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시 현재.
카인 일행은 라마이닝 백작령을 떠나 크로울 백작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처럼 기습적으로 들이닥치기엔 너무 알려졌으니, 오히려 대놓고 다녔다.
백작가의 후계자와 왕녀, 기사들.
원래라면 열차를 타고 갔어야 하나 그들은 걸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런 여유는 두 번 다시 부릴 수 없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평범한 모험가 파티 같았다. 그렇게 한가로운 산길에서 올리시렌은 아벨에게 왕국에 대해 설명해 줬다.
"크로울 영지는 왕국 제일의 공업지대야."
"공업...이요?"
아벨은 올리시렌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숲에서 살다가 이제 막 인간세계에 온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그런 아벨이 제법 귀여워 보이는 듯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뭐, 복잡하게 말할 거 없이 공장이 있으면 공업이라고 생각하면 돼."
"공장은 뭔가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의 일만 하는 곳. 그리고 물건을 많이 만들지."
"농사나 사냥이랑은 조금 다르군요."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뿐이지 멍청한 것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크로울의 모습과 그녀의 설명만으로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곳엔 회색빛의 구름이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하늘색이 다른 것도 그 공업 때문인가요?"
올리시렌은 쓰게 웃었다.
그녀의 뒤를 늘 지키고 있던 이소엘을 손짓으로 부르곤 그녀가 들고 있는 공산품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공장은 이런 것들처럼 똑같은 물건을 많이 만드는데, 어쩔 수 없이 주위를 더럽히게 돼."
"왜... 어쩔 수 없나요?"
"음."
올리시렌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고민하면서 턱을 괴었다.
그녀로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사실을 아벨이 물으니 쉬이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게 돈이 덜 들거든."
카인이었다.
조금 무거운 눈으로 크로울을 바라보던 그가 아벨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곰을 사냥을 했다고 치자."
"네."
"우리는 고기만 필요한데, 막상 잡고 나면 뼈나 가죽이나 내장이 나오지? 그럼 그걸 어떻게 했지?"
"쓸 만큼 최대한 쓰지만, 못 쓰는 건 땅에 묻지 않을까요."
"공업도 비슷해.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 잃는 게 있지. 네 말대로 '최대한 쓰면' 덜 잃겠지만 그러면 돈이 많이 들어."
"그럼 공업은 돈을 벌려고 다른 것들을 더럽히는 건가요?"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벨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크로울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공업만이 아니라 사람도 늘 돈을 향해서 움직이지."
"돈은 도대체 뭔가요. 그거 때문에 사람이 죽고, 저희 영지는 배를 곯는데 이상하잖아요... 배고픈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니."
아벨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간은 어떻게든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아르나에게 한 명의 어른으로서 대접받기 위해 버텼지만, 익숙해지면서 간혹 아이 같은 모습이 드러났다.
올리시렌은 그녀답지 않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카인을 돌아보았다.
매번 색다른 대답을 내놓는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돈이 생기기 이전에 사람은 자유롭기 위해선 강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돈이 많은 자가 더 자유로워."
"돈은 자유인가요?"
"적어도 내가 아는 돈은 그래."
올리시렌은 기가 찼다.
저명한 학자나 인생을 많이 산 사람도 아니고, 이제 겨우 열일곱의 귀족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소엘조차 카인이 내비치는 식견에 조금 놀랐다.
아벨은 카인의 말을 뇌리에 새기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진짜 길에서도 삶에서도.
하늘이 점점 회색으로 바뀌어 간다.
짙은 스모그가 지금부터 크로울의 땅이라는 걸 알리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백작성이 있는 곳만 그나마 발전한 에셀레드 영지와 달리 크로울은 영지 이곳저곳이 골고루 발전했다.
각 지역별로 다른 공업에 매달렸기에 작은 도시들이 발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크로울 영지의 경계엔 당연하게 작은 도시가 있었고, 카인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채애앵-.
그러나 입구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창을 기울여 교차로 막으며 막았다.
가장 앞에 있던 카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창을 내린 두 병사를 훑어보았다.
투구의 작은 틈 사이로 떨리는 눈동자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억지로 이런 무례한 짓을 했다는 것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렇기에 잠시 기다렸고.
"에셀레드 백작령의 카인 님이십니까?"
그들의 뒤로 콧수염이 멋들어진 중년의 기사가 걸어 나왔다.
올리시렌은 살짝 몸을 기울이며 카인에게 속삭였다.
"시작부터 들킨 모양이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어. 저쪽도 마찬가지고."
카인은 턱짓으로 콧수염을 가리켰다. 딱 봐도 병사들에게 명령한 자였다.
"경의 이름은?"
"오르필 크로울 베이트리라고 합니다."
카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계부터 크로울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쓰는 기사를 보냈다는 건 그들이 생각보다 빨리 대처했다는 의미.
단순히 힘으로만 밀어붙이기엔 조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트리 경."
"말씀하시지요, 로드 에셀레드."
카인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창대를 가리켰다. 그러곤 천천히 왼 허리춤의 아그웨스카를 잡았다.
"내가 '로드 에셀레드'인 걸 알면서 이러는 건 싸우자는 건가, 아니면 이야기하자는 건가. 명확히 해 주면 좋겠는데."
"당연히 저희는...."
쿠웅-.
베이트리 경의 입이 닫혔다.
능글맞게 적당히 넘어가려던 그는 순간 주위를 내리누르는 서늘한 살기에 식겁했다.
그 중심엔 카인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싸우는 쪽을 좋아해. 라마이닝보다 크로울이 더 쉬워 보이거든."
"...?"
"내가 닥치는 대로 공장들을 다 부수면 크로울이 버틸 수 있을까?"
아이리안 전체의 공산품을 책임지는 크로울 영지.
만약 카인의 공격으로 공장들이 돌아가지 않게 되면, 왕국 전역은 단숨에 몸살을 앓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카인도 같이 욕을 먹겠지만, 아예 망해 버릴 크로울보단 훨씬 나은 법.
베이트리는 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야수'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곤 급히 입을 열었다.
"창을 치워라-!"
처억-.
길이 뚫렸다.
그러나 카인의 보랏빛 눈이 그를 계속 바라봤고, 베이트리는 감정 없이 모두 베어 버릴 듯한 그 눈빛에 섬뜩함을 느꼈다.
간신히 판에 박은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이를 먹다 보니 자주 이렇게 깜빡하곤 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크로울 백작성으로 가는 열차를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카인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들었다.
아그웨스카를 쥐었던 손을 뗐고, 뒤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카인이 뒤를 돌아보자 소리를 낸 올리시렌이 웃고 있었다. 그러곤 그에게만 살짝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맨날 그러던 것처럼 이번에도 또 칼을 휘두르는가 했네."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라고 꼭 그러는 건 아니야. 칼은 뽑아야 할 때만 뽑아."
"기억해 두겠어. 이번엔 좀 평화적으로 해결되면 좋겠거든."
그녀의 소망은 당연하게도 곧 깨졌다.
Episode.Ⅰ
봄의 찬미
#39 EP.Ⅰ-9
봄으로 향하는 열차 (1)
성녀 카테리나 피오렐리.
그녀 성황궁에서 입던 성복은 벗어 두고 수수한 옷으로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까지 숨길 순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따르는 열두 명의 이단심판관이 흘리는 기세가 살벌하니 더더욱 대비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다는 델프트의 시계탑이죠?"
십이심판관의 선두에 서 있던 마우로 추기경은 붉은 케이프를 벗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상인들만큼 시간에 민감한 자들이 없으니, 상인도시의 시계탑이 가장 정확하다고 합니다. 아, 저기 있군요."
그들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고, 델프트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이단심판관들이 있었다.
카테리나 일행이 다가가자 그들은 손으로 성호를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빛으로."
성녀 역시 가볍게 성호를 그었다.
"빛은 우리의 것으로. 에셀레드로 향하는 배는 준비됐습니까?"
"그게...."
케이프에 덮여서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우로 추기경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을러댔다.
"준비하라고 한 게 언젠데, 왜 지금 대답이 시원치 않아!"
"일단 케르크항까지의 열차는 구했습니다. 그런데 선주들이 에셀레드 영지로 가는 걸 두려워해서 배편은 아직...입니다."
"심판관이란 놈이 배 하나 못 구했다고?"
이단심판관을 총괄하는 마우로 세노초크 추기경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게 선주들 사이에 에셀레드의 바다는 언제나 출렁이고 어둡고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소문이 돌아서 그렇습니다."
마우로 추기경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멈칫했다.
아무리 아이리안이 대륙 북서쪽의 변방이라고 해도 대륙과 나름 활발한 교류를 하는 왕국.
지도에서 살펴봤을 때 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리안의 영지가 에셀레드였는데, 왜 그들과의 교류가 적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녀가 부리는 신비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단심판관이 성녀님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성질이 들끓었다.
더 질책하려고 할 때, 카테리나가 적절하게 끊었다.
"아이리안의 다른 영지로는 잘 가나요?"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대꾸했다.
"예!"
카테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옥보다 희고, 찰랑이는 은발에 반짝이는 푸른 눈을 지닌 성녀의 그런 표정은 그들에게 괜한 죄책감을 들게 했다.
그녀는 무언가 어지러운 듯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 순간.
우우우우우-.
그녀의 품속에 있던 성류관 '가을'이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기억나는군요. 에셀레드 영지의 해안엔 7성 던전이 있으니 다들 안 가려는 겁니다."
"7성 던전이요!?"
마우로와 델프트의 이단심판관은 놀라서 반문했다.
대륙에서도 드문 것이 7성급 던전이고, 위치한 지역에 따라 난이도를 더 높게 취급하기도 한다.
그 중 쉽게 갈 수 없는 바닷가에 자리한 던전은 최악이었다.
카테리나는 '가을'이 전해 주는 미래의 기억을 조금 더 받아들이며 말했다.
"이 시기엔 그런 게 있었습니다. 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긴 하는데, 선주들이 던전인지 뭔지 알 리가 없으니 그저 피하겠군요."
성녀의 눈이 파고드는 '가을'의 힘에 순간 반짝였다.
마우로를 비롯한 이단심판관들은 그 빛을 보곤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지난번 규격 외의 마녀를 탐지하고, 프리문디의 사망을 확인한 이후 성녀는 성류관의 힘을 더 잘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성국의 사람들에게 그런 카테리나의 각성은 성검 '여름'의 주인 될 용사가 이제 곧 나타난다는 신호였으며, 가장 신성한 일.
카테리나의 푸른 눈에 가을빛이 다시금 반짝였고, 그녀의 고개가 서쪽으로 돌려졌다.
"용사님도 마왕도 아직은 약할 테니 우리가 어서 가야 합니다. 금액은 상관없으니 구해지지 않는다면 배를 사세요. 제 이름을 팔아도 좋습니다."
"빛으로 이름으로-!"
"그리고 반드시 에셀레드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던전에서 큰 조력자를 만날 거니까요."
예언인가, 예측인가, 둘 다 아니라면 다짐인가.
알 수 없는 미래를 말하며 카테리나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우우우웅-.
그리고 또 하나.
성류관 '가을'의 박동에 맞춰 진동하는 지엄하고 성스러운 검.
72겹의 봉인에 감겨 이단심판관들의 손에 옮겨지는 성검 '여름' 역시 울었다.
* * *
카인은 열차를 좋아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면 빠르게 뒤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어딘가 마음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르릉-.
하지만 열차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는 영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열차를 나름 타 본 올리시렌, 이소엘, 밴더빌트는 소음에 익숙한 듯했다.
그러나 평기사 에셔나 아벨은 영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듯, 솜을 귀에 끼우고 있었다.
카인 일행을 마중 나왔던 오르필 베이트리는 정다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도착하자마자 '그분'에게 보고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형님, 안에서도 이렇게 시끄러운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건가요?"
아벨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도심의 가운데를 다니는 만큼 삼사 층씩 올라간 건물과 옆길을 다니는 사람들을 살필 수 있었다.
소음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벨과 달리 그들은 평안해 보였다.
"적응한 거지."
"이런 걸 적응할 수가 있다고요...?"
"못하면 결국 도시 밖에 살아야 하는데 힘드니까. 그리고 네가 숲에서 살아서 조금 더 힘들 거야."
에셀레드도 발전하지 않았다지만, 북방 엘프의 숲에 비해선 도시였다.
늘 정적인 숲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벨에게 열차의 소음은 한층 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를 삼켰다.
'엘프의 피가 흘러서 더 힘들 거고.'
엘프는 청각에 예민하다.
숲에 사는 순혈 엘프들의 귀가 뾰족한 것은 더 넓은 범위의 소리를 들으려는 것.
아무리 하프에 하프라지만, 아벨도 그런 엘프의 피가 조금은 있으니 예민하리라.
하지만 외부인인 오르필까지 있으니 카인은 그런 말은 삼갔다. 그저 말해도 되는 정도만 말했다.
얼굴이 희게 변한 평기사 에셔는 조심스레 손을 올리며 말했다.
"로드, 시끄러운 건 괜찮은데, 속이 너무 울렁거립니다...."
"멀미네."
"배 탈 땐 늘 괜찮았는걸요."
"배랑 열차랑은 또 달라."
에셔는 눈이 반쯤 핑핑 돌면서 등받이에 축 처졌다.
하나는 소음에 힘들어 하고 다른 하나는 멀미에 지친 모습을 보며 카인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멀리 가진 않으니까. 오르필, 얼마나 걸리지?"
"아이언브릿지의 철교를 열었으니 세 시간이 조금 안 될 겁니다."
올리시렌은 조금 흥미롭다는 눈으로 오르필을 보았다. 그걸 발견한 카인이 물었다.
"유명한 건가?"
들은 바 없는 지명이었다.
올리시렌은 두 손바닥을 마주하게 들어서는 손가락만 꺾어 다리처럼 만들었다.
"크로울 백작령에는 아이리안에서 제일 큰 협곡이 있거든. 그런데 철교로 그걸 이어서 위에 열차가 지나갈 수 있게 했지."
"그래서 아이언브릿지라고 부르는군."
생각보다 별거 없이 이름 그대로의 뜻에 조금 실망했다.
올리시렌은 혀를 찼다.
"그 엄청난 협곡의 위를 지나는 거라고."
"...?"
"아이언브릿지 아래론 이 땅을 동서로 가르는 '그랜드 오웰'이 흐르고 주위로는 끝도 없는 협곡과 하늘이 보여서 그 풍경이 엄청나."
관광의 의미로 말한다는 걸 알고 카인은 쓰게 웃었다.
대충 어떤 구조인지 눈치챘다.
"그냥 기습하기 좋은 곳인데? 미리 화약을 설치해서 흔들면 열차를 탈취하겠어. 요인 암살이라면 다리만 부숴도 충분하겠고."
올리시렌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닫아 버렸다.
이런 쪽은 무슨 말을 해도 카인에게 닿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옆에 앉아 있는 이소엘을 툭툭 쳤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 혼자 말해선 씨알도 안 먹히네."
"카인 공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크로울 백작가가 방비를 한다고 하지만, 가장 취약한 부분이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카인과 이소엘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올리시렌은 그걸 보다 고개를 저었다.
오르필은 회색빛 올리시렌을 살폈다.
어떻게 봐도 제 1왕녀가 맞아 보였지만, 아는 척은 할 수 없었다.
그녀 스스로가 밝히지 않는 이상엔 무례였으며, 공식적으로 왕녀라 알려진다면 크로울은 최대한의 정성을 쏟아야 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고, 이쪽은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왕녀는 왕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오르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식당 칸에서 아이언브릿지 정식을 팝니다. 관련 선물도 주는데 좀 받아오겠습니다."
올리시렌의 눈이 반짝였다.
늘 왕녀나 마녀의 무게에 짓눌렸지만, 지금만큼은 그냥 제 나이대의 소녀 같았다.
"괜찮...."
"갔다 와."
카인은 문을 턱짓하며 말했다.
안 보였으면 몰라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본 이상 그냥 넘길 순 없었다.
올리시렌은 이소엘을 바라봤고, 그녀도 끄덕이자 머리를 정리하면 일어섰다.
"갔다 오래서 갔다 오는 거야. 절대 내가 신기하고 궁금해서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 둬."
"...그래. 미소는 지우고 말하면 믿어 줄게."
올리시렌은 조금 흠칫하더니 유리창에 자신을 비췄다.
카인의 말대로 정말 웃고 있는 걸 보곤 급하게 표정을 바꾸며 나섰다.
이소엘은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 물론 그 틈에 카인에게 짧은 묵례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오르필과 올리시렌, 이소엘이 식당 칸으로 갔고, 아벨과 에셔는 골골거릴 때.
밴더빌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들리십니까."
"당연히."
둘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열차의 굉음이 일어나고 말 소리가 오갈 때부터 계속 느껴지던 아주 작은 진동.
쿵-, 쿵.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지만, 듣다 보니 열차의 천장 위로 누군가가 딱 달라붙은 채 움직일 때나 날 소리였다.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밴더빌트는 창문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내 멈칫했다.
반 정도 열리는 창문에 비해 자신의 대검이나 몸이 너무 컸다. 그래서 자신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큰 차량의 연결 부위로 향하려 했다.
척-.
카인은 그런 밴더빌트의 팔을 잡곤 의자에 앉혔다.
"내가 할게. 여기 골골대는 애들 둘 지키고 있어,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니 금방 갔다 오지."
"예스, 마이 로드."
밴더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과 에셔는 힘겹게 손만 저었다.
카인은 옅은 웃음을 남기고 창문 밖으로 몸을 빼서 열차의 위에 섰다.
콰라라랑-, 콰르르-.
폭풍과 함께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것 같은 굉음.
어느새 도시를 벗어난 건지, 열차는 한층 더 속도를 올렸고 소리는 더욱 커졌다.
카인은 매서운 바람에도 거침없이 열차의 위를 걸었다.
그러다 여섯 칸 뒤 천장, 묘한 가죽 가방이 보였다.
탓.
가볍게 뛰어서 해당 칸을 살펴보니 돼지를 옮기는 축사 칸이었다.
비어 있는 가죽 포대를 쥔 채 카인은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후우웅-.
축사의 한가운데로 향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니 묘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은 폭탄으로 만든 구멍이었다.
카인은 손바닥을 펼쳐서 구멍의 크기를 재었다.
작았다.
열 살 즈음 되는 아이나 통과할 만한 구멍. 그리고 딱 적당한 만큼의 폭발을 일으켰다.
카인은 씨익 웃으며 가죽포대를 살폈다. 부서진 돌멩이들이 보였다.
[운명의 분기점을 발견했습니다.]
[선택에 따라 고정도가 변화합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흑발을 뒤로 쓸어넘기며, 구멍 아래 축사를 내려다보았다.
"재밌네?"
#40 EP.Ⅰ-9
봄으로 향하는 열차 (2)
카인은 양손으로 열차 위 구멍을 잡았다. 줄톱으로도 한참을 잘라야만 간신히 틈이 나는 단단한 쇠를 잡고는 그대로 당겼다.
쿠르르릉-.
근육 올올히 깃들어 있는 백색 뇌전이 요동쳤고, 종잇장처럼 구멍이 벌어졌다. 좀 더 커진 구멍으로 내려섰다.
축사의 돼지들이 멱따는 소리를 내며 놀라야 했지만, 다들 공포에 질린 듯 벽면에 붙어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다.
카인은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돼지들을 돌아보았다.
'동물들이 더 민감하군.'
회귀 전 전사 '불굴'처럼 고양이 찾기를 해 볼까도 싶었지만, 못했던 게 이 '겨울'의 힘 때문이었다.
다시금 이런 모습을 보니 조금 묘했지만,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다행히 돼지들이 멀어져 있어서 바닥에 난 작은 발자국이 잘 보였다.
카인은 신발에 오물이 묻는 걸 아랑곳 않고 축사 칸의 문을 열었다.
다음은 창고 칸이었다. 빽빽하게 놓인 짐들 사이로 쫓는 녀석이 쏙쏙 잘 지나간 것이 훤히 잘 보였다.
'아직 전문가는 아니고.'
어쌔신만큼 은밀하진 않았다.
그래도 꽤나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이는 아이였다.
발자국 간의 간격, 짐들에 닿아 있는 손자국, 아직은 쌀쌀한 이곳에서 깊게 숨을 쉰 듯 남아 있는 습기.
가볍게 지나갈 만한 부분들을 조합하며 카인은 상대를 추론해 나갔다.
'그래도 녀석답게 어릴 때도 의지가 뛰어난 모양인데. 뭘 하고 싶은 거지.'
테러는 아닐 것이다.
어릴 때라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철로에 깔린 돌을 폭발시키는 게 이렇게 하는 것보단 쉬울 것이니까.
암살에 무게가 기운다.
그러나 카인은 자신이 예상하는 그 녀석이 맞다면 암살 같은 쩨쩨한 짓은 안 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던 카인은 손을 뻗었다.
무거운 나무상자들 틈에 적금발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보였다.
콰르르르-.
요란한 열차 소리에 카인은 작은 틈처럼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지던 풍경이 끝나고,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삭막한 협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협곡을 잇는 검은 철교, 아이언브릿지.
카인은 머리카락과 크로울 백작성으로 가는 지름길인 아이언브릿지를 번갈아 보면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런 의미의 분기점인가, 사계여."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길을 제시하는 『사계』를 떠올리며 카인은 열차의 다음 칸으로 움직였다.
"지금의 너는 꼭두각시일지, 전사일지 궁금하군."
대충 그려지는 그림에 카인은 언제든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휘두를 각오를 다졌다.
올리시렌이 싫어할지라도 이것이 가장 효율적일 테니까.
* * *
오르필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앉은 올리시렌을 향해 물었다.
"어떠십니까. 입맛에 맞으십니까?"
"생각보단 맛있군요."
도도한 대답.
그러나 그녀의 포크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크로울 열차에 준비된 아이언브릿지 정식은 나름 격식 있는 코스요리였다.
음식 하나하나의 맛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지만, 데코레이션이 아주 좋았다.
지금 먹는 메인은 6개월이 지나지 않은 양의 앞다리를 와인에 적셔 숙성한 후 훈연한 요리였다.
그 뼈를 마치 아이언브릿지처럼 장식한 후, 그 아래에는 노란색 단호박 퓌레와 붉은 비트 소스를 활용해 협곡을 그렸다.
올리시렌의 취향에 딱 맞았다. 하지만 내심 아르나의 사과파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이소엘은 묵묵히 사주를 경계했고, 오르필은 올리시렌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자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크로울 백작성은 전문 요리사들을 다수 고용하고 있습니다."
"요리사들을?"
한둘이야 고용한다고 해도 그 이상을 백작가가 고용한다는 건 의아했다.
오르필은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언브릿지 정식을 포크로 가리켰다.
"지금 백작성의 주인께서 이런 음식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향후 크로울을 이런 공업단지보단 관광지대로 바꾸고 싶어도 하시고요."
"하긴 크로울엔 그랜드 오웰도 흐르고 협곡도 웅장하고 자연환경은 왕국 남부에선 가장 좋긴 하니 이해는 가는데...."
올리시렌은 오르필이 눈치채지 못한 틈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왕실정보국을 다루는 그녀는 당연히 칠대귀족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현 크로울의 주인은 가릭 크로울 백작.
누가 봐도 대장장이다 할 정도로 우람한 근육을 지니고, 투박한 성미를 지닌 그가 음식과 관광을 선호한다는 게 묘했다.
사람의 취향이 겉모습과는 다르다고 하나 그간 정보국에서 모은 정보에 따르면 가릭은 보이는 것 그대로였다.
올리시렌은 오르필의 눈을 마주했다.
왕도에서 죽은 지 산 지 애매하게 살던 안개꽃이 카인의 흑색에 조금 물들어 버렸으니.
"가릭 백작님의 취향이 조금 바뀌신 모양인가 보네요."
대개 귀족들이 한참 돌려서 말하지만 그냥 대놓고 물었다.
서로의 마음속을 예측하고 한발 물러섰다가 나아가는 건 이젠 그녀로서도 못 할 짓이 되었다.
카인처럼 시원하게 행동하는 게 속이 편해졌으니까.
오르필은 그녀가 이렇게 대놓고 찌를 줄은 몰랐는지 그대로 살짝 굳었다.
"제가 기억하는 가릭 백작님은 굳센 분이었는데 말이죠."
왕녀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밝히며 압박했고, 오르필은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가릭 백작님은...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백작님이 안 좋아하는데 백작성에서 일이 진행될 수가 있나요?"
"그분께서 원하시니 가능합니다."
올리시렌은 오르필이 '그분'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미묘하게 눈빛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요리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이라면?"
"아리안 크로울. 백작가의 안주인이십니다. 그분이 바라니 당연히 백작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시죠."
"제가 알기론 원래 안주인 되시는 분이 따로 계신 걸로 아는데 말이죠. 백작님의 두터운 사랑은 왕국 전체에 소문났잖아요?"
올리시렌은 방긋 웃었다.
그 순간 이소엘은 식기를 내려 두고 조금 더 긴장했다.
대개 올리시렌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땐 무언가 큰일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오르필은 누가 봐도 연기하는 표정으로 안타까움을 보이며 말했다.
"그렇죠. 미아 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가릭 크로울 백작.
두 후작과 다섯 백작가를 아우르는 칠대귀족가의 한 자리를 차지한 그는 백작가의 가주보다도 로맨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더욱 유명한 자였다.
그가 원래 결혼했던 본처는 미아(Mia)라는 이름인 지닌 평민이었다.
크로울 백작은 반대를 무릅쓰고 미아를 본처로 받아들였고, 여기까지가 왕국 전체를 절절히 울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은 법.
아무리 가릭 크로울이 단단하게 버틴다 해도 평민 출신 본처라는 건 꽤 약점이었다.
카인에게 줬던 왕실정보국의 자료에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뤘다.
휘하 귀족들에게 사사건건 반대를 당했고, 그들은 영지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전부 미아 탓이라 공격했다.
처음에 가릭이 성심성의껏 그런 공격을 막았지만, 성내의 하인들에게까지 무시당하는 미아의 꼴에 여러 수를 쓰다 결국 어느 남작가의 딸 하나를 후처로 들이며 상황을 봉합하고자 했다.
그게 바로 아리안 크로울.
평민 본처와 귀족 출신 후처의 갈등은 어마어마했으리라.
그러나 워낙 내밀한 백작성 내부의 이야기니 왕실정보국으로서도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설마 건강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정말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이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누워 계십니다."
오르필의 기뻐함이 보이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리안 님께서 나서서 백작가를 정리하셨지요. 물론 언젠가 미아 님이 깨어나시면 다시금 뒤로 물러나실 겁니다."
그럴 리 없다는 장담까지 엿보였다.
올리시렌은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 오르필의 속내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가릭 백작님의 상심이 크겠네요. 마침 카인 경과 함께 뵐 수 있을 테니 선물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오르필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밝히지 않는다 해도 왕녀를 앞에 두고 곧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법.
그는 고장 난 인형처럼 눈을 돌리다가 말했다.
"상심이 워낙 크셨는지 안타깝게도 최근엔 이름 모를 병에 앓고 계십니다."
"이름 모를 병이요?"
올리시렌도 이소엘도 당연히 병이 아니니 이름을 모를 거라고 추측했다.
"예."
"신관들은 불러 보셨나요?"
"그게...."
당연히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성국의 신관들이라면 병보다 독에 더 민감한 법.
그 건강한 가릭 백작이 갑자기 누웠다면 논리적으로 병보단 독이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독을 푼 건 미아도 가릭도 일어나지 못할 때 가장 이득을 볼 사람.
아리안 크로울.
화수분처럼 나오는 크로울 백작가의 내부 사정에 올리시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만두려 했다.
나름 카인에게 할 말들을 정리할 때, 이소엘이 낮은 목소리로 오르필에게 물었다.
"자녀분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
오르필의 두 눈이 순간 찢어질 듯 커졌다. 진심으로 놀랐다는 게 여지없이 보였다.
이소엘은 속내 모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아 님의 자녀분이 한 분 계신 걸로 압니다."
올리시렌도 조금 놀라 이소엘을 돌아보았다.
왕실정보국의 정보에선 가릭과 미아 사이에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르필은 급하게 앞에 놓인 냉수를 들이켜곤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들이라니요. 두 분 사이엔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아들이라 말한 적 없습니다."
이소엘은 차갑게 대꾸했다.
우우우우-.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듯한 기세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출신을 아는 올리시렌은 바보 같은 오르필보다는 그녀에게 더 믿음이 갔다.
"이소엘."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굳이 오르필 따위에게 그럴 바엔 백작성에 도달해서 말하는 것이 나을 터.
덩달아 기세를 피우던 오르필과 이소엘은 둘 다 기세를 흩었고, 긴장감이 차오르던 식당 칸에 평화가 왔다.
아니, 잠시 오는 듯했다.
콰앙-!
뒷문에서 폭음이 울렸고, 검게 칠해진 식당 칸의 문이 힘없이 바닥에 콰당-하고 떨어졌다.
"쿨럭쿨럭-."
삽시간에 일어나는 매캐한 연기에 식당 칸에 있던 다른 자들은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움직였다.
이소엘은 본능적으로 올리시렌의 곁에 섰다.
"오-르-필-!"
어린아이의 목소리.
"내가 돌아왔다. 크로울 백작가의 진짜 후계자인 나 루드 크로울이 여기 있다!"
"뭣-!"
도망가려던 자들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거센 바람에 폭연은 순식간에 걷혔고, 그곳에 서 있는 건 적금발의 어린 소년.
손에 돌멩이를 쥔 루드 크로울이었다.
"거짓말입니다."
스릉.
오르필은 상대를 살피곤 그대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소년 쪽으로 걸어가며 올리시렌에게 말했다.
"가릭 백작님의 이야기가 워낙 유명해서 간혹 억지를 부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백작성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던 아이인데, 여기까지 올 줄이야."
탓-!
그는 그대로 열차의 바닥을 디뎠다.
한 순간에 카펫이 밀렸고, 식탁과 의자, 식기들이 와자자자창-! 하며 요란히 부서졌다.
그 틈을 내달리는 오르필과 폭탄을 쥔 채 굳은 눈으로 마주하는 자칭 루드 크로울.
이소엘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나서고 싶었지만, 올리시렌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최우선.
"괜찮아."
그때 올리시렌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만약 돌아봤다면 올리시렌의 회색빛 눈에 검은빛이 반짝이는 걸 보았으리라.
"그가 올 거야."
휘이이잉-!
오르필은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도 상관없이 목을 베어 버릴 듯 횡으로 칼을 휘둘렀고.
소년, 루드는 그대로 돌을 던졌다. 그의 두 눈이 돌을 계속해서 응시했고 그의 입이 열렸다.
-부...!
아니, 정확히는 열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위험한 짓을 잘도 하는구나, 붐버맨(Bomberman)."
"읍!"
루드의 뒤에 나타난 사내의 억센 손이 입을 막아 버렸고.
까강-!
밤을 벼려낸 듯한 흑색의 칼날이 열차의 바닥을 찍었다. 그러곤 날아들던 오르필의 검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당신도 그렇고."
카인이었다.
#41 EP.Ⅰ-9
봄으로 향하는 열차 (3)
덜-컹, 덜컹.
육중한 열차와 가느다란 철로가 닿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식당칸에서 벌어진 더 요란한 일에 다들 한마디씩 하려 할 때.
"쉿."
카인은 검지로 입가를 가렸다.
모두를 조용히 시키곤-
꽈악.
루드의 턱을 잡아서 자신 쪽으로 돌렸다.
'눈매가 똑같군.'
이대로 쭉 커서 근육이 늘고 상처가 수 없이 생기면 그 '붐버맨'과 똑같을 얼굴이었다.
과거의 동료를 새로운 삶에서 만나긴 할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그 재회가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읍-!"
그것도 본인이 미끼인지도 모르는 인질로서.
카인은 보랏빛 눈으로 그를 직시하며 물었다.
"내 말이 맞으면 끄덕이고, 아니면 고개를 저어."
"읍읍!"
루드는 눈에 힘을 주며 온몸으로 요동쳤다. 절대 카인의 말에 따르지 않겠다는 작은 반항이었다.
카인은 예상했다는 듯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루드의 턱을 꽉 잡았다.
"제대로 대답 안 하면, 턱 뽑는다."
"...!"
카인은 살기를 일으켰다.
루드는 이 악물고 버티려 했다. 그러나 몸은 폭풍우 치는 바다 위 쪽배처럼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오르필조차 입도 뻥긋 못하고 물러설 만큼 카인의 살기엔 지독한 한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소엘은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카인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오면 늘 반대하던 게 왕녀 올리시렌이었다.
당연히 말릴 줄 알았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묘한 검은빛이 도는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켜봐."
검게 변한 올리시렌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그 앞에 있는 건 현재인가 미래인가.
"예스, 유어 하이네스."
올리시렌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답게 이소엘은 고개를 숙였다.
카인은 둘의 대화에 눈을 살짝 돌려서 올리시렌을 응시했다.
그녀는 짧게 끄덕였다.
찰나였지만, 카인은 올리시렌이 마녀의 힘으로 미래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루드에게 묻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도.
"루드 크로울. 오늘의 테러는 혼자 벌인 건가?"
루드는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카인은 예상한 것처럼 자연스레 아그웨스카를 루드의 발 위에 가져다 대었다.
루드의 눈이 순간 놀라 거대해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바로 협박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시작부터 턱을 뽑을 순 없겠지."
쾅-!
카인은 바로 칼을 내리찍었다.
루드는 짓쳐들어온 흑색의 칼날에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자신의 발 옆에 칼이 꽂혀 있었다. 카인은 그런 루드의 앞에서 싱긋 웃었다.
"처음이라 봐줬다. 두 번은 없어. 단독범이냐?"
"오르필을 처리하는 건...."
"말을 제대로 끝내."
서늘한 카인의 추궁에 루드는 옆에 있는 기사, 오르필을 턱짓 했다.
"저 인간을 죽이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야. 나는 크로울 백작가의-."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외엔?"
"내가 숨어들어 올 수 있게 해 주고, 물건을 대 준 몇 명이 전부다."
"반란 세력 같은 건가?"
카인이 검을 다시 쥐려 하자 루드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리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일 뿐이야! 반란군은 아니라고!"
"그 반란군들은 왜 널 도왔지?"
"금여우 년 옆에서 시중들던 오르필이 웬일로 성 밖으로 나왔기에 죽일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
"왜 너 따위를 도왔냐고. 돌멩이를 폭파하는 힘은 쏠쏠하다만, 암습에는 유용하지 않잖아?"
"...!"
카인은 혀를 차며 루드를 놓았다.
과거의 동료를 이렇게라도 마주해서 즐거웠지만, 더 큰 음모가 눈에 훤히 보이니 더는 이렇게 있을 수 없다.
휙-.
고개를 돌렸다.
열차의 창밖으로는 시원한 크로울의 풍경이 흘러갔다. 그러나 문제는 아까보다 명백히 더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
"이 녀석을 포박해서 아벨 곁에 둬. 수상하다 싶을 때 찌르라고 하면 잘할 거다."
카인은 그렇게 말하고 급하게 아그웨스카를 들고 뛰려 했다.
올리시렌은 그를 향해 외쳤다.
"나도 같이 가!"
"위험해."
"그러니까 같이 가."
카인은 올리시렌의 굳은 눈동자를 보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가 간다면 같이 따라갈 인물, 이 소엘. 하지만 올리시렌은 윙크를 남기며 잡아 세웠다.
"이소엘은 남아서 할 일이 있어."
오르필의 거짓말을 단박에 이소엘이 잡아낼 수 있던 이유를 아는 건 그녀뿐이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올리시렌뿐이었다.
이소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카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카인은 왼손을 뻗었다.
올리시렌은 그 손을 잡고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오르필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만 눈치를 못 챈 건가...."
이소엘은 루드의 주머니 속에 숨겨져 있던 돌들을 꺼내며 말했다.
"열차 내 당신과 병사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미끼가 루드입니다. 그 틈에 크로울의 명물인 '아이언브릿지'까지 날리면서 열차째로 수장시키는 게 목표겠죠."
"고작 내 목숨에 그렇게까지...?"
오르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미들네임에 나름 크로울을 박을 정도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리안이 실권을 잡고 있기 때문.
이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수백의 영지민들이 반란 세력에게 죽는 상황을 만든다면 누군가에 대한 끌어내리겠다는 여론이 강해질 테니까요."
루드도 이제야 자신이 미끼였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몇 가지 힌트만으로 그런 상황을 유추하는 카인과 올리시렌, 이소엘이 괴물처럼 보였다.
"그러면 아리안 님에 대한 실각보다 다리를 무너뜨리고 이 열차의 사람들을 죽인 반란 세력이 더 다칠 것 같은데...."
이소엘은 카인과 올리시렌이 떠난 열차의 앞을 쓱 보곤 말했다.
"혹은 그 반란 세력을 다시 이용해서 제 권력을 굳히고 싶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죠."
오르필은 입을 닫았다.
물증은 없지만,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아리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했다.
이소엘은 루드를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루드, 이게 담벼락 밖의 세상입니다. 그리고 오르필 경."
이소엘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귀걸이를 뗐고.
쿠웅-.
이소엘의 무기, 중력망치 크레드네.
순간 식당칸의 무게가 달라진 듯, 열차 소리가 무거워졌다.
"미아 님의 출신이 평민이라지만 혼인 후엔 신분이 달라진 걸 아시죠?"
이소엘이 제 무기처럼 휘두르는 저 무기는 본래, '어느 가문'의 상징. 오르필은 크레드네의 등장에 주저앉아 버렸다.
루드 역시 놀라서 중얼거렸다.
"웨어햄 백작가...?"
결혼을 했어도 미아의 출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 가릭 크로울 백작은 그런 말들을 끝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고, 그중 하나가 후견 가문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때 흔쾌히 후견 가문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웨어햄'이었다.
오르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정말 '웨어햄'을 이름에 붙이지 않은 건 미아님의 뜻이었던 겁니까?"
후견가문이 있어도 미아에 대한 여론이 나아질 기색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이름 뒤에 성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문엔 미아가 거기까진 거절했다고 했지만,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 웨어햄 백작가에 물을 사람도 없었으니 이름까진 거절당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 의문의 답을 진짜 웨어햄의 사람인 이소엘이 풀었다.
"웨어햄 백작님이 미아 님을 받아들이셨으니 사적으론 제 고모님이 되시겠군요."
"세상에."
그렇다면 루드의 신분 역시 달라지는 것. 오르필은 자신의 상상보다 세상이 더욱 크다는 걸 절절히 느꼈다.
그때.
스-걱.
이소엘은 쇠가 갈려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저 앞에서 나는 것이 분명 카인이 저지른 짓일 터.
무언가를 부수고 죽이는 것에 한해서 카인은 꽤 믿을 만했다. 이소엘은 농담처럼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 정체는 비밀입니다."
* * *
검은 칼날이 굳게 닫힌 열차의 문을 베어 낸다.
"꺄아아아!"
"호위병! 호위!"
"칼 든 미친놈이 나타났다고!"
둘이 들어간 객실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카인과 올리시렌은 아랑곳 않고 서로의 왼손을 쥔 채 객실 사이를 내달렸다.
혹시라도 그녀가 떨어질까 봐, 카인이 멀어질까 봐 둘이 같이 맞잡은 손이었다.
"기관차까지 앞으로 두 칸!"
스걱-!
지금까지처럼 다음 칸 열차 문을 베어 들어갔다. 분명 손님이 타는 객실이건만 조용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두꺼운 벨벳 커튼 너머로 간신히 투과되는 햇빛에 어렴풋이 수십 명의 모습이 보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보자마자 저들의 적의가 느껴진다. 카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모두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썼네."
"손에 무기도 들었고."
"루드를 보낸 반란군들이겠지."
"아니면 반란군의 뒤통수를 치려는 아리안의 사병일 수도 있겠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어둠은 카인의 것.
카인은 올리시렌의 손을 놓고 그대로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꽈악-.
올리시렌이 놓아주지 않았다. 카인은 의아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밤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그녀의 두 눈에 일어난 마녀의 흑색 힘이 어둠을 꿰뚫고 객실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털썩, 털썩.
이곳에서 사태를 대비하던 무리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굳이 피 볼 거 없지."
"연습했나?"
"아직 제대로 된 마녀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되더라고."
서 있던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걸 확인한 카인은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멋있네."
"더 센 것도 있는데 기회 되면 보여 줄게."
"그러다가 마녀인 거 들킨다."
"들킬 수 있는 상황에선 절대 안 쓸 거야."
"절대라는 말이 오래가는 꼴을 못 봤다."
둘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달렸다. 그러곤 마력석이 그득하게 쌓여 있는 두 번째 칸 위로 솟구쳤다.
콰르르르릉-!
한층 더 시끄러운 열차의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올리시렌과 카인은 열차의 천장을 밟으면서 저 앞을 보았다.
거친 바람에 올리시렌은 머리칼을 옆으로 치웠고, 그러자 진짜 풍경이 보였다.
하늘은 시릴 정도로 푸르렀고, 크로울의 협곡은 잔인할 정도로 올곧았으며, 그 아래로 흐르는 그랜드 오웰은 에메랄드 가루가 흩뿌려진 것처럼 보였다.
그 협곡 사이를 잇는 거대한 철제 다리, 아이언브릿지.
어느새 열차가 거의 도달했다.
카인은 찻길이 닿는 저 너머를 살피다 혀를 찼다.
"폭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군."
카인은 겨울의 힘으로, 올리시렌은 마녀의 힘으로 멀리 보자 다리 중간중간에 설치된 마법 폭탄들이 보였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이런 걸 다 예측하는 거야?"
아이언브릿지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카인은 테러를 걱정했고 루드의 존재를 볼 땐 그 뒷배를 예상했다.
지금 그 모든 게 사실이 되었다.
아이리안에서 날고 긴다는 무수한 사람을 봤던 올리시렌이었지만, 카인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장."
그리고 이런 답변도 처음이었다.
대답이 바람이 쓸려가기도 전에 카인은 손을 놓으며 홀로 기관차로 내려갔다.
올리시렌은 바람결에 흘러가는 카인의 흑발 몇 가닥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넌 어디에 있든 전장에 사는구나."
장엄한 풍경과 음습한 음모가 교차하는 열차의 천장 위.
올리시렌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자신의 왕국에선 카인의 전장을 없앨 거라고.
그렇게 내려온 기관차 내부.
기관사는 진즉 죽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긴 쇠로 잡아당기는 식의 브레이크는 부러져 있었다.
천둥만큼 요란한 열차의 소리와 저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함정의 다리, 아이언브릿지.
결단이 필요한 상황.
카인은 어제 먹은 밥을 말하든 태연하게 물었다.
"우리만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아."
일행 중 가장 약한 에셔도 기사인 만큼 달리는 기차에서 뛴다고 심각하게 다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승객들은?"
반면 올리시렌의 목소리는 떨렸다.
일행이 산다 해도 간만에 열린 아이언브릿지 경유 열차에 신나서 가족끼리, 연인끼리 아니면 홀로 유유자적하게 온 승객들의 목숨이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었으니까.
"선택해야겠지. 모두 같이 죽을 건지, 우리만 살 건지."
카인은 올리시렌에게 잔인한 선택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내 왕국엔 열차 사고로 죽는 사람은 없어."
"나도 그 왕국 사람이고?"
올리시렌은 회색빛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당연히."
#42 EP.Ⅰ-9
봄으로 향하는 열차 (4)
크로울 백작가의 화려한 방 안.
불꽃같은 반짝임이 깃든 풍성한 금발의 여인이 다리를 꼰 채 빗질하고 있었다.
화가들이 본다면 당장이라도 화폭에 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음유시인이라면 미모를 칭송하고자 할 만큼의 미인.
아리안 크로울.
그녀의 앞에 한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디에스(Diez, 10) 아리안, 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 섬나라는 마도 통신이 없어서 영 불편하다니까. 아직도 여긴 전보를 치지?"
"예."
"임무만 끝나면 빨리 대륙으로 돌아가야겠어. '마녀의 눈알'은 뭐래?"
"아이언브릿지는 계획대로 무너지고 열차에 타고 있던 자들은 대부분 사망합니다. 이후 아리안께서 크로울에 남은 반란 세력들은 쓸어버릴 거라고 했습니다."
디에스라 불린 아리안은 마음에 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빗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에 스스로를 비췄다.
"이렇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마녀의 눈알'까지 있는데 너무 조심스럽다니까. 이렇게 싹 다 죽이고 부수면 되는 거지."
"...'마녀의 눈알'은 만능이 아닙니다."
휙-.
아리안의 동그랗던 눈이 가늘어지면서 표독스럽게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살벌함에 그는 말을 이었다.
"불꽃을 꺼트릴 대적자 앞에선 무용합니다."
"그놈의 대적자는 무슨. 나타나면 우리 식대로 태워 버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새카만 가면으로 둘러쓰고 있었고 눈구멍에선 흰자와 검은자만 보였다. 그는 아리안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가볍게 대응하던 아리안이었지만, 마지막 인사만큼은 정중하게 치마를 살짝 들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하여 맞이하는 새벽은 금빛이리라."
* * *
콰르르르르-.
브레이크가 부서진 채 달려 나가는 열차. 모두를 살리겠다고 말했던 올리시렌은 생각보다 더 상황이 암담하다는 걸 깨달았다.
늘 자신 있게 나서던 카인이 팔짱을 끼고는 앞만 보고 있으니 더더욱 불안해졌다.
그녀는 어색하게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끼리 도망갈까?"
카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돌아봤다.
"너 왕국엔 죽는 사람이 없다며."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에 때려 박다가 죽는 사람도 없거든."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짧게 잡곤 기관차의 창밖으로 몸을 쭉 뺐다.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올리시렌은 다급히 소리쳤다.
"뭐 하려고!"
"브레이크는 고장 났고, 저 앞에 있는 다리는 무너질 거고, 사람은 살려야 하고."
"...?"
"사실 방법은 있어."
카인은 안쪽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올리시렌은 그 웃음에 움찔했다.
인간이 미소를 지을 땐 행복할 때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걸 놓아 버릴 각오가 섰을 때도 미소를 짓는다.
"하면 혼날까 봐 잠시 걱정했었다."
"누가?"
"내가."
카인의 미소는 딱 그런 웃음이었다.
올리시렌은 자기가 자기를 혼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네가 희생해야 한다면 나는 다른 걸 선택할 거야."
누군가를 제물로 이뤄 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올리시렌이 걷고자 하는 왕도였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거짓말."
슉-.
카인은 대답하지 않고 기관차의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가 급하게 왼손을 뻗었지만, 잡지 못했다.
올리시렌은 하는 수 없이 앞을 바라보며 마녀의 마력을 눈에 집중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힘.
카인이 정말 위험한 짓을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했지만.
주르륵-.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아직 마녀로서 성숙하지 못한 그녀의 눈으론 거대한 아이언브릿지와 수백의 운명이 담긴 열차를 읽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 미래의 틈.
"...?"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엔 흐릿하긴 했지만, 분명 아이언브릿지가 무너지고 열차가 협곡 아래로 처박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암전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
그리고 반짝이던 백색의 빛.
눈에 어렸던 마력을 흩어 내며 올리시렌은 기관차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미래를 바꾸는구나."
미래조차 바꾸는 카인과 함께라면 정말 '절대'라는 건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 *
카인의 검은 머리가 세찬 바람에 뒤로 흩날린다. 그의 바짓단과 소매가 미친 듯이 펄럭인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올곧게 앞을 바라보았다.
꽈악-.
그러곤 흑색의 아그웨스카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콰르르르르르릉-.
천둥을 머금은 먹구름들이 이어진 듯, 길게 이어진 차량들.
멈추지 않고 저승으로 달려 나가는 기관차.
['봄'이 당신의 헛된 희생을 만류합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메시지에 카인은 입꼬리를 들었다.
"기절해야만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볼 수 있었군. 근데 내가 뭘 할 줄 알고."
['봄'이 당신에게 『사계』를 모아 과거를 회귀한 이유를 떠올리라고 합니다.]
"이유, 이유라."
다시 앞을 돌아 보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크로울의 협곡과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검은 철제 다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한없이 푸르디푸른 하늘.
즐거웠다.
대장벽엔 늘 눈이 내렸다.
늘 먹구름이 꼈다.
그리고 그 백색 설원엔 몬스터들의 초록색 체액과 전사들의 붉은 핏물이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그런 세상을 살던 카인에겐 이 모든 풍경들이 어떤 예술 작품 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너는 내가 왜 회귀했는지 모른다."
['봄'이 당신은 아벨의 부탁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린 자들을 알아내고....]
"이거 신기라는 분이 영 맹탕이네. 잘 생각해 봐. 내가 아벨을 만난 곳이 어디인지."
['봄'이 침묵합니다.]
"마왕이 아벨에게 죽고 대장벽으로 쏟아지던 몬스터들이 사라진 세상. 적을 잃은 인류의 칼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그 시대. 나는 왜 모든 걸 버리고 묘비에 갔던 걸까."
그것도 한 병의 술을 품고.
카인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무거워서 그런지 열차는 점점 더 빨라졌고, 더는 이럴 시간이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절망과 환희.
그 사이 어딘가에서 터지는 울음이 아그웨스카의 칼날을 타고 공명했다.
"그때의 내겐 미래가 없었다."
['겨울'이 일어섭니다.]
쩌저저적-.
푸른 하늘을 통으로 얼려 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한기가 카인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백색의 뇌전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내겐 아주 조금의 미래가 생겼어."
삶을 살아가게 된 아르나.
진짜 형과 동생이 된 아벨.
허무하게 죽지 않은 밴더빌트.
충성의 의미를 찾은 클로이드.
자신의 왕국을 꿈꾸는 올리시렌.
이소엘, 에셔, 어머니 클로에, 마녀들....
다시 사는 삶에서 달라진 건 오직 카인 자신뿐이었다. 그러자 모든 세상이 바뀌었다.
카인은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아이언브릿지와 도화선에 불이 하나둘 붙기 시작하는 폭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헛된 희생이 아니야. 내가 내 손으로 다시 한번 만든-."
쿠웅-.
카인의 왼발이 앞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강철로 주조된 기관차의 천장이 우그러들었다.
의지의 무게였다.
카인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낮추며, 숨을 골랐다.
'겨울'의 패시브, 백색의 뇌전은 매일같이 카인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
아르후안과 싸울 때보단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쓰는 수.
"내 미래를 위한 칼이다."
[미래가 소모됩니다.]
한기가 카인에게 모여든다.
온 생명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기 전 몰아치는 최악의 겨울이 카인을 휘감는다.
우우우우우-.
한없이 푸르렀던 하늘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그 검은 속살이 비친다.
우주의 온도는 얼마인가.
그 답이 흘러내린다.
검은 우주에서부터 불어오는 극한의 한기가, 저 먼 수평선까지 단숨에 얼려 버리던 극한의 힘이 '겨울'의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밤의 겨울 Winter of Night
카인의 얼굴 위로 눈만 가리는 새하얀 가면이 피어나고, 순백의 망토가 짜였다.
가면의 설원공, 카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그대로 아그웨스카를 앞으로 뻗었다.
파지지지지직-!
칼날의 흑색을 잡아먹을 듯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순백의 뇌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카인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열차를 멈출 순 없다.'
이렇게 거대하고 빠른 걸 멈추는 건 아직 불가능했다.
멈춘다 해도 한참 밀릴 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카인은 아이언브릿지를 바라보다 씩 웃었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압도의 힘, 키리에(Kyrie).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베기보다는 모든 것을 연결할 자비로운 힘!
카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아그웨스카를 잡아 들었다.
콰아아앙-!
그 순간 터지는 폭음.
붉은 폭염이 뒤이어 터지고 아이언브릿지의 외곽부터 부서지고 휘어지면서 밑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리의 조각들이 협곡에 부딪치며 내는 깡-소리는 사실상 죽음으로 인도하는 종소리였다.
"꺄아아악-!"
"저, 저기!"
"다리가 무너져...."
열차의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들은 기대하던 아이언브릿지가 부서지는 걸 보며 경악했다.
게다가 열차가 멈추지 않는다.
쾅! 콰강-!
이어지는 폭발.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
혼돈의 절규가 카인의 등 뒤로 울린다.
마치 마검 '겨울'을 손에서 손으로, 생에서 생으로 전수했던 사람들의 마음처럼.
-하늘 높은 곳엔 영광이 있을지라도.
청각, 후각, 시각.
카인은 자신의 감각을 하나씩 닫았다. 오직 '겨울'이 뿜어내는 극한의 한기와 뇌전에 집중했고 현재의 한계에 마주했다.
'더!'
[미래가 급격히 소모됩니다.]
온몸이 삐걱댄다.
분명 처음 회귀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음에도, 여전히 작은 육체는 카인의 힘을 담기엔 부족했다.
근육은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지려 하고, 뼈는 견디지 못하고 쪼개지려 한다.
그가 다룰 힘이 아득하리 만큼 먼 곳에 존재하기에-.
카인은 모든 감각이 사라진 흑암의 심상에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백발을 한 줄로 묶은 후 턱과 뺨에 수염이 풍성하고 기골이 건장한 노인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
상상 속의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이라. 그리고 카인에겐 그리움의 대상이라.
-대지에는 닿지 않으니 나의 검으로 평화를 만들리라.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글로리아 Gloria.
카인은 눈을 떴다.
순백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쩌저저저저저적-!
빙하와 같이 거대한 얼음은 철로에서부터 시작해서 그의 시야에 있는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어!?"
놀라워하는 탄성이 객실에서부터 쏟아진다.
당연했다.
콰가가강-.
아이언브릿지가 폭발해 부서졌는데도 그들의 열차는 그 위를 달렸으니까.
그것도 흑색의 철교가 아니라.
"엄마! 얼음 다리야!"
카인이 만들어 낸 순백의 다리를.
쩌저저적-.
빈 허공을 내달리며 카인의 글로리아는 열차가 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운명의 분기점을 완벽히 뒤틀었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1%]
카인은 자신의 미래를 만들었고, 수백의 사람을 살렸으며, 그녀의 왕국으로 가는 얼음다리를 만들었다.
주륵-.
그의 눈, 코,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린다. 그 피는 '밤의 겨울'이 뿜어내는 극한의 한기에 붉은 결정이 돼서 바닥에 떨어졌다.
"두 번은... 잃지 않아."
치닫는 고통에도 검을 놓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 파도처럼 쏟아지는 것처럼 시야가 흐릿해질 때.
척-.
아그웨스카를 쥔 카인의 작은 손을 잡는 거친 어른의 손이 있었다.
[겨울을 살던 '내'가 보고 싶은 봄은 참으로 작구나.]
['겨울'이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카인은 목각인형처럼 간신히 고개를 돌렸고, 반투명한 과거의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참으로 따뜻하군.]
['봄'이 올바른 운명을 집행합니다.]
#43 EP.Ⅰ-9
봄으로 향하는 열차 (5)
당장이라도 자신을 뭉개버릴 듯한 고통이 사그라졌다. 피로와 상처로 찌들었던 육체엔 정체불명의 활기도 일어났다.
후우우우-.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실려 있는 분홍 꽃잎 한 장이 이마에 붙었다. 카인은 꽃잎을 떼버리면서 눈에 힘을 줬다.
그제야 '봄'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집중해라.]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은 이를 악물며 앞을 바라보았다.
늘 생명을 빼앗던 그의 검에 지금은 수백의 생명이 달려있으니까.
아그웨스카가 가볍고.
밤의 한기도 차갑지 않고.
늘 혼자 짊어지던 것이 나누어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아아아아-.
카인이 펼친 액티브 '밤의 겨울'이 시냇물이었다면 현현한 '봄'의 '밤의 겨울'은 폭포수.
풍경 자체를 일그러뜨릴 것 같은 우주의 한기가 아그웨스카로 집속하면서 가늘어지던 얼음 다리가 웅장해지기 시작했다.
가는 실로 협곡을 넘는 것이 카인의 한계라면, '봄'은 화려하고 거대한 길을 얼음으로 자아내면서 협곡조차 훌쩍 넘긴다.
"와아아아-!"
"기적이다!"
"세상에 기차가 하늘을 날아!"
얼음 다리로 협곡을 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승객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형님-!"
그러나 한 명.
창백해진 얼굴로 저 멀리 열차 지붕을 달려오는 어린 용사는 눈치가 빨랐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킬 자는 당연히 카인이며, 기적은 늘 그의 희생이었다는 걸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기 때문.
하지만 달려오던 아벨은 뜀박질을 멈췄다.
아직은 소년의 테가 남아있는 카인과 어른이 되어 버린 카인. 둘의 모습이 같이 보이자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 그대로 아벨의 표정에 묻어났다.
카인과 함께 아벨을 돌아본 '봄'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둘러댈 수 있지?]
이제는 자리를 뜨겠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말. 그러나 카인은 그의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쳤다.
"내가 치러야 할 '밤의 겨울'의 대가를 또 네가 가져간 건가?"
'봄'이 아르후안 때처럼 어느 정도 감당할 것을 알기에 '밤의 겨울'을 펼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거스름돈으로 나타난 것일 뿐.]
"거스름돈?"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늘 함께하면서도 <사계절의 신기>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카인을 내려다보며 '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로 나는 올바른 운명을 집행하기 위해 겨울과 함께 현현했다.]
'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 미소만큼은 세상에서 카인이 가장 잘 알았다.
최전선을 살던 자신이 매번 짓던 씁쓸한 미소였으니까.
'봄'은 멀리서 멈칫하는 아벨을 흘깃 살핀 후 가볍게 발을 굴렀다.
콰아앙-.
기관차가 투웅- 하고 거대한 종처럼 울렸고, 허공을 날던 얼음 다리가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땅을 향하기 시작했다.
봄은 헝클어진 흑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이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오늘 죽을 운명이었을까?]
"...그럴 리 없지."
카인이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카인을 맞이하러 크로울 백작성의 오르필이 오지 않았다면 이 열차는 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린 즉, 오늘 열차를 탄 사람들의 죽음이 지금은 아니었으리라.
[그게 '올바른 운명'이다. 이 세계선에서 원래 진행될 운명.]
"그 '올바른 운명'을 내가 지켰으니 '밤의 겨울'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는 거군."
아무리 바라봐도 대화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있는 법.
열 번을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한데, 카인은 단번에 핵심을 파고든다.
'봄'을 씨익 웃게 만들 정도로.
[그래. 그 올바른 운명의 무게만큼 내가 나타날 수 있었다.]
"...반대는?"
카인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직접적으론 아벨이 그 뒤로는 푸른 하늘과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열차가 보였다.
하지만 카인의 눈이 향하는 곳은 객차 어딘가에 있을 밴더빌트였으며, 멀리론 에셀레드 영지를 지키고 있을 아르나가 있었다.
산 자를 죽이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면, 죽을 자를 살리는 것 역시 같을 터.
펼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밤의 겨울'을 이 정도로 쉽게 만드는 힘이 반대로 쏟아진다면 카인으로서도 더더욱 대비해야만 했다.
[운명이라는 건 굉장히 구멍이 큰 그물 같지만 그걸 빠져나오는 자는 거의 없지.]
'봄'은 카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리곤 말을 이었다.
[너는 죽어야 할 자를 살리고, 살아야 할 자를 죽였다.]
"'올바른 운명'을 바꾼 대가를 치러야... 겠군."
[글쎄?]
진지하게 고민하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가벼운 대꾸.
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봄'은 열차가 원래의 철로에 닿아 가자 천천히 손을 놓았다.
[운명에 정답은 없다.]
"앞이랑 뒤랑 말이 다른데?"
[봄은 원래 좀 짓궂은 계절이라 그래.]
꽈악-.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말을 해 줄 듯 말 듯 하면서 시간 끄는 '봄'에게 진심으로 휘두르고 싶어졌다.
그는 이것 또한 눈치챈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세상은 이제 '11%'만큼 달라졌다. 어쩌면....]
'봄'조차 말을 쉽게 잇지 못한다. 사계절의 신기보단 정말 한 명의 사람 같은 머뭇거림이었다. 알에서 태어난 새끼 새가 세상을 바라보듯, '봄'은 시선을 돌렸다.
꽃이 만발했다.
반짝이는 얼음이 푸른 하늘을 가르며 다리를 만들었다.
흑색의 열차가 죽음이 아니라 생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카인이 선택한 미래가 아래도 위에도 있었다.
그는 대견하다는 듯 카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가 바꾼 만큼 이 세상의 '올바름'이 바뀐 걸 수도 있지, 봐라.]
얼음 다리로 협곡을 건넌 열차가 천천히 대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원래의 철로에 기막히게 이어지면서 긴 열차는 제 길에 들어왔다.
협곡 이전은 황량했지만, 얼음 다리를 건너온 이 땅엔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화아아아아아-!
붉은 꽃, 분홍 꽃, 노란 꽃.
꽃밭.
센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무수한 꽃들이 황량한 땅을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긴긴 겨울이 끝나고, 꽃이 피는 계절 봄.
'봄'은 꽃밭을 향해 팔을 펼쳤다.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팔에 바람이 휘감기고 꽃잎이 흩날렸다.
[겨울은 끝이 나기 마련이고 봄은 오기 마련. 그러니 네가 찾은 너의 봄.]
'봄'이 점점 더 투명해진다.
그를 빗겨 나가던 꽃잎들이 이젠 하나둘 통과했다.
쿡-.
그는 검지로 카인의 가슴께를 찔렀다.
[너의 미래를 소중히 여겨라. 그것만이 네 운명이 되어 줄 테니.]
"...내가 선택한 미래가 틀렸으면?"
카인은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고, 두 번을 살아도 알 수 없던 질문을 던졌다.
씨익-.
답은 없었다.
답을 해 줄 '봄'이 묘한 미소만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인은 왠지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종잡을 수 없는 봄.
정답이라는 것이 없는 운명.
그렇다면 미래 역시 정해진 것이 없지 않을까.
"형님."
아벨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자 더더욱 창백해 보였다. 카인은 급하게 아벨의 팔을 잡았다.
"일단 내려가자. 위가 더 어지러워."
"저는 어머니의 피를 빨아 살았습니다."
수백 년간 자리 잡은 바위처럼 아벨은 꿈쩍하지 않았다.
카인이 눈을 마주치자 아벨은 특유의 갈색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형님의 피를 빨아 살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어른 카인의 모습을 한 '봄'과 지금의 카인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아벨 나름대로 결심한 모양.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겁니다. 그 엄청난 한기는 무엇인지, 왜 갑자기 검을 바꾸셨는지."
언젠가 한 번은 이야기 해야겠다 싶던 말을 하나씩 꺼냈다.
아벨의 눈빛이 침잠한다.
그리고 가장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말을 퍼 올렸다.
"그리고 절 바라보던 눈빛은 왜 달라지셨는지."
"눈빛?"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처음 보았을 때 형님의 눈엔 안쓰러움과 떨림이, 제가 검술의 재능을 보이자 공포가 더해지셨었습니다."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먼 과거의 일이라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벨의 말이 맞을 것이다.
옅다고 해도 엘프의 피를 타고난 만큼 아벨은 주위 환경을 잘 살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필립이 저와 형님의 지도 대련을 잡은 날 형님의 눈에는 후회만이 보였습니다."
회귀를 하고 돌아왔으니 당연했지만 그 당연함을 눈치챈 건 아벨뿐이었다.
"사람은 계기가 있다면 바뀔 수 있죠. 그러나 그날은 어떤 계기도 없는데 달라지셨죠."
제아무리 아벨이 영리할지라도 카인이 미래에서부터 회귀했을 거라고 예상할 순 없었다.
"그리고 강해지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의 형님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요."
"...."
"그래서 더 노력할 겁니다. 형님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피만 빨아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앞에 나서서 형님을 지킬 겁니다."
카인은 아벨을 바라보았다.
같이 지낸 지 이제 고작 한 달이지만, 지난 전생의 20년보다 더욱 밀도 있던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변했다.
허울뿐이었던 형제는 진짜 형제가 되었으며, 속내를 보일 수 있을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카인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보이는 아벨의 모습은 진짜였으니까.
"기대하마."
카인은 몸을 돌렸다.
기관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올리시렌에게 가기 위해 튀어나왔던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멀미로 창백한 안색의 아벨은 그런 카인의 뒤를 따랐다. 꽃밭 사이를 달리는 만큼 꽃잎이 계속해서 둘에게 달라붙었다.
"확실히 덜 추워졌습니다."
아벨은 꽃잎들을 털어 내며 말했다.
언제나 비슷한 날씨를 유지하는 북방 엘프의 숲과 달리 아이리안 남부는 사계절이 격하게 움직였다. 그렇기에 아벨에게 계절의 변화는 신기했다.
"그래, 이젠 봄이 왔구나."
올리시렌이 기관실에서 나름 애 쓰는 듯, 열차가 부드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저 멀리.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크로울 백작성이 있는 도시, 아이언하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봄을 실은 열차가 달린다.
다만 그 봄이 진짜 봄인지 꽃잎인지 혹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올리시렌의 미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까득-.
디에스 아리안은 초조한 듯 다리를 떨며 손톱을 깨물었다.
반짝이던 그녀의 손톱이 침과 함께 땅에 떨어진다. 눈구멍만 뚫린 새카만 가면을 쓴 사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녀의 눈알'로 봤던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알아! 눈이 삐지 않은 이상 아이언브릿지에서 생긴 얼음 다리는 나도 봤어!"
다른 길과 달리 아이언브릿지를 통해 오는 길은 아이언하트로 직통이었다.
당연하리 만큼 카인이 저지른 일을 그녀는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 받았다.
"당장 소집할 수 있는 데이브레이커(Daybreaker)는 몇이야?"
"여긴 대륙도 아니고 연합지대도 아니라...."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보니 당신뿐이란 거지?"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봐. 나랑 당신이 힘을 합친다면 새로운 대적자를 여기서 죽일 수 있어?"
디에스 아리안은 진지했다.
그들의 '목표'보다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여자긴 했지만, 눈앞에 닥친 '목표'를 무시할 정도로 한심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역할 상 직접적인 전투를 겪어 본 적이 적기에 그녀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가면의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누가 대적자인지 알 수 없어서 불가능합니다."
"알면 '그 기술'을 쓰면 되고?"
사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일격필살의 기술인만큼 자신 역시 멀쩡할 수 없는 필살기를 아리안이 종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내를 체스 말보다 더 무심하게 버릴 계획을 짜다가 소파의 손잡이를 흰 주먹으로 때리며 욕설을 뱉었다.
"젠장. 젠장! 어차피 우리 임무는 진즉에 달성했는데 그냥 도망갈까?"
"대적자가 무서워서 도망갔다고 금빛 새벽이 목을 베러 쫓아오겠죠."
콰앙-!
그녀는 화장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팔에 어렸던 푸른 마나에 화장대가 우지끈- 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곤 어딘가 섬뜩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릭은?"
"아직 세뇌가 불완전합니다. 육체의 저항력이 워낙 강해서...."
와병 중이라 소문난 가릭 크로울 백작의 진상이었다.
그녀는 엄지를 들어 목을 베며 중얼거렸다.
"얼굴도 모르는 놈을 죽이는 데는 문제없겠지. 그럼 우리의 대적자를 맞이해 보자고. 우리 대신 싸워 줄 놈들이 잔뜩이니까."
Episode.Ⅰ
봄의 찬미
#44 EP.Ⅰ-10
얼음을 녹이는 것 (1)
「까앙-!
화염에 붉게 변한 철이 비명을 지르고.
까앙-!
초열의 열기 속에서 한 사내가 묵묵히 망치를 내리친다.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
시대를 구분 지을 검?
운명을 막아 세울 방패?
치이이이익-.
얼굴에서 방울져 내리는 물방울이 대답처럼 쇠를 식힌다. 땀인지 눈물인지는 오직 그만 알 뿐.
그는 화로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식어 가던 불꽃이 다시 치솟고 어두워졌던 철이 다시금 빛을 품었다.
망치질은 계속되었고 사내는 젊음을, 철은 자신을 잃었을 때 완성된 건 한 마리의 새였다.
그는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은 새 조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날개는 쇳물이라 날아오르지 못하는구나, 크로울."
- 어느 대장장이의 애도」
카인이 구해 낸 기차가 떠들썩했다.
협곡 아래로 떨어져 죽을 뻔했다가 기적처럼 얼음 다리로 살아난 만큼 요란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가장 비싼 객차는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곳엔 카인, 올리시렌, 아벨이 기관차에서 돌아와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맞을 준비를 해 두었다.
그 준비 중 하나는 크로울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쓰는 기사, 오르필의 제압이었다.
"무례요!"
오르필은 모인 사람들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아무리 왕녀가 계시고 백작가의 후계라 해도 다른 백작가의 기사를 이리 취급하셔선-."
"그렇지. 문제가 있지."
카인이 그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밴더빌트를 비롯해서 카인의 방법을 아는 자들은 그답지 않은 대답에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반면 묶여 있진 않았지만, 구석에 박혀 있던 루드는 콧방귀를 꼈다.
"좀 다르나 했더니, 역시 귀족이니까 웃고 떠들면서 해결할 생각이겠네."
"당신도 귀족입니다, 루드."
이소엘이 고저 없이 말했다.
루드는 본능적으로 불퉁하게 말을 뱉었다.
"내가 귀족은 무슨...."
하지만 그녀가 주먹을 들어올리는 걸 보고 바로 입을 닫았다. 아직도 저 이소엘이 무표정하게 오르필을 주먹으로 패던 모습이 눈만 감아도 선명했으니까.
카인은 그런 루드를 슬쩍 보며 웃었다.
"젊네. 아니 어린 건가."
"너도 아직 한참 젊은데 무슨."
"하긴 나도 젊지."
카인의 웃음이 조금 쓰게 변했고, 올리시렌은 순간 그가 청년이 아니라 살 만큼 산 아저씨처럼 보였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오르필을 대하면 크로울 백작가와의 불화가 일어날 테니 문제고, 대충 풀어 주자니 여기 루드가 마음에 안 들어 하고, 그럼 방법은 하나네."
스릉-.
그대로 아그웨스카를 뽑아 들었다.
그 순간 놀란 올리시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외쳤다.
"뭐 하려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는 이러나저러나 현재 크로울의 중요한 기사야!"
가릭 크로울의 재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크로울의 이름을 대는 기사를 베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처사였다.
다른 백작가의 이름을 이렇게까지 대놓고 무시하는 건 싸우자는 말이니까.
카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은 오르필에게 다가갔다.
"누가 안다고."
"우리와 이자가 같이 있는 걸 본 사람이 몇인데."
"기차가 날다가 사람 하나쯤 떨어뜨릴 수도 있지."
"야!"
올리시렌은 듣다못해 소리쳤다.
순간 격해지는 상황에 밴더빌트와 아벨은 카인의 뒤에 섰고, 이소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쌓여 있던 성질을 쏟아 냈다.
"넌 맨날 그런 식이야! 왜, 네가 희생하려고 하는데!"
"희생한 적 없다."
"아까도 그래. 네가 무슨 힘을 부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건 알아. 분명 수명이 깎였지?"
카인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입을 닫았다.
아벨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올리시렌은 오르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왜 네가 죽이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크로울 백작가와 다툼이 일어나는 건 결국 나 때문이잖아."
"...."
"뭐든 네가 하려 하지 마, 우린-."
올리시렌의 말이 끊겼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씩씩거리던 그녀는 마침내 한마디 말을 깊은 속에서 퍼 올렸다.
"...친구잖아."
순간 모두가 멈췄다.
그저 눈동자만 움직이며 카인과 올리시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카인은 잠시 가만히 서서 '친구'라는 말을 사탕처럼 몇 번이고 입에 굴려 보았다.
전우나 동료는 안다.
부모와 형제도 알았다.
'친구라....'
어색했다.
두 번째 삶에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카인에겐 친구가 그러했다.
올리시렌은 이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듯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꼭 너만 그런 건 아니라 이소엘도 친구고 아벨도 그렇고 여기 밴더빌트 경도-."
"알았다."
짧은 카인의 대답.
담긴 것은 분명 진심이건만 손에 들린 절망검 아그웨스카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오르필을 죽이려고 하자 올리시렌이 물었다.
"왜 칼은 안 놓는데?"
"친구를 위해 적을 베려고."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올리시렌이었다.
카인은 늘 효율적으로 움직여 왔다.
그녀를 죽이고 차기 아이리안의 왕을 뒤바꾸려는 귀족들을 상대했고, 정체불명의 적들과도 가장 빠른 길로 싸웠다.
그 목적이 친구로 바뀌었다 해도, 그가 선택하는 건 같았다.
그게 카인 에셀레드, 대장벽의 전사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오르필은 내가 죽여!"
루드가 소리쳤다.
본인의 목숨이 물건처럼 거래되던 걸 멍하니 지켜보던 오르필은 그를 보며 비웃었다.
왕녀나 요새 떠오르는 에셀레드의 후예한테 죽는 것이라면 순순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루드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니, 오르필로서도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 비웃음을 본 루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가 오르필의 멱살을 잡았다.
"뭘 웃어!"
"그럼 안 웃을까. 아무것도 없는 평민 자식이 소리만 지르는 이 상황에서."
이소엘은 루드를 귀족이라 불렀지만, 오르필은 평민이라 낮잡았다.
덜그럭.
분명 루드의 돌멩이를 다 털어 냈건만, 몰래 숨겨 두었던 하나가 있었다. 루드는 그대로 오르필의 앞에 들이밀면서 말했다.
"난 당장이라도 당신을 죽일 수 있어!"
"쯧쯧, 그러니 네가 평민이라는 거다."
오르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분노에 눈이 돌아가려는 루드를 세우는 건 이소엘의 말이었다.
"기사는 칼날 위를 걷는 자. 고작 죽음 하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
"그러나 명예, 영광, 과거. 칼날 위를 걷게 만드는 것들은 무섭습니다. 지금의 루드 당신은 오르필 경을 죽일 수 있겠지만, 목숨만 뺏을 뿐 기사로서 그는 영원할 테니까요."
루드는 카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목청을 높였다.
"저... 분도 죽이려고 했는데 똑같은 거 아닙니까!"
그 와중에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는지 호칭을 높였다.
이소엘은 고개를 저었다.
"카인 경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를 잡았습니다."
"당신이 잡았잖아요."
"'나'라는 칼을 움직인 것은 그입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오르필을 풀어 주세요. 제가 바로 이겨서 죽일 테니까."
그 순간 카인의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떼를 쓰는 걸 보니 애는 애군."
"...!"
오르필을 죽이겠다고 말할 때와 달리 지금 카인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한때 전우였던 전사의 치기 어린 시절을 보는 건 나름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아이가 자라서 언젠가 최전선의 전사가 된다라. 놀랍군.'
그리고 그날의 설원에서 희생하던 것도.
카인은 너무 늦었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스-걱.
빈 허공을 가르는 검은 일격.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데구루루르-.
당연히 오르필의 머리가 잘릴 줄 알았던 올리시렌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으아아아악-!"
하지만 들리는 건 비명이라.
눈을 뜨고 바라보자 바닥을 구르는 건 오르필의 왼팔이었다.
"그래도 떼를 부릴 수 있는 건 애일 때뿐이니 이렇게 처리하지."
"죽, 죽여서 입을 막는다면서... 요?"
루드가 튄 피에 놀라며 물었다.
팔을 잘린 오르필 역시 당연히 죽을 줄 알았기에 당황하며 카인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피식 웃었다.
"효율보단 미래를 선택했다. 그리고 친구가 죽이진 말라고 했으니까."
친구, 올리시렌.
그녀는 카인의 말에 순간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카인은 허리를 숙여 오르필과 눈을 맞췄다.
"오르필 경."
"...."
"그대가 저지른 죄나 과거는 난 몰라. 그래도 저 작은 애가 이렇게까지 죽이고 싶어 한다면 뭔가 있겠지."
오르필은 팔이 잘린 고통 속에서도 입을 앙다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카인은 그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건 기사로서의 마음을 찌르는 걸 테고."
"그렇습니다."
카인은 이 상황을 쫓아오지 못하는 루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에게 미래를 주겠다. 루드는 강해져서 직접 네 손으로 복수해. 그리고 오르필 경은 가능하면 떳떳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
누군가는 간절히 바랐지만, 얻을 수 없었던 미래.
카인의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올리시렌이 말했고 둘의 근본이 썩지는 않아 보여 이렇게 결정했다.
"싫으면 백작령에 아리안에게 쫓아가서 붙어도 돼. 어떻게 될지는 본인이 알겠지?"
스릉-.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집어넣었다.
그간 너무 달라진 카인에 걱정하던 밴더빌트는 깊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건 여전했지만, 효율을 위해 모든 걸 부러뜨리지 않고 때론 돌아가는 카인이 뿌듯했다.
그리고 남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이루는 일들.
자신을 위해 양보를 하는 카인의 모습.
루드 크로울이 처음으로 올려다볼 사람을 찾는 순간이었다.
카인은 몸을 돌렸고 그의 뒤를 밴더빌트와 아벨, 에셔가 따랐다.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이소엘이 루드의 근처로 다가왔다.
"저희도 백작성으로 갈 예정입니다. 같이 가시죠."
루드는 뜨거운 무언가가 눈에서 흐르는 걸 느꼈다. 그는 오르필을 한 번 본 후, 이소엘의 뒤를 따랐다.
"아리안 님은-!"
고통인지 후회인지 알 수 없는 아픔으로 갈라지는 오르필의 목소리.
"안개꽃의 왕녀님이나 에셀레드의 후계가 덤비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오르필은 자신의 잘린 팔을 주워들고 있었다.
그간 살았던 시간이 기사 오르필의 시간이 아니라 간신 오르필의 시간이라는 걸 깨달은 듯, 쓴웃음도 지었다.
새로운 미래를 쌓기 위한 첫걸음으로 진실을 외쳤다.
"정체 모를 용병이 늘 지키고, 수상한 자금도 쓰고, 약물도 다루고...."
카인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돌려 어깨 넘어로 반쯤 실성한 듯한 오르필을 바라보았다.
"나도 알아."
"...?"
"도박판의 돈처럼 인간의 목숨을 던지고, 타인의 슬픔 따위는 짓이기며, 세상을 좀먹는 자식들."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사랑조차 이용하여 상대를 갖고자 하며, 이 열차를 폭파하면서 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고자 했다.
그리고 아벨.
카인의 주먹이 쥐어졌다.
수백 개의 발이 달린 은빛 거미에 먹히던 것 같던 용사 아벨의 마지막 모습이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데, 똑같은 걸 보았다.
라마이닝의 테들리가 이름도 모르는 저들과 손잡은 최후였다.
그 이상의 것은 카인에게 필요 없었다.
"그대에게 루드가 있다면."
오르필의 죄를 심판할 자는 루드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용사 아벨을 죽이고 세상을 좀먹는 자들을 죽이는 건 누구의 몫인가.
"그들에겐 내가 있다. 보이면 죽인다. 들리면 찾아가서 죽인다. 냄새가 나면 모조리 불태워 죽인다."
카인은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
콰아아아앙-!
그 순간 창밖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졌고 객차의 유리창이 깨어졌다.
흩날리며 반짝이는 유리 가루 속.
"나는 죽이고, 그들은 죽고. 그 이상의 것은 알 필요 없지."
카인은 다시 검을 쥐었다.
크로울과 이름도 모를 적들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45 EP.Ⅰ-10
얼음을 녹이는 것 (2)
"저, 정말 쏩니까?"
아이언하트의 방벽 위.
마법대포를 다루는 크로울의 장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도 눈이 있는 이상 저 멀리 협곡의 아이언브릿지가 무너지는 걸 봤고, 얼음 다리가 생기면서 그 위로 기차가 건너는 것도 보았다.
기적 같은 광경에 경의까지 품게 되었건만.
"쏴라."
시체처럼 죽은 눈의 가릭 크로울 백작은 장교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세상에 얼음다리 위로 열차가 달리는 게 말이 되나요?"
짧은 명령 후 이어진 것은 가릭 옆에 딱 붙어 있는 아리안의 말.
그녀는 쥘부채를 접어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열차를 가리켰다.
"당연히 마녀가 저지른 패악이죠."
"그... 래도."
장교는 말을 머뭇거렸다.
마법사가 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기에 마녀의 소행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마녀가 연관된 것이라면 성국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경하게 막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았다.
크로울의 영지민을 살렸는데도 마녀라 선 그으며 공격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모습을 훑던 아리안은 가릭의 팔을 안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
"백작님, 확실하게 말씀해 주셔요."
대포의 장교 말고도 방벽 위의 다른 자들도 힐끔힐끔 가릭 백작을 봤다.
시체처럼 싸늘한 회색의 피부에 어딘가 텅 빈 동공.
-오늘은 시원하게 들이켜 보자고!
가릭은 시원하고 뜨거운 남자였다.
그의 얼굴만 한 맥주병을 들고 병사들과 신나게 마시기도 했으며, 적이 있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섰다.
-내놔 봐. 내가 좀 봐줄 테니까.
또한 대장간이 있다면 병사들의 무기를 손수 고쳐 주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남자 중의 남자, 가릭 크로울.
그들이 함께했던 가릭은 평민이라고 해도 내치지 않고 아내로 맞이해 계속해서 싸웠던 사내였다.
그들이 봤던 가릭이라면 마녀라 할지라도 영지민을 도왔다면 눈을 감을 것이다.
그러나 가릭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쏴라."
아리안은 풍성한 금발을 이리저리 꼬면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자, 다들 들으셨으면 쏘세요. 마녀가 있을지도 모르는 열차가 아이언하트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더없이도 아름다우나 끌리지 않는 서늘함이 깃들은 웃음이었다.
방벽에 설치된 세 문의 대포들이 기기긱- 거리며 각도를 맞췄고.
콰아아아앙-!
마력석이 불타오르고 준비된 마법사들이 그들의 서클을 미친 듯이 돌리면서 대포를 쏘았다.
아리안은 폭음 속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가릭을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대적자라고 해도 대포로 짓이겨 버리면 그만이지. 정 안 되면...."
그렇게 하면 열차에 탄 수백의 영지민이나 안개꽃의 왕녀가 죽겠지만, 아리안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초탄 명중 실패!"
포물선을 그리며 나간 대포가 애꿎은 땅을 때렸다. 그 후폭풍으로 열차의 창문들이 산산이 조각 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아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탄 명중 실패!"
두 번째 대포는 반대편의 대지에 꽂혔다. 그렇게 열차를 확실히 때릴 수 있게 된 세 번째 대포.
처음에 머뭇거렸던 그 장교는 가릭을 한 번 보고, 갑작스럽게 차출되어 떨고 있는 어린 마법사를 훑어본 후 두 주먹을 쥐었다.
"크로울을 위하여! 발사!"
"발사!"
콰아아아아앙-!
아리안의 풍성한 옷이 뒤로 펄럭일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대포에서 쏘아진 마법이 그대로 열차를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시야를 명멸하는 순백색 마법의 빛.
닿는 것들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대포의 압도적인 화력이 열차에 닿았다.
"삼탄 명중...?"
소리에 반사적으로 명중을 외치던 장교의 말끝이 묘하게 올라갔다.
마법대포는 실제 폭발이 일어나는 대포알을 쏘는 것이 아니라 폭연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명중한 곳의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다.
콰르르르릉-.
분명 대포에 직격당한 열차가 더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장교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뚝.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금발의 아리안이 들고 있던 쥘부채가 그녀의 손에서 부서진 소리였다.
"대적자!"
그녀의 시선이 꽂히는 건너편.
달려드는 열차의 위.
흑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보랏빛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얼음이 모인 순백의 망토를 두른 채 어둠으로 만든 것 같은 흑색의 검을 들었다.
카인이었다.
"아직 6세대군."
최전선은 마법대포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답게, 가장 최신의 것들이 들어왔다.
그런 최전선의 전사였던 만큼 그는 마법대포에 대해선 누구보다 빠삭했다.
6세대와 7세대 마법대포의 결정적인 차이는 '물리력'이었다.
실제 대포알이 아니라 대포에 새겨진 마법진을 결집한 특수한 마법을 쏘는 것이 6세대 마법대포.
그렇기에 카인은 조금 더 편하게 쳐낼 수 있었다.
"쏴라."
침묵하던 가릭은 다시금 명령했다.
"쏴라. 쏴라. 쏴라. 쏴라...."
높낮이가 바뀌지 않은 채 가릭은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뱉었고, 방벽 위의 사람들은 움찔거렸다.
누가 봐도 가릭은 정상적이지 않았으니까.
"쏘라는 소리 못 들었어요!?"
아리안의 날카로운 외침.
마법대포를 다루는 장교들은 찜찜했지만, 눈앞에서 가릭이 명령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대포를 조정했다.
"당장 저 검은 머리를 죽여 버려요!"
가릭의 명예를 빌려 날뛰는 아리안이 꼴 보기 싫었으며, 어째서 영지민이 있는 열차를 지킨 자를 죽여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크로울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
가릭이 직접 명령했으니 안 따를 수가 없었다.
"크로울을 위하여."
다가오는 열차를 예상하여 대포들이 발사각을 바꾸었고, 그 모습은 저 멀리 열차 위에 서 있는 카인의 눈에도 선명히 잘 보였다.
['봄'이 조금 남아 있던 올바른 운명을 전달합니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카인은 기분 좋게 바람을 맞으며 척추를 타고 오르는 지독하게 싸늘한 '겨울'의 힘을 인지했다.
'자신이 없구나.'
운명이란 걸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해 주는 족쇄와 같았다.
그러나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일어난 일을 뒤엎는 것이 쉬울 리 없으니까!
오히려 피가 끓는 것 같았다.
쿠웅.
그가 상대할 적들이 어쭙잖은 쓰레기들이 아니라 가까이는 용사 아벨을 죽인 것들이며, 멀리는 바뀌지 않으려는 이 세상 그 자체라는 걸 절감했기에!
꽈아아아아악-.
양손으로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내뻗은 왼발을 단단하게 기관차 위에 디뎠고.
마법대포의 입구가 번쩍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수우우우우우우-.
공기를 찢으며 내려오는 파괴의 빛.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맞고 죽었겠지만, 카인은 아니었다.
'질 자신이 없어!'
['겨울'이 운명을 포식합니다.]
[초겨울의 봉인이 흔들립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수직의 달빛은 엄정함으로 첫 번째 대포를 갈랐고.
외식 外式.
엘레이손 Eleison.
수평의 햇빛은 광대함으로 두 번째 역시 으스러뜨렸으며.
십자격 十字擊.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하늘과 땅이 이어지고, 해와 달이 동시에 빛을 뿜어내는 이 순간만큼은 카인 에셀레드가 아니라 최전선의 로드이스트였다.
콰가가가가가!
"전탄 명중 실패."
방벽은 침묵에 휩싸였다.
정확하게 내리꽂히는 마법대포를 칼 한 자루로 막아 내는 기적을 목도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소드마스터...."
전설로만 들려온 이름이자, 이 시대의 아이리안에선 오직 에드먼드 에셀레드만이 인정받은 것.
"마스터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
모든 무기의 주인.
한 명의 존재만으로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살아 있는 전략 병기.
그것이 소드마스터였다.
달리는 열차 위에 서서 세 발의 마법대포를 막은 것으로 그의 무력이 소드마스터임을 증명하며.
수백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나서는 것으로 그의 고결함이 검과 같이 올곧다는 것이 드러나니.
"소드마스터가 나타났다!"
진정한 의미의 소드마스터가 있다면 카인과 같으리라.
방벽 위는 난리가 났고, 열차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언하트에서 쏘아지는 마법대포에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열차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들 다시금 환호를 내질렀다.
환호와 절망이 교차하는 그 순간.
카인은 자신에게 힘을 줬던 '올바른 운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썰물처럼 힘이 흘러나가면서 몰아치는 공허함에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아그웨스카로 바닥을 찍으며 간신히 섰다.
"카인!"
올리시렌이 객차의 틈에서 나와 소리 질렀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오지 말랬지."
"그 전에 내가 너 혼자 다 하지 말라고 했지!"
"...."
"친... 구가 혼자 싸우는 걸 뒤에서 두고 보고만 있을 정도로 내가 개자식은 아니라서."
마법대포가 터지는 순간, 카인은 이런 상황을 직감하며 홀로 열차 위로 올랐다. 여럿이 있는 것보단 혼자 쳐 내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한 것이다.
올리시렌을 필두로 다른 자들이 열차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인은 그들의 모습에 효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저 멀리서 그들이 움직이는 걸 보며, 아리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해를 쏴라, 데이브레이커."
가릭은 그녀의 확성기라도 된 양 허망한 한마디를 뱉었다.
"쏴라."
반-짝-!
순간 아이언하트의 성문 아래서 오색의 빛이 명멸했다.
방벽 위의 사람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그곳엔 검은 후드를 둘러쓴 한 남자가 거대한 활을 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대지가 흔들린다.
활을 쏘아 하늘의 해를 떨어뜨릴 것처럼 거대한 압력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비어 있던 활에 나풀나풀 흘러나오던 오색의 빛이 모여들며 한 줄기의 화살이 되었다.
데이브레이커(Day-Breaker).
낮을 부숴 밤을 부르는 자.
온전한 황금의 새벽을 부르기 위해 밤을 인도하는 자.
아리안에게 고개 숙였던 사내는 자신의 모든 생명을 불태우며 기도했다.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그들의 대업을 방해할 대적자를 죽이기 위해 준비된 화살을 쏘았다.
구구구구궁-.
허공을 둥글게 가르며 다가가는 것이 마법대포라면, 그가 쏜 화살은 대지에 긴 상흔을 남기며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그 목표는 검은 머리의 카인이었으니 카인의 근처에 모인 동료들과 기관차 역시 영향을 받을 터.
화살이 짓쳐 드는 짧은 순간.
카인은 이를 악물며 '겨울'의 힘을 다시금 일으켰다.
딱 봐도 마법대포보다 위험해 보이는 일격.
다시금 수명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턱-.
그 순간 누군가 카인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귀걸이를 해제하며 중력망치 크레드네를 쥐는 이소엘,
대검을 뽑아 드는 밴더빌트,
세검을 뽑아 드는 아벨,
방패를 든 에셔.
그 모두보다 한발 빠르게 어떤 계산이 아니라 살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앞으로 나선 숭고한 여인.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지이이이잉-.
그녀의 회색빛 동공에 아그웨스카와 같은 끝 모를 어둠이 차올랐고.
사라져라.
아흔아홉 번째의 마녀.
끝에 서 있는 살아 있는 종말.
그녀의 한마디에 날아들던 오색의 화살은 반짝이는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젠장, 진짜 절대란 건 없었네."
올리시렌은 카인을 돌아보며 욕을 뱉었다.
마녀의 힘을 이렇게 쓰게 될지는 그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시 같은 상황에 부닥쳐도 그녀는 같은 선택을 하리라.
그게 올리시렌이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나 좀 대단했지?"
올리시렌은 카인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멸망의 대적자 Ⅲ』의 조건이 확정됩니다.]
+
...
클리어 조건 : 올리시렌의 각성(일부 달성), 끝의 자각(달성), 죽음.
성공 시 : 세계선 고정도 상승, 아이리안의 평화.
실패 시 : 회귀 취소.
+
"응."
카인은 메시지들 건너 웃고 있는 그녀에게 화답했다.
만약 저것도 그 '올바른 운명'이라면 운명조차 베겠다는 각오를 하면서.
#46 EP.Ⅰ-10
얼음을 녹이는 것 (3)
갑작스레 날아든 화살은 갑작스레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방금 아리안의 용병이 쏘아낸 화살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부류가 아니라는 걸 방벽 위의 모두가 알았다.
그럼 어떻게?
저 소드마스터에 다다른 검은 머리 청년의 힘인가.
옆에 있는 회색 머리 여인의 힘인가.
만약 여인의 힘이라면....
콰르르르르-.
기차의 요란한 소리가 다가와도 방벽 위의 침묵을 걷어 내지 못했다.
그래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아리안이었다.
꽈악.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붉은 핏물이 방벽 위의 벽돌에 똑똑- 떨어졌다.
그녀의 조직은 태양을 떨어뜨리기 위한 필살기, '데이브레이커'를 쓸 수 있는 자는 기술명으로만 불렀다.
그것만이 그의 가치니까.
즉, 저 일격은 이렇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 사라진다면 단 한 가지 경우일 터.
'마녀-!'
오직 마녀만이 지우리라.
아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마녀라 하기엔 파동이 없었어.'
마녀가 데이브레이커를 지울 정도로 기원을 끌어낸다면 반드시 특유의 파동이 퍼졌어야 했다.
성국이 마녀를 추적하는 방식도 이 파동을 찾아내는 것이고.
마녀의 힘을 쓰지만, 마녀의 파동을 내지 않는 경우라면....
아리안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녀에 대해선 가장 잘 아는 곳이 자신의 조직인 만큼 그 답은 어렵지 않았지만, 인정하긴 어려웠다.
'제대로 각성도 하지 않은 예비 마녀가 데이브레이커를 지울 기적을 부릴 수는... 없다.'
모든 일이 그들이 본 미래 그대로 움직였건만 그녀가 마주하는 현실은 희박하디 희박하여 불가능이라 여겼던 일!
툿-.
본인도 모르게 손톱을 물고 있다는 걸 깨닫곤 입가에 묻은 피를 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기관차 위에 무릎을 굽힌 흑발의 청년과 안개꽃의 왕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아리안은 꼬리뼈부터 치고 오르는 섬뜩함에 움찔했다.
지금은 아이리안을 그리고 세상의 운명까지 바꿀 흑발의 대적자, 카인 에셀레드.
제 색을 찾지 못한 회색의 왕녀,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혀가 닳아질 정도로 외웠던 자신들의 기도문을 외우며 가릭에게 딱 붙고는 차갑게 말했다.
"자, 다들 봤죠?"
"...?"
방벽에 깔리는 의문.
그녀는 수천수만 번 연습했던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의심하던 자들도 단숨에 현혹될 그런 웃음이었다.
"마녀가 부리는 기적을요."
"...!"
"제가 부리던 용병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다들 봤을 거예요. 만약을 몰라서 아티팩트까지 들려서 준비했던 건데 이렇게 쉽게 사라진 거면 마녀가 확실해요."
은근슬쩍 아티팩트의 힘이라고 언급하면서 의혹을 눌렀다.
하지만 일부는 넘어갈 리 없었고 아까의 장교가 반박했다.
"마법대포를 쳐 내는 검사도 있는데, 무작정 마녀라고 단정하는 건 너무 나가시는 겁니다."
아리안은 검지만 뻗어 코앞까지 다가온 열차를 가리켰다.
"책임질 수 있나요? 그대의 그런 나약한 판단으로 마녀를 아이언하트로 들인다면 벌어질 일들을요?"
"그건...."
휘이잉-.
짧은 바람이 불었고 아리안이 흘리는 향내가 다시금 가릭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릭에게 물었다.
"백작님이 딱 정해 주셔요. 마녀일 수도 있는 존재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받아들일 것인지, 남은 영지민들을 위해 저들을 쳐낼지."
모두의 눈동자가 가릭의 입으로 향한다.
그들이 알던 가릭 크로울 백작이라면 당연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영지민을 지킬 터.
"쏴라."
하지만 그녀의 세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는 그저 같은 단어만 말할 뿐이었다.
"다들 들었죠, 빨리 쏴요!"
"너무 가까워졌습니다. 여기서 쏘면 아이언하트에까지 그 여파가 미칩니다."
"쯧. 당신이 말만 안 걸었어도 한 발이라도 더 쐈을 텐데. 그럼 모두 칼을 들고 찔러 죽이세요. 마녀와 마녀를 돕는 자는 살려 둘 수 없죠."
"그럼 영지민들은 살려서-."
아리안은 그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는 크로울의 반란분자들을 솎아내기 위해 열차에 미리 준비해 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열차가 얼음다리를 건너 달려온다는 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
아리안은 자신의 계획에 변수가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도 대적자가 상대라면 섬나라의 영지민 따윈 관심도 없었고.
"마녀에게 홀렸을지 모르니 그냥 다 죽이라고요."
화아아아-.
사람의 목숨을 깃털보다 가벼이 여기는 그녀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 말이었다.
가릭 크로울 백작을 향한 충성은 결국 크로울 백작령에 사는 영지민들의 수호.
언제나 영지민들을 지키겠다고 다짐해 왔던 그들로선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작님?"
아리안은 굳이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녀의 꼭두각시 인형이 된 가릭의 한마디면 편히 갈 수 있었으니까.
"쏴라."
"그거 말고요.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
가릭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의 신념에 어긋나는 말이기에 그 몸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리안은 혀를 차며 품속에서 자신의 향수를 꺼냈다. 자연스레 향을 더욱 짙게 한 후 물었다.
"마녀가 눈앞에 있어도 영지민 몇을 살리겠다고 머뭇거리는 이 바보들에게 명령을 내려 주셔요."
"죽, 죽, 죽...."
"가릭 크로울 백작님?"
화아아아아-.
나긋한 말과 함께 숨통을 짓누르는 향에 가릭의 눈은 완전히 풀어졌다.
그렇게 내려진 명령.
"죽여라."
'아이언브릿지의 기적'을 잇는 '아이언하트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 * *
최전선엔 괴물이 살았다.
그 괴물은 대장벽 너머에서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몬스터가 아니라 동쪽 장벽의 절대자, '로드이스트'였다.
"검을 알려 달라고?"
풍성한 백발을 몬스터의 뱃가죽을 뜯어 만든 끈으로 한 줄로 묶은 노인.
턱과 뺨엔 흰 수염이 풍성했고, 어깨는 장벽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예."
순백의 대검, 겨울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청년을 훑어보았다.
전사 하나하나를 기억할 순 없었지만, 나름 오래 살아남은 녀석들은 익숙했고 청년의 얼굴도 익숙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노인은 말을 이었다.
"대장벽에선 전사들이 서로의 비기를 나누지. 굳이 내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오래 산다면 강해질 터."
"하지만 그들은 소드마스터가 아닙니다."
아직 어린 전사의 치기 어린 말에 그의 속내가 보인다.
노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설원의 한기를 막기 위해 입은 두터운 코트 속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수통을 꺼내 마시곤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으며 말했다.
"지랄하네. 소드마스터가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네 주제를 알고 가르쳐 달라고 해라."
젊은 전사는 고개를 저었다.
밑바닥의 밑바닥, 대장벽.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노인의 검을 봤다. 그건 아주 어릴 적 전사가 봤던 누군가의 검과 닮아 있었다.
"소드마스터는 저도 잘 압니다."
"해 봤자 오러를 검에 두르고 약 처먹은 놈처럼 뛰어 다니는 거나 알겠지."
"아버지가 소드마스터입니다."
우뚝.
노인은 순간 멈칫했다.
수없이 많은 자들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마다 소드마스터가 뭔지 모른다면 돌려보냈다.
당연히 청년의 대답도 지금까지 놈들과 비슷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족.
노인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전사는 다른 전사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이름 역시 적어도 몇 년 이상 지낸 전사끼리만 나누는 것.
그럼에도 노인이 물었다는 건 가르침을 구하는 젊은 전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신호였다.
"카인입니다."
"성은?"
"버렸습니다."
"버려진 거냐, 버린 거냐."
노인은 예리했고.
"제가 조금 더 일찍 버렸습니다."
절박한 카인은 뻔뻔했다.
"네 아비가 '진짜' 소드마스터인지 아닌지 내가 알 방법이 없다."
"어릴 적에 딱 한 번 본 거지만, 아버지가 칼을 내지르는 순간 낮이 밤이 되었습니다."
노인은 거친 손으로 턱을 쓸었다.
확실히 어쭙잖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진짜'를 봤으니 저런 말을 할 수 있으리라.
앙큼하게 지금의 자신을 세 치 혀로 속아 넘기는 거라도 그건 그것대로 가치가 있기에 그는 카인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카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길한 눈동자네."
"처음 들었습니다."
"그거야 눈 말고도 넌 다 불길하니 그냥 욕했겠지."
"...."
대장벽의 절대자이자 소드마스터인 노인이 생각보다 가벼운 자라는 사실에 카인은 조금 당황했다.
그는 씩 웃었다.
"내 이름은 조니다. 조니워커."
"예, 로드이스트 조니."
"길다. 그냥 사부님이라 불러."
"...!"
카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조니워커는 한 손으로 겨울을 뽑아 들어선 저 먼 설원의 지평선을 가리켰다.
"딱딱한 네 녀석도 바꾸고 '암천일광'도 가르치기 바쁘겠지만 우선 내 '진짜'를 보여 줘야겠구나."
스윽-.
어떤 기수식도 없었다.
평범하게 걷듯 그는 걸었고, 숨결조차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순백의 대검이 움직였고.
파아아아아아아-.
흰 눈이 쌓인 설원이 갈라지며 검붉은 제 속살을 보였다.
그뿐일까.
카인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내리던 눈들이 조니워커의 겨울이 가리켰던 방향으로는 오지 않는다.
"더 위."
대장벽에 와서 처음 보는 파란 하늘.
언제나 드리워진 먹구름엔 길게 칼자국이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맑은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해를 찔러 떨어뜨리는 자, 에드먼드 에셀레드.
그리고 구름을 베는 자, 조니워커.
카인이 마주한 두 번째 '진짜' 소드마스터였다.
그는 한숨인지 한탄인지 알 수 없는 숨결에 말을 실었다.
"이게 나의 세월을 벼려낸 나의 검이다. 따라올 수 있겠느냐?"
"따라간다면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카인이 누구를 말한 건지 모를 리 없었다. 조니워커는 그 간절한 보랏빛 눈에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의 용사님이 될 수는 있겠지."
"...."
"농담이다. 용사는 못 되지. 네가 끝까지 따라온다면 '겨울'을 이어야 하는데 '여름'의 용사가 어떻게 되겠냐."
"그렇군요."
노인은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는 카인을 내려다보다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선.
채앵-!
그대로 부러뜨려 버렸다.
계속 무표정하던 카인이 놀라자 조니워커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잡생각이 많은 놈은 검을 쥐어선 안 돼. 두 번째 가르침을 주지. 주먹은 네 손가락을 모은 후 엄지로 감싸는 거다."
그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인류라는 종족이 가장 처음 지닌 무기는 이 주먹과 발. 그러니 앞으로 일 년간 검의 사용을 금하겠다."
질기고 단단할 뿐 아니라 빠르게 회복하는 괴물들을 상대하기에 인간의 몸뚱이는 너무나 허약했다.
매일 싸워야 하는 카인에게 칼을 쓰지 말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이럼 몬스터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당황해하는 카인에게 노인은 손가락 세 개를 들며 냉정하게 말했다.
"세 번째, 내가 하란 대로 안 하면 거기서 내 가르침은 바로 끝이야. 닥치고 주먹질이나 해라."
* * *
쩌저저저저적-!
맹렬하게 달려가던 열차의 주위로 생겨난 얼음들이 붙잡자 아주 천천히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눈송이처럼 흩어지고 있는 순백의 망토를 두른 카인은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큰일을 덮는 방법을 아나?"
아무리 존재감이 없다 해도 1왕녀였던 올리시렌에겐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더 큰 일로 덮는 거지."
"내가 덮겠다."
하루 이틀 같이 다닌 게 아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카인이 무슨 짓을 할지 예상했다.
"다 죽이려고!? 안 돼! 절대 안 돼. 차라리 크로울의 지지를 못 받더라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순 없...."
겨울의 뇌전이 온몸에 스며들면서 조여드는 긴장감.
스륵-.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언젠가의 가르침처럼 네 손가락을 모아 엄지로 감싸며 주먹을 쥐었다.
"다 죽이는 것보다 다 살리는 게 더 큰 일이야."
느려지는 열차 위에서 카인은 지붕을 박차며 창과 방패를 든 크로울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카인의 주먹은 조니워커의 주먹과 닮았고, 뒷모습은 누군가에겐 하나뿐일 용사의 모습이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47 EP.Ⅰ-11
아이언하트 공방전 (1)
「"사랑하오."
붉은 노을이 두 연인을 비춘다.
"백작님, 전 평민이에요...."
"알고 있소."
"저와 만나면 백작님이 힘드실 거예요."
"나는 힘들어도 괜찮소. 그러나 그대가 힘들다면 돌아서겠소."
"...."
가릭은 미아의 손을 잡았다.
해가 지고 모든 것을 품는 밤이 올 때까지 이어지는 대화.
사랑이 진행된 과거와 시련이 지속될 미래를 잇는 현재의 고백.
마침내 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릭은 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네 개의 기둥은 순금이었고 벽면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얇은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가릭이 선물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남자라는 건 미아가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이렇게 화려한 보석함을 꺼내자 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릭은 미아의 손을 끌어당겨 보석함을 쥐여 줬다.
"크로울 가문의 시조께서 마지막으로 만든 물건이 이 안에 있소."
딸깍-.
가릭이 보석함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새 조각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누군가가 목에 걸 수 있게 고리를 붙여 둔 것이 보였다.
그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미아의 목에 걸어 주며 말했다.
"무기만 만들던 분이 왜 이런 조각을 만든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보다 당신에게 더 어울릴 것 같소."
크로울 가문의 가보.
가릭은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선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미아는 자신의 목에 걸린 새 조각을 집었다.
화아아아-.
분명 보석함에서 나올 땐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쥐자 연분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릭은 그걸 보며 미소 지었다.
"쥔 사람의 마음을 색으로 보여 준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당신...."
속내가 들킨 미아의 얼굴이 순간 새 조각처럼 새빨개졌다.
가릭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 조각엔 한 가지 전설이 있소."
"어떤 전설이요?"
가릭도 조각을 쥐었다.
미아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이 강철의 날개가 퍼덕일 때 모든 운명이 바뀐다는 전설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좋게 생각합시다. 이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할 때 이 새 조각이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 * *
새까맣다.
아이언하트의 성벽 앞에 크로울 백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든 채 군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명.
카인 에셀레드가 그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아이언하트의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스모그가 가득 담긴 바람이 불었다. 흩날리던 꽃잎들이 삽시간에 색을 잃을 정도로 검은 바람이었다.
그렇기에 카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파지지지지지직-!
길게 묶은 흑색의 머리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보랏빛 눈.
꽉 쥔 두 주먹에서 일어나는 순백의 벼락-!
"막아!"
성벽 위 금발의 아리안이 소리 질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크로울의 영웅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고, 마법대포를 세 번이나 검으로 쳐 내는 소드마스터와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죽여라."
가릭 크로울 백작의 낮은 목소리.
아리안의 말엔 시큰둥했지만 가릭의 명령에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 내며 무기를 세웠다.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라마이닝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백작가야.'
카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일행들이 무기를 쥐고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걸 잃어버릴 짓을 했던 올리시렌을 쓱 보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들곤 크게 소리쳤다.
"나는 카인 에셀레드다!"
구구구구궁-.
꽃밭이 울리며 꽃잎이 자지러지듯 흩어지고 육중한 아이언하트의 도심이 흔들렸다.
[초겨울의 봉인이 더욱 흔들립니다.]
지난 삶, 무수히 '겨울'을 휘둘렀지만 방금은 카인조차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터져 나왔다.
적들이 얼어붙는 건 당연하리라.
['겨울'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스스슷-.
액티브 '밤의 겨울'을 펼치는 것도 아니건만 카인의 어깨에서부터 점차 순백의 망토가 펄럭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로울 백작가는 들어라-!"
힘이 필요할 때 힘을 주는 신기가 있다면 거리낄 게 뭐가 있을까.
카인은 뒤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 대가가 나라면 웃으며 감당하겠다.'
올리시렌이나 아벨이 알면 기겁하고 말릴 다짐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쿵-.
그렇게 크로울의 군사들과 가까워지고.
"오늘 크로울은 내 손에 무너진다."
"...!"
고작 한 명이 백작가 전체와 싸우겠다는 선전 포고를 했다.
누구나 콧방귀를 뀔 이야기지만, 이곳의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바람을 거스르는 한기.
영혼을 얼려 버릴 것만 같은 날카롭고 차가운 살기가 크로울의 병력 사이로 파고들어 아리안조차 입을 닫게 했기 때문이다.
팟-!
그 순간 카인이 대지를 박찼다.
"창끝을 내려라!"
빛살처럼 달려드는 카인을 보며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명령했다.
병사들이 훈련받은 대로 창끝을 세웠다.
당연히 멈출 것이다.
카인이 창끝 앞에서 멈출 줄 알았건만, 그는 그대로 달려들었다.
영웅을 죽이는 건 마음을 찌르는 일이었지만 양심보다 먼저인 건 명령.
병사들은 창을 더 꽉 쥐었다.
아리안은 손에 땀을 쥐며 내려다보았다. 제발 이렇게 쉽게 끝나기를, 대적자 카인이 죽어 버리길 바라면서.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주먹으로만 괴물들을 상대하는 게 까다로울 테지.
두 주먹만으로 대장벽에서 일 년 동안 살아남은 전사가 있었다.
-아무리 때려도 회복되고 어떻게 하나를 잡는다 쳐도 티도 안 날 테니.
조니워커는 답을 알려 주는 스승이 아니었다. 답을 찾는 길을 알려 줄 뿐.
-싸워라.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라. 그러면 알 수 있을 거다. 두 주먹으로도 몬스터 떼거리를 이길 방법을.
그때도, 지금도.
카인은 언제나 답을 찾았다.
창들이 치솟은 위나 옆을 향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쿠우우우우웅-!
카인은 왼발로 대지를 내리찍었다. 그의 발뒤축을 중심으로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파지지지지지직-!
카인을 휘감은 순백의 망토에서 홍수처럼 뇌전이 뻗어 나왔고, 카인은 그대로 오른 주먹을 뒤로 당겼다.
'검이 선이라면, 주먹은 점.'
하늘의 해를 쏘아 떨어뜨릴 극강의 찌르기.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본 적은 있다.
카인은 '한 점'을 노리는 최강의 검술을 떠올렸다.
-나는 구름을 베고 네 아비는 해를 찔러 떨어뜨리지. 베기와 찌르기라. 고약하고도 찬란한 운명이구나.
조니워커가 인도했고.
기억이 따라갔으며.
카인이 찾아낸 애증의 정답.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던 그날의 검!
카인식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쿠르르르르릉-!
카인의 오른손에 뇌전이 회전하며 집속했다.
처음엔 미약한 바람이었지만, 어느새 그곳엔 번개폭풍이 강림해 있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목줄이 풀린 맹수처럼 수천의 뇌전이 그대로 뻗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파삿-!
뇌전은 카인을 향하던 창대들을 부쉈고.
닿는 갑옷들을 족족 으스러뜨렸으며.
파사삿-!
병사들이 쥐고 있던 무기들을 분질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병사와 기사들은 두 눈만 끔뻑거렸다.
"살, 살았다?"
무기와 갑옷, 방패가 부서지는 와중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랐다.
다들 몸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며 만질 때, 카인이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크로울의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명예를 아는 자는 길을 비켜라."
카인이 한 번 살려 주었다.
저벅-.
그는 부서진 창대들을 밟으며 걸어 나갔다.
병사들은 곁눈질만 하면서 슬금슬금 물러나고, 지휘하는 기사들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멈칫멈칫했다.
"다들 뭐 해! 당장 죽이라고!"
지켜보던 아리안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저 괴물 같은 대적자가 더 이상 다가오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장-!"
아리안은 자신이 회유했던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그들은 고개를 젓다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죽나 아리안이 잡은 약점이 들켜서 죽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엄청난 일격에 무기가 박살 난 이상 그들이 들 수 있는 건 주먹뿐이었다.
"미안합니다."
후웅-!
이름 모를 갈색 머리의 기사가 육중한 몸을 던지며 주먹을 뻗었다.
카인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짝 몸을 틀어 피한 후 대답했다.
"그 말이 당신을 살렸어."
팟-.
기사의 주먹도 충분히 빨랐다.
뒷골목의 양아치들 정도는 수십이 덤벼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풀썩.
그러나 땅이 푹 파일 정도로 튀어 오른 카인의 무릎보단 약했다.
"커-헉-!"
무릎으로 명치를 맞은 갈색 머리의 기사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쓰러졌다.
순식간이었다.
나선 기사 다섯을 한 번씩 때리는 것만으로 눕혀 버렸다.
"다음."
차가운 말이 전장을 휘감는다.
기사 다섯을 순식간에 눕혀 버린 카인에게 덤빌 자는 더 없었다.
"정말 소드마스터인가?"
"역시...."
"그런데 왜 죽이지 않지?"
본래 전쟁에서 죽이는 것이 살리는 것보다 쉽다.
하지만, 카인은 굳이 가시밭길을 걷고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크로울의 병사들은 얼떨떨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 공방전에서 살아난다면 모두 카인의 자비로움을 칭송할 정도로.
물론 카인은 그런 걸 바라진 않았다.
'이슈가 되겠어. 그리고 더 큰 것도.'
죽이지 않고 백작가를 홀로 이겨 낸다는 이슈를 만들고, 원래의 목적을 위해 카인은 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내 적은 단 한 명. 아리안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웅성거리던 병력이 고개를 들어 성벽 위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카인도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아리안은 가릭 백작님과 미아 님을 중독시켰고, 제 욕심을 위해 아이언브릿지마저 폭파하려 했지."
전사는 단순히 싸움만 잘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뿐일까. 백작님의 하나뿐인 아들을 몰래 처리했더군."
대장벽의 모든 전사들을 책임지는 '로드이스트'라면 영리하다 못해 간사할 정도까지는 되어야 법.
"내가 무너뜨릴 크로울은 저 간사한 여자가 제멋대로 하는 크로울이다!"
뽑지 않는 칼과 몇 마디 말로 카인은 절묘하게 전쟁의 판도를 뒤집고 있었다.
저벅-.
걸음에 맞춰 적들이 파도처럼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이언하트 공방전이라 불릴 전쟁이 싱거울 정도로 쉽게 승기가 기우는 순간이었다.
아리안은 혀를 찼다.
"내 말이 가릭 백작님의 말이라는 걸 다들 모르는군요."
파앗-.
그녀는 자신의 부채를 펼쳤다.
한 번 맡으면 코를 물로 씻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향내가 일어났다.
제 얼굴을 부채로 가리곤 초승달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요, 백작님."
아리안의 뒤로 순간 적색의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쿠웅-!
그것은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병력이 물러서며 생겨난 공터에 떨어져 내렸다.
탁.
아리안은 부채를 접었다.
부채의 끝으로 카인을 가리키며 죽음을 선고했다.
"죽여 주세요."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두 눈은 새빨갛고 코와 귀에서는 피를 흘리면서 한마디만 반복하는 적금발의 사내.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거침없이 찢어졌다.
"크아아아-!"
달궈진 쇳물처럼 전신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가릭 크로울 백작이 괴성을 내질렀다.
아리안이 준비한 마지막 수였다.
쿵-.
카인은 가볍게 왼발로 대지를 디뎠다.
중심을 낮추고 두 주먹을 들며 이젠 누가 봐도 아리안의 술수에 미친 가릭을 응시했다.
특히 그의 심장.
루드에게 있었고.
두근두근-.
가릭에게도 있는 것.
붉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뛰면서 가릭의 전신을 달구고 있었다.
크로울의 피를 타고 이어지는 '저주'였으며.
이 공방전의 마지막이었다.
#48 EP.Ⅰ-11
아이언하트 공방전 (2)
[초겨울의 봉인이 끝나 갑니다.]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크아아아아아-!"
가릭 크로울 백작은 인간이건만, 그의 뒤로 어렴풋이 '트롤'의 형체가 겹쳐 보였다.
정확히는 그의 심장.
루드에게도 이어지는 '저주'가 깃든 범인이었다.
본래 가릭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 심장이 뛰는 한 제 생명까지 불태우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할 터.
더욱 강해진 '겨울'의 힘이 카인의 눈에 쏠리면서 원래는 보지 못할 진실을 보게 만들었다.
후-웅!
가릭이 서 있던 곳에선 뿌연 먼지가 일어났고 그는 카인을 향해 내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가 손바닥만 하게 보였지만, 순식간에 가릭의 주먹이 거대하게 보이는 찰나.
핏-.
카인은 가볍게 왼발을 옆으로 디뎠고.
휘잉-.
가릭의 주먹이 카인의 코앞으로 지나갔다.
부드럽게 그의 돌진을 피해 낸 카인.
폭주하는 가릭은 제힘을 이기지 못한 채, 카인을 지나쳐 한참이고 달려 나가다 대지를 긁어내며 멈췄다.
"크으으으-."
그곳에 인간은 없었다.
새빨간 눈으로 으르렁거리는 '트롤'의 힘과 정신만 남은 괴물이 있었다.
"안타깝습니다, 백작님.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좀 더 좋게 만났을 텐데."
카인은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금발의 아리안이 홀로 남아 부채질을 하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우우우-.
터져 나오는 카인의 살기.
가릭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고, 아리안마저 본인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네년이 같잖은 술수를 벌여서 망쳤어."
혼을 베는 날카로움.
마음마저 자를 한기.
'이것이 바로 대적자....'
그녀의 감각으로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카인의 주위를 휘감는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렇지 않는다면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으니까.
카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스윽-.
그냥 손가락으로 목을 가로로 그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본 가릭.
['겨울'이 인과를 속삭입니다.]
초대 크로울은 트롤의 힘을 제 심장에 녹였다.
그 후 자식에서 자식으로 전승되면서 자연스레 불에 대한 저항력과 강건한 육체를 얻었다.
하지만 근친혼을 하지 않는 한 피는 흐려지기 마련. 가릭 크로울의 대에 와서는 손톱만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능을 쓰는 루드의 경우가 특별한 거겠지.'
어쩌면 가릭이 반대를 무릅쓰고 미아와 결혼한 것엔 사랑만이 아니라 피의 비밀도 엮인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일.
꽈악-.
카인은 상념을 털어 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제 말이 들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쿵.
카인의 왼발이 대지를 내리찍었다.
'밤의 겨울'을 쓰지 않음에도 피어난 순백의 망토가 펄럭였고, 보랏빛 눈이 가릭을 응시했다.
"용서하십시오."
가릭 크로울 백작.
아리안을 후처로 들여서 이런 사달을 냈다는 오점을 제외하면 괜찮은 귀족이다.
엄청난 수완가까지는 아니지만, 차근차근 영지를 운영해 나가는 자라고 왕실정보국은 그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카인도 가릭을 존중하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꺼내 들었다.
"미쳤을 땐 역시 정신 차릴 때까지 맞는 게 최고입니다."
후우우우웅-.
아이언하트에서부터 불어오는 검은 바람을 타고 꽃잎들이 둘 사이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카인이 움직였다.
가릭은 카인의 살기에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고, 원을 그리며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한 명의 숭고한 인간과 미쳐 버린 괴물의 싸움을 보는 모두가 직감했다.
이 승부에서 모든 것이 결착 나리라고.
올리시렌은 두 손을 맞잡았다.
마녀의 기도가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신을 향해 빌었다.
카인이 다치지 않기를.
자신이 벌인 일을 덮기 위해 그가 나서는 걸 알기에 더욱더 간절히 바랐고, 이소엘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짐을 덜고자 입을 열었다.
"지금의 크로울 백작님은 마치 몬스터와 같은데, 밴더빌트 경. 카인 님이 괴수 사냥은 잘하십니까?"
"음."
밴더빌트는 뺨을 긁었다.
사람과는 몬스터는 차이가 크다.
사람과 잘 싸운다고 몬스터를 잘 잡는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잘하십니다."
그때 아벨이 쐐기를 박듯 단언했다.
"형님은 못 하시는 게 없으니까요."
"...."
이소엘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벨의 말이 맹목적이지만, 끝나기 무섭게 올리시렌이 고개를 들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지켜보자."
올리시렌의 말.
그렇게 모두가 다시금 카인과 가릭을 바라보았다.
팟-!
시작은 카인이었다.
달려드는 카인과 피하지 않고 괴성을 내지르며 부딪쳐 오는 가릭 크로울!
쾅!
주먹과 주먹.
콰아아앙-!
인간이지만 몬스터의 힘을 각성한 미쳐 버린 가릭과.
콰앙-!
사계절의 신기를 품은 카인의 주먹이 그대로 맞부딪친다.
그럴 때마다 충격파와 함께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이 일어났다.
카인이 주먹을 내뻗고.
콰-앙!
가릭이 다시금 자신의 주먹으로 정면으로 부딪친다.
열 번, 백 번, 천 번.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묵묵히 뻗어 내는 주먹과 맞부딪치는 주먹의 현란하며 처절한 광경.
둘을 중심으로 가뭄에 마른 논처럼 대지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자들은 주먹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카인-!"
폭음을 꿰뚫는 한 줄기의 목소리.
올리시렌이 두 손을 입가에 모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겨!"
쾅!
순간 가릭의 주먹이 카인의 턱을 후려쳤다. 카인의 고개가 획 돌아갔고 코에선 코피가 터져 나왔다.
올리시렌은 자신의 말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싶어서 굳어 버렸다.
콰앙-!
카인은 냉철하게 동작이 커지면서 생겨난 가릭의 빈 옆구리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커헉."
묵직한 일격에 가릭은 피를 토했다.
붉어야 할 피가 몬스터처럼 묘한 푸른빛이 도는 게 지금의 가릭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였다.
콰콰강-!
가릭의 턱과 명치에 카인의 주먹이 계속해서 틀어박혔다. 그의 눈, 코, 귀에서 검푸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으으읏-.
피는 흰 연기를 피워 올리며 흩어졌고 그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었다.
카인은 내심 혀를 찼다.
'트롤의 회복력까지 각성한 건가.'
트롤이 잡기 까다로운 이유 중 가장 큰 건, 엄청난 회복력(Resilience).
일격에 목숨을 끊지 못하면 끊임없이 재생하면서 달려드는 트롤의 특성까지 각성한 모습이었다.
카인의 주먹이 아무리 때려도.
절대 지치지 않고, 상처 따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쿵-!
공격을 계속했다.
카인에게 쌓인 타격은 회복되지 않는 반면 가릭은 끊임없이 회복하며 압박하고 있었다.
아무리 빨라서 알아보기 힘들었어도 이렇게 지속되고 있는 만큼 하나둘 이 싸움의 향방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겼어."
아리안은 부채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카인이 칼을 써서 단숨에 죽이지 않는 이상, 이렇게 난타전으로 가면 당연히 가릭의 승리.
그녀는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승리감에 몸이 떨렸다.
"대적자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우리의 불꽃으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쿵-!
가릭이 물러난다.
분명 피해가 없어야 할 가릭이 카인의 주먹을 이기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쿵!
그리고 두 걸음.
툭-.
아리안은 입을 벌리면서 쥘부채를 떨어뜨렸다.
쿠웅!
"나는!"
카인의 주먹이 빛살처럼 터진다.
피범벅이 되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카인의 두 눈은 꺾이지 않았다.
몬스터를 잡은 숫자로는 온 세상을 통틀어도 한 손에 꼽힐 전사 중의 전사, 카인 로드이스트가 늘 걸었던 죽음의 길.
그리고 두 번 사는 카인이 새로이 걷는 사람을 살리는 길.
"카인 에셀레드다."
고난 속에서 카인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현재는 과거와 이별했고, 미래와도 일별했다.
『현재 세계선 고정도...11%』
화답하듯 지금껏 침묵하던 『사계』가 일어났다.
『아르후안(Arthuan)...제거.』
『아그웨스카(Agweska)...획득.』
『초겨울의 봉인...해제.』
스스슷-.
아무런 무늬도 없던 순백의 망토에 기기묘묘한 별자리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설원공이라 불렸을 과거엔 가면이 만들어졌지만, 지금의 그에겐 순백의 왕관이 피어났다.
콰아아앙-!
'겨울'의 힘은 한계를 모르는 듯 치솟았고, 카인의 주위로는 백색의 뇌전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삼하인(Samhain)의 '겨울'...개방.』
후우우우우!
카인의 상처들이 치유된다.
가릭과 달리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크아아아아-!"
밀리던 가릭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낮췄다.
얼마나 힘을 준 것인지 그의 온 근육이 올올히 터져 나갔다. 하지만 트롤의 회복력은 괴물처럼 그를 다시금 강화시켰다.
탓-.
대지를 박차는 가릭.
한층 더 트롤에 가까워진 가릭의 거대한 주먹이 쏟아진다.
턱.
더 이상의 공방은 없었다.
순백의 망토와 왕관을 쓴 카인이 낙엽을 붙잡듯 그의 주먹을 잡았으니까.
으드드드득-.
그리고 짓눌렀다.
가릭의 우람한 육신과 거대한 근육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땅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하시지요. 백작님에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지 않으십니까."
"크르르르."
가릭은 쩍쩍 갈라지는 땅에 처박히면서도 카인의 힘을 이겨 내고자 발악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후웅-.
가릭의 주먹이 지금껏 노리지 못했던 카인의 왼 허리를 후려쳤다.
그 순간,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반짝였다.
막는 건 어려운 게 아닌데, 달라진 '겨울'이 카인을 멈추게 했다.
툭.
주먹은 카인의 옷만 찢었고, 라마이닝의 브레디올이 도움이 될 거라며 건네주었던 보석함이 떨어졌다.
지금껏 보석함도 전투의 여파를 견딘 듯 금이 쩍쩍 가 있었다.
지금 떨어진 게 마지막 충격인지 깨졌고, 그 속에서 작은 새 조각 하나가 나타났다.
"미... 아."
그걸 보자마자 가릭이 멈췄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새 조각을 집었다.
카인의 붉은 피와 가릭의 푸른 피가 범벅된 새 조각.
"죽여, 가릭!"
멀리서 아리안의 괴성이 울렸지만 그에겐 닿지 않았다.
"미아, 루드...."
가릭의 눈물이 닿았다.
그러자 피가 씻겨 나가는 모습이 마차 날개가 퍼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카인은 직감했다.
아리안의 술수에 자신을 잃었던 가릭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걸.
'브레디올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라마이닝에서 받아 온 보석함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걸 예상한 것처럼 반응한 '겨울'에 카인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알던 '겨울'이 끝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가슴속에 도사린다는 의미였으니까.
"보고 싶다...."
픽-.
가릭은 새 조각을 쥔 채 축 늘어지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카인의 승리였다.
하늘과 땅이 울릴 장엄한 전투를 본 자들은 놀라움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그야말로 기적.
올리시렌이 벌인 일 따위를 기억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순간.
스릉-.
카인은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뽑아 들며 아이언하트로 내달렸다.
수직의 벽을 아랑곳 않고 뛰어올라 금발의 아리안을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두 팔로 제 목을 조르면서 카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겨서 기쁘겠네."
"너는 당연한 게 당연히 된 걸로 기쁜가?"
아리안은 카인을 마주했다.
신비로운 보랏빛 눈을 마주하자 자신 속에 있는 근본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꽈아아악-.
절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준비가 다 실패한 이상, 그녀는 마지막 도박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뜻대론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다, 대적자!"
그녀의 두 팔에선 푸른 파동이 일어났다.
마치 마녀가 기적을 펼칠 때 일어나는 파동과 닮아 있었지만, 묘하게 달랐다.
아리안은 제 목을 파고드는 손길 속에서 외쳤다.
"우리의 불꽃-."
"이번엔 놓치지 않아."
사아아-.
아리안의 풍성한 금발과 더불어 그녀의 두 어깨에 검은 직선이 그어졌다.
투툭-.
"끄아아아아!"
높은 비명이 뒤에서 울리고, 팔이 떨어지면서 나는 뭉툭한 소음이 들렸다.
#49 EP.Ⅰ-11
아이언하트 공방전 (3)
「마술사도 현자도 어쩜 그리 변변치 못한지.
그것들에 비해 말은 좀 못하셔도 용사님이 최고라니까요?
<사계절의 신기>로 '이 세상 모든 왕'들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신의 웃음을 되찾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제가 그분을 안 섬길 수가 있나요.
전 꼭 용사님과 함께 금빛의 여명을 볼 거예요. 마술사랑 현자는 뒤에 세우고요.
나머지는....
- 최후의 성녀가 말하는 용사」
"더러운 대적자!"
아리안의 찬란했던 금발에 성벽의 더러운 것들이 묻는다.
"황금의 새벽을 가로막는 이 세상 모든 악!"
잘린 두 팔과 함께 바닥을 구르며 그녀는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이제 우리가 너를 바라볼 것이야!"
카인은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뽑은 아그웨스카의 끝은 움직이는 아리안의 심장을 정확히 따라가고 있었다.
"더 말해 봐."
양어깨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보다 더욱 서늘한 카인의 살기가 그녀의 숨통을 조인다.
아리안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싸해졌다.
카인은 옆에 떨어진 그녀의 팔을 발로 차며 말했다.
"지금 널 두고 보는 건 너희들이 누군지 알 수 없어서 그래."
"...!"
디에즈 아리안.
그녀는 도시동맹이나 제국이라면 몰라도 이 변방 섬왕국의 백작가의 아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것에 놀라웠고, 신기했으며 섬뜩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떠올린 듯 미소 지었다.
"아하, 에셀레드. 그러고 보니 너는 그 간악한 마녀의 피를 타고났구나."
"마녀?"
카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아리안은 자신이 카인의 약점을 쥐었다 생각하며 의기양양해져서 말을 이었다.
"멍청하긴. 넌 제 어미가 어떤 자인지도 몰라! 아무리 재롱을 부려 봤자 너는 우리의 손바닥 위에서-."
"맞아, 잘 모르겠다니까. 그런데 하나는 알지."
스읏-!
아그웨스카가 검은 궤적을 그렸다. 아리안의 한쪽 발목이 잘려서 떨어졌다.
그녀는 피바다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며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카인은 최전선의 얼음보다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죽은 아리안의 손발을 잘랐다는 것."
"씨에떼 아리안(Siete, 7)이 돌아오지 못하신 게...."
"왜 그렇게 잔인한 일을 하신 건지 이젠 알겠어. 마녀보다 너희가 더 세상을 좀먹는 벌레인 것 같군."
첨퍽, 첨퍽!
아리안은 그 고통 속에서도 카인의 말에 격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핏방울이 비산한다.
하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투둑.
하늘은 분명 맑았지만, 그녀의 피가 튀기를 기다렸다는 듯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고통받은 자들의 눈물처럼 투명한 것이 아리안의 마지막까지 지우려고 했다.
그녀는 소리쳤다.
"우리는 이 세상을 구한다!"
"멀쩡한 부부를 갈라놓고 약과 마법 같은 걸로 사람을 조정하면서?"
그리고 아벨.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용사라 불렸음에도 결국엔 희생되어 버린 그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리안과 연관된 자들이 아마도 진범일 터.
굳어진 카인의 모습에 아리안은 비웃음을 지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도 존재하는 거야. 너도 귀족이라면 알겠지."
후우우우우-.
빗방울이 휜다.
삽시간에 끓어오른 카인의 살기에 봄비조차 그를 피했다.
-희생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장벽 안쪽 놈들은 최전선에서 희생하라며 사람을 던지고 있어-!
누군가 등 떠미는 희생 따위는 그저 제물에 불과한 것.
최전선은 대륙의 쓰레기통이었다.
밑바닥에 살던 자들, 서 있을 곳이 없어진 자들, 쫓겨난 자들....
그런 이들의 마지막 장소.
떠밀려진 그들의 붉은 희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장벽 안의 인류 세계.
꽈악-.
본능적으로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를 곽 잡았다.
조니워커가 분노와 함께 토하던 말을 이젠 카인도 절절히 공감했다.
그렇기에 제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늘 자신을 불태웠다.
"그딴 걸 알아야 귀족이 된다면, 귀족을 때려치우겠다."
"풋, 어리구나. 그 힘은 강하지만-."
"그렇게 하는 귀족들도 모두 죽이겠다."
그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정체 모를 거대한 분노에 불타오르는 카인의 보랏빛 눈을 마주하자, 고통조차 사라질 정도로 압도당했으니까.
"그게 엘프든, 왕이든, 설사 이 세상이든 희생을 등 떠민다면 모두 죽인다."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빗줄기마저 휘게 만드는 가공할 그의 살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카인은 그녀의 심장 위로 칼끝을 올리고 내려다보았다.
마치 저승의 심판관이 있다면, 지금의 카인과 같은 눈빛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죽인다. 세상을 구한다고? 타인을 불태우는 쓰레기들이 같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아니야!"
"떳떳하면 말해. 누구냐, 너흰."
아리안의 눈이 떨린다.
귀족 특유의 화려한 수식어로 카인이 덤벼왔다면, 그녀는 당당히 튕겨 냈을 터.
하지만, 지금 카인은 뭉툭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진심이 깃들어 있었고, 무게가 있었다.
아리안은 그에 응답했다.
"우리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새로운 새벽을 불러오실 창대한 '불꽃'을 섬기는 '보통 사람들(Commons)'일 뿐이니까."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들을 '보통 사람들'이라 부르는 것부터 그들의 은밀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름이 없다면 불리지 않지.'
이전 생의 카인이나 아벨이 그들의 이름을 모르던 것이 당연했다.
이름 없이 스스로를 보통의 사람들이라 칭하는데 어떻게 알 것인가.
"사이비 종교군."
카인이 짧게 그들을 요약했고, 그 순간 아리안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 질렀다.
"개소리!"
"딱 불을 숭배한다는 그런 미친 종교인데?"
"우리는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저 이 세상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뿐!"
"자유 같은 소리 하네."
차근차근 알아낼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렇기에 그녀를 격동시켜서 좀 더 정체를 캐 보고자 했다.
일부러 큰 상처를 입힌 것도 속내를 뒤흔들려고 했던 것이고.
그러나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계였다.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대적자 카인 에셀레드, 지금은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
카인은 대답 대신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리안은 유언처럼 저주를 내뱉었다.
"이젠 어둠을 두려워하라. 보통의 사람들이 늘 어둠 속에서 널 바라볼 테니까."
"뽑을 눈알이 많아서 즐겁군."
물론 씨알도 먹힐 리 없었다.
"미친... 놈."
"미쳐 버린 너희를 상대하려면 나도 미쳐야지."
아리안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팔을 들어 올리려는 듯 들썩였다.
이미 두 팔은 잘렸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차가운 봄비를 맞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마녀가 왜 마녀인지... 아나? 큭, 그걸 알게 될 때가 어서 오기를 바... 란다."
툭-.
아리안의 고개가 옆으로 꺾어지며 무너졌다.
미모와 말과 비밀스러운 마법으로 가릭 크로울 백작을 홀리고, 백작령을 좌지우지하던 여인의 마지막이었다.
카인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죽은 아리안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보았다.
아직도 환호를 내지르는 크로울의 병사들, 봄비에 물드는 초원, 저 멀리 멈춰 있는 열차, 그 앞에 서 있는 카인의 일행들.
그 가운데 보이는 회색의 여인.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자신의 목숨과 상관없이 카인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왕녀.
신비로운 힘을 지닌 예비 마녀.
[삼하인의 '겨울'이 저뭅니다.]
카인의 머리에 있던 백색의 왕관과 어깨부터 펄럭이던 순백의 망토가 눈이 녹는 것처럼 흩어졌다.
[운명이 거대한 불꽃을 마주하였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3%]
[새벽의 십이 자매 중 열 번째를 죽였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4.5%]
[종말이 영원을 일별합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5%]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메시지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여러 번 세계선 고정도가 뛰어오르는 건 처음 보았다.
이어지는 또 다른 메시지.
[15%만큼 바뀐 세계가 새로운 미래를 품습니다.]
화아아악-!
카인의 눈에 다른 곳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에셀레드의 절벽.'
에드먼드를 잡아먹은 던전 에이레가 너머에 있고, 아르나가 묻혔고, 전사 카인과 용사 카인이 다시 만났던 그 하얀 절벽이 보였다.
다행히 무덤은 없었다.
그러나 그 끝.
하얀 머리를 한 여성과 흑발의 자신이 서 있었다.
푸욱-.
그녀는 아그웨스카를 쥐더니 그대로 카인의 심장을 관통했고.
절묘하게 부러지는 칼날과 함께 카인은 에셀레드의 거친 바다에 떨어졌다.
['겨울'이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그리고 사라졌다.
카인은 환상처럼 보였던 그 모습에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미래는 내 손으로 만드는 것.'
저런 상황이 온다면 아그웨스카를 뺏기지도 않을 것이고, 저런 어설픈 칼솜씨에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미래를 뭉개며 카인은 흑색의 아그웨스카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아리안이 죽었다-!"
순간 귀청을 먹먹하게 할 정도로 쏟아지는 환호성.
크로울의 사람들이 아리안이 실권을 쥐면서 겪은 울분을 토해 내는 모습이었다.
"크로울 백작님과 미아 님을 안으로 모셔야 하니 문을 열어라!"
그그그그긍-.
병사들이 줄을 잡아당기고, 도르래가 돌아가면서 평상시 열리지 않는 아이언하트의 철문이 열렸다.
카인은 검을 넣곤 벽에서 뛰어내려서 열린 문 앞에 섰다.
에셀레드 백작령.
라마이닝 백작령.
그리고 크로울 백작령.
로스 후작의 관할인 세 개의 백작령이 카인과 올리시렌의 손에 떨어졌다.
카인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안 중부의 거대한 띠를 이루며 북쪽 엘프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마르퀴스 벨트' 동쪽의 거인, 헤터워드 로스 후작.
'이젠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움직이겠군.'
또한 잊지 않았다.
라마이닝 백작령에서 봤던 로스의 기사 네 명이 모두 똑같은 초록빛의 오러를 빼 들었다는 걸.
사람마다 오러의 색이 다르다.
어쩌다 비슷할 순 있지만, 하필 같은 기사단의 네 명의 오러 색이 같다면 명백히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초록은 숲의 색.
카인은 몸을 돌려 아이언하트의 대로로 걸음을 옮겼다.
'아르나 님께 그딴 저주를 퍼부은 글루미엠과 로스가 손을 잡았다라.'
엘프를 막기 위한 장벽이 초록으로 물들었다면 방법은 하나.
늘 자신이 하던 대로.
카인은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아까 전 위협적인 화살을 쏘고, 올리시렌의 비밀을 밝히게 할 뻔한 자의 위치를 물은 후 바로 움직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