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엘프의 숲.
에드먼드와 카테리나 성녀를 비롯한 성국의 일행들이 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성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딴엔 잘 은신했다고 하나 군데군데 느껴지는 엘프들의 시선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모두 정리하고 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굳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오. 이 땅의 왕족과 귀족의 책무지."
"교단에서 추정하기론 그 귀족 중 하나가 엘프와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카테리나는 에드먼드에게 빚을 지우고 싶었다.
아이리안의 귀족으로서 책무를 짊어질 그에게 은근슬쩍 적의 정보를 넘기고, 그의 행동을 제어하고자 했다.
하지만.
"로스라면 그럴 수도 있겠소."
어림도 없었다.
누구보다 내밀한 관계를 잘 아는 에드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테리나는 그가 대번에 정답을 말하자 조금 놀랐다.
"알고 계셨습니까?"
"대륙과 달리 아이리안은 워낙 소국이라 상층부쯤 되면 서로 숟가락 개수까지 알지. 배신자가 있다면 누구인지도 훤히 알 정도로."
"그러면 왜 가만히 두신 겁니까."
"...."
에드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 깊은 곳에 일렁이는 후회와 슬픔 따위가 흘러나오려 했지만, 다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무감각한 눈으로 숲의 길을 더듬었다.
지겨운 숲만 며칠째 헤매고 있는 만큼 성국의 정예들과 카테리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몸보다는 정신이.
그녀는 한 번 더 에드먼드를 자극했다.
"혹시 약점이라도 잡히신 거라면, 저희가 어떻게든...."
"세상 모두가 로스를 손가락질해도 나는 해선 안 되오."
굳게 닫혔던 에드먼드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로스 후작이 가장 사랑하던 여인의 심장을 꿰뚫어 터트렸으니 말이오."
"...!"
"그 심장에 얽매인 사내들도, 아이도. 나는 모두에게 죄인일진대 어찌 로스를 욕하겠소."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에 성녀를 비롯하여 성국의 사람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에드먼드는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깨를 으쓱였다.
"로스는 아직도 가정을 꾸리지 않았소?"
"예."
카테리나는 에드먼드의 물음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둘 정도씩은 다 있는 다른 귀족과 달리 로스 후작은 철저하게 혼자만 있었던 게 그녀가 봐도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이젠 흙이 되어 스러졌음에도 로스의 사랑은 식지 않는데, 어찌 그를 비난할까."
카테리나는 더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에드먼드와 함께 다니면서, 이 정도면 그가 상당히 친절하게 말해 준 것임을 알기에 차마 더 말을 붙일 순 없었다.
게다가 들어도 좋은 내용은 아니라는 게 느껴지니 왕국의 외인으로선 더 캐기도 어려웠다.
에드먼드는 복잡한 표정의 카테리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들었다.
"이제 거의 다 왔소. 도착하면 다 말해 드리리라."
아이리안의 최북단.
엘프의 숲에서도 한참을 북으로 올라가야만 닿는, '봄이 눈을 감는 곳'.
그리고 에드먼드의 비밀이 묻힌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Episode.Ⅰ
봄의 찬미
#93 EP.Ⅰ-24
구원의 봄 (1)
「"에드먼드."
창백하다 못해 순백의 도자기를 으깨 펴 바른 듯, 파리한 얼굴의 카를라가 그를 불렀다.
"당신밖에 없어."
에드먼드는 그답지 않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엘프든 사람이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찔러 꿰뚫던 그의 세검이 흔들린다.
"헤터워드는 할 수 없고 하이볼트 그이는... 이젠 하지 않을 거야. 이젠 왕보다 아버지가 되었거든."
뚝- 뚝-.
이제 막 몸 밖으로 나온 듯한 선홍빛의 피.
그 피가 카를라의 두 손에서 흐르고 있었다.
두-근.
그녀의 오른손 위에 맥동하던 아주 작은 심장이 박동을 멈췄다. 그녀는 그 심장을 탐스럽게 바라보다가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더 이상 미치고 싶지 않아. 제발 에드먼드...."
에드먼드는 카를라의 옆을 돌아보았다.
제 가슴이 열린 지도 모른 채 밝은 표정으로 죽은 채 쓰러져 있는 왕궁의 시녀.
'백은의 궁'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시녀였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올리시렌과 나이가 가까워서 그런지 유독 친하게 지내던 아이였고.
"이 빌어먹을 로스의 피를 없애 줘."
툭.
카를라는 무릎을 꿇었다.
로스 가문이 근친으로 혈통을 이어 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고귀함에 있었다.
뱀파이어라고 하긴 저열하지만, 인간이라고 하긴 고귀한 그들의 근원은 피였으니까.
아이리안 건국전쟁 당시 초대국왕은 엘프의 천적으로서 로스 혈족을 불렀고, 그들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대부분의 로스 혈족이 잠들어 있는 그들의 땅에 있었다면 충동을 어떻게든 조절했을 터.
하지만 에드먼드가 부순 새장에서 하이볼트라는 빛을 보고 튀어나온 카를라에게 이젠 한계였다.
그녀의 손에 죽은 시녀가 벌써 셋.
아무리 쉬쉬 넘긴다고 해도, 왕궁의 시녀들은 기본적으로 한미하나마 귀족가의 여식들인 만큼 한계가 있다.
현 카를라 오우드리.
구 에버윈 로스.
그녀는 신에게 자신을 바치듯 피에 절은 두 손을 들었다.
"내가... 올리시렌을 죽이지 않게 해 줘. 너도 이제 아이가 있으니까 내 맘을 알 거라 생각해."
후웅-.
에드먼드는 칼을 들었다.
그 끝으로 카를라의 심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허공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그저 그 끝만 떨릴 뿐이었다.
카를라는 그 끝을 천천히 심장 위 살갗에 올리곤 미소 지었다.
"내가 회복하지 못하게 단번에 부숴.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
다다다다다-!
궁 밖으로 무거운 발소리들이 들린다. 한발 늦었지만, 곧장 알고 달려오는 왕실기사단과.
"카를라!"
그 앞에서 외치는 건 분명 하이볼트의 목소리였다.
카를라는 다급한 표정으로 에드먼드를 향해 소리쳤다.
"어서! 나를 모두에게 괴물로 기억되게 하지 말아 줘! 내가 내 아이를 죽이지 않게!"
우우우-.
에드먼드는 특유의 금빛 오러를 칼 위에 씌웠다.
눈물로 번져 버린 시야에서도 오롯하게 보이는 카를라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푸욱-.
"고... 마워."
광증의 근원이었던 심장이 부서지면서 카를라는 천천히 뒤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덜컹.
동시에 궁의 문이 열리고.
하이볼트는 에드먼드의 칼을 가슴에 꽂은 채 바닥에 있는 카를라를 향해 내달렸다.
"여보! 카를라!"
그녀를 흔들고.
감긴 눈을 억지로 뜨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도 사람의 죽음을 뒤집을 순 없었고, 카를라는 피투성이의 손을 들어 하이볼트의 뺨에 한 줄기의 자국을 냈다.
"에드먼드는 제 부탁을... 들어준 거예요."
"내가 방법을 찾는다고 했잖아! 그 빌어먹을 로스 놈하고도 연락해서 찾고 있었다고!"
"아뇨. 그땐 늦어요."
"...."
하이볼트의 회색 눈에서 눈물이 아롱져 떨어진다.
눈물에 닿는 부분마다 카를라의 피 칠갑이 벗겨지고 그녀의 뽀얀 살결이 보였다.
카를라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에드먼드에게 말을 남기려고 했지만.
툭.
결국 입을 벙긋할 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카를라-!"
하이볼트의 서러운 절규.
차마 그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고 에드먼드를 향해 칼을 뽑은 웨인 시케르.
뒤늦게 달려오는 웨어햄 마탑주와 크로울 백작.
그리고 에드먼드는 멍하니 서서 카를라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나의 새장을 부순 나의 구원자 그리고 나의 에드먼드.
어릴적부터 다섯이 함께했다.
하지만 로스는 먼저 떨어져 나갔고, 다른 넷의 마지막은 지금이었다.」
* * *
하이볼트의 말이 이어진다.
올리시렌은 처음 접한 어머니의 진실에 입을 틀어막았고, 카인은 애꿎은 빈 찻잔만 만졌다.
"우리도 몰랐다. 로스의 피에 그런 광증이 깃들어 있는지."
"그럼 로스 후작은 주기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겁니까?"
카인의 물음에 하이볼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 아닌,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왕실정보국에서도 그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러겠지. 그들이 지닌 '피의 충동'이라는 건 어떤 약으로도 누를 수 없었으니까."
"...."
"그 이전의 로스 후작은 카를라가 나를 선택한 것에 절망했었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한걸음 물러났었다. 하지만...."
"카를라가 그렇게 죽고 나선 달라졌겠군요."
금단의 사랑을 감수하면서도 사랑했던 카를라가 결국 하이볼트의 궁에서 에드먼드의 칼에 죽었다.
그 순간 로스 후작은 아이리안 왕가의 절대적인 적으로 돌아섰다.
하이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잡아 죽이려고 하면서도 에드먼드에 대해선 이해하는 눈치더구나."
"그럼 전하는 어떠셨습니까."
"...."
하이볼트는 카인의 시선을 피했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저 보랏빛 눈앞에선 그의 진심이 모두 드러나는 것만 같다.
"어젯밤에 바르베타 대교구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전하에 대해 말해 주더군요."
카인의 친모, 클로에를 마녀라 밀고한 자가 하이볼트라고.
"...비겁한 변명이라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지만, 우선 금관의 영향이 꽤 있긴 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볼트의 이야기대로라면, 카를라 오우드리가 죽은 시기와 클로에가 죽은 시기는 거의 십 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아무리 그가 굳건하게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긴 세월 동안 마음이 좀먹히면 사람이 달라질 터.
"난 약한 사람이었다. 의연하게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었어."
"그게 에드먼드다?"
끄덕-.
이 일에 대해선 아직 듣지 못한 올리시렌은 둘은 번갈아 봤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섬뜩한 무언가가 있다는 눈치를 채면서.
하이볼트는 담담히 말했다.
"에드먼드는 가장 강했거든. 검으로든 마음으로든."
"그래서 복수하신 겁니까. 제 어머니가 마녀라고 신전에 신고하신 걸로?"
벌떡.
올리시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하는 눈초리로 하이볼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화살처럼 쏟아지는 둘의 눈빛을 끝내 마주치지 않았다.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
"지금은 후회한다. 하지만 그땐 그것만이 정답인 줄 알았어...."
털썩.
또 다른 마녀로서, 그리고 하이볼트의 딸이자 카인의 친구로서 올리시렌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었다.
"아이리안 사람들은 참으로 사람답군요."
아이리안은 어릴 적 떠났기에 카인에게 익숙한 건 비정하고 거대한 제국이나 웅장하고 비열한 성국 혹은 죽음이 눈처럼 내리는 대장벽이었다.
그런 카인에게 아이리안은 참으로 신기했다.
'일단 정이 넘쳐.'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정이 있었다. 그 정이 부패하면서 결국 사달이 나는 것도 너무나 인간적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에드먼드 에셀레드와 클로에.
한때는 에드먼드를 원망했고 어떨 때는 세상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고독에 절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을 짊어진 카인에겐 모두 빛바랜 과거일 뿐.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아벨이 두 번 다시 억울하게 죽게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벨을 죽게 했던 '보통 사람들'을 족치는 것.
다만, 지금은 아벨을 아이리안 섬에서 평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섬을 정리하는 기간일 뿐.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올리시렌."
상상도 못 한 진실을 알게 되어 눈동자가 떨리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가자."
"가...? 어디를?"
"왕도에서 얻어야 할 건 다 얻었으니 북으로 가야지."
하이볼트도 올리시렌도.
그리고 이 자리를 지켜보고 있던 밴더빌트나 이소엘, 웨인까지 조금 굳어서 카인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행동에 오히려 카인이 어색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들 그렇게 쳐다보지?"
"혹시 억울하거나 내가 싫거나 그러진 않나?"
"제 어머니를 밀고해서 말입니까?"
"그래...."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밀고는 했지만, 성국에선 아무것도 못 했는데 무엇이 싫겠습니까. 게다가 그만한 이유도 있고요."
"너...."
올리시렌은 울컥하며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치솟는 감정은 많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올 건 하나라 무엇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로스 후작이 왜 그렇게까지 엇나갔는지도 알게 되었으니 소득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지금의 이야기다.
하지만 카인에겐 이젠 빛바랜 과거의 사실이 다시금 재생될 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과거를 돌이켜 볼 여유 따위 없었다.
"어쩌면 마음이 죽은 건 너일 수도 있겠구나."
하이볼트의 말에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해가 뜨는 방향을 슬쩍 돌아보았다.
"지금의 저를 흔들게 하는 마음이라면 제 손으로 죽입니다. 그런 여유 따위 없습니다."
"...."
"왕도로 오는 길에 메이누스 역에서 올리비아 왕녀를 봤었습니다. 북으로 간다고 하던데 아마 북방원정군으로 가려는 거겠죠?"
카인이 주제를 바꾼다.
카를라와 에셀레드 백작가에 얽힌 이야기를 본인 스스로가 거절하니 다른 사람으로선 도리가 없었다.
"그래. 아마 맥로든과 로스의 기사단이 준비되어 있을 거야."
하이볼트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 뒤를 이어서 웨인이 입을 열었다.
"마탑에서 '대수림의 결계'를 풀 방법을 알아냈다고도 했습니다. 진짜 엘프들이 사는 '딥 포레스트'까지 밀어 버릴 계획이라고도 하고요."
"로스 후작이 엘프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데, 정말 '대수림의 결계'를 해제할 거 같습니까?"
"그 부분은 솔직히 의심스럽다."
엘프와의 싸움을 위해 건국된 아이리안의 국왕으로서 하이볼트는 현실을 짚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접근도 못 했던 '딥 포레스트'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
"함정이라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라도. 힘으론 우리가 엘프를 역전한 지 오래지만 그 결계를 깨지 못해서 엘프들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을 뿐."
"힘으로 승부할 생각이군요."
"맞다. 로스가 우리를 배신했다고 하나 속에 뱀이 아홉 마리는 꿈틀거릴 놈이니 아마 엘프를 배신할 방법도 마련해 뒀겠지."
적에 대한 신뢰.
카인은 그 묘한 발언에 턱을 쓸었다.
밑도 끝도 없이 로스의 손아귀에 휘둘리는 줄 알았지만, 나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희도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아무리 '헤드브레이커'의 권위가 있다고 해도 늦어 버리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빠르구나."
다다다다-.
그 순간 백은의 궁 밖에서 기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한 일이라면 들어오지 못할 테니, 보통 일이 아닐 터.
숨을 헐떡이는 젊은 기사는 웨인을 향해 경례한 후, 귓속말하려 했다.
하이볼트는 손을 흔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냥 말하라."
"예! 올리비아 왕녀님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맥로든-로스의 연합 기사단이 북방 엘프의 숲을 향해 출진했다고 합니다."
개전(開戰)의 소식.
생각보다도 너무 빠른 속도에 하이볼트는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카인은 턱을 쓸면서 찬찬히 맥로든 후작과 로스 후작의 그림자를 떠올렸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승부를 보겠다는 것 같군요."
에드먼드와 성녀도.
두 후작과 올리비아 왕녀도.
아벨과 아르나의 원수인 엘프 여왕 글루미엠도.
그리고 아이리안의 미래도.
모든 것이 북방 엘프의 숲에 모이기 시작한다.
"운이 좋군."
카인이 생각하던 아이리안의 봄이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었다.
#94 EP.Ⅰ-24
구원의 봄 (2)
로스 후작가.
헤터워드 로스 후작은 평시와 달리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흉갑에는 로스 후작가의 상징인 피막의 날개가 붉은 루비를 빻아 새겨져 있다.
그는 옆을 내려다보았다.
시그마리였다.
카인을 정리하겠다고 떠났던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누워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로스 후작의 눈빛은 여러모로 복잡해 보였다.
"금관이 깨졌던데?"
그의 옆.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있던 엘더 리히스가 말했다.
로스 후작은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복잡했던 눈빛을 숨기고 늘 그러하듯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바꿨다.
그러곤 리히스의 손끝이 가리키는 유리 상자를 바라보았다.
어제만 해도 분명 멀쩡했었지만, 지금은 조각조각 부서진 채였다.
로스 후작은 유리 상자를 들어 부서진 금관의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하이볼트가 죽을 때까지 버틸 거라 예상했던 게 깨져 아쉽지만, 상정 범위 내라 괜찮다."
"관이 깨지자마자 허겁지겁 기사단을 움직였으면서 말은 여유가 넘치는군."
리히스의 비아냥.
로스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고는 칼날 같이 서늘한 어투로 말을 쏘아냈다.
"당신은 나를 도와주기로 온 걸로 알고 있는데 내 착각인가 싶군."
그와는 며칠 같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오만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태도를 보기엔 충분했다.
리히스는 엘프가 아니라면 가축과 똑같이 취급했으며, 사사건건 자신을 비아냥대고 방해했다.
갑옷을 입지 않는 평시라면 상관없다.
글루미엠의 '약속'을 생각한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스스로를 굽힐 테니.
하지만 이제 약속의 끝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대미를 장식할 '북방원정'의 중요한 아군이 될 자가 이러니 더는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프에게 교육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리히스는 로스 후작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코웃음을 쳤다. 기대고 있던 기둥에서 튕겨 서며 그에게 삿대질했다.
"하-! 건방진 인간아. 너희 사회의 그 알량한 신분이 너를 증명하는 듯싶더냐."
"그럼?"
리히스는 숲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렸다.
"모든 것은 여왕님의 자비 아래 피고 진다. 내가 고작 인간 따위와 말을 하는 것도 여왕님께서 너를 고르셨기 때문이다."
"그 여왕님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나?"
"...."
리히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인간 중 후작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가 회유되어 손을 잡은 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말엔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게 느껴졌기에.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로스를 훑어보았지만, 머리가 반짝이는 것 말고는 보이는 건 없었다.
"나에 대해 불손함은 여왕님의 선택에 대해 불손함이다."
이어지는 로스의 한마디.
그 말에 리히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진다.
귀를 파내고 싶을 정도로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그는 으르렁거리면서 로스에게 다가갔다.
"너 따위가 수십 년을 살았다면, 나는 여왕님의 곁에서 수백 년을 살았다. 여왕님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안다."
"잘 안다는 엘프가 이렇게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로스 후작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맹수가 먹잇감을 포착했을 때처럼 그의 눈빛은 리히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삼백 년간 고착화되었던 전선이 무너지는 것에 관심이 없는 건가?"
멈칫.
리히스는 묘한 서늘함에 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아니다.
숲에서 가끔 보이던 마수와 같은 느낌이다. 언제나 보던 로스 후작의 주위로 새카만 무언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써 착각이라 치부했다.
동시에 인간 따위에게 멈칫했던 스스로에게 분노하며 로스 후작의 약점을 찔렀다.
"인간세계에서 친남매끼리 사랑하는 건 금기라고 알고 있다."
로스 후작의 눈이 가늘어진다.
하지만 리히스는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거침없이 말을 토해 냈다.
"그리고 네놈은 누나를 사랑했다고? 그걸 친구에게 빼앗기고 죽었단 말이지. 참으로 가련하구나."
"...."
"그 사랑이 스스로를 불태우고 인간들을 배신하게 만든 지도 모르겠지. 그 여자가 이걸 알면 얼마나-."
로스 후작은 오른손을 들었다.
콰아앙-!
건틀렛을 낀 손으로 화살처럼 리히스의 목을 잡은 채 바닥에 처박았다.
"커-헉-!"
리히스는 감각 밖에서 달려든 로스의 우악스러운 손에 조금의 반응도 하지 못했다.
경악이 가득 찬 초록 눈동자가 로스를 올려다본다.
그는 차갑게 단언했다.
"나에 대한 모욕은 괜찮다. 하지만 에버윈에 대해선 한마디도 허락하지 않겠다."
"감히. 인간. 따위가!"
리히스는 분노를 담아 한마디씩 끊어 소리쳤다.
우우우우우-.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초록의 힘. 엘프 특유의 '숲의 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쿵-.
그러나 꿈쩍할 수 없었다.
힘을 끌어 올리면 올릴수록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느낌.
정확히는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감히 엘프 따위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엘프의 천적이 거기 있었다.
인간의 갑옷으로 자신을 봉인한 붉은 눈의 괴물이 리히스의 말을 돌려주었다.
"과거 아이리안 건국 전쟁에서 엘프가 왜 패배했는지 모르는군."
로스는 제 얼굴을 리히스의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붉은 눈과 평상시에 비해 길어진 송곳니. 그리고 먹잇감을 앞에 둔 듯 거칠어진 숨소리가 리히스에게 쏟아진다.
리히스의 표정이 무너진다.
압도적인 붉은 마나와 짓쳐 드는 야성에 흔들리던 리히스의 입이 열렸다.
"거기까지."
냄새부터 달라진다.
좀 더 짙은 흙냄새와 진하다 못해 비릿한 풀내음.
다다닥-.
로스 후작은 리히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후다닥 물러났다.
기세를 지우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반짝아, 너무 흥분했어."
리히스가 일어선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그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가 자리했다.
"죄송합니다."
"아냐. 리히스도 혼나긴 해야 했어. 내가 그렇게 반짝이 말 좀 잘 들으라고 해 뒀는데, 이게 뭐야."
엘프들의 여왕이자 마녀, 글루미엠.
엘프들의 모든 의식은 세계수를 통해 그녀에게 연결되어 있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그녀는 리히스의 몸에 의식만 강림시켰다.
"리히스는 건국전쟁 이후 태어나서 잘 몰라. 대신 내가 잘 아니까 너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반짝아."
쿠웅-.
거대한 초록의 바람.
날카롭기보단 둔탁하다.
로스 후작을 징계하기 위해 글루미엠이 일으킨 초록의 바람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그적, 우적.
강철을 제련해서 만든 그의 갑옷이 일그러질 정도의 압력.
글루미엠은 말을 이었다.
"그 '빌어먹을 힘'을 말하려고 했던 건 마음에 안 드네?"
"제가 실언했습니다."
"실언은 실수고, 지금의 네가 한 건 고의 아니야?"
"조심하겠습니다."
글루미엠의 차디찬 초록 눈동자가 로스를 훑는다.
"흐음."
그러곤 이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쟁을 앞둔 만큼 분위기부터 달랐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보급품의 산은 보기만 해도 질릴 만큼 위용을 자랑했다.
"너는 왕국을 바치고, 나는 '에버윈 로스'를 만들어 주면 되는 거래를 잊지 마."
"알겠습니다."
로스 후작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글루미엠은 옆에 있던 소파에 털썩 앉은 후, 준비된 다과를 입에 넣었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렸다.
"괜히 황금 나뭇잎을 희생했어."
퉁-.
시그마리가 누워 있는 침상의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발로 차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정신 못 차릴 줄 알았다면,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아닙니다."
짜증을 내던 글루미엠은 로스의 말에 멈칫했고, 로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유용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어느새 붉은 눈은 사라져 평범하게 변했지만, 그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시그마리를 당장이라도 삼키겠다는 의지가 흘러나온다.
이를 잠시 바라보던 글루미엠은 장난스러운 어조를 멈추고 명령했다.
"불가."
"제 욕심이 지나쳤습니다."
로스 후작은 곧장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삼백 년 가까이 숲의 여왕으로 군림한 글루미엠은 로스 후작의 새카만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염원을 들어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는 걸 알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엘븐나이트를 이용해서 숲으로 데려와. 세계수 곁에 두면 그래도 빠르게 회복할 테니까."
"불가능합니다."
리히스의 얼굴을 한 글루미엠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로스를 째려보았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전쟁이고 약속이고 상관없이 찢어 죽이겠다는 듯 살기가 넘실거린다.
"엘븐나이트 전원을 매복시켜 뒀습니다."
"...카인 에셀레드?"
글루미엠은 그 강력한 병력을 어디다 쓴 건지 곧바로 알아챘다.
"마녀의 힘을 씌워서 그 왕녀랑 같이 인간의 손으로 처리할 속셈 아니었어?"
"그것도 할 겁니다만, 가장 좋은 건 아예 숲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정치라는 인간의 방법으로 못 오게 한다는 건?"
로스는 부서진 금관을 흘깃 쳐다보았다.
왕도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이렇게 되었으니 하이볼트의 권위도 등에 업으리라.
하지만 자세한 걸 엘프인 글루미엠에게 말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 게 분명합니다."
글루미엠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상대는 인간이 잘할 테니까. 엘븐나이트들을 부리려면 필요할 테니 리히스에겐 내가 명령해 두지."
"감사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리히스가 천천히 쓰러진다.
글루미엠의 말 역시 흐려지지만, 천둥보다 크게 로스 후작의 귓가에 남았다.
"네가 왕국을 바치는 날, 에버윈은 세계수에서 태어날 거야."
"감사합니다."
로스 후작은 글루미엠의 의식이 떠나고서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다가 일어났다.
그러곤 창틀을 쥐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얼마 안 남았어."
전쟁도, 새로운 왕도, 그녀도, 죽음도.
모든 것이 봄바람처럼 성큼 다가왔다.
* * *
"마르퀴스 벨트에서 북방 엘프의 숲까지 얼마나 걸리지?"
카인 일행은 다시금 열차를 탔다.
기사단을 준비 중인 에셀레드엔 이제부턴 공개적으로 행동해도 된다고 연락하고, 곧장 출발하여 북으로 향했다.
카인의 물음에 올리시렌은 빠르게 계산해서 대답했다.
"로스콤몬부터 전초기지까지 열차가 뚫려 있으니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실상 하루면 돼."
"대수림의 결계까진?"
일반적인 영지가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어 있듯, 북방 엘프의 숲도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원정의 핵심은 결계.
로스 후작이 엘프의 배신자를 통해 얻었다는 정보로 '대수림의 결계'를 해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급하게 원정이 시작되었으니까.
아이리안 건국 이후 삼백 년 가까이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던 '딥 포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기에 이번에는 원정이 아닌 전쟁이라 부르는 이들도 많았다.
"글쎄. 이전엔 숲 외곽에 사는 사람들이나 엘프들의 함정이 워낙 거세서 오래 걸렸을 텐데...."
"글루미엠과 짝짜꿍 되어 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군."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카인이 세계선을 건너기 한참 전부터 준비된 거대한 음모.
이전 세계선의 정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당시 카인은 이런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고, 용사 아벨은 모든 게 정리된 후의 정보만 가지고 있었다.
"왜?"
카인이 미래를 떠올리며 쓰게 웃자, 올리시렌이 물었다.
"크로이츠 제국은 언제나 식민지를 늘릴 야욕이 있으니까 조심해."
"뭐?"
갑작스러운 카인의 말에 올리시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지만, 카인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무엇 하나 똑바로 보이진 않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차창에 비춰진 보랏빛 눈.
그걸 바라보는 자신이었다.
#95 EP.Ⅰ-24
구원의 봄 (3)
왕도의 방위를 위해 '메이누스'처럼 위성도시를 만드는 방법은 장단점이 극명하다.
장점으론 방위의 측면과 더불어 세금이 잘 나오는 도시를 새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으론 새 도시를 키우기 위해선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위성도시를 세울 만큼 대도시의 물동량이 많아야 했다.
그래서 아이리안 섬에 위성도시는 단 세 곳뿐이었다.
왕도의 메이누스.
로스의 로스콤몬(Roscommon).
맥로든의 알트론(Athlone).
"난 기차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젠 좀 지긋지긋하군."
카인은 창문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바람에 실려 있던 푸른 봄의 내음이 흐려지고, 사람이 사는 냄새가 짙어진다.
그렇게 메이누스에서 출발한 카인 일행을 태운 열차가 로스 후작령의 위성도시 로스콤몬에 도착하고 있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밴더빌트도 떨떠름하게 동의했다.
카인이 기차 자체를 좋아한다면, 그는 기차라는 걸 거의 타 보지 못한 만큼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질리도록 타면서 앞으론 계속 말을 타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리안 남부의 크로울에서 시작해 왕도를 들러 마르퀴스 벨트까지 오는 여정 내내 기차를 탔으니 지겨울 만했으니까.
그래도 올리시렌의 이름으로 VIP 칸을 타서 짐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객차의 문밖으로 보이는 철도원들의 초조한 표정이 조금 껄끄러웠다.
"전에는 왕녀라고 해도 저러진 않았는데, 이게 좋긴 하네."
툭-.
그녀는 왼쪽 허리춤에 걸어 둔 '헤드브레이커'를 치며 말했다.
그 모습이 카인이 '아그웨스카'를 치면서 가볍게 적들을 협박하던 모습과 너무 닮아 카인은 혀를 찼고 다른 둘은 미소 지었다.
밴더빌트는 웃음기를 삼키며 진중하게 의견을 건넸다.
"왕녀님, 따라 할 대상이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따라 하다니? 아, 카인이 하는 짓과 닮았구나."
올리시렌은 장난스럽게 미간을 모았고 카인은 그걸 마주하면서 입꼬리를 들었다.
"내 행동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군?"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밴더빌트 경이나 이소엘은 점잖아서 안 하니 어쩔 수 없지."
"싫어한다는 말과 달리 행동은 솔직한데?"
카인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철도원들은 카인이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오자 후다닥 멀어졌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셋도 움직였다.
"허! 뭐래."
다만 올리시렌은 기가 찬 듯 꿍얼거렸고, 그 모습에 이소엘은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아닌 척하지만, 생각보다 서로를 닮아 가는 게 보였으니까.
탓-!
카인 일행이 열차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 레드카펫처럼 두 줄로 늘어서 있던 철도원들이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소리쳤다.
"로스콤몬 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유어 마제스티!"
본래 왕녀는 '유어 그레이스'라는 인사를 듣는다.
하지만 이제 올리시렌은 공식적으로 '헤드브레이커'를 계승한 왕국의 무를 상징하는 존재.
따라서 하이볼트와 같은 '유어 마제스티'라는 인사를 받았다.
익숙지 않은 인사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왕도 생활의 짬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두리번거리는 카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촌에서 온 사람처럼 왜 그래."
"최근에 역에 도착하고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어서 말이야."
올리비아와 기 싸움을 펼치고.
바르베타 총교구장과 만나고.
웨인 경에게 반역자로 몰리기도 하고.
"...."
올리시렌의 입이 꾹 닫혔다.
카인이 역에 도착할 때마다 겪었던 일이 뭔지 알기에 차마 농담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카인은 로스콤몬 역과 더불어 철도원 사이로 비치는 플랫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향수가 짙군.'
철도원들이 향수를 쓰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카인은 코를 찌르는 그들의 향기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이어지던 빽빽한 인간 카펫이 끝나고.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정복에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노년의 남성이 카인 일행을 맞이했다.
"로스콤몬의 역장, 워럴드입니다."
그는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절도 있게 인사했다.
오래된 나무의 고풍스러운 향이 짙게 풍기는 것이, 향수 선택을 잘하는 눈치였다.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기에 올리시렌은 편안히 말을 건넸다.
"올리시렌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들으셨죠?"
린드브룸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미 '헤드브레이커'를 계승했다는 점과 북으로 향한다는 걸 마법 통신을 통해 전국에 알렸다.
적에게 패를 미리 깐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작정 '헤드브레이커'를 들고 가서 '내 말 들어!'라고 해 봤자 혼란스러울 뿐이니까.
워럴드 역장은 절도 있게 모자를 다시 쓴 후 옆으로 비켜 길을 안내했다.
"예. 바로 북방기지로 향하는 플랫폼으로 모시겠습니다."
전장으로 향하는 열차는 필연적으로 무겁고 많은 보급품을 싣는다.
따라서 비용 절감과 운용의 편의를 위해 아이리안 전역에 주로 설치한 협궤에서는 운용하기 어렵다.
마르퀴스 벨트부터 북방까지 이어지는 철로는 폭이 넓은 광궤였고, 기차의 플랫폼 자체가 아예 달랐기에 안내가 필요했다.
이런 일에 역장이 나설 필욘 없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고 일이 일이니 나온 모양이었다.
협궤 열차와 광궤 열차가 다니는 곳이 꽤 먼 듯 워럴드 역장은 지하통로로 들어왔다.
곰팡내가 올라오지 않는 게 평상시에도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듯했다.
드문드문 마법등만이 깜빡이는 긴 지하통로 속.
카인은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로스 후작도 떠났나?"
"승객의 정보는 공식적인 명령서가 없으면 알려 드릴 수 없으나...."
워럴드는 머뭇거렸다.
그가 평상시에 지켜 온 규칙상 절대 말해선 안 되는 사항이나.
스윽-.
올리시렌은 하이볼트에게 받아 온 '헤드브레이커'를 슬며시 보였다.
전쟁에 관련한 모든 것에 대해 초법적인 권위가 그녀에게 있다는 거니 무작정 함구할 순 없었다.
"아침에 출발하셨습니다."
"기사단은?"
"...."
워럴드는 잠시 머뭇거렸다.
카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찔러 들어갔다.
"미리 출발시켰겠지. 오늘 같이 출발한 건 후발대랑 보급부대일 거고."
"예."
"철도청의 사람이라면 이런 건 미리 보고해야 할 텐데, 입 닫고 있던 이유는?"
취조하는 듯한 카인의 태도에 올리시렌은 소매를 잡고 말렸다.
"카인."
"피는 내가 묻힌다."
스릉-.
카인은 곧장 아그웨스카를 뽑아 워럴드의 목에 갖다 댔다.
밴더빌트는 반사적으로 카인의 뒤에서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했다.
이소엘은 올리시렌은 잡아끌며 단단해 보이는 벽면으로 물러섰다.
워럴드 역장은 깜빡이는 불빛 아래 우뚝 서서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첫째, 로스의 땅에 있는 철도청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의심이 심하시군요."
"둘째, 저 바보는 눈치채지 못한 거 같은데 이곳의 철도원들은 환대한 게 아니야."
"...?"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럴드는 섬뜩한 검은 칼날에 닿지 않게 천천히 뒤로 돌았다.
콧수염이 멀끔한 중년인의 얼굴은 그대로다.
하지만 지하통로 속 명멸하는 불빛 아래 짙은 그림자에 휩싸인 모습은 어딘가 불온해 보였다.
"우리의 눈을 가린 거지. 기이할 정도로 역에 사람이 없더군?"
린드브룸 역에서 카인을 잡기 위해 왕실기사단이 올 때도 직전에서야 승객들을 대피시켰다.
그만큼 위성도시의 역이라면 유동 인구가 많아 쉽게 조정할 수 없다.
하지만 로스콤몬 역은 달랐다.
기묘할 정도로 싸늘한 정적을 철도원들이 박수와 빽빽함으로 가렸을 뿐.
카인 일행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워럴드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그만큼 중요한 분이 오시기에 열차 시간을 미리 조정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카인은 그와 진실 공방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앞의 두 개가 어떻든 중요한 건 마지막이었으니까.
카인은 왼손으로 코를 가리켰다.
"향수로 가려도 냄새가 나."
"...?"
"피 냄새."
"...!"
"게다가 썩은 흙냄새도 나는군. 워럴드 역장, 성이 뭐지?"
아이리안의 공직은 평민이든 귀족이든 신분에 상관없이 맡을 수 있었다.
능력을 입증하면 얼마든지 오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천장은 존재하는 법.
각 영지의 주요 역장의 경우엔 영지의 주인이 생각하는 쪽으로 되기 마련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럴 땐 대부분 어떻게든 인연을 쌓았던 귀족이 되기 마련이고.
당연히 로스콤몬쯤 되는 거대 역의 역장이라면 로스 후작의 심복일 수밖에 없었다.
"워럴드 로스?"
카인은 무작정 찔러봤다.
듣고 있던 올리시렌은 고개를 저었다.
"로스 가문일 리는 없어. 로스의 혈족은 수십 년 전부터 하나둘 죽어서 현재 살아 있는 건 로스 후작밖에 없거든."
정화인지 청소인지.
지금의 헤터워드 로스가 후작이 된 후로 로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둘 죽었다.
원래도 로스의 영지 밖으로 나서지 않는 혈족인데, 숫자 자체가 줄어들고 로스 후작이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서 사실상 멸족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그때 워럴드의 입이 비틀린다.
지이이이익-.
인간이라면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입꼬리가 치솟고 그의 뺨이 천천히 찢어진다.
단숨에 넓어진 입을 열었다.
"한때는 워럴드 로스였지."
"지금은?"
"글쎄, 죽어서도 이용당하는 꼭두각시가 무엇으로든 불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스윽-.
워럴드는 손끝을 들었다.
유난히 창백한 검지를 들어 아그웨스카의 날을 밀어내려 했다.
뚝-.
"어떻게...?"
당연히 칼을 밀어내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손가락 피부가 찢기면서 붉은 속살이 뼈째로 드러났다.
카인도 워럴드를 마주하며 웃었다.
"꽤 질긴 피부군. 평범한 칼로는 흠집도 안 가겠어."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아주 허황된 건 아닌 모양이야."
"그걸 시험하려고 유인한 거 아닌가."
저벅, 저벅-.
지하통로의 양 끝.
방금 봤던 철도원들이 얼굴을 굳힌 채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는 몰랐지만, 옅은 마법등만이 비치는 지하통로가 그들로 가득 차자 카인이 말한 냄새가 무엇인지 다른 일행도 알 수 있었다.
워럴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북방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면 정말 이 통로를 지나야 해."
"그럼 쟤들은?"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거리낌이 느껴진다.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를 본 듯 소름이 끼쳤다.
워럴드는 괴물 같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대에게 전하는 경고."
"친절하군. 로스의 사람이 로스의 적인 우리에게 경고를 다 한다니."
"한때 같은 성을 지녔다고 해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다면 편협하다고 꼬집고 싶군."
카인은 워럴드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증거도 보여 주지."
척-.
워럴드는 정복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은빛의 단추가 후두둑 떨어지고 그의 속살이 보였다.
카인이 말한 썩은 흙내가 순간 화하고 풍겼다.
"읍-!"
올리시렌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돌렸다.
워럴드의 가슴엔 치명적인 자상이 있었고, 그곳에서 새카맣게 썩은 끈적한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 왕녀의 말대로 로스의 혈족은 죽었지. 그런데 '로스'라는 이름이 무엇이라고 죽어서도 묻히지도 못하곤 이 모양 이 꼴로 이용당하고 있다."
"언데드."
카인은 곧장 그의 상태를 알아봤다.
아마도 통로를 막은 다른 자들도 비슷하리라.
워럴드의 눈동자는 잠시 커졌다.
"우리의 상태를 아나?"
"많이 봤지."
평범한 세상에선 드물어도 대장벽에선 흔한 적 중 하나였다.
워럴드는 카인이 너무 태연하게 행동하자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우리는."
우리는-.
워럴드의 말이 지하통로를 울린다. 저 멀리 지켜보는 죽은 자들도 함께 따라 했다.
"로스의 파멸을 원한다."
원한다-.
사람이 가장 솔직해질 때는 기쁠 때보단 부정적일 때라고 카인은 믿는다.
그렇기에 아그웨스카를 내렸다.
워럴드는 다시금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적의 적인 카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헤터워드의 대적자여, 이대로 북으로 향하면 그대는 죽는다."
#96 EP.Ⅰ-24
구원의 봄 (4)
보급품 상자 더미에 걸터앉아 있던 맥로든 후작이 손을 높게 들며 외쳤다.
"어이! 로스 꼬맹이!"
그 순간 분주하던 북방 전초기지가 멈췄다.
그리고 맥로든 후작의 눈길이 향하는 곳.
머리가 반짝이는 로스 후작과 초록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헤터워드 로스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침묵 속에서 맥로든 후작은 씨익 웃었다.
"이젠 너도 다 늙은 아저씨구나. 다른 꼬맹이들이랑 같이 다니던 게 어제 같은데 말이야."
아이리안 칠대귀족 중 가장 오랫동안 가주 자리에 있던 맥로든 후작이다. 당연히 하이볼트나 로스 등등이 함께 지내는 것도 지켜보았고.
그들이 어떻게 소원해진 건지 사정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던지는 과거는 로스의 신경을 긁기 위한 발언일 뿐.
로스 후작은 눈썹을 한 번 들썩이곤 대답했다.
"영감님은 왜 아직 안 죽으셨습니까. 말하는 건 갈 때가 된 거 같은데."
다시금 침묵이 기지를 감싼다.
아이리안을 좌지우지하는 두 거인이 마주하는 자리에 호기심을 품은 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둘이 주점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말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후작으로 죽으면 그냥 죽는 거지만, 왕으로 죽으면 국장이니까. 기왕 죽을 거 왕 돼서 죽어야지."
로스 후작의 눈이 가늘어진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맥로든 후작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달라지셨습니다."
"뭐가?"
맥로든 후작은 상자에 팔을 베고 누우며 대꾸했다.
로스 후작은 흔들림 없이 꼿꼿이 서서 눈을 마주했다.
"전엔 진심으로 왕위를 탐내셨는데 이젠 아니군요."
어느새 둘의 말을 듣는 자들은 숨 쉬는 것마저 조심하기 시작했다.
숨소리라도 두 거인에게 들키면 당장이라도 죽임을 당해도 모자랄 대화였다.
맥로든 후작은 혀를 찼다.
"네놈의 핏줄은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도 알아보냐."
"그냥 찔러본 건데, 역시 맞군요."
로스 후작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상외의 일격을 당한 맥로든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만 벗겨진 게 아니라 정치 술수도 아주 고단수야."
"칭찬 감사합니다."
"아주 하이볼트 같은 구렁이가 되었어."
"욕은 자제해 주시죠."
툭.
맥로든 후작은 나이답지 않게 가벼운 움직임으로 상자에서 내려왔다.
다만 세월에 닳아 버린 육신은 이미 쪼그라들었고, 허리도 굽었기에 로스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맥로든 후작은 형형히 눈을 빛냈다.
"방음 결계를 쳐라."
로스 후작은 옆을 돌아보았다.
오면서부터 내내 똥 씹은 얼굴이었던 리히스는 그 눈빛에 잠시 인상을 쓰다가 물러서며 두 팔을 내밀었다.
우우우우우-.
초록의 바람이 일어나면서 맥로든과 로스를 감싸는 연두색 결계가 펼쳐졌다.
안의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는 결계였다.
맥로든 후작은 고개를 살짝 꺾어 결계 밖에 서 있는 리히스를 살폈다.
"투항한 엘프는 여자였던 걸로 아는데?"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엘더 급이?"
"네."
"쓰레기 같은 자식."
로스 후작이 엘프와 손을 잡은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이득이 되기에 넘기던 맥로든이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니 느낌이 달랐다.
국가의 대적이자 인생의 대적이라 여기던 엘프와 한 배를 탄 로스 후작이 혐오스러웠다.
"어차피 서로 알고 있던 사실 아닙니까?"
로스 후작은 가볍게 웃었다.
자신을 욕하는 건 상관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 욕은 자신뿐 아니라 그런 자신과 손을 잡은 맥로든 후작도 먹어야 할 욕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하이볼트가 싫은 게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둘의 눈이 마주한다.
이 시대의 거인이자, 아이리안 중부의 패자가 서로를 살피고.
"거래는 확실하겠지?"
맥로든의 말에 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거래대로 내 손녀가 왕으로 인정받을 만큼 업적을 이번 북방 원정에서 쌓을 수 있나?"
"아이리안 역사상 처음으로 '딥 포레스트'를 밟은 군주가 될 겁니다."
숭고한 귀족이기보단 비정한 장사치에 가까운 맥로든 후작은 잠시 턱을 쓸었다.
"그렇다면 나도 거래대로 계속해서 눈 감고 있겠다."
"좋습니다."
로스 후작은 몸을 돌렸다.
어차피 서로의 이득을 위해 손잡은 관계일 뿐이다.
맥로든 후작이 거침없이 들어오는 성격이라 말했을 뿐 원래대로라면 서로 말조차 섞지 않아야 했다.
"잠깐."
맥로든은 로스를 불러 세웠다.
방음 결계를 나가려던 로스는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카인과 올리시렌 왕녀가 왕도에 들렀다던데."
하이볼트는 마음이 죽었다.
그렇기에 두 후작의 적이라고 한다면, 힘겹게 발버둥 치는 올리시렌과 카인뿐이었다.
맥로든은 북방으로 올라오다가 본 사실을 말했고 로스 후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 있습니다. 로스콤몬을 거쳐 올 것도 압니다."
"막을 수 있나? 하이볼트 놈이 갑자기 정신 차려선 애지중지하던 '헤드브레이커'까지 쥐여 준 모양이야."
하이볼트의 마음이 죽었다며 카인에게 충고했던 맥로든 후작으로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모든 걸 알고 있는 로스 후작은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네. 그걸 받아올 줄은 저 역시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괜히 분란이 생기기 전에 막을 겁니다."
그의 단언에 맥로든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네놈이 그렇다면 확실하겠지. 죽이든가 정치질로 막든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저에 대해 잘 아는 게 영감님이라니 씁쓸하군요."
"내가 뭐 어때서!"
맥로든 후작은 발끈했다.
그 순간 로스 후작은 다시금 예리한 눈빛을 빛냈다. 날카로운 무기에서나 느껴질 예기가 섬뜩한 눈빛이었다.
"왕보다 탐나는 게 카인이라는 아이입니까?"
로스 후작의 눈에 은은한 붉은 아지랑이가 엿보인다.
맥로든 후작은 그걸 보곤 혀를 찼다.
"쯧, 눈치 하난 더럽게 빠르군."
"이젠 잊으셔야 할 겁니다."
로스 후작은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지 못할 테니까요."
반면 맥로든 후작은 은은한 비웃음을 지었다.
"또 네 녀석답게 더러운 수를 사용한 거냐."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너 그러다 언젠가 크게 당할 것이야."
"이번 원정이 끝날 때까지만 안 당하면 됩니다."
로스 후작이 결계를 빠져나가자 부드럽게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약식 대마법결계'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게냐."
린드브룸의 왕궁같이 거대한 규모로 마법진을 구축하진 못하지만, 마법이나 이능의 대규모 발현을 막아야 할 때.
약식으로 만든 대마법결계를 쓰는 건 상식이었다.
그리고 해당 결계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건 언제나 로스 후작가였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았다.
로스 후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들도 오고 결계를 푸는 방법도 있는데 필요하겠습니까?"
"일리가 있구나."
그리고 리히스는 엘븐나이트를 지휘해서 카인 일행을 막으라는 로스의 명령에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 * *
적의 적은 아군이다.
그렇다고 그 적이 영원히 아군이냐면.
'그럴 리 없지.'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워럴드의 말은 분명 호의가 담긴 충고지만 그걸 받아들여도 되는지는 다른 문제였으니까.
'게다가 언데드라.'
성국이 지역별로 신전을 세운 이유 중 하나는 언데드에 있었다.
동방이 멸망하고 빠르게 나타난 대장벽으로 서방의 인류 세계는 멸망의 파동을 막아 냈다.
그렇지만 완전히 막진 못했고, 세계의 생활상을 바꿨다. 크게는 성국의 대두도 있었고 작게는 장례의 변화였다.
기존엔 시체를 관에 담아 그대로 묻은 후 묘지를 세웠다.
하지만 동방의 멸망 이후 낮은 확률로 언데드로 다시 깨어나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본래 흑마법사들의 사악한 마법으로만 일어나던 일이 이제는 자연스레 벌어진다는 뜻.
신전은 그런 언데드를 성력으로 정화하면서 교세를 확장했고 화장 후에 매장하게 되면서 언데드의 등장은 거의 사라졌다.
'이들도 흑마법사가 일으킨 부류는 아니군.'
카인은 워럴드 역장을 비롯해 그와 같이 언데드로 보이는 철도원들을 살폈다.
자연발생 언데드는 생전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지닌다.
따라서 헤터워드 로스 후작에게 보이는 적의는 사실이겠지만, 이것 역시 로스 후작이 꾸며둔 함정일 수도 있으니까.
워럴드는 카인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걸 읽어 냈다.
"의심하나."
한마디였지만, 카인은 그가 생전에 단순히 철도역장은 아니라는 걸 읽어 냈다.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로스 후작이라면 사람도 조종할 힘이 있는데, 언데드 정도는 더 쉬울 테니까."
"우리의 적의는 진실이다."
"그 적의마저 이용할 사람이 로스 후작이고."
워럴드 역장은 웃었다.
다른 셋과 달리 카인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경험이 마음에 들었다.
"과연, 헤터워드의 대적자다워."
"그래서 내 말이 정답인가?"
카인은 대놓고 당신들이 이용당하는 건지 물었다.
워럴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정확히는 '로스 혈족'의 저주가 죽어서도 이어지기 때문이지."
로스의 피에 대한 말이 나오자 올리시렌의 눈썹이 들썩인다. 이 자리에서 로스의 피를 이은 유일한 생자가 그녀였으니까.
워럴드의 눈이 살짝 움직이며 올리시렌을 훑어보았다.
"닮진 않았는데, 닮았군. 에버윈의 딸인가?"
"어머니를 아시나요?"
"꽤. 많이."
후회와 고뇌.
산 자만이 짊어질 것 같은 무게가 워럴드의 말에 스며 있었고, 그 순간 워럴드는 누구보다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올리시렌이 뭐라고 되묻기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
"에버윈과 우리의 죽음부터 엘븐나이트까지 모두 로스 혈족의 비밀에 얽혀 있지. 궁금한가?"
툭-, 툭.
카인은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잠시 고민했다.
'시간이 없어.'
이미 북방원정군은 준비되어 있었고 올리비아 왕녀와 맥로든, 로스 후작 둘 다 북방으로 향했다.
엘프와 손을 잡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전쟁에서 중요한 건 시간이다.
'헤드브레이커'가 올리시렌의 손에 들어갔다는 게 전해진 이상,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올리시렌이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빨리 원정을 끝내는 수밖에 없다.
즉, 저쪽도 이쪽도 일분일초가 중요하다.
이때 과연 로스의 망령이 하는 말을 들을 가치가 있을까?
함정이 있다고 해도 늦어질 바엔 그냥 베고 지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스윽-.
카인은 누군가 자신의 옷자락을 당기는 걸 느꼈다.
범인은 올리시렌이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궁금합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들을 시간은 없군요."
"...?"
"왜 이대로 가면 죽는지나 가면서 말씀해 주시죠."
우우우우-.
지켜보던 올리시렌의 말과 동시에 미묘한 파동이 일어났다. 다만 이를 감지한 건 카인과 워럴드뿐.
카인이 워럴드를 바라보자, 그는 놀랍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호오."
그 모습이 마치 실에 끌려 팔을 드는 듯한 인형같이 보였다.
철도원들이 신호에 일사불란하게 뒤를 돌아 나가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왕가의 피가 섞였음에도 생각보다 괜찮은 지배력이야. 너는 우리처럼 로스 후작에게 조종당하지 않겠어."
"조종...?"
워럴드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단정한 걸음을 옮겼다.
"로스 혈족은 좀 더 짙은 피를 타고난 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그건 언데드로 깨어나도 마찬가지더군."
"그럼 현세대에 가장 짙은 피를 지닌 게 로스 후작인가요?"
"그래. 정확히는 에버윈도."
듣고 있던 카인은 불쑥 물었다.
"지금 함정이 있다면서 우리를 늦추려는 게 로스 후작의 뜻대로 움직이는 걸 수도 있겠군."
워럴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느껴지는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잠시 흔들리던 워럴드는 대꾸했다.
"로스 후작이 떠나면서 지배력이 약해졌다. 그 틈에 말하는 것뿐이야."
"그걸 어떻게 믿지?"
휙-.
그는 고개를 돌려 카인의 눈을 마주했다. 당장이라도 불타올 것 같은 그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믿지 못하면 그냥 가서 죽어라."
카인은 보고 싶은 걸 봤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말해라, 언데드."
가장 솔직한 감정은 가장 저열한 감정이다. 카인은 그 일면을 마주하고 나서야 워럴드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워럴드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카인을 보다가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엘븐나이트 전원이 다른 열차를 타고 북으로 갔다."
척-.
북을 향하는 손가락이었다.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 81명의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지."
#97 EP.Ⅰ-24
구원의 봄 (5)
"시간은 없고."
통로가 끝나 간다.
카인의 목소리가 희끄무레하게 햇빛이 비치는 출구까지 닿았다.
"그렇다고 네 명이서 함정에 그대로 들어갈 수도 없고."
엘븐나이트라면 라마이닝에서 한 번, 시그마리가 습격할 때 두 번 봤다.
카인은 냉정하게 그들의 수준을 재어 보았다.
'이길 순 있다.'
넷 중 가장 약한 게 올리시렌이라고 하나, 예비 마녀 주제에 힘의 활용이 능숙하다.
발람과 싸울 때처럼 다른 셋에게 버프를 주고, 자신이 어느 정도의 미래를 겨울에 바친다면 불가능할 건 없었다.
'하지만 붙잡히는 것부터 패배야.'
로스 후작의 수는 참으로 절묘했다.
엘븐나이트 전원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부터 어렵지만, 싸우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긴 싸움이 된다.
아무리 베어도 근처에 엘프만 있다면 회복하는 '숲의 비전'을 이은 괴물들을 상대로 하니까.
문제는 올리비아의 원정군이 성과를 내기 전에 올라가야 하는 카인 일행의 입장으로선 그들과 싸워 이기는 건 전투에 승리해도 전쟁에선 패배하는 꼴.
열차를 타고 가지 않는다면 엘븐나이트와 싸우지 않겠지만, 필연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다.
늦어도 패배하고, 싸워도 패배하고.
'로스 자식,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 꼼꼼하게도 방해하는군.'
카인은 거미줄처럼 그가 펼쳐둔 함정에 내심 이를 갈았다.
저벅-.
워럴드는 걸음을 멈췄다.
다른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면서 그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엔 올리시렌이 있었다.
워럴드는 그랬던 행동과 달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억지로 움직이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방법은 있다."
"...그럼 그것부터 먼저 말해라, 멍청한 언데드."
한참 하던 고민이 의미가 사라지자, 카인이 한 소리 했다.
워럴드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왜?"
"방법은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말할 수 없다."
마치 고장 난 마법 축음기가 같은 부분의 음악만 반복하듯, 그의 말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도 워럴드의 시선은 올리시렌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알려 주기 위한 행동 같았다.
"아!"
카인은 무언가를 깨닫고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이소엘도 눈치챘는지 둘의 눈이 마주쳤다.
올리시렌은 큰 회색 눈을 끔뻑이며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 왜?"
"아까 전 워럴드 역장이 말했습니다. 왕녀님께 지배력이 있으시다고."
이소엘이 먼저 말했고.
"로스 후작이 북방으로 떠나서 지배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절대 말하지 못하게 조금 더 강력하게 금제해 둔 게 있겠지."
카인은 워럴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그 방법이 있을 거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긍정했다.
후작의 지배력에 묶인 꼭두각시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었다.
"워럴드 로스."
올리시렌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쯤 들었으면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방법을 말해 주세요."
우우웅-.
묘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마녀의 힘을 발휘할 때 느껴지는 파동보다 훨씬 더 부드러우면서 약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카인은 그 파동이 워럴드의 죽은 살갗을 통과하지 못하는 걸 보았다.
워럴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올리시렌의 말에 대답했다.
"지금의 나는 말할 수 없다."
"지배력이라는 게 움직이긴 했는데, 닿지는 않는 모양이군."
카인은 혀를 찼다.
이번에는 일이 쉽게 풀릴까 기대했는데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한 번 더 해 볼게."
올리시렌은 다시금 힘을 발휘해 보았지만, 워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보다 더 헤터워드가 지배를 단단히 걸어둔 모양이다."
카인은 아까 철도원들이 나타났던 곳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다른 애들을 불러다가 말을 시키면 되지 않나."
"다른 녀석들은 알긴 하지만, 권한 문제로 하지 못한다. 오직 나만이 가능하다."
"쯧. 생전에 당신 로스 혈족 중에서 뭐 좀 되던 사람이었나 보네."
"...."
카인의 물음에 워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 싫은 것보다는 로스 후작의 금제로 막혀 있는 것이 그의 생전 과거와 관련되어 있는 눈치였다.
"워럴드 로스."
올리시렌의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부름을 받은 워럴드는 똑같이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후우우우웅-!
통로의 저 끝.
아니, 올리시렌의 뒤편.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세계의 이면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와 콧수염이 휘날렸다.
"어, 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올리시렌을 바라보았다.
기기기기긱-.
카인은 다시금 들리는 톱니바퀴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말하라.
올리시렌이 마녀의 힘을 담아 던진 명령이 워럴드에게 쏟아진다.
그 순간, 워럴드의 전신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파도에 쓸리는 모래처럼 씻겨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
워럴드는 마치 신에게 경배하듯 두 손을 들었다.
명령의 여파가 가라앉을 때까지 멍하니 위를 바라보던 워럴드는 입 끝까지 찢어지는 미소를 환하게 지었다.
"예스, 유어 마제스티."
쿵.
그는 무릎이 깨질 것처럼 한쪽을 바닥에 댄 후 오른 주먹을 가슴에 대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셋이 자신을 바라보자 올리시렌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는데."
"잘했다. 어쩌면 로스 후작을 상대하는 데 큰 힘이...."
마녀의 힘을 더한 명령으로 헤터워드가 부리는 지배력을 날리는 건 제법 쓸 만하지만.
'이런 지하통로에서나 하지 밖에서 하면 사방팔방에 내가 마녀라고 자랑하는 꼴이지.'
카인은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될 수 없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지. 무기는 뭐든 가지고 있으면 좋으니까."
올리시렌은 한결 가볍게 대꾸했다.
프리문디의 시련을 통과한 후 마녀의 힘을 절대 쓰지 않기로 다짐했었지만, 이미 그건 모래 위에 쓴 약속처럼 쓸려 나갔다.
그녀의 앞엔 늘 카인이 있었다.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불태우는 불꽃같은 사내.
그렇기에 올리시렌도 생각을 바꿨다.
끔찍하고 두려운 마녀의 힘이지만 써야 할 순간이 온다면 쓰겠다고.
그리고 무슨 대가를 치르든 후회하지 않겠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지배력이면 할 수 있는 게 좀 더 늘겠습니다."
워럴드는 눈을 빛냈다.
간절히 바라던 로스의 파멸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경외를 담아 올리시렌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애들에게도 가능하십니까?"
끄덕-.
발람과 싸울 때 이소엘이나 카인에게 걸어 주던 버프와 달리 이런 건 별다른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몇 번이고 가능했다.
워럴드는 마치 책략가처럼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북방까지 보내고 헤터워드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겠군요."
* * *
어린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동화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죽은 자가 가는 지하 저승의 입구엔 널따란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을 죽은 자들이 나룻배를 타고 건넌다. 이때 배가 반대편에 닿으면 생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
"우와...."
그리고 모두가 동시에 그 동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가장 앞장선 워럴드는 넷의 반응에 가슴을 쭉 펴며 팔을 뻗었다.
"이젠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지만, 로스콤몬은 환승역이 되기 전부터 발전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동량의 대부분은 배를 이용했죠."
거대한 지하공동엔 저승의 강물처럼 엄청난 물이 흘렀다. 그리고 워럴드의 손끝이 닿는 곳엔 웅장한 흑색 함선 하나가 떠 있었다.
"북방에서부터 흘러오는 엘리바가르(Elivagar)강을 활용한 무역에 강점이 있었고요."
워럴드의 얼굴에 회한이 보인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그는 함선에 다가갔다.
"그리고 로스의 배 나글파르(Naglfar)입니다. 바다를 건너 아이리안으로 올 때 탔던 로스의 상징이죠."
"오-."
"그 무엇도 물 위에선 따라잡을 수 없고, 그 어떤 폭풍우에도 멀쩡합니다."
"오오."
카인 일행은 감탄사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나글파르의 위용은 대단했고, 엘리바가르의 검은 강물은 위엄 넘쳤다.
"이 강물이 흘러서 빌라나 그랜드 오웰이 되는 거죠?"
아무래도 넷 중에서 아이리안의 지리에 가장 빠삭한 올리시렌은 물었다.
워럴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예, 잘 아시는군요. 엘리바가르의 열한 개의 지류가 아이리안 곳곳으로 퍼지며 흘러나갑니다."
라마이닝과 에셀레드의 경계가 되는 '빌라 강'.
카인이 얼음 다리를 만들어 통과했던 '그랜드 오웰'.
그 모든 강의 시작은 로스 후작령을 관통하는 엘리바가르였다.
저벅, 저벅-.
지하통로에서 그랬듯 아까 봤던 로스콤몬 역의 철도원들이 걸어왔다.
하지만 모두 표정이 밝았다.
워럴드에 이어 곧바로 올리시렌의 명령으로 로스 후작의 지배를 벗겨 냈기 때문이다.
"반은 나글파르로, 반은 나를 따른다."
워럴드의 명령에 그들은 잘 훈련된 병사처럼 나뉘었다.
나글파르로 배정된 자들은 수십 년간 일한 선원처럼 익숙하게 배에 올랐다.
"다른 배라면 안 되겠지만, 나글파르라면 열차보다 빠르게 북방 엘프의 숲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카인은 워럴드의 뒤편에 서 있는 절반을 가리켰다.
"이들은?"
"따로 할 일이 있지."
올리시렌에겐 철저하게 존대하지만, 카인에겐 워럴드도 편하게 말했다. 어차피 서로가 유쾌한 사이는 아니니 서로에겐 이게 더 편했다.
"가져와라."
다시금 이어진 명령에 남은 반절의 철도원이 나글파르에 들어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나무상자 수십 개를 꺼내왔다.
워럴드는 상자를 거칠게 뜯었고, 안에는 대포알과 화약이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스스슥-.
그는 거침없이 손을 넣었다.
그리고 화약의 상태를 점검하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도우셨군. 상태가 아주 좋아. 이게 다 올리시렌 님의 덕입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올리시렌을 귀여운 손녀처럼 띄워 주는 워럴드였다.
카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보존 마법이 상급이라서 여전히 잘 되어 있는 거 같다만."
"쯧. 감성이라곤 메마른 칼잡이놈이군."
뒤따르는 워럴드의 일침.
"...내가 살면서 언데드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다."
카인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말했고, 다른 셋은 색다른 카인의 모습에 슬며시 웃었다.
휙-.
물론 카인이 고개를 돌리자 곧장 웃음을 지웠다.
그걸 지켜보던 워럴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워럴드의 명을 따르는 다른 언데드들도 일하는 중간에 피식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죽은 자들이었지만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화약은 어째서?"
올리시렌은 물었다.
나글파르 정도 되는 함선이면 당연히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인도시 <델프트>의 마법 대포는 아니고 당연히 구식 대포였지만, 수군이 극히 드문 아이리안에선 충분히 통용될 만한 수준이다.
그런데 워럴드가 그 대포의 화약들을 통으로 빼 오니 의아한 것.
쿵.
워럴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올리시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녀 저하,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저희에게 다시금 죽으라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
#98 EP.Ⅰ-24
구원의 봄 (6)
올리시렌은 머뭇거렸다.
이미 죽어 언데드가 된 자들에게 죽으라는 말이 무엇이 어렵겠냐만.
그녀에게 이제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사람같이 다가왔다. 거기에 왠지 모를 애틋한 감각까지 피어나기에 더욱 머뭇거렸다.
"로스의 혈족은 불행합니다."
워럴드는 천천히 그의 속내에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밤의 귀족이 되기엔 태생부터 저열하고 인간과 섞이기엔 너무 다르기에 선 긋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저희들은 늘 선 밖에 있는 존재였죠."
헤터워드의 지배하에선 절대 말하지 못했을 그와 그들의 과거이며 에버윈이 카를라가 되어 차마 전하지 못했던 로스의 참모습.
"하지만 아이리안에선 우리를 받아줬습니다. 저희가 엘프의 천적이기에 엘프의 남하를 막는 도구로 키워져서 죽어서도 도구로 활용되는 게 로스 혈족입니다."
엘프의 남하를 저지하는 마르퀴스 벨트의 절반.
로스 후작령.
로스 혈족의 영광과 권세를 위해 정해진 작위와 토지가 아니다.
그들이 삼백 년간 인간의 선 안에서 엘프와 싸워 온 거룩한 전장이었다.
워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올리시렌의 눈동자를 올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저희를 이 땅에 받아 준 아이리안 왕가를 위한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로스 후작마저 잊어버린 진짜 책무를 말하는 자.
로스의 역사를 꿰뚫는 자.
워럴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다들 그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챘다.
콰앙-.
워럴드는 주먹으로 땅을 후려쳤다.
분함을 담아 외쳤다.
"그런데 헤터워드 놈은 사욕으로 로스의 역사를 버렸고! 책무를 내던지며 엘프와 손잡았습니다!"
워럴드의 말끝이 분노로 떨린다.
에버윈 로스를 잘 알고 헤터워드를 '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미 죽은 '워럴드 로스'.
쿵, 쿵-.
그의 뒤로 다른 로스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는다.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책무를 바라선 안 된다. 하지만 로스의 혈족들은 죽음으로 책무에서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헤터워드가 왜 그러는지는 압니다만, 놈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카인이 말했던 흙냄새와 피 냄새가 이미 죽은 로스 혈족에게서 불어온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다.
짙고 썩은 흙냄새는 이 땅에 붙박여 지켜 온 충성의 땀 냄새였고, 비릿한 피 냄새는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려는 마음이라-!
올리시렌은 연민을 접었다.
아이리안이라는 성을 짊어진 한 명의 왕족으로서,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정확히 어떤 걸 명령하면 되겠습니까?"
쿵-.
모든 로스가 머리를 땅에 박는다.
"전장에서 다시금 죽으라!"
엘리바가르의 강물이 출렁인다.
로스 혈족의 영광을 함께했던 나글파르가 떨린다. 마치 로스의 마지막을 위해 진혼곡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엘프와 싸우다 죽으라!"
쿵-!
아무리 머리를 땅에 박아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죽은 몸에서 배어 나오는 흑색의 진액만 묻을 뿐이었다.
"로스의 오점인 헤터워드를 죽이라!"
쿠우우웅-.
그러나 붉은 피도 투명한 눈물도 쫓아갈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이었다.
후웅-.
카인은 손가락을 들었다.
올리시렌이 왜 꺼내는지 물어봤던 화약 더미를 가리켰다.
"죽기 위해서 꺼냈소?"
"...말투가 달라졌군."
"죽음을 각오한 전사에게 함부로 말할 순 없으니."
지금껏 투닥이던 워럴드와 카인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키려는 자들끼리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워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타고 올라가야 했던 열차에 실을 예정이다. 나와 여기 절반이 함께할 것이고."
"엘븐나이트를 칠 생각이군."
헤터워드라면 카인 일행을 습격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을 것이다.
워럴드는 그런 엘븐나이트의 함정으로 폭탄을 지고 달려들 속셈이었다.
"엘프와 손을 잡고 만들어 낸 더러운 것들을 치우는 것이 내 마지막 사명일 테니."
카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에게 말을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아는 정보를 말했다.
"엘븐나이트는 근처에 엘프가 있다면 금방 회복하오. 그대들의 마음은 숭고하나 현실적으로...."
"그럼 엘프부터 죽이면 되겠군."
워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다른 로스 혈족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엘프와 싸우기 위해 북진하는 젊은 영웅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니."
워럴드의 눈이 반짝인다.
어쩌면 그들의 각오는 현실적인 힘 앞에서 무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숭고함과 의지를 비하할 순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올리시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명령하여 주십시오, 왕녀 저하. 저희의 죽음을 딛고 엘프의 심장에 칼을 꽂아 주십시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본다.
또르르-.
맑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 위를 구른다.
그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떨쳐 내고 숭고한 전사들을 위한 명령을 시작했다.
죽으라-!
그들을 얽맨 사슬을 풀고 전장에서 죽기를.
후우우우-.
다시금 일어나는 파동.
카인의 눈앞에 다시금 톱니바퀴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그 소리가 따갑지 않았다.
죽으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엘프의 절멸을 위해 죽기를.
그리고 올리시렌은 진심을 그러모아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하여 평안하라.
휘청-.
짧은 명령과 달리 길어진 말에 그녀는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휘청이는 올리시렌을 이소엘이 부축했다.
쿠웅-.
그리고 워럴드를 위시한 모든 언데드들이 파도처럼 모두 가슴 위에 주먹을 올리며 예우를 표했다.
"예스, 로드 로스."
책임을 잊어버렸으니 헤터워드 로스는 후작일지언정 로스 혈족의 로드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에버윈 로스의 피를 이은 올리시렌을 진짜 로스의 로드로 여기며 그들은 죽음을 맹세했다.
다들 활짝 웃으며 화약 상자를 들고 광궤 플랫폼으로 옮겼으며, 오랫동안 방치했던 나글파르를 점검했다.
부우우우우웅-.
점검은 길지 않았다.
깊고 긴 뿔피리가 수십 년간 잠자던 나글파르의 항해를 알린다.
그리고 천천히 카인 일행을 태운 함선이 검은 물살을 헤치며 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워럴드와 다른 로스 혈족들은 주먹을 올린 채 떠나가는 그들의 안녕을 빌었다.
"기억났습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밴더빌트가 배 난간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워럴드의 인상적인 콧수염에 머물렀다.
나글파르는 빨랐고 그들의 모습은 금세 점처럼 변했다.
"전대 로스 후작의 콧수염이 유려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역시."
올리시렌은 짧게 중얼거렸다.
머리로는 이제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론 대충 어림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친절한 이유가 있었군."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한 로스 혈족이 아니라 사사로이는 헤터워드의 아버지이며 올리시렌의 외할아버지였다.
이소엘 역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카인 공자님과 잘 안 맞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유?"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으로서 처음에 경계했기에 투닥거렸다고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올리시렌 역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소엘은 입을 닫았고 밴더빌트는 애꿎은 뺨을 긁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이리안의 최북단에서부터 흐르는 엘리바가르 강을 따라 북쪽을 향할 때.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아벨을 비롯한 에셀레드 기사단이 진군할 때.
"가자."
워럴드는 굳은 눈으로 말했고.
쿵.
죽은 후에도 부려 먹히던 로스의 혈족들은 북으로 가는 열차에 화약과 함께 몸을 실었다.
* * *
"이제 좀 깔끔해 보이는군."
철로 옆 화전촌.
숲 일부를 불태운 후 밭을 일궈 사는 마을이 침묵에 휩싸여 있다.
엘더 리히스는 그답지 않게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슬슬 오나."
그의 손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기다리다가 꼴 보기 싫어서 싹 청소했는데, 인간들이 이 아름다움을 이해할지 모르겠군."
엘븐나이트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생각하는 '기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 사실을 잘 아는 리히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왕님은 그 건방진 로스 후작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챙기시는지. 의식연결도 십일 간이나 끊으시다니."
일대일 전투에서 밀렸다는 건 애써 묻어 두면서 그는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그 불만을 애꿎은 인간들에게 풀었다.
시산혈해.
리히스의 주위에는 신원을 추정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개운하다는 듯이 그걸 보면서 웃었다.
"진즉에 이렇게 정리하면 좋은걸. 어서 남으로 내려가고 싶군."
바닥이 질척인다.
방금 쏟아진 붉은 피가 흙을 메웠고 그들의 한탄과 눈물이 땅을 절였기 때문이다.
쿠궁-, 쿵.
리히스의 길고 뾰족한 귀가 쫑긋한다.
저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타고 다니는 것이라 그런지 귀청이 터질 듯이 아팠지만, 지금의 소리는 즐거웠다.
"준비."
리히스의 명령.
철컥-.
엘븐나이트들은 이전에 명령한 대로 철로를 끊었고, 미리 정해진 위치에서 기다렸다.
리히스의 초록색 눈은 살기로 번들거린다.
"빨리 와라. 어서 숲으로 돌아가게."
리히스의 바람에 응답하듯 로스콤몬에서 출발해 북으로 향하는 열차는 굉장히 빠르게 다가왔다.
리히스는 본인도 모르게 다리를 떨다가.
쿠우우웅-!
열차가 탈선하는 소리와 동시에 외쳤다.
"공격해!"
전원이 엑스퍼트 급인 엘븐나이트들은 그대로 열차로 달려들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래도 이 상황에서 엘븐나이트 81명에게 기습당하면 살아날 수 없으리라.
리히스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그렇게 절반 이상이 열차에 진입했을 때.
덜컹-.
미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리히스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덜컹, 덜컹!
하나의 소리가 아니다.
리히스가 알기로 카인 일행은 네 명이다. 이렇게 여러 소리가 날 리 없는데...!
그 순간.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
세상이 빛을 잃었다.
햇빛 아래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세상은 붉은 화염에 휩싸였고, 폭발의 충격파가 대지를 뒤엎는다.
가장 근처에서 지켜보던 리히스는 본능적으로 실드를 펼쳐서 충격을 경감시키려고 했다.
"쿨럭-!"
그러나 너무나 강했다.
폭음에 그의 두 귀는 청력을 잃고 피를 흘렸고, 그의 마력은 단숨에 바닥까지 떨어졌다.
삐이이이이이이-.
귀를 쑤시는 듯한 이명 속에서 리히스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시력을 회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흡!"
실드에 빨려 들어가 아슬아슬했던 마력이 갑자기 훅 사라지더니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리히스는 급하게 세계수와 공명하여 마력을 공급받았다.
"엘븐나이트들의 회복이군."
방금 폭발에 휩싸였던 것들이 회복하려면 마력이 필요하다.
평상시라면 별문제 없었지만, 리히스 역시 상당한 마력을 쓴 직후라 위험했다.
하지만 이제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다 쓰니 걱정은 없-.
휘익-.
짙고 검은 폭연 속.
두 줄기의 낫이 튀어나와선 리히스의 발목을 잡아챘다.
베이든가 끌려가든가.
육체적인 싸움에 약한 리히스는 발목이 잘릴 바엔 끌려가기를 선택했다.
쉐에에엣-.
동시에 울리는 화살 소리.
아니, 저번 원정에서 들었던 고속연사가 가능한 석궁의 소리였다.
푸푸푹-.
다만 귀로 들은 게 아니라 미세한 진동을 몸으로 감지한 거라 늦었지만 엘프의 마법은 시전시간이 없다는 게 특징.
순식간에 바람처럼 몰려든 실드가 그의 코앞에 생겨났고, 허공에 화살들을 잡아 두었다.
"감히-!"
후웅.
초록의 마나가 요동쳤고 그는 단숨에 모든 화살을 튕겨 냈다.
"쳐라!"
적의 정체는 이젠 상관없다.
철저하게 엘프 사냥꾼의 방법으로 덤벼오는 적을 죽이면 되는 일.
밖에서 대기하던 엘븐나이트들이 전부 기차에 들어간 순간, 리히스의 그림자가 출렁였다.
쉬이이이익-.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건 워럴드였다.
"이-!"
그게 리히스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몸에서 일어나던 초록의 기운은 워럴드가 일으킨 '로스의 힘'에 잡아먹히며 무력해졌고.
그 틈에 워럴드의 새카만 단도가 리히스의 목을 베었다.
데구루루르.
어떻게 죽은 줄도 모른 채 멍청한 표정을 지은 리히스의 머리통이 바닥을 구르다가, 그가 죽인 인간들의 시체 옆에 닿았다.
"죽어서는 인간의 옆이라, 잘 어울리는군."
암살에 성공한 워럴드는 다시금 열차로 들어갔다.
로스 혈족과 그걸 모방해서 만든 엘븐나이트들 간의 전쟁이었다.
엘프가 없으니 회복은 못 할 터.
조금이라도 전력을 깎아 올리시렌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말하지 못하는 죄인의 속죄였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99 EP.Ⅱ-1
작은 손의 기도 (1)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듯.
이제 막 날개를 뻗는 새를 배웅하듯.
"내 이름은...."
용사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늘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리던 마술사왕은 탁자 아래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현자는 본인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고, 최후의 성녀는 그런 현자의 다리를 걷어차며 멈추게 했다.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말하는 그의 이름을 경청했다.
"■■■입니다."
"...?"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용사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용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말했다.
"내 이름은 ■■■입니다. ■■■이요. ■■■."
"분명 귀에는 들어오는데 알아듣질 못하겠군."
마술사왕은 인상을 팍 쓰며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음성은 따라 할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 할 수가 없어."
이 세상 모든 말에 통달한 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 섬에 사는 엘프의 말부터 사막 너머 동방의 말까지 알지만, 용사의 이름 하나 기억할 수 없었다.
"아아, 신이시여."
두 지식인이 고개를 내저을 때, 최후의 성녀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탄식했다.
간신히 입을 뗀 용사와 다른 일행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별빛을 갈아서 뿌린 듯 반짝이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흘러내렸다.
"어찌 이리 잔인하시옵니까."
"왜, 뭔데?"
마술사왕이 묻고 현자가 지그시 바라보며 진리를 구한다. 그리고 성녀는 용사에게 안배된 신의 섭리를 말했다.
"신께서 용사님을 허락하지 않으신 겁니다."
"<사계절의 신기>를 다루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신이 허락하지 않는 자.
이 땅 위에 존재가 성립되지 않는 자.
그 뜻을 아는 마술사왕은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반면 이제야 이 세상의 말을 하게 된 용사는 순박하게 검은 머리를 긁으며 되물었다.
"성녀님, 문제가 있습니까?"
"신께선... 당신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용사로서 해야 할 역할만을 하고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소를 닮은 듯한 그의 검은 눈동자가 끔뻑였고, 성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용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패시브."
툭.
등에 메고 있던 순백의 대검을 탁자 위에 올렸다.
"액티브."
허리춤에 걸려 있던 황금의 세검을 대검의 위로 교차했다.
"그리고 필살기."
머리에 쓰고 있던 찬란한 관을 그 위에 올렸다.
"나는 내 미래를 세상에 바쳤습니다."
용사는 싸웠다.
본래 싸움과 거리가 멀었지만, 싸워야 하기에 검을 쥐었고 멈추지 않고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이름도 남길 수 없는 겁니까?"
무수한 사람을 만났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었다.
확실한 건 이 자리에 함께하는 자들은 가장 좋은 사람이리라.
"그럼 나는 무엇입니까."
어린아이가 자아내는 듯한 미성숙한 말에 담긴 건, 절망이었다.
그와 삶과 죽음을 함께 겪은 성녀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도구입니다."
"쓰다 버리는 그 도구입니까?"
"예."
용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껏 자신을 불태우며 지키고자 했던 이 세상을 반추했다.
밤을 지새워 겨울을 버텼다.
잔불을 그러모아 봄을 피웠다.
햇빛을 담아 여름을 키웠고, 망각을 흘려보내며 가을을 겪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세상의 모든 계절을 지켜 내었다.
그러나 세상이 자신을 바라지 않는다.
존재 자체를 거절당한 용사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테이터스]에 제 이름이 괜히 없던 게 아니었습니다."
평소와 같은 어조.
똑같이 느린 대화.
용사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하던 동료들이었지만, 이 순간 누구도 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이제 절 존(John)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성은 어떻게 할까요?"
용사는 여차하면 자신들의 성을 붙이려는 동료들을 쓱 돌아보았다.
"내 세상에선 정체 모를 자에게 붙이는 성이 있습니다. 도(Doe)."
이름조차 남길 수 없는 용사.
■■■.
그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자신을 정의했다.
"하지만 내 나라에선 '도우'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부터 '존 도우'입니다."
'■■■'이 아니라 '존 도우'가 되는 순간.
용사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에 아주 작은 은빛의 점이 생겨났다.
거미가 발을 뻗듯, 은빛 점의 경계는 흔들거렸다.」
* * *
아이리안의 최북단.
부드드드드득-.
파도 소리마저 달랐다.
바다의 표면은 북방의 한기에 얇게 얼었고, 파도가 칠 때마다 얼음이 깨지며 겹치는 소리였다.
해안가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바다의 얼음이 바스러져 있었다.
"여기가...."
카테리나를 비롯한 성국의 인물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풍경도 놀라웠지만, 에드먼드를 따라온 이곳은 더더욱 신기했으니까.
에드먼드는 성인 남자 수십 명으로도 잴 수 없을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에 손을 올렸다.
"이곳은 '봄이 눈을 감는 곳'이오. <사계절의 신기> 중 '봄'이 있었던 곳이지."
"...!"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행방이 분명한 다른 세 신기와 달리 초대 용사 이후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봄'이 있던 곳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가 천천히 걷는다.
거대한 바위 뒤로는 새하얀 신전 하나와 쓰러져 가는 나무 오두막이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이 땅에 찍혀 있을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랐다.
"에드먼드 님은 어떻게 여길 아신 겁니까."
카테리나가 물었다.
성국이 하는 일은 언데드를 막고 신앙을 단단히 하며 대장벽을 수호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등 참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계절의 신기>에 관련한 것들이다.
"아내가 알려 주었소."
"...."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어둑어둑한 하늘도, 겹겹이 쌓인 희끄무레한 바다도 바랄 성녀의 푸른 눈이 가늘어진다.
에드먼드는 잠시 걸음을 멈춰 그 눈을 마주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의 의심대로 내 아내 클로에는 마녀요."
"역시 그때 들으셨군요."
메이누스의 신전에서 분명 방음 결계를 펼치고 말했었지만, 그에겐 아무 소용 없었다.
"듣고 싶지 않다고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
"모든 것은 빛으로."
카테리나는 두 손을 마주했다.
그의 주위로 은빛의 성력이 불꽃처럼 일어난다.
"빛은 우리의 것으로!"
스릉-.
성국의 정예들은 빛을 부르짖으며 에드먼드를 둘러쌌다.
꿀꺽.
하지만 거기까지.
훈련받은 대로 움직이긴 했지만, 에드먼드의 가공할 무위를 본 탓일까, 그들의 움직임은 미묘하게 굼떴다.
8+의 던전도, 북방의 절망으로 군림하는 엘프 여왕도 한 자루의 세검으로 물리는 무적자, 에드먼드.
그리고 마녀의 남편, 에드먼드.
마녀를 죽인다.
마녀와 같은 공기를 마신 자들도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 성국의 규칙이기에 에드먼드도 죽여야 한다.
척.
성녀는 고개를 들어 에드먼드를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입니다."
영원히 묻어 둘 수 있었다.
에드먼드의 무력이라면 사소한 의심 따위는 모조리 묻어 버릴 수 있으며, 총교구장조차도 특별히 파낼 생각이 없던 과거.
성녀, 카테리나는 에드먼드가 어째서 굳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의아했다.
에드먼드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테리나는 왠지 그가 바라보는 게 하늘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느꼈다.
혹은 누군가를 위한 인사 같기도 했고.
"비가 내릴 것 같소."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님. 마녀와 관련된 건 말을 돌릴 사안이 아닙니다."
휙.
에드먼드는 신전을 가리켰다.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낫겠군."
스으읏-.
성국의 정예들이 포위를 좁힌다.
마녀의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필욘 없으니까.
다만 에드먼드의 존재가 풍기는 존재감이 그들을 멈칫하게 할 뿐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비를 맞으면서 들으면 감기에 걸리오."
"에드먼드 님이 강하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저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면 에드먼드 님이라도 무사하실 순 없을 겁니다."
에드먼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긍정하는 것 같기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녀라는 건 참으로 슬픈 종족이지. 자의로 되는 것도 아니며, 이 세계의 축을 강제로 떠안게 되는 속죄양이니까."
저벅-.
에드먼드는 신전을 향해 걸었다.
그를 포위하던 성국의 정예들은 성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게다가 프리문디의 시험을 통해서 각성해야 하오. 귀족가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자란 소녀가 견디기엔 너무나 힘든 일."
카테리나는 고개를 잘게 저었다. 에드먼드의 말을 끊지 말라는 신호였다.
성국의 정예들은 조금 더 에드먼드에게 멀어지면서 길을 텄다.
그는 가벼운 묵례로 감사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시의 나는 겁이 없었소. 그 삼엄한 로스 후작가의 방어를 깨고 카를라를 구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아이리안을 내달릴 때였으니까."
"부인과 함께 프리문디의 시험을 받으러 가신 겁니까?"
끄덕.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에드먼드의 과거가 흘러나온다.
클로에가 안배했던 '봄이 눈을 감는' 곳에서 에드먼드는 눈을 떴다.
"프리문디의 목을 벨 생각이었소."
카테리나는 그 후에도 프리문디가 일으키는 아르후안의 밤이 이어진 걸 안다.
프리문디나 에드먼드가 부딪쳤다면 둘 중 하나는 무사하지 않을 텐데, 둘 다 무사했으니 싸우진 않았으리라.
그런데 아내를 위해 검은 든 에드먼드가 어째서 프리문디와 싸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격과 힘이 실제에 비하면 한참이고 떨어진다지만, 그 수가 무한하니 아르후안은 참으로 강적이었소. 더욱이 수평선의 마녀도 어려웠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겼소."
에드먼드의 승리 선언은 담담했다.
"나오는 족족 죽이고 또 죽였소. 튀어나오는 모든 것을 찔러 죽이니 이기더군."
그러나 듣는 성국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다.
성국이 지난 세월 그렇게 염원하던 대업을 에드먼드가 홀로 이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리문디를 원래 생각대로 죽이려고 했지. 그때 그녀가 말했소."
타닥-.
에드먼드의 발이 신전의 돌계단을 밟았다.
습기에 젖어 표면이 조금 끈적한 돌계단에서 그는 다시금 뒤를 돌아 카테리나를 보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지, 모든 마녀의 시작은 에셀레드이며 아흔아홉의 끝도 에셀레드일 거라고.
당시 에드먼드나 클로에가 의아해 하던 것처럼 성녀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이름은 프리문디 에셀레드.
"...!"
카인이 퀘스트 창으로 알게 되었던 내용을 에드먼드는 당시 직접 들었으며.
-과연 용사가 될 너희의 아들은 이 계절의 순환을 끊을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 궁금하구나.
끼이이익-.
마녀의 혈족이자 마녀와 결혼한 에드먼드가 두꺼운 석문을 밀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만큼 먼지와 소음이 상당했다.
화륵-.
검은 공간의 기둥마다 불꽃이 피워 올라 어둠을 밀어낸다.
에드먼드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 반쯤 밀려 나오는 어둠에 파먹히며 말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카인이오."
콰가가강-!
마른하늘에 번개가 바다를 향해 내리꽂혔다.
성류관 '가을'을 쓴 카테리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예?"
"성녀께서 마왕이라 손가락질하는 카인이야말로 이 세상 유일한 진짜 용사요."
신전의 가장 안쪽.
불빛이 비추는 최심부.
누군가 칼로 예리하게 베어 낸 돌로 만들어진 의자가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반투명한 여인이 의자에 앉은 채 에드먼드와 성녀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카인의 눈과 똑같은 보랏빛이었다.
#100 EP.Ⅱ-1
작은 손의 기도 (2)
솨아아아아-.
흑색의 강물이 엘프의 숲을 반으로 가른다.
그 물살은 거침없었고 올리비아의 북방원정군은 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을 챙겨라."
물을 퍼 올리는 자.
물을 옮기는 자.
그리고 떠온 엘리바가르의 강물을 각자의 물통에 분배하는 자.
"강을 따라 올라갈 거긴 하지만, 3차 원정 때의 기록에 따르면 엘프들이 마법으로 뜨지 못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러니 각자의 물은 챙겨 두라."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따랐다.
갑옷을 챙겨 입은 올리비아는 꼼꼼히 지시를 계속해 나갔다.
"식량은 가능한 한 보관이 용이한 건조식 위주로 챙겨라. 수분이 많은 식량을 챙기면 8차 원정 때처럼 부패의 저주에 당할 수 있다."
"예!"
올리비아는 지금껏 벌어졌던 모든 북방원정과 아이리안 건국전쟁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며 엘프를 분석했다.
맥로든과 로스 두 후작의 힘으로 총사령관이 되었다지만, 그녀는 꼭두각시로 머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병기는 여기 두어라. 엘프의 숲은 너무 빽빽해서 긴 무기는 쓸 수가 없다. 대신 방패를 챙겨라."
"알겠습니다!"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마력의 축복으로 대부분 훨씬 강했다.
아이리안의 시작은 엘프와의 투쟁에서 비롯하기에, 인간은 머리를 모았다.
약한 인간이 강한 엘프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그 방법은 기록이었다.
"엘프는 멍청하다!"
엘프와 싸운 모든 시간을 기록에 남겼다.
건국전쟁 당시부터 그간 진행되었던 총 11차에 걸친 북방원정까지 엘프의 모든 것이 낱낱이 기록되고 분석되었다.
"그들은 고이고 썩고 있다. 그딴 쓰레기들을 머리 위에 올리고 어떻게 살겠는가!"
"맞습니다!"
피로 적어 내린 패배의 역사.
인간은 패배를 거칠수록 끊임없이 변했다.
건국전쟁 땐 머릿수로 승부하기 위해 일반 병사들까지 전부 끌고 왔었다.
하지만 엘프의 숲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현혹을 일으키는 안개에 대부분이 쓰러졌다.
그 후론 숲의 현혹을 버틸 수 있는 기사와 마법사를 위주로 하는 정예군을 꾸렸다.
그렇게.
1차, 2차... 10차.
시행착오를 거치며 숲속에 박혀서 호시탐탐 남하하려는 귀쟁이 엘프들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 알아냈고.
가장 최근의 11차 북방원정에선 에드먼드의 지휘 아래 관측만 했던 '딥 포레스트'의 턱 밑까지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어떤 마법으로도 '딥 포레스트'를 지키는 '대수림의 결계'를 해제할 수 없었다.
희생양들을 던져 준 채 숲 안으로 꼭꼭 숨어 버린 엘프들을 잡을 방법이 없었기에 11차 북방원정은 그렇게 끝났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한 걸음 나아갔다!"
올리비아는 마법으로 커진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으며 소리쳤다.
"'대수림의 결계'를 풀 방법을 얻었으니까!"
와아아아아아아-.
맥로든 후작가는 휘하 웨어햄과 브래들리 백작가의 기사들까지 합쳐 120명의 기사를 데리고 왔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환호했다.
반면 로스 후작가는 라마이닝, 크로울, 에셀레드 세 백작가의 지원 없이 단독 세력으로 원정에 참여했다.
쿠웅.
그러나 그 수는 어림잡아도 맥로든 후작이 데리고 온 기사단보다 많았다.
소속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듯, 환호를 지르는 맥로든의 기사들과 달리 로스의 기사들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봄과 겨울이 혼재된 것 같은 원정군이었다.
"손뼉이라도 좀 치라고 해 봐라."
맥로든 후작은 로스 후작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건 약속하지 않았습니다만."
로스 후작은 쌀쌀맞게 대꾸했고, 맥로든 후작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비스라는 것도 모르는 놈. 국법에서 기사의 수를 제한하고 있는데 그걸 어기고 뻔뻔하게 다 데리고 온 놈."
맥로든 후작이 한숨에 뒤이어 빠른 어조로 헤터워드를 비난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맥로든 후작을 흘깃 보았다.
"영감님이 영지에 꿍쳐둔 기사들까지 데리고 왔으면 오늘의 원정 성공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졌을 겁니다."
"난 누구처럼 그런 거 안 키운다."
맥로든 후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거짓이라는 건 알 수 있는 말투였다.
"그렇다고 치지요. 정식계승자가 아닌 올리비아가 왕위를 이으려면 한 점의 오점도 없어야 하니."
맥로든 후작은 올리비아 2왕녀의 가장 큰 후견인이자, 외조부로서 사실상 그녀와 한 몸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라도 국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의뭉스러운 녀석. 다 알면서 굳이."
반면 로스 후작은 협력자일 뿐 한 몸까진 아니었다. 따라서 로스의 행동과 올리비아의 평판은 함께 가지 않았다.
서로가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관계와 없는 관계의 차이였다.
"먼저 뭐라고 하신 건 영감님입니다."
"나이 든 사람에겐 좀 져 주는 맛이 있어야지!"
"...."
로스 후작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맥로든 후작과 자신은 정말 맞지 않았다.
차라리 에드먼드가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래도 맥로든 후작이 훨씬 낫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후우우우-.
바람이 불었다.
어둑한 하늘 저편, 기록조차 없는 아이리안의 북에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었다.
더욱이 그 안에 담긴 것은 꿉꿉한 숲의 습기라.
11차 원정 당시 엘프의 숲을 겪었던 자들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건국왕께서 말씀하셨지. 좋은 엘프는 숲에 없다고, 그럼 어디에 있을까?"
남쪽은 봄이 한창이건만.
먹구름이 햇빛을 삼켜 버린 북방의 전장에 봄은 아직이었다.
"모르겠습니다."
로스 후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맥로든 후작의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린다. 앞머리가 가라앉을 무렵 그는 툭-하고 말을 이었다.
"저승이나 도시야. 죽거나 방랑하는 엘프만을 믿을 수 있다고 하셨지."
"...."
"로스 꼬맹아. 정말 저 북방 숲의 엘프를 믿을 수 있느냐?"
맥로든은 스스로가 이제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했다.
앞뒤 재지 않고 이득을 위해 달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그는 지킬 것과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걱정이 앞섰다.
저 멀리 등불처럼 반짝이는 올리비아를 위해서라도.
"거래대로 올리비아가 왕이 될 정도의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저 지긋지긋한 엘프들의 심장부, '딥 포레스트'도 우리가 밟고?"
끄덕-.
로스 후작은 한 점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맥로든 후작은 다시금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숲을 바라보았다. 숲은 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져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자연적으로 식생이 걸러지면서 적당한 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록에 미친 엘프들은 자신들의 마력을 이용해서 숲의 모든 식생을 키웠고, 맥로든의 눈엔 장벽처럼 보였다.
"올리시렌 왕녀가 '헤드브레이커'를 들고 오기 전에 정말 가능한가?"
본래 북방원정은 긴 시간 동안 철저히 준비하여, 가능한 한 전력을 보존하며 조금씩 숲을 삼키는 과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왕위를 걸고 벌어지는 한판 승부인 만큼 누가 더 빠르냐가 중요한 상황이었다.
"가능합니다. 올리시렌 왕녀와 카인이 왔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시점일 겁니다."
맥로든 후작의 눈이 가늘어진다.
상황이 너무 딱딱 들어맞는다.
긴 세월 정치판에서 구른 맥로든은 이렇게까지 상황이 잘 맞는 경우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네가 엘프들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모른다. 굳이 묻지도 않을 거고."
맥로든은 자신을 위해서 깊게 파지 않았다.
헤터워드 로스 후작을 혹시라도 용서하지 못하게 될까 봐.
적어도 그의 쓰임새가 다 끝날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하니까.
"다만 지금까지 봐 왔던 너를 믿겠다. 로스 후작."
그 말만을 남긴 채, 맥로든은 몸을 돌렸다.
그들이 걷는 길은 이미 시작부터 역천.
정해진 왕위 계승자를 바꾸고.
기존의 왕을 없애고.
아이리안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겠다는 그 순간부터.
시작이 올바르지 않기에 결국 도박수를 던져야 할 때가 다가온다.
그렇기에 맥로든 후작과 올리비아 왕녀는 로스 후작과 엘프 여왕이라는 도박에 걸기로 했다.
"믿는다라."
로스 후작은 자신과 점점 멀어지는 맥로든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정말 많이 늙으셨습니다, 맥로든 후작."
뿌우우우우우-.
모든 준비가 끝났다.
맥로든과 로스.
아이리안 중부에서 엘프의 남하를 저지하는 마르퀴스 벨트의 두 주인이 나란히 섰고, 그 앞엔 올리비아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
마탑에서 지원 나온 마법사 스물을 합쳐 삼백이 넘는 인원이 그녀를 우러러본다.
"12차 북방원정이자 마지막 원정을 시작한다."
"예스, 유어 하이네스!"
일제히 외치는 충성의 목소리가 대지를 떨게 했고, 엘리바가르의 강물마저 출렁이게 했다.
그렇게 올리비아를 필두로 한 북방원정군이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 * *
"쟤들 온다."
세계수의 아래.
널따란 나무 평상 위에 기대 누워 있는 글루미엠의 눈이 흑색으로 번뜩인다.
평범한 엘프라면 절대 가질 수 없지만,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가 되며 글루미엠이 얻은 '기적'이었다.
"반짝이가 일은 참 잘해. 우리와의 약속을 정말 지키겠어."
여왕의 검은 눈이 운명을 훑는다.
주위에 서 있는 일곱의 엘더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의 관측자인 글루미엠의 말은 항상 그대로 이루어졌기에, 그녀를 따를 뿐이었다.
'딥 포레스트'의 가운데 누워 숲을 바라보던 글루미엠은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 안 보이네."
아무리 샅샅이 운명을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엘더 중 글루미엠과 가장 가까이 있던 페이 멕게라티(Faye MacGeraghty)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카인이라는 인간 말씀이십니까?"
"응. 정말 운명 밖에 사는 놈인가 아니면 그사이에 죽은 건가. 전혀 찾을 수가 없네."
페이는 엘더, 시그마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지녔던 의문점을 하나 말했다.
"여왕님, 그럼 그 주변에 같이 다니는 사람의 운명을 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누군지를 모르는걸."
"로스 후작이 보낸 정보에 따르면 올리시렌이라는 아이리안의 1왕녀와 늘 함께 다닌다고 합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글루미엠답게 당연히 그런 건 열어 보지도 않아서 몰랐다.
"아이리안 왕가의 인물이라면 할 수 있지."
글루미엠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수백 년간 수십 번을 넘게 봐 왔던 아이리안의 핏줄을 떠올리면서 흑색의 눈을 번뜩였다.
숲은 돌아보지 않는다지만, 버림받았던 숲의 여왕은 운명을 굽어본다.
"하나는 저기 오고 있고."
올리비아의 운명을 보고 그대로 연결된 또 다른 운명을 역으로 읽어 내려 했다.
파지지직-.
좀 더 남쪽을 바라본 순간, 글루미엠의 주위로 스파크가 터졌다.
"여왕님!"
페이를 비롯한 엘더들이 놀라서 다가왔고, 살짝 그슬린 글루미엠은 손을 내저었다.
"별거 아니야. 저기 왕궁의 대마법 결계가 내 힘을 튕겨 내서 그래. 그럼 여긴 왕이 있을 테니 아니겠고."
수많은 엘프들의 의식을 하나로 연결하는 여왕답게 그녀의 광활한 정신세계는 마지막 아이리안의 왕족을 찾아냈다.
"어...?"
글루미엠은 눈을 끔뻑였다.
이내 마녀의 흑색 눈이 사라지고, 엘프 본연의 녹색의 눈동자가 멍하니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여왕님?"
"이거 재미있네."
그녀는 상상치도 못한 장난감을 얻게 되어 즐겁다는 듯 말했다.
"뭐가 보이셨습니까?"
"아주 짧게."
한순간, 글루미엠은 올리시렌의 운명을 보았다.
그 옆에 서 있는 카인도 보았다.
그들은 검은 함선을 타고 흑색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다만, 올리시렌의 운명을 관측하려고 하자마자 튕겨 버렸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 글루미엠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1왕녀는 마녀야."
마녀의 '기적'과 '기적'이 부딪치면서 무효화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101 EP.Ⅱ-1
작은 손의 기도 (3)
나글파르의 갑판 위.
카인 일행이 모두 나와 있었다.
본래 물 위로 다니면 같은 속도라도 육지로 다니는 것보다 느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로스의 함선 나글파르는 달랐다.
워럴드가 열차보다 빨리 북으로 보내 준다고 호언장담한 것처럼 쾌속으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게다가 엘프의 숲을 관통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니 단숨에 '딥 포레스트'에 닿으리라.
그 순간.
스릉-.
오연히 엘리바가르 강물을 내려다보던 카인이 아그웨스카를 반쯤 뽑았다.
"음...?"
동시에 올리시렌은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둘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밴더빌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카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올리시렌이 바라보는 곳을 차갑게 흘겨보았다.
"글루미엠이다."
"예?"
찰나였지만, 분명 있었다.
이전 시그마리의 습격에서 글루미엠이 '운명'을 고치려고 했을 때와 유사한 느낌이 번개처럼 내리꽂혔으니까.
"날 본 거야."
올리시렌은 묘한 감각으로 통찰했다.
오감의 밖.
본능적으로 마녀의 힘을 다루게 하는 여섯 번째 감각이 글루미엠을 인지했다.
올리시렌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많은 건 들키지 않았지만...."
그리고 카인은 척하며 척하게 올리시렌의 흐린 말끝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먹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올라간다는 건 알아차렸겠군."
"그리고 내가 마녀라는 것도."
탁.
검을 집어넣었다.
카인은 앞으로 걸어 나와서 갑판의 난간을 두 손으로 잡고 저 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검은 하늘과 검은 강물뿐.
게다가 삐죽삐죽 솟은 첨단이 이빨처럼 보이는 엘프의 숲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휘익-.
이내 카인은 몸을 돌려 올리시렌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밝히지 않았음에도 마녀라는 사실을 들킨 그녀의 눈은 초조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로스 후작과 손을 잡고 있잖아. 내가 마녀인 걸 로스 후작에게 전해서 성국에 밀고하면...."
"어차피 그 인간은 네가 마녀가 아니라도 밀고할 거다."
"어?"
카인의 입에서 나온 건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사실이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이 말해 주던데. 나한테도 마녀를 숨기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
올리시렌은 손으로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존재가 카인의 부담이 된다는 사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로스 후작이 다른 사람을 사주해서 신고한 것도 안다고 하더군."
순간의 놀람이 가라앉는다.
올리시렌은 카인이 무슨 의도로 바르베타 총교구장과의 대화를 꺼낸 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미 로스 후작은 마녀신고를 정치공세의 도구로 쓰고 있다는 거구나."
"그걸 성국 측에서도 잘 알고 있고."
"그럼 내가 마녀라고 신고해 봤자, 성국은 당장 움직이지 않겠네."
카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세계선과는 다르지.'
당시 올리시렌은 마녀라는 이유로 목이 잘린 채 성문 앞 창대에 꽂혔다.
그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서 신문에 나왔었고.
올리시렌이 진짜 마녀가 맞기도 하고 성국이 무식하게 일하는 건 맞지만, 한 나라의 왕녀에게 그런 처사는 상당히 과했다.
'성국이니까 그랬겠거니 했지만, 정작 바르베타는 상식적이었어.'
다소 광신도적인 면모가 없진 않았지만, 그건 성국의 성직자라면 당연한 일.
카인이 대장벽에서 만났던 다른 성직자들을 생각하면 바르베타는 나름 건전한 광신도였다.
그래서 카인은 확신했다.
원래의 왕위 계승자를 밀어내고 새롭게 왕위에 오르는 이상 명분은 중요했다.
그때 올리시렌이 원래 마녀라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처형해 버리면 그것보다 완벽한 명분은 없을 터.
올리시렌의 효수는 성국의 짓이 아니라 로스 후작과 당시 왕위에 올랐던 올리비아의 합작품이라는 걸.
'물론 성녀가 눈이 돌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엔 용사 아벨을 검증하기 위해 성녀가 왔다가 발견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가 아무리 주장해도 아이리안의 총교구장이 반대한다면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처리할 순 없으니, 로스와 올리비아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얼추 생각을 정리한 카인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름 바르베타 총교구장과 내가 친하다. 좀 봐달라고 말할 수 있어."
밴더빌트는 잘 모르니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뿌듯해했지만, 총교구장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 잘해 준다고 했다."
"둘 다 성격이 비슷해서 잘 맞나 보네."
어느새 여유를 찾은 올리시렌이 농담을 던진다.
카인은 강바람에 흩날리는 흑발을 쓸어 넘겼다.
"욕 같은데."
"눈치도 빠르고."
"내가 가서 왕녀가 마녀라고 신고해야겠군."
카인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평정심을 되찾은 올리시렌은 가볍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성국의 원칙 중 하나는 해당 지역의 정치에 불간섭하는 거야. 총교구장이 이미 마녀신고를 정치공세라고 판단한 이상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멈출걸."
"잘 알아들었네."
"왕 되려는 사람인데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다만, 카인은 성녀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마녀의 힘을 쓸 때마다 일어나는 파동을 직접 감지할 수 있는 성녀가 아이리안에 있다는 건 올리시렌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리라.
게다가 올리시렌의 마녀 각성은 아직 불완전해서 파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물론 작정하고 마녀의 힘을 쓰게 된다면 들키겠지.'
카인은 내심 쓰게 웃었다.
이전의 그녀라면 몰라도 최근의 올리시렌은 무슨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처럼 보였다.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달라질 그녀가 기대는 되었다.
지금의 그녀 같은 눈빛을 보이던 전사들은 대장벽에서 오래 버티거나, 그날 죽었으니까.
카인은 회색의 눈으로 북방을 바라보는 올리시렌을 보자 웃음의 쓴맛이 조금은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혹시 모르니 계획은 세워둬야겠군.'
신기, '겨울'의 주인답게 카인은 가끔 묘한 직감이 올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가능한 그런 일이 없게 하겠지만, 이번 북방원정 중에 올리시렌이 마녀의 힘을 크게 쓸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올리시렌이 왕인 아이리안이 아벨이 살기 조금 더 나을 테니까.'
카인은 자신의 목적을 떠올렸다.
시간을 거슬러 세계선을 뛰어넘는 모든 이유는 아벨이다.
아무리 새로운 미래를 기대한다고 해도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카인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나저나 우리만 올라간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지금 열심히 달려오는 에셀레드 기사단도 만나야지."
올리시렌이 카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엘리바가르의 거친 물살만큼이나 세찬 바람이 그녀의 회색 머리를 휘날렸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카인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배로 가면 못 만나는 거 아니야?"
카인은 올리시렌의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곤 대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빽빽한 엘프의 숲을 가리켰다.
"만난다."
"어떻게?"
"결국 우리나 기사단이나 북방원정군과 만나야 하니까."
저 멀리 작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엘프의 숲은 그들의 마법으로 불이 일어나지 않기에, 아마도 원정군이 체재하면서 피운 불의 연기일 터.
인간을 상대하는 전쟁이라면 저렇게 무방비하게 불을 피우진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반쯤 신비에 걸쳐 있는 엘프를 상대하는 것이니 원정군도 이런 부분은 편하게 움직였다.
카인은 손가락을 들어 원정군이 있을 곳을 가리켰다.
"저런 걸 보거나 여럿이 움직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모이게 되어 있지."
"괜찮겠어?"
올리시렌은 주어도 목적어도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카인은 바로 알아들었다.
"괜찮아."
"아벨이 기사단을 이끌고 여기서 큰 공을 세운다면 에셀레드에서 네 자리는 좁아질 수도 있어."
아벨이 카인을 밀어내진 않으리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카인을 에셀레드의 로드로 불렀기에 기사단이 카인을 버리진 않으리라.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보자면 이번 일은 카인에게 부담이었다.
"바라던 일이다."
다만, 카인 본인이 계획한 일이라 문제가 없을 뿐.
올리시렌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카인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와서 묻는 건 늦었다곤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물어야 할 거 같아."
"뭐든."
차마 카인과 눈을 마주치진 못했다.
그가 무슨 답을 하듯 이미 그녀의 삶에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무서워서.
"네가 바라는 게 뭐야?"
언제고 그녀가 물을 거라 생각했다.
"에셀레드의 지하 서고에서도 말했었어. 너는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왜 그러는 거야? 네가 바라는 미래가 뭐길래?"
"...."
카인의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다짐하고.
매일 밤 꿈으로 아벨을 죽이던 그날을 되새김질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산다고 자부했지만, 차마 올리시렌에게 말하긴 어려웠다.
침묵을 지키는 카인을 바라보던 그녀는 엘리바가르 물결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냥 좀 시끄럽게 살고 싶었어. 내가 살던 곳은 너무 조용했으니까."
어머니, 카를라 오우드리는 에드먼드의 손에 죽었다.
아버지, 국왕 하이볼트는 엘프의 주술이 담긴 금관으로 마음이 죽었다.
왕궁에서 올리시렌은 혼자였다.
"어쩌다가 마녀가 되니까 그때부턴 살고 싶었고."
걸리면 죽는다.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있는 모든 곳이 성국의 군세에 쑥대밭이 되리라.
올리시렌은 필사적으로 정보를 찾아가며 마녀의 운명을 피했다.
"그리고 지금은 잘 살고 싶어."
그렇게 만난 카인 에셀레드.
그는 올리시렌의 운명을 완전히 뒤틀었고, 더 나아가 아이리안의 운명마저 흔들었다.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한 그녀는 고개를 슥 돌려 카인에게 물었다.
"너는?"
올해 봄이 시작할 무렵.
아벨은 카인의 지도로 아르드바르를 익혔다.
그리고 곧장 물었다.
-제가 언젠가는 형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카인은 그때와 똑같이 답했다.
"새로운 봄이 온다면-."
당시에 이 말의 뜻을 아는 건 오직 카인뿐이었지만, 지금 한 사람이 더 늘었다.
"그 봄을 보고 싶다."
소망이었다.
기도였다.
그리고 카인의 절망이었다.
용사 아벨의 죽음을 딛고 얻은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봄을 보고자 하는 건 너무도 사치스러운 일이라.
오늘만을 사는 카인의 입장에서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새로운 봄은 너무도 먼 훗날.
"혼자?"
카인은 두 손을 쥐며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망을 기도했다.
"아니, 다 같이."
"그런데 왜 혼자만 하려고 하는 거야."
카인은 그 어느 때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겨울'이 당신의 기도를 듣습니다.]
"아직 나의 겨울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올리시렌은 자신보다 어린 카인이 이 순간 너무도 큰 어른으로 보였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겨울'이라는 무게가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로.
거친 물살처럼 말이 쓸려 나갔고, 나글파르는 어느새 북방원정군이 있었던 강 유역에 다다랐다.
주요 병력은 다 숲으로 향하고 남은 건 보급을 담당하는 일반 병력 조금이었다.
불을 피운 것도 그들이었고.
"이 배 덕분에 늦진 않을 모양이야."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력에 손을 흔들며 나글파르는 엘프의 숲으로 들어갔다.
봄의 전장으로.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02 EP.Ⅱ-2
별이 내리는 봄 (1)
'봄이 눈을 감는 곳'의 신전.
카테리나는 에드먼드를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마녀와 연관된 걸 알자마자 곧장 징벌을 내렸을 터.
꿀꺽.
하지만 달랐다.
신전의 가장 안쪽 반투명한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클로에, 잘 지냈소?"
에드먼드가 보랏빛 눈의 여인을 향해 안부를 물었다. 말 자체는 그답게 싱거웠지만, 담겨 있는 따스함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 떻게?"
천천히 큰 눈을 깜빡인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클로에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에드먼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답지 않게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살아왔소."
"당신...."
후우우우우-.
클로에가 일어난다.
두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움직였다. 그녀는 우뚝 선 에드먼드를 이리저리 살폈다.
"제가 어떻게 잘 지내요. 이미 죽었는데. 게다가 하나뿐인 남편은 죽을 자리로 들어갔고."
퉁명스러운 말.
하지만 얼굴에 만연한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미안하오."
마치 에드먼드의 이런 말이 듣고 싶었던 듯.
"잘 돌아왔어요, 에드먼드."
언데드도 돌아다니는 세상에 유령이 없을 리 만무하다.
성직자의 일 중 하나가 유령을 퇴치하는 것도 있을 정도니까.
"정체가... 뭐죠?"
카테리나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유령이나 언데드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데, 반투명한 클로에는 그런 것들과는 격이 다른 '무언가'였다.
클로에는 에드먼드에게 손짓하곤 성녀의 앞으로 날아왔다.
성국의 정예들이 무기를 교차하며 더 다가오는 걸 막기 전까지.
"클로에 에셀레드예요. 저 무뚝뚝한 인간의 아내죠. 성녀시죠?"
"...그렇습니다."
"이렇게 실물로 뵈게 될 줄은 몰랐네요. 지금부터 한참 후인데도 거의 변한 것도 없는 게, 잘 안 늙으시는 체질이신가 보네요."
"실물로?"
클로에는 카테리나의 반문에 자신이 빼고 말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뼉을 치면서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대충은 아시겠지만 전 '꿈꾸지 못하는 바람'의 마녀, 클로에기도 해요."
도시연합의 과학 기술과 성국의 신성을 더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녀의 파동을 측정하는 지도, '랄랑드 성표.'
이단심판의 주요한 근거가 '랄랑드 성표'인 만큼 카테리나는 마녀에 대해서 빠삭하게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지역이 아니라 '바람'이 속성이라면 꽤 대단한 마녀인데...."
마녀의 이명만 들어도 곧장 어떤 힘을 지닌 마녀인지 유추할 정도로.
클로에는 팔짱을 낀 채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꿈꾸지 못하는'이라는 이명이라면...."
마녀는 특징과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해당 정보는 이명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돌아보지 않는 숲'이라면 마녀가 힘을 발할 수 있는 속성은 '숲'이고, '돌아보지 않는'은 해당 마녀가 지닌 특징을 의미했다.
즉,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이자 엘프 여왕인 글루미엠은 숲에서만큼은 엘프의 힘에 더불어서 마녀의 '기적'까지 마음껏 부린다.
카테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뚫어지라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봐 왔던 마녀의 기록 덕분에 그녀는 답을 낼 수 있었다.
"당신의 '기적'은 미래를 보는군요."
클로에의 눈이 커졌다.
그건 허를 찔려 놀라워하는 모습보단, 기대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의 기쁨에 가까웠다.
"역시 성녀님!"
"바람이 속성이니 바람처럼 움직일 수도 있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미래를 봤겠고요."
"어머, 어머! 거의 맞아요! '이명'만으로 이렇게까지 정체를 알아내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물론 사람에게 말한 건 저이뿐이지만요."
마녀답지 않았다.
심지어는 백작가의 아내답지도 않았다.
마치 십대 후반의 소녀.
카테리나와 성국의 정예들은 클로에가 보이는 괴리감에 조금씩 더 경계하기 시작했다.
클로에도 그런 경계를 느낀 듯.
"이런, 에드먼드. 이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
"내가 설명하겠소."
에드먼드는 자신에게 붙어 있는 클로에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후웅-.
클로에는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허망하게 통과했다.
"클로에는 확실히 죽었지."
이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성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클로에는 그녀가 나를 처음 만날 때 모습을 빚어 남겨 둔 그녀의 '꿈'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카테리나는 본능적으로 정체 모를 혐오감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으득-.
마녀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 건 어차피 진즉 죽은 마녀이기 때문.
그러나 치솟는 기분만 생각하자면 당장이라도 징벌하고 싶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이유조차 모를 불쾌함에 흔들릴 거라면, 성녀라는 이름은 진즉 떼졌을 테니까.
카테리나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꿈을 남겨 두었다?"
"제가 미래를 보는 방식이 특이해서 그래요. 방금 제가 거의 맞았다고 했죠?"
"예."
"저는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미래를 볼 수 있어요."
"...!"
카테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녀의 힘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각 마녀의 특징과 속성에 한해서는 정말 기적이라고 불릴 일을 하기 때문.
그렇지만 이건 '기적'을 아득하게 상회하는 대이적에 가깝다.
클로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한 지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을 때, 에드먼드가 뒤이어 말했다.
"모든 걸 보는 건 아니오. 그녀와 관련된 사람의 미래만 볼 수 있지. 나나 카인 같은."
"사실 둘뿐이기도 하고."
바람이 불 때 단 두 명의 미래를 아는 건 이해 가능한 '기적.'
"그리고 '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어요. 제가 있는 이유죠."
카테리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정말 당신은 미래를 '보는' 존재군요."
클로에의 미래를 보는 힘은 그 강력함에 앞서 조건이 여럿 걸려 있다는 걸.
첫 번째는 바람이 부는 곳.
두 번째는 에드먼드와 카인 둘만.
세 번째는 미래의 '꿈'이 '기적'을 이용해 관찰한 미래만 과거의 클로에가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꿈을 꾸지 못하는군요."
눈을 감고 잠들었을 때 비치는 상이 아닌, 자신의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마녀, 클로에.
"네!"
클로에의 반투명한 모습이 순간 더욱 흐려졌다.
그러다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같이 위태해 보였다.
카인의 미래를 보는 마녀.
에드먼드가 어째서 카인이 용사라고 말하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꽈악-.
그러나 이것 때문에 그녀가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저도 미래를 봤습니다. 성류관이 비춰 준 '미래'이자 계시였죠."
한낱 이단의 마녀가 지껄이는 미래가 아니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성류관, '가을'이 비춘 광경이었으니까.
클로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파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본 마지막 미래는 제 아들이 '보통의 마왕'을 죽이는 그 순간이에요."
쿠르르르릉-.
먼 곳에서부터 뇌명이 울린다.
신전의 불꽃이 흔들리고 카테리나의 눈빛도 따라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 어떻게 말릴까요. 같은 광경을 봐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게-."
"헤네랄리페에서 아벨을 죽이는 그 순간."
"...."
카테리나의 눈이 가늘어진다.
클로에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말았어야 할 '가을'의 광경이 흘러나왔다.
클로에는 다시금 한 글자씩 끊어서 분명히 말했다.
"제 아들은 거기서 마왕을 죽여요."
쿠르르르르릉-!
천둥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카테리나의 얼굴을 휘감는 그림자는 더더욱 짙어졌고, 에드먼드는 그저 묵묵히 남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대수림의 결계'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리안 북방원정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딥 포레스트'를 감싸는 결계의 존재를 확인하곤 돌아간 원정도 존재하는데, 이젠 반나절이면 가능했다.
솨아아아-,
엘리바가르의 검은 물길이 옆으로 지나가는 작은 평지.
올리비아는 총사령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마법사들은 앞으로 나서라!"
로스 후작이 동족을 배신한 엘더에게 받았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마탑은 '대수림의 결계'를 해제할 마법을 연구했다.
"얼마나 걸리지?"
올리비아는 어느새 가져온 의자에 앉으며 선임마법사에게 물었다.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센 그는 생경하다는 눈빛으로 결계를 우러러보았다.
"저희의 계산보다 결계가 너무 커서 완전한 해제는 불가능합니다."
"...."
올리비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그녀의 눈빛과 그녀가 손에 쥐는 무기에 선임마법사는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습관적으로 로브 소매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숲의 습기 때문에 딱 달라붙는 가죽 갑옷을 입었다는 걸 깨닫곤, 그냥 가죽으로 이마의 땀을 찍어 내며 이어 말했다.
"대신 저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은 세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스윽-.
올리비아는 그제야 무기를 손에서 놓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맥로든 후작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로스 후작은 그저 숲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딥 포레스트'안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양.
"전군 휴식을 취한다. 마법사들은 조속히 '대수림의 결계'를 무너뜨리고 그 즉시 진입한다."
"예스, 로드 올리비아."
두 후작이 이끌고 온 기사단은 엘프들이 중간에 방해를 할 수도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며 진지를 구축했다.
올리비아의 권위를 위해 떨어져 있던 맥로든 후작이 다가왔다.
"아가."
"전장입니다. 맥로든 후작님."
늘 유들유들했던 올리비아였지만, 긴장되는 듯 혹은 절대 풀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맥로든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아랫사람들도 다 같이 긴장한단다. 단기 결전이면 모르겠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를 싸움에선 그러면 안 된단다."
올리비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바라던 왕위가 코앞이다.
맥로든 후작이 건네는 조언의 가치를 알기에 그녀는 긴장을 풀었다.
"...알겠어요."
맥로든 후작은 그런 올리비아의 곁으로 와서 낮은 목소리로 귓속말했다.
"로스 후작을 잘 보거라."
"...?"
"이상해. 원래도 이상했는데 숲에 들어오고부터 아주 이상해. 원정군에 반드시 있어야 할 '약식 대마법결계'도 이번엔 괜찮다고 가지고 오지 않고."
맥로든의 직감이었다.
그가 아는 헤터워드 로스 후작이라면 어떻게든 공을 내세우고 기사단을 다독이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헤터워드는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휘하 기사들도 시큰둥해 보였다.
올리비아는 회색의 안개가 감싼 반구형의 '대수림의 결계'를 보고는 대답했다.
"어차피 로스 후작의 가치는 저 결계를 푸는 것뿐이에요. 여차하면 저희의 병력으로 '딥 포레스트'를 집어삼킬 수도 있고요."
맥로든 후작가와 올리비아 왕녀는 온갖 상황에 대해 대비해 두었다.
그중엔 로스 후작의 배신도 있었다.
다행인 건 결계 해제는 마탑에 속해 있으니 그가 배신해 봤자 기사단을 물리는 것일 뿐.
거기까진 모두 계산했다.
그러나 맥로든 후작의 직감은 그 이상이 있다고 자꾸 울렸다.
하지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 수 있게 쉬는 것뿐이었고.
"일단은 지켜보죠."
"하, 그래야겠구나. 뭔가 찜찜한데."
그렇게 쉬는 동안 마탑의 마법사들은 회색의 결계에 달라붙어 있었다.
공격하리라 예상했던 엘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덕에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작업을 다 끝냈고 올리비아를 필두로 원정군이 줄 맞춰 결계의 앞에 섰다.
"그럼 문을 만들겠습니다."
선임마법사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화아아아아아-.
그 순간 회색의 결계가 흩어지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안개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안개의 밖.
수백 쌍의 초록 눈이 원정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103 EP.Ⅱ-2
별이 내리는 봄 (2)
결계 너머, 오색이 찬란한 숲의 마을이 보인다.
털썩-.
올리비아는 귓가에 울리는 이상한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직감상 절대 그냥 넘기면 안 될 소리였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소리가 날 게 없다.
게다가 눈앞에 아이리안의 그 누구도 밟지 못했던 '딥 포레스트'의 안쪽이 보이는 상황.
털썩-.
소리 따윈 중요치 않다.
올리비아는 깃발을 들었다.
"전군! 진격하라!"
콰다다다다다-!
대지가 울린다.
아이리안 300년의 한과 원망.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초록의 대장벽이 원정군의 압도적인 질주 아래 바스러진다.
털썩-.
엘프는 수가 적었다.
자세히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몸이 약한 관계로 아이를 낳을 때 많이 위험하여 잘 낳지 않는다는 학설이 사실인 듯했다.
북방 엘프의 마을에 어린아이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선조의 한이 서려 있다! 엘프 여왕을 잡아라!"
저 멀리 엘더들의 호위 속에 도망가는 여왕, 글루미엠이 보였다.
올리비아는 급하게 땅을 박차며 달렸다.
그 뒤를 맥로든 후작가의 기사들이 따랐다.
기기묘묘하게 얽힌 나무 넝쿨을 넘어 피에 젖은 숲을 달리던 올리비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털썩-, 털썩-.
"혹시 다들 이 소리가 들리는가?"
다른 소리였다면 환청이나 이명으로 취급하겠지만.
들리는 건, 마치 가죽 갑옷을 입은 기사가 쓰러져 흙바닥에 부딪치는 소리 같았으니까.
그래서 주위의 기사들에게 물었다.
"소리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들리는 건 자신뿐인 듯했다.
화아아아-.
왠지 안개가 더 짙어졌다.
소리에 대해 생각하던 올리비아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마녀의 힘을 부리며 도망가는 글루미엠을 잡기 위해 내달렸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든든했다.
언제나 큰 기둥이 되어 주는 맥로든 후작과 제대로 답은 안 해 주지만 힘이 되어 주는 로스 후작이 같이 달렸으니까.
"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노구의 맥로든 후작은 있다.
하지만 가슴팍에 상징을 박고 다니는 새카만 로스 후작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묘하게 잘생긴 기사가 말했다.
"로스 후작님은 반대쪽으로 돌아서 양동작전을 하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올리비아는 휘청였다.
털썩-.
정말 그랬던가?
맥로든 후작과 분명 로스 후작을 경계하자고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따로 보냈을까?
"어쩔 수 없으시다고-."
이어지는 기사의 말.
올리비아의 귀로 안개가 스며들었다. 한순간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아, 그랬지. 왜 이렇게 중요한 걸 깜빡했는지 모르겠군."
저 멀리 아른아른 글루미엠이 보인다.
자신을 흘깃흘깃 살피는 게 천적에게 쫓기는 초식동물같이 보였다.
올리비아는 '소리'나 '로스 후작' 같은 사소한 문제들을 뒤로한 채 다시금 대지를 박찼다.
'딥 포레스트'는 밖의 숲과 다르게 흙마저 부드럽고 폭신한 기분이었다.
쉬잇-.
그녀와 함께 달리던 기사 하나가 화살을 맞았다. 그가 단숨에 절명하는 걸 보며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쟁에서 모두가 살아가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잃기엔 너무도 아까운 기사기에 잠시나마 마음속으로 애도하고 내달렸다.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투둑-.
그리고 빗방울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사상 최초로 '딥 포레스트'를 정복하고 아이리안의 여왕이 된다는 꿈에 부풀었다.
* * *
"나는... 아이리안의 기사다...."
안개가 짙다.
'대수림의 결계'를 이루고 있는 희뿌연 안개가 파도처럼 물밀듯 몰려왔고, 단숨에 원정군을 삼켰다.
"이까짓...."
털썩.
엑스퍼트급 기사쯤 되면 저주나 마법에 대한 정신력이 상당한 편이다.
그러나 원정군의 기사 중 대부분은 첫 번째 안개의 파도에 휩쓸려 바닥에 누웠고.
"제길."
털썩-.
그나마 버티던 강한 기사들도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기사들은 안 빼나?"
엘더, 페이 멕게라티.
시그마리가 누워 있고 리히스가 멀리 간 만큼 글루미엠이 보낸 세 번째 엘더 엘프가 로스 후작에게 물었다.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관조하던 헤터워드는 입을 열었다.
"굳이. 그래도 주황색 띠를 팔에 찬 이들은 봐주면 좋겠군."
로스의 기사단, <로스 데 캐롯>.
마치 이날만을 위한 듯 모두 팔에 주황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두지. 그렇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도록."
색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저 젊은 엘프들이 일탈할 게 뻔해서 하는 말이었다.
"알겠다."
제 기사가 죽는다고 해도 시큰둥한 차가운 말.
페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수백의 기사가 바닥에 엎어진 전장을 돌아보았다.
스윽- 스윽-.
'딥 포레스트' 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엘프들이 그들의 사이를 거닌다.
결계의 환상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는 기사들을 발로 차고.
푸욱-.
심장에 칼을 꽂기도 하고.
스극-.
리히스가 그랬듯 팔과 다리를 잘라서 정리하기도 했다.
<로스 데 캐롯>의 주황색을 보고도 그들은 별 상관없이 학살을 자행했다.
"절반만 살리면 된다고 여왕님께서 말씀하셨다. 맞나?"
페이는 건조하게 물었다.
적극적이던 시그마리와 매사에 늘 딴지를 걸고 비아냥거리던 리히스와 달리 철저히 시킨 일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후 사흘쯤 두다가 깨워서 돌려보내면 된다."
그리고 일부 엘프는 기사의 시체를 끌어내어 옷과 장비를 벗겼다.
후우우웅-.
그들의 마법을 이용해 귀를 숨기고 외양을 바꿔서 기사의 모습으로 바꾸고 그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엘프가 인간세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현장이었다.
페이는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눈빛을 빛냈다.
저 멀리, 노인 하나가 한쪽 무릎만 굽힌 채 자신과 로스 후작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로스 후작도 그 눈빛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로... 스 꼬맹아...."
맥로든 후작이었다.
'대수림의 결계'의 환상에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로스 후작을 부른다.
"그대를 부른다."
"영감이 독해."
로스 후작은 천천히 안개를 거닐었다.
로스의 피.
헤터워드는 글루미엠이 엘프의 힘과 마녀의 힘을 동시에 녹여내어 만들어 둔 대결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안개마저 로스 후작에 닿을까 봐 그를 피해 흘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결계는 해제했는데...."
"지금까지 '대수림의 결계'를 돌파하지 못했던 건 엘프의 마법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마녀의 '기적'까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맥로든은 감기려는 눈을 어떻게든 부릅떴다.
이미 반쯤은 '딥 포레스트'를 짓밟고 글루미엠을 뒤쫓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네가 가져온 건 절반... 이었구나."
로스 후작이 마탑에 제출한 정보는 '대수림의 결계'를 이루는 마법적인 부분이었다.
즉, 결계의 중심인 마녀의 '기적'은 쏙 빠져 있었으니 반쪽이리라.
"엘프 여왕이 마녀인 건 성국에서도 아는데 속은 쪽이 멍청한 거죠."
로스의 차가운 말.
맥로든은 그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며 정신을 붙잡았다.
"하이볼트가 그렇게도 싫더냐."
에버윈 로스 그리고 카를라 오우드리.
로스 후작과 하이볼트 국왕 간의 일을 모두 아는 맥로든은 배신의 이유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딱히."
그러나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이젠 그를 이해합니다. 나의 누이가 에드먼드에게 했던 부탁도 이해되고."
처음에는 분노했다.
그다음에는 원망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복수.
로스 후작은 로스의 새장에서 그녀를 빼 간 주제에 지키지 못한 하이볼트를 응징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우울의 관'을 만들어서 천천히 마음을 죽이고자 했지만, 그 일은 실패했다.
로스 후작은 여전히 '대수림의 결계'에 휘감겨 보이지 않는 '딥 포레스트'를 돌아보았다.
"다만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카를라...?"
헤터워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의 말을 정정했다.
"에버윈 로스입니다. 카를라 같은 잡스러운 이름으로 부를 사람이 아닙니다, 제 누이는."
"미친놈.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대신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맥로든은 전장을 둘러보았다.
아니, 이건 전장이 아니라 도살장이었다.
서로의 칼과 무기가 부딪치고 신념과 분노가 부딪히며 목숨을 앗아 가는 전쟁이 아니라, 그저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
로스 후작은 손을 뻗어 맥로든 후작의 얼굴을 가렸다.
"푹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날 겁니다. '딥 포레스트' 깊숙이 글루미엠을 쫓아 들어갔다가 함정에 빠져 원정군 절반을 잃습니다."
"시나리오가... 있었어."
맥로든의 눈이 점차 감긴다.
수백의 기사도, 올리비아도 견디지 못했던 글루미엠의 환상에 평범한 인간이 이 정도까지 버틴 것만 해도 초인적인 정신력이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기지를 발휘해서 원정군을 살려서 돌아오죠. '딥 포레스트'를 밟고 목표 직전까지 달성하고 온 최초의 여왕이 될 겁니다."
이젠 현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이는 건 엘프들이 기사로 분장하는 모습이었다.
지금껏 마르퀴스 벨트는 엘프들의 남하를 저지했다.
그러나 지금 엘프들이 원정군으로 분장해서 아이리안의 상층부에 스며들고 있다.
엘프답지 않은 방법.
그리고 인간답지 않은 인간.
둘이 합작해서 그간 견고했던 마르퀴스 벨트를 부수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배신자...."
맥로든은 한마디를 남기고 털썩 쓰러졌다.
로스 후작은 바닥에 쓰러진 맥로든 후작을 내려다봤다.
방금 기억은 안개에 지워지리라.
글루미엠과 자신이 짜둔 대로 그들은 기억하고 보고 겪을 터.
"내가 배신하기 전에 먼저 배신당한 건 납니다. 내 모든 걸 앗아 간 인간세계는 무너져야겠죠."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담담한 진심을 남긴 채 천천히 결계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페이 멕게라티도 그의 곁으로 왔다.
"아직은 안 된다."
휙.
헤터워드는 방금과 달리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페이를 직시했다.
그녀는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먹구름이 잔뜩 낀 채,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원정군이 물러나고서 그대를 들여보내라고 여왕님께서 말씀하셨다."
"...."
에버윈이 보고 싶다.
세계수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을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었지만, 로스 후작은 몸을 돌렸다.
떼를 쓴다고 들어 줄 상대가 아니기도 했고.
아직은 납작 엎드려야 할 때였으니까.
그저 묵묵히 엘프들이 원정군을 도륙하는 현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페이가 말을 건넸다.
"저 늙은 인간하고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살려 달라면 하나 정도는 살릴 수 있다."
헤터워드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단언했다.
"죽여도 된다."
"알겠다."
페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는 세검을 뽑아 들었다.
인간세계에서 후작이라는 위치가 엘프 세계의 엘더와 비슷할 터. 특별히 다른 엘프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움직였다.
"후작은 하나만 있으면 되겠지."
바닥에 쓰러진 맥로든 후작의 목덜미 위로 세검을 높이 든다.
투툭-.
빗방울이 세검을 타고 맥로든 후작의 목에 떨어졌다.
헤터워드는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고.
쉐에에에에엣-!
페이는 그대로 맥로든의 숨통을 끊기 위해 검을 내리찍었다.
채애애앵-.
하지만 세검은 어디선가 날아온 새카만 칼에 튕겨 나갔다.
마치 맥로든을 지키듯 밤을 벼려 만든 새카만 칼이 그녀와 맥로든 사이에 꽂혔고.
"거기까지."
콰가가가가가강-!
갑작스레 터진 천둥에 엘프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세상을 불태울 것 같은 순백의 번개가 꽂혔고 흑발의 사내가 땅에 내려왔다.
후우우우우우-.
바람이 분다.
긴 흑발이 나부낀다.
빗방울이 휘고 결계의 안개가 그를 피해 물러선다.
"이 영감이 내게 조언해 준 게 있어서 한 번은 살려 줘야겠거든."
로스 후작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내는 살육의 현장을 익숙한 듯 쓱 둘러보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별 쓸모는 없었지만."
카인이었다.
#104 EP.Ⅱ-2
별이 내리는 봄 (3)
후우우우-.
하늘의 먹구름은 짙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비가 내리진 않았다.
덕분에 카인 일행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온다."
방금까지만.
카인은 저 멀리 북에서부터 밀려오는 뿌연 안개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올리시렌의 두 눈이 순간 새카매졌다. 그녀의 몸속 '마녀의 힘'이 안개의 정체를 읽어 냈다.
"글루미엠의 힘이야."
"어떤 건지 알겠나?"
"정신계열 현혹. 마법과 마녀의 기적이 섞여 있어. 안개에 휩싸인 자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는 것 같네."
올리시렌은 급하게 뒤에 떨어져 있던 밴더빌트와 이소엘을 가리켰다.
굳세라.
기기기기기긱-.
마녀의 힘을 발휘할 때마다 여지없이 들리는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 소리에 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밴더빌트와 이소엘의 전신에 흑색의 갑옷이 휘감겼다.
"오...?"
발람 전투 때부터 올리시렌의 버프에 익숙해진 이소엘은 태연했지만, 밴더빌트는 달랐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단단한 갑옷을 문질러 보기도 하고 제자리를 뛰면서 무게를 측정하기도 했다.
"상당히 단단하고 유연한데 무게가 없습니다. 이런 갑옷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과거의 기사들은 풀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공성추처럼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밴더빌트의 젊을 때였다.
당시 입었던 풀플레이트 아머보다 훨씬 더 견고하면서도 편한 흑색의 전신 갑옷에 밴더빌트는 계속해서 감탄했다.
카인은 쓰게 웃으며 물었다.
"올리시렌이 어떻게 그걸 만들었는지는 안 궁금해?"
밴더빌트의 주름진 얼굴이 붉어진다.
기사답게 갑작스레 생긴 갑옷에 흥분해서 나머진 모두 뒷전에 미뤘었으니까.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왕녀님이기도 하고... 마녀님이니까 이런 건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카인은 피식 웃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데 왜 갑자기 저희에게?"
휙휙-.
카인은 난간에 기댄 채 엄지로 몰려오는 안개의 파도를 가리켰다.
물가인 만큼 당연히 몰려오는 안개인가 했지만, 카인과 올리시렌의 반응에 밴더빌트도 그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후우우우우우우-.
어느새 배는 안개 속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나글파르를 운행하던 로스 혈족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미 죽은 언데드기도 했고 본래 로스 혈족이 엘프의 천적이라 불린 이유가 그들의 강대한 마법 저항력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오오?"
밴더빌트는 거대한 동물의 혓바닥처럼 자신을 휩쓰는 안개를 보며 신기해했다.
이소엘은 안개를 손끝으로 문지르곤 냄새를 맡았다.
"그냥 안개가 아니군요."
올리시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둘에게 갑옷을 입히지 않았다면, 둘 다 사이좋게 쓰러져선 꿈꾸고 있을 거야."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엔 아무런 장비 없이 검 한 자루만 찬 채 시큰둥해 보이는 표정의 카인이 있었다.
어떻게 멀쩡한지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법인지 주술인지, 날 잠재우려면 이 열 배는 가져와야 해."
파지지지직-.
'겨울'의 힘을 각성한 그 순간부터 패시브, 순백의 뇌전이 카인의 온몸을 뒤덮고 있다.
'겨울'의 격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라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카인을 현혹하진 못할 터.
'신기의 힘이 없었어도 이 정도는 어렵지 않고.'
대장벽에 있을 땐 이보다 훨씬 독한 저주를 맨몸으로 감당해야 했으니까.
약하면 죽고.
강하면 살아남고.
그리고 십 년을 살아남은 카인은 아득하리만큼 궤를 달리하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후웅-.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안개가 조금 더 흩어지면서 흐릿하게 좁은 평야 같은 것이 보였다. 엘프들이 산다는 '딥 포레스트'의 앞 같았다.
나글파르가 다가가면서 조금 더 잘 보였다.
스겅-.
기사들의 팔다리가 잘려 나간다.
어떤 엘프는 저항조차 못 하고 꿈틀거리는 기사의 손가락을 마디마다 자른 후 조약돌을 모으듯 주머니에 넣는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미소 짓는 엘프들의 손에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이 죽어 가고 있다.
"...!"
올리시렌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소엘은 급하게 달려 올라와 휘청이는 그녀를 부축했다.
밴더빌트도 카인 옆 난간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건 전장이 아닙니다... 도살장입니다."
카인의 보랏빛 눈이 차가워진다.
전쟁에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하다지만, 이건 아니다.
일방적으로 쓰러져서 곡식을 수확하듯 목숨을 잃는 것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니었다.
"원정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약식 대마법 결계'가 있을 텐데, 어째서 다들...."
올리시렌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지금껏 싸움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한쪽이 당하는 건 처음 보았으니까.
그리고 그 당하는 쪽이 자신의 왕국 기사들이다.
카인은 저 멀리 손가락을 가리켰다. 머리가 없어서 반짝이는 한 중년인이 있었다.
"저거 로스 후작이지? 머리를 보니 알겠군."
게다가 다른 기사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로스 후작의 외양을 알고 있는 올리시렌이 답했다.
"맞아. 가슴팍의 저 문양은 로스의 문양이기도 하고."
파지지직-.
카인의 보랏빛 눈에 뇌전이 튄다.
안개를 꿰뚫고 거리를 넘어서 로스 후작의 주위를 정확히 읽어 냈다.
그의 앞.
끝까지 저항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엎어진 맥로든 후작이 있었다.
투둑-.
비가 내린다.
차가운 빗방울이 카인의 얼굴을 타고 흐르지만,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 불길을 잠재우기엔 늦었다.
"전쟁에 패배는 당연하지만, 내부의 배신으로 도륙당하는 건 보기 싫군."
그렇게 말하며 아그웨스카를 쥐었다.
맥로든 후작에게 다가가는 엘프의 모습.
"카인."
올리시렌이 카인을 불렀다.
회색을 까맣게 물들인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카인을 잡았다.
"미안해."
"...."
"언제나 네게 희생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건 너뿐이네."
그녀의 마음속 일어나는 두 가지 감정이 손에 잡힐 듯했다.
왕국의 미래가 누워 있는 저곳을 바꾸고 싶다는 왕녀의 마음과 카인이 더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마음.
"굳이 말을 길게 할 필요 없다. 짧게 말해."
후웅-.
카인은 그녀의 손을 놓고 난간 위로 올라섰다.
불어오는 북방의 바람도, 짙은 안개도 카인에겐 범접할 수 없었다.
오직 올리시렌의 검은 눈만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인은 맥로든을 향해 세검을 세우는 엘프를 살폈다.
"구해 달라고. 네 왕국의 미래를."
"아니."
올리시렌은 두 팔을 펼쳤다.
기기기기기기기긱-!
흡사 세계가 찢겨 나갈 것만 같은 굉음이 울린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어나는 듯, 수천수만 개의 톱니바퀴가 으스러지는 소리!
살아!
올리시렌의 걱정.
"왕국보단 왕국민이 먼저야. 그리고 넌 내 국민이고."
마녀로서의 명령.
왕녀로서의 책임.
맨 처음 봤던 올리시렌은 입만 산 어린애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름 훌륭한 왕녀가 되었다.
카인은 그 모습에 미소 지었다.
"예스, 유어 그레이스."
타앗-!
그러곤 허공으로 치솟았다.
어느새 뽑은 건지 알 수 없는 아그웨스카를 그대로 집어던졌다.
쉐애에에에에-.
흐릿한 안개를 가르는 흑색의 궤적!
카인도 뒤이어 뛰어 날았다.
북방의 전장에 카인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