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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63

"영광입니다. 여명의 기둥이시여."

무작정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사제들은 참견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날 환영했고, 예의 바르게 상급자 대우를 해 줬다. 몰살 사건 이후로 교의 권위가 추락했다고 해도 검은 사제들은 권세에 충성하진 않는다. 사제들을 사병처럼 소유할 수 없다. 악마 섬멸에 대한 맹세 서약을 한 사제들에겐 설령 제국의 공작이라고 해도 명령할 수 없다. 레인버그가에 네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검은 사제가 우릴 데리고 간 것만 보아도 그들의 독자적인 권력구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제들은 날 상관처럼 여겼다. 힘을 보여 주고, 목숨을 구해 준 건 별개의 이야기다.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아 이동하며 본의 아니게 명령조로 말해도 검은 사제들은 군말 없이 행동했다. 권력에 대한 충성처럼은 보이질 않아.

"본모습을 모르니, 쯧,"

"예?"

"아무것도 아니오. 말론소 사제."

우샤스는 충견을 만들었다.

우린 죽음의 기사의 악취를 추적하며 멜카란 남쪽 해안가로 향했다. 며칠 만에 정령석이 미끼가 놓인 장소는 두 군데를 더 발견했다. 거신병은 없었으나 난 선두에 나서 죽음의 기사를 죽였다.

걸시는 아예 두더지가 되었다. 심지어 검은 사제들은 걸시가 있는지도 몰라, 이틀 뒤에나 구덩이 안에서 잠든 걸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멜카란은 바다도 역겹군."

해안가에 도착하고 나서야 우린 하루를 쉬기로 했다. 오늘이 아지비카교의 안식일이기도 했지만 흑마법사의 흔적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놈이 누구든, 놈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정령석이 유인하는 건 죽음의 기사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카란에서 바라본 바다의 풍경은 쓸쓸했다. 사제들이 처소를 준비하는 동안 난 모래사장에 앉아 물결치는 파도를 바라봤다. 바다는 더러웠다. 검은 물은 시궁창처럼 악취가 나고 미역인지 사람 머리카락인지 모를 해조류들이 파도가 칠 때마다 징그럽게 춤을 췄다. 바다의 짠 냄새는 싫지 않다. 하지만 비린내만이 가득해서,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날이 춥습니다, 공자님."

알론소 사제가 담요를 들고 곁에 왔다. 멜카란의 날씨는 지랄 맞아서 아침까지만 해도 덥다가 지금은 닭살이 돋을 만큼 추운 바람이 불었다. 난 힐끔 고개를 돌려 처소 준비에 한창인 걸시를 바라봤다. 천막을 덮을 방수천을 찢어먹은 걸시였다. 사제들의 시선이 날 향한다. 혹을 떼어 달라는 의미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려 알론소 사제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상하오. 다른 검은 사제들도 모두 그대들과 같소?"

내가 말을 시작하자 알론소 사제가 곁에 앉았다.

"무엇이 이상한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라고 해도, 날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단 얘기요. '악마 잡는 악마'와 소문과는 많이 다른데."

예의 없는 질문이었으나 굳이 매너를 지킬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알론소 사제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벽의 현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레인버그의 형제자매들을 자신처럼 여기라고 말입니다."

권력에 아첨하지 마라.

우샤스의 말 한마디로 그들은 지금껏 지켜온 태도를 바꿨다. 결국 알론소 사제의 말뜻은, 마치 레인버그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와 같다는 뜻이 아닌가? 우샤스에 대한 충성이 쌍둥이들에게도 향한다면 사실상 검은 사제는 레인버그의 병사다. 역시 전생에서 인류 분열의 원흉, 우샤스다. 아지비카교는 이제 누나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난 죽음의 기사와 전투를 벌이던 사제들을 떠올렸다.

친해지면 나쁠 것 없잖아?

"새벽의 현신, 우샤스 공녀를 그리 부르시던데."

난 알론소 사제와 더 대화를 나눴다. 검은 사제들은 우샤스 누나를 새벽의 현신이라 불렀다. 누나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 중에서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 별 뜻 없이 질문했으나 알론소 사제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밤을 정화하는 새벽, 네. 감히 말하건대 그분은 새벽의 현신입니다. 세상을 빛으로 물들이나 위선적이지 않으며, 밤을 밝히나 밤을 품기도 하며, 아스러지는 달을 인도하고 해를 품으며, 무저갱의 악마에게 끝을 고하는 그분은 새벽의 여인이자 고고하게...."

눼이, 눼이.

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사제의 우샤스 찬양을 흘려들었다.

우샤스를 새벽의 현신이라 부르는 건 검은 사제들만이 아니었다. 내 예상보다 더 많이 알려진 듯했다. 알론소 사제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날 놀라워하며 빈민가의 귀족들도 새벽의 현신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했다.

"레인버그의 고귀한 자식들이 달의 아이라 불리던 건 벨렘의 해가 떠오르기 전입니다."

열다섯이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쌍둥이들이 워낙 비범한지라 다른 귀족들처럼 성인식은 따로 치르지 않았으나 이제 레인버그의 쌍둥이들은 달의 아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내겐 여명의 기둥이라고 하셨잖소."

"호사가들이 붙인 별호가 마음에 들진 않으시겠지만, 이젠 대부분 그리 부르지요."

대체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별호를 붙이고 삽시간에 번져 나가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제국의 현자, 꺾이지 않은 꽃 데메니아 왕녀, 푸른 기둥이자 호수의 기사 라이베라 공작처럼, 사람들은 유명인에게 그럴싸한 별칭을 붙이는 걸 좋아했다. 우샤스 누나를 새벽의 현신이라 부르는 건 저 열렬한 팬들인 검은 사제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면, 다른 쌍둥이들의 별명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했다.

알론소 사제는 검은 사제지만 소문에 밝고 사교성이 활달했다.

내가 여명의 기둥이라 불린 건 악마 사건들과 연관이 있었다. 카란트로 변장한 위장자 악마를 죽인 건, 고위 성직자 몰살 사건 이후로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연회장의 지붕을 깨부순 후로 내가 영수술사라는 게 알려지면서 귀족들은 내가 아버지의 명성을 이을 후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영수술사이면서 악마를 죽여 제국의 공신이 되었다. 그처럼 내 행보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 마치 '영웅'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우스운 건 다른 놈들의 별명이다.

라니스타는 투신의 재림이라고 한다. 슬금슬금 나오던 말이었는데 완전히 굳혀진 듯 보였다. 투신 벤베르, 인간의 몸으로 신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역사상 최고의 무인. 하지만 난 라니스타가 이 별명을 몹시 언짢게 생각할 거라는 게 짐작이 갔다. 그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투신 벤베르보다 더 뛰어난 무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테니까.

압권인 건 멜리사 누나의 별명이었다.

"황혼의 마녀, 마녀? 하하하."

덕망 높은 제국 공작가의 공녀의 별명이 마녀란다. 누군가의 강렬한 악의가 담긴 별명은, 예상대로 멜리사 자처한 일이었다. 난 마탑에서 벌어진 멜리사의 기행을 듣다가 마녀라는 별명이 몹시 점잖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하루를 휴식한 후 우린 곧바로 바쁘게 움직여 정령석을 찾아냈다. 담긴 힘이 미약하다고는 하나 주변에 아직 죽음의 기사가 보이질 않는다. 알론소 사제는 정령석이 비교적 최근에 설치된 것이라고 했다.

"며칠 내로 찾겠군요."

"아니."

난 눈을 번득였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오."

찾았다.

흔적이 이어진다.

며칠 동안 놈의 기운에 익숙해져 이젠 뚜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천안통이 보여 주는 검은 길, 길 끝엔 놈이 있다.

검은 사제들은 내 시선을 따라 그곳을 쳐다봤지만, 항마력을 지닌 그들이라고 해도 보진 못할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아니다. 난 볼 수 있지만, 생물의 눈이 지닌 성능을 아득히 뛰어넘은 힘이었다. 물리적인 흔적이 없어도 난 '기'를 추적하며 놈에게로 향했다.

* * *

모래바람이 갑자기 일었다.

흑마법사? 아니, 보다 기운이 정순해.

뜻하지 않은 손님이다.

"검은 사제들인가?"

바람을 타고 다니는 남자다.

갑자기 등장한 그는, 공중에 서서 거만한 표정으로 우릴 내려다봤다.

사막과 어울리지 않은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 그의 어깨 견장에는 군청색 띠가 4개 달려 있었다. 이곳에서 날 포함하여 그가 누군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름은 몰라도 정체는 안다. 마탑의 4서클 마법사가 왜 멜카란에, 그것도 이 상황에 우리 앞에 나타난 거지?

"흑마법사를 쫓고 있겠군."

아.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아.

"미안하지만 돌아가시오. 그자는 내 먹잇감이오."

불길한 감은 틀리질 않아.

검은 사제들의 별명이 악마 잡는 악마라는 건 허투루 생긴 게 아니다. 마법사의 말을 도발로 여긴 사제들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은 채 곧바로 전투 준비를 했다. 난 사제 선에서 마무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4서클의 마법사는 강력한 존재지만 여러 명의 검은 사제와 대적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항마력은 마법을 없애는 힘이기도 하다. 괜히 천적이 아니다.

검은 사제들은 대화를 뒷일로 미뤄 뒀다.

곧바로 마법사에게 항마력을 쏟아 내는 호전적인 모습, 마음에 든다.

"허, 거칠군!"

허나 예상보다 그는 더 강력한 마법사였다.

순식간에 모래폭풍을 만들어 낸 마법사의 힘. 맹렬한 강풍이 휘몰아치자 방심하던 검은 사제들은 곧바로 항마력을 방어 결계로 바꿔야 했다. 서로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홀로 검은 사제들과 대적하는 마법사의 경지가 사제들보다 몇 단계는 더 위처럼 보였다.

"난 그대들과 싸울 이유가 없소. 흑마법사를 내가 대신 죽여 줄 터이니 얌전히 물러나는 걸 추천해 드리오."

"교만한 놈, 악의 퇴치는 우리의 신성한 의무다. 요술쟁이 놈이 어딜 함부로 끼어드느냐?"

"헛소리 말고 입에 찬 모래나 뱉어 내시오. 내가 먼저 발견한 먹잇감인데, 양심도 없이 가로채려 드는 게요? 수준을 보아하니 대사제급도 없는 모양인데 내 말 명심하시는 게 좋을 거요. 그대들 수준으론 놈을 죽이지 못해."

남자는 오만한 태도로 사제들을 나무랐다.

나이는 마흔쯤, 생김새는 고집 센 대머리 아저씨.

그리고 4서클의 마법사라는 점은 그의 정체를 유추하기 쉬웠다.

알론소 사제는 다른 사제와 달리 유순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청의 부마탑주를 뵈어 영광입니다. 우린 코시아의 사제들입니다. 새벽의 현신의 명령을...."

"시끄럽소."

휘이이잉-!

마법사 주변으로 생겨난 모래폭풍은 접근을 불허하는 성벽이 되었다.

"가타부타 다른 사정은 듣지 않겠소. 물러나시오. 두 번은 봐주질 않겠소이다."

명백히 사제들을 아래로 보는 거만한 말투에 알론소 사제도 인상을 굳히며 검을 꺼내 든다. 사제들이 검을 들자 마법사도 힘을 끌어올린다. 강력한 마나가 주변을 진동시키고 있다. 바람을 다루는 군청 마탑의 부탑주, 사막은 그의 편이다. 항마의 힘이 마법을 없애도 모래는 없애지 못해.

살벌해진 분위기.

나서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엥? 어디 가! 내 손수건!"

긴장을 깬 건 발랄한 걸시의 목소리.

숨어 있던 걸시가 폴짝 뛰어나오더니 무언가를 황급히 쫓았다.

개간네!

달비 또한 갑자기 화를 내며 그것을 쫓는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녀석들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돌아와! 이잉!"

붉은 손수건이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걸시의 품을 떠나 비행했다.

당황하던 난 곧 손수건이 누구 것인지 생각해 냈다.

"…멜리사."

손수건은 무사히 마법사의 얼굴에 안착했다. 그는 얼굴을 덮은 손수건을 떨쳐 내지 않았다. 가만히, 걸시의 콧물과 토사물로 범벅되었던 손수건을 얼굴에 덮은 채 서 있다.

얼마 후, 손수건이 그의 얼굴에서 저절로 떨어졌을 때.

"흑마법사를 죽이는 것에, 전적으로 그대들과 동조하겠소."

마법사의 태도가 달라졌다.

64

사제들이 반발할 때 난 고함을 내질렀다.

"끼에에에엑-!"

기괴한 행위에 모두 입을 닥치자 난 점잖은 목소리로 마법사에게 물었다.

"멜리사의 첨병입니까?"

"뭐? 그분을 아나?"

"알다마다요. 내 누님인데."

대머리 마법사는 모래폭풍을 거두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사제들의 경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와 내게 악수를 내민다. 난 짜증이 나서 손바닥을 후려칠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말론소 사제도, 이놈도 내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가 너무 명백했다. 내가 아닌 쌍둥이들에게 딸랑거리는 거잖아.

"만나서 반갑소. 폴스타 공자. 멜리사 님은 내 반생의 은인이요."

청록 마탑의 부탑주의 지위 정도 되면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난 그가 내민 손을 뻔히 바라보다가 어색해질 때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 부르며 인사를 나눠야 합니까?"

그제야 대머리 마법사는 피식 웃더니 제 이름을 말했다.

"과연, 그분과 닮았군! 난 청록의 다섯 손가락 중 하나인 벤보와라고 하오."

전에 만났던 청록 마탑의 단장, 바가지 머리의 마법사보다 한 서클 낮았으나 마법사의 힘은 단순히 서클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그는… 강한 편이다.

"공자를 도와 흑마법사를 죽이는 데에 일조하겠소이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목적이 뭡니까? 멜리사 공녀 때문에 그럽니까?"

"별뜻은 없소. 흑마법사가 지닌 정령석이 필요했을 뿐. 허나...."

"미리 말하지만 정령석은 내 거요. 빼앗으려거든 싸우겠소."

"하하! 정말 닮았군 닮았어! 걱정 마시오. 애초에 그분의 부탁으로 정령석을 구하러 왔을 뿐이오. 이제 목표가 바뀌었소. 기꺼이 정령석을 줄 터이니 경계를 푸시구려."

난 멜리사와 닮았다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겉모습이야 일단 같은 피가 흐르니 닮았다고 해도 인정하지만, 저 대머리는 어떻게 멜리사의 끔찍한 성격이 순수한 나와 닮았다고 막말을 내뱉는 거지?

"자자! 그럼 그렇게 되었으니."

대머리 마법사는 몸을 돌려 검은 사제들을 쳐다봤다.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소리쳤다.

"미안하오! 사제님들! 하하하!"

말뿐만이 아니라, 깊게 허리를 숙여 가며 사제들에게 사과하는 대머리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일순 머리에 맺힌 땀방울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거렸다. 빛나는 대머리다. 첫인상은 나빴다만 보기엔 호탕한 사내처럼 보였다. 역시 대머리는 호탕해야 제맛이지.

어느새 결정권자는 내가 되었다. 사제들은 당연히 싫어했지만 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훌륭한 전력이다. 쓸만한 인재다. 청록 마탑의 부탑주이며 멜리사에게 충성하는 자이니 친해서 나쁠 것 없다.

"호의를 받아들이죠. 벤보와 부탑주."

* * *

난 바닥에 떨어진 붉은 손수건을 집게손가락으로 주워들었다.

"누나."

손수건을 세차기 흔들어도 묵묵부답.

"멜리사."

이미 들켰는데도 발뺌할 셈인가? 진짜?

우연히 바람에 손수건이 날아갔다고 생각하라고?

"야."

"이 친구야."

"음, 여우 새...."

파닥파닥-!

손수건이 나비처럼 몸짓하며 날아오른다.

난 실소가 나왔다. 아무리 실험 대상으로 생각하더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지금까지 다 보고 있었겠군."

[멋진 활약이었어. 동생.]

"걸시의 콧물을 참아 내면서, 굳이 지켜볼 필요가 있었나? 그 노란 콩알은 뭐였고?"

[보험은 들어 놔야지.]

"저 대머리는 누나가 보낸 거라며? 정령석이 목적인 것 같은데 어림도 없어. 그건 내 거야."

[보채지 마렴, 동생아. 멜카란에 네가 찾는 게 있을 거란다. 호호.]

화르륵-!

손수건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재가 흩어지는 걸 보다가 난 머리를 긁었다. 씁, 이 요상한 기분은 익숙하지 않았다. 정말 정령석이 목적이었다면, 멜리사의 전언을 들은 마법사는 쉬이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마법사는 날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 의도에 거짓이 없다면, 역시.

멜리사는 처음부터 정령석을 얻어서 내게 줄 생각이었나?

* * *

"사제들까지 있으니 계획을 변경해야겠군. 자, 바람에 올라타게나. 놈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이동할 터이니."

"흑마법사의 위치를 아시오? 정령석이 놓인 곳과는 정반대의 곳에서 오셨잖소."

"추적꾼을 시켜서 알아냈소."

"추적꾼? 멜카란에서?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닐 터인데?"

"하, 걱정 마시오. 평범한 추적꾼이 아니니까."

"멜카란에 평범한 게 있긴 하오?"

벤보와와 말론소의 대화를 듣던 난 호기심이 생겼다. 말론소는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마법사가 길을 정하는 걸 거부했다. 벤보와는 믿을 만한 추적꾼들이라며 설득했다. 끝내 추적꾼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 벤보와에게 질문했다.

"추적꾼이 누구인데 이리 감추려 듭니까?"

"흠. 뭐, 정식 의뢰도 아니었으니."

벤보와가 대답했다.

"코산 일족들이요. 세상 그 어떤 자들보다도 믿음직한 추적꾼들이지."

나는 그가 말한 단어를 이해한 순간부터 놀라움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재빨리 걸시를 돌아봤다. 일행과 동떨어진 곳에서 걸시는 달비와 놀고 있었다. 듣지 못했다. 난 벤보와의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코산, 악마사냥꾼 일족을 말씀하십니까? 십여 년 전 모습을 감췄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버젓이 살아 있소. 강한 사람들이지. 세간에 알려진 소문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오."

코산 일족은 강력한 악마와 싸우다가 일족이 멸족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일족이 갓난아이였던 걸시다. 엄마의 일지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걸시도 그 사실을 안다. 자신을 고아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벤보와의 말대로 정말 살아남은 코산 일족이 있다면, 그들은....

"부탑주께선 그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만날 방법이 있는 겁니까?"

"내가 만나고자 한 게 아니라, 그들이 필요해서 날 찾은 거요. 이번 일은 덤이었지. 흠, 공자도 코산에게 관심이 있소이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럴 땐 싫어도 인맥을 활용하는 게 좋다. 멜리사를 걸고넘어지자 벤보와는 자신이 아는 사실을 순순이 얘기해 줬다. 코산이 원하는 건 마탑이 가진 어떤 '던전'의 정보였다. 벤보와는 흑마법사의 추적을 대가로 순순히 던전의 위치를 알려 줬다. 마탑의 중요 기밀을 알려 주는 벤보와, 미친 놈이다. '황혼의 마녀'라 불리는 멜리사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자이니 마탑과의 관계는 좋지 못한 거겠지.

벤보와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릴 만큼의 눈치는 있었다.

"나머지 한 곳의 정보는 일이 끝난 후 주기로 했었지. 서쪽 바실리스크의 바위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공자가 대신 내 말을 전해주겠소?"

난 씩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멜카란에 온 목적은 고대 도시의 유적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기회가 계속해서 찾아온다. 이게 '득'의 힘인가? 정령석을 얻고 난 후에 걸시에게 말해 줘야지. 사실, 네 가족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 * *

흑마법사.

그들은 악마만큼 불길하다.

악마를 섬기고, 시체를 되살리며, 죽음을 숭배하는 자.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흑마법사는 배척받고 죽여야 할 공공의 적이다.

이득 여부를 떠나 흑마법사의 소재가 드러나면 모두 앞다투어 죽이고자 한다.

그만큼 흑마법사는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대전쟁 때는 수천 명의 제국민들이 흑마법사의 사술에 당해 시체로 부활한 적도 있었고, 마탑의 수호법사 여러 명이 흑마법사 한 명에 당해 마탑의 권위가 실추된 적도 있었단다. 혹여 흑마법사와 상대하다가 저주에 당하면 손발이 촉수처럼 변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거나, 시한부 인생이 되거나, 대머리가 되거나 하는 등 죽음보다 끔찍한 결과가 따를 수 있다는 점도 흑마법사를 두렵게 한다. 여러모로 흑마법사의 악명은 상대하기 전부터 성가시게 만든다. 하지만 소문이 주는 공포심을 나만큼 절실하게 겪어 본 자가 있을까? 친하게 지내던 형제자매들이 사실 전생에서, 흑마법사의 악명 따윈 하룻강아지처럼 여길 괴물들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정말인지.

"다들 뭐하십니까?"

"기도라도 드리고 가는 게 좋을 듯하여...."

사막의 모래에 숨겨진 무저갱의 입구를 발견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행동한 건 나밖에 없었다. 난 악명이 가져다주는 무서움에 겁먹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사제들은 신께 기도를 드리고 마법사도 저만의 의식을 치른다. 난 한숨을 내쉬며 걸시에게 말했다.

"넌 오지 마."

"…걸시는 현자의 눈과 귀, 레인버그를 어둠에서 지키는 비수! 하지만...!"

걸시가 뒤로 물러났다. 녀석에 대해서 깨달은 점이 있는데, 정말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선 걸시는 내 말을 무척 잘 따랐다는 것이다. 걸시는 군말 없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숨을 모양이다.

"야단들은...."

난 지하 동굴의 입구를 내려다봤다.

뭐, 악명과는 별개로 저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확실히....

"악마의 아가리 속 같군."

바깥에서 바라본 지하 동굴은 몹시 기묘했다. 몹시 가파른 길, 천안통으로 봐도 그 끝을 알 수 없다. 둥그런 입구부터 뾰족하게 자라난 종유석들은 돋아나 있어 괴물의 이빨처럼 느껴졌다.

준비를 끝마치자 대머리 마법사가 선두로 동굴로 들어갔다. 부탑주답게, 동굴의 어둠을 밝힐 마법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횃불보다 훨씬 밝은 마법의 빛도 주변만 미약하게 밝힐 뿐, 빛은 얼마 가지 못해 부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입구를 지나자 사막의 더운 열기와 대조되는 강한 추위가 몰아닥쳤다. 이상하리 만큼 조용한 동굴엔 흔한 박쥐도 없다. 생명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바닥에 깔린 질척한 진흙은 죽음의 기사의 악취를 풍겼다.

"무시무시하군요. 끔찍한 악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알론소 사제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겁에 질린 듯 보였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악마의 기운이 아닙니다."

"예?"

익숙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격렬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 스산하고 역겨운 기운.

퀄츠성에도 있다.

꽃잎으로 잘 숨겨 놨지만 난 그 정체를 안다.

이 동굴에서 풍기는 죽음의 냄새보다도, 더욱 깊고 깊은 순수한 죽음의 결정체를.

우습게도 사제들은 더한 죽음을 모시면서도, 죽음의 미약한 향기에 벌벌 떠는 행색이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곳을 지나자 어느 정도 길이 평탄해졌다. 하지만 깊어질수록 숨쉬는 게 꺼려질 만큼 악취가 심해졌고, 일행들의 걸음도 경직되었다. 길을 지나 넓은 공동이 나왔을 때 난 걸음을 멈췄다. 어둠에 가려져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그래서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들은 신음을 삼켰다.

"용감하오. 작은 경의를 표하겠소. 죽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자들은 흔치 않지."

벤보와는 불길함을 참지 못하고 공격에 나섰다. 강풍이 악취를 몰아내며 어둠을 덮쳤다. 맹렬한 힘, 바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둠 속의 그는 태연하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잘 가시오."

그 순간, 난 일제히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았다.

공격의 개념이 아니다. 심장마비에 걸린 사람처럼 4서클의 마법사도, 항마력을 지닌 검은 사제들도 맥없이 쓰러졌을 뿐이다. 서 있는 건 나 뿐이었다. 황급히 벤보와를 살폈다. 사제들도 살펴봤다. 심장, 숨소리, 맥, 살아 있는 자의 증거들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 죽었어."

모두.

숨이 멎었다.

죽었다.

살아 있는 자가 없다.

"그대는 죽지 않았구려."

어둠 속의 남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나는 죽음의 신이라고 하오."

65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 자들은 미친놈이거나 더 미친놈밖에 없다.

그나마 덜 미친 자는 우연과 우연이 겹쳐 생겨난 몇 가지 기적 같은 현상들을 겪으며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 자다. 이런 자들은 대충 몇 대 맞다 보면 제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더 미친 자는 많이 위험하다. 그들은 진정 자신이 가진 힘이 너무 믿을 수 없이 강해서 '신'이라는 수식어 외엔 생각나지 않는 자들이다.

그는 거만했다. 자신이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얼룩말의 목덜미를 문 사자처럼 언제든 내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느긋하고 태평했다.

"간혹 있지. 생명을 풍부하게 품고 태어난 자들이. 축하드리오. 그댄 감히 죽음을 거역했소."

더러운 동굴에서 사는 것과 달리 놈의 복장은 깨끗했다. 자유 도시의 부르주아들이 주로 입는 검은 슈트에 긴 머리는 기름을 발라 뒤로 넘겼다. 기묘하게도,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허나 사교장의 귀족처럼 꾸민 행색이라도 추악함은 감추지 못했다.

진물이 흐르는 썩은 피부, 카멜레온처럼 툭 튀어나온 눈깔, 이가 다 빠져서 입술이 안으로 말려 있고,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종양이 이마와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려고 하였으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군. 죽으시구려."

이번엔 보였다. 그의 몸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검은 기운을. 그리고 확신했다. 놈이 가진 힘의 본질은 우샤스와 같다. 종교 행사에서 수백 명의 목숨을 단숨에 빼앗고, 되돌려주던 누나의 힘. 우주의 질서를 가벼이 여기는 가공할 힘. 하지만 놈은 힘은 누나에 비하면 바다 앞의 오줌 줄기다.

검은 기운은 내게 향하다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우샤스가 날 치료할 때마다 무언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이질적인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만. 놈의 힘이 누나를 뛰어넘지 않는 한 난 죽지 않는다. 즉, 난 절대 죽을 일이 없다는 뜻이다.

"…흐음? 기묘하구려. 스무 명의 생명을 앗아 갈 죽음이었거늘."

놈의 태도는 여전히 여유로웠으나 표정은 점차 일그러졌다.

"각오하시구려. 죽음은 자비로우나 감히 두 번을 거역하다니. 고통 속에서 죽어 가며 내게 사죄하시오."

놈의 힘이 더 커져서 뿜어져 나올 때였다. 상식을 뛰어넘는 힘은 놈만이 가진 게 아니다. 나는 보고 있었다. 그가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잠시나마 죽었던 이들에게서 촛불처럼 여린 빛이 스며드는 것을.

놈이 가진 힘은 생명을 강탈하는 더러운 힘.

나는 종교 행사 때를 떠올렸다. 우샤스는 빌렸다고 말했지만 분명 수백 명의 사람의 목숨을 강탈하고, 내게 건넸으며, '사용한 후'에는 다시 되돌려줬었다. 이 얼마나 생명을 경시하는 힘인가? 존엄과 거룩함으로 돈놀이를 하는 꼴이니, 정말 끔찍한 힘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아직 늦지 않았어.

놈을 죽이면 사람들은 되살아나겠지.

"부디 경외하고, 경배하여, 저승에선 참회하고, 참선하시오."

달려갔다.

놈과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히고.

놈의 명치를 있는 힘껏 때렸다.

커헉-!

아프게 맞는 법을 아는 자는 아프게 때리는 법도 아는 법.

피를 토하며 허리를 숙인 놈. 곧바로 경추를 팔꿈치로 내려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발목을 후려갈겨 부러트리고, 넘어진 놈 위에서 탭댄스를 췄다.

끄으윽! 끅! 끅!

고통에 찬 신음을 내는 놈.

"신 같은 소리 하네."

퍽!

한마디를 할 때마다 난 전력을 다해 발길질했다.

"네가 신이면 새끼야."

놈은 몸을 웅크리며 공격에 저항했으나 신체 능력은 형편없었다. 제법 맷집은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견디는 건 아니다. 어금니, 발목뼈, 갈비, 발가락. 아픈 곳을 골라서 지르밟았다.

"그놈들은 무슨 창조신이냐?"

솔직히.

난 그놈들이 자기 입으로 신이라고 말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근데 이 더럽게 생긴 놈이 거들먹거리는 꼴은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점잔 떨며 거만하던 놈은 이제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이익!"

놈에게서 터져 나오는 검은 기운, 역시나 내게 닿기도 전에 상쇄된다.

"강도 높여 달라고?"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한 자가 도둑질하다 걸린 도둑놈처럼 먼지 나게 처맞는다. 난 놈에게 굴욕을 주고 싶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모르고 너무 건방졌다. 이런 하찮은 힘으로, 잠시나마 내게 절망을 느끼게 했다는 게 화가 난다.

놈은 계속해서 날 공격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다. 스스로도 잔인하다고 여길 만큼 난 놈을 구타했다. 한참 동안 동굴엔 비명과 신음만이 울려 퍼졌다.

놈은 한참이 지나서야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항을 멈추고 도망을 택했다. 난 기어가는 놈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흑마법사는 소문만큼 끔찍한 존재였다.

어쩐지 죽을 만큼 때려도 고통만 느끼더니, 놈의 신체 구조는 평범한 사람과 달랐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이 놈은 제 머리를 스스로 떼어 냈다. 제 몸을 버리고 척추를 발 삼아 바퀴벌레처럼 도망간다.

당연히 난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제법 빨랐으나 무인의 움직임에 비할 데가 아니다. 난 놈의 머리카락을 쥐고 잡아 올렸다.

"역천… 생명… 죽음...."

놈의 얼굴은 이미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난 눈을 부릅뜨고 놈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누구에게 죽는지, 내 얼굴을 기억하길 바랐다.

"생명… 창조… 죽음...."

"날 봐."

"천국… 지옥… 죽음...."

"날 보라고."

죽을 만큼 처맞고 머리만 남은 놈이니 제정신이 아닌 게 정상이다.

놈의 시선은 뒤죽박죽이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놈은 생존 본능만이 남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무리를 지으려고 할 때였다.

개간네!

죽음으로 가득 찬 무저갱은 영수에겐 독.

내 품에 숨어 모습을 보이지 않던 달비가 갑자기 나타나 발굽으로 놈의 이마를 때렸다.

그 순간, 흑마법사의 시선이 돌아왔다. 놈은 정확히 내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뒤집는다. 검은 자는 눈꺼풀 위로 사라지고 흰자만을 드러냈다. 심장이 철렁거렸으나 난 내색하지 않았다.

"거룩하시어."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침착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하다.

"회개하노니."

"뭐?"

"부정하시어."

"죄악을."

"사하소서."

"뭐라는...."

"몰라뵀나이다, 몰라뵀나이다! 몰라뵀나이다!"

난 순간 흑마법사의 머리를 던져 버릴 뻔했다. 놈은 눈을 뒤집었다가 날 봤다가 뒤집었다가를 반복했다. 슬롯머신이 돌아가듯 놈의 눈은 격하게 요동쳤다. 난 역겨움과 두려움을 참아 내며 놈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 놈은… 놈은 내 눈을 마주 보길 두려워하고 있다.

"이젠 병신이라도 알겠다."

또다시 벌어졌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천안통.

신의 눈.

다룰 수 없는 힘.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공포의 악마, 현현마제, 무저갱의 검은 영혼.

악마가 공포에 떨고, 흑마법사가 용서를 빈다.

이해 못 할 상황들이 벌어진 건 모두 내 눈과 마주 본 이후였다.

"뭘 보고 있는… 젠장!"

흑마법사의 머리는 한순간에 증발하여 사라졌다.

놈이 죽자 몸도 증발하며 검은 연기를 남겼다.

연기는 부자연스럽게 흔들리다가 서서히 벽을 타고 위로 향했다.

"…우샤스."

난 연기가 모두 사라진 걸 확인하고 일행들을 살폈다. 숨이 돌아왔다. 심장이 뛴다. 맥은 약하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을 것이다. 평범한 자라면 죽었겠지만, 이들은 검은 사제들이며 4서클의 마법사다. 곧 정신을 차릴 수 있겠지.

찜찜함이 남았으나 어쨌든 내 목적은 흑마법사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보상을 받아야지."

동굴 공동의 끝. 흑마법사가 지키고 있던 어떤 장소.

구멍 너머 빛나고 있다.

마치 천국과 지옥의 경계와 같았다.

동굴엔 여전히 죽음의 악취가 가득했지만 저곳에선 풍부한 생명이 느껴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힘이 전해져 온다. 마치 아르테미스의 숲처럼, 영수의 기운이 풍만한 곳이었다.

다아!

웅크려 있던 달비가 신나서 뛰쳐나갔다. 녀석은 폴짝폴짝 뛰며 빛나는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난 방금 전의 상황이 얼룩처럼 남아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빛나는 구멍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전까진.

"와, 시발."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구멍 너머는 별세계였다. 무저갱 너머에 이런 곳이 있을지 상상조차 못했다. 연회장만큼 넓은 공간에는, 빈틈없이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들이 가득 박혀 있었다. 천장에는 자수정들이, 벽에는 루비와 사파이어가, 바닥은 '보석의 왕'으로 이루어진, 신의 보물 창고 같은 곳. 탐욕이 없는 자도 기꺼이 피를 묻힐 경이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보석 광산의 안쪽에는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눈부신 빛을 뿜는 그것이 있었다.

"음, 아무래도 우리 쪽 상단과 알리에바 단주와의 접선 자리를 마련해야겠는걸."

달비는 깡충깡충 뛰어가더니 보석 밭의 중앙, 그 어떤 보석보다도 크고 찬란한 '정령석' 앞에서 멈췄다. 녀석의 눈이 별빛처럼 빛난다.

정령석, 생명의 돌.

놀랍게도 흑마법사가 죽음의 기사를 유인하기 위해 사용한 미끼 정령석들은 단지 저것에게서 벗겨진 작은 파편에 불과했다. 달비는 작은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더니 이내 정령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꿈처럼 화사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 순간을 겪으며, 하나의 노래가 떠올랐다.

"산중 호걸이라 하는 호랑님의 생일날이 되어."

정령석의 빛을 흡수하고 달비가 푸른 빛을 내뿜자 영수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토끼는 춤추고."

천장의 자수정에선 토끼 형상의 영수들이 뛰쳐나와 달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여우는… 바이올린?"

사파이어에선 여우 영수가, 루비에선 늑대 영수.

온갖 보석에선 다양한 영수들이 뛰쳐나와 달비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단지 형상일 뿐, 진짜 동물들은 아니다.

그래도 숲속 동물들의 연회처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사슴은...."

달비는 앞발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령석의 빛이 사그라질수록 달비의 힘은 더 강해졌다.

다아! 다아!

신나는 노래는 없지만 신이 났다.

술이 없어도 취하는 것 같다.

영수들이 발하는 빛 무리는 보석보다 찬란했다.

휘감고, 피어나고, 저무는 각양각색의 힘들은 모두 조화롭게 서로를 이룬다.

대자연을 한눈에 담는 듯한 광경을 난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래그래, 무럭무럭 자라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 *

"어머, 꽃이다."

멍하니 모래 언덕에 앉아 있던 걸시는 깜짝 놀랐다.

"엥? 너무 많아!"

모래 위로 오색 빛깔 꽃잎을 지닌 꽃들이 갑작스레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명이 돌아오듯, 메마른 나무에서 초록 잎이 자라나고 모래를 뚫고 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황량한 사막을 채우는 생명, 기적의 순간에서 걸시는 웃으며 말했다.

"꽃밭의 꽃이 되어 버렸네."

66

삶과 죽음.

서로를 탐하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번져 가는 생명과 상응하여 죽음이 눈을 뜬다.

깨어날 리 없던 그것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태초의 요람에서.

묵시록의 기사는 녹슨 검을 꺼내어.

용암처럼 붉은 눈을 번득인다.

* * *

제정신을 차린 자들을 부축하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야말로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 개운한 건 나밖에 없다. 말 많던 벤보와 마법사와 말론소 사제는 입을 꾹 다물었고, 다른 이들은 죽다 살아난 충격에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질문에 난 한마디로 대답했다. 흑마법사를 죽이고 당신들을 살렸다고.

"도련님!"

동굴을 나서자마자 걸시가 허겁지겁 달려와 소리쳤다. 걸시는 착해. 날 걱정해 주는구나.

"그래, 괜찮다. 내가 또 굉장한 활약을...."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이상한 일?"

"정말 이상한 일이라서, 걸시는 소름이 돋았어요. 와, 무서워."

"흑마법사를 죽이고 온 건 난데 왜 네가 호들갑이야."

걸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겪은 이상한 일을 설명하고자 했다.

녀석은 허리를 숙여 모래를 한 움큼 쥐더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까지 숲이었는데! 또 모래야!"

또 주머니에서 모래를 꺼내 내게 보이며 경악했다.

"히익! 꽃이었는데 모래가 됐어!"

이젠 튼실한 다리를 재빨리 놀리며 언덕을 기어 올라간다.

난 가만히 서서 걸시의 재롱을 지켜봤다. 마침내 언덕을 올라간 걸시가 소리를 질렀다.

"나! 무! 가! 시! 들! 었! 어!"

이번엔 미친 짓이 좀 길다. 걸시는 다시 내 곁으로 헥헥거리며 뛰어 와, 갑자기 벌러덩 누워서 데굴데굴 굴렀다.

"푹신한 잔디였는데! 모래! 우푸푸!"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 내는 녀석에게 난 진중하게 격려했다.

"괜찮단다. 걸시야. 미친 건 죄가 아니야. 꼭 퀄츠로 돌아가면 치료병동의 모든 기술력을 동원해서 널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미친 사람에서, 덜 미친 사람으로."

"아닌데. 진짠데. 숲이 자라났는데. 왜 갑자기 모래가 되었대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걸시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맞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빨리도 물어본다.

"별일 아니야. 죽다가 살아난 것뿐이다."

걸시는 힐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양반이다. 토악질하고 기진맥진해 쓰러진 자도 보였다. 걸시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도련님은 죽음이 무섭지 않으시구나."

"죽는 걸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딨냐?"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도련님은 죽음 그 자체에 익숙해 보여요."

걸시는 동그란 눈으로 날 보며 얘기했다. 맑은 눈빛이다.

어떤 속셈도, 거짓도 보이질 않는.

"마치 백전노장 같으세요. 헤헤."

큭큭 웃으며 장난치는 걸시는 그저 열다섯의 날 노장이라 부른 게 웃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뜨끔해서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역시 걸시처럼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보면 전생의 비밀… 은 개뿔.

사실 내가 힘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고, 걸시는 이질감을 알아차릴 눈치 정도는 있었다.

워낙 쌍둥이들이 믿기지 못할 일들을 밥 먹듯이 행해서 희석되었을 뿐이며, 나 또한 그들과 비교하여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기에 익숙해져 버린 거겠지.

충분히 기괴하다.

아무리 공작가의 핏줄, 타고난 인재라고 해도.

열다섯의 내가 단 며칠 동안 멜카란에서 겪은 수많은 일과 난관을 극복한 능력들은 충분히 영웅의 일대기처럼 비범하고 대단한 것이다.

난 어딜 보고 있었던 걸까? 목표가 워낙 장대하여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여명의 기둥이라 하였나? 각오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이 수준이면 난 대체 무엇이 될 수 있는 걸까?

환경, 재능 그리고 필연.

즐겨 하던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전생의 내가 사기 스킬 하나 믿고 깝죽대던 초보자라면, 지금은 만렙 캐릭터 세 명에게 경험치를 수십 배 받으며 성장 중인 버그 캐릭터다. 멜카란에서 '힘'을 얻겠다고 각오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난 무엇을 얻었는가? 단숨에 강해졌다. 힘을 더욱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달비는 정령석을 흡수하여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다.

판이 깔렸다고 한다.

내가 멜카란에 온 뒤로 퍼즐처럼 맞춰지는 사건들.

검은 사제, 부탑주, 흑마법사, 정령석.

그렇다고 계획도 아니다.

이건 그들의 영향력의 결과다.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막대한 영향력.

만약 멜카란이 아니라 벤토의 거석 지대, 대협곡, 제국 남부 제도를 갔어도 마찬가지, 온갖 사건에 휘말렸겠지.

"삐악삐악."

"네?"

새삼 다짐했다.

응애, 나 아기 폴스타.

어미 새가 주는 먹이를 남김없이 받아먹어 주겠어.

* * *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말론소 사제는 깊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 떠났다. 떠나는 검은 사제들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발걸음이 무거울 것이다. 흑마법사는 죽였으나 정작 자신들이 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레인버그의 막내아들과 함께 있었다. 젠장, 상사가 우샤스라니! 난 부디 그들이 무사하길 바랐다.

벤보와 마법사는 참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날 은인이라 불렀다. 어떻게 멜리사를 따르는지 이해가 갔다. 그에겐 이득 관계가 직진과 후진밖에 없다. 은혜를 꼭 갚겠다는 벤보와에게 난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 잊지 마십시오. 이자까지 받아 낼 겁니다. 하하."

청록 마탑의 부탑주는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바실리스크 바위까지 동행하겠다고 했지만 대머리와 여행해 봤자 눈만 부실 뿐이다. 헤어지기로 하고 정보를 전해 들었다.

"코산 일족이라, 흐음."

아직 멜카란에 온 목적, 고대 도시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코산이 그토록 뛰어난 추적자라면 의뢰를 해 봄직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걸시야."

"네, 도련님."

"크게 기대하지는 마."

"예?"

걸시는 당차다. 아무리 엄마가 걸시를 아꼈더라고 해도 결국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다. 가족이란 울타리, 마음 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곳. 부모 없이 자란 걸시의 세상은 외로웠을 테지. 걸시는 멜카란으로 가겠다고 떼를 쓰며 코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어쩌면 이토록 오고 싶어 한 이유가 작은 희망에 기댄 게 아닐까. 내 경호를 핑계 삼아 혹시 모를 기적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난 덩달아 설렜다.

지금, 희망은 현실이 되었다.

"지금 코산 일족을 만나러 갈 거야. 운이 좋으면, 뭐."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흐렸다. 걸시는 멀뚱멀뚱 날 바라보다가 점점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리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치고 옆구리를 치고 뺨을 치더니 망가진 인형처럼 목을 좌우로 흔든다. 그 후로 걸시는 바실리스크 바위에 도착할 때 동안 말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 * *

달비가 달라졌다.

내 품에서 뛰쳐나와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목을 빳빳이 들고 깡총거리던 걸음은 이젠 제법 우아하게 다리를 뻗는다.

하지만 정령석을 흡수한 이후 몸집이 커졌긴 했어도 여전히 귀여운 달비다.

"달비야."

평소의 달비는 부르면, 다아다아. 귀엽게 울며 날 바라봤었다.

그러나 이젠 대답도 없이 날 쳐다만 본다.

이래선 안 될 것 같다.

난 달비를 품에 안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개간네!

그 순간, 달비는 발굽으로 내 손등을 쳤다.

충격이었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한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머리까진 허락했으나 달비는 영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이내 손길을 거부하며 소리를 질렀다.

다아! 다아다아! 개간네!

쓰다듬지 말라고 확실한 의사 표현을 했다.

뭐야, 어색하게.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사촌 동생처럼 달비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이대로 놔두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난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놀란 달비가 발굽으로 뺨을 때렸지만 아프진 않았다. 난 마치 고양이가 영역 표시를 하듯 머리를 들이밀며 녀석의 부드러운 털에 비볐다.

개간네! 개간네! …다아. 다아!

다시 달비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녀석을 품에 안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힘을 되찾을수록 성장하는 건 달비의 힘만이 아닌 건가? 사춘기도 겪어? 영수가?

이제 품에 안기는 것도 거부할 때가 온다면, 조금 슬플 것 같다.

* * *

숨결에 닿으면 피부가 돌로 변한다는 괴암의 마수, 바실리스크. 바실리스크 바위는 바실리스크가 돌로 변한 희생자들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던 괴이한 장소다.

바위의 생김새를 보아하니 그런 일화가 생겨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래사막 위의 거대한 바위는 마치 누군가가 조각한 듯 형태가 기묘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석면들이 언뜻 보면 사람처럼 보였다.

"벌써 도착해 있군."

"어디? 어디? 어디에 있어요? 어디 어디?"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았지만 그들은 이미 바실리스크 바위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걸시는 보지 못했다. 녀석이 둔한 게 아니다. 아마 숙련된 기사도 기척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에는 삭막한 사막과 우두커니 서 있는 큰 바위밖에 없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여 개눈깔이 쓰릴 정도로 오래 눈을 뜨고 보아, 난 그들이 어디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다크템플러 일족인가? 기척을 숨기는 것에 있어서는 슈테르닐의 전설적인 아사신들도 한 수 접을 거야.

등골이 찌릿찌릿하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주변은 조용했다. 바위 뒤, 모래 아래 그리고 그림자에 숨은 수십 개의 화살이 올곧게 날 겨누고 있다. 그들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을 경계했다.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공격에 나서겠지.

"난 벤보와의 대리자요!"

싸우려 온 게 아니다.

난 벤보와에게 받은 어깨 견장을 흔들어 보였다.

어깨 견장은 마법사의 상징이자 신분, 신뢰의 증거.

하지만 그들은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던전은 팔푸의 숲에 있소. 정확한 좌표는 이 천에 적어 놨으니 가져가시오."

난 견장을 발아래에 내려놓았다.

"난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라고 하오. 그대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소."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기껏해야 모래가 들썩이거나 작은 조약돌이 바위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정도였으나 그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코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십 년간 행적을 감췄다. 현자, 데메니아. 엄마도 오랫동안 찾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난 꼭 그들과 만나야만 했다.

가벼운 무력충돌? 아니, 그들은 죽자 살자 덤빌 텐데. 한 보 물러나 최대한 비위를 맞추며....

"악!"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아빠? 엄마? 아빠엄마? 저예요, 저! 걸시! 있어요? 나 알아보겠어요? 현자 데메니아 님께서 날 거둬 두셨어요! 십오 년 전 서대륙의 핏빛 늪에서...."

감춰 왔던.

숨겨졌던.

강렬하고 거대한 기운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코산 일족은 기척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힘이 아사신처럼 침착한 건 아니다. 악마 사냥꾼 일족, 전투 방식은 도리어 격렬하고 사납다. 난 산불처럼 타오르는 사나운 기운을 느끼며 확실히 이해했다. 걸시는 코산의 핏줄이 확실하다. 걸시가 용병들을 죽일 때 보여 줬던 폭발적인 감정이 그들에게서도 느껴졌다.

더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한 남자가 뛰어온다.

거구의 남자, 인상은 도깨비처럼 사납다.

천안통이 아니었다면 날 공격하는 줄 알고 반격했을 것이다.

그는 날 지나쳐 걸시 앞에 섰다.

아무 말 없이 입술을 물어뜯으며 서 있기만 하자.

걸시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빠? 걸시의 아빠인가요?"

그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몹시 고통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곱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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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몰라볼까."

"십여 년이 흘려도."

"…아저씨?"

"품에 안겨 날 올려다보던 눈빛을."

"내 손가락을 쥐던 작은 손을."

"어떤 것도 채울 수 없었다."

"널 잃은 후 내 가슴은 텅 비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아빠? 진짜 걸시의 아빠?"

"네 이름은 걸시가 아니야."

남자는 걸시를 와락 안았다. 그의 어깨가 떨린다. 꽉 안아 주고 싶지만, 다칠까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나는 그가 걸시의 아버지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는 품에서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부서진 돌조각이었다.

"페레걸 시야나."

'걸시'란 이름은 쿤칸 제국은 물론, 어떤 대륙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이상한 이름이다. 엄마가 붙인 걸시란 이름의 유래는 현자의 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핏빛 늪에서 구한 갓난아이, 아이의 곁엔 부서진 펜던트의 잔해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아이의 이름을 써 놓은 듯한 펜던트. 하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걸', '시' 두 글자뿐.

남자가 부서진 팬턴트의 잔해를 보여 주자, 걸시는 담담하게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시의 손을 떨리고 있었다. 오래 보아서 안다. 저처럼 긴장한 걸시는 아버지의 보물 도자기를 깨트린 후 처음이다. 걸시는 돌조각을 꺼냈다. 쓰레기에 불과했으나, 두 부녀는 지금껏 잃어버리지 않고 들고 있었다. 다만, 한 명은 예전부터 그 뜻을 알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야 그 뜻을 알았다.

"페레걸, 시야나? 걸시의 원래 이름?"

"성모 페레걸의 행복의 빛, 시야나는 축복받으며 태어난 아이라는 뜻. 넌 우리에게...."

핏줄의 만남은 기쁜 것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갓난아이 때 헤어졌고, 둘 다 서로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걸시는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남자는 아니다. 그를 괴롭히는 건 죄책감이다. 그가 걸시의 아버지라는 걸 확신한 것도 그 때문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를 만났다고 하여 얼싸안고 기뻐하기만 하는 작자는 진정 가족이 아니다. 재회의 눈물엔 그동안 겪은 고통이 담겨 있다.

도깨비 같은 거구의 사내가 운다.

"에궁, 울지 마세요."

"끄윽… 끅."

남자의 울음은 코산 일족이 지금껏 감춰 왔던 정체마저 희석했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 사냥꾼 일족, 피를 흘리지 않는 철혈의 사냥개, 죽음만이 잠들게 할 자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숨기지 않고 서려 있을 뿐이다. 남자를 위로하며 주변에 몰려든 코산 일족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난 내가 기척을 놓친 자들이 있다는 것에 살짝 놀랐다. 대부분 기사를 뛰어넘는 강자들처럼 보였으나, 그중엔 예상을 뛰어넘는 자들도 있어 보였다.

그들은 남자를 위로했다. 또한 걸시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네가 베네의 딸이구나, 어쩜 세상에!, 이렇게 예쁘게 자라주다니, 신이시여. 살아 있었어, 정말 놀라운 날이야. 저마다 건네는 한 마디마다 모두 걸시를 아는 눈치다.

걸시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걸시의 눈은 쉴 새 없이 코산 일족들을 살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코산 사람이 걸시에게 말을 건네자, 걸시는 고개를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걸시는 눈치가 없지 않다. 슬픈 진실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걸시에게 부서진 펜던트 조각을 건넸다.

"베네가 만들었지. 네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소중히 품은 여섯 글자다. 시야나...."

"…언제 돌아가셨어요?"

"그날, 널 잃어버린 지옥의 날에."

* * *

다행히 내가 레인버그의 핏줄이기에 그들의 게르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소문과 달랐다. 내가 '적'이었다면 모를까, 적어도 호의적인 대상에겐 음식과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자들이었다. 멜카란의 악인과는 당연히 수준이 달랐고, 대화를 나눠 보니 시골 사람처럼 순박한 면모도 보였다.

다른 게르에서 걸시가 가족 상봉을 할 동안에 난 호기심 많은 코산 사람들 몇몇과 대화를 나눴다. 전설의 일족이라고 해도 일상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곱슬머리의 중년 여자가 차와 요깃거리를 들고 내 곁에 앉았다.

"드셔요."

"감사합니다."

찻잔은 따뜻했고.

"소문으로 많이 들었어요."

과자는 꿀에 버무린 말린 과일이었다.

"전설의 '달의 아이'! 막내 공자님은 여명의 기둥이라 부르던가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간식을 주워 먹었다. 대접한 음식을 주저 없이 먹는 건 내가 그들을 믿는다는 행동을 보여 준 것이다. 사실, 아카시아 꿀이 몹시 맛있어 보였기도 했고.

"저도 소문을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아니, 소문이 아니지요. 아버지를 도와 제국을 구한 용맹스런 영웅의 일족, 코산의 용맹함은 제 어머니이신 현자 데메니아 님의 일지에 숨김 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난 저 꿀 발린 과일처럼 코산에 대해여 달콤한 칭찬을 건넸다. 확실히 엄마의 일지는 도움이 되었다. 코산 일족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조울증 환자들이다. 감정의 폭이 큰 코산 사람들은 칭찬을 달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어머, 데메니아 님! 제 어린 시절에 몇 번 그분의 식사를 만들어 드린 적이 있었지요. 아름답고, 빛나시던 분이셨어요."

코산은 대전쟁 때 레인버그를 도와 악마를 사냥했다.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용병들, 그 연결점은 현자 데메니아였다. 예상대로 레인버그와 코산의 관계는 좋구나.

"공자님 또한 그분처럼 빛이 나세요. 과연, 풍기는 '델'이 대단하시군요!"

"델...?"

"고대 히렐어로 영혼의 밝기를 뜻해요."

"제 영혼의 밝기를 볼 수 있으십니까?"

"우리들의 눈은 특별하거든요."

순간, 실없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다. 내 앞에서 눈이 특별하다고 말하다니. 재밌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걸시는 어릴 적부터 쌍둥이들의 무서움을 눈치채고 있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감을 쌓았다. 레인버그, 코산, 악마, 음식, 걸시와 녀석의 부모. 그러다 난 자연스레 진짜 궁금한 이야기에 대하여 은근슬쩍 질문했다.

"신화 속의 영웅처럼 언젠가 꼭 만나 뵙고 싶었으나,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다니 꿈만 같군요. 역시 그… 불길한 소문은 거짓이었던 겁니까?"

사라진 전설의 일족이 어떻게 버젓이 살아 있느냐, 란 질문을 돌려 말한 것이다.

"그건...."

곱슬머리 여자가 말을 아끼는 사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코산 사람들이 곁에 몰려와 저마다 한마디를 보탰다.

"우린 모두 그날을 기억한다오."

"굴욕과 슬픔의 날을."

"공자께선 알 자격이 있으시지. 데미니아 님께서 우릴 도와주셨으니."

"우린 여전히 복수를 꿈꾸오."

"가족을 앗아 간 놈을 찢어발길 상상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은 더해."

난 그날에 일어날 끔찍한 사건의 경위에 대해 전해 들었다.

* * *

코산은 몇백 년 전, 서대륙에 왕이 없던 시절부터 대밀림의 토착신을 대대로 모시던 제사장 가문이었다. 그들의 명성은 드높았고, 다른 부족민들도 존경했으며, 밀림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중재하는 심판관이자 악마로부터 숲을 지키는 수호자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하루아침에 밀림은 불타 없어졌다.

단 한 마리의 악마에 의하여.

코산은 모든 걸 잃었다.

친구와 가족, 명성과 의무, 모시는 신마저.

그 후, 코산의 역사는 복수의 굴레였다.

악마를 죽이기 위한 열망적인 복수심은 수백 년간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코산의 핏줄들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품고 태어난다고 했다.

수많은 악마를 죽였고, 그것에 곱절은 많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대밀림을 불태웠던 악마는 죽이지 못했다.

"십육 년 전, 우린 일족의 숙원을 풀 절호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잡았다고 생각했었죠."

코산은 16년 전 핏빛 늪에서 악마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이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았다.

분명 몇백 년 동안 갈고닦은 복수의 칼날이, 악마의 턱밑까지 닿았던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그날, 세간의 소문대로 코산은 몰살당할 뻔했다. 갑자기 악마가 '변심'하여 달아나지 않았다면. 이제 난 자연스럽게, 악마와 관련된 사건들은 쌍둥이들과 연관 지었다.

대륙도 다르며, 쌍둥이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 하지만 완전히 어긋나진 않아. 우린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잉태한 기간을 생각해 보면… 억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절묘하잖아.

힘을 잃은 코산은 지금까지 악마를 피해 모습을 감추고 도망 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복수의 칼날은 날카롭게 번득이는 것 같았다. 코산이 악마를 피해 도망 다녔다, 사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궁금한 건 그들이 걸시를 어떻게 잃어버렸느냐.

걸시는 그날 싸울 수 없던 유일한 코산 사람이었다. 갓난아이였던 걸시는 어머니에 품에 안겨 전투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숨어 있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코산이 예상하지 못한 건 악마 또한 '무리'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붉은 악마'가 달아난 후 코산 사람들은 힘겹게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의 상처보다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마을에 남겨진 노인과 어린아이 대부분이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찾고자 했습니다. 어찌 그녈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시야나는 우리 모두의 아이나 다름없는데."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하지만 시체는 모두 수습할 수 있었다.

단 한 명, 걸시를 빼고.

그 후 코산은 그림자에 숨어 도망치면서도 걸시에 대한 흔적을 쫓았다고 했다. 그러다 현자 데메니아의 흔적을 발견했고, 현자가 아이를 구하고 데리고 갔다는 가정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데메니아 왕녀가 병환으로 모습을 감춘 후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막장드라마냐고...."

엄마는 걸시를 구했으나, 그땐 이미 임신한 상태.

우릴 낳고 급격히 몸이 나빠져서 창궁관에서만 지냈어야 했으니 코산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난 문득 생각이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피의 악마, 음. 그 새끼 제가 죽여 드릴게요."

어차피 악마라면 씨를 말릴 생각이다. 겸사겸사, 죽여 버리지 뭐.

내 한마디는 침울한 분위기를 달아나게 했다. 대신 험악하고 싸늘해졌다.

내게 호감 있어도 결국 난 타인이다. 말실수했나? 일족의 철천지원수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죽여 주겠다고 하는 건, 어쩌면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무시한다고 볼 수도 있는 건가?

"공자를 무시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자신을 과신하는 버릇은 버리는 게 좋을 듯하오. 피의 악마가, 어떤 놈인지 알고나 있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내게 꾸짖듯이 말했다. 난 피식 웃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건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다. '죽일 수 없음 말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들에게 허락받는 게 아니니까."

꺄아아악-!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였다.

비명.

걸시의 목소리다.

난 황급히 게르를 뛰쳐나갔다.

"엇?"

그 순간,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날 무척이나 당황하게 하였다.

"너, 너, 걸시 이 패륜아."

걸시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녀석의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단검이 들려 있다.

그리고 피의 주인은, 쓰러져서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걸시의 '아버지'.

걸시가 자기 부모를 칼로 찔렀어!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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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행동에 진심으로 당황해 본 건 쌍둥이 외엔 오랜만이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걸시 씨."

존속살해는 '대한민국'에선 7년 이상 징역 혹은 무기 징역에 처하고, 쿤칸의 법도에 따르면 사형이다.

아니, 것보다 왜? 왜 찔렀대?

참변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설마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제 아비를 칼로 찌를 줄은!

"윽. 당황하지 마시오. 공자."

그때,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쓰러진 그가 힘겹게 말했다. 다행히 살아 있었으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나오는 게 과다출혈로 곧 가실 것 같다. 재빨리 달려온 코산의 치료사가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을 동안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걸시를 되려 위로했다.

"내 실책이니 걱정할 것 없다. 으윽, 이 정도 생채기는 하루 푹 쉬면 나아. 큭, 윽, 아, 윽."

누가 봐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환자다.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는 듯 기괴한 신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걸시는 범행 도구를 힘없이 내려놓으며 창백한 입술로 얘기했다.

"이… 이럴려고 한 게 아닌데...!"

"됐습니다. 걸시 씨.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억울함은 조사에서 토로하십시오."

"아니, 내 딸은 죄가...."

"위급 환자야! 어서 모시고 가게!"

무어라 할 말이 남은 남자처럼 보였으나 배에 구멍이 뚫린 그는 정말 위급했다. 치료사들이 그를 치료하는 동안, 난 걸시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징역살이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힝."

개간네!

걸시가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이자 달비가 머리를 때렸다.

난 걸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박하여 게르에 집어넣었다.

이제 당황하는 건 남자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실책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걸시를 탓하는 사람은 날 포함하여 한 명도 없었으나, 중상의 상처가 판단력을 흐리게 했거나 원래 골려 먹기 좋은 성격처럼 보였다. 자신의 딸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절규하는 남자를 보니 확실히 코산 일족이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벌써 피가 멎었네.

코산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를 자주 놀려먹었는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누군가가 들고 온 포승줄에 걸시는 게르의 기둥에 손이 묶여야 했다. 신나서 걸시의 형벌을 논하는 사람들을 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거참, 일 절만 하지.

* * *

그는 배를 찔리고도 반나절 만에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약초의 효능이 좋다기보다, 그가 코산이자 '강자'인 덕이다. 난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죽을 들고 그의 게르를 찾았다. 허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병상에 누운 그는 날 어색하게 맞이했다. 첫 마디는 '내 딸은 죄를 짓지 않았다오'였다. 그래서 난 걸시가 누굴 닮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남자의 이름은 벤베르 제리코.

코산의 이름은 특이하게 '성'을 존경하는 자의 이름을 따온다.

투신 벤베르를 따온 이름답게 거구의 몸은 근육질로 울긋불긋했고, 손바닥의 깊은 굳은살은 그가 얼마나 무기를 잘 다루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난 그와 대화를 나누며 코산에 대해 알아갔다. 제리코 또한 데메니아 왕녀, 우리 엄마와 인연이 있던 자였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딸을 구해 줬으니 내겐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는 이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었으나 전체를 이끄는 자는 아니었다.

코산 일족은 흩어져서 '피의 악마'를 추적하고 있었다. 마탑의 던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것 또한 악마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리코의 무리 외에도 코산 일족은 여럿 무리를 이뤄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민감한 질문에도 스스럼없이 답했다. 몇 년간 행적을 완전히 감췄던 코산이다. 아무리 내가 레인버그의 핏줄이라고 해도 감추고 싶은 건 있을 텐데.

괜한 머리싸움은 싫다.

"악마에게 쫓긴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얻은 정보를 이용하는 탓에 코산에게 무척 성가신 일이라도 일어나면, 크흠. 어찌하시려고 모두 답해 주시는 겁니까?"

난 단도직입적으로 친절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괜찮소. 현 '은검'의 주인은 곧… 다가올 복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

뭐, 코산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어느 정도 필요한 정보를 얻은 난 존속살해 사건의 진상에 대해 물었다.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제리코는 머쓱한 표정으로 상처 부위를 쓰다듬었다.

"녀석의 힘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내 실책이오. 시야나를 시험해 보려다가 호되게 당했지."

자식과 캐치볼을 하듯.

제리코는 대수롭지 않게 걸시와 장난을 치고자 했단다. 걸시에게 단검을 쥐여 줬으나 설마 자신이 상처 입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리코였다.

"기척을 숨기도록 했소. 난 눈을 감고, 녀석의 공격을 기다렸지. 시야나는 코산의 핏줄이니 혹여 힘을 이어받았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말이오. 참, 설마하니...."

제리코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한 상처가 아직 쓰라린 모양이다.

"난 개미의 기척도 읽을 수 있으나 걸시의 움직임은 놓치고 말았지.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일이야. 멋진 모습을 보여 주려다 칼을 맞고 쓰러진 아비라니, 하하하."

제리코는 웃다가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냈다.

"끅, 시야나가 움직였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단검이 내 배를 찌른 후였소."

"…제 어머니께선 걸시, 시야나를 평범한 하녀로 키우진 않으셨나 봅니다."

"그런가 보오. 제법 훈련받은 자의 숙련된 몸놀림이었소. 더 놀라운 건 제 아비에게 비수를 꽂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거요. 날 죽이고자 한 게 아니라, 날 믿었기 때문이겠지."

자식에게 칼빵을 당한 제리코는 왠지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는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간 채로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코산의 핏줄들은 악마를 너무 많이 죽여서인지, 기이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 많다오. 삼신의 축복인지, 악마의 저주인지 알 수 없는 힘 말이오. 그리고 간혹,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자들이 태어나지. 우린 무형의 그릇이라 칭한다오."

"시야나가 특별한 힘을 지녔단 뜻으로 들립니다."

"확신할 순 없지. 하지만… 난 기적적으로 시야나만이 살아남았다고 생각하진 않소. 갓난아이가 악마들의 습격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하나의 가정만이 떠오를 뿐이지. 시야나는 분명 핏줄의 힘을 강하게 이어받은 것이오. 갓난아이임에도 악마가 찾지 못할 만큼...."

쓸쓸한 목소리다.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던 제리코는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인가? 하하."

아닌 척했지만, 결국 자식 자랑이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멜카란에 온 후로 걸시가 보인 기이한 힘은 확실히 평범함을 넘어섰으니까.

개간네!

그때였다. 발치에서 조용히 자고 있던 달비가 벌떡 일어나 게르의 문을 향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윽고 걸시가 천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들어오더니 제리코를 와락 안았다.

"엉엉, 죽지 마세요. 불효자는 웁니다."

장난이 아니었다. 걸시는 진짜 울고 있었다. 난 녀석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코산 사람들이 걸시를 겁준 모양이었다. 걸시는 머저리 짓을 계속 이어 나갔다. 들고 온 양동이에 담긴 어떤 물에 손수건을 적시더니, 제리코의 얼굴을 닦아 줬다.

"퉤퉤! 이건 뭐지? 시야나!"

"염소의 오줌을 삭힌 거래요. 벨다 아줌마가 상처에 특효약이라고 하셨어요."

여기까지 지린내가 진동한다.

개간네.

달비가 인상을 팍 쓰며 욕 한마디를 남기고 게르를 나갔다.

염소 오줌물로 세수한 제리코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내 딸이 머릿속을 비운 것도 힘의 부작용일지도 모르지. 허허."

난 깨달았다.

걸시의 머리가 많이 비어 보이는 것도 '무형의 그릇'. 타고난 능력이었구나!

"약물! 마셔요!"

"나가 있어. 걸시."

걸시가 오줌통을 뒤집어 얹기 전에 난 게르 밖으로 쫓아냈다.

* * *

"내 이야기는 이쯤 하고...."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닦던 제리코가 내게 말했다.

"공자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삭힌 오줌은 강력했다. 차마 곁에 가지 못하고 난 멀찍이 떨어져 의자에 앉았다. 제리코가 날 보며 머뭇거리자 난 코를 막고 침대맡에 놓인 주전자를 바라봤다. 제리코는 코를 한 번 훌쩍이더니 주전자를 세숫대야 삼아 꼼꼼히 세수했다. 냄새가 어느 정도 가시자 난 의자를 들고 침대 곁에 앉았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침대보에 대충 닦으며 말했다.

"악마잡이에 익숙한 코산조차도 멜카란의 악취엔 치를 떤다오. 귀히 자라신 레인버그 공자께서 오실 만한 곳은 아닐지언데."

어째 말에 가시가 있네.

"보아하니 우릴 찾으러 온 것도 아니시고."

혹시 코산이라면 알지도 모른다. 나는 악마에게 멸망한 고대 제국, 악마를 숭배하던 옛 도시에 대하여 물어봤다. 흥미롭게 듣던 제리코가 무언갈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 들어본 적이 있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현자 데메니아 님께서 몇 번 언급하신 적이 있었지. 어쩌면 그곳이, 입구일지도 모르오."

"그곳이라면...?"

"마법사의 의뢰로 흑마법사의 거처를 조사하던 중 기이한 장소를 발견했었소. 공자. 암벽으로 감춰진 지하 동굴이었지. 아니, 동굴이 아니라 마치… 미궁이었소. 미로처럼 얽힌 길을 지나 지하로 내려갔으나 중간에 기묘한 힘이 가로막고 있어 그 이상 가지 못했다오. 오랜 세월에 파묻힌 고대 도시가 있다고 하면, 이곳의 너머보다 확실한 곳은 없을 테지."

"기묘한 힘이라면, 악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악마는 아니야. 악마 사냥꾼으로서 확신하오. 그 힘은 되려 신성한 기운이었소."

침입자로부터 지하 미궁을 지키는 신성한 힘.

코산 일족이 포기했을 정도니 허접한 건 아닐 거야.

난 농부에게서 얻은 멜카란의 지도를 제리코에게 보여 줬다.

"이쯤이었나."

제리코는 지하미궁의 장소를 지도에 마크했다. 멜카란 사막의 정중앙, 반나절이면 도착할 가까운 거리였다. 제리코는 내가 멜카란에 온 목적이 고대 제국의 터였다는 걸 알았지만 그 이상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과 알아도 쓸모없는 지식에 대한 경계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폴스타 공자."

그리고 그에게 걸시에 대한 '지식'은 무엇보다 필요한 정보였다.

제리코는 방금까지 나눴던 모든 대화가 본론이 아니었다고 단정 지으며, 갑자기 열의에 찬 큰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공자. 시야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딘가 모자라지만 마음씨는 착한 사람."

"…그래, 착하지. 그리고 내 딸은 얼굴도 곱지 않은가?"

"어딘가 모자라지만 마음씨는 착하고 얼굴은 예쁜 사람."

"…시야나는 자신을 레인버그가의 시녀라고 하더군. 코산은 대대로 관계에 아첨하질 않아, 귀족들의 권력이 어떤 구조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네. 내가 공자를 편히 대하는 것도, 자네를 현자 데메니아 님의 아들로서 대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듣기로는… '젊고 잘생긴' 귀족 아들과 '예쁜' 시녀 사이의 추문은 이 어두운 귀에도 종종 들려오더군. 숨길 것 뭐 있겠나. 쿤칸만 해도 솔가르 붉은 개새끼들이 유명하지."

이제야 난 이해했다.

걸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그는 나와 걸시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물어본 것이다.

"멍청한… 아, 죄송. 덜 똑똑한 여동생이죠. 걸시는."

그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가족으로 생각해 주다니, 정말 고맙구려. 공자."

69

내 볼일은 끝났다.

하지만 제리코의 상처가 다 낫기 전까지 코산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며칠 동안 지내며, 걸시는 코산 사람들과 무척 친해졌다.

보름달이 떠, 달비와 산책하던 밤이었다.

걸시가 게르에서 나와 날 따라왔다.

녀석은 어쩐지 슬픈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날 찾지 못했던 걸까요?"

지내 봐서 아는 거겠지.

코산의 사람들은 대단하다. 며칠 동안, 가만히 앉아서 휴식한 게 아니다. 그들은 사냥했고, 검은 사제들과 마법사도 힘겨워하던 죽음의 기사마저 수월하게 사냥했다.

"전설의 사냥꾼 일족이, 갓난아이인 날 정말 못 찾은 걸까요?"

그들의 능력을 이해한 걸시는 의문을 품은 듯 보였다.

"어쩌면… 찾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라요."

걸시의 저런 우울한 모습은 드물었다. 아니, 거의 처음 보는 것 같다.

장난치려던 난 뺨을 긁적이며 진중한 태도로 고민 상담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아.

달비는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봤다. 녀석은 보름달이 뜰 때면, 밤하늘을 몇 시간이나 올려다보곤 했다. 단지 밤하늘을 보는 게 좋아서일까?

솔직히 말해 난 밤하늘을 좋아하진 않는다.

별들은 어지럽게 놓여 있고, 달은 푸르게 빛나는데.

정작 달보다 큰 건 별인 데다가 내가 보는 저 빛은 아주 오래전 죽은 별빛일지도 모른다. 별에는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도 볼 수 없다. 달에는 토끼가 산다. 별에는 외계인이 살지도 모른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뿐이다. 별에 있는 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허블 우주 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본다면 더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시꺼먼 띠, 가스로 가득 찬 행성, 얼어붙은 대지, 그 너머.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는 자는 없다.

그래서 난 밤하늘이 싫다. 보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것. 차라리 고래의 이빨이나 신의 설탕이라면 경이롭기만 하고 끝일 텐데.

"난 밤하늘이 싫어. 넌?"

머뭇거리던 걸시는 조용히 고개를 올렸다.

사실 내가 히스테리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밤하늘은 검은 것, 빛나는 것. 두 개만 존재하는 간결한 공간이다.

걸시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봤다. 새벽 공기는 차갑다. 밤하늘은 싫다. 하지만 지금 기분은 딱히 나쁘진 않았다.

"앗."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 재밌게도 쿤칸에도 통용된다.

밤하늘에 꼬리를 흩트리며 떨어지는 유성에 걸시는 얼른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하지만 이내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다. 걸시는 울적한 표정으로 모랫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소원을 다 빌지 못했어요."

"뭔 소원인데?"

"말하면 저주로 바뀐대요!"

"흥, 별똥별의 소원 따위를 믿는 거냐?"

개간네!

달비가 화를 내다가 먼저 게르로 돌아갔다.

"것보다 더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알려 주지."

"마법… 이요?"

"그래. 이 주문을 세 번 외치면 행복한 일들만 생겨나고, 부모님 만수무강에, 교통 사고로 죽은 강아지가 살아나고, 고장 난 세탁기가 정상이 되며, 수능 1등급에 연봉 1억.... 됐다. 아무튼 굉장한 주문이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어쨌든 굉장하다는 거죠? 멜리사 아가씨께서 가르쳐 주셨나요?"

"아니, 이건 나밖에 몰라."

나는 웅장한 목소리로 장엄하게 외쳤다.

"깐따삐아!"

다시 한번 외쳤다.

"깐따삐아! 뭐해, 안 따라 하고. 다섯 번 외쳐야 효과 있어"

"까… 깐따삐아."

걸시는 뜻도 알지 못하면서 이 주문에 담긴 수치스러움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민망해하면서도 기특하게 깐따삐아를 외쳤다. 걸시는 다섯 번 외친 후 활짝 웃으며 효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사막은 썰렁하기만 했다.

"놀린 거죠."

"눈치가 늘었어."

걸시는 입술을 깨물고 밤하늘을 노려봤다. 다음 별똥별을 찾고자 하는 기세였다.

"걸시. 네 고민은 뜻 모를 주문만큼 쓸모없는 거야."

"쓸모없다뇨. 걸시의 마음은 설거지거리가 쌓인 주방보다 어수선한걸요."

"그럼 설거지를 해, 바보야.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해. 제리코 씨가 정말 널 버린 것 같더냐? 요 며칠 동안 넌 어떤 느낌을 받았냐?"

"아빠는… 따뜻해요. 아줌마도 따뜻했고, 아저씨들도 따뜻했어요. 현자님! 그리고 도련님처럼. 걸시를 따뜻하게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럼 된 거야. 축하해, 걸시. 가족을 되찾아서."

걸시의 기분은 아무래도 풀린 모양이다만.

이젠 내가 울적해지고 말았다.

* * *

"배려에 정말 감사하오, 공자."

걸시와는 헤어지려고 했다. 녀석이 원한다면 퀄츠를 떠나도 상관없었다. 아니라고 해도 당분간은 가족들과 함께 지내길 원했다. 코산도 코산 나름 위험한 삶을 지내고 있었지만, 적어도 멜카란에서만큼의 위험은 아닐 것이다.

내 뜻을 전하자 제리코와 코산 사람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걸시는 몹시 뿔난 얼굴로 소리 질렀다.

"전 현자의 비수, 레인버그의 그림자! 도련님을 모셔야 해요!"

"누가 평생 헤어진다냐? 잠깐 떨어지자고. 왜 호들갑인데."

"멜리사 아가씨하고도 약속했어요! 끝까지 도련님을 보살피겠다고!"

"시야나...."

"아빠! 아니, 아버지!"

걸시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 시야나가 아니예요. 제 이름은 걸시, 현자의 손가락. 맹세했으니, 어기면 엉덩이에 털 나!"

난 한숨을 쉬며 걸시에게 말했다.

"네 충성심이 진심이라는 건 알겠어, 걸시."

그리고 재빨리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쓰러지는 걸시를 안아 들고 난 들릴 리 없는 말을 읊조렸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원하지 않아."

멜리사와 우샤스는 내 작은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걸시를 멜카란 밖으로 안전하게 보내려면 지금이 기회다.

"데리고 가세요."

제리코는 걸시를 조심히 안았다.

"괜찮겠소?"

"어쩌겠어요?"

원망 정도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어.

제리코가 기절한 걸시를 둘러업었다. 난 걸시를 잠시 지켜보다가 뺨을 긁적이며 게르로 향했다. 남은 물과 식량으론 충분히 고대 제국의 터까진 갈 수 있겠지. 몸을 돌려 한 걸음 걸었을 때였다.

"윽."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신음.

이해할 수 없었다.

걸시가 서 있다.

하지만 의식은 없다.

"…너."

마치 꼭두각시처럼 걸시는 부자연스럽게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걸시의 발밑에 쓰러진 제리코는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강한 전사다. 걸시의 완력으론 맨손으로 제압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모습은. 걸시가 제리코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냄새."

당황스러운 상황에 머뭇거릴 때였다.

냄새가 났다. 멜카란의 악취 속에서도 뚜렷한 어떤 냄새. 난 이내 어떤 냄새인지 떠올렸다. 바람이꽃의 냄새잖아. 바람이꽃, 걸시, 기이한 힘. 난 멜리사의 말이 생각났다.

걸시가 필요할 거야.

"나는 걸시, 현자의 비수."

걸시가 입을 열었다.

허나 목소리는 걸시의 것이 아니었다.

평소의 참새처럼 발랄하고 높은 목소리가 아닌 첼로처럼 깊은 목소리.

"받아들였어. 그분의 마지막 부탁을."

처음 들은 게 아닌 내게도 익숙한 목소리.

"내가 선택한 길, 배신할 순 없어. 곁에 있어야 해, 따라가야 해. 맹약, 어길 수 없는 약속."

난 걸시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게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걸시의 기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힘줄, 초점 없는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간다. 비슷한 상태를 알고 있다. 기가 역류하는 주화입마의 현상이다. 되돌릴 방법은.

개간네!

달비가 먼저 나서서 걸시에게로 달려들었다. 푸른 빛을 발하는 달비의 몸이 걸시와 부딪히자마자 걸시의 기가 순식간에 진정이 되었다. 걸시는 쓰러졌으나 난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어머니, 대체 무슨...."

걸시에게서 들린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였어.

* * *

"정말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소?"

"냉정하게 말씀드려서, 네. 괜찮습니다."

코산은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난 방해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시야나가 걱정되십니까?"

"코산은 강하오. 내 딸이니, 내가 믿어야지. 이제 와 삶에 간섭할 권리는 내겐 없소. 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분이 시야나를...."

"정확하진 않습니다. 여우 녀석의 장난일지도 몰라요."

"여우?"

난 어깨만 으쓱했다.

걸시의 몸상태는 기이했다. 마치 저주처럼 집념이 그녈 속박해서, 어긋나면 몸을 갉아 먹는 독이 되어 버린다. 그 원인이 내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게 가장 나았다. 잘못되면 방금처럼 기가 비틀려서 폐인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젠장, 어쩐지 항상 달비가 걸시 곁에 있더라니, 달비는 알고 있었다. 영수의 힘으로 걸시를 보살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난 기절한 걸시를 업은 채로 코산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잘 부탁하오."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시야나 아버지."

* * *

"일어난 거 알고 있어."

"에헤."

걸시는 내 등에 업힌 채 말했다.

"죄송해요. 걸시, 창피한 모습을 보였어요. 갑자기 잠들어 버리다니...."

"그래."

"너무 피곤해서 그랬나 봐요."

"그렇겠지."

* * *

제리코가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멜카란 사막 중앙 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그곳은 모래언덕을 건너 절벽을 내려와 거석 지대의 틈을 건너야만 갈 수 있는 지하 동굴이었다.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다면 절대 찾지 못할 곳이다.

"으, 추워라. 옛날 옛적에 파르르 무너진 나라가 정말 이런 곳에 파묻혀 있을까요?"

"자유 영주들이 탐하는 옛 제국의 물건들이 왜 비싸겠어? 수천 년 동안 감추어진 도시다. 쉽게 발견하지 못할 곳에 있는 건 당연하겠지."

설상가상 동굴의 안은 더 지랄 같았다. 제리코 말대로 지하 미로다. 개미굴처럼 얽히고설킨 길은 수십 갈래나 되었고, 생김새도 비슷하여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걸시는 달비가 내뿜는 푸른 빛에 의존하여 걸었지만 수시로 자빠졌다. 미궁은 멜카란 전역에 뻗은 나무뿌리처럼 복잡하고 넓었다. 구불구불 뒤엉킨 길을 지나고, 지나고, 지났다. 가끔 사람의 뼈가 널브러진 곳도 있었다. 도굴꾼들의 비참한 말로다.

깊어질수록.

고대 제국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래에 오랫동안 퇴적되어 암석처럼 변한 건물의 기둥.

때론 바닥이 지붕이었고, 천장에는 잔해들이 삐죽 튀어나온 길도 있었다.

고대 제국의 터가 확실하다.

"건드리지 마, 걸시. 무너질지도 몰라."

벽면에 묻힌 철제 그릇을 건드리던 걸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상해.

난 확신과 동시에 의문도 생겨났다.

하루아침에 멸망했다고 했나?

정말 그렇다면.

이 흔적들은 마치....

제국은 통째로 매장당한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소꼽장난을 하듯이.

믿을 수 없이 강력한 힘이 제국을 사막에 파묻히게 한 것이다.

"소름."

거신병에 의해 멸망했다고? 아니다.

상대해 봐서 알아. 거신병은 이런 짓을 할 만큼 강하지 않아.

* * *

제리코는 아래까지 도달하는 데에 며칠이 걸렸다고 했으나.

개눈깔이 보우하사 우린 몇 시간 만에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서 왔던 난잡한 길과 달리 부서지고 풍화됐지만, 마찻길처럼 제대로 된 길.

그 길의 끝을 가로막은 하얀 안개.

그의 말이 맞다. 악마의 힘은 아니다.

하지만 신성하다고? 제리코는 단단히 착각했다.

난 눈을 번득이며 안개로 다가갔다.

안개 너머, 무언가가 있다.

그것에게서 흘러나온 불길함이 안개가 되어 침입자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흔히 개눈은 귀신을 볼 수 있다고들 한다.

그리고.

난 개눈깔이다.

비하의 의미를 접어두고, 그 순수한 의미에 집중하자면 내 눈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걸시."

"네?"

"무서운 거 싫어해?"

"걸시는 강해서 무서운 거 없지요오."

"다행이네."

난 공의 힘을 라멜스타에 담았다.

검은 사제들이 했던 것처럼, 무기에 퇴마의 기를 담아 전력을 다해 안개를 베었다.

촤악-!

안개는 순식간에 솜사탕처럼 녹았다.

그리고.

짙은 안개가 숨겨 왔던 수천 년의 비밀이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났다.

70

겨울바람보다 매서운 한기가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 같다. 안개 너머엔 이해의 범주를 넘은 거대한 도시가 존재했다.

그건 '터'가 아니었다. 파괴되어 부서지지도, 아득한 세월에 삼켜져 무너지지도 않았다. 마치 지금도 지도에 기록되어 있을 법한, 건재하고 융성한 도시였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깊은 지하에 자리한 옛 제국은 불길한 푸른 빛이 감돌아 동이 트는 새벽녘처럼 은은히도 밝았다.

장엄한 도시의 광경에 걸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개 너머의 도시에 흥분하며 달려가던 걸시는 곧 깨닫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걸시는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라면, 언제나 죽음을 경계하는 법이다. 죽음이 잠식한 도시에 두려움과 혐오를 느끼는 건 당연했다. 걸시가 창백한 얼굴로 내 뒤에 숨자, 달비가 어깨에 올라타 걸시의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저게 다 뭐래요? 이상해요. 지금도 사람이 살 것같이 도시는 깨끗한데, 정작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도시의 주인들이 사람이 아닌 것뿐이야."

퀄츠성이 쿤칸 제국의 성 중에서 넓은 편이라고 해도, 이곳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쿤칸 수도쯤 되어야 위용에 비견될까. 옛 제국의 도시는 찬란하던 전성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생명의 불꽃만을 꺼트린 채로 지하에 잠들어 있었다. 도로, 건물, 성벽, 모든 게 다 온존하다. 어찌 이 도시를 멸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수천 년 전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는가?

아치형 다리, 길게 뻗은 도로, 정비된 길과 조각상, 연회를 열 만큼 넓은 광장, 웅장한 건물, 그리고 서대륙의 고성과 비슷하나 보다 높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성. 이 도시가 세간에 알려지면 많은 모험가와 예술가, 건축가와 음유시인들이 기뻐서 춤을 추겠지.

하지만 역시.

이곳은 영원히 파묻혀야 마땅한 도시다.

악마 숭배.

지독하고 끔찍한 행위를 저지른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멸망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

악마의 저주인지, 신의 천벌인지, 의식 실패의 부작용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 두 눈으론 확연하게 보였다.

도시를 감싼 불길한 푸른 빛.

빛을 내는 건 그들.

"도깨비불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보네."

"히익! 도깨비불이라 하시면 멜리사 아가씨의 정원...."

"뭐, 비슷해. 걸시, 무서운 게 없다면서?"

"하지만… 하지만… 걸시는 늑대인간은 죽여도 귀신은 죽이는 방법을 몰라요!"

난 한숨을 내쉬며 도시를 천천히 둘러봤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대체...."

유령은 생각보다 훨씬 보기 힘들다.

정확히 말하면, '지성'을 지닌 유령들이다.

죽은 이의 흔적.

혼의 형태는 전장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말을 하는 귀신 병사는 없다. 혼이 어떻게 지성을 지녀 말을 하는지 모른다. 단지 개눈깔은 그들을 볼 수 있으며, 극히 드물게 보인다는 것만 안다. 그리고 유령을 보아도 대부분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원통함이 극심하면 귀신이 된다고들 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어서 남은 감정이 혼을 붙잡는 걸지도. 그러나 죽은 이의 감정은 물거품보다 의미가 없어 쉽게 꺼지고 만다.

그런데 이곳은 대체 뭐란 말인가?

수십, 수백, 수천.

젠장, 멸망한 옛 제국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신들의 소굴이었다.

* * *

귀신이 내는 푸른 빛이 눈을 현혹하고.

귀곡성은 노이즈음처럼 불쾌히 울려 퍼진다.

이렇게 많은 귀신을 본 건 처음이다.

전생에서.

수십만 명이 죽은 참사의 현장조차 이러지는 않았어.

저놈들은 수천 년 전의 망령들이다. 성불하지 못한 귀신, 고대 제국이 악마를 섬기다가 악마에 의해 멸망했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저놈들은 현현마제의 유령처럼 '악령'일 확률이 높았다.

기껏해야 육체가 없는 귀신이지만 난 몸을 숨기고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뭐하는 새끼들이지."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난 귀신들의 행동이 기이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놈들은 산 자처럼 행동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끔찍한 귀곡성처럼 들렸으나) 빈 가판대 곁에 앉아 물건을 파는 척 호객을 하며, 광장에는 현이 없는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가, 길목마다 바쁘게 뛰어가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되풀이하고 있어. 살아 있을 때의 삶을 잊지 못하는 건가? 자각이 없는 건 아닐 텐데."

"…혼잣말하지 마세요. 걸시, 무서워요."

귀신들은 똑같은 행동을 계속 되풀이했다. 연주가 끝나면, 또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 귀신은 골목길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수천 명의 귀신은 제각기 다른 행동을 했으나, 틀에 벗어나는 법은 없었다.

같은 장면만 되풀이되는 영화다.

귀신들은 도시 곳곳에 있어, 사실상 놈들의 시선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귀신이 보인다. 그리고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니 귀신은 더는 미지의 존재가 아니며 불쾌하기만 하다. 난 거침없이 죽은 자들의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 공포 체험은 없다. 만일 귀신들이 적의를 가져도, 빠따로 내려쳐 성불시키면 그만이다. 엑소시스트, 물리. 지금의 난 목 돌아가는 악령을 만나도 개패 버릴 수 있다.

라멜스타에 공의 힘을 실은 채 성큼성큼 도시를 걸었다.

걸시는 바들바들 떨며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개간네! 개간네!

크르릉.

"크르릉? 뭐야."

달비는 제 딴에는 험상궂은 표정(앙증맞은 쪽에 가깝다.)을 지으며 귀신들을 향해 짖어 댔다. 달비가 짖는다. 농부의 밭에서 잡아먹은 하이에나의 영향일까? 사슴이 짖는 건 몹시 기이한 광경이었으나 애초에 개간네- 개간네- 거리는 사슴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음."

죽은 자들의 도시에 들어온 지 수십 분이 지나자, 난 괜히 오버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귀신들은 불청객에 호기심 내지는 불편함을 보였으나 오히려 피하기만 할 뿐이었고, 아예 관심도 주지 않는 귀신들도 많았다. 난 산 자들의 삶을 흉내 내는 귀신들을 지나쳐, 유난히 짙은 푸른 빛을 내뿜는, 도시 중앙에 우뚝 솟아오른 성을 향해 걸어갔다.

* * *

가까이서 보니 가관이다.

무너진 성벽, 부서진 성문.

아예 왼쪽 성탑은 반파되어 있다.

"이질적이야."

도시 자체는 귀신들을 제외하면 위용 넘치는 대도시와 같다. 하지만 이 성만큼은 어울리지 않게 괴상했다. 우선 망루가 없다. 병사들이 경비를 서야 할 곳은 뾰쪽한 지붕으로 덮어 놨다. 성문은 어떠한가. 해자가 존재했으나 진입로와 도개교가 없다. 파괴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는 구조처럼 보였다. 그 탓에 난 걸시를 업고 해자를 단번에 건너야 했다. 외벽은 무너졌고, 내벽은 없다. 부서진 성문을 지나니 바로 내성으로 향하는 복도가 보였다. 분명히 이 쓸데없이 높고 큰 성은 왕이 살던 왕성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대도시에서, 방어시설이 전무한 왕성이라니.

벌거벗은 왕이 살던 곳이 아니라면.

딱히 병사가 필요치 않았다는 뜻이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 난 주위를 둘러봤다.

파괴된 건 이곳밖에 없다.

마치 비극의 원인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 주기라도 하듯이.

온전한 도시의 중심에 무너진 성이라니.

나는 탐구자가 아니다. 수천 년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관심 없다. 목표는 하나였다. 눈이 지끈거릴 만큼 강력한 힘을 내뿜는 무언가. 성의 지하에서부터 솟구치는 기묘한 힘. 저 수많은 귀신들을 붙잡고 있는 무언가가 악마가 아니라면, 이 성에서 느껴지는 어떤 힘이 원인일지도 몰라.

성문을 지나 복도를 거닐었다.

역시 기이한 곳이다. 도시에는 악마 숭배의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성에 들어서자마자 복도 양옆에 장식된 수많은 악마 조각상을 보며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성이 악마 숭배의 온상지라는걸. 어쩌면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이듯, 도시의 악마 숭배자들은 이 성에 모여서 악마를 숭배했을 수도 있었다.

온갖 우상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복도를 지나서 아직 썩지 않은 두 개의 거대한 나무 문짝을 열었다. 걸시가 입을 다물고 공포에 질린 것과 달리 내 행동거지엔 거침이 없었다.

끼이이익-!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다. 적막하던 성에 경첩이 고함을 지르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안, 그레이트 홀. 대리석 바닥과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넓은 홀을 마주한 그 순간이었다.

[오랜만의 손님이로구먼!]

담담한 척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속으론 심장이 덜컹했다. 갑자기 귀신 한 놈이 나타나 말을 걸었다. 우샤스 누나의 면상으로 단련하지 않았다면 비명을 내질렀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귀신들과 달리 얼굴이 썩어 굼벵이가 기어 다니는(유령임에도) 끔찍한 얼굴의 남자 귀신. 놈은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걸어왔다.

[젊고, 싱싱하고, 아름답고, 멋져. 나의 성에 마땅히 어울리는 손님들이로군. 어디 보자, 대충 수천 년 만인가? 방명록을… 이봐, 메데슨!]

"추워졌어요. 귀… 귀신이 나타난 걸까요?"

걸시는 놈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달비는 귀신을 향해 연신 욕을 해 댔는데 귀신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안 보이는 것처럼. 설마 귀신도 영수는 못 보나?

[네이~! 베기슨 성주님. 집사장을 부르셨나이까?]

[방명록을 어디에 뒀지?]

[죽은 자를 찾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요.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딨는진 모르겠지 말입니다요! 호호.]

[쓸모없는 녀석. 어쨌든 오랜만의 손님이니 대접을 해 드려야지. 나의 피앙세, 인사드리렴!]

천장에서 뚝 떨어진 귀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의 모습을 한 귀신이 날 향해 예스럽게 인사한다.

[이방인이여. 베기슨가의 마님이 될 날 뵈어 영광으로 여기세요! 오랜만의 손님이니 내 손등에 키스할 영광을 주도록 하겠어요.]

귀신이 손등을 내미나 난 무시하고 걸어갔다.

[호호호.]

[하하하.]

[히히히.]

세 유령은 저들끼리 장단 맞추며 놀더니 노래까지 불러 댔다.

난 안 보이는 척했으나 귀신 놈들도 내가 자신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 베기슨의 명성은 천하에 퍼져 나가니, 가장 위대한 악마술사는 누구인교?]

[베기슨! 베기슨!]

[대악마마저 무릎 꿇리니, 악마는 베기슨의 노예, 베기슨의 노예.]

[호호호. 수도의 어린 년들은 말하지. 벤쟈는 미쳤어. 난 보답하지. 팬티 속의 쥐, 코르셋 안의 거미, 그림자 안의 악마, 무덤 곁의 가족들. 호호호.]

응접실을 뛰어다니는 귀신들.

뭐였더라, 전생에서, 뮤지컬 영화?

할로윈 주제, 긴 다리의 해골 신사가 나오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엮이지 않으려고 애써 무시하며 '힘'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다녔다. 성안은 제법 복잡했다. 게다가 놈들이 내가 어딜 가도 따라다녔다. 곁에서 농담을 건네면서. 귀족 부인의 침실을 지날 땐 여자 귀신이 날 침소로 초대했고, 베기슨이라 부르는 남자 귀신과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기도 했다. 주방을 지나자 집사 귀신은 디너 메뉴를 소개했고, 하인들의 숙소처럼 보이는 방에서는 베기슨이 목놓아 엉엉 울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행동은 장난처럼 느껴졌다.

절정은 지하 감옥에서였다.

악마 숭배의 증거가 잔뜩 남아 있는 지하 감옥에서 지랄을 해 대는 통에 난 귀신들에게 반응하고 말았다. 기껏 눈이 마주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놈들은 흥분하며 소리 질렀다.

[손님이 우릴 본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저주받은 우릴 볼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텐데.]

[흐흐흐. 악마가 아니고서야!]

[너, 나 보이니?]

[보여? 보여? 보여?]

난 결국 참지 못했다.

"쌍판대기 안 치우냐."

짱구, 단비, 둘리가 옆에서 지랄하는 것 같았다.

"확 주둥이를 뜯어 버릴랑께."

내 말에 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성불을 시켜야 할 모양이다.

"미안해요오. 도련니임."

상황을 모르는 걸시만 울상을 지었다.

71

공의 힘을 담아 라멜스타를 휘둘렀다. 가벼운 힘이 아니다. 죽음의 기사를 죽인 힘이자 개방의 절기, 타구봉법의 무학의 묘리를 담아 바위를 조각 낼 강력한 일격이었다.

귀신들은 라멜스타에 닿자마자 밀가루 포대가 터진 듯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내 귀신들은 부활했다.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귀신들은 오히려 기뻐 날뛰기까지 했다.

[오오오! 우릴 볼 수 있구나! 그래, 팔천부의 수장이자 샤흐타베의 일성, 서왕보다 위대한 자, 북쪽의 짐승 인간들마저 두려워하는 베기슨 성주를 알현한 소감이 어떠한가? 하하하!]

썩은 얼굴의 남자 귀신은 가슴을 펴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하흥, 보여지는 건 오랜만이라서 흥분됩니다요. 수천 년 만에, 보여지고 있어, 내 탄탄한 근육을 봐! 죽은 사람치고는 쓸만하잖아? 매끄럽게 이어지는 복근과 허벅지… 보여 주고 싶어! 잘 봐! 잘 보라고!]

집사장 귀신은 몸을 비비 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변태는 귀신보다 조금 더 무섭기에 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두 나르시시스트 귀신과 달리 여자 귀신은 태도가 달라졌다. 침묵하며 뒤로 물러나더니, 머리카락을 내려 제 얼굴을 감췄다.

"두 번 뒤져."

성가신 귀신들이 자꾸 눈앞에서 알짱거린다. 난 공의 힘과 더불어, 달비의 힘도 빌렸다. 조화로운 영수의 힘이라면 저 불길한 귀신들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귀신들은 터져서 없어졌다가도 곧바로 살아났다.

하하하-!

히히히-!

귀곡성이 고막을 찢어놓는다. 걸시 또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렸다. 무서움에 바들바들 떠는 걸시였으나 내 곁에선 멀찍이 떨어졌다.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나도 무서워하는 것이다. 시발, 힘의 근원을 찾기도 전에 귀머거리가 될 것 같다.

방출의 마법으로 공의 힘을 쏟아 냈으나 역시 유령들을 없애지 못했다.

[하하하. 필멸의 힘은 닿지 않는단다.]

[저주를 풀 자는 없어. 신이 아니고서야!]

[강하구나, 너? 그래서? 강해서 뭐? 우릴 죽이지도 못하는데! 내 엉덩이나 핥으렴! 히히.]

[여긴 내 성이니, 내가 법이로다. 당장 날 기쁘게 할 춤을 추거라. 아니면 괴롭혀 줄 것이니라.]

귀신들이 날 조롱할 때였다.

[…닿았으면 좋겠어.]

뒤에 물러나 있던 여자 귀신의 작은 혼잣말.

두 귀신은 순간 입을 다물고 사납게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정적.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귀신들은 다시 유쾌한 척 낄낄거렸다.

[무섭지? 무섭니? 무섭지?]

[내 성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니? 이 도둑놈아! 손톱이 빠질 것이야, 엉덩이에 종기가 날 것이야, 꿈을 꾸더라도 악몽만 꿀 것이야, 머리가 모두 빠져 대머리가 될 것이야.]

"입 좀 여무세요. 씨발."

[센 척하네! 무서우면서! 내가 누군지 가르쳐 주마. 듣는 귀, 놀라서 도망갈 테니 잘 부여잡거라. 네 혼이 빠져나가서 도시의 양분이 될지도 몰라! 자, 잘 들어라.]

썩은 얼굴의 귀신이 노래처럼 음률을 넣어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난 두 귀를 막았으나 귀곡성은 귓구멍을 파고들어 선명하게 들렸다.

[육십만 명의 영혼을 제물로 바친 극악무도한 괴옥군주, 찬란한 제국을 사리사욕을 위해 디저트 먹듯 먹어치운 반란의 공작, 아이들이 노래 부르네, 베기슨 베기슨! 미친 공작! 날 먹지 마! 노인들이 노래 부르네, 베기슨 베기슨! 잘나고 잘났다네. 그리하여 제 백성을 먹어치웠다네. 룰루, 랄라~]

오페라 영화처럼 과장된 행동.

그들을 지켜볼수록 난 뺨이 자꾸만 실룩거렸다.

분명 짜증 나는 놈들이다.

악행 또한 어떤 폭군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연민이 드는 건지.

'고'의 성물을 얻은 후 내 눈은 감정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숨기는 것에 익숙한 자는 강제로 볼 수 없으나 걸시나 살인 농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자들은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설마, 귀신들의 감정까지도 볼 수 있다니.

유쾌하게 포장된 격렬한 상실감과 슬픔, 죄책감.

[무섭지? 무섭....]

"아니."

누군가 알아봐 주길 원하듯이 숨김없이 드러냈지만, 말과 행동은 감추기엔 급급하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차라리 보지 못했다면 놈들을 무시했을 텐데.

"슬퍼 보여."

광대처럼 익살맞지만 한은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자들보다 깊었다.

"이유가 뭐지?"

귀신의 한을 풀어 주면 성불한다고 하던가?

내가 무슨 무당도 아니고.

"날카로운 말뚝이 가슴에 여러 개 박혀 있는 느낌이다. 말해 봐. 뭐가 너희들을 그렇게 괴롭고 슬프게 하는 거냐?"

춤추고 노래 부르던 귀신들은 내 말이 끝나자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둡고 더러운 성에 정적이 감돈다.

긴 침묵.

걸시의 훌쩍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때였다.

[흑흑....]

여자 귀신의 울음.

오한이 돋을 만큼 깊고 탁하다.

비견하자면 제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이 저리 원통할까.

여자 귀신은 구슬피 울며 내게 사정했다.

[괴로워. 떠나게 해 줘. 수천 년 동안 끝나지 않아. 제발. 제발. 제발.]

남자 귀신은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리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명목이 없다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저들을 구해 주게. 나 때문에 몇천 년을 고통받고 있다네. 난… 난 악마보다 못한… 난....]

그리고 이어진 침묵.

낄낄.

비통해하던 그는 또다시 낄낄 웃기 시작했다.

[뭐지? 넌 뭐지? 마치 사제한테 고해성사하듯, 너에겐 내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싶어. 어떻게? 꽉 닫힌 쐐기를 뜯어 내고 내 마음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 그래, 우리 탓이야. 하하하하! 죄를 지었어. 죽은 후에도, 나의 백성들은 이 저주받은 도시에 갇혀 있다. 어찌 이 죗값을 치를까?]

광인처럼 박장대소를 하는 베기슨 옆에, 다른 귀신이 읊조린다.

[수천 년 동안 손님이 없었지. 죽어서도 우릴 싫어해. 이해하지만, 너무 외로워.]

그의 감정 또한 비통함으로 가득 찼으나 베기슨과는 달랐다. 죄책감보다 외로움이 더 컸다. 이들 중 가장 슬피 우는 건 여자 귀신이었다. 동정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을 돌린 것도 그 때문이다.

난 그들의 사정을 알고자 했다.

"…제국은 하루아침에 멸망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거신병들이 한 짓입니까? 악마 거인들이?"

엄마의 일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기록과 달랐다.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내던 베기슨이 대답했다.

[우리가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였나? 푸스스! 거신병은 한 주먹감도 안 돼! 하지만, 하지만....]

놈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방금까지 보였던 죄책감과 슬픔은 온데간데없고, 사악하기까지 한 웃음이었다.

[강한 자, 힘을 추구하는군. 넌 나와 같다.]

"좆 까는 소리 마."

[영혼을 묶는 저주. 그 힘을 찾고 있다는 걸 난 안다. 할 수 있을까? 네가 할 수 있을까? 힘을 원해? 원하겠지. 넌 거절하지 못해. 난 너 같은 자를 잘 안다. 그러니, 기회를 주마. 따라와.]

베기슨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따라오라는 말만 남긴 채 아래로 사라졌다. 집사가 그를 따라 아래로 사라졌고, 여자 귀신은 둘을 따라가다 머리만 내민 채 날 바라봤다.

[오지 마.]

이내 지하로 사라지는 귀신.

난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답은 정해졌으나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귀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건 저들이 이끄는 곳에 도시 전체를 감싼 강력한 힘의 원인이 있다는 것. 베기슨은 도시의 영혼들이 저주에 걸려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고 했다. 악마의 힘일까, 아니면.

"컬렉션 하나 추가할지도."

"훌쩍, 걸시를요?"

"비켜, 걸시."

난 라멜스타를 머리 위로 추켜올렸다. 유령 놈들은 벽을 통과할 수 있었지만, 난 지름길을 만드는 법을 알았다. 기다란 봉에 끝을 철퇴처럼 만들어 두 손으로 쥐고 힘껏 내려찍었다.

콰아앙!

지하 복도가 부서지고.

아래로 향하는 구멍이 뚫렸다.

난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향해 몸을 내던졌다.

걸시는 울부짖으며 날 뒤따라왔다.

* * *

귀신 놈들과 만나기 위해서 구멍을 여섯 개나 더 뚫어야 했다. 성은 드러난 지상보다 지하가 더 넓었다. 수천 년 전의 건축 기술이 이리도 좋았다니. '지름길'이 아니었다면 가장 맨 아래의 지하층까지 도달하는 데에 꽤 애를 먹었을 거야.

"걸시, 깨꼬닥."

"누워 있어."

지하로 향할수록 공기가 희박해졌다. 무공을 배운 육체와 달비 덕분에 난 숨 쉴 만했으나 걸시는 버거워 보였다. 걸시를 눕히고 난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하...."

성의 가장 깊숙한 지하는 드넓은 공동이었다. 가구 하나 없는 허전한 곳이나 자세히 보면 기괴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벽면과 바닥에는 기괴한 그림과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벽에 걸린 동물 박제들은 수천 년 동안 썩지 않고 멀쩡했다. 방의 중심에는 염소 머리와 인간의 몸을 한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그 앞에선 세 귀신이 같이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악마숭배를 하던 곳인가."

기괴한 조각상에서부터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힘.

악마와는 느낌이 달라.

강렬한 푸른 빛을 내뿜는 조각상의 손, 석상이 쥐고 있는 무언가.

귀신들이 보고 있는 무언가가 이 막강한 힘의 원천 같았다.

"역시."

도깨비불처럼 푸르게 빛나는 '구슬'.

이젠 익숙하다. 담긴 힘은 다르더라도 난 알 수 있었다. 공, 득, 고의 성물처럼 저 구슬 또한 아지비카교의 성물이라는 것을.

석상으로 걸어가자 여자 귀신이 말을 걸었다.

[저건 악마의 속삭임이다. 가까이 가선 안 돼.]

그 말에 베기슨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야! 저건 악마의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악마가 소중히 품었지.]

[오, 나의 피앙세. 날 원망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부디 내 말을 믿어 주게나. '놈'이 우릴 해친 것과 별개로 저 힘은 악마와 결코 어떠한 상관도 없다네. 단지, 난 저 힘을....]

베기슨은 또다시 비참한 표정이 되어 한참을 괴로워했다.

고통을 참아 내며 그는 힘겹게 말했다.

베기슨은 이 구슬을 악마에게서 훔쳤다고 했다.

또한 악마가 '영혼석'이라고 부르던 걸 들었다고 한다.

영혼석.

멜리사 누나가 알려 준 아지비카교의 열두 가지 성물.

같은 이름을 가진 성물이 있다.

"영혼의… 성물인가?"

욕심이 피어오른다.

멍하니 푸른 빛을 내뿜는 영혼석을 바라볼 때였다.

개간네!

달비의 욕에 난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걸시!"

걸시가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졌다. 난 재빨리 몸 상태를 확인했다. 마치 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주전자처럼 뜨겁다.

"어우우. 왜 이렇게 어지러워요?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요지경이다,요지경. 헤헤."

난 걸시를 둘러업고 구멍을 향해 위로 뛰었다. 경공을 발휘하여 수월히 위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중간에 침대가 놓인 방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걸시가 위급한 건 공기가 희박해서가 아니야.

예상대로 영혼석과 멀리 떨어져 침대에 눕히자 걸시의 몸 상태는 다시 좋아졌다.

"넌 여기 있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영혼석과 반응했던 거야.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멜리사가 왜 걸시가 필요할 거라고 말했는지.

내게 필요한 게 아니라, 걸시에게 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72

다시 돌아왔을 때도 세 귀신은 영혼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눈빛에 원통함이 서렸다. 베기슨의 시커먼 눈은 분노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망할!]

갑자기 베기슨이 영혼석에 손을 뻗었다.

파스스!

하지만 성물에 닿지 못하고 영혼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잿가루가 된 베기슨에도 두 귀신은 놀라지 않았다. 이내 영혼석이 푸른 빛을 발하며 작은 불씨를 토해 냈고, 잿더미에 불씨가 닿자 베기슨은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영혼은 이 저주받을 것에 속박되어 있다.]

[악마의 농간이었어.]

[차라리 삼신의 심판을 받아 나락에 떨어져 죗값을 치르는 게 나았을 텐데.]

난 여기까지 오며 마주했던 수많은 귀신들을 떠올렸다. 죽어서도 삶을 그리워하는 자들, 억울함과 분노조차 아득한 세월에 희석되어 그리움만 남은 영혼들이다. 난 견딜 수 있을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으며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삶.

발버둥 치다 비참하게 죽었던 삶.

그리고 확실한 파멸에 대항하는 삶.

처음이었다.

내 인생이 다른 이의 삶보다 낫다고 생각한 건.

아지비카교의 성물을 취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영혼의 성물, 다른 성물과는 달리 스스로 힘을 과시하듯 뿜어내는 저 성물도 결국 내게 있어선 목구멍으로 넘겨야 하는 음식이다. 성물을 삼키면 저들을 묶는 사슬이 풀릴까? 상관없어. 구원자가 될 생각은 없다. 난 내 욕심으로 영혼석을 향해 다가갔다.

[잠깐. 멈춰.]

가까이 다가갔을 때 베기슨이 손을 뻗어 날 가로막았다.

그가 날 본다.

[착한 아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넌 영혼석을 얻으려고 하겠지. 그러니 말해 주마.]

베기슨은 말하지 않아도 될 사실을 내게 얘기했다. 그는 내가 영혼석을 없애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얘기해서 겁주는 행동이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잊힌 제국의 향취에 속아 넘어가 영혼석을 차지하기 위해 성을 침범한 가소로운 자들이 있었다. 세간에서 제법 방귀깨나 뀌는 자들이었지. 언제나 가식적인 마법사 놈과 역겨운 땀내의 무인, 때로는 삼신 교단의 사제들과 북쪽의 짐승 인간들까지, 욕심에 사로잡혀 영혼석을 얻고자 덤벼들었다. 모두 죽었지. 흔적도 없이, 영혼도 남기지 않고.]

베기슨의 말이 길어지자 집사 귀신이 버럭 화를 냈다.

[뭐하시는 겁니까 주인님! 이자가 겁먹고 도망치면 어쩌자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절세보물로 속여서 제 꾀에 넘어가게 하자구요!]

[닥쳐라. 보면 모르겠느냐? 이자는 미친놈이다. 죽는 게 분명한 함정이라도 꿀이 발라져 있으면 핥아먹기 위해 덤벼드는 머저리란 말이다!]

"…다 들리는데요, 님들아."

[죽음을 극복한 자는 한 놈밖에 없었다. 스스로 마제라 칭하는 고약한 마법사였지. 하지만 놈도 기이한 마법으로 제 몸을 갉아먹는 힘을 뱉어 냈을 뿐, 영혼석은 얻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제, 뱉어 내다.

그놈이다. 현현마제.

[영혼석은 영혼을 가진 이를 삼킨다. 영혼이 있는 자는 영혼석을 품지 못한다. 영혼석은 그릇이며, 영혼은 물이기 때문이다. 그릇에 물을 담을 순 있어도, 물에 그릇을 담진 못하는 것이다.]

베기슨은 껄껄 웃었고, 집사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으며, 여자 귀신은 슬피 울었다.

[더군다나, 이 도시엔 수만 명의 영혼이 영혼석에 묶여 있지. 네 그릇이 아무리 커도, 어떻게 수만 명의 영혼을 품을 수 있을까? 호수에 몸을 담근다고 하여 품었다고 하겠느냐, 너 또한 물결의 일부가 되어 영원토록 도시에 갇힐 것이다.]

그의 협박이 계속될수록 난 의문만 짙어질 뿐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겁니까? 저 변태 말대로 내가 겁먹고 도망치면, 당신들 입장에선 죽도 밥도 아니게 될 텐데. 영혼석이 날 삼킬지, 내가 영혼석을 삼킬지 당신은 도박을 걸어도 잃을 것 하나 없잖습니까?"

이기적인 폭군, 죄책감에 시달리는 머저리.

하지만 지금, 날 향하는 목소리는 누구보다 당당했다.

[말했잖느냐.]

[넌.]

[나와.]

[같다고.]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곧장 영혼석을 향해 달려가 허겁지겁 영혼석을 집어삼켰다.

[으아! 진짜 미친놈이네!]

[흑흑… 흑흑. 불쌍한 사람, 그래도 말동무가 생겼군요.]

[어? 어?]

"…응?"

다아! 다아! 다아!

푸른 빛의 구슬을 삼켰다.

몸이 순간 없어진 줄 알았다.

아프진 않았으나 허무했다.

내 육체가 있는지 없는지 구별 못할 만큼 난 허전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내 몸은 영혼석이 발하는 빛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태양처럼 밝으나 그 색은 차분한 푸른 빛이니, 달과 가깝다.

[무슨...!]

[나… 나 해방되어 가.]

[자유, 자유, 자유!]

커진다.

점점 커진다.

믿을 수 없다.

거인이 된 것 같다.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쏟아지는 폭우.

화산 폭발.

태풍.

모든 재해가 내 몸 안에서 벌어진다.

작디작은, 내 하찮은 육체가 품기엔 너무 거대하다.

이래도 돼?

한계.

아니.

끝이라고 생각해도 또 커진다.

몸을 채우는 충만한 기.

그 느낌은 안다.

달비의 힘으로 몸을 채우면 난 인간을 뛰어넘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히어로, 인간의 한계를 넘은 초인.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한계를 넘어섰다.

베기슨 말처럼 영혼을 그릇이라 하면 접시만 한 내 영혼은 담을 수 없는 거대함에 짓눌러 부서지고 있었다. 그릇이 부서지면, 영혼이 부서지면, 나는 무엇이 되나? 그들처럼 흐름의 일부가 될까? 저주받은 도시에 묶여 영겁의 세월을 저놈들과 노래나 불러야 할까?

하지만 두렵진 않다.

깨달음.

난 방법을 안다.

휘몰아치는, 깎아내리는, 넘실거리며 덮쳐오는.

힘의 격류를 잠재울 방법을.

심법.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마음은 한계가 있는가?

라니스타, 그가 말했다.

베지 못할 건 없나니.

내공이 느껴진다.

달비의 것이 아니다.

녀석의 조화롭고 풍부한 자연의 기가 아니다.

영수의 힘도, 성물의 힘도 아니다.

천안통은 보고 있다.

배꼽 아래, 단전에 하늘을 뒤흔들고 땅을 진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깨어져 새어 나오다 결국 부서져 폭발한 힘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단전으로 모여 갔다.

댐이 무너져 막대한 물이 수해를 일으키듯, 막강한 힘이 벽을 두드린다. 그 힘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단전에 스며든 힘을 게걸스럽게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순수한 힘, 내공은 외부의 힘이 아니다. 지금껏 채워 왔던 힘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나 있었겠어.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배가 찢기고 심장이 멈췄다.

하지만 아프진 않다.

머리가 열렸다.

그야말로 뚜껑을 열고 힘을 받아들인다.

지하에 있음에도 하늘이 보였다.

그 너머, 달과 별도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끝없는 무저갱이 보인다.

깨달음.

강제적인 변화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였다.

새로운 감각, 새로운 깨달음.

영혼의 힘이 일깨워 줬다.

[생멸번천, 4륜과 9산8해 육천의 깨달음은 아직 닿지 못하니. 대천세계에 닿기 위해선 스스로 수미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수미를 이루면 넌 하나의 세계를 결성한다.]

[뭔 개소리야?]

라니스타의 가르침.

도통 이해할 수 없던 단어들은 겪어 봄으로써 내가 알던 단어들로 치환되어 갔다.

그동안 배웠던 내공심법들의 구절들이 이해가 갔다. 지금까지 난 무공 경지의 깨달음이라 함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했다. 하나 라니스타의 경지는 그런 하찮은 게 아니었다. 라니스타가 말한 경지는 제 몸 안에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건 한계가 아닌 기초이자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안에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내 안에도 세계가 있다. 외부의 힘으로 개안했으나, 나는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천안통이 보지 못하는 건 없다. 기의 흐름, 혈관은 줄기다. 단전은 뿌리다. 뿌리에는 세계가 있다. 세계를 인지하고, 세계를 품는다면.

하찮은 그릇의 관념에서 벗어나.

수십 만명의 영혼이 귀천하며 쏟아 내는 힘을 내가 모두 품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라니스타가 말한 '뜻하는 대로 두는' 경지는, 현실을 간섭할 만큼 거대한 '자신의 세계'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라니스타의 단전은 이미 자신의 세계를 넘어 현실을 엿볼 정도로 거대했고, 그렇기에 심검. 마음으로 휘둘러 생명을 베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을까.

아, 경이롭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지할 땐 두렵기만 했던 그가,

이젠 진정 존경하며 숭배의 마음까지 들고 말았다.

해가 뜬다. 달이 저문다. 꽃이 핀다.

느껴진다.

내 안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근본무명, 실체가 없으나 분명 세계와 같으니, 따라서 그릇의 크기는 상관없다.

빌어먹을, 그가 추구하는 무공은 단순히 강해지는 게 아니었어.

경지는 이치를 품는 것.

그 간결한 순리를 깨닫자 나만의 세계, 내공이 만들어졌다.

[믿을 수 없어.]

[물이 그릇을 담았다.]

[그가… 모두를 품었어.]

난 눈을 떴다.

지금까지 내가 눈을 감았다고 인지조차 하지 못해서 살짝 당황했다.

"끅."

나는 앞을 보았으나.

그 너머, 너머, 너머까지 보여 눈을 다시 감아야 했다.

"눈이 여섯 개나 더 생긴 기분이야."

예전의 시야.

평범한 사람들이 보는 시야를 되찾기 위해선 로브의 두건을 찢어 눈을 칭칭 감아야 했다. 맹인과 다름없으나, 그제야 난 예전처럼 앞을 볼 수 있었다. 천안통의 성능이 쓸데없이 너무 강력해졌어. 적응될 때까진 당분간 리신 코스프레를 해야만 하나.

* * *

성 밖으로 나가자 수만 명의 영혼들의 귀천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이한 힘을 지닌 아지비카교의 성물.

영혼석이 내게 흡수되며 멸망한 제국의 귀신들은 수천 년 만에 '죽음'을 되찾았다.

경이로운 장관이었다. 난 잠시 걸시를 데리러 가는 것도 잊은 채 위로 치솟는 영혼들의 행렬을 지켜봤다. 해방된 영혼들은 기삐 울며 기꺼이 안식을 받아들였다.

"축하라도 해야 하나?"

언뜻 폭죽을 터트린 듯 영혼들이 발하는 빛은 눈부셨다. 하지만 분위기는 새벽녘의 숲처럼 고요했다. 정막한 도시를 채우던 영혼들이 새푸른 빛깔을 흩뿌리며 위로 치솟자 도시는 밤바다에 잠긴 것처럼 검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영혼들의 움직임은 해일처럼 도시 주변을 휘돌았다. 수천 년, 그간의 그리움일까. 몇몇 영혼은 잠시 도시에 잔상처럼 머물다, 이내 느릿한 움직임으로 위로 향했다.

"…저들이 가는 곳은 어딜지."

죽어 본 적 있는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하지만 죽어서 다시 태어나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확실히 평범한 현상은 아니다.

죽었다는 건 알아도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영혼이 있다면 저승도 있을까, 아님 저들도 나처럼 곧바로 환생을 할까.

마지막 영혼이 지하 도시의 천장을 뚫고 사라지자.

귀기를 발하던 귀신들의 도시는 그제야 잠이 들었다.

[아, 이런...!]

귀천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성에서 세 명의 귀신이 위로 치솟았다.

그들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리듯 하늘을 향했다.

[맙소사!]

[오오! 느껴진다. 난 떠나고 있어!]

집사 귀신은 귀천하는 도중에도 춤을 췄다.

여자 귀신은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을 드러냈다.

웃고 있었다.

[나마저… 허락해 주는 것이냐.]

마지막으로 베기슨이 떠났다.

떠나던 중에 그는 날 발견했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난 뻐큐를 날리며 화답했다.

[…위대한 자가 될 자여.]

베기슨은 끝까지 수다스러웠다.

[붉은 눈의 기사가 깨어났다.]

이상했다.

그는 기원하던 안식을 찾았으나 얼굴은 몹시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오, 세상에. 느껴져. 놈이 온다. 묵시록의 기사가 널 찾고 있어. 달아나! 어떤 나라가 멸망하겠지만, 다른 대륙은 안전할 거야. 도망쳐. 부디, 묵시록의 기사가 널 찾고 있어.]

베기슨은 경고를 남긴 채 사라졌다.

73

영혼석.

아지비카교의 성물이 속박하고 있던 건 죽은 자의 영혼.

라니스타가 전에 말했다. 사람은 심기체가 있으니.

심이 영혼이고, 육체가 악마에 의해 죽었다면.

그들의 '기'는 어디에 있을까?

잔재된 기.

영혼석을 흡수하였을 때, 난 수만 명의 영혼이 남긴 바다처럼 거대한 기를 흡수했다.

죽은 자들의 넋을 '기연'이라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이건 분명 호재다.

라니스타가 보면 또 미친놈이 이상한 거나 주워 먹고 다닌다고 뒤통수를 때렸을 것이다.

"득템."

영혼의 성물을 흡수했다. 별달리 특별한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기운이 솟아오를 뿐이다. 나는 단전에 내공을 담았고, 그 수준은 과히 자만 떨지 않고 말하건대 무림의 경지, '절정'에 다다랐다.

"확실해졌군."

왠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택한 멜카란행이다.

치밀하게 짜인 계획이나 목표도 없었다.

하지만 난 멸망한 고대 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얻었다.

이 또한 '득'의 성물의 힘이다.

세계의 정점에 올랐던 현현마제가 죽어서까지 탐하던 힘다웠다.

"…아니면 성물이 성물을 부르는 걸지도."

이상하긴 했다. 아지비카교의 성물, 전설처럼 전승되던 강력한 신의 유물을 난 일 년 사이에 4개나 얻었다. 물론 대부분 쌍둥이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난 마치 성물이 서로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면 우선 멜리사에게....

도려어너님~!

저어어 잊어버리리신 거 아니이이시죠~!

성의 지하에서부터 걸시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아, 맞다.

까먹을 뻔했다.

* * *

걸시는 천으로 눈을 꽁꽁 싸맨 날 보더니 기겁하며 소리 질렀다.

"으아! 괜찮으세요, 도련님? 눈이라도 다치셨나요?"

"아니."

난 걸시의 상태를 살피며 대꾸했다.

"너무 잘 보여서 그래."

"…이상해요. 천으로 눈을 가리면 당연히 안 보이는데 너무 잘 보여서 그렇다는 말씀은 이상, 이상한...."

"이해하려 하지 마. 나도 모르니까."

영혼석이 사라진 후 걸시의 몸은 괜찮아졌다.

"걸시."

"네?"

"잠시 눈 좀 붙여."

"네에?"

"곧 돌아올게."

난 걸시를 침대에 눕히고 홀로 성에서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개눈깔의 성능이 좋다 못해, 방위군의 초계기 수준이다.

* * *

콰르릉-!

귀신이 떠나고 고요함이 감돌던 도시에 이변이 발생했다. 광장이 무너지며 깊고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지하에 파묻힌 도시라도 무저갱의 깊이는 어김없이 깊었다. 창백한 도시에 나타난 시꺼먼 무저갱은 불쾌한 이물질이었다. 이윽고 웅덩이는 피로 차올랐고, 붉은 호수가 되었다.

"거신병."

피의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괴한 거인.

못이 박힌 악마들을 쇠사슬에 묶고 무기처럼 휘두르던 거신병이 나타났다. 전에 검은 사제들과 싸웠던 거신병과 같은 놈이었다.

쿵! 쿵! 쿵!

수십 미터의 몸을 이끌고 기어나온 놈은 핏물을 흘리며 날 찾아 헤맸다. 놈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지진이 난 듯 울렸다. 난 침착하게 거신병의 행태를 살폈다.

"후."

놈에게 신경 쓰던 그사이.

찰나의 순간에 두 개의 구덩이가 또 생겨났다.

아니길 바랐지만 역시 두 개의 구덩이는 핏물이 차오르더니 두 마리의 거신병이 연달아 기어나왔다. 이로써 세 마리의 거신병이 도시에 등장했다. 집채만 한 손을 휘두르며 건물을 부수는 놈들이 찾는 건 아무래도 나인 모양이다.

거신병이 세 마리.

다아?

"괜찮아."

그래도 달비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

난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설렘과 벅참을 느꼈다. 향상심은 각성을 부른다. 지금 같은 경우엔 되레 각성이 향상심을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험해 보고 싶다. 끓어오르는 힘. 싸움을 즐기는 악귀 아수라가 된 것처럼 난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번에 달비는 뒤로 물러나 날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녀석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게 호기심이 아닐까 싶었다.

"내공은 의지의 발현과도 같다."

단전으로부터 내공을 끌어올려, 사지에 공급하고 머리를 깨우쳤다. 내공을 다룰 수 있게 돼서야 왜 라니스타가 달비의 힘이 무공과 어울리지 않아 내게 신선의 자세만 가르쳤는지 깨달았다. 달비의 힘은 조화롭다. 누군가를 해칠 파괴의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강력하고 정순한 힘이지만 무공의 이치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내공은 아니다.

내 몸 안에 흐르는 힘, 이 힘은 순수히 내 의지에 영향을 받는다.

파괴의 의도를 담아 내공을 운용하니 노도처럼 매서운 힘이 솟구쳤다.

"벤다."

검.

라멜스타를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검으로 변환시켰다.

"죽인다."

검기가 생겨났다.

무림의 경지로, 절정에 이르렀다는 증거.

이 세계에선 마스터라 불리며, 검에 통달했다는 의미다.

달비의 힘을 빌려서 펼쳤던 검기는 사실 내 힘이 아니었다. 그런 반푼이 마스터가 아니라, 지금의 난 온전히 내가 가진 힘만으로 검기를 펼쳤다.

슈욱-!

검기를 드러내자.

세 마리의 거신병이 곧바로 날 발견하고 쇠사슬을 휘둘렀다.

유조선의 닻 사슬처럼 굵고 긴 쇠사슬은 건물을 수수깡처럼 부수며 날 공격했다. 전엔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산을 깎아내리는 거신병의 공격에 정면으로 대적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피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난 능히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서, 아래로.

가장 간결하지만 가장 위협적인 공격.

난 일도양단의 기개로 검을 내려쳤다.

콰지직!

일격에 통나무보다 굵은 쇠사슬이 끊어졌다.

곧바로 사슬에 묶인 악마들이 몸에 박힌 못을 소나기처럼 쏟아 냈으나 난 피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모두 쳐 냈다. 내공을 얻은 뒤 깨우친 검막의 경지였다.

공격을 피해 낸 난 거신병을 향해 뛰어들었다. 못악마의 머리를 짓밟으며 순식간에 거인의 머리 위로 올라선 난 다시 한번 일도양단의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수십 미터의 거인을 일격에 양단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콰드드득-!

거신병의 살점, 두개골을 지나 쇠사슬을 부수고 뼈를 잘라 내며 일격에 정수리에서 가랑이 끝까지 베어 냈다. 내 검을 가로막는 건 없었다. 수십 미터의 거인이 피를 내뿜으며 반으로 갈라졌다. 예전이라면 결코 꿈꿀 수 없던 경지다.

휘익-!

흐름은 놓치지 않는다.

한 마리의 거신병을 도륙 낸 난 내공 운용을 멈추지 않으며 두 마리의 거신병을 향해 쇄도했다. 놈들은 동시에 쇠사슬을 휘둘렀으나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쇠사슬을 피하고 거신병의 다리를 잘라 냈다. 쓰러지는 놈을 뒤로하고 남은 거신병의 팔을 타고 뛰어들어 가 얼굴에 검을 쑤셔 박았다. 악마라고 하나 뇌를 터트리면 죽는다. 놈의 얼굴에 박힌 검을 힘껏 위로 들어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곤죽 냈다. 그 후 다리가 잘려 쓰러진 거신병의 목을 내려쳐 끝장을 냈다.

"하아, 하아."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세 마리의 거신병은 곧 재가 되어 흩어졌으나 전투의 흔적은 남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시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난 고대 제국이 거신병에게 멸망했다고 했을 때,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거신병은 '사람'에겐 태풍이나 지진처럼 큰 재앙이었다.

"그 거신병을, 세 마리나 죽였지. 단 한 호흡에."

전에는 한 마리를 죽이는 데에 검은 사제들의 힘을 빌려 공의 힘으로 죽여야 했다. 하지만 이젠 성물이나 달비의 힘조차 빌리지 않고 무공만으로 거신병 세 마리를 죽였다.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제국을 넘어 대륙에서도 나만큼 할 수 있는 무인은 드물겠지.

하지만.

살짝 시시하기도 했다.

시발.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느낌.

아니.

이제야 그들과 나와의 거리를 가늠해 본 느낌이다.

부족하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쌍둥이들에 대한 경이만 더 커진다.

세 마리를 죽이는 데에 아홉 번의 공격이 필요했다.

하지만 라니스타는 한 번의 공격에 아홉 마리의 거신병을 죽였어.

라니스타가 '한 세계'를 품었다고 치면.

난 기껏해야 이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만 얻었을 뿐이다.

"뭐야, 이 느낌. 설마 질투한다고? 내가? 그 괴물 새끼들을?"

질투? 어불성설이다.

어느 정도 비벼 볼 만해야 열등감이라도 느끼지.

그들은 나와 격이 전혀 다른 괴물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아직은.

* * *

지하 도시에서 나오자마자 난 하늘에 뜬 검붉은 태양과 마주했다. 불길한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멜카란과 가까웠다. 전보다 더 강렬한 악취가 풍긴다. 멜카란은 불쾌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마치, 무저갱에 들어온 듯 주변에 악의가 가득했다.

"묵시록의 기사."

베기슨의 경고가 생각났다.

고대 제국을 멸망하게 한 건 거신병 따위가 아니었어.

검붉은 태양은 작열하는데 사막에는 온통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난 입술을 깨물며 중립 마을로 향했다.

악마의 흔적을 쫓아 도착한 중립 마을.

마주한 건 비참한 현장이었다.

개간네!

"…말론소 사제님."

죽은 자들은 사제복을 입었다.

그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검은 사제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사인을 살폈다. 모두 일격에 목이 떨어져 나간 듯 보였다. 말론소 사제의 몸은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비통함에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였다. 난 눈을 감겨 줬다. 그는 검은 사제면서 세속적인 성격이었지. 진짜 말하려고 했었는데. 우샤스 누나에게, 괜찮은 사제 한 명이 날 도와줬었다고.

"사제님들이...! 흐윽."

뒤늦게 도착한 걸시가 참사를 목격하고 입을 막았다.

검은 사제들이 몰살당한 장소는 알리에바의 중립 마을과 가까운 곳이었다. 시체를 수습할 시간이 없었다. 난 급히 중립 마을로 향했다. 검은 사제들이 죽었다. 난 마을 사람들이 살아 있다고 기대하진 않았다.

"알리에바!"

그나마 다행일까.

마을에는 알리에바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보였다. 주민들은 몹시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죽음의 기사의 습격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던 그들, 등에 멘 배낭과 짐들을 보니 도망을 각오한 듯 보였다.

"공자님! 당장 도망치셔야 합니다!"

알리에바는 다른 주민과 달리 짐이 없었다. 대신 삽과 포댓자루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날 보자마자 달아나라고 손짓했다. 난 그를 진정시키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알리에바는 새파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힘겹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놈이 사제님들을 죽인 후 우릴 봤을 때였소. 갑자기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먼지처럼 사라졌지. 모든 순간이 악몽을 꾼 듯 찰나였어.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에 사제님들은...."

알리에바는 비통한 목소리로 흐느꼈다. 마을의 동쪽은 고대 제국이 있던 방향, 시간상… 놈이 사라진 건 내가 영혼석을 얻었을 때와 일치한다.

"사제님들은 우릴 지키려다가 참변을 당했습니다. 적어도 시체는 수습해야...."

"알았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소. 달아나십시오. 곧, 놈이 찾아올 터이니."

악마가 날 원한다.

나도.

악마를 원했다.

74

주민을 대피시키고 난 홀로 마을에 남아 놈을 기다렸다.

본다. 멜카란의 어두운 사막을 둘러본다. 눈에 보이는 시야, 그 너머까지도.

"죽음이...."

알리에바를 비롯한 주민들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 호위 없이 멜카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아마, 그들은 무사할 것이다. 멜카란에 죽음의 기사들이 사라졌다. 아니, 죽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산재한 죽음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악마의 식탁에 올라간 느낌이다. 공기마저 살의를 지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려 왔다.

멀지 않아, 죽음이 도착 하림을 알았다.

내 눈에는 보였다. 멜카란의 모든 악의가 한데 합쳐진, 마치 살의로 쌓아올린 거대한 탑과 같은 불길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내게 다가오고 있음을. 눈앞을 메우는 암울한 죽음의 형태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묵시록의 기사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 폭풍을 이끌고 다니는 자가 지평선 끝자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매서운 폭풍을 끌고 다니며, 발자국마다 죽음을 남기는 검은 형태. 그자를 본 순간, 라지엘의 서에 기록된 악마 한 놈이 떠올랐다. 온갖 더러운 힘을 지닌 악마들을 기록한 라지엘의 서에서도 거의 끝장에 가까운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었던.

"검은 태양을 등에 진 자."

라지엘의 서는 놈을 그리 불렀다.

파괴를 숭배하고 죽음을 수확하는 자, 검은 태양을 등에 진 자, 절멸의 배반자.

검은 말의 기수.

라지엘의 서를 어떤 이가 기록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를 세계를 멸망시킬 자라고 하였다. 태양은 검게 물들여 사악한 빛을 내뿜는다. 검은 대지에 검은 말이 여섯 개의 발굽을 내디뎠다. 검은 말에 탄 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투구 너머 번득이는 붉은 안광을 제외하면 그림자보다 어둡다. 그가 손을 들자, 검은 재가 모여 검날부터 손잡이까지 온통 칠흑처럼 어두운 검이 되었다. 검은 말의 기수가 날 본다. 그와나 사이의 거리는 1km였으나 난 바로 앞에서 놈과 마주한 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이질 않았다.

이번엔 활로가 없다.

마치.

라니스타와 대련할 때의 느낌이다.

어떻게 발버둥 쳐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늪에 빠진 듯한 무기력함과 온몸을 결박한 듯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엄습해 왔다.

난.

저것과 맞서면 반드시 죽게 될 거야.

"극복하라, 한계를… 한계를...."

미쳐야 해.

한계를 넘기 위핸 미쳐.

'그들'과 '나'의 차이.

하지만,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정해진 결말로 향하는 머저리 짓.

목숨을 반드시 허무하게 잃어버리라는 걸 안다.

그들은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할까.

몸을 짓누르는 공포에 움츠러든 사이.

놈이 손에 쥔 어두운 검을 휘둘렀다.

위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검정빛의 파도가 너울지며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그 힘은 무언가를 파괴하고자 하는 힘이 아니었다.

푸스스-!

검은 파도에 닿았던 것들.

더는 부서질 수 없는 사막의 모래, 수만 년간 그 자리에 있었을 단단한 바위, 미처 수습하지 못한 검은 사제들의 유품, 놈의 힘에 닿은 것들은 무엇이든 간에 검게 변하여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막조차 말라비틀어진다. 재만 남긴 채 녹아내려 사구가 평지가 되어 간다. 잿더미를 몰고, 검은 파도는 날 향해 덮쳐 왔다.

막아야 해.

어떻게?

내가 가진 어떤 힘으로?

우웅-

부피를 줄여 최대한 경도를 단단하게 한 라멜스타에 공의 힘을 담았다. 또한 내공을 이끌어 내어 검기를 두르고 도가검술의 방어적인 형태를 취했다. 일순 내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마침내 덮쳐 온 검은 파도를 향해 난 [태극혜검]의 묘리로 힘을 받아치는 게 아닌 넘기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읍!"

검은 파도는 내 검에 닿자마자 날카로운 창처럼 변해 찔러 왔다. 신음을 내뱉으며 간신히 가로막고, 라멜스타의 검날을 따라 창을 흘려보냈다. 태극의 묘리는 순환이다. 난 버티는 게 아닌 내 몸을 구심점 삼아 힘을 뒤로 넘겼다.

"하아, 하아."

힘을 받아 냈다.

하지만.

"내 생일선물이!"

난 손에 쥔 라멜스타를 거칠게 내려찍었다. 이미 무기의 형태가 아니었다. 검날은 놈의 힘에 닿자마자 부식되어 재가 되었고, 힘을 모두 받아 냈을 땐 자루만 남긴 채 사라진 후였다. 라멜스타의 형태 변환 성질도 없어져 자루만 남은 고철에 불과했다.

무기를 단 한 번의 응수에 잃었다.

난 고개를 들어, 조롱하듯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기사를 바라봤다.

익숙해서 싫었다.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상황, 내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깊은 절망.

쉬익-!

놈은 다시 공격했다.

두 번의 휘두름.

검은 파도가 연달아 몰아친다.

공의 힘을 전력으로 끌어내고 내공으로 호신강기를 만들었다.

난 힐끔 라멜스타의 손자루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씨발."

쿵!

첫 공격은 막아 냈다. 공의 힘이 달아나고 호신강기가 깨졌으나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연달아 덮친 검은 파도를 대비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난 벌거벗은 채 채찍을 맞는 죄수가 된 것같이 다가올 폭력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아!

그때, 흑의 기사가 등장한 이후 내 품에 숨어 잠자코 있던 달비가 형체를 드러냈다. 달비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며 홀로 검은 파도에 맞섰다. 기사의 공격은 노도와도 같았으나 달비는 굳건한 산처럼 악마의 힘을 막아 냈다. 달빛처럼 고요히, 그러나 찬란하게 빛나는 달비는 눈부신 빛을 흩뿌리며 점점 커졌다. 악마의 힘과 대조적이었다.

난 달빛이 닿는 곳마다 번지듯 피어나는 잔디를 봤다. 놈의 힘이 경악스러운 죽음이라면, 달비의 힘은 경이로운 생명이었다.

다아아아!

달비가 빛 속에 있다.

내 눈으로도 바라볼 수 없을 찬란한 빛.

그래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저 빛나는 누군가는 달비가 맞을까?

사슴의 모습을 벗어난, 마치 저 모습은.

빛은 퍼져 나가 붉은 눈의 기사를 비추었다. 놈은 괴로워하며 썩은 악취를 풍겼다. 빛이 닿자 칠흑 같던 검은 갑옷이 산화하며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간네!

달비는 잔뜩 화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기사를 압박했다. 죽음은 천천히 꺼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기사는 웅크린 채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다. 푹, 기사가 검을 땅에 박아 넣었을 때였다. 난 순간 놈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걸 알아차렸다.

"달비!"

적어지던 기사의 힘이 폭렬하듯 거대해져 빛을 순식간에 삼켰다. 그 힘은 날 덮쳤던 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기사는 곧바로 검을 휘둘렀고, 아홉 개의 검은 파도가 합쳐져 해일이 되어 달비의 빛을 잡아먹었다.

다아, 다아, 다아!

달비는 끝까지 맞섰다.

뒤에서 방출 마법으로 힘을 쏟아내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달비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으나 늦었다.

해일이 달비를 덮쳤고, 푸른 빛은 촛불처럼 약해지다가 흔적을 감췄다.

"…달비야?"

순간 달비의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 죽음, 영수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방심했다. 영수 또한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생명을 품은 존재다. 펜릴에 먹혀 약해진 달비가 생각났다. 정령석을 먹으며 강해진 달비라도 본연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다. 악마는 달비를 죽일 수 있다.

"달비."

울컥거리는 심장은 다행히, 녀석의 자그마한 목소리로 진정이 되었다.

다아.

느껴진다.

미약하지만 내 안에서 느껴졌다.

생명의 화신인 영수가 경악스런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약해졌으나.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잠시 쉬고 있어."

판단은 빨랐다. 이제 내게 선택권은 없다. 미치기 전에 죽는다면 개죽음이다. 달비가 위험해, 그리고 숨었다곤 하나 걸시도 가까운 곳에 있다. 도망쳐야 해. 전력으로, 놈을 피해서!

다아.

도망치고자 등을 돌렸을 때였다.

"어?"

다아.

달비가 날 부른 그 순간.

영혼석을 삼켰을 때의 그 격정적인 뒤흔들림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난 몸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힘에 당황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아, 다아.

달비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어찌 그 의도를 모를 수 있을까.

난 내 몸에 피어오르는 푸른 빛깔의 아지랑이들을 바라봤다. 내 의지에 따라 빛이 움직였다. 이 힘을 품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사라져 감을 느꼈다. 고고한 생명의 힘, 조화로우며 자비로운 힘. 난 다시 등을 돌려 검은 기사를 노려봤다. 놈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

달비는 놈의 힘에 당한 게 아니다.

날 위해서.

녀석은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내게 건넸다.

여태껏 모아온, 되찾아온 영수의 힘 전력을 내게 맡긴 것이다.

정령석을 얻었을 때 기뻐하던 달비의 모습이 생각났다. 녀석은 열망적으로 제 힘을 되찾기 바라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펜릴의 뱃속에 있던 때처럼 미약해지길 각오하면서까지 내게 힘을 준 것이다.

희생적인 믿음.

"씨발."

움직이지 않던 발이 가볍다.

이번엔 내가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맞짱 함 까자 개새끼야!"

* * *

칼날이 쇄도한다.

난 때를 노려 손바닥으로 검날을 쳐 냈다. 권법 또한 두 달간의 수련으로 단련되어 있다. 하지만 소림사의 백보신권처럼 극상의 무공은 배우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호신에 가까웠다. 죽음의 기사는 흑마에 올라탄 채 검을 휘둘렀다. 공격은 단순하다. 기껏 삼류 무사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단조롭고 평이한 공격. 하나 달비의 힘이 아니고서야 감히 막아 낼 엄두가 내지 않았다.

달비의 힘을 두르고 난 무승처럼 놈과 싸웠다. 검을 피하고 손날로 말의 목을 내려쳤다. 검은 말이, 놈의 힘의 연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내공을 두른 손날 찌르기는 칼날과 같다. 말의 목을 여러 번 내려치자 풍선처럼 터졌다. 그러나 흑의 기사는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검을 휘두른다. 검은 기운이 몰아친다. 다행히 근접전이 더 나았다. 악마의 힘이라도 근거리에서 피하면 끝이었다. 라니스타와의 실전을 제외하고, 내가 싸웠던 그어느 순간보다 긴장한 채 전투를 벌였다. 그야말로 스치면 죽음이다.

쉭! 쉭! 쉭!

사자가 싸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듯, 놈은 압도적인 힘으로 맞서는 걸 모두 부수고자 했다. 연달아 휘둘러진 검을 허리를 숙여 가벼이 피하고 발등으로 머리를 걷어찼다. 맨몸으로 갑옷 입은 자를 두들겨 패는 건 미친 짓이지만, 내공과 달비의 힘과 결합한 난 온몸을 무장한 것과 다름없었다. 생명과 죽음이 부딪힌다. 나 또한 피해를 입으나, 놈도 멀쩡하진 않았다. 휘청거리는 놈을 놓치지 않고 용조수龍爪手를 사용했다. 움켜쥐는 것으로 강철도 뜯어내는 무공으로 내가 배운 권법 중 가장 사납고 매서운 무공이었다.

콰드득!

놈의 머리를 뜯어내려고 했으나 투구를 벗기는 것에 그쳤다.

악마의 얼굴은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다. 그저 창백한 남자의 얼굴, 붉은 안광이 아니었다면 인간이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젠장. 권장법도 연습할걸."

애초에 무기든 자를 맨손으로 이기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니스타는 꾸짖으며 닥치고 배우라고 했지.

말 잘 들을걸.

놈은 단조로운 공격을 계속했다. 담긴 힘이 강력하고 매서우나 피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난 영활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모두 피해 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기민하게 움직이며 영수의 힘을 실어 주먹을 내질렀다.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호신을 위주로 타격을 입힌다. 놈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맞을 리 없는 검을 휘둘러 온다.

"좆밥으로 보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건 두 가지 경우.

천안통이 보지 못하거나 몸이 못 따라와 주거나.

하지만 놈의 공격이 천안통으로 보이는 한 피하지 못할 리가 없다.

라니스타의 움직임도 잠시나마 파악했던 신의 눈이다. 몸을 사람의 범주를 넘어 초인처럼 움직일 수 있는 무공도 배웠으니 놈의 공격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매서워져도 능히 피해 낼 자신이 있었다.

할 만해.

분명 달비의 힘 덕분에.

라멜스타가 바스러진 것처럼 놈의 힘을 막지 못하면 격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 고요하고 은은한 빛이 날 지켜 주는 한 놈의 공격은 피해를 주지 못했다.

"팍, 개새끼야."

놈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무감정했다.

감정을 감추는 게 아니다.

내 눈에 비친 놈은 인형과 다름없어 보였다.

악마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마치 마네킹을 두들겨 패는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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