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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75

검은 태양.

낮은 검고.

밤은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검은 땅엔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오랫동안 싸웠다는 것.

무던해진 감각 속에서 난 놈과 싸웠다.

이변은 내 뱃속에서부터 일어났다.

놈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굶주림이 느껴졌다.

단순히 배가 고픈 게 아니다.

기근, 끔찍한 굶주림, 내장이 뒤틀리고 혈관을 흐르는 붉은 피마저 메말라 가는 느낌, 아사 직전의 고통이 느껴졌다. 지하에 파묻힌 고대 도시가 형태는 온전하나 수십 만 명의 사람만 죽은 이유를 깨달았다. 놈의 힘은 생명을 갉아먹는 기근이자 가뭄이었다.

수백 번을 때렸으나 놈은 다시금 일어났다. 붉은 안광이 꺼지는 법이 없었다. 검은 갑옷은 파괴되어 놈은 제 속살을 다 드러냈으나 계속해서 몸을 일으켰다.

죽일 수단이 보이질 않아 지쳐 갈 때였다.

놈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뻗어진 내 팔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사라진 내 팔, 고통이 없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팔이 떨어진 건가, 지금?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지?

[멸하라.]

가뭄에 쩍쩍 갈라진 메마른 대지처럼, 내 몸은 점점 삐쩍 마르더니 이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상 현상은 현실감을 매몰시켰다. 난 내 몸이 부서지는 걸 보면서도 꿈처럼 의식이 흐릿하기만 했다. 팔이 떨어졌다. 몸은 메말라 가루를 흩뿌리고 걷기 위해 힘 준 허벅지는 부서져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내 몸은 산산이 조각 났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시야, 머리가 떨어진 증거. 난 바닥에 누운 채 부서지는 내 몸을 바라봤다. 안 돼, 안 돼. 내 육체. 겨울날 땅에 떨어진 낙엽처럼 허무하게 바스러지는 몸. 그리고 이내느껴지는 완전한 무너짐.

나는 보았다. 오로지 내 '눈'만 있다. 육체는 모두 모래 가루가 되어도 눈만이 남아, 나는 앞을 바라본다.

기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보인다.'

느껴지는 감각은 없다. 공허한 감각 속에 날 지탱하는 건 시각뿐.

난 살아 있는 게 아닌 건가.

죽음을 깨닫는 순간, 눈이 감겨 온다.

서서히 의식의 끈이 잘려 나간다.

발버둥은 없다. 죽음.

결코 두 번 다시 겪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하지만 요람처럼 편안해서 난 감기는 눈을 가만히 두었다.

[아가.]

[나의 소중한 아가.]

* * *

묵시록의 기사인 흑기사, 검은 말의 기수는 재앙의 권한을 가진 네 기사 중 하나이다.

그는 기근과 가뭄을 퍼트리며 지상의 생명을 멸할 의무를 수행한다. 악마이나 악마가 아니며, 대행자이자 형벌자(刑罰者)이다.

그들은 '지옥 묵시'의 날이 가까워지면 멸망을 전파하는 전령이다.

묵시의 날이 올 때까지 그들의 권한은 무한히 지속하며.

묵시록의 기사들은 결코 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대행자이자.

형벌자이기 때문이다.

* * *

묵시록의 흑기사는 시대를 종말하기 위해 다음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러나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뒤를 돌았다.

아득한 세월을 주기로 멸망을 종용하던 묵시록의 기사는, '그'가 아니더라도, 재앙의 권한이 기억하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기이한 현상을 목도했다. 죽음을 절대적이다. 묵시의 날은 운명이자 규칙이다. 결코 거스르지 못하며 거슬러서도 안 된다.

하나.

흑기사는 마주하였다.

죽음을 겪은 영혼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제 앞에 섰음을.

기사의 붉은 눈이 일렁인다. 기근을 퍼트려 수억 명의 목숨을 거뒀으나 그들 중 단 한 명도 새로이 생명을 얻은 자는.

없었다.

흑기사는 검을 움켜쥐었다. 감정을 빼앗긴 그는 자신을 채운 몇 가지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당황과 두려움이라는 걸 대행자이자 형벌자는 알 수 없었다. 잿더미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생명은 이내 다시금, 기근의 권한에 침범되기 전의 온전한 육체로 되돌아왔다.

* * *

"참모님. 저 자식은 왜 죽질 않습니까?"

"뭐?"

"이상하지 않습니까. 힘도 약한 주제에 난해한 임무마다 최전선에 투입돼서는 랭커들도 죽어 나가는 마당에 언제나 홀로 살아남아 돌아온다고요. 솔직히 말해, 으. 소름 끼쳐요."

"…넌 강함의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지?"

"랭커?"

"쯧. 랭커는 무슨. '강해서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 어쩌면 저 멍청해 보이는 대원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지도 모르지."

"에이, 무슨 그런 망발을 하십니까. 구원자라니, 고블린 한 놈 죽이지 못하는 머저리 놈이요?"

* * *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난 들려오는 목소리로 눈을 부릅떴다.

[역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에만 들려왔다.

뭐, 상관없나.

[어머니.]

바로 앞엔 인자한 갈색 눈으로 날 보는 자가 있었다.

데메니아 쿤칸, 제국의 현자.

내 어머니였다.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말, 난 죽은 모양이다. 그럼 여긴 사후세계일까?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닌데. 심상 세계. 아마 그쪽일 확률이 높아. 온통 새하얀 세계에서 난 엄마와 만났다. 엄마의 영혼, 그럼 나도 영혼이 돼 버린 건가.

날 보며 웃는 엄마를 향해 난 투정하듯 말했다.

[걸시 안에 계셨군요. 어머니. 말씀해 주시지, 놀랐지 않습니까.]

[…안녕, 아가.]

엄마는 그리워하는 얼굴로 얘기했다.

[해 줄 말은 많지만, 시간이 없단다.]

[어머니?]

[죽어서야 깨달았지.]

이상하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 날 불러 대화를 나누던 때처럼 이별을 상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아, 나의 역할을.]

[후회하진 않아.]

[언제까지나.]

[몇 번이라도.]

[괜찮단다.]

[내게 맡겨도 돼.]

[넌 나의 소중한 아이니까.]

무슨 말이지?

[잠깐만요. 뭔 얘기를....]

가까이 다가온 엄마는 부드럽게 날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품 안에선 따스한 햇볕이 느껴졌다.

[나는 언제라도 환영이야.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햇볕은.

내 안에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점점 젖어드는 그리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애틋한 그리움, 절절한 반가움.

[엄마.]

데메니아의 영혼은 빛 무리가 되어 나와 하나가 되었다.

* * *

무형의 그릇은 신과 영혼을 섬기는 '잇는 이'의 재목이기도 했다.

걸시는 빈 몸을 지녔다. 현자 데메니아는 죽어 영혼이 되자 자신에게 주어진 엄중한 책무를 깨달았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무지에 가려져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수레바퀴는 돌아가고 있었다. 육체의 저주에서 벗어나 영혼이 된 데메니아는 자신도 수레바퀴의 일부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후.

걸시의 몸에 깃들어 때를 기다렸다.

폴스타의 육체는 붕괴했다.

그가 '힘'을 남겨 둔 채 죽음의 안식을 맞이할 때 데메니아의 영혼이 폴스타의 영혼을 붙잡았다. 데메니아는 자신의 영혼이 가진 힘을 폴스타에게 불어넣었다. 윤회의 축복을 포기하면서까지, 데메니아는 기꺼이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영혼의 힘은 하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영혼석'의 힘으로 폴스타의 영혼은 다시 한번 기회를 부여받았다. 영혼석의 진정한 힘, 생과 사. 시공간마저 초월하여 영혼으로 뒤엉켜 힘을 전달할 수 있었다.

데메니아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신이 깨달은 힘을 폴스타에게 건넸다.

데메니아의 영혼이 폴스타의 영혼에 감춰진 수레바퀴를 건드렸다.

그러므로.

일순.

영혼이 '되돌려졌다.'

* * *

"난 죽지 못해."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을 감싼 천이 불타 사라지고, 꿰뚫어보는 눈이 드러났다.

"죄악의 굴레를 끊어 내기 위해서, 삼라만상 영겁의 되풂을 끝내기 위해서, 여기에서 죽을 순 없어."

폴스타는 곧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잊어버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더는 갈색의 온화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청백색의 눈, 경이와 환상을 품은 신의 눈이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새 푸른 달이 생겨났다.

달은 검붉은 태양을 가리며, 일식이 일어났다.

태양을 가린 달.

일식의 광경은 마치 하늘에서 신의 눈이 대지를 내려다보는 듯 거대한 눈동자와 같이 보였다. 멜카란은 암전되고, 눈을 마주하는 적은 공포를 일깨웠다. 감정을 빼앗긴 형벌자는 재앙을 퍼트리는 죽음의 기사로서 공포를 알지 못한다. 하나 그가 하늘에 뜬 신의 눈과 마주했을 때 그의 죄는 더욱더 커졌고, 죽음을 초월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태양이 가려지자 묵시록의 기사의 권한이 사라졌다.

데메니아의 영혼이 가져다준 힘으로, 폴스타는 다시 한번 초인의 영역에 들어섰다. 천사의 축복을 받았을 때와 같았다. 우샤스는 무수한 영혼의 힘으로 그를 강제적으로 초인으로 만들었으나 이번엔 스스로 초인의 문을 두들긴 것과 다름없었다.

폴스타는 라멜스타의 손자루를 주워 들었다.

부러진 칼날 대신, 검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흑기사의 갑옷을 부수고 속살을 베어 냈다.

흑기사의 살점은 모래를 뱉어 내며 뭉텅 잘려 나갔다. 그는 순식간에 팔과 다리가 잘렸고, 피 대신 모래를 뱉으며 쓰러졌다.

그가 흑기사의 권한을 잃어 갈수록.

그는 잊힌 자신의 예전 모습과 마주하게 되었다.

폴스타가 흑기사의 머리를 베어 끝을 내기 전에.

흑기사는 원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뱉어내듯 소리 질렀다.

"난 인간이었다!"

검을 휘두르던 폴스타는 행동을 멈췄다.

"융성한 제국의, 가장 용맹한 기사였다. 강의 여신이 날 축복하고 왕이 업적을 치하하니, 위대한 신들의 나라마저 입성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난 내 손으로 내가 태어난 나라를 멸망시켰다. 수십만 명의 제국민들은 하루아침에 아사했다. 그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흑기사의 붉은 눈은 처절하게 폴스타를 노려봤다.

"내가 묵시록의 기사를 죽이자 난 새로운 묵시록의 기사가 되었다. 날 죽인 자여. 묵시록의 기사는 필연의 존재이니, 절대 죽지 않는다. 기사를 죽인 자는 기사가 될지어니, 날 죽인 자여. 너 또한 흑기사가 되어 재앙의 대행자이자 형벌자로 전략할 것이니라."

숙명을 말하는 흑기사.

잠자코 듣던 폴스타는 입꼬리를 올렸다.

"좆까."

콰드득!

흑기사의 목은 폴스타의 검에 잘려 나갔다.

* * *

걸시는 검은 남자를 막아섰다.

"정신 차리세요, 도련님!"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싸움의 끝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폴스타 도련님이 흑기사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검은 기운이 도련님을 덮쳤다.

멀리 숨어서 지켜보던 걸시는 곧바로 달려왔다. 그에게서 벌어지는 현상이 몹시 불길하다는 걸 걸시는 감으로 알아차렸다.

검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가 알던 도련님이 아니었다. 온통 검은 갑옷과 붉은 안광을 내뿜는, 마치… 방금 죽은 흑기사처럼 도련님이 변해 버렸다고 걸시는 생각했다.

[도망… 쳐. 걸시.]

남자는 힘겹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탁하고 음습했다.

[내가… 조금 더, 정신 차리면 돌… 아 와. 이건, 젠장.]

그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 행동을 몇 번 반복할수록 그의 목소리는 더욱더 탁해졌다.

[죽… 죽을지도 몰라. 내 손에. 그건… 안 돼. 제발. 조금만 더… 버티면....]

움찔거리던 걸시는.

도련님이 괴로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걸시의 발은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아니요!"

걸시가 두 팔을 펼친 채로 검은 남자를 가로막았다.

"난 죽지 않아요."

[또 개고집을....]

"아닙니다! 이유는 확실해요! 왜냐고요? 내가 죽으면 도련님, 엉엉 울 테니까."

[뭔....]

"도련님은 맞는 거 싫어해. 슬픈 것도 싫어해. 그래서 날 죽이지 않아."

걸시가 눈물을 훌쩍이며 소리 질렀다.

"깐따삐아!"

검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걸시는 무서웠다. 그가 알던 도련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을 흩뿌리는 저 괴물들처럼 악취를 풍겼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건 자신의 긍지였다. 누군가는 비웃을, 하지만 비수에 맹세한 자신의 신념.

"두 번 더 외치면 되죠? 깐따삐아, 깐따삐아!"

지척에 다가온 검은 남자.

그의 눈을 감히 마주치지 못해 걸시는 고개를 떨궜다.

"깐… 따삐아. 아, 네 번 말하면 효과가...."

남자의 손이 뻗어졌다.

손은 거칠게 걸시의 머리를 향했다.

"악!"

걸시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괴로워했다.

너무 거칠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 탓에 머리가 완전히 헝클어지고 말았다.

"대단한 자신감이야. 걸시."

눈을 뜬 걸시는.

원래대로 돌아온 도련님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

"마법이 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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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걸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손길을 허락한 길고양이를 매만지듯 열성적으로.

걸시의 머리는 소가 핥은 듯 엉망이 되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이러시는 거에요?"

"그냥, 기특해서."

솔직히 말해서 위험했다.

몸을 짓누르는 억압감, 마음 깊이 피어오르는 살생심.

정확히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내 귓가엔 끊임없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누군가를 죽이는 걸 정당화된 의무이자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게 하였다.

정말 걸시를 죽일 뻔했다.

깐따삐아를 외치는 걸시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걸시를 쓰다듬던 난 녀석의 행색을 찬찬히 살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 사막에 도착했을 땐 깔끔했던 옷이 해지고 피와 오물이 묻어 얼룩졌으며, 손톱은 깨지고 온몸에 잔부상이 잔뜩이었다. 무엇보다 걸시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젠장."

이 모든 건 나 때문이다.

현자 데메니아, 엄마는 걸시의 몸 안에 깃들였다. 걸시를 종용했는지, 걸시 자신의 행동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걸시가 휘말렸다는 것이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걸시는 이렇듯 고집 피우며 따라올 이유가 없었겠지.

"미안하다. 걸시야."

난 걸시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어머니께서 네게 남긴 저주, 그건...."

"아니요!"

"응?"

걸시는 내 말을 가로채며 버럭 소리 질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요! 하지 마십쇼! 말씀드렸잖아요."

걸시는 열심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여태까지 봐 왔던 모습과 달리 제법 총명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전 현자의 비수, 왕녀의 손가락이자 레인버그의 눈. 바보 같은 날 믿어 준 건 현자님밖에 없으셨어요. 이건 '희생'이 아니에요. 내 선택이었어요. 모든 순간마다, 난 선택할 권리가 있었단 말입니다!"

말을 하던 걸시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주륵 나올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짧지만 현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어머니와?"

"제게 고맙다고 하셨어요."

걸시는 웃었으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그리고 보답은 도련님께 받으라고 하셨어요."

"보답? 그래, 줘야지. 뭘 줄까?"

"히텐가 고급 저택 3채만 일단 주시겠어요?"

퀄츠 성에서 가장 값어치 높은 거리이자 10대 상단주나 귀족들만 사는 호화 지역.

히텐가의 고급 주택 3채. 걸시의 월봉으로는 수천 년을 모아도 살 수 없는 금액.

레인버그의 공자라고 해도 그만한 돈이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

"알았어."

구체적이며 확실한 요구에 되레 난 기뻤다.

걸시의 행동이 조건 없는 희생이라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거야.

뭐, 기브 앤 테이크.

그거면 좋지.

* * *

검붉은 태양이 저물고 하늘은 쨍쨍하다.

햇볕은 여전히 뜨겁지만, 되레 상쾌한 느낌이다.

묵시록의 기사가 죽은 후 멜카란의 사막은 달라졌다.

그 변화는 자연이 수천 년에 걸쳐 이륙해야 할 변화였다.

하지만 난 단 몇 시간 만에 이루어진 경이로운 변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더는 악취와 살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산들바람이 으레 그렇듯 콧구멍과 폐를 신선하게 하고, 피부엔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사했다. 바람이 바람다워진 것이다.

모래 언덕엔 놀랍게도 새싹이 피어났다. 모래알갱이를 깨고 피어나는 새싹들은 삭막한 대지를 채우고 황갈색의 껍질을 벗겨 냈다. 행성의 자생을 단 몇 시간 만에 목도하는 경이로움은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하기만 했다. 녹지가 되어 가는 사막. 더는 생멸향 따윈 맡아지지 않는다. 하늘은 파랗고 해는 뜨겁고, 정말 좋은 날이다.

걸시는 피곤했는지 바닥에 누워서도 잘만 잤다.

우움부-

녀석 곁에, 전에 만났던 오아시스의 영수가 나타났다. 개구리 영수는 요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윽고 녀석이 지나간 자리마다 물이 퐁퐁 솟아나며 물길이 생겨났다. 걸시는 자다가 물벼락을 맞고 일어났다. 투덜투덜 대더니 이내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쓰러져 잠을 잔다.

영수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사막에 일어난 경이에 맞추어 영수들이 제 할 일을 열심히 한다.

멜카란이 언제부터 죽음의 대지, 가뭄의 사막이었을까?

대부분 숲과 평원, 대밀림인 서대륙에서 기후에 맞지 않게 부자연스럽게 생겨난 사막.

고대 제국이 융성하던 시절에는 이보다 더 푸른 녹지였는지도 모른다.

바뀌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건가.

몇몇 영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몰려들었다. 녀석들은 보고 싶어 했지만, 아직 달비는 그럴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밀알처럼 작은 모습으로 내 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달비. 배불리 먹여 주겠다고 한 약속이 엊그제였는데.

"약속할게. 달비. 이젠 더는 이렇게 두지 않아."

세계의 금지.

대협곡, 대밀림, 남부 제도, 아인들의 땅, 그 너머.

부자연스러운 환경.

멜카란처럼 악마나 그와 비슷한 것들로 인해 변화된 곳이라면.

그곳이라면.

달비의 '조각'들이 있을지도 몰라.

* * *

잠에서 깬 걸시는 눈곱 낀 얼굴로 다가오더니 하품을 하며 말했다.

"도련님, 도련님."

"뭐."

"도련님이 한순간에 불타서 재가 되는 걸 봤어요."

"응."

"너무 놀라서 걸시가 헛것을 본 거겠죠?"

"당연하지."

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불타 죽었으면 내가 왜 살아 있겠니."

"그쵸?"

"그래. 잠은 다 잤고?"

"네에."

"여우가 올 때까지, 나도 눈 좀 붙여야겠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버틸 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난 눈을 감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앗, 멜리사 아가씨."

"쉿."

멜리사는 곤히 잠든 폴스타에게 다가갔다.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날카로운 손톱을 얼굴에 갖다 대니 폴스타가 전에 삼켰던 노란 콩알이 입에서 저절로 기어 나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걸시는 경악했다.

'멜리사 아가씨께서 폴스타 도련님의 코딱지를 팠다!'

보이는 각도가 애매하여 생긴 오해였다.

멜리사는 노란 콩알을 지켜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여태껏 이런 짧은 시간에 이리도 많은 정보량이 담긴 콩알을 보지 못했다. 흥미롭게 폴스타와 콩알을 번갈아 보던 멜리사는 빨간 입술을 벌려 망설이지 않고 콩알을 삼켰다.

그 모습에 걸시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도련님의 코딱지를 먹었다! 멜리사 아가씨께서 도련님의 코딱지를 꿀꺽! 세상에!'

걸시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동안.

멜리사는 천천히 콩알에 담긴 마력을 분석했다.

구미호의 혀는 마법을 분해하고, 그에 담긴 막대한 정보량을 수집한다.

그러나 분석이 진행될수록 흥미에 찬 멜리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보이질 않아."

끝내 멜리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짜증 내며 소리쳤다.

"아무것도!"

걸시는 깜짝 놀라 숨었다. 코딱지가 맛이 없나?

화를 내던 멜리사는 품에서 책을 꺼냈다. 그녀만의 책으로, 다른 이가 훔쳐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책이었다. 멜리사는 붉은 펜으로 기록했다. 심혈을 기울인 요마계의 고능 요술도 통하지 않았다. 정보를 기재하며 골똘히 생각하던 멜리사는 입술을 깨물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지하다. 무지해. 망할! 이래선 지랄 맞은 허영심과 다름없지 않는가."

괴로워하는 멜리사를 지켜보던 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굳게 맹세했다.

'코딱지를 먹어서 자괴감을 느끼시는구나. 괜찮아요. 절대 말하지 않을게. 걸시도 작년에 졸업했는걸.'

* * *

잠에서 깼을 때.

뒤통수가 푹신해서 이상했다.

천천히 눈을 뜨던 난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에 기겁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누워 있으렴."

하지만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머리통을 눌렀다. 힘이 얼마나 장사인지, 내가 밀릴 정도였다. 난 경직된 자세로 뒤통수만 간신히 들어 올렸다. 하지만 녀석의 힘이 더 강해 결국 뒤통수에 기분 나쁜 푹신함을 허락하고 말았다.

"뭐여."

이상하다 못해 끔찍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멜리사의 꼬리를 배개 삼아 누워 자고 있었던 것 같다. 말이 돼? 제 꼬리를 보이는 것도 몹시 혐오하는 멜리사가, 제 꼬리를 이렇게 쉬이 내준다고? 여우의 꼬리, 예전부터 상당히 푹신해 보인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뒤통수에 닿는 푹신함은 시몬스 에이스침대 저리 가라였다. 하지만 이 상황 자체가 불편하여 몸은 편해도 마음은 가시 침대에 누운 듯 따끔거렸다.

내가 자꾸만 일어나려고 하자 멜리사가 뺨을 때렸다.

"가만있어."

어이가 없다.

그래도 가만있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넌 네 몸을 살펴보지도 못하냐?"

멜리사의 말에 난 뺨을 긁적거렸다. 중환자다. 육체적 손실은 없더라도 몸의 기운이 완전히 바닥났다. 강제로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이라 마치 임종 직전의 노인과도 같은 상태다. 그나마 영수들이 힘을 나눠 주어 망정이지, 아니면 영락없이 멜카란이 내 무덤이 될 뻔했다. 멜리사가 꼬리를 내준 건 마법 때문이었다. 푹신하다고 느낀 감각은 단순히 접촉에 의한 게 아니었다. 난 점점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꼈다. 힘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멜리사는 우샤스처럼 생명력을 나눠 주진 못하지만, 생명력을 충당시키는 요람은 만들 수 있는 것 같았다. 꼬리를 베고 누워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자세는 좀 그래.

멜리사의 공간회귀마법이 완성되기 전까지 난 꼬리에 파묻혀 누워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문득 냄새가 궁금해서 코를 킁킁거리다가 뺨을 또 맞았다.

여우 꼬리긴 하나 짐승의 털 냄새는 나질 않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눈을 감아도 불편함은 달아나질 않았다.

난 먼저 멜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누님."

"뭐."

"라멜스타 한 자루 더 만들어 주시겠어요?"

"라멜스타?"

"그, 왜 생일 선물로 받은 형태변환 무기 있잖습니까. 그거, 태워 먹었어요."

멜리사는 거칠게 꼬리를 휘둘렀다. 데구르르 굴러떨어진 난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 내며 멜리사를 쳐다봤다. 일어난 멜리사는 사나운 얼굴로 날 보며 쏘아붙였다.

"멍청한 놈. 하긴, 그런 조잡한 쓰레기 같은 무기로 용케도 버텨 왔군. 하지만 네 수준엔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였다. 죽은 레비아탄이 원통할 일이구나."

잠깐만요. 라멜스타, 당신들이 준 선물이거든요.

물론 속말은 삼켰다. 괜히 신경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모아 와."

"네?"

"네가 알아서 재료들을 모아와. 심심풀이 삼아 제작은 해 주지."

멜리사는 무기의 재료를 모아 오면 만들어는 주겠다고 했다. 난 라멜스타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떠올렸다. 대해의 괴수, 대협곡의 괴조. 음, 그 이상 가는 재료가 있던가? 전생의 지구에선 '무기'라고 하면 총기와 열병기를 뜻했다. 기술력이 집약된 소총, 대포, 더 나아가 전술핵과 항공 모함까지 무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 속에나 나오는 전설의 무기는, 무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검이 아무리 날카롭게 베여도 총알 한 방이면 부러지니까.

하지만 이 세상은 다르다.

마법과 초인, 기괴함과 경이로움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무기는 원시적이며 마법적인 것들을 뜻한다. 듣기로는 솔가르 공작가에 내려오는 검 두 자루는 거인왕을 베어 넘겼다고도 하며, 슈테르닐의 마검사들은 무기에 마법적인 인챈트를 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즉, 이 세상의 무기는 몹시 중요하다는 뜻이다. 라멜스타는 쓸만했지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형태 변환이란 특성만으로는 쓸모가 없었다. 좀 더 기가 막힌 무기를 얻는다면 난 더 강해질 수 있겠지. +10강 집행검 같은 무기는 어디 없나?

무기에 대해 고찰하는 사이 멜리사의 공간회귀 마법이 완성되었다.

몇 주 만에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난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아로니아 쉐이크와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즐겼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 오히려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하지만 따뜻한 샤워와 맛있는 음식으로도 머릿속을 채우는 의문들은 되레 복잡하게 뒤엉키기만 했다.

77

"많이 아프세요?"

영혼석을 얻고 나서부터 난 안대를 쓰고 다녔다. 양쪽 눈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니며 퀄츠성의 사람들에겐 눈병이 났다고 둘러대야 했다. 멜카란에 있었을 때보단 괜찮아졌으나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손잡아 드려요?"

"조금만 더 기다려, 걸시. 아직 돈이 들어오지 않아서 그래."

"앗, 걸시는 슬퍼요. 도련님을 보살피는 게 제 의무인데, 설마 제가 '토지 계약서' 때문에 항상 곁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요새 걸시는 멜카란에 돌아온 뒤로 항상 내 곁에 붙어 있었다. 전에는 전속 시녀이긴 해도 걸시는 자유분방하게 성을 돌아다녔다. 넌지시 토지 계약서에 대해 물어보는 걸 보면 충성심에 곁에 있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치유사라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아픈 게 아니래도."

한쪽 눈을 가리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안대도 멜리사가 준 특수 안대를 써야 했다.

양쪽 눈을 뜨면 너무 많은 정보가 뇌를 뒤흔든다.

천안통이 폭주했다. 전에도 우샤스 누나에 의해 천안통이 폭주한 적은 있었지만 그땐 격통이었고, 며칠이 지나자 괜찮아졌었다. 이번엔 다르다. 천안통, 불가사의한 힘. 전생부터 내게 주어진 능력. 확신하건대, 전생보다 이번 생에선 천안통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다. 이젠 확실해졌다. 내 성장이 천안통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젠장, 안 그래도 개눈깔인데 더 성장하면 대체 뭘 '보겠다는 거지?'

걸시의 보살핌 아닌 보살핌을 받으며 이 주가 지났다.

* * *

몸이 괜찮아진 것 같아 연무장으로 나왔다.

오늘은 라니스타가 퀄츠성에 머무는 날이다.

난 놈에게 질문과 더불어, 내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내공을 얻어 나름대로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지만.

무림인이자 천하제일인이 분명한 라니스타가 보기에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전과 다르게 이젠 적어도 라니스타의 뺨에 생채기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라니스타는 여전했다.

그는 내가 멜카란에 돌아왔어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연무장에서 마주치자마자 그는 날 보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호오, 과연 미친놈이로구나."

놈의 욕설이 칭찬이라는 걸 깨달은 건 몇 달이 되지 않는다.

난 괜히 우쭐해졌다. 짜증 나는 사실이지만, 놈에게 인정받는 건 기분 좋다.

"좋다. 섭혈관의 관주 정도는 되는 모양이로구나."

라니스타가 웃었다. 그 즉시, 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그는 내게 철검을 한 자루 던져 주며 호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절정에 이른 자들의 싸움이 어떤지, 오늘 뼈저리게 느껴 보도록 해라."

"뼈 안 저려도 되는데...."

문답무용.

검을 쥐자마자 쇄도하는 라니스타.

두 달 동안 오지게도 싸웠다. 모두 실전 경험, 죽을 뻔한 위기 수십 번. 라니스타는 항상 내 수준에 맞추어 아슬아슬하게 실력이 낮은 정도로 싸웠다. 대단한 새끼가 아닐 수 없다. 천안통도 없는데 내 힘을 단숨에 파악해서, 제힘을 조절하다니. 슈퍼맨이 그랬다. 힘을 조절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빠각!

이번에 상대할 놈은 장법을 쓰는 무인이다.

라니스타는 경공으로 쇄도하며 순식간에 코앞까지 도달했다. 곧바로 손바닥을 뻗자 피처럼 붉은 기운이 맺히며 날 '죽이려'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공격. 난 놈의 장풍을 간신히 피했다. 패악적인 힘이 담긴 장풍은 등 뒤 수십 미터의 연무장을 일격에 박살 냈다.

"흠. 이제부터 장소를 바꿔야겠다. 여우 놈에게 빚을 져야겠군."

"…시발."

복구 마법이 걸린 연무장이 이젠 부족할 지경인가.

확실히.

절정 고수의 싸움은 다르다.

난 철검에 내공을 담았다. 라니스타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달비의 영향인지 내 내공은 정파 중 도가와 불가 쪽에 가깝다. 익숙한 태극혜검을 펼쳐 공수에 응했다. 부드럽지만 약하진 않다. 태극의 묘리는 순리다. 난 놈의 몸의 호신강기를 거스르지 않고 틈을 찾아 검을 훑듯이 뻗었다.

콰직!

그러나 순식간에 붉은 손에 검날이 잡혀 부러지고 말았다. 황급히 허리를 숙였으나 놈의 손은 쇄도하는 매보다 빨라 순식간에 턱을 얻어맞고 말았다.

"카악, 퉤."

난 울컥, 피를 토해 냈다.

호신강기로 보호해도 소용없었다. 잇몸이 크게 찢어진 듯했다.

"쯧."

라니스타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차며 표정을 구겼다.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네 눈은 무가지보와 다름없다고."

말이 끝나자마자 사납게 덤벼들었다.

태극의 묘리는 방어에 있다. 이번엔 피할 수 있으리라.

빠각!

"으엑."

하지만 여전히 놈의 장법은 물처럼 흐르며 피하던 내 배를 정확히 가격했다. 아침에 먹었던 걸 뱉어 낼 뻔했다. 젠장, 왜? 놈의 실력, 라니스타가 흉내 내는 저 무인의 경지는 확실히 나보다 낮은데.

"넌 흉내 내지 마라. 몇 번 말하느냐?"

"가르침을… 주세요."

"무공을 따르지 말고, 무를 펼쳐라. 미친놈아. 네 눈은 능히 공허무형의 형태조차 가능케 한다."

놈이 장법을 펼친다.

난 힘겹게 막아 냈다.

연무장은 복구마법조차 사라질 만큼 개박살이 났다.

"제아무리 뛰어난 신공이라고 하더라도 무학과 묘리를 따라 하기만 해선 반푼이에 지나지 않는다. 저급하더라도 극에 이른 절기는 능히 신공을 제압한다. 넌 네 눈알 덕분에 흉내는 잘 내나, 어느 것 하나 고수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

난 별안간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 크게 깨닫고 말았다.

난 메타몽이었구나!

오리지널을 못 이기는 메타몽!

시발!

"그러니 깨우침은 버거울 것이다."

"하나, 만약 네가 스스로 어울리는 무학을 깨우친다면...."

"그건...."

라니스타는 말을 하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미친놈! 내공만 배웠지, 깨달음은 전혀 얻지 않았구나. 게다가 감히, 내 앞에서 힘을 숨겨?"

라니스타가 달려오더니 금나수의 수법으로 안대를 빼앗아 갔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 놀란 난 두 눈을 뜨고 라니스타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난 뜻하지 않게 '그것'과 마주했다.

지금까지.

보이질 않았다.

"거대… 한… 저건...."

영혼.

라니스타의 영혼.

어렴풋이 보였을.

하지만....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라니스타.

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저리… 거대한 거지?

고대 제국, 그곳에서 본 수만 명의 영혼.

한데 어울려 귀천하던 영혼의 빛은 너울지는 파도와 같았다.

하지만 놈의 영혼은 마치 빙산을 삼키는 해일처럼 컸다.

그렇다면.

라니스타의 영혼은 수만 명의 영혼을 합한 것보다 더 거대하다는 뜻인가?

"윽, 우웨에엑!"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웠다.

단순히 영혼의 크기가 거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남아 날 메스껍게 했다.

놈의 영혼의 빛깔… 흑기사? 아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묵시록의 기사조차 놈에 비하면 맑았다.

어찌 한 사람의 영혼이 저리 어둡고 더럽단 말인가.

살생할수록 영혼이 탁해진다면 놈은 대체 몇만, 아니 몇천만 명을 죽였단 말인가?

"여전히...."

라니스타는 괴로워하는 날 무심하게 지켜보며 말했다.

"기분 나쁜 눈이로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구토하던 난 어느새 피를 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쯧."

라니스타가 다가온다. 난 도망갈 수 없었다.

"보아하니 싸울 여력이 없군."

그가 손을 뻗는다.

강대한 내공이 담긴 손가락으로 내 단전을 찌른다.

"진정하거라."

그의 힘이 단전을 타고 흘려들어 온다.

뒤집히던 속과 역류하던 기는 놈의 기운에 강제로 굴복하여.

도리어 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난 지쳐 벌러덩 눕고 말았다. 이젠, 라니스타가 두들겨 패도 어쩔 수 없어.

때리라면 때리라고 해.

배짱을 부리자 라니스타가 섬뜩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누워 있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당황한 난 한 손에 내공을 담고 다가올 암수를 대비했다.

그러자 라니스타는 한숨을 내쉬더니 먼 곳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놈과 싸워서 이겼겠군."

"놈?"

"잘했다. 머저리 놈아."

* * *

상황 자체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라니스타와는 항상 검과 검을 맞대고 서로 죽이고자 안달 나기만 했었다. 공식 자리를 제외하면, 그와 만나는 모든 자리는 항상 실전과도 같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그와 싸움이 아닌 다른 주제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난 라니스타에게 멜카란에서 있었던 일을, 상사에게 보고하듯 기승전결에 맞추어 빠르게 전달했다.

그 후,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스승… 형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놈, 흑기사를."

"더러운 놈이 있었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왜 안 싸우셨습니까? 형님이라면 환장… 기쁘게 싸움을 걸었을 텐데."

"더러운 오물과 검을 맞대고 싶진 않았다. 더는."

더는?

"또한 놈은 깊게 잠든 상태였다. 어떤 머저리 놈이 깨우지만 않았으면 계속 잠들어 있었을 테지."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잘했다고 했잖아. 내심 내가 멜카란으로 간다고 했을 때 기대하셨소이까?"

"그래, 잘했다. 똥 치울 놈이 있으니 든든하구나."

라니스타와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 지랄 맞게 어색한 분위기.

농담은 받아 주질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라니스타는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먼 곳을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빼앗은 안대를 던져 줬다.

"진정되었으면 일어나거라. 배움이 남았으니."

"끝난 거 아니었어?"

라니스타가 소름 끼치게 웃었다.

"네놈이 날 이기거나, 다리가 분질러지기 전까진 끝나지 않는다."

* * *

요양 병동에 누운 난 붕대로 칭칭 감은 두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싸워 봤다. 아침부터 밤까지. 두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열렬하게 싸웠다.

확실히 내가 강해진 걸 느꼈다.

동시에 허덕임과 굶주림도 느껴졌다.

"만약 그 힘이었다면...."

묵시록의 기사를 죽였을 때,

난 얼핏 본 하늘에 '눈'이 있음을 떠올렸다.

기사를 죽였던 건 '나'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힘은 내가 아니었다. 교황을 죽였을 때 잠시나마 느꼈던 초인의 영역, 그 영역에 나 스스로 들어섰다. 엄마의 도움이 있었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내 힘이 강해진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힘을 다시 펼치려면.

"아지비카교의 성물이 일으킨 효과일지도."

영혼석의 힘인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자비카교의 성물을 모두 모으면.

예상치 못할 일이 벌어지리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 * *

퀄츠 성의 뒷정원, 귀신의 숲을 지나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다.

누나는 아홉 개의 꼬리를 흔들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랄라라, 요정 가루 세 꼽, 항랑각시의 다리 여섯 개, 몽마의 땀을 섞으면 피부 탱탱...."

"누나."

"꺄악, 씨발놈아!"

"풉."

멜리사는 기겁하며 아홉 개의 꼬리를 바짝 세웠다. 처음 보는 꼬락서니에 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지금 만드는 약이 뭔진 몰라도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온 것도 모를 정도라니.

"이 새끼."

멜리사가 표독스런 표정을 지었을 때 난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미안합니다!"

급히 사과했다.

손을 들어 올리던 멜리사는 씩씩 화를 참다가 다행히도 손을 내려놓았다.

"망할 녀석. 목에 방울이라도 채워 놔야지."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시발, 지가 오라고 해 놓고.

78

멜리사가 날 부른 이유는 '실험'에 대해서였다.

죽음의 사막으로 가기 전 멜리사는 실험해 보고 싶다며 내게 마법의 콩알을 먹였다.

난 '맞다, 그런 게 있었구나.' 싶었다.

"어떻게 줘? 씻어서 줘?"

"뭘 씻어?"

"똥으로 나올 거 아니야?"

"불결한 놈."

멜리사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했다.

내가 잠든 사이 노란 콩알을 끄집어낸 것 같았다. 설마, 어떻게?

"실패했으니, 이번 건은 보류야. 다음 실험 때 부르도록 하지."

"…그건 누나 알아서 하시고."

난 다른 용건이 있었다.

아주 중요한 주제라서 이곳에 오기 전 고민을 많이 했다. 아로니아 쉐이크 네 잔을 비우면서 골똘히. 지금 내가 이 상황에, 멜리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지만 무덤덤하게 넘어간다면 난 다시 쌍둥이를 신용하지 못하게 된다.

"누나는 다 알고 있었지."

의자에 앉아서 얘기했다. 약을 제조하며 설렁설렁 듣던 멜리사는 힐끔 날 보더니 하던 일을 멈추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난 멜리사의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이었다. 쌍둥이들의 눈은 모두 갈색이지만 자세히 보면 생김새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멜카란에 뭐가 있는지, 그리고… 걸시의 안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영혼이 누구인지도."

라니스타의 눈은 짐승처럼 사납다면 멜리사의 눈은 총명하게 빛났다.

"그런데?"

멜리사는 쉽게 수긍했다. 담담한 태도에 난 인상을 찌푸리며 강한 어조로 물었다.

"멜리사, 묻겠다, 넌 나의 적인가?"

"이 새끼, 말버릇 좀 봐."

예상된 반응이었다. 난 멜리사가 내 뺨을 때리기 전에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난 믿어. 누나가 적이 아니라는 거."

멜리사는 날 때리려다가 몸을 움찔거렸다. 확실히 라니스타와는 다르다. 멜리사의 성격은 더럽지만 라니스타와 다른 더러움이다. 난 침착하게 내 할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제발, 혼자만 알지 말고 좀 알려 줘. 걸시의 몸 안에 엄마의 영혼이 있다. 멜카란의 사막엔 괴물 같은 악마가 살고 있다. 이 말만 하면 되는 걸 왜 숨겼어?"

"그건 네가...!"

멜리사는 버럭 화를 내다가 말을 삼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난 멜리사의 총기가 흐르는 눈이 탁해진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다. 머뭇거리며, 내 시선을 슬며시 피하는 멜리사다. 당황했나? 표정을 읽기 힘들 때 난 멜리사의 꼬리를 슬며시 바라봤다. 아홉 개의 꼬리는 축 처져 있었다. 멜리사의 꼬리는 '개과' 동물이다. 저 의미는 몹시 기분이 새드하다는 뜻.

"진짜 뒤지려고."

내가 꼬리를 본 걸 알아차린 멜리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했다. 난 고통을 참아 냈다. 뺨이 부어오르겠지만 상관없었다. 맞을 가치는 있다. 멜리사의 본심을 알아내진 못했지만 어떤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아냈다. 멜리사는 날 때린 후 다시 약제조에 열중했다. 말을 걸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화난 채로 축객령을 내린 것이다. 난 한숨을 내쉬고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쏜살같이 문을닫았다.

"누나, 콜라겐을 먹어 봐. 피부가 탱탱해지거든."

귀신의 숲이 오늘따라 더 사나웠다.

* * *

삼 주 만에 우샤스와 연락이 닿았다. 쌍둥이 중에 가장 바쁜 건 당연 우샤스였다. 쿤칸을 넘어, 온 대륙에 아지비카교의 교리를 전파하고 다닌다. 성녀라는 직책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이젠 교황의 의미를 넘어선 듯했다. 아지비카교란 종교의 신도가 늘면 늘수록, 난 이 세계의 미래와 명운에 대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오 하느님, 계신다면 저 불길한 천사에 대해 뭐라도 해 보십시오.

퀄츠 성의 성당에서 삼신 미사를 끝낸 우샤스를 만났다. 난 신도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는 아름다운 성녀를 지켜봤다. 뒤에 날개만 없었지, 천사나 다름없이 신성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우샤스였다. 우샤스의 외모는 쌍둥이 중에서도 특별하다. 단지 얼굴 껍질의 생김새를 넘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희생을 각오하게 하는 고혹적이며 고귀한, 외형적 관념을 넘어 종교적인 의미까지 부여할 만큼 경이로운 외모다.

하지만 난 한쪽 눈을 꾹 감았다가 떴고.

순식간에 바뀐 장르를 목격했다.

천사는 사신이 되었다.

해골의 여인이, 이 세상 가장 불쾌함을 모아 놓은 듯한 끔찍한 외모로 신도들을 다독이는 건 악마의 속삭임이자 죽음으로부터의 초대처럼 느껴졌다. 신도들은 알지 못한다. 저 모습은 나만 알고 있다.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은 괴리감이다. 난 애써 힘을 진정시키고, 우샤스의 '껍질'하고만 마주 보기로 했다.

신도들이 모두 나가고.

둘만 남은 성당에서 난 우선 멜카란에서 있었던 일을 '고했다.'

"…그리고 말론소 사제가 타계하셨어. 흑마법사를 죽인 후 사제들은 곧바로 쿤칸으로 가질 않았더군. 더 남아서 자신들의 일을 찾고 있었나 봐. 결과는 비참했지만. 그들은 사제다웠어."

"그래, 알고 있단다."

우샤스 누나는 슬픈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오, 가엾은 영혼. 그대의 헌신에 감사하며 깊은 애도를."

난 옆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우샤스를 가만히 지켜봤다. 대체 누구한테 기도를 드리는 걸까. 진심으로 아지비카의 삼신을 섬기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난 기도가 끝나자마자 우샤스에게 말했다.

"흑마법사를 응징하고자 했지. 그건 종교적인 의무였어, 아님 개인적인 용건이었어?"

"둘 다란다, 폴스타."

"흑마법사, 놈의 힘은 마치...."

죽음을 다룬다.

생을 빼앗고 사를 부여한다.

흑마법사는 형편없는 경지였으나 우샤스는 다르다.

난 우샤스에게 진심을 말했다.

"난 누나가 무서워."

"후후...."

우샤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온화한 목소리로 날 다독인다.

"그래, 무서워하렴. 후후."

"…그리고 흑마법사가 날 무서워했어."

깊은 동굴에서 벌어진 일.

흑마법사는 마지막에 절규하며 쓰러졌다.

그가 느낀 공포는 절망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느낀 절망이 아니라, 그전부터 날 보며 두려움에 떨며 좌절했다. 순서가 잘못된 느낌을 받았다. 놈은 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심연을 너무 깊이 들여다본 것뿐."

우샤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얘기했다.

"주제넘게도. 후후."

성당을 떠나는 우샤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난 성당 의자에 벌러덩 누웠다.

우샤스 누나와의 대화는 항상 끝이 찜찜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더 미궁에 빠지는.

우샤스의 말들은 종교책의 구절처럼 미묘하기만 했다.

* * *

백작님과 협력하며 악마 색출과 민생 안정에 바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

퀄츠 성에 돌아오자마자 날 불러 독대를 했다. 창궁관으로 부른 건 비밀스러우며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고자 할 때였다. 창궁관의 수풀이 우거진 방, 나무 밑동을 의자 삼아 앉아 있는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쿤칸은 아지비카교 몰살 사건과 퀄츠 성 습격 사건 이후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제국을 지탱하는 네 기둥의 활약이 없었다면 큰 사달이 났을지도 몰랐다. 그중 아버지는 특히 고달프고 피곤한 위치였다.

민중들의 영웅, 귀족들의 시기.

영수의 힘을 받아 피곤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아버지가 저리 녹초가 될 만했다.

"아들아."

"예."

창궁관의 기운을 받으며 회복 중이던 아버지가 문득 내게 말했다.

"세상은 참 좆 같지."

"예?"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건 없더구나. 힘이 없는 자들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며, 소중한 가족을 잃을까 봐 하루하루 겁에 질려 살아가지. 참, 세상은 좆 같아."

몇십 년을 귀족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사실 평민 출신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버지는 술집 아저씨들이나 쓸법한 말투로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면 저럴꼬. 소주 한잔하면서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절대 넘을 수 없으리라."

"신분은 의외로 하찮은 것이다. 천명이 무엇이냐? 인본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내가 이를 증명했다. 하나, 나는 힘이 있기에 가능했던 거야. 잃고, 뺏기고, 저물어 가는 삶에서 영수의 힘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손을 올리자 무수한 새의 영수가 몰려와 앞다투어 손바닥에 올라가고자 했다. 내겐 달비가 있지만 다른 영수와는 저런 깊은 친화력이 없다. 전에 봤던 난다 긴다 하는 영수술사들도 저렇듯 많은 영수에게 사랑받는 자들은 없었다. 새삼, 아버지는 대단한 영수술사구나 싶었다.

"힘이 없으면 잡아먹히지."

난 아버지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래서 대전쟁 이후 쿤칸의 왕은 꼭두각시라 전략했다."

오우, 저런 불경한 발언까지.

괜히 창궁관에서 만나자고 한 게 아니구나.

뭐지?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하지만 개인이 가진 힘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나마 세상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난 솔가르의 붉은 개를 이길 수 있지만 검은 돼지가 힘을 보태면 두 놈을 이기지 못한다. 또한, 악마 놈이 있기에 우리 인간은 차고 넘치는 힘을 지니고도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공동의 적이 없었다면 500년 전 벌어진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쟁처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피의 전쟁이 일어났겠지.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괴롭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조화마저 어긋날 힘.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힘. 너무 과한 힘이라면, 문득 내가 걱정하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마주하는 모든 걸 굴복시키고, 인류의 적마저 쇠퇴시킬 힘이면 그 힘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겠느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걸어오며 말을 이어 갔다.

"넌 강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강해지겠지."

"예?"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감이 있는지, 난 알 수 없구나."

아.

아무리 바빠도 자식들의 소식은 꿰뚫고 계시구나.

레인버그 공작께선 멜카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눈치였다.

검은 사제, 마법사, 그리고 탈마병과 엮인 일들.

멜카란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의 원인이 나라는 점도.

너무 나댔나?

사실 꾸짖음을 받아도 난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나,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난 아버지의 꾸짖음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곁에 선 아버지는.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격려했다.

"그러니 꺾이지 말아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꺾이지 마."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이 널 좆 같게 하더라도, 믿는 자들이 배신하더라도, 나조차 널 이해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절대 꺾이지 말렴."

음,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자랑스러운 아들아."

그리고 난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전생에선 동료 죽이는 애물단지였고, 현생은 아직 덜 살아 봤어.

"…감사합니다."

"누가 뭐래도, 난 널 믿는단다. 빛나는 별, 폴스타."

79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창궁관에서 요양을 하기로 했다.

아르테미스의 숲으로 갈까 생각해 봤지만 창궁관의 힘도 그에 못지않았다.

달비의 힘을 되찾기 위해선 창궁관이 제격이다.

밀알만큼 작아졌던 달비는 어느새 포메라니안만큼 커졌다.

달비는 창궁관에 온 뒤로 내 품에서 벗어나 궁에서 생활했다.

녀석은 참 대단했다. 가만히 누워서 영수들을 부려 먹는다. 난 달비의 몸을 마사지해 주는 원숭이 영수를 보며 낄낄거렸다. 창궁관에선 달비가 황제나 다름없구나.

달비의 힘은 다행히 금방 돌아오고 있었다.

개간네! 개간네!

달비는 묵시록의 기사에 당한 게 분했던 건지 제 나름대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던 걸 따라 하는 건지, 달비는 복서가 샌드백을 치듯 나무를 발굽으로 내려치며 욕을 했다. 복싱 연습에 이어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도 흉내 낸다. 영수가 인간의 수련법을 흉내 낸다고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귀여워서 가만뒀다.

창궁관에서 거주하는 동안 아버지와 가끔 얘기를 나눴다.

멜카란에 일어난 변화와 영수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이르지만, 때가 된 것 같다며 '영수술사 훈련'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영수술사의 훈련, 기사나 마법사와 달리 체계적인 방법이 없을뿐더러 아카데미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세간의 인식도 영수술사는 단지 타고난 능력일 뿐, 배우거나 훈련해서 힘을 늘리는 유형의 힘은 아니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최강, 최고의 영수술사다.

그 힘은 절정고수, 마스터 경지에 오른 검사 두 명을 상대할 정도니.

쌍둥이의 힘이 태양처럼 너무 강렬하여 가려졌지만.

아버지의 힘은 분명 산불처럼 매섭고 강력한 힘이 분명했다.

"무인과 마법사도 경지가 있듯, 영수술사도 경지가 있다."

영수술사의 경지.

아버지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수술사의 힘은 자유분방하다. 장점이 될 수도 있으나 강자와 부딪힐수록 약점으로 변한다. 자신의 힘보다 영수의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영수의 힘을 빌린다는 개념에서 자신의 힘을 더한다는 것으로 바꿔 생각해야 한다."

아우우-!

푸른 늑대, 맥이 울부짖었다.

맥은 거대한 덩치로 날렵하게 뛰어 와 아버지의 곁에 섰다.

역시 멋있다. 푸른 털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녀석이 품은 힘은 담대하고 정순했다.

"오직 나만이 도달한 경지다."

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마스터들을 상대하였는지 보여 주마."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변이 일어났다.

눈을 감은 채 마치 물에 다이빙하듯 아버지는 팔을 벌리고 뒤로 넘어졌고, 맥은 넘어진 아버지 뒤에 서서 모습을 변화시켰다. 늑대의 형상이 뭉개지며 맥의 몸은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

첨벙-!

아버지가 맥의 품에 안겼다.

그 후, 일어난 변화는 두근두근한 것이었다.

맥은 물결치며 아버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맥의 자아는 사라져 눈빛을 잃었지만, 대신 아버지는 맥을 두르게 되었다. 서서히, 푸르게 빛나는 호수의 힘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아버지의 갑옷이 되었다. 천안통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영혼과 맥의 영혼이 마치 하나가 되어 둘은 같은 생명처럼 동일한 기운을 풍겼다. 영수술사는 간혹 자신이 다루는 영수의 힘과 닮은 기운을 가지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하게 하나가 된 광경은 처음이었다.

늑대 무늬가 새겨진.

푸르른 갑옷을 입은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난 진심으로 감탄했고, 아버지는 뿌듯해했다.

그의 목소리엔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왔다.

"난 혼일동화의 경지라고 부른단다. 소울메이트가 된 영수와 하나가 되는 경지. 영수는 자연의 짐승이다. 하나, 술사의 영향을 받아 점점 '그릇'이 빚어지며 독자적인 영혼이 생겨나게 돼.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다리를 만드는 경지. 나 또한 이 경지까지 도달한 영수는 맥이 유일하지."

아버지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창궁관의 기둥이 '물'이 되었다가 이내 다시 기둥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힘이지. 인간이 자연의 힘을 다루는 거야. 처음 이 경지에 도달했을 때 이 아비는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금기의 영역을 건드린 줄만 알았다."

아버지는 자신만만했다.

"지금의 난 마스터를 육탄전으로 이기며, 탑주급의 마법사보다 더한 개변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떠냐, 굉장하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은 하나였다.

위엄 넘치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

"멋있습니다. 아버지, 최고."

성의 없는 칭찬이었으나 아버지는 만족한 듯 껄껄 웃었다.

"핫핫하. 난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으나, 날 뛰어넘는 자질을 지닌 너라면 수년 만에 성공할지도 몰라. 자신감을 가지렴, 넌 날 이을 최고의 영수술사가 될 테니!"

"음, 잠시만요."

달비가 아까부터 지랄이다.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달비에게 오케이 싸인을 내렸다.

그러자 달비는 폴짝 뛰어들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난 이미.

성공한 적이 있었다.

위잉-!

묵시록의 기사와 싸웠을 때, 달비가 내게 힘을 건넸지.

그땐 난 게걸스럽게 달비의 힘을 잡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경지를 목격한 난, 천안통. 신의 눈으로 구석구석 살펴본 난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바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눈에 보이니까, 따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쪽이 잡아먹는 게 아니야.

공유한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건 그야말로 하나가 되는 것.

혼일동화의 경지라, 이름 하나 잘 지었다.

이미 익숙한 느낌에, 새로운 감각을 하나 덧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달비를 충전기로만 생각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굉장해."

하나로 이어진다는 건, 품는 것과 빌려주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음에 달이 떴다. 별이 뛰어논다. 풍부한 힘이 날 감싼다.

나는 달비가 뛰어놀 동산이 되었다. 혹은 드넓은 하늘이 되었다.

달비가 달을 주자, 나는 녀석의 하늘이 되었다.

달비의 조화로운 힘과 단전에 깃든 내공이 하나가 되어 간다.

녀석과 하나가 될수록 힘이 요동쳤다. 새어 나온 영수의 힘은 내 의지에 따라 모습을 바꿨다. 아버지는 자신을 지키는 튼튼한 갑옷을 원했다. 하지만 나는....

내 등 뒤로 푸른 빛이 모여 은하수처럼 환상적인 망토가 만들어졌다. 달비의 힘으로 이루어진 망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이었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그대로 잘라 붙여 놓은 듯 보였다. 난 망토를 보며 살짝 당황했다. 망토의 상징, 전생의 기억과 연관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존경하는, 선망하는 자들의 상징이기도 했다.

'히어로'라고? 이제 와서? 병신 같지.

다아?

달비가 가슴팍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녀석은 날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알아, 그래. 난 이 망토를 원하고 있어. 내 깊은 속마음을 녀석은 알아차렸다. 이제 숨길 것도 없지. 전생의 난 한때 영웅을 꿈꿨다. 그 열망은 개죽음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티끌로 남아 있었나 보다. 달비에게 들키고 말았다.

달비는 피부색이 옅어졌긴 했으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맥은 형태를 잃었는데, 과연 달비는 같은 영수라도 격이 다르다는 건가?

혼일동화.

푸르른 은하수의 망토를 걸친 채 난 아버지에게 정중히 고했다.

"성공하였습니다, 아버지."

난 담담하게 아버지와 마주했으나 이미 그가 어떤 반응을 하고 있을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슬며시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표정이 압권이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모두 담지 못해 웃지도, 울지도 못하여 기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복잡한 얼굴에선 많은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이 가르쳤긴 했지만 어떻게 한 번 보여 준 걸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느냐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의문 섞인 얼굴 혹은 청출어람에 대견해하면서도 괴물을 본 듯 기겁한 표정.

최강의 영수술사는 몹시 당황했는지 손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영수가 보인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어… 어? 이상하다. 뭐지?"

아버지는 충격이 큰지, 상황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영수술사, 내게 일어난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다.

"왜?"

"예?"

"그걸 왜 성공해...."

결국 그는 좌절했다.

"뭐야. 이 아비의 수십 년의 노력이 담긴 경지를 단 한 번에… 그리 쉽게...."

아비와 자식 사이를 떠나.

수십 년간 최강이라 불리던 영수술사의 프라이드.

굳건한 자존심에 금이 갔을 것이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뭐, 아버지가 대단한 건 인정해.

하지만 상대가 나잖아?

개간네!

달비가 화를 냈다.

그래, 사실은 달비의 영향이 더 크다.

난 그냥 달비의 힘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으니.

개간네, 개간네.

달비는 언짢은지 계속 날 훈계했다.

혼일동화의 경지.

사실 이미 내가 달비의 힘을 빌려 무공과 마법을 사용했을 때부터 혼일동화는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난 그야말로 달비를 충전기 취급했다. 내 힘을 달비에게 제대로 나눠 준 적이 없다. 아니, 할 줄 몰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아지비카교의 성물, 영혼석을 흡수한 후 난 단전에 내공을 쌓아 기를 다루게 되었다. 그래서 일방통행에서, 쌍방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강해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경지는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 이 경지는 힘의 소모가 몹시 큰 것 같습니다."

"…응? 아, 그래. 그렇지. 크흠. 영수는 자연이다. 하지만 이처럼 인간과 동화되면, 더는 자연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 제 힘을 소모하여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힘을 모두 다하면 저절로 혼일동화가 풀릴 것이다."

이해했다.

'초싸이언3'과 같구나.

힘의 소모가 커 유지를 오래 못 한다라.

그럼 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뭐지?

난 아버지가 했던 일을 떠올렸다.

기둥을 순식간에 물로 만들었던 힘.

영수의 힘을 보다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 보였는데.

이젠 달비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

녀석과 나의 의지는 일치한다.

난 위를 올려다보며 '쌀알만큼 아주 작은' 걸 불러냈다.

"아."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더 큰 힘이 빨려 들어갔다.

내공과 달비의 힘.

두 가지의 힘을 같이 다루는 건 예상보다 더 난해했다.

"좆 됐네."

난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 이, 일… 쾅."

콰르릉-!

파열음과 동시에 창궁관의 지붕이 격하게 뒤흔들렸다.

그 후, 네이팜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폭음과 진동이 건물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무슨 일이!"

깜짝 놀란 아버지가 힘을 펼쳐 창궁관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우린 황급히 창궁관을 나갔다.

관사의 마당에는 어느새 청늑대 기사들이 줄지어 모여 있었다. 과연 라니스타가 키운 기사들이다. 행동 한번 빠릿빠릿하네.

"…아들아. 전에 한 내 말, 명심하거라."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만, 그래. 좋은 말이다. 큰 힘엔 큰 책임."

아버지와 난 구멍이 난 창궁관의 지붕을 멍하니 바라봤다.

창궁관의 주변에는 작은 돌들로 가득했다.

저만한 크기라서 다행이지.

난 긴장한 청늑대 기사단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아르테미스의 축복이 깃드시길! 모두 하나씩 주워 가세요!"

그날 이후, 걸시가 말해 주길.

라니스타와 멜리사에게만 꼬리표처럼 붙던 '악명'이.

막내 공자에 대해서도 슬슬 생겨나는 것 같다고 했다.

80

어느덧 멜카란 이후 두 달이 지났다. 늦은 점심, 만찬을 즐기던 내게 방문객이 찾아왔다. 소식을 전달한 집사장은 노련한 베테랑이었으나 이번엔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그는 몇 장의 종이를 내게 건네며 도움이 필요하거든, 레인버그의 가신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겠다고 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혼자서 상대하는 게 낫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들은...."

"괜찮아요.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난 멜카란에서 내가 저지른 일들이 빠르나 늦으나 되돌아오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라? 성질도 급하시구먼.

종이는 증명서를 비롯한 여러 서류다.

신분을 증명하는 증명서와 면담 요청서 그리고 '배상청구서'.

"9천… 4천, 3천? 저택 스무 채는 지을 돈이잖아. 시발놈들."

'자유도시'의 영주들이 날 찾아왔다. 사신도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온 건 의외였다.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단순히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고 다닌 레인버그 막내 공자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인가.

요청서에는 레인버그 공작, 아버지와 함께 면담을 요청했으나 아버지가 거절한 모양이었다. 전에 말했던 '꺾이지 말라'는 얘기. 아버지는 아마 앞으로도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선, 모든 일 처리를 온전히 내게 맡기시겠지.

"뭐, 어디쯤 왔답니까?"

"대수관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난 먹던 고기 스튜를 마지막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푸틴타임'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먼 거리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나, 그들이 품은 건 내 등을 찌를 비수이니 굳이 시간 맞춰 마중 나갈 이유는 없었다.

* * *

대수관의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시선들이 내게 꽂혔다.

난 서글서글 웃으며 태연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섯 명의 영주들은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도시의 영주지만 이곳은 쿤칸의 사대 공작의 성이다. 앉아 있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그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계속 서 있었을 것이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서게 될 줄은 전혀 몰랐겠지만 말이다.

난 천천히 응접실 중앙에 마련된 길고 네모난 탁상으로 걸어가며 영주들을 살펴봤다. 역시 평범하진 않았다. 자본의 힘이 그 어느 나라보다 더 강력하게 발휘되는 자유 도시들이다. 그들의 권력은 신분에서 오는 게 아니다. 유명한 대상인, 정치가 혹은 이름 꽤 날리던 용병.

그리고.

탈마병 개조를 받았다.

멜카란에서 상대했던 탈마병보다야 외형적으로는 멀쩡했지만, 개눈깔은 못 속인다. 마법인가? 놈들은 그야말로 인두겁을 쓴 짐승들이다. 겉모습은 인간이나 속은 탈마병 개조를 한 살벌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세 시간이나 지각한 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표정으로 불쾌함을 토로하는 놈들, 계산에 빠른 그들이 표정을 숨기지 못할 리가 없다. 날 만만하게 보는 거다.

"삼신의 축복이 깃드시길. 자유도시를 지탱하는 대영주님들을 뵈어 영광입니다."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대수관의 응접실에 놓인 탁자는 퀄츠 나무로 만든 세련된 고급 가구다. 탁자 아래에는 매머드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이 깔렸고, 마법이 걸린 샹들리에는 밤에도 형광등처럼 뚜렷한 빛을 냈다. 사치를 싫어하는 아버지는 퀄츠 성을 미술품으로 꾸며 놓지 않았지만, 이곳만큼은 달랐다.

귀한 손님을 위한 정성.

벽마다 걸린 미술품은 분위기를 더욱 고풍스럽게 했다.

난 자리의 상석에 앉아 자리를 권했다.

다섯 명의 영주가 머뭇거릴 때, 내 맞은편에 한 남자가 앉았다.

결의에 찬 눈빛, 표독스러워 보이는 입, 얌생이 같은 콧수염.

그가 영주들의 대표자인가.

나머지 영주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공자. 의자가 부족하온데 하인들이 보이질 않군요."

탁자에 놓인 의자는 단 두 개.

다섯 명의 영주는 서 있어야 했다.

난 서글서글 웃으며 답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나 이상하군요. 영주님들이 걸어서 왔을 리는 없을 텐데. 의자를 찾는 걸 보아 다리가 몹시 아프신 듯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은 탁자에 모두 앉을 필요는 없으니 여독이 쌓이셨으면 옆관의 방으로 가 주무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공자! 이 무슨 무례한...."

"무례하다니요. 쿤칸의 전통으로 담대한 결정을 내릴 땐 결정권을 지닌 두 명만 자리에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지요. 입이 많아 봤자 좋을 것 없잖습니까?"

영주들이 버럭 화를 낼 때, 자리에 앉은 대표자가 나서서 중재했다.

"혜안이 있으십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공자님을 직접 뵙기 위해 우악스럽게도 저희 모두가 오고 말았군요. 이들도 눈으로 공자님을 담았으니,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지요."

그의 말에 다섯 명은 불편한 기색으로 뒤로 물러났다.

대표자는 웃으며 말했다.

놀랍게도 무표정일 때는 사나워 보이던 인상이 웃음을 머금자 온화하게 보였다.

"전 바나두, 모르디코, 카이로의 영주이자 여섯의 대표자 '나콜라시 라타마 타렌마라티오시'라고 합니다. 날 아는 모든 이들은 날 타렌이라고도 부르지요. 이 너른 제국 쿤칸에선 여명의 기둥이라, 우리 자유 도시에서마저 명성이 자자하니. 불세출의 영웅을 직접 뵙게 되어 무궁한 영광입니다."

"그래요. 나콜라시 라타마 타렌마… 뭐야, 타렌 님. 오래 기다리느라 출출하실 텐데 요깃거리라도 드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뜻밖에도 시간이 지체되어 퀄츠의 음식을 맛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군요. 곧 대목이 다가오니 성으로 돌아갈 시간마저 부족합니다."

시벌넘, 돌려 까네.

"바쁘시다니,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굳이' 절 찾아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장사꾼이다.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공자님이 멜카란에 남겨 놓으신 훌륭한 족적에 대하여 소담을 나누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흠."

난 가져온 서류들을 뒤적거리다가 탁상 위에 던졌다.

"검은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라. 이해를 다 못 하여서 그런데, 이게 웃고 떠들 이야기입니까?"

쿤칸의 공작가라도 그의 눈엔 거래 대상 혹은 뜯어먹을 살코기에 불과하다.

"안 될 건 뭐가 있겠습니까?"

"돈 뜯으러 온 사람에겐 소금이나 뿌리지."

작게 혼잣말로 속삭였다.

하지만 탈마 개조를 받은 그들의 귀엔 똑똑히 들렸겠지.

다섯 영주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타렌 영주는 달랐다.

그의 인두겁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공자님의 능청은 쉽게 못 당하겠군요. 제9군단이 입은 피해와 멜카란 지역의 자유 도시 소속 상인들이 입은 손해, 또한 왕국으로부터 양도받은 우리의 사유지인 멜카란을 무단 침범하여 왕국의 옛 재산들을 갈취하였으며, 그동안 일어난 멜카란의 위협의 원인은 모두 공자님의 타국 무단 활동이 시발점이었다고 사료되어, 앞서 기재한 배상청구서의 내역처럼 종합한 배상 금액은 2억 갤란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물론 위대한 푸른 기둥 레인버그의 찬란한 금고에 저장된 황금들이라면 충분히 갚으시겠지만, 그보다 더한 선택지를 드리기 위하여 찾아뵙게 된 거지요.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웃고 떠들 이야기가 아닙니까? 국제적인 논란 없이, 작은 대화만으로 거래할 소중한 기회이지요."

청산유수 같은 말을 잠자코 듣던 난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답했다.

"제가 그걸 왜 배상해야 합니까?"

그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재빨리 대답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공자님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지요."

"뭘 저질렀는데요?"

"역학조사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자유 도시 소속 제9군단의 부사관을 비롯한 수십 병사에게 중대한 부상을 입혔으며, 이는 탈마체의 운용비와 개발 개조 비용을 계산해 볼 때 일반 기병단의 십 년치 운영비와 맞먹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후유증을 논외로 치더라도, 그 후 공자님께서 벌인 일은 저조차 믿기 어려운 행동들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가에 끼친 피해와 자유 도시 소속 '용병단'의 떼죽음. 그리고 악마들이 출몰한 시기와 공자님의 거취가 놀랍게도 일치하더군요. 부수적으로 상단이 거주하는 마을에 입힌 피해 등 증거 또한 충분하니 부디 공자께서 저지른 행동을 부정하시질 않길 바랍니다."

"탈마병은 그렇다 쳐, 나머지 일은 왜 내 잘못이 되오?"

"이유를 물으시니 일천한 지식으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카이로 협약입니다."

"카이로 협약?"

"카이로 협약이라 하면...."

"내 가정교사라도 되오? 아니까 조용히 하시오."

"…역시 배움이 깊으십니다."

카이로 협약은 대전쟁 때 쿤칸 제국이 여러 나라와 맺은 범국가적 협정이다.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타국인들도 쿤칸인들의 죄를 증명하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협약. 대전쟁 때 기승을 부린 위장자와 위장자인 척하며 사고를 일으킨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맺어진 협약이다. 지금은 존재 여부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선왕의 유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난 대답을 곰곰이 생각했다.

좆까?

아니야. 그래도 레인버그 공자의 신분인데.

뒤지게 처맞을 소리 그만하세요?

존댓말만 하는 거잖아.

깊게 생각할수록 놈의 미소가 교만해진다.

난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덧셈 뺄셈도 못하시는 게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난 턱을 괴고 앉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멜카란은 시궁창이었소. 쥐새끼들이 계속 몰린 이유? 먹잇감이 풍부했기 때문이지. 그 먹잇감을 당신들이 제공하고 있다는 걸 세상이 모를 줄 아셨소? 이제 멜카란은 안전한 땅이 되어 가오. 당신들이 계속 먹잇감을 놓아도 이제 시궁창에서 벗어났으니 전처럼은 안 될 거요. 그렇다고 손해 보는 게 있소? 척박한 사막이나 죽음의 기사, 괴물, 흑마법사 따위가 판치는 무법지대에서 녹지가 생겨나 밭을 가꿀 수 있고, 북부 암석지대엔 당신들이좋아하는 기름도 잔뜩 나지 않소. 게다가 '지하에 거대한 고대 도시'가 있다는 소문도 있을 만큼 옛 유물도 심심찮게 발굴되니 앞으로 자원 활용은 더 무궁무진하겠지."

난 알리에바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토대로 그를 쏘아붙였다.

"이제 위협요소가 사라졌소. 그 잘난 역학조사니 뭐니, 마음껏 해 보시오. 멜카란엔 더는 악마가 없어. 그리고 그 이유는, 당신 입에서 나온 것처럼 '위대하고 훌륭한 족적'을 남긴 내 활약이오. 기껏 목숨 바쳐 악마를 죽였더니 뭐가 어째? 오히려 보답을 받아야겠소."

영주들이 정말 배상을 요구할 거라면 굳이 날 찾아올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날 떠본다는 거, 다 알고 있소."

주둥이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주절주절 말만 잘하던 타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만이 감돈다. 그가 말을 내뱉은 건, 긴 하품을 세 번이나 한 뒤였다.

"공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배상 문제는 차차 논의하도록 하지요. 시간 뺏어 죄송합니다. 우선 조사를 끝마친 후 다시 찾아...."

"아니."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할 것이오."

난 배상 청구서를 갈가리 찢어 던졌다.

휘날리는 종잇조각을, 그들은 당황한 눈으로 지켜봤다.

"보상은 당신들이 나에게 해야지. 멜카란을 녹지로 만들었으니 그 가치는, 적어도 9억 갤란 정도는 받아야겠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뒤에 서 있기만 하던 영주 중 한 놈이 버럭 소리질렀다.

"무슨!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9억 갤란이라니! 사마디아 성채를 한 채 지을 거금이잖소!"

"주기 싫소?"

"...."

"그럼 안 줘도 돼."

난 팔짱을 끼며 히죽 웃었고, 점점 영주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난 자유 도시의 영주님들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소."

방에 들어설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하지만 당신들은 날 병신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오."

난 한쪽 눈을 가린 안대를 벗으며 말했다.

"모두 죽이면 어찌 될 것 같소?"

81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인두겁이 찢어지기 직전이다.

영주들은 들끓는 속마음을 애써 숨기는 듯 보였다.

"우릴 이렇게 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난 웃음을 잃지 않고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왜들 놀라십니까. 에이, 설마 제가 영주님들을 협박했겠습니까?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폭주하던 천안통의 힘은 점점 나아지고 있으나, 아직 내 생각보다 훨씬 날이 서 있었다. 내 눈은 절대 보지 못할 것조차 보게 한다. 거리는 중요치 않다. 단편적으로 보이기만 해도 문제없다.

"신기하군요. 오십 명쯤 되나요?"

내 말을 이해한 영주들은 고요함 속에서 침 삼키는 소리만 내뱉었다. 어떤 이는 외마디 신음을 내뱉는 자도 있었다. 놈들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몹시 당황했다. 난 만족한 얼굴로 영주들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안대를 썼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를 모두 죽이면 어찌 될 것 같으냐고 묻는 거잖습니까. 저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식견을 지니신 자유 도시의 영주님들의 고견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내가 겸손한 태도를 보여도 한번 당겨진 긴장의 끈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입을 다문 다섯 영주는 대표자를 바라봤지만, 그 또한 깊은 생각에 빠져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턱을 괸 채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보다. 그들이 나에 대해 모를 리 없다. 멜카란의 배상 청구서? 개소리다. 2억 갤런이라는 거금으로 현혹했지만, 그들이 진정 원한 건 아마도 나에 대한 정보겠지. 직접행차한 걸 보니 내 예상보다 더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허술한 점이 더 많았다.

그래도 공적인 자리인데, 감히 뒤에서 수작을 부려?

"영주님들이 나에 대해서, 아니 레인버그의 아이들에 대해서 모를 리 없으실 텐데."

난 경고했다.

"척을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진심이었다.

"개인적인 복수는 못 하실 테니."

응접실을 감도는 불쾌한 침묵.

먼저 입을 연 건 타렌 영주였다.

"만에 하나."

그가 염소수염을 실룩거리며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옹졸한 마음을 품고 만에 하나 쿤칸 제국에 보복하였다면...."

타렌의 발언은 위험한 것이다. '만에 하나'라고 말머리에 가정을 달았어도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은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자는 없었다.

"제국에 유통되는 건축 자재와 난방 기관, 앞으로 도입할 열차의 부품과 내연 기관, 또한 서민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계적인 기구는 모두 자유 도시의 기술력과 생산성에 의존하오. 북부에 건설 중이신 대방벽의 설계 또한 자유 도시 출신의 기술자들과 건축가들의 도안이 절대 필수지요. 쿤칸에서 계획 중인 국가적 공사의 자금과 일자리 또한 우리 도시의 지분율이 상당한 편입니다. 물론,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 또한 큰 손실을 각오하고서 제국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 제재를 시작한다면...."

몹시 위험한 발언.

아버지가 들었다면 목을 쳤을지도 모르는.

"그 시발점이 국가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 때문이었다면, 과연 그 개인은 모든 걸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예의 차려 협박할 필요 없소. 내가 당신들을 존중한 건 그 이유 때문이니."

하지만 내 태도는 여전했다.

"그러나 너무 과신하진 마시오. 그대들이라면 알 거라 믿소."

경제력과 기술력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이 세계는 비틀렸다. 비틀림의 가장 큰 원인은 악마다. 마법, 자유 도시의 기술력, 사회 의식 수준, 모든 결합점이 맞물려 돌아가면 이 세계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현대의 지구처럼. 신비로운 힘 덕분에 산업화는 예상치 못할 방향으로 흘러가겠지만 분명 지금보다 더 강대하고 융성한 수준을 이륙할 수 있었을 테지.

그러나 현재, 이 세계의 전반적인 사회의 수준은 몹시 낮다.

성장의 한계가 정해진 것처럼,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면 갑자기 무너지고 만다. 수천 년 전의 고대 제국을 경험해 보고 나서 내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수천 년 전의 도시와 현대의 도시가 별반 다르지 않다. 기술의 발전이 지금 수준에 오랫동안 멈추어 있던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한계가 정해진 건 인류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악마.

대전쟁 때, 쿤칸의 역사는 멈추었다.

주변 왕국을 잡아먹고 찬란한 제국의 역사가 시작되어, 사회에 꽃을 피우려고 할 때, 악마와 위장자들이 나타났다. 위장자들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발전하지 못한다. 명백한 인간의 적, 악마. 난 이 세계의 경제, 정치, 기술, 문화 등 그 어떤 요소보다 중요한 점이 방위防衛라고 생각했다. 천적이 너무 확실하다. 인류를 적대하고 잡아먹는 악마가 있는 한, 인류의 한계는 명확해진다.

내가 잘 알지.

전생에서도 그랬다.

인류가 멸망의 길을 겪으며 일어난 일들.

아이폰이 몇 년째 단종되었더라?

하지만 만약.

이 세계에서.

악마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혹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 가치는 얼마쯤 될까.

"난 위장자들을 구별할 수 있소."

슈테르닐 백작님과 아버지는 습격 사건 이후, 달의 아이들이 위장자를 판별할 수 있음을 공표했다. 쿤칸 제국에선 이미 모르는 이 없이 널리 알려졌다. 내가 여명의 기둥이라 불리는 이유기도 했다. 물론, 쌍둥이들은 위장자들을 구별할 수 없지만 다른 이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달의 아이'들은 이미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대륙 너머 다른 국가라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손익에 민감한 자유 도시의 영주들이 모를 리가 있나.

그래서 놈들은 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손해 청구서라는 불쾌한 방법을 사용했다.

"멜카란이 어떻게 녹지가 되었는지 조사할수록 놀라울 거요."

의외로 이번 대답은 상당히 빨랐다.

타렌 영주는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인두겁을 다시 썼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 협박했을 때와 달리 온화하기만 했다.

"뵙게 되어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9억 갤란은 배상이니, 뭐니 하는 하찮은 이유가 아니라 저희가 공자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여 주십시오."

"좋습니다, 선물이라니! 레인버그의 자식들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지요."

결국엔 그가 말한 '소담'의 자리가 되어 버렸네.

앞으로 그들은 더 성가시게 굴겠지만 적어도 예의는 차릴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건 손익에 따르겠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소."

뒤이어 내가 한 제안은,

영주들에겐 9억 갤란보다 더 속 쓰린 이야기였다.

* * *

바퀴가 빠른 속도로 덜컹거리며 굴러간다.

말을 몰던 마차꾼은 깜짝 놀랐다. 말이 없는 데도 마차보다 훨씬 빠른 기이한 마차를 본 것이다. 말이 달리는 속도가 느리진 않지만, 어느새 말 없는 마차는 길을 지나 능선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그림자 장치를 간파했지?"

차량 안.

여섯 명의 영주는 인두겁을 벗고 짐승의 얼굴을 드러냈다.

악어의 얼굴을 가진 자가 날카로운 이를 사납게 딱딱거리며 말했다.

"마스터의 기감도 속였잖는가. 운송 중에 기관이 파손되었나?"

개코원숭이의 얼굴을 가진 자가 말했다.

"투입한 첩자들을 모두 돌아오라고 하세."

"하지만 비용이...."

"그의 눈을 보았나?"

그는 지금의 얼굴을 갖기 전부터, 원왕노후라고 불렸다. 탈마의 개조를 받을 때 기꺼이 원숭이의 인자를 심은 건, 그가 자신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그는 늙은 원숭이처럼 지혜로웠고, 몹시 이기적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선 가족마저 위험에 처하게 했다.

수많은 위험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목숨으로 극복하며, 그는 점점 자신의 보신保身에 대하여 어떤 이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위협할 적을 구별할 수 있다. 이는 마법과도 같은 능력이라, 그가 자유 도시 영주들의 대표자이자 의결자가 된 이유였다.

"어린 소년의 눈이 아니야."

그런 그가.

안대를 벗은 열다섯 나이의 공자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가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위협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목에 칼이 꽂히기 직전과도 같은 서늘한 공포.

그는 마스터 검사의 추적을 피했다. 대마법사의 격분 또한 식혔다. 악마들도 그를 속이지 못했다. 자유 도시의 기술과 자본을 탐한 왕국의 견제도 쉬이 이겨 냈다. 모든 건 그가 갈고 닦은 늙은 원숭이의 '감' 덕이었다.

그 '감'이 말해 줬다.

지혜로운 그는 감히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절대 적으로 두지 마라.

그가 레인버그의 공자라서가 아니다.

자유 도시의 영주는 태생이 천하니.

위광과 명예에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저, 능력을 숭배할 뿐.

타렌 영주의 생각에 공감한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회담 자리에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던 늙은 남자였다.

인두겁을 벗자, 그는 뱀처럼 간사한 눈을 지닌 짐승이었다.

"진정, 그자가 무서운 건 훗날 일어날 일 때문이네."

"알고 계셨군요."

"그들의 가치가 인정받는 날이 오면, 그들의 존재는 현 사회에선 절대적인 위치에 다다르겠지. 그 순간부터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납돼. 만약 일 년 뒤, 공자를 만나 지금 같은 자리를 가졌다고 합세. 공자가 우릴 모두 죽이고 위장자였다며 거짓 소문을 퍼트리면 그 누가 확인하겠는가?"

"…우릴 죽일 수 있을 거라 보오?"

멧돼지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끔찍한 몰골이 되면서까지 우리가 얻고자 한 게 무엇인지 잊으셨소?"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두는 거지. 왜 그리 날뛰나?"

악어의 조롱에 멧돼지가 송곳니를 매만진다.

"겁쟁이 놈."

"흥, 용병 나부랭이가 뭘 알겠는가."

용병왕이었던 자.

그리고 탈마 사단의 단장.

둘은 탈마병을 지휘할 권리를 두고 다투는 험악한 관계였다.

"우리끼리 싸워서 어쩌겠다는 건가."

뱀의 중재에 둘은 화를 삼켰다.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계산을 수정해야겠소. 폴스타 공자도 '다른 쌍둥이'들과 같은 단계로 상향 조정해야 해. 마탑이 불탄 사건, 절계왕이 일격에 죽은 사건, 그리고… 성녀.

이번 멜카란 사건도 그들이 일으킨 사건처럼 인과를 벗어난 일이오. 오류로 치부하고, 항상 계산식의 우선순위로 생각해야 하오."

"젠장, 성가신 놈이 또 나타났군요. 13개의 검과 원로들을 비롯한 '몇몇 불가사의'만 존재하던 때가 오히려 낫습니다."

"…미래가 어찌 될는지."

원숭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달의 아이들.

그들이 탄생한 후 세상은 격변하고 있다.

몹시 안 좋은 쪽으로.

'혹여 그들이 정말 악마를 섬멸할 자들이라면, 난 신화의 한 조각이 될지도 모르지.'

훗날.

수천 년이 지나,

지금 시대가 역사서의 첫 페이지에 나올 미래가 오면.

현시대를 가장 거룩하고 치열한 시대로 기록할 게 분명하리라.

82

얼마 후.

칼베인의 모피, 슈테르닐의 건어물을 비롯한 쿤칸의 수출품들을 서대륙과 연결하는 거대 상단에서 직접 상단주와 부단주 여러 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약속했던 9억 갤란의 어음을 지급했다. 큰돈이긴 하지만 대형 상단의 자금력으론 충분히 며칠 만에 운용 가능한 금액이다. 그리고 난 9억 갤란의 어음을 사용해서 곧바로 상단주와 거래했다. 목적은 귀금속과 광물의 유통 판매.

"타렌에게 전하시오. 제안을 수락해 줘서 고맙다고."

그들은 미리 언질을 들었는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거래 내역과 진행 상황은 틈틈이 편지로 주고받기로 했다.

"돈은 많을수록 좋지."

정원이 보이는 근사한 테라스에 앉은 난.

아로니아 쉐이크 대신 오랜만에 커피를 마셨다.

으음, 커리어 맨의 냄새.

"앞으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이 중요한 건 아니다.

돈이 있어야 사람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돈이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멜카란에서의 경험으로 배운 게 있다.

코산 일족의 추적술과 정보력, 마법사의 신비롭고 기이한 힘, 검은 사제의 항마력.

운이 좋게 이리저리 엮이며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의 보탬이 아니었다면 영혼석을 얻지 못했을 거다. 타인의 힘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온다. 놀랍게도,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들밖에 모르는 멜리사와 우샤스 또한 나름대로 인맥이 있었지 않았는가? 물론 검은 사제와 우샤스, 마법사와 멜리사의 관계는… 주종 관계였지만.

라니스타조차 오락 거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착실히 기사단을 기르고 있다.

"머니, 머니, 머니."

커피의 맛은 썼다.

* * *

혼일동화의 경지는 나와 달비의 힘을 공유하는 것이다.

멜카란 이후 약해졌던 달비는 혼일동화의 경지를 연습할수록 빠르게 힘을 되찾아 갔다. 어느새 달비는 전의 상태보다 더 좋아졌다. 난 녀석과 힘을 공유하며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장난기가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도통 심한 게 아니다. 혼일동화를 하면 나도 모르게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러운 마음이 생겨난다. 또, 달비는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상당히 오만하고 호전적이었다. 다른 영수에게 시비 걸고 괴롭힐 때부터 알아봤지만, 완전히 일곱 살짜리 애 같은 성격이다.

아침 훈련.

혼일동화의 상태에서 무공 연습을 끝마치고 방에 돌아왔을 때였다.

"도련님! 귀족 영애들의 러브레터인가 봐요!"

걸시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

난 인장을 알아보고 반갑게 봉투를 뜯었다.

"어머, 설렘설렘?"

"나가, 걸시."

"이제 도련님도 열다섯이 넘으셨으니까 걸시는 섭섭하지만 좋은 짝을...."

"아직 토지 계약서에 도장 안 찍었다."

"나가 보겠습니다."

편지는 내가 고대하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알리에바 상단주에게서 온 편지다. 전에 흑마법사의 거처 뒤에서 발견했던 보석 동굴에 대한 처분이 시작되었단다. 9억 갤란이면 설비 설치와 운송, 경호원을 고용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을 테고, 영수술사 몇몇에게 따로 의뢰도 했으니 약탈당할 위험도 없을 것이다. 멜카란은 전과 달라졌으니까.

무엇보다 자유 도시 영주들의 허락을 받았다. 그들의 상단과 거래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좋았다. 영주들은 내 가치를 내 예상보다 훨씬 높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들은 기꺼이 최저 수수료를 택했고 알리에바 상단의 존재도 인정했으며 보석을 채굴할 광부들과 그들을 감시할 탈마체도 지원해 줬다. 처음엔 너무 많은 호의에 살짝 경계심이 들었다. 하지만 영주들의 정보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하자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알고 있겠지, 쌍둥이들이 저지른 짓거리들도.

며칠 후, 아버지가 봐도 깜짝 놀랄 만한 황금을 실은 마차 두 대가 퀄츠성의 다리를 넘었다. 알리에바 상단주가 날 보겠다고 하여, 난 기쁜 마음으로 만나러 갔다. 응접실에는 알리에바 상단주가 들뜬 표정으로 있었다. 중립 마을에서 봤던 피골이 상접한 알리에바와는 달랐다. 그의 머리카락은 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했고 옷은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 깔끔했다. 적어도 십 년은 더 젊어 보였다.

"좋아 보이십니다, 알리에바 상단주."

"공자님!"

그는 날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십니까."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노인의 맑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상단에 고용되어 높은 임금을 받고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멜카란은 달라졌어요. 살을 파먹는 죽음이 득실거리던 끔찍한 멜카란이, 지금은 맑은 꿈이 피어나는 동산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두 공자님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평생 갚지도 못할 은혜를...."

"낮간지럽게, 그만하세요. 어떻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자신이 겪은 놀라운 일들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황금은 단 며칠 만에 채굴한 광석의 판매금이라고 했다. 자신은 광산의 감독관이며, 더 놀라운 사실은 영주들이 직접 자신을 고용하여 자유 도시 소속 상단의 멜카란 지부의 지부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못된 영주들이 어찌나 청렴한 척, 깨끗한 척하는지! 전 다 압니다. 공자님의 입김이 강하게 닿은 거겠죠! 덕분에 급료와 시설비, 운송비와 상납금을 제외하고도 몹시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어요. 과연, 자유 도시 상단은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유통 경로가 어찌나 촘촘하고, 사람 다루는 일에 어찌 그리 능숙한지. 돈 빠져 나갈 없이 대륙 전체에 유통망이 이어져 있고 게다가 동대륙까지...."

알리에바는 기분이 좋으면 술에 취한 듯 말이 많아지는 성격이었다.

난 그의 흥에 어울려 주며,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늙은이가 그만 주책 맞게...."

"오랫동안 버티셨죠."

"예?"

"영주들의 감시 아래서, 척박한 대지 멜카란에 그만한 중립 마을을 세우고 유지하셨잖습니까. 죽음의 기사들이 습격하기 전에는 물과 음식도 풍부했죠. 그리고 마을을 지키며, 검은 사제들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마음가짐. 인성 합격, 능력 합격."

레인버그 공작가에도 가문 소속 상단이 더러 있다.

하지만 내 사람은 없다.

"보고서를 읽었어요. 아마 채굴 속도로 보아 몇 달 안에 끝나겠죠. 좋아요, 일이 끝나면."

난 그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내 사람이 되어 주세요."

햇빛에 그을려 검게 찬 알리에바의 뺨이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어색해진 기류에 난 그가 어떤 출신인지 생각해 냈다. 음, 자유 도시는… 참 자유롭지.

난 급히 말을 이었다.

"제겐 인재가 필요합니다, 날 대신해 잡무를 맡아 줄 유능한 상인이."

"아, 아아."

"네."

"정말 절...."

"네. 알리에바 상단주, 당신이 필요해요."

사실.

유능한 상인을 원한다고 했지만 가장 필요한 건 내게 충성심을 가진 자였다.

알리에바 정도면 충분하다. 뜻하지 않게 난 그의 은인이 되었으니.

그는 돌아갈 때까지 내게 총 서른여섯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 * *

사람의 환심을 사는 데에 돈만큼 편리한 건 없다.

나는 연회를 개최했고, 초대장을 돌렸다.

작고 비밀스러운 연회지만 음식은 내가 전부 검수하여 최대한 호화롭게 꾸몄다.

귀족 사교 모임도 아니고, 화려한 무도회도 아니었다.

명목상 상단 호위에 참가한 영수술사들을 치하하는 단순한 저녁 만찬 자리라서.

초대받은 손님들은 간편한 복장으로 참석했다.

너른 연회장에 모인 사람은 기껏해야 열네 명.

서로 아는 사이들이라 저녁 만찬은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들도 단순히 막내 공자가 혼자 밥 먹기 심심해서 초대한, 가벼운 자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으며 만찬은 즐겁게 끝이 났다.

그리고 각자 후식과 잡담 시간을 즐길 때.

난 한 명씩 따로 불러내 대화를 나눴다.

"수고했어, 카주웨아."

"콧바람도 쐬고 좋았는데요."

카주웨아를 비롯한 영수술사들은 레인버그 가문의 식객이자 스타폴 기사단 소속이었다. 하지만 훈련 대부분은 영지 내의 교육관에게 받고 있었다. 영수술사들은 말을 탈 줄 모르거나, 공용어도 못 읽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카주웨아도 마찬가지로 까막눈이었다.

악마 소탕 건을 제외하면.

이번 호위는 레인버그 소속원으로서 처음 맡은 일인 셈이다.

"수업은 들을 만해?"

"어우...."

카주웨아는 골치 아프다는 듯 곱슬머리를 움켜 쥐었다.

"공자님, 제 머리는 많은 걸 담지 못합니다. 쿤칸의 역사 500년치를 모두 외우라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의무니까, 어쩔 수 없지."

카주웨아는 칼베인 출신, 다른 영수술사들도 쿤칸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 역사 교육은 기사들의 필수 과목인지라, 배우기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맞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차근차근 레인버그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교육받는 거니까요. 언젠가 이 카주웨아, 레인버그 공작님의 곁을 수호한 세 개의 검처럼 공자님 곁을 지킬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카주웨아는 출세욕이 강했지.

확실히, 카주웨아의 영수를 다루는 능력이라면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부족한 건 없고?"

"많습니다!"

솔직해서 좋다.

카주웨아는 오로라처럼 신비로운 보라색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얘기했다.

"생각보다, 견습이라서 그런지, 봉급이! 너무 짜요!"

자유분방한 사냥꾼 소녀가 금방 적응할 리는 없지.

난 히죽 웃으며 가져온 금화 주머니를 카주웨아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카주웨아는 묵직함에 처음 놀라고, 주머니 안에 든 금액을 확인하곤 기겁했다.

"이… 이건 뭐뇨오?"

말까지 꼬인 카주웨아다.

"옷 좀 사 입고, 맛있는 거 사 먹어."

카주웨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선 돈만큼 효과 좋은 건 없었다.

"와, 씨. 존나 좋아."

"좋아. 카주웨아, 변하지 않았구나. 내 앞에선 그런 상스런 말투를 허락하마."

그 후, 다른 영수술사들을 만나 고충을 '듣는' 척하고 돈을 내밀었다.

영수술사들이 레인버그에 남은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아버지의 위광, 최강의 영수술사가 존재하는 가문이라는 것.

카주웨아를 제외하고 대부분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길 원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의 환심을 사는 건 너무나 쉬웠다.

영수술사의 환심을 사는 게 아니다. 그들이 다루는 영수들의 환심을 사면 된다.

이미 달비가 예전에 교육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빠따질을 친 후로 달비는 이들의 대장이 되었으니까. 지금도 영수술사는 보고 있을 것이다. 달비의 발굽 아래 굴복한 자신의 영수들을!

전력이 되는 자들이야.

"카라칼 대장."

난 이들 중 유일하게 어색하게 서서 차만 마시는 거구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칼베인 호위대장이자 퀄츠성의 경비대장, 칼베인 마을의 카라칼이었다.

"칼베인 마을은 요즘 상황이 어떠합니까?"

카라칼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자님 덕분에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오히려 악마가 사라진 후, 사냥감들이 늘어 모피 생산이 크게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음, 그래요. 그래서, 카라칼 대장의 사정은 어떤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잘...."

"봉급은 얼마죠?"

난 그들도 원했다.

"아버지는 칼베인 사람에게 기회를 주셨죠. 기껏해야, 치안을 담당하는 말단 병사나 호위병에 불과하지만요. 하지만 카라칼, 칼베인 마을에서 난 느꼈어요. 카주웨아처럼 몇몇 칼베인 사람은 당신처럼 나아가고 싶어 해."

카라칼은 퀄츠의 경비대장으로 남기엔 아까워.

"조만간 기사단을 개편할 생각입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닙니다."

카라칼은 배척받던 칼베인 마을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경비대장으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인간 병사들은 그를 잘 따른다. 하지만 난 그의 지휘력의 한계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푸른 사슴을 어깨에 짊어질 날을 기대하도록 하죠, 카라칼 '경'."

83

안대를 벗고 천천히 바라봤다.

"음, 좋아."

이번엔 안대를 쓰고 봤다.

똑같았다.

"괜찮아졌어."

천안통의 폭주가 진정된 모양이다. 이번엔 후유증이 상당히 길었다. 두 달 넘게 잘 때도 쓰고 다녀야 했던 안대는 마치 '2020 마스크' 때를 떠올리게 했다. 멜리사가 만들어 준 안대가 아니었다면, 난 이석증에 걸린 환자처럼 돌고 도는 어지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끝, 끝났어요?"

걸시는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얼굴이 상기된 채로 가쁜 숨을 쉬는 걸시다. 천안통의 폭주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걸시에게 상대를 부탁했다. 무형의 그릇의 자질을 지닌 걸시는 천안통을 시험하기에 알맞은 상대였다.

"끝났어."

안대를 벗어도 걸시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끝났다고 말하자마자 걸시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수줍게 얘기했다.

"그럼 저 가도 돼요?"

걸시의 이상한 태도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엔 모델처럼 다양한 포즈를 잡던 걸시가 어느새 차렷 자세만 했다.

"어색하게, 뭘 부끄러워하냐?"

한 시간 넘게 뚫어지게 쳐다봤으니 나라고 해도 괜한 수치심이 들것 같긴 하다.

하지만 걸시는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몹시 긴박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아니, 아까부터 저… 변소를...."

개간네!

지루한지 하품을 하며 보고만 있던 달비가 화를 냈다.

"걸시야. 우리 사이가 아무리 가까워졌다고 해도 네 생리현상까진 알고 싶진 않구나. 화장실이 바로 옆에 있는데 뭐하는 거니."

"하지만...! 공자님의 침소잖아요, 걸시, 공과 사는 구별합니다."

퀄츠 성의 저택은 귀족 저택이 으레 그렇듯 화장실처럼 불결하게 여겨지는 곳은 구석진 곳에 마련되어 있다. 듣기론 솔가르 저택은 무려 화장실이 정원의 구석에 있어 가는 데만 수십 분이 걸린다고도 들었다. 하지만 지구 생활에 익숙한 난 내 방만 따로 화장실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오냐."

걸시는 상당히 위급해 보였다. 저택을 나와 복도를 지나 변소까지 가려면 걸시는 크나큰 시련과 맞서야 할 것이다. 난 달비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정원에 갈 테니까 알아서 혀."

걸시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멜리사는 천안통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 또한 내게 주어진 개눈깔의 출처를 알고 싶었긴 했다.

멜리사조차 일 년이 넘게 여러 가지 실험을 했어도 개눈깔의 힘 대부분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번엔 마법 안대에 저장된 여러 기록을 조사해 본다며, 정원의 오두막집에서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오두막집의 낡은 의자에 앉아 멜리사의 중얼거림을 관찰했다. 놈의 여우꼬리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가 축 처졌다. 슝슝 바람까지 내며 맹렬하게 흔들리다가 물먹은 천처럼 축 처지기도 하는 꼬리를 보는 맛이 쏠쏠했다. 멜리사가 알면 내 목을 쳤겠지만, 마치 시골 개를 보는듯한 흐뭇함이랄까.

"희한해. 저장된 마력이 전혀 없어. 힘의 원리를 모르겠군. 마력으로 감춰지나 정작 기로 운용되는 힘이 아니다."

멜리사는 실험에 열중할 때면 항상 저렇게 혼잣말을 했다. 열렬한 지식의 탐구, 의외로 멜리사는 학자에 가까웠다. 지금 상태라면 내가 꼬리를 밟기 전까진 상념을 깨트리진 못할 것이다.

난 멜리사가 대부분 시간을 기거하는 오두막집을 둘러봤다. 여러 번 왔지만 언제나 불쾌한 곳이다. 정원의 숲에는 괴물이 산다. 내가 어느 정도 힘이 강해지고 나서 녀석들은 모습을 숨겼지만, 어두운 숲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기괴한 형상이 생겨나곤 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 봤을 땐 무서워서 오줌이 나올 뻔했다. 멜리사가 키우는 놈들일까.

이 낡고 고즈넉한 오두막집도 자세히 보면 마녀의 집이다.

나는 멜리사가 선반에 놓은 다양한 '실험체의 잔해'들의 출처를 알고 싶지 않았다.

악마의 것, 아인의 것, 인간의 것.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이 세상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의 조각처럼 느껴지는 것들도 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구에서의 기억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멜리사도 마찬가지겠지. 지구라는 세상도 이 세계와 비교하면 별세계다. 멜리사의 고향인 요마계는 어떤 세계일까. 마법은 존재하는 것 같으나 이 세상의 마법과는 다르다.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라도 멜리사의 마법이 특출나게 다르다는 건 알겠다.

툭!

오두막집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던 난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멜리사의 꼬리가 갑자기 치솟으며 탁상을 치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역시, 축출밖에 답이 없나?"

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달비를 꾹 안았다.

"날 해부용 시체로 만들 셈은 아니지?"

멜리사는 깜짝 놀라더니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어머, 역시 고쳐야 하나?"

"뭘?"

"속마음을 말하는 버릇."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멜리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렴. 지금 네 가치는 실험대에 놓인 시체보다 훨씬 값지니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멜리사는 내가 가치가 없어지면 기쁘게 해부를 할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보였다. 언제 이 마녀의 집을 벗어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멜리사도, 나도 '그것'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 있었구나."

마녀의 집에 악녀가 도착했다.

오두막집의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온 자는 우샤스였다.

첩첩산중이라, 공기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았다.

우샤스는 멜리사를 쳐다도 보지 않고 내게 얘기했다.

"부탁할 게 있어, 동생."

툭! 툭!

성난 멜리사의 꼬리가 탁상을 여러 번 친다.

"지금 나와 있는 거 안 보여?"

쌍둥이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몹시 굶주린 상태가 아니고서야 맹수가 함부로 싸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은 서로의 힘을 안다. 만약 반목하면 이 세상은 내가 살던 지구처럼 산산이 조각 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쌍둥이들을 규합한 건 '미지의 적'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난 이유가 밝혀지고, 미지의 적마저 죽인다면 그 뒷일은…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멜리사의 짜증에 우샤스는 우아하게 웃었다.

"독점은 안 돼, 멜리사."

"흥. 독점이라고? 네년과 무식한 덩어리 놈에 비하면 난 아직 한 게 없지. 너야말로 내 실험을 방해하는 거라고."

우샤스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치 타이르듯, 조용하고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절대 온화한 태도는 아니다.

"우린 무언의 협정을 맺었죠. 좋아요. 멜리사, 전 당신을 존중해요. 하지만 멜카란에서, 협정을 먼저 깬 건 '언니'잖아요?"

"…쳇."

난 그들이.

날 가지고 협정을 맺은 사실을 알았으나.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둘이 대화를 나눈 사이 난 급히 오두막집의 문을 열고 달아났다. 전력을 다해 경공을 사용해서 귀신의 숲을 벗어나, 저택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건물의 벽을 밟으며 내 방의 창문까지 뛰어올랐다. 모든 행동은 한 번의 호흡에 이루어졌다.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았다. 난 내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침대에 눕자 천장에 글씨가 새겨진다.

피처럼 붉은 잉크로.

[외곽의 성당으로 오렴.]

뚝.

잉크가 내 뺨에 떨어졌다.

난 잉크에서 따듯함과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

* * *

우샤스의 용건은 크게 두 가지다.

악마 혹은 아지비카교의 성물.

성당의 문을 열었으나 우샤스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익숙하게 맨 앞자리의 예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악마? 성물?"

그러자 등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

어느새 우샤스가 내 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속으론 놀랐으나 난 침착한 척했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급히 앞을 보고야 말았다. 우샤스는 평소에도 무서웠으나 오늘은 더 이상했다. 멜리사 때문인지, 악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무서워서 난 정면만을 바라봤다. 우샤스의 얼굴은 텅 빈 어둠처럼 공허해서 함부로 볼 수 없었다.

"아지비카교를 위협하는 신흥 종교가 생겼어."

우샤스의 첫마디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악마가 문제라더니, 신흥 종교라고?

"서대륙의 교화에 신경 쓰는 동안 쿤칸에 종양이 생겨났지."

"무슨… 종교입니까?"

화난 우샤스에 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폭력교."

"뭡니까, 그 하찮은 네이밍은."

종교 단체의 명칭이 폭력교라고?

어떤 멍청이들이 듣기만 해도 사이비 같은 폭력교에 입교한단 말인가?

하지만 세상엔 멍청이들이 많았다.

우샤스는 폭력교의 신도가 천 명이 넘었다고 했다.

"아지비카교가 꽉 잡고 있는 쿤칸에 그 정도 규모의 사이비가 창궐할 수 있나… 있습니까?"

"교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공작이 방조한 일이야. 솔가르 영지 내에 생겨나 세력을 키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우샤스 누나의 손길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나의 손은 앞을 가리켰다. 새하얀 손가락이 가르키는 그곳엔, 해골이 있었다. 해골은 턱을 달각거리며,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폭력은 약자의 가장 큰 무기다.

폭력이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건 강자들이 제 것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에 불과하다.

인간은 언제나 폭력으로 쟁취했다.

날 단순한 학살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약자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지.

약자가 되어서야 인간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

폭력을 숭배하라.

악마를 두려워 말라.

올라선 자의 위선에 속지 마라. 그들 또한 폭력이 있기에 강대해질 수 있었다.

폭력은 진정한 자유요, 대의를 위해 우린 폭력을 배운다.

세상의 이치란 힘의 질서다.

참전하라, 배우고 깃들어라, 숭배하고 지배하라.

폭력교는 세상의 질서가 될 것이니라.]

투투툭!

해골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먼지로 돌아갔다.

우샤스는 폭력교 교주의 연설이라고 했다.

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개사이비잖아. 이딴 연설에 넘어간다고?"

"제국에 폭도들이 늘어나고 있어. 벼를 심는 것밖에 모르던 농부가 하루아침에 낫을 들고 이웃을 약탈해. 부자연스럽지 않니?"

"…악마의 힘이구나."

폭력교주가 악마라고 쳐도.

너무 대놓고 지랄하고 있다.

그동안 악마가 무서운 이유는 위장자, 인간을 속였기 때문이다.

저렇듯 대놓고 세력을 키우며 유혈 사태를 조장하면 교주가 악마든 아니든 처단할 명분이 생긴다.

"솔가르 씹새끼는 뭐 하고 있답니까? 자기 영지에 그만한 불온 세력이 날뛰는데."

"폭력교가 원인이라는 건 공작도 알겠지. 하지만 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

우샤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아마, 반란을 준비하고 있겠지."

"뭐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게 실수였다. 나는 우샤스의 얼굴을 마주했고, 그 순간 뱀 앞에 놓인 쥐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우샤스는 웃고 있었다. 겉껍질은 온화한 성녀였다. 미소는 따뜻했고, 눈빛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개눈깔은 본능적으로 우샤스의 속을 들여다봤다. 사신이 웃는 듯하다. 밤바다 깊은 곳, 눈을 빛내는 해골이 서서히 부상하듯 우샤스의 얼굴은 깊은 침묵이었고, 어둠이자 죽음과 가까웠다.

난 역겨움에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참아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단다. 동생아."

84

폭력교의 본거지는 감춰진 장소가 아니었다.

솔가르 공작의 방조 아래에.

폭도들이 모이는 곳은 붉은 기둥 영지의 외곽, 슈테르닐 왕국과 맞닿은 국경 근처였다.

그곳은 예전, 슈테르닐의 땅이었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사막. 죽음의 대지 멜카란과 달리 슈테르닐의 사막은 마법과 설화의 땅이었다. 폭력교는 슈테르닐의 고대 유적지에서 세를 불리고 있었다.

"폭력교주가 어떤 악마인지는 몰라. 하지만 이처럼 넓은 영향력을 지닌 악마라면 분명 강하겠지. 폴스타. 교단에 잠입해서 악마가 누구인지 알아내렴. 그리고 네가 가장 잘하는 행동을 해."

"도망치는 거?"

우샤스는 말을 멈추고 날 보며 히죽 웃더니, 짧은 침묵 뒤에 말을 했다.

"악마를 죽여."

"…내가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난 널 믿어. 폴스타."

누군가의 믿음이 이리 악랄하게 느껴질 줄이야.

"차라리 누나가 해결하지 그래… 그렇습니까? 아니, 그래요?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인데."

우샤스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연약한 내가 어찌 악마를 죽이겠니."

쌍둥이들에게서 들었던 적은 농담 중에서 당연 가장 웃긴 농담이다.

"혹여 성물이 있을지도 모르잖니?"

누나도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다른 이유를 말했다.

"너에겐 성물이 필연처럼 반응하니 이번에도 연관이 있을지 몰라."

우샤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다가온다. 난 눈을 꾹 감았다. 면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 어깨에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따듯해서 기분이 나빴다.

"힘내렴, 폴스타."

난 계속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알았어."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기꺼이."

"으음, 재미없네."

의외의 대답에 눈을 뜰 뻔했다. 난 눈꺼풀에 힘을 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엔 싫어했잖니. 하나, 지금은 약간의 걱정만이 남을 뿐. 굶주린 사냥꾼에게 먹잇감을 알려 주듯 기꺼이 악마를 죽이겠다고 하는구나. 예전이 재밌었는데. 깐따삐아의 도우너 님?"

결국 눈을 떴을 때, 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눈을 끔뻑거렸다. 이상하다. 천안통이 고장 났나?

왜 멀쩡해 보여?

난 우샤스의 따뜻한 미소가 되레 불편하게 느껴졌다.

* * *

멜리사는 우샤스의 부탁으로 솔가르 영지 외곽까지 향하는 공간 회귀 마법을 설치했다. 꼼짝없이 우샤스의 말을 듣는 걸 보니, 무언가 빚을 진 모양이었다. 공간 마법은 정말 편리하다. 멜리사는 어쩌면 쌍둥이들의 택시 기사가 아닐까?

걸시에게 마법이 완성됐다는 전갈을 듣고(알게 모르게 걸시와 멜리사는 서로 교류가 잦은 듯했다.) 정원에 설치된 공간의 문을 확인했다. 멜리사는 빈정이 상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문을 지나가기에 앞서, 속 쓰림과 울렁거림을 대비하고 있을 때였다. 달비가 개간네- 라고 짧게 울었다. 달비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저 자신감은 뭘까.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개간네.

무시하고 공간의 문을 열자 달비가 발굽으로 발등을 꾹 눌렀다. 그제야 난 녀석의 의도를 파악했다. 달비는 공간 회귀 마법에 휩쓸려도 멀쩡했지. 난 어깨를 으쓱하며 달비를 안았다.

혼일동화의 경지.

달비가 힘을 건네자 몸 주변을 감싸는 청백색의 물결이 피어올랐다.

난 망설임 없이 공간의 문을 열고 휩쓸리는 무너짐을 고스란히 느꼈다.

공간이 무너지고, 재구축되는 현상. 예전엔 어지럼증과 구토를 유발했지만 혼일동화의 경지에서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난 문을 지나쳐, 새로운 공간에 당도했음에도 멀쩡했다.

"고마워."

다, 다아.

달비는 발굽을 힘겹게 들어 제 눈 옆으로 갖다 댔다. 사슴의 몸 구조상 힘든 자세였으나 달비는 낑낑거리며 결국 자세를 성공했다. 녀석과 지내다 보면, 마치 아이를 키우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달비는 쿨- 한 인사에 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 저런 건 언제 배워 왔대.

* * *

"지긋지긋한 사막."

까끌까끌한 모래, 정수리를 덮는 태양열.

또 사막이다.

다행인 건 멜카란에 처음 당도했을 때보단 훨씬 나았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맹렬한 악의가 없다는 것만 해도 만족이다. 난 멀리 지평선을 바라봤다. 언뜻 보이는 '폭력의 신전'. 폭력교의 신도들이 모이는 성지이자 교주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이었다.

"세가 크다더니, 제법 많네."

길을 따라 신전으로 향하는 자들이 제법 있다.

어떤 이는 홀로, 어떤 이는 누군가와 같이.

걸어가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낙타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가고 있었다.

도시에서 신도들을 구한 뒤 폭력교 신전까지 후송하는 건가.

"씹새끼. 관리 좀 하지."

솔가르 공작은 짜증 나는 놈이다. 딱히 원한은 없지만 내 기억에 놈은 항상 역겨웠다. 열 살 이전, 아직 지구의 김창식을 떠올리기 전에도 말이다. 하긴, 퀄츠 성이 원래 솔가르의 성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의 레인버그에 대한 아집과 혐오는 이해할 만하다.

예전에는 직접적인 견제를 넘어 아버지를 비방하고 모함하기까지 했다고는 하나, 쌍둥이들이 위세를 떨친 후에는 잠잠한 편이었다.

"반란을 꾸민다라...."

물론 꼬리를 내렸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폭풍 속의 고요.

짐승은 사냥하기 바로 직전이 가장 조용한 법이다.

아무리 외곽이라지만 제 영지에서 이런 불법 폭도들의 집회를 용납하다니, 개새끼가 따로 없다.

난 멀리 떨어진 사구 위에 앉아 우샤스가 준비한 입교신청서를 확인했다.

[투쟁.]

-곧 다가올 항전에 맞서 싸울 자.

폭력의 가르침을 받아 쟁취할 자.

위에 서서 짓밟을 자.

잊힌 제국을 명예를 이을 용맹한 신도들은.

매나맨이 그믐달에 걸리는 날, 피의 성지를 뵈어라.

매나맨이 그믐달에 걸리는 날은 쿤칸의 관용어로 28일. 즉, 오늘을 뜻한다.

난 가입서에 적힌 문장들을 읽으며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종교적이지 않다. 신도를 모집하는 게 아니라 전쟁터에 나갈 병사를 모집하는 것 같았다. 대단히 나치스러운데?

"악마를 발견하기 전까진 폭력교 신도를 흉내 내라고."

귀찮은 일은 싫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 뒤집어엎을까도 생각했지만 만약 실패하면 우샤스의 화난 면상을 다시 마주해야 될지도 모른다. 일단 우샤스의 고견대로 악마를 찾기 전까진 폭력교 신도 행세를 해야겠어.

모래 언덕을 내려와 신전으로 향하는 신도 행렬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난 폭력의 신전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이자들의 행색을 살폈다. 어떤 멍청이들일까. 폭력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그냥 주먹을 써서 가진 놈들 무너트리자는, 대단히 양아치스러운 교리였다. 예상대로 신도들은 영 맛이 간 상태였다. 사방이 뚫린 짐마차에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불쾌한 악취가 나서 마차를 타고 싶진 않았다. 걸어가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폭력교의 양아치 교리에 감화된 자들이다. 마약을 했는지 눈이 노랗고 이빨이 다 썩어 가는 자들이 많았다. 저마다 허리춤엔 이가 빠진 철검을 차고 있다.

눈을 부라리며 지나갈 때마다 거칠게 어깨를 치고 가는 양아치.

웃통을 벗고 잘 익은 돼지고기처럼 생긴 육중한 몸매를 과시하는 양아치.

간혹 행렬에 동참한 여자 신도에게 기생충처럼 달라붙는 양아치.

양아치 소굴이구먼.

하지만 생각보다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폭력 위에 더 큰 폭력.

"저건 인간인가?"

행렬의 옆에서 사람들을 감시하는 거한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백 미터 간격으로 괴물 같은 덩치들이 신도들을 이끌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덩치다. 아인들도 놈보단 작겠다. 몸무게는 400, 500kg쯤 되나? 키는 3미터는 훌쩍 넘어 보인다. 인간이란 종을 한참 벗어났다. 기이한 기운이야. 인간보다 악마에 가깝다.

"악마가 인간에게 힘을 준다… 특이한 놈이로군."

거한들은 이곳에 악마가 있는 증거였다.

난 땅바닥에서 돌멩이 한 개를 주웠다.

그리고 거한을 바라보며 힘을 가늠했다.

한번 시험해 볼까.

돌을 던지기 위해 손을 뒤로 젖힐 때였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기척은 느껴졌으나 힘은 전혀 없는 자라서 무시했는데, 곧바로 내게 용건이 있을 줄은 몰랐다. 팔을 내리고 돌아보니 평범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맙소사! 진짜잖아?"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째서… 공자님께서 이곳에...?"

"나 알아요?"

"알다마다요! 퀄츠의 주민들이 공자님을 몰라뵙겠습니까. 긴가민가했는데, 공자님인 걸 아는 순간 놀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뻔했습니다."

퀄츠의 영지민인가.

변장하지 않은 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퀄츠 영지민을 이런 곳에서 본 건 탐탁지 않은 일이다.

"왜 여기에 있어요? 아저씨, 양아치야?"

그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닙니다! 구태어 말씀드리자면 폭력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는 폭력교 신전을 힐끔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그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어줬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며.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말라며.

퀄츠는 자비로운 영지였으나 늙은 부모를 봉양하라, 병든 아내를 간호하라, 말썽쟁이 자식을 보살피라, 짧은 기간에 거금이 필요했는데 우연히 전해 듣길, 이웃집 사촌 딸내미의 남편의 친구가 폭력교 사제인데 주먹 하나로 거금을 손에 쥐었다더라.

아무튼 그는 안타까운 사정이 있긴 했지만 결국 돈을 위해서 폭력교에 입교하고자 했다.

난 그를 찬찬히 바라봤다. 농사꾼이었나? 몸은 튼튼하다. 오히려 비계만 과시하는 양아치들보다 근육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다. 검을 배웠다면 꽤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걷는 자세, 몸의 균형만 봐도 알겠다. 그가 하루 동안 백 개의 밭을 가꿀 수 있더라도 싸우는 법을 모르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아저씨는 여기에 안 어울려."

난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정 돈이 급하면 퀄츠 성을 찾아와요. 날 만나기 힘들면 걸시라는 여자애를 불러서, 돈을 달라고 하세요. 이자 없이 빌려줄 테니까."

"예? 공자님. 하지만...."

그는 머뭇거렸다. 제 나름의 변명은 있는 듯하다. 자기는 꽤 힘을 쓰니까 자신이 있다는 건가? 고향에서 팔씨름 1위를 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걸.

"돌아가. 여기에 있다간 죽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확실히 죽을 테니까."

난 경고를 남기고 길을 걸었다.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힐끔 뒤를 돌아봤다.

제자리에 꼼짝없이 선 중년인은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에휴."

안타까움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던 거나 마저 해야지.

난 돌멩이를 쥐었다.

3cm가 채 안 되는 작은 돌멩이를.

3m가 넘는 거한을 향해 던졌다.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이다.

퍼억-!

쿵-!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윽."

난 거한의 뒤통수에 박힌 돌멩이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죽진 않았지만 일격에 기절했다.

거한이 쓰러지자 충격에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동료가 당하자 거한들이 달려왔다.

양아치들은 잔뜩 겁먹고 도망을 쳤다. 거한은 눈에 불을 켜며 범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내게 관심 두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난 유유히 난장판을 빠져나왔다.

수틀리면 그냥 다 뒤집어 버리자.

다아!

달비가 내 뜻을 알아 준 듯 쾌활하게 소리쳤다.

85

폭력교는 주제에 맞지 않게 일반 종교처럼 성직자 직위 체계가 있다.

평신도, 일반 신자들부터 시작하여 교주까지.

폭력의 신전을 향하는 이 무리는 신도다. 내가 쓰러트렸던 거한은 서로 사제들이라고 불렀다. 사이비 미치광이 종교 주제에 주교와 추기경도 존재한다.

기이한 건 성직자 직위가 교주를 제외하고 입교 시험에서 임명된다는 것이다. 폭력의 시험을 통과하면 최대 주교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상 종교를 가장한 무장 단체다. 전투에 부적합한 자들은 입교 시험으로 걸러 내고, 양질의 인재들만 건지는 건가.

난 괴물처럼 변한 폭력교 사제의 상태에 유의했다. 희미하지만 악마의 힘을 품고 있다. 예상하건대 직위가 올라갈수록 더 강력한 악마의 힘을 보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폭력교 교주는 쓸 만한 전투원을 찾아 제 힘을 나눠 주고 있다. 탐욕스러운 악마가 왜? 이유는 하나겠지.

"씨앗 심기로군."

악마가 군대를 모집한다.

제힘을 나눠 충직한 병사를 양성한다.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기 위해.

증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내 추론은 얼추 맞을 것이다.

이제 저 기괴하고 음산한 건물에서 확실한 증거만 찾으면 된다.

종교에 있어 '건물'은 어떤 의미일까.

이곳 사람들도 지구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옛 그리스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 시대의 종교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종교 건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종교란 경외의 영역이다. 그리고 무지한 신도들에게 직접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무래도 종교를 대표하는 외형, 즉 성당이나 신전 같은 건물일 것이다. 폭력교의 신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성공한 건물이었다. 보기만 해도 폭력교가 어떤 종교인지, 위세는 어떤지 짐작 가능케 했다.

"대단해. 반신반의했는데 이 정도라니...."

"냄새가 나, 돈 냄새가. 크큭."

신도들의 웅성거림만 봐도 위압감을 주는 데 성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폭력교 신전은 로마 시절의 콜로세움 경기장과 비슷한 구조였으나, 육 층이 넘는 탑이라 크기와 높이가 훨씬 컸다. 이 근처는 옛 유적지로 슈테르닐의 저주가 걸린 곳이라 하며 쿤칸인들은 기피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만한 규모의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 안 알려졌다고?

폭력의 신전은 웅장했다.

또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멜카란에서 느꼈던 혐오감이 저 건물에서도 느껴진다.

악마의 요람.

건물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악마처럼 보였다.

"저건… 피인가?"

눈썰미 좋은 남자 한 명이 경악하며 말했다. 건물 외벽의 창에서 검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가 멈추었다. 신전이 피를 토해 냈다. 살점이 뒤섞인 끈적거리는 사람의 피다. 익숙한 듯 거한들은 걸레를 가져와 '잔해'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에 광장에 모인 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살인범, 폭도, 농사꾼 할 것 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듯했다.

주변을 잠식한 진한 폭력의 냄새만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이 솎아졌다.

혹시나 하여 행렬에 동참했던 머저리들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택했다. 백 명이 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이탈했다. 폭력교 사제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역시 이들의 목적은 믿음을 지닌 평신도가 아니었다.

신전의 창문에선 끊임없이 비명과 신음, 피와 낡은 무기들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해를 한참 벗어난 혐오스러운 시설이다.

솔가르는 이래도 폭력교를 방치해 두고 있단 말이지.

100% 고의적인 방조다.

아무리 규모가 큰 이단교라고 해도 솔가르가 진심으로 토벌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민들이 자비 없는 폭도로 변해도 방관하고 있다. 솔가르 공작은 되려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이비 교도들과 폭도들의 무력 시위로 쿤칸이 큰 역경을 맞이하는 걸.

처참한 광경에도 광장에 모인 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 냄새가 익숙해 보였다. 용병은 평범한 자였다. 수갑을 벗지 못한 죄수, 쿤칸 군복을 입은 탈영병도 보였다. 더는 떨어질 곳 없는, 나락까지 도달한 자들이다.

"진짜만 남았나."

오히려 평범한 자들이 더 눈에 띈다. 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힐끔거리는 농부 아저씨와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붉은 머리 소년.

"호오, 저 녀석은 제법...."

라니스타에게 무공을 배우며 수십 명의 무인과 마주했다. 얻은 건 무공뿐만이 아니다. 난 무인을 알아보는 눈썰미를 얻었다. 붉은 머리 소년은 여기에 모인 자 중에서 가장 강하다. 물론 나 빼고.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자 신전의 문이 열리며 폭력교의 사제가 걸어 나왔다. 그는 거한과 달리 왜소한 몸집의 사내였다. 하지만 광장의 수백 쌍의 눈이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도 그는 담담했다. 인상과 달리 힘깨나 쓰는 자다. 거한들보단 더 강해.

사제는 눈가에 주름을 남기며 웃음 짓고는 친절한 말투로 소리쳤다.

"자자. 십 분 드릴 테니, 원하시는 분과 세 명씩 팀을 이루세요~! 어디 보자, 하나, 둘… 좋아. 수도 딱 맞네!"

교회 레크리에이션 시간이야?

명랑한 아저씨의 외침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세 명의 팀을 이루라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주변만 힐끔 쳐다볼 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락까지 떨어진 인간쓰레기들이 처음 보는 자를 신뢰할 리가 있나.

"늦어요, 늦어! 늦으면 모두 탈락 처리 할 겁니다!"

하지만 이어진 사제의 말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다.

"벌써 시작했다고요! 입교 시험, 첫 번째. 눈썰미 테에스트으입니다!"

입교 시험.

우습게도 그 한 마디에 광장은 사교 파티가 되어 버렸다.

사나운 인간들이 어색하게 동료를 구한다. 그 꼴이 퍽 우스워 난 낄낄거리며 지켜봤다. 서로 안면이 있는 자들은 쉽게 팀을 만들었지만, 대부분 외톨이라서 말 거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그래도 뒷세계엔 내가 모르는 유명세가 있는 건지 제법 강해 보이는 자들에겐 사람들이 몰렸다. 예상 못 했더라도 팀전이라는 건 안 순간 최적의 선택을 해야겠지. 그들은 모두 강하고 든든한 동료를 원했다.

다아?

난 멀뚱히 서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 발치에 앉은 달비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봤다.

난 씨익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동료는 너뿐이야."

다아.

달비가 정강이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토실토실 살 오른 뺨을 장난스럽게 쿡쿡 찌르자 달비는 털실같이 작은 꼬리를 흔들었다. 몸을 부대끼며 애정 표현을 하던 달비는 갑자기 폴짝폴짝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누군가를 향해 발굽을 들었다.

다아?

붉은 머리 소년을 가리킨 듯했다.

그도 나처럼 멀뚱히 서서 사람들을 지켜만 봤다. 얼굴에 독기가 잔뜩 올랐다. 동료를 구하지 않는 건 두 가지겠지. 부끄러움이 많거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실력자거나. 달비도 제법 눈썰미가 있네. 뭐,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레 그와 팀이 될 것 같았다.

"자, 십 분이 지났습니다. 어디 보자, 딱 알맞게 팀이 정해졌네요! 아깝네요. 잉여 인원이 생겨야 재밌을 텐데."

결국 선택받지 못한 두 명과 같은 팀이 되었다.

외형만 보면 가장 약골이다. 근육질의 몸매라도 얼굴은 순박하기만 한 농부 아저씨와 사춘기를 겪는지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붉은 머리 소년. 그리고 실실 웃기만 하던 나.

"흥. 실압근을 몰라보고."

나도 선택을 받지 못했다.

로브 속에 감춰 둔 실전 압축 근육을 보았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텐데.

팀이 생겼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헤헤, 도련님."

농부 아저씨가 쫄래쫄래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도련님의 신분은 비밀로 지켜 드리겠습니다."

"딱히 그럴 필요 없는데."

난 그의 뺨을 쳐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체 왜 돌아가지 않았죠? 뒈질라고?"

"그야 공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죠!"

"뭐요?"

"전 언제나 퀄츠의 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난 천천히 농부의 얼굴을 살폈다.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그는 몹시 부담스러운 결심을 해 버린 듯했다.

"전 어린 시절부터 대전쟁을 겪으며 자라 왔습니다. 제 나잇대의 쿤칸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큰 상처를 입었지요. 제 가족들은 위장자에게 모두 몰살당하였습니다. 마을의 목사였던 아버지가 사실 위장자였거든요. 하하."

그는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가족을 잃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 옅어진 건가?

아니, 아니겠지.

"공자님의 아버님, 위대하신 푸른 기둥 레인버그 공작 저하께서 마을을 구원해 주셨지요. 하하.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충성을 서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고아였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힘깨나 쓴다는 말을 들어 왔으나, 제 힘은 솔가르의 농노로서 밭 가는 데에만 쓰이고 말았습니다. 공자님의 경고를 듣고 제 가족을 위해 돌아가고자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이 경고할 만큼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면 더더욱 공자님을 홀로 남겨 둬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전 용기가 없었던 거지요. 이제야 천재일우의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은혜를 갚을 기회가!"

이런, 맙소사.

그러니 지금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고자 한 거겠지.

그는 내 예상보다 더 멍청한 호인이었다.

평범한 자였다면 30년 전의 은혜고 뭐고 도망쳤을 텐데.

이게 쿤칸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기사도의 폐해인가.

그는 이미 자신의 이념에 젖어 스스로를 너무 믿고 있었다.

세상에나, 팔다리가 잘리고 나서도 은혜니 뭐니 입에 발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 저기 저 소년도 공자님만큼 어려 보이는군요. 무슨 안타까운 사정이 있기에… 쯧쯧."

농부 아저씨는 붙임성이 좋았다. 홀로 떨어져 붉은 머리 소년에게 다가가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그들 곁으로 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아야겠지.

"난 퀄츠 출신의 나랑드 주니어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제 아들 또래인 것 같은데 말 놔도 되겠지요? 하하하-!"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으나,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색함에도 농부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소년! 이름을 알려다오! 같은 팀인데 붉은 머리라고 부를 순 업잖는가?"

소년은 대답을 거부했으나 농부는 집요했다.

결국 그는 작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말했다.

"…고운이오."

"고운? 아래 지방의 이름인가? 성은?"

"알 것 없잖소?"

"허허, 고슴도치처럼 까칠한 성격이로군. 난 명예와 부를 위해 폭력 교에 입단하고자 하네. 자네는 어린데도 불구하고 깊은 사정이 있어 보이는군. 뭣 때문에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러니까 알 것 없잖소!"

"그러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꾸나. 다 내 아들 같아서...."

"거참! 저 꼬마에겐 왜 안 물어보시오?"

꼬마?

날 보고 꼬마라고 했나?

"허흡. 꼬마가 아닐세. 저분은, 아니 저자는 나와 아는 사이니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지.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난 붉은 머리 꼬마에게 말했다.

"다 족치려고."

"뭐?"

"다 조져 놓으려고 참가했다. 왜? 넌 뭣 때문에 참가했는데?"

그는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두 명이 이유를 말했으니 이유를 끝까지 말 안 하면 혼자 머저리 같아진다.

결국 붉은 머리 꼬마는 한숨을 내쉬며 작게 말했다.

"어쩌다가 이런 자들과… 쯧. 이유는 따로 없소. 그저 날 증명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오."

"증명?"

난 일부러 박장대소하며 깔깔거렸다.

"하하하.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안 그래요, 아저씨?"

"응? 아, 그렇네. 하하하."

그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가 우스운가!"

"세상에 증명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사이비 교까지 와? 뭐, 폭력교를 소탕해서 솔가르에게 인정이라도 받을 요량이었나? 보고도 몰라? 여긴 그냥 병신 같은 곳이라고."

"…칫."

소년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날 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제의 지령이 떨어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삐돌이 새끼였다.

86

폭력의 신전의 문이 열렸다.

사제의 안내를 따라 입구와 복도를 지나가자, 위층으로 향하는 세 개의 계단이 나왔다.

좌우, 그리고 정면.

각기 다른 장소로 가는 계단처럼 보였다.

사제는 팀별로 각자 한 명씩 계단 앞에 서라고 명령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폭력교 입교 시험이겠지.

벌써부터 위층에서 들려온다. 끔찍한 비명과,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서 귀를 괴롭게 했다. 피의 비릿한 냄새는 코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전이라기보다 도축장에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에 오르기 전.

난 아저씨에게 마지막 경고를 했다.

"당신이 택한 거야, 난 선택권을 준 거라고."

작은 인연이라고 해도.

"죽어도 난 몰라."

신경이 쓰인다.

농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비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농노로 살아왔으나 나는 사내 중의 사내요! 이런 걸로 탓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뒤져도 몰라, 진심이야."

"…탓하지 않는다니까요."

* * *

스물두 명의 인간이 계단을 오른다.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몹시 신중하고 엄숙하다.

종교의 엄숙함이 아니라, 전쟁을 앞둔 병사의 엄숙함이다.

계단을 지나 위층에 오르자, 복도와 거대한 문이 우릴 반겼다.

핏자국이 묻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으나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핏물과 비명은 막지 못했다.

안내하던 사제는 내려가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제가 대신 나섰다.

"제군들."

제군? 이제 교단인 척도 안 하네.

그의 덩치는 몹시 컸다. 거한들과 비슷했으나 근육이 엄청났다. 사람 몸에 전차의 장갑을 붙여 놓은 듯했다. 천장과 바닥 간의 거리가 높은 편이었으나 그가 점프하면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것 같았다. 그의 기괴한 덩치에 놀라 침을 꿀꺽 삼키는 자들도 있었다. 난 그에게서 느껴지는 보다 확실한 악마의 기운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말카르토 사제다."

그의 목소리는 탁했다. 쇠를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는 인간의 성대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을 말카르토 사제라고 밝힌 놈은 거만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상의 전부는 힘이로다. 제군들의 선택은 옳았다. 폭력교의 성지에서 그대들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운명을 움켜쥐어라. 힘이 없으면서 군림하는 쓰레기들을 해치워라. 세례가 끝나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폭력교 교주님이야말로 순리 위에 설 분이시다."

덩치에 맞지 않게 말이 많은 놈이었다.

끔찍한 목소리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니 살심이 절로 치솟는다.

개간네!

달비도 잔뜩 화가 났다.

"나는 루차콴의 산악 병사였다."

시발, 그만 좀 말해.

"내 부대는 대협곡 근처에서 사나운 와이번들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끔찍한 아인들과 맞섰다. 부대원들은 싸울 줄 아는 놈들이었다. 우린 계속해서 승리를 취했고, 아인족의 머리로 막사를 장식했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와이번의 발톱에 허무하게 죽은 후, 어느 날이었다. 중앙 군부에서 파견한 기사 한 놈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놈은 상종 못 할 약골이었지. 장식할 아인의 머리는 줄어들고, 전우들은 와이번에게 먹히기만 했다. 그래서."

스물두 명의 신도 중에서 감히 그에게 입 닥치라고 할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난 귓구멍에 내공을 집중시켜 소리를 줄이는 것으로 평안을 얻었다.

"지휘관을 쳐 죽이고 내가 대신 전우들을 이끌었다. 삼 일에 걸친 습격을 막아 내고, 난 영웅이 되었지. 그러나, 상황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투에서 이긴 유능한 지휘관인 나를 쿤칸은 죄인으로 낙인찍어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알겠느냐? 세상은 썩었다."

사제는 오만하게 외쳤다.

"마침내 힘을 질서로 여기는 안식처를 찾았으니, 이곳이 나의 전쟁터이자 너희들이 나의 전우이니라. 그러니 기회를 주겠다. 내게 불만이 있는 자, 언제든지 덤벼라. 내 목을 취해 스스로 힘이 질서임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난 약골 지휘관과는 다르다. 너희들이 진정 따르고 숭배해야 할 힘의...."

콰앙-!

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가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그 거대한 덩치가 순간 붕 뜨더니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일격에 눈이 뒤집혀서 바들바들 떠는 사제를 향해 난 가운뎃손가락을 추켜들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배를 움켜쥐고 새우처럼 등이 굽었길래 발꿈치로 척추를 걷어찼다.

그는 이제 활처럼 휜 자세로 고통스러워하다 기절했다.

난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응? 어쩔거냐고."

그는 내가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힘이 전부라고 믿는 놈.

어쩌면, 전생에서 이어 온 혐오감일지도.

흔히 '랭커'라 불리는 능력자들 대부분이 저놈의 정신 상태와 비슷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수천 명이 희생당해도 당연시하는 자들.

헛소리할 때마다 쥐어박고 싶었는데.

살살 걷어차긴 했으나 과연 악마의 힘을 받은 지라.

그는 정상인과 달리 빠르게 상처를 회복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때마다 걷어차고 걷어찼다.

신도들의 날 보는 시선이 반갑다.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야.' 그런 느낌이다.

개간네!

어쩌다가?

시발, 쌍둥이들과 지내보라지.

퍽! 퍽!

두들겨 패고 있자, 아래층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릴 안내했던 사제였다. 그는 나와 쓰러진 사제를 번갈아 보다가 기침 몇 번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신도들을 향해 외쳤다.

"에… 그러니까. 작은 헤프닝이 있었습니다. 곧 입관入棺의 문이 열리니 신도들은 대기하여 주십시오. 문이 열리면 사제의 안내를… 아니, 그냥 들어가서 입교 시험을 치르시면 됩니다. 아, 젠장. 내가 또 설명을 해야 하잖아?"

결국 그는 짜증을 냈지만, 다시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문 너머에는 패배자들이 있습니다. 입교 시험에 탈락하거나 부상을 입어 떨어진 자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지요. 당신들은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제 몸을 지키시면 됩니다. 십 분 만 버티세요.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이 열릴 테니.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부상을 입거나 패배자들의 손에 붙잡혀 다음 층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당신들도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간단한 원리지요? 실패하면 다음 층에 오를 때까지 입관의 층의 머릿수를 채우는 겁니다. 혹은, 죽을 때까지. 하하...."

그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끝없이 반복하는 투기장이다.

능력이 있으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이 층에서 싸워야 한다.

형벌과도 같은 잔인한 시험에 폭력에 익숙한 신도들도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난 사제의 말대로 간결한 원리가 만족스러웠다.

얼마 후.

철문이 열리자.

강렬한 피 냄새와 더불어서.

우릴 노리는 사냥꾼들의 번득이는 시선을 마주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악마의 소굴이 분명해.

방 안은 살점과 핏물이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는 없었으나, 사제들이 치웠다고 봐야겠지. 어딜 보나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다. 우린 맨손이나, 그들은 조악한 무기라도 들고 있었다.

사제의 안내에 따라 방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죽음의 층.

위층에 오르거나 죽거나.

목숨을 위협받는 광인들의 독기가 지독했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부상은 약과였다. 그들 대부분은 부상자였으나 아무도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토록 처절한 자들의 절규는 오랜만이었다.

난 날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무기를 들었다고 해도, 몸이 멀쩡한 자들과 싸워 이기는 건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들 중, 내가 가장 어리고 덩치가 작았다. 어쩌면 날 토끼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건투를 빕니다."

사제가 문을 닫는 그 순간.

날 향해 달려오는 무수한 광인을 보았다.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부상자를 때리는 건 마음에 걸리니, 손가락 한 개로 상대해 주마."

그리고 내공을 담아 앞으로 뻗었다.

라니스타가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언젠가, 내가 라니스타에게 형 정도면 손가락 한 개로 마스터 검사도 죽일 수 있겠다고 농담 삼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고 대답했다. 그러며 한 번 보여 준 게.

바로 단씨 일가의 일양지.

능히 신공으로 분류되는 무공.

툭!

물론 난 일양지를 쓰지 못한다.

단지, 뛰어난 눈으로 한번 본 건 잊지 못할 뿐이고.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는 육체와 내공이 있을 뿐이다.

재빠른 몸놀림.

몇 초 만에 난 달려오는 여섯 명의 광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내공이 없는 자들의 혈도를 막으면 움직임도 봉할 수 있다.

관우는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었다.

입관의 층의 모든 광인의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단 일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9분이 넘는다.

난 팔짱을 끼고 문 앞에 서서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는 신도들을 향해 말했다.

"어째, 당신들도 덤빌 텐가?"

흉악한 악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젓는 광경이 퍽 우스웠다.

시간이 지나 문이 열리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타났으나.

신도들은 내가 오르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기웃기웃하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 * *

3층은 휴식이었다.

호텔처럼 여러 방이 줄지어 있는 복도에 도착했다.

중앙에는 쉴 수 있는 대기실이 존재했는데 내가 첫 번째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 내게 물과 먹을 것, 그리고 새하얀 수건을 가져다줬다. 그들이 말했다. 폭력교 입교를 환영한다고.

대기방에서 기다리고 있자, 하나둘씩 처절한 싸움을 겪은 자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난 수건이 필요 없었으나 그들은 새하얀 수건을 받자마자 피로 물들였다. 자신의 피인지, 타인의 피인지. 수건에 묻은 피가 흥건하다. 멀쩡한 건 빨간 머리 소년밖에 없었다. 내가 있던 층보다는 아니지만, 저 녀석도 꽤 활약한 모양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입관의 층을 통과했다. 상태도 제법 좋아 보이고.

난 담담히, 사람을 기다렸다.

개간네...!

달비가 짜증을 부린다.

덩달아 나도 짜증이 났다.

망할 놈.

문이 개방된 시간은 십 분.

몇 분이 지나.

끝날 무렵이었다.

난 계단 위로 올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다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이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그들의 사투가 짐작이 갔다. 손에 쥔 낡아 빠진 검은 핏물을 잔뜩 머금어 번들거렸다. 그들은 아래층의 광인처럼 눈에 독기로 가득했다. 물품을 주러 다가온 사제들에게 칼을 내밀며 경계를 한다. 십 분이 넘는 시간은, 인간을 미치게 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네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

젠장.

"웨엑!"

아저씨는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구토를 하며 쓰러졌다.

몸에 생채기가 가득하고, 얼굴엔 상처가 나 순박한 얼굴이 변해 버렸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다아?

달비는 쓰러진 아저씨를 발굽으로 마구 짓밟앗다.

그럴수록 쓰러진 그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