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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 *

끼룩-.

갈매기 몇 마리가 평화롭게 날고, 최근에 보수한 듯한 낡은 나무집들이 드문드문 있다.

밴더빌트의 봉토인 만큼 그가 가장 앞장서서 마을을 안내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묘한 짠내가 감도는 땅이었다.

문과 창문의 틈 사이로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은 아벨이 움찔움찔하자 카인이 그의 두 어깨를 잡았다.

"고개 들어. 발아래를 보지 말고 조금 멀리 봐."

"예!"

"목소리 낮추고. 가슴은 쫙 펴지만 공이 있는 것처럼 조금은 넣고 그만큼 등을 벌려. 다리는 말처럼 대지를 튕기고."

터벅, 터벅, 저벅.

아벨의 걸음걸이가 바로 바뀌었다.

이젠 제법 기사 태가 나는 걸음이었다.

카인은 아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다시 앞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이소엘은 왕도에 있을 때 받은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렇게 마을의 한가운데.

가장 큰 집이자 마을창고로 쓰는 곳에 도착했다.

끼익-.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문이 열렸다.

눈에 백태가 낀 흰 머리의 노파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으며 나왔다.

그러곤 일행들을 향해 덜덜거리며 절을 하려 했다.

아벨은 그 안쓰러운 광경에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이 마을의 촌장이신가요?"

아벨의 따스한 물음.

노파는 귀족들을 마주한 게 무섭다는 듯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말했다.

"예, 예. 이 노구가 아르츠위버 봉토의 촌장 아리안입니다."

"저희는 에셀레드 성에서 나왔어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순간 노파는 웃었다.

그러곤 아벨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몸을 돌리며 새하얀 포말과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를 가리켰다.

"이따 저녁이 되면 보이실 겁니다. 어찌나 불길한지. 고기도 못 잡습니다."

털썩-.

순간 아르나가 가방을 떨어뜨렸다.

집중되는 시선.

처음부터 카인은 절묘하게 노파의 시선을 몸으로 가리고 있었다.

의도한 바였다.

아르나는 빠르게 눈치를 채곤 카인을 향해 입 모양으로만 말을 전했다.

-노파. 가짜. 마녀.

카인은 아르나가 자연스레 가방을 줍는 걸 보면서 한마디를 벙긋하고 몸을 돌렸다.

-압니다.

그 순간.

까악-.

저 멀리 흰 절벽 위로 흑색의 까마귀 한 마리가 울부짖는다.

노을을 바라는 절규였다.

#17 Ep.Ⅰ-3

봄날 (4)

카인의 보랏빛 눈에 여름의 햇살이 비친다.

그 안에 보이는 건 적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을 '겨울'의 뇌전이었다.

뇌전에 드러나는 것.

'수평선의 마녀.'

흐릿한 노파의 모습 뒤로 백발의 긴 머리를 지닌 아름다운 마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눈에 흰 백태가 낀 것은 똑같은 여인이었다.

환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려서 대부분은 속여 넘겼다.

그러나.

카인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긁적.

아르나가 코를 긁는다.

냄새로 알아차렸다는 의미.

하프엘프다운 예민한 감각과 오랜 용병 생활로 다져진 경험 덕분인 듯했다.

즉, 이 자리에서 촌장 노파가 마녀인 걸 아는 건 카인과 아르나 뿐이었다.

"밴더빌트."

카인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노기사는 당당하게 걸어 나와 카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노파는 아르츠위버 봉토의 주인인 밴더빌트가 노기사라는 걸 듣자마자 놀랐다.

"아이고 기사님, 이 늙은이가 몰라뵀습니다."

그러곤 절을 하려 했다.

밴더빌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카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적을 상대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게 무엇인가?"

갑작스러운 카인의 물음에 밴더빌트는 아는 대로 답변했다.

"적이 누구인지, 얼마나 강한지, 아군은 얼마가 필요할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쉽게 상대할 수 있지?"

"적이 준비되기 전에 기습하는 게 제일입니다."

카인은 활짝 웃었다.

그러곤.

척-.

그대로 뛰어올라서는 밴더빌트의 어깨를 밟았다.

그가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의 손잡이를 잡아 뽑고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후우우우우웅-!

거대한 대검이 거침없이 바닷바람을 가르며 수직으로 떨어진다!

그 목표는 노파의 머리.

가까이 있던 아벨은 대경했지만 섣불리 끼어들지 않았다.

카인의 판단을 믿곤 세 보 뒤로 떨어지며 세검을 뽑았다.

"미친놈아!"

반면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갑자기 노파를 죽이려는 카인에게 소리쳤다.

바로 막으려 했지만.

척-.

어느새 그녀들 사이에 서 있던 아르나가 둘의 손목을 붙잡아 시간을 벌었다.

카인과 아르나를 제외한 모두는 노파가 형편없이 반으로 갈라지고 으깨져 죽을 거라 생각했다.

까아앙-!!

그러나.

순간 그녀의 앞에 생겨난 순백의 방어막이 카인의 대검을 막아 냈다.

카인은 튕겨 나가는 대로 한 바퀴 돌아서는 두 발을 단단히 대지에 고정해선.

쿠구구구구-!

수평으로 방어막을 후려쳤다.

깡, 까앙, 까아앙!

숨 쉴 틈도 없어 몰아치는 일격들.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대검의 일격에 방어막에 실금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파의 등이 펴진다.

점차 젊어지더니 허리까지 오는 긴 백발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백태가 낀 눈으로 무표정하게 몰아치는 카인의 공격을 응시했다.

"어떻게?"

"잘!"

파삭-.

열일곱 번의 충격을 견뎌 내자 방어막이 깨졌다.

카인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떤 의견도, 협의도, 협박도 없다.

그저 단숨에 죽여 버리겠다는 일념이 담긴 대검!

하지만.

척.

모든 물리법칙이 그녀의 손에 저무는 듯, 백발의 프리문디는 날아오던 대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 멈췄다.

"제법이구나, 에셀레드의 아이야."

"그쪽도."

"아직 밤이 되지 않았으니 나의 힘이 부족하리라 생각한 거니?"

그녀의 어조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적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투정을 부리는 손자를 대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카인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열린 입에 들어가는 거, 둘은 억지로 잡아 뜯고 들어가는 것."

"준비된 것과 준비되지 않은 것의 차이로구나."

수평선의 마녀는 카인이 단순한 귀족 집안의 아들이 아니라 무수한 전장을 거친 전사임을 직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닐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 지금처럼. 아벨."

아무것도 아닌 듯 뱉은 평범한 말.

하지만 미래의 용사에게 있어서는 뛰어나가라고 재갈을 풀어 주는 것과 같은 약속의 말!

스윽-.

아벨은 디디고 있던 왼발로 온 세상의 대지를 꽉 쥐었고.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푸른 천공을 가르며 작열하는 빛의 궤적!

세검을 뽑아선 그대로 햇살이 되어 마녀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그러나 수평선에는 닿지 못했고.

휙.

프리문디는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씨익 웃었다.

"이건 몰랐구-."

여유롭게 입을 여는 마녀의 틈을 아벨이 놓칠 리 만무했다.

아르드바르의 첫 번째 의지는 무엇이든 꿰뚫는 직선의 힘이며!

아르드바르.

루 델바흐 Lugh Delbáeth.

두 번째는 멈추지 않는 피의 궤적이다!

세검이 급하게 당겨진다.

흡사 온 세상이 수축하듯 잡아당기는 팔 힘에 더해 아벨은 다시금 대지를.

콰앙-!

발로 디뎠다.

손바닥 크기나마 그의 발이 닿은 땅이 거미줄처럼 으스러졌다.

그 속에 담긴 거력과 함께!

세검의 궤적이 다시금 폭발했다.

푸우욱-.

그녀는 뒤늦게 터지는 두 번째 아르드바르는 피하지 못했다.

결국 오른쪽 빗장뼈에 세검이 파고들었다.

뚜욱-.

세검을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른다.

그러곤 아벨의 손을 타고는 대지로 방울을 그리며 떨어졌다.

두 형제가 두 번째 마녀에게 먹힌 첫 번째 유효타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그녀는 흰 손을 펼쳐선 아벨의 세검을 쥐었다.

그러곤 천천히 자신의 상처에서 뽑아내며 카인 쪽으로 섬뜩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린 마녀를 맞이하려 만든 무대를 왜 망치는지 들을 수 있겠느냐."

"그대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카인은 손가락을 들어 언제든 마지막 남은 힘을 쓰려고 준비하는 아르나를 가리켰다.

"저주를 풀어라."

수평선의 마녀는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레몬빛 아르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묘한 웃음을 지었다.

"하프로구나."

"그래."

"저리 지독한 저주를 건 건 사랑의 아픔에서 수백 년간 빠져나오지 못한 어리석은 내 여동생, 글루미엠이겠고?"

"잘 아는군."

잠시간 정적이 흐른 후 마녀의 입이 열렸다.

"저주를 푸는 건 어렵지 않지."

마녀는 아벨의 세검이 꿰뚫었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져다 대었다.

이미 상처는 다 나아 있었고 남아 있던 붉은 핏방울을 검지 위에 올려 카인에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걸 부탁하려면 칼을 꽂기보단 내게 선물을 줘야 하지 않겠니?"

"지랄하네."

카인은 대검을 똑바로 들었다.

단숨에 힘을 쏟아서 죽이겠다는 자세였으며 아벨 역시 아르드바르의 기수식을 취하면서 수평선의 마녀를 향했다.

"미쳐 가지고 수백 년간 인간들을 잡아먹는 마녀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퍽이나 들어주겠네."

마녀는 입꼬리가 찢어져라 함박웃음을 지었다.

"후후, 너는 마녀를 잘 아는구나."

카인도 그녀를 보며 마주 웃었다.

'저런 마녀를 상대하는 데 말로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

그렇기에 카인은 처음부터 칼부터 꽂기로 계획했다.

그래야만 마녀가 제대로 대화에 응할 테니까.

지금처럼.

정과 행복이 교류하는 순간이 아니라, 섬뜩한 살기와 소름 돋는 암수가 오가는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거래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좀 시원했나? 이런 바람구멍이 막혀 버렸군."

카인의 보랏빛 눈이 번뜩인다.

적을 상대로 빛나는 그의 눈엔 항거할 수 없는 묘한 한기가 깃들어 있었다.

"꽤 시원했단다. 아마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할 첫 만남이 될 거고."

"첫 만남으로 끝난다고는 생각 안 하나?"

이 순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

하지만 수평선의 마녀는 그런 위협에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가 카인의 심장께로 손가락을 돌렸다.

"오러도 '그것'도 쓰지 않았다는 건 그냥 단순한 인사를 한 걸 테니."

카인이 입이 닫힌다.

눈이 가늘어진다.

'마검을 손에 쥔 것도 아닌데 눈치를 챘다라.'

카인은 내심 수평선의 마녀에 대한 경계심을 한 단계 더 올렸다.

상대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적은 그만큼 까다로운 법이기 때문이다.

카인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흘깃 가리켰다.

잔뜩 얼어 있는 올리시렌의 방향이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

"그래. '마녀의 밤'은 아마도 내일 올 거 같구나."

"여유 좋네. 나 같으면 밤이고 뭐고 일단 다 처리했을 텐데."

"에셀레드의 아이야. 너는 개미가 발가락을 문다고 다음 날 해가 서쪽에서 뜰 것 같으니?"

"닿지 못할 수평선의 마녀여."

"프리문디라 불러도 된단다, 너는."

수평선의 마녀이자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Primundi).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건 극히 드문 일.

하지만 카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전생에서부터 외워 온 말을 던졌다.

"내가 '밤'을 넘어 '수평선'에 닿는다면 서쪽에서도 뜰걸."

순간, 마녀 프리문디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카인과 여섯 명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백태가 낀 만큼 정말 눈으로 본다기보다는 마법적인 감각으로 파악하는 모습이었다.

제법 놀랐다는 듯 입을 열고 손으로 막으며 과장되게 카인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건 수백 년간 처음이니, 어쩌면 너는 내 '수평선'에 닿을 수 있겠어."

"내일을 기다려라, 마녀."

"오늘의 내겐 왜 바라지 않느냐?"

카인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뭘 믿고? 고작 말 몇 마디에 넘어오면 그게 마녀인가, 성녀지. 적어도 당신 멱살 정도는 잡아야 거래가 될 텐데."

수평선의 마녀 프리문디는 놀랍다는 듯 눈을 뜨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 역시 수백 년 만에 설레게 하는 말이로구나."

후우웅-.

바람이 분다.

그리고 눈처럼, 마녀 프리문디는 수천 마리의 나비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그 신비한 모습에 올리시렌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마녀다."

카인은 대검을 밴더빌트에게 던져 주곤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쳐버린 주제에 힘만 좋은 여자들이지. 그리고 우리가 내일 밤에 상대해야 하는 건 어린 마녀를 만드는 '가장 어두운 밤'과 저 여자야."

아벨은 마녀의 어깨를 꿰뚫었던 검을 넣고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묘했다.

분명 사람을 찔렀건만 카인을 찔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카인 때와는 달리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밴더빌트는 굳은 얼굴로 카인이 쓰고 돌려준 대검을 등에 보관했다.

카인은 곱게 묶어 두었던 검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풀었다.

단발에 가까운 헝클어진 그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고, 그 사이에서 보랏빛 두 눈이 반짝이며 올리시렌 왕녀를 직시했다.

"그리고 네가 되어야 할 존재고."

꿀꺽-.

그녀는 마녀를 처음 보았다.

그간 많은 서적을 탐독하고 이야기를 수집하며 마녀를 그려 왔지만, 직접 대면한 마녀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기괴하고, 교묘하다.

더욱이 그 말이 너무도 달콤하면서 그 속에 독과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녀가 되는 걸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 어떤 거라는 걸 지금에서야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이소엘과 함께 준비한 것이 정말 먹힐지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카인은 굳어 가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 같은 마녀라도 넌 너만의 길을 걸으면 되지."

"나만의 길?"

"누군가가 정해 준 길이 아니라 '올리시렌'이라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면 재미있겠네."

올리시렌은 그 순간 직감했다.

카인이 어디까지 계획을 세운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수평선의 마녀를 포함하여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생각을 가늠치 못하리라.

그리고 조금 가슴이 뛰었다.

전설로만 접하던 용사가 현재에도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을 지니고 있을 것 같아서.

Episode.Ⅰ

봄의 찬미

#18

Chapter. 4 봄날은 간다 (1)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킨다.

그걸 밤이라 불렀다.

빛은 어두운 하늘에 박혀서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그건 별이라 불렀다.

솨아-.

별빛이 빛나는 밤바다 앞.

카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뒤로는 아르츠위버 봉토를 둘러보고 이야기를 모아 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에셔와 함께 움직였던 밴더빌트였다.

"오늘은 넘어갔는데, 어제만 해도 저녁이 되면 해가 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르나가 설명을 더했다.

"정말 피와 같은 색이라서 이 마을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기를 꺼렸다고도 해요."

"오늘은 수평선의 마녀가 자리를 비웠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군."

"아마도...."

"그 여자가 무슨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일 리는 없고, 아마도 아르후안을 부르는 의식일 것이다."

카인의 단호한 정리.

올리시렌은 조금 놀란 듯 입을 벌리며 되물었다.

"설마 이 짧은 정보로 거기까지 추론한 거야?"

카인은 내심 쓰게 웃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대현자가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았을 터.

-아르후안의 정체에 대해선 성국에서도 말이 분분합니다. 확실한 건, 늘 해안에서 나타났고 등장하기 전에 해에서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카인이 알고 있는 건 당연히 용사 아벨이 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알아본 덕이었다.

-그래서 위치가 알려진 마녀들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아르후안'이 도대체 뭐냐고. 다들 말이 다르긴 했는데, 하나같이 똑같이 말한 건 거대한 입이었습니다.

사건을 조합해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대현자의 특기라면 정보를 가지고 어떤 적인지 알아내는 건 전사의 특기다.

그리고 카인은 전사였다.

바다, 거대한 입, 서로 다른 기억.

'아르후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감이 왔다.

또한 어째서 '가장 어두운 밤'이라 불리는지도.

"수평선의 마녀에 대해선?"

그에 대답한 건 이소엘이었다.

"다들 원래부터 그녀가 촌장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마을의 토박이였고 상당히 오랜 기간 살았다는 다수의 증언이 있습니다."

올리시렌 역시 이소엘의 말에 끄덕였다.

"심지어 그 할머니의 죽은 남편이나 자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니까? 단순한 환상은 아니었던 거 같아."

"어쩌면 진짜 살았을 수도 있겠어."

카인의 말에 올리시렌은 조금 놀라서 반문했다.

"수평선의 마녀가 이런 마을에서 살았다고? 왜? 그랬는데 마지막엔 마을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버린다고?"

"미쳤으니까."

짧으면서도 명쾌한 답변.

올리시렌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미쳤으니까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것이고 오래도록 함께 산 사람들을 제물로 바꾸는 것이리라.

"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단지 일부러 천천히 마차로 왔음에도 창백해진 아르나만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아르나는 카인의 시선에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공자님."

"곧 멀쩡해져서 새로운 삶을 아벨과 함께 에셀레드 성에서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아르나의 눈이 조금 커진다.

아벨 역시 같이 놀랐다.

"...너 좋은 사람이네."

올리시렌은 조금 놀랍다는 듯 카인에게 말했다.

밴더빌트는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인 양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곤 가운데 모닥불을 피우며 밤바다의 찬바람을 따스한 온기로 사그라트렸다.

일렁이는 불꽃의 주홍색이 모두의 얼굴을 비출 때.

"그냥 해야 할 일이라서."

카인은 그답지 않게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부끄러워서 말을 돌린다는 게 뻔히 보이는 수였다.

아르나는 잠시 카인을 바라보다 대뜸 입을 열었다.

"한 발은 가능합니다."

"한 발이라. 아벨이 아르드바르에 더 익숙해지면 어쩌면 둘이서 아르후안을 잡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카인은 미소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용병 '섬광'의 전심전력이 들어간 한 방이라면 활이라는 특징상 어쩌면 마스터의 일격보다 더 효과적일 터.

반면 아르나는 여기서 아벨의 이름이 들어간 게 이상한 듯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걘 아직 부족합니다."

클로이드가 아벨을 '애'라고 취급하는 것과 달리 아르나는 냉철하게 한 명의 '전력'으로 아벨을 평가했다.

카인은 어딘가 쓸쓸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아벨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짜는 위기에 빛나는 법입니다. 믿는다, 아벨."

아벨은 반짝이는 갈색 눈으로 카인을 올려다보며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그 어떤 고난에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게 싫었던 숲의 소년은 이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싸울 줄 아는 청년이 되었다.

그런 청년이 바라보는 등.

그곳엔 카인이 서 있었다.

평기사 에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짐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아벨처럼 믿음을 받는 기사가 되겠다고.

"뭔 한 발인데?"

알 수 없는 비밀 대화 같은 것에 올리시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카인은 웃으며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에셀레드만의 비밀."

그러자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거 성이 에셀레드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러자 아르나가 조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바꾸시려면 바꾸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일반적으로 남자 쪽의 성으로 성을 바꾸게 된다.

즉, 현재 아이리안이라는 그녀의 성을 에셀레드로 바꾸려면 카인이나 아벨과 결혼하면 되었다.

"작은어머님, 애는 그만 놀리시죠."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올리시렌은 발끈해서 소리쳤다.

"애라니! 애는 너지!"

"그런 게 애 같다는 거다."

"내가 왕도에서 어른스럽다고 소문난 안개꽃의 왕녀야. 그런 나한테 애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이네!"

"응, 다음 애."

"야!"

카인과 올리시렌의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아벨과 밴더빌트는 그제야 그 나이대로 보이는 카인의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늘 한계를 초월하는 힘겨움만 보이는 카인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되었으니까.

"풉."

순간 참다 참다 터진 웃음소리가 하나 들렸다.

다들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중갑을 단단히 두른 이소엘이 있었다.

이소엘은 소리 내지 않았다는 듯 엄숙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

"풉!"

카인의 말 한마디에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올리시렌은 얼떨떨하다는 듯 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소엘 이런 거 좋아했어...?"

"왕녀님이 간만에 마음 편해 하시는 걸 보니까 웃음이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한 말과 달리 어깨가 들썩인다.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일곱 모두가 있던 회의가 끝나고 각자의 취침 장소로 돌아갈 때, 아르나는 길을 돌아 카인에게 왔다.

다 꺼져, 불티만 뿜어내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했다.

"공자님."

"예, 작은어머님."

"만약 상황이 잘 못되면 절 버리세요."

"...."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보랏빛 눈을 들어 다 꺼져 가는 불씨 너머 제 죽음을 담담히 말하는 그녀를 바라볼 뿐.

"아벨은 이제 혼자 잘 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없어도 공자님이 계시기도 하고요."

아까 전 본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형제의 모습이었다.

카인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건 의아하나, 진심인 걸 알기에 아르나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절 믿지 마십시오. 전 아벨의 재능을 이용하려는 놈에 불과합니다."

"그런 분이라면 아까 전 마녀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셨겠죠. 그건 정말 마녀와 제대로 해 보겠다고 다짐한 사람만 가능한 검이었습니다."

아무리 활이 주 무기라고 하지만 그녀도 눈이 있었다.

수평선의 마녀가 만든 방어막을 부수기 위해 휘두르던 카인의 검격에 담긴 절실함을 읽어 내지 못할 리 없었다.

카인이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자 아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수평선의 마녀가 저희의 뜻대로 해 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내일 '아르후안'만 잘 끝나고 왕녀가 마녀로 각성하면 떠나겠죠."

"그래서입니다. 아까 잡지 않은 게."

"...?"

이번에 의아해하는 건 아르나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인은 옆에 풀어 둔 세검을 뽑아 불씨를 뒤적였다.

그러자 불티들이 허공으로 수없이 날아오르며 주위를 빛냈다.

하늘의 별만큼은 아니었지만, 지상에서 피워 올리는 아주 미약한 빛이었다.

"받아야 할 게 있는데 저희는 줄 게 없습니다. 하지만 꼭 이뤄야 할 거래죠."

줄 게 없으면 만들면 된다.

아쉬운 것이 없을 수평선의 마녀에게 아쉬운 것을 만들어서 그걸 쥐고 거래를 시도한다.

"그럼 일단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야겠군요."

용병이었던 아르나답게 단숨에 카인의 전략을 깨달았다.

"수평선의 마녀는 반드시 새로운 마녀가 탄생할 때 나타납니다. 무슨 방해가 있던 간에 마녀를 만들어 내죠."

전생의 용사 아벨이 성국의 대성당 지하에 봉인된 특급금서관에서 찾아낸 기록에 따르면, 성국은 피를 흘리는 해를 미리 찾아내서 함정을 판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이단심판관들을 떼거리로 보내서 어떻게든 막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수평선의 마녀는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 자리에서 마녀를 각성시켰다.

"즉, 이유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각성시키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아르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마 '기원' 때문일 거예요."

카인은 조금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르나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풀었다.

"용병 시절 어느 던전에서 알게 된 지식이죠. 마녀들의 이명이 정해지는 이유를 아나요?"

'돌아보지 않는 숲'의 글루미엠.

'닿지 못할 수평선'의 프리문디.

마녀는 각자 다른 이명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정해지는지는 몰랐기에,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르나는 말을 이었다.

"마녀는 어딘가 부서진 사람이라는 걸 말해 드렸었죠? 그 부서진 게 고쳐지기 바라는 게 각자의 기원이에요. 아마도 글루미엠은 숲이 자신을 돌아보길 바랐을 것이고...."

"프리문디는 수평선에 닿기를 바라는 것이겠군요."

카인은 기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랐을 뿐, 뜻은 이미 들었다.

-마녀는 자신의 이명을 이루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용사 아벨이 이 순간을 위해 말해 줬었으니까.

그래서 수평선의 마녀와 대립할 때 자신이 수평선에 닿겠다고 했었던 것이고.

잃어버린 무언가를 '이명'으로 삼으며 다시금 죽음과 함께 되찾는 게 '기원'인 종족, 마녀.

아르나는 마녀에 대해 한마디로 일축했다.

"슬픈 사람들입니다."

툭-.

카인은 식어 가는 모닥불에 준비해뒀던 마른 장작을 던졌다.

"기원을 바라지만, 이룬다면 사라진다라."

그러자 장작은 자신을 스스로 살라 먹으면서 불을 더욱 키웠다.

"그것도 비슷하군요."

카인의 눈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

아르나는 차마 더 묻지 못했다.

어딘가가 부서진 것은 몰라도 마지막까지 마녀와 비슷하다는 카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바라는 건지.

그 끝에는 무엇이 남을지.

#19 Ep.Ⅰ-4

봄날은 간다 (2)

시간이 무색하게 흐른다.

일행들은 아르츠위버에 사는 사람들을 밖으로 대피시켰고, 카인과 올리시렌은 해안가의 평평한 바위에 앉아서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맞이하는 저녁.

"온다."

카인이 세검을 쥐었다.

엉덩이를 떼며 바다를 향해 자세를 잡는다.

그의 눈이 바라보는 곳.

노을을 만드는 붉은 해.

흘러나오는 눈물과 같은 피.

분명 아까까지도 파랬던 바다였건만, 해의 피와 맞닿자 빠르게 붉어졌다.

하지만 이내 색을 잃는다.

세상을 비추던 빛이 흐려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올리시렌은 떨리는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없어."

물샐틈없이 총총했던 별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어둠만이 가득 찬 하늘.

"공자님!"

떨어져 있던 밴더빌트, 아벨, 이소엘, 아르나, 에셔가 다가와 일곱이 되었을 때.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형형색색의 나비 수천 마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않고 '마녀의 밤'에 온 걸 환영한단다."

나비들이 뭉쳐 만들어진 백발의 마녀, 프리문디는 가볍게 웃었고.

쿠구구구구구구궁-!

온 바다가 떨리며 누렇고 뾰족한 산들이 튀어 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크아아아아-!"

아르츠위버 해안을 가득 채울 만한 거대한 입에 붙어 있던 괴물의 이빨이었다.

수평선의 마녀, 프리문디는 카인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도면 다섯 명으로도 제물로 충분하겠어."

그러자 카인은 그녀와 천천히 부상하는 아르후안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내 눈엔 둘이면 되겠는데?"

마녀, 프리문디는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카인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흑발의 에셀레드여."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뻗었다.

촤아아아-.

바다가 일어난다.

아니, 바다 아래 숨어져 있던 괴물의 거대한 등판이다.

해가 흘리는 피를 받아먹으며 몸을 키운 검은색의 드래곤이 그곳에 있었다.

"이 아이가 그대가 기대하던 만큼의 적인지 궁금하구나."

펄-럭-.

녀석은 프리문디의 등 뒤로 날개를 느릿하게 흔들며 날았다.

가장 어두운 밤을 상징하며 늘 바다에서 나타난다는 블랙 드래곤, 아르후안.

한 번의 날갯짓에 불어오는 바람은 의지를 녹아내리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밤이 내려앉는 것만 같은 위용이었다.

"좀 약한데?"

카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다들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예상했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블랙 드래곤 앞에서도 평상시와 똑같이 편안한 그가 신기할 지경.

프리문디는 그런 아르후안의 머리 위로 떠오르며 카인에게 물었다.

"네 가슴의 '겨울'이 네 걸음을 그리 당당하게 하는 것이냐."

마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들 몰랐다.

올리시렌 정도나 '겨울'이 어떤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을 뿐.

아니, 그 외에 딱 한 사람.

"...!"

아르나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본래 대륙에서 활동하던 아르나에게 <사계절의 신기>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이름.

카인이 갑자기 달라지고 강해진 이유를 알았으니까.

마녀, 프리문디는 카인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순백의 대검은 없는데 왜 겨울의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구나."

최전선의 로드이스트를 계승하는 자들에게 이어지는 순백의 마검, '겨울'.

카인은 프리문디가 겨울의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점이 조금 신기했다. 이내 그녀가 대륙에서도 활동하던 마녀였다는 걸 떠올리며 말했다.

"알아서 뭐 하게."

"...."

프리문디는 눈을 한 번 끔뻑이며 카인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아르후안이 흘려 대는 지독한 살기에 굳어 있던 일행들은 카인 특유의 대화에 저절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스릉-.

과거 주로 쓰던 대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단단한 세검.

쿵.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대지를 내리찍으며 가슴께로 세검을 평평하게 들었다.

그 순간 땅에서부터 하늘로 눈이 올라가는 듯한 백색의 오러가 세검에 살얼음처럼 서리기 시작했다.

그 검 끝이 향하는 곳은.

프리문디의 심장.

"수평선의 마녀여, 저주를 풀어라. 그러지 않으면 저 용을 찢어 죽여 버리겠다."

"에셀레드의 이름을 지닌 자들 중 너처럼 말이 험한 놈은 처음이로다. 네 부모는 뭘 어떻게 가르쳤길래...."

프리문디의 말을 자르면서.

"어미는 죽었고 아비는 죽어 가지. 난 혼자 컸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프리문디는 조금 질린 듯이 카인을 바라보다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 기세가 좋구나. 수평선에 잠들어 있던 아르후안을 이긴다면 저주를 풀어 주지."

그녀의 묘한 말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사이 마녀, 프리문디가 다시금 흩어진다.

남은 건 검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고 하늘을 천장삼은 거대한 블랙 드래곤, 아르후안.

카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올리시렌! 저런 괴물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나!"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소엘을 돌아보았다.

이소엘은 즉시 귀걸이를 만지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올리시렌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족해."

처-얼-썩-.

바다는 누군가 주위를 흔드는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고, 바람이 혼란스러울 때 이소엘은 귀걸이를 쥔 채 소리쳤다.

"그래도 땅에 내리는 것 정도는 될 겁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전생에 이러나저러나 둘이 살아왔으니 기대했는데, 좋군.'

에셔는 처음부터 지급받은 대형 방패를 들었다.

그 뒤에는 밴더빌트가 두 손으로 단단히 대검을 들고 있었다.

아벨은 카인의 왼쪽 뒤편에서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보이며 아르후안을 째려보았고,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오른쪽에서 각자의 준비를 했다.

파앙-.

공기를 찢는 파공음.

일행의 맨 뒤에는 언제나 짓던 미소를 지운 채, 싸늘한 '섬광'의 표정을 한 아르나가 활을 쥐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뚝 떼어 와서 만든 듯한 맑고 투명한 푸른색에, 활시위는 연두색으로 은은히 빛이 난다.

화살 대신 걸린 건 바람의 마력이었다.

"말씀드렸었죠. 반드시 한 사람의 목숨은 끊는다고."

카인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폭풍활 호크마...!"

아르나가 순순히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이자, 맨 처음 카인에게 당당히 거래를 걸었던 이유였다.

폭풍활 호크마(Hokma).

외눈박이 대머리 거인을 한 발에 죽였다는 전설의 활.

사용자의 힘으로 끝없이 강해지는 화살을 만드는 활이었다.

물론 그 한계는 존재하는 법.

이미 죽어가는 아르나로서는 키울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에 드래곤의 목숨을 끊는 것도 제법 괜찮겠네요."

그녀는 '섬광'답게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벨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죽음을 각오했다는 게 여지없이 느껴지니 견디기 힘들었다.

"마지막 아닙니다."

우우우-.

카인의 세검이 조금씩 떨리면서 묘한 노랫소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블랙 드래곤 아르후안이 내뿜는 어둠의 힘으로만 가득하던 해안이 뒤바뀐다.

"시작입니다."

팟-!

눈부신 순백의 빛.

카인의 오러가 어둠을 밀어내고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빛의 영역에 닿자 움츠러들고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울부짖는 아르후안.

태어나면서부터 숨 쉬는 것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용종답게, 녀석의 주위로 어둠의 구체가 생겨났고.

콰앙-!

쏟아지는 비처럼 카인 일행을 향해 떨어졌다.

아벨은 아르나와, 올리시렌은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에셔와.

그리고 카인은 가장 앞에서.

투웅-.

어둠을 튕겨 내면서 소리쳤다.

"이소엘-!"

"예스, 로드 에셀레드!"

공주만을 바라보는 기사.

그리고 올리시렌과 한 몸으로 그녀를 지키고자 무거운 짐을 감수하기로 한 그녀는 귓불이 찢어지도록 귀걸이를 잡아당겼다.

쿠-웅-!

귀걸이가 명멸한다.

아르후안이 어둠이고 카인이 빛이라면 이소엘이 쥔 귀걸이에서 흘러나오는 건 무색의 마력!

아이리안 왕국의 삼대 보물 중 하나이며 모든 철을 뭉갠다는 망치, 크레드네(Credne)가 본모습을 보였다.

"호크마에 크레드네라니."

카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없었다.

저 아르후안 한 마리에게 질 자신이!

이소엘의 전신에서 푸른빛의 오러가 터져 나온다.

꽈아아아악-.

세게 쥘수록 그 빛이 더욱 짙어졌고, 그녀는 중갑 아래 숨겨진 모든 근육을 쥐어짰다.

그리고.

팟.

이소엘이 달리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 위로 마력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양발이 닿는 곳마다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망치 크레드네의 압력이 어느 정도인지 엿보이는 수준!

후우우웅-!

밀려드는 어둠의 구와 아르후안의 살기 속에서 이소엘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인간치곤 빠르다.

하지만.

데구루루르-.

아르후안에겐 평범한 속도.

블랙 드래곤의 거대한 검은 안구가 그녀를 따라 움직이고, 날카로운 손톱이 붙은 짧은 팔이 움직일 때.

꿈꾸라.

항거할 수 없는 명령이 아르후안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떨어진다.

카인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올리시렌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아르후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꿈꾸라-!

주르륵-.

올리시렌의 눈, 코, 입, 귀를 비롯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찐득한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카인은 이제야 전생에 둘이 왜 밴더빌트 하나만 데려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녀로 각성도 안 했는데, 이렇게까지 힘을 쓸 수 있다고?'

혀를 내둘렀다.

각성하지 않은 마녀는 초보 마법사나 엑스퍼트도 되지 못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올리시렌은 조금이나마 개방된 마녀의 마력을 격렬하게 불태우며 무려 블랙 드래곤 아르후안의 행동에 간섭했다.

올리시렌이 보이던 묘한 자신감.

이소엘이 목숨을 던지겠다 말한 충심.

'반쪽짜리 블랙 드래곤을 상대로는 충분해 보이는데, 이전엔 왜 실패한 거지.'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아르후안이 올리시렌의 언령 때문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이소엘이 아르후안의 대가리를 망치 크레드네로 후려 깠다.

그러자 엄청난 폭음이 귀청이 찢어질 듯 울렸다. 허공을 날던 아르후안이 휘청이며 대지로 내려온다.

바로 제 자세를 잡았지만.

콰아아아아아아앙-!

망치는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탄 이소엘은 두 손으로 크레드네를 붙잡곤 못이라도 박는 듯 계속해서 후려쳤다.

그녀의 무게와 중갑의 무게 그리고 크레드네의 중압에 녀석은 이소엘을 떨어뜨리지 못했고.

쿠우우웅-.

녀석의 거대한 몸체가 해안으로 떨어졌다.

"쳐어어어-!"

올리시렌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벨이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서 튀어 나갔다.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루 델바흐 Lugh­ Delb­aeth.

첫 번째 공격은 비늘을 뚫지 못하고 튕겼다.

그러나 이어지는 연격은 결국 아르후안의 비늘을 바스러뜨렸고.

손아귀가 찢어짐에도 멈추지 않던 아벨의 세검이 아르후안의 왼쪽 관자놀이를 쑤셨다.

그다음은 밴더빌트였다.

로 마이어 Lo Meyer.

하늘을 쑤실 듯 치솟는 대검!

그리고.

콰아아앙-!

노기사가 모든 생과 힘을 다해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

아르후안의 오른쪽 대가리가 뭉개지며 으스러졌다.

일격에 모든 힘을 다해서 내리찍는 최강의 수직 베기 '로 마이어'였다.

물 흐르듯 이어진 연계.

올리시렌의 간섭기와 이소엘의 망치질이 아르후안을 땅으로 내리꽂았고, 아벨과 클로이드의 공격이 결국 목숨을 끊었다.

왕녀 올리시렌은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폭풍활을 든 채 고요히 바라보는 아르나와 백색의 오러를 흘리는 카인을 향해 소리쳤다.

"이겼어, 이겼다고!"

하지만 카인은 담담한 얼굴로 고요히 어두운 수면과 저 먼 수평선을 응시했다.

"그럴 리가."

만약 이렇게 쉽게 끝났다면 전생의 밴더빌트는 죽지 않았으리라.

- 두 번째 밤이 시작됩니다.

"크아아아아-!"

검은 바다는 해안에 죽어 가는 '아르후안'과 똑같은 블랙 드래곤을 만들었고.

"크아아아아-!"

이번에는 두 마리였다.

#20 Ep.Ⅰ-4

봄날은 간다 (3)

두 마리의 블랙드래곤.

그들의 존재감은 물 흐르듯 완벽한 연계로 한 마리를 잡은 기쁨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카인은 당황하지 않고 외쳤다.

"이소엘!"

드래곤 레이드의 핵심은 전장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것.

카인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아까처럼 크레드네로 땅으로 내리라 명령했다.

"한 마리밖에 안 됩니다!"

이소엘은 덜덜 떨리는 팔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아까 전 전력을 쏟았지만, 다시금 힘을 끌어 올린다.

한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기사였으니까.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리면 충분해. 나머지 하나는 나랑 에셔가 맡는다."

처음 참여하지 않았던 인원은 카인, 에셔, 아르나였다. 아르나는 반사적으로 폭풍활 호크마를 들었지만, 카인은 손을 뻗었다.

"일단 지켜보시죠."

"위험합니다!"

카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리고 잔잔한 검은 바다와 별 하나 없는 밤의 하늘, 펄럭이는 두 마리의 블랙드래곤을 훑었다.

"아직 위험하지 않은 걸 수도 있습니다."

아르나는 입을 벌렸다.

평화가 그녀의 감각을 녹슬게 했을지라도 경험은 녹슬게 하지 못했다.

"설마?"

용병으로서 참여했던 던전 레이드의 경험 중 가장 끔찍했던 하나가 떠올랐다.

"아직 모릅니다. 잡아봐야겠죠."

파지지지지직-.

카인의 전신에서 순백의 뇌전이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혈관을 잡아먹고 근육을 찢어발기며 뼈를 강화하는 '겨울'의 힘.

그의 보랏빛 눈에서도 뇌전이 튀겼다.

"에셔."

"네-!"

누구를 어떻게라는 명령 따윈 사치.

"지켜."

에셔는 그의 몸만 한 방패를 들고 원거리에 있는 아르나의 앞으로 향했다.

이소엘이 기사라면 그 역시 기사.

평화와 안이한 생각이 그를 삐걱대게 했지만, 카인이라는 주군과 밀어닥치는 위협이 기사로서 에셔를 각성시켰다.

"예스, 마이 로드."

카인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가능하겠어?"

꽈아아악-.

그녀의 하얀 손이 주먹을 쥔다. 정련되지 않은 마녀의 마력이 그녀의 내부를 헤집어 일어나는 피와 달리.

뚝, 뚝-.

그녀의 주먹에서 흐르는 피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내는 의지의 붉은색!

"반드시."

카인과 일행들은 각자의 자리를 잡는다. 카인은 의지를 불태우는 올리시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 마디를 건넸다.

"유어 그레이스."

당신의 은혜를 위하여.

왕녀라는 속박을 넘고 마녀라는 사슬을 자신의 두 손으로 끊어버리려는 그녀를 향해 카인이 보이는 경의였다.

올리시렌은 피범벅이 된 얼굴임에도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그녀 역시 에셀레드의 온전한 지배자이자, 이 전장을 지휘하는 그를 향한 경의를 보였다.

저벅-.

순백의 뇌전을 휘감은 카인이 앞으로 나선다.

그 순간.

"크아아아아아아-!"

두 블랙드래곤은 카인을 돌아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 앞으로 만들어지는 암흑의 구!

아르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브레스-! 피해요!!"

드래곤은 그 단단하고 거대한 몸도, 숨 쉬듯이 쓰는 마법도 강력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용의 숨결, 브레스.

자신이 가진 마력을 한 점으로 집중하여 쏘아내는 파괴의 빛.

아르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움찔했지만, 정작 그 브레스의 경로에 있는 카인은 고개를 들었다.

끔찍하게 모여드는 어둠의 마력들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벨은 온 피부가 일어날 정도로 요동치는 암흑의 파동에 소리쳤다.

"형님-!"

"잘되었어."

"드래곤의 브레스란 말입니다!"

아벨의 절규에도 카인은 고개만을 끄덕였다.

쿠웅-.

내뻗는 왼팔.

세검을 쥔 채 든 오른팔.

모든 신경을 내달리는 순백의 뇌전.

파지지지지직.

몸을 낮춘다.

드래곤의 입이 더욱 벌어진다.

온통 흑과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에 단 하나의 불빛처럼 뇌전이 명멸했다.

"형-님-!"

아벨의 절절한 외침.

그는 보다 못해 에셔의 방패를 들고 튀어 나가려 했다.

척.

그러나 아벨은 올리시렌 왕녀에게 팔을 잡혀 움직임을 제지당했다.

아벨은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겠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올리시렌은 아랑곳 않고 카인만 보며 말했다.

"저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저럴 리가 없어요."

"그건...."

"그대는 동생 아닌가요? 믿어보세요, 당신의 형님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올리시렌은 언제고 힘을 쓰기 위해 팽팽히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브레스 Breath.

콰아아아아아아-.

두 마리의 드래곤이 동시에 어둠의 브레스를 쏘아냈다. 좌우에서 몰아치는 파괴의 빛에 카인은 눈을 감았다 뜨며.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횡으로 세검을 그었다.

세상을 찢어버릴 것 같은 폭음을 내뿜는 브레스와 다르게 아무런 소리조차 없었다.

그저 좌에서 우로.

가느다란 세검 하나가 횡단했고.

파삿-.

몰아치는 뇌전의 힘을 견디지 못한 채 부러졌다.

하지만.

[미래가 조금 소모됩니다.]

부족한 만큼은 『사계』의 '겨울'이 카인의 미래를 먹고 채울지니.

파지지지지지지직-!

몰아치는 어둠의 숨결을 가르는 달빛이 뻗어 나왔다.

필립을 반으로 갈라버렸던 당시보다 더욱 크고 밝아진 키리에는 단숨에 둘의 브레스를 자르며 나아갔고.

스읏-.

드래곤의 머리를 반쯤 파고들곤 사라졌다. 허공에 떠 있던 두 드래곤은 예상치도 못한 상처에 중심을 잃었다.

"쳐-!"

카인의 외침.

그 순간 이소엘이 크레드네를 쥐고 오른쪽 드래곤으로 향했다.

카인은 왼쪽의 드래곤을 향해 몸을 내던졌고, 순백의 뇌전에 휘감긴 그는 마법처럼 드래곤의 위로 치솟았다.

꽈아악-.

쥐어지는 주먹.

검은 사라졌지만, 무기가 사라진 건 아니다.

카인은 그대로 자신의 오른손에 순백의 뇌전을 집중 시켰다.

어떤 화려한 비기나 검격도 아닌.

그저 인간이라는 종족이 태어나면서부터 내뻗던 주먹질이.

콰아아아아앙-!

그대로 꽂혔다.

이소엘이 크레드네로 몇 번이고 후려 까고서야 내려오던 드래곤이었는데, 카인의 주먹질 한 방에 대지로 처박혔다.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의 비늘이든 드래곤의 두개골이든 상관없이 두 주먹으로 계속해서 후려쳤다.

드래곤의 검은 피.

검은 뼈.

그리고 검은 속내.

그 모든 걸 바스러뜨리는 모습.

이 모습을 본 자에게 피에 미친 악마를 그리라면 방금 카인의 모습을 그리리라.

반대로 최전선의 전사들은 자랑스럽게 그를 가장 높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그는 완벽한 전사였다.

카인은 드래곤의 숨통이 끊어진 걸 확인하고서야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저쪽도 다 되었군."

이소엘의 크레드네.

올리시렌의 언령.

틈을 노리는 아벨의 아르드바르와 단숨에 넓은 면을 베어버리는 밴더빌트의 로 마이어.

쿠웅.

아르나의 폭풍활 없이도 두 마리의 블랙드래곤을 잡는 건 순식간 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밤이군요."

아르나는 씁쓸히 말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해안에 드래곤의 시체 세 개가 생겼을 뿐.

- 세 번째 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일어나는 세 개의 포말.

"크아아아아아아아-!"

세 마리의 아르후안이 나타났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짠 일행들은 그 앞에 절망하며 무릎을 꿇었다.

더는 힘이 없었다.

이길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멈추지 않았다.

꿈꾸라-!!

폭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온 몸의 모든 피를 쏟아내면서도 두 눈에 힘을 주면서 드래곤들을 멈춰 세웠다.

"대단하구나."

다시금 몰려드는 나비들과 울리는 프리문디의 목소리.

그녀는 세 마리의 드래곤 사이에 나타났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힘이 부족한 걸. 아흔아홉 번째의 마녀여. '탄식'하라. 이 세상 모든 탄식이 네 힘이 되어 줄 테니."

올리시렌은 피를 토했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땅을 디디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죽은 피를 토하곤 카인을 바라봤다.

"네가 할 말을 뺏어도 될까?"

"물론."

그리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들어 올리곤 프리문디를 향해 중지를 들어 올렸다.

"지랄하네."

마녀, 프리문디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상상도 못 한 올리시렌의 반응이 퍽 즐거운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운명이 바뀌었구나. 본래 두 번째 밤에 절망하고 아르후안의 힘을 받아들여 탄식해야 할 '아득한 탄식'의 마녀가!"

그리고 돌아가는 고개.

투창처럼 쏘아지는 눈빛. 그 끝엔 덤덤히 서 있는 카인이 있었다.

카인은 자신의 흑발을 뒤로 넘기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프리문디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게 물들어 버렸어."

"저 아가씨 성격은 원래 저랬어. 네가 몰랐을 뿐이지."

프리문디의 웃음이 지워진다.

카인을 찬찬히 살펴본다. 이어서 이미 죽은 세 마리의 드래곤을 살펴보다가 다시금 카인에게 말했다.

"그저 '겨울'의 주인이 아니야. 너는 죽어야 할 자를 살리고 살아야 할 자를 죽이며 미래를 바꾸는 '세상의 대적자'로구나."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머리는 맹렬하게 돌아갔다.

'퀘스트 창의 내용이다.'

아르츠위버 봉토로 오기 전 봤었던 퀘스트 창에 분명 프리문디가 했던 말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모른다는 듯 인상을 쓰며 반문했다.

"그게 뭐지?"

프리문디는 기가 찬 듯 대꾸했다.

"이번엔 모른다는 작전인 게냐."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안다고 하나."

카인의 시치미에 프리문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저 먼 끝에 있는 검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닿지 못할 수평선의 마녀.

그녀에게 허락되는 건 바라보는 것 뿐. 수평선으로 손을 뻗어 쥐어보고자 했던 그녀는 허공만 잡다가 카인을 향해 말했다.

"이미 지나가서 고정되어 버린 세상을 바꾸는 자를 대적자라고 한단다."

"세상이 지나갔다?"

"현재에 쓰이고 과거에 쓰였고 미래에 쓰일 모든 가능성이 세상 하나에만 있다면 너무나 아쉽지 않느냐."

카인은 깨달았다.

첫 번째 퀘스트에서 '회귀 취소'가 나왔던 것과 이번엔 '사망'으로 나왔던 이유를.

'세계선 고정도가 부족했다면 그때로 돌아갔다는 것인가....'

용사 아벨의 심장을 찌르던 순간.

아벨과 결혼을 하려던 철혈황녀가 경악하고 성녀가 절망하며 온 세상이 자신에게 달려들던 헤네랄리페의 퍼레이드.

카인은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회귀는 모든 걸 해결해주는 정답이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준 것뿐.

그 사실을 프리문디의 말로 실감해버렸다.

그 잠깐의 표정변화를 눈치챈 듯 프리문디는 슬쩍 비웃음을 지었다.

"이젠 뭔지 아는 눈치구나, 어린 에셀레드여."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더는 나설 힘이 없는 일행들과 제 목숨을 불태워서 활을 쏠 준비가 된 아르나를 눈에 담았다.

"바뀐 건 없어."

각오를 세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하나. 작은 어머님을 저주에서 해방하는 것."

"넌 '마녀의 밤'을 방해해서 나를 협박하고자 하는 거 같았는데."

프리문디가 팔을 뻗는다.

올리시렌의 언령이 흐려진다.

그 순간 세 마리의 블랙드래곤이 요란하게 그르렁- 소리를 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안 될 것 같다만?"

카인은 프리문디의 말에 씨익 웃었다. 그 누구보다 쓸쓸하고 고독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어제 말했지. 네 수평선에 닿겠다고."

수평선은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그만큼 멀어지는 것.

절대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하는 게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의 기원이며 이명이었다.

"닿는다면 네가 바라는 모든 걸 다 해 주마."

마녀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빼놓지 않고 수평선에 닿고자 했기에, 프리문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닿아서 저 빌어먹을 당신의 수평선을 부숴주지."

"맘대로 하거라. 본래 인간 남자가 입만 산 건 내가 잘 아는...."

프리문디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어둠과 검은색으로만 가득하던 세상에 유일하게 이질적인 빛을 내뿜던 카인을 중심으로.

보기만 해도 얼어버릴 것 같은 한기가 흘러나왔다.

카인은 허공을 손가락으로 찍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겨울이여."

[다량의 미래가 소모됩니다.]

[『사계』가 선택을 재고하길 바랍니다.]

[정말 '겨울'을 일으키시겠습니까?]

"바뀐 건 없으니까."

#21 Ep.Ⅰ-4

봄날은 간다 (4)

「"형님은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사시면 됩니다."

바닷바람이 불고, 푸른 잡초들이 그 박자에 따라 눕는 절벽 위.

카인은 웃었다.

"좋구나."

"그 삶에서는 어머님도 구해 주시면 더욱 좋고요."

"당연하지. 작은어머님을 구하는 건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어."

아벨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인을 불안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너무 선선한 태도.

죽음을 바라고 누구도 가 보지 못했던 모험의 길을 가라고 등 떠미는데 거절하지 않는다.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아벨은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어째서 에셀레드로 돌아오신 겁니까."

카인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묘지에 다 부어서 비어 버린 술병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아벨은 답답한 듯, 한 번 더 물었다.

"사실 제가 부탁한다고 형님이 해 주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럴 정도로 쉬운 일도 아니고요."

"그렇지."

"그런데 왜...."

카인은 아르나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세월에 닳고 닳아 버린 보랏빛 눈에 비치는 하얀 묘지.

그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

카인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뀌는 건 없으니까. 아무것도."

최전선이 사라진 시대.

전사의 힘이 영광이 아니라 돈에 팔리는 지금.

가면의 설원공, 카인은 무엇을 바라보고 생각하는가.

그건 용사라도.

제아무리 대단한 권능으로도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진심이었다.」

* * *

차갑다라는 개념이 맹렬하게 갱신된다.

겨울의 한기는 생명을 멈추게 하고 바다의 표면을 얼린다.

그러나 지금.

카인이 허공을 찌르자 울려 퍼지는 순백의 힘은 바다 깊숙한 곳까지 단번에 얼리고 공간마저 얼리는 극한(極寒)이었다.

프리문디는 경악했다.

늘 여유 넘치던 그녀답지 않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액티브!"

"정답."

"이 무슨.... 그 어느 신기든 액티브를 쓰고서 멀쩡한 주인은 없었어!"

공기가 침묵한다.

바람이 흩어진다.

온 세상이 멈추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카인은 씨익 웃었다.

"알아. 나도 들었어."

열기를 뿜던 모든 것들의 진동이 사라지고, 겨울이 그리는 순백의 허무가 카인을 중심으로 천천히 뻗어 나갔다.

"말했지? 내가 그 빌어먹을 수평선이고 뭐고 다 부숴 버리겠다고."

"네놈-!"

프리문디의 발악적인 외침.

동시에 그녀의 뒤에 있었던 세 마리의 블랙드래곤이 경주마처럼 쏘아졌다.

카인이라는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하지만 카인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몰라도.

[미래가 급격히 소모됩니다.]

'오늘을 위하여.'

바뀌지 않는 다짐을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는 전사에겐 어렵지 않은 적!

파사사사삿-.

블랙드래곤의 몸체.

강철조차 이겨 내는 단단한 비늘조차도 세계를 멈추게 만드는 순백의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휙.

카인이 손을 뻗는다.

순식간에 얼어 버린 블랙드래곤이 천천히 얼음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프리문디, 밤의 온도를 아나?"

마법도시 <릴>의 푸른탑주가 올지라도 보일 수 없는 경이였다.

이미 일행들은 한기가 닿지 않는 곳까지 도망쳐서 떨리는 눈동자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아르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공자님, 왜...."

상상을 초월한다.

신기를 얻은 자도 드물었지만, 그 신기를 이렇게까지 활용하는 자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가을'을 지닌 성녀는 머리에 쓰고만 있을 뿐 진짜 힘을 끌어내진 못한다.

'여름'의 성검은 주인을 찾지 못해 성국에서 잠자고 있다.

'겨울'은 최전선의 로드이스트가 휘두르고 있다.

그렇다면 카인이 쓰는 신기는 무엇인가.

마녀의 말대로 정말 '겨울'이라면 지금 어떻게 되는 건지, 아르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간절함이 카인을 저렇게 만드는가.

그것도 아르나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분명한 건, 강한 힘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법.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는 일행들을 진정시킬 겸 말했다.

"끼어들 틈이 없군요."

"저 녀석이 뭘 하는 건지 아시는 거죠?"

올리시렌의 물음.

아르나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끄덕였다.

"희생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카인은 일행들이 멀리 떨어진 것을 슬쩍 보곤, 얼어붙어 죽어 가는 블랙드래곤 뒤에서 경악하는 프리문디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 시작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놀라면 쓰나."

"네놈 도대체 정체가...."

파지지지직-.

카인의 전신에서 튀어 오르는 순백의 번개.

그 하얀 궤적에 따라 극한이 퍼져 나가면서 모든 게 정지되었다.

쩌저저저저적-.

드래곤조차 삼켜 버렸던 '겨울'의 한기가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래가 급격히 소모됩니다.]

카인은 어른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가진 비장의 수.

희생을 각오한다면 쓸 수 있는 '겨울'의 법.

밤의 겨울 Winter of Night.

한기가 카인에게 모여든다.

겨울이.

바다마저 단숨에 얼려 버리는 극한의 힘이 그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의 얼굴 위로 눈을 가리는 새하얀 가면이 피어나고, 등 뒤로는 펄럭이는 순백의 망토가 펼쳐진다.

가면의 설원공.

피의 설원을 지켰던 최강의 전사.

카인 로드이스트.

그의 진면목이었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아르후안이 얼어붙더니 그대로 으스러졌다.

- 네 번째 밤이 시작됩니다.

곧장 검은 바다에서 네 마리가 튀어 오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카인에게서 비롯되는 극한에 닿자마자 나오지도 못하고 얼어 죽었으니까.

카인은 수평선까지 바다를 얼려 버리는 '밤의 겨울'을 펼치며, 당황하는 프리문디에게 말했다.

"넌 말했지. '수평선에 잠들은 아르후안'이라고."

프리문디의 말 중 묘하게 걸리던 부분.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야 그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미 블랙드래곤은 그때 바다 밖으로 나와 있었어. 그렇다면 진짜 아르후안은 이 바다 아래지?"

- ■번째 밤이....

끔찍했던 그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미 얼어 버린 바다에선 아무것도 태어나지 못하는 법이니까.

바다 아래 잠들어 있을 진짜 '아르후안'조차 카인이 일으키는 극한에 저항하지 못했다.

귓가가 울린다.

온몸이 불타는 듯 찢어질 것 같았으며, '겨울'의 액티브를 시도하면서 영혼조차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적이 앞에 있다.

아군이 뒤에 있다.

가장 앞에서 싸우는 자는 늘 당당해야 할지어니.

그렇기에 카인은 웃었다.

우우우우우-.

'겨울'의 액티브 '밤의 겨울'이 아르츠위버 해안을 뿌리 끝까지 얼렸다.

프리문디는 주춤거리면서도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고자 했다. 카인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수평선의 마녀여."

"...!"

"수평선은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닿을 수 없지."

세검은 부러졌다.

그의 두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카인은 대검을 두 손으로 쥔 양 양손으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단숨에 상대를 수직으로 갈라 버릴 듯한 자세였다.

프리문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계속 물러났지만, 막혔다.

아무리 대단한 마녀라고 할지라도 모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별조차 없는 밤하늘과 어두운 바다는 결국 그녀의 '기적'으로 만들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카인은 저 멀리 점처럼 작게 보이는 프리문디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곤 수평선까지 꽝꽝 얼어 버린 바다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부숴 버리는 건 간단해."

하얗게 얼어 버린 검은 바다.

그러자 그 아래 도사리고 있건 밤의 드래곤, 아르후안의 거대한 동체가 보였다.

튀어나왔던 건 저것의 발톱만 할 정도로 진정한 드래곤이 밤의 바다에 도사리고 있었다.

파지지지지지직-!

액티브(Active), 밤의 겨울.

세상을 얼려 수평선까지 멈추게 했고.

패시브(Passive), 순백의 뇌전.

카인의 온몸을 헤집으며 그의 의지에 따라 몸집을 불렸다.

[너무 많은 미래가 소모됩니다.]

심지어는 마검이라 불리던 '겨울'조차 만류할 정도로 거대한 미래가 빨려 들어갔다.

카인은 앞과 뒤를 훑어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보다 중요한 건 지금 살아가는 오늘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으리라.

또한 언젠가 좋아질 거라 기대하면서 지금의 고통을 감내하지도 않으리라.

소년 카인이 아니라 삼십 년을 넘게 밑바닥을 전전하던 어른 카인이 얻어 낸 삶의 방식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온 세계가 카인이라는 한 점에 의해 일그러진다.

그 모습에 프리문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수백 년간 바라던 것.

닿을 수 없었던 수평선을 드디어 이 시대의 사람이 닿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카인은.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초승달의 빛을 쏘아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저 적을 베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베어 내고,

콰가가가가가가-.

얼어붙은 바다를 반으로 조각내며, 그 아래 도사리고 있던 아르후안의 몸체마저 반으로 갈라 버리는 위대한 빛!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밤도 갈라 버리는 수직의 광선이 뻗어 갔고.

쩌적-.

저 멀리 보이던 수평선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프리문디는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실망했다.

"닿긴 했지만, 부수진 못했구나."

카인은 힐긋 그녀를 바라보고는 다시 수평선을 향해 섰다.

키리에가 수직이었다면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어 수평으로 쥐었다.

그러곤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프리문디, 기억해라."

그 웃음은 용사 아벨이 아르나의 묘지에서 보았던 그 미소였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카인의 두 손에서부터 폭풍처럼 뇌전이 일어났다.

그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번개가 쥐어진 것만 같아 보일 정도였다.

"에셀레드의 검은 두 번이야."

이 세상에 성국이 나타나기도 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기적이 있었나니.

그건 십자(十字)였다.

하늘과 땅을 잇는 두 개의 직선은 어둠을 가르는 빛이었고 기적의 현현-!

-자비를 베푸소서.

희망은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긴 시간 속에서도 변치 않았으며.

-신이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그 열망은 어떤 세상이 온다 해도 그대로였고 겨울의 주인들에게 어두운 밤을 헤쳐 나갈 작은 등불이 되었다.

그렇게.

암천일광 暗天一光.

외식 外式.

엘레이손 Eleison.

겨울의 태양은 드높고 날카로운 법.

이 시대 '겨울'의 주인은 카인이었다.

심장이 저릿하다.

관절이 타오르고 온몸의 뼈들이 삐걱댄다.

'참는다-!'

카인은 어금니가 부서지라 이를 악물었다.

한 번뿐인 순간.

지금뿐인 현재.

돌이킬 수 없는 시간.

한 번을 사는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다시 사는 사람에게 지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그렇기에 카인은 귓가를 울리는 미래의 소모는 개의치 않았다.

가장 완벽하고 반짝이는 지금을 위하여.

키리에와 정반대의 빛.

흡사 아벨의 아르드바르에서 터져 나오던 햇빛이 카인의 손에서 빚어지며 수평의 파동이 되어 퍼졌다.

십자격 十字擊.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의 달빛 키리에.

자신의 지금과 세상의 오늘을 잇는 수평의 햇빛 엘레이손.

두 검기가 어우러진 십자격이 얼어붙은 세계를 부수며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파스스스스스슷-.

시선이 닿는 저 너머의 수평선이 견디지 못하고 얼음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밤엔 다시금 반짝이는 별들이 돌아왔고, 색을 잃어버렸던 해안으론 저 멀리서부터 본래의 바다가 떠밀려 왔다.

어느새 시간이 흐른 건지 깨어지는 틈새로 어슴푸레한 군청색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마녀의 밤'이 흩어졌고.

저 먼 천공에 떠 있던 프리문디가 깃털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쿵.

그 앞.

카인이 두 주먹을 쥐고 환하게 웃었다.

"약속을 지켜라, 마녀."

#22 Ep.Ⅰ-4

봄날은 간다 (5)

카인을 올려다보며 프리문디는 특유의 큰 눈을 깜빡였다.

사아아아아-.

'밤의 겨울'을 펼치며 반쯤 나타났던 카인의 망토와 가면이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새벽처럼 보이는 얼굴.

보랏빛 눈에 바람처럼 출렁이는 검은 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프리문디는 과거의 무언가를 추억하듯 카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척.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 끝엔 이곳으로 달려오는 아르나가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크윽-."

아르나는 그 순간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짙은 암녹색의 빛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빠져나온 암녹색의 힘은 프리문디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그녀의 피부를 녹색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프리문디는 악취를 지우려는 글루미엠의 저주를 흡수한 자신의 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글루미엠의 저주는 이제 사라졌단다. 다만 그간 상한 몸은 어쩔 수 없어."

저 멀리 아르나는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삽시간에 혈색이 좋아지는 게 보였다.

카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깔끔한 마녀군."

"내 기원을 이룬 그대에게 무엇을 속이랴."

"말투가 좀 오래된 연극의 대사 같아서 조금 그렇지만 말이야."

카인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프리문디와 눈을 마주했다.

수백 살 차이가 나는 마녀.

그러나 이렇게 마주하면 그저 몇 살 많은 연상의 여인으로만 보였다.

프리문디가 팔을 뻗어왔다.

카인은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거친 카인의 뺨을 쓸었다.

"'그'처럼 가련한 삶을 살고 측은한 길을 걸을 대적자로구나."

카인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떼면서 대꾸했다.

"그대는 그런 놈에게 졌지."

"패배?"

"그래."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직 몰라. 승패를 논하는 걸 보니."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르나의 저주를 풀었으니 자신은 목표를 완수했다.

하지만 프리문디의 묘한 말을 들으니 어딘가 찜찜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카인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지었지만, 눈에선 눈물이 맺혔다.

그러곤 한 방울씩 떨어졌다.

팅-.

땅에 닿은 마녀의 진심은 그대로 반짝이는 보석이 되었다.

"마녀가 왜 태어나는지 아느냐?"

"당신이 만드니까."

"그렇게 단순한 거라면 좋겠구나."

프리문디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보석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올리시렌을 손짓하여 가까이 했다.

"기억하거라, 마녀는 울지 못한단다."

그렇게 말하며 땅에 떨어진 보석을 주워들어 카인에게 보였다.

밤인데도 별빛을 반사하여 어딘가 찬란함을 품고 있는 듯했다.

"모든 마녀의 눈물은 이렇게 보석이 되어 버리지. 하지만 단 한 명, 첫 번째 마녀 카렌 마이어만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어."

"마녀의 눈물(Tear of Witch)이 설마 진짜 눈물일 줄은...."

가까이 온 올리시렌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카인이 돌아보자 그녀는 마저 말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신비의 보석이야. 낮에는 평범한 유리 같은데, 밤에 보면 유난히 더 빛나서 인기가 좋아."

"파티의 가장 맛있는 부분은 대개 밤에 일어나니까?"

"잘 아네."

"귀해?"

"꽤. 시장에 갑자기 한두 개씩만 나오는 보석이니까 이 나라에선 후작 부인 둘만 가지고 있을걸."

카인은 바닥을 구르는 프리문디의 눈물 중 하나를 집었다.

휙.

그러곤 올리시렌에게 던졌다.

"이제 셋이네."

올리시렌은 찜찜하다는 얼굴로 보석과 프리문디를 살폈다.

"눈앞에서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바로 받는 건 좀...."

"비싸다며."

"내가 너한테 뭘 말하겠어. 후."

프리문디는 특유의 백태 낀 눈으로 카인과 올리시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린 에셀레드는 어린 마녀와 꽤 친밀한 사이로구나."

"이게?"

"그게."

"...."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녀의 시작에 대해서 말하던 프리문디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모든 걸 놓아버린 여인의 눈빛으로 카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두 번째로 나타난 마녀는 맞지만, 어머니의 일은 잘 모른단다."

"카렌 마이어가 어머니?"

프리문디는 뜻을 알 수 없는 애매한 미소를 띤 채 계속 말했다.

"그리고 마녀가 되는 건 간단하단다. 어머니의 눈물을 한 방울만 마시면 되지."

올리시렌은 눈을 끔뻑였다.

첫 번째 마녀의 눈물이라면 아무리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에 남아야 한다.

하지만 올리시렌이 아무리 기억을 돌려 봐도 자신은 눈물을 마신 적이 없었다.

프리문디는 제 색을 찾은 바다를 가리켰다.

"강, 바다, 비, 우물. 그 모든 곳에 어머니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어."

카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바로 눈치챘다.

"설마 그냥 운으로 걸리는 거라고?"

"운이라면 운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그럼 물 마시다가 거기 우연히 카렌 마이어의 눈물이 있다면, 그럼 마녀가 되는 건가요?"

올리시렌은 기가 차서 재차 물었고 프리문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알게 된 마녀의 진실.

카인은 허술하디 허술한 이야기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순간 멍해졌다.

평생 마실 물에 수백 년 전의 여인이 흘렸던 눈물이 들어가 있을 확률은 운명이라 불러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라면 어떨 것인가.

카인은 올리시렌을 돌아보았다.

마녀로 각성하며 고생했던 그녀는 멍하니 프리문디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선택된 자들은 한 명씩 세계의 부정적인 일면을 맡는단다. 나 같은 경우엔 '절망'이었고 새로운 마녀가 될 그대는 '탄식'이어야 했지."

프리문디가 카인을 돌아보았다.

아르나를 살리겠다는 생각 하나로 마녀의 밤을 통째로 부숴 버린 괴물.

그녀는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조금 고민되는지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프리문디의 눈에 비치는 건 여전히 카인이었다.

물론 카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카인의 얼굴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꺼내 올리려는 것 같았다.

"많이 닮았구나, 어린 에셀레드여."

"누굴?"

"늙은 에셀레드를."

카인은 프리문디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에드먼드에게 들은 바가 없어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둘 이전의 에셀레드 중 마녀와의 접점이 있는 자는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특별한 가문도 아니고.'

물론 에셀레드 가문이 오래되긴 했다.

수백 년 전 대륙에서 건너온 초대 에셀레드가 세운 곳으로 나름 아이리안의 부침을 함께했다.

늘 기사들의 영지긴 했지만, 위치도 위치고 성격들도 대개 온후해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적도 없었다.

그저 작은 섬왕국의 작은 백작령에 불과한 자신의 가문을 프리문디가 언급하자 의아할 따름이었다.

사아아아아-.

프리문디의 손끝과 발끝부터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기원이 이뤄졌으니 더 존재할 수 없겠어."

그녀는 마녀답게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단단히 입을 다물었다.

"운만 띄우고 입을 닫는다는 건 나머진 직접 알아보라는 거지?"

카인은 그걸 눈치챘고.

"내가 여기서 다 말하지 않아도 네 삶의 사계절이 답을 인도할 테니."

프리문디는 태연히 대꾸했다.

끼룩-.

불길했던 까마귀들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지고 갈매기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원래의 바닷물이 돌아오면서 특유의 짭조름한 냄새가 은은히 퍼져 나갔고, 아침 특유의 개운한 온도가 일행을 감쌌다.

"끝이네...."

이 자리에서 온전한 마녀가 되지 못한 올리시렌은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금방이라도 뜰 것처럼 붉게 타오르지만 보이지 않는 지금.

새벽의 시간.

마녀 프리문디가 일출과 함께 죽음을 각오할 때.

척.

카인이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일행들이나 프리문디나 순간 놀라서 카인을 돌아보았다.

"입 닫는 건 자유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이야기해라, 마녀."

"후후. 네가 한 일? 승패? 마녀의 탄생? 어머니? 늙은 에셀레드? 무엇도 말해 주기 싫구나."

프리문디는 어린 조카를 다루듯 카인에게 장난처럼 대꾸했다.

카인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 번뜩이는 보랏빛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왜 수평선에 닿고 싶었지?"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 프리문디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바다의 수평선에 무엇이 있길래 네 기원까지 된 거냐."

"어린 에셀레드에겐 아무 쓸모없을 이야기일 텐데."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는 없다.

앞으로 남은 계획이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마녀가 말하기 싫다고 한 부분들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쓸모만을 계산해서 살아가는 삶은 버렸어."

두 번 사는 자만이 가진 특권은 삶의 방법을 정할 수 있는 것.

카인은 백작령에서 쫓겨나 대륙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약자를 등쳐야 했고, 쓸모를 계산해서만 움직여야 했다.

최전선에서도 역시 목숨을 저울에 올려 계산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살아 봤기에.

그 끝이 얼마나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에.

카인은 입을 열었다.

"마녀의 기원은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거라 안다. 수평선 너머에 네가 원하는 게 있나?"

"시시한 이야기란다."

"나는 그 시시한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지. '적'이니까."

프리문디는 고개를 숙였다.

"적...?"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팔과 다리가 사라지며 그녀는 바닥을 굴렀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세상에 그런 무지막지한 논리는 처음 들었단다. 적이니까 말하라고?"

"그래. 아마도 당신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적은 나다."

세상의 빛을 빼앗고 블랙드래곤을 마음대로 부리는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

그녀가 살아온 세월 동안 성국이 알짱거리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카인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똑바로 선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적(Enemy).

친구가 가깝다 한들 자신을 부수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적보단 가까울 수 없는 법.

프리문디는 이 순간, 적이라는 단어로 수백 년간 씻을 수 없던 절망이 진정으로 흩어지는 걸 느꼈다.

"넌 무기가 없더구나."

밴더빌트에겐 대검.

아벨에겐 세검.

아르나에겐 호크마, 이소엘에겐 크레드나, 에셔에겐 대형 방패.

올리시렌의 경우 그녀의 마력 자체가 무기였다.

그러나 카인에겐 무기가 없었다.

"아직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카인도 무기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매번 밴더빌트의 대검을 뺏어 쓸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아무 무기나 쓸 수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겨울'의 힘을 끌어다 써도 버텨 줄 검을 구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기에.

"내 적에게 무기도 없다니, 그건 두고 볼 수 없지."

우우우우우우웅-.

프리문디가 사라져 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나 그녀를 이루던 가루들은 흩어지지 않고 카인의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흑색의 검날.

한 자루의 검이 끝에서부터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세상 모든 '절망'을 벼린 것."

직선의 검이다.

끝은 한쪽이 올라가 있으며,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얇은 폭을 지녔다.

하지만 길었다.

웬만한 대검과 같은 길이에, 넉넉한 손잡이를 지닌 검이 카인의 앞에 꽂혔다.

카인은 흑색의 검을 쥐며 물었다.

"이것이 네 시시한 이야기인가?"

이제 프리문디는 목 아래까지 사라졌다.

그리고 카인의 말에 유언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그래. 시시한 내 모든 삶이지. 그렇기에 네 마음이 꺾일 때, 이 검도 부러질 거란다. 그날의 수평선처럼."

화아아아아-.

닿지 못할 수평선의 마녀, 프리문디.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해가 떠올랐다.

찬란한 햇살이 온 세상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카인을 비출 때.

-모든 '마녀의 밤'이 끝났습니다.

-아르후안이 사라집니다.

마녀의 밤이 끝났다.

카인은 담담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일출을 등지며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일행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집으로."

[클리어 조건 중 '올리시렌의 각성'이 실패하였습니다.]

[숨겨진 클리어 조건 '프리문디 에셀레드의 끝'이 성공하였습니다.]

[『멸망의 대적자 Ⅱ』의 일부가 『멸망의 대적자 Ⅲ』으로 승계되고 공개됩니다.]

[세계선 고정도 : ▲ 8.5%]

[보상 '...?'이 밝혀집니다.]

[절망검 '아그웨스카(Agweska)'가 『사계』와 연결됩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23

Chapter. 5 봄을 그리다 (1)

그 한마디를 뱉고 카인은 그대로 모래사장에 쓰러졌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올리시렌과 아벨, 클로이드. 그 뒤를 쫓는 다른 일행들.

정신이 혼미해지는 틈에도 카인은 미소를 지었다.

'혼자가 아니군.'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삶.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어떤 온기를 준다는 건지 알려 주는 삶이었기에 카인에게 그들은 소중했다.

* * *

성국, 헤네랄리페의 성황궁.

그 지하엔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푸슛-!

황동관들이 끊임없이 증기를 내뿜는 그곳의 가장 큰 벽에는 세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위로는 빠르게 명멸하는 불빛들이 움직였다.

"아르후안 등장했습니다!"

불빛이 서북쪽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상황을 지켜보던 신관이 소리쳤다.

"위치는 서북서! 아이리안 섬입니다."

그걸 바라보는 백여 명의 성직자들은 급히 자신들의 일에 집중했다.

아르후안이 일으키는 힘의 파동을 토대로 이번 마녀의 밤이 얼마나 강할지 측정해야 했으니까.

"마녀의 밤 시작했습니다!"

"뭐 이리 빨라! 이번 밤의 수준은?"

"7성급입니다."

"...최소 7성의 마녀가 탄생하는가."

순간 공동을 감싸는 정적.

웨에에에에엥-.

동시에 들어오는 사이렌 소리와 붉은 불빛.

쉬이이익-.

군데군데 삐져나온 동관의 틈으로 거친 증기들이 뿜어진다.

성국의 모든 기술이 합쳐진 이 공동의 가장 가운데 앉아서 지켜보던 붉은 옷의 추기경이 소리쳤다.

"가장 가까운 이단심판관은?"

"최근접 부대는 현재 상인도시 델프트에 있습니다."

중년인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지금 보내도 5일은 더 걸리는데! 7성급은 몇 년 만이지?"

휘리리리릭-.

한쪽 구석엔 오래된 책들이 굴러다니고 급하게 책들을 읽는 수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급하게 과거의 일을 찾다가 소리쳤다.

"40년 만입니다!"

"그걸 놓칠 순 없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심판관들에게 연락하라! 7성급 마녀가 아이리안 섬에...."

카인 일행이 아르후안을 잡고 두 마리가 나타나는 순간, 공동의 지도는 다시금 격변했고.

지도위 반짝이던 불빛이 아이리안 섬을 중심으로 천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서늘한 적색은 복잡하게 움직이던 성황궁 지하 공동에 침묵을 불렀다.

웨에에에에-.

의미 없는 사이렌 소리만 가득 채우고 이따금 빠져나오는 백색 증기가 그들의 숨통을 답답하게 했다.

신관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마녀의 밤, 8성급으로 진화했습니다...."

성국에 단 여덟만 존재하는 절대 권력자, 팔대 추기경.

그중 하나답지 않게 그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거대한 지도와 일렁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8성급 마녀가 탄생한다...?"

기원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위험한 기원을 지닌 마녀라면 성국에서도 피해를 각오해야 할 거대한 힘을 지닐 터.

추기경이 말을 잇지 못할 때.

턱.

지하공동 밖에서 들어온 여인이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마우로 세노초크 추기경."

이단심판성의 추기경 마우로 세노초크는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붉은 사이렌만 맴도는 지하 공동조차 가리지 못하는 미모, 이 자리에 있는 신관, 수녀, 추기경 그 누구와도 다른 복장.

성국에서, 아니 전 대륙에서 단 한 명만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은 여인.

찰랑이는 부드러운 은발에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푸른 눈을 지닌 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서, 성녀님!"

성녀, 카테리나 피오렐리.

그녀는 마우로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께선 저희가 이겨 낼 수 있는 어려움만을 주십니다."

그녀는 처음 겪는 8성급 마녀의 밤에 당황한 마우로 추기경을 대신해서 지휘를 시작했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8성급 마녀의 자료를 조사해 주세요. 공략을 짭니다. 그리고 당장 모든 전화와 수정구를 활용해서 아이리안 근처의 이단심판관들을...."

성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8성급이라는 충격에 휩싸인 지하 공동을 정리할 때.

카인 일행은 두 마리의 아르후안도 잡았고, 세 마리가 나타났다.

당연하리만큼 지도 위 불빛들은 요동쳤고 이내 하나씩 어둠으로 물들었다.

신관은 한층 더 절망 어린 목소리로 보고했다.

"9성급 진화했습니다...."

성녀 카테리나의 표정조차 얼어붙었다.

시작부터 9성의 잠재성을 지닌 마녀라면 어디까지 성장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그녀는 머리 위에 놓인 금빛 관을 만지작거렸다.

늘 외우던 기도문을 외우며 상황을 바라보았다.

"성녀님, 성전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종등급까지 한 발자국만 남긴 등급, 9성.

가뜩이나 마녀는 까다로운데, 그 탄생부터 9성으로 시작한다면 그 한계는 무시무시하리라.

마우로 추기경이 그녀에게 간언했다.

어떻게든 침착하려고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리안 섬왕국에 모든 인간을 죽이고 그 땅에 바닷물을 뿌려 모든 생명을 지워서라도 9성급으로 시작하는 마녀를 없애야만 합니다."

카테리나의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마우로를 향한다.

"추기경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 건가요?"

마우로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마주했다.

"무고한 자는 없습니다. 마녀와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이단이죠."

"오만입니다."

"하지만 9성급 재질을 가진 마녀가 본격적으로 '기원'을 깨닫고 '기적'을 펼치기 시작하면 그 여파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

"이게 최선입니다. 저 지역을 모두 죽이십시오. 해 봤자 섬왕국 따위. 작정하고 쓸어버리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마우로 추기경은 성전을 주장했다.

팔대 추기경 중 가장 과격한 쪽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현 상황이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성녀, 카테리나.

그녀는 자신의 긴 은발을 만지작거리면서 불 꺼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9성의 마녀의 밤이라면 정말 성전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있는 저울은 쉽게 기울지 않았다.

심판 중 죽을 무고한 자들의 무게와 대의.

성녀라도 어려운 선택.

시간이 흐른다.

밤이 지나고 9성급 마녀의 밤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다른 추기경들이 하나둘 공동으로 내려올 때.

그리고 본격적으로 프리문디가 등장해서 카인과 맞상대 할 때.

파삿-! 파사삿-!

지도 위의 불빛들이 하나씩 깨진다.

빛이 사라진 전구의 유리가 반짝이는 눈물처럼 깨져 떨어졌다.

상황을 관측하던 신관은 벌벌 떨며 말했다.

"9성... 초월."

"...."

그 순간 성녀는 머리 위의 관을 내리곤 두 손으로 쥐었다.

두근-.

사람의 심장처럼 금빛 관에선 기분 좋은 '가을'의 힘이 흘러들어 왔다.

묘한 안도감을 준다.

'가을'의 힘이 담긴 성류관이 주는 안도감은 전구들이 부서진 지도를 바라보며 말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신의 질서 아래 안정된 이 시대에 감히 마녀 따위가 날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녀님!"

전쟁을 주장하던 추기경 마우로는 신난 기색으로 소리쳤다.

"섬에 사는 사람들이 안타깝긴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생겼으니 움직여야겠군요."

"그럼 성전을...."

팟-.

공동의 모든 불이 꺼졌다.

그리고 들어오는 지도 위의 불들.

아이리안 섬 주위의 불빛은 진즉 전부 부서졌다.

그러나 몰려들었던 나머지 불빛이 찬찬히 처음의 자리로 향하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계속 말하던 신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책상 위의 자료와 지도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마녀의 밤... 로스트."

"마녀가 탄생했다는 건가!"

추기경 마우로가 소리쳤고,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마녀 탄생 직후 일어나는 기적이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마녀의 밤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

성녀는 다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성국은 지금껏 마녀를 만들어 내는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와의 긴 싸움을 지속해 왔다.

그중 단 한 번도 이런 결과를 얻은 적은 없었기에 다들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침묵할 때.

파삿-.

어디선가 전구가 깨지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푸슈슈슈슈슛-.

이번엔 앞이 아니라 뒤였다.

다들 고개가 돌아간다.

미친 듯이 증기를 토해 내는 관들. 그리고 공동 뒤에 마련된 아흔아홉 개의 전구 중 불이 들어온 건 몇십이 되지 않는다.

지금껏 나타났던 마녀들의 생명을 표시하는 불빛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언제나 켜져 있던 두 번째 마녀의 전구가 깨지며, 꺼졌다.

"닿지 못할 수평선의 마녀, 프리문디... 사망했습니다."

마우로는 멍하니 상황을 반복했다.

"마녀의 밤이 사라지고, 마녀가 죽었다?"

이게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명확하다.

성국이 수백 년간 이루지 못했던 간절한 소망, 밤의 소멸과 프리문디의 죽음.

"신이시여...."

카테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기도했다.

신의 왼쪽 자리에 있다는 성녀라지만, 단 한 번도 신과 조우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신의 의지가 있으리라 믿었고.

지금, 이 순간.

우우우우우-.

그녀가 들고 있던 성류관, '가을'.

그것으로부터 엄청난 금빛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녀 카테리나는 밀려드는 힘과 동시에 천천히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기 위치가 에셀레드 영지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던 눈이 어느새 '가을'의 금빛으로 물들어 번쩍였다.

그 모습이 무엇인지 아는 신관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고, 수녀들은 급하게 기록을 뒤적이며 카테리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아이리안 섬 남동부 에셀레드 백작령입니다."

"...아벨 에셀레드."

성녀는 계시처럼 순간, 머나먼 다른 세계선에 있을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

"가능합니다. 저 땅에는 미래의 용사님이 계시니까요. 아마도 그분이 처리하셨겠죠."

밑도 끝도 없는 성녀의 발언에 다들 멍하니 성녀를 돌아보았다.

다만, 성전을 주장하던 마우로 추기경만이 놀라서 반문했다.

"설마 방금 계시를...?"

"그리고 카인 로드이스트."

카테리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기억들은 전부 짙은 안개가 드리운 양 제대로 떠오르는 것 없이 몇몇 이미지만 생각난다.

하지만 마지막 날 보았던 흑색의 궤적은 선명하다.

먼 곳에서부터 검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던 흑발의 사내.

번쩍이던 순백의 뇌전.

모든 걸 포기해 버린 듯하던 보랏빛 눈.

두 손으로 쥔 마검.

그녀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겨울의 마왕과 함께 계십니다."

마왕이었다.

우우우우-.

한층 더 빛나는 '가을'의 빛.

세계선을 뛰어넘는 기억이 <사계절의 신기> 중 성류관 '가을'을 통해 그녀에게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카테리나는 에셀레드 영지가 있을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용사님과 마왕이 함께 있는 저곳으로."

쿵-.

금빛 서기에 휩싸여 계시를 말하는 성녀를 향해 모든 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미래가 없네.]

차가운 목소리.

카인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방금까지 아르츠위버 해안의 모래사장에 있던 자신이다.

'겨울'을 과다하게 사용한 만큼 기절했을 테고, 깨어나면 일행들이 있어야 한다.

[그대의 미래가 그렇게 펑펑 쓸 정도로 창창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들리는 건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도 아래도 옆도 없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물고기처럼 낡은 철액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 가운데.

낡은 외투를 걸치고 큰 대검을 등에 멘, 지쳐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알면서."

카인은 편하게 대꾸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누군지는 잘 알았으니까.

[하긴 '내' 일이니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자 얼굴이 빈틈없이 그어진 상처들이 꿈틀거렸다.

카인은 바닥을 디디며 일어섰다.

바닥이 없는 공간이지만, 바닥이라 생각하자 더없이 단단한 바닥이 되었다.

"너는 회귀하기 전의 나인가?"

생김새가 똑같았다.

그러자 상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겉만. 속은 딴 거.]

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도 뻔뻔하게 말하는 걸 보면 나랑 비슷한 놈이군."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두 쌍의 보랏빛 눈이 상대를 탐색한다.

아무리 자신을 마주했다고 한들 긴장을 놓지 않는다.

가장 믿을 수 없는 상대.

그리고 가장 강력한 적이 될 수 있는 상대는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둘 다 카인이라 부르면 헷갈리니 날 부를 땐 '봄'이라고 불러라.]

#24 EP.Ⅰ-5

봄을 그리다 (2)

-'봄'이라는 놈이 원래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에게도 없죠.

아벨이 남긴 그 말.

<사계절의 신기> 중 유일하게 존재부터 행방까지 아무것도 모르던 마지막 신기 '봄'.

스스로를 그런 봄이라 자칭하는 과거의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팔을 뻗는다.

금이 쩍쩍 간 철액자 하나가 그의 손에 쥐었다.

[이게 뭔지 아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를 하면서 세계선이 바뀔 때, 철액자 속 그림이 바뀌는 걸 보았다.

거기엔 언제나 삶이 그려졌었다.

"내 삶."

[역시 눈치가 좋아, 카인. '겨울'이 삼키는 미래는 생각보다 소중한 거야.]

스으으으윽-.

봄의 손이 움직인다.

피어나는 오색의 빛.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부서진 액자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그러나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것 역시 어리석어.]

"...."

[전에도 '밤의 겨울'을 신나게 썼지? 미래가 소모된다고 '겨울'이 아무리 말해도 실제로 네게 해가 온 적은 없었으니까.]

카인은 입을 닫았다.

그의 말이 정답이었다.

막연히 미래를 소모한다는 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건 알았지만, 직접적으로 어떤 일을 불러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스윽-.

봄은 부서질 것 같던 철액자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러자 철액자가 조금씩 원상태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네게 '겨울'을 전승한 스승도 말했다. 액티브를 사용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고.]

"너 정체가 뭐냐."

카인은 왼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어떤 무기도 없기에 주먹을 들었다.

스승과의 이야기는 적어도 이 세상에선 자신만이 아는 일.

봄은 쓰게 웃었다.

[근데 너는 몇 번이고 써도 괜찮았어. 지금처럼.]

봄이 줄어든다.

건장한 카인의 모습에서 어려지기 시작하더니 20대 중반 즈음 되는 청년이 되었다.

봄은 흑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네 '미래'를 대신할 수 있을까.]

"...!"

[한 번은 생각해 보라고. 네가 왜 용사가 된 동생의 가슴에 칼을 꽂게 된 건지 모르는 거 같아서.]

카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래를 희생한다는 건.

그저 좋지 않은 내일과 안 좋은 일을 겪는다는 수준을 넘어, 그 세계의 운명조차 뒤틀어 버리는 것이라는 걸.

하지만 카인은 두 주먹을 쥐면서 고개를 저었다.

"말장난이다. 아벨의 일은 아벨의 일이야. 내 미래가 용사의 운명까지 뒤틀었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럴 수도 있고.]

"만약 내가 조금 더 강했으면 아벨을 무력화시키고 홀로 성국에 쳐들어가 모두 죽여 버렸을 거야."

[그런 해결책도 존재했겠지.]

"아예 약했다면 이런저런 꼴 안 보고 길바닥에서 죽었을 테고."

[그런 결말도 있겠어.]

봄은 카인의 그 어떤 말에도 선선히 긍정했다.

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꿈을 꾸는 것 같이 나타난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느새 철액자는 처음처럼 멀쩡해졌다. 봄은 허공에 철액자를 놓으며 말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운명은 만드는 자의 것이 아니라 걷는 자의 것이니까.]

"그럼 난 지금처럼 살겠다."

카인은 봄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힘이 있음에 주저하지 않는다.

힘을 낼 수 있음에 멈칫하지 않는다.

미래를 아까워하지도 않겠다.

어차피 '내일'이라는 건 오지 않는 것.

언제나 '오늘'을 사는 카인에겐 알 수 없는 미래 따위보다 지금이 더 소중했다.

어려진 봄은 방긋 웃었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건 참으로 찬란하고 고귀하다.]

"...."

[하지만 남겨진 자들에게 네 희생은 상처라는 걸 기억해.]

꿈결처럼 세계가 흩어진다.

액자들은 순백의 새가 되어 저 먼 곳으로 날아가고, 스스로를 '봄'이라 칭하던 자는 손을 흔들었다.

[늘 지켜보마, 카인 에셀레드.]

그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봄과 같았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선 시원한 바닷바람이 들이치며 카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바람이 몇 번이고 그를 건드리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

에셀레드 영지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물수건을 쥔 채 카인을 걱정하는 올리시렌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지?"

"얼마 안 됐어. 아침에 기절했는데, 지금은 해가 위에 걸린 정오니까 그렇게 길진 않아."

카인은 눈물 자국도 지우지 못한 올리시렌의 얼굴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환자를 이렇게 마차로 옮기다니. 그러다 내가 골로 갔으면 어떻게 하려고."

순간 늘 뻔뻔하던 올리시렌의 얼굴이 허예졌다.

생각보다 과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카인이 당황했다.

올리시렌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인의 옆으로 와 상태를 살폈다.

"아직도 안 좋은 거야? 아르나 님이 몸에는 문제가 없다고 일단 성으로 돌아가자고 하셔서...."

척.

자신의 팔을 이리 쥐고 저리 쥐며 혼란스러워하는 올리시렌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놀리고 싶어서 해 본 거니까."

"너...."

하지만 올리시렌은 손을 빼진 않았다.

보랏빛 눈과 그녀의 안개꽃 같은 회색빛 눈이 서로를 마주한다.

만난 건 짧았지만, 겪은 건 무엇보다 두터운 둘.

둘은 피식 웃고는 떨어졌다.

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려 마차 밖을 보았다.

올 때와 똑같은 푸른 바다.

하얀 절벽.

초록색 초원 위의 소로.

그러나 달라진 것도 있었다.

+

『멸망의 대적자 Ⅲ』

'카인 에셀레드'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가장 고귀한 길로 수평선의 마녀, '프리문디 에셀레드'를 떠나보내는 기적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건 결국 타인이 겪어야 할 시련을 빼앗는 결과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가치를 판단할 순 없지만, 이제부터 나아갈 길은 오직 당신만의 것입니다.

또한 '겨울'의 액티브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계절의 신기>를 자극했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8.5%

클리어 조건 : 올리시렌의 각성, ■■, ■■.

성공 시 : 세계선 고정도 상승, ■■.

실패 시 : ■■.

*클리어 조건이 확정될 시 보상도 확정됩니다.

+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군.'

지금까지 나타나던 퀘스트들은 사건이 터지면 그 후 계산해서 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카인이 프리문디를 처치하는 건 예상치 못했는지, 미리 등장한 다음 퀘스트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

카인은 쓰게 웃다가 한 군데에 눈을 고정했다.

프리문디 에셀레드.

마녀도 원래는 평범한 사람이니 성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성이 '에셀레드'일 줄이야.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에셀레드와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집안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더욱이 프리문디가 보이던 묘하게 정감 있던 태도.

'이래서 그렇게 친절했나?'

처음에는 미쳐서 그런가 싶었지만, 이걸 보니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카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신비한 힘을 타고나는 가문은 대륙에 흔하다.

그런데 가문에 첫 번째 마녀 카렌 마이어와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가 같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알 리가 없지.'

카인이 기억하는 에드먼드라면 가문의 역사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카인에게 그랬듯.

친모였던 클로에 라마이닝에게 그랬듯.

가주라곤 하지만, 칼 휘두르는 것 말곤 무심했으니까.

성에 돌아가자마자 서고를 뒤져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스으으으-.

한기가 흐른다.

마차 바닥에 흑색의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

절망검 『아그웨스카』

마녀 프리문디가 어릴 적 보았던 '칼'을 따라 벼려낸 검.

'카인 에셀레드'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절망도 부러지지 않으리라.

*『사계』와 연결되었다.

+

평상시 주로 쓰던 대검은 아니다.

너무 얄팍한 폭이 아쉽지만, 길이는 충분해서 제법 마음에 들었다.

'부러지지 않는다니 다행이군.'

카인의 검술은 엄청난 힘을 한 방에 때려 박는 식.

따라서, 내구성이 꽤 중요했다.

이번에 아르후안과의 싸움에서도 세검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나갔으니까.

그렇다고 밴더빌트의 대검을 매번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기 급의 물건이 아니면 몇 번 버티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만큼 버텨 준다고 하니 카인으로선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을 태운 마차가 움직일 때, 카인을 한참이고 보던 올리시렌이 한마디 뱉었다.

"...고마워."

카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알아."

올리시렌의 눈이 가늘어진다.

"혓바닥이 반으로 잘렸나, 말이 뭐 맨날 짧아."

올리시렌 특유의 직설적인 표현에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짧게 말해도 통하잖아."

"그건... 그렇지."

올리시렌은 카인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마차의 밖이 보였다.

어느새 절벽의 외길이 끝나고, 에셀레드 성의 직할령이 시작되는 나무 목책들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그 모습에 올리시렌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네."

"네 집은 왕궁인데?"

"느낌이 그렇다고, 느낌이!"

카인은 피식 웃었다.

그 역시 이젠 많이 익숙해진 정겨운 에셀레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긴 시간을 헤매다 돌아온 땅.

그리고 최선의 오늘을 살아 새로운 과거를 만들고 있는 대지.

에셀레드의 영지에 들어섰다.

양을 키우거나 밭을 일구던 영지민들은 평소 보지 못했던 마차에 의아해하다가, 카인이 타고 나갔다는 걸 기억하곤 팔을 흔들었다.

올리시렌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시골이라서 그런가. 백작쯤 되면 나름 고위 귀족인데 영지민들과 거리가 없어 보이네."

"기차가 들어오고 상업이 발전하는 다른 곳과 여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대륙의 크로이츠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리안 왕국도 나름 의욕적으로 철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모든 지역을 이을 수는 없으니, 처음 시도한 건 왕도와 두 개의 후작령과 그리고 다섯 개의 백작령을 잇는 것이었다.

꽤 시간이 지난 만큼 다른 곳들은 기차로 오갈 수 있게 연결 되었다.

하지만 던전의 문제도 있고 에드먼드 백작이 이런 쪽의 계산에는 무딘 바람에 에셀레드 백작령에만 기차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릴 땐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카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증기를 내뿜는 기차와 끝없이 늘어져 있는 객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고 만남과 이별이 이뤄지는 기차역.

어린 소년의 가슴을 뛰게 하기엔 충분한 로망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카인이 기차역을 처음 마주한 건 파도에 떠밀려 가다 닿은 어느 작은 폐역이었다.

잃어 봤기에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이런 순박한 것도 나쁘진 않아."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박하다'는 표현.

늘 책에서만 접하던 표현이었는데, 에셀레드 영지에 와서는 실제로 사람에게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도시의 삶. 왕도의 사람들.

닳고 닳아 버린 자들은 절대 지닐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에셀레드에선 숨 쉬고 있었다.

"그러게. 기사들도 그렇고."

"왠지 마지막 말은 시비 거는 거 같은데?"

싸워야 하는 기사들이 순박하다는 건 모로 봐도 칭찬은 아니었으니까.

올리시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혀를 내밀었고, 카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 큰 왕녀가 이렇게 애 같아서는."

"진짜 애가 뭐래."

"그 애가 프리문디를 어떻게 했더라."

"...."

올리시렌은 차마 더 말을 못 잇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디 가서 말로 꿀린 적이 없던 그녀였지만, 카인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좀 더 달려서 성에 도착하고 맨 처음 본 건.

촤아앗-!

클로이드의 검이 허공을 그었고.

툭.

처음 보는 귀족의 목이 떨어져 땅에 구르는 모습이었다.

기사단장 클로이드는 핏물이 묻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공자님."

올리시렌은 피로 붉어진 바닥을 보곤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순박하다는 말 취소."

#25 EP.Ⅰ-5

봄을 그리다 (3)

이소엘은 자연스레 올리시렌의 앞을 막아섰다.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해치지 않을 걸 알긴 하나, 호위 기사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아벨 역시 카인을 대상으로 똑같이 하려 했다.

휘휘.

하지만 카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넌 저기 가야지. 부기사단장이잖아."

"그렇긴 하죠...."

아벨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게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인의 막무가내로 시작한 거지만 진짜 부기사단장이 된 이상 아벨의 올바른 자리는 저쪽.

일행들이 마차에서 모두 내려 각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카인은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를 불렀다.

"클로이드 단장."

"예스, 로드 에셀레드."

카인은 목과 몸이 분리된 기사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시체는 누구지?"

"라마이닝 백작가의 남작입니다."

라마이닝 백작가.

아이리안 왕국의 다섯밖에 없는 백작가 중 하나며.

'친어머니의 가문.'

카인은 이를 갈았다.

그 이름을 이 순간에 들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목과 몸이 분리된 그를 턱짓하며 재차 물었다.

"나머지 일행은 없나?"

"혼자서 라마이닝 백작님의 말을 전달하러 왔다더군요."

클로이드의 당당한 태도.

보통 전쟁 중에도 상대방의 사신은 죽이지 않는 게 예의인데, 그는 시원하게 죽였다.

치료하고 말 것도 없을 정도로.

카인은 그 점이 의아했다.

"내가 아는 자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려는 사람이었는데...."

클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옆에서 보면 답답할 정도로 우직하고 가만히 있으려는 게 클로이드다.

용맹한 가주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믿을 만한 바위겠지만, 그 홀로 있다면 모든 오욕을 뒤집어쓰기 딱 좋은 성격.

'실제로 답답도 하고.'

원래도 그런 성격에 나이까지 먹어서 카인은 클로이드가 늘 아쉬웠다.

그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에셀레드의 미래가 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달라져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기에 그 카인조차도 조금 당황했다.

"얘는 뭐라던데?"

"모릅니다."

클로이드는 떳떳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다른 기사들은 그게 잘났다는 듯 가슴을 쭉 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올리시렌은 슬쩍 카인 옆으로 와서 중얼거렸다.

"혹시 에셀레드 영지의 특산품 중에서 약 같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내가 어떻게든 덮어 볼게."

"이 땅이 그런 거라도 자라는 땅이면 좋겠네."

카인은 아벨에게 그랬듯 휘휘 손을 저었고, 올리시렌은 눈웃음을 지으며 떨어졌다.

그러곤 죽은 기사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카인은 그의 품을 뒤적였다.

그러면서 재차 물었다.

"내가 다시 묻지 않게 자세히 말해 봐."

"이자는 감히 공자님을 '카인 놈'이라고 불렀습니다."

멈칫.

죽은 자의 품을 뒤지던 손이 멈췄다.

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클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전형적인 기사답게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잘랐다?"

클로이드는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 바로 잘랐습니다."

"혹시 지금 나한테 말하는 사람이 클로이드 단장이 아니라 밴더빌트인가?"

자신만을 따르는 노기사, 밴더빌트라면 그럴 수 있다.

정확히는 밴더빌트라도 한마디에 이러진 않겠지만 백번 양보하면 가능하리라.

그런데 우유부단한 클로이드가 그 한마디에 검을 휘둘렀다고 하니 카인으로선 쉬이 믿기지 않았다.

쿵.

클로이드는 땅을 치며 차려 자세를 취했다.

쿵-, 쿵!

동시에 그를 따르는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똑같이 자세를 취했고, 아벨은 엉겁결에 그들을 따라 했다.

그리고 클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아벨 공자님을 부기사단장으로 들이실 때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변해야 한다는 걸요."

"...그러라고 넣은 거긴 하지."

쿵.

그러곤 주먹을 들어 심장에 갖다 댔다.

아이리안 섬에서 충성을 맹세할 때 하는 자세였다.

클로이드는 허리를 숙였고.

뒤이어 기사들도 카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가장 처음 정해야 하는 건 충성의 대상이었습니다. 기사에겐 무엇보다 주군이 필요했으니까요."

"그게 나다?"

"아니요. '에셀레드'입니다."

"...?"

클로이드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광기라고 부를 정도의 우직한 충성심이 그의 눈에서 번뜩였다.

"공자님은 백작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주군은 아닙니다. 하지만 에셀레드의 대표십니다."

카인은 눈을 끔뻑였다.

로드 에셀레드.

에셀레드 영지의 주인.

"내가 에셀레드의 현재 로드니까 나를 따르겠다?"

말장난.

하지만 그 클로이드와 그 에셀레드 기사단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린 결론치곤 제법이었다.

"예스, 마이 로드. 그러니 우리의 대표를 '놈'이라고 부르는 자는 살려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가 라마이닝 백작가와의 전쟁이라도?"

카인이 웃는다.

클로이드는 그를 마주하며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그랬지."

카인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기사도 주인도.

굳이 더 말로 서로를 알아볼 필요 없는 순간이었으니까.

둘은 처음으로 서로를 위해 움직였고, 이 순간 처음으로 하나의 에셀레드가 되었다.

슥-.

손끝에 걸리는 감각.

카인은 죽은 자의 품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자, 그럼 까 보자고. 인연을 끊었던 외할아버지, 라마이닝 백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주머니를 열자 들어 있는 건 한 장의 종이었다.

길게 글이 적혀 있었지만, 카인은 그걸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글로 똥 싸는 건 오랜만에 보는데."

척.

카인은 그것을 올리시렌에게 건넸다. 왕도의 정치판에서 구르던 그녀는 읽자마자 의중을 파악했다.

"로스 후작한테 빌어라? 빌지 않으면 식량 지원을 끊겠다? 참나.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후작이 의심을 하고 있으니 제 손주에게 미리 가서 사죄하고 해결하라니...."

그녀는 카인의 입을 통해서 로스 후작가 기사단과 필립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는 사건에 이러는 거면 라마이닝 백작이 괜히 제 발 저려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그래도 로스 후작이니 냄새를 맡았을 수도 있고."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우리가 무슨 일을 했나?"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리시렌은 늘 뻔뻔한 그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인은 손짓으로 뒤에 있던 기사들을 불렀고, 그들은 클로이드와 아벨 뒤로 질서정연하게 섰다.

"잘했다."

"...!"

어린아이가 왕도의 사탕이라도 선물 받은 듯 다들 얼굴이 환해졌다.

"기사라면 이렇게 지를 줄 알아야지. 끝까지 갈 각오는 되었나?"

"예스! 마이 로드!"

기사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

카인은 씨익 웃었다.

아직 햇병아리로만 보이는 이들 위로 한때 최전선을 같이 노닐었던 동료들이 덧씌워 보인다.

"에셀레드 영지는 낙후되었다. 다른 영지들에 비해 농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지."

많은 것이 부족하고.

"게다가 힘도 없다. 그나마 있던 아버지는 던전에 들어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니까."

많은 것이 혼란스럽지만.

"그러나 우린 우리다."

"우리!"

"우리는 칼이 있고."

"칼!"

"내가 있다."

쿵-!

담담한 카인의 연설.

그것만으로도 그간 자극받던 에셀레드 기사단의 심장에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카인은 흑색의 아그웨스카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들었다.

"지금 우리는 침략받고 있다. 라마이닝 백작가는 식량으로 우리의 멱살을 뒤흔들고 있고, 로스 후작가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침략-!"

"그러니 우리가 먼저 친다."

그 순간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카인을 돌아보았다.

상상치도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카인은 개운하게 웃으며 칼을 천천히 내렸다.

위치는 동북.

라마이닝 백작가.

"식량이 없다? 그럼 뺏어야지."

"...."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면 가서 죽여야지."

쿵.

작은 발소리.

아벨이었다.

과격한 카인의 발언에 기사들이 멈칫할 때, 오직 아벨만이 호응했다.

쿵, 쿵.

시작은 고독했으나 이내 하나둘 늘어난다.

그리고 밴더빌트까지 저들에 합류했다.

하지만.

"영지전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올리시렌이 찬물을 붓는다.

"왕가가 허가하면 가능해."

"전하는 절대 허가 안 하실걸? 두 후작의 등쌀이 얼마나 심한데."

"왕녀의 허가도 될 텐데, 아니야?"

순간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이소엘은 카인과 올리시렌의 사이에 서면서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위험합니다. 두 분 다."

"아니. 이게 나도 올리시렌도 사는 길이야."

"...?"

"이미 두 후작은 등을 돌렸어. 2왕녀인 올리비아를 차기 왕으로 밀고 있지. 그런데 가만히 있으려고?"

"...."

이소엘은 움찔했다.

왕실 기사이자 올리시렌의 호위 기사로서 그녀도 나름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안다.

마녀의 각성 때문에 후순위로 밀렸을 뿐이지, 지금 왕위 계승권 경쟁은 점차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

맨 처음 카인이 말했듯 올리시렌에게 제대로 된 세력은 없었다.

왕은 늙었고, 관료들이 뭉쳐 있는 왕당파는 가볍다.

반면 두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교활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야."

"공-격."

"이미 네가 칼을 맞게 될 때, 저들은 모든 준비를 끝내 뒀을 거다. 그때 시작해선 늦어."

올리시렌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카인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으니까.

"그래서 이제 왕도로 돌아가면 나름 대비를...."

카인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

"그건."

"수가 없을걸? 당장 2왕녀 올리비아의 친모가 맥로든 후작의 외동딸이야. 로스 후작은 귀족파의 이득을 위해 달라붙었고."

"...."

"네가 어떻게든 이득을 주겠다고 후작들을 설득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그 괴물들에게 소용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어."

올리시렌은 두 주먹을 쥐었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자신에게 말해 주는 이는 카인이 처음이었다.

막연히 잘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던 건지 이제야 체감할 수 있었다.

"내 힘을 쓰면...."

마지막 남은 올리시렌의 보루.

마녀의 힘.

카인은 바로 부정했다.

"그럼 얼씨구나 하고 성국놈들이 와서 죽인다에 내 목숨을 걸지."

성국의 이단심판관.

애매하게 돌려 말했지만, 누군지 둘은 확실히 알았다.

올리시렌은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그럼 네 답은 지금 쳐야 한다는 거야?"

상황을 처음부터 환히 알고 있었던 만큼 답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카인은 분명히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두 후작, 다섯 백작. 아이리안 칠대 귀족가 중 후작들의 입김이 닿지 않고, 그대와 가까운 건 우리뿐이다."

척.

카인은 손을 내밀었다.

이전엔 아르나를 살리기 위해 오욕을 감수하라는 의미였다면.

"어차피 선택지는 없어. 할 수 있는 건 적들이 대비하기 전에 빨리 치고 빨리 칼을 꽂는 것."

이젠 정말 전우로서의 길을 가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이전보다 더 잡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왕국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으니까.

"이건 내전이야."

"지지부진하게 끌면 그러겠지."

"그럼?"

"앞으로 한 달. 이 봄이 끝나기 전에 모조리 정리한다."

올리시렌은 팔을 들었다.

그리고 카인의 손을 마주하기 한 뼘 전에 멈춰 서며 고민했다.

이 길이 맞는 것인가.

카인의 말대로 될 것인가.

"그것도 어차피 내전 아니야?"

척-.

카인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압도적인 공포가 나타나면 전쟁은 멈추게 되어 있지."

동시에 겹쳐 보이는 모습.

왕도의 입구.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창.

그리고 손과 발이 잘린 채 창에 꽂혀 있는 여인의 시체.

「아이리안의 1왕녀가 마녀였습니다. 이는 용사를 찾기 위해 방문하신 카테리나 성녀님이 발견하셨습니다. 성국은 이후 아이리안 왕국에 대해....」

오래전 보았던 신문.

그땐 밴더빌트를 죽음에 몰아넣었던 여자기에 기사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꾸리라.

노기사가 살아남은 것처럼 그녀의 미래를 자신의 오늘로.

Episode.Ⅰ

봄의 찬미

#26

Chapter. 6 봄의 여행길 (1)

「그의 발걸음을 따라 눈이 내린다. 그 눈은 너무나 쓸쓸한 흰색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그에게 보이는 카렌의 모습은 붉었다.

그것이 에셀레드의 사명.

겨울의 숙명, 설원의 종말.

그리고 멸망과 싸워야 하는 우리의 지표.

고독하라.

외로우라.

그렇게 반짝여라.

대적자여....

-에셀레드 백작가 지하 서고」

먼지조차 오래된 지하 서고 안.

가장 안쪽의 낡은 탁자.

카인은 탁자 위에 빼 둔 아주 얇은 몇 장의 기록을 들어 눈으로 훑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편지의 일부 같기도, 누군가 급하게 쓴 일기의 한 부분 같기도 한 메모.

적힌 글씨는 매우 고풍스러웠다.

'과거의 나라면 봤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기록이다.'

전생에서야 갑작스레 쫓겨났으니 이런 게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번째 마녀 프리문디를 만나며 쌓인 가문에 대한 궁금증, 후계자이면서도 몰랐던 '에셀레드'의 비밀들.

이제는 알아야 했다.

"근데 이 넓은 곳에 이거밖에 없다니."

카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말소리가 퍼져 나가면서 지하 서고의 서가들이 울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에셀레드 가문의 시초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대개의 귀족이 가문을 일으킨 초대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할애하고 영웅화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마치 누군가 당시 에셀레드의 기록을 칼로 도려낸 느낌이었다.

"너도 몰랐겠지...."

카인은 그나마 쓸모 있어 보이는 기록을 만지작거리며 닿지 못할 말을 건넸다.

아벨은 있지만, 이 말을 들을 용사 아벨은 없으니까.

용사 아벨과 전사 카인.

둘은 밤을 지새우며 계획을 세웠다. 물론 모든 걸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곤 생각지 않았다.

다만 이런 비밀이 에셀레드 가문에 엮여 있을 줄은 상상치 못했다.

똑똑-.

"뭘 몰라?"

갑작스러운 소리.

고개를 돌린 문 쪽에 서 있는 건, 회색빛 머리가 등불에 반짝이는 왕녀 올리시렌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아직도 독서 중?"

"무슨 일 있나?"

올리시렌은 카인의 태연한 대꾸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손을 휘저어 먼지를 밀어내며 카인의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못된 버릇이야."

"뻔히 다 아는 걸 굳이 말하는 것도 좋은 버릇은 아닌 거 같은데?"

"어째 말 한마디 지지를 않아."

끼익-.

그녀는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곤 카인이 올려 둔 기록들을 쓱 읽었다. 그러곤 서가들을 살펴봤다.

"어쩌다 보니 다른 가문의 비밀 서고에도 들어왔네."

제법 신기한 눈치였다.

카인은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곤 답했다.

"하긴 왕녀가 이런 곳에 올 일은 없으니까. 소감은?"

올리시렌의 눈이 반짝인다.

프리문디와의 전투를 겪은 후 한층 더 진해진 마녀의 힘이었다.

더욱이 '이명'이나 '기원'을 각성한 것도 아니라서 힘을 쓴다고 파동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즉, 과한 힘이면 몰라도 이 정도로는 성국에 걸릴 턱도 없었다.

"좋네. 근데 안 좋아."

무언가 발견한 눈치.

하지만 카인이 뭐라 되묻기 전에, 그녀는 내려오면서 하려 했던 말을 먼저 말했다.

"일단 에셀레드의 주인 된 녀석을 며칠이고 품고 있을 만한 곳은 아니니까."

"...."

카인은 그녀의 회색빛 눈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움직이며 집요하게 눈을 맞췄다.

"그래서 무슨 속셈이야? 한 달 안에 모든 싸움을 정리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서고에 처박힌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끝까지 갈 테니까."

"그러는 놈이 기사단의 훈련을 아르나 님에게 맡겨 두나?"

카인이 없는 에셀레드 기사단.

그들은 주군을 섬기지 않고 에셀레드 영지를 섬기겠다며 이전과는 달라졌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바.

함께 구르면서 같이 훈련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카인은 모든 걸 다른 사람에게 맡기곤 서고에만 있었다.

올리시렌이 짚는 게 바로 이 점이었다.

"기사들의 훈련은 클로이드와 밴더빌트가 있으니까 손색은 없어."

둘 다 백작가에 이렇게 있기엔 아까운 기사들이었으니까.

가능하다면 왕궁기사단으로 데리고 오고 싶을 정도였고.

"게다가 아르나 님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기사들이 이 악물고 움직이더라."

숲의 마녀 글루미엠의 저주가 사라진 아르나는 회복하기 위해 훈련에 참여했다.

처음 기사들은 그녀를 얕봤다.

그들이 기억하던 아르나는 병약해서 햇볕 아래로도 나오지 않으려는 여인이었기에, 자신들의 훈련을 따라 한다는 것이 호기심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하나둘, 그들은 아르나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아벨 역시 실력을 되찾아 가는 아르나에게 밀렸다.

에셀레드 기사단은 경악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그런 상황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는지 카인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클로이드나 밴더빌트 정도 되어야 작은어머니한테 비벼볼 텐데 다른 녀석들은 어림도 없지."

그것도 폭풍활 호크마를 쥔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고.

올리시렌은 괜히 뿌듯해하는 카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효자네, 효자야. 그나저나 우리의 첫 번째 타깃이 될 라마이닝 백작가는 영 복잡한 모양이야."

"왕실정보국에서 그런 것도 알려 주나?"

올리시렌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네."

"국왕 전하가 정말 아무것도 없이 후계자로 두진 않았을 테니까. 뭐라도 쥐여 줬을 텐데, 그럼 역시 정보지."

아이리안 왕국 전역을 세세하게 파악하는 최고의 정보조직.

왕실정보국.

"답은 하지 않을게."

그녀는 애매하게 웃을 뿐, 확답은 주지 않았다. 카인은 바라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넘어가 줬다.

"그래서 라마이닝은 어떤데."

"다 큰 아들이 둘인데 뻔하지."

"후계자 문제?"

라마이닝 백작가의 사람들은 에셀레드의 지하 서고에서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정답."

"백작이 지지하는 자식은 있을 거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정확히는 누구를 더 지지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어."

올리시렌이 그 말과 동시에 한심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카인은 그런 표정을 재빠르게 캐치하고는 물었다.

"외손자가 낑낑거리는 에셀레드 영지를 차지해서 두 아들들에게 떼어 주려는 건 아니겠지?"

"음...."

올리시렌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을 뿐.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니 오히려 황당해하는 건 카인이었다.

"설마 진짜로?"

"정확히는 로스 후작에게 적당히 바치고 자작령 정도만 남겨서 줄 생각인 거 같더라. 내 동생이 왕이 된다면 말이지."

"미친놈들."

카인은 곧장 욕을 뱉었다.

작은 땅도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아이리안 왕국에 다섯밖에 없는 백작령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녀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더 큰 문제가 있어."

"여기서 더 큰 거?"

올리시렌의 눈이 카인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런 때 지하에 처박혀서 꼼짝도 안 하는 놈이 있다는 거."

"딱히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의 명분이 만들어질 시기를 기다리는...."

"자연스레 아벨에게 권력을 넘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올리시렌의 날카로운 통찰이 카인이 말하지 않던 진심을 찔러 들어간다.

"...."

"순진한 에셀레드 사람들은 모르겠지. 근데 내 눈엔 보여. 넌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움직이고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벨을 밀어 넣고 있잖아."

카인은 조용히 올리시렌과 눈을 마주쳤다.

순식간에 진심을 들켜 버렸지만, 그녀에게 거짓으로 둘러 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왕도의 정치판을 굴렀다는 게 거짓은 아니네."

그래서 담담하게 인정했다.

"이 누나가 눈치가 빨라서 놀랐어?"

"입도 살았고."

"왜 그러는 건데."

"뭐가."

"네 나이 도련님이라면 다들 권력을 얻고, 가문을 계승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길 바라던데 왜 너는 다 포기하려고만 해?"

"...."

"에드먼드 백작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지. 다들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난 알아."

왕국 최강의 검호로 인정받기 위해 에드먼드는 검을 뽑은 적이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왕가의 사람들과 두 후작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에셀레드를 힘으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에드먼드의 검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그것보다 엄청난 것을 봐버렸다.

"바다를 얼리고 수평선을 가르는 검이라니. 그런 건 에드먼드 백작도 불가능할 거야."

올리시렌은 몸을 한층 더 가까이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힘이 공짜일 정도로 세상이 만만치 않지. 넌 분명 뭔가를 희생했을 거야. 아마 수명?"

"작은어머님이 말해 준 건가."

대륙에서 특급 용병으로 살다 온 아르나라면 충분히 눈치챌 거라 예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보면 누구나 알걸?"

다만, 아이리안 섬왕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알아챌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장난스레 말을 거는 또래의 여자아이도 아니고, 운명에 발버둥 치는 안타까운 예비 마녀도 아닌.

"카인 에셀레드. 당신이 바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죠?"

한 왕국의 첫 번째 왕녀로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카인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아무것도."

전생과 달리 올리시렌과 거리가 좁혀진 걸 후회하진 않는다. 하지만 뭐든지 말할 사이가 된 건 아니다.

그렇기에 카인은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거기서 답을 얻은 눈치였다.

"네가 없는 가문을 원해?"

"내가 없는 가문?"

"언제고 카인이라는 사람이 사라져도 알아서 잘 굴러갈 세상. 마치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이 자신이 떠난 후를 걱정하는 것처럼."

생각보다 정확한 그녀의 표현에 카인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언젠가 그런 속내가 들킬 거라곤 예상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올리시렌이 될지는 예상치 못했을 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떠나지 마."

하지만 카인은 그 미소를 단호히 차단했다.

"떠나야 해."

"네가 없는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건 없어. 아마 네가 사라지면 다들 아닌 척하면서도 그리워할 거야."

"아닌 척만 해도 충분해."

올리시렌은 입술을 내밀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도 하고, 괜히 서고의 다른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진심을 툭 뱉었다.

"너 그런 방식 마음에 안 들어."

"떠나는 거?"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거."

카인은 얼굴을 굳혔다.

전생의 나이까지 합친다면 지금의 올리시렌은 한참 연하다. 그러나 눈은 생각보다 더 정확했다.

"넌 마치 일 년만 살다가 떠날 사람처럼 살잖아."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카인의 삶.

그리고 한 달 안에 왕국을 정리한다는 것이 어딘가 쫓기는 모습 같았기에 올리시렌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너무도 대단하고 반짝이기에.

얼마나 더 이렇게 빛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내가 선택한 삶이다."

카인은 다시금 단호히 대답했다.

그날의 절벽.

모든 것의 마지막을 기약하고자 마주했던 작은어머니의 묘비가 아직도 눈에 선연하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이게 맞다고 내가 선택한 거야. 그러니 괜찮다."

"너 그게 옳다고...."

"옳은지 틀린 지는 내가 정해. 할지 말지도 내가 정하고."

카인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더 파고들 틈이 없다는 걸 깨닫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각오해. 그런 태도가 언제고 큰 시련으로 돌아올 거야."

"각오는 처음부터 했다."

"고집쟁이."

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서재에서 대중없이 몇 권의 책을 꺼내 탁자에 올려 두기 시작했다.

'가문의 역사를 다루던 책들.'

모두 살펴본 카인은 그녀가 뽑는 책들의 공통점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게 뽑아낸 열 권.

올리시렌의 눈엔 은은하게 마녀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카인이 쥐고 있던 얇은 기록을 가리켰다.

"그게 여기 있는 것 중엔 가장 오래되었어. 반면에."

그녀는 탁자 위의 책들을 하나씩 깔며 말했다.

"얘들은 상대적으로 최근. 멀면 사십 년이고 가장 최근 건 일 년이야."

카인은 책을 손으로 쓸었다.

촉감이나 생긴 거나 영락없이 오래된 기록인데 예비 마녀가 최근의 기록이라 말한다.

"재밌네?"

카인은 씨익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올리시렌 역시 마주 웃었다.

먼지조차 오래되어 드나든 이 없을 지하 서고에 놓인 최근의 기록.

용사가 되어도.

최전선의 전사가 되어도.

알지도 못했던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27 EP.Ⅰ-6

봄의 여행길 (2)

"지하 서고를 관리했던 건 아리안입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카인과 올리시렌에 하녀장은 이마에서 나는 땀을 연신 닦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관리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함부로 대하긴 좀 그런 친구라서 맡겼었죠."

"대하기 어려웠다?"

카인은 다리를 꼬며 물었다.

신분이 다른 것도 아닌 같은 하녀끼리 무엇이 어려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녀장은 올리시렌을 흘깃 봤다.

마치 그녀가 있어서 말하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일어날까?"

"괜찮아."

반쯤 엉덩이를 들었던 올리시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녀장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클로에 마님과 함께 라마이닝 백작가에서 온 시녀라서 그렇습니다."

"...!"

올리시렌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카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턱을 쓸면서 중얼거렸다.

"어머님과 함께 말이지...."

"예. 그때 라마이닝에서 같이 온 게 밴더빌트 기사님과 아리안이었죠."

"난 왜 그녀를 모르지?"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친모와 함께 지낸 기억이 흐릿하다고 하나, 하나밖에 없는 전속 시종을 까먹을 정도는 아니다.

하물며 아리안이라는 이름은.

'...프리문디의 가명.'

밴더빌트의 아르츠위버 봉토에서 촌장으로 있던 그녀가 쓰던 이름이었다.

클로에 라마이닝.

그리고 같이 온 밴더빌트와 아리안이라는 시녀.

무언가 냄새가 났다.

이전에는 알아낼 수 없었을 무언가의 냄새가.

하녀장은 카인의 물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속 시녀로 오긴 했는데, 마님께선 그녀를 멀리했습니다. 그냥 저희를 주로 부르셨죠."

"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이곳으로 오시고 몇 달 정도는 같이 지내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붕 떠버린 아리안이란 시녀에게 지하 서고를 맡겼고 말이야?"

"그...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어디?"

"밴더빌트 기사님의 숙소입니다."

"성안이 아닌가?"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하녀장은 어색한 듯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었다.

"성안에도 있긴 한데, 답답하시다고 외부에 작게 하나 만드셨습니다. 저희가 굳이 관리할 필요는 없으나...."

"마침 아리안을 보내기 좋으니까 보낸 거네."

카인과 올리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적합한 배정이었다.

아리안이라는 시녀에 대해 의문이 가긴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열어 둬야 하는 바.

"혹시 그 사람 말고 지하 서고에 출입하던 사람이 있나?"

하녀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성내의 계단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확실히 답할 수 있었다.

"없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암살자나 도둑들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그 가능성을 지웠다.

에드먼드 백작이 있을 땐 그의 가공할 감각을 뚫고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백작이 던전 에이레에 들어간 후엔 바뀐 책이 없으니, 당연히 그 이전의 사람이 장난을 쳤으리라.

'아니면 이 하녀장이 거짓말을 하던가.'

카인은 의심을 지우지 않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 아리안이라는 시녀는 어디 있지?"

그러자 하녀장은 당황한 듯 눈을 떼굴떼굴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죽, 죽었습니다."

"뭐?"

"소문으론 아마도 밴더빌트 기사님이 죽였다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