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용사의 등장? (2)
거침없이 전진하는 에단의 뒤에서 가토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도련님의 저력은 어디까지지?'
방금까지만 해도 숲에 갇힌 채 마수들과 혈전을 펼쳤다. 하지만 에단이 도착한 이후로는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이로운 힘을 지닌 네이드도 마수를 막아서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런데 에단의 등장과 동시에 모든 게 바뀌었다.
에단은 순식간에 마수들을 정리한 채 앞장섰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침없는 발걸음이었지만, 확실히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가토의 충성심은 더욱 깊어졌다.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던 가토는 순간 휴고가 떠올랐다. 휴고도 이 모습을 본다면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낄까?
그런 걸 떠올리다 보니 언제쯤 떨어진 일행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련님."
"왜 불러."
"...헨리 씨와 휴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걸어가던 에단이 시선을 돌려 가토를 바라봤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알고 계셔서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아닌데? 알아서 잘 있겠지 뭐."
"...그, 그러면 지금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세계수."
"세, 세계수요?"
"어.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
"그렇군요...."
에단의 담백한 대답에 가토가 쭈그러들었다. 휴고와 헨리가 걱정됐지만, 에단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언급하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걷자, 거대한 나무 덩굴이 보였다. 에단은 직감적으로 이 너머에 세계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단이 품속에서 세계수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자 몰골이 말이 아닌 네이드와 가토가 눈에 띄었다. 휴고에 대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녀석한테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가 되겠군.'
에단이 덩굴 앞에 서자 세계수의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나가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 준비는 해 뒀군.
― ...이걸 알고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나와 페온의 말에 에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꽉 막힌 앞만을 바라봤다. 이내 덩굴이 벌어지며 길이 열렸고, 저 앞에 앙상한 거목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심각해 보이는군.'
세계수의 본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순 없었지만, 지금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세계수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덩굴을 헤쳐 들어서자, 가토와 네이드도 뒤따랐다.
'이게 세계수....'
네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세계수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륙 차원에서 불가침 영역으로 지정한 엘프의 숲에 있는 나무였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성함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나무라고 했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자태에 대해서 수많은 음유 시인들이 노래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건....'
듣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검게 물든 껍질과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나무 주위에는 식물 하나 없이 황폐했다.
아름답고 신성하기는커녕, 음산하고 불길했다.
가토의 표정도 네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수가 오염됐다고는 들었지만....'
반신반의했다. 에단의 말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세계수라는 이름 자체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물로 보니 세계수는 지금 병들어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체감되었다.
"쯧."
에단이 혀를 차며 세계수를 향해 다가가려는 그때, 엘프 여성 하나가 나타나 에단과 일행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이곳은 인간들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르니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단호한 말투였지만, 정작 르니엘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또 세계수의 결계가 발동하지 않다니.
그간 겪어 보지 않은 일을 오늘 두 번이나 연달아 겪었다.
르니엘을 제외하면 엘프들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는 세계수가 인간에게 길을 터 준 상황에 혼란스러웠으나, 그렇다고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목숨을 잃기 싫으면 당장 나가."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르니엘의 눈은 목표를 주시하고 하고 있었다.
"흠...."
에단이 팔짱을 낀 채 일그러진 표정의 르니엘을 바라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당장 나가라고!"
르니엘의 호통을 들은 네이드가 품으로 손을 넣었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어째 말투가 조금 살벌하다?"
"그것이 도련님의 뜻이라면."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내가 언제 쟤를 죽이라고 했어?"
둘의 대화를 들은 르니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자기도 모르게 활시위가 떨렸다.
"이, 이 자식들이...!"
르니엘이 목표를 조준했다. 시위에 걸쳐진 화살은 하나지만 인원은 셋.
에단은 그런 르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은 있고? 그거 놓으면 넌 죽는 건데."
에단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르니엘이 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자신이 없었다. 엘프들의 힘은 대부분 정령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세계수가 병든 뒤 정령들은 엘프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정령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엘프는 빈말로라도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르니엘은 엘프들의 전사였다. 그렇기에 상대의 역량을 가늠하는 안목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 강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르니엘은 지금 저들 중 누구와 싸워도 승리할 수 없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르니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싸워야....'
르니엘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활시위를 놓으려고 하는 그때.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거든? 얘기라도 한번 들어 보는 게 어때?"
―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건 알고 있냐?
― 확실히 그 발언은 조금 그렇구나....
카이나와 페온의 말을 무시한 에단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화살 끝만을 바라봤다.
"...그럴까?"
르니엘이 활을 내리며 한 말에 일행은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들어 보고 결정해. 어차피 너도 알잖아? 그거 놓았으면 죽었을 거라는 거."
에단이 웃으며 말하자, 르니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거기서 뭐 해. 얘기할 거 아니야?"
"...여기서 얘기하면 안 돼?"
"장난해?"
에단이 얼굴을 찌푸리자, 르니엘이 잔뜩 얼어 있는 모습으로 슬금슬금 일행에게 다가왔다. 르니엘의 귀는 축 늘어져 있었다.
가토는 말없이 그런 르니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여워....'
엘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본 엘프는 듣던 것처럼 신비롭기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이 컸다.
"와, 왔어...."
르니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지면에 성검을 푹 하고 박아 넣었다. 에단의 돌발 행동에 르니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갖춰졌네."
"...진짜지?"
"그럼."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르니엘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이런 성격인 줄 알고 있었지.'
르니엘은 원작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캐릭터였다. 원작 주인공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여자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백치미가 가득하다고 하더니.'
단순하고 순진한 캐릭터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일단 우린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줄게."
"...그걸 어떻게 믿어?"
르니엘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확실히 이제는 조금 경계를 하네.'
한번 데였기 때문인가. 르니엘은 원작에서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람을 믿지 않았다.
"뭐, 딱히 증명할 방법은 없는데."
에단이 성검을 쥐었다.
르니엘이 화들짝 놀라며 활을 붙잡았다. 에단이 왼손을 들어 경계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그대로 세계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금 무슨...!"
르니엘이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에단이 생명의 나무에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단의 성검에서 빛이 퍼져 나가 세계수를 감쌌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포근한 빛이었다. 성검의 정화를 받았지만 세계수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뭐야 반응이 없는데?'
하지만 르니엘의 반응은 달랐다.
"생명의 나무가... 치유받고 있어...."
르니엘은 감격에 젖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설마 당신이 용사인가요?!"
"아닌데?"
에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용사라니. 누구한테 그딴 걸 들이밀고 있어.
예상외의 답변에 르니엘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뭐, 용사는 아니지만 도움을 주러 왔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도움이라고?"
"어."
에단이 턱 끝으로 세계수를 가리켰다.
"얘 낫게 하러 왔어."
"정말이야?"
르니엘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진짜 단순하네.'
이렇게 단순한 캐릭터는 처음 만나 봤기에 신선함을 느꼈다.
'아니다. 단순한 걸로 따지면 모룬도 만만치 않지....'
하지만 모룬은 외모와 성격 문제가 심각했고, 르니엘은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에단이 세계수를 바라봤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군.'
그러면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에단이 성검을 응시하자, 카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지 않아. 내 힘만으로는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예상했던 부분이다. 성검 한 번 휘두르는 거로 세계수의 정화와 회복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에단이 르니엘을 바라봤다.
"장로 좀 소개해 줘."
"...장로님을 보러 간다고?"
르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할 말이 있거든."
* * *
르니엘은 주위를 경계하며 길을 안내했다.
'...이상하네.'
마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마수화된 숲의 짐승들이다.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녔기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습을 보면 반드시 피해야 했다. 엘프들이 마을에 고립되어 있는 이유에는 마수의 출몰도 지대한 영향을 차지하고 있었다.
르니엘은 언제나 마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길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수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르니엘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웬만한 애들은 다 잡았거든."
"...진짜?"
"어."
"...역시 용사 맞지?"
"아니라고."
에단이 정색했다. 용사 취급을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어딜 비교하고 있어.'
에단의 반응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르니엘이 다시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에단은 르니엘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자... 이제 어떻게 해 볼까.'
에단은 머릿속으로 세계수의 오염을 주도한 배신자를 어떻게 족칠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덜미가 안 잡힐 테니까.'
미끼를 준비해야겠다.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에단의 바로 뒤를 따라가던 가토가 미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또 무슨 짓을 벌이시려고....'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 [117화] 용사의 등장? (3)
르니엘의 뒤를 따라가던 에단이 고민에 빠졌다.
'조지는 건 조지는 거고 어떤 명분을 만들어 둘까.'
힘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금 에단이 가진 힘이라면 무력으로 짓누르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반발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힘 앞에서 당장은 불만을 삼키고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튀어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는 안 됐다.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둬야 지속적인 세계수의 관찰이 가능했다.
'귀찮은 건 질색인데.'
자신이 일일이 나서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에단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앞서 나가던 르니엘이 말했다.
"용사... 아니... 구원자? 호칭을 어떻게...."
"...에단이라고 불러라."
"음... 알겠어. 에단,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해 봐."
"오늘 생명의 나무를 찾아온 건 너희뿐이 아니었어. 어떤 여자가 생명의 나무 앞에서 기절했더라고."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거 신기하네. 그 인간은 지금 어디 있지?"
"우리 마을에서 쉬고 있어. 그런데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
르니엘이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엘프들은 원래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는 거의 인간을 증오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에단은 르니엘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잘됐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뒤에서 따라가던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그 사람이 혹시 헨리 씨인가?'
르니엘이 말한 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맞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무사하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럼 휴고 그 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분명 휴고는 헨리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발견된 사람은 헨리 혼자라고 하니 휴고에 대한 걱정이 싹텄다.
'별일 없겠지?'
가토는 휴고를 믿고 있었다. 이제 휴고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었다. 가토가 진심으로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였다.
'도련님은 휴고가 걱정되지도 않으신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보다 먼저 수하로 받아들였던 이가 휴고 아닌가. 그런데 에단은 휴고를 걱정하기는커녕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단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놈은 오래간만에 포식하겠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날을 잡은 김에 충분히 성장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이쪽이야."
르니엘이 앞을 가리켰다. 에단이 정면을 바라봤다.
* * *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리트마가 혀를 찼다. 르니엘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을의 상태가 이 꼴이 난 거지.'
한심했다.
마을을 둘러봐도 르니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엘프들이 득실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간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빠르게 발전한다. 엘프와 비교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이다. 한데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엘프는 어떠한가.
'버러지 같은 놈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한다는 같잖은 가치관을 앞세워 이 좁아터진 숲속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리트마는 그런 삶이 혐오스러웠다. 그에게는 미래가 보였다.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미래가.
'이게 전부 그 나무 따위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세계수.
엘프들은 생명의 나무라고 칭하는 거목.
힘의 원천이자, 그들이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이유였다.
엘프들은 모두 생명의 나무를 사랑했지만 리트마는 다르게 생각했다.
'고작 나무 하나에 종속되어 있는 놈들!'
생명의 나무에 집착하여 그곳을 떠나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나무를 수호하는 수호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트마의 안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결국 리트마는 숲을 나갔다. 그리고 '그들'과 접촉했다.
그들의 원대한 계획을 들은 리트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어.'
우물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그곳에서 만족하고 살고 있었다. 리트마는 그 우물을 부수고 싶었다.
'...나도 이 계획에 동참하고 싶어.'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물부터 부숴야 했다. 그 우물은 바로 엘프들의 보물인 생명의 나무였다.
생명의 나무만 없으면 엘프들이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트마도 바보는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가 엘프들의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생명의 나무가 죽게 되면 엘프들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리트마에게 새로운 힘을 맛보게 해 줬다.
'...정령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야.'
'죽은 마나'라고 불리는 사특한 힘. 하지만 일반적인 죽은 마나보다 훨씬 정순하고 강렬한 힘이었다. 새로운 힘을 얻게 된 리트마는 그것에 매료되었다.
힘이라는 것은 중독성이 있었고, 이미 리트마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버렸다.
'이 힘을 전파해야 해.'
그들은 리트마에게 계획을 공유했고, 리트마는 그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덕분에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생명의 나무는 죽어 가고 있었으며, 그만큼 숲에 죽은 마나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달콤했다. 생명의 나무가 병들면 병들수록 리트마는 더욱 강해졌다.
'머저리 같은 르니엘.'
르니엘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심할 것도 없는 것이 오늘도 인간 침입자를 마을로 데려왔다.
'예전부터 그랬지.'
순진한 주제에 모두의 총애를 받았다. 리트마는 그런 르니엘만 보면 화가 치밀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계획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명의 나무라는 사슬을 끊을 때가.
* * *
르니엘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을에 들어섰고, 에단과 일행이 뒤따랐다.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군.'
르니엘은 그나마 양호한 상태였다. 다른 엘프들의 얼굴은 초췌하다 못해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음울한 기운이 마을 전역에 만연해 있었다.
멍하니 있던 엘프들의 시선이 에단 일행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맺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어, 알고 있어."
에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세계수를 병들게 만든 원흉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찾아왔으니까.
"미안 지금 상황이...."
"괜찮아."
에단이 르니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왔다. 예견했던 상황이다. 지금부터는 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장로는 어디 있지?"
"...이쪽."
르니엘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안내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에단의 능력을 보고 난 후 르니엘은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이 우리의 용사구나!
그렇게 생각해 망설임 없이 마을로 이끌고 오긴 했지만,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내 눈으로 봤잖아.'
심지어 세계수도 길을 열어 준 자들이 아닌가.
르니엘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 녀석들은 누구지?"
가장 듣기 힘든 목소리에 르니엘이 몸을 떨었다.
"...리트마."
"너 지금 제정신이야?"
리트마가 살벌한 표정으로 르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실수 때문에 생명의 나무가 병들고, 마을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외지인을 데려와? 아까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그때 에단이 앞으로 나섰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에단의 말에 리트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트마가 쌍심지를 켠 채 에단을 노려봤다.
"오해? 지금 오해라고 지껄이는 건가? 인간 주제에?"
'뻔뻔한 건 대단하군.'
에단이 내심 감탄했다. 에단은 리트마가 어떤 놈인지 안다.
그가 세계수를 오염시키는 일을 주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르니엘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사실도 알았다.
"너희 인간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기나 하고 지껄이는 건가?"
에단이 눈을 껌뻑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 나는 지금 이곳에서 동료를 보호 중이라고 해서 찾아온 건데 말이야. 생명의 나무라면... 세계수를 말하는 건가? 세계수가 병들었다고?"
"하! 뻔뻔하기 그지없군. 너희 인간들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모른 척을 하겠다는 말인가?"
"모른 척이 아니라. 몰라서 묻는 거다. 세계수가 병들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인간들이 세계수를 오염시켰다고? 애당초 세계수를 오염시킬 방법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걸 우리가 어떻게...!"
리트마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고함을 내지르려 할 때, 에단이 리트마의 말을 자르며 말을 이었다.
"만일 세계수가 병들었다고 하면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에단의 말에 리트마의 눈이 커졌다. 리트마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개,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또 무슨 헛소리로 우리에게 피해를...."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때 멀리서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노인이 있었다. 르니엘이 노인을 보고 말했다.
"툰나님...."
툰나라고 불린 나이 많은 엘프가 간절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보잘것없지만 저는 이 마을의 장로인 툰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나무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에단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툰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장로님! 또 인간 놈들의 입바른 소리에 현혹되시는 겁니까!"
리트마가 소리쳤다. 하지만 툰나는 리트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에단을 응시했다.
"...실례되는 말씀이긴 하나, 믿기지 않기에 재차 묻습니다. 정말 생명의 나무를 낫게 할 수 있으십니까?"
툰나의 얼굴에는 간절함과 동시에 의심의 기색이 가득 차 있었다. 에단의 말만을 믿기에는 그간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 전에 제 동료가 이곳에 있는 게 사실입니까?"
"갈색 머리의 여성이라고 한다면 맞습니다."
"먼저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툰나가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장로님!"
리트마가 소리쳤다. 툰나가 고개를 돌려 리트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리트마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또다시 인간들에게 배신당할 생각이십니까? 지긋지긋하지도 않습니까?"
"...이유 없는 의심은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의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꼴이 된 게 누구 때문에...."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그건...."
"우리에겐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헛돼 보이는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합니다."
툰나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리트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에단이 리트마의 얼굴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배우가 따로 없군.'
감탄이 절로 나오는 뻔뻔함이었다.
◈ [118화] 배신자 찾기 (1)
'신기할 정도의 철면피군.'
엘프의 얼굴 가죽은 인간보다 두터운가?
그런 원초적인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단은 리트마가 무슨 일을 행했고, 이후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주인공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악역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원작에서 이 녀석이 외부와 내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도 어이가 없지.'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리트마를 훑어봤다.
'이걸 왜 모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트마는 외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티를 풀풀 내고 있었으니까.
반짝이는 반지, 목걸이, 귀걸이, 의복.
다른 엘프들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의 사치품이다.
저게 자기 나름대로 자중한 것일 텐데....
'얘네는 눈이 없어?'
엘프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생각이 없는 거다.
다른 엘프들의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천으로 이루어진 특색 없이 평범한 옷.
당연히 장신구 따위는 있을 리가 만무했다. 평생을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이 어디서 저런 장신구를 구해 오겠는가.
하지만 리트마는 달랐다. 비단 같은 옷을 걸친 채 수많은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모르는 게 머저리였다. 리트마는 대놓고 외부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떠들고 다니는 셈이었다.
'뭐, 일단 두고 보자고.'
여기서 터트려서야 재미를 볼 수가 없으니까.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먼저 일행분에게로 안내해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리트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결국 또다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저주 같은 악담을 퍼부은 리트마가 자리를 떴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르니엘의 표정은 어두웠고, 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입니다."
멀어져 가는 리트마에게서 시선을 돌린 툰나가 일행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일행은 툰나를 따라 이동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검소한 집이었다.
"여기 안에 제 일행이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툰나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에단이 그 뒤를 따랐다.
'여기 있었군.'
침대에는 헨리가 누워 있었다. 일행들도 놀란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일행이 찾아왔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가토가 불안한 표정으로 툰나를 바라봤다.
"...상태가 많이 심각한 건가요?"
"면목이 없습니다만... 저도 이분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도련님, 헨리 씨를 빨리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요?"
"기다려."
에단은 가토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헨리를 지켜보았다.
헨리의 호흡은 일정했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은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죽을 녀석도 아니고.'
헨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에단이 몸을 돌려 툰나를 바라봤다.
"제 일행이 어디서 처음 발견된 거죠?"
"그건 내가 설명할게."
뒤에서 지켜보던 르니엘이 앞으로 나왔다. 르니엘은 헨리와 어디서 조우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자아가 발현된 건가.'
혹은 생존 본능일 수도 있었다. 세계수는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까. 에단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 헨리의 몸 위에 올려 두었다.
지이잉―
목걸이가 진동하며 은은한 빛을 발산했다. 툰나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건...."
"세계수의 목걸이."
에단의 대답에 르니엘의 눈도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건...."
"훔친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을 지을 건 없어."
에단이 르니엘을 향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툰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제 생각보다 더욱 특별한 분이셨군요."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보다는 이 녀석이 더 특별한 녀석이죠."
에단이 헨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헨리의 주위에는 은은한 장막이 펼쳐진 것 같았다.
"이분은 대체...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는...."
툰나가 해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툰나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럼 이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정화를 한다는 것인지...."
"그것도 이따 함께 보여 드리죠."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제기랄!"
리트마가 분노를 토해 냈다.
"르니엘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이 또...!"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곧 있으면 생명의 나무는 완전히 오염될 것이다.
이제 생명의 나무는 생명을 낳고 마나를 순환하는 것이 아닌, 동물을 오염시키고 죽은 마나를 배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트마는 더욱 강해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엘프들도 숲 밖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 이상 숲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생명의 나무라는 존재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다.
리트마가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거처에는 수많은 사치품들이 가득했다.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 선물들은 인간들의 성의였다. 리트마는 구태여 이런 선물들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협조했을 뿐인데 그들이 먼저 건네기 시작한 것이었고, 리트마는 그러한 것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나무를 정화한다고?
불가능한 소리였다. 이미 씨앗은 싹을 틔웠고, 숲에는 마수들이 들끓었다. 현재 숲의 주인은 엘프가 아니었다. 엘프들도 마수를 피해 다녔고, 마수에게 목숨을 잃은 엘프들도 적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하게 둘 수는 없지.'
리트마의 얼굴은 살벌했다.
* * *
"한 번 올 때마다 고역이 아닐 수가 없군."
"그러게 말이야."
로브를 걸치고 있는 남자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낮추거라."
"어차피 저희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있어 봤자 마수 몇 마리가 전부일 텐데...."
"내 말이 우습나?"
파이론의 서늘한 음성에 보헨이 입을 다물었다. 파이론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지금 여기 놀러 온 건가?"
"...아닙니다."
"안일한 생각은 집어치우도록. 우리는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니 할 일만 하면 된다."
파이론의 어조는 고저가 없었지만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준비는 끝났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보헨이 대답하자 파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론의 시선이 보헨의 옆에 있는 키얀에게로 옮겨졌다.
"그럼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키얀의 대답과 동시에 보헨과 키얀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키얀과 보헨은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실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자아가 강한 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헨과 키얀이라도 파이론의 말은 거역하지 못했다.
단순한 직위 때문이 아니었다. 파이론은 괴물이었고, 괴물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위험해.'
보헨은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며 산전수전 모두 겪은 이였다.
하지만 그런 보헨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자가 바로 파이론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면서도 파이론 같은 자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두고 볼 수는 없지.'
상대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한들 공략법은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보헨은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얻게 되면 그게 마지막일 거다.'
보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고양감이 치솟았다. 마치 황홀경 같았다.
보헨이 품에서 작은 보석 파편 같은 것을 꺼냈다. 검게 물들어 있는 보석이었다.
"씁,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군."
수많은 자들이 갈구하는 보석이었다. 이 보석의 힘을 흡수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보헨은 욕망을 억눌러 냈다. 보석은 계획의 일부였다.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파이론은 곧바로 보헨을 의심할 터였다.
그리고 보헨은 파이론의 의심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보헨이 발끝으로 흙을 차올리자, 바닥이 한 움큼 파지며 꽤나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안에 보석을 떨구는 보헨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하나.'
아직 세 개가 더 남아 있었다. 순간 욕망이 치솟았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힘에 대한 갈망을 이겨 내기가 어려웠다. 마치 약에 중독된 듯이.
'겨우 짐승 따위가 이 힘을... 부러운 새끼들.'
보헨이 주변의 기운을 느꼈다. 보석은 짐승을 마수로 변하게 만들며, 마수화가 된 짐승은 몬스터보다도 아득히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마수는 숲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세계수를 오염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마수가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에서 죽은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세계수가 완전히 침식되어 타락한다면 이제 보석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터.
마나는 사멸하고 죽은 마나만이 숲에 만연할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움직여야겠지.'
그것은 보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평생 파이론을 앞지를 수 없었다. 파이론 또한 강해질 테니까.
'그 전에.'
보헨이 품속에 있는 검은 파편을 움켜쥐었다. 기회가 보인다면 언제든지 힘을 흡수할 생각이다. 협력자도 구했다. 키얀도 보헨과 같은 뜻을 공유하고 있었다. 혼자서라면 힘들지 몰라도 둘이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게 진작 융통성을 가졌으면 좋잖아?'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숲은 고된 장소였다. 편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모든 부분이 불편했으며, 씻는 일은 꿈조차 꿀 수도 없다. 심한 일교차는 단련된 이들도 견디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지원한 이유는 하나였다.
엘프의 존재 때문이다. 엘프는 미관상 매우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와 큰 눈, 그리고 비단 같은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무릇 남성이라면 욕정을 자제하기 어려울 터.
하지만 파이론은 이를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임무에 방해될 뿐이라고.
그때 보헨은 파이론의 명령에 처음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고, 파이론은 보헨을 힘으로 억눌렀다.
보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날의 공포가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지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기랄.'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그놈은 대화가 통하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그들에게 협조적인 엘프가 하나 있었다. 엘프답지 않게 속물적인 녀석이라 다루기가 매우 수월했다.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은 헛된 희망을 품고 있겠지?'
큭큭.
조소가 새어 나왔다. 똑같이 미개한 엘프 주제에 욕망이 가득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엘프가 바라는 욕망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전에 잘 구슬리면 하나쯤은 얻을 수 있을 거야.'
큰 욕심은 가지지 않았다. 그저 엘프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한 보헨은 머릿속으로 어떤 뇌물을 준비할까 고민했다.
◈ [119화] 배신자 찾기 (2)
검을 든 에단이 숲을 걸었다. 그 모습을 네이드와 가토가 묘하게 바라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에단의 물음에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도련님이 검을 든 모습이 신기해서...."
가토의 시선이 에단의 검으로 향했다. 에단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검 쓰는 걸 싫어한다고 했어? 그래도 블란테의 자제인데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낯섦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에단이 검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에단의 검술 실력은 출중한 편에 속했다.
블랙 오우거를 처치할 때도, 아카데미의 교수와 겨룰 때도 에단은 검을 썼다.
하지만 에단에게 검은 수단에 불과했다. 에단이 승리해 온 이유는 뛰어난 검술 때문이 아닌, 에단 본인의 강함 때문이었다.
그런 에단이 계속 검을 쥐고 있으니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 ...크흠. 격투가가 검을 들어서 쓰나.
한편 페온은 그런 에단이 못마땅했다. 물론 에단은 페온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쯤일까.'
에단이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감각에 집중했다. 천천히 주변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고요하지만 풍기는 누린내는 숨길 수가 없었다. 어둡고 음험한 기운은 죽은 나무에 이끌리게 된다.
'숫자가 적군.'
개체 수가 줄었다. 에단이 줄인 것도 원인이겠지만 다른 이유가 무엇일지도 예상이 갔다.
'휴고 녀석이 실컷 포식하고 있나 본데.'
휴고가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과식은 몸에 좋지 않지만.'
죽은 마나는 생명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죽은 마나에 과다 노출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에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당한 중독이야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에단은 위기를 발판 삼아 더욱 성장했다. 에단에게 죽은 마나는 더 이상 양날의 검이 아니었다.
오히려 먹음직한 음식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꽤나 머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수가 감지되었지만 거리가 문제였다.
에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툰나가 물었다.
"설마 타락한 짐승을 찾고 계신 겁니까?"
"타락한 짐승이요?"
툰나의 말뜻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명백히 마수를 가리키는 단어였으니까.
'아니, 얘네들은 말을 왜 이렇게 꼬아서 하지?'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게 종족 특성인가?
세계수는 생명의 나무, 마수는 타락한 짐승.
구태여 추상적인 말을 섞어서 말한다. 하지만 그걸 지적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에단은 장단을 맞췄다.
"네, 맞습니다. 뭐... 타락한 짐승...."
"역시 그러시군요.... 저희를 대신해 그 순수한 아이들을 구원해 주시려는 겁니까?"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에단이 멋쩍은 눈으로 툰나를 바라봤다. 그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했다.
뭐라 말을 잇기 힘들어 가만히 있자, 이윽고 툰나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용사이십니까?"
"...."
에단은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오늘만 용사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 ...이 새끼가 용사면 세상은 망했어.
'제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카이나의 말에 짧게 반박을 한 에단이 툰나와 눈을 마주했다.
"저는 용사가 아닙니다."
에단은 용사라는 과업을 짊어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망나니면 족했다.
답답하게 지내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으니까.
에단의 단호한 대답에 툰나의 눈빛이 순간 음울해졌다.
"그러시군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툰나의 목소리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마수... 아니, 타락한 짐승을 찾으러 갑시다."
감각에 걸리는 기운이 있었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툰나였지만,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은 어디 가지 않는 듯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저기 있군요."
툰나는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절벽 아래 무리 지어 있는 마수를 바라보았다.
'마수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군.'
이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툰나의 얼굴에 걱정과 긴장감, 그리고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
의심과 걱정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마수들 하나하나가 웬만한 몬스터보다도 위협적인 놈들이었으니까.
놈들이 한 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면 정말 위험했다.
"지켜보고 계시죠."
검을 든 에단이 카이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가능하시죠?'
―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시끄러운 검?'
― 썩을 놈이....
'그래서 가능합니까?'
― 충분하다. 저 정도 오염쯤이야 한 번의 참격으로 모두 정화할 수 있어.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검을 치켜들자, 툰나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분명 타락한 짐승들을 구원한다고...."
자기가 언제 구원한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네. 뭐 까짓것 구원해 주죠."
에단이 앞발을 내밀었다.
체중이 사선으로 이동하며 원심력을 더한다. 에단의 뒷발이 회전하며 그와 동시에 등 근육이 강하게 수축하여 폭발적으로 이완했다.
콰앙!
에단이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후웅!
순간 광풍이 휘몰아치며 지면이 격동하는 것 같았다. 휘두른 검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쏟아지는 광채가 마수들을 덮쳤다. 강한 공격도 쉽게 막아 내는 마수들의 장벽은 성검의 광채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털썩.
마수들이 광채를 얻어맞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수들은 점차 크기가 작아지며 검게 물든 피부색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쓰러지면서 그 근원인 죽은 마나가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에단은 손을 뻗어 죽은 마나를 흡수했다.
"대충 끝났나."
숲에 만연하던 죽은 마나가 약해졌다.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에단이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눈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들 그래? 장로님은 또 왜 그러시고요."
"...오, 구원자시여."
툰나가 무릎을 꿇고 에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어나시죠."
"...그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이래서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예상은 했다. 엘프와 자신은 상성이 나쁠 것이라고. 하지만 예상보다 더 나빴다.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르니엘도 탄성을 터트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르니엘의 절절한 눈빛에 에단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가토."
"구원자...."
"뒈질래?"
에단의 살벌한 목소리에 가토가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둘의 대화에 네이드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언제 이렇게까지.'
에단의 재능은 알고 있었고,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 줬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에단은 또 한 번 자신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나이가 들어 버린 모양이군.'
네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단이 네이드를 응시했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나이를 먹은 모양입니다."
"새삼스럽기는. 아직 정정하잖아? 난 은퇴시켜 줄 생각 없으니, 기대는 접어 둬."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에단이 가파른 절벽을 순식간에 타고 내려갔다. 네이드와 가토도 뒤를 따랐다.
"르니엘."
르니엘이 막 에단을 뒤따르려 하는 순간, 툰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네, 장로님."
"고맙구나."
"그게 무슨...."
"네가 인연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번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르니엘의 말에 툰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르니엘. 삶은 선택의 연속이야. 가끔은 실수가 있을지 몰라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르니엘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먹먹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로님."
르니엘이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에단이 밑에 도착하자 동물들이 하나둘 눈을 뜨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마수가 아닌 산짐승에 불과했다.
'흠, 뭔가 아직 거슬리는데.'
죽은 나무 덕분에 에단은 죽은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 그런 에단의 감각에 아직 죽은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잔여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짙어.'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훑어봤다. 그때 에단의 시야에 무언가가 걸렸다.
인위적으로 뒤집힌 땅이 보였다. 에단이 망설임 없이 다가가 걷어차자, 땅이 움푹 파이며 거슬리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빙고."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이제 거의 끝났군."
보헨이 이마를 쓸어내렸다. 몸이 고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보헨이 자신의 손에 들린 보석 조각을 바라봤다. 이것만 땅에 묻어 두면 이번 일은 끝이었다.
'일은 끝났지만....'
보헨은 숲을 바로 떠날 생각이 없었다. 보헨의 머리는 이미 음욕에 절여져 있었다.
'그 녀석은 한 번 보고 가야겠어.'
뒤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는 끄나풀 역할을 하는 엘프였다.
보헨이 자신의 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상당히 고가의 사치품이었지만, 이 일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고작 이딴 걸로 세계수를 얻을 수 있다니.'
웃음만 나왔다. 이제 곧 준비된 것이 발현되면 이딴 보석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질 터.
'그러니까 그 전에 즐겨야지.'
보헨이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슬슬 시간이 됐나?"
이전 접선 때 따로 말을 해 둔 장소가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이 숲을 찾아왔으니, 지금쯤 가면 딱 만날 수 있을 터.
"적당한 엘프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보헨은 부푼 꿈을 안고 자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그때,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가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자마자 머리 위로 강한 바람이 일었다.
'뭐야?!'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보헨이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보헨의 눈앞에는 야수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크르르르.
"이게 무슨...."
그는 당황하며 검을 쥐었다. 보헨의 본능이 위험하다 경고하고 있었다.
교활하고 잔혹한 은빛 늑대.
늑대의 입에서 누린내와 함께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저 늑대는 지금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고 있었다.
보헨은 침을 삼켰다. 은빛 늑대의 살기에 몸이 떨렸다.
[120화] 배신자 찾기 (3)
'...뭐지 이 괴물은?'
눈앞에 있는 괴물은 마수가 아니었다. 이 숲에 존재하는 마수는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수냐, 아니냐 따위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위험하다. 상대하면 안 된다.
파이론이 진심을 내비칠 때와 흡사한 감각이었다.
'이 짐승 새끼가 그 정도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헨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고, 용기라는 이름의 만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피해야 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원을 해 줄 인력도 없었다. 여기서 부상을 입어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그러나 보헨은 함부로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지금 몸을 돌리면 곧바로 목이 물어뜯길 것 같았다.
보헨이 검을 뽑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기회가 보이면 당장에라도 내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빛 늑대는 보헨이 도망치려는 낌새를 눈치챘다는 듯 비웃음 섞인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크르르르."
"저 개새끼가...."
자존심이 상했다. 이 정도 힘을 얻고서 저딴 몬스터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하지만 보헨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보헨이 눈을 빠르게 굴렸다.
'어디 쓸 만한 거 없나?'
그때 보헨의 눈에 돌멩이 하나가 보였다. 그는 자세를 틀어 돌멩이를 그대로 걷어찼다.
빠악―!
걷어찬 돌멩이가 은빛 늑대를 향해 쇄도했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파밧!
크아아!
자신을 향한 공격에 휴고의 야성이 폭발했다.
휴고가 사족 보행으로 거칠게 내달렸다. 그 모습을 본 보헨이 아연실색하며 몸을 돌렸다.
"제, 제기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그러면 개죽음이다.
하지만 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보헨은 몸을 빼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앞뒤 없이 돌진하는 몬스터들에게는 곧잘 먹히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몸을 슬며시 비틀며 마치 비웃듯 공격을 피해 냈다. 손톱이 돋아 있는 휴고의 손이 보헨의 검을 붙잡았다.
콰지직!
마나 어린 검이 단번에 분질러졌다. 그것으로 보헨은 전의를 잃었다.
"제기라아아알―!"
보헨이 괴성을 내지르며 도주했다. 은밀함과 임무의 수행은 지금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보헨은 본능적으로 생존 가능성이 제일 높은 방향으로 뛰었다.
협조하는 엘프와의 접선 장소, 그 인근에는 키얀도 있을 테니 그곳에만 도착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터였다.
크르릉!
야수화한 휴고가 방해물을 모두 산산조각 내며 보헨을 쫓았다. 휴고의 손에 닿는 모든 게 가루가 되었다. 압도적인 살기가 뒤에서 들이닥치자, 보헨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느꼈다.
"살려 줘―!"
보헨이 간절하게 소리쳤다.
* * *
"흠, 대충 이쯤인가."
에단이 땅을 파헤치며 근방에 있는 보석들을 모두 회수했다. 이 보석이 마수를 만든 원흉이었다.
에단이 손바닥 위에 있는 보석을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다. 파편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파편에 잔재하던 기운은 에단에게로 흡수되었다.
― ...마음에 들지 않는군.
카이나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나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성검과 죽은 마나는 상극의 기운.
자신의 힘을 다루면서 동시에 죽은 마나의 힘을 흡수하려는 에단을 아니꼽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에단은 원래 타인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에단은 파편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질이군.'
마나의 질이 상당히 저급했기 때문이다.
과거 마나의 양이 아쉬웠던 상황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보석의 힘을 흡수했겠지만, 지금의 에단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저품질의 마나는 에단이 힘을 쌓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가 지금껏 흡수한 죽은 마나는 모두 상급이었다.
밤의 일족인 벨몬트와 블랙 오우거의 마나는 모두 정순하고 농도 높은 죽은 마나였다.
'고유의 특성도 있고 말이야.'
전부터 느껴 왔다.
벨몬트에게서 죽은 마나를 흡수한 이후로 어둠에 있어 제약이 사라져 밤 또한 낮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했을 때는 녀석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피어를 얻었다.
그 이후 데스 나이트와 리치의 힘을 흡수했을 때는 벽을 부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권능감과 예리한 감각을 깨우쳤다.
그런 순도 높은 죽은 마나만 흡수하던 에단에게 이딴 저급한 기운이 눈에 찰 리 만무했다.
'그래도 다 부수기는 아까우니.'
에단이 작은 주머니에 파편을 모아 뒀다.
'자, 그러면 대충 상태는 알았네.'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숲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 볼까.'
지금껏 거침없이 뚜드려 맞던 세계수였다.
상태가 어찌나 안 좋은지 헨리 또한 가수면 상태였다.
'먼저 배신자부터 척살해야지.'
이쯤 되면 명분은 필요 없었다. 이미 장로와 르니엘의 지지를 얻은 상태다. 대충 상대하다가 정 안 되면 뒤집어엎으면 되었다.
파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고, 성검의 정화 능력이 있는 한 에단은 이미 명분을 얻은 상태다.
'이것만으로는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았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에단이 의식을 집중하고 감각을 퍼트렸다. 가장 먼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 하냐?"
에단이 르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르니엘이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에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용사...."
"야, 얘 좀 치워."
에단이 무심하게 말하자, 가토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용사님의 뜻이라면...."
꽈드득.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자 살벌한 소리가 퍼졌다. 눈에서 살기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본 가토가 화들짝 놀라며 르니엘을 붙잡았다.
"바, 방해하지 마시죠."
르니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든 말든 에단은 집중하여 감각을 넓혔다.
살려 줘―!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이의 목소리였는데 동시에 익숙한 기운도 느껴졌다.
거칠고 흉포한 기운이었다. 에단에게는 익숙한 휴고의 기운이었다. 에단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찾았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 * *
리트마는 예정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들....'
리트마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는 외지인을, 협력자들을 이용해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접선 장소에는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히 인간 주제에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다는 사실에 짜증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이번에는 약소한 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다.'
리트마는 이미 인간이 건네는 뇌물에 익숙해져 있었다.
소박하고 소소한 삶을 영위하는 엘프들과는 다르게, 리트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인간들의 사치품에 매료되었다.
바라보고, 몸에 두르는 것만으로도 고양감이 치솟았다. 리트마는 점점 사치품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지만, 리트마의 몸에는 점점 인간들의 사치품이 걸리기 시작했다.
'...두고 보자고.'
리트마가 이를 갈았다. 인간 놈들이 오는 순간 짜증을 토해 낼 생각이었다.
살려 줘―!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목소리였다. 리트마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무, 무슨...."
자신과 인간들이 접선한다는 사실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사항이었다.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만남에서 갑자기 괴성을 지르다니.
리트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인간의 목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거친 살기가 느껴졌다.
'마수?'
아니 마수 따위가 아니었다.
"제, 제기랄!"
수풀을 헤치며 보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야수화한 늑대가 달려들었다. 순간 리트마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사, 살려 줘!"
"크르릉!"
휴고가 팔을 휘둘렀다. 리트마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거대한 나무가 수수깡 부서지듯 산산이 조각났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진 리트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 제기랄!"
보헨이 다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자, 리트마도 우왕좌왕하다가 그의 뒤를 쫓았다.
"이, 인간 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나도 몰라 귀쟁이년아!"
오히려 보헨이 묻고 싶은 상황이었다. 이런 돌발 상황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이 새끼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한시가 촉박한 상황에 동료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초조함이 앞섰다.
'차, 찾았다.'
그때 멀리서 키얀의 모습이 보였다. 파이론 만큼은 아니어도 키얀이라면 힘을 합쳐 늑대를 상대할 순 있을 것 같았다.
"키, 키얀!"
"뭐, 뭐야?!"
키얀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보헨에게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새끼 좀 어떻게 해 봐!"
뒤에서 미친 듯이 쫓아오는 늑대를 발견한 키얀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윽고 보헨이 몸을 던져 지면을 굴렀다.
휴고의 앞발이 한 끗 차이로 보헨의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보헨이 자세를 잡았다. 경험이 많은 만큼 노련한 대처였다.
"후욱, 후욱."
보헨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 옆에는 리트마도 같이 있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키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보헨이 짜증을 냈다.
"나도 몰라! 갑자기 저 늑대 새끼가 날 덮쳤다고!"
"후, 빨리 처리하자. 이거 파이론한테 걸렸다가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키얀이 몸을 떨었다. 보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는 무리였지만 둘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귀쟁, 아니, 리트마 씨?"
보헨이 리트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트마의 얼굴에는 당혹과 짜증이 가득했다.
"지금 이게 무슨...."
"저희도 당혹스러운 상황인 건 마찬가지니까 일단 눈앞에 있는 저것부터 처리하시죠."
"하... 알겠다."
리트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트마는 엘프였다. 하지만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는 더 이상 엘프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지 않았다.
대신 리트마는 다른 것을 얻었다.
리트마의 손에서 죽은 마나가 피어올랐고, 눈도 검게 물들었다. 그의 손끝이 늑대를 향했다. 죽은 마나로 형성된 화살이 목표물을 포착했다.
화살이 쏘아져 나가려는 그때, 또 다른 외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쾅!
에단이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에단의 검에 주변 나무들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누가 우리 댕댕이 건드렸어?"
뒈질라고.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 [121화] 세계수 (1)
크르르르.
야수화한 휴고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한 상태였다.
마수를 포식하면서 체내에 죽은 마나가 상당량 쌓였기 때문이다.
죽은 마나는 휴고를 더욱 포악하게 만들었다.
그 탓에 손짓 한 번에 찢기거나 날카로운 어금니에 으깨질 녀석들이 도망가고 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군침을 흘렸다. 열심히 도망쳐 봤자 어차피 곧 자신의 먹잇감이 될 녀석들이니까.
그런데 놈들의 앞을 막아서는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났다.
검을 든 채 사나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저 인간에게서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른 먹잇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쾌했다.
이성을 잃은 휴고는 그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턱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휴고는 이빨을 딱딱거리며 이 이상한 기분을 털어 내려 했다.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에단과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휴고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크르르...."
"아이고, 많이 무서웠나 보네."
에단이 부드러운 어조로 휴고에게 말했다.
"크아아!"
에단이 손을 뻗으려고 하자, 휴고가 살기를 폭사시켰다. 그와 동시에 에단의 손이 치켜 올라갔다.
"씁!"
"...크르."
"크르? 너 이빨 드러내려고?"
에단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최근 죽은 마나를 포식하면서 에단의 존재감은 과거와 차원이 달라졌다.
게다가 휴고는 각인된 트라우마 탓에 본능적으로 에단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휴고는 포식자였다. 하지만 포식자 간에도 서열이 있는 법이다.
고양이는 호랑이를 두려워하고, 개는 결코 늑대를 넘지 못한다.
휴고의 꼬리가 말리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트마와 보헨, 키얀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방금 전까지 긴박하게 쫓기고 있던 보헨과 키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에단의 시선이 휴고에게서 리트마로 돌아가자,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에단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어, 아까 마을에서 뵌 분 아닙니까?"
"...."
리트마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이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분들과는 아시는 분입니까? 분명 외지인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에단의 말에 리트마의 얼굴이 짜증과 분노로 물들었다. 그의 시선이 보헨과 키얀에게로 향했다.
눈치가 빠른 보헨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일이 귀찮아졌군.'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었으나, 저 인간 때문에 일이 꼬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어때.'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마다 목격자와 증거를 지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상대의 실력인데.'
은연중에 서로 간의 서열이 드러났다. 저 괴물 같은 짐승보다 서열이 높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고, 기회는 지금뿐이다. 저 늑대 짐승이 잠잠해진 지금 이 순간을 노려야 했다.
보헨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가 키얀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지자, 키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트마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분위기의 흐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싸늘해진 공기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에 감돌았다.
물론 에단에게는 예외였다. 에단이 여유를 잃지 않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왜 대답이 없으시죠?"
"...알 필요 없다."
리트마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보헨과 키얀이 뛰쳐나가려는 순간.
바스락.
수풀 속에서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한둘이 아니었다.
"...리트마?"
르니엘이 리트마를 보며 말했다. 리트마의 얼굴이 다시금 굳었다.
"네가 여긴 왜...."
'...제기랄.'
리트마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저 인간 하나쯤이야 죽여서 입을 봉할 수 있었지만 르니엘은 경우가 달랐다.
르니엘의 기동력은 마을에서 최상위권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마을에 소문이 퍼질 게 분명했다.
어색한 침묵을 바라보던 에단이 씩 웃으며 르니엘에게 물었다.
"장로님은?"
르니엘이 뒤를 바라봤다. 어느새 툰나와 함께 네이드와 가토도 도착해 있었다.
한 걸음 뒤에 있던 툰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곤 빠르게 눈치챘다.
"...리트마."
늘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던 그였는데, 이번엔 엄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네.'
그렇지 않아도 리트마의 정체를 어떻게 까발려야 할까 고민하던 에단이었다.
한데 현장에서 리트마를 발견한 덕분에 생각보다 상황이 쉽게 흘러갈 듯싶었다.
에단은 놈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휴고를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에단이 손으로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자, 휴고의 몸이 흠칫 떨렸다.
휴고는 지금 간신히 야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턱이 아려 오고, 심장이 옥죄였다. 원초적인 두려움이 휴고의 발을 묶어 놨다.
마치 사자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에 휴고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끼, 끼잉...."
휴고가 신음을 흘렸다. 에단의 눈이 다시금 살벌해졌다.
'감히 내 귀여운 멍멍이를.'
때릴 곳 하나 없는 애를 얼마나 복날 개 두들겨 패듯 팼으면, 이렇게 겁에 질려 있단 말인가.
에단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야."
에단이 쌍심지를 켠 채 노려보자, 세 사람의 몸이 떨렸다.
피부가 저릿했다. 숨통을 짓누르는 살기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
몸이 얼어 버린 세 사람을 바라보던 에단은 짜증이 치솟았다.
'명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우호적인 관계 따위는 나중으로 밀어 놔도 됐다.
'내가 가진 걸 이용하면 그만이야.'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쓰며 판단했단 말인가.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툰나를 바라봤다.
"아시죠?"
"...괜찮습니다."
툰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건 곧 툰나의 허락이라는 소리였다. 그 속뜻을 알아차린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에단이 휴고에게 다가가자, 휴고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에단의 손이 다시금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고는 잠자코 에단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빈틈투성이처럼 보였지만 에단을 공격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에단의 손길이 닿자 다리를 후들거렸다.
"네이드."
"네, 도련님."
에단의 부름에 네이드가 곧장 대답했다.
"방해하는 새끼들이 나타나면 알아서 처리해. 내 말 알지?"
"알겠습니다."
네이드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에단이 손에 들려 있는 성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로 쓰고 싶지 않네.'
짜증을 풀 때는 역시 맨손이 제격이었다.
푹!
― ...너 진짜.
에단이 지면에 성검을 박아 넣자, 카이나가 짜증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하고는 손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키얀과 보헨이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의 기백에 압도당한 것이다.
'이 녀석은 뭐지?'
처음 마주하는 감각이다. 사자 앞의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그 괴물 같은 파이론과 마주했을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보헨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칼밥을 먹고 자란 이들은 모두 기민한 눈치를 자랑한다.
그런 그가 봤을 때 눈앞에 있는 자는 절대 대적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보헨이 리트마를 향해 물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리트마는 입을 다물었다.
르니엘이 데려온 인간 놈들 때문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르니엘 혼자였다면 그녀를 처리하면 그만이다. 일이야 좀 복잡해지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잠깐.'
리트마의 표정이 돌변했다. 증거의 인멸이라는 전제를 놓는다면 이번 일도 해결할 수 있었다.
리트마는 정체되어 있는 마을과 일족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머저리 같은 르니엘과 머저리를 두둔하는 툰나가 있었다.
'이번 일은 기회다.'
리트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단은 바뀐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해 냈다.
저렇게 대놓고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면 이상한 일일 터.
타닷!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순간 당황한 리트마가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에단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에단의 발끝이 리트마의 명치에 꽂혔다. 깔끔한 프론트 킥이었다.
명치가 관통되는 것 같은 강한 충격에 리트마의 허리가 크게 휘었다.
"커헉!"
리트마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겪어 본 적 없는 강렬한 고통이었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어디서 눈깔을 굴리고 있어?"
뒈질라고 새끼가.
갑작스러운 에단의 돌발 행동에 일행이 화들짝 놀랐다.
보헨과 키얀이 뒤늦게 몸을 움직이려 해 봤지만, 에단의 눈과 마주치자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 순간 가토가 두 사람에게로 달려들었다.
네이드도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에단의 명령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네이드는 그 자리에 있어!"
뛰어가던 가토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나 혼자서 가능할까?'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의심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 의심을 잘라 낸 이는 에단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그 짧은 말 한마디에 가토의 머릿속 상념이 모두 지워졌다.
"쪽팔리지 않게 해."
에단이 경고하듯 으르렁거리자, 가토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나는 지금 할 일에만 집중하면 돼.'
마음을 다잡은 가토가 검을 뽑아 들었다.
관리되지 못한 명검. 하지만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검에는 가토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빠르게 달려든 가토가 근처까지 다가오자, 보헨과 키얀의 고개가 돌아갔다.
보헨과 키얀은 경험이 풍부했다. 그리고 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경지보다도 경험이었다.
가토의 앳된 얼굴만 봐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머릿수에서도 그들이 앞섰다.
'저 녀석이라면.'
머리가 기민하게 회전했다.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승부가 늘어지면 안 된다. 최대한 빠르게 저 애송이를 제압하고 인질로 이용해야 했다.
"키얀!"
보헨이 키얀을 향해 눈을 흘겼다. 키얀은 보헨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파앗!
키얀이 지면을 걷어찼다. 흙더미가 가토의 안면을 향해 튀었다.
'기사라는 족속들은 이딴 변칙에 약하지!'
명예와 신의를 중요시하는 기사들은 이런 변수에 대응을 못 하기 마련이다.
보헨과 키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지만 그 순간.
쐐액!
흙더미를 관통한 가토의 검이 그대로 쏘아져 왔다. 갑작스레 등장한 검에 당황한 보헨이 팔을 들어 올렸다.
푸욱!
팔에 검이 들이박히자, 화끈한 통증에 보헨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개...!"
보헨이 분노를 터트리려 하는 그때, 모래를 뚫고 나온 가토가 달려들었다. 가토의 얼굴에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왜? 이런 거에 처음 당해 봐?"
나는 많이 당해 봤는데.
가토가 지면을 박차며 무릎을 들었다. 에단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는 동작이었지만 깔끔한 플라잉 니 킥이었다.
콰직!
가토의 무릎이 보헨의 턱에 적중했고, 이내 그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가토는 방심하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보헨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내려찍었다.
그러고는 보헨의 팔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아냈다.
가토는 한 손에 검을 든 채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키얀이 서 있었다.
◈ [122화] 세계수 (2)
'뭐야, 이 녀석은...!'
키얀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기세에서 밀린 탓에 이미 승세는 기울었다.
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키얀은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고 있었다.
키얀이 빠르게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보헨은 이미 끝이 났고, 남은 전력은 리트마 하나였는데....
콰직! 콰직!
리트마의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 곤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리트마를 짓밟고 있는 에단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이건 미쳤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키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지만, 그와 동시에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닷!
그대로 등을 보이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키얀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검을 빼 들었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치며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자, 키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힘 싸움은 키얀의 주특기나 다름없었다.
"나를 얕잡아 보지 말...."
그 순간, 키얀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꽈드드득!
키얀의 검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밀리다 못해 키얀은 이윽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쿵!
무릎을 꿇은 키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가토의 힘은 키안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무, 무슨 힘이...!'
믿기지가 않았다. 가토의 덩치는 평범했다. 눈에 띄게 건장한 체격이 아님에도 가토는 규격 외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키얀을 찍어 누르던 가토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왜? 당황스러워?"
"이, 이 애송이가!"
키얀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당장 할 수 있는 대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가토의 검을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그러게 운동 좀 하지 그랬어!"
말을 마친 가토가 이를 악물고 힘을 더했다. 키얀은 더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검을 포기하고 몸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촤악!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키얀의 팔에 상흔이 생겼고, 곧이어 팔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상처가 그리 깊진 않았으나, 전투의 양상에 확실히 지장을 줄 정도는 되었다.
'...제기랄.'
키얀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젖살도 안 빠진 애송이에게 이런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키얀이 고개를 돌렸다.
흉포하기 그지없던 저 늑대 놈은 무슨 이윤지 갑자기 얌전해졌고, 일행은 모두 당해 버린 암담한 상황이었다.
도주를 꾀하자니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들이 많았다. 이 많은 사람을 뚫고 몸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영향력이 약해졌다 한들 숲은 엘프의 편이었다. 리트마의 도움이 없이는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때 리트마를 밟고 있던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좀 쓸 만해졌군.'
백 프로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조금 전의 가토는 기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는 될 일도 되지 않을 터.
그렇기에 가토를 사지에 던졌고, 예상했던 대로 그는 에단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한편 전투를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모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저 인간도 평범한 자가 아니야.'
마을의 전투원 중 하나인 르니엘은 가토의 실력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뛰어난 기본기와 변수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평정심, 그리고 상대를 찍어 누르는 완력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르니엘이 가토를 주시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뒤에서 굉음이 터졌다.
쾅!
그와 동시에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기는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였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건장한 체격,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갈색 머리와 갈색빛 눈.
소란 속에서도 무심해 보이는 눈빛과 다문 입술에는 우직함과 더불어 위엄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거무죽죽하던 키얀의 안색이 환해졌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외향적인 특징을 보면 대충 누군지 예상이 가는 인물이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네이드의 표정이 돌변했다.
부드럽고 인자하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살기를 머금고 있는 눈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네이드는 곧장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우웅!
단검이 공명하며 마나가 밀집되었고, 이내 완성된 마나 소드가 나타났다.
'이런 미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얀의 입이 벌어졌다.
마나 소드.
그것도 불안정한 상태가 아닌, 제대로 구현된 마나 소드였다.
'마스터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가 차원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존재가 바로 마스터였다. 그런 자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키얀이 파이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웅!
파이론이 검을 뽑자 새하얀 검신이 검게 물들었다. 죽은 마나로 형성된 마나 소드였다.
키얀의 입이 한 차례 더 벌어졌다.
'저, 저 양반도 마스터....'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스터의 경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스터씩이나 되는 놈들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키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때.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얀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바닥에 엎어졌다.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네 상대는 나인데.
가토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스터 둘과 비교해서 손색이 있을 뿐, 가토 또한 맹수였다. 키얀이 빠득 이를 갈았다.
"...오냐. 상대해 주지."
키얀이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가토와 키얀을 슬쩍 바라본 에단이 다시 네이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역량은 네이드가 위고.'
네이드는 마스터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노련한 이였다.
비록 어쌔신이라는 특성 탓에 대인전에서는 다른 마스터들보다는 조금 취약한 편이지만.
'그것도 상대가 첸이나 아버지일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이지.'
그 둘을 제외한다면 네이드는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마스터가 아니었다.
검신에 돋아 있는 죽은 마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줄기차게 흘리고 있는 저 죽은 마나는 낯이 익었다.
데스 나이트가 사용하던 기운이다.
그때는 에단이 가진 특성 덕에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네이드는 쉽지 않을 터였다.
데스 나이트는 아니지만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남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이잉.
성검이 진동하는 소리에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이 갔지만, 에단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리트마 위에 걸터앉았다.
털썩.
그러고는 팔장을 낀 채 네이드의 결투를 지켜보았다.
"어디, 우리 집사가 얼마나 강한지 볼까?"
에단의 태도에 르니엘과 툰나가 눈을 끔뻑였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챙! 채재재재재쟁!
연신 불똥이 튀겼다. 검이 맞부딪치며 일어나는 충격파와 풍압에 몸이 밀려났고, 대지가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쟁터를 떠올리게 하는 굉음의 연속이었다. 귀가 멀 것 같았으며, 몸은 소리에 맞춰 연신 움찔거렸다.
전투는 점차 과열되었다. 르니엘은 두 마스터에게 압도되어 뒷걸음질 쳤다.
그때, 툰나가 르니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리를 옮기자꾸나."
툰나의 말에 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리는 너무 가까웠다. 툰나와 르니엘이 에단의 곁으로 다가갔다.
"좋은 구경하시는군요."
에단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자, 툰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대체...."
"쉿."
에단이 검지를 들었다.
"지금은 지켜보기만 하시죠."
잠시 전투를 지켜보던 에단이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몸이 달아오른 것이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휴고였다.
휴고는 아직까지도 야수화를 벗어나지 못했다.
'흡수한 죽은 마나가 원인이겠지.'
에단이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휴고가 성장할 수 없었다.
지금 휴고는 죽은 마나의 탁기(濁氣)를 모두 태워 내야 했다.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 미친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구나.
에단의 생각을 읽은 페온이 혀를 찼다.
수인의 내구력은 인간과 궤를 달리하며, 성장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들은 전투와 포식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그 힘을 온전히 체득하기 위해서는 실전이 필요했다.
'암, 실전만 한 게 없지.'
그런 점에서는 블란테의 교육 방침과 이상하리만큼 흡사했다. 에단이 휴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휴고!"
에단의 부름에 휴고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서는 번들거리는 안광이 줄줄 흘렀고,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멈추지 않고 새어 나왔다.
"가서 도와."
휴고는 에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마치 이해했다는 듯이 귀를 쫑긋했다.
크르르!
휴고가 상체를 숙였다. 마치 도약을 위한 준비 자세 같았다.
파밧!
휴고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네이드는 휴고가 달려드는 타이밍에 맞춰 슬쩍 몸을 빼 길을 만들어 줬고, 덕분에 휴고의 날카로운 발톱이 파이론의 가슴팍을 노릴 수 있었다.
콰앙!
파이론이 검을 들어 휴고의 공격을 막았다. 지금껏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파이론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공격이 생각보다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휴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휘릭!
휴고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유연하게 휘었다.
휘익!
딸려 오는 휴고의 다리가 파이론의 턱을 노렸고, 파이론은 검을 회수하며 거리를 벌렸다. 간발의 차이로 휴고의 발이 파이론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네이드가 아니었다.
스르륵.
그림자처럼 파이론의 뒤를 잡은 네이드가 단검을 찔러 넣었다. 푸른 마나가 둘린 네이드의 단검은, 강철도 두부 썰듯 썰어 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후웅!
파이론의 미간이 좁혀졌다. 돌파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스터급의 경지에 이르면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결정된다.
더군다나 역량에서 또한 네이드가 앞선다는 걸 파이론은 알았다. 그런 상황에 빈틈을 보였으니 네이드가 놓칠 리 만무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파이론은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여기서 쓸 게 아니었지만."
파이론이 검을 지면에 찔러 넣었다.
쿠웅!
그 순간 죽은 마나가 폭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반발력이 네이드와 휴고를 밀어냈다.
"지금이냐?!"
바로 그때, 에단이 활짝 웃으며 달려들었다. 성검 대신 세계수의 목걸이를 쥐고 있던 에단이 목걸이를 힘껏 던졌다.
지이잉!
목걸이를 기점으로 보호막이 전개되며 파이론이 일으킨 죽은 마나의 폭풍과 맞부딪쳤다.
에단은 펼쳐진 보호막을 지나쳤고, 그대로 파이론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힘 다 썼어?"
그럼 이제 내놔야지.
에단의 품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죽은 나무가 꿈틀거렸다.
◈ [123화] 세계수 (3)
에단이 자신의 팔을 붙잡았을 때, 파이론은 조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파이론은 지금 죽은 마나를 발산하고 있었다.
죽은 마나는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는 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겁도 없이 달려들다니.
보지 않아도 결과가 예상됐다.
파이론의 무미건조한 입술이 미약하게 비틀렸다. 에단은 파이론의 웃음기를 읽어 냈다.
"웃겨?"
건방지네.
꽈드드득!
에단이 왼손으로 잡았던 멱살을 놓고 파이론의 목을 움켜쥐었다. 에단의 악력은 이미 범인의 경지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크윽!"
파이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단의 무모한 행동을 보고 방심을 했다.
파이론이 팔을 들어 에단을 떨쳐 내려 했지만, 꽉 쥐어진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단의 사나운 안광이 파이론을 주시했다.
"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에단의 목소리와 함께 죽은 나무의 힘이 발현되었다.
끼에에에에엑!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에단과 맞닿아 있는 파이론에게는 뚜렷하게 보였다.
빼빼 마른 고목.
하지만 죽기 직전의 피폐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저건 지금 생명을 탐하고 있었다. 요사스럽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나무는 자신에게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파이론은 본능적으로 저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죽은 나무!'
파이론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힘을 애송이가 쥐고 있었다.
'저게 어째서!'
죽은 마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파이론은 엄청난 고통과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본래 죽은 마나는 산 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이론의 몸은 인간과 달라졌다. 이미 반쯤은 언데드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한 대가를 치러 얻은 힘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파괴적이고 패도적인 힘을 무한히 발산할 수 있었다.
평생 넘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벽도 단숨에 부술 수 있었다.
전능함과 함께 갈증을 느꼈고, 그만큼 힘을 더욱 찾게 되었다.
신체의 욕망은 점차 옅어졌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고, 열량은 최소한만 섭취해도 충분했으며, 감정의 기복도 옅어졌다.
파이론을 움직이는 것은 힘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가장 원초적으로 포식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죽은 나무였다.
파이론의 눈에 검은 혈관이 돋아났다. 파이론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힘은 네놈 따위가...!"
"가질 게 아니라고?"
에단의 입이 반달처럼 휘었다.
"너 그거 존나 식상한 말인 거 알아?"
에단이 비아냥거리며 파이론의 고간을 걷어찼다.
끔찍한 고통에 파이론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숙였다. 상체를 숙인 파이론은 에단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에단이 파이론의 턱을 걷어차자, 파이론이 뒤로 밀려났다.
곧바로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파이론의 동공이 움직였다. 비록 편법으로 벽을 부쉈지만 파이론도 마스터였다. 에단의 움직임에 대응할 기량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파이론의 팔이 꿈틀거리자 검이 휘둘러졌다.
쾅!
하지만 에단의 오른발이 파이론의 검을 걷어차는 바람에 그의 공격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뭐 하냐?"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에단의 다리가 한 번 더 움직였다. 이번에는 파이론의 가슴팍을 향해 딮 킥(Deep Kick)을 날렸다.
딮 킥은 타격을 입히기보다는 상대를 밀어내기 위한 발차기였다. 에단은 상대를 넘어트릴 생각이었다.
강한 충격에 파이론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발을 내디뎠지만 그걸 두고 보고 있을 에단이 아니었다.
"어쭈."
에단이 파이론의 목을 움켜쥔 채로 다리를 걸었다.
화악―!
파이론의 시야가 반전됐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지면으로 향했다.
파이론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재빠르게 일어서려 했지만 에단의 발이 더 빨랐다.
빠악!
에단이 그대로 파이론의 얼굴을 걷어찼다.
"어휴 시원해."
수위 높은 반칙 공격인 사커 킥은 에단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
파이론의 고개가 들렸다.
흰자위가 드러나려 했지만 파이론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곧장 몸을 굴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볼 에단이 아니었다.
에단은 파이론을 따라가 다시금 발을 들어 올렸다.
퍼억!
에단의 발이 복부에 꽂혔고, 파이론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에단이 무릎으로 파이론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어딜 가려고?"
에단의 왼손이 다시금 파이론의 목덜미를 짓눌렀다.
키에에에에에―!
죽은 나무가 파이론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다. 파이론은 에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에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가 볼 테면 나가 보든가."
이미 승기는 기울었다. 파이론의 체력은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편 네이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에단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의 벽은 그리 쉬운 게 아니야.'
에단의 움직임은 분명 마스터의 것이었다. 저자는 네이드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마스터의 비기를 꺼내야 이길 수 있는 상대.
물론 자신이 비기를 꺼내면 저자도 똑같이 꺼내 들 테지만, 더욱 오랜 시간 마스터로 있었기에 비기 싸움에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마스터의 비기를 꺼내지도 않은 채 손쉽게 제압하고 짓누르고 있었다.
정체 모를 힘을 사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한다. 패자는 말을 하지 못하니까.
'...지금 도련님과 겨룬다면.'
이길 수 있을까?
비기를 빼고 생각하면 회의적이었다.
네이드는 어쌔신이었다. 정면 승부는 그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빈센트나 첸과는 결이 달랐다.
하지만 네이드도 엄연한 마스터였고, 노련한 전사였다.
관록은 편법으로 얻을 수 없는 법이다. 네이드가 보기에 에단은 노련했고 교활했다.
상대의 심리를 관통하고 있는 저 완숙함은 재능만으로 얻을 수가 없었다.
네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야수화한 휴고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네이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휴고 씨."
네이드가 휴고를 부르자 그의 귀가 쫑긋거렸다. 누렇게 물든 동공이 네이드를 향했다.
눈을 마주친 네이드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어째서 말들이 휴고를 기피했는지, 어째서 휴고의 신체 능력이 그렇게 뛰어났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크릉."
휴고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네이드와 휴고는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가토를 바라봤다.
"같이 감상해 볼까요?"
"...."
네이드의 말에 휴고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의도는 이해했는지 가토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챙! 채재쟁!
가토는 지금 전투를 통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열 번의 연습보다 한 번의 실전이 유익했다.
그는 지금 스펀지처럼 경험을 흡수하고 있었다.
키얀은 사선을 넘어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비록 파이론과는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어디 가서 칼밥으로는 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토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체계적인 수련을 거듭해 온 것이 움직임에서 보였다.
하지만 흐름을 끊는 것은 키얀 같은 이들의 주특기였다.
변초와 허초를 섞어 상대를 교란하면 흐름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토는 흔들리지 않았고, 진실을 판별해 검을 찔러 넣었다.
'이런 애송이에게 이 정도의 판별력이 있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키얀은 점점 초조해졌다. 가토는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키얀에겐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 그래 파이론은....'
파이론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진 키얀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파이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위에 있는 자는 에단이었다.
'제, 제기랄! 저 새끼는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온갖 유세를 떨며 무게 잡던 파이론도 쓰러졌다. 희망의 빛이 점점 사라졌다.
'이, 이런 괴물 새끼들이 도대체 어디서....'
마음이 꺾이니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피부에 하나둘 자상이 생겨나며 키얀의 몸이 피에 젖어 갔다. 안색이 파리해지며 동공이 불안함에 떨렸다.
'아, 안 되겠어.'
키얀이 다시 한번 모래 더미를 발로 찼다. 먼지구름이 일었음에도 가토는 눈살만 찌푸릴 뿐 당황하지 않았다.
키얀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가토가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가토의 상체가 숙어지더니 그대로 질주했다. 도주하는 키얀을 향해 달려 나가던 가토가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평소 같았다면 대응했을 키얀이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도주를 택한 순간 가토의 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키얀의 입에서 진한 선혈이 흘러나왔다.
"끄아악!"
키얀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지면을 기어 다니며 삶을 갈구했다.
가토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판별할 수 없었다.
실망감인지 동정심인지, 감정을 알 수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가토는 기사였다. 그리고 주군의 명을 받은 기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가토가 무심한 눈으로 검을 붙잡아 뽑아냈다.
촤악!
"끄아아악!"
피가 솟구치며 키얀이 다시금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에단에게서 힘을 갈취당하던 파이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파이론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그걸 듣고 있던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때 페온과 카이나가 동시에 소리쳤다.
― 막아라!
― 빨리 막아!
에단은 자세를 바로잡아 엘보우로 파이론의 얼굴을 찍었다.
콰지직!
"커헉!"
파이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문을 막았나 싶던 그 순간.
파이론은 검은 잿더미가 되어 잘게 부서져 내렸다. 이윽고 잿더미 사이에서 음산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단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툰나와 르니엘이 몸을 떨었다.
"지금 무슨 일이...."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비단 연기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숲 곳곳에 저것과 같은 기운이 만연해 있었다.
화아아악!
검은 연기가 모여들어 그 크기가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에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토!"
에단이 빠르게 달려가 가토의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가토가 뒤로 끌려오며 바닥을 굴렀다. 몸집을 불린 검은 연기가 죽어 가는 키얀에게 흡수되었다. 키얀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에단이 지면에 박혀 있는 성검을 잡아 뽑았다.
― 너...!
카이나가 분통을 터트렸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했다. 에단의 팔에 힘줄이 돋아났다.
마나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미 에단의 몸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죽은 마나였다. 죽은 마나는 성검과 상극이었다.
지금 사용 가능한 것은 순수한 완력과 성검 자체의 능력.
촤아악!
성검이 휘둘러지며 성스러운 기운이 키얀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검게 물든 키얀은 그 일격을 피해 냈다.
"쯧."
에단이 혀를 찼다. 귀찮아지기 전에 처리하기에는 늦어 버렸다.
"■■■■■."
키얀의 검은 눈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입을 열 때마다 검은 연기가 넘실거리는 것이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태 안 좋으면 곱게 뒤지지 그러냐."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오히려 편해진 걸 수도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은 감 잡았다.
'저건 지금 힘을 당겨쓴 거잖아?'
뿌려 둔 씨앗이 싹트기도 전에 힘을 모조리 끌어온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한 선택이겠지만.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휴고가 인간의 형상을 되찾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쯧, 이건 아쉽네.'
휴고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대신에 내가 크면 되지.'
입맛이 돋은 에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 [124화] 세계수 (4)
죽은 마나에 잠식당한 인간.
불길함이 형상화되어 넘실거린다. 꺼림직하고 섬뜩한 기운이 숲을 메웠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네이드가 에단을 불렀다.
"도련님."
"어, 괜찮아."
에단이 가볍게 손을 들며 네이드의 걱정을 일축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뿌려 둔 씨앗을 흡수한 녀석은 강했다.
'하지만.'
에단은 이미 저따위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녀석을 상대로 승리했다. 고작 저런 조잡한 급조물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쓰읍."
오히려 입맛이 돋았다.
이미 에단이 흡수한 죽은 마나는 과분할 정도로 넘쳐흘렀지만, 에단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고작 이 정도 수준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온갖 특전을 독식한 주인공도 헤쳐 나가지 못한 길이었기에 현실에 안주해 있을 수는 없었다.
파이론이 힘을 갈망했던 것처럼, 에단도 똑같은 갈증을 느꼈다.
검은 안광에서 흘러나온 맹렬한 적의가 에단에게로 향하자, 피부가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저릿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던 에단은 씨익 웃었다.
"뭘 꼬나봐?"
콰득!
에단이 발을 내딛자 지면이 움푹 파였고, 순식간에 검은 형체 앞에 도달했다. 에단의 팔에는 죽은 마나가 넘실거렸다.
콰앙!
에단의 주먹이 키얀을 향해 휘둘러졌다. 빠르게 팔을 든 키얀이 주먹을 막아 냈다.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내지르던 손을 펼쳐 역으로 키얀의 손목을 붙잡았다.
꽈아악!
에단이 힘을 주어 키얀의 손목을 움켜쥐자, 순식간에 죽은 마나가 에단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
키얀이 괴성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했다. 힘을 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항하는 듯싶었다.
"시끄러워."
에단이 붙잡은 손을 당기며 그대로 키얀의 다리를 걸었다.
후웅―!
키얀의 몸체가 흔들렸다. 지면을 짚기 위해 팔을 내디뎠지만, 키얀을 마중 나온 것은 에단의 주먹이었다.
콰직!
검은 얼굴이 뒤로 꺾였다. 에단이 키얀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놓는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빠악!
에단의 주먹이 키얀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키얀의 몸이 넘어가려 하자, 에단이 그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붙잡은 팔을 휘감으며 에단이 몸을 돌렸다. 키얀의 골반이 에단의 허리에 밀착됐다.
퉁―
키얀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콰앙!
큰 충격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에단이 무심한 눈으로 키얀의 얼굴을 짓밟았다.
콰직! 콰직! 콰직!
수차례 짓밟던 에단이 키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에단의 허벅지가 키얀의 갈비뼈를 짓눌렀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키얀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상처가 빠르게 아문 키얀은 검게 물든 안광으로 에단을 주시했다. 눈이 마주친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뭘 봐?"
에단이 팔을 들었다. 이윽고 에단의 팔꿈치가 키얀의 얼굴을 으깨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직!
에단이 무심한 듯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쉬지 않고 파운딩을 날렸다. 에단의 소매가 찢어질 정도로 무참한 파운딩이었다.
팔꿈치가 꽂힐 때마다 키얀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에단은 죽은 마나의 흡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키아나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 저런 미친....
― ...이놈이 원래 손속이 좀 과해.
― 네 눈은 썩은 오크 눈이냐? 저게 손속이 조금 과한 정도라고?
카이나가 어이없어하며 페온의 말에 답했다. 이건 손속이 과한 정도가 아니었다.
에단은 카이나의 예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승부는 생각보다 쉽게 결판날 수 있었다.
성검의 힘을 적극 활용한다면 보다 수월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런데 이 녀석은....
성검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검을 버리거나 등한시한 것은 또 아니었다.
보험을 위해 에단은 검을 쥐고 있었다. 에단은 한 손만으로 적을 제압한 채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카이나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 너보다 더한 새끼가 있을 줄이야....
― ....
페온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둘의 대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죽은 마나의 추출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이 정도로는 큰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군.'
거북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기껏 최후의 방법을 시전한 녀석이었지만,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모든 힘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물을 것도 없으니.'
어차피 이 녀석도 끄나풀에 불과했다. 에단이 찾는 것은 그보다 뒤에 있었다.
콰직!
에단이 마지막 엘보우를 무심하게 가격하자, 키얀이 파이론과 마찬가지로 검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에단이 콧방귀를 끼며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미간을 좁혔다.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균형이 뒤틀리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다. 죽은 나무의 힘으로 제약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죽은 마나는 본래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페온의 도움으로 부정적인 부분들을 최대한 덜어 내고 있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서둘러 진행해야겠어.'
대부분의 문제들은 끝났다. 이제 세계수의 복원만이 남았다.
에단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네이드와 가토, 르니엘과 툰나가 말없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르니엘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 용사님이 맞나요?"
울먹이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에단의 잔혹한 손속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툰나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다.
"아닌데?"
용사 아니라고 말했잖아.
* * *
― ...언니.
― ...누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의 목소리였다. 동생은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동생을 떠올리며 버텼다. 동생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다.
'그런데... 동생이 왜 언니라고 불렀다가 누나라고 부르지... 남자였나?'
자신의 전부이자 원동력이었던 동생. 가냘프고 병약해 자신이 돌봐 줘야만 했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감과 중압감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얼굴과 목소리 등 모든 것이 희미했다.
흐릿한 잔상만이 헨리의 손을 붙잡았다.
― ...언니.
― ...누나.
― ...왜 나를 버렸어?
'아니야.'
나는 버리지 않았어.
바빠서 그랬을 뿐이야.
언제나 너만 생각하고 걱정해 왔어.
헨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헨리의 외침은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
― ...이미 늦었어.
늦었다니?
대체 뭐가 늦었다는 거야?
그리 묻고 싶었다. 헨리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 몽롱함 속에서 어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에단 씨....'
그때 헨리의 머릿속에서 에단이 떠올랐다.
그가 있으면 복잡한 감정이 진정되고는 했다. 답이 없다고 생각되는 난제도 에단이 나서면 해결되었다.
'에단 씨가 오시면.'
이 악몽 속에서도 깨어날 수 있지 않을까?
동생의 원망 소리가 쉬지 않고 메아리쳤다.
― 왜 나를 안 구하러 왔어?
― 왜 나를 버린 거야?
― 언니.
― 누나.
헨리는 귀를 막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적당히 징징거리지?"
그리고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이 어려 있는 익숙한 목소리. 날카로운 목소리였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음성이었다.
"...에단 씨?"
"어."
뒷말은 듣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에단이었다.
"늦었다고 했지? 미안한데 아직 안 늦었거든?"
"그게 무슨...."
"일단 불 좀 켜자."
이어지는 에단의 뒷말과 함께 그녀의 악몽이 끝났다.
화악!
헨리의 눈이 떠졌다.
"허억!"
헨리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게 할래?"
"에, 에단 씨?"
헨리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그녀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 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일단 일부터 하자."
급한 불은 꺼야 할 거 아니야.
* * *
르니엘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따라다녔다. 에단이 하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곱씹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에단이 용사라고 확신했다. 에단이 보여 준 모습이 용사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용사가 맞을까?'
에단의 무력은 르니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강한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용사의 소양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
르니엘은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건 상대를 제압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고 있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잔혹한 손속과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확인 사살.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소름 끼치는 검은 기운.
그리고....
르니엘은 똑똑히 보았다.
에단의 뒤에 떠올랐던 나무 한 그루의 형상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던 앙상한 나무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뿜어내던 생명의 나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느낌을 보여 줬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느껴졌다. 귀곡성을 터트리며 생명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르니엘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아니,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힘을 다루는 자가 과연 용사가 맞을까? 르니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확신할 수 없었다. 르니엘이 믿고 따르는 툰나는 아직 아무런 말이 없었다.
르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엘프가 누워 있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엘프는 그녀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자 중 하나였다.
'리트마....'
리트마는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르니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리트마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리트마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의에 따져 묻지 않았다.
자신의 안일함이 마을과 숲을 위기에 빠트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럴 줄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그 누구보다 르니엘을 힐난했던 리트마는 외부의 세력과 내통하고 있었다.
리트마는 상황이 안 좋아지자 망설이지 않고 적의를 내비쳤다.
수백 년을 함께해 온 자신과 일평생을 마을에 헌신했던 툰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던 툰나는 복잡한 얼굴의 르니엘을 빤히 바라봤다. 리트마는 르니엘이 데려온 외지인에 의해 저지당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행동했다. 주저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찍어 누른 에단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목걸이를 쥐고 있는 에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에단이 쥐고 있는 목걸이.
그가 목걸이를 처음 꺼내 들 때 툰나는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툰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에단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 [125화] 헨리 (1)
에단이 차가운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잠에 빠져 있었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지금 무언가에 의해 붙잡혀 있었으니까.
에단이 목걸이를 들었다.
이건 촉매였다.
헨리의 의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지.'
에단이 목걸이를 헨리의 몸 위에 올렸다.
지이이잉―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따스한 온기와도 같은 빛이었다. 드레이가 뿜어낸 찬란한 광채와는 결이 다른 신성함이었다.
후웅!
보호막이 펼쳐지며 에단과 헨리를 둘러쌌다.
에단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무의식에 늪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집이었다. 아니, 나무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할 수준의 오두막이었다.
집 안에서는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군.'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 친화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숲속의 오두막.
에단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됐다.
'단열은 안 될 테고, 벌레는 들끓겠지. 기본적인 생활도 뭐....'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비단 식재 조달만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 고려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걸었다.
에단이 한 걸음씩 다가가자 웃음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땅거미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숲의 어둠은 사나웠다.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하지만 에단의 시야는 뚜렷했다. 이제 에단에게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흑흑흑."
헨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은 에단이 문을 열었다.
쾅!
후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또다시 시야가 반전되는 상황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에단이 앞을 바라봤다. 정체 모를 괴물이 에단의 앞에 서 있었다.
한참 위에서 에단을 내려 볼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이 정도 사이즈는 블랙 오우거 외에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에단이 목을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래, 뭐.... 이 정도 이벤트도 없으면 안 되겠지."
안 그러면 실망이지.
터벅터벅.
에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괴물을 향해 걸어 나섰다. 괴물이 에단을 향해 포효했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에단이 웃었다.
* * *
쿠웅!
거인이 바닥에 쓰러진 걸 확인한 에단이 가볍게 손을 털어 내자, 그와 동시에 어둠이 걷히고 배경이 달라졌다.
에단의 얼굴에는 짜증이 맴돌았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라는 거야?"
하지만 앞을 보아하니,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았다.
헨리가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에단은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에단은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죽은 나무는 세계수와 상극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무엇보다 가까웠다.
에단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의 앞에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지금 헨리를 비난하고 있었다.
에단이 발을 내디뎠다.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적당히 징징거리지?"
에단이 다가서자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동요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아직 안 늦었거든?"
누구 마음대로 늦었단 말인가. 정말 늦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표독스러웠다. 절망과 원망이 가득한 눈이었다.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헨리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일단 불 좀 켜자."
쾅!
에단이 땅을 구르자 응집된 죽은 마나가 폭발하듯이 전개되었다.
에단이 지닌 죽은 마나는 최근 포식을 한 터라 충만한 상태였고, 반대로 세계수는 지금 빈사 상태나 다름없었다.
'헨리한테 이럴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렇다고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다. 에단은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
죽은 마나가 퍼지며 순간 어둠이 짙어진 듯 보였지만, 순식간에 하얀 배경으로 바뀌었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눈이 팅팅 부은 헨리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왜 질질 짜고 있어?"
"...네?"
헨리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이런 상황에서 구박을 받으니 서러움이 북받쳤다.
"하, 하지만...."
헨리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려 하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울면 맞는다."
"...아, 알겠어요."
헨리가 울음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에단에게 얻어맞는 건 사양이었다.
에단이 사람을 패는 걸 수도 없이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죽을 거야....'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에게 맞아 죽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에단은 울음을 꾹 참고 있는 헨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 좀 낫네."
"...너무해."
헨리가 작은 투정을 부렸다. 에단은 헨리의 말을 무시한 채 허공을 바라봤다.
"보고 있는 거 알거든?"
에단이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지금 안 내보내면 다 깨부순다?"
살벌한 경고였다. 하지만 허언은 아니었다. 에단은 지금껏 내뱉은 말을 모두 지켜 왔다.
― ...이유가 뭐지?
"이유?"
에단이 헨리의 목덜미를 붙잡아 쑤욱 끌어 올리자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딸려 왔다.
"네가 내 직원 울렸잖아."
에단이 씨익 웃었다. 헨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 그 녀석은....
"거기까지. 그 이상은 별로 필요 없거든."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에단에게는 하등의 상관도 없었다.
에단이 헨리를 씨익 바라봤다.
"이미 상처받은 거 조금 더 받아도 되지?"
"네?"
헨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에단이 말했다.
"얘가 네 꼭두각시인 거? 그래서 어쩌라고?"
"꼬, 꼭두각시요...?"
헨리가 말을 되물었다. 하지만 에단은 헨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줄, 내가 오늘 끊어 버릴 거거든."
― 네가 무슨 권한으로...!
녀석은 마치 화를 내는 듯했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소유욕을 가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소유욕은 에단도 뒤지지 않는다.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헨리는 에단의 소유였다.
에단은 자신의 것을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권한이 왜 없어?"
에단이 고개를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너 여기서 이대로 죽을래?"
에단의 질문에 헨리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방금까지 그녀는 죽고 싶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에단이 나타나자 절망과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늘도 자신을 어둠 속에서 건져 냈다. 거기까지 떠올린 헨리의 동공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하는 거죠?"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정말 에단에 손에 의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분명 방금까지는 죽고 싶었는데...."
헨리가 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살고 싶어졌어요."
"좋아."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들고 있던 헨리를 지면에 내려놨다.
뚜둑. 뚜두둑.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주도권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왜, 죽을까 봐 겁나?"
― ...내가 죽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대충은."
생명의 나무.
세계수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마나를 순환시킨다.
마나는 정체되지 않고 순환한다. 그게 이 세계의 규율이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작가의 설정까지 깊게 파고드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 나무가 완전히 오염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반대되는 성향의 녀석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단 점이다.
망령과 언데드들이 들끓으며 '지하'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대기 중의 마나는 흐려지고, 정령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일이 더럽게 귀찮아진다는 거지.'
에단에게는 적들이 활개 칠 발판을 마련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태도가 더럽게 아니꼽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상 도와주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저따위 태도를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생각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에단이 죽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죽은 나무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은 지금 진심이었다.
― ...진심인가?
"그럼 거짓말 같아? 지금 선택해. 여기서 뒈질지. 아니면 내보낼지."
― 어차피 상황은 끝났어.
"누구 마음대로 끝났어? 어차피 너도 '진짜'는 아니잖아."
―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왜, 궁금해?"
― ....
히죽 웃는 에단의 모습에 세계수가 침묵했다. 결국 세계수가 입을 열었다.
― 그 증표가 어째서 네놈 따위에게 갔는지 모르겠군.
"왜 혀가 길어지실까."
― 좋아. 내보내 주지,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다.
"글쎄? 살면서 후회를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너무 식상한 경고 아닌가?"
― 내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놈이 그렇게 말하는 건가?
"아무 일 없게끔 내가 만들 거거든."
― 허! 좋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시야가 다시 한번 반전된다.
번쩍 눈을 뜬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툰나의 거처였다. 에단이 눈을 뜨자, 툰나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뭐, 잘 해결됐어."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에단 님."
"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죠?"
많은 일을 겪어 놓고도 헨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 탓에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귀찮아. 나중에 말해 줄게."
에단이 몸을 돌렸다. 뒤에는 가토와 네이드가 서 있었다.
휴고는 지금 다른 거처에서 자고 있었다. 심신에 적지 않은 피로가 쌓인 탓에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인원이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원래라면 정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에단이 성검을 바라봤다. 성검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이미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세계수를 완전히 정화하기는 어려웠다.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에게는 설명하지 못했다.
세계수가 피해를 감수하고 정화를 택한다면, 아마 헨리는 소멸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불쾌함이 들었다. 그따위의 결과는 사양이었다.
'빼앗기는 건 질색이야.'
원작과는 상황이 달라진 탓에 이제부터는 에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개척해 나가야 알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무턱대고 희망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어그러질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어떻게든 되기 마련일 테니까.
에단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쉬었지?"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노인을 너무 고생시키시는군요."
"아직 정정하면서 엄살은, 가토 너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벌써 약아졌네. 뭐, 그럼 움직이자."
이제는 진짜 끝을 볼 시간이다.
◈ [126화] 헨리 (2)
일행에게 말을 한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목걸이에서는 더 이상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흥미를 잃은 에단의 시선이 르니엘과 툰나에게로 향했다.
"이제 세계수로 가 마무리 지어야지."
"...장로님."
르니엘이 툰나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표정에는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번 일은 숲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건 아닐까?'
르니엘는 확신을 하는 게 두려웠다. 그때 르니엘의 어깨에 툰나의 손이 올라갔다.
그의 손은 따듯했다.
"르니엘."
"...."
"괜찮다."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르니엘은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르니엘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니엘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를 찾아갈 방법은 많았다.
에단의 몸에 뿌리내리고 있는 죽은 나무.
그리고 유일한 증표인 세계수의 목걸이와 헨리.
'하지만 작정하고 숨어들면 의미가 없지.'
세계수의 또 다른 자아는 이미 에단을 적대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 * *
타다닷!
르니엘을 선두로 에단과 일행이 뒤따랐다. 헨리는 에단이 짐짝처럼 짊어진 채 달렸다.
헨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헨리의 신체 능력으로는 이 속도를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르니엘의 뒤를 따라가는 에단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하군.'
르니엘은 시시각각 뒤바뀌는 길을 막힘없이 개척해 나갔다.
세계수의 방해였다. 하지만 르니엘은 마치 익숙하다는 듯 새로울 길을 찾아냈다.
마치 위에서 관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즉에 막든가.'
오염되기 전부터 채비를 제대로 했으면 이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찬 에단이 르니엘의 뒤를 바지런히 따랐다.
바로 그때,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에단은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다가 발로 몬스터를 걷어찼다.
쾅!
몬스터가 사정없이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하지만 몬스터의 숫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네이드! 가토!"
"알겠습니다!"
가토가 선두로 튀어나왔다. 가토의 검광이 번뜩였다.
네이드도 따라붙어 단검을 휘두르자 피가 솟구쳤고, 사방에 몬스터들의 괴성이 메아리쳤다.
르니엘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내 숲의 심층부 입구에서 멈춘 르니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이 막혀 있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계수는 언제나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길을 막아 버리다니....
"비켜 봐."
에단이 헨리를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와 넝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검으로는 의미가 없겠군.'
성검의 힘은 정화에서만 극강의 효과를 자랑했다. 이럴 땐 오히려 다른 것이 더 효과적일 터.
에단이 죽은 마나의 힘을 끌어 올리자 검은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음험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마치 귀화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에단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발을 축으로 몸이 회전했다. 에단이 왼손을 내밀었다.
꽈광―!
귀가 멀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길이 뻥 하고 뚫렸지만, 그 또한 일시적이었다.
넝쿨이 다시 길을 막으려고 들자 에단이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지금이 적기지.'
키에에엑!
죽은 나무의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네이드와 가토가 열심히 몬스터를 막고 있었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에단이 헨리의 목덜미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린 채 터진 길을 따라 질주했다.
달려 나가면서 에단이 고개를 돌려 르니엘을 바라봤다.
"고맙다!"
르니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숲의 심층부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세계수를 마주하게 됐다.
생명과 풍요와는 거리가 먼 앙상하게 마른 거목이었다.
제정신인 상태로 세계수를 마주하자 헨리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헨리."
에단이 헨리를 불렀다. 헨리의 표정은 한마디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에단 님.... 저는 대체 무엇이죠?"
에단은 헨리를 바라보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기억 안 나?"
에단이 성검을 꺼내 들자 카이나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
'지켜보고 계세요.'
에단은 모두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헨리는 세계수가 만들어 낸 인격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 기제가 헨리였다.
'원래라면 더 복잡해졌겠지만.'
세계수의 보험이 바로 헨리이기에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상태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덩달아 헨리도 가진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다행이야.'
만일 헨리를 향한 세계수의 통제가 그대로 작용했다면, 에단의 의도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넌 내 직원이라고. 어딜 도망가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에단이 성검을 쥔 채 세계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속이 들끓는다. 죽은 나무가 아우성을 치고 있다.
에단의 내부는 한쪽으로 치우쳐져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 더욱 가까웠다.
에단이 세계수에게 점점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대체 뭐를 할 생각이지?
"왜? 이제야 좀 쫄리냐?"
― 왜 저딴 녀석에게 집착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내 직원이라고. 어딜 마음대로 직원을 빼 가려고 하고 있어."
에단이 히죽 웃었다. 앙상한 세계수가 몸을 떠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그만, 멈춰!
"싫어."
세계수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 녀석과의 대화라.'
아마 에단이 지니고 있는 죽은 나무의 힘 때문이겠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건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이었고, 몇 차례 언급된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 앞으로는 개척을 해야 했다.
"헨리."
"...네."
"죽고 싶은 건 아니지?"
순간 에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헨리가 죽고 싶다고 대답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헨리는 한 차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답했다.
"네, 살고 싶어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에단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거면 됐어. 들었지? 얘가 살고 싶다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너도 진짜는 아니지 않나?"
― 그걸 어떻게...!
"알면 다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검을 세계수를 향해 찔러 넣자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단은 밀려나지 않았다.
에단의 다리는 지면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후읍―
에단이 숨을 들이 삼켰다. 복압이 단단하게 유지되며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죽은 마나를 몸 전체에 골고루 퍼트렸다.
카이나가 역정을 냈다.
― 야! 나는 이 기운 존나 싫어!
그러나 에단은 카이나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에단의 몸에서 날뛰던 죽은 마나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푸욱!
성검이 세계수에 깊이 박혔다. 그와 함께 성검에서 찬란한 빛이 발산되었고, 에단은 검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좀 낫는 것 같지 않아?"
원래라면 이 방법으로 오염된 세계수를 정화하려 했지만, 이것만으로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계수는 너무 약화되었다. 만일 회복된다고 해도 그 힘과 크기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축소될 것이다.
'그렇다면.'
살을 붙여 주면 된다.
검을 찔러 넣은 뒤 에단이 손을 뗐다. 그러고는 곧장 땅바닥에 팔을 박아 넣었다.
"후읍!"
에단이 다시 한번 의식을 집중했다. 그제야 페온은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 깨닫고 소리쳤다.
―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가만히 지켜보고 계세요.'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것은 자신이다. 이건 확신이다. 이 행동은 확신 없이 던지는 만용 따위가 아니었다.
"후읍!"
에단이 숨을 들이켰다. 복압을 단단하게 유지했다. 지금부터는 반동을 견뎌야 하기에 충격에 유의해야 했다.
쿠구구구구구―
에단은 죽은 마나를 모조리 이끌어 냈다. 그와 동시에 죽은 나무조차 끄집어냈다.
키에에에에―!
죽은 나무의 귀곡성이 숲에 울려 퍼졌고, 그 압도적인 위용에 르니엘은 기가 죽었다.
이윽고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마나 폭풍이 휘몰아쳤다.
마나와 죽은 마나, 그리고 성검의 정화 능력까지.
모든 기운이 상충되고 있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는 카이나가 악을 질렀다.
― 이 미친 새끼야!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조율하십시오!"
에단이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이제 자신도 한계였다.
나름의 한 수를 던지긴 했지만,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한마디로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뜻이다.
'상충하는 두 거목.'
별생각 없이 넘기기에는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단에게는 한계가 명확했다. 대부분은 편법으로 손에 넣은 힘이었다. 마스터의 벽은 넘었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조금 더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이 바로 파멸의 순간이었다.
'그 모든 걸 해결할 방법이.'
지금 던진 이 도박 수였다.
죽은 나무가 에단의 손을 벗어났다. 죽은 나무는 이미 많은 양분을 섭취한 상태였다.
원래라면 묘목도 안 되는 일개 나뭇가지였던 죽은 나무는, 차근차근 힘을 모아 어느새 약화된 세계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에단은 거기에 양분을 더했다. 에단이 손에 넣은 죽은 마나를 모조리 죽은 나무에게 집어넣고 있었다.
― 이런 미친놈이 지금 무슨 짓을...!
페온이 경악을 삼켰다. 저놈이 지금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단이 벌이는 일은 세계수인 '생명의 나무'와 '죽은 나무'의 융합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합일.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과를 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뿌리가 어떻게 함께한단 말인가.
하지만 에단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언젠가 뒈져.'
저승이나 윤회 따위는 모른다.
두 거목은 가장 멀어 보였지만, 에단이 보기에는 가장 가까워 보였다.
그렇기에 에단은 확신했다. 위태로운 자신의 상태를 해결하고, 저 재수 없는 세계수의 자아에게 엿을 먹일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걸.
그 여파?
'그게 내 알 바냐?'
그딴 건 모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자신이 열이 받는다는 거다.
에단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곧 죽어도 굽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여기서 뒈지더라도.'
사건 한번 일으키고 간다.
에단의 얼굴에 핏대가 돋아났다. 눈가에선 실핏줄이 터지고, 죽은 마나의 과용으로 인해 검은 피가 눈코입에서 줄줄 흘렀다.
에단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에단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에단의 비아냥에 세계수가 기겁하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 이, 이 정신 나간 새끼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고대로부터 내려온 법칙을 깨부술 생각이냔 말이다!
"그러게 누가 좆 같은 협박을 하래?"
그것도 나한테?
넌 사람 잘못 봤어.
◈ [127화] 나를 협박해? (1)
르니엘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단순한 마나의 폭풍이 아니었다. 죽음의 마나와 세계수의 마나가 맞부딪쳤다.
더불어 꽂혀 있는 검에서도 찬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세 가지의 힘이 서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우위를 점한 것은 에단이 뿜어내는 어둡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에단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르니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내, 내가 또 실수한 걸까?'
에단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르니엘의 시선이 이번에는 헨리에게로 향했다.
르니엘의 눈이 점차 커졌다. 헨리는 생각보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마주했던 것 같은 몽롱한 눈이 아닌, 또렷한 눈동자였다.
'대체 어떻게....'
헨리에게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우직하게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 옆에 거대한 나무가 생겨나는 모습에 르니엘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소름 끼치는 모습의 나무였다. 그 나무는 세계수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쾅!
그때 거대한 폭발음이 터졌다. 휘몰아치던 마나가 결국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에단이 그 순간 헨리를 끌어당겼다. 에단이 왼손을 들었다. 마나를 통해 신체를 보호할 수 없다.
이미 모든 마나를 소진한 상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체의 내구력뿐이었다.
옷이 찢어발겨지며 살가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은 이 순간을 놓칠 생각이 없었기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단의 눈은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뿌리내린 죽은 나무와 세계수의 자리싸움이 시작됐다.
죽은 나무는 세계수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세계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력으로 방어했다.
"카이나!"
에단이 소리치자 카이나에게서 짜증 가득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카이나가 빽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에단의 의도는 확실하게 읽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던 성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저 빛은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한 힘이 아니었다.
― 나도 이제 몰라! 제기라아알!
키에에에에에엑―!
죽은 나무의 뿌리가 세계수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세계수는 죽은 나무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었다.
―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꽈드드드득!
세계수를 꽁꽁 싸맨 죽은 나무가 세계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 끄아아아아아악!
세계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의 여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도 헨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에단이 힐긋 눈을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의 몸은 가늘게 떨리는 중이었다.
"버텨."
이것까지는 에단이 도와줄 수가 없었다.
헨리의 인격에 세계수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헨리의 심경이 흔들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에단은 이제 헨리를 완전히 세계수에서 분리할 생각이었다.
콰지직!
세계수를 압박하던 죽은 나무가 결국 세계수의 몸을 완전히 부러트렸다.
더 이상 세계수의 비명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나의 여파가 가세되었다. 하지만 이번 여파는 얼마 가지 않았다.
죽은 나무가 세계수의 잔재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죽은 자의 몸에서만 마나를 추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수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마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폭풍의 여파가 걷혔다.
에단의 몸은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었다.
고된 채찍질을 당한 죄수의 몸처럼 몸 곳곳에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단은 아랑곳 않고 달렸다.
에단이 노리는 것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성검이었다. 에단이 왼손을 뻗어 성검을 쥐었다.
순간 빛이 발산되며 에단의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됐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죽은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성검이 흩뿌리는 섬광이 죽은 나무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상체를 숙였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에단이 질주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두 차례의 도움닫기를 통해 죽은 나무를 향해 뛰어들었다.
푸욱!
에단의 손에 들린 성검이 죽은 나무의 몸에 꽂혔다.
'카이나 씨?'
― 이런 개....
카이나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욕설은 에단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 썅! 하면 되잖아!
카이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다시 한번 힘을 발산했고, 그와 함께 죽은 나무가 거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책 끝냈으면 이제 돌아와야지?"
에단이 죽은 나무의 겉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죽은 나무의 표면이 갈라지며 에단의 손이 푹 박혔다.
이미 한 번 흡수한 힘이었다.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빨리 안 와?"
에단이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죽은 나무의 몸이 비틀렸다.
죽은 나무에게도 자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은 나무는 지금 겁을 먹고 있었다. 세계수를 삼킬 때처럼 포악하고 광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상대를 요리하는 건 에단의 주특기였다.
콰직! 콰직!
저항의 의지를 부숴 버리기 위한 에단의 주먹질이 시작됐다.
에단의 왼손은 타이탄의 장갑이 보호하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어떤 대응을 하든,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려 하든 의미가 없었다.
타이탄의 장갑은 죽은 나무의 껍질을 계속해서 벗겨 냈다.
콰지직!
주먹질이 이어지자 에단의 팔이 결국 죽은 나무 사이에 깊게 박혔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 거기서 오른쪽!
카이나의 외침에 에단의 눈이 번뜩였다. 에단이 팔을 뽑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질렀다. 죽은 나무의 속살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콰지직!
에단의 손이 다시 한번 깊게 박혔다. 손에 감각이 느껴졌다.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찾았다.'
손에 집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에단의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물체는 바로 죽은 나무의 핵이었다.
키에에엑!
죽은 나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성검의 힘이 죽은 나무를 방해했고, 내부에서는 에단이 거칠게 핵을 움켜쥐고 있었다.
죽은 나무의 핵이 귀여운 반항을 시작하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상큼한 새끼.'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타이탄의 장갑을 꿰뚫을 수는 없었다.
에단이 왼손에 힘을 줬다. 전완근에 핏줄이 돋아나자 죽은 나무의 핵이 바르르 떨렸다.
"터져 볼래?"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말하자, 죽은 나무의 저항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마지막 경고야. 뒈지기 싫으면 다시 들어와. 우리 지금까지 좋았잖아?"
키에엑....
그 단말마를 끝으로 죽은 나무의 크기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결국 에단이 쥐고 있는 핵만 남게 되었다.
에단이 말없이 죽은 나무의 핵을 바라봤다.
에단이 처음 죽은 나무의 힘을 흡수할 때 봤던 볼품없는 나뭇가지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에단이 움켜쥔 나뭇가지에 힘을 주자, 나뭇가지가 떨리더니 이전처럼 에단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흡수되는 모습에 에단은 가만히 죽은 나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쿠웅―!
엄청난 충격이 갑자기 에단의 몸을 덮쳤다. 실제로 몸이 들썩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해일 같은 힘의 파도가 에단의 신체에 휘몰아쳤다.
이전의 힘과는 궤가 달랐다.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페온이 침음을 집어삼켰다. 이런 종류의 힘은 페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 카이나의 목소리가 에단의 귀에 파고들었다.
― 뭐 해, 머저리 새끼야! 빨리 검을 쥐어!
쿵.
한 차례의 충격과 함께 몸 전체의 혈관이 돋아났다. 흉측한 모습이었다.
에단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야속하게도 거리가 멀었다.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정신력이나 인내력으로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앞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헨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 내가 뭐라도 해야 해.'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다. 헨리는 아직도 이성을 되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에단이 자신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고, 끝까지 자신을 믿었다는 것을.
헨리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헨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헨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헨리의 손이 성검으로 향했다.
― 너...!
카이나가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헨리에게 닿지 않았다. 헨리가 성검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헨리를 향해 소리치려 했지만, 에단은 지금 목소리 한 점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헨리가 결국 성검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눈을 부릅떴다. 원래라면 엄청난 반발력이 헨리를 덮쳐야 정상이었지만, 성검의 반발력은 헨리를 덮치지 않았다.
헨리가 검을 쥔 채 에단에게 뛰어갔다.
"에, 에단 님! 제가 지금 뭘 하면 되죠?!"
헨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하지만 성검을 꼬옥 붙잡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고 확고했다.
에단이 손을 뻗었다. 헨리가 황급하게 에단에게 성검을 건넸다.
'제기랄, 정말로 뒈지겠군.'
농담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때마다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에단의 육체는 이미 한 번 각성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수용 가능한 마나의 총량이 늘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기운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페온이 섣부른 조언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넘어섰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자그마치 세계수의 힘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관조하는 세계수의 힘을 일개 인간이 모두 흡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죽은 나무의 막대한 기운조차 받아들였다.
한 가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국에 거대한 두 힘을 모두 삼키려 들었다.
페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너무 무모한 짓을 저질렀어.'
페온과 카이나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에단의 몸은 지금 폭탄과 다름없었다.
총량을 아무리 늘린다고 한들 저 둘의 힘은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헨리가 에단에게 성검을 건네주는 그때, 페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 에단! 쟤를 빨리 붙잡아!
에단은 페온의 외침 한마디로 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에단은 성검을 건네받으며 얻은 잠깐의 자유로 헨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헨리가 당황하며 에단에게 끌려왔고, 에단은 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헨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단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 견딜, 수, 있겠, 냐...?"
진지한 에단의 물음에, 당황에 물들었던 헨리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에단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상관없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견딜 수 있습니다."
◈ [128화] 나를 협박해? (2)
에단은 페온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성검을 매개체로.'
터질 것 같은 힘을 헨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에단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은 지금 대해와도 같았다.
더군다나 이질적인 기운이다. 일반적인 마나도 아니고, 죽은 마나도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였다.
이 기운을 헨리가 과연 수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일에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헨리가 적임자였다.
그녀는 세계수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아 중 하나였기에 이 방대한 기운을 받아들이기에는 최적이었다.
헨리의 확고한 눈을 바라본 에단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에단의 몸속에 있는 기운은 이전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띠지 않았다.
잠잠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힘 자체가 에단의 수용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에단의 몸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에단의 왼손이 성검의 날을 붙잡고 손잡이를 건넸다. 헨리는 망설이지 않고 에단이 건넨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 시작한다.
카이나 또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규격 외의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의 역할은 결코 단순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스―
거대한 바다에 미약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에단의 몸속에 있던 바다가 천천히 흐른다. 성검이라는 통로는 넓지 않았지만 견고했다.
좁은 장소에 불만을 가진 해일 같은 마나는 순식간에 성검의 통로를 통해서 헨리를 향해 넘어가기 시작했다.
쿵―!
갑작스러운 충격에 헨리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 죽을 거 같아.'
아직 일부분만 넘어왔음에도 엄청난 힘과 여파가 느껴졌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이를 악물며 견뎌 냈다.
'이 정도도 못 참아?'
헨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는 했다. 그게 자신의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주제넘게 나서는 것은 과용과 만용이라 여겼다.
하지만 헨리는 에단을 봐 왔다. 에단은 언제나 무모했다. 블란테라는 배경을 감안하고 바라봐도 에단에 행동은 미친 짓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언제나 증명해 왔다. 헨리는 그런 에단의 당당함을 동경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다. 헨리는 소심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에단이 이런 고통을 짊어지게 된 원인이 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빚을 청산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덜어 낼 수 있다면....
'여기서 죽어도 돼.'
그게 헨리의 각오이자, 다짐이었다. 헨리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파도가 거칠어지며 헨리를 향해 마나의 이동이 가속화됐다.
촤악!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헨리의 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헨리는 결코 고통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에단의 호흡이 점점 평안해졌으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페온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정말 이 막대한 기운을 수용하고 있다니.
외관상 보이는 어리숙함에 헨리를 낮게 평가했었다. 하지만 헨리의 역량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대마법사나 마스터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 마나의 대해를 헨리는 담담히 흡수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세계수의 유지를 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헨리가 과소평가될 이유는 아니었다.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한들, 이 대해 같은 마나를 수용하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통로의 역할을 담당 중인 카이나는 연신 고통에 찬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 이런 제기랄! 어쩌다 이딴 녀석을 만나서는!
카이나가 한탄이 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대한 마나가 길을 건너는 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다.
후우, 후우.
에단의 호흡이 이전보다 훨씬 평온해졌고, 일정해졌다. 에단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얼굴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지만, 조금 전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된 상태였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이를 부서져라 악물고 있는 헨리가 보였다.
한 발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르니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 엘프임에도 그녀는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외지인들에게만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이 느껴졌다.
가녀린 헨리의 모습을 한 차례 지켜본 르니엘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저, 저도 도움을 주겠습니다!"
르니엘이 무턱대고 성검에 손을 뻗었다.
'저런 미친!'
에단이 소리치려 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상태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덥썩.
르니엘이 헨리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반발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에단이 한숨을 돌렸다.
'이 기운을 수용하고 있어서인가?'
대해와도 같은 마나의 통로를 자청하고 있는 지금, 섣부르게 반발력을 일으켰다간 성검조차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런 줏대 없는....'
하지만 도리어 상황은 나아졌다.
비록 헨리에 비해서는 뒤질 수 있어도, 엘프 중 누구보다 세계수와 친화력이 높은 이가 바로 하이엘프인 르니엘이었다.
르니엘 또한 에단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수용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헨리의 낯빛이 한결 나아졌다.
스스스스―
파도가 치며 마나가 넘어간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던 마나도 어느새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들었다.
에단은 지금 가늠하고 있었다.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본인의 몸을 관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순간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에단이 통로를 막으며 성검을 붙잡고 있던 왼손을 당겼다.
툭―
에단이 성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하아."
에단이 엎드린 채 호흡을 골랐다. 통로를 막자, 나가떨어지기는 헨리와 르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갑자기 얻은 방대한 마나를 제어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눈을 감은 헨리는 자신의 내면이 보였다. 그제야 헨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인간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의문이 해소되었다. 숲에 들어서고 나서 느낀 이질감과 세계수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를 봤을 때 느껴지던 묘한 동질감.
잊었던 본분이 보였다. 몸을 가득 채운 마나는 헨리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헨리가 눈을 떴다. 마나의 컨트롤은 숨을 쉬는 것처럼 할 수 있었다. 마나의 형질은 달라졌지만 결국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같았다.
손을 뻗자 그녀의 손에서 작은 묘목이 생겨났다.
새싹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작은 나무 한 그루였다. 천천히 땅을 파기 시작한 헨리는 그곳에 나무를 심었다.
'이건 세계수일까?'
헨리가 본인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정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제대로 자라게 된다면 분명 숲과 대륙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걸.
'당장은 문제가 없겠네.'
헨리의 갈색 눈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맑은 눈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이 르니엘과 에단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포함한 이 셋이 지금 마나의 순환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육체 자체가 세계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인간은 유한한 삶을 가졌다.
인간에 비해서는 오랜 기간을 살아가는 엘프도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관조하는 세계수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헨리는 쓸쓸한 표정으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봤다.
'너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세계수는 원래 인격을 지니지 않는다. 헨리를 만들어 낸 인격조차 결국에는 어떠한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던 그것은 그녀의 여동생이자, 남동생이었으며, 그녀의 부모였다.
'아는 게 많지가 않네.'
헨리가 에단을 바라봤다.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바뀌는 것은 크게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헨리였다.
에단이 말해 준 사실이다. 원래라면 자신은 세계수가 회복되며 자연히 소멸할 존재였다. 하지만 에단은 헨리를 그런 존재로 놔두지 않았다.
에단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 맴돌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자를 만나는 기분은 특별했다.
'정말 괴물이었네.'
헨리는 이제 에단이 얼마나 괴물인지를 알게 되었다.
넘쳐 나는 마나를 자신과 르니엘에게 나눠 줬지만, 이 둘의 마나를 합친 것보다 에단이 지닌 마나의 양이 더욱 컸다.
헨리는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정도였으니까.
헨리가 에단을 바라봤다. 바닥을 짚고 있던 에단이 숨을 한 번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후,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에단이 혀를 내두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이내 특유의 웃음을 머금은 채 헨리를 바라봤다.
"이제 좀 정신 좀 차렸냐?"
에단의 가벼운 언행에 헨리도 작게 미소 지었다.
"네.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요."
에단의 시선이 이번에는 헨리의 옆에 있는 르니엘에게 돌아갔다. 르니엘은 아직도 낑낑거리고 있었다.
"...쟤는 언제 괜찮아지냐?"
"잠시만요."
헨리가 르니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르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헨리의 손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호오."
에단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헨리는 어떻게 보면 르니엘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인도에 르니엘의 가파른 호흡이 일정해지고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니엘이 눈을 떴다.
"...용사님?"
"아직도 그 소리냐?"
에단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성검을 들었다.
― ...이런 빌어먹을 새끼.
성검을 쥐자마자 카이나의 신랄한 욕설이 에단을 반겼다. 에단은 킥킥 웃으며 답했다.
'결국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 내가 뒈지는 줄 알았거든? 야, 페온. 이 새끼 원래 제정신이 아닌 거야, 아니면 최근 들어 미친 거야?
― 원래 제정신이 아닌 쪽에 가깝지. 그걸 지금 느끼다니. 카이나, 너는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건가?
― 이런 ㅆ....
카이나가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하자, 에단은 귀를 닫았다.
'어떻게 일을 해결하긴 했군.'
시간을 지체한 탓에 생각보다 일이 어려웠다.
'그래도 남은 일이 많아.'
안심하기는 일렀다. 가장 먼저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데 걸릴 시간을 생각한다면 벌써 늦었다.
레벨린과 교장이 도주하며 생긴 공백은 에밀라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것은.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을 뵙겠군.'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방문한다.
◈ [129화] 복귀 (1)
르니엘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르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소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이건."
처음 겪은 막강한 기운이었다. 생명의 나무가 멀쩡했을 때도, 이런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기운은 겪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멀뚱멀뚱 앞을 바라봤다. 에단과 그 옆에 서 있는 헨리가 보였다.
"...용사 님?"
르니엘이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단의 뺨이 움찔거렸다. 에단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대응했다.
"내가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에단이 생각하기에 용사라는 단어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에단이 살벌하게 눈을 부릅뜨자, 찔끔한 르니엘이 고개를 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 아직 통성명을 하지 못했네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헨리가 르니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르니엘이 시선을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헨리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친숙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르니엘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의도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헨리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르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며 천천히 일어서는 르니엘의 눈꺼풀이 떨렸다. 투명한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제가 무슨...."
"저걸 봐 주시겠어요?"
헨리가 고개를 돌려 나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어린나무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시선이 그 나무를 향했다.
"...저건."
르니엘의 눈이 한 번 더 거칠게 떨렸다. 저 가녀린 나무가 어떤 존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한평생 같이 살아왔던 존재였으니까.
헨리가 르니엘의 손을 놓았다. 르니엘이 천천히 다가가 어린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와아...."
르니엘은 어린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 하냐?"
에단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둘을 바라보자, 헨리가 민망한 듯 웃었다.
"너무 분위기를 깨시는 거 아닌가요?"
"뭐, 나도 사람인지라 협조를 해 주고 싶기는 한데."
에단이 손목을 두드렸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 * *
가토와 네이드가 거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일전에 조우했던 마수에 비하면 이번에 등장한 몬스터는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머릿수만 많을 뿐 단순한 몬스터에 불과했다. 가토의 시선을 따라 다리가 움직였고, 검이 그에 맞춰 춤을 췄다. 무수한 실선이 그어지며 선혈이 솟구쳤다.
네이드는 힐긋 가토를 바라봤다.
'엄청난 성장이군.'
이 정도까지 가파른 성장을 할 줄은 몰랐다. 가토의 재능과 노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언정 이 정도 속도의 성장은 이해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열 번의 훈련보다 한 번의 실전이라, 그건가.'
네이드가 상체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네이드의 발이 몬스터의 발을 걸었다. 몬스터의 상체가 붕 뜨자, 네이드가 단검을 내리그었다.
푸슛―!
순식간에 급소를 가격당한 몬스터가 목을 틀어막았지만, 성큼 다가온 죽음을 막아설 수 없었다. 피거품을 무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동공이 생기를 잃었다.
네이드가 다시 가토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네이드는 가토를 주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토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파밧!
가토가 몬스터의 하단을 걷어찼다. 공중에 뜬 몬스터의 목을 단칼에 베어 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큭큭.'
네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에단과 휴고, 그리고 가토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들밖에 없었다.
'늙은 나이에 설렘을 느끼게 해 주는군.'
그때부터 둘은 지칠 줄을 모르고 싸워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털썩.
몬스터들이 자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진 몬스터들은 바닥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끝난 건가?"
네이드가 중얼거리자 가토가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토의 숨은 아직 거칠었다. 그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에단은 일을 이미 끝냈을 것 같았다.
가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가토의 옷은 엉망인 상태였다.
가토가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는 여전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옷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뽀송뽀송한 네이드의 의복에는 피 한 점 묻지 않았다.
"...."
가토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직 멀었네요."
"욕심이 과하십니다."
"그런가요?"
네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가토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면 휴고 녀석 혼 좀 내야겠어요. 저희만 이렇게 고생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가토가 볼멘소리를 내자, 네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소리인 것 같군요."
그 순간, 기척을 느낀 네이드와 가토가 고개를 들었다. 몬스터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도련님."
"어, 고생했어."
에단이 덤덤하게 손을 들어 네이드를 향해 말했다. 순간 에단의 시선이 가토를 향했다. 에단이 미간을 좁힐 정도로 가토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얘는 상태가 왜 이렇게 거지꼴이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셔."
에단이 손을 건네 가토를 일으키려 하다가 손을 뺐다. 에단의 행동에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네 손이 조금 더러운 것 같아서. 찝찝하잖아."
"...."
가토가 서운함과 서러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피식 웃더니 재차 왼손을 뻗었다.
"농담이야, 인마. 표정 한번 가관이네."
"...저 울 뻔했습니다."
"명색이 내 기사라는 놈이 아무 데서나 눈물을 흘려서야 쓰나."
에단이 가토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가토가 엉덩이를 털어 냈다.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뭐 얼추 해결됐다고 봐야지."
가토가 고개를 돌려 헨리와 르니엘을 바라봤다. 가토는 단번에 헨리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점을 눈치챘다.
이전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 벽이 쳐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벽에서 느껴지는 것은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은은한 위압감에 가까웠다.
네이드가 헨리와 에단, 르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모두 달라졌군.'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올린 네이드는 알 수 있었다. 저 셋은 같은 기운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중 에단은... 독보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방금까지 가토의 성장세도 엄청나다고 여겼지만, 등장만으로도 가토의 존재감이 옅어질 정도로 에단은 또다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나타났다.
'부작용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성장 방식으로 힘을 얻은 게 아닌 탓에 완벽하진 않았다. 마스터로서 갖춰야 하는 것은 마나가 전부가 아니니까.
'차차 나아질 문제지.'
에단은 분명 머지않아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네이드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에단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벨트라인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성검이 꽤나 불편했다.
'아버지를 뵈는 김에 검집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는데.'
에단이 네이드와 가토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
* * *
휴고는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의 안정만 취하면 머지않아 눈을 뜰 터였다.
툰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숲의 풍경이 보였다.
"르니엘."
툰나가 르니엘의 이름을 되뇌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툰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툰나의 시선이 다시금 휴고에게로 돌아갔다. 툰나는 휴고의 외향이 뒤바뀌는 과정을 직접 봤었다. 오랜만이기는 했으나, 낯설지는 않았다.
'수인족.'
과거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종족이었다. 대부분의 수인족은 엘프처럼 숲이나 산에 터를 잡고 있었지만, 그들은 엘프와 달리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우월한 신체 능력과 타고난 전투 본능은 수인족을 뛰어난 전사로 만들어 줬다. 숫자로는 인간에게 밀렸지만, 압도적인 전투 능력으로 인간의 군대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결국 패한 것은 수인족이지만.'
어떠한 일을 계기로 수인족은 패배하고 말았고, 다시 뿔뿔이 흩어진 수인족들은 자취를 감췄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휴고가 평범한 늑대족이 아니라는 것은 털의 색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은빛 털은 선택받은 늑대족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툰나가 생각에 잠긴 채 휴고를 바라보고 있을 때, 숲 너머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긴 시간을 숲과 마을에서 살아온 툰나는 비록 나이를 먹었지만, 다가오는 자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툰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기운을 느꼈다. 포근함과 충만한 기운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툰나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성공했군요."
* * *
툭툭.
가토가 휴고의 턱을 건드렸다. 자기들은 이렇게 개처럼 구르고 있는데,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눈꼴시었다.
에단은 그런 가토에게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툰나를 바라봤다.
"일은 대충 해결된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툰나는 떨리는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는 이 마을의 장로였다. 그 말인즉 가장 오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었고, 에단의 존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에단의 주위에 마나가 순환되고 있었다. 에단의 몸속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안정되어 있었다.
르니엘과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툰나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기연을 얻었구나."
르니엘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툰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시금 에단을 바라봤다.
"저희 마을은 당신을 영원한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에단이 헨리를 향해 힐긋 시선을 던졌다. 에단의 의중을 눈치챈 헨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생명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녀가 툰나와 르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헨리의 말에 툰나와 르니엘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결단코 지켜 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에단이 둘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휴고에게로 다가갔다. 가토가 다가오는 에단을 보며 자리를 피했다. 에단이 휴고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간질간질.
에단이 휴고의 턱을 간질였다. 마치 강아지를 대하는 손짓이었다.
부르르.
휴고가 미세하게 몸을 떨더니 이내 몸을 비틀었다. 가토는 눈을 끔뻑이며 멍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개야?'
◈ [130화] 복귀 (2)
모든 일이 정리되자, 엘프의 숲에서 에단의 평판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염된 숲을 정화하고, 비록 아직 어린나무이기는 하나 세계수를 완전히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거대한 거목이자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었던 세계수가 없어진 상태다 보니 완전한 대체가 가능할지 걱정하는 엘프들도 있었지만, 르니엘과 툰나의 보증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당장은 에단과 헨리, 르니엘의 힘이 세계수를 대체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결국에는 세계수가 필요했다.
'애초에 세계수 자체도 의심스러운 존재였군.'
고작해야 일개 나무 하나가 마나를 순환시킨다.
마나라는 것은 무엇이고, 순환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하'와 '사자(死者)'에게서 나오는 죽은 마나는 무엇이 다른가.
어쨌든 에단은 결국 두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박 수였으며,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은 설정이었다. 본인의 감을 믿은 것이다.
'뭐, 같은 나무니까.'
덕분에 에단의 내면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안정된 상태였다. 불안정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페온과 카이나.
그 둘도 아직 모든 걸 말해 주지는 않았다. 둘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지금 추궁하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밝혀내야 할 사실이다.
'짜증이 나는군.'
이런 복잡한 일은 본래 자신이 담당했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해결할 일을 덤터기 쓰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에단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가토를 바라봤다.
"휴고 깨워."
"넵, 알겠습니다."
가토가 휴고를 향해 다가갔다. 휴고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콧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가토의 얼굴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가토가 휴고의 턱을 긁었다. 휴고가 몸을 배배 꼬았다.
"...너 뭐 하냐?"
"...죄송합니다."
에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토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깨워야지. 휴고야, 밥 먹자."
번뜩.
휴고의 눈이 번뜩였다. 휴고가 잽싸게 몸을 일으킨 다음에 주변을 둘러봤다.
"바, 밥...? 어, 여긴...?"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풍경이었고, 익숙한 것이라고는 앞에 있는 에단과 가토뿐이었다.
웃음을 참는 가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반면 에단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큭큭큭, 많이 배고팠냐?"
"...."
휴고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야 여기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싶다만 시간이 없어. 움직이면서 보존식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건지...."
가토가 눈을 끔뻑이며 휴고를 바라봤다.
"너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그러게? 나 대체 뭐 하고 있었지?"
휴고도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억이 통으로 사라진 상황이니 이런 감상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휴고의 반응을 보던 가토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야."
"어?"
"멍, 해 봐."
"...뭐라고?"
휴고는 가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대뜸 짖어 보라고 하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까. '멍' 한번 해 보라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윽,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건 넌데."
"...?"
휴고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보자, 가토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애들 아니랄까 봐."
그때 에단에게 툰나가 다가왔다.
"너무 그러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분은...."
"네. 뭐 그래도 제 동료니까요."
에단의 반응에 툰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에단의 대답이 예상외였던 것이다.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제가 도움드릴 수 있는 것은 크게 없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에단은 툰나의 말을 소홀하게 듣지 않았다. 툰나는 긴 시간을 살아온 엘프였다. 그의 연륜과 지식은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에단이라도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부터는 더욱 북쪽으로 넘어가세요."
"여기서 북쪽이라면."
"그렇습니다. 좀 거북한 존재들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죠."
툰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거북하다고 말하는 대상은 신성 왕국임이 분명했다.
'아직은 좀 귀찮은 녀석들인데.'
신성 왕국은 일개 국가나 무력 집단이 아니었다. 대륙의 유일신이라는 어마어마한 명분을 등에 업은 폭군이었다.
적어도 에단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무력만 따진다면 밀리지 않겠지만.'
블란테의 무력은 신성 왕국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서워할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놈들도 처리해야 할 대상이니까.'
에단은 드레이를 책임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단은 지금껏 뱉은 말을 허투루 넘긴 적이 없었다.
"갑자기 신성 왕국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까?"
"왕국을 넘어, 설산을 향하게 되면 정답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툰나가 에단에게 작은 팔찌를 건넸다. 은색에 특별한 문양도 없어 보이는 팔찌였다. 에단은 거부하지 않고 팔찌를 받아 들었다.
"이것도 '증표'인가요?"
에단의 물음에 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용사님에게는 모르겠지만, 저 동료분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죠."
툰나가 휴고를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기회군.'
수인족에 대한 정보.
후일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정보였다. 원작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정보는 에단도 알 도리가 없는 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꼼꼼히 읽어 보는 건데 말이야.'
누가 킬링 타임용 웹소설을 탐독하듯 철저히 분석한단 말인가.
'다시 돌아가도 못 할 짓이지.'
에단이 팔찌를 품에 넣었다.
"좋은 선물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요.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 하는 거죠. 덕분에 숲이 다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툰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덩달아 르니엘도 툰나와 같이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단으로서는 정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거기다 세계수가 완전히 오염되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오히려 죽을 쑤게 되는 쪽은 에단 일행이었다.
적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꼴은 못 보지.'
다른 걸 떠나서 눈꼴시어 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됐지만, 엿을 먹이고 도망간 레벨린과 마크를 떠올리면 아직도 짜증이 치밀었다.
에단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면.'
수인족에 대해서도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이동해 보겠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잡아 뒀군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좋은 것도 얻게 되었고. 다만 부탁드릴 게 있다면...."
"네.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지켜 내겠습니다."
아직 세계수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어린나무는 주변의 비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툰나와 르니엘의 결의 가득한 눈빛을 보아하니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배신자는 잘 처리했습니까?"
에단이 지나가듯이 말하자, 툰나와 르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배신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는 건 좋지 않겠지.'
이 무리의 수장이자 실권자는 툰나였다. 여기서 툰나에게 과도한 간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르니엘이 몸을 작게 떨었다.
"알아서 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배신한 녀석인 데다가 입지도 잃어버렸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단은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이곳에서 직접 처리하기엔 걸리는 게 많아 주의로 끝냈다.
"명심하겠습니다."
르니엘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은 남지 않았다.
"일어나자."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말은 되찾았지만, 마차가 망가져 당장 운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게 나으려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에단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헨리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리가 마차에 손을 뻗자,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지면에서부터 나무뿌리가 올라와 마차를 감싸자, 실선이 그어지거나 파손된 부위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가토와 휴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에단도 감탄 어린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좀 쓸모가 생겼나요?"
헨리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하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밥값을 좀 하는군."
에단의 대답에 헨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저야 고맙군요."
네이드가 허리를 두드렸다. 제아무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며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마차 위에 올라탄 네이드를 본 헨리도 눈치를 힐끔 보더니 헤헤거리며 마차 위로 올라갔다.
"음, 그럼 나도 타야겠네. 불만 없지?"
에단까지 마차 위에 탑승하자,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가토가 휴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알지?"
"...잠깐만."
휴고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당연히 말들은 기겁을 하며 휴고의 손길을 피했다. 휴고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왜 나만...."
"그 이유를 아직도 몰라?"
"...뭔데?"
"멍, 해 보면 알려 줄게."
"아까부터 그게 무슨 소리야...."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차의 옆에서 떨어졌다. 마부석은 오늘도 가토의 차지가 되었다.
'...나 이걸로 기뻐해도 되는 걸까?'
가토는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지만, 금방 떨쳐 냈다. 가토 외에는 고삐를 들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오늘도 두 발로 여행길을 걷게 된 휴고보다는 입장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에단은 말없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바뀐 게 없군.'
휴고의 정체는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단지 묻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은 휴고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휴고는 휴고였고, 이전과 같은 동료일 뿐이었다.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도련님께서는 안목이 좋으시군요."
"갑자기 사탕발림이야?"
"그냥 그런 것 같아서 말해 봤습니다.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사탕 좀 드릴까요?"
네이드가 품속에서 작은 알사탕을 꺼냈다.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네이드를 바라봤다.
"이런 건 도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거야?"
"도련님이 좋아하셨으니까요."
"아, 그래."
할 말이 없어지자 에단이 알사탕을 받아 들었다. 얇은 껍질을 까고 입에 넣으니 달달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달긴 하네."
"입맛에 맞으십니까?"
"근데, 나는 홍삼 맛을 더 좋아해."
"...홍삼이요?"
"어."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그런 게 있어. 씁쓸하면서 맛있는 거."
와그작.
에단이 입에 넣은 사탕을 깨부수며 말했다.
◈ [131화] 격동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