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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12

◈ [161화] 냄새가 나네 (1)

"그 시험 보도록 하지."

에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테이블에 팔을 걸치며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이름이?"

"...도란이라고 합니다."

"좋아, 도란. 용병 길드의 규율은 지켜야지. 내가 그렇게 몰상식하지는 않아."

에단이 사미라를 바라봤다.

"사미라, 시험은 보통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지?"

"보통은 시험용 임무가 따로 있습니다. 혹은 실력을 입증하는 경우도 있죠."

"시간을 허비하는 건 싫으니 후자로 택해야겠네. 실력은 어떻게 입증하면 되지?"

"보통은 담당관이 따로 있죠."

사미라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고 도란을 바라봤다.

"저 말이 맞나?"

"맞습니다. 하지만...."

후자를 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모난 돌은 정을 맞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심성이 뒤틀려 있는 탓에 신입의 객기를 좋게 보지 않았다.

평소라면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감히 용병 길드의 문을 박살 내며 난동을 부렸으니.

용병들은 그 누구보다 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용병'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높은 단합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허투루 움직일 수 없었다.

에단이 기세를 거뒀음에도, 에단과 휴고가 보였던 충격적인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저런 처참한 몰골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담당관이 누구야?"

에단의 물음에 용병들의 시선이 천천히 한쪽으로 몰렸다.

"...뭐, 뭘 봐, 병신들아!"

주목을 받은 용병 하나가 몸을 돌린 채 빠른 발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도란을 바라봤다.

"쟤야?"

"...."

수치심이 치밀은 도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등급을 원하십니까?"

"은. 나를 포함해서 애들 전부. 더 요구하는 건 없어."

에단이 담백하게 말하자 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권한에서 가능한 수준을 요구해서 다행이군요. 당신과 저 남성분은 실력을 입증했지만, 아무래도...."

"사족 그만 붙이지. 어차피 용병은 성과로 입증하는 것 아닌가?"

에단이 손가락을 이용해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결국에는 이게 중요하잖아."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 에단을 보며 도란이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가 없군요."

결국 용병이라는 족속들은 돈을 좇는 하이에나였다. 그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증명은 영지전에서. 그럼 되는 것 아닌가?"

'원래라면 들을 것도 없이 거절했었겠지만.'

에단은 무언가가 달라보였다. 도란이 바 테이블 아래에 손을 넣더니 은색 용병패를 꺼냈다.

"당장은 모든 인원에게 배포할 용병패가 부족하니, 일단은 이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이제 당신들의 신원은 용병 길드가 보증합니다. 용병단도 개설한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 주먹 용병단."

에단의 말에 도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이름의 뜻이...."

에단이 말없이 씨익 웃자, 도란이 헛웃음을 지었다. 용무가 끝난 에단이 몸을 돌렸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누구도 에단에게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 * *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다음날이 되자 단원들은 은색 용병패를 모두 수령할 수 있었다.

단원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용병패를 받아 들었다.

"저... 두목 님."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어안이 벙벙해서...."

동패도 아닌 자그마치 은패였다.

은패 용병은 세간에서 거의 수습 기사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물론 정식으로 기사 임명을 받은 평기사보다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노략질이나 일삼던 그들에게는 감개무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단원들은 그 자리에서 입증하거나 보여 준 것이 없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디까지 에단과 휴고였으니까.

"...모르겠다."

"저희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지금부터라도 수련을 더 해야 할 거 같은데...."

단원들이 그런 원초적인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다가왔다.

"좋은 고민을 하고 있구나."

단원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의 뒤편에서는 사미라가 살벌한 미소를 걸친 채 서 있었다.

"...사미라 님?"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며? 보아하니 몸은 조금 쓸 만한 것 같은데, 이제는 실전을 경험해야지 않겠어?"

"시, 실전 말씀입니까?"

"그래, 실전. 내가 애들 가르칠 짬은 아니지만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사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단원들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영지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대충 쓸 만하게 개조를 해 놔야지."

이어지는 사미라의 말에 단원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안 일어나고 뭐 해?"

밍기적거리는 단원들을 보며 사미라가 표정을 굳히려고 할 때, 에단의 목소리가 단원들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그러게. 뭘 하는지 모르겠네. 요즘 아주 살 만해졌나 봐?"

"히, 히익!"

그들에게 악몽을 선사해 준 목소리였다. 단원들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과거의 기억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에단이 팔짱을 낀 채 단원들을 바라봤다.

"왜? 하기 싫어? 하기 싫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대체 뭘 도와준다는 거지?'

'정상적인 건 아닐 거 아니야!'

그간의 경험으로 눈치가 빨라진 용병들이 잽싸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마, 맞습니다! 너무 감격을 받아서 잠깐 멍 때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첨가되지 않은 거짓말이었지만,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라도 넘어가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미라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애들은 괜찮네. 그럼 움직여 볼까?"

'어, 어디로 움직인다는 거지?'

'더는 가고 싶지 않아....'

마음은 그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단원들이 음울한 표정으로 사미라를 뒤따랐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얼굴이었다. 에단은 조소를 머금은 시선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단원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이제 대충 요구 사항은 충족한 것 아닌가?"

"...."

에단의 말에 칼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바뀌실 일은 없으시겠죠?"

"잘 아네."

"하아, 지금 바로 움직이실 생각인가요?"

"뭉그적거릴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죠."

칼센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자, 헨리가 다가와 에단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에단 님."

"왜."

"지금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네 빚 갚으러."

"...한니발 씨?"

에단이 무언의 긍정을 보이자, 헨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에단에게 말했다.

"에단 님, 그 사람은 진짜 위험한... 어라?"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겪어 온 에단의 모습과 한니발의 모습 중 과연 누가 더 위험하단 말인가.

"...."

헨리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와중에도 에단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꽤나 보는 눈이 많군."

"단번에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칼센의 목소리에는 책망이 섞여 있었다. 대놓고 일행을 응시하는 자들은 없었지만, 힐긋거리는 시선은 확실히 느껴졌다.

"뭐,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에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칼센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과의 대화는 하면 할수록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언변에 능하다거나 협상을 잘한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야.'

에단이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은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에단은 가진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자였다.

'아직 어린 나이임을 감안하면 미래가 두렵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덧 원하던 위치에 도착했다.

"호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엄청난 규모의 담장이었다. 과장을 조금 더한다면 성벽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확실히 돈을 바른 흔적이 있군."

담장의 입구에는 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도시의 병사들은 아닌 것 같았다.

"저택의 주인이 사비로 고용한 경비원들입니다."

"확실히 돈 많다고 자랑하는 게 눈에 보이는구먼."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최소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 어디 가서 기사 임명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고작 저택의 경비나 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에단이 팔장을 낀 채 저택 방향을 응시했다. 코끝을 스치는 미약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역시나인가.'

"에단 님."

에단이 시선을 돌리자 심상치 않은 헨리의 표정이 보였다.

'느끼고 있군.'

헨리의 뿌리는 세계수에 있었다.

비록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마나를 감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어떤 존재보다 예리하고, 예민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세계수의 힘을 융합하고 흡수한 것은 에단도 마찬가지. 에단에게도 익숙한 잔향이 느껴졌다.

'죽은 마나.'

레벨린과 엮여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담한 것 같았다.

* * *

"하하하! 한니발 자네 덕에 정말 웃음이 끊이지가 않는구먼."

"과찬이십니다."

한니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내 처음에는 자네를 의심했지만 괜한 의심이었어. 자네 말을 들은 이후 안 풀리는 일이 없으니 말이야."

"저는 단지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모든 일은 브릭스 백작님의 능력이십니다."

"자네가 그리 말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래서 이번에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마음이 급한 것은 이해합니다만,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보시죠. 아직은 적기가 아닙니다."

"흐음, 병력의 차이는 확연하지 않나? 자네도 알다시피 이 많은 병력과 인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많은 재화가 들고 있네."

"제가 어찌 그 사실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저 또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내 괜한 의심을 했어...."

브릭스 백작의 눈이 몽롱해졌다. 한니발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몽롱해진 브릭스의 눈을 바라봤다.

"걱정은 접어 두셔도 됩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백작님은 모든 것을 쥐게 될 것입니다."

"그래.... 나는 자네만 믿네...."

"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백작 님."

덜그럭.

찻잔을 내려 두는 동시에 한니발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한니발이 옷가지를 정돈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브릭스를 바라봤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게."

한니발이 냉소적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구역질이 치미는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한니발이 복도를 지났다.

'이 짓도 얼마 남지는 않았으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한니발은 귀가 많았고,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급함을 느껴서는 안 되지만.'

여유를 가질 때도 아니었다.

한니발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 [162화] 냄새가 나네 (2)

"칼센."

에단의 목소리가 심상치가 않았다. 칼센이 긴장한 기색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제 돌아가 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죠?"

"궁금하면 여기 있든가."

"...아닙니다."

정보 길드원의 본분과 자신의 안위 중, 칼센은 안위를 택했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득이 되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결국 죽으면 끝이지.'

칼센은 미련을 버렸다. 칼센이 움직이기 전 에단을 향해 말했다.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오냐."

에단의 대답에 칼센이 피식 웃더니 멀어졌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유동 인구가 없군.'

방금까지만 해도 바글거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리에는 스산함이 감돌았다.

'작업을 쳐 뒀어.'

죽은 마나의 기운.

결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산 자의 접근을 차단하기에는 충분한 농도였다.

'요즘에는 말이 없으시군요.'

에단이 페온을 향해 물었다.

― ...기분 탓이다.

페온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변명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무엇을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페온에 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블란테의 선조, 무투, 그리고 성검과의 연관성.

에단이 잡생각을 털어 냈다. 그때 헨리가 다가왔다.

"에단 님, 저곳에 들어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어, 지금 고민 중이야."

무력을 행사한다면 경비원쯤은 어렵지 않게 제압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보는 눈이 줄어 있다고 한들 그 정도 소란을 벌이면 내부에서 눈치챌 가능성이 농후했다.

'다 깨부술 수는 없으니.'

그렇게 되면 결국 덜미를 잡히게 되거나 상대가 도주할 수도 있었다. 그건 에단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게 방법이 있어요."

"...그래?"

에단의 미지근한 반응에 헨리가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요?"

"조금."

"...그럴 수가."

헨리의 충격받은 얼굴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건데?"

"...보여 드리죠. 휴고 씨도 이쪽으로 와 보세요."

"아, 넵."

휴고가 다가오자 헨리가 손을 들었다. 그 주위로 산뜻한 바람이 일더니 에단의 주위를 휘감았다.

― ...은신인가.

"이제 보이지 않을 겁니다."

페온과 헨리가 엇비슷하게 말했다. 에단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가린 장막을 바라봤다.

'세계수의 숲과 비슷한 작용인가.'

외부의 침입자를 걸러 내는 숲의 장막. 그것과 흡사한 기운이었다.

"이제 꽤나 쓸 만해졌는데?"

"...기뻐해야 하는 건가요?"

"어, 칭찬이야."

"...감사합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헨리가 담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잠시만 보고 계세요."

헨리가 눈을 감고 담장에 손을 얹었다. 그 이후 꽤나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스스스.

헨리가 담장과 융화가 되고 있었다. 마치 헨리의 몸이 담장에 흡수되는 것 같았다.

에단과 휴고가 감탄하며 헨리의 뒤를 따랐다. 셋의 몸이 담장을 무사히 통과했다.

"됐죠?"

헨리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놀랐다. 처음으로 쓸모 있다는 걸 입증했네."

"...."

에단의 신랄한 평가에 헨리가 입을 다물었다.

"이거 유지 시간을 얼마나 되지?"

"마음먹으면 하루 종일도 가능합니다."

헨리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휴고가 떫은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보자 에단이 물었다.

"휴고, 네가 보기에도 띠껍지 않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

휴고의 반응에 헨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는 소리는 대체...."

"잡담은 그만하고 움직이자고."

헨리가 찝찝한 표정을 지은 채 에단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서 둘러본 저택은 광활했다. 내부에도 몇 명의 경비원이 자리해 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상태가 안 좋군.'

경비병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모두가 몽롱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에밀라와 만났을 때 느꼈던 감각이 경비원들에게도 느껴졌다.

'수작질을 부리기는.'

쯧.

에단이 혀를 차며 내부로 깊이 들어섰다. 담벼락을 지났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저택 내부에 들어섰다.

저택에 들어서자 죽은 마나의 기운이 더욱 농후해졌다.

"조금 불쾌하네요."

헨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는지 크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긴 복도를 걸을수록 냄새가 짙어진다. 휴고의 눈살이 좁혀지며 동공이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휴고가 제일 먼저 반응하는군.'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에단이 감각을 집중하자 걸음의 끝에 문이 하나 보였다.

'뭐지?'

강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음험한 기운은 아니었다. 굳이 흡사한 것을 찾으라고 하면 휴고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강렬한 야성. 하나 휴고와는 그 결이 달랐다. 휴고의 야성이 칼날처럼 날카롭다면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묵직했다.

에단이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야."

"...네?"

흐릿하던 휴고의 눈이 색을 되찾았다.

"정신 차려라."

"...죄송합니다."

"알면 됐고."

에단이 문을 열었다. 문안에는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에단의 눈이 어둠을 관통했다.

'저 녀석인가.'

어둠 속에서 보이는 하나의 인영.

비교적 작은 체구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강한 존재감.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야. 불 좀 켜 봐."

"...네? 아, 알겠습니다."

화아악!

빛이 번지며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헨리가 다루는 마나의 본질은 세계수에서 비롯된다.

신성력과는 비교하기 힘들었지만 세계수의 힘은 정화의 성질을 띤다.

그 탓에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잠식되어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아이?"

헨리의 목소리였다. 어둠이 걷히고 보이는 것은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검은 눈동자가 일행을 주시했다.

"누구?"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가슴을 옥죄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헨리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크르르르."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소리에 획 하고 고개를 돌린 헨리는 휴고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었다.

휴고의 동공이 완전히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이빨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에단이 손을 휘둘렀다.

빠악!

휴고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내가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

휴고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에단이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소녀의 체구는 다비보다도 작았다.

붉은 머리칼을 지닌 소녀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늑대? 아니야.... 인간...?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소녀가 골똘히 고민하다 에단을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구야?"

"글쎄."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에단이 씨익 웃으며 다가가자, 무표정이던 소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가오지 마."

"왜?"

"...너 위험해."

"내가? 딱히 위험하지는 않을 건데 말이야."

소녀의 시선이 엎어져 있는 휴고에게로 향했다. 휴고를 바라본 에단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건 불가항력이었고."

"나, 안 믿어."

소녀의 눈빛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휴고와는 결이 다른, 묵직한 존재감이 에단 앞에 드러났다.

'재밌네.'

책으로 보던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같은 야성도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신선함이 느껴졌다.

에단이 한 발자국 더 다가서려 할 때, 페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가 왔군.

페온의 목소리와 동시에 에단도 그 존재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불청객이 찾아왔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헨리도 눈치챘는지 몸을 틀었다.

한니발이 손을 들었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행위가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이 말해 줬다.

헨리가 마나를 끌어 올려 방어하려 들었지만 한니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러나....

탓.

그보다 더욱 빠른 것은 에단이었다.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으며 한니발을 바라봤다.

"우리 초면이지?"

한니발의 얼굴에서 미약한 당황이 감돌았다. 그의 손에서 검은빛이 폭사되었다.

쾅!

에단이 팔로 한니발의 손을 쳐 내자, 한니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리해라!"

가만히 있던 소녀에게서 야성이 폭발했다. 에단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소녀가 팔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콰앙!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공격을 방어해 냈지만, 막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에단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에단이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보기보다 꽤나 힘을 쓰는데?"

에단이 팔을 털어 내며 말하자, 한니발이 살기 어린 눈으로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병신이냐?"

한니발에 물음에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라고?"

"너 같으면 순순히 그걸 대답해 줄 거 같아?"

에단이 손을 풀었다. 손에서 섬뜩한 뼈 소리가 울렸다.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든 소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가 있을 줄은 알았다."

붉은 곰이 어째서 원작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검게 물든 눈이 소녀가 지금 자아를 잃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뭔가를 알고 왔군."

한니발이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모르고,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지."

씨익 웃은 에단이 단어들을 나열했다.

"아카데미, 레벨린, 죽은 마나, 검은 보석, 영지전, 붉은 곰."

이야기를 듣던 한니발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몇 가지 더 있는데, 시간상 들려주기는 힘들 것 같다."

"...아무래도 살려 보낼 수 없겠군."

"그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니발이 싸늘한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온 것 아닌가?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바로 죽이지는 않으마. 그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들어야겠으니."

"아니,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뭘 믿고 날 이겨 먹으려 하냐고."

콰아아아앙!

에단이 피어를 끌어 올렸다. 막대한 위압감이 저택에 진동했다.

유형화된 마나와 피어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에단이 지닌 피어는 더 이상 블랙 오우거의 수준이 아니었다.

리치, 그리고 세계수.

둘의 기운을 먹어 치운 에단의 피어는 전설로 전해지는 드래곤의 피어와도 비견될 정도였다.

'...이게 무슨.'

한니발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와 붉게 물들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석상처럼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자는 뭐지?'

한니발은 눈치가 빨랐다. 이자는 범접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 살아야 해.'

그러나 입조차 벌릴 수가 없었다. 한니발이 눈을 굴려 옆에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라!'

한니발이 속으로 되뇌자, 소녀가 몸을 바들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또 개수작을 부리네."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지만 한니발의 의도가 먹혔는지 이내 소녀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수인족인가.

수인족은 태생적으로 피어에 내성을 가진다. 저 소녀는 수인족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또 다른 수인족이 존재했다.

크르르.

콰드드득!

휴고가 나무로 된 바닥을 부수며 몸을 일으켰다. 사나운 야성이 피어올랐다.

검은 소녀의 눈과 누렇게 물들어 있는 휴고의 눈이 마주쳤다.

◈ [163화] 얘기 한번 들어 볼까? (1)

후웅!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녀의 팔을 휴고가 몸을 젖혀 피했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며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휴고가 소녀의 눈을 향해 팔을 찔러 넣었다.

소녀가 고개를 비틀어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휴고의 팔을 낚아채려 들었다.

휴고의 눈이 소녀의 팔을 빠르게 좇았다. 팔이 닿으려는 순간 도약한 휴고는 천장을 발판 삼아 가속했다.

탓!

혈전을 벌이는 두 괴물을 바라보는 한니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저, 저게 무슨...."

둘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왜? 당황스러워?"

그때 들려오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한니발이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니발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스스스!

그의 손에 검은 기운이 맺혔고, 곧이어 손을 휘둘렀다.

"그래, 발악 한번 해 봐."

콰앙!

날아오는 손을 에단이 가볍게 패링했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한니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너는 대체 뭐지?"

원론적인 질문에 에단이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은 대충 빚을 갚으러 왔다고 하면 될 거 같은데?"

"...빚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한니발의 목소리에서 황당함이 묻어 나왔다.

"내가 또 빚을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거든. 일로 와 봐."

에단이 저만치에서 구경하고 있는 헨리에게 손짓했다. 헨리가 쭈뼛거리다가 슬그머니 에단의 곁에 다가왔다.

한니발이 미간을 좁힌 채 헨리를 바라봤다.

"...기억이 나는군."

한니발은 금전 관계가 얽혀 있는 자는 거의 잊지 않았다. 당연히 헨리에 관해서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헨리는 레벨린과 연관된 자였기에 더욱더 잊을 수가 없었다.

"...레벨린이 보냈나? 이유가 뭐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만한 짓을 벌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었다.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구나?"

웃음을 흘리는 에단의 반응에 한니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지?"

"말했잖아. 빚을 청산하러 왔다고. 원래라면 정당한 대가를 치르려고 했는데."

에단이 오른손 손가락 하나를 한니발에게 보여 줬다. 에단의 손가락 끝에는 가느다란 생채기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떠야지 보일 상처에는 작은 피가 한 방울 맺혀 있었다.

"보시다시피 크게 다쳐 버렸네?"

"와...."

― ...허.

헨리와 페온이 짙은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니발이 미간을 좁혔다.

"같잖은 말장난을 하는구나."

"말장난?"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내가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아?"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납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휴고."

휴고를 부르는 에단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휴고의 귀가 쫑긋했다. 휴고의 눈빛이 돌변했다.

홱!

휴고가 벽을 박차며 질주했다. 휴고의 신형이 순간 소녀의 눈에서 사라졌다.

후웅!

휴고가 팔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격이었지만,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퍼억!

하지만 던진 팔은 미끼였다. 소녀가 팔에 집중한 사이 휴고의 발이 그녀의 배에 꽂혔다.

휴고는 공중에 붕 뜬 소녀를 뒤쫓고는 두 손을 모아 그대로 내려쳤다.

꽈앙!

강렬한 소리와 함께 소녀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착지한 휴고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휴고의 눈이 에단을 바라봤다. 피어오르던 귀화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 상태가 돼도 반항을 안 하는구나.'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에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헨리는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휴고의 입장은 달랐다. 휴고는 에단에 대한 공포가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에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휴고가 머뭇거리다가 곁으로 다가왔다.

크르르.

아직 굶주려 있다는 듯 휴고의 눈이 노랗게 번들거렸다.

"시끄러워."

뚝.

에단의 한마디에 휴고의 으르렁거림이 귀신같이 멎었다.

"너 되게 무서운 놈이구나. 아주 손속에 자비가 없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저런 어린애를 패냐?"

"...."

에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아이도 저렇게 무자비하게 패 버릴 정도면 건장한 성인은 말할 것도 없겠네."

에단의 시선은 한니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니발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협상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에단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원하는 것을 말하시오."

"새끼."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코웃음 쳤다.

"아직도 고개가 빳빳하네."

에단이 살기를 일으켰다. 한니발이 저항하려고 발버둥질했지만, 에단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에단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한니발의 눈에서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제야 눈이 좀 마음에 드는데?"

에단이 한니발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이미 손가락의 상처는 아물어 핏방울의 흔적만 보였다.

"뭘 원하냐고?"

에단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빚 변제."

"...."

황당함이 치밀었다. 헨리가 얼마만큼의 빚을 졌는지 한니발도 기억하고 있었다.

저택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으로 모자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래, 지금 상황만 모면하면.'

얼마든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한니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벌써부터 구라를 치네?"

화악!

에단의 손이 순식간에 한니발의 멱살을 붙잡았다. 한니발이 저항하기 위해 죽은 마나를 끌어올렸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내가 너를 뭘 믿고. 너 같은 놈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럼 왜...."

에단이 멱살 쥔 손을 놓음과 동시에 기운을 거뒀다. 가슴을 조이던 기운이 거둬지자 한니발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에단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주위는 아직 꽤나 어두웠다.

"일단 불 좀 켜 봐."

"...."

한니발이 천천히 움직이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튼짓하려면 어디 한번 해 보든가."

"...."

이윽고 주변이 밝아졌다.

헨리가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막았다.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어리잖아?'

그녀가 미묘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불이 켜지자 에단은 적당한 장소에 걸터앉았다. 한니발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모르겠군.'

에단의 얼굴을 봐도 짚이는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턱을 괴며 물끄러미 한니발을 바라봤다.

"정말 남의 등 잘 쳐 먹게 생겼네."

"...."

한니발의 외모는 에단이 예상하던 그대로였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단정하게 기른 콧수염. 계산적으로 보이는 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한니발의 평정심이 지금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단이 오만한 표정으로 한니발에게 턱짓했다.

"뭐 해? 앉아."

"...."

한니발이 눈을 질끈 감고서는 에단 앞에 앉았다.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거상이었다.

돈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다. 일국의 왕도 한니발에게는 예의를 갖추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한니발이 물었다.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처음에는 레벨린이 보낸 사자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니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레벨린의 세력을 무너뜨린 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최근 한니발의 행보는 레벨린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니 알아차릴 리가 없었으니까.

한니발의 질문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야, 의자에 앉게 해 줬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

"정신 차려. 뒈지기 싫으면."

"...내가 죽으면 그쪽도 무사하기는 힘들...."

"시험해 볼까?"

에단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한니발이 헛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

한니발의 대답에 에단이 살기를 거두며 말했다.

"내가 뭐 때문에 찾아왔냐고 물었지?"

에단이 품속에서 서류 더미를 끄집어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한니발이 서류를 향해 힐긋 보더니 에단을 응시했다.

"읽어 봐."

에단의 말이 떨어지자 한니발이 서류 더미를 잡고 읽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한니발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세간에 퍼져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 서류 안에 가득했다.

"이것 외에도 꽤나 재밌는 짓들을 벌이고 있던데?"

한니발이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을 응시하는 그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한니발의 감정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표정 관리가 안 되네?"

"...이걸로 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뭘 어째? 내가 뭘 원하는지는 알고 찔러보는 거야?"

"...결국 원하는 것은 돈과 권력이 아닙니까?"

"돈과 권력?"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블란테의 위상은 이미 일개 국가와 맞먹었다. 가지고 있는 재화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블란테가 마음먹고 돈을 쓸어 담기 시작하면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다.

'제국쯤은 되어야지.'

에단이 원하는 것은 그따위가 아니었다. 한니발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상대를 간파하는 것이 상인으로서의 가장 큰 덕목이었고, 한니발은 그동안 자신의 안목으로 많은 이득을 취해 왔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이지?'

자신이 쥐고 있는 게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지고 오는지를 모르는 건가?

"내가 원하는 건 별로 없어."

에단이 손가락을 들어 쓰러져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쟤, 붉은 곰이지? 어떻게 한 거야?"

"...."

"짱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뒈지기 싫으면."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저 아이 또한 레벨린이...."

"내가 짱구 굴리지 말라고 했지."

쾅!

에단이 테이블을 걷어찼다. 테이블이 산산조각 나며 한니발의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

에단의 시선은 한니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레벨린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겠지. 그런데 네가 정말 아무것도 몰라? 지랄하지 마. 그래서 애들 약점을 줄줄이 들고 쟤를 이용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나? 네가 생각하는 게 눈에 훤한데 내가 대신 말해 줄까?"

"...."

"영지전은 핑계일 뿐이고, '지하'의 문을 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레벨린이랑은 상관없이. 왜? 연락이 두절됐으니까. 아주 좋은 명분이겠지."

"그, 그걸 어떻게...."

"왜 몰라. 쓰기 좋은 패도 저기 있고, 돈과 정보, 더군다나 명분까지 있네?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언제 오겠어."

"...."

에단의 말에 말문이 막힌 한니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정곡을 찔렸다.

콰악!

에단이 한니발의 목을 움켜쥐었다. 에단의 눈에서 형형한 귀화가 타올랐다.

"그런 주제에 어디서 이빨을 까고 있어?"

뒈질라고 새끼가.

◈ [164화] 얘기 한번 들어 볼까? (2)

한니발은 에단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만약 에단이 레벨린과 어떤 관계에 있었고, 어디까지 아는지 알았다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침묵하자 에단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솔직하게 가자고, 솔직하게. 어차피 너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제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반대로 묻지. 넌 뭘 원하지?"

에단이 되물었다. 그때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던 휴고가 으르렁거리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

"...."

휴고가 입을 다물었다. 헨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뭔가 불쌍한데.'

기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휴고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한니발이 휴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가 에단을 바라봤다.

"혹시 수인입니까?"

한니발의 질문에 에단이 말없이 응시했다. 에단의 깊은 눈을 바라보던 한니발이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야."

"...네?"

"내가 짱구 굴리지 말라고 했지."

쾅!

에단이 벽에 주먹을 꽂았다. 굉음과 함께 저택이 진동했다.

"이 새끼, 표정 다 드러나네. 왜? 경호원들이 죄다 들이닥치면 널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콰직!

"끄아아아악!"

에단이 한니발의 발등을 짓밟았다.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무시한 채 반대편 발도 똑같이 밟았다. 에단이 발을 밟으며 말했다.

"소리 지르면 죽을 줄 알아."

콰직!

"...!"

한니발이 눈을 부릅떴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자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왔다.

"넘볼 게 없어서 내 거를 넘봐? 내가 웃으면서 좋게 좋게 말하니까 좆으로 보여?"

덜컥!

그 순간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에단이 기세를 뿜어내자 막대한 기운이 저택을 가득 메웠다.

경호원들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자아를 거세당한 경호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휴고."

에단의 부름에 곧장 휴고가 움직였다. 헨리도 마나를 끌어 올렸다.

꽈아악!

벽면에서 나무뿌리 같은 게 형성되며 경호원들을 제압했고, 휴고는 거침없이 경호원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남은 경호원들은 에단의 앞에 당도했고, 에단은 무심한 얼굴로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걷어찼다.

뻐억!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경호원이 벽에 처박혔다. 고개를 숙인 경호원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흘러나왔다. 즉사였다.

"내가 경고했잖아. 왜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지?"

에단이 또다시 다가온 경호원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콰지직!

으깨진 바닥에 박힌 경호원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니발이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해?"

에단의 형형한 안광이 한니발에게로 향했다.

"그, 그렇습니다! 저는 단지 생각할...."

에단이 한니발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렸다. 멱살을 잡히고 끌려가자 짓밟힌 발등에서 엄청난 통증이 엄습했다.

자칫 비명을 내지를 뻔했지만, 에단의 흉흉한 눈빛에 한니발이 입을 다물었다.

"너 욕심냈잖아. 여기서 또 구라 치면 그때는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솔직해지자고."

"...."

"대답 안 해? 대답하게 해 줄까?"

"...죄송합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 수 있잖아."

쾅!

에단이 그대로 한니발의 머리를 바닥에 꽂았다. 한니발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시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에단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욕심이 좀 많아. 그래서 내 걸 욕심내는 애들을 보면 조금 화가 치미네?"

꽈드드득!

바닥을 짓누르고 있는 압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한니발이 입을 벌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끄으으으."

"이제 정신 좀 차리겠어?"

"죄, 죄송합니다! 다신 안 하겠습니다!"

"좋아. 믿어 주지."

에단이 가하던 힘을 멈춘 뒤 그대로 한니발의 몸을 일으켰다.

한니발의 머리는 땀으로 푹 젖어 있었고, 퀭한 동공은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앉아."

"...끄윽."

한니발이 절뚝거리며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생각보다 많이 지체했네.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고."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더군요. 그때 제게 다가온 분이 계셨습니다."

"설명이 기네. 짧게 못 해?"

"...레벨린 님이 제게 먼저 제안했죠. 힘과 권력, 그리고 영겁의 삶. 욕심이 생기는 달콤한 말이었습니다."

한니발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레벨린이 잠적하고 연락이 두절된 이후로는 전부 너의 독단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럼 쟤는 뭔데."

에단이 쓰러져 있는 소녀를 향해 턱짓하자, 한니발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레벨린 님이 소개해 주신 용병입니다."

"그래? 수인족을 다루는 법도 레벨린한테 배운 거냐?"

"이미 대부분의 작업은 끝나 있었고, 저는 인계받은 것뿐입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또 하나 질문하지. 우리 영지에 도적 새끼들 풀어놓은 것은 누구지?"

"...도적이라니요?"

"어. 곰 발이니 뭐니 하는 새끼들 말이야."

"...그자들은 분명 블란테에... 허억!"

한니발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반응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이거 실수로 비밀을 발설해 버렸네."

에단이 한니발에게 다가가 그의 입을 움켜쥐었다. 강한 압력에 한니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우읍! 우읍!"

"방금 전 말 다 들은 거 맞지?"

한니발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죽은 놈은 말을 못 하거든."

에단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자, 한니발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우읍! 우읍!"

한니발이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손바닥을 펴 보이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손을 놓았다.

"농담이야."

"허억, 허억!"

한니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이자들이 블란테였단 말인가?'

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행동했지만 결국 붙잡혔다.

한니발은 상인이었고, 많은 귀가 있었다. 당연히 최근 들어 블란테가 어떠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전례 없는 움직임에 대륙의 시선이 블란테에 집중되었고, 한니발은 의구심을 느꼈다.

'이자 때문이었어.'

모든 상황은 눈앞의 남자가 주도했다. 한니발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간 쌓아 온 관록이 말해 줬다.

에단이 한니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 다시 대화를 해 보자고. 이제는 좀 솔직해지겠지?"

"모,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래. 솔직해지니까 얼마나 좋아. 그럼 이제 물어볼게. 이번 영지전, 구체적으로 무슨 계획이야?"

"하네시드 영지에 매립되어 있는 마석이 많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마석이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에단이 품속에서 검은색 보석 파편을 꺼냈다. 한니발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 계속 말해 봐."

"본래라면 협상을 통해 매립된 마석을 채취했었겠지만...."

한니발이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니발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생각을 조금 달리했습니다. 레벨린 님이 사라지시고 제가 독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지하의 문을 열고, 그 새끼들의 총애를 얻으면 그 뒤로는 네 세상이라고 생각한 거냐?"

"그걸 어떻게...."

"빤하지."

그게 레벨린과 협력하는 자들의 생각일 테니까.

에단이 한니발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염병하지 말라고 해. 너 같으면 개미 새끼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

"...."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너의 자유인데 말이야. 남들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 될 거 아니야. 영지전에서 승리한 뒤에는 어떻게 문을 열려고 한 거야?"

에단이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기억을 떠올린 에단이 와락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설마 죄다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나?"

"...."

"허."

황당했다. 설마 이 정도로 정신 나간 새끼였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에단이 한니발에게 다가가 그대로 턱을 후렸다.

뻐억!

한니발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니발에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수인은 또 뭐야? 쟤한테 어떤 작업을 해 둔 거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에단의 발이 다시 한번 치켜 올라가자, 한니발이 애원하듯 소리쳤다.

"저, 정말입니다! 저도 그년에게 소개받은 게 전부입니다!"

에단의 발이 멈췄다. 눈살을 좁힌 채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너, 쟤 이름은 아냐?"

"...."

"쓰레기 새끼."

에단이 바닥에 침을 내뱉은 뒤 소녀에게 다가갔다. 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소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페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대화에서도 침묵하던 페온의 음성에 에단은 꺼림직함을 느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껏 해 온 과격한 해결 방식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에단의 내구성과 페온의 도움으로 인해 얻은 결과였다.

에단이 의식을 집중하자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마석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처박아 뒀군.'

기가 찼다. 수인들은 마석에 반응한다. 그 점을 이용해 머릿속에 박아 넣은 마석을 매개체로 이용한다.

자세한 활용법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대로 깨 버릴 수 있을까?'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었다. 에단의 마나는 마석에도 반응했으니 외력을 가하면 그만이었다.

혹은 죽은 나무의 힘으로 마석에게서 마나를 추출할 수도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섣부르게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 ...길을 알려 주마.

그때, 페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온의 미약한 기운이 에단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에단은 고민 없이 페온을 뒤따랐다. 고민해 봤자 달리지지 않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페온의 기운이 소녀의 내부를 순환했다.

― 모두 흡수해야 한다.

소녀를 통제하던 죽은 마나를 에단이 흡수했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들은 아니었다.

페온의 기운이 소녀의 머릿속까지 도달했다. 머리 한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마석 파편을 바라보던 페온이 말했다.

― 이걸 내가 부수게 되면 그 순간 모든 기운을 흡수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뭐, 한번 해 보죠.'

에단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고민은 다른 방법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이었다.

에단의 대답에 작게 한숨을 내쉰 페온이 마석 파편을 향해 다가갔다. 깊게 가라앉은 페온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에단은 주의 깊게 페온의 모습을 지켜봤다. 페온이 손을 뻗어 허공을 붙잡았다.

그 순간,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질적이었다. 공간이 분리된 것 같았다.

쩌엉―!

페온의 주먹이 마석을 때렸다. 그 순간 마석이 산산이 조각났다.

◈ [165화] 붉은 곰 (1)

'뭐야 저건?'

페온의 주먹과 그로 인한 상황.

하지만 여유롭게 관망할 시간은 없었다. 에단이 곧바로 죽은 마나를 흡수했다.

딱히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바다에 물 한 바가지를 넣은들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에단이 눈을 번뜩였다. 소녀의 호흡은 안정을 되찾았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개짓거리하던 것 좀 치웠을 뿐이야."

에단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헨리."

"네, 대장님."

"그냥 편하게 불러."

"음... 알겠어요, 도련님."

"얘 좀 데리고 여관으로 돌아가. 휴고도 곧 정신 차릴 거야."

"알겠습니다."

소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에단이 미묘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별걸 다 하네.'

확실히 전보다는 쓸모가 많아진 것 같았다.

"자, 가자."

우쭈쭈.

뭔가 강아지를 부르는 것 같은 제스처로 휴고를 불렀다. 휴고가 눈을 끔뻑이다가 헨리를 따라나섰다.

"...."

에단이 고개를 가로젓고 한니발을 바라봤다.

"야."

"네, 네?"

한니발이 퍼뜩 얼굴을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한니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쟤는 데려간다."

"그, 그게...."

"내가 보호조치 해 주겠다는 거잖아. 왜, 불만 있어?"

한니발이 참담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반박이나 반론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없...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제야 갱생의 여지가 보이네. 여지가 안 보이면 여기서 그냥 죽여 버리려고 했거든."

벽에 박혀 죽어 있는 싸늘한 주검들이 한니발의 눈에 띄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른 대화를 좀 나눠야겠지? 보호비는 어떻게 할 거야?"

"보호비라고요...?"

"그래. 설마 그냥 손 털고 끝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지?"

순간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한니발이 격하게 얼굴을 저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드려야죠!"

"이제 대화가 좀 잘 통하네."

에단이 한니발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더니 쪼그려 앉았다. 에단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 보니 더욱 소름 끼쳤다.

한니발이 침을 꿀꺽 삼키며 에단의 눈을 바라봤다.

"헨리 빚이 어떻게 되지?"

"...이자까지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리자 한니발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자가 무슨 말입니까. 당연히 없던 것으로 쳐야죠."

"그렇지? 그래서 얼마인데."

한니발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에단의 말에 대답했다.

"...500골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500골드라고? 얼마 안 되네."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럼 보호비랑 양육비는 1,000골드 정도면 되겠다. 헨리 빚은 청산해야 되니까. 500골드는 제하고 줘도 돼."

"...네?"

한니발이 말을 되물었다. 계산이 어딘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해? 아, 그리고 정신적 피해 보상도 이번에 받아야겠네."

에단이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쟤랑, 쟤, 쟤. 젠장, 일일이 세기도 힘드네. 쟤들 가지고 나 죽이려 든 거. 그리고 우리 가문도 모함하려고 들었지?"

에단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수고비까지 더해야 하니까. 어디 보자...."

에단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렸다.

"대충 만 골드는 받아야겠는데?"

"마, 만 골드...."

한니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액수였기 때문이다. 만 골드라는 거액은 한니발에게도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무슨 이런 날강도 같은.'

하지만 그 날강도의 손에 지금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한니발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에단이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뜯어내고 싶은데 내가 마음이 여려서 말이야. 너도 계획하던 것들이 있잖아? 내가 좀 도와줄게."

"...."

한니발의 표정이 돌변했다. 빛바랜 눈이 총기를 되찾았다.

'거상이란 이름값을 하는군.'

돈이 될 것 같은 냄새를 순식간에 맡는다.

"이번 영지전에 중앙 정계와 국왕이 나서지 않는 이유는 입막음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한니발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여기서 괜히 말장난을 해 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정도라면 영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수지 타산을 계산해 본 결과...."

"좋아. 아주 만족스러워. 아주 천하의 개 쓰레기 같은 대답이야."

에단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한니발이 고개를 숙였다.

"좋게 좋게 가자고. 이미 돈도 많은 새끼가 괜히 원한만 늘려서 어디 써먹으려고?"

"...맞는 말씀입니다."

"마석이니 레벨린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신경 꺼. 보아하니 너도 작업당했을 것 같은데."

에단이 한니발의 목을 붙잡았다. 당황한 한니발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모가지 분질러지기 싫으면."

한니발의 몸속에도 죽은 마나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었다.

수인족 소녀와 같이 머리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경우는 아니었기에 조심스러워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스스스.

에단이 죽은 마나를 흡수하고 손을 놓았다. 그 순간 한니발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게 대체...!"

"뭐, 그런 법이지. 네가 레벨린을 믿지 않듯. 레벨린도 너를 신용하지 않은 거야."

에단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 마나의 정체가 죽은 마나인 것을 알아챈 한니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너무 멍청했군요."

"알긴 아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한니발이 에단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좋은 질문이야. 이제야 조금 대화가 통하네."

"...."

"먼저 영지전. 이미 판을 벌였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을 것 아니야. 여기서 무르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테니까."

"맞습니다."

"계획대로 영지전을 벌여. 대신 피해는 최소화한 다음에 상대도 납득할 만한 보상을 주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뭐가 있어?"

내 영지도 아니고 말이야.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단은 선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우리랑 협력하는 건 어때?"

"협력 말인가요?"

한니발의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다. 득실을 계산하는 상인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에단이 아니었다.

"눈깔 똑바로 뜨고."

"...죄송합니다."

에단의 말에 한니발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레벨린이 잠적한 뒤로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내가 이거 터트리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에단이 서류 더미를 펄럭였다. 워낙 많은 권력가들이 얽혀 있는 장부였다.

퍼지게 되면 수많은 하이에나가 달려들 게 불 보듯 빤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판을 더 키우자고."

"...어떤 계획이시죠?"

"최근 우리 가문이 일을 벌이고 있거든. 너도 듣긴 했을 텐데?"

"알고는 있습니다."

한니발도 이미 파악한 정보였다. 블란테가 아카데미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니까.

"당연히 다른 애들은 눈을 뒤집고 난리를 치겠지."

에단의 말에 한니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는 수많은 이들이 탐내는 과실이었다. 그 과실을 다른 이도 아니고 블란테가 삼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부를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머리는 빨리 돌아가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도 알아.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

에단이 가지고 있는 패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세계수."

"...!"

한니발의 표정이 돌변했다.

"...세계수와도 연관이 있으십니까?"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말해 주고 싶지만."

에단의 눈이 진중해졌다.

"확답을 해야 말해 줄 수 있겠는데 말이야."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에단이 히죽 미소 지었다. 웃음 속에 느껴지는 섬뜩함에 한니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선택지는 없어.'

여기까지 온 이상 에단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수락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한니발은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득실을 따지는 게 바로 상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단은 자신 있었다. 한니발 같은 자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것은 에단의 주특기였다.

"엘프, 정보 길드, 성자."

에단이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잠자코 에단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말한 명분."

"명분? 설마...."

한니발이 입을 벌렸다. 에단은 생각보다 더 큰 걸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성자라 함은.... 설마 신성 왕국과 연관이 있으십니까?"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내 명분은 신성 왕국 따위가 아니야."

"그게 무슨...."

한니발이 에단의 말을 곱씹었다.

"설마 신성 왕국과 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한니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성 왕국은 대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주신이라는 명분과 막강한 무력, 더불어 사람들의 지지까지 갖추고 있었다.

'제정신인 건가?'

제정신이라면 신성 왕국과 적대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한니발을 바라봤다.

"왜 겁나?"

"그야 당연히...."

한니발이 대답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에단의 가문은 블란테였다.

그리고 블란테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무력 집단이다.

'뭘 모르는 자들은 다른 검술 가문이나 마법 가문을 언급하지만....'

상인인 한니발은 알고 있다. 일신으로 블란테와 대적할 수 있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신성 왕국도 블란테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한니발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란테가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니발이 고개를 저었다. 블란테가 강한 무력을 지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혼자서는 열을 이기지 못해.'

신성 왕국은 많은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관계는 이미 신앙과 종교를 넘어섰다.

더군다나 수많은 시민들도 신성 왕국을 향해 큰 믿음을 보였다.

신의 뜻이라는 명분. 그 명분 하나로 신성 왕국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한니발을 바라보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내가 말했잖아. 신성 왕국이 아니라 성자라고."

"성자...?"

"내가 지금 성자를 데리고 있거든."

그 순간 한니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어, 아무리 신성 왕국이 개 같은 억지를 부리며 억압하려 들어도, 감히 성자가 있는데 함부로 지껄일 수 있겠어? 뭐, 수가 틀려서 걔네들이 싸움을 걸거나 무력으로 압박을 넣는다면...."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오히려 좋지."

꼬우면 덤벼 보든가.

◈ [166화] 붉은 곰 (2)

'지, 진심이야.'

에단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에단은 지금 농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신성 왕국과 맞붙을 의향이었다. 과연 대륙에서 신성 왕국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세력이 있을까?

국가도 대적하기 힘든 게 신성 왕국이다. 국민들의 민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란테는 가능해.'

블란테는 순수한 무력 집단이다. 민심이나 타인의 지탄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한니발은 공포를 느꼈다. 지금껏 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블란테의 저력이 느껴졌다.

'이건 잡아야 한다.'

상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여태껏 수많은 선택을 해 왔고 거의 모든 선택이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순간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건 예측이 되질 않아.'

판도가 뒤바뀌었다.

에단은 아직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확답을 하지 않은 자신을 상대로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드러내는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질끈 감았다가 뜬 한니발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족한 몸이지만 함께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한니발의 대답에 에단이 씨익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니발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에단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이제 슬슬 가진 걸 까야겠지?"

에단이 한니발을 향해 턱짓하자 한니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너부터 까야지. 그럼 나부터 까리?"

"아, 그렇죠.... 뭐부터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요?"

"먼저 뒤 구린 새끼들부터 싹 다 언급해. 당연히 장부도 작성했겠지?"

"그걸 전부 토해 내란 말씀입니까?"

"장난해?"

에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연히 전부지. 아니, 살을 붙여서라도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다만, 정보를 규합하고 장부를 가지고 오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 줄게. 그럼 나도 가진 패를 까줘야겠지."

에단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세력들을 읊기 시작했다.

초창기에 흡수한 정보 길드부터 시작해서, 엘프들의 지지, 한니발에게 보여 준 장부, 더불어 부패한 신성 왕국의 정보와 성자의 도주까지.

무엇하나 경악스럽지 않은 일이 없었다.

'...차고 넘친다.'

설마 정보 길드와 엘프들의 지지까지 얻고 있을지는 예상치 못했다.

'허튼짓을 했으면 곧바로 덜미를 잡혔겠군.'

이제야 아귀가 맞았다. 에단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내고, 저렇게 정보에서 이점을 취하고 있었는지.

'정보 길드와도 연관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한니발도 정보 길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경험이 있었다.

어떻게 블란테가 정보 길드를 흡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다.

하나 에단이 가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계수와 엘프....'

대륙인들에게 있어 세계수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당연히 세계수와 함께 공존하는 엘프들이 가진 말의 무게도 무겁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에단의 눈이 한니발의 몸을 훑었다.

"보여 준 장부. 그것을 바탕으로 엮을 수 있는 애들은 죄다 엮어. 조만간 국가 집회에 소환될 예정이니까."

"...소환에 응하실 생각이십니까?"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는 전쟁광은 아니어서 말이야."

에단의 말대로 소환에 응하지 않게 되면 곧바로 연합군의 압박이 들어올 터였다. 상대가 블란테인만큼 철저한 대비를 한 채.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블란테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

일정 시간 버틸 수는 있겠지만, 결국 양적 우위에 있는 연합국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걸 위한 대비일 테니.'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예정대로 지내라고. 성과는 섭섭지 않게 보여 줄 테니."

"알겠습니다."

문밖을 나가기 직전 한니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단이 뚜벅뚜벅 그를 향해 다가섰다. 한니발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 갑자기 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를 그냥 믿기는 좀 그렇더라고."

"그럼...?"

에단이 한니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에단의 마나가 몸과 머리를 휩쓸자, 한니발은 몸을 파들거리며 경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이 손을 뗐다. 한니발의 경련이 멈추고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게 무슨...."

"뭐 같아?"

에단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있자, 한니발의 뇌리에 불안감이 치밀었다.

"서, 설마...."

"이제 처신 잘하라고."

에단이 한니발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말했다. 한니발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제 그는 에단을 결단코 배신할 수 없었다.

만일 에단을 배신하게 된다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에단이 무심하게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섰다.

―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처세술이 늘었다고 하시죠.'

에단은 레벨린처럼 타인의 머릿속에 죽은 마나를 심어 두지 못한다. 지금 에단의 행위는 단순히 마나를 끌어올려 한니발의 몸을 훑은 것뿐이었다.

그 말인즉, 한니발이 예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그는 절망 어린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에단이 한니발을 힐긋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 *

헨리와 휴고가 수인족 소녀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하던 도중 휴고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길게 돋쳐 있던 송곳니가 작아지고, 몸을 뒤덮고 있던 털이 사라졌다.

골격이 돌아오며 누렇던 안광도 평범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신기하네.'

헨리가 묘한 눈초리로 휴고를 응시했다. 이성을 되찾은 휴고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헨리 씨가 왜? 여, 여긴 어디죠? 그리고 저는 대체...."

"아, 신경 쓸 거 없어요. 일 다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까요."

"...제가 정신을 잃었었나요?"

이쯤 되면 휴고도 무언가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그간 정신을 잃거나 기억을 잃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네."

하지만 헨리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오히려 김이 빠진 건 휴고였다.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그때 휴고의 눈에 낯선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는 뭔가요?"

휴고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소녀를 가리키며 묻자, 헨리가 이번에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도 몰라요."

"...."

헨리의 반응에 휴고가 잠시 침묵하다가 재차 물었다.

"저희 이대로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요?"

휴고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보면 납치극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남들 눈에는 우리가 안 보여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헨리의 말에 휴고가 눈을 끔뻑였다.

"안 보인다구요?"

"말 안 했었나요? 저 투명화도 할 수 있어요. 뭇 남성들의 로망이죠."

"...그렇군요."

휴고는 반박하는 것을 포기했다. 세계수에 다녀온 이후로 헨리에게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던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휴고는 고민하는 것을 포기했다. 에단과 함께하며 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걷던 휴고를 헨리가 바라봤다.

"휴고 씨."

"네?"

"...돌아가는 길이 어디였죠?"

"...."

* * *

결국 휴고의 안내로 세 사람은 여관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음, 일단 방으로 옮기는 게 좋겠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죠?"

헨리의 물음에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헨리가 수긍했다.

여관의 복도를 지나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나 죽네...."

"내 팔자야...."

"차라리 날 죽여줘...."

"...내일 일어날 수는 있겠지?"

"왜 우리가 이렇게 개같이 굴러야 하는 거야?"

"왜긴 왜겠어. 누구 때문이지...."

"이래서 대장이 멍청하면 아랫것들만 고생한다는 말이 있구나...."

"...미안하다."

뭔가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헨리와 휴고는 용병단의 대화를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선 헨리가 소녀를 침대에 눕히고 등을 켰다. 불빛에 비친 소녀의 혈색은 썩 나쁘지 않았다.

헨리가 묘한 눈초리로 소녀를 바라봤다. 헨리는 두 사람의 전투를 처음부터 지켜봤기에 소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아이에게도 뭔가가 있겠지.'

헨리가 고개를 돌리자,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휴고가 보였다.

"...헨리 님."

"네?"

"...이상합니다."

"뭐가요?"

"분명... 처음 보는 아이일 텐데 묘한 친근함이 느껴져요."

"...."

헨리는 휴고의 말에 명확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깨어나기를 기다려 보죠."

"알겠습니다. 도련님은 별일 없겠죠?"

"...그 사람이 걱정돼요?"

"그건 아닙니다."

어디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에단을 걱정한단 말인가.

* * *

수인족 소녀, 타미는 꿈에 빠져 있었다.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따뜻한 꿈이었다.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용할 수 있는 만큼만 사냥했다.

소박했지만 행복한 삶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타미를 누구보다 아꼈고, 그만큼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줬다.

"아빠, 이 숲 밖에는 뭐가 있나요?"

"...타미야. 숲 밖이 궁금하니?"

"네! 궁금해요."

그때, 아빠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서글퍼 보였다.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타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가 미안하구나. 나중에... 모든 갈등이 풀린다면 꼭 세상을 보여 주마."

"정말요?"

"그래."

타미의 아빠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타미를 바라봤다. 그것이 타미가 기억하는 아빠의 마지막 미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는 깨졌다.

습격은 순식간에 진행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빠르게 대응했다.

마을 사람들은 강했다.

타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거대한 모습으로 돌변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이 무너지고 숲이 타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저 한데 뭉쳐 발악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윽고 나타난 백색의 갑주를 입은 자들의 검에서는 섬광이 치솟았고, 마을 사람들은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된 포효를 내뱉었다.

사방에 피가 낭자했으며, 생명이 사그라드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타미의 아빠가 울분을 토해 냈다. 전세가 기울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습격한 이들의 수적 우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죄?"

선두에 서 있던 백색 갑주를 입은 자가 투구를 벗었다. 그 남자는 무심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타미의 아빠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며, 세상에 해를 끼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너희들은 대륙의 해충이다."

"...그래,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저항하겠다."

"귀찮게 구는군."

남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뒤편에서 백색 갑주를 입은 다른 기사들이 등장했다.

"단장님, 찾았습니다."

"데려와."

겁에 질린 아이들이 끌려 나왔다. 울먹이는 아이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한 마리씩 죽여."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167화] 붉은 곰 (3)

처절한 비명이 숲속을 가득 메웠다.

백색 갑주를 걸친 기사들은 무심하게 일을 진행했다. 그들에게 이 행위는 단순한 업무일 뿐이었기에 죄책감이 자리할 공간 따위는 없었다.

땅이 피에 젖었다. 아이들의 죽음에 어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멈춰라!"

타미의 아버지가 소리쳤지만 기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한 명씩 목숨을 잃어 가자,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마을 사람들, 아니, 수인들이었다.

타미의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불굴의 전사였던 그도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 명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저항하지 않겠다. 부디 아이들만큼은 살려 다오."

그를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따뜻한 심성을 소유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빠!"

그는 아버지였기에 차마 타미를, 그리고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래. 괜찮아."

"너는 잘못 없어."

선두에 서 있던 백발의 남성은 여전히 무감정한 눈초리로 수인들을 응시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인족은 가축 이하의 해충들이었다.

"짐승 새끼 주제에 인간을 따라하는 건가."

남자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걸 들은 타미의 아버지는 눈에 핏발이 서도록 이를 꾹 다물었다.

"...부디 아이들만은 살려 주시오."

이가 갈렸다. 억울하고 분통이 치밀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항하지 않는다고 했나?"

백발의 남자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남자의 눈에는 짙은 경멸이 서려 있었다.

타미의 아버지가 고개를 들려고 하던 순간, 그의 목에 실선이 그어지며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감히 짐승 새끼 주제에!"

남자의 손에는 아름다운 검이 들려 있었다.

한 사람의 목을 잘랐음에도 그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남자는 피를 묻히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어른들은 초연히 죽음을 맞이했고, 아이들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마을의 어른들을 모두 죽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짙은 혐오가 담긴 얼굴이다.

"모두 죽여."

남자는 처음부터 협상이나 타협 따위는 가정해 두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아이들은 수단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해충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이 죽기 시작했다.

아직 수인화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저항은 의미 없는 행위에 불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때, 한 여성이 백발의 남성에게 다가왔다.

"라오나드 님."

"...무슨 일이지?"

라오나드에게 다가선 여성은 레벨린이었다. 수인들의 위치를 알려 준 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들과 레벨린은 협력을 맺은 관계였기에 라오나드는 탐탁지 않았음에도 그녀에게 존중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 하나는 제가 데려가고 싶습니다."

"...이유는?"

라오나드가 인상을 찌푸리자, 레벨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또 수인들의 마을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

빠드득.

라오나드가 작게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당

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가증스러운 여자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오나드의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라오나드가 싸늘하게 몸을 돌렸다. 라오나드가 돌아서자 레벨린의 눈도 차게 식었다.

"들으셨죠. 그 아이는 제가 넘겨받겠습니다."

레벨린은 타미를 넘겨받았다. 타미의 눈은 죽어 있었다.

소녀는 아직 어렸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타미의 아버지가 죽은 이유는 자신들 때문이었다.

모두가 죽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이제 모두 말 못 하는 시신이 되었다.

아이가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닌 탓에 타미의 마음은 이미 죽어 버렸다. 레벨린이 타미를 데려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시험하기는 좋겠구나."

레벨린이 싱긋 웃으며 타미의 머리에 마석 파편을 밀어 넣자 얼굴에 검은 혈관이 돋아났다. 바닥에 쓰러진 타미는 거칠게 경련했다.

한참을 그렇게 경련하던 타미의 몸이 어느 순간 추욱 늘어졌다.

레벨린은 그런 타미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

타미가 몸을 일으켰다. 레벨린의 표정에 만족감이 서렸다. 첫 시도가 성공적이라니, 운이 좋았다.

레벨린은 타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타미는 도구에 불과했고, 도구에게는 이름이 불필요했으니까.

그 이후 타미는 감정을 거세당한 채 도구로 이용되었다.

* * *

쾅!

에단이 거칠게 여관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아무도 없네?"

에단이 여관을 훑어보며 말하자, 다가온 종업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최근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 손님들이 많이 나갔습니다."

"안 좋은 소문?"

"...객실에서 남자들의 신음 소리가 너무 크게 난다고...."

종업원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에단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생겨났다.

"무슨 그런 개 같은 소문이 돌아?"

"...죄송하지만 손님분 일행께서 그러시는 것 같아서...."

"...."

에단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먼저 사과하지."

에단이 종업원에게 은화 몇 닢을 건네주자 종업원이 깊게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금방 해결할 테니까, 주인한테는 걱정 말라고 해."

"넵!"

에단이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갔다.

여관방의 방음은 없는 수준인 탓에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목, 아니, 이제 두목도 아니지. 형씨 대답 좀 해 보쇼."

"혀, 형씨?"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립니까? 대장님이라고 듣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 형씨는 좀 아니지 않냐?"

"지금 그게 중요하단 말입니까? 양심이 있으면 대답 좀 해 보시죠.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누구 때문입니까?"

"나도 책임이 있긴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새끼 때문 아니냐."

"그 새끼가 누굴 말하는 겁니까. 설마...."

"악마 같은 새끼가 그 새끼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에단 그...."

쾅!

에단이 여관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나무로 된 문이 가루가 되며 방 안이 훤히 드러났다.

방 안에서는 단원들이 침대에 엎드린 채 만담을 나누고 있었다.

눈을 끔뻑이며 가루가 된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단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호, 혹시 전부 들으셨나요?"

줄리엔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에단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쳐졌다.

"너희들이 말한 악마 새끼 여기 있다."

얼굴이 검게 죽은 단원들이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개중 눈치가 빠른 몇몇은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 저돕니다! 그 말을 한 건 모두 저 사람입니다."

단원들의 손가락이 줄리엔을 가리켰다. 줄리엔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이, 이! 배신자 새끼들이!'

줄리엔이 치를 떨었다. 어찌된 녀석들이 전우애나 우정이 이리 없단 말인가.

물론 자신이 내뱉은 말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두목을 저렇게 순식간에 팔 줄은 몰랐다.

줄리엔의 몸이 덜덜 떨리며 이빨을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명백한 잘못이었다. 줄리엔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줄리엔은 눈치가 빨랐다. 여기서는 일단 죄를 인정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게 최선이었다.

에단이 무심한 눈길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줄리엔을 바라봤다.

"아니야. 맞는 말 했네."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미쳤습니다! 남 등골이나 처먹던 기생충 같은 저희를 구원해 주신 은혜도 모르고 잠시 헛소리를 지껄였습니다!"

"그래? 하긴 도적질이나 하던 새끼 거둬 주니 뒷담이나 까고, 여관에 민폐나 끼치는 새끼들로 거듭날 줄은 나도 상상 못 했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라고 했지? 다행히 죄를 묻기 어렵진 않겠네."

뚜둑. 뚜두둑.

에단이 손을 풀었다. 소름 끼치는 뼈 소리에 줄리엔의 등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줄리엔이 엉금엉금 기어가며 에단의 발을 붙잡았다.

"부,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너 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나?"

엎드려 있는 줄리엔의 등에 에단의 따가운 시선이 박혔다.

"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불평불만을 하지 않겠습니다!"

"흐음...."

에단이 턱을 쓰다듬었다. 에단이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줄리엔이 더 처절하게 애원했다.

"정말입니다! 늘 기쁘고 감사하게 여기며 훈련에 임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일단 일어나 봐."

"네, 넵!"

줄리엔이 에단 앞에 우두커니 섰다.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줄리엔은 에단과 눈을 마주치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 심장이 멎을 것 같아.'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압박감이 아니었다.

"기쁘고 감사하게 여긴다고?"

"...그, 그렇습니다!"

"대답이 느리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웃으면서 지내야겠네."

"...네?"

"방금 말했잖아. 기쁘고 감사하게 여긴다며. 그럼 웃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이번에도 거짓말을 한 건가?"

에단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 같은 기색이 보이자, 줄리엔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웃으면서 살겠습니다!"

줄리엔의 입가가 경련하며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단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보니까 이번에는 믿어도 되겠네."

"감사합니다!"

빠악!

그 순간, 에단의 발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줄리엔의 정강이가 부러졌다.

"끄아아아악!"

줄리엔이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줄리엔을 바라보며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시끄럽네."

"...."

줄리엔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에단의 심기를 한 번 더 거스르면 그때는 진짜 죽은 목숨이었다.

"언제까지 누워 있으려고?"

줄리엔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붉어진 얼굴에서, 얼마나 고통을 견뎌 내고 있는지 느껴졌다.

"음? 아까랑 표정이 조금 다른데? 웃으면서 지내겠다고 하지 않았나? 웃음이 사라졌는데?"

"...!"

줄리엔의 얼굴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줄리엔은 눈을 질끈 감으며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한 말은 지켜야지. 안 웃고 있었으면 그대로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 버릴 뻔했잖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에단의 말에,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단원들도 오한을 느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다른 단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네?"

"쟤 웃고 지내는 거 말이야. 아, 너희들은 감사함을 모르는 건가?"

그제야 에단의 말을 눈치챈 단원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 저희도 웃으면서 지내겠습니다."

단원들은 동시에 기괴한 미소를 장착했다.

◈ [168화] 붉은 곰 (4)

에단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동시에 타미가 눈을 떴다.

그 탓에 휴고와 헨리, 그리고 에단의 시선이 동시에 타미에게로 향했다.

"...어디? 여긴."

타미의 멍한 모습을 본 에단은 흥미로운 듯 바라봤고, 휴고와 헨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어떻게든 해 보라는 듯 눈빛을 나눴다.

하지만 그 둘 또한 이런 상황에 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당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이는 헨리였다.

"큼, 크흠! 저희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랍니다! 헤헤."

헨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가려 하자, 타미의 몸이 움찔거렸다. 타미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 같은데요....'

휴고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경험이 없는 자기가 봐도 저건 아닌 것 같았다.

"큼! 크흠! 저기...."

휴고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서려 하자, 타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오, 오지 마."

"...."

곧바로 찌그러지는 휴고의 모습에 헨리가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둘이 하던 짓을 빤히 지켜보던 에단이 혀를 찼다. 휴고와 헨리는 자존심 상한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아무리 에단 님이라도 다르지 않을걸요!'

'도련님도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둘은 에단이 언제나 거칠게 일을 해결해 왔기 때문에 그 역시 아이를 다루는 법을 모르리라 확신했다.

둘의 생각이 어떻든 에단은 타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오지 말라고!"

타미가 본능적으로 목소리에 피어를 실어 소리치자, 중압감이 방 안을 휩쓸었다.

하지만 에단도 지지 않고 마나와 피어를 동시에 끌어 올렸고, 타미의 기세는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타미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기운이 제압되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에단 님!'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소녀인데 어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은 휴고와 헨리도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에단을 바라봤다. 타미에게 다가간 에단이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에단이 타미를 향해 말했다.

에단은 타미의 과거를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책 몇 페이지에 담긴 내용이 전부였지만, 타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였을 과거다.

천애 고아로 살아온 에단, 아니, 류태신은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과거였다.

섣부른 위로나 감정에도 없는 말을 읊을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미를 데려온 것뿐이다.

감정을 꿰뚫는 아이의 눈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이 한참 동안 타미와 눈을 마주하다 입을 열었다.

"이름은?"

"...타미."

타미가 대답했다. 헨리와 휴고가 입을 벌렸다.

'...저게 먹힌다고?'

'말도 안 돼....'

에단이 타미를 바라보다 작게 미소 지었다.

"대답해 줘서 고맙다. 지금 급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돼.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말해 줘."

"...."

타미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을 바라보던 타미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타미가 축축이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꿈은 아니지?"

많은 의미를 내포한 물음이었다. 에단은 씁쓸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타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많은 기억이 뒤엉켰다.

레벨린에게 조종당하며 자신의 의사와 다른 행동을 했을 때의 기억도 타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간 그녀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타미는 덜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가진 이 힘으로 죄 없는 이들을 상처 입히고 말았다.

그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타미는 아직 가족을 잃은 충격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

에단이 그런 타미를 말없이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뭐라도 먹겠어?"

헨리와 휴고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저게 울고 있는 아이에게 할 말이란 말인가?

"...응."

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와 휴고가 다시 한번 당황했다. 하나같이 예상 밖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둘을 바라봤다.

"뭐 하냐?"

"네?"

"먹을 거 가져오라고."

"아...."

휴고와 헨리가 서로를 바라봤다. 묘하게 서로 눈치를 보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둘 다 다녀와."

"넵."

휴고와 헨리가 곧바로 방을 나섰다. 방 안에는 타미와 에단이 남았다.

조용해진 방 안에 자그마한 타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빠는 나쁜 사람이야?"

아이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타미를 바라봤다.

"글쎄?"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에단은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에단은 늘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거기에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류태신일 때도, 에단일 때도 다르지 않았다.

"나쁜 사람은 모르겠고,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에단이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타미가 멀뚱거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왜? 내가 나쁜 사람 같아?"

"...아니."

타미가 고개를 저었다.

에단은 그녀에게 꾸밈없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타미는 조금이나마 에단에게 마음을 열었다.

"일단 밥부터 먹어."

때마침 돌아온 헨리와 휴고의 양손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타미가 눈을 깜빡거렸다.

* * *

음식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헨리와 휴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타미의 모습을 지켜봤다.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식성을 자랑하던 휴고조차 놀랄 모습이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휴고가 침을 꿀꺽 삼켰다. 먹고 있는 걸 보자니 어째서인지 허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이러다간 계속 침을 삼키겠다 싶어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휴고는,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순식간에 음식들을 해치우고 멀뚱거리며 휴고를 바라보는 타미였다.

타미는 손가락을 들어 휴고를 가리켰다.

"응? 나?"

휴고가 자신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늑대."

타미의 말에 휴고가 눈을 끔뻑이며 에단과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에단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 어쩌죠?'

뭔가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발설된 것 같았다.

"어, 늑대가 얘야."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휴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에, 에단 님...."

"왜?"

에단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보자 헨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 어쩌죠?"

"뭘 어째. 딱히 비밀도 아닌데."

"비밀이 아니라고요?"

"숨겨서 어디다 쓰게."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았다. 휴고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듯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죄송한데 무슨 얘기인가요?"

"아, 너 수인이거든. 보니까 늑대족이던데."

"...예?!"

휴고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에단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인 몰라? 너 막 변신해. 털 숭숭 나고 주둥이 길어지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휴고도 수인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자신에게 대입해 본 적은 없었다.

"그.... 농담이죠?"

"아닌데?"

"...근데 왜 말씀 안 해 줬어요?"

에단이 휴고를 멀뚱거리며 응시했다.

"너가 안 물어봤잖아."

"예?"

"아니, 물어보지도 않은 걸 대답해 줘야 해?"

"...그런가요?"

"그렇지. 아 쟤도 수인이야."

"...네?"

"헨리도 인간이라기에는 좀 애매하지."

"에단 님!"

"왜, 딱히 비밀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둘의 대화를 들으며 휴고가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이상한 거구나...."

뭔가 묘하게 납득이 되는 기분에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미가 입을 열었다.

"...이상해."

"이상할 수도 있지."

에단이 피식 웃으며 타미를 바라봤다.

이상한 게 딱히 죄는 아니잖아?

* * *

잭슨이 복귀했다. 잭슨은 곧바로 메이의 호출을 받고 접견실로 올라섰다.

메이는 잭슨의 모습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음...."

잭슨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꾀죄죄한 수준이 아닌,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말을 하던 메이가 입을 막았다. 참고 얘기해 보려 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탓이었다.

"왜 이런 꼴로 올라온 거죠?"

"...바로 호출하셔서."

메이의 말에 잭슨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하자, 메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당장 씻고 오세요."

"...네."

잭슨이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접견실로 올라갔다.

"왜 이렇게 늦었죠?"

"꼼꼼히 씻느라...."

메이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 복귀가 늦은 건 여러 이유 때문입니다."

"...합당한 설명을 해 주셔야 할 겁니다."

메이가 엄한 눈으로 잭슨을 바라보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한 무리의 수장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블란테에 방문한 이후 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올랐다고요?"

메이의 목소리에서 황당함이 묻어 나왔다.

잭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에단 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산을 오르다 보니 동굴이 하나 보이더군요. 아, 이곳이 에단 님이 말씀하신 장소구나 해서 들어가 보니."

"보니?"

"인간들과 몬스터, 뱀파이어가 같이 있더라고요."

"...지금 저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메이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잭슨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잭슨이 다급하게 전후 사정을 포함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메이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야기를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일단 말씀해 보세요."

"그 이후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나가."

"예?"

"나가라고!"

"서, 설명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에단 님의 명령입니다."

"하...."

메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찌된 게 에단만 언급이 되면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거기서 훈련하느라 길드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소리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뭡니까."

"그럼 잠시 성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잭슨이 대뜸 옷을 훌렁 벗어젖혔다. 메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메이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지금 뭘 하는 거죠?"

"어떻습니까?"

꿈틀꿈틀.

잭슨이 자세를 취했다. 오밀조밀한 근육이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수련의 성과입니다."

잭슨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메이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쩌다가 정보 길드가 이 정도 수준까지 추락했단 말인가.

암담함을 느꼈다. 메이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잭슨이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크, 크흠!"

잭슨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메이를 바라봤다.

"그래서 복귀를 하지 않은 이유가 한가하게 수련이나 하고 있었다, 그거입니까?"

"에단 님에게 계획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획?"

"용병단을 창단하려는 것 같습니다."

"...잭슨 씨."

"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그럼 징계 내용은...."

"하,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뭔가요."

잭슨의 다급한 태도에 메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뱀파이어에 관한 사실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메이의 눈에 흥미가 생겼다. 밤의 귀족이라 불리는 뱀파이어는 아직도 세간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 뱀파이어 분이 희대의 신물을 개발해 냈습니다! '보충제'라는 근육증강제인데...."

"잭슨 씨."

"네?"

"6개월 감봉입니다."

"...."

◈ [169화] 붉은 곰 (5)

휴고는 일전에 렉사르와의 교전에서 부분적으로 신체가 변하는 것을 알았다.

'...도련님이 주신 조각 때문인 줄 알았는데....'

에단이 건네준 마석 파편이 신체를 변화하게 만들어 주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본인 스스로가 수인이라는 생각에까지는 차마 닿지 못했다.

'...내가 수인이었구나.'

뭔가 기분이 묘했다. 참담하다거나 침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잠시 멍 때리고 있던 휴고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동안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던 게...."

"너 그때마다 장난 아니었어."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휴고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예전에 동굴에서 나왔을 때 턱이 아프던 것도...."

"...어, 어. 갑자기 돌 같은 걸 주워 먹으려고 해서 내가 뜯어말렸지. 그것 때문에 아팠나 보네."

에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휴고는 에단의 짧은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휴고가 충격받은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도, 돌을 먹다니...."

"...."

에단은 휴고의 시선을 외면했다. 잠자코 있던 페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무릎이랑 팔꿈치로 턱을 작살낸 놈이....

페온의 목소리도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멀뚱거리며 에단과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해.'

분명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다. 타인을 쉽사리 믿기에는 그녀가 입은 상처는 너무 깊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의 대화를 보자 경계심이 옅어지고 있었다.

'...왜 이러지.'

또 다른 수인을 만나서일까. 타미에게도 자신의 일족이 아닌 다른 수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새로운 수인이 뭔가 얼빵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식.

타미가 작은 미소를 머금자, 모두의 시선이 타미에게로 향했다.

타미가 다급하게 입을 가렸지만 이미 셋의 눈은 타미의 입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 웃었어."

"그래."

에단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타미를 위로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야 할 때였다.

"타미."

"...."

타미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지만, 에단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자아를 잃고 있었을 때의 기억은 어디까지 나지?"

다소 민감한 질문에 휴고와 헨리가 당황했다. 설마 벌써부터 저런 질문을 던질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다.

"...전부는 기억 안 나."

"그렇겠지. 힘들겠지만 나는 네 답을 들어야만 해. 레벨린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지."

"레벨린을 알고 있어?"

타미의 눈에 경계심과 적의가 서렸다.

"알고는 있지. 개 같은 년이라는 것 정도는."

에단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타미는 그런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생각보다 잘 통하네."

"...레벨린에 관해서는 거의 기억나지 않아. 나는 대부분 싸우면서 지냈어. 가끔 레벨린의 얼굴을 본 장소도 한 곳이었어."

"그 장소는 기억이 나?"

"가는 길은 몰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 주위가 어두웠어."

'쯧, 실패인가.'

레벨린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타미를 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아쉬움이 들었다.

그때, 타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벨린이 있던 장소에 찾아오던 이들의 모습은 기억이 나."

"...더 말해 봐."

타미가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

"...하얀 갑옷. 하얀 머리의 남자."

타미의 답변에 에단의 입이 비틀렸다.

'찾았다.'

거기 있었구나.

특정되는 인물은 하나였다. 설마 레벨린이 그쪽과 협력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원작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사실이었으니까.

'앙큼한 새끼들이.'

명색이 신성 왕국이라는 놈들이 레벨린이랑 결탁을 맺어?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 * *

에단이 타미와 저택을 떠난 후 한니발은 난장판이 된 방 안을 바라봤다. 주변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피가 낭자했다.

하지만 한니발의 얼굴은 착잡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싸늘할 정도로 무감정해 보였다.

'시간이 촉박하군.'

한니발은 쉬지 않고 계산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참담한 내부를 뒤로한 채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향할 장소가 있었다.

* * *

"누가 찾아왔다고?"

"한니발입니다."

"...그 거물이 직접?"

"네, 어떻게 대응할까요?"

"올려 보내. 내가 직접 마주해야 되겠어."

메이는 내심 적잖게 당황했다. 한니발에 대해서는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거상 한니발.

대륙의 재화를 쥐고 있다고까지 알려지는 이가 바로 한니발이라는 상인이었다.

정보 길드는 한니발과도 거래한 경험이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니발은 상인이었고, 상인에게 정보는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하지만 정보 길드와 접촉할 때는 언제나 대리인이나 수하를 이용했다. 당연한 처사였다.

한니발급의 거물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으니.

그런데 지금 한니발이 몸소 정보 길드를 방문했다. 그렇다면 정보 길드 또한 그만한 예우를 갖춰야만 했다.

메이가 옷가지를 정리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한니발이 길드원의 안내를 받고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한니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니발은 가볍게 주변을 훑은 뒤, 메이를 바라봤다.

'묘한 분위기군.'

신선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한니발이 가라앉은 눈으로 가림막 뒤에 있는 메이를 바라봤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인 한니발입니다."

"저야말로 소문으로만 듣던 거상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다.

'과연, 이자가 거상 한니발인가.'

가림막 너머로 거상의 기세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바쁘신 분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메이의 물음에 한니발이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말을 전달받았습니다."

"어떤 말을 전달받았다는 거죠?"

"그분이 가진 세력 중 하나가 정보 길드라는 사실을요."

"...."

한니발의 입에서 나온 경악스러운 말에 메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한니발과 붉은 곰의 연관성을 말해 준 것이 자신이라지만, 벌써 접촉했을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어떤 대화를 나눴길래 한니발 정도 되는 거물이 에단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행차했단 말인가.

이성을 되찾은 메이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정보 길드는 그분의 세력입니다."

"...놀랍군요."

"전후 사정이 궁금하군요.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니발은 간략하게 에단과 조우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런 미친.'

황당하다 못해 경악스러웠다.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다.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니발의 말을 모두 들은 메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떤 게 말이죠?"

"그동안 준비하던 일이 전부 어그러진 것 아닙니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상인입니다. 득실을 따지는 장사꾼이죠. 만일 제가 준비하던 계획이 더 진전됐다면 저는 더 큰 손해를 봤을 겁니다."

"...대단하군요."

감탄스러웠다. 확실히 거상이라 불리는 이다웠다.

"그리고 제 감이 말해 주더군요."

한니발이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분 뒤에 서는 게 제게 훨씬 이득이라고 말이죠."

한니발의 말에 메이도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조언해 줄 위치는 되지 않지만, 후회되는 선택은 아닐 겁니다."

"많은 위로가 되는군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한니발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보의 일부를 풀었다. 그는 많은 재화와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상인이었다.

돈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었다.

한니발은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뒤 세계를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무력으로는 넘볼 수가 없는 곳이기에 생각지도 않았지만."

사업 수완이나 재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어둠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었다.

"블랙마켓을 말씀하시는군요."

일명 암시장.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블랙마켓이었다.

티켓을 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간단한 일이다.

메이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며, 한니발은 위상을 떨치는 거상이다. 블랙마켓의 입장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니발이 하는 말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말 전쟁을 벌일 생각이군.'

에단은 지금 블랙마켓을 통째로 수면 위로 들어 올릴 생각이었다.

엮을 수 있는 자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목줄을 채울 계획이다.

귀족이니 왕족이니 할 것 없이 전부.

'그를 위한 초석이 그 장부인가.'

생각보다 더욱 위험했다. 도박이나 인신매매에 연류된 이들은 블랙마켓 전체와 비교할 게 아니었다.

"귀와 입이 필요합니다."

"돈을 뿌릴 생각입니까?"

"투자라고 생각하시죠."

이미 뇌물은 먹여 놓았다. 귀족들의 눈과 귀는 막혀 있다. 한니발은 일부러 흔적을 남기며 움직일 생각이었다.

혼자가 아닌, 상인들과 귀족들을 동시에 묶어서.

세간에는 소문이 나돌 것이다. 돈이 더 몰리면 자연스럽게 사람이 몰리며 이목이 집중된다.

블랙마켓에 입장할 티켓이야 널리고 널렸다. 지금부터 작정하고 구한다면 더 늘릴 수도 있었다.

메이가 정보를 흘리면 한니발은 티켓을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판을 키운다.

커진 판에서 돼지는 몸집을 불릴 터. 그렇게 먹기 좋게 살이 오른 돼지는....

"사자가 잡아먹을 겁니다."

"사자가 잡아먹겠네요."

메이와 한니발의 뜻이 통했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블랙마켓은 음지에 숨어 있는 만큼 삼엄한 경계를 자랑했다. 어중간한 무력으로 설쳐 봤자 처참하게 죽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력이 과연 블란테라는 괴물에게도 통할까?

에단이 블란테를 이끈 채 작정하고 판을 뒤집어 버리게 된다면 상황 또한 반전된다.

어둠 속에 깊게 뿌리내린 나무가 활활 불타오를 것이다.

그를 위해 이용할 것이 바로 이 장부였다. 먼저 이목을 끌어 줄 개들이 필요했다.

"도박장의 위치와 귀족들의 신상 정보, 그리고 별장들까지. 오늘 내에 정리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돈의 출처는 제가 찾아 드리죠. 당연히 정보값은 치를 겁니다."

"주책맞게 조금 설레기까지 하는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들뜨는 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본래라면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했을 정보 길드와 거상이, 에단이라는 구심점으로 하나 되어 손을 맞잡았다.

◈ [170화] 붉은 곰 (6)

"성인식에 대해 알고 있어?"

에단의 물음에 타미가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난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어."

"그건 알고 있어. 성인식을 치렀다면 저 녀석이랑 싸울 때 그 상태로 싸우지는 않았겠지."

에단이 멀뚱거리며 가만히 서 있는 휴고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어?"

"글쎄? 나도 어디서 말을 주워들은 것뿐이라서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야."

원작에서 언급되는 수인의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완벽하게 풀린 설정도 아니었다.

에단이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추 수준. 어쨌거나 지금 휴고를 제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북부로 넘어가야만 했다.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해. 아빠와 마을 사람들도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 말한 게 전부였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일부에 불과해."

"그걸로 충분해."

"나는 늑대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저 녀석은 성인식을 치른 줄 알았어."

"제대로 치른 건 아니지. 애초에 저 녀석은 완전한 웨어울프도 아니야."

"그, 그런가요?"

당혹스러워하는 휴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수인이며 늑대족이라는 것도 처음 듣는데, 심지어 제대로 된 늑대족도 아니란다.

'...뭐지.'

충격을 넘어 실감이 가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휴고를 힐끔 바라본 타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완전히 변할 수 없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쟤는 완전히 변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야매로 했다고. 쟤는 천적이랑 만났었거든."

"...정말?"

타미의 눈이 짐짓 커졌다. 살면서 천적을 조우하기는 쉽지 않았다.

"제, 제가 천적을 만났나요?"

휴고의 질문을 무시한 에단은 타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나를 다룰 줄 알던데. 그건 어떻게 하던 거지?"

"...늑대족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설명해 줄 수 있어."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타미가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마나를 어떻게 쌓아?"

타미의 질문에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와 헨리를 바라봤다. 둘 다 일반적인 케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음....'

― 마나 수련법으로 쌓는다.

"마나 수련법으로 쌓지."

페온의 말을 들은 에단이 답하자, 타미가 눈을 깜빡였다.

"마나 수련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연에 있는 마나를 통해서 마나를 쌓아. 보통은 커다란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쌓거나, 아니면 마을의 전사들이 도와줘."

전자는 에단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에단이 궁금한 것은 후자였다.

"전사들이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대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나를 체득하게 만들고, 마나를 몸속에 주입시켜 줘. 꽤나 많은 고통이 수반되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별로 시도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

타미의 말을 들은 에단이 침묵했다. 이야기를 듣던 휴고도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 같았다.

'...잠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블란테의 마나 수련법. 일반적인 마나 수련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타미가 설명한 수인들의 수련법과 블란테의 수련법은 놀랍도록 흡사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고작 있는 차이점이 외부의 마나를 주입한다는 건가.'

에단이 생각에 잠겼다. 읽은 적이 있는 설정 같았다. 타인의 마나 주입. 그것이 안 되는 이유는 마나의 형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서로 다른 성질의 마나를 지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수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수인은 기본적으로 특별한 수련법이 아닌, 자연의 마나를 그대로 흡수한다.

그렇기에 마나의 충돌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아무리 인간이 수인의 수련법을 따온다고 한들 모든 걸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의 경우는.'

에단은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나를 느꼈다.

고요하다. 그리고 깊었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마나의 바다가 에단의 몸속에 있었다. 에단이 이 중 다룰 수 있는 마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내가 가진 마나는.'

근원에 가까웠다.

산 것과 죽은 것.

죽은 나무와 생명의 나무라 불리는 세계수의 힘.

'이미 경험했어.'

르니엘과 헨리. 둘이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가능한 건가?'

에단은 전력이 필요했다. 이제는 대비를 갖출 때였다. 곧 전쟁이 벌어진다. 에단이 준비하는 모든 것들은 그를 위한 초석이다.

'제대로 된 성인식은 북부로 넘어갔을 때. 그때는 늦어. 대비를 해야 한다.'

에단의 형형한 눈빛을 바라본 휴고가 불안감에 짐짓 몸을 떨었다.

'...왜 또 저런 눈빛으로 보시는 거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에단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보통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페온은 무언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도 페온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지금 추궁한다고 한들 페온은 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에단이 표정을 풀고 다시 타미를 바라봤다.

"많은 도움이 됐군."

"...이제 끝이야?"

"그래. 충분한 대답을 들었어. 정신없을 텐데 고생 많았다."

"...나 이제 쓸모없어?"

타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에단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타미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또 혼자야?"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와 헨리를 바라봤다. 휴고와 헨리 모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았다. 에단이 타미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니,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새끼는 아니거든?"

"...."

"그러고 보니 너는 용병단이잖아? 단원들은... 뭐, 표정을 보니 정상적인 새끼들은 아니었나 보네."

하기사 타미의 상태를 보면 제대로 된 단원들로 용병단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조금 이상한 놈들이지만, 네 수하를 자칭하는 녀석들은 있어."

"...?"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를 바라봤다.

"애들 소집해."

"아, 넵."

휴고가 문밖으로 나간 직후, 쿵쿵거리며 건물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쾅!

문이 벌컥 열리며 단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원들의 입가에는 여전히 기괴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부, 부르셔서 찾아왔습니다."

"많이 컸다?"

"네?"

"윗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그딴 식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이야, 경첩 헐거워진 거 봐라. 고막 나가는 줄 알았네."

"어, 어...."

"얼씨구. 이제 사과도 안 해? 이 새끼 정신 못 차렸네."

쾅!

줄리엔이 재빠르게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죄송합니다!"

"그래. 알면 됐고. 나 말고 얘한테 인사나 해."

줄리엔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에단의 옆에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분은...?"

"설마 못 알아보지는 않겠지?"

에단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줄리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소."

줄리엔은 곧장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 저 소녀가 누구인지 격렬히 생각했다. 고심하던 줄리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따님...?"

에단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줄리엔이 곧바로 다시 머리를 박았다.

에단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전해 무슨 일을 했지?"

"약탈...을 했죠."

"그래. 그때 그 개 같은 이름은?"

"...곰 발?"

"누구의 사주를 받고?"

"...붉은 곰입죠."

"그럼 얘는 누구일까? 이렇게 떠먹여 줬는데도 모르면 그냥 나가 죽어라."

"설마...."

줄리엔의 얼굴이 짙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저 꼬맹, 아니, 저분이 붉은 곰...이신가요?"

"어. 알면 빨리 받들어 모셔."

"허억!"

줄리엔이 헛숨을 들이켰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간 명령을 하달했던 붉은 곰은 줄리엔보다 거대한 풍채를 지닌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그야말로 붉은 곰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자였기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소녀는 아무리 봐도 용병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10대 초반의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곰과 연관 있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칼뿐이었다.

"노, 농담이시죠?"

"농담 같냐?"

"...."

줄리엔이 입을 다물고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는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줄리엔과 단원들을 바라봤다.

타미가 입을 열었다.

"...누구?"

"있어. 붉은 곰 따라 하던 놈들. 네가 정신적 지주니까 받들어 모실 거야."

"...."

타미가 멀뚱거리며 줄리엔을 바라봤다. 줄리엔은 저 소녀가 붉은 곰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쟤 표정 보니까 아직도 안 믿나 본데? 한번 보여 줘 봐."

"뭐를?"

"뭐, 없나? 흠...."

에단이 자신의 허리춤에 착검되어 있던 단검 한 자루를 건넸다.

"이걸로 보여 줘 봐."

에단이 타미에게 단검을 건네자, 줄리엔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에게 날붙이는 조금...."

끼기기긱.

단검이 종이짝처럼 구부려졌다. 줄리엔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저, 저, 저게 무슨...."

타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타미의 눈이 일순 붉게 물들자, 사나운 기세가 방 안에 맴돌았다.

콰직.

그와 동시에 공처럼 뭉쳐졌던 단검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줄리엔이 멍청한 표정으로 쇳가루를 응시했다.

"이제 믿겠어?"

"...네."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모습을 보고도 믿지 않으면 머저리였다.

"그럼 줄리엔은 이제 대장직 내려놓고 얘 시켜. 아, 얘 이름은 타미거든? 말 안 들으면 이것처럼 될 거야."

에단이 턱짓으로 쇳가루를 가리키며 말하자, 단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 대장은 에단 님 아니었습니까...?"

"아직까진 그렇지.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원래라면 너보고 계속 맡으라고 하려 했는데. 내부에서도 반발이 꽤나 많은 거 같길래."

에단이 다른 단원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자, 곧바로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맞습니다. 전 두목님보다 타미 님이 대장을 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능력으로나 외관으로나, 전혀 비교가 안 됩니다. 두목님은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애초에 '곰 발'이라는 이름 자체가 붉은 곰에서 따온 것 아닙니까? 당연히 원조를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줄리엔이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단원들을 바라봤다.

"너, 너희들이 어떻게...."

"뭐가 말입니까."

"할 말 있으면 해 보십쇼."

"전부터 짜증 났습니다."

"양심이 있으면 곱게 내려놓으십쇼. 어차피 거부해 봤자 저 꼴이 될 텐데."

단원 중 하나가 가루가 된 단검을 가리키자 줄리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희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날 줄리엔은 두목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 [171화] 수련

처음에는 낯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던 타미는 금세 에단 일행에게 동화되었다.

"이제 내 말에는 절대 복종해야 해."

"아무렴요."

헤실헤실.

줄리엔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벌써부터 타미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뭔가 꼴 보기가 싫었다.

'그나저나 쓰는 말투가 꽤나 고상한데.'

한니발 곁에 있어서 그런 건가? 잘은 알 수 없지만, 나이와 목소리에 비해 타미의 어휘 수준은 높아 보였다.

"버러지들아! 날이 밝았다!"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여관 밖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단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창백해졌다.

"...왜 그래?"

타미의 물음에 줄리엔이 음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

에단이 한 발 앞으로 나가 대신 답했다.

"얘들 수준이 어디 가서 객사하기 딱 좋아서 좀 고쳐 써야 해."

에단의 말을 들은 타미가 단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건 그렇네."

타미의 반응에 단원들이 서글픈 표정으로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건장한 남성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가는 모습이 영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제일 늦는 녀석은 오늘 뒈졌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거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사미라의 말에 단원들이 거칠게 뛰쳐나가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원들의 소란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시끄러운 녀석들이라니까."

에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옆에 있는 휴고를 바라보았다. 휴고는 아직도 어딘가 멍청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휴고."

"아.... 넵, 부르셨습니까?"

"우리도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어떤 걸 말입니까?"

"들었잖아."

에단이 타미를 힐긋 바라봤다. 휴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제가 기억이 잘...."

"아, 그래? 기억 못 해도 괜찮아. 기억은 내가 하고 있거든."

"하, 하하...."

휴고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바로 나와."

* * *

하아.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풀었다.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대련은 오랜만인데.'

휴고는 본인의 실력에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취월장하는 실력. 사람들의 경탄 어린 시선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휴고는 본인이 깨달을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에단에 비교하면 반딧불에 불과했다.

'...비교가 안 돼.'

에단이 괴물이라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나 과거에는 이 정도까지 격차를 느끼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에단의 가장 큰 강점은 기술과 노련함이었기 때문이다.

경험은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기술은 노력하면 향상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체급의 격차를 느낀 것도 아니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에 있어서는 휴고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고개를 들어 봐도 에단의 경지가 가늠되지 않는다.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에단은 높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에단이 전투에 나설 때도 매한가지였다. 에단이 가진 힘은 과거와 차원이 달라졌다.

가망이 없는 싸움에 도전하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도 없었다. 그러나 휴고는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위해서야.'

휴고는 갈증을 느꼈다. 휴고는 가토를 의식하고 있었다. 휴고가 성장하고 있는 사이, 가토는 더욱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토가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휴고는 초조함을 느꼈다.

'나는 왜 마나를 다루지 못하게 하시는 거지?'

그런 순수한 의문이 오늘로써 해소되었다. 휴고가 타미를 힐긋 바라봤다.

수인.

엘프같은 이종족보다도 더욱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바로 수인들이었다. 휴고도 지나가면서 몇 번 주워들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내가 수인이라니.'

휴고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타미도 수인이라고 말했다. 한데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휴고의 시선에 타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달라.'

구체적으로 어디가 다른지를 짚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과 타미는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발톱은 감출 수 있어도, 본질은 가릴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구나.'

자신은 수인이며 야수다. 그 사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자 휴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단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조금 집중해야겠는데.'

기류가 바뀌었다. 휴고의 눈빛이 바뀌었다. 고요한 눈 안에 날카로운 이빨이 숨어 있었다.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에단이 목을 비틀자 섬뜩한 뼈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진심으로 싸워야 효과가 있는 거잖아?"

에단이 타미를 향해 묻자 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많이 힘들어."

타미가 동정하는 시선으로 힐긋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굳은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야, 많이 컸는데?"

에단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에단이 가볍게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주의해라. 저 녀석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으면.

'알고 있습니다.'

침묵하고 있던 페온이 입을 열었다. 에단이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높은 숙련도를 요하기 때문에 페온은 우려가 되었다.

'미세한 컨트롤은 부탁드리겠습니다.'

― ...나도 모든 걸 조절할 수는 없어.

'조금이면 충분합니다.'

에단이 몸에 힘을 풀었다. 승리를 위한 전투가 아니다. 이건 휴고를 성장시키고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지도였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인데.'

묘한 신선함이 느껴졌다. 에단이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통통.

가벼운 움직임이다.

보폭은 좁지 않게, 팔의 위치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쯤.

에단이 자세를 갖추자 휴고도 대비를 시작했다. 호흡을 들이마신 뒤 자세를 낮췄다.

피가 달아오른다. 휴고의 눈이 목표를 포착했다.

파앙!

휴고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에단은 차가운 눈으로 휴고의 움직임을 좇았다. 섬광 같은 움직임이다.

파앙!

에단이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달려드는 휴고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힘을 뺀 가벼운 일격이었음에도 휴고의 몸은 휘청거렸다.

휴고가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쯤은 감안하고 있었다. 휴고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자, 에단이 연속으로 휴고의 안면에 잽을 날렸다.

팡! 팡! 팡!

보이기는 가벼워 보였지만, 소리가 에단의 주먹을 따라오지 못했다.

휴고의 동체 시력은 아주 뛰어났다. 하지만 에단의 주먹을 좇을 수는 없었다. 주먹을 읽으려는 순간, 얼굴이 뜯겨 나갈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크윽!"

휴고가 멈칫하는 순간, 에단의 눈빛이 바뀌었다. 에단이 주춤하는 휴고의 앞발을 삼켰다.

허리가 비틀리며, 숨죽이고 있던 뒷손이 튀어나온다. 휴고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피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에단의 주먹은 그만큼이나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이윽고 주먹이 휴고의 안면에 꽂히려던 그때, 에단이 손을 거뒀다.

"긴장 마."

힘 조절할 테니까.

에단의 미소에 휴고의 얼굴이 굳었다. 그 또한 남자이며 기사였다. 휴고의 자존심에 생체기가 생겼다.

"후우우."

휴고의 호흡 소리가 바뀌었다. 휴고의 움직임에 본능이 더욱 가미되었다. 그때, 에단의 손이 휴고의 시야를 가렸다.

'슬슬 두드리면 되려나.'

달려들 타이밍을 읽기 어렵다. 그게 휴고의 장점이다. 본능에서 나오는 짐승 같은 움직임. 그것을 읽어 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면 그만이다. 에단은 휴고의 진심을 최대한 끌어내야만 했다.

타닷!

마치 상대를 제치듯 휴고가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했다. 에단의 팔을 피해 쏜살처럼 달려들었다. 휴고의 주먹이 에단의 얼굴을 향했다.

슥.

하지만 에단은 휴고의 공격을 피해 냄과 동시에 발을 걸었다.

훽!

휴고의 중심이 뒤집혔다. 공중에서 재빠르게 몸을 틀어봤지만, 에단이 손바닥이 먼저였다.

에단은 휴고의 머리를 틀어잡고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콰앙!

"커헉!"

휴고의 입이 벌어지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자기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인지가 되지 않았다. 그때, 에단의 주먹이 휴고의 복부를 후려쳤다.

뻐억!

끔찍한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뼈에 사무치고 뇌리에 꽂히는 격통이다.

"이런 방식인가?"

에단의 주먹에서 마나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휴고의 몸을 부수기 위한 타격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휴고의 몸속에 마나를 새기기 위한 타격이었다.

'뭔가 재밌는데?'

에단이 씨익 웃으며 다시 타격을 이어 나갔다.

뻐억! 뻐억!

"끄으으윽!"

휴고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왔다. 휴고가 격렬히 저항하며 에단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왜 그렇게 숨소리가 거칠어?"

"...."

휴고가 원망 어린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정말 치가 떨려 오는 고통이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통을 감수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 고통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련님...."

"왜?"

"제가 생각해 보니까 조금 천천히 강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소리 그만하고."

"...."

휴고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 얘 좀 변하게 해 봐."

"...응. 알겠어."

"자, 잠깐...."

휴고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타미의 행동이 먼저였다.

타미가 곰족 특유의 야성을 끌어올리자, 휴고의 동공이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짐승의 누린내가 진동했다. 골격이 뒤바뀌며 주둥이가 길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사나운 야수가 에단을 포착했다.

"...."

하지만 휴고는 에단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멀뚱거리며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주춤.

야수화한 휴고가 뒤로 물러났다. 에단이 물끄러미 휴고를 바라봤다.

"...너 뭐 하냐?"

"...."

당연한 이야기지만, 휴고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에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네."

에단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내가 먼저 가야지."

타닷!

에단의 신형이 사라졌다.

휴고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에단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역시 감은 좋아. 짐승이라 그런가?"

휴고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쾅!

에단이 왼손으로 패링하자, 휴고의 몸이 훤히 드러났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해볼까?"

― ...끄응.

에단이 품으로 파고들자 휴고의 누런 눈이 흔들렸다.

퍽! 퍼버버버버벅!

현란한 바디 연타가 배에 꽂히기 시작하자 휴고의 몸이 거칠게 들썩였다.

에단의 주먹에는 마나가 넘실거렸다. 한 방, 한 방이 살벌한 일격이었다.

위험한 곳은 노리지 않았다. 적당히 힘 조절도 하고 있었다. 세세한 마나 조작만 페온에게 맡겼을 뿐이다.

"조금만 참아 봐."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깨, 깨개개갱!

휴고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172화] 과욕 (1)

깨갱 깨개갱!

처절하고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여관 뒤편 공터에서 치른 수련이라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왔지만, 헨리가 입구 앞에 쳐 둔 나무들로 이목이 몰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수련이란 명목의 폭행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 휴고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공격 따위는 에단이 모조리 흘려 냈다.

슥, 빡!

휴고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불쌍해."

타미가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실력의 격차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일방적인 폭력이 일어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래야만 안전했다. 실력이 비등하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에단은 템포와 타이밍을 적절히 조절하며 휴고를 타격했다.

"그, 그만...."

휴고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에 에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말도 하네?"

"...어, 어라?"

휴고는 시선을 내려 은색 털이 수북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매가 약이네. 어째든 각성은 한 거 같으니 그만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에단은 느끼고 있었다. 휴고를 때리면 때릴수록 휴고의 반응도 기민해지고 있었다. 휴고의 몸속에 마나가 스며들고 있는 것이리라.

'방법이 이거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에단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휴고의 성장을 위해서는 방도가 없었다. 참된 지도자란 매를 들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휴고야.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정말 아프구나."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에단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휴고가 섬뜩함을 느끼며 에단에게서 멀어졌다.

"어딜 가니? 아직 덜 끝났단다."

에단이 휴고에게 달려들었다. 휴고의 곡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 * *

부르르.

휴고가 바닥에 엎어진 채 몸을 떨었다. 어느새 휴고의 야수화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눈을 까뒤집은 채 가늘게 경련하는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에단이 후련한 표정으로 숨을 돌렸다.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닌데."

에단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타인을 지도하는 일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왜? 뭐 할 말 있어?"

"...아니요."

"...없어."

헨리와 타미가 안타까운 눈초리로 쓰러져 있는 휴고를 바라봤다.

'...불쌍해.'

휴고의 저항은 정말 처절했지만, 그만큼 보람은 있었다.

휴고는 성장했다.

근육과 뼛속에 마나가 각인되었다. 시간이 지나 몸이 회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마나가 축적될 것이다.

타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무력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다.

'...마나 컨트롤도.'

이 방법이 위험하고 어려운 이유가 바로 마나 컨트롤이다.

너무 소량 주입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마나를 싣게 되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된다.

득보다도 실이 더 많게 되는 것이다.

회복하고 흡수할 수 있을 정도의 마나.

그런 정밀함이 요구되는 게 바로 이 수련법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무리 없이 진행했다.

수련을 빙자한 폭력인 것 같았지만, 휴고의 전신에는 양질의 마나가 퍼져 있었다.

그 사실에 타미는 적지 않게 감탄했다.

하지만 타미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에단은 가만히 휴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몇 차례 더 해 줘야겠어.'

휴고의 한계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 방식으로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몇 차례는 더 시도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수련을 빙자한 폭력은 즐거운 법이었다. 한층 상쾌해진 표정의 에단이 타미를 바라봤다.

"단원들은 뭘 하고 있는지 한번 가 볼까?"

에단의 물음에 멀뚱거리고 있던 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쾅!

광견 칼릭스가 눈을 부라렸다. 주위에 살벌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마치 살기가 유형화된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지? 다시 한번 말해 봐."

칼릭스의 얼굴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가 제대로 된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무참히 패배하게 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벌건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입이 저렴하고 소문을 부풀리는 용병들이다.

기본적으로 용병들은 가십거리를 좋아했고, 덕분에 악명 높은 금패 용병인 광견의 평판이 바닥에 처박혔다.

광견이란 이름이 유명한 이유에는 금패 용병인 그의 실력도 있지만, 잔학한 성징도 한몫 차지했다.

칼릭스의 흉흉한 살기에 그의 뒷담을 내뱉던 용병들이 침을 삼켰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칼릭스의 눈빛이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 그게 아니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용병들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칼릭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신같이 당했다고? 똑같은 경험 한번 시켜 줄게."

칼릭스가 둘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두 용병이 저항하기 위해 힘을 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쾅!

둘의 머리가 거칠게 바닥에 처박히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즉사였다.

뿌드득.

순식간에 두 명을 참살한 칼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살면서 이 정도의 치욕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그 누구든지 자신을 모욕하면 그 배로 되갚아 줬었다.

한데 가장 화가 치미는 것은 그 둘을 떠올릴 때면....

덜덜.

칼릭스가 자신의 다리를 바라봤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쾅!

칼릭스가 본인의 다리를 후려쳤다. 묵직한 통증과 함께 떨림이 멈췄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다친 건 얼굴뿐이 아니었다. 겉에 난 상처와 평판이야 복구하면 그만이다. 악명 높은 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자존심의 상처였다. 마음이 굴복하면 그건 돌이킬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칼릭스의 눈에 짙은 살기가 맴돌았다.

* * *

블란테의 기사들은 조용히 회군하고 있었다.

회군하기 전, 잠깐 사이에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다. 렉사르가 에단에게 참패하고 에단은 다시 한번 본인의 실력을 증명했다.

이제 블란테의 기사들 중 그 누구도 에단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기사들은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단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발을 들이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있었다.

렉사르의 실력도 예상 이상이었다. 렉사르는 최소 최상급의 경지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한 광경을 봤기 때문에 기사들은 어서 빨리 가문으로 돌아가 검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들은 기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검사이자, 전사였다. 힘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것은 카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론의 가슴에도 불꽃이 피어올랐다. 카론은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을 진정한 채 길을 걷고 있었다.

기사들은 평소처럼 길에서 야영을 하며 밤을 넘겼다. 문제는 다음날에 있었다.

날이 밝으며 다시 이동을 재개하려 한 순간, 카론이 먼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렉사르는 어디 갔지?'

눈에 띄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부재는 순식간에 인지되었다.

기사들이 멍한 표정으로 렉사르가 있던 장소를 바라봤지만 증발하듯 사라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카론은 포기가 빨랐다. 아무리 기를 쓰고 찾아봤자 추격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 가문으로 돌아가시죠."

렉사르가 어디로 향했는지 얼추 예상이 갔다.

'...어휴.'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때로는 빠른 인정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 * *

렉사르는 휴고에게 징표를 남겨 놨다. 그의 눈과 후각은 대상을 추적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뿌득.'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는 완전한 패배였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확인할 것이다.'

에단에게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직 저력을 숨기고 있는 괴물이라는 것은 확실히 인지했다. 렉사르가 노리는 것은 에단이 아니었다.

'휴고.'

그 녀석의 눈빛, 채취, 그리고 순간 변화한 팔.

털과 골격, 그리고 강철처럼 날카로운 발톱.

이것은 의심이 아닌 확신에 가까웠다. 렉사르는 자신의 확신에 못을 박기 위해 지금 달려 나가고 있었다.

타닷.

렉사르의 움직임이 더욱 기민해졌다. 그의 추적 능력은 블란테에서 따라올 이가 없었다. 렉사르의 금빛 안광이 빛을 발했다.

* * *

칼릭스가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광견이 보복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 말이 사실이야?"

"그래."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황 보니까 작정하고 덤빌 생각이던데? 영지전을 앞두고 진짜 전쟁을 하려나 봐."

"...아니, 용병단 하나로 부족해서 더 모은다고?"

"그래. 듣기로는 검은 도끼도 재낀다는데?"

"미친... 하긴, 시기는 지금이 적절하긴 하겠네."

"그치? 검은 도끼는 세력을 잃었으니까. 또 처벌하기도 마땅치 않잖아. 곧 영지전이 코앞인데."

"...피바람이 불겠네. 큭큭."

"그러니까. 좋은 구경을 하게 생겼어. 크하핫!"

용병들은 우려를 표하기보다는 즐거워했다. 그들은 늘 가십거리를 고파했다.

지금 같은 상황은 용병들에게도 드문 일이었고, 그만큼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미라는 미처 그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나름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탓이었다.

광견은 건물 내에 있는 용병을 소집했다. 기세가 살벌한 그들은 모두가 실력을 입증한 베테랑 용병들이었다.

"내가 내건 제안은 다르지 않다. 내 보수와 영지전 때 얻는 수익의 전부다. 나눠 가지는 건 알아서 해."

칼릭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을 이었다.

"대신 그 두 새끼의 목은 내가 딴다. 방해하는 새끼는 죽여 버릴 테니까 명심해."

붉게 충혈된 칼릭스의 눈빛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용병들도 시선을 회피했다. 그 정도로 칼릭스의 살기는 흉악했다.

끼이익.

그때, 문이 열리며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들어섰다. 용병들의 안광이 남자에게로 집중됐다.

"뭐야, 저 새끼는?"

"...물을 게 있어서 왔다."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온 거야?"

"킥킥, 목소리는 또 왜 저래?"

조소와 비아냥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칼릭스는 말없이 남자를 노려봤다.

'뭐지?'

서늘한 느낌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후드 사이로 비치는 안광이 칼릭스에게로 향했다.

"네가 광견인가?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렉사르가 칼릭스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용병들이 렉사르 앞을 막아섰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컥!"

렉사르가 용병 하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을 붙잡힌 용병이 버둥거렸다.

"길을, 막지, 마."

렉사르가 씹어뱉듯 내뱉은 경고에 분위기가 냉각됐다. 용병들이 본능적으로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렉사르가 붙잡고 있던 용병을 가볍게 집어 던지자 용병의 몸이 거칠게 바닥에 처박혔다.

"...역시 말로는 못 알아듣는 건가."

렉사르가 후드를 벗었다.

얼굴을 가득 메운 빼곡한 흉터가 드러난다. 용병들이 흠칫 놀랐다. 렉사르가 품에서 작은 톱날 검 하나를 꺼냈다.

군데군데 피딱지가 묻어 있고, 이가 나가 있는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칼이었다.

"같잖은 새끼들이."

렉사르가 차갑게 분노했다.

◈ [173화] 과욕 (2)

렉사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니, 격렬하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도륙이 펼쳐지고 있었다. 렉사르는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는 냉정하고 교활하며 잔혹했다.

끔찍한 비명과 절규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렉사르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톱날 검에 살이 뜯겨 나가고 피가 낭자한다.

용병들은 처음 겪는 공포를 느꼈다. 사방으로 퍼지는 비릿한 피 냄새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도살이며 도축이다.

결과는 정해져 있다. 토끼는 아무리 발악해 봐야 사자를 이기지 못한다. 머릿속에 도망쳐야 한다는 글자가 새겨졌다.

하지만 렉사르는 그들의 도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유일한 입구인 정문을 막아섰다.

"괴, 괴물 새끼!"

뒷문이나 창문을 이용해 도주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렉사르는 그들도 놓치지 않았다.

차르르륵!

서늘한 쇠사슬 소리. 사슬이 마치 뱀처럼 움직여 도망가려는 이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용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발악했다. 렉사르는 무심하게 남자를 끌어당겼다.

휙!

끌려온 용병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푸슛!

피 분수가 솟구치고, 악취와 비린내가 진동했다. 건물 안이 피 안개로 자욱해졌다.

흠칫.

칼릭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광견. 미친개.

두려움을 모르며 잔학하기로는 따라올 이가 없다는 악명 높은 용병.

하지만 칼릭스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금빛 안광.

그 시선이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으며, 손가락 하나라도 함부로 까닥거리면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저항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지금 칼릭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생각은 오직 생존이었다. 칼릭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뚜벅뚜벅.

렉사르가 다가오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당신은 대체...."

"내가 말했지."

렉사르의 불쾌한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뱀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 닭살이 돋아났다.

"용건이 있어서 왔다고."

렉사르가 칼릭스의 면전까지 다가왔다. 얼굴이 닿기 직전의 거리였다. 칼릭스의 눈이 흔들렸다. 잔뜩 겁에 질린 눈이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저 눈빛. 렉사르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시선이다. 저 표정을 짓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는 가문을 통틀어 둘밖에 없었다.

빈센트와 첸.

그 둘만이 렉사르가 인정한, 진정한 강자였다. 그렇기에 렉사르는 그들의 명령을 수행한다.

철저한 약육강식.

그런데 그것에 이변이 생겼다. 아직 다 성장하지도 않은, 어린 사자가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가볍게 주제 파악을 시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당한 것은 렉사르였다.

기가 차고 황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에단은 분명 사자의 피를 이은 자였으니까. 다만, 에단의 밑에 있는 기사는 인정할 수 없었다.

짐승의 냄새, 짙은 누린내.

그 냄새가 렉사르의 코를 자극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었다. 렉사르는 휴고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야수의 팔과 날카로운 발톱.

지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렉사르가 흉흉한 안광으로 칼릭스를 노려보자, 그는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게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순리였다.

렉사르가 칼릭스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충분히 모욕적인 행동이었지만, 칼릭스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떨며 렉사르의 분노가 사그라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큭큭."

학살극을 벌인 자가 웃고 있었다.

칼릭스가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이 죽어 있었고, 살아 있는 이들조차 신체 한 곳 정도는 분리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지옥이었다. 인간이 이런 참극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줄 모르겠군."

렉사르가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용무가 있어서 왔고, 정신 나간 개새끼한테 물을 게 있어서 찾아왔어. 순순히 대답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렉사르가 움켜쥔 멱살을 잡아당겼다. 거구의 칼릭스가 끌려왔다. 렉사르가 칼릭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전에 찾아왔던 녀석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디에 있는지. 전부 말해라. 하나도 놓치지 말고."

핏빛 안개 속에서 렉사르의 금빛 안광이 빛을 발했다.

* * *

휴고가 퀭한 얼굴로 스튜를 먹고 있었다. 평소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것이 아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미적거렸다.

"어디 아프냐?"

"...아닙니다."

에단의 질문에 휴고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휴고는 본인이 숟가락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며칠 내에 모두 회복될 거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타미가 말했다. 휴고는 물끄러미 타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네...."

과연 이게 진짜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휴고는 착잡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진짜 수인이었어.'

그것도 수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웨어울프, 바로 늑대인간이었다.

'...털이 숭숭 나고.'

휴고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 손에서 강철 같은 발톱이 돋아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모두가 대수롭지 않고 태연한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심란한 표정을 지어봤자 우습기만 할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를 끝나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 또 할 거야."

"...네?"

휴고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말은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왜, 너도 좋냐?"

에단이 히죽 웃으면서 말하자 휴고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네."

이미 선택지는 없었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여관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칼센이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빨리도 찾아오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칼센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에게도 설명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칼센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에단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 타미를 바라봤다. 에단이 저택에 잠입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한니발의 저택에는 많은 괴담과 괴소문이 떠돌아다녔다.

저택의 주인인 한니발은 대륙에서 유명한 대상인이었고, 그만큼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승냥이 같은 도둑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정보원인 칼센은 저택에 침입한 자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모조리 실종됐어.'

그렇기에 내심 에단을 걱정했다.

일전에 에단이 보여 준 무력에 압도되었지만, 한니발은 베일에 싸여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에단이라 한들 무턱대고 들어가면 생명이 위험했다.

하여 걱정을 안고 찾아왔는데... 에단은 태연자약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칼센이 황당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물끄러미 칼센을 바라봤다.

"배고프면 와서 밥이나 먹어."

"그것도 좋... 그게 아니라...."

"얘 안 보여?"

"저분은...."

새로운 인물이 그의 눈에 띄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칼을 지닌 소녀였다.

칼센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이 저 소녀를 가리킨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단 님이 그러실 리가....'

칼센이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혹시 저분이 붉은 곰...."

"정답."

에단이 씨익 웃자, 칼센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혐오와 경멸의 눈빛이 섞였다.

"에단 님...."

"왜?"

"실망입니다."

"...또 뭔 지랄이야?"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칼센이 참담하고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신의를 가진 채 행동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협조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이건.... 저는 더 이상 협력할 수 없습니다."

칼센의 얼굴은 결의로 가득했다.

에단과 휴고, 그리고 헨리가 눈을 끔뻑였다. 지금 칼센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고. 그래서 왜 대뜸 찾아와서 지랄하는 건지 이유나 한번 들어 보자."

"몰라서 묻습니까? 아무리 붉은 곰이 위협적인 존재라고는 하나 딸을 인질로 잡다니요.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기가 찬 에단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휴고와 헨리, 그리고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는 눈을 깜빡이며 칼센을 가리켰다.

"쟤, 바보야?"

"...어?"

타미의 발언에 칼센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툭. 툭.

에단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 네 의견은 잘 들었고. 일단 여기 앉아 보지?"

"...."

그쯤 되자 칼센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칼센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헛다리를 짚어도 너무 잘못 짚은 탓에 모두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하여간 정보 길드 녀석들은 믿음이 안 가요, 믿음이."

'아니, 저 꼬맹이가 붉은 곰인 게 말이 되냐고....'

억울함이 치밀었지만, 차마 에단에게 토로할 수는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붉은 곰의 모습과 지금 타미의 모습은 전혀 매칭이 되지 않았다.

"대충 배 좀 채웠으면 애들이나 좀 확인하러 가 볼까."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는 사미라에게 전달받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는 아니었다.

에단은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단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체력이나 기술이 아닌, 실전이었다.

날붙이 쓰지 않고, 적을 죽이고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게 개성이 되겠지.'

용병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다양한 특기를 보유하고 있다.

맨몸 박투.

거친 남자들은 주먹으로 대화하기 마련이라 주먹질을 안 해 본 용병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장을 안 하는 용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맨손은 날붙이의 효율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 같은 격투술 훈련은 필수적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몸을 일으킨 에단은 걸음을 옮겼다.

에단과 일행은 도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섰다. 사미라에게 전달받은 방향과 에단의 감각을 이용하면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지 않았다.

"끄아아악!"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에단과 일행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칼센이 흠칫거렸지만 에단은 거리낌 없이 발을 움직였다.

숲의 중심부에 들어서자 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단원들은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몬스터와 혈전을 펼치고 있었고, 단원들의 뒤편에는 사미라가 살벌한 미소를 띠며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는 두툼한 채찍을 쥔 채로.

"어, 왔어?"

사미라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 [174화] 접점 (1)

짧은 기간이지만 에단이 직접 지도한 덕분에 단원들의 수준은 그리 낮지 않았다.

체력과 신체 능력은 손볼 것이 없다. 그것이 사미라의 평가였다.

'어떻게 굴렸길래 몸이 이따위야?'

상의를 탈의한 단원들의 모습은 살벌했다. 그들의 근육은 비대하기만 한 것이 아닌, 날렵하고 날카로웠다.

도드라져 있는 혈관은 효율적으로 혈액을 운반했고, 심폐 능력 또한 절정에 달했다.

또한 격투술에 대한 이해도도 뛰어났다. 마나를 운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싸우면 사미라가 밀릴 정도.

'하지만 문제는....'

부족한 실전 경험과 맨손이라는 제약이다. 사미라는 그 점을 인지했다.

'최소한 쓸만하게 만들려면 살상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야 해.'

단원들은 태생이 도적이며, 산적이었기에 살생에 있어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구를 이용했을 때다. 맨손으로 적의 목숨을 끊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훨씬 부담스럽고 피곤한 일이었기에 권장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작은 날붙이 하나만 있어도 노력의 수준이 달라지니까.

'뭐, 까라면 까야지.'

사미라가 피식 웃었다. 갑을 관계가 명확하니 이럴 때는 속이 편했다.

사미라가 채찍을 꺼내 들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촤악!

사미라가 채찍을 휘둘렀다.

땅이 한 움큼 파이며 단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버러지들."

사미라가 사나운 미소를 머금었다.

훈련의 내용은 단순했다. 도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면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이 있다.

"인원수를 맞춰!"

출몰하는 몬스터의 머릿수에 맞춰 단원들이 나선다. 협공이나 협력은 허용되지 않는다. 몬스터의 수준도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진심으로 싸워야 할 거다."

사미라의 스산한 목소리에 단원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몬스터들은 사납게 소리 지르며 단원에게 다가왔다. 체구가 작은 몬스터들도 저마다의 무기가 있다.

몽둥이부터 시작해서 조악한 날붙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가지고 있다.

보통은 인간도 가지고 있는 무기로 대응하기 마련이었지만....

단원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다. 절망스러운 표정의 단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 어쩌죠?"

에단에게 배웠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걸 허용할 사미라가 아니었다.

촤악!

거친 채찍 소리, 깊게 파인 지면.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으, 으아아아!"

코볼트에게 달려든 단원들은 에단에게 배운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프론트 킥으로 포문을 열고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직 엉성하기 그지없었고, 몬스터들의 화만 돋게 만들었다.

단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갈 길이 멀군.'

사미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 * *

하지만 생각보다 단원들의 적응은 빨랐다.

맨손으로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도 점점 익숙해졌고, 사미라의 흉악한 채찍이 휘둘러지는 일도 드물어졌다.

'이건 아쉽네.'

아직 종종 위협용으로 휘두르고는 있었지만, 단원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어, 왔어?"

사미라가 고개를 돌려 에단과 일행을 바라봤다. 에단은 구르고 있는 단원들을 바라보며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오, 생각보다 잘 굴리고 있는데?"

"그럼, 내가 누군데."

사미라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미라의 어투가 평대로 바뀌었지만, 에단은 구태여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성과만 나온다면 호칭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에단이 팔장을 낀 채 단원들을 바라봤다.

아직 어설프고 엉성했다. 곧 실전에 투입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다.

휴고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전투 센스를 자랑했다.

'이 녀석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에단이 타미를 흘겨봤다. 타미 또한 휴고에게 뒤지지 않는 감각과 본능을 지니고 있을 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타미의 물음에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훈련. 아까 말했잖아. 쟤네가 너무 약해서 쓸모 있게 만드는 중이라고."

에단의 대답에 타미가 물끄러미 단원들을 바라봤다.

"너무 약해."

"나도 알아."

타미의 말에 에단이 동조했다. 단원들은 객관적으로 약했다.

"내가 알려 줘도 돼?"

타미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에단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타미를 바라봤다.

"의외네. 안 귀찮겠어?"

"내 부하들. 내가 관리해야 해."

타미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분들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네.'

몬스터들과 처절하게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걱정할 때는 아니지....'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조만간 그 끔찍한 구타를 다시 겪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찔했다.

타미가 터벅거리며 앞으로 나서자, 사미라가 눈을 끔벅이며 타미를 바라봤다.

"저 꼬맹이는 누구야?"

"얼마 전에 데려왔어."

"...뭐, 이상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니죠?"

사미라의 말투가 경어로 바뀌며 갑작스레 경계의 기색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개소리지?"

"크흠, 비슷한 나이대의 딸이 있다 보니...."

사미라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비는 그녀에게 있어 친딸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비는 잘 있겠지?"

사미라의 물음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어. 네 딸도 못 믿나?"

"그럴 리가. 걔가 어디 가서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거든."

"걱정할 것 없어."

"그거 다행이군."

사미라가 히죽 웃었다. 그녀는 다비가 어디 가서 당하고 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저 꼬맹이는 도대체 뭐야?"

"눈썰미가 많이 죽었네."

사미라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사미라가 움직이려고 들었다.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어린아이가 다가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후웅!

그때,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기세에 사미라의 눈이 커졌다.

숨길 수 없는 위압감.

공기가 무거워지며 왜소한 체구의 타미가 커져 보였다.

터벅터벅.

타미가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단원들의 다리가 멈췄고, 몬스터도 움직임을 멈췄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가 타미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안녕."

타미가 손을 흔들었다. 단원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장님?"

"응. 너희들 생각보다 너무 약해."

타미의 신랄한 말에 단원들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단원들은 지금 기세에 압도되어 타미를 말린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었다.

타미가 앞으로 다가가자 몬스터들은 조금씩 주춤거렸다.

"일로 와."

타미가 기세를 조금 죽였다. 몬스터를 제약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그들은 타미를 적으로 인식했다.

키에에엑!

몬스터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타미는 물끄러미 몬스터를 지켜보다가 손을 들었다.

탁.

타미가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을 가하자 나무로 된 몽둥이가 힘없이 바스러졌다.

후웅!

타미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지만 들리는 파공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기가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몬스터의 머리가 타미의 손에 얻어맞자....

퍼엉!

순식간에 터져 나가며 푸른 피가 비산했다. 머리가 날아간 몬스터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타미는 대수롭지 않게 똑같은 행위를 이어 나갔다.

몬스터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으나 타미는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몬스터가 뒤돌며 도망치려 하면, 타미가 달려들어 몬스터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

후웅!

쾅!

발목을 잡고 그대로 휘두르자 몬스터가 바닥에 처박혔다. 몬스터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즉사였다.

그때부터 타미의 일방적인 학살극이 시작됐다. 저항이 의미가 없을 정도다. 타미의 힘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열 마리 가까이 되던 몬스터가 모조리 도살당했다. 타미의 옷과 머리에 피가 덕지덕지 튀어 있었다.

타미가 고개를 돌렸다. 전과 다를 바 없는 무감각한 표정이었지만, 그 때문에 단원들은 더욱더 강한 섬뜩함을 느꼈다.

"...이렇게 하면 돼."

타미의 말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쟤들이 저걸 따라 할 수 있겠냐?"

"...못 해?"

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대한 단순하고 간단하게 보여 줬는데 이걸 왜 따라 하지 못한단 말인가.

"말했잖아. 쟤들 생각보다 더 약하다니까."

에단의 말에 타미가 단원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말이야?"

단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단에게 자주 듣던 비난이었지만, 타미에게 듣는 한마디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한편 사미라는 멍한 표정으로 타미를 바라봤다.

"...쟤는 또 뭐 하는 녀석이야?"

"처음부터 알아볼 줄 알았는데 실망인걸. 제대로 일하고 있던 거 맞아?"

"그게 무슨...."

이해 못 할 에단의 말에 사미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그 설마가 아마 맞을걸."

"아니, 쟤가 붉은 곰이라고? 듣던 거랑 너무 다른데?"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허."

사미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붉은 곰이 저런 어린아이일 것이라 상상한단 말인가.

한편 타미의 모습을 지켜보던 칼센의 입도 떡 하고 벌어졌다.

'저, 정말 사실이었어....'

이렇게 두 눈으로 본 이상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타미의 무력은 그야말로 괴물 같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붉은 곰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모습이다.

사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 녀석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군."

"내가 원래 흔한 걸 싫어해."

에단이 씨익 웃었다. 슬슬 준비는 갖춰졌다. 단원들은 아직 부족했지만, 그것은 실전으로 쌓아 가면 될 부분이다.

'애초에 승리가 확실시된 전쟁이니.'

전력 차이는 명확했다. 상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해 봐야 수성이 전부. 전면전은 꿈도 꿀 수 없는 전력 차이다.

퍼드득.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에단이 날아드는 새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뭐야?"

하얀 새 한 마리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자, 잠깐만요!"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던 칼센이 호다닥 뛰어왔다. 칼센이 새를 바라보더니 에단을 향해 말했다.

"서, 서신인 것 같습니다."

"서신?"

칼센이 가리킨 곳을 보자 새의 다리에 종이가 묶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단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종이를 떼어 냈다.

'쓸데없이 판타지스럽네.'

에단이 서신을 펼쳐 훑어보기 시작했다. 유려한 글씨체였다.

[한니발입니다.]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본문을 대충 확인한 에단은 종이를 그대로 구겨 버렸다. 서신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허, 이 새끼가."

기가 찼다.

지금 누구더러 오라 마라야?

◈ [175화] 접점 (2)

에단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파들파들.

에단의 손에 붙잡혀 있는 비둘기가 몸을 떨었다. 물끄러미 손을 지켜보던 에단이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러 가 볼까?"

음산한 목소리에 에단 주위에 있던 이들이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혼자 다녀올 테니까 알아서 시간 때우고 있어."

* * *

정보 길드와 접촉을 끝낸 한니발이 저택에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고용인을 통해 시신을 정리하고 새로운 경호원들을 뽑았다.

"...곧 오겠군."

한니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단과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전서구를 이용했다. 평범한 전서구가 아닌, 냄새를 바탕으로 대상을 찾아가는 전서구였다.

당연히 드높은 몸값을 자랑했지만, 한니발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돈 몇 푼보다 시간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깐.'

그때, 한니발의 뇌리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 뽑은 경호원들은 따로 정신을 조작한 이들이 아니다.

나름대로 돈을 들여 실력이 보장된 이들을 뽑았다. 어지간한 상대는 모두 제압할 수 있겠지만.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잖아.'

불길함이 느껴졌다.

한니발이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미리 말을 전달해야 한다.

조만간 저택에 방문할 자가 있다고. 그래야만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다.

쾅!

살벌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한니발이 우두커니 멈춰 서더니 마른세수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콰앙!

사람 한 명이 벽을 관통하더니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게 구멍 난 벽으로 에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둑. 뚜두둑.

"환영 인사 한번 거하네?"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띤 채 다가오자 한니발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빠른 인정과 사죄가 먼저였다. 한니발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한니발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보같이 경호원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못했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한니발이 고개를 숙였다. 에단이 멀뚱거리며 한니발을 응시했다.

"그게 끝이야?"

"...네?"

"그게 끝이냐고."

"제가 어떻게 해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에단이 한니발을 가리켰다.

"네가. 나를. 여기까지 불렀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누구보고 오라 마라야?"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한니발이 침을 삼키며 재차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에단의 얼굴을 보고 포기했다.

'아....'

에단은 지금 즐기고 있었다. 말과 달리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한 자에게 더 말해 봤자 사족일 뿐이었다.

한니발이 빠르게 포기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에단이 한니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됐어.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쓸데없는 이유면...."

흥이 식은 에단이 차게 식은 눈으로 한니발을 응시했다. 서늘한 눈초리에 한니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제 준비하려고 합니다."

"영지전?"

"그렇습니다. 사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고, 타이밍만 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뭐, 나도 슬슬 지루하던 참이었어. 지체해서 좋을 건 없지."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이며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영주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영주? 아, 여기 영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영주는 지금 한니발의 꼭두각시였다. 그렇기에 한니발이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계획을 진행할 수 있던 것이다.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한니발을 바라봤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네?"

"알아서 해.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에단이 별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니발이 눈을 끔뻑였다.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게 뭐가 있어?"

"아, 알겠습니다."

한니발은 에단의 대한 생각을 수정했다. 악인은 아니었지만, 선인 또한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면 에단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행이군.'

만일 에단이 영주에게 걸린 암시를 곧장 해제하라고 명했으면 일이 귀찮아졌을 것이다.

이미 닦아 놓은 길을 놔두고 크게 돌아가는 상황은 한니발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그 일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이후인데...."

"말해 봐."

"블랙마켓은 언제 흡수할 계획이십니까?"

한니발의 질문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게 뭔 개소리야?'

블랙마켓이 왜 언급된단 말인가.

하지만 에단은 여기서 한니발에게 되묻는 멍청한 짓은 벌이지 않았다. 에단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머리를 굴리던 에단은 이내 한니발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눈치챘다.

'앙큼한 녀석이.'

에단이 씨익 웃었다.

"영지를 접수한 이후 우리가 거기 마석을 죄다 먹은 뒤. 그때 시작하자고."

"...과연."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에단의 방식이 가장 깔끔했다. 마석을 모두 채취한 뒤 채취한 마석을 바탕으로 블랙마켓과 접촉.

블랙마켓 입장에서는 물지 않을 수가 없는 미끼였다. 그리고 그 미끼를 문 순간.

'블란테가 개입하겠군.'

그렇게 되면 상황은 정리된다. 소문이 퍼질 염려도 적었다. 장은 언제나 음지에서 열렸으니까.

최적의 기회이며 명분이었다. 자본과 인맥 무력을 모두 갖춘 상황이다.

실패할 확률이 더욱 희박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한니발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에단이 상기되어 있는 한니발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가 시킨 것들은 다 했어?"

"네?"

"애들 약점 잡을 만한 것들."

"아...."

한니발이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준비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정신 나갔냐?"

에단의 살벌한 목소리에 한니발이 재빠르게 변명하려 했지만, 눈빛을 보자 변명이 쏙 들어갔다.

"죄, 죄송합니다. 금방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정리만 하지 말고 소문도 흘리고, 애들도 낚아 올리라고."

"아, 알겠습니다.... 엮여 있는 거물들은 아마 블랙마켓에도 관심을 보일 겁니다. 그때를 노리면 충분히...."

"자신 있어?"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니발을 노려봤다. 한니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 있습니다. 최대한 판을 키우겠습니다. 연이 닿아 있는 밀수꾼이나 노예상도 동원해서...."

"흐음... 믿어 보겠어."

에단이 턱을 쓰다듬었다. 에단의 표정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이자 한니발이 겨우 안도했다.

"아, 아! 그리고 이제 다시 번거롭게 해 드리지 않기 위해서...."

한니발이 품에서 수정구를 건넸다. 에단의 얼굴이 귀찮음으로 물들었다.

"이걸 하나 더 들고 다니라고?"

"네? 하지만...."

"야, 이거 두 개 어떻게든 묶어 봐."

에단이 품에서 통신구를 하나 더 꺼냈다.

한니발이 눈을 깜빡거리며 통신구를 바라봤다.

"그건 무슨...."

"정보 길드랑 아버지. 두 군데랑 연결되어 있어."

"정보 길드와 아버지라고 하면...."

한니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에단이 아버지라고 부를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다.

'비, 빈센트?'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블란테의 주인인 빈센트가 가진 이름의 무게는 제국의 황제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비, 빈센트와 직통되는 수정구라니....'

한니발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에단이 쥐고 있던 수정구를 툭 하고 던지자, 한니발이 화들짝 놀라며 수정구를 받아들었다.

"내일까지 만들어서 여관으로 가져와."

"...이걸 저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수정구에 수작질을 하면 내가 아니라 가문이 움직일 텐데."

"...빠르게 처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한니발이 굳은 얼굴로 대답하자 에단이 손을 휘적거리며 멀어졌다.

* * *

에단이 저택을 나오고 감각을 집중했다.

'아직 거기 있으려나.'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미 에단의 감각은 마스터와 견줄 정도로 예민하다.

그 순간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일행의 기운은 아니다. 조금 더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렉사르?'

에단이 눈을 감고 기감을 더욱 세밀하게 퍼트렸다.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렉사르가 있는 장소로 질주했다.

에단이 향한 장소의 끝은 여관이었다. 말없이 여관의 문을 열어젖히자, 후드를 눌러 쓴 렉사르의 모습이 보였다.

에단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렉사르에게 다가갔다. 렉사르는 고개를 숙인 채 빵과 스튜를 먹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에 에단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에단이 다가오자 렉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오셨...."

쾅!

에단이 그대로 렉사르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먹고 있던 스튜에 처박아 버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 났다.

렉사르의 품에서 검이 출수되었다. 향하는 장소는 명확했다. 에단의 발목을 향해 검이 그어진다.

"어쭈."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에단이 그대로 렉사르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무릎을 차올렸다.

쾅!

이번에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마나가 실린 무릎에 렉사르의 고개가 높이 튀었다.

"어딜 가려고."

그대로 멀어지려는 렉사르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메쳤다.

콰앙!

나무로 된 바닥재가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커헉!"

렉사르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렉사르는 저항하려 들었지만, 에단이 무릎을 이용해 렉사르의 가슴팍을 제압하는 게 더 빨랐다.

"움직여 봐."

에단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가문의 일원이라고 언제까지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꽈드득.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먹에서 회색의 마나가 넘실거렸다. 렉사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서 검을 휘두르며 저항해 봤자, 저 주먹이 먼저 자신의 얼굴에 꽂힐 것이다.

'즉사다.'

실력의 차이가 명확하다.

황당했다.

이 정도로 순식간에 제압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전까지의 에단은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왜 여기까지 기어 왔지?"

물음에 망설이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생각했지만, 에단의 실력에 충격을 받은 렉사르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꾸우욱!

에단의 무릎이 가슴팍을 압박하자 렉사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끄으으윽...! 물을 게... 있습니다...!"

"물을 거?"

표정을 조금 푼 에단이 몸을 일으키며 렉사르의 팔을 걷어찼다.

퍽!

렉사르가 쥐고 있던 톱날 검이 여관 벽에 꽂혔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어디 한번 지껄여 봐. 들어는 줄게."

에단이 주변에 굴러다니는 의자 하나를 잡고는 걸터앉았다.

에단의 광오하면서도 여유로운 태도에 렉사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어리석었군.'

과거의 모습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커 봤자 새끼 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미 자격을 갖췄어.'

에단은 렉사르의 위에 앉아 있었다.

◈ [176화]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