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격동 (1)
기상 직후의 훈련 때문에 블란테의 아침은 분주했다. 후끈한 열기와 기합 소리는 블란테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바쁜 하루를 맞이했다.
"모두 빠르게 준비를 갖추도록!"
"충!"
기사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블란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묵빛 갑주.
빈센트와 첸도 검은 정복을 입으며 준비했다. 첸은 미묘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빈센트의 곁을 보좌해 온 첸은 빈센트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런 모습의 가주님은 오랜만이군.'
빈센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이 미숙했다. 검술 가문의 수장이라는 권위는 빈센트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첸이 빈센트 옆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첸의 시선을 느낀 빈센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웃고 있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분 나쁘니 그만 웃지."
"상처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시는군요."
"뭐라도 잘못 주워 먹었나?"
"글쎄요."
첸이 빙그레 미소 짓자, 얼굴을 찌푸린 빈센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은 채비를 갖추고 묵묵히 빈센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불만을 가진 기사들도 있었다.
'전쟁이나 토벌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주군의 명령에 의심을 품는 것은 명예에 어긋난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블란테는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리의 수장인 빈센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수하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아카데미 따위에 가는데 이런 준비를 해야 하지?'
이러한 불만은 있었지만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대열의 사이에는 카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론은 다른 기사들보다도 더욱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맞나?'
가장 먼저, 에단을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이 에단을 넘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줄을 잘못 탔다는 게 문제지!'
이미 미운털이 박혀 버렸다. 개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하지만 카론에게도 나름대로의 억울함이 있었다. 가문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약육강식을 가훈으로 두는 가문의 특성상 약하면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막내로 태어난 카론은 불리함을 짊어진 채 후계자 싸움을 시작했다.
어릴 때의 나이 차는 의미하는 바가 컸고, 당연히 마스터를 목전에 둔 모룬은 넘볼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블란테의 피를 이었으면서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카론은 어쩔 수 없이 먹잇감을 찾아야 했고, 때마침 좋은 먹잇감이 바로 에단이었다.
검술 가문 직계이면서 검을 두려워하며, 지식도 교양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짐승 같은 형.
카론은 에단을 경멸하고 혐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하게 여겼다. 에단 덕에 자신이 입지를 키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에단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과거의 나태한 돼지가 아니었다.
변한 에단과 부딪히며 카론은 현실을 인정하게 됐다.
카론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았고, 그 말인즉 더 이상 에단을 넘볼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아카데미까지 찾아가는 꼴이라니.'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블란테에서 가주의 명은 곧 법이나 진배없으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기사들도 감히 볼멘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은 기사들이 이번 일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사들만 이렇게 모을 줄이야.'
누가 보면 무력행사를 나간다고 생각할 정도의 숫자였다. 카론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찾아가는 이유가 뭐야?'
아들인 자신조차 묻지 못한 이유였다. 빈센트가 아카데미를 대하는 태도는 블란테의 구성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방문이라니.
'에휴.'
카론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카론의 입지는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검술 스승도 이제 자신을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검술 스승인 아드먼이 떠오르자 입안이 썼다. 한 차례 고개를 흔든 카론이 정면을 바라보자, 기사들을 훑는 빈센트가 보였다.
후웅―
빈센트는 그저 시선만 던졌을 뿐이었지만,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에 기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블란테의 기사는 모두가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시선만으로 그런 블란테의 기사들을 제압했다.
'...정말 괴물이군.'
자신의 아버지가 괴물이라는 사실은 과거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다시금 느꼈다.
빈센트가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빈센트는 늘 성장했다. 그의 성장은 더뎌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는 거지?'
카론은 두려웠다. 형제끼리 해 왔던 이권 다툼이 우습게 여겨졌다.
기사들은 여전히 긴장한 채 서 있었고, 빈센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드는군."
"...!"
툭 던지듯 내뱉은 빈센트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말이 우스운 건가?"
"아닙니다!"
기사들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빈센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탐탁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말하도록. 증명할 기회는 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빈센트는 몸을 돌렸다.
철그렁.
그때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멈춘 빈센트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저건 누구지?'
처음 보는 인상에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큰 로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덜그럭거리는 쇠사슬과 여러 무기들.
블란테는 고명한 검술 가문이다. 모든 기사들이 자신만의 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검은 한 자루뿐이었다. 저자처럼 수많은 무기들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그만큼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빈센트가 미간을 좁힌 채 후드를 눌러쓴 사람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별건 아닙니다. 기회를 준다고 하여 찾아왔을 뿐이지요."
큭큭.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음침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빈센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지금 내 말을 거역하고 싶다. 그건가?"
"그럴 리가요. 단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죠. 우리가 아카데미를 가는 이유가 무엇이죠? 설마 그 망나니 때문입니까?"
미소를 머금고 있던 빈센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망나니?"
그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압력이 향하는 대상은 후드를 눌러쓴 정체 모를 남성이었다.
잘그락. 잘그락.
무형의 기세에 사슬과 무기들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의 턱도 덜덜거리며 떨렸다. 몸이 떨리는 와중이었지만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크크... 망나니가, 아닌가요?"
후웅.
기운을 거둔 빈센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놈이 망나니인 건 사실이지."
"...하."
"하지만 아들놈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렉사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추적하는 사자' 렉사르의 질문에 빈센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에단한테 얻어터지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 * *
에단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바뀐 것은 크게 없었다. 휴고와 가토는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 좀 떨어지라고. 말 몰기가 힘들잖아."
"...아니, 이 정도도 안 되는 거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말이 안 무서워하고 배겨?"
휴고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말들의 기피가 더욱 심해졌다.
말이 안정을 취하려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야 했다. 남들이 보면 일행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휴고는 서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귀여운 새끼들.'
가토와 휴고를 한 차례 바라본 에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미래였다. 자신의 행동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후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에단은 헨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헨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휴고와 가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네?"
"너 기억은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잘 모르겠어요."
"뭐?"
헨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분명 모르던 것을 알게 되기는 했다.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세계수가 조형한 존재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러면 채권자는 어떻게 된 건데?"
"아... 채권자요?"
헨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뼉을 부딪쳤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헨리가 멋쩍게 웃었다.
"최근 너무 다사다난한 일이 많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 빚은 왜 졌지?"
"너 혹시 미쳤냐?"
"아니 그게...."
헨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는 헨리에게 거짓 기억을 심어 놨다. 어떻게든 움직이도록 동기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기억이 조금 뒤죽박죽이라서요."
"일단 기억나는 거라도 말해 봐."
"그... 아마 빌리게 된 게... 돈이 필요해서."
"그야 돈이 필요하니까 빌렸겠지. 왜 필요했는데?"
"그게... 동생한테 보내 줘야 하니까?"
"...맞을래?"
"죄송합니다."
헨리가 빠르게 사과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헨리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
"그런데 그게...."
"뭔데?"
헨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에게 말했다.
"돈이 필요해서...."
"나랑 장난해?"
에단의 얼굴이 사나워지자, 헨리가 쭈물거리며 대답했다.
"그... 기억상으로는... 그 돈을 불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돈을 불려? 네가? 뭐 어떻게?"
"아마... 도박이겠죠?"
그 순간 에단의 손이 올라갔다. 헨리가 얼굴을 가리며 싹싹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휴."
에단이 손을 내리고 한심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도박으로 빚을 져 놓고는 뭐? 동생?"
"...하하."
그녀도 머쓱했는지 웃음만 흘렸다.
"그래서 빚은 누구한테 졌는데."
"아 그게... 그 한니발이라고...."
헨리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이런 이름을 들어 봤다면 아마 원작에서 언급된 내용일 터.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한니발이라고 하면 혹시, 거상 한니발을 얘기하는 겁니까?"
네이드의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을 거예요...."
에단은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려고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뭐, 생각이 나질 않는 거 보면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고....'
지금 중요한 건 헨리가 지고 있는 채무였다.
"그래서 빚이 얼만데?"
"그... 한 1,000골드 정도...? 헤헤."
"...야."
"네?"
"내려."
"살려 주세요!"
헨리가 울먹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 [132화] 격동 (2)
헨리가 에단에게 말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동생에게 보낼 돈이랑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아카데미의 급여가 너무 적었기에 어두운 곳까지 가서 돈을 빌렸다.
돈을 빌린 걸로도 모자라 그 돈을 불리기 위해 도박에까지 손을 댔다.
한마디로 크게 한탕 하려다가 개같이 말아먹었다는 소리였다.
'뭐 이런.'
분명 헨리는 세계수의 보험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이가 알코올중독에 도박 빚을 진단 말인가. 에단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돈을 빌리기 위해 알게 된 사람이 한니발이라는 유명한 상인이다.
"왜 그러고 살았냐?"
에단은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헨리는 할 말이 없었는지 마차의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거상 한니발이라.'
대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돈 귀신 캐릭터. 욕심 많고, 야망이 넘치던 캐릭터로 기억한다.
'결국 주인공한테 걸리긴 했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한테 제대로 교육을 당한 이후로 그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상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많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으니 주인공의 조력자로는 제격이었다.
'나한테는 크게 메리트는 없지만, 상대하기는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헨리를 통해 한니발과 접촉할 명분이 생겼고, 에단은 그를 압박할 충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블란테라는 세력.
블란테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집단이다. 상인에게든, 귀족에게든, 왕족에게든 블란테라는 가문이 가지는 위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뭐.'
블란테의 망나니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조만간 바뀌게 될 이미지였다.
아카데미의 교사직은 명패가 될 것이고, 따라오는 의심은 실력으로 짓누르면 그만이다.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닥친 일들 때문에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이번 기회에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붉은 곰 녀석들도 해결해야지.'
녀석들은 지금 낙동강 오리 알 신세다.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자취를 감춘 레벨린이 일개 용병단까지 챙겼을 리 만무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에단이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정보 길드와 연결하기 전 네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상인이랑 일면식이 있나?"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네이드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그것도 뭐 과거의 인연?"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네이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에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음흉하기는.'
하지만 에단에게는 오히려 잘됐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너 급여가 얼마였지?"
"아, 아카데미에서의 급여 말씀인가요?"
"그럼 내가 뭘 물어보겠냐?"
에단이 한심해하며 바라보자, 헨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20골드쯤...."
헨리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진짜 뒈질래?"
"10골드입니다...."
"그래, 두 배 주기로 했으니까. 네 월급은 앞으로 20골드야."
"와, 정말인가요?"
헨리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궁핍하게 살아온 탓에 20골드가 얼마나 큰 거금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당분간 안 줘."
"네?! 왜요?!"
"빚 갚아야지."
"히익."
헨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에단이 눈살을 좁힌 채 바라봤다.
"네 급여로 빚을 다 까면 그때부터 줄 거야. 왜, 불만 있어?"
"...아닙니다."
헨리의 표정이 암울해졌다.
20골드라는 돈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1,000골드라는 거금을 전부 변제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하고, 얼마나 개처럼 굴러야 한단 말인가.
'자, 그러면 얘는 해결이 되었고.'
에단이 수정구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수정구에 마나가 깃들기 시작하며 형상이 떠올랐다.
―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 컨셉 언제까지 할래?"
에단이 짜증이 묻어난 표정으로 말했지만, 메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대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래, 편할 대로 해라."
에단도 체념했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메이는 그런 에단을 말없이 응시했는데,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궁금해?"
― ...짓궂으시군요.
"어, 그래. 끊는다."
― 궁금합니다.
"얼마만큼?"
― 이익...!
"그래, 잘 가."
― 궁금해서 미쳐 버리겠어요! 이제 됐습니까?!
"어, 괜찮네."
에단이 킬킬거리며 웃다가 이어서 말했다.
"세계수 문제는 해결했어."
에단의 대답에 메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정말 놀랍군요....
"왜? 내가 못 해낼 줄 알았어?"
―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저희 정보원들은 접촉조차 못 했기에....
"실력 부족이겠지."
― ....
에단의 신랄한 힐난에 메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신경 쓸 바는 아니었기에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일은 잘 진행하고 있나?"
― 사미라 씨에 관한 일 말인가요?
"어. 붉은 곰은 어떻게 됐지?"
― 접촉은 성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붉은 곰의 행보가 조금 이상하더군요.
"이상하다고?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 붉은 곰은 원래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될 의뢰만 수행하고 다녔죠. 저는 단장이 영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군."
에단이 피식 웃자,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붉은 곰은 지금 정체되어 있습니다. 최근 의뢰를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별로 좋은 의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의뢰인데?"
― 영지전입니다.
메이의 대답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영지전?"
아니, 그걸 왜 해?
에단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의뢰였다.
영지전은 집단끼리의 전투였기에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일개 용병단이 활약하기에는 쉽지 않은 임무였다.
붉은 곰 용병단은 엄청난 주가를 달리고 있었다. 실력은 입증되었다고 봐도 좋았고, 당연히 모아 둔 돈도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전쟁은 다른 얘긴데.'
소규모 무리가 뛰어나다고 한들, 영지전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어려웠다.
전투의 지휘권자가 귀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용병을 쓰다 버릴 소모품으로 여겼으니까.
'레벨린이 없어진 게 크군.'
확실히 지시를 내리던 존재의 부재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가 이상하지?"
― 영지전에 참가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말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니까요. 영지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겠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 그런데 이상한 게... 붉은 곰을 고용한 게 영지전에 참가하는 영주가 아닙니다.
"뭐?"
― 그 사이에 한니발이라는 상인이 끼어 있어요.
"한니발?"
― 들어 보셨나요?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눈을 마주친 네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단의 시선이 다시 수정구 너머의 메이에게로 향했다.
"어, 좀 알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거든."
― ...쉬워진다고요?
"그래. 앞으로 이제 벌어질 상황을 간략하게 알려 줄게. 네가 잘 써먹어 보라고."
이미 벌어진 상황과 벌어질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 설명했다.
아카데미 주축들의 도주, 블란테의 아카데미 흡수 계획, 세계수를 오염시킨 놈들의 정보, 이어지는 마수, 그리고 붉은 곰에 관한 계획까지.
드레이에 관한 얘기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메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정구에 비친 메이의 입이 떡하고 벌어져 있었다.
― ...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글쎄? 나도 몰라."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 * *
아카데미는 소란스러웠다.
관리원 대부분이 빠져나갔고, 때문에 당연히 정상적인 수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에밀라는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학생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교수들의 이탈로 남은 교사는 둘 뿐이었다.
에밀라와 크러쉬.
크러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카데미를 빠져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하나?'
에단의 경고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애당초 에단의 말은 믿기 힘든 것투성인 데다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었다.
크러쉬는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에밀라는 아카데미를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크러쉬는 그런 에밀라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고고한 귀족인 내가 평민보다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지.'
에단이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귀족의 권위는 책임으로 만들어진다. 그걸 떠올린 크러쉬는 다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에밀라의 얼굴은 복잡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홀연히 사라진 에단에 대한 원망도 들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에밀라와 크러쉬만으로는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역부족이었다.
당장 아카데미의 기능 자체가 멈췄는데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에단이 오면 일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았다.
"에밀라 교수님."
에밀라가 고개를 들었다. 리사가 에밀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사 학생, 무슨 일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에밀라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먼저 들려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죠?"
"그거야 뭐...."
에밀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소문이 들려오기 마련. 그녀가 최근 들은 소문 중 하나는 리사와 에단이 교제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에밀라가 리사와 에단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겠으나, 에밀라는 리사와 에단이 남매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도 적지 않게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평민 출신 기재라고 알려진 리사의 가문이 블란테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고...."
리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에밀라를 응시하자, 에밀라의 얼굴도 사뭇 진지해졌다.
◈ [133화] 격동 (3)
'예쁘게 생기긴 했네.'
리사가 눈을 끔뻑이며 굳은 표정의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는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얼굴선, 뚜렷한 이목구비,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칼, 짙은 속눈썹과 차가운 듯하면서도 고혹적인 눈매.
'...이런 사람이 오빠를 왜 좋아하는 거지?'
심지어 에단은 에밀라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얼굴을 굳히고 있는 에밀라가 귀엽게 느껴졌다.
상황은 급박했지만, 리사는 왠지 그녀를 골려 주고 싶었다.
"교수님, 제가 왜 평민인 척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죠?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는다면 훨씬 편한 생활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고작 가문의 위신이 높다고 나한테 빌빌거리는 모습이."
"...."
"교수님도 그러신가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눈살을 좁히면서 말하는 에밀라의 모습에 리사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요. 교수님은 블란테에 뒤지지 않은 아카데미의 꽃 아닌가요?"
"...리사 학생."
상기된 얼굴로 다그치는 에밀라를 웃으며 바라보던 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저보다 교수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에밀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리사가 에밀라의 팔을 붙잡았다.
"그건 오빠가 나서면 해결될 거예요. 근데 아직 저는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교수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리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 저희 아버지가 오고 있어요."
"아버지라고 하면... 블란테의 가주가 온다고요?!"
에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빈센트는 세간에 얼굴을 비추지 않기로 유명했다.
블란테가 고유의 자치령으로 인정받게 된 이후 빈센트는 그 어떤 대외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베일에 쌓여 있고, 신비한 인물이 빈센트였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에 직접 행차한다니.
"이유가 무엇이죠?"
"저도 구체적인 건 듣지 못했지만... 아마 저희 가문이 아카데미를 맡을 것 같아요."
"...블란테 가문이 아카데미를요?"
그게 가능한 얘기인가?
아카데미는 평등을 표방하는 대륙의 협력 단체였다. 각국 고위 인사들과 귀족들의 자제도 몰려들고 있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그런 아카데미의 통제권과 운용권은 민감한 문제였다.
귀족이 아카데미의 운용을 맡게 되면 자신의 세를 키우는 데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최근 대륙 내에서 아카데미가 가지는 권위는 결단코 낮지 않았다.
그런 아카데미에서 연달아 사건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이 대거 목숨을 잃을 뻔했고, 교직원들의 대처는 미흡했다.
아카데미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앞으로가 더 문제인 상황이라는 점이다.
교직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다는 것은 아카데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에밀라가 유능하고 다재다능하다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혼자서 수많은 학생들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블란테가 온다고 하면.'
블란테는 검술 가문이었다.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운용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오히려 많은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기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반발이 엄청날 거야.'
블란테는 웅크리고 있는 사자였다. 지금은 구석에서 몸집을 불리고 있지만,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바로 블란테다.
한 가문이 국가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눈엣가시인데 대륙의 중심으로 진출할 빌미를 준다?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들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아카데미는 좋은 먹잇감이니까.'
그동안은 레벨린의 수완으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탈하자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든 해결할 것만 같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
어째서인지 에단의 얼굴을 떠올리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리사 학생?"
"음, 일단...."
리사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을 좀 모으죠."
일단은 어떻게든 해야 했다.
* * *
"하암."
에단이 기지개를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더럽게 귀찮네.'
이제 초반에 얻을 수 있는 대다수의 기연은 얻어 냈다.
그 외에도 부수적인 무언가가 있었지만, 지금의 에단에게는 딱히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과한 편이지.'
에단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의도치 않게 얻은 힘. 에단은 욕심이 많았지만, 소화하지 못할 것까지 탐하지는 않았다.
정말 의도치 않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불안 요소는 지워 냈지만.'
에단이 눈을 감고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을 느꼈다.
몸속에 있는 기운은 더 이상 죽은 마나가 아니었다. 흉포하고 사납던 죽은 마나 대신 호수같이 고요한 마나가 자리해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여기서 페온과 카이나를 추궁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에단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그냥 운동하고 퍼질러 자고 싶군.'
본래라면 주인공이 나서서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이 도맡게 되다니. 형용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코쟁이 놈들은 당연히 반발하겠지?'
작은 중소 가문이 아카데미를 운용한다고 해도 난리를 칠 판에 블란테라니. 입에 거품을 물게 될 게 빤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막상 닥쳐 보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다.
'명분은 마련해 놨으니까.'
원래라면 천천히 절차를 밟아 흡수할 생각이었지만, 레벨린이 도주해 버리는 탓에 절차는 건너뛰게 되었다.
'슬슬 그놈들 얼굴도 한번 봐야 되고.'
영지의 산속에 짱 박아 둔 녀석들이 떠올랐다. 대략적인 기본 운동만 알려 주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으라 명령해 뒀던 놈들.
바로 벨몬트와 줄리엔 패거리.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에단이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집단 중 하나였다.
필요에 의해서 놔둔 것이기도 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아무래도 직접 손을 대야 했다.
'제대로 운동은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동굴 속에서 낑낑거리고 있을 녀석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 * *
후욱, 후욱.
블란테 가문의 산속 동굴 안에는 오늘도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뚝뚝.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턱을 따라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신음 소리.
"하나만 더!"
"고작 그 정도로 포기하려고? 그것밖에 안 돼?!"
줄리엔과 벨몬트의 응원에 잭슨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팔굽혀펴기를 성공했다.
파르르.
한계에 다다른 팔이 파르르 떨렸다. 잭슨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허억.
잭슨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동굴에서 운동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동굴 안은 정보 요원인 잭슨도 처음 겪어 보는 구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뱀파이어, 고블린, 인간의 조합이라니.
직접 본 게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심지어 이들은 무언가를 꾸미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운동 방식은 또 왜 체계적인 건데?'
모든 운동은 기본적인 맨몸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세와 휴식 시간, 그리고 가동 범위까지, 모든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걸 알려 준 이도 에단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니면 이게 블란테의 수련법인 것일까?
잭슨은 정보 요원이었지만, 전투 요원이기도 했다. 정보를 캐다 보면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해질지 알 수 없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단이 알려 준 운동법에 호기심을 느꼈다. 기사가 된 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블란테의 수련법이었다.
그런 수렵법을 경험할 기회가 왔음에도 포기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한 번만 해 보자!'
그렇게 시작된 근력 트레이닝.
푸시업, 풀업, 스쾃, 크런치까지. 모두 생소한 용어였다. 하지만 숙달된 조교들의 시범으로 잭슨은 어렵지 않게 따라 했다.
단순한 동작에 처음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속도를 제한하고, 횟수를 늘리고, 쉬는 시간을 줄이니 운동의 강도는 차원이 달라졌다.
'저래서 몸들이....'
어둠 사이로도 보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근육들이.
잭슨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충분히 탄탄한 몸이었지만, 줄리엔의 우람한 가슴근육을 보자 자신의 몸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잭슨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줄리엔은 그런 잭슨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첫날부터 정말 대단하십니다. 첫 등장 때부터 범상치 않았음은 느꼈지만...."
"...과찬입니다. 고작 이 정도밖에 못 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그런 소리 마시죠!"
잭슨을 바라보는 줄리엔의 눈에는 뜨거운 열의로 가득했다.
"그래, 처음 온 녀석치고는 꽤나 봐줄 만하더군."
꽤나 균형 잡힌 몸을 가지게 된 벨몬트가 잭슨에게 다가왔다. 벨몬트의 팔은 더 이상 앙상하지 않았다.
상의를 탈의한 벨몬트의 피부는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얬다. 하지만 그 하얀 피부에는 오밀조밀한 근육이 자리해 있었다.
"마셔라."
벨몬트가 무심하게 잔 하나를 잭슨에게 건넸다. 그걸 본 줄리엔의 눈이 흔들렸다.
뒤에 자리해 있던 험상궂은 인간들도 아쉬움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벨몬트 님, 정말 괜찮습니까?"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본 적 있느냐? 걱정 말거라. 최근 몬스터를 포획하는 속도가 늘어 충분한 양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오오...."
줄리엔을 포함한 인간들과 고블린이 감탄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잭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받아 들었다.
"...이게 무엇이죠?"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아하니 마시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기에는 색과 향이 좀 이상했다.
'내용물도 좀 걸쭉한 것 같고....'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비주얼이었다. 잭슨이 꺼림칙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줄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얘들아, 불 좀 켜라."
"네! 형님!"
산적들이 불을 몇 개 더 밝히자 동굴이 환해졌다. 시야가 트이자 그제야 잔 안에 든 내용물이 보였다.
'...피?'
잔에 넘실거리는 것은 마치 피처럼 보였다. 잭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거 설마...."
잭슨이 말끝을 흐리자, 벨몬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의 특제 비전 드링크다."
"그렇다면 여기 담겨 있는 게... 피라는 소리입니까?"
"피는 피지만 단순한 피가 아니지."
대답하는 벨몬트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벨몬트를 바라보던 잭슨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 [134화] 격동 (4)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엘프의 숲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툰나는 에단 일행이 마을을 떠난 뒤 곧장 르니엘을 불렀다.
"르니엘."
평소처럼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모습에 르니엘이 굳은 얼굴로 툰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툰나가 어떠한 의도로 자신을 불렀는지 예상이 갔다.
"리트마의 상태는 어떻지?"
"당분간 눈을 뜨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툰나는 고민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한 무리의 수장이었다.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다만, 고민하는 지점은 '방식'에 관한 문제였다.
리트마가 외부인과 어떻게 내통하였는지, 또 내통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이후 똑같은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또다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에단은 엘프들의 규율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겠군.'
잠시 에단을 떠올린 툰나가 르니엘을 바라봤다.
"르니엘."
"네, 툰나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저는...."
르니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툰나와 눈을 마주쳤다. 르니엘의 눈에는 결의가 차올라 있었다.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르니엘의 확고한 대답에 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을 소집해 주게."
"알겠습니다."
르니엘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번 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르니엘은, 명실공히 마을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였다.
르니엘이 마을에 있는 모든 엘프를 소집했다.
"리트마의 처분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합니다."
르니엘이 차게 식은 눈으로 엘프를 바라봤다.
"이것은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해치려고 한 자를 용서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르니엘이 가볍게 손짓했다.
휘잉∼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일었다. 붕대에 쌓인 리트마의 몸이 모두의 앞에 떠올랐다.
리트마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에단에 의해 철저하게 박살 난 탓에 리트마를 알아보는 자들도 많지 않았다.
"뭐야?"
"...저게 누구지?"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외모 탓에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리트마는 여느 엘프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저희 마을과 숲, 그리고 생명의 나무를 위기에 빠트린 범인이 바로 리트마입니다."
"...리트마라고?"
엘프들이 혼란에 빠졌다. 리트마는 원래 누구보다 엘프들의 안위와 숲의 보호에 적극적인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 그가 배신자라니.
엘프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습니다."
툰나는 말없이 르니엘의 뒤편에 서 있었다. 르니엘은 어느새 엘프들을 이끄는 중심점이 되어 있었다.
원래 이 역할은 툰나의 몫이었지만, 이번 일은 르니엘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이제 그녀가 엘프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매서운 안광이 리트마에게로 향했다.
"이게 배신자의 말로입니다."
르니엘의 말투는 굳어 있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후우웅―
바람이 일며 무형의 활과 화살이 그녀의 손에 걸렸다.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기자 손가락에 걸리는 감각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표적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했다.
퉁!
르니엘의 손끝이 활시위를 놓자, 바람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리트마를 관통했다.
푸슉!
선혈이 솟구쳤다.
충격적인 광경에 엘프들은 입을 떡 벌렸다.
가족과도 같은 마을 구성원의 죽음만으로도 충격적일진대, 다른 누구도 아닌 르니엘의 손길로 인해 리트마가 목숨을 잃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르니엘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재차 손을 들었다.
후웅!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몰아치던 바람은 르니엘의 손짓으로 인해 회오리가 되었다.
단순한 회오리바람이 아니었다. 폭풍 속에는 마나의 칼날이 가득했다.
콰가가가가가―!
회오리바람이 리트마의 선혈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리트마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게 찢겨 나갔다.
"...."
잔혹한 광경에 엘프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개중에는 구역질을 하는 엘프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니엘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차게 식은 눈으로 붉은 회오리바람을 응시했다.
"이게 바로 숲과 마을을 위험에 빠트린 자의 말로입니다."
무심한 듯 보이는 르니엘의 연설에 엘프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는 이제 르니엘이 있다는 사실을.
* * *
블란테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단은 적당한 인원만 차출해서 오라고 했지만, 에단과 빈센트가 생각하는 적당히의 기준이 달랐다.
정예 기사 100명.
병사들의 숫자가 아닌, 오롯이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구성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중급 마나 유저 이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 상급이거나 최상급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
개개인이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는데, 그들이 갑주를 입은 채 대대적인 이동을 하고 있으니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뭐, 뭐야?! 전쟁 준비인가?"
"블란테가 움직인다고?"
"빠, 빨리 알려야 해!"
영지민부터 지나가는 행인과 상인까지. 블란테의 이동은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최정예로만 구성된 블란테 기사들의 이동. 이건 아무리 봐도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상황에 여유를 가지고 있는 자는 빈센트와 첸 이외에는 없었다. 빈센트는 간만에 나온 외출을 만끽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않았다. 그저 대열을 갖춘 채 발맞춰 걷고 있었다.
엄숙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위압 있는 풍경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 본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기사들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모두 상급 마나 유저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딘 기사들에게 행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야영지도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카론은 천막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카론 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개인 시종의 질문에 카론이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에단을 볼 생각을 하니 심란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또 지랄하겠지.'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비수와도 같은 에단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푹푹 찌르는 기분이었다.
'대체 아카데미에는 왜 가는 거야?'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
블란테는 이미 안정된 집단이다. 괜스레 파란을 일으킬 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우∼"
카론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천막 안으로 누군가가 대뜸 들어왔다. 카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블란테의 혈족 중 카론의 입지가 제일 좁다고는 하나, 예고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서다니.
카론은 불쾌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지만, 의외의 인물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영지에서 출전 전 소란의 주범이었던, 렉사르라는 남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카론의 시종이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체...."
"그만."
팔을 들어 시종을 제지한 카론이 몸을 일으켰다.
'...강해.'
후드 너머로 수많은 흉터가 보였다. 저 흉터들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나든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렉사르 자체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다. 끈적하고, 소름 끼치며, 포악한 살기였다.
하지만 카론 또한 블란테의 일원이었다. 여기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성함이 렉사르라고 하셨나요?"
"맞습니다."
쇠가 갈리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가 렉사르의 입에 흘러나왔다. 듣기 힘든 목소리에 카론이 멈칫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시 질문했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까?"
카론의 물음에 렉사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의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카론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렉사르의 시선이 카론을 향했다. 보기만 해도 비릿함과 끈적한 살기가 느껴지는 누런 동공이었다.
"에단 님에 대해서 질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형에 대해서요?"
예상 못 한 질문에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모를 거북함에 카론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 물러섰다.
"뭐가 궁금하시죠?"
"어떻게 싸우는지."
'뭐야, 왜 또 말이 짧아? 그리고 그게 왜 궁금하지?'
일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렉사르의 대화를 떠올렸다.
'...설마 그걸 담아 두고 있었나?'
카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렉사르를 바라봤다. 장구류며 옷차림이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자가 있다는 걸 왜 몰랐지?'
그리고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어려운 건 아니니 설명은 드릴 수 있습니다. 한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끔직한 목소리군.'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말로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카론이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
원론적인 카론의 물음에 렉사르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렉사르의 시선이 카론에게로 향했다.
렉사르의 짐승 같은 눈을 마주한 카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란테의 사냥개."
그 말을 끝으로 렉사르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론이 눈을 끔뻑였다.
'사냥개? 무슨 소리를.... 설마?'
마침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간 소문만 무성하고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
'이자가 추적하는 사자라고?'
빈센트를 제외한 개인의 무력이라면 흑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첸이 가장 강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함께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 있었다.
'추적하는 사자.'
한데 렉사르라는 자는 딱히 숨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카론도 몇 차례 들은 적 있었다.
'추적하는 사자'에게 쫓기게 된다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다고.
괴담처럼 도는 말이었기에 카론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괴담은 괴담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니.'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나 첸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음성에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뭐, 별일은 없겠지.'
카론은 과거의 망나니 때의 에단부터, 바뀐 이후의 에단의 싸움 방식까지 렉사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지에 대한 표출이었지만, 그럼에도 충실히 에단의 전투 방식을 설명했다.
렉사르는 천천히 카론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이런 놈한테 내가 당할 거라고?'
기가 찼다.
카론의 말을 듣고 있던 렉사르의 안광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 [135화] 격동 (5)
"...블란테가 온단 말입니까?"
순간적으로 크러쉬의 몸이 비틀거렸다. 크러쉬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벽을 짚었다.
비록 넘어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어?'
에단이 블란테라는 말.
반신반의했다. 블란테가 누구인가. 불세출의 검술 명가 아닌가. 대륙에 떨치는 위상만 놓고 보면 그 어떤 가문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귀족 중에서도 귀족이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정말 블란테라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니 소름이 끼쳤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크러쉬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에밀라가 크러쉬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네, 그래야죠."
에밀라는 침착하게 이후 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사에게 전달받은 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일인지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야 했다.
학생들의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이대로 가다가는 아카데미는 붕괴하고 말 게 빤했다.
"...먼저 학생들을 모아 보시죠."
에밀라의 말에 크러쉬가 결의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확히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크러쉬는 에밀라를 신뢰했다.
크러쉬가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도 정작 이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학생들 사이에 속해 있는 리사는, 학생들의 상황을 직접 겪고 있었다.
"리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율리가 리사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사에게는 많은 추문이 따랐다. 교수와의 스캔들, 로만과의 사건, 그리고 드레이까지.
그녀가 주의를 주며 입단속을 시켰지만, 떠도는 소문을 모두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율리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자, 리사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미안해.'
리사는 율리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지만, 어찌 됐건 리사는 율리를 속였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율리가 느낄 배신감은 적지 않을 것이다.
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상황에 꼴에 귀족이라는 것들은 권위를 세우고 있고.'
권력을 지녔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리사가 알고 있는 귀족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 주고 있지 않았다.
실력과 평등을 추구하던 아카데미의 본질이 옅어지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리사가 나서서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소란스럽던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드레이였다. 드레이의 윤기 나는 금발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의 이미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 아니었다.
"정녕 아카데미의 학생이 맞습니까?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요."
드레이의 지적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 학생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던 리사가 눈살을 좁혔다.
'저 녀석은....'
라프.
꽤나 저명한 기사 가문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 기사 가문의 자제인 만큼 학생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뭐 하는 새끼야?"
라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라프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내뱉은 건 아니었다.
라프는 자존심이 강했다. 강한 자존심만큼 자신의 실력과 가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아카데미의 반 배정은 실력순이었다. 하지만 그 기준은 교수진들이 결정했고, 라프는 최근 B반으로 강등당했다.
라프 본인을 제외한다면 모든 학생들은 라프가 강등당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특유의 오만함.
그것이 바로 라프가 강등당한 이유였다. 라프의 자부심은 정도를 넘어섰다.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영 못 믿겠단 말이야. 머리 색은 특이한 것 같은데. 너, 어디 가문이냐?"
유치한 비아냥이었다. 라프가 미소를 머금은 채 건들거리면서 드레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정작 드레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드레이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는지 라프의 표정이 굳었다.
라프는 건방지게 앞으로 나선 드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레이에 대한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다. 라프는 그 소문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카데미에는 머저리들이 가득했으며, 실력만 놓고 본다면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외는 있었다. 높은 집안의 자제라면 라프도 어느 정도의 대우를 해 줬다.
'버러지 같은 평민 주제에.'
하지만 드레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라프가 손을 들었다. 피하든, 피하지 않든 그것을 덜미 잡아 교육을 시킬 생각이었다.
드레이는 여전히 라프를 빤히 바라봤다. 경멸이 담긴 시선에 라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 안 깔아?!"
라프가 손찌검을 하려 하자, 드레이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견인력에 드레이가 끌려 나갔다.
쿵!
드레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와 함께 타격음이 터졌다.
빠악―!
리사가 라프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것이다. 정통으로 정권을 맞은 라프가 그대로 뒤로 쓰려졌다.
"끄아아악!"
라프는 얼굴을 감싸 안으며 비명을 터트렸다. 코뼈가 부러진 것인지 라프의 얼굴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카앗! 퉷!"
리사가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사의 입가가 비틀렸다. 통쾌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더 지껄여 보시지? 아주 엿 같아서 들어줄 수가 없던데."
리사의 신랄한 욕설에 코를 틀어막은 라프가 리사를 노려봤다.
"느...! 으 개즈식이...!"
"얼씨구, 이제 말도 똑바로 못 하냐? 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부모님한테 말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것도 이른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리프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욕설에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리사... 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상대방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변두리 약소 귀족이 아닌,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인 진짜배기 귀족이다.
이건 실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기에는 사건이 커졌다.
재판이나 처벌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뭐가 됐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테니까.
하지만 리사에게서는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듯 짝다리를 짚은 채 팔짱을 끼며 라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꽈드득!
라프가 이를 악물었다. 과거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민 주제에 알량한 검술 실력을 믿고 설치는 게 눈에 거슬렸다.
라프가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코가 그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리사를 찢어 죽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라프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키이잉.
라프의 분노를 대변하듯 불쾌한 쇳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검을 뽑은 이상 라프의 의도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 리사와 싸울 셈이야?'
이전까지였다면 리사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 탐사 이후로 리사의 진면목을 알게 된 자들이라면 리사가 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사의 무위는 동급생들 중에서 독보적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차렸으니까.
드레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리사를 만류했다.
"그만하시죠. 감정적으로 나서서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이미 분노에 물든 라프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오히려 만류하는 드레이마저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가 뭔데 멈추라 마라지? 선택권은 나한테 있어. 저년을 죽이고 너 또한...."
"너 혀 더럽게 긴 거 알아?"
리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검이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리사의 검은 이미 한 차례 피를 머금었다. 목숨을 건 실전은 그 어떤 훈련보다도 그녀를 성장시켰다.
"너...."
순간 머뭇거린 라프가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림은 공포의 방증이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납득할 수 없었다. 고작 저따위 평민 계집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라프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부정했다.
이것은 전투 전의 고양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뇄다. 어차피 승자는 자신이다. 라프가 쓰는 검술은 명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근본 없는 평민의 검과 비견될 게 아니었다.
뿌드득.
라프가 부서질 듯 검을 움켜줬다. 흥분이 공포를 집어삼켰다. 경험 없는 하룻강아지는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과거 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에단을 보며 '할 만하다'라고 여겼고, 아무것도 못 한 채 박살 났다.
'재수 없는 오빠의 마음이 이해가 되네.'
눈앞에 검을 들고, 공포를 외면하는 라프의 모습이 더없이 같잖게 느껴졌다.
리사는 우스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피식, 코웃음을 치자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죽어!"
라프가 검을 든 채 맹렬히 달려들었다. 위압적인 모습이지만, 그만큼 단순하고 무식했다.
저래서야 검을 든 의미가 없었다. 흥분한 멧돼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방법이 너무 많아서 고민일 지경이야.'
반격할 방법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무엇을 골라도 별 상관없었다.
돌진하는 라프를 향해 리사가 검을 밀어 넣었다. 신속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적절한 타이밍을 노린 공격.
"흥!"
라프가 리사의 일격을 피해 냈다. 그 또한 수위에 오른 검사였다. 이 정도 검을 피해 낼 실력은 지니고 있었다.
"뭘 쪼개?"
리사가 다시금 콧방귀를 뀌며 빙그르 회전했다. 라프가 당황하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라프의 대응이 눈에 훤했다.
리사는 검무를 췄다. 그와 동시에 라프에게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솟구쳤다.
라프의 손에 검흔이 새겨졌다. 그리고 전신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촤아악!
"끄아아악!"
붉게 물든 채 바닥에 엎어진 라프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리사는 벌레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싸늘한 눈초리로 라프를 바라봤다.
"이제야 주제 파악이 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
◈ [136화] 불쾌한 도발 (1)
리사의 승리를 목격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평민이라고 알려진 리사가 명문가의 적자인 라프를 압도적으로 이기다니.
귀족의 입장에선 평민이 주제 넘는 짓을 벌였다고 생각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광경을 본 학생들은 리사가 로만을 죽였다는 소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라프 경!"
같은 동급생이면서 '경'이라는 호칭을 부르며 달려 나가는 학생.
그 학생은 라프를 부축하며 리사를 노려봤다.
"알량한 실력을 믿고 까부는 거 같은데,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보아하니 로만을 죽인 것도 사실 같은데."
리사가 로만의 목을 베는 모습은 같은 반 학생들이 목격했다. 에밀라가 주의를 줬다지만, 모든 학생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리사에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비난하는 학생을 바라봤다.
"어쩌라고."
"뭐 저런 무뢰배 같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귀족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는 자도 있었고, 당장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협박조로 읊조리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리사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빠가 오면 다 입 다물 것들이.'
리사도 믿는 구석 없이 일을 벌인 게 아니다.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도착해 이 꼴을 본다면 눈을 뒤집고 격분할 것이 분명했다.
빈센트는 명백한 딸바보였다. 리사는 빈센트의 과한 애정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까지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에단이 떠나기 전 전달한 말도 있었다.
― 막무가내로 들이박아. 네가 잘하는 것 중 하나잖아.
― ...왜 갑자기 시비야?
― 사리지 말라고.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지금은 에단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귀족 출신 학생들이 신랄하게 리사를 씹어 대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업보로 돌아갈 것이다.
리사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라프가 저주 어린 욕설을 지껄였으나, 리사는 중지를 치켜들며 가볍게 응수했다.
"끄아아악! 반드시 죽여 버린다!"
라프가 광분하며 괴성을 질렀지만, 리사에게는 같잖을 따름이었다.
드레이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어쩔 생각입니까?"
"뭘 어째?"
리사의 태연한 반응에 드레이가 눈살을 좁혔다.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을 텐데. 설마 정말 에단 교수님의 동생인가...?'
드레이는 리치가 있던 동굴이 무너질 때 그녀가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 뭐? 갑자기? 아직 오빠랑 교수님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나온 해프닝 정도로 여겼다. 너무 허황된 얘기라고 생각했고, 리사의 입장에서는 블란테임을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블란테라고?'
그녀가 이미 저지른 일이 많았기에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율리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리사의 팔을 붙잡았다.
"리사아아...."
거의 울기 직전인 율리를 향해 리사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정말로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 * *
아카데미에는 다양한 클래스가 있었다. 다비는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
본과에 들어갈 수는 없는 나이였기에 어린 학생들을 수용하는 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10대 초반 학생들이었다. 재능과 천재성을 인지하고 입증하기에도 부족한 나이다.
당연히 그 어린 학생들은 모두 하인이나 시종을 대동한 높으신 분들의 자제였다.
어리지만 알 건 아는 나이. 그들의 행동거지는 날 때부터 배워 온 예식이 몸에 밴 상태다.
반면 다비는 여관의 종업원 출신이다. 험한 용병들의 행동거지를 보고 자랐고, 사미라 또한 거칠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이미 권력의 맛을 깨우친 학생들은 대놓고 다비를 깔봤다.
다비는 눈치가 빨랐다. 동급생들이 높으신 분들의 자제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자신을 먹잇감처럼 본다는 것도 느껴졌다.
'귀엽네.'
하지만 아이들이 거칠게 살아왔다면 얼마나 거칠게 살아왔겠는가.
다비는 비록 어렸으나, 여관의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이었다.
눈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고, 사람을 구슬리는 데에는 도가 텄다.
"너는 어디 가문 사람이야?"
시비를 걸려는 듯 다가오는 남학생이 보였다. 나이를 보면 다비의 또래로 보였다.
"앗, 저 말씀인가요?"
다비가 해맑게 웃자, 남학생이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 그래. 우리들은 서로의 가문을 다 알고 있어서 말이지. 참고로 우리 가문은 아델이야."
'그게 뭔데.'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와! 정말 그 아델 가문이란 말씀인가요?"
다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기를 죽이려고 한 말이었지만, 다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다가간 학생은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어린 나이었다. 다비의 반응을 의심할 만큼 성장한 수준은 아니란 소리였다.
남학생의 콧대가 높아졌다. 으스대는 표정으로 다비를 바라봤다.
"오! 너도 들어는 봤나 보지? 그 유명한 대마법사 아이작 아델이 바로 우리 아버지야."
"와! 정말 대단해요! 혹시 나중에 뵙게 되면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정말 영광이에요!"
다비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예상한 상황과는 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남학생은 기분이 좋아졌다.
"뭘 좀 아는 녀석이네. 너는 이름이 뭐야?"
"아, 저는 다비라고 합니다! 제가 여쭤봐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지. 내 이름은 로이스 아델이야."
"미래의 대마법사를 이렇게 뵐 줄이야! 영광입니다. 혹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다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이스를 바라봤다. 로이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 그래! 너는 착하니까 친하게 지낼 수도 있지.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구나. 나중에 아버님을 뵙게 되면 인사를 시켜 줄 수도 있어."
"와아!"
다비가 손뼉을 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 반응에 로이스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귀, 귀여워.'
천한 평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로이스는 이미 다비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가 보기에 다비는 다른 사람들처럼 전형적으로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순수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반응과 표정을 보여 주는 듯했다.
때문에 욕심이 깃들지 않은 그 순수한 표정과 행동에 로이스의 마음이 녹았다.
"로이스 님과 같은 수업을 들으려면 더 노력을 해야겠어요! 다음에 좀 알려 줄 수 있으신가요?"
"...못 해 줄 건 없지."
"우와! 로이스 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다비가 활짝 웃었다. 로이스는 그 해맑은 미소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프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로이스 님한테 배우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싹싹한 다비의 말의 로이스는 차마 거부를 할 수 없었다.
'...더 얘기하고 싶은데.'
공부를 하러 간다는데 어떻게 붙잡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로이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 내가 알려 주려고 해도 너무 모르면 힘들지."
"네! 로이스 님한테 배울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할게요!"
"그래...."
총총거리며 멀어지는 다비의 모습에 로이스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다. 친하게 지내는 동급생이 눈을 끔뻑이며 로이스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너 아까 주제 파악을 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어?"
"울려 줄 거라고 하더니."
"그건 그렇고... 쟤 좀 귀여운 것 같은데?"
마지막 동급생의 말에 로이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야."
"어, 어...?"
"너, 쟤 건들지 마."
"...왜?"
"내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어?"
로이스의 사나운 눈초리에 기가 죽은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로이스가 같이 있던 학생들도 노려봤다.
"너희들한테도 하는 소리야. 내 말을 무시했다가는... 알지?"
"으, 응...."
동급생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차마 로이스 앞에서 그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로이스는 무리 중에서 가장 힘도 세고, 가문의 위세도 드높았다.
* * *
다비는 멀어지면서 로이스를 슬쩍 흘겨봤다.
'병신.'
다비가 피식 조소 지었다.
'그나저나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얼마 전, 에밀라가 자신에게 찾아왔다. 다비는 에단이 데려온 학생이기에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여기는 별문제가 없지만....'
본과 학생에 비해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고, 이곳의 교사들은 레벨린의 수하가 아니었는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무너지면 결국 이곳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싫은데.'
다비는 아카데미 생활을 더 즐기고 싶었다. 이제 갓 입학했는데 이렇게 끝나는 건 너무 아쉬웠다.
'에단 오빠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에단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에단이 나선다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타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어요.'
다비는 에단을 믿었다.
* * *
"...나. 우울하다."
날씨는 좋았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고메드와는 큰 연관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던 고메드가 눈을 끔뻑였다.
고메드는 자신의 신력(信力)에 자부심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만 하던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사실에 더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문을 지키는 것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거대한 문은 자신만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에단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생겼다.
에단은 자신이 힘껏 열어 재끼던 거대한 철문도 가벼운 발길질로 열어 버렸다.
고메드는 침울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봤다.
"고메드. 사는 이유. 궁금하다."
후우.
고메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메드의 눈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때,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아 있던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고메드, 너무 상심하지 마."
"고맙다. 하지만 고메드, 쓸모가 없다."
"그러지 마! 그래도 나랑 친구들은 고메드가 있어서 늘 든든한걸?"
"...정말인가? 고메드, 든든한가?"
"그럼! 듬직하고 멋있어!"
"우어어! 고메드! 열심히 하겠다!"
고메드와 자주 대화 친구를 해 주는 학생이었다. 최근 이 학생은 풀이 죽은 고메드가 걱정됐는지 자주 나와서 고메드를 위로해 주고는 했다.
"헤헤, 다행이다. 어?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지?"
여학생이 앞을 가리켰다. 먼 지평선에서부터 한 무리의 인파가 다가오고 있었다.
찌릿.
피부가 따끔거렸다.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거리임에도 기세가 느껴졌다. 고메드가 일순 긴장감을 머금었다.
"...위험하다. 저놈들."
고메드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거체가 문을 막아섰다.
"너, 빨리 들어가라. 여긴, 위험하다."
"하지만 고메드가 지켜 줄 거 아니야?"
"...일단, 지원을, 요청하겠다."
고메드가 거대한 종을 울렸다. 문지기 생활을 하며 처음 울리는 종이었다.
고메드가 긴장을 머금은 채 다가오는 무리를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은 고메드보다 강했다. 에단을 만날 때처럼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때 고메드의 새끼손가락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메드가 시선을 돌리자 여학생의 가느다란 팔이 보였다.
고메드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 지킨다.'
결의를 다진 표정의 고메드가 정면을 응시했다.
◈ [137화] 불쾌한 도발 (2)
정보 길드에 제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는 보고서를 받아 들고 미간을 좁혔다.
'흐름이 달라지고 있어.'
사전에 확보해 뒀던 정보이기에 이번 일로 정보 길드는 꽤나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정보는 속도전이다.
10분의 차이로 모든 걸 뒤엎는 게 바로 선점의 효과였는데, 이번에 세계수와 블란테의 이동이라는 큰 정보를 에단에게 얻은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그 흐름은 모두 그자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오랜 시간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그녀였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처음 겪고 있었다.
흐르는 상황이 급박했다. 마치 전쟁같이 시민들과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숨죽여 있던 블란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주축이 사라진 사실, 그리고 그 자리를 블란테가 꿰차려고 한다는 사실로 인해 대륙이 격동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블란테가 강대한 무력 집단이고, 전투를 기피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연합국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개인은 집단에게 패하기 마련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지?'
그때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정보 길드를 내걸었다.
어차피 실권은 그녀에게 있었기에 걸 수 있던 협상안이다. 하나 지금 보면 그때의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아카데미, 세계수, 블란테.
망나니라고 평가받던 에단이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에단의 저의가 어떻고, 얼마만큼의 정보를 알고 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본명까지도.'
메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데릴라'라는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건 이번 일로 정보 길드는 적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
블란테의 움직임을 미리 알았던 것이 매우 컸다. 세상은 혼란에 빠졌지만 정보 길드는 평화로웠다.
'이후의 일은.'
에단이 언질을 줄 것이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순간 기가 찼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변하게 됐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왜 안 와?'
잭슨을 보낸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기에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늦어져도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닌가.
'또 어디 박혀서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이렇게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두고 봐.'
메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블란테의 기사들은 발이 빨랐고, 덕분에 며칠 만에 기사들은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자는 넉넉했기에 거의 대부분은 야영으로 해결했다.
선두에 있던 빈센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아카데미의 외벽과 고메드를 바라봤다.
"한 덩치 하는 친구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건장하군요."
빈센트와 첸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냥 건장한 정도야?'
'괴물들의 기준이란....'
그때, 혀를 날름거린 렉사르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치울까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렉사르 특유의 쇳소리 같은 소리가 묻어 나와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빈센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옆으로 다가온 렉사르를 바라봤다.
"최근 들어 몸이 근질거리나 보군."
"...그래 보입니까."
"그렇게 몸이 근질거린다면 나나 첸 경이 상대해 줄 수도 있는데."
얼음장처럼 싸늘한 첸의 시선이 꽂히자, 렉사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사양하도록 하죠."
렉사르는 과거 첸과 친선 대결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요구한 대결이었기에 승부의 결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생긴 얼굴의 자상이 욱신거렸다. 렉사르는 인상을 찌푸린 채 빈센트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와 기사들이 문 앞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위세에 여학생이 고메드 뒤에 숨어들었다.
고메드는 긴장을 삼켰다.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나, 지킨다, 학생.'
고메드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이 학생을 보면 여기서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누구냐, 당신들. 정체를 밝혀라."
고메드의 물음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감히 자신의 주군에게 무례를 끼쳤기 때문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에 기사들의 기세가 칼날이 되어 고메드의 목을 조였다.
고메드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첸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가서 대화를 나눠 보겠습니다."
"됐네. 내가 가지."
빈센트의 대답이 조금 예상 밖이기는 했지만,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도약해 말 위에서 내려온 빈센트가 말없이 걸어 나갔다. 그저 걷기만 하는데도 공기가 냉각되는 것 같았다.
고메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카데미 내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고메드는 열심히 지원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원. 언제 오나.'
다가선 빈센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고메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학생 학부모인데 잠깐 들어가도 되나?"
"...흐어."
고메드가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하, 학부모인가?"
"맞네. 내 딸이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지."
"그, 그렇다면. 바로 하지 그랬나. 말."
"음...? 바로 말한 것 아닌가?"
빈센트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고메드가 손을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말았다.
그때 고메드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혹시 학생 이름이 뭔가요...?"
학생의 질문에 빈센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리사라고 하는데 알려나 모르겠군. 혹시 알고 있느냐?"
"아, 리사면 저희 클래스인데? 와, 리사 아버님이세요? 대박!"
여학생이 폴짝거리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고메드가 눈을 끔뻑이며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나, 죽지 않는 건가?"
고메드의 말에 빈센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네가 왜 죽나? 이상한 친구군."
"하, 하하. 맞다. 그렇다면, 문 열어 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고메드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려고 했다. 에단의 폭력을 겪은 이후 고메드의 성향은 많이 유해졌다.
고메드가 성문에 손을 가져다 댄 그 순간.
꿈틀.
가슴께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고메드의 몸이 멈칫했다.
"...자네."
빈센트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께름칙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네, 지금...."
빈센트가 고메드에게 말을 건네려던 그 순간, 고메드의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끄어어어어!"
괴성을 내지른 고메드의 주위로 흉험한 마나가 넘실거렸다.
빈센트가 인상을 찌푸렸고, 여학생은 당황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달라진 고메드를 올려다봤다.
"고, 고메드?"
하지만 이미 고메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후웅!
고메드의 거대한 주먹이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꺄아아악!"
여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숙였다. 가만히 그 상황을 바라보던 빈센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터벅.
한 걸음을 내딛자 빈센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여학생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주먹이 당장에라도 머리 위를 덮칠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빈센트가 손을 들어 고메드의 팔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 꽤나 힘이 세구먼."
그렇다기에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목소리였다. 고메드의 검게 물든 안광이 빈센트를 노려봤다.
"가주님!"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고 뛰쳐나오려 했지만, 빈센트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가만히 있도록."
빈센트는 남은 한 손으로 여학생을 감싸 안았다.
"조금 놀랄 텐데 괜찮겠느냐?"
끄덕끄덕.
여학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후웅!
그 순간 여학생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여학생은 다시금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날아오는 여학생을 첸이 가볍게 받아 들었다.
"괜찮습니까?"
"...아, 안 괜찮아요."
여학생의 목소리에서 서러움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저보다 저분이...!"
여학생이 시선을 돌렸다. 빈센트와 고메드는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 빈센트였다. 빈센트의 안위는 아무 걱정이 없다. 다만,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면.
'이 기운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개개인이 가진 포악한 기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첸과 같은 걸 느낀 렉사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일이 재밌어지는군."
렉사르는 재밌는 사건을 경험한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빈센트는 말없이 고메드를 지켜보았다.
'아직도 상태가 바뀌고 있군.'
고메드의 육체가 뒤틀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거대하던 육체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외력으로 인한 신체의 변화에는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
빈센트가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다.
"우어어!"
그때 고메드의 반대편 손이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빈센트는 붙잡아 두고 있던 팔을 가볍게 밀어냈다.
코끼리와 인간 사이 만큼의 체급 차이가 났다. 힘 싸움이 성립될 것 같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밀려난 것은 고메드였다.
밀려난 고메드가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며 빈센트는 턱을 쓰다듬었다.
"검을 뽑기도 그렇고. 조금 난감하군."
그래도 딸이 다니는 아카데미이기에 쓸데없는 유혈 사태는 벌이고 싶지 않았다. 빈센트가 고민하던 사이, 고메드의 골격이 다시 한번 뒤틀렸다.
"끄어어어어어!"
고메드가 또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괴성이라기보다는 고통에 찬 절규에 가까웠다.
빈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좀 자고 있게나."
고메드를 향해 도약하던 그때, 빈센트가 갑작스레 겁을 뽑더니 곧장 마나를 방출시켰다.
고메드의 몸이 꿈틀거렸다. 빈센트가 고개를 돌려 첸을 바라봤다.
"첸!"
첸 또한 이변을 눈치챘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푸른빛의 마나가 거침없이 타올랐다. 첸이 검을 휘두르자 푸른 마나의 장벽이 펼쳐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카론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마나 컨트롤이 무슨...!'
방대한 마나 양보다 이 정도 규모의 방벽을 펼쳤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가 않았다. 빈센트도 마나를 일으켜 보호막을 형성했다.
꿈틀거리던 고메드의 몸이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충격을 동반한 대폭발이 발생했다.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아찔한 굉음과 태풍 같은 기세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거대한 문이 순식간에 조각날 정도로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그런 강력한 위력 속에서도 빈센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불쾌하군.'
빈센트가 인상을 구겼다. 폭발의 여파가 걷히자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빈센트는 최후의 순간 고메드가 내뱉은 말을 들었다.
'살려 줘....'
하지만 고메드의 애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빈센트는 더없이 불쾌했다.
◈ [138화] 리사의 부탁
에단은 마차 밖으로 펼쳐져 있는 맑은 하늘이 보며 하품을 했다.
'슬슬 도착했겠군.'
블란테의 이동속도는 다른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했기에 슬슬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간만의 부녀 상봉인데 천천히 가도 되겠지.'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블란테는 대륙의 끝자락에 있다. 몬스터들의 범람을 막아서는 살아 있는 요새가 바로 블란테였다.
'위명은 있지만 그것뿐이라는 거지.'
블란테가 이동하면 주위 모든 세력들이 블란테를 견제한다. 블란테가 그만큼 껄끄럽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소리다.
'그걸로는 안 돼.'
그것만으로는 후일을 대비할 수 없다. 정계에 알을 박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에단은 중앙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명분과 실리.'
득이 되는 것들만 취하면 된다.
위기 시에 블란테만 희생하는 것이 아닌, 타국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한테 미루면 다 뒈지니까.'
급한 불은 껐지만 어디까지나 급한 불이다.
'지하'에서 놈들이 범람하기 시작하면 모든 상황이 뒤바뀔 터.
'가지고 있는 패는.'
에단은 객관적으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먼저 명분이 있었지만, 그를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증인들이 도주했다.
'크게 상관은 없어.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혐의를 입증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엘프들의 지지는 상황을 반전시킬 때 써먹으면 되겠고.'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성검을 바라봤다.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성검... 성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좋아, 대충 그림은 그려지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블란테의 입지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보다 확실한 명분과 세력은 없다.
'이거면 녀석들과 치고받고 싸워도 눈치를 안 봐도 되겠는데?'
사건이 터지기 전 부패한 개자식들의 뿌리를 뽑을 생각이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데....'
에단이 골똘히 고민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방법은 없었다.
'그건 뭐 리사가 알아서 하겠지.'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은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다만,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음에도 에단의 가슴에는 찝찝함이 남아 있는 것이 걸렸다.
'...정말 이게 끝인가?'
무언가 거슬렸다. 정말 레벨린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친 게 끝이란 말인가?
툭툭.
에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네이드와 헨리가 그런 에단을 힐끔 바라봤다.
'찝찝한데.'
에단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 * *
비산한 파편들, 그리고 피어오르는 거대한 먼지구름이 폭발의 파장을 단편적으로 드러냈다.
투두둑.
돌가루와 쇳가루들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주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반면 빈센트의 몸에는 작은 핏자국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고메드...!"
첸이 보호하고 있던 여학생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 죽었다.
여학생이 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빈센트는 아무 말 없이 여학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소란을 파악하고 멀리서 학생들과 에밀라가 다가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에밀라는 갑작스러운 소란과 참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고메드는 시체조차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리에 있던 여학생의 상태는 패닉에 가까웠다.
에밀라는 교수로서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정리해야 했다. 학생을 보호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에밀라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쿵!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미건조한 빈센트의 시선이 에밀라에게 향했다.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에밀라는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실력자였다. 하여 웬만한 마스터를 마주해도 기에 눌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턱이 떨린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에밀라의 물음에도 빈센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말없이 에밀라를 응시하고 있자, 기약이 없는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리사는 잘 있나?"
"리사? 설마 당신이...."
에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강한 위압감에 짓눌려 가려져 있던 시야가 넓어지며 기사들의 행렬이 보였다.
'블란테.'
헛숨을 삼킨 에밀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낭자한 혈흔, 산산이 조각난 문.
"...당신께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빈센트가 이맛살을 구겼다.
"내가 그렇게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진상을 파악해야 해서...."
에밀라가 서럽게 울고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익숙한 감각이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뭐지?'
꺼림직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다. 안개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얼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
'...레벨린.'
레벨린의 기운이었다. 그녀를 떠올리자 에밀라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은 에밀라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모든 게 거짓이었군요.'
에밀라는 고메드를 알고 있다. 조금 바보 같고 단순했지만, 순진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잔혹하게 죽을 만한 녀석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학생만 봐도 그랬다. 고메드는 학생을 좋아했고, 학생들도 곧잘 고메드를 따랐다.
이가 갈렸다. 레벨린의 잔혹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겁니까?'
분노에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에밀라가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말없이 에밀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꼴을 보여 줬군요."
"괜찮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니까."
에밀라가 학생을 부축했다. 어느새 첸이 다가와 빈센트 곁에 섰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당시에는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줬다.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온 거니까요."
첸의 대답에 에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여학생을 안아 들고 지나가자, 학생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학생들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메드의 죽음.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죽음이었다.
장성한 성인이 봐도 충격적인 광경을, 아직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학생들이 봤으니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지?"
한 학생이 의구심을 표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기사들이었다.
검게 빛나는 갑주, 그리고 강렬한 카리스마.
아카데미에 재학하면서 다양한 기사들을 만났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자들은 없었다.
"저 문양은... 설마...?"
그제야 학생들의 시선이 갑옷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검은 갑주.
거기에 새겨진 사자 문양.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브, 블란테...!"
"블란테라고?!"
학생들이 일제히 뒷걸음질 쳤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블란테의 명성과 악명은 자자했다.
고위 귀족의 자제가 대부분인 아카데미의 특성상 블란테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블란테는 어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검사 중의 검사, 기사 중의 기사. 그게 바로 현시점 블란테의 위치였다. 블란테와 대등하다고 알려진 가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 명가 아큐르와 또 다른 검술 명가로 알려진 카이제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블란테와 다르게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블란테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크게 놀랐다.
'...블란테가 도대체 여기를 왜 찾아온 거지?'
갑작스러운 출현.
심지어 등장한 장소가 아카데미였다. 블란테가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수차례의 초청에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블란테가 도대체 왜?
하지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밝혀졌다.
"아빠―!"
멀리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여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들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등장한 이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쟤 리사 아니야?"
"아빠라고?"
"농담하지 마...."
학생들이 눈을 비볐다.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황당해도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싸늘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빈센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는 점이었다.
위엄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었다.
빈센트가 팔을 벌리며 리사를 반겼다.
"리사, 오랜...."
쐐애액!
그 순간 리사가 발을 휘둘렀다. 깔끔한 일격이었지만, 빈센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리사의 발을 붙잡았다.
"너무 천박한 행동은 좋지 않단다."
"아빠야말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진짜 제가 하고 싶던 말이 얼마나...!"
리사는 쌓인 감정이 많았다. 대뜸 등장한 오빠부터 시작해, 방금 전 소란, 그리고 전쟁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대동한 수많은 기사들까지.
황당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전후 사실을 파악하고 추궁하고 싶었지만,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리사가 발을 내리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다듬으며 다시금 빈센트를 바라봤다.
"아빠."
"그래, 우리 딸."
"...일단 할 말이 있어요."
리사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싫었지만 자존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였다.
"말해 보거라."
빈센트가 따뜻한 시선으로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 * *
아카데미가 또다시 한바탕 뒤집어졌다.
평민으로 알려진 리사가 블란테의 일원이었다니.
그것도 단순히 블란테 소속이 아닌, 직계 혈통이었다. 그 사실에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간 평민으로 여기고 리사를 깔보고 비아냥거리던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초조해졌다. 웬만한 귀족 가문들은 블란테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블란테가 입김 한 번 불면 가문이 위태로웠다.
"어, 어쩌지?"
"나 리사한테 말실수한 것 같아."
"나, 나도.... 아니, 그러게 왜 가문을 숨겨서...."
"...사실 저것도 다 쇼 아닐까?"
"그 사람들이 모두 가짜라고?"
학생들이 시선을 돌리자, 우직하게 서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 그렇지? ...나는 죽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되지 않을까?"
평소 거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던 몇몇 학생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들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 걸려도 블란테에게 걸리다니.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 [139화] 또 다른 앙숙 (1)
"그런데 애당초 블란테인 걸 숨긴 게 잘못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 같은데?"
"하, 진짜 어이가 없네...."
학생들의 반응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기보다는 회피하기 급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정말로 블란테의 자제였을 줄이야.'
혹시나 했던 가정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리사의 검술 실력은 동급생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한다.
뛰어난 재능만으로는 이룩하기 어려운 성취였다.
아카데미를 몇 년 다니는 것만으로 그 정도 성취를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라프가 진짜 망한 거 아니야?"
"...그렇네? 라프 너 괜찮아?"
학생들의 시선이 라프에게로 돌아갔다. 최근 리사와 가장 큰 다툼이 있었던 것은 라프였다.
라프가 큰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리사가 아무 배경 없는 평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란테라고?'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리사에게 얻어맞은 얼굴이 욱신거렸다. 그 통증보다도 동급생들의 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그 가면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위세 떨 때부터 알아봤다.'
'제대로 걸렸네. 쯧쯧.'
라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라프가 살벌한 눈초리로 동급생들을 노려봤다.
"블란테인데 뭐 어쩌라고?"
대놓고 하는 도발에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직 블란테의 기사들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 미쳤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라프는 이미 분노에 잠식되어 있었다.
블란테 기사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매서운 시선에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저희가 한 말 아니에요...!"
라프가 학생들의 어깨를 밀쳐 냈다.
"나도 꿀릴 거 없어. 우리 가문도 카이제르 소속이라고."
라프의 아버지는 카이제르에 소속된 기사였다. 비록 직계는 아니었지만, 라프의 말대로 카이제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나는...."
라프가 더 입을 열려고 하자, 학생들이 라프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입을 열게 놔두면 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블란테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학생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하, 하하.... 이 녀석이 원래 입이 조금...."
학생 한 명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때 절그럭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산한 정적이 감돌았다.
질척이는 불쾌함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카이제르...?"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친 목소리였다. 학생들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침을 삼켰다.
몸이 굳은 것은 라프도 매한가지였다. 분노에 이성을 잃어 내지른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큭큭.... 머저리 같은 카이제르 놈이 여기에도 있었나...?"
렉사르가 손을 뻗었다. 라프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학생들은 말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하실 수 없으십니까?"
드레이가 렉사르의 앞을 막아섰다. 렉사의 표정이 굳었다.
"...너는 뭐지?"
"학생입니다."
스스스.
드레이가 침을 삼켰다. 그 또한 긴장감에 몸이 떨려 왔다. 저 소름 끼치는 존재 앞에 서는 데에도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자기가 보는 앞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만큼은 좌시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라프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 파장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드레이는 공포라는 감정을 억눌렀다.
렉사르는 말없이 드레이를 응시했다. 누런 동공이 드레이를 훑었다. 맹수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감각에 드레이가 침을 삼켰다.
'제기랄....'
이렇게까지 나선다면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렉사르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끈적이는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드레이의 시선이 다른 기사들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블란테의 기사들은 렉사르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둘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드레이는 재차 각오를 다졌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게끔.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겨뤄 보지 않아도 기량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고양이가 날고 기어 봤자,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저편에서 에단과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산한 미소를 걸친 채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에 드레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아카데미에 돌아온 에단은 박살 난 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익숙한 기운이 발목을 잡았다.
죽은 마나.
이건 죽은 마나의 잔재였다. 낭자한 선혈, 반파된 문, 그리고 죽은 마나.
'씨앗을 심어 뒀나.'
예상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레벨린은 에단의 예상보다 더욱더 잔혹해졌다.
'오판했군.'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면 고메드의 몸에 심어진 씨앗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메드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잔혹한 죽음을 맞이할 녀석은 아니었다.
"쯧."
에단이 혀를 찼다. 흩뿌려진 피와 산산조각 난 문을 보니 입맛이 썼다.
'아버지께서 도착하셨나 보군.'
일행은 눈앞의 광경에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렇다고 배려를 해 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말없이 박살 난 문안으로 들어서자, 일행들도 따라가기 시작했다.
부지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학생과 블란테의 기사들.
"...정말 오셨군요."
이동하면서 블란테가 찾아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블란테의 정규 기사들을 보자 가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휴고는 긴장했는지 침을 삼켰다.
"...쟤는 뭐지?"
에단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대치 상황이 보였기 때문이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인물,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드레이.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에단의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에단은 거침없이 발을 옮겨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금 내 학생에게 뭐 하는 거지?"
"...학생?"
렉사르의 목소리를 들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왜 그따구야? 뭐 잘못 처먹었냐?"
대놓고 시비조인 에단의 어조에, 드레이와 기사들이 헛숨을 삼켰다.
"...네가 에단인가?"
렉사르의 목소리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 뭐지?'
저 질문은 자신이 블란테의 직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저런 방자한 태도라니....
또한 말투와 생김새부터 개성적인 녀석이다. 이 정도로 뚜렷한 개성이면 원작에 묘사가 되었을 테니 에단이 모르는 게 이상했다.
'블란테의 일원이면서 특이한 차림새라... 아, 그 녀석인가?'
딱 짚이는 곳이 있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그런데 너 말이 짧다?"
"...정말 많이 바뀌긴 했군."
"몸이 무거워서 살 좀 뺐지. 왜 놀라워?"
호의라고는 찾기 힘든 날 선 대화가 오갔다.
에단은 렉사르 앞에서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는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너 우리 반장한테 뭐 하려고 했냐?"
"저놈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 저 뒤에 있는 녀석의 입을 조금 찢어 줄 생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듣기 불쾌한 목소리.
에단이 고개를 돌려 드레이 뒤에 움츠리고 있는 라프를 바라봤다.
"쟤는 누구냐?"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자, 드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B반의 라프라고 합니다."
"그게 누군데?"
"...."
드레이는 할 말을 잃었고, 에단은 다시금 눈살을 좁히며 기억을 되짚었다.
'대충 떠오를 것 같은데.'
익숙한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 보니, 주인공한테 깨지는 녀석인 게 기억났다.
"아, 네가 그 좆도 아닌 가문 믿고 나대는 그 새끼구나?"
에단의 신랄한 욕설에 라프의 눈이 부릅떠졌다.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토가 이마를 쳤다.
"도련님은 여기서도 마찬가지구나...."
"그러게...."
둘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의 천성과 언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은 알고 있었다. 에단이 결코 입으로만 나불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침없는 에단의 언행은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기에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가, 같잖은 가문?"
라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이런 처우를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라프가 알기로 에단은 평민이라고 했다. 그런 자가 자신의 가문을 모욕하다니. 라프가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했다.
"대충 상황은 예상이 가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알 것 같았다. 에단이 렉사르를 바라봤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도 알 거 같고."
에단의 말에 렉사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깊게 눌러쓴 후드 사이로 보이는 입꼬리가 비틀렸다.
"왜? 몸이 근질거려?"
에단은 렉사르 같은 녀석을 많이 봐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책에서의 묘사와 지금 보이는 모습을 통해 어떠한 성격인지 알 수 있었다.
"큭큭.... 확실히 많이 달라지긴 했군. 과거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너도 혀가 기네. 닥치고 본론만 말해."
에단이 비릿하게 웃으며 렉사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결국 한바탕 붙고 싶다는 거 아니야?"
에단의 검은 동공이 렉사르의 눈과 마주쳤다. 누린내가 넘실거리는 렉사르의 눈앞에서도 에단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큭큭,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지금 당장...."
"마음 같아서는 어울려 주고 싶긴 한데 지금 조금 바빠서 말이야."
에단이 휴고를 향해 손짓했다. 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내가 누굴 부르겠냐?"
"옆에 가토도...."
"뒈질래?"
에단의 겁박에 화들짝 놀란 휴고가 후다닥 뛰어갔다.
'쌤통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토는 고소함을 느끼며 웃었다. 가토는 작은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세계수 때문에 개고생할 때 휴고는 숙면을 취했기 때문이다.
에단의 곁에 다가온 휴고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휴고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야."
"네, 도련님."
"쟤 눈 한번 봐봐."
휴고가 렉사르의 눈을 바라봤다. 렉사르의 눈빛은 지금 더욱더 사나워졌다. 불쾌한 심기가 반영된 탓이다.
"어때, 무섭냐?"
"아니요...?"
빠드득.
휴고의 말에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너 따위는 발라 버릴 수 있다는데?"
에단이 장난기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 [140화] 또 다른 앙숙 (2)
휴고의 얼굴이 패닉으로 물들었다.
에단이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을 벌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 도련님...!"
휴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뱉은 말이기에, 그가 나서서 해명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야."
하지만 에단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휴고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알았다.
'아.... 물 건너갔구나.'
에단의 짓궂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기에 휴고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말해 봐. 쟤가 무서워?"
에단이 휴고의 어깨를 치면서 속삭였다. 휴고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렉사르를 바라봤다.
렉사르의 표정은 살벌했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놈들을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휴고가 멀뚱멀뚱 렉사르를 지켜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휴고의 대답에 에단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자, 들었지?"
에단이 씨익 웃으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에단은 렉사르의 귀가 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흘러넘치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에단이 렉사르를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기분 나빠?"
에단이 등을 치자, 휴고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밀린다 싶으면 이걸...."
에단이 끝말을 흐리며 휴고에게 당부했다. 휴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진짜로요?'
휴고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묻자, 에단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자신감을 북돋아 주듯 휴고의 둥을 두드린 뒤 건물로 향했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려나?'
휴고가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가토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고를 보고 있었고, 네이드와 헨리도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듯 웃음을 머금었다.
'어휴, 내 팔자야.'
휴고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렉사르는 당장이라도 휴고를 찢어 죽이려는 기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음.... 혹시 대화로는 안 될까요?"
"대화? 무슨 대화를 말하는 거지?"
듣기 거북한 목소리와 함께 절그럭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휴고의 동공이 렉사르의 팔 쪽으로 옮겨졌다.
휴고의 눈에 순간 노란빛이 맴돌았다.
꽈드득.
주먹을 움켜쥔 휴고는 자연스럽게 전투를 대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가 한 발짝 물러섰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얼굴에 큰 자상이 있기는 하나, 아직 앳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잘 쳐 봐야 자신의 또래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겁을 먹었다기보단 오히려 당황해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렉사르는 자신이 앞에 서도 오금이 저리는 상대였다. 그런데 또래로 보이는 녀석이 조금도 기죽지 않아 하는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에단 교수님과 관계된 사람 같은데.... 누구지?'
휴고가 드레이를 힐끔 보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 조금 피해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휴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드레이가 라프를 들쳐 메고 자리를 옮겼다.
라프가 뾰족한 시선으로 드레이를 노려봤지만, 드레이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라프를 옮겼다.
"너...."
"닥치고 있어."
드레이의 서늘한 목소리에 라프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언성을 높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에단은 건물로 들어서면서 휴고와 렉사르를 힐긋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냈네.'
에단은 렉사르가 꽤나 오랜 시간 음지에 숨어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무슨 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렉사르는 양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꽤 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군.'
결국 이 또한 처리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그래야만 '지하' 놈들과 대적이 가능했다.
문득, 에단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자는 카론이었다.
'쟤도 왔네?'
설마 아카데미에 카론까지 찾아왔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완전히 밀려났나 보군.'
가뜩이나 입지가 좁았던 카론이었다. 에단이라는 방패막이 없었다면 애당초 승계 구도에 발을 담글 수도 없는 위치였다.
에단이 피식 조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에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새끼.'
카론이 속으로 에단을 씹으며 눈앞의 렉사르와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에단이 가장 먼저 거둔 수하이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평민 출신 기사.
아직 에단은 정식으로 작위를 계승받지 못했다. 당연히 기사 임명 같은 높은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빈센트와의 모종의 협의를 통해 기사 임명권을 얻게 되었고, 에단은 약조대로 휴고와 가토를 정식 기사로 임명했다.
예외적인 일이었다. 가주가 아닌 자가 기사 임명을 하다니.
기사들 사이에서도 많은 말이 오갔다.
하지만 빈센트에게는 그 어떤 반론이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블란테에서는 빈센트가 곧 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휴고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는 했다.
하인 출신 새내기가 과연 어떠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지. 단순히 에단의 변덕에 혜택을 얻은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학생들과 기사들 모두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에단은 건물 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에밀라가 있을 장소는 예상이 갔다.
아카데미의 접견실은 하나이니까 빤하지.
에단이 계단을 오르고 있자, 페온이 말을 걸었다.
― ...그 녀석은 위험한 놈이다.
'알고 있습니다.'
― ...알면서도 그 아이를 그렇게 두고 왔단 말이냐?
'제가 보기엔 휴고도 위험한 놈입니다.'
당연히 지금의 휴고라면 렉사르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렉사르는 휴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에단은 휴고와 렉사르를 붙여 둔 것이었다.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진 녀석이니까.'
렉사르라는 존재 자체가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리고 그렇기에 휴고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이기도 했다.
휴고에게는 스승이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스승이 필요가 없는 존재다. 휴고의 가장 큰 장점은 야성에서 비롯된 본능이니까.
'지금이라면 야수화를 해도 상대하기 힘들겠지만.'
운이 좋다면 보다 일찍 야수화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래라면 에단이 직접 도와주는 게 맞겠지만....
'귀찮아.'
일일이 수준을 맞춰 주면서 상대하는 일은 에단과 맞지 않았다.
'여차하면 네이드도 있고.'
아무리 렉사르가 요주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네이드와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에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크흠, 크흠."
에단이 목을 가다듬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다수 보였다.
에밀라, 리사, 빈센트, 첸까지.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늦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에단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빈센트가 미간을 좁혔다.
"건방지구나."
"죄송하게 됐습니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오느라."
에단은 빈센트 앞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산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빈센트의 경지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괴물이군.'
에단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내적으로 에단은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다.
아직 부족한 게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단에게는 마스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에단의 경지가 빛바랜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와 죽은 나무의 기운을 흡수한 에단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안정된 상태였다.
말없이 에단을 지켜보고 있던 빈센트가 눈살을 좁혔다. 얼굴이 굳은 것은 첸도 매한가지였다.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에단에게 물었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 온 거냐?"
"어디서 잠깐 수련 좀 하고 왔습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대꾸하자, 빈센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빈센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무표정을 고수하던 첸의 얼굴에도 동요가 생겨났다. 에단이 가문을 떠난 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에단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지금 에단이 이룩한 경지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해명을 요구하는 빈센트와 첸의 시선을 느낀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명할 수도 없고.'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아버지와 첸이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능청스럽게 자리에 앉은 에단이 다리를 꼰 채 주변을 둘러봤다. 리사와 에밀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에밀라는 안도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리사는 짜증을 억누르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빠 보니까 좋냐?"
"...뒈질래?"
"어허, 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 쓸래?"
까득―
리사가 낮게 이를 갈았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에밀라가 눈을 끔뻑였다.
'...정말 남매지간이긴 하구나.'
그것도 모르고 예전에 오해했던 일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얘기는 어디까지 했습니까?"
에단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담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빈센트의 눈이 가라앉았다.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다. 한마디 물으마."
"편하게 말씀하시죠."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별로 꾸미는 건 없습니다. 감히 저에게 엿을 먹이는 놈들의 골통을 부숴 버렸을 뿐이죠. 그게 블란테의 방식 아닙니까?"
"...."
말을 듣던 빈센트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태연했다.
"아버지께도 좋은 기회 아닙니까?"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회? 어디 한번 지껄여 보거라."
에단의 말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빈센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언제까지 변방에서 방벽 노릇만 할 겁니까. 그렇게까지 맹약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겁니까?"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표정이 굳은 것은 첸도 매한가지였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이제는 설득과 협상의 영역이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이미 저희는 너무 많은 견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저도 알고,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모두를 적으로 돌려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 이건 기회입니다. 명분은 저희에게 있죠."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냐?"
빈센트의 말에 리사와 에밀라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에단이 미소를 지우며 표정을 굳혔다.
"두려우신 겁니까?"
"두려워? 블란테가 전쟁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빈센트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대답은 에단이 기다리고 있던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아무리 맹약에 묶여 있다고는 하나, 뒤통수를 얻어맞고 넘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말해 보거라."
"간판만 좀 빌려주시죠."
에단이 벌이려는 일은, 블란테라는 간판만 있으면 충분히 할 만했다.
◈ [141화] 야수의 눈 (1)
블란테의 맹약.
철혈의 사자에게 채워진 목줄.
'나도 잘 몰라.'
그 맹약에 관해서는 에단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맹약에 대한 떡밥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
블란테의 맹약은 가주에게 국한되어 있었고, 굉장히 편의주의적인 약조였다.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말뿐인 약조.
하니 에단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에단이 해야 할 일은 블란테라는 이름을 십분 활용하는 것.
'신의 따위는 필요 없지.'
에단은 페온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었다.
블란테의 맹약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언급하면 무언가 반응할 줄 알았지만, 페온은 침묵을 유지했다.
'흐음.'
페온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추측이 아닌 확신에 가까웠다. 그간 페온이 내뱉었던 말들은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으니까.
그런 페온을 낚아 내기 위해 여러 미끼를 뿌렸지만, 페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뭐, 시간은 많아.'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페온은 에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해를 끼칠 만한 이유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에단은 말없이 고민에 잠겨 있는 빈센트를 바라봤다.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에밀라와 리사는 그 고요한 침묵 속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빈센트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뭐지?"
"계획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의뭉스러운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끝까지 본색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더냐?"
"본색이라뇨. 누가 보면 제가 아버지에게 해를 끼치는 줄 알겠습니다. 정말로 별거 없습니다. 이게 다 가문의 위상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라서요."
에단이 말을 내뱉은 그때, 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이 터져 나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빈센트는 대번에 이 굉음의 주범이 누군지 알아챘다.
'렉사르.'
빈센트의 표정이 굳었다.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에단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말이냐. 지금 더 늦으면...."
"휴고는 그런 막돼먹은 망아지한테 죽을 정도로 형편없는 놈이 아닙니다."
빈센트는 에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하에 대한 애정은 인정한다. 그것이 바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의 덕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만함은 다른 문제였다.
렉사르는 위험했다. 무력이 아닌 위험도로만 따지면 블란테에서 가장 위험한 녀석이 렉사르였다.
빈센트가 지그시 자신을 노려보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혹시 의심되시면 내기 한번 하시겠습니까?"
"...내기?"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검을 들었다. 검집 없이 덩그러니 있는 검이었다.
빈센트와 첸의 시선이 돌아갔다. 처음 에단이 들어왔을 때부터 눈에 밟히던 물건이다.
예사롭지 않다.
딱 그 표현이 옳았다.
"검 한 자루만 주시죠."
에단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듯 에단에게 물었다.
"검? 네 손에 들린 것도 검이 아니더냐?"
"검이기는 하죠."
조금 시끄러운.
에단은 말을 삼켰다. 지금도 카이나는 에단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제 성검의 쓸모는 다했고.'
물론 추후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나, 성검의 용도는 다른 데에 있었다.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기는 안 하시는 겁니까?"
"...."
* * *
절그럭.
쇠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거친 목소리. 렉사르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토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통제했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 교전이 벌어지는 것은 확실했다.
기사들도 말릴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직계 혈족 간 싸움도 말리지 않는 것이 블란테다.
불만이 있으면 힘으로 푸는 것이 바로 블란테의 방식이었고, 오랜 시간 수습 기사 생활을 해 온 가토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학생들을 현장에서 떨어트린 가토가 주변을 둘러봤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학생들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가토의 얼굴은 학생들보다도 어려 보였고, 그런 녀석이 자신들을 통제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가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을 수행했기에, 학생들은 반항하지 못한 채 가토의 통제를 따랐다.
가토가 학생들의 정리를 끝낸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엔 블란테 진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토, 조금 살 만한가 보지?"
"도련님 뒤에 붙어 다니면서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하긴 어떻게 얻은 기사직인데 말이야. 큭큭큭."
대놓고 들리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들. 하지만 가토의 안색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눈 하나 까딱이지 않는 가토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기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토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한 삶은 아니었다.
에단과 함께하면서 보낸 시간은 고됐고, 그 고된 삶은 가토의 양분이 되었다. 가토가 싸늘한 눈초리로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들의 실력은 훌륭했다. 블란테의 기사답게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같잖네.'
가토가 느끼기에는 같잖게 느껴졌다. 가토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저따위 말을 듣는 것보단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남자.
저자가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가토는 휴고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난입할 생각이었다.
'잘해라.'
도련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가토가 말을 삼켰다.
렉사르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앞의 하룻강아지가 지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송곳니였다. 그래서인지 황당하기까지 했다.
'저런 녀석을 교육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실소가 흘러나왔다. 렉사르가 휴고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봐주도록 하지."
"음.... 죄송합니다. 별로 내키지가 않네요."
렉사르는 한 차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휴고의 시선이 렉사르의 손을 따라갔다.
"도련님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아서."
"...명을 재촉하는군."
렉사르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그것이 전투 개시의 신호탄이었다.
후웅!
렉사르의 품에서 톱날 검이 빠져나와 휘둘러졌다. 마나는 서려 있지 않았다. 렉사르 나름의 관용이었다.
휴고가 가볍게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하자, 검의 궤도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하고 거칠었다.
렉사르의 야성이 느껴지는 공격.
휴고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걸 본 블란테 진영 측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상대가 안 되잖아?"
"훈련은 안 하고 도련님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비웃음도 있었지만, 몇몇 이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저 녀석은 뭐지? 실력은 괜찮은데?"
"마구간 지기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휴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칼날의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려나?'
뻑!
휴고의 발끝이 렉사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타이밍을 재다가 던진 발차기다 보니 큰 대미지를 기대하진 않았다.
렉사르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는 걸 본 휴고가 상체를 숙여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타닷!
짐승처럼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렉사르의 품에 들어간 휴고가 팔을 가격했다.
렉사르도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휴고가 다가오는 순간에 맞춰 칼을 휘둘렀지만, 휴고는 물 흐르듯 공격을 피해 내며 팔을 쳐 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유연성과 반사 신경이었다.
검을 놓친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사이 휴고는 무기가 꺼내지기 전에 달려들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근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먹질이었지만,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흉악했다.
렉사르의 누런 동공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휴고의 주먹을 좇았고, 그러는 한편 반격을 준비했다.
차르르륵.
소름 돋는 쇳소리에 휴고가 순간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사슬낫을 꺼내 든 렉사르가 거리를 벌린 휴고를 바라보며 웃었다.
"감이 좋구나, 꼬마야."
"...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낫 부분이 아닌, 뒤쪽의 사슬만 던졌을 뿐인데도 강력함이 느껴졌다.
휴고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거친 심장 박동에 몸속의 피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감각이다. 휴고가 낮게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를 식혔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돼.'
렉사르는 강했다. 잡생각을 한다면 순식간에 수세에 몰릴 게 분명했다.
다시 상체를 숙인 휴고는 순간적으로 질주했다. 휴고가 달려 나가자, 사슬이 휴고의 앞을 가로막았다.
휴고가 기민한 몸놀림으로 사슬을 모두 피해 냈다.
"잡았다."
렉사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슬의 끝자락이 휴고의 발을 붙잡은 것이다.
"후읍!"
하지만 휴고는 멈추지 않았다. 숨을 들이켰다. 복압을 단단하게 잠그고 그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차르르!
쇠사슬이 딸려 왔다. 사슬의 무게가 더해진 휴고의 발이 렉사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다.
쾅!
괴성과 함께 지면이 움푹 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분명 하인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어?"
기사들은 휴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하인 출신, 그것도 마구간 지기였다는 것 정도.
같이 수련했던 수습 기사들의 말로는 체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했다. 체력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지만, 체력만 뛰어나서는 쓸모가 없었다.
한데 정작 눈앞의 휴고는 검 하나 쥐지 않은 채 렉사르와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
입을 꾹 다문 채 휴고를 노려보는 렉사르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스스스.
휴고는 렉사르의 주위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는 걸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위험한데.'
휴고의 예민한 본능이 경고했다. 이런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지금껏 교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운에 가까웠다.
렉사르는 휴고의 신체 능력을 예상하지 못했고, 휴고는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제 렉사르는 더욱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풍겨 오는 살벌한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유가 뭐지?'
딱히 긴장되거나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뛰며 분노가 치밀었다.
휴고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에단이 건네주고 간 작은 보석 파편이었다.
'밀린다 싶으면 이걸 부숴.'
에단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써야겠지.'
지금이 아니면 사용할 기회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휴고가 한숨을 내쉬며 검은 보석 파편을 움켜쥐었다.
악력이 가해지자 검은 파편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휴고에게 녹아들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순간 휴고의 눈이 누렇게 물들었다. 렉사르의 눈과 매우 흡사한, 짐승의 눈이었다.
"저 녀석 설마...!"
지켜보고 있던 가토가 당황해하며 네이드를 바라봤다. 저 모습은 가토가 야수화할 때의 모습이었다.
"잠시 지켜보도록 하죠."
네이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휴고가 야수화를 사용한 것에는 에단의 지시가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우선 지켜보는 게 옳았다.
'도련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 [142화] 야수의 눈 (2)
휴고는 렉사르에게 패한다.
정해진 사실이었다. 에단이 준 것은 작은 마석 파편. 흡수의 의미도 없는 미세한 파편이다.
'죽은 마나에 반응하니.'
휴고의 야성이 드러날 것이다.
'완벽한 야수화가 될지 반쪽짜리일지는 모르지만.'
에단에게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떻게 되든.'
렉사르는 폭발한다. 에단이 한 내기는 승리를 점치는 게 아니었다.
'렉사르에게서 살아남는 것.'
그 정도면 충분히 휴고의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쾅! 콰광!
굉음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에단이 바지를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보실까요?"
싸움 구경은 해야지.
* * *
휴고는 완전히 야수화가 되지는 않았다. 외적인 변화는 누렇게 물든 동공, 그리고 돋아난 어금니가 전부였다.
이전처럼 울부짖거나 야성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그저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짜증이 치밀 뿐이었다.
'...뭐지 이건?'
이전의 야수화와 달라진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휴고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이전처럼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 생각하고 판단을 했다.
휴고가 가늘게 뜬 눈으로 렉사르를 응시했다.
움직임이 멎은 렉사르에게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산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휴고는 두렵지 않았다.
두근두근.
오히려 호승심이 생겼다. 속이 들끓는다. 휴고는 지금 느껴지는 이 기운이 바로 '마나'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렇게 쓰는 건가?'
탓!
한 번의 도움닫기로 휴고는 렉사르의 앞으로 이동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말도 안 되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휴고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강철 같은 손톱과 이빨로 적을 물어뜯으려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휴고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슉, 슈슈슉!
휴고가 주먹을 뻗었다. 군더더기가 없는 날카로운 주먹질이었다. 마치 에단이 펼치던 펀치 콤비네이션과 흡사했다.
경로를 예측하는 공격, 피해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렉사르는 다시 한번 사슬을 휘둘렀다. 휴고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콰직!
휴고가 사슬을 지르밟았다.
"다 보고 있습니다."
"...건방지구나."
스스스.
렉사르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사슬이 마치 춤을 추듯 움직였다. 휴고는 그 모습을 두고 보지 않았다.
휘릭.
휴고의 몸이 회전하며 렉사르의 복부에 뒤차기를 꽂았다.
뻐억!
렉사르가 몇 차례 뒷걸음질 쳤다.
방금 전 기술은 에단이 애용하는 일격이었다. 휴고는 지금 에단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휴고의 동체 시력과 신체 능력은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렇기에 에단은 휴고에게 따로 격투술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휴고는 배우지 않고도 구사할 수 있었다.
'도련님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단이었으면 방금의 일격으로 렉사르를 제압했을 것이다.
렉사르가 후드를 벗었다. 그의 얼굴에는 빼곡한 상처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침음을 흘렸다.
누런 동공,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덥수룩한 검은 머리.
휴고보다도 더 짐승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너는 뭐냐."
"음.... 휴고입니다. 에단 도련님의 기사죠."
휴고는 스스로를 블란테의 기사가 아닌, 에단의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 점이 부끄럽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고가 에단의 전투 자세와 유사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 대답이야 천천히 들으면 되겠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렉사르가 품에서 또 다른 무기를 꺼냈다. 흉측한 외향의 사슬낫이었다.
"...후우."
휴고가 한 차례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굳혔다.
파밧!
그러고는 곧장 질주를 시작했다. 사슬낫이 휴고의 경로를 따라 날아갔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머리가 낫이라는 것이다. 공격로를 예측하기 힘들고 한 번의 실수가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렉사르의 공격은 사냥꾼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사슬낫의 추격을 피해 휴고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멍청하기는!"
마나가 어린 사슬낫이 휴고를 쫓았다. 경이적인 마나 컨트롤이었다. 휴고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홱!
그러면서 낫의 손잡이 부분을 낚아챘다. 렉사르의 눈이 커졌다. 휴고의 움직임이 마치 기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후읍!"
한 번 했던 행동이다. 휴고가 숨을 들이마시며 힘을 주자, 얼굴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렉사르도 이번에는 사슬을 놓치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휴고는 공중에 떠 있다는 점.
쑤욱!
애초에 휴고가 노린 점이 그것이었다. 공중에 떠 있던 휴고가 사슬을 잡아당겨 순식간에 접근했다.
휴고는 오른쪽 무릎을 들어 올렸고, 그걸 본 렉사르는 사슬을 놓으며 팔을 들었다.
콰직!
팔로 휴고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충격까지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렉사르가 뒤로 밀려났다. 휴고는 사뿐하게 지면에 착지하며 손을 털었다.
"...후우, 힘드네."
휴고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물러난 렉사르를 추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감이 좋군. 마치 짐승 같아...."
렉사르의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르르륵.
렉사르가 다시 사슬을 끌어당겼다. 전투가 재개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휴고가 자세를 갖췄다.
"거기까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좌중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휴고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
휴고의 부름에 에단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휴고에게 다가갔다.
"고생했다."
에단이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고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에단을 바라봤다.
"제가 무슨 개입니까?"
"아니었어?"
"...그게 무슨."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휴고를 뒤로한 채 에단이 몸을 돌렸다.
빈센트와 첸이 에단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도 적지 않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휴고의 동공이 누런색에서 본래의 흑갈색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빈센트는 눈썹을 미묘하게 꿈틀거렸지만, 감정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에단은 그 변화를 지켜봤다.
'아직은 지켜볼 생각인가.'
빈센트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까지 성장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누가 키웠는데요."
"허, 그렇게 말하니 더 욕심이 나는구나. 어떠냐, 흑사자 기사단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 이런 놈팡이 녀석 밑에 있지 말고 올 생각이 있나?"
빈센트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흑사자 기사단의 단원. 대륙 제일이라고 명성을 떨치는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토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방금 빈센트가 내뱉은 제의는 모든 기사들의 염원과도 같은 것 아니던가.
가토는 복잡한 마음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하지만 휴고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아니요. 저는 에단 님 밑에 있겠습니다."
"호오.... 따로 이유가 있더냐?"
빈센트의 물음에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에단 님 밑에 있는 게 더 좋아서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휴고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으셨죠? 제의를 하려면 그런 것보다는 다른...."
에단과 빈센트, 그리고 첸의 시선이 돌아갔다.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렉사르가 이를 갈면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멋대로 여기서 끝내려고 하십니까?"
렉사르가 거친 음성을 토해 냈다. 격렬한 분노가 그의 목소리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빈센트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첸을 호출했다.
"첸."
"네, 가주님."
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할 때, 에단이 팔을 들어 첸을 만류했다.
"잠시만요."
"지금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제가 하죠."
에단이 미소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가볍게 목을 풀며 렉사르에게로 나아갔다.
첸과 빈센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에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추게 된다면 힘에 취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잘못됐다. 지금의 렉사르는 위험했다.
"아빠. 저건...."
리사도 얼굴을 굳혔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고, 상대를 가늠할 수 있다면 렉사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을 터.
하지만 반대로 휴고는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아들놈 밑에 있겠다더니 걱정은 안 되느냐?"
"...아, 도련님이요?"
빈센트의 물음에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제가 보기에 제일 걱정이 필요 없는 사람이 도련님인 것 같습니다."
휴고의 눈에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마치 에단이 위험해 처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시험해 보는군.'
세계수의 힘까지 흡수한 뒤, 힘을 휘두르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몸이 근질거렸는데 적당한 상대를 만났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뿔이 잔뜩 났을까?"
비아냥거리는 에단의 어조에, 살벌한 눈빛이 그의 얼굴로 꽂혔다. 렉사르는 다시금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이구, 얼굴에 흉터도 많은데 구기니까 살벌하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크아아아아!"
렉사르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광폭한 마나가 터져 나왔다. 가만히 지켜보던 에단이 히죽 웃으며 검을 쥐었다.
'힘 좀 써 볼까?'
― ...엿 같은 새끼.
카이나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에단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앞발을 내디뎠다.
후웅!
허리가 비틀리며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함께했다. 에단이 마나의 편린을 끄집어냈다.
그가 느끼기에는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후우웅!
이성을 잃은 것처럼 달려들던 렉사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그의 본능이 경고했다. 당장 자리를 피해야 했다.
거대한 해일이 자신을 덮치고 있었다.
'...이걸 피할 수 있나?'
사람이 과연 자연재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렉사르의 발이 멎었다. 당황하기는 에단도 매한가지였다.
'...이런 옘병.'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일부분을 끄집어냈다고 생각했건만, 그 일부의 여파가 이 정도일 줄이야.
저 마나의 해일을 방치하면 아카데미의 상당수가 증발하고 말 터였다.
에단이 질주했다. 순식간에 반대편에 도달한 에단이 렉사르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너는 꺼져 있어."
마치 짐짝을 대하듯 무심하게 말한 에단이 그대로 렉사르를 멀리 던졌다.
훽!
렉사르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에단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 들었지만, 어느새 다가온 빈센트와 첸이 에단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버지?"
빈센트가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이르구나."
첸이 나서려 하자, 빈센트가 팔을 뻗어 막고는 한 걸음 내디뎠다.
"됐네. 나도 가끔은 몸을 풀어야지."
키이잉.
빈센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히기 시작했다.
◈ [143화] 피는 속이지 못한다 (1)
키이잉.
빈센트의 칼집에서 검이 뽑혔다.
해일 같은 마나가 덮쳐 오고 있음에도 빈센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정작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포악했다.
마나의 해일보다, 검 하나 들고 있는 빈센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주변에 있는 이들의 숨을 더 막히게 만들었다.
'...괴물이 따로 없군.'
이런 괴물이 원작에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단 말인가?
문장의 나열로 보는 느낌과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감각은 천지 차이였다.
후웅.
빈센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기세 좋게 검을 휘두른 게 아니다. 그저 여유롭게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뚝.
하늘과 땅의 위치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구역감이 치밀었다.
후우웅!
마나의 해일이 허공으로 역류했다. 마치 역천(逆天)하는 폭포를 보는 것 같았다. 막대한 기운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었다.
이게 바로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빈센트의 진면모라고.
― ...이번 가주는 꽤나 쓸 만한 놈이구나.
페온의 퉁명스러운 말에 에단은 기가 찼다.
'이게 쓸 만한 수준이라고?'
마스터의 경지를 얕게 본 것은 아니었다. 편법을 이용했다고는 하나 에단도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였다. 증명은 결국 결과로 하는 것이고, 에단은 지금껏 결과를 창출해 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 누가 와도 기가 눌린 적이 없던 에단은 지금 처음으로 압도되는 감각을 느꼈다. 피부가 저릿했다.
그 괴물 같은 '지하'의 리치를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 ...페온, 너보다 강하지 않냐?
― 닥쳐라.
카이나와 페온이 티격태격하며 나누는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신을 되찾은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만있으셨어도 제가 정리했을 텐데요."
"...고얀 놈."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검을 이용해 적절하게 마나를 방출하고, 세계수의 목걸이를 활용하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설령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많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빈센트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사태를 정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
하지만 방금 느낀 압도감을 떨쳐 내려는 듯 에단이 툴툴거리면서 말하자,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빈센트가 에단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한 경지. 그리고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마나의 총량.
모든 것이 놀라웠다.
'더군다나 저 검.'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에단이 어떤 경로로 저 검을 손에 넣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만한 물건을 들고 있으면서 왜 검이 필요하다는 거지?"
에단이 내기의 상품으로 원한 것은, 검 한 자루였다. 저런 검을 들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검이 필요하다니 의아함이 들었다.
"아, 이거요?"
에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애 줄 거예요."
"...뭐라고?"
빈센트가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 ...뭐라고 이 새끼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이나의 걸걸한 욕설이 에단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 * *
렉사르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첸이 무력을 행사할 것도 없었다.
순순히 제압당하면서 별다른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번들거리는 안광으로 에단과 휴고를 노려보며 사라졌다.
'뭘 꼴아 봐?'
당연히 에단은 콧방귀를 뀌며 넘어갔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에밀라와 크러쉬가 나서서 학생들의 인도를 시작했다.
크러쉬는 최선을 다해 에단의 눈을 피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애쓰는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조금 골려 주고 싶지만.'
시간을 할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카론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 귀여운 동생."
에단이 히죽 웃으며 다가가자, 카론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최대한 에단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에단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으음, 형 말을 개무시하는 건가?"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파고들자, 카론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내, 내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 잘 들리나 보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그 모습을 본 카론은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아까는 바빠 인사도 못 해서 말이야. 어때, 요즘 살만은 해?"
히죽히죽 웃는 에단의 말이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카론은 렉사르에게 에단의 정보를 넘겼던 것이 내심 걸렸다.
"모, 못 지내지는...."
"너 그런데 말이 짧다?"
"...않았어요."
"그래, 보기 좋네. 오랜만에 리사 얼굴이라도 보러 온 거야?"
"그 싸가지 없...."
카론의 시선이 리사에게로 돌아갔다. 멀리서 리사가 사나운 눈초리로 카론을 노려봤다.
"...지 않은 누나가 생각나더라고요...."
카론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리사는 그에게도 버거운 존재였다. 리사의 실력은 가문에서도 유명했다.
리사의 검술 실력은 옛적에 카론을 넘어섰고, 실력주의가 만연한 블란테이기에 카론은 리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껄끄러운 인간이 둘이나....'
카론은 최대한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에단 오빠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오빠라고?'
리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카론은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리사는 모룬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오빠라는 호칭을 붙인 적이 없었다.
그련 리사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오다니.
리사가 다가서며 카론을 지그시 바라봤다.
"카론도 있네?"
'...개 같은 년. 그래도 동생인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그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리사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에단보다 더 무서웠다.
"어, 어.... 리사 누나....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오랜만이네. 그런데 너 실력은 좀 늘었어?"
"시, 실력? 어떤 실력...?"
"내가 뭐를 물어보겠어? 당연히 검술 실력을 묻는 거지."
카론도 머저리가 아니었다. 지금 리사는 비아냥대고 있는 거다.
속에서 울분이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건방진 누나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으, 응.... 조금 늘긴 했어."
"그래? 잘됐네.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실력은 느는구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뭐야 얘네?'
대화가 아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카론을 좀 골려 주려고 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을 갈구는 실력은 에단보다도 리사가 뛰어났다.
― ...정말 네 핏줄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 잘못된 선입견이다. 카이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가자."
"아, 그래. 또 보자, 카론."
리사가 획하고 몸을 돌렸다. 카론은 부들부들 떨면서 에단과 리사를 노려봤다.
'...개 같은 연놈들.'
하지만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때 멀어지던 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카론, 방금 나 욕한 거 아니지?"
"...어?! 아니야! 내가 욕을 왜 해!"
카론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리사가 물끄러미 카론을 바라봤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해? 갑자기 귀가 가려워서 물어본 건데."
"저, 정말 아니야. 내가 왜 네 욕을 하겠어."
"그렇지? 하나뿐인 귀엽고 멋진 누나인데 말이야. 그럼 갈게."
리사가 팔을 흔들며 멀어졌다. 카론은 안도감을 느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묘한 시선을 느낀 카론이 주위를 둘러봤다. 카론이 고개를 들자, 기사들이 고개를 피했다.
기사들의 시선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카론은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제, 제기랄....'
에단과 리사의 대한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 * *
방금 보여 줬던 빈센트의 모습에 에밀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검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권태로운 움직임. 아래에서 위로 검을 드는 그 행위만으로 막대한 마나를 모두 소멸시켰다.
압도적인 위세를 가진 마나였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고 죽음을 각오한다고 한들 그 마나의 해일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실력을 과신한 적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비관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에밀라는 최근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꽃이니, 은발의 여검사니, 수많은 별호가 에밀라를 따라왔다. 많은 칭송과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랐다.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객관적인 시선을 키웠다.
학생들은 저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에밀라의 재능은 그 어떤 학생들보다 뛰어난 편에 속했다.
20대 나이에 이룩한 최상급이라는 경지.
교만에 빠진 적은 없었으나,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조급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에밀라는 지금 조급함을 느꼈다. 에단은 그녀보다 어렸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멀어졌다.
마스터까지 한 발자국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과연 한 발자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빈센트를 떠올리자 오금이 저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빈센트의 일 합도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에 허탈감이 들었다. 학생들을 인도하면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한 학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가 순간 당황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교수가 됐으면서 감정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에밀라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일단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 있겠습니까?"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에밀라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의 상황 정리가 끝나자, 에단 일행과 빈센트와 첸, 그리고 남은 교수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계획을 설명드리죠."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쏠렸다. 따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들 아카데미의 중축이 통째로 사라진 사실은 알고 있죠?"
에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유지 인원도 없었다.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직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뭐 어디 적당한 세력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겠죠."
직설적인 에단의 말에 에밀라와 리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카데미의 존속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권력 다툼이 시작된다면 아카데미는 본질을 잃게 된다.
균등한 기회는 사라지고, 차별은 더욱 강화될 게 분명했다. 에밀라는 부패한 곳에 교수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른 거죠."
시선이 일제히 빈센트에게로 쏠렸다. 빈센트는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내가 너를 도와야 할 이유는?"
빈센트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블란테의 위상은 이미 드높았다. 구태여 아카데미에 발을 들여 모두의 견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빈센트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리사가 죽을 뻔했다니까요?"
쨍그랑!
빈센트가 들고 있던 찻잔이 산산이 조각났다.
◈ [144화] 피는 속이지 못한다 (2)
모두의 이목이 빈센트의 찻잔에 쏠렸다. 찻물이 쏟아지고 파편이 비산했지만 옷이 더렵혀지지 는 않았다.
빈센트가 마력으로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태연하게 마력으로 물과 파편 조각을 태워 버리고 무심하게 물었다.
"...계획이 뭐지?"
― 저거 뭐냐?
― ...딸 사랑이 지극하군.
카이나가 황당해하며 말했고, 페온도 거기에 첨언했다.
'미치겠네.'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그럼에도 씰룩거리는 입술이 티가 났는지 빈센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에단이 멋쩍은 헛기침을 내뱉다가 빈센트를 바라봤다.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설명드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은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다.
"들어와."
에단의 말에 문이 열리며 드레이가 나타났다. 드레이의 굳은 얼굴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뭘 쫄고 있어?"
에단이 씨익 웃으며 손짓하자, 드레이가 어색한 발걸음으로 에단에게 다가왔다.
리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드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빈센트는 흥미가 있어 보였다.
"이 녀석은 누구지?"
"제가 가르치는 학생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조커 카드이기도 하죠."
"제대로 설명해 보거라."
에단은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한 번의 설명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드레이."
"...네."
"보여 줘 봐."
에단의 말에 드레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드러내고 싶지 않던 힘이었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아, 잠깐."
막 성력을 방출하려는 순간 에단이 저지했다.
드레이가 눈을 끔뻑거리며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드레이에게 검 한 자루 건넸다.
"제가 이 검을 줄 사람이 있다고 했죠?"
좌중을 둘러본 에단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자, 보여 줘."
진짜 성자의 힘을.
드레이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성력을 끌어올렸다.
시작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레이는 반쪽짜리이지만 분명한 성자였다.
그가 뿜어내는 성력은 일반적인 성직자와는 궤를 달리한다.
성력이 꿈틀거리며 몸속을 질주하기 시작하자, 드레이의 머리칼이 광채에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성검의 힘이 더해졌다. 타오르는 빛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짙어졌다. 순간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빛이 발광했다.
리사와 에밀라가 눈을 가렸다. 하지만 빈센트와 첸, 에단은 확실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툴툴거려도 말은 잘 들어주신단 말이야.'
에단은 드레이에게 검을 건네기 전, 카이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좀 도와주시죠.'
물론 카이나는 걸걸한 욕설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드레이의 모습을 보니, 말은 그렇게 해도 확실하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성검의 위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엄청난 회복력, 그리고 마수나 사특한 존재를 상대할 때 얻는 막강한 위력.
'지금은 크게 끌리지 않는 점들이지.'
회복력.
에단은 자신의 몸을 알고 있었고, 얻은 힘을 알았다. 에단의 몸에는 대해 같은 마나가 잠재되어 있었다.
마나의 총량을 따진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인물의 마나를 더해도 에단과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에단은 지금 숨 쉬고 있는 세계수나 매한가지였으니까.
'그게 꼭 무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빈센트를 보고 다시금 느꼈다. 가야 할 길은 멀었다. 그렇다고 그게 에단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더군다나 신체 능력, 내구력까지 크게 상승했다.
'성검'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제일 큰 건 사실....
너무 시끄러웠다. 드레이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저 표정의 원인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증폭된 신성력 때문도 있겠지만.'
난처함과 당황함이 공존하는 얼굴이 된 데에는 카이나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았다.
에단은 고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돌렸다. 빈센트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에단이 믿고 있는 제일 큰 후원자가 이거였다.
"성자가 저희를 지지합니다."
"...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빈센트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 흐른 시간에 비해 에단이 몰고 온 폭풍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아카데미, 그리고 성자.
가벼운 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신성 왕국은 대륙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대륙의 국교는 유일신 하나였고, 그 유일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신성 왕국이었다.
일반 시민에게나 귀족에게나 할 것 없이 막대한 입김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무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피바람이 불겠군.'
빈센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에단이 가지고 있는 패가 너무 강한 탓에 대륙 전체가 흔들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빈센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에단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자, 이제 됐어."
에단이 드레이에게 손짓하자, 흘러넘치던 신성력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뭐, 이건 나중에 뒤통수칠 때 이용할 거고.... 그전에 초석이 더 필요하겠죠?"
"초석이라.... 한번 말해 봐라."
빈센트는 이제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약속?"
"네. 아카데미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불만을 억누르는 게 한계에 다다랐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에단이 에밀라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그림자 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학생이라도 그래요. 개판 오 분 전인데 뭣 하러 다닌단 말입니까?"
에단이 주변을 훑어본 뒤 말을 이었다.
"학생들이 혹할 만한 보상을 줘야죠.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식시킬 만한 보상."
"...."
에단이 빈센트를 응시했다.
"애들 한번 가르쳐 보시죠."
"허, 블란테가 그래야 할 이유가...."
빈센트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려 하자, 에단이 리사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리사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벌떡 일어나 빈센트의 곁에 다가갔다.
"아, 아빵...."
"...."
빈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음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 * *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블란테는 아카데미에 잔류해 있기로 했다.
많은 수의 기사들은 필요하지 않았기에 일부는 가문으로 복귀하기로 결정됐다.
그렇다고 당장 복귀하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지금 상황을 세간에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복잡한 일이 많겠군.'
이제부터는 진짜 귀찮고 피곤한 일들의 연속이다.
'로만의 관한 것을 언급할 수도 있지만.'
마크가 사라진 이상 로만의 가문에서 말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용해 먹으려는 새끼들은 있을 수 있지만.'
블란테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세력들이 이번 기회에 승냥이처럼 달려들 수도 있었다.
정치권은 명분 싸움이다. 정치에 문외한인 에단도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놈들은 처절하게 응징할 거고.'
에단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원작 주인공처럼 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상황을 뒤집어엎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공표해야 한다. 에밀라와 크러쉬, 그리고 에단이 학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가 됐다. 하룻밤 사이에 아카데미의 기류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쿵!
하지만 금세 적막에 휩싸였다. 기사들의 위압감에 기가 눌린 것이다.
단상 위에 먼저 에단이 올라섰다. 유려한 언변 따위는 구사하지 못한다. 에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둘러봤다.
에단의 시선이 지나가자,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학생들을 둘러보던 에단의 눈에 밟히는 학생이 있었다.
'잘 지내나 보네.'
다비였다. 다비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지은 채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또래들도 보였는데, 모두 다비를 바라보며 쩔쩔매고 있었다.
'맹랑한 꼬맹이.'
에단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학생들을 바라봤다.
"나를 모르는 녀석들은 없겠지? 자, 다들 잘 지냈나?"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에단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아카데미 다니기 뭐 같아?"
에단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에단의 언행이 너무 가볍고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해. 갑자기 교수와 직원들이 잠적해 버렸으니까. 이게 뭔가 싶고, 당장 가문에 돌아가고 싶겠지.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
"내가 그래도 명색이 너희들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방치할 수는 없지. 너희들은 결국 여기에 배우러 온 거잖아."
에단의 말에 한 학생이 용기 내어 물었다.
"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에단과 학생들의 시선이 그 학생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히죽 웃었다.
"좋은 질문이다. 뭘 어떻게 하겠냐고? 전과 다를 거 없어. 책임감 없는 쥐새끼보다 양질의 교육을 시켜 주마."
"쥐, 쥐새끼요?"
"그래 쥐새끼. 황당하지 않아? 아무런 대비 없이 사라진 학장과 직원들. 아, 걔네에게 희생당한 이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흑...."
에단의 말에 한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메드의 곁에 있던 학생이었다.
고메드가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이미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멀쩡하던 녀석이 이유 없이 폭사당할 리가 없지."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근거를 댈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심의 씨앗을 뿌려 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게 곧 명분이 되고 지지가 되니까.
'꿀릴 것도 없고.'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다. 지지 세력도 충분하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빈센트가 흥미로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다시 학생들을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라. 책임은 교수들이 지니까. 우리가 양질의 교육을 시켜 주고, 보호해 주지."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걸 본 학생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에단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빈센트뿐이었다.
빈센트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에단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에단에게 말했다.
"...건방진 녀석."
"칭찬으로 알아듣죠."
빈센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상 위에 올라섰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빈센트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학생들을 훑어봤다. 어깨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학생들이 헛숨을 삼켰다.
"나쁘진 않군."
빈센트가 그렇게 칭하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간략하게 소개하지. 블란테의 수장, 빈센트 블란테다."
빈센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학생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145화] 묘한 기류 (1)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빈센트의 목소리는 좌중을 압도했다.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자의 등장이었다.
블란테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없었지만, 빈센트의 얼굴을 아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빈센트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대륙을 호령하는 사자들의 우두머리.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학생들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에단은 단상의 뒤편에서 휘파람을 불며 빈센트의 연설을 바라봤다.
'카리스마 지리네.'
확실히 가주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다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말 한마디로 모두를 휘어잡았다. 반론이나 의심의 목소리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에단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빈센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침묵하던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이곳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지?"
"...."
빈센트의 물음에 학생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함부로 입을 열만큼 담이 큰 자도 없었을뿐더러, 빈센트의 의중이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학생들을 주시하다 말을 이었다.
"이곳의 교육 방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수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기사는 검을 들어야 하고, 그 검은 피를 묻히며 날을 세우는 존재다."
블란테의 훈련 방식은 독특하다. 극히 실전과 가깝고, 그 방식을 지향한다.
마나 수련법도 그랬다. 블란테의 마나 수련은 전투 중 체득하는 것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다.
천혜의 수련 장소도 있었다. 해마다 몬스터가 범람하고, 기사들은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쓰며 실전을 경험한다.
그게 블란테가 철혈의 기사로 대륙에서 군림하는 이유였다.
학생들은 침묵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그런 자존심이 순식간에 뭉개진 것이다. 학생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학생들을 바라보던 빈센트의 시선이 순간 에단에게로 돌아갔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던 에단과 시선이 교차했다. 빈센트의 입꼬리가 조금 비틀렸다.
빈센트가 다시 학생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블란테가 고수하는 방식만이 모두 정답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빈센트가 내뱉은 말에 기사들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오히려 첸과 네이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빈센트가 저 말을 내뱉은 이유가 바로 에단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에단의 수련법은 기존의 수련 방식과 매우 달랐다. 독특하고 특이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블란테의 연무장에도 에단이 남기고 간 방식이 조금씩 차용되고 있었다.
당연히 뛰어난 효능을 보이고 있었고, 가주인 빈센트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바뀌지 않은 생각이 있다면."
스르릉.
맑고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빈센트의 검이 꺼내졌다.
검의 자태는 아름다웠다. 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가 보아도 뛰어난 명검이라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훌륭한 검이었다.
빈센트가 지면에 검을 밀어 넣었다.
"검에 있어서만큼은 블란테가 최고라는 것이다. 불만이나 의의가 있다고 한들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빈센트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희들을 가르치기로 한 이상, 너희들은 모두 최고를 꿈꿔야 할 것이다."
빈센트의 말에 학생들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인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학생들이 감격에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빈센트가 지금 공표한 것이다. 블란테의 검을 알려 주겠다고.
모두가 숭상하는 검술 명가의 검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학생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버지 말 한번 기똥차시네.'
예상보다 뛰어난 언변이었다. 빈센트 자체가 지닌 위압감으로 순식간에 학생들을 휘어잡았다.
조금 머리가 큰 애들이라면 이후의 파장을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학생들은 어렸다.
'그건 내가 나서서 해결할 문제이고.'
이제부터는 어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해야만 했다.
* * *
빈센트가 학장으로 취임했다.
물의를 일으킨 렉사르는 기사들과 함께 가문으로 복귀를 명받았는데, 예상외로 그는 고분고분하게 가문으로 복귀했다.
"너는 남아 있을래?"
에단이 카론을 향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카론은 거의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사양하겠습니다."
질색하는 표정을 바라보며 킥킥 웃음을 흘린 에단이 카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럼 조만간 또 보자."
"...."
카론은 말없이 대열에 합류했고, 절반가량의 기사들이 떠났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학생들이 가진 불만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블란테에게서 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검술을 주력으로 하지 않는 학생들은 불만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아카데미의 위상 자체가 상승하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었다.
'문지기의 존재는 크게 필요 없겠고.'
고메드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에단도 레벨린이 이 정도까지 잔혹한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고메드 같은 존재를 다시 뽑을 이유는 없지.'
고메드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편의주의적 전개를 위해 조형된 캐릭터였다.
별로 의미가 없는 캐릭터라는 소리였다. 소설적 과장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기왕 철문이 허물어진 김에 적당한 검문소로 바꾸면 될 노릇이고.'
당연히 그 역할은 당분간 블란테가 맡을 예정이다. 블란테의 상징인 검은 정복을 입은 채.
'도발과 홍보가 모두 필요하니까.'
방문하는 모두가 감히 아카데미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블란테를 도발하는 것일 테니.'
에밀라는 수업 스케줄 재구성을 담당했다. 학생들은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외의 일도 벌어졌는데, 생각보다 휴고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전 보여 준 전투.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앳된 얼굴이다. 나이도 학생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또래였다.
그런데도 그런 실력이라니. 학생들이 주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휴고는 멋쩍어하면서도 학생들의 질문을 들어 주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예요?"
"제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전부 도련님 덕입니다...."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대부분이 휴고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때때로 에단과의 관계를 묻는 학생들도 있었다.
가토는 근처에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뭔가 기분이 묘했다. 주목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렸다.
'...지금껏 고생은 내가 더 하지 않았나?'
가토가 피땀 흘리며 고생할 동안, 휴고는 침대에서 가만히 쉬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가토가 뾰로통한 얼굴을 한 채 휴고에게 다가섰다.
"야, 대련 한번 하자."
"대련?"
학생들의 시선이 가토에게로 쏠렸다. 둘의 대련은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휴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럼 저는 이만...."
휴고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학생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맴돌았다. 그때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저도 지켜볼 수 있을까요?"
"...대련을요?"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물어본 학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보고 싶어요!"
연쇄 작용으로 옆에 있던 학생들도 같이 대답했다. 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봤다.
"마음대로 해."
가토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학생들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쟤네 뭐 하고 있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어린애들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하는 짓들이 귀여워 보였다.
에단과 같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사가 물었다.
"...쟤네는 뭐야?"
리사의 물음에 에단이 잠깐 동안 말없이 둘을 바라봤다.
"동료."
"동료?"
리사가 눈을 깜빡이며 예상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에단이 이런 대답을 할 줄이야.
"왜, 이상하냐?"
"어. 엄청 이상해."
"그래도 내가 기른 녀석들이야. 너보다는 강할걸?"
"...장난해?"
리사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에단과의 실력 차이는 인정하는 바였지만, 리사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가토와 휴고는 또래로 보이는 나이대였다. 리사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대의 상대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우습게 보다가는 큰코다친다."
"오빠야말로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내기 한번 할까?"
에단이 휴고와 가토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이런 이벤트도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촉박하지는 않았다.
에단이 다가가자, 가토와 휴고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둘의 시선이 리사에게도 향했다.
'...예쁘다.'
둘 모두가 같은 감상을 느꼈다. 리사의 외모는 객관적으로 봐도 출중했다.
찰랑이는 머릿결, 날카로운 듯 보이면서도 맑은 눈빛, 아름다운 얼굴선,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약간 표독스러운 인상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인상이 오히려 리사의 매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훨씬 예뻐지셨구나....'
한창 수습 기사로 훈련을 하던 도중 연무장을 지나가던 리사를 본 기억이 얼핏 남아 있었다. 그때도 순간 넋을 잃었었다.
두 사람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뭣들 하냐?"
"아, 아닙니다."
가토가 정신을 되찾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흐음.... 누가 좋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가토야."
"네, 도련님."
"내 동생이랑 대련 한번 해봐."
"...네?"
에단의 말에 가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리사와의 대련이라니.
"왜, 무서워?"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가토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네."
그때 리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리사가 가토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단련 상태는 나쁘지 않네.'
옷 너머로도 단련된 육체가 느껴졌다. 수련을 게을리한 몸이 아니었다.
"우리 혹시 본 적이 있었나?"
"예전에 연무장에서 봤던 적은 있습니다. 리사 아가씨께서는 저를 못 봤겠지만...."
"어, 난 못 봤어."
날카로운 대답에 가토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사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오빠가 그렇게나 자랑하던 실력을 한번 볼 수 있을까?"
"...저야 영광입니다."
"그럼 됐네. 연무장으로 옮기자."
리사가 가토의 팔을 붙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토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동공이 떨린 것은 가토 혼자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휴고의 눈도 거칠게 떨렸다.
'...이 녀석들 봐라?'
에단이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 [146화] 묘한 기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