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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 * *

굳세어라.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사방이 눈부실 정도로 밝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자신을 녹일 것 같은 발람의 용암이 뿜어내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꿈?'

워낙 밝은 나머지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흐릿한 속삭임이 들리지 않았다면 깨어나지 못했으리라.

방금 꿈결처럼 스쳐 지나간 것이 뇌리에 선명했다.

'북방 엘프의 숲 최북단에 그런 곳이 정말 있는가.'

친모 클로에가 마녀였다는 건 알았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봄'을 깨운 사람일 줄이야.

영원과 종말.

최근 들어 계속해서 듣는 이야기로 카인은 대강 눈치챘다.

아마도 영원은 마녀 측.

그리고 종말은 자신과 같이 <사계절의 신기>를 지닌 자들.

'그렇다면 악마는 영원의 하수인이라고 했으니 마녀와 같은 편일 거고,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군.'

별 해괴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놈들이지만, 그들이 영원이나 종말 중 어느 쪽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아는 게 너무 적다.

카인은 정신을 가다듬곤 조심히 손을 내밀어 보았다.

치이이익-.

공기도 없는 용암 속에서 자신이 버티고 있는 건, 아주 얇은 흰색 막이 펼쳐져 있기 때문.

그걸 조금이라도 넘어서자 손가락이 녹아 버릴 뻔했다.

"시간문제."

그리고 맞은편 용암이 꿀렁이더니 이목구비를 만든다. 얼굴만 나타난 발람은 카인의 죽음을 선고했다.

"그 종말의 힘도 곧 없어진다. 끝을 보지 못한 어린 종말은 나와 함께 죽는다."

지금 카인을 지키는 건 '밤의 겨울'을 일으킬 때 생겨나는 망토의 힘이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일분일초도 버틸 수 없는 극한환경에서 이렇게 카인을 지키는 것만 봐도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 시간문제지."

하지만 빠르게 힘이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 길어 봤자 십 분.

'내게 남은 미래를 다 쓰면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절망에 압도되기 전, 카인은 냉정하게 현재 상태를 되돌아보았다.

찬란하라.

답은 가능했다.

이곳이 아무리 깊다 해도, 카인의 미래를 전부 쓴다면 모조리 밤의 겨울로 얼려 버리고 지상까지 키리에를 날리며 나가면 된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나간다면 멀쩡할 수 있을 것인가.

당장의 수명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다 소진한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카인은 그 순간 '봄'이 남겼던 한마디가 떠올랐다.

[남겨진 자들에게 네 희생은 상처라는 걸 기억해.]

간절했던 올리시렌의 얼굴.

완벽하라.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이소엘의 행동.

오래전 맹세를 삶의 지표 삼아 살아가는 에셔의 모습.

기괴한 발람의 얼굴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카인의 뇌리를 스친다.

스윽-.

아그웨스카를 잡았던 힘을 조금 풀며 카인은 입을 열었다.

"악마여, 죽을 때 죽더라도 궁금한 게 있다."

"...."

발람은 지그시 카인을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용암의 흐름에도 발람의 표정은 차가워 보였다.

"왜 나를 죽이려 하나?"

"그대가 종말이니까."

"종말이 뭐지?"

"피고 지는 이 세계의 약속된 미래. 정해진 끝의 대리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발람이 표정과 달리 나름대로 말은 해 주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종말이라고 치고, 왜 갑자기 이렇게 나선 거냐?"

"영원께서 걸음 하셨으니, 하수인으로서 나는 그분께 도움이 되어야 한다."

"영원은 누군데?"

"이 세계의 수호자. 정해진 끝을 거부하고 모든 생명의 지속을 이어 가는 위대한 대속자."

까드드드득-.

카인을 감싸는 결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발람의 용암이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상황.

카인은 발람을 보며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모든 마녀가 영원인가?"

올리시렌이 특별한 건지 마녀라면 모두 특별한 건지 묻는 질문에.

"...죽어라."

발람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공격을 거세게 이어 갔다.

완벽하라고! 제발!

그리고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죽어 줄 순 없겠어."

아까 전부터 미약하게 들리던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고, 카인은 그 말의 주인이 올리시렌임을 깨달았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용암이 당장이라도 카인을 뒤덮을 기세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카인이 바라보는 건 이 용암과 대지 너머. 지금 귓가로 울부짖는 회색머리 여인이었다.

살아!

두근-.

아그웨스카가 요동친다.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의 절망으로 벼려낸 칼날이 어린 마녀의 간절한 외침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제발 살아!

카인은 미소 지었다.

기기기기긱-.

에셔나 이소엘에게 마녀의 힘이 덧씌워질 때처럼 톱니바퀴들이 엇갈리는 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끼기기긱-!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펼쳐지듯.

수천수만 개의 톱니들이 부서지면서.

죽지 마, 살아나!

어린 마녀의 간절한 소망이 지저 밑바닥까지 닿았다. 카인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세 단어밖에 못한다면서 다른 것도 잘하네."

카인의 등 뒤로 다시금 흑색망토가 펼쳐진다.

원래 자신의 힘이었던 것처럼 어떻게 써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힘을 받은 에셔가 바로 움직일 수 있던 이유였으니까.

'이거라면 미래를 다 바치지 않아도 가능하다.'

동시에 딱딱하게 굳었던 발람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영원이 종말을...!"

"영원이고 종말이고 난 그딴 거 몰라."

펄럭-.

자라나던 망토는 이소엘의 등 뒤에 나타난 날개처럼 모양이 바뀌어졌다.

동시에 카인의 머리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던 백색 왕관에 흑색의 힘이 깃들며 점차 탁해진다.

"울보 공주님의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해 널 죽여야겠어."

꽈아아악-.

아그웨스카를 강하게 쥐었다.

그 순간 새카만 회색의 불꽃이 칼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용암보다 뜨겁고 무거운 불꽃이었다.

언제나처럼 다시 나타나!

"예스, 유어 하이네스."

간절함이 빚어 낸 기적인가.

인간의 마음이 불러온 이적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카인은 주위에서 몰려드는 흑색의 기운을 쥐었다.

"너는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다!"

발람의 외침.

그 순간 주위가 넓어졌다. 드넓은 공동이 생기고 용암들이 날카로운 창처럼 카인의 전방위를 포위했다.

"종말이여, 죽어라!"

쉐에에에에엣-!

그 수를 헤아린다면 수억이리라. 카인 한 사람을 찔러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용암의 창!

-하늘 높은 곳엔 영광이.

'겨울'의 주인들이 빌던 간절한 기도의 종착점, 카인 에셀레드.

그의 검이 천천히 허공에 회색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글로리아 Gloria.

쩌저저저저저저저적-!

거미줄을 수십 겹으로 겹친다면 보일 궤적처럼 아그웨스카가 엄청난 속도로 회색의 검기를 그려낸다.

이전 얼음다리를 만들었던 것도 결국은 글로리아의 변형.

순백의 겨울과 흑색의 마녀가 합쳐진 회색의 궤적이 닿는 모든 것을 얼려 부서트렸다.

발람이 소리쳤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무한의 존재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용암의 창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카인은 태연하게 웃었다.

"아직 안 끝났다."

[미래가 소모됩니다.]

다시금 겨울의 힘을 일으키고 카인은 유려하게 몸을 한 번 돌리며 아그웨스카를 전방위로 휘둘렀다.

-대지에는 나의 검으로 만든 평화가.

암천일광 暗天一光.

외식 外式.

엑스첼시 Excelsis.

파아아아아아앗-!

수없이 그어졌던 회색의 검기가 한순간에 터져 나갔고 주위의 모든 용암에 틀어박혔다.

마치 그 모습이 촘촘하게 만든 그물같이 보였다.

펄럭.

카인은 검을 위로 들었고 올리시렌의 날개의 힘으로 치솟았다.

"안-돼-!"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발람의 고함을 무시하며 모든 걸 부수며 올라갔고.

화아아아아아아아-.

대기의 포근함이 카인을 맞이했다.

"카인!"

저 멀리 올리시렌과 이소엘이 환호하는 게 보였다.

"나와 같이 지옥으로 가자, 종말이여!"

그러나 그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카인이 뚫고 나온 구멍에서부터 다시금 협곡처럼 대지에 금이 그어지더니 발람의 거대한 팔이 따라 솟았으니까!

그러나 아까와 달랐다.

붉은 용암으로만 이루어졌던 발람의 몸체에 선명한 회색의 선들이 빼곡히 그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영광을 얻을지어다.

카인은 자신을 쥐어짜기 위해 달려드는 발람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고.

주먹을 쥐었다.

삼첩 三疊.

글로리아 엑스첼시 데오

Gloria Excelsis Deo.

꽈아아아아악-!

그 순간 발람이 멈췄고 카인은 입을 열었다.

"잘 가라, 악마."

툭-.

회색의 궤적이 부풀어 오른다.

투투툭-.

치솟았던 손에 박혀 있던 회색의 궤적이 터져 나갔고, 발람의 손은 형편없이 부서졌다.

투투투투투-!

그리고 대지.

저 지평선에서부터 이 지평선까지 용암이 가득한 대지에서부터 회색의 빛이 치솟았다.

[『순환하는 계절 LI』를 성공하였습니다.]

동쪽에서부터 햇빛이 펼쳐오기 시작했다.

#64 EP.Ⅰ-15

계절은 그렇게 죽어 간다 (5)

여명의 첫 햇빛이 비치자 모든 것들이 제대로 된 색을 지니기 시작한다.

그렇게 드러난 카클링턴의 대지.

발람 때문에 지평선에서부터 반대편까지 모든 땅이 쩍쩍 갈라졌고, 그 위론 부서진 발람의 조각들이 새카맣게 굳어 있다.

카인은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모든 걸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유독 발람의 조각이 안 보이는 공간이 보인다. 원주민들과 마을 사람들이 피신한 곳의 입구였다.

그 공터 가운데 에셔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걸 성공했군.'

시골 영지의 평범한 기사에게 너무 가혹한 일을 시킨 게 아닌가 했지만, 저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으로 보이는 건 발람의 마지막 발악에 갈라진 대지의 끝.

"카-인-!"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쏟아 내는 올리시렌이 보였고, 그녀를 보필하는 이소엘이 보였다.

'가야겠어.'

펄럭.

신기 '겨울'은 백의 망토를.

마녀 올리시렌은 흑의 날개를.

물론 카인은 흑이든 백이든 관심 없었고 당장 쓸모 있는 흑색 날개를 펼치며 활강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

순간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회색의 왕관이 다시금 원래의 순백을 찾아간다. 그 아래로 카인의 검은 머리가 흩날렸다.

머리칼 틈 사이로 비치는 찬란한 빛에 반사적으로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돌아보았다.

'이 세상은 참으로 넓다. 내가 모르던 것이 너무도 많아.'

아직 공작조차 없는 작은 섬나라, 아이리안.

여타 다른 대륙인처럼 카인도 아이리안을 쉽게 보고 있었지만 이젠 그런 생각을 버렸다.

너무도 많은 걸 겪었고.

너무도 위험한 걸 보았기에.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햇살처럼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창을 살폈다.

+

『전지전능의 세계개변』

'영원'의 하수인을 물리치며, 당신은 '종말'에 가까워졌습니다. 『사계』의 주인으로서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합니다.

「1. 세계선 고정도」

지금까지와 같습니다. 특별한 힘은 없습니다.

단, 고정할 수 있습니다.

「2. 세계개변력」

현재까지 지닌 세계선 고정도의 퍼센트가 변환됩니다. 퍼센트만큼 알고 싶은 모든 걸 알 수 있으며[全知],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全能].

단, 고정되지 않습니다.

+

평상시와 달리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듯 선택지 두 개가 계속 남아 있었다.

카인은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이건 세계개변력을 고르는 게 맞다.'

세계선 고정도엔 실질적인 능력이 없었으니까.

반면 이걸 세계개변력으로 바꾸면 마치 신과 같이 전지전능을 얻을 수 있다니 당연히 후자를 골라야 한다.

하지만 카인은 당장 선택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용암의 악마, 발람을 해치우는 건 분명 대단한 위업이긴 하다.

하지만 아벨이 마왕을 잡았던 것이나 자신이 대장벽을 수호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일.

[땅에 닿으면 자동으로 「세계개변력」이 선택됩니다.]

게다가 메시지까지 카인이 세계개변력을 고르기를 바라는 상황.

카인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올리시렌의 힘으로 생겨난 흑색 날개가 천천히 자신을 내리고 있다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고 있나?"

카인은 고개를 들고 일출을 향해 물었다.

"아는 게 있으면 말 좀 하지. 이번엔 미래를 많이 쓰지 않았으니, 네 수고도 줄었을 건데."

[뻔뻔하군.]

기다렸다는 듯 '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누가 봐도 세계개변력이 좋아 보일 텐데 왜 안 고르나?]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만 골라서 간다고 그 모든 길이 좋진 않다.

"정답만 고르는 삶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아니까."

때론, 멍청해 보여도 우직하게 직진해야 할 때도 있다.

카인의 과거를 아는 유일한 '봄'.

그렇기에 무슨 존재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겐 조금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 거면 돌아오지도 않았다."

[너답군. 아니 나답다고 해야 하나. 세계개변력을 쥐게 되면 정말 전지전능이 된다. 신이 자리를 비운 세계에 네가 새로운 신이 될 수 있어.]

카인은 반짝이는 2번 선택지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그럼 세계개변력을 고르면 되나?"

[...반면 세계선 고정도는 오직 고정만 가능하지. 하지만 생각하라, 카인 에셀레-]

쿠웅.

'봄'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 카인은 주먹으로 두 선택지 중 하나를 내리쳤다.

['카인 에셀레드'가 「세계선 고정도」를 선택했습니다.]

['겨울'이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봄'이 당신의 선택에 실소를 짓습니다.]

쿵.

카인의 발이 땅에 닿았다.

흑색 날개는 먼지처럼 흩어졌고, 세상의 톱니바퀴들이 바스러지면서 들리던 소음 역시 사라졌다.

[왜 세계선 고정도를 골랐지?]

올리시렌이 전달하던 마녀의 힘이 사라지자 카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버텨 냈다.

"생각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선택지라면 비슷한 가치여야 하는데, 하나만 너무 대단하다는 건 이상하지. 그럼 '고정'한다는 것에 전지전능만큼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후후....]

'봄'은 웃음 뒤로 선택에 대한 평가를 더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웃음만으로도 그의 만족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차피 처음부터 세계선 고정도를 고를 생각이었다."

[왜?]

추궁보다는 카인의 답변을 기대하는 느낌.

"전지전능 따위엔 관심 없거든."

[네가 상대할 수 없을 적이 나타난다면?]

"잘 알 텐데. 내 적은 언제나 상대할 수 없는 적들이었고 난 늘 이겼다."

이전 세계선에서 마주한 적들은 적(敵)이라는 말에 부족함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런 벽을 무수히 부수고 넘어 로드이스트까지 올라선 게 그였기에 그 말엔 무게가 실렸다.

카인은 멀리 보이는 올리시렌을 향해 가볍게 달리며 말을 이었다.

"신이 되고 싶었다면 아벨의 심장을 가르지도 않았어. 내가 바라는 건 속죄니까."

[속죄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라던 것이겠지. 알겠다.]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엔 에셔와 올리시렌, 이소엘이 보인다. '봄' 역시 같은 걸 보고 있기에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삶에서 첫 번째의 속죄만을 이어 간다면 나는 답하지 않았을 터.]

후우웅-.

'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봄바람이 불어왔다. 발람과의 전투에 한계를 넘어선 카인의 몸을 가볍게 해 주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너는 네 스스로의 의지로 걷고 있지. 봄에서 비롯된 자여, 그 길이 여름으로 인도할 것이다.]

['봄'이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7.5%]

[세계의 미래가 2.5%만큼 달라졌습니다.]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메시지창들.

카인은 물고기처럼 그 틈으로 달려 나갔다.

점점 올리시렌과 이소엘과 가까워진다.

후아아아아아-!

그 건너편.

지평선에서부터 요란한 먼지폭풍을 일으키며 중년의 사내가 쏘아져 오고 있었다.

'이소엘과 닮았군.'

점차 가까워질수록 중년인이 잘 보였다. 허름한 로브를 입고 오른손에 나무 스태프를 쥔 게 전형적인 마법사!

아이리안엔 마법사가 귀하다.

수가 워낙 적기도 했고, 그나마 있는 마법사들은 전부 수도 린드브룸의 마탑에만 있기 때문.

'저렇게 고속 이동을 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적어도 6성 이상.'

기사의 수준은 숫자로 딱 나누기 어렵지만, 마법사는 던전처럼 나누기 쉬웠다. 그렇기에 마법사들도 대개 1성부터 9성까지 나뉘었고, 6성부터는 고위급 마법사라고 취급했다.

"이소엘-!"

[달라진 미래에 세계가 당신을 주목합니다.]

그는 이소엘의 이름을 외치다 순간 카인과 눈을 마주쳤다.

"네놈이 우리 이소엘과 왕녀님을!"

그의 얼굴이 아까 마주쳤던 발람과 비슷할 정도로 구겨지더니 스태프의 끝으로 카인을 가리켰다.

당황한 이소엘이 뭐라 하기도 전 마법이 먼저 완성되었다.

윈드 스피어(Wind Spear).

상이 일그러질 정도로 공기가 집속한다. 그리고 형체를 드러내는 연둣빛 바람의 창.

듀얼캐스팅으로 만든 마법답지 않게 빠르고, 정확하고, 거대했다.

"안 됩니다-!"

이소엘은 그를 말렸지만, 이미 윈드 스피어는 카인을 향해 쏘아졌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평소라면 옆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겠지만, 발람과의 전투로 지친 나머지 반응이 늦고 말았다.

파지지지지직-!

근육 한 올, 신경 한 줄기.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일으키며,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쥐었다.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바람의 창을 직시했고.

콰드드드득-.

왼발로 땅을 디뎠다.

이미 갈라졌던 땅은 버석버석하게 짓뭉개지면서 카인의 긴 족적을 받아 냈으며.

'벤다.'

튀어 나가는 카인의 쾌검을 버텨 냈다.

쉐엣-!

먼지구름과 동시에 허공에 흔들림 없는 흑색의 궤적이 그어졌다.

파앗.

그 궤적에 닿은 연둣빛 바람의 창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지며 소멸했다. 카인보다 한 발 먼저 이소엘에게 다가선 중년인이 입을 쩍 벌리며 놀랬다.

"내 마법을 벤다고?"

타닷.

카인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틀렸어.'

혼을 갈아 넣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먼저 공격한 이상 멈출 수 없다. 반쯤 풀려 버린 눈에 또렷한 살기가 맺히면서 카인은 중년인만을 바라보았다.

'놀랄 시간에 마법을 더 쏴야지, 주문쟁이.'

일출도, 발람의 조각들도, 이소엘도 흐려지면서 오직 중년인의 목만이 카인에게 보인다.

그리고 다시금 움직이는 절망의 검 아그웨스카!

중년인은 가공할 살기를 흩뿌리며 달려오는 카인에게 공격 마법을 쓰려 했다.

"안 된다구요!"

하지만 이소엘의 만류에 그는 급하게 술식을 바꿨다.

윈드 실드(Wind Shield).

중년인의 마법에 마나가 배열하면서 바람의 실드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연둣빛의 반투명한 막이 카인과 다른 셋의 사이에 세워졌다.

기기기기기기긱-!

흑색의 아그웨스카는 윈드 실드에 막혔다. 하지만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두 다리를 대지에 박아 넣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힘까지 불태우면서 칼을 뻗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기적.

"에드먼드도 아니고 정말 마법을 베!?"

단단했던 윈드 실드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찢겼다.

'목.'

좌에서 우로 베어 낸 카인은 다시 반대로 칼을 휘두르려 했다. 정체를 알 수 없고, 먼저 공격한 대상은 죽이고 보는 게 대장벽의 규칙이었으니까!

쉐에에-.

"카인, 이제 괜찮아."

피를 탐하는 검은 궤적이 멈춘다.

카인의 칼끝이 멈춘 곳엔 피투성이가 된 올리시렌이 서 있었다.

"아버님, 적이 아닙니다!"

그 뒤로 이소엘이 중년인의 허리를 붙잡으며 그의 캐스팅을 막고 있었다.

"...."

뼛속에 새겨질 정도로, 본능이 될 정도로 깊게 박힌 살기가 멈춘다. 하지만 검을 쥔 카인의 손은 풀리지 않는다.

중년인이 조금만 허튼 모습을 보이면 베겠다는 의지.

둘을 지키겠다는 집념.

피는 제 손에만 묻히겠다는 결의.

"쉬어도 돼, 카인 에셀레드."

올리시렌의 간곡한 말에 카인의 팔이 천천히 내려간다. 흐려진 눈에 어렴풋이 올리시렌의 모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나."

"응."

"적은."

"이젠 없어."

"알... 겠다."

쿵.

카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전투의 끝이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65 EP.Ⅰ-16

봄을 위한 여정 (1)

「"여자 마법사는 다 마녀냐고? 그딴 멍청한 질문을 나한테 하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마술사왕은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맞은편의 '그'가 순진하게 웃으며 용기라는 말을 좋아하는 걸 보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신기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걸 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근데 왜 현자한테 안 묻고 나한테 묻나?"

마술사왕, 현자, 성녀, 용사.

그리고 몇 명.

용사 파티에서 '그'는 주로 현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었다.

....

'그'가 대답하자 마술사왕은 어디선가 꺼낸 금화를 손가락 틈으로 굴리며 중얼거렸다.

"순리와 역리로 말을 하면 이 바보가 알아먹을 리가 없는데, 놈이 너무 고지식하게 설명했군. 좋아, 내가 간단하게 말해 주지."

파앗-.

'그'와 마주 앉은 탁자 위로 마술처럼 동화, 은화, 금화 3개가 나타났다.

그리고 마술사왕은 금화를 검지로 끌어당겼다.

"금은 마녀다. 이 세상이 허락한 능력을 기원으로 본인이 바라는 기적을 발휘해."

....

"알아,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먹는 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초능력자에 가깝다. 마법처럼 공부할 필요도 없고, 마나를 쓰는 것도 아니니까."

...!

마술사왕은 어느새 금화를 사라지게 한 후 은화를 같은 자리로 끌어당겼다.

"은은 마법사다.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능력을 마나라는 매질과 의지라는 연료로 부리는 자들이지. 그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시키면서 점차 강해진다."

...?

"그러니 여자 마법사라고 마녀는 아니라고. 뭐, 이제 마녀는 멸종했지만 말이다."

....

"마녀가 다시 나타날 순 없냐고?"

마술사왕은 '그'의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그로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진리가 '그'에겐 호기심의 대상이라는 게 신기했다.

오래된 기록으로만 접했지만, 마술사왕은 최선을 다해 생각을 정리한 후 답했다.

"가능할 거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닥치면 첫 번째 마녀가 다시 등장할 수도 있겠지."

...!

"그럼 마왕이 종말이냐고? 내 생각엔 아니다. 고작 마왕 따위를 종말로 취급하기엔 마녀가 부리는 힘이 너무나 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사에 기록된 마녀들은 기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위업을 남겼다.

마술사왕의 말대로 마왕은 '따위'에 불과할 정도로.

스윽-.

마술사왕은 마지막 동화를 끌어당겼다.

"덤으로 동은 성직자들이다. 지금의 성녀를 마지막으로 신의 의지가 더는 이 땅에 닿지 않을 테니 말이야."

....

"성녀가 나름 뭔가를 해 본다곤 하지만, 만들어진 신앙이 신앙일지는 잘 모르겠군. 어쨌든 마녀와 마법사의 차이는 이해했지?"

'그'는 활짝 웃으며 끄덕였다.

마술사왕은 그 모습에 풋 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손가락마다 금화를 꺼냈다가 숨기는 걸 보여 줬다.

평화로운 한때.

그리고 누구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할 때였다.」

* * *

"형님! 제가 보이십니까?"

부드러운 어조에 담긴 조급함.

카인은 바위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가 또렷해지며 갈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아벨이 보였다.

"잘 보인다."

"다행입니다. 정말...!"

아벨이 카인의 건너편을 날카롭게 흘긴다. 카인을 걱정하는 만큼 누군가를 원망하는 선연한 눈빛이었다.

아벨은 다시 카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겠습니까?"

카인은 눈동자를 굴렸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정갈한 하얀 방.

지푸라기를 말려서 대충 묶어 둔 여관의 침대가 아니라 정말 귀족이나 가질 수 있는 최고급 침대의 느낌.

"크로울 백작성이겠고 시간은-."

카인은 손을 들어 올려 손톱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했다.

"길어 봤자 사흘인가."

너무 익숙하게 시간의 흐름을 체크하는 그 모습에 아벨은 조금 놀랐다.

"...이런 적이 많으셨습니까?"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생에는 거의 없었지만 대장벽에서 싸우던 때에는 이렇게 기절했다가 깨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어쩌다 보니까."

아벨은 다시금 반대편을 날카롭게 흘겨보곤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이틀째가 막 끝나 갈 때입니다. 갈 땐 멀쩡했던 형님이 이런 꼴로 오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모르지."

카인의 즉각적인 단언에 아벨의 이목구비가 가운데로 쏠리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이 뒤섞이는 느낌.

그 모습에 카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하지만, 네가 내 빈자리를 잘 채웠을 건 알아. 이거면 되는 거 아닌가."

"...네!"

아벨의 표정이 급변했다.

카인에게 늘 도움만 받던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벨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순간 붉어진 채로 크게 대답했다.

"근데 말이야."

휘익-.

카인은 반대로 누웠다.

그러자 아벨이 흘겨보던 상대들이 보였다.

짙은 초록색 3인용 소파에 두 중년인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

그중 한 명인 가릭 백작이 빼빼 마른 손을 들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상태였지만, 이젠 나름 회복된 모습이었다. 트롤의 치유력을 지닌 혈통다웠다.

"오랜만은 아니지만, 느낌으론 오랜만일세."

"그러게 말입니다만."

그 반대편.

이소엘과 어딘가 닮은 얼굴의 중년인이 팔걸이에 기댄 채 겸연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고 있었다.

"이 사람 덕분에 족히 하루는 더 누워 있었는데, 왜 여기 있습니까."

발람과의 전투에서 카인은 지닌 모든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런데 뒤늦게 나타난 저 마법사 때문에 마른오징어를 쥐어짜 물방울을 내듯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까지 뻗어 버린 건 사실상 저 사람의 탓이 컸다.

카인의 가시 어린 말에 중년인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미안하네, 나는 디그리드 웨어햄. 이 친구처럼 백작이야. 마탑주기도 하고."

가릭 백작은 뒤이어 말했다.

"디그리드 저놈이 어릴 적부터 그러긴 했지만, 제 딸만 연관되면 정신을 못 차려서 자네에게 실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어."

카인이 에셀레드의 로드(Lord)라는 걸 고려한다면, 현재 이 방엔 아이리안에서 다섯밖에 없는 백작 중 셋이 모여 있는 형국.

'성질을 내는 건 늦어도 되지만 이 상황은 지금뿐이지.'

카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가릭 그로울 백작과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을 한 눈으로 봤다.

마법사의 분류는 그 머릿수만큼 많다고 하지만, 카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눴다.

첫 번짼 학구파.

방에 틀어박혀서 철저하게 마법이라는 학문을 궁구하는 자들.

두 번짼 실전파.

연구된 마법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당장이라도 같이 싸울 수 있는 자들.

'전형적인 실전파 마법사다.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으니까.'

마법사들과 같이 싸운 적이 많은 카인으로선 쓰러지기 전 디그리드 백작이 보인 마법만 봐도 대강의 견적이 나왔다.

이런 마법사가 아이리안의 마탑주였다는 건 회귀를 한 카인으로서도 처음 아는 사실.

'맥로든 후작 아래의 평범한 백작은 아니겠어.'

아이리안 왕국은 칼과 피에서 태어난 나라인 만큼, 귀족제 역시 전쟁을 고려한 부분이 남아 있다.

특히 후작과 백작의 관계가 그러하다.

늘 북방 엘프의 숲과의 전쟁을 고려하는 국가답게 유사시를 대비하려는 성향이 묻어 있기 때문.

두 후작의 영지는 북방 엘프의 숲과 마주한 국경지대고, 문제가 벌어진다면 백작들은 즉시 후작의 명령에 따라서 전투를 진행해야 했다.

동쪽 전선의 로스 후작은 에셀레드, 라마이닝, 크로울을.

서쪽 전선의 맥로든 후작은 웨어햄과 브래들리에 전쟁 시 명령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리안 건국 이래 엘프 전쟁은 없었지.'

북방의 숲을 차지하려는 인간들의 북방원정이 번번이 실패했다고 알려졌지만, 엘프의 힘을 깎아내린다는 정치적 관점에선 늘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국경이 고착되다 보니, 건국 당시 전쟁을 대비했던 귀족제는 어느새 평범한 귀족제로 변질되었다.

카인은 검지로 눈썹 끝을 긁으며 물었다.

"가릭 백작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처음 뵙지만, 백작이라고 넘어가 드립니다."

"휴우-."

"하지만 백작쯤 되는 인간이 갑자기 혼자서 카클링턴에 나타났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군요."

가릭과 디그리드는 이미 말을 나눈 모양이었다.

둘이 고개를 돌려 누가 먼저 말할지 눈빛으로 정리하더니 가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카클링턴에 이놈이 나타난 건 왕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일직선을 그으면 거길 지나치기 때문이네."

디그리드 백작은 바람 마법에 특화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왕도에서 크로울까지 날아오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카인은 디그리드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발람을 봤겠군요."

그 정도 크기면 못 보는 게 이상한 일. 카인은 대놓고 물었다.

"역시 그건 악마 발람이 맞았어!"

디그리드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악마를 학문으로까지 연구하는 게 마법사니 어느 정도 아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용암의 악마, 발람! 어떻게 그런 고위급 악마가 아이리안 땅에 있던 거지? 자네는 어떻게 발람을 깨운 건가?"

그러곤 눈을 반짝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뒤편으로 가릭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카인은 손바닥을 펼쳐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저희가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말할 관계는 아닌 거 같습니다."

디그리드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에드먼드의 아들이면 내겐 조카인데."

"그 조카를 보자마자 죽이려던 분이니까요."

"...."

디그리드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눈이 돌아갔다고 한들 자신이 행동은 무례 중에서도 무례.

카인이 강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조카를 보자마자 죽이는 상황이었다.

카인은 그의 시무룩한 모습을 보며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애 같은 사람이군.'

마법사 중엔 저런 사람이 꽤 있었기에 익숙했다.

어릴 때부터 아카데미나 마탑에서만 활동해서만 그런지 대부분 나이에 비해서 아이 같은 면모가 있다.

"그리고 발람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

카인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답지 않게, 서늘한 기운이 방 안을 감돈다.

카인과 한 번 싸워 본 가릭 백작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카인은 그런 가릭을 가리켰다.

"가릭 백작님의 친구라 들었습니다."

"맞네."

"하지만 가릭 백작님이 몇 년 동안 아리안에게 조종당하던 사실을 몰랐던 걸 생각해 보면, 그사이에 교류는 없으셨고요."

"...부끄럽지만 그것도 맞네."

어릴 적엔 친구일 수 있다.

하지만 몸이 다 크고 각자의 위치가 백작쯤 되면 교류하기 어려워지는 법.

카인이 알기로 백작들이 직접 면대면을 하는 건 정례모임을 제외하곤 극히 드물다.

"평상시에 교류하지도 않던 분이 왕도에서부터 직선으로 날아오신 이유를 가장 먼저 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와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저와 관련이 없다면 지금 이렇게 급하게 오시지 않았겠죠."

디그리드 백작은 멀뚱멀뚱 카인을 내려다보다가 시원하게 웃었다.

제법 마음에 든다는 미소였다.

"생긴 건 에드먼드인데 속내는 하이볼트의 어릴 적과 똑같군. 이러면 더더욱 좋지. 가릭 네 말대로 난 놈이야."

"그렇다니까."

가릭 백작은 뒤에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디그리드는 화답하듯 엄지를 치켜들곤 카인을 향해 말했다.

"자네 혹시 공작(Duke)해 볼 생각 없나?"

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가리켰고, 디그리드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66 EP.Ⅰ-16

봄을 위한 여정 (2)

「제1조.

아이리안 왕국은 엘프와의 전쟁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다.

제2조.

왕국의 통치자는 아이리안 왕가로 한정한다. 단, 북방원정을 소홀히 하거나 엘프와의 전쟁을 대비하지 않으면 바꿀 수 있다.

제3조.

왕국의 정치제도는 기존의 세력균형과 향후 벌어질 엘프 전쟁을 고려하여 공작은 공석으로 두며, 두 명의 후작과 네 명의 백작으로 구성한다.

제4조.

아이리안의 공작령은 북방 엘프의 숲으로 한정한다. 따라서, 공작의 공석은 북방 엘프의 숲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차지한다.

....

제44조.

백작 이상의 작위를 추가할 경우는 전쟁 중 명령체계를 위해 단승으로 한정한다. 단, 아이리안 왕가와 모든 후작과 백작이 찬성한다면 새로운 계승 귀족을 인정한다.

....

-아이리안 대헌장 초고 중.」

"갑작스러운 말이군요."

카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아이리안을 되새겨 보았다.

대륙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서쪽 변방이긴 해도, 공작이 나타났다면 자신이 한 번은 들었으리라.

'없었다.'

그 소리는 엘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

'그럼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데.'

이전 세계선과 지금의 세계는 정확히 17.5%만큼 달라졌고 그 영향이 지금 눈앞에서 흥분해서 입을 여는 디그리드에게도 미쳤을 것이다.

"그럼, 그럼. 로스 후작이 하이볼트 전하께 보고를 올리는 걸 듣자마자 내가 바로 출발했으니까!"

"...."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올리시렌과 달리, 디그리드는 자신의 기분대로 말을 한다.

그 덕에 대화할수록 카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무시하기엔 내용이 내용인지라 꾹 참고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로스 후작의 보고와 공작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디그리드는 제 이마를 치고는 다시 말했다.

"아, 이런. 미안하네. 내가 너무 앞뒤 없이 말했군. 후작이 지금까지 있었던 원정이 아니라 엘프전쟁을 주장했어. 즉, 북벌이지."

엘프전쟁이 터져서 숲을 차지한다면 그곳을 공작령으로 삼아 아이리안 최초의 공작이 될 것이다.

왕국법부터 북벌을 부르짖는 나라니 이번 전쟁 최고의 영웅이 공작으로 추대될 것이고.

'내게 전쟁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러나 카인이 듣기엔 여전히 중간을 너무 건너버린 이야기.

"...그게 말이 됩니까."

"왜?"

"지금까지 북방원정에 그쳤던 건 인간의 힘과 엘프의 힘이 비등해서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라니요."

디그리드는 품속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서 카인에게 보여주었다.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르나, 눈에 익지 않은 것이 평소 본 적 없던 종류였다.

"그 로스가 엘프들의 엘더 중 하나를 회유했다고 하더라고! 원정군이 한 번도 침입하지 못했던 대수림의 결계에 대한 술식을 우리 마탑에 제출했고 이건 복사본!"

뒤에서 듣고 있던 가릭 백작은 디그리드가 흔드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거 진짠가?"

"아직 마탑에서 애들이 연구 중이긴 한데, 내 직감상 이건 진짜 결계의 술식이 맞아!"

수많은 연구를 통해 다져진 대마법사의 직감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아이리안 최고의 마법사인 디그리드가 그렇다니 가릭이나 카인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만 없을 뿐이지, 정치력 하나만큼은 제일인 헤터워드답군. 건국 이후 최초로 엘더를 회유해 냈어!"

가릭 백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감동했고, 디그리드 백작은 몸을 돌려 가릭 백작에게 다가간 후 신나서 결계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님."

아벨이 그때 낮은 목소리로 카인에게 속삭였다.

"제가 아는 한 아홉 엘더 중 그 누구도 죽으면 죽었지, 인간 쪽에 붙을 리 없습니다."

북방 엘프의 숲 외곽에서 나고 자란 만큼 아벨은 숲의 사정을 잘 알았다.

"그래, 맞아. 아마 반대일 거다."

아벨은 카인의 대답에 눈을 끔뻑였다.

"...?"

카인은 라마이닝 백작가에 파견되었던 로스 후작가의 기사단 <로스 데 캐롯>이 보이던 불길한 초록빛 오러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렇기에.

"로스 후작이 엘프 쪽에 붙은 거야."

"...!"

"자세한 건 올리시렌하고 이야기해 봐야겠지만 말이야."

아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바로 섰다.

똑똑-.

카인은 침대의 프레임을 노크하며 북벌에 흥분한 두 중년인의 시선을 끌었다.

"다 맞다고 치죠."

"거 속고만 살았나, 의심이 엄청 많네!"

디그리드는 자신이 죽일 뻔한 건 잊은 건지, 제 주장을 시큰둥하게 받는 카인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속고만 살았습니다."

카인은 낮은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아...."

디그리드의 흥분이 식고, 어깨가 처진다.

그가 에셀레드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긴 힘들었으니까.

다만 이제 기억난 모양이었다.

카인은 그들의 흥분을 단숨에 얼려 버릴 차가운 말을 꺼냈다.

"우선, 제가 공작이 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시명령권이 두 후작이나 그들의 대리인에게 있는데 제게 무슨 권한을 주겠습니까?"

북벌의 흥분이 가렸던 냉정한 현실을 카인이 일깨운다.

"맥로든이나 로스나 그럴 사람들이긴 하다."

가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백작이 되기 전부터 후작이었던 두 괴물을 아는 만큼 그들의 행동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2왕녀 올리비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서 왕위계승권이나 단단히 할 겁니다."

"웨어햄까지 해서 백작가 넷이 지지하는 것도 불가능하겠군. 전시엔 후작의 지시에 백작들은 따라야 하지. 헤터워드 이 인간이 수를 제대로 썼어."

카인의 불꽃같은 활약으로 다섯 백작가 중 사실상 셋이 넘어갔고, 디그리드로 인해 웨어햄 백작가도 사실상 카인의 편.

칠대귀족가 중 넷과 현 왕이 1왕녀 올리시렌을 지지한다면, 두 후작이 아무리 2왕녀 올리비아를 밀어 봤자 판을 뒤집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다르다.

모든 법과 규칙 위에 존재하는 아이리안의 전쟁법에 따르면 백작들은 무조건 후작을 따라야 하는 상황.

게다가 2왕녀 올리비아에게 북벌의 공을 밀어 준다면 흔들리던 왕위계승이 공고해질 것이다.

"제가 흔든 판을 짓누르기 위해 전쟁 카드를 꺼낸 겁니다."

카인은 다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현실을 꼬집었다.

'로스가 엘프와 손을 잡았다는 건 올리시렌하고 상의해 보고 판단해야겠어.'

올리시렌은 왕실정보국을 움직일 수 있고, 자신보다 아이리안의 정치와 역사에 대해 잘 알 테니까.

"소름 돋는군."

가릭은 닭살이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연신 쓸었다.

전쟁조차 제 잇속을 위해 꺼내는 로스 후작이나, 그걸 몇 마디 말로 유추하는 카인이나 둘 다 자신과는 궤가 다른 존재 같았기 때문이다.

"아, 걱정 없어."

그때 디그리드는 봄날에 산책을 나온 한량처럼 입을 열었다. 가릭 옆 소파에 털썩 앉고는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너한테도 깜빡하고 말 안 했던 건데, 괜찮아?"

가릭 백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투인가. 다른 아이들도 있는데."

디그리드 때문에 한두 번 쉬어 본 한숨 아닌 듯 묘한 노련함이 엿보인다. 디그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팔을 벌렸다.

"무슨 상관인가. 난 우리 애들한테도 이래."

"저 친구들은 에드먼드의 애들이잖나. 가뜩이나 에드먼드가 던전에 들어간 것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왔다던데?"

"...?"

휘익-.

디그리드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좌우로 굴리면서 말을 이었다.

"로스 후작이 그러는데 에셀레드 해안가에서 에드먼드의 '황혼의 오러'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 게 관측되었다고 하더라고."

카인의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 아이리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태반은 에드먼드만 제자리에 있었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현재의 국왕 하이볼트에게 우직하게 충성을 보이는 에드먼드가 그의 뜻에 따라 올리시렌을 지지했다면 두 후작이 뭘 해도 뒤집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후작은 에드먼드를 정치적으로 처리했다.'

이전 세계선에서 두 후작이 판 함정은 훌륭했고, 에드먼드를 결국 던전에서 사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이볼트가 손쓸 수 없게 올리시렌을 마녀라 해서 죽이고 둘째, 정열의 홍화 올리비아를 국왕에 올렸다.

'그런데 에드먼드가 나타났다?'

카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오러를 쓴다고 모두가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카인의 스승이었던 조니 워커가 말한 진정한 '소드마스터'는 자신만의 '검'을 품은 자.

조니 워커는 구름을 베는 검을 지녔고, 에드먼드는 해를 찔러 떨어뜨리는 검을 품은 진짜였다.

'세계의 미래가 17.5퍼센트만큼 바뀐 게 고작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일 리가 없었군.'

미간을 꾹꾹 눌려 펴며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전 세계선의 정보로 세상을 바꾸는 만큼 더 점차 쓸모가 없어짐을 깨달았다.

"그럼 에드먼드는 어디 있는데?"

가릭이 디그리드에게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걸 알아야지!"

"아니, 로스 후작도 모른다는데 마탑에 있던 내가 어떻게 알아!"

가릭 백작은 카인과 아벨을 돌아보았다.

"혹시 본성에서 온 연락이 있나?"

카클링턴에 갔다 온 카인은 자연스레 아벨을 돌아보았다. 아벨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전 보고는 일상적인 연락이었고 이번 보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가릭 백작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 쉬었다.

"던전에서 일 년 가까이 처박혀 있던 인간이 집은 안 가고 그럼 어딜 간 거야."

마탑주 디그리드 백작도 문제였지만, 에드먼드 에셀레드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가릭의 어조에 스며 있었다.

"일단 에드먼드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있을 거 같은 곳은 알아."

가릭 백작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이 새ㄲ...."

하지만 카인과 아벨이 눈에 보이자, 분노를 삭이고 조금 순화된 말로 물었다.

"그걸 먼저 말하지, 그랬나. 로스 후작도 모르는데 그럼 자네는 어떻게 알지?"

"저번 원정 때 에드먼드가 나한테 마법 좀 하냐고 묻더라고."

"왕국의 마탑주에게 마법 좀 하냐니. 참으로... 에드먼드다운 물음이라서 신뢰가 가는군."

가릭 백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디그리드가 워낙 문제가 많은 인간이라서 그렇지, 사실 까 보면 에드먼드도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인간만이 고위 마법사나 소드마스터가 되냐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좀 한다고 했지."

"역시 너다운 대답이고."

"그러니까 날 들고 숲을 뛰어서 얼음 파도가 밀려오는 최북단으로 데리고 가더라."

카인은 눈을 크게 떴다.

발람에게 잡혀갔을 때 꿈결처럼 클로에와 에드먼드가 그곳에서 나누던 대화를 봤었다.

아마... 디그리드를 데리고 간 곳은 그곳이리라.

북방 엘프의 숲 최북단, '봄이 눈을 감는 곳'.

"뭔지 모를 낡은 신전 하나랑 무덤이 있더라고."

"누구 무덤?"

"모른다니까. 묘비에도 이름이 없어서 에드먼드한테 물어보니까 누군가가 자기 무덤을 먼저 만들었다고 하더라."

#67 EP.Ⅰ-16

봄을 위한 여정 (3)

백악절벽 위에 아르나의 무덤만 있을 뿐, 에셀레드의 땅에 클로에의 무덤은 없다.

어째서 본처인 클로에의 무덤을 찾을 수 없는지 혹자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그녀의 본가인 라마이닝 백작가의 가족묘에 있을 거란 말도 있었고, 과거의 카인도 비슷하게 추정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럴 리 없지. 마녀라고 내쫓듯 시집보냈었는데 죽었다고 데려올 리 없지.'

그렇다면 어디 있는 것인가.

죽었다는 것도 병상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클로에가 갑자기 사라지고, 에드먼드가 죽었다고 발표한 것뿐이라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설도 돌았었다.

당시 어렸던 카인은 어머니의 죽음이 사실이냐고, 그렇다면 무덤은 어디냐고 몇 번이고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듣지 못했던 진실을 알아차렸다.

'디그리드가 본 건 아마 어머니의 묘.'

에셀레드의 땅도, 라마이닝의 묘에도 묻히지 못한 마녀 클로에는 '봄이 눈을 감는 곳' 옆에서 죽어 묻혔으리라.

그것도 제 무덤을 미리 만들어서.

디그리드는 카인의 심정이 어떻게 요동치는지 전혀 모른 채 당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마법으로 뭔가 이상한 게 있는지 찾아보라더라."

"있었나?"

디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뭔가 묘한 느낌은 계속 드는데 적어도 내가 아는 마법으론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더라고."

"그래서?"

"자신한테 소중한 장소가 될 곳인데 다행이라고 하더라."

"...그 에드먼드에게 소중한 장소라는 게 생길 줄이야."

가릭 백작은 턱을 쓸며 고민했다.

원래의 카인이었다면 가릭과 똑같이 이해하기 어려워했겠지만, 그 무명의 묘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는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번의 삶으론 알 수 없던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느끼면서.

"아무튼 거기 에드먼드 백작이 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카인의 물음.

디그리드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 인간이 갈 곳이 거기밖에 생각 안 나거든."

"그렇군요."

"이제 그러니까 거기 가서 에드먼드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로스 후작이 일으킬 엘프 전쟁에서 성과를 세워서 공작이 되면 되는 거다!"

디그리드의 열렬한 주장에 가릭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아무리 전시작전권이 두 후작에게 있다고 해도 그 에드먼드가 아니라고 말하면 아닌 거긴 하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그리고 진짜 소드마스터 에드먼드라는 이름의 주먹은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할 왕국 최강이었다.

* * *

"몸은?"

카인은 두 백작과의 말을 하다 얼추 회복되자 올리시렌을 방문했다.

그녀 역시 마녀의 힘을 너무 휘두른 건지, 반송장처럼 다른 방에 누워 있었다.

"너는?"

둘은 서로의 상태를 묻다가 피식 웃었다.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창백한 얼굴과 푸른 입술을 보니 물음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다. 올리시렌은 손을 쫙 펴들며 천장을 향했다.

"왕궁에서 지낼 땐 마녀에 악마까지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너랑 같이 다니니까 별 해괴한 일을 다 겪네."

매번 보던 천장이지만, 왕궁의 천장과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올리시렌과 수많은 일이 쌓인 지금의 올리시렌도 다른 것처럼.

그 간극에 카인의 역할이 크다는 걸 느끼며 그녀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드륵-.

그때 과일을 깎던 이소엘이 눈치 좋게, 침상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카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앉았다.

"뭘 그렇게 웃나. 싫어?"

"아니."

올리시렌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새장 속의 새처럼, 색이 없는 회색의 안개꽃으로 불리던 그녀에게 세상은 너무도 반짝였으니까.

숨 쉬는 것조차 벅찬 하루하루가 그녀의 안에 쌓이며 어제와 내일의 올리시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소엘, 카인에게 찬물도 한 잔 줘."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이소엘은 마법으로 차갑게 만든 물을 카인에게 건넸다.

카인은 그 물잔을 받으면서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그리드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온 거잖아. 그럼 속에서 열불이 날 텐데 마셔야지."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이 말주변이 없다는 건 올리시렌도 잘 알았다.

오죽하면 하이볼트도 그와 독대를 피하고 같은 왕국 말이지만 해석해 줄 사람을 동석시킬까.

그 사실을 더 잘 아는 이소엘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아버님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사람은 좋은 분입니다."

"...정말 부녀관계가 맞군."

카인은 찬물을 들이켰다.

극과 극으로 다른 분위기에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의 딸이라고 이소엘 자신이 말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가 뭐래?"

올리시렌에겐 미리 말하지 않은 모양.

카인은 폭풍 같았던 디그리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정리했다.

카인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열심히 더 싸우래."

목석같이 늘 제자리를 지키던 이소엘답지 않게, 그녀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눌렀다. 다시 찬물을 한 잔 따르곤 그대로 들이켰다.

"죽일 뻔한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사람도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인은 그런 이소엘의 말에 미소 지었다.

자세한 사정은 아직 모르지만, 웨어햄 백작가의 영애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기사로 살 정도로 디그리드와 그녀는 다르다 싶었다.

'아닌 척해도 이소엘도 상당히 단단한 사람이고.'

중갑으로 무장한 후, 중력망치 크레드네를 휘두르는 모습도 엄청나긴 하다.

하지만 카인이 그것보다 이소엘을 더 높게 평가하는 건 그녀의 태도.

'올리시렌이 마녀인 걸 들킨다면 자신이 마녀라고 뒤집어쓴다고 했었지.'

성국이 마녀를 어떻게 다루는지 뻔히 아는데도 그녀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나섰다.

말뿐이 아니다.

아르후안과 싸울 때도, 아이언하트 열차에서 뒤를 맡길 때도, 발람과의 전투에서도 이소엘은 행동으로 증명했다.

그렇기에 이소엘에게 농담이라며 손짓했다.

'뭐, 별 상관없기도 하고.'

어차피 이소엘이든 이소엘 웨어햄 영애든 카인에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니까.

같이 칼 들고 싸운 전우냐 아니냐만 중요하기에, 이소엘은 이미 전우였다.

"말주변은 없으시지만 놓칠 수 없는 말들은 많이 해 주시더군."

디그리드와 가릭 백작에게 들은 걸 올리시렌에게 말했다.

칼을 들고 싸우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지만, 이런 왕국 내 정치싸움은 올리시렌이 더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흐음, 공작에 엘프전쟁에 에드먼드 백작님도 생환한 걸로 추정된다라."

원래의 회색빛 머리카락을 되찾은 올리시렌은 침음성을 내며 고민했다.

지금까지의 판은 완전히 엎어 버리는 계책들에 그녀도 당장은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러다 카인을 돌아보았다.

"너는 로스 후작이 엘프 쪽에 붙었다고 의심하는 거고?"

"그래."

"확률은?"

어떤 변수는 존재만으로 판을 뒤흔든다.

그리고 로스 후작의 배신은 그 무엇보다 큰 변수이기에 올리시렌으로서는 꼭 확인해야 했다.

카인은 당시 초록빛 오러를 똑같이 흘리던 <로스 데 캐롯>을 다시금 떠올리며 말했다.

"100%다."

이소엘은 작게 왼손을 들었다.

카인과 올리시렌이 자신을 돌아보자, 질문을 던졌다.

"배신했다는 엘더가 숲의 비전을 기사들에게 전달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라마이닝에서 만난 초록빛을 흘리던 네 명의 기사들이 엘더의 힘으로 달라진 게 아니냐는 질문.

카인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엘프 하면 뭐가 떠오르나."

"고기 안 먹고, 이쁘게 생겼다는 거?"

올리시렌의 대답은 엘프에 대한 평범한 이들의 인식이었다. 카인은 이어 이소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숲이 떠오릅니다. 방랑하는 엘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숲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래. 엘프는 숲에 살면서 고기를 안 먹고 미형의 모습이지. 하지만 내가 아는 엘프의 가장 큰 특성은 똑같이 미친놈들이라는 거야."

"...?"

둘은 카인의 말이 한 번에 이해되지는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분명 엘프와 인간은 다른데도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데 있다."

"그렇게 많이 다릅니까?"

"흔한 문제지만 내 보지. 달리는 열차의 앞에 다섯 명이 묶여 있는 철로가 있고 네가 선택하면 한 명이 묶인 철로로 열차를 보낼 수 있지. 어떻게 할 거야?"

열차라는 게 생길 때 같이 대두되었던 유명한 논리 문제.

왕궁에서 배울 만큼 배운 올리시렌이나, 린드브룸 아카데미를 수학한 이소엘로선 익숙했다.

"작위와 부작위에 관한 거라면 이미 많은 논의가 있고, 선택에 관한 다양한 학설이 있는데 이걸 다 말해?"

카인은 씨익 웃었다.

검지를 들어 올리시렌을 가리켰다.

"그게 엘프와 인간의 차이야."

"...?"

"엘프는 하나지만, 인간은 여러 의견이 나올 정도로 하나가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장벽엔 온갖 것들이 흘러들어온다. 특히 대륙에서 발붙일 곳이 없는 자들이 대다수다.

그렇다면 인간만 있을 것인가.

'인류로 통칭되는 모든 종류가 다 온다.'

엘프, 드워프, 그 외의 유사 인류들.

적과 싸워서 등을 맡길 수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대장벽이기에, 숲을 떠난 방랑엘프들이 많이 모인다.

철저한 침묵의 맹세로 평상시엔 엘프에 대해선 말하지 않지만, 수없이 싸워 온 전장에서 같이 싸운 전우에겐 한두 마디쯤은 흘리게 된다.

카인은 올리시렌과 이소엘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그들이 말해 준 진짜 '엘프'에 대해 말했다.

"엘프가 숲에 사는 이유는 각자의 세계수가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그들이 단순히 큰 나무니까 떠받든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럼?"

"엘프들의 본체가 세계수거든."

"...?"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엘프에 대한 이야기.

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에게 개인은 없어. 그저 세계수를 중심으로 모두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지니지. 따라서 아까 물어본 열차의 문제에서 그들은 당연히 아무 고민 없이 하나를 죽인다."

"모두의 생각이 우선이기에 하나는 관심 없다?"

"맞아."

"그럼 방랑엘프들은 뭐야?"

"본체에서 뛰쳐나온 자들. 세계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군락에서 뛰쳐나온 엘프계의 이단이지."

이소엘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카인이 바라보자 물었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산다기엔 각자 사람처럼 다르게 말하고 움직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 일이 있을 때와 슬픈 일이 있을 때의 사람은 다르다. 어떤 일을 겪었냐에 따라서 달라질 거고."

"예."

"모두 하나라지만 그게 차이를 구분 짓는다."

"그걸 개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까?"

카인은 턱을 쓸며 잠시 고민했다. 적절한 예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왕과 네크로맨서의 차이에 가깝다."

"아...!"

명령권을 가진 건 같지만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소수는 늘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의 명령을 거부하는 언데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엘프의 왕은 세계수를 대표하고 해당 군락의 모든 엘프의 총의에 해당하지. 즉, 엘프여왕의 결정은 네크로맨서의 결정이야."

듣고 있던 올리시렌이 반문했다.

"그럼 로스와 손잡은 엘더가 마침 딱 방랑엘프가 된 거 아닐까?"

"왕의 측근은 충성스러운 자로 두는 게 상식이지. 엘프도 마찬가지야. 엘더의 배신보단 여왕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게 훨씬 더 가능성이 높지."

카인의 짧고 당연한 답변에 올리시렌은 애꿎게 뺨을 긁었다.

학자들도 모르는 사실을 카인이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찰나.

끼익-.

그들의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 틈에 보이는 건 귀족의 옷을 어색하게 겹쳐 입은 적금발의 소년, 가릭 크로울 백작과 미아의 하나뿐인 아들인 루드 크로울이 있었다.

"혹시 들어가도 됩니까."

카인은 현재 방주인인 올리시렌을 돌아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68 EP.Ⅰ-16

봄을 위한 여정 (4)

루드가 들어온 이상 기존의 이야기는 더 진행할 수 없는 법.

올리시렌은 이소엘과 눈빛을 주고받곤 적당히 말을 마무리했다.

"실마리를 잡는 데만도 며칠은 걸릴 거야."

아이리안의 삼대 권력자 중 하나인 헤터워드 로스 후작에 대한 뒷조사니 당연하다.

사실 이것도 아이리안의 왕실정보국쯤 되니 가능한 일이었고.

카인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속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회복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니 딱이군."

악마 발람과의 전투는 카인이라도 상당히 부담이었으며, 지금 몸에 남은 상처들은 제법 컸다.

올리시렌이 힘을 주어서 그나마 지금 정도로 끝났지, 아니었다면 정말 모든 미래를 바쳤으리라.

'좀 더, 그리고 빨리 강해져야겠어.'

세상 모든 일을 힘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카인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백작님에 대한 것도 알아볼게."

아이리안의 백작들이 유례없이 많이 몰려 있는 크로울에서 지금 올리시렌이 말하는 건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카인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녀는 카인의 단호한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드먼드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줄은 몰랐다.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그런 이유 아니다."

카인은 크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에드먼드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정말 숨으려고 한다면 누가 그를 찾을 수 있을까."

"아...."

아무리 왕실정보국이 아이리안에서 난다 긴다 해도 왕국 최강의 검호 에드먼드를 쫓긴 어렵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는 사람이니 걱정 안 해도 돼."

"응."

둘은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곤 은쟁반에 다과를 든 채 들어오는 루드를 향해 손짓했다.

소파도 있었지만, 방의 저쪽 끝에 있어서 너무 멀다. 그렇다고 호위 기사인 이소엘을 일어나게 할 수 없으니 카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앉아."

"예?"

루드는 순간 멈칫하며 당황했다.

카인은 대수롭지 않게 의자를 턱짓했다.

"나눠 먹으려면 가까이 있어야지. 그거만 우리 주고 나가려고?"

"아니요...."

루드는 어색하게 웃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들고 있는 은쟁반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왕녀가 누워 있는 침상 위에 두는 건 불경하다 싶었고, 다탁 같은 건 멀리 있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제 무릎 위에 올릴 때, 가늘고 하얀 손이 뻗어와 쟁반을 잡았다.

툭.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침상 위에 두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요."

카인처럼 편하게 말해도 괜찮지만, 크로울 백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며 이곳이 크로울 백작성이니 올리시렌은 왕녀로서 조금 말을 올렸다.

"어... 예. 감사합니다."

드륵.

카인은 멀리 있던 의자를 가져와 루드의 옆에 앉았고, 셋은 은쟁반에 담긴 다과를 집었다.

올리시렌은 정교하게 장식된 디저트를 들어 카인에게 보였다.

"...?"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이런 거 먹어 본 적 없지?"

카인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올리시렌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디저트를 한입에 삼켰다.

"넌 에셀레드에만 있었으니까 한 번 물어봤어."

"에셀레드도 백작령이다."

"파티쉐는 없던데."

"...."

땅만 넓지 대부분 쓸모없는 임야나 바다, 절벽이 대부분인 에셀레드이기에 그런 호화로운 요리가 없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백작이었던 에드먼드가 디저트 같은 음식은 멀리했고, 안주인의 역할을 해야 할 클로에는 늘 아팠다.

'사실 아프다고 칩거하는 시간엔 주로 북방에 계셨던 거 같지만 말이야.'

열차조차 들어오지 않는 시골 영지니 파티를 열어도 올 사람도 없고, 다른 웬만한 백작가는 휘하에 수많은 귀족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에셀레드는 그렇지 않았다.

철저하게 에드먼드 백작을 중심으로 에셀레드 기사단에 모든 권력이 몰린 구성.

자연스레 디저트를 만들 파티쉐 같은 사람들은 에셀레드의 백작성엔 없었다.

먹성 좋게 디저트를 집어먹던 올리시렌은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긴 한데, 역시 내 입엔 아르나 님이 해 준 사과파이가 제일 나은 거 같아. 너도 그렇지?"

카인은 잠시 굳었다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긁었다.

이소엘을 슬쩍 바라보자 그녀의 표정도 카인과 같았다.

아르나의 사과파이를 먹어 본 둘로서는 아무리 올리시렌이 말해도 차마 그렇다는 말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중간에 끼어 있던 루드 크로울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르나 님이 누구신가요?"

"아벨의 어머님이에요."

"아하, 여기 계신 카인 님의 어머님이시군요."

당연히 누가 봐도 형제처럼 구는 둘이니 별생각 없이 즉시 말했다.

그리고 카인은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말하듯 평범하게 대꾸했다.

"친어머니는 아니다."

"아...."

순간 루드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당장 자신의 친모인 미아와 후처로 들어와 별짓을 다 한 아리안의 일도 있었으니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며 루드는 눈알만 데구루루 굴렸다.

올리시렌은 루드의 그런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다가 툭 하고 말했다.

"그래도 저긴 친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제야 루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등을 맡겼던 전사, 루드 크로울.

그의 어린 시절이 제법 귀여워 보인 카인은 과자를 들어 루드의 앞에 들었다.

루드는 어색한 눈으로 끔뻑거리다가 카인이 주는 과자를 집어 먹었다.

툭툭-.

카인은 검지와 엄지를 문질러 닦으며 입을 열었다.

"집에 들어와서 사는 느낌은 어때?"

루드는 눈을 위로 들며 잠시 고민하더니, 과자를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왜?"

"전에도 백작성엔 거의 들어오진 않았으니까요."

"그럼?"

"어머니와 함께 별관에서 지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귀족들의 눈치가 너무 심해서...."

미아의 출신이 평민이라는 게 루드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

올리시렌은 혀를 찼고 이소엘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웨어햄의 이름을 미아에게 빌려 주었건만, 정작 본인이 안 쓰고 이런 꼴을 당한다고 하니 답답했다.

하지만 그 숭고한 마음을 아니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더욱이 그 아이에게 할 말도 아니었고.

카인은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루드에게 줬다.

"죽여 버려."

"...예?"

카인은 창밖을 턱짓했다.

루드가 테러를 위해 쳐들어왔던 아이언하트 철교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한없이 멀리 나아가면 겨울의 대장벽이 있다. 카인은 대장벽의 전사이자 루드를 살린 에셀레드의 첫째로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

"힘이 있잖아."

듣고 있던 올리시렌은 카인의 팔뚝을 쳤다.

"지금 애한테 무슨 소리야!"

"애는 무슨. 전사지."

루드의 눈이 동그래진다.

백작성에 돌아온 후 미아도 그렇고 올리시렌처럼 다들 자신을 애로만 취급했다.

하지만 오직 카인만이 루드를 동등한 한 명의 전사로 바라봤다.

"루드 크로울."

카인의 보랏빛 눈이 서늘하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정은 세계선을 넘어서도 같은 법.

루드는 눈치 좋게 그 따스함을 직시했다.

"가릭 백작은 너와 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었다."

대륙에 비해 평민과 귀족 간 신분의 벽이 두꺼운 아이리안에서, 백작이 평민을 본처로 삼는 건 전례가 없었다.

가릭 백작은 사랑을 위해 그런 세상과 늘 싸웠고 그 결과물이 눈앞의 루드.

-늘 차갑던 아버지가 처음 웃으며 말해 주신 게, 우리의 가슴엔 쇳물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카인은 어린 루드의 위로 대장벽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던 전사 루드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이전 세계선에서도 가릭 백작은 루드를 아꼈다.'

그러나 아리안의 계획에 꼭두각시가 되며 미아와 루드를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드만큼은 어떻게든 탈출시키고 세뇌를 이겨 내며 루드한테 저 말을 남겼을 것이고.

"그리고 이젠 네 차례다. 네가 네 어머니를 지키고 아버지를 지켜라."

카인의 존재로 크로울 가문의 미래가 통째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전사의 가슴을 지닌 자라면 달라지지 않으리라.

툭.

카인은 검지로 루드의 뜨거운 심장을 가리켰다.

루드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눈알이 새빨개졌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겉은 어린아이지만 마음은 단단한 전사다웠다.

"네!"

"후우- 그렇다고 진짜 죽이면 안 돼요."

올리시렌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카인의 말이라 어쩔 수 없이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정말 루드가 크로울 백작 휘하의 귀족들을 죽이면 큰일이기에.

그러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카인 님이 해 주신 말씀은 누군가를 죽일 각오를 하면서 제 사람을 지키라는 걸로 알아들었습니다."

스윽-.

올리시렌은 미소 지으면서 그런 루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인의 말대로 정말 전사군요."

"...."

그 모습에 이소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카인은 괜히 애꿎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리시렌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설마 진짜 죽이라는 의미였어?"

"...아니."

"대답하기 전에 시간이 길었는데?"

"네 착각이다."

"그럼?"

"에셀레드 영지에선 찾을 수 없는 파티쉐가 만든 과자를 가져다준 게 고마워서 말한 건데 불만 있나?"

카인은 뻔뻔한 얼굴로 과자를 들어 보였다. 조금 전 올리시렌이 그를 놀릴 때 보이던 자세 그대로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놀린 건 그대로 기억하고 되갚네. 이런 인간이 에셀레드의 후계자라니, 참나."

"크흠."

본인이 생각해도 대답이 조금 궁해진 카인은 더 말을 잇지 않고 과자를 씹었다.

그렇게 넷이 농담을 이어 나갈 때.

똑똑-.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노크 소리에 이소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있는 건 금쟁반에 과자를 들고 온 미아였다.

그녀는 이소엘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다가 루드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크로울 가문의 은쟁반이 침대 위에 있는 걸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들이 엄마보다 빠르네."

"아니에요, 전에 귀한 손님이 오면 드실 걸 가져다 줘야 한다고 어머님이 말씀해 주셔서예요."

카인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아는 고개를 한 번 숙여 예를 표한 후 루드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침상에 앉아 있는 올리시렌을 향해 말했다.

"올리시렌 왕녀 저하, 혹시라도 저희 아이가 실례를 저질렀다면 부족하나마 어미로서 사죄드리겠습니다."

올리시렌은 두 손을 내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방금 머리도 쓰다듬어 줬습니다."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미아 님이야말로 편하게 하시지요. 크로울의 안주인께서 크로울 백작성에서 이러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올리시렌은 이소엘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카인을 가리켰다.

"이전에 보셔서 아시겠지만, 막 대하는 저 인간도 있지 않습니까."

미아는 카인을 보며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왕녀도 그도 서로를 얼마나 편하게 여기는지 엿보였으니까.

"알겠습니다. 왕녀님."

"좋습니다."

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민 출신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는 올리시렌이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꾸욱-.

미아는 옆에 있는 루드의 손을 쥐었다.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아니라 고생으로 거칠어진 손이었다.

그 촉감에 용기 내어 말했다.

"사실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어떤 부탁이신가요?"

그녀의 신분과 관련된 부탁이리라.

왕녀에 에셀레드와 웨어햄 백작가까지 함께 있는 이 순간이라면 그 어떤 논란도-

"이 아이와 그이가 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루드를 포함한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Episode.Ⅰ

봄의 찬미

#69 EP.Ⅰ-17

어느 봄날에 (1)

「아버지는 내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하고, 보여 줄 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이름 없는 비석의 글귀」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

루드는 이런 상황 자체가 어색한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형님?"

미아가 들어오면서 살짝 열린 틈으로 갈색의 눈동자가 보였고, 아벨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카인이 서 있는 걸 보고 처음엔 미간을 찌푸렸지만, 미아나 루드를 확인하곤 바로 풀었다.

"그래, 너도 들어와라."

"예."

아벨은 별다른 질문 없이 카인의 옆에 섰다. 그렇게 카인과 아벨,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루드의 손을 다시금 잡으며 말했다.

"모두 아시다시피 크로울 백작가엔 참으로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건 제가 부족한 탓이고요."

"...."

올리시렌이나 카인은 곧장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핍박을 버텨 왔던 여인의 목선이 너무나 하얗고 얇다.

그 몸에 새겨진 세월의 상처를 이겨 내는 그녀만의 방법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이나 이 아이나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엔...."

"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아리안으로부터.

'보통 사람들'로부터.

크로울 영지를 해방한 것이 이 자리에 있는 카인 일행이기에 굳이 아픈 상처를 스스로 말하게 하진 않았다.

다만 카인은 평상시와 달리 떨리는 눈동자의 루드를 살피며 말했다.

"미아 님. 이미 루드는 다 컸습니다."

꽈악.

미아는 거칠어진 루드의 손을 다시금 붙잡았다. 루드는 언제든 뺄 수 있었지만, 고개를 숙이며 가만히 있었다.

슥슥-.

올리시렌은 카인의 소매를 붙잡아 당기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라는 의미.

카인은 좀 더 크게 고개를 저었다.

품 안의 자식이 영원히 어린 파랑새일 순 없고 때론 생각보다 빠르게 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결국 둘을 해친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고 있기에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미아는 그런 카인을 향해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카인 님께서 무얼 보신지 모르나 루드는 아직 성년이 되기엔 몇 년이나 남은 아이입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게 언제인지 아십니까?"

"...."

카인의 물음에 미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명확한 답을 알진 못했으나 직감적으로 '나이'가 아니라는 건 느꼈으니까.

쫘악-.

카인은 옆에 있던 아벨의 팔목을 잡아서 손바닥을 다 보이게 펼쳤다. 검을 쥐는 부분들이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여 있다.

루드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 성년이 되기엔 부족한 소년의 손이라고 할 수 없다.

"시간입니다. 나이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자기 삶을 살았냐는 시간."

"그건-."

"펼쳐 보시죠. 루드의 손을."

미아는 멀뚱멀뚱 손을 내밀고 있는 아벨과 기사로서 단련된 그의 손을 훑어보곤, 위험한 상자를 열 듯 조심스레 루드의 손을 돌려보았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잔뜩 그어진 상처투성이 손가락.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조금 눌어붙은 손바닥.

흙이나 모래를 다루면서 거칠어진 손등.

아벨의 손처럼 루드의 손에도 어른의 시간이 스며 있었다.

"...."

미아는 그 큰 눈을 끔뻑이며 루드의 손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카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부탁은 저희에게 하실 게 아닙니다. 이제 한 명의 어른이 된 루드가 아버지 가릭 백작과 어떻게 지낼진 그의 선택이니까요."

"이미 제 아들은 제 품을 떠났었군요."

미아는 루드를 껴안았다.

루드는 저항하지 않고 그녀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옛날과 똑같이 따스했지만, 루드는 카인의 말대로 이 따스함에만 있을 순 없었다.

아직 어리다지만 미아만큼 루드가 버텨 낸 시간이 쌓여 그를 어른으로, 전사로 발돋움하게 했기 때문이다.

"가릭 백작이 싫나?"

카인은 루드에게 물었다.

그제야 미아는 포옹을 풀었고 루드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싫은 건 아닙니다."

"그럼 무섭나?"

"그런 것보다는 그 가릭 크로울 백작이 정말 제 아버지인지 잘 모르겠어서...."

말끝을 흐리는 루드를 보며 카인은 할 말을 골랐다.

"적어도 내가 본 가릭 백작은 좋은 사람이야."

끄덕-.

루드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아리안의 세뇌에 조종당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가릭 크로울 백작이 상당히 괜찮은 남자라는 건 루드도 안다.

하지만.

"그건 알지만 정말 제 아버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드 크로울, 방금 미아 님은 우리에게 부탁했지만 그건 내가 거절했지."

"예."

"하지만 네가 부탁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도와줄 수 있다."

올리시렌도, 이소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다만 아벨은 그답지 않게 손가락을 꼬며 조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자연스레 그 모습을 기억에 담아 두며 루드를 응시했다.

"돕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도움받는 것도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던데, 어떻게 하겠나?"

카인이 씨익 웃으며 악수하듯 손을 뻗었다.

늘 씁쓸한 미소만 짓던 그답지 않은 밝은 웃음에 루드는 잠시 멈췄다.

찹.

그러곤 손을 맞잡았다.

굳은살끼리 부딪치는 전사의 악수였다.

"가능하십니까?"

루드의 물음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 돼도 되게 하는 게 전사니까."

* * *

"이 인간이 애한테 되지도 않는 공수표를 막 던진 거네?"

올리시렌이 소파에 기댄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어둡게 변했던 머리카락이 원래의 회색빛을 되찾은 걸 보니 꽤 회복한 모양.

그 뒤에 서 있는 이소엘도 평상시 그녀답지 않게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맞은편의 카인을 바라보았다.

"뭐가. 원래 남자는 주먹을 부딪치며 친해지는 거야. 그렇지, 아벨?"

카인이 찻잔을 들어 옆에 앉은 아벨에게 내밀었다.

짠.

아벨은 찻잔을 부딪치며 카인의 말을 긍정했다.

"저희도 그렇게 친해졌죠."

"맞아."

"그건 너희 형제가 이상한 거고...."

카인과 아벨.

두 형제에게 상식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기 위해 농담을 하는 건지 처음엔 헷갈렸다. 그러나 듣다 보니 두 사람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제 막 침상에서 일어난 가릭 백작님하고 루드를 싸움 붙이자고?"

"가릭 백작이 보는 앞에서 나와 루드가 대련하는 것도 괜찮지."

"아버지 앞에서 애를 패겠다?"

"패는 게 아니라 대련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대련을 심하게 몰고 가서 가릭 백작이 나서게 하고-."

카인은 한숨에 차를 모두 들이켠 다음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루드에게 아버지의 정을 보이면 되는 거지."

"그럼 너는?"

"...?"

올리시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인은 늘 그랬다.

언제나 자신을 악역으로 돌려서라도 해결하려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효율이 좋은 건 안다.

그러나 '카인'의 삶엔 그만큼의 상처가 생기는데 매번 무덤덤한 그가 너무 안타까웠기에,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왜 굳이 네가 악역이 되려고 하는데."

아벨은 입을 벌렸다.

카인의 뜻이기에 찬동했지만, 그 결과가 결국 악역이 되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릭 백작과는 충분히 친밀하니까, 이런 사건 하나 정도는 있어도 앞으로의 계획엔 문제없다."

"내가 왕이 되는 그 계획?"

"응."

"카인 에셀레드. 내 왕국엔 희생양 따위는 없어."

올리시렌은 단호하게 못 박았다.

"있어야 한다면 내가 될 거야. 그게 왕이니까. 그러니까 네가 하지 마."

카인은 빈 잔을 내려 두고 잠시 올리시렌을 바라봤다.

'봄'이 말하던 새 삶의 이유가 된 왕녀의 말.

조금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고 하지."

"그렇다고 하지가 아니라 그런 거야."

"알겠다."

"정말?"

"이번만큼은 정말이다."

카인은 눈을 돌렸다.

어차피 루드와 가릭의 부자 관계를 회복시키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으니까.

그 속내가 뻔히 보이는 올리시렌으로선 답답했다.

그래도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달라지는 것 같아서 기분 좋게 찻잔을 들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난 아무튼 고된 대련으로 움직이게 하는 쪽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아벨은 카인의 말에 찬동했다.

아벨에게 아버지 에드먼드 백작은 흐릿한 뒷모습만 보이는 자. 딱히 아버지와의 유대도 없고 관계도 없는 아벨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나 있다면, 카인 에셀레드.

형이자, 아버지이자,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 줄 그와 이런 관계가 된 계기는 비 오는 날의 '대련'이었기에 당연한 발언이었다.

"어떻게 두 형제가 똑같아선. 어휴. 대련을 하는 건 결국 같은 고난을 겪게 해서 친하게 만들자는 거잖아?"

"응."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있어. 둘이 같이 요리하게 하자."

"...?"

이소엘은 올리시렌이 요리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움찔했고, 카인과 아벨은 정확히 같은 방향과 각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예전에 아버지랑 요리해 본 적이 있단 말이야. 그때 정말 많이 친해졌었어. 오죽하면 이거면 충분하다고 더 노력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하이볼트 전하가?"

"그럼. 나한테 아버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지."

카인은 아까 전 올리시렌처럼 관자놀이를 검지로 돌리며 눌렀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진짜 있던 일인 건 맞아 보인다.

'문제는 올리시렌의 미각이 작은어머니의 사과파이를 맛있게 먹을 정도로 파멸적이라는 거지.'

국왕 하이볼트의 식성이 이상하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평범한 입맛일 터.

"그 충분하다는 게 그만하라는 소리 아니었을까."

"그렇지. 충분히 친해졌으니까 그만하라 하신 거겠지. 그러니까 같이 요리시키면 될 거 같아."

올리시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스윽-.

그때 이소엘은 올리시렌이 보지 못하는 시야에서 검지 두 개를 교차하며 X자를 그렸다.

그걸 본 카인이 피식 웃자, 올리시렌은 샐쭉하며 물었다.

"왜 웃어?"

"아니다. 이소엘의 의견도 들어 보면 좋겠다 싶어서."

올리시렌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소엘은 기사답게 그사이에 손을 내리고 바른 자세로 서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하루 정도라도 여행을 다녀오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말 듣고 갔다가 우리가 발람을 만났는데?"

"...."

올리시렌의 말에 이소엘은 순간 말이 궁해졌다.

카클링턴에서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럼 그냥 카인 님 말대로 대련으로-."

덜컹-.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이 있는 방문이 거칠게 열렸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 디그리드 웨어햄 마탑주 겸 백작이 들어왔다.

"딸아, 왜 이야기하지 않느냐!"

"무슨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네가 여섯 살 때 우리가 함께 갔던 초원의 밤 말이다! 그때 우리는 하늘의 별을 하나씩 세며 부녀간의 정을 채웠거늘."

"...예."

이소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답지 않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셋은 신기하게 지켜봤다.

웨어햄 백작은 성큼성큼 들어오며 과장되게 말했다.

"네가 그때 얼마나 귀여웠는데! 세상에 내 딸이 이렇게까지 반짝이고 아름답고 예쁘고-."

"웨어햄 백작님,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이소엘이 담담한 척하며 그를 말렸다.

그러나 디그리드는 오히려 더 신나서 말했다.

"아니, 이분들도 알아야지! 글쎄 내 딸이 말일세."

"대련으로 하면 됩니다!"

이소엘은 그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언브릿지 근처에서 반란 세력을 찾았다더군."

디그리드는 그런 이소엘의 반응에 만족한 듯 본론을 꺼냈다.

"거리도 멀지 않아서 짧은 여행으로는 좋은 기회지 않느냐."

"어디서부터 엿들으신 겁니까."

카인의 물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돈독해야 하니까! 물론 그래도 내 딸과의 관계보단 못하겠지만!"

디그리드는 말을 돌렸다.

얼렁뚱땅이긴 하지만 루드와 가릭 백작의 관계를 위한 방향이 여행으로 정해졌다.

#70 EP.Ⅰ-17

어느 봄날에 (2)

다그닥-, 다그닥-.

본래는 마차를 이용해 가려고 했지만 가릭 백작이 적당한 승마가 자신의 건강에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말을 타고 움직였다.

-걔, 그거 지 아들하고 나란히 말 달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물론 그 진의는 디그리드 백작이 말해 줬다.

"괜, 괜찮으냐."

그런 가릭 백작의 이마엔 땀이 흐르고.

"예...."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루드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능숙한 가릭 백작과 달리 말을 타본 경험이 거의 없는 루드로서는 매 순간이 고역.

그나마 본인의 운동 신경이 좋고 말이 순하여 별문제는 없이 가고 있었지만, 가릭 백작이 그리던 그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릭과 루드의 뒤에서 슬슬 쫓아가던 카인은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대련으로 끝내자니까."

올리시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작부터 이렇게까지 안 맞을 줄은 그녀도 몰랐으니까.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좀 더 지켜봐봐. 요리하면 된다니까?"

대련을 지지하던 카인과 아벨은 기대감이 전혀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옆을 따르던 이소엘의 눈빛도 조금 비슷했고.

"계획상으로는 폭파된 아이언브릿지까지 도착해서 같이 요리하기로 했으니, 아직 한참 남았어!"

"그래."

카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건 아니다. 그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는 봐주겠다는 뜻이었다.

* * *

"백작님, 볶을 때 쓰는 양파는 네모나게 작게 썰어야 하고, 식감이 필요할 땐 조금 길고 두껍게 썰어야 합니다."

루드의 어조는 자상했다.

하지만 식칼을 든 채 낑낑거리는 가릭 백작에겐 왕의 말보다 냉엄하게 들려왔다.

"그, 그래. 아들이 말하니 더 잘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한참을 더 낑낑거리는 가릭 백작.

계속 지켜보던 루드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듯하니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그래. 그러려무나."

가릭 백작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칼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아이리안 칠대귀족이 언제 요리를 해 봤을까.

당연하리만큼 가릭 백작은 요리에 서툴렀다.

-그냥 계속 센 불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최대화력으로!

카인의 시선은 부서진 무쇠 프라이팬을 향했고.

-간이 좀 부족하군. 아까도 넣었는데 정말 많은 조미료가 들어가는구나.

땅을 파고 부어 버린 끔찍한 맛의 국물 요리도 훑어보았다.

올리시렌은 잘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면서 버려진 국물 요리를 아쉽다는 표정으로 살펴보다가 카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버릴 정도는 아니던데 말이야. 다들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야?"

"네 입맛엔 어땠나?"

"그렇게 맛있진 않았지. 그래도 나름 매콤해서 빵 찍어 먹기 괜찮겠던데."

"...."

차마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카인은 말문이 막혔다.

대장벽에서 요리는 사치다.

원정에 나간다면 그저 살기 위해서 정해진 분량만큼의 식사를 하는 곳이니까.

그런 대장벽에서 십 년을 버틴 카인에게 있어 음식이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족했다.

'사람이 먹는 거라면 말이야.'

적어도 가릭 백작이 만든 건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몬스터에게 먹여도 발광할 정도의 물건이었는데 그걸 왕녀라는 사람이 옹호하니 기가 찼다.

촤아아아-!

불꽃이 치솟는다.

루드는 작은 손으로 큰 요리도구들을 어려움 없이 다루면서 능숙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가릭 백작이 물었다.

"요리를 꽤 잘하는구나. 성의 셰프에게 배웠느냐?"

"성에서 도망 나오고 여관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방에서 배웠죠."

아리안이 권력을 쥐고 미아와 가릭이 의식을 되찾지 못할 때, 루드는 살려고 도망쳤다.

이 세상은 어린아이가 혼자 살기 녹록치 않다.

때문에 루드는 불과 일 년 남짓한 시간 만에 온갖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건 동시에 가릭 백작의 말문을 막히게 할 주제였다.

분명 봄이 오며 따스해진 날씨지만, 카인은 저 둘 사이에서 대장벽의 설원을 느낄 정도로 떨어지는 온도를 느꼈다.

카인은 올리시렌에게 속삭였다.

"요리하자고 해서 더 망한 거 같다."

올리시렌도 입맛이 이상할 뿐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라 검지로 뺨을 긁었다.

"그러게."

"이제라도 대련으로 넘어가는 게 낫지 않나."

"이소엘의 의견까진 실행해야지. 여행까진 아니지만 반란 세력이라는 적과 같이 싸우면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아마도 만나도 싸우는 건 나와 아벨이 될 거 같다만."

루드가 제법 싸울 수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싸우라고 내보낼 순 없다.

그렇다고 가릭 백작이 직접 싸우기엔 그의 상태도 아직 좋지 않았다.

두 부자와 카인, 아벨, 올리시렌, 이소엘. 여섯이 단출하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싸울 사람은 역시 둘뿐.

올리시렌은 한층 더 차가워진 두 부자의 모습을 보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냥 대련이 맞나."

"그렇다니까."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동의합니다."

아벨도 카인을 따라 하며 수긍했다.

* * *

가릭 백작은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을 쫓아오는 넷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좋은 사람들이 네 곁에 있어서."

루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음에 저들의 계획을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단다. 왕녀부터 에셀레드의 두 형제, 웨어햄의 영애가 너와 나의 사이를 좋게 하고 싶다니."

말도 안 되는 구성이긴 했다.

한 명씩만 있어도 아이리안 섬에선 떵떵거릴 수 있는 자들이 모여서 하려는 게 이런 일이면 더욱더.

루드는 카인을 닮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제가 먼저 다가가야 했던 건데, 이렇게 일을 키워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가릭 백작은 고개를 가로젓곤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언제나 좋은 거지."

"백작님에게도 좋은 사람들이 있으십니까?"

가릭 백작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닿기에는 종일 말을 달려도 닿을 수 없는 게 지평선이다.

그건 과거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로 손을 뻗으면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은 모래처럼 손가락 틈으로 흘러나가 버린다.

"있었다."

그렇기에 가릭 백작은 더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간절하고 그립기에 함부로 입에 담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

루드는 그런 가릭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하면서 비치는 붉은 노을이 그의 얼굴을 밝힌다. 그 속에서 루드는 저 멀리 있는 백작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다행입니다."

"음?"

가릭은 루드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급하게 앞을 바라보는 루드의 행동.

가릭 백작은 씨익 웃었다.

"내 말을 따라 한 게냐."

"실례라면 죄송합니다."

"아니.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하는 건 당연하지. 그렇게 닮고 그렇게 자라는 게 아들이니까."

루드는 아들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혀 안에 넣고 굴려 보았다.

"...예."

여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간질거리는 것이 기분 좋았다.

"사실 아까부터 걸리던 게 있었단다."

"어떤 겁니까?"

"네가-."

콰아앙-!

순간 저 멀리서 폭발음이 울렸다.

"넌 뒤!"

카인은 아벨을 향해 소리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네!"

카인이 전방으로, 아벨이 후방으로 뛰쳐나갔고, 이소엘은 그 자리에 남아 올리시렌을 지켰다.

가릭 백작은 폭음과 동시에 달라지는 카인의 눈빛을 봤다.

이전이 외유라면 이젠 전쟁의 시간.

"우리끼리 외유하려고 병사들을 미리 보냈었다! 가서 다 잡은 반란 세력을 징치할 생각이었고."

"그럼 반란 세력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친 모양이군요."

"그래. 아리안의 꼭두각시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폭탄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더한 것도 있습니다."

급하게 상황을 교환하는 둘의 말 사이로 루드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가릭과 카인이 돌아보자 루드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방금 들린 폭탄의 폭발 모양과 소리를 들어 보면 '디캐스터 4'입니다. 그렇다면 더 센 게 있을 겁니다."

가릭 백작은 눈을 끔뻑였다.

"그런 걸 어떻게 잘 아느냐."

"반란 세력과 함께 백작성을 엎으려고 했었다고 말씀드렸죠. 제 능력으로 폭탄의 사용이 줄어든 만큼 폭탄 창고를 보여 주더군요."

여관과 마찬가지로 반란 세력.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 때 아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느껴진다. 가릭은 루드와 같이 으스러지라 주먹을 쥐었다.

루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창고에서 가장 비싼 건-."

"디캐스터 시리즈를 가지고 있다면 <델프트>의 '디오빈 상단'과 거래선을 텄다는 뜻이고, 해 봤자 '마우톤 2' 정도 같은데?"

카인의 빠른 판단.

루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잘 싸우고 멋있는 건 알았지만, 이런 부분까지 꿰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저, 정확합니다."

카인은 언제든 아그웨스카를 뽑을 수 있게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네가 있을 때 반란 세력은 몇이나 있었지?"

"식량의 소모를 생각해 보면 30명 남짓입니다."

가릭 백작은 루드의 말에 급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사이에 잡아들인 놈들이 많으니 남은 건 5명 안쪽일걸세!"

"좋습니다, 아벨!"

"예스, 로드 에셀레드!"

"여기서 지켜라. 폭탄에 휘말리면 안 되니 남은 놈들은 내가 가서 해치우지."

혹시라도 반란 세력과 싸움이 벌어지면 슬쩍 하나를 놓쳐서, 가릭과 루드가 같이 이겨 내게 해 볼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폭탄은 아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디캐스터나 마우톤 시리즈는 마법폭탄이 아니라는 것. 아마도 자금의 문제가 컸을 터다.

'그렇다면 대포류는 당연히 없겠고, 석궁은 조심해야겠군.'

세상에서 폭탄을 제일 많이 쓰는 곳은 대장벽이다.

그러니 폭발에 일가견 있는 루드가 놀랄 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을 수밖에.

카인은 반란 세력이 쓸 수 있는 폭탄의 수준을 가늠하고는.

파앗-!

그대로 대지를 박찼다.

화아아아아-.

카인의 신형이 질주하며 허공에 흑색의 궤적을 그렸고, 그 길을 따라 꽃잎들이 강풍에 일어났다.

아이언브릿지 근처 작은 마을에 도착한 카인과 크로울 백작가의 병사들은 단숨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몰라보기엔 카인이 크로울 백작령에서 한 일이 너무 컸다.

"적은?"

"중앙, 마을창고에서 4명이 농성 중입니다!"

생각보다 가릭 백작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카인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면서도 그의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내심 높이 평가했다.

"피해는?"

"경상자는 다수, 중상자나 사망자는 없습니다."

"좋다. 물러서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경례를 표했고, 카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른 집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마을창고를 응시했다.

타탓-.

그러곤 마을의 흙바닥을 박차며 아그웨스카를 뽑았다.

"그만 와! 터트려 버린다!"

창고 틈새 사이에서 협박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고.

콰아아앙-!

길목에 미리 심어져 있던 폭탄이 터졌다.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끓어오른다. 바람마저 살펴볼 정도로 세상에 느려지고 붉은 폭발이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게 보인다.

'벤다!'

파앗.

폭탄의 붉은 폭발과 검은 연기가 자로 대고 그은 듯한 흑색의 직선에 반으로 잘렸다.

그리고 보랏빛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 카인이다!"

"아이언브릿지의 소드마스터!?"

백작성에 가까이 사는 이상 그들도 카인을 모를 수 없다.

구구궁-.

몇 번이고 터지는 폭발을 베어서 뭉개 버린 후 카인은 마을창고의 입구를 사선으로 잘라 무너뜨렸다.

그 안에는 4명의 반란 세력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박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다른 사람도 아니라 기적을 만들었던 카인에게 달려들 만한 배짱은 없었으니까.

카인은 창고 내부를 쓱 둘러보며 다른 적은 없나 살피다가 바퀴 자국이 두 줄로 난 걸 확인했다.

"저건 뭐지?"

"그, 그건."

"가장 먼저 대답한 놈은 살려 준다."

"대장이 발리스타를 끌고 나갔습니다!"

"왜?"

"백작성의 하인 하나와 대장이 소꿉친구인데 백작이 온다는 걸 미리 알고...."

타타탓-.

카인은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로 네 명을 단숨에 기절시킨 후 다시 내달렸다.

화아아아아아!

'고작 반란 세력 따위에게 내부 스파이가 있을 줄이야.'

자신이라면 폭발을 베어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아벨은 아직이다.

'이소엘은 올리시렌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고!'

그런 상황에서 가릭 백작에게 발리스타로 '마우톤2'를 쏜다면?

실드마법 아티팩트가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니라면?

카인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며 다급히 내달렸다.

#71 EP.Ⅰ-18

어느 봄날에 (3)

기릭- 기릭-.

매끄럽지 못한 나무 바퀴가 비명을 지른다.

성인 하나 크기의 발리스타를 한 남자가 끌고 가고 있었다.

"나 혼자만 죽을 순 없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

지저분한 살기를 줄줄 흘리는 중년인.

크로울 백작가에 원래부터 반란 세력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기존의 가릭 백작이 모난 데 없이 영지를 잘 이끌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안이 실권을 쥐면서 그녀에 반하는 반란 세력이 등장했다.

-일일이 고르기 귀찮군요. 한꺼번에 통째로 불태워 버리죠.

물론 반대파를 모조리 쓸어버리기 위한 아리안의 계획이었다.

자신과 척지는 자들을 쓰레기통에 모아두듯 반란 세력으로 모이게 한 후 죽이려 했지만, 아리안이 먼저 죽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 반란 세력의 대장인 키널드는 진짜 반대파가 아니었다.

배우로서 실패해 뒷골목을 전전하며 양아치로 살던 키널드는 아리안에게 선택받으면서 대장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충성을 바친 건 아니다.

짤랑-.

허리춤에 묶인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바친 충성의 대상은 바로 금화.

"크크큭, 보인다."

드넓은 초원으로 이뤄진 크로울 영지의 특성상 먼 곳에서도 상대를 관찰할 수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발리스타를 끌고 올라간 그는 수풀에 숨어 말라비틀어진 가릭 백작과 일행을 응시했다.

"살다 살다 돈도 안 받고 일을 할 줄이야."

아리안이 죽었다는 걸 듣고 키널드는 도망가려 했지만, 올리시렌이 한 발 더 빨랐다.

시시각각 좁혀 오는 크로울의 포위망에 잡힐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

키널드는 자신의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할 수 없었다!

툭-.

품에서 거무튀튀한 쇠공인 '마우톤 2'를 꺼내선 폭탄을 쏠 수 있도록 개조된 발리스타의 화살에 장착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같이 죽는 거다!"

디캐스터 시리즈가 일일이 도화선에 불을 붙여야 한다면, 마우톤 시리즈는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폭발한다.

게다가 화력도 더 좋으니, 비싼 가격을 제외하곤 상급의 폭탄이다.

끼리리릭-.

발리스타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면서 시위가 장전되고, 화살의 끝이 가릭 백작을 향한다.

타앙-.

키널드는 발리스타를 쏘며 유언처럼 소리 질렀다.

"황금만-."

스윽-.

뒤에서부터 짓쳐들어오는 흑색의 궤적이 키널드의 목을 위아래로 이등분시킨다.

"...세."

그의 말을 이어 가던 호흡은 자연스레 끊겼고, 그의 머리는 마지막 단말마를 남기며 바닥을 굴렀다.

카인이었다.

아주 조금만 더 빨랐으면 키널드가 발리스타를 쏘기 전에 잡을 수 있었을 터.

'제길!'

그러나 이미 발리스타는 쏘아졌다.

마우톤 시리즈의 폭탄이 매달린 화살이 땅에 꽂히는 동시에 일어나는 불꽃이 일행들을 불사를 터!

'미래를 바친다.'

파지지지지직-.

카인은 거침없이 '겨울'을 일으켰다. 그의 주위로 순백의 뇌전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올리시렌도, 가릭도, 아벨도, 이소엘도. 이젠 아니겠지만 미래이자 과거에 전우였던 루드도.

'누구 하나 잃을 순 없어!'

아무도 잃지 않는다는 게 욕심인 걸 안다.

하지만 카인이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 욕심을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신기, '겨울'의 힘을 끌어당겨 한계를 다시 한번 뛰어넘으려는 순간.

후우우웅-.

봄바람이 꽃잎과 함께 불었고 카인은 아벨의 갈색 눈을 마주했다.

그 눈빛이 카인을 멈춰 세웠다.

"아벨 에셀레드."

아무리 먼 거리라도 카인은 느낄 수 있었다.

용사 아벨의 가슴에 칼을 꽂은 게 어제 같으며 내일이라도 다시 일어날 것처럼, 매일 밤 꿈으로 사무치게 겪는 카인에겐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불태울 각오를 세운 용사의 눈빛이었다.

* * *

타앙-.

새의 날갯짓만큼이나 작은 소리.

그러나 초원에선 절대 들리지 않을 탄성소리에 아벨의 좋은 귀가 반응했다.

눈이 초원을 훑는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만 발휘되던 그의 전투본능이 운다.

그 순간.

카인이 달려간 마을 쪽에 야트막한 언덕과 수풀이 보였고,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감지했다.

"폭-탄!"

아벨은 소리쳤다.

휘익.

올리시렌이 반응하기도 전에 이소엘은 아벨이 바라보는 방향을 등지며 그녀를 껴안았다.

폭탄이 예상되는바, 몸으로라도 폭발을 막기 위해서!

동시에 중력망치 크레드네를 소환하여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가릭 백작도 움직였다.

꽈악-.

뼈마디가 아직 영글지도 못했는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들을 위해.

제 목숨이 폭탄에 찢길지라도 아들만은 살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으스러지라 껴안았다.

'형님.'

아벨은 폭탄이 쏘아지던 언덕에 나타난 카인을 응시했다. 상당히 멀리 있었지만, 카인의 검은 머리와 보라색 눈은 눈에 띄니까.

그리고 카인의 주위로 백색의 뇌전이 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으득-.

아벨은 이를 악물었다.

루드와 가릭을 위한 계획을 짤 때, 올리시렌이 카인에게 쏘아붙이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왜 굳이 네가 악역이 되려고 하는데.

뒤이어 카인이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룰 때가 떠올랐다.

자신과의 싸움.

아르후안의 시련.

라마이닝 백작성 전투.

아이언하트 공방전.

그걸 지켜본 아르나는 아벨을 따로 불러서 말했다.

-기적엔 공짜가 없단다. 아마도 카인 님은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있겠지. 대개는 수명이나 미래고.

어째서 카인만 희생하는가.

왜 카인이 악역으로 살아야 하는가.

적어도 아벨에게 있어 카인은 희망이고 빛이기에 스스로를 불태워 자신을 지키려던 그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으드드드득-.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아벨은 이를 악물었다. 허리춤의 세검을 쥐며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는 화살을 직시했다.

-제가 언젠가는 형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물음에 카인은 단언했었다.

-새로운 봄이 온다면.

아직 계절은 순환하지 않았다.

봄은 새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아벨은 카인의 장담을 넘어서야 했고, 카인만이 희생하는 불합리한 구조를 깨부수기 위한 힘이 필요했다!

두근-.

세상이 느려진다.

색이 사라지고 천천히 흑과 백만이 남아 구분되는 시야가 펼쳐진다.

그리고 아벨은 모든 걸 지우기 시작했다.

올리시렌과 이소엘.

가릭과 루드.

바람, 땅, 꽃잎, 햇빛.

남기는 건 오직 둘.

저 멀리 보이는 카인과 짓쳐들어오는 화살!

두근, 두근.

아벨의 감각이 맹렬히 한계를 돌파한다. 그의 머리는 가능한 모든 상황을 예단하여 가능성을 계산해 낸다.

미래 예지에 가까운 전투본능이 눈을 떴고.

팟-!

아벨이 대지를 박찼다.

그의 발끝이 닿는 족족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 듯 파인다. 그렇게 아벨의 속도가 카인의 발끝에 닿았고.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지금까지의 궤적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르고 단단한 은빛이 아벨의 오른손에서 쏘아졌다.

푸욱.

100m 밖에서 단검을 던져 사과를 맞히듯.

아벨은 주먹만 한 폭탄의 정 가운데로 세검을 찔러 넣었다.

화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실수!

경험이 부족한 아벨은 '마우톤 2' 폭탄이 충격 반응형이라는 걸 몰랐다.

살고자 하면 멀리 쳐 내야만 했다.

세검이 꿰뚫은 폭탄이 우글거리면서 코앞에서 터지려 한다.

두근두근두근-.

그걸 바라보고 상황을 인지해 나가는 아벨의 심장도 터지려 했다.

카인을 위한 마음과 목숨의 위협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전투본능은 한계를 뛰어넘는다!

라마이닝의 나이트, 빅터 밀링턴이 보였던 방어검술 페르그나 (Fergna)의 궤적이 횡으로 그어지고 밴더빌트가 보이는 바위를 쪼개 버릴 참격, 로 마이어(Lo Meyer)가 수직으로 일어선다.

화아아아아앙-.

얼굴이 뜨거워진다.

눈이 녹아 버리려 한다.

'버텨! 형님이 희생한 것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해!'

하지만 아벨은 눈을 부릅뜬 채로 수직의 궤적이 닿을 수 있는 극한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그의 본능이 그리는 검.

세상에 무적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그 왼편에 자리할 최강의 검.

'신이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아벨식 암천일광.

십자격 十字擊.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후우우우우-.

횡으로 베어지는 아벨의 세검에 마우톤 시리즈의 팽창폭발이 횡의 궤적으로 수렴하고.

우우우우-!

뒤잇는 수직의 참격이 횡의 궤적을 부수며 십자를 그렸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땅을 뒤집을 폭발음이 뒤따랐다.

"...어?"

올리시렌은 기묘하게 퍼지는 폭음에 이소엘의 품에서 고개를 내밀어 크레드네 너머를 보았다.

그들을 불태웠어야 할 붉은 폭발이 십자로 사등분된 채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앞엔 붉게 타고 있는 세검을 으스러지라 쥐고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년, 아벨.

아벨은 자신이 폭발을 베어 버린 것이 어색한 듯 검을 쥐었던 손까지 펼쳐 번갈아 보았다.

"잘했다."

뒤를 돌아보자 달려온 카인이 있었다.

털썩.

아벨은 전신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기묘한 탈력감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 힘조차 나지 않아 팔꿈치로 대지를 디디며 숨을 헐떡였다.

카인은 그런 아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벨은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고서야 말할 수 있었다.

"형님의 기대를 채웠습니까?"

크로울 백작성이 있는 아이언하트로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열차의 천장 위.

-형님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피만 빨아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앞에 나서서 형님을 지킬 겁니다.

-기대하마.

아벨은 맹세했었다.

"그래."

그리고 오늘, 그날의 기대를 조금이나마 채웠다.

"정말 잘했어."

"다행... 입니다."

풀썩.

아벨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며 쓰러졌고,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해 줬다.

"고작 열다섯에 진짜 소드마스터의 길에 발을 들인다라."

폭발을 벤다는 건 결국 무형의 힘을 똑같이 힘으로 되받아치는 걸 의미한다.

그건 칼과 칼이 부딪치는 걸 넘어 검에 자신의 신념을 담는다는 뜻이며, 소드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에 다다르는 첫 발자국.

"게다가 내 검을 따라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대장벽의 '로드이스트'가 대를 이어 가며 만들어가는 검술, '암천일광'을 몇 번 본 것만으로 따라 해냈다.

카인은 대륙의 역사상 아벨 정도로 검의 재능을 타고난 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을 돌아보았다.

이소엘은 어느새 망치를 다시 귀걸이로 바꿨고, 올리시렌은 다리에 묻은 흙을 털고 있었다.

"왜...."

루드는 자신을 꽉 껴안은 가릭 백작을 코앞에서 마주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폭발에서 자신을 먼저 지키려고 했냐고.

"아들이지 않으냐."

가릭 백작은 씨익 웃었다.

그러나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격하게 움직인 만큼 치솟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루드는 놀라서 그런 가릭 백작을 붙잡으며 말했다.

"백작님!"

가릭 백작은 그런 루드를 스윽 바라보았다.

"아까 하려다가 끊긴 말을 이어서 해도 되겠느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혹여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가릭 백작은 급하게 이어지는 루드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버지라 불러 다오."

"...."

아까부터 루드는 가릭을 백작님으로 불렀다.

그게 내심 가슴에 남은 모양. 그러나 루드가 망설이자 가릭 백작은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어렵다면 조금씩 익숙해지-."

"아버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번에 말허리를 자른 건 루드.

가릭 백작은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올리시렌과 카인은 미소를 지었다. 올리시렌은 카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성공한 거 같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런 것 같군."

"여기는?"

올리시렌은 기절한 아벨을 바라봤고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얘는 너무 많이 성공했어."

북방전쟁의 전주곡이 연주되기 전, 어느 봄날이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72 EP.Ⅰ-19

내생에 봄날은 (1)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

성검 '여름'을 쥐어도 불타 죽지 않는 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국의 성직자들은 그를 존중했다.

하지만 조금의 걱정은 있었다.

'이런 섬나라의 백작이면 건방지지 않을까?'

파견 성직자들에게 파견지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은 필수.

대륙에 비해 신분제가 공고한 아이리안인데, 소드마스터라고 하니 성국을 등에 업고 건방지게 움직일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감사하오."

에드먼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아침 세숫물을 가져온 어린 성직자는 그의 정중한 인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성호를 긋곤 물러선다.

에드먼드는 도도도-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세수를 시작했다.

"참으로 겸손하고 과묵한 사내입니다."

마우로 추기경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던 아이리안 총교구장, 노초 바르베타는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에드먼드 백작은 북방원정 때가 아니라면 워낙 활동이 드물어서 저희도 처음 뵙는 건데, 걱정과 달리 좋은 분이군요."

나란히 선 둘 뒤로 풍성한 금발의 여인이 걸어왔다.

둘은 성녀를 향해 급하게 인사했다.

"모든 것은 빛으로."

카테리나는 가볍게 목례하곤 입을 열었다.

"빛은 우리의 것으로. 저런 분이니 성검 '여름'이 에드먼드 님의 손에서도 화염을 쏟아 내지 않는 겁니다."

"역시."

마우로는 고개를 주억였다.

우우웅-.

다만 평생을 성직에 바쳐 온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수인을 그리곤 음파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결계를 만들었다.

그러곤 에드먼드를 등지며 총교구장 본인과 서기 한 명만 열람할 수 있는 1급 기밀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성녀님, 에드먼드 백작을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

카테리나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아벨이 용사가 되어 마왕을 물리치고 카인이 그런 아벨을 죽이는 미래를 성류관 '가을'에게 계시받은 입장에서 '여름'이 선택한 자를 의심하는 그를 좋게 볼 수 없다.

바르베타는 에드먼드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할 때 성녀의 싸늘할 반응은 이미 각오한 바였기에,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에드먼드 백작의 본처인 클로에가 마녀였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 책임질 수 있습니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카테리나의 말에 바르베타는 고개를 저었다.

"마녀심판으로 판정하진 않았기에 '정황'입니다."

"그럼 그 클로에라는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제 근처에 있다면 마녀인 걸 알 수 있으니,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다시금 고개를 젓곤,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 고독하게 얼굴을 씻고 있는 에드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었습니다."

"검증할 수 없는 일로 그런 말을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시체를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

"클로에가 마녀라는 익명의 신고를 받고, 저희도 고민했습니다. 아이리안의 칠대귀족, 그것도 소드마스터인 에드먼드의 아내를 어떻게 검증할지요."

이단심판성의 추기경으로서 마우로는 바르베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에 비하면 이단들이 차라리 더 쉽다.

누가 어떻게 마녀가 되는지도 모르기에 마녀를 잡으러 자신만만하게 가도 마녀가 강하거나 권력자라면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북방의 글루미엠도 있고 말입니다."

카테리나 역시 성국의 정의가 세계만방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당장 글루미엠을 토벌하려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를 것도, 아이리안 왕국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걸 알기에 공공연하게 두고만 보고 있기 때문.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두고만 볼 순 없었습니다. 비밀리에 에드먼드 백작에게 클로에가 마녀로 의심되며, 제가 직접 방문하겠다고 했죠."

카테리나나 마우로는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제야 눈치챘다.

단순히 본처 클로에가 마녀라는 익명의 신고를 받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젠 다음 날 에드먼드 백작은 클로에가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장례도 치르지 않았고, 시체도 없었죠."

말 그대로 정황.

"에드먼드 백작이 마녀를 감싸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하지만 너무나 의심스러운 정황.

바르베타는 카테리나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차마 더 파볼 수가 없어서 그대로 멈췄었습니다."

"마우로 추기경."

"예, 성녀님."

"랄랑드 성표에서 아이리안 지역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라테라노 성국의 수도 헤네랄리페엔 거대한 순백의 성황궁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성황궁의 지하엔 전 세계의 마녀를 추적할 수 있는 '랄랑드 성표'가 자리한다.

올리시렌의 각성을 추적한 것도 랄랑드 성표의 반짝임이었다.

그러한 변화의 추적을 담당하는 것이 이단심판성.

마우로 세노초크 추기경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리안 지역은 엘프 여왕의 영향력으로 마녀의 각성 때를 제외하곤 제대로 표시가 안 돼서...."

"알겠습니다."

카테리나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꺾어 바르베타의 어깨 너머로 에드먼드를 살펴보았다.

"혹시 그 마녀의심자와 에드먼드 사이에 자녀가 있습니까?"

바르베타는 눈을 반짝였다.

이 부분을 말하기 위해 말을 에둘렀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리안 섬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카인 에셀레드가 클로에와 에드먼드의 아들입니다."

반면 카테리나 성녀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 몰랐다는 듯 바르베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벨과 이복형제라는 걸 떠올리며 금세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에드먼드 님이 마녀의심자를 숨겼다면 어디가 유력합니까."

바르베타는 위를 가리켰다.

하늘이 아니라 지도상의 북.

"북방엘프의 숲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이라면 저희가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카테리나는 마우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에드먼드 백작이 가려 하는 곳도 북방입니다."

"재미있군요."

카테리나는 대리석 조각이 지을법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성검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마녀에게 홀려 잠시 삿된 길을 가려 한다면, 정정하는 것이 성녀로서의 업.

"일단 북방에 가면 알 수 있겠군요."

성녀의 결정에 바르베타와 마우로는 고개를 숙였다.

후우우우.

바람이 불었다.

에드먼드는 흘깃 셋을 바라보더니,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은 건가?'

카테리나는 그 순간 마주한 에드먼드의 무심한 눈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성법의 무음 결계로 분명 소리를 막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눈빛은 모든 걸 안다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 * *

성녀의 행차지만 아이리안 총교구에서 마련한 파티는 10명 남짓한 소수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장소라면 성전의 대군세라도 일으키겠지만, 아무래도 미지의 북방엘프의 숲이라면 인원이 많아 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

가능한 한 정예 중의 정예만 모았다.

아이리안에 파견된 팔라딘 다섯과 이단심판관 출신 셋.

그리고 성녀와 추기경.

평범한 상단으로 위장하여, 가장 가까운 열차역에 내렸다. 그 후 길잡이를 구해 최단 거리로 북방 엘프의 숲에 닿았다.

"도착했습니다."

길잡이가 울창한 숲 앞에서 멈췄다. 성국의 파티보다 조금 앞서 걷던 에드먼드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성직자만 입을 수 있는 옷과, 긴 천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잘했소."

"여기서부턴 외곽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내부의 진짜 엘프의 숲엔 닿지 않길 바랍니다."

팅-!

에드먼드는 은화를 엄지로 튕겨 길잡이에게 던졌다.

"숲 안은 내가 더 잘 아오."

"...예예."

길잡이는 얼굴을 가린 천의 틈 사이로 보이는 무감각한 눈을 마주하곤 돈을 쥐고 곧장 사라졌다.

에드먼드는 이번에도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십니까?"

카테리나의 물음에 에드먼드는 턱을 쓸었다.

"딱히 이상하진 않소.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하다?"

"별것 아니오. 그 전에 내 변덕에 성녀님부터 해서 다들 움직여 주다니 참으로 감사하오."

에드먼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작답지 않게 가벼운 머리였지만, 그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성국의 일행들은 마주 인사했다.

그 순간.

"미친놈."

화아아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북방 엘프의 숲 안쪽에서부터 차디찬 바람이 불었고, 바람결에 여인의 목소리가 실려 있었다.

"네 운명은 에이레에서 죽는 건데, 어떻게 살아온 거야?"

"모른다, 글루미엠."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

세상에서 여덟 번째로 나타난 마녀이자, 엘프여왕 글루미엠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성국의 인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이렇게 입구부터 만날 줄은 몰랐지만, 최악을 대비해 뒀기에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화아아아아-.

다시금 바람이 불었고.

"하긴, 너 같은 놈에게 그런 걸 묻는 내 잘못이지. 왜 왔지?"

"궁금한가?"

카테리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에드먼드의 어조가 바뀐 건 하나도 없지만, 그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

"건방지구나."

"나는 너와의 거래로 에이레에 스스로 들어갔다."

성녀 일행을 포함해 아이리안 대부분은 에드먼드가 두 후작의 정치질에 들어간 걸로 알았지만, 조금 더 깊은 일이 있다는 걸 조금 전 대화로 눈치챘다.

"그래서? 나는 모든 엘프의 여왕인 글루미엠이다. 숲에서 어쩌겠다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만."

척-.

에드먼드는 허리춤에 매달린 세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후우우우우-.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거세고 차갑다 못해 시린 살기가 숲을 향해 쏟아진다.

해를 찔러 떨어뜨리는 그의 검이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앉아 있는 글루미엠을 노린다.

"방해하면 죽인다."

"네놈!"

"방해하지 않으면 나도 먼저 건드리지 않겠다."

"이전 원정 때처럼 네놈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쿠르르르릉-.

숲이 진동한다.

성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강해. 이게 여덟 번째 마녀인가.'

오래된 마녀일수록 강한 만큼, 글루미엠이 보이는 힘은 그녀의 모든 신경을 건드릴 정도로 섬뜩하고 마녀다웠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돌려 카테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

들썩-!

그녀가 어깨에 메고 있던 상자가 열렸고 성검, '여름'이 허공을 날아 에드먼드의 손에 잡혔다.

손이 닿는 부분부터 찬란한 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스윽-.

에드먼드는 왼발을 앞으로 디디며 몸의 중심을 낮췄다. '여름'을 가슴께 앞 횡으로 잡아 들며 숲을 향했다.

"설마 황혼의 오러가 밤을 갈랐던 것이...."

글루미엠의 목소리가 떨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성검 '여름'.

평범한 철검을 쥐어도 무시무시한 에드먼드의 손에 쥐어진 성검은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다시 말하지. 방해하면 죽인다. 방해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선명한 그의 갈색 눈에 천천히 살기가 피어오르면서 멀리서 보면 금빛으로 보였다.

"...."

그리고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사라졌던 길잡이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에드먼드 백작으로 추정되는 자를 북쪽의 길잡이가 발견했어."

올리시렌은 왕실정보국이 올린 자료를 보며 맞은편, 카인에게 말했다.

카인은 애꿎게 찻잔만 돌렸다.

그녀는 예상했던 반응에 피식 웃곤 다른 서류를 들어서 보였다.

"로스 후작에 대한 정보부터 들을래?"

"엘프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가 나왔나?"

"그건 아닌데 나름 재미있는 정보더라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73 EP.Ⅰ-19

내생에 봄날은 (2)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

"미들네임이 로스라면, 로스 후작가의 기사?"

카인의 반문에 올리시렌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서류를 들어 시그마리의 사진을 보여 줬다.

"정확히는 기사단장. 머리는 초록색이고. 기사단장이 된 지 꽤 되었는데 하나도 안 늙었고 말이야."

"평범한 인간의 머리가 초록색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 매일 바깥으로 나가 싸우는 기사가 수십 년 동안 겉늙지 않을 가능성도 낮고."

올리시렌은 다음 장을 넘겨 한 줄로 적힌 결론을 가리켰다.

-로스 후작가의 시그마리 기사단장은 엘프 혹은 하프 엘프로 추정됨.

-명확한 증거는 발견 못함.

이미 서류를 살핀 올리시렌은 간단하게 줄였다.

"알려지지 않은 출생과 과거, 나이나 외모에 비해 엄청난 실력, 과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우리 왕실정보국은 꽤 확률이 높다고 봐."

"명확한 증거가 없을 뿐?"

그녀는 입맛을 다시면서 '명확한 증거'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엘프가 인간사회에, 그것도 후작가에 녹아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뭘 증거로 잡아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카인은 팔짱을 끼며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군. 하나하나는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로스 후작의 기사단장이라면 확실해."

올리시렌은 카인을 훑어보았다.

칼만 뽑으면 달려들기 바쁘지만, 그 전이라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한 게 그다.

그러나 로스 후작가에 관련된 건 너무도 빠르게 결정 내리고 있는 게 영 어색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아는 거야?"

"너도 본 거다."

올리시렌은 카인이 이전에 설명해 주었던 걸 떠올렸다.

"아! 숲의 비전!"

그녀가 떠올린 것은 로스 후작이 보냈다는 기사들의 오러 색깔.

"그래. 기사가 피워 내는 오러의 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확실한 건 없지만, 대개는 그 사람의 성향으로 갈리더군."

"뭘 익히냐에 따라서 성향이 달라지고?"

"대개는 그렇지 않지만, 엘프의 비전은 익히는 자의 성향을 하나로 만드는 쪽이다."

"어떻게?"

카인은 잠시 턱을 쓸었다.

굳이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숲에 가면 말해 줄게. 듣는 거랑 직접 겪고 보는 거랑은 확실히 다르니까."

"...."

에셀레드 백작령에만 있던 카인이 북방숲에 간 적이 없을 텐데, 마치 직접 가 본 것처럼 말을 하니 어이가 없다.

올리시렌은 잠시 카인을 흘겨보았다.

카인은 뺨을 만지며 물었다.

"뭐, 묻었나?"

"...반질반질한 게 뻔뻔해 보여서."

"칭찬 고맙다."

그 의도가 뭔지 훤히 보였기에, 카인은 능글맞게 받아쳤고, 올리시렌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곤 엘프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 카인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엘프가 귀를 숨기고 인간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어."

카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른 평범한 엘프들은 전쟁 중이 아니니까."

죽느냐 죽이느냐.

아무리 삼백 년 가까이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고 해도 아이리안 왕국과 엘프는 전쟁 중.

아무리 엘프가 인간으로 분장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리를 위해선 백 번도 할 것이다.

"게다가 여왕부터가 마녀인데, 뭘 못할까."

"하긴."

팔랑-.

그녀는 서류를 넘겼다.

장난스러웠던 표정을 지우곤 진지하게 카인을 돌아보았다. 카인 역시 얼굴을 굳혔다.

"사실 이제부터 본론이야."

"뭔데 이렇게 무게를 잡아."

"클로에 님의 사망 발표 이틀 전에 에드먼드 백작과 시그마리 기사단장이 접촉했다는 기록을 발견했어."

꽈악-.

카인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물과 기름보다 더 어울리지 않을 둘이 만났다는 사실은 카인의 뒤 허리에 얼음을 꽂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클로에 님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아들인 나도 시체를 보진 못했지."

"왕실정보국에서도 사실은 클로에 님이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나 봐."

"추적해 봤나 보군."

올리시렌은 고개를 끄덕이곤 표로 정리된 다음 장을 보여 주었다.

아이리안 섬 중남부에 존재하는 왕국의 전 지역들의 지명이 적혀 있고, 그 옆에는 X표시가 되어 있었다.

"교단 안에 있어도 어떻게든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을 텐데, 정말 아무데도 안 계셨어. 그렇다는 건...."

"정말로 죽어서 몰래 묻혔거나, 북방 엘프의 숲에 있다는 소리겠군."

왕실정보국의 눈이 닿지 않는 두 군데였기에 카인은 올리시렌의 뒷말을 쉽게 예상했다.

"게다가 며칠 전엔 교단 측에서도 에드먼드 백작과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다는 정보도 있어."

"확실한가?"

올리시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니야. 에드먼드의 감각 때문에 가까이서 수집한 정보는 아니니까."

"이것도 정황만 보인다 정도군."

"그래."

카인은 한쪽 팔걸이에 팔을 올리곤 턱을 괴었다.

후우우우-.

열린 창틈 사이로 봄바람이 불었다. 퀴퀴한 아이언하트의 매연은 적었고 맑은 꽃향기만이 둘의 사이를 갈랐다.

툭.

분홍빛 꽃잎 하나가 카인의 찻물 위로 떨어졌다.

카인은 금색 티스푼으로 건져 내며 입을 열었다.

"마녀인 걸 눈치챈 교단을 피해서 에드먼드 백작이 북방 엘프의 숲으로 어머니를 도피시켰다는 게 되나."

"도피를 위해 시그마리와 협상이 있었을 것이고."

타락-.

카인은 발람과 싸울 때 봤던 환영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명확한 사실은 알 수 없었지만, 카인은 가능한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가지고 생각했다.

즉, 위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로스 후작이 에드먼드 백작에게 요구한 게 뭔지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에드먼드 백작이 단순하고 정치에 눈이 어두워서 두 후작의 음모에 던전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투 속에서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아버지를 오해해 왔던 그의 과거가 내는 맛이리라.

"사실 일반적인 백작이 그렇게 순순히 던전에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야."

"아내를 살리기 위해 살아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던전에 들어갔다라."

카인은 찻물 속으로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뽀얗고 하얀, 어린 얼굴.

이 얼굴이 자라서 밑바닥 용병이 되고 대장벽으로 흘러가 전사가 된다.

'그리고 동생의 가슴에 칼을 꽂지.'

그 모든 비극의 시작을 찾으라면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의 실종이리라.

그가 사라지면서 두 후작가는 야욕을 드러냈고 아벨을 이용해 자신을 축출했다.

『사계』가 시간을 돌려 멈춘 것이 절벽에서 아벨과 싸우던 날이던 것만 봐도 모든 분기점의 시작은 그날.

그리고 그날을 만든 건 에드먼드의 부재.

'난 에드먼드의 선택을 늘 멍청하다고 욕했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카인의 마음에 났던 상처가 그러했다.

이제는 완전히 아물어 흉터만 희미하게 남았지만, 성숙하지 못했던 과거의 카인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당연히 에드먼드였다.

하지만, 멍청한 선택이 아니라.

클로에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간신히 봉합되었던 상처가 벌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올리시렌은 생각에 빠진 카인의 눈치를 보다가 처음에 하다 만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북쪽의 길잡이가 에드먼드임을 확신하지 못하던 건 성직자의 옷을 입고 성국 사람들과 같이 있어서래."

"성국?"

카인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백 번 양보해도 에드먼드와 성국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세검을 들고 숲을 향해 자세를 취했다고 하더라고. 그 살기에 주저앉을 뻔했다고 하니...."

"맞겠군."

아이리안에서 세검을 들고 그 정도를 보일 사람은 자신과 에드먼드 둘 말곤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을 정리했다.

예상치 못한 과거가 드러나는 찰나.

덜컹-!

"왕녀님, 총사령관이-."

가릭 백작과 디그리드 백작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린드브룸 왕궁에서 귀족회의를 하고 바로 올리시렌에게 온 모양.

다만, 카인이 있을 줄 몰랐기에 두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

"이번 북방원정. 아니죠, 엘프 전쟁의 총사령관이 정해졌습니까?"

카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가릭 백작은 헛기침을 하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네. 자네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어."

사실 가릭과 디그리드 백작은 카인이 대뜸 올리비아가 총사령관이 될 거라고 말할 땐 의아했다.

지금까지 왕가의 인물만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만큼 늘 하이볼트가 맡았다.

아무리 두 후작이 뭐라고 해도 하이볼트가 당연히 올리시렌에게 줄 거라 예상했으니까.

판세를 읽고 판단하는 카인의 눈에 두 백작은 소름 돋았다.

디그리드 백작도 가릭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밤이라도 샌 듯 눈두덩이가 시커멨다.

"2왕녀 올리비아가 정말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올리시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올리비아는 이제 열일곱이에요. 성년식도 치르기 전이라고요. 아무리 권력이 중요하다고 한들 애를 어떻게 전장에...."

가릭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말리는 대신들도 많았지만, 로스와 맥로든 두 후작이 동시에 지지하고 나서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원정군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할 둘이 힘을 합쳐 주장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리고 두 백작은 카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열일곱이라는 이유로 올리비아의 총사령관 임명을 거부한다면 같은 나이의 카인 역시 암묵적으로 인정되던 로드 에셀레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외통수군요."

올리시렌은 본능적으로 손톱을 물려고 했다.

카인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방해하곤 두 백작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공작을 만들어서 왕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걸 넘어서, 올리시렌은 아무것도 못하는데 올리비아는 총사령관까지 맡아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걸 보여 주겠군요."

"맞아. 올리비아에게 왕위가 가는 건 자연스럽다고 어떻게든 홍보할 거야. 피를 흘린 자와 피를 흘리지 않은 자의 차이는 명확하니까."

카인은 올리시렌을 잠시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그럼 에셀레드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예상했던 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진즉, 계획은 세워두었다.

가릭 백작은 당황한 듯 언성을 높였다.

"총사령관의 명은 왕명과 같네. 그걸 어긴다는 건 반역이야!"

"왕명도 닿아야 명령입니다."

카인의 짧은 말.

두 백작과 올리시렌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카인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총사령관의 명령을 듣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 저희가 들어간다면, 현장 지휘권은 총사령관에서 당장 명령이 가능한 올리시렌에게 이양됩니다."

"그렇지! 왕가의 인원이니 그녀도 명령권을 가질 수 있어!"

디그리드 백작은 일어서며 외쳤다.

"네. 그리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면 명분상으로도 문제가 없고, 올리비아에게 몰리는-."

덜컹.

다시금 문이 열렸다.

이번에 뛰어 들어온 건 아벨과 밴더빌트였다.

이 순간에 들어온 둘을 보자 카인은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에셀레드 본성과 연락을 담당하는 아벨이 말할지 말지 우물쭈물하자 카인은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말해도 돼."

"올리비아 총사령관의 첫 번째 명령이 에셀레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백작이 부재중이니 이번 원정에는 참여하지 말고 가능한 전력을 보존하라고...."

카인은 목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재밌네?"

조금 전에 느낀 서늘함은 칼날의 서늘함이 아니라 정치의 서늘함이라는 걸 알았기에.

"상대편에 앉아 있는 자들이 말랑말랑한 호구가 아니었군."

로스와 맥로든 그리고 글루미엠까지.

아이리안의 두 거인과 괴물이 카인 에셀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74 EP.Ⅰ-19

내생에 봄날은 (3)

로스 후작성의 집무실.

헤터워드 로스 후작은 턱을 괸 채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두 개의 체스판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날뛰어 봤자 너는 에드먼드가 될 수 없어."

툭-, 툭.

왼쪽 체스판에 놓인 검은 나이트를 손가락으로 치며 중얼거렸다.

카인 에셀레드의 존재로 맥로든 후작과 짜 왔던 계획이 많이 어그러졌다.

하지만 에드먼드처럼 존재만으로도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정도가 아니라면, 방법은 늘 있는 법.

탁-.

나이트를 들어 왼쪽 체스판에서 오른쪽으로 옮겼다.

새로운 체스판.

기존엔 같이 있는 무리가 많았지만, 이젠 없다. 홀로 서 있는 흑색 나이트를 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판 자체를 짜는데 칼 좀 휘두르는 정도로 무엇을 하겠느냐, 카인."

그리고 로스 후작의 눈이 데구루루 움직이다 체스판의 밖으로 향했다.

두 체스판의 사이.

홀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킹을 잠시 째려보았다.

"하이볼트...."

후작들이 하는 계획을 모조리 방해하고 엎을 수 있지만 눈을 감은 왕, 하이볼트.

아무리 후작이라고 해도 그의 이름을 이렇게 불러선 안 되지만 로스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엔 살기까지 서려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서지 말라. 그렇다면 네 목숨만큼은 계속 이어 줄 테니까."

하지만, 올리시렌의 목숨은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준비는?"

"언제든지."

달빛이 비치는 창가 아래.

꼿꼿하게 서 있던 시그마리는 이슬이 맺힌 나뭇잎처럼 웃어 보였고, 로스 후작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일국의 왕녀가 마녀인 게 들키고 그런 마녀를 지원하던 귀족들은 성국에서 치워 줄 테니 아주 마음에 들어."

스스로가 세운 계획들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느낀 로스 후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시그마리는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후작님, 에드먼드 백작이 숲에 나타났습니다."

"...."

그는 웃는 채로 굳었다.

아무리 판을 잘 짜고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절대 통하지 않는 존재가 에드먼드였으니까.

"다행인 건 곧장 숲 안으로 들어가 북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계는 전혀 관심이 없나 보군."

"네. 그리고 성국의 성직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국...?"

로스 후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피식 웃어 버리곤 집무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붉은 소파를 응시했다.

차라라-.

그 옆, 투명한 유리컵 안 얼음들이 녹아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금빛의 위스키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에드먼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알 수 없는 놈이에요, 에버윈."

"...."

시그마리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는 소파를 향해 말하는 로스를 익숙한 듯 보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로스 후작은 시그마리가 사라지는 걸 흘깃 보곤 빈자리를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 * *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방을 비추는 마법 등불에 번쩍인다. 그리고 그 눈은 두 백작과 올리시렌을 훑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무엇이든."

가릭 백작은 당당히 답했고 디그리드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할 준비를 했다.

"카를라 오우드리."

"...."

하지만 카인이 던진 이름의 파괴력은 강했다.

아이리안 칠대귀족이자 어릴 적 친구로서 같이 다니던 두 백작의 입을 꽉 닫게 했으니까.

카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올리시렌 쪽으로 향했다.

"그 본명은 에버윈 로스라고 하셨죠. 현 로스 후작의 친누나라고 했고요."

"그랬지."

"올리시렌, 뭔가 알아낸 건 있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1왕녀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국왕 하이볼트와 카를라의 하나뿐인 딸이지만, 어머니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그녀는 폭풍우 치는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일렁이는 마음을 억누르고, 입을 꾹 닫는 두 백작을 향해 눈을 떴다.

"없었어. 정확히는 내가 열람할 수 있는 왕실정보국의 정보엔 단 하나도 없어."

"너보다 더 강한 권한을 지닌 사람은?"

"아버지뿐이야."

콰릉-!

분명 낮에는 날씨가 괜찮았다.

하지만 해가 지면서 먹구름이 성큼성큼 몰려오더니, 저 멀리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토톡, 톡.

카인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어둠 속에서 서늘한 안광을 빛냈다.

"로스 후작은 올리비아를 지지합니다. 크게 보면 올리시렌은 조카인데,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2왕녀를 밀고 있죠."

"...."

"국왕도 이상합니다. 여기 올리시렌을 분명 차기 왕위계승권자라 발표했는데, 정작 하는 건 하나도 없죠."

콰르르르릉-!

아까 전보다 더 요란해진 천둥.

번쩍이는 번개의 불빛 속에 카인은 손가락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도 2왕녀를 총사령관으로 만들겠다는 두 후작의 떼를 받아 주고요."

"그러고 계시지...."

"이 상태 그대로는 답이 없습니다."

셋은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상 엘프전쟁이 확정된 탓에, 카인이 지금까지 백작가들을 회유하고 접수하던 방법은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두 후작이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 둔 이 판은, 개인의 무력으로 뒤엎을 수가 없다.

카인은 답답하여 재차 물었다.

"카를라에 얽힌 비사가 도대체 뭡니까. 뭐길래 로스 후작이 날을 세우고, 하이볼트 국왕은 그녀가 죽고 나선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

"말할 수 없네...."

가릭 백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거절했다.

"이 상황에도 우리가 말을 안 하는 건, '신뢰의 맹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야."

뒤를 잇는 디그리드의 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백작들에게 신뢰의 맹약서까지 쓰게 한 것인가.'

명문가에 은밀히 내려온다고만 들었지, 카인조차도 직접 본 적 없는 아티팩트, '신뢰의 맹약서'.

효과는 간단했다.

해당 맹약서에 사인한 사람은 맹약서의 맹약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만약 맹약을 어긴다면 그들이 대가로 건 걸 빼앗기고.

디그리드 백작은 자신과 가릭을 번갈아 가리켰다.

"목숨과 더불어서 나는 마나를, 이 친구는 명예를 걸었네."

"사실상 두 분이 지닌 모든 걸 거셨군요."

"그래."

"당시 일을 알고 말할 수 있는 건 하이볼트 국왕뿐이고요?"

콰르르릉-!

다시 한번 번쩍이는 번개.

가릭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둘일세. 하이볼트와 에드먼드."

"에드먼드 백작은 왜 빠진 겁니까."

"하이볼트가 에드먼드는 맹약서 따위를 적지 않아도 입을 열지 않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럴 리가 없지.'

하이볼트 국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친우처럼 지내던 다른 둘에겐 맹약서를 받고 에드먼드에겐 받지 않은 이유가 분명 있을 터.

카인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황에 답답함을 삭이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밤.

저 북쪽 숲에 가닿기 전에 존재하는 수도, 린드브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인이 바라보는 끝에는 철옹성의 둥지 속에서 침묵하는 국왕이 있었다.

'이전 세계선에선 별일은 없었다.'

카인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로스 후작가에 넘어간 에셀레드에서 쫓겨나고 대륙으로 흘러 들어간 탓에 아이리안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문과 전보가 발달한 대륙에서 정보를 보려면 못 볼 것도 없다. 큰 소식이면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고.

'국왕은 자연사. 1왕녀는 마녀로 몰려서 사망. 그리고 2왕녀가 새로운 왕이 된다.'

왕위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런 큰 소식.

카인은 올리시렌이 죽고 올리비아가 왕이 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 후 아이리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귀족들의 입김으로 흔들린다더라.

새로운 여왕이 문란하다더라.

북쪽의 엘프들이 밀고 내려왔다더라.

수많은 뜬소문 중에 분명했던 건, 지금의 굳건한 아이리안은 사라지고 유약하고 이름만 남은 국가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총사령관은 2왕녀가 가져갔고, 에셀레드의 병력은 막혔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나 라마이닝의 병력을 따로 움직이는 건 바로 반역이고요."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전을 격화시키고 바로 반역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반대야. 그럴 바엔 내가 광장에서 화형당하는 게 나아."

올리시렌은 단호했다.

차라리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져서 아이리안이 전쟁의 화염에 불타는 건 볼 수 없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선 카인에게 몇 번이고 말했고 카인도 그녀의 숭고한 의견을 존중했다.

"우리는 그대의 뜻을 따르겠네."

"나도."

가릭과 디그리드 백작은 카인을 향해 말했다.

쏟아지는 셋의 시선 속에서 카인은 창틀에 두 손을 짚곤 어른어른 자신이 비추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뒤로 셋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고, 저 앞으로는 꽃의 초원에 무수한 비가 내리고 있다.

그 아래.

발전한 도시인 아이언하트답게 마법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이 우산이나 비옷을 입고 종종 걷는 게 보였다.

카인은 한참이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에 검은 머리를 한 얼굴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기해. 아벨 하나만 생각해. 어차피 아벨이 용사가 되지 않게 하고 잘 살게 하는 게 목표였잖아?

마음속에서 울리는 맨 처음 자신이 가졌던 생각에 카인은 쓰게 웃었다.

지금도 저 목표가 달라진 건 아니다.

-어차피 마녀면 글렀지. 숨긴다고 해도 숨겨지겠어?

성국 놈들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카인도 잘 안다. 오죽하면 대장벽까지 쫓아와서 이단을 색출해 내려고 했을까.

-이 섬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황이 꼬인 이상 그냥 버려. 아벨을 죽게 만든 그 보통 사람들이나 찾아서 죽이자고.

툭.

카인은 몸을 돌려 창틀을 기대섰다. 그러곤 자신을 바라보는 셋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너 혼자만 잘 살면 되는 거야.

이윽고 카인은 입을 열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오오?"

디그리드 백작은 꽉 막힌 상황에서 방법을 생각해 낸 카인에게 놀랐고.

"방법이 있다고?"

올리시렌은 떨리는 눈동자로 반문했다. 카인이 선택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엇인가."

이어지는 가릭 백작의 물음.

-너만 생각해, 너만.

"상황이 이렇게 꼬인 건 하이볼트 국왕의 모호한 태도 때문입니다. 계승권은 올리시렌에게 주고 후작들이 떼쓴다고 2왕녀에게 총사령관을 준다?"

"그렇지...?"

올리시렌의 말끝이 떨린다.

카인이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맥로든 후작이야 제 손녀가 2왕녀니까 거기로 붙겠죠. 그런데 로스는 왜? 혈연으로 따지면 조카인 올리시렌을 더 지원해야겠죠."

"...."

아이리안의 권력 구도에 숨겨진 비밀.

"에버윈 로스."

콰릉-.

다시금 치는 번개를 등지고 카인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러곤 북으로 난 유리창을 가리켰다.

"방관하고 있다고 하나 중요한 건 다 하이볼트 국왕이 쥐고 있죠. 그럼 우리끼리 고민한다고 뭐가 풀리겠습니까."

순간 디그리드와 가릭은 입을 쩍 벌렸고 올리시렌의 두 눈은 부릅떠졌다.

"서, 설마 아버지를 암살하려고?"

"카인, 자네가 강하다곤 하지만 그건-."

카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절 어떻게 생각하시면 그런 말이 먼저들 나오는 겁니까."

"자네가 그간 해 온 걸 생각해 보게."

"...."

아무리 카인이라지만, 그들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만하게 행동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필요하면 하긴 할 겁니다."

"역시!"

실제로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국왕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이볼트는 정례회의를 제외하곤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어."

카인은 올리시렌을 가리켰다.

"그래도 설마 딸이 보자는 것도 싫다곤 안 하시겠죠?"

"카인."

콰르르릉-.

다시금 치는 번개.

그리고 쏟아지는 백색에 올리시렌의 회색빛 눈이 반짝였다.

"왜?"

많은 뜻이 들어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잘 살려고."

"그러면 이런 가시밭길이 아니라 올리비아에게 가는 게 나아."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

"여기 있는 모두, 아벨, 아르나, 밴더빌트, 에셀레드 영지, 라마이닝-."

마음속의 자신에게도.

현실을 사는 자신에게도.

세계선을 건넌 자신에게도.

"지금의 내가 가진 게 좀 많아졌거든."

고독하고 찬란했던 가면의 설원공 로드이스트 카인이 아니라, 따스하고 반짝이는 카인 에셀레드의 대답이었다.

"왜 우리 이소엘은 이야기 안 하나?"

그 뒤로 디그리드 백작의 작은 물음이 있었지만, 셋은 듣지 않은 척했다.

#75 EP.Ⅰ-19

내생에 봄날은 (4)

논의는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두 백작은 카인의 말대로 움직였고, 카인과 올리시렌은 아이언하트로 왔던 일행 그대로 움직였다.

"아벨."

그렇게 도착한 기차역의 귀빈실.

카인은 아벨에게 말했다.

"너는 에셀레드로 돌아가라."

"...예?"

당연히 카인의 옆에서 왕도 린드브룸까지 갈 줄 알았던 아벨은 눈을 부릅떴다. 카인은 에셀레드가 있는 서쪽을 가리켰다.

"말을 타고 에셀레드로 가서 이걸 아르나 님과 클로이드랑 함께 읽어."

툭.

카인은 붉은 인장으로 단단히 밀봉된 편지 하나를 건넸다. 아벨은 반사적으로 받았지만, 갑작스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차를 타고 라마이닝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에셀레드까지 말 타고 가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급한 편지라면 가장 빠르게 에셀레드로 돌아가는 방법은 아벨의 말이 맞다.

하지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왕국법에 따라 기차를 이용하려는 자는 모두 신분을 철도청에 밝혀야 해."

"왕녀도 예외는 없더라고."

올리시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철도가 처음 아이리안에 설립될 무렵 워낙 많은 테러나 범죄가 일어나면서 왕국법으로 정해졌다.

그 이후로는 철도에선 사소한 범죄는 벌어져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카인은 자신과 아벨을 번갈아 가리켰다.

"즉, 적은 우리가 기차를 예약한 순간,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고 있다는 거다."

"로스 후작가가요?"

"그래. 현재 철도청장인 루브릭 남작은 로스 후작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자랐거든."

카인은 올리시렌을 향해 고맙다는 표현을 담아 눈을 찡긋했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벨은 까끌까끌한 봉투를 손가락으로 문대다가 바닥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말고 밴더빌트 경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카인이 자신을 보내는 건 이유가 있으리라.

하지만 아벨은 너무도 아쉬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전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밴더빌트도 적합하니까.

카인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밴더빌트를 흘깃 보곤 아벨의 말을 부정했다.

"그는 에셀레드의 기사가 아니야, 내 기사지. 하지만 너는 에셀레드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잖나."

"...!"

아벨은 카인의 말에서 은은한 피 냄새를 맡곤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꼭 네가 가야 해."

그 피는 적의 것이라.

직감적으로 아벨은 자신이 들고 있는 이 편지의 내용이 위험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툭.

카인은 살짝 굳은 아벨의 어깨를 두드렸다.

"믿는다. 너밖에 없어."

아벨은 밴더빌트를 바라보았다. 노기사는 다시 험한 길을 돌아갈 아벨을 향해 묵례했고, 아벨도 그의 인사를 따라 했다.

"무탈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카인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 안부 인사를 했다.

카인은 쓰게 웃었다.

"너야말로. 그 편지를 열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맨날 왜 제겐 돌이킬 수 없다고만 하십니까, 형님."

굳은 아벨의 갈색 눈.

카인은 그 위로 피를 토하며 마지막만큼은 스스로 선택했던 용사를 겹쳐 보고 있었다.

"저는 형님을 만나곤 단 한 번도 돌아가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건 배신당하고 자신을 잃어버린 용사 아벨이 아니라, 카인의 등을 바라보며 자라는 소년 아벨이었다.

"...그래."

카인은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억눌렀다.

눈물인가 기쁨인가.

알 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용사 아벨의 시간은 이젠 오지 않을 것이다.

카인 역시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는 할지언정 현재를 포기하고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너는 아벨이구나.'

아르나를 살렸고, 아벨도 살린다.

용사 아벨의 그림자를 지워 내며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너를 보내는 거다."

투웅-.

아벨은 카인의 편지를 품에 넣고, 그 위로 꽉 쥔 주먹을 소리 나게 올렸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그러곤 옷깃을 세워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카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에셔."

"예!"

"따라가."

"예?"

가만히 있던 평기사 에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 혼자 보내? 수행 기사 한 명쯤은 있어야지."

"예, 예스! 로드 에셀레드!"

에셔는 자신의 몸통만 한 방패를 등에 단단히 매고는 허둥지둥 아벨의 뒤를 쫓았다.

"에셀레드 기사단 소속 둘을 보냈네?"

올리시렌은 카인에게 속삭였다.

"눈치가 빠르군."

아벨이 그러했듯, 그녀도 카인의 말에서 은은한 피 냄새를 맡았다. 마녀로서의 직감이자 왕녀로서의 판단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써서 보낸 거야?"

"곧 알 수 있을 거야."

"나한테도 못 말해 주겠다?"

휘릭.

카인은 크로울에서 준비해 준 흑색 코트를 입었다. 안쪽에 단단히 장비한 무기와 방어구를 가리기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올리시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카인의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적의 대군세 앞에 홀로 맞서는 기사의 모습 같아서, 올리시렌은 장난으로라도 더 이상 쏘아붙일 수 없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열차표를 들었다.

"가자고."

"그래. 이번 열차 여행에선 별일 없었으면 좋겠군."

카인의 작은 바람.

그 소리에 듣고 있던 밴더빌트나 이소엘은 움찔했다. 그리고 올리시렌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뚝을 쓸었다.

"설마. 또 얼음다리를 만들거나 싸우거나 할 일은 없겠지."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아갔다.

"거기까진 없겠지만, 피 볼 일은 있을 거 같군."

"너 불길하게 그런 말 할래?"

"칼을 뽑아야 할 때 안 뽑을 수는 없잖나."

티격태격.

카인과 올리시렌이 말을 이어 가며 개찰구로 나가는 걸 바라보며 밴더빌트와 이소엘도 둘을 따랐다.

간밤에 요란하게 내리던 비는 여전한 듯, 하늘엔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긴 증기를 내뿜으며 넷을 태운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 * *

"모든 왕도행 열차가 린드브룸에 바로 도착하지 않는 건 알지?"

올리시렌은 놀릴 거리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카인에게 말을 걸었다.

입을 닫고 흘러가는 창밖 풍경만 바라보던 카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나를 놀리고 싶나?"

"아니, 에셀레드는 기차도 안 들어오는 곳이니까. 혹시 아나 싶었지."

"어차피 너도 왕녀라 많이 안 타 봤으면서."

"그건... 맞아."

올리시렌은 뺨을 긁으며 수긍했다. 대개 장거리를 움직이는 기차의 특성상 린드브룸을 벗어날 리 없는 왕녀가 탈 일은 극히 드물었다.

"육지의 항구, 메이누스."

카인은 툭 뱉었고, 올리시렌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네?"

"열차가 수도까지 직통으로 가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본래 메이누스는 평범한 평야 지대였다. 특징이 있다면 린드브룸과 멀지 않다는 것만 있었고.

아이리안에서 처음 철로를 깔 땐 남부의 백작가와 중부의 후작가의 철로를 린드브룸에 집중하고자 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반란이나 외세가 쳐들어온다면 수도가 순식간에 위험해질 수도 있는 법.

따라서 메이누스 평야로 에셀레드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귀족가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모았다.

그래서 왕도로 가려면 우선 메이누스로 가서 린드브룸으로 가는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물길이 모이면 항구가 되듯.

기차의 흐름이 모이는 메이누스엔 사람들이 하나둘 정착하며 이젠 상당히 큰 상업 도시가 되었다.

그런 메이누스의 별명이 육지의 항구였다.

"카인."

올리시렌이 목소리를 낮춘다.

그녀는 작은 쪽지 하나를 두 손가락에 껴서 들었다.

"몇 시간 전, 메이누스에 시그마리 기사단장이 나타났다는 말이 있어."

로스 후작가의 기사단, <로스 데 캐롯>의 정점. 그리고 엘프로 의심받는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

아마도 왕실정보국이 긴급으로 보낸 정보일 터.

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전 승무원이 왜 들어왔나 했더니, 정보국 소속이었나.'

올리시렌이 타고 있는 VIP 객차엔 철도청 승무원들도 쉽게 들어올 순 없다. 다만 아까는 이소엘이 잠시 나가서 불러 와선 먹을 간식 등을 준비해 줬었다.

그때 카인은 올리시렌의 냅킨이 다른 사람의 것과는 조금 더 평평하지 않은 걸 봤었다.

아마도 저 쪽지가 들어 있었으리라.

"혼자?"

카인은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고.

"아니, 기사단 하나 정도의 숫자와 동행해 왔다고 해. 당연히 복면을 쓰고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고."

"재미있군. 북방원정을 기획 중인데 기사단장이 내려와 있다라."

카인은 턱을 쓸었다.

인간의 기사단을 이끄는 엘프인가, 그저 머리카락 색이 특이하고 잘 늙지 않는 인간일 것인가.

"직접 보면 알겠어. 인류의 배신자인지 아닌지 말이야."

"싸울 거야?"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에서 묻어 나오는 묘한 느낌에 반문했다. 그러자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기회만 되면 칼을 뽑는 사람인 줄 아나."

"아니야?"

"...맞긴 하지."

카인은 스윽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올리시렌은 이제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할 건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똑똑-.

올리시렌은 왕녀의 권한으로 기차의 한 량을 통째로 빌려서 쓰고 있었기에 누군가의 노크가 멀리서 들렸다.

"누구시죠?"

이소엘은 자연스레 칼을 손에 쥐며 물었다.

이번엔 부르지 않은 불청객이었으니까!

똑, 똑.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뚝뚝 끊어지는 노크였다.

척.

그리고 노크가 끊어지기 전에 카인은 물론, 밴더빌트도 무기를 손에 쥐었다. 좋은 의도로 온 건 아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누구냐."

밴더빌트는 대검을 손으로 쥐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돌아오는 건 맑은 여인의 목소리.

예상치 못한 답에 셋은 카인을 돌아보았고,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매정하시군요. 그쪽에서도 저를 보고 싶어 하는 걸로 알고 찾아뵈러 왔습니다만."

스릉-.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뽑았다.

그리고 얇은 나무문 건너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부러 칼 뽑는 소리를 크게 울린 만큼, 건너편의 여인도 들을 수 있었다.

"나이로는 제가 훨씬 더 많은데, 칼부터 뽑으시다니 무례하십니다."

"그럼 가는 순서도 더 빠르겠군."

"에셀레드의 공자님이 이렇게까지 삭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에 담긴 내용과 달리 목소리의 고저는 변하지 않는다. 카인은 천천히 숨을 뱉으며 몸에 가벼운 긴장을 불어 넣었다.

"섭섭한가?"

"조금요."

"그러면 안 되지."

쉐에에에에엣-!

카인은 수평으로 들고 있던 아그웨스카를 그대로 나무문을 향해 내찔렀다.

물을 파고들 듯 아그웨스카의 칼날이 막힘없이 문을 꿰뚫었다.

'피했군.'

하지만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스륵-.

검을 다시 잡아당기자, 아그웨스카의 칼날이 만든 구멍으로 초록색 눈알 하나가 나타났다.

"놀랐습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칼부터 꽂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지 알기 전에 미리 해치워두면 편하니까."

가늘게 휘어지는 눈.

카인의 대답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눈치였다.

"이쯤 되니까 고작 열일곱에 소드마스터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군요. 감탄했습니다."

쫑긋-.

그 순간 카인의 귀가 움직였다.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그의 본능이 무언가를 잡아냈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열차의 천장을 쓰윽 둘러보았다.

"이 위로 움직이는 것들은 네가 준비한 건가?"

"놀랍군요. 숲의 비전을 둘러서 소리도 안 나고, 진동도 열차에 먹혀서 없었을 텐데."

그 말에 카인을 제외한 세 사람도 문 건너편의 초록 눈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인간 사회에 파고든 엘프.

엘프의 명예를 버리고 전쟁의 승리만을 바라는 위대한 엘더.

후두두두-.

객실의 모든 창으로 초록의 눈알들이 나타난다. 이소엘은 급하게 올리시렌의 앞을 막아 섰고, 밴더빌트는 카인의 등 뒤에 섰다.

끼익-.

문이 열린다.

그리고 들어오는 건 호리호리한 한 명의 여인.

또각-.

걸음마다 흔들리는 초록빛의 머리.

"처음 뵙겠습니다. <로스 데 캐롯>의 기사단장,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라고 합니다."

여태까지가 후작들과 싸우기 위한 준비였다면, 이제부턴 본격적인 전쟁이리라.

카인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76 EP.Ⅰ-20

아크투루스(Arcturus) (1)

「"모든 전사들의 위대한 절망이자 찬란한 희망, 로드이스트를 뵙습니다."

초록 머리의 사내가 뻣뻣하게 굳어선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소리쳤다.

그 맞은편.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예사니스."

무감각한 보랏빛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면의 설원공, 카인이 앉아 있다.

카인은 손짓으로 초록 머리의 사내, 예사니스도 앉게 했다.

그는 군기가 잔뜩 든 신병처럼 카인과 마주했다.

"생존일은?"

"현재 백 일이 조금 넘었습니다."

"방랑엘프 치곤 대단하곤."

카인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대장벽에 흘러들어온 방랑엘프가 몇 있었지만, 평균 생존 72시간의 대장벽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엘프는 없었다.

예사니스가 이레귤러일 뿐.

"감사합니다!"

그는 카인의 말에 곧장 기립해서는 소리쳤다.

"...그래."

하지 말라고 말해 봤자 통하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어,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예,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엘프는 어떻게 해야 잘 죽일 수 있나. 은근히 까다롭던데."

"...예?"

예사니스는 본인도 모르게 얼빠진 눈으로 반문했다.

카인은 그런 그를 보며 차갑게 살짝 웃었다.

"우리의 장벽을 넘어 인류 세계를 침범하려는 적 중에는 가끔 엘프도 있으니까."

"아, 다크엘프!"

"그래."

"백 번이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미친놈들인 엘프들을 죽이는 데 무엇을 말씀 못 드리겠습니까!"

그런 엘프가 끔찍하여 스스로 세계수와의 선을 끊고 방랑을 선택한 방랑엘프, 예사니스.

"가장 중요한 건 '선'을 보는 겁니다."

그는 한 명이라도 전우를 더 살리기 위해 생긴 것과 달리 끔찍한 엘프의 모든 걸 말했다.」

* * *

수십 쌍의 눈동자.

마치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거미인 양 눈동자만 드러낸 자들이 열차의 창밖에서 카인 일행을 바라본다.

"당장은 여러분들을 해칠 생각이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또각- 또각.

그리고 시그마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카인 일행이 통으로 빌린 객차를 이리저리 훑어본다.

"난 있는데."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다시금 쥐었다.

그러자 달리는 열차에 딱 붙어서 이 상황을 감시하던 엘븐나이트들이 카인 쪽으로 일제히 눈을 돌렸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기괴한 광경에 올리시렌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시그마리는 카인의 그런 행동을 젊은 날의 객기로 판단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넘치시는군요. 하긴 어린 나이에 그렇게 강한 힘을 쥐게 되면 그럴 만합니다."

반면 카인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시그마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았다.

"엘프가 버젓이 후작가의 기사로 활동한다라. 재미있군."

"오호. 제 귀는 둥그런데 엘프라 하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시그마리는 사람과 똑같은 자기 귀를 흔들며 카인에게 말했다.

파직-!

그 순간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에 순백의 뇌전이 잠시 튀었고.

['겨울'이 은닉된 진실을 일부 드러냅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묘한 한기가 한순간에 스쳐 가더니.

스으으읏-.

마법으로 가려져 있던 엘프 특유의 큰 귀가 나타났다.

시그마리는 카인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뭘 하신 겁니까."

"내가 뭘?"

카인이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자, 시그마리의 귀는 다시 인간의 것처럼 변했다.

그녀는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인의 다른 일행들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방금 겪은 게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마법을 풀고 자신을 드러내게 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시그마리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진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객차 밖에 붙어 있는 그녀의 기사들이 습도 짙은 숲과 비슷한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재미있습니다. 후작님이 뭐라고 하셨어도 이전에 없애 버려야 했군요."

까딱-.

카인은 시그마리의 손가락이 세검에 닿는 걸 보았다.

"지금이라도 없애게?"

칼을 뽑기 위해 천천히 몸의 중심을 낮추며 시그마리는 카인을 응시했다.

정체 모를 흑색의 검을 쥔 흑색 머리의 카인.

외양은 아직 어려 보이지만, 그 속내도 모르겠고 조금 전처럼 정체 모를 힘도 지니고 있다.

"가능하면 그래야겠습니다."

카인이 그러하듯 시그마리도 정체불명의 적을 보면 일단 검부터 찔러 넣는다.

거울의 반대편처럼 싸울 때만큼은 비슷한 둘은 차가운 눈동자로 서로를 응시했다.

초록의 눈과 보랏빛 눈.

엘프와 인간.

'그리고 나의 과거를 부쉈던 로스의 칼이여.'

스으으으으읏-.

시그마리의 기사들이 흘리는 살기가 얼어서 부서지고, 그 자리를 메우는 건 설원과 같은 공허하고 끝없는 카인의 차디찬 살기!

당장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판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시그마리였다.

"한 다리 거쳐서 듣는 정보와 실제 마주하는 건 역시 다릅니다. 그럼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유언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자가 말했다면 건방진 도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카인이 입을 열자 명확하게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 같았다.

시그마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치솟는 긴장감에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아벨이나 아르나 같은 잡종을 살려 두는 건지 모르겠군요."

"...."

"인간 귀족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태연하게 죽이던데,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복형제를 살리는지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카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시렌이나 밴더빌트는 카인의 얼굴을 보면서 느꼈다.

지금 그의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걸.

그걸 알 리 없는 엘프, 시그마리는 카인의 무언을 말하기 곤란한 것이라 치부했다.

"어차피 잡종이 낳은 잡종. 뽑고 짓밟아도 잡초처럼 숲의 외곽에서 살아남던데 이젠 끝낼 때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뽑고 짓밟았나?"

카인의 어조는 평범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얼마나 폐쇄적인지, 여왕이나 세계수와 연결되지 않는 방랑엘프나 하프엘프에게 얼마나 혹독한지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카인이 만난 건 대륙의 엘프들인지라.

정작 아르나나 아벨이 아이리안 섬의 엘프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들어 본 적 없었다.

물어봐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을 생각도 없었고.

시그마리는 담담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인간의 아이는 물이 상당히 필요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숲의 외곽에 있는 모든 샘을 막았습니다. 아르나가 쓰지 못하게요."

"...."

"아르나 본인이야 며칠이고 물이 없어도 살겠고 숲을 떠나도 되겠지만, 어린아이는 세계수의 가호가 필요하니 떠날 수가 없죠."

"아벨만 두고 잠시 물을 뜨러 갔다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자 시그마리는 인형이나 지을 법한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커서 두고만 보던 쓰레기가 분리되면 당연히 저희가 청소했겠죠."

용병 '섬광'의 아르나는 강하다.

제아무리 엘더라도 일대일이라면 승리를 점치기 힘들 정도.

그렇기에 두고 봤지만, 아이만 두고 사라진다면 그 아이를 죽이겠다는 끔찍한 말을 그녀는 태연히 입에 담았다.

덜컹- 덜컹-.

철로가 끊기던 지점이었는지 한층 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고, 시그마리는 못다 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왕님께서 자비로우셔서 그녀의 감각 하나만 받고 다시 풀어 주셨죠."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각?"

"미각을 바쳤었습니다."

"...."

아르나의 사과파이가 맛없던 이유.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생각하던 이유.

끊임없이 싸우고 감각이 날카로워진 용병의 미각만이 이상했던 것.

그저 날 때부터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그마리는 카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그다음엔 일 년 동안 왼팔을 바쳤었죠."

"일 년간?"

"여왕님과의 맹세입니다. 일 년간 왼팔을 쓰지 않으면 원래대로 풀어 주고, 쓴다면 곧장 자기 손으로 아벨을 죽이게 하는 강제 맹약."

"...!"

"그렇게 일 년씩."

시그마리는 제 몸을 한 부위씩 가리키며 즐겁게 말을 이었다.

"팔, 다리, 코, 귀... 그 독한 종은 쓰지 않더군요. 편하게 쓰고 자식을 죽이는 걸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

"그런데 이젠 잡종들이 죽는 걸 보겠습니다. 우리야 약속만 지키면 가만히 있지만, 당신네 인간들은 그런 거 상관없이 마음에 안 들면 죽이니까요."

시그마리는 씨익 웃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짓는 뒤틀린 미소에 카인은 아벨의 말에 떠올랐다.

-북방의 엘프들은 개새끼입니다.

용사가 된 아벨도 제 죽음에는 초연했지만, 엘프에 대해선 이를 갈았고.

-저는 어머니의 피를 빨아 살았습니다.

지금의 어린 아벨도 엘프의 숲 외곽에서 살았던 시간을 지옥으로 여겼다.

어째서인지는 지금까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그마리에게 고마웠다.

바로 밴더빌트를 바라보았고 노기사는 눈빛만으로 뜻을 알아채곤 이소엘의 옆으로 가서 올리시렌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미의 마음을 농락하는 그딴 게."

쿠웅-.

카인의 발이 열차를 디딘다.

그저 무게가 찍혀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모든 살기가 폭발하는 것만 같은 진동이 울렸다.

"즐거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화내는 카인의 모습에 시그마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인간들도...."

"인간이고 엘프고."

카인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스윽-.

그러곤 아그웨스카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 끝으로 시그마리의 머리를 가리켰다.

"내 눈앞에서 그딴 짓 하면 죽어."

스릉-.

시그마리는 자연스레 은빛의 세검을 뽑은 다음 카인을 보며 비웃었다.

"참으로 감정적인 인간입니다. 무엇을 그리 자신하죠? 그리고 지금 이곳을 노리는 제 부하들이 있는-."

탓-.

카인은 다시금 그녀의 말을 자르며 박찼다.

'주절주절 말이 길어도 죽는다.'

말을 하는 중이면 어쩔 수 없이 한 박자 늦을 수밖에 없으니까.

카인의 아그웨스카가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달려든다.

채애애앵앵-!

그와 동시에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돌입하는 기사들!

밴더빌트와 이소엘은 각자 올리시렌의 좌우를 맡으며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쉐에에에에엣-.

카인의 아그웨스카는 그대로 공기를 찢어발기며 찔러 들어갔다.

채앵-!

하지만 시그마리는 시그마리.

<로스 데 캐롯>의 기사단장이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듯, 초록의 오러가 휩싸인 세검으로 카인의 검을 튕겨 냈다.

그러나 완전히는 불가능했다.

목을 노리던 카인의 검을 옆으로 밀어냈지만, 조금뿐이라.

그녀의 귀를 반으로 가르며 뒤로 뻗었다.

"빈틈."

동시에 시그마리는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자신에게 승기가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카인은 아그웨스카의 손잡이 그대로 시그마리의 쇄골을 내리찍었다.

콰앙-!!

동시에 튀어나오는 무릎.

시그마리의 명치를 후려치며 그녀의 몸을 객차의 반대편에 틀어박았다.

"커헉-. 어떻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초록 머리는 산발이 되고, 내부가 진탕된 그녀는 피를 토했다.

"저 인간을 죽여-."

그러면서 내뱉는 명령.

눈이 공허한 초록 눈의 기사들이 카인을 향해서도 달려든다.

파지지지지지직-.

카인의 전신에서 들끓는 순백의 뇌전이 신경을 불태우고 근육을 자극하며 온몸을 내달려!

그의 아그웨스카까지 뇌전으로 물들였다.

스윽-.

단숨에 양측에서 달려들던 엘븐나이트 둘의 허리를 횡으로 베었다.

"에드먼드의 자식은 역시...."

"에드먼드가 잘난 게 아니다. 내가 잘난 거다."

"쿠쿡, 큭."

시그마리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 미소도 카인의 다음 말로 멈췄다.

"글루미엠, 나와."

"...?"

"음흉하게 다 보고 있는 거 안다. 튀어나오라고, 당장."

데구루루르르-.

그 순간, 시그마리의 눈알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부분까지 돌아가 버려 흰자위만 남은 상황.

"아비나 아들이나 하나같이 건방져."

열차의 싸움이 멈췄다.

모든 공간이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묘한 기세가 흐르기 시작했고, 시그마리의 육체가 공중에 떠올랐다.

"근데 아비랑 다르게 엘프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네? 아르나는 침묵의 맹세를 하고 있어서 못 말했을...."

쉐에에에에-!

공기를 찢어발기는 칼의 소리.

'하나같이 말이 길어서 좋군.'

카인의 검이 다시금 내달렸다.

그 끝엔 엘프 여왕 글루미엠이 강림하며 카인의 눈에 선연히 보이기 시작한 '선'.

시그마리의 정수리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어지는 은빛의 선이었다.

#77 EP.Ⅰ-20

아크투루스(Arcturus) (2)

여왕, 글루미엠은 카인을 보며 처음엔 비웃었다.

세계수의 화신인 여왕과 연결되는 '선'만 멀쩡하면 엘더급 엘프가 죽을 리 없는데 멍청하게 달려드는 꼴이 웃겼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카인의 칼끝이 노리는 건.

까아아아아아앙-!

그녀의 머리 위!

순백의 뇌전에 휘감긴 흑색의 아그웨스카가 닿자마자 그녀의 머리 위로 천공을 향해 솟아 있는 은빛의 '선'이 나타났으니까.

"어떻게!?"

"잘."

얼마나 단단한지 카인의 일격을 받아 냈다.

그리고.

까아아아앙-!

이번엔 다시금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선을 베어 내고자 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이 출렁였지만, 엘프의 '선'은 끝내 끊어지지 않았다.

"쳐!"

시그마리의 몸에 강림한 글루미엠은 손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그러자 멈칫거리던 엘븐나이트의 눈이 데구루루 굴러가더니 그대로 카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아무리 카인이라도 엑스퍼트의 끝자락에 달하는 힘을 뿜어내는 엘븐나이트 여럿을 쉽게 상대하긴 부족하다.

게다가 인형극의 인형처럼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달려드는 것들을 죽이는 건 더 어려운 일.

"공자님-!"

밴더빌트가 자리를 이탈해 카인을 지키고자 했다.

솨아아아-.

카인은 왼편에서 달려들던 엘븐나이트의 목을 베고 뒤에서 암습하던 건 무릎을 차 무너뜨리면서 소리쳤다.

"가만히!"

"...!"

밴더빌트는 그의 명령에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시에 올리시렌도 눈을 부릅떴다.

악마, 발람과 싸울 때야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지금은 마녀이자 엘프 여왕이 떡하니 나타나 있는 상황.

카인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꽈악.

이소엘은 무력감에 몸서리치는 올리시렌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이 열차는 그녀들의 전장이 아니었다.

"에드먼드...!"

휜 눈자위만 번뜩이는 시그마리는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며 에드먼드 백작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쉐에에에엣-!

허공을 가르는 흑색의 궤적.

그에 따라 피어나는 피의 폭죽!

아무리 인간들이라 하지만, 특별히 '숲의 비전'을 전수한 엘븐나이트가 단체로 볏단처럼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건 글루미엠으로서도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건 의문이었다.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너무 강해."

글루미엠은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이십 년도 살지 못한 인간이 엘븐나이트를 이렇게 쉽게 상대한다는 건 그녀로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나이의 에드먼드도 저렇게까지 잘 싸울 거라곤 상상되지 않았기에.

휘익-.

그녀는 손을 뻗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일어나라.

시그마리의 '선'이 뿜어내는 은빛이 환해지더니.

와라라라라라-!

무기질의 열차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초록색 넝쿨.

덜컹, 덜컹.

갑자기 나타난 굵은 넝쿨로 금방이라도 철로에서 튀어 나갈 듯 객차가 흔들린다.

그 넝쿨은 단숨에 카인의 두 발을 잡아채려 했다.

타탓-.

하지만 카인에겐 의미 없었다.

땅을 딛고 사는 게 인간이지만, 그는 이제 벽과 천장을 디디며 싸우기 시작했으니까.

날아오는 넝쿨은 피하고.

엘븐나이트가 휘두르는 오러는 가볍게 튕겨 내고.

수욱-.

빈틈이 보이면 단숨에 칼을 꽂고!

벽, 천장, 바닥.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공간 전체를 활용하면서 내달리는 카인의 모습에 글루미엠은 이를 악물었다.

일어나라.

다시금 공간을 울리는 여왕의 명령.

스윽-.

그러자 카인에게 조각나버렸던 엘븐나이트의 시간이 되감긴다. 곳곳으로 터졌던 살점과 피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모이고.

척-.

죽음에서 돌아온 기사가 되었다.

카인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숲의 비전을 전한 수준이 아니라 이건 무슨 언데드인데?"

"인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거지."

"효율이라...."

엘프와 인간.

종족이 다르지만, 장벽 밖의 적을 상대하는 데는 똑같은 인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버린다.'

카인은 그 생각을 지웠다.

대륙의 엘프라면 몰라도 적어도 눈앞에 있는 섬엘프의 여왕은 같은 인류가 아니다.

아니, 같은 인류기에 이렇게까지 잔혹하겠지만, 로드이스트로서 카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나도 효율적으로 싸우겠다."

카인의 선언에 글루미엠은 비웃었다.

"퍽이나. 꼬맹이라 그런지 입만 살았구나."

"그래?"

파지지지지지직-!

그와 동시에 찬란하게 퍼져 나가는 뇌전의 백광.

그 백색의 격류 속에서 카인의 보랏빛 눈을 보는 순간 글루미엠은 가슴 한구석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자신의 본체는 저 멀리 숲의 궁전에 앉아 있는데도!

씨익.

카인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다가오는 엘븐나이트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그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엘프를 제대로 죽이는 방법은 둘.

첫째는, '선'을 끊어서 죽이는 것. 대다수 엘프가 강한 건, 개인의 의식보다 '선'으로 연결된 같은 부족 엘프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즉, 틈만 나면 모두의 힘을 가져올 수 있기에 '선'을 끊어야만 죽이기 쉬웠다.

'엘더급 이상 엘프라면 선을 끊지 않으면 죽이기 힘들고.'

하지만 예사니스가 이 방법을 말해 주기 전까진 카인은 늘 두 번째 방법을 사용했었다.

퍼어어어억-!

지금까지 칼날로 적을 베었다면, 이번엔 아그웨스카의 옆면으로 엘븐나이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겨울'의 뇌전이 깃든 절망검의 일격을 받아 낼 엘븐나이트는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

퍼억.

카인은 머리만 노렸다.

"미친놈!"

보다 못한 글루미엠은 욕을 토했다.

엘프를 죽이는 방법 두 번째는, 머리를 없애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생겨나면 다시는 못 살아날 때까지 부숴 버리고!

'숲의 비전'을 이용해서 만든 것답게 죽는 방식도 엘프와 비슷했다.

쿠웅-.

잘 짜인 음악과도 같은 리듬으로 카인은 발을 디뎠다.

그러곤 왼 주먹과 오른손에 쥔 아그웨스카로 집요하게 엘븐나이트의 머리만 노렸다.

글루미엠의 손짓에 간혹 다시 살아나는 개체도 있었지만, 카인은 놓치지 않았다.

부수고, 부수고, 그리고 부수고.

저들도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푸른 꿈을 지닌 젊은 기사였을 것이고.

하지만 로스 후작의 야욕과 엘프의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한낱 싸우는 인형이 되어 버린 자들을 위해.

퍼어억!

'죽인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가질 수 없게 된 자들을 위해 카인은 검에 진심을 담았다.

전사만이 할 수 있는 장례였다.

그렇게 살아남은 엘븐나이트를 한 손에 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글루미엠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물렸다.

휘익.

카인은 땅을 향해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그러곤 선명한 보랏빛 눈으로 글루미엠을 응시했다.

"왜 그랬나?"

시그마리의 몸이 아니라 저 '선'너머 존재하는 여왕 그 자체를 바라보는 듯한 눈.

치열한 싸움으로 요란히 흔들리던 객차가 원래의 안정을 되찾을 정도가 되어서야 글루미엠은 미소를 지었다.

"아르나? 아벨?"

"그래."

"이유가 필요하나?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그 순간.

카인도 똑같이 미소 지었다.

거울을 마주하는 것만 같은 미소에 글루미엠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고.

"너는 좋은 엘프다."

"...?"

카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글루미엠은 물론 올리시렌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그를 바라보았다.

카인은 왼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칼을 쥐었다.

덜컹-.

열차가 한 번 떨리고 카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세상에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이거든."

[미래가 소모됩니다.]

『삼하인(Samhain)의 '겨울'... 개방.』

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늘 차가웠던 그의 보랏빛 눈에 순백의 뇌전이 무수히 몰아치다 못해 불꽃처럼 보였다.

우우우우우우우-.

우주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한기 속에서 절망의 외침이 울린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개 같은 엘프!'

아벨이 뱉었던 욕들이 뼛속 깊이 이해되기에 카인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아르나는 무슨 마음으로 아벨을 키운 것인가.

아벨은 그런 아르나를 보고 무슨 마음으로 자라난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런 둘을 이전에 어떻게 대했는가!'

차오르는 후회와 타오르는 분노가 카인의 등을 떠밀고.

파앗-.

카인의 발이 바닥을 박찬다.

그의 발이 닿았던 곳마다 얼음꽃이 피어난다.

파사사사삿-.

그를 잡아 죽일 듯 쏘아지던 넝쿨은 닿기도 전에 순백의 얼음에 휩싸여 부서졌다.

"막아!"

글루미엠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온 신경을 잡아 뽑아 버릴 듯한 차가운 살기에 소리쳤다.

"그아아아아-."

그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은 엘븐나이트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온몸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어린 에셀레드야, 제법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만, 네게 뾰족한 방법은 없어!"

글루미엠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스윽-.

엘븐나이트 한 기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스윽-.

상처를 회복해야 하지만, 베인 곳 위로 뇌전이 스치며 화상을 입히고 그 안쪽으로 한기가 파고들어 괴사시키니 엘븐나이트라고 해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쉴 동안 카인은 남아 있는 엘븐나이트를 도륙해 버렸다.

"...!"

이 세상에 단 하나.

오직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과거를 위해 미래를 불태우는 카인을 막을 건 아무도 없었다.

후우우우우우우우-.

글루미엠은 카인의 눈을 응시했다.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시리고 오싹한 카인의 살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저벅-.

카인은 다시금 피를 털고 검을 쥐며 걸었다.

"어차피 나는 여기에 없어."

"안다."

글루미엠은 현재 조종하고 있는 시그마리의 초록빛 머리를 들며 카인을 조롱했다.

"너의 분노를 이 평범한 다른 엘프에게 풀려고? 참으로 못된 아이로구나?"

"방금 말했지.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이라고!"

팟-!

카인이 바닥을 박차며 짓쳐들어 갔다.

얼마나 무거운 힘이 실린 건지 열차의 나무 바닥이 폭탄이라도 터진 듯 부서졌고 단단한 쇠 프레임을 드러냈다.

타탓-.

혜성처럼 쇄도하는 카인.

제 미래를 불태우며 분노하는 한 명의 전사를 바라보며 글루미엠은 두 손을 뻗었다.

무너져라.

마녀의 기원이 톱니바퀴처럼 드러나며 세계에 있을 수 없는 기적을 피워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