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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 [86화] 오만의 대가 (4)

'에단 블란테라고?'

리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지금 에단이 내뱉은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일단 발뺌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황한 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리사의 생각일 뿐이었다.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누, 누가 더듬었다는 겁니까?"

당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리사의 모습에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 간만의 재회라서 감동이야?"

"그 인간 말종이랑 재회하는 데 무슨 감동을... 헉!"

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그녀의 말에 에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지금 인정했네?"

"하아...."

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표독스러운 눈초리가 꽂혔지만, 에단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빛이 불순하다?"

"그러면 지금 좋게 생겼어?"

리사의 말투가 평대로 바뀌었다.

"당신... 정말 에단 맞아?"

"오라비한테 말버릇이 왜 그래?"

"그쪽이 제대로 된 오빠 노릇을 했어야 대우를 해 주지."

리사가 한 걸음 다가가 에단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재수 없는 눈빛은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허...."

"그래서 잘난 블란테의 차남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뭐겠어. 건방진 여동생 얼굴 한번 보려고 왔지."

"개소리하지 말고."

"편지를 그딴 식으로 보냈으면서 이 정도도 예상 못 했어?"

"그러는 본인은 애초에... 하, 말을 말자."

에단이 팔장을 낀 채 벽에 몸을 기댔다. 삐딱한 에단의 자세에 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불만이야?"

"어."

"꼬우면 교수하든가. 아, 그럴 능력은 안 되나? 이미 한번 경험했지?"

"너...!"

리사가 으르렁거리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내가 원하던 반응이야. 마음에 드는군."

― 너랑 성격이 판박이구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페온의 말을 단호히 반박한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리사를 바라봤다.

"가문은 뭐 하러 숨기는 거지? 날파리들만 꼬이는 것 아닌가?"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

"왜 상관할 바가 아니지? 네 오빠인데."

리사가 경멸의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제 와서 무슨 오빠 노릇이야? 네가 한 짓은 기억하지도 못하나 보지?"

'대체 뭔 짓거리를 한 거야, 이 새끼는.'

에단의 기억은 단편적이었다.

그렇기에 과거에 에단이 어떤 짓들을 저지른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오빠 노릇을 하려는 건 아니고,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입장?"

"너 따라다니는 녀석. 걔가 일을 하나 저질렀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설마 율리를 말하는 거야? 걔가 그럴 애는 아닌데."

"걔는 아니고, 로만이라고 너보다 먼저 나한테 깨졌던 녀석."

"로만? 그 새끼가 대체 뭘?"

"글쎄다. 궁금해?"

에단이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사의 이마가 다시 찌푸려졌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야?"

"조금?"

"너...!"

"뭐, 그러면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걔가 벌인 일의 수위가 꽤 높아. 가문을 건드렸거든."

에단이 내뱉은 말에 리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블란테를 건드렸다고?

블란테가 거론된 순간 상황이 달라진다. 가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리사의 일상은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자세히 설명해 줘."

"그때 일로 나한테 앙금이 남아 있었나 보더라고. 뭐 나를 건드린 거면 관대하게 넘어가 줄 생각이 있었는데, 하필 선을 넘어 버렸네?"

"설마...."

"의뢰 내용은 내 주변 인물의 암살, 납치였어. 직계 가족을 포함한 전부."

"미친... 그걸 말이라고."

"너도 알고 있겠지? 가문에서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

리사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먼저 건드렸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의 가문이었다.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도 너한테는 한 가지 희소식이 있어."

"...희소식?"

에단의 말에 리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리사는 간절했다.

힘만을 추구하는 가문은 진저리가 나 떠나왔는데, 이제 와서 가문으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힘들게 얻어 낸 자유와 일상.

블란테가 개입한다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질 게 빤했다.

"으음.... 말을 해 줘야 하나?"

"...빠드득!"

"오우, 너 이빨 부서진 거 아니야?"

리사의 속은 타들어 갔지만 에단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리사의 눈빛을 바라보던 에단이 농담을 멈췄다.

"하나뿐인 여동생이니까 말해 주지. 아직 가문에서는 모르는 사실이야. 내가 말을 안 했거든."

"그렇다면...!"

"그런데 내가 보고를 안 할 이유가 있을까?"

리사는 에단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다.

"내 주변 인물이 습격을 받았어. 만일 나와 그들이 약했다면 모두 죽었겠지."

"...."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너랑 그 새끼들의 형편을 봐줘야 할 이유가 뭐지?"

"...부탁이야."

리사가 에단을 바라봤다. 리사의 눈은 진지했다. 가만히 리사를 응시하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좋아, 들어주지.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왜? 싫으면 지금이라도...."

"아니야! 말만 해! 시키는 건 다 할게!"

"일단 나랑 말을 먼저 맞추자고."

에단의 음흉한 미소에 리사는 몸을 떨었다.

* * *

"허억, 허억.... 나 죽어...."

연무장에는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단의 체력테스트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시업을 시작으로, 스쿼트, 윗몸일으키기, 턱걸이.

부위별로 시행된 성적 나누기에 학생들은 승부욕을 느꼈다.

'내가 저 녀석보다는!'

'죽더라도 쟤는 이긴다!'

물론 기사가 목표인 무투파와 마법이나 학자가 목표인 지식파는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애초에 가는 길과 목표가 달랐으니까.

하지만 같은 계열의 학생들은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무투파는 무투파끼리, 지식파는 지식파끼리.

혈기왕성한 나이대 학생들의 승부욕은 무시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리사 쟤는 괴물 아니야?"

리사의 기록은 압도적이었다.

남녀 학생을 통틀어 가장 높은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표정 보여? 완전 독기를 품었는데?"

"그러게.... 교수님한테 불려 가서 무슨 소리 듣기라도 했나?"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 들을 게 있어?"

"그건 그래...."

2위인 반장 드레이와 큰 격차를 벌리고 있는 리사는 뛰어난 기록으로 다른 학생들의 의욕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리사는 엄청난 속도로 턱걸이를 진행하면서 힐긋 다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선이 향한 장소는 바로 로만이 있는 곳, 로만과 리사의 시선이 교차했다.

로만을 바라보는 리사의 눈빛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로만이 이를 악문 채 운동에 집중했지만, 리사를 좇기는 무리였다.

속도를 올리던 로만은 결국 체력의 한계를 맞이해 퍼졌고, 리사는 이번에도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여기까지."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적으로 이렇게 고된 수업은 처음 겪었다.

학생들이 단내 나는 숨을 헐떡였다. 연무장은 땀과 열기로 가득했다.

"그럼 이제 성적을 발표하지. 1등은 리사. 그 뒤로 드레이...."

에단이 순서대로 호명하자, 학생들의 희비가 갈렸다.

경쟁심을 느끼던 이를 이긴 학생은 기뻐했고, 패배한 자는 분함을 느꼈다.

로만의 성적은 무투파 기준, 하위에 자리매김해 있었다. 리사는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삭였다.

"모두 수고했다. 역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도록. 이건 수업을 위해 진행한 테스트였으니까 말이야. 내 수업을 잘 따라온다면 기록은 무조건 오르게 될 테니까."

"...그 말이 정말인가요?"

열의에 타오르는 한 학생의 질문에 에단이 씨익 웃었다.

"다음 수업은 점진적 과부하다. 기대해도 좋아. 다들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에단이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나서며 두 번째 수업이 완전히 끝났다.

"하아, 죽을 거 같아...."

"...난 아직도 뭘 배운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뭔가 할 만하지 않아?"

"너 변태야?"

"그건 아닌데.... 뭔가 쟤한테는 지기 싫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대련할 때처럼."

"그건 그렇지...."

"다음 수업도 이런 식은 아니겠지?"

"또 이런 수업이면 난 진짜 죽어...."

학생들의 평가는 갈리는 편이었다. 물론 에단은 그들의 평판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 * *

기숙사에서 몸을 씻은 에단은 방에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리사가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원래는 그냥 다 뒤집어엎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저도 좀 골치가 아플 것 같더라고요."

―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저도 그냥 넘어갈 만큼 너그럽지는 못해서요."

― 확실히 네가 너그러운 성격은 아니지.

"...뭐, 그래서 조금 고민을 했죠. 상대에게 엿을 먹이면서 이득은 취하고, 자리는 지킬 만한 방법을."

― 그런 게 있나?

"없을 건 뭡니까? 아버지는 생각보다 정이 많습니다. 그것도 하나뿐인 딸내미인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프지 않겠습니까?"

― 설마 여동생을 여기에 부른 것도....

"정답입니다."

― ...무서운 녀석.

"뭘 또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원래 가족이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단이 문을 열자, 앞에는 리사가 짜증 가득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여기까지 부른 거야?"

"꼬우면 뭐라고?"

"너 진짜...!"

"쉿."

에단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려고? 감당할 수 있겠어? 교수 방에 침입한 학생이라는 소문이 돌 텐데."

빠드득!

리사가 이를 갈며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하지 말까?"

"...아니, 할 거야."

"잘 생각했어."

에단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에단의 책상에는 수정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거야? 가문에는 통신 수정구가 없을 텐데?"

"동생아, 내가 미리 다 조치를 해 놨단다."

"...예전보다 재수가 더 없어진 거 같은데?"

"그만할까?"

"미안해."

리사가 에단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근데 나는 어디에 앉아?"

의자는 한 개였고, 그 의자는 에단이 사용하고 있었다.

에단은 리사의 말을 무시한 채 수정구에 마나를 주입했다. 통신 대상은 블란테로.

마나가 주입되며 수정구에서 빛이 맴돌았고, 이내 한 사람의 얼굴을 비쳤다.

'수정구를 통해 봐도 위엄 넘치네.'

늙은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빈센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 에단?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 접니다."

― 옆에는 누구지? 설마 리사인가?

"네, 아빠...."

리사의 말에 에단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에단이 멀뚱멀뚱 리사를 바라봤다.

"아빠?"

"...닥쳐."

◈ [87화] 오만의 대가 (5)

에단이 미묘한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봤지만, 리사는 애써 빈센트가 비치는 수정구만 노려보았다.

'원래 아빠라고 불렀나? 원작에서는 못 본 거 같은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알긴 아는구나. 교수 노릇은 할 만하더냐? 그리고 리사 너는, 가문에서 도망치더니 그곳은 좀 만족스럽고?

'이 아저씨 많이 서운하셨네.'

서운해하는 티를 팍팍 내는 빈센트의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이 썩 정감 있게 느껴졌다.

"교수 노릇도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교수란 사실을 알았을 때 리사의 표정은 정말 장관이더라고요."

에단의 말에 리사가 째려보는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수정구 너머에 있는 빈센트가 에단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 호오... 그렇단 말이냐? 대체 어떤 반응이었지?

"아빠, 이 망나니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진 거죠?"

― 그건 나도 의문이구나. 하지만 달라졌다고 해서 망나니가 아닌 것 같지는 않던데....

예상 못 한 빈센트의 반응에 이번에는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뭐라도 했습니까?"

"...."

― ....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하는 리사와 빈센트.

그리고 왠지 모르게 페온의 시선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크흠."

에단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제를 바꿨다.

"바쁘실 텐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시죠."

― 그래. 이유도 없이 연락할 녀석들은 아니지. 할 말이 뭐지?

"제가 아카데미의 교사로 부임하고 난 뒤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 ...사건? 내가 거기서 벌어진 사건까지 알아야 하나?

"그냥 들어 보시죠. 리사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 ....

"리사와 같은 반에 로만이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학장의 아들이죠. 그런데 로만 그 녀석이 리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 뭣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빈센트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에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 계속 말해 보거라!

"...뭐, 아무튼 그게 전부라면 상관없을 텐데, 리사한테 접근을 하더라고요."

― 뭣이?!

'뭐야, 이 아저씨.'

에단이 빈센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재차 말을 이어 나갔다.

"조금 진정하시고.... 그런데 리사 이 녀석이 평민인 줄 알고 자꾸 같잖은 짓을 하더라고요."

― 같잖은 짓이라고?

"학장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외적으로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은 교칙에 어긋나지만, 제 나름대로 세력을 만들었더라고요."

― ...그래서 그놈들이 뭘 한 거지?

"리사를 겁박하던데요?"

― 감히!

빈센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내질렀다. 수정구 너머였지만, 빈센트가 얼마나 격분했는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 이런 딸 바보 캐릭터였어?'

조금 깨는데....

에단이 리사를 바라봤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리사의 팔뚝을 에단이 툭툭 치며 속삭였다.

"뭐 해? 말 안 하고."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자리에 앉은 빈센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리사에게 물었다.

― 리사, 확실히 말하거라. 그 말이 사실이더냐?

"...응, 사실이야."

― 빠드드득!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들이 대체 무슨 겁박을 한 거지?

에단이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교수로서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 ...말해 봐라.

"원래라면 귀족의 권위로 찍어 누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리사가 그런 짓에 겁먹을 녀석입니까?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자, 놈들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 ...손?

"어쌔신을 고용해서 리사를 납치하려고 하더군요."

― ....

'뭐야? 이번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네?'

하지만 그 순간, 빈센트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갔다.

― 지금 기사단을 소집하겠다. 전면전을 준비해야겠군. 당장 가문으로 복귀하거라. 감히 블란테를 능멸한 자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아, 아빠! 잠깐만!"

― 더 들을 것도 없다!

"아버지, 리사 말대로 잠깐 얘기 좀 들어 보시죠."

― ....

"리사가 꿈에 그리던 생활입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가문으로 복귀를 할 텐데, 그걸 박탈하면 가엾잖습니까."

―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감히 블란테를 능멸한 놈들을 좌시하란 소리야?!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죠. 먼저 어쌔신들의 신상은 모두 파악해 놨습니다. 구체적인 보고는 네이드가 할 겁니다. 그 괘씸한 놈들은 씨를 말려 버리죠."

― ...좋다. 이번 기회에 그 쥐새끼들을 박멸시켜야겠군.

"학장이랑 그 아들놈은 저한테 맡겨 주시죠. 아버지께서는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시면 됩니다."

― 그게 무슨 말이지?

"'학장 직위를 내려놔라'라고 말이죠."

에단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 *

툭툭.

레벨린이 노트를 두들겼다. 슬슬 그분들을 만날 시간이 돌아오고 있었다.

'계획이 어그러졌어.'

그녀가 만든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헨리, 용병, 산적, 그리고 아카데미까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에단 블란테.'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이가 갈렸다.

에단만 아니었어도 벌써 많은 계획이 진전됐을 것이다.

'괜찮아. 세계수 쪽에서는 순탄히 진행되고 있으니까.'

아카데미와 블란테는 초석에 불과했다. 중심이 되는 것은 세계수.

'더 이상 미꾸라지가 설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곧 시기가 다가온다. 그분을 영접하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해야 했다.

레벨린이 보고서를 바라봤다. 에단을 처리할 계획이 머릿속에서 수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계획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만연한 계획들이다.

'망나니 녀석이....'

단숨에 처리하기에는 큰 먹잇감이다.

원래라면 천천히 놈의 목을 조여 가며 무너뜨릴 생각이었고, 용병들과 도적들은 그를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돌발 행동 때문에 그 계획도 어그러졌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할 수도 없었다.

블란테는 숨죽인 맹수.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더욱 큰 화를 맞이할 게 분명했다.

에단을 회유할 생각도 했었다. 과거의 에단은 다루기 쉬운 망아지에 불과했으니까.

에단같이 감정적이고 권위적인 상대는 원하는 먹잇감만 던져 준다면 충분히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때 꼭두각시로 만들어 뒀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의 에단은 완전히 달라졌다. 본신의 힘도, 정신력도.

지금의 에단에게는 목줄을 채울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레벨린이 끌려다니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불안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레벨린은 결국 혼자 판단하지 않고, 의견을 묻기로 결정했다.

서랍 안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아 빠진 목함을 꺼냈다.

레벨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레벨린만 사용하는 개인 집무실인 데다가 누군가의 방문 일정도 없었다.

원래라면 별도로 마련한 장소에서 진행해야 했으나, 마음속에 자리한 초조함이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

레벨린의 입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입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는 천천히 흘러 목함을 둘러쌌다.

목함이 삐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크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깊은 어둠이 올라왔다.

어둠은 조금씩 형체를 갖춰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 무슨 일이냐.

"존안을 뵙습니다."

― 시기가 이르구나.

"죄송합니다."

― 나무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 그만해라....

"아닙니다. 다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레벨린이 머리를 바싹 조아리며 저자세로 말했다.

연기로 이루어진 형상은 그 태도가 싫진 않은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 필히 이유가 있어서 나를 부른 거겠지.... 이유가 뭐지?

"다름이 아니라...."

레벨린은 진행되고 있는 계획과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검은 연기가 목소리를 내었다.

―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나 지금 상태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 한데 계획을 방해하는 애송이라... 지금 처리하는 게 좋겠느냐?

"그랬으면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 요컨대 표면상으로 드러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 그러면 내가 나서지.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 적당한 제물만 있다면 언제든지 현신할 수 있다. 꽤나 계획을 잘 진행했더군.

"감사합니다!"

―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니나, 인간 놈을 꼭두각시로 만들 정도로는 충분하지. 거기에 추가적인 제물이 있다면 원래 힘을 복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검은 연기가 내뱉는 말에 레벨린이 고민하다 말했다.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말해 보거라.

레벨린은 떠오른 계획을 설명했고, 검은 연기는 그 계획에 만족을 표했다.

― 그럼 준비를 해 두도록....

검은 연기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고, 뒤이어 목함도 자연스럽게 닫혔다.

'...됐어.'

골칫덩이를 제거할 때가 왔다.

* * *

"고생했다."

에단이 리사를 향해 말하자, 리사가 뾰족한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 맞아?"

"아니면 어쩌려고?"

"...하아, 부탁이야. 난 지금이 너무나 소중해.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진심 어린 리사의 부탁에 에단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리사를 바라봤다.

"...너, 남자 친구 있냐?"

"그게 무슨 소리야?!"

리사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하기야.... 그럴 일은 없지. 그 녀석도 없어졌는데...."

"그 녀석?"

"있어, 그런 게."

리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지만, 에단은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원래 너는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까.'

주인공이 감쪽같이 사라진 지금, 제대로 된 설명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놈이 처리해야 할 일을 내가 떠안았잖아.'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는데, 일이 귀찮아지고 말았다.

"야, 너 이제 돌아가."

"안 그래도 돌아갈 생각이었어. 누구한테 가라 마라...."

똑똑.

순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리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리사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당황하기는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누, 누구야?'

리사가 입 모양으로 에단에게 물었다. 하지만 에단도 리사와 다르지 않았다.

'나도 몰라.'

'아니, 네가 모르면....'

리사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금 이 현장이 발각당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것이 빤했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방에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얼굴 좀 보시죠."

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에단에게도, 리사에게도.

'에밀라? 에밀라가 무슨 일이지?'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나 떠올려 봤지만, 딱히 볼일은 없었다.

리사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매섭게 노려봤다.

'에밀라 교수님이 여길 왜 와?!'

벙긋거리며 격렬한 분노를 토해 내는 리사.

그 모습에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모르면....'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아?'

'아....'

리사가 입을 벌렸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 [88화] 오만의 대가 (6)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

페온은 유흥거리를 지켜보듯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 어찌할 거냐?

'글쎄요?'

딱히 별생각 없었다.

수틀리면 가족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만 아닌가. 설마 가족 사이를 스캔들로 의심할 리도 없을 테고.

'그건 그렇고, 쟤는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거지?'

딱히 찾아올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에밀라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오해 살 만한 그런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니까요."

에밀라의 말을 듣던 에단은 기가 찼다.

'그런 의도가 뭔데?'

도대체 무슨 의도가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리사가 에단을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문 연다?'

'자, 잠깐...!'

이 대치가 재밌긴 했지만, 지속해 가는 건 귀찮았다.

리사는 급하게 말리려 했지만, 에단의 손이 더 빨랐다. 결국 리사는 결단을 해야 했다.

휘릭!

리사가 침대 위에 올라가서 이불을 뒤집어썼고,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역시나 에밀라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에밀라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오해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수업에 관해서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니까요."

"수업? 너랑 내가 수업에 관해서 나눌 얘기가 있나?"

"비록 분야는 다르나 서로 교육 방침을 보완하여...."

"네가 생각해도 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건 알고 있지?"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에밀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진짜 수업 때문에...."

"네가 정말 내 수업을 참견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고 하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이미 네 윗사람과도 얘기가 끝난 일을 가지고 네가 뭔데 왈가왈부하고 있는 거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이 쏘아붙이자, 에밀라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에밀라를 바라봤다.

"한 번 더 묻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야? 그것도 남자가 사용하는 층에."

"...."

에밀라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저 머저리 같은 놈이....

하지만 에단은 페온의 말 따위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에밀라가 계속해서 우물쭈물하며 서 있자, 에단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가지?"

"...학생들한테 들은 게 있습니다."

"들은 거?"

수업이 지랄 맞다,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밀라가 말을 이었다.

"혹시... 리사 학생과 특별한 관계이신가요?"

"...뭐라고?"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밀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잔뜩 긴장한 표정의 에밀라를 바라봤다.

"평범한 관계는 아니지?"

피가 섞인 가족이니까.

에단이 대답한 직후, 에밀라의 고운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

순간적으로 에밀라의 몸이 휘청였지만, 에단은 비틀거리는 그녀를 말없이 지켜봤다.

"학생과 교수 간 불미스러운... 일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에밀라가 말을 중얼거리자, 리사가 이불을 집어 던졌다.

"더는 못 들어 주겠네!"

에밀라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리사에게로 옮겨졌다.

리사를 바라보던 에밀라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곧이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지금 기숙사에서 무슨 짓을...!"

에밀라가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에단이 에밀라를 붙잡았다.

에단의 돌발적인 행동에 에밀라도 당황하며 대응하려 하였지만, 수 싸움은 에단이 한 수 앞섰다.

에밀라의 다리를 걸어 중심을 흩트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안는가 싶더니, 에단의 다리가 뱀처럼 에밀라의 복부를 휘감았다.

처음 겪는 백 마운트 자세의 압박감에 에밀라의 입이 벌어졌다.

에밀라가 비명을 지를 것처럼 보이자, 에단의 팔이 그녀의 목을 타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리어 네이키드'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에밀라를 기절시킬 생각이 없던 에단은 그립을 완성시키지 않고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 * *

"그러니까 지금 하신 말씀이...."

에밀라가 리사와 블란테를 번갈아 보았다.

"...두 분이 가족 관계?"

에밀라가 그렇게 말하자, 리사가 혀를 찼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리사의 대답을 들은 에밀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까지 왜 관계를 숨긴 거죠?"

에단이 에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안 물어봤잖아?"

"...."

"그것도 있고, 애초에 둘 다 블란테인 것을 숨기고 있는데 뭣 하러 알려? 그리고 숨기는 거로 따지면 너도 새벽의 다...."

"새벽의?"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순간 에밀라가 에단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에단은 고개를 젖히고는 상체를 낮췄다. 그러고는 발바닥으로 에밀라의 골반을 밀고 그대로 스윕(넘기기)했다.

철푸덕.

바닥에 엎어진 에밀라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 ...박정한 놈.

'쟤가 뭘 할 줄 알고 당해 줍니까.'

이윽고 멍한 에밀라의 표정에 서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교수님, 괜찮으신가요?!"

리사가 화들짝 놀라며 에밀라에게 다가갔다. 이내 리사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당연히 철면피를 차고 있는 에단에게는 타격이 없었고, 결국 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라 교수님은 왜 이런 녀석을....'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자란 것 없는 아카데미의 꽃 에밀라와 모자란 것투성이인 파탄 난 인성의 에단.

그런데 입장은 정반대라니.

입맛이 쓰다 못해 떫었다. 누워 있는 에밀라를 앉힌 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할 얘기는 끝났지? 그럼 난 이제 돌아간다."

"그래, 들어가라."

"...경고한다. 에밀라 교수님 조심히 보내라."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봤다.

"여자 층은 바로 위거든? 근데 네가 나한테 경고할 짬이 되냐?"

"짬? 알 수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난 이제 진짜 갈 거야."

에단이 휘휘 손을 휘젓자, 미간을 좁힌 리사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에단이 리사를 흘겨보며 불러 세웠다.

"야."

"왜?"

"창문으로 뛰어내려."

"...뭐라고?"

"어차피 높지도 않잖아. 지금 나가면 백 프로 걸릴걸?"

"이 개자...."

"또 이런 오해받고 싶어?"

에단이 턱 끝으로 에밀라를 가리키자, 에밀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하아, 내 신세가 어쩌다...."

결국 리사는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창문에 발을 걸친 그녀는 에밀라를 힐긋 바라봤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교수님을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소리 없는 응원을 마친 리사가 그대로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런 리사를 에밀라가 말없이 바라봤다.

"왜, 옛날 생각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너도 처음엔 내 방에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그게 무... 그건 당신을...."

"아무튼 그게 그거지."

얼이 빠진 얼굴로 한참 동안 에단을 주시하던 에밀라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 봤자 소용없겠군요."

"자, 그럼 본론을 얘기하자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정말 수업 방침 때문이야? 그건 신경 꺼. 네 상사와 학장이랑도 얘기가 끝난 문제야. 아, 그리고 학장 직위도 이제 곧 끝물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에단에게 일련의 사건을 간략하게 들은 에밀라의 턱이 점점 벌어졌다.

"그런 멍청한...."

"너도 겁 없이 남의 침소에 들어왔잖아?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아주 상습범이야."

에단이 음흉한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떨었다.

에밀라의 반응을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에밀라가 큰 눈을 깜빡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한 표정이다.

"...너 원래 이렇게 멍청했냐?"

"그게 무슨 망발이시죠?"

에밀라가 쌍심지를 켜자,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설마 아직도 레벨린 그년을 믿고 따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에밀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벨린은 그녀에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믿고 의지할 존재 하나 없이 기계처럼 살아가던 그녀를 이끌어 준 존재가 바로 레벨린이다.

하지만 그 관계에 의심이 싹트자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레벨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게 무엇이었지?

에밀라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할 수준은 되었다.

"나는 선택권을 너한테 줬고, 선택은 네 몫이야. 나는 레벨린의 팔다리를 조금씩 끊어 먹고 있어. 이제 레벨린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도 곧 삼킬 수 있겠지."

"저는...."

"새벽의 달이라고 했나?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야. 너는 그냥 에밀라 교수님이 어울려. 학생들한테도 제법 진심인 것 같던데?"

"...."

에밀라의 메마른 감정은 학생들을 통해서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수업을 할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고,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에밀라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새벽의 달.

밝은 달의 재림이라는 위명에는 짙은 고독함이 서려 있었다.

에밀라는 뛰어났고, 강했으며, 혼자였다.

'...하지만 이자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언사와 행동.

망나니라는 오명을 쓰든 말든, 에단은 개의치 않았다.

'가문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에단은 가문이 아닌, 본인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에밀라는 스스로를 혐오했지만, 자신의 힘은 믿었다.

하나 변명의 여지 없이 에단에게 패배했다.

지금 싸우면 그때보단 승산이 높겠지만, 패배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실전이라면 에단의 변칙 공격을 쉬이 장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죠?"

툭 던진 에밀라의 질문에는 많은 의도가 섞여 있었다.

에단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강하냐고?'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질문이기도 했다.

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류태신은 수많은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죠? 훈련 비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엄청난 재능과 신체 조건을 가진 선수들이 쏟아지는 격투판에서, 류태신은 동양인이라는 불리한 신체 조건으로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 줬다.

'무적.'

말도 안 되는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분석하여 계획과 플랜을 짜게 되면 결국 약점은 드러나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류태신에게는 그런 약점조차 없었다.

언젠가 금메달리스트의 레슬러와 붙은 적이 있었다.

류태신은 그를 레슬링으로 바닥에 굴려 버리며 자신의 레슬링 실력을 증명했다.

블랙벨트의 주짓떼로들은 하위 포지션에서 류태신을 농락하려고 했다.

하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파운딩과 순간적인 서브미션 캐치 능력은 블랙벨트의 주짓떼로도 압도했다.

'무적의 투신.'

류태신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그렇기에 지금 에밀라가 한 것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았다.

'아마 모두 같은 대답을 했지?'

그때 류태신은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에밀라가 진지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고,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존나 쎘어."

류태신이, 아니, 에단이 웃었다.

◈ [89화] 오만의 대가 (7)

허탈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대답.

하지만 그렇기에 에밀라는 오히려 후련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만약 노력을 들먹이거나, 의지력을 말했다면 더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한 대답.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납득은 하였다.

"...그렇군요."

허탈한 듯 보이면서도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에밀라가 웃자,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네."

에단이 에밀라를 내려다봤다.

에밀라의 표정은 이전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넌 어디에 붙을 거지?"

그녀의 대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의외네? 주인님처럼 따르던 레벨린을 택할 줄 알았는데."

원작에서는 그만큼 그녀의 고뇌가 깊었고, 선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에밀라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에단을 쏘아봤다.

"지금 비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왜 날 믿고 택했지? 이번에는 속는 걸 수도 있잖아?"

에단의 물음에 가만히 생각하던 에밀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더럽게 세니까요.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었나요?"

에밀라의 대답에 에단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 충분해."

그녀가 한 말을 통틀어 봐도 가장 시원한 답변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에단은 곧바로 레벨린의 개인 업무실을 찾아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연 에단은 휘파람을 불며 건들건들 레벨린에게 다가갔다.

"전부터 느꼈는데 말이야. 학장도 아닌 주제에 개인 업무실은 과분한 거 아니야?"

레벨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뜸 찾아와서 트집을 잡는 겁니까?"

"대뜸은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지."

"할 말? 무엇이죠?"

레벨린의 물음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동료 교사가 나를 시해하려고 하더라고."

"...설마 크러쉬 말씀인가요?"

"오, 알고 있나 보네?"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으니까요. 어찌, 파면하면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쉽게 대답이 나왔네? 너무 인정머리가 없는 거 아니야?"

"그걸 원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 아닙니까?"

"사실 크러쉬는 별로 상관없어. 주범은 따로 있거든."

"주범? 설마...."

레벨린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왜, 누구 같은데?"

"아닐 겁니다."

"걔 소문은 안 들렸어? 갑질이 심하던데."

빠득.

레벨린은 이를 갈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죠?"

"일단 학장 불러. 즐거운 삼자대면을 시작하자고."

* * *

갑작스러운 레벨린의 호출에 학장 마크는 투덜거리며 레벨린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내가 상급자 아닌가? 이렇게 마음대로 불러도 되는 거야?'

불만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레벨린에게 따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마크는 주제를 아는 자였고, 그렇기에 지금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대부분의 전달 사항은 대리인이나 수정구를 통해 전달했다. 레벨린이 직접 호출하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다.

마크가 부랴부랴 레벨린의 업무실에 도착했다.

"크흠."

업무실 앞에 선 마크가 헛기침과 함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마크가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있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똑똑.

"마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셔도 됩니다."

레벨린의 대답과 함께 마크가 문고리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곳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에단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마크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쟤가 왜 여기에 있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마크를 향해 에단이 손짓했다.

"뭐 해? 일로 오지 않고."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크는 주제를 알고 있는 소시민이었다.

눈치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바로 마크였다.

마크가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마크의 얼굴은 불안감에 물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맴돌았다. 마크는 이 정적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다지 좋지 않은 기류가 느껴졌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책망받고 있다는 건 알아차렸다.

하지만 원인이 짚이지 않았다. 마크가 눈알을 굴리다가 레벨린을 힐긋 바라봤다.

'제기랄.'

마주친 레벨린의 시선이 싸늘했다. 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여기에 부르신 이유가 혹시?"

마크가 입을 열자, 에단이 얼씨구나 하고 마크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이봐, 학장."

"...네, 에단 씨."

"학장은 잘못 없어. 그런데 그런 말이 있더라고."

"무슨 말 말입니까...?"

"자식의 죄는 부모가 짊어진다고."

"...설마."

"당신 아들이 상큼한 짓을 벌였더라고."

마크는 순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충격이 가득한 얼굴의 마크는 떨리는 입을 벌리며 물었다.

"호, 혹시 제 아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궁금해?"

"...무엇인지는 모르나 제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들놈도 훈계하겠습니다."

"...."

에단이 마크를 바라봤다.

떨리는 동공으로 에단의 눈을 마주 보던 마크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에단이 레벨린을 바라봤다. 레벨린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다 말한다?"

"제 잘못은 아니니까요."

"하, 여기서 이렇게 꼬리를 자른다고? 좋아."

"...대체 제 아들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당신 아들이 블란테를 적으로 돌렸어."

마크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나중에는 턱이 빠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체 로만이 왜...?"

"좀 귀여운 짓을 벌였더라고. 나름대로 괜찮은 어쌔신들을 구했던데?"

"어, 어쌔신?"

"어. 의뢰 대상도 참 넓어. 내 주변 사람들을 납치, 감금, 살해. 아, 내 주변이 누구겠어? 다 가문 사람들이지."

에단의 말을 들은 마크가 크게 휘청했다.

우당탕.

의자가 엎어지고 마크가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자, 잘 몰라서 그랬을 겁니다. 부디 목숨만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마크를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목숨을 구걸해? 누가 죽인대?"

에단의 말에 마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 말은...."

"나는 너한테 손 안 댈 거야. 귀찮게 뭐 하러 그래? 가문의 기사단이 몰려올 텐데. 블란테를 모욕하고 겁박한 책임을 물으러."

"아아...."

마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끝났다.

돌이킬 수가 없다. 이번에 아들이 저지른 실수는 무마할 수가 없을 정도로 컸다.

'미리 언질을 했어야 했어.'

아들의 심성이 착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별달리 훈계하지 않았다. 귀족의 세계에서 착하고 유악한 심성은 약점을 잡히기 좋았다.

오히려 적당히 이기적이고 오만한 성정은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이라고 생각했다.

'이 머저리 같은 녀석이....'

하지만 이번에는 그 표적이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어 버렸다.

사슴이나 잡으라고 쥐여 준 활로 사자 무리를 겨눴다.

돌이키기에는 늦어 버렸다. 명분은 상대에게 있고, 곧 블란테의 정규 기사단이 마크와 로만의 죄를 묻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블란테는 원한을 잊지 않을 테니까.

마크 같은 평범한 귀족 가문은 대응할 수조차 없었다.

마크가 레벨린을 바라봤지만, 그녀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레벨린은 마크라는 장기 말을 망설임 없이 도려냈다.

'나는 버려졌구나.'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이 치솟았다.

지금껏 충실한 개가 되어 보여 준 충성심은 의미를 잃었다.

마크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에게 물었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물음이었다.

"누가 너를 잡아먹는대?"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들어 봐. 아직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게 무슨...."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너를 여기로 부르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 말이 사실이었다.

에단이 가문에 말을 전했다면 벌써 기사단이 출발했을 테고, 그랬다면 귀찮게 마크를 호출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마크의 눈에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던 레벨린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그렇다면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좋아, 살고 싶나 보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놈의 퇴학을 원하시면 지금 바로...."

"아니, 아니, 그 녀석은 퇴학시키지 않아도 돼. 걔가 뭘 알겠어."

마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방금도 말했잖아? 책임은 아버지가 져야 한다고. 그러니 학장직 내려놓자."

"...!"

방금 에단이 내뱉은 말에 마크는 순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 그게 무슨...."

"나도 가문 측에 뭔가 할 말이 필요할 거 아니야.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 가문에서는 분명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

"하, 하지만...."

방금 뭐든지 하겠다고 말한 마크였으나,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장이라는 자리는 마크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크의 가문은 보잘것없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마크는 빠르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마크가 레벨린을 바라봤지만, 레벨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저 사람도 이 제안은 예상하지 못했구나.'

명목상 학장의 직위는 마크가 맡고 있었지만, 마크는 레벨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크가 학장직을 내려놓고 블란테 측의 사람이 학장의 직위를 수행한다면, 레벨린의 팔다리는 모두 잘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블란테가 레벨린 따위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 사람도 당황이라는 것을 하는구나.'

늘 사람 머리 위에서 남을 조종하는 데 도가 튼 이가 바로 레벨린이었다.

레벨린의 뒤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던 마크로서는 그녀를 전능하다고까지 여겼다.

마크에게 있어 레벨린의 당황하는 모습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결단을 할 수 있었다.

마크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레벨린의 눈이 마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조금 기다리세요.'

싫습니다.

당신이 저를 먼저 버리지 않았습니까?

마크가 레벨린에게 충의를 보여 줄 이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크의 입이 열렸다.

"학장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마크!"

레벨린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단은 레벨린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저와 아들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것뿐일까. 학장직에서는 물러나도 일선에서는 일할 수 있을 게 해 줄게."

부학장이니 뭐니 많잖아?

시킬 거 하나쯤은 있겠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에단이 고개를 숙여 마크의 귀에 속삭였다.

"어, 그게 쟤를 엿 먹이기 수월할 것 같거든."

레벨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90화] 오만의 대가 (8)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건가.'

능구렁이 같은 녀석.

빠득.

레벨린은 업무실에 홀로 앉아 이를 갈았다.

이건 협상이 아닌 통보였다. 그것도 일방적인 통보 조치.

'나를 고립시키려고 하는군.'

이전부터 느껴졌다. 명백한 적의와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머저리일 터.

어째서인지 에단은 레벨린을 적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에단은 의도적으로 레벨린의 팔다리를 자르고 있었다.

'시작은 에밀라부터.'

에밀라를 에단에게 보낸 이후부터 그녀의 태도가 달라졌다.

'암시가 풀린 건가? 어째서?'

레벨린이 에밀라에게 건 암시는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레벨린을 이 위치까지 올려 주었다.

'죽은 마나.'

하사받은 힘과 권능, 레벨린은 이 힘들로 수많은 것들을 일궈 냈다.

그 암시도 같은 맥락이었다. 씌워 둔 검은 마나, 큰 계기가 없다면 풀릴 이유가 없는 세뇌였다.

'헨리도 그렇고....'

헨리는 다루기 쉬운 직원이었다.

처음부터 헨리가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유인했다.

예상대로 헨리는 레벨린의 손 위에서 춤을 췄고, 헨리의 의지는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헨리는 심증뿐이니까. 하지만....'

헨리의 정체가 과연 레벨린이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수의 시험에도 별다른 반응이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계획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헨리가 특별한 존재가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절대적으로 필요하진 않았다.

'뿌려 둔 도적들도 자취를 감췄고.'

심지어 아카데미까지 노리고 있었다.

'대체 나를 적대하는 이유가 뭐지?'

과도하고 노골적인 적대.

레벨린의 기억상 에단에게 원한을 살 만한 기억은 없었다.

'이 전의 조우에서는 오히려 우호적이었지.'

블란테의 망나니로서 모두에게 외면을 받을 때, 레벨린은 오히려 에단에게 호감을 샀다.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을 텐데.'

욕망에 충실하고 단순한 인간이었다.

물욕이 강하고, 여자를 탐하며, 권력을 원하고, 대우받기 좋아하는.

정말 추악한 인간이었다. 레벨린은 추악하고 욕심 많은 인간을 좋아했다.

'단순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에단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속을 알지 못했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을 적대한다는 사실 하나.

심지어 그 적대를 숨기지 않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수정구를 통한 대면에서부터 드러낸 강한 적의.

'...상관없어.'

아카데미를 빼앗겨?

다시 찾아오면 그만이다.

계획이 진행되면서 그분이 생각보다 일찍 나오게 됐다.

'제물은 충분해.'

명분만 만들면 그만이다. 때마침 시기도 적절하다.

적당한 던전이 발견된 것이다. 그분이 나선다면 던전을 종속시키는 것은 단순한 일이었다.

'...녀석들도 같이 처리하면 되겠군.'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하지 않았다.

* * *

"아무나 들어오도록."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낮은 저음의 목소리.

밖에 있던 수행인 하나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첸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첸 단장님은 지금 훈련 중에 있습니다."

"지금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해 낸 수행인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빈센트는 첸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같은 검을 수행하는 기사로서 수련 시간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훈련을 중단시키면서까지 명한 호출이다. 필시 무슨 일이 벌어졌을 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수행인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첸이 찾아왔다. 훈련 도중 급하게 찾아온 터라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훈련 중에 미안하군."

"저는 기사입니다. 주군께서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빈센트와 오랜 기간을 함께한 첸은 빈센트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빈센트는 지금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일이 벌어지긴 하겠군.'

평소 빈센트는 화를 자주 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번 분노하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르고는 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추적하는 사자를 부르도록."

"...그 녀석들을 말입니까?"

첸이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빈센트가 무언가 일을 벌이리라 예상했지만, 추적하는 사자를 호출할 정도의 일일 줄은 몰랐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추적하는 사자는 블란테에서도 손속이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실력은 확실했지만 그만큼 확고한 결단 없이 소집해서는 안 되는 녀석들이었다.

'끝을 보는 놈들이지.'

그들에게 명예나 자비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명칭 그대로 적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물고 늘어지는 게 바로 추적하는 사자들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잠잠히 있었던 것 같더군."

"...."

"아무리 블란테가 숨을 죽이고 있다고 한들 이런 취급을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그게 무슨...."

"습격이 있었다더군."

뒤이어 빈센트는 얘기를 간략하게 전달했고, 그걸 들은 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지금 호출하겠습니다."

이런 일에는 첸이 이끄는 흑사자 기사단보다 추적하는 사자가 제격이었다.

그들의 잔학무도함은 훌륭한 무기이자 경고였으니까.

* * *

"녀석들이 늦군."

밝은 달의 단장은 와인을 홀짝이면서 창문을 바라봤다.

달이 밝았다.

밝은 달이라는 전설적인 어쌔신 길드를 이끄는 만큼, 그는 달을 볼 때면 많은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놈이 사라졌을 때는 당황했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지.'

길드 이름의 바탕이 된 '밝은 달'이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어쌔신.

곁에서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자는 괴물이었다.

그야말로 어쌔신의 전설.

애초에 밝은 달이라는 이름도, 아무리 밝은 달이 떠 주변이 환해도 결코 임무를 실패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붙었다.

암살 대상이 그 누구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그 모습에는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괴물 놈에게도 마지막 임무는 만용이었지.'

블란테 가주의 암살.

그때나 지금이나 황당한 임무였다.

의뢰자가 제시한 착수금은 역대급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블란테였고, 실패가 확실시되는 임무였다.

누가 봐도 미친 의뢰.

의뢰를 수락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수락했지. 큭큭큭.'

만용이었는지, 혹은 그저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지는 당사자만 알 수 있었다.

밝은 달이 그 임무를 수락하자, 많은 말이 나왔다.

― 가능할 리가 없어.

― 이건 그냥 자살행위야.

― 밝은 달의 전설도 끝이 나겠군....

― 제정신인 건가?

― ...그래도 밝은 달이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미쳤어? 상대가 블란테야. 전쟁의 악마이자 흑사자의 왕인데 그놈을 어떻게 죽여?

― 그래도 지금까지 밝은 달의 업적을 생각해 봐.

― 아무리 그래도....

― 나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 나도. 아무리 흑사자라고 해도 목에 칼 하나 안 박히겠어?

― ...그렇게 말하니까 또 일리가 있군.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신이라 칭송받는 블란테의 가주를 상대로 '가능성이 있다'라는 평을 받는 어쌔신은 밝은 달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날 밝은 달은 종적을 감췄지.'

암살에 나선 그날 이후로 밝은 달은 종적을 감췄다.

'무서워서 잠적했다, 도망갔다' 등 많은 말이 나왔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죽었다.'

'실패했다.'

'밝은 달도 어쩔 수 없구나.'

전설의 어쌔신이 한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

그 임무를 끝으로 밝은 달의 전설은 막을 내렸다.

'멍청한 녀석.'

결국 밝은 달이 사라지고, 자신은 밝은 달이 일궈 낸 모든 것을 독식하는 데에 성공했다.

'실력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결국에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밝은 달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자, 세력을 일궈 내기가 정말 수월했다.

'밝은 달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니까 보수도 크고 말이야.'

어차피 일은 밑에 있는 애들이 도맡아 한다.

다루기 쉽고 멍청한 녀석들이지만 실력은 확실했기에 임무에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너무 위험한 의뢰는 적당히 거르고 있으니까.'

실패는 리스크가 컸다. 밝은 달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나는 건 너무나도 큰 손해였다.

'이번 임무는 정말 꿀 같단 말이야.'

평민이 대상이라니.

이 정도 수준의 의뢰면 어쌔신 길드까지 올 게 아닌, 시정잡배나 도적단들도 옳다구나 하고 받을 수준의 의뢰였다.

그런데 그런 단순하고 간단한 임무에 거금의 착수금을 선뜻 던졌다.

이상한 의뢰는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별거 아닌 일이어도 확실한 처리를 원하는 졸부들이 간혹 있기에 그는 착수금을 그대로 받았다.

'안 받으면 병신이지.'

거액을 가볍게 넘기는 것을 보아하니, 졸부 상인이거나 알부자 귀족인 것 같았다.

'돈 많은 녀석들 손에 잘못 걸렸군. 큭큭.'

가끔 이런 노다지 같은 의뢰가 들어오고는 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녀석들 또 일 끝내고 놀고 있나 보군.'

분명 술집에서 여자나 끼고 놀고 있겠지.

난이도가 높은 임무가 아닌 만큼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밝은 달의 단장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였다.

한가로운 여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그 여유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콰광!

강렬한 파공성.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지?"

밝은 달 단장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 아무도 없나?!"

단장이 사람을 불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수하가 들어왔다.

"다, 단장님...!"

쐐애액!

퍽!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이 수하의 머리를 관통했다.

수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자리에 엎어졌다. 눈을 감지 못한 수하의 얼굴은 아직도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이처럼 보였다.

"이, 무슨...! 감히 누가 우리를 습격한 거야?!"

이제야 흘러가는 사태를 파악한 단장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하지만 일선에서 물러선 지 오랜 시간이 흐른지라 단장의 단검은 초라하기만 했다.

밝은 달빛이 창문을 지나 단장을 비추고 있었다. 단장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밖은 밝았으나, 문 너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두웠다.

깊은 심연과 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밝은 달 단장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단장의 고요한 외침에 어둠 너머에서 짐승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큭큭큭, 알다마다. 도시에 숨어 사는 쥐새끼들 아니신가?"

사람 같지 않은 목소리.

그리고 풍겨 오는 누린내.

밝은 달의 단장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자, 괴물이다.

크르르.

마치 웃음소리 같은 으르렁거림.

그들은 절그럭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흑색의 가죽 갑옷과 그 위를 감싸고 있는 투박한 사슬.

사슬은 피로 뒤덮였고,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허리춤에는 보기에도 흉악한 수많은 무기가 걸려 있었고, 한 손에는 역수로 쥔 검이 들려 있었다.

휘어 있는 한 손 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찾았다."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는 환하게 웃었다.

◈ [91화] 의심의 씨앗 (1)

일련의 상황이 정리되자 휴고와 가토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이 시작되고 우물쭈물하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어쌔신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가토, 넌 알아?"

"멍청한 놈."

마차를 몰던 가토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당연히 기사단이 움직이겠지. 블란테를 무시하고 도발한 상황인데."

"그건 아는데... 숨어 지낼 게 빤한 녀석들인데 어떻게 처리하나 궁금해서...."

"...어떻게 잘하지 않을까?"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은 가토도 매한가지였다.

마차 뒤편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네이드가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평범한 기사단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네, 어쌔신은 도망치는 데에 도가 튼 놈들인지라 평범한 기사단으로는 쫓기가 쉽지 않죠."

"그렇다면 대체 누가...."

"아마 '추적하는 사자'가 움직일 겁니다."

휴고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지만, 가토는 무언가 들은 게 있는 듯 상념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추적하는 사자는 소문에 불과한 것 아니었습니까?"

가토의 물음에 네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소문이 아니더군요."

네이드의 미소가 씁쓸하게 바뀌어 있었다.

"가문에서 단순하게 무력으로만 따지자면 가주님과 첸 경, 그리고 그 두 분이 이끄는 흑사자 기사단이 최강이겠지만... 특정한 목적을 목표로 하는 일에선 '추적하는 사자'들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휴고와 가토의 입이 벌어졌다. 흑사자 기사단을 뛰어넘을 정도라니....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네이드가 더 이상 말을 꺼내기 싫어하는 눈치인 것 같자, 일행들도 더는 묻지 않았다.

'...무서운 놈들이지.'

추적하는 사자.

손에 피를 묻히는 자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자들이다.

'놈들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

빈센트를 암살하려고 잠입한 그날.

가장 먼저, 추적하는 사자들이 네이드의 냄새를 맡았다.

당황했다. 잠입 도중 발각당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

그 섬뜩한 모습과 잔혹한 전투 방식.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광전사 같은 집요함.

'일신의 무력보다도... 그 집념이 무서운 법이지.'

추적하는 사자의 단장은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마스터는 선택받은 자들이 인고의 노력 끝에 올라가는 경지였다.

하지만 추적하는 사자의 단장은 마스터 정도로, 아니, 어떤 면에서는 마스터보다 더욱 위협적인 녀석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자, 네이드는 고개를 저어 저 밑바닥으로 떨쳐 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정리는 확실히 되겠군.'

그들은 어쌔신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심지어 나태와 오만에 젖어 약해진 놈들이 상대라면 더더욱.

'별로 힘도 들이지 않겠어.'

과거의 잔재를 털어 낸 네이드는 마차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흠.... 왠지 모르게 찝찝하단 말이지.'

삼자대면을 마친 에단은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분명 순탄하게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뭔가가 가슴에 걸렸다.

미묘한 찝찝함.

'보통 이럴 때면 뭔가 있던데.'

레벨린이 할 수 있는 선택지로는 뭐가 있을까?

그녀가 쓸 수 있는 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애초에 그것을 노리고 압박하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심지어 목적을 숨긴 채 천천히 조이는 것도 아니다. 이유 없는 적의는 시작부터 드러냈으니까.

'그렇기에 적당히 대비책을 꺼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니까.'

레벨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렇게 대놓고 숨통을 압박하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그래서 찝찝하단 말이야.'

적어도 오늘은 확실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그게 에단이 원하던 것이었고.

그걸 위해 시행한 삼자대면이었다.

'좋아, 더 기다려 보지.'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슬슬 일행이 세계수에 다다를 테고, 녀석들의 허락을 맡으면 에단이 이동하면 된다.

'여기서 얻을 것이라고 하면....'

지금 에단에게는 구태여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물건이었다.

'검.'

그것도 성검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의 검이자, 그의 아이덴티티.

'비루한 재능을 커버하는 사기적인 아이템이지.'

원래 에단은 성검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쥐고 있으면 귀찮은 일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 새끼는 왜 사라져 가지고.'

골치가 아파 왔다.

에단이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정원을 걷고 있자, 에밀라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대화는 끝냈습니까?"

대뜸 다가온 에밀라를 에단이 멀뚱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는 할 일 없냐?"

"그게 무슨.... 제가 궁금해하는 게 이상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내 눈에 많이 띄는 것 같아서."

"자, 자의식 과잉입니다!"

"흠.... 뭐 그렇다고 하고, 대화는 계획대로 잘 끝냈어. 아니, 계획보다 수월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더 찜찜하단 말이지...."

"...."

에단의 말에, 믿고 따르던 레벨린과 적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 에밀라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단이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페온이 말했다.

― 너만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지겠구나.

'어차피 그 상태면 속 터져도 안 죽지 않습니까? 아, 이미 죽은 상태인가?'

― ....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페온이 입을 다물었다. 시무룩해진 페온을 무시한 에단이 정원을 거닐며 물었다.

"이제 곧 수업 시간인데 이제 더할 참견은 없는 건가?"

"없습니다. 아, 설마 오늘도 전과 같은 무식한 수업을 하려고 하십니까?"

"아니. 체력 측정은 끝나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오늘은 애들이 좋아하는 걸 시켜야지."

"좋아하는 거라니요?"

"어, '피구'라고 애들이라면 환장하는 게 있어."

"...피구?"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에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에밀라에게 에단이 씨익 웃어 줬다.

"궁금하면 쉬는 시간에 놀러 오든가."

어차피 피구는 쉬는 시간이 없거든.

* * *

에단의 수업은 점점 악명 높아지고 있었다.

갈수록 몸이 힘들고 피폐해지지만, 정작 보람은 느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그런 경쟁을 즐기는 자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죽을 거 같아. 아직도 몸이 풀리지 않았어."

"설마 오늘도 비슷한 수업은 아니겠지?"

"차라리 나를 죽여 줘...."

"왜? 나는 나름대로 할 만하던데. 내 체력 상태도 알 수 있고."

"너는 변태가 분명해. 내 옆에 얼씬도 하지 마."

반응은 격렬했다.

느낀 적 없는 강한 근육통에 교실 내부에선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 에단이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쾅!

"힘세고 강한 아침."

박력 넘치게 문을 열어젖힌 에단이 교실을 둘러봤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학생들의 얼굴은 전반적으로 초췌했다.

"왜 이렇게 인상이 안 좋아? 무슨 안 좋은 일들 있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학생 한 명의 볼멘소리에, 에단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학생을 바라봤다.

"정말 모르겠는데? 설마 어제 그 몸풀기 수준의 스트레칭으로 지금처럼 앓는 소리를 내는 건 아니겠지?"

"그게 몸풀기라고요?!"

"교수님이 해 보세요!"

"맞다! 맞아!"

우우우!

학생들의 야유와 볼멘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에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나는 운동을 쉬지 않아."

"그걸 어떻게 믿어요?"

리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당연히 학생들은 리사의 말을 지지했고, 에단은 그런 그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뭐.... 외설스럽기는 하지만 증명해 줄 수밖에."

에단이 옷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교, 교수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에단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단추를 마저 풀었다.

"왜? 궁금하다며?"

에단이 씨익 웃으며 상의를 벗어 던졌다.

여학생들은 하이톤의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고, 남학생들은 심드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한 듯 에단을 바라봤다.

"와...."

하지만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반응은 모두 같았다.

짙은 탄성.

조각 같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에단의 몸은 살아 있는 예술품 같았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한 예술품이라기에는 흉악함도 함께 존재했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근육들, 그리고 그 위에 두드러져 있는 핏줄.

그들의 눈앞에는 강철 같은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이게 사람 몸이야?"

"...저게 가능하다고?"

"혈관이 무슨...."

학생들이 입을 벌리며 몸을 감상하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광배를 기점으로 뻗어 나간 흉측한 근육들.

"미, 미친!"

"오, 오우거다! 등에 오우거가 달려 있어!"

마치 오우거가 울부짖는 것 같은 등 근육.

― ...좋냐?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페온의 음성을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여학생들과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끔뻑이는 남자 학생들.

"체력과 근력의 중요성은 일전에 몸소 보여 줬고, 그에 따른 부가 효과도 오늘 보여 줬다."

반응을 즐기던 에단이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저, 저도 그런 몸이 될 수 있습니까?!"

한 남학생의 물음이었다.

순간 에단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육체미.

건장하고 강한 몸.

학생들에게는 낯설지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는 기사라는 존재가 희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가는 기사는 병기나 진배없었고, 그만큼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사람은 본 적 없어.'

기사들의 몸에 근육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로 검을 휘두르며 단련을 하다 보니 근육이 자라는 부위가 정해져 있었고, 그만큼 지방도 같이 껴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해, 아름답지가 않았다.

물론 기사가 아름다운 몸을 추구하는 자는 아니다.

주군을 수호하는 방벽이자, 적들을 처단하는 검인 기사는, 언제나 명예와 강인함을 추구해야 한다.

학생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에단이 보여 준 '육체미'는 고정 관념을 머릿속에서 지우기에 충분했다.

"될 수 있냐고? 당연히 불가능하지."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단번에 실망한 듯 빛을 잃었다. 에단은 일희일비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 수업을 충분히 듣는다면 가능하다. 내 운동량은 고작 어제 한 게 전부가 아니거든."

학생들이 다시 반색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알기 쉬운 놈들.'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직 때가 타지 않은 녀석들이다.

에단이 뒤편을 바라봤다. 로만은 가만히 에단을 노려보며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쟤는 아직 모르나 보네.'

조만간 더럽게 깨질 텐데.

'그러고 보니 그놈은 왜 안 보이지?'

크러쉬는 복귀하고 다시 수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단의 눈에는 단 한 번도 띄지 않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에단을 피하는 것 같았다.

'기숙사에서도 안 보이고. 뭐,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애당초 그렇게 비중이 큰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때, 로만 옆으로 아카데미의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다가섰다.

그러고는 그가 귓속말을 건네자, 로만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만이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섰고, 학생들의 시선은 일순간 로만에게 쏠렸다.

'얼씨구.'

시작됐구나.

에단은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로만을 기억에서 지웠다.

◈ [92화] 의심의 씨앗 (2)

황급하게 학장실로 뛰어간 로만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학장실 안에는 개인 물품들을 정리하고 있는 마크가 있었다.

"아, 아버지! 이게 무슨...?!"

로만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마크는 아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묵묵히 짐을 옮기고 있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로만이 다가가 마크의 손을 붙잡았다.

마크가 시선을 돌리자, 빛바랜 그의 눈동자에는 로만이 비쳤다.

"로만...?"

"맞습니다, 접니다! 학장님의 아들 로만이요. 이게 대체...!"

초췌한 마크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물들었다.

"로만, 이 머저리 같은 녀석!"

마크가 로만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만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버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크를 바라보는 로만.

빠득.

마크는 이를 갈며 로만을 노려봤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 녀석에게 차마 손찌검을 할 수는 없었다.

"하아.... 너 때문에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주세요!"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지? 재산까지 털어서 도시로 갔더구나. 거기서 또 일을 벌였고."

"그걸 어떻게...."

"이유가 뭐지? 왜 그런 짓을 벌인 게야?!"

천둥소리 같은 마크의 호통에 로만이 몸을 떨었다.

"...그 건방진 평민 놈이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 위치를 모르는 놈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 머저리 같은... 하, 됐다.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밀려오는 현기증에 마크는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둔한 아들놈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내 친히 설명해 주마. 주제 파악을 시킨다고? 좋아, 맞는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 대상이 잘못됐다."

"그 평민 교수 말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하찮고 천박한 녀석이 왜 신성한 아카데미에...."

"평민? 허,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도 그 편협한 사고를 고치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의심을 할 줄 모르는 게냐?"

힘껏 움켜쥔 마크의 주먹은 붉게 물들었다.

"...그 교수는 평민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디 촌구석의 몰락 귀족이라도 됩니까? 하지만 그까짓 작위뿐인 신분은...."

"허, 몰락 귀족이라고 멸시하는 것이냐? 그것참, 웃기는구나. 변방에 있는 작위뿐인 귀족이라면 흡사 우리를 말하는 것 같지 않으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버지와 저는 아카데미에...."

"그깟 아카데미, 허울뿐인 울타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느냐? 그렇기에 조심히 몸을 사렸어야 했거늘.... 네 녀석 때문에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

계속된 질타에 분개한 로만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알 수 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제대로 된 설명을 해 달란 말입니다!"

"오냐, 그 설명 지금 해 주도록 하마. 주제를 파악 못 한 건 그놈이 아니라 네놈이다. 에단 교수의 가문은 고작 변두리의 몰락 귀족이 아닌, 국경을 호령하는 사자다."

"사자...? 설마...."

로만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변방의 사자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브, 블란테?"

"이제야 네놈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이해가 된 거냐?"

"그, 그럴 리가! 그 천박한 놈이 어찌!"

짜악!

마크는 아직도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로만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려라! 이 머저리 같은 녀석...."

로만이 멍한 얼굴로 뺨을 붙잡고 있었다. 마크가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얼굴로 로만을 바라봤다.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만일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곧바로 군대를 출전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도발 행위였다."

"...어째서 가문을 숨긴 거죠?"

"나도 모른다. 어째서 가문을 숨겼는지....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군."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다가왔는지.

그랬다면 이해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아카데미를 집어삼킬 계획을 짜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허탈함이 더해졌다. 학장이라는 직책에 느꼈던 자부심이 민망했다.

자신은 그저 쓰기 좋은 장기 말에 불과했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으니까.

"그, 그럼 저희는 이제...."

로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내뱉는 그 순간, 학장실의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또각또각.

단정한 구두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레벨린이었다.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죠?"

마크의 말투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미 마크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였다.

"표정 푸시죠. 기회를 드리려고 찾아온 거니까요."

"기회? 지금 기회라고 하셨습니까? 이 상황에서 어떤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이시죠? 제게 당신의 개인 시종 노릇이라도 하라는 소리인가요?"

마크가 비꼬는 말투로 레벨린에게 말했지만, 레벨린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요. 시종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기회는, 이곳 아카데미의 학장이라는 신분으로 남아 있게 해 드린다는 말이었습니다."

마크의 눈은 의심으로 가늘어졌지만, 옆에서 대화를 듣던 로만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맴돌았다.

로만은 레벨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과 맥락을 짚어 낼 정도의 눈치는 가지고 있었다.

'이 기회는 잡아야 해.'

로만은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문으로 돌아가 별 볼 일 없는 삶을 영위하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권력의 달콤함을 맛봤다. 권력이란 한번 맛을 본 이상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함이다.

"아버지!"

로만이 크게 소리치자, 마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들이라도 이럴 때만큼은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마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결국 질문했다.

"어떤 기회를 주신다는 말이죠?"

변변찮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는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레벨린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별것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것만 해 주면 돼요."

이전처럼.

레벨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쟤는 뭐 갑자기 나가냐. 버릇없게. 아, 급하게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건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지."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에단이 교탁에 손을 걸친 뒤 학생들을 둘러봤다.

"다들 표정이 봐줄 만하네."

"...정말 그래 보여요?"

"응, 그래. 다들 죽어 가는 것 같은데."

각양각색의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래, 말해 봐."

"...오늘도 이전 같은 수업인가요?"

순간 퍼지는 정적,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왜? 또 하고 싶어?"

"아니요!"

에단의 물음에 학생들이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여 줬다.

"걱정 마. 오늘은 안 할 거니까. 나도 또 그 짓 하기 싫어."

귀찮거든.

에단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분홍색 공이었다.

에단이 공을 바닥에 튕겼다.

"오늘은 팀전이다."

에단의 말에 학생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었다.

"설명은 밖에 나가서 해 주지. 복잡한 룰은 아니니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거야."

씨익 웃으며 내뱉는 말에 학생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 맞아?"

리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 * *

이제 익숙해진 연무장.

에단이 단상에 올라 공을 들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룰은 간단했고, 전반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어 이해 못 한 인원은 없어 보였다.

"내가 반장에게 받은 성적표다. 대충 형평성 있게 팀을 구성했으니 불만은 가지지 말도록."

에단의 호명에 학생들이 갈라졌다.

검을 주로 수련하는 무투파, 마법과 그밖의 학식을 수행하는 지식파들로 나눠졌다.

"단순한 피구라면 한쪽이 너무 유리하니까 제한을 두마. 기사를 진로로 정한 녀석은 마나를 일절 사용하지 못한다. 반면 마법이나 학술을 배우는 이들은 '적절히' 구사해도 된다."

그때 안경을 쓴 여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 적절히가 정확히 어떤 수준이죠?"

"뭐, 대충 이 정도면 안 뒈지겠다, 정도로 조절하라고."

씨익.

에단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여학생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뭐, 뭔가 위험할 거 같은데?"

"위험하기는 뭐가? 체력 검증 때 그렇게 우리를 개무시하더니 잘 걸렸다."

지식파 학생들이 독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무투파를 노려봤다. 무투파에 속한 학생들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자, 슬슬 시작해."

한마디를 내뱉은 에단은 학생들을 방치한 뒤 훌쩍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래서 피구가 편하다니까.'

대충 공만 던져 주면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논다.

어지간한 수업보다 피구를 시키는 것이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연무장 밖으로 나온 에단은 앞에 서 있는 에밀라를 바라봤다.

"...너 많이 한가하냐?"

에단이 이제 한심함을 넘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에밀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놀러 오라고 한 것은 당신 아닙니까?"

"내가 쉬는 시간에 놀러 오라고 했지, 언제 아무 때나 오랬어?"

"...사실 최근에 수업을 배정받지 못했습니다."

에밀라가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에단은 대충 예측할 수 있었다.

'슬슬 에밀라에 대해 눈치를 챘나 보군. 그런데 왜 나한테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거지?'

아무리 에단이 수업의 자율을 보장받았다고 한들, 레벨린 정도라면 뒤에서 여러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움직인 것은 학생 측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물고기.

로만 그 녀석 덕에 쉽게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명분을 바탕으로 아카데미까지 빼앗는다면 그녀에게는 정말 남은 것이 얼마 없게 된다.

'이제 '그때'가 다가오기도 하고.'

아카데미에서 얻는 두 번째 히든 피스.

사실 이건 에단이 탐내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검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에단이 아닌, 원작 주인공이 반드시 얻어야 할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행방불명된 지금, 에단이라도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세계수를 치유하는 데 성검이 필요한 건 알겠는데... 성검을 얻을 에피소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 문제야....'

세계수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왔다. 사실 에단은 이렇게 늦장을 부리고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도발을 하고 있으니 슬슬 입질이 오겠지.'

에단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든 피스인 성검을 얻게 되면 곧바로 세계수로 떠날 생각이었다.

고민에 잠긴 채 걷던 에단이 옆을 바라봤다. 옆에는 에밀라가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너 많이 한가하지?"

"...."

"구경이나 해."

에단이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무장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시끌벅적한 소리가 문밖까지 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호기심이 들었는지 연무장을 힐긋 바라봤다.

"그럼...."

에밀라가 무언가 홀린 듯 발을 옮겼다.

◈ [93화] 폭풍 전 고요 (1)

피구.

가히 한국 체육 시간의 꽃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스포츠였다.

단순한 룰.

장소와 장비에 구애받지 않는 게임.

적당한 공 하나만 주어지면 어디서든 할 수 있기에, 만사 귀찮은 체육 교사는 늘 피구를 시키고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 중 하나가 바로 피구였다.

'승부욕.'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본능적인 감정에 충실한 녀석들이지.'

육체와 지능.

양립한 학생들, 그리고 암암리에 매겨진 서열.

나눠진 팀에 공 하나.

승부욕이 불타지 않으면 이상한 환경이다.

예상한 것처럼 연무장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에밀라는 문을 바라보며 멈칫했다. 괴성과 기합 소리에 놀랐기 때문이다.

"...대체 학생들에게 뭘 시키신 거죠?"

"말했잖아. 보면 알아."

에단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에밀라는 한숨을 내쉬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연무장의 문이 열리자, 후끈한 열기가 먼저 느껴졌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공을 집어 던진 학생 하나.

학생의 눈에는 살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죽어!"

"개소리를! 너나 뒈져! 이 근육 머저리들!"

공을 받은 지식파 학생이 공중에 피구 공을 띄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순하고 빠른 영창.

"마나여, 내 의지에 응해라! 매직 볼!"

우웅!

공중에 떠 있던 피구공이 마나에 진동했다. 마나에 둘러싸인 공이 공성 병기처럼 쏘아졌다.

콰앙!

"이런 미친!"

무투파 학생이 몸을 날렸다. 공이 지면을 부술 것처럼 바닥에 튕겼다.

"쳇!"

공을 집어 던진 지식파 학생 하나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저 자식이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거야...?"

"무슨 헛소리야? 뇌도 근육으로 차 버렸냐? 그 정도로는 안 죽어."

"그래.... 죽지는 않겠지....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죽는 건 아니니까. 그치?"

"잘 아네."

"저 자식이!"

에단이 예상한 대로 분위기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거칠게 공을 주고받았다.

형평성도 괜찮았다. 무투파, 즉 육체적 능력이 우월한 학생들은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이 뛰어나 게임에서 전반적인 우위를 가져갔다.

하지만 마법파, 즉 지식파들은 벌써 포지션을 나누고 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무투파를 압도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지.'

협동심과 승부욕, 그리고 팀에게 느끼는 동료애.

'그것도 그거고, 사실 귀찮은 게 제일 크지.'

교수 노릇에 진심인 것도 아니고, 에단은 구태여 매 수업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밀라는 입을 떡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재밌어 보이지 않아?"

"재미요? 재미보다는 위험해 보이는데...."

에밀라의 반응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위험하기는. 위험이야 목검 들고 싸우는 게 더 위험하지."

"...."

에단의 말에는 틀린 곳이 없었다.

에단이 공수해 온 피구공 자체는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 설령 과열된 분위기 탓에 위험이 뒤따른다고 할지라도, 대련에 비해서는 위험도가 현저히 낮았다.

'적당히 위험해야 재미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한 에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자, 학생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 교수님?"

그와 동시에 이글거리며 눈빛을 불태우던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이 룰은 너무 비겁합니다!"

"맞아요! 반장, 너도 말 좀 해 봐!"

"아니 나는...."

학생들이 앞다투어 입을 벌리자, 순식간에 귀가 아플 정도로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 입 안 다물어?"

"...."

에단이 인상을 구기며 읊조리자,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공평이 어디 있어? 그건 내가 정해. 불만 있어? 그럼 너희가 교수하든가."

에단의 거친 언행에 반박하는 학생은 없었다. 이미 요 며칠 사이에 에단이 어떤 인물인지를 깨달은 탓이었다.

리사가 한껏 표정을 구기며 에단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데 에밀라 교수님은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죠?"

리사의 물음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어? 그러게 에밀라 교수님은 무슨 일이에요?"

여러 학생들이 묻자, 에밀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에밀라의 어깨를 밀었다.

"너희들,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당연히 피구 한 게임 하려고 온 거잖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지만 그녀는 거부 의사를 마저 드러내지 못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엄청났기 때문이다.

"와, 진짜요?"

"교수님! 저희 팀으로 오세요!"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양심 없냐?"

"야, 솔직히 너희들한테 유리한 룰이잖아. 에밀라 교수님이 누구야, 검술 담당이시지? 그러면 우리 팀에 오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옳소!"

"이 자식들이 단체로 뭘 잘못 처먹었나!"

거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과열된 분위기 속에 에밀라는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고, 에단도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쩔 수 없지.'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다들 조용. 확실히 에밀라 교수만 참가하면 형평성에 어긋나겠지?"

에단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나도 참가해 주지."

오랜만에 한번 즐겨 볼까?

* * *

"...야."

"...어."

"내가 뭘 본 거지?"

"나한테 묻는다고 아냐?"

"...같은 사람이 맞을까?"

"...나한테 묻는다고 내가 아냐고."

에밀라와 에단의 피구 대결.

그 대결은 두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경이롭고, 또 격렬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하던 피구도 살벌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경기와 비교하면 애교일 정도였다.

"...마나 안 쓴 거 맞지?"

"응.... 너도 봤잖아."

"내 눈이 안 믿겨서 그렇지...."

"...그러게."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학생들.

에단과 에밀라의 페이스에 따라가기 급급했을 뿐인데 어느새 모두 바닥에서 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안 그럴 거라더니...."

리사가 마지막으로 처절한 말을 내뱉으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 * *

에단이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막상 하니까 할 만하지?"

"확실히 다방면에서 운동은 되는 것 같습니다. 순발력과 동체 시력 등이 중요한 훈련이군요."

"그래, 열심히 훈련하라고.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잖아."

빠득―

"초심자 상대로 너무 전력을 쓴 것 아닙니까?"

이를 악문 에밀라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전력이래? 나는 가진 힘의 반도 쓰지 않았어."

"웃기지 마십시오! 절반도 안 쓴 사람이 공을 던질 때 '뒈져!' 같은 기합을 씁니까?"

"어. 난 쓰는데?"

유치한 대화를 하면서 에단이 연무장을 나섰다.

"아, 반장."

에단이 뒤를 돌아보며 반장을 호출하자, 드레이가 시체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당장에라도 얼굴이 흘러내릴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여기 대충 정리하고 들어가."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드레이의 몸도 축 늘어졌다.

에단이 연무장 밖을 나서자, 이번에는 에밀라가 아닌 더욱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은 잘 끝냈습니까?"

레벨린이었다.

특유의 속내를 알기 힘든 미소를 띤 채 에단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눈웃음 사이로 서늘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에밀라를 흘겨봤다.

시선을 느낀 에밀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에밀라 씨도 계셨군요?"

"...네."

에밀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더니 앞으로 나섰다.

"여기는 무슨 일일까? 수업에 참견이라도 하려고?"

"참견이라니, 그럴 리가요. 단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 말?"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던 레벨린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저를 적대하는 이유가 뭐죠?"

많은 의도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 안에는 레벨린 개인의 궁금증이 가장 크게 자리해 있었다.

레벨린이 에단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봤다.

"내가 왜 너를 적대하지?"

하지만 에단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적대한 적 없어."

"그럴 리가요. 지금까지의 행동 모두가 저를 노리고 한 것 아닙니까?"

"글쎄, 너무 자의식 과잉인 거 아닌가? 그렇다면 반대로 묻지."

에단이 한 발짝 다가갔다.

에단의 얼굴이 레벨린과 가까워졌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뭔가 찔리는 게 있을 텐데? 감히 블란테를 상대로 수작질을 한다든가, 그런 거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도 잘 모르겠거든. 너를 적대하는 이유? 나는 딱히 너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원래 내 성격이 그런 거지."

블란테의 망나니.

에단은 그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았다. 망나니 취급을 받기에 그 취급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뭐, 개인적으로 적대감이 있는 건 아니니까 틀린 말도 아니지.'

단순히 에단의 목적과 필요 때문에 적대적인 포지션을 취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후, 레벨린의 가식적인 미소에는 미세한 금이 그어졌다. 그녀는 볼을 꿈틀거리며 서늘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좋습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잘 생각했네."

"수업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방금은 참견 안 하겠다며."

"참견은 아닙니다. 아카데미의 방침이자 규정이죠. 정기적인 던전 탐사가 있습니다."

'왔구나.'

에단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시기를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슬슬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했다.

던전 탐사.

레벨린이 말하는 건 일반적인 던전 탐사가 아니었다.

바로 학생들의 실전 경험을 높여 주고 위기 대처 능력을 키우기 위한 예행연습이자 훈련이었다.

사전에 준비된 던전과 몬스터, 그리고 보상.

전형적인 소설 클리셰였다.

원작에서는 예상치 못한 몬스터의 등장과 담당 교수의 실종으로 스토리가 흘러갔다.

악재가 겹치게 되었고, 주인공이 나서 상황을 해결한 뒤 보상을 얻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이걸 네가 말하니까 더 구리네.'

원래라면 레벨린은 별로 언급이 되지 않는 흑막이었다.

자연스레 본인이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아랫사람들을 즐겨 이용했다.

에밀라, 마크, 그 밖의 교직원들.

손과 입이 되어 줄 사람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직접, 그것도 구린내를 풍기면서 직접 전달한다라....

"싫다면?"

"예정된 수업입니다. 에단 교수님이 거부해도, 다른 교수님이 위탁을 받겠죠. 안 그런가요? 에밀라 씨?"

"...맞습니다."

에밀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레벨린을 바라봤다.

레벨린은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에단을 마주 봤다.

"뭐, 좋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애초에 이걸 기다렸으니까.

― ...조심하거라.

페온이 구린 냄새를 맡았는지, 조용히 있다가 말을 더했다.

에단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설마 쫄리십니까?'

― 괘씸한 놈. 걱정을 해 줘도 지랄이냐?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 곁에는 페온 님이 계신데.'

― 큼, 크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맞는 말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에단은 조심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위험이 닥쳐오면 도망치는 게 아닌, 들이박고 보는 성격이니까.

"언제 가면 되지?"

◈ [94화] 폭풍 전 고요 (2)

'당장 다음 날이라. 조급한 모양이군.'

그녀가 늘 유지하고 있는 포커페이스.

조만간 레벨린의 가면을 완벽히 부숴 줄 생각이었다. 대화를 끝낸 에단은 돌아섰고, 레벨린은 묘한 눈으로 에밀라를 흘겨봤다.

"에밀라 씨."

"...네."

"부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글쎄요? 과거의 에밀라 교수님이었다면 이런 조언도 불필요했겠지만.... 스스로 고민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레벨린이 몸을 돌렸다.

홀로 서 있던 에밀라가 레벨린의 말을 곱씹었다.

'무슨 의미지?'

그녀답지 않은 조언이었다.

에밀라가 우두커니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단은 기숙사로 돌아와 개인 운동을 시작했다.

상의를 탈의하고, 물구나무서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후욱, 후욱."

전반적인 신체의 기량이 워낙 높아져 웬만한 운동으로는 별다른 자극이 오지 않았다.

몸을 지탱하던 손바닥의 모양이 점점 바뀌었다.

다섯 손가락, 네 손가락, 세 손가락, 두 손가락, 이윽고 검지 하나.

후욱!

에단이 구슬땀을 흘리며 몸을 굽혔다가 일으켰다. 신체를 고르게 유지하는 균형 감각과 코어, 그리고 손가락에 집중하는 집중력과 전신의 협응력.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의식했다.

수차례 반복하던 에단이 반대 손으로 땅을 짚었다.

플란체를 시작으로 고난도 맨몸 운동들을 수행하던 에단이 운동을 끝내고 폴짝 뛰어올라 바르게 섰다.

"후우."

그는 흥건하게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에단의 몸은 아직 성장하고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갔다.

― 많이 좋아졌구나.

페온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에는 에단도 동의했다. 잠재력이 높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한계를 모르고 좋아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운동을 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게 아쉽군.'

장비만 충분하다면 하고 싶은 운동이 많았다.

바벨, 덤벨, 케틀벨, 로프, 체인.

가문에서는 야장들에게 부탁해 적당한 기구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좁은 공간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 맨몸 운동 위주의 단련을 하고 있었다.

'뭐, 신체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마법사와 기사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까.

에단도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검도 수련을 해야 하고.'

맨몸의 한계는 분명하다.

익숙하지 않은 공격들과 변칙들로 순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리치와 살상력에서 차이가 벌어진다.

'상대가 마나를 다룬다면 더더욱.'

마나의 경지.

원작 스토리는 주인공의 히든 피스와 재능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구체화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페온을 통해 나름대로 구체적인 체계를 습득할 수 있었다.

지역별로 구분법과 명칭이 다르다고는 하나, 블란테에서 규정한 규칙은 따로 있었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마나 유저의 경지를 나누는 구분법.

'누가 소설 아니랄까 봐.'

하지만 나누는 방법은 나름대로 구체적이다.

검에 두른 마나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벨 수 있는 금속의 두께.

블란테에서는 그 두 가지로 수준을 판별한다.

경지에 오른 기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판가름할 수 있으니, 그 방법을 이용해 나눌 수도 있었다.

― 너의 수준은 잘 쳐 봐야 상급이다.

마나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단에게는 어마어마한 경지였다.

마나를 느끼고 마나 유저로 입문하게 되면 못해도 수년의 수련을 거듭해야 다음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다.

하지만 에단은 평범한 길을 걷지 않았다.

'죽은 나무.'

죽은 마나라고 불리는 사기(死氣)를 흡수하는 불길한 힘.

왕도를 벗어난 힘을 빌려 에단은 단숨에 엄청난 경지를 도약했다.

죽은 마나만이 아닌, 죽은 생명체의 특성까지 흡수했다.

'주인공은 수많은 축복과 갖가지 히든 피스들로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했지만.'

에단은 아직 가지고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목에 걸린 세계수의 목걸이, 그리고 왼손에 흡수된 타이탄의 장갑. 마지막으로 원작과 다른 룬어 '절망'.

'이게 제일 거슬린단 말이지.'

원래 주인공이 가지게 될 룬어는 '희망'이었다.

'능력도 단순했고.'

빛의 발산, 치유와 마나의 회복, 그리고 사특한 존재의 정화.

맞서야 할 적들을 생각하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사라졌고, 팔에 새겨진 룬어는 '절망'이라는 전혀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로 바뀌었다.

'슬슬 시험해 보긴 해야 하는데.'

절망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묘하게 불길하고 부정적이었다.

'레벨린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라진 룬어라....'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 이 에피소드에서 적의 난이도는 크게 높지 않았다.

'그 이유는 룬어 때문일 테고.'

처음 등장하는 흑막의 세력, 그와 상반되는 주인공의 룬어 희망.

그 힘으로 동료를 구하며 손쉽게 흑막을 저지한다.

하지만 룬어의 단어가 바뀐 상황.

그렇다고 해도, 에단에게는 다른 무기가 존재했다.

죽은 나무.

주인공이 스토리의 중반부를 넘어가서야 얻게 될 힘.

하지만 에단은 조기에 그 힘을 손에 넣었다. 이 능력 또한 언데드와 상극인 힘이었다.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네.'

곧 일행이 세계수에 도착할 시간이다. 더욱 지체되면 일이 복잡해질 터.

에단은 머릿속에서 잡념을 지워 냈다.

* * *

다음 날 오전, 갑작스러운 던전 탐사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로 건물 밖에 정렬했다.

"던전 탐사? 원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이 나오나?"

"...그러게. 하지만 뭐 나쁘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지.... 에단 교수님 수업은 더럽게 빡세니까...."

"왜, 난 그래도 재밌던데?"

"확실히 재미는 있지."

"그래도 던전 탐사는 또 다르잖아. 진짜 실전이라는 느낌?"

"진짜 실전이니까 그렇지, 멍청아."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시끌벅적 떠들던 학생들 앞에 에단이 나타났다.

"어제는 잘 쉬었나?"

"네!"

에단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딱히 빠진 인원은 없는 것 같았으나,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귀찮게 출석을 불러야 하나? 빠진 인원은 없겠지?"

에단이 말하자, 그때 드레이가 손을 들었다.

"로만이 없습니다."

"로만?"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에단이 내건 타협안이자 협상 내용.

학장이라는 직위의 반납, 하지만 급진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마크가 레벨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한들, 어쨌든 학장의 자리에는 마크가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학장 교체는 혼란만 야기할 뿐이었다. 하여 에단도 충분한 준비를 갖춘 뒤 행동할 생각이었다.

'설마 벌써 자리를 떴나?'

그런 생각을 하는 때, 로만이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한 로만이 대열에 합류했다. 로만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벌한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보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이상한데.'

하지만 추궁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했다. 에단은 로만에게서 시선을 떼고 학생들을 둘러봤다.

"다들 사전에 고지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겠지?"

"던전 탐사 말인가요?"

"그래."

그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사가 손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수업 아닌가요?"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알다시피 나는 직원에 불과해서 말이야. 위에서 까라니까 까는 거야. 그러니 불만 있으면 학장한테 따져."

에단이 내뱉은 말의 속내를 눈치챈 로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개자식이....'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자신과 아버지를 우롱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리를 빼앗는 외지인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좋아, 우리를 같잖게 본다 그거지?'

로만이 화를 억눌렀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블란테라는 이름이 오늘도 너를 지켜 줄 수 있는지 보자고.'

저 방약무인한 태도도 오늘까지일 테니까.

로만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채비를 갖춘 학생들과 에단이 움직였다.

아카데미의 본질은 결국 전투 가능한 자들의 양성이었다.

현재 대륙은 평화로웠으나, 언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국력은 결국 힘이 결정했고, 힘은 곧 강자의 숫자와 직결된다.

뛰어난 기사와 마법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이 되기 마련이니까.

아카데미의 설립 이유도 결국 그것 때문이다.

학식의 수행, 소양 등은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시되는 수업은 전투 마법과 검술이었다.

그러다 보니 던전 탐사나 몬스터 토벌은 위험했으나, 배운 것들을 적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실전 경험을 쌓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학생들은 간만의 실전에 긴장했다. 전투복을 착용하고, 날 선 진검을 쥐자 더욱 실감이 났다.

에단을 필두로 학생들이 뒤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이쪽인가?'

사전에 들은 지리와 손에 쥐어진 약도를 통해 탐사를 진행했다. 에단으로서는 익숙지 않은 지리였지만, 이번 던전 탐사에 배정된 교수는 에단 혼자였다.

'더럽게 노골적이야.'

함정의 냄새가 풍기다 못해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꽤나 긴 시간 동안 숲을 헤치고 지나자,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저는 동굴이랑 인연이 깊네요.'

―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구나.

페온이 에단과 같은 감상을 느꼈는지 달갑지 않은 소리를 내뱉었다.

"잠시 휴식."

에단의 말과 함께 학생들이 정렬한 뒤 자리에 앉았다.

행군 같은 이동이 끝나고 휴식이 주어지자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험난한 숲인 탓에 대열을 유지하며 걷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학생들은 긴장한 상태였기에 피로도는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죽겠다. 너는 괜찮아?"

"나도 힘들지."

율리가 한숨을 내쉬며 리사에게 물었다.

말로는 힘들다고 대답한 리사이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땀 흘린 거 안 보여?"

리사가 이마를 가리켰다. 송골송골 맺힌 작은 땀방울이 보였다.

"...너한테 물은 내가 바보다."

결국 체념한 율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 체력 괴물에게 공감을 구한 것이 잘못되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율리가 턱짓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로만이 있었다.

"어제 급하게 나갔잖아."

"아...."

리사는 일련의 사건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로만이 무슨 일로 교실을 박차고 나갔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실상을 알고 있는 리사는 로만에게 좋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하지만 구태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언급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로만과 리사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마주치자 로만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지금 쟤가 웃을 상황인가?'

앞으로 닥칠 상황을 알고 있는 리사는 로만의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다.

'...기분 나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 [95화] 리치 베오드라도 (1)

스스스.

레벨린이 목함을 열자 불길하고 음험한 검은 연기가 치밀어 올랐다.

검은 연기는 일정한 윤곽을 따라 뭉치더니, 이내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검고 윤기 나는 뼈가 드러나고,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요사스러운 붉은 안광이 대신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레벨린은 압도되는 느낌을 받으며 흠칫 몸을 떨었다.

'...위압감이 이 정도라니.'

이보다 위에 있는 존재가 가지는 존재감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레벨린은 들끓는 가슴을 억누른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그만하거라."

쇠가 부딪치는 듯한 불쾌한 음성.

그 음성에는 사람의 심령을 옥죄는 것 같은 강제력이 느껴졌다.

"현신한 육신은 마음에 드십니까?"

"...흠, 나쁘지는 않군. 꽤나 쓸 만한 놈이었나 보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물을 물색하긴 하였으나, 최상급의 제물은 찾지 못했습니다."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정도만 해도 네가 말한 놈들에게는 과분한 정도니까."

붉은 안광이 기분 좋은 듯 흔들렸다.

"베오드라도 님. 준비는 마쳤습니다. 몬스터의 수, 그리고 사체의 수 모두 말씀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고생했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베오드라도의 말에 레벨린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충복에게는 그만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법이지."

"감사합니다."

레벨린이 머리를 깊게 숙였다. 베오드라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것'은 찾았느냐?"

베오드라도의 물음에 레벨린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송구합니다. 최선을 다해 찾고 있으나 아직...."

"흠.... 빨리 찾는 것이 좋을 것이야. '죽은 나무'는 우리의 계획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

"그 정도로 중요한 물건입니까?"

레벨린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베오드라도를 바라봤다.

붉은 안광과 마주하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궁금한 게 많구나."

"죄송합니다."

레벨린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베오드라도는 가만히 레벨린을 바라봤다.

"마음은 이해하나, 조급해하지 말거라.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레벨린은 그리 대답하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장 조급한 것들은 너희들이면서...!'

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둘의 상하 관계는 명확했고,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못할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오드라도의 눈에는 그런 레벨린의 속마음이 빤히 보였다.

"그러면 먼저 자리를 잡아야겠군."

유쾌한 음성으로 말한 베오드라도가 레벨린을 흘겨봤다.

'우둔한 녀석.'

헛된 희망을 가진 채 발악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래도 이용 가치는 충분하니.'

적당한 과실을 보상으로 내걸면 알아서 열심히 움직였다.

레벨린이 하는 일에 비하면 그들이 주는 보상은 정말 실낱같은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인 것이지.'

베오드라도는 웃음을 삼킨 채 몸을 움직였다.

* * *

"자, 슬슬 일어나지."

에단의 말이 떨어지자, 학생들이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동굴 앞에 서자 다시금 긴장감이 차올랐다.

"왜 이렇게 겁을 먹었어?"

리사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율리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긴장을 안 해...."

"이번이 처음이야? 아니잖아. 겁먹지 마."

덤덤한 위로였지만 그 무덤덤함이 오히려 힘이 되었다. 율리는 묘한 표정으로 리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되게 멋진 척하네."

"뭐라고?"

리사가 인상을 찌푸리자, 율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조언해 줘서."

"...별로. 그리고 걱정 마. 위험하면 내가 구해 줄 테니까."

"정말이지? 믿고 있는다."

율리가 밝게 미소 짓자, 리사도 마주 입꼬리를 올렸다.

에단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제법 잘 지냈나 보군. 저런 친구도 사귀고 말이지.'

― 너랑은 다르게 저 아이는 사회성이 있구나.

'저도 사회성은 넘칩니다.'

페온의 말에 짧게 반박한 에단이 몸을 돌렸다.

"자, 다들 준비됐나?"

"넵!"

우렁찬 대답에 에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는 끝났다. 어제 한 피구 같은 게 아니야. 갑작스러운 실전에 당황스러우리라 생각하지만...."

에단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들 그러려고 온 거잖아?"

에단의 말에 리사가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맞습니다!"

"좋아. 학생들이지만 군대 못지않네. 역시 엘리트들이야. 걱정하지 마라. 위급 시에는 내가 나설 테니까."

에단을 필두로 각오를 다진 학생들이 동굴에 입장했다.

* * *

이 던전은 인솔 교수가 한 명만 붙는 게 이상한 곳이었다.

바로 갈림길 때문이었는데, 입구는 하나여도 음습한 동굴을 걷다 보면 길이 두 개로 나뉘었다.

'인솔 교수가 나 혼자인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인솔과 안전.

갈림길이 존재하는 던전에서는 혼자서 책임지기 어려운 과제들이었다.

에단의 몸은 하나였고, 학생들은 다수였으니까.

아무리 에단이 능력이 좋고 뛰어난 교수라고 한들 모든 학생들을 주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두 개로 나눠진 길.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인력 충원을 요청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응해 줄 리가 없지.'

애초에 짜여진 판 위에 올라선 것이니 인력이 지원될 리는 없었다.

'원작에서는 왼쪽이었지.'

원래라면 학생들을 둘로 나누는 것도 미친 짓이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학생들을 모두 이끌고 길 한쪽씩 들어가 보는 게 옳은 선택.

'그래서는 녀석의 각성이 이뤄지지 않겠지.'

에단은 이번 사건을 눈여겨보던 드레이 각성의 초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그때, 로만이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저희들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한 던전 탐사 아닙니까? 인원을 나누도록 하죠."

'아예 저의를 숨길 생각이 없는 놈이군.'

너무 대놓고 의사를 드러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에단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그래? 일리가 있군. 로만 너는 어디로 가고 싶지?"

에단의 반응에 로만이 씨익 웃었다.

"저는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너는 왼쪽으로 가라."

로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인원을 나누자는 건 네가 말한 제안이잖아. 너는 왼쪽으로 가면 되겠네. 모두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는 없으니 내가 임의로 정한 건데, 불만 있나?"

로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돌린 에단이 이번엔 드레이를 바라봤는데, 그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드레이, 너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싶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지금 무슨...!"

명백한 차별에 로만이 발끈했지만, 에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럼 교수를 하지 그랬어. 아니면 아버지한테 이르든가."

명백한 조롱에 로만이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과 움켜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왼쪽으로 가죠."

"잘 생각했어. 자 그러면 이제 나누도록 하지."

에단이 학생들을 배정했다. 힘의 균형은 치우쳐져 있었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학생들이 우측에 몰려 있는 탓이었다.

왼쪽 방향을 배정받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볼멘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수님, 배정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맞아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에단은 예측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학생들을 바라봤다.

"뭐가 불공평하다는 거지?"

막상 에단이 묻자,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왜? 스스로 본인의 역량이 낮다고 말하기는 민망한가?"

에단이 품에서 종이 조각을 하나 꺼냈다.

"이건 너희들의 성적표다. 뭐, 이전 성적을 인계받지는 않았어. 나는 고정 관념을 가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너희들이 많이 반발했던 체력 성적. 이번 배정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물론 마법이나 학문이 전공인 학생들에게는 불리한 시험이니 그 부분은 감안했고."

"...."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뭐, 내 교육 방침이 옳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마라."

에단이 학생들을 주르륵 훑어봤다.

"경쟁심을 가지도록. 아카데미는 그렇게 평화로운 곳이 아니야. 이곳에서의 성적과 역량은 추후 너희들의 권력이 된다."

아카데미의 영향력은 현대의 학벌주의보다 더욱 심했다. 이곳은 신분 제도가 존재하는 세계였으니까.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왼쪽으로 들어갈 테니까."

배정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리사와 드레이, 학급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둘이 오른쪽 입구에 들어섰다.

긴장한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드레이와 무덤덤하게 별다른 표정 변화 없는 리사, 그리고 그 뒤에는 율리와 다른 학생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언제든지 몬스터가 출몰할 수 있으니 긴장을 놓지 마."

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알겠어."

"목소리를 낮춰, 율리. 어두운 장소에 상주하는 몬스터들은 귀가 밝아."

리사의 경고에 율리가 입을 가렸고, 드레이는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드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상당히 익숙해 보이네요."

"글쎄,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것들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서요."

"기분 탓이야."

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답을 하고는 정면을 바라봤다.

'가문 덕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산맥을 마주하고 있는 블란테는 지리적 특성 탓에 늘 몬스터와 밀접한 삶을 살고 있었다.

빈번하게 습격하는 몬스터들, 그리고 겨울철이 되면 정기적인 토벌까지 나섰다.

그렇기에 어릴 때부터 몬스터의 습성에 관해서는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다.

자연스럽게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블란테의 기사들은 몬스터에 관해서는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묘한 시선으로 리사를 바라보던 드레이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어둠을 응시하던 드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 동공은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방에 몬스터가 있습니다. 아마... 코볼트로 보이는군요."

리사가 황당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드레이를 바라봤다.

"저 어둠 속이 보인다고?"

"네. 제가 눈이 좀 좋습니다. 한센 씨, 라이트 마법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드레이가 고개를 돌려 마법사 학생에게 부탁했다.

"아, 알겠어."

한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눈을 감고 라이트 마법을 위한 구절을 읊조렸다.

"빛이여 어둠을 밝혀라. 라이트(Light)."

영창을 하자 이윽고 허공에 빛의 구가 형성됐다. 눈부실 정도로 밝지는 않았지만, 어둠이 어느 정도 걷히는 빛이었다.

크크릉.

야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코볼트 한 마리가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코볼트야."

코볼트를 발견한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리사의 얼굴이 획 하고 돌아가 드레이를 바라봤다.

'...얘 뭐야?'

◈ [96화] 리치 베오드라도 (2)

동굴의 심층부.

몬스터, 인간, 동물들의 뼈로 이루어진 의자 위에 베오드라도가 앉아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안구 대신 붉은 안광이 타오르는 것처럼 흔들렸다.

베오드라도는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다.

'불편한 옷이군.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본신의 힘을 모두 끌어낼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그는 힘의 제약을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것이다. 베오드라도는 이곳에 현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벌레 같은 것들.'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동굴을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인간들의 기운이.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터져 죽을 가련한 생명체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본능에 자리 잡은 혐오감만이 스멀거렸다.

'아니지, 지금은 오히려 훌륭한 오락거리구나.'

현신했다는 사실에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 해소책이 바로 저 벌레들이었다.

'같잖은 경고는 들었으나....'

레벨린이라는 이름의, 말을 잘 듣는 벌레가 한 조언.

한 인간을 조심해라.

'주제넘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베오드라도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평소의 그라면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벌레를 터트려 죽였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는 않았다.

'건방지긴 하나... 쓸 만한 녀석이니까.'

온전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만한 실행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순조로운 모양이군.'

던전 곳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베오드라도가 안배해 둔 것들이다.

'더욱 큰 절망을 주기 위해서는 적당한 희망도 필요한 법이지.'

무료함을 달래 줄 오락거리를 허무하게 망가뜨리면 재미가 없을 터.

'슬슬 하나 더 준비를 해 주마.'

베오드라도가 손을 들자, 불길한 검은 기운이 손에 밀집되었다.

그는 손에 모인 죽은 마나를 빚어 무언가로 만들어 냈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라."

빚어낸 것에 명령하자 그것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듯 자취를 감췄다.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해 줬으면 좋겠군."

베오드라도의 안광이 흔들렸다.

* * *

"전방에 고블린 두 마리. 후위는 마법의 영창을 준비하고, 한 명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세요. 전위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세요."

순식간에 지시 사항들을 내뱉은 드레이가 검을 들었다. 그의 검에는 푸른 피가 묻어 있었다. 코볼트의 혈흔이었다.

리사도 검을 뽑아 고블린을 처리할 준비를 마쳤다.

'이 녀석 진짜 뭐지?'

평소에는 맹한 인상을 주던 드레이는 실전에 돌입하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과 망설임 없는 지시에 동급생인 학생들도 드레이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반장이라는 타이틀이 아닌, 드레이의 리더십에 매료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눈이 좋다고 평가할 게 아니야.'

라이트가 주변을 밝히자 미약하게 보이는 몬스터의 윤곽.

솔직히 구분할 수 없었다.

형체는 흐릿하게 보였으나,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리사는 시력이 좋은 편이었다. 검을 다루는 게 주특기였지만, 뛰어난 시력으로 활도 곧잘 다뤘다.

'밤눈이 밝다는 말은 이상하잖아.'

그것도 밝은 달이 뜬 날, 달빛에 의존할 수 있을 때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드레이는 무언가 달랐다. 이건 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추궁할 수도 없고....'

밝히지 않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리사는 추궁 대신에 검을 들었다.

* * *

좌측 통로로 입장한 학생들이 전진하고 있었다. 앞줄에는 겁에 질려 몸을 떠는 학생들이 있었고, 후위에는 로만과 그의 무리가 있었다.

로만을 중심으로 구성된 무리는 좌측으로 이동한 학생들 사이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에단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팔짱을 낀 채 따라갔다.

로만이 힐끗 뒤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놈.'

에단을 흘겨본 로만이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아카데미를 노릴 속셈이었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오늘이 너의 마지막일 테니까.'

블란테의 후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레벨린에게서 전해 들은 계획은 그런 사소한 일들을 모두 무마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방향에 따라 계획이 달라진다고 생각했겠지만, 잘못 생각했어.'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거만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완전히 뒤바뀔 것을 상상하니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툭.

그때 앞 사람이 멈춰서며 로만과 부딪쳤다.

앞을 바라보니 먼저 나아가던 학생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만이 얼굴을 구겼다.

"뭐 해? 앞으로 안 가고!"

"하, 하지만... 앞이 어두워서...."

"그러면 마법을 써! 머저리같이 머뭇거리지 말고."

"하지만 마력을 아껴야 하잖아...."

"내 말 못 들었어? 몬스터는 우리가 처리한다고."

"...."

겁박하는 말투로 으르렁거리는 로만의 말에 기가 죽은 학생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에단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권력에 취해 있군.'

원작에서 로만은 던전 탐사에서 큰 사고를 치고, 그 사고를 권력으로 덮으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사고가 아니겠지.'

적어도 그 사고는 로만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성향과 안일한 행동이 겹쳐서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로만의 행동을 보면 그 상황과 달랐다. 무언가 특별한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감추지도 않고 노골적이란 말이지.'

하지만 에단은 그것에 응했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보도록 할까.'

값은 그 뒤에 치르고.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 * *

로만 패거리의 강요로 선두에 선 힘없는 학생들은, 처음과 다르게 점점 더 발걸음이 과감해졌다.

몬스터들이 등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학생들이 빛을 거둬도 매한가지였다. 한참을 걸어도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고 긴장한 학생들은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리가 길을 잘 선택했나 봐...."

"와.... 다행이야...."

"아니면 우측으로 간 녀석들도 우리랑 같은 상황인 거 아니야?"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뭐야, 괜히 긴장했잖아."

긴장이 풀리자, 학생들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에단의 생각은 학생들과 달랐다.

― 뭔가 이상하구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생각한다면 이 지역에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흔적'도 존재해서는 안 됐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주변을 훑었다.

'죽은 나무'라는 능력을 얻고, 죽은 마나를 흡수한 에단은 남들보다 밤눈이 밝았다.

하여 얼마 전까지 몬스터가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들이 그의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미세한 발자국, 털, 머리카락, 바위에 새겨진 상흔, 체액.

그런 흔적들이 눈에 밟히고 거슬렸다.

'찜찜하군.'

에단의 감각은 예민했다. 그리고 예민한 감각은 언제나 얼추 맞았다.

쿵, 쿵.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동굴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만나 메아리치듯 공명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학생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모, 모르겠어...."

"라이트라도 비춰야 하는 거 아니야?"

"...로만, 어떡하지?"

선두에 서 있던 학생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로만을 바라봤다. 로만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너희가 먼저 확인해야 우리가 움직일 거 아니야. 안 그래?"

로만이 고개를 돌려 패거리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너희들 여기 놀러 왔어? 아니면 날로 먹으려고 하냐? 우리가 처리해 준다고 하잖아. 그러면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이 다르잖아."

"뭐라고? 미쳤냐?"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총체적 난국이군.'

권위 의식에 찌든 로만의 모습에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들이 문제가 아니네.'

에단이 정면을 응시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갑주가 움직이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경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투구 사이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사특하고 음험한 기운.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마나와 흡사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이질적인 기운.

에단이 앞으로 나아갔다.

"빨리 앞으로 안 가?!"

에단은 동급생에게 살벌한 협박을 하고 있는 로만의 뒤통수를 후렸다.

빠악!

"크윽! 어떤 개...."

로만이 고개를 돌렸지만, 뒤에 있는 사람이 에단인 것을 알아채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지. 꼬우면 교수하라고."

에단이 로만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봤다. 로만의 얼굴에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짜증과 분노로 점철된 얼굴이었다.

'얘는 아닌가 보군.'

눈앞에 저 살벌한 녀석은 아무래도 로만이 준비해 둔 놈이 아닌 모양이었다.

― ...조심하거라.

'전 언제나 조심하죠.'

에단이 몸을 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에 가 있어라. 다친다."

피식 웃은 에단이 앞을 바라봤다. 흐릿하던 녀석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났다.

소름 끼치는 기운을 뿜어내는 묵빛 갑주.

― ...데스 나이트.

페온이 침음을 삼켰다.

'역시 원작이랑 다르군.'

원작에서 등장한 언데드는 데스 나이트처럼 고위 언데드가 아니었다.

주인공의 양분이 될 만한 적당한 수준의 녀석들.

'후반에나 등장할 새끼가 머리를 들이밀고 있어. 짜증 나게.'

피부가 저릿했다. 에단의 감은 예리했고, 하여 저 갑옷덩어리가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주의해라. 쉬운 상대가 아니야.... 만일 위급하다면....

'설레발놓지 말고 지켜보시죠.'

에단이 웃었다.

그는 강자와의 대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의 싸움은 에단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에단은 늘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 왔다.

카론, 모룬, 벨몬트, 야수화한 휴고, 블랙 오우거, 에밀라.

모두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한 적들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늘 승리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데스 나이트의 힘.

에단은 그 감각이 좋았다.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자살행위를 하는 취미는 없거든.'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결과를 알 수 있는 싸움은 시도하지 않는다. 그건 오만이고 만용이었으니까.

네이드, 첸, 빈센트.

아직 에단이 넘보기에는 과분한 거물들이었다.

에단은 욕심이 많았으나, 후일을 도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정도 급은 아니거든.'

상대의 힘을 가늠하는 것.

그건 본능의 영역이었다. 에단이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는 손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에단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휘었다.

"준비됐어? 난 준비됐는데."

― ....

"아, 대답을 기대하고 한 소리는 아니야. 어차피 말도 못 하잖아."

― ....

죽음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칠흑처럼 검은 검신에 어두운 마나가 넘실거렸다.

"...화났냐?"

쪼다 같은 새끼.

◈ [97화] 리치 베오드라도 (3)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은 갑주의 기사.

데스 나이트.

원작에서도 수차례 언급된 몬스터다.

언데드 계열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녀석.

― 평범한 데스 나이트가 아니니 방심하지 마라.

페온이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데스 나이트 정도 되는 녀석이 지금 시점에 등장하다니.'

레벨린과 로만.

그 둘의 의도가 느껴지는 노골적인 함정.

무언가 준비를 해 뒀으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데스 나이트였다니.

데스 나이트는 만들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뛰어난 경지에 오른 기사의 시체가 준비물이라 재료 준비부터 난이도가 높다.

심지어 경지에 이른 기사의 정신력은 강철과도 같아 언데드로 만들기 더욱 어려웠다.

하여 뛰어난 경지에 올랐으며, 원한을 품은 채 목숨을 잃은 기사가 필요했다.

'심지어 제련 과정도 보통이 아닐 텐데.... 뭐 가능하기야 하겠군.'

레벨린의 뒷배가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 시기에 데스 나이트가 나타났다는 게 놀라울 뿐.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풍기는 분위기와 느껴지는 압박감.

― 그 칼쟁이 교수보다 강하다.

'알고 있습니다.'

눈앞에 데스 나이트는 에밀라보다 강했다.

에밀라를 상대로 얻어 낸 승리도 페이크와 허초, 그리고 가진 아이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무기들로 에밀라의 흐름을 끊어 얻어 낸 승리.

물론 그 역시 에단의 실력이었지만, 경지와 역량만 놓고 본다면 에단이 밀리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뭐 언제는 쉬웠나?'

에밀라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

주인공이라면 어렵지 않은 상대일 수도 있었다.

용사의 축복과, 언데드와 상극인 '희망'이라는 룬어.

아이러니하게도 에단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뜻하는 룬어를 지니고 있었다.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군.'

당장은 아껴 둬야 할 패였다. 룬어는 그 반작용이 상당히 강하니까.

'다른 무기도 있지.'

하지만 에단도 언데드와 상극인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에단이 비릿하게 웃으며 데스 나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탐색전은 여기까지만 하지?"

에단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그가 애용하는 투박한 철검이었는데, 사실상 연습용 검이었다.

'명색이 검술 가문 아들내미인데, 검 하나 바꿔야겠군.'

뭐, 여기를 무사히 통과한다면 검이 자연스럽게 딸려 오겠지만.

통통.

에단이 가볍게 스텝을 뛰며 검을 왼손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손은 허리춤에 가져갔다.

마치 펜싱을 하는 듯한 자세.

'훈련 캠프 때 펜싱하던 애한테 심심풀이로 배운 걸 써먹게 됐네.'

배웠다고 하기도 민망한,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 하는 정도였지만, 에단의 재능은 한 번 본 것도 그럴싸하게 흉내 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펜싱은 일반적인 검술이랑은 궤를 달리하는 현대의 스포츠다.

'하지만 탐색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잽과 같은 펀치보다 월등히 긴 사정거리라면 초반의 탐색전으로는 충분할 터.

검을 뽑아 든 데스 나이트가 검을 지면에 대고 끌면서 에단을 향해 걸었다.

기기기긱.

바닥에 닿아 끌리는 검에서 불쾌한 소음이 나며 불똥이 튀었다.

데스 나이트의 행동은 마치 에단을 비웃는 것 같았다.

"분위기 더럽게 잡네."

에단이 웃었다.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탓!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단련을 거듭한 에단의 몸은 신속했다.

쐐액!

에단의 검이 데스 나이트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근접한 에단의 검에도, 데스 나이트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 흉포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 조심해라!

쿠구구구!

"옘병!"

왼손에서 압도적인 반발력이 느껴졌다. 에단의 신체 능력은 범인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뛰어난 육체적 재능, 블랙 오우거의 특성, 더불어 마나의 컨트롤.

모든 걸 적절히 조합할 줄 아는 이가 에단이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가 뿜어낸 기운은 그런 에단의 일격을 밀어낼 만한 것이었다.

당혹감에 젖은 듯 보이는 에단의 얼굴.

"큰일 났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에단의 입꼬리가 휘었다.

"그런 건 너만 쓸 수 있어?"

스스스스스!

데스 나이트가 뿜어낸 검은 기운. 에단에게는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데스 나이트는 언데드였고,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은 죽은 마나였다.

에단은 죽은 마나를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죽은 나무.'

벨몬트, 블랙 오우거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포악하고 강렬한 기운. 그 위압적인 기운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에단이 뒤를 힐긋 바라봤다. 학생들이 몸을 벌벌 떨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기절한 학생들도 보였다.

유일하게 웃고 있는 한 명.

바로 로만이었다.

"너는 끝나고 보자."

아주 뒈질 줄 알아.

에단이 다시 상대에게 집중하며 내면에 있는 힘을 끄집어냈다.

키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자신의 양분을 발견하자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무형의 기운이 번져 나갔다.

― ...무슨 무모한 짓을.

'일단 지켜보고 있으시죠.'

자신이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이따위를 무서워할 것 같아?'

에단이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쿠구구구구―

죽은 나무의 기운이 마치 올가미처럼 데스 나이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데스 나이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힘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늦었어, 새끼야!"

에단이 데스 나이트의 마나를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 마음껏 먹어 치워라.'

데스 나이트의 검이 에단의 목을 노리고 그어졌다.

에단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곤두서 있었다. 붉게 충혈된 에단의 눈이 데스 나이트의 검을 응시했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에단이 목을 젖히며 피하는 대신 몸을 숙였다.

타앙!

에단의 몸이 탄환처럼 쏘아졌다. 절묘하게 들어간 타이밍 태클이었다. 양쪽 다리를 붙잡는 투 레그에서 원 레그로 물 흐르듯이 옮겨졌다.

데스 나이트가 빠르게 반응하며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에단의 목적은 데스 나이트를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에단이 뱀처럼 움직였다.

중심을 잡기 급급하던 데스 나이트는 순식간에 등을 내줬다.

에단이 데스 나이트의 백 포지션을 잡고 등 위에 올라탔다.

"위험한 물건은 먼저 내려 두지?"

손에는 아직 검이 들려 있었다.

콰직!

에단의 검이 데스 나이트의 팔을 찍어 냈다.

이때도 반발력은 느껴졌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어쭈, 버텨? 그래 한번 계속 버텨 봐!"

콰직! 콰직!

등에 올라탄 채 수차례의 공격을 지속하자, 데스 나이트의 갑옷이 넝마가 되며 그가 결국 검을 놓쳤다.

이를 본 에단이 망설임 없이 검을 집어던졌다. 넝마가 되기는 에단의 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은 이미 제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꽈아악!

에단의 팔이 데스 나이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초크야 먹히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뒈지는 건 똑같잖아?'

에단이 달라붙자, 죽은 나무의 기운이 기회를 포착한 듯 더욱 게걸스럽게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리어 네이키드 초크(Rear Naked Choke).

본래라면 상대의 경동맥을 압박해서 기절시키는 기술이었지만, 상대는 데스 나이트였다.

피가 흐르지 않고, 숨을 쉬지 않는 죽음의 기사.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경동맥을 조르는 대신 죽은 마나를 흡수하면 그만이다.

데스 나이트가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에단을 떼어 내기는 쉽지가 않았다.

'단순히 힘만 세다고 풀 수 있을 것 같아?'

제대로 걸린 백 초크는 블랙 벨트의 주지떼로도 풀기 힘들었다.

아니, 완벽하게 그립이 완성되었다면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반면 에단은 블랙 벨트의 주지떼로도 압도하는 주짓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블랙 오우거 수준의 근력을 지녔고, 죽은 나무의 힘으로 데스 나이트의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상황은 에단에게 유리하게끔 반전되었다.

"어때, 다리가 풀리는 기분은?"

에단이 데스 나이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성이 없는 언데드였지만, 마치 몸을 떠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꽈악!

데스 나이트의 손이 에단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에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발버둥 쳤지만, 허사였다.

죽은 나무는 여전히 데스 나이트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고, 데스 나이트의 생명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를 약 올리는 에단의 상황도 악화되어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에단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급작스럽게 밀려드는 죽은 마나로 인해 내장이 짓뭉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에단이 치아가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내가 질 것 같아?"

어디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어 봐.

죽은 마나는 쉴 새 없이 힘을 흡수했고, 마침내 데스 나이트의 기운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모든 힘을 잃고 텅 비어 버린 갑주가 된 데스 나이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쿵!

묵빛의 갑주가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떨어진 갑옷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에단이 자연스럽게 그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엎어지지 않고, 한쪽 무릎과 팔로 지면을 짚었다.

에단의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허용치를 넘어서는 기운을 억지로 흡수한 반작용이었다.

눈과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에단의 팔이 벌벌 떨렸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빨리 몸을 추슬러야 한다!

페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에단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시끄럽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과식해서 체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에단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충격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교, 교수님.... 괜찮으신 건가요?"

"다들 비켜 있어."

"...네?"

에단은 맹렬한 눈빛을 하고는 비틀거리면서 로만을 향해 다가갔다.

로만의 몸이 굳어 있었다.

'괴, 괴물이야....'

로만은 거만하고 오만했지만, 안목이 없지는 않았다.

방금 에단의 모습.

데스 나이트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쓰러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육박하는 괴물이 바로 데스 나이트였다. 아무리 에단이 블란테의 적자이며 일신의 무력도 대련을 통해 증명했다고 한들, 데스 나이트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데스 나이트가 나오는지도 몰랐어!'

레벨린을 통해 대략적인 언질만 들었을 뿐이다. 마크와 로만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계획 또한 완벽에 가까웠다.

데스 나이트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며 등장할 때 로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순식간에 에단을 쳐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반대로 흘러갔다.

에단은 데스 나이트를 정면에서 깨부쉈다.

게다가 지금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은 마치 무저갱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의 모습 같았다.

눈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로만에게 다가간 에단은, 로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들 비켜."

에만의 말이 떨어지자, 얼어붙어 있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로만 곁에서 떨어졌다.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패거리도 거리를 벌렸다.

"내가 이따 보자고 했지?"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 [98화] 리치 베오드라도 (4)

터벅터벅.

피가 뚝뚝 흐르는 에단의 모습은 마치 악귀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로만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자, 잘못 건드렸어.'

에단이 하찮은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멈춰야 했다.

아니, 그전에 에단과의 승부에서 패배했을 때 승복해야 했다. 분노에 이성을 잃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선택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직 갈기도 채 나지 않은 어린 사자라 여기고서 얕보고 말았다. 에단은 어린 사자가 아니라 교활하기 그지없는 다 큰 사자였다.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었고, 로만은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에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와 흡사한 사납고 거친 음성이었다. 목소리에서 에단의 감정이 느껴졌다.

로만은 입을 다물었다. 변명 따위가 통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었고.

후웅!

이내 주먹이 로만의 얼굴 앞에 당도했다. 강한 풍압이 로만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여기서 뒈질래, 아니면 전부 깔래?"

"전부 말하겠습니다."

로만은 일말의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 * *

"...그 말이 사실이라고?"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에단은 레벨린의 성향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뒷배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면 데스 나이트가 전부가 아닐 터.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로만의 동공이 흔들렸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로만을 궁지로 몰아세웠다. 에단은 말없이 로만을 응시했다.

'오판했어.'

자신도 안일하게 생각했다. 눈에 훤한 함정이라 여겨 로만을 얕잡아 봤다.

하지만 등장한 데스 나이트는 에단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했다.

짜증이 일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반대쪽 학생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판단은 내가 하지 않을 거야."

에단은 로만을 학생들의 몫으로 남겨 둘 생각이었다.

에단의 손날이 로만의 뒷목을 가격했다.

빠악!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로만의 눈이 뒤집혔다. 에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로만을 바라봤다.

'이게 실제로 되는구나.'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말을 마친 에단이 들어왔던 길을 바라봤다.

'내가 갈 때까지는 버텨라.'

녀석이라면 잠깐은 가능하다.

특히 상대가 그쪽 계열이라면 잠재력은 더욱 폭발적일 것이다.

* * *

푸욱.

살을 꿰뚫은 섬뜩한 소리. 드레이는 몬스터의 목을 관통한 검을 끄집어냈다.

촤악!

순식간에 피가 솟구쳤다.

학생들은 입을 다문 채 드레이를 따라갔다.

서걱!

선두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이는 드레이뿐만이 아니었다. 리사도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검이 어둠 속에서 빛나자, 몬스터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리사는 아름다웠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검무에 붉은 피가 꽃처럼 피어났다.

"...리사가 저 정도였어?"

"나도 모르겠어...."

율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리사가 멀게만 느껴졌다. 율리는 리사의 옆을 힐긋 바라봤다.

하나하나 몬스터를 도살해 나가는 드레이.

여러 몬스터를 한 번에 처리하는 리사와 비교하면 초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드레이에게 더욱 쏠렸다.

드레이는 존재감이 옅은 학생이었다.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신을 과시하지 못해서 안달인 로만과는 전혀 상반되는 케이스였다.

최근에 에단에 의해 반장이 된 이후 학생들의 주목을 조금 받게 되었지만, 이전과 다름없는 행동으로 그 관심도 시들어 갔다.

말 없고, 순한 캐릭터.

그게 드레이였다.

하지만 오늘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드레이와 전혀 달랐다.

실력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의 움직임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공격을 피하고 다가가 찌른다.

지극히 단순한 일련의 동작이지만 드레이는 그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렇기에 학생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런 감상을 느끼기는 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의 머릿수를 주도적으로 줄이는 쪽은 리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드레이에게 기가 눌렸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리사도 드레이를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검술 수업 때 몇 번 검을 겨룬 적은 있었다. 그때마다 리사의 감상은 똑같았다.

'실력은 괜찮네.'

기본기가 탄탄한 녀석.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리사는 눈이 높았다.

평생을 보고 자라온 게 블란테의 기사였으니, 당연히 보는 눈이 높아지고 평가가 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리사는 전혀 다른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드레이의 검이 리사의 옆을 지나갔다.

키, 키에엑....

고블린 하나가 목이 관통당한 채 쓰러졌다.

"조심하시죠."

드레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향했다. 어둠은 짙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드레이가 뒤를 돌자, 학생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라이트 좀 켜 줄 수 있을까요?"

그의 말에 라이트 마법이 발현되었고, 이내 학생들은 드레이와 리사를 앞세워 더욱 깊은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드레이의 옆으로 리사가 따라 걸었다.

앞을 보며 걷던 드레이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리사에게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어. 고블린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

"아, 그렇습니까?"

"...너 반응이 그게 뭐야?"

리사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드레이는 리사의 말을 들은 시늉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말을 잘 못 합니다."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어? 아니잖아. 원래 좀 맹하고 멍청하고, 말도 없고...."

"...그 정도였나요?"

드레이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야. 단지... 조금 의외라서."

"뭐가 의외죠?"

"몬스터 상대하는 거. 어릴 때부터 해 왔어?"

"네, 뭐...."

드레이가 더 이상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기색이기에 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던 학생들 사이에도 침묵이 감돌았다.

'또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군.'

입맛이 썼다.

불편함이 싫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사람들이 자식을 의식하는 것이 버거웠다.

아카데미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을 뽐내는 또래 학생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과 다른 것을 보면 동경과 선망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드레이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조금 힘들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드레이는 서글픈 웃음을 지은 채 동굴로 전진했다.

드레이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이상해.'

이건 실전이기도 했지만 엄연한 수업이었다. 학생들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던전 탐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몬스터를 살상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너무 얼어 있어.'

드레이가 뒤를 돌아보자, 겁을 집어먹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아카데미에는 엘리트들만 모여 있었다.

던전 탐사가 처음이면 모를까, 이 정도로 겁을 먹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야생 동물이 사전에 위험을 감지하는 것처럼.

이건 인지의 영역을 뛰어넘는 본능의 영역이었다.

'나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나 보군.'

그래서 선두를 자처하고, 이전에 드러내지 않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드레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이다.

앞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애초에 아귀가 맞지 않아.'

교수가 참관하지 않는 던전 탐사라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드레이가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제외한 다른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학생들뿐이었다.

'애초에 학생들을 나눈다고? 뭐 때문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야, 너 왜 그...."

갑자기 멈춰 선 드레이를 향해 리사가 물었다. 드레이의 상태가 이상했다.

드레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집중하고 있는 오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이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격렬한 거부감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었다. 강렬한 두통도 동반되었다.

드레이가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리자, 리사가 다급하게 부축했다.

"야, 너 갑자기 무슨...."

"피해야 합니다."

대항은 불가능하다.

상대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수준의 죽은 마나가 느껴졌다. 이는 누구보다 드레이가 잘 알았다.

불길하고 섬뜩한 기운이었다.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감히 예측도 할 수 없었다.

그 존재는 스스로를 숨기고 있음에도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던전 탐사?'

웃기는 소리.

이건 자살행위다. 어느새 드레이의 팔에는 닭살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다들 도망...!"

그 순간, 드레이만 느꼈던 기운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쿵!

분명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모두 무언가 내려앉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라이트가 꺼지며 심연 같은 어둠이 그들을 덮쳤다.

"뭐, 뭐야!"

"라이트가 꺼졌어!"

"빨리 켜!"

혼란이 퍼져 나갔다. 드레이가 급하게 몸을 돌려, 전방에서 느껴지는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돌발 상황에 당황하기는 리사도 매한가지였다. 리사도 감각이 뛰어나 드레이와 똑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리사는 블란테의 적통이었다. 뛰어난 기사들과 함께 수련하며 성장했으며 그곳에는 첸과 빈센트 같은 괴물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리사는 상대방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도망가야 한다.

승산이 없다. 이길 수 없다.

에단과 맞붙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상이었다. 에단은 단련된 무인의 분위기를 풍겼지만, 충분히 겨뤄 볼 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가슴을 옥죄는 듯한 두려움이 치밀어 올라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내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 허억!"

"끄, 끄윽.... 나 갑자기 숨이...."

"리, 리사! 어디 있어?"

학생들이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며 하나둘 바닥에 엎어졌다.

그중에서 리사에게 익숙한 율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율리! 잠깐...."

"멈추세요."

드레이가 손을 들어 리사를 막아섰다. 리사가 자신을 막아서는 드레이를 향해 분노를 토해 내려다 참으며 말했다.

"왜 막아서는... 뭐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려져야 할 드레이의 모습이 리사의 눈에 들어왔다.

착각이나 환영이 아니었다.

드레이의 머리칼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 [99화] 함정 (1)

성인(聖人).

단어 그대로 신성한 사람을 칭한다.

교국에서 공표하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

제아무리 신실한 사제의 신성력도 성인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반쪽짜리 성자.'

드레이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었다.

진정한 성자는, 아니, 성녀는 지금 신성 왕국이 보호하고 있었다.

드레이는 성녀의 친오빠였다.

두 남매는 가난했다. 화전민 출신으로 하루하루를 빌어먹기도 버거웠다.

어릴 때 두 부모를 여의고 둘은 힘겹게 살았었다.

하지만 둘의 외향은 특별했다.

두 사람의 머리칼은 찬란한 금발이었다. 물론 금발인 사람은 꽤나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남매의 금발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특이하다 못해 특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금발.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녀의 머리에는 윤기가 흘러넘쳤다.

화전민의 삶은 궁핍하기에 두 남매의 몸은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몸이 그 정도로 야윈 상태라면 머릿결도 푸석푸석하고 거칠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리칼은 언제나 화사하게 밝은 빛을 뿜어냈다.

본래 사람은 자기와 다른 존재를 밀어내기 마련이라, 남매는 그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하여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을 잃은 남매는 서로를 더욱 의지하며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새하얀 사제복과 백색의 갑옷을 입은 무리가 화전민의 마을을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했다.

저런 높으신 분들이 여기에는 무슨 볼일로 찾아왔나 싶어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들은 화전민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용무는 드레이 남매에게만 있었다.

남매를 발견한 중년 사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 오... 신이시여....

감격한 표정으로 기도하는 사제의 뒤로 기사들이 차례차례 무릎을 꿇고 따라 기도했다.

드레이는 당황했고, 동시에 겁먹었다.

당시의 드레이는 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드레이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드레이가 앞에 섰고, 여동생은 바들바들 떨며 뒤에 숨었다. 작은 몸집의 소년이 작은 몸집의 소녀를 지키고 있었다.

사제는 인자하면서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 성인(聖人)을 뵙습니다.

그 이후로 남매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하고 처절한 삶이 아닌, 호화스러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는 족쇄가 채워졌다.

성자와 성녀라는 족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족쇄의 무게는 달랐다.

드레이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었다. 신성력이라는 그들이 추앙하는 힘은 그의 여동생이 훨씬 많이 지니고 있었다.

드레이는 성자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동생과 같은 점이라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뿐이었다.

드레이가 성자의 수준에 걸맞지 않은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제들은 드레이를 향한 대우를 달리했다.

핍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관심을 거뒀을 뿐.

그 탓에 그들의 관심은 오롯이 드레이의 여동생을 향했다. 드레이는 그 덕에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그들의 간섭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매사 그들의 통제하에 움직일 수 있었으며, 여동생은 갈수록 점점 자아를 잃어 갔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추앙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드레이의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은 점차 그들이 원하는 인형이 되어 갔다.

드레이는 그런 여동생을 구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족쇄의 크기가 달라졌을 뿐, 드레이에게도 성자라는 이름의 족쇄가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드레이는 탈출을 감행했고, 성공했다.

예상외로 추격은 없었다. 그들이 드레이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 드, 드디어 탈출했어. 이제 거기는 끝이야!

호화롭고 풍족한 생활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하지만 드레이는 궁핍한 삶이 더 행복했다.

신성 왕국에서의 삶은 감옥이며 지옥이었다. 하지만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여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심한 간섭을 당하지 않던 드레이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는데,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통제를 매 순간 받는 여동생은 어떠하겠는가.

드레이는 여동생의 표정을 기억했다.

인형이나 다름없는 얼굴.

빠드득.

드레이는 이를 갈았다.

성인의 상징인 금발을 염색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드레이는 지식이 필요했다. 신성 왕국에서 배운 것들은 편협한 지식이었다.

신성 왕국은 '신'이라는 이름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왕국과 제국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여동생을 구출하려면 힘과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없었고,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천운이었다.

신성 왕국에서 배운 검술과 지식이 아니었다면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을 터.

아무리 학생들 사이에서 인맥을 만들어도 신성 왕국과는 대적할 수 없었다.

신성 왕국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모두 일관된 사고방식이었기에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대륙의 주신은 하나였다.

그러니 그들이 신성 왕국을 적대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던 드레이에게 변화가 생겼다.

에단은 무언가 달랐다. 비록 평민 출신의 교수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부터 다른 교수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존재감을 최대한 숨기던 자신을 알아봐 주었고, 이번 던전 탐사 때도 팀 리더로 보냈다.

'그 사람만 있다면....'

그때 머리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며 격렬한 통증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화르르륵!

불행의 원인이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제 색채를 되찾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칼이 흩날렸다. 드레이의 의지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사악하고 불길한 존재를 인식하고 움직인 것이었다.

학생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드레이의 머리칼에서 발산하는 찬란한 황금빛에 이목이 쏠려 모두가 입을 벌린 채 드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가 거슬려 찾아왔거늘... 불쾌한 녀석이 있었구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멍하니 드레이를 응시하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몸이 굳은 것은 뒤에 자리해 있던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정신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리사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쇠사슬로 몸을 칭칭 감은 기분이었다.

"뒤에 있으세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걸까.

드레이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비록 반쪽뿐인 성자였지만, 드레이는 지금 어둠과 대적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터벅.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람의 골격 같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뼈였다. 로브를 걸친 해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섬뜩한 안광은 마치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쁘구나."

그 한마디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리사는 그때 더욱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망쳐야 해.'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지만, 비슷한 기운은 느껴 본 적 있었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격분했을 때였다.

빈센트는 대륙 제일의 검사 중 하나였다.

그렇다는 것은 저 해골이 빈센트와 동등한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누구도 건들 수조차 없는 강함이었다.

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손을 들어 드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에 휩싸이며 진정되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차분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절망적이었다.

"잘 알고 있구나."

베오드라도의 턱이 딱딱거렸다. 마치 비웃는 듯한 모습이었다.

"참 기분 나쁜 족속들이야."

흉흉한 안광이 드레이를 직시했다. 베오드라도가 손을 뻗자, 타오르는 구체가 떠올랐다. 그는 영창도 없이 마법을 구현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파이어 볼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붉은 불꽃이 아닌, 그림자처럼 어두운 불꽃이 구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없어지거라."

심드렁한 목소리였으나 파급력은 엄청났다.

화르륵!

살갗이 벗겨질 것 같은 열기가 동굴에 퍼져 나갔다.

드레이가 뒤를 돌아봤다.

학생들은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리치의 위압감에 기절하거나 몸이 굳은 자들이 대다수였다.

드레이가 검을 들어 올리자, 신성력이 죽은 마나에 대항하듯 거칠게 타올랐다.

마나를 다룰 수 있지만 경지는 미미했다. 그러나 지금 발휘하는 신성력은 마나와는 궤를 달리하는 힘이었다.

꽝!

드레이가 방벽이 되었다. 불똥이 튀면서 검은 화구가 터져 나갔다.

까드득.

드레이가 이를 악물자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리사가 그런 드레이를 바라봤다.

'나, 나는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그녀는 검사였다.

비록 지금은 정체를 숨기고 있었으나, 검술 명가의 혈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드레이의 정체가 누군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사실은 리사가 지금 보호받고 있다는 것.

그녀의 뒤에서는 학생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리사는 사명감과 동시에 책임감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포가 리사의 발을 잡았다. 지금 그들을 지키는 이는 드레이였다.

그때 드레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베오드라도를 도발했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드레이는 두려웠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이겨 내기 위해 공포를 짓눌렀다.

'내가 지켜야 한다.'

드레이는 반장이었다. 에단의 독단으로 떠맡은 자리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드레이는 반장으로서 동급생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나만으로도 벅차던 검은 구체인데, 이번에는 수십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드레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절망스러웠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사는 자신의 손바닥을 검으로 그었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흘렀다.

덕분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도와줄게."

"...리사 씨, 위험합니다."

"리사 씨가 뭐야. 우리는 동급생이야.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뒈지는 건 똑같아."

맞는 말이었다. 드레이는 저 많은 화구를 혼자서 막아 낼 수 없었다.

"...교수님이 올 때까지 버티자."

리사는 평생을 혐오하던 에단에게 희망을 걸었다.

아카데미에서 본 에단은 늘 자신감이 넘쳤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에단이 온다고 한들 상황은 바뀌지 않을 테다. 하지만 어쩐지 에단이 오면 이 절망적인 상황조차 해결해 줄 것 같았다.

베오드라도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귀가 밝았다.

"너희들이 말하는 자가 그 녀석을 가리키는 건가? 하하, 이거 어쩌지. 희망을 짓밟아서 미안하구나."

베오드라도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금쯤이면 아마 다 죽었을 테다. 너희가 길을 선택한 것처럼 나도 길을 택했지. 너희들은 나를 만났으니, 반대쪽은 내 기사를 만났겠군. 아끼는 데스 나이트를 그쪽으로 보냈거든."

리사와 드레이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하지만 리사는 이내 그 감정을 지워 냈다.

"글쎄다?"

"흐음, 애써 강한 척을 하는 건가? 그렇다고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텐데 말이야."

베오드라도의 비아냥에 리사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교수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야."

숨을 들이마신 리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최악의 망나니 새끼거든."

◈ [100화] 함정 (2)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에단이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 교수님께서 가시면 저희는 어떡해요?"

"맞아요! 지원 요청은 하셨어요? 차라리 나가서 지원을 불러요!"

"일단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또 그 괴물이 나타나면 어쩌죠? 교수님도 힘겹게 이겼는데...."

비틀거리던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네? 그게 무슨...."

에단이 무감정한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내가 너희들을 왜 책임져야 하지?"

에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의 본분은 학생들의 안전을 챙기는 것이다. 하지만 동급생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태도에 짜증이 치솟았다.

"교수님이니까 당연히...."

"집어치워. 나는 교수 그까짓 거 안 하면 그만이니까."

"...."

"내보내 달라고? 너희만 나가면 다른 학생들은 그냥 뒈지라는 건가?"

에단이 턱짓으로 쓰러져 있는 로만을 가리켰다.

"이 새끼가 한 말 못 들었어? 걔네 쪽이 여기보다 더 위험해. 잠깐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성자가 있으니 평범한 수준의 언데드라면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 급만 나와도 안 돼.'

데스 나이트와 싸워 보고 깨달았다. 이 녀석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춘 적이 나오면 드레이는 손을 쓰지 못한다.

겨우 버티는 게 고작일 터. 시간이 없었다.

에단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죽은 마나를 과도하게 흡수한 탓에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여야 했다. 학생들을 인솔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판했군.'

안일했다.

갈라진 두 길.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인원을 나누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이 반의 담당 교수 또한 레벨린의 꼭두각시였기에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되었지만, 에단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과 이렇게까지 달라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적을 얕잡아 보았고, 신중하지 못했으며, 내면에 오만함이 자리 잡아 이 사달이 난 거다.

'아직 멀었는데 말이야.'

에단의 경지는 아직 미약하다. 그런데도 자신감이 과했다. 에단은 방금의 싸움으로 그 사실을 여실히 느꼈다.

"몬스터는 더 안 올 거다."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에단의 감각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근처에서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 말을 어떻게...."

"걱정되면 알아서 나가. 이미 지나온 길이잖아."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도 알고 있었지만, 공포에 휩싸여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에단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기사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에 온 것 아니었나?"

"...."

학생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에단은 혀를 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큰한 고통 때문인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최악이군.'

이래서 싸울 수나 있을까?

에단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불가능해.'

지금의 몸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제대로 운신하기조차 힘들었다.

'그걸 가지고 온다고 하면?'

에단이 이 사건을 기다린 이유. 그 무기를 들고 오면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다.

'안 돼. 시간이 없어.'

하지만 그러면 늦을 가능성이 높았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에단은 발을 움직였다.

발이, 온몸이 무거웠다. 의지를 충실히 수행하던 깃털 같은 몸이 아니었다.

전신이 물먹은 수건, 아니, 쇳덩이 같았다. 속이 들끓으며 열이 펄펄 나고 있었다.

― ...잠시 멈추어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멈춰요. 빨리 가야지.'

― 어차피 이대로면 얼마 가지도 못해. 너는 너무 무리했어.

'알고 있습니다. 무리는 일상이죠.'

― 농담할 상황이 아니다.... 위험한 방법이지만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그게 무슨....'

― 이렇게 위험한 편법을 알려 주게 될지는 몰랐지만.... 일단 몸에 있는 기운을 흡수해야 한다.

이 기운을 흡수해?

에단은 자신의 몸에서 사납게 날뛰는 죽은 마나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억누르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가능합니까?'

― 확신하진 못한다. 아니, 오히려 잘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봐야지. 하지만... 이대로 가면 결과는 정해져 있어.

'알겠습니다.'

― 먼저 자리에 앉아라.

페온의 목소리는 침중했다.

* * *

에밀라는 며칠째 수업을 배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인력은 넉넉한 편이 아닌 데다, 교수 몇은 용무를 보기 위해 휴가도 냈다.

본래라면 쉴 틈 없이 수업을 진행해야 했을 에밀라는 며칠째 정원만 걷고 있었다.

심지어 담임으로 있는 반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건 명백한 견제였다.

'알고 있는 건가....'

레벨린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고 확신한 에밀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밀라는 레벨린을 가족으로 여겼다.

사람을 향한 불신을 레벨린이 치유해 줬기에, 에밀라는 그녀를 그 누구보다 믿고 따랐다.

하지만 그 무한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단을 만난 것이 첫 시작이었다. 에단은 그녀에게 의심에 씨앗을 심어 뒀다.

의심의 씨앗이 싹트자,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나를 속인 건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부모라고 여기던 존재가 그동안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니.

혼란스러웠고,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그러한 감정이 들며 에밀라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때 에단이 교수로서 아카데미에 찾아왔다. 에단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망설이지 않았다.

에밀라는 그런 에단이 신기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에단의 행동에서는 신중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들이박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의 의도대로 모든 일이 흘러갔다.

'...나랑은 달라.'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가문을 등에 업은 채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에단은 스스로를 믿었다. 에밀라는 그런 마음가짐이 낯설었다.

반대로 에밀라는 언제나 본인에게 의구심을 품었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그저 인형처럼 살아왔다. 스스로 생각을 할 필요도,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구원자라고 생각했던 레벨린과 만난 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에밀라의 자아는 지워진 채 레벨린의 의도대로 움직였으니까.

'...레벨린을 의심하라는 말이 사실이었어.'

에단의 말을 의식하고 레벨린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눈에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레벨린도 자신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에밀라는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에밀라 교수님."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간 믿고 동경하던 목소리였으니까.

에밀라가 자리에 멈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레벨린 님...."

에밀라의 앞에는 레벨린이 서 있었다.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지금은 딱딱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에밀라의 가슴이 아려 왔다.

레벨린의 표정을 보며 에단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방황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요."

레벨린의 눈이 에밀라를 응시했다.

깊고 맑은 눈이었다. 에밀라는 그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오판했습니다. 그런 자와 어울리게 해서는 안 됐는데 말이죠."

"...."

레벨린이 말하는 자가 누군지 알아차린 에밀라가 침묵했다.

에밀라가 시선을 돌렸다. 레벨린을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에밀라가 바닥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동안 저를 이용한 건가요?"

에밀라가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레벨린은 한참 동안 에밀라를 바라봤다.

"...정말 암시가 풀렸네요."

"...!"

레벨린이 말한 순간 에밀라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그간 모든 게 전부...."

레벨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묵묵히 에밀라를 바라보던 레벨린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밀라는 그 미소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요. 방해꾼은 사라졌으니, 다시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방해꾼이 사라졌다니...."

"당신을 망친 그 사람. 지금쯤 죽었을 거예요."

그 순간 에밀라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녀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에단 씨 말인가요?"

"네. 그자 때문에 힘들어하던 것 아니었나요?"

레벨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블란테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하하, 역시 정말 순수하시군요."

레벨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 낸 그녀가 에밀라를 응시했다. 레벨린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일련의 일은 모두 에단의 독단으로 처리할 겁니다. 만용을 부린 교수와 희생당한 학생들이라고 말이죠. 명분이 우리한테 있으면 제아무리 블란테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죠."

맞는 소리다.

아무리 블란테가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무력 집단이라고 하여도 타당한 명분 없이 무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대륙의 연합체인 아카데미라면 더더욱.

블란테는 강해 봤자 혼자였다. 국가가 뭉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난받는 건 블란테의 망나니가 되겠군요."

"...에단 교수님은 강합니다."

"그거 의외군요. 패배를 했다지만 그 정도로 고평가할 줄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벨린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에는 상대가 다르거든요."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불행하게도 망나니 교수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겠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꽈득!

에밀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사나운 눈빛이 레벨린에게 쏘아졌다. 에밀라가 몸을 돌렸다.

"찾아가려 하시는 겁니까? 이미 늦었을 텐데요."

"...늦지 않았습니다."

그가 버텨 줄 것이다.

에밀라는 그렇게 믿었다. 그녀는 몸을 숙여 다리에 마나를 집중했다. 에밀라가 지면을 박차자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밀라가 사라진 장소를 말없이 지켜보던 레벨린이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군요."

암시는 한번 풀리게 되면 되돌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에밀라는 마크처럼 쉽게 버리기에는 아까운 패였다.

"먼저 찾아가 주면 고마운 일이죠."

베오드라도는 리치였다. 아니, 리치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그를 폄하하는 일이었다.

그는 레벨린이 숭배하는 존재들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힘을 쓴다면 에밀라는 다시 레벨린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모든 건 전부....'

그녀의 염원을 위해서였다.

* * *

그럴 리 없어.

그 사람이 죽을 리 없다.

에단은 강했다. 힘과 경지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에단은 정신적으로도 강한 사람이었다. 곁에만 있어도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늘 자신감과 배짱이 가득했고, 그것을 결과로 입증해 온 사람이었다.

'더 빨리...!'

초조함이 엄습했다.

이미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이조차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에밀라가 이를 악물었다. 마나를 최대한으로 가용하여 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 * *

"큭!"

드레이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리사는 화구를 얻어맞고 공중을 날았다.

두 사람의 행동은 제약되어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학생들이 몸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량의 차이가 확연함에도 페널티를 안고 있는 쪽은 학생들을 지키는 드레이와 리사였다.

드레이가 아무리 찬란한 신성력을 발휘해 봤자, 눈앞에 있는 괴물의 손짓 한 번이면 사그라졌다.

괴물은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러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목을 내줄 수도 없었다.

두근두근.

드레이의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벽에 부딪힌 리사도 몸을 일으켰다. 리사의 얼굴에서 피가 떨어졌다.

"더럽게 아프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낸 리사의 눈은 아직 포기의 빛을 띠지 않았다. 드레이도 검을 바로 잡았다.

"흠, 슬슬 질리는구나."

베오드라도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두려웠지만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겁을 먹으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율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난 약해.'

우리 때문이다. 우리가 짐이 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저들도 몸을 빼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여기서 몸을 떠는 게 전부야?

이럴 바에는 죽는 게 낫다.

율리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교수님!"

율리가 소리쳤다. 그가 올 거라는 희망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끄럽구나."

베오드라도가 손을 들었다. 검은 마나가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에 응집되었다.

드레이와 율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고생했어."

스르륵―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듯이 모습을 드러낸 은발의 여인.

"이제 내가 지켜 줄게."

에밀라가 등장했다.

◈ [101화] 함정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