들을 가르친다는 사실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러쉬 교수님을 만나 봐야겠어.'
로만이 병실에 있는 크러쉬를 찾아갔다. 크러쉬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만큼 수치심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구지?"
"로만입니다, 교수님."
"여기까지 와 준 것은 고맙지만, 나가 줬으면 좋겠군."
음울한 크러쉬의 목소리에 로만이 고개를 저었다.
"크러쉬 교수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잘못은 건을 일으킨 평민 녀석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로만의 말에 크러쉬의 몸이 움찔했다. 그런 크러쉬의 반응을 보고 로만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교수라고는 하나, 그따위 행패를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소문?"
로만이 간략하게 자기가 주도하고 퍼트린 소문을 설명했다. 가만히 로만의 말을 듣던 크러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역시 고귀한 핏줄은 뭔가가 다르군...."
크러쉬의 진심 어린 칭찬에 로만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로만은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녀석을 아카데미에서 쫓아내 버리죠. 어차피 배경도 없는 평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녀석에게 교수라는 자리는 과분한 직위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만... 어떻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로만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에단은 태연했다.
'뒷배가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징계나 퇴출을 걱정하지 않고, 이런저런 상황에 마구잡이로 들이대도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편할 줄은 몰랐다.
― 분명 블란테의 이름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름은 안 쓰지 않았습니까.'
내가 과시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알아서 엎드리는 상황이었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오늘 하루는 이미 지났고, 내일부터 에단은 자신이 원하는 반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제 주인공과 마주하게 되겠군.'
그리고 덩달아 건방진 여동생도.
과연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잘 가고 있는 건가?'
에단이 떠난 일행들을 떠올렸다. 휴고와 가토, 헨리는 상당히 불안했지만, 네이드가 함께한 만큼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일행을 그곳으로 보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정보 길드.'
정보 길드가 주로 활동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붉은 곰도 덤으로 엮으면 좋고.'
붉은 곰은 언젠가 마주쳐야 하는 패거리 중 하나였다.
녀석들도 레벨린의 패 중 하나였으니까.
'급하게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여유를 가져도 좋았다. 어차피 귀찮은 일은 모두 원작 주인공이 해결할 테니까.
에단은 자신의 안위를 챙김과 동시에 본인의 성장만 추구하면 되었다.
'시간 아까운데 몸이라도 풀고 있을까.'
에단이 웃통을 벗었다. 그간 혹독한 단련을 견뎌 온 에단의 몸은 하나의 무기와도 같았다.
부피, 밀도, 그리고 데피니션까지.
완벽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에단이 팔을 지면에 대더니 그대로 물구나무를 섰다.
"습."
에단이 호흡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호흡의 압력이 배를 단단하게 잠갔다.
이 정도 경지에 다다르면 복압과 호흡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에단은 물구나무 푸시 업을 시작했다. 단순히 횟수를 채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폭발력을 위해서라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이미 폭발력은 충분했다. 그런 훈련은 가문에서 넘치도록 했다.
'이 정도 중량은 크게 부담도 없고.'
이미 에단의 신체 능력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봐도 좋았다. 야수화한 휴고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신체 능력을 지닌 에단에게,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게.'
수축과 이완, 1초면 끝날 동작을 1분에 가깝게 쪼갰다.
근육이 늘어나는 상황과 몸에 걸리는 부하를 즐겼다.
'적응했다고 자만하면 안 되지.'
평생 동안 사용하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몸에 들어왔다.
그런 몸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 천천히 몸을 느끼는 시간이 필요했다.
에단이 우두커니 물구나무를 서서 푸시 업을 하던 도중, 벌컥 문이 열렸다.
"당신...!"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방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은 에밀라였다. 에밀라의 얼굴에 담긴 표정이 분노에서 당혹으로 바뀌었다.
"뭐야?"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번쩍 일어났다. 에단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기 남자 층 아니었나? 무슨 볼일이지?"
에단의 물음에 에밀라가 고개를 피하며 말했다.
"...왜 그런 꼴로 있는 거죠?"
"보면 몰라? 운동 중이었잖아."
에단이 수건을 하나 꺼내 들어 목에 걸쳤다.
"...원래 그렇게 아무 장소에서나 옷을 벗습니까?"
"여기가 아무 장소야? 내 방에서 웃통 까고 운동하겠다는데 뭔."
"하... 빨리 옷이나 입으시죠."
"싫어. 씻고 입을 거니까.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해."
"당신.... 됐습니다. 당신은 뭘 믿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거죠?"
에밀라의 질문에 에단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건 왜 물어?"
"어떻게 첫날부터 사고를 칠 수 있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러게 직원 교육을 잘 했어야지. 뭘 믿냐고? 난 언제나 자신이 없으면 행동을 안 해. 난 나를 믿고, 그리고 내 가문을 믿지."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에밀라에게 다가갔다. 에밀라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이 말을 이었다.
"너도 자신이 있어서 내 침소에 두 번이나 찾아온 것 아닌가?"
에단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에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소리를...!"
"농담이고, 혼자 있을 생각이니까 나가."
에단이 에밀라를 슬쩍 밀었다. 에밀라는 쉽사리 밀려났고, 문은 그대로 닫혔다.
"...."
에밀라가 멍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봤다.
* * *
다음 날, 에단은 업무실이나 교무실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드디어 주인공과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에단이 발을 옮기자, 그에게 향하는 시선들도 함께 움직였다.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사람이야?'
'잘생기긴 했는데 딱 봐도 인상이 사납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곱지 않은 시선과 목소리들.
'재밌네.'
하지만 에단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시선들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문에서도 지금과 같은 멸시와 조롱의 시선을 한몸에 받지 않았던가.
'거기까지만 하면 봐줄게.'
하지만 소곤거리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건들기 시작한다면 말이 달라졌다.
'벌집을 건드렸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 주지.'
그전까지는 지금처럼 관대하게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에단은 학생들의 말을 무시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 복도를 걷던 에단이 목적지를 확인하고 씨익 웃었다.
[A반]
문 앞까지 다가간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학생의 시선이 에단을 향해 쏘아졌다.
"반갑다, 친구들."
에단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에단의 모습에 학생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군.'
곱지 않은 시선들을 느끼며 에단은 생각했다.
'여기는 어떻게 휘어잡는 게 좋을까?'
◈ [61화] 주인공
"반갑다."
에단의 말이 나오는 순간, 모두들 수군거리면서 한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
"소문의 평민?"
얼추 봐도 비싼 장신구를 차고 있는 귀족 무리.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 있는 평민들.
반의 분위기를 대강 파악한 에단이 천천히 위에서부터 학생들을 훑어봤다.
'쟤가 내 여동생이군.'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에단의 기억이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요소들이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에단처럼 평민 행세를 하고 있지만 결코 감출 수 없는 귀족의 위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사는 에단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그럴 수 있지.'
지금의 에단은 외모와 분위기가 모두 달라졌으니까.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름뿐이었다.
'그나저나 주인공이 누군지를 모르겠군.'
이 반에 있는 것은 확실했는데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워낙 잘생겼다고 묘사하길래 알아보기 쉬울 줄 알았는데... 모르겠군.'
특출한 녀석이 있다면 페온이 먼저 입을 열었을 텐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원작 주인공 찾기를 포기한 에단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자, 조용. 출석 부른다."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학생들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추, 출석?"
"우리 출석 확인 같은 거 한 적 있었어?"
"없는 거 같은데...."
학생들의 반응이 호의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한마디로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소리다.
에단은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책을....
'아, 준비한 게 없었지.'
에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밀라에게 말이라도 해 둘 걸 그랬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어차피 자신이 아는 몇 명의 이름만 부르고 말면 되는 일이었다.
에단이 대충 단상에 손을 얹어 삐뚜름하게 섰다.
"리사."
에단이 리사의 이름을 부르자, 예상한 인물이 반응을 보였다.
"대답 안 하나?"
"네."
리사의 대답에 에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강혁."
두 단어. 이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국식 이름이었다.
에단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주시했다. 하지만....
'...뭐지?'
반응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에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강혁?"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강혁이 누구야?"
"강혁이라고 알아?"
"아니, 처음 듣는데? 다른 반 애 말하는 거 아니야?"
"다른 반에도 없을걸? 애초에 이름도 특이하잖아."
"뭐야.... 저 교수 왜 저러는 거야?"
학생들의 반응에 에단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주인공이 없었다.
―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페온의 물음에도 에단은 침묵했다. 에단이 리사를 바라봤다.
'그래, 리사 근처에 있어야 해.'
에단이 리사 곁에 다가갔다. 리사 곁에는 남자 학생이 앉아 있었다.
에단이 다가서자 학생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름이 뭐지?"
"야, 얀입니다."
"너는?"
에단이 고개를 돌려 다른 근처 학생들에게도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강혁이라는 인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업은 잠시 보류다. 그동안 자율 학습이다."
에단이 몸을 돌렸다.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도서관.'
당연히 도서관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에단은 밖에 돌아다니는 직원을 아무나 붙잡아 도서관의 위치를 물었다.
마침내 도서관을 찾아낸 에단이 안으로 들어섰다. 도서관의 규모는 거대했고, 웅장했다. 마탑의 서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페온은 말없이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단이 이렇게나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대륙의 역사. 마왕, 그리고 용사."
에단은 기억을 더듬어 주인공이 책을 찾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갔다.
영웅담을 정리해 놓은 듯한 책의 순서.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 글귀도 써져 있지 않은 낡아빠진 책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에단은 말없이 그 책을 빼 들었다.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선택받은 용사만이 얻을 수 있는 힘과 조언.
아카데미에서 얻게 되는 첫 번째 히든 피스였다.
에단은 천천히 책을 펼쳤다.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남은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룬어]
[절망]
책에서 음산한 검은 빛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빛은 에단의 팔을 타고 오르더니 이내 피부에 깃들기 시작했다.
― 무, 무슨 일이냐?
"...."
에단은 빛을 발하고 있는 문자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글귀와 무늬는 희미해지며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룬어....'
용사이자 주인공만이 얻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룬어.
주인공이 얻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서도 주인공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그 소리는.'
주인공이 진작 해결했어야 하는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먼저 세계수.'
분명 세계수의 오염을 막지 못했을 거다.
오염이 진행되고 있다면, 상황이 더욱 급박했다. 세계수가 완전히 오염되어 버리면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 자신은 엄청난 페널티를 안게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적들은 막대한 이점을 얻는 것이고.'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몸을 돌린 에단이 곧장 교무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에단이 예고 없이 문을 덜컥 열자, 레벨린이 미간을 좁히며 에단을 바라봤다.
"무슨 볼일이죠? 지금 수업하셔야 할 시간 아닙니까?"
"그건 사과하지.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흐음, 말씀해 보시죠."
"강혁,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가?"
에단이 레벨린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레벨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장 대답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고맙군."
대답을 들은 에단이 곧장 몸을 돌리자, 레벨린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정확합니다. 학생들의 이름은 모두 외우고 있으니까요."
"암기력 하나는 대단하군. 그 정도면 천재 아닌가?"
"비꼬시는 거면 됐습니다. 혹시 알아봐 드릴까요?"
싱긋 입꼬리를 올리는 레벨린을 보며 에단이 피식 웃었다.
"내가 찾을 거니까 필요 없어."
"그거 유감이군요."
"아, 그 말을 빼먹었군."
"...뭐죠?"
"오늘 월차 낼게. 급한 일이 있어서."
"무슨 월차가 있다고... 저기요!"
에단이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은 뒤 달리기 시작했다.
계획이 바뀌었다.
'녀석들을 만나야겠어.'
상황이 달라졌다. 여유롭게 관조할 순 없었다.
'귀찮아졌군.'
시간이 촉박했다.
* * *
다그닥, 다그닥.
"이게 맞아?"
"몰라, 우리는 까라면 까야지."
"나도 아카데미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뭐야? 블란테의 기사라는 놈이 그따위 곳을 선망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명심해. 너는 블란테의 가신이야. 마음가짐을 바로 하라고."
"너는 가 보고 싶지 않아?"
"...어."
"대답이 조금 늦었는데."
"아니라니까?!"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발끈해."
휴고와 가토의 대화를 바라보던 헨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하.... 말하는 것만 보면 영락없는 애네...."
그런 헨리를 보던 네이드도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보기에는 헨리 씨도 충분히 어린 축에 속합니다."
"아, 그런가요? 괜히 머쓱해지네요."
헨리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에단이 빠지고 예정되지 않은 일정이 생겼지만, 포기해서 그런지 꽤나 안정감을 찾게 되었다.
'동생이 보고 싶네.'
헨리가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어린 동생이 생각났다.
* * *
에단이 정문을 바라봤다.
'시간이 없어.'
에단에게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빨리 일행들과 만나야 했다.
에단은 철문에 손을 얹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근육이 부풀고 혈관이 돋아났다.
쿠구구궁.
철문이 굉음을 일으키며 밀려나고 있었다.
발밑이 움푹 파였다. 에단이 인상을 쓰며 힘을 주자 쿵! 소리와 함께 철문이 활짝 열렸다.
문밖에는 문지기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에단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얼굴을 감싼 채 오들오들 떨었다.
"야, 그땐 조금 미안했다. 그러니까 다음엔 잘 좀 하자."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일행과 에단 간의 거리는 하루가 넘게 걸릴 만큼 벌어져 있었다.
'일단 최대한 뛰어 봐야지. 유산소 트레이닝은 오랜만인데.'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달렸다. 분주하게 발을 놀려야 따라붙을 수 있을 터였다.
* * *
일행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꽤나 익숙해졌는지 능숙하고 빠르게 준비를 끝마쳤다.
"...평화롭네요. 안심도 되고."
모닥불 앞에 앉아 헨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평화와 그리 친숙하지 않았다.
늘 초조함과 촉박함에 쫓기는 기분로 살았다. 실적 부족과 불안정한 미래, 그리고 부양할 가족이 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걸 놓아두고 홀가분한 기분이 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헨리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제 주제에 이런 곳에 끼어 있어도 될까요?"
"...."
휴고와 가토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만히 식사를 준비하던 네이드도 헨리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다가와 수프 한 접시를 건넸다.
"이거라도 드시죠."
"감사합니다."
헨리가 수프를 받아 들었다. 수프에서는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 모르겠네요. 아직."
"모르시면 괜찮습니다. 저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건 도련님도 다르지 않았죠."
"도련님이요?"
헨리가 되물었다. 덩달아 가토와 휴고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셋의 반응이 재밌는지 네이드가 미소를 머금었다.
"궁금하신가요?"
"네."
"저도 궁금합니다."
"저도...."
모두 궁금해하자,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할아버지처럼 네이드가 입을 열려 했다.
그 순간.
"그 이야기, 나도 좀 들어 보자."
수풀을 헤치고 에단의 머리가 등장했다.
"꺄아아아아악!"
헨리가 비명을 질렀다. 네이드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고, 가토와 휴고도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도,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아니.... 도련님이 여긴 왜."
"왜 이렇게 놀라?"
에단이 땀에 푹 절은 옷을 벗었다. 얼마나 땀과 열을 머금었는지 옷에서 김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에단이 옷을 쥐어서 물기를 짜내었다. 옷에서 물이 흥건하게 떨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무식하게 뛰어 댔군.'
조금만 찾아봤다면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간만에 땀도 빼고 좋지, 뭐.'
제대로 유산소 운동을 했으니, 이제 단백질과 수분을 보충할 차례였다.
"네이드, 내 것도 있나?"
"네. 여유롭게 했으니 드시죠."
"고맙군."
에단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체취에 헨리가 볼을 붉혔다.
'모, 몸이....'
에단의 몸은 정말 잘 벼린 검 같았다. 갑옷같이 우락부락하지는 않았지만, 돋아난 혈관과 꿈틀거리는 근육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여기까지 대체 무슨 일로...."
"계획이 조금 틀어져서 말이야. 내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일이라는 것은... 말씀하신 그것 말씀인가요?"
"어, 정보 길드. 녀석을 좀 찾아봐야겠어."
강혁에 대한 정보. 그게 필요했다.
◈ [62화] 합류 (1)
원래 하려던 야영은 갑자기 나타난 에단 때문에 접어야 했다.
"...평화가 끝났네."
휴고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에단이 마차의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아쉬워?"
"아, 아닙니다."
"아쉬우면 말해. 다시 보내 줄 테니까."
"어디로요?"
"궁금해?"
에단의 섬뜩한 미소에 휴고는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 안에 일을 다 끝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페르나니엄 자치령.
용병의 도시이자 무역의 도시.
자유를 표방하는 도시로 유명했다.
비록 공권력은 없다시피 한 무법 지대라고 볼 수 있었지만, 독자적인 규율이 질서를 만들었다.
누구보다 거칠게 사는 용병들이 세운 힘의 율법.
그 율법은 고압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덕분에 확실한 강제력을 가졌다.
페르나니엄 자치령은 그 구조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상인들이 모이면서 많은 돈이 돌기 시작했고, 돈 냄새를 맡은 용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상인들도 용병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상행의 안전을 위해서는 용병이 필요 불가결했기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도시는 발전했다.
빠른 성장 탓에 부작용도 따랐지만, 그를 뛰어넘는 장점 때문에 페르나니엄 자치령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확실히 활기가 넘치는 도시네."
"와, 해가 떨어졌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신기하네요."
휴고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상인들의 호객 행위와 길가에서 술을 마시고 연초를 태우는 용병들.
신선한 분위기였다. 무질서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상인들은 에단 일행을 힐긋거리며 주시하고 있었다.
'호구를 노리는군.'
에단 일행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초짜 여행객.
유희를 즐기는 귀족이거나 갓 자립한 초보 행상인.
한마디로 빼먹기 좋아 보이는 먹잇감이었다.
에단이 봐도 그랬다.
앳돼 보이는 기사 둘에 어벙한 외모의 여자 하나, 그리고 나이 든 중년.
'좋은 먹잇감이 따로 없군.'
그렇다고 블란테임을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경계심을 주는 편보다는 호구 잡히는 게 나았다.
에단이 마차에서 내렸다. 지금부터는 직접 훑어볼 생각이었다.
인파가 북적였다. 에단이 마차에서 내리자,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뭐지?"
"도련님 인상이 안 좋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해맑은 휴고의 대답에 에단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인상이 더럽다고?"
"조금.... 정확히 말하면, 잘생겼는데 다가가기 힘든...."
― 딱 맞는 말이구나. 너는 거울도 안 보고 다니더냐.
휴고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인상이 안 좋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상이 거칠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용병을 상대로도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에단을 기피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짜증이 난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나마 접근하던 상인들도 몸을 돌렸다.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단의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기는 하였지만, 싸움터에서 구른 용병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에단을 멀리하는 이유는, 에단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피어 때문이었다.
블랙 오우거는 몬스터 중에서도 마수에 가까운 존재였다.
영물이나 신수와는 질이 달랐다. 그것들보다 더 포악하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뭐, 덕분에 편해지긴 했네.'
에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에단을 향해 접근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소녀였다. 소녀는 당찬 발걸음으로 에단을 향해 다가왔다.
"여행객이신가요? 혹시 아직 쉴 장소를 찾지 못했으면 저희 여관으로 오세요!"
에단이 말없이 눈앞의 소녀를 바라봤다. 주근깨가 있는 얼굴과 갈색 머리를 한 소녀.
에단을 마주했음에도 소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음식은?"
소녀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끌리기는 했지만, 음식은 중대 사항이었다. 그들에겐 편한 잠자리보다 질 좋은 음식이 우선이었다.
"맛도 양도 최고입니다! 자신할 수 있어요!"
소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에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내해."
* * *
뜻밖의 인연으로 머물 장소가 정해졌다.
에단 일행은 소녀가 안내하는 장소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동떨어진 장소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긴 세월이 엿보이는 간판에는 '질긴 가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용병단 같은 이름이군."
"여관 주인분이 용병 출신이라 그래요! 겉은 투박할지 몰라도 내부는 나름대로 깔끔하답니다."
"그래, 기대하지."
"넵, 말과 마차는 제게 맡기세요."
소녀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린 가토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고삐를 건넸다. 소녀가 작은 손으로 고삐를 쥐고는 능숙하게 말을 이끌었다.
그걸 본 가토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휴고를 슬쩍 바라봤다.
"누구보다 쟤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시끄러워."
휴고는 여전히 말과 친해지지 못했다.
일행은 여관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은은하게 전해졌다.
문을 열 때 나는 투박한 소리에서조차 적지 않은 세월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상당한 풍채의 중년 여성이 일행을 맞이했다.
네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곳 주인이십니까?"
네이드의 물음에 중년 여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 허름하지만 제가 주인입니다. 방이 필요하신가요?"
여주인의 물음에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머무를 생각입니다. 객실을 좀 여유 있게 쓰고 싶습니다만...."
"운이 좋네요. 때마침 머무르던 용병들이 떠나서 방이 비던 참입니다."
"그럼 준비해 주시죠. 식사는 가능한가요?"
"그거야 당연하죠.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여주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네이드가 힐긋 뒤를 바라봤다.
"...종류는 상관없으니까 넉넉하게 준비해 주시죠."
"하하, 배가 터질 정도로 준비해 드리죠. 숙박비랑 식비까지 총 20실버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선불로만 받아요."
네이드가 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서 건넸다. 여주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화는 오랜만이네요. 거스름돈은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괜찮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음식부터 준비해 주시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여주인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일행은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주인이 용병 출신이라길래 남자일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네요."
"그래도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봐."
"갑자기 급히 서두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애초에 정보라면 가문의 힘을 이용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걸로는 부족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세력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네이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원래라면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에단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모르지."
"...."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가문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에단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입지를 다진 상태였다. 에단이 독자적인 세력을 꾸려 무언가를 모의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덩달아 용병들도 찾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
"어, 붉은 곰."
"들어 본 적 있어요. 최근 들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신생 용병단으로 꽤나 실력이 있다고...."
"찾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있으니까 찾지."
일행은 설명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구체적인 대답을 하기가 애매했다.
'붉은 곰은 레벨린의 수하였고, 레벨린의 발을 자르기 위해서 붉은 곰에게 접근한다.'
정보의 출처부터, 설명하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그때 말과 마차를 데려갔던 소녀 종업원이 들어왔다.
"헤헤, 금방 왔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음식은 금방 나와요!"
종업원이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안에서도 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당히 활기찬 아이네요."
휴고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업원 소녀는 작은 덩치로 큰 접시를 가뿐하게 옮겼다.
넓은 테이블이 순식간에 먹음직한 음식들로 가득 채워졌다.
일행이 식사를 시작했다. 아이가 자신만만해하던 것처럼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밖에서 먹던 네이드의 요리도 분명 훌륭했지만, 노상에서 먹는 음식과 편안한 자리에서 먹는 음식에는 확실한 차이가 존재했다.
"헤헤, 제가 장담했죠?"
음식을 빠르게 먹어 치우는 일행을 바라본 아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기대한 보람이 있네."
"제가 과장은 좀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아요. 페르나니엄은 처음인가요?"
"티가 많이 나나?"
"네, 완전요. 혹시 귀족이라거나 높은 분은 아니시죠?"
"왜 그것도 티가 나나?"
에단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소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귀족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딱히 걱정한 건 아니에요. 페르나니엄에서는 귀족이라도 똑같은 외지인이니까요. 귀족이 아니면 있는 집 자제인가요? 상인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궁금한 게 많나 보군."
"헤헤, 한창 그럴 나이라서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에단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그냥 여행객이라고 생각해. 여기에는 찾는 사람이 있어서 온 거고."
"찾는 사람이요? 누구요? 상인? 용병?"
"용병.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붉은 곰' 용병단이라고."
"붉은 곰이요? 의뢰 때문에 찾는 건가요?"
"어, 의뢰를 맡기려고."
"하지만 소문을 듣기로는 되게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불안한 듯 보이는 소녀의 말에 휴고와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제일 위험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모든 일을 지켜봤다.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어떻게 죽이는지.
모룬과의 결투에서 어떻게 모룬을 제압하는지.
에단이 아카데미에서 온 교수를 어떻게 박살 내는지.
그리고 아카데미를 지키던 문지기를 어떻게 손보는지.
그 장면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붉은 곰 용병들이 얼마나 악명 높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히 에단의 손속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에단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행이 먹던 손을 멈추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태도가 상당히 어색했던 것이다.
'왜 자상해?'
'아니, 뭘 잘못 먹었나?'
소녀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아니에요. 손님인데 당연하죠."
"그래, 이름은?"
"다비입니다."
씩씩한 대답에 에단이 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놈들 데리고 동네 구경이나 시켜 줘."
에단이 네이드를 포함한 일행들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기자 네 사람은 당혹스러워했다.
당황하기는 다비도 마찬가지였다. 예상 못 한 거금을 손에 쥔 다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돈은."
"무슨 소리야. 거스름돈은 들고 와야지."
에단의 대답은 단호했다.
◈ [63화] 합류 (2)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짐을 푼 에단은, 각자 활동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혼자는 위험...."
"위험하다고?"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가토는 빠르게 수긍했다.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에단은 걱정할 대상이 아니었다.
가토가 보기에 에단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산맥에서도 잘 먹고 잘살 위인이었다. 고작 용병들 따위가 넘볼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용병들이 위험하면 모를까....'
"나이가 나이인지라 여행이 고되더군요."
네이드도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며 객실 위로 올라갔다.
에단은 혼자 도시로 나왔다. 저녁을 넘어 밤이 되자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진 도시였다.
일단 주정뱅이의 숫자가 늘어났다.
가뜩이나 거칠고 사나운 용병들이다. 거기에 술이 더해지자 곳곳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단순한 싸움판이 아니었다. 관중이 있고 돈이 오가는 놀음판이 되었다.
"개자식아!"
"오늘 죽어 보자!"
주먹이 오갔다. 환호성과 함께 웃음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신기한 일은, 싸움이 과열될지언정 검을 뽑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의 규율인가 보네.'
재밌었다. 싸움의 수준은 저열했다.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싸움이지만 보는 맛이 있었다.
에단은 제일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장소에 비집고 들어갔다. 역시나 싸움판이었다.
"나는 마킨한테 10실버 건다!"
"멍청한 놈! 딱 봐도 잭슨이 승기를 잡은 거 안 보여? 나는 잭슨한테 20실버!"
결투 중인 사람들은 도시 내에서도 꽤나 유명 인사인 듯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베팅한 돈을 걷는 자가 에단에게도 다가왔다. 막상 에단의 앞에 서자 작게 움찔거렸지만, 돈에 대한 탐욕이 더 큰지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처음 보는 형씨네? 눈빛 한번 살벌해라. 용병 같지는 않은데... 형씨도 베팅할 거유?"
말없이 둘의 싸움을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마른 녀석의 이름이 뭐지?"
"정말 여기 처음 왔나 보네? 검은 옷 입은 녀석 말하는 거지? 그러면 잭슨 맞아. 잭슨한테 베팅하려고? 돈 벌려면 잭슨 말고 마킨한테 거는 걸 추천하는데. 무식하게 보여도 마킨이 싸움 실력은 꽤 좋아."
"잭슨한테 10골드 베팅하지."
에단이 품에서 금화를 꺼냈다.
'냄새가 나는데.'
싸움판에서 싸우고 있는 마른 몸의 남자.
촉이 느껴졌다. 에단은 정석적인 루트로 정보 길드를 찾아 나설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무모하고 직관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지, 진심이야?!"
남자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에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끔뻑이던 남자가 골드를 받아 들었다.
"후회해도 난 몰라."
거액의 베팅에 놀란 것은 돈을 받은 남자뿐이 아니었다.
"10골드? 미친 진짜라고?"
"아니, 잭슨한테 10골드를 걸었다고?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싸움판에 몰리던 시선이 순식간에 분산되었다. 뜬금없이 등장해서 고액의 돈을 베팅한 에단에게로 주목이 쏠렸다.
"지금 상황은 딱 봐도, 잭슨이 불리한 상황이야! 돈을 버릴 생각인가?"
"버릴 생각이면 나도 좀 줘!"
"닥쳐! 잭슨이 이길 거니까!"
"넌 매번 되도 않는 녀석한테 걸어서 다 잃는 주제에 뭔 개소리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에단은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다들 보는 눈이 애꾸 수준이구나.
'동감입니다.'
언뜻 본다면 일방적인 싸움이다. 하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달랐다.
마킨이라고 불린 남자는 큰 체격을 믿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반면 잭슨이라고 불린 남자는 방어 일변도였지만, 모든 공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소한 동작도 놓치지 않았다.
보고, 피하고, 막았다.
예측할 수 있는 공격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에단이 보기에 잭슨은 지금 상대의 공격을 받아 주고 있었다.
끝낼 기회는 아까부터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잭슨은 의도적으로 싸움을 늘어뜨렸다.
'돈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잭슨이 승리할 것이다.
그만큼 실력의 차이가 극명했다.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다면 이 대결의 승자는 잭슨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저 녀석이 진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거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군.'
10골드라는 목돈을 걸기는 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에단에게는 그리 뼈아픈 지출이 아니었다.
가문에서 들고 온 돈도 적지 않았을뿐더러, 산적들을 털면서 얻은 수확도 상당했다.
10골드 정도면 충분히 베팅할 만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에단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내 촉이 맞다면 말이지.'
"마킨한테 전 재산 올인!"
"나도 마킨한테 건다! 50실버!"
"빨리 돈 받아!"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판돈을 걸지 않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돈을 걸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판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결과가 빤히 보이는 대결이었다. 평범한 이들이 보는 기준으로 불리한 쪽에 큰돈이 걸렸다.
'이걸 놓치면 병신이다!'
10골드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가 되더라도 며칠 술값을 충당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마킨, 빨리 끝내!"
"잭슨! 개고생 그만하고 빨리 처맞고 쓰러지기나 해!"
대다수의 사람이 마킨을 응원하고 잭슨에게 야유를 보냈다.
"후욱, 후욱! 뒈져!"
거친 숨을 내뱉던 마킨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보기만 해도 위력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찰나의 순간, 잭슨이 마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킨의 팔 사이로 잭슨의 주먹이 비집고 들어갔다.
무방비로 노출된 마킨의 턱에 잭슨의 주먹이 제대로 꽂혔다.
'호오.'
에단이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빈틈을 발견하고 그사이를 파고든다.
단순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시도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역시 꽤나 하는 놈이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길거리 싸움을 전전하던 과거의 기억.
에단은 이내 잡념을 떨쳐 내고 다시 눈앞에 집중했다.
"끄윽!"
마킨은 몸을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잭슨을 꽉 붙잡았다.
"이익! 넌 이제 뒈졌어!"
마킨이 그대로 잭슨을 집어던지려고 하자, 잭슨이 무릎으로 마킨의 고환을 찼다.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남들에겐 잭슨이 몸부림친다고 보일 정도로.
"우우우! 추하다!"
"발악하지 말고 빨리 끝내라고!"
하지만 에단은 잭슨의 움직임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밌네.'
잭슨의 무릎이 사타구니를 지속적으로 타격하자, 마킨의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킨은 붙잡은 손을 놓았다.
"끄으으, 이런 비겁한...!"
"뭐가?"
잭슨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마킨의 육신이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순간 싸움판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토록 시끄럽게 소리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정적이 지속되던 와중, 한 남자가 목소리를 냈다.
"조, 조작이다!"
"시발, 이건 개수작이야! 너희들 짜고 쳤지?!"
"너도 범인이지?!"
돈을 잃을 위기에 처한 용병들이 모두 현실을 부정하며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에단도 그들의 타깃 중 하나였다.
'어이가 없군.'
용병들은 태생부터 돈을 좇는 망자들이었다. 돈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모두 눈이 돌아갔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잭슨의 표정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 새끼들 왜 이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싸움에는 변수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반전은 늘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평소와 달랐다. 돈을 잃는 자들이 분개하는 건 같았지만 그 정도가 달랐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에단을 향해 있는 걸 보고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건 사기야!"
"내 돈 내놔!"
"저 사기꾼 새끼!"
원망의 화살이 몰려들었지만, 에단은 팔장을 낀 채 심드렁하게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할 말 다 했냐, 이 머저리 새끼들아?"
"뭐, 뭐라고?"
"이 우라질 새끼가!"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를 풍겼다. 용병들은 태생부터 뒤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규율 따위는 허울뿐인 울타리에 불과했다. 언제든지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단이 그 울타리에 불을 지른 것이다.
에단이 조소를 지으며 중지를 올렸다.
"지들 눈이 병신인 걸 나를 탓하네. 맘에 안 들면 덤비든가. 아니면 나도 한판 할까? 내가 지면 방금 낸 골드의 열 배를 뿌려 줄게."
"여, 열 배?"
"100골드?!"
돈이 거론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눈에 탐욕이 감돌았다.
"왜? 내가 거짓말 치는 거 같아? 궁금하면 덤벼 봐. 나한테 이기면 100골드 던져 줄 테니까."
"나, 나랑 싸워!"
"닥쳐 새끼야! 내가 싸울 거야!"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소란이 번졌다.
에단이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이 둘러싸고 있던 공간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잭슨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이 다가서자, 잭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누구야?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잭슨의 물음에 에단이 말없이 잭슨을 바라봤다.
"그러는 너는 마나 유저쯤 되는 녀석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단순한 취미 생활인가?"
"...!"
잭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진짜 누구야?"
잭슨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나가던 사람."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본 것이었지만, 잭슨을 본 뒤로 의심이 생겼을 뿐이다.
잭슨과 마킨의 싸움은 단순한 실력 차이 수준이 아니었다. 마킨을 마무리할 때 미세하지만 마나의 흔적이 엿보였다.
마나를 사용하는 수준의 용병이라면 이런 길거리 싸움에 발을 들일 이유도 없었다. 그것도 일부러 수준을 맞춰 주면서.
그렇기에 녀석을 의심한 것이었다.
'인상착의도 모르겠는 걸로 봐서는 원작에서 비중 있는 녀석은 아닌 것 같고.'
잭슨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명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애초에 원작에서 남자 캐릭터의 비중은 없다시피 하지만.'
그나마 있는 비중은 주인공한테 대들다가 깨지는 캐릭터 정도였다.
떠오르는 캐릭터를 대입해 봐도 눈앞에 있는 잭슨과 유사한 캐릭터는 없었다.
여러 가지 가정이 들었다. 하지만 확신은 들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가설이 떠오르긴 했지만 조급하게 굴지는 않았다.
지금 가장 거슬리는 것은 용병들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에단은 호구처럼 당해 줄 성격이 되지 못했다.
"얼굴은 험악한 놈들이 계집아이처럼 말만 많네."
에단이 용병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도발을 던졌다.
"저, 미친 새끼가!"
용병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함부로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용병은 기본적으로 돈에 환장하는 족속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늘 사선을 넘어 다니는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생명의 위협을 빠르게 감지해 낸다.
이번이 그런 상황이었다.
에단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피어가 용병들을 망설이도록 만들었다.
"다들 비켜! 병신들이 겁이나 집어먹고 말이야."
"어떤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용병이 입을 다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거구의 사내였다. 쓰러져 있는 마킨도 거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마킨이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방금 한 말은 사실이겠지?"
"뭐? 돈? 그래 뭐.... 줄게. 물론 이기면 말이야."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 [64화] 정보 길드 (1)
"흐흐, 만일 그 말이 거짓말이면 모가지를 비틀어 주겠어."
"모가지도 안 보이는 돼지 새끼가 모가지 운운하니까 거참 신기하네."
"...."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되게 솔직하네?"
"그래,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 주마. 돈은 죽이고 나서 가져가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에단이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권태로워 보이기 그지없었다.
에단의 조롱이 기폭제가 되어 남자가 성난 황소처럼 뛰어들었다.
에단을 그대로 밟아 죽일 기세였다.
"뭐 하고 있어!"
잭슨이 다급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잭슨과 다르게 에단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비켜 있어."
― ...또 뭔 짓을 하려고....
페온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었다.
황소같이 달려든 남자가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에단을 밟아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쿵!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나 먼지구름이 걷히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거한의 발은 에단을 짓밟지 못했다.
에단의 다리가 남자의 발을 뱀처럼 휘감았다.
그 상태로 다리에 힘을 주자, 남자의 신형이 기우뚱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개수작을!"
남자의 몸이 쓰러졌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조여 왔다.
"주, 죽기 싫으면 당장 놔, 이 새끼야!"
"방금까지 죽인다고 하지 않았냐?"
"자, 잠깐."
"싸움에 잠깐이 어딨어."
에단이 그립을 확고하게 잡았다. 에단의 근력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초월했다.
남자의 힘도 덩치에 걸맞게 강한 편이겠지만, 블란테의 혈통이며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한 에단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힐 훅(Heel Hook).
에단이 거한의 다리를 비틀었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무릎 연골이 종이 찢어지듯 찢어졌다.
"끄아아아악!"
연골이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그 시각, 휴고와 가토는 여관 앞 작은 공터에서 가벼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둘의 실력은 비등했다.
마나 수련 이전까지는 휴고가 조금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토가 마나를 깨우친 이후로는 오히려 가토가 우위를 점했다.
쉬익!
가토의 목검이 휴고의 뺨을 스쳤다.
휴고가 발을 내디디며 흐름을 바꾸려고 하자, 가토가 몸을 빙그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에 휴고가 몸을 크게 낮추며 공격을 피한 뒤 거리를 벌렸다.
"우와.... 오빠들 엄청 강하구나...."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다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익숙지 않은 칭찬에 휴고가 머리를 긁으며 민망해했다.
"헤, 헤헤.... 고마워."
그런 휴고를 가토가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 목검을 정리했다.
땀은 충분히 흘렀다. 휴고와의 대련은 언제나 큰 양분이 되었다. 휴고의 공격은 매우 변칙적이고 동물적이었다.
그와 대련을 할 때면 마치 짐승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예측하기 힘든 타이밍과 공격.
덕분에 휴고와 매일 대련하며 자연스럽게 임기응변도 크게 늘었다.
임기응변은 실전을 통해서만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휴고와의 대련은 실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괜찮겠지?"
휴식을 취하던 도중 휴고가 가토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설마 에단 도련님을 걱정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내가 도련님을 걱정하겠어? 도련님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이 또 뭔가 일을 벌일까 봐 걱정하는 거야. 시비 걸리면 어떻게 될지 빤히 예상이 가잖아."
"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또 일이 생겼겠어?"
"...그렇지?"
"...."
가토는 휴고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거한의 십자인대를 찢어 버린 에단이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끄아아악! 주, 죽여 버릴 거야!"
거한이 비틀린 다리를 부여잡으며 에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에단이 발을 높이 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에단의 발이 거한을 몇 차례 짓밟았다. 처음에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렸지만, 거한은 얼마 안 가 잠잠해졌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만족스럽다는 듯이 에단이 웃었다.
'미, 미친.'
에단을 바라보던 용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거한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존재였다.
포악하고 잔혹한 성격 탓에 늘 사건 사고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한 앞에서 싫은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우악스러운 성격만큼 실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용병들에게는 힘이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
모든 사람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거한의 다리를, 마치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 듯이 가볍게 비틀어 버렸다.
인간 같지 않던 거한이 바닥에 뒹굴며 순식간에 전투 불능이 됐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고 무심하게 확인 사살까지 끝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히 분노를 토해 내던 용병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른 놈들은 안 와? 내가 가?"
에단이 한 걸음 내딛자, 용병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기세라는 게 있다. 기세는 한번 형성되기 시작하면 거스르기 어려웠다.
에단의 기세는 이미 저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야, 너. 이쪽으로 와 봐."
에단이 사람 하나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돈을 걷던 남자였다.
"저, 저요...? 저는 왜...."
"빨리 안 와?"
에단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잔뜩 기가 죽은 남자가 에단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낚아챘다.
"내가 이겼으니까. 이 돈은 내가 가진다."
"네, 네? 하지만 배분을."
"왜? 100골드 때는 아우성치더니 불만이야? 나도 내가 느낀 서러움과 슬픔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거한을 순식간에 박살 내 버린 에단의 말은 단순한 억지로 치부할 수 없었다.
"불만 있으면 나오든가."
"...대, 대체 정체가 뭐지?"
어느 용병의 물음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뭐야, 그 식상한 질문은. 좀 참신한 걸로 해 보지 그랬어? 불만 있으면 '질긴 가죽'으로 와. 며칠간은 머무를 생각이니까."
"질긴 가죽?"
"질긴 가죽이면 소문의...."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질긴 가죽이라는 여관에 대해 따로 아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보를 캐내고 싶지만.'
에단이 힐긋 잭슨을 바라봤다.
잭슨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에단이 잭슨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내 말대로 끝났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럽니까."
"갑자기 경어 쓰니까 어색하잖아."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용병들은 뒤끝이 강해,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겁니까? 저명한 귀족가의 자제라도 되나 본데 여긴 페르나니엄입니다. 용병과 상인의 도시란 말입니다."
"뭐, 저명 비슷한 거긴 하지. 그러는 너는 억지로 용병들 사이에 들어가려는 거 보니까. 정보 길드인가?"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에단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단의 입가가 크게 휘었다. 잭슨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정보 길드라니, 넘겨짚기가 과하군요."
"큭큭, 그래? 용병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쟤네들한테 화두를 던지면서 물어볼까?"
"...하,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왜 이렇게 방해하는 건지 들어나 봅시다."
"너희들을 찾아다니던 중이었거든."
"우리를? 대체 무엇 때문에?"
"아까부터 묻는 게 참 많네. 정보 길드라는 놈들이 너무 정보를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여기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당신 덕에 내 계획도 모두 허사가 돼 버렸습니다."
"뭘 어떡해. 그냥 가는 거지."
에단이 잭슨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지나가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순간 고민했다. 여기서 에단을 그냥 놓아줘도 되는가.
에단의 행동은 분명 도를 넘었다. 검을 뽑아도 규율에 어긋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면?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들은 에단이 상대를 어떻게 짓밟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단순히 패배가 끝이 아니었다. 저 정도의 부상이라면 복귀는 힘들지도 모른다. 용병의 삶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용병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원한도 많이 사게 된다. 그러니 큰 부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돈 몇 푼에 목을 걸고 싶지 않았다.
원래 용병이라는 족속은 돈에 목숨을 베팅하는 직업이었지만, 에단에게 대항하는 것은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주춤주춤 물러서던 용병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뒤를 노리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선뜻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에단이 풍기는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어.
완벽한 피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블랙 오우거를 흡수하면서 얻은 부가 효과.
에단이 살기를 끌어올리자, 자연스럽게 피어가 강해졌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
피어에 노출되면 대항이라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홍해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를 에단이 태연하게 지나쳤다.
* * *
에단은 질긴 가죽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미 체념한 잭슨은 축 늘어진 건어물처럼 에단에게 질질 끌려왔다.
여관에 휴고와 가토는 없었다. 다비도 없는 것으로 보아 동네를 구경하기 위해 함께 나간 것 같았다.
'잘됐군.'
적어도 둘만 있는 게 대화하기는 수월했다.
때마침 여관 안도 조용했다. 사람도 딱 한 명뿐이었다. 있는 사람이라고는 취기가 잔뜩 올라서 엎드려 있는 헨리.
"...한심하군."
한숨을 내쉰 에단이 잭슨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이제 용건을 말해 보시죠."
"좀 기다려. 성급하기는."
하지만 급하기는 에단도 다르지 않았다.
에단이 여관 주인에게 말해, 마실 것 두 잔을 준비했다.
"붉은 곰, 그리고 곰 발. 아는 거 있지? 용병이랑 산적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아카데미."
"말을 잘못했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원하는 건 없어. 얘네가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궁금한 건 바로 너희들이야."
"...그걸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뭘 하기는, 협력하려고 하는 거지."
"하, 협력? 대체 당신의 뭘 믿고요?"
"왜 그걸 네가 판단하는 거지? 더 위가 있잖아."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글쎄, 여기부터는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은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연스레 풍기는 압도감에 잭슨이 움찔 몸을 떨었다.
"...대체 뒤에 누가 있는 거죠? 당신이 무슨 블란테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오, 드디어 정답이군."
"그게 무슨...."
에단이 품에서 휘장을 꺼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사자.
블란테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없어.'
촉박한 시간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잭슨의 부릅뜬 눈을 보며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감이 와?"
◈ [65화] 정보 길드 (2)
"이게 무슨...! 설마 블란테가 페르나니엄을 노리고?!"
"무슨 헛소리야. 이딴 촌구석을 블란테가 먹어서 어디에다가 쓴다고.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용무일 뿐이야."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습니까?"
"시작은 산적 새끼들, 그리고 그 이후는...."
에단이 잠시 침묵했다. 여기서는 말을 꺼내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규모가 조금 커야지.'
원래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한데 원작 주인공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일이 꼬였다.
그걸 생각하자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몰라도 돼."
"지금 그걸 말이라고...."
"미안한데 내가 시간이 없거든? 좋게 가면 안 될까?"
"정말 산적까지 연관되어 있습니까?"
"뭐야? 정보 길드라는 녀석이 그것도 몰라? 그렇다면 실망인데."
에단의 말에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증뿐이었습니다. 붉은 곰은 최근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용병단입니다."
"그건 알고 있지."
"끝까지 으시죠. 용병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상품성?"
에단은 의미 없는 질의응답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것도 정답이기는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위상이었습니다. 명성이나 위상 따위는 용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죠. 소문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니까요. 하지만 붉은 곰 용병단의 소문은 너무 빠릅니다. 등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용병단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속도죠."
"한마디로 작위적이다?"
"맞습니다. 용병이라는 전투 집단은 한쪽 권력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야 용병의 가치가 없어지기만 하죠. 장기 말이 될 바에는 귀족 가문의 병졸이 되는 게 나을 정도니까요. 어쨌든 붉은 곰 길드의 소문을 따라 올라가니 끝이 없었습니다."
"근원지가 어딘데?"
"귀족들의 소행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의 루트가 보여서 파 봤더니...."
"아카데미?"
잭슨이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의뢰와 완벽하게 해결되는 사건, 그리고 그 정도의 실력자가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질 가능성. 모든 게 아카데미의 조작이라고 판단됐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단서는 없고 모조리 심증뿐이었죠. 그래서 물밑 작업을 준비 중이었고요."
"그 물밑 작업이 용병계에 발을 들이는 거였나 보네?"
"맞습니다.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요."
"다른 용병 인맥은 없었나? 명색이 정보 길드면서."
조롱이 섞인 에단의 말에 잭슨이 고개를 저었다.
"용병처럼 입이 가벼운 자들을 신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거래 상대일 뿐이죠."
"큭큭, 그럼 나는 어떤 사람 같은데?"
"...모르겠군요. 대체 당신은 뭘 원하는 겁니까?"
잭슨이 진심을 담아 물었다.
다리를 꼰 에단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너는 말해도 몰라."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에단이 읊조리자, 잭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단은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원작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정보 길드도, 붉은 곰 용병단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걸 이용하기 위해서는.'
탁탁.
에단이 검지로 탁자를 두드렸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에단 블란테."
"에단...? 그 망나... 아니, 말썽쟁이 둘째 말입니까?"
잭슨의 중얼거림에 에단이 씨익 웃었다.
"걔가 나야."
그 순간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에단은 분명 돼지에 불퉁한 인상을...."
에단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던 잭슨이 미간을 좁혔다.
"...인상이 사납긴 하군요."
잭슨의 반응에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죠. 에단이라는 도련님이 무슨 바람인지 몰라도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고 치자고요. 그런데 고작 정보원 나부랭이를 붙잡은 이유가 뭡니까? 그것도 심증 하나만 가지고."
"아까 말했잖아. 정보 길드가 필요하다고."
"그 이유를 묻는 거잖습니까. 블란테 정도의 가문이 왜 정보 길드에 집착하죠? 그리고 정식 루트를 통해서도 아닌, 이렇게 정보원 하나를 붙잡아 두는 방식으로요."
'시간이 없거든.'
사실 이 대화도 생략하고 싶었다. 오늘 중에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히 시도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패를 보여 주지 않으면 의심을 살 테고, 협박만으로는 신용을 얻기는커녕 협상도 되지 않을 테다.
'이쯤이면 됐다.'
유순하고 온건한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면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유를 알려 줄 수는 있어."
에단의 대답에 잭슨의 표정이 돌변했다.
"하지만 공짜로 줄 수는 없지."
"...허?"
"이유를 발설하면 나한테도 위험이 따르거든. 너희가 책임질 녀석을 데려와야지."
에단이 히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가면 쓴 아가씨 있지? 걔한테 데려가 줘."
순간 잭슨의 표정이 살벌하게 바뀌었다. 잭슨의 신형이 순간 자취를 감췄다.
고개를 돌린 에단의 눈앞에 날붙이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에단은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비수를 피해 낸 뒤, 곧장 팔꿈치를 뒤쪽으로 꽂았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잭슨의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아까 좀 치더라고."
에단이 씨익 웃었다. 천진한 웃음, 마치 장난감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아가씨에 대해 알고 있지?"
"하하, 이 새끼. 아까부터 날로 먹으려고 드네? 미안한데 내가 좀 바쁘거든?"
에단이 한 걸음 다가갔다.
잭슨이 물러나는 척하며 달려들었다. 한 손에는 비수를 들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빨리 끝내자."
에단이 가벼운 스텝으로 사이드로 물러났다. 그러자 잭슨이 숨겨 둔 비수가 빛을 발했다.
퍼억!
그때 에단의 발이 잭슨의 손목을 그대로 가격했고, 그는 손에 쥔 비수를 놓쳤다.
빙그르.
에단의 몸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회전력이 더해진 에단의 뒤 차기가 잭슨의 복부에 꽂혔다.
퍼억―!
"크윽!"
잭슨이 신음을 흘리며 허공을 날았다. 잭슨의 눈은 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눈이 아니었다.
에단은 조급해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서 손을 뻗었다.
그 타이밍을 노리던 잭슨이 마주 손을 뻗었지만, 에단이 뻗은 손은 눈속임이었다.
후웅!
뒤에 숨겨 놨던 에단의 주먹이 반원을 그리며 잭슨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체중이 실린 러시안 훅에 잭슨의 목이 크게 꺾였다.
주먹을 얻어맞자 장막이 펼쳐진 것처럼 시야가 뚝― 하고 끊어졌다.
털썩, 잭슨의 신형이 무너졌다.
그 순간, 멀리서 곰 같은 체격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질긴 가죽의 주인이었다.
"남의 여관에서 꽤나 소란을 일으키는군요."
여관 주인이 풍기는 기백이 매서웠다.
용병 출신이라는 말답게 산전수전을 겪은 자의 살기였다.
에단은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손을 들었다.
"정당방위였습니다."
에단의 대처에 여관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거품을 물고 쓰러진 잭슨을 바라봤다.
"쯧쯧, 정보원이라는 놈이 이렇게 칠칠치 못해서야."
"이 녀석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크게 떠드는데 못 듣는 게 이상하지 않나?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귀는 잘 들립니다."
"하하, 그래 보이는군요."
확실히 잭슨은 안일하게 행동했다. 여관에 사람이 없어 보인다고 하여 꽤나 큰 목소리로 자신의 정보를 떠들어 댔으니.
"...그나저나 제가 묻고 싶군요. 정보 길드는 왜 건드는 거죠?"
여관 주인의 물음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단이 올린 손을 내렸다.
"그 대답은 왜 듣고 싶지?"
에단의 말이 평대로 바뀌었다.
"그 위상 높은 블란테 가문의 도련님께서 정보 길드에 신경을 쓰니, 의심을 할 수밖에. 비록 미천한 용병 출신이지만 거기에 친구가 있거든요."
예상 못 한 여관 주인의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 자신을 낮추는 것치고는 상당히 강하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풍겨 오는 기백.
자신을 낮춰서 말하고 있지만,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겸손한 태도치고는 숨기는 게 있어 보이는데?"
"나이 먹은 아줌마가 뭘 숨기겠어요.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저도 이제 지켜야 할 게 있어서 말이에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딸이 있었으니까.
그때 때마침 잭슨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뜨려는 전조였다. 잭슨은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직였다.
콰직!
그 순간, 에단의 발이 잭슨의 복부를 짓밟았다.
"큭!"
잭슨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에단이 쪼그려 앉아서 잭슨을 바라봤다.
"더 하려면 해도 되고."
"대체 목적이...."
"아까부터 왜 다들 그 소리지?"
에단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일어났다.
"나한테 큰 목적이 있어 보여?"
물론 목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발설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뢰배처럼 막무가내로 일관했다. 격조 없이, 사납게, 망나니처럼.
쓰러져 있는 잭슨의 배 위에 에단이 발을 얹었다.
"왜? 후환으로 협박하게?"
"...정보 길드를 우습게 보지 마라."
"하, 우습게 보는 건 너 아닌가?"
에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짜증이 치밀었다. 협상 따위는 역시나 귀찮았다.
"블란테가 우스워? 용병들이 가득한 이딴 영지? 오늘이라도 쓸어버릴 수 있어."
페르나니엄은 상인들과 용병들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다.
용병들이 바글거리는 탓에 웬만한 무력 집단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다.
용병들은 거칠고 사나운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블란테라면 얘기가 달랐다.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블란테와 견줄 만한 무력 집단은 찾기 힘들었다.
블란테 개인의 힘만으로도 이따위 영지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었다.
"너희의 정보? 자신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당장 나도 너희 우두머리를 알고 있는데?"
"...."
에단의 말은 반쯤은 과장이었다. 블란테의 무력이 엄청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에단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었다.
한 도시를 괴멸한다는 결정은 가주도 내리기 어려운 사안이다.
수많은 외압과 지탄을 받을 테고, 그로 인해 입게 될 손해도 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에단의 패기와 거친 언행이 설득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래도 의도는 알아야 합니다."
잭슨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흥분이 가라앉은 잭슨의 모습에 에단의 기세도 누그러졌다.
"그저 대화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목적은 없어. 해를 끼치지도 않을 거다. 맹세하지."
"...알겠습니다. 일단 발부터 치워 주시죠."
잭슨의 말에 에단이 발을 치웠다. 눈앞에 서 있는 여관 주인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제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여관 주인의 말에 잭슨이 그녀를 힐긋 바라봤다.
"...검은 도끼?"
"한참 전에 버린 이름입니다."
"허, 여기가... '질긴 가죽'이었군요."
둘만 아는 것 같은 얘기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할애해 들을 생각은 없었다.
'이름은 들어 본 거 같은데 가물가물하네. 뭐, 지금 궁금해할 건 아니지.'
"슬슬 가지?"
에단이 재촉하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잭슨이 여관 문을 향해 걸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에는 좀 조용히 있다가 가시죠."
"유의하죠."
진지해 보이는 둘의 대화를 에단이 똥 씹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잭슨이 여관 밖으로 나섰다.
"알고 있었습니까?"
"뭘."
"여관 주인에 대해 말입니다."
"아니."
"저 여자는 과거에 검은 도끼라는 아명으로...."
"야."
에단이 잭슨을 바라봤다.
"시끄러우니까, 길이나 안내해."
"...."
◈ [66화] 정보 길드 (3)
에단의 말에 잭슨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
"아니, 왜죠? 그녀는 전설적인 용병...."
"아, 좀."
에단이 눈을 부라리자, 잭슨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는 뭔 정보 길드라는 녀석이 말이 이렇게 많아.'
자고로 정보 길드라 하면 입이 무겁고, 작은 정보 하나라도 돈을 받고 파는 족속들 아니던가.
그런데 잭슨은 입이 싸도 너무 쌌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길은 미로 같았다.
골목의 구석으로 향한 잭슨은 숨겨진 맨홀을 열고 지하도로 향했다.
'...에휴, 진짜.'
예상은 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그녀를 만날 때 지하도를 거쳤으니.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악취가 진동했고 공기는 끈적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잭슨의 발은 거침이 없었다. 에단도 어렵지 않게 잭슨을 따라나섰다.
에단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인지할 수 있었다.
찰박찰박.
꽤나 먼 거리를 안내한 잭슨이 옆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천장을 두드렸다.
"흘리는 말을 주의해라."
잭슨의 말과 동시에 천장에서 사람 하나 지나갈 법한 통로가 생겨났다.
잭슨이 먼저 올라갔고, 그 뒤를 에단이 따라갔다.
통로 위로 올라가자 좁은 통로에 계단이 있었다. 잭슨은 말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단도 그 뒤를 따라 올랐다. 한참을 그렇게 오르자 검은 벽이 나타났다.
"귀를 막으시죠. 암호를 말해야 하니."
"괜찮아."
"괜찮지 않습니다. 여긴 암호가 없으면...."
"꼬리 없는 쥐. 눈 없는 까마귀."
"...!"
잭슨의 눈이 커졌다. 순간 막혀 있던 벽이 사라지고 동굴 같은 복도가 생겨났다.
"...대체 어떻게?"
"잘. 난 간다."
에단이 걷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와 긴 계단, 그리고 은은한 조명이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잭슨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다.
'아가씨에 대한 것도 모자라... 통로의 암호까지 알고 있다고?'
위험했다.
본래라면 외부인의 출입은 통제해야 한다. 그것도 에단처럼 뭘 할지 모르는 존재라면 더더욱.
하지만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잭슨의 발을 붙잡았다.
일전의 전투, 잭슨은 자신의 무력을 믿고 있었다.
정보 길드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실전에서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수 싸움에서 압도당했다. 가진 패를 드러내기도 전에 짓밟혔다.
실전이라면 반드시 죽었을 터.
그걸 생각하니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래,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
미심쩍은 것투성이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말은 에단이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부디 실수하지를 않길 바랍니다."
잭슨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내가 그렇게 경우가 없지는 않아."
"...."
그간 에단의 태도를 보았을 때 신용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에단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조명은 점차 어두워졌다.
'진짜 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보 길드로 가는 길을 왜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놨단 말인가?
계단을 모두 오르자, 문 하나가 나타났다. 에단이 무심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 * *
문을 열자 꽤나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동양풍이었다. 앞을 가리는 은근한 가림막과, 한복인지 기모노인지 알기 힘든 동양식 전통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에단이 할 말을 잃었다.
책으로 읽었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막상 마주하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서 오세요, 귀인이시여."
묘령의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은한 목소리였다.
"그만."
"저를 찾아오셨다는 말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만하라고."
― ...쟤는 왜 저러는 거냐?
이런 상황에 내성이 없기는 페온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여 소녀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귀...."
"데릴라."
"...."
여자가 갑자기 침묵했다.
"...데릴라가 뭔가요?"
"뭐긴 네 이름이잖아."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데릴라."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치기 시작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
"가면 쓴 여인으로 부르세요.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데릴라가 아닙니다."
"장난해? 언제 그걸 다 부르고 있어? 데릴라면 충분하지 않나?"
"당신...!"
그 순간 여자의 눈에서 살기가 쏘아졌다.
에단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면 쓴 여인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냥 메이라고 부르세요."
"그래, 뭐.... 정 원한다면야."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죠? 그것도 블란테의 유명 인사께서."
"오, 나를 알고 있나?"
"모르는 게 이상하죠. 버림받은 망나니에서 한순간에 경쟁자를 짓누르고 우뚝 선 강자가 되었으니 말이죠. 심지어 아카데미의 꽃도 꺾었다죠?"
"걔가 꽃인가?"
"그분도 유명 인사죠. 아카데미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예를 가지고 있고, 그만큼의 실력도 겸비한 분이니까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인데."
"그럴 리가요.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어두운 과거를 이겨 낸 분이니까요."
"어두운 과거는 뭐, 어쌔신 시절을 말하는 건가?"
"...당신은 대체 뭔가요? 보고를 받았을 때도 믿기 어려웠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뒤바뀔 수가 있는 거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자, 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말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주제를 바꾸겠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이죠? 블란테의 정보력이 그렇게나 뛰어났었나요?"
'그럴 리가.'
에단의 가진 지식은 모두 원작 소설의 힘이었다.
메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메이는 원작의 중요 인물 중 하나였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정보 길드의 수장이었다. 가녀린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저래 보여도 상당히 강하겠지.'
일단 메이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이를 걸고넘어지면 메이는 결코 지금처럼 곱게 대화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보를 원하는 건가?"
"후후, 확실히 쉽지 않군요. 역시 귀인...."
"그만하라고. 귀인이니 뭐니 개소리 지껄이면 네 이름을 동네방네 까발린다?"
빠득.
메이는 이를 갈았다.
"좋습니다.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 캐물을 만큼 양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 저한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죠?"
"강혁에 대해 알고 있나?"
"...강혁? 그게 누구죠?"
메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네.'
정보 길드의 수장도 강혁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강혁은 사라졌다.
그 탓에 세계를 구원할 용사 자리에 엑스트라 악역인 망나니가 서게 되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강혁만 있다면 옆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며 꿀을 빨면 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이 처리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무너질 판이었다.
에단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휴고, 가토, 네이드, 빈센트, 첸....
새로운 인연들의 목숨까지 모두 달려 있었다.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세계수는 지금 상태가 어떻지?"
가림막 너머로 메이의 몸이 움찔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반응을 보니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 정도."
"...그렇다면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에단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모르겠어?"
주인공이 없다는 건 중대한 사항이었다.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세계수.'
주인공이 초반에 해결해야 할 이벤트였다.
'그게 남아 있다면.'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있을 뿐.'
하지만 그렇다면.
'도서관에서의 기연은 무엇이지?'
룬어의 습득.
그리고 거기 써져 있던 내용.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기는커녕, 부정적인 내용만 적혀 있었다.
뭐가 바뀐 것일까? 주인공은 또 어디 간 거고?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보다 행동을 해야 할 때. 붉은 곰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에단이었다.
운이 좋게도 잭슨을 발견했고, 메이와 대면할 기회가 생겼다.
'정보 길드의 수장과 대면할 기회는 쉽지 않지.'
메이는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였다. 원작 주인공도 갖은 우연이 겹쳐 그녀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것도 블란테의 힘이겠지.'
그저 본신의 힘을 믿고 설치는 애송이였다면 메이는 에단을 만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블란테.'
현시점, 대륙에서 수위에 오른 무력 집단.
그게 블란테가 가진 이름의 힘이었다.
'그 머저리 새끼들은.'
에단의 형제들은 블란테의 힘에 취해 상대를 짓누를 생각만 할 뿐, 이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할지가 관건이었다.
'상대는 나를 건들지 못해.'
정보 길드.
정보 거래가 그들의 주 수입원이긴 했지만, 하는 일이 일인 만큼 무력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여기서 안면을 트고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족해.'
그러기에는 아쉬웠다. 에단은 안전한 이득만 취하는 일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에단이 의자에 걸터앉은 채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지금 무엇을 하는 거죠?"
메이는 권위를 중요시한다. 에단은 그 권위와 마주 서고 있었다.
"검은 웅덩이, 요정의 속삭임, 지하의 탑."
"...!"
앉아 있던 메이가 몸을 들썩이며 일어났다.
에단이 거론한 것들은 모두 정보 길드의 핵심 지부였다.
"...당신, 대체 뭐야?"
"글쎄, 뭘까?"
에단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자신은 있다. 여기서 틀어져도 상대의 목줄을 붙잡을 자신이.
'놓칠 생각은 없지.'
얕보이지 않는 것.
그건 현대에서나 이곳에서나 똑같이 통용되는 진리였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군요. 제 앞에서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도 오랜만이구요."
"적어도 가면과 장막 사이에서 정체를 감추는 너보단 내가 낫지 않을까 싶은데."
에단의 말에 메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건...."
"왜? 또 변명을 늘어놓고 싶어서?"
"...어쩔 수 없군요."
그녀가 가림막을 치우고 천천히 여우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벗자 희고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외모, 하지만 눈빛과 표정만큼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 같았다.
에단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메이가 얼굴을 드러내는 건 주인공이 꽤나 고생을 한 뒤에야 나오는 에피소드다.
'그런데 이제 내가 고생을 해야 해서 문제지.'
그 생각에 순간 짜증이 났다.
세계수과 관련된 일은 벌써 진행이 꽤나 됐을 터.
메이가 얼굴을 드러낸다는 건 상대를 완전히 신용하고, 상대에 감격했다는 일종의 증명.
정보 길드의 간부 중에도 메이의 본얼굴을 본 자들은 드물었다.
메이는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의 여유로운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숨기던 본명, 그리고 정보 길드의 주요 거점. 얼굴을 드러냈음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는 표정.
그렇기에 에단의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숨겨 둔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기는군."
에단이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죠?"
메이의 물음은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과거의 행보부터, 변화, 그리고 앞으로의 목적.
당연히 에단은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이 없었고, 메이도 대답을 원해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서 천천히 다가갔다.
메이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속셈이죠? 더 다가오지 마세요."
메이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에단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고 하지...!"
메이가 대응을 하려는 그 순간.
에단이 말없이 손을 뻗었다.
"협력하자고. 후회는 없을 테니까."
에단이 미소 지었다.
◈ [67화] 정보 길드 (4)
"그 얘기가 사실인가요?"
메이의 얼굴에서 의심의 기색이 묻어났다.
에단이 꺼낸 말 자체가 쉽게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왜? 너희도 그게 의심돼서 조사하던 것 아니었나?"
에단이 말한 것처럼 갑자기 등장한 세력인 아카데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블란테와 세계수, 용병들에게까지 마수를 뻗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신 말씀은...."
정도가 과했다. 그 사실에는 에단도 동감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녀석한테 막혔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에단은 그저 메이가 미리 대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말에 대한 근거는...?"
"당연히 없지."
에단의 당당한 태도에 메이가 미간을 좁혔다.
"아까 내가 말한 것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
메이가 침묵했다. 확실히 에단이 말한 것들은 정보 길드에서도 통제되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단의 말을 모두 신용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치부할 수도 없어.'
메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너희도 성의를 보일 시간이군."
"한 가지만 더 묻죠."
"흠.... 뭐가 더 궁금하지?"
"잭슨을 만나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 모두 계획이었습니까?"
메이의 물음에 에단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그걸 다 계산해서 움직였으면 천재지.
에단의 대답에 메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목적을 이룬 에단이 몸을 일으키자, 메이가 물었다.
"약속은... 지킬 건가요?"
"난 거짓말은 안 해."
대답을 끝으로 에단이 몸을 돌렸다. 메이가 쓰게 웃었다. 그녀답지 않게 협상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말려들었다. 정보의 우위는 물론이고, 상대에게 저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신감까지.
모든 부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입맛이 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들었다. 에단은 약속했다.
'받고 싶은 것도, 해 줄 것도 딱히 없지만.... 한 번, 네가 원할 때 도와주지.'
명확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조건이었다.
평소 메이의 성격대로라면 결코 수락하지 않을 조항이었지만, 메이는 어째서인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에단에 대해... 전면 수정할 필요성이 있겠어.'
에단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사람이 너무 급격하게 바뀌어 등급을 조정 중이었지만 잘못 생각했다.
에단에 대한 정보 등급은 격상해야 할 것 같았다. 메이가 보기에 에단은 대륙에 큰 파장을 일으킬 사람이었다.
'저런 자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간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아카데미 교수가 블란테에 방문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방금 대화에서 에단에게 직접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 막무가내의 성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카데미....'
의심스러운 게 많은 집단이다. 그렇기에 최근 정보 길드도 아카데미라는 집단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블란테라....'
블란테는 거룡이었다.
가진 힘이 강할수록 주변을 살피지 않는 우를 저지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에단은 달랐다. 아카데미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단의 존재가 더욱 무서웠다.
'척을 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상대가 블란테라면 더더욱.
* * *
입구의 문을 닫은 잭슨은 근처 골목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블란테라는 이름에 짓눌려 버렸다.
아니, 에단이라는 존재에게 기가 죽었다. 더 정확히는, 압도되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에단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여 주는 태도와 확신이 두려웠다. 그런 사람을 메이와 만나게 한 건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이 치밀었다.
물론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나름의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내고 만 것 같았다.
"제길...."
잭슨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리를 배회할 때,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섰다.
정보 길드의 간부로, 잭슨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후던, 무슨 볼일이지?"
"무슨 볼일? 지금 그게 네놈 입에서 나올 말이냐?"
"...."
잭슨이 입을 다물자, 후던은 잭슨의 멱살을 붙잡았다. 분노한 그의 얼굴은 사나웠다.
"따라와."
후던이 쓰레기를 내던지듯 잭슨을 밀어냈다. 잭슨은 말없이 후던을 따라나섰다.
'그것 때문인가?'
짐작이 가는 바는 하나였다. 에단, 그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입이 썼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후던이 잭슨의 몸을 밀치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잭슨, 정신이 나갔나?!"
"...어쩔 수 없었어. 상대는 블란테였다."
잭슨은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란테는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후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 역시 잭슨에 맞춰 목소리를 줄였다.
"블란테? 그 잘난 블란테가 여기까지 행차했다고? 그 증거는?"
"...블란테가 아니면 보여 줄 수 없는 무위였다."
잭슨은 대답을 하고도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빈약한 근거였다.
후던의 주먹이 잭슨의 얼굴을 스치며 벽에 꽂혔다.
"만일 아가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그날로 죽는다."
"...."
후던의 경고에 잭슨은 차마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잭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제를 모르고 나댄 그 새끼는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뭐라고? 잠깐 그는 블란테의 적...."
"닥쳐. 나에게 간섭할 권리 따윈 네게 없으니까."
재차 에단의 정체를 밝히려던 잭슨이었지만, 후던이 말을 끊는 바람에 말을 채 내뱉지 못했다.
아니, 말한다 해도 후던은 에단을 공격할 것이 빤했다.
그는 잭슨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정녕 블란테의 원한을 살 셈이냐?"
"하, 블란테란 개소리는 차치하고. 원한?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걸 따졌지? 목숨을 내놓고 시작한 일 아니던가? 나는 내 목숨보다 아가씨가 더 중요해."
후던이 씹어뱉듯 읊조렸다.
잭슨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잭슨이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기척이 다수 느껴졌다.
'숫자가....'
자그마치 일곱.
하나같이 실력이 검증된 정보원들이었다.
"감히 우리와 아가씨를 얕잡아 보고 능멸한 그 새끼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후던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에단이 밖으로 나섰다.
"신기하군."
밖에 나온 에단이 감탄 섞인 휘파람을 불었다. 들어간 입구와 같은 방향으로 나왔을 뿐인데 전혀 다른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평범한 건물이었고, 문밖은 대로변이었다.
시끌벅적하던 소리도 없어졌다.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만취한 취객밖에 없었다.
― 같이 있던 녀석은 꽤나 강하더구나.
'그래 보이더라고요.'
메이와 만난 장소.
그곳에는 메이 외에도 또 다른 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일종의 안전장치겠지.'
정보 길드의 수장인 만큼, 안전장치 하나 없이 외부인과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번에도 책을 보고 알았다고 할 게냐?
페온의 추궁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글쎄요. 꿈에서 봤습니다."
― 쯧, 말을 말자.
에단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거닐던 에단이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 찝찝함이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 감이 좋구나. 숫자가 꽤 많아. 하나하나의 수준을 따지자면 충분히 상대할 만하지만.... 위험하겠구나.
에단은 페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수의 습격.
실력이 어떤가를 떠나, 합을 맞춘 무리는 위험했다.
단순한 배가 아닌, 몇 곱절 이상으로 상대하기 껄끄러웠으니.
에단이 인기척을 느끼고 경계를 하기 시작하자,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존나 없어 보이네."
에단이 피식 웃자, 가장 앞에 선 이가 발끈했는지 몸을 움찔했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너희들 너무 식상한 거 아니냐?"
"...자신감이 넘치는군. 실력도 그만큼 뛰어난지 확인해 보마!"
남자가 에단에게 달려들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습격자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좋아, 너는 기억했어.'
에단이 몸을 틀자, 그가 반격하리라 생각한 후던이 긴장한 채 대비했다.
하지만 에단은 곧장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예상 못 한 에단의 반응에, 후던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을 간다고?"
"그럼 병신같이 싸워 주리? 쫓아와 보든가!"
에단이 중지를 들어 올리며 혀를 내밀었다. 후던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쫓아!"
은밀한 습격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후던과 그 일행들이 에단을 쫓기 시작했다.
'흠.... 어찌한다.'
에단이 달리면서 머리를 굴렸다. 성가신 상황임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 자리에서 습격당하길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에단은 전투를 즐겼지만, 무모함까지 즐기지는 않았다.
'룬어를 사용하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실전에서 사용해 보기는커녕 연습도 해 본 적 없는 룬어는 너무 도박 수였다.
'일단 좀 낚아 볼까?'
도망을 가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단이 자신 있는 것은 격투만이 아니었다.
타다다다닷!
에단이 발을 움직이자, 따가운 바람이 그의 볼을 스쳤다. 주위 사물이 빠르게 지나갔다.
에단의 속도는 가히 경이로웠다. 웨어울프의 피가 섞인 휴고에게도 밀리지 않는 신체 능력을 지닌 에단이었다.
'기초 체력은 중요하지.'
에단이 호흡에 집중했다.
허벅지에 혈류가 몰리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까지 이용하자, 에단의 스피드는 어지간한 명마의 수준을 초월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호흡은 고르게 유지되었다.
에단의 심장은 강철과도 같았다. 매일같이 행한 고강도 트레이닝은 에단의 신체를 강철로 만들어 냈다.
"미친, 무슨 속도가!"
쫓아오던 후던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마나를 사용했음에도 에단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은밀함과 민첩함이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에단은 그 궤를 달리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후던이 이를 악물고 쫓자, 에단은 속도를 확 줄였다.
"병신들. 평소에 놀았냐?"
에단이 중지를 다시 치켜들자, 후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는지, 후던이 괴성을 토해 냈다.
"크아아아! 죽인다!"
'좋아 입질은 충분하고.'
이제 유인만 하면 되는 일. 에단은 도심에서 떨어진 여관을 향해 달렸다.
* * *
대련을 끝낸 가토와 휴고는 다비와 함께 도시를 구경했다.
"...슬슬 돌아갈까?"
"그래, 좀 가자."
휴고가 슬그머니 꺼낸 말에 가토가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변 노점상은 모두 다 경험한 것 같았다.
상인들과 용병들의 도시답게 밤에도 활기를 띠고 있었고, 그만큼 볼거리들도 풍부했으며 먹을거리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 과했다.
"힝, 벌써?"
다비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성장기인 다비의 위장은 휴고와 가토에 뒤지지 않았다.
"이제 문도 다 닫았잖아. 다음에 또 오자."
"정말요?"
다비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지만, 휴고는 다비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장 날이 밝으면 일행은 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휴고가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다비가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가토가 대신 대답했다.
"...다음에 꼭 다시 오자."
그제야 다비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가토도 쓰게 웃으며 다비와 휴고를 바라봤다.
평생 검만을 수련한 가토이기에 아이의 말을 모질게 끊기가 어려웠다.
"이만 돌아가자."
"응, 그래."
가토의 말에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도 슬슬 돌아오셨겠지?"
"그러지 않을까?"
"하하, 또 무슨 사건을 벌이신 건 아닌가 몰라."
"설마.... 잠깐 일을 보고 온다고 하셨으니 별일 없을 거야."
"...."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침묵했다.
셋은 말없이 걸었다. 어느덧 여관 근처까지 도착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저거 설마...?"
"이런 제기랄."
빠르게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에 가토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토가 검을 붙잡았다. 휴고는 다비를 보호하며 한 발자국 앞에 섰다.
"타이밍 좋고."
달리는 에단이 말했다.
◈ [68화] 정보 길드 (5)
정보 길드의 간부들이 에단을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에단은 숨조차 가빠 보이지 않았다.
에단의 체력은 규격 외였고, 아무리 간부들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에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온 에단이, 숨조차 고르지 않고 휴고와 가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은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가라!"
에단의 외침.
당혹감을 떨치지 못한 가토가 우물쭈물하다가 앞으로 뛰어들었고, 휴고는 다비를 보호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흥, 아직 젖도 못 뗀 애송이가!"
가토의 얼굴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했다.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간부들 입장에서는 그가 같잖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새 가토는 평정을 되찾았다. 휴고와의 대련에서 패배한 뒤로, 가토는 평정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간부 하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가토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은 매서웠다.
하지만 가토는 얼마 전까지 첸과 수련했다.
첸이 가볍게 휘두르던 목검이 지금 눈앞에서 내리꽂히는 검보다 수배는 위협적이고 매서웠다.
가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검이 출수됐다.
서걱―
간부의 검이 그대로 양단되었다. 하지만 간부의 득의양양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역량조차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검을 양단한 가토의 몸이 빙그르 회전하며 그대로 간부의 복부를 가격했다.
팡!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간부의 몸이 그대로 비행했다.
다른 간부들이 순간 몸을 멈칫했다. 후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본능이 경고하는 듯했다.
새로 나타난 애송이는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라고.
"다들 저 새끼 먼저...."
"...쯧쯧."
후던을 바라보던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가토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눈빛의 의미를 이해 못 한 후던이 고개를 돌렸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살기였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너 뭐하냐?"
"...!"
후던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빼려고 했으나, 에단의 손아귀가 먼저였다.
후던의 멱살을 잡은 에단의 얼굴이 악귀처럼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에단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후던은 저항해 보려 했지만, 무게 중심에 대한 이해도는 일반인 수준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공간과 무게 중심은 에단의 통제하에 있었다. 심지어 신체 능력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에단이 우위인 상태.
후던의 저항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에단은 발을 후던의 다리 사이로 넣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후던은 공중에 뜨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부웅―
몸이 공중에 떠오른 그 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바닥에 꽂히는 건 찰나였다.
쾅!
완벽한 업어치기에 후던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콰직!
이어 에단이 무릎을 후던의 가슴팍에 얹자, 후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모습에 다른 간부들이 급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을 가토가 아니었다.
곧장 가토가 적들을 향해 뛰어들며 베테랑 간부들과 교전을 시작했다. 가토는 능수능란하게 협공에 대처했다.
정보 길드의 간부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애송이로만 보였던 가토의 움직임이 너무 노련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휴고와 도련님을 상대로 싸워 봤어?'
가토는 울분을 토해 내듯 검을 휘둘렀다.
속임 동작, 변칙.
에단은 상대의 심리를 읽으며 가지고 놀 줄 아는 베테랑 선수였고, 휴고는 짐승 같은 직감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괴물이었다.
두 괴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토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훌륭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가토의 성장세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가토의 검이 빛을 발할 때마다 정보 길드 간부들은 하나씩 제압당했다.
그러는 사이 에단은 신음을 내뱉고 있는 후던을 흘겨봤다.
에단의 싸늘한 표정에 후던은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으리란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너 그래도 한가락 하는 애지? 그렇다면 후환을 남겨 두면 안 되지."
그 말과 동시에 에단이 후던의 발목을 그대로 짓밟았다.
콰직!
"크아아악!"
후던이 비명을 내질렀다. 에단은 무심하게 다리를 한 번 더 들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발도 그대로 지르밟았다.
콰직!
"끄, 끄으으윽!"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 이 개자식들, 이러고도...!"
"그 대사들은 질리지도 않냐?"
에단이 터덜거리며 다른 간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수명이 다해 가는 가로등이 깜빡이며 에단을 비췄다.
에단의 표정에서 불안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희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지?"
"우리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간부 하나가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에단의 손이 더 빨랐다.
쫘악―!
에단의 손바닥이 간부의 뺨을 후려쳤다. 짜릿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밤중에 시끄럽게."
"커헉."
남자의 입에서 뽑힌 이와 함께 진득한 핏물이 흘러나왔다.
"...보지 마."
휴고가 다비의 눈을 가렸다. 에단이 저 상태에 돌입한 이상, 휴고나 가토는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이게 잘한 짓 같지?"
에단이 슬금슬금 몸을 빼고 있는 다른 간부에게 다가갔다. 에단의 손이 간부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런데 왜 그 생각은 못 하냐? 남을 죽이려 들면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쫘악―!
에단의 손찌검에 간부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우, 우리는...."
"너희는 정보 길드 뭐시기라고? 뒤에 귀족들도 끼고 있고? 뭐, 용병들도 우릴 쫓는다고?"
"그래.... 이제 시작일 뿐...."
"야."
에단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너희들, 그거 벗어."
휴고와 가토가 머뭇거리자, 에단이 눈을 부라렸다. 둘의 행동이 민첩해졌다.
두 사람이 로브를 벗자 가려져 있던 정복이 드러났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흑색 정복, 그리고 가슴팍에 수놓아진 검은 사자.
그 누구도 감히 사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대륙의 포식자.
"브, 블란테?"
다른 간부들은 잭슨과 후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후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왜? 이제야 상황이 파악돼?"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용병들? 귀족들? 그래, 뒷배가 있다면 죄다 불러 봐."
"이, 이럴 수는...."
"그리고 잘 숨어야겠다. 블란테의 적통을 협박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저, 적통이라고?"
한편 뒤쪽에서 에단의 말을 듣고 있던 후던의 표정은 아연해졌다.
처음 잭슨이 블란테라는 이름을 언급했을 때, 후던은 믿지 않았다.
블란테가 누구던가.
대륙을 호령하는 고고한 사자. 사나운 몬스터를 막아서는 살아 있는 방벽.
그것이 블란테였다. 그런 블란테가 고작 정보 길드에 관심을 가지다니.
겁을 상실한 어떤 간 큰 녀석이 블란테를 사칭했다고 생각해, 다른 간부들에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만에 하나, 사칭범이 아니고 진짜 블란테의 끄나풀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상대를 제압하고, 증거를 인멸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정보 길드의 간부들은 산전수전 모두 겪은 베테랑이었다.
전투에 있어서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증거 인멸?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지부를 옮기고 잠시 몸을 숨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애새끼들한테.
그들의 자존심이 산산이 조각났다.
처음 공중에 붕 떠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질 때만 해도, 기회를 엿보려 했다. 무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아직 실전 경험은 부족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판이었다.
두 다리를 산산이 부숴 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말의 기회도 노릴 수 없게끔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블란테의 적통이라니.'
에단의 눈빛.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며, 후던은 깊이 후회했다.
'잘못 건드렸다.'
이런 눈빛을 한 자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
음지에 숨어 있던 기억을 잊은 채 자만해 버렸다.
힘을 과신하는 순간, 이런 날이 오기 마련이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후던은 자신의 목숨으로 이 일을 끝내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꽉 감았다. 에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후던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너, 지금 뭐 하냐?"
"...!"
후던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렸다.
에단이 입꼬리를 비틀며 후던의 손목을 붙잡았다. 후던이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에단의 근력은 저항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게 후던의 손목을 꺾는 행위는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수월했다.
기무라 락? 키 락?
기술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비틀면 된다.
콰드득.
들려서는 안 될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손목의 뼈가 손쉽게 조각났다.
"왜? 네 목숨 하나로 끝낼 생각이었어? 네 목숨이 그렇게 가치가 높나?"
소름 돋는 목소리. 에단은 웃으면서 협박했다.
그때 멀리서 한 인영이 다가왔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이 가로등 빛과 달빛에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에단이 잭슨에게 인사했다.
"...그쯤 하면 안 되겠습니까."
"어, 안 돼."
에단의 단호한 대답에 잭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곤란해집니다."
"곤란하게 해 봐."
에단의 태도는 삐딱했다.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정보 길드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에단이 굳은 표정의 잭슨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뭐라고? 적으로 돌려?"
"정보 길드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게...."
몸을 일으킨 에단이 후던의 반대편 팔꿈치를 밟았다.
콰직!
"끄아아악!"
사지가 모두 박살 난 후던이 몸을 꿈틀거렸다.
"허리도 쓰기 싫어?"
에단이 조용히 읊조리자, 후던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후던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그는 이제야 에단이 어떤 인물인지 깨달았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와 가토를 바라봤다.
"경험도 있겠다. 할 수 있지?"
에단이 턱짓했다.
"전부 묶어."
두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부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가토와 휴고가 나선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단이었으면 제압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
에단은 천천히 잭슨에게 다가갔다.
굳이 화를 숨기지 않았다. 분노한 감정에 따라, 몸에서 자연스럽게 피어가 흘러나왔다.
― 무서운 녀석.
고작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했을 뿐인데 이 정도였다.
에단은 여기서 멈출 녀석이 아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페온은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는 어디까지 나아가게 될지.
― 이 녀석이라면....
자신의 목표를 대신 이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페온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에단은 잭슨의 앞에 도착했다.
에단의 검은 동공이 잭슨의 갈색 동공을 응시했다.
잭슨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저도 블란테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그래?"
"하지만 여기서 굴복하면 어차피 무너집니다."
"그래, 뭐 납득은 되네. 그런데 이해도 해 줘야 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잭슨이 침을 삼켰다.
더 이상 뒤가 없었다. 양지와 음지 사이, 중간 지점에서 살아가는 게 그들이었다.
한 번 실패해, 얕잡혀 보이면 끝장이었다.
잭슨이 주위를 둘러봤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없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는 용병과 상인의 도시. 그 누구보다 빠르게 소문이 퍼지는 곳이었다.
여기서 굴복할 수 없었다.
"미리 조치를...."
쾅!
큰 굉음이 일어났다.
◈ [69화] 상대를 잘못 골랐어
쾅!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잭슨의 볼이 꿈틀거렸다.
'드디어 시작인가.'
잭슨은 언뜻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자였지만, 그 또한 정보 길드의 간부였다.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에단.
만난 지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적으로 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어쩔 수 없어.'
그러나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후던이 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했다. 잠깐이지만 자신이 봐 온 바로, 에단은 결코 곱게 넘어가지 않을 인물이었다.
'블란테의 압박이 들어오면 우리는 끝이야.'
그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잭슨은 미리 움직였다.
검은 도끼.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설적인 용병으로 회자되는 그녀에게 의뢰했다. 당연히 그녀는 거절했다. 에단이 블란테 가문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도 건들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과거가 있었고, 잃을 게 있었다.
먼지구름이 일어난 장소는 그녀의 여관, 질긴 가죽이었다.
"여기까지 합시다. 일행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몰라도 돼. 그런데 그것도 알고 있었어? 우리 일행 중에 노인네가 하나 있거든."
"...무슨 소리죠?"
쾅콰과과광!
먼지구름 뒤에서 살벌한 금속음이 이어졌다.
콰직!
슈우우우웅!
도끼를 짊어 든 거구가 튀어나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먼지 사이로 흰머리의 남성이 장갑을 매만지며 걸어 나왔다.
"아직 노인네 취급은 이릅니다, 도련님."
"하여튼 귀는 밝아요."
"...!"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네이드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평온하지 않았다.
잔잔한 분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
"휴식을 방해받아서 조금 불쾌하군요."
"나도 안 쉬고 있는데 쉬려고 그런 거야?"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보군요."
"헨리는 어디 있어?"
"아직 안에 있습니다."
에단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챙겨 와."
고개를 끄덕인 휴고와 가토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에단이 잭슨을 바라봤다.
"선을 넘었네."
"당신들은 대체...."
에단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자신을 건드린 것으로 모자라 일행에까지 손을 뻗었다.
에단이 약했다면, 네이드가 없었다면....
낭패를 본 쪽은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여기서 목숨을 잃었겠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이드."
"네, 도련님."
"제압할 수 있겠어? 전설적인 용병이라던데."
"그래 봤자 용병 아니겠습니까."
에단이 뒤를 바라봤다. 다비가 몸을 떨고 있었다.
입이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애는 죄가 없지."
에단이 다비에게 다가갔다.
"손 좀 줄래?"
에단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하자, 다비가 오들오들 몸을 떨면서 한 손을 내밀었다.
"이거 쥐고 있어."
에단이 목걸이를 벗어서 건넸다. 세계수의 목걸이다.
"지켜라."
정해진 시동어는 없다. 에단의 의지가 곧 시동어다.
지이잉.
지금껏 쌓여 온 마나가 다비의 주위에 펼쳐졌다.
"미안하게 됐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 무릎을 털었다.
"애는 죄가 없지만... 어른은 그러면 안 되지."
에단이 전방을 바라봤다.
몸이 묶인 간부들, 사지가 부서져서 미세하게 몸을 떠는 후던.
그리고 비장의 수가 수포로 돌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잭슨.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 벽에 처박혔던 거대한 그림자가 멀쩡히 걸어왔다.
거구의 여자.
그 덩치는 단순한 살덩이가 아니었다. 투박하고 거대한 양손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오는 여관 주인.
"제압할 수 있다고 했지?"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래, 죽이지는 마라."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정이 많으시군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네이드가 침묵하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제압이나 해."
여관 주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꽤나 나이를 먹었군요.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이야."
"세월이 야속한 건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네이드도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서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뭐죠?"
"통성명을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네이드의 말에 여관 주인이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 맞는 말이죠. 우리의 시대는 이미 끝났으니. 그리고 보아하니... 다비에게 해를 가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요."
"그쪽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불쾌하군요. 먼저 손을 뻗은 건 그쪽 아닙니까?"
"...할 말이 없군요."
여관 주인이 투박한 도끼를 뻗었다. 도끼의 끝이 네이드에게로 향했다.
그걸 본 네이드도 허리춤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스산했다.
― 결과는 정해져 있군.
네이드는 대륙에서 수위에 드는 강자다.
검은 도끼.
그녀 역시, 한때 이름을 떨쳤던 용병으로 원작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하지만 네이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
네이드는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담근 강자다.
비록 첸과 빈센트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순 있지만, 여기서 용병 따위에게 패배할 위치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날 터.
에단은 이제 다른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왜? 더 부를 애들 있어?"
"...여기는 블란테의 영지가 아닙니다."
"반대로 말하면, 블란테의 구역이 아닌 곳에서 고작 우리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는데."
에단이 잭슨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가문에 돌아가면 어떻게 하려고?"
블란테는 은원을 잊지 않는다. 은원을 행하는 데 있어 비난과 손가락질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그게 블란테의 방식이었다.
'제기랄.'
잭슨이 고개를 숙였다.
판단을 잘못했다. 에단은 적이 되지 않는다면 위험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 한번 적대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상대보다 위험하고 흉포했다.
오판했다.
에단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음에도 방심해 버렸다.
에단에게 압도된 것은 사실이지만, 에단은 아직 어렸다.
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이건 모두 정보 길드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져온 참상이었다.
'이제 끝이다.'
돌이킬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소란이 커져 용병들이 개입하고, 정보 길드의 인원들이 더해지면 목숨은 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뒤는?
정보 길드의 연줄은 거미줄처럼 광범위했다.
귀족, 상인, 용병, 어쌔신.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치부는 있기 마련이고,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자는 없다.
정보 길드는 그 '비밀 정보'를 자기의 무기로 삼았다.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상대의 목을 노릴 비수로써.
하여 정보 길드를 비호하는 세력은 다양했다.
하지만 정보 길드의 적이 '블란테'라도, 계속 비호할 수 있을까?
블란테는 원한을 잊지 않고,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불똥이 튀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쭙잖게 옹호하려 들었다가 목이 뜯기는 건 자신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 텐데, 누가 감히 블란테를 막아선다는 말인가.
'여기서 위험의 씨앗을 제거하는 게 마지막 희망이었어.'
이 이상 어떠한 변명을 늘어놓은들 궁색하기만 했다.
잭슨의 체념하는 듯한 표정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단은 잭슨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콰직.
"왜 저 녀석이나 너나 멋대로 체념하는 거지? 너희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나?"
저따위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힘이 약했다면.
가진 게 없었더라면.
싸늘한 주검이 되는 것은 에단 자신과 일행이었을 터.
먼저 선을 넘은 쪽은 이들임에도 마지막 태도는 저따위라니.
그 점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빨리 끝내."
에단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네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스.
네이드 주위에 흐르는 마나가 농밀해졌다.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음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네이드가 마치 흩어지는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보이긴 하나 잡을 수 없는 그림자처럼.
"하앗!"
거대한 도끼가 네이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흉악한 기세였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하지만 네이드는 연기가 흩어지듯 검은 도끼의 앞에 다가섰다.
손에 든 작은 단검.
검은 도끼는 네이드가 손을 쓰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새 단검이 검은 도끼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검은 도끼의 몸이 움찔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였으면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평온하고 따스한 목소리.
그렇기에 더 오금이 저렸다.
검은 도끼가 무기를 손에서 놓고는 무릎을 꿇었다.
"...괴물이로군."
"평범한 인간입니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다비는 입을 틀어막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휴고와 가토가 헨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헨리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저기에 집어넣어 놔."
에단이 손짓하자, 보호막이 잠시 해제되었다.
헨리가 다비 곁에 들어서자, 에단이 재차 손짓했다.
지잉―
그러자 다시 보호막이 빛을 발했다.
― ...정말이지 좋은 기물을 얻었군.
'그럴 수밖에. 주인공의 사기템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에단은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잭슨이 몸을 바동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휴고가 떨리는 눈으로 가토를 바라봤다.
"가토...."
"왜?"
"이래도 되는 걸까?"
가토가 차가운 눈으로 휴고를 노려봤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도련님의 검이야. 블란테의 기사라고. 도련님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도련님을 지켜야 해."
"...."
"상황 파악이 안 돼? 실력이 약했으면 오늘 죽은 건 우리야. 기억해. 마구간에서 말보다 못한 너의 삶을 구해 준 건 도련님이야. 설마... 사사로운 정의감과 정에 휘둘리는 건 아니겠지?"
"...미안."
가토가 눈을 흘겼다.
"만약 네가 머뭇거리면 내가 너를 대적할 거야."
가토가 휴고의 왼쪽 가슴팍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붙잡았다.
"명심해. 그 문양은 가볍지 않으니까."
"...알겠어."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휴고가 힐끗 다비를 바라봤다.
안타까운 감정은 여전했지만, 이제 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토의 말은 사실이었다.
옳고 그름보다 에단의 명령이 우선이었고, 힘이 없었다면 죽는 것은 일행이었다.
약육강식.
그게 블란테의 방식이었고, 세계의 진리였다.
에단이 잭슨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또다시 누군가 나타나고 있었다.
"똑같은 등장이군."
네이드가 슬며시 에단의 곁에 붙었다.
"도련님."
"그래, 얘네 상대로는 방심하면 안 되지."
정보 길드의 수장.
그리고 그를 따르는 그림자들.
쟤네가 진짜였다.
뚜뚝.
에단은 자신의 목을 비틀었다.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쾅!
에단의 발이 잭슨의 배에 꽂히자, 그는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벽에 박힌 잭슨의 고개가 뚝 하고 떨어졌다.
"이제 협상을 시작해 볼까?"
당연히 갑은 자신이었다.
◈ [70화] 협상 (1)
"...제압 가능할까요?"
메이가 정면을 향해 걸어 나가면서 말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메이가 눈을 감았다.
"그 정도인가요?"
"옆에 있는 중년 남성이 위험합니다. 만일 교전이 벌어지면... 아가씨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블란테라지만 대체 저 정도의 사람을 어디에서...."
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까마귀.
정보 길드의 수장인 자신을 지키는 수호대.
무력으로는 그 어떤 집단에게도 꿀리지 않고, 난전에서는 그 누구보다 위협적인 자들.
냉정한 판단력과 뛰어난 분석 능력을 가진 까마귀들이 승산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희박한 것이었다.
눈앞의 남자.
'에단 블란테.'
블란테 가문의 둘째이자, 골칫덩이인 망나니.
'완전히 틀려먹은 정보군.'
망나니라는 점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거침없이 정보 길드를 들이박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단순한 망나니였다면 저런 세력과 무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권력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고 있어.'
뒷배만이 아니다. 이렇게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에단 본인의 무력일 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 일은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썩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에단과 얘기가 잘 끝난 상태였다.
한데 수하를 컨트롤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갔다.
그러니 책임 소재는 자신에게 있었다.
'대가를 치러야지.'
하지만 저 어린 사자에게 어떤 대가를 제시해야 한단 말인가.
처음엔 최후의 수단으로 교전도 생각했다. 에단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블란테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자신과 까마귀들로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승산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에단의 곁에 있는 저 중년 때문에.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위험한 사내였다.
싸우게 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메이는 수없이 많은 괴물을 만나 왔지만, 기가 죽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괴물이라고 한들 한낱 사람이었고, 그녀는 사람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모르겠어.'
검은 단색의 정복을 입은 노신사.
얼핏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외관이었지만, 메이의 본능은 다급하게 경종을 치고 있었다.
문제는 저 노신사만이 아니었다.
에단, 단순한 망나니인 줄 알았지만 잘못 생각했다.
막무가내인 듯하면서 냉정했다.
욕심은 많아 보였지만, 욕심을 뒷받침하는 힘과 권력을 쥐고 있었다.
'앞으로 어디까지 커질지.'
예측조차 되질 않는다.
에단은 아직 어린 사자였다. 지금도 이럴진대 후에는 어떤 폭풍이 일어날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에단이 메이를 향해 다가가자, 까마귀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네이드가 미끄러지듯 따라붙었다.
"움직이면 죽습니다."
소름 돋는 목소리.
어둠에 숨은 까마귀들을 네이드는 정확히 인지했다.
네이드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달빛과 마나를 머금은 단검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났다.
'짜증 나는군.'
에단은 메이를 향해 걸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예정이 어긋났다.
주인공은 홀연히 사라졌고, 상대는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강자존.
에단은 격투기 선수 시절부터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약하면 잡아먹힌다.
모두가 에단의 이빨이 빠지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블란테라는 뒷배가 있었음에도 에단은 오늘 목숨이 위험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자신의 행위를 명예로운 희생으로 여겼다.
그 점이 화가 났다.
체념, 결의.
그 표정은 저 녀석들이 지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차라리 끝까지 이기적인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에단이 왼손에 힘을 줬다.
뿌드득.
에단의 손에 착용된 타이탄의 장갑은 아무리 강하게 움켜쥐어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에단을 바라보던 메이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그 말은 곧 책임을 지겠다는 소리지?"
"네. 수하의 잘못이 곧 제 잘못이니까요."
메이의 표정은 담담했다.
에단이 그 담대한 표정을 보고 코웃음 쳤다.
"그럼 제시해."
"네?"
"내가 너한테 물어야 하나? 네가 할 수 있는 걸 먼저 말해."
"...그게 무슨."
"만약 내 성에 차지 않으면."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오늘 너희들은 전부 죽어."
그가 내뱉은 말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말씀, 진심이신가요?"
"그럼 내가 한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려?"
― ...위험하지 않겠느냐?
'블란테가 언제 굽히는 것을 봤습니까?'
에단의 곁에는 네이드가 있었다.
휴고와 가토는 훌륭한 전력이다.
에단도 전투에 돌입하면 사용할 수 있는 패를 가지고 있었다.
룬어, 페온.
그리고 상대가 모르는 장비들도 있었다. 승산은 충분했다.
위험? 감수할 수 있었다.
메이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에단의 눈을 바라봤지만, 그 눈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적대하려 들고 있어.'
보복 따위는 가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정보 길드가 보복을 두려워해야 했다.
상대는 블란테니까.
메이가 고개를 돌려, 묶여 있는 간부들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후던을 바라봤다.
후던이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이자, 메이는 눈을 감았다.
"...정보 몇 개로는 성에 안 차시겠죠."
"당연한 소리 아닌가? 네 목숨이 그렇게 헐값은 아닐 거 아니야. 내 목은 너보다 비싼데?"
에단의 비아냥거림에 메이를 지키는 그림자가 꿈틀거리자, 네이드에게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표정은 평온했으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진심이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얼 제시하지? 어떤 걸 내걸어야 에단의 분이 누그러지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해.'
어쭙잖게 이득을 취하려 들면 에단은 곧바로 눈치챌 것이 빤했다.
그녀의 말에 정보 길드의 명운이 걸려 있었기에 말과 행동에 주의를 가져야만 했다.
"...자리를 이동하시지 않겠습니까?"
메이가 그렇게 말하자, 에단이 잠시 고민했다.
"네이드."
"네, 도련님."
"자신 있어?"
"노인네를 너무 부려 먹으시는 것 아닙니까?"
"왜 말을 돌려? 아까는 정정하다더니."
"위험합니다."
"좋아, 이동하지."
듣는 척도 하지 않는 에단의 모습에 네이드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자신 있으니까 아까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허허,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닌가 봅니다."
네이드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에단이 몸을 돌려 다비에게 다가갔다.
세계수의 목걸이가 펼쳐진 장막. 장막은 주인을 인식하는 건지, 에단을 자연스럽게 통과시켰다.
장막으로 들어온 에단이 손을 뻗었다.
"고생했다."
"...."
다비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여관 주인이 먼지를 털어 내고 일어서며 쓰게 웃었다.
맷집은 좋은 것 같았다.
"괜찮은 것 같네. 빨리 가 봐."
에단은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었고, 시간을 돌리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에단이 여관 주인을 흘겨봤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얼마나 애절한 사연이 있는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각자 자신만의 사연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은 없어."
경고였다.
이번에는 한 번 넘어갔지만, 이후에도 같은 선택을 한다면 에단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목에 걸고 메이 앞에 섰다.
"이제 가지?"
메이가 슬며시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이곳에는 듣는 귀가 많았다.
* * *
메이는 에단을 데리고 아지트 중 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의 모든 인원은 정보 길드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에단과 일행을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아지트로 이동한 메이는 곧바로 직원을 통해 후던과 잭슨, 그 외 부상당한 인원을 후송했다.
"...상태가 좋지 않군요."
치료사로 보이는 직원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치료하세요. 낫게 한 뒤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메이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후던과 간부들은 차마 메이를 마주 볼 수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을 무시하고 시선을 돌린 메이가 계단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혼자 다녀올게."
"도련님."
"걱정 마."
에단이 씨익 웃었다.
"내가 그렇게 허접하지는 않으니까."
네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메이를 바라봤다.
"부디 실수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싸늘한 경고. 메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길을 안내했다.
꽤나 넓은 방. 메이의 집무실인지 응접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단은 메이가 말하기도 전에 의자를 빼 와 걸터앉았다.
에단의 행동을 바라보던 메이의 볼이 꿈틀거렸다.
"여기는 손님을 불러 놓고 차 한잔 대접 안 하나?"
협상 테이블.
에단이 가장 귀찮아하면서도 자신 있어 하는 분야 중 하나였다.
메이는 눈썹을 미묘하게 꿈틀거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지만 차는 따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요. 다음부터는 유의하겠습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뭘 믿고 너희가 주는 걸 덥석 먹겠어?"
에단의 말에 메이의 볼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하하....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농담 같아?"
"...협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어, 있어. 그런데 마음에 안 드네."
"...어떠한 점이 불쾌하게 느껴지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너무 목이 뻣뻣해."
쾅!
에단이 테이블 위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메이를 바라봤다.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돼?"
여기서는 망나니처럼 나가야 한다.
― 미친놈.
페온이 혀를 찼다.
메이는 에단의 태도를 보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뭐지?'
정보 길드의 수장이 되기까지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메이였다.
가장 천대받는 직업들부터, 가장 고고해 보이는 귀족까지.
연기하지 않은 직업이 없었고, 모두를 속이고 현혹했다.
그렇게 메이는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온갖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며 한 무리의 수장이 된 것이다.
정보 길드의 수장이 되고 난 뒤 이러한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다.
에단에 대한 평판은 알고 있었다.
'블란테의 망나니.'
하지만 최근 행보가 바뀌고 있었다.
없다시피 하던 입지를 크게 늘렸는데, 늘린 방법도 파격적이었다.
악명 높은 몬스터인 블랙 오우거를 단독으로 토벌하고,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인 에밀라를 굴복시켰다.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다 망신당했던 에단이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도 교수로 말이다.
'최근에 벌인 일도....'
얼마 전에 입수한 정보가 있다.
블라디미르 크러쉬.
마법 가문 블라디미르의 적자이자, 아카데미의 교수인 크러쉬를 학생들 앞에서 무참히 박살 냈다는 정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에단의 행보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또 뭘 원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과거와 달라지긴 했지만 망나니 같은 행보는 변화하지 않았다.
메이는 사람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단에게서는 그 무엇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벌써부터 협상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원하는 거지...?'
상대는 블란테였다.
재물, 권력, 힘.
정보 길드가 가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족했다.
그렇다면 줄 수 있는 것은....
메이가 주먹을 쥐었다.
"저희를 원하는 겁니까?"
메이의 대답에 테이블 위에 얹힌 다리가 슬며시 내려가며, 에단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제야 대화가 조금 통할 것 같네."
'이거였구나....'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탐욕을 부릴 줄은 몰랐다.
'...기가 차는군.'
블란테는, 아니, 에단은 지금 정보 길드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71화] 협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