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인이 아이언하트로 들어가고 이틀 후.
레몬 빛에 가까운 밝은 금발을 질끈 묶은 채, 촛불 아래서 무언가를 적는 여인.
아르나 에셀레드.
그녀의 갈색 눈에 순간 초록빛이 어른거렸다.
팟-!
창문이 깨졌다.
밤을 틈타 무언가가 에셀레드 백작성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아르나는 늘 손을 뻗으면 집을 수 있는 거리에 놔둔 활을 집어 들어서는 몸을 낮추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아르-."
슈우웅-!
복면을 쓴 채 침입한 자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에 화살을 박았다.
쿵.
머리가 꿰뚫린 적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평범한 여인이나 기사면 달랐겠지만, 용병으로 구르고 굴렀던 '불굴'의 아르나에겐 당연했다.
소속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팔엔 주황색 띠가 묶여서, 로스 후작가의 기사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아르나는 조심스레 화살로 시체를 조사하려 했다.
그때.
"이빨을 다 뺐다고 생각했는데, 숨기고 있던 거였네?"
시체에서 초록빛의 연기가 일어났다.
혹시 모를 독을 조심하기 위해 창가 쪽으로 몸을 움직이곤 활시위를 다시 팽팽하게 당겼다.
연기는 공중에 모여 뭉치더니 한 여인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옆으로 누워서 턱을 괸 채, 나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여인의 귀는 뾰족했다.
"뭐라 말을 해 보렴. 십오 년 전엔 어떻게든 내게 말하고 싶어 했으면서 왜 이리 말수가 줄었어, 아르나?"
삼백 년간 군림한 북쪽 숲의 지배자.
이 세상에 여덟 번째로 나타난 마녀.
그리고 아르나에게 저주를 쏟아붓고 아벨의 탄생을 막았던 자.
"글루미엠... 여왕님."
그녀가 움직였다.
Episode.Ⅰ
봄의 찬미
#50 EP.Ⅰ-12
초록의 여왕, 황혼의 검 (1)
아르나의 눈동자가 시체와 글루미엠을 번갈아 보았다.
연기로 이루어진 글루미엠은 담뱃대를 들어 시체를 가리켰다.
"이게 궁금해?"
"...예."
"널 죽이려고 내가 보낸 암살자야. 반짝이네 기사라던데 이젠 보내 봤자 의미가 없겠네."
"반짝이?"
글루미엠은 살짝 미소 지었다.
초록색 연기가 뭉쳐 만들어진 모양이건만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엘프 중에서도 글루미엠은 특출났다.
"머리가 반들반들하길래 내가 지어 준 별명이지. 물론 누군지는 비밀이야."
하지만 아르나의 등허리엔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글루미엠의 강함은 무섭지 않다.
그녀가 이끄는 북방 엘프들도 무섭지 않다.
하지만.
"어서 고마워해야지. 내가 너를 안 죽이기로 생각했다니까?"
아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긴장을 풀지 않고 활을 꽉 쥘 뿐.
글루미엠은 흥이 식었다는 듯 혀를 차곤 담뱃대를 물었다.
그 끝으로 아르나와 창밖을 번갈아 휙휙 가리키다 말했다.
"대신 네 아들을 죽일게. 네 죄는 하나의 생명을 품은 것이니 그 대가로 생명 하나만 가져가는 게 공평할 테니까."
글루미엠이 웃는다.
아르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아벨을 죽인다면 아르나가 지금껏 버텨왔던 고통의 의미가 없어질 것이며, 절망할 터.
글루미엠이 보고 싶은 건 그런 아르나의 모습이었다.
아르나는 일부러 허리를 올곧게 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기쁜 꼴을 볼 수 없으니 절대 굽히지 않으리라.
게다가 글루미엠이 아무리 무섭고 대단한 엘프 여왕이자 마녀라지만, 그것보다 더욱 찬란한 자를 만났으니 굽힐 이유도 없었다.
아르나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어려우실 겁니다."
글루미엠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예상과 다르다.
그 아르나가 살려 달라고 빌진 않을 거 같았고, 해 볼 대로 해 보라고 배짱은 부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담담하다.
아니, 담담한 것을 넘어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자신감에 차 있다.
글루미엠은 반문했다.
"왜?"
"아벨은 혼자 있지 않으니까요."
"그 괴물 같은 에드먼드가 저 바다에 잡아 먹혔는데 누구를 믿는 거야."
에드먼드 에셀레드.
에셀레드 백작이자 카인과 아벨의 친부.
그리고 왕국 최강의 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진 글루미엠이지만, 에드먼드만큼은 몇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글루미엠의 비아냥에 아르나는 피식 웃었다.
"제 저주가 어떻게 풀렸는지 모르시는군요."
글루미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반쪽짜리 엘프 주제에 아이를 밴 아르나에게 걸린 저주가 풀린 건 그 즉시 눈치챘다.
더구나 삼백 년을 산 글루미엠에게도 아르나는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이한 하프엘프였기에 그녀는 바로 움직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숲의 제전' 때문에 그땐 움직일 수 없었고 가능한 빨리 올 생각만 하느라 어떻게 저주가 풀린 건지는 생각지 못했다.
"어떻게 풀렸는데?"
"다른 마녀가 풀어 주었죠."
글루미엠의 미간이 좁아진다.
찌푸리는 모습조차, 날아가던 새가 걱정하여 날개를 접고 내려올 만큼 아름다웠다.
"누구?"
아르나는 쐐기를 박듯 마녀의 이름을 말했다.
"프리문디."
순간 여왕의 눈이 커졌다.
자신 이전의 일곱 마녀들을 떠올리며 누가 범인일지 생각하면서도 프리문디만큼은 절대 그럴 리 없다 여겼다.
"에드먼드가 홀로 엘프 기사 일백을 죽일 정도로 대단하지만, 제 저주는 풀지 못했습니다."
아르나는 곧은 눈으로 글루미엠을 응시했다.
시시각각 조여 오던 저주의 고통.
환한 미소를 짓는 아들, 아벨.
자신의 저주를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해 말은 않았지만 답답해했던 에드먼드.
그녀가 보는 건 코앞에서 지랄하는 여왕이 아니라 스스로가 여왕의 저주를 버텨냈던 눈물의 세월이었다.
"우리가 해내지 못한 걸 해낸 사람이 아벨의 곁에 있습니다. 그냥 차라리 제 목숨을 노리시죠. 그게 더 쉬울 테니까."
아르나는 자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카인'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아무리 글루미엠이 날고 기어도 결국엔 카인이 그녀의 심장에 칼을 꽂을 거란 걸.
"재밌네?"
글루미엠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마치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그럼 사양 안 할게."
순간 글루미엠이 팔을 뻗었다.
초록색 연기가 거대한 촉수처럼 아르나를 찢어 죽이기 위해 물리력을 지닌 채 짓쳐 들었다.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글루미엠이니 아르나는 대비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즉시 폭풍활 호크마를 꺼내 들었다.
정돈되어 있던 그녀의 방엔 폭풍이 몰아친다. 반쯤 깨어졌던 창문은 호크마가 일으키는 거센 바람에 완전히 터져 나갔다.
폭풍활의 존재만으로도 마녀 글루미엠의 힘을 밀어내긴 충분했다.
두두두두두두-.
그뿐이 아니었다.
호크마가 현현하는 그 순간부터 아래서부터 수십의 기사들이 몰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글루미엠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거인이라도 되겠다는 양, 거침없이 크기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못 할 줄 알아!"
덜컹-!
아르나의 방문이 강제로 열렸고, 무장한 클로이드가 들어왔다.
바닥의 시체와 글루미엠의 모습을 본 클로이드는 칼을 단단히 잡으며 아르나와 눈을 마주쳤다.
끄덕-.
동시에 글루미엠을 치기로 순식간에 의견이 교환된 그 순간.
"...어떻게?"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시각, 후각, 청각, 촉각 그런 걸로 감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르나도, 클로이드도, 글루미엠도.
그들은 짜기라도 한 듯 밤의 어둠이 뒤덮인 창밖을 돌아보았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밤이 갈라진다.
새벽녘 밤을 자르는 첫 번째 햇살처럼 찬란한 금빛의 기둥이 저 멀리서 치솟았다.
"에드먼드의 끝으로 분명 에이레(Eire)가 안배되었던 건데!"
글루미엠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기답게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동시에 썰물처럼 밀려오는 누군가의 존재감.
익숙했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
밤을 반으로 나눈 금빛의 기둥이 솟아난 곳은 에셀레드의 해안.
에드먼드 백작이 홀로 들어갔던 7성 던전 에이레가 있는 곳이었다.
"백작님이 던전을 클리어 하신 모양입니다!"
늘 진중한 클로이드답지 않게 밝게 외쳤다.
"그렇군요...."
그러나 아르나는 그처럼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왠지 모를 직감.
하프엘프로서의 직감인지 어머니로서의 걱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드먼드의 귀환이 꼭 좋은 일로 이어지진 않을 것 같다는.
* * *
글루미엠이 나타나기 하루 전.
끼익- 끼익-.
노와 배가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일정한 박자가 마음을 안정시킨다.
저 멀리로는 희미하게 아이리안의 모습이 보였고, 가까이엔 새파란 바닷물이 점잖게 출렁였다.
심장에 얼음을 품었다고 소문난 이단심판관조차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성녀 카테리나 피오렐리는 '가을'을 만지작거리며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델프트의 이단심판관들이 아무리 구하려고 해도 에셀레드 영지로 가는 배는 구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열차를 타고 항구도시 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묘한 우연이 일어났다.
역전에서 우연히 빼빼 마른 강아지를 봤다. 본래 강아지를 좋아하는 카테리나는 당연히 눈길이 갔고, 먹이를 챙겨 주려 했다.
그런데 강아지가 마치 사람처럼 그녀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건 케르크의 어느 빈민가였다.
그곳엔 강아지의 주인이자 침상에서 골골거리는 노인이 있었다.
'큰 병은 아니었지.'
노환과 영양실조가 겹친 상태.
눈앞에 아픈 자가 있는 걸 그냥 넘길 수는 없으니, 카테리나는 그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듣게 된 건 노인은 본래 케르크-에셀레드 항로의 선장이었지만, 고리대금으로 배를 빼앗기곤 술만 마시다가 이 꼴이 되었다는 것.
선박수리공이었던 외동아들은 고리대금업자의 눈치를 보는 다른 선주들이 피하니 어쩔 수 없이 먼 도시에서 배를 수리하며 일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강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린 것이라 했다.
'처음엔 당연히 신의 뜻이라 생각했다.'
배를 살 돈은 충분하지만 그걸 에셀레드 영지까지 제대로 끌고 갈 이를 구하지 못하던 게 성녀 일행이었다.
그런데 마침 딱 적절한 이가 나타났으니 그녀는 노인과 아들을 괴롭히던 고리대금 길드를 징치하고 배를 맡겼다.
올바른 일을 했다는 생각에 항해 초반엔 기분이 좋았다.
우우우우우-.
하지만 성류관 '가을'이 그녀에게 묘한 신호를 보냈다.
카테리나는 그걸 경고로 받아들였다.
최근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던 그녀는 찜찜함을 느꼈다.
'너무 딱딱 잘 들어맞았어.'
가장 필요한 순간 준비된 것.
우연인가 필연인가.
마우로 추기경처럼 신의 안배니 해서 받아들이면 끝날 일이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우우우-.
'가을'이 운다.
그 쓸쓸하고 고독한 울음이 그녀에게만 속삭이고 있다.
그렇기에 카테리나는 의심했다.
진정한 용사 아벨과 가당치 않게 그를 죽였던 카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 것도 '가을'이고, 자신들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가을'.
결코 무시할 순 없었다.
하지만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콰강-!
순간 멀리서 옅은 천둥이 들렸다.
맑고 평화로운 하늘에 어울리지 않은 소리라 카테리나는 곧장 갑판으로 나갔다.
마우로나 다른 이단심판관들도 급하게 무기를 들고 나왔다.
콰르르릉-!
아이리안 섬의 모습이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딱 어느 해안 근처만 먹구름이 껴 있었고, 파도가 엄청나게 일고 있었다.
"저기를 넘어가면 에셀레드입니다!"
선장 노인이 소리쳤다.
마우로 추기경은 생각보다 더 험악해 보이는 일기변화에 눈을 가늘게 뜨며 살폈다.
그러다 옆에 온 카테리나에게 말했다.
"국지적 기상변화를 일으킬 정도라면 이건 7성이 아니라 8성입니다."
"게다가 수중 던전이니 8+겠군요."
"성녀님, 던전에 먼저 들어간 팀이 있으면 문이 닫히는 게 당연한 건데...."
마우로의 눈이 카테리나의 눈에서 그녀가 들고 있는 '가을'로 향했다.
성류관으로서 존엄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의아한 건 의아한 것이었다.
"성류관이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카테리나는 단언했다.
<사계절의 신기>가 닫힌 던전을 열 수 있는지 알려져 있진 않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그러곤 '가을'을 들어 저 던전, 에이레를 향했다.
우우우우우-!
성류관에서 일어난 갈색의 빛이 폭풍우 가운데로 직진했다.
할 수 있다는 증명 같았다.
동시에 마우로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걱정 마세요. 만약 용사님과 상관이 없다면 '가을'은 기적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마우로는 항거할 수 없어 보이는 위대한 자연의 변화 앞에서 신을 향한 기도를 외울 뿐이었다.
"모든 것은 빛으로, 빛은 우리의 것으로."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선장 노인이 카테리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성녀님이 가시려는 곳이 저 안쪽이십니까?"
위화감이 없다.
정말 한평생 내내 바다 위에 있었을 외양과 말투.
'가을'의 경고를 잊진 않겠지만, 지금의 노인에겐 의심할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카테리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예, 신께서 인도하고 있습니다."
"에델웨알흐(Æðelwealh)겠군요."
"에델웨알흐?"
"에셀레드의 바다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건, 에델웨알흐의 저주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설 따위는 이단으로 취급하는 성직자로서 마우로가 발끈하려 할 때, 카테리나는 눈짓으로 그를 진정시키고 더 말을 시켰다.
그러자 선장 노인이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망국왕 에델웨알흐.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던진 곳에서 보랏빛의 바위가 자라났고, 그때부터 저 바다의 날씨가 이상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선장 노인은 자신을 구해 주었으니, 자신들도 목숨을 걸고 성녀 일행을 '에델웨알흐 암초'에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카테리나는 다시금 너무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 노인은 선원들에게 급하게 명령을 내리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곤 누구도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노인은 보통 사람이었다.
* * *
쿠르릉-.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천둥소리가 들리는 어느 공동 안.
바닥엔 마물들의 썩은 피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한 남자가 아랑곳 않고 거대한 문 앞에 꼿꼿이 앉아있었다.
툭하면 무너질 정도로 깡마른 사내. 그의 앞엔 금빛 세검이 수직으로 꽂혀있었고.
"배가... 고프군."
입을 여는 순간 갈라진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오래 물을 마시지 못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51 EP.Ⅰ-12
초록의 여왕, 황혼의 검 (2)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 게 소원이었던 선장 노인답게 배는 거친 폭풍우를 뚫고 에델웨알흐 암초에 안착했다.
불길한 보라색 암초 위.
카테리나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가장 먼저 내려선 암초의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회전한다.
모든 출입을 막겠다는 듯 완벽하게 막힌 에이레의 입구였다.
뒤따라 내린 마우로는 선장 노인에게 고압적으로 말했다.
"기다릴 수 있나?"
닫힌 던전을 조사하는 건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정말 카테리나의 말처럼 들어가게 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기왕이면 타고 온 배로 편하게 끝까지 가려는 심산이었다.
선장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예, 당연합죠."
"아니요. 케르크로 돌아가세요."
카테리나가 끼어들었다.
이단심판관들이나 선원들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에셀레드의 백악절벽을 가리켰다.
"작은 배를 남겨 두시면 알아서 들어가겠습니다."
선장 노인은 공손히 손을 모은 후 입을 열었다.
"성녀님, 아무리 가까워 보여도 작은 배로 이런 에델웨알흐의 폭풍우를 뚫고 가는 건 무리-."
"딱 여기까지가 제가 베푼 일의 대가입니다."
그녀는 성호를 그으며 선장 노인의 말을 잘랐다. 성녀가 이렇게 강하게 선을 긋는 마당에 아무리 추기경이라지만 마우로도 뭐라 가타부타 할 수 없었다.
그건 선장 노인 역시 마찬가지.
그는 바로 작은 배에 필수 물품을 좀 두고 대륙으로 돌아갔다.
카테리나는 암초 위에 우뚝 서서 멀어지는 큰 배를 응시했다. 마우로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조심히 물었다.
"혹시 제가 모르는 게 있는 겁니까."
카테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너무 예민하게 행동한 건가 싶은 의심이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선장 노인을 경고하던 성류관 '가을'을 믿었다.
인간의 말로만 신앙이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성류관 '가을'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성검 '여름'은 신의 힘을 상징하기에 그녀는 둘의 선택을 믿어야만 했다.
성녀마저 믿지 않는다면 성국의 의미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다른 자들은 아니었다.
아무리 팔대추기경 중 하나인 마우로라 할지라도 자신만큼의 믿음은 없다.
"계시입니다."
그렇기에 카테리나가 선택한 건 언제나 사용하던 마법의 주문 같은 말이었다.
"오-!"
어떤 설명이나 논리보다 앞서는 '신의 계시'와 그걸 전하는 '성녀'.
"모든 것은 빛으로."
마우로는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였다. 암초 곳곳에 흩어져 조사하던 다른 이단심판관들도 잇따라 고개를 숙였다.
카테리나는 혀끝에 남은 씁쓸함을 애써 삼키고 닫힌 에이레의 입구를 마주했다.
우우우-.
멀리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슬픈 노래.
세상의 모든 슬픔을 빚어 만든 음률.
그건 카테리나에게만 들리는 듯, 마우로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뚝.
그녀의 하얀 뺨 위로 투명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성류관 '가을'을 쥐곤 에이레의 닫힌 문을 가리켰다.
우우우우우우-!
카테리나는 확신했다.
지금 이 노래는 '가을'이 부르는 노래라는 걸!
찬란하고 쓸쓸한 갈색의 빛이 폭죽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다른 자들은 바닥에 부복하며 기도를 외웠다.
'가을'의 빛이 한 점으로 모이더니 에이레의 문을 향했다.
끼기기기기기기!
수천 마리의 새가 울부짖고, 수만 개의 쇳조각이 부딪치며 깨지는 굉음이 문에서부터 터져 나온다.
닫힌 던전을 정말로 여는 것만 같은 그 모습에 다들 한층 더 열심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카테리나는 이를 악물고 성력을 끌어 올리면서 버텨 냈다.
팅-.
잠시 후 무언가 부러지는 맑은 소리가 나면서 굉음이 멈췄다.
마우로는 놀라 소리치며 입을 쩍 벌렸다.
"무... 문이!"
에드먼드가 들어간 후 일 년 가까이 닫혀 있던 에이레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기적이었다.
한순간에 대량의 성력을 소모한 카테리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을'이 건네는 힘에 금세 진정할 수 있었다. 마치 그녀를 반드시 저 안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성류관을 잠시 내려다보던 카테리나는 열린 에이레의 문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빛으로, 빛은 우리의 것으로."
그러곤 가장 먼저 걸어들어 갔다.
다른 심판관들 역시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 * *
던전은 3성 단위로 급격히 달라진다.
3성까지의 던전은 동굴 같은 몇 개의 방이 있고 나타나는 모든 몬스터들을 죽이면 클리어된다.
6성까지의 던전은 좀 더 많은 방이 존재하며, 각 방별로 강가나 숲 등 각자 다른 환경이 펼쳐진다.
등장하는 몬스터 역시 환경에 걸맞은 녀석들이라 까다롭다.
더욱이 4성 이후의 던전이 특히 어려운 이유는 '보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던전의 '보스'.
던전 속 몬스터들의 속성을 한 몸에 지닌 가장 강한 개체!
대륙에선 그런 '보스'를 홀로 잡을 수 있느냐는 기준으로 몇 성이라며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여유도 사실 6성까지뿐.
문제는 7성 이후의 던전이었다.
7성 던전부터 달라지는 점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방이 아니라 사실상 독립된 세계가 나타났다.
환경조차 6성까지는 장난이라는 것처럼 극한의 용암지대나 혹한 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기 중간보스입니다."
마우로는 얼굴을 찌푸리며 산산이 조각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을 들어 올렸다.
찐득하게 검게 썩은 몬스터의 까지 같이 딸려 올라왔다.
카테리나는 몇 갈래로 찢겨 나간 중간보스 '드래곤 터틀'의 머리 조각 앞에 섰다.
찢긴 조각의 크기만 해도 카테리나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몇 성급 중간보스죠?"
마우로는 등껍질을 두드리며 강도를 재어 봤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조금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소 5성입니다."
"이곳이 수중동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6성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7성부터는 '보스'뿐 아니라 '중간보스'까지 나타나기에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그리고 지금 성녀 일행이 보는 건 던전 에이레의 중간보스 중 하나였던 '드래곤 터틀'의 사체였고.
카테리나는 수중동굴을 훑어보았다.
종유석이나 석순들 중 멀쩡한 건 하나도 없다. 벽에는 거대한 발톱 자국이 빽빽하게 메워져 있었다.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 짙게 남은 곳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드래곤 터틀'의 흔적뿐.
"한 명이군요."
마우로도 흔적을 살펴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단 한 방에 꿰뚫었습니다. 잔흔이 이렇게 적은 걸 보면 세검입니다."
마법대포로 수십 방을 갈겨도 멀쩡한 등껍질 채로 찢겨 나간 '드래곤 터틀'.
비틀-.
익숙했다.
카테리나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고 마우로가 놀라 다가와서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에셀레드의 절벽엔 아주 큰 검흔이 하나 있죠.
갈색 눈에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용사, 아벨.
지금 카테리나의 눈엔 용사였던 아벨이 보였다.
-아버지가 남긴 거라는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성검을 들어도 당시의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다니....
성검, '여름'이 선택한 불패의 용사, 아벨이 성검을 내뻗었다.
그녀가 보기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용사는 아버지의 흔적을 쫓던 것뿐이고, 자신은 그의 뒤를 볼 뿐이었다.
"성녀님? 성녀님!"
마우로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잠깐 보이던 환상이 흩어졌다.
카테리나는 '드래곤 터틀'의 사체를 보았다. 환상 속 아벨이 찌르던 '검'과 똑같은 궤적이 아른 거린다.
용사조차 뒤쫓던 검사,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이 이 던전의 끝에 있으리라.
카테리나는 성호를 그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 앞엔 생각보다 더 큰 조력자가 있습니다. 어서 가죠."
게다가 성류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일직선으로 어떤 방향을 알려 주었기에 성녀 일행은 직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쉽진 않았다.
독립된 세계에 가까운 방들을 건너기만 하는 거였지만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해쓱해질 정도였다.
몬스터까지 있었다면 진즉, 전멸했을 극한의 환경이 이어졌으니까.
그리고 다른 의미로도 학을 뗐다.
빛 한 점 없는 수중 공간에 떠 있는 건 갈기갈기 찢긴 몬스터들의 시체였다.
신성마법으로 빛을 비추다가 쏟아지는 푸른 피에 놀라다 못해 이젠 익숙해졌다.
그 시체를 본 마우로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검사 한 명이 어떻게...."
던전에서 가장 필요한 힘은 성력.
성력은 사람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성녀 일행이 하는 것처럼 던전의 환경적 제약까지 막아 줄 수 있기에 공략대엔 충분한 성직자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사제의 존재는 귀했고 성국은 더더욱 존중받는다.
"그러니 저희가 찾아가는 거죠."
카테리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이며 대꾸했다.
단 한 명이 지나간 죽음의 길.
성력이 없는 검사가 검 한 자루만으로 만든 이 길이 그가 얼마나 엄청난 실력자인지 짐작하게 했으니까.
그렇게 86개의 거대한 세계를 지나 도착한 87번째 방, 공동.
쿠르르릉-.
던전 밖과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특징인지 몰라도 미약한 천둥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곳이었다.
무언가의 입구인 듯 지금까지 이어지던 극한환경은 없었고 말 그대로 평범한 공동이었다.
그리고 여기도 산처럼 몬스터들이 죽어선 몇 개의 산을 이뤘고,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바닥엔 호수처럼 썩은 피가 굳어 있었다.
"저기-!"
심판관 중 하나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대지에 꽂힌 한 자루의 낡은 세검 앞.
한 남자가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굶은 건지 툭 치면 스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기세가 사방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카테리나는 다른 일행들을 멈추게 한 후 아벨과 닮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걸었다.
"에드먼드 백작님?"
카테리나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후우우우우우우우-!!
순간 그녀를 날려 버릴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일어나 검을 쥔 에드먼드가 그녀를 꿰뚫기 직전 멈추면서 일어난 바람이었다.
패앵.
그리고 방금까지도 대지에 꽂혀 있었던 세검이 손에 들린 채 그녀의 목을 노렸다.
에드먼드는 눈뜰 힘조차 남지 않은 듯, 감은 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몬스터가... 아니야."
카테리나는 자신이 저 칼날 위에 서 있다는 걸 느꼈다.
조금만 잘못해도 떨어져 죽으리라.
침을 삼키며 간신히 말했다.
"저는 성국에서 온 카테리나 피오렐리라고 합니다."
"환상인가."
툭.
에드먼드는 한마디만 남긴 채 옆으로 쓰러졌다.
굳어 있던 마우로를 비롯한 심판관들이 달려오려 했으나, 그의 옆에 쪼그려 앉는 카테리나의 모습에 멈칫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품에서 크리스털 병을 꺼내 최상급의 성수를 에드먼드의 입가에 적셨다.
쩍쩍 갈라졌던 그의 입술에 윤기가 차오르고, 죽어 가던 에드먼드의 몸에 생명이 움튼다.
"성... 수?"
누운 자세 그대로 에드먼드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카테리나는 누구보다 선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예.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건너왔습니다."
그 순간 72겹의 봉인 속에서 성검 '여름'이 잘게 흔들렸다.
#52 EP.Ⅰ-12
초록의 여왕, 황혼의 검 (3)
성수 덕분에 정신을 차린 에드먼드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맨 끝, 막내 심판관이 지고 있는 짐을 턱짓했다.
"밥?"
"약간의 식량입니다."
"좀 주면 좋겠소."
카테리나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막내 심판관은 보자기를 펼친 후 주섬주섬 식량을 꺼냈다.
육포와 딱딱한 빵.
그리고 같이 먹을 수 있는 과실주가 들어 있었다.
에드먼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느리게 마치 새가 모이를 먹듯 먹었다.
"배가 고프면 빨리 먹어야 하지 않나?"
바라보던 이단심판관 중 하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드먼드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오랜 기간 안 먹다가 갑자기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나지. 최대한 꼭꼭 씹어서 조금씩 먹어야 하오."
직접 겪지 않으면 쉬이 알 수 없는 정보.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최선을 다해서 먹기 시작하는 에드먼드에게 카테리나가 물었다.
"이곳에 얼마나 계셨던 겁니까."
"여기까지 온 게 반년, 여기서부터 배고파서 못 간 게 다시 반년."
물도 식량도 없이 에이레에서 일 년을 버틴 에드먼드 에셀레드.
던전의 입구가 닫혀 있었으니 그의 말은 사실이리라.
기도라도 하듯 천천히 식사하는 저 남자가 그들이 보아 온 피의 길을 만든 소드마스터라는 걸 실감했다.
빵 하나를 다 먹자 어느 정도 에드먼드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과실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어투를 바꿔 입을 열었다.
"무시무시하기로 소문난 이단심판관을 손짓으로 부리시는 거면 혹시 성녀시오?"
"그런 허명으로 불리긴 합니다."
카테리나는 공손히 말했다.
에드먼드는 그런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듯 왼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닫혀 있던 거대한 문으로 향했다.
"어떻게 던전에 들어오고, 왜 성녀님이 제게 이렇게 하시는지는 밖에서 듣기로 합시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카테리나와 마우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척-.
그러나 에드먼드가 막았다.
"이 너머는 '최종보스'. 아무리 성국의 사람들이라고 하나 잘못 휩쓸리면 죽소."
마우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가 굽실거릴 정도로 에드먼드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추기경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다.
팔라딘 기갑군단 정도는 아니지만, 이단심판성의 정예들과 성녀까지 함께하는 상황.
"돕겠습니다."
힘 있는 말로 반박했다.
에드먼드는 잠시 마우로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성국 분들이 하신다고 하시니 어떻게 말리겠소. 그럼 문만 열어드릴 테니 잘 부탁드리오."
쿵.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땅을 디뎠다.
우우우우우-.
그를 중심으로 다시금 바람이 휘몰아쳤고, 그 색은 보일 듯 말 듯한 연한 청록색이었다.
카인과 닮은 에드먼드의 흑발이 허공에 너울거리고 아벨과 닮은 갈색의 눈이 올곧게 앞으로 바라봤다.
스슷-.
당겨지는 왼발과 동시에 그의 세검이 허공에 은빛의 궤적이 그어졌고.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콰가가가가가가강!
번개가 대지에 내리꽂히는 것만큼 빨라 보이는 검.
에드먼드가 어떻게 '드래곤 터틀'을 찢어 죽인 줄 알게 할 엄청난 속도의 찌르기!
'최종보스'의 방으로 향하는 거대한 석문이 산산조각 났다.
부서져 내리는 문 안.
그 속에 있는 건 군대!
저 멀리 보이는 금빛의 옥좌엔 모든 바다를 호령할 '어인왕'이 노성을 토하고, 그를 따르는 수천의 '어인'들이 삼지창을 든 채 고개를 돌려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인간이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에드먼드는 몸을 슬쩍 돌려서 마우로와 이단심판관들이 나설 수 있게 길을 열었다.
하지만.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우로조차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움직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최종보스' 방에서부터 내리꽂히는 수천 쌍의 눈빛에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직감했으니까.
마우로조차 그랬으니 다른 이단심판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심판의 업을 진 자들답게 급하게 성호를 긋고 성가를 부르며 정신을 수습했다.
"죽고 싶은 자는 선을 넘어라. 도망갈 자는 선을 넘지 마라."
'어인왕'의 낮은 목소리.
던전 에이레의 마지막 88번째 '어인왕'의 방과 87번째 공동엔 선이 있었다.
"진정한 암흑심해군요."
카테리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온 곳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검디검은 심해가 최종보스의 방이었다.
즉, 발 디딜 곳 하나 없고 숨 쉴 수 없는 심해로 들어가서 수천의 '어인'들을 지나쳐 '어인왕'까지 죽여야 하는 것이 바로 에이레의 최종관문!
당당하게 나섰던 마우로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돌아 다른 이단심판관을 살펴봐도 다들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니라 성국의 검인 '팔라딘'들과 모든 신성의 정점에 있는 '프리스트'가 있어도 승부를 점칠 수 없을 정도의 적이었다.
"그럼 내가 들어가도 되겠소?"
에드먼드는 환경이 어떻든 적이 얼마나 강하든 관심 없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잡았던 마우로는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싸워 보지도 않고 이렇게 무력하게 손을 놓은 건 그의 생에 처음 있는 일.
그만큼 8+ 에이레의 '최종보스' 방은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이었다.
"어떻게 싸우실 겁니까."
너무나도 평안하게 저 지옥으로 들어가 싸우겠다는 에드먼드가 이해되지 않았다.
마우로는 추기경 이전에 한 명의 전사로서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드먼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낡은 세검을 움켜쥐었다.
"찌르고 죽이고 다시 찌르고 죽일 뿐이오."
"...!"
그의 말에 신빙성은 그가 지나온 길이 증명한다. 그렇기에 마우로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라
카테리나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에드먼드에게 축복을 걸었다. 성력으로는 성국 제일인 성녀의 축복은 확실히 달랐다.
에드먼드는 자신의 주위에 오색 빛이 번쩍거리는 게 신기한 듯 몇 번이고 팔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럼 갔다 오겠소."
툭.
에드먼드는 그대로 암흑심해로 몸을 내던졌다.
"죽여라!"
지켜보던 '어인왕'이 명령하자, 수천의 '어인'들은 물속으로 들어온 에드먼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다의 압력에 움직이기도 힘들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어두운 심해 속.
채재재재재재쟁-!
에드먼드는 빛이 났다.
그의 질주를 막을 건 없었다.
그를 막던 어인들의 삼지창은 터무니없이 쉽게 부서졌고, 그들의 몸은 그대로 베어 쓰러졌다.
그의 몸에 반짝이는 성녀의 축복 덕에 에드먼드가 달려 나가는 길이 밖에서도 훤히 잘 보였다.
올곧은 직선!
그의 찌르기처럼 '어인왕'까지 가는 길은 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았다.
"마스터 팔라딘께서도 저렇게 할 수 있으실까요?"
강한 건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엄청날 줄은 몰랐던 카테리나는 마우로에게 물었다.
그 광경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던 마우로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젊으셨을 땐 가능할지 몰라도 지금은-."
꽈드드드득-.
심해에서 들리는 기괴한 소리에 마우로의 입이 닫혔다.
'어인'들을 죽이던 에드먼드의 세검이 압력에 못 이겨 으스러지는 소리였으니까.
오랜 기간 손질하지 않았던 만큼 에드먼드의 검은 한계를 넘었고, '어인왕'은 진즉, 눈치채고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인간!"
옥좌에서 '왕'이 일어선다.
호흡만으로 바다를 떨게 하는 '왕'이 에드먼드를 향해 거침없이 살기를 뿜어낸다.
죽음과 죽음이 교차하고.
'왕'의 창끝에서부터 대지를 갈라 협곡을 만들 법한 힘이 일어나는 찰나.
쿠웅!
달려가던 에드먼드가 다시금 왼발로 심해를 디뎠다.
바다가 그의 발아래 깔렸고.
에드먼드는 반쯤 부러진 세검으로 '어인왕'을 가리켰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부러진 세검이 최후의 비명을 지른다!
동시에 에드먼드의 갈색 눈이 청록색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다의 '왕'과 인간의 '정점'이 맞부딪치는 압도적인 광경에 카테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았다.
피비비빗-.
에드먼드의 찌르기는 제대로 들어갔지만, 역시 세검이 버텨 주지 못했다.
'어인왕'의 갑옷을 뚫고 푸른 피를 보이게 했지만, 손잡이까지 으스러졌다.
'어인왕'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며 비웃음을 지었다.
"문 앞에 있던 너를 진즉에 느끼며 이 순간을 기다렸다. 죽어라!"
그의 삼지창에 거대한 뇌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해를 끓게 만들 힘이 뭉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15퍼센트의 세계가 계절을 노래합니다.]
덜컹덜컹!
72겹의 봉인으로 이루어진 성검, '여름'을 담은 상자가 들썩이더니 부서졌다.
솨아아아아-!
이단심판관들과 성녀를 스쳐 지나가는 금빛의 궤적!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쪼개고 쪼개야만 인지할 수 있는 찰나.
스윽.
에드먼드의 눈이 움직였다.
날아오는 세검이 보였다.
무엇인지는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가 휘두를 수 있는 검이 자신에게 온다는 것!
화아아아아아아아-!
에드먼드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날아온 금빛의 세검을 잡자마자 온몸으로 폭포수 같은 불꽃이 쏟아진다. 죽음에 한없이 가까웠던 그의 몸을 정화한다.
에드먼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상태라면 가능하리라.
혼도 정신도 육체도.
그가 지닌 모든 것을 한 점으로 끌어모으며 내질렀다.
아르드바르.
최종식.
클라우 솔라스 Claíomh Solais.
다시금 터져 나오는 금빛의 찌르기.
암흑의 심해가 에드먼드의 검에서부터 폭발하는 찬란한 금빛 불꽃에 정화된다.
승리를 자신하던 '어인왕'은 표정조차 바꾸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그뿐 아니라 금빛의 불꽃에 휘말린 '어인'들까지 가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강!
그제야 울리는 파공음!
에드먼드의 손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금빛의 찌르기가 심해에서부터 치솟았다.
그 끝, 에이레의 경계마저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고, 마침내 금빛의 일격이 밤을 가르며 창공으로 뻗어 나갔다.
"이게 무슨...."
해를 찔러 떨어뜨리는 찌르기가 자신의 검인 건 맞다.
그러나 이런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에드먼드는 그제야 손에 들린 세검을 살폈다.
찬란한 금빛의 세검.
날도 세워지지 않았으며 너무나도 얇아서 쇠막대기처럼 보였다. 그 위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세밀하게 음각된 검이었다.
우우 우우-.
하지만 에드먼드는 손으로 느껴지는 검의 느낌에 전율했다.
보통의 세검이 아니다.
명검이란 칭호마저 모욕에 가까운 신검-!
암흑심해가 사라진 곳으로 카테리나가 들어와서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땅에 붙박여 하늘을 지탱하는 지엄하고 성스러운 '여름'입니다."
"성검... '여름'?"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성검에서 천천히 금빛이 사그라졌다.
마치 에드먼드는 주인이 아니라는 듯 지금 그의 손에 들린 건 아무것도 없이 밋밋한 세검 한 자루였다.
물론 그것마저 대단한 일이었기에 카테리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격이 없는 자는 잡자마자 불타 죽는데 에드먼드 님에겐 쥘 자격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단심판관도 쥘 수 없는 검이기에 겹겹이 봉인해서 들고 다녔다.
그런 성검, '여름'이 에드먼드의 손에선 얌전하다.
에드먼드는 성검을 몇 번이고 살피다가 물었다.
"성녀가 성국을 떠나고, 성검이 나타났다는 건 이 시대의 끝이 찾아올 때가 된 것이오?"
"...'그 예언'을 아시는군요."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되었소."
"예언대로 이제 진정한 용사님이 나타날 때가 된 겁니다."
"용사가 필요한 시대라...."
"그 용사가 아드님입니다."
순간 에드먼드는 놀라서 성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벨 님이야말로 진정한 용사시죠."
"...."
에드먼드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빛을 잃은 성검을 카테리나에게 건넸다.
"그 아벨이 내가 아는 꼬맹이 아벨인지는 모르겠으나, 용사는 성검이 선택하기 전까진 모르는 법. 자세한 건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해를 찔러 떨어뜨리는 검.
황혼(Dawn)을 부르는 자.
엘프 여왕, 글루미엠조차 피하는 진정한 초인.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친부.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
그가 돌아왔다.
Episode.Ⅰ
봄의 찬미
#53 EP.Ⅰ-13
이미, 저물었다 (1)
"이건...."
먼저 들어간 카인에 이어 일행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어느 천막 안.
"우욱."
나름 단련된 에셔였지만,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 파편들을 보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피가 튄 자국만 보면 옆에서 터진 폭탄에 휩쓸려 죽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천막의 얇은 방수포에는 흔적 하나 없으니 폭탄은 아닐 터.
어떤 식으로 죽은 건지 알기 어려웠다.
다들 눈동자를 굴릴 때, 카인만 이런 피바다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시체 조각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화살을 쐈던 부하가 있던 곳이지?"
올리시렌은 딱딱하게 굳은 채 물었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모두 죽인 모양이다. 그리고."
툭.
뒤집어져 있던 시체 하나를 돌렸다.
상반신의 반쪽은 날아가 있었고 그의 가슴이라고 추정되는 부위에 검은 단검의 자루가 꽂혀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 속에서 미묘하게 익숙한 냄새가 시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쾌하고 맑은 꽃향기.
한 송이의 꽃이 아니라 수천수만 송이의 다양한 꽃이 있을 때만 맡아지는 그 향기.
카인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뒤편에 선 올리시렌의 얼굴도 굳었다.
"이게 그 사람이구나...."
천막의 다른 부상자들을 다 죽이고 시체로 남겨진 '데이브레이커'.
그의 공격을 맞상대했던 카인과 올리시렌은 향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카인은 시체를 다시 뒤집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은 죽임당했을 수도 있겠고."
아리안에게 들은 '보통 사람들.'
그들과 연관된 것답게 아무리 찬찬히 살펴도 다른 흔적은 없었다. 카인은 하는 수 없이 천막 밖으로 나왔다.
햇볕이 쨍쨍했다.
열차에서 봤던 것처럼 하늘은 맑았다.
하지만, 동료들이 나오고 있는 천막 안. 그 안은 지옥이었다.
아주 얇은 천 한 장으로 구분되는 세상.
"기억하겠다."
대장벽에서 그랬듯, 카인은 자신만의 애도를 표하며 걸음을 옮겼다.
에셀레드 백작가.
라마이닝 백작가.
그리고 크로울 백작가.
카인은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리안 섬 중부, 마르퀴스 벨트를 양분하는 로스 후작가가 관할하는 세 개의 백작가 전부가 현재 카인과 올리시렌의 영향력에 들어온 상황.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카인은 옆을 돌아보았다.
처음엔 싫었지만, 이젠 옆을 보면 보이는 익숙한 회색 머리의 그녀.
아이리안 왕국의 제1 왕녀.
왕도 린드브룸에선 존재감이 흐릿하다고 비아냥거리는 조로 '안개꽃의 왕녀'라 불리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마주쳤다.
"몇 번이고 말한 거지만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죽거나 죽이거나, 분명히 선택해야 해."
살고 싶다면 그녀도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왕위라는 욕망의 성배에 달려드는 승냥이들과도 싸워야 한다.
아이리안의 칠대귀족가 중 셋을 품은 이상 올리시렌에겐 왕이 되거나 반역자가 돼서 죽는 두 가지 길만 남았기 때문이다.
"네 손을 잡은 그때부터 단 한 번도 돌이키고 싶은 적은 없었어. 공범."
같이 죄를 저지른 자, 공범.
그녀의 적확한 말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좋은 표현 없나."
"꼭 나쁜 사람들이 어떻게든 좋은 말로 꾸미려고 하더라."
* * *
로스 후작가.
헤터워드 로스 후작은 부드러운 융으로 그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연신 쓸고 있었다.
닦을 땀은커녕 먼지 하나 없다.
단지 그의 초조한 심경을 보이는 행동이었다.
맞은편의 기사단장, 시그마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반복하던 로스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융을 집어던졌다.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체스 말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시그마리 단장!"
"예스, 로드 로스."
"아르나는 처리했나? 안심하고 있던 후방이 무너지면 저 같잖은 왕녀나 도련님이 주저앉을 텐데."
"실패했습니다."
"뭐...?"
시그마리의 담담한 대답에 로스 후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더니, 평소의 그답지 않게 소리쳤다.
"어떤 한심한 엘븐나이트를 보내서 실패해!"
시그마리는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흥분한 로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엘븐나이트를 보내진 않았습니다."
"지금 나한테 보고한 거랑 다르게 행동했다는 게, 자랑-."
"글루미엠 여왕님께서 직접 움직이셨습니다."
그의 말을 자르며 들어온 시그마리의 대답에 로스 후작은 굳었다.
빨갛던 얼굴이 글루미엠 네 글자에 순식간에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자랑일 수 있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민망했지만, 엉덩이 무거운 북방의 엘프 여왕이 움직였다면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로스 후작은 궁금증이 들었다.
"그럼 여왕이 실패했다는 건가?"
시그마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엘더 중 한 명으로 여왕에 대해 안 좋은 말을 꺼내는 것에 거부감이 솟았으니까.
"반짝이한테 그냥 다 말해 줘. 생긴 건 돌이라도 하는 건 여우니까 잘할 거야."
그러나 글루미엠이 남긴 전언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셀레드 백작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
로스 후작의 눈코입이 벌어진다.
아마도 그가 날 때도 저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으리라.
에드먼드 에셀레드의 등장에 그가 얼마큼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글루미엠 여왕이 물러섰다는 걸 절절히 이해했다.
"던전에서 일 년 만에 살아온다는 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여왕께서 에셀레드 백작을 직접 본 건 아닙니다. 그러나 던전 에이레가 있는 곳에서 '황혼의 오러'가 하늘을 찌르는 건 보셨습니다."
"...일어날 수 있던 일이군."
로스 후작은 옆 탁자 위에 준비된 수십 장의 융 조각 중 아무거나 하나를 쥐고 머리를 닦았다.
이번엔 정말 땀을 닦는 거였다.
에드먼드 에셀레드.
그 이름이 주는 압박감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들어가기 전에도 괴물이었는데 이제는 더더욱 괴물이 되었겠어."
그와 함께했던 세월이 스친다.
그렇기에 더더욱 두려웠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로스 후작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멈칫멈칫하다가 순간 눈을 빛냈다.
촤르르르르-.
체스판 위 몇 안 남은 말들을 팔로 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곤 새로운 체스 말을 하나씩 깔기 시작했다.
"최악은 에드먼드와 그 카인이라는 망나니가 함께하는 일."
탁-.
모두 깔진 않았다.
하나하나 말을 놓으면서 제 생각을 정리해 갔다.
"올리시렌이냐 올리비아냐."
두 개의 퀸을 반대쪽에 두었다. 그리고 킹은 눈길 한 번만 주곤 룩을 집었다.
"왕은 무관심하고, 귀족 가문들은 성벽처럼 올리비아를 둘러쌌지."
색과 상관없이 뽑은 여섯 개의 룩을 올리비아를 상징하는 백색 퀸 앞에 두었다.
아이리안 왕국의 칠대귀족가를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이후 홀로 동떨어져 있던 룩 하나를 올리시렌 쪽에 두었다.
누가 봐도 에셀레드 백작가였다.
그리고 올린 흑색 나이트.
로스 후작은 잠시 멈추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나이트로 여섯 개의 룩 중 두 개를 올리시렌 쪽으로 옮겼다.
"천방지축인 애 하나가 이걸 사대 삼으로 만들고 뒤에는 이 판을 뒤엎을 괴물이 있다라."
톡톡-.
체스판은 손끝으로 두드리던 로스 후작은 체스 말이 가득 담긴 통에서 무언가 하나를 집었다.
성직자를 상징하는 비숍이었다.
"괴물은 괴물로 상대하는 건 어떨까?"
엘프 여왕이 마녀니 당연하게 성국은 엘프들의 적이다. 자연스레 그런 엘프와 손잡은 로스 후작에게도 성국은 거리낄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에드먼드를 상대하기엔 성국이 효과적인 칼이라는 건 분명했다. 시그마리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성국이 에드먼드를 적대하겠습니까?"
"그 아들을 적대하게 하면 되겠지."
로스 후작은 미소 지었다.
이것보다 좋은 수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카인을 상징하는 흑색 나이트를 툭툭 쳤다.
"그대의 생각처럼 이 녀석의 성장세가 너무 빨라."
"아무리 그 에드먼드의 아들이래도 영지에서 나온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요샌 소드마스터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더욱 좋군. 성국과 갈라두면 볼 만하겠어."
순간 말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한 시그마리는 의아했다.
무슨 방법으로 카인 에셀레드와 성국의 사이를 갈라놓겠다는 건지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로스 후작은 자기 손발이 되어 주는 초록의 괴물을 바라보며 그만이 꺼내 들 수 있는 답을 입에 담았다.
"12차 북방원정을 일으킨다."
"...!"
"맥로든 영감도 지금 몸이 달았을 테니 마르퀴스 벨트는 당연히 동의할 테고, 엘프들의 남하 징조가 보인다고 하면 왕실도 움직이겠지. 그럼 당연히 카인은 당연히 징집되어서 숲에 갈 테고."
"아벨을 보낸다면 가문의 적통을 아벨에게 넘긴다는 의미니, 본인이 가겠군요."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는 아이리안 귀족들의 근간은 피와 죽음으로 우뚝 선 개척자들이다.
그런 만큼 칠대귀족가의 적통을 이을 자들은 병역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지켰다.
로스 후작이 찌른 곳이 너무도 인간적이라 시그마리는 대화 중 처음으로 웃었다.
"그걸 위한 마르퀴스 벨트니까."
엘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후작'이라는 권력을 쥔 가문이 왕국을 등지는 순간이었다.
바위에 새겨지고, 피에 남아 있던 태고의 맹세라도 결국 시간 앞에선 삭아 버린다.
그리고 엘프는 그런 시간을 아주 길게 살아가는 종족.
시그마리는 인간의 변화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께서도 흡족해하실 겁니다. 숲에만 들어온다면 마녀사냥에 환장한 성국 놈들이 참을 수 없게, '기적'을 거는 건 쉬운 일이니까요."
로스 후작은 맥로든 후작에게 연락하기 위해 일어섰고.
"나는 인간을 맡지. 지금의 칠대귀족제에서 팔선귀족정으로 바꿔봐야겠어."
시그마리는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면서 웃었다.
"저는 숲을 맡겠습니다."
복수에 눈이 먼 인간과 깊은 숲속에서 이빨을 드러내는 엘프가 손을 잡고 카인을 노리기 시작한다.
* * *
크로울 백작가, 아이언하트.
카인이 들어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점차 봄이 가까워지는 것인지, 온화한 기운이 가득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크로울 백작을 대신하여 그간 아리안이 집무를 봤지만,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그들은 질린 눈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의 인구수가 1,902명인데 요구하는 식량은 오천은 먹일 양이군요. 다시 계산하세요. 이렇게까지 필요하면 그 이유를 첨부하세요."
회색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
"아리안 일당이 해먹은 재물은 제가 찾아 뒀습니다. 그림 좋게 도시수비대장을 보내 환수하세요."
안개꽃처럼 존재감이 없다고 손가락질 받던 왕녀.
"크로울 백작님과 미아 님의 건강이 회복되면 큰 파티를 열 겁니다. 초대 목록을 작성하세요."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그녀는 크로울 백작령의 모든 정보를 외우고 있었던 것처럼, 단번에 모든 일을 해낸다.
그 압도적인 처리 능력에 실무관 중 그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철컥-.
문이 열린다.
이소엘은 냉정한 눈으로 올리시렌을 둘러싼 환경을 살핀 후 그녀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가릭 백작님이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곁에는?"
"어제 깨어난 미아 님과 카인 공자님이 계십니다."
올리시렌은 쥐고 있던 만년필을 종이에 콕콕 찍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높였다.
"...그 주둥이에서 뭔 말을 할지 불안해서라도 직접 가 봐야겠어. 한 시간 동안 휴식합니다. 가자."
"예."
둘이 나가고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실무자들은 힘을 풀 수 있었다.
며칠간의 업무였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올리시렌 왕녀의 참모습을 제대로 느꼈다.
"저분이 왕이 되시면 어떨까...?"
누군가의 중얼거림.
답하는 자들은 없었지만, 다들 속으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올리시렌은 아주 조금씩 본인도 모르게 왕녀에서 왕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54 EP.Ⅰ-13
이미, 저물었다 (2)
「엘프를 '인류'라는 큰 범위로 포괄하는 걸 반대할 학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서쪽 섬나라의 학자들은 하나같이 반대했다. 그 긴 이유를 요약하자면 그들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당연히 아이리안의 엘프들도 인류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잔인하듯 땅과 역사를 두고 싸우는 두 종족의 잔인함이야말로 같은 인류라는 증명일 테니까.
- 랑베르, '초록의 엘프' 중」
"올리시렌 왕녀님 드십니다."
가릭과 미아가 돌아온 후 크로울 백작가는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올리시렌이 왕실정보국을 활용해서 빠르게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
당장 지금 소리치는 하녀까지도 모두 그녀가 채워 넣었을 정도였다.
끼이이익-.
큰 방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두 개의 침대였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아이리안 칠대귀족가 중 하나인 크로울 백작가의 가릭 크로울.
그는 살점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깡말라 있었다.
단지 이불 위로 언 듯 보이는 장대한 기골만이 건강할 적 그의 육체를 짐작케 할 뿐.
"저희가 일어나서 맞이해야 하지만, 그러질 못해 죄송합니다."
그 옆 침대엔 미아.
수수한 갈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얼굴선이 제법 유려하다.
미모로만 따지면 카인이 처리한 아리안 크로울이 훨씬 윗줄이라지만, 아리안에겐 없는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여인이었다.
올리시렌은 둘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곤 침대 사이에 앉아 있던 카인에게 다가갔다.
카인은 올리시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인사해 줘?"
"하지 마, 징그럽게."
탁자의 맞은편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다.
본래 귀족가에선 사용하지 않는 배치지만, 아직 회복되지 못한 크로울 부부를 위해 배치된 자리였다.
가릭 백작은 힘겹게 몸을 돌렸다.
베개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곤 간신히 눈만 카인과 올리시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자네의 말과 달리 왕녀님과 자네는 상당히 친해 보이는데?"
묘한 정감이 묻어 있다.
가릭 백작이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 고려한다면, 퍽 이상할 정도로 친근한 어조였다.
카인은 익숙하게 앞에 놓였던 반쯤 마신 찻잔을 들었다.
"서로 틱틱거리는 게 뭐가 그리 친합니까."
"자네와 내가 싸울 때 왕녀님이 응원해 주셨던 거 같네만."
"그럼 그 상황에서 누가 응원 안 하겠습니까."
그러나 광대와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마른 가릭 백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친구 눈치가 없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카인이 뭐라고 했나요?"
자신이 없을 때 자신에 대한 말을 한 눈치라 올리시렌이 물었다.
그러자 미아는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두 분이 같이 다니게 되었냐고 물으니, 가는 방향이 같아서 동행하는 거라고 말하셨습니다."
올리시렌은 너무나 카인다운 심심한 대답에 장난스레 입을 삐죽였다.
"같이 겪은 생사고락이 얼만데 그냥 가는 방향이 같은 거였어?"
"그거면 충분하지."
"...?"
"바라보는 곳이 같고 걸음이 향하는 곳이 같은 것보다 필요한 건 없으니까."
말이 담백하다고 그사이에 담긴 것이 심심한 건 아닌 법.
아르후안과 맞서 둘은 같이 싸웠고 라마이닝의 고락을 같이 겪었으며 크로울의 부침을 함께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이상으로 관계는 두터웠다.
"그러네."
카인을 이 기회에 한 번 놀려 볼까 했던 그녀는 가슴속에 몽글몽글 차오르는 묘한 기분이 들킬까 싶어 짧은 대답만 뱉었다.
"그런데 백작님, 싸운 걸 아시는 거면 그 사이의 기억이 있으신 겁니까?"
올리시렌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가느다란 미소를 짓던 가릭 백작에게 물었다.
아리안의 술수에 조종당할 때의 기억이 없다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릭 백작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분은 없지만 몇 개는 남아 있습니다. 하나 빼곤 전부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지만요."
"...."
이성을 잃은 인형이 되어서도 가릭은 아리안의 명령에 반항했었다. 특히 영지민을 죽이거나 그의 가족과 관련된 일에 심했고.
카인과 싸운 기억을 제외하곤 전부 좋지 않을 기억이 분명하기에 올리시렌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하녀가 미리 준비해 둔 홍차를 조심스럽게 마시며 자연스레 이어지는 침묵으로 화제를 피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미아가 말했다.
"왕녀님은 참 상냥하십니다."
상냥하다는 말.
올리시렌에겐 낯선 표현이었다.
"아픈 곳만 후벼 파는 제가 상냥하다니요."
"침묵으로 상처를 덮을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왕도에서 살 땐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야 했기에 얻은 별명이 바로 '안개꽃.'
그런 자신이 상냥하다는 건 너무나 어색했다.
"겉으로는 안 그런데 속내는 좀 그런 편이더군요."
카인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네가 뭘 안다고."
대답을 빼앗긴 올리시렌이 잠시 카인을 흘겨보았다.
짙은 흑발에 반짝이는 보랏빛 눈을 지닌 소년을 만난 후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알기에, 차마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싫으면 말든가."
"쿠쿡."
미아와 가릭 백작이 카인의 시큰둥한 대꾸에 웃어 버리자 올리시렌으로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쓴 차를 마시기 전에 입에 넣는 달콤한 케이크 같은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가릭 백작의 입에선 무거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리안은... 자네가 죽였다고 들었네."
"가능한 한 살려서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그럴 테지. 그래야만 하고. 자네 같은 영웅이 불가능할 대상이어야 나와 미아가 이런 꼴을 겪은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테니까."
카인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옆머리를 긁었다.
늘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
그게 아니면 자기 사람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영웅이란 말을 듣기엔 제가 너무 속물입니다. 그럴듯한 미래 같은 것도 없는걸요."
"에드먼드가 기대하던 것보다 더 잘 컸어. 잠시 잡아 주겠나?"
가릭 백작은 손을 뻗었다.
침대 밖으로 나서는 건 아직 어렵지만, 기대 앉을 수는 있는 상태.
카인은 조심스레 가릭을 일으켰다.
그제야 조금 더 숨 쉬기 편해진 건지 약하게 숨을 고르던 가릭은 말을 이었다.
"그 검에 미친 인간이 유일하게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카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만."
가릭의 직설적인 표현처럼 카인의 기억 속 검호 에드먼드는 가정도, 가문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거에만 미친 인간이었다.
'만약 백작이 되지 않았다면 어머니와도 만나지 않았을 거다.'
인간사의 정보다 칼날의 서늘함을 좋아할 에드먼드가 다른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자네 이야기일세."
"예?"
카인은 본인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올리시렌은 그 진심어린 반응에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 전까지 열 마디면 열 마디 모두 칼이었지만, 그래도 자네가 태어난 후론 적어도 한 마디는 자네 이야기로 바뀌었네."
세계선을 건너 회귀했기에 에드먼드에 대한 기억은 수십 년 전 어릴 때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에드먼드가 어떤 남자인지는 카인에게 분명히 새겨질 만했다.
의례적인 행동을 할 뿐 그저 온종일 검을 휘두르는 광인(狂人).
왕국 최강의 검호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최강의 남자.
아버지로서 정 따위는 전혀 없을 자.
'그리고..., 있다면 내가 아니라 아벨이겠지.'
카인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의 어머니인 클로에가 마녀인 걸 아는 에드먼드가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
사랑했다면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지 않았으리라.
어린 자신을 내버려두고 홀로 던전에 들어가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아르나 작은어머님과는 북방원정에서 스스로 만났으니 정략결혼이었던 클로에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의 선택은 아벨.
카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마 그렇다면 제가 아니라 아벨 녀석일 겁니다. 들으셨을지 모르겠는데 제 이복동생이-."
가릭 백작은 형형한 눈으로 카인을 응시하며 말을 끊었다.
"자네 맞네."
"솔직히 못 믿겠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셨습니까."
"에드먼드가 선대 에셀레드를 열일곱에 이겼던 것처럼, 자신도 자네가 열일곱이 되면 패배할 수도 있겠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올리시렌은 두 눈을 깜빡이며 카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는 미아 역시도 처음 듣는 듯 카인을 돌아보았고.
그러나 정작 카인은 조금도 못 믿겠다는 듯 쓴웃음만 흘렸다.
"왕국 최강의 검호를 제가 이긴다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멈춰선 안 된다고 했지. 언젠가 아들의 칼을 떳떳하게 받기 위해서."
"...."
카인은 고개를 내렸다.
반쯤 마신 붉은 찻물에 자기 모습이 비쳐 보인다.
마침 열일곱의 자신.
하지만 이미 다가올 시간을 살아봤기에 그 말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내 재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제법 괜찮은 수준이지 아벨처럼 시작부터 뛰어나서 용사까지 오를 재능은 아니었다.
-...제법이긴 하구나.
더욱이 그런 평가는 자신만 스스로 내린 게 아니라 동쪽의 절대자였던 조니 워커 사부님도 내린 것.
아마도 소드마스터에 다다른 에드먼드를 지금의 자신이 이기려면 오직 <사계절의 신기>의 힘이 필요할 뿐인....
'설마?'
순간 카인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봄이라는 놈이 원래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에게도 없죠.
제 손에 죽음을 맞이하던 용사 아벨이 하던 말.
성검, '여름'.
성류관, '가을'.
마검, '겨울'.
세 가지 계절은 그 위용을 역사에 새겼지만, 오직 '봄'만이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 가장 필요한 순간 '봄'이 카인의 안에 있었다.
'나한테 말을 걸던 것도 봄이고.'
[늘 지켜보마, 카인 에셀레드.]
에드먼드가 팔불출도 아니고,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봄'뿐.
친모 클로에가 마녀인 것도.
의문의 살인이 눈 오는 날 일어난 것도.
그리고 아마도 '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에드먼드가 보고 싶었다.
후릅-.
여러 가지 생각을 털어 넣듯, 카인은 다 식은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뭐,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죠."
어차피 죽은 인물에게 무엇을 물을까.
카인은 올리시렌을 가리켰다.
지금까지가 평범한 관계였다면, 이제부턴 칠대귀족과 왕가의 시간이었다.
"가릭 백작님. 저는 올리시렌 왕녀를 왕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가릭은 뼈만 남은 손을 들어 턱을 쓸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그에겐 아이리안 왕국의 대귀족다운 아우라가 엿보였다.
"왕녀 둘 중 하나는 왕이 되어야 하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더욱이 에셀레드와 라마이닝 그리고 우리가 합치면 벌써 세 백작가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칠대영에서 이젠 삼대사가 되었다.
가릭 백작이 은연중에 지지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남은 건 단 한 곳뿐.
"하지만 말일세, 카인."
가릭의 분위기가 바뀐다.
아이리안의 일곱 정점 중 하나 다운 위엄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퀭하지만, 준엄함이 묻어 나오는 눈빛이 회색빛의 올리시렌을 향했다.
"왕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
"그렇게 따지면 그냥 자네가 왕 하겠다고 손들어도 별 차이 없지 않나?"
"...!"
카인과 올리시렌이 함께했지만, 세 백작가가 그녀를 지지하는 건 전적으로 카인의 역할이 컸다.
막말로 왕 후보로 자신을 지지하라고 해도 동의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에 잠긴 카인을 제쳐 둔 채, 가릭이 물었다.
"왕녀님. 왜 왕이 되고 싶으십니까?"
올리시렌은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자 가릭의 말이 하나 더 이어졌다.
"무슨 짓을 해서든 힘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왕이 되면 뭘 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올리시렌의 말끝이 떨리고.
"귀족과 왕은 다른 겁니다. 국가와 영지처럼 그리고 하이볼트 전하와 제가 다른 것처럼요."
가릭은 올리시렌과 카인이 직시하지 못하던 핵심을 찔렀다.
#55 EP.Ⅰ-13
이미, 저물었다 (3)
왜 왕이 되고 싶냐는 가릭 백작의 물음에 올리시렌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은 살고 싶어서.
그다음은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 이유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살고자 왕관의 무게를 굳이 견뎌야 하는가?
올리시렌이 고민하는 기세가 역력하자 가릭 백작은 말을 돌렸다.
"하이볼트 전하께선 왕녀님을 제 1계승자로 두셨죠. 그리고 그걸 로스와 맥로든, 두 후작이 반대하면서 2왕녀를 밀고 있고요."
아리안의 마수에 걸린 게 몇 년 전이라지만 가릭은 그 전부터 이런 암류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던 눈치.
누가 뭐래도 가릭 크로울 백작은 칠대귀족이었다.
그는 왕도 린드브룸이 자리한 북쪽을 흘깃 돌아보곤 물었다.
"하이볼트 전하가 어떻게 왕이 되셨는지는 아십니까?"
"예. 그건 아버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최근엔 연례행사에서만 뵈었지만, 제가 가까이 봤던 왕자 시절의 하이볼트 전하는 무시무시하셨었죠."
가릭이 기억하는 하이볼트 룬 아이리안의 모습은 늘 눈물을 마시며 제 형제들을 하나씩 없애던 철혈의 남자였으며.
귀족 세력에게 당근과 채찍을 절묘하게 내밀며 국정을 운영하던 정치의 귀재였다.
하지만 올리시렌으로선 갸웃할 수밖에 없는 하이볼트에 대한 설명.
"제가 봐 온 아버님은 늘 평온하셨는데...."
곱게 말을 돌려서 그렇지, 가릭이 말하는 하이볼트의 모습은 지금으로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릭 백작은 잠시 착잡한 눈길로 올리시렌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버윈 로스. 그녀가 돌아가시고 나서 달라지신 겁니다."
"로스 후작가의 사람인가요?"
올리시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카인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가릭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카를라 오우드리(Carla Audrey)라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어머니...!"
올리시렌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로스 후작가의 사람이라고?'
아이리안 왕국에서 평민은 성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평민은 아닐 것이며, 귀족 간에 이름이 겹치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있다지만 감히 후작의 성과 똑같이 쓸 곳은 없을 터.
가릭 백작의 말대로라면 올리시렌의 친모는 현재의 올리시렌을 죽이려는 로스 후작가의 사람이란 의미였다.
"현 헤터워드 로스 후작의 누나가 올리시렌 왕녀님의 어머님이십니다."
"전 처음 들어요!"
딸인 공주조차 처음 듣는 비사.
가릭 백작은 쓰게 웃었다.
"그럴 수밖에요. 이걸 아는 건 왕가와 칠대귀족가뿐이었으니."
"어머니가... 로스."
올리시렌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가문의 직계가 어머니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혹시 당시 유행이 아내를 둘씩 맞이하는 겁니까?"
카인이 던진 농담.
진지하게 듣던 미아는 크게 웃어 버렸고, 한창 고민하던 올리시렌은 황당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마디로 분위기를 바꾼 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에드먼드 백작도 아내가 둘, 크로울 백작님도 둘, 하이볼트 전하도 둘. 어디 다른 백작님도 둘일 거 같은데요."
"딱히 유행은... 아니었네. 다들 어쩔 수 없었지."
"뭐, 믿어드리죠. 그런데 그 정도 되는 이야기가 비밀이라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있었다는 건데 뭡니까?"
가릭 백작의 눈이 올리시렌을 잠시 바라보았다.
당시 비사의 전말을 아는 그로서는 하이볼트와 그녀의 딸 앞에서 뭐라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몇 번이고 입만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세한 건 자네들이 알아보게. 왜 로스 후작이 아직도 혼인하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매사에 적극적이셨던 하이볼트 전하가 '카를라 오우드리'가 죽은 후 칩거하시는지."
올리시렌은 고개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출생의 비밀에 대한 정리가 얼추 끝난 눈치였다.
"그리고 왜 로스 후작가가 제 편에 서지 않는지도 알아야겠군요?"
"예, 왜 다른 사람들이 왕녀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지 않는지부터 아셔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올리시렌은 고민만 가득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금이 좋을 때군.'
그건 가릭이 지적한 '왜 왕이 되려 하는가'라는 부분.
지금까지 살기 위해서 달렸고, 카인이라는 검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한다면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쿠웅.
문이 닫혔다.
가릭 백작은 카인을 향해 윙크했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드는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군요."
"이 섬을 위해, 그리고 내 아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도 해야 했던 말이니까. 자네는 싫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네만."
"제가요?"
"그래, 나는 수십 년을 백작으로 지냈네. 게다가 세 번째 왕의 탄생도 지켜볼 정도며, 이런 별 해괴한 꼴도 다 겪었고."
사람이 십 년을 전념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그럼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버텨 낸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 답이 앞에 있었다.
아무리 약해진다 한들 그의 총명한 정치적 감각은 그대로였다.
"자네는 왕이 어떻고 말고 따위는 관심 없을 거야. 그냥 왕의 권력이 필요할 뿐이지."
"꼭두각시를 바란다는 말씀이군요."
"틀렸나?"
"한때는 원했지만, 그 전에 살아야 했습니다. 저나 그녀나."
카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번 의자를 집어넣던 올리시렌이 정신없이 나가느라 빼둔 의자를 제자리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는 왕을 원합니다."
카인에게 올리시렌은 노기사 밴더빌트를 잡아먹은 원수였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듯.
카인도 역시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사건이 쌓일수록 조금씩 바뀌었다.
"그녀가 진짜로 왕이 되고 싶은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가 없던 제게 미래를 보여 준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왕의 자격이라. 그것도 맞지."
카인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려 했다.
"카인."
그때 가릭 백작이 그를 불러 세웠다.
카인이 뒤를 돌아보자 그는 카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하는 눈치로 구석구석 살펴봤다.
그리고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에드먼드를 너무 미워하지 말게나."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상관없습니다."
"올리시렌 왕녀에게 왕의 자격이 있다고 말하던 온도와 방금 뱉는 말 온도가 천지 차이인 건 아나?"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요."
세계의 시간은 뒤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은 들릴 수 없다.
가릭은 생각보다 더 완고한 모습을 보이는 카인을 바라보다가 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지지했고, 가릭은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나, 에드먼드, 로스, 헤터워드 그리고 철없는 마법사 친구까지 해서 다섯은 옛날에 친구였네."
"아버지에게 친구가 있었다고요...?"
카인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검에 미친 에드먼드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검 말고 또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설마 그 카를라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건 그 다섯입니까?"
"그렇지."
"그래서 아까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가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단지 서투를 뿐이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카인은 몸을 돌리며 문고리를 쥐었다.
하지만 바로 열진 않았다.
자신이 그저 순진한 열일곱의 소년이었다면, 가릭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먹지 못했을 터.
'차라리 몬스터와 싸우고 싶군.'
적이 나타나고 죽이고.
하얀 설원을 몬스터의 체액으로 더럽히고 전사들의 붉은 피로 물들이던 대장벽이 그리울 정도로, 카인은 이 자리가 불편했다.
늘 원망하던 대상의 다른 모습을 듣는 건 그만큼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선물이라면 이건 싫습니다."
쾅.
날카로운 한마디를 남기고 카인은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내 아들한테도 어떻게 말 붙일지 모르는데 너무 성급했던 걸까?"
"아니요."
미아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곤 가느다란 손을 침대 밖으로 뻗었다. 가릭 백작 역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잘하셨어요, 가릭."
* * *
성국의 이단심판관이라고 하면 공포의 대명사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남는 것이 없으며, 오롯한 빛의 정의를 세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흘깃.
그런 이단심판관들이 한 사내를 조금씩 훔쳐봤다.
"눈알 원위치."
마우로 추기경이 으르렁거리자 그제야 다들 앞만 보고 걸었다. 성녀 카테리나는 나란히 걷던 에드먼드를 돌아보았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오. 다들 신기할 테니."
후우우웅-.
대륙과 에셀레드 영지 사이의 그레이트 오션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에드먼드가 입고 있던 흑색의 이단심판관복이 펄럭이며 에드먼드의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속에 비치는 건 반쯤 부서진 에델웨알흐와 대륙을 향하는 수평선. 그의 발이 디딘 곳은 툭 튀어나온 절벽 위였다.
"무리한 부탁일 텐데 고맙소."
에드먼드는 눈 아래부터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툭 치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카테리나는 두 손을 내저었다.
"저희야말로 영광이죠. 그런데 돌아오신 걸 정말 안 밝혀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옆을 돌아보았다.
키가 작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있는 에셀레드의 풍경이 저 멀리 보였다. 시골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에드먼드는 이단심판관의 후드를 푹 눌러쓰며 자신을 숨겼다.
"내가 살아 돌아왔음을 알리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오."
그 말을 카테리나는 본인이 좋을 대로 해석했다.
"아벨 님이 뵐 때 성검을 전달해 주면서 밝히실 생각이시군요."
"뭐... 그렇소."
에드먼드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본래 성녀 카테리나가 이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용사가 될 사람의 아버지이자 성검을 쥐는 자 앞에서는 속내를 훤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 님이 돌아오셨다는 게 알려지면 그 카인은 도망가기 급급할 텐데, 정말 잘 선택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벨에 대한 호의와 카인에 대한 적의가 묻어나는 그녀의 말에 에드먼드는 쓰게 웃었다.
카인의 쓴웃음과 똑 빼닮은 표정으로.
"사실 아직도 내 두 아들이 하나는 용사고 다른 하나는 마왕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소."
"저 역시 계시를 받기 전까진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카테리나는 성류관 '가을'을 슬쩍 보였다.
이미 성류관이 <사계절의 신기>임을 알고 있는 에드먼드는 계시를 내린다는 '가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왕도로 바로 향할 예정이오?"
"그렇습니다. 혹시 들르고 싶으신 곳이 계신가요?"
호의가 듬뿍 묻어 나오는 카테리나의 말.
중간에서 일행을 조율하는 마우로 추기경은 내심 한숨을 쉴 정도로 카테리나의 다른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아이리안 섬 북방에 엘프의 숲이 있다는 건 아실 거요."
"찢어 죽여도 모자랄 마녀가 다스리는 곳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카테리나는 성국의 힘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숲 채로 밀어 버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눈엣가시처럼 엘프의 숲을 가만히 두었다.
"그 숲에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소. 혹시 일정이 안 된다면 나 혼자라도...."
"됩니다."
휙-.
그녀는 성호를 그으며 고민 없이 말했다.
"성검이 선택한 에드먼드 님이 가고자 하는 곳이 빛의 길이니까요."
너무나 열렬한 성녀의 지지에 에드먼드는 다시금 쓰게 웃으며 성류관 '가을'을 바라보았다.
후드로 가려진 그의 눈초리엔 불신이 반짝이고 있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56 EP.Ⅰ-14
우연히 봄 (1)
톡, 톡, 톡.
올리시렌은 무언가 걱정이라도 있는 듯 빈 종이에 펜을 찍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거침없이 일을 처리해 왔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
"...."
이소엘은 고뇌에 휩싸인 올리시렌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자리를 떴다.
"한 잔 드시고 하시죠."
그리고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하얀 쟁반과 방금 이소엘이 끓인 세이지 차가 들려 있었다.
"미안. 나 때문에 너도 걱정할 텐데."
올리시렌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차를 들었다. 왕실에서 먹던 최고급의 세이지 차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담긴 정성과 마음만큼은 같기에 올리시렌의 속까지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소엘은 그녀에게 물었다.
"일이 힘드십니까. 혹, 그렇다면 이젠 크로울의 관료들에게 넘겨도 될 것 같습니다."
아리안 크로울이 권력을 쥔 이후, 크로울 백작령의 행정사무는 전부 멈춰 있는 것에 가까웠다.
다른 분야는 하던 대로 했다.
하지만 금전과 관련된 분야는 민감하기도 하거니와 그들을 뽑은 백작의 승인이 없다면 관료들로선 도저히 뱃속에 구렁이를 넣고 다니는 지방 귀족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삐걱삐걱 어떻게든 굴러가다 아리안이 죽고 원래의 가릭 크로울 백작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적어도 가릭 백작님이 일어나야 관료들이 일을 할 수 있어."
가릭 백작이 아직 침상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아직 그의 권위가 백작령 구석구석까진 닿기 어려우니 그 빈자리를 제 1왕녀라는 칭호로 채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올리시렌은 뜨거운 차를 용케도 꿀꺽꿀꺽 잘 마시곤 잎 가루가 조금 남은 잔을 내렸다.
이소엘에게 미소를 보이면서 슬쩍 손목을 꺾어 빈 잔을 보였다.
"언제나 고마워."
"부족한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죄송합니다."
"무슨. 이소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어."
왕녀 올리시렌.
그리고 그녀의 하나뿐인 호위 기사 이소엘.
왕궁의 장서관.
린드브룸 아카데미의 금서관.
마지막으론 웨어햄 백작이 군림하는 마탑의 봉인지정실까지.
올리시렌이 마녀가 된 것까지 모든 걸 아는 이소엘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둘이 함께 모든 곳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그렇기에 서로는 너무 잘 알았다.
이소엘이 올리시렌을 잠시 바라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최대한 고르는 눈치다.
"평소랑은 좀 다르지?"
이소엘이 자신을 아는 만큼 올리시렌 역시 그녀를 알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정말 지치신 거면 휴식도 일의 일환이라고 하면서 쉬실 분이 그냥 멍하니 계시니까요. 혹시 다른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드륵-.
올리시렌은 의자를 돌렸다.
이미 크로울의 관료들은 퇴근한 늦은 밤.
등지고 있던 네모난 창밖으론 새카만 하늘과 밝게 빛나는 별이 펼쳐져 있었다.
"이소엘."
창유리는 불투명했다.
방 안에 켜져 있는 낮은 촉광의 마법등 빛이 어른거리고 회색의 올리시렌과 탁한 금발의 이소엘이 같이 비췄다.
올리시렌은 창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소엘을 바라보았다.
"내가 왕이 될 만할까?"
그저 한미한 귀족 가문 출신인 줄 알았던 어머니 카를라 오우드리에 대한 고민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예."
이소엘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단언했다.
"왕녀님은 그 누구보다 왕에 가까우신 분입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왕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라는 걸. 마녀라는 게 들키면 죽으니까 어떻게든 발버둥 쳤던 거고...."
카인 에셀레드.
올리시렌은 그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다시 삼켰다.
살아남기만을 바라던 자신에게 왕이 되어서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준 카인의 이름을 말하기엔 마음속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전 어려운 건 잘 모릅니다."
"거짓말. 너한테 밀린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그 말 들으면 통곡한다."
이소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이제는 먼 과거가 되어 버린 그 시절이 그녀를 웃음 짓게 했다.
"그런 저도 아는 건 있습니다. 아무도 몰라주던 저를 왕녀님만이 제대로 봐주셨다는 겁니다."
"...."
"사람을 볼 줄 아는 왕녀님이라면 충분히 왕의 자격이 있습니다."
"글쎄. 올리비아가 먼저 널 봤다면, 걔도 나처럼 했을걸?"
이소엘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2왕녀 올리비아는 그 당시의 자신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름 끼치게 영리하고 자신을 잘 숨기는 올리비아라면 포기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지금이나 그때나 더러워지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리라.
"운도 왕의 자격입니다."
그러나 이소엘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왕의 자격은 있다.
하지만 왕이 된다면 올리시렌이 행복할 것인가?
"이소엘, 가끔 보면 농담을 꽤 좋아해."
올리시렌이 피식 웃고는 원래 보던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소엘은 그 옆모습을 늘 그렇듯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책무며,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지키는 것이 자신의 신념.
올리시렌이 하는 짙은 고민에 고삐를 채우지 않고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아는 올리시렌이라면 금방 길을 찾을 테니까.
툭-.
올리시렌은 몇 장의 서류를 더 처리하다가 펜으로 한 곳을 찍었다.
「카클링턴(Qaclington) 광산」
무언가 떠올리려는 듯 이소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 뭔가 수상해. 이소엘은 크로울 영지의 지리서 좀 가지고 와봐. 나는 과거 세수 자료 좀 살펴봐야겠어."
"예스, 마이 로드."
수십 년에 걸쳐 익숙해져 버린 관료들과 달리 단기간에 방대한 자료를 살펴보던 올리시렌이 품은 작은 의심.
그 의심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까진 시간이 그렇게 걸리진 않았다.
올리시렌은 최근 십 년간 세수들을 한 줄로 이었다.
"봐봐, 어때?"
이소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행정 업무는 잘 모르는 그녀지만 확실히 이상한 점이 보였다.
"너무 똑같습니다."
아무리 광산이라고 하나 카클링턴의 세수는 늘 동일했다.
너무 오래된 곳이라 익숙해진 나머지 기존 관료들은 같든 말든 관심을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스윽-.
올리시렌은 이소엘이 가져온 지리서를 펼쳐 카클링턴 광산을 찾았다.
톡톡-.
손끝으로 백 년 전 지도 위에 표시된 '카클링턴 철광산'을 두드렸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광산으로 역할을 했다면 우리가 알아야 했는데 몰랐어. 그렇다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거겠지."
"네,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옛날부터 채광했는데도 세금을 똑같이 낼 정도로 마르지 않았다라...."
올리시렌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경우의 수를 조합했다.
세금은 똑바로 내고 있으니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수상했다.
다른 더 큰 수입원이 있지만 가리고 있을 수도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불법적인 세력에 점령되어 가리개용으로 쓰이고 있을 수도 있다.
드문 경우라지만 그렇다고 없었던 일은 아니니까.
"아!"
그때 이소엘이 작은 탄성을 내었다. 올리시렌이 돌아보자 그녀는 카클링턴을 가리켰다.
"왠지 익숙하다 했었는데 생각났습니다."
"이소엘은 여길 알고 있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카인 공자님이 말해 주셨습니다. 내일 바로 가실 거라고요."
"...카인이? 왜?"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올리시렌은 팔짱을 낀 채, 한참이나 그 지리서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고민이 길어지는 듯하자, 이소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게 찜찜하시다면 카인 공자님과 같이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확실히 걔랑 같이 가면 든든하긴 해. 하지만 여기 남은 일들이 너무 많아."
이소엘은 손을 펼쳐 크로울의 아이언하트와 카클링턴 광산까지의 거리를 어림짐작했다.
대충 재어 보니 반 뼘 정도.
"반나절이면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곳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가깝네."
"머리도 복잡하시고 당장 급한 것도 없으니 다녀오시면서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일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올리시렌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소엘은 그 소리가 허락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임을 잘 알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아침.
크로울 백작령의 연무장.
크로울의 강력한 병력과 기사들은 아리안의 횡포로 백작령 곳곳에 흩어졌다.
가릭이 정신을 차린 후 소집령을 내렸지만,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돌아온 이는 극히 드물었다.
채앵-!
그렇기에 카인, 밴더빌트, 아벨까지 단 셋만이 드넓은 크로울의 연무장에서 칼을 맞대고 있었다.
챙!
번쩍이는 검광처럼 겨울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하지만 걸음이 느린 봄답게 아직은 쌀쌀하다.
채앵, 챙!
"허억-."
하지만 셋은 모두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고 그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격하게 실전처럼 검을 맞대는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밴더빌트."
카인이 연습용 검을 내리며 그를 불렀다.
털썩.
이미 체력을 거의 다 쓴 아벨은 흙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둘을 올려다보았다.
"예스, 마이 로드."
아벨의 세 배가 넘는 세월을 살았던 노기사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근육을 보이며 대답했다.
카인은 그런 밴더빌트를 응시하다 물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에드먼드 백작님 말씀이십니까?"
"그럼 내 아버지가 둘인가."
카인의 퉁명스러운 말에 밴더빌트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러곤 바닥의 아벨을 흘깃 살피곤 말했다.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건 질리도록 들었어. 당장 이 아이리안 최강으로 불리는데 그걸 모를까."
"몸도 강했지만, 마음도 강한 분입니다."
"...?"
밴더빌트가 늘 하던 말을 할 줄 알고 튕기던 카인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에 검을 바닥에 꽂곤 그를 바라보았다.
아벨은 싱긋 웃으며 따라 꽂았고, 밴더빌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쥐고 있던 대검을 꽂았다.
연습의 종료를 의미했다.
휘익-.
가장 가까이 있던 밴더빌트는 크로울의 하녀들이 뽀송뽀송하게 말려 둔 수건을 두 형제에게 던져 주곤 말을 이었다.
"에드먼드 백작님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은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뭐, 뻔하게 검을 어떻게 휘둘러야 한다고 말해 준 거 아니야?"
카인이 심드렁히 대꾸하고 아벨은 반짝이는 눈으로 노기사를 보았다.
에드먼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만큼 호기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밴더빌트는 조금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11차 북방원정에 출정하시기 전날이었습니다. 백작성 밖에 있는 제 모옥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 한 번 찾아오셨었죠."
-클로에는 끝까지 내가 지키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대에게 다시 맡겨야겠소. 부탁하오, 나이트 밴더빌트.
"아버지가 로맨스를 아시는 분이었군요?"
아벨의 말에 카인은 혀를 쯧-하고 찼다.
"그럴 리가 있나. 그냥 되는 대로 뱉는 말일 거야."
밴더빌트의 난감했던 표정이 조금 풀리며 두 형제에게 말했다.
"저도 그때 말곤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가문의 기사였으니까요."
카인은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툭 터놓고 말했다.
"크로울 백작님이 아버지와 친구라고 하던데 영 믿기지 않아서 물어봤어."
그 말을 듣자, 밴더빌트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손뼉을 치며 급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에셀레드에서 집사를 하던 분이 크로울에 산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영지를 벗어날 정도면 뭐 범죄자 아니야?"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카클 광산인가에서 정착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라."
"카클링턴 광산일 거예요!"
아벨은 씩씩하게 손들며 말했다.
그 손으로 제 머리를 톡톡 쳤다.
"이 근처의 지리는 다 외워 뒀으니, 분명합니다. 게다가 아이언하트와는 멀지도 않아요."
카인은 그런 아벨에게 엄지를 치켜들고 밴더빌트에게 물었다.
"잘했다. 그럼 그 집사는 아버지의 어릴 때를 알겠네?"
"그럴 겁니다."
"가깝다고 하니까 한 번 만나고 오지 뭐."
올리시렌이 그랬듯 카인 역시 가릭 백작의 말을 조금 신경 썼다.
마침 가까운 데에 그 열쇠가 되어 줄 자가 있다고 하니 찜찜한 마음을 털어 낼 겸 갔다 오기로 결정했다.
#57 EP.Ⅰ-14
우연히 봄 (2)
「"그 주문쟁이놈하고 내가 겹친다고?"
젊은 현자는 인상을 팍 썼다. 그 앞에 놓인 나무 맥주잔을 들어선 벌컥벌컥 마시곤 입을 닦으며 말했다.
"마술사왕이라고 주위에서 떠받들어 주니까 그 녀석의 콧대가 하늘까지 치솟은 거야. 내가 마술사와 현자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 주지. 여기요!"
현자는 손을 높게 들었다.
주점의 주인은 익숙한 듯 차가운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가져왔다. 현자가 방금 마신 빈 잔이 치워지고 다시금 가득한 잔이 나타났다.
현자는 그걸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지? 영 모르겠다는 눈치네."
어차피 처음부터 상대가 알 거라 예상하지도 않았다. 현자는 이번엔 천천히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마술사 놈은 이 잔을 채우기 위해서 별별 고생을 다 하고 이뤄 낼 거야. 하지만 나는 다르지. 이게 어떻게 하면 바로 차는지 알아."
"전능(全能)과 전지(全知)의 차이입니까."
"...."
현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술사.
무엇이든 알고 있는 현자.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둘이 함께하는 건 모두 반짝이고 찬란한 용사 덕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현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다.
취기에 흔들려 보이는 건지, 불이 흔들리는 것처럼 마음도 흔들려서 그런지 머릿속 깊이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나 놈이 지닌 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 세상 모든 왕'이 사라지고 신께서 울음을 그치시면 진짜 전지전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다."
"금빛의 여명...."
"그래. 손만 대면 부서질 이 시대가 재탄생하는 그 순간이 오면 모두가 알 테니."
"그게 언제입니까?"
현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맥주도 마시지 않고, 잔만 한참이고 만지작거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용사님이 해가 저무는 곳에 잠든 '봄'을 깨울 정도로 세상을 바꾸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전지가 불완전하다는 걸 고백하는 소리였다.」
* * *
이 세상 가장 서쪽의 섬나라, 아이리안. 그곳에서도 남부, 크로울 백작령의 아이언하트.
"아벨하고 밴더빌트는 남아 있어."
카인의 말.
"공자님, 그래도 오스왈드 집사님을 찾으려면 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밴더빌트가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러자 카인은 코웃음을 쳤다.
"밴더빌트도 그 사람하고 마주한 적 없다며."
"그거야...."
"에드먼드 백작이 어른이 되기 전에 있던 집사 영감 하나 내가 못 찾을까 봐?"
"알겠습니다."
밴더빌트는 시무룩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아벨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그럼 형님, 저라도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카인은 저 뒤편에 서 있는 아이언하트의 백작성을 턱짓했다.
"내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올리시렌이랑 너뿐이야."
권력으로선 왕녀 올리시렌, 무력으로선 이전 세계선에서 마왕을 물리쳤던 아벨만이 카인의 자리를 채울 수 있다.
카인은 아벨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옆을 흘깃 쳐다봤다.
하얀 백마를 타고 있는 올리시렌과 평범한 말을 이소엘이 보였다. 올리시렌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었다.
"쟤가 갑자기 간다고 하니까 너라도 있어야지. 그래야 내가 자리를 비울 수 있어."
"저뿐이군요... 형님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그 순간 아벨의 눈이 반짝였다.
숲에서 엘프들에게 천대받으면서 자라고, 로스 후작가의 암수에 걸렸던 아벨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정을 알려 준 게 카인이다.
동시에 아벨이 되고 싶은 롤모델 역시 카인.
그런 카인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인정하고 있다는 걸 알자 들뜰 수밖에 없었다.
'노리고 말한 거긴 하지만 너무 효과가 좋군.'
카인은 내심 쓰게 웃었다.
이전 세계선에서도 아벨과 진즉에 가까이 지냈다면, 다른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털어 버렸다.
'다시 살기 때문에 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 상황을 똑같이 겪는다면 똑같으리라.
용사 아벨의 희생으로 얻어 낸 두 번째 삶.
그걸 잘 알기에 카인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름 의젓해 보이려고 하지만 코찔찔이 같은 모습이 중간중간 보이는 아벨이었다.
"부탁한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안 그런 척하지만 말에 들뜸이 묻어난다. 밴더빌트가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다 카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이 없는 동안 아벨을 잘 보고 있겠다는 노기사의 약속이었고.
끄덕.
카인 역시 끄덕이며 화답했다.
둘이 물러서자 대형 방패를 든 평기사 에셔가 신나서 카인의 근처로 다가갔다.
카인은 에셔의 모습을 보면서 턱을 쓸었다.
"너도 남아 있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아닙니다! 그래도 로드께서 가시는데 한 사람쯤은 시중들 사람이 있어야죠!"
"나 시중 필요 없어."
"그, 그럼 제가 목숨을 걸고 로드를 지키겠습니다!"
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어차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영감 한 명 만나고 오는 일정인데 에셔의 열기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다그닥-.
웃으며 지켜보던 올리시렌이 말과 함께 다가와서 말했다.
"에셀레드의 작은 백작님이 움직이는데, 저 기사의 말대로 한 명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왕궁의 무도회서나 말할 법한 어투로 말하는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카인을 잔뜩 놀릴 생각으로 가득한 미소.
"작은 백작은 무슨. 에셀레드의 공식 후계자는 아직 없어."
에드먼드가 정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장자인 카인이 계승할 예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간 관습적으로 그랬던 것뿐이고 왕실에서 거부하거나 다른 두 후작이 흉계를 펼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에셀레드에서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다음 백작이 누구일 거 같냐고."
"...."
"다 너라고 할걸? 그러니 아이리안 칠대귀족이 될 사람답게 다녀."
"아벨이 백작이 될 수도 있지."
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벨이 번개같이 대답했다.
"아니요! 무조건 형님이 되셔야 합니다!"
"아벨, 생각은 바뀌기 마련이니까...."
"절대 아닙니다! 저는 형님의 뒤를 지키는 거면 충분합니다."
이소엘은 고개를 돌리며 살짝 웃어 버렸고, 올리시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난감해하는 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그만들 그러고 얼른 가자. 일찍 출발하면 이따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카인은 애꿎은 뺨을 괜히 긁다가 크로울 백작 측에서 준비해 준 말을 탔다.
아이언하트 성내에선 달릴 수 없으니 넷은 말굽이 포장된 길을 밟을 때마다 일어나는 기분 좋은 느릿한 박자를 들으며 움직였다.
그 옆으로는 6층 가까이 올라간 건물들이 보였고, 그 너머론 열차가 움직이면서 일어나는 뿌연 수증기가 엿보인다.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에셀레드와는 전혀 다른, 진짜 도시였다.
"근데 넌 왜 카클링턴에 갑자기 같이 가겠다는 거야?"
카인의 물음에 올리시렌은 어젯밤 세수 자료를 살펴보다가 발견한 의문점을 이야기했다.
"그런 거면 가서 실사 조사를 하는 게 딱이긴 하네. 이소엘에다가 마침 나도 같이 가니까 별문제도 없을 것이고."
"맞아. 게다가 이소엘이 외유를 갔다 오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더라."
"네가 얼마나 칠칠찮게 굴었으면, 나이트 이소엘이 그랬을까."
"너! 나같이 우아하고 완벽한 왕녀에게 무슨 그런 말을 해."
"이소엘에게 한 번 물어볼까?"
그 말에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던 올리시렌은 고개를 휙 돌려 가장 좌측에 있던 이소엘을 응시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카인을 돌아보았다.
"왠지 네 말이 맞다고 할 거 같으니까, 묻지 마."
"그래 칠칠이 프린세스."
"내가 그래도 누나니까 봐줄게."
카인은 그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늘 짓던 쓴웃음이 아니라 정말 그 나이대 소년다운 가벼운 미소에 올리시렌도 마주 웃었다.
아침햇살이 둘 사이로 내려오고 봄 냄새가 그득한 바람이 분다.
요란한 도시의 소리에서도 둘의 말은 끊이지 않았고 그런 둘을 따라 나이트 이소엘과 에셔가 따랐다.
성 바깥으로 나오자, 넷은 빠르게 말을 몰았다.
순식간에 푸른 초원과 듬성듬성 핀 희고 노란 꽃들이 스친다. 경사가 조금 있는 평야라 그런지 달리면 달릴수록 바람 끝이 서늘해졌다.
"워, 워."
작은 협곡이 눈앞에 보였고, 넷은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멀진 않았다.
마침 낡은 다리도 보였기에 넷은 한 줄로 한 명씩 통과하기 시작했다.
"이 협곡 때문에 철로가 안 깔린 건가요?"
나이트 에셔의 물음.
대개 광산에서부터 아이언하트까지는 협궤철로라도 까는 강철의 크로울답지 않게, 카클링턴은 열차가 없었다.
"아이언브릿지도 만드는 시대에 그런 건 아니고 아마 땅 때문일 거다."
"땅이요?"
이소엘이 먼저 지나고 그 뒤로 올리시렌과 카인이 건너편 땅을 디뎠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에셔는 땅을 바라보며 조금 놀랐다.
건너편과는 전혀 다른 토질이었다.
푸욱-.
말발굽의 다그닥 소리보다는 푹신한 솜을 밟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인은 올리시렌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자료를 통해 카클링턴 지역에 대해 알게 된 걸 말하기 시작했다.
"전설이긴 한데, 이곳에 이름 모를 악마가 살았답니다. 그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면 땅을 비옥하게 해 주어서 이곳의 땅이 이렇다고 하고요."
아무리 왕녀라지만 상대가 정식기사라면 존중해야 했기에, 카인이나 이소엘에게 말하는 것과 다른 어투였다.
나이트 에셔는 악마라는 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정말 악마가 있었던 겁니까."
그러자 올리시렌은 피식 웃으면서 저 멀리 보이는 완만하게 높은 산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죠? 지금은 죽었지만, 예전 활발한 화산이라서 이렇죠."
"화산 근처 흙은 가볍고 어둡거든. 그래서 광산도 있는 거고."
에셔의 얼굴이 조금 평안해졌다.
화산이나 낯선 곳보다도 악마를 무서워하는 게 요즘 사람답지 않아 보였다.
그때 계속 침묵하던 이소엘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마법학이나 과학 같은 논리적인 체계가 없던 과거엔 해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신비와 경외를 가졌었습니다."
다들 너무 빠지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면서 이소엘의 말을 경청했다.
"화산이 터지는 걸 보곤 지맥의 마나가 뭉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기보단 그저 화산의 악마가 분노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 이야기 속에 악마라고 나타나는 건 다 그런 거군요."
에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로서 잘 싸우긴 했지만, 이런 쪽은 영 젬병인지라 어딘가 멋져 보이는 이소엘이 말하니 저절로 수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소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엔 성검 같은 것도 있고, 마녀나 도래할 마왕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마탑에 악마학이라고 악마를 연구하는 분야도 있습니다."
"어...."
"무조건 없다고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카인 공자님의 기사라면 차갑게 생각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건방진 충고가 아닌 같은 처지로서의 조언.
에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장이라도 있으면 받아 적을 기세였다.
카인은 이소엘의 따스한 마음이 손에 쥐어질 것처럼 분명해서 자연스레 미소 지으며, 앞을 바라봤다.
카클링턴 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카클링턴 광산도시가 슬슬 보였다.
"악마든 마왕이든 뭐든 내가 칼을 박아 버릴 테니까, 가자."
"마녀는?"
올리시렌의 물음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는 마녀라면 칼 한 번쯤 맞아 주지."
"딱 기억해 두겠어."
그렇게 넷은 정오가 되기 전에 카클링턴에 들어설 수 있었다.
#58 EP.Ⅰ-14
우연히 봄 (3)
철은 돈이 된다.
돈이 안 되는 시대가 있겠냐마는 특히 공업이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엔 특히 더 돈이 되었다.
특히, 아이리안의 공업을 담당하는 크로울 백작령에서는 더욱더 중요한 만큼 자본이 모이는 철광 근처가 발전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카클링턴 화산 기슭에 있는 광산도시의 외양은 여타 다른 광산도시와는 달랐다.
에셔는 뺨을 긁으며 말했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다."
카인은 본인이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아닌 건 아니라 정정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에셀레드를 떠올릴 정도로 카클링턴은 휑했다.
올리시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까워지는 카클링턴을 살폈다.
"세금을 그렇게 많이 내는 곳이 이렇게 허름한 건 좀 이상한데."
이소엘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손짓했다. 그래도 카클링턴 중심부에는 제법 높은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로도 가려질 만큼 적은 수였고 아주 오래된 양식들이었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광산에 가까워져 올수록 느껴지는 특유의 매캐한 금속 냄새를 가늠했다.
"일단 가 보면 알겠... 저기 사람이 나오는군."
도시의 정문이 열리고 갈색 말을 탄 기수가 카인 쪽을 향해 달렸다.
등에 멘 깃발을 보아할 때 크로울 백작성으로 급하게 파견하는 전령처럼 보였다.
카클링턴의 기수는 허겁지겁 달리려다 카인 일행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그는 넷의 면면을 살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여자 둘이 백마를 타고 있는 걸 보곤 보통 일행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기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크로울 백작성에서 오시는 기사분이십니까?"
다른 영지의 사람이 이렇게 올 리는 없고, 기사가 아니라면 호위 병력이 많을 테니 그로선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카인은 다른 셋을 쓱 훑어보곤 기수에게 말했다.
"크로울 백작님의 변고는 아는가?"
귀족적인 말투.
기수는 말에서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은 위에서 대꾸했다.
"이번에 왔다 간 상단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왔다. 가까운 광산들부터 점검하면서 혹시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려고."
애매하게 잘 둘러대는 카인의 말에 기수는 순간 환희의 웃음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저, 정말 기사가 맞으십니까!"
"그래."
백작가의 후계자고 왕녀고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었기에 간략하게 거짓말을 했다.
다만 카인은 내심 의아했다.
심기가 뒤틀리면 언제든 자신들의 머리와 몸을 분리할 수 있는 자들을 왜 반갑게 맞이하겠는가.
'기사를 좋아하는 곳이 있을 리 없는데, 설마.'
기수는 곧장 말에서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세상에 맙소사!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저는 카클링턴 조합장의 아들 아론입니다."
"버리지 않았다?"
"예, 지금 마침 아이언하트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기사분들의 힘이 꼭 필요하니까요!"
도살자에 가까운 기사를 바랄 이유는 단 하나, 무력이 필요할 때뿐.
카인은 자연스레 추측했다.
"몬스터라도 나타났나 보군."
그러자 아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붉은 입술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며 말했다.
"차라리 몬스터라면 낫겠습니다."
"...?"
"그 원주민 놈들이 저희 조합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단 말입니다!"
"납치?"
카인은 올리시렌을 돌아봤다.
왕국민을 귀하게 생각하는 그녀답게, 납치라는 말이 나오자 눈빛이 달라졌다.
아론은 그런 미묘한 변화는 눈치채지 못한 채 아이언하트에 도착하면 하려고 준비한 말을 하려 했다.
"잠깐."
하지만 카인이 팔을 들어 아론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그가 방금 나왔던 카클링턴의 정문을 가리켰다.
"멀지도 않으니 가면서 듣지."
"제가 마음만 급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바로 저희 조합장님, 아버지와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아론은 익숙하게 말에 다시 타서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넷이 나란히 따랐다.
"뭔가 일이 꼬이는 거 같네."
올리시렌의 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회색의 하늘 아래 볼록 솟은 카클링턴 화산과 허름한 광산도시를 눈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해."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늙은이란 말이야."
우우우-.
카클링턴 주위의 흑토지대를 지나 본격적인 도시의 경계에 다다른 순간, 올리시렌의 회색빛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걸 본 건 대화하려고 마주 보던 카인뿐이었다.
[영원이 '잊혀진 계절'을 되살립니다.]
[운명의 분기점이 깨어납니다.]
『세계 개변의 가능성... 해제.』
[『멸망의 대적자 Ⅲ』 변화합니다.]
['봄'과 '겨울'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왜 그렇게 인상을 찌푸려?"
자신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지는 카인에 올리시렌이 반문했다.
"그냥... 산책하러 가는 느낌으로 온 거였는데, 일이 커진다 싶어서."
"뭐, 그런 거 가지고. 자, 이 도시의 일도 어서 해결하고 돌아가자."
올리시렌이 먼저 나아갔고, 그 뒤를 이소엘이 바싹 따라붙었다.
카인은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안 나올 줄 알았건만.'
카인은 이전에 보고 넘겼던 퀘스트를 떠올렸다. 자연스레 그의 눈앞에 잊지 말라는 듯 글자들이 나타났다.
+
...
클리어 조건 : 올리시렌의 각성(일부 달성), 끝의 자각(달성) -> 영원의 예감(진행 중), 죽음.
성공 시 : 세계선 고정도 상승, 아이리안의 평화.
실패 시 : 회귀 취소.
+
올리시렌을 죽여야 나아갈 수 있다면, 자신은 죽이지 않고 나아가리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게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고삐를 쥐었다. 카인의 속도에 발맞춰 에셔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 * *
아론이 카인 일행을 데리고 멀리서 보였던 채굴조합 건물에 도착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기사님들을...?"
아론을 보내고 한숨을 쉬고 있던 조합장 파웰은 두 눈을 끔뻑였다.
그가 카클링턴을 떠난 게 방금이기도 했고, 아이언하트에 도착해도 현재 크로울의 일을 맡아서 하는 왕녀의 허락을 받아 기사들이 오는 건 한참 걸릴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마침 여기 오는 길이라 만났습니다."
카인의 태연한 대답.
파웰 조합장은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일행을 둘러보았다.
에셔를 제외한 셋이 보통 사람으론 보이지 않아서 기사 같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기사님들이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오셨다는 게 믿기질 않습니다. 제가 채굴조합을 맡은 게 벌써 25년이나 되었지만, 그간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카인이 온 건 에셀레드의 예전 집사였던 오스왈드를 찾으러 온 것이기에, 뒤로 물러났다.
올리시렌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클링턴의 세금이 25년간 똑같더군요. 자료를 보니 채굴조합에서 대표해서 내던데 제가 잘 찾아왔네요."
파웰 조합장은 그대로 굳었다.
언젠가 올 것이 지금 왔구나 하는 듯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올리시렌은 내부를 둘러보다가 뭉툭하게 뚫린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담하지만 평화로운 도시, 카클링턴.
그녀는 창에 기대섰다.
정오의 햇살이 그녀의 후광처럼 보였다.
"보아하니까 돈을 횡령하는 건 아니고, 정체불명의 조직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뭐죠?"
"그게 다 저 징글징글한 원주민들 때문입니다!"
올리시렌의 맞은편 창으론 카클링턴 산과 철광의 입구가 보인다.
그 입구엔 검은 복면을 쓴 몇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파웰 조합장은 그쪽을 가리키곤 지난 세월 쌓인 한을 풀겠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이 매번 통제합니다. 철광에 들어가서 더 캐고 싶은데도 못 캐게 하고, 문제는 덜 캐려고 해도 어떻게든 저희를 잡아채서 밀어 넣습니다."
"원주민...?"
아까 전 카클링턴 납치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자들이 원주민이었다.
파웰 조합장은 찬물을 마시곤 말을 이었다.
"이 땅에 옛날부터 살면서 복면 쓰고 다니는 놈들을 원주민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저처럼 여기서 나고 자라도 이주민이라 부릅니다."
"저 사람들은 왜 그런 짓을 하죠?"
올리시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예 채굴을 못 하게 하는 거면 몰라도 정해진 양만 하게 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팡팡.
파웰은 찬물로도 터지는 속을 못 달랜 건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때렸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다들 검은 걸 뒤집어쓰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왜 그러는지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하고."
"말을 못 하는 건 아닌가?"
카인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파웰은 고개를 저었다.
"한 달에 세 번 정도 교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땐 말도 정말 잘하더군요."
"교류?"
"식량이나 외부 물품 같은 걸 저희가 팔고 원주민들이 사 갑니다. 그래도 이건 나은 게 나름 괜찮은 약초나 금속을 가져와서 서로 이득이긴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파웰의 언행을 보니 거짓은 아니리라.
올리시렌은 팔짱을 끼곤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한 양의 채굴만 한다면 세금은 늘 같겠네요. 그런데 그쯤 되면 다른 광산으로 갈 수 있지 않나요?"
파웰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소매를 걷어 자신의 손을 보였다. 쭈글쭈글해져 핏줄이 도드라진 게 그가 살아온 세월이 느껴졌다.
"이미 갈 사람은 다 갔고, 대부분은 제 또래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기엔 평생 광산밥만 먹었으니 할 수가 없고요."
"여태껏 계실 정도로 광산의 효율이 좋나 보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카클링턴 광산은 제 모든 삶이 있는 곳입니다."
파웰의 시선이 다시금 광산으로 향한다. 이주민이라 불리지만, 그의 고향은 틀림없이 여기리라.
그의 눈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특유의 눈빛이었다.
"떠날 순 없고, 광산은 원주민들이 막고 있고, 그럼 납치는 뭔데?"
카인은 근처 의자에 걸터앉고는 물었다. 이번에 대답한 건 처음에 납치사건을 말했던 아론이었다.
"다들 늙어가는 도시라지만 어린애들이 드물게 있습니다. 그런데 저번 달부터 '교류회'가 열릴 때마다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그 교류는 도시 내에서 하나 보군? 평상시에 원주민들은 안 들어오고?"
"예!"
아론과 파웰은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똑같은 박자로 끄덕였다.
카인은 턱을 쓸었다.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격화될 때 아이들이 사라지는 건 그만큼 큰일.
올리시렌은 오기 전에 봤던 지리서를 떠올리며 물었다.
"제가 알기로 카클링턴 광산은 백 년 전에도 있던 걸로 알아요. 그럼 교류회도 그만큼 된 걸 텐데 그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조금은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중간에 광맥이 고갈되어 몇 년 정도는 광산이 문을 닫았었습니다."
"지금은 잘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예. 원주민 중에 유일하게 복면을 안 쓰는 영감이 돌아오고서부턴 다시 철이 나오더군요."
카인은 영감이라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혹시 그 영감 이름이 오스왈드인가?"
"어... 떻게? 원주민 중에 유일하게 이름을 밝힌 사람입니다."
"그냥 그럴 거 같아서."
카인은 자신이 미래를 소모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렇게 소모한 미래가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게 아닐까 하면서.
#59 EP.Ⅰ-14
우연히 봄 (4)
채앵-!
광산 앞을 지키던 원주민들이 창을 들었다. 복면의 눈구멍 속에서 핏줄 선 눈알이 또렷하다.
기가 약한 사람이라면 질릴 듯한 눈빛.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엔 애들이 길을 잃었나 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도시를 다 뒤져도 못 찾겠더군요. 그럼 어디 있겠습니까.
'죽었거나, 원주민의 땅에 있거나.'
조금 전 파웰 조합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태연하게 흑색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오스왈드 나오라고 해."
"...."
수십 년간 본 이주민과도 교류회 때만 말할 정도로 폐쇄적인 자들답게, 묵묵부답이었다.
톡-.
카인은 허리춤에 걸린 아그웨스카의 손잡이를 쳤다.
"피 보지 말자고. 그리고 오스왈드에게 내가 누군지 말하면 바로 나올 거니까, 말이나 전해."
"...?"
"내 이름은 카인 에셀레드다."
순간 두 원주민의 눈이 커졌다.
오스왈드가 에셀레드 백작가의 집사로 일했다는 걸 알고 있던 눈치.
둘은 한 번 마주 보더니 한 사람이 급하게 어디론가 향했다.
카인은 가볍게 움직이면서 카클링턴 광산의 입구를 살폈다. 여타 다른 광산들과 다른 건 없어 보였다.
단지 100년이 넘은 오래된 광산이라기보다는 딱 25년 전부터 다시 시작한 게 맞는 듯, 받침목이나 구조들이 새것이라는 게 눈에 띌 뿐.
후우우웅-.
카인이 한참이나 그걸 바라볼 때, 광산의 어둠 속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뜨거웠고, 습했다.
카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떠오르기 싫은 기억이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냄새가 익숙해.'
아이리안에서 맡은 냄새가 아니다.
영원의 눈이 내리는 곳, 대장벽.
셀 수 없이 무수한 몬스터가 쏟아지는 곳인 만큼, 드물지만 초대형 몬스터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놈들 아가리에서 불던 거랑 비슷한데.'
처절하게 싸우고 지독하게 죽여봤던 전사만이 느끼는 묘한 직감이었다.
카클링턴에 들어오기 전 이소엘이 말했던 악마가 괜히 떠올랐다.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서 홀로 복면을 쓰지 않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의 뒤로 복면을 쓴 원주민 넷이 무기를 들고 따랐다.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인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허리가 꼿꼿이 펴져 있는 걸 보니 단련을 쉬지 않았던 것 같았고, 카인을 훑어보는 눈빛에 어린 경계심이 그의 정신이 또렷하다는 걸 방증했다.
오스왈드는 카인의 몇 발자국 앞에 멈춘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카인 공자님을 뵙습니다."
깔끔할 정도로 완벽한 예법이었다. 그가 에셀레드 백작가의 집사였던 것이 분명했다.
카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에셀레드를 사칭하는 놈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고 하기엔 어릴 적 에드먼드 백작님과 빼닮으셨습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에셀레드의 기사들이나 시종과 하녀 중 아무도 카인에게 닮았다고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백작성에 붙어 있는 큰 초상화 속 에드먼드 백작을 봐도 닮은 구석은 잘 모르겠고.
오스왈드는 카인의 그런 반응에 살짝 미소 지었다.
"외양은 사실 그렇게 안 닮으셨지만, 분위기가 비슷하십니다."
"검밖에 모르는 인간하고 닮았다는 건 욕 같군."
오스왈드는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는 이주민들이 보였고, 자신의 뒤에 있는 원주민들도 의아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온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이야기하기 누추한 곳인데, 들어오시겠습니까?"
"외부인은 못 들어간다며?"
그 순간 오스왈드의 미소가 깨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카인에게 물었다.
"이주민들과 먼저 만나셨군요."
"방금 파웰 조합장과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납치를 한 거고?"
움찔.
카인은 그 순간 오스왈드와 함께 온 원주민 중 하나의 눈이 떨리는 걸 보았다.
오스왈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납치요?"
카인은 방금 그 원주민의 인상착의를 기억해 두었다.
그러곤 오스왈드의 옆에 서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이 작은 땅에서 뭐 때문에 원주민이니 이주민이 하면서 나누는 건지 들어 보자고."
* * *
"여긴 정말 에셀레드 같은데요."
에셔가 낮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카인이나 오스왈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원주민이 사는 카클링턴의 기슭은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중간중간 빵 굽는 연기나 올라올 뿐이니까.
"아직도 제가 아는 풍경 그대로인가 보군요."
오스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고,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수긍했다.
"에드먼드 백작이 영지 발전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건... 맞습니다."
"대충 듣기로는 옛날 집사라고 들었는데 언제쯤 일했던 건가?"
"대략... 에드먼드 백작님이 이십 대 초반 정도셨을 때까지 모셨습니다."
카인은 시기를 계산해 보다가 툭 하고 물었다.
"그 후엔 여기로 돌아와서 촌장처럼 있는 거고?"
"네. 제가 태어난 곳이라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대충 25년 전이네. 광맥이 말라 버린 철광에 다시금 철이 나타난 때랑 겹쳐."
"...!"
휙-.
오스왈드는 날카롭게 고개를 돌리며 카인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세금 문제 때문에 온 김에 겸사겸사 들린 거라 좀 알지."
오스왈드는 세금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들은 원주민 마을 건물 중 그래도 가장 깔끔한 곳에 들어섰다.
오스왈드는 자신을 따라 움직이던 자들에게 손짓하며 물러서라 말했다.
하지만 카인이 제동을 걸었다.
"막말로 우리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뭘 믿고. 저들은 남겨 둬야 그대도 안심하지."
"에셀레드의 공자님을 못 믿으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지요."
"혹시 저들이 들어선 안 되는 말이 있어서 내보내려는 거면 이해하고."
오스왈드는 가만히 카인을 응시했다.
분명 칼은 허리에 있지만, 교묘하게 휘둘러지는 그 혀는 칼보다 훨씬 날카롭다.
지금도 자신과 원주민 전사를 두 편으로 갈라 버리려는 정치적인 술수임을 느꼈다.
"그럴 리가요. 다들 남아 있도록."
어차피 숨길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을 거라 카인의 술수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오스왈드는 투박한 찻잔을 꺼내 카인과 에셔의 앞에 두곤,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제게 무엇이 궁금해서 오셨습니까."
"에드먼드 백작의 어릴 때가 궁금해서."
오스왈드의 안면에 편안함이 깃든다.
에드먼드가 실종된 건 들었고, 그전에도 분명 북방원정이니 개인 수련이니 하며 백작령에 없었을 터.
아들로서 아버지의 과거가 궁금한 건 당연하다 싶었다.
"그 전에."
그러나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
카인은 찻잔을 가볍게 쥐고 들며 저녁 메뉴를 말하듯 핵심을 물었다.
"애들은 왜 납치한 거야?"
-나는 어차피 오스왈드를 보러 온 거였으니까 원주민 쪽을 알아볼게. 너는 여기 남아서 이주민 쪽을 파봐.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채굴조합 쪽에 남고, 자신과 에셔는 이쪽으로 왔다.
물론 파웰 조합장의 이야기에 딱히 꼬투리를 잡을 건 없었지만.
'사람 일이 그럴 리가 없지.'
이전 세계선에선 에셀레드 백작가에서 쫓겨나, 맨몸뚱이로 덜렁 대륙에 도착한 후 카인은 밑바닥에서 구르고 또 굴렀다.
겉보기에 번지르르하고 말에 빈틈이 없을수록 의심해 봐야 한다는 걸 당시에 뼈에 사무치도록 배웠다.
오스왈드의 주름이 더욱 깊어진다.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저희는 납치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래?"
"파웰 그 자식이 납치범을 못 찾아서 답답해하는 건 알겠지만...."
칠대귀족가의 집사 출신답게 그간 오스왈드의 말은 단정했고 침착했다.
하지만 파웰을 언급한 순간 그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카인은 그의 속을 조금 더 파 보고자 혀의 칼날을 갈았다.
"파웰 조합장의 말을 들어 보면 원주민들이 나쁜 놈이던데. 광산의 채굴을 멋대로 막아서 가난하게 만든다고."
"그 자식이...!"
오스왈드의 눈에 분노가 켜진다.
하지만 카인이 바라보는 건 그가 아니다.
이 방에 서 있는 원주민 전사 넷.
그중 납치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움찔하는 하나.
흥분한 오스왈드는 그런 카인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 멍청한 놈의 말을 믿어선 안 됩니다. 저희가 카클링턴 광산을 위해서 무슨 희생을 치르는지도 모르는 쓰레기가!"
"그래서 납치로 복수한다?"
"공자님!"
오스왈드가 소리쳤고 다른 전사들에게도 분노가 옮길 때, 한 놈만 별 반응이 없었다.
카인은 대놓고 그를 응시했다.
['잊혀진 계절'의 파편을 찾았습니다.]
'이게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군.'
"공자님...?"
동시에 일부러 자신을 격분시켰다는 걸 눈치챈 오스왈드는 카인의 시선을 따라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른 전사들 역시 그와 거리를 벌렸다.
파앗-!
순간 그의 두 눈에서 용암보다 붉은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복면이 갈라지면서 귀밑까지 찢어진 그의 입에 열렸다.
"영원께서 오시기에 눈을 뜨니, 종말을 마주하는구나."
"아, 악마!"
오스왈드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휘익-.
카인은 그를 흘깃 보곤 손짓으로 피하라 신호했다.
에셔는 등에 메고 있던 대형 방패를 들어 그들을 방어했고,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뽑았다.
스릉-.
그 순간 불타오르는 알 수 없는 것의 눈이 아그웨스카를 직시했다.
저벅-.
눈에서만 흘러나오던 불꽃이 한순간에 전신을 휘감았다.
지옥불 속에서 그가 말했다.
"그대들의 공양 덕에 나 발람(Balam)은 영원을 맞이하리라."
피슈슈숫-.
십일 붉은 꽃은 없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은 없다는 말처럼 눈의 불꽃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불에 휩싸인 한 명의 사람뿐.
"아, 안 돼!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살려, 살려 줘!"
타오르는 불꽃에 몸이 휘감긴 채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던 자는 뭘 해 보기도 전에 까만 재가 되어 무너져 버렸다.
['잊혀진 계절'이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간략한 한 줄의 메시지를 뒤이어 테두리의 색이 조금 달라진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
『순환하는 계절 LI』
모든 것엔 끝이 있고, 그 끝에 저항했던 '영원의 하수인'들도 있습니다.
'끝'도 '영원'도 모든 건 『사계』의 주인이 선택합니다.
클리어 조건 : 내일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발람의 소멸.
시작 시각 : 노을이 저물 때.
성공 시 : 세계선 고정도를 세계개변력으로 변화 가능, 영원의 성장.
실패 시 : 카클링턴 화산의 대폭발.
*세계개변력의 %만큼 전지와 전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 세계개변력은 고정하지 못합니다.
+
"산책길인 줄 알았는데, 현실은 용암길이었네."
<사계절의 신기> '겨울'의 힘을 쓸 때마다 소모되는 미래는 단순히 수명이 아니라 운명까지 포괄하는 것.
'미래를 소모해서 일어난 일인가.'
카인은 자신의 존재 때문에 일이 커진 게 아닐까 싶어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에셔의 뒤편에 있는 원주민들을 쳐다보았다.
"방금 공양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오스왈드, 알고 있지?"
에셔가 몸을 살짝 틀었다.
그렇게 벌어진 곳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오스왈드가 보였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집어넣지 않고 섬뜩한 예기를 그대로 흘렸다.
"내가 아는 공양은 제물을 바친다는 뜻이야. 마침 애들이 사라졌네? 이상한 놈도 나타났고.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당신."
오스왈드는 힘겹게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공양은 알지만, 납치는 정말 모릅니다."
"채굴조합 쪽도 알아?"
"파웰 그 작자는...."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다 모아두고 말하는 게 편하겠어. 한쪽이 혹시라도 헛소리 하면 혀를 잘라 버리게."
꿀꺽-.
원주민 전사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전통이니 역사니 하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카인의 기세가 섬뜩했기에 그들이나 오스왈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60 EP.Ⅰ-15
계절은 그렇게 죽어 간다 (1)
「악마란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속삭이는 사악.
받은 만큼 일하는 사역.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반증.
경전 속 무수한 말들이 악마를 정의하려 하지만, 악마학에 입문하려는 마법사에겐 모두 틀렸다.
나 더스틴이 단언하건대, 마법으로서의 악마학을 공부하려는 마법사들은 기억하라.
악마는 신비이며 기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악마의 비의를 탐구하여 마법이라는 논리로 끌어내리는 자들이다.
기억하라.
악마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신비라는 걸.
- 더스틴, '악마학 입문' 서문」
아직 쨍쨍해야 할 낮이건만, 카클링턴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리고 광산 앞 광장.
평상시엔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교류회가 펼쳐지던 곳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대충 납치범들은 찾은 모양이군."
나올 수 있는 양측의 모든 자들이 모였고, 그 가운데는 까맣게 불탄 재 다섯 개가 모여 있었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로 잿더미를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옆에 있던 올리시렌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결계가 반구형으로 펼쳐져 있다. 마치 아르후안이 나타나기 전 세상이 나뉘는 것과 닮은 모양새였다.
'범위는 카클링턴 화산 전체.'
결계가 구부러지는 부분을 보면 대충 그 정도의 넓이로 보였다. 퀘스트 실패 시 화산이 대폭발한다고 적혀 있기도 했으니 맞으리라.
화산이 폭발한다면 이 지역의 사람들만 죽는 게 아니라 아이언하트까지도 피해가 갈 터.
'그렇게 되면 사실상 크로울 백작령은 끝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것이고, 크로울에서 아이리안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왕국 전체가 흔들릴 것이다.
카인은 제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같이 결계를 살피던 올리시렌이 카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들이 갑자기 불타 죽은 게 그 발람이라는 악마 때문이라는 거지?"
"발람이 악마라고 오스왈드가 말했으니까 그렇겠지. 자세한 건 이제 양측의 말을 한 번 맞춰봐야 하고."
"카인,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지 마."
카인은 피식 웃었다.
같이 위기를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 그런지 그녀의 눈치는 꽤 빨랐다.
카인은 여유롭게 농담을 뱉었다.
"왕명이라면."
"왕녀의 명은?"
"그 왕녀님이 너무 흔들리는 거 같아서 미심쩍은데."
가릭 백작의 말 이후 그녀가 고민하던 부분을 카인이 찔렀다.
올리시렌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다섯 잿더미의 건너편.
원주민 대표 오스왈드와 이주민 대표 채굴조합장 파웰이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평상시라면 양측 다 용납하지 못했을 상황이지만, 상대가 카인인 이상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감히 에셀레드의 후계자로서의 카인이나, 크로울의 기사라 자칭한 카인에게 뭐라고 할 배짱이 없었으니까.
"원주민 두 명, 이주민 세 명. 합쳐서 다섯 명이 타 죽었다. 특징은 젊은 남자라는 거고, 교류회에서 친밀하게 지내던 놈들이라는 거지."
올리시렌은 카인과 나란히 서서 입을 열었다.
"납치당한 아이도 다섯이고."
"최근에 이들에게 뭔가 다른 점이 있었는지 아는 자는 이야기해 봐."
카인의 명령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복면을 쓰고 교류회가 아니라면 입을 열지 않는 원주민 쪽은 더욱 조용했고, 이주민들은 그들이 먼저 말하기 전까진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카인은 그런 모습을 쓱 살피곤.
스릉-.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뽑아 들었다.
카클링턴을 휘감은 흑색 결계보다 어두운 불길한 검이었다.
"말할 때까지 닥치는 대로 손가락을 썰면 한 사람은 말하겠지?"
후우우우우-.
카인에게서 서늘한 살기가 주위로 퍼져 나간다.
대장벽의 전사가 작정하고 끌어 올리는 살기를 평범한 사람들이 견디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원주민이고 이주민이고 상관없이 생명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모두 칼날이 목덜미를 노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카인."
그 순간 올리시렌이 카인의 왼팔을 잡으며 말렸다.
"내가 할게."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야."
"네게 악역을 맡기고 싶지 않아. 너도 이자들도 모두 내 왕국민이니까."
카인은 올리시렌의 회색빛 눈동자를 직시했다.
에셀레드에서 로스의 기사들을 죽였다고 말했을 때도, 라마이닝 백작가의 사람들을 죽일 때도, 아이언브릿지 때도 그녀는 늘 한결같았다.
스릉.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집어넣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 왕국민이라.'
고민하던 것과 달리 올리시렌의 말에는 왕이나 할 법한 말이 흘러나온다.
카인은 살기 또한 거둔 후 팔짱을 끼며 물러섰다.
"알겠어. 상냥한 왕녀님의 방법을 지켜보지."
순간 올리시렌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상냥? 웃기지 마. 네가 직접 피를 묻히거나 악역을 맡는 게 싫을 뿐이야."
"...?"
처음 보는 올리시렌의 표정에 카인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그녀는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1왕녀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이다."
그 순간 오스왈드나 파웰을 비롯한 모두는 굳어 버렸다.
단 셋밖에 없는 왕실의 인물 중 하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끄덕-.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움직인 셋이 수긍하자 믿어야만 했다.
"왕국법을 다들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 주지."
왕가의 정당한 명령을 어긴다면 어떤 벌을 받을지.
왕가에서 명령 한 줄이라면 지역 하나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것과 그 지역 출신의 사람이 금융, 노동, 거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배제당한다는 것.
왕가의 사람이 작정한다면 씨족을 말살시키는 반역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
올리시렌의 입에선 담담히 지난 역사 동안 합의된 아이리안의 법이 흘러나왔다.
너무도 당연한 듯 말하는 어투에서, 듣는 자들은 자신들의 처우가 어떻게 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너희들이 살아온 시간을, 너희들과 같은 피가 흐르는 모든 자를 지워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왜 왕가가 이런 힘이 있는지 아는가?"
다들 공포에 벌벌 떨 뿐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카인은 제법 흥미롭다는 듯 이를 지켜봤고, 이소엘의 눈은 반짝였다.
늘 '안개꽃'이라 불리며 은둔하던 올리시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을 고대했기에.
이소엘은 올리시렌만을 위한 한 명의 기사로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희들을 지키는 것이 왕가가 해야 할 의무니까."
"...왕녀님!"
그 순간 감동한 자들이 원주민, 이주민 가리지 않고 그녀를 불렀다.
올리시렌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언제나 우중충한 미소만 짓던 것과 달리 개운한 미소가 피어났다.
'상냥도 하고 정치도 좀 하는 여왕이 되겠어.'
카인도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가릭 백작이 묻던 왕의 자격을 증명하고 권력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이 제법 기꺼웠다.
아벨이 앞으로 살아갈 아이리안에 어울리는 왕의 모습이며, 제법 재미있는 미래를 만들 왕이 될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악마라는 것이 이 땅을 지워 버리려고 한다."
"...!"
"너희의 시간, 혈육, 땅을 지키고 싶나? 나를 의지해라. 내게 말해라. 너희의 목숨 줄을 쥔 대가로 내가 너희를 살릴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소엘이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소리쳤다.
"예스, 유어 하이네스!"
구호니, 예법이니 모르는 자들도 눈앞에서 보여 주니 하나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예, 예스!"
"하이네스!"
"예스, 하이네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땅을 적시듯, 하나둘 시작된 목소리가 땅을 울릴 정도로 커졌다.
왕과 전사의 차이.
다스리는 자와 가장 앞에서 적과 싸우는 자.
카인은 자신의 길과 올리시렌의 길이 평행선처럼 절대 맞닿을 수 없다는 걸 느끼며 몸을 돌렸다.
에셔는 그런 카인의 뒤를 따랐다.
'이제부턴 전사의 시간이니까.'
전사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적의 목을 베면 된다.
그리고 카인은 전사였다.
적은 악마 발람이고.
정치는 그녀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제 칼을 갈 때였다.
* * *
"오스왈드 영감이 광맥을 살리려고 고대의 악마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래서 25년 전부터 다시 철이 차올랐다고 하네."
둥그런 탁자를 두고 올리시렌과 카인이 마주 봤고, 사이엔 이소엘과 에셔가 앉아 있었다.
"괜히 이름만 듣고 바로 악마라고 하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군. 채광을 제한하던 것도 그 때문이겠네?"
"그리고 원주민은 발람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고, 이주민은 그걸 모르는 자들을 구분하는 거였어."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며 올리시렌의 말을 경청했다.
"어쩐지 말도 안 된다 싶었다."
카클링턴에 광산 개발이 시작된 게 백 년 전.
게다가 중간에 한 번 광맥이 끊겼다가 다시 캐기 시작한 곳인데 아무리 외부에서 왔다고 해도, 그 정도 시간이라면 모두 원주민이라 불려도 마땅하다.
그런데 아직도 서로 구분한다는 게 이상했는데 악마의 비밀을 공유하는지 아닌지가 진짜 기준이라니 이해가 갔다.
"복면은 실제론 이주민으로 구분되어 있어도 악마의 거래를 알고 있던 자들을 받아들이려는 수더라고."
"나름 치밀했네. 오스왈드 영감이 돌아와서 만든 룰인가?"
"응."
에셀레드 백작가의 집사를 관두고 제 고향이었던 카클링턴에 돌아와 다시 광산을 일으켰던, 오스왈드.
그가 지금 시스템의 대부분을 만들었다.
탁.
카인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치다가 차가운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그럼 제물은?"
"오 년에 한 번씩 사람 한 명."
"그 영감 어디 있어? 죽이고 시작해야겠어."
카인이 일어서려 하자 올리시렌이 만류했다.
"법으로 해결하면 돼. 굳이 네 칼에 피를 묻힐 필요 없어."
"악역은 내가 아니라 왕국법에 맡기라고?"
올리시렌의 눈동자는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러라고 있는 법이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한 사람만 지니는 신념이 엿보였다.
카인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법만큼 입맛대로 휘두르기 좋은 게 없지만... 이런 건 나중에 말하고. 납치는 뭔데?"
"그간 잘 유지되던 비밀이 최근에 유출되었다고 해."
카인은 그 한마디에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챘다.
"납치한 애들을 제물로 바쳐서 뭔가 다른 걸 바랐나 보군."
"응. 그 다섯 명이 최근에 카클링턴 밖에 나가서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더라."
"타 죽을 놈들이 타 죽었네."
악마와의 거래는 위험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제물을 바치면 그만큼 대가를 주지만, 어설프게 진행한다면 악마에게 종속되는 것.
'발람이 깨어나면서 최근에 거래한 그 다섯이 영향을 받았군.'
콰라라라라라라라라-!
그 순간 대지가 요란하게 울렸다. 카인 일행은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겐 안전한 곳에 대피해 있으라고 한 만큼, 도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콰라라-!
오래되어 축이 삭았던 건물들은 무너지고 화산의 대지가 갈라진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단단히 쥐면서 광산 쪽을 응시했다.
파지지직-!!
대지가 울부짖을 때, 카인의 전신에서 백색의 뇌전이 울음을 잡아먹는다.
직접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순백의 빛이 카인을 휘감았다.
'나와라, 악마. 단번에 목을 베어 주마.'
카인도 악마라는 걸 풍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다만, 본 드래곤이나 고스트 웨일 같은 초대형 몬스터 정도라면 카인은 단 일격에 그를 잘라 죽일 생각이었다.
쿠쿵, 쿵, 쿠우.
저 먼 곳에서부터 진동이 시작된다.
카인이 온 정신을 집중해서 광산의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
"위, 위입니다."
에셔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올려다본 곳, 카클링턴 화산의 분화구.
"콰아아아아아아아-!"
[잊혔던 영원의 하수인, 발람이 등장했습니다.]
용암의 악마, 발람.
괴성을 내지르는 용암 거인의 몸통이 흑색 결계를 부수며 나타났다.
화산이 치마라도 되는 양 걸려 있었고, 발람의 머리는 붉은 노을이 적혀진 빨간 구름을 부쉈다.
"저런 걸 우리가 잡아야 한다고...?"
올리시렌의 목소리가 떨린다.
발람의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용암 방울 하나가 집채만 할 정도로 거대했다.
"아-."
중력망치 크레드네를 쥐고 있던 이소엘은 반쯤 얼이 빠진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에셔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방패를 단단히 쥐었다.
"예상과는 다르지만, 더 잘됐네."
그런 그들에게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
셋은 동시에 카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그웨스카를 내리고 저 아득하게 멀리 있는 거대 악마 발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칼 쑤실 곳이 많잖아."
처음 보는 거대함에 압도되기엔 카인이 거쳐 온 전장이 너무도 많았다.
#61 EP.Ⅰ-15
계절은 그렇게 죽어 간다 (2)
압도적인 크기.
저렇게 멀리 있어도 숨 쉬는 걸 불편하게 만들 가공한 열기.
대지 속 응축되었던 모든 용암을 그러모아 빚어낸 듯한, 발람의 모습에 질릴 수밖에 없었지만, 기가 죽을 리도 없었다.
"그러네. 쑤실 곳도 많고 여긴 우리밖에 없고."
올리시렌의 눈이 검어진다.
아직 자신의 '기원'이 뭔지 어떤 '기적'을 펼칠지 모르는 미숙한 마녀지만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가능한 모든 마녀의 힘을 끌어냈다.
"카인 공자님이 칼로 베신다면 저는 망치로 때리겠습니다."
꽈아아악-.
올리시렌의 옆에서 이소엘이 크레드네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잘 막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악마를 두려워하던 시골 기사 에셔는 두 손으로 방패를 단단히 들었다.
발람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주위로 비산하는 용암 방울을 막을 각오였다.
"...그래."
카인은 셋을 한 번씩 보곤 고개를 돌려 발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밤을 배경 삼아 붉은 용암을 번쩍이는 고대의 악마, 발람.
쿠웅.
그 전율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카인은 천천히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적이 아무리 무시무시해 보여도 시작은 한걸음부터지. 그걸 잊지 않는다면 이긴다."
전사로서 적을 해체한다.
거대한 크기는 넓은 지역과 군세를 공격하기 쉽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적을 잡기엔 불리하다.
'무시무시하지만 대인 공격력은 약해.'
또한, 뼈와 근육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용암이라는 액체로 만들어진 것이니 어떤 공격이 의미 있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회피는 불능. 체력이나 방어는 아마도 엄청날 터.'
그나마 사람의 모습이니 목을 자르면 어떨까 싶지만, 목만 해도 작은 산등성이는 되는 크기.
'나의 미래를 잡아먹고 태어난 악마인가.'
자신이 '겨울'에 미래를 뺏겨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운이 안 좋아서 그런 건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인은 봄의 말을 떠올렸다.
[운명은 만드는 자의 것이 아니라 걷는 자의 것이니까.]
동쪽의 절대자, 로드이스트 '조니 워커'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했고 카인도 지금 한 걸음을 떼었다.
척-.
그리고 지금.
다른 셋도 한 걸음을 걸으며 네 명의 워커(Walker)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이성이 없는 건지, 괴성이면 충분한 건지 발람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용암이 카클링턴 화산 근처로 마구 튀었다.
문제는 집채만 한 크기.
카인은 뒤를 흘깃 보았다.
원주민과 이주민들이 같이 숨어 있는 지하 동굴의 입구가 있다.
아이리안 전역의 문제 이전에 당장 이곳에 살던 자들이 그대로 생매장될 상황.
올리시렌이 입을 열었다.
"나이트 에셔,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에셀레드의 평기사, 에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각오하듯 발람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예스! 유어 그레이스."
올리시렌에겐 마녀의 힘.
이소엘에겐 중력망치 크레드네.
카인에겐 절망검 아그웨스카.
하지만 에셔가 지닌 건 용기뿐!
카인은 올리시렌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다음 말에 멈칫했다.
"그럼 날 믿을 수 있나요? 나는 당신이 저걸 막을 힘을 줄 수 있어요."
에셔는 카인을 돌아보았다.
한 손을 심장 어귀에 올린 후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제 충성은 에셀레드를 향해 있지만, 그전에 전 기사입니다. 약자를 위한 칼을 들고 불의에 맞서는 게 접니다."
이소엘은 중얼거렸다.
"수백 년 전 기사의 맹세...."
대륙에 비해 문화가 늦된 아이리안에서도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던 오래된 기사의 맹세를 말하는 에셔.
"제 앞엔 악마가 있습니다. 악이 있습니다. 그걸 막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화아아아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올리시렌에게서 흑색의 빛줄기가 뻗어 나온다.
언제 이렇게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몰랐지만, 마녀임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라 카인은 일단 말리고자 했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위해선 쓰지 않을 거지만, 우리를 위해선 써야 해. 그래도 내가 '기원'을 각성하지 않아서인지 아직 파동이 희미해서 다행이야."
"하지만."
그녀는 카인의 말을 잘랐다.
"말했잖아, 내 왕국이라고."
그리고 검은 눈의 마녀, 올리시렌이 에셔를 향해 명령했다.
굳세어라.
기기긱-.
카인은 그 순간 묘한 소리를 들었다.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강제로 이어 붙여서 억지로 무언가를 돌리는 걸 지켜보는 기묘한 감각.
그 순간이었다.
"어, 어?"
에셔의 전신에서 올리시렌의 것과 같은 흑색의 빛줄기가 솟아 나왔다. 그러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전 그러하듯, 고치처럼 에셔를 완전히 감싸더니.
팟-!
완전히 달라졌다.
얼굴을 제외하곤 전신이 검은 갑옷으로 감싸였다. 게다가 그의 밋밋했던 방패는 기기묘묘한 문양이 새겨지며 유려해졌다.
"할 수 있겠나요?"
올리시렌은 검지를 들었다.
마침 그들의 머리 위로 발람의 용암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스스슷-.
동시에 에셔의 두 눈이 올리시렌과 같이 검게 물들었다.
타앗-!
그러곤 그대로 대지를 박찼다.
마법대포가 발사되듯 에셔 주위의 땅은 푹 파였고, 검은 갑옷의 에셔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콰가가가가가가-!
그리고 쏟아지는 방울을 향해 방패를 내밀었다. 그의 방패는 이 어둠을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커졌고 용암방울을 마을로부터 먼 곳으로 튕겨 버렸다.
쿠웅-.
에셔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떨어졌다. 그러곤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 이 힘이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을 믿을게요."
올리시렌은 미소를 지었고, 이소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카인은 에셔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도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마녀의 힘보단 성국의 힘에 가까운데.'
성국의 기계화 팔라딘과 사제들은 간혹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올리시렌이 보인 힘은 성국의 사람들이 쓰는 것과 한없이 닮아 보였다.
'다른 점이라곤 색인가.'
백색의 성국과 흑색의 올리시렌.
이내 카인은 미소를 지었다.
에셔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앞으로 걸어 나섰다.
'흑색이든 백색이든 써먹으면 되지.'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마녀가 힘을 쓸 때마다 느껴지던 묘한 파동은 아주 옅었다.
이 정도라면 발람이 보이지 않을 범위가 되면 흩어질 터.
콰아앙-!
올리시렌의 힘을 받은 에셔는 차원이 다른 몸놀림으로 마을 사람들이 피해 있는 곳으로 떨어지는 용암을 받아쳤다.
카인은 그 모습을 턱짓하며 올리시렌에게 물었다.
"과거를 보는 거 말고 이런 힘은 언제 또 개발한 거야."
"너 때문에."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마을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에셔가 지킬 것이기에 셋이 발람을 무찌르면 되는 상황.
올리시렌은 카인을 가리켰다.
"너 또 그 이상한 힘 쓸 거지?"
"...."
"아리안 님이 말씀하시더라. 모든 힘에는 대가가 존재한다고. 네가 갑자기 강해지는 거까진 아버지가 그 에드먼드 백작이니 이해할 수 있어."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싸움은 전사의 몫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왕의 자격을 지닌 자는 싸움 역시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싸움을 나서는 전사마저 그녀는 소중히 하는 왕이었다.
"하지만 아르후안이나, 아이언브릿지가 부서지자 얼음 다리를 만드는 것. 그건 기적의 영역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소드마스터라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그러자 올리시렌은 카인의 보라색 눈을 또렷이 마주했다.
마녀의 힘으로 검어진 올리시렌의 회색 눈과 신비가 가득하고 타고난 카인의 보랏빛 눈이 어떤 장벽도 없이 상대를 비춘다.
그녀는 카인에게 물었다.
"맞아? 소드마스터?"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이전 세계선에서 카인은 이미 소드마스터였다. 아니, 그런 말로는 경지를 정의할 수 없는 '진짜'였다.
조니 워커의 가르침으로 자라 대장벽에서 수천수만의 전투로 단련된 그는 누가 뭐라도 부정할 수 없는 최강자.
"곧 된다는 거네."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더 강해진다면.
그리고 더 걷는다면.
다른 자들에게 소드마스터가 종착역인 것과 달리, 카인에게 소드마스터는 지나가는 간이역이리라.
"지금은 아니고."
"그럼 지금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너랑은 상관없는 대가야."
"에셀레드 백작가의 카인은 내 왕국민이야."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을 딱 잘라서 반박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 친구고."
마지막은 발람이었다.
"함께 싸우는 전우야. 그런 사람이 무언가를 잃고 있다는 게 어떻게 나랑 상관없지?"
"네 목숨과 왕국의 운명을 걸고 마녀의 힘을 쓰게 하는 것보다, 내가 조금 희생하는 게 나아."
카인은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자신이 써 버리는 '미래'는 이미 한 번 바닥까지 써 본 적도 있고, 그 모든 건 자신만 홀로 감당하면 된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그럴 수 없다.
카인이 특별히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불행해질 걸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나 혼자 끝낸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정답이라면 더욱 거칠 것이 없었고.
그때 이소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녀님께선 매일 밤, 파동이 일어나지 않는 수준으로 제게 실험하셨었습니다."
"이소엘!"
"말렸었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으셨습니다. 코피를 흘리시고 다음 날 초주검이 되는 상태가 되어도 끝까지 하셨었죠."
"그만!"
하지만 이소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도 카인 공자님의 희생을 보았습니다. 처음엔 뒤에서 우러러봤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벅저벅.
그녀는 카인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 이소엘은 올리시렌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세상에 더 나은 희생은 없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시죠. 미약하다 해도 당신의 희생을 조금은 나누고 싶습니다."
"위험해."
카인이 정중하게 말리자 듣던 올리시렌은 울분을 토했다.
"야, 카인! 너는 안 위험해?"
"나랑 너희는 다르지."
"다르긴 뭐가 달라! 고집불통인 자식.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꽉 막혀서는. 잘 보고 있어. 우리가 끝내 버릴 테니까, 이소엘!"
이소엘은 중력망치 크레드네를 쥔 채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로는 발광하는 용암의 악마 발람이 보였다.
올리시렌은 두 손바닥을 맞잡았다.
굳세어라.
기기긱-.
카인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전과 같이 맞물리지 않는 기계의 소리가 울렸고, 이소엘의 전신이 흑색의 갑옷으로 휘감겼다.
찬란하라.
수수수숙-!
이번 변화는 크레드네였다.
원래도 사람 하나는 짓뭉갤 정도로 거대했지만, 올리시렌에게서 흘러나오는 흑색의 힘에 밑도 끝도 없이 거대해졌다.
팟.
올리시렌의 한쪽 코에서 코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완벽하라!
그 순간.
파아앗-!
이소엘의 등 뒤에서 거대한 흑색 날개가 펼쳐졌다.
이소엘은 망치를 들었다.
그녀의 가슴께부터 솟아올라 하늘 높이 치솟은 크레드네의 위용이 주위를 내리눌렀다.
올리시렌은 발람을 가리켰다.
"이소엘, 저 악마를 부숴 버려!"
"예스, 유어 하이네스."
펄럭-.
순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휘청거리는 올리시렌을 카인이 잡았고 흑색의 날개와 함께 이소엘이 튀어 올랐다.
"어때? 전투에 쓸 수 있는 단어는 3개뿐이지만, 이 정도면 믿어 볼 만하지? 내가 도운 이소엘이라면...."
신이 순백의 천사를 빚는다면 인간의 손에서 빚어지는 천사는 흑색일 것이다.
지금 쏘아져 나가는 이소엘처럼!
수수수수-!
그녀의 손에 들린 크레드네는 올리시렌의 마녀의 힘에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이 자랐고.
카인은 올리시렌의 기대에 단언했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아."
후우우우웅-!!
올리시렌이 허리를 꺾으며 크레드네를 잔뜩 뒤로 당겼다. 발람은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어 그녀를 쳐 내려 했지만, 늦었다.
쉐에에에에에에엥-.
대기를 찢어발기는 굉음.
건물만 한 망치가 왕실기사의 전력과 더불어 한 마녀가 바란 축복을 담아 휘둘렀고.
팟-!!
그대로 발람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용암으로 만들어진 몸답게 머리였던 용암들은 그대로 으스러지며 사람이 없는 평야로 흘러내렸다.
올리시렌은 소리쳤다.
"이겼어!"
"똑바로 봐."
머리가 통으로 뭉개졌지만, 발람의 손은 파리를 잡으려는 인간의 손처럼 이소엘을 쫓았다.
"콰아아아아아-!"
그리고 발람의 머리가 자랐다.
공중에서 이소엘은 날개를 펼치며 다시금 발람의 머리를 날려 버렸지만, 발람 역시 다시 회복할 뿐.
파도가 계속 밀려오는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짓는 것과 같아 보였다.
"고마워."
스릉.
이젠 카인의 차례.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뽑아 앞으로 나섰다.
#62 EP.Ⅰ-15
계절은 그렇게 죽어 간다 (3)
카인은 고개를 들곤 눈을 가늘게 뜨며 발람을 살폈다.
콰아아앙-!
신화 속 여전사처럼 이소엘이 흑색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누빈다.
콰앙-!
그리고 끊임없이 발람을 후려치는 중력망치 크레드네.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열 번이 넘는 직격이 꽂혔다.
하지만.
"콰아아아-!"
발람은 같은 괴성을 지르며 회복할 뿐이었다.
그걸 살피고 다시 발람을 향해 걸을 때.
척-.
미약한 힘으로 카인의 옷소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기다려... 조금만 더 있으면 이소엘이...."
올리시렌이었다.
그녀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코에서도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에셔와 이소엘에게 건 마녀의 힘을 유지하는 데 힘이 부치는 것이리라.
"그래도 너랑 이소엘 덕분에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이 왔어. 물러나."
"너, 또! 그거!"
올리시렌은 간신히 숨을 이으며 고함쳤다. 카인이 무엇을 할지 잘 알기에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으니까.
툭-.
카인은 그런 올리시렌의 간절한 손을 소매에서 떼었다.
그리고 손날을 뻗어 저 멀리 발광하는 발람의 머리께에 가져다 대었다.
지쳐 버린 올리시렌은 간신히 몸을 움직여 카인의 시야로 발람의 키를 재어보았다.
콰아아아앙-!
그 틈에도 이소엘은 쉴 새 없이 발람을 부쉈고, 발람은 회복된다.
"보여?"
"...작아졌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람은 분명 여전히 거대했지만, 다시 회복할 때마다 조금씩 줄었다.
"무한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지. 회복이 안 될 때까지 부수면 우리가 이긴다."
"이소엘이 이렇게 부쉈는데도 줄어든 게 간신히 보일 정도야...."
털썩.
올리시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는 눈치.
동시에 이소엘의 속도가 느려지는 게 보였다.
분명 대단한 힘이지만, 이런 장기전에는 불리했다. 카인은 올리시렌의 회색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소엘을 불러서 쉬고 있어. 나머진 내가 한다."
턱.
올리시렌은 양손을 들어 올려 카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쳤지만, 빛을 잃지 않은 검은 눈동자로 카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굳세어라. 어?"
이소엘에게 힘을 주었던 것처럼 카인에게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힘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카인에겐 전달되지 않았다.
"찬란하라! 완벽하라! 굳세라고!"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두 손을 풀어냈다.
"마음은 충분히 받았어."
"아니 왜 너한테는 안 되는 거야? 찬란하라-!"
카인은 그녀의 검은 힘과 검은색의 절망검 아그웨스카를 흘깃 번갈아 보았다.
'아마도 검 때문인 것 같군.'
수평선의 마녀 프리문디가 절망을 벼려 만든 검보다 강한 마녀의 힘을 올리시렌이 발휘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이소엘 건 오자마자 풀고, 에셔에게 힘을 더 주고 피해 있어."
그의 말에 올리시렌은 두 주먹을 쥐었다.
아르후안 앞에서 무력했던 그때 주먹을 쥐었던 것과 같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핏방울을 내었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카인의 곁에 가기엔 너무도 부족했다.
"...알겠어. 잘 부탁해."
이 이상은 의미 없는 징징거림이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뿐.
휘이이이-.
이소엘의 흑색 날개에서 검은 깃털이 우수수 빠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는 발람의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며.
쿠웅.
이곳으로 착지했다.
땅에 내려서자 크레드네는 원래의 크기로 줄어들었고, 검은 갑옷은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날개는 깃털로 흩어져 버렸다.
이소엘 역시 너무도 큰 힘을 쓴 탓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이소엘은 고개를 떨궜다.
올리시렌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카인을 바라보았다.
"피하기도 공격하기도 쉽지만, 아무리 때려도 바뀌는 게 없었습니다."
카인은 아까 전 보았던 퀘스트창을 떠올렸다.
'이래서 내일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었군.'
그전까지 발람을 막지 못하면 카클링턴 화산을 낀 아이리안의 땅이 고통받을 터.
"금방 끝내마."
이소엘은 땀과 피에 절어서 카인을 바라보는 올리시렌을 보곤 잠시 말이 없었다.
쿵.
그러곤 가슴에 주먹을 올리고 말했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당신에게 이 아이리안을 맡깁니다."
저벅.
카인은 그녀들을 뒤로한 채, 발람을 향해 걸었다.
용암의 악마, 발람은 앵앵거리던 이소엘이 사라져서 그런지 더더욱 광분하면서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화아아아아아아-.
그 여파에 폐를 불태울 것 같은 뜨거운 바람이 중구난방으로 몰아치고, 용암들이 비산했다.
'저걸 못 잡으면 여기서 더 엄청난 일이 터진다는 거지?'
꽈악.
그의 마음이 꺾이지 않는 한 부러지지 않을 검, 아그웨스카를 쥐었다.
쿠웅.
카인은 왼발을 내디뎠다.
끓어오르는 대기와 미증유의 재앙을 올려다보았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직!
그의 보랏빛 눈에서부터 튀기 시작하는 순백의 뇌전!
삽시간에 그의 전신에서 뇌전이 터져 나왔고, 밤의 어둠을 밀어내는 환한 순백의 빛을 내뿜었다.
"크르르르르르-!"
발람이 몸을 돌렸다.
'겨울'의 뇌전을 쓰기 시작하는 카인은 눈부셔서 찾기 쉬웠다.
후우우웅-.
그의 두 팔이 구름을 찢어발기며 천공으로 올라간다. 허공에서 서로 맞잡더니 그대로 카인을 향해 내리찍을 생각.
밤의 겨울 Winter of Night.
발람이 내뿜는 열기에도 절대 녹지 않는 한기. 백색 뇌전이 닿는 자리가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한다.
스스스스스스스스-.
저 먼 흑색의 우주에서부터 내리꽂히는 한기가 순식간에 주위를 식힌다.
초열의 지옥이 팔한지옥으로 뒤집어지는 순간.
[미래가 소모됩니다.]
『삼하인(Samhain)의 '겨울'... 개방.』
카인은 미소 지었다.
'역시 겨울이 진화했다. 잘하면 미래를 더 안 쓰고도 가능하겠어.'
그의 등 뒤로 순백의 망토가 겨울에 강물이 얼어가는 것처럼 생겨나고, 머리 위로는 고고한 순백의 왕관이 만들어진다.
그야말로 겨울의 왕.
겨울의 지배자.
이 세상 모든 겨울의 주인.
손에서 손으로, 목숨에서 목숨으로 그렇게 닿은 마지막 '겨울'의 주인.
카인 천천히 아그웨스카를 휘두른다. 마검 '겨울'의 주인들이 그들의 생을 불태워 만든 최강의 검술이 펼쳐졌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콰가가가가가가가-!
공간 자체를 베는 초승달의 검기가 뇌전과 한기에 휘감겨 쏟아졌다.
지극히 작은 인간이 뻗어 내는 검기에 발람은 아랑곳 안 했지만.
패착이었다.
툭.
허공을 나아가면 갈수록 밑도 끝도 없이 커지더니 그대로 발람의 왼 어깨를 수직으로 베었으니까.
게다가 키리에에 담겼던 한기가 순식간에 잘린 상처를 파고들었고, 붉은 용암으로 꿈틀거리던 곳이 시커멓게 냉각되었다.
발람의 왼손이 바닥에 떨어질 때, 카인은 유려하게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다시금 검을 그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외식 外式.
엘레이손 Eleison.
에셀레드의 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듯, 카인의 검도 그러했다.
저 높은 곳에서 어떻게든 온기를 전하려던 겨울의 태양이 담긴 수평의 검기가 쏘아졌다.
스윽-.
이번에는 목이었다.
시린 태양빛이 서린 검기가 발람의 목과 들어 올려져 있던 그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치이이이익-.
그리고 상처에는 어김없이 우주의 한기가 묻어났다.
이소엘의 공격에는 바로바로 회복했지만, 카인의 공격에는 불가능했다.
점점 더 시뻘게지는 것이 발람 나름대로 회복하려는 것 같지만, 그의 몸을 파고드는 겨울의 한기를 몰아내기엔 상대적으로 약했다.
파앗-.
허공으로 날았다.
그에겐 날개가 없었지만, 순백의 망토가 힘을 보탰고 그가 지키고 싶은 이 모든 지역이 그를 지지했기에.
십자격 十字擊.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하늘과 땅을 잇는 달빛의 키리에.
카인의 지금과 세상의 오늘을 연결하는 햇빛의 엘레이손.
두 검기가 겹치며 화산조차 단숨에 부술 정도로 커졌고.
파아아아앗-!
분화구 위로 치솟은 발람의 몸을 네 조각내며 관통했다.
쿠웅, 쿵, 쿵!
'겨울'의 한기에 얼어 버린 용암 조각들이 힘을 잃고 대지로 떨어진다.
한순간에 부서진 발람의 모습.
카인은 아그웨스카의 끝을 땅으로 내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퀘스트 완료가 안 떠.'
발람을 정말 잡았다면 지금까지처럼 완료와 동시에 성공 시 보상이 나타날 터.
스윽.
카인은 몸을 낮췄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응하기 위한 자세였다.
'그럼 발람이 멀쩡하다는 뜻.'
카클링턴의 분화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많았던 용암의 근원이 저 화산 아래인 것처럼, 발람의 근원도 아래리라.
액티브, 밤의 겨울을 꺼내서야 간신히 튀어나온 걸 없앴는데 분화구까지 들어가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던전의 극한환경보다 심할 텐데 버틸 수 있을까.'
카인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사방이 붉은 용암으로 꿈틀거릴 것이며, 발 디딜 곳조차 없을 것이다. 심지어 발람이라는 적이라는 특징상 그 용암들이 모두 적일 것이다.
악마(惡魔, Devil).
고대에서부터 이름이 내려오는 악마라는 적이 얼마나 암담한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카-인-!"
멀리서 들리는 올리시렌의 외침.
카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피해!!"
그녀의 흑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이는 순간, 카인은 직감했다.
'아래.'
쩌저저저적-!
아무것도 없던 땅이 부서지더니 용암으로 만들어진 거인의 손이 치솟았다.
올리시렌의 경고 덕에 카인은 한 걸음 더 빨리 움직여 위로 튀어 올랐다.
찹-! 찹! 찹!
"이젠 양으로 승부하네!"
카인은 이를 악물며 뛰었다.
순식간에 지평선까지 대지가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붉은 용암의 손이 뻗어 나왔다.
찹!
어떻게든 카인을 잡으려는 발람의 손아귀를 피하지만.
치지지지직-.
용암의 손이 더 빨라지자 카인의 옷가지가 더 빠르게 타 버렸다.
카인은 다시금 '밤의 겨울'의 한기를 일으켰다.
[미래가 소모됩니다.]
우우우우우-.
그 순간 다시금 하늘 너머 우주에서부터 한기가 내리꽂혔다.
쩌저적-.
올리시렌 쪽을 제외한 모든 곳.
지평선 저 너머까지 발람의 손이 나타난 땅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침없이 카인을 쥐어 채려던 발람의 붉은 손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가면 내가 손해-.'
쩌저저저저저적-!
하지만 카인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카클링턴으로 올 때 보았던 협곡처럼 거대한 금이 화산에서부터 이곳까지 수 킬로미터에 걸쳐 벌어졌다.
탓-.
카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뛰어올랐다.
그렇게 보이는 틈의 아래.
수우우우우욱-!
그 협곡을 가득 채울 만큼 두꺼운 팔뚝이 치솟아 올랐고 온 세상을 한 손에 쥘 용암의 손이 펼쳐졌다.
'젠장!'
아무리 카인이라도 이렇게 거대하게 나오면 피할 수 없었다.
급하게 '겨울'의 망토를 전신에 둘렀다.
하지만 망토 채로 발람의 거대한 손아귀에 잡혔다. 그리고 쥔 손의 한 곳이 일그러지더니 발람의 입이 나타났다.
"드디어 잡았다."
겨울의 한기가 발람의 손을 계속 얼려 갔지만, 지맥에 쌓인 용암은 이미 무한대!
"종말이여, 모든 악덕을 가지고 나와 지옥으로 가자."
카인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카인-!"
올리시렌의 비명이 닿기도 전에.
발람의 손이 카인을 그대로 지저로 끌어당겼다.
#63 EP.Ⅰ-15
계절은 그렇게 죽어 간다 (4)
「"에드먼드, 어떻게... 여길."
저 멀리 언덕의 끝.
하얀 빙하가 파도처럼 쓸려오는 아이리안의 최북단.
엘프의 숲에 가로막혀 누구도 닿지 못할 곳에 한 여인이 있었다. 하얀색에 가까울 정도로 희게 변한 금발에 지쳐버린 보라색 눈을 지닌 여인.
클로에 에셀레드.
그녀는 오래된 하얀 신전 속에 앉아 있었다.
"그대를 만나러."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한 사내였다.
전신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고, 자르지 못한 그의 긴 머리에는 엘프들이 흘린 붉은 피가 덕지덕지 굳어 있었다.
"...카인은 잘 지내나요?"
"그 녀석이 걱정되면 이렇게 숨어 있으면 안 되지. 데려오기 힘들잖소."
에드먼드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는다.
클로에도 그 손을 잡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가 반대 손으로 자신의 손을 끌어당기곤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우리 아이를 살리기 위해선 전 여기 있어야 해요."
에드먼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프의 숲 너머에 있는 유일한 건물이 신전이라니 어색하다. 게다가 그곳에 제 아내가 미리 와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에드먼드가 아는 게 있었다.
"카인에겐 다른 무언가보단 어머니가 필요하오. 그리고 내게도 아내인 그대가 필요하고."
클로에는 그의 말을 자르듯 입을 열었다.
"에드먼드, 이곳이 어딘지 아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클로에는 두 팔을 위로 뻗었다.
파앗.
신전의 기둥마다 매달려 있던 횃불에 불이 켜지면서 어둠이 흩어진다. 그리고 밝아진 신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클로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봄이 눈을 감는 곳'이에요."
에드먼드가 떠올린 건 자연스레 세계 최후의 보물이라 여겨지는 <사계절의 신기>였다.
"봄? 설마 그 '봄'?"
네 개의 신기 중 '여름' 하나만 해도 세상을 들썩이게 만드는 성검이요, '가을'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성류관이니까.
성국이 지금 같은 강력한 권력을 지니게 된 건 <사계절의 신기> 중 두 개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물론, 강하기 때문에 두 개나 소유하고 있다는 게 에드먼드의 생각이었지만.
"네. 눈물의 마녀와 전설의 전사왕이 세운 마지막 요람."
"설마...."
그 순간 클로에의 보랏빛 눈이 반짝였다. 횃불에 반사되는 빛이 아니라 정말 그녀의 눈이 빛나는 것이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클로에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신전의 횃불들이 일렁이고, 여럿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것만 같았다.
"'여름'의 주인이 나타나면 마왕이 등장하는 것이요, '가을'의 왕이 나타나는 건 겨울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는 것."
"그건 전에 카인에게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속...."
"그리고 '겨울'이 이 시대를 부숴야만 '봄'이 도래하리라. 기억하고 계시죠?"
"당연히. 그대의 말이라면 모든 걸 기억하오."
클로에는 절절한 에드먼드의 진심에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그리고 단언했다.
"난 내 아들이 죽는 걸 볼 수 없어요."
"클로에...."
"미안해요, 에드먼드. '봄'의 눈을 뜨게 하는 건 저 혼자면 충분해요. 영원을 바쳐 종말을 얻어야 하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