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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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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해?"

쌍둥이들이 지하 서고에 모였다. 엄마의 유품에 대해 설명하고, 라지엘의 서가 가진 '위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그들은 라지엘의 서를 번갈아 가며 읽더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강력한 저주가 깃든 책이야. 그러나 이 세계의 마법 체계와는 전혀 다르군. 확실히, 이 책은 다른 세계의 물건이다."

멜리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라지엘의 서'라고 불리는 이 책을 멜리사는 이계의 물건으로 여겼다. 악마를 기록한 사전이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과 연이 여기까지 닿았군."

라니스타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책을 바라봤다.

"그녀의 의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그는 엄마의 피가 스며든 책 첫 장에 손을 올리고 묵념했다. 우리 손에 라지엘의 서가 들어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며, 엄마에게 감사하라고 했다. 라지엘의 서는 악마 사전이다. 이 책에 적힌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린 대단한 책을 얻은 게 틀림없다.

"이 책이 그럼 진짜라는 거지."

우샤스 누나가 대답했다.

"라지엘. 내가 아는 '그분'이라면, 이 책은 진실만이 기록되었다."

우샤스는 라지엘의 서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라지엘의 서의 주인을. 라지엘, 그는 천계의 천사이자 서기라고 했다. 우샤스의 존재로 진짜 천국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천사의 물건이 눈앞에 있으니 얼떨떨했다.

"폴스타."

우샤스는 내게 라지엘의 서를 건네며 말했다.

"내일까지 다 외워."

"뭐? 내일까지?"

"집중하는 게 좋을 거야. 혼자만 바보가 되기 싫으면."

우샤스 누나는 책에 깃든 저주가 너무 강력해서 존재만으로 세계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중요한 건 라지엘의 서에 적힌 내용이라며 내일 이 시간에 책을 불태울 거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내가 암기하지 못하면, 이후에도 책의 내용을 절대 알려 주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다. 라지엘의 서는 장편 소설책만큼이나 두껍다. 대부분 삽화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하룻밤 사이에 외울 분량이 아니다. TV 특종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암기 천재라면 모를까, 내가 암기할 것이 못 된다.

"보자마자 다 외운 겁니까, 형제자매님들은?"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난 습관적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리려다가 참았다.

개간네!

용감한 달비가 쌍둥이에게 덤벼들었다가 우샤스 누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난 라지엘의 서를 노려봤다. 내 '뇌기능'은 이 책을 하루 만에 외울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편법은 존재했다. 천안통의 힘이 전보다 강력해진 지금이라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모든 수험생이 꿈꾸는 능력,

'기록하는 눈'을.

* * *

'눈에 새기다'라는 비유적인 표현이 있다.

눈으로 본 무언가를 잊지 않도록 마음속 깊이 새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할 일은, 비유가 아닌 직역이다.

문장 그대로 눈에 '새긴다'.

처음 이 능력이 발휘된 건 수색대 지침서를 외울 때였다. 146장에 이르는 지침서를, 선임들은 하루 만에 외우라고 했었다. 흔한 부조리와 가혹행위다. 하지만 그때 난 정말 하루 만에 지침서를 암기했었다. 결국 잘난 척한다고 맞은 건 똑같았지만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내가 수색대장의 눈에 들게 된 계기가 되었었다.

사실은 암기한 게 아니라 눈에 새겨 넣은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듯이 눈에 지침서를 새겨 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했다. 천안통이 가진 가장 유용한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점이 너무 명확해 자주 사용할 힘은 아니었다. 146장의 지침서를 외운 대가로 몇 달 동안 극심한 비문증에 시달렸다.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대신 글자들이 날아다녔지만.

그땐 결국 지침서를 모두 외우고 나서야 글자들이 사라졌었다. 워낙 지랄 맞은 부작용이라서(눈을 감아도 글자들이 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쓰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눈에 암기할 내용을 새기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쓸 일도 없었다. 지침서를 들고 다니면서 보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선임들의 구타를 두려워한 그때의 나처럼,

이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달라진 건 그때보다 천안통의 힘이 더 강력해졌다는 것.

쌍둥이들이 돌아가고, 홀로 지하 서고에 남아 라지엘의 서를 펼쳤다.

암기라기보다 책과 눈싸움을 하는 것과 같았다.

난 두 눈을 부릅뜨고 라지엘의 서를 노려봤다.

악마를 그린 삽화, 악마를 묘사한 내용, 특성, 악마가 지닌 힘까지.

난 모든 내용을 눈에 새겨 넣었다.

* * *

라지엘의 서를 보며 알아낸 게 있었다.

예상대로 악마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다는 것.

의외인 건 아르테미스의 성지에서 싸웠던 검은 늑대 악마였다.

"부정한 짐승을 이끌던 군단장이라고?"

놈의 악마명은 '펜릴'.

라지엘의 서에 묘사된 놈은 수천 마리의 악마를 이끌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몹시 위험한 대악마였다. 그런 놈이 내게 죽었다. 이유는 저 녀석 때문이겠지.

개간네! 개간네! 개간네!

옆에서 같이 책을 읽던 달비는 '펜릴' 페이지가 나오자 버럭 화를 내며 발굽으로 삽화를 짓밟았다. 달비는 은근히 다혈질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화난 것 중에 지금이 가장 분노에 찬 모습이었다. 여러 증거가 달비를 아르테미스라고 가리킨다. 녀석이 달의 신이라면, 확실히 대악마와 싸울 수 있었겠지. 다르게 말하면 펜릴이라는 놈이 아르테미스와 몇백 년간 싸워 댄 흉악한 악마였다는 것이다.

"그랑카치, 침묵의 악마...."

라지엘의 서에는 내가 죽인 악마들도 기록되어 있었다.

백작의 아들로 위장한 생선 대가리, 놈의 이름은 그랑카치.

칼베인에서 싸웠던 악마, 깊은 물의 검은 뱀.

"악마가 악마를 섬긴다."

놈들의 기록을 읽던 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놈들 모두 섬기는 악마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섬김의 대상도 각각 달랐다. 아예 지옥에서 싸웠던 촉수 악마는 대놓고 '칠악'을 섬긴다고 나와 있었다.

악마들의 기록은 몹시 흥미로웠다.

때론 소설을 읽는 것처럼 허무맹랑하기도 했고, 묘사한 악마가 너무 끔찍해서 소름이 돋았으며, 세상에 이런 더러운 존재가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뒷장으로 갈수록 더욱 강하고 위험한 악마들이 나왔다.

라지엘의 서를 읽던 난 점점 확신이 들었다.

엄마가 남긴 유산이, 그녀의 말대로 구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난 놈의 삽화를 유심히 바라봤다.

"위장자들의 왕."

놈만 죽일 수 있다면.

* * *

유일하게 '기록'이 온전치 않은 악마가 있었다.

단지 삽화와 더불어 한 문장만 기록된 악마들이었다.

"칠악."

어떤 힘을 지녔는지, 어떤 악마인지,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건대, 악마들에게 왕이 있다면 난 이놈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공통으로 칠악을 묘사하는 하나의 문장.

'멸망을 부르는 자.'

간결하지만 두려운 묘사였다.

"잠깐, 그럼 이건 뭐지?"

난 칠악을 묘사한 삽화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삽화들은 모두 한 장의 그림을 일곱 개로 찢은 듯했다.

삽화에 묘사된 칠악의 악마는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난 거침없이 삽화를 찢어서 이어붙였다.

"악마가 아닌 건가?"

칠악의 악마가 지켜보는 존재,

삽화의 중심에 그려진 누군가.

온통 검게 칠하여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기이하게도 난 인간을 그린 것으로 생각했다.

악마를 기록한 라지엘의 서에서 기록되지 않은 존재.

난 한동안 인상을 찌푸리며 삽화를 바라봤다.

* * *

새벽녘이 되어서야 책을 다 읽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할 건 연습이다.

난 책의 페이지를 눈으로 '보는' 연습을 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과는 달라서 처음엔 애를 먹었다. 요령이 필요했다. 다행히 옛 경험을 떠올려, 방법을 찾았다. 여러 시도 끝에, 라지엘의 서 한 장을 본 후 백지를 놓고 투영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점점 두 눈에 글자들이 떠다니기 시작했고, 난잡하게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는 데에만 수 시간이 걸렸다.

눈이 지끈거리고 뻑뻑해서 눈물이 나왔다. 집중력이 필요했다. 기분전환 겸 신선의 자세를 취했는데, 놀랍게도 책의 페이지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쌓일수록 천안통이 강해지는 건 알고 있었다. 상승효과구나.

연습을 거듭할수록 이제 라지엘의 서를 펼치지 않아도 난 라지엘의 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눈앞에 책이 있는 듯 보였다. 비문증으로 고생하던 전생과는 달랐다. 내가 원할 때 책을 펼치고 덮을 수 있었다. 기억하는 것과는 달랐다. 라지엘의 서의 내용은 드문드문 기억났지만, 내가 원하는 페이지를 보고 싶으면 눈앞의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되었다.

비유하자면 내 눈은 책장의 역할을 했다.

원하는 책을 꺼내어 읽을 수 있다.

라지엘의 서는 내 머릿속이 아니라 눈에 새겨져 있다.

타이밍 좋게도 라지엘의 서를 눈에 모두 새겨넣었을 때, 지하 서고의 문이 열리며 쌍둥이들이 들어왔다. 벌써 하루가 지난 건가. 난 뺨을 닦았다. 밤새 흘린 눈물로 라지엘의 서가 축축할 정도였다.

우샤스 누나는 날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어."

누나가 다가오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줬다.

남매의 정이 넘치는 훈훈한 모습이었으나 난 소름이 끼쳤다. 누나의 눈빛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흑심이 언뜻 보였던 것이다.

쨍그랑!

멜리사의 여우 꼬리가 휘둘러지더니 '늑대인간의 손'이 담긴 유리병을 깨트렸다. 늑대인간의 손이 순간 꿈틀거린 것 같았으나 라니스타의 발에 밟혀 짓뭉개졌다. 멜리사는 곧바로 라지엘의 서를 불태워 버렸다. 역시 그들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라지엘의 서가 멜리사의 마법에 재가 되었다.

"쯧."

흩날리는 재를 보는 멜리사의 표정은 섬뜩했다. 그녀는 불쾌하면 혀를 차는 습관이 있다. 저번에 노예 상인으로 위장한 악마 놈을 족칠 때와 비슷한 분위기다. 고민하던 난 멜리사 누나에게 예의상으로 물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소?"

"3년이다."

"응?"

"3년 동안 조사한 걸 날로 먹다니."

멜리사가 화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세계는 문명의 발생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역사가 몹시 짧아. 기껏해야 삼천 년도 되지 않지. 게다가 '아인'이라고? '옛 기록'엔 없던 새끼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멜리사는 역사학자나 마법사 그리고 귀족들이 알면 까무러칠 사실을 화를 내며 얘기했다.

"세계는 주기적으로 멸망과 재건을 반복했다. 멸망의 주범이 악마인 건 알았지. 하지만 왜, 놈들은 재건되는 세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알아내 주마. 이 망할 책에 담긴 진실을 넘어, 모든 지옥을 샅샅이 뒤져서 반드시 알아낼 거야."

라지엘의 서가 멜리사 누나의 탐구욕을 자극한 것 같았다.

* * *

제국은 신년 행사로 바빴다.

악마 습격과 아지비카교의 지도층 몰살 사건으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성주들은 저마다 성대하게 축제를 준비했다. 퀄츠 영지도 마찬가지로 불안에 떠는 영지민을 위해 사냥터를 개방하고 고기와 곡식을 베풀었다.

날 포함하여 쌍둥이들은 많은 행사에 초청받았다.

하지만 난 백작의 초대와 황성에서 열리는 기사단 축제의 위원 초빙도 무시하고 퀄츠 성의 행사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난 거사擧事를 계획했다.

동대륙을 떠나 서대륙으로 떠날 생각이다.

그것도 야만의 땅, 대협곡과 더불어 서대륙의 대표적인 금지인 '멜카란'으로.

멜카란은 슈테르닐 왕국만큼 드넓은 땅이다. 그러나 서대륙인들은 절대 발을 들이지 않고 범죄자와 도망자들만이 모이는 황야다. 멜카란은 저주받은 대지다. 악령과 괴물이 득실거리며, 그곳에 뜬 태양은 검붉어 산 자들의 생명을 빼앗고, 죽음의 기사들이 대낮에도 활보하며,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이 서로의 살점을 탐하는 곳.

서대륙 자유도시의 뛰어난 군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왕의 권력조차 닿지 않는다.

강자들은 더럽다며 멸시하지만, 속으론 무서워하며.

경멸받는 흑마법사가 혐오스러운 마법을 뽐내는.

악마조차 발을 들이기 꺼린다는 세계의 시궁창.

멜카란.

내가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엄마의 일기에서 난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악마 도시.

옛날, 악마와 거래하던 사악한 자들이 세운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악마와 계약하여 강력한 힘을 누렸지만, 악마를 지배하겠다는 오만을 범해 거신병에게 짓밟혀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그 저주받은 도시의 터가 멜카란에 있다. 엄마의 일기에는 그곳까지 향하는 길이 기록되어 있었다. 엄마는 입구에서 포기하고 돌아간 모양이지만.

지금까지 악령이 출몰한다는 저주받은 도시다.

그곳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멜리사 누나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악마와 거래하던 자들이 있던 곳이니 '아지비카의 성물'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

고의 성물은 악마가 들고 있었다.

난 기꺼이 멜카란까지 가고자 했다.

아무리 악명이 드높은 지랄 맞은 곳이라도 겁먹지 않았다.

난 지옥까지 다녀왔고,

지옥의 악마조차 두려워하는 자들과 몇 년을 지냈다.

"재밌겠다."

심지어 난 모험을 앞둔 소년처럼 흥분했다. 강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미친놈이 되는 것. 이미 훌륭한 선례가 세 명이나 있으니 난 미쳐도 단단히 미쳐야 해.

51

"좋은 곳이지."

"응? 좋은 곳이라고?"

"힘의 질서만이 존재하는, 아늑하고 반가운 곳이었다."

"어딜 간다고 들은 거야? 멜카란으로 간다니까?"

"그래, 그립군. 타성에 젖을 때마다 종종 찾아가곤 했지."

아침 훈련 때였다.

라니스타에게 멜카란으로 간다고 말했다. 워낙 흉악한 곳이라 조언이라도 들을까 싶었다. 하지만 라니스타는 대륙 최악의 지역이자 금지, 살인자들의 땅 멜카란을 '좋은 곳'이라고 불렀다.

"무림과 비슷한 곳이었다."

라니스타가 말해 줬다. 놀랍게도 그는 '10살' 때 이미 멜카란에 간 적이 있었다. 4년 전 전생을 떠올린 직후다. 그는 사냥제가 끝나고, 청늑대 기사단들을 모조리 때려눕힌 후에 검술 스승을 찾는다는 핑계로 자주 사라진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시기에 멜리사 누나의 도움으로 멜카란이나 대협곡 같은 흉악 지대를 돌아다녔단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새삼스레… 참 대단하시네요."

라니스타의 덩치는 열 살때까진 또래와 비슷했으나, 몇 달 만에 40cm 정도가 커서 성인 키보다 컸었다. 그렇다고 해도 앳된 외모는 여전했는데 소년의 몸으로 그 '멜카란'을 돌아다녔다니. 순전히 그가 '라니스타'라서 살아남은 것이다.

"멜카란에선 내 이름을 쓰거라."

"라니스타?"

"그리움에 취해 덕을 베풀었었지.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다면 의협심을 가진 자들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니스타는 자기가 멜카란의 사람들에게 잘해 준 적이 있다며, '라니스타'라고 이름을 알린다면 많은 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갈색 눈에 외모도 비슷하니 오해 살 일도 없을 거란다.

"응."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좋은 판단인지는 모르겠다.

우선 멜카란에서 라니스타의 이름을 대면 외부인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적개심을 누그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라니스타라면… 은혜보다 원한을 더 아낌없이 주는 남자일 텐데.

고민해 봐야겠다.

* * *

느긋하게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 멜카란까지 가려면 적어도 몇 달은 소모가 될 것이다.

다행히 몇 년 전 라니스타가 이용했던 기똥찬 '택시'가 퀄츠 성에 있었다. 난 음침한 정원의 오두막집을 찾았다. 멜리사 누나는 라지엘의 서 이후로 주로 오두막집에서 어떤 책을 열심히 집필하고 있었다.

"기사님."

난 능글맞은 태도로 멜리사 누나에게 부탁했다.

"멜카란 입구까지 얼맙니까?"

"뭐?"

"그 뭐 시더냐, 공간 회귀 마법인가? 라니스타에게 들었어. 멜카란까지 가는 '좌표'가 있다며? 한 번만 데려다 주세요, 기사님."

"…멜카란엔 왜 가려고?"

멜리사에게 숨길 이유는 없다.

난 엄마의 일기장에 적힌 멸망한 도시에 대해서 말하며, 이곳이라면 아지비카교의 성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아홉 꼬리를 삐죽 세웠다.

"그래서, 내가 왜?"

"응? 성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흥미 없어."

라니스타와 멜리사는 서로 으르렁대지만, 한 가지 졸렬한 공통점이 있었다.

변덕이 심하다. 난 멜리사가 정말 성물에 관심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공짜로 '택시'를 태워 주기 싫은 것이다. 내심 멜카란에서도 멜리사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멜카란까지만 데려다 줘, 누나."

"공간 회귀 좌표값을 계산할 시간으로, 이걸 마저 쓰겠어."

멜리사는 날 무시하고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택시비는 낼게."

그제야 멜리사가 관심을 보였다.

"뭘?"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멜리사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난 후회했다. 차라리 시간이 걸려도 뱃길을 이용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좋아."

멜리사가 먼저 행동했다. 그녀는 오두막의 선반을 뒤적거리더니 유리병에서 노란색 콩 한 알을 들고 왔다. 그리고 내게 콩을 내밀었다.

"삼켜."

"실험물이 되어 달라는 거구나."

난 노란 콩을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냥 평범한 콩이었다.

"이게 뭔데?"

"기록기다."

멜리사 누나가 설명했다. 이 콩을 삼키면, 내 눈으로 보는 모든 시각 정보가 기록된다고 했다. 평생 지속되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누나의 설명대로라면 며칠 동안의 시각 기록만 기록되고 입으로 다시 뱉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런 걸로 퉁치면 다행이다.

"실험이 성공하면 팁도 얹어 주지."

"부작용은 없는 거지?"

누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살짝 불안했지만, 뭐 괜찮을 것이다.

난 노란 콩알을 삼켰고, 거래는 성사되었다.

"…내 눈으로 보는 모든 게 기록되는 거 맞지?"

"예상대로라면."

난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이런저런' 일을 할 땐 눈을 감고 할 수밖에 없겠구나.

"내일 이 시간에 정원으로 와. 멜카란 근처 마을과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 놓을 테니."

"멜카란 안쪽까지는 못 갑니까, 기사님."

"못 가."

"돈도 냈는데 함 가 주이소. 설마 멜리사 누나가 못하는 건...."

그때였다. 아홉 개의 꼬리의 털이 쭈볏 섰다. 구미호가 화났다. 난 급히 입을 다물었다. 못 가는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누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보며 한마디를 남겼다.

"깝죽거리지 마라."

* * *

"뭐가 필요하려나."

여행 가는 기분으로 준비물을 생각했으나.

"흉악 괴인, 죽음의 기사, 피에 젖은 대지… 그리고 후라이팬."

역시 요리 도구 따위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도련님."

튼튼한 가죽 가방에 짐을 싸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걸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걸시, 이것 좀 구해 줄래?"

걸시에게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부탁했으나 녀석은 내 얼굴만 빤히 바라봤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알아서 뭐하게?"

"마님의 서고를 돌아본 후 떠나는 여행이라면… 악마."

"악마?"

"악마 사냥?"

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걸시와 마주 봤다. 걸시는 예전부터 엄마의 심부름꾼으로 지내 왔다. 저번에도 지하서고를 들락날락거렸지. 내 생각보다 걸시는 비밀이 많은 시녀였지만 그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오다시피 한, 친구 같은 녀석이다. 천안통의 힘이 없어도, 표정만으로 난 걸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다. 걸시는 지금, 부푸는 설렘 가득 안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눈빛이 적나라해서 무시할 수 없었다. 난 걸시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했다.

"왜, 따라오려고?"

"후후. 악마사냥이 맞네요. 그렇담 걸시가 빠질 수 없죠."

"뭔 소리야."

걸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길가의 잡풀로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음식 솜씨, 물 양동이 네 개를 들고 산을 두 번 넘어도 지치지 않는 강철 체력, 달변가마저 홀리는 유려한 말솜씨, 빼어난 외모."

난 살짝 소름이 돋았으나 재밌기에 걸시의 말을 끊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 '왕녀의 눈'이자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지성, 데메니아 왕녀님이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키워 온 현자의 제자!"

걸시는 뿌듯한 눈빛으로 날 보며 소리 질렀다.

"어때요, 놀랐죠?"

상상도 못한 정체! 내가 깜짝 놀라길 바라는 걸시였지만.

난 귀를 후비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라고."

"예?"

"대충 알고 있었어."

지하 서고에서 걸시를 만난 이후로 오히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내 시종이면서 찾으면 없고, 남쪽 섬에 있을 때부터 가끔 며칠간 사라지고, 퀄츠 성의 시녀면서 빨빨 바쁘게 돌아다니고, 회복실에만 있었던 엄마가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걸시가 십 년 넘게 짤리지 않고 공자의 시종으로 남은 게 가장 큰 증거다. 목욕물도 맞추지 못하는 녀석이, 내가 허락했다고 해도.

어떻게 계속 공자의 시종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히이."

걸시는 요상한 신음을 내며 시무룩해졌다.

"어렵사리 숨겨 왔는데…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답답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는 등 걸시는 과장된 행동을 보였다.

난 한숨을 쉬며 걸시에게 말했다.

"왜 따라오려고 해?"

"걸시는 이제 '왕녀의 눈'의 책임과 마님의 유언에 따라, 도련님을 곁에서 보좌할 의무를...."

"됐어, 필요 없어. 혼자 갈 거니까, 아버지한텐 이야기하지 말고."

"안 돼요!"

"안 되기는."

걸시는 고집을 부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실 거예요."

"멜카란으로 갈 건데?"

걸시는 멜카란이라는 말을 듣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멜카란의 악명은 쿤칸 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멜카란으로 가지 않는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걸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됐어요! 멜카란에는 '귀신'과 '괴인'이 들끓는데요. 마님께 배운 제 지식이 빛을 발할 기회예요!"

걸시는 어릴 적부터 괴이에 대한 무수한 지식을 배워 왔다고 말했다. 엄마의 일기를 보면, 엄마는 괴물 사냥꾼이자 보물 추적꾼이며, 대륙 곳곳의 괴이한 것들에 대해 파란만장한 모험을 했었다. 일기에 써진 내용 외에도, 서고에는 엄마가 쓴 다양한 책들이 있었지. 놀랍게도 걸시는 서고의 책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걸시는 멜카란의 개조인간과 괴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지도 또한 외우고 있다며 자신이 훌륭한 길잡이가 될 거라고 날 설득했다.

"그리고 멜카란이라면 코산 일족을 마주칠지도 모르잖아요!"

"코산 일족?"

"네. 마님께서 말해 주셨어요. 걸시는 코산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잠깐, 코산 일족이라면 괴물 사냥꾼들이잖아?"

엄마의 일기장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엄마는 젊었을 적에 '코산'이라 불리는 괴물 사냥꾼들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고. 지하 서고에 숨겨 둔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잔해도 그때 얻은 것이었다. 코산 일족은 괴물을 사냥하는 자들로, 서대륙 출신이지만 쿤칸 제국에서 일어난 대전쟁 때 아버지를 도와 악마를 잡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들었다. 레인버그와 코산을 연결해 준 게 엄마였구나.

"그렇담 네가...."

안타깝게도 코산 일족은 비극을 맞이했다.

코산은 괴물 사냥이 일족의 숙명으로, 오랫동안 추적해 온 '피'의 괴물을 사냥하다가, 되레 사냥당해서 일족 전체가 몰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엄마의 일기에 따르면 유일하게 갓난아이만이 살아남았다고 적혀 있었지.

다음 일기는 우리들이 태어날 때 적힌 것이라 갓난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너였구나."

걸시가 그 아이였다.

"마님께선 제 생명의 은인이자, 삶의 지침을 내려주신 분. 걸시는, 도련님을, 보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누가 누굴 보살펴."

"걸시는! 지금까지 수련을 해 왔습니다! 현자의 제자로! 레인버그의 나침반이 되기 위해서!"

점점 흥분하던 걸시가 버럭 소리 질렀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당당한 걸시의 태도에 예상은 했었지만. 아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걸시는 정말 엄마의 서고와 지하 서고에 있는 책들을 모두 외우고 있을 테고, 지식 백과 수준으로 많은 걸 알고 있을 테지.

"걸시야. 일 더하기 이는?"

"삼!"

"오."

"말했잖아요, 걸시는 똑똑해요."

"그럼 342 곱하기 214는?"

"모릅니다!"

난 잠시 걸시의 당당한 눈빛을 마주 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안 돼."

걸시를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

걸시는 끈질길 테고, 밤중에도 날 귀찮게 하겠지.

하지만 쫓겨난 걸시는 문을 두들기거나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 정원에 도착할 때까지 걸시는 보이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모양이니, 멜카란에도 기념품 가게가 있다면 몇 가지 사 줘야겠어.

* * *

누나의 공간 회귀 마법은 마법의 문을 넘는 것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조차도 한걸음에 갈 수 있다. 대륙을 넘어 세계에서 손에 꼽는 대마법사라면 공간 회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멜리사처럼 자유자재로 장거리 이동을 하는 마법사는 알려진 자가 없었다.

유일한 단점은 극심한 멀미다. 거리가 멀수록 멀미는 심해진다. 공간을 한순간에 뛰어넘는 것이니 당연하다. 비유하자면 뱃멀미에 심한 사람이 기름진 음식과 술을 진탕 마시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작은 쪽배로 건너는 듯한 멀미가 느껴진다.

멜카란은 바다 건너 서대륙에 있다.

"손수건을 안 챙겼어."

난 미리 구토를 각오하고 멜리사에게 부탁했다. 멜리사는 품에서 자기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멜리사 누나의 손수건 취향은 보기와 달리 기괴했다. 새빨간 장미꽃 문양이 바느질된 낡은 손수건이다.

"빨아서 줄게."

"그냥 너 가져라."

정원에 설치된 공간 회귀 문, 통칭 '어디로든 문'.

난 문을 열었다.

문 너머 일렁이는 사막의 풍경.

새삼 난 깨달았다. 대륙 강자들도 발을 들이길 꺼리는 최악의 대지, 살인마들의 피난처인 멜카란을 혼자 갈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무섭기는커녕 설레어하다니. 근묵자흑이라 하였나.

난 어깨를 으쓱하고 왼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는 불쾌한 멀미에 난 입술을 꽉 깨물고 오른발을 힘겹게 내디뎠다.

"기다려. 아직 동행인이 안 왔잖아?"

몸이 완전히 넘어가기 전, 멜리사 누나의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싶어 뒤를 돌아봤을 때, 멀리서 뛰어오는 걸시가 보였다.

"뭐? 쟨 필요 없어."

"필요할 거다, 폴스타."

멜리사가 웃었다. 여우의 웃음은 간교했다. 왜? 걸시가 누나의 '계획'에 왜 필요한 거지?

하지만 질문할 수는 없었다. 걸시가 문 너머로 뛰어들자마자 순식간에 환경이 바뀌었다.

극심한 멀미.

사막의 황량한 모래에 오늘 아침에 먹었던 음식들을 장식하며 난 급히 뒤를 돌아봤다.

"아."

넘어진 걸시가 모래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움윽움!

얼굴을 모래에 처박은 채 기이한 비명을 내뱉는 걸시였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막힌 듯한 비명에 난 급히 걸시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넘어지면서 구토를 했는지 노란 얼굴로 숨을 켁켁거렸다.

다아다아!

난 걸시의 등을 두들겼고 뜻하지 않게 걸시가 아침에 먹은 브로콜리의 처참한 잔해를 확인했다.

개간네!

뭐가 신이 나는지 기뻐하던 달비는 코를 찡그리며 욕을 했다.

개간네라, 누가 가르쳤는지 참 적절한 단어를 가르쳤다.

문은 이미 닫혔고, 이쪽에서 열 방법은 없었다.

"닦아."

모래와 토사물이 묶은 걸시의 얼굴을 보자니 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걸시는 힘겹게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 * *

진정될 때까지 삼십 분이나 걸렸다.

걸시가 괜찮아지자 난 굳은 얼굴로 걸시에게 말했다.

"머리 아프다, 걸시야."

"죄송해요."

말로는 죄송하다지만 얼굴은 더없이 해맑았다.

난 곰곰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멜리사에게 말했니?"

"아뇨! 아가씨께서 먼저 제 의무와 가치에 대해서 인정하시며, 부디 도련님을 따라 멜카란으로 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어요! 야호!"

"누나가 먼저? 젠장!"

멜리사는 바보가 아니다. 또한,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성격도 아니다. 멜리사는 나에게 걸시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게 실험의 일환이든 혹은 다른 꿍꿍이든 멜리사는 걸시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멜리사가 걸시를 보냈다. 굳이, 걸시를?

"너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걸시와는 오래 알고 지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현자의 제자, 비수, 지켜보는 눈이자 듣는 귀.

걸시가 지어 낸 별칭이 아니었던 건가.

52

사막이 덥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황량한 모래와 바위의 대지 멜카란은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건조한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다. 사막에선 주로 햇빛을 가리고 통풍이 잘되는 얕은 천을 둘러쓴다. 만약 사막에선 솜을 넣은 두꺼운 조끼를 입거나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은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는 게 좋다. 미친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걸시는 덥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걸시는 미쳤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름에도 서늘한 퀄츠 성에서만 지냈다. 사막에서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성에서 입던 하녀복을 입고 오다니.

"팔 들어 봐."

걸시는 주춤거리며 겨드랑이를 옆구리에 딱 붙이고 손만 내밀었다.

"양팔 모두 번쩍."

"으."

얼마나 더웠을까,

서글프게도 팔을 든 걸시의 겨드랑이는 땀으로 몹시 젖어 있었다.

"현자의 제자라면서 멜카란이 사막인 것도 몰랐냐?"

"구할 수 있는 가장 얇은 옷이었어요."

난 멜리사의 붉은 손수건이 걸시의 겨드랑이 땀으로 더럽혀지는 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근처 마을에 들러야 했다. 멜카란의 저주받은 도시까지 단번에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멜리사 누나는 멜카란으로 들어가는 길목까지만 통로를 열어 줬다. 근처에 마을이 있으니 들려서 가죽 물통이나 먹을 것 그리고 낙타 두 마리를 사야겠어. 덤으로 걸시와 내 옷까지.

"으헥, 더워. 도련님 어디 가세요? 멜카란은 저쪽인데."

걸시는 더위에 허덕이며 날 따라왔다.

"네 땀내 때문에 못 살겠다. 마을에 들를 거야."

"어, 이 근처 마을이면… 용병 마을밖에 없잖아요?"

흉인들의 대지 멜카란으로 가는 길목이다. 정상적인 마을이 있을 리 없다. 걸시가 말한 용병 마을은 흔히 스캐빈져 소굴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멜카란으로 도망친 수배범을 잡기 위해 몰려든 현상범 사냥꾼이나 굳은 일을 마다치 않는 용병들이 들르는 곳이며, 멜카란을 경계하는 자유도시의 군인들이 상주하는 군사 기지를 상대로 장사하기도 하여 군인, 용병, 사냥꾼들이 득실거리는 무법 지대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아주 깔끔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재밌겠다."

난 고개를 돌려 걸시를 바라봤다. 걸시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무법 지대로 가는데, 십 대 소녀가 재밌겠다며 깔깔거린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네?"

"그래야 내 시종이지."

"헤!"

걸시의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 * *

"신기하지 않니? 어째 냄새만 맡아도 이리 역겨운지."

"마치 집사장의 겨드랑이 냄새 같아요."

"그걸 맡아 봤다고?"

용병 마을은 가까워져 갈수록 암내와 찌른 내가 뒤섞인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들었던 소문과는 별개로 냄새만 맡아도 불쾌하고 역겨워지는 마을이었다.

"그거 아세요? 마을을 방문한 외부인 중 일주일에 다섯 명 이상이 실종되거나 죽는데요.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예술가라고...."

걸시가 이상한 상식을 뽐냈다. 용병 마을은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무모한 예술가들이 많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사막 위에 세워진 마을은 용병과 모험가들이 버리고 간 고물들과 '저주받은 도시'에서 들고 온 진귀한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슬럼가의 음울함과 고풍스러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이상한 마을이었다.

"도련님은 무섭지 않으세요?"

걸시가 물었다.

도적들의 소굴이 무섭지 않느냐고.

"넌?"

무섭거나 긴장하는 게 귀족가의 자제로서 자연스럽겠지.

하지만 난 이런 슬럼가조차 전생의 멸망한 지구에 비하면 평범한 일상이었다.

뜻밖인 건 어릴 때부터 시종으로 자란 걸시가 담담하다 못해 재밌어하는 것이다.

"재밌어요! 저어기 보이는 거대 동상 좀 봐요! 녹슬었지만 예쁘다. 고대 제국의 유산일지도 몰라요! 구경해도 될까요?"

난 걸시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선 옷부터 사자. 너 얼굴 좀 가려야겠어."

걸시가 울상을 지었다.

"못생겨서요?"

"그 반대야. 넌 쓸데없이 예뻐."

멜카란에는 어울리지 않아.

* * *

쓰레기 마을에 경비병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일부러 외진 곳을 선택했지만,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주치는 자마다 험악한 인상으로 우릴 노려봤고, 시선은 계속해서 우릴 좇았다. 놈들의 표정만 봐도 이미 귀찮은 일에 휩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을 중심가로 들어가서야 옷, 가죽 물통, 육포와 나침반 따위를 파는 잡상인을 찾았다. 잡상인은 얼굴에 하얗게 분칠한 거구의 남자였다. 붉은 염료로 입술을 새빨갛게 칠했는데, 사막의 더위에 땀에 번져 쥐를 잡아먹은 흉측한 얼굴이었다. 그는 처음엔 우릴 무뚝뚝하게 대했다.

"언니, 이거 얼마예요?"

하지만 걸시가 가죽 물통의 가격을 물어보자, 갑자기 가게 주인이 사근사근 친절해졌다.

"예쁜 아이야, 날 보고 하는 소리니?"

"네, 예쁜 언니?"

쓰레기 마을에서 쓸만한 물건을 파는 잡상인이다. 물건을 도둑맞지 않았다는 건 가게 주인이 실력이 있다는 증거다. 우스꽝스럽게 화장을 하긴 했으나 근육질의 몸매는 잘 단련되어 보였다.

"얘, 그건 하이에나의 가죽으로 만들어서 냄새 나. 이 물소 가죽 물통을 추천할게!"

난 걸시와 잡상인의 대화를 지켜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붙임성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상대를 가리질 않구나. 지나가는 놈들마다 걸시를 노골적으로 노려본다. 난 우선 몸을 가릴 로브를 집어 들었다.

"이건 얼마죠, '누나?'"

"왕국 돈으로, 2천이면 돼, 잘생긴 오빠야."

물론 호의와 가격은 별개였다. 이딴 저급품의 낡은 천 옷 따위가 퀄츠 성의 고급스러운 모피보다 세 배는 비쌌다. 어쩔 수 없지. 이런 걸 예상하고 여윳돈을 많이 챙겼으나 필요한 걸 다 사면 빈털터리가 되겠어.

"두 벌 줘, 동생아."

"오호홍, 오빠 참 화끈하시다."

낡은 로브를 걸시에게 건네자 걸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련님!"

"어? 왜?"

걸시의 다급한 목소리에 덩달아 긴장했다.

"이거이거, 첫 선물이네요!"

모래와 먼지가 쌓인 로브를 소중하게 품은 걸시의 모습에 뻘쭘해졌다.

"사막을 지날 때 필요한 물건들이 뭐 있지?"

"물통, 나침반, 코주악 크림...."

"나머진 됐고 갈아입을 옷만 골라."

"와!"

난 걸시가 옷을 고르는 사이, 주인장에게 종이와 펜을 빌리기로 했다.

"200."

"…한 장 줘요."

과연 쓰레기장의 잡상인, 종이 한 장을 책 두 권의 값으로 팔았다.

난 종이에 글을 대충 쓴 후 램프의 불에 태웠다. 잡상인은 애써 비싸게 준 종이를 곧바로 태우는 내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조심하렴, 예쁜 아이들아. 여긴 위험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

필요한 물건을 샀을 뿐인데 가진 돈 대부분을 썼다. 잡상인은 그래도 고객이라고 걱정해 주는 척을 했다. 입으로만 씨부렁거리지 말고 값이라도 깎아 주던가.

가진 돈 전부를 낙타를 사는 데 사용했다. 한 마리를 살 돈밖에 없어서 걸시를 태우고 난 걸어가려고 했으나, 걸시의 극구반대로 1인용 안장에 두 명이 탔다.

"멜카란으로 가는 거야."

"네!"

"무서워해야 정상인데."

"안 무서워요!"

난 어깨를 으쓱하며 낙타를 몰았다.

쯧, 멜리사.

당연하게도 난 걸시를 데리고 악마와 도적과 살인마의 소굴에 갈 생각이 없다.

멜리사에게 전언을 보냈으니, 그녀의 변덕이 끝나면 걸시를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언을 보내도 곧바로 찾아오지 않는 걸 보니, 변덕이 끝나기엔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 * *

예상은 하고 있었다.

"미친놈년들,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다니지?"

"하, 황당할 지경이군. 멜카란이 애새끼들 놀이터가 된 건가?"

"어디 보자, 피부는 허옇고 치아도 고른 게 자유도시 관광객이거나 멍청한 붓쟁이겠네."

"낄낄, 저런 멍청한 새끼들 덕에 배부르게 살지. 저번 붓쟁이 새끼는 900에 팔았던가?"

마을을 나서고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험악한 인상의 덩치들을 만났다. 걸시의 말이 맞았다. 일주일에 실종자만 수십 명이 생겨나는 마을, 우린 하이에나들의 손쉬운 먹잇감이다.

"오! 저년은 벤 졸리 사창가에 팔면 2천은 나오겠는데?"

"저놈도 노예상보다 벤 졸리에게 팔자. 반반하게 생겨서 3천도 받을 거야."

저 험상궂게 생긴 일곱 명의 덩치들은 인신매매가 특기인 것 같았다.

능숙하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방심한다고 볼 수도 없다. 상식적인 현상이다. 놈들은 무장한 일곱 흉악범, 우린 낡은 천을 뒤집어쓰고 멜카란을 구경하러 온 철없는 어린놈들. 마을에서 나갈 때부터 우릴 주시하며 따라오다가 일행이나 호위가 없으니 마음 놓고 덮쳤겠지.

"으음."

난 놈들의 얼굴을 빤히 살펴봤다. 한 명, 한 명 얼굴의 주름살 개수까지 세어 가면서 느릿하게 노려보자, 놈들은 불쾌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씹새끼가 뭘 야려?"

"눈 안 까냐, 새끼야."

지저분한 수염과 대체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떡 진 머리, 연탄재를 묻힌 듯 더러운 피부와 햇볕에 노화되어 노인처럼 주름진 얼굴. 겁주기 위해 부리부리하게 뜬 노란 눈알과 녹슨 칼, 난 버티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노골적인 비웃음이다.

"진부한 새끼들! 하하하!"

놈들은 평생 멸시받고 살아온 종자들이니, 내 행동에 즉각 반응했다.

방금 전에 날 노예상에게 판다고 해 놓고, 녹인지 피가 말라붙은 것인지 모를 칼을 내민다.

"뒤질라고 씨발!"

"배때기에 칼침을 맞아도 웃는지 어디 한번 보자."

신기해서 웃었다. 저런 고전적인 악당은 전생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지구를 멸망시키는 이계의 괴물과 신의 능력을 지닌 '괴물'하고 싸웠었지. 이곳에서의 삶도 그렇다. 인간에 대한 살의와 악의만이 존재하는 악마 놈들과 싸우다가, 저런 욕망덩어리와 마주하니 우습게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약했더라면.

저놈들은 악마보다 무서운 놈들이었겠지.

놈들이 행동이 거칠어지자 직접 나서려고 하던 그때였다.

"개새끼야!"

"어?"

인신매매범의 욕설을 가만히 듣기만 하던 걸시가 갑자기 고막이 아플 만큼 욕설과 고함을 질렀다.

"도련님에게 감히! 주제도 모르는 벌거지들! 너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개새끼들! 개 같은 짓을 하니 너네 엄마 아빠도...."

"와, 패드립."

걸시는 연달아 놈들을 욕했다. 지독한 욕이었다. 스캐빈져 마을에 사는 악인들이니 웬만한 욕은 아침 문안인사로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걸시의 욕은 인간의 존엄과 효심을 자극하는, 아주 악랄한 것이라 옆에서 듣는 나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심지어 일곱 명의 덩치조차 얼빠진 얼굴로 걸시의 주둥이만 노려본다.

난 걸시를 쳐다보다 '고'의 성물을 얻은 뒤 개안했던 '눈'을 떴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면 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볼 수 있다.

걸시의 감정은 이상했다. 아무리 현자의 제자였다고 해도 아직 어린 소녀, 퀄츠 성에서 지내던 하녀에 불과한 걸시는 사람 여럿을 죽인 게 확실한 악인들을 상대로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걸시의 감정은 몹시 사나웠다. 분노와 폭력, 불꽃처럼 타는 빨간 오라다. 도리어 악인들보다도 더한 격렬한 감정이 보였다.

결국 말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놈들은 손찌검하려고 들었다.

난 보이는 걸 믿었다.

"걸시, 물어!"

"캉!"

걸시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걸시가 바보긴 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건 아니야.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퍽-!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걸시의 뒤돌려차기에 덩치가 두 배는 큰 놈이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적어도 격투와 싸움에 있어선 똑똑했다. 용병들이 자세를 가다듬기 전에 재빠른 몸놀림으로 다음 상대를 때려눕혔다.

잘 싸운다.

무공과는 다른 느낌. 작고 여린 몸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며 적의 급소만을 가격하는 기술이다. 마치 전생에서 봤던 이계 대적군병의 특공무술과 흡사했다. 나는 걸시가 용병을 제압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그리고 쌍둥이들이 감춘 비밀에 비하면 걸시의 실력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새 일곱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모두 모랫바닥에 처박혔다.

"음."

내가 크게 놀란 건 걸시의 다음 행동이었다. 아주 잠깐, 말려야 하나 싶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멜카란은 거친 곳이라 웬만하면 이해하려고 했으나, 난 정의의 심판관 노릇을 하려고 멜카란을 찾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걸시의 저 행동은 아마 오랫동안 훈련 받은 결과일 것이다.

푹!

칼이 휘어진 작은 단검으로 능숙하게 용병들을 불구로 만든다. 죽이진 않아도 사지의 힘줄을 끊어 놓으니 죽은 것과 다름없다. 걸시는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꺾이지 않은 꽃이라...."

걸시는 어릴 때부터 퀄츠 성에서 나와 같이 자라왔다. 레인버그의 하녀들은 접시를 쉽게 닦는 법이나 침대보를 깨끗하게 세탁하는 법을 배우지, 사람을 효율적으로 불구로 만드는 법을 배우진 않는다. 걸시의 저 행동과 저 행동에 이르는 판단들은 모두 '현자'의 솜씨겠지.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은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으며, 추하다는 걸 알고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어두운 면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듯 보였다.

끄아아악-!

용병들의 처절한 비명을 뒤로하고 걸시가 내게 걸어왔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뺨에 묻은 핏물을 닦아 줬다.

"잘 싸우는데."

"걸시는 이제 숨길 수 없어요."

53

"뭘?"

"마님이 돌아가시고, 전 제 의무를 지켜야 하거든요."

걸시는 용병을 불구로 만들 때보다 표정이 굳어지더니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상해요?"

아마도.

내 실력을 아는 걸시가 굳이 나서서 용병들을 상대하고 불구로 만든 건.

내게 알려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추악하다고 여기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지금껏 같이 자라 온 얼빵한 녀석이. 사람 죽이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냉혹한 암살자라고 하면 거리를 두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역시, 내 비밀에 비하면 사소하기만 했다.

"넌 원래 이상했어."

난 한마디만 하고 가던 길을 갔다. 당황한 걸시가 뛰어와 다시 내 앞을 막았다.

"도련님, 걸시는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어쩌라고."

항상 멍청하지만, 말을 멈추는 법이 없던 걸시가 입을 다문다.

"것보다 왜 개소리를 냈냐?"

"…예? 물어라고 하셔서...."

"그렇다고 개소리를 내? 왜 무는 게 개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충견 같은 느낌이잖아요."

"난 개가 싫어."

사실이다.

전생에서 항상 날 개눈깔이라고 부르던 새끼들 덕에 개도 싫어졌다.

"무는 게 개밖에 없어? 고양이도 좋고, 도마뱀일 수도 있고 개미나 사슴벌레일지도 모르지."

개간네-!

멜카란으로 넘어온 이후 비실비실 거리던 달비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걸시는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쓸데없는 대화라고 생각하냐?"

"예."

"방금 대화도 그랬어. 자, 갈 길 가자. 바쁘다."

걸음을 서두르는데 뒤에서 키득거리는 걸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 *

'멜카란'임을 알리는 경고 푯말이 꽂힌 곳까지 향하며 우린 어중이떠중이들을 수차례 더 만났다. 그때마다 걸시가 나서서 하이에나들에게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줬다. 난 걸시가 용병들을 불구로 만드는 모습을 연이어 바라보며 생각을 고쳤다. 걸시는 이상했지만, 더 이상한 아이였다.

처음엔 어릴 때부터 받아 온 교육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을 보는 눈으로 바라본 걸시는 정상적인 사람과 확연히 달랐다. 보통 감정은 슬프든 기쁘든, 화나든 무섭든 격해질수록 반응이 큰 법이다. 그리고 대부분 감정의 최고조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걸시는 달랐다. 평소엔 잠잠하다가도 화를 내면 순식간에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그녀의 감정의 곡선은 매우 유별났다.

내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전생에서부터 겪어 온 풍부한 경험을 근거로 걸시가 정신에 문제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걸시. 넌 확실히 이상해."

세 번째 습격을 치른 후에 난 걸시에게 고백했다.

걸시는 괜스레 뿌듯한 얼굴이 되어서 대답했다.

"내 말 맞죠? 도련님, 전 이상하다니까요."

"자랑이다."

심하게 말하면 미친 여자다.

짐작하건대, 걸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녀의 핏줄이 문제다.

베일에 감춰진 악마 사냥꾼 일족 코산 일족을 엄마의 일기장에선 이렇게 묘사되어 있었지.

[그들의 마음은 비눗방울과 같다. 작은 자극으로도 금세 터지고 마니, 그들을 대할 땐 귀중한 유리그릇을 대하는 것처럼 해야 했다.]

* * *

멜카란의 경계는 세 살 아이도 알 수 있었다.

척박한 황야에 무수히 세워진 '푯말'. 적어도 수백 개는 돼 보였다.

왕국공용어나 쿤칸어는 물론, 유목 민족과 알 수 없는 언어까지, 제각기 다른 무수한 언어가 적힌 푯말이지만 모두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건 알겠다.

위험, 죽음, 경고.

이곳을 넘으면 확실히 죽을 거라는 메시지.

살인마와 저열한 용병들의 습격으로 평범한 사람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도착한 자들에게 경고 푯말은 예외 없이 돌아가라고 경고했다.

동물은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거친 모래바람에도 얌전했던 낙타들이 멜카란과 가까워지자 우릴 등에 태우는 걸 거부하고 자꾸만 달아나려고 들었다.

"괜히 샀어."

강제로 끌고 가 봤자 어차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난 낙타를 풀어 주고 걸시와 같이 멜카란의 경계로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걸시와 같이 멜카란으로 가야겠군. 멜리사의 변덕이 끝나길 기다릴 순 없다. 그렇다고 걸시를 내버려 두자니 오히려 더 위험하다.

푯말 지대를 지나자 공기마저 달라졌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로 텁텁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태양은 여전히 뜨거운데, 모래는 차가웠다. 모순적인 공간, 서 있는 것조차도 이질적인 곳이다. 확실히, 금지는 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알아."

멜카란에 들어선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난 또다시 불청객을 맞이했다. 하지만 앞서 상대했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랐다. 거침없이 나서던 걸시도 이번엔 신중히 경계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수십 명이 어느새 몰려와 우리 앞길을 가로막았다. 놈들은 조직적으로 훈련 받은 자들이었다.

"탈마병들인가."

"으, 이상하게 생겼어요.""

걸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난 담담하게 놈들을 둘러봤으나 속으론 감탄이 나왔다. 그들은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한쪽 팔이 짐승의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두터운 팔이었고, 어떤 이의 눈은 독수리처럼 노랬으며, 아예 사자의 얼굴을 한 괴물 인간도 보였다.

저게 자유 왕국의 '힘'.

쿤칸 제국에선 금지된 기술, 혐오스럽다며 배척하는 '탈마체'.

마법과 연금술로 육체를 개조한 자들인가?

탈마체가 되면 마법을 배울 수도, 오러를 사용할 수도 없으며, 몸은 끔찍한 몰골로 변하고, 정신도 피폐해진다. 그러나 확실한 장점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닌 것 같지?"

멜카란은 주변 왕국들의 시한폭탄이자 없애고 싶은 더러운 얼룩이다. 얼룩을 번지는 걸 막고자, 그들은 군대를 파견해 멜카란을 경계하며 오고 가는 이들을 통제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멜카란에 파견된 군대는 어김없이 개조 인간들이다. 보통의 충성심과 적당한 무력으로는 멜카란에서 주둔할 수 없다. 탈마병들은 명령만을 따르는 우직한 충견들이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우릴 노려봤다.

하지만 난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의 눈빛은 야수처럼 맹렬해졌다.

"뒤로 물러나 있어."

걸시는 군말 없이 달아났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주 멀리까지.

"크흠."

군인들은 걸시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명령을 따를 뿐, 돈이나 여자를 원하는 자들이 아니야.

난 그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제9군단의 용맹스런 군인들이십니까?"

탈마병, 정식 명칭은 제9군단.

난 군의 예식에 맞춰 오른손을 왼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탈마병들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마치 윙윙거리는 파리를 보듯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놈들에겐 난 귀찮은 존재, 그뿐이었다. 대화를 나눌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놈들에게 난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었다.

"지나가게 해 주라."

태도가 돌변해도 탈마병들은 무심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탈마병들의 어깨 견장에서 가장 화려한 장식을 한 자를 찾았다. 사자처럼 갈기가 난 얼굴에 손가락이 칼날로 되어 있으며 발바닥이 아닌 발굽을 지닌 개조 인간, 다른 탈마병보다 어깨 견장이 화려한, 아마 저자가 이 조직의 대장일 듯싶었다.

"제9군단에게 정식으로 협상을 요청하지."

탈마병은 노력하지 않아도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대가는 끔찍한 몰골과 강제된 충성심.

보통 사람은 탈마병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탈마체가 된 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졌다.

"협상은 동등한 관계여야 하지."

내 말에 놈이 반응했다.

짐적건대, 놈은 '인간'이던 시절에 제법 지식 수준이 있었던 자다.

"제9군단의 임무보다 우위에 있는 건 왕과 결정권이 있는 자유도시의 부르주아 혹은 수행자가 판단하기에 그에 준하는 직위를 가진 자들뿐이다."

그는 보기보다 유순했다. 날 설득시키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머저리 꼬마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아. 하나, 임무를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다."

난 그의 단호한 태도에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이들을 대표하는가?"

그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판단해 보게. 난 레인버그가의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이며, 쿤칸 제국의 붉은 기둥이자 퀄츠를 다스리는 라이베라 공작 저하의 아들일세. 어떤가? 이 정도면 협상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난 내가 너보다 상급자라는 말투로 점잔 떨며 말했다.

하지만 사자 대가리 놈은 피식 웃더니 욕으로 대답했다.

"병신."

그가 껄껄대자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폴리넨의 신흥 부르주아라고 하거나 헷갈리게 하고자 했으면 대륙 너머 제국의 알려지지 않는 가문의 아들내미라고 해야지. 심지어 멜카란까지 명성이 자자한 레인버그가의 '달의 아이' 중 한 명을 사칭하느냐?"

난 살짝 당황했다. 제국에선 모르는 이 없이 유명하다고 해도, 이런 변방의 금지까지 네 쌍둥이들의 이름이 알려졌었나?

그는 경고의 의미로 제 부하들에게 수신호로 명령했고, 탈마병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었다. 허세가 통하지 않았으니 우릴 겁주면 물러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 죽이는 걸 임무처럼 생각하는 자들.

짐승의 건조한 눈빛이 내게 쏠린다.

무수한 눈이 날 본다. 제법 매섭고 따갑다.

그렇게 탈마병들의 이목이 쏠릴 때, 난 천천히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아느냐?"

당연히 모른다.

난 대답하지 않는 놈들을 향해 씩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X이나 까 잡수라는 뜻이다."

매서우나 냉철했던 눈빛이 이젠 감정적으로 흔들렸다. 난 그들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운뎃손가락을 곧게 펴고 한 명, 한 명한테 친절하게 엿을 먹여 줬다. 탈마병은 이제 날 손봐주겠다고 생각했는지, 무기를 들고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거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숨을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는 레인버그의 푸른 문장을 자랑스러워했다.

쌍둥이들도, 목적은 다르지만 레인버그라는 이름을 감추지 않는다.

"친히 알려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니."

놈들은 내가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임을 겪어 보지 않았기에 믿지 않는다.

"레인버그의 폴스타가 어떤 자인지 똑똑히 보아라."

난 변형 무기 라멜스타를 기다란 봉 형태로 바꿨다.

처음 배운 무공이었으나 이제 와 그 위력을 펼칠 수 있게 된 절세 무공 중의 하나인 타구봉법의 기본 자세를 취했다. 놈들은 내 자세를 보고 비웃었으나,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6… 5, 아니. 3분이면 충분하다.

다아?

"괜찮아."

달비의 힘도 빌릴 필요 없어.

난 탈마병들의 기괴한 생김새를 보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악견난로(惡犬攔路)."

타구봉법.

그야말로 놈들을 상대하기에 최적의 무공이 아닌가?

난 거침없이 달려가서, 지근거리의 탈마병의 머리를 후들겨 갈겼다.

과연 멜카란을 경계하는 군인이 아닌지라 놈은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으나 굵은 나무가 아작 나는 소리가 들리며 놈의 두 팔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묵직하다. 탈마병의 개조된 팔은 듣기로 바위도 부순다는데, 타구봉법의 위력을 견디지 못했다. 탈마병은 이어진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숙련된 탈마병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그제야 방심하던 탈마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날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내 일격을 막아 내는 자들은 없었다. 봉을 휘두르면 모래바람이 불었다. 탈마병은 검, 창, 발톱 그리고 이빨을 내밀며 짐승처럼 공격했으나 타구봉법의 신묘한 무학은 난전에서 큰 진가를 발휘했다.

봉은 때론 뱀처럼 스멀거리며 적의 급소를 물었고, 때론 거목의 줄기처럼 날 지켰다.

자신 중 누구도 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탈마병은 이제 인해전술을 펼쳤다.

가장 큰 놈은 4미터가 넘는다. 거구들이 날 감싸자 그림자가 져서 주변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두들겨 패 기절시켜도, 놈들은 쓰러진 동료를 방패 삼아 날 압사하려 들었다.

"천하무구(天下無狗)."

탈마병에게 둘러싸인 난 타구봉법의 절초를 펼쳤다. 봉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이 치는 굉음이 들려왔다. 주변의 모든 개를 두들겨 팬다는 타구봉법의 절초, 천하무구의 위력 앞에선 탈마병조차 동네 강아지에 불과했다.

54

대단하던 위세의 탈마병은 이제 모래 구덩이에 처박힌 신세가 되었다. 악마도 때려잡는다는 제9군단의 탈마병을 상대로도 격차가 명확했다.

"아직도 몰라?"

탈마병 대장은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전의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나서자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킨다. 한 놈당 뼈 다섯 개는 부러트렸는데도 말이다.

"네놈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강제된 충성의 괴물이라 비난 받는 군인들이다. 의무에 대한 책임감은 바닥일 터. 실력을 보여 줬으니 알아서 굽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들은 내 예상보다 더 악바리였다.

"네놈이 설령 쿤칸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대장이 소리 지르자 사자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오만한 놈!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우릴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네놈의 살점을 씹어먹으며 죽을 것이다!"

탈마병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언뜻 보면 군인의 참 자세처럼 보이지만 난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루하고, 지루한 상황이야.

"고집을 신념이라 여기는 놈."

난 라멜스타를 봉 형태에서 날카로운 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검 끝으로 탈마병 대장을 가리키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너 같은 새끼는 예전부터 많이 봐 왔지. 현실 파악을 못해 애꿎은 희생만 치르는 멍청한 새끼들을."

탈마병 대장은 갈기가 떨릴 만큼 화를 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어린 놈이 무얼 알겠느냐!"

"…잘 알지."

과거를 떠올렸다.

폴스타로 살아왔던 삶보다 더 먼 과거를.

고집을 신념이라 여겼던 놈. 결국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불구덩이에 처넣은 미련한 놈.

난 탈마병 대장을 바라봤다. 분노에 차 길길이 날뛰던 놈이 내 시선과 마주치더니, 당황한 얼굴로 자그맣게 말했다.

"…놈. 넌 '달의 아이' 따위가 아니구나. 넌… 당신은 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누군가 그랬던 것 같다.

실력 행사를 하기 전까지 내 말을 믿지 않았던 놈이다.

"세 번의 기회를 주마."

이젠 그 누구도 내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죄송하다고 말하면 용서해 주지."

쿵! 쿵! 쿵!

내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탈마병 대장과 놈을 따르는 병사들은 둔탁한 발소리를 내며 덤벼들었다. 확실히 탈마병 대장과 정예병은 다른 탈마병보다 수준이 두세 단계는 높았다. 하지만 역시 위협이 되질 않는다. 난 무림의 '무당'이라 불리는 세력이 사용한 검초를 운용했다. 라니스타와의 실전 중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무림인이 있었다. 형은 '말코도사'의 머저리 같은 '태극검'이라고 했었지. 사람 죽이는 검으로 제압을 목적으로 둔 이상한 검법이다.

탈마병의 맹수 같은 돌격에 맞서 난 오로지 칼등으로만 상대했다. 마치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잎처럼 거친 공격을 유순하게 피해 냈다. 맹렬한 공격도 내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했다.

"첫 번째 기회다."

마냥 순진한 검법만은 아니다.

살의를 담자, 내 검은 소리없이 다가가 어느새 탈마병 대장의 목을 겨누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죽음을 코앞에 둔 대장은 아직도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내 검을 쳐 낸 후 다시 덤볐다. 날 물어뜯어 죽이려는 듯 흉한 이를 드러내며 머리를 들이민다. 난 단 한 걸음으로 공격을 피한 후 검을 놈의 뒷덜미에 얹었다.

"두 번째 기회."

아무리 질긴 근육질의 피부도 내가 힘을 주면 두부처럼 썰려 나가겠지.

그 사실을 모르는 놈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놈은 포기하지 않고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휘둘렀다. 가까운 거리였으나 피하지 못할 공격은 아니다. 하지만 난 일부러 몸을 꼿꼿히 세운 채 놈의 검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냈다.

"뭣!"

그는 지금까지 베지 못한 사람 몸뚱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확실히 힘의 차이가 전해졌는지, 놈의 노란 눈알에 경악이 서렸다. 놈의 팔뚝보다 작은 내 몸이, 대검을 튕겨 냈다. 내공을 체득한 후 가장 눈에 띈 변화다.

호신강기.

"마스터!"

이 세계에선 '마스터'의 상징.

세 번째가 되어서야 놈은 망설임이 생겼다. 하지만 애초에 생사에 연연하지 않던 멍청한 놈이었다. 격차를 깨달은 지금도, 놈은 고집을 신념이라 믿으며 결국 재차 내게 검을 휘둘렀다. 난 신경질적으로 라멜스타를 휘둘러 놈의 검을 박살 냈다.

"신중하게 택해."

세 번의 기회가 끝났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대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러다 결국은 체념한 듯 공허한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그는 다시 한번 부러진 검을 휘둘렀다.

공격에 아무런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검은 내게 닿지도 못했다. 탈마병 대장이 고개를 숙이자 탈마병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죽여라."

난 무감정하게 그를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누가 니들을 죽인다고 했냐?"

탈마병은 소문과 달랐다. 흉측한 신체와 잔혹한 성질. 뭐, 그건 맞지만 강제적으로 충성을 맹세해 어쩔 수 없이 멜카란을 경계하는 더러운 일을 맡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 사이에선 죽음마저 불사하는 유대감과 신념이 보였다.

그래서 짜증이 난다.

"알려라."

아직 라니스타처럼 검기를 자유자재로 뿜는 경지는 아니다. 하지만 내겐 멍청한 대마법사가 건네준 '방출 마법'이 있다. 난 달비의 기를 빌려, 검을 매개체로 힘을 쏟아 냈다. 리버스 메테오와는 운용 방식이 달랐다. 불씨처럼 작은 조각들이 산탄처럼 쏘아져 탈마병들을 난도질했다.

"위대한 쿤칸 제국, 푸른기둥 레인버그의 막내 아들이."

"홀로 제9군단의 탈마병를 두들겨 팼으며."

"이어 멜카란을 평정한 호걸 중의 호걸이라고."

난 일부러 그가 잘 듣도록 한 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그리고 쓰러진 탈마병에게 다가가서 무심하게 주먹을 추켜올렸다.

이후, 죽을 직전까지 두들겨 맞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들 모두에게 뼛속 깊숙히 새겨 줬다.

* * *

처음과 달리 그들은 멜카란을 향해 걷는 날 두려움 혹은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싸움이 끝나자 어느새 걸시가 따라왔다. 언제 어떻게 숨었는지,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아, 맞다."

멜카란으로 걸어가던 난 문득 생각나 뒤를 돌아봤다.

간신히 눈만 떠 있는 탈마병들은 섬짓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들의 걱정과 달리 난 작은 용건이 남아 있었다.

"마실 것 좀 있냐?"

* * *

푯말 지대를 지나자 본격적인 죽음의 대지가 펼쳐졌다. 앞선 스캐빈져 마을에선 지독한 악취가 났지만, 멜카란은 건조하고 텁텁한 숯 냄새가 났다. 가장 놀라운 건 하늘이었다. 붉은 구름이 가득 낀, 비 대신 모래가 쏟아질 듯한 더러운 하늘에는 일식 직전의 태양처럼 검붉은 태양이 고고히 떠 있었다. 물리적 현상은 당연히 아니다. 마법이니, 악마니 하는 기괴한 힘이 자아낸 공포스런 광경이다.

"잘 숨어, 너."

걸시는 태연작약했다. 훈련으로 다져진 담력보다 타고난 성질인 듯싶다.

"어떻게 한 거야?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닌 모양인데."

싸움이 일어나자 걸시는 도망갔다.

문제는 탈마병과 싸울 동안 내가 걸시의 기척을 잠시 놓쳤다는 것이다.

천안통, 개눈깔을 가진 난 쉽게 녀석을 찾을 수 있었지만 꽤 높은 수준의 싸움꾼도 숨은 걸시를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마님께선."

걸시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일족의 힘이라고 하셨어요."

왜 부끄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걸시는 뺨을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의 비밀은 일기장에 쓰여진 것 외에도 많은 모양이다.

난 넌지시 걸시에게 질문했다.

"걸시. 뭘 더 숨기고 있지?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

"으음? 아! 남쪽 섬에 절 보낸 것도 마님이었어요."

걸시가 대답했다.

"뭐? 자발적으로 간 게 아니었어?"

"당연한 말씀을!"

걸시는 당당하게 얘기했다.

"전 공자님의 시녀지만 마님의 제자기도 했다구요. 고생했었어요. 일주일에 세 번! 본가와 섬을 왕래하며 공자님의 상태를 마님께 보고하고...."

"잠깐, 날 감시한 거잖아."

"마님은 공자님이 꾀병을 부린다는 걸 아셨으니까요."

난 어깨를 으쓱했다. '놈들'이 익숙해진 것도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땐 평생 숨어서 유유자적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러길 원했었다. 어리석고, 미련한 선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그도 그럴 게, 자기 세상을 멸망시킨 주범들이 형제자매였잖아?

"그래. 그래서 뭐. 사과할까?"

"네."

"꾀병부려서 미안하다고?"

"괜찮아요, 도련님."

걸시와는 말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걸시는 해맑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다.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엄마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어떻게요?"

"어쨌든 너, 현자의 제자라고 했잖아. 섬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왜 지금까지 내 시녀로 있었던 거야?"

"그거야, 도련님을 택한 건 저였으니까요?"

"엉?"

걸시는 방실방실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마님께선 언젠가 때가 오면 네 명의 공자공녀님들 중 '차기 가주'가 될 분을 보필하라고 하셨어요. 마님이 현자로서 라이베라 가주님의 그림자에서 암약하셨듯이, 전 레인버그가의 감춰진 비수로 키워졌어요. 언젠가 마님처럼 레인버그와 가주님을 보필할 운명이었죠."

난 걸시의 강렬한 시선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전 도련님이 가주가 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내가 좀 잘나긴 했어도, 형누나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잖아."

"분명 그분들이 도련님보다 훨씬~ 더 대단하시죠! 하지만 도련님은 더~ 특별하셔요."

"뭐가."

"목욕물을 보기만 해도 뜨거운지 차가운지 맞추시...."

"됐다. 걸시야. 넌 사람 보는 눈이 처참하구나."

"그리고 도련님의 형제자매님들은 왠지 사람이 아...."

걸시는 말을 내뱉다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걸시라도 자신이 모시는 가문의 후계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흉보는 짓이 잘못됐다는 걸 아는 눈치는 있었다. 하지만 난 걸시의 뒷말이 예상됐고, 충분히 이해도 갔다. 어쩌면 걸시는 보는 눈이 뛰어난 걸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걸시가 날 레인버그의 차기 가주로 생각하는 건 그나마 예상 가능한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어쨌든 누군가가 날 믿고 있다는 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잘 이해가 안 됐어요."

"왜?"

"피할 수도 있었던 싸움이잖아요?"

걸시는 궁금해했다.

그녀는 내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아니면 정체를 숨겨셔도 됐잖아요. 그런데 공자님은 레인버그의 공자임을 당당히 밝히셨어요. 탈마병들은 행실이 끔찍해도 일단 자유도시의 사유재산, 영주들과 관계가 어긋날 게 뻔한데...."

"그걸 바라는 거야."

"네?"

"내게 관계 따윈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 방금의 충돌은 사소한 일상이 될 정도로 큰 문젯거리들이 닥쳐오겠지. 그때마다 일일이 관계를 신경 쓰고 최적의 답을 생각해 내며 내 지위와 명성을 피력하라고?"

걸시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흥. 그럴 필요 없지. 내가 탈마병 부대보다 약했더라면 어쩔 수 없이 굽혔을 거야. 하지만 굳이 강한 힘을 가졌는데, 누구 신경 쓰랴 뭐 신경 쓰랴 형식적인 퍼포먼스는 개지랄이지. 죽도 밥도 안 돼. 적어도 내가...."

난 뒷말은 삼켰다. 내가 그리고 있는, 예상하고 있는 미래는 걸시가 알 의무가 없었다. 쌍둥이들은 착실하게 미래에 대해 대비하고 있으니, 뒤처진 나도 그들을 뒤따라가야 했다. 정말 중요한 건 이 세상의 관계 따위가 아니다.

멜카란은 시작이다.

소문은 퍼져 나갈 것이다.

난 날 더 알릴 의무가 있다.

달의 아이의 명성만으론 부족하다.

난 지구에서, 그들의 악명이 가졌던 절대적인 힘을 기억한다.

"이 세상의 끝에 사는 아인들조차도 내 이름을 알게 될 거야."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언뜻 오만해 보이는 이 말을 석가모니께서 하셨다.

"레인버그가엔 갈색 눈의 미친 개가 산다고."

"으엑!"

걸시는 질색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뭐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별거 없어. 그냥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거야."

"네? 세계 통일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라니스타 님도 그런 야망은 없으실 거야."

난 쌍둥이들이 정말 지 내키는 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럴 힘이 있었기에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난 이유와 세상에 드리운 위험을 그들은 약한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은 배울 만했다.

걸시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표정엔 절망감이 어려 있었다.

"도련님이… 타락하셨어."

"주책 떨지 마."

사실 말은 대범하게 하긴 했어도 무모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이번 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빌어먹게도, 전생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불확실한 위험에 바들바들 떨면서 온몸이 갉아 먹히는 데도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었다. 그렇게 연명한 목숨의 결과가 어떠한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억 못 하는 비루한 마무리를 지었지 않았는가?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

이번 삶에서는.

반드시.

* * *

신창 너머로 전해지는 까끌까끌한 감촉. 붉은 대지에 발바닥은 익어만 간다.

멜카란의 사막은 찜질방 사우나처럼 더웠다. 햇빛은 바늘처럼 따깝고, 가끔 바람이라도 불면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콧속으로 파고들어 코를 수시로 풀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짜증 나는 건 냄새였다.

"산불이라도 난 것 같네."

시간이 지날수록 탄 냄새가 더 심해졌다. 물을 적신 손수건으로 콧구멍을 막아 보지만 소용이 없다.

"생멸향이라고 불러요."

의외로 걸시는 잘 참았다.

"생멸향?"

녀석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명이 타는 냄새."

"그래, 걸시. 네 해박한 지식을 자랑해 봐."

"멜카란이 두려운 이유는 멍청한 살인마들이나 정체 모를 괴생명체 때문이 아니에요. 멜카란 대지에 깊숙이 밴 생멸향은 죽음의 기사들이 생명을 불태우는 냄새라고 해요. 증오의 향기라고도 하죠!"

죽음의 기사.

흔해 빠진 이름과는 별개로.

쿤칸 제국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권에서 그들을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 여기고 있다.

생명을 앗아가는 자, 죽음을 뿌리는 자 그리고 악마의 충직한 부하.

난 멜카란에서 고대 왕국을 찾으며 놈들과 분명 마주칠 거라고 예상했다.

"이 악취가 죽음의 기사의 냄새라면, 심할수록 놈들과 가깝다는 뜻이로군?"

"네! 마님이 말씀하시길, 인육도 즐겨 먹는 멜카란의 흉인들이 유일하게 개는 안 잡아먹는데요.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키우던 개가 컹컹 짖으면 만사 재껴 두고 도망친다네요?"

"오호라. 그렇담 냄새를 따라가면 놈들과 마주치겠군. 좋아. 악취를 쫓자, 걸시야."

"네에? 냄새가 나는 곳에 죽음의 기사가 있을 텐데, 냄새를 쫓는다고 하시면...."

"멍청한 척 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걸시는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재차 자신이 이해한 게 맞냐는 듯 날 멀뚱히 바라봤고,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익-!"

걸시는 리액션이 크다. 난 팔을 버둥거리며 질색하는 걸시에게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제 좀 후회되냐? 넌 따라올 곳을 잘못 정했어."

"으, 으, 이잉."

요상한 신음을 내뱉으며 끙끙 앓던 걸시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걸시는 각오했어요. 마님의 수제자, 현자의 손가락이! 부끄럽게, 시작하자마자 포기하겠어요? 이 목숨, 도련님에게 기꺼이...."

"됐다. 줘도 안 가지니까 청승 떨지 말고."

걸시는 투덜거리며 날 뒤따라 걸었다.

난 속마음은 숨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약간은 감동했고 그보다 더 부담스러웠다. 누군가가 날 따르고, 믿고, 도와주려고 하는 것. 태생부터 양심 없게 태어난 일부 종자들은 그들을 충분히 이용하려 들지만 난 제법 양심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찔리면 아프다. 전생에서도 그랬지. 날 따르던 부하 놈들이 어떻게 됐더라?

사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꺾이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품어도 되는 것이다.

"…난 아직 멀었어."

"네에.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이에요오."

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피를 내 종이에 묻히고 바닥에 버렸다.

종이엔 마법이 걸려 있다. 그들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다. 착실하게 내 신호가 전달되었을 텐데.

벌써 네 장째야.

이렇게 재촉해도 멜리사의 답장은 아직인가.

55

"물, 물 주세요."

"하마 새끼냐?"

사막을 무시한 게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실수가 있다면 걸시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우린 멜카란의 사막을 걸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나 걸시는 탈마병에게서 빼앗은 식수마저 모두 처마셨다. 단순히 목이 말랐다면 난 물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걸시는 탈수 증상을 겪었고, 난 어쩔 수 없이 물을 내놓아야 했다.

"어쩜 그러지? 십 분마다 탈수 증상이라니. 람보르기니도 너보단 연료비가 좋겠어."

"람보르기니가 뭔진 몰라도. 걸시는 마구간의 말보다 물을 더 많이 마셔요."

성의 하녀들은 걸시를 자주 뒷담했었다. 내가 남긴 음식들을 시종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로 독차지했다고 투덜댔었지.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진짜 혼자 다 처먹은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보다 연비가 떨어지는 몸. 이 또한 걸시가 '특별한 핏줄'이기 때문일까.

난 모래를 기어 다니는 걸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성가셔."

목이 메말랐지만 나라면 며칠 동안 물 없이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걸시는 오늘이 고비처럼 보였다.

개! 간! 네-!

조용하던 달비도 화를 내기 시작했다. 녀석은 무척이나 짜증 난 듯 평소보다 악센트가 강하게 욕을 했다. 앙증맞은 발굽을 세차게 밀어내며 미친 듯 사막을 껑충 뛰어다니던 달비다. 발광하는 달비를 구경하던 난 기어코 녀석이 높은 사구에서 데구루루 굴러떨어지자 황급히 뛰어갔다.

"야, 어디 가."

달비는 멈추지 않았다.

모래 언덕을 구르면서도 녀석은 머리를 휘두르며 지랄발광을 했다.

개간네-! 개간네~! 개간네!

귀여운 새끼 사슴이 눈을 까뒤집고 욕을 한다.

녀석의 처음 보는 광기 어린 모습이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멜카란의 사악한 기운이 달비를 미치게 한 걸까?

난 황급히 녀석이 떨어진 사구 아래로 뛰어갔다.

"같이 가… 으아악!"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오던 걸시가 자빠져서 데굴데굴 구른다.

난 무시하기로 했다. 걸시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쿵!

높은 모래 언덕을 내려가던 난 사막의 아지랑이 너머로 서서히 달라지는 풍경을 봤다. 신기루는 아니다.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멜카란의 마법적인 현상 중의 하나인 듯싶었다.

"풀 냄새?"

아래로 내려갈수록 텁텁한 사막의 공기와 탄내가 사라지고 풀내음처럼 신선한 냄새가 났다. 달비는 언덕 아래에 도착하고 나서야 발광을 멈췄다. 족히 40M는 넘는 언덕의 아래엔 놀랍게도 풀밭이 펼처져 있었다. 달비가 이곳까지 날 이끈 것이다.

"달비야?"

달비는 몸의 털을 꼿꼿이 세우고 어느 한곳을 응시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난 분노가 어린 달비의 눈을 언제 본 적이 있다.

시선의 끝엔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두막집이 보였다.

저주받은 멜카란과 어울리지 않았다.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난 메마른 사막을 거닐 때보다 더 긴장했다.

달비를 화나게 한 무언가가 저곳에 있다.

"아아아악! 악!"

비명을 내지르며 굴러떨어지던 걸시가 내 발치에서 멈췄다.

옷이 모래로 엉망이 됐지만, 생채기 하나 없었다.

걸시는 머리카락에 붙은 모래를 털어 내다가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응? 여긴 어디래요?"

난 걸시의 등에 붙은 모래를 털어 주며 말했다.

"잘됐다. 저 집주인에게 길을 물어보자."

걸시는 오두막집을 응시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도련님, 이상한 거 아시죠?"

"뭐가?"

"마경 멜카란의 한가운데에 한가로운 오두막집이라뇨? 어음, 아마 집주인은 살인마겠죠. 우리처럼 멋모르고 들어온 모험가들을 불러들여 독을 먹인 후 살점을 야금야금 뜯어 저 굴뚝 아래 난로에 훈제를...."

"그거 잘됐네."

걸시는 호들갑을 떤 게 아니다. 식인마 정도야, 멜카란에선 악랄한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럼 악인을 혼내 줄 수 있잖아?"

내가 멜카란으로 온 이유다.

더는 숨지 않고, 피하지도 않는다.

위협은 커지고 비밀은 쌓여만 가는데, 어물정거리면 순식간에 죽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멜카란에서의 여정은 적응, 닥쳐 올 큰 위협에 대하여 대항하기 위해 경험치를 쌓는 게 목적.

그러니 트러블은 환영이다.

편한 걸음으로 오두막집까지 걸어간 난 문 앞에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계십니까? 떠돌이 여행자인데 목이 말라 그러니 호의를 베풀어 주십시오."

난 마치 밀 싹이 풍족한 농부의 집을 방문하듯, 능청스럽게 외쳤다.

약탈의 성지 멜카란에선 이렇듯 친절하게 말하는 이는 없겠지.

만약 오두막집의 주인이 평범하다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무시하거나 문을 걸어잠그고 위협하거나 날붙이를 들이민다면 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문은 천천히 열렸고, 인상 좋은 푸근한 아저씨가 식칼 대신 물이 가득 담긴 쇠그릇을 들고 나왔다.

"멜카란의 여행자라니, 드문 손님입니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눈이 실처럼 작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살찐 눈꺼풀 뒤로 날 연신 살펴대는 그의 눈빛이 보인다. 그는 190cm의 거구였지만 어딘가 순박해 보여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에는 흙이 묻어 있고, 근육이 단단해 보여 마치 농부처럼 보였다.

사막의 농부, 우습다.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온 걸시가 눈치를 살피다가 쇳그릇을 가리켰다.

"마셔도 돼요?"

"…그럼요. 꼬마 아가씨."

나와 걸시는 앳된 외모를 로브로 가리면 성인이나 다름없다. 그는 단번에 걸시의 얼굴을 확인하고 꼬마 아가씨라고 느끼하게 불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일순 변한 것 정도야 아직 이상할 건 없었다.

"키아!"

걸시는 염치가 없다. 물을 다 마신 걸시는 한 그릇 더를 외쳤다.

"집을 찾아서 다행이오. 이 근방에는 마을도 없으니 하룻밤 자고 가시지요. 밤은 위험합니다. 특히, 멜카란의 밤은."

그는 기꺼이 물을 떠다 주며 식사와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려고 했다. 난 속으로 비웃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니. 통할 상대가 멜카란에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표정은 은혜를 입은 호구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후아, 소문에 멜카란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살인을 저지르는 무서운 곳이라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하하."

난 스릴러 영화에서 반드시 죽는 듯한 멍청이의 흉내를 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난 괜찮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조심해야 할 거요."

그는 우릴 식탁으로 안내했다. 마침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식탁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검은 빵 여섯 개, 희멀건 스프가 담긴 그릇 네 개, 그리고 사막에선 보기 드문 녹색 채소까지.

"편히 드시오. 남은 음식은 많으니."

"감사합니다. 삼신의 가호가 깃들길, 하하."

식탁에 앉으려던 난 뒤에서 소매를 잡아끄는 달비 때문에 무게중심을 잃을 뻔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고 동전을 줍는 척 허리를 숙였다.

"왜, 뭐?"

달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날 노려봤다. 어디서 배웠는지 볼까지 부풀린 게 이 상황이 상당히 불쾌한 듯 보였다. 난 달비의 등을 토닥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

난 동전을 보이며 허리를 폈다.

"별거 아닙니다. 사소하지만 답례로… 퀄츠의 동전입니다."

남자는 동전을 세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동전을 매만지는 손길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 위에서 하기엔 긴 편이었다. 난 참을성 있게 그의 감상을 기다렸다.

"아름다운 무늬요."

남자는 동전에 새겨진 퀄츠의 문양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퀄츠에서 오셨소?"

난 부인하지 않았다.

걸시는 이미 허겁지겁 빵을 스프에 찍어 먹고 있었다. 난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식이 넉넉하네요. 하하, 마치 여러 명이 함께 먹던 식사자리 같습니다."

"홀로 먹는 양이오."

그는 부엌 뒤편을 가리켰다. 집 구석엔 흙이 묻은 농기구들이 쌓여 있었다. 금방 사용한 듯 흙은 마르지 않았다. 모래밖에 없는 사막에서 저처럼 수분기 있는 흙이 있다니 흥미롭다.

"일이 힘든 만큼 많이 먹는 편이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농사일을 하고 있소."

"오, 사막에서 농사라...."

이번엔 진심으로 놀랐다. 집 근처에 난 풀숲도 그렇고 근처에 오아시스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농사라니, 푸른 녹색 채소들을 보면 거짓말도 아닌 것 같은데.

"날이 밝으면 밭을 보여 드리지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들었다. 검은 빵은 딱딱하고 푸석했다. 그에 반해 녹색 채소는 싱싱해서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난 왠지 채소에 손이 가지 않았다. 사막에선 맛볼 수 없는 싱그러운 맛이겠지만, 그에 상반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채소를 보고 역겨움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큰 손으로 우악스럽게 빵을 뜯어서 내게 건네고 채소를 염소처럼 게걸스럽게 씹어먹었다. 남자의 입가로 녹색 즙이 흘러나와 테이블을 더럽힌다. 식사 매너가 더러웠지만, 그 이상으로 난 역겨움을 느꼈다. 헛구역질을 삼키며 빵을 씹어 보지만 텁텁한 곡내가 더욱 속을 울렁이게 하였다. 걸시는 상관없이 맛있게 먹었지만 난 결국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빵만 물에 적셔 먹었다.

* * *

태양열에 뜨겁게 달궈진 모래는 밤이 되자 얼음처럼 차가워졌을 터.

낡고 냄새나는 방이지만 사막의 밤을 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난 차라리 노숙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요...."

방이 좁기도 했지만 걸시는 아예 벽에 붙어 나와 최대한 먼 거리에 누웠다.

"왜."

"부엌데기 언니들이 말했거든요. 이런 상황이 오면 필히 가랑이 간수...."

"씁, 말조심해."

난 걸시를 꾸짖었다.

"넌 자 둬. 연비를 보충해야지."

"도련님은요?"

"알아서 잘 테니까."

"가랑이...."

"그만."

뒤척이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이내 정적만이 감돈다.

허나 정적도 잠시,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더니 방을 시끄럽게 채웠다.

"어차피 못 잤겠구먼."

난 잠을 자지 않았다. 눈을 또렷히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예상대로다.

190cm의 거대한 쥐새끼가 천장 너머에 웅크려 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틈새 사이로 노란 눈알이 보였다. 놈은 내가 결코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했겠지만 난 낮처럼 환하게 놈의 움직임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놈은 이방인을 경계하는 낌새가 아니었다. 살기를 억누르지 않는다.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난 이 기분을 알고 있다. 악마와 마주쳤을 때와 비슷하나, 보다 친밀하다.

개들은 개장수를 알아본다고 하지.

그렇담 사람은 살인마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난 본능을 간과하지 않는다.

우린 이미 놈의 식탁에 올라간 거야.

몇 시간 동안, 날이 밝을 때까지 숨어 있던 쥐새끼는 걸시가 일어나 배고프다고 칭얼거리자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56

"호화스럽군요."

부엌으로 나오자 벌써 음식은 차려져 있었다.

식탁 위는 어제와 달랐다. 사치스럽게도 구운 고기와 감자, 매운 향이 올라오는 붉은 소스와 심지어 꿀까지 있었다. 퀄츠 성의 만찬에 익숙해진 내겐 별거 아닌 차림이지만 멜카란에선 매우 값진 음식들이겠지.

"하룻밤 묵고 가는 손님에게 대접하기엔 과하지 않습니까?"

난 음식을 마련한 집주인에게 따지는 듯한 행세로 말했다. 걸시는 깜짝 놀라 날 보며 고개를 저었다. 걸시는 그저 맛있는 음식이, 집주인의 변덕으로 먹지 못할까 봐 무서워하는 듯했다.

"걱정할 것 없소."

그는 우리에게 식사를 권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침 '재고'가 들어오는 날이라, 식재는 충분하오."

식탁에 앉자 그는 내 앞 접시에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덜어 주었다.

"어제 도통 드시질 못하셨잖소."

그러곤 자기 접시엔 싱싱한 채소를 덜었다. 그는 고기는 손도 대지 않았다.

"채소를 싫어하시오?"

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는 어제처럼 게걸스럽게 채소를 씹어먹었다. 입안 가득 집어넣고 씹어먹는 모습은, 사슴이나 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새 푸른 잎을 먹는대도 마치 육식동물이 살점을 씹어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맛있는걸."

아그작-! 아그작-!

식탁 위엔 그가 뿌리채소를 씹어먹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렸다. 걸시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히 포크를 들었고, 이내 고기를 우물우물 먹었다. 둘의 식사를 지켜보던 난 시선을 돌려 앞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바라봤다. 포크로 자르자 쉽게 잘린다.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덜 익혔는지 새빨간 핏물이 접시에 고인다.

"…이건 무슨 고깁니까?"

농부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들이 좋아하는 고기요."

"그렇군요."

이제 난 망설임 없이 고기를 먹었다.

꽤 맛있다.

전생부터, 지금까지.

웬만한 고기는 모두 섭렵한 나조차도 처음 맛보는 고기라는 게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 * *

그날 오후에는 농부의 권유로 '밭'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는 정말 농부였고, 멀지 않은 곳에 사막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비옥한 토지도 있었다. 수분기를 머금은 검은 흙을 보며 난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 날씨는 여전히 건조하고 덥다. 오아시스가 있더라도 절대 농작물이 자랄 환경은 아닌데.

하지만 밭과 가까워질수록 농부의 말은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검은 흙에 초록 싱그러운 새싹들이 보이더니, 이내 정말 농작물이 심어진 밭이 보인 것이다. 규모도 꽤 크다. 어떤 밭엔 붉은 토마토가 주렁주렁 널려 있고, 그 옆엔 오이와 상추 따위도 보였다.

"이 날씨에 가능하다고?"

걸시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막을 가꿔 농작물을 기르다뇨! 혹시 수확의 여신의 사제님이신가요?"

그는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뒀다. 입꼬리가 뺨까지 기이하게 올라간 것이다. 세상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저런 세숫대야면 가래침이라도 뱉어 줄 수 있을 거야.

"멜카란은 사막이기 전에 저주받은 땅이오. 생명을 삼키는 죽음의 대지는 결코 새싹을 용서치 않지."

농부가 웃는 얼굴로 농작물을 살펴본다.

그는 자신이 일궈 놓은 밭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밀과 보리가 자라는 비옥한 땅은 금광맥보다 희귀하다오."

농부의 밭은 기이했다. 서로 수확 시기가 다른 작물이 같은 흙에서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난 방법을 찾아냈소."

그는 마치 밭을 포옹하듯 두 팔을 벌리고 손을 안으로 오므렸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천천히 흙밭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밭의 모든 작물이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이끌리듯 잎은 그를 향해 흔들렸고, 뿌리는 흙을 털고 일어나 그를 향해 솟아났다.

"와아!"

언뜻 보면 한낱 식물 따위가 자신을 길러 줄 부모의 은혜를 깨우친 듯, 그를 만지고 어르고자 하는 장엄한 모습이었다. 걸시는 감탄을 내뱉었지만 난 되레 소름이 돋았다.

개간네.

달비는 알고 있었다.

저 식물의 갈구 어린 몸짓은 은혜와 덕을 아는 게 아니라, 끔찍이도 갈망하는 식욕의 장면이라는 것을. 하이에나가 시체를 뜯어먹듯이 농부를 잡아먹기 위해 몸부림치는 섬뜩한 광경이라는 것을.

하하하-!

이내 식물의 뿌리가 농부를 휘감았으나 그는 기쁜 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죽음을 양분 삼아 찬란히 피워 낸 내 작물들은 기름지고 비옥한 땅에서 키워 낸 채소보다도 훨씬 더 맛있다오."

사각사각!

"또한 농작물을 먹고 자란 쥐는 천하 진미보다도 맛있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밭 주변에 잎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사막 쥐다. 본래 생쥐보다 작은 크기나 저놈들은 여우보다도 컸다. 구덩이에는 붉은 눈을 빛내는 쥐들이 득실거렸다. 걸시는 아침에 먹은 고기의 정체를 깨닫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역겨워."

농부는 낄낄거리며 내게 물었다.

"멜카란을 여행하는 무지한 나그네여. 어찌, 방법이 궁금하지 않소?"

쥐새끼들의 사각거리는 기분 나쁜 소음과 역겨운 악취를 내뿜는 흙.

그리고 살기를 감추지 않는 놈.

난 격양된 감정을 숨기고 천천히 밭을 살폈다. 검은 흙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무언가, 들키지 않게 매장되어 있으나 천안통은 보지 못하는 게 없다. 눈에 힘을 주자 서서히 식물의 뿌리가 보였다. 그리고 뿌리의 끝을 따라가 족히 10미터는 지난 지하에서 난 보았다. 사막에 풍족히 자란 식물, 그 원인이 되는 비료가 무엇인지 깨달았고, 신물이 올라와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궁금하지 않느냐고?"

식물은 비료를 먹고 자랐다.

죽음의 땅과 어울리는 비료를.

"그래, 엿 같은 놈아."

내 한마디에 분위기는 급변했다. 걸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고, 농부는 웃음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처음엔 악마가 뒤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놈이 가진 악의는 너무 거대했다.

그리고 한 인간이 지니기엔 순도가 너무 깊었다.

마치 악마처럼,

그래서 악마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다.

사이코패스? 짐승보다 못한 새끼?

아니다. 그 어떤 욕도 부족하다.

그야말로 놈은 '악마 같은 놈'이란 말에 가장 잘 어울렸다.

"하지만 넌 악마가 아니야."

농부는 나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지? 갑자기 악마를 왜 언급하오?"

그러곤 뒷걸음질을 쳐 가져온 농기구를 자루에서 꺼냈다.

덩치만큼 큰 곡괭이엔 흙이 묻어 있다. 빨갛고 비릿한 흙이었다.

"도대체… 몇 명이지?"

종과 상관없이 식물의 뿌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그리고 뿌리의 끝엔 아직 썩지 않은 인간의 머리가 휘감겨 있었다.

식물은 인간을 양분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천안통으로 보지 못했다면, 놈을 본 순간 느꼈던 불쾌함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농부는 태연했다.

"아직도 시치미를 떼? 개새끼야. 몇 명 매장했느냐고 물어보잖아."

그제야 농부는 곡괭이를 어깨에 걸치며 본색을 드러냈다.

하! …하하하!

허리를 숙여 박장대소를 터트리던 그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의 땅에선 인간은 무엇보다 훌륭한 비료다."

농부가 손을 뻗어 토마토를 따서.

"토마토를 키우기 위해선 '비료'가 세 명이 필요해."

제 입에 넣어 으적으적 씹어먹는다.

토마토의 과즙은 피처럼 빨갛다.

"보라, 십 년 동안 일군 내 기적을."

그는 두 팔을 벌려 제 밭을 자랑했다.

토마토 한 그루에 세 명의 인간이 필요하다면 이 밭에 자란 수많은 작물을 여태까지 키워 내기 위해선 몇 명의 인간이 희생되었을까. 난 굳이 계산하지 않았다.

"인간은 쓸모가 많지. 고기는 열흘을 먹고, 놀잇감으로도 훌륭해."

그가 광기를 드러내자 식물의 줄기가 태풍에 휩쓸린 듯 강하게 흔들렸다.

난 농부의 광기 어린 눈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현생이 아닌 전생에서다.

생명에 가치를 매기는 일이 빈번하고, 인간의 목숨값이 생각보다 훨씬 싸구려라는 걸 깨달았던 날.

"멜카란… 그래."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찌는 듯한 사막의 더위로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이글거리는 태양과 다른 무언가가 빛을 내며 푸른 하늘을 간섭한다.

다아~

달비는 하품을 하며 내 품으로 들어왔다.

영수의 기운이 마음을 달래주나, 단지 그뿐이었다.

이번 생도 역겨움은 참 많았지.

하지만 지금까지 본 진창은 '악마'가 인간에게 행한 짓거리였다.

"이제 좀 잊었나 했더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라니스타 놈이 멜카란을 타성에 젖을 때마다 간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오랜만이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악마 때문에 희석되고 말았다.

"히히히."

본색을 드러낸 농부는 지금, 자신이 포식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는 순간 알았다. 넌 정말 훌륭한 비료가 될 거야."

놈은 땅 아래 묻힌 희생자들처럼 이번 또한 똑같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두렵나? 공포는 영양가가 풍부해. 더 무서워해라, 밭은 네 공포를 먹고… 아?"

그는 알 수 없었다. 잘려 나간 손목의 아픔은 뒤이어 찾아올 것이다.

"저건 내...."

농부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밭에 '먹이'가 떨어지자 뿌리는 즉시 게걸스럽게 농부의 손을 휘감고 체액을 빨아 댔다.

으어억!

그러고 나서야 농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가 발버둥칠수록 핏물은 솟구쳤다. 밭의 농작물은 농부의 피를 기쁘게 받아 마셨다. 또한, 손 하나로 성이 차지 않은지 뿌리는 농부를 향해 뻗어 나갔다. 놈은 어느새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네놈… 악!"

놈이 손을 짜른 범인이 나라는 걸 깨닫고 거친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어리석었다. 고통에 삼켜져 내가 자신을 손쉽게 죽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난 라멜스타를 휘둘러 놈의 남은 손도 잘라 냈다. 라니스타에게 배운 발도쾌검은 그의 눈엔 반짝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팔을 내려다봤다. 상처에선 피가 터져 나왔지만 농부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네노옴!"

놈의 팔의 살점이 녹아내리더니 손목을 휘감아 상처를 지혈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놈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서운할 뻔했어.

인간을 먹고 자란 식물을 먹은 탓인지, 도마뱀처럼 원래 재생 능력이 있는진 알 바가 아니었다. 난 무관심하게 칼을 휘둘렀다.

목을 치지 않은 건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다. 죽어 가는 순간에선 그래도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느끼길 바랐다. 하지만 감정을 보는 눈, '고'의 힘으로 놈을 유심히 살펴도 오직 분노만이 보였다.

"윽, 아. 윽!"

머리만 남은 상태로도 놈은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비명만 내지를 뿐, 명줄이 끈질긴 놈이다.

"망할 놈."

굳이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자 한 건 만족감 때문이 아니다.

뭐… 나름의 추모라고 해 두자.

땅 밑에 묻힌 희생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죽었겠지.

"새끼야."

난 놈 옆에 쭈그려 앉았다.

충혈된 눈이, 악마보다 끔찍한 두 눈이 날 죽일 듯이 노려보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생에선 착하게 살어."

그리고 일어나 머리를 걷어찼다.

멀리 날아가 옥수수밭에 떨어진 농부의 머리는 점점 뿌리로 뒤덮였다.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나 그 또한 먹이에 불과했다. 놈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찜찜하지 않아. 악인의 최후가 인과응보로 끝나는 건 좋은 일이다. 우연히 내가 사구에서 떨어져 희생자를 막았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정말 우연일지."

다아.

달비가 품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채 날 올려다봤다. 가끔 난 달비가 내게 뭘 원하는지 뚜렷이 알게 될 때가 있었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 좋은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도련님...."

걸시는 담이 크다.

사람이 토막 나는 광경을 목격했어도 정신적인 충격은 전혀 없어 보였다.

"속이 안 좋아요."

다만 걸시는 음식의 정체를 알자 속이 메스꺼운 듯했다.

"으, 우에엑!"

기어코 구토하는 걸시다.

"도망가, 걸시."

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 꺄아아악-!"

힘들어하던 녀석은 번쩍이는 하늘을 보자마자 비명을 내지르며 줄행랑을 쳤다.

걸시는 순식간에 오두막집을 지나 허겁지겁 모래 언덕을 기어올랐다. 살겠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걸시의 행동에 난 어깨만 으쓱했다. 평소엔 둔한 걸시지만 이럴 때만큼은 빠릿빠릿하네.

"많이 화났구나."

반면 난 느긋하게, 관람객처럼 하늘을 구경했다.

별의 태동조차 몇 번 보았다고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반짝이는 빛은 고요하게 낙하했고, 부서지는 별의 잔해는 하늘 곳곳 잘게 흔적을 남겼다. 별똥별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은 낮보다 더 환해졌고, 저주받은 식물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다. 하늘, 그 너머에서 낙하하는 '저것'을 난 편하게 '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별을 본 적이 없으니까.

"더 커졌어."

달비는 화가 난 모양이다. 운석은 호수에서 악마와 대적했을 때보다 더 컸다. 날 해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살짝 발꿈치가 저렸다.

다아? 다아다아-!

"안 쫄았어."

놀리는 듯한 달비의 웃음소리에 난 녀석의 털을 마구 헝클었다.

"녀석아."

운석을 다루는 힘.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쌍둥이들이라면 별조차 쉽게 파괴할 순 있겠지만, 그뿐이다.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전생, 악마,환생.... 그러니 신이라고 없으랴?

"어라, 그럼 난 지금 신이랑 친구 먹은 거야?"

다아~!

마침내 운석이 지면을 강타하고 달비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더불어 지축을 울리는 폭풍과 굉음이 몰아닥쳤다. 큰 충격과 태양처럼 눈부신 섬광에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난 눈을 감은 찰나의 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변화일지도 모르지만, 순간 내 품에 안긴 달비의 털이 길어졌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여파가 가시고 눈을 뜨자 달비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이게 뭐야?"

손에 기다란 은색 실 몇 가닥만이 착각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57

낙하의 충격으로 깊고 넓은 구덩이가 생겼다. 뒤집히고 부서진 땅은 저주받은 식물의 뿌리까지 뽑아 냈으며, 별빛은 달비의 분노를 대변하듯 녹색을 대지에서 지워 냈다. 농부가 행한 만행은 완전히 소거됐다. 작고 귀여운 달비도 화나면 무섭구나. 어째 이대로 가다간 나보다 더 세지는 거 아닌지 몰라.

"명복을 빕니다."

죽어서도 흙 속에 묻혀 양분을 빼앗기던 희생자들은 모두 화장되었다.

난 가벼운 묵례를 하고 뒤돌았다. 수년간 멜카란에서 지낸 놈의 오두막집은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지.

"걸시!"

멀리 언덕 위에 걸시가 지쳐 뻗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어코 가파른 사구를 기어 올라간 모양이다. 저 정도 육체 능력이면 무술을 배워도 굉장하겠는데.

개간네.

걸시를 부르던 난 인상을 찌푸렸다. 개간네? 달비는 만족스러운 울음을 내지 않았다. 긍정적인 건 다아다아, 부정적인 건 개간네. 아직 녀석은 화가 난 상태다.

"왜?"

달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구덩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불만이지? 난 녀석이 뚫어지게 보고 있는 구덩이에 시선을 돌렸다. 충격의 여파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도 내 눈은 문제없이 볼 수 있다. 난 안력을 더해 집중해서 구덩이를 확인했다.

구덩이, 깊은 곳.

예상보다 훨씬 깊어 바닥은 한참 아래에 있다.

이상하다. 방금 충격으로 생겼다기엔 훨씬 더 깊었다.

"본래 있던 건가?"

구덩이는 충격으로 생긴 게 아닌 듯했다. 예전부터 모래와 흙에 숨겨져 있던 구덩이가 충격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가? 지하수가 메마른 흔적이라기엔 구덩이의 모양이 너무 반듯해. 마치, 누군가가 파놓은 굴처럼.

개간네!

"저건 또 뭐야."

그건 한순간에 나타났다. 구덩이에서 순식간에 기어 올라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기이한 무언가는 언뜻 연기처럼 보였으나 난 놈이 살아 있는 존재임을 확신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눈이 마주친 것이다. 검은 연기에 숨은 푸른 두 개의 눈, 난 그것에게서 익숙하지만 꺼림칙한 기운을 느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었다. 아는 이들은 하루가 지나면 모르는 이로 채워졌다. 나날이 투쟁이었다. 전생의 난 형편없이 약한 주제에 희귀한 능력을 타고났고, 그래서 이용만 당하다 결국 어떻게 뒤졌는지도 모른 체 생을 마감했었다.

모든 건 한순간에 변했다.

"레벨 업, 레벨 업."

이번 삶도 한순간에 변할 수 있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

저놈 또한 성장을 위한 경험치다.

마침내 놈의 형태는 완전해졌다.

검은 갈기의 하이에나,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나온 괴물은 집채만 한 짐승이었다.

저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니 육탄전은 손해겠지.

난 내가 가진 힘들을 상기하며 최적의 승리를 구상했다.

우선 방출 마법을 응용하여 놈의 힘을 가늠해 보자.

우우웅-!

손바닥을 펼쳐 마법을 사용하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구球 형태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항마력의 방출이다. 유물 '공'의 힘을 방출 마법으로 쏘아 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악마라면 소멸하거나 큰 해를 입겠지.

"맞고 뒈져라."

첫 시도였으나 가볍게 성공했다. 역시 이 힘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같아.

전설의 대마법사 현현마제의 마법인 방출은 몹시 간결한 힘이다.

멜리사 누나는 제법 대단하다는 듯 설명했지만, 그때의 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힘을 방출하는 것뿐이라면 그다지 대단할 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방출 마법에 익숙해질수록, 난 이 힘이 가진 가능성을 발견했다.

비록 내 뱃속에서 똥이 된 멍청한 노파였지만 괜히 대마법사의 마법이 아니다.

합-!

난 항마력의 구를 놈에게 방출했다. 포탄처럼 쇄도한 붉은 구는 놈과 부딪히자마자 폭발했다. 단순한 폭탄이 아니다. 항마력을 응집하여 쏘아 낸 포탄, 그야말로 멸악의 포탄이다.

"씁, 아직 멀었어."

위력은 생각보다 약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방출 마법의 놀라운 점은 마법의 '갈래'.

칼베인에선 달비의 힘을 방출하여 악마를 죽였고, 이번엔 공의 힘을 방출한 것이다.

내가 강해질수록 방출 마법은 직관적으로 강해진다. 또한, 활용 방법도 무궁무진해.

"영수는 자연을 닮거늘."

놈은 충격은 받았으나 항마력 때문은 아닌 듯 보였다. 주춤거리던 놈이 금세 사기를 뿜어냈다. 악취가 풀풀 나는데 악마나 마법과는 관련이 없다라.... 역시 예상하던 대로 저놈조차 영수인가?

"네놈이 닮은 건 시쳇더미로 가득 찬 구덩이구나. 아니, 네놈이 있기에 해괴한 일이 벌어진 건가?"

사람을 양분 삼는 식물, 악마의 땅 멜카란 때문이 아니라면 저놈 탓일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영수든 악마든 무슨 상관이랴. 놈이 날 죽이려 드니 맞서 죽일 뿐이다. 항마력은 통하지 않았으니 이제 '연발'을 시험해 볼까.

힘을 쪼개서 방출한다.

어퍼컷이 아닌 잽 느낌으로.

웅! 웅! 웅!-!

찰나에 일곱 개의 구가 만들어졌다.

야구공만 한 크기, 담긴 힘은 약하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난 멜카란에서 내가 가진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전투엔 대포만 필요한 게 아니야. 기관총이 있으면 다수의 싸움에서 쓸만하겠지.

일곱 구를 방출하자 전의 마법보다 더 빠르게 날아갔다.

"약해질수록 제어에 쉽군."

마법이 연달아 괴물을 강타했으나 역시 피해는 주지 못했다.

놈의 화만 돋운 격이다. 갈기를 잔뜩 세운 놈이 거대한 이를 드러낸다. 이내 거칠게 달려오기 시작했는데 놈이 지나간 자리엔 석유 같은 검은 액체가 생겨났다. 난 재빨리 라멜스타를 봉의 형태로 변형했다.

"역시 이만한 게 없어."

코끼리만 한 하이에나가 덤벼드나 난 침착했다. 라니스타 새끼와의 많은 실전으로 얻은 게 또 하나 있다면 역시 담력이겠지. 전혀 무섭지 않아. 타구봉법의 당두봉갈當頭棒喝의 자세를 취했다. 마침 놈도 개의 모습이니 개패는 무공인 타구봉법으로 아주 개팰 수 있겠다.

놈은 굶주린 호랑이보다 더 빨랐으나 내 눈엔 굼벵이처럼 느렸다.

난 침착히 격돌에 대비하여 봉을 앞으로 내밀었다.

영수는 물리적인 힘은 통하지 않아. 하지만 내공을 담으면 놈도 쥐어 팰 수 있겠지.

쿵쿵쿵-!

지척에 도달하여, 마침내 부딪히기 직전!

그때였다.

개간네!

내 몸에서 달비가 뛰쳐나갔다. 몸에서 튀어나와 말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나와 괴물 사이를 가로막은 달비는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윽!"

재빨리 봉을 휘둘렀으나 이미 괴물의 이빨은 달비를 향했다. 그에 맞서 달비는 앞다리를 들고 발굽으로 괴물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앙증맞은 달비의 몸은 괴물의 주둥이보다 작았다. 괴물의 입질에 비하면 앙증맞고 작은 몸짓에 불과했다.

"너!"

달비는 영수, 물리적인 힘은 통하지 않아도 영수끼리의 충돌로 피해는 입는다.

당황한 난 전력을 다해 괴물을 저지하려고 했다.

다아.

그러나 너무나 침착한 달비의 태도.

"뭐야?"

이내 난 깨달았다.

잡아먹혔으면 진작에 잡아먹혔다.

괴물의 움직임이 달비의 난입과 동시에 멈췄어.

이어진 상황은 당황스러웠다.

다아! 다아! 개간네?

흉악하고 불쾌하고 사악하고 어두운 기를 뿜어내던 하이에나 괴물 영수가.

조막만 한 달비를 상대로 넙죽 엎드려 있다.

개간네!

그리고 달비는 앙증맞은 발굽으로 괴물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 모습이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 딱밤을 주고 있는 모양새다.

뭔 지랄이지?

저 모습은 진짜....

"훈계하냐?"

달비는 다아, 개간네를 섞어 가며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에 괴물은 놀랍게도 '죄송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달비는 혼내듯이 괴물을 나무랐고, 사기를 내뿜던 괴물은 얌전해져선 낑낑거리며 울 뿐이었다.

"영수는… 자연의 짐승."

후우, 처음 겪는 현상이나 이해 못 할 건 아니야.

아무리 악마처럼 불길한 힘을 내뿜던 놈이라도 이질적이진 않았지.

놈이 진짜 영수라면, 그래.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있구나.

푸른 호수의 영수 맥이나 달빛처럼 화사한 달비와 다르게 놈처럼 죽음과 시궁창, 불쾌함에 존재하는 영수라도 영수는 영수다. 자연에도 불쾌한 건 얼마든지 있다. 죽음도, 부패도, 오염도, 자연의 이면이다.

"그래도 우스운 꼴이야. 자연이 조화라고 쳐도, 저놈이 달비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은 대체...."

개간네! 개간네!

달비의 훈계는 계속되었다.

* * *

달비가 화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랄발광하며 사구에서 떨어진 이유가 놈 때문이었구나.

달비의 발굽 딱밤이 계속될수록 하이에나 영수의 기운이 점점 달라졌다.

더욱 맑아진 느낌. 여전히 꺼림칙하나 전보단 괜찮다.

부정적인 영수라고 해도 악마와 비슷한 기를 내뿜진 않았다. 아마 놈이 타락한 건 멜카란의 영향이겠지.

작은 사슴이 수십 배나 큰 하이에나를 나무라는 걸 보며 난 머리만 긁적였다.

신나서 싸울 수 있었는데 흥이 식었네.

"뭔 생각을 한 거야."

문득 내가 생각해 놓고도 소름이 돋았다. 라니스타 놈과 같이 지내다 보니 사고조차 무림인처럼 되어 가네.

다? 다다! 다아! 개간네!

달비는 방언이 터졌다.

다아, 개간네. 두 단어 아닌 단어만으로 달비는 자신의 심정을 열렬히 피력했다.

뜻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대강 유추하자면 달비는 놈에게 몹시 화가 났으며, 어쩐지 일을 그르친 부하를 책망하는 실망한 상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금까지 살벌한 악의를 내뿜던 하이에나 놈은 얌전히 서서 꼬랑지를 가랑이 사이에 넣은 채 낑낑거리기만 했다.

개간네! 개간네! 개간네!

꾸짖음이 끝나지 않았다. 달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온도가 높아졌다. 이제 발굽으로 놈의 앞발을 꾹꾹 밟으며 성질을 냈다. 마냥 귀엽기만 한 모습이지만 하이에나의 귀와 꼬리는 겁먹은 듯 축 처졌다.

"…언제까지 하는 건데?"

문제는 달비의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난 힘을 거두고 무안하게 서서 둘의 만담을 지켜봤다. 왠지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멀뚱히 서서 구경하던 난 문득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거, 하 사장. 똑바로 합시다. 이래선 영수의 체면이 안 서잖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부디 용서를...."

"하참, 꼭 내가 나서서 꾸짖어야 정신을 차리요? 안 되겄어. 말로 해선 안 되니께, 발굽 맛을 봐야 쓰겄서."

"용서해 주십시오!"

멜카란의 불쾌한 공기가 머리를 살짝 돌게 했는지도 모른다. 난 달비와 하이에나 놈의 대화를 상상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걸시가 봤다면 망설이지 않고 미쳤느냐고 물어봤겠지. 하지만 실없는 상상은 그치질 않았다.

"집에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히히. 하이에나의 아내가 여우, 자식이 토끼래."

개간네에!

달비의 성냄이 절정에 치달을 때였다. 혼자 키득거리던 난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일어난 일에 경악했다. 작은 입을 벌린 달비가 달려들어 하이에나의 목덜미를 물어 버린 것이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웃긴 일이 아니었다.

"어어! 또 지랄이네!"

58

달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오물거리자 푸른 털이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하이에나 놈은 가차 없이 녹아내렸고, 녹아내린 액체는 달비의 입으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 달비는 순식간에 하이에나 영수를 마치 젤리를 먹듯 호로록 먹어치워 버린 것이다.

"…너."

만족한 듯 달비의 표정은 환해졌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테라린 호수에서 잉어 영수를 잡아먹은 전례가 있다. 하지만 달비는 아무 영수나 잡아먹진 않는다. 엄마가 남긴 지식으로 보아, '아르테미스'가 정말 산산조각 난 상태라면.

역시.

"저 역겨운 것도 네 조각이었구나."

달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깜찍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녀석의 입가에 묻은 검붉은 액체가 케첩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아!

달비는 혀를 날름거려 입을 닦았다.

살짝 소름이 돋았으나 이내 내게도 일어난 변화에 달비를 따라 나도 웃었다.

"그래, 잘했어."

달비의 성장은 나의 성장.

테라린 호수 때처럼 늘어난 기를 느꼈다.

"무럭무럭 자라서...."

밤하늘 은하수처럼 빛나는 달비의 눈동자.

하지만 녀석은 보기보다 순진하진 않다.

오히려 달비는 투쟁적이며, 사납고, 거침이 없는 편이다.

하긴, 대악마의 배 속에서 아득한 세월을 이 악물고 버티던 녀석이니.

"나와 함께 세계를 지배하자꾸나."

다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달비는 눈을 빛내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 * *

오두막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달비가 꽃 한 송이를 물고 왔다. 농부의 역겨운 밭에서 자란 식물과 느낌이 달랐다. 자주색 꽃잎이 예쁘게 폈다. 달비는 꽃을 내 발치에 놓았다. 일부러 못 본 척하자 개간네라고 소리 지른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꽃을 주웠다. 삭막하던 사막과 죽음으로 얼룩진 흙더미만 보다가 시야가 자줏빛으로 채워진다.

"예쁘네."

달비를 쓰다듬자 녀석은 이마를 손바닥에 비벼 댔다.

아버지가 언젠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악마와의 전쟁 때, 자신이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영수의 덕이었다고. 악마는 슈바르젠 백작처럼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수많은 사람에게 남겼겠지. 전쟁의 중심에 있던 아버지는 분명 미쳐 버릴 만큼 힘든 일들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다아?

달비는 내 곁에서 동그란 눈으로 날 관찰하듯 살펴보고 있었다.

멜카란의 악취가 옛 향수를 자극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난 달랐다.

"괜찮아, 달비야."

다아!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지.

오두막집으로 돌아온 난 농부의 방으로 향했다.

놈의 방은 삭막했다. 낡은 침대밖에 없는 방에는 창문도 없어 곰팡이의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보다 쥐새끼가 더 좋아할 곳, 짐승의 굴이다. 방을 둘러보던 난 인상을 찌푸렸다. 놈은 철두철미했다. '먹잇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 자신의 집에서조차 비밀을 숨기고 숨겼다.

"빌어먹을 놈."

하지만 내겐 보였다.

난 곧바로 침대를 치웠다.

침대 밑은 다른 장소보다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쥐새끼답군."

라멜스타를 쇠 지렛대로 사용해서 마루판자를 뜯어내자 아래로 향하는 굴이 나왔다. 난 망설이지 않고 놈의 비밀 공간으로 향했다. 지하굴은 오히려 집보다 관리가 잘돼 있었다. 어두컴컴했으나 내 눈엔 환히 보였다. 이곳은 놈의 저장고다. 다만, 쥐새끼와 다르게 먹잇감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저장해 놓은 곳이다.

"히야."

벽면과 선반에 놓인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자 농부의 비밀이 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생각보다 더 또라이였네."

역겹다.

악의가 느껴져서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선반에 장식된 놈의 '수집품'.

난 밤새 걸시를 노려보던 놈의 섬뜩한 시선을 떠올렸다.

자는 사이 머리카락을 잘라 가? 미친 새끼.

벽을 장식한 머리카락, 한 사람의 것이 아닌 게 분명한 머리카락들은 나중에 불태우기로 했다. 굳이 이 역겨운 곳까지 내려온 목적. 난 눈을 부라리며 '정보'를 찾았다. 살해당한 자들의 유품인지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쥐굴에서 난 유일하게 농부의 것으로 유추되는 물건들을 찾아냈다.

아무리 농부가 잔혹한 살인마라지만 이곳은 멜카란이다. 놈도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곳에서, 놈은 몇 년을 홀로 살아왔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겠지. 내 예상대로 놈은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이만하면 쓸만하겠어."

멜카란의 지리가 그려진 지도였다.

그것도 보통의 지도가 아니라 '위협 요소'들이 상세하게 적힌 지도.

놈이 죽인 자 중에 농부를 위협할 강자들은 없었다. 그건 농부가 쥐새끼처럼 피해 왔기 때문이다. 오두막집 근처 멜카란 경계선에는 탈마병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다. 또한, 오두막집을 넘어 멜카란 곳곳에 도사린 위협들도 놈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역시."

멜카란답게 위험 요소들이 촘촘히도 적혀 있다. 한 발자국 걸으면 살인마가 나오고, 도적 떼가 나오는 식이었다. 하지만 농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역시 그들이었다. 붉은 글씨로 자신에게 경고하듯 써 놓은 한 문장.

"기사들은 죽음을 수확하는 자들이다."

안타깝게도 고대 제국의 터는 지도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 *

오두막집을 불태우고 모래 언덕을 올라올 때까지,

도망친 걸시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린아이도 아니고 흙장난이나 하고 자빠졌다.

"뭐해."

난 녀석이 수분기 없는 모래를 뭉쳐 힘겹게 만들어 낸 탑을 발로 찼다. 그제야 걸시는 깜짝 놀라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얘기했다.

"하늘에서 별님이 떨어졌어요."

"응."

"도련님이 하신 거예요...."

"그런데?"

"도련님은 하늘에 뜬 고약하고도 찬란히 빛나는 구슬들을 떨어트릴 수 있나요?"

"구슬? 뭐, 별하고 달, 해 같은 거 말하는 거냐?"

"네. 날씨가 너무 더워요. 저 망할 해 때문이겠죠. 저것도 떨어트릴 수 있나요? 아, 여기 말고 멀리. 근처에 떨어지면 걸시 옷 다 타 버려요."

걸시는 평소에도 횡설수설을 자주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난 오두막집에서 챙겨 온 물병을 꺼내 녀석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무래도 걸시는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걸시는 뺨을 타고 흐르는 물을 혓바닥으로 낼름거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요. 각오한 바에요. 천재天災를 다룬단들, 우리 도련님이니까!"

쓸데없는 각오를 해 버린 걸시는 당당한 걸음으로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길인지도 모르잖아. 농부의 지도로는 걸시가 가는 방향은 개미지옥이다. 난 걸시 곁으로 달려가 자주색 꽃을 건넸다. 황갈색 황량한 풍경에 지친 걸시가 꽃을 보고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예쁘다."

놀랍게도 걸시는 꽃을 주자마자 제 머리와 귓등에 꽂으려고 들었다. 난 너무 잘 어울려서 그만 칭찬을 하고 말았다.

"잘 어울리네."

"걸시가 꽃이게요, 꽃이 걸시...."

"그만."

개간네!

달비가 고함을 질렀다. 걸시의 행동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의 발굽은 내 허벅지를 향했다. 걸시에게 꽃을 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왜? 주지 마?"

하하하-!

달비는 신나 하는 걸시를 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개간… 다아.

심지어 머리에 꽃을 단 걸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이쪽이야, 걸시."

우선 근처 중립 마을로 방향을 정했다. 그곳이라면 멜카란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살 테니 고대 제국의 터를 아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멜카란은 정말 엿 같은 곳이야. 난 미간을 찌푸리며 검붉은 태양을 올려다봤다. 악인들이 모여서 멜카란이란 세기의 무법 지대가 탄생한 게 아니라, 어쩌면 멜카란이기에 희대의 악인들이 탄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기묘하게 역겨운 곳이다. 공기마저 따갑고 짜증은 살의로, 피곤함은 무기력함으로변한다. 단지 이글거리는 사막이라서가 아니다. 이곳엔 확실히 들끓는 악의가 산재해 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어."

하하하-! 배고파요! 목말라요! 하지만 참을게요, 난 현자의 비수니까!

걸시의 증상이 더욱 심해진 걸 보아하니 서두르는 게 좋겠다.

* * *

발바닥의 끈적거림.

증발해 버릴 듯한 머리카락.

침을 삼키면 모래 알갱이가 가득.

어딜 보나 황량하다. 탄 냄새는 가시질 않고 귓가엔 성가신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걸시는 말을 잃었다. 멍한 표정으로 내 그림자에 숨어 졸졸 뒤따를 뿐이다. 녀석의 발치엔 달비가 따라다녔다. 달비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걸시는 진작 탈수든, 정신 이상이든 간에 사막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내 눈은 빌어먹을 사막에선 너무 뛰어났다. 난 흐릿하게 눈을 뜨고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 다녔다. 사막의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 구별해 대는 천안통의 힘은 뇌를 쥐어짜 내는 듯 괴롭혀서 최대한 힘을 숨긴 채 걸었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멜카란의 기묘한 '무언가'가 자꾸만 내 눈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더위와 불쾌함은 참을 만했으나 멀미는 버거웠다.

"젠장."

마주침은 싫다.

멜카란에서는 더욱이.

농부의 지도를 참고하여 최대한 위협을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협은 사냥꾼이 파놓은 덫 따위가 아니다. 놈들도 두 다리가 있으니 움직이는 건 당연하다. 큰 위협은 아니었으나 결말이 뻔하여 마주치기 싫었던 그들을 만나고 말았다.

두두두-!

멜카란의 생물은, 산재한 악의를 닮아서 몹시 괴상하다.

특히 군마보다 큰 곤충들은 역겨움과 더불어 근원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더군다나, 그런 거대 곤충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충적蟲馬賊들은 오죽할까.

사막에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놈들은 올곧게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딱정벌레, 전갈 따위에 올라탄 인간은 인간의 형상을 했으나 인간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지비카교의 성물, 고의 힘을 발휘하여 난 몰려드는 도적 떼를 바라봤다. 끔찍한 악의가 일렁이며 치솟아 황갈색 모래 위에 먹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

악의는 쉽게 전염이 돼.

화를 내는 자에겐 같이 화를 내고,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자에겐 먼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쉽게 들어 버리는 것이다.

도적들이 앞에 섰다.

놈들이 일으킨 모래바람에 콧속이 간지럽고 눈이 따갑다.

"가진 것 다 내놓아라."

신기할 노릇이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놈들은 비슷한 행동과 말투를 하는구나.

"그럼 살려 줄 텐가?"

멜카란의 위협이자 자유도시를 넘어 서부 왕국까지 악명을 떨치는 도적 떼를 만났으나, 마치 동네 양아치를 상대하듯이 난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그들 중 전갈을 타고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내게 말했다.

"기꺼이."

놈들도 무신경한 것 마찬가지였다. 큰 건이 아니라는 거겠지. 놈들에겐 일상이다. 그저 지나가다가 먹잇감을 발견했을 뿐이고, 관례처럼 도적질하기 위해 온 것에 불과할 것이다. 난 후드와 얼굴 가리개를 벗었다. 그러자 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쓸만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예전 일이다."

난 담담하게 도적에게 말했다.

"너희 같은 도적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흠씬 두들겨 패 주고 보안국에 신고하려고 했지. 하지만 엉엉 울며 비는 통에 난 그만 용서해 주고 말았어. 그게, 담배 살 돈이 없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그러더군. 담배 한 갑. 세계가 멸망해 가는데 그깟 담배 한 갑."

멜카란은 향수를 자극한다고? 빌어먹을 라니스타.

"난 담배와 소주까지 사 줬다. 만약 다시 도적질하는 게 걸리면 두 손을 잘라 버린다고 그랬지. 난 놈들에게 분명 염라대왕이었을 거야. 분명 두려워했었을 거라고. 근데, 망할!"

도적들은 내가 뭘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먹잇감의 넋두리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야. 몇 달, 몇 주도 아니었지. 다음 날이었어. 논현 지구에서 일가족이 살해당해, 조사 파견을 나갔었다. 불쌍한 가족의 집엔… 잔인하게 살해당한 시체의 옆엔, 담배꽁초가 있었지."

나는 전생을 모두 기억한다.

그럼에도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참, 주둔군 보급품이라 상당히 곤란했어. 방위군이 범인으로 몰렸거든. 그 뒤엔 누가 민간인에게 보급품을 유통했는지 꼼꼼히 조사하더군. 결말은 시시해. 결국 난 말하지 못했어. 내가, 내가 놈들을 놓아 줬다고. 내가 담배를 건넸다고. 그 알량한 이해심과 동정으로."

"뭔 헛소리를 길게 주절주절 늘어...."

"적어도 죽는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59

챙-!

검날의 폭은 한 치면 충분했다. 그러나 길이는 도저히 검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길었다.

자루와 날 끝의 차이가 수 미터나 되니, 갑자기 나타난 기묘한 검에 도적들은 당황하면서도 물러서진 않았다. 난 점창파의 사일검법의 묘리를 담아 검을 휘둘렀다. 사일(射日), 그 뜻과 같이 무림에서 뛰어난 쾌검의 검법을 지닌 점창파. 점창파의 도인을 흉내 낸 라니스타에게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슈욱-!

바람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

비명도 들리지 않는다.

세 번의 휘두름에 그들의 머리는 익은 과실이 떨어지듯 허망하게 떨어져 나갔다.

기이했다. 난 가까스로 마음에서 생겨 나는 통쾌함을 진정시켰다. 즐거워해선 안 될 일이다. 주인을 잃은 벌레들이 황급히 달아난다. 멜카란의 사막은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였다. 핏물은 금방 모래 아래에 스며들고 시체는 강한 바람에 묻힌다.

다아....

"왜?"

다아?

"젠장, 미안."

천안통의 힘은 위험하다.

내가 개눈깔이라 부르며 비난하는 건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다.

신의 눈, 신의 시선.

죄악의 크기마저 보인다면.

과연 난 심판자의 자격이 있는 것인가?

한낱 인간 주제에. 죗값을 물을 권한을 준단 말인가?

완전한 월권행위잖아.

하지만… 왠지 이곳에서만큼은.

명예와 도덕심은 생존의 흙더미에 파묻힌 멜카란에서는.

꺄아아악-!

걸시의 비명에 정신을 차린 난 곧바로 녀석에게 뛰어갔다. 죽이지 못한 도적은 없었다. 걸시는 무사했으나 도적 떼의 습격에도 무서워하지 않던 녀석은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무슨 일...."

걱정했으나 걸시는 날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멀찍히 떨어진 다음에야 걸시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걸시는… 걸시는 혼란스러워요. 왜죠? 왜?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요."

지금까지 보여 줬던 대담한 태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난 한숨을 내쉬며 걸시에게 사과했다.

"미안, 내가 널 생각...."

"도련님, 눈이."

걸시는 겁먹은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

"빨개요. 마치… 마치...."

차마 걸시는 뒷말을 하지 못했으나 난 걸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아지비카교의 성물, 고의 부작용은 알고 있었으나 멜카란에선 더욱더 깊게 발현되었다.

난 심호흡을 하며 날뛰는 눈의 힘을 진정시켰다.

"멜카란."

아로니아 쥬스, 따뜻한 샤워.

희석되어 잊힌.

"너무 비슷하단 말이야."

멸망 직전의 지구가 풍기던 썩은 내가 이곳에서도 나고 있다.

* * *

사람은 분위기에 쉽게 휩쓸린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멍청한 생물이라는 뜻이다.

눅눅하고, 축축하고, 무기력하고, 절망적이며,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난 그런 분위기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뛰어난 눈으로 수없이 지켜보았다.

"이래선 안 돼."

그래서 난 나름의 대처 방안을 세웠다. 분위기에 휩쓸린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다른 규격의 멍청이가 되는 게 훨씬 좋았다. 난 시무룩해진 걸시에게 말했다.

"걸시야, 엿 같은 세상에서 즐겁게 지내는 두 가지 비법을 알려 줄까?"

"눼에에?"

힘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는 걸시는 녹아내리는 마쉬멜로처럼 끈적이는 표정이었다. 불쌍한 것,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지만 시녀장에게 머리통을 맞고도 히히 웃던 발랄한 녀석인데.

"간단해. 필요한 건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샤워다."

난 냅다 달려가서 걸시를 둘러업었다. 깜짝 놀란 걸시가 발버둥 치나 내 눈은 이미 놈들을 좇고 있었다. 멜카란의 사막에는 주인을 잃고 야생화된 낙타 무리가 더러 있다. 제법 먼 거리라도 내 눈은 이미 낙타 무리를 포착한 후였다.

"끼오오옷!"

"꺄아아악!"

무림의 경공까지 사용하여 달려가자 내 뜀박질은 낙타의 달리기보다 빨랐다. 걸시는 허둥대며 비명을 질렀지만 난 걸시에게 사냥의 권리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어느새 낙타 무리까지 도달한 난 걸시를 있는 힘껏 낙타 무리 사이로 던져 버렸다.

"으악!"

난 걸시를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멜카란에서 보여 줬던 걸시의 몸놀림은 평범하지 않았다. 걸시는 코산 일족의 핏줄, 칼베인의 사냥꾼처럼 날쌔고 강인한 몸을 지녔다. 뛰어난 체조 선수처럼 걸시는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낙타의 등에 훌륭하게 착지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에 등을 내준 낙타는 지랄발광했지만 걸시는 거머리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고기다!"

"네?"

"지금 필요한 건 단백질이야!"

걸시가 낙타의 시선을 빼앗은 사이 난 라멜스타를 휘둘러 낙타의 생을 마감시켰다.

당연히 걸시를 던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걸시는 쓰러진 낙타와 날 번갈아 보며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도련님. 퀄츠 성의 사람들은 절 보고 자주 최고의 바보라고 그래요. 아마 도련님이 도련님이라서 최고의 칭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먹자."

낙타 고기의 손질은 걸시의 몫이었다. 비록 세상이 걸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걸시는 퀄츠에서 가장 훌륭한 시녀였다. 의식주에 관련된 기본 지식과 더불어 '현자'의 제자답게 잡다한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다. 낙타 도축과 손질도 그중 하나다. 난 말끔하게 손질된 고기 조각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샤워, 몸을 씻자."

"이 사막에서 물을 어떻게 찾아요, 도련님?"

문득 걸시가 나와 오래 지내다 보니, 정상적인 의견도 낼 줄 알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더냐, 만능 잡캐 영수술사가 아니더냐."

다아!

달비가 나섰다.

녀석은 마치 자기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자 얼마 후 모래만이 가득한 사막에 자그마한 물웅덩이가 갑자기 생겨났다.

멜카란은 죽음이 산재하여 영수들이 드물었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웅덩이에선 작은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멍청한 표정이 귀여운 개구리는 달비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더니 폴짝폴짝 뛰어가기 시작했다. 달비도 깡충깡충 개구리 걸음을 흉내 내며 녀석을 쫓아갔다.

"따라가자."

나도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개구리 걸음을 걸었다. 걸시는 내 모습을 보며 노골적으로 비웃다가, 재밌을 것 같다며 자기도 따라 했다. 하지만 열 걸음을 가지 않아 재미로 하기엔 너무 힘들다는 걸 깨닫고 우린 인간처럼 두 발로 걸어갔다.

생명의 조각.

드넓은 멜카란에서 저 오아시스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막의 햇볕도 오아시스의 물결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보석 가루가 되었다. 개구리 영수는 보기보다 강한 영수 같았다. 영수에겐 독처럼 느껴질 멜카란에서도 녀석은 오아시스를 지켜내고 있었다. 난 로브를 벗고 냉큼 오아시스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쿠륵크-!

개구리 영수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달비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달비도 신나서 오아시스의 물에 몸을 던졌다. 물은 햇볕에 데워져 따뜻했고, 영수가 지키는 물이라 깨끗하고 맑았다. 게다가 달비까지 들어오니 물이 달을 머금은 듯하다. 망설이며 가만히 서 있던 걸시에게 난 소리질렀다.

"너도 들어와, 걸시!"

"하지만 도련님...."

"이제 와 체면 차릴 필요 있어?"

나와 달리 땀을 많이 흘린 걸시는 더러운 상태였다. 걸시도 불결함을 혐오하는 편이다. 주춤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오아시스를 향해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영수의 힘이 깃든 물이다. 따뜻함을 넘어서 기운을 북돋아 주니 걸시도 활짝 웃으며 외투를 벗고 목 끝까지 몸을 담갔다.

다아!

걸시가 들어오자 달비가 세차게 수영하며 달려들었다. 달비는 발굽으로 걸시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하하! 뭐야, 얜!"

걸시는 물을 마시면서도 깔깔 웃었다. 걸시도 달비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달비가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달비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걸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걸시에겐 허락한 모양이었다.

"아하학, 꼬르륵, 아하하!"

난 둘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걸시는 물을 너무 많이 먹어 괴로운지 캑캑거리다가도 활기차게 웃었다. …아닌가? 뛰어노는 게 아니라 익사시키려는 사슴과 저항하는 사람인가? 난 걸시가 즐거워 보여서 가만히 놔뒀다. 다행히 달비는 걸시에게 몇 번 물을 먹이다가 금방 관뒀다.

물놀이를 끝낸 우린 손질해 둔 낙타 고기를 먹었다. 향신료도 없고 훈제에 쓰일 만한 좋은 나무도 없어서 바싹 구운 고기는 육질이 딱딱하고 누린내가 심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계획은 실패였다. 맛있는 음식, 쌍둥이들이 전생의 악인이었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항상 내 식사는 만찬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 긴장감이 얼마나 극에 다다랐는지 깨닫는다. 음식에 집착하게 된 건… 젠장, 또 전생의 기억이다.

[식충이놈, 작전 실패로 널 지키기 위해 대원 여섯 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넌 상부에게 만찬이나 요청했다고? 아로니아 쉐이크와 피터루거 스테이크 때문에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하게 해? 이딴 놈을 지키려고 내 동료들이....]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루카스는 죽기 전 꼭 볼프강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여....

"도련님?"

"응?"

"안 드세요?"

걸시는 양손 가득 맛없는 낙타 고기를 쥐고 있었다.

"맛있니?"

"네! 누린내가 환상적이에요!"

"걸시야, 나 세상이 적어도… 아니다."

"네?"

"아무것도 아니야."

난 뒷말은 주책 같아서 삼켰다.

* * *

개간네에~

중립 마을에 가까워지자 달비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이젠 놀랍지도 않네."

무슨 일이 일어난 거겠지.

난 문득 내가 가진 아자비카교의 성물, '득'의 성물이 생각났다. 어쩌면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연속된 사건들은 모두 '신'의 농간이 아닐까? 득의 힘은 날 이득 보게 하는 힘이다. 그게 엿 같은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게 문제지만.

사막 위에 지어진 제법 큰 마을, 부르는 명칭은 있지만 대부분 이 마을을 중립 마을이라 부른다. 목이 언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할 것 없는 멜카란이지만 결국 사람들은 음식과 옷이 필요하다. 중립 마을은 무법자를 상대로 위험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모인 곳. 약탈자들도 물자를 공급하는 중립 마을에선 암묵적으로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

마을의 어귀엔 성벽이 세워져 있었으나 방어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무너진 성벽 너머엔 웅성웅성 떠드는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석공들이 지은 황갈색 건물마다 붉은 천을 매달아 놓았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초입에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이 무장한 채 서 있었다. 자경단이라기엔 수가 많았다. 또한 표정이 전쟁을 앞둔 군인처럼 비장했다. 긴장감을 넘어, 두려움마저 엿보인다. 난 숨지 않고 마을로 걸어갔다. 그들 중 몇 명이 우릴 발견했고, 떠드는 목소리는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도련님...."

그들 중 한 명이 나서서 내게로 걸어왔다.

걸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지만 난 태연하게 기다렸다.

멜카란에선 마주치는 놈마다 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약탈자들이 아니다.

남자는 거리를 두고 서서 외쳤다.

"이방인! 당장 이곳을 피해 멀리 달아나시오!"

예상대로 우릴 해치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는 협박이 아닌 경고했다. 우리가 마을을 벗어나길 원하고 있었다. 난 천천히 그의 안색과 옷차림을 살폈다. 먼저 대화를 시작했으나 우릴 염두에 두고 있는 눈치가 아니다. 하지만 낯빛이 창백하고 손은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어루어 만지고 있다. 그들을 두렵게 만든 무언가가 있는 거군.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군요. 무슨 일입니까?"

"이방인이 알 바 아니요."

"마을엔 꼭 들러야겠습니다. 물통이 메마르고 배낭이 가볍습니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의외로 호의적으로 대답했다.

"음식과 옷이 필요하거든,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오. 하지만 물통을 채우기도 전에 목이 달아날 테니 추천해 드리고 싶진 않소."

"우릴 죽일 생각입니까?"

"허, 우리가 살인마로 보이시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남자의 검을 가리켰다.

"그게 식칼은 아닐 테고."

난 능청맞은 말투로 남자를 설득했다.

"이유를 말해 주면 귀찮게 안 할 테니 말해 보시오. 나라면 실랑이할 동안에 몇 마디 내뱉겠소."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더니, 낮고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마을은 저주받았소."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의 기다림이 저처럼 암울할까.

"운이 나쁘시구려. 이 마을엔 곧… 죽음이 내려앉는다오. 죽음을 피하려거든 반대 방향으로 쉬지 않고 달리시오. 아니, 이미 늦었는지도."

그들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나는 곧 알아차렸다.

냄새가 난다.

고무가 타는 냄새, 불쾌하고 역겨운 냄새다.

코로 들이마시는 순간 바늘처럼 온몸을 찔러 댄다.

죽음의 악취는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무장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모두 겁에 질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 멀쩡히 서 있는 건 나와 걸시밖에 없었다. 기묘하게도 난 죽음의 악취가 익숙했다. 뭐, '퀄츠 성'에서 많이 맡아 본 냄새잖아.

"제가 운이 나쁘다고 하셨습니까?"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자들.

죽음을 흩뿌리고, 죽음에 충성하여 죽지 않는.

그리하여 죽음의 기사로 불리는 것들.

"아닙니다."

멀리, 사구의 위로 나타난 검은 형체, 신기루처럼 나타난 검은 형체는 모래를 검게 더럽히며 스멀스멀 마을 어귀로 기어 내려왔다. 그것들이 나타나자 태양은 검붉게 타올랐다. 방금까지 환하던 세상이 어둡게 물들어 간다.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세상은 어두컴컴해졌다.

"당신들이 운이 좋았던 겁니다."

60

비슷한 존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악몽처럼 끔찍하고 두렵게 생긴 존재인지는 몰랐다.

죽음의 기사라고 하여 갑주를 입은 해골 기사라도 되는가 싶었다만, 실제로 보니 악마와 다름없다. 모래 언덕을 빠르게 기어 다니는 놈은 사지가 수 미터나 되고, 몸통엔 무수한 눈이 달린 괴물이었다. 언뜻 거미처럼 보였으나 사람의 손과 관절을 지녔다. 놈의 움직임은 매우 빨라 수십 미터의 거리를 급격히 좁혀 왔다.

죽음이란 불쾌함을 형상화한 듯한 괴물.

몸통에 달린 무수한 눈은 모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여러 쌍의 눈이 마을의 사람들에게 향할 때, 난 서서히 힘을 발산했다. 달비의 힘이 몸에 깃들자 악취가 사라지고 선선한 새벽 공기가 불어오기 시작했다. 어둑하던 주변이 달빛처럼 은은한 빛으로 채워져 나가자, 괴물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한순간에 모든 눈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뭘 꼬라."

난 수십 쌍의 검은 눈알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놈은 어느 정도 지능도 있는 듯 보였다.

날 먼저 없애야 할 적으로 인식하고 기다란 네 다리를 재빠르게 놀려 가며 내게 덤벼들었다. 몸통의 아랫부분에는 거대한 입이 있었다. 거미가 사냥하듯 놈은 수십 개의 작은 이빨이 난 입을 내게 들이밀었다.

"하."

공포영화가 무서운 건 저항할 수 없어서다.

귀신을 쥐어 팰 수 있다면 장르는 액션으로 바뀌는 것이다.

난 달비의 힘과 공의 힘을 발휘하였다. 다소 촌스러운 마법명, '리버스 메테오'였다.

콰직!

손바닥에서 뻗어 나간 막강한 힘은 괴물을 일격에 터트렸다. 리버스 메테오는 괴물을 꿰뚫고 하늘로 한참을 치솟은 후에야 사라졌다. 강한 힘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강했다는 것이다. 풍선처럼 터진 괴물의 살점과 체액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난 얼굴 가리개와 로브를 벗고 치덕치덕 얼굴에 묻은, 석유처럼 검은 피를 닦아 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토를 했다.

"시발, 멋있었는데."

힘껏 폼을 잡았는데 마무리는 구토라니.

죽음의 기사가 나타난 이후부터 사람들의 시간은 멈춰선 듯했다. 두려움에 떨며 꼼짝도 못 하던 남자는 죽음의 기사가 '죽어 버리자' 얼빠진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표정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죽음의 기사를 죽일 수 있는 건… 죽일 수 있는 건… 갈색 눈… 갈색 머리, 갈색. 설마!"

남자의 태도가 달라졌다. 허리를 깊게 숙여 내게 감사를 표하더니, 아직도 굳어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열띠게 대화를 나눴는데, 들어보니 날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갈색 눈의 학살자...!"

문제는 그자가 나도 아는 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처에 서자 마을의 대표자로 짐작되는 노인이 나서서 말을 걸었다.

노인이 주름진 눈가를 더욱 찡그리며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라… 라니스타 님이십니까?"

멜카란으로 가기 전, 라니스타 놈이 말한 게 생각났다.

뭐, 멜카란에 협을 베풀었다고? 근데 별명이 갈색 눈의 학살자야?

"아닙니다. 하지만 아는 사이지요. 노인장은 어떻게 라니스타를 아십니까?"

"멜카란의 주민들이 그를 모를 리 없지요! 갈색 눈의 학살자, 악마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자, 사막의 태양마저 그를 피해 도망가고, 바질리스크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지옥의 전사, 학살의 기사, 슈테르닐의 광전사조차 그에 비하면 제정신인...."

악명인지 명성인지.

이 세계는 지구와 달리 열다섯만 되도 성인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라니스타를 제외하곤.

노안도 정도가 있지.

생각해 보면 라니스타는 제 육체 정도는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 년 만에 40cm 이상 컸으니. 무림에선 그 경지를 '환골탈태'라고 했던가?

"난 그런 미친놈이 아니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당신은 우리 마을의 은신이십니다. 감사하...."

"누가 공짜로 구해 줬답니까?"

"예?"

"따뜻한 물이랑 음식, 새 옷을 내놓으세요. 그리고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후후."

난 위협적으로 말했으나 당연히 요구할 만한 내용이었다.

노인은 당황하다가 알았다며 제집으로 날 초대했다.

"걸시?"

괴물이 나타난 후로 걸시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평소엔 잘만 도망치더니, 굳은 표정으로 멈추어 선 걸시는 불러도 대답이 없다.

다아?

달비가 발굽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자 그제야 걸시는 움직였는데,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뭔데."

"걸시는 거미가 너무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세 번 말할 필요까진 없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난 문득 걸시가 거미줄 청소 당번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걸시는 거미를 무서워하지 않아. 가끔 엄마랑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질 때 걸시가 벌레를 쫓아내기도 한걸.

…벌레를 무서워하는 엄마를 위해서.

* * *

걸시가 제정신을 차리는 데까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려 벌벌 떨던 녀석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태연하게 마을로 걸어갔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걸시에게 소리쳤다.

"네 밑에 거미."

"네?"

"씁, 단순히 정신이 나간 수준이 아닌데 이거."

걸시가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도련님, 이 사람들이 농부처럼 뒤통수를 치면 어떡하죠?"

"네 어깨 거미."

"왜 자꾸 거미 타령을 하세요? 도련님!"

"…그럴 일은 없어."

난 본 주제로 돌아와 걸시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편견은 나빠, 걸시. 이 사람들은 악인이 아니야."

"걸시는 이해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련님 성격, 이상합니다."

"뭐?"

"순진하게 사람을 믿는 모습, 이상합니다! 방금까지 도적 목 슝강슝강 쳐 내던 모습과는 다릅니다."

걸시는 의뭉스러운 표정이 되어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을 믿지 못하시면서, 이번엔 저 사람들을 믿어요. 왜에에 그런지 걸시는 알 수 없어요."

멜카란에서 지낸 지 며칠이 지났다고 걸시와는 친해진 것 같다. 놀리는 듯한 말투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를 말해 봤자 이해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아니, 세상 그 누구도 날 이해할 수 없다. 불신과 믿음, 선과 악. 세상 순리가 양분법으로 간결하게 나눠진다면 세상은 더 좋아질까, 나빠질까?

난 망설임 없이 마을로 향했고, 걸시도 천천히 뒤따라왔다.

* * *

따뜻한 샤워, 푹신한 침대, 달콤한 까이막.

생각보다 괜찮은데.

"새벽녘의 여신께서 우릴 보살펴 주셨나 봅니다. 각오한 죽음이라도, 목에 드리워진 검은 낫의 위협을 벗어나니 세상이 더 밝게 느껴지는군요."

마을의 대표자이자 알리에바 상단의 단주인 알리에바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가졌다. 그는 감사 인사를 건넸으나 난 대꾸하지 않았다. 새벽녘의 여신이 보살핀 게 아니라 내가 구해 준 건데.

상차림은 마음에 들었다. 향신료로 조리된 고기, 구수한 냄새의 수프, 염소젖과 꿀로 만든 디저트까지. 꽤 호화롭다. 가슴까지 기른 회색 턱수염이 인상적인 알리에바의 의복도 자수가 새겨진 고급 옷이다. 방금까지 괴물에게 몰살당할 뻔한 마을 상황과 다르게 의식주는 풍족해 보였다.

알리에바의 집 풍경은 삭막한 멜카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집 곳곳 아기자기하게 꾸며 놨는데, 알리에바 그의 취향은 아닌 듯했다. 너덜너덜한 동물 인형, 값진 물감으로 엉망으로 그려진 벽화, 또한 마당엔 시소와 가죽 공도 있었지.

식탁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내게 알리에바가 말을 건넸다.

"손자 녀석이 한 짓입니다. 병든 닭보다 못한 저 그림이 하늘 신을 그렸다고 하더군요. 하하."

벽화를 가리키며 알리에바는 웃었다.

난 주위를 구경하는 걸 멈추고 빵을 찢어서 입에 쑤셔 넣었다.

집에 어린아이가 살던 흔적은 있으나 아이는 없다. 난 무어라 말할 게 없었다. 빵만 처먹고 있자 알리에바는 빈 잔에 쿰쿰한 냄새가 나는 발효 술을 가득 따라 주며 말했다.

"사려가 깊으신 분입니다. 라니스타가 아니신 갈색 눈의 여행자시여."

난 술을 들이켜 푸석푸석한 빵을 한입에 삼켰다.

"라니스타는 내 형제요."

그리고 내 정체를 밝혔다.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쿤칸 제국 공작가의 막내아들이라고.

알리에바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는 순순히 내 정체를 믿어 줬다. 반응이 마치 예상했다는 듯 보여 이유를 물으니, 그는 믿지 못할 것도 없다며 라니스타에 대해서 말했다.

"그가 멜카란에 남긴 족적은 제가 알기론, 그 어떤 영웅이나 강자도 불가능했던 위업입니다. 잠시나마 죽음의 땅에 '피보라'의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이지요. 하하, 쿤칸의 한 상인에게 '라니스타'가 '달의 아이' 중 한 명을 뜻한다는 걸 들었을 때는 정말, 게다가 멜카란을 활보하던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살의 어린 나이였다는 걸 알았을 땐 제 비루한 관점을 깊게 탓하게 되었지요. 세상에, 믿지 못할 건 없구나, 하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공감을 표했다.

라니스타를 겪어 본 두 사람의 공통적인 시선.

그는 제법 라니스타를 대단하게 묘사했지만, 속뜻은 이거겠지.

아니, 시발! 어떻게 저런 새끼가 다 있지?

* * *

그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얼마 전부터 멜카란에 검은 태양을 드리우며 나타나기 시작한 죽음의 기사.

"4년 전쯤… 됐을 겁니다. 멜카란은 금지로 악명 높으나 늘 죽음이 곁에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삶의 이면이 그러하듯, 피치 못할 사정을 가진 자들이 모여 멜카란의 밝은 곳을 이루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쯤부터 변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은 신만 아시는 법인데도 양심과 인성이 잡아먹히는 광경을 저같이 무지한 자들조차 깨달을 만큼, 멜카란의 주민들은 악의의 늪에 서서히 빠지고 있었던 겁니다."

알리에바는 음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입이 움직일 때마다 수염이 떨린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를 괴롭히는 기억들이, 몸을 떨게 하고 있다.

다아.

달비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조그마한 사슴이 곁에 앉아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죽음의 기사는 깊은 모래에 파묻혀 보고 들을 수 없는 죽음입니다. 가끔 하늘이 노하여 사막을 뒤엎는 모래 폭풍이 일어날 때마다 한둘 모습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하지만 4년 전, 무슨 연유에서인지 한 줌 바람도 일지 않는 날에도 죽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알리에바의 말을 듣던 난 욕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는 '4년 전쯤' 죽음의 기사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어딜 가나 죽음이었습니다. 마차 아래도, 침대맡에도, 검은 태양의 불길한 빛이 비치는 한...."

그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벽화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난 잠시 그가 기도를 드릴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갈색 눈의 학살자가 등장한 시기도 그때쯤이었습니다."

알리에바는 말을 하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다.

난 괜찮다며, 그 새끼는 학살자라고 불러도 괜찮은 놈이라고 욕했다.

"…멜카란의 흑마법사조차 라니스타 님을 두려워한 건, 그가 유일하게 죽음의 기사를 '죽일 수' 있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라니스타가 멜카란에 '강림'한 이후로 들끓던 죽음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정말 미친놈은 미친놈이야, 아무리 전생을 떠올렸다고 해도 그 나이에 그런 괴물과 싸울 생각을 해?

그 뒤로 몇 년간 멜카란은 나름 평화로웠다.

살인마가 살인하고, 도적놈이 도적질하기만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알리에바는 얼마 전부터 죽음의 기사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놈들이 나타난 시기가 내가 아자비카교의 위장자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후와 일치했다.

즉, 연결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라니스타 님이 죽음으로부터 우릴 구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젠 제 눈으로 직접 폴스타 공께서 죽음의 기사를 해치우는 걸 보았으니 신의 뜻이 분명합니다!"

알리에바는 부담스럽게 날 쳐다봤다.

"거듭 얘기하지만, 당신들은 운이 좋았던 겁니다. 것보다 왜 마을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죽으면 재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그게...."

뒤이은 알리에바의 말에 난 흥미를 느꼈다.

"검은 사제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검은 사제.

우샤스, 누나가?

61

"아지비카교의 검은 사제들을 말씀하십니까? 왜 동대륙 제국의 사제들이 도움의 손길을...?"

알리에바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자님은 자유 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유 도시.

공학이 발달하고 기묘한 정치적 구도로 왕국에 속해 있음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은 도시.

난방 장치, 건축, 운송 수단, 자동화 장치 등 아직 서투르고 비효율적이라 상용화되진 않았으나 분명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과학의 중심지다. 탈마병 위주로 용병 파견업을 하고 있으며, 상업 또한 뛰어나 가장 유명한 상단 열 곳 중 반 이상이 자유 도시 소속이다.

한마디로.

"흥미로운 곳입니다."

순간, 알리에바의 얼굴에 증오가 스쳤다. 부드럽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특권층을 위해 무수한 사람을 양분 삼아 성장하고, 삼계명을 어겼으며, 이익을 위해 생명을 불태우는 욕망의 대장간, 악마들의 도시입니다. 멜카란은 놈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가 넘치는 쓰레기장이지요. 탈마병들은 멜카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도시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멜카란은 군사 훈련 장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놈들이 고의적으로 죽음을 일깨워 전투 경험을 쌓는 동안 후폭풍은 고스란히 우리가 감당하게 되는 거지요."

난 며칠 전에 만났던 탈마병 무리를 떠올렸다.

필요 이상으로 거칠던 놈들, 알리에바의 말에 일리가 있어.

난 아자비카교 사제들이 왜 도와주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을 뿐이나 알리에바는 분통을 터트리며 쌓인 감정들을 토로했다. 아마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겠지. 난 노인의 억울함을 들어줄 참을성은 있었다.

알리에바는 술로 목을 축인 후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자유 도시는 거름망이며, 멜카란은 수용소입니다. 농노, 몰락한 귀족, 빚더미에 앉은 상인, 왕의 정적까지. 왕국은 쓸모없어진 인간들을 도시에 팔아넘기고 영주들은 자그마한 희망을 쥐여 준 채 멜카란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추방당한 자들은 영주가 제시한 해방금을 충당하기만 하면 신분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쥐고 멜카란의 금과 기름, 유물 등을 찾아 나서지요. 허나 추방자들이 신분을 되찾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시궁창은 시궁창일 뿐."

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많이 겪어 본 상황이었다. 그래, 전생에서다.

알리에바의 사정은 이러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던 상단주였는데, 단 한 번의 발주 실패로 영주들의 눈 밖에 나서 멜카란으로 추방당했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이자조차 갚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유도시의 풍족함과 부유함은 멜카란의 고혈을 쥐어짜 낸 결과물입니다."

"…그렇군요. 근데...."

난 뺨을 긁적이며 얘기했다.

"왜 아자비카교의 사제들이 도와주는지 말씀 안 하셨는데."

"아지비카교가 섬기는 삼신은 형태는 다르나 분명 하늘신과 본질은 같으니! 불합리함으로 고통받는 우릴 불쌍히 여겨 구제해 주기 위해서...."

"글쎄요."

난 처음으로 알리에바의 말을 끊었다.

알리에바가 당황한 얼굴로 멀뚱멀뚱 날 쳐다보자, 난 그의 독실한 신앙을 배신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군요. 분명 그럴 겁니다."

검은 사제.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위장자로 판별나 몰살당한 후 성녀 우샤스의 지위는 아지비카교에서 절대적으로 변해 가고 있을 텐데. 검은 사제들은 누나의 명령에 따를 확률이 높다. 그리고 내가 아는 우샤스는 중생 구제를 위해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이유가 있어, 검은 사제들을 멜카란에 파견한 이유가.

"하지만 죽음의 기사가 마을을 덮칠 동안 사제들은 보이질 않군요. 그들은 어딨습니까?"

* * *

마을에서 나온 난 고지대의 바위 위에 올라가 눈을 부릅떴다.

알리에바는 검은 사제들과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진실'을 추앙하는 아지비카교 사제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사제.

죽음의 기사.

둘 다 뚜렷이 보이는 기운.

"찾았다."

높은 바위를 내려오는 데엔 세 걸음이면 충분했고.

저곳까진 뛰어서 십 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같이 가요오!"

걸시가 부리나케 쫓아오나 난 무시하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 * *

가까워질수록 냄새가 악랄해졌다. 부자연스럽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치 하늘 위에 거대한 가림막을 쳐 놓은 듯 어두운 사막에 도착해서야 난 뜀박질을 멈췄다. 잠시 뻐근한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는 사이 동안 난 내게 펼쳐진 풍경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거목만큼 큰 선인장이 자라 있는 선인장 지대라고 생각했으나 이내 못 박힌 거인들임을 알아차렸다. 죽음의 기사들의 악취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역겨운 냄새도 맡다 보면 적응하는데, 놈들의 악취는 도리어 더 심해지기만 할 뿐이다.

"예상보다 더 심하군."

난 죽음의 기사가 구체적으로 몇 명인지 알고 싶어졌다.

중립 마을을 습격한 거미 괴물은 무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괴물만 수십 마리다.

병사의 창보다 큰 못이 무수하게 박힌 거인들은 크기가 어림잡아 3미터는 넘었고, 구멍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물은 모래를 적셔 건조했던 사막이 마치 파도가 치는 해변의 모래사장처럼 수분기를 머금었다. 검고 붉은 세계, 악몽의 풍경을 지켜보는 듯한 광경에 난 굳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내 힘을 직시하지 못했다면 두려움에 삼켜졌을 것이다.

난 못 박힌 거인들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주변에 쓰러진 채 발악하는 거인들이 더러 있었으나, 몰려드는 거인에 비하면 수가 적었다. 그리고 거인을 쓰러트린 자들, 아지비카교의 사제복을 입은 검은 사제들은 지금도 죽음과 맞서고 있었다. 난 솔직하게 놀랐다. 악마와 대적하며, 싸우는 신부들인 검은 사제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주위를 둘러싼 죽음의 기사들을 보고도 전혀 주눅이 들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다.

"복수심이라, 허."

검은 사제들은 일반적인 아지비카교 성직자들과 다르다.

교황을 모시지 않는다.

교리를 전파하지 않는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목적은 오직 하나.

악마 섬멸.

악마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거나 가족과 친구를 잃은 자들은 간혹 악마에게 저항하여 아주 우연찮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극소수의 일부는 '저항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공의 힘과 성질이 같은, 항마력이란 힘이다. 대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쿤칸 제국에서 가장 많은 항마력을 지닌 자들이 생겨난 건 우연이 아니겠지.

난 숨어서 그들의 성전을 지켜봤다.

그건 독실한 신앙을 지닌 종교인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 어떤 싸움보다 처절했고, 복수심과 분노로 일렁거리는 전투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킨 건 오로지 복수심 하나.

악몽처럼 두려운 못 거인들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손에 쥔 검을 휘두른다. 아지비카교 성물인 '공'의 힘만큼은 아니지만, 검은 사제들이 쥔 무기에는 항마력이 깃들어 어렴풋이 붉은빛을 지녔다. 싸우는 사제들, 각자 사용하는 무기는 다르지만 숙련된 기사처럼 싸움에 익숙해 보였다.

"기묘해. 참."

자비와 용서가 덕목인 종교의 사제에게, 정작 분노와 복수심이 악마를 죽일 최고의 연료가 되었다니.

못 거인들은 많았으나 내가 나설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항마력은 악마를 죽이면서 악마로부터 지키는 힘이기도 했다. 간혹 거인의 공격이 사제에게 닿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항마력이 사제를 지켜 냈다. 검은 사제들의 결계다.

사제들은 분풀이하고 있다. 진득한 분노가 휘두르는 무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내가 나서는 건 방해다. 못 거인을 모조리 쓰러트린 후에야 그들은 만족할 테니까.

싸움은 길어졌다.

"도련님."

걸시도 어느새 따라왔다. 어떻게 날 찾았느냐니까 냄새를 맡았단다.

개눈깔에, 개코 시녀야?

걸시는 인상적인 표정으로 사제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걸시는 나처럼 감정을 볼 순 없지만, 워낙 맹렬한 전투라서 걸시의 몸은 움찔거렸다.

"와아, 대단해! 정말 잘 싸우는데요? 도련님이 나설 것도 없겠어요."

"괜히 마탑의 대항마가 아니야. 마법사들이 무서워할 만한...."

난 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어캣처럼 몸을 빳빳이 세우고 '그곳'을 바라봤다. 눈이 욱신거린다. 멜카란의 초입부터 느꼈던 기운? 아니야. 하지만, 분명 저건.

"도련님?"

"네 모든 재주를 다해 숨어, 걸시."

둥둥-!

거친 숨소리만이 들리던 삭막한 사막에 울려 퍼지는 거대한 북소리.

심장을 울리는 강렬한 북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부터 이제 악취는 코를 뜯어내고 싶을 만큼 심해졌다. 북소리가 들리자 못 거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수십 거인들의 핏물이 한곳으로 모여 간다. 그곳에선, 싱크홀처럼 모래가 폭삭 가라앉으며 지름 수십 미터가 되는 거대한 구멍이 갑작스레 생겨났다. 순간 알리에바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죽음의 기사는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 뜻 그대로 모래에 파묻힌 건 당연히 아니겠지.

난 '무저갱'을 뜻함을 알아차렸다.

악마들의 행동들은 전부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다.

못 거인들은 구멍을 향해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윽고 구멍이 점차 핏물이 채워진다.

나는 이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다.

개간네에!

달비를 품고 힘을 끌어올렸다.

라니스타처럼 완성된 몸이 아닌 난 내공을 일깨우기 위해서 운기조식을 취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상대였다.

위잉-! 위잉-!

검은 사제들이 이변을 눈치채고 구멍을 향해 항마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사제들의 힘이 모여 붉은 결계가 되어 갔다. 결계는 구멍을 틀어막기 위해 돔 형태로 이루어졌다. 찰나의 시간은 벌어 줄 수 있겠지만 소용없겠지.

둥! 둥!

예상대로다.

북소리가 멈추었다고 생각했을 때.

핏물이 찬 구멍으로부터 서서히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능히 도시의 성벽을 넘을 만하다.

쇠사슬에 묶인 수십 마리의 못 거인 시체를 허리에 걸친 채 피의 웅덩이에서 기어 나오는 살점 거인.

"거신병."

공작가를 습격했던 놈과 모습은 달랐지만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아 보였다.

쿵! 콰직!

놈은 쇠사슬을 휘둘렀다. 마치 산을 갈아내듯 육중한 일격이었다. 사슬에 묶인 못 거인이 비명을 지르고, 흘린 피가 비가 되어 모래를 적신다. 검은 사제들의 항마력 결계는 놈의 일격은 버텼으나 시간문제다. 사제들은 전력을 다해 결계를 유지할 뿐, 다른 방법은 떠올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다아!

달비가 마치 자신을 믿으라는 듯 발굽으로 내 가슴을 툭 치며 소리 질렀다.

"다아! 다아다아! 시발!"

난 라멜스타를 쥐고 숨을 들이마신 후 악마를 향해 욕설과 고함을 내질렀다. 두려움에 찰 때면 욕을 내뱉은 건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나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자기최면일지도 모른다. 욕을 크게 하고 나자 질척이는 발바닥을 떼어 낼 수 있었다.

[강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느냐?]

놈을 향해 돌진하는 그 순간에.

급박한 상황과는 달리 머릿속에선 느긋한 놈의 말이 떠올랐다.

[방법이야 있지. 아주 확실한 방법이라, 나 또한 그리 강해졌느니라]

듣기 싫은 놈의 목소리가 하필 이 순간에 들리는 건 반복된 학습의 결과겠지.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오갈 때마다 항상 놈이 있었으니까.

지금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인가?

[뭔데.]

[인간의 생존 욕구를 거스르는 것이다.]

[응?]

[생존에 대한 욕구는 그나마 인간이 가진 가장 똑똑한 부분이지. 결국 '산다'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한계를 넘지 못한다. 십 년을 수련하며 정진해도 한 번의 생사결투가 경지를 진화시키는 법. 살고자 하는 마음을 거슬러라. 만용을 이겨 내면 그게 용맹일지니.]

[그러다 죽으면?]

라니스타는 하하 웃으며 대답했었다.

[어쩔 수 없는 개죽음이지! 하하하하!]

62

수십 미터 덩치의 거인.

핏물의 호수에 잠긴 악마.

바랄 수 없는 도움.

"다아! 다아다아! 개간네!"

개간네-!

난 머릿속을 비웠다. 달비처럼 두 가지 단어만 사용하며 달려갔다.

벤다. 베지 못할 건 없으니.

경공을 사용해, 매처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거인의 목을 벨 만큼 날의 크기를 늘린 라멜스타를 휘둘렀다. 아아, 베지 못할 건 없으니 검은 마음에 있다. 그게 바로 초월의 경지 심검....

깡-!

"그게 뭐냐고, 시발."

첫 일격은 보기 좋게 가로막혔다. 거인의 피부는 훨씬 단단하여 마치 쇠와 부딪히는 듯 강한 반발력이 일어났다. 생채기만 냈을 뿐이다. 역효과다. 사제들의 결계에 몸부림치던 놈이 이제 날 바라본다. 거대한 눈구멍이 날 보자마자 쇠사슬이 휘둘러졌다.

퍽-!

결계가 부서지기 직전이다.

놈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진다.

놈의 잠자리처럼 생긴 기괴한 눈알은 초점이 없었으나 날 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런 괴물 수십 마리를 베어 낸 라니스타를 난 흉내 내지 못한다. 괜찮다. 나만의 방법을 사용하면 돼.

힘을 방출해 봤자 통하지 않는다.

달비의 메테오는 분명 강하나 변수가 크다. 놈을 죽일 만큼 큰 힘을 사용하다가, 지친 나머지 뒤이은 변수를 대처하지 못하는 건 자살행위다. 결국 방법은 가장 원초적이며 효과적인 방법밖에 남지 않는다. 직접 몽둥이를 쥐고 두들겨 패는 것.

위잉, 위잉, 위잉.

두 달에 걸친 생사혈투로 난 내공의 운용과 무공의 원리에 대하여 깨우쳤다. 내공을 담는 법, 무인의 손에 쥔 무기는 신체의 연장선이다. 난 사제들의 전투 방식에 영감을 얻었다. 달비의 힘은 순수하여 그 어떤 무공심법과도 어울렸지만, 부정한 것들을 죽이는 데엔 공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

라멜스타를 날카로운 검의 형태에서 기다란 몽둥이에 강판처럼 홈이 여러 개 난 무기로 만들었다. 벨 수 없으니 '깎아내려는' 의도였다. 내공에 공의 힘이 섞이자 완전한 힘은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 사제들처럼 라멜스타에 항마력이 깃드니, 붉은 기운이 치솟았다.

콰앙!

마침내 결계가 부서진 그 순간, 난 다시 한번 도약하여 라멜스타를 휘둘렀다.

퍽! 푸스슥-

그야말로 깎아내렸다. 거인의 살점은 라멜스타에 짓눌려 터지며 핏물을 내뿜었다. 효과 있다. 상처는 얕지만 내 눈엔 뚜렷하게 보였다. 항마력이 놈의 '존재'를 지우고 있어. 계속 깎고 깎다 보면 놈은 완전히 사라질 테지.

끼이이이! 끼이이! 끼이이이!

놈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곧바로 반격에 나선 놈은 못 거인 수십 마리를 줄지어 꿰어 놓은 쇠사슬을 휘둘렀다. 휘두를 때마다 못 거인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끔찍한 무기였다. 수십 명을 일격에 해치울 거대한 무기였으나 내겐 느릿한 공격이었다. 공격에 힘을 쏟기 위해 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하고자 했다.

슝!

한 번의 도약,

아슬아슬하게 발아래를 스쳐 지나가는 쇠사슬.

개눈깔이 인식하는 시야.

쇠사슬이 휘둘러진 시간은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았으나, 난 모든 장면을 확실하게 보았다. 발 아래, 쇠사슬에 묶인 못 거인이 날 보며 웃는다. 거인의 살점이 부풀었고, 박힌 못은 빠져나오려고 한다.

모든 게 보였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고 손을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최선의 행동, 허나 대처 방법은 그뿐. 수십 마리 못 거인의 몸에서, 수천 개의 날카로운 못들이 뿜어져 나왔다. 사방을 가득 채운 못, 난 그 순간에도 최대한 쇄도하는 못을 피해 냈다.

콰직! 콰직!

하지만 소나기의 빗줄기처럼 촘촘한 못 세례를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치명상은 피했으나 어깨와 허벅지, 옆구리에 못 네 개가 박혔다. 머리가 아찔할 만큼 큰 고통이 밀려왔으나 난 피를 쏟아내면서도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정도 고통."

라니스타에게 두들겨 맞던 나날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습게도 그 순간들이 지금은.

"우러러 볼수록."

도움이 된다.

"…좆 같아만 지네."

개간네!

핏물이 주륵주륵 흘러나오던 상처와 박힌 못은 달비의 도움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지혈은 됐으나 욱신거리는 고통은 여전했다. 나은 게 아니다. 응급처치로 상처를 봉합했을 뿐이다. 놈을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당할 처지였다. 소모전은 불리해. 놈을 해치우는 데 이 이상 상처를 입는 건 손해가 막심하다. 난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강력한 일격으로 놈을 한 번에 해치워야만 해.

끼이익-!

거신병의 공격이 이어지기 전에, 힘을 회복한 검은 사제들이 다시금 결계를 펼쳤다. 사제들의 항마력은 놈을 죽일 수 없었으나 행동을 방해하기엔 충분했다. 만약 저 힘들을....

"한계를 넘어."

그 순간, 난 눈을 번뜩였다.

보였다.

정답이.

난 등을 돌려 검은 사제들에게 외쳤다.

"그대들의 힘을 내게 집중시키시오! 모든 힘을, 악마 섬멸의 의지를 담아 내게 쏟아!"

라니스타가 말한 목숨을 걸고 한계를 넘는다는 의미.

어쩌면 목숨을 걸 도박에 기꺼이 응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검은 사제들이 곧바로 내 말을 따라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난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성녀 우샤스와 같은 핏줄이다! 퀄츠를 습격했던 악마와 맞선 선봉장이 누군지 잊었더냐? 부탁이 아닌 명령이다. 모두 힘을… 큭!"

결계가 부서지자마자 거인은 다시 한번 쇠사슬을 휘두르려고 했다. 난 즉시 라멜스타를 끝이 뾰족한 일자 형태의 가느다란 봉으로 만들어 거인의 살점에 꽂아 넣었다. 크기로 보아도 바늘이 박힌 것과 다름이 없었으나 충분했다. 라멜스타는 통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의 힘을 방출시키자 즉시 거인의 몸이 굳었다.

항마력을 주입했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항마력이 놈의 존재를 집어삼키고 있다. 효과는 뛰어났다. 다만, 어떤 물리적인 충격이 아닌 순수한 항마력만으로 상대하는 것이라 거신병을 없애기엔 힘이 부족했다.

행동으로 보여 주면 알 것이라 생각했다.

"공자님께 힘을 보태라!"

누군가의 외침.

그리고 이어진 항마력의 방출.

그들은 내게 직접 항마력을 쏟아 냈다. 마법을 지우고 악마를 멸하는 힘이나, 난 이 힘을 이용할 수 없었다. 내 힘이 아니다. 단지 형태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달비라면.

하압! 켁켁-!

달비는 항마력 덩어리를 집어삼켰다. 녀석은 괴로운 듯 켁켁거렸다. 난 황급히 항마력을 '방출'시켰다. 막대한 항마력이 마치 불타는 듯 타오르며 라멜스타를 타고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항마력과 거신병이 부딪힌 순간, 거인의 몸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피 웅덩이가 사라지고, 하늘은 밝음을 되찾았으며, 악취는 사라졌다. 거인의 사체는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달비...."

개간네에....

난 이 무식한 방법은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달비는 일순간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을 삼켜서 품었다. 오직 내가 힘을 이용할 수 있게, 고통을 참아 냈다. 항마력을 삼킨 건 독을 삼킨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나마 항마력이었기에 버텼지, 다른 힘이었으면 내 몸은 조각 났을지도.

켁켁!

내 곁에 누운 달비는 기침을 하며 힘들어 보였다.

젠장, 내 몸이 문제가 아니야.

달비가 괴로워했다.

달비의 힘이 내게 영향을 끼치듯 내 상태도 달비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주화입마인가."

힘을 받아들이지 못해 오히려 몸이 붕괴되는 현상이라고 했던가? 지금 내 상태가 라니스타가 말했던 주화입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활로가 보였기에 행한 행동이었는데.

"베론 강보다 깊고 삼신님의 자비만큼 너른 은혜를 입었습니다. 레인버그의 빛나는 달, 북부의 희망이신 위대한 폴스타 공자님."

검은 사제들이 다가왔다. 난 모래에 누운 채 설렁설렁 대답했다.

"우샤스가 보냈소?"

당황하는 검은 사제.

연륜이 있는 중년 사제가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는 새벽의 현신을 모시는 새벽의 신도들입니다. 거룩한 임무를 품고 저주받은 멜카란으로 향하였으니 분명 공자님과의 만남 또한 운명의...."

"말이 기오. 혹시 날 추적한 건가?"

사제들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당황보단 황당한 표정, 무슨 소리를 하냐는 질문을 차마 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우샤스에게도 서신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더라니, 누나도 멜카란에 볼일이 있었던 건가. 어쨌든 나와 관련된 건 아닌 걸로 보였다.

"그래요. 그래서, 왜 온 겁니까?"

사제들은 분명 자기 입으로 기밀이라고 말했으나, 생각보다 순순히 사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샤스와 남매라고는 해도, 사제들이 날 대하는 태도는 무척 순종적이었다.

검은 사제 중 한 명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보였다.

다아! 다아!

기운이 빠져 혓바닥을 내민 채 쉬고 있던 달비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른다.

나 또한 속으로 기뻐했다. 그래, 이게 '득'의 힘이더냐?

"정령석이군요."

무저갱에서 가끔 발견되는 정령석, 멜리사는 더는 정령석을 구할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

"역시 지혜로우신 분,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정령석, 생명을 품은 돌입니다."

사제의 이어진 말은 이러했다.

죽음의 기사가 부활하여 멜카란으로 정찰 나온 사제 중 몇 명은 사태를 조사하던 중에 기이한 현상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들은 조사 끝에, 누군가가 정령석을 이용해서 '죽음의 기사'들을 한곳으로 유인하고 있는 정황을 발견했다고 한다. 죽음의 기사가 무더기로 발견된 곳엔 항상 정령석이 놓여 있었다. 정령석을 달비가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정령석엔 강력한 생명 에너지가 깃들어 있다. 죽음을 삼키는 기사들을 유인하는 미끼로 제격이라는 소리다.

"누가 죽음의 기사를 굳이 한곳에 모은단 말입니까?"

"죽음을 가공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사제는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역겹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사령술사, 흑마법사. 놈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금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악마만큼 혐오하고 증오하는 존재들이 있다.

오히려 더 증오하기도 한다.

인간이면서 인간을 배신하고, 악마에게 충성하며 허락받지 않은 힘을 다루는 자들, 흑마법사다. 놈들은 대전쟁 때도 제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 슈테르닐의 마법사와 아버지의 활약으로 모두 없앴다고 들었었다.

그건 그렇고.

"정령석…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제들은 눈치가 빨랐다.

"본래 회수해서 우샤스 님에게 드려야 하나… 공자님이 영수를 다루시기에."

그가 정령석을 내게 건넸다.

다아! 다아!

달비가 꼬리를 맹렬하게 흔든다.

"다 주십시오."

모를 것 같았나. 그의 품엔 세 개의 정령석이 더 있다.

사제는 애매한 웃음을 짓더니 정령석을 모두 꺼냈다.

"보잘것 없는 이름이나, 전 코시아의 말론소 사제입니다."

난 히죽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누나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분명 허락해 줬을 테니."

"그게...."

"아, 누나를 만나면 꼭 당신의 보잘것없는 이름을, 화려하게 치장해서 들려주겠소."

사회생활은 저렇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제들의 눈초리가 말론소 사제에게 맹렬히 꽂혔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난 정령석 4개를 모두 달비에게 먹였고.

달비는 한입에 꿀꺽 삼키더니 그 즉시 강력한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칼베인에서 정령석을 흡수했을 때도 엄청났다. 지금은 단순히 계산해도 그때의 4배다.

달비는 부족한지 입맛을 다셨으나 효과는 굉장했다. 피곤함이 사라지고, 상처는 온전히 낫다 못해 오히려 싸우기 전보다 몸이 더 튼튼해진 기분이다. 내겐 직접적인 영향은 없으나, 달비의 성장은 내 성장이다. 확실히 달비가 더 많은 힘을 품었다는 게 느껴졌다. 달비의 몸에 그려진 달의 문양이 더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더 있겠군."

"예?"

"정령석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도와주겠소."

다아!

우리 달비 배부르게 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