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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29화] 형제의 질투 (2)

블란테 가문 내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연무장.

주로 직계 혈족들과 정식 기사들이 단련하는 장소였다.

일반 기사나 수습 기사들은 올 수 없는 곳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대연무장에 도착한 에단은 주변의 모습을 확인하고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나.'

대연무장은 평 기사도 특별한 사유 없이는 오지 못하는 곳이다.

규정상 막아 둔 것은 아니었다.

직계 혈족과 그들의 직속 기사 위주로 모여 있는 특성 탓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에단과 같이 토벌에 참가한 토벌대원들.

가토를 제외한 수습 기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사실대로 증언한다 한들, 가문의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블란테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며, 가문에 먹칠하기를 일삼던 망나니가 블랙 오우거를 처치하다니.

이미 모룬을 중심으로 이뤄진 가문의 권력 구도에 균열이 생겨났다.

대부분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처치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토벌대원이라고 한들 그들은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에단은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저들은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다.

에단은 뒤통수를 얻어맞고도 웃어넘길 만큼 머저리가 아니었다.

"어이, 재밌어 보이네?"

에단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인기척을 느낀 자들이 고개를 돌렸고, 에단의 모습을 확인한 모룬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그걸 몰라서 묻나?"

"큭큭, 뒤늦은 변명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변명? 내가 변명을 하려고 온 거 같아?"

에단은 더 이상 모룬을 향해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참을 생각도 없었고.

에단의 가시 돋친 언행에 모룬의 얼굴에도 힘줄이 돋아났다.

"변명이 아니라면 뭐 하러 온 거지? 이미 모든 증언은 끝났어. 너는 명예로워야 할 토벌에서 거짓말과 수작질로 가문의 명예를 실추했다."

"거짓말과 수작질이라. 쟤네가 그러든?"

모룬을 바라보던 에단의 시선이 수습 기사들을 향했다. 수습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에단의 시선을 피했다.

"흥, 쓸데없는 짓 마라. 이제 와서 다시 저들을 겁박하려는 거냐? 저들은 너 따위 거짓말쟁이와 달리 명예를 아는 자들이다."

"거짓말쟁이라.... 그 말 책임질 자신은 있고?"

에단의 싸늘한 눈이 모룬에게로 향했다. 서늘한 기운을 느낀 모룬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미 다 끝났는데 무슨 책임을 진다는 말이지?"

"병신, 겁먹었냐?"

"...뭐라고?"

"쫄았냐고, 덩치만 큰 머저리 같은 새끼야."

에단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모룬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에는 이게 제격이었다.

류태신은 트래시 토크라면 이골이 나 있는 선수였다.

― 무서운 놈....

페온은 에단의 언행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귀족가 자제란 녀석이 어찌 칼 밥 먹고 다니는 용병보다도 입이 거칠었다.

"왜 거짓말쟁이가 지껄이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을까?"

에단이 고개를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 모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생이라고 봐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얼씨구, 봐주는 거 맞아? 겁먹은 게 아니라? 밑에도 쪼그라든 것 같은데."

"너 이 자식!"

폭발한 모룬이 주먹을 휘둘렀다. 감정이 실린 탓에 동작이 컸고, 군더더기가 많았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에단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 모룬의 주먹을 이마로 받아 냈다.

모룬은 건장한 덩치에 걸맞게 주먹도 컸다.

당연히 실린 힘도 적지 않을 터.

에단은 그만한 각오를 하고 주먹을 받아 냈다.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그런데 생각보다 충격이 덜했다. 아니, 덜한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로 정타를 받아 냈음에도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 없었다.

모룬의 주먹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맷집이 괴물이 됐군.'

― 설마 이런 효과도 생길 줄이야....

페온이 말을 잃었다.

블랙 오우거의 생명력을 흡수하면서 맷집 또한 덩달아 상승한 것 같았다.

모룬의 주먹을 이마로 받아 낸 에단은 입꼬리를 올린 채 모룬을 바라봤다.

"덩치랑 안 맞게 솜 주먹이네?"

에단의 비릿한 미소에 모룬은 이를 갈았다.

빠드득.

"...그렇게도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모룬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치고는 그 크기가 거대했지만, 시퍼렇게 서 있는 날은 진짜였다.

"결투를 신청한다."

모룬의 말에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한편 심상치 않은 둘의 분위기를 보며 네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멍청한 선택을 했군.'

본래대로라면 이 말은 에단에게 해야 하는 말이었다.

가문의 장자인 모룬의 힘은 결코 얕잡아 볼 것이 아니었으니.

카론과는 경우가 달랐다. 카론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모룬의 털끝에도 스칠 수 없었을 테니까.

반면에 에단이 카론을 이긴 것은 반쯤은 요행에 가까웠다.

창의적인 공격과 허점을 노리는 변수로 카론을 몰아붙여 얻어 낸 승리였다.

정상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면 에단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네이드는 기억을 상기했다.

다시 생각해도 충격이었다.

천재라고 칭송받던 수많은 자들을 조우해 왔지만, 겉만 번지르르 한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도련님은 다르다.'

철없는 망아지라고만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에단을 봐 온 네이드의 생각이었다.

갱생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망나니.

검을 무서워하는 검술 가문의 자제.

하지만 에단은 한순간에 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바뀐 뒤에 보여 준 모든 행보가 파격적이었지만, 역시 가장 컸던 것은.

'블랙 오우거.'

만용이라고 여겼다. 몇 번 쟁취한 승리에 도취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정신을 차리고 겸손이란 걸 배우게 할 심산이었다.

블랙 오우거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괴물인지를 알고 있던 네이드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너지고 말았다.

에단은 마나를 사용했다.

어설프게 사용한 것도 아닌, 능숙하게 다뤘다.

위기의 순간에도 목숨을 담보 삼아 블랙 오우거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범인이라면, 아니, 닳고 닳은 전사들도 자신의 목을 함부로 내놓지 못한다.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마무리하는 순간, 네이드는 전율을 느꼈다.

그렇기에 네이드는 이번에 벌어진 일에 탄식했다.

'안타깝구나.'

수습 기사들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 * *

"결투는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모룬과 에단을 향해 다가오는 자는 첸이었다.

'아버지가 올 줄 알았는데, 의외군.'

확실히 이런 자리에 가주가 매번 얼굴을 비추고 개입하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첸의 등장에 모룬이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단장님."

"원래라면 직계 가족 사이의 결투는 허가할 수 없지만, 이번만 예외로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의 결정입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룬은 가라앉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첸은 에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결투를 승낙하시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첸이 피식 웃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고저 없는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다.

"이 결투는 지금부터 제가 보증합니다. 제가 지켜보는 한 이 결투에서는 그 어떠한 부정행위도 벌어질 수 없습니다."

첸은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첸의 시선을 받은 자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가 하는 단언에는 그만한 강제력이 있었다.

의지력이 실려 있는 말이었다.

그 누구도 여기서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 없게끔 하는 경고.

"준비는 되셨습니까?"

무심한 듯한 말투에 에단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미 준비됐습니다."

그 모습에 첸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태도가 말뿐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첸은 에단의 잠재력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모룬을 넘는 것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는 블랙 오우거를 잡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성립조차 안 되는 결투지만....'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되는 결과였다. 가문의 장남인 모룬은 이미 완성된 전사였다.

불같은 성정과 감정적인 성격 탓에 단점이 명확하긴 했지만, 가문 내에서도 수위에 드는 검사였다.

'벽을 뚫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아직 꽤나 먼 얘기였다. 하지만 첸은 확신하고 있었다. 모룬이라면 마스터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만, 그 기간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마스터라는 경지는 결국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단 도련님은... 모르겠어.'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예측이 불가능했다. 이제 더 이상 에단은 구제 불능의 망나니가 아니었다.

얼마 전 결투에서 보란 듯이 카론을 제압했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이번 토벌에서도 자신을 증명해 냈다.

더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형제들을 겁내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위해서라면 송곳니를 드러냈다.

에단은 이제 어엿한 포식자였다. 첸은 에단의 그 변화가 썩 달가웠다.

'지켜보마.'

가주님은 애가 타겠군.

결투를 직접 보지 못해 몸이 달아 있을 빈센트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기는 필요 없습니까?"

"보다시피 들고 있는 게 없군요."

에단이 양팔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몸짓이 여유로워 보였는지 모룬이 으르렁거렸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마."

에단은 여기서 모룬을 더 긁어 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결투가 시작되려는 조짐이 보였다.

'옥타곤에 올라온 것 같군.'

어느새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살아 있는 쇠창살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전부터 느껴 왔지만, 이 감각은 상당히 중독성 있다.

'상황은 불리하고.'

체급 차이도 심한 데다가 상대는 이미 완성된 전사였다. 반면 에단은 쥐고 있는 무기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들 생각이 있다면 손에 쥘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지금은 맨몸이 좋아.'

첸이 검을 뽑았다.

에단과 모룬 사이에서 서늘한 예기를 뿜어내던 검 끝이 이내 하늘로 향했다.

따로 지시는 없었지만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투 시작이다.

곧장 모룬이 뛰어왔다.

마치 황소가 돌진하는 것 같이 위협적이었다.

불리한 상황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에단이라도 긴장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의외의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같잖군.'

에단보다 한참은 큰 모룬이, 지금은 어쩐지 작게 느껴졌다.

◈ [30화] 질투의 대가

두려움은 원초적인 감정이다.

공포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방어 기제이자 성장을 위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두려움은 그 대상에 대해 알 수 없을 때 느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모룬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망나니 에단은 약자였고, 이번 기회에 건방진 동생을 혼내 주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다리가 굳어졌다.

머리로는 부정했지만, 본능이 말했다.

몸을 돌려.

도망쳐.

이런 감각은 생소했다.

모룬은 강했다. 태생적으로 강건했고, 어려서부터 검을 쥐었다.

하늘이 놀랄 기재까지는 아니었지만, 검을 곧잘 다뤘으며, 블란테의 피를 이은 자답게 뼈와 근육이 질겼다.

덕분에 남들보다 강했고, 남들처럼 다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그에게 아주 생소했다.

문제는 그 생소한 감정을 가주인 빈센트도 아닌, 에단에게서 느끼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모룬은 그 감정을 외면했다.

― ...뜻밖의 수확이군.

페온은 침음을 내뱉었다.

에단은 지금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아니, 살기라고 칭하기에는 애매한 기백이었다.

에단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블랙 오우거의 힘을 흡수하면서 뜻밖의 것까지 따라온 모양이었다.

피어.

한 구역을 호령하는 급의 몬스터만 내뿜는 기운.

피어를 이겨 내는 정신력을 가진 전사는 드물다.

― 이놈이 특출 난 거지.

담이 크다고 치부하기에는 에단이 보여 준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마나를 갓 다루기 시작한 녀석이 블랙 오우거 앞에서 건방을 떨었으니까.

― 원래는 저게 정상이지.

모룬이 애써 공포라는 감정을 떨쳐 내고 뛰어들었지만, 페온은 알 수 있었다.

발이 굳어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경지에 이른 자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공포를 떨쳐 내기 위해서 휘두르는 검 따위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위력이 강하다고 한들 맞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휘두르는 검.

에단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검이 기세 좋게 떨어져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쳐 갔다.

빠른 검의 움직임에 지켜보는 사람들이 감탄했다.

하지만 첸은 알 수 있었다.

'감탄하긴. 그보다... 에단 도련님의 기세가 심상치 않군.'

에단은 물러나는 대신 앞으로 전진했다.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선택지는 몸의 중심이 되는 다리다.

오블리크 킥.

일명 악마의 발차기.

'제대로 걸리면 선수 생명이 끝나거든.'

상대의 무릎을 짓눌러, 무릎 관절을 어긋나게 하는 킥 공격이었다.

말이 많은 기술이기도 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라 치명적인 부상을 초래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싸커 킥, 스탬프 킥, 로우 블로, 써밍, 버팅 등 위험도가 높은 반칙성 공격들과 비교해도 오블리크 킥은 별달리 뒤지지 않는다.

에단이 몸을 슬쩍 낮춰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치 벌레를 밟아 죽이려는 것처럼 발을 들었다. 하지만 에단이 노리는 것은 벌레가 아닌 모룬의 무릎 관절이었다.

'헛수고다!'

꽤나 날카롭게 들어오는 발이었지만, 모룬은 에단의 공격을 무시했다.

몸의 내구성을 자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책이었다.

콰직!

마나가 실린 에단의 발이 모룬의 무릎을 짓밟았다.

앞으로 체중이 쏠려 있던 모룬은 당연히 대응하지 못했다.

"크악!"

무릎이 어긋나며 모룬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승부가 났군.'

첸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에단의 몸놀림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기대치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최근에 보인 성과들은 모룬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났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무참히 죽였고, 뒤이어 모룬과 승부를 벌인다니....

그런데 에단의 움직임에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에 걸맞은 숙련도를 겸비하고 있었다.

저러한 공격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공격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잔혹한지.

첸은 헛웃음을 흘렸다.

'검만 안 들었을 뿐이지 완벽하군.'

한편 모룬은 자신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게 믿기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는 검을 가볍게 피해 낸 에단이 모룬의 팔을 붙잡고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다.

'이게 감히!'

모룬은 이를 악물었다.

생소한 기술이라 대응이 늦은 데다가, 몸의 내구성을 과신한 실책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

모룬은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긋난 무릎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질긴 근육과 인대가 버티고 있었다.

모룬은 우악스러운 덩치답게 힘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비열한 짓밖에 못 하는 녀석이!'

모룬이 팔에 힘을 줬다. 목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이대로 집어던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모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에단이 말했다.

"뭐 하냐?"

에단이 웃었다.

모룬은 에단의 웃음을 보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불안감이 치솟았다.

"뭘 하려... 끄아악!"

모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이 겨드랑이 사이에 있는 모룬의 팔을 꺾었기 때문이다.

'힘을 주는 방식이 무식하잖아.'

애초에 이제 에단은 근력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모룬이 비명을 지르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어딜 자꾸 가."

에단이 모룬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모룬이 마치 목줄 잡힌 개처럼 끌려왔다.

감정이 실려 있는 무식한 손속이었다.

'어떻게 해 줄까.'

에단의 머릿속에 다양한 마무리가 떠올랐다. 이미 상대는 전의를 잃었다.

가능하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에단은 모룬의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자, 잠깐...."

모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얼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불길함이 강하게 다가왔다.

더 이상 치욕과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전의는 이미 꺾인 지 오래였다.

한 번 부러진 전의는 다시 붙지 않는다.

"잠깐은 없지."

인생은 실전이야.

에단의 허리가 휘었다. 모룬의 육중한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리고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단단한 목재판으로 만들어진 연무장의 지면이 우지끈 부서졌다.

모룬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좌중이 침묵에 휩싸였다.

'수플렉스.'

제법 만족스러웠다.

기술의 화려함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합을 맞추는 프로레슬링이 아닌 이상 실전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에단이 상쾌하게 웃었다.

* * *

'....'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후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았던 첸이 말을 잃었다.

에단의 승리를 점치는 자들은 드물었지만, 블랙 오우거의 사체를 직접 목도한 뒤로는 생각을 달리했다.

저 참상을 직접 만들었다면, 에단이 승리하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리'라는 단어에 국한해서였다.

첸은 블란테 가문의 기사단장이자 수호기사였다.

에단을 알고 있고, 모룬을 알고 있었다.

에단이 갑자기 재능을 개화한 것인지, 아니면 노리는 것이 있어 힘을 숨겨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간 에단의 행동은 막무가내였고, 달라진 이후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줬다.

반면 모룬은 부족한 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가문의 적통으로서 충실한 성장세를 보여 왔다.

아직 어린 데다가 주위 또래와 비교해 본다면 모룬은 수위에 들 정도의 강자였다.

'단지 그 기준이 블란테에 맞춰져 있을 뿐.'

블란테 가문.

수많은 마스터를 배출해 내며, 가주의 옥좌 역시 마스터의 벽을 부순 자들만이 올라섰다.

모룬은 분명 마스터에 오를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블란테의 적통이라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자질일 뿐이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재능은 블란테에서 흔해 빠진 것이었으니까.

지금껏 모룬이 가문 내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던 건 그를 뛰어넘는 혈통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란테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첸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번 결투를 보고 확신했다.

'폭풍이 일어난다.'

작은 파란으로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파란 정도가 아니다.

가문의 망나니로만 여기던 문제아가 사건을 일으켰다.

그것도 가문의 구도를 바꿀 만한 대사건을.

'나이 먹고 주책이군.'

평정을 유지하던 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에단의 몸놀림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직 경지가 낮았다.

하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노련함을 가지고 있었다.

수없이 사선을 넘어온 첸은 그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완성되었을 때 그 경지가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검을 뽑고 싶군.'

기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검사이자 전사로서 한번쯤 에단과 공방을 나누고 싶었다.

검을 든 자가 훨씬 유리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투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무기의 효율성으로만 따진다면 검은 창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스터의 벽을 넘은 자들 중에는 검사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유로움.'

갇힌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심상을 구축하고 무리를 완성하는 것에 있어서는, 검이 창보다도 훨씬 위에 있었다.

'도련님을 보니 느껴지는군.'

벌써부터 미래를 점치기에는 섣부르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첸은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마스터의 경지.'

에단은 그 경지를 깰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반면 옆에 있던 네이드는 눈살을 좁혔다.

'성장했군.'

에단이 바뀐 것은 알고 있었다.

육체와 전투 감각, 그리고 노련한 테크닉 모두 네이드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중 특히 블랙 오우거를 무참히 박살 냈을 때는 경악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마나라니....'

에단은 분명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다. 블란테 가문의 마나 수련법은 그 어떤 마나 수련법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네이드는 블란테 가문의 수련법을 배우지 않았지만, 그것을 판별할 안목은 있었다.

그렇기에 에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나는 어릴 때부터 수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감응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단순한 망나니로 여겼을 때는 혀를 차며 한심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에단이 변화를 겪게 된 이후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블랙 오우거를 처치할 때 에단이 보여 준 마나의 운용 방식은 매우 정밀하고 세련됐다.

마나를 다룸에 있어 정상의 경지까지 올라간 마스터의 시선으로 본 장면이었다.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네이드는 물을 수 없었다.

사실상 의미는 퇴색됐지만, 네이드는 표면상 자신의 경지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에단과 같이 수련하던 수습 기사들은 네이드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수습 기사에 불과한 그들의 발언권은 가문 내에서 극히 미미했다.

'블란테 가문의 본질은 무력이다.'

제국법에 저촉될 만큼 사특한 방법으로 습득한 힘이 아니라면, 에단이 어떠한 방식으로 강해지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한다.

그간은 모룬이 가문의 적통 중에 가장 높은 경지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 세력 구도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정기 토벌에서도, 이번 결투에서도.

체면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기 가주로 유력하던 모룬의 입지가 크게 흔들려 버린 것이다.

'모든 게 의도대로였나?'

네이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단이 과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면, 주위 형제들과 에단에게 집중되는 권력에 반감을 가진 자들의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가문 내에서 이뤄지는 아귀다툼과 견제는 매우 살벌했고, 잔인했다.

하지만 그간 모든 가문 사람들은 에단을 견제하기는커녕 외면하기에 급급했다.

에단은 가문의 수치이자, 사건을 몰고 다니는 망나니였으니까.

네이드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에단을 바라봤다.

◈ [31화] 압승

― ...미친놈.

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페온은 무투가다.

검의 이점을 버리고 무투를 택한 만큼, 모룬을 향한 에단의 공격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걸 독학으로 깨우쳤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이건 혼자서 수련하고 써먹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펼친 무리수가 아니란 말이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 확신했기에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상대의 무릎을 작살내고, 중심을 무너뜨리고, 그대로 전투를 끝내는 일련의 과정.

에단의 전투는 극히 단조로웠지만, 그만큼 실전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실전성이라는 것은 이론으로 확립할 수 없는 종류였다.

'물어본다고 한들 의미는 없겠지.'

대체 어쩌다가 블란테 가문에서 이런 녀석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페온은 생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장해 왔다.

냉병기가 판치는 시대에 무투술은 소외됐고, 그만큼 페온은 많은 고난 끝에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남들과 같이 검을 들었다면, 진즉에 넘어섰을 벽이었다.

그렇기에 페온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후손이었지만, 살아생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이를 먹으니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드는군.'

페온은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 냈다.

에단은 말없이 모룬을 바라봤다. 죽지는 않았지만 모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시체처럼 몸이 축 늘어진 데다가,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서는 누런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린내가 연무장 내에 퍼졌지만, 아무도 코를 막지 않았다.

여기서 불쾌한 티를 내고 나서의 후폭풍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모룬을 발로 밀어냈다.

모룬의 몸이 힘없이 밀려났다.

"얘, 계속 패?"

"...아."

에단의 물음에 첸이 정신을 차렸다.

에단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보이는 감정이라고는 미약한 불쾌함뿐이다.

첸은 그 모습에 떨떠름하게 검을 올렸다.

"제가 보증한 이번 결투의 승자는 에단 도련님입니다."

간략한 승리사였다.

그러나 기사단장인 첸이 보증한 승리의 증명이었다. 가주를 제외한다면 첸의 보증을 반박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단은 목을 풀며 걷기 시작했다.

인파가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그들의 얼굴은 당혹과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쯤 있을 텐데.'

에단이 고개를 돌리며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안 올 녀석이 아닌데.

'찾았다.'

에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사람 사이에 몸을 숨겼지만, 숨겨질 존재감이 아니었다.

에단이 카론을 향해 다가갔다.

카론이 헛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이 발걸음의 속도를 올리며 카론의 면전까지 다가갔다.

"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결백을 주장하는 그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어, 그러겠지."

에단은 카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 거야. 계속 지금처럼만 하라고."

에단이 카론의 어깨를 툭 치고 몸을 돌렸다.

카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분명 자신의 분풀이 대상이던 망나니였지만, 어느새 처지는 뒤바뀌어 있었다.

카론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이제 더 이상 반론의 여지도 없었다.

에단은 더욱 강해졌다. 형제 중 가장 강하다는 모룬도 에단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저 자리에 서 있는 게 카론이었다면, 더욱 끔찍한 꼴을 당했을 것이었다.

* * *

에단은 별채로 돌아왔다.

이제 별채에서 지낼 이유는 없었으나, 본채의 어수선함이 싫었다.

별채는 조용했다.

하녀 몇 명과 그를 총괄하는 네이드.

그리고 에단의 휘하에 있는 가토와 휴고가 전부였다.

'바로 가주를 만나서 협상을 해도 되지만....'

그 전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앞으로의 행보는 신중함을 기해야 했다.

'여기서 정체되면 안 된다.'

그럼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블란테 가문에서 가만히 있는다면 조금 더 강해지겠지만, 가문이 몰락하며 함께 무너져 내릴 터였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가문을 살릴 방법을 찾는 한편, 원작 주인공의 기연을 뺏어야만 했다.

판을 바꾸기 위해서는 판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때마침 원작 흐름상 큰 에피소드가 벌어질 시기였다.

'하나하나 준비를 하고 싶지만... 망할 원작이.'

원작 소설은 철저하게 주인공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흘러가는 내용이 심각하기 그지없어도, 온갖 기연을 독식하는 주인공이 우연찮게 상황을 해결하고, 히로인의 애정을 얻게 되는 내용으로 진행이 된다.

원작에서의 사건과 에피소드는 주인공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짜증이 나는군.'

정보가 부족했다. 결국에는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알고 있는 정보는 주인공이 가져가게 될 기연과 아이템들.

'내가 먹는다.'

비록 완결까지는 읽지 못했기에 모든 걸 알고 있진 않았다.

'스토리로 따지면 80프로 정도 읽은 거 같은데.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하지만 원작 주인공이 착실히 빌드 업을 하는 부분은 충분히 나와 있으니,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뭐,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남이 자신을 앞서 나가는 꼴을 볼 생각도 없었다.

에단은 정상에 올라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성향은 류태신이었던 선수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있는 모습을 볼 생각은 없었다.

"운동이나 할까."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역시 근육을 혹사해야 했다.

* * *

연무장에서는 휴고와 가토가 대련 중이었다.

둘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곁에 에단이 있어 그 빛이 바랜 감은 있지만, 블란테 가문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둘의 성장은 매우 빨랐다.

쉬익!

가토의 목검이 휴고의 앞을 지나갔다. 한 번의 공격을 흘린 휴고가 다시 달려들려 했지만, 가토는 쉽사리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휴고가 목검을 피하느라 젖혀진 허리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토의 찌르기가 휴고의 미간을 노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 휴고가 몸을 크게 젖히며 텀블링했다.

단순한 텀블링에도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다.

"...짐승이냐."

"죽을 뻔했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속도 그대로 목검에 찔렸다면 아무리 휴고라도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피할 줄 알고 한 거지."

가토가 씨익 웃자, 휴고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밥은 먹고 하냐?"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휴고와 가토의 시선이 돌아갔다.

두 사람은 결투의 결과를 궁금해하며 에단에게 다가갔다.

에단이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별채에는 소문이 잘 퍼지지 않았다.

소문에 발이 달리려면 사람이 필요했는데, 상주하고 있는 이가 부족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련의 결과는... 역시 이기셨군요."

에단이 말없이 웃어 주자, 가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괴물 같은 사람.'

눈앞의 휴고도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단을 볼 때면 휴고가 일반인처럼 보였다.

그만큼 에단이 짧은 시간 내에 판도를 많이 바꿔 놨다.

"몸이나 풀어 볼까?"

"저희 대련 지금 끝났...."

"그래서?"

휴고가 소심한 반발 의사를 내뱉으려 하자, 에단이 그의 말을 딱 잘라 냈다.

"...하겠습니다."

애초에 거절 따위는 상정하지 않았다.

연무장에는 다양한 크기의 쇳덩이들과 바위들이 산재해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조금 더 제대로 된 장비들로 구색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블란테 가문의 야장들은 뛰어났지만, 철저한 규칙 아래서 무기를 만들었다.

수련용 검 하나를 가져오려고 해도, 절차가 까다로웠다.

그런데 현재 가문 내 에단의 입지로는 바벨이나 원판 따위를 주문하기는 어려웠다.

'이제 달라졌지만.'

이번 보상을 받기 전에 제대로 된 운동 장비도 구비를 해 둘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쉬운 대로 이렇게라도 운동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해."

휴고와 가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의 바위를 번쩍 들었다.

"하나."

에단의 구호에 맞춰 둘이 동시에 앉았다.

"둘."

"끄어어억!"

휴고와 가토가 신음을 터트리며 일어섰다.

"...흠."

에단의 구호가 멈췄다.

가토와 휴고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얘네가 머리를 굴리네?"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가 진짜 힘들 때 나오는 곡소리인지, 아니면 조금 더 편하게 가려고 하는 수작질인지.

두 사람에게는 애석하게도, 에단은 수작질을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자, 잠깐...."

가토가 뒤늦게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에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바위의 여유분은 남아 있었다.

에단이 바위 하나를 번쩍 들더니 휴고가 들고 있던 바위 위에 얹었다.

"꺼헉!"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에단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토의 바위 위에도 추가로 바위를 얹어 줬다.

"끄허억!"

가토의 입에서도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해, 안 앉고?"

가토와 휴고는 에단의 목소리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 악마 같은 녀석.

'이 정도는 해야 훈련이 되죠.'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애초 이런 훈련쯤은 휴고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태생부터 다른 녀석이다. 이 정도는 혹사라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의외는 가토였다.

가토는 소설 내에서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엑스트라 1.

그런 녀석이 이렇게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는 것에 내심 놀랐다.

'기회를 잡았다는 건가.'

그만큼 준비가 됐다는 뜻이겠지.

에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견딜 수 있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둘을 경험한 에단이 보장할 수 있었다.

"하나!"

에단의 구령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연무장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층 성장한 체력 덕분에 어지간한 대련으로는 지치지 않던 휴고와 가토도 그대로 지면에 널브러졌다.

어느 정도 훈련 강도가 올라가자, 에단도 홀로 운동을 진행했다.

에단의 팔 위에는 바위 네 개가 올려져 있었다.

강해진 근력 때문에 이 정도가 아니면 훈련이 되지 않았다.

'밸런스도 잡히고 나쁘진 않지만....'

비효율적이었다.

후웁!

마지막 세트를 끝낸 에단이 바위를 살포시 내려놨다.

괜히 집어던졌다가 연무장이 손상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시는 걸까....'

휴고는 존경 반, 두려움 반이 담긴 눈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멀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득히 멀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게 달라졌어.'

자신은 하인 중에서도 천대받던 하인이었다.

천애 고아로 블란테 가문에 거둬진 것 자체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에단이 자신의 삶을 뒤바꿔 주었다.

에단의 삶도 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에단은 가문 내에서 버림받은 자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에단이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은 단 하루도 훈련을 소홀하게 한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휴고의 감사 인사에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뭐 실수했냐?"

에단의 반응이 너무 덤덤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헤헤, 아닙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운동이 힘들어서 그랬나 봅니다."

"싱겁기는."

에단이 웃으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

때마침 네이드가 찾아왔다.

이제 슬슬 다시 움직일 시간이 다가왔다.

"마침 잘 왔네. 밥부터 먹자."

운동 후 단백질을 거를 수는 없으니.

◈ [32화] 대가 (1)

'...엄청나게 먹는군.'

비단 에단을 대상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휴고와 가토 또한 걸신이 들린 것처럼 눈앞의 음식들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이드가 시선을 던지자 하녀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벌써 추가 주문을 몇 번이나 넣은 상태였지만, 에단은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음식들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식욕도 영향이 있었나?'

원래 음식은 잘 챙겨 먹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만한 운동량을 소화해 낼 수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에단은 아직 성장기인 상태이다 보니, 영양 과잉을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먹는 양이 늘었다.

이렇게 많이 먹었음에도 아직도 에단의 위장은 음식을 더 먹고 싶다는 듯 꼬르륵거렸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평소에 먹던 한식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런 투정을 부릴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에단은 묵묵히 식사를 지속해 나갔다.

그 뒤로 몇 번의 접시를 더 비우고 나서야 식사 시간이 끝났다.

접시가 산처럼 쌓였고, 그것을 바라보는 하녀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후."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포만감과 함께 나른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래서 용무가 뭐였지?"

"...이제야 물어보시는군요. 대련 직후에는 왜 가주님을 찾아뵙지 않은 겁니까?"

"급할 게 없으니까."

"...오만하시군요."

"저자세로 나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야. 저자세로 나가 봤자 목줄밖에 더 묶여?"

에단은 수많은 능구렁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현대의 지구에는 계급이나 작위는 없었지만, 그보다 더 심한 구렁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때 깨달은 점은.

'휘둘려서는 안 되지.'

자기가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저자세로 나가게 되면 끝까지 상대에게 붙잡히게 된다.

에단은 가주의 제안을 모두 완수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 보상을 얻느냐뿐.

'그게 문제지.'

즐거운 고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후.... 편지가 하나 왔습니다."

"편지?"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가토와 휴고의 얼굴에도 궁금한 기색이 드러났다.

에단이 말없이 받아 든 편지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문자였다. 하지만 에단의 기억 때문인지 글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발신인이... 리사.'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주인공의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붉은 장미라는 아명을 지닌 아카데미의 꽃 중 하나이자, 블란테 가문의 셋째였다.

에단은 편지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최대한 격식을 갖춘 내용이었지만, 실상의 내용은 정반대였다.

[나는 가문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고, 관계되고 싶지도 않다. 한 번 떨어진 에단 오라버니는 이곳에 올 생각도 말고, 카론이 오더라도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버지에게는 심심한 안부를 전한다.]

― 당찬 여자애로군.

페온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에단은 말없이 편지를 바라보다가 네이드에게 건넸다.

"네이드."

"네, 도련님."

"내가 아카데미 시험을 본 적이 있나?"

"3년 전 입학시험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떨어졌을 테고."

"참담했죠."

네이드가 덤덤하게 대답을 하자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시험 내용은 뭐였지?"

"...정말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니, 대충은 나. 그런데 뭔가 좆같은 기분이 들어서, 제대로 들어야겠어."

"시험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괴성을 지르시면서...."

"거기까지."

에단은 어지러움을 느끼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읽어 봐."

에단이 편지를 네이드에게 건네줬다.

"...역시 리사 님이시군요."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지."

계획이 정해졌다.

다음 행선지는 아카데미였다.

* * *

"그렇게 결투가 끝났습니다."

"허... 듣고도 믿을 수가 없군."

허리를 세우고 첸의 말을 듣던 빈센트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빈센트의 얼굴에는 아직도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경지를 뚫고, 나이를 먹으면서 감정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결투를 보니 다시 느껴지더군요."

"무슨 말인가?"

"승부욕이라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눈앞의 상대가 가주님의 피를 이으신 도련님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블란테 가문의 가신이 아닌, 그저 한 명의 기사로서 검을 뽑고 싶더군요."

"...허허."

빈센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검을 수행해 왔고, 가문 안에서 수많은 일을 함께 겪었다.

빈센트가 아는 첸은 결코 가볍게 말을 내뱉지 않는다.

하니 그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거겠지.

'...역시 갔어야 했군.'

체면을 신경 쓰지 말고 결투를 직접 참관할 걸 그랬다.

에단의 건방진 모습 때문에 괜히 자존심을 세웠다.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직접 결투를 주관해도 괜찮았을 테다.

'건방진 녀석.'

에단은 아직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 점이 영 못마땅했다.

자기가 정리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 맹랑한 모습에 기가 찼지만, 에단은 모든 발언을 직접 증명해 냈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그것이 바로 블란테의 방식이지.'

하지만 동시에 작은 걱정도 들었다.

'검을 쓰지 않는다라....'

정확히 말하자면 블란테가 검을 숭상하는 것은 아니다.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하는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블란테 가문이 검술 명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에단이 검을 소홀히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거 검을 멀리하고 외도를 택한 블란테 가문의 사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끝이 좋지 않았기에, 빈센트는 에단이 검을 쥐기를 바랐다.

똑똑.

그때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왔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에단의 목소리였고, 빈센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들어오너라."

첸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몸을 돌려 영주실을 나가려 했다.

영주실을 나가면서 에단과 눈이 마주쳤는데, 첸의 눈빛은 마치 타오르는 것 같았다.

에단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늦었구나."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허...."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

빈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건을 수습하라고 했다만, 수습이 아니라 사건을 더 커지게 만든 것 같더구나."

"저를 둘러싼 의혹을 떨쳐 냈으니 됐습니다."

"후폭풍은 신경 쓰지 않는 게냐."

"누가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애송이를 일일이 신경 씁니까?"

"크하하하하! 말 한번 가관이군. 네 형이 애송이라는 말이더냐?"

"네. 뭐, 보셨다면 아셨을 텐데 아쉽네요."

에단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빈센트는 블랙 오우거의 처참한 사체를 보고 이미 느꼈다.

에단은 여전히 망나니였다. 하지만 힘과 가치관을 지닌 망나니였다.

"좋다! 그 정도는 되어야 블란테의 혈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래, 그래서 견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냐?"

"아니요. 신경 씁니다. 그러니까 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대륙 연합 아카데미. 그곳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갑자기 거길 가려는 이유가 있더냐?"

"편지가 왔더군요."

에단이 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를 흔들었다.

"편지?"

"리사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읽어 보시겠습니까?"

에단이 편지를 건네자 빈센트는 말없이 편지를 읽어 나갔다.

편지를 읽어 나가던 빈센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어이가 없군.'

편지를 다 읽은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래서 동생한테 이딴 소리 좀 들었다고 아카데미까지 찾아간다고?"

"네. 보시다시피 제가 속이 좀 좁아서요."

물론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결국 원작 주인공과 얽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주인공이 있는 아카데미 인근으로 가는 것은 필수였다.

'원래라면 조금 더 천천히 가 보려고 했지만.'

편지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허락을 바라는 게냐?"

"설마요."

"그럼 뭘 원하는 거지?"

"전폭 지원해 주시죠."

"허, 전폭 지원? 아카데미에서는 신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블란테' 아닙니까. 그 정도의 영향력은 행사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편법을 써서라도 네 입지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게냐?"

"그게 제 요구 사항입니다."

빈센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그는 본래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수련함에 있어서는 블란테 자체적으로도 충분했고, 실전 경험도 충분히 쌓을 수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의 주요 목적은 인재 양성도 있지만, 결국 국가 간의 화합과 친목이 우선시되었다.

그중에는 정치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고, 빈센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계급의 높낮이가 없고, 가문의 배경이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결코 의미가 없지 않다는 사실도.

그렇기에 의문을 가졌다.

빈센트와의 내기에서 이긴 지금이 에단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바닥을 치던 입지가 넓어졌고, 확실시되던 승계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시기에 아카데미에 입학이라니, 빈센트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정 입학을 원하는 거냐?"

"아니요. 시험은 치릅니다. 하지만 학생으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게냐?"

"말은 끝까지 들으시죠. 학생이 아니라 교수로 갑니다."

"...뭐라?"

에단의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 겁니다, 아버지."

대화를 끝낸 에단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아, 오늘 중으로 무기고도 열어 주시죠. 그건 별개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에단이 영주실 밖으로 나갔다.

"...어이가 없군."

폭풍이 몰아친 것 같았다.

에단의 요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단의 나이는 아직 10대.

아카데미의 신입생 중에는 20대도 적지 않았다.

대륙 각지의 인재들이 모이는 장소이니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당연히 아카데미의 주축을 담당하는 교수진도 매우 호화롭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거 블란테 가문에도 교수직 권유가 들어왔었다.

검술 교수와 자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하지만 빈센트는 거절했다.

블란테 가문은 검술 가문이었다.

굳이 정치색이 얽힌 아카데미에 발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리사가 가문을 떠나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에단도 멋대로 시험을 치렀다가 가문에 먹칠을 하고 돌아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다시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다고 했을 때는 실망의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에단은 전혀 뜻밖의 소리를 덧붙였다.

교수로 들어가겠다니....

고작 10대의 나이에 불과한 녀석의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평소라면 고민도 해 보지 않을 사항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빈센트와의 내기 끝에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권리를 챙겼다.

막무가내로 요구했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도록."

빈센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아카데미의 관계자를 불러야겠어."

제의를 받아들이려면 당사자를 불러야지.

◈ [33화] 대가 (2)

"그게 정말인가요?"

헨리의 얼굴에 활기가 생겨났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생기는구나.'

아카데미 직원으로서 근무를 시작한 지도 어언 3년째.

근무 연차는 제법 쌓였다고 볼 수 있지만, 그녀를 향한 대우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처사지....'

작위와 인맥을 보지 않고 실력과 성과만을 따지는 것이 아카데미의 신조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작위와 인맥 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으니까.'

봐주는 뒷배가 있는 동기들은 수많은 지원을 등에 얹고 벌써 날개가 돋친 듯 성장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직도 말단 직원이었다.

말단 직원이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배를 곯을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오지 파견 근무를 보내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성과가 없으면 업무 난이도가 점점 낮아져야 하거늘, 점점 높아지고만 있었다.

1년 전 마지막으로 배정받은 임무만 봐도 그랬다.

블란테 가문 소속 기사, 아카데미 검술 교수 초청.

'이게 말이 돼?!'

블란테가 어떤 가문이던가.

철혈의 기사가 가주로 있는 검술 명가로서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드높은 위명과 함께 악명도 엄청났다.

듣기로는 적의 목을 참수하고, 그 피를 그 자리에서 마신다는 소문도 있었다.

폐쇄적인 집단인 만큼 무수한 소문이 뒤따랐다.

악랄하고 살벌한 풍조를 지녔다고 알려진 블란테.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사자 무리에 자신을 던져 놓았다.

애초에 블란테 가문은 아카데미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의 교수 초빙이나 시연 같은 온갖 청탁에도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한데 헨리는 블란테 가문과 원활한 협의를 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무의 기간도 없었다.

그 탓에 1년째 기약 없이 마을에서 하루하루를 술로 축내며 살아갔다.

블란테의 저택에 들어선 적은 한 번 있었다.

물론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지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와 달라고 하시더군요. 언제가 편하시겠습니까."

차가운 인상의 기사의 물음에 헨리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어떻게, 바로 준비하면 될까요?"

헨리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미 알딸딸해진 몸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은 헨리가 기사를 바라봤다.

우왕좌왕하는 헨리의 모습에도, 기사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바로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마차는 밖에 준비해 놨으니.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네, 넵! 바로 가겠습니다!"

기가 죽은 헨리가 소심하게 대답하자, 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주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서워.'

이전에 블란테 가문에 방문했을 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같은 사람인지 의심되는 괴물 같은 기사들의 시선을 받을 때면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 일만 성사가 되면.'

드디어 임무의 달성이다.

아카데미는 철저하게 성과 위주로 평가했다. 성과와 결과를 그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당연히 블란테 가문을 교수진으로 초청하는 것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이번 일을 무사히 끝마친다면 헨리의 입지도 상당히 높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꼭 잡아야 해!'

헨리의 눈에 불같은 열정이 타올랐다.

* * *

꿀꺽.

헨리가 침을 삼켰다. 블란테 가문의 저택은 산맥의 중심부에 있었다.

험지가 있는 저택이었다. 헨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위치 선정이었다.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따로 있었다.

험지에 자리 잡았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웅장한 크기의 문.

그 문 앞에 선 헨리는 압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괜찮아.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처음보다는 괜찮았다. 헨리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기회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헨리는 마차에서 내려 정문 앞에 섰다.

앞장서 있던 기사가 내부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쇠가 맞물리는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헨리는 그 소리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자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서 있었다.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헨리를 향해 있었다.

헨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그래, 내가 시킨 건 모두 했겠지?"

빈센트의 말에 첸이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신 것은 모두 준비해 뒀습니다. 아마 표정이 볼 만할 겁니다."

"큭큭, 오줌을 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준비된 기사는 빈센트의 지시하에 이뤄진 작업이었다.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무력시위.'

상대방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지금부터는 협상의 자리였다.

제아무리 블란테 가문이 검술 명가로 위명 높다고 한들, 아카데미는 대륙 국가들이 힘을 합해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겁박으로 타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말이지.'

겉으로만 할 수 없을 뿐이지, 세상은 원리와 원칙대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표면상으로는 규칙에 얽매여 있지만, 그 규칙은 사람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넓어진다.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한다. 하지만 단순히 무력만을 숭상해서는 이렇게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다.

무력을 활용한 정치.

'무서운 놈.'

본래 빈센트는 에단에게 이렇게까지 전폭적인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카데미의 파견 직원을 호출한 후, 권유가 먹히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뒤에 붙인 말 때문에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블란테 가문이 그 정도 일도 못 하는 건 아니겠죠? 거래로 얻은 보상인데 최선을 다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빤한 도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빈센트는 그 도발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휘둘릴 줄이야.'

괘씸한 감정도 들었지만, 그렇게 나쁜 감정이 치밀지는 않았다.

"이제 곧 들어오겠군."

"그럼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빈센트와 첸이 은연중에 마나를 끌어 올렸다.

물론 살기까지 끌어 올리지는 않았다.

범인에게 살기를 분출했다가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단지 거래에 앞서 상대의 기를 죽여 놓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치기에는 아카데미 파견 직원의 반응이 너무 강렬했다.

"히이이이익!"

들어오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듯 비명을 내지른 파견 직원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명의 마스터가 은연중에 내뿜는 마나와 기백은 장난이 아니었다.

* * *

"여기까지가 저희 아카데미가 보장해 드리는 내용입니다.... 혹시 다른 질문 사항이 있으신가요?"

빈센트는 말없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반면 헨리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빈센트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이기라도 하면 첨언이라도 하겠지만, 빈센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흠...."

빈센트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콧숨만 내쉬었고, 그런 반응이 헨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 무서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마스터와 대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아카데미 직원으로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이골이 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스터의 기백을 마주하자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교수진은 이미 아카데미 측에서 결정을 하고 온 것인가?"

"네, 넵? 아닙니다! 저희 아카데미는 블란테 가문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검술 가문으로 명성이 자자한 블란테 가문에서 보내 주시는 분이라면, 누구든 충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빈센트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빈센트가 처음으로 긍적적인 감정을 드러내자 헨리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면 어떤 이를 교수로 보내든 우리 마음이라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저희 아카데미는 빈센트 가문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원래라면... 은퇴한 기사들을 보내 주려고 했지만... 아카데미 측의 입장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 예상외야."

빈센트의 말에 헨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야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블란테에서도 그만한 호의로 대답하는 것이 예우겠지."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교수로는 에단을 보내도록 하겠네."

"넵! 그럼 바로 당사자분과 계약서를...."

헨리가 말을 잇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에단... 에단이라고?'

떠올랐다.

블란테 가문의 미친 돼지 망나니.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

많은 사람들이 욕하지만, 블란테라는 배경 탓에 함부로 거론하지 못하는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망나니였다.

'분명 입학시험에도 떨어지지 않았나?'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입학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정 입학과 편법을 방지하기 위해, 응시생은 직위와 가문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하지만 에단은 그 규칙을 모두 무시했다.

시작부터 자신의 가문을 나불대더니 시험 자체도 개판으로 치러 치욕을 당했으며, 시험이 끝난 이후로도 온갖 협박질로 아카데미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런 에단을 교수로?'

헨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잠시만요. 그건 문제가...."

"설마 이제 와서 교수 초청 건 자체를 무른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건 우리 블란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이해해도 되겠지?"

"아, 그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에단 님 같은 경우는 세간의 평가도 있고, 이미 입학시험을 치른 경험이...."

"설마 블란테의 적통인 에단을 무시하는 건가?"

빈센트의 얼굴이 노기로 물들었다. 은연중에 흘리던 기운에 조금씩 살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헨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 못해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니라...."

헨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헨리가 고개를 돌렸다.

야수 같이 굵은 선을 가진, 하지만 아직 앳된 티를 모두 벗지 못한 미남자가 접객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블란테의 가주와의 자리였다.

이렇게 함부로 난입하는 행위는 큰 무례였으나, 정작 가주인 빈센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침 잘 찾아왔구나. 온 김에 네가 직접 인사하거라."

에단이 헨리를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블란테 가문의 둘째, 에단 블란테입니다."

평범한 인사였다. 격식을 차리긴 했으나 과하지 않은 평탄한 인사.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지.'

계획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은 성격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교수로 합격하면 모난 성격이 알아서 드러날 테니까.

'어떻게 시작할까.'

인사하는 에단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34화] 짜여진 판 (1)

헨리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이미 짜여진 판이었다는 것을.

지금 타이밍에 에단이 등장하는 것, 헨리의 반응과 대화의 흐름까지.

모두 사전에 준비되어 있던 것이다.

헨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에단도 미리 고지를 받은 상태였다.

'애초에 모를 리가 없지.'

헨리는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비중은 있었다.

'이유는 뭐 차차 나오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헨리의 성향.

'모질지 못하고, 나쁜 말도 못 하지만. 자신의 소신은 있는.'

신념 있는 소시민.

이 단어가 딱 헨리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미 굴러간 눈덩이는 더 이상 크기를 키우기 힘들 정도로 커진 상황.

이 상황을 모면하기도, 부정하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헨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에단이 헨리와 눈을 마주쳤다.

에단의 인상에 헨리는 어째서인지 주눅이 든 모양새로 목을 움츠렸다.

'이게 블란테의 돼지 망나니라고? 듣던 거랑은 너무 다르잖아!'

아무리 소문이 믿을 게 못 된다고 할지라도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에단은 단기간에 몸을 완성했다. 이미 불필요한 지방 덩어리는 모두 걷어졌고, 옷으로는 에단의 근육질 몸을 모두 가릴 수 없었다.

혹독히 단련된 전사의 몸이었다. 그와 더불어 블랙 오우거를 처치하면서 얻은 피어의 힘 덕분에 위압감 또한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에단의 시선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 자신감은 근거 없는 거만이 아닌, 스스로의 믿음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그 기백에 헨리는 주눅이 들었다.

에단이 가볍게 목례를 취하며 손을 건네자, 당황하던 헨리가 손을 맞잡았다.

'...거칠어.'

에단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

피부가 거칠었다.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손이었다.

한 번도 몸을 단련한 적 없는 헨리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전사의 손이었다. 검을 버리고 술과 음식을 탐하는 주정뱅이의 손 따위가 아니었다.

에단은 맞잡은 손을 놓고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러고는 헨리를 향해 나름의 정중한 손짓으로 앉으라고 권유했다.

"상당히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에단은 여유로운 어투를 잊지 않았다. 빈센트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에단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헨리 님은 입이 무거우신가요?"

에단의 물음에 헨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여기서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단은 헨리의 대답을 잠시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저와 가문 모두 헨리 님을 신용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 블란테 가문은 아카데미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이죠? 아카데미는 수많은 국가에서 모두를 위한다는 취지로...."

"그게 문제죠. 권력자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단순히 그런 이유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권력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에단은 다리를 꼬면서 말을 이었다.

"뭐, 이건 우리 가문의 개인적인 견해이니,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헨리 님을 보아하니 아직 부패한 것 같지는 않군요."

"아... 감사합니다."

― 미친 능구렁이 같구나.

페온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페온은 에단이 미친놈처럼 싸우기만 하는 모습만 지켜봐 왔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협상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그간 느낀 에단의 모습과는 심한 괴리가 있었다.

그러한 감상을 하는 것은 빈센트와 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빈센트와 첸도 뭔가 잘못 먹은 것처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뛰어난 전사는 평화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시던 말씀입니다."

헨리의 시선이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기에, 빈센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하지만... 평화 속에서도 뛰어난 전사를 만들기 위한 준비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간에 퍼진 저에 대한 소문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달라졌음을 주장하고 싶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았고요. 물론 과거에 저지른 치부를 모두 덮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증명해야죠."

에단의 눈이 가라앉았다.

"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아카데미를 이용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헨리는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놀랐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 위로 후회의 기색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답변했다.

"왜, 안 됩니까?"

"...네?"

"고작 그런 일로 시도하면 안 되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블란테는 언제나 고고해야 합니다. 거슬리는 먼지가 있다면 털어 내야 하는 법이죠. 설마 지금까지 블란테를 향한 아카데미의 존중이 모두 거짓이었다, 그런 말씀은 아니시겠죠?"

에단의 안광이 서늘해졌다. 의도적으로 피어도 조금 풀자, 헨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대화를 할 때 나는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의 분위기를 에단이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그런 생각은...."

"그렇다면 그만한 증거가 필요한 법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는 가문 내에서 그 어떤 형제보다 강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헨리의 시선이 빈센트를 향했다. 빈센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일세. 최근 장남인 모룬과 결투해서 승리했지."

"...그럴 수가."

모룬의 대해서는 헨리도 알고 있었다. 빈센트 가문을 섭외하기 위해 온 파견이었으니, 그 정도의 조사야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망나니로만 알고 있던 에단이 그와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 거짓말일 수도....'

헨리가 에단과 빈센트, 그리고 첸을 번갈아 봤다.

저들의 표정에서는 거짓의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들이 거짓말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블란테의 적통이자 최강자인 제가 아카데미에 교수로 함께한다는 것은 아카데미 측에 최대한의 예우를 한다는 증거입니다. 한데... 아카데미 측의 입장은 다른 것 같군요."

"...."

"그렇다면 저희 측도 대응을 할 생각입니다. 블란테는 당한 치욕을 배로 갚습니다."

"...지금 협박하시는 것입니까?"

"협박이요? 협박이란 이런 게 아닙니다. 이건 단순한 경고죠. 제가 만약 협박을 한다면...."

에단은 살기를 일순간 끌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여동생이 있더군."

"...!"

헨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심약해 보이기만 하던 흐리멍덩한 동공이 살기로 채워졌다.

'마음에 드는군.'

만일 이 도발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면 진정으로 실망했을 것이다.

"지금 하시는 말의 의도가 뭡니까?!"

헨리가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지만, 에단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앉으시죠."

"...실수한 겁니다."

"아직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얘기를 듣고 결정하시죠."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블란테의 입장에 당황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물러설 수는 없군요. 이미 저는 아카데미에서 한 번 굴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정도의 성의 표시와 대응까지 했는데, 다시 말을 바꾼다면 섭섭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겠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블란테에 관해 알고 있다면 그 악명도 잘 알고 있겠죠. 당황하신 것은 알지만, 감정적인 대응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제가 찾아온 것이죠. 단순한 협상을 합시다."

"협상?"

"이전에 말씀하셨듯, 아카데미에서는 실력이 모든 것을 판가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진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레벨린 씨와는 입사 시기도 비슷한 것 같은데, 벌써 직급 차이가 꽤 나지 않습니까?"

"윽...."

"심지어 뒤늦게 임용된, 그 유명하다는 에밀라 씨와도...."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죠?"

"검술 교수 한 명을 불러 주시죠."

"네?"

에단이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교수를 쓰러트리고 제 실력을 증명하겠습니다."

* * *

대화가 끝난 뒤 헨리는 부리나케 저택을 떠났고, 에단은 빈센트와 독대하고 있었다.

"...나를 많이 놀라게 하더구나."

"놀라실 것까지야."

빈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언변은 어디서 배운 거지? 평소 네 행실을 보면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하, 농담도 재밌군요. 이런 걸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알아서 터득하는 거죠."

거짓은 아니었다.

류태신으로 살던 시절, 격투기 단체와 각종 매체 언론들은 단순한 능구렁이 수준이 아니었다.

온갖 정치질과 금전적인 장난질을 통해 류태신을 조종하려고 들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협상하는 법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지, 언변은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무시무시한 놈....

충격을 받은 것은 페온도 마찬가지였는지, 아직도 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다. 이것도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그렇다면 하나만 묻겠다."

"말씀하시죠."

"아카데미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

빈센트의 표정에서는 복잡함이 묻어났다.

그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에단의 대답에 빈센트는 물론이거니와 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는 알고 있겠지?"

"결투에서 한 번 이겼다고 모든 것을 가져갈 생각을 하면 그게 도둑놈 심보죠.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연루되는 것은 사양이고... 아시지 않습니까, 편지."

"...정말 그게 이유라고?"

"네. 그게 이유입니다. 괘씸해서 잠을 잘 수가 없네요. 기대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그토록 혐오하던 오빠가 검술 전담 교수로 갔을 때 리사가 지을 표정이."

"허...."

빈센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끝까지 속을 숨기는구나, 능구렁이 같은 녀석.'

하지만 빈센트는 그런 에단의 모습이 괘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빈센트가 작게 웃었다.

"확실히 조금 기대가 되긴 하는군."

빈센트는 에단의 의도대로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큭큭, 그렇죠?"

"...제가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에단이 물었다.

"첸 경은 기대 안 됩니까?"

그 물음에 굳어 있던 첸의 입가가 휘어졌다. 첸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차가운 인상인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니까 어딘지 모르게 기괴했다.

"그럴 리가요."

첸의 대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 * *

헨리는 멍한 표정으로 응접실 밖을 나왔다. 응접실 밖에서는 여전히 살벌한 기색을 뿜어내고 있는 기사들이 헨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헨리는 샐쭉한 표정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저희가 영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괘,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게요."

기사의 권유를 마다한 헨리가 빠른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빨리 가야 해....'

상황에 휘둘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다니....

헨리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려 했지만, 암담한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35화] 짜여진 판 (2)

헨리는 정신없이 산을 타고 내려갔다.

저택으로 올 때는 안락하게 마차를 얻어 타고 왔지만, 지금은 그러한 시간적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은 상황이다. 암담하다. 하지만 이러한 암시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티지를 못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내려와 마을에 도착한 헨리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뛰어 내려오느라 꼴이 엉망이었다. 먼지와 낙엽 따위의 것들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털어 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하아...."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 사건을 전달했을 시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 가늠이 되지가 않았다.

헨리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수정구에 암호 코드를 입력했다.

"안 받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교신이 되지 않는다면 변명거리가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의미 없는 기대를 걸어 봤다.

하지만.

― 뭐가 안 받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와 동시에 통신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리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수정구 너머를 응시했다.

― 갑자기 연락한 이유가 뭔가요, 헨리 씨?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레벨린.

분명 자신과 입사 동기였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 지금은 쳐다보기도 어려운 상관이 되었다.

'언젠가는 저 높은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는데.'

암울함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일을 수습해야 했다. 헨리가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블란테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그게 정말인가요?

레벨린이 반색했다. 하지만 목소리 너머에서는 의심이 조금 묻어났다.

레벨린은 헨리와 입사 동기였다. 당연히 이번에 주어진 임무가 성사시키기 어려운 임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레벨린은 그의 상관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아카데미를 향한 블란테의 입장은 언제나 초지일관이었다.

대놓고 부정하거나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고운 시선을 보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당황과 의심이 함께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맞다면.

헨리가 거둔 성과는 적지 않았다. 블란테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 정말 잘됐군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교수로는 누구를 초청하기로 했죠?

"...."

레벨린의 질문에도 헨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멘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레벨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요? 헨리 씨, 대답을 해 주시죠.

레벨린이 연달아 재촉하자 헨리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단입니다."

― 뭐, 블란테 가문이 아무나 교수진으로 보내진 않겠... 뭐라고요?

레벨린이 마치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헨리의 고개가 더더욱 숙여졌다. 바닥을 뚫을 것 같은 기세였다.

"에단 블란테입니다."

* * *

"하아... 이런 사고를 일으키다니."

레벨린은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눌렀다.

사고를 쳐도 너무 큰 사고를 쳐 버렸다.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레벨린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 은발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아름다운 외모와 대비되는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에밀라 씨, 괜찮겠습니까?"

"네. 제가 가고 싶습니다. 블란테라고 했죠?"

"네. 상황이 피곤해질 뻔했는데, 에밀라 씨라면 믿고 맡겨도 안심이 될 것 같네요."

"아카데미를 상대로 저런 행패를 부리는 걸 묵과할 수 없을 뿐입니다."

에밀라의 눈이 차게 식었다.

* * *

"호오."

블란테 가문의 무기고 앞에 선 에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격투기 선수로서 전 세계를 누비면서 웬만한 관광 명소는 전부 가 봤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훌륭한 구조물이었다.

금속으로 된 거대한 문과 그에 수놓아진 화려한 문양들.

언뜻 봐도 엄청난 거금이 들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얻을 건 얻어야지.'

에단이 상대하게 될 교수진.

그중에서 상대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 방도가 없었다.

에단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원작의 흐름과는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하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에단은 자신의 무력을 밝혔다.

그러니 아카데미 측은 더욱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목록에 올라오는 대상이 몇 명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누가 오든 그에 대한 대비를 하면 될 뿐이다.

에단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 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의 강화가 필요했다.

'얻을 거는 정해 두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들었다. 대충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무기고였다.

저 중에 하나만 가져올 수 있다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나밖에 안 되겠죠?"

에단의 물음에 빈센트가 눈살을 좁혔다.

"욕심이 과하구나. 원래라면 그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에단은 빠르게 체념하고 문 앞에 섰다.

무기고 앞에 서자 마나가 에단에게 흘러들어 왔다.

― 오랜만에 보는구나.

페온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과거의 감상에 빠진 것 같았다. 당연히 에단은 그런 페온을 배려해 줄 생각이 없었다.

'괜찮은 거 있으면 말 좀 해 봐요.'

이미 뭘 꺼내 올지는 결정했지만, 혹시 몰래 빼돌릴 만한 것들이나 예상보다 좋은 물건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소설의 내용 자체가 주인공 몰아주기였는데, 그런 떡밥이 이 상황에서 풀리기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었다.

'애초에 그게 필요하기도 하고....'

"그곳에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려라."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그었다.

'언제 적 감성인지 모르겠군.'

에단의 피가 문양에 떨어지자, 화려하게 수놓아진 문에 빛이 감돌았다.

끼기긱.

소름 돋는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담담하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당부하마. 가져오는 것은 하나다."

빈센트의 거듭되는 경고에 에단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무기고 안에는 수많은 무기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무기를 보는 안목이 부족한 에단이 보기에도 하나같이 뛰어난 상등품이었다.

가치 높은 무기에는 저마다의 기품이 있었다.

화려한 장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무기 고유의 분위기.

'볼 건 없군.'

에단은 소설 내용 중, 무기고의 초입에는 눈여겨볼 게 없다는 부분을 떠올렸다.

하여 에단은 천천히 발을 옮기지 않았다.

무기들을 훑어보는 걸로 그만이었다.

― 잠깐!

그때 페온의 목소리가 에단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 잠깐 저쪽으로 가 보자꾸나.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에단이 얼굴을 구겼지만, 페온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 ...역시 맞구나.

페온의 얼굴에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은데 어쩌죠."

― 너는 인간이 맞긴 하느냐....

에단의 칼 같은 반응에 페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저 장갑 한 짝을 들어 봐라.

에단은 페온이 가리킨 장갑을 바라봤다.

검은색 가죽 장갑에 먼지가 소복이 올라가 있었다.

나머지 한 짝은 어디 갔는지, 장갑은 왼손용 하나만 남아 있었다.

"별로 가져가고 싶지 않은데요."

에단이 단칼에 거절 의사를 내비치자, 페온이 역정을 냈다.

― 예끼! 그냥 들라면 좀 들어!

페온의 반응에 에단이 큭큭 웃음을 흘리며 장갑을 들었다.

쌓인 먼지를 대충 털어 냈지만, 평범한 외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껏 봐 온 무기들은 각자 저마다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 장갑은 아무리 봐도 별달리 특별한 게 없었다.

― 이걸 써 봐라.

"가져갈 생각 없다니까요."

― 잔말 말고 껴 보기나 해.

결국 에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왼손에 장갑을 착용했다.

"오...."

에단이 장갑을 끼자, 장갑이 손에 착 달라붙더니 이내 피부에 흡수된 것처럼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내가 쓰던 녀석이다. 원래라면 두 짝이 한 쌍이어야 하지만... 이런 곳에 있었군.

에단이 말없이 사라진 장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하나 더 챙겨도 모르겠네."

― ...내 말은 듣지도 않는구나. 그래 맞다. 그러니까 일단 챙기라고 한 소리다. 그 장갑은 설사 마스터가 와서 보더라도 간파하지 못해. 그건 이미 너에게 생착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 장갑은 뭐죠?"

― 나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우연히 가게 된 곳에서 정말 우연하게 얻은 물건이야. 받을 때 듣기로는 타이탄의 물건이라고 하던데, 정확하지는 않다.

"...타이탄?"

― 믿기 힘들면 믿지 않아도 된다. 나도 듣고 넘긴 얘기니까.

하지만 에단은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타이탄의 단서가 여기서 나온다고?'

타이탄은 소설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설정이었다. 아직 제대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주인공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기 전에야 풀리는 떡밥 정도로 생각했다.

'이상한데....'

원작 소설은 먼치킨 소설이다.

당연히 온갖 기연과 기회, 영약과 무기들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어 주인공의 발판이 된다.

그런데 타이탄이라는 엄청난 설정이 블란테에 숨겨져 있었다. 주인공도 얻지 못한 무기를 에단이 얻게 되었다.

'페온도 소설과 다르게 갑자기 나타났지.'

블란테 에피소드에서도 휴고만 조금 등장했을 뿐, 페온이나 다른 것들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원작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에단으로서는 그 이상 알 수가 없었다.

뭔가가 거슬렸다. 단순히 불쏘시개용 소설이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거슬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알아내기는 힘드니까.

"그래서 기능은 뭐죠?"

에단의 물음에 페온이 씨익 미소 지었다.

― 이제야 그걸 물어보는구나. 그 장갑은 타지 않는다.

"...그게 전부입니까?"

― 그런 반응을 할 줄 알았다. 끝까지 들어라. 타지 않고, 얼지 않으며, 찢어지지 않는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 무투의 방어가 해결된다는 소리다. 그 어떠한 마법 공격도, 그 장갑이 보호하는 부분에는 피해를 주지 못한다. 마나를 두른 검과 창도 장갑이 보호하는 부분에는 생채기를 내지 못해.

"허."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 이런 미친 게 여기서 나와?'

대충 들은 것만으로도 이 장갑이 얼마나 미친 성능을 가진 것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단순히 스펙을 올리는 게 아니다.'

피해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 범위가 왼손에 국한되기는 하겠지만, 그마저도 엄청났다.

― 짝이 없는 게 아쉽구나. 그 장갑은 한 쌍이어야 제대로 된 가치가 드러나는데 말이지....

페온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예상 못 한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동굴에서 페온을 데려온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었다.

에단은 다시 원래의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고 나서야 에단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주저하지 않고 무언가를 곧장 집어 들었다.

― ...설마 이걸 가져가려고 하는 게냐?

페온은 에단이 꺼내 든 것을 보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습니다."

필요한 것은 얻었다.

이제 남은 건 결투의 대비뿐이다.

'설레는데.'

싸움에 나서기 전은 언제나 설렜다.

◈ [36화] 첫 번째 기연 (1)

에단이 블란테 가문의 무기고 안에서 나왔다.

무기고 밖에서는 아직 빈센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단을 응시하는 빈센트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어떤 무기를 가져온 거지?"

에단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흔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빈센트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맴돌았다.

"...고작 그딴 걸 가져왔다는 말이더냐?"

황당함과 함께 노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블란테 가문의 무기고에는 보물과도 같은 진귀한 무기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중에는 밖으로 유출됐을 때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것들도 있었다.

검을 다루는 자에게는 꿈과도 같은 기회를, 고작 저런 볼품없는 목걸이 하나랑 뒤바꾸다니.

'정녕 검의 길을 갈 생각이 없는 거냐.'

빈센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에단이 고의적으로 아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저는 이게 마음에 듭니다."

에단의 입가는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이 목걸이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그 진면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괜히 주인공이 가져간 아이템이 아니지.'

성능 자체도 뛰어났지만, 이 목걸이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열쇠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빈센트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단은 빈센트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했다.

* * *

"으아아아악!"

모룬이 괴성을 질렀다. 모룬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팔과 목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언뜻 봐도 중상자의 모습이었다. 모룬은 자신이 겪은 치욕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그따위 머저리 녀석한테 지다니.'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에단을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었다.

과거였다면 그 생각을 실천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을 테지만.

'...제기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부상과는 별개였다. 몸의 상처야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부러진 뼈는 붙으면 더 단단해진다.

블란테의 육신은 질기고 단단했다. 마치 담금질을 하고, 망치질을 한 것처럼 더욱 강인해졌다.

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모룬의 머리에는 회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새겨졌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에단을 찾아가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에단의 얼굴을 떠올리면 몸이 벌벌 떨렸다.

'블란테의 장자이자, 장차 가주가 될 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모룬은 자신의 뺨을 쳤다.

금 간 목과 허리가 비명을 질러 댔다. 아찔한 통증이 이 상황이 지독한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으아아아악!"

지금 모룬이 할 수 있는 것은 괴성을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 * *

"...제기랄."

카론의 상태도 모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을 잘못 선택했어.'

카론은 가문의 막내였다.

일반적으로 막내에게는 주어진 선택지가 적었다. 가문을 수호하는 기사가 되든가, 아니면 자기 길을 개척하거나.

가문 내에서 입지를 키우려면 형제를 짓눌러야만 했다.

다행히도 블란테 가문은 약육강식이었다. 태어난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카론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있었다.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는 에단 블란테.

블란테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 검을 두려워하는 불량품.

에단을 짓밟으면서 카론은 자신의 입지와 자존감을 키워 나갔다.

모룬과 리사에게 대들 생각은 없었다. 카론은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었다.

그 둘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달랐다.

'그런데 어째서.'

에단이 뒤룩뒤룩한 지방 덩어리를 제거하고 나타났을 때.

그때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어야 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무난하게 지나갔을 일이었다.

"제기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카론은 이미 완전히 에단에게 짓밟혔다. 반박의 여지도 없는 완패였다.

하지만 희망은 남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설마 모룬 형님도 패배할 줄이야...."

유일한 희망이던 모룬도 에단에게 별다른 수도 써 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카론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길을 잘못 선택해도 한참 잘못 선택했다.

이제는 체념하고 에단 앞에서 기어야 할 때였다.

카론의 마음속에서 에단에 대한 공포심이 싹텄다.

* * *

에단은 연무장에서 가볍게 뛰며 몸을 풀고 있었다.

빈센트의 복잡한 눈빛에도 에단은 별다른 사족을 달지 않았다.

'애초에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에단이 알고 있는 정보는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었다.

에단이 할 일은 그저 결과로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불안감 대신 기대감이 든다. 에단은 이런 감각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에단이 천천히 속도를 올려 가며 뛰고 있을 때, 말없이 바라보던 페온이 물었다.

― 한 가지 물으마.

"말씀하시죠."

호흡을 유지하며 달리던 에단이 답했다.

― 왜 굳이 박투를 고집하는 거지? 그 길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페온의 질문에 에단이 대뜸 발을 멈췄다.

에단이 미묘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제가 맨몸 격투를 고집한다고요?"

― ...아니었나?

페온의 물음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전혀요. 저는 맨몸 격투를 고집할 생각이 없습니다."

에단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에단이 단검을 가볍게 던져 역수로 잡았다.

"그래도 되는 상대이기에 그런 것뿐이죠."

숙련도가 부족한 것은 알고 있었다.

에단은 류태신이었던 격투기 선수 시절, 평생을 격투에 매진했다.

다양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술의 집합체가 종합 격투기였다.

각국 굴지의 괴물들 사이에서 류태신은 무패를 유지했다.

전문가들의 분석과 대응도 류태신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 어떤 전략도 류태신 앞에서는 간단히 파훼되었기 때문에.

그런 과정들이 반복되니 열의는 식어 갔다.

격투에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을 수련해 왔고, 밟아 온 길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에단에게 있어 격투는 수단이었다.

에단은 가볍게 단검을 몇 차례 휘둘렀다.

정형화되지 않은 날것의 단검술이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공격이 날카로웠다.

"지금까지 검술은 필요하지도 않았고, 아직 익숙하지도 않고."

에단이 씨익 웃었다.

― ...정말 재수 없는 놈이구나.

페온이 배신당한 것 같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자신과 같이 주먹만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은 페온의 생각과 달랐다.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한 번 걸어 본 길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신념은 고집이 되고, 고집은 아집이 된다.

아집을 가지게 되면 성장은 정체된다.

에단은 탐욕적이었다. 그게 뭐가 됐든 모든 것을 탐하려고 했다.

'그 욕심에 매몰당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에단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 오만함도 실력 있는 자가 가지면 자신감이 되지... 좋다. 슬슬 때가 되었으니 내가 가진 '격투'를 전수해 주마.

페온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단이 눈을 끔뻑거리며 페온을 바라봤다.

"그거 꼭 전수받아야 합니까?"

에단의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뚝뚝 묻어 나왔다.

결국 참다못한 페온이 역정을 냈다.

― 그냥 받아!

* * *

"여기가 블란테의 영지인가?"

말에서 내린 에밀라의 얼굴에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말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에밀라의 옷에도 군데군데 먼지가 묻어 있었다.

"오, 오셨습니까!"

헨리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에밀라의 이마에 작은 주름이 생겨났다.

"당신이 헨리인가요?"

에밀라의 눈빛에서 추궁의 기색을 읽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에밀라 씨."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검술 교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에밀라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까칠한 태도에 헨리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감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건의 원흉은 헨리 자신이었으니.

"블란테의 영지에 게이트가 없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없을 줄이야...."

어느 정도 크기의 영지에는 대부분 게이트가 보급되어 있었다.

물론 서민이 사용하기에는 터무니없는 비용을 자랑했지만, 그만큼 상당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낙후된 곳이군요."

"헤헤, 그래도 산골짜기에 있어서 그런지 공기는 좋습...."

눈치 없이 말을 내뱉던 헨리가 에밀라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일정은 언제죠?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군요."

"모, 모레입니다. 예정보다 일찍 오시는 바람에... 하하."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숙소라도 안내해 주세요. 짐을 풀어야겠습니다."

"넵, 제가 머물던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헨리는 에밀라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아주 상전이 따로 없군. 입사일로 따지면 나보다 후배인 주제에.'

하지만 그 말을 밖으로 내뱉을 강단은 없었다.

에밀라는 아카데미에서도 뛰어나기로 유명한 검술 교수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빼어난 외모와 실력 덕분에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얼마나 큰 인기를 얻고 있냐면, 까칠한 성격도 단점이 아닌 매력 포인트라고 불리는 지경이었다.

'변두리에 처박혀 있는 나랑은 차원이 다르구만.'

헨리는 속이 쓰렸다.

* * *

― 주먹과 발을 쓰는 격투술이 냉병기보다 앞서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렇군요."

― 꼭 그따위 반응을 해야겠느냐?

"뭐가 잘못됐습니까?"

― 하... 됐다. 계속 진행하지. 그런 말을 들어 본 적 있느냐? 검을 자신의 몸처럼 여겨라.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요."

무협지에서.

페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검은 아무리 잘 다뤄도 도구에 불과하다.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몸처럼 다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그 점에서 우리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페온이 마나를 끌어 올리자, 손에 마나가 차올랐다.

― 검에 마나를 실을 줄 아는 마나 유저는 극히 적다. 마스터를 목전에 둔 자들이나 간신히 시전할 수 있는 경지지. 설사 시전하더라도 그 효율은 매우 나쁘지.

페온이 주먹을 뻗었다. 반투명한 몸으로 펼치는 단순한 주먹질이었지만, 그 기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육체만을 극한으로 단련하는 무투가들은 누구나 마나를 몸에 실을 수가 있지. 마나를 전달하고 이동하는 속도, 효율, 반응. 모든 게 검이나 창과는 차원이 달라. 지금부터 그 운용법에 대해 알려 주겠다. 원래라면... 내가 수련해 온 격투술을 알려 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

에단의 기술은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페온은 여기서 에단에게 무언가를 전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평생을 격투만 수련한 페온도 에단의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만일 살아서 만났다면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념에 젖을 시간이 아니었다. 에단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페온을 바라봤다.

"시작 안 합니까?"

페온은 순수해 보이는 시선 속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탐욕이었다.

성장에 대한 게걸스러운 탐욕. 페온도 강함에 미쳐 있을 때 가지고 있던 감정이라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허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탐욕스러운 후손에게 밑천이 모두 털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 [37화] 첫 번째 기연 (2)

별채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느닷없이 찾아온 평화는 익숙하지 않았다. 가토와 휴고는 여유로움이 달갑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류태신이 에단의 몸으로 눈을 뜬 뒤, 그들의 생활 양식은 오직 고강도 트레이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드시 에단이 있어야만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토와 휴고는 이미 운동 중독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만족이 되지 않았다.

"...열다섯, 이제 끝이잖아. 교대해."

"잠깐만, 조금만 더 쥐어짜고."

휴고가 승모근에 쇳덩이를 짊어진 채 몇 회 더 앉았다 일어섰다.

긴 쇠막대에 거대한 쇳덩이가 끼워져 있는 독특한 형태였는데, 에단은 이 물건을 '바벨'이라고 칭했다.

'호오, 역시 실력이 대단하네. 첫 작품에서 이 정도의 퀄리티가 나올 줄이야.'

물건을 받자마자 에단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 휴고와 가토는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않았다. 독특한 모양새이긴 했지만, 특별해 보이지는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직접 운동을 시작하자 전혀 다른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중량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게 되니 운동 효과도 배로 늘어났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문의 야장들은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다.

에단이 주문한 물건을 받아 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빨리 비키라니까. 체온 떨어지잖아."

가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휴고를 재촉했다. 하지만 휴고는 싫다는 듯 바벨을 놓지 않았다.

장비의 여유가 부족하다 보니, 이런 사소한 다툼이 벌어지고는 했다.

결국 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벨을 내려놨다. 바벨이 지면에 떨어지면서 큰 굉음을 일으켰다.

"아, 큰일 났다...."

"너... 괜찮아. 도련님은 안 계셔."

에단은 바벨을 함부로 던지는 것에 굉장히 예민했다.

"그런데 요즘 도련님은 뭐하고 계시지?"

"글쎄, 연무장에는 잘 안 보이는 것 같던데."

훈련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단이, 최근 들어서는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뭐지?"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음...."

에단은 말없이 나뭇가지를 세워 두고 있었다.

평범하게 세워 두는 것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지정한 위치에 던져서 세워 두고 있었다.

그러고는 조약돌을 던져 나뭇가지를 쓰러트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마나 수련의 진수를 알려 줄 것처럼 말하더니, 페온은 전혀 다른 훈련을 시켰다.

뭔가 허송세월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 의심하지 말거라.

에단의 생각을 읽었는지 페온이 입을 열었다.

― 마나는 단순히 육체의 움직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너는 육체의 강인함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지금은 그게 큰 장점으로 작용하겠지만, 추후에는 너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야.

"뭐 별말은 안 했습니다만...."

에단은 별다른 말 없이 조약돌을 던지며 나뭇가지를 쓰러트렸다.

실력은 점점 늘어 갔다. 단순히 힘껏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닌,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각으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마나를 싣고, 마나를 통제한다.

대충 무슨 감각인지는 알 것 같았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뭔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것 같았다.

에단이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 갑자기 어딜 가느냐?

"떠오른 게 있어서요."

생각대로라면 조금 더 재밌는 방법이 될 것 같았다.

* * *

샥― 샥― 샥― 샥― 첨벙.

에단이 찾아간 장소는 호수였다.

'역시 되네.'

에단이 가볍게 손을 풀었다. 에단의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기교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마나의 세심한 컨트롤이었다.

에단이 손목의 스냅과 손가락의 힘만을 이용하여 돌멩이를 던졌다.

쐐액―

돌멩이가 비행하며 물 표면과 접촉했다.

마치 물 위를 유영하듯, 돌멩이는 부드럽게 한참을 나아가다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 ....

페온은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히 에단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에단이 피식 웃으며 다시 돌멩이를 쥐었다. 지천에 널린 것이 돌멩이 따위였다. 훈련 도구 걱정은 필요 없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헨리가 눈을 굴리며 말을 끝냈다. 최대한 억울함을 피력하며 불합리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에밀라는 그런 헨리의 속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제길, 콧대 높기는.'

헨리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카데미 교수.

각국의 인재들을 지도하는 만큼, 실력과 인성적인 측면에서 보증을 받은 자들만이 교수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명망 높은 직업이다 보니, 수많은 엘리트들이 아카데미의 교수를 지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원자들에게는 입학생의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아카데미는 그만큼 엄격했다.

'귀족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카데미에서는 대부분 뒷배경을 비밀에 부치지만,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에밀라의 대한 소문은 어떠한 것도 떠돌지 않았다. 에밀라는 그저 묵묵히 학생들을 지도할 뿐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뜬금없이 나타나 뛰어난 실력과 아름다운 외모로 학생들을 휘어잡자, 에밀라를 시기하는 시선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에밀라의 뒤를 조사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몰락한 귀족이거나 비슷한 거겠지, 뭐.'

에밀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함부로 대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말투는 까칠하고 날이 서 있었지만,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식사 중에는 조용히 하셨으면 좋겠군요."

"네? 아... 알겠습니다."

헨리는 결국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에밀라는 음식을 먹으면서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마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여기에 변변한 장소가 별로 없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서 식사나 마치시죠. 그건 그렇고 내일 블란테 가문으로 찾아가면 되는 건가요?"

"아, 넵. 내일 오전에 찾아가는 것으로 협의를 끝냈습니다."

"아카데미를 무시한 건방진 망아지를 혼내 주고, 빨리 돌아가고 싶군요."

에밀라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만큼 아카데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

헨리는 안도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에밀라가 위로 올라갔다. 헨리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 푹 쓰러졌다.

"후, 진이 다 빠지네.... 뭐야, 다 먹었잖아?"

맛없다는 기색으로 먹은 것치고는, 에밀라는 접시에 있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정작 말하기 바빴던 헨리는 얼마 먹은 것도 없었다.

"저, 저기요, 음식 몇 가지 주문 더 가능할까요?"

"미안한데 이제는 안 돼요. 재료가 다 떨어져서."

"아...."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서러워진 헨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 * *

다음 날, 에단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평소 에단은 화려한 의복보다 몸을 움직이기 편한 연무복을 주로 입었다.

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대접하는 만큼, 단색의 연무복보다는 조금 더 화려한 옷을 들어 올렸다.

"...사건이 끊이지가 않는군요."

옷을 입는 것을 기다려 주던 네이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활기가 생긴다는 것이지."

에단이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답했다.

말은 태평하게 했지만, 적어도 이번 상대는 만만하게 여길 상대가 아니라는 걸 에단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귀도 밝네."

"...모룬 님과는 또 다를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하하,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에단이 웃으며 네이드를 바라봤다. 에단의 몸은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연무복 사이로도 오밀조밀한 근육의 윤곽이 드러났다.

전사의 몸이었다. 그걸 슬쩍 쳐다본 네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걱정이 필요 없다는 소리이신가요?"

"아니. 나는 그런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다려 봐. 결과로 증명해 줄 테니까."

"허허."

네이드가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자신의 걱정이 무시당해서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감이 들었다.

'도련님은 이번에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는지.'

에단의 성장은 눈부셨다. 적지 않은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천재를 만나 온 네이드도, 에단 같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괴물을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성장이 아닐 수도.'

에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한 경지를 이룬 네이드는 그것을 간파할 통찰력이 있었다.

"아, 네이드. 검 하나만 준비해 줘."

이번에는 조금 색다르게 갈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는 에단이었다.

* * *

"설마 또 결투가 벌어질 줄이야."

이번에는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결투가 아니었다.

사실 결투가 아닌 시험이었지만, 블란테에서는 그런 구분을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외지인과의 대결이라는 것이었다.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감정싸움이자 이권 다툼이 아니었다. 같은 블란테끼리라면 누가 이기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이는 외부인이며, 블란테는 높은 자존심을 자랑하는 검술 가문이었다.

외부인에게 당하는 패배는 큰 치욕이었다.

그렇기에 분위기는 한층 더 엄숙해졌다.

많은 기사들이 모였고, 그들이 풍기는 기도는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휴고와 가토도 있었다.

"도련님도 대단하시군...."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에단의 행보는 보면 볼수록 기가 질렸다.

승부욕 같은 감정은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느끼기에는 에단이 너무 높았다.

"동감이야.... 그런데 너는 어제 어디 갔다 온 거야?"

"알고 있었어?"

"저녁부터 무장을 하고 갔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도련님이 호출하셔서."

"도련님이?"

"어. 나도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서 준비를 하고 나갔지."

"뭘 했는데? 나 몰래 무슨 특별훈련 같은 거 한 거 아니야?"

휴고가 섭섭하다는 얼굴로 묻자 가토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말도 섞기 싫어하던 둘이었지만, 어느덧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아니더라고."

"그럼 뭔데?"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도 짐승 같지만, 도련님은 정말 괴물 같다는 게 느껴지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설명하기 힘들다니까. 잔말 말고 그냥 보기나 해."

가토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

가토가 기억을 상기했다.

며칠 전 밤, 에단의 부름에 따라나섰을 때였다.

당시에는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때 에단의 손에는 투박한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가토는 에단과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38화] 아카데미 측의 시험 (1)

터벅 터벅.

에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이번에는 야외 연무장에서 시험이 진행되었다.

'홈그라운드에서 하는 시험이라.'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전에는 직접 아카데미까지 찾아가 망신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감정이 고조됐다.

링이나 옥타곤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싸우기 직전에 느껴지는 감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시선이 보였다.

어제 에단을 도운 가토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고, 인파 사이에는 카론과 모룬도 보였다.

'속 보이기는.'

한쪽 팔과 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모룬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누구보다 에단이 꼴사납게 패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자기만 손해일 텐데.'

가문의 위세만 떨어진다.

블란테의 영지에서 블란테가 패배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질 생각도 없지만.'

에단이 목을 풀었다. 목에서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에단이군요."

터진 길 사이로 에밀라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과 얼음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외모가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 자들도 있었다.

'역시 쟤가 나왔네.'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즉 실질적으로 전투에 조예가 깊은 교수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아카데미 측에서 올 수 있는 교수를 예상하여 특정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내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나 보군.'

에밀라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감정이 없어서 저런 눈빛을 내뱉는 게 아니었다.

그저 분노의 표출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네. 제가 에단입니다. 이제 직장 동료가 될 사이인가요?"

"...듣던 대로 자유분방한 입을 가지고 계시군요. 어디서 나오는 오만함이죠?"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오만이 아니라 자신이라고도 부르죠."

"하, 말은 잘하는군요. 이전에 아카데미에서 무참하게 당했다고 하던데, 그건 기억 못 하나 보죠?"

에밀라의 귀여운 도발에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에단이 한 손으로 귀를 후볐다.

"글쎄요. 제가 과거에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기억이 나질 않네요."

에단의 태도에 에밀라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과거를 부정하는 겁니까? 그 태도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에밀라 님은 과거를 잊지 않는 편인가요?"

"...무슨 의미죠?"

"별 의미 없습니다."

날 선 대화가 오가고 있는 와중에 첸이 다가왔다. 첸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군.'

아카데미를 낮게 여기는 것은 첸도 다르지 않았다. 아카데미라는 집단에 안 좋은 인식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생각을 달리해야겠어.'

첸이 에밀라를 바라봤다.

단련된 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성이었지만, 옷 사이로 단련된 근육이 느껴졌다.

발걸음, 호흡, 눈빛, 기도.

모든 것들이 에밀라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첸은 묘한 호승심이 일었지만, 공과 사를 구분할 줄은 알았다.

'결과가 기대되는군.'

에밀라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에밀라는 결코 모룬 따위와 비교될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모룬을 완전히 압도했다. 모룬과의 대결에서 보여 준 것이 전부였다면, 에단이 불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승부의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생각을 마친 첸이 두 명에게 시선을 던졌다.

"준비되셨습니까?"

에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에단도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의사를 대신했다.

이윽고 첸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결투가 공정할 것을, 블란테의 기사 첸이 보증한다. 모두 각각의 명예의 먹칠하지 않게끔 결투에 임하도록."

첸의 검이 떨어졌다.

시험의 시작이라 생각했지만, 첸은 결투를 보증했다. 여기에는 첸과 빈센트의 의도가 묻어 있었다.

'결투라.'

에밀라의 입가에 호선이 그어졌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서릿발보다도 차갑다.

'후회하게 해 주지.'

가볍게 코를 눌러 주고 갈 생각이었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괜히 빈센트 가문에 감정을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먼저 시작한 건 이 녀석이니까.'

모든 것은 소문이었다. 누구든지 조작할 수 있는, 검증되지 않는 내용들.

확인된 사실은, 에단이 아카데미 시험에 응시했고, 그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처참한 성적으로.

에밀라가 검을 뽑았다. 검신이 얇은 아름다운 검이었다.

에밀라가 검을 뽑자 에단도 검을 뽑았다. 두껍고, 투박한 검이었다.

에밀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밀라 정도 되는 경지의 검사는 검의 외관만 봐도 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관리가 안 된 검.'

수준 낮은 검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좋다고 할 수 있는 검도 아니었다.

유추하자면 수련용 철검. 그것도 관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빠득.

에밀라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반면 에단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면서 여유를 잃지 않았다.

'또 그 짓을 하려고.'

에단의 검을 의식하던 카론과 모룬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은 언제나 검을 쓰는 척하면서 검을 미끼로 사용해 왔다.

비겁하다고 할 수 있는 변수에, 자신들은 언제나 첫수를 내어 주고는 했다.

'이번에도 같은 수법인가?'

하지만 에단은 검을 내던지지 않았다.

"먼저 안 와?"

에단의 가벼운 언행에 에밀라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매가 약일 수도 있겠지."

에밀라가 가볍게 튀어나왔다. 가볍고도 빠른 움직임이었는데, 마치 유연한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에단이 에밀라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에 서술된 내용으로 미리 알고는 있었다. 외관만 봐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저 검은 베기 위한 검이 아니다. 약점을 노리고 찌르기 위한 검.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이유는 뭘까.

쐐액!

에밀라의 검이 에단의 미간을 노렸다. 에단이 고개를 젖혀 피해 냈다.

"무서운데."

빠른 일격에 에단이 휘파람을 내뱉었다. 어깨의 움직임으로 공격 방향을 예측하지 않았다면 피해 내기 어려웠으리라.

살의가 담긴 일격은 아니었지만, 피해 내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을 위력이었다.

'피했어.'

에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죽일 작정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상처 정도는 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피해 냈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리는지 지켜봐 주마!'

에밀라의 눈이 변했다. 기를 죽여 놓고 시작하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초장부터 제대로 갈 생각이었다.

에밀라가 다시 공세를 가져가려던 순간, 그 흐름을 끊은 것은 에단이었다.

부웅!

몽둥이가 날아오는 듯한 소리가 에단의 검에서 들려왔다.

'피할까? 아니야.'

에밀라는 경지에 이른 검사다. 에단이 휘두르는 검격 깊지 않다는 것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런 검을 중간에 파훼시키는 것은 에밀라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심을 끊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단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답했다.

"얼씨구, 자신 있어?"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에밀라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수를 돌리기에는 늦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에밀라의 검신은 가늘었다. 그러나 질 좋은 명검이다. 부러지지도 않을뿐더러, 부러지게끔 만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밀라는 순간 검이 부러진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무슨... 힘이...!'

콰드드득!

에단의 근육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와 동시에 에밀라가 쥔 검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위태로운 대치 상황에서 에단이 공격을 이어 나갔다.

에단은 검술의 대가가 아니었다. 그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에단은 격투가로서는 완성되었지만, 검사로서는 이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에게도 자신 있는 것이 있었다.

큰 기술을 요하지 않는 기본 검술.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사선 베기.

모든 검술과 검법의 근간이 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폭, 타이밍, 힘을 주는 방향성.

이 모든 것이 에단의 주특기였으니까.

매끄러운 연계? 상대의 흐름을 끊는 수 싸움?

에단에게는 사치였다.

"후읍!"

에단은 호흡을 삼켰다.

앞발을 내디뎠다. 발을 지면에 못 박아 놓고 검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는 검일 뿐, 어느 곳에도 화려함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면 족하다.

서걱!

에밀라는 에단의 검을 피해 냈다. 본능적으로 저 검과 부딪치는 순간 좋지 않은 꼴을 보이게 되리란 걸 느꼈다.

"잘 선택했어."

에단이 웃었다. 에밀라는 섬뜩함을 느끼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에단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에단의 검이 연계되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연계는 아니었다. 연계는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매우 빨랐으며, 무거웠고, 강했다.

마치 폭풍과 같은 검이었다. 에단은 체력에 한계가 없는 것 같이 검을 휘둘렀다. 에밀라는 거리를 벌리고 싶었지만, 에단을 떨치기란 쉽지가 않았다.

'무슨 속도가...!'

흐름을 끊어야 했다.

방금의 경험으로 느꼈다. 검끼리의 힘 싸움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뿐이야!'

힘만으로는 검이라는 도구를 정복하지 못한다. 검사(劍士)는 역사(力士)가 아니었다.

'지금!'

에밀라는 연계가 부자연스러운 순간을 노리고 회심의 일격을 찔러 넣었다.

그 순간, 에단이 미소 지었다.

'걸렸네.'

에단은 검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아직 검을 다루는 것에는 초심자나 다름없었다.

기교나 깊이 면에서는 에밀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에단이 '싸움'이라는 행위에서도 초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에단은 누구보다 베테랑이었다.

류태신은 무적이자 무패의 챔피언이었으니까.

미끼를 던지고, 그것을 낚아채는 것은 선수 시절 류태신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에밀라의 검이 에단을 향해 찔러 오는 순간, 에단의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에단의 다리가 에밀라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헉!"

"느낌 좋고."

제대로 들어간 뒤차기.

뒤차기는 모든 킥 공격을 통틀어도 위력 면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한다.

그런 위력의 공격을 에단이 사용했으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장 내장이 파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나로 보호하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어.'

에단이 몸을 트는 순간 복부를 마나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내장이 터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심지어 막았음에도 에밀라는 순간 배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에밀라가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자, 에단이 발을 멈췄다.

에단의 호흡은 평온했다.

반면 에밀라의 얼굴은 벌써부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

이렇게 서로 수 싸움을 하면서 겨루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로가 동등한 조건일 때에만 해당되었다.

에단과 에밀라는 전제 조건이 달랐다.

에밀라는 숙련된 마나 유저였고, 에단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초심자였다.

그런데 에단에게 있어 이 대결은 패배해서는 안 되는 대결이었다. 더군다나 에단은 패배를 매우 싫어했다.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에단이 씨익 웃으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아하니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았다.

에밀라를 흔들어 줄 적기 말이다.

◈ [39화] 아카데미 측의 시험 (2)

에밀라의 과거가 어떠한지 에단은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더 우습지.'

에밀라도 주인공과 연계되는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한 에밀라가 주인공의 심성에 감화되어 아픔을 치유한다는 설정이었다.

'토악질이 쏠리는군.'

에단의 성격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로? 치유?

그래, 깎아내리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에단이 그러지 않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당근보다 채찍을 선호했다.

"왜, 아픈 게 익숙하지 않나? 이거 이상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별 의도는 없고... 구를 만큼 굴렀잖아? 왜 이렇게 고고한 척을 하나 궁금해서 말이지."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에밀라에게만 들렸을 것이다.

"...나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아카데미의 설화(雪花),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나?"

에단이 능청스럽게 웃자 에밀라의 눈에서 살기가 맴돌았다.

"...죽여주마."

검을 드는 순간 에밀라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애초 에단이 원하는 바였다.

이번 결투에서 이기고 난 후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래야 더 재밌기도 하지.'

에밀라가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돌진했다.

에단은 재빨리 고개를 젖히며 검을 피했으나, 그 즉시 에밀라의 몸이 회전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검은 당장에라도 에단의 목을 베어 버릴 기세로 다가왔다.

그걸 지켜보던 첸의 발이 움찔거렸다. 이대로는 에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에단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경로는 예측되고, 그녀의 검이 다가오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하니 자신의 검을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쾅!

물론 그것을 견디는 것은 오직 에단의 근력이었다.

에단이 발을 더 내디디며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콰드드득!

"같은 수법에 안 넘어간다."

에밀라의 눈이 빛나며 주변의 마나가 일렁였다.

"무섭네."

에단이 이를 드러냈다. 물론 그도 마나를 운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의 마나 총량이 부족하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에단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이상으로 마나를 근력에 집중한 덕분에, 에단의 검이 조금씩 에밀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차린 에밀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힘으로 안 되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전략으로 바꾸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샤샤사사사삭!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검격이 이어졌다.

저 속에 들어가면 몸이 갈려 나갈 듯한, 폭풍 같은 검격이었다.

퉁! 퉁!

에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흐름이 끊긴다.'

빠른 공세는 적에게 방어를 강요하다 보니, 흐름과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공격 흐름은 툭툭 끊기고 있었다. 공격이 매끄럽게 연계되지 않았고, 지점마다 에단의 검이 경로를 헝클어 놨다.

그 탓에 조금씩 에밀라의 기세가 수그러들었고, 그 순간.

퍽!

에단의 프론트 킥이 적중하며 에밀라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연이어 에단이 웃으며 킥을 날렸다. 빠르게 몸을 빼려고 했지만, 연이은 복부의 충격에 그녀의 발이 굳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검을 든 에단이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안 쫄아도 돼."

에단의 검은 상당히 느렸다. 그녀는 에단이 의도적으로 검의 속도를 늦췄다는 걸 알아차렸다.

으드득.

굴욕감에 이를 갈았다.

"...감히 나를 조롱하는 건가요?"

"지금 '감히'를 붙일 처지는 되고?"

"후회할 겁니다."

에밀라가 마나를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에단이 어떤 자인지는 감이 잡혔다.

소문과는 달리 에단은 무능한 망나니가 아니었다.

어금니를 숨긴 야수였지.

'죽인다.'

에단은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다. 원래라면 건방진 콧대를 눌러 주고 말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살아 나갈 수는 있어.'

주변에 블란테의 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에단을 죽이게 되면 저 늑대들이 자신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밀라에게도 안전장치 하나쯤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밀라는 지금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상태였다.

― 이건 위험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단이 웃었다. 에밀라를 도발한 보람이 있었다.

에밀라의 기세가 달라졌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첸을 바라봤다.

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빈센트가 보이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

에밀라가 움직였다. 순간 신형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보고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측의 영역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숙이자 검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대로 하단에서 에밀라를 향해 검을 그었다.

간결하나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흥!"

하지만 에밀라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뻗었다. 에밀라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장막이 씌워져 있었다.

서걱―

검이 잘려 나간 걸 본 에단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아니, 이럴 수가!"

"이제야 표정이 볼만해지는군요. 하지만 늦었습니다."

에밀라가 검을 뻗었다. 이제 에단을 죽이고 이 자리를 탈출하면....

"...이럴 줄 알았냐?"

입꼬리를 뒤틀며 그녀를 바라본 에단이, 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고는 눈빛으로 자신의 하고픈 말을 전달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부터 재밌는 순간이니까.'

에단이 뻗어지는 에밀라의 검을 왼손으로 쥐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에밀라의 검에 감도는 푸른빛.

그 말인즉, 에밀라가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강자라는 소리였다.

한데 에단은 저 검을 맨손으로 쥐려고 하고 있었다.

'멍청하긴.'

에단의 바보 같은 선택을 비웃은 에밀라가 검에 힘을 실었다.

콰드드득!

불똥이 튄다. 피가 아니라 불똥이 튀고 있었다.

에단의 손에서 쇠가 갈리는 파열음이 울렸다.

손에 마나를 싣고 있었다. 에단은 아직 마나를 방출할 수 있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뼈와 근육을 질기게 만들고, 순간적인 폭발력을 만들어 낼 자신은 있었다.

'성능 확실하군.'

― 이런 무모한....

페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설마 저 장갑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제가 쓸모 있다고 한 게 하나 더 있죠.'

에단이 목걸이를 바라봤다. 사용법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흐트러트려!'

에단이 무기고에서 들고 나온 목걸이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세계수의 목걸이.

여러 효과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효과는 마나 실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나를 충전해야 하지만.'

에단은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공급 대상이 있으니 자신의 마나가 필요할 리가 있나.

마나가 형상화되어 검으로 표출되는 이 순간이야말로 세계수의 얼마나 좋은 먹잇감인가.

대치의 균형이 무너졌다. 에밀라는 아직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다.

마나의 운용 자체도 버거웠다. 그런 마나가 강제적으로 추출을 당하고 있었다. 속이 진탕되는 것은 당연하다.

"커헉!"

에밀라의 몸이 비틀거렸다. 균형이 넘어가자, 에단이 손에 쥔 검을 그대로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는 에밀라가 에단의 품에 안겼다.

"이거 어쩌지?"

이제 시작인데.

퍽!

에단의 무릎이 에밀라의 명치에 꽂혔다.

"커헉!"

에밀라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큰 일격이었다.

'의지력이 좋네.'

에밀라가 거리를 벌리려고 들었다. 느낌은 확실했다.

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밀라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전같이 기민한 몸놀림은 아니었지만, 에밀라의 발은 움직였다.

하지만 에단은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빠악!

에단의 발이 그녀의 정강이를 후렸다. 이미 대미지가 쌓인 상태였다.

에단의 프론트 킥을 얻어맞자 에밀라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에단이 그녀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퍽! 퍼벅! 퍼버벅!

리버샷으로 포문을 연 펀치의 연계. 에단이 즐겨 사용하던 펀치 콤비네이션이었다.

대망을 장식하는 어퍼컷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 에단이 에밀라의 은빛 머리칼을 붙잡아 당겼다.

에밀라가 힘없이 당겨졌다.

에단의 잔혹한 손속에 관중들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단은 에밀라를 그대로 감아 메쳤다.

쿵!

먼지가 뭉게뭉게 퍼질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룬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전의 트라우마가 상기된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에밀라의 정신력은 우습게 볼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아직 눈은 살아 있었다.

'편하게 보내 줄 수도 있지만.'

조르기 같은 종류의 기술을 이용한다면 고통 없이 기절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서브미션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에단이 에밀라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에단의 허벅지가 에밀라의 갈비뼈를 압박했다.

"끄어어억...."

에밀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또다시 충격이 이어졌다.

에단의 주먹이 에밀라의 얼굴을 노렸다.

쾅!

주먹이 사정없이 꽂히며 피가 터져 나왔고, 자비 없는 공격에 에밀라의 눈에서 흰자위가 떠올랐다.

에단이 멈추지 않고 다시 파운딩을 이어 나가려고 할 때.

척.

첸의 검이 에단의 앞에서 멈췄다. 그제야 에단이 공세를 멈췄다.

"거기까지입니다."

첸의 저지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말리는 게 너무 늦습니다. 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

시험이 막을 내렸다.

* * *

시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에단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간 에단이 보여 준 파격적인 행보와 패배를 모르는 전투가 인상적인 탓이었다.

에단이 모룬에게 승리를 거뒀을 때에도 적지 않은 파장이 일어났다.

에단의 평판은 수직으로 상승했고, 에단의 입지는 크게 높아졌다.

블란테 가문이 에단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험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교수.

블란테는 폐쇄적인 가문이 아니다.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대륙 내에서도 입김이 강하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당연히 최근 아카데미가 어떤 평판을 받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각국의 기재들이 모이는 전도유망한 집단.

그곳의 교수라면 응당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하여 이번에는 패배를 예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에단이 만용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괜히 일을 벌여 블란테라는 이름에 먹칠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예측은 빗나가 버렸다.

에단은 승리했다.

교수는 생각보다 뛰어났으며, 마스터를 목전에 둔 강자였다.

하지만 그런 강자를 상대로도 에단은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줬다.

그 모습이 블란테의 기사들에게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야만적이고, 손속 없는 그 모습이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놀랍더군."

"별거 아니네요."

에단이 히죽 웃으면서 말하자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칭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손속이 과했어."

"봐줄 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목숨을 위협받기는 했고요."

"...그 점에서는 할 말이 없군. 확실히 과한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지. 만일 네가 큰 상처를 입었다면 아카데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게다."

빈센트의 안광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멀리서 지켜봤기에 빈센트도 알고 있었다. 대결 후반부에 에밀라의 공세에 살의가 담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과가 잘됐으니까 된 거죠, 뭐."

에단이 씨익 웃었다. 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책임을 물을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빈센트가 에단을 호출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그 손은 어떻게 된 거지?"

빈센트가 에단의 왼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단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 [40화] 성능 확실하네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은 침묵했다. 에단이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생각보다 성능이 확실했다.

'어떻게 하죠?'

―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 놓고.

페온의 불퉁한 핀잔에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삐졌군.'

― ...안 삐졌다.

에단이 짧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연한 기회에 얻었습니다."

"그게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습니까."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빈센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다면 묻지 않겠다."

'사실인데.'

페온이 아니었으면 얻기 힘든 기연이었다. 원작에서도 언급되지 않았으니, 원래라면 절대 얻지 못할 물건이었을 테다.

'성능도 만족스럽고.'

에단처럼 근접 전투를 즐기는 이에게, '타이탄의 장갑'만큼 효율적인 무기는 찾기 어려웠다.

마나를 두른 검도 이겨 내는 막강한 내구력이라니.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뜻밖의 수확이야.'

하지만 이를 무기고에서 얻었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괜히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

미소 짓고 있는 에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빈센트가 미간을 좁혔다.

"검을 쓰더구나."

"나름대로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건 검술이라고 할 수 없다."

"뭐, 검을 휘두르면 검술 아니겠습니까."

"후....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깨어났습니까?"

"아직이다. 듣기로는 아마 오늘 저녁쯤에는 눈을 뜰 것 같다고 하더군."

"코는 멀쩡하답니까?"

꽤 피가 많이 튀던데.

에단이 중얼거리자 빈센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음부터는 손속에 주의하도록."

"형과 동생을 상대로는 그런 소리 없었는데, 여자라서 배려하시는 겁니까?"

"쓸데없는 잡음을 주의하라는 거다."

"뭐, 조심하도록 하죠."

답은 했지만 딱히 말을 따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단은 목숨을 위협받았다. 타인을 죽이려고 한다면 자신도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에단이 거칠게 손을 쓴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애초에 에밀라가 흥분한 이유는 내 도발 때문이겠지만.'

에밀라에게는 숨기고자 하는 과거가 있었다. 그로 인한 트라우마도 있었고, 에단은 그 부분을 건드렸다. 에밀라의 역린이었다.

'그건 그거고.'

에단에게 도발은 일상이었다. 고작 한마디의 도발 때문에 평정을 잃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역량 부족이었다.

그것까지 배려해 줄 이유는 없었다.

"갑자기 신경을 많이 쓰시는군요."

"...가문에 누가 되지 말라는 거다."

"하하, 조심하겠습니다."

'속이 보이는군.'

빈센트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문 승계 때문인가.'

빈센트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룬은 가주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

모룬 본인의 무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뿐이다.

심약한 마음과 감정적인 성향.

모두 가주와는 걸맞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명분은 모룬에게 있었다.

이전까지는 가문의 장자이자, 적통 중에서는 가장 강했으니.

하지만 에단의 입지가 커진 뒤로는 판도가 바뀌었다.

에단의 지지 세력이 생겨난 것이다.

모룬을 지지하던 자들도 그가 가주의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가장 큰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무력마저도 뒤처진다는 사실이 결투를 통해 증명됐으니, 모룬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가문의 아귀다툼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에단은 지금 한시가 급했다. 아카데미로 가기를 결심한 이상, 한시라도 빠르게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야. 녀석을 앞지를 수 있으니.'

원작 소설은 주인공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모든 사건은 주인공 위주로 형성되며 행보마다 기연이 쏟아진다.

그 기연이 사사로운 것이든, 혹은 천재일우의 기연이든.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이용해 사전에 기연을 강탈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조건이 너무 많이 붙었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이미 에단은 아카데미에 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깨어나면 말씀해 주시죠."

"또 쓸데없는 짓을 할 생각이냐?"

"하하, 그럴 리가요. 이제 직장 동료가 될 사이인데 풀 건 풀어야죠."

"허."

빈센트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그렇게 박살을 내 놓고 감정을 풀겠다니.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단이 가볍게 목례하고 영주실을 나오자, 밖에 첸과 네이드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며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돌아가자."

에단은 별채로 향했다.

* * *

"...후우!"

가토가 검을 휘두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가토는 혹독할 정도로 훈련에 매진했다.

휴고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둘의 훈련량은 평소에도 무지막지한 수준이었다.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거야?"

"...그걸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도련님? 도련님은 언제나 괴물 같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하아... 그런 수준이 아니야. 이번엔 상대가 달랐어. 아카데미에서 온 교수는 마스터를 바라보는 실력자였다고."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야?"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스터라는 존재가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와서 알고 있었지만, 아직 쉽게 실감이 들지 않았다.

"어. 블란테 내에서도 마스터는 둘뿐이야."

공식적으로는.

가토가 혼자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토는 네이드를 떠올렸다. 네이드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집사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도련님이 제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그 정도의 성장 속도는 말이 안 돼."

가토가 휴고를 응시했다. 가토의 시점으로는 휴고도 괴물 같았다.

휴고는 분명 얼마 전까지 마구간을 치우는 하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휴고는 수습 기사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단 몇 개월 만에 일궈 낼 수 있는 성장이 아니었다.

블란테의 기사단에 입단하는 건 어려웠다.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이 혹독한 시험을 거치고 나서야 간신히 수습 기사의 자격을 얻는다.

자격을 얻는다고 끝이 아니다. 매일같이 지옥 같은 훈련을 이겨 내야만 방출당하지 않았다.

그런 어린 괴물들을 단 수개월 만에 뛰어넘었다.

'물론 도련님의 훈련이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에단이 제시한 훈련은 그간 쌓아 온 상식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체력과 정신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의 훈련은 단 한 시간도 견뎌 내기 버거웠다.

'그만큼 효과도 확실했고.'

성장 속도가 체감됐다. 체력, 근력, 순발력 모든 게 한 단계 성장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휴고의 성장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에단과 휴고, 둘을 바라볼 때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성장하고 있지만, 저 멀리 앞서 나가는 둘을 보면 목표가 희미해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가토가 검을 으스러질 것처럼 쥐었다.

가토는 휴고가 이해되지 않았다. 휴고에게는 치열함이 엿보이지 않았다.

저런 마음가짐을 가졌음에도 저런 성과를 보이다니....

'도련님도 다르지 않았지.'

에단이 야밤중에 가토를 호출해 같이 검을 수련했을 때.

가토는 큰 충격을 느꼈다.

에단의 검술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재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경험이 부족했을 뿐.

가토는 그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기본부터 에단을 지도했다.

감히 자신의 실력으로 에단을 지도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에단은 충실하게 가토의 지도에 따랐다.

애초 가토는 크게 알려 준 것이 없었다.

검을 쥐는 법, 발의 움직임, 시선, 휘두르는 방법.

이게 전부였다.

에단은 그 모든 걸 순식간에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

'심지어... 대련도 패했지.'

에단의 주특기는 맨몸 박투였다. 그간 에단이 싸워 온 것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검만으로 가토를 압도했다.

기교를 부린 것도, 변칙을 섞은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기본기 하나만으로 가토는 제대로 된 역량을 끌어올리지도 못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어.'

모든 타이밍을 뺏기고, 흐름이 끊기며,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했다.

실전이었다면 수도 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패배한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카데미 교수와의 결투를 지켜보며 자신이 당시에 어떻게 패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투의 이해도가 달라.'

에단은 검술이 아닌 전투에서 자신을 압도했다.

그에게 있어 검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재능이 없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루도 정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대련 한번 하자."

가토가 휴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휴고는 난처하다는 얼굴을 지었지만, 가토의 진지한 얼굴을 보자 차마 거절의 의사는 내보일 수 없었다.

* * *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검술 실력이 꽤나 느셨군요."

"스승이 좋았거든. 누구랑은 다르게."

지칭하는 대상을 눈치챘는지 네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쉽게도 검술은 제 특기가 아니라서요."

"알고 있어. 너는 검사가 아니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면 머저리지."

"후.... 말로는 못 당하겠군요. 그런데 그 왼손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에단이 피식 웃으며 왼손을 흔들었다. 오늘 이 왼손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런 게 있어."

에단이 두루뭉술 넘어가자 네이드가 이마를 찌푸렸다.

"...놀라웠습니다. 도련님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더군요."

"칭찬으로 들을게. 뭐야, 쟤네 또 저래?"

에단이 가토와 휴고의 대련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럴 수가 없겠죠."

그런 전투를 봤는데, 피가 끓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네이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봤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지나쳤다.

"식사 안 하십니까?"

"어. 오늘은 안 해. 네이드도 그냥 쉬어. 오늘은 따로 귀찮게 안 할 테니까."

"...그럼 알겠습니다."

네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멀어졌다.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마 오겠지.'

에밀라는 찾아올 것이다. 그녀의 성격상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위험의 싹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기사의 성향은 아니었다. 기사는 명예를 중시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존재였으니까.

에밀라의 본질은 기사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기사 작위를 수여받지 않은 정식 기사가 아니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에단은 책 속에 에밀라를 떠올렸다. 초반 주인공의 성장을 책임져 줄 선생이며, 동료이던 그녀의 과거는 깨끗하고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대다수는 에밀라를 명예로운 검사라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인식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비수.

암살자.

거칠고 사납기로 유명한 용병들도 혐오하는 것이 바로 어쌔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본질이었고, 어쌔신은 자고로 위협의 싹은 사전에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어쌔신의 본능이이니까.'

에단은 달빛을 바라보며 차분히 에밀라를 기다렸다.

◈ [41화] 교수의 정체 (1)

"하아."

헨리가 음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던 에밀라가 에단에게 패배한 것이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뛰어난 기량으로 교수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하는 에밀라가 블란테의 망나니 따위에게 패배하다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망나니가 달라졌다는 건 헛소문이 아니었다. 애초 에밀라는 패악질을 일삼는 망나니 따위가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에밀라를 이길 정도면 그냥 교수 시켜도 되는 거 아니야?'

억울했다. 아카데미의 교육 방침은 개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검술에 문외한인 터라 검술 쪽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전투 실력만큼은 나무랄 곳이 없어 보였다.

'조금 안 좋은 인식은 있겠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점점 행복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옅어졌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에밀라 님이 일어나면 한번 말해 보자. 그런데 상처가 꽤나 심각해 보이던데....'

에밀라의 얼굴은 정말 처참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지만, 에단의 사정없는 주먹에 피가 튀고 살이 뭉개졌다. 아름답고 고왔던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블란테 측의 사람들도 탄식을 금치 못했다.

분명 블란테의 승리를 축하해야 하는 것은 맞았지만, 에단의 손속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탓이었다.

'끔찍했지....'

멀리서 지켜보던 헨리도 입을 막을 정도였다. 예상 못 한 결과였다. 결과는 잔혹했다.

'보고는... 모르겠다.'

헨리가 문을 열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에밀라의 건강이었다. 에밀라는 아카데미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니까.

"에밀라 님... 어라?"

회복을 하고 있어야 할 에밀라가 자리에 없었다.

* * *

에밀라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 잘못이다.'

따로 상부에 보고는 하지 않았다. 레벨린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아카데미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위험한 녀석이다. 처리해야 해.'

블란테의 적통이 죽는다면 적잖은 파장이 생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도 될 만큼 에단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어.'

자신에 대한 정보는 모두 삭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안일한 판단이었다. 그 녀석은 분명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평정심을 흔들며 도발했다.

에밀라가 옷가지를 갈아입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는 두건을 싸맸다.

의복은 검게 통일했다. 빛도 투과되지 않을 정도의 검은색이었다.

평소의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검사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죄송합니다, 레벨린 님.'

과거로 돌아온 에밀라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 무언가를 알고 있던 것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 흥,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느냐.

"하하, 별거 아닙니다."

에단이 시치미를 떼자 페온이 인상을 구겼다. 에단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 일부러 그렇게까지 한 것이냐?

"다시 말하지만 봐줄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 흥, 누구 눈을 속이려느냐. 그 애송이 가주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았느니라.

"기다려 보시죠. 아직 모든 걸 보여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니까."

에단이 창문을 바라봤다. 땅거미가 드리웠다. 완연한 밤이 되었고, 보이는 빛이라고는 은은한 달빛뿐이었다.

슬슬 손님이 찾아올 때가 됐다.

"눈치채지는 못했습니까?"

― 뭘 말이더냐?

"에밀라는 검사가 아닙니다."

― ...뭐라고? 그럼 대체 뭐란 말이냐? 나이에 비해서 검을 쓰는 실력이 꽤나 상당하던데.

"글쎄요. 그건 지켜보면 알게 되겠죠."

― 허, 재수 없는 놈.

슬슬 올 때가 되었다. 에단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온다.'

이건 확신이다. 원작에 묘사된 에밀라의 성격과 에단의 도발, 모두 지금을 위한 것이었다.

에단이 슬며시 눈을 흘겼다. 그림자 같은 은영이 보였다.

"역시 왔네."

― ...저 녀석은.

찾아온 손님을 발견한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검은 의복으로 몸은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체격과 풍기는 분위기가 에밀라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점은, 호흡과 발걸음 따위의 습관까지도 모두 달라졌단 것이다.

이는 원작에도 묘사되지 않았다.

검을 쓰는 에밀라와 본모습으로 돌아간 에밀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군."

"집착하는 여자는 매력 없는데."

에단의 우스갯소리에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싸늘하던 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글쎄? 나는 아무래도 장수할 것 같은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그 모습을 본 에밀라가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쐐액!

단검이 빠르게 쏘아져 왔지만, 에단이 고개를 젖혀 피해 냈다.

일전 시험의 반복 같았다. 그때의 전투도 방금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흠, 신분 세탁한 쓰레기라는 것 정도?"

"...뒤에는 누가 있지? 블란테인가?"

"하하, 블란테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뭐, 네 위에 있는 녀석이 꾸미는 짓이라면 좀 흥미가 있긴 하지만."

에밀라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가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전의 대결 때와는 몸놀림이 완전히 달랐다. 에밀라가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위험하다!

페온이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에단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사라지는 건 착각이다.'

에밀라는 마법사가 아닌 어쌔신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눈속임이었다.

해결 방법은 상대의 속도와 이동 경로를 예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담이 커야 했다. 자칫 오판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게 분명했으니까.

'재밌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에단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에단이 몸을 낮추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에밀라의 다리를 포착한 에단이 그대로 들러붙었다.

에밀라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에단이 미련 없이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옷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위험하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하하, 아까도 그 소리를 하지 않았나? 매력 없는 악당이나 지껄일 것 같은 대사를 하고 있네."

에밀라가 다시 발을 내디디려 했지만, 이번에는 에단이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 내디딤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단검을 끄집어냈다.

쐐액!

에단이 단검을 집어던졌다. 이전에 보였던 막무가내 방식이 아니었다. 에단은 마나를 정밀히 컨트롤했다.

에밀라의 눈이 커지며 단검을 좇았다.

그 순간, 에단이 다가갔다.

"좀 익숙해졌지?"

에단이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공중으로 피하기에는 방이 좁다고 생각한 에밀라가 몸을 숙였다.

그녀는 그대로 단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에단의 무릎이 더 빨랐다.

후웅―

에밀라의 허리가 크게 휘며 거리를 벌렸다.

에단은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따라붙으며 주먹을 뻗었다.

빠른 주먹 연계에 에밀라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망나니 따위가 아니야!'

주먹에는 마나가 서려 있어,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집중 안 해?"

에단이 그녀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빠악!

"크윽!"

에밀라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에단이 다시 머리채를 쥐려고 하자 에밀라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에밀라가 에단에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죽을 바에야!'

후회와 회한이 밀려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좀비라도 됐어? 동귀어진하게?"

무협지를 많이 봤네.

에단이 씨익 웃었다. 단검이 움직이는 경로에는 에단의 왼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꽈드득!

에단의 왼손이 단검을 짓뭉갰다.

'독이 묻어 있었나 보네.'

속으로 생각한 에단이 쥐고 있던 단검에 더욱 힘을 줬다.

그 순간 에밀라는 빠르게 판단했다. 찌그러진 단검을 놓은 뒤 허리춤에서 새로운 단검을 꺼냈다.

"세계수의 가호."

에단이 작게 중얼거렸다.

차고 있던 목걸이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흡수했던 에밀라의 마나가 보호막으로 바뀌었다.

지잉―

성스러운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세계수의 보호막은 에단의 주위에 있는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요소를 자체적으로 판단해 배제한다.

한마디로 에밀라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쩌엉―!

에밀라가 반탄력으로 튕겨 나갔다.

에단은 곧바로 따라붙어 에밀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에단의 악력은 평범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에밀라가 단검을 놓쳤다. 그녀의 가녀린 팔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밀라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녀는 남은 손으로 복면을 뜯어냈다.

에밀라가 고통을 무시하면서 달라붙으려 하자, 곧장 에단의 무릎이 마중 나왔다.

퍼억―! 퍼억―!

에밀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에밀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키스 시도가 너무 격렬한데?"

에단의 무릎이 멈췄다. 마지막 기회였다.

평소의 에밀라라면 갑자기 생긴 빈틈에 의심을 품었을 테지만, 그녀는 지금 한계에 내몰렸다.

에밀라가 입을 크게 벌리며 에단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이것도 독이겠지.'

공격 수단이기도 하겠지만, 자살행위이기도 했다. 저 공격을 하고 나면 에밀라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밀라가 다가오려 하는 순간.

휘리릭―!

에단의 상체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에단의 다리가 구렁이처럼 에밀라를 옭아맸다.

삼각 조르기.

일명 트라이앵글 초크.

꽈아악!

에단의 허벅지가 그녀의 경동맥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미 완벽하게 잠겼기에, 파훼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밀라의 얼굴이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하."

에단이 웃으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가 잠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압력으로 인해 에밀라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3초가량.

"하나, 둘, 셋. 잘 자라."

에단이 에밀라의 이마에 딱밤을 날림과 동시에 그녀는 눈을 까뒤집었다.

이내 에밀라가 완전히 정신을 잃자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한 허리를 풀며 에단이 말했다.

"언제까지 구경할 생각이지?"

에단의 말에 어둠 속에서 네이드가 슬며시 나타났다.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에밀라가 나타난 이후 소란이 적지 않았다.

미리 소리를 차단했다면 모를까, 네이드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이 정도의 소리를 포착 못 할 리가 없었다.

네이드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무단 침입한 주제에 말은."

"도련님."

"보이는 대로야. 암살 시도지, 뭐."

"감히 블란테에게...."

네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분노하자, 에단이 에밀라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같은 어쌔신 출신인데 뭐 짚이는 거 없어?"

"...!"

그 순간 네이드의 눈이 커졌다.

◈ [42화] 교수의 정체 (2)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네이드의 목소리가 침중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다.

평생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뭐야. 찔러본 건데 진짜였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에단의 태도에 네이드의 눈썹이 휘었다.

"...진실을 말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이드의 무거운 태도에 에단이 풀썩 웃었다.

"진짜야. 스스로도 말했잖아. 검사가 아니라고. 애초에 그렇다고 다른 냉병기를 다루는 것 같지도 않고... 뭐 짐작할 만한 것들이 추려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을 모르겠고 음침하잖아. 그러니 어쌔신이라고 찔러본 거지."

"...정말 그것뿐입니까?"

거듭되는 네이드의 추궁에 에단이 네이드를 응시했다.

"어. 그것뿐이야.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하지? 네이드는 지금 블란테의 가신 아닌가? 그거면 충분하지. 과거 따위는 신경 쓸 이유도 없고, 관심도 없어."

에단의 말에 네이드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내 네이드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도련님은 달라지셨군.'

감회가 새로웠다. 묘한 감흥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 말이 맞습니다."

네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같은 능글맞은 노신사의 얼굴이었다.

― 역시 걸음걸이가 일반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더니 어쌔신이었구나.

'눈썰미가 좋군요.'

― 속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거라. 그나저나 어울리지도 않게 사람을 잘 다루는구나.

'어울리고 말고가 있습니까? 그냥 하는 거죠.'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계획에 속도가 붙었다.

아카데미로 가기 전 적어도 네이드만큼은 자신의 패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신을 심어 줘야 했다. 하지만 결과로 증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네이드는 결국 블란테에 충성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래서 질문의 대답은?"

에단이 네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에밀라의 과거는 알고 있었다. 에밀라도 원작의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은퇴한 지 꽤 오래되어서... 하지만 짚이는 구석은 하나 있군요. 에밀라 씨가 임관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은퇴한 어쌔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새벽의 달."

"새벽의 달?"

에단이 시치미를 떼며 묻자,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쌔신이 있습니다. 거물급들만 노린 터라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겼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임무 도중 사망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신분 세탁을 했다는 거네."

"그렇게 되는군요."

"신기하군. 전직 어쌔신이 검술 교수라니."

"도련님은 어떻게 눈치채고 있던 겁니까?"

"시험 도중 협박을 하더라고."

"협박 말입니까?"

"어. 자기 어쌔신이라고, 끝나고 죽일 거라고 대놓고 말하던데?"

―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게 정말입니까?"

네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관성 있게 유지하던 표정이 지워지고 살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왜 미리 말을 안 하신 거죠?"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네이드."

"...네, 도련님."

"나는 결과로 증명해. 봐봐. 이번에도 결국 이긴 건 나야."

"이번에는 저도 그냥 넘어가긴 곤란합니다. 자칫하면 도련님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 네이드가 복수해 주겠지. 내 집사잖아. 아닌가?"

에단이 네이드를 응시했다. 네이드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네이드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제가 졌습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요. 그래서 이 여자는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계획? 그건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 * *

에단이 네이드를 보냈다. 네이드는 극구 거절했지만, 에단의 의사가 워낙 완강했다.

그리고 첨언했다. 아카데미에 가는 데 있어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빈센트에게는 보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네이드는 여전히 난감한 의사를 비쳤지만, 에단의 거듭된 당부에 결국 마지못해 순응했다.

'아, 다른 것보다 밧줄이나 가져다줘.'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 거죠?'

'있어. 쓸데가.'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 * *

삶은 지옥이었다.

인생은 불우했다. 아니, 슬픔이라는 감정도 후에는 무뎌졌다.

기계로 살아갔다. 그저 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는 폐기되기 마련이었다.

임무를 행함에 있어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에밀라는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일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감정도 죄책감도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는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구원받았다.

묶여 있던 쇠사슬을 끊어 주고, 감정을 다시 일깨워 준 사람이 있었다.

'레벨린.'

그녀의 또래였지만 레벨린은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었다. 여태껏 마주해 온, 욕망에 파묻힌 돼지가 아니었다.

레벨린은 목표와 신념이 있는 귀족이었다. 그녀는 에밀라를 구원해 줬으며 에밀라를 필요로 했다.

남들처럼 부속품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에밀라 그 자체를 존중해 줬다.

그때부터 에밀라는 바뀌었다. 그 빛에 감화되었다.

과거를 탈피하고 에밀라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삶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과거에 비하면 천국과도 같았다. 하지만 아직 에밀라의 가슴속에는 귀족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혐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이기도 했다.

지웠음에도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혐오.

그러한 감정을 최대한 외면한 채, 에밀라는 임무를 수행하러 내려왔다.

또다시 귀족이 문제였다.

가문이라는 권력에 심취해 주제도 모르고 교수 자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이미 입학시험에서도 최악의 점수로 낙방했다고 들었다.

에단에 대해 나도는 말도 매우 저질스러웠다. 최악의 망나니이자 블란테의 수치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런 이가 교수 직위를 노리다니.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화가 났다. 그렇기에 에밀라는 직접 먼 거리까지 찾아 나섰다.

비록 죽일 수는 없을지언정, 주제 파악을 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패배를 맞이한 것은 그녀였다. 에단은 소문 따위의 망나니가 아니었다.

에단의 몸은 단련한 전사의 것이었지, 나태한 돼지가 아니었다.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에밀라는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에단은 에밀라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고 있었다.

모든 심리 싸움에서 패배했다.

허를 찌르는 공격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뤄지는 변칙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에단은 에밀라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가장 숨기고 싶은 과거의 편린을 알고 있었다.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그녀를 거둬 준 레벨린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에밀라는 마음먹었다.

에단을 죽이기로.

에밀라는 다시 그토록 혐오하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이번 일만 처리하면 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감정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벨린에게 먼저 보고 후, 에단의 뒤를 파헤치는 게 제대로 된 순서였다.

하지만 에밀라는 이미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토록 지우고 싶던 과거가 끄집어내진 이상, 그녀는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잃을 수는 없어.'

지금 이 삶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 * *

"야, 안 일어나?"

에단이 에밀라의 뺨을 툭툭 건드리자, 에밀라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에밀라가 힘겹게 눈을 뜨자, 에단이 웃었다.

"...!"

에밀라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에밀라의 몸은 그녀의 의사를 따라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조차 막혀 있었다.

에밀라가 당황하며 몸을 훑어보니, 자신의 몸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에밀라가 당황해하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오히려 밧줄의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아, 마나를 쓸 생각은 하지 마. 그러면 바로 죽여 버릴 거니까."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에밀라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생각보다 성공적이네."

에단이 쪼그려 앉아서 에밀라를 바라봤다.

이내 막아 놓은 입을 풀어 주자 에밀라가 곧장 입을 열었다.

"무슨 속셈이지?"

"왜? 무슨 속셈이 있을 것 같아?"

"시치미 떼지 마라. 뒤에는 누가 있는 거지? 설마 블란테 가문이 제대로 나선 건가?"

"하하, 설마하니 한물간 어쌔신 하나에 우리 가문이 그 정도로 신경을 쓸까? 그렇게 생각 안 해, 새벽의 달?"

에밀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에밀라는 몸을 비틀었다.

들켜서는 안 되는 과거이자 비밀이었다.

한데 에단은 확실히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에밀라가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운용하려는 순간.

퍼억!

에단의 발이 그녀의 명치에 꽂혔다.

"커헉!"

그녀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에단은 에밀라의 앞으로 다가가 다시 쪼그려 앉은 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잡았다. 숙여진 고개가 들렸다.

에밀라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이쯤 되면 느낄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여자라고 약하게 때리거나 하진 않거든."

에단은 살의라는 감정을 마주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하게 조소 지으며 말했다.

"두 번은 없어. 알겠지?"

에단이 에밀라의 눈을 바라봤다. 에밀라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하하하,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너는 너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 뭘 원하느냐고? 반대로 물을게.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

에단의 물음에 에밀라가 말을 잃었다. 정곡이었고, 그래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에밀라의 신분은 단순히 아카데미의 교수에 불과했다.

에밀라는 귀족도 아니었고, 상인도 아니었다.

권력도, 재력도 없었다.

모든 권력과 의사권은 레벨린에게서 나왔다.

"하나 더 물을게. 네 뒤에 뭐가 있지? 아니, 질문을 바꿀게."

"...."

"네 뒤에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이야?"

이번에도 에밀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레벨린에 대해 뭐를 알고 있지?'

에밀라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레벨린에게 매료되었을 뿐. 그녀에게 의심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에밀라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 [43화] 뿌려둔 씨앗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