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게 다냐?"
"그리고 마님의 비밀 서고를 알고 있는 유일한 심부름꾼이죠."
아무렇지 않게 말한 뒷말이 더 충격적인데.
* * *
걸시는 마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도련님이라고 해도 서고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강제로 보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결국 엄마의 귀에까지 들어갈 테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엄마가 퀄츠 성 지하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 서고를 가지고 있는 건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한때 현자라 불렸다. 많은 것을 아는 자다. 현자가 자신만의 비밀 서고를 만들었다고 해서 탓할 일도 아니다. 내가 많은 걸 감췄듯, 엄마도 감추고 싶은 게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걸시가 엄마의 비밀 서고의 관리자인 건 꽤 충격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걸시가, 그 멍청한 걸시가 어떻게 엄마의 심부름꾼이 되었지? 하긴, 처음부터 내게 걸시를 붙여 준 건 엄마였지.
다른 형제자매와 달리, 열 살 이후까지 시종을 계속 데리고 다니는 건 나밖에 없었다. 어쩌면 걸시는 내 시종이기 전에, 엄마의 심부름꾼으로 키워지던 하녀일지도 몰랐다.
걸시는 엄마에게 말하겠지.
그렇담 언젠가 엄마도 내게 말해 줄 것이다.
그때까지 난 서고의 비밀을 감추기로 했다.
* * *
우괴협에 이어 '곤찬차'와 '대수협객'을 이겼고.
우샤스 누나는 사절단에 참가하여 왕국으로 떠났으며.
멜리사 누나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몇 주 동안 제법 무난한 삶이 이어졌다.
"어머어머, 도련님. 옷이 날개시다."
"칭찬이냐, 욕이냐?"
난 레인버그가를 상징하는 푸른 빛깔의 벨벳 옷을 입었다. 흔히 귀공자들이 입는 스타일로, 귀족들 모임에서나 입는 예절복이었다. 움직이는 데 몹시 거추장스럽기만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어야만 했다.
"걸시는 감동했어요. 도련님이 드디어 첫 공무를 보시다니!"
"공무는 무슨, 그냥 초대받은 거잖아."
며칠 전, 반복되던 내 삶에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형제자매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에서 초대받는다. 우샤스 누나는 수시로 추기경과 만났고, 라니스타 놈은 다른 영지의 기사단 고문까지 맡을 만큼 기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독고다이같던 멜리사 누나도 귀족들 모임에는 몇 번 참가하기도 했다.
레인버그가의 위상을 드높이는 건 형제자매들이다.
지금까지 난 4년 동안 남쪽 섬에서 박혀 있을 때는 물론이고, 퀄츠 성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누군가의 초대를 받거나 사교 모임에 불려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지난 생일 파티 때의 파격적인 행동이 평가를 반전시킨 것 같았다. 며칠 전, 내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다. 서남쪽 해안지대와 바다를 경계하는 제독이자 레인버그가와 친밀하게 지내는 슈바르젠 백작의 초대장이었다.
슈바르젠 백작은 생일 파티 때 내 모습을 몹시 인상 깊었다고 칭찬하며, 꼭 자신의 성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본론은 아니었다. 서신의 끝머리에서 자기 아들이 '영수술사'의 재능을 개화한 것 같다며 한 번 살펴봐 줄 수 있냐라는 말을 추가로 덧붙였다.
슈바르젠 백작은 덕망 높고 온화한 귀족이다. 대전쟁 이후 레인버그가와 친밀하게 지내는 '푸른 기둥'의 귀족이며, 마테란드 가문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수준 높은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제독이었다. 난 가주가 되고자 했으니, 그와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지내야 했다. 마침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다. 엄밀히 말해서 난 영수술사가 아니지만, 상대가 영수술사인지 아닌지는 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영수를 볼 수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호들갑 떠는 걸시를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저택 앞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백작에게 초대받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아버지가 백작가에 건넬 선물을 실은 마차를 준비시킨 것이다. 마치 우리 아들 좀 잘 봐주쇼, 하면서 뇌물을 건네는 철부지 아빠 같았다.
* * *
레인버그의 깃발을 단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건, 몹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난 레인버그의 위상을 실감했다. 가는 동안 몇 번이나 지주와 군수들의 초대를 받았고, 난 기꺼이 그들과 저녁 만찬을 즐겼다. 느긋한 여정이었다. 이 주가 지나서야 백작령에 도착했다.
슈바르젠 백작의 영지는 제국 서남의 해안지대로 여섯 개의 항구 도시를 지닌 넓은 영지였다. 그중 백작이 기거하는 슈테람 성이 있는 슈테람 해안 도시는 마테란드 공작의 태청항과 비견될 만큼 화려한 항구 도시다. 퀄츠 영지에도 베모니아 도시가 있지만, 생선 비린내만 진동하는 어항漁港에 불과했다.
슈테람 항구는 무역선도 많았으며 제독이 다스리는 영지답게 군선들도 줄지어 보였다. 듣기로 슈바르젠 백작은 슈테르닐 왕국과 밀접한 관계라고 들었다. 때문에 솔가르 공작의 견제를 받지만, 육로는 레인버그가가 지상 병력을 보충해 주고 대신 해군력과 무역로를 지원받는 상생하는 관계라고 들었다.
어쨌든, 레인버그 가문에 있어 몹시 중요한 양반이라는 거다.
도시는 항구 도시답게 활기찼다.
여러 나라의 무역 상인들로 인해 혼합된 독특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레인버그는 마찬가지로 슈테람에서도 환영받았다. 일부 박학한 도시민들은 마차가 지나가자 파란색이 들어간 물건을 들어 보였다. 푸른 기둥, 레인버그를 향한 경의였다.
슈테람 성은 퀄츠 성보단 작지만 아름다운 굴곡이 인상적인 성이었다. 지붕이 뾰족하고 높으며 새하얀 벽면의 성은 마치 공주님이라도 살법한 외형이다. 음침한 퀄츠 성의 정원과 달리 입구부터 꽃들이 만발한 정원도 있었다.
"저 양반인가?"
아주 드물게, 성주인 슈바르젠 백작이 직접 저택의 앞까지 마중 나왔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는 날 반갑게 맞이했다.
이르쉬 롬 슈바르젠 백작,
아버지 나이 때의 아저씨였는데, 푸근한 인상이 정이 가는 외모였다. 그는 패드와 주름을 사용한 헐렁한 옷으로 체형을 가렸지만, 그럼에도 배가 볼록 튀어나온 게 재밌어 보이기도 했다. 백작은 쿤칸 제국에선 보기 드문 금발 벽안이었다. 확실히 슈테르닐 왕국의 핏줄이 섞였구나.
"폴스타 공자! 반갑소! 속 보이는 초대에 이리 응해 주어 감사할 따름이오."
"푸른 기둥을 지탱하는 남쪽 바다의 멋진 사나이, 제독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껄껄 웃었다. 아버지가 넌지시 알려 준 인사말이었는데, 그가 귀족답지 않게 '사나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했었다. 확실히 처음 만난 백작에게 건넬 인사말치고는 너무 정겨웠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네.
그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난 간결하게 인사를 나누고, 며칠 지내게 될 숙소를 안내받았다.
멋진 방이었다.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창밖의 풍경이 상쾌했다.
이제 그의 아들을 칭찬하면서 추켜세울 일만 남았나.
좋은 느낌이 든다.
백작과는 친하게 지낼 것 같구만.
* * *
저녁 만찬은 백작의 가신들과 같이했다. 백작은 보기엔 유쾌한 아저씨처럼 보여도 슬픈 가족사가 있었다. 대전쟁 때 그는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 간신히 늦둥이를 가졌는데, 안타깝게도 출산 중에 처를 잃었다. 아버지 연배의 그가 내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는 이유였다. 유일한 가족이니 그에게 아들은 희망이자 기대일 것이다.
만찬은 화려했다.
해안가가 이래서 좋다.
레몬즙과 석굴, 신선한 생선 요리와 쿤칸 제국에선 보기 힘든 향신료를 곁들인 고기 요리, 진귀한 해산물로 가득한 저녁 만찬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슈바르젠 백작은 떠들기 좋아하는 아저씨였고, 난 그의 바다 무용담을 들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다행히 귀족의 식사 예절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두 접시를 비웠다.
"베탄 섬의 야만인들을 모조리 굴복시켰을 때 놈들이 내게 경의를 표하며 귀중한 보물을 바치더군. 화산석이라는 놈인데, 불씨를 머금은 돌이지. 보고 싶으면 오늘 밤에라도 찾아오게나. '붉은 개'들은 돌이나 모으는 영감이라고 욕하지만, 내 컬렉션을 못 봐서 하는 소리야."
"보물이라 하시니 생각났습니다. 백작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마련한 선물입니다."
놀랍게도, 이 세계도 아저씨의 취향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온화한 아저씨들은 수석 수집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의 취향은 더욱 고급스럽고 난해했지만.
그래도 이거라면, 만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식탁 위에 보였다. 나중에 보여 줄 생각이었지만 식사 예절도 중요치 않은 것 같고,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은 예상대로 기대에 찬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난 천천히, 뜸을 들이며 상자를 열었다.
"아시다시피 퀄츠 성 연회장의 지붕은 박살이 났습니다. 이건 그때 지붕에 떨어진 돌입니다. 이 작은 돌 하나가, 단단한 대리석 지붕을 무너트렸지요."
상자의 안에는 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작은 돌멩이가 있었다. 누군가에겐 보석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백작은 진면목을 알 것이다.
사실 나는 잘 모른다. 이 돌이 정말 월석인지는. 지구의 월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니까. 뭐, 그렇다고 누가 알겠어?
"달에서 떨어진 월석입니다."
백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홀린 듯, 내게 다가온다.
"내, 내 소원이 있다면 대협곡 '밑바닥'의 돌을 가져오는 것이었네. 그곳은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지."
중얼중얼거리며 월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달이라면. 저 밤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이라면, 그곳이야말로 그 누구도 절대 가 보지 못하는 곳이 아니던가? 아무리 뛰어난 대마법사도, 꿈조차 꾸지 못할. 달의… 돌."
무조건 비싸고 값지다고 해서 최고의 선물은 아니다.
받는 이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원하던 선물이 최고의 선물이다.
백작은 애타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고, 난 기꺼이 월석을 꺼내 그의 통통한 손바닥에 올려 줬다. 백작의 초대를 받은 이후 문득 생각난 선물이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그는 자신의 장식장에 월석을 가장 첫 번째로 올리겠다며 말했다.
월석을 선물한 이후, 자신의 무용담만 늘어놓던 백작이 내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길 원했고,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영수술사로 넘어갔다. 난 지난 4년 동안의, 내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바꾸기 위해서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4년 동안 영수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은둔 생활을 했다며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었다.
사실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생일 파티 때 결과로 보여 줬으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문은 세 명만 모여도 널리 퍼지는 법이다. 내게 호감을 느낀 백작과 가신들로 하여금 은둔 공자의 숨겨진 이야기는 내 평가를 반전시킬 소문이 되어 줄 것이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눴을 때.
"몇 달 전 테라린 호수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아들 녀석이 달라졌지."
백작이 본론을 꺼냈다.
그는 아들이 영수술사의 재능을 개화했다고 생각한 이유를 설명했다.
"레인버그 공작님과 전쟁터에 같이 섰던 전우로서, 난 영수술사가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기억해. 카란트는 마치 숲이 살아 있는 듯, 나무와 대화를 나누고 꽃과 인사를 건네받으며 붕어도 없는 연못에 먹이를 주고 바람에 속삭이길 시작했지. 레인버그 공작님이 위대한 호수의 정령을 길들였듯이, 녀석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게 틀림없네."
카란트 경, 백작의 아들.
슈바르젠 백작은 아들이 영수술사가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하녀들은 카란트의 방에서 신비로운 생물을 '봤다고' 하더군. 그러니, 영수가 아니겠나?"
백작의 말을 경청하던 난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영수라는 놈들이 그렇게 쉽게 보이는 게 아닌데?
"카란트 경은 만찬에 참가하지 않았군요."
"미안하네. 녀석이 테라린 호수로 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이후부터 방에만 틀어박혀 잘 나오질 않아. 그래도 자네 말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군. 참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이야. 자네가 4년의 은둔 생활을 견뎠듯이 아들놈도 자네처럼 제 나름의 수련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구라인데.
"자넬 초대한 게 정말 옳았어. 선배로서, 아들 놈을 잘 가르쳐 주게나.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하겠네."
백작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했다. 난 알 수 없는 텁텁함을 느끼며 카란트를 기다렸다.
"오! 왔구나, 카란트!"
카란트는 만찬이 다 끝날 때쯤에야 슬며시 나타났다.
뒤늦게 와선, 능글맞게 백작의 곁에 앉는 어린 소년.
카란트는 제 아비를 닮아서 아름다운 푸른 눈과 금발을 지닌 소년이었다.
특히 큰 눈망울에 바다처럼 푸른 눈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잘생겼다. 기품 넘치고 세련된 외모, 귀족 영애들의 관심을 한몸에 이끌 만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시발.
분명 다른 이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엔 서서히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난 손을 식탁 아래로 숨겼다.
살짝 떨리는 손가락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슈베르젠 백작이 애지중지 여기는 늦둥이 아들 카란트는.
사나운 짐승의 얼굴을 한.
악마였다.
"반가워요, 카란트 경."
나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27
전생과 현생.
두 세계를 모두 살아 본 입장으로서 나는 끔찍한 것들이 주는 근원적인 공포는 문화와 국경, 심지어 세계와 차원마저 초월하여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지구인들도, 쿤칸의 제국민들도 모두 지네와 거미를 무서워하고 깊은 바다 아래에 도사린 비늘과 아가미의 생물들을 두려워한다.
카란트로 위장한 악마 놈도 그랬다. 놈의 생김새는 물고기와 흡사했다. 인간의 몸을 흉내 내고 있으나 얼굴은 생선 대가리다. 고등어와 닮았다. 작았을 땐 한 끼 저녁 식사에 불과한 어종이지만, 사람 몸을 한 고등어가 초점 없는 노란 눈알로 날 쳐다보는 모습은 악몽처럼 끔찍했다.
백작은 식사를 권하며 새 음식을 내놓으려고 했으나, 악마 놈은 거절했다. 난 보았다. 그가 식탁에 차려진 해산물 음식을 보며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을. 무슨 의미일까, 맛있게 구워진 생선 구이를 제 동종처럼 여기는 건가?
점점 놈의 악마적인 외형이 뚜렷해졌다. 이제 더는 푸른 눈의 소년이 아닌, 생선 대가리의 괴물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가 보는 앞에서 생선을 발라 먹었다.
"매일 이런 신선한 해산물을 만찬으로 즐길 수 있는 카란트 경이 부럽군요."
"전 해산물은 싫어하는 편이라...."
"카란트, 예의 없잖으냐."
날 바라보는 놈의 노란 눈알에, 왠지 모를 분함이 깃든 것 같았다.
저녁만찬이 끝나고 백작의 주도로 카란트와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만남을 회피할 핑계는 많았다. 하지만 난 기꺼이 악마 놈과 단둘이 남는 걸 택했다.
백작은 자신의 보물 창고로 안내했다. 성의 그 어떤 곳보다 더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곳, 바로 수집한 돌을 모아 놓은 취미실趣味室이었다. 백작은 정말 월석을 장식장 첫 칸에 소중히 올려놓았다.
"얼마든지 구경해 보게. 단, 만지는 건 안 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허허, 그렇지? 내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일세. 아무에게나 쉽게 보여 주는 곳이 아니야."
백작이 기대할수록 난 가슴이 답답해졌다. 불쌍한 양반.
"자넬 믿네. 난 나가 있을 터이니, 아들 놈과 잘 얘기해 보게. 나이는 같더라도 부디 카란트의 소중한 은사가 되어 주게나."
하녀가 차와 다과를 들고 오자 백작이 껄껄 웃으며 나갔다. 카란트와 단둘이 마주 보게 된 난 어색하게 웃었다. 카란트는 아버지가 극성맞다고 불평했다. 철부지 아들 같았다. 정말, 어색할 것 없는 연기다.
난 가만히 장식장을 둘러봤다. 그는 많은 돌을 모았다.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그리고 희귀하고 흔한 돌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일부 돌은 길거리에서 주워 온 듯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백작에겐 모두 어떤 의미가 있겠지. 저 돌들은 슈바르젠 백작의 인생의 조각들이다. 난 고개를 돌려 카란트를 마주 봤다. 생선 대가리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백작은 작은 돌에도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틀림없이제 아들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악마로 대체되었음을 알게 되면, 이 무수한 의미의 조각들은 그저 돌멩이에 지나지 않겠지.
"백작님의 취미가 정말 상당하네요. 이 많은 돌을 모으려면 족히 몇 년은 걸렸을 텐데, 언제부터 이런 취미를 가지셨던가요?"
카란트에게 질문하자 놈은 막힘없이 과거 이야기까지 들먹이며 대답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모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괴팍하다고 하지만, 전 무척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엔 가끔 이 방에서 아버지가 돌마다 새겨진 경험에 대해 말씀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저 돌은, 왕국 북부의 유목민에게서 받은 거라고 하시더군요."
위장자는 구분할 수 없다.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멜리사 누나가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놈은 카란트의 기억마저 빼앗았다.
"최강의 영수술사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설프게 아무 사람이나 초대할 위인이 아니지요. 아버지가 인정하셨습니다. 열넷, 저랑 같은 나이에 뛰어난 영수술사가 되셨다니… 솔직히 말해서 부럽습니다. 그리고 존경스럽습니다. 전 기껏해야 몇 달 전부터 '영수'의 힘을 간신히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악마의 능청스러운 지랄에 나도 능글맞게 웃었다.
"뛰어나다, 최강이다. 이런 수식어는 제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까지 그런 위명들은 모두 제 형님이 독차지하고 있던 위세였습니다."
"라니스타 경.... 확실히 제 어두운 귀에도 놀라운 소문들이 자주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분에 대한 소문들이 정말 사실입니까?"
"소문은 약과입니다. 이미 최강의 기사단장에, 검술 실력은 솔가르 가문조차 뛰어넘었습니다."
"그 붉은 개들을요? 이가 날카롭다고 들었는데!"
"하하. 아무리 푸른 기둥 아래라고 해도 공작 가문을 개라고 하다니요."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말버릇이 옮은 탓에...."
"백작님 핑계를 대니 어쩔 수 없습니다. 뭐, 개는 개라고 불러야죠."
시발, 흔해 빠진 귀족들의 대화.
그는 완벽히 카란트를 흉내 냈다. 잠깐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악마를 볼 수 있는 개눈깔이 없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가 악마인지 몰랐을 것이다.
"형님의 강함은 마치...."
난 생선 대가리의 소름 끼치는 눈을 직시하며 슬며시 말했다.
"악마 같죠."
그 순간, 생선의 초점 없는 눈이 흔들렸다. 갑자기 눈이 찢어질 듯 커지며 온통 노란 눈동자로 뒤덮였다. 대가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심해 물고기처럼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얼굴이 되어 날 노려봤다. 난 구역질을 참으며 간신히 표정을 숨겼다.
거대한 바퀴벌레, 팔다리가 뒤엉킨 괴물, 그리고 저 생선 대가리.
악마는 인간에게 있어 생리적인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경멸의 존재였다.
"슈바르젠 백작님의 바람대로 영수술사의 깨달음을 전하고 싶었으나, 밤이 늦었습니다. 훈련은 내일 오후부터 하도록 하죠."
"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공자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갈 때까지, 노란 눈동자가 끝까지 날 살펴봤다.
* * *
방으로 돌아온 난 창을 열고 검은 밤바다를 바라봤다.
라니스타 놈이 할 말은 뻔했다. 누나들은 행방도 모른다.
도움 요청 따윈 할 수도 없었지만, 하기도 싫었다.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꽁무니를 빼고 도망간 후에 검은 사제들에게 고발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백작과 사이가 틀어지겠지만, 레인버그 가문의 공자의 고발이면 검은 사제들도 움직일 테고, 사제들에게 잡힌 카란트는 몇 달의 감시 끝에 결국 생선 대가리 악마인 게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백작은 하나뿐인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할 것이다. 많은 충돌이 발생하겠지. 결국 악마라는 게 밝혀지면 내 안위와 레인버그의 명예는 지킬 수 있겠지만, 백작은 더는 푸른 기둥의 편이 아니게 된다.
단 하나를 지키고자 많은 걸 포기하는, 과거의 내가 선택했을 길이다.
카란트가 악마라는 걸 자연스레 알릴 방법은 없다. 위장자는 멜리사 누나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백작을 설득할 수도 없다.
"젠장."
창문을 닦고 커튼을 쳤다. 침대에 누워 손바닥으로 눈을 매만지다가 뺨을 세게 꼬집었다. 지금까지 나였다면 고민 따윈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안주하고 도망치고 달아나고. 그건, 습관이었다. 도전하고 겁먹지 않고 당당했던, 그자가 분명 나였었다.
개눈깔의 힘을 믿고 방위대에 지원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개눈깔의 힘 때문에 두려운 것을 누구보다 실감하여 꼬리 말린 개새끼가 된 29살의 난.
같지만, 달랐다.
합리적인 판단이라 여긴 건 모두 내 생존이 최우선을 둔 것이다. 돌파구가 아니라 비상구였다. 만약 지금 이 문제를 두고 도망친다면 분명, 앞으로도 도망치는 행동은 습관이 될 것이다. 난 항상 도망칠 테고, 정작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오면 도망칠 수 없게 되겠지.
"비상구가 아니라, 돌파구를."
새벽이 다가왔다.
명상을 시작하자, 달비가 무릎 위에 올라왔다.
자연지기라는 놈 덕분인지,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백작의 오전 공무가 끝나는 때를 기다려 티타임을 핑계로 단둘이 대면했다. 백작이 기거하는 방은 서고와 침실, 응접실이 연결된 구조였다. 나는 아마 백작과 친밀한 사람만이 초대받는, 작은 응접실에서 조그마한 원형 탁상을 두고 백작과 마주 앉았다.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차와 버터 쿠키가 나왔다. 하지만 냄새와는 다르게 차 맛은 뒷끝이 씁쓸한 맛이었다.
난 응접실 선반에 장식된 세 개의 돌을 발견하고 말했다.
"백작님은 수집한 돌을 삶의 조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방에도 세 개의 장식돌이 보이는데 장식장이 아니라 가까운 곁에 두시는 걸 보니 특별한 조각 같습니다."
백작은 웃었지만, 미소가 어딘가 씁쓸했다. 이 쓸데없이 달달한 냄새의 차처럼.
"가장 왼쪽에 있는 돌부터 순서대로 채피, 리아나, 그리고 카란트일세."
장식장이 아닌 생활하는 곳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둔 돌들은 모두 백작의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정원에서 가장 처음 주운 돌이라고 했다. 백작은 내가 준 월석이 가장 아끼는 보물이 되었지만, 이 돌들은 가치를 넘어 자신의 존재 의미라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저릿했다. 정원의 돌과 방에 장식된 돌의 차이는 단지 '의미'.
악마는 그에게서 모든 의미를 앗아갔다.
"그래, 폴스타 공자. 오늘부터 교감 훈련에 들어간다고 들었네. 지원해 줄 건 없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기에 여러모로 고민이 됩니다. 다만...."
나는 능청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우선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가 영수의 힘을 깨달은 장소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들이 언제 달라졌는지, 그 이후의 행보까지 알고 있는 건 모두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백작은 의심하지 않고 기꺼이 몇 달 전에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줬다.
몇 달 전, 카란트와 백작은 항구와 멀지 않은 작은 섬으로 휴양을 갔다.
그곳엔 테라린 호수라 불리는 신성한 호수가 있었다. 카란트는 호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나룻배가 전복되어 호수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다. 당시, 백작은 아들이 호수 깊숙한 곳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호수는 섬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깊고 넓었다. 병사들은 당장 카란트를 구하러 몸을 던졌지만, 뒤집힌 나룻배를 중심으로 호숫가를 수색해도 카란트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백작은 애초에 처음부터 잔잔한 호수에서 배가 뒤집힐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테라린 호수는 신성하다고 여겨졌고, 그곳엔 물의 정령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한 시간 뒤, 절망하던 백작에게 카란트가 스스로 걸어 찾아왔다. 카란트를 호위하던 기사는 모두 실종됐지만, 카란트는 몸만 젖었을 뿐 다친 곳은 없었다.
"물의 정령이 내 아들을 지켜 준 거야."
백작은 굳게 믿고 있다.
"호수의 정령, 푸른 늑대 맥의 업적은 너무나도 유명하지. 어쩌면 레인버그 공작님의 푸른 늑대같이, 대단한 영수가 카란트를 살렸는지도. 하하, 표정 풀게나. 주책 좀 부려 봤네."
그때였군.
난 표정이 굳어져 연기라도 웃을 수 없었다.
테라린 호수.
난 천장을 힐끔 바라봤다.
비린내가 진동을 해.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절대 카란트 경에겐 말씀하지 마십시오."
"흠?"
"테라린 호수에...."
28
오후에는 카란트와 만났다. 영수에 관해 얘기했으나 놈도, 나도 관심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서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카란트는 몇 달 동안 일어난 변화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며 자신이 영수의 재능을 가졌느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해 줬다. 대화는 한 시간이면 족했다. 놈은 전날처럼, 헤어질 때 노란 눈알을 뜨고 날 주시했으나 두 번째라고 적응되었는지 역겨움은 덜했다.
그 후 난 레인버그의 수행원에게 테라린 섬으로 향하는 배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레인버그의 이름은 대단했다. 수행원은 밤에도 영주의 섬까지 갈 배편을 쉽게 구했다. 수행원은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작은 배를 구했는데, 배의 선장은 벙어리라고 한다. 그는 아마 내가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벙어리 선장을 구한 자신이 매우 유능하다는 것에 기뻐했겠지만, 사실을 말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비린내가 났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저녁이 되었다. 슈바르젠 백작은 날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않았다. 난 슈바르젠의 식솔들에겐 슈테람 항구 도시의 밤을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성에서 나왔다. 수행원을 따라간 곳은 외진 선착장의 으슥한 곳이었다. 선착장엔 작은 어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원은 내가 혼자라는 것에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그를 보며 입을 두 번 두들기면서 침묵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홀로 테라린 호수섬으로 향했다. 가까운 섬이라 선착장에서 출항한 지 몇십 분 만에 도착했다. 비린내는 여전히 진동했다. 바다의 비린내가 아닌 썩은 생선의 악취였다. 벙어리 선장의 낡은 어선에서 나는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섬의 작은 선착장에 내려 언덕길을 걷는데도 계속 비린내가 따라왔다.
섬은 작았다. 낮은 언덕을 오르자 곧바로 드넓은 호수가 보였다. 섬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호수는 왜 슈바르젠 백작이 개인 소유지로 독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였다. 달과 별이 호수에도 떠 있다. 특히 큰 보름달이 뜬 날이라, 마치 두 개의 달이 서로 마주 보는 것 같았다. 별의 여신의 눈망울처럼 아름다운 호수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호수와는 별개로 비린내는 더 심해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해져만 갔다. 난 눈을 크게 뜨고 호수를 바라봤다. 점점 거울처럼 별과 달을 비추던 수면을 넘어서, 나는 더 많은 것과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낚시를 하다니."
겉보기와 달리 호수는 공허하고 냉정했다. 물속에는 작은 물고기조차 살지 않았다. 난 그제야 이처럼 넓은 호수에서, 개구리나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호수가 머금은 별빛이 이젠 내 망막에 내려앉은 듯했다. 눈이 부셔도 난 오랫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 천안통의 힘은 예상할 수 없다. 눈을 감으면, 더는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깊숙한 호수.
마침내 깊은 바닥이 보일 때쯤.
다아!
갑자기 달비가 움직였다. 녀석은 무언가를 봤는지 소리를 내며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고, 난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가 떠야 했다.
"넌?"
잔잔한 물결이 일더니, 이내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물이 살지 않는 호수다. 저건 생물처럼 보이나 생물이 아니다. 나는 예상외의 뜻밖의 상황에 살짝 당황했다. 호수의 정령은 사실 악마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이 호수에는 정령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영수가 왜...."
사람의 몸만큼 큰 잉어였다. 녀석의 비늘은 비단처럼 곱고 무지개처럼 다양했다.
잉어가 가만히 날 바라본다. 달비가 더 방정맞게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영수의 감정은, '술사'의 감정을 따른다고 했다. 자연의 영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저 비단잉어 영수는 몹시 슬픈 듯한 눈이었다. 잉어, 하물며 영수임에도 난 녀석이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단 잉어 영수는 서글픈 눈으로 날 바라보다 이내 깊숙한 호수에 모습을 숨겼다. 그때, 심상치 않던 달비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갑자기 호수를 향해 몸을 던진 것이다. 달비는 잉어를 따라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 입술을 깨물며 겉옷을 벗었다. 달밤에 수영이라니, 시발.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난 즉시 호수로 달려갔다. 수영은 할 수 있었지만, 녀석들을 따라갈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호수의 물은 따뜻했고, 머리를 모두 담가도 숨을 쉴 수 있었다. 호수는 몹시 깊고 어두웠지만 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잉어가 있었다. 잉어를 따라가던 달비는 뒤돌아 내게 왔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물속임에도 숨을 쉴 수 있었고, 물의 저항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은 물에 잠겨 헤엄치고 있지만 전설 속 인어라도 된 듯 움직임은 편했다. 나는 능숙하게 잉어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가까이 가자 잉어는 더 깊은 곳을 향해 헤엄쳤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건 녀석의 힘이다. 잉어 영수는 내가 자신을 따라오길 바라고 있다.
난 잉어를 따라 헤엄쳐 호수의 가장 밑바닥까지 도달했다. 텅 빈 모랫바닥은 허전했으나 멀리 유일하게 해초가 자라난 바위가 하나 보였다. 잉어는 바위 곁에서 멈추어 섰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가 아님을 눈치챘다.
그곳까지 다급하게 헤엄쳤다. 난 순간, 물속임을 잊어버리고 숨을 들이켤 뻔했다. 바위라고 생각했던 건, 눈을 감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다. 물살에 금발의 머리카락이 일렁여서 해초처럼 보였다. 처음 시체를 보았을 때 너무 멀쩡해서 살아 있다고 착각했다. 죽었다는 걸 알고 있는 지금도 헷갈릴 정도다.
카란트.
그의 시체는 물속에 오랫동안 있었음에도 불지 않고 죽었을 때 모습 그대로 굳은 것처럼 온전했다. 잉어는 시체를 맴돌며 고래의 울음처럼 구슬픈 소리를 내었다. 시체를, 영수가 지키고 있는 건가? 이 호수 깊숙한 곳에 시체를 놔두고 지키고 있는 이유.
악마.
녀석은 악마로부터 시체를 지켜 낸 것이다.
악마와 영수.
늑대의 뱃속에 있던 달비가 생각났다. 어쩌면 여태까지 잉어 영수도 호수의 악마를 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란트의 개입으로 무언가 틀어지게 되었다. 잉어는 시체를 지키며 슬퍼했다. 위장자가 성에서 썩은 비린내를 풍길 때도, 녀석은 호수에서 카란트의 시체를 지켰다.
영수는 초월의 짐승이며, 자연과 생물의 경계에 있는 존재다. 아버지가 그랬었다. 죽음은 순리다. 따라서 죽음은 영수들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모르기에,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하지만 영수술사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면 달라진다.
'술사'의 '감정'.
저 영수가 느끼는 비통함은 누구로부터 흘러 들어온 것인가?
카란트는 단순히 악마에게 잡아먹힌 게 아니다. 그가 실종된 이후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영수는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사건의 결말이 행복했더라면, 백작의 기대는 덧없는 게 아니었을 텐데. 그가 악마를 이겨 냈더라면.
카란트는 끝까지 싸웠다.
난 그의 시체를 안고 이 외로운 밑바닥에서 끌어올렸다.
* * *
"하아, 하아."
강기슭에 카란트의 시체를 두었을 때였다.
헤엄치느라 기진맥진이 된 난 철퍼덕 앉아 숨을 골랐다.
다아!
그러며 달비의 행동을 지켜봤다. 달비는 호수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은빛 털을 부풀리더니 별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호수를 물들였다. 마침내 드넓은 호수 전체가 달비를 따라 빛나기 시작하자, 나는 숨을 멈추고 경이롭고, 황당한 상황을 멀뚱멀뚱 지켜보게 되었다.
그때였다.
잉어 영수의 몸이 작아졌다 싶었을 때, 달비가 입을 벌려 냉큼 잡아먹었다.
"응?"
다아~!
달비는 우물우물 거리더니, 꿀꺽 삼켰다.
맛있는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잉어는 가시가 많아서 먹기 불편한데.
아니, 그것보다 진짜 잉어도 아니고 '영수'잖아.
"그걸 네가 왜 처먹냐."
놀랄 힘도 부족했다. 심지어 난 방금까지 슬퍼하고 있었으나, 달비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먹었네. 우리 달비, 잉어를 먹었네. 한입에 꿀꺽 삼켰네, 초식이 아니라 육식이었네. 낄낄.
하지만 이내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아버지가 알려 준 아르테미스의 전설이 생각났다.
이 녀석, 진짜.
"달비, 네가 아르테미스냐? 달의 여신님?"
달비는 날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 개소리냐고 되묻는 것 같은 행동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뭐, 맞겠지. 신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악마와 '쌍둥이'들이 존재하는 세계다. 아르테미스, 달의 여신이라 불릴 만큼 강한 영수가 있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며, 지금 녀석의 모습이 모든 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도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 * *
비린내가 코를 마비시킨다.
"엇! 놀래라!"
지랄은.
"공자님? 폴스타 공자님! 여기서 무엇을… 정말 놀랐잖습니까."
언덕을 올라오던 '카란트'를 만났다.
난 힐끔 뒤돌아봤다. 멀리 있으니 강기슭의 카란트는 무사할 것이다.
"백작님께 여쭤 보니 이 호수에서 실종된 이후 카란트 경이 달라졌다고 하시더군요. 호수의 영수의 힘을 느끼셨나요?"
"하하, 아버지도 참. 그땐 정말 죽을 뻔한 아찔한 경험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수술사의 힘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종종 영수의 힘을 갈고닦고자, 몰래 찾아오곤 합니다. 이런, 아버지에겐 비밀입니다. 영수의 힘을 제대로 펼치게 된 후에 슈바르젠 가문을 깜짝 놀래킬 계획이거든요. 하하."
하하하.
지랄.
난 말하면서 놈에게 점점 다가갔다.
"혹시 제가 말했던가요? 제 눈깔이 개눈깔이라는 거."
"…무슨 말씀이신지."
"뭐, 생선 대가리는 진작에 보였고, 그 외에도 많이 보이거든요. 하루면 충분했어요. 스카우터의 성능이 구려서 확신할 수 없는 게 문제였지만. 아, 맞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프리더를 모르겠구나."
비린내.
"그래도 몇 번 봤다고 그 정돈 알겠더라. 난 쌍둥이들과 달리 무저갱의 바퀴벌레, 노예상인은 아무리 지랄해도 못 이기지만."
잉어 영수를 만나고 난 뒤로 더 확실해졌다.
놈은 약하다. 아니, 약해졌다.
검은 늑대처럼, 오랫동안 영수의 힘으로 봉인되어.
"생선대가리 정도는 혼자서도 토막 칠 수 있겠더라고. 자갈치 아지매 스타일로."
콰득!
난 입고 있던 라멜스타를 순식간에 변형시켜 도끼로 만들고, 전력으로 휘둘러 생선 대가리를 토막 쳤다.
29
묵직한 일격이었다. 도끼는 생선의 비늘을 가르고 노란 눈알을 터트리며 아가미까지 깊숙하게 박혔다. 으깨진 대가리에선 푸른색 염료처럼 시퍼렇고 진득한 피가 솟구친다. 폴스타의 기습에 당한 악마는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나 곧 놈의 쪼개진 대가리에서 연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석탄을 태울 때보다 더 검은 연기였다. 막대한 연기는 순식간에 주위를 장악했다. 이내 산불이라도 난 듯 섬은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지상에 남아 세상을 어둡게 물들였다. 검은 안개가 자욱해지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악마는 조용히 안개에 숨어 몸을 일으켰다.
[그랑카치, 그랑카치.]
악마는 검은 연기에 숨어, 제 이름을 속삭였다.
악마의 이름은 그랑카치Grangach.
그랑카치의 죄악은 침묵.
주변을 장악한 검은 안개는 밤보다 어둡고 조용했다.
침묵의 안개는 상실을 강요한다.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자는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한다. 점차 방향 감각이 소실되고 무게중심과 살갗의 촉감도 잃어버리며, 마침내 오감을 상실한다. 육체의 지배권을 잃은 자는 상실의 두려움에서 공포로 허덕인다. 그랑카치의 먹잇감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천천히 그랑카치의 이빨에 찢겨져 죽는다. 검은 안개의 희생자는 자신이 먹히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마지막에 이르려 뇌가 먹혔을 때 비로소 죽음을 실감하게 된다.
침묵.
깊은 물의 악마, 그랑카치의 죄악이었다.
[어리석은. 어리석은.]
그랑카치는 먹잇감을 조롱했다. 감히 자신을 상처입힌 자다. 천천히 유린하며, 몇 시간에 걸쳐 야금야금 씹어먹고자 했다. 그랑카치는 호수의 영수와 오랫동안 싸우며 육체는 쇠약해졌지만, 죄악의 힘만은 여전했다. 죄악은 근본과 맞닿아 있으며,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는 힘이다. 영수조차도 검은 안개의 침묵을 벗겨 낼 수는 없었다.
[공포에 삼켜져 떨지도 못하는구나.]
감각을 상실하고 굳어 버린 먹잇감을 보라.
잡아먹혀도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할 가련한 존재야.
비록 푸른 눈의 소년은 잡아먹지 못했으나, 이놈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포식하리라.
악마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탈을 벗자 심연을 헤엄치는 악마가 부화했다. 인간을 잡아먹는 검은 물의 생선은 안개를 헤엄치며 폴스타의 주변을 유영했다. 공포는 훌륭한 향신료다. 인간이 충분히 겁에 질리도록, 악마는 천천히 만찬을 기다렸다.
마침내 악마가 갈치처럼 뾰족한 주둥이를 내밀고, 폴스타를 향해 쇄도했다. 그랑카치는 인간의 살점을 뜯어먹고, 붉은 피가 비늘을 적시길 기대했다. 노란 눈알이 희열에 차 번득인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이가 폴스타의 팔을 뜯기 직전이었다.
"시발놈아."
쿵!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랑카치는 턱을 가격한 폴스타의 도끼에 주둥이가 잘려 나갔다. 또다시 피를 내뿜은 건 자신이었다. 검은 연기가 휘감기자 주둥이가 다시 생겨났다. 상처는 금방 재생이 되었으나 그랑카치는 고통보다도 굴욕에 치를 떨었다.
먹잇감의 발악.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침묵을 강요받은 자는 자신의 죽음에 순종적이어야 했다.
간혹 존재했다. 유독 다른 이보다 감각이 날카로워 오랫동안 침묵의 강요를 버텨 내는 인간들, '오러'라 불리는 끔찍한 힘을 다루는 인간이었다.
그랑카치는 좀 더 신중해졌다. 그는 폴스타의 주변을 맴돌며 때를 노렸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인간이 '죄'를 지닌 이상, 악마의 죄악은 절대적이다. 시간은 걸려도 결국 놈도 모든 감각이 소실될 것이다.
그랑카치는 포식의 순간을 수백 년간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먹잇감의 상태를 살핀다. 이번엔 공격하지 않고 안개에 숨어 천천히 다가갔다. 반응하지 않으면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더러운 새끼가."
그때였다.
또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침묵해야 할 먹잇감이 반격에 나섰다.
푹!
순식간에 도끼질에 주둥이가 잘려 나갔다. 그랑카치는 황급히 도망쳤으나 도끼질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되는 폴스타의 공격에 그랑카치의 몸통은 뭉개지고, 지느러미가 잘려 나갔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랑카치는 깨달았다. 먹잇감의 '발악'이 아니라는 것을.
폴스타는 달아나는 악마를 쫓아가서 연달아 머리를 내려쳤다. 사정없이 내려치는 도끼질에 악마의 푸른 피가 사방팔방 뿜어져 나왔다. 장작을 쪼개듯 거침없는 도끼질에 악마의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머리가 완전히 잘려 나가기 전에, 그랑카치는 간신히 안갯속에 숨어 도망칠 수 있었다.
도망치던 그랑카치는 보았다.
침묵속에 허덕여야 할.
공포에 삼켜져 아무것도 보이지 말아야 할.
'먹잇감'이 자신을 또렷하게 직시하고 있음을.
놈은 되레 분노에 차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눈빛이었다.
"이게 네 힘이냐?"
폴스타는 도끼날에 묻은 푸른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고작 시커메지는 게?"
검은 안개가 주위를 감쌀 때만 해도 폴스타는 긴장했다. 그래서 악마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악마가 공격에 나서자,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눈치챘다. 악마는 안개에 숨어 단순히 몸을 검게 물들일 뿐이었다. 폴스타는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보고 있었다.
"다 보여, 새끼야."
그랑카치는 경악했다. 존재하게 된 이후부터, 그랑카치는 침묵의 안개에 저항하는 먹잇감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별의 짐승을 다루는 자들만이 침묵에 저항했을 뿐, 결국 잡아먹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허나, 저놈은 뭔가? 저항하는 게 아니다. 침묵의 안개를 꿰뚫고 자신을 직시했다. 죄악은 태초 이전의 어둠보다 더 깊고 어두우며, 빛 따위가 간섭하지 못할 가장 '고결한' 힘이었다.
악마의 죄악은 절대적이다.
절대, 죄를 지닌 인간은....
[그럴 리가 없다.]
죄가 없는 인간이 있을 리가.
[순리를....]
죄악을 꿰뚫어 볼 존재가 있을 리가 없어.
악마는 분에 차 소리 질렀다.
[인간 따위가 어찌 죄를 이겨 내느냐! 침묵을, 어찌 본단 말이더냐?]
폴스타는 악마의 분노에 어깨를 으쓱했다.
"지랄 마. 보이는 걸 어쩌라고."
그는 도끼를 추켜들고 달려들었고, 그랑카치는 안개에 숨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헉헉, 시발. 횟감이 너무 신선하잖아."
폴스타는 악마를 계속해서 토막 냈으나 놈은 죽지 않고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했다. 검은 안개가 악마의 몸을 휘감을 때마다 상처가 재생됐다는 걸 눈치챈 폴스타는 헛된 짓을 관두기로 했다. 안개는 벨 수 없다. 하지만 없앨 수단은 있다.
상처가 회복되자마자 그랑카치는 도망쳤다. 어느새 바다와 가까워졌다. 입수를 허용한다면, 분명 놓치게 될 것이다. 폴스타는 포기하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악마를 토막 낼 생각은 없었다. 대신 라멜스타를 도끼 형태에서 작살 형태로 변형시켰다. 작살의 끝은 낚싯바늘처럼 휘어져 찔리면 빠져나올 수 없도록 했다.
그랑카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에게 악마의 권위는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두려워 이 상황을 벗어날 생각만 했다. 하지만 죄악이 무용지물인 악마는 그저 흉측한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내 폴스타에게 따라잡힌 그랑카치다.
푸욱!
폴스타는 작살을 그대로 그랑카치의 척추에 내리꽂았다. 레비아탄의 비늘로 만들어진 라멜스타는 생선의 무른 살점을 꿰뚫고 지면에 단단히 박혔다. 그랑카치는 입속에서 검은 안개를 내뿜었으나, 폴스타의 주먹질에 순식간에 내뿜던 연기가 사라졌다.
[이 힘!]
그랑카치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죄악의 힘을 막아 낸 힘은 분명 악마와 상반되는 힘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도 아니며, 천사도 아니다. 침묵의 안개를 꿰뚫어 본 건 이 힘인가? 아니, 그는 이 힘을 사용하지도 않았어. 악마는 공포에 질렸다.
'공의 힘은 통한다. 하지만 부족해.'
그랑카치는 계속해서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폴스타는 아지비카교의 성물이자 악마와 마법의 힘을 헛되게 하는 공(空)의 힘을 사용하여 연기를 막았다. 하지만 검은 안개는 계속해서 내뿜어졌고, 공의 힘은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젠장, 아직 멀었냐!"
점점 더 연기를 막을 수 없게 되자 폴스타는 다급해졌다.
그때, 명랑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개간네?
"그래, 빨리!"
개간네!
달비였다. 잉어 영수를 삼키고 난 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던 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비의 꼬리털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는 걸 긴박한 상황에서도 폴스타는 알아차렸다. 달비는 폴스타의 외침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린 사슴은 달처럼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랑카치와 폴스타는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을 가르고 낙하하는 광휘의 별똥별이 보였다.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 중 하나가 떨어지고 있다.
"달비야."
폴스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거 떨어지면, 난 어쩌라고?"
작살을 놓으면 악마는 검은 연기에 숨어 바다로 도망친다.
그렇다고 월석이 떨어지는 곳 중심에 있는 건 자살행위다.
그 위력을 잘 알기에, 폴스타는 애절한 표정으로 달비를 바라봤다.
다아.
달비가 다가와서 폴스타의 등에 기댄다.
영수가 술사의 감정과 동화되듯, 술사도 영수의 감정을 느낀다.
이제 폴스타는 겁먹지 않았고, 악마의 척추에 꽂힌 작살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점점 별빛이 가까워질수록 악마는 괴성을 내질렀다. 짐승의 비명보다 소름 끼쳤고, 원한에 찬 사람의 고함보다 더 처절했다.
콰아앙!
마침내 섬에 별똥별이 떨어졌다. 폴스타와 악마의 지척에 떨어진 별은 순간 밤을 몰아낼 엄청난 빛을 내뿜었다. 빛이 닿자 그랑카치의 검은 안개는 순식간에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빛은 악마를 조각냈다. 허나, 폴스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달비."
폴스타는 작살을 뽑고 일어나 갈가리 찢겨 도륙 난 악마를 바라봤다. 놈은 더는 검은 안개를 뿜지 못했다. 하늘의 별이 떨어진 곳엔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연병장을 부수고 대리석 지붕을 무너트린 위력은 그대로였다. 허나, 악마를 조각 낸 빛은 전에 없던 힘이다.
"몸보신하고 더 강해졌네."
잉어 영수를 삼킨 뒤로 생겨난 변화다.
달비는 하품을 하며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폴스타는 파랗게 물든 사슴의 꼬리를 보며, 문득 달비가 모든 힘을 되찾으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궁금해졌다.
갈가리 찢긴 악마는 삶에 대한 욕구를 놓지 않았다. 죄악을 부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랑카치는 온몸이 찢긴 채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낚싯줄에 걸린 생선이 발악하듯 몸을 펄떡이며 바다로 향했다. 움직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폴스타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작살을 들었지만, 이내 팔을 내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선착장에 들어오는 한 척의 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돛에는 슈바르젠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 * *
추했다.
저런 꼴로 살기를 갈망하는 놈의 모습은 너무나 추했다.
악마가 더 역겨워졌다.
짜증 나는 건, 저런 모습을 전생부터 너무 많이 봐 왔다는 것이다.
"끝이다."
작살을 내리꽂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난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한 척의 배를 확인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작살을 내려놓았다. 혹시나 카란트의 시체를 찾지 못할 상황, 그리고 내게 벌어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수를 써 놨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카란트가 악마인 걸 증명하기 위해서 백작의 마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슈바르젠 백작님."
난 고개를 숙였다. 지랄 맞을 전생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날 괴롭혔다.
날 지키기 위해, 이용당해서 죽은 수많은 동료들이 생각났다.
선착장에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곧바로 성큼성큼 악마에게로 걸어갔다.
슈바르젠 백작이었다.
악마는 이미 모습이 바뀐 후였다.
미끌거리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너덜거리는 팔과 다리가 되었다.
놈은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기 직전의, 가련하고 불쌍한 카란트가 되어 슈바르젠 백작에게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살려 주세요, 아버지!"
백작이 멈칫, 걸음을 멈춘다.
이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표정은 죽어 가는 아들을 앞에 둔 아버지의 얼굴이라기엔 너무 담담했다. 하지만 악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악마에게 아비의 마음을 이해할 심장은 없었다. 그저 위장자가 되어, 카란트가 되어, 날 모함하기 바빴다.
"으,윽. 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카란트의 앞에 선 백작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난 그가 필사적으로 참고 있음을 눈치챘다. 새어 나올까 봐, 기계처럼 말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카란트, 심한 상처를 입었구나."
"공자가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미친 공자가, 저 빌어먹을 놈이, 나, 날 시기해서! 우엑-!"
카란트가 피를 토했다. 악마였을 때와 달리, 시뻘건 붉은 피였다. 백작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카란트를 조심히 안았다. 제 아들의 등을 천천히 두들기는 백작의 손은 몹시 떨렸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푸른 눈은 내 자랑이었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게 껴안았다.
"아, 아픕니다."
그리고 천천히 품에서 카란트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릉!
칼을 뽑는 소리가 서늘했다.
백작은 검을 카란트에게 겨눴다.
카란트는 당황하며 손을 뻗었다.
"아버지?"
"하지만 네 눈은 짐승처럼 붉구나."
백작은 순식간에 카란트의 뻗은 손을 잘라 냈다.
손이 잘려 나간 카란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작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산의 용암과도 같았다. 언제 곧 폭발할지 모르는 강렬한 분노와 증오가 목소리에서 묻어 나왔다.
"대전쟁에서 겪었다. 내 자식을 뜯어먹은 붉은 눈의 악마 놈들을, 어찌 잊겠느냐."
푹!
백작의 검이 카란트의 다른 팔을 잘랐다.
"나의 조각, 내 영혼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의미. 그 어떤 값진 보물보다 날 가장 기쁘게 한 건, 정원에서 주운 하찮은 돌이었다. 세 개의 돌은 내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기어코 악마 놈은 내 의미를 모두 앗아가는구나."
다리를 자르고, 배를 찔렀다. 그제야 악마가 본색을 드러냈지만, 백작의 검에 무참히 머리가 잘렸다. 악마는 더는 회복하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백작의 검은 계속해서 휘둘러졌다.
"어찌, 어찌, 어찌! 내게 남은 하나의 사랑마저 빼앗느냐! 아아, 채피, 리아나. 카란트!"
악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도질당했다.
칼을 휘두르던 백작의 푸른 눈은 점점 충혈되어, 마치 악마처럼 붉게 보였다.
푸른 눈과 붉은 눈.
'카란트'가 흘린 붉은 피는 점점 푸르게 변해 갔다.
30
"아들 놈이...."
백작이 말했다.
"영수와 교감하는 걸 보여 준다며."
갈기갈기 찢긴 악마의 사체는 순식간에 썩었다. 피비린내와 썩은 내가 뒤섞여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다. 푸른 피와 썩은 살점이 뒤섞여 땅이 시궁창의 오물처럼 변해 갔다. 백작의 발치는 더러운 것들로 얼룩졌다.
"호수로 오라고 했지."
하지만 백작은 무릎을 꿇었다. 오물이 바지를 더럽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독한 악취를 그는 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악마가 내뿜은 푸른 피가 물감처럼 서서히 얼굴에 번져 간다. 나는 감히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백작은 공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슬픔이 메아리치는 표정이 되었고, 이내 분노로 일그러졌다가 고통을 참는 듯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결국, 그는 견디지 못하고 절규를 내질렀다. 처절하고 슬픈 비명이었다.
그는 직접 악마를 죽였다.
카란트가 악마라는 걸 알린 날 탓하지도 않았다.
대전쟁 때 백작은 악마로부터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기에,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실감은 결코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이나 겪는 일이다. 하지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 불의의 사고도 아닌 악마라는 사악한 존재에게 죽임을 당한 것. 간신히 잊었으나, 뒤늦게 얻은 아들마저 악마에게 죽었다는 것.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면부지의 나조차도 호수의 외로운 밑바닥에서 죽은 카란트를 봤을 때 가슴이 조이듯이 아려 왔다.
난 감히 슈바르젠 백작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었다.
* * *
시간이 지나.
절규를 멈추고 백작이 일어났다.
고통이 사라진 게 아니다. 슬픔이 진정된 게 아니다.
다만, 그는 애써 참으며 비통한 마음을 삼키고 내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는 강인한 사나이였다.
"달의 아이는 악마도 구별할 수 있나?"
백작이 묻는다.
"자넨 카란트가 악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어떻게? 평생 녀석과 산 아비조차 몰랐는데, 무슨 재주로 악마를 알아본 거지?"
"영수의 힘입니다."
"영수?"
"처음부터 그가 악마라고 확신하진 못했습니다. 미끼를 던졌고, 호수에 홀로 남게 되자 놈이 본색을 드러내어 악마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두 영수의 도움입니다."
나는 그럴듯한 이유를 말하며 둘러댔다. 안타깝지만 거짓말이 최선이었다.
"기만해서 죄송합니다, 백작님. 위장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많은 이에게 알리는 것보다 제 독단으로...."
"그만. 알고 있네. 그러니, 사과는 하지 마."
수십 년 전 일어난 '위장자'들의 공포를 백작은 직접 겪은 자다.
그는 머리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개 같은 일은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할 문제는 아니다.
난 백작을 호수로 안내했다. 그리고 강기슭에 숨겼던 카란트의 시체를 조심히 안아서 그에게 보여 줬다. 백작은 카란트의 시체를 보자마자 급히 뛰어왔다.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 시선을 오직 카란트에게만 두고 달려온 백작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카란트의 뺨을 매만졌다.
악마에게 죽은 자는 시체를 찾을 수 없다. 백작은 그 사실을 알기에, 카란트의 온전한 시체를 본 순간부터 어린아이처럼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란트를 안으며 소리쳤다.
"그저 내 곁에만 있어 줬으면, 아비는 바랄 것도 없었다. 카란트, 미안하다. 나 때문이야, 카란트, 카란트."
남겨진 자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백작의 모습은 내가 전생에서 수없이 봐 온,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젠장.
"슈바르젠 백작님. 카란트는 영수술사였습니다."
"…뭐?"
"테라린 호수에는 영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호수의 악마를 봉인하던 영수였겠지요. 카란트 경의 육신이 악마에게 먹히지 않고 깊은 호수에서 몇 달 동안 잠긴 채 온전했던 이유도 영수가 카란트 경을 지켜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영수들이 자애로운 존재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의 존재이며, 죽음은 섭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술사와 교감을 나누고, 감정을 교류한 영수는 다릅니다. 호수의 영수가 카란트 경을 지킨 이유도 분명 그러한 이유였을 겁니다. 카란트 경은 악마에게 잡아먹힌 게 아닙니다. 영수가 오랫동안 육신을 지킬 만큼, 그는 깊은 희생과 용감한 정신으로 악마와 맞서 싸웠습니다. 봉인에서 풀려난 악마가 지금까지 학살을 저지르지 못한 것도, 놈이 무척 약해진 상태라 힘의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다. 호수에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생겨났다. 달비가 장난치며 생겨난 현상이다. 백작은 놀란 눈으로 물보라를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알량한 위로가 아닙니다. 카란트 경은 분명 훌륭한 영수술사가 되었을 겁니다. 푸른 눈에 어울리는, 호수의 영수를 지닌 훌륭한 영수술사가."
아들의 손을 한참 동안 잡고 있던 백작이, 쉰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
"자넨 레인버그 공을 닮아 무척이나 자상해."
백작의 진심.
"하지만 그와 달리 몹시 잔인하군."
무어라 변명할 수 없었다.
"고맙네."
별과 달빛을 비추는 테라린 호수는 쓸데없이 너무 반짝였다.
젠장.
* * *
성으로 돌아왔으나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난 가만히 앉아 자연지기를 받아들이는 명상의 자세를 취했다.
바람이, 몸 안에서 분다.
그리고 차가운 물방울이 뺨을 간지럽힌다.
달라졌어.
명상이 끝난 후 난 전보다 확실히 더 좋은 느낌을 받았다.
"충전기의 성능이 더 좋아졌구나."
달비의 파란 꼬리털이 파르르 떨렸다.
* * *
밀랍으로 봉한 서신을 보낸 지 삼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슈테람 성에 도착했다. 레인버그 공작의 방문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레인버그 휘하 가신들과 기사는 물론, 백작을 제외하고 슈테람 성의 모든 이들이 몰랐으며, 황실과 교황청에도 이번 일을 알리지 않았다. 오직 나와 백작 그리고 아버지만이 알고 있었다.
카란트의 죽음은 뒤늦게 알려질 것이다. 불쌍한 카란트, 그는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백작은 홀로 슬픔을 감수해야 했다. 이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죽은 이의 넋조차 기리지 못한다니, 비참하게 느껴졌다.
'위장자'에 대한 회담이 백작의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이번 카란트 사태는 봉인된 악마가 풀려난 것이다. 몇십 년 전 있었던 대전쟁과 경우는 달랐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쿤칸 제국에서 더는 악마들을 볼 수 없다고 여겨졌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악마들이 있다는 것, 대전쟁 이후에 남은 악마들이 있을 줄 모른다는 것,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방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이번 일은 백작의 목소리가 컸다. 그의 슬픔은 곧 악마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되었다.
회담이 진행되자 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 근래 아버지는 몹시 바빴다. 아르테미스의 성지로 향하는 여행과 생일 파티 때를 제외하고 퀄츠 성에 있던 적이 드물었다. 아버지는 공무는 가신들에게 맡겨 놓고 어디론가 자주 떠나 있었다. 알고 보니 위장자에 대한 '소문'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했다.
실종된 자들이 돌아오거나 갑자기 행실이 달라졌다는 소문을 알아보던 아버지가 내린 결론은,어쩌면 위장자들이 제국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난 놀라지 않았다. 멜리사 누나가 그랬다. 무저갱은 '비었다고'. 직접 노예 상인으로 위장한 악마를 만나기도 했었다. 쿤칸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과 바다 너머 대륙에서도 위장자들이 활개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대전쟁 때와 달리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는 것뿐.
증오로 이글거리는 슈바르젠 백작은 마침 위장자의 소문을 조사하던 아버지에게 거센 불을 붙였다. 대전쟁 때와 달리 위장자들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미리 싹을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일치했다.
슈바르젠 백작은 아버지를 지원하고, 아버지는 조만간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다.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영수술사였다. 이미 영수가 악마에게 독과 같은 존재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영수를 다룰 줄 알면 '위장자'가 아닌 확실한 증거가 된다. 영수술사끼린 서로 쉽게 구별이 가능한 점도 있다.
제국에 위장자가 어디까지 침투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주장은 이러했다.
최대한 조용히 영수술사를 모아, 동시에 척결한다.
그리고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나였다.
회담 후 백작의 방에서 나올 때 난 힐끔 선반을 바라봤다.
장식되어 있던 세 개의 돌이 없었다.
* * *
마차는 레인버그의 휘장이 걸려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퀄츠 성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백작이 말했다. 내가 영수의 도움을 받아 악마를 구별했다고.
그가 모를 리 없다. 아버지는 제국 제일의 영수술사다. 그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악마를, 내가 영수의 힘으로 감지했다고? 거짓말인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악마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검은 사제들의 의식 혹은 백작이 카란트의 붉은 눈을 보고 위장자인 걸 알아차린 것처럼, 위장을 하지 못하도록 반죽음 상태로 만드는 것. 영수가 영향은 미치더라도, 나처럼 바로 악마를 구별할 순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복잡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느끼는 복잡한 심경을 난 어렴풋이 예상했다. 퀄츠 영지에 도착하여 레인버그의 마차로 옮겨 탈 때 난 넌지시 아버지에게 말했다. 생일 파티 때 했던 말이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헝클었다.
* * *
"며칠 동안 싸우지 못했으니, 오늘은 세 명과 싸우겠다."
라니스타와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슈테람에서 겪은 지랄 맞은 일들의 통증을 잊기 위해선,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나았다.
"오늘 '죽을' 놈들은 누군데?"
"하! 백서선생, 매난검, 속화귀라는 놈이다. 내가 마교의 고독蠱毒재재에 떨어져서 수백 명의 악귀와 싸울 때...."
"자세한 건 안 알려 줘도 돼."
라니스타는 피식 웃었다.
"패는 맛이 있겠구나."
그는 긴 장검, 짧은 단도 두 자루, 그리고 낫을 바닥에 놓았다. 오늘 그가 흉내 낼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무기인 것 같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라니스타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건 실전이잖아?"
"음."
"왜 내가 고집부렸을까, 무공을 배우니까 몸만 써야 한다고."
난 달비를 바라봤다.
"실전답게 해야지."
악마놈과 싸울 때 느꼈다.
모든 걸 부딪혀야 해.
무공뿐만 아니다.
더 많은, 더 강한 힘을 얻고,
그 힘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했다.
새벽, 해도 뜨지 않았는데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라니스타는 몸을 들썩거렸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서 떨어질지 모른다.
"형은 지금 백서선생인가 뭔가 하는 놈이지? 그놈은 저거 어떻게 할 수 있대?"
달비가 떨어트린 달조각이 연병장을 강타하기 직전, 라니스타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쿠웅-!
마침내 운석이 떨어졌다.
라니스타가 기사단장이 된 이후 연병장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 멜리사 누나의 마법으로 부수고 지랄해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운석이 떨어진 곳엔 깊은 구덩이가 생겨나, 연병장은 복구되지 못했다.
쿨럭, 쿨럭!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는 라니스타가 보였다.
그의 몸은 흙먼지가 묻어 더러웠으나 상처는 없었다. 난 라니스타가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며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라니스타 놈의 눈이 달라졌다.
난 문득 실수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했던 것이다. 왜 저렇게 빛나지? 흥미로움으로 가득 찬 어린 소년의 눈을 보는 것 같잖아. 오히려 날 꾸짖고 때려 패던 사자의 눈이 더 낫겠다.
"몇 단계를 건너뛰어야겠구나."
라니스타 놈이 검을 들었다.
"아아! 본래의 힘은 안 돼!"
"우쭐하지 말아라."
나는 몇 번 본 적이 있다. 레인버그가의 숙련된 기사들은 '오러'라는 걸 다뤘고, 그들의 검에 맺히는 신비로운 기운도 본 적이 있었다.
라니스타, 그의 검에도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의 본래의 힘은 아니다. 그가 무저갱에서 보여 준 건 검에 맺히는 정도가 아니라 주변을 메우는 거대한 붉은 용의 기운이었으니까.
허나, 전에 흉내 내던 무림인과 달리 오러를 사용한다는 건.
"좆 됐네."
"화산의 비화난검수다. 그는 하급 무사를 넘어, 무림의 칼밥을 먹던 놈이지."
난이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도망치지 않고 라멜스타를 무기로 변형시켰다.
조금 더, 조금 더.
절대 무리라고 생각할 만큼, 극한까지 몰아가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힘은 얻지 못할 거야.
* * *
손가락이 덜렁덜렁거리지만 뭐, 우샤스 누나가 고쳐 주겠지?
"각오가 달라졌다."
라니스타 놈이 물었다.
"왜 강해지고 싶으냐?"
"꼭 필요한 대화인가?'
아파 뒤지겠는데 말을 시키는 라니스타 놈이 달갑지 않다.
"사제지간다운 대화가 아니더냐?"
난 손가락이 뚝 떨어질까 봐, 안타깝게도 가운뎃손가락을 추켜들진 못했다.
"…모든 걸 위해."
대신 대답을 했다. 어쨌든 그가 날 제자로 여기는 이상 맞춰 주는 게 좋다.
"흠?"
대충 대답했으나 진심이긴 했다.
레인버그의 가주, 호의호식, 악마 죽이기, 라니스타, 멜리사, 우샤스, 전생, 동료, 가족, 생존, 저항, 자유, 의지.
모든 건 강함이 있어야 가능한 일.
힘에 대한 필요는 전생에서도 절실했다.
결국 꺾여서 포기하고,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기억 못할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만약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라...."
라니스타 놈이 갑자기 설교하기 시작했다.
"제자야, 욕심이 많은 놈은 두 가지의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
뭐.
"하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 놈이며."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 찼네. 어디 들어나 보자.
"다른 하나는 모든 걸 쟁취하는 놈이 된다. 나처럼 말이다. 하하하!"
가운뎃손가락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이런, 떨어져 버렸네.
31
실전이랍시고 내 손가락을 깍뚝 썰어 버린 라니스타도 미친놈이지만, 장난이랍시고 중지 손가락을 '상처 부위'가 아닌 곳에 붙여 버린 우샤스도 악독한 년이었다. 회복의 대가로 난 여섯 군데의 각기 다른 신체 부위에 가운뎃손가락이 붙어 있는 기괴한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엿을 날리는 데에 주로 사용하던 손가락이 배꼽에 붙었다가 이마에 붙었다가 하는 모습을 보며, 난 처음으로 손가락에 동정심을 느꼈다. '그만 죽여 줘....' 말을 하는 것 같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누나에게 묻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샤스가 지은 미소는 공포영화 포스터와도 같았다.
"넌 유난히 축복의 힘을 잘 받아들이는구나. 신기해. 이쯤 하면 부작용이 일어날 법도 한데."
"축복도 사람 가리나? 것보다, 부작용이라니?"
"기적은 변덕이 심해. 회복을 바라도 되레 손가락이 썩어들어갈지도 몰라."
"하하 농담이 지나쳐."
어쨌든 잘린 손가락은 흉터도 없이 깔끔하게 붙었다.
우샤스 누나의 집무실에서 나와서 내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난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시발, 농담일 리가 있나. 어쩌면 한 번만 더 내 손가락으로 장난질했더라면, 영원히 중지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썩는다라...."
문득 우샤스 누나의 무시무시한 면상이 생각났다. 기적은 변덕이 심하다고 했지. 누나의 반송장 같은 몸은 역시 누나가 가진 힘과 연관이 있는 건가? 기적같은 힘을 믿다가 크게 데였을지도.
* * *
쌍둥이들에게 몇 안 되는, 거의 유일한 공통점을 하나 찾자면 의외로 '효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습을 듣기 위해 엄마에게 가던 난 이제 막 회복실에서 나오는 멜리사 누나와 마주했다. 종종, 엄마를 만나는 쌍둥이들을 보곤 했다. 희한하게도 전생의 악인들이 효심이란 감정은 알고 있었다.
"엄마는 괜찮아?"
멜리사 누나는 찌푸린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알고 싶니?"
"응?"
"끝나면 정원으로 와."
누나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멜리사 누나는 맛이 간 사람이다. 대악마를 죽이러 무저갱으로 향하면서 소풍을 가듯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또라이다. 그런 멜리사 누나가 저리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내가 기억하기엔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드디어 세계멸망의 징조가 나타났나?
"어머니."
엄마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핏줄이 드러날 만큼 창백한 피부와 총기를 잃은 눈빛, 영수의 힘이 만연한 회복실이 아니면 금방 쓰러지실 위태로운 몸 상태. 난 애써 웃으며 곁에 앉았다.
"멜리사 누나가 뭐라 그랬어요?"
"귀엽기도 하지. 꽃을 꺾어다 준다고 하더구나."
꽃을 꺾어 주는 게 그리 심각할 일인가.
가 보면 알겠지.
엄마는 영수를 보지 못했으나, 영수는 엄마를 좋아했다.
달비가 깡충 뛰어 무릎 위에 앉는다. 엄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상하고, 따뜻한 기운이야. 폴스타."
칭찬을 받자 달비가 품에 파고든다. 엄마는 달비의 기를 느끼고, 떨리는 손을 뻗었다. 달비를 볼 수가 없어, 허공을 쓰다듬던 엄마에게 달비는 일어나서 머리를 비볐다. 깜짝 놀란 엄마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어머, 세상에나."
이내 기뻐하며, 달비를 쓰다듬었다.
"예쁜… 예쁜 사슴이야."
"어? 보이세요?"
"이제 보이는구나. 신기해. 맥은 몇십 년간 볼 수도 없었는데, 이 귀여운 아이는 내 눈에도 보여."
갑자기 영수술사의 재능을 개화했을 리가 없다. 난 달비를 바라봤다. 달비는 날 보며, 꼬리를 파르르 떨더니 짧게 울었다. 역시 비범한 녀석이야.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영수는 없다. 우리 달비를 제외하고. 존나 멋있어.
* * *
"내가 왜 '그녀'를 '아끼는 줄' 알아?"
엄마에게 그녀라니, 자식이 부모에게 아낀다고 말하다니.
멜리사 누나는 정원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뭔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누나는 대뜸 저렇게 말했다.
난 누나가 단순히 효심이 깊은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낳아 주셔서?"
"은혜를 갚는 거야."
멜리사 누나가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앞으로 몇 달도 못 살겠지."
젠장,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헛소리라고 소리 질렀겠지.
"우샤스 누나의 힘을 빌리면...."
"우샤스가 말해 준 거다.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야."
"왜?"
"생명력이 고갈된 거야. 뿌리가 썩은 꽃에 물을 준다 한들, 시든 잎은 저물기만 하지."
멜리사 누나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녀가 말한 '은혜'는 부모 자식간의 당연한 도리가 아니었다. 엄마는 우릴 낳고 난 후 몸이 쇠약해졌다. 멜리사 누나의 말에 따르면, 단지 아이를 낳아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녀의 생명의 뿌리는 우리 때문에 썩은 거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만이 아니다. 난 천안통을 개안했고, 라니스타는 무림인처럼 내공을 습득했으며, 멜리사와 우샤스 누나도 각기 전생의 힘을 계승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다른 평범한 자들과 다르게 태어났다. 그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다르게' 태어났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릴 낳아 줄 자들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
임신했을 때부터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한다. 모성애마저 짓누르는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었을거라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우릴 낳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네 쌍둥이를 무사히 낳은 건 기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도움도 컸다. 영수의 힘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우린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엄마가 지금까지 살아 계신 것도 아버지가 조성한 회복실의 힘이었다.
"생명이 바닥난 인간은 병에 걸린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지."
"고통을 느낀다고? 지금도?"
"여태까진 햇살과 파도의 힘이 받쳐 주었지. 이젠 한계에 이르렀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녀는 끔찍한 고통의 나날을 견디면서 죽음을 기다려야 해."
"…방법이 있구나."
엄마는 멜리사가 꽃을 꺾어 온다고 했었다. 멜리사 누나가 어떤 사람인가, 대책이 없는데 내게 쓸데없이 이런 말을 하거나, 엄마에게 꽃을 꺾어 온다고 하거나 하진 않는다. 예상대로 멜리사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협곡에 재미난 게 있다더군. 그 옛날 쿤칸 왕이 죽어 가는 왕비에게 꺾어다 줬다는 '바람이 꽃'. 줄기를 꺾어도 시들지 않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고 품으면 고통을 없애 준다고 해. 전설처럼 여겨지지만, 직접 찾아보기 전까진 알 수 없지."
"찾을 생각이구나."
대협곡.
쌍둥이들이 생일 선물을 마련한다고 전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미친 곳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드넓은 절벽에 불과 번개를 뿜는 괴조가 득실거리는, 쿤칸 제국과 슈테르닐 왕국은 물론 아인들조차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금지 중의 금지. 쌍둥이들이라서 옆집 드나들듯이 했지, 마스터급의 검사도 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굳이 따라오라곤 안 해."
"정말 바람이 꽃이 있을까?"
"한 송이 구해다 줘?"
"아니, 같이 갑시다."
누군가를 위한 꽃.
직접 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멜리사 누나를 따라서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나무 문을 열기 전에,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문 너머는 오두막집이 아닌 괴조들의 둥지, 대협곡이겠지. 처음으로 망설이지 않고 멜리사의 '어디로든 문'을 통과하는 것 같네.
* * *
대협곡의 절벽을 살짝 내려다봤다. 대체 이 깊은 협곡이 어떻게 생겨났지? 침식 작용이라기엔 지랄 맞게도 깊었고, 지각변동이라기에도 증거가 부족하다. 대륙이 반으로 쪼개지다가 말았나? 아니, 마치 누군가가 협곡을 파낸 것 같다. 대충 에베레스트 산만큼 큰 삽으로, 그 삽을 들 수 있을 만큼 큰 거인이, 몇천 번에 걸쳐서 파낸 것 같았다. 경이로움과 동시에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자연이 만들어 냈다기보다, 오히려 '신'처럼 초월적인 존재가 창조한 것 같잖아.
난 대협곡의 끝을 보기 위해서 눈에 힘을 줬으나, 까마득한 아래서, 훨훨 날아다니는 괴조들의 모습만 봤을 뿐이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 천안통이 깊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건 무저갱보다 더 깊다는 뜻인데.
"아인들은 대협곡을 흔적이라고 불러."
내가 감탄하고 있자 멜리사 누나가 슬며시 등을 떠밀었다. 태연하게 말을 걸면서 저지른 흉악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난, 침착하게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했다.
"아지비카교의 창조신이 공동의 악신과 싸웠던 흔적이래."
누나는 내 발버둥치는 꼴이 퍽 우스웠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흐하, 말도 안 돼. 신이라고 해도 이성인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질러? 히히."
"누나."
난 진지하게 물었다.
"대협곡에 떨어지면 누나도 뒤져?"
꼬리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난 순간, 누나의 꼬리가 반사적으로 오므라드는 걸 목격했다. 뭐지? 쫄았나? 진짜로? 누나는 꼬리와 달리, 목소리와 표정은 담담했다.
"네 빈곤한 상상력이 때론 부럽기도 해."
누나의 꼬리는 쉽게 펴지지 않았다.
"떨어지는 건 무섭지 않지. 하지만… 으, 날개 달린 것들이란."
대협곡에 날개 달린 건 '새'밖에 없다.
뜻밖이었다. 멜리사 누나도 무서워하는 게 있구나.
저 아래, '괴조'들을 무서워하는 누나가 정말 의외였다.
* * *
대협곡 근처에서만 나는 전설의 꽃을 찾기 위해서 나는 눈을 부라리며 한참을 걸었다. 멜리사 누나는 하늘을 날 수 있었고, 나와 달리 아주 편하고 쉬운 방법을 사용해서 꽃을 찾았다. 빌어먹을 마법.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수색해도 멜리사 누나도, 나도 '바람이 꽃'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어떻게 생겼는지 누나가 준 낡은 그림으로만 알고 있었고, 다른 특징은 전혀 정보가 없었다.
오지 중의 오지다. 지금까지 본 꽃만 해도 수천 종은 되는 것 같다. 차라리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쉽다. 뭐, '내 눈'이라면 그건 너무 쉽지.
"가야겠어."
"응?"
점심에 와서 날이 저물었다.
"시간 낭비야."
"뭐?"
"전설은, 전설이었는지도 모르지. 이런 불확실함에 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
"하지만 엄마가...!"
"그래, 그러니 포기하지 마. 동생아!"
가끔 잊곤 한다. 멜리사도 어마어마한 쌍년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날 수색꾼으로 부리는 게 목적이었는지도. 교묘하게, 아닌 척하면서 미끼를 던져 버린 거야.
"세 시간 뒤에 올 테니 그때까지 열심히 찾아봐."
"괴조들이 득실거리는 금지에 나 혼자 있으란 말입니까, 누님."
"너, 달라졌다며? 이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해."
"꼬리를 잡아뜯...."
"뭐?"
"세 시간 뒤야."
멜리사 누나가 갔다.
....
참, 맛이 간 사람이야.
* * *
어둠은 금방 내려왔다. 빛 한 점 없어, 내 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개눈깔은 야간투시경 기능도 탑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휴대용 충전기이자 손전등인 달비가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달비는 대협곡으로 온 뒤로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싶었지만 난 녀석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개간네! 개간네!
밤이 되고 나선 더 지랄이었다. 난 달비를 달래며 얘기했다.
"왜에."
개간네!
"꽃만 찾고 가자. 금방 찾을게."
개간네, 개간네!
"아니 시발, 네가 찾아보던가."
그때였다.
달비는 깡충 뛰어, 대협곡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이 멎을 뻔했지만 이내 달비가 영수임을 상기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 고개만 쭉 뻗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뭐여, 십."
주머니에서 멜리사 누나가 준 낡은 그림을 꺼냈다. 동물의 가죽에 그려진 탓에 잘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바람이 꽃이 워낙 신기하게 생겨서 특징은 구별하기 쉬웠다. 각기 다른 색의 세 개의 꽃잎, 꽃잎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줄기가 길며 무궁화꽃처럼 생긴 암술.
달비는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이 꽃을 가리키고 있었다.
값비싼 트러플을 얻기 위해서 특별히 키운 돼지를 사용한다더니.
"잘했다."
진작에 이럴걸.
난 마음을 굳게 먹고, 긴장된 몸을 진정시켰다.
"안전제일, 안전제일."
그리고 천천히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단련된 몸이다. 클라이밍이 어렵진 않다. 발을 디딜 곳도 많다. 문제는 떨어지면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뿐이다. 난 긴장하고, 주의하며 절벽을 내려갔다. 꽃은 30미터쯤 내려간 곳에 홀로 덩그러니 피어 있었다. 저러니 전설의 꽃 취급받지. 누가 대협곡까지 와서 30미터 아래에 있는 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저 꽃을 처음 발견한 놈이 새삼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네.
마침내 바람이 꽃이 핀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확실히 비범한 꽃인 게 드러났다. 이토록 어두운데, 꽃잎 자체에서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며 세 가지의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난 조심히 꽃을 꺾었다. 줄기를 만지자마자 묘한 기분이 몸을 휘감았다. 이거라면, 엄마의 고통을 덜어 줄 수도 있겠지.
소중히 품고,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아주 강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계속 불었고.
다아!
내 머리 위로 '날개 달린 것'이 보였다.
멜리사 누나의 마음을 백분 이해할 것 같았다.
"와이번."
소를 잡아먹는 비룡, 와이번.
농가에 나타나면 영주가 기사단을 파견한다는 괴물이 내 머리 위에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때'가 이상하다. 바람이 꽃의 저주인지, 와이번이 바람이 꽃을 지키는 파수꾼인 건지. 뭐가 되었든 엿 같은 상황이다.
확실히 와이번은 날 적대했다. 놈이 즐겨먹는 먹이는 젖소지만, 절벽에 매달린 인간도 꽤 매력적인 먹잇감일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속에 입은 라멜스타에 손을 올리고 때를 기다렸다.
나와 놈의 차이는 날개.
기회는 한 번.
놓치면 고난은 수십 배.
와이번은 소를 낚아챌 때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강습 준비를 시작했고.
나는 천천히 라멜스타를 변형시키며 기회를 노렸다.
32
아마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다.
개미가 자기 몸무게의 수십 배를 드는 완력을 지녔다던가, 갯가재의 눈은 지구의 어떤 동물보다 가장 넓은 범위의 빛을 볼 수 있다던가, 동물들이 가진 특이하고 굉장한 능력을 알려 주는 다큐멘터리였다.
그 방송은 특이하게도 인간의 능력을, 지능을 제외하고 순전한 육체적 능력을 다른 동물들의 능력과 비교도 했었다.
인간의 육체적인 힘은 꽤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전투력은 늑대보다 밑이었고, 당연히 호랑이라던가, 코끼리 같은 거대한 육상 동물들에겐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물며 소를 잡아먹고 하늘을 나는 비룡 와이번과 상대가 되겠는가. 뭐, 마법적이거나 초능력이거나 알 수 없는 힘을 제외하고 순수하고 본질적인 비교라지만.
챙-!
하지만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난 라멜스타를 매끈한 몸신에 뾰족한 날을 지닌 투창으로 변형시켰다. 던지기 능력, 인간은 발달한 팔 근육과 뛰어난 인지능력으로 그 어떤 동물보다 무언가를 잘 '던질 수' 있다.
와이번은 절벽에 매달린 날개 없는 생물을 먹잇감으로 생각했다. 놈은 날개를 접고 아가리를 벌리고 쇄도했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매섭다. 마치 매의 사냥과도 같았는데, 소의 척추도 단번에 끊는 강력한 공습이었다.
저놈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죽일 순 있어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날개가 없는 난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다. 필요한 건 원거리 공격이었다.
라니스타 놈과의 실전으로, 난 많은 걸 터득했다. 그는 수십 명의 무림인을 흉내 냈고, 각기 사용하는 무기와 무공도 달랐다. 그래서 난 내가 지닌 힘의 수준과 라멜스타의 변형의 한계를 잘 알았다. 투창의 끝을 라멜스타의 변형 한계인 철사로 만들어 손목에 감았지만, 길이의 한계는 기껏해야 6미터.
마침내 수 미터로 가까워졌을 때, 난 투창을 등 뒤로 힘껏 젖혔다. 자세가 어정쩡했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쌍둥이들의 수작질로 내 몸은 평범한 자의 신체능력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시발!"
우렁찬 기합과 동시에 창을 쏘았다.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기차게 들렸다. 쇄도하는 와이번은 피할 도리가 없다. 날아간 창은 정확히 와이번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던진 힘과 와이번이 낙하하는 힘이 맞물려 단단한 두개골도 박살 나, 투창은 와이번의 머리를 반쯤 파고들고 나서야 멈췄다. 와이번이 죽자마자 난 라멜스타를 변형시켰다. 내 옆을 스치며 떨어지는 와이번.
거리 조절을 못 했다면 와이번을 죽이지 못했거나 내 손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라멜스타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난 막대기 형태에 걸이를 만들어 허리춤에 매달았다.
"와이번."
난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지는 와이번의 시체를 빤히 지켜봤다.
와이번을 죽였다. 그것도 절벽에 매달린 채로.
자, 이제 누가 괴물이지?
* * *
크으릉!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와이번을 죽이자 놈의 친구인 듯 다른 와이번 한 마리가 더 등장해도.
놈은 앞서 죽인 와이번과 달리 가죽색이 눈처럼 새하앴다. 내가 알기로, 와이번의 피부색은 몹시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난 침착하게 다시 투창을 던질 준비를 했다. 놈은 첫 놈과 달리 내게 쇄도하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기회를 엿봤다.
다아!
가만히 있던 달비가 울었다. 운석의 힘은 분명 강하지만 절벽에 매달린 상황에서 쓸만한 기술은 아니었다. 난 달비를 진정시키고, 천천히 놈을 주시했다. 젠장, 이쯤 되면 '도와주지' 않으려나. 아니, 기대하지 마. 이것 또한 경험이다. 놈을 죽이고, 위기를 벗어나야 의미가 있다.
근처를 유영하던 와이번이 제자리에서 날갯짓했다.
점점 놈의 주둥이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난 재빨리 투창을 뻗었다.
콰아아!
놈에게도, 내게도 기회였다. 놈은 날 얼어 죽일 '브레스'를 쏠 기회, 난 놈이 날갯짓을 멈춰 투창을 적중시킬 기회. 투창은 놈의 머리를 꿰뚫었지만, 그와 동시에 놈이 쏜 냉기 브레스가 내게 작렬했다. 하얀 와이번은 변종, '마법'을 사용하는 괴물, 마물이었다.
난 당연히 와이번이 쏜 마법이 멜리사 누나의 마법보다 강력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공의 힘이 마법으로부터 날 지켰다. 붉은색을 띤 보호막이 생겨나 방패가 되어 브레스를 모두 막았다. 나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주변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절벽이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빙벽처럼 변했다. 공의 힘이 아니었다면 얼어붙어 떨어졌겠지.
"X 같은 곳이네."
시발, 괜히 대협곡이 금지 중의 금지가 아니다.
난 다른 와이번이 오기 전에 빨리 절벽에서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하얀 와이번이 쏜 브레스에 순식간에 절벽의 면이 빙벽처럼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내려올 땐 쉬웠으나, 빙벽처럼 얼어붙으니 자칫하다간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난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난 라멜스타를 너무 무기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난 허리춤에서 꺼내, 라멜스타를 아이스바일로 변형시켰다. 대충 어디서 본 걸로 흉내만 냈으나 문제없을 것이다. 아이스바일은 빙벽의 얼음을 깨부수는 낫과 해머의 기능을 가진 도구로, 얼음을 부수고 손과 발을 집어넣을 틈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정말 응용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나는 아이스바일을 힘차게 휘둘렀다.
"윽."
그러자 절벽이 무너져내렸다.
* * *
팔다리가 자유를 잃고 끝없이 떨어지는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가 않다.
그 끝이 죽음으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면, 날개 없는 인간이 누리는 더없는 호사라고 생각될 만큼 난 상쾌함을 느꼈다. 난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오줌보가 간지럽다. 정말 죽는다면 시원하게 싸 버렸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젠장.
"너."
난 옆에 나타난 멜리사 누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누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 보고 있었구나."
"어."
"태연하네. 넌 지금 죽음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거야."
"그러네."
"실없는 녀석."
누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자, 난 저번 무저갱 때처럼 몸이 둥실 떠올랐다.
절벽 위로 날아가며 누나가 말을 걸었다.
"내가 끝까지 무시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지? 계획은?"
"누나가 안 구했을 리가 없잖아."
멜리사 누나는 처음부터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날 홀로 놔두고 간 척만 하고 마법에 숨어서 날 미행했다. 속 보이는 연극에 장단을 맞춰 준 것이다. 내 눈의 성능은 너무 뛰어났다. 심지어 마법조차 간파할 수 있다는 걸 새로이 알게 되었지만, 크게 놀랄 것도 아니었다. 개눈깔이 괜히 천안통이라 불린 게 아니다.
멜리사 누나가 날 홀로 놔두고 감시한 건 연구의 일환이겠지.
누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꽤 통쾌했다.
하지만 멜리사 누나는 나와 달리 유쾌한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절벽 위로 오르자마자 마법을 해제했다. 하마터면 다시 떨어질 뻔했지만 유연한 낙법으로 살아남았다. 난 멜리사 누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고, 누나의 꼬리는 비 맞은 개처럼 축 처졌다.
* * *
줄기를 꺾어도 시들지 않는 바람이 꽃.
회복실의 앞에서 엄마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잠이 든 것 같았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괴로워 보였다. 난 살며시 엄마의 품에 바람이 꽃을 올려놨다. 그러자 서서히 찌푸린 표정이 편안해졌다.
"잘 자요, 엄마."
누가 꽃을 주고 갔는진 중요하지 않다.
그날까지, 평안하기를.
* * *
죽음의 위기를 겪을수록 의지는 더 굳건해졌다.
강해진다고 각오했다. 하지만 라니스타 놈과의 실전은, 내게 믿을 수 없는 전투 경험을 선사했지만 순수하게 강해지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나는 보다 빨리 쌍둥이의 옆에 서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며 포기했던 전생과 달리, 이번에는 먹음직한 먹잇감이 주변에 넘친다.
자연지기를 받아들인 후로 난 점점 몸이 굳세지는 걸 느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분명 '충전기'의 성능을 키우는 게 자연지기를 모으는 것에 있어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테라린 호수의 잉어 영수를 삼켰듯이, 달비가 아무 영수나 잡아먹는 괴물 영수는 아니었다.
아르테미스의 전설과 아버지의 말로 유추하건대, '신의 조각'에 해당하는 영수를 모아야 할 듯싶다. 그리고 일단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조각에 해당하는 영수가 아인들의 땅에 있는 모양이니, 지금 내 힘으론 아직 닿지 못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시간과 노력따위 없이 강해질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 남았느냐.
답은 쉽다.
'템빨.'
악마, 와이번 그리고 멜리사로부터 날 구했던 아지비카교의 성물의 힘.
열두 개의 성물, 내가 가진 건 공空의 힘.
다른 성물도 공의 힘만큼 특출난 힘을 지녔다면 내 상황에 가장 빨리 강해지는 방법이다. 단 하나의 문제는 '위기'다. 시간과 노력 없이 강해지고자 하니 필연적으로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돌개바람이 무섭다고 닥쳐올 폭풍을 대비하지 않으랴?
난 멜리사 누나가 퀄츠 성을 떠나기 전, 협상을 끝내기 위해 귀신의 정원으로 향했다.
* * *
"위장자를 구별하기 위해선 내 도움이 계속 필요할 거야."
"그런데?"
"내 눈이 가진 다양하고 놀라운 힘을, 누나는 원하고 있지."
"지랄이 늘었구나, 폴스타."
"협력할게. 대신, 아지비카교의 성물에 대한 정보를 넘겨. 누나는 분명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멜리사 누나는 별 미친놈 보겠다는 듯한 눈으로 날 뚫어지게 보다가, 정말 자연스럽게도 마침 한 가지 성물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게 있다고 말했다. 멜리사 누나는 흔치 않게도 내 안부를 먼저 걱정했다.
"아직 때가 이르라고 생각하지만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네 수준에선 꽤 큰 역경이 될 텐데 괜찮겠냐?"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오브 코스."
* * *
"청록 마탑의 정상, 심득의 층에 봉인된 현현마제의 보물이 아지비카교의 성물 중의 하나인 득(得)일 가능성이 있어."
큰일 났다.
시작부터 '마탑'이야기를 꺼냈다.
슈테르닐 왕국에 있는 일곱 개의 마탑, 그러나 왕국과 별개로 독립적인 권한과 권위를 지닌 마법사들의 성지.
쿤칸 대륙을 넘어 동대륙과 더 먼 곳에서도 마법사들이 찾아오며, 사실상 한 국가와 맞먹는 무시무시한 세력.
마탑은 일곱 개의 다른 색을 지녔으며, 마탑마다 소속된 마법사들의 마법이 다르다. 청록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리적인 파괴의 마법을 지녔고, 군청 마탑의 마법사들은 방어적인.... 아무튼 시발, 대협곡보다 더 X 같은 곳이라는 거다.
게다가 누나의 말은, 마치 마탑의 보물을 훔쳐 오라는 뉘앙스가 아닌가?
일단 말을 모두 들어보기로 했다.
"득? 뭔 성물이래?"
"전설적인 대마법사 현현마제가 말년에 고하길, '득'을 얻고 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 노망 든 늙은이의 헛소리라기엔 현현마제가 이룩한 업적이 증거가 돼."
"모든 걸 얻을 수 있다고? 드래곤볼도 아니고. 그런 대단한 물건이 있다면 지금까지 마법사놈들은 왜 안 쓰고 있대?"
"다룰 수 있는 자가 없었겠지."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 개눈깔의 효과인지, 내가 잡아먹은 천 년 묵은 사제들의 영혼 때문인지, 난 아지비카교의 성물의 힘을 쓸 수 있었다.
"정말 소원을 들어주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지로 작동되는 성물일지, 몹시 궁금했었지."
"누나라면 충분히 훔치고도 남았을 텐데."
"…난 얻지 못해. 심득의 층까진 쉽게 들어가도, 그 층엔 보이지 않는 어떤 마법이… 있거든."
"으잉? 누나가? 전설의 대마법사, 요마계의 지존 멜리사 누나가 얻지 못했다고? 으잉?"
누나는 화를 꾹꾹 참는지, 아홉 개의 꼬리가 사납게 휘둘러졌다. 우샤스 누나와 라니스타 놈과 달리 멜리사 누나는 어느 정도 놀려먹기 편했지만, 선은 지켜야 한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자 누나가 말을 이어 나갔다.
"마탑주, 그 늙은 병신들이 쓴 마법이라면 진작에 간파했을 거다. 하지만 그 마법은, 이 시대의 마법이 아니야. 아니, 마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누나는 날 빤히 쳐다봤다. 날 본다기보다, 내 두 눈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네 눈이라면 가능할지도. 감히 내 마법 너머를 응시했던, 그 기분 나쁜 눈이라면."
각오를 했지만,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무려 마탑, 그것도 정상층에 침입하는 것이다.
"…성물, 내 거지?"
"뭐?"
"내 거 맞지? 득의 성물, 나한테 줄 거지?"
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갑시다."
쌍둥이들과 지내며 내게 결여되었던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시발, 쌍둥이들도 처음부터 저렇게 강했을까?
아니다.
미친놈들이 미친 짓을 미치도록 하니까 저렇게 미친놈처럼 강해진 것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광기, 노빠꾸 직진 스타일이다.
33
마법.
열등과 우등 간의 절대적인 경계가 존재하는 것.
마법은 학문이나 검술이 아니다.
그들에게 노력 따윈 필요치 않다.
마법사의 마법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이다.
마법은 태어날 때부터 선사 받은 힘이다.
늦은 나이에 마법 능력을 개화한 경우도 있지만, 결국 재능을 일찍 꽃피웠나 늦게 피웠느냐는 차이일 뿐이다.
마법 재능이 없는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수단을 써도 절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마법사는 재능이 모든 것인 세계에서 산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과 확실한 차이다. 마법사를 귀히 여기는 풍조 또한 키울 수 없는 인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마법사들이 오만하고 건방지고 X 같은 놈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것도 그들 모두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도 마법을 가르친다. 마탑에서도 수련생을 받는다.
허나, 가르치는 개념은 아니다. 단지 재능을 개화시키는 개념이다. 타고난 힘을 더욱더 이끌어 내도록 담금질하는 과정이며, 마법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고, 배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전생, 지구에서 내 '천안통'처럼, 초능력을 지닌 초인들의 능력과 마법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었다. 특히 타고난 힘이라는 것과 신비로운 능력이라는 점에서 초능력과 마법은 아주 흡사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가진 마법이 다른데, 얼음을 조형하거나 물을 제멋대로 다루거나 불을 내뿜는 자연조작 계열이 있고, 환상을 보여 주거나 정신을 조작하는 정신조작,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하는 괴이 계열의 마법 등 갈래만 수십 개다. 뭐, 그런 점에서 개눈깔도 어떻게 보면 마법이다.
마탑은 이러한 마법의 성질을 일곱 개로 나누어 계열에 속하는 마법사들을 결집했다.
득의 성물을 훔치고자 하는 마탑은 청록의 마탑으로, 주로 물리적인 파괴를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마탑이다. 예전에 수업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슈테르닐 왕국과 쿤칸 제국마저 마탑을 함부로 못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청록 마탑의 억제력이라고.
청록 마탑의 마법사들은 염력이나 신체 파괴, 토막, 분쇄에 적합한 마법을 쓰며, 금속을 조정하거나 넓은 범위를 압살시키는 광범위 살육전에 특화한 마법사들이다.
나머지 여섯의 마탑도 알아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일곱 개의 마탑은 색에 따라서 부르는 이름이 달랐는데, 마탑주들을 통틀어 칠색의 마탑주라 부르는 이유였다. 파괴의 청록에 이어 방어적인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군청의 탑, 식물의 생장을 조정할 수 있는 녹갈의 탑, 돌과 바위를 다루는 황갈의 탑.
"하, 또 뭐였더라."
예전에 배웠던 내용이라 헷갈린다. 어디 보자, 청록, 군청, 녹갈, 황갈. 나머지 세 탑은.... 그래. 다홍, 불을 다룸. 시안, 물을 다룸. 그리고 목탄의 탑. 검은 마탑이며 정신, 괴이, 변형, 창조 등 규정지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을 다루는 가장 미스테리한 마탑.
"조심해야 할 놈은...."
마법은 타고난 재능이라고 했다. 특히 마법사들끼리의 서열은 절대적이었는데, 격차를 알려 주는 게 '서클'이라는 개념이다. 아주 우생학적인 개념으로, 한우에 등급을 매기듯, 마법사에게 매긴 등급이다.
마력이 높을수록 서클이 높다. 서클은 마법사의 돌이라고, 마법을 사용하면 표면에 띠가 생기는 이상한 돌로 측정한다. 얼마나 강한 마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돌에 새겨지는 띠의 수가 다르단다. 네 개의 띠를 두를 수 있으면 존경을 담아 '메이지'라 불리며, 기사단장 이상의 권위를 누린다. 다섯 개부터는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것 같다. 여섯 개 이상은, 그의 이름 자체가 역사이자 신화가 된다나.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난 멜리사 누나는 9서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꼬리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다르고, 꼬리를 몇 개 사용하느냐에 따라 마법의 위력도 다르다. 아홉 개 모두 사용하면 한 9서클쯤 되겠지. 뭐, 진짜 존재하는 경지인지는 알 바 아니고, 지가 요마계의 지존이라는데 그 정돈 세야지.
그리고 또....
"뭐하냐."
"마탑 간다며. 뭔 놈들인진 알아야지."
"쓸모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와. 공간회귀지점 설정 끝났어."
난 마탑에 가기로 한 뒤부터 책을 찾아가며 마법사들에 관해 공부했다. 하지만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공부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적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멜리사 누나는 '어디로든 문'의 설정이 끝났다고 했다. 하루가 넘게 걸린 걸 보니, 마탑의 정상층은 멜리사라도 쉽게 오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난 멜리사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향하며 넌지시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돼?"
무턱대고 가자고는 했지만 몹시 불안했다.
"심득의 층으로 곧바로 갈 수 있게 공간회귀지점을 설정해 놨어. 넌 그냥 출입만 하면 된다."
"난 누나가 고작 그 정도로 역경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고려한 거야."
"그 가능성, 만에 하나라고? 진짜?"
멜리사의 꼬리가 움찔거렸다. 깨달은 게 있다. 누나가 왜 내게 꼬리를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아홉 개의 꼬리는 감정에 너무 솔직해서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난 뒤통수를 노려봤지만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악은 청록의 마탑에 속한 '모든' 마법사들와 싸우는 거다."
"젠장, 괜히 책을 봤어. 청록 마탑이 슈테르닐 왕국의 군사력과 맞먹는다는 얘기를 왜 읽었을까."
"걱정하지 마. 나도 나설 테니까."
그게 더 걱정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 *
"여기가 심득의 층?"
"아니."
아무것도 없다.
모래바람만 세차게 부는 황량한 평야다.
어디로든 문을 넘었는데, 도착한 곳이 여기다.
멜리사 누나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홉 개의 꼬리는 세차게 흔들렸다.
"늙은이들이 용케도 눈치챘군."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두 개의 꼬리가 움직였다.
꼬리에서 짙은 자홍색 연기가 뿜어지더니, 멜리사와 날 휘감았다.
연기가 가시자 멜리사 누나는 순간 다른 얼굴로 변했다. 난 누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흑발의 평범하게 생긴 사십 대 중년의 여자로 보일 것이다. 아마 내 얼굴도 다른 얼굴로 변해 있겠지. 변장했다. 정체를 숨겨야 할 일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멜리사 누나의 손에는 어느샌가 전신을 감쌀 수 있는 로브 두 벌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로브를 입고 두건을 깊숙이 써서 얼굴을 가렸고, 나도 멜리사를 따라 로브를 입었다.
"이제 곧 청록의 마법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응?"
"함정이야. 회귀지점을 설치한 '대마법사'가 누군지 퍽 궁금했나 보군. 멍청한 늙은이들."
뭐가 어쩌고 어째?
난 멜리사 누나가 상정한 최악을 너무나도 일찍 마주한 상황에 머리가 아찔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난이도'가 급상승했지만 이 또한 기회… 죽을 기회겠지, 시발.
아니야. 침착하게 굴자. 멜리사가 있다. 당황하면 전의 겁쟁이로 돌아가는 거야. 난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뭘하면 되지?"
두 번째 질문이나, 담긴 의미는 달랐다.
멜리사 누나가 손짓하자 땅에서 두 개의 문이 치솟았다.
"회귀지점을 복구시킬 때까지 싸울 수밖에. 넌 이걸 지켜."
"좋아. 내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갑자기 대지가 격동하더니, 두 개의 기둥이 치솟아 올라 신전의 입구처럼 거대한 문을 만들었다. 이윽고 문을 통해 황량한 평야에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기 전, 마법에 관해 조금 공부해서 알았다. 저건 공간 이동이 아니라, 공간 회귀 마법이라는 것으로, 굉장히 희귀한 마법이다.
멜리사 누나를 제외하면.
오로지 마탑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인 것이다.
* * *
나는 멜리사 누나가 마법으로 지구의 모든 핵탄두와 전략 병기를 일순간에 폐기한 저력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나타났을 땐 앞이 깜깜했다. 국가 군사력으로 평가 받는 마법사 군단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지?
하지만 이미 멜리사 누나는 싸워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지구라는, 한 행성의 군사력을 상대로.
일곱 개의 꼬리가 움직였다.
난 멜리사가 이 와중에도 두 개의 꼬리를 남겼다는 것에 감탄하며.
그녀가 만들어 낸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마법들을 관상했다.
청록 마법사들이 약한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난데없이 멜리사 누나의 공격을 받았지만, 나름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들은 청록의 탑에서도 정예들이겠지. 심득의 층에 발생한 이변을 조사하기 위해, 마탑에서 엄선한 마법사들.
하지만 격이 달랐다.
청록의 마법사들이 멜리사 누나를 짓누르거나 조각조각 토막 내려고 해도, 누나는 땅 자체를 뒤엎어 버렸다. 청록 마법사들의 힘은 파괴. 허나 멜리사 누나가 땅을 뒤집어 버리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뒤집힌 땅은 어느새 산처럼 솟아올라, 마법사들을 덮쳤다.
콰드드득!
아마 저 영감이 마탑주일 것이다.
멜리사 누나에 의해 발생한 산의 충돌.
그 거대한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노인이 있었다.
"오, 카카로트. 당신이 필요해요."
세계 최강자들의 싸움.
노는 물이 달라.
와이번 잡고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한 내가 우습네.
"저것도 전력이 아니라니."
긴가민가했다.
지구와 달리 이 세계는 강자들이 많았다.
어쩌면 쌍둥이들도 이기지 못할 강자가 있진 않을까.
하지만 마탑주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는 멜리사 누나의 모습을 보며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나더 레벨의 괴물은 역시 쌍둥이들이라는 걸.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 쌍둥이의 곁에 서려면, 세계 최강자 레벨 정도는 돼야 한다는 걸.
난 뻘쭘하게 마법사와 멜리사의 전투를 지켜봤다.
천지가 개벽하듯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는 대격전이었으나 누나의 뒤에서 문을 지키고 있는 난 평안했다. 멜리사 누나의 표정도 무척 밝다. 아마 저 마법사들은, 자신이 여우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홀로 우두커니 서서 문을 지킬 때였다.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눈이 따갑다. 순간, 길로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달비가 운다. 격렬한 전장에서 벗어난 놈이 있었다. 그놈은, 날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은 점점 아프고, 두통은 심해졌다. 개눈깔은 정직하다. 내게 활로를 찾으라고 명령하는 듯하다.
어마어마한 적의.
놈은 날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법사의 복장은 특이했다.
흔한 마법사들의 복장이라기보다 군복과 같았다.
어깨 견장엔 청록 마탑을 상징하는 문장과 다섯 개의 선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사가 다섯 개의 선이 그려진 어깨 견장을 하고 있다. 뜻하는 건 알기 쉽다.
다섯 개의 띠, 5서클.
놈은 대마법사다.
34
머리카락 한 올 튀어나오지 않고 일정하게 자른 바가지 머리.
숯검댕이를 칠한 듯 짙은 눈썹.
아침마다 면도하는지 수염 자국조차 없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입술은 작아서 옹졸하게 생겼다.
복장도 마법사들과 달리, 마치 황실 기사들처럼 반듯하게 각이 진 군복을 입었다. 새하얀 옷은 표백제를 쓴 듯 얼룩 하나 없다.
어찌 저리 융통성이 없게 생겼을까?
마치 학창시절 때, 담임이 숙제를 잊어버리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할 때 번쩍 손들고 숙제 검사를 해야 한다고 외치는 부반장이 생각났다. 아무튼, 그런 고지식함이 외모에서 드러나는 남자였다.
"젠장."
난 저자를 이길 수 없다. 30대 후반처럼 보이나, 5서클의 강한 마법사다. 천안통의 뛰어난 능력 중 하나가 분수를 파악하기 쉽다는 거다. 악마와 싸우듯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방심을 유도해서 어떻게든 될 수도 있겠지만, 난 성물을 훔치러 온 도둑놈이다. 목숨을 걸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개간네?
난 순간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적의를 지닌 그는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수십 개의 '투명한' 구체들.
청록 마법사들이 무서운 건 보이지 않는 힘을 다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엔, 그의 파괴의 마법이 훤히 다 보였다. 청록 마법사의 가장 큰 힘이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난 라멜스타를 방패 형태로 변형하고 추켜올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구체가 일제히 떠올랐다.
난 최대한 담담한 척했다. 놈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네 마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도발이다. 놈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답은 행동으로 대신했다.
슈우욱-!
수십 개의 구체가 일제히 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기를 관둬선 안 되기에, 여전히 여유로운 척했다. 마침내 구체 다발이 나와 내 주변을 폭격했다.
쾅! 콰콰쾅!
수십 발의 포탄이 폭격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내가 서 있던 지반이 폭삭 내려앉을 만큼 파괴력이 엄청났다. 구체 한 개의 파괴력은 3미터의 구덩이를 남겼다. 거인이 주먹으로 내려친 듯한 자국이 수십 개가 생겨났다. 멀쩡한 건 공의 힘으로 지켜지던 나와 영수 달비밖에 없었다. 5서클의 마법사가 가진 힘을 절실하게 체험했다.
그는 전략 병기다.
하지만 여전히 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자 그는 미간을 구겼다. 다소 놀란 듯 보였지만, 내가 원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난 낮고 굵은 목소리로, 예를 들어 라니스타가 날 협박할 때 사용했던 목소리를 응용하여 놈에게 말했다.
"관두거라, 아해야."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멜리사와 마법사들 간의 대전쟁을 지켜봤다. 나는 14살의 어린 소년이 아니다. 긴 로브를 둘러쓴 정체 모를 존재다. 그것도 마탑주와 정예 마법사들을 압도하는 마법사를, 멀찍이 뒤에 서서 여유롭게 바라만 보는 존재인 것이다.
콰드드득!
마법사는 화가 난 것 같다. 그는 다시 수십 개의 구체를 만들어 냈다. 이번엔, 전보다 더 크고 많았다. 난 슬며시 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모든 반응은 다 계산된 것, 절대 겁먹은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난 우매한 자를 싫어한다."
이번엔 반응이 있다.
마법사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허나, 무지하다고 죽이진 않지."
우매하다, 무지하다.
마법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모욕.
그는 여전히 구체를 공중에 띄워 놓은 채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무지하다는 것이요, 노인장?"
노인장? 좋아. 변장 마법이 도와주네.
"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건 무지하기 때문이다. 너 또한 불을 보고도 덤비니 나방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
"침입자 주제에 스스로 불이라고 일컫는단 말인가?"
"쯧, 그러니 무지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그냥 그럴싸하게 씨부렁거리는 것이다,
"어찌 불을 보고도 덤비려고 드는 게냐?"
"…네놈이 불인지 아닌지, 어찌 안다고?"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군."
"헛소리, 힘이 있다면 날 짓눌렀겠지."
놈이 다시 마법을 가했다. 하지만 난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콰콰쾅!
폭격이 지나가고, 난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놈의 마법이 내게 집중되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놈은 멜리사가 세운 두 개의 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난 시선을 그쪽으로 두지 않았다.
두 번째 마법도 막히자 송충이 눈썹은 이제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난 그에게 손을 뻗었다가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내려놓았다. 마치 죽이려다가 만 것처럼 보이겠지. 이번에도 내가 대응하지 않자 오히려 놈이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다.
"노인장이 정말 불이라면 왜 싸우지 않는 거요? 알량한 위선으로...."
"베커드의 아이러니다."
공부한 보람이 있다.
베커드의 아이러니.
대마법사 베커드는 강력한 마법사다.
하지만 너무 강력한 힘이 되려 그를 속박하고 억제했다.
악마 한 놈을 죽이기 위해 도시 하나를 궤멸시킨 이후, 베커드는 자신의 마법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베커드의 아이러니는 마법사들의 마법이 더 강해질수록, 되레 마법에 제한이 생기는 아이러니를 뜻하는 것이다.
"보여 주지."
내 목적은 간단하다.
공간회귀지점이 복귀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놈을 공격하여 실패하면, 놈은 날 비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드러난 힘보다 짐작할 수 없고, 예상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더 무섭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개간네!
놈이 날 공격한 이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달비가 깡충 뛰며 소리 질렀다. 물론, 놈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테니 내가 쓴 마법처럼 보이겠지.
햇빛보다 환히 빛나는 무언가가 하늘로부터 낙하한다.
이변을 알아차린 놈은 이젠 경악에 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설마."
마법사의 마법은 지극히 개인적인 힘이지만, 때론 비슷한 형질을 묶어 하나의 명칭으로 부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불을 내뿜는 마법들은 화염 방사, 어떤 방법으로든 하늘을 나는 마법은 플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명칭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력한 마법을 뜻하는 명칭이 있다.
"메, 메테오."
놈은 '메테오'를 보자마자,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섣불리 놈을 달비의 힘으로 공격했다면, 저렇게 도망치면 끝이다. 라멜스타로 근접전을 노리기엔 놈이 너무 강했으며, 목적이 아니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다아!
도망치는 놈을 보며 달비를 쓰다듬었다.
"쫄았네, 저놈. 그치 달비야?"
개간네!
운석은 놈이 아닌 내게 떨어지고 있었다.
쉬이익-!
마침내 운석이 지면에 부딪히자 섬광이 터졌다.
테라린 섬에서 악마 놈을 산산조각 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빛은 날 해치지 않았다.
일부러 파괴력이 높지 않은 이 방법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놈이 보기에 내가 메테오를 막아 낸 것처럼 보여야 했다.
빛이 사그라지자 도망치던 마법사가 우두커니 선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양 눈썹이 서로 인사할 만큼 미간을 찌푸린 채 경악에 찬 얼굴로 말이다.
"별의 힘을… 다루시는군요."
메테오가 유명한 건 과거의 역사 때문이다.
별의 힘, 운석을 떨어트리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초월자의 증거가 된다.
마법 역사책에서 봤어, 메테오는 6서클 이상의 특별한 마법사가 사용했다고.
그는 이제 태도가 유순해졌다.
허술한 연기였지만 통한 것 같다.
"마지막 경고니라. 마법사들이 모두 죽길 원하는가?"
위협에도 그는 내게 예의를 갖춘 말투로 대답했다.
"청록 마탑의 수호마법사, 청록단장 마노와. 위대한 경지에 오른 초월의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난 살짝 장난기가 돌았다.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
"난 별의 대마법사, 도우너다."
"위대한… 도우너."
그가 말했다.
"제 무지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 당신을 막아야만 합니다."
"가능할 것 같더냐."
"막을 수 없습니다."
"알면서, 막겠다는 것이냐?"
"신념은 어리석음으로 단련됩니다. 위대한 도우너가 무얼 하시려는지 몰라도, 마탑을 침범한 이상, 당신은 적입니다."
"대가가 죽음이라도?"
"기꺼이."
씁, 내장지방처럼 생각보다 더 꽉 막혔네.
그는 다시 마법을 펼쳤다. 이젠 구체가 아닌 수십 개의 채찍 같은 힘을 펼쳤다.
"채찍을 휘두르려고?"
놀라는 그의 얼굴에 정들겠다.
"어떻… 게?"
당황하던 그는 다시 다른 마법을 펼쳤다. 이젠 길고 뾰족한 창이 수십 개가 생겨났다.
"이쑤시개구나."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 그래도 작은 입술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마법을 쓸 때마다 난 본 걸 그대로 얘기했다. 그로선 마법이 모두 간파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찌 하나의 형태만 고집하느냐, 구와 점을 동시에 사용하면 더 강력할지언데."
"…위대한 도우너. 당신의 적인 제게 왜 가르침을 주시는 겁니까?"
시간 벌려고 새끼야.
"적? 감히 네놈이 내 적이 될 수 있단 말이더냐?"
"허나 전 당신을 없앨 마음으로...."
"네놈의 마음이 무엇이 중하더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과 전 적이 분명한데 왜 제 마음을 운운하시는 겁니까?"
"그거야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수호 마법사의 신념은 마탑을 지키는… 헉!"
그때였다.
갑자기 놈이 벼락 맞은 놈처럼 덜덜 떨기 시작했다.
흰자가 보일 만큼 눈을 까뒤집고 떠는 게 꼭 귀신 들린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발작이 몹시 징그러워 보였다.
"쟤 뭐야?"
마침 멜리사 누나가 도착했다.
그녀는 마탑주와 마법사들을 상대로 여유롭게 승리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완전히 가지고 논 거다.
"복구 끝났어. 가자."
발작하는 놈을 뒤로하고 문을 넘었다.
* * *
청록 마탑의 정상층.
심득의 층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기이한 곳이었다.
좁은 방에 오직 하나의 문만이 있었다.
"문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깔렸지."
멜리사 누나가 말했다.
"공허만이 존재하는 어둠, 마법으로도 벗겨 내지 못했지만 네 눈이라면 보일 거야."
누나는 문을 열고 길을 찾으라고 했다.
득의 성물과 현현마제의 유산이 있는 비밀의 서고를.
난 문을 열었다.
순간, 우주가 펼쳐졌다.
"별들이… 보여."
"별?"
멜리사 누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이 별은 나만 볼 수 있는 건가.
누나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했지만, 내겐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이었다.
"행운을 빌어."
문 너머로 발을 딛자 허공이라도 밟을 수 있었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난 밤하늘을 헤엄쳤다. 몸이 완전히 문 너머로 넘어오자, 저절로 문이 닫혔고, 이내 모습을 감췄다.
"이런 곳은 처음 봐."
기괴하지만 신비로운 세계였다. 어둡지만 밝았다. 외롭고 쓸쓸했지만, 고독하진 않았다. 따뜻했지만, 춥기도 했다. 무서운 곳이지만 무섭게 느껴지진 않는다. 이 세상이, 실존하는 현실이 아닌 몽상적인 꿈의 세계에 온 것 같았다.
"길."
내 눈엔 길이 보였다. 이 길이 아닌 곳을 밟으면, 난 어둠에 삼켜져 떨어질 것이다. 이 아래는, 끝이 존재하지 않는 나락이다. 활로는 단 한 길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죽음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활로마저 뒤죽박죽이었다. 길이 뒤섞이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순간 생겨나더니 갈라지고, 솟아나고, 무너졌다.
끔찍한 미로였다.
난 조심히 활로를 걸었다. 눈을 감는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 미로는 날 집어삼키기 위해 혀를 날름거리는 뱀과 같았다. 천안통으로 보지 않으면 난 잡아먹힐 것이다.
현현마제의 유산이 잠든 방이 수백 년간 지켜지던 이유였다. 수천 개의 길 중에서 오직 '정답'으로 향하는 길은 단 한 개밖에 없어.
"내가 아니면 누구라도 못 찾을 거야."
난 날 믿었다.
내 눈이 보여 주는 길이 정답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 * *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몇 시간이 지났지? 이곳의 감각은 무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다. 외롭고 쓸쓸한 곳이다. 난 오직 끝을 찾아 걸어 다녔다. 고요한 침묵의 세계에서 상념은 방해였다. 답을 찾는 선지자가 되어 어둠을 헤맸다.
똑똑.
마침내 난 하나의 문과 마주했다.
문을 노크하자, 머릿속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천억 중의 단 하나, 열린 길을 해치고 온 자여.]
[티케가.]
[함께하리라.]
35
문을 열자 퀴퀴한 책 냄새가 먼저 날 반겼다. 문 너머엔 넓은 방이 있었다. 지나온 미로에 비하면 작디작지만, 평수로 따지면 100평은 될 법했다. 이곳이 전설의 마법사 현현마제의 서고.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곳이다.
현자라 불리던 엄마의 방도 이보다 많은 책은 없었다. 수백 년이 지났으나 상태는 마치 방금까지 사람이 지내고 있었던 것처럼 훌륭했다. 먼지와 거미줄도 없다. 방을 빙 둘러 세워진 높고 넓은 책장에 잘 정돈된 책과 깔끔한 목재 탁상 그리고 방 중앙 천장에서 아직도 은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가 보였다.
"달비."
달비는 따라오지 못한 것 같다.
문을 지나칠 때부터 느꼈던 쓸쓸함, 영수조차 출입을 불허하는 곳이었어.
"계단이잖아."
놀랍게도 내가 서 있는 곳은 2층이었다. 서고를 지나자 아래로 향하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오래된 나무 계단은 아직도 굳건해서 발을 디뎌도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1층은 침실처럼 되어 있었다. 흰 이불이 덮인 침대와 큰 거울이 있는 화장대도 보였다. 계단을 절반쯤 내려온 그 순간, 1층의 벽난로에서 불이 확 피어올랐다. 은은한 불빛이 1층을 비추고,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언뜻 평범한 서고였지만, 난 마법으로 가득한 곳임을 알았다. 수백 년간 빛나는 전등과 낡았음에도, 바스러지지 않는 책들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분명 현현마제의 서고에 있는 책들은 몹시 귀중한 사료들이며, 멜리사 누나가 군침을 흘릴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던 난 내가 내려온 나무 계단 뒤에 '보이지 않는' 문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시발. 꼭꼭 숨겨 놨네."
미로를 지나 서고에 도착했더니,
서고에도 보물을 숨기기 위해 장치가 있었다.
현현마제가 자신의 보물을 숨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눈은 에단 헌트와 도미닉 토레토를 합친 것보다 성능이 더 뛰어났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난 쉽사리 계단 뒤에 숨겨진 문을 열 수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기만 하면 된 것이다.
"히야."
득의 성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겨진 방은 단 하나의 보물만을 지키고 있었다.
새하얀 방 중앙에, 유리 상자에 보관된 '보석'이 있었다.
예전, 공의 성물과 똑같이 생겼다. 다른 건 색의 차이.
공은 붉고, 득은 하얬다.
방에는 다른 마법적 함정은 보이지 않았다.
난 성큼성큼 다가가서, 유리 상자를 열고 득의 성물을 잡았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냉큼 입으로 가져갔다.
멜리사 누나가 빼앗을 것 같진 않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
"끄윽."
이물감이 들면 바로 뱉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공의 성물처럼 목구멍을 타고 가볍게 넘어갔다. 난 내심 기대하며 일어날 변화를 기다렸다.
득의 힘, 현현마제가 이 힘을 얻은 뒤로 그는 전설에 남을 대마법사가 되었다고 했다. 무슨 힘이지? 강력한 마법을 얻나? 아님 '윌 스미스'라도 나타나서 소원이라도 들어줄까?
"…흠."
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당장은 변한 게 없다. 현현마제의 서고를 열 때, '티케'가 함께한다고 했었지. 멜리사 누나는 알지도 몰라.
"두 개째."
지우가 관장 배지를 모으는 맛을 이해했다. 나는 내가 모르던 수집욕을 알게 되었고, 모든 아지비카교의 성물을 모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단지 성물이 가진 힘만으로도 강력하지만, 왠지 다 모으면 무언가 다른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보통은 그렇잖아, 수집률 100% 특별 보상, 뭐 이런 거.
"하, 뒤질 것 같네."
목적을 달성했다. 득의 성물을 얻었으니 이제 필요한 건 아로니아 셰이크와 따뜻한 목욕물이었다. 대마법사 한 놈 골려 먹고, 시간 체감도 되지 않는 길고 어두운 미로를 지났더니 피곤이 한계를 넘어갔다.
난 숨겨진 방에서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침대 쪽을 바라봤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그런 대수롭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걸 보았고.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나무 계단을 오르려고 했다.
쉬익-!
순식간에 난롯불이 꺼졌다. 난 애써 내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무언가를 무시한 채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이토록 빨리 날 줄은 몰랐다. 난롯불이 꺼져서 추운 게 아니다. 서고는 순식간에 겨울밤처럼 싸늘해졌다.
스르륵-
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애초에 난롯불이 꺼졌는데도 뒤돌아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반응이었나.
스르륵. 스르륵-
바닥을 끄는 소리는 일정하게 났고, 나와 점점 가까워졌다.
난 걸음을 빨리했으나 내 걸음과 맞추어 소리도 빨라졌다.
[내가 보이는구나.]
아로니아 셰이크, 멜리사 누나 꼬리는 아홉 개, 걸시는 바보, 라니스타는 씨발 놈.
애써 다른 생각을 해서 떨쳐 내려고 했으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히히.]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유리가 깨지듯 높고 갈라지는 목소리. 젠장, 현현마제의 성별은 누나가 알려 주지 않았지만, 난 그가 여자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주 독한 성질머리를 지녔으며,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몹시 거대한 원한을 지녔다는 것도.
[득의 힘을 다룰 자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무 계단을 모두 올랐으나, 서고 끝에 문이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몇백 년 동안.]
귀신의 부름에 답하지 말라는 충고는 동서양 고금, 심지어 세계가 다르더라도 똑같았다.
하지만 내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자 이제 놈이 내 앞에 나타났다. 스르륵, 소리가 들리고 내 옆에 놈이 지나갈 때 난 숨을 잠시 멎었다.
늙은 할망구 귀신이.
[득의 힘으로도, 영생은 누릴 수 없었지.]
내게 고언한다.
[그렇다면 생을 이어 가면 되는 게야. 사신이 날 찾아오기 전, 현현의 주술로 내 영혼과 마력을 결합하여 육신에서 방출시켰단다. 영혼과 마력은 육신을 떠나, 득의 성물에 보호받는, 사신도 찾지 못할 아공간에 갇히게 되었지. 오, 정말 외롭고도 긴 시간이었단다. 늙어 제 기능을 못하던 내 썩은 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지. 사신이 찾지 못하는 이곳을 과연 누가 찾아올까? 호호호.]
노인공경은 인간의 도리라지만, 놈이 악의로 가득 찬 악령이라면 다르다.
모른 척이 통하지 않다.
귀신은 기가 센 놈을 무서워하지.
"개년아. 친절하게 왜 설명하고 지랄인데?"
무당이 악귀에게 씨발씨발거리는 이유였다.
나는 강력한 태도로, 현현마제로 유추되는 귀신을 모욕했다.
하지만 할망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걸렸고, 황홀함에 젖은 눈으로 날 사랑스럽게(역겹게도) 바라만 봤다.
[오, 넌 나의 빛이란다. 아가야, 젊었다면 키스라도 해 주고 싶구나.]
소름이 끼쳤다.
[어찌 이리 사랑스러울꼬.]
할망구가 점점 다가온다.
[아름다운 갈색 머리와 눈이야.]
난 갈망하는 눈을 보았다.
[내 몸이 되길 충분해. 아아, 살아 있는 살점, 흐르는 피, 그리웠어.]
"뭐? 개, 개년아?"
[네 영혼을 끄집어 내어 사신에게 주고, 네 육신은 내 것이 될 거란다.]
라멜스타를 언월도로 만들어 귀신을 향해 휘둘렀다. 무당이 쓰는 무구로, 효과가 있길 바랐다. 하지만 언월도는 귀신을 통과했다. 실체가 없기에 벨 수 없었다.
즉시 공의 힘을 사용했다. 악마의 힘과 마법을 사라지게 하는 공의 힘이라면 귀신에게도 통할 것이다.
히히히히-!
그때였다. 할망구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자 붉은 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 개구나! 히히히히! 난 운이 좋지, 히히히. 역시 득은 날 원하고 있어.]
마침내 지척까지 가까워지자 난 등을 돌려 도망치는 걸 택했다. 하지만 심장에 찬물을 부은 듯 시큰한 고통을 느꼈고, 고개를 내리자 내 가슴을 관통한 귀신의 손이 보였다.
"흡!"
손은 순식간에 입을 파고들었다. 악령 때와 같았다. 역겨운 이물질이 입을 파고들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끔찍한 감각. 귀신은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해, 내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선명하게 보였다. 현현마제, 늙은 귀신은 손과 발, 몸을 입에 넣을 때까지만 해도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가, 마침내 머리만이 남자 갑자기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후루룩-!
귀신은 자신을 '한 점' 남기지 않고 내게 먹혔다.
"꺼억."
이상했다.
현현마제는 분명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해,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 걸 택했다. 아마 내 유령을 끄집어 내고 육신을 차지할 어떤 방법이 있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실패한 모양이다. 무저갱의 악령 때와 비슷했지만, 이 느낌은 좀 더....
"역겹네."
한 번.
평생의 단 한 번 겪을 지독히도 역겨운 경험을 두 번이나 겪었다.
난 제자리에 주저앉아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쯤 되면 내 몸이 수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고스트버스터즈의 힘이 내 목구멍에 있는 건가? 귀신 먹는 인간? 천안통이 내 유일한 능력이 아니었던가?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윽."
이 진귀하고 해괴한 경험은 내 정체성과 자아에 대해 고민까지 하게 했다. 하지만 상념은 그리 오래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맹장이 터진 것처럼 복통이 생겼고, 난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내질렀다.
개간네!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또한 뱃가죽이 뜯어질 만큼 배를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비명을 내지르던 그때, 서고 끝에 문이 생겨났고 동시에 달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비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난 이유는 모르지만, 녀석을 꽉 안아 주고 싶었다.
다아?
"고마워, 넌 최고의 소화제야."
그러자 복통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왜 영수술사가 만능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다.
달비는 충전기도 되고, 소화제도 될 수 있었다.
"예상 못 할 일이 벌어진 것 같네."
멜리사 누나도 보였다.
득의 성물을 얻어서인지, 현현마제 귀신이 내 뱃속의 똥이 되어서인진 모르겠으나.
멜리사 누나는 서고를 막던 어둠이 사라졌다고 했다.
누나는 날 힐끔 쳐다보고는 관심을 서고에 두었다.
"대단해. 과거의 마법과 역사, 잊힌 전설, 성물에 대한 정보까지! 엄청나네. 당분간 심심하진 않겠어. 호호."
멜리사는 깔깔 웃으며 기뻐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다지 기쁜 것 같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맹렬하게 흔들려야 할 꼬리가 축 처져 있잖아.
* * *
심득의 층은 결계가 사라졌다. 멜리사 누나는 마법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현현마제의 서고에 있던 책들을 남김없이 가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로든 문'은 반칙이다. 문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퀄츠 성의 정원이다.
복통으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날 위해서 누나는 친절하게도 내 방까지 데려다줬다. 아니, 방법은 썩 친절하진 않았다. 사람을 풍선처럼 둥둥 띄워서 창문으로 날려 보낸 방법이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창틀을 잡지 못했다면 난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망할 년.
36
난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웠다. 달비가 없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아픔이었다. 맹장이 터진 것처럼 아프다. 안타깝게도 우샤스 누나는 성에 없고, 의료병동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날 밤, 난 엉엉 울며 달비를 안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 후로도 발작적으로 복통이 찾아와서 며칠 동안 달비를 안고 침대 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인 건 자연지기를 흡수하는 신선의 자세를 취할 때마다 복통이 점점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평소엔 몇 시간 자세를 취하면 자연지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현현마제 유령을 삼킨 이후 이젠 더 오랫동안 자연지기를 받아들였다.
복통만이 아니다.
난 확실히 내 몸에 생겨난 한 가지 변화를 인지했다.
며칠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난 이 기괴한 감각이 무엇인지 골똘히 고민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발가락이 한 개 더 자란 느낌이다. 발가락을 움직일 수는 있는데, 꺼림칙하고 어색했다. 내가 왜 이 여섯 번째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 몸의 감각.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무언가가 추가되었다.
난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여 봤다.
재활치료를 하듯이, 미세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서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며칠 동안의 훈련 끝에, 마침내 감각이 무엇을 움직이게 하는지 난 깨달았고.
여섯 번째 발가락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었다.
* * *
열흘이 지나서야 멜리사 누나가 내 방을 찾았다.
난 멜리사 누나의 아홉 개의 꼬리가 모두 치솟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왔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득(得)의 힘은 아주 기이해."
누나는 날 보자마자 대뜸 설명에 들어갔다.
"티케는 행운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고대의 신."
난 잠자코 설명을 들었다. 궁금해도 뺨이 붉게 상기된 누나의 말을 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제의 서고에 있던 사료들을 종합해 봤어. 득의 힘은 티케의 축복으로 여겨지더군. 득(得)의 힘은, 뜻대로 네게 득이 되게 해 주는 힘. 쉽게 말하면 행운.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도 성물의 보유자를 '행운이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포르투나'라고 불렀더군. 기록된 성물의 보유자들은 모두 제 능력을 뛰어넘는 지위와 부를 누렸다. 무두쟁이가 대상인이 되고, 아사신이 술탄에 오르며, 현현마제 또한 본래 마탑의 서기에 불과했어."
"행운이 힘이라고? 당장 도박꾼들의 섬으로 가야겠네."
"그런 단순한 운이 아니다, 멍청아."
난 인상을 찌푸렸다.
행운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
운빨좆망겜에서 이득 보기, 로또 당첨, 도박 대박.
당연한 거 아닌가?
"득의 힘은 단지 운을 좋게 만드는 게 아니다. 네게 득 되는 걸 너무 쉽게 얻을 수 있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네게 득을 주는 힘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전혀 득을 보지 못할 상황에서도 네게 득을 주는 행운이라는 거다. 운과 개념이 다르다. 확실히 알아둬야 해. 과신해선 안 될 힘이다. 득의 힘은 운이 나쁜 상황에서도 득 되는 무언가를 얻는 힘이지, 운명을 조율하는 신의 힘은 아니야."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그때 멜리사 누나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멍청한 놈! 네가 어떤 병신 짓을 저질러도 항상 무언가 득이 된다는 게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몰라?"
"혹시, 누나가 가지고 싶었던 거야?"
멜리사 누나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 심술이 가득하다. 뭔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애써 참는 듯 보였다.
"어쨌든 굉장한 힘이라는 거다. 게다가 '티케'라는 신의 존재도 몹시 흥미로워. 아지비카교의 신은 세 명, 삼신신앙이지. 그런데 득의 성물은 티케, 행운의 여신을 직접적으로 뜻하고 있어. 아지비카교가 다신교의 성질을...."
전생의 내가 살던 한국에선 멜리사를 부르는 알맞은 단어가 있다.
멜리사 누나는 의심할 바 없는 '역덕'이다.
누나가 오면 곧바로 말하려고 했지만, 선두를 뺏겼다.
난 한참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해 논설하는 멜리사를 향해 말했다.
"현현마제 그 새낀 대체 뭐하는 새끼지."
그리고 손을 뻗어, 그동안 연습해 온 '새로운 감각'을 펼쳤다.
챙!
뭔가 나왔다.
손바닥에서 허여멀건 한 무언가가 방출됐다.
처음 쓸 때보다 세져서 이젠 유리창을 부술 정도다.
"나 마법 생긴 듯."
슬며시 멜리사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다시 해 봐."
방을 부술 이유는 없다. 난 부서진 유리창을 향해 손을 올렸다. 이걸 쓸 때의 감각은 묵은 똥을 밀어내듯, 목구멍에 찬 가래를 뱉어내듯 한 기분이다. 역겹지만 사실이다. 물론 똥과 가래 대신 난 몸에 깃든 자연지기를 담아서 내뿜었다.
다아!
그때였다.
달비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녀석이 내 몸에 닿자 폭발적인 똥, 아니 힘이 넘쳐 올랐다.
난 이 힘을 있는 힘껏 방출했다.
콰드득!
이건 예상외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두둑! 콰드득!
콰아앙!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난 침착한 척 멜리사 누나를 바라봤다.
내 손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내 방의 벽을 완전히 부수었지만, 내겐 낯설지 않고 익숙한 광경이었다. 문제는 왜 '하늘'이 아니라, '내 손'에서 튀어나왔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슈바르젠 백작님에게 미안하다. 사실 그거 월석 아니었다.
어쩌면 일종의 달비의 똥이 아니었을까?
달비의 힘을 받아들여 방출하자 내 손에서 '메테오'가 날아갔다.
아니, 이건 메테오도 아니다. 월석도 아니고 운석도 아니다.
하지만 위력은 굉장했다. 벽 전체를 무너트린 '마법'은 청록의 마법사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꺄아악! 이게 뭐예요!"
다행히 내 방의 위치는 정원과 가까워서,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벽이 무너져내린 소리가 퀄츠 성에 울려 퍼졌고, 소동을 듣고 뛰어온 걸시가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경비병과 기사들은 물론 뒤늦게 아버지까지 달려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몰린 사람들은 멜리사를 노려봤다. 당연하게도 멜리사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다른 귀족 가문은 어떨진 모르겠으나, 멜리사 누나가 내 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벽이 무너진 소동은 그냥 헤프닝에 그쳤다.
아버지는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이 정도야 쌍둥이들을 겪어 본 레인버그가의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상인 것이다.
"어머어머, 이거 어째요. 멜리사 아가씨, 어우. 못살아, 정말."
걸시만이 울상을 지었다.
"…내일 이 시간에 내 정원으로 와."
멜리사 누나는 한마디만 남겨 놓고 떠났다.
아홉 개의 꼬리 때문에 다른 쌍둥이들과 달리 감정을 알기 쉬웠다.
하지만 이번엔 좀 헷갈렸다. 누나의 꼬리가 높게 치솟은 건, 연구대상이 생겨서일까?
다아! 다아!
신난 달비가 또각또각 발굽을 굴리며 방을 돌아다니다가 내게 다가오더니 칭찬해 달라는 듯 머리를 종아리에 비비적거렸다. 난 달비를 안고 휑한 바람이 부는, 한때 내 방의 벽이었던 곳을 쳐다봤다.
"잘했어, 달비야."
당분간, 다른 방에서 지내야겠네.
* * *
"현현의 주술은 남은 사료가 적다."
하루 뒤 멜리사 누나의 오두막집을 찾았다.
누나의 책상은 낱장의 종이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모든 책을 뒤져 봤지. 알아낸 건 한 가지야."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멜리사 누나다. 꼬리가 의자에 삐죽 튀어나와서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영혼이식술법."
"영혼이식?"
"현현마제는 제 마법에 악마의 힘을 섞어 영혼이식술법을 만든 모양이더군. 하지만 완전한 실패작이야. 멍청한 년이지, 영혼 이식이 그리 쉬울 줄 알았나? 신의 영역을 넘본 대가야. 멍청한, 어리석은, 더러운...."
누나는 한참 동안 현현마제를 욕했다.
난 누나가 진정되길 기다렸지만, 욕설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왜 마법을 쓰게 된 건데?"
욕하던 멜리사가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살짝 무서웠다.
"영혼을 이식한 게 아니라, 히히. 마법, 제 마법을 네 녀석에게 이식한 것 같아, 아하하! 멍청한 년!"
"마법을 이식해?"
"아하핫! 몇백 년간 골방에 갇혀 있다가 도리어 힘을 주고 갔구나. 걸작이군, 걸작이야! 요마계에서부터 많은 멍청이들을 봤지만, 이년이 최고야. 하하하."
뭐가 우스운지 깔깔대는 모습이, 미친 사람과 다름없었다.
난 누나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미친 사람이 가장 무서울 때가 바로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멜리사 누나가 눈물을 닦아 내며 얘기했다.
"현현마제, 놈의 마법은 '방출'이다."
"방출.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단순한 마법이야. 그저 자신이 지닌 에너지를 쏘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그 마력이 7서클에 다다르면 이야기는 달라져. 영혼이식술법도 방출의 마법을 이용한 걸로 보인다. 자신의 영혼을 마력과 같이 방출해 낸 거지."
"그게 뭐야."
"어쨌든 놈은 실패했고, 넌 그의 '마법의 본질'을 고스란히 얻게 된 거야. 히히히, 어쩌면 '득의 성물'의 첫 번째 선물일지도 모르지."
멜리사 누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역시 꼬리는 솟아 있었다.
"축하한다, 마법사가 되었구나."
"…고맙읍니다."
마법사로 전직했다.
* * *
곧바로 라니스타와의 실전 싸움을 이어 갔다.
역시, 실전이기에 난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사용했고.
달비의 힘을 방출하자 라니스타는, 아니 '구룍두검'은 죽었다.
"이 씨발놈이."
곧바로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먼지투성이 라니스타는 잔뜩 화난 얼굴로 외쳤다.
"또 요상한 걸 배워 왔구나. 개방의 장로도 울고 가겠다. 어디서 자꾸 이상한 힘을 주워 오는지, 넌 뭐가 되고 싶으냐? 주화입마가 없다고 잡탕밥을 만들고 지랄이더냐."
라니스타가 화를 내는 것 보니 성공한 것 같다.
* * *
퀄츠 영지와 아인들의 땅이 맞닿은 곳은 위험한 지역이지만, 가죽과 고기가 넘쳐나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레인버그가의 관리하에, 크고 작은 사냥꾼 마을이 많았다. 그중 가장 깊은 숲에서 사냥하는, 오래된 사냥꾼 마을인 '칼베인'에서 상소문이 전해졌다.
레인버그 공작은 그들의 고충을 들어줄 의무가 있었고, 곧바로 파견대를 모집했다.
"저보고 대장 노릇을 하란 말입니까?"
아버지는 나도 소집했다. 단지 레인버그 막내 공자로 가는 게 아니었다.
파견대의 대장 역할을 내게 맡긴다고 한 것이다.
"칼베인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목격되었다. 살이 오른 동물들이 넘쳐날 이 시기에, 사냥감이 없다고 하더군. 오죽하면 그 칼베인의 사냥꾼들이 상소를 올리겠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제게 맡기셔도 괜찮겠습니까? 전 칼베인 사람들과 연이 없잖습니까."
"네가 아니면 안 돼."
아버지가 씨익 웃는다.
"칼베인에 영수를 느끼는 소녀가 있다고 들었다. 워낙 폐쇄적인 마을이라 지금까지 조사할 여력이 되지 않았지.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않으냐? 너라면 쉽게 영수술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믿고 맡기마."
37
폐쇄적인 칼베인은 오래된 사냥꾼 마을이다. 레인버그가 퀄츠 성을 지배하기 전부터 칼베인은 존재했다. 지금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퀄츠에서도 칼베인을 제 영지민으로 생각하지 않고, 칼베인에서도 퀄츠를 자신들이 속한 영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칼베인에 파견되는 인력은 출중한 능력을 지닌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차출되지 않았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사의 빛나는 은빛 갑옷은 칼베인에선 전혀 쓸모가 없다. 제국 제일 기사단의 명예를 지닌 청늑대 기사들도, 칼베인에선 평범한 퀄츠 성의 인간일 뿐이다.
간혹 칼베인 마을에서 도시로 출가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칼베인 출신의 사람들은 남녀를 떠나서 모두 강인하여 눈에 띈 활약을 보였다. 몇 년 전 말단 병사로 시작해 경비대장 직위에 오른 젊은 '카라칼'이 대표적이다.
칼베인 사람들은 강했다.
그들은 퀄츠의 사람들 그리고 제국민의 신체 능력을 월등히 웃도는 힘을 지녔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아버지가 퀄츠 영지를 다스린 이후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금기로 남은 것이다. 일곱 살 때부터 사냥에 나가야 하는 환경적인 요인, 아인들의 땅과 맞닿은 미개척지의 삶. 그건 단순한 표면적인 이유일 뿐, 진짜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인버그는 칼베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파견대는 잡무원과 짐꾼들을 제외하고 모두 칼베인 출신으로 꾸려졌다. 경비대장 카라칼과 그의 부하들, 칼베인과 퀄츠 성의 모피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이다. 하지만 내가 파견대를 이끈다고 하여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쌍둥이들이 몇 년 동안 저지른 업적들이 있었고, 이제 은둔공자가 아니라 영수의 힘을 각성한 영수술사로 더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칼베인은 추운 곳이다.
야크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외투와 발가락을 지켜 주는 털신을 신었다. 염료로 염색해 푸른 털로 장식하고 레인버그 문장을 수놓은 털모자도 썼다. 레인버그의 문장을 새기고 떠나는 두 번째 여정이다.
마차는 세 대였다.
한 대는 칼베인을 위한 선물과 보급품을 싣고, 다른 한 대는 조사관들과 잡무원이 탔다. 나머지 한 대는 날 위한 마차였다. 확실히 이름값이 좋긴 좋아. 혼자서 마차를 독점하다니, 퍼스트 클래스네.
경비대장 카라칼과 열두 명의 부하들은 말을 타고 이동했다. 정식 기사들은 아니지만 칼베인 출신답게 위용이 대단했다. 혼자서 늑대 무리를 사냥한다는 칼베인 사냥꾼들이다. 괜히 아버지가 칼베인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니구나.
마차에 오른 난 목적을 상기했다. 칼베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조사하는 건 내 최우선 과제가 아니다. 아버지가 내게 맡긴 일은, 칼베인에 나타난 영수술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레인버그가는 영수술사를 파악하고 비밀리에 소집하는 것에 몰두했다. 우샤스 누나가 장기간 자리를 비운 것도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다고 들었다.
난 아직도 슈바르젠 백작의 처절한 비명이 귓가에 생생했다.
악마, 인간의 적.
위장자들이 존재하는 걸 안 이상, 아버지는 최대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할 것이다. 대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면 쿤칸 제국은 무너지고 말 테니까. 짐작컨대 얼마 남지 않았다. 제국에서 위장자들을 적출하는 그날까지.
* * *
제국이 다스리는 영토의 가장 끝.
국경의 무장지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
쿤칸 제국에서 가장 아인들의 땅과 가까운 마을.
칼베인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고, 지랄 맞은 날씨 때문에 고역이었다.
퀄츠 성은 날씨가 따뜻해 꽃들이 만발했지만, 군인들이 근무하는 무장지대의 초소를 넘자 순식간에 폭설과 강풍이 마중을 나왔다. 한기와 충격에 강한 특수 목재로 만든 마차의 바퀴가 아니었다면 진작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짐꾼들은 마차에 틀어박혔다. 혹한에 익숙한 퀄츠 사람들도 이곳의 추위는 버티지 못했다.
그나마 교역로 쪽은 모피와 고기를 파는 사냥꾼들에 의해 괜찮은 편이었다. 시선을 조금만 멀리 두어도, 허리보다 높게 쌓인 눈들과 새하얀 백의를 입은 산들이 보였다.
"절경이구먼."
검은 야크 한두 마리가 둔덕에서 날 바라봤다. 듣기로는 무리를 지어 다닌다던데. 사냥감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니 그 때문일까? 뒤돌아 뛰어가는 야크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다아!
달비는 아까부터 바깥에서 뛰어놀기 바빴다. 안 그래도 허연 놈이 눈 속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니 언뜻 보면 눈덩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제 무장지대를 지났으니, 칼베인까진 앞으로 여드레나 더 걸린다고 했지.
혼자 마차에 앉아 있자니 좀이 쑤셨다. 잠도 마차에서 잤고, 음식도 시종들이 알아서 가져다줬다. 칼베인 사람들은 좀처럼 쉬질 않았다. 육포 따위를 말에서 탄 채로 먹고, 잠은 말이 쉴 때 잠깐 잘 뿐이다. 대단한 체력이다. 나야 라니스타의 말을 빌려, '기연'을 얻어서 추위가 아무렇지 않았지만,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아도 칼베인 사람들은 강인했다.
"카라칼 씨."
창을 열고 '카라칼'을 불렀다.
이번 파견대의 호위대장 격인 카라칼.
묵묵하게 말을 몰던 그가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나이는 언뜻 듣기로 서른 중반이라고 들었다.
말단 병사로 군에 입대해서, 국경수비대의 부대장을 역임하고 퀄츠 성의 경비대장까지 오른 칼베인 남자. 제국민과 비슷한 외모였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다르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젊은 나이임에도 눈처럼 새하얬다. 어찌나 모발이 풍성한지, 사자 갈기처럼 쭉 뻗어 있기까지 했다.
덩치도 라니스타 놈보다 훨씬 크다. 2미터쯤 될까? 무엇보다 눈동자가 기이했다. 사람의 동공보다 짐승에 가깝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면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마치 독수리의 눈처럼 맹렬하고, 사납다.
"무슨 일이십니까?'
목소리 또한 위압감이 있다.
레인버그의 막내 공자가 이름을 불렀는데, 저처럼 간결한 대답이라니!
누가 봐도 무서운 외모에 말 걸기 어렵게 생겼지만, 난 아니었다.
"마차 타요."
"전...."
순간, 카라칼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헷갈린 모양이다. 입을 다문 카라칼은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어어, 호의가 아닌데. 명령인데."
"네?"
"마차 타세요."
간혹 나도 헷갈릴 때가 있다.
전생에서 이어져 온 내 성격은 과연 지구의 침략자들 때문에 망가졌을까, 아니면 원래 망가져 있었을까.
정체가 밝혀질 뻔한 순간에 깐따삐아를 말하던 놈이니, 후자에 가깝다.
"심심하니까 말동무나 해 줘잉."
아마 카라칼은 겪어 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일 것이다.
그는 독수리 같은 눈으로 매섭게 날 노려봤다. 적의가 아니라 내 의도를 파악하는 듯 보였다. 난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콘, 잠시 말을 맡기마."
카라칼은 마지 못해 마차로 넘어왔다.
* * *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카라칼, 아인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몇 번 봤습니다."
카라칼은 나와 대화하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아인들의 땅에 가 본 적은요?"
"몇 번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레인버그가의 귀중한 도련님과의 대화라서, 애써 참고 성실하게 대답을 해 줬다.
"좋습니다. 아인에 대해 당신이 보고 들은 것들, 모두 내게 들려주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충분히 무례했다. 그리고 카라칼은, 귀중한 도련님을 상대로도 선을 넘으면 제 할 말은 하는 남자였다.
"죄송하오나 공자님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대체 왜, 야만의 땅에 대해 관심을 두시는 겁니까?'
"언젠가 가야 하니까요?"
"…아인들의 땅에, 공자님이 말입니까?"
"난 영수술사잖아요. 라이베라 저하께서도 젊었을 때 수련을 위해 아인들의 땅에서 지냈다고 하죠."
카라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난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카라칼이 할 말을 숨기고 있는 듯한 낌새를 풍겼기 때문이다. 결국 카라칼이 말을 이어서 했는데, 난 예상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연회장을 부순 '별'을 보았을 때, 예전 아인들의 땅에서 보았던 무언가를 다시금 떠올렸습니다."
"별? 내 생일 파티 때 말입니까?"
"칼베인의 남자는 성인이 되기 위해 일곱 번의 의식을 치릅니다. 그중 마지막 의식은 칼베인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야만의 땅으로 향하는 겁니다. 더 깊이, 더 많은 야만의 땅을 겪을수록 용맹의 증표로 남습니다. 전… 어리석게도 용맹과 무모함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 더 야만의 땅 깊숙한 곳까지 향했으나 다다른 곳은.... 아인들의 금지禁地였습니다."
"금지? 대협곡 같은 곳입니까?"
놀랍게도 카라칼의 독수리 같은 눈이 천천히 흔들리며,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곳은 사막의 폭풍이자 대해의 분노와도 같은 곳. 한 발자국을 걸으면 세상이 변하는 곳. 그곳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악마입니까?"
"아닙니다. 확신한 건데, 그것들은 사악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자연의 화신이자...."
"영수?"
카라칼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전 영수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것들도 '영수'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아인들의 땅은 대단히 넓습니다. 제국이, 촌락처럼 느껴질 정도로.... 죄송합니다."
카라칼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차 싶었는지 내게 사과를 했다. 난 어깨만 으쓱했다. 레인버그 공작의 아들이지만 제국에 대한 존경심이나 애착심은 쥐뿔도 없다.
"폭풍에 휩쓸린 전 죽음의 순간에서 간신히 아인들에 의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인들이라, 제국의 적이 당신을 살렸군요."
카라칼은 말을 아꼈다. 내 위치와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지 않은 것이다. 뭐, 아인들을 옹호했다고 해도 내가 무어라 하진 않았을 거다. 레인버그 가문에는 사자와 여우와 시체가 산다. 아인들이 대수더냐.
난 이처럼 강인한 사내를 겁먹게 한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보다 호기심만 생겨났다. 오히려 살짝 기뻤다. 난 창밖에서 뛰어노는 달비를 쳐다봤다. 전설의 몬스터들아, 딱 기다려라.
"대화 즐거웠어요, 카라칼."
카라칼은 고개를 숙이곤 마차에서 곧바로 제 말로 뛰어서 올라탔다.
생각보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칼베인 마을에서 출가한 건가.
* * *
예정보다 일찍 칼베인에 도착했다.
겨울 숲속의 마을이지만 황량하진 않았다.
높은 방책으로 둘러싸인 칼베인은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다.
마을엔 문지기가 없어,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지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수십 채의 오두막집이 보였으나 인기척에도 나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카라칼은 익숙한지, 마차를 마구간으로 몰았다. 말을 묶고 마차를 지킬 짐꾼들만 둔 채 우린 카라칼을 따라서 마을을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