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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9

99

숙소로 돌아온 난 제리코 부녀와 저녁 식사를 했다. 대화 주제는 주로 걸시의 생활이었다. 할 말을 적어 오기라도 한 듯 걸시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제리코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경청했다.

밤이 되어 걸시가 잠들자 제리코는 세 명의 사람과 같이 내 방을 찾아왔다. 멜카란에서 봤던 사람이 둘, 나머지는 한 명은 모르는 자였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손에 굳은살이 박인 걸로 보아 제법 뛰어난 사냥꾼처럼 보였다. 그들과 인사하고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덩치 큰 사내는 대밀림에서 놈들의 동태를 살피던 파수꾼이었다.

"대밀림은 은신처에 불과했었소. 흡혈귀들은 서대륙뿐만 아니라 온 도시와 마을에 역병처럼 퍼져 있었지. 놈들은 그림자에 숨은 괴물 따위가 아니오. 사람이 많을수록, '먹이 활동'이 더 활발해진다오. 우리 코산의 사냥꾼들은 인간의 탈을 쓴 흡혈귀들을 추적하고 사냥해 왔소. 하지만...."

그는 목이 타는 듯 헛기침을 했다. 제리코가 독주를 건네자 병째 마셨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취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두려움을 험상궂은 표정 안으로 구겨 넣었으나 겁에 질린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놈들이 대밀림으로 모이고 있소. 단지 인간을 사냥하는 짐승들에 불과한 자들이 서로 힘을 결탁한 증거도 있지. 놈들은 몹시 교활해서, 결코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오. 하지만 카라스팔 도시, 로우 해안가 마을, 그리고 왕도에서까지. 대륙 곳곳에서 놈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있소. 이제 놈들은 더는 흔적을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오!"

직접 마주해야 알겠지만.

코산족에게 듣기로는 흡혈귀는 악마와 비슷하나 달랐다.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공통점을 지닌 다수의 괴물이며, 위장자처럼 인간 사회에 녹아들었으나 타인을 흉내 내는 게 아니다. 그래서 흡혈귀임을 들키는 걸 매우 경계한다. 하지만 남자가 말하길, 몇 년 전부터 놈들의 행동 양태가 아주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흡혈귀임을 들키는 걸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래 들어선 미라가 된 부자연스러운 시체가 곳곳에서 발견되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흡혈귀의 존재를 모르던 민중들도 눈치챌 거라고 경고했다.

악마만으로도 충분히 소란스럽다.

송곳니에 잡아먹힐 두려움이 퍼진다면.

위태롭게 지탱되던 도시의 밤은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흡혈귀가 모습을 드러낸 게 몇 년 전이라고 했죠. 시기를 맞춰 보죠. 5년 전쯤, 맞죠?"

"카라스팔에서 일어난 참극이 5년 전이니… 대충 그쯤이오."

머리가 지끈거렸다. 쌍둥이들이 직접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아도 이쯤 되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책임이라고도 할 건 없지만, 나도 25%의 지분을 지닌 셈이다.

난 그와 대화를 나누며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피해자가 나온 화전민 마을에서 지내던 자였다. 그리고 흡혈귀가 인간을 사냥할 때까지,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흡혈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죄책감과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이다.

코산 일족이 몇백 년간에 걸쳐 사냥하고 있는 '피의 악마'.

피의 악마를 따르는 시종, 흡혈귀와 놈들의 특성.

난 라지엘의 서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유품, 악마 사전.

악마 사전에는 악마의 이름과 고대 시대 벽화처럼 추상적인 그림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룻밤 만에 외워야 했던 무수한 악마들의 이름 중 특별히 인상에 남았던 악마가 더러 있었다. 위장자들의 왕, 이름만 기록된 악마 혹은 기록되지 않은 일곱 악마 그리고 '악마'임에도 '백작'이라 기록된 악마.

악마, 악마, 악마.

결국엔 악마.

"아~ 진짜. 씨발!"

난 레인버그 공자의 체통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네 명의 코산일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난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제리코만 태연할 뿐, 나머지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들 입장에선 난 껄끄러운 존재다. 쿤칸 제국, 레인버그 가문의 공자, 여명의 기둥. 그런 놈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욕을 내뱉으니 당황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난 치솟은 짜증을 분출하고 싶었다.

"세상이 참으로 좆 같소, 안 그러오?"

적어도 멸망하는 지구보단 이 세계가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서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다. 난 머리를 박박 긁었다. 잡념이 비듬과 같이 털어져 나갔으면 좋겠다. 전생에선 망해 가는 세계, 살려 보겠다고 알량한 재주 믿고 방위군에 입대했다. 이 세상에선 살아남아, 닥쳐 올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있다. 난 무어라 장황하게 늘어진 헛소리 속에서 허덕이는 멍청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운명이란 건가? 그렇다면 몹시 개 같은 것이다. 전생과 현생에 걸쳐 발현된 천안통으로, 난 대체 무얼 보고 싶은 거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리코에게 삿대질했다.

"죽여 주겠소. 모두 죽여 주겠소."

"공자. 진정하시오. 무슨 소리를...."

"흡혈귀든 악마든 모두 죽여 주겠다는 말입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혹여 내가 죽더라도,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당신들에게 피해는 전혀 끼치지 않을 것이니."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 제리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 솔직히 말해, 난 공자가 여명의 기둥이라 불리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소. 하지만 이젠, 알 것 같기도 하오."

싫어도 해는 떠오른다.

* * *

제리코는 흡혈귀의 '습성'에 대하여 알려 줬다.

약점, 사냥의 전조, 피해자가 발생하는 주기.

"흡혈귀뿐만 아니라 조심해야 할 괴물이 또 있소."

그리고 또 다른 악마에 대하서.

"간혹 흡혈귀의 '사냥터' 곁을 떠도는 괴물들이 나타나곤 하오. 우린 놈들을 늑대인간이라 부르지."

"늑대인간?"

"놈들은 흡혈귀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을 잡아먹는다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거지. 경우에 따라선 흡혈귀보다 더 위험할 수 있소. 시야나도… 놈들에게 죽을 뻔했지."

'늑대인간'이란 괴물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엄마의 비밀 서고엔 늑대인간 표본도 있었으니까.

모기새끼든 개새끼든 상관없다.

그들의 뿌리는 악마다.

개간네! 개간네!

분노를 품을수록 달비가 사납게(혹은 귀엽게) 울었다.

녀석은 내 분노에 동조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녀석의 분노에 공감하는 걸지도.

* * *

흡혈귀는 홀로 행동한다.

코산 일족은 최소 네 명 이상씩 팀을 이루어 흡혈귀를 추적하고 사냥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 흡혈귀들의 활동이 왕성해져서 절대적으로 인력이 부족했다.

처음부터 걸시와는 같이 행동할 생각이 없었다. 아침이 되자 제리코가 미리 연락해 둔 코산일족 다섯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연락과 정보 수집을 담당하며 각 도시에 흩어진 코산 일족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를 받아 팀을 배치하는 지휘부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걸시는 녀석의 말을 빌려, '현자의 비수'다. 뇌세포가 부족한 게 흠이지만 이쪽 일에 익숙한 만큼 연락병에 더 어울릴 것이다.

"흑흑, 도련님. 정말 저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일이나 잘해. '현자의 비수'로서 첫 번째 임무잖아?"

"비수… 임무. 네! 현자의 비수 걸시! 명을 받들여, 충실히 이행하겠나이다!"

걸시는 신나서 그들을 따라갔다.

크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적어도 내 곁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 * *

아직 화전민을 잔인하게 죽인 흡혈귀는 잡히지 않았다.

왕국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대밀림 초입 부근에 산민 마을이 많이 생겨났다고 들었다.

당장 조사해 볼 곳은 여덟 곳. 우린 포목상으로 위장하여 마을을 조사했다. 팀의 대장인 제리코가 상황을 주도했으나 내게 진행 상황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피를 마시기 시작한 흡혈귀는 적어도 두 달간은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기로 보면 곧 희생자가 발생할 겁니다."

"그전에 잡아 족쳐야겠군요."

"놈들은 굴 속의 여우와 다름없어 사냥할 때를 제외하곤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각오를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공자님."

"희생자를 기다리라는 겁니까?"

난 키작은 아저씨를 노려봤다. 그는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다시 내 눈을 마주 봤다. 당당한 눈빛이 마치 틀린 말을 했냐고 묻는 듯했다. 난 그를 무시하고 제리코에게 말했다.

"희생자가 나올 때까지 마을에서 죽치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지하실'이 있던 근처 숲은 모두 조사해 보셨습니까?"

"며칠 동안 수색해 봤네. 은신처는 보이질 않았어."

코산 일족의 수색 능력은 한 번 경험해 봤다. 모래사장에서 바늘도 찾을 자들이니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직접 보기 전까진.

"다시 한번 뒤져 봅시다."

"시간 낭비입니다. 공자님."

"그럼 당신은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안 말려."

"공자를 따라 다시 한번 수색을 진행한다. 잭 콜백."

그는 불만을 토로했으나 제리코가 나서니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 * *

"하, 시발. 이럴 줄 알았지."

난 뚜렷한 핏자국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검붉은 흙은 피를 머금어 축축했다.

핏자국은 숲속으로 이어져 있다. 방금 흘린 피처럼 보여 당황했으나 이내 난 침착하게 제리코에게 물었다.

"저게 안 보이시오?"

내가 가리킨 핏자국을 제리코는 보지 못했다. 당연하겠지. 이렇게 대놓고 있는데 그들이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손가락으로 흙을 쓸었다. 피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몇 초 후, 눈을 뜨자 핏자국은 사라져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시오."

과거의 흔적을 본 건가?

어쨌든 개눈깔은 흡혈귀의 흔적을 보았다.

흔적은 울창한 숲까지 이어졌다.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과 잡풀을 뜯어 내며 걸었다. 거목의 나무뿌리 사이를 지나 덩굴을 걷어 내자 사람의 뼈 조각이 묻혀 있었다. 난 거목을 감싼 덩굴을 모두 베어 냈다. 덩굴 사이로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발견됐다. 핏자국은 나무 위를 향해 있었다. 제리코는 그제야 나무 윗동에서 부자연스럽게 꺾인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놈들도 학습한 모양이지."

추적을 피해 흔적을 지우고 나무 위까지 올라간 놈이다. 원숭이처럼 민첩했다. 하지만 흔적은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제리코는 나무 위에 올라가 꺾인 나뭇가지들을 살폈다. 그는 곧 흡혈귀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수 미터 떨어진 거목의 아래, 수풀로 감췄으나 그곳만큼은 덩굴이 자라 있지 않았다.

대밀림은 오래전, 부족 사회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터전이었다. 코산은 피의 악마에 의해 멸망한 밀림 부족의 후손들이다. 세월이 흘렀으나 몇백 년 전, 인간의 터는 아직 밀림에 잔재되어 있었다. 지금은 흡혈귀들의 은신처로 사용되는 밀림의 지하실이 그러하다.

제리코가 수풀을 치우자, 지하로 향하는 문이 나타났다.

난 놈의 은신처 앞에 섰다. 다행이었다. 쥐새끼는 굴에 머물고 있다. 숨죽이고 웅크린 채 기회를 엿보고 있으나 내 눈엔 문 너머의 놈이 훤히 보였다. 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케엑-!

놈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으나 난 일격에 목을 베었다.

처음엔 인간이었으나 목이 떨어진 놈의 몸은 점점 괴물처럼 변했다. 송곳니가 돋아나고 손톱이 칼날처럼 길어졌다. 피부는 잿빛으로 변했고 머리털은 모두 빠졌다. 가장 기괴한 건, 목과 몸이 분리된 놈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흡혈귀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잘린 목과 몸 안에는 검붉은 모래만이 가득했다. 더는 생명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100

끄륵-! 끄륵-!

놈의 몸이 벌떡 일어나 제 머리를 찾는다.

난 가만히 서서 놈을 지켜봤다.

제리코 일행이 덤벼들려고 했으나 내 만류에 뒤로 물러났다.

"…이 느낌."

악마와 비슷하나 같지는 않다.

난 흡혈귀에게서 폭력교 사제의 느낌을 받았다. 악마의 힘을 받아, 악마가 되어 가던 사제들이다. 마찬가지로 놈은 악마가 아니다. 아마 인간이었을 터. 피의 악마의 힘을 받아 흡혈귀가 되었을 것이다. 난 놈이 머리를 찾고 제 몸에 붙이는 것까지 확인했다.

쉬잉-!

머리를 되찾자마자 다시 한번 목이 잘려 나갔다. 놈은 발악하며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놈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지만 고통 때문은 아니었다. 분노가 이는 눈으로 날 노려본다. 혐오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공자. 이 검을 쓰시오."

제리코가 자신의 검을 건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칼날, 흡혈귀는 검을 보자마자 겁에 질렸다. 흡혈귀는 은으로 만든 무기로만 죽일 수 있다. 놈은 죽고 싶지 않은 듯했다.

"괜찮아요."

난 제리코의 검을 사양하고 철검을 들었다.

"목을 베어도 죽지 않는다면."

천둔검은 가장 무거운 검이다. 내공을 싣는 순간부터 평범한 철검은 산봉우리를 들어 올린 듯 무거워졌다. 난 놈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콰아앙-!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먼지가 피어올랐다.

움푹 파인 구덩이엔 짓뭉개진 살점만이 존재했다.

형태도 없이 곤죽이 된 흡혈귀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뭉개 버리면 되잖습니까."

제리코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흡혈귀의 잔해와 날 번갈아 봤다.

* * *

개간네!

"이제 알겠어. 달비, 너 잔뜩 화났구나."

개간네, 개간네!

"너 때문에 나도 분노로 머릿속이 어질어질할 정도야."

개가아안네에!

밀림을 돌아다니며 깨달았다.

이 정도 규모의 거대한 자연임에도.

자연의 짐승인 영수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멜카란 때와 마찬가지였다. 대밀림의 영수들도 악마에게 쫓겨 사라진 듯 보였다. 달비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내 감정이 달비에게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나도 달비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대밀림에 오고 난 뒤부터 치솟던 짜증과 분노는 역시 달비의 영향도 컸다.

흡혈귀를 처리한 후 저녁 식탁엔 드물게도 고춧가루로 맛을 낸 스프가 올라왔다. 저녁을 만들어 준 잭 콜백은 코산의 전통이라고 하였다. 흡혈귀를 죽인 밤에는 항상 빨간 음식을 먹는다. 이유는 다양했는데, 콜백은 '피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의견이었다.

무뚝뚝한 사내 네 명과 무슨 대화를 할까.

잠자코 맛없는 스프를 마시던 난 문득 일어난 궁금함에 제리코에게 질문했다.

"코산 일족은 대밀림의 제사장 가문이었다고 했죠.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어떤 신을 모셨습니까?"

"태양과 달입니다."

아.

난 달비를 바라봤다.

녀석은 아직도 콧바람을 씩씩 내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아.

기분이 풀렸는지 달비는 품으로 들어와 몸을 뉘었다.

난 계속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상한 기분에 휩쓸렸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나, 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거잖아?

* * *

폭력교 사제들을 아무리 죽여도, 교주를 죽이지 못했다면 폭력교는 근절되지 않았겠지.

마찬가지다. 이번 일이 보다 깊고, 오래되고, 난해하겠으나 근본 원리는 같다. 흡혈귀를 아무리 죽인다고 해도 숙주를 죽이지 못하면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다. 코산 일족이 피의 악마와 대를 걸쳐 수백 년 간 싸워 온 이유다. 대가리를 쳐야 하는 것이다.

그전에.

난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은검의 검주께선 어디 계십니까?"

제리코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직 던전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소."

마탑의 '던전'.

제리코 일행이 멜카란에 온 이유였지.

제리코는 은검의 검주는 던전에 감춰진 마도구를 얻고자 한다고 했다. 피의 악마를 추적하기 위한 마도구를 말이다. 제리코는 흥미로운 얘기를 해 줬다.

"놈은 모습을 숨길 줄 아오. 십여 년 전에도, 그리고 전대 검주의 시절에도 기회는 있었지. 하지만 은검이 놈의 심장에 닿기 전에, 피의 악마는 모습을 순식간에 감추고 달아났다오. 현 은검의 검주께선 누구보다 사명감이 투철한 자라오. 자신의 대에서 원한과 저주의 고리를 끊어 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지."

제리코는 솔직하게 얘기해 줬다.

"공자 또한, 수단 중의 하나일 테고 말이오."

"흐음."

모습을 감춘다라.

난 제리코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난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유일한 수단일 겁니다."

'뱀 악마' 때와 같다.

놈이 모습을 숨길 줄 안다고 해도, 개눈깔엔 다 보일 것이다.

* * *

내겐 개눈깔이 있으나 다른 이들은 위장자와 마찬가지로 흡혈귀와 인간을 구별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하지만 위장자와 달리 확실한 구분 방법이 존재했다. 흡혈귀는 '은'에 반응한다. 피는 '생명'의 근본으로 여겨진다. 피 대신 모래가 흐르는 흡혈귀는 타인의 생명을 갈취하여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순수'를 상징하는 순은은 그들의 거짓됨을 밝히듯이 독이 되어 몸뚱어리를 부식시킨다.

'존 콜백'이라 부르는 키 작은 중년인은 무장할 때 은포크와 나이프를 챙겼다. 그가 어디에서나 식사할 때 격식을 차리는 멍청이가 아니라면, 흡혈귀를 죽일 무기로 식기를 사용해야 할 만큼 상황이 나쁘다는 뜻이다. 내가 쳐다보고 있자 존 콜백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농담했다.

"흡혈귀의 고환을 썰 때 좋습니다."

"오, 몇 개나 썰었는데요?"

설마하니 저급한 농담에 대답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존 콜백은 대답을 망설이다가 손가락 열 개를 펄쳐 보였다.

"배우지 못한 터라 숫자 열 이상은 세지 못하는 게 안타깝군요."

시시한 남자였다. 무장을 끝마친 존 콜백은 마시던 싸구려 위스키를 들고 의자에 앉았다. 날이 밝으면 다시 대밀림을 수색할 예정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지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존은 세수 대신 술을 마시며 잠 깨는 걸 택했다. 제리코와 다른 일행은 보충 병력을 요청하러 갔다. 어색함을 싫어하는지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왕국의 부층들은 죄다 은식기를 사용합니다. 흡혈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허공에 스테이크를 써는 흉내를 냈다.

"집을 찾은 손님들은 항상 집주인이 대접하는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경계하고 적대하는 주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은포크로 집은 고기를 입안에 가져다 넣고 친절하게 내용물까지 보여 줘야 했죠."

쉬익-!

존 콜백은 나이프를 던졌다.

벽에 박힌 나이프의 손잡이가 짧게 떨다가 멈춘다.

"지금은 훌륭한 관습도 모두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오렌지색 빛이 창가로 스며든다. 여명이 밝아 왔다. 아침이 되기까지 십 분쯤 남았나.

난 잭 콜백에게 물었다.

"흡혈귀 사냥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낳아 준 부모가 죽고, 길러 준 삼촌이 죽었을 때부터 했었지요.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기껏, 삽십 년 정도 지났군요."

그는 베테랑인 만큼 아는 게 많았다.

난 수색이 재개될 때까지 그와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주로 그의 신세 한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럼 흡혈귀를 죽일 방법은 오직 은으로 만든 무기로 심장을 찌르는 것밖에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공자처럼 무식… 이런, 간혹 삐뚤어진 입술이 단어를 잘못 뱉어 내곤 합니다. 부디 양해를. 공자처럼 무식하게 강한 힘으로 아예 곤죽을 내버리면 모를까, 사실 불가능하지요. 목을 베는 법도 통하나 추천해 드리진 않습니다. 목뼈가 몹시 단단해 일격에 베지 못하면 역으로 당할 테니까요. 흡혈귀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강합니다. 저급한 흡혈귀조차 베테랑 군인이 당해 내지 못하니 빌어먹을, 놈들은 인간들의 포식자들이오."

두 번 무식하다고 했어?

그가 목젖을 꿀렁이며 위스키를 마셨다.

"꺼억. 아무튼 그렇소. 은으로 만든 거라면 식기나 부자놈들의 귀금속, 혹은 부인의 '장난감'도 괜찮다오. 단지, 박아넣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하하, 천박한 흡혈귀 놈들."

싸구려 위스키만큼 저급한 단어 선택이었다.

첫인상은 좋지 않았으나 점점 마음에 든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공자, 우린 거지 새끼예요. 예전엔 부자 놈들한테 적선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엿 같은 고환 나이프 대신에 제대로 날이 서 있는 은검을 휘둘렀다니까요. 하지만 대를 거듭할수록, 우리는 잊혀 갑니다. 어릴 때지만 기억납니다. 공자님의 아버지, 위대한 레인버그 저하께서 아직 맨발로 흙을 묻히던 농민이었던 시절이. 오히려 그때가 좋았지."

취할수록 존 콜백의 주둥이가 쉴 새 없이 바쁘게 떠들었다.

난 가만히 앉아 그의 술주정을 들었다. 내가 그 맨발로 흙 묻히던 농민의 아들이라서 그럴까, 그는 내게 속마음을 기꺼이 털어놨다.

"지난 삼십 년의 평화는 사람들의 공포를 무디게 했습니다. 백주대낮에 악마가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을 그 짧은 시간에 잊고 말았지. 그러니 지금 꼴이 어떻습니까? 망할! 사냥꾼의 감이 확신합니다. 옵니다. 저번 대전쟁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두려운 시절이! 근데도 망할 귀족 놈들은!"

"어째 귀족에게 큰 불만을 품은 듯합니다."

"당연하지요! 좆같이 멍청한 새끼들!"

그는 내가 귀족이라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그가 말하는 귀족은 서대륙 왕국의 귀족만을 뜻하는 걸지도.

"흡혈귀 사냥이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들 때문입니다. 흡혈귀 놈이 발악하면 손가락 한두 개 잘리거나 그냥 콱 뒤져 버리면 그만이지만, 인간이 지랄하면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특히, 흡혈귀가 귀족이나 부자로 위장하면 도무지 손쓸 방도가 없지요. 분명 흡혈귀 새끼인데, 아직도 저 높디높은 성에서 떵떵거리는 씹새끼가 있단 말입니다!"

"흡혈귀 귀족이라, 흥미롭네요. 구별도 가능하잖습니까. 왜 가만히 놔두고 계십니까?"

부추길 의도는 없었으나 그는 싸구려 위스키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제리코가 오면 그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몇 차례 때리겠지.

"니미럴 귀족 때문입니다. 놈들은 제 성에 흡혈귀가 있더라도, 무시할 놈들이니."

"귀족들이? 왜죠? 잡아먹히면 어쩌려고?"

"하하. 흡혈귀 놈들은 악마와 다릅니다. 인간의 피를 탐하는 짐승 주제에 잔머리가 뛰어나 제 몸 지키기에 열중인 겁쟁이들입니다. 놈들은 절대 귀족이나 부자 혹은 강자들을 습격하지 않습니다. 혹여라도 피해가 올까 되레 무서워하지요. 대신 놈들이 잡아먹는 건 하층민입니다. 언제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대밀림의 화전민들처럼, 왕국이 버러지처럼 취급하는 사람들. 그들이 몇 명 사라져도 윗놈들이 눈 하나 까딱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흡혈귀를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귀족들의 피는 고결하여 그럴 리 없다며, 감히 어딜 의심하냐며. 미친 새끼들."

멜카란에서 겪으며 서대륙 왕국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뭐, 악마놈과 다를 바 없잖아. 존은 우리 아버지를 제외하고 귀족들은 자신들을 배척하고 심할 때는 범죄자 취급까지 했다고 한다. 코산이 베일에 감춰진 일족이 된 이유도 사실상 타의였던 것이다.

코산 일족은 이래저래 고달픈 사람들이었다.

레인버그와 멀어지게 된 건 오해 때문, 지금은 오해가 풀렸다.

그리고 코산 일족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피의 악마 때문이다.

난 자신이 있었다.

레인버그는 코산을 품을 만큼 넓고 크다. 피의 악마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남은 문제는 은검의 주인과의 문제.

어떤 방법으로 그의 검을 빼앗을까.

"이놈, 존!"

돌아온 제리코가 만취한 존의 뺨을 쳤다.

짝, 명쾌한 소리가 들리고 나서 놀랍게도 존은 한순간에 술이 깼다.

그 모습에 난 그가 생긴 것과 달리 응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101

흡혈귀들의 은신처는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다. 그들은 평소에는 상관없으나 피를 섭취하고 나면 극도로 햇빛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렇다고 약점은 아니다. 단지, 싫어만 할 뿐이다.

울창한 나무와 수풀이 햇빛을 가로막고 먹어도 '뒤탈없는' 먹이들과 숨을 수 있는 옛 부족의 터가 가득 한 대밀림은 흡혈귀의 은신처로 제격이었다. 코산도 그 사실을 알고 지난 삽십 년 동안 이곳에 감시를 둬 흡혈귀를 경계했다. 가끔 굶주린 흡혈귀들이 있긴 했으나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하지만 '5년 전' 부터 대륙 곳곳에 흡혈귀들이 발견되고 사냥꾼들이 분산되자 도리어 대밀림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대밀림은 지랄 맞게 넓었다. 우리가 있던 곳에서 사건이 발생한 곳까지 하루를 꼬박 뛰어가야 했다. 지도로 보면 남쪽 끝에서 출발하여 숲이 끝나는 북쪽 끝이 도착 지점이었다. 흡혈귀의 특성 때문이다. 홀로 행동하는 놈들은 행동 반경 안에 다른 흡혈귀가 있는 걸 몹시 꺼린다.

"공자. 숙소를 구했소. 새벽녘이 밝으면...."

"그럴 시간 없어요.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놈을 추적하죠."

"어두워서 흔적을 찾기가 난해하오."

"따라오기만 해요."

연락병이 가져다준 정보. 며칠 전,이 근방에서 일어난 사건은 남쪽 숲에서 일어난 사건보다 더 심각한 대규모 실종 사건이었다. 대밀림에서 나는 목재와 모피를 왕국까지 운반하는 졸데 상단의 고용인 대부분이 실종됐다. 실종자 중에는 졸데 상단의 부단주도 있다. 흡혈귀의 소행치고는 대범했다. 치밀함과 은밀함은 전혀 없다. 제리코 말대로 밤에 숨어 살던 놈들의 행태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난 실종자가 발생한 졸데 상단의 벌목장에서부터 피의 흔적을 발견했다. 개눈깔만 보는, 과거의 흔적이다. 핏자국은 벌목장 곳곳에 어지럽게 뿌려져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잡혀 갔다. 피를 흘리며 질질 끌려간다. 벌목장을 지나 어두운 숲까지 자국은 이어졌다. 흔적을 읽던 난 제리코에게 경고했다.

"한 놈이 아닙니다."

그의 주름진 이마가 가뭄에 마른 대지처럼 금이 갔다.

제리코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흡혈귀가 단체 사냥을 하다니. 수십 년 만에 처음이오."

"은검 한 자루 빌려야겠습니다."

벌레 잡는 데 힘쓰고 싶지 않다.

제리코는 허리춤에 맨 은검을 뽑아서 내게 건넸다. 이제 그의 무기는 작은 단검밖에 없었지만 누가 검을 사용해야 할지 잘 아는 듯했다. 흡혈귀의 은신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벌목장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발견했다. 문을 감추지도 않았다. 놈들은 대범했다. 더는 숨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코산인들은 분개했다. 검을 쥘 나이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흡혈귀들을 사냥해 왔다. 일족의 복수를 위해 희생하며 피 칠갑을 해 왔다. 그런데 숨어서 도망가야 할 흡혈귀들이 이젠 버젓이 인간사냥을 개시했다.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난 그들의 썩어 가는 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횃불을 준비하는 동안 난 혼자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지하는 제법 깊었다. 내가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제리코가 횃불을 건넸으나 난 들지 않았다.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서늘한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안에서부터 불어 왔다.

바람은 비릿한 냄새를 품었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자 악취로 코가 저릴 지경이었다.

도착한 곳은 와인 저장고였다. 제법 긴 복도, 그 끝엔 철문이 있고 가는 길에는 오크통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와인을 숙성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크통 안에는 와인처럼 붉은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존 콜백이 나이프를 들고 오크통의 마개를 땄다. 그는 곧바로 코를 막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런 니미럴!"

오크통은 아홉 개였다.

짜증 나는 우연이다.

실종자도 아홉 명이었다.

일행들은 제각기 무기를 꺼냈다. 나이프와 포크, 단검과 꼬챙이. 제대로 된 검을 쥔 자는 나밖에 없었다. 제리코는 며칠 뒤 무기 조달이 가능할 거라고 했지만, 너무 형편없었다. 역시, 준비하길 잘했지.

그들은 긴장했다.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의 흡혈귀가 있다. 복도 끝, 철문을 열면 펼쳐진 풍경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지랄을."

가관이다.

문을 열었으나 놈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귀족들이나 쓰는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긴 식탁.

다섯 명의 인간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촛대에 꽂힌 눈알.

꽃병에는 꽃 대신 사람의 뼈.

와인잔에는 검붉은 핏물이, 접시 위에는 사람의 장기.

예복을 갖추어 입은 그들은 우아하게 식사를 즐겼다.

"처죽여 주마, 짐승 새끼들!"

존이 소리를 지르자,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던 자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창백한 피부와 날렵한 콧대, 찢어진 눈을 지닌 중년 남자였다. 목소리 또한 외모와 같이 날카로웠다.

"당신들은 자신이 사냥꾼이라고 믿소?"

"뭐?"

"어찌 잡아먹힐 자들이 스스로 사냥꾼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할 따름이오."

그의 말에 네 명의 흡혈귀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마침 성찬이 시작됐으니 어떻게, 자리를 마련해 드리오?"

제리코가 격분했다.

"피를 마시는 짐승 주제에 감히 덫을 놓다니. 겁을 상실하였구나!"

하하하-

흡혈귀의 웃음소리가 메아리 쳐 울린다.

"그대들의 피는 성찬의 디저트가 될 예정이오. 걱정 마시오. 머리는 나중에 먹어 주겠소. 제법 솜씨 좋은 주조사가 있어 좋은 술이 될 테지."

난 오만한 흡혈귀와 격분한 제리코 일행을 번갈아 봤다. 그들에겐 복수의 시간을 선사해 주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제리코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할 말 다 했니?"

"오, 당신은 썩은내에 찌들은 사냥꾼과 달리, 제법 맛있어 보이오. 어떻소? 내 하인이 된다면 여섯 번의 성찬까지는 살려 줄 의향이 있소."

사실 놈의 힘이 제법 강해 보이길래 테스트를 하려고 했다. 흡혈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놈에게서 얼마나 더 강한 흡혈귀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 싶었다. 단지, 아까부터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혐오감을 해소시키고 싶을 뿐이었다.

개간네.

쿵-!

식탁 위로 뛰었다.

놈들이 내 움직임을 깨닫고 송곳니를 드러낼 때쯤.

이미 놈들의 머리는 분리되어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난 머리만 남은 놈들의 표정을 바라봤다. 송곳니가 점점 길어진다. 눈엔 분노가 머물다가, 이내 공포가 서린다. 은검엔 검은 재가 묻어나왔다. 철검으로 벴을 때와 달리 상처부터 시작된 붕괴는 순식간에 몸으로 번져 재가 되어 흩날렸다.

다섯 흡혈귀가 앉아 있던 자리엔 검은 재밖에 남지 않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제리코를 돌아봤다.

"희생자들을 묻어 주도록 하죠."

제리코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쩝쩝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릴 때지만 라이베라 저하의 전투를 목격한 적이 있었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소. 살면서 그렇게 강한 자는 보지 못했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공자는...."

문득 그가 날 보는 시선이 몹시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쌍둥이들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 저러지 않을까 싶다.

"정말 대단하시오."

"허투루 들은 건 아니겠죠?"

"예?"

"다 죽여 주겠다고 했잖습니까. 피의 악마든, 뭐든."

난 진심이었다.

* * *

대밀림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우리는 대밀림과 왕국 사이의 유일한 도시, 베르텐베켄으로 향했다. 코산 일족이 주로 머무는 도시로 회담할 때마다 베르텐베켄으로 모인다. 얼마 뒤, 보충 병력이 베르텐베켄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베르텐베켄은 제법 큰 도시라 메신져도 한두 명 있었다. 메신져는 목탄의 탑 출신의 마법사들로 서로 정신망이 연결되어 있다. 쉽게 말해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통신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라, 비용을 지불하면 통신망을 이용해서 한계적이긴 하지만 대륙과 대륙 간의 통신도 가능했다.

메시지를 보낸 후 하루가 지나 다시 메신져의 집을 찾았다.

알리에바의 답장이 도착했는데, 때마침 물건 조달이 완료되었다고 했다.

난 곧바로 제리코와 같이 갈단 상단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난 넌지시 제리코에게 물었다.

"무기를 조달하고 있다던데, 보유 수량이 얼마쯤 됩니까?"

그는 내가 '귀족생필품' 따위를 구하러 상단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제리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모두에게 보급할 수 있으나, 언제까지 버티려는지는 모르겠소."

"왜요? 삥땅이라도 치나요?"

"삥땅이라니… 은으로 만든 무기는 모두 소모품이오. 은의 함유가 높을수록 철과 달리 쉽게 망가지는 데다가 흡혈귀를 죽이다 보면 독기에 물들어 '순수'의 힘을 잃어버린 다오. 그럼 평범한 철검과 다를 바 없어지지. 전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오. 사태는 급박하고, 흡혈귀는 대담해지고 있지. 두 달을 버티면 다행이지 않겠소? 후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갈단 상단의 입구에 도착했다.

난 미리 연락해 둔 상인과 인사하고 신분을 인증했다. 그는 우릴 상단의 창고로 안내했다.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내 질문에 제리코가 어리둥절했다.

"레인버그 공자가 아니오?"

"그러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창고로 가는 길목은 많은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제리코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체 어떤 물건을 주문했길래 이리도 삼엄하오?"

그는 걸시의 아빠다. 걸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

창고에는 넓은 천으로 덮어 둔 상자들로 가득했다.

난 그더러 직접 천을 걷어 달라고 말했다. 자신을 하인처럼 다룬다고 생각했는지 제리코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천을 걷고, 상자 안에 든 물건이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천을 걷던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난 알아차렸다.

"공자...."

상자 안의 물건들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내가 부탁했긴 했지만, 정말 조달할 줄이야.

새삼 자유 도시의 영주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역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상자에는 무기들로 가득했다.

평범한 롱소드 수십 자루, 그리고 창과 도끼까지.

수백 명을 무장시킬 수 무기다. 우습게도 쿤칸 제국에서조차 이렇게 많은 병장기를 한 번에 유통하려면 영주 혹은 왕에게 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서대륙의 왕국은 썩어서 돈이면 다 되는 것 같았다.

무기의 수준은 평범했다.

뛰어난 장인이 만든 게 아닌, 대장간에서 찍어 낸 양산품이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제리코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건… 이게 대체 다 얼마...."

"싸게 넘겨 드리죠."

흡혈귀와 싸울 때도 멀쩡했던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공자. 우린… 이만한 돈이… 없소."

"돈으로 달라는 게 아닙니다."

'숙명'과 '직업'의 차이.

피의 악마가 죽은 후 그들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까.

난 야비하게도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레인버그로 오십시오. 강요는 아닙니다. 일족분들한테도 전해 주세요. 원하시는 분만 오셔도 좋습니다.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드리지요. 레인버그에서 본인들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제리코는 상인이 아니다. 사냥꾼인 그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어리숙한 면모가 있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신은 결정권이 없다고. 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선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둬요."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대가 없이 선뜻 건네는 방법.

아주 못된 거래 방법의 하나였다.

102

며칠 뒤.

흩어져 있던 코산의 사냥꾼들이 베르텐베켄으로 집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 지부에서 알아낸 정보를 공유하고 제리코와 만나 새로운 무기를 받았다. 은의 무기를 받아 가는 사냥꾼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고, 누군가는 날 경계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북쪽 숲에서 만난 흡혈귀 놈들처럼 다수의 흡혈귀들이 몰려다닌다는 목격담이 줄을 이었다. 코산의 사냥꾼들은 강하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들은 흡혈귀를 한 놈씩 사냥했었다. 십여 년 전에 핏빛 늪에서 발생한 사건도 우연히 피의 악마를 사냥할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십 명의 코산인들이 덤벼도 피의 악마를 죽이진 못했다. 악마를 놓치고 늑대인간의 습격에 많은 가족과 친구를 잃었다.

제리코를 포함한 숙련된 사냥꾼들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위험한 때임을 알고 있었다. 한곳에 모인 사냥꾼들은 계획을 변경하는 것에 모두 찬성했다. 은검의 주인과 '선봉장'들을 제외하고, 코산인들은 개인 활동을 관두기로 했다. 베르텐베켄에 수십 명의 사냥꾼이 모였으나 성주와 경비병들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코산은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사냥꾼들이었다.

사냥꾼들의 회의가 끝난 그날 저녁, 난 제리코를 찾아갔다.

"이제 난 혼자 다니겠습니다. 연락병을 붙여 필요한 정보만 제공해 주세요."

인원이 많아질수록 난 귀찮기만 했다. 전생에서도 내가 했던 일은 소수 대원이 모인 특별팀의 정찰병이었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미친 짓엔 사람들의 보탬은 필요 없었다. 제리코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로는 괜찮냐고 물었다.

"코산인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알잖아요? 지금까지 본 내 방식을요."

"그래, 레인버그 저하께서도 독단활동을 즐겨 하셨지. 못마땅해하던 자들에겐 훌륭한 실력으로 증명했고 말이야. 솔직히 말하지. 아직 공자의 힘을 눈으로 보지 못한 사냥꾼들은 공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들도 있네. 그리고 그들은 공자가 하는 일에 방해만 될 테고 말이야. 우리에겐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증오의 지혜와 결핍된 분노가 있으나, 공자에겐 믿을 수 없이 압도적인 힘이 있지. 검주께선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난 공자를 믿네."

난 제리코의 칭찬에 머쓱해졌다.

뺨을 긁적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제리코와 걸시는 부녀 사이답게 정말 닮았다.

그들의 표현엔 가식이나 숨김이 없었다.

"존 콜백이 말하더군요. 흡혈귀 중에 귀족으로 위장한 자가 있다고."

난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말했다.

"…코울로스 남작. 몇 년 전, 광왕이 메토 성의 영주로 봉한 신흥 부르주아일세. 일찍이 의심을 품어 조사했으나 마땅한 증거는 나오질 않았어. 다만, 그믐달이 뜰 때쯤이면 농노들이 사라졌네. 그 수는 일 곱, 몇 년간 항상 같았지."

"흡혈귀 짓이 분명하군요. 역시, 놈이 귀족인 탓에 흡혈귀라고 밝혀 내지 못하셨군요?"

"코울로스 남작은 막대한 부를 지닌 자로 자유 도시의 영주들과도 친분이 있다고 들었네. 매달 광왕에게 공물을 보내어 신임도 받고 있지. 놈을 죽이려면 천 명의 경비병을 상대해야 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놈이 사냥에 나서길 기다릴 뿐.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냥 장면을 들키지 않았어. 치밀하고 잔인한 놈이야."

"좋군요. 메토 성이라고 하셨죠? 멀지도 않네."

"…공자. 어찌할 생각인가?"

난 내 간단하고도, 나밖에 할 수 없는 계획을 설명해 줬다.

계획이랄 것도 없어서 말 두 마디에 모두 설명이 가능했다.

제리코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위험해. 몹시 위험해."

"뭘, 새삼스레 그래요?"

"남작은 어쩌면 정말 '귀족'일지도 모르네. 같은 흡혈귀라도 격이 다른 놈이야."

"내가 질 것 같아요?"

"아니, 자네가 이기겠지. 놈을 일격에 도륙 낼지도 몰라. 하지만 그 뒤엔? 정말 그렇게 막무가내로 덤벼들 텐가? 쿤칸이 다른 국가와 맺은 '협약'에 대해서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자칫하단 분쟁으로 번질지도 몰라."

난 큰 소리로 하하 웃었다.

"난 악명 따윈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에겐 말할 수 없지만 '국가 간의 분쟁' 따위는 너무나 하찮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 * *

베르텐베켄에서 메토 성까지는 마차로 하루를 달려 도착했다.

하지만 남작을 만나기 위해선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나는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쿤칸 제국 4대 기둥이자 레인버그 공작가의 공자이며 부르길, 여명의 기둥이자 악마를 구별하는 달의 아이다.

레인버그 공자의 신분으로 메토 성의 성주를 만나는 자리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난 가만히 답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공식적으로 서술된 방문 요청서는 퀄츠 성의 알리에바와 가신들의 역할이었다. 형식적인 이유야 간단했다. 국가 간의 친목 도모, 시시껄렁한 이유. 하지만 쿤칸 공작가의 공식적인 요청인 만큼 폐쇄적인 코울로스 남작은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요청서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대장이 도착했다. 난 남작을 만나기에 앞서 주문한 의복을 갖추어 입었다. 푸른색 염료로 물들인 고급 천으로 지은 의복으로 셔츠 위에 조끼를 입고 투버튼 코트를 걸친 쿤칸의 예복이었다. 허리춤엔 장식용 검을 찼다. 검날이 짧고 뭉툭한 장식용 검은 날이 서 있지 않았으나 검날은 순은으로 만들었다.

레인버그 휘장을 건 마차를 타고 메토 성으로 출발했다. 메토 성은 언덕 위에 지어진 작은 성으로 성벽이 낮고 내전과 외전이 각각 한 채밖에 없는 성이다. 언덕 주변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고, 유일하게 올라가는 길목은 하나였는데, 곳곳에 경비병 처소가 보였다.

약속된 시간까지 성문에 도착하자 남작의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젊은 고용인이었으나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다크서클이 진하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예의는 갖추었으나 성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혼자 온 날 의아하게 생각하며, 내게 고용인을 위한 식사가 마련되었다고 했다. 혼자라고 답하자 집사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곧바로 표정을 숨겼으나 난 표정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어떤 자인지 알고 있는 건가?

성문이 열리자 성의 경비병들이 일렬로 서서 날 맞이했다.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주인은 종종 치안을 자랑하곤 한다. 그러나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남작이 제 영지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왕이 허락한 병사보다도 훨씬 많아 보였다. 난 이죽거리며 집사에게 말했다.

"남작께서 부를 쌓아 두셨다더니 과연 대단하네요? 어째 퀄츠 성의 병사보다 더 많아 보여."

그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메토 성엔 무뢰한들이 많습니다. 도둑놈들이 득실거리니, 집 지키는 개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성가시다면 당장 돌아가라 말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뭐, 구경꾼들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집사를 따라 내성으로 향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잘 꾸며 놓은 응접실이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코울로스 부인께서 꼭 공자님을 직접 안내해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거인이 하품할 시간 동안만 기다려 주시면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러죠, 뭐."

"감사합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집사가 나가자 난 팔짱을 끼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 누웠다.

응접실은 평범한 귀족처럼 꾸며 놓았다. 이상할 건 없다. 단지, 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평범함 안에 숨은 핏자국이 낭자했지만 말이다. 바닥에도, 벽에도, 귀부인을 그린 그림과 햇살이 드는 창문에도. 붉은 손자국이 가득했다. 대체 몇 명을 죽였는지 상상도 가지 않아. 짐승의 굴 안에서, 난 뻐근해지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어 놈을 기다렸다.

"베텐 누네켄- 공자님."

간드러진 목소리에 눈을 떴다.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온 그녀는 시중을 물러가라 명하고, 내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내게 왕국의 인사를 건네며 맞은편에 선 저 여자, 코울로스 부인. 남작의 아내다. 집 안임에도 양산을 쓴 부인은 키가 몹시 크고 팔다리가 삐쩍 말라 있었다. 빨간 드레스를 입었는데, 창백하고 생기 없는 피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메토의 안주인이자 코울로스 남작부인이라고 하옵니다. 과연! 위대한 제국의 빛나는 공자님이시군요. 꽃밭에 선 소녀보다 아름다워요. 호호."

부인은 얼굴을 반쯤 가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감춰진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검은 자만이 보였다.

내가 뻔히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부인이 키득키득 웃으며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쿤칸에선 잘 하지 않는 레이디에 대한 격식이다. 부인이 요구한 손등 키스에 난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제기랄, 너한테 보낼 존경은 욕밖에 없다. 부인은 내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부끄럽군요. 공자님. 쿤칸의 예법은 익숙지 않아서, 공자님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 세계엔 뻐큐가 없다.

"그냥 해 봤습니다."

"호호. 무슨 암호인가요? 손가락 중 가장 긴 손가락을 올려 보인 다라, 그 뜻은… 호호호."

요사스런 웃음에 소름이 돋았다. 난 얼른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작은 어딨죠?"

"…남작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자님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셨지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호호."

* * *

식탁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촛대에 꽂힌 눈알이나 장기가 담긴 접시는 없었다. 모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상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남작이 중앙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발소리가 나지 않는 우아한 몸놀림으로 맞은편 상석에 앉았다. 서서 기다리던 부인이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는 부드럽고 당찬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하하! 폴스타 공자! 이것 참 반갑구려. 이 구석진 시골까지 공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오. 정말 대단한 업적들이오. 만나는 자마다 꼭 공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오. 특히 자유도시의 영주들이 몹시 칭찬하더군. 대단해. 안 그래도 직접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리 귀한 발걸음을 해 주다니, 참으로 영광이오."

그는 껄껄 웃으며 나에 대한 칭찬을 이어 갔다.

난 시큰둥하게 앉아 굳은 표정으로 들었다.

"멜카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왕국도 한동안 떠들썩했소. 모두가 놀랐다오. 흉측한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멜카란을 정화한 자가 쿤칸 제국 공작가의 아들이라니! 그야말로 영웅의 기개였소. 그야말로 과거엔 라이베라 공작이 있었다면, 지금은 폴스타 공자가 있는 게지."

남작은 술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술잔을 들고 마셨으나 입술만 갖다 댔을 뿐 술잔의 술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음식도 덜어 앞 접시에 놓았으나 먹는 척만 할 뿐이었다. 난 표정을 풀고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그저 제가 할 일은 인간의 도리로,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03

"멜카란을 정화하고 악마를 죽인 게 어찌 당연한 일이겠소? 겸손이 지나치시구려."

"역겹고 더러운 것을 치우는 것이니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오물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단지 전 손이 더러워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뿐입니다."

난 샴페인을 마셨다. 차린 음식도 먹었다. 그는 포크를 내려놓고 내 말을 경청했다. 음식을 씹어 삼킨 후 난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제가 서대륙으로 넘어온 이유도 불결한 게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냥꾼들은 놈들을 흡혈귀라고 부르더군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더럽고 불결한 짐승이라고 합니다. 햇빛을 무서워하는 어둠의 하수인이며, 모래로 가득 찬 몸통을 지닌 악마의 인형에 불과한 자들이지요. 심장도 없는 주제에 사람인 척하는 가련한 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허? 흡혈귀들은 단지 전설이 아니었습니까? '불결하고 더러운' 시궁창의 인간들이 밤을 두려워하여 만든 전설 말입니다."

"남작께선 보기보다 귀가 어두우시군요. 저에 대한 소문은 들었으면서 흡혈귀에 대한 건 듣지 못하셨습니까? 사실, 전 얼마 전에 흡혈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악취 나는 놈이었지요. 목을 베어도 살아 있더군요. 머리만 남은 놈이 한참 동안 살아 있었습니다. 모래를 뿜어 대는 게 어찌나 더럽던지."

난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제 가문의 창고에도 하나 있습니다. 머리만 잘라다가 박제로 만들어 유리병에 보관하고 있지요. 아직 가끔 눈을 깜빡거리곤 합니다. 참으로 질기고 멍청한 존재가 아닙니까? 스스로 죽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니, 쯧쯧."

하하.

난 웃었고.

그는 웃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그가 입을 열자,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난 널 안다. 어리석은 공자야."

말투 또한 사나워졌다.

"우릴 죽이러 다닌다는 것도."

호방하게 웃던 얼굴은 비틀리고 녹아내렸다.

그는 흰자위가 없는 검은 눈으로 날 노려보며 경고했다.

"알량한 영웅심리, 어리석구나. 네놈은 착각에 빠졌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상위 포식자를 이길 수 있겠더냐? 네놈도 먹이에 불과하다. 날 떠볼 생각으로 온 모양인데, 이제 어찌할 것이냐?"

호호호-

옆에서 부인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난 광왕의 신하이자 왕국의 남작이지. 네놈은 어리석게도 제 신분을 밝힌 채 손님으로 와 있고 말이야. 착각하지 마라. 놓아 주는 건 나다. 돌아가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려라. 곧 찾아가도록 하지."

그가 내게 축객령을 내린다.

"돌아가는 길에, 선물이나 받아 가도록 하게. 공자. 어제 뽑아 낸 신선한 음료일세."

난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어갔다. 나가는 문이 아닌 놈들에게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난 그의 머리를 붙잡고 식탁에 내려쳤다. 단단한 대리석 식탁이 반으로 갈라졌다.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카악!"

부인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덤벼들자, 난 은검을 뽑아 휘둘렀다.

조각난 그것은 붉은 드레스 안에 모래만을 남겼다.

"넌 날 알지 못해."

쿵-! 쿵-!

놈은 발버둥쳤다. 박살 난 머리는 순식간에 재생됐다.

전에 벤 흡혈귀와는 확실히 재생 속도가 훨씬 빨랐다.

"카악! 날 죽이면… 광왕이… 인간들의 협약...."

놈은 머리가 재생될 때마다 입을 놀리며 날 협박했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박살 냈다.

"거 봐."

쿵!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쿵!

"머저리 새끼야."

쿵쿵-!

"미친… 놈...!"

그때였다.

놈의 몸이 변형을 일으켰다. 머리가 갈라지고 몸이 부풀어 오른다. 난 뒤로 물러나 놈의 변화를 바라봤다. 제리코가 그랬지. '귀족'이라고 그랬던가? 놈은 보통의 흡혈귀와 달랐다. 단지 송곳니가 돋아나는 것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변형할 줄 알았다.

놈의 팔은 마치 사마귀처럼 변했고, 쪼개진 머리에선 안쪽의 뇌가 훤히 보였다. 부풀어 오른 몸은 딱딱하게 굳어져 인간의 두세 배는 커졌다. 징그러운 모습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악마는 혐오스럽다. 악마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생리적인 혐오감을 자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놈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네놈 탓에 다시 몇 달을 먹어야겠구나. 젠장! 이제 곧 축제가 벌어질 텐데!"

"축제? 무슨 축제?"

"우선 네놈의 몸을 뼈째로 씹어먹어 주마!"

쉬익-!

놈이 거칠게 팔을 휘두른다. 변형된 팔은 사마귀의 다리 혹은 낫처럼 날카롭고 강인했다. 바람을 찢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빠르고 강하여 통나무도 일격에 잘라 낼 위력이었다. 기술은 없다. 단지 휘두를 뿐. 마치 포식자의 오만함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놈의 공격에 몸이 뭉텅뭉텅 잘렸을 테니까.

난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놈은 내가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줄 착각하고 있다.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난 일부러 닿을 듯 말 듯, 위태롭게 공격을 피했다. 최소한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놈을 죽이는 데에 힘을 쏟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혈귀 귀족의 수준.

놈이 흡혈귀 중에서 강한 편에 속한다면.

확실히 코산 일족은 낭떠러지 앞에 서서 싸움하고 있었구나.

무림의 경지로 본다면 놈은 일류 무사쯤은 되었다.

"장난은 끝이다."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목과 다리를 향해 휘둘러진 놈의 팔을 피해 난 도리어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훨씬 빠른 속도로 참격을 날려 목을 잘랐다. 심장을 찌르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았지만, 난 놈이 잠시나마 살아 있길 바랐다.

과연, 은검으로 잘라도 전 놈처럼 곧바로 먼지가 되어 흩어지지 않았다.

갈라졌던 머리는 재생됐다. 놈의 몸은 머리를 찾는 듯 허둥지둥거렸다. 난 놈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놈이 보는 앞에서 몸을 짓뭉갰다.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자신의 몸을 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난 놈의 머리를 들고 문을 열었다.

유유히 내성의 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지나가던 집사와 하인은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산책을 나온 듯 자연스러운 발걸음에 깨닫지 못하고 내게 인사했다.

하지만 곧 내 손에 들린 게 자신의 고용주라는 걸 알아채고 비명을 질렀다.

경비병들이 도착했다.

경악하는 사람들 사이로 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갈팡질팡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눈치였다.

난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아직 죽지 않은 남작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보아라! 당신들에게 썩은 돈을 주던 주인의 정체를! 인간이, 목이 잘린 채 살아 있지 않더냐? 이게 악마의 하수인, 흡혈귀라는 존재다."

잘못 생각했다.

처음엔 흡혈귀의 존재가 알려지면 서대륙은 큰 혼란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악마로도 버거운데, 흡혈귀라니.

하지만 직접 부딪히며 난 깨달았다.

알아야 한다.

잡아먹히는 자들을 위해서라도.

남작은 죽어 가면서도 수치스러운지 표정을 찌푸렸다.

이내 머리는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람들은 바람에 날린 재를 피해 우르르 달아났다.

"기다리시오!"

나가려던 차에.

길을 막는 자가 있었다.

병사는 아니었다. 품질이 높은 갑옷과 검을 착용한 자다. 그는 기사처럼 보였다. 왕국 소속인가? 왕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는지, 남작을 감시할 제 수하 몇 명은 심어 놓은 듯했다.

"공자의 행동은 용납 못 할 일이오. 아무리 남작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대는 왕국 소속 신하의 성에 공자의 신분으로 찾아와 난동을 부렸소. 이는 재판에 넘겨질 일이오! 수도까지 직접 모실 터이니 검을 내려놓으시오."

난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엿 드세요."

"뭣들 하느냐?"

기사가 외쳤다.

"공자를 포박하라!"

그제야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쿤칸과는 다르구나.

쌍둥이들을 직접 경험해 봤다면 이런 짓은 못 할 텐데.

"하하하!"

문득 내가 든 생각이 우스워서 웃음보가 터졌다.

쌍둥이들을 두둔하는 건가? 마치 내가 그들이라도 된 듯한 모양새잖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아났다.

순식간에 거리는 벌어져 추격은 금방 끝이 났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 길다고 느껴졌다.

* * *

"이래서 싫어."

유명한 말이 있다.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였나?

지구에서, 니체라는 사람이 한 말이다. 너무 유명한 말인 데다가 많이 남용한 탓에 중2병스러워진 말이었다. 물론 니체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우습게도, 지금의 내게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악마를 잡기 위해선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이 꽃밭이라면 장미꽃으로 두들겨 패 주겠지만, 세상은 지구나 이곳이나 온통 엿 같은 것투성이였다.

그래서 싫다.

아무리 악마라지만.

잘린 머리를 들고 미친놈처럼 웃는 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야.

다아.

달비가 무릎 위에 올라와 배에 머리를 비볐다.

날 위로해 준다.

난 달비를 안았다.

한참 동안.

날 들여다보지 않을 때까지.

* * *

"코울로스가 죽었다."

피의 악마는 자신을 지킬 다섯의 아이를 둔다. 죽으면 채워지는 아이다. 하지만 힘을 나누어 만들기에 곧바로 만들지는 못한다. 모두 잃어버린 후 다섯을 채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아이가 죽었다.

그는 네 아이를 불러들였다.

"여명의 기둥이 움직였다."

그는 악마이나.

악마가 아니다.

하지만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침묵, 폭력 그리고 질병까지 없애더니 기어코 내게 찾아왔구나."

피의 악마가 자식들에게 명했다.

"놈을 두면 나의 자손들이 모두 비참하게 죽어 갈 터이니, 힘을 합해라. 아이들아. 타고난 이기심으로 지금껏 홀로 사냥해 왔으나 이젠 시대가 격변하느니라. 곧 다가올 '축제'를 고대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일지어니. 모여서 싸워라. 아이야. 군대를 조직하라. 피의 도시를 세워라. 지옥과 현실을 이을 교두보를 세우는 것이다. 피의 강이 흐르리라. 송곳니를 지닌 자가 군림하리라. 아이들아. 자손들에게 가서 전하거라. 숨어 지내던 굴욕의 시대는 끝이 났으니, 포식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려라!"

자식들이 의지를 전하러 사라지자.

피의 악마는 조심스레 품은 붉은 구슬을 꺼내었다.

"오오, 악마의 숭상이여. 거대한 지배자여. 일곱의 대리자여. 오만한 신들이여."

구슬을 품자 그의 늙은 피부는 생기가 돌고 주름이 사라졌다. 탁한 피부는 하얗게 변하고, 회색 눈은 총기 어린 백색 눈으로 바뀌었다. 백작은 죽었다. 그는 악마이나 악마가 아닌 자다.

* * *

남작을 죽인 후에도 세 명의 흡혈귀를 더 죽였다.

제리코가 말했다. 여태껏 내가 죽인 흡혈귀의 수는, 지난 이 년 동안 죽인 수와 동일하다고 했다. 내가 대단한 탓도 있겠지만, 흡혈귀들이 더는 어둠에 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림에 숨은 새로운 흡혈귀를 죽이고 난 후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급보가 도착했다.

코산의 정찰병이 보내왔다.

급히 봉한 편지봉투엔 붉은 액체가 마른 자국이 있었다.

인주처럼은 보이질 않았다.

104

익숙했다.

....

아니, 익숙하지 않았다.

급보를 가져온 통신병을 향해 말했다.

"어딥니까?"

그는 지쳐 있었다.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밤낮을 달렸을 테고 목을 축이는 시간조차 부족했을 것이다. 신발 밑창이 떨어졌고 종아리가 부어 있다. 눈의 실핏줄은 터졌고, 뺨과 이마는 노랬다. 하지만 난 그를 보채며 곧바로 마차에 태웠다. 그가 가져온 급보는 사냥꾼이 흡혈귀에게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동화 속 용사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흡혈귀와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냥꾼들도 당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조금은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동료를 잃는 건 익숙했다. 나는 많은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뒀다. 마모된 감정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순간부터 지금의 나와 이어졌다. 아는 이가 죽으면, 죽게 만든 자에게 복수할 뿐이다. 하지만 결국 하찮은 착각이었다. 타인의 감정과 죄악의 무게마저 보는 개눈깔은 정작 내 마음은 보지 못했다.

어제 저녁, 사냥꾼 무리가 습격을 당했다. 은신처가 들통이 났다. 사냥꾼 중, 살기 위해서 가족과 친구를 버린 자가 있었다. 그는 동료를 팔았다. 흡혈귀들이 은신처를 습격했고, 대부분의 사냥꾼들이 죽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고 하더라도, 기사단이 상주하는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연락병이 말하길, 순찰을 하던 병사가 현장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몰살당했을 거라고 했다. 만약 내가 알지 못했다면 안타까운 이야기로만 들렸을 것이다. 내가 가세했더라도 처음부터 불리한 전쟁이었다. 희생자가 나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생자가 내가 알던 사람이어선 안 됐다.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쓰레기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인을 평등하게 생각했다면 난 석존釋尊처럼 성인聖人이 되었을 것이다.

해가 두 번 뜬 후에 나와 제리코는 왕국의 수도와 가까운 구텐베르텐 도시에 도착했다.

구텐베르텐의 성주는 이름 없는 일족을 위해 기꺼이 은혜를 베풀었다. 자신의 도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무마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적어도 혼을 기리기 위한 장례식과 부상을 치료할 치료사들은 지원해 줬다.

난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 도시 외곽에 마련된 화장장을 찾았다. 기름을 머금은 장작을 높게 쌓고 불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산인들은 흡혈귀에게 죽은 자는 영혼이 더럽혀진다고 믿었다. 그들 또한 사랑하는 이의 묘지를 원했으나 이번엔 화장할 수밖에 없었다. 영혼의 정화, 시신을 불태워 맑은 영혼이 되길.

화장을 기다리는 시신들이 짚불 더미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넋을 기리며 시신들을 염하는 코산인들 뒤에 서서 난 희생자들을 바라봤다. 일곱 개의 시신 중에 내가 아는 자가 있었다. 그는 유족도 친구도 없이 외로이 누워 있었다. 나와 제리코는 그의 앞에 섰다. 제리코는 자신의 은검을 뽑아 그의 가슴 위로 올렸다.

"언제나 내 검을 가지고 싶어 했지. 너머에서는 마음껏 휘둘러 보게, 친구여."

그의 부르튼 손은 아직도 은나이프를 쥔 채였다.

존 콜백.

그는 지지 않았다.

흡혈귀에게 먹힌 시체는 피가 모두 빨려 마른 미라가 된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난 그의 몸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눈으로 보았다. 여러 정보가 뒤섞여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된다. 끝까지 저항했다. 왼팔이 뜯겨 검을 놓쳐도, 오른팔로 나이프를 들어 흡혈귀의 심장에 꽂았다.

난 염을 하는 코산인에게 돈을 건네며 부탁했다.

화장하기 전, 고급 위스키를 그와 같이 태워 달라고.

* * *

치료사의 집에 가던 중에 제리코는 몇 번이나 멈추어 섰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십수 년 동안 죽은 줄 알았던 딸을 찾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았다. 강직한 사냥꾼이라도 마음에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은 것이다. 그는 또다시 상실의 고통을 겪을까 두려움에 차 있었다.

치료사의 집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강렬한 약재 냄새가 진동했다. 자유 도시의 기술 덕에 왕국의 의료 수준은 높다고 들었다. 마당에는 피가 묻은 붕대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뒤뜰에서 피곤한 얼굴로 약을 달이던 치료사는 우릴 보며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제리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리코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치료사에게 들고 온 돈을 모두 건넸다. 귀족이 치료사에게 얼마를 주는지 난 알고 있다. 돈을 받아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 없이 약을 마저 달이기 시작했다.

병실에는 한 명의 치료사와 여섯 명의 환자가 있었다. 제리코는 두리번거리며 딸을 찾았다. 흡혈귀에게 당한 상처는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과 마찬가지라서 외상이 심했다. 다섯 명은 그나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으나, 몸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작은 숨만 내쉬는 중환자가 있었다. 체구로 보아 걸시 같았다. 제리코는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난 언제나 눈물은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터져 버려 새어 나오는 것이다. 화날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린다. 그러니 제리코가 흘리는 눈물은 가장 농도가 진했다. 분노와 슬픔,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흘러넘쳤다.

"다신 널 잃어버리진 않겠다고 다짐했거늘."

제리코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침대 앞에서 무릎 꿇었다.

"시야나, 네가 입은 상처를 아비가 대신 받아 줄 수 없는 게 원통스럽구나. 제발 견뎌다오. 부디 살아다오. 나의 전부야. 꼭 복수해 주마. 널 이렇게 만든 흡혈귀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돼지 먹이로 줄 테니. 시야나, 시야나."

난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저 환자가 걸시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난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환자 중엔 걸시가 없다.

"설마...."

불길함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올라올 때였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치료사님 이거면 돼요? 말쑥하고 부덴 꽃잎 말린 거, 새붕대도 잔뜩.... 어라?"

걸시가 약재와 붕대가 담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녀석은 우릴 보고 깜짝 놀라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앗. 도련님? 아빠?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

걸시는 상자를 내려놓으며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부끄러워요. 걸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많은 사람이 다쳤는데… 혼자만 멀쩡하잖아요. 흐윽. 지금은 치료사님을 도와주고 있어요. 도련님, 화났어요? 아빠는 왜 울고 있어? 이런! 또 민폐를 끼쳐 버린 건가!"

"잘했다."

"네?"

"살았잖아."

"헤, 걸시. 멜카란도 헤쳐나간 몸이잖아요! 아뵤, 흡혈귀들은 제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사실은… 기사님들이 도와줬지만.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걸시는… 난...."

녀석이 평소대로 발랄한 척을 하고 있음을 난 진작 알았다. 무형의 그릇인지, 걸시의 성격 탓인지 걸시의 감정은 누구보다 잘 보였다. 녀석은 떨고 있다. 두려움과 공포, 무력함, 좌절, 혹은 죄책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몸을 가득 채웠다. 애써 담담한 척하는 건 우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겠지.

걸시가 들어왔을 때부터 제자리에 굳어 눈물을 닦아 내던 제리코는 천천히 걸어가 걸시를 꽉 안았다. 걸시는 제리코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하지만 걸시의 손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구, 울지 마요. 아빠."

난 인상을 찌푸렸다. 제리코가 진정되자마자 난 성큼성큼 걸어가 걸시의 손을 낚아챘다.

"아야!"

걸시의 왼팔은 엉망이었다. 녀석은 부상을 숨기고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치료사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다른 사람은 의식을 찾지 못하는데 혼자 걸어다니는 게 미안해서? 걸시는 보기와 달리 어리광을 잘 부리지 않는다.

"너도 쉬고 있어. 곧 퀄츠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도련님, 전 정말 괜찮...."

"토 달지 마, 바보 걸시야."

전투의 흔적.

흡혈귀의 핏자국은 걸시의 몸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왼팔에 남은, 붉은 손자국.

성의 기사들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왼팔이 뜯겨 나갔을 것이다.

죽었겠지. 잔인하게. 피를 모두 빨리고 미라가 돼서.

더는 마실 수 없다. 걸시가 만든 아로니아 쉐이크. 혹은 펄펄 끓는 목욕물 혹은 우당탕탕 넘어지는 소리, 라니스타에게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날마다 붓기인 줄 알고 끓이던 맛없는 호박죽, 가끔 똑똑한 척하며 장황하게 늘어놓던 헛소리.

다아.

"앗, 오랜만이야. 사슴아!"

달비가 걸시의 왼팔을 핥았다. 걸시의 표정이 점점 편안해졌다.

발걸음을 돌린 날 걸시가 불러세웠다.

"도련님...."

걸시는 되레 날 걱정하며 물었다.

"눈이 빨개요. 괜찮으세요?"

고의 성물은 내 눈을 붉게 물들게 했다.

고苦.

괴로움.

붉은 눈이 괴로움의 상징이라면.

악마의 눈이 붉은 건 자신이 괴로운 게 아닌 괴로움을 퍼트리는 역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난 기꺼이 놈들을 괴롭게 할 준비가 되었다.

* * *

의식을 차린 생존자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습격한 흡혈귀 중에 유난히 강한 흡혈귀가 있었다고. 존 콜백을 비롯하여 강한 사냥꾼들이 은신처를 지키고 있었으나 한 놈을 당해 내지 못했다고 했다. 놈은 조장을 죽이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만약, 놈이 계속 남아 있었다면 성의 기사가 도착했더라도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존자는 확신했다.

제리코는 놈을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피의 악마는 다섯의 강한 흡혈귀를 선별하여 자신의 수족처럼 다룬다. 다섯의 흡혈귀는 스스로 밤의 귀족이라 불렀다. 남작도 자신을 귀족이라 하였으니, 놈도 다섯 귀족 중 한 놈일지도 모른다. 그의 실력은 일류 무사 수준이었으나 제리코는 남은 네 귀족은 남작보다 훨씬 강할 거라고 예상했다. 과거 핏빛 늪에서 전대 은검의 검주와 선봉자들의 활약으로 밤의 귀족을 모두 죽이는 데에 성공했으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이 생겨난 것이다.

희생자들이 발생한 빈도로 놈들의 동선을 파악했다.

확실히 흡혈귀들은 대밀림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얼마 후,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코산 일족의 수장인 은검의 주인을 비롯하여 세 명의 선봉장이 모두 대밀림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선봉장들은 강인한 코산 일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세 명의 사냥꾼이다. 그리고 은검의 주인의 강함은 밤의 귀족을 압도한다고 들었다. 난 그가 얼마나 강한지 물었고, 제리코는 기꺼이 그의 힘을 '마스터 이상'이라고 했다.

아직 마스터급의 실력자와는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라니스타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본다면.

그들의 실력은 능히 절정고수를 넘어섰다.

그렇다고 초절정에 이르진 않을 것이다. 라니스타가 내게 무사행을 명한 것도 내 실력으론 초절정에 다다르지 못하나 절정의 실력은 뛰어넘었으니 마스터급의 실력자와 부딪히며 실력을 길러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 * *

오늘 아침, 대밀림에 세 명의 선봉장이 먼저 도착했다.

"폴스타 공자, 위명은 많이 들었소. 하나 소문과 진실은 다른 법이지. 여명의 기둥이라 불리는 그 실력! 내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싸움을 걸었다.

난 히죽 웃었다.

마침,

'라니스타식 비무'가 그리웠던 참이었다.

105

선봉장들의 나이는 젊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자가 서른에 지나지 않았다. 전대 선봉장들은 밤의 귀족과 싸우다 동귀어진했다고 들었다. 선봉장은 밤의 귀족과 맞설 코산의 정예 사냥꾼, 십여 년 넘게 공석이었다가 몇 년 전에 새로이 선봉장이라 불릴 만한 인재가 나타났다고 했다.

겉보기에 십 대에 불과한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들은 확실히 젊었다.

성격이 호전적이고 대담하여 내가 레인버그 공자라는 걸 알면서도 싸움을 걸어왔다. 대충 의도는 눈치챘다. 직접 날 상대해서 전력을 알아보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주도권을 가지겠다는 뜻이다.

"동대륙의 여명의 기둥이라 하면 모르는 이가 없다고 들었소. 난 코산 제1선봉장, 로메로라고 하오. 공자의 공로를 듣고 감명한 바,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지 않겠소?"

언뜻 겸손해 보이는 말투였으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로메오는 거구의 남자였다. 얼굴은 쿤칸의 산악인처럼 거칠고 사납다. 몸은 불곰처럼 거대하고 두터웠다. 저자가 선봉장 로메로, 그의 양옆에서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두 남자가 라피스, 라즐리인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둘은 일란성 쌍둥이였다. 똑같이 생겨서 가르마만 다르게 탄 게 우습다. 제리코는 둘을 코산의 천재라고 칭찬했었다. 어린 나이에 코산 일족의 선봉장이 되었으니 실력은 어느 정도 있겠지.

"굳이 싸워야겠소?"

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힘 낭비를 하긴 싫소."

물론 거짓말이다.

예상대로 로메오는 내 심기를 자극하고자 입을 놀렸다.

"공자를 무시하는 게 아니오. 하지만 어찌 눈으로 보지 않고 확신할 수 있겠소? 작은 소문이 대륙을 건너며 부풀어 올랐음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이오? 거북하게 생각하진 마셨으면 하오. 단지 사내답게 검을 몇 번 부딪혀 보겠다는 건데 낭비랄 게 있겠소?"

"정말 내가 싸웠으면 하오? 하, 당신들이 날 감당할 수 있겠소?"

"공자. 공자가 레인버그의 공자의 신분으로 있겠다면 기꺼이 손님 대접을 해 주겠소. 하지만 곧 등을 맡겨야 할 전우가 될지언대, 힘을 파악하는 게 서로 좋지 않겠소? 걱정 마시오. 다치진 않을 테니."

이쯤 하면 됐다 싶었다.

명목은 충분히 챙겼고, 난 싱글벙글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좋아. 귀찮으니까 세 명 다 덤벼."

선봉장이 도착하기 전, 제리코가 경고했다.

그들은 분명 내게 시비를 걸어올 거라고.

난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었다.

능글맞게 넘어가는 법을 안다고 말이다.

"공자?"

예상과 다른 상황에 제리코가 당황했다. 코산의 사냥꾼들은 선봉장의 편이었다. 내가 흡혈귀를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본 건 몇 명 없다. 아직 대부분의 코산인들은 날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기회에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한 명당 십 초면 떡을 칠 테니, 삽십 초 동안 내가 이기지 못하면 진 걸로 하지."

로메오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험상궂게 구겨졌다.

"흐흐. 역시 귀족의 값비싼 피가 흐르시는구려. 아니, 공작 저하는 태생이 농민이었으니, 공자의 오만한 피는 왕녀의 영향일지도 모르겠구려."

"오, 선넘네."

쌍둥이들도 가세했다.

"들었어? 십 초래."

"재밌는 사람이네."

"귀족을 때릴 기회지?"

"먼저 나설래? 라피스?"

"좋아. 라즐리."

난 가만히 서서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엄마의 조언은 확실했다. 코산 일족은 태어날 때부터 증오와 분노를 가지고 태어나니, 작은 자극에도 활활 타오른다고. 제리코가 검을 건넸으나 난 사양했다. 대신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싸울 거야, 말 거야?"

"너희는 뒤로 물러나 있어. 내가 먼저...."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으로 날아가는 화살보다 빨리 뛰쳐나가 로메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내공을 싣지 않아도 놈을 날려보내기엔 충분했다. 기습을 당한 로메로는 뒤로 날아가 여섯 번을 땅바닥에 굴렀다. 거구의 덩치답게 맷집도 뛰어나 곧바로 몸을 일으켰으나 이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턱을 가격했으니 지금 놈의 눈에는 세계가 빙글빙글 돌고 있을 테지.

"로메로!"

쌍둥이들은 동시에 외치고, 동시에 내게 덤벼들었다.

주먹이 양옆으로 쇄도한다. 허리를 숙여 피하자, 쌍둥이의 왼발과 오른발이 동시에 덤벼온다. 발차기를 피하자마자 쌍둥이들은 같은 동작으로 뒤돌려차기를 썼다. 어느 공격도 내 몸에 닿진 못했으나 마치 한 몸이 된 듯한 매끄러운 공격이었다. 과연 쌍둥이야? 어느 집안의 미친 쌍둥이들과는 다르구먼.

몸이 민첩하고 날래다. 아직 어리지만 수준은 청늑대 기사단의 부단장급은 된다. 제리코가 천재라고 부른 이유를 알겠다. 어쩌면 이 녀석들을 두고 마스터의 재질을 지녔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이익-!

쌍둥이들은 이를 악물고 덤볐다. 둘의 합격기는 현란하면서도 정확했다. 왼쪽에서 옆구리와 허벅지를 공격하면 오른쪽에서 방어가 허술한 발목과 머리를 공격해 왔다. 같은 실력이면 당해 낼 수 없다. 적어도 두 수는 높아야 대적할 만하다. 그러니, 내 상대는 되지 못했다. 난 각각 한 손을 사용해서 쌍둥이들을 제압했다. 속도의 차이가 명확했다. 녀석들이 아무리 잘 짜인 공격을 해도 모두 피하고 반격하면 그만이었다.

10초가 흐를 동안 많은 합이 오갔지만 되레 지친 건 쌍둥이다.

"하아, 하아, 왜 안 맞는 거야!"

"라즐리, 침착하게 가자. 좀 더 강하게...."

퍽-

난 다시 한번 궁신탄영의 묘리로 벼락같이 공격했다. 수법을 알아도 피할 수 없었다. 왼가르마를 탄 놈, 라즐리가 쓰러졌다. 로메로보다 맷집이 약한 녀석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감히 내 동생을!"

퍽-

남은 놈이 고함을 지르며 덤볐으나 역시 한 수를 당해 내지 못하고 같은 처지가 되었다. 난 쓰러진 세 명을 둘러보며 한 개의 손가락을 펼쳤다.

"아직 십 초 남았는데?"

쓰러져 끙끙대던 놈들 중 로메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응?"

난 그의 달라진 분위기에 눈썹을 찌푸렸다. 보인다.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의 격류가. 검붉은 기운이 몸에서 뿜어져 나와 두 팔을 감싼다. 살짝 당황했다. 로메로에게서 일어나는 변화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폭력교 사제 혹은 흡혈귀. 놈들처럼 그는 자신의 몸을 악마의 힘으로 변형시켰다. 두 팔은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곰보다 거대한 팔은 피부가 붉고 손톱은 칼날처럼 길었다. 난 흥미롭게 그의 변화를 관찰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코산의 '저주'인가.

악마를 오랫동안 사냥하여, 악마의 저주를 받은 코산.

걸시의 기묘한 체질인 무형의 그릇 또한 악마의 저주의 한 종류였다.

"후우, 후우."

로메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득이는 눈으로 날 노려봤다.

정신을 차린 쌍둥이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잠깐! 로메로 형! 무슨 짓이야?"

"아무리 화나도 그렇지! 그릇을 풀면 어떡해!"

로메로는 화가 나 이성을 잃은 게 아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쌍둥이들에게 말했다.

"멍청이들아. 공자는 강해. 우릴 압도하잖아!"

다혈질인 줄 알았더니 제법 '보는 눈'은 있는 자였다.

"건방 떨지 말고 너희도 빨리 풀어. 씨발! 선봉장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모를 보일 셈이냐?"

쌍둥이들은 로메로의 일갈에 흠칫 놀라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많은 코산 사냥꾼들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망 섞인 눈빛에 쌍둥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선봉장은 뜻 그대로 선봉에 서는 자들. 당하는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될 자들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선봉장의 각오를 지닌 것이다.

"젠장!"

"조금. 아니, 많이 아플 거야. 공자."

라즐리의 왼쪽 다리가 붉게 타오른다.

라피스의 오른쪽 다리에 서리가 맺힌다.

하하하-!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니스타가 내게 심어 놓은 엿 같은 버릇 중의 하나로.

위기와 상관없이 호승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괜스레 즐거워졌다.

다아!

달비가 내 의도를 눈치챘다.

난 혼일동화의 경지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세 명의 선봉장들을 향해 외쳤다.

"이건 대련이나 대련이 아니다. 미친놈이 고안한 실전 같은 싸움으로, 결과가 어떻든 무언가 깨닫는 게 있을 테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덤벼. 기꺼이 상대해 주마."

라니스타식 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세 명이 한데 엉켜 쓰러져 있다.

아-!

윽-!

아파-!

난 쓰러진 놈들 위에 걸터앉고 팔짱을 꼈다.

뺨에 묻은 핏물을 닦아 냈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졌다. 선봉장들."

로메로가 반발했다.

"뭐? 우릴 박살 낸 게 누구인데! 윽."

고함을 지르려다가 갈비뼈가 아픈지 신음을 내뱉는다.

중요한 전력이다. 병동 신세를 지게 할 순 없다.

다만, 라니스타에게 배운 기술들로 심한 격통을 유발하는 상처를 살짝 입혔을 뿐이다.

"30초가 지났잖아. 삼 분이나 걸렸네."

선봉장들은 어이가 없을 것이다.

3대1. 아마 자신감의 원천이었을 악마화. 그러고도 압도적으로 졌다.

그런데 30초 안에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 졌다고 말한다.

"당신들."

군인에게 분노는 불필요하다. 기사에겐 지휘관의 명령에 충실한 충성이 미덕이다. 하지만 스타폴 기사단에 필요한 건 충성심이 아니다. 응어리진 분노는 악마와 맞설 각오의 원동력이 되겠지.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게 인간의 신체를 강탈당한 그들처럼.

몸 일부가 악마처럼 변한 순간부터, 그들의 감정은 폭발하기 직전처럼 격렬했다.

만약 분노를 제대로 된 대상에게 풀지 못한다면 피에 미친 살인마가 될 게 뻔했다.

"만약 증오의 대상이 사라지면 어찌할 건가?"

내 질문에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냘 향한 분노로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피의 악마가 죽고 나면 당신들은 어찌할 거냐고 묻는 거야."

코산의 사냥꾼들은 평생 복수의 칼날을 품고 산다. 그들의 분노와 복수심은 대를 걸쳐도 사라지지 않았다. 난 그들을 족쇄처럼 묶은 증오심이야말로 악마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칼날이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지만.

만약 알 수 없게 된다면 칼날은 자신을 찌를 수도, 남을 해칠 수도 있겠지.

선봉장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그들은 피의 악마가 죽은 이후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듯 보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선봉장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악마가 죽어 증오가 사라지면 좋겠지만, 자네들도 알겠지. 자신의 칼날은 쉽게 무뎌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러니 날 도와. 내 옆에만 있으면 언제든지 증오가 퐁퐁 솟아날 테니까."

"무슨...."

"스카웃 제안이야. 피의 악마는 물론, 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를 쳐 죽일 거거든. 어때? 레인버그의 사냥꾼이 되는 건?"

첫 만남에 두들겨 맞고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일족의 숙적을 죽은 취급하며 그 뒤의 상황을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말한다면, 나라도 웬 미친놈인가 싶을 것이다. 선봉장들의 눈빛은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만약 피의 악마가 죽더라도 난 당신을 따르지 않소. 은검의 검주만이 우리가 따라갈 등대요."

그거면 충분했다.

작은 의문.

'만약 피의 악마가 죽는다면.'

그는 가정했다. 어쩌면 레인버그 공자가 악마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인간은 고뇌에 찬 동물이라.

작은 고민도 제 안에서 구르고 구르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뭐, 그러시던가요."

그들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거뒀다.

날 보는 코산의 사냥꾼들의 표정이 기묘했다.

레인버그와 코산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여명의 기둥이자 흡혈귀를 여럿 죽인 나였기에 코산인들을 내게 호감을 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타인, 외부인에 지나지 않았다. 제리코에게 일족들에게 내 제안을 퍼트려 달라고 했었으나 코산인들은 진심으로 여기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선봉장을 향한 내 제안을 그들 모두가 들었다.

이제 깨달았겠지.

공자의 제안이 진심이라는 걸.

* * *

자정에 은검의 검주가 베르텐베켄에서 출발했다는 급보가 도착했다.

일족의 수장이자 정신적인 지주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대밀림에 모여든 코산인들은 모두 검주를 만나기 위해 길목부터 마중에 나섰다. 얼마 후 은검의 검주가 언덕길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부터 풍기는 아우라가 엄청났다. 굳이 천안통으로 보지 않아도 될 정도다.

아직 해가 밝지 않았다. 하지만 검주와 가까워질수록 빛이 환했다. 어둠을 가르고 다가오는 그자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걸어 다니는 형광등이다. 그가 가진 힘은 개눈깔로 보았던 수많은 기운 중에서도 상당히 유난스러웠다. 은검의 힘일까. 어딘가 우샤스(천사 버전)와 닮은 듯하기도 해.

"…뭐야?"

가까워질수록 난 깨달았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잖아.

그의 상태는 마치.

우샤스에게 힘을 부여받은.

교황과 성직자들을 학살하던 '초인'이 된 나와 같았다.

난 살짝 헷갈렸다. 그는 우샤스의 졸개인가? 은검은 우샤스의 수많은 계략 중의 하나였던가? 아니, 진정하자. 우연의 일치로, 그의 힘이 우샤스의 힘과 닮았을지도 모르잖아.

…우연?

지랄이지.

그는 두 손으로 거대한 보자기를 짊어진 채 걸어왔다. 마땅히 표현할 게 없어서 보자기라고 했지, 집 한 채는 거뜬히 들어갈 엄청난 보자기였다. 보자기로 감싼 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피 냄새가 진동했다. 보자기에서 새어 나온 핏물이 길을 더럽혔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핏물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가 내뿜는 기운이 피를 태워 버렸다.

툭-!

은검의 검주가 도착하자 코산인들이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홀로 서 있는 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는 날 보며 웃음 지었다. 티 없이 맑은, 아이 같은 웃음이다. 검주의 나이는 생각보다 젊었다. 사십쯤 됐을까. 하지만 머리가 새하얗게 세고 주름이 많아 언뜻 보면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푸른 눈이었다.

쿵!

그는 짊어진 거대한 보자기를 내던졌다.

"감사절 선물일세, 하하하!"

검주는 보자기 주변의 남자에게 얼른 풀어 보라고 재촉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자기를 풀다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곤 기겁하며 뒤로 자빠졌다. 스르륵- 풀린 보자기가 열리고 검주의 선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06

보자기로 싼 물건은 흡혈귀의 머리였다.

수십 개의 머리. 머리카락이 엉겨붙어 마치 어부의 그물에 걸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흡혈귀 머리는 방금 죽인 듯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사냥꾼들도, 나도 깨달았다. 저건 '은검'으로 죽인 게 아니다. 목의 찢어진 상처와 부러진 뼈의 생김새는 소름 돋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뜯어 낸 거야. 손으로 머리와 목을 직접, 생닭의 목을 비틀 듯 비틀어서 뜯어 낸 상처다. 검주의 기운은 순수했다. 다른 감정 하나 섞이지 않고, 오로지 증오만으로 가득 찬 순수한 분노였다. 난 저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탄했다. 사이코패스가 이런 느낌일까?

"북부 거인의 벽에서부터 대밀림까지 내려오며 죽인 흡혈귀들이야. 놈들 대부분이 변질한 지 일 년도 안 된 애송이들이지."

은검의 검주는 다른 이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코산의 사냥꾼들이 흡혈귀 머리를 처리하는 동안 그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어째서지? 인간을 흡혈귀로 변질시킬 수 있는 놈이 어째서 지금까지 동족의 수를 늘리지 않았던 거지? 선대는 흡혈귀가 늘어날수록 놈의 힘이 약해지기에 그렇다고 했다. 난 처음부터 아니라고 확신했어. 봐라! 기어코 우리가 두려워하던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놈은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죽이지 못하면 몇 년 사이 왕국은 흡혈귀들의 나라가 될 거야."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코산인들은 굳은 얼굴로 검주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당장은 흡혈귀보다 급한 일이 있다. 늑대인간의 우두머리가 탄생했어. 경우에 따라선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사냥 장소는 파악했으니 선봉장들과 정예 사냥단은 날 따른다. 출발은 정오야. 준비해 둬."

그는 능숙하게 사냥꾼들에게 명령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느새 주변에는 선봉장과 검주, 나만 남게 되었다. 선봉장과 검주가 대화를 나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다. 그들은 제 입으로 졌다곤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패배했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검주는 풀이 죽은 선봉장의 상태를 눈치채고 아이처럼 웃었다.

"졌구나, 이놈들."

그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게 얘기했다.

"공자! 반갑소. 격하게 안아 주고 싶으나, 그전에 상황은 정리해야겠소. 우선 우릴 도와주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 보시오."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악마도 죽이고, 겸사겸사 은검도 빼앗으려고요."

"막말을!"

선봉장이 발끈했으나 노려보자 시선을 피했다.

은검의 검주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악수를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 보인다. 환한 빛을 내뿜는 그에게서 우샤스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난 티아고라는 이름을 지닌 벨텐의 나무꾼이오. 별 볼 일 없는 나무꾼이었으나 누이가 악마에게 죽고 복수하다 보니 어느새 은검이 내 손에 쥐여 있더군. 언제나 이 검은 내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렇다고 처음 본 이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소? 어디, 내게도 한 수 가르쳐 주지 않겠소?"

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눈빛이 올곧다. 그의 말은 진심이다.

"노인장께서 되려 제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검주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노인이라, 아직 그리 불릴 나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고맙소. 체면을 세워 주시는구려. 그럼, 진심으로 덤비겠소."

호승심.

라니스타는 너무 압도적이다.

솔가르 공작은 뱀 새끼다. 힘을 수단으로 여기는 자다.

그러나 저자는 다르다. 힘을 숨기지 않고 날 도발하듯 기운을 내뿜는다.

우웅-!

마을 어귀에 쌓아 놓은 여분의 은검들이 갑자기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일하러 간 사냥꾼들이 다시 모였다. 그들의 허리춤에 찬 은검들도 격하게 진동했다. 마치 고조되는 싸움에 기뻐하는 구경꾼들처럼 은검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는 허리춤에 맨 '손자루'를 뽑았다.

검날이 없다. 자루밖에 남지 않는 검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루를 손에 쥐자마자 반듯한 은색의 칼날이 생겨났다.

은검은 자루에 지나지 않았다.

칼날은 그였다.

"멋있는 검입니다."

난 장검보다 긴 검신에 끝이 뾰족한 날을 지닌 은검을 보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무기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나라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신화 속 명검은 저런 검을 뜻하는 거겠지. 소유자의 힘을 칼날 삼아 예기를 발하는 검이었다. 직접 보기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나 눈으로 보니 탐욕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곧 은검이고, 은검이 곧 그였다.

난 오싹함을 느끼며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게 마스터의 경지.

상대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

그의 검이 빛날수록 난 조바심을 느꼈다.

다아!

혼일동화의 경지를 펼쳤다.

달비의 힘을 받아들이자 푸른 망토가 어깨로부터 생겨나 펄럭였다.

이제 조급하지 않았다. 난 여유롭게 검을 들었다. 다가올 격렬한 전투를 기대했다. 깨달음이 있으랴, 사실 그런 건 좆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마스터의 검사와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뺨이 떨릴 정도로 즐거웠다.

그가 자세를 취했다.

양손으로 검자루를 쥐고 어깨 위로 높이 든 검.

투박한 자세였으나 풍기는 기운은 과히 일도양단의 기세.

산마저 가를 힘.

그에 맞서 난 검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검 끝이 땅바닥에 박혔다. 승천하는 용처럼 치솟는 쾌검으로 내가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검술 중의 하나였다. 힘과 힘의 대결, 승부는 단판.

검을 부딪치기 직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구경꾼들의 침 삼키는 소리만이 들려올 때였다.

"내가 졌소."

그가 검을 내려놓았다. 환하게 발하던 빛도 꺼졌다. 그의 기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뭐하는 겁니까? 전력으로 덤빈다며?"

난 곧바로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맥이 빠진다. 들끓던 근육과 터질 듯 두근대던 심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허무한 결말에 난 화를 냈으나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하. 신을 낳았다더니! 광오한 소문으로 생각했거늘 거짓이 아니었소. 결과를 아는데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내가 졌소. 검을 원하오? 가져가시오."

혹여 어떤 꿍꿍이라도 있을까 난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눈빛은 순수했고, 감정은 새하얗기만 했다. 천안통은 속일 수 없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역수로 쥐자 칼날이 사라졌다. 내게 은검의 손자루를 건네는 행동은 담담하기만 했다. 일족의 보검이자 강력한 무기를 건네는 데에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주는 머뭇거리는 날 보며 호탕하게 외쳤다.

"대신 막대한 의무를 짊어지게 될 것이오."

"…의무?"

"은십자의 검은 수백 년간 분노와 저항의 상징이었소. 이 검을 건넨다는 건 곧 코산의 명운을 공자에게 맡긴다는 뜻이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요. 피의 악마를 죽이는 것.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지."

선봉장들이 경악하며 그를 만류하지만 검주의 각오는 진심이었다.

"공자라면 악마를 죽일 수 있을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에 일족의 보물을 건넨다는 겁니까? 진심이세요?"

검주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물론 배가 아프오. 건네고 싶지 않소. 하지만 검이 그댈 택했는데 어찌하란 말이오?"

검주는 개구장이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응시했다.

그러다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하다는 듯 검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애초에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놈이었지. 아시오? 은십자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야. 검이 주인을 택하지. 공자와 대적하고자 할 때, 이 건방진 검이 힘을 끌어내지는 못할망정 되레 날 말렸소. 오히려 공자에게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

검주의 말과 행동은 검을 잡동사니 취급했으나 표정에서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마땅한 자가 없어서 내가 들고 있었을 뿐이오. 날 검집으로 여기는 검 따위를 믿고 휘두르겠소? 이놈의 목적은 단 하나요. 피의 악마의 멸살.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난 놈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지. 전대 검주들도 마찬가지오. 수백 년간 놈의 소망을 이루어 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 그러니 공자의 검이 되고 싶어 하는 놈이 미워도 이해가 가오. 코산에겐 더는 희망이 없다고 하는 거지. 그리고, 공자라면 악마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거야. 하하. 어쩔 수 있나, 검이 떠난다는데 검집이 어떻게 말리겠소?"

그는 확실히 상식을 넘어선 자였다.

망설이던 난 바닥에 버려진 은검의 손자루를 쥐었다.

그 순간, 난 깨달았다.

이 검.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그가 소리쳤다.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야, 뭔들 못하겠소?"

난 손에 쥔 은검을 내려다봤다.

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순수한 빛.

무엇 하나 섞이지 않는.

하지만 그래서 불길한.

우샤스와 같다.

"우리의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

난 은검을 도로 검주에게 건넸다.

"때가 올 때까지 당신이 들고 있어 주십시오."

"허, 공자마저 날 검집 취급하는군. 좋소. 기꺼이 그리하리다."

아직 다룰 수 없는 검이다.

불가해한 힘이 날 해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지 않는 이상은.

혹은 불길함마저 감수하고 사용해야 할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은.

은검을 손에 쥐지 않고자 했다.

* * *

은검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사냥꾼 사이로 퍼져 나갔다. 분위기가 시끄러워졌으나 정작 검주는 태평스러웠다. 난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식사를 같이했다. 그는 정오가 될 때까지 고기를 쌓아 두고 먹었다. 티아고라 불리는 사내가 어떻게 나무꾼에서 은검의 검주가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은둔공자에서 어떻게 여명의 기둥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우샤스를 아십니까?"

가장 궁금한 질문은 마지막으로 미루어 뒀다.

정오가 되어 출발을 서두를 때, 난 그에게 질문했다.

넌지시 질문하자 티아고는 입안 가득한 고기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다시 한번 질문했다.

"아지비카의 성녀, 새벽의 현신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오오. 그래, 당연히 알지. 공자의 누님이 아니오?"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요."

"하하. 그럼 누님을 달리 어찌 부른단 말이오. 유명하지. 사기꾼이 판치는 종교계에서 진정한 성녀님이지 않소. 헌데 그건 왜 물어보시오?"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멀리서 몇 번 본 적은 있으나 아는 사이는 아니오."

"오래전 기억까지 모두 떠올려 보십시오. 하찮은 거라도 좋습니다. 날개 달린 여자를 만났다든가 백골의 마녀와 마주쳤다든가 혹은 그와 준하는 신비롭고 역겨운...."

"역겨운 건 수없이 보았으나 공자가 말한 것들은 보지 못했소. 흐음, 공자의 태도가 이상하구려. 두려움이라곤 태어날 때부터 뱃속에 놓고 온 자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몹시 긴장한 듯하오. 성녀와 관련된 일이오?"

"…비슷합니다. 검주와 은검에게서 느껴지는 '힘' 말입니다. 성녀의 힘과 너무 닮아 있어요."

티아고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입안의 고기를 모두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서야 말을 이어 나갔다.

"은검과 아지비카의 성녀의 힘이 비슷하다라? 흐음, 일리가 있소. 정말 공녀가 아지비카 삼신의 힘을 계승했다면 말이지."

"아지비카의 힘? 아지비카교가 은검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은검의 기원 때문이오. 사실 은십자검과 코산 일족은 전혀 연관이 없다오. 코산이 밀림의 제사장 가문인 건 아실 것이오."

"태양과 달을 모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아직 대밀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때, 그들은 모두 태양과 달을 섬겼지. 코산은 강력한 권력을 지닌 제사장이었다오. 수백 년 전, 당시에도 아지비카는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종교였지. 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땐 모시는 신이 다르더라도 모든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했소. 우리에게도 존중의 의미로 '은십자'의 검을 선물했다고 들었소. 즉, 은십자의 검은 사실 아지비카의 보물이니 이 신묘한 힘은 엄밀히 말하면 아지비카가 근원이지."

"…그렇군요."

"안색이 나쁘오. 괜찮소, 공자?"

"괜찮습니다. 잠시, 세수 좀 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수대가 아닌 침실로 뛰어갔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생각해 보자.

그게, 아지비카의 힘이, 우샤스에게 계승된 거라고?

아닐 거야.

우샤스의 힘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힘.

전생에서 그녀는 희대의 마녀, 인류를 분열시킨, 인류의 가장 큰 적.

그 힘이 은검과 닮았고, 은검의 근본이 아지비카에 있다면.

우샤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난 깐따삐아의 마법사라고 거짓말했다.

우샤스는 자신이 천사라고 했다.

처음부터 거짓말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낮춘 걸지도 모른다.

다아?

걱정하는 달비를 보며 생각했다.

달의 신도 있는데.

다른 신도 없을까.

107

'레인버그 공자는 늑대를 무서워한다.'

이런 소문이 사냥꾼의 막사에서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늑대인간의 우두머리가 나타났다던 대밀림의 깊은 정글, 흔적을 쫓으며 움직인 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늑대인간을 여럿 사냥했다.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나 악마의 힘을 받아 악마가 된 존재들이다. 크게 위협될 건 없었다. 검주와 선봉장들에겐 늑대인간은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의 전투 모두 뒤에서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했다. 그러니 늑대를 무서워한다는 소문이 도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대밀림에 들어온 이후부터 느껴지는 이질감과 불쾌함에 난 몸을 움직이기 싫었다. 그들을 따라나섰으나 무언가 내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도 발길을 잡는다. 대밀림에 흡혈귀들이 몰린다며? 왜 늑대인간밖에 없지? 이곳에 흡혈귀들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늑대인간과 흡혈귀는 공생 관계라고 들었다. 먹잇감이 부족한 대밀림에 왜 늑대인간이 득실거리는 거지? 검주에게 말했으나 그는 어차피 늑대인간도 소탕해야 할 악마라며 사냥에만 몰두하고자 했다.

나는 감을 믿었다. 그리고 믿음엔 확실한 바탕이 있다.

'득의 성물.'

지금도 이해할 수 없긴 매한가지나 여러 사건으로 인해 난 확실히 성물이 가지는 위력을 인정했다. 멜리사가 말하길, 어느 상황에서나 득을 볼 수 있는 힘이라고 하였다. 전설적인 대마법사 현현마제가 평생에 걸쳐 얻고자 했던 성물이며, 메타비아의 탄생 신화, 호메로 유적, 사마하의 파라오 등 수천 년 전의 이야기 속에서도 '득'의 성물로 추정되는 유물이 있었다. 추상적인 힘이라서 과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밀림에서 늑대인간을 사냥하는 게 내게 아무런 이득이 없음을 난 깨닫고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다.

지금까진 '깨달음'과 '정진'이라는 명목으로 흡혈귀들을 사냥해 왔다. 몇 주간이나. 하지만 결국 아무런 '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챗바퀴를 도는 햄스터처럼 의미 없는 짓을 그만둘 때였다. 악마를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애써 무시하겠는가?

그날 밤.

검주의 막사를 찾은 난 은십자의 검을 돌려받았다.

그는 갑자기 변한 내 태도에 당황했으나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다. 홀로 떠난다는 얘기도 안 했다.

쓰던 은검을 검주에게 주고 은십자의 검을 허리춤에 찼다. 손자루만 덜렁 매단 탓에 폼은 나지 않았다. 젠장, 아무리 우샤스의 힘을 풍기는 불길한 검이라도, 당장 내게 필요한 무기라는 건 확실했다.

막사로 돌아온 난 곧바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여우의 마법이 걸린 물건이다. 이번엔 멜카란에서처럼 무시할 수 없을 거야. 난 멜리사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여우가 은혜를 잘 갚는다고 하지 않던가? 멜리사는 빚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내가 실험 대상이 되어 줄 때마다 따박따박 보상을 지급해 줬다. 그리고 현재 멜리사는 내게 빚이 있다.

…제발 빚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종이에 글을 쓴 후 촛불에 태웠다.

검은 연기가 일렁이다가 도깨비불처럼 푸르게 타오르더니 이내 사라진다.

[아직 생일선물 안 줬잖아. 지금 줘, 누나.]

저번엔 대충 넘어갔지만 멜리사에게 받을 게 남았다.

멜리사는 생일 선물로 재료를 모아오면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난 멜카란에서의 사건 이후 멜리사가 내뱉은 말이다.

즉, 정말 생일 선물을 줄 생각이었으면 무기로 퉁 쳐선 안 된다는 거다.

의자에 앉아 발만 까닥거릴 때였다.

찰칵-!

간이 막사에서 들려올 수 없는.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왔구나.

난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꾸앙.]

"…누구세요?"

* * *

베르텐베켄 북쪽의 작은 산, 수풀에 가려진 언덕 위에 서서 난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산 어귀에 모여 있는, 적어도 수백 마리가 달하는 흡혈귀. 짐승처럼 밤에도 훤히 앞을 볼 수 있는 흡혈귀에겐 횃불 따윈 필요치 않았다. 놈들은 은밀하고 조용히, 하지만 사납고 열망적인 기를 내뿜으며 '사냥'을 기다리고 있었다. 흡혈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검은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 그곳은 짙은 안개로 가려진 동굴. 동굴 안에선 내가 있는 곳까지 풍길 정도로 역겨운 악취가 났다.

"정말 찾았네."

산은 안개로 자욱했다. 자연적인 안개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악마의 마술이다. 안개에 휩쓸리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천안통이 아니었다면 웅크린 흡혈귀 군대를 보지 못했겠지. 아무리 뛰어난 추적술을 지닌 코산이라도 사이한 안개의 덫은 피하지 못했을 거야.

[핫핫!]

나도 녀석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도달 못했을 것이다.

[내 신통력이 어떠냐! 이 몸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존재는 없느니라! 핫! 핫! 핫!]

웃음소리가 특이한 저놈은 몇 시간 전 내 막사를 찾아온 '요괴'였다. 자기 입으로 멜리사의 수족이자 28성 가장 뛰어난 추적꾼이라고 했는데 겉보기엔 그냥 귀여운 봉제인형 같았다. 녀석의 이름은 위토치雉. 뀡과 닮은 외모로 초록색 깃털에 얼굴 깃털만 빨간 게 몹시 귀엽게 생겼다. 하지만 요괴는 요괴인지라 짐승인데도 말을 할 수 있었고, '문'을 통해 날 여기까지 안내했다.

"고마워, 치."

[흥! 감사 인사는 괴왕께 해! 큼큼, 괴왕께서 전하라 하셨느니라!]

치는 부리로 제 날갯죽지 깃털을 쪼더니 깃털 한 개를 뽑아서 내게 건넸다. 이상한 녀석, 깃털을 받기 위해 손을 뻗던 그때였다.

개간네!

달비가 치를 향해 덤벼들었다.

달비는 발굽으로 치의 머리를 때리고 깃털을 왕왕 씹었다.

분노에 휩싸인 달비는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처럼 매서웠다.

[아이고! 이게 뭐야!]

놀란 치가 푸드덕푸드덕 날개를 퍼덕이며 발버둥쳤다. 난 한숨을 내쉬며 달비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녀석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끝까지 입에 문 깃털을 놓지 않아 치의 윤기 나는 깃털이 한 움큼 빠지고 말았다.

[이놈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치는 버럭 화를 내며 노란 부리를 벌렸다. 하지만 달비와 눈이 마주치자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뒤로 슬금슬금 피했다.

[흠흠, 아무튼 깃털에 전언을 담았으니 읽어 보아라. 나는 간다! 꼬끼오!]

"뭐야."

치가 힘차게 울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멜리사의 부하라고? 이상한 놈이다. 꼬끼오? 뀡이 아니라 닭이었나?

퉷-!

개간네.

포악한(귀여운) 얼굴의 달비는 깃털을 뱉더니 다시 내 품으로 들어왔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치의 깃털을 불태웠다.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썩을 놈, 생일 선물이라고? 착각하지 마. 감히 내게 선물을 요구해? 흥, 넌 내 실험물일 뿐이다. 동생이라 불러줬더니 정말 친한 줄 아는가 본데, 넌 그냥 흥미로운 생쥐일 뿐이라고. 난 네놈이 편할 때마다 부르는 도우미가 아니야. 망할 녀석! 그렇다고 무시하면 넌 날 욕하겠지. 지랄하겠지. 그건 또 짜증 나. 왜 선물을 주고 지랄이야! 아무튼, 네놈이 내가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그럼 안 되지. 이걸로 청산이야. 그깟 꽃 한 송이 줬다고 감히....]

"궁시렁 궁시렁."

난 무시하고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허리춤에 찬 은십자의 검이 아까부터 계속 떨고 있다.

산어귀에 모인 흡혈귀들은 수백 마리.

난 눈썹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흡혈귀는 이기적이라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며?

저놈들, 마치 군대처럼 조직되어 있잖아.

"미끼였군."

대밀림은 덫이자 미끼였다. 코산 일족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 흡혈귀들이 모이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늑대인간 또한 피의 악마의 종복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작 놈들의 목적은 베르텐베켄이었다. 놈들은 '사냥'이 아니라 '전쟁'을 원했다. 베르텐베켄, 도시의 근처에 이리 많은 흡혈귀들이 조직화하여 집결했다. 놈들은 밤에 숨어 인간을 사냥하는 게 아닌, 모습을 드러내어 인간 왕국을 정복하길 원했다.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밤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쿤칸에서 일어난 대전쟁이 지금, 서대륙 왕국에 벌어지고 있다.

난 안개로 둘러싸인 동굴을 바라봤다.

불길함이 응축되어 형상화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저 너머에 존재한다.

피의 악마.

흡혈귀들의 어머니가.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늦진 않았으나 이른 것도 아니다. 놈들은 이미 출정 준비를 끝마쳤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베르텐베켄은 순식간에 피로 강을 이루게 될 터였다.

"고난."

난 은십자의 자루를 손에 쥐었다.

칼날이 없다.

"역경."

라니스타는 내게 13검주를 만나, 4개의 검을 빼앗으라고 했다.

그가 강조한 건 깨달음과 정진.

서서히 은빛 칼날이 돋아난다.

"또라이."

무엇이 깨달음이고 무엇을 정진하란 말인가?

단순히.

흡혈귀를 죽이는 것? 은검의 주인이 되는 것? 피의 악마를 죽여 코산의 복수를 돕는 것?

아니다.

결국 귀결되는 건 하나다.

라니스타가 말한 깨달음이란.

위이잉-!

은빛 칼날이 솟구쳤다. 기괴한 검날이다. 내 키만큼 긴 칼날, 검의 가드 또한 길게 뻗어 십자 형태처럼 되었다. 은검의 검주는 이 검을 십자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쥐었을 땐 십자의 형태가 아니었다. 이젠 십자검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다. 이 모습이 진정,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은빛의 십자검이었다.

검은 기뻐하고 있다.

내 미친 짓에.

"개새끼들아!"

언덕에서 뛰쳐나와 산어귀로 뛰어갔다.

고함을 지르며 쇄도하니 흡혈귀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고 섬뜩한 검은 눈으로 범인을 찾는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갔다. 그래, 깨달음이 별거냐. 고난과 역경의 극복은 순화된 표현이다. 결국 미친 짓이다. 신화 속 영웅이나 강자들은 하나같이 또라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단지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상인이니까.

"하하하! 과연 보검이구나!"

십자검은 보통의 무기가 아니었다. 단지 잘 베고, 부러지지 않는다고 하여 '13검' 중 하나로 불리지는 않는다. 은십자검은 내 미친 짓에 기뻐하며 빛을 뿜었다. 빛은 우샤스의 축복 혹은 저주처럼 내게 힘을 선사했다. 근육이 팽팽해지고 피가 솟아나는 게 귀에 들릴 정도다. 씨발! 역시 저주의 검이잖아! 끝나면 난 뒤질 만큼 아프겠지만, 그 정도 대가는 상관없다.

이제 수백 마리의 흡혈귀들이 일어나 날 대적했다.

내 포효에 움찔하던 놈들은,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이내 곧 내가 혼자인 걸 깨닫고 비웃었다. 놈들에게 난 독사굴에 걸어 들어간 무모한 병신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난 존나 센 울버린이다. 뱀독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 짐승계의 미친놈, 사자에게도 덤벼드는 족제비과의 울버린이라는 거다.

"뒤져!"

맞서는 흡혈귀.

세 명을 일격에 베었다.

그리고 은십자검을 휘두르고 휘둘러, 순식간에 열 명의 흡혈귀를 죽였다.

"하아, 하아. 거참."

파괴력은 굉장했다. 흡혈귀는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재생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십자의 검이 빛을 발할수록 난 빨리 지쳤다. 마치 내 생명력을 대가로 힘을 주는 듯했다.

슈우욱-!

비명을 지르는 흡혈귀들 뒤로, 네 개의 신형이 뛰어왔다.

막대한 악마의 힘이 느껴진다. 저놈들이 밤의 귀족. 과연, 남작은 좆밥이었구나.

"덤벼."

평소의 나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아직 수백 마리의 흡혈귀가 남았다. 밤의 귀족도 무시 못할 적이다. 동굴 너머엔 피의 악마가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분명, 이건 목숨을 위협하는 역경이다.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난 거침없이 은십자 검을 쥐고 무공의 자세를 취했다.

역경을 극복하였을 때.

난 성장할 거야.

이게 바로 깨달음.

당신이 말한 게 이런 거죠? 미친놈의 선두주자, 라니스타 스승님.

찰칵.

고조되는 분위기.

터질 듯한 심장.

서늘한 등골.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문 여는 소리.

[아차차, 깜빡했지 뭐야! 남방장님이 도움을 주신다네? 그럼, 꼬끼오!]

108

분위기를 깬 건 치의 목소리였다.

난 추켜든 검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녀석이 내게 윙크를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자 흡혈귀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려오던 밤의 귀족들과 흡혈귀들도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저것'을 깨닫고 위를 올려다본다.

밤하늘에 해가 떴다.

아니, 해처럼 밝은 무언가다.

먹구름이 불길로 물든다. 그것이 서서히 내려온다. 나무의 잎들에 불이 붙는다. 초목이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몸이 불타는 것 같다. 끌어올린 내공을 모두 호신강기로 펼쳐야 했다.

끄아아악-!

흡혈귀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놈들의 저주받은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변 일대가 순식간에 화형장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건, 치솟는 불길을 휘두른 거대한 새였다. 천안통은 스카우터의 기능도 겸한다. 대충 내재된 기운을 파악하고 강자를 확인할 수 있다. 전생에선 무지하기에 깨닫지 못했으나, 내 경지가 높아질수록 강자를 구별하기 편했다. 아직 쌍둥이의 경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수준의 적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난 저것의 등장에 몹시 당황했다.

감히 볼 수 없다.

아무리 보아도 태양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는 단지 태양처럼 고고하게 떠서 날갯짓할 뿐이었다.

그러나 날개가 불러온 열풍은 산을 한순간에 불태우고, 무수한 재가 휘날려 땅을 더럽혔다. 소각장에 들어온 것 같다. 저 강력한 열원은 흡혈귀뿐만 아니라 모든 걸 불태우려고 하는 듯 보였다. 흡혈귀와 밤의 귀족은 얼룩에 지나지 않았다. 머리가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고? 작열하는 불길이 뼈마저 한순간에 태워 버리는데 버틸 리가 있나.

개간네에!

난 달비와 가진 내공으로 열기를 버틸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산이 녹아내리는 듯한 광경은 몹시 공포스러웠다. 불타는 거조가 사라진 건, 흡혈귀를 모두 잿더미로 만든 후였다. 고약한 악취, 난 코를 막고 피부에 달라붙은 잿가루를 털어 내며 주변을 돌아봤다.

수백 흡혈귀.

전멸.

산.

마치 사구처럼 변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음.

"아니, 씨. 너무 과하잖아."

멜리사식 도움.

난 코를 킁 풀었다. 콧물에 재가 섞여 검었다.

"하."

펼쳐진 참극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미쳤다는 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멜리사도 대단한 미친년이었지.

불길은 꺼졌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사람은 피의 악마가 친 안개로 없다고 쳐도, 산 자체를 불태워 황무지로 만들었다. 이 산은 지금 당장 씨앗을 심어도 몇십 년간 재활할 수 없을 지경이다.

개간네에!

달비가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몹시 원통한 울음소리였다.

"선물 한번 화끈하네."

이제 남은 건 단 한 마리였다.

부서진 동굴에선 여전히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 * *

동굴에서 걸어나오는 자가 있다.

창백한 피부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붉은 장발, 오뚝한 콧날과 짙은 눈썹. 인상은 날카로웠으나 잘생긴 축에 속했다. 놈은 붉은색 코트를 걸치고 검은 구두를 신었으며, 귀걸이를 하고 하체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서쪽 귀족들의 화려한 차림새를 한 놈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자네가 저지른 짓인가?"

흡혈귀 수백 마리가 타죽었으나 그는 불쾌한 기색만 내비칠 뿐이었다. 난 가만히 서서 놈을 응시했다. 녹아내린 피부, 짚불처럼 푸석한 머리카락, 뭉개진 코와 흉측한 눈매, 화려한 복장으로 감추려고 해도 천안통은 속일 수 없다.

"왜."

난 놈에게 질문했다.

"깝치는 거냐?"

"으음?"

"몇 년 전부터 왱왱거리는 모기 새끼들이 극성이라더군. 왜? 뭐가 네놈들을 자극한 거지?"

제리코는 흡혈귀들이 본격적으로 수가 불어난 시기를 5년 전쯤이라고 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지랄 맞다. 5년 전은 우리 쌍둥이들이 빌어먹을 전생을 떠올렸을 때였다. 비단 흡혈귀뿐만이 아니다. 대전쟁 이후 잠잠하던 '악마'의 활동은 몇 년 전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들이 원인이다.

내 질문에 놈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내게 되묻는다.

"그게 자네가 듣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인가?"

"뭐?"

놈은 제 딴에는 우아하게, 사교장의 귀족들처럼 손짓하며 얘기했다.

"난 이야기를 좋아하네. 단편적인 죽음은 수백 년 동안 너무 많이 겪었어. 사람을 죽이는 건 돼지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세. 하지만 이야기가 첨가되면 맛이 풍부해지지. 난 들려주는 것도, 듣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네. 먹히기 전에 울부짖는 아이의 이야기, 죽어 가는 어미에게 들려주는 먹힌 자식의 이야기, 아! 사랑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네. 창백한 연인을 위한 고백은 입맛을 돌게 하는 훌륭한 가니쉬지."

그는 나르니스트 환자였다. 연극을 하듯 풍부한 몸짓과 억양으로 말을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흉측한 괴물의 발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장 목과 머리를 분리하고 싶었으나 대답은 들어야 했다. 난 대꾸 없이 가만히 서서 그의 장단에 어울렸다. 제 이야기를 주절주절 내뱉던 놈은 문득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아아! 그날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다. 계시가 있었으니, 곧 피의 축제가 열리리라!"

"계시? 어떤 새끼가 그리 말하디?"

"…무례하군. 이야기는 하나다."

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검붉은 기운이 놈의 몸에서 솟구친다.

"거사를 망쳤으니 한 번에 죽이진 않겠다. 열흘에 걸쳐 피를 마시고, 삼 일에 걸쳐 살점을 먹으리라."

난 놈과 마주한 순간부터 강렬한 의문에 휩싸였다. 그래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저자가 정말 피의 악마인가? 혹시 악마의 꼭두각시 혹은 미끼에 불과하지 않을까? 저자가 수백 년간 악몽에 숨어 공포로 군림하던 악마란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 허무하잖아.

카악-!

송곳니를 드러내며 쇄도하는 놈.

순식간에 내게 달려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른다.

흡혈귀의 왕이라, 과연 다른 흡혈귀와 격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 봤자 흡혈귀 수준이다.

오히려 은검의 검주에게서 느낀 힘이 훨씬 강했어.

사각-

놈은 반응도 하지 못했다.

난 은십자의 검을 휘둘러 놈을 동강 냈다. 허리가 잘린 놈은 상하체가 완전히 분리됐다. 하지만 예상대로 피는 흘리지 않았다. 쉽게 죽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난 곧바로 은십자검을 수차례 휘둘러 놈을 잘게 조각냈다. 목을 분리하고 팔을 도려냈으며 몸통은 난잡하게 갈아 버렸다. 땅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브러진 놈의 잔해들, 토막 난 놈은 도무지 살아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나.

놈의 몸은 곧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다시 하나로 뭉치며 인간의 형상이 되어 갔다.

"어리석...!"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소리 지르길래 다시 달려가서 벴다.

놈은 약했다. 내가 상대한 어떤 악마들보다도.

제 몸이 잘게 조각날 동안 놈은 반격조차 못했다.

스르르-

안개화.

그리고 재생.

"저급한 인간 주제… 컥!"

토막.

재생.

"감히 밤의 왕… 큭!"

죽고 살아나고.

"무식한 놈이...!"

"쓰레기 같은...!"

"네놈의 가족을...."

여섯 번 죽였을 때 난 검을 멈췄다.

"가족을 뭐?"

몸을 웅크리고 방어자세를 취하던 놈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족을 모두 몰살시켜...."

"할 수 있으면 해 봐. 제발."

다시 토막 쳤다.

난 놈의 기이한 '재생'의 한계를 알고 싶었다.

온몸을 토막 냈다. 아무리 악마의 힘이라고 해도 죽고 살아남을 반복하다 보면 끝에 다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수십 번을 반복하여 놈이 절규 어린 비명을 내지를 때 난 깨달았다.

"크아아악! 제발, 제발! 그, 그만!"

"징그럽네 진짜."

은십자의 검을 휘두르고, 혼일동화의 경지에서 달비의 힘도 사용하고, 운석도 떨어트리고, 악마를 멸하는 공의 힘을 방출 마법으로 직격도 시켜 봤으나.

놈은 끊임없이 재생했다.

내가 공격을 멈추자 놈은 황급히 달아났다.

도망치는 놈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며 이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십 번이나 죽다 살아난 놈이지만 주둥이는 살아 있었다.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곧 축제가 열리면 너 또한 먹잇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놈이 사라진다. 피보라를 일으키며 붉은 안개로 흩어진다.

붉은 안개는 밤하늘에 퍼져 나가 점점 옅어졌다.

그동안 코산 일족은 피의 악마를 죽이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이나. 기회를 잡아도 놓치기 일쑤였다. 피의 악마가 강해서가 아니다. 코산 일족이 마탑의 던전까지 원했던 이유, 놈은 지금처럼 위기에 빠지면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다.

난 천천히 허공을 둘러봤다.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뱀의 악마처럼 인간의 눈에는 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여유롭게 주변을 관찰했다.

확신했다. 놈이 모습을 숨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나는 사명감조차 느꼈다.

"꼭꼭 숨어라."

망설임 없이 또박또박 정확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당황하겠지.

"머리카락."

아무것도 없는 허공.

밤의 찬 공기만이 있는.

기감으로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보다 뛰어난 마스터가 와도 놈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눈깔은 추상의 영역, 죄악과 감정조차 본다.

앞에 섰다.

놈은 요지부동.

얼굴은 이미 경악에 찼으나 '혹시나' 싶은 거겠지.

수백 년 동안 볼 수 있는 존재가 없었을 테니.

"보일라."

난 즉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딜 도망가?"

그리고 놈의 장발 머리채를 낚아챘다. 내 손이 닿자마자 놈은 형태가 드러났다. 두 손을 휘두르며 저항하지만 난 우악스러운 손길로 머리채를 잡고 바닥의 돌부리에 처박았다.

퍽-!

만족스러웠다.

반쪽만 남은 얼굴에도 확실히 서려 있었다.

경악과 절망이.

"어째서?"

"잘 보인다, 새끼야."

상처가 재생됐으나 놈은 도망가지 않았다.

손발을 덜덜 떤다. 눈빛은 경악에 차 있다.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놈은 숨을 헐떡이며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대인! 부디,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놈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간청했다. 난 갑자기 변한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오만한 놈이라서 끝까지 저항할 줄 알았는데, 저 비굴한 태도는 뭔가?

"뭐?"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공자, 여명의 기둥! 찬란한 달의 아이!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놓아만 주십시오. 다신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도 잡아먹지 않을 테니...."

당연히 거짓말이란 걸 안다. 굳이 고의 눈으로 간파하지 않아도 살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뱉어 내는 비열한 말이다. 난 살짝 어이가 가출할 뻔했다. 이 미친놈은 악마 주제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과연 놈은 내게 살려 달라고 비는 게 통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공자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게도, 제게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부디 가련히 여겨 주셔서...."

"사람 잡아먹는 놈이 뭔 사정?"

구구절절 설명하는 놈.

자신은 수백 년 전, 대밀림 제사장 가문의 노예였고, 금을 캐다 우연히 악마를 만났고, 악마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후회하고 어쩔 수 없었지만, 공자를 만나 정신을 차렸으니 앞으로 인간답게 살겠다니 뭐니 궁시렁궁시렁.

뭐, 개소리다.

난 울고불고 질질 짜는 놈에게 진심으로 경멸과 혐오감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껏 상대했던 악마들은 날 두렵게라도 했지, 놈은 그저 찌질이잖아.

"다행이야."

만약 코산 사람들이 지금 피의 악마의 모습을 봤다면 화병으로 몸져누웠을 것이다.

수백 년간 사냥하고 사냥당하고, 가족과 친구를 잃고 삶마저 증오에 빼앗긴.

비참한 운명을 선사했던 장본인인 피의 악마가 사실은 눈물 콧물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쪼다라니.

"좋아."

"공자?"

"고통스럽게 죽여 줄게."

놈이 모습을 감추기 위해 흐릿해질 때, 나는 놈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아주 작고 미약하여 쉽게 간파할 수는 없지만 놈이 토막 나 재생을 시도하면 이번엔 확실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놈의 불가사의한 생명력의 '근본'이겠지.

은십자검을 휘두르자 놈이 발악했으나 실력 차이가 명확했다.

저항조차 못하며 사지가 잘려 나가는 놈.

재생하기 위해 안개로 변한 순간, 난 놈의 몸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난 빛나는 무언가를 은십자검으로 찔렀다.

흐읍!

하지만 간발의 차로 회복된 놈의 살점과 두꺼운 갈비뼈가 검을 막아 냈다. 붉은빛은 다시 사라졌다. 놈은 이제 경악을 넘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날 노려봤다. 행동이 솔직하잖아. 역시 놈의 약점이구나.

109

"야이 씹새끼야 내가 누군 줄 알고 씨발! 살려 달라고 했잖아!"

우아한 척, 고상한 척하던 놈이 시정잡배 말투로 욕을 내뱉었다.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오만함은 쉽게 씻어 낼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비는데 살려 줘도 되잖아! 얼씬도 안 한다고! 왜 날 못 믿냐고! 쓰레기야!"

목숨을 구걸하는 약자의 입장에서 적반하장으로 욕을 하고 날 못된 놈으로 몰았다. 놈의 정신은 이미 무너진 것 같다. 기이한 힘으로 반복해서 재생하지만 고통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다. 난 놈이 상처를 입을 때마다 격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확인했다. 벌써 열 번 넘게 토막 났다가 재생된 놈이다. 이제 끝을 낼 때가 왔다.

"이익-! 놔라, 미천한 인간아!"

다시 안개로 변해 도망치려는 놈을 넘어트렸다. 그리고 세찬 빛을 내뿜는 은십자검을 놈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눈이 쓰릴 만큼 힘을 준 채로 놈을 응시했다.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붉은빛, 놈의 몸속을 빠르게 이동하는 무언가. 놈이 가진 힘의 근본.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하나 내 눈은 놓치지 않고 붉은빛을 따라갔다.

쉬익-!

벼락같은 출수로 검을 박아넣었다.

"윽!"

심장이 꿰뚫렸다.

하지만 붉은빛은 놓쳤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거뒀다. 놈이 벌벌 떨며 다시 비굴한 자세로 목숨을 구걸한다. 주둥이를 잘라 내자 조용해졌다. 검 끝은 확실히 붉은빛으로 향했다. 직격했었을 터였다. 하지만 찌르기 직전, 난 문득 불쾌함을 느껴 힘을 풀고 말았다. 빗나간 검, 날 멈추게 한 건 나의 '직감'. 저걸 부수면 안 돼. 내게 '득'될 게 없어. 대신에 놈의 몸에서 끄집어내자. 저 불길한 붉은빛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내겐 이득이 될 것이다.

놈은 다시 한번 재생되어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다.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며 사형장의 죄수처럼 절망 어린 얼굴이다.

난 다시 은십자검을 들어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야 했다. 말벌보다 빨리 움직이는 붉은빛을 한순간에 드러내기 위해선 의사의 수술 집도처럼 정확함과 섬세함이 필요했다.

"하아."

숨을 내쉬고, 참았다.

부동의 자세, 움직이는 건 두 팔뿐.

마침내 기와 체가 일치할 때, 난 검을 휘두르려고 하였으나.

크하하하-!

놈의 시끄러운 웃음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울고불고 지랄하던 놈이 이젠 미친놈처럼 웃는다. 난 눈썹을 찌푸리며 놈에게 말했다.

"드디어 돌았구나."

놈의 얼굴을 확인한 난 긴장하며 다가올 수단을 대비했다.

겁에 질린 얼굴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씨발. 넌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냐?"

"넌 도축 당하기 전이고, 도축 칼은 내가 쥐고 있는데?"

"큭큭. 구렁텅이에 빠진 건 네놈이나 나나 똑같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구나."

놈이 발악하며 소리 질렀다.

"멍청한 놈! 내 피는 악마의 성수이니라! 한 방울만으로 사람을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만드는데 넌 온몸이 흠뻑 젖었구나. 날 갈가리 찢으며 기뻐했느냐? 이 또한 내 계략이었다. 네놈에게서 악마의 피가 흐르는 게 느껴진다. 크하하! 넌 네가 혐오하는 악마가 될 것이다. 내 충복이 되어, 피를 탐하는 짐승이 될 것이다. 여명의 기둥이 제국민을 죽여 먹으니, 얼마나 굴욕적이겠느냐! 하하하하!"

"그래서, 언제 된다고?"

"피의 계승은 이미 시작됐다. 목구멍이 타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아파 오지 않느냐?"

"음."

난 검을 거두고 팔짱을 낀 채 놈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흐른다.

웃던 놈의 미소가 사라지고 난 지루함에 하품을 했다.

"이제 끝났어?"

"피의 계승이… 왜...?"

"뭐?"

"왜?"

"뭐 씨발놈아."

넋 나간 놈을 걷어찼다.

철퍼덕 넘어져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놈의 표정은 멍청하기만 했다.

놈이 소리 질렀다.

"이미 계승은 끝났을 터! 내 명령을 들어라, 나의 아이...."

퍽-!

주먹으로 대답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퍽퍽-!

구타를 당하면서도 뭐가 억울한지 바락바락 소리치는 놈이다.

"네놈, 인간이 아니구나. 넌… 그래."

하하하-

징한 놈이다. 이 상황에 아직도 웃음이 나와?

"어차피 '우린' 서로 죽일 수 없다. 이제 분이 풀렸느냐? 시간 낭비 그만하고...."

"아까부터."

난 놈의 말을 끊었다.

"너무 잘 보였어."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모래알보다 작은 붉은 구슬.

천안통은 이제 놓치지 않았다.

검을 휘둘렀다. 놈이 최후의 발악을 했으나 은십자검이 발하는 빛 무리에 삼켜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손을 뻗어 붉은빛을 움켜쥐었다. 녹아내린 흡혈귀의 왕은 이제 더는 몸이 재생하지 않았다. 잿더미가 되어 흩어진다. 수백 년 동안 악몽이었던 괴물의 최후는 허망했다. 난 바람에 흩날리는 잿가루를 지켜보다가 손에 쥔 무언가를 내려다봤다. 천천히 손바닥을 펴서 정체를 확인했다. 작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힘'.

"아지비카교의 성물."

붉은 구슬.

흡혈귀 왕의 힘의 근원이자 '악마'로 느껴졌던 힘의 정체는 아지비카교의 성물이었다.

난 작디작은 구슬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기운에 침을 삼켰다. 성물 '공' 그리고 '고'. 두 개 모두 악마의 신전에서 발견됐다. 이 붉은 성물도 악마의 몸에서 적출한 것이다.

아니.

"놈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했다."

문득.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아지비카교의 성물은 과연 '신'의 성물일까?

* * *

난 천천히 입을 벌려 구슬을 삼키고자 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성물이 가져다주는 힘은 몹시 강력했다. 붉은 성물이 내게 선사할 막강한 힘은 가정뿐인 잡생각에 비하여 너무나 찬란했다.

구슬이 삼키기 직전.

"안녕."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행동을 멈췄다. 자의 반, 타의 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난 성물을 움켜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사신이 있었다. 썩어 가는 백골의 여인, 온갖 불길함을 길러다 사악함으로 빚은 듯한 죽음의 인형이다.

"우샤스… 누나."

우샤스가 나타났다.

왜? 라는 의문보다, 제발. 이라는 간절함이 우선이었다.

우샤스가 먼저 내 앞에 나타난 적은 드물다. 우샤스는 반드시 내게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날 만나러 왔다. 지금 이 상황, 이 타이밍. 손에 쥔 성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으나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들통 났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성물을 발견한 즉시 누나가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기특해. 내 동생."

우샤스는 웃으며 말했다.

꺾이지 않은 꽃, 데메니아 왕녀의 아름다움을 넘어섰다고 하는.

제국의 성녀, 빛나는 대리인, 새벽의 현신.

웃음은 아름다웠다. 여신의 웃음처럼 고고하고 포근했다. 허나, 개눈깔은 낯짝 너머의 불길함을 보았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간의 얼굴 안에는 악마보다 두려운 죽음이 날 비웃고 있다.

"또 다른 악마를 죽였구나."

"누나. 왜...."

"생명이 느껴져. 아아, 생生의 달콤한 향기에 어지러울 지경이구나."

그녀가 한 발짝 다가오면 난 두 걸음 물러났다.

"그거."

우샤스가 새하얀 손으로 내 왼쪽 손을 가리켰다.

성물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나한테 주지 않을래?"

제발.

그런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빌고 빌었으나 결국 우샤스는 말하고 말았다.

우샤스가 원하고 있다. 내 손에 쥔 성물을.

그동안 우샤스는 내가 성물을 얻는 것에 도움을 주며, 자신은 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혹적인 웃음으로 가린 서늘한 욕망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우샤스가 이토록 무언가를 원한 적이 있었던가? 아, 한 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상황과 경우는 다르지만 우샤스는 원했었다. 교황을 비롯한 아지비카 고위 성직자들, 위장자들을 모조리 죽였을 때다. 우샤스는 그들의 죽음을 원했고 나를 말미암아 제 욕망을 채웠다.

저항.

대꾸.

발버둥.

소용이 없음을 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치와와도 짖는다. 컹컹.

"그건 좀 아닌데."

"…으음?"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보는 우샤스의 시선이 악마보다 두렵다.

난 가진 힘을 다해 용기를 냈다.

"누나, 이건...."

"이건?"

"내 거야."

시발, 내가 구한 거라고.

"다, 단비 거야! 단비 거라고!"

"단비가 누구니?"

"내 거라고! 내 거! 내 거!"

우샤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후후. 귀여운 동생. 떼쓰지 말렴. 어차피 그 힘은 너에게 불필요하단다."

"뭐! 왜!"

"병사는 검을 쥐고 학자는 펜을 들지. 네게 어울리는 힘이 아니야. 하지만 내겐...."

그 순간이었다. 우야스는 갑자기 두 뺨을 손으로 감싸더니 희열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봤다. 눈매가 반달이다. 하얀 피부는 상기되어 분홍빛이었다. 그녀는 빨간 입술로 내게 속삭였다.

"떨릴 만큼 황홀하단다."

'경국지색'이란 말이 있다.

빼어난 외모의 미녀는 나라를 뒤흔든다.

천하제일 미인에게는 간이나 쓸개도 빼서 준다고 했던가?

글쎄, 다른 남자가 누나의 저 모습을 봤다면 기꺼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비린 맛이 나는 역겨운 오물을 삼킨 듯 속이 울렁거렸다.

역겹다. 어디서 예쁜 척이야?

젠장, 어떡하지.

고민에 사로잡힌 난 안절부절못하며 우샤스의 눈치를 살폈다.

도망갈까?

난 우샤스의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몇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하고 내 영혼은 저 마녀의 손에 뽑힐 것이다.

싸워?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주라고?

손에 담긴 성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한 힘을 내뿜었다.

"어머."

좌불안석.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우샤스가 깜짝 놀란 '척'하며 물었다.

"설마 주기 싫은 거니?"

"…응."

"날 믿지 못하는 거구나."

"그런 게 아니잖아. 이건 내가 얻은 거고. 누나는 얌체처럼 빼앗으려...."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내게 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이런, 폴스타. 강탈이라니! 말이 심해. 누나에게 주는 선물이 아까워?"

"선물을 주는 사람 마음이지 받는 사람이...."

우샤스가 다가온다.

"믿음이 없는 자를 무어라 부르는지 아니?"

"알고 싶지 않아요."

"불신자."

미소가 사라진 그녀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저승에서 만난 염라대왕이 저런 얼굴일까.

"날 믿고 주지 않겠니? 오, 귀여운 동생아. 이런 사소한 일로 혼내긴 싫단다."

혼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난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매 맞기 전의 아이 같았다. 저항해도 좆 돼. 맞기도 싫어. 결국 남은 건 그녀의 의도대로 성물을 건네는 것뿐.

난 움켜진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착하구나."

우샤스가 성물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찰칵-

"하."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웃음소리.

"이럴 줄 알았지."

우리들의 바로 옆에 생겨난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녀가 아홉 개의 여우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걸어왔다.

표정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활활이가 썩은 내가 난다고 하더니, 역시 너였구나."

멜리사.

엎친 데 덮친 격이다.

110

멜리사가 왜 왔지? 설마 이년도 성물을 노리고?

"망할 년."

"멜리사."

멜리사는 우샤스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곤 기묘한 미소가 걸린 우샤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얘 거야."

멜리사의 등이 이리 넓었던가?

"메… 멜리사 누나."

내 편이 등장했다.

오오, 존나 듬직해.

우샤스는 으르릉거리는 여우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흐응, 왜 간섭이야?"

"너도 '실험'에 동참한다고 했잖아! 이건 거래 위반이지. 룰을 어길 셈이야?"

"일부만 그랬지. 멜리사."

"썩을 년. 날 속이려 하지 마. 룰을 어기면 네년 날개를 뜯어 줄 것이야."

"오, 지혜로우나 무지한 여우신. '아이의 기억'을 잊지 못했구나. 불쌍한 자...."

"…넌 예전부터 짜증 나는 년이었어."

세계멸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이 있을까? 핵전쟁 때문에 멸망하든, 치료할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서 죽든, 종말의 순간은 짧지는 않을 것이다. 천천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치유되지 못하고 죽어 가겠지. 전생의 지구처럼.

종말은 길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난 주변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눈으로 목격하며 어쩌면 세계 멸망은 그리 오랜 기다림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팡-! 혹은 콰앙-! 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득한 상공이었다. 구름보다 위에 있는 창공, 사람의 눈으로는 간신히 형체를 알아볼 만큼 멀리 있는 그곳에 네 마리의 짐승이 나타났다. 한 놈은 나도 알고 있었다. 불타는 거조, 일대를 날갯짓 한 번에 불태운 새다. 하지만 다른 세 짐승은 알지 못했다. 기괴하게 생긴 세 마리의 짐승이었다. 하나, 확실한 건 놈들의 힘은 거조 못지않았다.

웅웅-

여우꼬리.

아홉 개가 움직였다.

난 어긋남을 보았다. 천안통이라서 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긋나고 있다. 공간이 비틀린다. 멜리사를 중심으로 세상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막대한 마나가 뭉치고 있다. 세상의 모든 힘을 잡아먹으려는 듯 멜리사는 과식을 멈추지 않았다.

피어났다.

불타는 새의 날갯짓에.

더는 푸른 숲을 일굴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산이 순식간에 수풀과 거목이 자라나 오히려 예전보다 더 울창해졌다. 새가 날아든다. 짐승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일순간에 마치 꿈을 꾸듯 모든 생명이 꺼지기 시작했다. 날아들던 새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짐승들은 살점이 녹고 백골이 되어 이내 파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거목과 숲도, 울창한 숲은 황무지가 되었다.

끝이 아니었다.

다시 숲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사라졌다.

생과 죽음의 순환.

기적 일부분이 지금, 이곳에서 빨리 감기로 펼쳐지고 있다.

"으. 어. 어. 어."

난 달달 떨리는 턱 때문에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했다. 이건 '강함'의 수준이 아니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아득히 초월했다. 씨발, 신의 영역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차원이 다른 새끼들인 줄은 알았는데, 직접 놈들의 힘을 일부 엿보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멸망한다.

이대로 두면 반드시.

안 돼.

말려야 해.

"드. 드. 드. 리. 겠. 습. 니다."

우샤스를 향해 간청하며 성물을 내밀었다.

"안 돼!"

멜리사가 가로막았다.

아아, 멜리사.

처음엔 구세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파국을 몰고 올 전령이었다.

"돼!"

"안 돼!"

"된다니까. 누나. 제발."

악몽 같은 상황.

세계멸망의 원인을 내가 제공했다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

오랜만이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

저항조차 못할 운명에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흑."

눈물이 나왔다.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다. 눈물은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흐르는 것. 절대 내가 이 상황이 무서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준다니까. 왜 그래. 흑흑."

억울했다. 제발 받아 줘. 왜 니들끼리 화내고 지랄이야.

팽팽한 기싸움 속에서 내 서러운 울음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쪽팔렸다. 창피해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체면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세상을 괴롭히지 말아 줘. 이제, 난 정말 이 세상이 좋아지고 있단 말이야.

히-

그때였다.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 순간,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눈물을 닦아 내고 욕을 참아 내며 우샤스를 노려봤다. 우샤스는 몹시 즐거운 얼굴로 꺄르르 웃었다. 저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배를 붙잡고 웃는 우샤스의 모습에 멜리사는 인상을 구겼다.

"미친년."

욕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샤스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정말 울잖아? 재밌어. 하흐흐-!"

자존심은 '있는' 자의 특권이다. 난 그들에 비하여 모든 게 부족하다. 따라서 자존심도 없다. 나는 약자다. 살기 위해선 얼마든지 우샤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하지만 '이성'은 게이지 않아도, '감성'은 아니었다. 난 날 약올리는 우샤스를 노려봤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갈겨 봤으면 좋을 텐데.

한참 웃던 우샤스는 방금 전에 비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걱정하지 마. 성물은 너에게 줄 거니까."

내가 우샤스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단지 그녀가 죽음을 두르고 다니는 여인이라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원한 건 생의 성물에 담긴 힘일 뿐이야."

공포스러운 건 우샤스의 이중성에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면을 지녔다고 하지만 우샤스는 단지 이중인격자 수준이 아니었다. 추상적인 의미이나 이만큼 확실한 표현은 없다. 천사와 악마.

우샤스는 절대 섞이지 않을 두 존재를 동시에 품고 있는 자였다.

또 시작이다. 지금 내 눈에 우샤스는 사신이 아닌 새하얀 날개를 가진 천사처럼 보였다. 거룩하고 신성하다. 농부 아저씨를 구원하던 천사의 모습이다. 그 누가 지금의 우샤스를 멸망의 주범이라고 생각할까?

"흥, 껍데기만 주면 뭐해? 알맹이를 가로채면 아무 소용 없잖아!"

"잠시 빌리는 거야. '언니.'"

"징그럽게.... 칫. 네 주둥이를 믿으라고?"

"때가 되면 돌려줄 거야. 언니. 그게 낫잖아? 후후."

멜리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샤스를 흘겨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약속이다?"

"약속."

"어기면 바늘 천 개 삼켜."

"기꺼이."

망할 괴물들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을 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샤스가 성물을 가져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소중히 품어 입으로 가져가더니,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곧바로 내게 성물을 돌려줬으나 강력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삼켜."

멜리사가 성물을 삼키라고 했다. 난 불쾌함에 잠시 머뭇거렸다. 방금, 우샤스의 입이 닿았잖아. 젠장. 하지만 이 상황에 하찮은 이유로 삼키지 않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난 눈을 꾹 감고 알약을 삼키듯 성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다른 성물과 마찬가지로 몸속으로 들어오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어떤 힘이 느껴지진 않았다.

자기 목표를 달성한 우샤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퍽-!

"아야."

멜리사는 내 곁에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아픈 것보다 기분이 나빴다. 멜리사는 잔뜩 심술 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당장 얻자마자 삼켜야지, 그걸 멈추랬다고 멈춰?"

"…하지만 우샤스에게 살해당하면 어떡해."

"망할 놈! '실험'이 꼬였잖아. 너만 아니면 제대로 서열 정리를… 아무튼, 너도 참 미련하구나. 베르덴 고서에선 '생'의 성물을 불사의 조각으로 여겼지. 쯧. 그 힘을 놓치다니."

"생의 성물이라고 했지. 역시, '그런 힘'이었어?"

"후, 이제 와 알게 뭐야. 부디 저 썩을 년이 약속을 지키길 바라기나 하렴."

"잠깐! 때가 되면 돌려준다고 했잖아. 그때가 언제...."

"네가 알 필요 없어."

멜리사가 문을 열고 사라졌다. 같이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질렀으나 무시했다. 젠장,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화풀이다. 난 한바탕 폭풍이 몰고 간 베르텐베텐의 북쪽 산을 둘러봤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울창했던 산이 지금은 잿가루만 날리는 황무지가 됐다. 뭐, 흡혈귀 수백 마리가 득실거렸고, 서대륙의 악몽이었던 피의 악마가 죽었고, 세계 종말의 전조가 시작되기도 했지만.

"피곤해."

지금은 따듯한 샤워와 아로니아 쉐이크가 필요할 뿐이다.

난 발라당 누웠다.

다아....

"무서웠지?"

내 품 깊은 곳에서 덜덜 떨던 달비가 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달비도 쌍둥이들만은 무서워했다. 하룻강아지처럼 컹컹 짖지만 막상 쌍둥이들이 힘을 드러내면 호다닥 품속에 숨고는 한다. 악마도 무서워하지 않는 달비, 녀석의 정체가 아르테미스임을 감안하면.

"씨발. 신도 상대가 안 되는 거 아니야?"

쌍둥이들의 힘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 * *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멀리서 코산 일족의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오고 있었다. 대밀림에서 베르텐베켄까진 이틀을 마차로 와야 한다. 저들이 여기에 있다는 소리는, 젠장! 뭐야, 며칠을 잔 거야? 차가운 땅바닥이 포근하게 느낄 만큼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던 모양이다. 당장 며칠을 자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말이다.

그들은 날 발견하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첫마디는 당황 어린 질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공자! 대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산 전체가 하루아침에 민둥산이 되었네!"

소란스러운 그들이 귀찮기만 했다. 난 대충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승리 포즈를 취했다.

"이겼어요."

"이겼다니… 흡혈귀들은?"

"수백 마리를 비롯한, 피의 악마까지. 싹~ 다 전멸시켰죠."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땐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가장 많은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불신이다. 믿지 못하는 코산인들이 얼토당토않다며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두 번째 반응은 순응이다. 믿지 못할 결과라도 주변에 널린 증거들과 경험으로 정말 피의 악마가 죽었음을 인지한 자들은 선봉장밖에 없었다. 선봉장들은 경악에 휩싸여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세 번째 반응은 포기다.

생각하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모르겠다 난."

은검의 검주가 허탈한 웃음을 짓곤 코산 일족에게 말했다.

"난 은퇴하련다."

"검주님?"

"몰라~ 나 같은 나무꾼은 나무나 패야지. 애초에… 깜냥이 안 됐어, 난."

은검의 검주가 터벅터벅 큰 걸음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코산인들이 그를 따라갔으나 세 명의 선봉장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표정은 갈등에 차 있었으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검주가 갑자기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새 검주에게 인사드리지 않고?"

나와 검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제리코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검주님...!"

"뭐? 증오스러운 피의 악마가 죽었다고 하잖나? 수백 년간, 우린 고통만 받았지. 이제 복수의 굴레는 끊어졌다. 니들끼리 알아서 잘 살아~ 날 따라 나무꾼이 되든, 레인버그의 사냥꾼이 되어 '지금까지' 해 왔으며 유일하게 '잘하는 일'을 계속할지는 스스로 택하는 거지. 뭐, 저놈들은 똑똑하니 벌써 어디에 붙어야 할지 잘 아는 모양이다만."

검주는 선봉장을 향해 실망한 표정을 보였다. 곧 선봉장들이 움찔거리며 발을 뗐지만 검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만류했다.

"관둬라. 망할 놈들아! 잘살아! 하하하!"

등 돌려 걸어가는 검주의 뒷모습은 몹시 개운해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쓸쓸하기도 했다.

제리코는 검주에게 뛰어가 짧게 말을 나눴다. 그리고 깊게 허리를 숙인 후, 내게로 걸어왔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제 딸과 지내고 싶습니다. 검주님."

"환영해요. 제리코."

세 명의 선봉장.

그들은 퀄츠 성으로 돌아가는 3주간의 긴 여정 동안 어색하게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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