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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10

* * *

파지지지직-.

카인은 하이볼트를 치료할 때처럼 '겨울'의 뇌전을 손에 끌어 올렸다.

그리고 엎어져 있는 맥로든 후작의 뒤통수에 가져다 대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전기 충격에 맥로든 후작은 파들파들 떨다가 눈을 떴다.

글루미엠의 '대수림의 결계'가 덧씌운 환상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눈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영감님."

"너... 는?"

깨어나긴 했지만 몽롱했다.

하지만 이내 맡아지는 비릿한 피 냄새에 곧장 정신을 차렸다.

수백 쌍의 초록 눈이 그를 바라본다.

"내 손녀사위 아닌가?"

장난기 어린 맥로든의 물음에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바닥에 꽂힌 아그웨스카로 손을 뻗었다.

"뭐, 그것도 살아야 될 텐데 말이죠."

생명을 수확하던 엘프들이 모여든다. 숲의 나무들이 그렇듯 엘프들도 카인이 빠져나갈 틈 없이 그를 포위했다.

그들의 발에 걸리는 기사들은 발로 차서 치워 버리는 게, 생명을 생명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포위의 밖.

이곳을 바라보는 로스 후작과 엘더 페이가 있었다.

맥로든 후작은 그를 보며 소리쳤다.

"네놈이 그러고도 아이리안의 후작이더냐! 부끄럽지도 않아?"

"않습니다."

"...."

순간 맥로든 후작은 말문이 막혔다. 비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에게나 먹히는 것.

로스의 태도에 이미 글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오히려 다른 것에 더 관심 있었다.

카인이 타고 온 로스의 검은 함선, 나글파르였다.

"쯧. 나글파르를 꺼낼 줄이야. 워럴드의 지배력은 어떻게 풀었지?"

"잘."

"...."

방금 맥로든처럼 로스 후작도 말문이 막혔다.

그 틈에 카인 일행을 여기까지 빠르게 데려다준 나글파르가 거친 물살을 이기고 땅에 닿았다.

거기서 올리시렌을 비롯한 셋이 다가오는 것도 보였다.

"말투에 싹수가 없고 머리도 없는 게 헤터워드 로스 후작 같은데, 맞나?"

카인은 그를 직시했다.

그간 이름은 지겹게 많이 들었다.

이전 세계선까지 통틀어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로스 후작은 상당히 평범하게 생겼다.

다만 그를 휘감은 미묘한 분위기가 위험하게 보이게 했다.

"무례하군."

"너는 너 죽이려는 놈한테 뭐 얼마나 예의 있지?"

카인의 말에 헤터워드는 잠시 움찔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짧았다. 사과하지."

"이거 많이 개자식이네. 제멋대로 난리 피우고 사과하고."

엘프들의 뒤편에서 헤터워드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워럴드의 지배력을 어떻게 풀었는지 말하면 고통 없이 죽여 주마."

카인은 검지를 들어 로스 후작을 가리켰다.

"너 따위가?"

가소롭다는 웃음과 업신여기는 삿대질이 교차한다. 아이리안에서 절대 부딪치지 말아야 할 둘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카인의 뒤에서 지켜보던 맥로든 후작은 손뼉을 쳤다.

"손녀사위 잘한다!"

카인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말했다.

"그만하시죠."

"...알겠네."

맥로든 후작은 입을 닫았고, 다시금 카인과 로스가 대치했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때, 팔다리는 필요 없겠지."

로스 후작은 엘더, 페이를 돌아보며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님의 힘으로 너무 싱겁게 이기고 있다곤 생각했다. 젊은 애들은 답답해했고."

스스슷-.

엘프들이 무기를 쥔다.

첫 열에 있는 녀석들은 가벼운 세검을 쥐었고, 그 뒤로는 활과 정령을 부리는 엘프들이 서 있었다.

페이는 카인의 보랏빛 눈과 마주했다.

"너로군, 여왕님께서 운명을 보지 못했다는 인간이."

"걔는 부끄럽지도 않나."

스윽-.

카인은 왼발을 옆으로 밀며 바로 섰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아그웨스카를 잡아 뽑았다.

"나한테 패해서 도망간 걸 부하들한테 종알종알 다 말할지는 몰랐네."

화아아아아악-!

엘프들의 살기가 치솟는다.

그들의 지독한 살의 가운데서 카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카인의 도발에 입을 벌렸던 페이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저 셋을 믿는 건가?"

엘프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카인의 일행들이 합류하는 걸 막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아니."

"그럼 미친 인간인가?"

엘더, 페이는 카인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저들은 오히려 날 믿고 있고."

이소엘과 밴더빌트가 강한 편이기도 하며, 올리시렌의 버프가 함께라면 더욱 걱정 없었다.

"나는 나를 믿을 뿐이다. 보고 싶었다, 로스 후작."

살을 에는 살기 속에서 카인은 왠지 모르게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몸이 태어난 고향은 에셀레드지만 마음이 태어난 고향은 대장벽이라.

하루에도 수천의 괴물들이 달려드는 곳에서 카인은 늘 이런 싸움을 해냈기에 익숙했다.

"나를?"

로스 후작은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당신이 상상하기도 전부터."

아그웨스카의 칼끝이 움직인다.

솨아아아!

그 순간 팽팽하던 엘프의 활시위가 풀리면서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아이리안 역사에 기록될 마지막 북방전투의 시작이었다.

#105 EP.Ⅱ-2

별이 내리는 봄 (4)

솨아아아아-!

화살이 날아온다.

맥로든 후작은 머리를 붙잡으며 급하게 몸을 숙였다.

이 거리에선 사람이 쏴도 무시무시한데 지금 쏘는 건 수십의 엘프 궁사.

아무리 죽을 날이 가까운 맥로든이라지만, 귓가에 들리는 바람 소리에 저절로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그에겐 수가 없었으니까.

티잉-!

하지만.

카인에겐 수가 있다.

티잉, 팅, 팅!

화살이 짓쳐 드는 순간을 나누고 나누어 마주할 시간 속에 카인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대장벽의 나날이 떠오른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붙잡고 다가오는 화살들을 인식하며 휘둘렀다.

'이건 의도가 사악하군.'

그 중엔 칼로 막기 힘든 하반신을 노리는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위와 동시에 노리면서 둘 중의 하나는 적중시키겠다는 뜻.

쿠웅-.

발을 들어 화살을 내리찍었다.

카인이 느끼는 시간 속에선 전사의 칼날조차 보이는데, 화살은 더욱 느릿하다.

이쯤은 문제없었다.

팅.

눈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은 아그웨스카로 튕겨 냈다.

푹.

힘을 잃은 화살은 카인 근처의 땅에 박혔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빽빽한 화살의 숲.

놀랍게도 맥로든과 카인의 주변이 화살로 새카매져도, 둘에게 꽂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스슷-.

카인은 슬쩍 흘기며 미소 지었다.

"커헉-!"

엘프 하나가 화살을 맞고 소리 질렀다.

'일단 한 놈.'

날아오는 화살 중 적절한 놈이 있었다.

아그웨스카의 옆면으로 일부러 빗겨냈고, 눈먼 화살이 엘프의 어깨에 박혔다.

화살에 맞은 엘프는 쏘던 활을 떨어뜨리고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하나, 둘.

'아쉽군.'

적의 화살로 적을 없애려고 했지만, 엘프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금방 막혔다.

소환되어 있던 바람의 정령을 움직여 튕겨 나오는 위험한 화살들을 막아내기 시작했으니까.

"그만 쏴라!"

하지만 의도는 성공했다.

엘더 엘프, 페이의 명령에 화살 비가 그친다. 맥로든 후작은 섬뜩한 소리가 멈추자 고개를 빼꼼 들었다.

어림잡아도 수백은 될 화살들이 주위에 고루 박혀 있다.

섬뜩한 마음을 애써 떨쳐 내며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나... 나를 지켜 준 겐가?"

맥로든의 중얼거림에 카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흑색의 검을 쥔 그의 몸에도 상처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로스만큼은 아니지만, 네겐 나도 적인데... 왜?"

늘 냉정하게 손익을 고려해서 움직이는 맥로든으로선 카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상황도 아니고 엘프가 쏘는 화살비에서 자신을 구하는 건 아무리 계산해 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카인은 잠시 옆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싸우면서 다가오는 올리시렌 일행이 보였다.

"같은 국민 아닙니까."

올리시렌이나 내뱉을 법한 입에 담으니 영 껄끄러웠지만, 실시간으로 변해 가는 맥로든 후작의 얼굴을 보니, 하길 잘했다 싶었다.

"국민?"

"우리끼리 싸우다가도 엘프라는 큰 적이 나타나면 힘을 합쳐야죠."

"힘을 합친다...."

반쯤 멍해진 그를 뒤로한 채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들어 어깨에 올렸다.

크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칼을 이렇게 두는 건 과거 '겨울'의 대검을 사용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러곤 페이를 향해 말했다.

"좀 더 하지, 왜 그만하나."

카인은 근처에 꽂힌 화살들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부러뜨렸다.

"하긴, 이 거리에서 그렇게 쏘는데 한 발도 못 맞춘 거면 부끄러워서라도 안 쏴야지. 드워프도 이건 맞추겠다."

엘프의 자존심을 부러뜨린다.

이미 카인을 맞추지 못한 것에 치욕이며, 수백의 엘프가 적 하나가 주는 압박에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굴욕.

카인의 도발에 대부분의 엘프가 들썩였다.

그때, 페이가 카인에게 물었다.

"너, 에드먼드와 무슨 관계지?"

한참을 멍하니 카인을 바라보던 그녀는 보면 볼수록 그와 에드먼드가 겹쳐 보였다.

-간다.

지난 회차의 원정군과도 싸웠던 만큼 페이는 에드먼드를 선명히 기억했다.

당시 페이의 지휘 아래 보급병들을 납치해서 인질로 삼을 때, 다른 원정군들이 나서지 못할 때.

에드먼드가 홀로 세검 한 자루를 들고 나섰다.

-내가 간다.

페이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카인이 서 있는 자리가 그 자리다.

에드먼드는 저기서부터 '대수림의 결계'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엘프들도 정령과 마법, 검과 화살로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불가능했다.

방금 카인이 그랬던 것처럼.

에드먼드는 세검 하나로 엘프의 포화를 단숨에 뚫어내고 보급병들을 받아 갔다.

꽈악-.

페이는 치솟는 공포를 내리눌렀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질주하는 그의 눈이 꿈에 나타날 때마다 잠에서 깰 정도로, 페이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었으니까.

그 공포가 슬금슬금 떠올랐다.

"에드먼드랑 안 친하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지켜보던 로스 후작이 말을 덧붙였다.

"저 녀석이 에드먼드의 친아들이다."

"...!"

페이는 다시금 카인을 훑어 내렸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손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괴물이 괴물을 낳았어."

몸의 균형.

화살들을 잡아채는 감각.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판단하는 머리와 대처 능력.

그리고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육체.

모든 걸 버텨 내는 명검.

페이와 같이 카인을 살펴본 로스 후작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허명은 아니었군."

로스 혈족이든, 대륙의 잘나가던 기사든 에드먼드 앞에선 빛이 바랬다. 그는 인류에게 허락된 가능성의 끝이 에드먼드일 거라 판단했었다. 그만큼 에드먼드는 일반적인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그러나.

저 나이의 에드먼드도 강하긴 지독하게 강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카인이 석년의 에드먼드를 아득히 상회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엘프답게 싸워서."

"엘프답게?"

엘프와 긴 세월 싸워 왔던 후작으로서 그는 엘프의 장점을 말했다.

"비열하고, 치사하게. 빈틈이 보이면 곧장 목덜미에 화살을 꽂는 사냥꾼처럼."

그는 턱짓했다.

처음에 향한 건 카인의 뒤에 딱 붙어 있는 맥로든 후작이었고.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그다음은 검은 갑옷을 입은 왕녀 일행이었다.

콰앙-!

카인 쪽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은 것과 달리 저쪽은 치열했다.

콰가가강-!

밴더빌트의 대검이 선연한 오러에 휘감긴 채 엘프들을 상대한다. 워낙 동작이 크고 느려서 재빠른 엘프에게 유의미한 타격은 없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워낙 강맹한 밴더빌트의 검에 엘프들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가온다면.

콰앙-!

귀걸이였던 중력망치, 크레드네를 어느새 쥔 이소엘이 그대로 후려쳤다.

직격당한 엘프는 실드 마법과 정령으로 충격을 줄여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크아아아악-!"

바람에 휘날리는 종잇장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 모습을 본 페이는 떨떠름하게 로스 후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간이 원래 이렇게 강했나?"

에드먼드나 카인 하나가 강하면 몰라도, 같이 온 다른 사람들도 너무 강했다.

지금 엘프들이 아무리 엘프의 본대가 아니라고 해도 너무 압도적이었다.

로스 후작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나도 몰랐군. 저 왕녀 일행이 저럴지...."

원래는 로스가 예상한 대로였겠지만, 올리시렌의 버프가 너무 강했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활력.

가볍고 유연한 갑옷에 완벽한 방어.

밴더빌트와 이소엘.

두 기사가 온전한 실력, 아니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는 버프였다.

"카인-!"

올리시렌이 외쳤다.

카인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갈게!"

"그냥 거기 있어. 뚫고 오기 힘들다."

강하다고 해도 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적의 땅인 만큼 싸우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물론 같이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급해서 카인이 먼저 날아온 이상 억지로 뭉칠 바엔 따로도 괜찮았다.

그 순간 올리시렌의 눈이 검게 변했고.

이동.

기기기기기긱-!

세계를 구성하는 톱니의 수레가 다시금 움직인다.

"어...!"

올리시렌 일행을 치려던 엘프들은 허공에 헛손질했다.

그 공중에 흩날리는 건 검은 먼지였고.

"간다고 했지?"

셋은 카인의 옆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공간이동에 카인은 눈을 끔뻑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 전장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너-."

"말은 나중에."

올리시렌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카인의 말을 막았다. 그러곤 맥로든 후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렇게 뵙는 게 몇 년 만이죠?"

맥로든 후작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하얀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작년 여름 무도회 때 본 게 마지막이니 일 년이 조금 안 되는군요."

"그땐 이런 데서 다시 뵐 줄 몰랐는데 말이죠."

맥로든 후작은 방금 공간이동을 만들어 낸 게 올리시렌 왕녀라는 걸 눈치챘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흑색의 갑옷을 만든 것도 그녀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지금 선연하게 보이는 흑색의 눈이 답을 말하니까.

"혹시...."

맥로든 후작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마법이 아닌 '기적'을 부리는 흑안의 여인. 맥로든이 아는 한 그럴 수 있는 자는 마녀뿐이었다

쉿-.

올리시렌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러곤 카인을 돌아보았다.

"좀 더 버틸 수 있겠어?"

카인은 그녀의 회색빛 눈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올리시렌의 눈은 새카만 마녀의 힘에 검어졌다.

흑안의 마녀가 말하기에, 자안의 전사가 답했다.

"얼마나?"

"이유는 안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난 이 평원에 누워 있는 원정군을 깨울 거야."

맥로든 후작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시간이 좀 필요해. 범위가 너무 넓어."

마녀임을 숨기고자 했다.

마녀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마녀가 아니게 살려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놓지 않았고 올리시렌은 스스로 선택했다.

"각오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카인이 가장 중요한 걸 되물었다.

"없어."

"큰일이군."

카인은 농담을 뱉곤 아그웨스카를 들었다.

밴더빌트와 이소엘이 맥로든과 그녀를 지키듯 섰다.

카인이 제자리를 지켜야 했던 건 맥로든 후작을 지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방어에 특화된 어머니의 기사, 밴더빌트와 왕녀의 기사, 이소엘이 함께 있는 이상 카인은 목줄 풀린 야수였다.

올리시렌은 각오 대신 카인의 등을 바라보며 늘 되새겼던 다짐을 뱉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게."

쿠웅-.

먹구름이 요동치고 강물이 출렁인다. 땅마저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엔 회색의 머리카락이 눈처럼 천천히 흑색으로 물들어가는 올리시렌이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펼쳐서 마녀의 본능이 속삭이듯 휘젓기 시작했다.

때론 격렬하게.

때론 애절하게.

"미안한 만큼 빨리 끝낼 테니까."

"올리시렌."

카인은 몸을 돌렸다.

그 방향은 페이와 로스 후작이 있는 곳이었다.

"살아라."

나글파르에서 들었던 그녀의 걱정을 돌려주었다.

탓-!

그리고 기적을 목도하고 얼빠진 엘프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올리시렌은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기기기기기긱-.

카인은 등 뒤로 올리는 톱니의 소음에 미소 지었다.

'그대의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올리시렌은 아이리안을 위해 선택했고, 카인은 자신의 과거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었다.

"로스-!"

달려드는 엘프 검사.

발목을 붙잡는 엘프 정령사들의 마법.

카인은 그 끝에 서 있는 로스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06 EP.Ⅱ-2

봄이 오는 날에 (1)

'봄이 눈을 감는 곳'의 신전 안.

두 여인이 날카롭게 설전을 펼친다.

"카인은 마왕이 맞습니다."

"내 아들은 거기서 마왕을 죽인다니까요?"

....

카테리나와 클로에의 설전.

처음에 긴장하고 있던 성국의 정예들은 남 일 보듯 하는 에드먼드의 무관심에 적응했다.

에드먼드 역시 둘 중 누구의 말이 옳든 관심 없는 태도.

성녀나 마녀나.

카테리나나 클로에나 주위의 태도가 달라지는 걸 느끼면서 설전을 끝냈고, 클로에는 허공을 날아 에드먼드 옆에 붙었다.

기기긱-.

클로에가 조금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조금 투명해진다.

카테리나는 아주 작게 들린 기묘한 톱니바퀴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카인이 정말 마왕 같아요? 그 작고, 귀엽고, 엄마 품밖에 모르던 애가?"

"될 수도 있소."

후우우웅-.

건조한 에드먼드의 대답에 순간 클로에는 쌍심지를 켜며 팔짱을 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성녀 전에 에드먼드부터 손봐주겠다는 기색이 물씬 풍겼다.

"에드먼드 님은 카인의 편이 아니신가요?"

카테리나는 물었다.

친부인 만큼 당연히 카인을 옹호할 줄 알았던 그가 오히려 자신의 편으로 말하니 의아할 따름.

"잠시 칼을 뽑겠소."

성국의 정예들이 놀랄까 봐 점잖게 미리 말한 에드먼드는 세검을 뽑아 들었다.

콰악-.

그러곤 자신의 앞 돌바닥에 꽂아 세웠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것이 그가 얼마나 온전히 힘을 쓰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러곤 검의 왼편에 서서 물었다.

"이 검엔 몬스터의 피도 잔뜩이지만, 사람의 피도 그득하오. 그럼 이 검은 나쁘오?"

"...."

은빛의 평범한 세검.

그러나 주인이 아이리안 최강의 에드먼드라.

그의 손에 들린 이상 천하의 명검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적을 찌르고 베었으리라.

에드먼드는 걸음을 옮겨 이번엔 오른편에 섰다.

"그저 철로 만들어진 무기에 불과하오. 태생이 사람을 죽이게 태어난 것이라 하면 나쁘겠지만, 이 검으로 구해 낸 사람이 더 많으면?"

"...."

그러나 에드먼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살인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겠다는 게 그의 각오.

카테리나나 클로에는 에드먼드의 어깨 위에 올려진 무게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쭉 들어 보니 클로에는 '기적'으로, 성녀님은 '계시'로 같은 장면을 본 것 같소."

"맞아요."

"맞습니다."

스윽-.

에드먼드는 검을 뽑았다.

유려한 궤적으로 다시금 검집에 꽂아 넣은 후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이 칼을 보고 욕을 할 것이오. 피를 머금었다고. 그리고 누군가는 이 칼로 많은 걸 지켜 냈다고 칭송할 것이고."

책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다.

늘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던 한 남자가 깨달은 지혜가 뿌리 깊은 마녀와 성녀의 갈등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 칼은 아무것도 아닌데,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 것이오. 그렇다면 둘의 말도 같소."

같은 순간에 의견이 다르다면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 것이리라.

듣고 있던 에드먼드가 꼬집었다.

"그리고 내 해석도 있지."

그리고 그는 그것보다 중요한 걸 말하고자 입을 열었다.

"클로에."

"네."

에드먼드는 손을 뻗었다.

쥐어지진 않겠지만, 손을 잡는 느낌이라도 내고 싶어 클로에는 그 위에 손을 포갰다.

"카인은 마왕이 될 수 있소. 혹은 용사가 될 수도 있지. 아니면 에셀레드의 백작이 될 수도 있고, 혹은 평범한 모험가가 되어서 퀘스트샵을 전전할 수도 있소."

"우리 애는-"

발끈하는 클로에의 말을 끊으며 에드먼드는 재차 말했다.

"그대가 죽은 후 나는 좋은 아버지로서 행동하지 못했소. 아버지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겐 아들보다 당신이 더 중요했으니까."

"...."

"그래서 난 성장한 카인을 잘 모르고. 이제와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한 가지만은 꼭 하게 하고 싶소."

클로에는 그를 돌아보았다.

겉은 무도회에서 에드먼드를 처음 만났던 소녀라지만, 그 속은 미래를 꿰뚫는 '꿈꾸지 못하는 바람'의 마녀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검의 길을 걷는 한 남자로서 에드먼드의 말을 경청했다.

"녀석의 뜻대로 살게 하고 싶소. 마왕이든 용사든 상관없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싶은 것이오."

"알잖아요, 에드먼드. 내가 보는 미래는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

"제가 관측한 미래는 절대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 저는 '꿈'을 꾸지 못하고 우리는 자유가 없어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지만, 클로에가 관측한 미래는 반드시 무슨 일을 해도 일어났으니까.

스윽-.

그러나 이내 손가락을 들어 클로에를 가리켰다.

"그랬었지."

에드먼드는 손가락을 들었다.

끝에는 굳은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던 카테리나가 있었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지고 에드먼드는 그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젠 아니오. 내가 살아왔잖소."

"아!"

카테리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클로에가 어떻게 그렇게 단언했는지 이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클로에의 '기적'을 깨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에드먼드는 클로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대를 이곳에 두는 조건으로 글루미엠과 후작들은 내가 에이레 던전에 들어가기를 바랐소."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당신이 굶어 죽는 걸 봤어요."

성녀도 고개를 주억인다.

에이레의 최종보스룸 앞에 있던 에드먼드는 굶어 죽기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만약 에드먼드가 인간을 초월한 강자가 아니었다면, 카테리나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터.

동시에 성녀가 최상급 성수를 먼저 먹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리라.

"내가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던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소. 성녀께선 어떻게 에이레에 오시게 되었소?"

카테리나는 성류관을 만지작거렸다.

클로에와 논쟁을 벌이던 헤네랄리페의 그 장면을 언급했다.

"갑자기 '가을'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벨 용사님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이 흘러들어왔고, 용사님에게 엄청난 아버님이 있다는 것도 알았죠."

"카인이 더 성장해서 무서운 마왕이 되기 전에 처리하고."

에드먼드는 카테리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사실을 먼저 말했다.

칼만 날카로운 게 아니라 눈치와 입담도 날카로운 남자였다.

"믿을 수 있는 동료를 구할 생각이었겠구려."

"맞습니다. 백악절벽에 남겨 둔 검흔을 보며 용사님이 감탄하시던 기억이 있어서...."

"거기 있는 건 두 갠데, 하나만 내 것이오."

에드먼드는 정확한 사실한 짚곤 성국의 정예 중 하나가 들고 있는 '여름'이 담긴 상자를 흘낏 보았다.

대립하던 두 여자의 사이에 섰다.

"나는 카인이 용사든 마왕이든 사실 별 상관없소."

처음에 돌아본 건 카테리나였다.

"성국에서 죽이든 말든 그 아이의 선택이라면 존중할 테니까."

성녀는 성호를 그은 후 두 손을 맞잡았다.

"모든 것은 빛으로."

어쩌면 가장 강한 적이 될 뻔한 에드먼드가 마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카테리나는 마음속 깊이 이런 상황을 끌어낸 '빛'에 대해 감사했다.

"클로에, 맨 처음 들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 있소."

이번에 돌아본 건 처음에 비해 확연히 투명해진 클로에였다.

그녀는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나 살아 있을 때 말해야죠, 이제 말해 봤자 뭐해요."

에드먼드는 쓰게 웃었다.

"내가 어리석어서."

"흥, 뻔뻔하긴. 말해 봐요."

"성녀님도 제 말을 들어 주시오."

카테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과 아벨의 미래를 본 둘에게 에드먼드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을 꺼냈다.

"카인은 혼자였소?"

"아니, 그렇다니까 지금까지 뭔 말을 들은 거예요. 혼자 웬 퍼레이드에 나타나서... 혼자...."

클로에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에드먼드가 무엇을 묻는지 깨달아 버렸으니까.

이번엔 카테리나를 향해 물었다.

"카인은 혼자 용사 일행을 넘어서 아벨을 죽인 것이오?"

"예. 하얀 대검을 들고 정예 병력을 순식간에 날려 버리고 저희를 제친 후에 용사님의 가슴에 칼을 꽂았습니다."

"내 둘째 아들인 아벨이 용사가 된 건 마왕을 죽여서고?"

"예."

"아벨은 강했겠군.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마왕조차 이기지 못한 용사였으니까."

"네, 당연히 최강의 용사...!"

카테리나 역시 에드먼드가 무슨 의미로 말을 꺼냈는지 깨달았다.

둘이 용사나 마왕의 이름에만 빠져서 논의할 때, 에드먼드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든 마왕이든 그런 엄청난 퍼레이드에서 용사를 죽이려면 혼자선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카인은 혼자였지."

"예, 정말 혼자였어요."

"그런 일을 혼자 해야 할 정도로 카인은 고독한 삶을 살았던 게 아닐까 하오."

클로에는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닫힐 때마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차올랐다. 하나뿐인 아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이제야 눈치챈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았다.

그리고 에드먼드는 다시금 카테리나에게 말했다.

"아벨은 워낙 어릴 때만 봐서 잘은 모르겠으나, 성국의 마스터 팔라딘께 사사했다면 강했을 것이오. 마왕까지 해치울 정도면 더욱더."

"...맞습니다."

그는 여러 겹의 봉인에 감싸인 '여름'이 담겨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저걸로 마왕을 죽였고."

"네."

"그리고 퍼레이드 때도 들고 있었고?"

"...네."

"그런데 단번에 카인에게 칼을 빼앗겨서 죽었다라. 그게 말이 되오?"

카테리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시의 자신이 느꼈던 감정에 휩쓸려 냉정하지 못했다. 클로에나 에드먼드가 말했듯, 보고 판단하는 건 지금의 자신인데 그러지 못했다.

에드먼드가 냉철하게 짚은 '계시' 속 상황은 분명 이상했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세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내가 칼잡이라서 느끼는 게 하나 더 있소. 아벨은 용사라서 강해졌다고 해도, 카인은 어떻게 강해졌을까...?"

둘은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칼날 위엔 깃털조차 앉지 못한다. 죽든지 살든지 양자택일시키는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으니까.

그리고 에드먼드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생사를 가르는 칼날 위에 살았던 남자였다.

"그토록 강하다면 아무리 대륙이라고 해도 이름을 날렸을 텐데, 습격 전까진 누구도 몰랐소."

클로에나 카테리나가 본 미래는 서로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된 부분은 존재했다.

에드먼드의 말은 그 가운데 부분이라 둘은 수긍했다.

"고독하게 자라 외로이 검을 쥐고 마지막까지 홀로 움직인 게 카인이오."

쿠구구구궁-.

신전이 흔들린다.

씁쓸하게 웃던 에드먼드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흘러나오는 오러.

압도.

그야말로 거대한 절벽이 눈앞으로 무너지는 듯한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그 미래를 부술 것이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목표가 흘러나왔다.

아버지로서, 검사로서, 남자로서.

카인의 미래를 걱정하는 에드먼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왕이든 용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그 미래를 막을 것이오."

"백작님...."

"그리고 그게 둘이 바라는 일일 것이고."

카테리나의 입장에선 그 뒤에 무슨 일이 있든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 나았다.

클로에도 카인이 용사든 말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고.

"도와주시오."

카인이 15%만큼 바꾸었던 세계가 카테리나를 아이리안으로 불러, 에드먼드를 살게 했다.

스윽-.

그리고 최강의 검이 아들의 미래를 위해 처음으로 굽혀지는 순간이었다.

['18.5%'의 세계가 미소 짓습니다.]

#107 EP.Ⅱ-2

봄이 오는 날에 (2)

"올리비아도 구해 주게!"

맥로든 후작의 외침.

빗발치는 엘프의 화살 속에서 카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올리시렌이 '기적'으로 빚어 낸 흑색 방패를 하나 들고 있었다.

티잉-.

그리고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그 아이가 먼저 깨어 있어야 자네들이 생각하는 대로 상황을 끌어 갈 수 있어!"

맥로든은 급하게 덧붙였다.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정말 그가 도와주고 싶어서 말하는 건가 고민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카인은 이 자리에서 올리비아가 죽기를 바랐다. 올리시렌도 괜찮은 왕위 계승자긴 하지만 카인이 보기에 올리비아는 그 이상의 계승자.

계략, 심계, 권위, 후광.

정통성 하나 빼곤 모자랄 게 없었으니 사라지는 게 미래를 생각하면 좀 더 이득.

카인이 들은 체 만 체하자 맥로든 후작은 모두를 깨울 '기적'을 준비 중인 올리시렌에게 말했다.

"원정군을 깨우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이 곧바로 1왕녀님의 말을 들을 리 없습니다."

툭-.

올리시렌은 등허리에 매달아 둔 '헤드브레이커'를 쳤다.

왕실의 무력을 상징하는 무기니 이걸로 명령하면 들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맥로든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선 불가능합니다. 두 후작가에서 데리고 온 만큼 명령 계통도 다르고, 기존의 명령권자가 올리비아입니다."

그녀는 맥로든 후작의 얼굴을 응시했다.

꿀꺽-.

산전수전 엘프전까지 겪은 맥로든이었지만, 마치 밤하늘인 양 새카만 올리시렌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꽈악.

"바로 '헤드브레이커'를 알아보고 명령에 따를 리가 없습니다. 기존 명령권자의 명령이라면 훈련받은 대로 반사적으로 움직이지만요."

여유로운 상태면 가능해도, 이곳은 전장이다.

엘프들의 본대가 언제 올 줄도 알 수 없고, 아군은 전부 글루미엠이 만들어 둔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평범한 경우에도 꿈을 꾸고 일어나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법.

엘프 여왕이 작정하고 만들어 둔 환상이라면 혼란이 더욱 심할 게 훤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저도 그렇게 깨어나면서도 잠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올리시렌은 카인이 뇌전으로 하이볼트의 정신도 돌려놓는 걸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적'이 넓긴 해도 카인만큼 효과적일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맥로든 후작은 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목소리라면 기사들이 따를 겁니다."

깨어난 직후엔 당연히 '헤드브레이커'를 알아볼 리가 없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명령이라면, 자연스럽게 따를 것이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후작님은 믿습니다."

직감적으로 맥로든이 모두 진실만을 말한다는 걸 인지했다.

글루미엠의 '딥 포레스트'에 가까워지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나씩 깨달았다.

방금 보인 공간이동부터, 지금 준비하는 전체 각성까지.

그중 하나가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것이었기에 맥로든의 말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리비아도 후작님과 같은 생각일까요."

그녀를 깨울 순 있다.

명령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나서 올리시렌의 말에 따라 원정군을 움직이게 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탕!

맥로든 후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부리부리한 특유의 눈으로 올리시렌을 향해 말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하게 만들겠습니다. 왕녀 저하."

"...."

올리비아를 이 자리에서 가장 잘 아는 건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올리시렌이다.

올리비아가 지닌 무시무시한 욕망을 알기에 그의 말은 무조건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맥로든은 피가 날 정도로 두 주먹을 쥐었다.

카인의 말에 그간 꺼져 있다가 한순간에 확 불타오른 마음의 불씨가 튀어나온다.

"카인 녀석이 그러더군요. 아무리 싸워도 큰 적이 나오면 합치는 것이 같은 왕국민이라고."

올리시렌은 슬쩍 미소 지었다.

이전의 그라면 아랑곳하지 않고 죽으라고 던졌을 텐데, 조금은 달라진 모습이 좋았다.

정확히는 자신과 비슷해진 모습이 좋았다.

"아무리 저희의 길이 다르다고 해도 엘프 앞에선 하나입니다."

"한 번입니다. 이렇게 속아드리는 건."

맥로든은 활짝 웃었다.

둘을 지키듯 무기를 휘두르던 밴더빌트와 이소엘은 아이리안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된다는 걸 신기하기도 하고 기뻤다.

-맥로든 후작의 말이 틀리진 않아.

카인은 조금 눈을 더 떴다.

바로 옆에서 말하듯 올리시렌의 목소리가 전달되었으니까.

기기긱-.

아주 작은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어차피 로스 후작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여기 다섯 명이서 엘프의 전장에서 빠져나오는 건....

올리시렌은 말끝을 흐렸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자신의 버프가 있다고 해도 카인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고 카인이 정체 모를 백색 왕관과 망토를 두르는 그 힘을 써야지만 가능하리라.

카인이 매번 무엇을 희생하는지 명확하게 모르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의 희생을 선택할 수 없었다.

-어쨌든, 가능하면 구해 줘.

그렇다면 맥로든이 말한 대로 하면서 자신이 원정군을 깨워 물러서는 게 최선이리라.

카인은 저 멀리 보이는 로스 후작을 보았다.

엘프들의 치열한 방어 뒤에서 자신을 품평하듯 바라보는 그를 향해 중지를 올렸다.

헛웃음을 짓는 로스 후작을 등지며, 카인은 전장의 바닥을 훑었다.

'세상에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일 거다.'

원정군의 신체가 장난감처럼 굴러다닌다. 생명이 생명을 존중하는 것 하나 없는 전장이었다.

그 와중 저 멀리 다른 기사들보다 조금 왜소하고 좋은 갑옷을 입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회색 머리가 투구 밖으로 튀어나온 올리비아가 있었다.

탓-.

카인은 땅을 박찼다.

"정령이여!"

엘프들은 순간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맞바람을 불었다.

웬만한 나무도 뽑힐 저항 속에서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들었고.

로 마이어 Lo Meyer.

밴더빌트의 수직 베기를 따라 했다.

끼이이이이엑-.

카인의 뇌전과 아그웨스카에 닿은 정령은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흩어졌다.

"쏴라-!"

검을 휘두르면서 생겨난 빈틈.

악착같이 엘프의 화살이 그곳을 쑤시고자 날아왔다.

카인은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지지지지지직-!

그의 전신에서 맥동하던 '겨울'의 패시브, 순백의 뇌전이 흘러나온다. 뇌전이 거미줄처럼 퍼지더니 자석으로 당기듯 화살 방향을 살짝 비틀어 버렸다.

쉐에에엑-.

그 순간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

엘프 검수들이었다.

그들은 세검같이 얇은 검을 쥔 채 카인이 땅에 떨어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령도 활도 안 되면 직접 칼로 죽이겠다는 생각.

다다다다-.

그뿐 아니었다.

카인이 노리는 게 올리비아임을 눈치챈 엘프는 발 빠른 몇을 떼서 그녀에게 보냈다.

지금까진 별 의미 없었지만, 카인을 잡기 위해서 어떻게든 써먹겠다는 심보였다.

카인은 짜증을 내기보단 일관된 엘프의 간사한 모습에 웃었다.

"오히려 어쭙잖은 인간보단 엘프가 훨씬 낫네."

귀족이니 뭐니 들먹이면서 어깨만 가득 올라간 자들은 엘프의 화살 한 대면 끝난다.

엘프가 타고난 게 없진 않겠지만 숲에서 산다는 건 필연적으로 사냥꾼이 된다는 의미.

숲을 지키고 생명을 소중히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런 숲에 살기 위해선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부족의 세계수가 자리한 숲을 건드리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다른 의미의 광신도 집단이 카인이 아는 엘프기도 했고.

'아이리안 섬엘프들은 선을 좀 넘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휘익-.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높게 들었다.

미래를 소모하지 않으면서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곤 자신 있게 땅을 내달렸다.

티잉.

허리를 반으로 베기 위해 날아오는 칼날은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로 부쉈다.

까앙-.

왼편에서 겨드랑이를 노리고 찔러 오는 검은 한 번 살짝 내리친 후 팔에 껴 부러뜨렸다.

콰가가가강-.

그런 기적이 수없이 이어진다.

미리 합을 맞췄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카인과 엘프 사이엔 완벽한 공방이 오갔다.

콰앙-.

물론 승자는 올리비아 옆에서 칼을 들고 있던 엘프를 발로 차 버린 카인이었다.

지켜보던 엘더, 페이의 손가락이 떨린다.

에드먼드의 질주와는 다르지만, 그의 압도적이고 멈추지 않던 모습과 카인의 싸움이 겹쳐졌다.

까딱-, 까딱.

손끝을 검 위에 뗐다 붙였다 반복했다.

그만큼 고민이 이어진다.

평범한 엘프들에게 맡겨도 되는지, 엘더로서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

아직 무슨 수를 부릴지 모를 로스 후작을 감시 하나 없이 두기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엘프들의 피해는 는다.

과거의 상처도 치료할 기회.

스윽, 스윽.

페이는 누군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기고 와."

글루미엠이었다.

본신은 아니고, 엘프 궁수 하나의 몸을 빌려서 나타난 모습.

당장이라도 나갈지 말지 고민하던 페이는 환하게 웃은 다음 대지를 디뎠다.

솨아아아아-.

원체 가벼운 종족에 바람의 정령이 힘까지 실어 주니 페이가 오히려 더 화살처럼 느껴진다.

카인은 손을 들어 올리비아를 꺠우려 했다. 그러나 저 멀리 지켜보던 엘더가 날아온다.

휘리리리릭-.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짓쳐들어왔고 회전하는 해괴한 검격에 아그웨스카를 세워 막아 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카인의 방어에 튕겨 나간 페이는 그대로 쭉 밀려났지만, 이내 다시금 쇄도해 왔다.

그를 포위하던 엘프들은 조금씩 물러서며 둘만의 경기장을 만들었다.

카인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치사한 놈들이 일대일 싸움에 버프를 주는군.'

카인의 눈에 엘프들이 페이에게 마법적인 버프는 기본이고 인간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정령 마법까지 걸어 주고 있었다.

게다가 '북방엘프의 숲'이라는 환경 자체도 엘프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쉐에에엣-.

카인은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는 페이의 검을 피해 냈다.

"아직."

그리고 이어지는 이연타.

쉐에에에엑-.

가벼운 몸에 잘 어울리는 고속연타!

속도보단 힘과 정확성의 검술을 구사하는 카인에게 있어 엘더 페이가 펼치는 검술은 다소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다.

"에드먼드의 아들이여, 너는 여기서 끝이다!"

화아아아아아-.

페이의 전신에서 초록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여태까지가 몸풀기였다면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듯 페이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팅-!

카인은 최적의 궤적을 그렸다.

'어차피 공격은 어렵지 않다.'

섬엘프 사이에서는 강한 공격이겠지만, '겨울'의 패시브로 몸과 감각이 완벽하게 바뀌어 가는데 경험까지 풍부한 카인에겐 별것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부족하군.'

티이이잉-!

카인은 쓰게 웃었다.

가장 짧고 정확한 경로로 여럿이라도 된 듯 순식간에 몰아치는 페이를 막기 위해 아그웨스카를 이동시켰다.

채앵-.

빗겨내기엔 페이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채애애앵-!

둘의 검이 부딪치면서 주홍의 불꽃이 튀었다. 쇠가 타는 매캐함이 깃든 불꽃이었다.

하지만 페이의 박자는 일정했다.

카인이 조금씩 그녀의 공격 박자에 적응해 가면서 막는 게 안정화될 때.

페이의 눈이 반짝였다.

흩날리는 낙엽 Volitans Foliis.

엘프 검수의 비전.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보고 만들었다는 불세출의 검법!

박자와 박자가 이어지는 찰나의 틈.

페이는 검 끝이 갈라져 보일 정도로 자신의 모든 걸 짜내어 찔러 들어왔다.

"에드-먼드-!"

그 끝에 있는 건 카인이지만, 페이에겐 수십 년간 그녀에게 공포를 주었던 에드먼드가 있었다.

카인은 그녀가 발악하듯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며 입꼬리를 들었다.

"영리한데 멍청하네."

#108 EP.Ⅱ-2

봄이 오는 날에 (3)

「꾸욱-.

에드먼드는 잠자는 아기의 볼을 손끝으로 찔러보았다. 하얗고 빵빵한 뺨이 쑤욱 들어갔다가 튀어나온다.

"...."

그는 무엇이 그렇게도 신기한지 방금 아이의 뺨을 찔렀던 검지를 바라보았다.

생경했다.

손끝으로 사람을 죽이는 감각은 너무나 익숙했지만.

신비롭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살아 있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앞으로 실컷 볼 건데 왜 그렇게 어색해해요."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상 옆.

하얀 원피스를 입은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러게 말이오."

꾸욱-.

다시 한번 아기의 뺨을 찔렀다.

곤히 잠든 녀석은 에드먼드의 손길에도 꿈쩍하지 않고 새근새근 잠을 잤다.

"아이의 이름은 지었어요?"

"...아직."

이미 몇 개의 후보는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잠들어 있는 이때까지도 무엇을 이름으로 할지 정하지 못했다.

클로에는 일만의 대군 앞에서도 당당하던 에드먼드가 작디작은 아이 앞에서 여러모로 당황해하는 점에 웃었다.

"아이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제가 보는 미래는 상관없이요."

에드먼드의 머릿속으로 지하 서고에서 읽었던 이야기 속 한 남자가 떠오른다.

아내와 함께 대륙에서 건너온 자.

이제 막 국가의 체제가 성립되는 아이리안으로 와서 다섯 번째 백작가를 만든 자.

바람처럼 왔다가 다시 바람처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위대한 전사.

"강했으면 좋겠소. 그 무엇도 잃지 않게."

"그리고요?"

"소중함을 알면 좋겠구려."

"강하고 소중함을 안다라."

에드먼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이었다.

지금껏 수십의 봄을 마주했지만, 지금 클로에와 아이와 함께 맞이하는 봄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봄의 하늘이 파랗고, 꽃이 붉고, 풀들이 초록으로 반짝인다는 걸 느꼈다.

흑백의 세상을 살던 그에게 아이는 빛을 가져왔다.

"카인."

"카인이요...?"

"카인 에셀레드. 우리 가문을 맨 처음 열은 선조님의 이름이오. 카렌 님과 함께 섬으로 오셨었지."

클로에는 미소 지었다.

과묵해서 할 말만 차갑게 하는 남자가 에드먼드다. 그가 이렇게까지 따스한 말을 길게 하는 게 재미있었다.

에드먼드는 그런 클로에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이, 아니 이제 카인의 머리를 거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카인 에셀레드."

한겨울의 연못의 표면은 얼어 버린다.

그 위로 누군가 돌을 하나 던지면 얼음에 실금이 간다.

지금 에드먼드가 카인을 바라보는 미소는 얼음장에 간 실금처럼 희미했지만 한 남자가 짊어졌던 겨울의 끝이었다.」

* * *

엘더 페이의 공세가 강맹하다.

다른 엘프들이 끼어들기 무서울 정도로 하늘과 땅을 오가며 현란하게 카인을 몰아붙였다.

스윽.

지켜보던 로스 후작은 페이와 합공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지켜봐."

여왕, 글루미엠은 로스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제가 도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볼 게 있어서 그래. 내 본체와 가까워지니까 저 녀석에게 뭔가 느껴져."

순백의 뇌전을 두른 채 페이의 공세를 막아 내는 카인.

글루미엠은 카인의 운명을 자신의 '기적'으로 볼 수 없음에 처음엔 의아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예 대마법 결계에 막힌 경우를 제외하곤 카인처럼 미래 자체가 없는 건 너무 이상했다.

"뭔가 있어."

"뭐가 말입니까?"

"미래를 읽을 수 없는 녀석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가 봤던 에드먼드의 운명이 바뀌었어."

그녀가 본 운명상 에드먼드는 던전, 에이레에서 아사(餓死)해야 했다.

그러나 너무도 건강히 나타나서는 심지어 '여름'을 들고 자신까지 협박했다.

그녀가 알던 세계가 더 이상 없는 기분이었다.

글루미엠은 고개를 돌렸다.

올리시렌 일행이 싸우는 장소로.

"저기도 이상해."

"...?"

"하나는 마녀라서 못 보고, 다른 여자애는 운명은 보이는데, 이렇게 내 앞마당에서 싸우는 운명은 없거든."

"...!"

"그리고 저 늙은이. 미래가 없는데 실시간으로 그때마다 만들어지네."

카인에겐 아예 없었다.

밴더빌트의 운명은 딱 지금까지만 보였다.

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운명이었다.

글루미엠은 카인은 흘겨보았다.

"이렇다는 건 저 녀석이 세계의 운명을 뒤트는 놈이네."

정답이었다.

이전 세계선에서 이소엘 웨어햄이 엘프의 숲에 들어와 싸울 일은 없었다. 노기사 밴더빌트 아르츠웨버 역시 이 시간대에선 이미 죽은 자.

글루미엠의 '운명관측'으론 이미 원래의 세계선에서 한참이고 달라진 둘의 운명을 파악할 순 없었다.

"세계의 운명을 뒤튼다?"

로스 후작도 식견이 있는 편이었지만, 마녀 글루미엠이 하는 깊은 이야기를 쫓아가기엔 부족했다.

글루미엠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은 모든 게 미리 만들어져 있거든."

"제가 이렇게 있는 것도 정해진 거란 말씀이십니까."

로스 후작은 정중히 물었다.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고 생각했지만, '운명'을 바라보는 마녀 글루미엠 말처럼 다 정해진 거라면 입맛이 매우 쓸 테니까.

그러자 글루미엠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정해져 있다곤 안 했어. 만들어져 있다고 했지."

"...?"

"네가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땅이 있는 거랑 같아."

"...!"

늘 말이 짧고 귀찮아하는 엘프가 아니라 여왕다운 면모가 보였다.

글루미엠은 카인의 움직임을 놓칠세라 최대한 집중하면서 말했다.

"세상의 운명은 정말 거대한 그물이라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고, 그걸 어떻게 살지는 개인의 몫이야."

모든 생명의 공통이었다.

글루미엠은 아이리안 섬엘프의 모든 의식의 총화로서, 그리고 '운명'을 지켜보는 마녀로서 세계의 비밀 하나를 엿보았다.

"나는 그중 이뤄질 걸 봐. 그런데 그게 없단 말이지. 과거, 현재, 미래. 뭐라도 있어야 하는데 저 녀석에겐 단 하나도 없다라."

글루미엠이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 로스 후작은 올리시렌 쪽으로 가려 했다.

스윽-.

글루미엠은 다시금 그를 잡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

"제가 도와야 엘프들의 피해가 줄지 않겠습니까?"

글루미엠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앞에서 로스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손바닥 위의 공처럼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엘프들을 도와야 내가 그 여자를 잘 부활시킬 테니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저기를 가만히 놔두라는 건 세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로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왕녀에게 마녀의 혐의를 씌울 필요가 없다는 것."

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카만 눈으로 말도 안 되는 '기적'을 펑펑 써대는 순간에 올리시렌이 마녀임을 눈치챘다.

왕족이 마녀라니.

절대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약점이었다.

"두 번째는, 저 운명 없는 놈도 이상한데 저 마녀는 더 이상해."

"예?"

"마녀가 저렇게 이것저것 다 할 줄 알면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도 남지 않겠어?"

"아."

당장 로스 후작이 본 '기적'만 해도 검은 갑옷과 실드, 순간이동, 엘프들의 공격을 막는 초능력 그리고 글루미엠의 잠에 빠진 자들을 깨우려는 시도였다.

"도대체 어떤 '기원'이길래 저렇게까지 다양한 '기적'을 쓰는지. 그렇다고 이명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여왕님의 마법과 '기적'을 풀겠습니까."

글루미엠은 잠시 턱을 쓸었다.

맨들맨들한 턱이었지만, 진짜 수염이라도 있는 듯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말했다.

"할지도."

"...!"

에드먼드만큼이나 냉정하기로 소문난 로스 후작이 그녀의 말에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글루미엠은 피식 웃었다.

"마녀의 강함은 나이도 있지만, 순번과 그 힘이 시작되는 '기원'에 있거든. 저 왕녀의 '기원'을 모르니 내가 무조건 이길 거라곤 확신할 수 없어."

"그럼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모르니까. 네가 후작의 자리를 유지해야 아이리안의 상류층으로 스며들 우리 애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데 괜히 나섰다가 나중에 들키면 문제가 돼."

글루미엠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하지만 로스 후작은 쉬이 따를 수 없었다.

채앵-!

엘더 페이와 카인의 전투는 한층 더 치열했다.

타탕, 탕!

올리시렌 일행과 엘프 군단의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거대한 '기적'을 준비하는 올리시렌에게 유리하다는 의미.

미래는 미래지만 당장 전투를 가져와야 한다고 판단되었다.

"반짝아. 그리고 나설 필요 없다."

글루미엠은 쓰게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남쪽을 가리켰다.

기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 모든 감각을 집중하자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엘븐나이트 기사단을 끌고 간 리히스 오히긴은 사망했다."

헤터워드는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카인 일행이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오는 시점에서, 리히스와 엘븐나이트는 공을 쳤다고 판단했다.

합류하는 데 조금 늦을 뿐이지 피해는 없을 줄 알았다.

글루미엠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로스 후작을 흘겨보았다.

"원래는 바로 알아야 하는데 너와 다툰 그날 벌로 연결을 잠시 끊어 두어서 늦게 알았어. 워럴드가 죽였더군."

"어떻게 혈족의 지배력을...."

로스 후작은 기가 찼다.

올리시렌 왕녀가 에버윈의 딸인 만큼 지배력이 있긴 할 터.

그러나 아이리안 왕가의 피와 섞이면서 자기 지배력에 비해선 훨씬 떨어질 게 뻔했다.

워럴드에게 단단히 걸어 둔 지배가 그렇게 풀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다.

글루미엠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 저 말도 안 되게 다양한 '기적'중 하나를 썼겠지."

이룰 수 없는 걸 이루는 게 '기적'이다.

대개의 마녀가 하나씩만 쓸 수 있고, 글루미엠쯤 되어야 두 개를 쓸 수 있는 '기적'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마녀, 올리시렌.

"네 잘못이 아니니까 탓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은 엘븐나이트 20기는 내가 불렀으니 이들을 투입하면 될 거야."

사분의 삼을 잃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선 제법 쓸 만한 도구일 터.

제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들며, 실시간으로 '숲의 비전'을 통해 무한히 회복하는 기사가 합류한다면 상황이 뒤바뀔 것이다.

"그리고 원정군에게 증원군은 없지 않나? 내가 본 미래엔 전혀 없던데."

"예. '약식 대마법 결계'도 일부러 두고 오는데, 후발대를 굳이 꾸리겠습니까."

"그럼 지켜보자고. 결국 우리의 승리니까."

글루미엠은 여유롭게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스 후작은 남쪽의 숲을 바라보며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상황이 잘 풀릴지, 절대적인 '운명관측'이 이미 안 되는 경우를 봤는데 다음에도 확실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글루미엠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로스 후작으로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채앵-!

카인과 페이의 전투를 돌아보았다.

페이는 몇 번이고 '흩날리는 낙엽'을 시전했다.

어딜 찌를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칙적인 공격.

팅.

그럼에도 카인은 우직하게 아그웨스카 하나로 버텼다.

최소한의 거리를 움직이며 완벽한 방어를 펼쳤고, 페이의 공격은 매번 아그웨스카에 튕겨 나갔다.

"너, 인간...."

페이는 숨을 헐떡였다.

제 자리에 있는 카인과 달리 주위를 종횡무진하며 틈을 찾아내 찌르는 검술을 쓰는 만큼 힘들었으니까.

카인은 그런 페이를 보다가 검을 내렸다.

"숨 돌릴 시간을 주지."

"같잖은 양보라면 집어치워라, 인간."

"아니, 할 일이 있어서."

파지지지지직-.

카인의 오른손에서 다시금 순백의 뇌전이 명멸했고, 그대로 옆에 누워 있던 올리비아 2왕녀를 지져 버렸다.

"끄으으윽-."

그녀는 환상과 현실 속에서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마구잡이로 허우적거리는 올리비아를 향해.

파지지지직-.

다시금 '겨울'의 뇌전을 먹였고.

원정군의 총사령관, 올리비아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내가 누군지 기억나지?"

끄덕-.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었다.

"제 남편...."

"쯧."

카인은 혀를 찼다.

'영감이나 손녀나 혀만 길어선.'

파지지직-.

다시 한번 온 신경을 긁어내리는 뇌전이 몸을 한바탕 휘젓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그, 그만...."

#109 EP.Ⅱ-2

봄이 오는 날에 (4)

농담 한 번 한 것치고 호되게 당한 올리비아는 눈을 또렷하게 떴다.

분명 방금까진 '딥 포레스트' 안쪽을 달리면서 글루미엠을 쫓았는데 현실에선 들어가지도 못했다.

"퉤."

게다가 형편없이 땅에 박혀 있었는지 코와 입엔 젖은 흙이 들어 있었다.

"짧게 말한다. 너희는 글루미엠의 환상 마법에 당했고, 우리가 구하러 온 거야."

올리비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헉헉거리는 심상치 않은 엘프부터 해서 저 멀리엔 싸우고 있는 올리시렌 일행이 보였다.

순간 눈을 부릅떴다.

"올리시렌이 언제부터 저렇게 싸울 수 있던 거죠?"

경악이었다.

그녀가 아는 올리시렌은 나설 때 나서지 못하고, 늘 안개꽃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는 여자다.

하지만,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올리시렌은 글루미엠을 잇는 또 하나의 여왕다운 패기가 엿보였다.

"게다가 눈은 왜 저렇고요?"

올리비아는 투구를 벗었다.

풍성한 회색의 머리와 달리 눈은 금색으로 반짝였다.

회색의 머리와 눈이 아이리안 왕가의 정통적인 상징인 만큼 그녀는 늘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렸었다.

정확히는 올리시렌의 회색 눈과는 다른 눈을 가리고자.

"닮았군."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올리비아는 곧장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올리시렌과 닮긴 뭐가 닮았다는 거죠?"

"하이볼트랑 닮았다고."

"...."

아버지랑 딸이 안 닮으면 누가 닮겠는가.

올리비아의 입이 쏙하고 들어갔다.

그녀가 얼추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아 이어 말했다.

"이제 원정군을 다 깨울 건데 깨어나자마자는 너처럼 정신을 못 차릴 거 같다고 영감이 말하더라."

"네, 저도 마지막 그 한 방이 없었으면 한참 걸렸을 거예요."

무슨 속셈에서인지 엘프는 흩어져서 원정군을 죽이지 않고 오직 카인과 올리시렌 일행만 상대하고 있었다.

전장의 승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마지막 수확을 앞두고 과일이 무르익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

카인은 그들이 같잖았다.

제법 괜찮은 사냥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마주한 엘프는 오만한 수확자였다.

"올리시렌은 정당한 '헤드브레이커'의 계승자다. 그러니 그녀의 말에 따라 원정군에게 명령할 수 있겠나?"

"제 명령이라면 몽롱해도 훈련받은 기사들이니 따르겠지만...."

올리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딥 포레스트'를 점령한 최초의 여왕.

엘프들을 학살한 최고의 영웅.

손만 뻗으면 닿을 자신의 미래였다. 이제 곧 이뤄졌어야 했을 것들이기도 했고.

그러나 이젠 없다.

현실의 그녀는 글루미엠의 마법에 원정군을 전부 잃은 패장이다.

게다가 저 멀리서 엘프와 함께 서 있는 로스와 한 배를 탔다는 오명도 써야 하리라.

환상에서 깨어나듯, 올리비아는 자신의 꿈이 정말 꿈결처럼 흩어졌다는 걸 실감했다.

후우우웅-.

습도 짙은 차디찬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의 뺨을 스쳤고, 바람엔 물기가 조금 담겨 있었다.

"할 거야, 안 할 거야?"

카인은 급하게 물었다.

페이의 기색이 안정화되며 자신을 노리는 엘프들의 기세가 다시 날카로워진다.

재차 시작될 전투 직전에 카인은 확답받고자 했다.

올리비아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안 한다고 한다면요?"

"죽인다."

스윽-.

카인의 아그웨스카가 움직인다.

핏방울조차 데구루루 굴러나가는 칠흑의 칼날이 올리비아의 목 근처로 다가왔다.

카인이 이렇게까지 할 줄 예상치 못했던 올리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할게요."

바닥을 쥐며 일어섰다.

그녀의 금빛 눈엔 원망과 분노, 허무만이 가득했다.

'쯧, 거짓말이군.'

카인은 직감했다.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여자에게 이런 거짓말 따위는 어렵지 않을 터.

그래도 맥로든 후작과 올리시렌이 같이 옆에서 말하면 하긴 하리라.

슥-.

카인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딱 붙인 다음 속삭였다.

"지금부터 나는 너를 올리시렌 옆까지 데려다줄 거야. 버텨."

올리비아는 새파란 살기를 줄기줄기 흩뿌리며 카인을 지켜보는 엘프들을 훑었다.

"이 엘프들을 어떻게 하고요?"

"죽인다."

아까와 똑같은 대답에 올리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 맨날 다 죽인다-고-."

아니,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체력을 회복한 페이가 손을 들었고, 그 순간 다시 화살비가 쏟아졌으니까.

환상 속에서 본 무력한 엘프들과 현실의 엘프는 급이 달랐다.

소름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화살들에 올리비아는 두 눈을 감았다.

"달려!"

카인은 그대로 그녀의 손을 쥐고 달렸다.

올리비아는 화살이 무서웠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믿고 같이 내달렸다.

티티티티팅-!

하나의 검이 그리는 건 하나의 궤적이라.

하지만 카인의 손에 들린 아그웨스카는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든 현란하고 복잡한 궤적을 그려냈다.

카인의 '순백의 뇌전'이 화살촉을 살짝 틀어 버리는 것도 좋았지만, 올리비아를 지키면서 움직여야 하니 직접 쳐 내는 게 맞았다.

"바람이여-!"

"물이여-!"

바람의 압박이 짓쳐 든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하여 떨어진다.

"바, 발이!"

올리비아가 경악했다.

단단했던 흙바닥이 땅의 정령의 힘으로 딛는 순간 쑥 빠지는 진흙으로 변했으니까.

파지지지지직-.

카인의 전신에서 뇌전이 일어선다.

미래를 희생하지 않고도 이미 충분히 강해진 카인은 땅에서부터 올리비아를 뽑아낸 후 어깨에 걸쳤다.

카인의 발아래로 번개가 끊임없이 튀기면서 땅의 정령이 부리는 수작질을 전부 바스러뜨렸다.

계속해서 시도하던 정령술사들은 카인의 번개가 아득하게 격이 다른 무언가라는 걸 눈치챘다.

"어딜!"

타앗-.

페이었다.

아침마다 세계수에 고인 이슬을 정제해서 만든 회복약까지 들이켠 채 달려들었다.

쉬이이이잇-!

소리조차 일그러뜨리는 쾌속의 찌르기!

몸이 가볍고 민첩성이 뛰어난 엘프의 특징을 잘 살린 검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서 일렁이는 바람까지.

'직접 공격은 안 된다 싶으니 방향을 틀었군.'

내심 혀를 찼다.

정령술이 대단한 이유는 직접 공격이 아닌 버프에 있었다.

정령술이 뛰어난 엘프들이 페이에게 정령 버프를 집중하니 그의 속도나 실력은 소름 돋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티잉.

하지만 그래 봤자일 뿐.

카인은 올리비아의 손을 놓치지 않은 채 그의 검을 빗겨냈다.

"너 혼자서 이렇게 달려들면 별 의미 없다."

엘더, 페이는 압도적이다.

문제는 다른 엘프 검사들이 페이의 박자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로 합격을 연습한 것이 아니라면 손발이 꼬이거나 공격이 겹칠 수밖에 없는데, 천지사방을 내달리면서 공격하는 페이 멕게라티의 스타일이라면 더더욱 끼어들 수가 없다.

목숨이라도 걸지 않는 이상엔.

그리고 하나 정도라면 부러지지 않는 검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고.

"제길!"

페이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면 카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 건 어려워 보이고, 자신 홀로라면 시간만 늦출 뿐이다.

목숨과 상관없이 자신을 도울 것이 필요했다.

어느새 올리시렌과 열 걸음 정도 남은 상황.

그녀의 새카만 눈이 카인과 올리비아를 향했다.

이동.

기기기기긱.

이제는 익숙해진 마녀의 힘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흑색의 힘이 카인과 올리비아를 감쌌다.

카인은 순간 허전함을 느꼈다.

자신이 쥐고 있던 올리비아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역시 안 되는군."

마녀의 힘은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계절의 신기>의 영향이리라.

'보통 사람들'이나 퀘스트창에서 말하던 '영원'과 '종말'이라 나누는 것과도 관계 있을 것이고.

꽈악-.

하지만 지금의 카인에겐 의미 없었다.

자유로워진 손까지 두 손으로 아그웨스카를 잡고 페이를 마주했다.

"제대로 가지."

"최선을 다하겠다."

후우우우웅-.

다시금 엘리바가르 강에서부터 바람이 불었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던 빗방울이 휘어지고, 서로의 검에 흘러내릴 때.

타탓-!

이번엔 둘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머리.'

이미 많이 봤다.

카인은 페이가 내지르는 검의 방향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 냈다.

'다리, 발, 뒤돌아서 허리.'

한발 알 수 있다는 건 안정적으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

페이는 자신이 읽힌다는 걸 아주 조금 늦게 깨달았고, 그게 승부를 갈랐다.

쿠우우웅-.

카인의 왼발이 대지를 내리찍었다. 그의 전신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순백의 뇌전이 튀어 올랐다.

페이의 커다란 녹색 눈을 마주한다.

그곳에 있는 건 횡으로 검을 뻗어 내는 카인이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낮도 밤도 아닌 이 시간.

노을조차 밀려오지 못하게 틀어막는 먹구름을 뚫는 달빛처럼, 카인의 아그웨스카에 창백한 달빛이 휘황했다.

어둠에서 피어나는 차가운 빛.

파아아아-.

몇몇 엘프들은 너무도 밝은 빛에 눈을 돌렸고, 몇몇은 천둥과 함께 달려드는 창백한 궤적을 볼 수 있었다.

페이는 자신을 반으로 쪼갤 듯 날아오는 달빛의 검기에 이를 악물었다.

부패하는 잎사귀 Deficiens Foliis.

엘프 특유의 비전에서 비롯되는 초록의 오러가 흩어진다.

태어난 것엔 죽음이 안배되듯

나타난 것은 언젠가 사라지듯.

자연의 생멸이 담긴 페이의 검이 키리에를 녹여냈다.

카인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엘더라는 게 그냥 되는 건 아니었군.'

미래를 소모하면서 사용하던 키리에에 비하자면 손색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막힐 줄은 몰랐다.

처억-.

아그웨스카를 돌려 잡고는 페이가 멈칫한 틈을 보고 바로 달려들었다.

글루미엠이나 로스 후작이 왠지 모르게 끼어들지 않으니, 강한 적을 하나씩 잡으면 될 터.

아그웨스카가 다시금 달빛으로 물든다.

대장벽의 간절한 기도가 빚어 낸 첫 번째, 키리에의 빛이 휘황하게 퍼져 나온다.

쉐에에에엣-!

직접 달려드는 카인.

좌에서 우로 뻗어지는 깔끔한 베기가 페이를 향했다.

'죽였다.'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페이는 멀쩡했다.

투, 투툭.

죽은 건 얼굴까지 투구로 가린 웬 기사 하나였다.

"엘븐나이트!"

페이는 소리쳤다.

엘븐나이트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무엇인진 안다.

쿠우우우웅-!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온 스무 기의 엘븐나이트가 그대로 카인을 둘러쌌다.

"운명은 내 편인가 보군."

엘프라면 안 되지만, 쓰다 버릴 수 있고 언제든 회복시킬 수 있으며 고통을 모르는 엘븐나이트라면 페이와 손발을 맞출 수 있었다.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파앙-.

페이에 비하면 엘븐나이트는 느렸다. 그러나 너무 많고 거치적거린다.

카인이 부드럽게 피하는 순간.

흩날리는 낙엽 Volitans Foliis.

다시금 찔러 오는 페이의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엘븐나이트의 벽.

푸슛-.

페이의 검이 좌측의 엘븐나이트의 복부를 관통하며 핏방울과 함께 찔러 들어왔다.

끼기긱!

카인은 본능적으로 아그웨스카의 옆면으로 빗겨냈다. 끈덕진 피에 불꽃이 일지도 않았다.

"죽어라, 에드먼드의 아들이여!"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페이는 신나서 소리쳤다.

그 순간.

깨어나라!

쿠웅-.

구름까지 출렁일 정도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있는 건 올리시렌이었다.

그녀는 밤보다 까만 눈동자와 어둠보다 짙은 머리를 휘날리며 세계에 명령했다.

일어나라!

죽지 않은 원정군들은 한순간 눈을 떴다.

카인을 몰아붙이던 페이는 금방이라도 피가 터져 나올 것같이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카인을 향해 소리쳤다.

"죽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엘븐나이트.

검을 내찔러 오는 페이.

"...."

그리고 명령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올리비아.

가장 적절한 순간에 예상대로 되자 카인은 피식 웃었다.

'...겨울이여.'

가능하면 쓰지 않기로 했지만, 수가 없기에.

'미래를-.'

바치려는 순간.

파아아아아아앙-!

저 멀리서부터 폭풍이 휘몰아치듯 바람의 굉음이 들렸고.

털썩.

페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도 목 위로는 남은 게 없는 상태로.

"카인 공자님!"

엘븐나이트가 나타난 곳으로 다시금 나타난 기사들이 있었다.

가장 앞에 선 것은 방금 페이의 머리를 일격에 터트린 폭풍활 호크마를 쥔 아르나와.

"형님!"

아벨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클로이드, 빅터 밀링턴, 에셔.

"로드를 지켜라!"

과거 에드먼드가 질주했던 곳으로 카인이 달렸고. 이젠 에셀레드 기사단이 진군했다.

#110 EP.Ⅱ-2

봄이 오는 날에 (5)

쿠구구구궁-!

"로드 에셀레드를 위하여!"

어림잡아 일백의 기사가 달려온다. 그들의 기백과 발소리에 '딥 포레스트' 앞 평원이 요동친다.

몇몇은 통일된 갑옷을 입었지만, 나머진 모두 달랐다.

심지어는 금속 갑옷과 가죽 갑옷도 혼재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오합지졸의 기사단.

그리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카인 공자님-!"

피슈우우웃-.

아르나였다.

폭풍활 호크마는 그녀의 힘을 빨아들여 바람의 화살을 만든다. 그 화살 아래 버티는 엘프는 하나도 없었다.

화살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그녀가 시위를 놓을 때마다 엘프가 하나씩 반드시 죽었다.

"이젠 저희가 공자님을 지킬 차례입니다."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기사단장 클로이드의 세검에 찬란한 햇빛이 폭발한다.

그대로 내질러진 검은 갑작스레 나타난 기사단을 막으려던 엘프를 꿰뚫었다.

우직하고 무식하기로는 섬에서 첫손에 꼽힐 클로이드.

전장에서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 전차였다. 클로이드를 따르는 기사들은 카인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며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페르그나 Fergna.

갑자기 나타난 에셀레드 기사단을 향해 쏟아지는 엘프의 공격을 선두에서 막아내는 둘이 있다.

"나는 빅터- 밀링턴-! 은혜는 갚는다!"

브로드소드를 쥔 채, 마치 춤을 추듯 전장을 화려하게 활보한다.

화살 하나하나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과 정령 공격도 한때 라마이닝의 기사였던 빅터의 칼을 넘지 못했다.

그가 어째서 '강철 바위'라는 이명으로 불렸는지 알 수 있었다.

티잉-!

그 뒤로 제 몸만 한 큰 방패를 쥔 에셔도 있었다.

"에셀레드를 위하여!"

파아아아앙-!

빅터가 차마 막지 못한 공격이나, 대단위 공격은 에셔가 방패 채로 막았다.

그 뒤로는 손발을 잘 맞춘 에셀레드 기사단이 세검을 찔러넣는다.

"...."

카인은 검을 내렸다.

하이볼트가 에셀레드 기사단을 두고 <블러드 하퍼>라고 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합을 맞춰 정교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사 개개인의 무력은 압도적이었고, 모두 한 마음을 품고 일직선으로 돌파한다.

그들의 진군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 부서지고 있었다.

그 선의 끝은 카인.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엔.

아르드바르.

루 델바흐 Lugh Delbaeth.

두 자루의 세검을 쥔 아벨이 있었다.

녀석은 오른손의 세검으론 공명정대한 에셀레드의 검을 펼쳐내고.

엔 자우어.

왼손의 세검으론 대륙의 밑바닥 용병이나 익힌다는 악랄한 검술을 펼쳤다.

한 사람이 동시에 펼쳐내는 상극의 검술에 아벨을 상대하는 엘프 검사들의 머리가 복잡했다.

문제는 복잡하면 안 된다는 것.

엘프들의 진형에 틈이 생기자 아벨은 두 세검을 교차하며 질주했다.

아벨식 암천일광.

십자격 十字擊.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후우우우우-.

바람이 빨려든다.

저 하늘의 먹구름마저 내려올 듯 출렁이는 중심엔 아벨이 있었다.

카인의 등을 보았다.

카인이 가려는 길을 보았다.

그리고 카인을 보았다.

아벨의 찬란하고 위대한 재능은 어린 소년에게 겨울의 전사들이 기도로 빚어낸 검술을 가져다주었고.

수평 베기와 수직의 참격이 교차하며 엘프의 방벽을 통으로 갈아 버렸다.

"...."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반짝인다.

빛이 비쳐서가 아니다.

아주 오래전.

지금처럼 닳고 닳은 전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 나가기도 힘들었던 어린 소년이 바라던 그 광경이다.

바랐지만,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꿈이 이뤄졌다.

카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모든 원정군은 모여라-!"

뒤늦게 올리비아의 명령이 울렸다. 총사령관이 지닌 마법 확성기로 쩌렁쩌렁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평야 전체에 퍼졌다.

올리시렌의 '기적'에 눈은 떴지만,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던 기사들이 언데드처럼 비척비척 일어났다.

"어-서-!"

이따금 보면 상처 입고 눈도 못 뜨는 자가 많았다.

하지만 그간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한 것인가.

엘프들을 상대하기 위해 총사령관 아래서 혹독하게 훈련했던 기사들은 생각하기 전에 그녀의 말을 따랐다.

북방 엘프의 숲에 싸움을 벌이려면 기본적으로 이 정도의 훈련은 되어 있어야 하는 모양.

카인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제법 볼만했다.

상황이 진전된다.

전황이 뒤바뀐다.

버티면 엘프의 승리였지만, 이젠 원정군과 에셀레드 기사단까지 온 마당에 쉽게 승산을 점칠 수 없다.

"운명에 다른 후발대가 오는 게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로스 후작은 말을 돌려가며 글루미엠을 추궁했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했으나 리히스의 일부터 원정군을 꾸리느라 파악하지 못했다.

물론 그만큼 에셀레드 기사단이 은밀하기도 했고, 일부러 '헤드브레이커'를 앞세운 소문으로 덮은 것도 있었지만.

"내 '운명관측'에 보이지 않는 자가 하나 더 있어. 그의 영향으로 움직여서 볼 수 없던 거고."

싸늘한 초록의 눈동자가 전장을 담는다. 폭풍처럼 밀고 들어오는 에셀레드 기사단과 뒤로 물러나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원정군.

카인을 제외하고 누가 자기 눈을 또 피한 것인가.

글루미엠은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두 자루의 세검을 쥔 채 엘프들을 도륙하고 있는 갈색 머리의 청년을 가리켰다.

"반짝아, 쟤 알아? 나 쟤 왠지 익숙한데."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느낀 건지 아벨이 고개를 돌렸다.

아벨의 정면을 본 로스 후작은 서류에 박혀 있던 사진 하나를 떠올렸다.

"아벨입니다. 아벨 에셀레드."

쿠구구구구-.

글루미엠을 중심으로 공기가 무거워진다. 무언가 있다면 찌부러질 듯한 무시무시한 압박이 퍼졌다.

"에셀레드, 에셀레드! 그놈의 개 같은 에셀레드의 종자들! 그럼 저게 아르나가 자신을 바쳐서라도 살리려던 그 종자로구나."

글루미엠이 분노한다.

스스스슷-.

숲의 나무들이 제 가지를 떨어대고 그들끼리 부딪치는 기묘한 소리는 칼날끼리 맞대는 소름 끼치는 무언가 같았고.

후우우우웅!

숲에서부터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은 글루미엠이 뿜어내는 분노였다.

카인은 고개를 돌려 분통을 터뜨리는 글루미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제멋대로 소리쳤다.

"왜 달라졌지? 이전에 본 저 녀석의 운명엔 이딴 건 없었는데! 저 빌어먹을 것들을 가릴 정도로 달라진 이유가...."

있었다.

글루미엠도 고개를 돌렸다.

칼을 내린 채 자신을 보던 카인과 눈을 마주했다.

기차에선 어렴풋이 느꼈지만, 자신의 본체와 가까운 이곳에서 바라본 카인 에셀레드는 무언가 달랐다.

인간과 엘프라는 종족의 차이 정도를 가볍게 짓누를 정도로 생명으로서 '근간'이 다른 무언가로 보였다.

"클로에...."

글루미엠이 걷는다.

로스 후작이 그녀를 따르려 했다.

스윽-.

그러나 다른 엘프의 몸을 이용해 글루미엠은 의식을 쪼갠 후, 로스를 '딥 포레스트' 쪽으로 안내했다.

"...."

헤터워드 로스 후작은 카인을 흘깃 본 후, 바라는 대로 숲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넌 에드먼드와 클로에의 아들이구나. 눈이 똑 닮았어."

세상의 눈과 머리카락 색이 다양하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다들 비슷했다.

그러나 보라색 눈은 달랐다.

존재한다고 말만 들었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중 하나는 클로에였고, 두 번째는 카인이다.

"'꿈'의 마녀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개화된 에드먼드의 아들이여."

카인도 그녀를 향해 걸었다.

어차피 이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전투 한 번 이겼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건 아니다.

'이 싸움의 끝은 글루미엠이다.'

결국 수백 년간 군림해 온 엘프 여왕을 죽여야만 끝나리라.

"네가 이 모든 걸 만들었구나."

카인이 전술의 측면에서 파악한다면, 글루미엠은 자신이 지닌 '운명'의 연결로 진실을 파악했다.

본래 존재하던 아벨의 운명을 틀어버린 자.

죽어야 할 자를 살리고, 살아야 할 자를 죽이며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천명의 길잡이.

"너 하나만 없었으면 모든 건 바뀌지 않았을 터."

우우우우우우-!

글루미엠의 분노가 울린다.

그녀를 중심으로 초록의 기세가 선명한 악의를 지닌 채 현현한다. 카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대꾸했다.

"말은 똑바로 해라, 귀쟁이들의 왕이여."

"...?"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으면 되는 거다. 여기에 있지 않았으면 되는 거고, 아르나 님과 아벨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또 되었겠지."

"...."

"그뿐일까? 하이볼트의 마음을 죽이던 '우울의 관'을 만든 것도 너겠지. 로스 후작을 회유한 것도 너고."

"건방진 인간."

"빌어먹을 엘프."

불꽃이 튄다.

글루미엠이 기세를 끌어 올리듯 카인 역시 몸 안을 거칠게 뛰노는 순백의 번개를 꺼내두었다.

초록과 순백의 경계.

파지지지직-!

서로서로 침범치 못하지만 호시탐탐 파고들 기회만 노리는 그들만의 작은 전장.

"형님."

아벨이었다.

카인의 옆에 서서 다짐했던 대로 그를 지지했다.

"카인."

올리시렌이었다.

지금껏 억눌러만 왔던 마녀의 힘을 밑바닥까지 사용하며 검은 눈과 머리의 여인이 되었다.

"공자님."

밴더빌트였다.

"로드 에셀레드."

클로이드였다.

하나 둘 셋.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이전 세계선의 카인과 달리, 이번의 카인에겐 사람이 있었다.

외로이 싸우는 전장은 없었다.

이젠 함께 싸운다.

그의 행동과 말에 달라진 모두가 카인의 뒤로 섰다.

"에셀레드를 위하여!"

그뿐일까.

아이리안 섬의 남서부, 에셀레드 영지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북상해 온 에셀레드 기사단.

그들은 카인의 좌측에 늘어섰다.

"아이리안을 위하여!!"

로스 후작이 배반했다고 하나, 기사들마저 혼을 판 건 아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북방원정군은 아이리안 섬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기사들만 참여할 수 있는 군단이다.

고개를 숙인 올리비아와 인상을 쓰는 맥로든 후작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북방원정군이 카인의 우측에 도열했다.

새의 눈으로 보면 카인의 양쪽으로 날개가 펼쳐진 것 같으리라.

쿵.

카인이 발을 굴렀다.

쿠구궁-.

그 뒤에 있던 아벨을 비롯한 카인과 인연이 있던 자들이 따라서 발을 굴렀다.

어떤 이능력도.

마나나 오러도 아닌.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날개.

쿠구구구구구구구!!!

그리고 이어지는 에셀레드 기사단과 원정군의 발구름!

빗방울마저 그들의 기세에 놀라 휘어지고, 먹구름 사이로 작은 틈이 벌어졌다.

가느다란 햇살 한 줄기가 그들을 내리쬐었다.

차가웠던 한기가 물러나고 봄날 같은 온기가 머물기 시작했다.

그때, 글루미엠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긴 것 같으냐?"

글루미엠의 기세가 종잇장처럼 밀려난다.

밀릴수록 강한 힘을 뿜어냈지만, 그녀의 의식이 강림한 엘프의 살갗에 초록의 새순이 돋았다. 마치 엘프라는 종족의 한계를 맞이한 모습이었다.

"어리석고 멍청하며 불쌍한 인간들아, 마지막을 맞이하자꾸나."

파사사삿-.

글루미엠이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어차피 본체는 '딥 포레스트'의 세계수 앞에 있고, 이곳에 있는 건 의식을 담은 단말일 뿐.

강대한 그녀의 힘을 꺼낸 만큼 오래가진 못했으리라.

저벅-.

카인은 앞으로 나섰다.

글루미엠의 눈이 커질 때.

스읏-.

흑색의 아그웨스카가 글루미엠이 깃들었던 단말의 목을 베었다.

어차피 먼지로 흩어지는 중이었으니 피가 튀지도 않고 머리가 구르지도 않았다.

"이, 이, 이 개보다 못한 에셀레드야!"

다만 가는 길의 글루미엠에게 다시 한번 굴욕감을 줄 순 있었다.

"이긴 거 같냐고? 이겼다."

카인은 흑색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우리가."

와아아아아아아-!

마지막 봄의 전장에서 울려 퍼지는 최초의 승리 선언이었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11 EP.Ⅱ-3

폭풍의 계절 (1)

「초대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고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야 최후의 성녀는 그 모든 시간 동안 노력했던 것의 결실을 보았다.

이제 시작만 하면 되건만.

그녀는 해야 할지 말지, 며칠째 결정하지 못하며 머뭇거렸다.

"후우...."

그녀가 지녔던 의문은 하나다.

자신마저 세상을 떠나면 신의 말과 의지는 이 땅에 남지 않을 터. 그 이후의 신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남은 생을 불태워서라도 신의 부재에 대해 답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답'이 옆에 있다.

스윽-.

자기 손으로 모든 글자를 적어 내린 '빛의 성서'를 손으로 쓸었다. 하얀 사슴 가죽으로 재단된 만큼 부드럽게 까끌거린다.

"신께선 본인을 참칭하지 말라고 하셨건만...."

신이 없는 자리를 채우는 신.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된 신.

성녀가 빚어 낸 신.

진짜 신이 비운 자리를 채울 거짓된 신이 있었다.

"그게 걸리신다면 신이 아니라 '빛'이라고 부르시죠."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촛불만 일렁이던 맞은편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천천히 그러나 선명히.

은빛의 기운이 모여들더니 한 사람을 만들어 냈다.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아직도 마왕을 죽일 적과 똑같이 젊은 성녀와 달리 완전히 노인이 되어 버린 그.

"존."

초대 용사, 존 도우.

그는 최후의 성녀가 만들어 낸 '빛의 성서'를 손끝으로 당겼다.

"제 세계엔 신이라는 건 없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말을 처음 배울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유려한 어투.

벌써 이 땅에서 살아간 지가 수십 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무언가 찜찜했다.

"그 세계에선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을 뿐이지 모든 기적의 주재자께선 있을 거라 저는 말했죠."

과거 용사 존을 추앙하던 성녀는 사라졌다. 지금의 그녀는 존에게 쌀쌀맞게 말했다.

본래 흑발에 흑안이었던 존 도우의 눈과 머리가 은빛으로 물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혹은 그간 들었던 그의 행적 때문일 수도 있었고.

존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제 세상처럼 신이 없는 자리를 믿음으로만 메우는 건 어려울 것 같았습니까?"

"그곳은 증명을 못 한 것이고, 이곳은 정말 흩어지시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의 신앙이 줄어든다면 세상의 구성이 흔들릴 테니 저는 그런 붕괴를 막아야 합니다."

성녀의 확고한 신념.

존 도우는 이럴 때마다 자신이 살던 곳과 이 세계의 차이를 실감했다.

신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 존재를 증명하여 신앙을 바치는 '이세상'과 그저 믿음과 말씀으로 각자의 신을 그리는 '저세상'.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는 성녀부터가 이렇게 말하니 더 이상 이 문제로 이야기할 건 없었다.

"알겠습니다. 거짓이지만 무엇보다 참된 '빛'을 만든 걸 축하드립니다."

성녀의 눈이 가늘어진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어 버린 존을 훑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신이 싫으시겠군요."

"싫다 좋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개인의 존재 증명인 이름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대에게만 노화를 피할 수 없게 하셨으니."

성녀는 성전 위에 올려진 존의 손을 보았다.

수십 년 전 주름 하나 없던 손이 이젠 깡말라서 주름졌다. 거죽은 얇아지고, 뼈대는 가늘어졌다.

톡 치면 부러질 것만 같다.

"신이시여, 참으로 잔인하시옵니다."

태어남에 죽음이 뒤따르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쌓은 경지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면 종의 수명을 뛰어넘기 마련.

마술사왕은 벌써 사백 년을 살았고, 신의 축복을 받은 자신도 벌써 칠십 년을 살았지만, 겉으론 그나 자신이나 청년으로만 보인다.

반면, 존은 달랐다.

그의 경지가 '용사'라는 칭호답게 드높았지만, 노화는 조금도 미룰 수 없었다.

마치 원래의 그가 죽기로 정해진 '운명'에 따라 강제로 이끌리는 모습이었다.

"뭐, 이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존은 진즉, 정리를 끝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정했다.

신이 자신을 싫어한다면, 자신 역시 신을 싫어하리라.

신이 자신의 끝을 바란다면 자신도 신의 끝을 바라리라.

"그리고 성녀님. 거짓은 나쁘지 않습니다."

존은 미소 지었다.

그의 속내는 단 하나도 깃들지 않은 거짓의 웃음. 하지만 웃음이 가장 가까운 표정.

"진짜 대신에 더더욱 진짜처럼 행동한다면 그것 또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만들어진 신, '빛'.

성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신앙과 신과 종교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되도록 번성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성서는 가능한 한 온건하고 중립적으로 적었고.

존은 휘리릭 살펴보다가 한 구절을 짚었다.

"아 그리고 이단의 범위는 늘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더?"

"마녀."

"...."

"아무리 진짜 같은 거짓이라고 해도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만큼의 대가는 치르셔야죠."」

* * *

그냥 들어온다면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빽빽한 숲, '딥 포레스트.'

스스스스슥-.

글루미엠의 의식이 강림한 엘프가 발을 뻗자, 숲이 저절로 움직인다.

이 모든 숲을 지탱하는 게 세계수고, 글루미엠은 세계수의 화신이다.

그런 글루미엠의 단말과 함께하니 어려운 건 아무것도 없다.

"반짝아."

"예, 여왕님."

그녀를 따르는 로스 후작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인간 중에서 '딥 포레스트'에 정식으로 초대받고 발을 디디는 건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강제로 들어간 자는 당장 로스도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고.

평상시 엘프들이 이렇게 빡빡한 숲에서 어떻게 다니나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답을 얻었다.

헤터워드가 다른 생각을 할 때, 글루미엠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아홉 엘더 중 나는 둘을 잃었어."

엘더 리히스 오히긴, 워럴드 로스에게 사망.

엘더 페이 멕게리티, 아르나의 화살에 사망.

"그리고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하나를 더 희생시켜야 해."

시그마리 에이그리히, 희생.

"엘더 셋이 빠진 상황인데, 네가 엘더 셋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할 거야."

로스 후작은 잠시 글루미엠을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곧장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다 왔어."

어째서 밖에선 보이지 않은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가운데 있다.

그리고 나무와 넝쿨로 지은 집들이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소담스레 지어져 있다.

로스 후작은 집들의 틈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의 눈동자들을 느꼈다.

글루미엠이 있는 만큼 적의보다는 의아함과 경계심이었다.

글루미엠은 땅이 어떻든 쭉쭉 미끄러져 나갔다.

로스 후작은 피의 힘을 조금 끌어오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도착했다.

거대한 나무, 세계수 아래.

흰색의 제단 위.

시그마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저벅, 저벅-.

글루미엠이 지금까지 강림해 있던 엘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앞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바로 허리를 숙였다.

인간의 소녀와 같은 키.

나른한 표정.

풍성한 초록의 머리와 바람을 잘라다 만든 듯한 연둣빛 드레스.

"돌아가 봐."

글루미엠의 본체였다.

그녀가 손짓하며 말하자 엘프는 인사를 남기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녀는 눈만 깜빡이는 로스 후작을 보며 웃었다.

"내 진체를 직접 본 인간은 반짝이, 네가 세 번째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돼."

세 번째.

로스 후작은 첫 번째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글루미엠은 눈치 빠른 그가 물어볼 줄 알았지만, 입을 닫고 있는 걸 보았다.

한 줄기 웃음을 더 얼굴에 담았다.

"내가 언급하는 걸 싫어할까 봐 안 물어보는 거야?"

"여왕님께 좋은 기억은 아닐지라."

"하긴 그 에드먼드는 너도 싫어하지."

두 번째는 에드먼드였다.

지난 11차 원정 당시 에드먼드는 보급병을 구하고 그대로 '딥 포레스트'를 세검으로 공격했다.

이곳을 휘감은 결계는 마법과 마녀의 '기적'을 버무린 거대한 대결계기에 고작 인간의 검에 무너지겠냐 싶었다.

하루, 이틀, 사흘.

에드먼드는 중간에 물을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오러를 씌운 세검으로 찔렀다.

기술이 아니라 힘으로 흔드는 결계.

결계가 무너지진 않겠지만, 너무 흔들리다 보면 보수의 어려움이 생기겠다고 판단한 글루미엠은 그대로 에드먼드를 결계 안으로 삼켰었다.

글루미엠은 당시를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게 인간이라니 말도 안 돼."

로스 후작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그럼 시작해 보자."

글루미엠은 누워 있는 시그마리의 옆에 섰다.

돌 위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정말 로스 후작의 꿈을 위해 제물로 쓴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글루미엠은 고개를 들었다.

"네 누이인 에버윈 로스를 이제부터 빚어 낼 거야."

사아아아아아-.

시그마리와 로스 후작의 몸에서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빛망울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루미엠의 초록 눈이 조금씩 검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올리시렌도 그렇고 마녀의 힘을 강하게 쓸 때의 특징이었다.

"이 세상에 죽은 자를 되살리는 수법은 없어. 언데드라고 할지라도 그건 정교한 모사에 불과해."

"잘 압니다. 이 빌어먹을 혈족은 죽어서 대부분이 언데드로 깨어나니까요."

피의 저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로스 혈족은 나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리는 언데드가 아니라 나름 자연발생 언데드로서 두 번째 삶을 영위하는 기분이었으니까.

파스스슷-.

세계수의 가지가 흔들린다.

글루미엠의 몸이 점차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하는 건 에버윈이라는 여자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너의 운명 중 과거의 에버윈에 대한 모든 걸 모아서 넣는 것뿐."

"몇 번이고 말씀해 주셔서 잘 압니다."

엘프는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다만 방랑엘프는 지키지 않는다.

그 차이는 세계수에 있었다.

세계수에 연결되어 여왕이나 다른 일족과 의식이 동조된 엘프가 거짓말을 한다면 점차 연결이 무뎌진다.

반면 방랑엘프는 세계수라는 거대한 힘을 포기하고 자유를 얻은 만큼 거짓말의 자유도 있었다.

그리고 엘프 여왕쯤 되면 조금의 거짓말도 치명타로 다가오기 마련.

"너는 네 역할을 충분히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너는 이제 가장 '에버윈 로스'와 가까운 가짜를 만날 거야."

꽈악-.

로스 후작은 두 손을 꽉 쥐었다.

배어나오는 땀에 손바닥이 축축해졌지만, 그딴 건 관심 없었다.

"시그마리를 제물로 쓰길 잘한 것 같네. 그동안 너와 쌓인 유대가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화를 이끌고 있어."

화아아아아-!

초록의 빛 망울이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그마리의 심장으로 들어갔고.

두근-.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그녀가 변화했다.

늘씬하고 길쭉한 시그마리에서 로스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에버윈으로.

"어쩌면 진짜보다도 네겐 더 진짜 같은 가짜일 거야."

"그거면 됩니다."

몇 번의 심음이 터지고 가라앉자 이곳에 시그마리는 없었다. 로스 후작과 어딘가 닮은 여인이 누워 있었다.

에버윈 로스.

그리고 하이볼트의 아내이자 올리시렌의 친모였던 카를라 오우드리.

그녀가 로스의 새장을 탈출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아...."

인류를 배신한 대가로 얻은 사랑.

로스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에 손을 대었다.

그때 글루미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짜는 가짜."

"...?"

"그만큼의 감수해야 할 것도 있지."

약속의 범위는 가능한 한 에버윈을 살린다는 것이었으며, 약속 너머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운명의 눈을 지닌 글루미엠의 비웃음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