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지쳐서 쓰러진 자, 수건을 얼굴에 덮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자,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거나 주먹을 움켜쥐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자도 있다. 찢긴 피부에서 송골송골 피가 맺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흥분하여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방금 지옥을 헤쳐나왔다. 하지만 이상하다. 겁을 먹은 자가 없다. 오히려 광장에 있을 때보다 더 차분하다. 고조된 분위기 속 신도들은 마치 숙련된 병사처럼 고요히 불타오른다. 난 입관의 시험을 치른 후 많은 이들이 겁먹고 도망치거나 헛된 꿈을 접고 전의가 꺾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탈락자들의 최후를 목격했음에도, 자칫 죽을 뻔했음에도, 이들은 되레 전의를 불태운다. 독기가 서린 눈빛엔 망설임이란 보이지 않았다.
흥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보상이 주어진 대도 제 목숨값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은가?
그런데도 야만적이며 잔인한 현실을 수긍하고 다음 시험을 기다린다니.
"흠. 역시."
시험의 목적은 단지 전투원을 발굴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시련 자체가 훈련이다.
이 시련을 통과한 자는 악마를 숭배하는 사교도원이 되겠지.
"후우, 하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습니다."
대기실의 침상에 누워 기절했던 아저씨가 일어났다. 그가 얼굴을 덮은 수건을 내렸을 때, 얼굴에 난 상처가 몇 년이 지나 굳은 흉터처럼 변했음을 발견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생긴 상처처럼 보이지 않았다. 달비가 그의 기운을 북돋아 줬긴 했으나 상처를 치료하진 않았다.
난 아저씨의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계단을 올라왔을 때 그는 피부에 면도칼로 난도질당한 듯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했다. 며칠을 요양할 상처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멀쩡히 일어났고, 작은 상처는 사라진 상태였다.
"벌써부터."
난 부상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향을 받는군."
상처가 낫고 있다.
부자연스러운 회복력이다.
"아저씨. 사촌의 친구 뭐시기가 폭력교 사제였다고 했죠. 입교 테스트가 원래 이렇게 지랄 맞답니까?"
"자세히 이야길 해 주질 않아서 잘 모르겠네. 하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 그 녀석이 말했던 광명을 찾았다는 헛소리가 말이야."
"…광명을 찾았다고요?"
그는 작게 속삭였다.
"공자님. 이제 무언가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악귀들의 공격 속에서 전… 홀로 버텨야 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난… 내 손가락을 씹어먹던 놈에게 부러진 단검을 박아넣었을 때 머릿속의 안개가 순간 걷히는 듯했습니다. 여전히 폭력은 무섭습니다. 하지만 불필요하다곤 생각되지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위장자가 제 어머니를 죽이고, 솔가르가 내 삶을 짓밟고, 둘 다 레인버그의 위대함에 물러간 것도. 공자님도, 레인버그 저하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광을 쟁취한 것도 결국은 폭력, 폭력은...."
"뭔 개소립니까."
"…아, 죄송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다. 그저… 난…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난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눈을 떴다.
들키지 않게 손가락 틈 사이로 그들을 지켜봤다.
보였다.
악의가 심어졌다.
아저씨가 달라졌다.
모든 이들이 달라졌다.
고의 눈은 죄악을 비춘다.
붉은 눈은 보고 있다.
악마의 악의가 그들의 마음에 심어졌다.
멜카란과 같은 증상이다. 상식을 벗어난 악인들이 집결하던 멜카란은 흑기사와 검은 태양의 영향이었다. 폭력교도 마찬가지. 이들 또한 서서히 악마의 힘에 동화되고 있다. 인간의 이지와 지식을 멸시하고 강자생존의 저급한 폭력에 물들어 가고 있다. 거한처럼 몸이 기괴하게 변하거나 상처가 회복되는 것 또한 악마의 힘이다.
폭력교주.
폭력교의 꼭대기에 있는 자.
"만만한 놈이 아니겠어."
폭발적으로 늘어난 폭력교의 신도 숫자를 생각해 볼 때, 놈은 분명 강한 악마겠지.
개간네!
달비가 못마땅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발굽으로 땅을 콩콩 내려쳤다.
악마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나밖에 없었다. 달비의 힘이겠지. 할 일은 명확해졌다.
멜카란에서처럼 악의의 원천을 죽이면 폭력교의 흔적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 * *
세 명이 모두 살아남은 팀은 몇 팀 없었다.
팀원을 잃은 자들은 다시 저마다 수를 채워 세 명씩 한 팀을 꾸렸다.
그리고 팀별로 방을 배정받았다. 시설은 나쁘지 않았다. 세 개의 깨끗한 침대와 원한다면 하얀 사제복을 입은 자들을 시켜 음식과 물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다. 입관의 시험을 통과했기에 우린 이제 견습 사제의 신분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안내 사제로부터 다음 시험에 대하여 들었다.
다음 시험은 투쟁의 시험.
4층에 마련된 투기장에서 정해진 상대와 싸워서 이기면 된다.
대결은 일대일.
상대는 도전장을 제출한 팀과 맞붙는다.
이긴 자는 위로 올라간다. 진 자는 입관의 문으로 떨어진다.
경기 시간은 10분이다.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진하면 둘 다 탈락한다.
투사들은 빠른 시간 내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팀전이었으나 특이한 규칙도 존재했다.
팀원 두 명이 지더라도, 이긴 자는 다른 팀원을 구하기만 하면 대진표에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사제들도 참가한다. 투쟁의 시험의 승리자 세 명은 주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때문이다. 투쟁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제들의 수가 가장 많다고 하였다. 그들은 힘을 기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사실상 입관의 문을 처음 통과한 신도들이 토너먼트전의 우승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친절한 안내인 사제는 자신은 결승팀까지 올라가 봤다고 자랑했다.
독특한 규칙이기에 편법도 가능했다.
하지만 중간 편입 또한 강자의 특권이라고 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난 팔짱을 끼고 입술을 오므렸다.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다.
우승? 쉽지.
편한 길이라면.
준우승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승전에 맞붙을 팀에 편승하면 된다.
세 명 모두 살아 있더라도 한 놈 전투불능으로 만들면 끝이다. 두 명이 반발하면 혼자 나가 승리하면 된다. 정말 쉬운 길이다.
남은 방법은 귀찮다. 붉은 머리 소년은 충분히 우승 전력이다. 문제는 농부 아저씨. 그가 죽거나 입관의 문으로 떨어트리면 쉽겠지만 그런 쓸데없는 악행은 불필요하다. 혹은 그가 아슬아슬하게 결승전까지 살아남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귀찮은 방법이다. 아저씨가 포기하고 팀을 나가 사제 직위에 만족하면 좋을 텐데.
"아닙니다. 공자님. 전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깨달음을 얻을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전 할 수 있어요."
역시 그는 거부했다.
이미 악마의 힘에 물들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고민하던 난 문득 생각난 라니스타의 조언에 결정을 내렸다.
"헷갈리면 난관을 택해. 깨달음은 고난에서 오는 법이니."
'아저씨 키우기' 게임 시작이다.
* * *
투쟁의 시험.
토너먼트가 시작되었다.
폭력의 신전은 외형만 콜로세움인 줄 알았더니 내부의 기능도 같았다.
4층으로 올라가자 거대한 내부 경기장이 존재했다. 참가자들도 객석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경기장의 열기는 살벌했다. 지독한 훌리건들도 이들에 비하면 천사들이다. 모두가 죽음을 외치고, 선수가 상처를 입을 때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도박도 허용되어 승자 예측을 두고 판돈이 오갔다. 이놈들도 자신이 몸담은 곳이 '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남부 제도의 해적 아지트 정도는 되야 이곳의 광기와 비견될 만할까.
난 첫 번째 대전을 지켜보며 수준을 파악했다.
허접하다. 기껏해야 사제들의 싸움이다. 나라면 모두 일격에 해치울 수 있겠어.
하지만 아저씨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죽는다.
"승자는 베실로누! 패자는 전투불능이 도달하였음으로, 입관의 문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약자로 판별되어 교주님의 심판을 받을지어니!"
패배한 자는 복부를 창에 여러 번 관통당해 살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는 피와 내장을 토해 내는 자신의 배를 부여잡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부디!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쿵!
그때였다.
천장이 뒤흔들렸다.
난 본능에 따라 힘을 끌어올렸다.
불쾌한 것이 온다.
콰앙!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경기장은 뼈와 살점으로 어지럽혀졌다.
마치 풍선이 터지듯 사람 몸이 터졌다.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터져 나간 모습이다.
"전지전능하신 폭력교주! 교주! 교주!"
경악스러운 광경에 오히려 신도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교주를 연호했다.
교주의 심판이라고 하였다.
모든 이들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개눈깔은 보았다.
천장을 관통하고 벼락처럼 내려친 기이한 힘이 저자의 몸을 짓밟는걸.
"막을 수 있을까."
저 공격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살짝 오싹해졌으나 그와 더불어 '무림인'의 호승심이 생겨났다.
라니스타의 광기는 결코 이자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사실 아 다르고 어 다를 뿐.
폭력교의 폭력.
무림인의 무.
숭배하는 건 같을지도.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싸우고 싶다. 빨리."
난 신도들처럼 교주의 힘에 경의가 들지 않았다.
단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놈이 강한지, 내가 강한지.
주먹을 불끈 쥐던 난 문득 내가 뭘 하는지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교당한 거야."
이러면 라니스타 놈과 다를 바 없잖아.
푸드득-!
광장에서 봤던 살점과 피를 토해 내던 건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뭉개진 시체는 망자의 예의도 없이 창문 밖으로 바로 던져 버렸다. 삽으로 살점을 던질 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첫 경기가 끝났다.
죽은 자가 네 명, 입관의 문으로 떨어진 자가 열 명.
한 시간이 지난 후 나머지 16강전으로 치른다.
대진표는 금방 나왔다.
첫 주자는 불행하게도.
농부 아저씨였다.
* * *
대전에 나가기 전, 투사는 조악한 무기지만 제법 많은 가짓수의 무기 중에 한 개를 고를 수 있었다. 병기고까지 아저씨를 따라간 난 검과 방패를 고르려는 그에게 다른 무기를 추천했다.
"봉 들어요."
"예?"
"봉 들라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시간, 짧은 시간이다. 그동안 싸우는 법은커녕 검을 쥐고 휘두르는 법조차 가르칠 수 없다. 그러니 난 그에게 최적의 방법을 알려 줘야만 한다.
"농부가 무슨 검방이야? 아저씨, 괭이질은 지겹도록 했을 거 아니야? 봉 들어. 그게 아저씨 손에 익숙해."
"그야 밭만 수십 년 갈아왔으니.... 하지만 싸우러 가는데 괭이질이 무슨 소용입니까? 방패가 있어야 몸을 지키고, 검이 있어야 상대를 찌르지요!"
"어디서 말대답이야?"
"아니, 공자님...."
88
그는 당황하면서 머뭇거리다가 내가 노려보자 천천히 검과 방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억지로 봉을 주워 들었는데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도리깨질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나아. 수십 년간 곡식을 두들긴 솜씨잖아. 보리알맹이를 솎는 게 아니라 사람 쥐어팬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손에 익숙하긴 합니다만...."
그는 봉을 들고 위에서 아래로 휘둘렸다. 도리깨, 콩과 보리에서 알맹이를 솎아 내는 농기구다. 단순해 보여도, 이 시대의 농부는 수확한 농작물을 모두 수작업으로 처리한다. 농노였던 그는 과연 몇만 번의 도리깨질을 했을까? 우습게도,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그는 봉을 휘두르는 법을 안다. 그동안 도리깨가 사람을 향하지 않았을 뿐이다. 역사적으로도, 농민봉기를 영주들이 두려워한 이유가 있다.
물론 도리깨를 잘 휘두른다고 하여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운 자를 이길 수는 없다.
"기왕 길죽한 막대기를 휘두를 거면 창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 돼. 창날이 걸리적거려."
"공자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닥치고 이 동작 하나만 외우쇼."
난 그의 손에서 거칠게 봉을 빼앗았다.
"상대들은 대부분 광견처럼 거칠게 공격할 것이오. 그러니 개 잡는 법을 가르쳐 주지."
당두봉갈(當頭棒喝)의 초식.
머리를 한 대 세게 내려치는 타구봉법의 자세 중 하나로 정확한 힘의 분배와 빠르기가 필요한 무공이다. 난 봉을 들고 내려쳤다. 내공을 담지 않았으나 휘두르는 속도에 철봉이 갈대처럼 휘어졌다가 돌아왔다. 바람을 찢는 소리에 농부 아저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 대 맞음 골로 가겠군요."
"도리깨를 휘두르는 방법에 분배와 정확도의 묘리를 더한다고 생각하세요. 앞으로 한 시간, 이 자세만 주야장천 연습할 겁니다."
"이 공격 방법을 배우면…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니, 어차피 아저씨가 밀릴 거야."
그가 배울 수 있는 최적의 무공이라지만 한 시간 만에 당두봉갈을 터득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단지, 흉내만 되어도 된다. 당두봉갈의 묘리를 깨닫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저, 적의 뚝배기를 알맞게 깨트리면 끝이니까.
"방심을 유도해요. 아저씨는 겉모습은 좆밥이니까."
"공자님...."
"맞아 줄 건 맞아 줘요. 죽겠다 싶으면 도망가고. 벌벌 떨다가."
기회는 한 번.
"상대가 화가 나서 어차피 작대기에 한 대 처맞아도 안 죽겠다, 싶어서 덤벼들 때를 노리세요."
그가 할 수 있길 바란다.
"상대를 미친개로 여기는 겁니다. 봉을 휘두를 때만큼은 겁먹지 마세요. 광견을 내쫓듯 진심을 다해 멸시하며 봉을 휘두르는 겁니다. 아니면 적 대가리를 보리 알맹이로 생각하시던가요."
이 또한 상대가 월등히 강하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기껏 폭력교 사제의 수준이라면.
"그렇군요. 콩알을 솎아 내듯 상대의 대가리를 솎아 낸다. 음, 수십 년 동안 농사를 하며 배운 거라곤 농사일밖에 없었는데 이리 도움이 되는 날도 오다니. 공자님은 어떻게 이런 신기하게 싸우는 방법도 아십니까? 대단하십니다."
난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격려했다.
"살아서 봅시다."
"예!"
"죽어도 나 원망하지 말고."
"…이제 그 말씀 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
철문이 열린다. 투사들이 투기장으로 입장한다. 관중들은 죽음을 바란다. 식혔던 열기가 다시 뜨거워지고 노란 눈알들이 투사들을 감시한다. 농부 아저씨가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약속이라도 한 듯 욕설과 비난이 난무했다. 악마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폭력과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약자를 멸시하는 폭력교 사제들은 그가 얼른 죽길 바라는 눈치였다.
반대편의 철문이 열리고 상대방이 투기장으로 걸어 들어온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상대방은 같이 입교한 신도.
하지만 수준은 사제들과 엇비슷한 정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 만약 농부 아저씨가 내가 알려 준 동작을 흥분하여 잊어버리거나 과신하며 맞서고자 한다면, 그의 조각 난 시체들이 광장에 흩뿌려질 것이다.
하지만 난 담담히 그의 경기를 지켜봤다.
다아.
달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입교할 때의 다짐은 아직 유효하다.
엿 같으면, 뒤집어 버리면 돼.
투쟁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둘이 노려보다가 먼저 덤벼든 건 상대방. 아저씨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 거친 몸놀림으로 길죽한 창을 찌른다. 창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무기.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자라면 검보다 세 배는 좋다. 아저씨는 그에 맞서, 농사일로 단련된 튼튼한 종아리를 이용하여 열심히 도망 다녔다.
우우-!
그 누구도 투기장에서 도망치는 자는 없었다.
농부의 행동은 약자의 비겁함이다. 폭력에 심취한 관중들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아저씨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마,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도망가고, 피하고, 구르고.
흙을 뿌리고 돌을 던지고 욕을 내뱉고.
농부 아저씨의 기행이 끝나지 않자 야유도 끊임없었고.
난 아저씨의 행동이 비겁해질수록 미소를 짓게 되었다.
"기회가 왔어."
주어진 시간은 10분, 경과하면 둘 다 탈락.
안달 난 건 아저씨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그는 시간 초과로 탈락하길 원하지 않았다. 또한, 이제 일말의 긴장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아저씨를 잡아 죽일 파리처럼 생각했다. 그저 빨리 약자를 죽이고 다음 라운드에 올라가고 싶을 뿐. 몸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창만 휘둘러 댄다. 그는 성난 황소처럼 덤벼들었다. 상황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상대의 확실한 방심.
아저씨는 착실한 수험생이었다.
빠각!
덤벼드는 적을 향해 휘둘러진.
수십 년 경력의 도리깨질에 적게 첨가된 무공의 향기.
그 위력은 기꺼이 인간의 두개골을 부수었다.
끔찍한 파격음을 끝으로 상대가 쓰러졌다.
삼 분을 남겨 두고 승자는 아저씨가 되었다.
"와아!"
그가 내게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난 고개를 돌렸다.
승자가 나왔음에도 투기장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 * *
다음 상대는 빨간 머리 소년이다.
이름이 고운이라고 했던가.
그는 별걱정 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폭력교 사제였다.
신도가 아닌 사제, 폭력에 익숙한 자.
하지만 결과는 지금껏 싸워 왔던 경기 중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정해졌다.
단 140초 만에 승부가 났다.
승자는 빨간 머리 소년.
이겼음에도 그는 별 감흥 없이 등을 돌렸다.
"빨간 머리, 말투, 행동, 그리고...."
애써 감추려 해 봐도 놈의 검술은 쿤칸 제국의 검술이다.
그리고 라니스타가 등장하기 전까지 쿤칸 검술의 교본은 대부분 솔가르 공작가가 작성하고 교육했다. 아직도 기사들은 자신만의 검을 찾기 전까진 솔가르 검술을 배운다. 하지만 저 소년은 특히, 솔가르 검술을 깊게 파고든 것 같았다.
"검술. 우연인가?"
난 전에 생일파티와 사교장에서 봤던 솔가르 가문의 인간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아닌데. 솔가르 공작가에 저리 깔끔하게 생긴 내 또래 아이는 없었는데.
* * *
마지막 경기는 나였다.
보통 메인 매치는 마지막 경기가 되지 않던가?
16강전 마지막 경기의 투사가 된 건 아마 입관의 문에서 압도한 게 영향이 컸겠지.
"살육의 투사가 한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투쟁의 시험 결승전까지 올랐던 실력자. 그가 휘두르는 호쾌한 철퇴는 상대를 곤죽으로 만드니, 당해 낼 자가 없다! 명실상부 주교의 직위에 가장 가까운 사제, 말카르토!"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다.
강자존의 폭력교이니 편법은 물론, 불법도 어느 정도 허용되겠지.
내 상대가 저놈이라는 건 저놈이 날 상대로 정했다고 봐야 하나?
쿵! 쿵!
정녕 저게 사람의 발소리란 말인가.
말이 많기에 복부를 걷어차 쓰러트렸던 말카르토라는 이름의 거한.
갈비뼈를 모두 부러트렸는데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다. 이젠 인간과 거인의 혼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크하하-!"
여전히 불쾌한 목소리로 처웃는다.
목소리가 꽹과리보다 커서 관중들의 환호성을 뒤엎을 정도였다.
"놈!"
놈은 첫 대면과 똑같았다.
일격에 쓰러진 주제에 오만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며 외쳤다.
"내가 방심했다! 흐하하! 설마 '여명의 기둥'이 폭력교에 나타날 줄이야!"
"뭐야, 날 아나?"
"큭큭. 예전 루차콴 호위병 시절에 본 적이 있지. 건방진 상판대기라서 기억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더 용서 못 한다. 감히 '방심한' 날 기습하여 쓰러트린 놈! 위명과 달리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오늘 내 철퇴를 맞고 기둥이 부러지리라!"
"뭐야, 날 알고도 그래?"
"훗, 자만하는군. 여명의 기둥, 달의 아이라고 하여도 이제 내 상대는 못 된다. 난 내 자신의 '혼'을 교주님에게 바쳤다. 교주님은 막강한 은총을 내려주셨지. 큭큭, 교주님은 날 신뢰하고 있어. 크롸라! 나, 강하다! 하하!"
"이제 말도 잘 못하네. 머저리 놈."
악마의 은총이라고 하였나.
확실히 달라졌다.
놈에게선 악마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전에는 그래도 인간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확실히 '악마'다.
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리석은 공자여."
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 씨발놈아."
"겁에 질렸나 보군. 하! 죽기 직전에도 네 명예를 걱정하느냐?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여명의 기둥이란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이에나들이 덤벼들게 할 순 없지. 네 시체는 내 것이야. 후에 레인버그 공작놈을 쳐 죽일 때, 네 썩어서 구더기가 들끓는 머리를 억지로 먹여 주마. 흐하하-! 폭력교가 제국을 지배하리라!"
"선넘네."
난 손가락을 들었다.
"널 잡아먹고 난 주교를 넘어 추기경이 될 것이다!"
놈이 덤벼든다.
쿵! 쿵!
지진이 일어난다.
다아.
난 손가락에 힘을 모았다.
일양지의 묘리는 일점이다.
그러나 난 내공을 자유자재로 다루진 못한다.
다아다아!
그래도 문제없다.
달비가 신나서 뛰어논다.
검지에 모인 내공은 점점 날카롭게 가다듬어졌다.
방출 마법.
난 놈의 미간을 조준했다.
"호이!"
일양지.
혹은 '초능력 내 친구'.
일점으로 방출되어 날아간 순수한 내공은 일류 고수가 펼친 기의 발산과 다를 바 없었다. 놈의 죽음에 어울리지 않는, 분에 차고 넘치는 힘이었으나 더는 그의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푸슉-!
놈은 내게 도착하기 전에 쓰러졌다.
머리는 없다.
청소부의 수고를 덜어 줬다.
방출된 내공에 잘려 나간 머리는 이미 광장의 어딘가에 흩뿌려졌으리라.
목없는 몸은 맥없이 쓰러졌고, 잘려 나간 목에선 피 분수를 내뿜었다.
역겨운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서 등을 돌렸다.
관중석은 조용하기만 했다.
난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리며 셀레브레이션을 했다.
"워우-!"
눈치없는 농부 아저씨만이 환호성으로 화답을 해 줬다.
* * *
투쟁의 시험 16강이 끝났다.
여덟 팀이 올라갔으나.
전원 생존하여 올라간 팀은 세 팀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팀은 도전을 원하는 사제들로 채워졌다.
주교 직위에 오르길 원하는 사제들은 멍청한 말카르토 사제와 달랐다.
아마, 도중에 편입하는 자들은 어중이떠중이 신도들과 달리 제법 강할 것이다.
즉, 당연한 얘기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상대는 더 강해진다.
문제는 그 수준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
"아저씨요."
"예, 공자님."
"준비되셨는교."
"예, 공자님."
이틀의 시간이 남았다.
난 아저씨의 어금니를 부러트릴 각오를 했다.
처맞으면서 배우는 게 가장 낫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9
"아니,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못합니까?"
"그게 잘 이해가...."
답답했다.
"누가 그렇게 봉을 힘없이 휘두릅니까? 새끼손가락에도 힘을 주세요. 그리고 자꾸 내디딤이 반 박자씩 늦는데 따, 따, 따따따, 따따. 이 박자를 맞추라고요. 네? 리듬감이 그리 없어요? 미친개를 패기도 전에 되레 물렸다. 아, 끝났다 끝났어. 이미 당신 죽어서 지금 바깥에 비료됐어. 잘됐네, 잘됐어. 사막에 난 잡초 한 포기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 주셨어. 역시 농부야. 짝짝. 최후마저도 아름답네."
"공자님도 참… 말씀이 너무 거치십니다."
"그래서 뭐요? 죽어 가면서 나 원망하려고?"
"아니, 전부터 말씀드렸는데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니까요. 자꾸 그러시니까 진짜 원망감이 들려고 합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내 원망 듣곤 못 살지. 다시 따라 해 보쇼. 이게 허투르 휘두르는 것 같아도 배우면 진짜 세다니까."
난 봉을 휘두르며 타구봉법의 삼십육로 중 세 가지를 보여 줬다. 연속된 동작이라도 따라 하지 못할 건 없다. 하지만 농부는 머뭇거리며 내 동작을 따라 하다가 기어코 자빠지고 말았다.
"뭐지? 이걸 왜 못하지?"
답답함을 넘어 무기력함까지 느껴졌다. 이리 쉬운 걸 왜 못 따라 하는 걸까?
"아."
문득 라니스타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난 어금니를 매만졌다. 우야스의 힘으로 다시 돋아났긴 했지만, 4년을 어금니 없이 살아왔었지. 그때 난 왜 그렇게 심하게 맞았는가? 그가 날 미워해서가 아니다. 단지 답답해서다. 생각해 보니 더 열받네. 사이코패스 새끼, 답답하다고 어금니를 뽑아?
"흠, 역시 무림의 무공은 어울리지 않아. 속결로 배울 만한 게 아니군."
"무림이란 곳이 대체 어디길래 이런 해괴한 짓거리를 가르치는 겁니까. 아고, 삭신이야."
남은 시간은 3일도 채 되지 않는다.
번뜩임이 필요한 때다.
난 당두봉갈의 초식을 어렴풋이 흉내 내던 그의 움직임을 되새겼다. 수십 년간 휘두르던 도리깨질을 응용하였기에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었던 거다. 그는 농부다. 그에겐 농사일로 다져진 체력과 근력이 있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백 번은 휘둘렀을 낫과 삽, 괭이질.
"만류귀종이라, 아직 내가 담기엔 아득한 경지다만."
농사일을 사람 죽이는 방법과 연관시킨다면.
라니스타가 흉내 낸 무림인의 무공은 정말 다양했다. 어느 날은, 낚시대를 가져와서 날 쥐어 패기도 했고, 피리와 북, 쇠종처럼 악기를 들고 쥐어 패기도 했다. 라니스타는 만류귀종이란 말을 즐겨 했다. 그가 말하길.
[흐름은 결국 하나로 통일되니, 무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흐름을 모두 알아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흐름 하나하나가 '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괭이질을 하고 삽질을 하는 것 또한 '무'로 승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려 준 자세로 내일 아침까지 서 있으세요. 다리가 아파서 앉거나 지루하다고 누워 버리면 그냥, 자신을 비료라고 생각해요. 몸에 티가 나니까 변명하지 말고. 꾀부리면 비료라고 부를 거야. 인간비료, 인간똥덩어리."
"…알겠습니다."
순박한 농부의 눈에 독기가 어린다. 그도 똥덩어리라는 말은 모멸감이 드는 모양이다.
난 그에게 무림의 기공 수련 자세를 가르쳤다. 운기조식이랄 것도 없다. 당연히 내공은 모이질 않을 테니까. 다만, 그의 근육은 항상 긴장하여 무공을 배우기 좋은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처음엔 막막했다.
난 농부의 생활을 떠올렸다.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아로니아를 따던 시녀들의 움직임까지도.
"개눈깔, 개눈깔, 기깔나는 신의 눈깔."
농부가 낫을 휘두른다. 보리를 벤다.
낫을 휘두른다. 머리를 벤다.
갈대는 흔들린다. 농부는 바람에 따라 움직임을 바꾼다.
눈을 감자 오히려 더 선명하다.
마치 영화를 보듯, 생각하는 장면들이 뚜렷하게 재생된다.
천안통이 개안된 이후, 난 상상조차 현실처럼 바라볼 수 있었다.
희미하고, 불분명하고, 어지러이 사라지던 예전의 상상과 달리.
"도리깨질."
"괭이질."
"잡초 뽑기."
"모내기."
연결되어.
사람 죽이는 법이 되어 갔다.
* * *
"다시 말하지만 이건 삼류 무공이오."
"예, 예."
"숙련된 기사를 만나면 꼼짝 없이 죽을 테지."
"예? 그 말씀은… 숙련된 기사가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제대로 배울 수만 있다면, 적어도 이곳 사제 놈들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오...."
나는 길만 터 주면 된다.
그가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끊임없이 반복했던 농사일을.
단지 흐름을 만들어 사람 죽이는 방법으로 길을 터줬을 뿐.
성취.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오로지 그의 몫.
난 봉을 들고 밤새 고안해 낸 동작들을 그에게 보여 줬다.
타구봉법을 보여 준 것과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호오, 도리깨질을 저리 격하게 하시다니, 큼큼. 공자님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농사일도 뛰어나실 것 같습니다."
"음? 괭이질이네요. 어우, 일 분만에 밭을 다 갈아 버리겠습니다."
"잡초 뽑기는 상당히 힘들고 귀찮은 일이죠. 손아귀 힘만 세지기만 하고."
"네? 수박을 그렇게 딴다고요? 그렇게 심하게 안 비틀어도 꼭지는 잘라 버리면 되는데."
말이 엄청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나.
내가 보여 준 동작들은 그에겐 몹시 익숙한 농사일과 닮았으니까.
"따라 해 보시오."
무공을 가르쳐 줄 땐 엉거주춤 어색하게 따라 하던 그는 이제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리고 내가 알려 준 동작들을 따라 했는데 비슷하기만 할 뿐, 완전히 따라 하는 건 한 동작도 없었다.
그게 중요했다.
비슷하다는 것.
비슷하게나마 흉내 냈다는 것.
"첫 동작이 도리깨, 두 번째 동작이 괭이. 우선 이 두 가지를 실전에 응용하도록 하죠. 대전 상대가 되어 드릴 테니 마음껏 덤비시오."
"하지만 공자님, 체력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농부의 체력마저도 바닥났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걱정 마시오. 든든한 조력자가 한 명 있으니."
"조력자라면...."
그는 보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조력자가 곁에 있다.
농부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가 밤새도록 기공 자세를 한 후에도 저리 멀쩡한 몸 상태를 유지하는 건 달비의 영향이다. 달비는 아저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입관의 문에서 상처 입고 올라온 그를 발굽으로 신나게 짓밟은 것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아저씨가 패는 맛이 좋은가 보다.
조악하지만 무공이랄 게 탄생했다.
"음, 이 무공을 '농활검법'이라고 하죠."
"히익! '검법'이라뇨? 평민이 검을 다루는 법을...."
"이제 와서 무슨 소리람. 어쨌든 그럴 듯한게 더 좋지. 농사꾼의 고된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 검법이니 그리 대단할 것도 없어요. 애초에 아저씨가 누굴 가르쳐 준다고 해도 배울 사람도 없고, 체력만 왕창 소비되니 따라 할 자도 없고."
농활검법은 그야말로 무식했다.
농부의 움직임에 맞춰 억지로 비틀었다.
제대로 된 검법이 아니다. 같은 숙련된 농부나 배울 수 있을까.
그러니.
다르게 말하면 그만을 위한 최적의 무공이다.
"이건 배워도, 안 배워도 좋소. 어차피 따라 하기엔 무리일 테니."
마지막으로 난 그에게 농활검법의 '비기'라고도 할 수 있는 동작을 보여 줬다.
사실 그가 이 동작을 따라 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더해 가는 상상속에서 장난스럽게 탄생한 동작이었다.
"비기."
난 봉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소림 봉술과 비슷하나 보다 격정적이고, 난잡했다. 마치 어린애가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몸에 붙은 벌레를 내쫓는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록 허접해도 담긴 힘은 예사롭지 않다.
메뚜기 때를 쫓는 농부,
봉을 마구 휘둘러 주변을 끊임없이 공격하니.
"못 따라 하겠죠?"
"…네."
비기.
'메뚜기 떼 쫓기'다.
* * *
투쟁의 시험.
다시 막을 올렸다.
첫 출전 투사는 16강전에서 상대를 비겁하게 이겼던 농부 아저씨.
폭력교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인간을 솎아 내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상대는 신도이긴 하나, 입관의 문을 아무 상처 없이 통과한 실력자.
그러나 5분의 결투 끝에 농부아저씨가 이겼다.
예전 싸움과는 달리 정면으로 맞붙어 이긴 것이다.
* * *
빨간머리 소년도 이겼다.
압도적인 승부.
그의 이름을 외치는 자들이 생겨났다.
다음 차례는 나였다. 이번엔 나도 무기를 들었다. 농부가 사용한 철봉이다.
하아, 오늘 경기는 가장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
* * *
경기가 끝났다.
이기긴 했으나, 간신히 승리했다.
걸린 시간 9분 49초, 아슬아슬했다.
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뺨에 묻은 핏물을 닦아 냈다.
처절한 싸움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비틀거리며 경기장에서 나오다가.
복도를 지나쳐 대기실로 돌아왔을 땐 언제 그랬냐는듯 쌩쌩해졌다.
"괜찮은가?"
농부가 걱정하며 물었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빨간 머리 꼬마도 눈을 흘긴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느껴 봤네요. 오, 농부 아저씨. 그동안 제가 너무 심했죠?"
"으응?"
농부는 당황했다. 방금 사투를 벌인 사람치고는 너무 쾌활했기 때문이다. 사실 난 두들겨 맞긴 했어도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런 척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을 뿐이다. 폭력교에서 난 많은 걸 깨달았다.
특히 절대 이해 못할 것 같던 라니스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힘을 아끼는 게 더 힘들다더니, 과연.
상대는 약했다.
16강 때와 마찬가지로 손가락 한 개로 이길 수 있는 적이었다.
하지만 난 교육을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낮추었다.
농활검법만으로 승부, 게다가 몸상태를 농부 아저씨의 수준에 맞춰 마치 내가 그가 된 것처럼 처절하게 싸웠다. 싸우는 순간만큼은 내가 아니라 아저씨였다. 농활검법의 개선점과 보완점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내공을 얻은 후 내 경지는 보통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처한 역경을.
라니스타가 날 가르치기 위해 많은 무림인을 흉내 낸 것과 같은 이치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라니스타가 내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이유는 그는 스스로 더는 상승할 경지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약하게 낮출 수밖에 없었다.
사자가 쥐새끼 흉내를 낸다?
주둥이로만 내뱉으면 쉽지.
새삼 그의 괴물 같은 능력을 다시금 깨닫는다.
난 천안통의 힘으로 따라 할 수 있었다지만 그는 대체 어떻게 한 걸까?
게다가 난 농부 아저씨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이리 난해하고 벅찼는데, 그는 지금까지 내게 보여 준 무림인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다. 미친놈이다, 진짜. 더군다나 나와 농부 아저씨의 경지 차이보다, 나와 라니스타와의 경지의 차이가 훨씬 높을 것이 아닌가?
"이게 더닝 크루거 효과인가?"
무식할수록 용감하다.
알면 알수록 깨닫는다.
"이리 오세요. 아저씨."
"으응."
다음 경기가 있을 때까지 난 살벌하게 아저씨를 혼내키며 농활검법을 가르쳤다.
* * *
투쟁의 시험 4강.
경기를 앞둔 밤이었다.
그동안 과묵하게 자리만 지키던 빨간 머리 꼬마가 은근슬쩍 내게 말을 걸었다.
"나랑드 주니어, 저자는 처음 봤을 땐 무기를 쥐어 보지도 못한 초보였소."
난 무표정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단 며칠 내에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싸움에 익숙한 놈들도 이기고 있소. 대체 어찌한 것이오?"
"뭘."
"…모두 그대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오?"
"그런데."
"아니,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을...."
"꼬우면 반말해."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침대에 앉았다가, 얼마 후 다시 일어나서 내게 걸어왔다.
"첫 라운드 때 있잖아. 그 씹새끼, 어떻게 죽였어? 기이한 힘을 다루는 것 같던데. 너 마법사냐?"
경어를 쓰며 잰 척을 할 때는 난 그가 솔가르 가문과 연관된 가신 가문의 종자이거나 견습 기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말을 하자 말투가 완전히 변했다. 뒷골목에서 자란 자의 말투다.
그에게 작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난 잠시 그와 말상대를 해 주기로 했다.
90
"마법이야."
"응?"
내 대답에 당황한 빨간 머리는 말문이 막혀 의문만 뱉었다.
예상 못 한 대답이었는지 녀석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넌 마법사가 아니다. 지금껏 보여 준 몸놀림, 마법사의 기색이 전혀 아니야. 애초에 마법사가 무술을 어떻게 가르쳐? 정체가 뭐야 너?"
"응. 사실 무술이야."
"말도 안 돼! 그럼 손가락으로 기를 발산시켰단 말인가? 네가 마스터라도 돼?"
"응, 마스터야."
"그럴 리가! 마스터란 자고로 제국 제일 검술의 솔가르조차...."
나는 검지손가락을 그에게 내밀며 소리쳤다.
"호이!"
"힉!"
그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피했다. 머리가 달아나던 사제 놈의 모습이 생각난 듯했다. 뒤구르기까지 구르며 거리를 둔 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욕을 내뱉었다. 난 검지를 휘이 젓으며 말했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고? 시비 걸러 왔어?"
"아니, 그...."
빨간 머리는 다행히 염치란 게 있는 모양이다. 빨간 머리는 지금 상황이 어색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팀이라고 해도 며칠 동안 말 한마디 없다가 뜬금없이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 예의가 없다. 궁금한 게 있으면 우선 양해를 구하고 정중하게 물어봐야 한다. 놈의 실력을 보면 같은 또래 중에선 군계일학이었겠지. 하지만 지네 안방에서 하던 버릇을 내 앞에서 하는 건 용납 못 하지.
난 방에서 나와 운기토납의 자세를 취하던 아저씨를 불렀다. 그리고 실전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농활검법을 가다듬고 보완했다. 삼류 무공도 숙련도가 높으면 무시 못할 무공이다. 아저씨 또한 수련을 잘 따라와 며칠만 더 배우면 폭력교 사제들은 상대가 되지 않을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
밤새도록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다.
피곤함은 달비에게 맡긴다. 날개를 달아 줘요, 달비.
농부 아저씨의 도리깨질 숙련도가 제법 높다. 머리통에 제대로 가격할 수 있다면 청늑대의 견습 기사도 일격에 쓰러질 힘이었다. 몇 시간 동안 봉을 수백 번 휘두르던 농부는 수련을 멈추고 슬금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공자님. 아까부터 저놈이 떠날 생각을 안 하는데요?"
"놔둬요."
녀석은 검은 잘 다룰지 몰라도 은신술은 영 아니었다.
기둥 뒤에 숨어 우릴 힐끔힐끔 보며 관찰했는데 어느새 세 시간이 넘었다.
농부에게조차 들켰으나 빨간 머리는 자신이 잘 숨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따금 작은 움직임으로 농활검법의 투로를 따라 하기도 했다. 언뜻 듣기로, 무림에선 무공 수련을 훔쳐보다 들키면 바로 목이 잘린다던데.
"날이 밝으면 두 시간 정도 휴식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피로는 누적되었을 테니."
"예, 공자님."
더는 자세를 손봐 줄 게 없었다.
방으로 돌아갈 때 빨간 머리도 따라왔다.
난 갑자기 등을 돌려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녀석은 깜짝 놀라다가 이내 태연한 얼굴로 날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난 그의 태도에 호기심이 커졌다.
"말투는 쌍놈인데 자존심은 귀족이라, 희한한 놈이로군."
내가 느적느적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정면에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각오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나가면 300만 갤런을 주지. 몇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해 주면 돼. 어때? 300만. 괜찮잖아?"
"뭐 이 새끼야?"
"응?"
"나 돈 많아. 누굴 거지 새끼로 아나."
난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자꾸 귀찮게 하면 호이 맛 좀 보게 될 거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 계속 쳐다봤다. 그러다 강하게 삿대질을 하자 다시 허리를 숙이며 뒤구르기를 했다. 역시 이상한 놈이다. 의외로 자존심이 센 놈은 아니다. 질문이 생겼다고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알던 평범한 귀족들은 수치로 여기는 행동이다. 또한 내 행동에 겁을 먹는다는 건 내 실력을 알아봤다는 뜻. 무지렁이 같은 놈도 아닌데. 뭘까, 마치 강제로 귀족 프라이드를 주입한 뒷골목의 소년 같다.
문득 생각나는 단어가 있었으나.
난 예절을 아는 지식인이었으므로 굳이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칫."
멋진 뒤구르기를 한 녀석은 황급히 방을 나갔다가 경기를 한 시간 앞두고 돌아왔다.
* * *
투쟁의 시험 4강.
이제 지루하기만 하다.
가장 문제였던 농부 아저씨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온 이상, 난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다. 벌써 피비린내 나는 역겨운 곳에서 며칠이 지났다. 결전은 우승 후, 폭력교 교주를 만난 뒤 아저씨와 빨간 머리 꼬마를 내려보낸 후 곧바로 날뛸 생각이었다.
첫 경기와 마찬가지로 싱거운 승부를 결정지은 후 빨간 머리 녀석의 차례가 되었다.
그동안 선전하던 녀석은 상대한테 첫 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앞선 경기와는 달랐다. 그는 허술한 공격을 당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자칫 하단 목이 베일 뻔했다. 그럼에도 그는 손에 쥔 봉을 어설프게 휘둘렀다. 당장 적을 이길 뻔한 기회가 더러 있었으나 그럴 때마다 그는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솔가르 제국 검술은 상당한 수준이다. 제국 기사 중에서도 이름 꽤 날릴 정도다.
"젠장!"
그는 화를 내며 다시금 봉을 휘둘렀다. 그 자세를 보건대, 어리석게도 농활검법을 따라 하는 듯했다. 아무리 삼류 무공이라지만 어제 멀리서 훔쳐본 것만으로도 따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봉을 검처럼 휘둘렀다. 무게중심을 잃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상대와의 실력 차이가 심하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결국 일 분을 남기고 그는 몸에 익숙한 투로를 따라 적을 제압했다. 승리하였으나 눈빛은 분노로 일렁거렸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인가? 빨간 머리는 손에 쥔 봉을 거칠게 메다꽂았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아 짜증 난 어린애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 * *
"미안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녀석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또래에게 가르침을 구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난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날 '꼬마'라고 부른 것 때문이 아니다. 이상하게 짜증이 나는 놈이었는데 그동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과를 듣자 난 깨달았다.
"이제부터 널 교관… 선생이라고 생각할게."
전생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언젠가 내게 '눈의 비밀'을 알려 달라던 놈이 있었다. 그는 끈질기게 날 설득했다. 나는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 힘을 기술처럼 여겼고, 또한 자신이 능히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당당했다. 자신이 고개를 숙이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결국 그는 대장이 되었지만, 끝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빨간 머리 녀석은 재능이 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보통, 저런 놈은 성공한다.
난 그를 가만히 노려봤다. 날 마주 보는 눈알이 보석처럼 밝다. 어떠한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다. 녀석은 자신이 고개를 숙이면 내가 무공을 가르쳐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저런 걸 재능 있는 자의 자존감이라 부른다.
"왜?"
"많은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게. 몇 가지 물음에만 답해 줘. 내 사정을 말할 순 없지만… 믿어 줘. 이 일이 끝나면 꼭 답례할 테니까."
"네놈한테 있는 거나 잘 배우지, 왜 쓸데없이 다른 걸 배우려고 해? 네가 다루는 검술이 더 강해. 모르진 않을 텐데?"
그는 강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날 증명하기 위해 이 끔찍한 곳까지 제 발로 걸어들어왔어. 하지만 미개한 야만인들의 다툼에선 무엇도 얻지 못해. 그런데 너에게선, 어쩌면 내가 원하던 걸 얻을지도 몰라."
소년의 치기 어린 영웅심도 아니다.
그가 자신을 증명하겠다고 한 말은 서투른 각오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는 거다.
"부탁하마."
난 팔짱을 끼고 벽에 몸을 기댔다.
빨간 머리의 표정이 들뜬다. 하지만 난 그를 보고 있지 않다.
성당에서 보았던 우샤스 누나의 섬뜩한 미소와.
솔가르 영지 내에 창궐하는 악마의 씨앗들.
그리고 때마침, 녀석이 등장했다.
연이란 우습다. 작은 베풂에도 무엇이 돌아올지 기대하게 한다.
난 씨익 웃었다. 그는 내 미소의 의미를 후에 깨닫게 될 것이다.
"뭐가 궁금한데?"
"아! 고마워! 우선! 그래, 왜 봉을 다룰 때 가장자리와 중앙을 파지하고 휘둘러? 힘을 실을 거면 양손을 이렇게 가지런히 잡는 게 낫지 않나? 중심 이동을 용이하게 하려면 차라리 세 뼘쯤 거리를 두는 게 좋겠고. 그리고 왜 상대방이 공격할 때 무릎을 굽히고 봉 끝을 아래로 두지? 정면에 두는 게 공격을 대비할 때 훨씬 좋잖아? 아까 싸울 때 느꼈는데, 미안하지만 허점투성이야! 근데 이상한 게, 저 아저씨의 실력이 크게 늘어났단 말이야. 아, 또...."
그는 머릿속에 담아 둔 질문들을 속사포로 뱉어 냈다. 배우고자 하는 열성적인 모습에 난 머리를 쥐어 박고 싶었다.
"닥치고 내가 하는 거 보고 기억해."
녀석은 입을 꾹 다문 채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난 녀석의 봉을 빼앗아 든 후 농활검법을 펼쳤다. 농부 아저씨에게 가르쳐 준 것과 달리 일 초부터 마지막 초식까지 연달아 이어서 펼쳤다.
"오, 가까이서 보니 다르네."
초식을 마친 후 녀석에게 봉을 던지며 말했다.
"해 봐."
빨간 머리가 농활검법을 펼친다. 역시, 이놈. 재능이 있다. 아저씨에겐 미안하지만 재능 차이가 심했다. 며칠을 배워야 간신히 따라 하던 아저씨와 달리 녀석은 한 번 가까이서 본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투로를 외우고 똑같이 펼쳤다. 삼류무공이라고 해도 이 정도 재능이면, 녀석은 흔히 말하는 천재일지도 모른다.
감흥은 없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겨우 저 정도 '천재'는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이제 알 것이다."
난 빠르게 달려가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녀석은 당황하며 반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힘이 들어가는 내 손과 무신경한 눈빛에 곧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봉을 휘둘렀다. 농활검법을 제법 따라 했으나 날 스치지도 못했다. 휘두른 봉에 침대가 부서지고 방이 엉망이 되어 갔다. 난 한 대도 허용치 않고, 주먹으로 복부를 가격했다. 그는 방금 마신 물을 토해 냈다. 더러워진 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그는 결국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그 뒤, 기세는 더 매서워졌다.
침대를 부수지 않고, 쓸데없는 걸 베지 않고.
오로지 날 베기 위해 휘둘러지는 검.
야단법석은 덜했으나 위협은 더 컸다.
"흡! 어떻게?"
난 놈이 휘두른 검을 한 손으로 잡았다. 내공을 다루는 자와 아닌 자. 절정의 고수와 이류 무사. 그리고 마스터와 평범한 검사의 극명한 차이다. 맨손으로 칼날을 잡았으나 놈이 아무리 검을 빼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새로운 걸 배우고자 한 건 지금 배운 검술에 한계를 느껴서인가?"
검을 놓자마자 힘을 주고 있던 녀석이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멍청한 녀석아. 아직 기의 발현도 못 한 놈이."
부서진 침대에 튀어나온 나무토막에 머리를 박힌 놈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난 살짝 안타까움을 느꼈으나 이 정도 '각인'은 약과다. 놈이 알고 싶어 하는 게 이런 거겠지.
"검을 자유로이 사용해라. 네 검법이 몰아치는 공격 위주의 검술이라고 해도, 이미 적의 목이 달랑거리는데 너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난 아파 하는 녀석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눈을 마주친 녀석은 깜짝 놀라 겁에 질린 얼굴로 검자루를 꽉 쥐었다. 하지만 차마 휘두르진 못하는 놈이다.
"왜, 꼽냐?"
"큭."
"네가 얻고자 한 깨달음이 설마 무술을 배우지도 못한 농부의 재주는 아니었겠지. 일어나. '라니스타식 수련'이 남았으니까."
며칠이 지난 후.
소년의 어금니는 훌륭하게 빠졌다.
91
"선생! 알려 준 대로 소금을 한 아름 물고 있었더니 이제 잇몸이 안 시려. 하하."
"독한 놈, 진짜 하네."
"선생이 성격은 나빠도 빈말은 하지 않잖아. 그리고 이 정도면 싼 편이야. 선생 덕분에 많은 걸 얻었으니 어금니 하나 정도야! 선생 줄까?"
빨간 머리, 고운이 내민 손바닥엔 반질반질한 어금니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녀석의 성격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런 곳에서 만난 또래 남자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부터 정신 나간 놈인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결승 전날까지 계속 싸울 줄은 몰랐다. 너도 미친놈이다."
"왜 자꾸 날 미친놈이라고 해? 미친 건 선생이지."
"칭찬이야. 미친놈일수록 강해지거든. 대표적인 예가… 됐다. 넌 내가 아니라 이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해."
"응? 어떤 녀석?"
개간네!
달비는 착했다. 난 녀석이 아저씨나 빨간 머리를 좋아해서 자연의 기운을 나눠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녀석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나눠 준 것이다. 요새 항상 불만에 차서 개간네- 라는 노래하는 달비라서 알아차렸다. 뜻하지 않게 부려 먹게 됐어. 이 일이 끝나면 정령석을 구해다 줘야지.
"선생, 선생이 보기에 지금 내 수준은 어디쯤이야?"
고운은 며칠 동안 '라니스타식 수련'에도 지치지 않고 따라왔다. 그와 겨루고 검술을 다듬어 주면서 난 점점 확신이 들었다. 그는 솔가르 가문과 확실히 연관이 있다. 개눈깔은 잊지 못한다. 어릴 적 기사 선별식에서 몇 번 본 게 다지만 솔가르 공작이 아끼는 기사들의 검술 시범을 본 적이 있었다. 솔가르 가문 특유의 맹렬한 검법을 고운 또한 익히고 있었다.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배우는 제국 검법과는 격이 달랐다.
또한, 그에게서 강렬한 원념처럼 보일 정도로 강함에 대한 집착을 느꼈다.
그는 비무가 끝나면 항상 저렇게 자신의 경지를 물어보고 했다.
"넌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상하지 않느냐? 보통 사람은, 내 존재 자체가 기이하다고 여길 거야. 너처럼 대충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글쎄. 선생은 아마, 마스터와 가까운 천재 검술 소년쯤 되지 않을까?"
"그 천재 소년이 우연히 너와 만나 검을 가르쳐 주고?"
"세상엔 신기한 일들이 많거든. 나도 어릴 적에 개밥이나 훔쳐먹다가 지금은...."
고운은 말을 멈추고 잠깐 생각하다가 히죽 웃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 선생."
고운은 검술 재능은 제법이었으나 머리 돌아가는 속도는 걸시와 비슷한 듯 보였다. 비무를 할 때 제 입으로 제국 검술이니 솔가르이니 몇 번 언급했으면서 아직도 숨길 모양이다. 녀석이 검을 손질하러 갔을 때, 옆에서 수련하던 농부 아저씨가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어째 저 아이와 친해진 것 같습니다, 공자님."
난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통 모를 일이군요.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는 겁니까? 전 요 며칠 공자님이 저 녀석을 두들겨 패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하긴, 사실 천안통으로 보지 못했다면 나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녀석은 순수하게 자신의 경지가 상승했다는 것만 기억했다.
어금니가 뽑힌 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놈이었다.
"내가 눈썰미 하나는 끝내주죠. 싸가지 없는 놈들도 친해질 방법을 잘 알아냅니다."
"흐하, 지난 며칠 동안 공자님께 처맞기만 했는데도 저리 친하게 구는 걸 보면… 아, 설마!"
농부는 뭔갈 깨달았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키며 놀라워했다.
"어쩌면 저 소년, 어린 나이지만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일지도 모릅니다."
"개소리를 즐기시는군요."
"공자님이 귀히 자라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세상엔 수많은 변태가 존재합니다. 녀석이 처음 보이던 태도를 기억하십시오. 웃어른이 말을 걸어도 무시하던 예의 없는 놈이었는데 지금은 내게 먼저 인사도 건넵니다. 공자님이 손봐 준 뒤로 저렇게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예?"
개간네!
"…어쨌든 이제 결승만 남았네요. 기억하세요. 당신의 가장 큰 무기는 수십 년간 햇볕과 흙으로 단련된 힘이라는 거."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살아서 나가 레인버그 저하께 고하실 때 거짓 없이 제가 겪은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예?"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농부 아저씨는 지금까지 내 곁에 남은 이유를 말해 줬다. 처음엔 은혜 갚기라고 해서 그저 호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욕망이 그득한 사람이었다.
"쿤칸 대제국의 명망 높은 귀족 가의 자제분들은 모두 시험을 치른다고 들었습니다. 여명의 기둥이라 불리시는 공자님이니, 곧 은퇴하실 레인버그 저하의 뒤를 이어 새로운 푸른 기둥이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이 한 몸, 비록 농노 출신이나 레인버그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죠?"
"예, 예!"
"그럼 결승전이 끝나고, 이 살인마 소굴의 대장을 만난 후에 자유가 되면 곧바로 퀄츠 성으로 달려가세요. 그리고 가족들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면 언젠가 초대장이 갈 겁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내 기사단에 그는 필요 없다.
난 함박웃음을 짓는 그에게 속마음을 숨기고 같이 웃었다.
* * *
투쟁의 시험 결승전.
폭력교 주교의 자격을 얻는 투쟁의 장이 열렸다.
앞선 경기와는 다르게 결승전에 올라온 세 명은 한 팀이 되어, 두 명이 이겨야만 우승할 수 있다. 한 경기만 이기면 주교의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결승을 통과한 세 명은 사제들에게조차 출입을 불허하는 혈맹의 층으로 오를 수 있다. 그곳에서 세 명은 혈맹의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언제나 주교가 될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첫 투사는 나랑드 주니어였다.
농사꾼의 몸으로 결승에 이른, 폭력과 가장 거리가 먼 사내가 투쟁의 마지막 시험대에 올랐다. 그의 결승 상대는 부테르텐 사제이다. 농부의 몸은 오랜 농사일로 단련되어 단단했지만 부테르텐 사제의 우람한 근육에 비하면 호박과 사과의 차이였다. 부테르텐 사제가 등장하자 관중들은 환호를 멈추었다. 그들은 기대하고 있다. 곧 뒤틀리고 찢길 농부의 몸을.
부테르텐이 폭력교 사제가 된 지는 3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사제가 되기 전, 악마에게 가족을 잃었다. 화목한 가정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존경하는 부모는 악마에게 먹혔고, 사랑하는 여동생은 악마에게 유린당했다.
그는 분노했다. 하지만 막대한 분노를 악마에게 풀진 못했다. 강력한 악마에 비해 그는 나약했기 때문이다. 분노는 응어리졌고, 쌓일수록 그의 정신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쌓인 분노를 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자신이 악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6개월 동안 쿤칸 제국 전역을 떠돌며 여동생과 닮은 흑발의 여자 네 명을 죽였다. 피해자의 시신은 사지가 뒤틀려 있었다. 모두 맨손으로 행한 상처였다. 그는 응어리진 분노를, 손으로 잡고비틀고 찢는 것으로 해소했다.
그가 주교가 되지 못한 건 같은 팀을 하고자 하는 사제와 신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 그의 강함을 믿고 팀원이 된 자들은, 언제나 비틀린 시체로 나타났다. 그가 이번에 '가장 약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이번에도 투쟁의 시험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부테르텐은 타고난 괴력꾼이었다. 사제가 되기 전에도 그는 맨손으로 벽돌을 부수고 나무를 쪼갰다. 사제가 되고 나선 폭력의 은총을 받아 맨손으로 뼈를 부술 수 있게 되었다.
탕탕-!
부테르텐 사제는 나랑드 주니어와의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방패를 주워 들었다. 항상 맨손으로 싸우던 그가 병장기를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이 몹시 간지러웠으나 간신히 참아 냈다. 상대를 무시하지 않아서다. 적은 봉을 잘 다룬다. 그 힘은 바위를 부술 정도이니, 맞아선 안 되는 힘이다. 부테르텐 사제는 신전을 나가 분노를 풀기 위한 일념으로 전투에 진심을 다했다.
"젠장, 망할 놈!"
나랑드 주니어는 거칠게 봉을 휘둘렀다. 수십 년간 휘둘러 온 도리깨질이 사람 죽이는 방법으로 승화된 기술이다. 그는 이 기술로 경기장에서 세 명의 사제를 꺾었고, 경기 후에 덤벼드는 사제 일곱 명을 해치웠다. 하지만 상대는 모두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처럼 방패로 몸을 방어하는 자는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방패를 거칠게 내려칠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범한 사람은 버티지 못하고 팔 근육이 마비되고 뼈가 골절되었을 힘이나, 부테르텐 사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집념으로 방어하며 기회를 노렸다.
고수에게 배움을 받았으나 결국 나랑드 주니어는 싸움에 익숙지 못한 농부다.
지금까지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방심을 유도하던 그는, 처음으로 상대를 밀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싸움의 우위에 있는 건 익숙한 경험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을 느낀 나랑드 주니어는 점점 방어를 소홀히 하고 공격에 치중했다.
그 순간이었다.
부테르텐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봉이 옆구리를 향해 찔러 들어올 때, 부테르텐은 방패를 버리고 곰처럼 거대한 손으로 봉을 붙잡았다. 그리고 황소의 뿔도 부러트린 괴력으로 농부에게서 봉을 빼앗았다. 나랑드 주니어는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봉을 놓치고 말았다.
봉을 멀리 던진 부테르텐은 희열에 찬 눈으로 나랑드 주니어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저 잘 익은 과일처럼 '무른 근육'을 비틀어 찢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배출'의 기쁨을 느꼈다.
"역겨운 놈!"
농부가 덤벼든다.
부테르텐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맨손 대결이면 주교라도 절대 지지 않는다.
황소처럼 달려든 농부의 손을 부테르텐이 낚아채듯 잡았다.
"끄으윽!"
서로 양손을 맞잡고 힘을 겨루는 꼴이 되었다.
하나 농부의 손은 괴사하기 직전처럼 푸르게 변해 갔다.
그는 응어리진 분노를 풀기 시작했다.
점점.
가족을 잃은 분노가 희열로 차올랐다.
* * *
나랑드 주니어.
그는 악마에게 가족을 잃은 후 솔가르의 농노가 되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그는 분노를 잠재웠다.
하나.
악마를 향한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점점.
가족을 잃은 슬픔이 분노가 되어 갔다.
* * *
"농부를."
부테르텐은 기이함을 느꼈다.
"우습게!"
손가락이 꺾인다.
적이 아닌 자신의 손가락이.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이 내가 힘에서 밀린다고?
"보지 마라!"
뚜둑-!
한순간이었다. 농부의 힘은 부테르텐의 괴력에 한참 못 미쳤으나 단 한순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은 확실하게 그의 힘을 압도했다. 그 차이는 부테르텐의 손가락을 꺾었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농부는 재빨리 달려가 봉을 주워 들었다. 당황한 부테르텐은 황급히 방패를 주워 들었으나, 농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깨닫고 말았다.
"악마?"
"좆 같은 소리하네!"
농부는 악에 바친 울분을 토해 냈다.
그의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부테르텐은 악마라고 생각했다.
"비기, 좆 같은 놈 개같이 패기!"
본래의 명칭은 메뚜기 떼 쫓기.
하지만 명칭을 한 남자는 농부의 말에 박장대소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언뜻 농부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듯한 봉은 방패를 든 부테르텐의 사각지대를 정확히 노리며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그가 봉을 내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을 땐, 이미 부테르텐의 온몸은 벌에 쏘인 듯 퉁퉁 부은 상태로 쓰러진 후였다.
* * *
살인마 부테르텐을 두려움에 떨게 한 두 명.
얼마 전 제국을 떠들썩하게 한 '베렘의 사형수'.
일곱 명의 기사를 무참히 죽인 강자.
그리고 다른 의미의 진정한 '폭력'.
백 명을 죽이고 먹어 힘을 얻은 '주술사 벰'.
주교를 넘어 추기경 자리를 노린다던 신흥 강자.
그러나 둘은.
한 명은 1분 23초.
다른 한 명은 1초가 되기도 전에 죽었다.
* * *
"선생의 힘은 정말 가늠할 수 없어. 어쩌면 우리 아버지보다 강한 거 아니냐?"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엿 같은 사람이지만, 강한 사람이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꼭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선생도 만나면 좋아하실걸?"
"참, 너도 대단하다."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솔가르 가문과 연관 있다곤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 공작의 아들일 줄이야.
92
"곧 목을 따 주마, 애송이!"
"날 만났으면 넌 진작에 죽었다! 씹창놈아!"
투쟁의 시험을 통과했다. 사제가 아닌 신도 세 명이 시험을 통과하자 폭력교 사제들이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수십 명의 비난 속에서 아저씨는 의기소침했고 고운은 애써 무시했지만 난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지랄하네. 다 기억해 놨다. 발가락 마디마디 다 분질러 주마."
홀로 미친개처럼 응수하며 놈들의 얼굴을 노려봤다. 정작 눈을 마주친 놈들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 하지만 난 기꺼이 손을 더럽힐 자신이 있다.
"엿 같은 놈들."
"하하. 선생은 참 대단해. 내가 자란 베헨의 뒷골목에서도 선생만큼 성격 더러운 사람은 흔치 않는데 말이야."
난 성격이 더럽지 않다. 아로니아 쉐이크를 즐겨 마시는 평화주의자다.
다만, 더러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한 거지.
우승자 세 명은 곧바로 혈맹의 층으로 올랐다. 굳게 닫힌 붉은 문이 열리자 어두운 계단이 반겼다. 좌우 벽에 촘촘히 켜진 촛불의 여린 빛만이 계단을 비추고 있다. 아직 태양은 저물지 않았음에도 밤처럼 어둡다. 엄숙하고 스산한 분위기에 두 명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킨다. 나도 인상을 찌푸리며 답답함을 느꼈다. 짓누른다. 불길하고 불쾌한 힘이 사방팔방 쏟아지고 있다.
"폭력의 가호가 있기를, 승천하십시오, 신도님들."
여기까지 안내했던 마른 몸의 사제가 계단 아래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리고 계단을 올랐다. 내가 앞장서 계단을 오르고 두 명이 뒤따랐다.
지난 며칠 동안 끊임없이 싸웠다.
경기장에서나, 밖에서나.
폭력은 익숙했다.
애초에 내겐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던 기억이 있다. 폭력의 신전은 축소판에 지나지 않는다. 멜카란과 흡사했다. 괴물의 내장 안에서 잠을 청하던 그때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폭력의 신전에서 자행된 반인륜적인 시험들, 대체 어떤 믿기지 못할 사악함이 도사릴지 '혈맹의 층'이라는 명칭만 듣고는 이번 시험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짧고도 긴 계단을 올랐을 때.
우리들은 무대에 서게 되었다.
마치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시켰다. 무대 아래엔 관중이, 사방에 높은 단상엔 강렬한 악마의 기를 내뿜는 폭력교 주교와 추기경으로 예상되는 자들이 앉아 우릴 기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무대였다. 우린 놈들을 즐겁게 할 배우다. 아래층보다 점잖았으나 휘몰아치는 광기는 그보다 더 심했다. 난 인간의 낯짝 뒤에 숨겨진 악마의 얼굴을 보았다. 천안통은 꿰뚫어 봤다. 폭력교 주교 이상의 사제들은 인간이나 악마인 자들, 인간으로 태어나 악마로 변모한 자들이다. 슈테람 해안 도시에서부터 멜카란에 이르기까지, 난 수많은 악마들과 마주했다.
그중엔 흑기사처럼 죄악을 심는,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악마도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인간의 본질 자체를 비트는 악마의 힘은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악마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이다.
난 천천히 악마들을 둘러보다가 무대의 정면에 위치한 오페라하우스의 상석 자리에서 시선을 멈췄다. 저자다. 뿔이 달렸으며, 그걸 숨기지 않는 자. 용암석처럼 검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날 내려다보는 자.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의 사내, 키가 4미터가 넘어 육중한 압박감을 내뿜는 자. 언뜻 인간의 얼굴을 하였으나 잇몸을 뚫고 튀어나온 송곳니는 짐승보다 사나웠고 등에 돋아난 척추뼈는 꿈틀거리며 오싹함을 자아냈다.
저 새끼가 악마이자.
폭력교 교주다.
"내 친히 축하의 인사를 건네지."
악마가 말했다. 목소리는 저음이었으나 접시가 깨지듯 날카로웠다. 모순적이고 불쾌한 목소리로, 입꼬리를 올리며 마치 왕처럼 위엄 있게 우릴 치하한다.
"그대들은 투쟁하여 승리를 쟁취했어. 기삐 듣게. 짐의 거룩한 눈에 잠시나마 담길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어.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짧지만 즐거웠네. 그리하여 기꺼이 은총을 하사하니, 잘 듣게나."
놈이 일어나 팔을 벌리고 웅장하게 외쳤다.
"혈맹의 시험은 짐의 위대한 운명과 합류할 자를 선별한다네! 한 명이 남으리라. 서로 의지하여 시련을 통과한 동료를, 비참하게 죽여 홀로 남는 자는 인간의 불순함을 거부하고 폭력의 순리를 흔쾌히 받아들일 자일지어니!"
고운과 농부는 흔들리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세 명과 한 팀.
처음부터 폭력교와 어울리지 않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혈맹의 시험은 지금까지 같이 싸워 온 동료를 죽여야 하는 시험이었다.
난 아래층에서 들고 온 조악한 철검을 뽑아 들었다. 고운과 농부도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무기를 든다. 그들에겐 귀띔을 해 둔 상태였다. 혹여 개판이 되면 무조건 도망을 치라고.
검을 쥔 내 모습에.
악마는 소름 끼치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말.
초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는 것.
"피해!"
보았음에도 말은 느렸고, 행동은 굼떴다.
천벌이라 부르며 폭력교의 광인들이 벌벌 떨던 포악한 힘, 패배자를 무참히 짓뭉개던 힘의 정체는 단순한 악마의 공격, 형상화된 기의 짓눌림이었다. 난 놈이 공격을 행한 그 순간부터 검을 휘둘러 막았으나, 놈의 공격은 두 명을 향해 있었다. 허용하면 죽는다는 걸 알았다. 간절한 마음이 일순간 힘을 끌어낸 걸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이 느려졌음을 깨달았다. 잠시나마, 초인의 감각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난 가까운 거리, 고운을 향한 악마의 공격을 찢어발겼다. 그 후, 간신히 농부 아저씨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불그스럼한 기를 튕겨 낼 수 있었다.
"호오."
쿵!
하지만 뒤이어 일어난 일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다.
"아...."
그는 피를 울컥 토해 냈다. 가슴팍을 적시는 핏물에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뒤늦게 자신의 배에 구멍이 뚫렸음을 깨달은 농부는 허탈한 얼굴로 쓰러졌다. 재빨리 복부를 압박하며 지혈을 하려고 했으나, 뚫린 구멍이 너무나도 컸다.
"둘 모두 죽일 생각이었거늘, 짐의 형벌을 막을 줄이야."
상처 너머가 보인다.
내장이 사라졌다.
마치 짐승이 파먹은 듯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간단한 답조차 도달하기에 오래 걸렸다.
아저씨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을까?
간단한 답.
젠장.
"자네의 실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네. 축하하네, 자네는 주교를 넘어 추기경으로 추대받을 것이야. 하지만 저 버러지 두 명이 살아 있으니 자네가 친히 죽여 주지 않겠나?"
으득-!
이빨이 부서질 듯했다.
당장 놈을 죽이고 싶었으나 농부의 떨림이 점점 작아져 갔다.
"아저씨."
그가 느끼는 감정은 너무 허무하기만 했다. 슬픔도 분노도 없다. 단지 아스라지는 자신의 생명이 공허하다고만 느꼈다. 그는 탁한 눈빛으로 위를 바라봤다.
"하늘도… 볼 수 없어."
달비의 힘으로 생명을 이어 가나 곧 꺼질 생명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내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공자님. 역시 헛된 꿈이었나 봅니다. 난 고작 이 정도였어.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으면… 만족해야 했었는데."
피를 토해 내며, 꺼져 가는 생명을 붙잡으며.
그가 간신히 말을 이어 나갔다.
"제 고향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그때였다.
하하하-! 호호호-! 깔깔-!
재밌는 연극을 본 듯.
그들은 박장대소하며 박수를 쳤다.
"그야말로 약자의 비참한 말로가 아닌가! 하하하-!"
사제들의 웃음소리가 연달아 메아리쳤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검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신에게 기도는 드리지 않는다.
다만.
"죽지 않아."
죽어 가는 농부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죽지 않소."
죽음을 앞둔 자를 섣불리 위로하는 것.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여명의 기둥, 타인이 날 그리 부른대도. 기꺼이 여명이 되어 주마."
가져온 입교 신청서를 불태웠다. 우샤스가 작성한 종이다. 새하얀 연기가 일렁이다가, 하늘로 재빠르게 치솟았다. 난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간청했다.
"우샤스!"
죽음이든.
천사든.
상관없어.
"이곳에 성물은 없다! 하나, 내 앞에 저 악마 놈들을 무참히 도륙 내어 네 의지를 증명할 테니!"
우샤스와의 거래.
그가 날 정말 아낀다면.
"부디 간청하오니, 이자에게 구원을!"
우샤스에겐 단순한 변덕일지라도.
분명 농부에겐 기적이 될지어니.
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내 의미 모를 행동에 악마들의 웃음소리만 커져 갈 무렵,
펄럭-!
그때였다.
새하얀 날개가 강림했다.
천사의 날갯짓은 기적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건 빛이었다.
빛이 무지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림하였다.
난 두 눈 가득 담긴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눈물을 살짝 흘리고 말았다.
강림한 천사는, 두 발을 땅에 딛지 않고 서서 내게 손길을 내밀었다.
천사는 새하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줬다. 문득 이 순간이 너무 부끄러워 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멍청이처럼, 이래선 폼이 안 살잖아. 우샤스는 새벽의 현신이라 불린다. 아지비카의 교리에선 새벽은 어둠을 정화하며 빛을 이끈다. 천안통이 고장 난 게 아니라면, 지금 내 눈앞의 우샤스는 불길하고 사악한 해골이 아닌 거룩하게 빛나는 천사였다.
천사는 농부를 가엾게 여겨, 그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빛줄기를 따라 날아올랐고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천사가 사라져도 여운은 남았다.
"신이시여."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불경을 입에 담는 것처럼 몹시 작은 목소리였으나 고요함 속에선 확실하게 들렸다.
"감히!"
교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그의 복장이나 느껴지는 기운에서 추기경임을 알 수 있었다. 눈이 붉다. 악마의 하수인이 불쾌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상하다 했거늘, 제국에서 보낸 첩자더냐, 아지비카의 위선자더냐? 어떤 장난을 쳤는진 모르지만 현혹하려 하지 마라. 순리는 힘의 질서다. 제국의 위명이 추락한 건 잊혔기 때문이다. 쿤칸은 시작부터 수많은 왕국을 집어삼키고 탄생한 나라, 폭력을 꽃 피울 밭이니 감히 어딜 아지비카의 위선자놈이 신전을 더럽히느냐? 폭력이야말로 최고의 수단이다. 내 오늘 널 죽이고 후에 아지비카를 소탕하여 이를 증명...."
"동감이야."
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무신경하게 검을 휘둘렀다. 뻗어 나간 검기는 순식간에 추기경의 목을 베었다. 교주는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았다. 잘려 나간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교주는 얼굴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다른 사제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일격에 추기경을 쳐죽인 난 머리를 긁적였다.
"이젠 지겹다."
동료가 죽는 건 익숙하다.
수없이 많은 자들이 내 옆에서 죽었다.
그래서 난 참는 법을 배웠다.
불합리함에 굴복하고 분노를 삭혀 참아 내는 법을.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네놈들이 착각한 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수 명의 머리가 떨어진다.
"제 딴에 지닌 폭력이 강하다고 믿었다는 거다."
베고 벴다.
혈맹의 층에 모인 주교급 이상의 사제들이 모두 거칠게 달려들었다. 빨간 머리 고운도 가세했다. 그는 악마에게 대적할 수 없지만, 추기경을 이길 실력은 있었다. 피, 살점, 뼈. 아수라장의 광기가 검을 쥔 손가락을 조종하는 듯하다. 놈들을 죽이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폭력은 일찍이 받아들였다. 위선 떨며 힘의 순리를 거짓이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수단은 수단일 뿐이다. 난 내가 가진 폭력으로 무얼 할지, 적어도 놈들보단 현명하게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웅덩이와 흩뿌려진 살점.
찢긴 사지와 굴러다니는 머리.
고운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다가 결국 구토를 했다.
악마와 엮이면 항상 이렇다.
현실은 지옥의 일부가 돼 버린다.
악마는 덤벼드는 자를 모두 죽일 때까지 단상에 앉아서 웃기만 했다.
93
"하아, 하아. 선생. 이게 대체...."
악마의 하수인을 모두 죽였다. 고운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지 못하는 듯 경악에 찬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난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조언했다.
"놈은 네게 관심이 없어. 도망쳐. 최대한 멀리."
"하지만 선생을 버리고...."
"도망쳐."
고운은 갈등했다. 무엇이 맞는 판단인지 헷갈려 하는 듯 보였다. 의리, 명예, 신념. 허나 소년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기가 가득 찬 현실은 명예를 아는 소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는 겁에 질렸다. 곧 부들거리는 다리로 휘청거리며 아래층을 향해 뛰어갔다. 후에 그가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길진 몰라도, 그는 자신의 판단력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짝짝짝-!
구경하던 폭력교 교주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박수 쳤다.
"짐의 운명에 이리도 어울리는 자가 있더냐?"
그가 난간을 뛰어넘었다.
쿵-!
무대로 내려온 그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위선과 거짓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진실은 힘이다. 힘이야말로 질서이니, 짐이 친히 네게 권하마. 짐의 운명을 곁에서 지켜보아라. 널 폭력의 교주로 삼아, 짐의 손에 죽어 갈 신과 악마를 조롱할 영광을 주마."
"…악마?"
난 놈의 말에 모순을 느꼈다. 놈이 말하는 '신'이 무엇인지 상관없다.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해도 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악마이면서 악마를 죽이겠다고 한다. 당장 놈을 베고 싶었으나, 난 인내심을 가지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마음먹었다.
아니, 그전에.
대답은 해야겠지.
"좆 까."
퍽-!
일양지의 수법을 사용해 내공을 방출했다.
놈의 머리는 깔끔하게 터져 나갔다.
"징그러운 놈."
물론 이리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살점이 찰흙처럼 녹아내리며 한데 뭉치더니 이내 목 위로 솟구쳐 올랐고, 살점에서부터 얼굴이 생겨나 이내 머리가 되었다. 놈은 즐거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하! 무례하구나!"
두둑! 두둑!
놈의 몸이 순식간에 팽창하고 경화되고 뭉치고 늘어나고를 반복했다. 발작하는 근육은 놈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곧 악마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보기만 해도 무른 살점이 아닌 금속의 느낌이었다. 놈의 근육은 결이 수십 갈래로 늘어났고 힘줄은 쇠사슬처럼 굵게 돋아났다.
"하!"
놈이 주먹을 들고, 철퇴처럼 땅을 내려쳤다.
콰아앙-!
충격은 거대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뒤흔들렸고 벽이 갈라졌다. 순식간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폭력의 신전은 뼈대만을 남기고, 그 아래의 층들은 모두 잔해에 깔렸다. 난 무너지는 바닥을 피해 위로 뛰어올랐다. 투쟁의 층에서 기거하던 수십 명의 사제들이 피하지 못하고 붕괴에 휩쓸려 죽어 나갔다.
"후후."
붕괴가 끝났을 땐 살아남은 사제들은 없었다. 난 기둥 몆 개만이 간신히 서 있을 뿐인 폭력의 신전과 잔해에 파묻힌 시체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도 내가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깔끔하게 자멸했네."
난 악마에게 물었다.
"힘자랑도 유분수지, 자기 집을 이리 부쉐 놓다니 뭔 짓거리야?"
일격에 큰 건물을 부순 건 어떠한 마법이나 악마의 기이한 힘이 아니었다.
단지, 상상을 초월하는 순수한 괴력이었다.
친절하게도, 놈이 보여 준 힘자랑 덕에 난 확실하게 깨달았다.
힘만 따지고 보면.
놈은 날 압도한다.
악마가 대답했다.
"필요한 걸 찾았으니 이제 연극은 필요없느니라."
악마란 놈은 만날 때마다 각기 다른 씹새끼들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 날 노리는 헤드헌터 악마도 만났다.
"뭐하는 새끼냐, 너? 악마가 악마를 왜 죽여?"
놈이 날 원하는 이유는 날 폭력교 교주로 삼길 원해서다.
그리고 폭력교의 목표는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기껏해야 악마답게 사람 죽이는 짓거리를 하려고 한 줄 알았는데.
신과 악마를 죽여?
"큭큭. 어리석은 인간의 아이야. 내 계속 말해 왔거늘 깨닫지 못했느냐?"
놈이 다가온다.
난 놈의 전신에 깃든 힘이 보였다.
잡기술은 통하지 않아.
놈을 이길 방법은.
놈을 압도할 더 거대한 힘밖에 없다.
개간네에-!
달비의 힘.
내게 깃든 내공.
모든 힘을 운용하여 이끌어 낸다.
자연의 짐승, 영수와 영혼을 나누고 힘을 더하니.
다아!
밤하늘 그리고 은하수.
휘황찬란한 푸른 망토를 등에 걸치자, 조악한 철검은 달빛을 내뿜었다.
"호오?"
달비와 하나가 된 혼일동화의 경지.
난 포만감과 비슷한 힘의 포화를 느꼈다.
"덤벼."
웃으며 악마를 향해 손을 까닥거리며 도발했다.
쿵! 쿵! 쿵!
놈이 달려오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저런 놈과 정면 승부할 생각은 없다. 무공이란 어려운 단어로 치장해도 결국은 싸우는 법이다. 순식간에 쇄도하며 들어온 놈, 거대한 덩치를 앞에 두니 마치 산과 싸우는 느낌이다.
쉬익-!
담긴 힘만큼 속도도 빨랐다. 놈이 뻗은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휘둘러진 주먹만으로도 바람을 찢으며 강풍이 일었다. 난 곧바로 검을 뻗어 반격했다. 찰나에 여섯 번을 벴다. 혼일동화로 달비의 힘을 받아들인 내공은 변화를 일으켜,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별빛을 흩뿌렸다. 순수한 힘, 검술의 투로는 거들 뿐이다. 평소의 무공보다 몇 배는 강한 참격이 악마의 몸을 유린했다.
"하하!"
분명 베었고,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난 구름을 벤 듯한 착각을 느꼈다.
놈의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은 금속과 달리 유연했다. 찢긴 상처는 곧바로 뭉치고 팽창하는 근육에 파묻혀 사라졌다.
슉-!
놈의 공격은 단순했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찬다. 하나 일격마다 산을 무너트릴 힘을 담고 있다. 속도는 바람처럼 빠르다. 한 대라도 허용하면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도 남겠지. 놈의 반격을 피한 후 난 재빨리 거리를 뒀다. 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그때였다.
개간네!
달비의 외침에, 난 재빨리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 뜯겨 나간 놈의 살점 뭉치가 있었다.
그리고 곧 주먹이 되어 내게 날아들었다.
'좆 됐다.'
너무 가까워,
검을 들었으나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을 때.
쿵!
다가올 격통을 대비하며 입술을 깨물던 난 몸을 감싼 푸른 망토에 눈이 커졌다.
"그래, 달비야."
혼일동화는 달비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그 뜻은 내가 달비의 힘을 모두 가져간다는 게 아니었다. 달비도 나와 싸운다. 놈의 기습을 막아 낸 달비는 망토 속에서 얼굴만 빼곰 내민 채 우쭐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씨발놈이 수작을 부려?"
이번엔 내가 덤벼들었다. 순수한 힘의 대결에 투로의 잔재주는 필요 없다. 난 오직 힘을 이끌어 낼 수단만을 사용했다. 문득 라니스타가 말한 '형태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으나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쾅! 쾅!
검과 주먹이 부딪혔음에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혼자선 이기지 못해, 하지만 달비가 조력한다. 난 공격에만 치중했다. 혹여 놈의 공격을 놓치면 달비가 도왔다. 둘의 힘이 결정화된 푸른 망토는 아무리 악마 놈의 괴력이라고 해도 부술 수 없었다.
하하하-!
"씨발!"
격렬한 난투 속에서도 놈의 웃음소리는 계속 들렸다.
검날을 옆구리에 박고 사정없이 휘저어도.
겨드랑이부터 등까지 깊이 베어도.
손가락을 잘라도.
놈은 웃었다.
쿵-! 쿵-!
놈의 상처가 늘어날수록 전투는 더 버거워졌다. 놈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점들은 저마다 의지를 지니고 날 죽이려고 들었다. 기감을 날카롭게 세우고 눈을 번득이며 작은 살점마저도 견제했다. 마치 군대와 싸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놈은 죽을 상처를 몇 번이나 입었으나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했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승산은 있다.
놈은 언뜻 불사의 힘이라도 지닌 것처럼 보였으나 난 사방팔방 흩뿌려진 놈의 살점이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둔해지는 걸 알아차렸다. 또한, 놈의 근육도 미세하지만 줄고 있다. 일곱 번의 중상을 입힌 후에야 변화를 알아차렸다는 게 문제지만.
아수라처럼 광기에 휩쓸린 싸움은.
놈이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멈추었다.
혼일동화의 경지는 힘을 크게 소모한다.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 난 기회를 틈타 혼일동화를 풀고 힘을 모았다. 운기조식, 이 세계엔 없는 특이한 개념을 악마가 몰라서 다행이었다.
"역시 넌 짐과 함께해야 하느니라."
"좆 까라고. 대답이나 해. 왜 악마가 악마를 죽이려고 드냐고"
"흐흐. 악마와 인간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느냐?
악마의 웃음은 비열했다. 그래서 악마답지 않다고 느꼈다.
사악하고 불길한 악마는 인간을 잡아먹는다. 위장자로 변하여 사람을 속이고 죽이는 것도 모두 인간을 죽이는 것에 귀결된다. 하지만 놈은 달랐다. 자신의 신도를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그건 변덕이었다. 놈은 지금까지 인간을 이용했다. 인간을 악마로 탈바꿈시켜 자신의 병사로 사용했다. 난 악마인 놈이 인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놈, 하등종인 인간과 우리들은 공통점이 많지. 특히, 욕망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그득해. 인간은 자신보다 낮은 자를 죽이고, 쟁취하고, 올라서려고 한다. 하물며 악마라고 다르겠느냐?"
"그럼 네놈은 악마들의 우두머리라도 될 생각이냐?"
악마가 악마를 숭배한다.
이미 증거로 드러난 사실, 내가 직접 전황을 목격했었다.
라지엘의 서에도 추상적이지만 분명 기록되어 있었다.
악마에게도 서열이 있다.
타고난 서열은 절대적이다
인간은 운명을 극복할 수 있지만 악마는 아니다
"신기한 놈일세."
그래서 놈의 발언은 파장이 컸다. 내가 이해한 게 틀리지 않다면, 놈은 악마 서열을 뒤집고 위에 서겠다는 뜻이 아닌가?
"우두머리?"
내 물음에 처음으로 놈이 미소를 거뒀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노려본다.
난 그의 눈에서 악마의 살의가 아닌 인간이나 보여 줬던 지독한 탐욕을 읽었다.
"그런 하찮은 게 아니다."
놈이 덤벼든다. 난 곧바로 응수하며 싸웠다.
악마는 싸우는 와중에도 주절거렸다.
"곧 다가올 항전에서 나는 곧 옛 명예를 되찾으리라."
* * *
난 놈의 몸을 감싼 근육 덩어리 너머 진정한 본체가 있음을 꿰뚫어 봤다.
열매와 같다. 과육을 벗기면 씨가 나올 것이다. 씨를 파괴하지 않으면 근육은 무한히 재생되어 놈을 지킬 갑옷이 되겠지.
검을 휘둘러 봤자 소용이 없다. 살점을 넘어 씨를 타격해야 했다. 격렬한 싸움 중에서도 난 승부수를 강구했다. 혼일동화의 경지에선 놈과 비등하나, 달비의 힘이 사라지면 난 죽고 만다.
"하하-! 왜 그러느냐? 네놈은 인간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하다. 마스터, 그렇게 불리우는 인간이겠지. 하나, 이게 무슨 꼴이더냐? 항전이 오기도 전에 악마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이잖느냐."
놈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놈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힘이 점점 꺼지고 있고,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자신이 승리하리란 것을.
놈을 죽이기 위해선.
재생하지 못하도록 한 번에 짓뭉개거나.
근육 너머 본체를 타격하는 것.
전자는 할 수 없으니, 나는 후자를 택했다.
탠덤 탄두, 이중 탄두라는 미사일이 있다.
전차의 장갑을 부수기 위해 고안된 미사일로 두꺼운 철갑판도 뚫고 속을 파괴한다.
우선 상대적으로 약한 폭약으로 장갑을 무효화한 뒤, 속을 파괴하는 이중 탄두.
쉽게 말해 때린 곳 더 때리는 것이다.
난 천안통으로 놈의 약점을 살폈다. 용의 역린은 없었다. 하지만 비교적 무른 부분은 있다. 약점은 아니지만,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난 그의 왼쪽 가슴을 향해 검을 쑤셔 박았다. 곧바로 근육이 팽창하며 상처를 삼켰으나,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강공을 이어 갔다.
'보이지 않는 자'들은 헛되다고 판단해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엔 뚜렷하게 보였다.
점점 악마의 회복 속도가, 내가 노린 그곳만 서서히 늦어지고 있다.
마침내 지금까지의 감촉과는 달리,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혔다고 느꼈을 때.
놈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한번 묻겠다."
놈이 말했다.
"폭력의 운명에 동참하여 짐의 영광스러운 부관이 되어라. 항전에 참가하여 승리한다면 인간이 거머쥘 수 있는 한계 너머의 부와 명예가 주어질 것이다."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새끼, 쫄리네."
질 것 같으니까 입을 터는 건 확실히 인간과 똑같구나.
94
안타까운 건 쫄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혼일동화의 경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난 악마와 대화를 나누며 기를 운용했다.
"네놈이 말하는 '항전'이라는 게 뭐지? 악마 놈의 적이 어딨다고?"
"하하하! 고약한 인간들은 '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구나."
"뭐?"
"되찾으리라, 지옥을 호령하던 대장군의 위명을."
이번엔 놈은 길게 대화를 하지 않았다. 곧바로 코뿔소처럼 맹렬하게 돌진했다. 놈이 뜀박질하자 땅이 울렸다. 힘껏 날아오른 놈이 거대한 주먹을 내려치자 땅이 갈라지고 뒤집혔다. 난 날아드는 파편들을 피해 내며 놈과 거리를 벌렸다. 탐색전은 끝난 듯했다. 전력으로 덤벼오는 악마였다.
쿠루룩-!
놈의 몸은 이제 액체처럼 움직였다. 근육은 끊임없이 수축하고 팽창하며 형태를 바꿨다. 이윽고 놈의 몸에서 수십 개의 '팔'이 돋아났다. 사람 몸통만 한 팔 수십 개로, 놈은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며 덤볐다. 덤프트럭보다 위압적이고 빨랐다. 경공을 쓰는 내 움직임조차 따라잡을 정도다.
"괴, 괴력몬!"
어딘가 한참 잘못된 지옥의 괴력몬이다. 놈은 여섯 개의 팔을 휘둘렀다. 얼마나 강한 힘인지 강풍이 불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도저히 막거나 반격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혼일동화의 힘을 회피에만 써야 했다. 놈의 맹공은 끝날 줄 몰랐다. 난 피하기에 급급했고, 이대로 가다간 패배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쿵쿵-!
놈의 발광에 폭력의 신전은 폐허가 되었다. 땅이 뒤집히고 높게 솟은 기둥이 부러졌다. 지진과 태풍이 들이닥친 재앙적인 광경을 놈은 혼자서 연출하고 있었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이기는 방법,
젠장, 결국엔.
생각해 보면 지금껏 이겨 온 악마 놈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미친놈이나 할 법한 결단이 필요했었다.
지잉-!
기를 발끝에 응축시켜 놈에게서 멀리 달아난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뻗고 천천히 움켜쥐었다. 허공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나, 마치 강철을 비틀듯 안간힘을 썼다. 어마어마한 반발력을 난 힘겹게 이겨 냈다. 마침내 주먹을 쥐었고, 혼일동화의 경지가 풀렸다.
"하, 끝이로군!"
십 초.
십 초를 버텨야 해.
이제 능숙히 피할 힘이 없다. 모든 공격을 간신히 피해 내야 했다. 놈은 주먹과 발을 마구잡이로 난타했다. 범인의 눈에는 잔상처럼 보일 공격이나, 천안통은 놓치지 않았다. 문제는 육체가 개눈깔의 '성능'을 따라올 수 있는가.
쉭쉭-!
머리를 노리는 주먹을 고개만 돌려 피한다. 연달아, 초의 단위보다 적은 시차로 옆구리와 허벅지를 향해 쇄도하는 주먹을 높이뛰기 자세로 도약하며 틈 사이로 공격을 흘렸다. 곧바로 놈의 어퍼컷이 날아와, 검을 지지대로 삼아 주먹을 막고 뛰어올랐다.
챙-!
그 충격에 내공이 깃들지 못한 조악한 철검은 부러지고 말았다. 무기를 잃은 날, 놈은 먹잇감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공중에서 사방팔방 일곱 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충격에 대비했다. 어금니, 손가락 절단, 피부 토마토 죽, 제발 그 정도 수준의 고통이어라.
퍼억-!
"카악!"
씨발!
부딪힌 적은 없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좆 같은 고통은 비행기에 부딪힌 충격이다.
막으면 부러진다. 한 대의 공격을 맞고 튕겨 나갈 생각이었다. 단 한 대, 그 격통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난 마치 축구공처럼 튀어 나가 한참을 데굴데굴 굴렀다. 격통은 순간 생각을 멈추게 했다. 입가에 잔뜩 묻은 무언가가 피인지, 구토인지 알 수 없다. 면도칼이 뼈를 도려 내고 있다. 제발, 제발!
"하아, 하아."
위를 올려다봤을 때, 놈의 비열한 낯짝이 보였다.
"이젠 묻지 않으마. 나약한 약자 놈, 결국 최후는 고깃덩어리이니라. 하하하!"
놈이 주먹을 올렸다.
토했다. 검붉은 피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난 입꼬리를 올렸다. 놈처럼 비열하게 웃었다.
악마의 주먹이 멈춘다. 그가 의아하게 날 바라볼 때, 난 최대한 비열하게, 입꼬리를 잔뜩 올리고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뜬 채로 작게 말했다. 크게 외치고 싶었으나, 갈비뼈가 부러져서 어쩔 수 없었다.
"위를… 봐, 병… 신아."
작열하는 사막의 태양이 자리를 양보했다.
벌건 대낮에 새하얀 달이 떴다.
달은 점점 커졌다.
가까워지고 있다.
놈은 이변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 하하하!"
실성한 듯 박장대소하다가.
놈은 몸을 돌리고 자신의 모든 근육을 왼쪽 팔에 집중시켰다.
악마의 팔은 생물의 범주를 넘어, 마치 군선의 함포 같았다.
폭력의 신전을 삼킬 만큼 거대한 낙석에도 놈은 도망치지 않았다.
아무리 거대한 육체를 지녔다고 한들, 낙하하는 저것에 비하면 하찮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호수 섬에서 싸웠던 물고기 악마와는 각오도, 자신감도 격이 달랐다. 놈은 웅크리며 주먹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난 헛웃음이 나왔다.
"미친… 놈."
단순한 '낙석'이 아니다.
저것엔 힘이 깃들어 있다.
물리적인 파괴력을 넘어 혼일동화의 경지로 이끌어 낸 달비와 내 모든 힘이 담겨 있다.
악마를 멸하는 공의 힘도,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내공과 '신'의 기운조차 뭉쳐, 오로지 놈을 파괴하기 위해 천벌이 되어 낙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놈은 당당히.
제 주먹을 뻗어 깨트리려고 하는 것이다.
"오너라! 이까짓 시련도 이기지 못한다면 감히 짐이 왕이 될 수 있겠느냐!"
쿠쿠쿠쿠-!
저것이 날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에 몸이 떨릴 정돈데 놈은 진정 자신이 이겨 내리라 믿으며 굳게 서서 주먹을 휘둘렀다. 문득, 악마임에도, 처죽여 마땅한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에 난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인정해, 이 새끼는 미친 새끼야.
콰아아앙!
마침내 거대한 낙석과 놈의 주먹이 부딪혔다.
산과 맞서는 짐승과 다름없었다.
콰직, 콰직!
놈의 주먹이 닿은 부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 설마, 아니지?"
하하하-!
균열은 점점 전체로 번져 갔다.
혹시나 싶어 소름이 돋았으나.
곧 낙석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난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놈의 오만한 웃음소리는 음소거를 하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난 세상을 채운 푸른 빛에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푸른 빛과 뛰어노는 달비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달았다. 난 지금, 폭발의 중심에 서 있는 거구나.
-쿠르르릉!
이윽고 먼저, '소리'가 들렸고,
푸른 빛이 사그라지며 참혹한 풍경이 나타났다.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손바닥을 펼쳤다.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될 힘이야.
흔적이 없다.
파괴? 아니, 이건… 소멸과 가깝다.
악마가 자아낸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물리적인 파괴를 넘어 존재의 소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던 폭력의 신전도, 사제들의 시체도 없다.
악마가 파괴한 사막은 도리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세상에서 악마 놈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 같았다.
난 내 품 안에서 잠든 달비를 느꼈다.
이게 네 진정한 힘이니?
난 고통을 참아내며 힘겹게 일어났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미처 지우지 못한 얼룩을 찾아냈다.
"약자의 비참한 말로, 그런 거냐?"
악마놈.
얼굴의 작은 조각만 남았다.
눈 한쪽과 입만 남은 조각.
놈은 날 흘겨보더니 입을 우물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말했다.
[간. 발. 의. 차. 이. 였. 다.]
"지랄, 허세는."
[좋. 은. 대. 결. 이. 었. 어.]
난 놈의 조각을 짓밟았다.
어디서 훈훈한 척이야.
크크크-
그러다 징그러운 웃음소리에 재빨리 발을 뗐다.
바퀴벌레를 밟은 게 더 상쾌한 느낌일 것이다.
[결국 넌 우리와 함께하리라.]
[바래진 천사의 날개라도 항전을 이기진 못해.]
"뭐?"
대답은 없었다.
놈은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 * *
어딘가의 지하.
눈, 코, 입, 뇌, 심장, 폐, 간, 대장, 뼈와 살점.
질서 정련하게 바닥에 놓여 있다.
홀로 바닥에 놓인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말할 수 없어.]
"흐음."
새하얀 손가락이 뇌를 움켜쥐자, 입이 다시 움직였다.
[…말할 수 없어.]
"너무해."
온화한 갈색 눈에 실망감이 서린다.
그녀가 한숨을 쉬자, 숨결에 흩어진 장기들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악마의 뇌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아."
아득한 과거, 폭력의 악마를 폐위시켜 '왕'들의 장군이 된 악마.
하나, 새벽에 무릎 꿇어 저항조차 못하고 소멸하였으니.
"…역시 기다릴 수밖에 없을까?"
날개 달린 자는 하얀 깃털을 매만지며 슬픔에 잠겼다.
"언제까지 잃어버린 상태로 있어야 할까?"
그녀의 슬픔에 반응하듯.
지하에 갇힌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울부짖었다.
* * *
"곧, 왕들이 오리라. 그러면 너조차.... 크악!"
수백 조각으로 나뉜 악마가 한순간에 소멸했다.
그의 지위는 귀족, 결코 얕볼 수 없는 악마. 한 나라를 멸망시켰던 독살의 악마.
하지만 그의 검을.
단 일격도 견디지 못했다.
"그것참 기대되는군."
검날에는 피조차 묻어나오지 않았다.
사자는 웃다가, 고개를 떨궜다.
"…무엇이 이리."
그는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벨 수 있었으나,
정작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조차 깨달을 수 없었다.
* * *
"찾았다."
여우 꼬리가 살랑 흔들렸다.
그녀의 손에는 바람이꽃 한 뭉텅이가 들려 있다.
절벽에서 올라온 그녀는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나 바람이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시들어 갔다.
"젠장, 젠장, 젠장!"
여우비가 내렸다.
* * *
하루를 걸어 도착한 외곽 마을 첫 번째 여관에서 식사하다가 허겁지겁 날 찾아온 빨간 머리 고운을 만났다. 녀석은 내게 사과했고, 부끄럽다고 했으며, 일어난 일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해 줄 말은 그다지 없었다. 그저, 폭력의 신전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밖에.
고운의 복장은 달라져 있었다. 신전에선 꾀죄죄했으나 지금은 깔끔하고 값비싼 재질의 의복을 입었다. 그는 신분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솔가르 내에 번영한 도시인 메타니아까지 마차를 제공하고 그곳에서 가장 비싼 주점에서 술을 사겠다고 했다. 공짜 밥은 거절하는 게 아니지.
그는 마차에서 내게 얘기했다.
"선생, 아니 스승님. 이제 정식으로 우리 가문의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어. 내 가문으로 와. 스승님이라면 분명 환대받을 거야!
난 모른 체하며 물었다.
"네가 뉘 집 아들인데?"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정체를 밝혔다.
"나 사실 붉은 기둥의 자식이거든. 고운 솔가르. 미들 네임은 없어. 성도 생긴 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솔가르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그는 활짝 웃으며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깜짝 놀라거나, 혹여라도 쿤칸에서 검을 쥔 자들이 그리하듯, 검의 종가 솔가르에게 존경이라도 보이는 모습을 기대한 듯했다. 어림도 없지. 난 담담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난 레인버그 가문의 공자야.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여명의 기둥."
하하.
고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쉽게 믿지 못하겠지. 나라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폭력의 신전같이 야만스러운 곳에서, 솔가르의 핏줄을 만난다니. 하지만 정말, 귀족 사칭이 아니야. 아직 사교 파티에도 가 보지 못했지만 가계도에 정식으로 올라간, 솔가르의 자식이라니까."
"누가 못 믿는다고 했냐?"
난 나지막이 말을 이어 나갔다.
"통성명을 하니 이름을 말해 준 거지.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폴스타라고."
"아니, 난 진짜 진담이라니까. 감춘 건 미안한데, 스승님아."
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도 정말이라니까."
"어?"
"걸시만큼 바보인 녀석. 떠올려 봐. 벌써 잊었어?"
"…여명의 기둥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건… 뭐야. 천사, 그거 환각이… 갈색 눈, 갈색 머리? 하지만 폴스타 공자가 검의 달인이라는 건 듣지 못했는데...."
난 피식 웃으며 쏘아붙였다.
"레인버그 막내 공자가 솔가르의 검술 스승이라도 되면 확실히 재밌겠네. 느그 아부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겠어."
"말도 안 돼."
하루 뒤, 헤어질 때 일부러 레인버그 휘장이 걸린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난 마차의 창문을 열고 얼빠진 고운의 얼굴을 구경했다.
녀석과 다음 만날 자리가 기대되네.
95
친분이 있는 검은 사제에게서 농부 아저씨의 후일담을 들었다. 아저씨는 악마의 상처를 이겨 내어 성흔이 새겨졌다. 검은 사제들처럼 항마력이 생긴 것이다. 그는 자연스레 아지비카교의 검은 사제가 되기 위한 시련을 수행하게 되었다. 우습게도, 폭력의 신전 사제가 되고자 한 그가 이젠 아지비카교의 사제가 된 것이다. 악마가 그에게 무얼 남겼던지, 난 잘 이겨 내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아저씨의 소식은 끊겼다.
오늘.
왜인지 모집도 하지 않은 스타폴 기사단 입단 신청서가 내 침대맡에 도착하기 전까지 말이다. 아침에 일어난 난 눈을 비비적거리며 신청서를 읽었다. 개눈깔도 힘이 없으면 사람 눈깔과 다름없는지라, 눈곱이 껴 시야가 뿌옇다. 하지만 신청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나랑드 주니어, 견습 기사. 이 양반이?"
솔가르의 농노였던 그는 레인버그의 기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 사제가 되어 예전 신분을 말소하고 자격을 얻은 듯했다. 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책상에 앉아 신청서를 읽었다. 쿤칸은 다른 국가와 달리 '기사단'을 허용한다. 옆 동네 슈테르닐만 해도 반란의 여지를 두지 않기 위해 왕실기사단과 더불어 몇몇 왕당파 귀족들만 기사단을 지녔다고 들었다. 하지만 쿤칸 제국의 기사단은 의미가 특별하다. 솔가르처럼 유구한 전통의 기사단도 있지만, 악마 전쟁 때 항전하던 자들이 만든 집단이 기사단이 된 예도 있다. 대표적으로 청늑대 기사단이다. 영국의 신화처럼, 아서 경과 란슬롯 경이 존재할 법한 국가다.
왕권이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제대로 된 작위도 없는 내가 기사단을 결성한 것만 봐도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다. 뭐, 어차피 인재는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가문의 귀족들은 도련님의 영웅 놀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스타폴 기사단을 어중이떠중이들로 채울 생각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강자라도(쌍둥이 제외) 두 손이 바쁘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나 대신 다양한 일을 맡아 줄 엄선된 정예들이 필요했다. 재화를 불리고 회계를 담당할 상인, 정식기사는 아니나 악마를 식별하고 숙련된 기사만큼 강한 영수술사들, 충성심이 높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현장감독. 그리고.
"검법을 익힌 검은 사제라… 괜찮네."
그는 한 번 죽었었다. 그럼에도 다시 기사가 되고자 열망한다. 내 곁에서,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보았던 사람이다. 각오는 충분히 한 뒤겠지. 난 대충 임명장을 휘갈긴 후 걸시를 시켜 아버지의 서재에 보냈다.
얼마 후, 그가 편지를 보냈다.
당분간은 새벽의 성녀를 모시는 수호 사제로서 실력을 쌓겠다고 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난 지금의 삶에선 물론, 전생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기이한 쾌감을 느꼈다. 인연이 쌓이는 것. 예전엔 동료를 잃는 게 두려워 가까이하지 못했었지.
"여명의 기둥이라...."
처음엔 오글거렸으나 계속 들으니 썩 나쁘진 않네.
* * *
우샤스가 머물고 있다는 북쪽 베헬린의 땅까지 며칠이 걸려 도착했다.
난 무너진 성당의 문턱을 넘자마자 강렬한 불길함을 눈에 담았다.
이곳에서 무얼 하는지는 몰라도, 부러진 단상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는 우샤스는 죽음을 머금은 사신이었다. 오랜만이었다. 난 그녈 만나며, 긴장감에 심장이 옥죄는 느낌을 받았다. 천사의 날개에 현혹되어 그녀가 무엇인지 잊고 있었다. 힘겹게 앞에 서서 떨리는 입을 열었다.
"악마 놈이 그러더군. 바래진 천사의 날개라고. 악마들도 누나를 알고 있는 거야."
우샤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슬픈 눈빛으로 날 한참 동안 바라봤다.
침묵이 불쾌하여 등을 돌렸다. 우샤스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이나 우샤스를 찾아 여행했으나, 정작 만난 후 몇 분도 되지 않아 난 다시 길을 나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누나도 내가 아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악마와 우샤스의 관계는 중요치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가 '내 편이냐, 아니냐'. 그것 하나뿐이다.
* * *
퀄츠 성에 또다시 가장 큰 축제, 아르테미스의 사냥제 시즌이 돌아왔다. 연이어 발생한 악마 사건들로 불안에 떠는 백성들을 위해 아버지는 직접 나서서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 레인버그 영지를 넘어, 해안 도시와 북쪽 경계까지 오가는 바쁜 일정이었다. 청늑대 기사들은 검 대신 활을 들고 광활한 북쪽 평야에서 순록을 사냥하고, 채집꾼을 위협하는 위험한 짐승들을 몰아낸다. 이번엔 칼베인 사람들도 합류하였다. 레인버그를 따르는 가신들은 기꺼이 베풂의 행렬에 동참했다. 마치, 지구의 크리스마스 시즌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축제에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난 홀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아르테미스의 숲이었다.
"오랜만이지?"
다아-!
달비는 풍부한 자연의 기운을 만끽했다. 우거진 숲속에서도, 드넓은 구덩이 안에 자리한 아르테미스의 숲. 처음 아르테미스의 숲의 탄생 신화를 들었을 때 난 그러려니 했다. 이토록 움푹 파인 넓은 구덩이 숲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생태계가 만들어진 건 하늘에서 떨어진 '아르테미스'의 흔적이라고 했었지. 이젠 알겠다. 신화가 아니라 진실이다. 달비가 예전의 힘을 되찾는다면, 퀄츠 영지만큼 큰 구덩이 정도야 달덩이 하나 떨어트려서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어디 보자."
아르테미스의 숲은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일 년 전엔 영수들 때문에 혼쭐이 났었다. 아버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걷는 것조차 버거운 곳이었지. 하지만 난 망설이지 않고 숲을 향해 낙하했다.
숲에 도착하고 나서도 거침없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가득한 영수, 어딜 봐도 영수들이 보였다. 하지만 전과 달리 녀석들은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달비가 좋아서,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달려들 듯하다가도 내가 노려보자 끙끙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란 인간,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못 잊는다.
난 내가 넘어졌던 그 장소까지 가서.
잔뜩 내공이 담긴 목소리로 사자후의 묘리까지 사용하여 소리 질렀다.
"일렬종대, 헤쳐 모여!"
아버지가 말했다.
영수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언어에 담긴 감정과 의미를 읽어 내어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사사삭-!
고요하던 숲이 한순간에 들썩거렸다. 높게 솟은 나무가 움직이더니, 나무를 짊어지고 다니는 거대한 거북이 영수가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축축한 땅에는 코를 킁킁거리며 알록달록한 색깔의 토끼 영수들이 구멍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숲을 여유롭게 나는 나비들도, 창공을 날며 날 감시하던 독수리 영수들도, 물가의 개구리도.
주위의 영수들은 모두 내 앞으로 달려왔다.
"난 너희들이 일 년 전에 한 짓을 기억한다."
그땐 정말 무서웠었다.
"비록 달비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너희 태도는 몹시 무례했다."
언덕에서 구르고 자빠지고 떨어지고.
아직 아무런 힘도 없던 소년이 늑대와 생사결투를 벌이고.
뭐, 덕분에 달비를 만났지만.
"모두 엎드려 뻗쳐."
의사가 통해도, 녀석들은 달비처럼 모든 단어를 이해하진 못했다.
어리둥절한 영수들을 향해 달비가 몸소 나섰다.
작은 머리를 땅에 박더니 네 다리를 최대한 길게 뻗는다.
애초에 네 다리로 걷는 녀석들이니 힘들 것도 없겠지.
아니, 그전에 영수니까 이런 행동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분은 낼 수 있다.
영수들은 일사불란하게 달비의 행동을 따라 했다.
만족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다아! 다아!
영수들의 모습에 달비도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재밌는지 다른 행동을 취한다. 전에도 보여 줬던 충성 경례다.
자연의 짐승인 영수들은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영수술사들도 교감을 나눈 영수에게 이런 짓은 시키지 않는다.) 행동을 따라 하며 난감해했다.
달비가 즐거워할수록 난 풍만해지는 힘을 느꼈다. 역시, 아르테미스의 숲은 혼일동화를 연습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다. 창궁관도 좋았으나 여기만큼은 아니다. 별다른 수련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달비가 원하는 대로 뛰어놀고, 장난치며 넘치는 기운에 몸을 맡기면 되겠지.
그래.
나도 한 마리의 짐승이 되는 거야.
영수가 힘을 얻는 법은 간단했다.
존재하는 것, 자연의 조화로운 기운을 어그러트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난 달비와 영수의 힘을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기꺼이 수치심을 포기했다. 신경 쓰지 마. 이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야. 난 입은 옷을 모두 벗었다. 자유로움, 사타구니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영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개간네!
곧 날아든 달비의 발굽을 맞고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왜? 꽤 괜찮은 방법 같았는데.
개간네, 개간네!
달비는 발굽으로 내 발등을 계속 내려쳤다.
마치 무슨 흉측한 짓이냐며 꾸짖는 것처럼 보였다.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난 달비의 행동에 큰 의문을 가졌다.
생각해 보니 녀석, 지금까지 내가 씻을 때나 똥 쌀 땐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지.
기분 탓이 아니다. 옷을 벗으면 난 자연의 조화로움을 더 깊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달비의 짜증에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고 혼일동화의 경지를 수련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그 힘. 폭력의 악마를 지워 버렸던 그 힘만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달비를 따라 아르테미스의 숲을 돌아다니며 자연의 힘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가는 곳에는 영수들이 항상 따라왔다. 탈의 외에 힘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달비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난 녀석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거북이?"
포복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간다. 거북이라고 하니, 맞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녀석은 물에 들어가 헤엄쳤다. 자세가 기이했다. 사슴이 수영하는 게 아니라 물고기가 헤엄치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물고기?"
그 후, 달비는 짐승의 특징적인 움직임을 따라 했다. 뭐지? 퀴즈쇼인가? 얼빠진 얼굴로 달비를 구경할 때, 녀석은 화를 내며 영수들을 가리켰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난 뒤늦게 깨닫곤 달비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아!"
녀석은 지금 나더러 영수의 움직임을 따라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흠,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려면 짐승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건가?
일리가 있다. 무공 중엔 형의권이라는 권법도 있지 않던가?
난 열심히 따라 했다. 긴팔원숭이가 걷는 것처럼 팔을 들고 경박하게 뛰어다니다가 토끼 영수를 따라 하며 짧은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다. 달비의 표정을 본 건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흉내 내고 있었을 때였다. 수면 위로, 날 내려다보는, 아주 건방지고 비열하기까지 한 달비의 미소를 그제야 난 보고 말았다. 난 열심히 움직이던 허리와 하체 운동을 멈추고 부력에 몸을 맡겼다. 호수 위로 둥둥 떠다니며 눈을 감았다. 달비가 장난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 * *
이상하다.
아무런 소식이 없다.
벌써 공식적인 생일 파티도 끝났지 않았는가?
"작년에는 챙겨 줬으면서."
실망한 게 아니었다. 단지 '이번엔 다르다는' 걸 살짝,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다.
작년엔 쌍둥이들이 모여 생일 선물이랍시고 대해의 괴수를 잡았지. 그때 내가 준 선물은 허접스럽게 그린 켈리그라피였다. 이번에도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생일 며칠 전부터 기대, 아니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일 당일이 되어, 퀄츠 성 연회장에서 시작된 파티가 끝나도 쌍둥이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우습다. 그들의 정체를 아는 내가, 열다섯에 스물아홉 살을 더해 실제 나이는 마흔을 넘긴 내가, 생일 선물 교환식을 기대하고 있다니.
그래도.
혹시 모르지.
"이번엔 직접 구해야겠군."
난 쌍둥이들의 선물 목록을 생각했다.
96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건 빌드 업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 당신들과 문제 없어. 우린 아직 가족을 연기하고 있잖아.
그러니 지금처럼만 지내자. 이 괴물 새끼들아.
대충 그런 의미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게 더 불안하다. 그들이 작년에 서로 선물을 교환한 건 쌍둥이의 애틋한 가족애가 남아서가 아니다. 내가 그렇듯, 그들도 열 살 이전에 화목했던 시절의 기억은 남아 있을 것이다. 전생을 떠올리기 전엔 우리들은 정말 친했다. 서로 아꼈고, 생일마다 고사리 손으로 직접 선물을 만들고 교환했으며, 밤마다 모여 카드 놀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몹시 기이하고 미묘한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런 옛 생각이 나는 사소한 행동이 더 중요해졌다. 저마다 꿍꿍이를 숨기고 있지만, 적어도 겉보기엔 아직 우린 화목한 가족을 연기한다는 걸 서로에게 알려 줘야 했다. 이 또한 생존에 필요한 작은 재치인 것이다.
생일 당일에 열린 축하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쌍둥이들은 일주일 뒤, 퀄츠 성으로 모인다. 성인이 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후계 수업에 대한 논의가 있기 때문이다. 몹시 걱정되는 일이나 우선 그때까지 난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자 했다.
"바람이꽃이면 되겠지."
난 가장 먼저 멜리사의 선물을 구하고자 했다. 멜리사 누나에게 줄 선물은 바람이꽃이다. 난 멜리사가 꽃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퀄츠의 정원은 음산한 귀신의 숲으로 유명했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가득 핀 정원이다. 정원에 득실거리는 불쾌한 것들만 없으면, 마테란드 공작의 분수정원보다 더 멋진 정원이 될 수도 있었다.
멜리사의 오두막집엔 항상 어울리지 않게 꽃병이 놓여져 있었다. 멜카란 이후로 천안통의 성능 실험 때문에 오두막집에 자주 오갔는데, 난 꽃병에 꽃이 하루마다 바뀌는 걸 봤다.
"개과동물이 꽃을 좋아한다더니."
큰집 마당의 복돌이가 그렇게 진달래꽃을 잘 주워먹었는데.
아무튼 저번에 어머니를 위해 바람이꽃을 가져다줄 때도 그랬다. 꽃을 보던 멜리사의 꼬리는 살랑거렸다. 꽃을 더 구하지 못해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고, 냄새를 맡으면 고통이 가시는 '무안단물' 같은 바람이꽃이면 멜리사의 꽃병을 오랫동안 장식하지 않을까 싶다.
일주일의 시간은 짧았다.
난 결단을 내리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대협곡, 인간의 발길을 불허하는 대륙 금지 중에 한 곳.
예전엔 홀로 다니기엔 두려웠던 곳이나 이젠 거침없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난 곧바로 대협곡의 끝없이 깊은 절벽 사이를 뛰어다녔다. 여전히 절벽 아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젠 떨어질 위험은 없다. 가끔 와이번이 귀찮게 할 때마다 '호이' 맛 좀 보여 줬다.
"고작 일 년이 지났는데, 훠우."
라멜스타를 전력으로 던져 간신히 잡았던 와이번이다.
삿대질 한 번에 터져 죽는 걸 보며 난 격세지감을 느꼈다.
전생에선 강해지려고 수년을 똥밭에 굴러도 그대로였었는데, 거참.
절벽에 핀 바람이꽃을 얻기 위해 난 부단히도 뛰어다녔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절벽 깊은 아래까진 내려가지 않았다. 그곳엔 우샤스 누나처럼 불길한 게 있고, 궁금하긴 하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득의 힘을 얻은 후 난 내 직감을 믿게 되었다. 무저갱보다 깊은 저 나락에서 불길하게 피어오르는 악취를 애써 무시하며 바람이꽃을 찾는 것에만 집중했다.
새벽녘에 도착했으나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난 아인의 땅 근처까지 가서야 단 한 송이의 바람이꽃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개눈깔이 아니었다면 절대 못 찾았을 것이다. 이만하면 정성 어린 선물이다. 고맙다는 말을 기대할 수 없는 게 살짝 짜증 날 정도로, 열성을 다했다. 하루종일 개눈깔을 부라리며 절벽을 돌아다니면서 와이번을 물리쳤다. 퀄츠로 돌아가는 길엔 마차를 빌렸다. 쉴 새 없이 달려도 하루가 넘게 걸리는 거리였으나, 출발하자마자 잠든 난 일어나자 어느새 퀄츠에 도착한 후였다.
요새 멜리사는 항상 자신의 오두막집에 머물고 있었다.
막상 선물이랍시고 먼저 주려고 하니 상당히 껄끄러웠다. 어색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뭐, 이건 생존의 일환이자 가족 연극의 연장선이고 생각하면.
실험을 핑계로 오두막집을 찾은 난 넌지시 바람이꽃을 건넸다.
멜리사는 내 손에 들린 새하얗고, 나풀거리는 꽃잎들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선반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망토가 있었다. 내 선물인가? 살짝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멜리사는 주섬주섬 낡은 망토를 어깨에 걸치더니 아홉 개의 꼬리를 모두 숨겼다. 천안통으로도 자세히 볼 수 없다니, 마법이라도 걸린 망토였나.
그리고 말없이 내 손에서 바람이꽃을 낚아챘다.
"구하는 데 힘들었어."
"…음."
창가에 놓인 꽃병에서 새빨간 꽃을 꺼내고 바람이꽃을 꽂는다. 난 멜리사의 저리 조심스러우며 정성스러운 손길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한참 꽃을 만지작거리며 꽃병을 꾸미던 멜리사였다. 망토는 꼬리를 가렸지만 형태는 보였다. 망토가 남사스럽게 움직였다.
"재료는 구했냐?"
"응?"
갑자기 멜리사가 물었다.
"레비아탄의 비늘은 있으니, 빨리 가져와 멍청아.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아, 응."
부러진 라멜스타를 대신해 멜리사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주기로 했었다.
헛된 말이 아니었구나.
* * *
작년 생일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기억, 압도적으로 무서웠던 기억은 역시 우샤스의 눈물이었다. 난 지금도 대체 왜 우샤스가 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악마의 기원과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난 이유와 더불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난 도무지 우샤스를 위한 선물을 정할 수 없었다. 결국, 돈이 정성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따르기로 했다. 멜카란의 보석 광산에서 귀족들도 경악할 많은 돈을 벌었다.
"팔찌면 되겠지."
우샤스는 악세서리를 하지 않는다. 그나마 찬 악세서리라곤 예전 미사를 드릴 때 제식용 도구로 팔찌를 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래도 아지비카의 성녀가 아니던가? 난 우샤스와 어울리는 보석이 뭘까 생각해 봤다.
"다이아몬드."
보석의 왕이자.
찬란한 광채를 품은 사치의 여왕 다이아몬드.
하지만 너무 새하얗고 투명하여 어울리지 않아.
우샤스는 빛난다. 그러나 신성한 광채는 아니다.
어둠도 있다. 그야말로 새벽, 태양과 어둠, 낮과 밤을 고루 간직한 존재다.
"검은 다이아몬드."
그런 게 있던가?
그날 오후, 난 알리에바를 호출했다.
* * *
라니스타의 선물을 준비하는 사이.
하루를 앞두고 간신히 우샤스의 선물이 준비되었다.
알리에바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어렵사리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이게 아인들의 땅에서만 난다는 검은 보석, 탄바이트군요."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새벽의 현신'에게 바칠 공물이 아니었다면, 탄바이트를 소유한 뷀제 부인이 독실한 아지비카 신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팔찌를 만들지 못했겠지요."
난 팔찌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신기했다. 처음부터 제식용으로 제작되어 팔찌의 생김새는 수수했다. 하지만 은팔찌의 중앙에 박힌, 아주 작은 검은 보석 하나만으로 왕가의 보물처럼 고귀한 기세를 풍겼다. 탄바이트는 신기한 보석이었다. 다이아몬드 열 배의 가격이 아깝지 않다. 어찌 저리 밤처럼 어두운데, 찬란한 빛을 내뿜을 수 있을까.
다아....
달비도 팔찌를 관심 있게 바라봤다.
다아.
자연의 짐승, 영수조차 홀릴 보석인가?
돈값하는구만.
다우다웁-
"응?"
잠깐 방심하는 사이, 달비는 유령처럼 스르르 걸어나가 팔찌를 삼켰다.
난 우물우물거리는 달비의 뺨을 바라봤다. 달비가 다이아몬드 열 배 가격의 팔찌를 먹었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키우던 개가 이상한 거 주워먹었을 때처럼 손가락을 집어넣고 뱉어 내게 해야 하나? 아니면 달비에게 그냥 주고, 다른 걸 구해야 해?
퉤-!
다행히 달비는 빠른 시간에에 내 고민을 멈추게 해 줬다.
녀석이 뱉어낸 팔찌는 다행히 형태는 멀쩡했다.
"이… 이건."
하지만 상인이자 심미안을 지닌 보석상 알리에바를 당황하게 할 결과물이 되었다.
탄바이트 보석이 변했다. 작은 보석 안에 밤하늘이 펼쳐졌다. 은하수를 박아 넣은 듯, 밤하늘에 찬란한 별들을 작게 만든 듯했다.
"탄바이트가 아인들의 땅에서 난다고 하셨죠."
"예? 아, 예."
달비는 굶주렸다.
탄바이트는 '찌꺼기'다.
아인들의 땅.
어쩌면 그곳은 달비의 먹이저장고일지도 몰라.
* * *
쿤칸에도 백주는 있다.
하지만 죽엽청처럼 발효약재술은 없다.
일주일만에 발효는 불가능하지만.
약재를 알맞게 섞으면 비슷하게나마 흉내는 낼 수 있다.
라니스타는 무림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그리워는 하고 있다.
지구를 유린하고 짓밟던 무림인 새끼들은 아직도 치가 떨린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무림인에 대한 연구를 동아시아 방위군 연구소에서도 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편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방위군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무림인과 마주치면 술을 대접하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라니스타도 술을 즐겨 마신다. 하지만 무림인인 그가 즐겨 마시는 약재술은 없다. 내가 만든 야매 청주라도 혀가 그리움을 알지 않을까?
그가 돌아온 날, 따로 식사를 하던 라니스타를 찾아갔다.
그리고 잔을 주고 술을 따랐다. 순간 은은하게 퍼지는 약초의 향기로운 냄새에 라니스타는 잔을 들더니 한입에 털어넣었다. 독초라도 넣어볼걸,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났다.
"제자가 스승에게 술을 올리는 이유를 아느냐?"
술을 들이킨 라니스타가 문득 물었다.
"무엇입니까, 스승님."
"이끌어 주라는 뜻이다."
라니스타가 술을 따라 잔을 내게 건넸다.
난 도망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부딪혀 넘어졌다.
라니스타였다.
놈은 술잔을 건넸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을지어니, 좋다. 내 오늘부터 너의 하늘이 될 테니, 날 하느님처럼 모시거라."
"꺼, 꺼지십시오!"
좋은 선물이 아니었다.
* * *
난 미사를 진행하는 우샤스를 구경했다. 새하얀 손목에는 만인의 눈을 현혹할 보물이 있었으나, 우샤스가 차니 그냥 멋있는 팔찌에 불과했다. 성당에서 나온 난 뺨을 긁적였다. 뭐야, 결국 난 놈들에게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한 거잖아?
이 애매하고 짜증 나는 기분이 어디서 오는지 곰곰히 생각하던 난, 역시 십 년의 기억이 날 괴롭히고 있음을 인정했다. 가족이었지, 친구였었지. 십 년 동안. 우리들은. 어쩌랴,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진 않는다. 난 나였고, 놈들은 놈들이었다. 그래서 빌어먹을 십 년의 기억, 어린 내가 느낀 서운함을 난 쉽게 지워 낼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자 걸시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요 며칠 축제 준비와 '비밀 활동'으로 바쁘다며 모습을 감췄던 걸시였다.
"짠!"
스리슬쩍 다가온 걸시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처음엔 지갑인 줄 알았으나 고급스럽게 치장된 인주였다.
진사(辰沙)가 제법 선명하게 붉은 걸 보니 돈 꽤 든 것 같다.
"고귀하신 분이 탄생하셨으니! 걸시의 작은 선물이여요."
"하하."
"이제 도련님도 도장 찍을 일이 많아지실 거에요! 이 인주를 사용해 주세요. 증명서에 쾅, 입학서에 쾅, 혼인서에 쾅쾅. 그리고, 토지계약서에도 쾅쾅."
"알았다."
오늘부로 확실히 걸시는 유일하게 저택 두 채를 소유한 하녀가 되었다.
* * *
다아?
꽃을 물고 온 달비다.
"생일 선물?"
다아!
"고마워."
난 히죽 웃으며 달비가 가져온 꽃을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개간네!
달비가 화를 냈다. 평범한 꽃에 담긴 기운이 심상치 않아 약초라도 생각했거늘.
아니었나 보다. 달비는 내 정수리 위로 올라오더니 발굽으로 콩콩 때렸다. 화풀이라고 생각했지만 딱콩은 열다섯 번이었다. 녀석 나름대로, 축하한다는 인사였다.
"5년인가."
전생을 떠올린 지 햇수로 5년.
4년은 허무하게.
지난 일 년은 격동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변화는 더욱더 격렬하겠지.
97
타인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흥미롭고 쓸모없는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랭킹 6위의 파이로 키네스트 초능력자가 대봉전투에서 무림인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얘기, 북부방위군 중장이 배신하여 측정불허의 괴물을 숭배하며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는 얘기 혹은 불길한 눈알을 가진 수색꾼 한 명이 죽음을 몰고 다니는 골칫덩어리라는 얘기.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쿤칸은 물론, 대륙 너머의 소왕국까지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다지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은 사소한 행동까지 감시당하는 자들이었다. '때'가 다가올수록 많은 이목이 쏠렸다. 아버지는 현상 유지를 원했으나, 모략꾼들은 명실상부 제국의 패권을 거머쥘 가문으로 레인버그를 손꼽았다. 그 이유엔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전쟁영웅 라이베라 공작의 위명도 있었으나, 몇 년 전부터 레인버그의 후계자가 더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사소한 사건이 이토록 뜨거운 감자가 된 거겠지.
"당연히 수석이지. 그뿐만이 아니야. 솔직히 말해, 아카데미 검술 선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우리 라니스타 도련님만 할까? 되려 한 수 가르쳐 주실걸!"
"으음, 그렇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안 가. 그분들이 아카데미를? 아무리 뛰어난 노사가 와도… 안 그래?"
아침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서 시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아로니아 도련님은 입학하시지 않을까? 여명의 기둥이잖아! 아카데미엔 제국 너머 남쪽 제도의 군주의 영애들까지 입학한대!"
"그렇지! 차기 가주님으로 가장 유력하시니 아카데미 졸업은 필수겠지. 인맥을 쌓기 위해서라도? 어머, 이러다 다른 나라 아리따운 공주님과 약혼하실지도!"
꺄르륵.
난 시녀의 떠드는 소리를 훔쳐 듣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날 아로니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렇다 쳐도.
역시 하녀들까지 날 차기 가주로 생각하고 있구나.
이제 와 무슨 의미인가 싶긴 하지만.
"아카데미? 캠퍼스 생활?"
난 진저리를 쳤다.
"지랄이지."
쌍둥이들의 아카데미 입학 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충격적인 소식.
하지만 퀄츠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했다.
'달의 아이'들은 모두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했다.
뭐, 당연한 거다. 라니스타는 검으로 산을 쪼개고, 멜리사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대적하면서도, 동시에 열렬한 스카웃 제의를 받는 마법사다. 우샤스는 말할 필요도 없지. 어나더 레벨인 그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 나이에 꼬물이들과 뭘 하겠다고? 40대 아저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꼴이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아카데미에 갈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뿐이다. 친구 만들기. 당연히 내 성격에, 하하호호 웃으며 전교 회장이 되는 건 결단코 무리였다.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는 내 목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아카데미는 보통 졸업까지 3년이 소모되니, 그때 동안 악마를 잡으면 백 마리는 더 잡을수 있다.
아버지가 내게 은근슬쩍 입학에 대해 물었다.
다른 쌍둥이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입학을 원하는 말투였다.
배움의 섬 혹은 무세이온Mouseion의 섬.
동과 서대륙의 중앙, 대해에 있는 제주도만 한 섬.
섬 전체가 아카데미 교육 시설이자 귀족, 군부, 갑부의 자제들은 물론 미천한 자라도 재능이 뛰어나다면 입학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학 시설이다. 교육뿐만 아니라 무세이온은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마탑과 협력하여 마법사들을 양성하거나 뛰어난 기사를 초빙하여 검술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무재들뿐만 아니라 정치나 군인, 지식인들도 걸출한 자들을 배출했다고 들었다. 대전쟁 때 슈테르닐 왕성을 수호한 전설적인 군인 살라만도 아카데미 출신, 자유 도시의 진보된 과학자들 대부분도 아카데미, 대충 잘나간다 싶으면 무세이온 출신.
하지만 명성만큼 졸업이 어렵다. 연줄로 입학한다고 하더라도 1학기를 수료하지 못한 채 쫓겨나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 수만 명이 지원해도, 한 해 졸업자는 수십 명.
그야말로.
세계 학연의 최정점에 있는 대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쌍둥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난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하고.
대신 '무사행'을 택했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 * *
"카악- 퉤!"
"쯧,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난 걸쭉한 피가래를 뱉어 냈다. 라니스타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으나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짓는다. 처맞는 짓도 일 년이 넘으니 익숙해져 버렸다. 젠장, 익숙해선 안 될 게 익숙해져 버린 느낌이다. 난 라니스타가 무어라 하든 목젖을 간지럽히는 비릿한 피를 뱉어 내는 데 열중했다.
졌다.
전력을 다했다.
죽을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 정도 의미가 아니다.
난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사용해서 덤볐다. 지친 달비가 옆에서 발라당 누워 혀를 헥헥거렸다. 녀석의 기질은 날 닮아 지친 와중에도 라니스타를 향해 욕을 했다. 난 한 번도 '저 상태의 라니스타'를 이기지 못했다.
"산이 깎였어. 산이 깎였다고."
난 뒤를 돌아봤다.
분명, 야트막한 작은 산이라도 우뚝 솟은 봉우리가 존재했었다.
지금은 없다. 라니스타가 휘두른 검기가 무참히 산을 깎아 냈다. 대규모 토목공사도 그에게 맡긴다면 하루 만에 신속 해결 가능할 것이다.
"언제 옮겼다고...."
이곳은 멜리사가 제공한 수련 장소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서 라니스타와 실전 결투를 했다. 내공을 체득한 후 연무장은 몹시 비좁았다. 라니스타와의 싸움은 지형이 뒤바뀔 정도로 격렬했다. 난 콜록콜록 기침하며 아린 갈비뼈를 부여잡았다. 단 한 대, 한 번의 공격을 맞았으나 산이 깎여 나갈 힘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라니스타는 작은 산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올람의 거산까지 깎을 모양이었다.
"쯧. 경지의 차이가 극심하구나."
근래 들어.
라니스타를 전혀 이기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선 라니스타가 흉내 내는 무인이다.
혼일동화의 경지를 배운 후 절정에 이른 고수까지 꺾었다. 몇 번이나. 그러다가 저번 생일 때 라니스타에게 술을 올린 후 놈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길,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자.
무인이 초절정에 이르면 이때부턴 같은 경지가 아니면 당해 낼 수가 없단다.
절정의 고수 열댓 명이 덤벼도 초절정의 고수가 이기진 못하더라도 죽지는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직접 맞붙으니 더욱더 절실히 깨달았다. 더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다. 즉, 한계를 극복한 초인의 경지다.
도저히 이길 방도가 없으니 마음이 답답했다.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게 많아지니 호승심은 열등감과 무기력함으로 바뀌었다.
배 째라, 벌러덩 누워 있으니 라니스타가 무언가를 던졌다.
쾅-!
난 내 뺨 옆을 스치고 땅바닥에 박힌 무언가를 흘금 흘겨봤다. 자세히 보니 종이로 만든 두루마리다. 어떻게 두루마리가 단단한 땅을 두부 자르듯 잘랐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리면 어린이용 뽀로로 장난감 식칼도 천하제일 무기가 될 테니까.
"이게 뭡니까?"
두루마리에 적힌 예스러운 글자.
옛 쿤칸의 글씨이나 난 읽을 수 있었다.
"심삽검연도?"
두루마리를 펼치니 붓글씨로 써진 글귀가 나왔다.
은검의 주인.
재잘거리는 검의 주인.
탐하는 검의 주인.
...글귀는 모두 각각 누군가를 지칭하는 듯 보였다.
어리둥절한 내게 라니스타가 말했다.
"13개의 검의 주인을 기록한 벤베르의 서신이다."
"벤베르? 전설적인 투신?"
라니스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난 아차 싶었다. 라니스타는 언뜻 보면 어른 같아도 속은 세 살배기 철부지 새끼다.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이의 무력을 높여 부르는 걸 몹시 싫어한다. 존경받는 벤베르는 황제조차 투신이라는 명호를 붙여 주나 라니스타는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날 때리지 않았다.
"그중 일부는 거짓이나 진실도 있다."
"13개의 검? '남부제도의 유령선'처럼 그저 떠도는 이야기 아니었어?"
이 세상은 지구가 아니다. 소문은 뜬구름처럼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설령 지구라고 해도 헛소문들이 진짜처럼 받아들여지는데, 미디어 매체가 없는 이곳이야 오죽하겠는가.
'13개의 검'도 그렇다. 세상엔 경이로운 검이 열세 자루 있는데, 이 검의 소유자들은 모두 경천동지할 힘을 지녔다더라. 그래서? 내가 알기로는 권력자 중에 13개의 검이니 뭐니 나불거리는 자는 없다. '사람'이 그만한 힘을 지녔는데 지금껏 잠잠할 리가 없다.
"이 망할 새끼는 항상 두 번 말하게 하는군. 일부는 거짓이나 진실도 있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라니스타의 꾸짖음에 난 머쓱하게 손을 올려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위명이란 참으로 달콤한 것이다. 내가 무림에선...."
시작됐다.
라니스타의 '라떼는 말이야.'
"조수빙왕은 정말 손으로 빙하를 빚는 신기한 자였다. 매목구염황은 화림을 자유자재로 다뤘으며, 스스로 검의 지존이라 부르던 자도 그만한 이유는 있던 자다. 검주들도 몇백 년 동안 잊히지 않았던 자들이니 위명에 걸맞은 자들일 터."
그가 명령했다.
"네가 직접 겪고, 다듬고, 깎이고 날 세워 경지를 높여라. 적어도 네 자루의 이상의 검을 얻어 와야 한다."
"왜요?"
"…네놈은 절정과 초절정의 사이에 있으니 필요한 건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요? 검주들의 검을 빼앗으면 깨닫는 게 있다는 소린가요? 강도짓이 아닌가요?"
그가 날 때리기 전에 난 주둥이를 급하게 놀렸다.
"스승님은 상대해 보셨나요? 물론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무인의 호승심은 옥황상제한테도 덤빈다고 하잖아요."
라니스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화를 내기 전에 관심을 돌리는 데에 성공한 듯 보였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놈들은 무인이라기보다...."
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기분 나쁜 눈빛이다. 주로 내가 발전된 모습을 보이거나 더 심하게 두들겨 패려고 할 때 저 짜증 나는 눈빛을 번득이곤 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라."
"싫다면요?"
말해도 맞고 말 안 해도 맞는다.
그러니 난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습관이 생겼다.
"마도 놈들은 비열한 존속들이나 그들의 방식 자체는 공감이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스승의 전언을 개새끼가 뼈다귀를 발라 먹는 잡소리처럼 듣는 제자 따위 필요 없다. 네 자루의 검을 들고 오지 않으면 널 제자로 삼지 않겠느니라."
난 활짝 웃었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엿 같은 회사에 사표를 내던지는 듯 상쾌한 마음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난 그의 제자가 되어 매 맞는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얻은 게 있다. 내 손에 쥐어진 합격 목걸이, '힘'이라는 증표다.
악마는 물론, 악인과 괴물까지.
그에게서 배운 무공이 아니었다면 결코 극복하지 못했겠지.
사자에게서 무는 법을 배운다. 아직 내 작디작은 이빨은 세상을 마음대로 물어뜯기엔 여물지 못했다. 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다. 손에 쥔 사표를 조용히 품 안에 넣는다.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난 삐뚤어진 입으로 굴복의 말을 내뱉었다.
"가져오겠나이다, 스승님."
라니스타는 만족한 얼굴로 호탕하게 말했다.
"마교에선 '검사냥'이라 불리던 의식이다! 고수들의 검을 빼앗고 쟁취하여 자신의 무공을 갈고닦는 거지. 네 눈깔은 사의한 힘을 지녔으니 얻는 것도 더 많을 터. 하지만 명심하라. 깨달음은 혈겁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거지의 투정에도 깨달음이 있으니, 이번 무림행으로 심기 또한 연마하는 것이다!"
"스승님. 여긴 무림이 아니라...."
난 그의 발길질에 뒤로 발라당 넘어지며, 고통과 더불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난 매를 버는 체질일지도 몰라.
98
13개의 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멜리사를 찾았다.
멜리사와의 관계는 상호협조적이다. 난 멜리사의 실험 대상이 되거나 귀찮아하는 일을 대신 처리해 주고, 멜리사는 내 힘으로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택시'를 태워 줬다. 그렇다고 평등한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껄끄러운 관계임은 여전하나 바람이꽃을 선물한 이후로 왠지 멜리사가 유해졌다. 실험도 강압적이지 않고 찾아가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두막집에 앉아 창가에 놓인 꽃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몇 주가 지났는데 꽃잎은 시들지 않고 생생했다. 마녀의 집 같은 곳에서 창가의 꽃병만큼은 발랄했다. 가만히 앉아 꽃을 구경하고 있자 얼마 후 오두막집의 문이 열렸다. 멜리사는 전에 부탁한 정보가 적힌 종이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난 종이뭉치에 적힌 기록들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뭘."
13개의 검주.
진짜였구나.
"누나,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이 기록들이 진짜라면 왜 세상엔 드러나지 않았던 걸까? '은의 검'은 이해하는데, 나머지는 이상해."
멜리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퀴벌레를 보듯 날 쳐다봤다. 입술을 우물거렸는데, 분명 욕을 참고 있는 게 분명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착한 얼굴로 돌아와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세상이 왜 아직 멸망 안 한 줄 알겠니?"
"쌍둥이들이 멸망을 안 시켜서?"
"들끓는 악마에, 세계의 절반을 터로 삼고 있는 아인족에, 대협곡 아래엔.... 어쨌든 인류는 아무리 '마스터'니 '대마법사'니 하는 자들이 있어도 너무나 약한 세력이란다. 하지만 인류에게도 '억제기'가 있어. 자신의 멸망을 억제하는 존재들. 그리고 분명 '13검'의 검주들은 가장 강한 억제기 중 하나야."
인류의 멸망을 억제하는 자들이라.
그럼 이제부터 검을 빼앗으러 가는 나는 악당이겠네.
난 기록을 읽었다. 멜리사의 말에 따르면, 13개의 검은 소유한 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 나고 무기 난 게 아니라, 무기 나고 사람 난 것이다. 수백 년간 이어 온 전설, 그 바탕이 되는 13개의 검. 누군가는 대륙 절세의 검을 13개의 검이라고 포장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검은 검이라고 부를 뿐, 검의 형태를 하지 않는 것도 있다. 악마 전쟁 이전에는 아는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무를 중요시하는 쿤칸에서나 제법 아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검은 계승됐다.
수백 년간, 주인을 바꾸며.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는 않으나, 확연히 드러나지도 않은 채로.
멜리사의 기록을 읽던 난 첫 번째 행선지를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었다.
베일에 감춰진 검주들의 기록들 단편적인 사이로, 내가 익히 아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산 일족."
코산은 강력한 사냥꾼이자 추적꾼 일족이다.
그들이 사냥하는 건 맹수 따위가 아니다.
악마.
악마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유일무이한 혈족들이다.
대전쟁 때 이후로 코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며 마지막 목격 장소는 멜카란이다.
하지만 난 그들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재회를 기다리는 딸과 아버지도 말이다.
"누님, 우선 은검의 주인을 찾으러 갈 겁니다."
멜리사는 예상했다는 듯 오두막집의 문을 열며 대답했다.
"준비해 놨어."
요 며칠 마차를 타고, 말을 끌고 다니며 새삼 멜리사가 제공하는 편리함을 절실히 깨닫는 와중이었다. 마법사 만세다. 난 허리를 숙여 멜리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오두막집을 나섰다.
"…조심하렴."
"뭬야?"
문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있을 수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단어의 조합에 난 기겁하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오두막집은 굳게 닫혔고 '열면 뒤진다'라는 강렬한 불길함을 내뿜고 있었다. 멜리사가 조심하라고 했다. 우샤스가 그랬다면, 능글맞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멜리사잖아?
"바람이꽃, 더 구하러 갈까."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 *
"시야나, 네 아버지 뵈러 가자."
아로니아 쉐이크를 들고 온 걸시는 쟁반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난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유리잔과 지저분하게 흘린 아로니아 쉐이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걸시의 얼굴은 평온했다.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근데 왜 놀란 척을 한 걸까?
"무슨 짓이니."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코산 일족과는 빠르든 늦든 한 번 더 만나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목적이 난감해졌다. 난 '은의 검'의 주인을 만나러 간다. 그의 검을 빼앗기 위해서 말이다. 걸시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쩌면 둘 다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걸시를 놔두고 가는 건 너무 비겁하다.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는 버릇은 이번 생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난 일단,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걸시가 여행 채비를 하는 동안 난 알리에바와 만났다.
바쁜 일정을 보내던 알리에바는 날 위해서 기꺼이 하루 일정을 반납했다.
하지만 내가 내민 조달서에 그는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많은 걸 이 주일 만에 서대륙 베르텐베켄까지 조달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따지는 듯한 말투, 어쩔 수 없다.
조달서에 적힌 물건들은 보통 평범한 게 아니었으니까.
"자유 도시 그 인간들에게 부탁해 봐요. 하루도 안 걸릴걸요?"
"확실히 자금이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겠군요. 하지만 이 많은 '은'으로 정말...."
"걱정 말아요. 소모된 비용보다 더 큰 리턴은 확실할 테니까."
음, 아마도.
난 들고 온 서신을 알리에바에게 건넸다.
"그리고 갈단 상단의 심부름꾼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목적지가 적혀 있지 않는 서신에 알리에바는 어깨를 으쓱했으나 이유는 묻지 않았다.
편지 봉투는 글귀만 적혀 있을 뿐이다.
[내 보물, 페레걸 시야나]
정말 오글거리는 접선 암호였다.
* * *
며칠 뒤, 멜리사의 공간 회귀 마법문을 지나 '대밀림'에 도착했다. 걸시는 저번 멜카란 때처럼 엄청난 구토를 했지만, 다행히 옷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녀석은 금방 기운을 차리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 선물로 쿠쿠 빵을 준비했는데, 이 날씨라면 금방 썩겠어요. 하하-!"
서대륙은 동대륙보다 넓다.
정확하겐 인간들의 영역이 훨씬 넓은 것이다.
동대륙은 아인들의 땅이랑 이어져 있기에 쿤칸과 슈테르닐을 제외하면 모두 개척이 불가능한 땅이다. 하지만 서대륙의 땅은 두 곳을 제외하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거주 불가의 금지.
한 곳은 멜카란이었다.
지금은 개척을 시도하며 급변하고 있는 지역이 되었으니.
사실상 서대륙의 금지는 단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
카수의 대밀림 혹은 갈구하는 대밀림.
자유 도시의 윗지방이자 왕국의 서쪽 지대.
아인들의 땅과 '너머의 땅'을 제외하곤 동서대륙에서 가장 넓은 밀림 지역이었다.
금지가 그렇듯 흉흉한 소문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는데, 간결한 경고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들어가면, 못 나옴.
하지만 실제로 도착하니 소문보단 밝은 곳이었다. 아직 대밀림의 입구라서 그런지, 얼마 가지 않아 제법 규모가 큰 화전민 마을에 도착했다. 왕국의 간섭을 피해 도망쳐 온 농노들이 세운 마을에는 농부뿐만 아니라 밀림에서 나는 나무를 베는 나무꾼들이나 약초꾼 혹은 사냥꾼과 상인들도 보였다.
이방인인 나와 걸시를 경계했으나 딱히 시비를 걸어오진 않았다. 길목에서 벗어나 포목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사냥꾼 행렬에 섞여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 또한 이방인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후, 더워라."
걸시의 손수건은 땀으로 축축했다. 연신 이마와 겨드랑이 닦아 내던 걸시는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걸시는 잠시 고민하더니, 총총걸음으로 걸어가 갑자기 남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시야나!"
"아빠!"
어야둥둥.
부녀의 재회는 감동적이었다.
적어도 딸에게 칼 맞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 * *
걸시는 제리코의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제리코와 난 마을에서 나와 밀림으로 들어갔다.
길을 벗어나 조금만 옆으로 갔을 뿐인데 인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약초꾼들도 정해진 길로만 다녔다. 욕심을 내 길을 벗어난 약초꾼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제리코는 진중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서신의 내용이 정말 내가 이해한 게 맞소?"
"전에도 말했잖아요? 내 목적은 악마 섬멸이라고."
"공자의 도움은 개인적인 것이오,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도움입니다."
"알았소. 그렇다면, 우선 보여 드려야 할 게 있소."
제리코는 능숙하게 밀림 속을 헤쳐나가며 날 안내했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산민 마을.
하지만 아까 본 마을과는 달리 분위기가 암울하고, 가라앉았으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문이 열린 오두막집이었다. 한 어린아이가 집의 입구에 서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은 허전했다. 녀석은 멍하니 오두막집 안을 바라보다, 우리가 다가가자 느린 발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난 오두막집 안에 펼쳐진 풍경을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가 저런 걸 봐도 괜찮습니까?"
"밀림의 주민들은 마른 시체를 두려워하지 않소. 어린아이라도 마찬가지로."
오두막집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시체 세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밀림의 습하고 더운 날씨에 시체가 부패할 법도 한데, 미라처럼 완전히 말라 있었다.
"정녕 두려운 건 피를 흘리는 시체지."
제리코는 오두막집의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화전민 마을과 가까운 곳으로, 우거진 수풀에 가려진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의 문을 열자마자 난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제리코는 익숙한 듯 문을 열고 계단을 지났다.
"이건… 씨발, 이건 대체."
지하실엔 한 가지 거대한 도구밖에 없었다.
마른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거대한 '맷돌'.
지하실 바닥 또한 검붉은 얼룩으로 가득하여 얼마나 많은 피가 지하실에 흘렸는지 불쾌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맷돌처럼 생긴 기구의 구조는 간단했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넓은 입구와 그리고 무언가를 '짓누르기 위해' 설계된 구조물과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와 연결된 쇠사슬의 끝엔 범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나 쓰일 법한 핸들이 보였다. 제리코가 힘겹게 핸들을 돌리자, 맷돌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내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이건, 씨발!"
착즙기.
"맞소. 오두막집의 가족들이 화전민을 죽이고 '갈아 버린' 범인들이오."
"인간이, 인간을?"
"그들 또한 협박받았소. 결국엔, 피가 모두 빨렸지만."
이 기구는 남김없이 '뽑기 위해' 만든 맷돌이다.
콩 대신 다른 걸 갈아 버리는.
지옥에나 어울릴 법한.
그야말로.
악마의 기구다.
제리코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놈들이 이렇게 도시와 가까운 곳까지 나타난 경우는 몹시 드물었으나 있는 일이었지. 하지만 며칠 사이 연달아 사건을 일으킨 건 이번이 처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