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힘을 초월한 마녀의 힘!
이 세계 여덟 번째 마녀이자 엘프 여왕의 존재감이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기긱-.
카인의 귓가로 다시금 세계의 톱니바퀴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서 부딪치는 굉음이 들렸다.
"어차피 이 아이를 상처 입혀도 나는 멀쩡하지! 하지만 넌 아니야! 짓눌려 죽어라, 어린 에셀레드야."
글루미엠의 광소.
에셀레드에게 당했던 과거를 풀어내려는 한풀이.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마녀의 힘.
기적의 거대한 무게감이 카인을 납작하게 만들 듯이 짓눌러 왔다.
['겨울'이 당신의 검을 지지합니다.]
쿠르르릉-.
하늘은 푸르고 맑건만, 저 멀리서부터 천둥이 울린다.
"뭐...?"
그러나 글루미엠은 단숨에 그 소리가 카인의 오른손에 쥐어진 흑색의 검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달았다.
카인식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에드먼드에게 보았던 그날의 검을 따라 한다.
목줄 풀린 맹견처럼 뇌전이 질주하고 바람이 일어나고.
콰가가가가가가!
번개폭풍에 휘감긴 흑색의 아그웨스카가 시그마리의 정수리에서부터 하늘로 치솟는 '선'을 자르고.
후웅-.
두 번 찌르는 에셀레드의 검답게 그대로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다시 달려들었다.
글루미엠은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안 돼!"
"돼!"
#78 EP.Ⅰ-20
아크투루스(Arcturus) (3)
시시각각 다가오는 카인의 칼날.
글루미엠은 아홉 엘더 중 누구도 잃을 순 없었다.
엘더급 엘프가 빠질수록 세계수를 지탱하는 자신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
특히 인간계에 숨어든다는 불명예를 스스로 짊어진 시그마리는 특히 더 유용한 엘더기에 글루미엠은 더 늦기 전에 결단했다.
바친다!
끼기기기기긱-!!
마녀가 자신의 기적을 행사할 때마다 카인에게 들리는 톱니바퀴의 부서지는 소리가 증폭된다.
시그마리의 뒤.
반짝이는 은빛의 '선'에 연결된 초록색 눈으로 바라보는 글루미엠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보였고.
'세... 계수?'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하지만 카인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숭-덩.
'느낌이 없어.'
분명 가느다란 하얀 목을 베었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은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에드먼드 이후로 처음이야."
글루미엠의 끓는 목소리가 울린다.
화아아아아-.
시그마리의 발끝에서부터 주홍색 불티가 튀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그녀를 사라지게 한다.
카인은 그녀의 뒤에 보이는 글루미엠의 본체를 응시하며, 칼을 내렸다.
"도망쳤나."
"그래. 네 칼에서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바치지 말아야 할 걸 바쳤어."
거대한 세계수의 가운데.
하나의 가지에 다섯 개의 황금색 나뭇잎이 붙어 있다. 그러나 그중 맨 왼쪽의 하나가 주홍색 불꽃에 삼켜지고 있었다.
글루미엠의 환영은 그곳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린 에셀레드야, 너는-"
"카인이다."
카인은 글루미엠의 말을 잘랐다.
아마도 마녀의 기적에 세계수를 바쳐서 시그마리를 초장거리 공간이동 하는 것이리라.
대장벽으로 달려들던 마물 중 지능이 있고 신비를 가진 것들이 드물지만 보이던 거라 딱히 새로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간이동으로 사라지는 건 대이적답게 엄청난 대가가 필요한 일.
"엘프 여왕을 도망치게 만든 사람의 이름 정도는 외워야지?"
씨익.
그렇다면 지금의 승리는 자신의 것.
카인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
"카인이라고 다시 말해 줘야 하나? 하긴, 도망치는 데 바쁘니 외울 정신은 없겠지."
불꽃이 시그마리의 허리까지 삼키며 사라졌다. 그만큼 저 멀리 북방의 숲과 열차의 공간이 이어진다는 의미였고.
우우우우웅-.
패배의 굴욕과 분노에 몸서리치는 엘프 여왕 글루미엠의 기세가 더욱 진해졌다.
시그마리의 몸에 강림했던 것은 약과인 양, 세계수를 등진 진짜 엘프 여왕의 힘은 카인조차 한 걸음 물러나게 할 수준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카인 에셀레드. 그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니 외워 주마."
"어차피 싫어도 기억날 것이다. 부하를 보내 놓고 주둥이만 나불거리다가 급하게 도망가는데, 기억이 안 나면 바보지."
"...으득."
카인의 도발에 글루미엠은 잇소리가 울릴 정도로 이를 갈았다.
동시에 올리시렌과 이소엘, 밴더빌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흘깃 바라봤다.
평상시 카인과 달리 이렇게까지 말꼬리를 잡는 게 어색했으니까.
그러나 카인의 꽉 쥔 주먹을 살피곤 다들 내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벨과 아르나에게 특히 무르던 카인이기에 진심으로 분노했음이 엿보였으니까.
"나는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이자 지나가 버린 운명의 마녀. 미래의 조율자."
스윽-.
카인은 본능적으로 아그웨스카를 들었다.
섬뜩하다.
그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치솟는다. 그녀의 초록색 눈에 먹물이 풀리는 듯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광으로 여기렴. 이렇게 내가 직접 누군가의 '운명'을 만지는 건 에드먼드 이후 처음이니까!"
화아아아아아-.
그 순간 카인은 검은색 번개가 파도처럼 쏟아지는 걸 느꼈다.
귀청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무수한 톱니바퀴에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완전히 검게 물들어 버린 그녀의 눈.
"운명이여! 저 건방지고 어리석은 것의 미래를 보여라!"
우우우우우-.
지금까지가 엘프 여왕 글루미엠의 힘이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마녀로서의 기적!
운명을 읽고 미래를 살피는 운명의 관측자로서 글루미엠은 잔혹할 정도로 무감정한 초록 눈을 빛냈다.
"뒤틀어라! 짓이겨라! 시련과 혼돈으로 녀석의 운명을 잡아먹어라!"
그 속에서 엘프 여왕이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카인의 운명을 파고들고 제멋대로 바꾸려는 것도 아무도 알 수 없을 터.
"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그마리의 머리만 남을 정도로 공간이동이 진행되었지만, 카인은 가만히 서 있었고 글루미엠은 피범벅이 된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역시 입만 살았군."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내렸다.
글루미엠이 하도 당당하게 말해서 혹시 자신이 모르는 엄청난 방법이 있나 했지만, 없었다.
게다가 공간이동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니 뭔가 있어도 하긴 늦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네 미, 미래가 왜 없지...."
"한심하긴."
카인은 그녀를 조롱했다.
['봄'이 쓴웃음을 짓습니다.]
['겨울'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내심 글루미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겐 미래가 없다는 것인가.'
이미 한 번의 운명을 살았다.
그리고 살게 된 두 번째의 기회.
미래를 불태워서 현재를 지키는 자신에게 정해진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전 세계선의 모습으로 늘 나타나는 '봄'이 카인에게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걷는 길이 나의 길이라.'
카인은 미래가 없다는 그 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후회 없이 살리라.
그것만이 자신의 두 번째 삶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엘프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시그마리를 보낸 건 나를 살펴보고 가능하면 싹을 미리 자르려던 거겠지?"
"...."
글루미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가는 그녀의 표정으로 충분히 답을 들었다.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었다.
덜컹- 덜컹-.
둘의 싸움으로 이미 객차 안의 의자나 테이블 중 멀쩡한 건 하나도 없다.
카인은 엘븐나이트의 시체를 대강 발로 밀어 공간을 만들고, 찌부러진 철제 의자 하나를 가져와 대충 앉았다.
화아아아아아-.
부서진 차창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다. 피에 물을 살짝 탄다면 나올 법한 짙은 주홍색 석양빛이었다.
카인은 그 햇빛 아래서 패배에 몸서리치는 글루미엠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올렸다.
당연히 중지였다.
"꺼져라, 패배자."
"네, 네놈!!"
분노 서린 글루미엠의 외침!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올리시렌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만큼 글루미엠의 진체가 내뱉는 외침은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후웅-.
그러나 카인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뒤로 흩날리던 흑발을 쓸어 넘길 분이었다.
"그리고 아벨에게 감사히 여겨라."
"어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 주마. 입 더러운 카인 에셀레드!"
"오늘 내가 그대의 엘더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아벨이니까."
"하! 죽이지 못한 거겠지."
순간, 카인의 보랏빛 눈이 석양에 번뜩였다.
글루미엠은 실제로는 한참 멀리 있는 카인이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순간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살기에 움찔거렸다.
"정말 그럴까?"
"...."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당연히 헛소리라고 비웃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본능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카인은 손목을 꺾어 폈던 중지 그대로 글루미엠의 머리를 가리켰다.
"아벨이 칼을 들고 네 목숨을 따러 갈 때까지 꼭 그 지긋지긋한 삶을 더 살고 있어라. 귀쟁이 여왕."
"어린 에셀레드야."
"카인."
"...오늘 패배한 건 나이니 네 그 건방진 요구를 들어주마. 카인 에셀레드."
어느덧 시그마리의 눈만 남은 상황.
그녀의 초록 눈에 겹쳐진 엘프 여왕의 시선이 카인을 내려다본다.
"지금의 승리를 즐기거라. 그 시간이 길지 않을 테니."
"에드먼드가 당신의 숲에 들어간 걸로 안다."
그리고 카인은 천천히 비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힐난했다.
"그때 입도 뻥긋 못 한 여왕이 하는 말은 신뢰가 가지 않는군."
단숨에 찔려 버리는 그녀의 역린.
"이 개...."
하지만 이전에 카인의 말에 분노하던 것과는 달랐다. 에드먼드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 역시 난처해 보이는 게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오래전의 에드먼드다.'
직접 마주하면 또 다르겠지만, 글루미엠이 보이는 힘은 대장벽에서 상대하는 보스급 마물에 가까운 힘.
이곳이 대장벽과는 가장 먼 후방이고, 제국이나 성국과도 국력의 차이가 심한 걸 생각해 보면 글루미엠쯤 되면 거의 최강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런 글루미엠조차 에드먼드의 이름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니 에드먼드 백작의 힘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너희가 과연 숲까지 올 수 있을까?"
시그마리의 눈도, 그녀에게 강림해 있는 글루미엠의 눈도 곱게 휘어진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인간이던데 말이야."
후우우우우웅-.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치던 글루미엠과 세계수의 환영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그마리가 있던 자리에는 그녀가 들고 있던 고급 세검만 덜렁 남았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
카인은 이미 떠나 버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잘 알 수밖에 없던 게 마왕이 죽은 후 겪었던 전사의 삶이었으니까.
"공자님!"
글루미엠이 사라지고 가장 먼저 달려오는 건 노기사 밴더빌트였다.
뒤를 이어 올리시렌과 이소엘도 다가왔다.
카인은 턱짓하며 주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의자들을 가리켰다.
"앉아. 아직 한 시간은 넘게 가야 하는데 앉아서 가야지."
"카인...."
올리시렌의 목소리가 떨린다.
글루미엠이 등장했을 때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두 기사의 뒤에만 있었던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리라.
카인은 물끄러미 올리시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배웠지?"
"...?"
"글루미엠이 쓰던 기적들 말이야."
"아, 그거야."
마녀의 말이 현실 세계에 구현되는 것이 기원에서 비롯하는 기적이다.
올리시렌은 많은 말로 연습했었지만 쓸 수 있는 단어는 몇 없었다.
"마녀가 이렇게 성국 걱정 안 하고 힘을 쓰는 경우는 저 귀쟁이 여왕 말곤 없을 테니까, 다음에도 잘 봐둬."
"알았어."
석양이 지고 어둠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며 밤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열차는 밤을 헤치며 메이누스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우웅-.
숲길을 걷던 카테리나 성녀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울리는 기묘한 공명에 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쪽을 돌아보았다. 앞장서던 에드먼드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 있소?"
"마녀의 파동이 느껴집니다."
에드먼드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물속에 손을 넣어 물결을 재어 보듯 바람 속에 손을 넣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소. 글루미엠의 것이겠지. 성녀께선 어떻게 하시겠소."
카테리나는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돌렸다.
"아이리안 섬엘프의 토벌은 정식 의결이 늘 되지 않기도 하고, 그렇다고 메이누스의 총교구 차원에서 움직이기엔 상대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마녀 글루미엠을 토벌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열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신의 뜻과 인간의 현실은 같이 하기 어려운 일이니."
그러나 다시금 파동이 느껴지자 성녀가 움찔거린다. 에드먼드는 그 모습을 흘깃 보곤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남았소."
"도착지가 말씀이신가요?"
"글루미엠의 멸망이."
"예?"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말해 줬소. 글루미엠은 에셀레드의 이름을 지닌 자에게 죽는다더군."
카테리나나 다른 성직자들은 그 말을 반갑게 받아들였지만, 에드먼드의 눈빛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79 EP.Ⅰ-21
봄의 증명 (1)
「빛이시여, 마녀는 정말 죽여야 하는 존재가 맞사옵니까?
어제 저는 마녀의 심장에 말뚝을 박았습니다.
그 마녀가 낳은 두 아들의 목을 비틀었고, 마녀의 결혼한 남자의 팔과 다리를 뽑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누군가의 아비와 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 목도 가누지 못하던 아이들까지.
마녀를 숨겨 준 그 마을의 모두를 죽였습니다.
빛이시여.
제가 믿고 따르는 당신의 말씀은 세상 모두는 빛 아래 평등하고, 죄를 지었어도 진심으로 속죄한다면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또한 저희는 무슨 죄를 짊어졌기에 아이만이라도 살려 달라 울부짖는 자들을 없애야 하던 것입니까.
이 작은 기도의 답을 들을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과 뜻은 '여름'으로 피어나 '가을'로 저문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부족하고 불경한 의심을 품는 제게 당신의 빛을 빼앗아 가지 않는 것이 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겁도 납니다.
정작 마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당신께서 손길을 거두어 갈까 두렵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뜻이옵니까.
'가을'을 쥔 성녀의 말씀이 뜻이옵니까, 경전에 기록된 말씀이 뜻이옵니까.
혹은 마녀 엘프가 살아 숨 쉬는 아이리안 섬으로 이 불민한 자를 보내시는 것도 뜻이옵니까.
-어느 성직자의 일기.」
* * *
"달려! 달리라고!"
이히히힝-!
루브릭 남작의 외침에 마차의 말들이 한껏 투레질하며 내달린다.
육지의 항구, 메이누스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인 만큼 마차가 달릴 길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에 이런 질주가 가능했다.
"젠장! 젠장!"
그리고 마차 안.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중년의 루브릭이 머리를 붙잡으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시그마리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승차인명부에 적지도 않고 태우다니."
그는 아이리안 전역의 철도를 총괄하는 철도청장으로, 메이누스의 철도청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청장님! 올리시렌 왕녀님의 객차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자도 아니고 왕녀가 탄 객차가 습격당했다.
시체만 남은 적들에게 정체를 알 수 있는 증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루브릭은 단숨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직전 로스 후작에게 마법 통신으로 시그마리를 은밀하게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왕녀도 적어야 하는 승차인명부에서 그녀와 <로스 데 캐롯>의 기사 몇 명을 적지 않고 태웠으니까.
시간대를 맞춰 보면 메이누스에서 타고 가서 중간역에서 왕녀의 열차에 탔을 터.
스윽.
루브릭 청장은 목을 쓸었다.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로스 후작은 자신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러 온 왕실기사단은 승차인 명부부터 찾고....
"이상한 점을 바로 찾아내겠지."
재깍재깍.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이 순간.
루브릭 청장은 가능한 빨리 메이누스 대환승역에 달려가 올리시렌 왕녀에게 머리를 박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없던 시골 남작가의 장남이었던 자신을 아이리안 철도청장까지 끌어 올려 준 로스 후작에겐 감사하나, 이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까.
탁-.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살폈다.
이제 곧 왕녀가 탄 열차가 들어 올 때다.
"더 빨리 달려!"
미리 준비하라곤 했으나 혹시 모르니 그는 급해진 마음만 일찍 도착하고자 했다.
콰가가가가강-.
그때 마차의 창밖.
열차의 굉음과 같은 소리에 올라서 고개를 돌렸다.
메이누스가 육지의 항구라면 육지의 배도 존재하는 법.
그의 작은 마차 옆으로 거대한 하얀 배가 엄청난 증기를 내뿜으며 내달렸다.
열 개의 바퀴는 바퀴살이 휘어 보일 정도로 돌았고, 그것이 떠받치는 몸통은 티 하나 없이 하얗고 거대하여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루브릭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순식간에 멀어지는 하얀 배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바르베타 총교구장이 어딜 이렇게 급하게...!"
그는 순간 입을 막았다.
이 길은 메이누스 대환승역으로만 뚫려 있기에 도착할 곳은 하나뿐.
철도청장인 자신과 아이리안 섬의 모든 성직자의 우두머리인 바르베타 총교구장에 올리시렌 왕녀까지.
어떻게 일이 풀릴지 암담해진 그는 본능적으로 성호를 그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이시여, 제발 손자가 다 자랄 때까진 이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옵소서."
그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소원을 빌며 계속 내달렸다.
* * *
끼기기기기기긱-!
두꺼운 철로와 열차의 바퀴가 맞물리면서 천천히 속도가 줄어든다.
폐허에 가까운 객차에 있던 카인 일행은 짐을 챙기며 밖을 보았다.
메이누스의 전경이 보인다.
반파된 그들의 객차를 보는 도시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경악에 가까웠다.
"아마 나가면 철도청장이 나와 있을 거야."
"왜?"
올리시렌은 카인의 반문에 기가 막힌 듯 제 얼굴을 가리켰다.
"무려 왕녀가 탄 열차에 이런 테러가 벌어졌는데, 안 나오고 배기겠어?"
"그렇군. 왕녀였지."
"뭐?"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짓자, 카인은 자연스럽게 웃은 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우인 것만 생각했다."
"너...."
그것이 카인 나름의 농담임을 안 올리시렌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남은 짐을 챙기며 카인과 올리시렌의 뒤를 따랐다.
"청장이 로스 후작의 사람이었지?"
"어, 아마 시그마리나 기사들이 타는 걸 눈감아 준 게 루브릭 청장일 테고."
카인의 짐까지 들고 있던 밴더빌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몰래 탄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루드 크로울 공자도 아이언하트로 가던 열차에 잠입했었으니 말입니다."
올리시렌은 이소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소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차 끝에 있는 문 위를 가리켰다.
복잡한 모델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맨 처음은 모두 '4'로 시작하고 있었다.
"열차의 세대가 달라서 청장이 눈감아 준 거로 생각하는 겁니다."
"세대요?"
열차가 달리지 않는 시대부터 검을 잡던 노기사로선 아무래도 어색한 내용.
이소엘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이리안이 철도를 도입할 때, 대륙의 철도는 3.5세대 즈음이었습니다."
"아...."
"3세대 열차까지는 평범한 열차라면, 메이누스와 수도 린드브룸으로 향하는 열차는 마법도시 <릴>이 만든 경계 마법이 장착된 4세대입니다. 따라서 이 열차는 불법침입자를 바로 잡아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복잡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빠르지 않았는데, 세상이 너무 빠릅니다."
밴더빌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진다.
카인은 앞으로 훨씬 더 변화가 빨라지고, 지금 대륙엔 5세대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는 걸 말하려다가.
툭툭-.
밴더빌트의 어깨만 두드렸다.
그렇게 셋이 나아갈 때.
올리시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카인이 머리를 터트려 버린 엘븐나이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마치 언데드와도 같던 자들.
상황이 마무리되고 철도원들이 조사하기 전 카인과 미리 살펴보면서 그들이 여전히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를 거세하고 뼈에 숲의 비전을 박아 엘프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게 개조된 상태였다.
꽈악.
적이라도 아이리안 왕국민이라면 죽는 걸 껄끄러워하던 올리시렌답게,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카인이 대뜸 입을 열었다.
"엘프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었다."
다들 자신을 쳐다보자, 카인은 엘븐나이트를 베면서 튄 붉은 피가 굳은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의 손에 피가 쩌억-하고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젠 싫다. 아벨이 왜 그렇게까지 엘프를 싫어하는지 알겠거든."
아이리안 왕국의 뿌리 깊은 엘프 혐오.
용사까지 된 아벨이 보이던 엘프에 대한 증오.
사람과 비슷하게만 생겼을 뿐, 그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종족의 아래서 자랐던 인간의 아이라면 당연하리라.
"그러니 왕녀 올리시렌."
"아까는 전우라며,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목소리를 깔아."
"이번 엘프전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네 왕위를 위해서도, 이 왕국을 위해서도, 엘프들을 죽이기 위해서도."
올리시렌과 카인은 서로를 응시했다. 따스한 격려보다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다.
"네가 말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랑 확실하게 담판 지을 생각이었으니까 걱정 마."
"그래?"
카인이 그만큼 준비가 다 되어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묻자, 올리시렌은 품속에서 작은 반지를 하나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웨어햄 백작이 끼고 있던 것 같은데."
"맞아, 크로울 영지를 떠나는 날 밤에 내가 따로 받아 둔 증표야."
-마탑은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해서....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이 헐렁하다고 해도 아이리안 마탑의 주인답게 처음에는 에둘러 거절했었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옆에 서 있던 이소엘을 찔러서 말을 시켰고, 그는 자기 반지를 바로 빼서 올리시렌에게 주었다.
-하하, 딸이 부탁하는데 뭐가 대수겠습니까. 우리 마탑은 올리시렌 왕녀님을 보증합니다.
카인은 올리시렌의 이야기를 듣곤 피식 웃었다.
'애지중지하는 딸이 1왕녀의 호위 기사인데 안 뺄 수도 없었겠지.'
어쩐지 출발하는 날 이소엘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별로던데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올리시렌은 어깨를 쫙 폈다.
"아버지가 만약 독대를 안 해 준다고 해도 왕국법으론 마탑주나 총교구장의 보증을 받거나 혹은 왕실기사단장을 이기면 할 수 있거든."
"그건 처음 들었군."
이전 세계선이든 지금이든 아이리안 왕실과는 별 상관없는 카인으로선 알 수 없던 규칙.
올리시렌은 '마탑주의 반지'를 다시금 품에 넣었다.
"그러니까 나도 진심이라는 거야. 단순히 왕녀라고 가만히 있을 생각 없어."
"잘했다."
카인은 피식 웃곤 몸을 돌렸다.
엘븐나이트와 시그마리를 보고 카인은 현재 국왕인 하이볼트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있던 찰나였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인가.'
혹은 모든 걸 알지만 가만히 바라만 보는 것인가.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라면 올리시렌이 딸이라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올리시렌의 행동이 제법 기꺼웠다.
드륵-.
카인은 어느새 가까워진 객차의 문을 열었고.
"문을 열까요?"
객차와 객차 사이.
미리 나와 있던 철도원들이 절도 있게 경례하며 물었다.
열차는 이제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천천히 멈추고, 카인은 반투명한 유리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메이누스 대환승역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이는 건 없지만, 사람이 꽤 많이 모여 있다.
문고리를 쥔 철도원은 카인의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
"현재 청장님께서 마중을 나와 계십니다."
"그런 것치곤 사람이 좀 많아 보이는데."
"그게...."
쉬이 말을 잇지 못한다.
철도청장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와 있다는 뉘앙스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메이누스에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나? 왕실에서 온 사람인가."
하지만 린드브룸에서 오기엔 웨어햄 백작처럼 날아오는 게 아니라면 시간상 불가능하다.
또 다른 칠대귀족가의 사람이 와 있는 게 아닌 이상 현재 메이누스에 철도청장보다 높은 사람은 있을 리 없다.
철도원이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기에 카인은 슬쩍 웃었다.
어차피 살기도 없으니, 열차의 큰 문을 곧장 열었다.
"카인 에셀레드 공자님을 뵙습니다."
철도청의 정복을 입은 중년인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가슴께에 부착된 명패에 적힌 루브릭이라는 이름이 그가 청장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
쿠우우우웅-!
수십 개의 금빛 창이 대환승역의 바닥을 내리찍는다.
기계갑옷을 입은 성국의 기계화 팔라딘이 왼쪽에 한 줄로 서 있고, 반대편엔 이단심판관이 서 있다.
그 섬뜩한 두 줄 사이.
깡마르고 볼이 홀쭉하고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기계화 팔라딘과 이단심판관이 따르는 자.
"이단심판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아이리안 총교구장, 노초 바르베타 대주교가 상처인지 주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빼곡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80 EP.Ⅰ-21
봄의 증명 (2)
척-.
카인은 손을 들어 자신을 뒤따라 나오려던 올리시렌을 막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 슬쩍 고개를 더 내밀었다가 성복의 흰 자락을 보고 급히 뒤로 숨었다.
그 기색을 느끼며 카인은 허리를 펴고 성국의 인물들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직 각성은 안 했다고 하지만 모른다.'
성국의 이단심판.
이교도라면 순수 사제들도 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고, 마물이라고 하기엔 아이리안 섬은 너무나 안전한 땅.
그렇다면 남은 건 마녀일 터.
올리시렌이 '기원'을 깨달아 '기적'을 부린다면 온전한 마녀로서 들킬 테지만, 아직은 아니다.
'...하는 짓은 마녀 뺨치지만.'
발람과의 전투를 잠시 떠올린 카인은 더더욱 눈앞에 있는 성직자와 올리시렌은 마주하게 하면 안 된다 판단했다.
"누구지?"
카인의 하대.
후웅-!
그 순간 기계화 팔라딘과 이단심판관들은 일제히 들고 있던 창을 카인에게 향했다.
"다들 젊어서 이러는 거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셀레드의 장남 카인. 나는 노초 바르베타, 불민하나 아이리안의 대주교입니다."
쿠웅-.
노인이 부드럽게 손을 올리자 다들 원래의 자세를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리안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심지어 중앙정계에서 힘 좀 쓴다는 루브릭 철도청장마저 바르베타 총교구장 앞에선 꼼짝 못 하고 있다.
카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은은한 압박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대장벽에 죄인들을 찾으러 쫓아 온 성국의 비밀특무성과 상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아이리안에서 몇 번 싸움을 겪었지만, 사람이 주는 섬뜩한 느낌은 세계선을 건너서는 처음이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카인 에셀레드입니다. 먼저 다짜고짜 심판부터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냥 묻죠. 죄목이 뭡니까?"
카인은 더욱 여유 있게 나갔다.
올리시렌이 마녀임을 들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게 생각해 뒀으나, 당장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인의 머리가 새로운 전략을 짜기 위해 치열하게 돌아갈 때, 바르베타 총교구장의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카인만을 바라보았다.
"마녀입니다."
"마녀라. 그럼 대상자는 누굽니까."
"당신입니다. 카인 에셀레드."
"...?"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올리시렌을 잡기 위해서 쫓아온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작은 실마리라도 얻어서 무작정 두드리러 온 건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자 의아했다.
'에드먼드가 성국의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했는데, 관련이 있는 건가.'
올리시렌의 왕실정보국에서 준 정보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성직자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성복을 함부로 입는 건 상당한 중죄기에 에드먼드의 성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테고 분명 성국의 배려로 받은 것이리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
상황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까지 진행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도 성국을 움직이는 것이.
"제가 알기로 이단심판은 성국이 바라는 답을 할 때까지 고문하는 겁니다."
카인의 한마디가 물결을 일으키고.
"대주교님!"
바르베타 총교구장의 양옆에 있단 팔라딘과 이단심판관들은 발끈했다.
그러나 바르베타는 못 들은 척 하얀 수염을 쓸면서 카인의 보랏빛 눈을 직시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요."
"대주교님?"
성질내던 자들이 그의 한마디에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카인 역시 예상치 못한 발언에 바르베타를 쳐다보았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특히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이교도나 마물이면 몰라도 마녀의 경우엔 파악하는 방법이 어려워서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럼 마음에 안 드는 자를 마구잡이로 잡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카인의 도발.
하지만 노회한 바르베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럴 순 있지요. 그러나 저희를 빛께서 늘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럼 급하게 왕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건 당신들의 '빛'께서 시키는 일이십니까?"
바르베타 대주교의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까지야 넘길 수 있지만, 저 말은 그들의 신앙의 대상인 '빛'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
정말 이단심판으로 넘어간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기에 카인은 더더욱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정체불명의 흉수에게 왕녀와 칠대귀족가의 일원이 테러당한 마당인데 말입니다."
옆에서 초조하게 듣고 있던 루브릭 청장의 안색이 하얗게 변한다.
카인의 어조가 올라감에 자기 목이 뎅-겅하고 썰리는 미래가 보였다.
그렇다고 끼어들 수도 없다.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도는 에셀레드의 카인과 바르베타 대주교의 담화에 감히 껴들 엄두조차 나지 않기 때문.
"루브릭 철도청장."
그때 카인이 그를 불렀다.
척-!
루브릭은 철도청에 막 들어온 신병처럼 각 잡고 바로 서서 대답했다.
"네!"
"테러범은 누군지 찾았습니까?"
"그게...."
카인은 루브릭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보았다. 게다가 떨리는 손과 흔들리는 눈빛.
'올리시렌의 말대로 시그마리를 묵인한 건 이놈이겠어.'
예상한 적과 예상치 못한 방해물이 생긴 상황에 카인은 둘을 동시에 치우기로 했다.
시그마리를 칼로 물리쳤다면, 이제는 혀의 시간이었다.
"승차인명부는?"
"...."
루브릭은 갑자기 자신에게 튄 불똥에 당황하면서도 아픈 부분만 팍팍 찌르는 카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보이는데 뭔지 잡히지 않기에, 카인의 말을 기다렸고.
"역과 철도에 한해서는 하이볼트 전하 다음의 권력을 지닌 게 당신이란 걸 압니다."
"예, 그렇습니다!"
물론 칠대귀족가가 입김을 불면 흔들리는 자리지만, 공식적으론 그랬다.
"그렇다면 왕국과 상관없는 총교구장이라는 자가 신원미상의 범인에게 테러당한 절 심판하겠다고 하는데, 두고 보실 겁니까?"
카인의 눈이 웃음 짓는다.
동시에 루브릭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덜덜 떨며 바르베타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그는 루브릭이 무슨 결정을 지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르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은 차기 에셀레드 백작이 확실시되는 미래의 소드마스터, 다른 쪽은 아이리안의 모든 신성 권력의 정점인 총교구장인 대주교.
차라리 아빠가 좋냐, 엄마가 좋냐는 질문이 그리워질 정도의 난제였다.
"청장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바르베타 대주교는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루브릭은 그가 순순히 한 발 빼는 것 같아서 내심 안도했지만.
"성국의 이단심판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찌 감히 대들겠습니까."
"...!"
이어지는 칼날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침묵이 이어진다.
팔라딘과 이단심판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철도원과 카인까지 모두 루브릭의 입만 바라본다.
게다가 희대의 테러 사건으로 메이누스 대환승역의 해당 플랫폼은 폐쇄한 만큼, 열차 소리도 거의 없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짓누른다.
루브릭의 얼굴은 시시각각 하얗게 변했다.
"루브릭 청장이 충성하는 건 아이리안 왕국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죠."
"루브릭 가문은 갓난아이까지 전부 세례를 받아 교적에 올라와 있지요. 참으로 신실한 가족입니다."
양측의 압박이 거세진다.
사이에 낀 루브릭은 이미 망한 인생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그만."
그때 들리는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
또각-, 또각-.
수십의 사람을 이끌고 한 여인이 걸어 들어온다.
새빨간 드레스에 손에는 검은 쥘부채를 쥐었다.
'가면?'
과거에 가면의 설원공이라 불릴 정도로 가면을 썼던 만큼, 카인의 눈에는 그녀의 눈동자까지 완전히 가린 가면이 먼저 보였다.
마법으로 가면 안에서도 밖이 잘 보이는 구조 같았다.
"총사령관으로서 이제 마르퀴스 벨트에 올라가려고 역에 왔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이네요."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보는 여인이지만 방금 말로서 누군지 알 수 있었고.
"올리비아 왕녀님을, 불민한 빛의 종이 뵙습니다."
꼿꼿했던 바르베타 대주교의 목이 잠깐이나마 숙여진다. 왕족이 아니라면 그가 숙일 자가 없기에 상대의 정체는 뻔했다.
'2왕녀 올리비아 룬 아이리안.'
그녀는 카인을 향해 호감 어린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대주교님은 자주 뵈었는데, 이쪽은 처음 만나네요.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인 걸 보니 카인 에셀레드겠고요."
올리시렌의 왕위를 위협하는 여인이자 맥로든 후작의 손녀, 로스 후작의 지지를 받는 자.
그리고 올리시렌의 동생인 '정열의 홍화' 올리비아였다.
서로의 친모가 다른 게 확실한지 체구나 기질의 차이가 컸다.
'적이다. 그러나 적인가?'
그녀는 카인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였다.
"바르베타 대주교님."
"예, 왕녀님."
"제가 듣기론 카인 공자를 이단심판에 올릴 생각이라는 것 같던데, 맞나요?"
우아하다.
동시에 정열적이다.
올리시렌이 어째서 '안개꽃'이라 불렸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올리비아는 빨간 장미와도 같은 여인이었다.
바르베타는 카인을 한 번 보고 말을 이으려고 했다.
탁-.
하지만 올리비아는 일부러 소리 나게 부채를 잡으며 바르베타의 말을 끊었다.
"말에는 어감이라는 게 있어요. '받아야 한다'와 '받으셔야겠다'는 참으로 차이가 크죠."
바르베타의 눈썹이 들썩인다.
지금 올리비아 왕녀가 바라는 걸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르베타에게 한 걸음 더 걸어갔다.
"차이가 있나요?"
"...예."
"그럼 꼭 이단심판을 해야겠다는 것처럼 제가 들은 건 잘못 들은 것이지요?"
대주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곤 눈앞의 2왕녀와 열차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1왕녀를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 참고인 조사를 위해 마중 나온 것이지 심판대에 올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카인 공자?"
"...."
카인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명백히 자신을 바르베타의 마수에서 구해 주는 꼴.
'내가 올리시렌 쪽인 건 잘 알 텐데 이 기회에 해치우지 않고, 나를 살려 준다라.'
성국을 등에 업을 수 있는 지금만큼 자신을 제거하기에 최고의 때는 없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걸 포기하면서 카인에게 친절히 말했다.
"언니와 함께 있다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테러당하셨다니,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카인은 그녀의 속셈을 헤아리고자 했고, 올리비아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사가 조금 길어질 듯해요."
그녀는 뒤를 눈짓했다. 그러자 왕실 기시단의 기사가 말했다.
"승차인명부를 보관하는 제3 문서고에 방금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루브릭 청장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라고 어찌 그 생각을 안 해 봤을까.
하지만 문서고는 철저하게 마법적인 보안이 걸려 있어서 그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루브릭 청장을 쥐고 흔들어도 당장은 나올 게 없답니다?"
촤악-.
다시금 부채를 펴며 귀부인이 웃듯 입가를 가렸다.
"그럼 문서고의 화재를 일으킨 자는 누구입니까."
카인은 되물었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자연발화일 수도 있고 엘프가 와서 테러를 한 걸 수도 있습니다. 아직 밝혀진 게 없어서 말이죠."
"밝히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제가요? 왜요?"
"...."
조사를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사해서 뭔가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로스 후작은 물론이고 같은 쪽인 올리비아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건 조사를 질질 끌어서 모두에게 잊히게 만드는 것.
카인은 올리비아에게 다른 의미로 왕의 자격이 있음을 알아챘다.
사람 좋은 올리시렌이 부리기엔 어려운 정치적인 술수이자, 자신이 한 번 구해 줄 테니 당신도 넘어가라는 담화를 하는 걸 보니 적어도 정치적으론 훌륭한 왕의 그릇이다.
"그러니 여기까지 둘 다 하시죠. 지금 열차 안에서 승객들이 얼마나 떨고 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요."
그리고 올리비아의 고개가 미묘하게 돌아간다.
카인이 내린 문을 슬쩍 보면서 자신의 가슴께에 부채를 얹었다.
"언니조차 내리지 못하고 창문으로 구경만 하고 계시니 정말 아파요."
자신에게 적인지는 의문이나, 올리비아가 올리시렌의 적인 건 확신할 수 있었다.
#81 EP.Ⅰ-21
봄의 증명 (3)
양측의 대결로 치닫던 상황이 올리비아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되었다.
게다가 올리시렌이 기차 안에만 있는 것과 달리 대조적으로 직접 나서서 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이미지도 쌓는다.
'어려운 적이야.'
카인은 내심 혀를 찼다.
그저 노회한 두 후작의 꼭두각시 왕녀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마주하니 만만치 않았다.
시그마리의 공격을 명분으로 로스 후작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것도 그녀가 한 발 먼저 움직여 막혔고.
아쉽긴 했다.
그래도 바르베타의 이단심판은 피한 만큼 카인이 물러서려 할 때.
"심판은 아니어도 같이 차나 한잔 마시면 좋겠습니다, 카인 공자."
바르베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다른 일행분들은 먼저 가셔도 되고, 공자님만 모실 수 있으면 됩니다.
무언가를 아는 건가.
나를 의심하는 건가.
생각보다도 집요한 바르베타 대주교에 카인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올리비아 역시 평소라면 순순히 물러날 대주교가 이렇게 나오자 놀랐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는.
"어쩌죠?"
덥석.
그대로 카인의 왼팔에 팔짱을 끼며 바르베타를 마주했다.
"사실 카인 공자님과 제가 먼저 선약이 있어요."
누가 들어도 거짓말임을 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거짓이라 손가락질할 수 없는 핑계였다.
"대주교님, 한 번만 봐주세요."
폭풍의 핵처럼 떠오른 왕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바르베타로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올리비아와 카인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감사해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하지만, 카인 공자님. 저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
바르베타는 카인을 향해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하고 뒤돌아 나갔다.
"알아들으셨어요, 카인 공자님?"
절레절레-.
올리비아의 물음에 카인은 그녀의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에드먼드 생환.
물론 당연히 거짓말.
카인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아먹었다.
바르베타 대주교의 걸음에 따라 시립하던 팔라딘과 이단심판관이 따라 나가고, 플랫폼이 한산해졌다.
"이걸로 빚진 거 퉁친 거로 해요."
올리비아는 떨어지며 상쾌하게 말했다.
카인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자, 올리비아는 부채로 위를 찔렀다.
"제가 에셀레드 백작가의 참전을 막았잖아요."
"그게 당신이 내린 선택입니까?"
카인은 조금 놀라며 반문했다.
당연히 두 후작이 총사령관 올리비아의 이름을 빌려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왜요? 놀랐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중하고 늘 진심으로 부딪치는 올리시렌과 전혀 다른 타입.
카인은 올리비아가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법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쵸! 엘프를 죽이는 데 진심인 아이리안에서 왕위 계승자가 엘프를 못 죽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국왕 하이볼트가 인정한 계승자, 올리시렌의 명분을 무너뜨리기엔 아주 적절한 선택.
대개라면 여기서 물러났겠지만, 카인 역시 전장은 물론이고 이권이 오가는 정치판에서도 구르고 굴렀기에.
"그럼 그 왕위를 노리는 사람이 엘프와 손을 잡은 건 괜찮습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주 찔렀다.
"...호오."
올리비아는 부채를 펼치고 가면 위, 입가를 가리며 묘한 소리를 냈다.
다만, 그녀를 따라왔던 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뿐이었다.
휙-.
올리비아는 그 기색을 느낀 건지 뱅그르르 돌아선 말했다.
"혹시 나 대신 화내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서지 마요. 아까 대주교 뒤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얼마나 추해요."
그러곤 고개를 돌려 카인을 흘겨보았다.
"제법이시네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숨기는 것도 제법이고. 아주 마음에 들어요."
"...."
"그거 알아요? 우리 둘이 동갑이라는 거?"
카인은 두 눈을 끔뻑였다.
세계선을 건너고는 나이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생각해 보고서야 그렇다는 걸 인지했다.
올리비아는 부채로 자기 정수리와 한참 위에 있는 카인의 머리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런데 크기만 보면 훨씬 더 어른이네요."
"칼질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봅니다."
"흐흠. 뭔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카인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지금 카인의 육체는 성장기와 함께 겨울의 뇌전이 온몸을 헤집으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마검, '겨울'을 얻은 게 저번 생에선 20대 중반.
이번엔 10대 후반.
신기가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했다. 아마도 로드이스트일 때보다 더욱 단단하게 자랄 터.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말해 드리는 건데, '저'는 엘프와 손을 잡지 않았어요."
아마도 가면 아래 눈은 가늘게 웃고 있으리라. 교활하지만 사악하지 않은 소악마의 웃음처럼.
"만약에라도 엘프의 손을 잡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라질 뿐이겠죠."
즉, 맥로든 후작과 자신은 깨끗하고 문제가 생긴다면 로스 후작에게 뒤집어씌운다는 말.
"어때요?"
"뭐가 말씀입니까."
"언니는 버리고 저한테 갈아타는 거요."
"...."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요."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그러십니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얀 두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이걸 주죠."
그리고 손을 모은다.
개울물을 떠 마시려는 듯 곱게 모은 두 손을 카인에게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준다는 상황에 카인이 묵묵히 내려다보았고, 올리비아는 카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때요?"
"뭘 주신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요."
"...."
"당신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걸 걸 수 있어요."
"제 가치를 높게 보시는군요."
"그럼요."
올리비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카인을 응시했다.
완전한 가면을 쓰고 있기에 그녀의 눈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초롱초롱하리라.
"일단 강해요. 그리고 영리하고, 에셀레드 백작가의 장남이고, 어른스럽고, 뻔뻔하죠. 그뿐일까요? 사악하고, 못되면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이복동생을 끼고돌 정도로 유약하기도 하죠."
"중간부터는 욕 같습니다만."
"그래서 좋은 거예요.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완벽한 주인공 같으면서도 누구보다 사람다운 게 당신이니까요."
카인은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는-, 아니 미쳤다는 걸.
"올리비아 왕녀님."
하지만 카인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미치지 않고서는 일분일초도 살 수 없었던 지옥이었고.
"전 올리시렌이 왕이 되는 걸 원합니다."
올리비아의 광기 따위는 닿지 못할 정도로 아득하리만큼 먼 곳에 있는 게 카인이었다.
"언니가 왕이라."
자신의 페이스에 카인이 휘말리지 않자 올리비아는 가면을 붙잡고.
스윽-.
그대로 옆으로 치웠다.
풍성한 회색의 머리부터 올리시렌과 확실히 비슷하지만, 어딘가 조금 더 선이 가는 얼굴이 드러난다.
그녀는 가면을 코끝까지만 내렸다.
올리비아의 황금빛 눈이 깜빡이며 카인의 보라색 눈을 쫓았다.
"재미있네요. 그렇게 하면 저는 당신을 가질 수 있나요?"
"왜 그렇게 제게 집착하는 겁니까."
올리비아가 웃는다.
언뜻 보면 누구보다 맑고 순수해 보이는 미소.
하지만 카인은 그녀의 눈이 웃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말라 죽었어야 할 언니가 당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렇게 커졌는데, 당연히 욕심나요."
"그것뿐만은 아닐 겁니다."
"어머, 절 얼마나 만났다고 재단하시죠?"
"뭔가 더 있을 것 같으니까요."
카인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의뭉스러운 말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왕녀와 전사.
올리비아와 카인 에셀레드.
무수한 말이 오갔지만, 이 순간에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올리비아는 가면을 완전히 내렸다. 그리고 주홍색 튤립을 갈아 바른 듯한 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언니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그래서 저도 뺏어가겠다?"
척.
올리비아는 날카로운 미소를 짓곤 다시 가면을 썼다.
"물론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것도 있죠. 잘 생각해 봐요. 할아버님도 은근히 당신과의 혼약을 긍정적으로 고려하시던데."
휘익-.
바람처럼 나타난 그녀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금 또각-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아차."
올리비아는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손에서 놓지 않던 부채를 들어 열차의 깨진 창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 속에는 이 상황을 지켜보던 굳은 얼굴의 올리시렌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에는 제대로 마주하면 좋겠네요, 올리시렌 언니.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세상인데 죽기 전에 자매끼리 밥 한번 먹어야죠."
"...."
올리시렌은 아무 말 없었다.
잠시 그녀를 흘겨보던 올리비아는 몸을 휙 돌리며, 카인의 귓가에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돌아갔다.
"재미없어."
문서고가 타 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얼굴이 밝아진 루브릭 청장도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갔다.
"너희들은 남아서 승객들의 하차를 돕고!"
그럴 리는 없지만 다른 객차의 승객이 테러범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으니 수사를 위해 모두 기차에 잡아 두고 있었다.
카인의 대화를 들을 정도로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창문을 통해 누가 왔었고 물러났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
숙련된 철도원들의 안내에도 승객들은 잔뜩 겁먹은 채로 움직였다.
특히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 있는 카인의 눈치를 보며 내렸다.
"왕녀님은 모두가 내리고 내리시기로 했습니다."
카인의 객차에 있던 밴더빌트가 먼저 내려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지금 내리면 왕족에게 인사를 해야 하니 혼란이 가중될 터.
올리시렌다운 배려였다.
"밴더빌트."
"예스, 마이 로드."
"혹시 내게 혼약자 같은 건 없었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노기사는 카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 못해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제안이 안 들어온 건 아니나 에드먼드 백작님이 관심이 없으셔서...."
와르르르르-.
별일 없다는 걸 알자 승객들이 내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에 따라 발소리가 요란해진다.
게다가 막아두었던 근처 플랫폼까지 풀면서 열차가 들어오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카인은 그 도시의 소음 속에서 올리비아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벨은 시켜야겠지?"
"예...?"
"가능한 저런 미친 여자만 아니면 좋겠군."
다음을 기약하진 않았지만, 북방원정의 총사령관이니 분명 숲에서 다시 만날 터.
카인은 내심 올리비아에게 학을 뗐다.
그 사이 승객들이 다 내리고 마지막으로 올리시렌이 내려왔다.
그녀는 땅만 보고 걸었다.
"뭘 그렇게 숙이고 있어."
"너 혼자에게 다 맡기고 있어야 했으니까. 걔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고."
"올리시렌."
"응."
"할 말이 없으면 칼로 찌르면 돼."
이소엘과 밴더빌트가 눈을 부릅뜨며 카인을 돌아보았다. 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상대도 너를 죽이려는데, 너도 가능한 물어뜯어."
"난 아무것도 없는걸. 대주교 앞에 나설 수도 없고...."
"시간이 있다."
"...?"
"이소엘과 함께한 시간. 나와 함께한 시간. 우리가 같이 싸운 시간.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나?"
"...!"
"누군가 너를 때릴 거 같다면 미리 때려라. 잘 모르겠으면 일단 때리고 보는 게 맞다."
올리시렌이 왕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카인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봐 왔던 올리시렌은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인은 자신의 방법을 말했다.
"그게 밑바닥을 사는 사람의 방식이야."
"마치 그렇게 살아 본 것처럼 말하네."
질리도록 살았기에 카인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생각이 정리된 올리시렌은 카인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와 똑같은 회색 머리였지만, 눈동자는 그녀와 다른 회색이다.
"대주교님에게 갔다 와."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영감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어. 마지막에 남긴 것도 네가 어떻게든 오게 만든 거지?"
"...."
"우린 먼저 가 있을게. 어차피 난 내 집에 잠시 가는 거인 걸."
카인은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따라가지."
#82 EP.Ⅰ-21
봄의 증명 (4)
밤의 검은 하늘이 어느새 조금씩 밀려나면서 군청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시간.
아이리안의 모든 열차가 몰리는 메이누스답게 새벽이 다가오는 심야에도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가게가 많았다.
솨아아아아아-.
아니 많았었다.
비가 오는 깊은 밤.
하지만 점차 그 불빛도 꺼진다.
대장벽은 끊이지 않는 눈이 내리는 설원이기에 카인은 비엔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는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거야.
올리시렌이 왕도로 떠나는 열차에 바로 몸을 실으며 남긴 말.
때론 헤어지고서야 아는 것도 있다. 어둠에 사로잡힌 메이누스의 밤거리를 홀로 걷던 카인은 저 멀리 보이는 대환승역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혼자 다니게 된 건 처음인 것 같군.'
이 세계선에 온 후로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함께했었다.
밴더빌트, 아벨, 올리시렌....
혼자가 익숙했던 카인이지만, 이젠 혼자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아는 이 하나도 없는 어둠의 도시를 걸으며 카인은 과거의 자신을 되찾아 가는 기분이었다.
저벅-.
그렇게 한참이고 걸어서.
메이누스 한복판에 자리한 성국의 거대한 성당 앞에 도착했다.
도심의 불이 꺼지는 것과 달리 성당은 요새처럼 불이 켜져 있었다.
카인은 검은 우산을 살짝 들어 성당 입구를 지키던 두 명의 사제에게 얼굴을 보였다.
"...!"
몰려오는 밤으로부터 성당을 지키듯 묵묵하게 서 있던 둘의 눈동자가 커진다.
카인은 입을 열었다.
"언제나 문이 열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올리시렌과 함께 왕도 린드브룸으로 올라가지 않고 와야 할 만큼 바르베타가 지닌 정보는 중요했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드시지요."
그들에게도 역시 '카인 에셀레드'는 여러 의미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카인은 용족의 마수가 입을 벌린 것처럼 거대한 정문을 올려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예?"
"들어가서 무슨 짓을 당할지 알고 순순히 들어갑니까."
카인의 냉정한 말.
아이리안 전역의 신성과 숭배를 한 곳에 모으면 이곳이라.
카인의 말을 그들의 '빛'에 대한 모독이라 느낀 두 사제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들은 감정을 누르고 잠시 서로를 마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편의 사람이 정문 옆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솨아아아아아-.
비가 한층 더 굵어지고 카인이 쓴 검은 우산을 꿰뚫듯 내리기 시작할 때.
기기기기긱-.
거대한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부턴 밤조차 낮으로 바꿔 버릴 만한 빛이 터져 나왔다.
카인이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익숙한 모습의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희가 그렇게 경우 없는 곳은 아닙니다."
노초 바르베타 아이리안 총교구장.
카인에게 이단심판을 언급하며 결국 그를 불러낸 노회한 고위 사제였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다르게 가벼운 걸음으로 문에서부터 땅으로 향하는 13계단을 내려왔다.
"그렇다곤 들었습니다."
카인의 짧은 말에 '실제론 어떤진 모르겠지만요.'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바르베타 대주교는 바로 알아먹었다.
"안으로 들어오기 불편하다 하시니 그럼 밖으로 가시죠."
저벅.
그리고 내려온 카인과 똑같은 땅.
노인과 청년.
둘은 잠시 마주하다가, 바르베타 추기경이 가리킨 바로 앞 3층짜리 작은 건물로 향했다.
심야답게 불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1층은 카페 겸 빵집으로 사용되는지 은은한 빵 굽는 냄새와 차향이 맡아졌다.
드륵-.
바르베타 대주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 옆에 놓인 화분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꺼낸 작은 열쇠를 들어 문을 열었다.
심야답게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탁-!
하지만 그가 손을 한 번 흔들자 간간이 박혀 있는 마법등과 촛불이 한꺼번에 불을 밝혔다.
"이 불민한 노구가 멀리 가진 못하여 바로 앞의 카페로 왔는데 어떻습니까."
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국 측에서 꼭두각시로 사용한다고 하기엔 사용감이 꽤 있었고, 그렇다고 진짜 카페라기엔 바르베타의 행동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스윽.
그는 손가락으로 가운데 빈자리를 가리켰다.
카인은 신발에 묻은 빗물을 입구 근처에 털고 들어갔다.
"저는 대주교님을 못 믿습니다."
카인의 말에 간단한 음료를 만들 수 있는 카운터로 가던 바르베타는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카인을 곁눈으로 보며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바르베타 님이나 '어이, 노초!'라 부르십시오."
"...."
대환승역에서 봤던 바르베타 대주교는 제 소신이 꿋꿋하면서도 휘어질 땐 휘어질 줄 아는 사제였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그의 모습은 집 앞에서 카페 하는 성격 좋은 동네 할아버지에 가깝다.
그 간극에 카인이 입을 열지 않자 바르베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호칭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이 저를 대주교라 부르면 저는 대주교여야 하며, 바르베타라고 부르면 바르베타가 되는 거죠."
"...그래도 어이, 노초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달그락-.
그는 주름진 깡마른 손을 뻗어 차를 우릴 수 있는 도구를 차곡차곡 정리해 쟁반에 담았다.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카인의 테이블에 가져와 하나씩 차리기 시작했다.
카인은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를 도왔다.
바르베타는 그때만 기다렸다는 듯 맞은편에 앉은 후 카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카인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씨익 웃었다.
"노인네가 힘에 부쳐서 도와달라는 건데 싫은 겁니까?"
"역에서 뵌 사람과 너무 달라서 한 번 봤습니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카인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순식간에 다 정리가 되었고, 바르베타는 익숙하게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곳엔 저를 '대주교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죠."
"그래서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겁니까."
카인은 바르베타를 응시했다.
자신은 그를 믿지 못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베타는 그를 믿는 듯 이 근처엔 쥐새끼 한 마리 없었다.
'팔라딘 하나쯤은 동행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막말로 카인이 마음먹고 칼을 뽑아도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바르베타는 카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있다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니까요. 대주교로서의 말만 해야 하고."
"제가 이대로 바르베타 님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탁-.
그는 주전자 속에 재료들과 맑은 물을 다 넣곤, 소리 나게 뚜껑을 덮었다.
안이 보이지 않는 백색 주전자를 가리켰다.
"이 안의 차가 어떻게 우려지는지 아나요?"
"찻잎에서 뭔가 나와서 맹물을 찻물로 바꾸겠죠."
"그걸 우린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보지 못한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있죠. 카인 에셀레드. 저도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르베타는 검지를 들어 카인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저를 대주교가 아니라 바르베타라고 부르는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걸 이 주전자 속과 같이 아는 것뿐입니다."
카인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건방지고 고압적인 사람이라면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베타처럼 능글맞은 자는 대하기 어려웠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후우우우우우-.
열을 받은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르베타는 급하게 불을 끄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카인 에셀레드, 이단심판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역에서 했던 말과 같은 대사.
하지만 어감이 달랐다.
역에선 당신에게 혐의가 있으니 조사를 해 봐야겠다는 의미라면,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해야 한다는 느낌.
주전자를 뜸 들이듯 기다리던 바르베타는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한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밀고가 들어왔습니다."
"밀고라."
"당신이 '돌아보지 않는 숲'의 글루미엠에게 마녀의 축복을 받아서 강해졌다고 하더군요."
"...!"
카인의 눈이 커진다.
단숨에 저 밀고가 어떤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카인의 반응에 바르베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무도한 자들입니다. 성국이 자기네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쓰는 칼도 아니고 제 잇속을 위해 저희를 써먹다니."
"정치공세인 걸 아시면서 왜 하시려는 겁니까."
탁-.
뜸 들이기가 끝난 모양.
바르베타는 주전자를 들었다.
카인의 잔에 먼저 졸졸- 붉은 찻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성녀께서 당신의 종말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언급되자, 카인은 놀라 반문했다.
"카테리나 피오렐리?"
이번에 놀란 건 바르베타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성녀님의 풀네임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이번 대 성녀님이 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구에서도 모르는 사제가 태반인데."
카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기 싫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용사 아벨과 함께 다니는 성녀 카테리나의 무용담은 동쪽 끝의 대장벽에까지 시끄럽게 울렸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엔 성녀가 공개가 안 된 모양이군.'
생각지도 못했던 실책에 카인은 앞으론 이런 상황도 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답했다.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녀는 저를 왜 죽이려는 겁니까."
다행히 바르베타는 더 깊이 따지고 들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당신이 마왕이라고 하시더군요."
"...예?"
"마왕과 용사가 형제로 태어났으니 마왕이 더 자라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게 성녀님의 뜻입니다."
"...."
카인은 찻잔을 들어 뜨거운 찻잎을 들이켰다.
대주교가 끓인 차답지 않게 상당히 싸구려 맛이었지만, 뜨끈한 것이 속을 풀어 주는 기분은 좋았다.
바르베타 역시 찻잔을 들었다.
"헤네랄리페에서 단숨에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진심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더군요."
그 순간 카인은 성국의 수도 헤네랄리페를 떠올렸다.
잊을 수 없었다.
비도 눈도 아닌 꽃이 내리던 날.
제 손으로 용사 아벨을 죽이던 그날의 장소.
에셀레드의 하얀 절벽에서 마주한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여정을 되짚던 카인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바르베타를 바라보았다.
"에드먼드 백작님을 구한 건 성녀입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에드먼드 백작님입니까?"
"...."
정곡을 찔린 카인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바르베타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이리안에 오시는 길에 에이레에서 구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이제야 그림이 그려진다.
카인이 모르던 곳에서 움직이던 것은 성녀며, 성녀가 에드먼드를 구한 것이며, 본래 죽었어야 할 그가 다시금 이 땅을 활보한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이야기에 카인은 찻물 속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왜 성녀가 움직인 것인가.
용사 아벨 때야, 마왕이 본격적으로 발호하면서 인류세계를 위협하니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본래 헤네랄리페의 성황청에서 나올 일 없던 그녀가 굳이 밖으로 나온 것 무엇인가.
아벨이 용사고 자신을 마왕이라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빛께서 성류관, '가을'을 통해 계시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바르베타가 순순히 알려 주었다.
세계선을 건너게 해 준 『사계』는 <사계절의 신기> 네 개가 합쳐진 기적이다.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겠지만.'
그런 『사계』를 구성하는 신기 중 '가을'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성녀의 것.
그렇다면 자신처럼 이전 세계선의 기억을 갖고 있어도 말이 된다.
'정확히는 신기를 통해 바라보는 거겠지.'
죽고 살아난 자신이 세계선을 건넜다면, 그녀는 아마도 세계선의 '관측자'이리라.
이제야 자신을 왜 마왕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짠.
바르베타는 심각한 얼굴색의 카인의 얼굴이 비치는 찻잔에 자신의 찻잔을 들이밀었다.
순간 찻물이 일렁이면서 카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뭔가 짚이시는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마왕."
"마왕 아닙니다."
"성녀께서 틀리셨다는 말이군요?"
성국의 지도자가 성황이라면 성녀는 그들의 신앙을 대리하는 자.
대주교 앞에서 그녀가 틀렸다 지적하는 건 싸우자는 소리였다.
"틀렸습니다."
그리고 카인은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요?"
바르베타는 예상했다는 듯 능숙하게 넘기며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럼 그대의 어머니인 클로에가 마녀라는 것도 틀린 겁니까?"
"...!"
#83 EP.Ⅰ-21
봄의 증명 (5)
카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르베타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아는 것인가.'
대장벽 안쪽, 인류 세계.
다양한 국가들이 존재하지만 크게 제국과 성국, 도시연합이 삼대 축을 이루고 있다.
그중 성국의 위치는 특별했다.
그 힘이 제국엔 미치지 못하나, 신성력의 존재가 '신'을 증명하는 만큼 '신'을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존재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외딴 아이리안만 해도 왕국민의 절반이 성국의 신앙을 따르고 있는 수준.
다만, 성국도 지닌 힘에 비해 어수룩한 행동으로 역사에 수많은 실패와 과오를 저지르며, 이젠 현실 정치와 가능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이 아이리안의 정치에 간섭하고자 한다면 바르베타 대주교가 선봉장이겠지.'
후릅-.
조금 차가워진 찻물을 들이켜곤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또 누가 밀고한 겁니까. 정치공세에 마녀가 참 많이 쓰이는군요."
친모 클로에에게 마녀라는 증거가 있다면 진즉, 이단심판관이 왔을 거다.
증거가 없다면 굳이 그렇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카인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바르베타는 카인의 동작을 따라 차를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마녀는 스스로가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 찾기 어려워서 자주 이용되곤 합니다. 이 세상에 약속된 마녀는 아흔아홉인데 마녀신고만 일 년에 수천 건에 달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렇다는 건 저에 대한 신고도, 어머니에 대한 신고도 의미 없는 신고겠군요."
카인이 물을 타려고 하자 바르베타는 높은 곳에 뚫려 있는 원형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마녀심판을 함부로 할 수 없는바. 허위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신고 후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군지 추적하는 겁니다."
초기의 성국이 힘만 있고 정보는 없는 채로 거하게 저지른 실수들은 역사에 상처로 남아 있다.
그 후 성국은 지속해서 정보에 힘을 쏟아서, 이젠 밀고자의 대부분은 바로 추적할 정도로 정보력이 강해졌다.
"예를 들어 카인 공자님에 대한 신고는 로스 후작 쪽에서부터 일곱 단계를 거쳐서 메이누스의 사서가 했죠."
바르베타는 주름진 눈으로 살짝 윙크하곤 말을 마무리했다.
로스 후작이 펼치는 계책을 미리 알려 준 걸 보면 그들의 손에 놀아나야 한다는 게 꽤 마음에 안 든 모양.
"하지만 말입니다, 그대의 어머니에 대한 신고는 달랐습니다."
"밀고자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까?"
바르베타는 잠시 고개를 숙여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로스 후작을 말할 때와 달리 몇 번이고 고민하는 기색.
막 끓인 차향이 실내에 일렁인다.
솨아아아아-.
하지만 나무로 막아둔 창밖에서 더욱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잡아먹히는 건 금방이었고, 이내 바르베타가 고개를 들어 카인의 보랏빛 눈과 마주했다.
"예."
"그래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말든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해라면 손해일 사람이었습니다."
카인은 머리에 번뜩하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친모 클로에의 가문이었던 라마이닝의 사람들. 특히 로스에서 받아 온 엘븐나이트의 뒤에 숨어 으스대던 영감.
"바이스 라마이닝 전대 백작?"
절레절레-.
바르베타는 고개를 젓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그분이 밀고했다면 편했을 겁니다. 부모나 자식이 마녀가 되었을 때 서로 신고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카인 역시 잘 알았다.
지금의 자신이 주로 귀족들을 만나서 대부분 편한 가정만 보는 것뿐, 불행한 모습의 가정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것을.
바르베타에게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카인은 그의 의도를 찔렀다.
"처음부터 말해 주시려고 부른 거 같은데 돌리지 말고 말씀하시죠."
"하이볼트 룬 아이리안."
"...!"
"그때도, 지금도 이 아이리안의 왕이죠."
카인의 눈이 순간 부릅떠진다.
바르베타가 곧장 말한 이름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이름이었으니까.
카인은 반사적으로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왕도, 린드브룸.
올리시렌이 하이볼트와 담판을 하겠다고 떠난 곳.
선대의 역사가 꼬이고 꼬인 이상 그녀가 호언장담한 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게 확실했다.
* * *
"아비로는 만날 수 있으나, 국왕으로선 접견을 거부한다?"
린드브룸의 왕성, 백은의 궁.
하얀 꽃이 궁을 감싸고, 군데군데 안개꽃으로 수놓아진 순백의 궁의 주인은 올리시렌이었다.
그녀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반문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중년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시케르 경."
"예스, 유어 그레이스."
왕궁기사단장, 웨인 시케르.
에드먼드 백작이 사라진 이상, 아이리안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그는 거목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세를 품고 있었고.
백은의 궁을 감싸는 꽃향기마저 그에게 닿는다면 싸늘한 철의 냄새로 바뀔 기사였다.
대검을 휘두르는 밴더빌트의 덩치는 에셀레드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컸다. 그에게 흠이라면 이미 너무 늙어 버렸다는 것.
반면 웨인 시케르는 흠이 없는 밴더빌트와 같았다.
"전 이 나라의 1왕녀예요. 그런데 국왕 전하를 마음대로 못 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올리시렌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전하께서 명령하셨고, 저는 그걸 따를 뿐입니다."
올리시렌도 하이볼트 국왕의 뜻을 대충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궁정 관료가 아니라 가장 말이 안 통하는 웨인 시케르 기사단장을 보냈다는 건, 이야기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툭-.
이런 상황까지 예상했기에.
"여기 마탑주의 보증입니다. 공식적으로 요청하죠."
왕국법에 따르면 마탑주, 대주교, 왕실기사단장 셋 중 하나의 보증만 가져와도 국왕과 마주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정식 절차를 따라서 접견을 요구했지만.
스윽-.
웨인 시케르는 마탑주의 반지를 확인하곤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왜죠? 국법에-."
"왕녀님에게 내려진 유폐를 푸는 것으로 마탑주의 보증이 방금 제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유폐?"
올리시렌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예. 전하께서 왕녀님께 무기한 유폐를 내리셨었습니다."
"이유는요?"
"70년 전 마무리된 아이리안 대전쟁을 이번에 칠대귀족가 간 영지전을 허가하시면서 일으킬 뻔했기 때문입니다."
"암묵적으로 허가하신 사항입니다."
"저는 명시적으로 명령받았습니다."
올리시렌의 회색 눈과 웨인 시케르의 투명한 푸른 눈이 마주한다.
분명한 건 양측 다 절대 흔들림이 없다는 것.
"유폐를 받았다면 진즉, 절 잡아갔어야 할 텐데요?"
"국왕 전하께선 딸이라 차마 그렇게까진 안 하신 겁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군요."
올리시렌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이볼트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할진 몰랐다.
카인의 말대로 그래도 친딸이고 본인이 손수 임명한 왕위 계승자니,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 상황.
올리시렌은 서늘한 눈빛으로 웨인 시케르를 응시했다.
"그럼 대주교의 보증을 가져오면 됩니까?"
"그럼 아마 가져오는 사람의 죄를 사해 주실 겁니다."
"...카인 에셀레드에게 죄가 있다?"
"예. 전하께서 그렇게 판단하시면 있는 겁니다."
올리시렌의 뒤에 있던 이소엘과 밴더빌트의 압박이 쏟아졌지만, 웨인 시케르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셋을 쓱 훑어보았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
"아버지를 뵈려면 결국 당신의 보증이 필요한 거군요."
"예."
"그대의 보증을 받으려면?"
"이전에 에드먼드 백작이 했던 것과 같습니다."
탁-.
그는 왼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을 소리 나게 치곤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꽈악-.
올리시렌은 주먹을 쥐었다.
하이볼트가 철저하게 그녀와 일행을 피하는 이상, 대주교의 보증을 가져와서 왕실기사단장을 칼로 이길 사람은 한 명뿐.
그녀는 남서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왠지 카인의 보랏빛 눈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카인이 있어야만 풀릴 수 있다는 절망이 잠시 스쳤다.
* * *
"그때 전 막 총교구장에 임명되어 아이리안에 왔을 때인데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타국의 정치에 발을 걸치게 되는 것이며, 소극적이라면 글루미엠의 경우처럼 마녀의 성장을 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할 터.
"한 나라의 국왕이 백작의 아내를 마녀라고 밀고했다라."
바르베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피부에 가득한 상처와 주름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만드는 웃음엔 깊이가 있었다.
"이 불민하고 불경한 자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어 몇 날 며칠을 고민했었지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르베타는 에셀레드에 은밀히 의견을 전하고, 조사하러 간다고 하자마자 에드먼드가 클로에의 사망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저 가만히 있으니 해결되었습니다."
스윽-.
바르베타는 검지를 들어 카인을 가리켰다.
"마녀의 아들로 의심되며 마녀의 축복을 받을 자, 카인 에셀레드."
무엇 하나 확인되지 않았지만, 모든 게 진실인 명제였다.
당장 카인이 들고 있는 아그웨스카부터 마녀가 자신의 기원을 서려 만든 검이며, 올리시렌의 축복이 그를 살렸고, 클로에가 카인을 현생에 만들어 냈으니까.
"굉장한 모욕이군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웃음기가 묻어 있는 바르베타의 물음에 카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불민한 자가 고언을 청합니다."
카인의 눈이 어른어른한 마법 등 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이 열렸다.
"대주교쯤 되는 양반이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까. 무슨 목적일까. 성녀가 날 잡아 죽이고 싶어 한다는데 왜 날 도와주는 것일까."
"모든 것이 물음이로군요."
"모든 것이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의문으로 가득 찬 세계를 물음으로 살아간다라, 마음에 듭니다."
바르베타는 그런 카인이 마음에 드는 지 몇 번이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간, 팔을 벌렸다.
"제가 아이리안의 총교구장이 되기 전에 뭘 했는지 맞혀보시지요."
카인은 그를 쓱 훑어보고 코끝을 툭툭 쳤다.
"제가 피 냄새 하나는 잘 맡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겐 처음부터 옅은 냄새가 나더군요."
"오호."
"그럼 피 냄새가 나는 사제라면 뭐가 있겠습니까. 이단심판관이겠지요. 기계화 팔라딘이라면 기름 쩐내도 같이 날 테니."
바르베타는 자신을 가리키며 수긍했다.
"맞습니다."
휘익.
그러곤 그가 자기 손으로 무수히 집행했던 당시를 생동감 있게 손짓으로 표현했다.
"마녀의 심장에 말뚝을 박고, 마녀가 낳은 아이들의 목을 비틀고, 마녀에게 홀린 남자의 사지를 뽑았었죠."
"...."
그의 말이 진행될수록 피 냄새가 짙어진다.
마녀나 사람이나 똑같이 붉은 피를 흘리고 똑같은 피비린내가 나는 생명이기에.
"그것뿐이겠습니까. 마녀가 머무르던 곳에 그녀와 접촉했던 모두를 죽였죠. 늙든 젊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
밀이 익으면 수확하고, 밀알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빵을 굽는다는 걸 말하는 것과 바르베타의 말의 차이를 알 수 없다.
사람으로서 금기시되는 걸 신의 이름으로 당연하게 했다는 그 광신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르베타는 그걸 보고 카인에게 물었다.
"마녀심판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예."
그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저런 말엔 긍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런 말을 하면 바르베타가 불같이 화낼 거라 생각했지만.
"저도 마음에 안 듭니다."
예상이 어긋났다.
#84 EP.Ⅰ-21
봄의 증명 (6)
지금까지 바르베타 대주교의 말은 수없이 보였던 연기처럼 매끄러웠다.
"'빛'께선 죄를 심판하시어 천당과 지옥을 나누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속죄의 기회도 주시는 분이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어지는 말은 처음 뱉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왜 마녀에겐 그런 기회조차 없는 겁니까."
카인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짊어지고 있는 피의 물음이며 고해성사였으니까.
"마녀는 죽여야 할 이단이라고 친다면 그 주위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 죽여야 하는 겁니까. 저는 그 답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후웅-.
바르베타는 팔을 들었다.
그의 손바닥 위로 찬란한 백색의 광원이 나타났다.
마법사들이 펼치는 '라이트'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성직자가 제 성력을 현실에 구체화시킨 신성한 빛이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였어도 이 불민한 자에게서 은총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죠."
성력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성력이 깃들어 있다는 건, 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악마나 마물 같은 이단을 따르면 성력은 곧장 사라집니다. 하지만 마녀에게만 그대로라는 건 '빛'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카인은 성녀가 있을 북쪽을 가리켰다.
"그 성녀께선 뭐라고 하십니까."
"행동하십니다. 주로 잘 찾고 잘 죽이시지요."
"그렇다면 그녀의 말이 맞지 않겠습니까. 신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게 성녀니까."
카인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지만, 바르베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주위에 성국의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큰일 날 소리를 태연하게 입에 담았다.
"성녀께선 너무 인간적이십니다."
"인간적이라?"
"당신을 말할 땐 늘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노를 보이시더군요."
그럴 만했다.
카인이 용사 아벨을 죽이는 이유도 모르는 채로 눈앞에서 죽는 걸 봤어야만 했으니까.
신기를 통해 어디까지 이전 세계선을 봤는지는 모르나, 저 부분을 봤다면 조금만 봤어도 충분히 그러리라.
바르베타가 지적하는 부분은 그 부분이었다.
"성녀께서 신과 가장 가까운 이유는 <사계절의 신기> 중 성류관, '가을'의 선택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겨울'의 주인으로서 모르는 사실은 아니나 아이리안의 평범한 귀족이라면 모를 이야기.
카인은 잘 모르는 척 경청했다.
알 사람은 안다지만, 세계의 비밀에 가까운 걸 바르베타가 말해 주는 건 상당히 긍정적인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을'은 성녀께 세계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
아무리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다시 들으면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성녀는 운명의 관측자다.'
성류관, '가을'의 주인이 관측자라면.
성검, '여름'의 주인은 모두의 앞으로 나서 싸우는 용사였다.
'그리고 마검 겨울은 인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였고.'
그렇다면 그 모든 계절이 하나가 된 『사계』는 무엇인가.
카인은 자신에게만 보이던 퀘스트 창의 제목이 '멸망의 대적자'라는 걸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번 사는 세상에선 이미 알던 것조차 잘 모르던 거였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까.
바르베타는 말을 이었다.
"성녀는 성류관이 보여 주는 운명을 보고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서 설명하는 역할을 하죠."
"인간적이면 안 되겠군요."
그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쉬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간이 어찌 인간이지 않겠냐마는 성녀는 인간이면 안 됩니다. 제가 보았던 전대의 성녀님만 해도 철저하게 관측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감정은 인간의 것이다.
세계의 운명을 엿보고 말해야 할 인간에게 감정이 있다면, 그 운명을 제 감정대로 섞어서 볼 터.
바르베타가 이번 대 성녀를 불신하는 이유였다.
"저를 부른 건 이것 때문이군요."
자신에게 여러 정보를 준 것.
마녀에 대한 진심을 말한 것.
그리고 빛에 대한 신앙과 동시에 성녀에 대한 의심.
카인은 이제야 바르베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성녀께 에드먼드에 대한 의심 사항을 말할 때 당신에 관해서도 같이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보인 표정이 또렷합니다."
바르베타는 머리를 톡톡 쳤다.
그녀가 보인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에 바르베타는 오늘을 계획했을 터.
"당신이 마왕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녀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빛'께서 내리신 성력만 믿고자 합니다."
화아아아아-.
바르베타의 손에서 피어난 순백의 성력이 카인에게 전해진다.
카인의 몸에 닿자 더욱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호를 그었다.
성력을 처음 본 건 아니다.
그러나 카인은 바르베타의 하얀 성력이 닿는 순간, 너무도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겨울의 뇌전?'
순백의 뇌전과 순백의 성력.
무언가 관계가 있으리라.
하지만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라 카인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게 마녀심판입니까?"
그러자 바르베타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부르자면 부를 순 있으나, 평범한 사람 중에서도 성력에 반응하지 않는 자도 많아서 좀 다릅니다."
카인은 바르베타의 눈빛에서 보이는 광신과 맹목에 조금 서늘함을 느끼며 이어 물었다.
"만약 제가 그런 평범한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못했다면...."
"빛께서 당신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 뱉는 말 속에서 카인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깨어 있는 성직자라기보다는 철저한 광신도군.'
성녀를 의심하는 것도 그녀의 자격에 대한 의문일 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광신이라 다행이지, 반대였다면 사사건건 바르베타 대주교의 반대와 박해를 받았을 미래가 훤했다.
툭-.
바르베타는 품에서 날개가 달린 패를 하나 꺼냈다.
"대주교의 보증패입니다. 쓸모가 꽤 있으실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성녀와 다른 길을 가신다는 건 꽤 부담이실 텐데."
바르베타가 성녀를 불신한들, 성황을 제외하곤 무소불위의 권력을 인정받은 게 성녀다.
그녀가 카인을 마왕으로 몰고 있는 이상, 바르베타의 이런 행동은 위험했다.
"이것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르베타는 마녀심판에 대해 얘기하던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빛'께서 바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성녀의 말씀대로 마왕이 될지, 혹은 용사가 될지 모든 것은 '빛'의 뜻일 겁니다."
카인은 대주교의 보증패를 쥐었다.
"제가 이걸로 마녀를 옹호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르베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성호를 긋곤 성국의 인사말을 건넸다.
"모든 것은 '빛'으로."
['겨울'이 미소 짓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8%]
과거 카인은 성국의 사람들이 '될 대로 되라'는 말을 멋들어진 인사말로 쓰는 게 아닌가란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랬다.
* * *
카인은 곧장 대환승역으로 돌아왔다.
린드브룸으로 향하는 열차는 시간마다 있기에 가장 빠른 기차표를 뽑아선 움직였다.
바르베타 대주교와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이제 창밖으론 조금씩 해가 뜨는 게 보였다.
토독-.
다만 먹구름들이 아직 적게나마 끼어 있어 조금씩 밝아지는 것만으로 유추할 따름.
카인은 딱딱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어두운 일출을 바라보았다.
덜컹-. 덜컹.
느릿한 기차 밖으로 흘러가는 비 젖은 풍경이 점차 햇빛에 물드는 걸 보던 카인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훤칠한 미남인 줄은 이제야 알았어."
깡마른 영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바르베타 영감에게 시달리고 온 카인으로선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노인이 등장하면서 카인이 있던 객차의 모든 사람이 철도원의 안내로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영감님이 열차를 타고 움직이긴 꽤 힘든 새벽입니다만."
누구냐는 물음 전에 카인이 넉살 좋게 이 새벽부터 무슨 난리냐고 반문을 던지자, 노인은 씨익 웃었다.
"원래 늙으면 아침잠이 사라져서 말일세."
"아무리 그래도 아이리안 서쪽의 지배자인 맥로든 후작님이 여기 오실 정도로 한가하진 않을 텐데요."
"호오."
노인, 맥로든 후작의 눈이 커진다. 그러곤 카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빠진 데 없고, 모난 데 없고. 영리하고. 어떻게 맞혔나?"
"별거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철도원들을 부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칠대귀족가의 주인은 되어야 하는데, 웬만한 사람은 제가 봤습니다."
"로스야 머리가 없으니 보자마자 알 테고. 브래들리 백작이야 노인이 아니니까, 그럼 남은 건 나겠군?"
"예."
"역시 마음에 들어. 걱정은 안 하나?"
"...?"
밑도 끝도 없이 들어오는 물음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이 객차에 있는 맥로든의 호위 기사들을 감지하곤 살짝 웃었다.
"후작님이 저를 죽일지 말지요?"
"그럼, 그럼. 우리는 적 아닌가. 그대는 올리시렌 왕녀를 밀고 있고 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손녀딸을 밀고 있잖나."
카인은 맥로든 후작에 대해선 잘 몰랐다.
이전 세계선에서도 지금처럼 주로 부딪치던 건 로스 후작이었다.
'맥로든이라는 이름은 멀리서 소문으로만 들었지.'
단지 아는 건 그가 늙었다는 것과 욕심이 많다는 두 사실뿐.
그러나 직접 마주한 맥로든 후작은 두 가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런데 후작님은 저를 적으로 생각지는 않으신 모양입니다만."
"왜지?"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암살자들이나 기사만 보내시겠지, 본인이 이렇게 오시겠습니까?"
"하하하하, 맞네!"
탁-.
맥로든 후작은 카인의 명쾌한 말이 마음에 쏙 든 듯 무릎을 치면서 격하게 인정했다.
마을마다 하나쯤 있을 유쾌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맥로든 후작이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뭐, 맘대로 하시죠. 대답할지 말지는 제 마음이니까요."
싸운다면 언제든 싸울 준비는 되어 있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대화하자고 온 이상, 카인 역시 칼을 먼저 뽑을 생각은 없었다.
'로스라면 달랐겠지만.'
엘프와 손을 잡고 인간을 제물로 엘븐나이트를 만들고, 아벨을 속이고, 에셀레드를 노리고.
쌓인 일이 많기에 그 반짝이는 머리를 보자마자 몸과 분리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맥로든 후작은 이야기를 들어 줄 순 있었다.
"자네 혹시 만나는 여자는 있는가?"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라 카인은 자신답지 않게 반문했다.
맥로든 후작은 시원하게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에드먼드 백작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물을 텐데, 아무래도 자리에 없으니 말이야. 그럼 본인에게 물어야지. 약혼녀나 진지하게 만나는 여인이 있냐고 물었네."
카인의 머릿속으로 올리시렌의 모습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는 맥로든이 말하는 관계로는 정의할 수 없었다.
"없습니다만."
"젊은 사람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구만. 괜찮은 사람 있으면 일단 많이 만나 보고 그래야지!"
막연히 상상하고 있던 맥로든 후작은 깐깐하고 욕심이 번들거리는 영감이었다. 하지만, 실제 만나 본 그는 정말 어디에나 하나쯤 있을 할아버지였다.
"내 손녀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우리 올리비아는 어떤가?"
"...."
물론 대뜸 왕녀를 만나 보라고 하는 영감이 어디에나 있을 할아버지가 될 순 없었다.
"요새 나름 잘나가서 북방원정의 총사령관도 하고 있다네!"
Episode.Ⅰ
봄의 찬미
#85 EP.Ⅰ-22
봄에게 바라는 것 (1)
「몸이 죽어 버리는 건 예정된 거라 새삼스럽지 않다. 죽기 전에 내게 오면 어떻게든 살려 낼 자신도 있고.
그러나 마음이 죽는 건 다르다.
분명 심장이 뛰고 있고, 밥을 먹고, 말을 하지만 그 사람은 죽어 있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 또한 보이지 않으니 어찌 살리리.
-닥터 블랙의 편지 중」
카인은 간만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맥로든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씨익 웃었다.
"아까 만나지 않았나? 내가 일부러 시간 맞추게 했었는데."
사람이 좋아 보인다 해도 후작은 후작.
그것도 아이리안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구른 노회한 맥로든 후작의 말엔 뼈가 있었다.
"저희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고 계셨군요."
"어찌 모르겠나. 그러려고 로스는 철도청장을 키웠고, 나는 철도청에 많은 걸 먹이고 있는데."
"그럼 로스 후작이 저를 습격하는 것도 아신 겁니까."
맥로든 후작이 웃는다.
어둠 하나 없이 맑은 웃음 속 맥로든의 칼이 번쩍였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알았냐와 몰랐냐 둘만 따지면 후자네. 나는 일단 말부터 해 보는 성격이라, 당연히 로스 놈도 말을 먼저 할 줄 알았지."
시그마리와 엘븐나이트가 열차에 몰래 오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짜고짜 습격할 줄은 몰랐다는 맥로든의 말.
"그렇군요."
카인은 순순히 긍정했다.
그러자 이번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맥로든 후작이었다.
"뭘 믿고 그렇게 내 말을 쉽게 믿나?"
"진실이면 믿으면 되고, 거짓이라도 제가 밝혀낼 수 없는 거니 이 자리에선 믿는 게 맞지요."
"자네...."
척.
맥로든 후작은 바로 카인의 손을 잡았다. 피하려면 피하겠다만, 손을 거칠게 뺄 때 그의 손가락이 부서질까 봐 그러지 못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카인의 손을 잡은 채 맞은편 좌석으로 움직였다.
"정말 내 손녀사위 될 생각 없나? 운 좋으면 자네는 왕의 사위도 되고, 에셀레드의 백작이자 맥로든 후작도 될 수 있네!"
"왕의 사위야 그렇다고 해도, 맥로든 후작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맥로든 후작에게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들만 해도 여럿이다. 그런데 한 대를 건너뛰고 대뜸 손녀사위에게 후작령을 맡긴다는 건 후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자네를 밀면 되지! 내 자식들은 하나같이 변변치 않아서 다 마음에 안 들거든."
카인은 맥로든 후작이 살짝 미친 것 같다고 내심 정정하며 말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호위 기사 중 자식분에 선 안 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건 또 왜 그런가? 다 내 충성스러운 기사들인데!"
"지금이야 충성을 바치겠죠. 하지만 후작님의 사후엔 어떻게 할지 다들 고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후계자 경쟁이 혼란스러운 지금이 가장 몸값이 비쌀 때이니 당연히 움직일 겁니다. 어차피 차기 맥로든 후작의 줄을 잡는 거니 배신도 아니고 사후도 대비할 겸."
씨익-.
맥로든 후작은 맑은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모두 일어나!"
척.
그의 명령에 객차 안에 있던 열두 명의 호위 기사가 일제히 일어났다.
"내 자식놈들에게 줄을 대고 싶은 녀석은 손을 들어라."
열둘 중 일곱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들었다.
"생각이야 자유니까, 그럼 진짜 댄 놈 있느냐."
들었던 일곱 중 여섯은 팔을 내렸고, 가장 젊어 보이는 기사 하나가 계속해서 손을 들고 있었다.
카인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동자와 맺히는 식은땀.
게다가 어떻게든 팔을 내리고 싶어 하지만, 줄에 묶인 인형처럼 꼼짝도 못 하는 모습.
맥로든 후작은 다시 카인을 돌아보았다.
"역시 자네 말대로 있었네. 그렇다면 자네와 나의 대화도 미주알고주알 내 자식놈에게 말하겠지?"
서늘한 살기.
싱글벙글 웃는 표정 속 다시금 차가운 살기가 번뜩였고, 맥로든 후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명령했다.
"자결해라."
"예, 예스, 마이... 로드."
덜덜덜-.
끝까지 손을 들고 있던 기사는 자신의 검을 뽑아서 제 목을 찔렀다.
표정에서 극한의 공포와 후회가 느껴지지만, 그의 팔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스윽-.
칼끝이 살갗을 가르기 직전.
"호오, 빠르구만."
카인이었다.
카인은 맨손으로 기사의 칼날을 잡고.
채앵.
부숴 버렸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표정과 달리 기사는 부러진 칼날이라도 제 목에 쑤셔 넣기 위해 움직였다.
파지지지직-.
카인은 가볍게 순백의 뇌전을 일으켜서는 눈물을 쏟아 내며 자결하려던 기사를 기절시켰다. 하지만, 바닥에 누워서도 그의 팔이 꿈틀거린다.
마치 기생충처럼 숙주를 죽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그 팔을 발로 밟아 고정하곤 맥로든 후작을 바라보았다.
카인의 표정은 냉랭해졌지만, 그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사람 좋은 할아버지의 미소만 지었다.
"불만이 잔뜩 있어 보이는 표정이로구나."
"금제입니까."
"그래. 영지 내 마법사가 열두 명만 금제를 새길 수 있어서 아쉽지만, 내 호위 기사들은 모두 받고 있다네."
"...."
카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다시금 웃었다.
"왜, 내가 억지로 거는 거 같은가?"
카인은 다른 열한 명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나지막하게 혀를 차는 자는 있을지언정,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기사에게 연민이나 안타까움을 품는 이는 없었다.
"그런 건 아니군요."
"철저히 선택일세. 내 호위 기사가 되려면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금제를 받아야 하고 아님, 지원조차 하지 말라고."
"효율적이군요."
"내가 사람을 잘 못 믿어서 그러네. 수십 년을 따로 살아온 자에게 내 목숨을 맡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촤악-.
맥로든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팔을 펼쳤다.
일출에 제 색을 찾아가는 풍경을 배경 삼아 일어난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손녀와 혼인한다며 이 모든 걸 물려 줄 수도 있어."
"본인부터 이런 인간이니까 로스 후작이 엘프와 손잡는 걸 보고만 있었군요."
카인의 싸늘한 말.
그러나 맥로든 후작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손을 잡다니! 단지 엘프의 전향자를 받아서 그들의 기술을 쓰는 게 아닌가?"
"...."
"그게 아니고 정말 자네 말대로 로스가 엘프와 편을 먹고 있다면 잘라 내야겠고."
"방금처럼 말입니까."
그는 다시금 웃었다.
카인에겐 더 이상 사람 좋은 할아버지의 미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서늘한 칼을 번뜩이는 늙은 몬스터의 뒤틀린 미소 같았다.
-만약에라도 엘프의 손을 잡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라질 뿐이겠죠.
메이누스 대환승역에서 만났던 올리비아 왕녀의 말이 떠오른다.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이용하고 버린다는 말을 맥로든이나 그녀나 참 잘하는군.'
올리비아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깡마른 노인의 손녀라는 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딱-.
맥로든 후작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던 기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미래의 손녀사위가 이렇게 말리니 처형은 나중으로 미뤄야겠어."
선심이라도 쓰는 양 말하는 맥로든을 보며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적에게 보이는 비웃음이었다.
"처음부터 보여 주기용으로 하신 거면서."
"내가 말인가? 이유는?"
맥로든은 일부러 과하게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었다.
카인이 좀 더 정답을 말하길 기대하는 듯, 모른다면 그것 자체로 놀림거리라는 듯 미묘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이었다.
"이유는 모릅니다."
카인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나 맥로든 후작은 모른다는 말에 더더욱 기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휙휙 손짓하며 어서 더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당신이나 저 같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죽이진 않겠죠. 적어도 누구랑 줄을 대고 있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일러바친 건지는 뽑아내고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짝-, 짝-.
맥로든 후작은 천천히 그러나 힘 있는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네, 카인 에셀레드. 어떻게 그 꽉 막힌 에드먼드에게서 이런 자식이 나왔는지 모르겠군.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나는 틀렸는가?"
잘 짜인 연극무대처럼 흥분되었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배우처럼 천변만화하던 맥로든 후작의 주름진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간다.
아이리안의 '맥로든'을 짊어지고 있는 자의 표정이 된다.
카인은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틀리진 않았습니다."
"그럼 옳은가?"
"옳지도 않습니다."
맥로든은 카인의 대답을 듣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틀리지도 옳지도 않으면 뭔가."
"강제로 금제를 거는 것도 아니고 엘프 같은 것들하고 몰래 손잡은 것도 아니니 틀리진 않았습니다만...."
척-.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디디며 아그웨스카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스르륵-!
동시에 열한 명의 기사들이 무기를 꺼내 카인을 겨눴다.
맥로든의 최정예를 모두 모은 듯, 열한 명 모두 엑스퍼트 중급 이상이었다.
먹구름이 어느 정도 걷힌 듯, 차창 밖에서 선명한 백색의 햇빛이 들어온다.
햇빛은 기사들의 무기에 반사되면서 이지러지고 반짝하면서 객차를 밝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카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마음에 안 듭니다. 로스 후작을 두고 본다는 그 으스대는 태도고 같잖고."
"...!"
카인의 말에 맥로든 후작은 입을 벌렸고.
"기사의 충성 하나 제대로 못 받아서 금제를 거는 의심병도 찢어 버리고 싶군요."
닫힐 줄을 몰랐다.
카인은 할 말을 다 해 시원한 듯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씨익 웃었다.
맥로든 후작은 그런 카인을 멍하니 보다가 한마디를 뱉었다.
"미친놈."
"그 소리 자주 듣습니다."
"그래도 손녀사위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 손녀랑 만날 수 있을 거 같군. 모두 칼 넣어라."
스르릉-.
기사들이 무기를 넣는다.
맥로든 후작은 턱을 쓸면서 서 있는 카인을 다시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말 마음에 든단 말이야."
"금제 안 받습니다."
"어차피 소드마스터급을 금제할 역량도 없네."
"그리고 올리시렌을 왕으로 올릴 겁니다."
"올리시렌 올리고 내 손녀 올리비아랑 결혼하면 되지."
"...."
차마 못 뱉었지만, 카인의 목까지 맥로든이 한 말이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조금 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왕이 되고 싶네. 왕이 부리는 그 권력이 갖고 싶었거든. 그런데 지금 더욱더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저 영감님 관심 없습니다."
"원래 시작은 다 그래."
카인은 능글맞게 말대꾸하는 맥로든 후작을 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막연히 상상하던 맥로든 후작의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맥로든 후작은 열차가 나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린드브룸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마르퀴스 벨트로 올라갈 거네."
"잘 가십시오."
"자네는 하이볼트를 만나서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하겠지? 올리비아가 총사령관이 된 걸 뒤집을 사람은 하이볼트뿐이니까."
카인과 올리시렌이 함께 열차를 탔다는 사실만으로 맥로든은 상황을 꿰뚫었다.
"막을 겁니까?"
카인은 다시금 아그웨스카를 쥐었지만, 맥로든은 허허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내가 그럴 필요가 없네. 이미 마음이 죽어 버린 자를 자네가 어떻게 돌리겠는가."
"마음이 죽었다...?"
#86 EP.Ⅰ-22
봄에게 바라는 것 (2)
솨아아아아아-.
열차가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철로를 미끄러진다.
메이누스에서부터 온 열차는 아마도 이제 차고지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갈 터.
카인은 돌아갈 열차를 바라보았다.
-적인데 내가 그걸 왜 알려 주나?
마지막에 들었던 맥로든 후작의 말이 떠오른다.
-손녀사위가 된다면야 뭐든 알려 줄 수는 있다네.
쓴웃음이 지어진다.
카인은 내심 그를 종잡을 수 없는 늙은이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로스 후작보다는 나은 영감이라는 걸 알았으니 나름 소득이라.
저벅저벅.
린드브룸의 플랫폼이 가득 찰 정도로 열차에서 내린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카인의 주위로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딱 알 수 있는 기사의 체형. 무기가 없는 대부분과 달리 허리춤에 들려 있는 칼.
누구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밴더빌트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군.'
카인은 노기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안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무기에 대한 규정이 엄격해졌다.
당장 밴더빌트가 젊었을 적엔 칼을 차고 말을 타는 게 기사의 당연한 모습.
그러나 이젠 열차가 다니고, 거대한 비행선이 하늘을 가르며, 말은 한낱 유희의 대상으로 남은 시대가 되었다.
늘 생존의 위험에 시달리는 대장벽이나 에셀레드 백작가는 이러한 문명시대가 아니라 야만의 구시대로 살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서던 그때.
"흑발에 보라색 눈, 찾았습니다."
카인의 감각에 저 멀리 보이는 철도원의 말이 잡혔다.
"카인 에셀레드 맞습니다."
린드브룸 역의 철도원들이 하나같이 카인만을 살피며 서로에게 통신을 주고받는다.
신분을 밝히고 열차를 탔으니 예상한 일이지만, 미간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웨에에에에에엥-!
천장의 붉은 마법등이 켜졌다.
요란한 사이렌이 플랫폼을 요동시킨다.
평범한 승객들은 하나같이 놀랐고, 철도원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했던 것처럼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승객들은 빠르게 대피시켰다.
카인은 그 모습을 스윽 둘러보며 걸음을 멈췄다.
'환영 인사라고 하긴 과하고, 사냥이라고 하면 알맞겠어.'
바닷속 작은 물고기 떼가 거대한 포식자를 피해 도망가듯, 평범한 왕국민들은 철도원의 안내에 따라 카인을 피해 사라졌다.
후우우웅-.
수백의 인원으로 북적이던 곳이 순식간에 한산해진다.
사이렌만 요란히 울리고 아침햇살마저 지울 만큼 붉은 마법등만이 카인을 감싼다.
그렇게 일반인들이 사라지자.
척, 척-.
저 멀리 역의 문이 모조리 열리더니, 백여 명의 기사들이 열을 맞춰 걸어왔다.
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왕실기사단?'
왕도에서 이 규모로 기사를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반역자들 아니면 왕실기사단뿐.
게다가 대놓고 아이리안 왕실의 문장을 경갑에 새기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카인은 그들의 구성을 훑었다.
전위는 검을.
중위는 창을.
그리고 후위는 활과 그물을 채비했다.
다수가 단수의 괴물을 붙잡기 위해 지니는 전형적인 장비 구성이었다.
"카인 에셀레드 경 맞습니까?"
맨 앞.
밴더빌트가 떠오르는 체격의 중년의 기사가 홀로 다가온다. 그는 카인의 열 걸음 앞에 멈췄다.
"기사로 임명된 적은 없으니 경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카인 공자님이라 부르겠습니다."
휙-.
카인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팔을 들었다.
우르르르르-.
그러자 왕실기사들은 원형으로 카인을 둘러쌌다. 카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실기사단장, 웨인 시케르 경."
"저를 아십니까?"
카인과 웨인 시케르가 서로를 마주한다.
에드먼드가 사라진 후 아이리안의 수호검, 왕국제일검이라 손꼽히는 웨인 시케르.
그리고 늘 정체되어 있던 아이리안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폭풍의 핵, 카인 에셀레드.
서로를 모르기엔 너무 유명한 존재들이었다.
카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름 정도는 압니다. 너무 유명하시니까요."
하이볼트 국왕의 정치력은 대단한 편이다.
그리고 그런 정치력의 기반엔 에드먼드와 웨인 시케르로 대표되는 무력이 근간한다.
그는 카인을 훑어보았다.
바위처럼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입꼬리가 조금 움직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왕실기사 몇은 놀라서 움찔거릴 정도였다.
"카인 공자님도 유명하십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정말일까 궁금했습니다."
"직접 보시니 어떻습니까. 제가 소드마스터 같습니까?"
카인은 두 팔을 벌리며 물었다.
그러자 웨인은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크고 번쩍이는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는 가짜는 아닌 건 알겠습니다."
"...."
"저처럼."
카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저 오러 블레이드를 검에 씌워서 휘두르는 자들은 빠르고 강하긴 하지만, 허울뿐인 소드마스터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세계에 투영시켜 현상을 정복해 나가는 자들은 진짜 소드마스터다.
'이 차이를 안다라.'
대개의 사람은 물론이고 잘나간다는 기사들 역시 소드마스터에 대해선 잘 모른다.
오러 블레이드만 뽑아내면 인정해 주기도 해서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싸우고 정진할 필요가 없는 문명사회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따라서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안다는 건 그 사람이 얼마나 검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며, 느끼고 있다면 그는 충분히 훌륭한 기사였다.
웨인 시케르가 그러하듯.
"제 동료인 올리시렌 왕녀가 먼저 올라와 있는 걸로 압니다."
"예, 맞습니다."
"이렇게 왕실기사단이 저를 맞이하는 건 올리시렌이 보내서 환영 인사를 해 주기 위한 겁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를 태연하게 물었다.
카인의 뻔뻔함에 웨인은 웃지도 짜증 내지도 않고 담담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사냥이겠군요. 저를 왕실에 위협되는 적으로 판단하시고 나온 거 같은데-."
카인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꽈아아악.
그다음은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쥐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
긴장감이 차오른다.
꺼지지 않는 붉은 마법등이 카인을 비롯한 왕실기사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비춘다.
사이렌 소리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욱 섬뜩한 침묵만이 백여 명의 기사들 사이에 피어난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
긴장하여 발을 끄는 소리.
근육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일어나는 갑옷의 마찰음.
쿠웅-.
전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 가운데서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디뎠다.
허리를 숙이며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웨인의 목을 베어 버릴 자세를 취했다.
까딱-.
웨인 시케르의 손가락이 그에 맞춰 움직인다.
목석같다지만, 그 역시 저울 대신 칼끝에 자기 삶을 올리고 사는 기사.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싶은 눈치였다.
절레절레.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으려던 카인은 허리를 조금 펴며 반문했다.
웨인 시케르는 자신의 왼 허리춤의 검을 살짝 치며 답했다.
"당신의 길에 저는 시련이 될 겁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은 뭡니까."
"전하의 판단입니다."
웨인은 귀족이 아니었다.
젊었을 적 하이볼트는 동료들과 아이리안 전역을 여행했었고, 그 와중에 다 쓰러져 가는 산촌에서 한 아이를 구했다.
그게 바로 웨인이었다.
웨인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가르치고.
하이볼트는 정성껏 그를 키웠고, 웨인은 그에 보답하듯 훌륭하게 자라 왕실기사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하이볼트의 명령을 전적으로 따르는 충실한 인물이었다.
"아직 전하께서 카인 공자님을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이라고 한다면?"
"그 순간 당신을 죽일 겁니다."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을 겁니다."
"...쯧."
카인은 혀를 차며 완전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아그웨스카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꼭두각시보다 더 맹목적이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정말 현상 유지만 하면서 보던 클로이드보다 바보 같은 게 웨인이라는 남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카인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덮치려는 기사들을 휙 가리켰다.
"이 '전하의 판단'이라는 건 아무리 봐도 날 잡아 죽이려는 것 같습니다만."
"잡는 건 맞지만 죽이는 건 아닙니다."
저벅-.
웨인 시케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읽었다.
"에셀레드 백작가의 장남 카인. 아이리안 대전쟁을 일으킬 뻔한 죄를 물어 왕도에 도착하는 대로 1급 반역자로 취급한다."
"...?"
"단, 마탑주나 대주교, 왕실기사단장의 보증 중 하나가 있다면 죄를 유예한다."
카인은 단숨에 저 명령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쓸데없이 보증 부분이 덧붙여져 있다. 진짜로 죄를 물을 생각은 없는 반역죄군.'
굳이 '보증' 부분을 추가한 것만 봐도 카인을 막을 의도가 가득했으니까.
"하이볼트 전하는 2왕녀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겁니까."
그러지 않고선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올리시렌과 자신을 밀어낼 리가 없다.
2왕녀 올리비아가 총사령관으로 입지를 다진다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뒤엎을 수 없다.
그런데 정작 1왕녀 올리시렌은 그녀를 후계자로 선정한 하이볼트의 속내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웨인은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했다.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건너편 열차 플랫폼을 가리켰다.
메이누스로 돌아가는 새로운 열차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철도가 깔리면서 같이 생긴 철도특별법상 역은 독립적인 구역으로 설정됩니다. 따라서 여긴 법적으로는 왕도가 아닙니다."
하이볼트의 명령서는 '카인'이 '왕도'에 들어오면 '반역자'라고 했다.
따라서 이 자리는 '왕도'가 아니기에 아직 카인은 죄인이 아니었다.
"돌아가라?"
카인의 물음에 웨인 시케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도에만 안 들어오면 문제없습니다."
"처음부터 절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고...."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다.
지금처럼 자신을 포위한 왕실기사들이 입을 쩍 벌린 채로 웨인 시케르를 바라보는 모습 같은 게 그렇다.
모두의 시선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아직 당신은 끝날 때가 아닙니다."
웨인은 한 명의 기사이자, 에드먼드가 사라진 아이리안의 수호검으로서 입을 열었다.
"지금껏 수많은 기사를 봤지만, 에드먼드에 가장 가까운 건 당신입니다. 그러니 헛된 모험을 하기보단 아이리안의 검이 되길 바랍니다."
미래의 수호검을 향한 현재의 수호검이 보이는 호의.
그러나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배려는 감사하나 그럴 수 없습니다."
웨인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카인을 마주했다.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을 건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검을 얻은 자가 의지를 굽히진 않을 테니."
훅-.
웨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른팔을 하늘로 들었다.
쿠웅-!
그 순간 카인과 웨인을 감싸는 백 명의 왕실기사들이 발을 굴렀다.
정예기사들이 일제히 바닥을 내리찍으니 린드브룸의 역사가 먼지를 토하며 흔들릴 정도였다.
웨인은 천천히 팔을 내리며 카인을 가리켰다.
"전원 착검."
쿵.
잠시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팽팽해진다.
"적은 1급 반역자 카인 에셀레드."
쿵, 쿵-!
검, 창, 활, 그물.
강력한 하나를 잡기 위한 인간의 지혜가 왕실 기사들의 손에 들린다.
웨인 시케르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명령을 머뭇거렸다.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카인은 품속에서 순백의 날개가 달린 바르베타의 보증패를 꺼냈다.
"노초 바르베타 대주교의 보증패입니다."
"...그걸 어떻게?"
웨인은 두 눈을 끔뻑였고, 카인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사라진 주위를 쓱 훑어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이제 제 친구에게나 안내해 주시죠. 궁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거 같은데."
#87 EP.Ⅰ-22
봄에게 바라는 것 (3)
아이리안 최고의 상업도시인 메이누스만큼은 아니라지만, 린드브룸도 아침이 꽤 부산한 도시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저벅-.
백여 명의 왕실기사단이 발을 맞춰 걸어가고 있고.
저벅, 저벅-.
그들의 맨 앞에는 웨인과 카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이하러 나온 상인들이나 왕도의 국민들은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비켰다.
웨인은 몇 걸음 걷다가도 카인을 흘깃 보고, 카인이 돌아보면 먼 산을 보곤 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카인은 어린애 같은 모습의 웨인에게 친절히 물었다.
차라리 대놓고 뭐라고 하면 시원하게 치고받겠지만, 호의로 다가오는 웨인에겐 차마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목적어도 주어도 없는 물음이지만, 카인은 쓰게 웃으며 잘 대답했다.
"반역죄라면 여기 와서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대주교의 보증패를 가지고 있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웨인은 카인을 잡으러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해 두었다.
그중 하나는 웨어햄 마탑주의 보증패를 카인도 가지고 있는 경우.
그렇게 되면 올리시렌의 보증패와 같은 거라 의미 없다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카인이 꺼낸 건 그 깐깐하기로 소문난 노초 바르베타 대주교의 보증패.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풀렸습니다."
"어쩌다 보니...."
웨인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카인의 말을 곱씹었다.
처음에는 목석같은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냥 단순한 사람같이 보였다.
-엘프 여왕 글루미엠과 저희의 아버지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이 아이리안에선 형님에게 꽤 어려울 적입니다.
햇살이 눈부시다.
카인은 근처에 있던 과일 가게에서 사과 하나를 사서 베어 물면서 이전 세계선에선 보지 못했던 린드브룸을 둘러보았다.
-한 명을 더 꼽자면 거의 나서지 않지만, 왕실기사단장 웨인 시케르 경도 있겠군요.
용사 아벨이 해 주던 이야기가 이제는 무엇인지 안다.
'내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라는 정보였지.'
이미 살아봤다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다시 사는 삶에서도 새로운 적을 만났고, 끊임없이 싸워야 했으며, 나아가야 했다.
카인은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린드브룸의 왕궁을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이 아이리안에서.
이 봄이 끝나기 전에.
아직은 멀리 있지만, 해야 할 일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또각.
올리시렌이었다.
밖에 있을 때와 달리, 궁정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힐을 신고 왕궁의 복도를 걸었다.
궁내의 사람들은 그녀가 보이자 다들 허리를 숙이기 급급했다.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둘을 따르는 노기사는 어색한 듯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올리시렌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곤 말했다. 그러자 밴더빌트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제가 죽기 전에 왕궁을 이렇게 걷게 될 날이 올지 몰랐어서 그렇습니다."
요즘에야 열차를 타고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지만, 밴더빌트가 기사가 되기로 할 땐 달랐다.
저 멀리 꿈에서나 볼 궁궐이었으니까.
당시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날 수도 없었으며, 타 가문의 기사가 함부로 들어오는 건 전쟁 선포와도 같은 일.
게다가 왕궁은 왕의 명령이 있지 않은 이상엔 갈 일이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연히 그려오던 린드브룸의 왕성을 왕녀와 같이 걷고 있다고 하니 겸연쩍었다.
"카인이랑 떨어져 계셔서 그 녀석을 생각하시는 건가 했습니다."
올리시렌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밴더빌트는 뺨을 긁었다.
"당연히 제가 충성을 바치는 공자님을 생각하긴 합니다. 그래도 저보다 더더욱 기사다우니 걱정되진 않습니다."
"하긴...."
올리시렌은 말끝을 흐렸다.
카인과 겪어 낸 시련과 고난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건 카인이었다.
더는 그래선 안 된다.
그녀는 이내 피부가 새하얘질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
"그 녀석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하고 싶은데, 어렵네요."
"...."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쓰게 웃었다.
올리시렌이 지닌 책임감이 무엇인지 알고 이 걸음의 끝이 무엇인지도 알기에, 묵묵히 따르는 것으로 그녀를 응원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걷다가 도착한 곳은 희고 붉은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었다.
척-.
정원의 입구.
서 있던 두 명의 왕실기사가 각자의 손을 뻗어 교차하면서 올리시렌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전하께서 왕녀님의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아니요."
올리시렌은 막무가내로 한 걸음 더 들이밀며 왕실기사를 압박했다.
"왕녀로서는 금했지만, 딸로서는 환영한다고 하셨을 텐데요."
두 명의 왕실기사는 조금 당황한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웨인 단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둘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들어오라 해라."
정원의 안쪽.
아침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하이볼트의 말이었다.
그의 묵직한 명령에 두 왕실기사는 바로 몸을 돌려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스, 유어 마제스티."
올리시렌은 왕실기사를 스쳐 지나가며 물었다.
"웨인 시케르 단장은 어디 간 거죠?"
"...."
대개 웨인 기사단장이 하이볼트를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데,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물음.
반면 사정을 아는 두 기사는 당연히 대답할 수 없었다.
"반역자를 잡으러 갔단다."
대신 하이볼트가 대답했고, 올리시렌은 희고 붉은 꽃이 만발한 궁정정원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정원 밖에 서 있었다. 말 그대로 국왕도 홀로 있는데, 왕녀가 기사를 데리고 들어가는 건 그것 자체로 문제가 되기 때문.
"둘도 들어오라."
"...!"
갑작스러운 하이볼트의 명령에 이소엘과 밴더빌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는 바, 둘도 올리시렌의 뒤를 따랐다.
정원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꽤 컸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꽃의 길을 거치고 들어온 곳은 탁 트여서 웬만한 기사 연무장 수준으로 넓은 풀밭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쪼르르-.
홀로 주전자를 들고 홀로 찻잔에 따라 홀로 마시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세상의 모든 피로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고, 풍성한 회색 머리는 다 늙은 사자의 갈기같이 푸석해 보였다.
다만, 머리 위에 올려진 작은 금관이 그의 정체를 알게 했다.
"앉거라. 두 기사는 서 있어야겠군."
원형 테이블에 준비된 의자는 세 개였다.
올리시렌은 하이볼트의 왼편에 앉았고, 두 기사는 조금 멀리 떨어져 그녀의 뒤에 섰다.
"전하."
올리시렌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하이볼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왕위 계승자가 아니라 내 딸로 온 것 아니냐. 편하게 부르거라."
"그거 거짓말입니다."
"그래?"
하이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만나 주신다고 하셨지만, 일단 얼굴부터 보고 말하면 되겠다 싶어서요."
표정이나 눈빛의 변화는 없었지만, 올리시렌의 우격다짐이 합격점이라는 신호였다.
"올리비아는 교활하지. 규칙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빈틈을 찾아서 넘고 부수고 이득을 취하려 해. 반면 너는 우직하다."
날카로운 칼로 얇게 살을 저미듯 두 왕녀를 평가하는 하이볼트의 말.
"그런데 달라졌구나."
"시험이었군요?"
하이볼트는 아무것도 못 들은 듯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입에 가져가 대지 않고 잠시 정원의 바람과 햇볕을 잔에 담았다.
"날이 좋군."
"올리비아가 교활하고 제가 우직하면, 아버지는 치사하군요."
하이볼트의 눈썹이 들썩였다.
올리시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금세 가라앉히곤 차를 들이켰다.
"차가 쓰구나."
"입맛이 쓰셔서 쓴 거 아닙니까."
"네가 이 왕궁을 떠난 게 이제 고작 한 달이다. 그런데 말에 칼이 담겨 있는 게, 내 딸이라고 하기엔 많은 게 달라졌어."
올리시렌은 카인을 떠올렸다.
왕궁에 있을 땐 이렇게까지 말할 일이 없었다.
말수가 적은 이소엘과는 대화가 잘 없었고, 그 외엔 마녀임을 숨기기 급급해서 타인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했었으니까.
삶도, 말도, 마음도.
그러나 카인을 만나면서부터 달라졌다.
"에셀레드의 장남이 너를 이렇게 바꾼 게냐."
"원래 이랬습니다."
"그럼 내가 너를 잘 못 봤다는 거로구나. 모든 관료와 귀족 위에 있는 내가 말이야."
하이볼트의 회색빛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올리시렌에게 못 박힌다.
그 눈빛이 주는 압박감이 멀리 떨어진 이소엘이나 밴더빌트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도 원래 다 그런 법입니다."
그러나 올리시렌은 아무렇지 않았다.
하이볼트의 눈빛에 겁먹기엔 이미 거쳐 온 지옥들이 상당했으니까.
"오죽하면 딸이 친어머니의 본명도 이제 알았을까요."
"...!"
달그락.
하이볼트의 표정은 가면을 씌운 것처럼 그대로였지만, 그의 손에 힘이 빠졌다는 걸 찻잔의 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올리시렌은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한미한 남작가의 외동딸인 카를라 오우드리가 제 어머니입니까, 아니면 현 헤터워드 로스 후작의 여동생인 에버윈 로스가 어머니입니까."
지금 왕위에 대한 싸움의 근간은 맥로든 후작의 욕심과 로스 후작의 이유 모를 증오에서 비롯된다.
지금까진 올리비아가 맥로든 후작의 손녀이며, 귀족 세력이 왕권을 쥐기 위해서 그런 거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어머니의 진짜 이름을 알고 난 이상, 숨겨진 과거가 있으며 로스 후작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유가 그에 있으리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여동생이 아니라 에버윈은 헤터워드의 누나다."
하이볼트는 올리시렌의 말을 정정했다.
"아버진 알고 계셨군요."
후릅-.
하이볼트는 텅 빈 눈으로 찰랑이는 찻물을 바라보다가 조금 마시고 답했다.
"네 어미이기 이전에 내 아내였는데 그거 하나 모를까."
"가릭 백작님이나 디그리드 마탑주님은 말을 못 한다고 하시더군요."
"내가 '신뢰의 맹약서'로 둘의 입을 닥치게 했으니까."
탁자 위에 올라온 올리시렌의 손이 꽉 쥐어진다.
모든 걸 알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하이볼트를 향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친다.
숨겼기에 분노가 일고.
너무나 쉽게 말해 주기에 당혹스럽고.
제 이름조차 딸에게 남기지 못할 정도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짐작하다 보면 슬프고.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니, 흘리지 않았다.
"그게 로스 후작이 제 적이 된 이유입니까."
아이리안의 왕위를 노리는 한 사람으로서 담담히 물을 뿐이었다.
하이볼트는 그의 예상과 번번이 다르게 행동하는 올리시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커져 있는 그의 눈에서 놀라움이 묻어 나왔다.
"따지지 않느냐."
"그건 나중입니다."
"사연은 묻지 않느냐."
"그것도 나중입니다."
"그럼?"
올리시렌의 회색 눈동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올곧게 국왕을 바라보았다.
"제 길에 방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된다면 어떻게 치워야 할지 알아내는 게 첫 번째입니다."
"너는 왕위에 욕심이 별로 없던 걸로 알았다."
올리시렌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이소엘과 밴더빌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허공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끝엔 카인과 에셀레드의 모두도 있었다.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요."
"혼자가 아니라...."
저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꽃의 길에서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하이볼트의 뒤에 묵묵히 서는 웨인 시케르.
"걱정했는데 잘하고 있었군."
그리고 빈 의자를 잡고 보랏빛 눈으로 올리시렌을 향해 말을 던지는 카인이었다.
"빈자리의 주인들이 모두 왔구나."
그리고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하이볼트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가 너희들의 사형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88 EP.Ⅰ-22
봄에게 바라는 것 (4)
카인, 올리시렌 그리고 하이볼트.원형 탁자에 셋이 앉고 뒤로 각자의 기사가 서 있었다.
"사형장...."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하이볼트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올리시렌은 그의 말을 되새겼고, 그녀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반면 카인은 달랐다.
달그락-.
하이볼트가 뭐라 말하든 아랑곳없이 탁자 위 찻잔을 자신의 앞에 둔 후 주전자를 집었다.
"새벽에도 잔뜩 차를 마셨는데 여기도 차뿐이군요. 같이 먹을 빵 같은 건 좀 없습니까. 고기면 더 좋고요."
하이볼트의 카인 쪽으로 향한다.
그의 회색 눈 속 비치는 흑발의 청년은 가볍게 입꼬리를 들었다.
"갈 때 가더라도 먹는 건 제대로 먹이고 보내시죠."
"에드먼드와는 정말 다르구나."
카인은 일부러 과장된 어조로 하이볼트를 도발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막상 저는 에드먼드 백작님을 잘 모르니 뭐라 말하기 어렵군요."
"너는 내가 무섭지 않으냐."
분명 협박했건만, 카인의 태도가 하도 태연하니 하이볼트는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카인은 눈짓으로 웨인 시케르를 살폈다.
그러곤 크게 말을 뱉었다.
"정 안 되면 국왕 전하의 목이라도 따고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인 에셀레드!"
그 순간 듣고 있던 웨인이 소리를 높였다.
개인적으로 호감이 있다고 하지만, 하이볼트에 대한 불경한 언사를 지켜볼 수는 없었으니까.
척.
하이볼트는 팔을 들어 웨인을 막았다. 그러곤 올리시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이 녀석하고 어떻게 친해진 게냐."
왕실정보국에서 가져온 정보를 보았을 때 카인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본 모습이 평가를 아득히 뛰어넘으니 자연스레 물어보게 되었다.
올리시렌은 자신의 하얀 목을 손으로 쓸면서 쓰게 웃었다.
"절 처음 볼 때도 목을 썬다고 하던 사람이긴 하죠."
평상시 카인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하면서 감쌌다.
"허어."
하이볼트는 짧은 호흡 속에 아주 적은 감정을 담아 뱉었다.
그 순간 정답을 찾은 듯 카인의 눈이 반짝였다.
하이볼트는 그런 기색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진짜 반역자로군."
카인은 몸을 뒤로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유난히 반짝이는 햇살 아래서 맑은 정원의 바람을 향해 손을 뻗고, 입에는 빵 한 쪼가리를 물었다.
그러곤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럼 가짜 반역자군요."
하이볼트는 검지를 들었다.
건방진 자세를 취하고 있는 카인을 가리키며 냉엄하게 말했다.
"내 의도를 눈치챘군."
"그걸 어떻게 눈치를 못 챕니까. 등장하면 바로 때려잡아도 부족한 게 반역자인데, 왕과 접견이 가능한 삼대 보증패를 가져오면 봐준다는 게 말도 안 되는데 말이죠."
장난기가 사라진다.
날카로운 칼이 번뜩이는 전장처럼, 서로의 눈빛이 칼이 되고 말이 마법이 되어 서로를 노린다.
올리시렌의 눈과 달리 아무것도 깃들어 있지 않은 회색의 눈과 카인의 보랏빛 눈이 서로를 살핀다.
상대는 어떤 자인가.
무슨 패를 지니고 있나.
이 상황을 어떻게 엎을 것인가.
무언의 공방이 오갈 때, 올리시렌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로스 후작이 어머니의 동생이면서도 왜 제 적이 되었는지 말해 주시죠."
"...."
하이볼트는 턱을 쓸면서 허리를 뒤로 기댔다.
카인과의 일대일 싸움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올리시렌까지 합한 이대일의 싸움이었으니까.
"여기 있는 다른 사람이 들어도 되느냐?"
"예."
올리시렌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지금껏 사선을 함께 거쳐 온 동료기에 나오는 믿음이었다.
하이볼트는 잠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마녀라는 것도?"
"...!"
올리시렌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정확히는 카인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하이볼트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짧게 혀를 찼다.
"이 아비에게는 기를 쓰고 숨기려고 했으면서 이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어... 떻게 아신 겁니까."
"왕궁 장서관, 아카데미 금서관, 마탑의 봉인지정실. 아닌 척하면서 네가 뻔질나게 돌아다닌 걸 내가 모를까."
세 곳 모두 마녀가 되지 않기 위해 드나들었던 곳.
손에서 배어 나오는 땀을 급하게 드레스에 문질렀다.
철저하게 숨긴 건데 어떻게 하이볼트가 '마녀'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 것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따졌다.
"그건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맞다. 그래서 방금 찔러봤다."
올리시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그렇게 숨겼는데, 결국 하이볼트의 물 흐르듯 넘어가는 언변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황당하기도 했으며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이볼트는 이런 적이 많았던 듯 특별히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둘밖에 없는 딸 중 하나가 마녀라. 그럼 왕으로서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겠지."
등장하면 성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마녀라면 아무리 하이볼트 국왕이라도 덮고 갈 순 없었다.
게다가 올리시렌의 자리를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올리비아도 있고.
"절 자르실 겁니까."
"...."
왕녀의 물음에 하이볼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응답이란 건 언제든 그녀를 잘라 버릴 수 있다는 의미.
드륵-.
하이볼트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참으로 안타까우나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정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웨인 시케르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거짓말."
카인이었다.
하이볼트는 걸음을 멈췄고, 카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볼트를 향해 걸었다.
스윽-.
웨인 시케르는 몸으로 카인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카인은 그를 슬쩍 흘겨보곤 하이볼트에게 말했다.
"왕도로 오는 길에 맥로든 후작을 만났습니다."
"쯧, 그 말 많은 영감이 뭐라고 말했나 보군."
아이리안엔 공작이 없지만, 크로이츠 제국엔 공작만 해도 셋이며 후작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이 많다.
숫자가 적은 만큼 칠대 귀족가와 왕실은 서로에 대해 훤히 알 정도로 관계가 돈독한 게 하이볼트의 말에서도 묻어났다.
"국왕 전하의 마음이 죽었다고 하시더군요."
"...."
그는 몸을 돌렸다.
손으로 웨인 경을 옆으로 가게 하고 카인을 똑바로 마주했다.
카인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건방지게 행동했군."
대범하긴 하나 무례하진 않다는 게 카인 에셀레드에 대한 평가였다.
하이볼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인의 건방진 행동에 평가가 잘못된 거라 판단했었지만, 실제는 그 반대.
카인이 완벽하게 행동한 것이었다.
"전하께선 감정이 사라지셨죠?"
"어째서?"
"표현이 적은 건 사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묘하게 시간이 걸리시더군요."
처음부터 카인은 하이볼트의 반응을 체크했다.
어조의 변화.
목을 딴다고 했을 때, 그의 반응.
날카롭게 서로를 살필 때의 눈빛.
"마치 이럴 땐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죠."
"찔러보는 게냐?"
하이볼트가 올리시렌을 찔러 마녀임을 알아냈듯, 자신을 찔러 원하는 답을 듣기 원하는 건지 물었다.
하지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베는 겁니다."
"벤다라?"
"무엇 때문에 전하의 감정이 죽은 건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그딴 거 솔직히 별 관심도 없습니다."
"오호."
더 이상 연기는 필요 없었다.
하이볼트는 밀랍으로 빚어 낸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얼굴로 뒷짐을 졌다.
"오히려 없는 게 더 낫다고도 생각됩니다."
"어째서? 내가 마음이 동해서 올리시렌을 아끼고 귀하게 여겨 왕위를 즉시 물려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카인은 자기 심장과 머리를 두 손으로 나누어 가리켰다.
그리고 심장 위로 X를 그렸다.
"감정이 없다고 머리가 죽은 게 아니니까요. 이득과 불이익을 충분히 판단해서 움직이시니 거래하기도 좋지 않겠습니까."
"정보가 튀어나오길 바라는 찌르기가 아니라 내가 나뉘어서 움직이길 바라는 베기라."
하이볼트는 내심 카인에 대한 평가를 좀 더 상향했다.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처럼 카인에 대한 평가는 무력에만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카인의 진짜 힘은 그의 왼손이 가리키는 두뇌에서 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
"절반은 정답이다."
"무엇이 오답입니까."
"지금의 나는 이득과 손해를 계산할 순 있다. 그러나 왜 이득을 골라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지."
"...."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이볼트의 상태가 예상보다 더 안 좋은 모양이었다.
'예상한 게 맞긴 했지만, 중증이군.'
늘 죽음을 맞대고 있는 대장벽엔 별의별 놈이 많았다.
그중엔 마음이 죽었다는 표현이 딱 맞을 놈들도 많았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목숨.
암담한 미래.
절망스런 과거.
모든 게 짓눌리고 싸우기만 강요되는 대장벽에선 제정신인 놈이 이상한 놈일 정도였으니까.
일부는 원래대로 기쁨, 슬픔, 즐거움 등을 다시 느끼게 되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카인은 대장벽의 로드이스트로서 그들을 이끌어야 했다. 그때 써먹은 첫 번째 방법이 '이득의 교환'이었다.
마음이 아무리 죽어도 머리가 살아 있는 한, 사람은 이득을 줌으로써 움직이게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하이볼트는 그 단계도 지나 버렸군.'
언제 자기 삶을 끝내도 이상치 않을 정도로 '마음이 죽어 버린 왕', 하이볼트 룬 아이리안.
카인은 '두 번째 방법'을 써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이볼트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희색의 눈동자로 멍하니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저 과거의 내가 결심한 대로 나는 움직일 뿐이다. 하던 대로 답습하는 인형 같은 삶이지."
"왜입니까."
"...."
하이볼트는 다시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그의 눈이 아주 잠시 올리시렌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와 닮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카인은 핵심을 짚었다.
"에버윈 로스?"
하이볼트는 이번엔 자연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원래 이름으로 불리는 걸 싫어했다. 카를라 오우드리라고 부르거나 왕비님이라고 부르거라."
"그럼 지금의 왕비님은 어떻게 합니까."
올리비아의 어머니이자 두 번째 왕비를 물었고.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하이볼트의 진심이 누구에게 있는지 역력하게 드러나는 발언.
카인은 고독을 빚어 사람을 만든다면 딱 그렇게 생겼을 그에게 말했다.
"올리시렌이 두 번이나 물어도 답변하지 않으셨죠. 다른 말로만 돌리셨지."
대개의 사람은 이쯤이면 순순히 사연을 털어놓겠지만, 하이볼트는 그러지 않았다.
"말해 주고 싶지 않다. 쉽게 말해 줄 거였으면 관련자들에게 '신뢰의 맹약서'를 쓰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야."
"전 들어야겠습니다만."
"내게 이득을 물었지?"
"예."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이득을 제시해 보거라. 너희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비밀을 알려 주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카인은 그 소리에 곧장 씨익 웃었다.
하이볼트는 카인이 에드먼드와 전혀 닮지 않아 보였지만, 저 웃음만큼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인은 흘러내리는 흑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살려 드리죠."
카인의 전신에서 조금씩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온다.
척-.
웨인 시케르는 곧장 칼을 잡았다. 하이볼트에게 향하는 그의 기세를 끊어 내려 했다.
하지만, 다 막진 못했다.
후우우우웅-.
동쪽의 설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하이볼트에게 닿았고, 하이볼트는 번개를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카인의 살기에서 영혼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경외감과 소름이 느껴버렸으니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나는 죽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살려 준다는 게 무슨 의미-."
스릉.
"의미가 있습니다. 죽여 드린다는 게 아니라 살려 드린다는 거니."
밤을 벼려 만든 것 같이 새카만 아그웨스카가 뽑혔고, 웨인 시케르도 그에 맞서 자신의 검을 뽑았다.
Episode.Ⅰ
봄의 찬미
#89 EP.Ⅰ-23
봄날의 눈 (1)
머리가 반짝이는 로스 후작이 침상을 내려다본다.
침상 위엔 귀조차 숨기지 못한 채 정신을 잃은 시그마리가 색색거리며 누워 있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다."
로스 후작의 맞은편.
시그마리와 똑같은 초록색 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성이 그녀를 진찰하며 말을 이었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여왕님을 강림시킨 탓에 내상이 너무 심각해."
"고칠 수 있겠소?"
로스의 말에 그는 불쾌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인간의 기준으로 십 년이 넘는 시간은 꽤 긴 걸로 안다."
"그렇소."
후우우우웅-.
남자의 눈이 번뜩인다.
"그런데 그대의 말은 걱정보단 쓸 만한 도구가 고장 나서 아쉽다는 느낌이군."
그러나 로스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마주했다.
"그게 우리의 계약이니까. 당신들도 어차피 나를 도구로 쓰는데 내가 왜 정을 줘야 하지?"
엘프와 로스 간의 관계를 꿰뚫는 말.
"...쯧."
남성은 혀를 찼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글루미엠 여왕도 내키지 않고, 그런 여왕과 계약한 대머리 인간 후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엘더 중 하나로서 따르지 않을 수는 없는 바.
미리 숲에서 준비해 온 약재를 시그마리에게 먹였다.
로스 후작은 그의 치료를 지켜보다가 물었다.
"시그마리가 낫기 전까진 나와 함께 일하는 걸로 여왕님께 들었소. 그런데 아직 이름도 못 들었군."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리히스 오히긴(Rhys O'Higgin). 시그마리와 마찬가지로 아홉 엘더 중 하나다."
"그럼 이제부터 리히스 로스 오히긴으로 다니면 되겠군."
귀족의 성을 미들네임으로 넣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리히스는 인상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창가 앞 유리로 만들어진 상자를 보았다.
리히스는 시그마리의 치료를 마치고 유리 상자 속 금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왕께서 만드신 물건 같군. 두 개가 한 쌍이겠지만... 정신 지배라는 고도의 마법을 새긴 것치곤 너무 효과가 약해."
"시그마리가 물리적으로 강하다면 그대는 마법적인 통찰력이 좋은 엘더로군."
리히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로스 후작을 돌아보았다.
인간과 같이 일해야 한다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꾹 눌러 참았다.
로스 후작은 그의 곁으로 와서 금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오."
"조금 우울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게 전부인데? 관을 쓴 걸 애매하게 만드는 인식 저해도 걸려 있군."
"엘프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약하오. 쉽게 부서지고 죽어 버리지."
리히스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일그러진 것처럼?"
하지만 로스 후작은 사람 좋은 미소만 자연스레 지은 후 몸을 돌려 나갔다.
리히스는 그가 나간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깟 사랑 때문에 인간을 배신한 배신자답군."
파직-,
그리고 보관되어있던 금관에 리히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금이 갔고.
순백의 뇌전이 아주 짧게 명멸했다.
* * *
크로이츠 제국을 비롯하여 대륙 대부분의 왕실엔 무기를 들고 들어갈 순 없다.
하지만 아이리안은 그 대부분에 포함되지 않았다.
태생이 엘프와의 전쟁에서 시작된 국가인지라, 왕이라도 기본적으로 엘프와 싸울 수 있는 기사기에 무기를 찰 수 있었다.
그 덕에.
스릉-.
이 궁정 정원에서 카인의 흑색 칼과 웨인 시케르 왕실기사단장의 은빛 칼이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카인은 웨인의 뒤편에 금관을 쓰고 있는 하이볼트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절망에 빠지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왜 사는지도 모르게 되는 걸 자주 봐 왔습니다."
실제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인류 세계의 동방한계선인 대장벽의 평균 생존시간이 72시간인 건 타살도 있었지만, 자살도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장벽엔 그런 자들이라도 필요했다.
'우울의 칼날이라도 적을 죽일 수 있다면 써먹어야 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에 가슴이 일렁였는지.
인간으로서의 모든 '마음'이 죽어 버린 자일지라도 대장벽은 받아들였고, 그들을 전선으로 내보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로드이스트들은 고민했다.
마음의 병을 지닌 자들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지, 회복시켜서 어떻게 잘 싸우게 할지.
그 덕에 두 가지 방법이 정립되었다.
첫 번째는 이득을 제시해서 움직이게 하는 방법.
그리고 두 번째는 마검, '겨울'의 계승자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파지직-.
카인의 왼손에서 순백의 뇌전이 일어난다.
동시에 웨인 시케르의 검날에 천천히 오러가 덧씌워졌다.
사실상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의 오러는 짙고 무겁고 푸르렀다.
그는 일단 점잖게 카인을 말렸다.
"칼을 집어넣으십시오."
"당신의 호의는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칼을 뽑을 때입니다."
"카인 에셀레드!"
쿠구구궁-!
웨인 시케르의 외침엔 상당한 기운이 실려 있었고, 주위의 풀들이 강풍에 휩쓸리듯 흔들렸다.
하지만 카인은 머리카락 끝만 흔들렸을 뿐, 땅에 붙박여 하늘을 향하는 기둥처럼 고요했다.
"웨인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의 하이볼트 전하께서 이상하다는 걸."
"...."
그 역시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상해졌다고 해도 하이볼트는 하이볼트인 만큼 웨인 시케르라는 기사를 움직이는 건 왕명뿐이었다.
일촉즉발의 대치.
"너와 같은 나이일 때 에드먼드가 누굴 이겼는지 아는가?"
그걸 깨는 건 하이볼트의 말이었다.
"잘 모릅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용사 아벨도 그렇게까지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선대 에셀레드 백작이었다."
인형처럼 단단했던 하이볼트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감정이라는 게 엿보였다.
하지만 너무 미약하여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에드먼드가 천재인 건 알았다.
그러나 늘 강한 자가 백작을 맡는 에셀레드의 선대를 열일곱의 나이에 이겼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장벽의 전사와 용사의 아버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지만, 왕으로부터 직접 들으니 말의 무게가 달랐다.
"그리고 당시 에셀레드 백작의 수준이 지금의 웨인 경과 비슷하겠어. 그도 잠시나마 왕실기사단장의 역할을 했었으니까."
"칠대 귀족가의 백작이 말입니까?"
하이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올리시렌과 카인을 번갈아 본 후 자조했다.
"내 나라긴 하지만 아이리안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지. 당시 일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아마 비슷할 거다."
"그렇군요."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왕 앞에서 칼을 꺼내도 이렇게 평안한 것만 봐도 얼마나 아이리안이 전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인지 엿볼 수 있다.
그러니 왕국 최고 귀족들 중에 하나인 에셀레드 백작이 기사단장에 앉을 수도 있었겠지.
'아이리안이 아니라 제국의 궁정 정원에서 이렇게 칼을 뽑았다면 황실기사 전원이 날아왔을 텐데 여기라 다행인 건가.'
카인은 내심 쓰게 웃으면서 아그웨스카를 들었다.
"이기면 제 맘대로 전하를 살릴 수 있습니까?"
하이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금 인형 같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웨인 경이 패배한다면 그대를 막을 자도 없으니까 말이야."
"...."
카인과 올리시렌이 그를 바라보았다.
티끌만치도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올리시렌은 탁자 아래로 주먹을 쥐었고.
후우우웅-.
카인에게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이름을 붙이자면 투쟁이라!
하지만 카인의 칼날엔 오러가 없었다. 그 뜻이 명백한 바, 웨인 시케르는 하이볼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러를 꺼내 전력으로 맞부딪칠지, 오러 없이 검만 나눌지 전부 그의 의견대로 하겠다는 신호였다.
"에드먼드 정도는 아니지만, 웨인 경도 소드마스터긴 하다. 그리고 그대는 그렇게 불리고 있고. 둘이 오러를 꺼내 전력으로 싸우면-."
하이볼트는 손을 들어 정원을 가리키곤 그 너머에 하늘로 치솟은 회색 궁전을 가리켰다.
"왕궁의 대마법결계가 충격을 상쇄한다고 해도 꽤 박살 날 테니 오늘은 검으로만 겨루게."
어조의 변화도 하나 없는 하이볼트의 명령에 웨인은 절도 있게 충성을 외쳤다.
"예스, 유어 마제스티."
사실상 카인을 반역자가 아니라 백작의 장자나 올리시렌의 조력자로 인정하겠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둘에게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스윽-.
스윽-.
카인이 움직인다.
발이 땅을 쥐듯 무겁고 천천히 그러나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위치를 바꾼다.
웨인 역시 카인의 맞은편에서 서로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팟-.
선공은 웨인이었다.
그는 몸무게의 절반 이상 가벼워진 것처럼, 바닥이 파일 정도로 카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후우우우웅-.
자로 잰 것보다 정확하게 그의 칼날이 일직선으로 쏟아진다.
'깔끔하다.'
카인은 자기 귀를 자를 듯 짓쳐 오는 칼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채앵.
칼날의 중간 부분을 아그웨스카로 정확하게 쳐 내면서 검격을 밖으로 빗겨냈다.
하지만 웨인 시케르는 놀라지 않았다.
곧장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고.
기기기기긱-!
아그웨스카와 그의 은빛 검이 괴성을 자아냈고 주홍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둘의 눈동자에 불꽃이 번뜩였다.
'예리하군.'
틱-.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기울이며 웨인의 칼날에 더욱 무게를 실은 후 아예 밖으로 튕겨 냈다.
채앵-!
하지만 웨인은 가볍게 검을 거둬들이며 다시 달려들었다.
달려들고 튕겨 내고, 불꽃이 튀며, 두 사내의 땀방울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
탓, 탓.
무도회장의 중앙에서 춤을 추듯 둘의 발이 현란하게 얽힌다.
서로가 상대인 이상 오러 없이 검술만 겨룰 때 큰 기술을 꺼낸다면 곧장 물어뜯으려고 올 터.
작은 기술로 상대의 틈을 벌리려고 했다.
섬뜩한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는 은빛 칼날과 그 모든 궤적을 읽어 내면서 가장 빠른 길로 내달리는 흑색의 칼날!
그 고도의 공방에 밴더빌트와 올리시렌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체는 카인 공자님이 부족합니다."
이소엘은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웨인 시케르는 사십 대, 십 대 후반인 카인에 비해 육체는 노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간 단련해 온 세월은 그 차이를 무시했다.
게다가 웨인은 근육 한 올 한 올까지 오러로 재구성한 듯 기기묘묘한 움직임까지 어렵지 않게 보였다.
"하지만 기술은 공자님이 위입니다."
밴더빌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이소엘이나 하이볼트 역시 마찬가지.
에드먼드가 천재였으니 그 아들인 카인이 천재적인 재능을 지닐 순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재능뿐이다.
왕실기사단장을 상대로 신체 능력이 부족함에도 비등비등한 승부를 가릴 정도로 기술이 완벽하다는 건 모로 봐도 이상했다.
"거쳐 온 지옥의 숫자가 다르다는 것인가."
하이볼트의 눈이 깊이 침잠한다.
후웅-!
웨인의 공격은 강하고 빠르고 올곧았다. 아이리안 왕실 검술 '칸트레브'에 모든 삶을 쏟아 낸 강철의 기사다웠다.
틱.
그러나 카인은 달랐다.
얼굴을 노리는 웨인의 칼날을 옆으로 피하기도 하고.
후욱-.
뒤로 허리를 완전히 접어 빗겨내기도 했다.
웨인의 똑같은 공격에 단 한 번도 같은 방어를 하지 않는다. 초마다 바뀌는 격투 방법에 바위 같은 웨인마저 질릴 것 같았다.
퍼억-.
그 순간.
공방이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
쉐에에에에-.
아그웨스카가 한층 더 가속했다.
목표는 웨인의 목!
쿠웅.
그러나 웨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카인의 위협적인 찌르기에도 그는 더더욱 위험에 가까이 다가가 기회를 만들었다.
그대로 칼을 수직으로 들었다.
칸트레브 Cantref.
바위조차 쪼갤 거력이 떨어져 내린다.
쿠웅.
웨인과 똑같은 걸음.
카인은 씨익 웃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오러를 일으키지 않는다 한들 그 역시 검에 인생을 바친 자!
웨인의 일격은 카인에게 대장벽의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무거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다시 쥐며 찌르기에서 그가 수천수만 번을 휘둘렀던-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횡의 궤적을 흑색의 절망으로 그었다.
까아아아아앙-!
귀를 찢어 버릴 것 같은 폭음이 울렸고.
"동방의... 검?"
휘청-.
그 순간 승패가 가려졌다.
#90 EP.Ⅰ-23
봄날의 눈 (2)
에드먼드 이후 새로운 수호검.
왕실기사단장 웨인 시케르.
그가 카인의 앞에 주저앉았다.
티잉-.
그 앞으론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진 절반의 검날이 꽂혔다.
"혹시 비싼 칼입니까."
카인은 부러진 칼날을 턱짓하며 물었다.
적확하게 들어맞은 키리에와 카인의 마음이 꺾이지 않는 이상 부러지지 않는 칼, 아그웨스카의 조합이 만든 결과였다.
"마지막 그 검술, 동방의 것입니까?"
그러니 웨인이 답하는 건 다른 의문이었다.
부러진 검이나 패배 따위보다 그를 현혹하는 건 카인이 그려낸 흑색의 궤적이었기에.
잡힐 듯 말 듯 어른거리는 그 검로를 물었고, 카인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었다.
-암천일광이라는 이름을 듣고 궁금하지도 않았느냐. 서방 인류세계 어디에도 없는 말인데?
스승, 조니 워커에게 일 년 반쯤 배웠을 때 들었던 질문이었다.
살아남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던 시기라 별 관심 없었다고 하자 그는 크게 한숨 쉬었다.
그러곤 암천일광의 근원을 말해 줬다.
-이제는 멸망한 동방의 말이다. 우리의 부서진 소망과 동방의 전설이 더해진 검이지.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기에 대장벽의 로드이스트쯤 되니 신기한 검술을 쓰는구나 생각했을 뿐, 정말 동방에 뿌리가 닿은 것인지는 몰랐었다.
즉, 카인을 비롯하여 역대 로드이스트가 계승하고 발전시킨 암천일광은 '암천일광(暗天一光)'이었다.
하지만 단번에 그 근원을 알아볼 만큼 동방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카인이 대답 없이 계속 웨인을 내려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검술의 내력을 묻는 건 실례일 테니."
그러곤 조금 눈이 커져 있는 하이볼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 신, 웨인 시케르, 패배하였습니다."
"봤다."
"하지만 전하께서 죽이라면 죽이겠나이다."
우우우우-.
웨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 정원의 덤불에서 하나둘 낯선 눈들이 나타났다.
각자의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한 가지 같은 건 모두 기사라는 것.
카인도 하이볼트를 돌아보았다.
왕실기사단의 기척은 진즉에 느끼고 있었고, 이런 대련이 아니라 정말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운다면 저들도 투입될 터.
'엘븐나이트보단 강하군.'
개개인의 실력 자체는 위였다.
다만 엘븐나이트의 가공할 회복력을 고려하면 이 정도 실력 차이는 어느 정도 상쇄될 터.
카인이 냉정하게 전력을 살피고 혹시라도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략을 짤 때.
하이볼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웨인 경도 알다시피 나는 몇 년 전부터 왜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죽어서 편안해지고 싶었지."
풍성한 회색의 머리가 출렁인다.
그러나 아까 전부터 거슬리던 금관은 접착제라도 붙여 둔 듯 꿈쩍하지 않았다.
하이볼트는 자신과 똑같이 회색 눈과 회색 머리를 한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저 아이를 왕위 계승자로 올린 이유는 알지만, 지금에 와서는 당시의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도 없다."
마음이 죽은 왕, 하이볼트.
자신에게 이득인 게 무엇인지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감정이 사라진 인형이 천천히 카인의 앞으로 걸어왔다.
"너는 이런 나를 바꿀 수 있겠느냐."
푸욱.
카인은 들고 있던 아그웨스카를 정원의 흙에 꽂은 다음 오른손을 들었다.
"가능합니다."
"해 보거라. 왜 고쳐야 하는지 가슴으론 이해하지 못하나, 머리론 의아해하고 있었으니까. 웨인 경을 이긴 그대라면 믿어 보지."
카인은 손가락으로 하이볼트의 머리 위에 늘 있던 금관을 가리켰다.
"그럼 우선 관부터 들겠습니다."
"관?"
하이볼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카인은 옆에 있는 웨인을 돌아보았고, 그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 반응에 좀 더 넓게 둘러보았다.
하이볼트는 카인의 말에 제 머리를 만졌다. 하지만 절묘하게 관은 빗겨나갔다.
"아무것도 없다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파직-!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순백의 뇌전이 튀었다.
['겨울'이 은닉된 진실을 일부 드러냅니다.]
그 순간 카인을 중심으로 뼛속까지 파고드는 묘한 한기가 퍼져 나갔고.
스으으읏-.
"아-!"
웨인은 경탄했다.
왕실기사 중 몇몇은 자신들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제 눈을 비볐다.
하이볼트는 그들의 반응에 다시금 머리에 손을 올렸다.
잡히는 게 있었다.
"내가 정말... 관을 쓰고 있었군."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평상시에 금관을 쓰고 다니는 왕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왕은 관을 쓴다.
그렇다고 매일 쓰진 않는다.
왕으로서 권위를 보이거나 타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만 쓰는 것이 관인데, 하이볼트는 이런 정원에 나올 때마저 쓰고 있었으니 퍽 이상했었다.
'인식 저해였군.'
왕궁엔 대마법 결계가 펼쳐져 있다.
만약에라도 왕궁이 위협을 받을 시 마법을 걸러내는 결계로 감도 설정이 중요했다.
너무 약한 마법까지 다 감지하면 불편하기도 하고 들어가는 힘도 과도하기에, 일정 이상의 마법만 감지하고 막는 게 일반적인 대마법 결계의 구성이다.
"떼겠습니다."
하이볼트는 고개를 숙여 제 머리를 카인에게 맡겼다.
카인은 가볍게 금관을 들었다.
파지직-.
다시금 뇌전을 일으켰고 금관의 구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대마법결계의 감지 수준을 빗겨냈다.'
아예 숨기거나 가리는 수준이면 걸릴 테지만 이 금관은 '평범하게 있을 법한 물건'을 '인식이 거의 되지 않게' 하는 수준의 미약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절묘한 인식 저해와 감정조절입니다. 그리고...."
카인의 눈엔 금관에서 빠져나온 초록의 선이 북동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이것과 연결된 것도 있군요. 아마 이 금관의 문제가 생길 시 바로 알아차리기 위한 도구로 보입니다."
"자네는 마법에 대해 잘 아는군."
하이볼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간 그를 보았을 때, 마음이 죽었다지만 간혹 감정을 표현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에드먼드와 관련될 때였다.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카인은 그가 할 다음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에드먼드의 아들이 이런 걸 잘 아니까 신기하십니까."
"부정할 수 없군."
카인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기분이 어떠십니까?"
"개운하군. 그간 늘 잡혀 있던 발목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의 감정을 늘 부정적으로 만들던 물건이 떨어졌으니 개운하리라.
그러나 그간 바닥을 넘어 심연까지 빠졌던 감정이 한 번에 회복될 리는 없다.
그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카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자네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카인의 친모, 클로에 라마이닝.
그녀를 마녀라고 신전에 고발한 자, 하이볼트니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으리라.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의 말은 천천히 하시죠. 그리고 제가 마법을 딱히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주술에 가까워서 쉽게 알아차린 겁니다."
"주술?"
"마법이 만들어지기 전 비술입니다. 단순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술식 보안이 없어서 인지만 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대장벽에서 지겹게 봐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파지지지지직-!
카인은 다시금 오른손을 들었다.
손에선 순백의 번개가 당장이라도 적을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그럼 살려 드리겠습니다."
하이볼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웨인이 달려와서 카인의 손목을 잡았다. 그 반대편엔 하이볼트의 손도 있었다.
"지금, 이걸 내 머리 위에 올릴 생각인가?"
하이볼트의 회색 눈엔 번쩍이는 뇌전의 빛이 명멸했다.
"예."
"...금관을 벗었으니 이제 나아질 것 같네만."
"어림도 없습니다. 머리에 남은 걸 깨끗이 쓸어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걸로 나를 지진다고?"
파지지지직-.
소리부터 생김새까지.
사람의 몸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울 뇌전에 하이볼트가 머뭇거렸다.
"이게 효과가 최고입니다."
"많이 해 봤나?"
카인은 과거 대장벽 시절을 떠올렸다.
-차라리 죽여라, 카인 로드이스트! 이딴 고문에, 내가 꺾일 성싶더냐!
-으아아아아악, 제발 살려....
-싸우겠습니다, 싸우겠단 말입니다!
이득도 계산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죽어 버린 자들에게 했을 때, 매번 잘 먹혔었다.
물론 '겨울'의 힘을 쓰는 만큼 피로도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지금의 카인으로도 가능한 일.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주 효과가 좋았습니다."
"...정말로?"
"예, 전하. 저 못 믿으십니까?"
"솔직히 못 믿네. 왕 앞에서 칼 꺼내고 목을 딴다는 사람을 어떻게 믿는가."
카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논리정연한 하이볼트의 말에 자신을 돌아보니 충분히 그럴 만하긴 했다.
하이볼트는 굳은 카인을 보며, 이전의 그라면 짓지 않을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네, 하게."
"전하-!"
웨인 시케르가 그를 불렀다.
하이볼트는 잡았던 카인의 손목을 놓고 웨인의 손도 풀었다.
"이 지독한 허무 속에서 나를 꺼낼 수 있다니 믿어야지."
"아직 하실 말도 많고, 하실 일도 많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인은 씨익 웃었다.
텁-.
그리고 하이볼트의 머리 위로 오른손을 얹었다.
웨인은 불안한 눈초리로 둘을 번갈아 보았고, 올리시렌도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따끔합니다."
"따... 끔?"
갑작스러운 말에 셋은 카인을 쳐다보았다.
"어른이라면 다 참을 정도입니다. 참으십시오."
파지지지지직-!
'겨울'의 뇌전이 일어난다.
신기의 힘을 얻은 그 순간부터 카인의 온몸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끊임없이 성장시키던 순백의 힘이 하이볼트를 향해 쏟아졌다.
『삼하인(Samhain)의 '겨울'... 개방.』
'...이게 왜 지금?'
카인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순간 굳었다.
미래를 소모하며 겨울의 힘을 끌어낼 때만 개방되던 겨울의 각성 형태가 저절로 일어났고.
콰가가가가강-!
그 순간 마른하늘에서부터 순백의 번개가 카인의 오른손을 내리찍었다.
그 여파에 웨인마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원에 긴 자국을 남기며 밀려났다.
"전하-!"
그는 어떻게든 하이볼트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둘에게서 일어나는 엄청난 힘에 쉬이 다가갈 수 없었다.
하이볼트의 두 눈이 갈 곳을 잃어버린 채 헤맸고, 전신으론 순백의 뇌전이 튀며 푸들푸들 떨리게 했다.
"으아아아아!"
보다 못한 웨인은 오러를 일으키며 필사의 각오로 다가갔다.
후웅-.
하지만 그 순간, 끝났다는 듯 궁전을 순백의 색으로 물들이던 뇌전이 멈췄고, 카인의 오른손이 떨어졌다.
스으으으으-.
하이볼트의 그림자에서 초록색의 잔영이 일렁이며 빠져나오려 했다.
"웨인 경!"
반쯤 혼절한 하이볼트를 웨인 시케르에게 맡겼다.
땅에 박혀 있던 아그웨스카를 들어 도주하려는 초록의 잔영을 횡으로 그어 버렸다.
'지독하게도 쌓여 있었군.'
마음이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를 짓누르던 부정적인 감정이 방금 사라졌다.
카인은 눈을 끔뻑이는 하이볼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방금 남아 있던 마법의 잔재까지 없앴습니다."
"개운하군. 아주 개운해."
하이볼트는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피며 자연스레 웃었다.
"인간의 마음은 나약하군. 아주 조금 방향성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후회되고 아프니 말이야."
그러곤 멀리서 바라보던 올리시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올리시렌은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와, 바로 옆 풀밭에 무릎 꿇고 앉았다.
"전할 말이 많지만, 어떤 말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구나."
올리시렌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예, 아버님."
"괜찮다고 생각했다. 왕이 될 자라면 응당 겪어야 할 시련이라고 여겼고, 이겨 내지 못한다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이볼트는 담담히 그의 생각을 고백했다.
"카를라와 나의 귀한 딸아, 미안했다."
"아닙니다."
올리시렌의 큰 눈에 물기가 서린다. 그간 말하지 못했던 하이볼트의 냉대에 얼었던 가슴이 녹는 기분이었다.
꾸욱-.
하이볼트는 그녀를 쥔 손에 힘을 더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놈은 안 된다."
"예?"
그의 손과 발이 떨린다.
카인의 뇌전에 휩싸였을 때, 느꼈던 고통이 떠오르면서 바로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놈은 에드먼드와 똑 닮은 놈이야."
올리시렌과 웨인이 카인을 돌아보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따끔하신 걸 텐데, 전하께서 엄살이 심하신 모양입니다."
하이볼트는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고함쳤다.
"조금!?"
"뭐 그럼, 생각보다 더 따끔하신 걸로 하시죠."
"카인 에셀레드!"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뻔뻔한 카인의 말에 하이볼트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죽음만을 바라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91 EP.Ⅰ-23
봄날의 눈 (3)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만남은 잠시 멈췄다.
하이볼트에겐 금관이 내리누르던 우울을 털어 낼 시간이 필요도 했으며, 카인 역시 그러했다.
시그마리의 습격에서부터 대주교와 맥로든 후작 그리고 왕궁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사건들을 몇 개나 하룻밤 사이에 겪었으니까.
다만 잠은 자지 않았다.
올리시렌이 자랐던 '백은의 궁'에 딸린 아주 작은 정원에서 햇빛을 받으며 아그웨스카와 함께 누워 있었다.
휘이이이-.
기분 좋은 듯 두 팔을 머리에 받치고 다리를 반쯤 꼰 채 휘파람을 부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량이었다.
"편해?"
올리시렌이 홍차가 찰랑이는 잔을 들며 물었다.
카인은 눈도 뜨지 않고 대꾸했다.
"전혀."
"하는 건 편해 보이는데."
"여긴 우리 넷밖에 없으니까.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전사는 쉴 때도 전력으로 쉬어야 해."
올리시렌은 그 말에 대답지 않았다.
다만 동쪽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카인의 앞머리를 우묵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카인 에셀레드.
에셀레드 백작가의 장자.
매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행동하고 달려들지만, 그의 어깨에 실려 있는 건 이제 아이리안 왕국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런 카인이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모두 그만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어쩌면 지금이 그가 마지막으로 맛보는 휴식이 아닐까.
이끄는 자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녀에겐 카인의 모습이 왠지 시리도록 아파왔다.
"너도 잘 기억해 둬. 쉬는 것도 수련이야."
"쉬는 건 내가 세상 누구보다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올리시렌의 속내는 전혀 모르는 카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밴더빌트."
"예, 공자님."
"가문에서 연락 온 건 있나?"
올리시렌과 같은 탁자에서 과자를 집어 먹던 노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괜찮나 보군."
올리시렌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생각나는 게 있었다.
"크로울 기차역에서 에셔 경하고 아벨을 에셀레드로 돌려보낸 그거?"
"응."
"왜 보냈는지 아직도 말 못 해 줘?"
벌떡.
카인은 상체를 들어 올리곤 바닥에 앉았다. 가볍게 눈꺼풀을 뜨며 보랏빛 눈을 반짝였다.
'백은의 궁'에서 빛을 발하는 은빛과 햇살, 그리고 아주 작은 정원의 초록이 뭉친 그 눈은 올리시렌을 응시했다.
"아마 이제 곧 들을 수 있을 거다."
"...?"
"온다."
카인 다음으로 밴더빌트, 이소엘, 올리시렌 순서로 무엇이 오는지 알았다.
궁의 문이 열리고 한결 가벼워진 걸음의 하이볼트가 웨인 시케르만을 데리고 걸어왔다.
넷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하이볼트는 고개를 살짝 꺾어 웨인에게 말했다.
"초롱초롱하게 날 바라보니 좀 부끄럽군."
"...."
웨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왕의 마음이 건강해진 건 좋지만, 조금만 덜 건강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란 작은 생각을 지우면서.
"어디 회의실에서 이야기할까 했는데, 역시 정원이 좋겠군."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자신들이 먹던 찻잔을 들며 일어났다.
하이볼트는 그들에게 눈인사하며 밴더빌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밴더빌트 경."
자신의 이름을 왕이 알고 있을지 몰랐던 밴더빌트의 두 눈이 커진다.
"네, 국왕 전하."
조금 어색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에셀레드는 여전히 에셀레드인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거기 기사들이 저번 원정 때 별명을 얻었던 것처럼 여전히 무식하고 강력하냐는 의미였네."
카인은 에셀레드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목재 중 가장 귀하다는 북방의 나무로 만든 에드먼드의 가구들.
칠대귀족 중 가장 가난한 에셀레드 백작령이니 돈 주고 사진 않았을 터.
당연히 에드먼드가 기사들을 이끌고 나갔던 11차 북방원정 중에 뜯어 왔으리라.
"전하, 제가 말할 사안이 아닌 듯하옵니다."
"호오?"
밴더빌트는 카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에셀레드의 정명하신 주인이 여기 계시니, 제 답보단 카인 공자님의 말씀이 적확할 것이옵니다."
짝짝-.
하이볼트는 두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웨인이 익숙하게 하이볼트의 앞에 찻잔을 세팅하곤, 찻물을 따랐다.
"저 작은 에드먼드가 그 무식하고 무서운 메뚜기들을 꺼내고 있어서 물은 건데, 내가 묻는다고 말해 줄까."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향했다.
반면 둘의 대화를 듣던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인이 에셀레드 기사단을 움직인다는 말씀이신가요? 딱히 들어온 첩보는 없었어요."
아벨을 보낸 시점에서 대충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왕실정보국에서 에셀레드 기사단의 출격을 말하지 않았기에 여태 의아했을 뿐이다.
하이볼트는 올리시렌을 잠시 보다가 카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좋으냐. 어린애를 놀려먹으니."
카인은 씨익- 미소 지었다.
"어린애라는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 올리시렌이 명백히 저보다 연상입니다만."
"로스 여우의 수작을 부수고, 영지의 혼란을 잠재웠지. 그 후 라마이닝과 크로울 백작령도 접수했고 여기 마탑주와 대주교의 지지까지 받아 낸 놈이면 어른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다. 네놈을 무조건 제 편이라고만 생각하는 내 딸에게 전하는 경고다."
"...?"
가만히 듣고 있던 올리시렌은 큰 두 눈을 끔뻑였다.
"일개 범부라면 평생을 기울여도 어려운 일들을 이 녀석은 고작 봄이 절반 지났을 때 해결했다."
"전하의 저주도 끼워 주시죠."
"...그래, 그것도. 아무튼 이런 놈이 준비하는 일을 왕실정보국이 완벽히 포착해서 네게 보고를 올릴 정도면 늦다."
"설마."
방금도 물었듯 아벨을 보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에셀레드 기사단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아귀가 딱딱 맞았다.
자신이 프리문디에게 마녀의 자격을 시험받기 위해 에셀레드에 방문했을 때, 아벨을 부기사단장에 꽂았던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크고 정교한 카인의 그림에 올리시렌은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저놈은 에셀레드에 웅크리고 있던 기사단을 전부 북방으로 보낼 속셈이야."
하이볼트 역시 올리시렌과 똑 닮은 회색 눈으로 카인을 돌아보았다.
"혹시 다른 라인이 있으신 건가요?"
올리시렌의 물음에 하이볼트는 곧장 혀를 찼다.
"쯧, 정보는 가공되기 전도 중요하다. 에셀레드의 식량 흐름이 지금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올리시렌이 입을 꾹 다물자 하이볼트는 방금 자신이 찾아낸 정보들을 입에 담았다.
"라마이닝에서부터 곡식과 함께 장기보존식도 같이 받는다고 하더구나. 게다가 에셀레드의 대장간에 불이 안 꺼진 지 벌써 꽤 되었지."
올리시렌은 왕실정보국에서 이러한 작은 정보들을 모아서 정리한 자료를 받았다.
하지만 하이볼트는 작은 정보들을 직접 조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도달하는 결론은 같을지라도, 그 결론을 도출해 내는 시간은 하이볼트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물론 모든 정보를 이렇게 할 순 없단다. 하지만 그래야 하는 곳은 해야 해."
"아버님에게 에셀레드는 그렇게까지 살펴야 하는 곳이군요."
"당연히."
하이볼트는 단언했다.
그는 딴청 피우는 카인을 검지로 가리켰다.
"에셀레드엔 두 마리의 괴물이 사니까. 첫 번째는 에드먼드. 두 번째는 저놈이 부른 <블러드하퍼> 기사단이다."
하이볼트는 그대로 밴더빌트를 돌아보았다. 그 이름이 익숙한 노기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반면 생전 처음 듣는 <블러드하퍼>라는 이름에 올리시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카인 역시 마찬가지.
'이름만 들으면 좀 있어 보이는군.'
풀과 곡식을 뜯어먹는 메뚜기를 보통 그래스하퍼라고 표현한다.
메뚜기 하나둘은 무섭지 않아도 떼거리로 날아든다면 재앙인데, <블러드하퍼>라고 기사단을 칭하는 건 피를 삼키는 재앙이란 의미니 나름 있어 보이는 기사단 같았다.
"너도 처음 듣느냐...."
다만 하이볼트는 카인마저 그러니 어이가 없는 눈치.
카인, 올리시렌, 이소엘까지 젊은이 셋 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볼트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에셀레드엔 평상시엔 좀 우직하다 못해 멍청한 기사들만 있을 거다."
"예, 맞습니다."
오죽하면 로스의 필립이 아벨을 데리고 와서 깽판을 쳐도 에드먼드가 가만히 있으랬다고 정말 가만히 있었을까.
두 번째 삶에선 그들이 바뀌어서 별 신경 쓰진 않았지만, 정도가 심하긴 했었다.
"에드먼드가 일부러 그런 애들을 뽑아서, 그렇게 키웠다. 무식하게 강한 놈이 아니면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고."
"...!"
"그 덕에 지난 원정에서 에셀레드 기사단이 <블러드하퍼>라고 불렸지. 지나갈 때마다 엘프들의 머리가 메뚜기에 뜯긴 것처럼 사라진다고."
"아하."
"그뿐일까. 전직이나 퇴역기사들이 모여드는 곳도 에셀레드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리안 건국전쟁 이후, 귀족은 육대귀족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었다.
그때 섬 밖에서 온 이질적인 기사가 공포에 가까운 검으로 굳어진 세력을 갈라 자리를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에셀레드 백작가다.
이후 알게 모르게 에셀레드 영지는 기사의 고향이라 여겨졌다.
게다가 웃기고도 슬프지만, 아이리안 섬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라는 것도 오래된 기사들이 몰리는 이유기도 했다.
'밴더빌트가 자주 추억하는 과거와 지금의 에셀레드는 차이가 없으니까.'
카인은 쓰게 웃었고 하이볼트는 말을 이었다.
"에드먼드가 있을 땐 틈틈이 그들의 칼을 봐줬으니 네 부름에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을 거다. 집계되지 않은 기사 수가 얼만지 감도 안 잡히는군."
하이볼트가 호들갑처럼 에셀레드의 기사단을 경계하는 걸 봐도 카인은 무덤덤했다.
늘 원망만 했던 아비의 기사단은 관심 없다.
'게다가 대장벽의 전사들에 비하면 손색이 커.'
대장벽이라는 모루와 죽음이라는 망치가 제련해 내는 전사들을 지휘하던 카인으로선 에셀레드가 어떻든 어차피 눈에 차지 않았다.
영 시큰둥해하는 카인의 반응에 하이볼트는 가슴을 치곤 물었다.
"그래서 몇이나 불렀느냐. 로스 쪽 북방기지로 집합시킨 모양이던데."
"전부입니다."
"...뭣?"
"올 수 있는 사람 다 오라고 했습니다."
최소한의 병력만 에셀레드에 남기고 전부 불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엘프들을 상대해야 하는 데다가, 일이 잘못 풀리면 두 후작의 기사단들도 상대해야 할 게 뻔했으니까.
가능한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하이볼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개 후작은 최대 70명, 백작은 30명의 기사를 둘 수 있는 제한이 있는 건 아나?"
"로스 쪽은 더 많은 듯합니다만."
"그건 숨기는 것도 있겠고, 휘하 귀족가의 기사를 대여하는 형식으로도 불려서 그렇다."
"뭐, 그렇군요."
"왜 알면서 안 말렸는지는 안 묻나?"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뻔하지 않습니까. 기사 하나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엄청난데 로스에서 알아서 다 부담한다고 하니 말라 죽으라고 일단 둔 것이겠죠."
"처음엔 그랬지. 어느 순간부터는 건드리기엔 너무 커져서 두었고."
지극히 냉철한 분석.
하이볼트는 자신과 말하는 상대가 열일곱의 귀족 공자가 아니라 구를 대로 구른 노회한 장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런 느낌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에셀레드의 모든 기사급은 몇이나 될까?"
"전하의 반응을 보아하니 30은 넘어 보이는군요."
"자금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 묻힌 자들까지 긁어모은다면 아마 150은 되지 않을까 한다."
공식적으로 백작이 지닐 수 있는 기사 수의 다섯 배, 후작에 비해서도 두 배에 다다르는 수.
게다가 에드먼드라는 존재까지 있었으니 에셀레드가 지닌 위엄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로스 후작이 같잖은 수를 써서라도 에셀레드를 가지려던 이유도 알 수 있었고.
카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면 뭐합니까. 부르긴 했어도 돈 없어서 금방 흩어질 처지인데요."
라마이닝, 크로울, 웨어햄.
다른 백작가들의 도움까지 있으니 그리 쉽게 흩어지진 않을 터.
그러나 카인은 하이볼트의 속내를 꿰뚫어 봤기에 약한 소리를 던졌다.
하이볼트는 씨익 웃으며 허리 허리춤에서 손도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내가 해결해 주지. 이소엘의 크레드네와 함께 왕국 삼대 보물로 불리는 도끼, 헤드브레이커다."
푸욱-.
도끼 하나를 풀밭에 던져 꽂더니, 하이볼트는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카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와 왕실의 무력을 상징하는 녀석이다. 이걸 쥔다면 물자의 보급 정도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운 권력을 줄 것이야."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8.5%]
#92 EP.Ⅰ-23
봄날의 눈 (4)
아이리안에서 삼대 보물로 취급되는 도끼이자 아이리안 독립의 상징.
수확의 도끼, '헤드브레이커'.
"아이리안 초대 국왕께선 당시 엘프 여왕의 대가리를 저걸로 부쉈지."
날부터 손잡이까지 마법적 처리를 거친 금으로 만들어 번쩍거린다.
손가락이 닿기만 해도 베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움이 서려 있고, 도끼날을 타고 은은한 붉은 아지랑이가 살랑인다.
전대 엘프 여왕의 머리를 부순 무기라는 게 허명으론 보이지 않았다.
"크흠, 전하."
다만, 그의 자유분방한 언동에 웨인이 헛기침으로 말렸다.
"그럼 골통?"
물론 하이볼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손짓으로 웨인에게 다물라고 신호하며, 둘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명확히 아는 하이볼트가 씨익 웃었다.
"총사령관이든 법이든 무력에 한해서는 도끼의 주인에게 뭐라고 할 수 없다."
아이리안 내 모든 규칙과 법의 위에 존재하는 '헤드브레이커'.
아무리 북방원정의 총사령관이 대단하다고하나 헤드브레이커의 주인에겐 명령할 순 없었다.
게다가 에셀레드의 기사단이 전원 집결하는 것도 지원받을 수 있다.
그야말로 아이리안 왕가를 상징하는 최강의 도끼.
하이볼트는 자신이 땅에 박은 헤드브레이커를 턱짓했다.
"가져가라, 올리시렌."
"...!"
"왕실의 무력을 상징하는 헤드브레이커라면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너."
하이볼트는 카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드먼드보다 독한 놈."
"욕이 심하시군요."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헤드브레이커의 권위가 지켜 줄 것이야."
카인은 무언가 기대하는 듯 웃고 있는 하이볼트를 마주 보며 따라 웃었다.
"기대하시는 그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 첫째 딸은 마녀고 둘째 딸은 엘프랑 손잡은 후작이랑 같이 있고, 둘 다 왕위 계승권자로서 실격인데 그림이라도 괜찮아야지."
"...."
달라진 하이볼트 덕에 답답한 현 상황을 깨부술 방법은 얻었지만, 근본은 그대로.
헤드브레이커를 집어 든 올리시렌은 입을 다물었다.
마녀라는 게 알려진다면 왕위는커녕 아이리안에 살아남기도 어렵다는 현실이 짓쳐 든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누군가 이기도록 하고 싶지도 않다."
카인은 곧장 오른손을 들었다.
파지지직-.
은은한 뇌전 소리가 들렸고 하이볼트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내리거라."
"아직 저주의 영향이 남아 계신 것 같습니다만."
다시금 '겨울'의 뇌전으로 충격을 주겠다는 카인의 말에 하이볼트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건 원래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니 백날 그 번개로 날 지져도 바뀌지 않아."
카인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고 그 모습에 하이볼트는 몸서리쳤다.
"올리비아를 단독으로 총사령관으로 올린 건 명백히 내 실수니, 이제라도 수습하려고 꺼냈지."
"그래서 원하는 게 어떤 겁니까."
"압도적인 승리. 혹은 압도적인 패배."
하이볼트는 단언했다.
그의 형형한 회색 눈이 왕으로서 둘을 내려다본다.
조금 가벼워지고 조금 솔직해졌지만, 그는 지금도 이전에도 이 아이리안의 정명한 절대자.
그의 말은 늘 무거웠다.
"이제 둘의 조건은 같다. 누가 더 엘프를 많이 죽이는지, 글루미엠을 죽이는지에 따라 향후가 달라지겠지."
"야만적이군요."
문명의 시대에 정점이 되는 길이 엘프를 죽이는 것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러나 카인은 미소 지었다.
문명이란 옷으로 감싸도 결국은 싸움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순간이었으며.
'내게 가장 익숙한 방법이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던 전사에겐 편한 방식이었으니까.
"어떻게 싸우라고 말하진 않겠다. 어차피 잘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다만...."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일방적으로 기울어 버린 판을 '헤드브레이커'를 통해 돌려 둔 하이볼트의 말이라면 끝까지 기다려 줄 용의가 있었다.
그는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속내를 꺼냈다.
"어떻게든 내 딸이 다치지 않게 해 다오."
"...."
"제 어미를 잃은 딸이다. 제 아비에게마저 버려졌던 딸이다."
바람이 분다.
봄바람에 실린 진심은 무엇보다 무거웠기에, 카인과 올리시렌은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온 왕이기 전에 아버지였던 하이볼트만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겨도 올리비아가 죽지는 않게 해 다오. 져도 올리시렌이 죽지는 않게 할 테니. 나는 이 손으로...."
하이볼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하얀 두 손을 들었다.
씻은 지 얼마 안 된, 깨끗하고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남자의 손이다. 허나 봄바람에 함께 실린 것은 피의 비릿함이었다.
"내 형제들을 죽였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였어. 이 땅에 '아이리안'이라는 성을 이어받는 자는 단 셋만 남겨 뒀다."
하이볼트, 올리시렌, 올리비아.
이렇게 왕족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이유는 하이볼트가 일으킨 '피의 호수' 사건 때문.
왕국의 역사를 한 번이라도 살펴본 자들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숙청이었다. 하이볼트는 제 손에 피를 묻혀서 난잡했던 왕실을 올바로 세웠다.
"처음엔 나와 달리 내 딸 둘은 서로가 서로만 죽이면 되니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참으로... 잔인한 생각이었군요."
카인의 중얼거림에 하이볼트는 쓰게 웃었다. 두 딸의 아비보다는 비정한 선대 왕으로서의 배려였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살리고 싶다. 부족한 아비 때문에 고통받는 딸을 살리고 싶어."
"하지만 전하. 올리비아는 엘프와 손을 잡았습니다."
절레절레-.
하이볼트는 고개를 저었다.
"엘프와 손을 잡은 로스 자식과 한 편을 먹을 것뿐이야."
"그 사실을 아는데 묵과하는 것만으로도 왕의 자격이 없는 겁니다. 엘프라는 족속을 멸절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왕가의 자손이 제 이득을 위해 눈을 감는 일은 있어선 안 됩니다."
"...."
카인의 정론에 하이볼트는 차마 그의 마음을 더 비치지 못했다.
"저도 카인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헤드브레이커를 꽉 쥔 올리시렌이 입을 열었다.
"살릴 이유가 있다면 살리겠습니다."
"오오-."
하이볼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샐틈없이 단호한 카인의 말보다 조금의 틈이 보이는 올리시렌의 말이 기꺼웠기 때문이다.
"물론 없다면 죽일 겁니다."
이어지는 올리시렌의 말.
카인이 평상시 뱉던 말투 그대로였다.
하지만 하이볼트는 개의치 않고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거면 된다. 어차피 그 이상은 내 몫이 아니니까."
얼추 이야기가 정리될 때.
"그래서 로스 후작은 엘프와 손잡을 정도로 전하를 왜 싫어하는 겁니까."
카인은 핵심을 물었다.
이제는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하이볼트는 고개를 돌려 '백은의 궁'을 살폈다. 지금은 올리시렌 혼자만 쓰지만, 과거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를라가 죽은 후 하이볼트 역시 발길을 끊었다.
그사이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와 전혀 다를 것 없이 관리된 궁을 살피며 말했다.
"로스 후작은 카를라를 사랑했으니까."
이미 전말을 알고 있는 웨인 시케르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커졌다.
"어, 어머니는 로스 후작의 친누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올리시렌의 목소리가 떨린다.
몇 가지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하이볼트의 입에서 나온 건 그 모든 걸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래. 같은 아비를 두고 같은 배에서 나온 남매 관계가 맞다."
"...!"
하이볼트는 숨겨 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카를라 오우드리라 알려진 올리시렌의 친모가 실은 에버윈 로스로서 현 로스 후작의 친누나라는 사실.
로스 가문은 본래 인근 한 혈통으로 가문의 순수성을 지켜 왔다는 진실.
근친을 권장한다고 하나 그래도 친남매의 근친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현실.
"하지만 헤터워드는 에버윈을 사랑했다."
"어머니는요?"
올리시렌의 물음에 하이볼트는 가슴을 쳤다.
"당연히 나지. 나와 에드먼드가 그녀를 가두고 있던 새장을 부수고 꺼냈었거든."
"그런데 제 기억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로스 후작과 왕가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올리시렌의 의문.
하이볼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이렇게 벌어진 겁니까?"
"내가 그녀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제가 알기론 병으로-."
하이볼트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병은 병이었는데 죽인 건 에드먼드였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