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똑똑-.
카인과 올리시렌은 밴더빌트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오래된 나무 문이 끼익- 소리와 함께 열렸고, 편한 옷을 입은 그가 환하게 웃었다.
"여길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인 공자님."
"나도 그래. 이런 숙소가 따로 있는 줄은 몰랐는데?"
밴더빌트는 에셀레드 백작가의 기사가 아니다.
클로에 라마이닝과 함께 온 기사.
즉, 지금은 클로에의 하나뿐인 아들인 카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인 만큼 그를 위한 공간을 성안에 마련해 두었다.
카인은 당연히 그가 늘 거기에 지내는 줄만 알고 있었다.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이것저것 다 챙겨 주는 성내 생활은 영 어색했습니다. 들어오시죠."
노기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는 그가 직접 만든 듯한 목재 탁자와 침상이 보였으며, 틈틈이 이것저것 가져다 둔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인과 올리시렌은 안으로 들어섰다.
벽돌로 만든 벽난로까지 있는 게 제법 아늑한 숙소였다.
둘은 밴더빌트가 직접 만든 나무 의자에 앉았고, 그는 손수 깎은 컵을 들면서 물었다.
"차 한 잔 끓여 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아르츠위버 봉토에서도 그대가 차를 끓였었군."
카인은 쓰게 웃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그에게 무심했던가 깨달아 버렸으니까.
당연하다 생각했었는데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밴더빌트는 사내답게 어깨를 으쓱이며 카인의 쓴웃음을 흩어 버리곤 올리시렌에게 물었다.
"왕녀님은 달콤한 게 좋으십니까, 시원한 게 좋으십니까."
"추천대로 마시죠."
"제가 아리안에게 배운 비장의 차가 있죠. 바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밴더빌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물로 만든 주전자를 끓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숙소에 손님을 맞이한 게 제법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동시에 카인과 올리시렌은 서로 눈빛을 마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이름을 꺼낼 수 있었으니까.
"아리안?"
카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고.
"아! 클로에 님을 따라 저와 같이 온 친구입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먼저 떠나 버렸지만요."
"무슨 일로?"
밴더빌트는 미리 준비해 둔 찻잎들을 꺼내 섞으며 조금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는 여기 숙소를 담당하는 친구라서 며칠에 한 번씩은 꼭꼭 왔었습니다."
"오호, 그렇군."
탁-, 탁.
밴더빌트는 금세 차를 끓였고, 카인과 올리시렌 앞의 나무 탁자에 올려 두었다.
둘은 미소로 화답하며 컵을 집었다. 제법 향내가 달큰하니 입에 잘 맞을 느낌이었다.
밴더빌트는 자신 몫의 차를 뒤늦게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숲으로 찾으러 갔었는데...."
카인은 반쯤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에셀레드 백작성.
그 사이엔 제법 울창한 숲이 있었다. 물론 이곳까지 길이 잘 정돈되어 있기도 하고 기사단의 활동지라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다.
"죽어 있었습니다, 눈 속에서."
"그날인가."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난하고 따스한 에셀레드 지방에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눈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때기도 했다.
누군가는 카인의 친모, 클로에가 있어서 이런 이변이 일어나는 거라고 쑥덕거릴 때였고.
카인은 당시 갑작스러운 폭설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영지민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녀의 시체를 눈 속에서 처음 찾은 게 전데, 다른 사람들은 제가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더군요."
후릅-.
밴더빌트는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쓰디쓴 무언가를 마시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의 입에 머무는 건 과거의 기억일 것이다.
"어째서?"
카인은 다른 걸 물었다.
눈에 익숙지 않은 따스한 지방의 사람이 갑작스러운 폭설에 동사하는 건 흔하다.
그러나 밴더빌트가 아리안을 죽였다고 하녀장이 말하는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터.
"...."
그에게 있어 꽤 상처였던 일일까.
밴더빌트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올리시렌은 카인의 눈치를 살피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이트 밴더빌트. 저희는 아리안을 쫓고 있어요."
그녀가 지하 서고에서부터 이어진 추적을 설명했다.
담담히 귀를 기울이던 밴더빌트는 자신이 입을 닫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를 지탱하는 충성의 마음이 상처를 이겨 냈다.
"확실히 지하 서고의 기록을 바꿀 사람이라면 아리안밖에 없겠군요."
"시체가 도대체 어떤 상태였길래 사람들이 그대가 죽인 거라 생각한 거지?"
"...손목과 발목이 잘려져 있었습니다."
올리시렌이 마시던 차를 멈춘다.
카인 역시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뜨곤 안 좋은 표정의 밴더빌트를 바라보았다.
"잘린 손발은?"
"없었습니다."
"사인은? 과다 출혈인가."
밴더빌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눈 위에 묻어난 피가 너무 적었습니다."
몇 년 만에 내린 눈.
내성의 숲에서 흰 눈 위에 손발이 잘린 채 발견된 시녀, 아리안.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죽여서 추적의 고리를 끊었어.'
처음엔 아리안의 단독범행이나 그녀가 온 라마이닝 백작가에서 무언가 의뢰해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파악하면 할수록 그런 자들은 할 수 없을 냉정한 음모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자네가 칼을 쓰는데 마침 손목과 발목이 없으니 범인이라고 의심했겠군."
밴더빌트는 당시의 일을 하나둘 떠올리기 시작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전 정말 죽이지 않았습니다."
"믿어. 자네가 정말 죽였다면 그렇게 귀찮게 죽이지 않았을 테니."
카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간 오해받았던 게 마음에 꽤 맺혀 있었던 듯, 밴더빌트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사로서 느낀 아리안의 사인은?"
카인의 물음.
"일단 제가 발견한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흠...."
카인과 올리시렌은 동시에 턱을 쓸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이 심장마비이다.
'그걸 일으키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아리안의 잘린 손목과 발목.
즉, 우연히 일어난 심장마비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일으켜서 죽였고, 손발을 잘라 갔다고 생각하게 만든 모습이다.
카인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지금 이 저택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들은 에셀레드 기사단 정도인데, 그 사람들이 이 근처에 올 리가 없지."
"예."
"그다음은 밴더빌트인데 정말 죽일 거였으면 단숨에 목을 잘랐을 것이고."
"...."
믿어 주는 건 좋은 데 그 방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밴더빌트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올리시렌은 노기사와 어린 주인이 보이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쿡쿡 웃었다.
카인은 세 번째 손가락을 들곤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제3의 인물인데, 그대는 아리안과는 친했나?"
밴더빌트는 순순히 대답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같은 라마이닝 백작가 출신이었기에 서로에게 의지하는 게 많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와 라마이닝의 둘째, 테들리 공자님과 관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카인의 눈이 커진다.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테들리는 여자 관련해서는 아주 깨끗한 사람인데."
"지금 아내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게 아리안이라고 했습니다. 둘 다 어릴 때기도 했고, 테들리 님의 혼인이 정해지면서 여기로 함께 보내졌고요."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군."
무언가 느낌은 오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때 올리시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향해 고갯짓 했다.
"한 번 그 시체가 있던 자리로 가 보죠?"
올리시렌이 지닌 힘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본인도 모르나, 마녀의 힘으로 확인해 보는 것도 밑져야 본전.
밴더빌트의 안내에 따라 셋은 움직였고, 숲속의 작은 길에 도착했다.
우우우웅-.
아무래도 오래된 일인 만큼 올리시렌은 조금 더 힘을 일으켰고.
무언가 본 듯 얼굴을 굳혔다.
"카인, 혹시 에셀레드 백작가에 보라색 눈을 지닌 사람이 또 있어?"
그 순간 둘은 뻣뻣하게 굳었다.
보라색 눈을 지닌 건 카인을 제외하면 단 한 명.
"있었지...."
카인의 어머니.
클로에 라마이닝.
"그 사람이 잘랐어. 아리안의 손발을."
#28 EP.Ⅰ-6
봄의 여행길 (3)
"나는 당신과 혼인할지라도 에셀레드의 성을 쓰지 않겠어요."
클로에가 에드먼드와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뱉었던 말.
당시 젊었던 에드먼드 백작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셀레드와 라마이닝.
두 백작가의 연회에서 비롯된 부부의 첫 만남이었다.
카인조차 이야기로만 들었던 시절의 이야기.
누군가는 둘이 행복한 부부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관계였다고 말했다.
아들이라지만, 그리고 두 번을 살고 있지만, 무엇이 정답이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하얀 잠옷을 입고 흰 침대에 하얀 피부를 지닌 채 힘겹게 숨을 쉬었고.
반짝여야 할 금발은 푸석푸석하게 백색으로 무뎌지고, 깡마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보랏빛 눈동자만이 유독 빛났다.
기억 속 그 모습 때문에, 아무래도 아르나 작은어머님에게 조금 더 정이 갔으리라.
늘 아팠고.
늘 누워 있었고.
언제나 빈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거둔 어머니, 클로에 라마이닝.
아들, 카인은 처음으로 그녀의 다른 모습을 마주했다.
* * *
올리시렌이 클로에를 알 리는 없고 당연히 보이는 대로 말할 터.
그녀가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그날의 상황은 이랬다.
길을 걷는 아리안.
눈이 오기에 그녀는 주홍색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반대편에서 검은 우산을 쓰고 왔고.
"서로 뭐라 말을 주고받았어. 그리고 아리안이 털썩- 하고 쓰러졌어."
"상대가 누군진 안 보이고?"
"응. 내가 보는 시선으로는 검은 우산만 보이네."
아리안이 쓰러지고 그 위로 흰 눈이 쌓인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게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보랏빛 눈을 지닌 미인이었다.
그녀는 팔을 휘저었고, 그대로 아리안의 시체의 손발을 잘라선 사라졌다.
"검은 우산이 아리안을 죽이고, 손목과 발목을 자른 사람은 다르다라."
별별 꼴을 많이 본 카인이지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밴더빌트 역시 그가 알고 있던 클로에는 하지 않을 행동을 들으니 의아할 따름이었고.
"그러게. 아, 하나 더 있다."
올리시렌은 집중했다.
끊어질 듯 말 듯 한 클로에의 작은 중얼거림을 먼 시간 너머서 듣고는 따라 했다.
"'엠마가 역시....'라고 하네. 도대체 누군데 말을 안 하는 거야. 왕도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 예쁜 분인데."
"아리안을 죽인 검은 우산이 엠마인가."
카인은 자연스레 올리시렌의 물음을 뭉개곤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밴더빌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녀장 이름이 엠마입니다."
"뭐?"
셋은 동시에 성안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을 밴더빌트 쪽으로 가게 만든 것이 그녀인데, 아리안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그녀라고?
카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반인이야."
"심장마비를 만들게 하는 유물이라도 쓴 거겠지."
"유물의 가격이 한두 푼도 아니고 고작 시녀 하나를 죽이겠다고 하녀장이 들고 다닐 건 아니야."
"그런 가격을 감수할 가치의 무언가가 있다면?"
"...."
올리시렌은 무언가 짐작한 눈치였다.
"그래서 이 보라색 눈을 지닌 여인은 누구냐고. 딱 봐도 보통 분은 아닌데 둘은 바로 아는 거 보니 중요한 사람 같네."
카인의 짧은 대답.
"내 어머니."
올리시렌은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이 혹시라도 말실수 한 게 있나 되짚었다.
"가 보자고. 과연 하녀장 엠마가 이번엔 무슨 말을 할지."
올 때는 둘이었지만, 갈 때는 셋.
순식간에 달려간 셋은 방금 전 하녀장을 만났던 방의 문을 열었고.
덜컹-.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한 장의 쪽지가 떨어졌으며, 카인이 주우려 하는 순간 화륵- 하고 타올라 사라졌다.
그 안쪽, 의자.
방금 전까지 생기 있게 말하던 하녀장 엠마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카인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작은 유리병을 살폈다.
"독이야."
올리시렌은 마녀의 힘을 일으키며 엠마의 방을 살폈고,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마시고 죽었어."
지하 서고에서도 숲길에서도 사용한 마녀의 힘.
"저는 아까에서야 왕녀님이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밴더빌트의 굵은 목소리.
카인은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
그녀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없어, 미쳤다고. 이소엘도 힘이 있다는 거만 알지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몰라."
카인은 턱을 쓸며 고민했다.
"그런데 하녀장은 우리가 자신을 찾아올 걸 미리 알았다는 듯 자결을 했어. 어떻게 그런 걸까?"
카인은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녀장 엠마가 에셀레드 백작가에서 일한 게 못해도 수십 년이니, 이 방에 뭐라도 흔적이 있으리라.
엠마라는 사람의 흔적을 셋이서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없었다.
올리시렌은 죽어 있는 엠마의 시체를 흘깃 보곤 한숨을 쉬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어."
"저 역시 못 찾았습니다. 마치 누가 도려낸 것처럼 아주 깨끗합니다."
카인은 입을 닫고 곰곰이 시체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수십 년을 산 공간에 그 사람의 흔적이 없을 수 있을까?'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러려면 지독할 정도로 의지와 경계심이 있어야 한다.
그간 스쳐 지나만 가던 하녀장, 엠마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동료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올리시렌."
"응."
"이 사건은 라마이닝과 에셀레드 백작가 두 군데가 연관되어 있었고,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던 거야."
"그래서 왕실이 개입되어 있는지 묻는 거야?"
아이리안 왕국에서 그 정도의 영향력을 떨칠 수 있는 집단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왕실이었으니까.
카인은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맞아."
올리시렌은 고민했다.
이런 일을 과연 왕실에서 꾸밀 수 있을 것인가. 꾸몄다 한들 무슨 목적에서일 것인가.
몇 가지의 질문을 떠올려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린 아니야. 이런 이유도 목적도 모를 일을 저지를 정도로 여유가 없어."
왕실정보국을 쥐고 있는 1왕녀의 확답.
최소한 방금 전 하녀장, 엠마가 죽은 것과는 상관이 없으리라.
"왕실을 제외한다면, 성국 교단?"
다음으로 떠오르는 곳은 바로 성국이었다.
특히 교단을 신봉하는 아이리안 왕국에선 성국의 입김이 강력했다. 만약 그들이 움직였다면 가능한 일.
하지만 카인도 올리시렌도 고개를 저으며 성국의 가능성도 지웠다.
"성국이 움직였다고 하기엔 너무 은밀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성국은 성국.
나름 최소한의 선은 있었다.
성국이라면 대놓고 움직이면서 힘으로 억눌렀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도 않을 것이고.
물론 아예 들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이기도 하는 곳이었지만.
"그럼 우리가 모르는 제3의 불꽃?"
카인의 농담에 올리시렌은 피식 웃었다.
아까 전 엠마의 방을 열었을 때 팔랑팔랑 떨어지던 쪽지의 내용은 그녀도 봤으니까.
"아마도."
"그 쪽지는 누가 둔 거야?"
순간 올리시렌은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입을 벌렸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방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는 마녀의 힘이 은은히 깃들어 있었다.
이내 곧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전혀 보이지 않아."
"죽는 모습은 있는데 쪽지는 안 보인다라. 단서가 사라졌네."
시간을 건너온 전사도.
힘을 깨워 가는 예비 마녀도.
이렇게까지 목숨으로 다음으로 나아갈 다리를 끓어 버리는 방법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아닙니다."
그때 밴더빌트의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라마이닝 백작가엔 흔적이 있을 겁니다."
카인은 턱을 쓸었다.
시작은 프리문디의 말 때문이었으며, 그 후 서고에서 에셀레드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의도처럼 없었고, 찾아보니 연관된 아리안이나 하녀장 엠마는 죽었다.
그 진상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올리시렌의 정성을 위해서, 카인은 허리춤에 들고 다니던 아그웨스카의 검집을 툭툭 쳤다.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건, 한 번 움직이면 끝까지 갈 거기 때문이야."
피와 죽음의 길.
그리고 권력과 다툼의 방향.
지금의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길이었다. 과연 그 길을 다른 자들도 걸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카인은 엠마의 시체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올리시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이 없는 것처럼 하면서 교묘하게 등을 떠밀고 있으니까."
"함정일까?"
"글쎄. 어쩌면 숨겨져 있던 뿌리를 파낸 걸 수도 있고."
카인 에셀레드는 쓰게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어머니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재미있고.'
그나마 남은 단서를 떠올리며, 라마이닝 백작령이 있을 동북쪽을 돌아보았다.
"아리안과 정을 통했다는 라마이닝의 둘째, 테들리부터 털어 보자고."
"눈빛은 싹 다 불 질러 버리겠다는 거 같은데?"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프리문디에게 받은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슬쩍 들어 보였다.
"겸사겸사. 알잖아, 내 방법."
"알지. 마음에 안 드는 그 방법. 뒤가 없이 마구잡이로 해치워 버리는 거."
올리시렌은 한숨을 푹 쉬며 끄덕였다.
* * *
에셀레드 영지의 동북부, 라마이닝 백작가.
중년의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서 포크와 나이프를 쥐곤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하녀와 시종들은 묵묵히 빈 잔을 채우고, 한 번 사용한 식기들을 바꿔 가며 둘의 식사를 보조했다.
"형님."
짧은 머리의 차남이 부르자 긴 머리를 지닌 라마이닝의 장남, 브레디올이 고개를 돌렸다.
"웬일로 식사 중에 부르지."
"저희 사이가 그렇게까지 안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브레디올과는 전혀 다르게, 굳센 인상에 머리조차 군인처럼 짧은 차남 테들리가 입꼬리를 들었다.
휙-.
브레디올은 뭉툭한 나이프 끝을 돌려 동생의 인중을 가리켰다.
"난 네놈을 믿지 못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거든."
"저희가 형제는 형제인가 봅니다. 저도 똑같이 생각하니까요."
"부른 이유."
목소리에 냉기가 뚝뚝 흐른다.
라마이닝 백작령을 두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사이였으니까.
오늘의 식사도 현 바이스 라마이닝 백작인 만들어서 간신히 이루어진 것이고.
"과연 아버지 말대로 에셀레드 백작령이 쉽게 굴러떨어질까요?"
"그럴 리가. 다섯밖에 없는 백작령 중 하나인데 그렇게 쉬울 리 없지. 당장 아버지가 보낸 사자도 돌아오지 않고 말이야."
첫째 브레디올은 딱 잘라서 상황을 정리했다.
라마이닝 백작이 달콤한 말로 두 형제 사이를 다시 붙여보려 했지만, 현실을 너무 잘 아는 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에셀레드를 대표하는 우리의 조카도 만만치 않다고 하고요."
평범한 테들리의 어조와 달리 담긴 내용은 묵직했다.
브레디올은 나이프를 돌려 다시 고기를 썰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네 녀석의 그 잘난 정보원이 알려 준 건가?"
차남 테들리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장남 브레디올은 정보원에 대해 캐물으면 늘 이렇게 웃어 버리는 동생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의뭉스러운 녀석."
"감사합니다."
"하지만 틀린 적은 없으니까. 그 조카가 만만치 않다면 소문과는 다르군."
"사자의 자식은 그래도 새끼 사자라는 거겠죠."
"쯧, 그 에드먼드와 그 클로에의 하나뿐인 아들이니까."
브레디올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의 연회장에서 당찼던 동생 클로에와 젊었던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
그날의 연회를 떠올리면서 브레디올은 툭- 하고 말했다.
"죽이진 말자. 적당히 돈을 주고 멀리 보내는 것도...."
"영지를 뺏긴 채 살아가는 게 더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더 고통스러울 테니 기왕 시작하면 죽여 버리자는 테들리의 냉정한 속내.
브레디올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앞의 스테이크로 고개를 돌렸다.
"못 믿을 놈."
#29 EP.Ⅰ-6
봄의 여행길 (4)
머리가 없다.
반질반질한 두피를 드러낸 채 풍성한 수염을 지닌 중년의 사내가 고심하며 탁자 앞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다.
구도는 특이했다.
백색의 킹과 나이트.
둘을 둘러싼 두 개의 흑색 퀸과 네 개의 검은 나이트.
"아이리안 왕국이군요."
그의 맞은편 앉아 있는 여성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빈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고 생각했지."
고립되어 있던 백색의 나이트를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무언가를 집요하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나이트가 좀 이상해. 7성 던전에 딱 붙어서 말라 죽을 촌구석 백작가라고 생각했는데...."
"필립이 돌아오지 못했죠, 후작님."
대머리의 중년인, 로스 후작.
그는 대충 나이트를 집어던지곤 기지개를 쭉 폈다.
"정말 그들 말대로 바다에 휩쓸려서 죽었을 수도 있어. 에셀레드의 절벽이 얼마나 험한지도 알고, 뭔 일을 저질렀다고 하기엔 물렁한 곳이니까."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위에는 기사의 정복을 입었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는 백색의 나이트를 집어 들어선 원래의 자리에 두었다.
"제가 후작님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죠. 의심되십니까."
로스 후작의 눈이 가늘어진다.
마법등 특유의 찬란한 빛이 방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의 의심을 거두기엔 부족했다.
"그래. 다른 녀석도 아니고 검은 여우가 사고에 휩쓸린다? 동시에 그 많은 내 기사들이 같이 죽는다? 이상하지 않나, 단장."
그녀는 말없이 판을 내려다보았다.
현재의 국왕과 그와 같은 편을 이루고 있는 촌구석 백작가 에셀레드.
그리고 나머지 후작과 백작들.
"후작님.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순간 로스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가 휘두르는 검이 하는 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기사단 <로스 데 캐롯>.
로스 후작의 첫 번째 검, 기사단장 시그마리는 후작과 한없이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팅-!
손가락을 튕겨 백색의 나이트를 때렸다.
오러가 담긴 그녀의 손가락은 나이트의 반절을 부숴 버렸다.
"어차피 우리의 편이 아니라면 정리해 버려야죠."
"역시 그렇지?"
로스 후작은 바닥만 남은 백색의 나이트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곤 홀로 남은 백색 킹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욕망은 없었다.
그저 불꽃같은 복수심만이 일렁이며 킹을 바라보고 있었다.
"맥로든 영감은 저 왕 자리가 탐나는 모양이야."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공작도 두지 못하는 이 땅에서 왕이 되든 말든 가치가 없죠."
"맞아. 그런데 내가 왕을 죽이고 싶다.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찢어 버리고 싶어."
그녀는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스 후작의 의자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숙였다.
"예스, 마이 로드. 당장 왕과 에셀레드 백작가를 죽이고 오겠습니다."
"시그마리 단장. 칼은 갈아 둬야겠지만 당장은 아니야."
로스 후작은 자신과 같이 있던 흑색 나이트 4개 중 하나를 손바닥에 올린 채, 시그마리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로스 후작은 선연히 빛나는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일단은 보자고. 겁 많은 라마이닝 백작과 속내를 알 수 없는 에셀레드의 꼬맹이가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습니다."
시그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치솟는 의문 하나를 꾹 눌렀다.
'그땐 늦지 않을 것인가.'
상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목덜미를 물어뜯어야 하는데,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닐까란 의문.
그러나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이 던전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엔 그럴 일은 없을 터.
그녀는 과한 걱정을 털어 버렸다.
* * *
"에셀레드 기사단은 이것밖에 안 되나-!"
쩌렁쩌렁한 카인의 외침!
한 순간에 수련장에 있는 모두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했다.
듣고 있던 기사들은 거친 숨과 튀어나오는 침방울을 막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밖에 안 돼!? 너희들이 그러고도 에셀레드의 기사냐!"
쿠웅-.
카인은 뭉툭한 목검을 쥐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원형을 이루는 피와 땀의 흔적들.
그리고 기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검을 든 채 카인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카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고 무기를 든 기사들이 우르르 움직이면서 그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수련장이 한순간에 전장으로 뒤바뀐다.
카인의 보랏빛 눈에서 번개처럼 쏘아진 지독한 살기가 삽시간에 기사들을 옭아맸고, 기사들은 이를 악물며 무기를 들었다.
"이 정도면 전장에 데려가 봤자 시체만 늘리겠는데."
카인의 도발.
그 순간 기사들이 대지를 박찼다!
전후좌우.
카인의 사방에서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든다.
'확실히 재능은 있다.'
파지지지직-.
오직 그의 귓가에만 들리는 뇌명.
동시에 그의 전신이 한껏 긴장했고, 백색의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인은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카인의 발이 벌어지면서 대지를 꽉 잡는다.
그리고 그어지는 유려한 검의 원.
타다다다닥-!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사방에서 쏟아진 공격을 튕겨 냈다.
당연히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서로 하하호호 웃으면서 물러날 싸움이면 시작도 하지 않는다.'
카인의 날카로운 눈이 제일 가까이 있던 기사에 꽂혔고, 튕겨 나가며 허공에 뜬 그의 몸을.
콰앙-!
그대로 발로 후려 찼다.
시간이 무수히 쪼개진다.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카인은 가공할 속도로 움직였고, 처음에 달려들었던 기사들은 그대로 한 대씩 맞으며 멀어졌다.
"쳐라-!"
하지만 넷이 끝이 아니었다.
이미 카인의 반응 속도에 익숙해진 다른 기사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둘, 셋, 넷.
각자 편한 구성으로 모여서는 카인을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카인은 그걸 보며 미소 지었다.
저번보다 나아졌고, 다음엔 더 나아질 것이다.
무가로서 수백 년을 버텨온 저력이 어디 가지 않은 듯, 기사들의 수준은 상당했다.
물론 지금까진 바위에 박힌 칼에 불과했다. 누구도 그들을 꺼내서 휘두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카인은 '겨울'이 뿜어내는 패시브, 백색의 뇌전을 전신에 휘감으며 천천히 에셀레드 기사단이라는 검을 쥐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뒤로 빼지 마-!"
공격과 동시에 지적되는 단점.
기사는 쓰러지면서도 인사했다.
"어깨가 너무 뒤로 갔어."
이 기사는 다음은 어깨를 챙기리라.
"머리를 먼저 들이밀면 대가리 터진다, 너."
다음 기사는 조금 더 오래 살며 에셀레드의 검으로 살리라.
"둘이 호흡을 맞출 땐, 동시보다는 조금 시간 차이가 있는 게 좋아."
이들은 조금 더 날카로운 합격을 펼치리라.
지하 서고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카인과 이뤄지는 실전 같은 훈련 속에서 에셀레드 기사단은 미친 듯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클로이드가 멍해질 정도였다.
밴더빌트는 그런 클로이드 단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다음은 우리입니다. 그만 놀라시고 몸을 푸시죠."
"...나이트 밴더빌트. 공자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클로이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엑스퍼트라고 하나 이렇게 기사 수십 명을 농락하는 건 그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일.
아무리 카인에게 재능이 있었다고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모릅니다."
밴더빌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바다를 얼리고 수평선을 부숴 버리는 검격을 날리는 걸 본 이상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으니까.
"검의 길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저 빨리 가냐 늦게 가냐일 뿐이죠. 그런데 카인 공자님은...."
"클로이드 단장. 무슨 말을 해도 공자님은 공자님입니다."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오러가 늘어나고 짙어지면 엑스퍼트를 넘어 '마스터'라 불러도 될 모습이었으니까.
밴더빌트 역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답게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클로이드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카인이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기사들을 하나씩 무릎 꿇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검의 길엔 지름길이 없죠. 하지만 빨라지지 않으면 죽어야만 했던 게 공자님입니다."
"...."
클로이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달라지지 않으면 파멸만이 남았던 카인이 달라지자 다른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 일조한 게 당신이었습니다, 클로이드 단장."
기사들이 갈대처럼 모두 누웠다.
카인은 멀리서 지켜보던 둘을 향해 손끝을 까딱였고, 밴더빌트는 먼저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클로이드는 나이가 들면서 얇아진 아랫입술을 깨물곤 그의 뒤를 쫓았다.
기사들이 기어서라도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남은 건 셋.
"조금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벨.
"괜찮을 겁니다."
밴더빌트.
"...."
그리고 묵묵히 세검을 드는 클로이드까지.
현재 에셀레드 기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셋이었다.
카인은 여유롭게 목검을 들며 입을 열었다.
"고작 이 정도로 지칠 거면 나가 죽어야지."
"역시 형님이십니다."
아벨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카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내심 쓰게 웃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계절의 신기>의 주인이라서다, 아벨아.'
신기의 효과 중 패시브는 그 이름답게 주인이 되면 늘 작용했다.
백색의 뇌전도 마찬가지.
카인이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가. 최전선에서 십 년을 어떻게 버텼는가.
본인의 노력과 재능도 중요했지만, 가장 큰 기반은 패시브의 힘이었다.
'겨울'의 패시브는 언제나 힘을 불어 넣는다.
번개가 온 신경을 작렬하는 고통을 주지만, 그만큼 빠르게 육체를 강화하고 오러의 양을 늘린다.
어제, 오늘, 내일.
쉬지 않고 조금씩.
'물론 허락된 것 이상을 쓰려고 하면 대가를 바쳐야 하지만 말이야.'
스윽-.
카인은 왼발을 내밀었다.
동시에 상대하는 셋도 각자의 자세를 취했다.
현재 지닌 힘만으로 상대하기엔 어려운 셋.
그러나 카인의 허리는 꼿꼿했다.
오늘이 안 되면 내일이 있다.
내일이 안 되면 그다음이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기리라.
정상에 서 본 카인만이 지닐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파지지지직-.
카인의 등허리에서 흘러나오는 백색의 뇌전이 섬뜩한 소리를 낸다.
클로이드, 밴더빌트 그리고 아벨. 셋의 전의가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치솟는다.
터지기 직전의 화약 같은 상황.
하지만.
"손님이 왔으니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기운 빠질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가 수련장에 퍼졌다.
수련장의 입구에 서 있던 아르나의 목소리였다.
레몬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그녀는 전의와 뇌전이 어우러지던 수련장을 여유롭게 건너오며 말했다.
"라마이닝 백작가에서 또 사람을 보냈어요."
툭, 툭.
아벨의 검을 눌러 땅으로 향하게 하고, 클로이드의 칼은 옆으로 밀어 버린다.
둘과 아르나 사이의 현격한 실력의 차이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어디 목숨을 부지할 놈인지 아닌지 봐야겠군요."
카인은 웃으면서 목검을 어깨로 올렸다.
그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에셀레드 백작가에서 가장 강한 아르나가 그 앞으로 다가왔다.
"...더 강해지셨네요."
"원래 이 나이 때 애들이 빨리빨리 큽니다."
"애처로울 정도로 말이죠."
잠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고, 아르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몸을 돌렸다.
카인과 아르나.
둘이 빚어 낸 미묘한 긴장감에 바라보던 기사들 대부분은 침만 삼킬 뿐이었다.
"일단 보러 갑시다."
카인은 그녀의 뒤를 따랐고, 이내 다른 셋도 같이 향했다.
#30 EP.Ⅰ-6
봄의 여행길 (5)
에셀레드의 평기사 한 명이 정복을 입은 채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러곤 조금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는 몰리우트 남작을 향해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라마이닝 백작가의 휘하 귀족 중 하나, 몰리우트 남작.
-에셀레드가 어떤지 보고 올 사람이 필요해. 아버지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번엔 '내 사람'을 보내야겠지.
'브레디올 공자님....'
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렁하기로 소문난 에셀레드 영지였기에, 도착할 때까진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하고 나니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에드먼드 백작이 던전에 들어가 나오지 못한 지 벌써 1년이나 지났고, 로스 후작이 수작을 부린 지도 꽤 되었으니 당연히 반쯤 병들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달랐다.
기사들은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기세가 상당했으며, 백작성에 일하는 시종들은 철저했다.
마치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처럼.
라마이닝 백작의 첫째 아들, 브레디올을 지지하는 몰리우트 남작은 자신이 사지에 보내졌다는 걸 직감했다.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러자 에셀레드의 평기사는 무심한 눈으로 흘깃 그를 보곤 대답했다.
"카인 공자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아! 첫째."
순간 평기사의 눈이 찌푸려진다.
살기가 느껴진 건 아니지만, 몰리우트 남작은 실수하면 수명이 뭉텅이로 깎일 것이라는 걸 느끼곤 급하게 덧붙였다.
"...공자님 말씀이시군. 가세나."
평기사는 그 정도는 용인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절도 있는 자세로 몸을 돌려 앞장선다.
몰리우트는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압박감을 애써 지우며 그를 따랐다.
기나긴 복도.
왼쪽으로 길게 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흡-."
우연히 본 밖의 정경에 그는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평기사는 그가 이상한 소리를 내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그가 밖을 보는 걸 알곤 살짝 미소 지었다.
"별거 아닙니다. 새로운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러는 거 같습니다."
몰리우트는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창문 밖,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일렬로 서서 하나같이 몰리우트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존경의 의미가 아니다.
빈틈이 보이면 그대로 찔러 버리겠다는 듯한 기세의 눈 수십 쌍이 그곳에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갈 때마다 따가운 눈초리가 몰리우트를 푹푹 찔렀다.
"그, 그런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긍정뿐.
힘이 빠지려는 무릎을 간신히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걷다가 도착한 작은 문.
카인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에드먼드의 집무실 입구였다.
평기사는 허리를 숙이곤 문을 손짓하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몰리우트의 손끝이 떨린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열었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흑발의 사내, 카인이었다.
어리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젊은 모습.
하지만-.
"앉아."
카인이 맞은편 의자를 턱짓하며 말하자, 몰리우트 남작은 본인도 모르게 순순히 말을 따랐다.
왠지 모르게 따라야 한다는 기분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몰리우트는 조심스레 앞을 바라보았다.
가운데 있는 건 카인.
왼쪽에 있는 회색빛 머리를 지닌 여인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올리시렌 왕녀님은 아니겠지.'
어딘가 익숙한 얼굴과 머리색이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 금세 지웠다.
오른쪽에는 노기사 한 명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서 있었다.
"나이트, 밴더빌트 아르츠위버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나오자 몰리우트는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한때 라마이닝 백작가의 소속이었으니 그에 대해 들은 바가 꽤 있었고, 몰리우트는 운 좋게 몇 가지를 기억했다.
하지만 밴더빌트가 옆에 카인이 있는 만큼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자, 몰리우트 남작은 침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카인이 그런 밴더빌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는 척 좀 받아 주지 그래."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마이닝을 떠난 지 몇 년인데, 당연히 밴더빌트가 알 만한 자는 이렇게 올 리 없으리라.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몰리우트를 돌아봤다.
"기사들이 다 이런 거지. 이해할 수 있지, 몰리우트 남작?"
"그렇... 절 아십니까?"
카인의 능청스러운 말에 대답하던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아는 거에 뒤늦게 놀랐다.
"날 만나러 온 게 누군지는 파악해야지 판단할 수 있으니까. 실종될지 말지 말이야."
올라가는 카인의 입꼬리.
몰리우트의 이마에선 순간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로스 후작가의 <로스 데 캐롯>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전에 왔던 라마이닝의 사절도 실종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방금 들은 카인의 말.
꿀꺽-.
몰리우트는 본인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카인이 말한 '실종'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고."
"...예."
"내가 알기로 그대는 브레디올 라마이닝 1공자를 따르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내게 전하는 말이 있나?"
카인의 시선이 올리시렌을 살짝 향했다.
당연히 그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었을 리는 없고, 전부 올리시렌이 준 정보였다.
"브레디올 공자님께선...."
몰리우트는 말을 전해야 할지 말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기도 했고, 막상 에셀레드 백작령을 보니 할 필요 없어 보였다.
스윽-.
카인은 그의 앞에 찻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밴더빌트의 손이 주전자를 쥐곤 그의 앞에 차를 따른다.
카인은 주홍빛 찻물 너머에서 보랏빛 눈을 빛냈다.
"어려워 마.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그대의 처우는 결정되어 있거든."
찻잔을 쥐던 몰리우트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그러니 편히 말해도 돼. 편하게."
몰리우트의 머리카락 사이에서도 땀이 솟기 시작했다. 본인 역시 실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치솟는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런 모든 걸 내리눌렀다.
아무리 한미하다고 하나 그도 영지를 지닌 귀족.
몰리우트는 가능한 허리를 꼿꼿이 펴곤, 브레디올이 전하고자 하던 말을 건넸다.
"긴 말을 빼고 핵심만 말씀드리자면, 밀항 편을 알아봐 주신다고 했습니다."
"밀항? 대륙으로?"
"예. 아무리 가문이 다르다고 하나 사사로이는 브레디올 공자님의 조카가 아니십니까."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수긍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하고 싶으나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몰리우트는 카인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걸 보자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했다.
"아이리안 섬은 이제 전장의 불꽃에 휩싸일 거라 하셨습니다. 로스 후작의 복수심과 맥로든 후작의 욕망이 전부 불태울 거라고요."
"두 후작 모두 그럴 사람들이지."
"이 왕국은 왕가와 두 개의 후작가, 다섯 개의 백작가. 총 여덟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중 가장 약한 기둥이 에셀레드입니다."
카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가 있을 땐 단연코 최고였다.
하지만 그에게만 너무 많은 힘이 몰려 있었던 만큼, 그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최약체가 되었다.
"그래서 평생 놀고먹을 만큼의 재물을 드릴 테니 카인 공자님께선 대륙에서 편히 사셨으면 좋겠다는 게 브레디올 1공자님의 뜻입니다."
"본 적도 없는 외삼촌이 날 굉장히 위해 주는군."
카인은 빈 찻잔을 들었다.
밴더빌트는 다시 한번 주전자를 쥐어 조르르- 잔을 채웠다.
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차를 조금 마시고 몰리우트와 눈을 마주했다.
"재물을 좀 지출해서라도 에셀레드 영지를 차지하면 이득일 테니 이해는 되는데, 그쪽 2공자도 나름 외삼촌이니 거래할 만하지 않을까."
그 순간 몰리우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겁먹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테들리 2공자는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귀족적이네."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그는 목표를 위해선 상대를 죽이고, 방해되면 죽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카인 공자님을 죽이려 할 겁니다."
"왜?"
"그게 편하니까요."
카인은 씨익 웃었다.
아마도 방금의 이야기가 몰리우트가 브레디올의 뒤에 서게 된 이유이리라.
"테들리는 상종을 못할 놈이고 브레디올은 그나마 거래를 할 만하다라. 둘 다 이 에셀레드를 노리는 건 똑같군."
"카인 공자님. 국법도 있고 번지르르한 정치싸움도 있지만,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힘입니다. 힘이 없으면 이 난국을 돌파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몰리우트는 자신의 진심이 카인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아무리 에셀레드가 달라졌다고 한들, 다른 가문에 비해선 힘이 없다.
단순히 기사들의 무력이 높다고 강한 것이 아니다.
병사들을 소집할 수 있는 영지의 경제력과 인구.
휘하 귀족들을 이끌 수 있는 카리스마.
전통과 경험이 풍부하고 선두에 서서 병사와 기사들을 독려할 수 있는 귀족까지.
그 모든 게 잘 어우러져야지만 영지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기에, 에셀레드는 최하위로 평가받는 것이었다.
물론 '마스터' 에드먼드의 존재는 홀로 에셀레드를 최강으로 만들었지만, 지금 그는 없었다.
몰리우트가 지적하는 부분은 이 점이었다.
카인은 턱을 쓸며 고민하다가 올리시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충 선전 포고 같은 데 말이야."
"이렇게까지 판을 짜면 나도 안 넘어갈 수가 없지."
아이리안 왕국의 첫 번째 불화는 라마이닝과 에셀레드 백작가의 분쟁에서 시작할 것이며.
카인은 어리둥절해 하는 몰리우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고마운 제안을 가져와 줘서 그대는 실종되진 않겠군. 그런데."
그간 모두의 생각을 뒤엎을.
"필요 없어."
카인은 방긋 웃었다.
몰리우트 남작은 순간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서늘한 살기가 그를 점점 옥죄기 시작했으니까.
"백작가든 후작가든. 내 앞길을 막으면 모두 썰어 버린다. 테들리가 어쩌든 별 관심 없다. 길을 막으면 베어 버릴 뿐."
"힘이...."
"있어. 아주 많이."
몰리우트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명분도 중요합니다. 다른 백작이나 후작들은 자신들의 정치력으로 왕가의 승인을 받을 겁니다! 반대로 에셀레드의 승인은 철저히 막을 거고요."
"왕가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그냥 반역자가 되니 문제가 되지, 암암."
카인은 몰리우트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는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어 간다고 착각했다.
카인은 올리시렌을 돌아보면서 저 착각을 깨 주길 바랐고.
그녀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제 이름으로 에셀레드의 영지전을 인정합니다."
몰리우트는 싱긋 웃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왕녀 저하?"
"처음 봅니다, 라곤도 몰리우트 남작. 내가 1왕녀 올리시렌입니다. 영지전의 승인이 가능한 세 명 중 하나죠."
물론 왕이 아니라 왕녀가 승인하는 영지전이라면 나중에 문제가 불거질 수는 있지만, 그건 어차피 나중 일.
"어, 어떻게!?"
"잘."
카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성의 없는 대답은 몰리우트의 입을 막기 충분했다.
그러곤 열려 있던 집무실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의 처우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했었지? 나가서 만방에 알려라. 1왕녀가 인정한 영지전이 시작된다는 걸."
몰리우트는 혼란스러웠다.
최약체라고만 생각했던 에셀레드에 올리시렌 왕녀가 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그들이 왜 이렇게 당당한지도 알 수 없었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가면서 연신 땀을 훔쳤다.
'설마 이렇게 아이리안 대전쟁이 시작되는 것인가.'
동시에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라마이닝과 에셀레드.
한때 연회를 같이 열었고, 혼인 동맹까지 맺었던 관계였지만, 이제 둘 중 하나는 사라지리라.
Episode.Ⅰ
봄의 찬미
#31
Chapter. 7 우리의 봄이 오기 전에 (1)
몰리우트 남작이 에셀레드 백작령에서 살아서 돌아왔다.
그가 전한 새로운 후계자, 카인에 대한 내용은 왕국을 뜨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뜨거운 부분은 1왕녀 올리시렌이 인정한 '영지전'.
본래 영지전은 폐해가 크고 귀족 간 군비 경쟁을 일으켜 왕실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따라서 70년 전 '4차 아이리안 대전쟁' 이후, 허가 없는 영지전은 반역으로 취급되었고 그 허가는 당대 왕실의 직계에게만 권한이 주어졌다.
즉, 현재 아이리안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영지전을 인정할 수 있는 건 국왕과 1왕녀 올리시렌, 2왕녀 올리비아 단 셋.
하지만, 역대 왕족들 중에서도 막상 영지전을 허가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 간의 영지전 허가는 처음이었다.
이러니 1왕녀가 영지전을 허가한 걸 두고 '5차 아이리안 대전쟁'의 시작이라 부르는 자들도 꽤 있었다.
사실상 내전의 시작이었으니까.
흰색을 바탕으로 군데군데 녹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왕궁.
담처럼 둘러싼 궁 한가운데엔 사람이라곤 단 둘뿐인 적막한 정원이 있었다.
"에셀레드와 라마이닝의 영지전이라, 칠대귀족가의 영지전은 70년 만에 처음이군."
수염이 없다.
매끈한 얼굴에 누구보다 피곤한 표정을 짓는 중년의 남성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 위엔 작은 금관이 하나 올려져, 그가 아이리안 왕국의 첫 번째 인간이자 왕인 '하이볼트 룬 아이리안'임을 짐작케 했다.
"누구 하나가 파멸하지 않는 이상 전쟁의 은원은 끊어지지 않는데, 올리시렌 언니는 자기가 살려고 영지전을 허가했어요!"
그의 맞은편.
주홍색 튤립을 펴 바른 듯 부드러운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음...."
"아버지. 당장 취소시키세요. 남작이나 자작 수준도 아니고 칠대귀족가의 영지전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그녀의 말이 이어지면서 점점 국왕 하이볼트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올리비아, 나는 너만을 아끼지 않는다."
올리시렌이 '안개꽃'의 왕녀라 불리는 것처럼, '정열의 홍화'라 불리는 2왕녀 올리비아 룬 아이리안.
하이볼트가 냉정하게 선을 긋자 그녀의 커다란 금빛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올랐다.
반짝이면서 파도처럼 굴곡진 회색빛 머리카락이 떨리며 그녀의 감정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저, 저는 그저 나라가 걱정돼서...."
국왕은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자다.
"올리시렌이 가만히 있었다고 네가 걔를 죽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열일곱에 즉위하여 어느덧 삼십육 년째.
하이볼트는 왕실 내 모든 암투를 헤치고 이리 같은 귀족들의 아가리를 피하며 왕좌를 지켜 왔다.
즉, 어린 딸의 술수에 넘어가기엔 그는 너무 노회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외할아버지께서 그 정도론 하지 않으실 거예요!"
맥로든 후작이 그녀에게 미리 일러둔 말이었다.
하이볼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권력은 형제든 자매든 서로 죽이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지."
"전 언니를 죽일 생각은 없어요!"
"나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죽이게 만들었어."
붉은 꽃들이 군데군데 핀 정원을 울리는 하이볼트의 목소리엔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것이 올리비아에겐 시간에 닳고 닳아 버린 왕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원래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 건지, 버텨온 시간이 얼마나 고독한 건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언젠가 너희도 서로를 죽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만 죽이면 되니 아픔은 덜할 것이야."
쿵-.
올리비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그건 경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놀라움이라고 하는 마음이리라.
왕이라면 응당 왕자를 낳기 위해 후궁을 늘리겠지만, 하이볼트는 왕녀 둘이 태어나자 더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설마 그 이유가....'
혹자는 하이볼트의 능력에 문제가 생겼거나, 그의 취향이 바뀌어서 그렇다는 험담을 입에 담았다.
어떤 꿈 많은 자는 하이볼트가 몰래 북방의 엘프를 만나느라 그러는 것이라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했고.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의 진심.
-어차피 죽여야 될 사이라면 한 번만 죽이게 하기 위해서.
올리비아는 처음으로 그 장막을 들춰 본 기분이었다.
"네 뒤에 맥로든 가문이나 로스 자식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셨죠...."
올리비아는 말끝을 흐렸다.
하이볼트는 언제든 그녀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정말 단 한 번도 올리비아의 행동에 간섭치 않았다.
그저 1왕녀 올리시렌에게 왕실정보국을 쥐여 준 게 전부였다.
"그러니 첫째도 가만히 두는 게 공평하겠지. 칠대귀족가 중 여섯을 잃고 하나를 얻으려고 한 걸 테니."
양쪽에 전부 간섭하지 않겠다는 하이볼트의 선언.
"아버지, 언니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순진한 모습을 연기하던 올리비아의 금빛 눈이 또렷해진다. 늘 하던 연기를 집어치운, 명석한 여왕 후보자의 물음이었다.
이런 모습은 좀 만족스러운지 국왕, 하이볼트의 입가가 살짝 휘었다.
"내 정치적인 식견을 듣길 바라는 게냐."
"예. 솔직히 차기 국왕은 언제나 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이었다.
"별일 없다면 맥로든과 로스가 지지하는 네가 올리시렌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겠지."
"별일이라면?"
휙-.
하이볼트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의 가슴에서부터 앞으로 뻗어 나가는 궤적.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알 수 없는 행동이다.
그는 그런 표정을 살피곤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때 넌 너무 어렸으니 잘 모르겠구나. 방금 내가 보인 건 에드먼드 백작이 마스터의 경지를 증명하기 위해 보인 검이었다."
"...!"
"다른 가문이라면 몰라도 올리시렌이 쥔 건 그 '에셀레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에드먼드 백작은 던전에서 죽었어요."
"나는 열일곱에 왕이 되었고, 에드먼드는 전대 에셀레드 백작을 열일곱에 이겼단다."
올리비아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하이볼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그리고 마침 에드먼드의 아들, 카인도 열일곱이라던데 어떨까?"
뚝-.
국왕 하이볼트는 자신의 앞에 피어 있는 회색의 꽃과 붉은 꽃 중 후자를 꺾어 버렸다.
그러자 붉은 꽃이 마치 핏물처럼 땅을 향해 떨어졌다.
"물론 로스 자식이나 맥로든 영감이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뚝-.
하나 남았던 회색 꽃도 부러뜨린 채 하이볼트는 왕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리비아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이볼트가 완전히 사라진 후, 아무도 들리지 않게 입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저도 마침 열일곱이네요."
* * *
"아벨, 돌아가려면 지금이야."
카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를 묵묵히 따르던 아벨은 얼굴 가득한 땀을 망토를 잡아당겨 닦은 후 말했다.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네 손에 무고한 자들의 피가 묻을 수 있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죠?"
어린 아벨이 보이는 반짝이는 눈.
먼 미래 그 눈을 잃어버린 용사 아벨이 겹쳐 보이기에.
"...그래."
카인은 차마 거짓으로 꾸밀 수 없었다.
아벨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활짝 웃었다.
"그럼 상관없습니다. 제 손에 피를 묻힐수록 형님의 손에 덜 묻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지만, 에셀레드 백작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어머니 혼자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저희는 알죠."
아벨이 고개를 돌리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올리시렌은 간만에 왕녀답게 살포시 웃었고, 기사 이소엘은 묵묵히 수긍했다.
밴더빌트나 어느새 그를 따르게 된 평기사 에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프리문디가 불러온 밤에 싸웠던 자들이었다.
카인은 웃으면서 혀를 찼다.
"쯧, 난 분명히 말렸다. 나중엔 아무리 후회해도 늦어."
"이렇게 안 따라가면 더 후회할 겁니다."
카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주먹을 들었다.
스으으으읏-.
수십의 사람이 만드는 바람이 멈춘다.
지독하리만큼 고요한 숲.
방금 전까지 울리던 아벨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만들 정도로 짙푸른 밤이었다.
휙휙-.
카인은 수신호를 그렸다.
따라오던 에셀레드 기사단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카인을 비롯한 여섯은 그대로 직진하며 앞으로 나갔다.
습기 가득한 숲의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어디 하나 평평하지 않은 숲길을 소리 내지 않고 밟으며, 한층 긴장을 돋우며 걷는다.
어쌔신이 아닐까 할 정도의 은밀함.
우---.
저 멀리 보이는 황색의 등불에 카인은 다시 멈췄다.
"거참 백작님도 겁이 많으셔."
라마이닝의 병사 셋.
그들은 등불을 숲속에 휘저으며 형식적으로 살폈다.
"그러게 말이야. 누가 이렇게 험한 '셔우드 숲'을 지나온다고."
"요새 심상치 않다는 에셀레드 백작가가 올까 싶은 거겠지."
"그게 문제네. 몰리우트 남작님이 이상한 말을 하셔서 그런 거지, 사실 에드먼드 백작이 없다면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곳이잖아."
"그리고 거기 여자들도...."
다른 영지의 사람들이 에셀레드 백작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대화들.
병사들은 경계심 없이 시시덕거렸다.
듣다 못한 밴더빌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카인은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눈알을 양쪽으로 굴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우우-.
카인의 세 걸음 앞.
그들이 등불을 흔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불빛은 카인 일행을 숨기고 있는 어둠을 뚫지 못했다.
등불을 들고 있던 병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대충 다 봤으니 돌아가자고."
"그래, 그래. 어차피 문제가 있으면 다음 번 애들이 알아챌...!"
사아아아아앗-.
은빛의 검이라면 달빛이라도 반사했겠지만, 카인이 뽑은 아그웨스카는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흑색의 검.
무음의 궤적이 차가운 숲의 공기를 갈랐고.
툭-.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적이...."
사아-앗-!
다른 둘이 말을 완성하기도 전.
카인은 유려하게 몸의 중심을 옮기며 양편에 있던 병사들의 목을 같이 잘라 버렸다.
단 두 번의 칼질로 셋의 목숨을 거둬 버리는 순간이었다.
후두두둑-.
카인은 숲으로 칼을 휘둘렀다.
검신에 묻어 있던 병사들의 피가 빗방울처럼 흩어진다.
"아벨, 기억해. 최고의 승리하는 방법은 준비된 상태로 준비되지 않은 적을 치는 거다."
숨어 있던 일행들이 허리를 든다.
누군가는 착잡한 눈으로 시체가 되어 나자빠진 병사들을 내려다봤고, 아벨은 바닥을 구르는 등불을 주웠다.
"그럼 늘 준비되어 있어야겠군요."
카인은 아벨의 대답이 제법이라는 듯 입꼬리를 들었다.
"정답."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끊을 독심도 준비하고?"
올리시렌은 어딘가 마뜩잖다는 어조로 물었다.
왕국민은 전부 자신의 사람이라 느끼는 그녀에게 이렇게 죽어 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좋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인은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곤 몸을 돌렸다.
"독심을 품지 않아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준비하는 것도 방법이지."
"...불가능하네."
올리시렌은 표정을 굳히곤 그의 뒤에 섰다.
"아직은."
카인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게 짧게 대답하곤 걸음을 옮겼다.
끝이 보이는 셔우드 숲.
아이리안 섬왕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울창한 숲이었다.
몰리우트를 일부러 풀어 주고 소문을 흘리게 해서 모두가 혼란스러워할 때.
"저기가 라마이닝 백작성이다."
카인 에셀레드가 라마이닝의 심장에 도착했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섬뜩할 정도로 카인이 했던 것과 똑같이 정찰병들의 목을 베고 들고 온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달과 별만이 바라보는 밤.
"가자."
에셀레드는 전장으로 걸어갔다.
#32 EP.Ⅰ-7
우리의 봄이 오기 전에 (2)
"기사들을 가장 많이 죽인 게 뭔 줄 아나?"
늙고 늙은 기사.
젊었을 적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왔을 것이며,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적을 해쳤을 이름 모를 자.
그는 미약한 불만 남은 장작처럼 물었다.
"칼 아닙니까?"
그의 맞은편.
외눈 안경을 쓴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한때는 그랬지."
노기사는 안타깝다는 듯 짧게 혀를 차곤 부정했다.
청년은 알쏭알쏭한 그의 말에 반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 대포는 힘은 충분해도 맞추기가 어려우니 아닐 테고, 마법 총은 엑스퍼트 이하의 기사들에게만 먹히니 또 아니겠군요."
"그렇지. 언젠가는 모르겠지만."
"그럼 권력입니까? 마스터라도 할지라도 주군이 죽으라고 한다면 죽음을 불사하니까요."
청년 같은 요즘 시대의 사람이 이제는 반쯤 잊힌 '충성'을 바로 떠올리자 노기사는 놀라워했다.
그 모습에 청년은 그의 얼굴에 있던 고랑들이 전부 주름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왜냐면, 일부는 그의 입에 미동하지 않는 상흔이었으니까.
노기사는 자신의 앞에 놓인 '레드브레스' 한 잔을 털어 넘기곤 입을 닦았다.
"비슷해."
"이것도 아니라면... 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뭡니까 그 엄청난 무기는?"
스윽-.
노기사는 수십 년간 검을 잡으며 휘어진 검지를 들었다. 그 끝이 향한 건 청년의 품속이었다.
"여기요?"
노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은 의아해하며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가죽 지갑.
동전 몇 개와 상인도시 '델프트'의 칠선상단에서 발행하는 화폐 '델'이 들어 있을 뿐.
노기사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 돈. 돈이 기사를 가장 많이 죽였어."
청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따지고 보면 돈만큼 사람을 부릴 수단이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죽였다는 건 쉬이 수긍할 수 없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돈 때문에 살고 죽는 자들이 무수히 많으니 이해는 합니다. 그래도 기사를 가장 많이 죽였다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스윽-.
노기사는 고개를 돌려 선술집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청년이었을 적, 이 마을은 한가롭게 농사를 짓고 주일마다 교단에 가서 기도를 올릴 뿐인 그런 시골이었다.
계속 그랬다면 짙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마법등을 단 마차는 덜컹대며 조심스레 포장된 도로를 다니고, 깊은 밤에도 사람들은 등불 아래를 걸었다.
그뿐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 보면 많이 볼 상인들이 각자의 가게를 열어서 밤에도 낮처럼 물건을 팔고 있다.
"기사가 태어나기엔 이 세상은 이제 너무 밝아졌어."
"그건 전 세계의 모든 상인들이 '델프트-선언'으로 상인도시 '델프트'를 세우면서 획기적으로 개선된...."
아카데미에서 앵무새처럼 외웠던 내용을 말하던 청년은 흠칫했다.
노기사가 자신의 나이일 적 세상은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둠은 인간을 노리는 무수한 적들이 숨 쉬는 공간이었을 것이며, 오직 투쟁과 피만이 삶을 이어 나가는 열쇠였을 것이다.
"개선되었지. 이젠 마법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불빛을 만들어 팔고, 국가들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대륙은 혼란스럽습니다. 아이리안 왕국이야 작은 섬나라라서 가능한 겁니다."
"시간문제 아니겠는가."
청년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평생을 걸었던 그의 말에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인류를 수호하던 기사의 검이 벨 적이 없군요. 그냥 살인자의 검이 될 뿐이지."
노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사라지고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자, 기사가 충성을 바칠 대상이 사라지고 신념도 흐려지고 의지도 사라진다.
"이 땅에 남은 신비라고 해 봤자 교단의 '성녀'나 '마녀'들뿐이야. 아니면 대장벽의 전사들 정도겠지."
"...새로운 마왕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지금껏 살아 보니까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답을 찾아."
그 순간 노기사의 눈이 반짝였다.
창밖, 아주 평범한 도심의 길.
낮에 비가 왔던 만큼 우비를 둘러쓴 자가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중에도 벌써 열에 가까운 자들이 얼굴을 우비로 가린 채 걸었다.
"막상 말은 이렇게 했는데 아직도 기사들이 많이 있군."
"예?"
하나같이 어깨가 벌어져 있었고, 걸음걸이가 일정했다.
노기사는 그런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술병을 들곤 술을 따랐다.
"피 냄새가 나."
청년은 갑작스러운 노기사의 말에 자신의 팔을 들어 킁킁거렸다.
그 모습이 기꺼운지 노기사는 마시려던 잔을 스윽 밀어 청년에게 건넸다.
"자네에게 나는 건 아니니까 그럴 필요는 없네."
청년은 넘실거리는 술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다가 조금 밀면서 거부했다.
"제가 일하는 중에는 안 마시기로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시는 게 좋을 텐데?"
노기사의 눈이 다시금 창밖으로 향했다.
아무리 마법등이 반짝인다 해도 그 빛마저 삼킬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오는 게 보였다.
"오늘 밤은 그냥 술 취해서 밤새 자고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설마 말씀하신 피 냄새라는 게...."
기기긱-.
대답 대신 노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낡은 의자가 나무 바닥에 쓸리는 소음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노기사가 탁자에 기대두었던 검을 집을 땐 아무 소리조차 없었다.
그는 하얗게 세 버리다 못해 반쯤 빠져 버린 머리를 돌렸다.
"부족한 내게 델프트의 아카데미에 가서 애들을 가르치란 건 제법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한때의 주군이 위험한데 움직여야겠지."
젊은 상인은 피냄새보단 다른 걸 맡았다.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늑대의 냄새를.
"제게 들어온 정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마이닝 백작가를 이렇게 야밤에 습격할 곳도 없고요."
노기사는 싱긋 웃었다.
젊었을 적에는 제법 유려했을 법한 웃음이지만, 지금은 어딘가 처연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정말 그렇다면 내일 같이 떠나세나. 아니라면 오늘 밤 난 죽겠고."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라마이닝 백작성이었다.
* * *
"같은 백작령이 맞나 싶습니다."
아벨이 조금 기죽은 듯이 말했다.
에셀레드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라마이닝의 풍경.
중심부에는 거대한 기차역이 존재했고 외성엔 거미줄처럼 포장된 길이 뻗어 있었다.
성벽을 넘는 것이 조금 까다로웠을 뿐, 안에 들어오자 사람이 많아서 숨기 편했다.
"그래서 저 왕녀가 맨날 우리한테 시골시골 하는 거다."
카인이 아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올리시렌을 돌아보자 그녀는 괜히 콧방귀를 꼈다.
"말은 들었지만, 세상에 마법등 하나 없어서 밤에 다 잠드는 곳이 에셀레드일지는 몰랐지."
"이들은 밤을 빼앗겼지만 아직 우리에겐 밤이 있다."
"괜히 멋진 말로 빠져나가려고 하지 말고."
"들켰군."
툭툭-.
그녀와 시답잖은 농담을 몇 번 한 후, 카인은 단단한 성벽을 손등으로 쳐 봤다.
울림조차 없이 웅장하고 단단한 라마이닝 백작성의 벽이었다.
올리시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마이닝 백작은 뭐 그리 겁이 많은지, 돈만 생기면 성벽을 올렸다고 하더라."
"이 정도면 마법 대포도 견디겠는 걸."
"너 마법 대포 본 적 있어?"
그녀는 카인이 허세를 부리겠거니 하면서 놀렸다.
카인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지난 삶에서 발에 채듯 본 물건이다. 직접 운용까지 해 본 입장이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조금씩 나뉘어서 출발했던 기사들이 약속된 장소로 모여들었다.
카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모두를 쓱 훑어봤다.
"도심을 걸어왔으니까 이젠 알겠지, 라마이닝엔 아무 방비도 없는 걸."
"긴장조차 안 하더군요."
평기사 에셔가 당혹스럽다는 어조로 말을 뱉었다.
아무리 영지전이 어색하다고 한들 왕녀가 직접 인정한 '전쟁'인데 이들은 너무도 평온했다.
"에셀레드의 이름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
"만약 아버지가 온다고 했으면 이들이 이렇게 태평할까?"
그럴 리 없었다.
홀로 귀족가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왕국 최강의 기사인 에드먼드가 움직인다면 그 어디라도 가시를 세우고 기다리리라.
"나는 바꿀 것이다. '에드먼드'라는 이름이 아니라 '에셀레드'라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도록."
올리시렌은 카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피와 공포로 정점에 서겠다는 방식은 여전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걸 안다. 게다가 카인의 행보가 도움이 되는 것도 알기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넘어갔다.
스릉-.
카인은 허리춤의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다시 뽑아 들었다.
마주하는 것은 라마이닝의 성벽.
수십 년의 자본과 집념이 합쳐진 거대한 벽으로 카인은 몸을 돌렸다.
"이젠 못 돌아가. 끝까지 간다."
기사들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전쟁이 주는 묘한 고양감과 바닥에 떨어진 에셀레드의 이름이 그들을 충동질한다.
뜨거운 눈들이 바라볼 때.
파지지지직-.
흑색의 아그웨스카 위로 순백의 뇌전이 튀겼다. 그러다 천천히 모양을 드러내는 오러.
후우우우우우-.
카인은 수평으로 한 번 칼을 그었다.
내성벽은 두부처럼 썰렸고, 깊숙한 곳까지 상흔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더라고."
우우우-.
그리고 이어지는 수직의 일격.
바닥에서부터 이어지는 네모를 만들겠다는 듯, 번뜩이는 오러를 휘두르며 카인은 말했다.
"무언가를 쥘까 말까 하는 걸 '선택'이라 하던데 그건 틀렸어."
우웅-!
이어진 세 번째 검.
성벽으로 절망검이 들어갔다 나왔을 뿐, 별다른 상흔은 없었다.
카인은 다시금 검집으로 검을 집어넣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양손에 하나씩 쥐고 무엇을 버릴지 고르는 것이 '선택'이다. 라마이닝은 가짜 선택을 했지만, 우리는 진짜를 해야지."
스슷-.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순간에 대지를 디디며 온몸의 근육을 적절하게 조이고 풀며 온 힘을 주먹으로 향했다.
대지의 단단함.
패시브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육체의 강건함.
그 어떤 고난에도 부러지지 않을 마음까지.
쿠구구구궁-.
모든 것이 카인의 오른 주먹에 휘감기기 시작한다.
아그웨스카가 빛나던 것처럼 그의 주먹에 순백의 오러가 뇌전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을 소리가 나도 모자랄 모습인데, 아무 소리도 없다.
그렇게.
슈우우욱-.
인간의 별이 반짝인다고 하지만, 아직은 어두운 밤을 가르는 백색의 궤적이 그려진다.
닿는 곳은 카인이 적당히 잘라둔 성벽!
콰가가가가가가가강-!
아그웨스카가 잘랐던 만큼의 두꺼운 성벽이 네모나게 잘려선 저 안쪽으로 수욱- 하고 들어가다 쓰러졌다.
"성벽을 주먹으로 쳐서 날린다고?"
올리시렌은 황당한 듯 반문했다.
기사들이나 아벨 역시 카인이 보인 엄청난 위력에 할 말을 일었다.
팟-.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폭음에 주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성벽 위에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카인은 기사들을 빠르게 반으로 나누곤 명령했다.
"아벨, 1공자 브레디올 라마이닝을 잡아 와."
"예스, 마이 로드."
아벨은 가슴께에 주먹을 올리며 다짐한 후, 절반의 기사들을 이끌고 구멍 난 성벽을 파고들었다.
"밴더빌트는 2공자 테들리."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밴더빌트가 어떤 기사인 줄 아는 만큼 에셀레드 기사단원들은 순순히 그를 따랐다.
카인은 남은 올리시렌과 기사 이소엘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우르르 들어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 빈집털이 같은데."
현재 라마이닝의 중요 전력들은 에셀레드와 경계를 나누는 '빌라 강'에 포진하고 있다.
라마이닝이 안이하게 대처하는 게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틀리진 않았는데, 카인이 파고드는 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한발 빠른 움직임으로 비어 버린 상대의 중심부를 치는 것.
"빈집은 아니지. 이제 집 주인을 보러 갈 건데."
남은 셋은 바이스 라마이닝 백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33 EP.Ⅰ-7
우리의 봄이 오기 전에 (3)
카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라마이닝 백작성의 지리 따위는 상관치 않고 가장 큰길을 따라.
콰앙-!
닥치는 대로 부쉈고.
퍼어억-.
보이는 대로 쓰러뜨렸다.
"잡아라-!"
칼은 뽑지 않았다.
"적, 적이 너무 강합니다!"
그저 두 주먹과 발이면 충분하기에. 기사든 병사든 카인이 지나가는 길에 눕는 건 공평했다.
수십에 달하는 적들을 계속 눕히자 내성의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지 더는 달려들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그저 점점 사람이 몰려들고.
카인의 발걸음에 맞춰 슬금슬금 피할 뿐이었다.
"카인 에셀레드."
한마디를 뱉은 후 씨익 웃었다.
'이쯤 모였으면 성공이군.'
양쪽으로 갈라져 바이스 라마이닝 백작의 두 아들을 잡아 올 기사들을 위해 일부러 소란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더 뜨거웠으니까.
"에셀... 레드!?"
라마이닝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놀랐다.
영지전이 벌어진다는 말이 들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현 에셀레드 백작가의 후계자가 이곳에 있다니.
쉬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거짓이다! 자랑스러운 라마이닝의 사람들이여 저놈을 당장 죽-."
"할 소리가 거짓이라는 것밖에 없나 보군. 진짜든 아니든 적이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카인은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하찮은 선동을 끊어 냈다.
동시에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마법등에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그들은 대부분 카인의 눈과 마주칠까 봐 눈을 돌렸다.
아무리 빨리 움직였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약골일 줄이야. 전사는커녕 싸울 생각을 지닌 자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카인은 혀를 찼다.
"라마이닝은 이것밖에 안 되나?"
"...."
이어지는 도발.
그럼에도 달려드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당신이 정말 에셀레드라면 귀족의 수치다!"
아니, 덤비진 못해도 입을 놀릴 자가 있긴 했다.
카인의 맞은편,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귀족이라면 예법에 맞게 결투장을 보내고,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그래?"
카인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답지 않게 짧게 반문했다.
그 순간.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스릉-.
성벽을 베곤 쭉 검집에 넣고 있었던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천천히 뽑아 든다.
쿵.
지금까지는 그저 놀아 줬다는 듯, 검을 뽑는 순간 달라졌다.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묵직하고, 차가운 얼음이 목덜미를 쑤시는 것처럼 서늘한 카인의 기세가 라마이닝에 퍼진다.
카인을 비난하던 청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쿵.
그는 돌부리에 걸려선 혼자 뒤로 넘어졌다.
카인이 다가간다.
라마이닝의 사람들은 그 기세에 썰물처럼 물러섰다.
"아마 라마이닝의 남작이나 자작으로 보이는데."
스읏-!
밤을 가르는 흑색의 칼날.
"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피, 터져 나오는 비명.
청년은 잘려 나간 팔을 붙잡으며 절규했다. 그의 아래팔이 백작성의 정원을 뒹굴었다.
카인은 가볍게 검에 묻은 피를 털곤 말했다.
"앞으론 주둥이 놀릴 때 생각하고 해. 다음은 목이니까."
주춤주춤.
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보인 피에 인파는 더욱 멀어지기 시작했다.
카인의 걸음을 막아야 할 그들이 멀리서 보면 오히려 환영하는 인파로 보일 정도였다.
전쟁.
아이리안 왕국의 사람들이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단어가 그대로 사람이 된다면 저 검은 머리의 카인이 되리라.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느낀 두려움이었다.
"...."
올리시렌은 고통에 바닥을 구르는 이름 모를 남작을 한참 바라보다가 카인의 뒤를 따랐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눈치 없이 입을 열진 않았다.
그렇게 셋의 걸음이 끝난 건.
"외손자의 얼굴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구나.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 잘 보여."
노년의 바이스 라마이닝 백작을 마주하고서였다.
그는 가시가 배기지 않게 단단히 코팅된 지팡이를 쥔 채 꼿꼿이 서 있었다.
뒤로는 기사 넷도 있었다.
눈만 보이는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팔에 묶인 주황색 천이 그들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주황색을 가문의 색으로 삼고, 기사들이 팔에 감고 있는 곳은 하나.
카인도 잘 아는 곳.
"로스 후작가의 기사입니까."
카인의 물음에 라마이닝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스 후작님이 은혜롭게도 빌려주셨지."
그는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이 자신에 뒤에 있는 걸 영광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한 명의 백작이라기보다는 로스 후작만 보면 쫓아다니는 강아지와 같은 꼴이었다.
카인은 일부러 말을 끌었다.
"나름 백작인 분이 후작의 기사를 지원받는다라...."
이 상황을 지켜보는 라마이닝의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준 것이다.
"같은 백작가로서 부끄럽군요."
"에셀레드와 라마이닝은 급이 다르다."
"평이 야박하십니다. 그래도 제 어머니가 따님이실 텐데요."
사아아-.
순간 라마이닝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의아했다.
아주 짧은 시간 지나간 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방금 본 건 '공포'.
아버지가 딸에게 갖기 어려운 종류의 감정일 터.
그러다 이내 밤의 어둠을 밀어낼 정도로 환해진 마법등 불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밝군. 적이 이렇게 들어오는 걸 막지도 못하고 불만 비추는 게 내 집일 줄이야. 싸구려 연극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야."
"제가 연극의 주인공이면 외할아버지께선 초반에 등장하는 입만 산 악역이 딱 맞겠습니다."
"...."
침묵이 내려앉는다.
서로 간의 대화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남은 건 오직 피와 폭력뿐.
라마이닝 백작은 기사들에게 명령하기 전 고개를 돌려 카인의 일행을 살피다 올리시렌과 눈을 마주했다.
아이리안 왕가 특유의 회색빛 눈을 알아보곤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설마 같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왕녀님."
외손자 카인은 본 적 없다.
하지만 1왕녀 올리시렌은 멀리서라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천으로 마스크를 하고 있던 올리시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곤, 떨떠름하게 천을 내렸다.
"오랜만입니다. 라마이닝 백작."
"예, 그렇습니다. 다음에 왕녀님을 뵐 땐 시체로 뵐 줄 알았는데, 운명이라는 건 참으로 신비하군요."
휙-.
라마이닝 백작은 그대로 지팡이를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1왕녀와 2왕녀의 후계자 경쟁으로 시작된 싸움이니 이 자리에서 올리시렌을 죽여 버리면 깔끔하게 끝날 것이다.
소문이야 돌겠지만 결국 역사는 승자의 것.
바이스 라마이닝 백작은 큰 선택을 했고.
저벅-.
그의 뒤에 서 있던 <로스 데 캐롯>의 기사 넷이 그녀를 향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카인은 그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똑같다.'
아무리 같은 훈련을 받고, 같은 제식을 따른다 해도 사람인 이상 조금은 달라야 한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로스 후작의 기사 넷은 키나 체형은 물론 걸음걸이마저 같았다.
스읏-.
카인은 쥐고 있던 아그웨스카를 수평으로 들어, 올리시렌을 향해 걷던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러곤 그녀와 이소엘에게 말했다.
"내 뒤로 서."
"우리도 싸울 수 있어."
"알아."
같이 마녀 프리문디, 드래곤 아르후안과 싸웠다.
올리시렌이 얼마나 독종이고 이소엘이 저 작은 체구에 얼마나 단련된 근육을 숨기고 있는지 봤다.
여기 있는 그 어떤 자들보다 저 둘이 잘 싸운다는 걸 카인은 알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이건 내 전쟁이다. 뺏지 마."
"너...."
올리시렌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둘의 대화를 덤덤히 듣고 있던 이소엘이 그녀의 팔을 잡고 끌었으니까.
올리시렌은 이소엘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받아들이라는 의미.
쿵.
"어차피 셋 다 이 자리에서 죽을 건데 선후를 바꾸는 건 어렵지 않다. 마지막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라마이닝 백작은 가소롭다는 듯 지팡이를 바닥에 치면서 말했다.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이 이번엔 카인을 바라보았고.
스릉-.
넷 모두 칼을 뽑았다.
그리고 일어나는 초록빛의 오러.
"뭔가 이상하군. 오러의 빛마저 이렇게까지 똑같다라."
카인은 천천히 왼발을 앞으로 디디며 검을 다시 꽉 쥐었다.
적은 엑스퍼트급 기사 넷.
'중급 하나에 하급 셋.'
그리고 여기는 카인 혼자.
양쪽은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갔고.
탐색전을 벌이듯 넷은 사이를 벌리며 카인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올리시렌은 멀리 떨어지며 외쳤다.
"적이 준비하기 전에 쳐야 한다며!"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카인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시원하게 웃었다.
엑스퍼트 넷이 짓누르는 기세를 온몸으로 버티면서 카인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최전선의 설원만큼 극한의 환경도 아니고, 보이지 않던 적이 언제 나타날지 걱정할 곳도 아니다.
안온한 귀족가의 저택.
평화에 찌든 검.
같은 기사단 넷의 오러가 같다는 건 로스 후작가에 무언가 있다는 소리, 무언가 냄새가 났다.
카인은 왼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한 수 양보하지."
순간 기사 넷은 무언가 상의하려는 듯 서로를 마주하다가.
쉐에에에엣-!
좌측에 있던 자가 검을 든 채 달려들었다. 정확한 걸음과 흔들리지 않는 검의 궤도가 그의 훈련량을 짐작케 했다.
누군가에겐 눈 깜짝할 사이이며.
생과 사를 가르는 칼날 위에서 십 년을 살았던 카인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시간.
칼날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느끼곤 카인은 허리를 틀며 아그웨스카를 사선으로 뻗어 냈다.
팅-.
기사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자신의 오러가 휘감긴 검이 카인의 일격도 견디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아그웨스카의 칼날이 뱀처럼 휘감기며 그의 팔을 끊었다.
휘익-.
곧장 카인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오른팔을 자른 만큼 생긴 공간에서 횡으로 휘둘러 기사의 갑옷 틈으로 그대로 베어 죽였다.
파아아아아.
일어나는 피보라에 나머지 셋이 동시에 달려든다.
모든 것이 느려지는 시간 속.
카인의 보랏빛 눈만이 움직인다. 정확하게 주홍색 띠를 팔에 맨 셋을 순차적으로 훑곤 걸음을 옮겼다.
제아무리 오러를 두르고 힘을 쏟아 낸들, 모든 공격의 시작은 발에서 비롯되는 법.
사아아아-.
공기를 베어 낼 때 기묘한 소리를 내는 아그웨스카의 검은 칼날이 두 번째 기사의 어깨를 통으로 다시 잘라 냈다.
그 작은 틈.
세 번째 기사가 그 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
'걸렸군.'
카인은 슬쩍 웃었다.
일부러 보인 빈틈에 낚인 그의 명복을 빌며, 투구를 관통하며 목을 찔렀다.
마지막으로 멈칫하는 네 번째.
'칼을 뽑으면 늦다.'
인간의 생살에 꽂힌 검을 빼는 것도 늦는데, 투구까지 동시에 물려 있으니 이 싸움의 시간 속에선 느릴 수밖에 없었다.
툭.
카인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검을 놓았다.
거인이 대지를 달려 나가듯 큰 보폭으로 네 번째 기사를 향했고.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곤.
콰아아아앙-!
단숨에 그의 복부 갑옷을 후려쳤고, 갑옷은 통째로 우그러졌다.
"커헉-."
투구 아래로 그가 뱉어 낸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앞의 셋이 신음을 뱉기도 전에 죽었던 것과 달리 그에겐 여유가 존재했다.
"사는 건 한 놈이면 되겠어."
활시위처럼 당겨지는 주먹.
그리고 카인의 주먹은 자비 없이 기사의 투구 위로 내리꽂혔다.
쾅.
단숨에 셋을 죽이고 하나의 팔을 잘라 낸 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라마이닝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이딴 풍선 같은 놈들을 믿고 있었다는 게 실망스럽습니다. 라마이닝 백작?"
주춤-.
백발의 노인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엑스퍼트 넷을 단숨에 제압해 버린 카인의 보랏빛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다시금 뒤를 돌아봤지만, 더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성.
자신의 집.
평생을 보냈던 땅.
하지만, 이 심장 같은 곳에서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질 자가 없었다.
"나는-!"
카인이 일어나 바이스 라마이닝에게 향할 때.
"위대한 라마이닝의 이름을 받은 나이트, 빅터 라망 밀링턴."
"오오, 빅터! 역시 너밖에 없구나."
라마이닝 백작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한때 그의 곁을 지켰던 충성스러운 기사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났으니까.
카인은 빅터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혀를 찼다.
"라마이닝에선 처음 보는 진짜 기사군."
#34 EP.Ⅰ-7
우리의 봄이 오기 전에 (4)
침묵이 내려앉는다.
죽어 있는 <로스 데 캐롯>의 시체들을 제외하고 입을 여는 건 라마이닝 백작뿐이었다.
"빅터 경... 내가 미안했네. 어리석었어. 전엔 그대와 같은 충신을 몰라보고."
"백작 각하. 입 다무십시오."
백작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는다.
동시에 카인을 미소 짓게 하는 발언이었다.
카인은 엉거주춤 서 있는 백작을 가리키며 빅터에게 물었다.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온 거 아닌가? 그런 것 치곤 입이 너무 험한데."
"충성은 했었지. 옛날에."
"...?"
"그는 나를 버렸소."
빅터의 눈이 바닥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로스 후작가의 기사를 향했다.
조금은 비틀리고 그것보단 더욱 고집스러운 입이 살짝 휘어지며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딱 그 정도만 대하려고 하오."
카인도 시체들을 슥 훑어봤다.
그러곤 빅터와 라마이닝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강하고 충성스럽고 고집스러운 기사와 그걸 눈엣가시로 여기는 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흔한 갈등.
게다가 로스 후작을 저렇게까지 따르고 있으니 더더욱 사이가 벌어졌으리라.
'흔하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
상황이 대충 보인다.
노기사는 충성으로 백작을 대했지만, 백작은 그를 효용으로만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다 더 큰 효용을 지닌 로스 후작의 기사들이 나타나자 얼씨구나 하고 눈엣가시 같던 빅터를 날렸을 거고.
카인은 혀를 찼다.
지금 눈앞에 마주한 빅터의 경지는 아이리안 왕국에 몇 없을 엑스퍼트 상급이었으니까.
그러나 늙으면서 육체의 정점을 지났기에 젊을 때만큼은 강하지 않을 것이며, 라마이닝 백작의 성격상 실전이 많지도 않을 터.
한 명의 전사로서 너무도 아쉬운 마음을 담아 카인은 입을 열었다.
"충성은 어떤 불구덩이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는데 그걸 백작이 몰랐군."
젊음을 바쳐 모셨던 주군보다, 오늘 처음 마주하는 젊은 침략자가 기사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
빅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미소는 카인이 짓고 있는 웃음과 한없이 닮은 무언가였다.
"그렇다면 충성도 아닌데 굳이 왜 왔지?"
"진짜 기사들이 지나가는 걸 우연히 봤소. 보자마자 알았지. 저들은 라마이닝 백작성을 침략하러 온 거란 걸."
스읏-.
카인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색의 아그웨스카를 들어 빅터의 목을 가리켰다.
투구를 단박에 꿰뚫어 버릴 듯한 기세가 검 끝으로 모인다.
그리고 일어나는 순백의 오러.
"오지 않았으면 살았을 텐데."
스릉.
빅터는 브로드소드를 뽑아선 두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면서 중심을 낮추고 어깨너비로 벌리는 것이 짧은 간격에 능숙한 모습이었다.
그 역시 황색의 오러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기사로서 살았으니 죽을 때도 기사로서 죽어야지. 어중이떠중이에게 죽긴 싫고, 마침 진짜 기사들이 보여서 왔소."
"전장에서 죽겠다라. 이 백작령에 유일한 진짜군."
카인은 이런 '진짜'들을 좋아했다.
전사와 기사가 서로를 바라본다.
바람조차 숨죽이며 오러를 일으킨 둘을 휘감았다.
그들을 비추는 수많은 마법등.
빛이 비추는 빅터의 피부는 본래의 살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상처가 가득했다.
말 그대로 백전의 노장.
카인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산책을 하듯 <로스 데 캐롯>을 베던 것과 달리 진짜 기사인 빅터를 향해선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까다롭네."
빅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경지가 어디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의 삶과 의지가 검을 지탱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 뿐이었다.
빅터는 얼음장이 부서질 때 피어나는 얇은 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까다롭다는 평가를 해 줘서 고맙소. 난 당신을 보며 암담함을 느끼는 중이니까."
화아아아아아-!
둘의 기세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끓어오른다.
일촉즉발의 상황.
라마이닝의 마지막 기사가 칼을 휘두르기 직전.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라마이닝 백작의 얼굴엔 환희가 떠올랐다.
"하하하! 내 승리다 어리석은 에셀... 레드?"
지원군이 오는 줄 알고 기뻐했지만, 드러나는 모습은 피 칠갑을 한 기사들.
에셀레드 기사단이었다.
카인은 오러를 지우며 검을 내렸고, 빅터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처음은 아벨이었다.
어깨에 사람을 들춰 맨 아벨은 빈 곳에 던지곤 입을 열었다.
"1공자 브레디올입니다."
브레디올은 꼼짝달싹 못하게 칭칭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
먼 남부에서 만든다는 미라의 모습과 비슷했다.
이에 질세라 얼마 안 되어 반대편에서 밴더빌트 역시 사람을 들고 왔다.
"제가 조금 늦었군요. 2공자 테들리입니다."
쿵-.
바닥에서 애벌레처럼 움직이고 있는 브레디올의 옆에 테들리를 던졌다.
백작령의 후계자 둘이 볼썽사납게 모랫바닥을 구르는 꼴.
라마이닝 백작은 입을 쩍하고 벌리곤 카인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네놈!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카인은 정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심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둘은 네게 사사로이는 외삼촌이오, 공적으로는 향후 백작령을 이을 귀족인데 이렇게 대하는 건...."
"아하, 그렇군요. 모두 칼 뽑아."
카인은 빅터에 대한 경계를 지우지 않으며 나지막이 명령했고.
스르르르릉-.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들어온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아벨, 밴더빌트는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브레디올과 테들리를 지키던 자들을 죽이고 와서 그런지 은은한 살기가 그들의 칼에 맴돌고 있었다.
원래도 카인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수십.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카인은 대검을 쥔 밴더빌트를 향해 명령했다.
"밴더빌트."
"예스, 마이 로드."
"라마이닝 백작이 헛소리 한다 싶으면, 둘째부터 손가락을 잘라."
밴더빌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바닥을 기는 두 공자 사이에 섰다.
둘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저기서 좀 더 움직이면 귀찮으니까 다리를 잘라도 좋고."
카인의 한마디에 굳어 버렸다.
"알겠습니다."
밴더빌트의 시리디시린 은빛 칼날이 그들의 위를 이동했다.
흡사 사신이 들고 다니는 낫처럼, 어디를 잘라야 하는지 재 보는 것 같아 공포스러웠다.
"아벨."
카인은 손짓하며 아벨을 불렀다.
그러자 아벨이 카인의 옆에 섰다.
카인은 그의 한쪽 어깨를 잡고 맞은편에서 기사로서의 죽음을 바라며 미소 짓는 나이트 빅터를 가리켰다.
"여기 진짜 기사가 있다. 나이가 들었지만, 너보다는 많은 전장을 거치고 살아 있는 진짜지."
척.
아벨은 카인의 말에 반사적으로 세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기사가 되어 가는 아벨.
그렇게 되길 바라는 카인이 물었다.
"브레디올을 잡아 올 때 만났던 적들은 어땠지?"
"쭉정이였습니다."
"왜?"
"그들의 칼은 너무나 가벼웠습니다. 열의가 없는 훈련으로 틈은 너무나 넓었고 기회만 되면 도망가려 했기에 약했습니다."
아벨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내용은 그러지 않았다.
싸우고 죽였던 적들.
그 누구 하나 아벨의 가슴을 뛰게 하기엔 부족했다.
"저 기사, 빅터는 다를 거다."
누군가가 평가하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 우뚝 솟은 진짜 기사에 대한 평이었다.
아벨은 상관없다는 듯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가 너를 상대할 땐 죽이지 않으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손색이 있지."
빅터는 처음에 어째서 카인이 아벨을 불렀는지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본인은 상대가 누구든 죽일 각오로 싸울 것이오. 이 목숨을 끊어 주길 바라니까."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적.
아벨은 고개를 돌려 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죽입니까?"
"네가 살리고 싶다고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꽈악-.
아벨은 다시금 세검을 쥐었다.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살릴 때, 더 압도적인 실력이 필요한 법.
그에게 빅터라는 적은 넘어서야 할 대상이었다.
"해내겠습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이미 라마이닝 백작가의 핵심을 잡아 채면서 이번 기습은 성공했고.
'아벨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이 봄이 지나고 다시 올 새로운 봄을 위해, 카인은 둘의 싸움을 만들었다.
버려진 기사, 빅터.
새로운 기사, 아벨.
둘을 중심으로 원형의 공간이 생겨난다.
라마이닝의 사람들도 에셀레드의 기사들도 움직이지 않고 둘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스슷-.
아벨이 낚싯대를 흔들 듯 세검의 끝을 살살 돌리며 옆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 보이는 은근한 틈.
카인의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제대로 배웠어.'
반면 빅터는 브로드소드를 쥔 채 제자리에서 상대가 치고 들어오기를 바랐다.
찔러 들어가는 세검과 근접전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소드의 대결.
후우우우웅-.
저 멀리 셔우드 숲으로부터 차가운 밤바람이 불었다. 바람에는 나뭇잎 몇 장도 같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팔-랑.
한 장의 나뭇잎이 경계하는 둘의 사이로 떨어지면서, 둘의 시선이 가려지는 찰나.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아벨의 세검이 터져 나가는 폭발처럼 은빛 직선을 허공에 그으며 찔러든다.
마법의 불빛들이 어우러지면서 그의 검이 오색빛깔을 띠는 것 같았다.
슷-.
빅터는 왼발을 뒤로 빼며 가볍게 반보 물러섰다.
그만큼 늘어나는 간격.
단거리에 유리한 브로드소드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움직이기에 아주 적당한 공간이었다.
페르그나 Fergna.
가문의 절기가 되기는 아쉽지만, 음유시인이 부를 노래에 이름을 새기기엔 충분한 빅터의 검술!
팅-.
빅터의 외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페르그나'는 춤에 가까운 검술이었다.
티잉-.
대지를 찢어발길 듯 발을 내디디며 찌르는 아벨의 세검을 튕겨 내기 시작했다.
얇은 검을 넓은 면으로 살짝 밀어 방향을 바꾸는 것.
틱, 티팅, 팅!
두 검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불꽃과 서로 어우러지는 교묘한 박자가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 같이 만든다.
올곧은 아르드바르의 궤적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꺾어 대는 빅터의 검술.
밴더빌트는 팔짱을 낀 채 지켜보는 카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아벨 공자님이 상대하기엔 아직 벅찬 것 같습니다."
"아직 경험이 너무 부족해. 반면에 빅터는 수십 년간 검을 잡았고."
아벨의 얼굴로 땀이 흘러내린다.
온 힘을 다한 찌르기가 강철 벽에 튕겨 내듯 계속 빗나가자 그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압도적인 힘으로 밀고 들어가야 빅터의 방어를 깰 수 있다. 그러나 점을 노리는 세검의 힘으로는 상성 상 불리했다.
밴더빌트는 등에 멘 대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난입하겠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돌려 밴더빌트를 올려다보았다.
"밴더빌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기사도를 이렇게까지 어기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밴더빌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포기할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놓지 말아야 할 것도 아는 어른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쓴맛이 감도는 미소였다.
"공자님이 아끼시는 동생분이니까요. 제 손을 더럽히는 게 맞겠죠."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고마워."
카인은 조금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아벨과 빅터의 싸움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말했지? 아벨은 대륙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놈이라고."
수 싸움에도 밀리고, 체력관리의 실패로 장기전에서도 밀리게 생긴 아벨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를 압도하던 빅터의 표정에 살기가 감돌며, 끝을 내려는 순간.
아벨의 전투본능이 깨어났다.
척-.
쥐고 있던 세검을 공중에 던져 왼손으로 다시 잡곤, 비어 있던 오른손으로 검집을 잡았다.
세검으론 밀리고.
방어는 부숴야 하고.
목 앞으로 칼날이 번뜩이고.
아벨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로 마이어 Lo Meyer.
드래곤을 으스러뜨리던 참격!
그 주인인 밴더빌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35 EP.Ⅰ-7
우리의 봄이 오기 전에 (5)
콰아아앙-!
아벨은 검집을 쥐곤 그대로 횡으로 베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날아오는 베기에 다가오던 빅터는 급하게 움직이며 검집을 튕겼다.
쉐에엣-.
그의 손이 꼬이는 순간 아벨의 왼손에 있던 세검이 다시금 폭발했다.
츳!
세검이 빅터의 왼팔뚝을 스쳤고, 허공에 핏물이 흩날렸다. 그는 이를 악물며 다시금 자세를 낮췄다.
"연습해 본 적도 없는 쌍수 따위!"
스스로에게 하는 격려.
방어하는 사람이 무엇을 방어해야 할지 헷갈리게 하려면, 공격의 패턴을 바꾸고 다양하게 해야 한다.
가장 적절한 답은 아벨처럼 양손에 검을 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란할 수는 있지만, 가볍고 아쉬운 것이, 쌍검. 그만큼 두 손으로 검을 휘두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빅터는 다시금 승기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고 거북이처럼 아벨을 향해 다가갔다.
로 마이어 Lo Meyer.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반쯤 풀린 눈을 지닌 아벨은 가장 적절한 순간, 밴더빌트의 참격을 검집으로 휘둘렀고 빈틈이 나오면.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그대로 찔렀다.
빅터는 인내심을 가지며 늘어나는 상처를 견뎠다.
제대로 연습해 본 적 없는 검이라면 반드시 패턴이 보일 것이고, 그 순간을 노리면 자신이 승리할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어떻게?"
수십의 검격이 오갔고, 빅터는 아벨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눈에 담았지만 이어지는 건 경악뿐이었다.
그 어떤 수도 똑같지 않았다.
교묘할 정도로 발목과 손목을 휘고 무릎과 팔꿈치의 위치를 바꿔 가며,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본능의 검을 펼쳤다.
"나는 빅터 라망 밀링턴! 강철바위다!"
한때 라마이닝을 대표했던 이명을 외치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핏-.
방어가 약해진다.
그 틈으로 아벨의 검이 그를 그었다.
후우웅-.
공격이 강해졌다.
빅터는 치명적인 급소만을 가리며 아벨의 거리에서 자신의 거리로 천천히 좁혔다.
경악하던 밴더빌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서려 할 때.
슥.
카인은 그의 앞을 한 발로 막으며 턱짓했다.
"이미 승부는 났어."
"빅터 경은 살을 주고 뼈를 얻겠다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이건 아무리 아벨 공자님이 대단해도 대응하기 어려울...."
"아벨의 무기가 저것뿐일까?"
"예?"
밴더빌트의 얼빠진 대꾸.
카인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저 녀석이 나한테 '해내겠다고' 말했다. 그럼 형으로서 믿어야지."
자신보다 강하고 상성도 좋지 않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이기겠다고 말한 아벨.
그리고 그의 말을 믿는 카인.
밴더빌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나섰던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저는 아벨 공자님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툭.
대검을 쥐던 손을 떨어뜨리며, 카인의 뒤에 꼿꼿이 섰다.
"하지만 늘 기적을 보여 주셨던 카인 공자님의 말을 믿겠습니다."
둘이 대화하는 틈을 타 라마이닝의 공자 둘이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 사이사이 화살처럼 꽂히는 밴더빌트의 눈빛에 꼼짝도 못했다.
그렇게 두 백작가가 바라보는 결투가 끝에 다다랐다.
아벨의 손이 어지러워진다.
딛는 발의 위치가 아쉬웠고, 빅터는 다시 자기가 이긴다고 생각하면서.
페르그나 Fergna.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이겼어."
카인은 단언했고, 흐리멍덩해 보이던 아벨의 갈색 눈이 또렷해졌다.
그걸 코앞에서 마주한 빅터는 직감했다.
"함정-!"
엔 자우어.
늘 올바른 궤적을 그리던 세검이 독사와 같이 꾸불거렸고, 처음 보는 일격은.
후우우우우우-.
바람같이 빅터의 얼굴을 스쳤다. 얼굴 곳곳의 상처가 지독히도 시렸다.
아벨의 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빅터의 왼쪽 눈앞에 있었으니까.
전체적인 결투를 설계하고 마지막까지 냉정하게 싸운 아벨의 완벽한 승리였다.
쿵.
빅터는 그대로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아벨을 향해 목을 늘어뜨렸다.
"죽여라."
그러나 아벨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카인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해냈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나도 하던 일을 계속해야겠어."
주군과 기사를 보는 모습.
그제야 아벨은 빅터를 향해 몸을 숙이며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벅.
카인은 그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곤 단 하나 살려 뒀던 <로스 데 캐롯> 기사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잡아당겼다.
저-벅.
요동치는 기사를 끌고 라마이닝 백작으로 다가가는 검은 머리의 전사, 카인.
아벨의 싸움이 찬란했다면.
저-벅-.
카인의 걸음은 한없이 밤을 닮아 어둡고 잔혹했다.
앞에 놓인 시체를 거침없이 밟아 나갔고, 라마이닝 백작은 지팡이를 놓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카인의 뒤로 하나둘 사람들이 서기 시작했다.
올리시렌과 이소엘이 처음이었고 상황을 경계하는 최소한의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가 그 뒤를 따른다.
그야말로 에셀레드.
대륙을 마주한 에셀레드 해안에 몰아치는 '그레이트 오션'의 파도와 같은 모습.
앞은 피로 만들어진 길이었으니.
카인은 주저앉은 라마이닝 백작에게 몸을 요동치면서도 얼굴만큼은 무표정한 로스의 기사를 들이밀었다.
"이들을 믿었습니까?"
"...."
툭.
카인은 그를 옆으로 던졌다.
그러자 기사들이 그를 단단히 잡고 밧줄로 묶은 후 뒤로 뺐다.
"너무 약해서 아쉽군요."
"네 아비도 내게 이러진 않았다! 에드먼드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는데, 고작 네놈이...."
카인은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억지로 짓는 미소가 마스크에 그려진 광대의 미소같이 보일 정도였다.
카인은 검지를 들어 입을 가렸다.
"시끄럽군요. 패배자 주제에."
라마이닝 백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카인의 말에 치욕을 느낀 듯 머리를 흔들면서 소리 질렀다.
"네가 지닌 야만의 힘이 문명의 힘에 상대가 될 거라 생각하느냐! 이런 우악스러운 걸 이 왕국에서 보고 있을 것 같냔 말이다!"
"두고 보지 않겠죠."
"...?"
"그러라고 이러는 겁니다. 그 잘난 문명의 힘인지 마도학인지, 난 그딴 거 모릅니다."
척-.
카인은 팔을 들었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건 대화가 끝나고 서로 손을 맞잡고 일어나는 빅터와 아벨이었다.
"칼을 들고 덤비면 적입니다, 죽여야죠. 칼을 내리고 안기면 아군입니다, 살려야죠."
"설마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이유가 적을 구분하려고...?"
차가울 정도로 시린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라마이닝 백작의 떨림이 멈췄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음보다 차가운 무언가가 스쳐 내려가는 걸 느꼈다.
이렇게까지 단순하고 우악스럽게, 그러면서 일은 대놓고 치는 카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모르겠으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
카인은 웃으며 허리를 폈다.
당당하게 대지를 딛고 일어선 에셀레드 가문의 후계자.
그가 이 상황 자체를 거북해하는 올리시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왕녀님, 에셀레드와 라마이닝 백작가 간 영지전의 결과를 발표해 주시죠."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마음의 무거운 짐을 털어 내곤 말했다.
"라마이닝과의 영지전에서 승리한 쪽은 에셀레드입니다."
* * *
에셀레드가 소수의 기사들을 이끌고 라마이닝을 정복했다는 소문은 엄청난 속도로 왕국에 퍼졌다.
국왕 하이볼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보다 붉은 와인을 나무잔에 잔뜩 붓곤 마셨다.
2왕녀 올리비아는 갑작스레 달라진 올리시렌의 행보에 손톱을 깨물었고, 조금 거리가 있는 맥로든 후작은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마이닝과 붙어 있는 로스 후작가는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기사들을 몇 번이고 죽인 카인 에셀레드의 다음 적이 자신들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로스 후작과 시그마리 기사단장은 침묵 속에서 움직였다.
* * *
며칠 후, 라마이닝 백작가의 지하.
딱딱한 나무 의자에 두 명의 중년인이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오물과 시체가 어우러진 썩은 냄새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철저한 지하 감옥 안.
둘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덜컹-.
문이 열린다.
밖에서 들어오는 횃불의 불빛이 문틈을 흰색처럼 보이게 하다가, 누군가의 후광이 되었다.
"백작 할 사람 손."
존대 따위는 집어치운 말.
카인이었다.
카인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밖에 있던 횃불 하나를 들고 안으로 돌아왔다.
며칠 사이에 퀭해진 라마이닝의 두 아들이자, 어머니의 형제.
브레디올과 테들리의 얼굴을 한 번씩 비췄다.
그러곤 의자에 결박되고 입은 천으로 묶여서 '읍!'밖에 못하는 둘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쉽군. 손 들면 정말 백작을 시켜 주려고 했는데."
카인이 그들을 놀리듯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읍읍!"
장남 브레디올이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내며 소리쳤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기에 카인은 그의 입을 막던 천을 풀었다. 그리곤 서릿발 같은 보라색 눈으로 브레디올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라마이닝 백작이 되고 싶나?"
"아버지는 어떻게 했나!"
카인의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라마이닝 백작을 생각하는 아들의 태도가 제법 기꺼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도망갈 기회와 돈을 준다고 하던 그 브레디올이었군."
"네가 이렇게 악마 같을 줄 알았다면...."
"악마?"
카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목을 손으로 휘휘 저어 자르는 모습을 하며 이어 말했다.
"악마보다 더럽고 치사한 건 인간이야."
"...."
"이쪽 하고도 이야기해야겠지."
휙-.
둘째 테들리의 입을 막던 천을 풀었다.
격정적인 브레디올과 다르게 그는 상인 같은 표정으로 그간 속으로 무수히 되뇌던 말을 뱉었다.
"카인, 네게 이 아이리안을 주겠다."
"네 것도 아닌 걸 어떻게 주려고."
카인은 차갑게 되물었다.
"테들리-!"
장남 브레디올은 동생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테들리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카인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감금당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눈초리였다.
"세상이 인정하게 하지."
"고작 라마이닝의 둘째 아들이 말하기엔 너무 큰데."
카인은 구석에 놓여 있던 세 번째 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의자가 그의 오러에 따라 날아왔고, 카인은 자리에 앉아 테들리를 마주했다.
테들리는 카인을 향해 단언하듯 말했다.
"나는 불가능해도 '우리'는 가능하다."
그 순간 카인의 눈이 번뜩였다.
어머니 클로에를 따라왔던 라마이닝의 시종, 아리안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그녀와 젊었을 때 관계가 있다고 했지.'
카인은 그를 슬슬 떠볼 생각으로 태연하게 물었다.
"우리?"
그의 가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열망이 천천히 그의 텅 빈 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조금 더 사람다워진 테들리.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우리의 힘이 있다면 두 왕녀가 아니라 네가 왕이 되는 것도 가능해."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뭔가 있는 조직이긴 하나 보군.'
왕실정보국도 아니고 성국도 아니면서 넓고, 미래를 살았던 카인조차 몰랐던 은밀한 집단.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돼서 썩은 무언가의 냄새가.
"살려고 그냥 헛소리를 뱉는 건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물어볼 게 있긴 했지."
"뭐든."
테들리는 그런 힘이 있었으면 왜 가만히 있었던 건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묻는 거라 예상하며 대답을 차분히 준비했다.
"아리안. 어떤 여자였지?"
"...!"
하지만 나오는 건 간신히 흘려보냈던 과거.
순간 테들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어, 어떻게 네가 그 이름을! 그분은... 커헉!"
테들리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동시에 그의 눈, 코, 귀에서도 핏물이 부자연스럽게 주르륵 흘러내렸다.
"테들리!"
덜컹덜컹!
테들리는 당장이라도 의자가 부서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카인이 살펴보기 위해 일어나는 순간, 그는 눈을 뒤집으면서 소리쳤다.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우리의- 불꽃으로-!"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테들리가 순간 늘어졌고, 카인은 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죽었어.'
심장이 멈췄다.
그 순간 묘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입고 있던 상의를 잡아 찢었다.
그 가슴 한복판에서는.
차라라라라라-.
수십 개의 발이 달린 거미처럼 숨 쉬고 있던 은빛의 무언가가 테들리의 몸속으로 파고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찢었으면 못 봤으리라.
카인으로선 꿈에서도 잊을 수 없던 것.
'아벨....'
용사 아벨의 가슴팍에 박혀 있던 것과 닮은 모습이었다.
[운명의 분기점을 발견했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9%]
Episode.Ⅰ
봄의 찬미
#36 EP.Ⅰ-8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1)
「이 세상은 너무나 얇았다. 한 꺼풀을 들춰내자, 보고, 듣고, 만져도 알 수 없었던 운명이 있었다.
-어디에도 있을 존」
부서져 내리는 테들리의 시체.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까지도 목청 높이던 그가 해머에 얻어맞은 석상처럼 흩어지고, 바닥엔 옷가지 몇 개만 남았다.
'용사도, 나도 모르던 것이 이 아이리안에 많았군.'
세상의 중심은 '대륙'이다.
그런 대륙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아이리안 섬은 말 그대로 '변방'.
그런데 이곳에서 용사가 태어나고, 용사를 잡아먹던 '은빛의 무언가'까지 존재했다.
아이리안 섬에 카인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혹은 이미 만연한 걸 회귀해서야 발견한 것인가.
카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어떤 놈들이든 좋은 놈들은 아니야.'
대장벽에서 싸우던 그때처럼 검을 쥐었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리안의 귀족들과, 적이 될 거라 생각했던 북방의 엘프들.
그리고 정체 모를 새로운 적.
아그웨스카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각은 조금 안이해졌던 카인을 다시금 전사로 만들기 충분했다.
강해져야 한다.
그것만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아벨을 위한 속죄일지어니.
저벅-.
카인은 몸을 돌려선 기겁한 채 물러서 있는 브레디올 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된 거지?"
"나도 모른다!"
브레디올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인은 그런 그를 보더니.
"테들리가 평범한 둘째가 아니었는데, 당신도 어떤 첫째인지 알 수 없겠어."
스릉-.
절망검을 뽑았다.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흑색의 검신은 어두운 감옥에선 윤곽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브레디올은 척추를 훑고 내리는 싸늘한 한기에 진저리쳤다.
지금껏 만나 봤던 기사들과 카인은 근본부터 달랐다. 기사가 아니라 마치 닳고 닳은 괴물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대신 대답해라. 아리안, 어떤 여자지?"
"...."
브레디올은 카인의 눈을 피했다. 그러곤 입술을 꽉 깨물며 할 말들을 억지로 삼켰다.
카인은 한 걸음 더 다가가선 그의 목젖에 아그웨스카를 갖다 댔다.
"말해."
"이 세상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특히 너는 아리안에 대해선 모르는 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나 적어도 카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선 틀린 말이었다.
아그웨스카의 검은 칼날이 그의 살갗을 조금 더 파고들었고, 한 방울의 따스한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당신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달라."
"다르다?"
브레디올은 고개를 들었다.
빤히 바라보던 그는 무엇이 웃긴 것인지 혹은 자신의 슬픔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쿡쿡- 웃었다.
"너처럼 살았다면 내 세상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적어도 이딴 식으로 지진 않았겠지. 로스의 수상한 초록색 기사들도 활개 치지 못했을 거고."
"적어도라...."
브레디올이 달라졌다.
겁먹고 조금은 위축되어 있던 그에게서 귀족 특유의 완고함이 느껴졌다.
이제야 진짜 백작가의 후계를 마주하는 느낌.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었다.
브레디올은 턱으로 자신을 묶은 로프를 가리켰다.
"좋아. 내가 아는 만큼은 다 말해 주마. 대신 풀어."
스윽-.
묶고 있던 로프를 한 번에 베었다.
브레디올은 뻐근해진 어깨를 슬슬 돌리며 카인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서 다른 누군가를 찾는 눈빛이었다.
"아리안은 클로에를 신전에 고발하려 했다."
그 누군가는 카인의 어머니이자 브레디올의 하나뿐인 여동생, 클로에 라마이닝.
카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칠대귀족가는 영지 내 사법, 행정, 징세권을 지닌다. 따라서 아주 특수한 경우만 신전에 일러바칠 수 있다.
대표적으론 성국의 수배자 색출, 악마숭배, 이단.
그리고.
"클로에가 이상한 마법을 쓰는 걸 봤다고 말이야."
"마녀...."
늘 아프기만 하고 창백했던 어머니가 마녀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망나니였던 테들리는 아리안을 만나서 사람이 달라졌다. 크로울 백작처럼 시끄러워질 일도 없는 둘째기도 하니 평민이었던 아리안과 혼인시키려고 했었어."
"그럼 아리안은 백작가의 내성을 자유롭게 다녔겠네."
"그때 문틈으로 봤다더군."
카인은 어머니에 대해 말할 때, 라마이닝 백작이 찰나였지만 왜 공포를 보인 건지 이제 알았다.
당시 어머니가 마녀로 확정되었다면, 라마이닝 백작가는 진즉 성기사의 군홧발에 짓이겨졌을 테니까.
"우리는 필사적으로 아리안을 말리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마녀냐고. 아니면 다른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운 거냐고."
"그래서...?"
"인정했다. 마녀로 각성했다고."
카인은 두 눈을 감았다.
어머니에게 마녀의 힘이 있다면 아리안의 손발을 자르고 사라지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눈꺼풀의 장막 속에서, 올리시렌이 봤다던 눈 오는 날의 진실도 짜 맞춰졌다.
브레디올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나 그의 씁쓸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낮과 밤이 수없이 지난 후, 우리는 클로에를 일단 라마이닝 백작가 밖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비겁한 선택.
훗날 마녀라는 게 들켜도 이미 쫓아냈으니 라마이닝의 타격은 적을 것이고, 클로에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마침 마녀라도 감당할 남자가 있었지."
"에드먼드 에셀레드."
걸어 다니는 일인 군단.
아이리안 섬 유일의 마스터.
그리고 왕국 최강의 검호.
에드먼드와 발맞출 기사단이 있다면, 천 년의 숙원인 '북방 엘프의 숲'도 정벌했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그런 괴물 같은 에드먼드의 반려자로서 마녀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하지만 궁금증이 다 해결되진 않았다.
"왜 죽이지 않았지? 죽여서 아리안의 입을 막는 게 제일 편했을 텐데."
"테들리가 아리안을 죽인다면 자기도 같이 죽겠다고 했으니까."
"딸이냐 아들이냐에서 딸을 절벽에서 밀었군. 이제야 왜 라마이닝이 에셀레드에 냉담했는지도 알겠어."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언젠가라도 성국에 발각된다면 발뺌하기 위한 태도일 터.
브레디올은 다시금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카인을 향하는 건지 이제는 없는 클로에를 향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다."
목적지가 없는 편지는 출발하지 못하는 법.
"당신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
스릉-.
아그웨스카를 허리춤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와 브레디올과 테들리의 차이를 말하던 라곤도 남작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브레디올은 나름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덜컹.
감옥의 문을 열었다.
환한 빛이 갑작스레 쏟아졌다.
브레디올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로막았다. 손 틈새로 빛에 휩싸인 카인이 어슴푸레 보였다.
카인이 몸을 돌리며 한마디를 남겼다.
"라마이닝 영지를 잘 부탁한다, 브레디올 백작."
라마이닝의 다음 백작을 향한 인사였다.
브레디올은 어두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곤 빛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화답했다.
"그래, 로드 에셀레드."
그 이상의 말은 사치였다.
두 남자는 시간과 행동만이 올바른 답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 *
카인, 올리시렌 그리고 밴더빌트.
올리시렌의 호위 기사인 이소엘은 잠시 자리를 비웠기에, 셋만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그녀는 포크를 들곤 하얀 케이크를 푹 찍으며 물었다.
"그러면 뭐 더 쫓을 게 없네."
올리시렌은 왕녀답지 않게 큰 케이크 조각을 와구와구 먹었고, 그녀의 입가에 생크림이 잔뜩 묻었다.
카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켰다.
"케이크 하나 깔끔하게 못 먹는 왕녀님의 체스판을 닦아 두긴 했으니 여기까지 온 이유론 충분하지."
그 체스판의 이름은 아이리안 왕국이었다.
올리시렌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손가락으로 크림을 닦아 먹곤, 이번엔 접시 채로 들었다.
"뭘 모르는구나. 원래 케이크는 이렇게 먹어야 더 맛있어."
"...."
카인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왜. 뭐. 불만 있어?"
올리시렌의 눈빛이 따갑다.
카인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쩌다 이런 사람하고 어머니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나 싶어서."
올리시렌은 마녀였고 밴더빌트는 클로에를 따라 평생을 희생한 기사기에 브레디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부 전했다.
그가 이 아이리안 섬에서 가장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둘이 되었다.
올리시렌은 피식 웃었다.
"그거야 왕국 최고의 미녀인 내게 반해서 그렇지."
"입은 먹는 곳이지 싸는 곳이 아니야."
"사람 빵 먹는데 더러운 소리 하네. 어쨌든 왕실정보국을 좀 살펴봤는데, 이 땅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건 전혀 모르더라."
미래에서 온 카인도, 마왕을 물리쳤던 용사도 모르던 자들인데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툭-.
올리시렌은 묵직한 종이 뭉치를 탁자 위에 올렸다.
휘르르-.
쓱 살펴보던 카인은 겉면을 들었고, 처음 적혀 있는 건 '카인 에셀레드' 자신이었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에 대해 꼼꼼하게 적어 두고 비교한 자료였다.
다음을 넘겼다.
주로 칠대귀족가의 사람에 대한 자료였지만, 나름 이름 있는 하위 귀족가도 간간이 보였다.
카인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올리시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거든. 그런데 테들리 라마이닝은 개망나니에서 나름 제대로 된 둘째 공자로 변했지."
"아리안을 만나서."
"맞아. 그래서 가져왔어. 지난 삼십 년간 귀족들의 이상 동향을 기록한 거야. 아리안에 대한 흔적이 끊겼지만, 저들이 조직으로 움직인다면 비슷한 패턴이 보일 테니까."
갑자기 달라진 자들.
의문의 죽임을 당한 자들.
카인은 내심 아이리안의 왕실정보국을 낮춰 보고 있었지만, 자료를 읽어 나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주 작은 의혹이라도 기록하곤 시간과 사건 순으로 정리한 것이 제국의 자료보다 보기 편했기 때문이다.
슥슥 넘겨보던 카인은 손을 멈췄다. 그러곤 열린 페이지를 둘에게 보여 줬다.
"여긴 너무 성의가 없잖아."
「에드먼드 에셀레드
특징 : 강함」
시시콜콜한 것까지 적힌 다른 자들과 달리 에드먼드에 대해선 단 두 줄이었다.
올리시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찻잔을 들었다.
"저거 말곤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더라고. 무슨 수를 써도 그의 감각에 걸렸다던데."
"하긴 그 에드먼드라면 그럴 만하지."
다음 장을 넘기려던 카인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곤 홀짝홀짝 차를 마시는 그녀를 돌아봤다.
"감지 범위가 어느 정도였나?"
마스터의 범위를 잘 알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그녀는 심드렁히 대답했다.
"딱 에셀레드 백작성. 그 밖에선 가끔."
카인은 곧장 조금 침울해 보이는 밴더빌트를 돌아보았다.
"그 오두막은 감각에 걸릴까, 안 걸릴까?"
그는 순간적으로 카인이 뭣 때문에 이렇게 묻는지 알아차리곤 놀라 외쳤다.
"걸립니다! 백작님이 계시는 중앙을 기준으로 하면 남문보단 훨씬 가까우니까요."
"그럼 눈 오는 날의 살인 사건도 알겠군."
"...!"
둘의 눈이 순간 부릅떠졌다.
카인은 '강함' 두 글자만 적힌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어머니가 마녀인 걸 진즉 알았던 걸까.'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세상 누구보다 가깝지만, 누구보다 멀게 느껴지는 에드먼드를 떠올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카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슬슬 다음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딱 좋은 곳이 나왔네."
올리시렌은 카인의 옆으로 와 같은 서류를 보았다.
「아리안 크로울.
특징 : 모 남작가 출신, 크로울 백작의 새로운 후처, 과거 기록 없음.
...
...
현재 크로울의 실권자.
추가 조사 필요.」
#37 EP.Ⅰ-8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2)
로스 후작가의 기사단 <로스 데 캐롯>.
대개 귀족가의 기사단이라고 하면 외부의 입김이나 내부의 인맥 등으로 실력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로스 후작이 우직하게 실력 우선으로 키웠기에, 왕실기사단 다음으로 평가받는 곳이었다.
그런 후작이 <로스 데 캐롯>의 단장으로 여성을 내세우자 늘 찬성만 말하던 로스 휘하의 귀족들이 처음으로 난색을 보일 정도였다.
다른 직무도 아니고 기사단장으로선 너무 젊었고, 기존의 명성이나 공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로스 후작은 특유의 반짝이는 머리를 융으로 닦으며 말했다.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칼이 나을 거 같은데, 시그마리!
로스 후작이 강력하게 지지하는 새로운 기사단장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출신을 알 수 없으며,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에 초록색 머리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후견인이 후작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귀가 둥글지 않았다면 '북방 엘프의 숲'에서 온 첩자라 하여 당장 사지를 찢어 죽였을 정도로 엘프와 닮았기 때문이다.
-예스, 마이 로드.
-내 기사단장에 어울리는지 아닌지 증명해 봐.
시그마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로스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판을 깔았다.
무제한 난투.
로스 후작은 <로스 데 캐롯>의 차기 단장 작위를 난투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공표했고, 그 순간 후작령 전체가 달아올랐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지닌 최강의 기사를 너나없이 난투에 내보냈다.
우승하지 못해도 로스 후작의 눈에 든다면 이득이었으며, 그들의 눈에 여리여리한 시그마리는 만만히 보였다.
단, 참가엔 조건이 있었다.
-패자는 승자의 부하가 된다.
로스의 입김이 닿는 귀족가의 최정예 기사들을 부릴 수 있다는 건 더더욱 그들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렇게 벌어진 난투.
다들 손에 땀을 쥐고 볼 때, 오직 로스 후작만이 편히 내려다보았다.
시그마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기사가 나타나도.
시그마리의 허리만 한 팔뚝을 자랑하는 기사가 등장해도.
시그마리의 얄팍한 검은 가볍게 씹어 먹을 거대한 무기가 튀어나와도.
마지막까지 서 있던 건 그녀였다.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보다 키가 큰 자는 무릎을 잘라 내렸고, 팔뚝이 굵은 자는 팔을 베었으며,
채앵-!
다른 자의 모든 무기는 부쉈다.
마치 폭풍 같았다.
그것도 녹색의 폭풍.
로스 후작은 녹색 폭풍이 휩쓴 핏빛 난투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직 그녀가 기사단장이 되는데 반대하는 자 있나?
-....
각 가문에서 손꼽히던 기사들을 압살하는 모습을 봤으니 당연하게도 반발하는 자는 없었다.
그래도 아주 작은 질문은 튀어나왔다.
다른 기사들을 살려 두면 부하가 될 텐데 어째서 병신으로 만든 거냐고.
시그마리는 얼굴에 잔뜩 튄 핏물들을 세수하듯 밀어 버리면서 활짝 웃었다.
-같잖아서요.
로스 후작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루아침에 기사를 잃은 귀족들은 필사적으로 길러 왔던 정치력을 모두 웃음에 투자하며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로스의 날카로운 녹색 칼을 향한 찬미였다.
그렇게 시그마리가 '로스'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삼아 기사단장으로 살아온 지 벌써 십 년.
강산이 변할 시간에도 진짜 엘프처럼 그녀의 미모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칼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흐음."
그런 시그마리가 후작성 로비에 걸려 있는 거대한 아이리안 전도를 올려 보고 있었다.
북쪽은 검게 칠해져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는 '북방 엘프의 숲'.
중앙의 서쪽은 맥로든, 동쪽은 로스 후작가가 자리하여 엘프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마르퀴스 벨트'.
그리고 아이리안 섬 남부에는 다섯 백작가가 자리 잡고, 남부와 중부 사이엔 왕도 '린드브룸'이 존재했다.
"인간들이 숲의 아름다움을 알 리가 없지."
드넓은 로비에서 홀로 서 있는 그녀의 곁으로.
팔랑-.
어디선가 들어온 초록색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그마리는 여유롭게 팔을 뻗어 나뭇잎을 쥐었다.
"라마이닝에 보낸 녀석들이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듯 나뭇잎을 집중해서 보던 시그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셀레드는 에셀레드네. 아비도 괴물이었는데 아들도 새끼 괴물이고, 더러운 잡종도 나름이고."
파삿-.
제 역할을 다한 듯, 낙엽처럼 색이 빠지다 나뭇잎이 으스러졌다.
시그마리는 그대로 걸음을 움직였고, 집무실에 있던 로스 후작을 찾아갔다.
로스 후작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니,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라마이닝에 빌려줬던 '초기형 엘븐나이트'가 전부 소실됐습니다."
로스 후작은 놀라운 소식에 안경을 벗었다.
"에셀레드가 기사단이라도 잔뜩 끌고 왔나 보군."
"카인 에셀레드 혼자서 처리했습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톡, 톡-.
"아무리 초기형이라지만...."
에셀레드의 이름을 쓰는 놈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자는 없었다.
가장 걸림돌이었던 에드먼드는 클리어 불능의 던전에 처박는 걸로 해결했지만, 작은 에셀레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머리가 아팠다.
그는 조금 더 고민하다 몸을 돌렸다.
로비의 아이리안 전도보다 작지만, 조금 더 상세한 지도가 걸려 있었다.
로스 후작은 턱을 괴곤 찬찬히 지도를 살폈다. 그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닿은 건 크로울 백작령이었다.
"아마 다음은 크로울이겠지."
그는 단숨에 카인의 다음 목표를 짚어 냈다.
"그럴 겁니다."
"에드먼드가 그랬듯 아예 송곳처럼 튀어나오면 쳐버릴 텐데, 애매해. 내가 써먹기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시그마리는 로스의 고민에 한쪽 입꼬리를 들었다.
걸림돌이 나타나면 로스는 그것도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했으며, 시그마리는.
"처리할까요?"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부수는 걸 선택하는 쪽이었다.
로스 후작은 태연하게 서늘한 말을 뱉는 그녀를 곁눈질하곤 고개를 저었다.
부정의 뜻이었다.
"아직은. 어차피 강해 봤자 애니까."
"애는 자랍니다. 언제든 명령하십시오. 그게 '계약'이니까요."
후우우-.
사방이 꽉 닫힌 로스의 집무실에 부자연스러운 산들바람이 불었고, 책상 위의 서류들이 나풀거렸다.
바람이 그치자 시그마리의 동그랬던 귀가 엘프의 귀처럼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로스 후작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든든하지. 북방의 엘더(Elder)께서 내 충성스러운 기사가 되어 주고 있으니까."
"예스, 마이 로드."
쿡-.
그는 책상 위의 지휘봉을 들어선 경계를 맞대고 있는 맥로든 후작령을 가리켰다.
스윽-.
그러곤 맥로든에 포함되어 있는 웨어햄(Wareham)과 브래들리(Bradley) 백작령을 쓸어가다 왕도 위에 멈췄다.
"그래도 아쉬워."
"무엇이 말씀입니까."
"작은 에셀레드를 좀 더 풀어 두면 노망난 맥로든의 목을 알아서 따 줄 것 같거든."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로스 후작의 눈이 조금 커졌다.
북방 엘프의 숲에서 내려온 엘더 시그마리가 이렇게까지 약한 소리를 내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 괴물 에드먼드 에셀레드와도 나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그녀의 말은 로스 후작으로도 쉬이 넘기기 어려웠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시그마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왕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엘더평의회도 아니고 '돌아보지 않는 숲'이 직접?"
북방 엘프의 숲의 남하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 두 후작가의 목표이며, 그렇기에 가장 광활하며 숲과 맞닿은 땅을 지녔다.
그러나 로스 후작이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르퀴스 벨트'의 숙명을 벗어던지고 엘프와 손을 잡은 지 어언 십 년.
숲의 내부 구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았다.
가장 위에는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이자 모든 엘프들의 여왕인 글루미엠.
그녀를 따르는 아홉 명의 엘더.
총 열 명이 숲의 의견을 결정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글루미엠은 잘 나서지 않았고 대개는 엘더평의회가 모든 결정을 도맡았다.
그중 한 명이 눈앞의 시그마리였다.
그녀는 엄숙히 말을 이었다.
"예. 지금 에셀레드에 있는 배신자 아르나와 잡종 아벨을 반드시 죽이라 하셨습니다."
"늘 침묵을 지키던 글루미엠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는 턱을 쓸었다.
아르나와 아벨에 대해서는 로스 후작도 잘 알고 있었다.
엘프의 숲 외곽에 살고 있던 둘에게 필립을 보내서 남하시킨 게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데려갈 때랑 지금이랑 엘프 여왕의 태도가 달라진 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떤 이유로 엘프의 여왕이 태도를 바꾼 것인가.
모든 상황을 손아귀에 올려서 계산하는 성미의 로스에겐 답답한 문제였다.
다만 이렇게 당장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붙들고 있는 건 시간 낭비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는 다시금 벽면의 전도로 눈을 돌렸다.
쿡-.
아이리안 최악의 영지이자 최고의 시골, 에셀레드 백작령.
지난 세월 견고했던 아이리안의 귀족들이 그 에셀레드의 에드먼드에 의해 흔들렸고, 이젠 그 아들인 카인에게 휘둘린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혹은 난세인가.
스윽-.
에셀레드에서 출발하여 라마이닝을 거쳐 크로울 백작령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그리며 로스 후작은 입을 열었다.
"크로울엔 '그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
시그마리는 떠올리는 것만 해도 불쾌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탄내가 나는 게 그럴 겁니다."
"미쳐 버린 광신도들과 시골 영지의 미친 후계자가 부딪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여왕님의 명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그마리의 재촉에 로스는 턱짓으로 에셀레드를 가리켰다.
"아벨이야 카인을 따라다니니 두고 봐야 하지만, 아르나는 홀로 성에 있으니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겠군."
명령하지 않았다.
그저 자유를 주었고, 시그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금 귀를 인간의 귀로 바꿨다.
"엘(EL)의 율법이 숲에 깃드나니."
"자네가 직접 할 건가?"
"어차피 여왕님의 저주에 시달리는 하프 따위, 엘븐나이트를 보내면 충분할 겁니다."
* * *
피해가 적었다는 뜻은 복구도 빠르다는 의미다.
최소한의 피로 점령한 라마이닝 백작령은 새로이 백작이 된 브레디올에 의해 빠르게 안정되었다.
게다가 왕녀가 직접 영지전의 승패를 가린 이상, 브레디올은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에셀레드를 향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올해 보내야 했던 식량의 두 배를 보내지."
"좋네."
안경을 쓴 브레디올의 말에 맞은편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디올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엄지로 꾹꾹 눌러 폈다.
"우리로서도 꽤 무리한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알지. 다섯 백작령 중 꼴등이 우리고 여기가 4등인 건 아이리안 사람들이라면 다 알 걸."
"...자주 들은 말이지만, 라마이닝의 백작이 돼서 들으니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이군."
카인은 피식 웃으면서 스스로의 가슴을 가리켰다.
"난 그 꼴등 영지의 후계자니까 쌤쌤이라 칩시다."
"이제 와서 말하긴 좀 늦긴 했는데, 원래 이렇게 뻔뻔한 성격이었나?"
브레디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왕래는 하지 않았지만, 소문은 들었다.
지극히 귀족적이고 고고하다고 알려진 카인.
그러나 브레디올이 마주한 그는 피를 무서워하지 않는 전사며, 노회한 용병과도 같았다.
카인은 쓴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면 바뀌기 마련이니까."
"하긴 나도 그렇긴 하지."
브레디올은 수긍했다.
그러나 서로의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일이 평행선처럼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툭-.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은 보석함을 카인에게 던졌다.
네 개의 다리와 기둥은 순금이었으며, 벽면은 얇게 세공한 대리석이었다. 게다가 위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크로울의 가릭 백작이 예전에 우리에게 준 물건이다. 그걸 가져가면 잘 대해줄 거다."
모래를 쓸어내 추억을 건져 올리듯 카인은 손가락으로 음각된 그들의 문양을 쓸었다.
다른 것보다 이 문양이 너무나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이 문양이 크로울 백작가의 문양인가?"
"당연히."
카인은 눈을 빛냈다.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인연의 상징이 거기 있었다.
#38 EP.Ⅰ-8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3)
「카인이 대장벽의 전사일 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전사들이 그를 우러러보던 그때.
-붐(Bomb)!
콰가가가강!
젊은 전사는 돌멩이를 던지곤 소리쳤다. 그러자 흩뿌려진 돌멩이들은 몬스터들 사이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쾅-! 콰강-!
그러나 역부족.
"대장, 적이 너무 많습니다."
"방패나 똑바로 들고 더 터뜨려!"
콰아앙-!
이성을 잃은 채 인간 세계의 최전선을 향해 몬스터들이 짓쳐든다.
카인은 오래전 에셀레드 해안에 몰아치던 폭풍을 떠올렸다.
그날 집채만큼 일어나던 파도와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지금이 꽤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카인 대장...."
이미 그들과 함께하던 전사들은 모두 죽었다.
시체조차 몬스터들의 발에 짓이겨져서 남지 못했다.
그 피바다 속.
"해가 뜰 때까지만 버티면 원정대가 돌아온다. 그럼 우리가 이겨."
적금발의 젊은 전사 하나와 보랏빛 눈이 빛나는 카인만이 칼을 들었다.
기계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몬스터들의 손톱을 튕겨 내지만, 점차 한계에 치닫는다.
"저쪽에 전략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대장벽의 거점들을 점검하려 카인이 나온 순간을 노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다.
이 정도로 적들이 몰아닥치는 건 대장벽에서도 꽤 드문 일.
철저한 노림수였다.
카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콰득-.
그저 한 번이라도 더 마검 '겨울'을 휘두르며 적을 죽였다. 살기 위해선 말할 호흡이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대장은 아이리안 출신이시죠?"
그러나 젊은 전사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여유가 아니다.
포기했을 뿐이다.
운이 좋아 마지막까지 남았지만, 더는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전사들의 금기를 범했다.
"첫날에 못 배웠나? 전사들의 과거는 묻어 두라고."
카인도 처음부터 알았다.
저 녀석이 자신처럼 아이리안에서 왔다는 걸.
아무리 숨겨도 말투에서 만큼은 고향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향의 전사가 뱉는 마지막 유언을 위해 카인은 조금은 따뜻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젊은 전사는 쓰게 웃었다.
"잘 기억합니다. 내일이면 죽을 건데, 괜히 들어 봤자 잠자리만 사나우니 뒤질 때나 말하라고요."
늘 죽음을 등에 지고 사는 대장벽의 전사들에게 타인의 과거는 짐이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해 이름조차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 되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뚜욱-.
카인은 옆을 흘겼다.
젊은 전사가 서 있는 설원이 붉었다.
돌이킬 수 없는 출혈이었다. 죽음이 삶보다 흔한 곳이 이 설원이라지만, 카인은 그 가치까지 잊지는 않았다.
파지지지지지직-.
한층 더 겨울의 힘을 끌어내며 그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전사 카인의 애도(哀悼)였다.
젊은 전사는 가슴을 꿰뚫은 조악한 뼈창을 꽉 쥐다가 손을 놓았다. 그러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늘 차갑던 아버지가 처음 웃으며 말해 주신 게, 우리의 가슴엔 쇳물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젠 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군요."
카인은 이번엔 고개까지 돌렸다.
짙은 피 냄새를 뚫고 맡아지는 고약한 냄새는 저주의 냄새.
그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죽음을 앞둔 젊은 전사에게서 흘러나왔다.
카인은 직감했다.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그 '쇳물'이라는 게 어떤 식의 저주인지.
"너 설마...."
"그간 감사했습니다, 대장."
"멈춰! 원정대가 돌아올 거야!"
그럴 리 없었다.
해가 뜬다 해도 이곳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 생각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할 터.
카인 혼자만이면 몰라도 그를 지키면서는 그에게도 무리였다. 그리고 젊은 전사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기억해 주십쇼. 루드. 이젠 불러 줄 사람이 없는 제 이름이니까요."
화르르르-.
녀석의 전신에서 불꽃이 치솟았고, 이마에선 어딘가 익숙한 문양이 나타나며 붉게 빛났다.
-파이널 붐(Final Bomb)!!
팟-!
정점을 찍은 순간 대지를 박찼다.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몬스터들의 파도로 몸을 던졌다.
손이 잡아먹히고 머리카락이 뽑혀 나가도 녀석은 어떻게든 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우우우웅-.
하늘을 가르며 유성이 떨어지듯.
쇳물이 있다는 것이 진실인 양.
정말 그의 상처에선 불꽃이 흘러나와 몬스터들을 불태웠다.
임계점을 넘어서듯 저 멀리까지 달려 나간 그는 몸을 돌렸다.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몬스터들에게 몸을 맡기며 카인을 향해 웃었다.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순간.
어둠만이 가득한 밤의 새벽.
콰가가가가가가가가-!
온 지평선을 붉게 태우는 화염이 치솟았고, 하늘의 구름조차 놀라 도망쳤다.
몬스터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웨이브를 삭제시키는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짓쳐 오는 뜨거운 열풍.
카인은 몸을 돌렸다.
정말 파도처럼 몬스터들의 체액이 꿀렁꿀렁 흘러오고, 같은 속도로 어둠이 밀려났다.
하늘의 해는 뜨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만든 해가 떴다.
"루... 드."
그렇게 카인 로드이스트는 또 한 명의 전사를 가슴에 새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