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사냥꾼 마을 아니랄까 봐 집집이 야크 고기를 끈에 매달아 말리고 있거나 모피들을 줄에 걸쳐 무두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간혹 진귀한 사치품인 매머드의 상아도 보였다. 외진 사냥꾼 마을에 도둑이 있을 리가 없으니 마당에 널어놓고 지내는 것 같았다.
"사냥감이 없다더니 멀쩡한 것 같은데요?"
"전에는 더 많았습니다, 공자님."
며칠 동안 말동무가 되어 친해진 카라칼이 물음에 대답했다.
"모피의 질이 떨어져 보이는군요. 오래된 모피와 마른 고기. 신선한 사냥감이 한동안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기사 여럿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잡는 매머드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오로지 칼베인의 사냥꾼들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상아와 가죽을 비교적 싼 값에 레인버그가와 거래했다. 레인버그의 주요 교역 물품이다. 사냥감이 없다면 칼베인뿐만 아니라 레인버그 가문도 손실이 엄청날 것이다. 기사들을 사냥꾼으로 기를 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죠? 사냥에 나갔나?"
"문이 열린 걸 봐선 사냥에 간 건 아닐 겁니다. 큼, 사냥하지 않는 칼베인 사람들이 갈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카라칼은 마을 한쪽을 가리켰다.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데, 주변에 술통이 지저분하게 널브러진 게, 딱 봐도 주점처럼 보였다. 나와 카라칼과 그의 병사만이 주점으로 향했다. 간혹 주점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 혹은 목청 높여 노래 부르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카라칼은 주점의 문을 열기 전, 칼베인 사람들은 자신처럼 참을성이 뛰어나지 못하다면서 미리 사과를 건넸다.
"괜찮아요. X같이 굴면 X같이 해 주죠, 뭐."
"네? 공자님?"
당황한 카라칼을 뒤로하고 주점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이 고요해지면서 따가운 눈초리들이 일제히 내 몸에 박혔다. 난 담담하게 주점을 둘러봤다. 수십 명의 칼베인 사람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주점에 모여 있다. 나보다 더 어린 소년이 노르스름한 액체가 담긴 나무잔을 들고 있으니 대충 이 마을의 주도酒道가 예상이 갔다.
내가 누구인지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대놓고 레인버그 사람이라고 모자에 문장까지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저런 태도라니,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주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레인버그의 깃을 달고 칼베인의 고충을 없애러 왔습니다. 촌장님이 누구십니까?"
대답 대신 들려온 건 혀를 차는 소리였다.
"쯧쯧."
난 그자를 확인했다. 카라칼보다 더 덩치가 큰 '할머니'였다. 칼베인 사람들이 아인의 피를 이은 자들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하지만 카라칼처럼 대부분 아인보다 인간 쪽에 가깝다. 하지만 저 할머니는 보다 아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듯싶었다.
'뿔'이라, 흠.
엄마의 수업에서 들었다. 황실이 아인들을 배척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악마처럼 뿔이 달려 사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할머니의 이마에 앙증맞게 난 작은 뿔은 악마의 뿔보다 산양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눈 또한 몹시 특이했다. 염소처럼 동공이 길쭉했다.
"촌장님이신가요?"
"에잉, 쯧쯧."
대답 대신 또다시 혀를 찬다. 난 배시시 웃으며 화답하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할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칼베인 사람들은 인간과 미묘하게 달랐다. 누구는 완전히 인간과 똑같이 생겼지만, 어떤 이는 손톱이 맹수처럼 날카롭다든가, 송곳니가 길게 자라서 입 밖으로 튀어나온 자들도 보였다.
"제가 달갑지 않으신가 봐요?"
난 그들을 향해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황한 카라칼이 나서서 자신이 얘기해 보겠다고 했지만, 난 대화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쯧, 라이베라를 불렀더니만."
어라? 아버지 이름이 나오네.
뭐, 아는 사이라고 해도 놀랄 건 없지. 몇십 년 전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아인들의 땅에서 수련했으니, 칼베인 사람들과 몇 번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굽히고 기껏 부탁했더니, 웬 애송이가 왔어?"
꽤 신선했다. 레인버그의 깃을 달고 온, 레인버그의 공자에게 이런 태도라니! 처음 겪는 푸대접이다. 확실히 달라, 이들은 레인버그를 그저 친절한 이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주점에 모인 칼베인 사람들은 모두 날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 사이에 낀 카라칼이 촌장을 말렸으나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난 촌장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사냥감이 줄었다면서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상세하게...."
"그뿐이겠나!"
갑자기 할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없었어! 이건 징조야, 징조. 야만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어! 에잉, 라이베라 고얀 놈.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질 않았쓰이. 어이, 카라칼, 이 빌어먹을 놈아. 당장 애송이를 돌려보내고 네 주인 모셔오라고!"
"우릴 우습게 여기는 거요?"
"벌써 며칠 동안 사냥감이 안 보였다고!"
할머니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다른 사람들도 동조해서 고함을 지르기 바빴다.
음.
알기 쉬운 사람들이다.
참 착한 사람들이야.
개간네! 개간네!
하지만 방법이 서툴렀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도 서투른 방법을 쓰고자 했다.
내가 지금 취해야 할 태도는 배척하는 척하는 칼베인 사람들과 맞서서 신경질을 내는 게 아니다. 섣부른 마찰은 '없던' 적의를 도리어 키우는 꼴이다. 내가 레인버그의 공자라는 신분과 아버지가 보낸 사절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내게 원하는 건, 내 '위치'에서 오는 힘이 아닌 내가 가진 순수한 힘을 확인하는 것.
그러니 내가 힘을 증명하기만 하면, 그들의 불만은 사그라지겠지.
개간네! 개간네! 개간네!
"안 돼, 달비. 더 약하게 해 줘. 지붕이 부서질 정도로만."
개간네?
"개 같아도."
다아.
달비의 몸이 희미하게 빛이 났다.
난 히죽 웃으며 카라칼에게 말했다.
"카라칼, 어린아이들을 제 쪽으로 데리고 와 주겠어요?"
"공자님?"
"부탁이 아닌데."
"…알겠습니다."
카라칼이 병사들을 시켜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려고 하자 칼베인 사람들이 흥분하며 막았다. 그들이 곁에 있기만 해도 아이들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랑이가 벌어지려고 할 때, 이변을 눈치챈 자들이 생겨났다.
카라칼과 할머니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동시에 지붕을 올려다봤다.
"환영 인사에 감동해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다아!
"어디 보자, 셋, 둘."
십 초가 더 지났다.
"…하나."
콰지직!
그 순간,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큰 파열음과 동시에 두꺼운 원목을 겹겹이 쌓아서 튼튼하게 지은 술집의 지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부서진 잔해들이 사람들을 덮쳤다. 하지만 상처를 입는 자들은 없었다. 과연 칼베인,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무토막이야 쉽게 피했다. 아이들도 곁에 있던 병사와 사냥꾼들이 지켜 줘서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난 마룻바닥을 뚫고 처박힌 작은 돌을 주웠다.
힘을 드러내라.
짖어서 이를 보여 주면, 함부로 굴지 않을 테니.
쌍둥이에게 배운 교훈이긴 하지만, 역시 지나치긴 해.
"선물입니다, 레이디."
지금까지 화만 잘 내던 할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날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이이! 우리 주점을!"
그때, 먼지를 둘러쓴 거한이 팔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난 살짝 뒤로 물러나 주먹을 피하고, 복부를 걷어찼다. 라니스타의 괴물 같은 힘에 비하면, 칼베인의 거한도 어린애 수준이다. 덩치가 족히 나보다 두 배는 될 법한 거한이 일격에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하하하하!
촌장은 갑자기 낄낄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신명 나게 웃는지, 저러다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하하하, 제 아비랑 똑 닮았어."
주점을 부수고 칼베인 사람을 쥐어팼으나, 도리어 촌장의 태도는 온화해졌다.
"미안하게 생각하이. 어쩔 수 없었어. 하하하."
"겁줘서 쫓아내려고 하셨군요."
"괜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이 꼴 좀 보게나! 크게 한 방 먹었으이! 하하하!"
칼베인 촌장이 무례하게 군 건 방법이 서툴렀을 뿐, 이해는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레인버그의 막내아들이 이런 외진 사냥꾼 마을에서 까불다가 비명횡사하면, 칼베인은 무척 난처해진다. 그래서 내가 칼베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겠지. 아버지를 예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이딴 일로 관계가 틀어질 사이도 아니고.
내가 정말 힘이 없었다면, 차라리 첫 만남에 등쌀에 못 이겨 도망치는 게 칼베인에게도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난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서, 정말 '쌍둥이' 같은 짓을 해 버렸고.
자칫하면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촌장은 걸걸한 성격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내민 푸르스름한 돌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레이디라니, 하하. 라이베라도 날 그렇게 불렀지. 보자마자 반해서는, 성가시게 쫓아다닐 때가 있었어."
"아버지랑 아는 사이십니까?'
"그가 야만의 땅으로 갈 때 길 안내를 잠시 했었다네."
"으음, 아버지가 촌장님에게 반하다니, 믿기지 않네요."
"얘기해 주랴?"
"기대되는군요, 레이디."
"하하. 좋아. 집으로 가세."
촌장은 나가면서 내게 덤벼들었던 거한의 대가리를 세게 후려쳤다.
"카라칼, 가져온 선물들 여기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 주겠나?"
"공자님...."
쌍둥이들이 괴상한 짓을 저지를 때마다 '달의 아이'라고 불리며 나까지 엮였다.
하지만 이젠 억울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 * *
촌장과의 대화 이후.
숙소에서 나와 마을 주변을 둘러봤다.
야만의 땅과 가까운 외진 곳이라서 그런지 영수들이 많았다.
퀄츠 숲에선 볼 수 없던 제법 강한, 토지신에 근접할 영수들도 있었다.
"어디쯤 있나."
주점에는 없었다.
촌장에게 물어보니.
'그년은 사냥 시기에도 꽁지 빠지게 돌아다녀. 몹쓸 년.'
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을에도 오지 않고 며칠간 자리를 비울 때도 있다고 하니 직접 찾아 나서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난 칼베인에서 제법 먼 곳까지 향했다. 야만의 땅과 가까워질수록 영수가 더 많아진다. 원래 영수들은 날 싫어하지만, 달비가 곁에 있으니 덤비거나 하진 못했다.
달비는 깡충깡충 뛰어놀다가, 영수를 발견하면 호다닥 뛰어가서 같이 놀았다. 다람쥐 영수가 녀석의 등에 올라타고, 늑대 영수가 녀석의 머리를 핥아 준다. 나무 영수든, 연못의 영수든, 달비에겐 모두 친절했다.
"이상하긴 해."
벌써 한 시간을 걸었는데도, 영수만 보일 뿐 '짐승'들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흔적조차 없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밭에도, 작은 발자국 하나 찍혀 있지 않아.
39
날이 어두워졌다.
햇빛이 사라지자 추위는 더 거세졌다.
순식간에 밤이 되었고, 지랄 맞은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뼛속까지 얼리는 강풍과 만나 눈보라로 변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위험하다. 걸음을 떼자 발자국이 순식간에 눈으로 덮였다.
"후우, 젠장."
숲에선 여전히 짐승의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난 테타린 호수를 떠올렸다. 귀뚜라미 한 마리 울지 않던 고요한 호수. 이 사나운 눈 속의 숲 역시 마찬가지다. 예상은 했지만, 악마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험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맹수조차 겁먹고 도망가는 존재는, 악마밖에 없다.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여유롭고 느긋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난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끈질기게 흔적을 쫓았다. 눈보라와 추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외투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하얀 지옥을 걸어갔다.
칼베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자작나무 숲에 들어설 때였다.
나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눈이 쌓이는 이런 날씨에도 발자국은 선명하게 새겨졌다. 찍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생김새는 언뜻 고양잇과 맹수의 발자국과 같았으나, 발가락이 일곱 개였다. 크고 깊은 발자국, 짐작건대 코끼리만큼 더 큰 덩치다.
"악마."
난 황급히 발자국을 좇았다.
다아!
나만 달리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숲의 영수들이 날 뒤따랐다. 아니, 이 녀석들도 발자국의 주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자연의 존재인 영수가 무언가를 쫓는다. 난 악마라고 확신했다.
개간네!
마침내 자작나무 숲속의 얼어붙은 연못가에서 난 발자국의 주인과 마주쳤다. 화난 달비가 작은 발굽을 들어 놈을 위협했다. 난 재빨리 라멜스타를 변형시켰다. 따라온 영수들은 자작나무 위로 올라가 지켜봤다. 난 악마를 발견했으나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악마?
아니야.
놈은 악마와 비슷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거대한 덩치에 호랑이를 닮았지만, 머리가 몇 배는 더 컸다. 거대한 입과 사람 몸통만 한 송곳니를 지녔고, 검은 털에 뱀의 꼬리를 지닌 괴물이었다. 놈의 눈동자는 쇠구슬이 박힌 듯 생겨서 초점을 읽을 수 없었다.
난 천천히 놈의 주변을 맴돌며 상황을 지켜봤다.
놈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날 앞에 두고도 가만히 멈춘 채 입을 오물거리기에만 바빴다.
뭘 먹고 있는 건가?
"으히아!"
그때, 괴물의 입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괴물이 낸 소리는 아니었다. 겁먹은 여자의 비명이다.
"윽."
이내 난 비명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괴물의 이 사이로 하얀 다리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다행히 토막 난 신체는 아니었다. 난 황급히 라멜스타를 도끼 형태로 변형시켰고, 놈의 등 뒤에 올라탔다. 놈은 거칠게 저항했다. 난 발뒤꿈치로 놈의 옆구리를 힘껏 내려쳤다. 야크의 가죽처럼 질겼지만 '라니스타'의 살가죽보단 연했다. 자세가 고정되자, 도끼를 높이 세웠다.
라니스타와의 실전.
그가 쓰던 어떤 자세.
동의 무사가 사용했다던 검술.
콰직!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휘둘러진 도끼는 두꺼운 괴물의 목을 한 번에 절단했다. 거대한 머리는 사과를 따듯 몸에서 분리되었고, 괴물의 몸은 진득한 '빨간 피'를 내뿜으며 몸부림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사라락!
괴물이 죽자마자, 나무 위에서 보기만 하던 영수들이 일제히 내려왔다. 내게 올 줄 알았지만, 나쁜 새끼들이 괴물의 머리에 몰려들더니 입속에 있는 누군가를 꺼내주려고 했다. 쯧, 내겐 달비만 있으면 돼.
난 라멜스타를 지렛대로 이용해서 괴물의 아가리를 열었다. 대가리가 얼마나 큰지 황소도 한입에 꿀꺽 삼킬 정도였다. 뭐, 그러니 살아 있는 거겠지? 난 괴물의 혀 위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곁에는 날다람쥐 영수가 있었다. 작은 녀석이지만, 아버지의 창궁관에서 봤던 '토지신'과 느낌이 비슷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이 여자는 괴물의 한입 간식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여자는 기절했지만 몸에 이상은 없었다.
"이 여자가 영수술사군."
괴물 입에서 끄집어내 눕히자, 영수들이 몰려들었다. 숲속의 친구들이냐? 칼베인 마을의 사람답게 이 여자도 아인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는데, 입술만 새빨간 게, 쥐 잡아먹은 것처럼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머리카락의 색이었다. 칼베인이 염색약을 개발한 게 아니라면, 저 근본 없는 보라색 머리는 이 아이의 자연 모발이다.
깨어날 기미가 없자, 난 연못에서 물을 떠 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니 효과 있겠지.
촤륵!
얼굴에 물을 들이붓자 화들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
"씨발!"
번쩍 눈을 뜨고, 번쩍 욕을 하는 여자.
나이는 나와 또래로 보인다. 신기하게도 눈동자도 보라색이었다.
"와, 씨발. 뒤질 뻔했네."
그럴 수도 있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으면 험한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해.
여자는 캑캑거리며 한참 동안 기침을 했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괴물의 머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곁에 있는 날 눈치를 못 챈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이 X 같은 새끼가! 감히 날 잡아먹어? 내가 누군 줄 알고! 씨발!"
여자는 괴물의 머리를 꾹꾹 짓밟았다. 분에 안 풀렸는지 주먹질을 하고, 발로 차기도 했는데 그만 눈에 미끄러져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근데 넘어진 상황에서도 연신 발길질을 하며 화를 냈다. 재밌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하아, 하아."
한참 분풀이를 하던 여자가 드디어 날 눈치챘다.
죽은 괴물과 날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우, 감사! 감사, 감사!"
그러더니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팔을 마치 새처럼 파닥파닥 거리며 발을 힘차게 구른다. 닭의 움직임을 표현한 현대적인 무용인가? 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뭐하는 거요?"
"아인식 감사 표현… 얼레? 쿤칸어를 하시네?"
"쿤칸 사람이니까."
"난 또 아인인 줄 알았지. 어머? 쿤칸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게 더 신기한데?"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살갑게 말을 걸던 여자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 기겁하더니 바들바들 떨며 날 삿대질했다.
"다, 당신. 악마지?"
"뭐?"
"내 친구들이 싫어하는 건, 악마들뿐인데!"
친구들? 난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영수들이 날 피해서 나무 위로 도망쳤다. 뭐가 무서운지 내 눈치를 살폈는데, 여자가 없으면 당장 멀리 달아났을 기세다. 이래서 아무리 영수술사라도 위장자를 구별하기 어렵다. 영수들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마법사와 아지비카교의 검은 사제들이지만, 놈들은 유독 날 싫어했다.
"난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다."
"…레인버그?"
"들어본 적 없나?"
"정말 폴스타 공자님이세요?"
겁에 질린 여자는 갑자기 화색하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다. 조울증이 의심되었다.
"그걸 어떻게 믿죠? 폴스타 님은 영수술사라던데, 영수들이 싫어하잖아."
"나에 대해서 아는구나. 얘, 안 보이느냐?"
달비를 가리켜도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만 보냈다.
하긴, 아버지도 달비를 바로 못 봤는데.
"달비야, 보여 줘."
달비는 날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꼬리를 파르르 떨고 여자에게 깡충깡충 뛰어갔다. 전에 엄마 앞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달비는 다른 영수들과 달리, 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비범한 존재다.
"와!"
여자도 달비가 보이자 경계심을 풀었다.
"못 보던 아이네, 귀엽다! 정말 폴스타 공자님이시군요."
"어째 쉽게 믿네?"
"위기에서 구해 준 영웅이 왕자님이라는 게, 진부하긴 하지만 못 믿을 것도 없죠."
"왕자라니?"
"레인버그 공작령에선 '달의 아이'들이 왕자고, 공주잖아요."
외진 곳에서 살아가는 칼베인 사람치고는 대륙 사정에 밝은 듯했다. 여자는 바지 주름을 살짝 잡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쿤칸의 숙녀들이 주로 하는 인사법이었다.
"사카주아의 딸, 카주웨아, 인사 올립니다. 쿤칸을 떠받드는 푸른 기둥, 레인버그 가문의 공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인사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칼베인 사람들은 저러지 않았는데.
"네가 칼베인에 나타난 영수술사구나."
"어머, 절 아시나요?"
"아버지가 찾으라고 하셨...."
"와아!"
카주웨아는 조울증이 확실했다.
"드디어 이 X 같은 곳에서 탈출하는 거야!"
다행인 점은, 칼베인을 떠나는 것에 몹시 호의적이라는 것.
난 카주웨아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전에, 주변 괴물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카주웨아는 그제야 놀란 눈으로 소리 질렀다.
"아차, 이, 이럴 때가 아니야. 공자님, X 됐어요! 마을이...!"
가는 날이 장날이다.
참 대단한 속담이라니까.
* * *
눈보라가 멎었다.
카주웨아를 따라간 곳엔 괴물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적어도 수십 마리, 제각기 다른 발자국이 보였다.
"마을로 향했다고?"
"지금쯤이면 도착했을지도!"
카주웨아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 숲에서 영수들과 자주 놀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영수들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짐승들이 숲속에서 모습을 감춘 것도 그 시기였다. 사냥꾼들을 데리고 숲을 조사했지만, 영수가 보이지 않는 멍청이(카주웨아의 말을 빌려.)들은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를 참을성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홀로 며칠 동안이나 숲을 헤매며 흔적을 조사했는데, 야만의 땅과 가까운 자작나무 숲까지 도달하자 마침내 놈들을 마주했다고 했다.
괴물.
내가 죽인 대두 괴물처럼 짐승이 아닌 끔찍한 괴물 수십 마리가 자작나무 숲에 숨어 있었다. 카주웨아는 자신이 얼마나 침착하고 통찰력이 뛰어난지 말해 주며, 확신하건대 괴물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게, 자작나무 숲에 모인 괴물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고 했다.
괴물은 악마가 아니다. 하지만 괴물은 분명 악마와 관련이 있어.
부러진 나무, 발자국, 알 수 없는 오물, 괴물 떼의 흔적이 마을로 이어진다.
카주웨아는 이 사실을 마을에 알리려다가 괴물의 습격을 받아 봉변을 당했다고 했다. 그게 두 시간 전이니, 괴물들이 마을에 도착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젠장, 마을까지 뛰어가도 한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타세요!"
카주웨아는 생각보다 더 강한 영수술사였다.
어느새 말처럼 커진 날다람쥐를 탄 카주웨아가 외쳤다.
날다람쥐 영수는 날 싫어했지만, 달비가 개간네!를 외치자, 군말 없이 날 등에 태웠다.
날다람쥐는 자작나무를 올라타기 시작했다. 이 땅의 자작나무는 크게 자라서 높이가 30미터를 넘었다.
"가자!"
"워, 활공?"
날다람쥐가 몸을 활짝 펴고 날았다.
* * *
"젠장, 습격이다."
"네? 뭐가 보여요?"
칼베인은 아직 수십 킬로미터 정도 남았지만 내 눈엔 상황이 훤히 보였다. 높게 쌓은 방책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괴물도 사체도 많았지만, 산 놈들이 아직 수십 마리나 돼 보였다. 그나마 칼베인 사냥꾼들이라 여태까지 버틴 것이다. 대두 괴물은 약과였다. 매머드를 닮은 괴물이 가장 컸는데, 족히 20미터는 넘어 보였다. 놈이 방책을 부수는 괴물, 놈부터 족쳐야 해.
개간네에!
달비도 많이 화가 난 것 같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미친 할망구로부터 얻은 방출의 마법, 내가 가진 자연지기와 더불어 달비의 힘이 더해지면, 별은 하늘이 아닌 내 손에서 떨어지게 된다.
난 항상 내 힘의 목표를 쌍둥이에 비교했다.
사실상 세계 최강자 세 놈한테.
약하지 않아.
이 힘은 절대 약하지 않다.
5서클의 청록의 마법사도 놀라게 한 힘.
"매머드 괴물 다리 사이로 뛰어."
"네? 진심인가요?"
"내 말만 들어. 네 활약은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전해줄 테니까."
카주웨아는 두려움보다 출세욕이 더 컸다. 날다람쥐 영수는, 그야말로 날다람쥐처럼 끔찍한 괴물 사이를 헤쳐나가 매머드 괴물까지 도달했다. 난 몸을 눕히고 손을 하늘로 뻗었다. 개간네! 달비가 눈부신 빛을 내뿜는다. 내 몸 안에 별과 달이 뛰어논다. 이제 할 일은 이 가공할 힘을 내뿜는 것이다.
"으아악!"
빛이 터지자 매머드 괴물이 반응했다. 20미터의 괴수가 다리를 구르자 땅이 흔들렸다.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날다람쥐는 날쌔게 매머드의 다리를 피해 놈의 배 아래까지 기어들어 갔다. 위험을 감수하고 확실한 순간을 기다렸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흐아!"
방출의 마법.
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법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메테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이라면.
이건 말 그대로 '리버스 메테오'라고 부를까?
40
콰아앙!
손에서 뿜어진 맹렬한 빛무리 속에, 연회장의 지붕을 부수고, 악마를 조각냈던 월석이 탄환처럼 쏘아져 매머드 괴물의 배를 꿰뚫었다.
새푸른 빛은 매머드의 속을 파고들어, 마침내 등까지 꿰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20미터의 괴수가 꼬챙이에 찔린 고깃덩어리가 된 꼴이다.
가장 거대한 괴수가 일격에 쓰러졌다. 놈이 쓰러지며 근처에 있던 멍청한 괴물 몇 마리가 휩쓸려 뭉개졌다.
"와씨, X 돼네!"
카주웨아는 경악과 섞인, 몹시 훌륭한 감탄사를 외쳤다. 날다람쥐는 쓰러진 매머드를 뒤로하고 재빨리 방책을 넘어 칼베인 마을로 들어갔다. 망루 위에서 활을 쏘던 사람들은 경악하다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급히 소리를 질렀다.
"고, 공자님이 오셨다. 폴스타 님이 오셨어!"
마을 안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거대한 놈들은 망루의 사냥꾼들이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지만,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방책이라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방책을 뛰어넘을 수 있거나, 작은 놈들은 벌써 마을 안으로 침범하여 몇 차례 전투를 벌인 것 같았다. 난 죽은 괴물들을 둘러봤다. 다행히, 사람의 주검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님!"
카라칼이 급히 뛰어왔다. 그는 노련했고, 우선 현재의 사정을 설명했다. 괴물의 습격은 이십 분 전, 사상자는 없지만 부상자는 속출. 방책은 무너지기 직전.
"모두 한곳으로 뭉친다. 망루의 사냥꾼들도 모두 내려오라고 해. 괴물들을 한 지점으로 유인해 맞선다."
병력을 나누기엔 괴물의 수가 많다. 희생을 각오하면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누구 하나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 작전은, 순전히 내 힘에 의존되는 계획이다.
"내가… 내가 유인할게요."
카주웨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겪었으니, 카주웨아를 믿었다.
칼베인 사냥꾼들은 사냥꾼임과 동시에 뛰어난 병사였다.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의문을 갖지 않고 내가 있는 곳으로 결집했다. 날다람쥐를 탄 카주웨아가 방책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괴물의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무운을 빌었다.
"다행인 건 괴물의 지능이 상당히 낮다는 것이다."
난 달비를 바라봤다.
개간네!
방출 마법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달비의 힘이라면.
"할 수 있겠어?"
다아!
달비는 당당한 표정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조그마한 게 믿음직스럽다.
콰드득!
시작되었다.
콰드득! 콰득!
마침내 방책이 부서졌다.
다행인 건 한 지점에서 들려왔다는 것이다.
특수처리를 한 원목을 수 겹으로 쌓아 지은 방책이 서서히 금이 가고.
"으아악!'
카주웨아와 날다람쥐가 방책을 뛰어넘을 때, 마침내 방책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카주웨아는 용감했다.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흩어져 있던 괴물들이 무리를 지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더 거센 위협이다. 괴물이 무리를 지었으니 각개격파가 불가능하니까. 칼베인 사냥꾼과 카라칼의 병사만이 있었다면 이곳이 그들의 무덤이 되었을 것이다.
"한 명의 힘이."
전생부터 뼈저리게 느껴 온 '불합리.'
"한 세계를 학살하고."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이어 칼베인 사냥꾼도, 카라칼도, 카주웨아도 고개를 들었다.
"한 세계를 구원했지."
쌍둥이들.
그들이 사는 세계를 얕지만 잠시나마 맛본 것 같았다.
세 개의 빛나는 별이 밤하늘을 밝히며 낙하한다.
쾅! 쾅! 콰앙!
별똥별은 괴물 무리를 강타했다. 세 번의 흔들림, 세 번의 광채, 충격은 엄청났고, 떨어져 있던 우리도 여파에 휩쓸려 넘어졌다.
별의 힘은 괴물을 박살 냈다. 빛이 사그라지자 괴물의 흩어진 살점과 핏물이 마을을 더럽힌 걸 볼 수 있었다. 살아 있는 괴물도 있었다. 비교적 충격 지점의 바깥에 있던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몇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카라칼이 선두에 나서서 괴물을 도륙했고, 칼베인의 사냥꾼들이 능숙하게 괴물을 사냥했다. 가세하고 싶었지만, 너무 지쳤다.
개간네에....
달비 또한 지쳐 있다. 내가 지치면 녀석도 지쳤다. 녀석이 지치면 나도 지쳤다. 난 달비를 안았다. 녀석이 없었으면 하지 못했을 거야.
"폴스타, 스타폴."
뒤에서 촌장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할머니는 날 보며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높게 추어올렸다.
"별을 떨어트리는 자, 폴스타."
"폴스타...."
촌장의 외침은 전염이 되었다.
"별을 떨어트리는 자, 폴스타!"
폴스타-! 폴스타-!
시발,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이런 거, 익숙하지 않아.
내 이름을 연호하는 칼베인 사냥꾼들을 향해 난 수줍게 손을 올렸다.
와아아-!
쌍둥이들, 지들만 좋은 거 하고 있었네.
* * *
눈이 따가웠다.
"아직 아니야."
흔적들이 움직인다.
괴물의 '그림자'들이 빠져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악마 놈."
그림자가 빠져나오자, 괴물의 사체는 모두 평범한 '동물'의 사체로 변해 갔다.
커진 몸이 줄어들고, 변형된 몸이 돌아온 것이다. 처음부터 놈들은 숲의 짐승들이었어.
당황하는 카라칼에게 외쳤다.
"말을 준비해, 카라칼! 날 따라와요!"
카주웨아를 불렀으나, 날다람쥐 영수는 작아져서 움직이지 못했다. 몇 시간을 뛰었으니. 영수라고 해도 기계는 아니다. 난 카라칼과 병사, 사냥꾼 몇몇과 말을 타고 그림자를 쫓았다.
* * *
수십 개의 그림자가 눈밭을 더럽히며 질주한다. 그림자들이 지나간 자리엔 검은 자국이 남았다. 눈이 쌓인 터라 말의 다리가 느려 금세 놓치고 말았으나 난 자국을 따라 계속 말을 몰았다.
흔적은 자작나무 숲까지 이어졌다. 칼베인 사냥꾼들은 이 숲이 야만의 땅과 이어진다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수색을 멈추진 않았다. 아인보다 두려운 게 무엇인지 그들도 잘 아는 것이다. 난 카주웨아가 대두 괴물에게 잡아먹혔던 연못가에서 그림자들을 찾았다. 이미 놈들은 기분 나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수십 개의 그림자는 마치 끈적한 콧물이 뭉치듯 꿈틀거리며 서로의 몸을 합쳤고, 부풀렸다.
덩어리진 그림자,
악마다.
괴물도 끔찍했으나, 저건 비교할 수 없이 불쾌하고 역겨웠다.
짐승을 괴물로 만들었던 그림자들은 모두 한 악마의 파편이었다.
"멈추세요."
거리를 둔 채로 놈을 경계했다.
난 혹한의 추위에 눈이 아파도 놈을 뚫어지게 보며 눈을 한 번도 감지 않았다.
"위장자는 아니야."
심해의 무저갱에 봤던 다이모니온처럼 지능이 떨어지는 악마로 보였다. 짐승을 괴물로 만들었고, 그 외에 어떤 힘을 지녔는지 모른다. 하지만 난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이모니온을 봤을 때처럼 극복할 수 없는 공포가 '보이지' 않았다. 숙련된 병사와 사냥꾼들이 있다. 지금이 기회, 난 카라칼과 사냥꾼들에게 외쳤다.
"사냥꾼들은 뒤에서 원호하고, 카라칼과 병사들은 날 따라와. 함부로 맞서지 말고, 내가 신호를 보내면 한 번에 덮친다."
명령을 내렸으나 숙련된 병사와 사냥꾼들은 굼떴다. 의문에 찬 얼굴로 날 쳐다보기만 하는 카라칼에게 난 버럭 화를 냈다.
"뭐해?"
"…뭐가 보이십니까?"
"뭐요? 저거 안 보여?"
저렇게 거대한 검은 코딱지가 꿈틀거리는데?
난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초점이 내가 보는 곳과 맞지 않았다. 애써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그들은 보지 못하고 있다. 난 악마를 가리켰으나, 그들은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젠장."
천안통으로만 볼 수 있는 악마였던가.
난 즉시 라멜스타를 검으로 변형시켰다.
"악마에게 상처를 낼 테니 모두… 윽!"
끼이-!
악마에게 라멜스타를 꽂아 흔적을 남기려고 했던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갑자기 악마가 내지른 비명에 말과 사람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재빨리 카라칼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죽은 건 아니지만, 기절했다.
쉬익-!
놈의 비명은 반격의 시작이었다. 검은 덩어리였던 악마의 모습이 점점 길고 날렵해지더니, 이내 뱀의 형상으로 변해 갔다. 마침내 놈은 황소를 한입에 삼킬 거대한 뱀이 되었다. 칠흑 같은 검은 비늘을 지닌 뱀이 하얀 눈밭 위에서 사납게 머리를 추켜올렸다. 혀를 날름거리며 날 위협하며 분노에 찬 붉은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개간네!
달비의 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난 라멜스타를 꽉 쥐었다. 눈을 힘껏 꾹 감았다가, 떴다. 이제 악마를 죽이기 전까지 눈을 감을 일은 없다. 이번엔 더욱 순수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피가 뜨거워졌다. 라니스타와의 실전은 어느덧 수십 번이 넘었고, 그때마다 난 항상 죽음을 극복했다. 그가 왜 실전을 중시했는지 난 깨달았다. 몸이 들끓지만, 심장은 차분했다. 추위는 잊히나, 감각은 살아났다.
검은 뱀은 아가리를 벌렸다.
이윽고 독니를 번득이며 날 집어삼키기 위해 쇄도했다.
난 검을 세우고 구불거리는 뱀의 움직임이, 한순간 일직선이 되는 '때'를 기다렸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기회는 한 번이었고, 그 순간도 몹시 짧았다. 하지만 천안통, 개눈깔은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난 내 눈이 가리키는, 한순간의 때를 기다려, 뱀의 벌린 아가리 속으로 검을 쑤셔 박았다. 검이 뱀의 입천장을 꿰뚫고, 독니가 내 팔을 뜯어내기 전에 난 힘껏 검을 휘둘렀다.
검은 뱀은 두 갈래로 갈라진 제 혀처럼, 윗 주둥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며 꼬리로 내려쳤으나 난 가볍게 피해 냈다. 복잡한 뱀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놈은 약했다. 그리고 느렸다. 어디까지나 라니스타와 비교해서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발광하던 놈은 또다시 덤벼들었고, 난 같은 방법으로 때를 노려 뱀의 머리를 베었다. 크기가 워낙 커 단번에 머리를 잘라 낼 순 없었으나, 살점이 너덜거릴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혔다.
개눈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육체의 힘이 따라 준다면, 쌍둥이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오만한 게 아니었다.
라니스타는 내 눈을 초인의 눈이라 불렀다. 아득한 경지에 선 초인만이 볼 수 있는 경지를, 예를 들어 라니스타가 무수한 싸움 끝에 도달하여 볼 수 있는 세상을 난 처음부터 볼 수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X 같지만.
그래, 지금까진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였어.
검은 뱀은 짐승처럼 지능이 떨어졌다.
계속해서 상처를 입으면서, 똑같은 방법으로만 공격을 가했다.
뱀의 머리가 곧 떨어질 듯 너덜거림에도.
"안심했다."
짐승을 괴물로 만들고.
천안통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 뱀의 악마.
"네놈이 X밥이라서."
그 정도로도, 충분한 공포다.
나도 천안통으로 볼 수 없었다면 놈에게 당했을 테고, 놈은 계속해서 칼베인을 넘어 전 제국에 공포를 퍼트리고 다녔을 악마다. 지금 여기서 나와 만나 다행이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답도 없어.
쉬익!
콰드득!
수 번의 부딪힘 끝에 마침내 뱀의 머리를 베어 냈다.
잘린 뱀 머리의 번득이던 붉은 눈은 서서히 사라졌고, 머리가 잃은 몸통은 발광하며 주변 나무를 부러트리다가 결국 움직임을 멈췄다.
"후. 해치웠나?"
쉬운 상대였어. 난 숨을 고르며 승리를 만끽했다. 몇 달 전, 남쪽 섬에 있던 게으른 놈이 이제 기사단도 버거워할 악마를 단신으로 해치웠구나.
스르르륵!
그때였다.
뱀 머리가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가 뱀의 몸통에 달라붙는다.
그렇게 머리가 생겨났다.
놈은 멀쩡하게 살아나서 다시금 날 향해 붉은 눈을 번득였다.
"씨발 놈의 주둥이."
개간네!
달비는 검은 뱀이 아니라 날 보고 있었다.
* * *
베고, 베고, 베고.
살아나고, 살아나고, 살아나고.
공의 힘을 사용했다.
그러나 재생을 막아도 그때뿐, 놈은 계속해서 몸을 붙여 살아났다.
머리를 잘라도, 토막을 내도, 공의 힘을 사용한 채 반으로 찢어 죽여도.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았다.
놈을 압도한다고 해도 끝없이 살아나는 악마라면 얘기가 다르다. 눈이 따갑다 못해 지끈거린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천안통은 길게 쓸 힘이 아니었다. 얼마나 더 싸워야 할지 모른다. 이대로라면 놈에게 죽지 않아도, 내 뇌가 녹아내리겠다.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로 뜨고 뱀의 눈을 응시했다.
"하, 시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다. 천안통은 간혹 내게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보여 준다. 정상적인 개념과 가치관을 장착한 인간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일들이다. 끔찍한 두통을 겪으며 난 천안통이 '수집한' 정보들로 유추하여, 하나의 결과를 도출했으나 맨 정신에 하긴 힘든 행동이었다.
쉬익!
뱀이 또다시 아가리를 벌렸다.
"아, 못 해 먹겠네. 먹어라, 악마야."
난 두 팔 벌려 놈을 맞이했다.
까드득! 까드득!
놈은 날 한입에 삼켰다.
악마의 독니와 라멜스타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41
씹어먹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악마는 곧 목구멍을 젖혀 자신의 뱃속으로 날 밀어 넣었다. 악마의 뱃속은 어둡고, 끔찍하고, 뜨겁고 역겨웠다. 날 꽉 조이는 뱀의 근육에서 소화액이 샤워기처럼 뿜어졌다. 라멜스타를 변형시켜 전신을 감쌌으나,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다. 난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공의 힘, 라멜스타, 그리고 달비. 공의 힘, 라멜스타, 달비...."
우선 공의 힘을 펼쳤다. 놈의 뱃속에서 악마의 힘을 막는 공의 성물이 힘을 발휘하니 일순간 날 녹이려 들던 소화액이 밀려 나갔다. 붉은 막이 방패가 되어 날 지켰다. 하지만 이 정도론 악마를 죽일 수 없다. 난 그 틈을 타, 라멜스타를 두꺼운 막대기 형태로 변형시켜 늘렸다. 날 조이던 뱀의 근육을 밀어내 몸을 뒤척일 공간이 생겼다.
이래서 개눈깔이 X 같다는 것이다. 시발, 적당히 할 수 있는 걸 '보여 줘야지'.
난 검은 뱀의 뱃속에서, 남은 달비의 힘을 모두 끌어냈다.
별을 떨어트리거나 리버스 메테오를 사용할 순 없더라도.
개간네!
먹힐 때까지만 해도 곁에 없던 달비가 갑자기 곁에 나타났다.
달비는 푸른 빛을 머금었다.
영수는 악마에게 독.
아무리 재생 능력을 지녔더라도.
그림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빛으로 태워 버리면 돼.
개간네에!
이윽고 달비의 몸이 밤하늘에 뜬 달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빛에 닿자, 순식간에 뱀은 검은 진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날 잡아먹은 뱀이 녹아내렸다. 이번엔 그림자로 변하지도 않았다. 달비의 빛이 계속해서 검은 진물을 쬐자 서서히 증발했고, 마침내 검은 뱀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아....
달비가 지친 듯 쓰러졌다. 난 달비를 안으려다가 멈칫했다. 악마가 죽자마자 몰려든 숲의 영수들이 달비의 주변에 앉아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며 달비를 보살폈다. 난 달비의 힘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잠시, 달비를 녀석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악마는 죽었다.
"어디서 온 놈이냐."
그러나 놈은 어디에서 왔지?
흔적.
희미한 흔적이 이어진다.
악마와의 싸움으로 민감해진 개눈깔이 악마의 흔적을 밝혔다.
몇 주 전, 어쩌면 몇 달 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된 악마의 흔적이 내겐 보였다.
아마, 놈이 왔을 곳까지 이어진 흔적이겠지.
난 흔적을 따라갔다.
"연못 아래."
뱀의 몸이 움직이며 남긴 흔적.
난 망설이지 않고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얼음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못은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닥, 마치 무저갱과 같다.
놈은 이곳에서 왔다.
악마들의 고향, 놈의 무저갱이 여기다.
깊어서 단번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숨을 쉬기 위해 올라오던 난, 내 곁으로 다가오는 작은 붕어를 발견했다.
영수들은 날 싫어한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도 있었지.
달비를 구할 때.
악마를 죽일 때.
붕어가 곁에 붙자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테라린 호수에서 겪었던 일과 같았다. 영수는 내가 무저갱에 들어가길 원하고 있었다. 난 아래로 헤엄쳤다. 계속해서, 깊은 물 속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자, 바위로 감춰진 수중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위협'은 없다.
동굴의 통로를 지나서 위로 올라가자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좁은 굴이었다.
"뱀굴인가."
놈이 온 곳, 무저갱을 발견했다. 이런 외진 곳에, 연못 아래에 숨어 있던 곳이니 대전쟁 때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악마는 왜 이제야 움직인 거지?
무저갱을 찾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난 멜리사 누나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악마의 무저갱엔 반드시 보물이 있으니, 쿤칸 제국이 무저갱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니라.
굴을 살피던 난 힘들이지 않고 '보물'처럼 생각되는 걸 발견했다.
사람 머리만 한 돌멩이였다.
"성물은 아니다."
하지만 돌멩이 주제에, 마치 '영수'처럼 보였다. 돌이 막대한 힘을 품고 있다. 마법사들이 꿈에 그리는 보물이라는 '마석'일까? 난 조심스레 돌멩이에 손을 올렸다.
"이건… 충전기?"
단지 만졌을 뿐인데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강인한 기.
난 재빨리 돌멩이를 부둥켜안고 신선의 자세를 취했다.
자연지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전에 없이 거대한 힘이 내 몸 곳곳, 깊숙한 곳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달비보다 더 강력한 충전기였다. 믿을 수 없는 힘이야. 난 아랫배가 저릿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힘은 정말 굉장해. 혹시라도 흘릴까 봐, 난 무아지경으로 힘을 탐닉했다. 순식간에 지금까지 쌓았던 자연지기를 뛰어넘는 힘이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불었고, 물이 되어 채워졌으며, 불이 되어 타오르고, 땅이 쌓이고, 나무가 자라나기시작했다. 이 힘은 대자연, 그 자체였다. 악마에겐 독이겠지. 무저갱에 놓인 이 돌멩이 하나 때문에, 뱀 악마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있었을 거야.
육신의 감각은 하찮았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졸음을 느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든 아이처럼, 난 잠을 마다치 않고 만끽했다.
'4년' 만에,
깊게 잠들 것 같았다.
* * *
제발 날 지켜 주지 마!
아니야, 난 못해.
난 희망이 아니라고, 제발.
겁먹은 척하는 것도 지겨워.
창식, 넌 이상해.
병신 새끼, 왜 나 따윌 지키려다....
기억해 둬라, 우린. 너 때문에 죽는 거다
날 그 눈으로 보지 마.
너 때문에.
너라면.
넌....
다 너 때문이야.
* * *
이마를 적시는 차가운 물에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뜨자 동굴의 천장이 보였다. 종유석이 머금은 물이 한 방울 떨어져 얼굴을 적셨다.
난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았다. 동굴은 찬데, 물은 미지근했다. 종유석에 맺힌 물이 아닌 듯싶다.
"젠장."
무저갱의 어둠이 반가울 지경이다. 마석의 힘을 받아들이며, 난 아주 깊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깊게 잠들진 못한 것 같다. 오랜만에 기분 나쁜 악몽을 꿨다. 아니, 악몽이 아니지. 모든 게, 다.
"후우."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대자연의 힘을 품고 있던 돌은 이제 볼품없는 돌일 뿐이었다.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 넘실거리는 힘이 느껴졌다. 달비 충전기를 사용해서 자연지기를 모으면 개운하고 상쾌할 뿐, 이처럼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라니스타 놈이 항상 씨부렁거리던 개소리가 이해가 갔다. 이게 자연지기, 이게 내공. 악마와의 연이은 싸움으로 지쳐 있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활력이 넘쳤다.
다아!
달비가 허벅지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너 좀 커졌다?"
전엔 종아리에 머리를 비볐었는데.
달비가 커졌다. 달비가 강해지면 나도 강해졌었지, 힘의 영향이 서로에게 가는구나.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개간네?
계속해서 꿈의 잔해가 머리를 맴돌았다.
난 머리를 박박 긁고 달비의 머리도 마구잡이로 헝클었다.
"X 까라지."
악마의 무저갱에서 볼일은 끝났다.
난 다시 해저 동굴로 향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잡생각이 달아났다. 어두운 물속을 헤엄쳤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위를 향해 힘차게 다리와 손을 휘젓는다.
붕어 영수는 게을렀다.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놈이 나타나선 날 물속에서 숨 쉬게 해 줬다. 하지만 이미 햇빛이 화사하게 비출 만큼, 물 밖과 가까워진 후였다.
"푸하!"
카라칼과 사냥꾼들이 걱정할까 싶어서 얼른 그들을 찾았으나, 이상하게도 자작나무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심지어 전투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초병 정도는 세워 둘 만하잖아.
혼자 남은 난 뺨을 긁적였다.
"귀찮게."
어쩔 수 없이 칼베인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칼베인까진 말을 타고 한 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제법 먼 거리였다.
하지만 쉬지 않고 뛰어서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해의 위치가 정오와 가까웠다.
지치지도 않는 게, 내 몸에 확실히 변화가 생긴 듯싶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안이 시끄러운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괴물에게 입은 피해와 내가 부순 주점을 짓느라 바쁘겠지.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웅성거림 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어라?"
마을 사람들은 바빴다. 내가 넌지시 걸어가서 마을을 통과할 동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두 모여 있었는데, 사냥꾼들 중심에는 짙은 청록색 외투를 입고 푸른 늑대를 탄 남자가 있었다.
맥과 아버지다.
"뭐여."
아니, 어떻게 아버지가 여기 계시지? 퀄츠 성에서 칼베인까진 열흘 넘게 걸리는데. 혹시 내가 출발하자마자 몰래 뒤따라온 건가? 난 정말 팔불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여기서 뭐하십니까?"
"수색 작전은 기사들이 도착하면 내일 새벽… 응?"
내가 외치자마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의 고개가 돌려지더니, 모두 날 바라봤다. 시선 집중을 받자 난 괜히 쑥스러워 손을 다시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몹시 놀란 듯했다. 뭐, 하루 정도 지난 것 같으니 그럴 만도 하다. 죽은 줄 알았나? 아버지 곁에 있던 카라칼이 움찔하며 뛰어오려다가,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독수리 같은 눈이 빛났다. 설마, 눈물이 맺힌 걸까.
"아, 폴스타!"
날 보는 아버지의 눈이 너무 애절했다. 심지어 제국 공작의 체면이 구겨지게 야단스럽게 뛰어오며 날 와락 안았다. 이 양반이, 사람들 다 보는데 호들갑을 떨면서 날 걱정했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치과 의사처럼 입속까지 검사했다.
"세상에, 어금니가 없구나!"
"이건 라니스타 형이 뺀 겁니다."
"아…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내 심장은 여태까지 멈춰 있었단다. 아, 아르테미스시여! 감사합니다."
다아?
"소식을 들었다고요? 며칠이나 지난 겁니까?"
"네가 행방불명된 지 오늘로 열흘이나 지났어."
아버지는 퀄츠 성에서 출발하여 이제 막 칼베인에 도착한 것이다.
세상에, 악몽을 꿀 만큼 오래 잤다 싶었더니.
이토록 오래 무저갱 바닥에서 자빠져 잔 거야?
다아!
달비는 친구이자 영수이자 충전기이자 링거액이었다.
녀석이 힘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죽진 않았어도 영양실조에 걸렸을지도.
"악마와 싸웠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수척해 보이진 않구나. 다행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들아."
난 촌장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아버지에게 그동안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그림자 뱀 악마, 놈에게 영향을 받자 괴물로 변한 짐승, 발견되지 않은 무저갱.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듣던 아버지는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악마다. 젠장, 짐승을 괴물로 만들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악마라니. 아직도… 그런 끔찍한 악마가 남아 있던가."
아버지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잠잠하던 악마가 요즈음 들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원인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우연이 아니다. '우리들'이 전생을 기억한 이후로, 갑자기 악마들이 활발하게 나타났어. 무언가 상관관계가 있다. 멜리사 누나의 말을 빌려,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을 테니까.
* * *
카라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카주웨아가 마을에 도착했다. 카주웨아는 날 보자마자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와락 안았다. 카주웨아는 내가 실종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숲을 수색했다고 했다. 난 약속대로 아버지에게 카주웨아의 용맹함과 날렵함에 대해서 칭찬했다. 아버지는 카주웨아에게 퀄츠 성에서 지내길 권유했고, 칼베인 사람이면서 출세욕이 있던 카주웨아는 흔쾌히 퀄츠 성의 객식구가 되겠다고 했다.
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을 더 묵고, 아침부터 칼베인 마을에서 나섰다.
떠날 때, 사냥꾼들은 날 영웅이라 부르며 노래를 불렀다. 제국엔 없는 노래로, 인디언들의 노래와 닮아 있었다. 촌장으로부터 성인식을 치른 칼베인 사람만 착용할 수 있는 상아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난 목걸이를 걸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아버지도 주머니에서 상아 목걸이를 꺼내어 목에 걸었다. 오래된 목걸이인지 상아가 노르스름했다.
"히야!"
카주웨아가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안타깝게도 카라칼과 병사들은 주점이 완공될 때까지 칼베인 마을에 남기로 했다.
* * *
몇 주 동안 잠만 자던 시간까지 포함해서 한 달 가까이 맛있는 걸 먹지 못했다.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수십 개의 요리를 주문해서 혼자 즐기던 때였다.
"폴스타 님,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카주웨아가 찾아왔다.
"날 모셔?"
아버지가 영수술사를 필요로 한다. 카주웨아는 객식구로 아버지의 손님이다. 하지만 카주웨아는 마치 날 모시는 호위 기사처럼 얘기했다. 카주웨아는 당당하게 내게 선언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전 출세하고 싶습니다."
"응, 알아."
"그러니 '줄'을 잘 타야겠지요. 누구보다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튼튼한 줄을요."
"그래. 근데 왜 날 모신다고 해."
"지금부터 작업하는 겁니다."
카주웨아는 칼베인 출신이라 아직 예법에 서툴렀지만, 도리어 솔직하고 당당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야망이 있는 친구구먼. 하지만 난 그다지 네가 원하는 줄은 아닐 텐데."
쌍둥이들이 닻을 메다는 강철 사슬이라면, 난 메주를 묶는 짚에 불과하다.
카주웨아는 내게 무릎 꿇고 한쪽 손을 내밀어 제법 본격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칼베인 사람들은 오로지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만 판단합니다. 저 카주웨아, 폴스타 님이 장차 위대한 푸른 기둥의...."
"됐어, 그만해."
쯧, 다른 놈들을 아직 못 만나 봐서 그렇다.
카주웨아의 충성심이 얼마나 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영수, 날다람쥐를 타고 보여 줬던 활약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용감했다. 아직 나이도 어리다. 어디까지 클지는 몰라도, 뛰어난 영수술사가 될 건 분명했다. 난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그리고 카주웨아에게 다가가서 엄숙한 태도로 손을 붙잡았다. 카주웨아는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아버지를 도우면 멀지 않아 퀄츠 영지의 봉신封臣까진 어렵지 않게 받을 텐데."
"…더 높은 자리를 원합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카주웨아의 출세욕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 같다. 난 손을 놓았지만 카주웨아는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뭔 짓인가 싶어 녀석의 얼굴을 쳐다볼 때였다.
"으악!"
음식을 나르던 걸시였다.
걸시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황급히 다가와서 수도手刀로 내 손을 잡고 있던 카주웨아의 손목을 쳐 냈다. 그러곤 카주웨아를 밀쳐 냈다. 황당한 행동이었다.
"너 뭐하냐."
걸시는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남녀칠세부동석! 걸시의 임무, 음흉한 목적의 여자 접근 차단! 수행 중, 도련님."
"누구 맘대로?"
"걸시 마음… 아니, 시종의 임무입니다. 성인식을 치를 내년까지...."
"됐어. 그러지 마. 제발 좀."
42
멜리사의 정원,
누나가 돌아오자마자 오두막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칼베인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운이 좋아."
멜리사는 흥미로워했다.
"무저갱에 남은 정령석은 없을 터인데, 아니...."
날 지그시 노려보더니 피식 웃었다.
"득의 성물을 지녔으니 당연한 건가?"
역시 멜리사는 득의 성물을 원하고 있었어. 그런 느낌이야.
"정령석, 마법사 놈들은 마석이라고 부르지. 재미난 물건이야. 자연의 기를 머금은 귀중한 정령석은 신화적인 마장구를 만들 때 꼭 필요한 재료지. 하지만 정령석이 머금은 힘을 흡수한다고? 들어본 적도 없어. 자연의 힘을 흡수한다라, 씁. 라니스타에게 이상한 걸 배웠어."
라니스타는 멜리사를 이상하다고 하고, 멜리사는 라니스타를 이상하다고 했다.
뭐지? 서로 견제하나? 이상한 놈들끼리 서로 삿대질하는 게 퍽 우습다.
"다른 정령석은 이제 없어?"
"무저갱의 악마가 풀려난 후로 정령석은 대부분 소실됐어. 다시 말하지만, 네놈이 운이 좋았던 거야."
이게 득의 성물의 효과라면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비유하면, 퀘스트의 보상 같은 거로구만?
* * *
다음 날.
새벽부터 라니스타 놈과 실전을 치렀다.
나는 평소대로 가진 힘을 모두 쏟아부었는데, 괴상한 일이 발생했다.
치르르-!
한 걸음 내딛자, 먼지가 일며 바람이 분다. 자연적인 바람이 아닌 내게서 불어온 바람이었다. 난 슬며시 라멜스타를 뻗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지저분한 연병장 바닥의 돌 부스러기들이 밀려 나갔다. 난 내 몸을 둘러싼, 선명하게 보이는 푸르스름한 무언가를 바라봤다. 마치 내 몸을 연료 삼아 가스 불처럼 은은하게 타올랐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오호."
라니스타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드디어, 이 씨발 놈이.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먹고선."
욕을 하든가, 칭찬을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하지.
"기를 발현했구나."
난 라니스타가 기뻐하는 이유를 내가 기 혹은 오러라 불리는 힘을 펼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날 더 합법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는 이유가 생겨서라고 확신했다.
"드디어 잡놈들을 흉내 내지 않아도 되겠어. 끌끌끌, 하하하!"
소름이 돋았다.
다이모니온, 호숫가의 위장자 그리고 검은 뱀.
놈들을 봤을 때보다 지금이 더.
오한이 돋아서 다리가 벌벌 떨려왔다.
"하, 하하. 좋아, 시발. 함 뜨자."
나도 미친놈이 되어 갔다.
두려움은 찰나였고, 솔직하게 말해.
새로운 경지를 배울 수 있음에 기뻐서 몸이 떨려 온 것이다.
* * *
라니스타가 말했다.
기(오러)는 곧 '반발력'.
저항하는 힘이라는 것.
처음엔 외력에 저항한다. 나중엔 한계에 저항한다. 마침내 땅과 하늘의 이치를 저항하니, 인간이 하늘 위에 서는 힘이라고 했다. 라니스타는 단련하면 그 어떤 힘보다 위대하고 강력한 힘이라며, 만약 신이 있다면 능히 신의 간섭마저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무림인의 자만심일까?
그렇다기엔 정말, 라니스타는 신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장난질을 관둬도 되겠구나."
라니스타는 지금까지 싸워 왔던 수많은 실전을, 단지 장난질로 치부했다. 내 가운뎃손가락을 잘라 내고, 무수한 상처를 입혔던 싸움들이 하찮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는 검을 들자 검신에 출렁이는 기가 맺혔다.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무기'를 들지 않고 싸운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뇌철사군 남궁사. 내가 열일곱 때 죽였던, 일류 무인이다."
라니스타는 자세를 취했다. 여태까지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지만, 본격적으로 '무공'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한편으론 무서웠으나 난 인정받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챙-!
라멜스타를 봉으로 변형시켰다. 무공의 초식은 모두 외우고 있었으나, 기가 없어 펼치지 못했던 무공. 타구봉법의 자세를 취했다. 난 그제야 타구봉법의 묘리를 깨우칠 수 있었다. 기를 두르지 않으면 역설적이게도, 무기가 없이 무공을 펼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호오."
나는 순수한 호승심과 탐구심探究心으로 라니스타에게 내 전력을 부딪쳤다. 라니스타는 웃으며 내 재롱을 성심껏 받아쳤다. 날이 저물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진심이다. 난 그가 고마웠다.
우습게도 경지가 오를수록, 그에 대한 존경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지금까진 장난이었으나, 이젠 난 그가 내 스승임을 알고 있다. 내가 힘을 갈구하면 그는 기꺼이 답을 건네준다. 전생의 악연에 얽매여선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내 적이 아니다. 하지만, 뛰어넘어야 할 산이자 스승이었다.
날이 저물고, 날이 밝아도 가르침은 끝나지 않았다.
즐거웠다.
끊이질 않는 아수라의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랐다.
* * *
"벌써 두 달째지?"
"말도 마. 라니스타 도련님은 그렇다 쳐도, 폴스타 도련님까지...."
"미치신 걸까?"
"불경하게! 하지만… 이제 곧 후계자 교육이 시작될 텐데 어쩌시려는지 몰라."
퀄츠 성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소문은 어느새 쿤칸의 변방 마테란드 공작가까지 퍼지게 되었다.
레인버그 가문의 장남이자 대륙제일 기사단의 단장 라니스타 퀄츠 레인버그와 영수술사의 힘을 각성하여 신성으로 떠오른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가, 후계 다툼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움을 벌이며 하루도 빠짐없이, 잠자는 시간조차 아껴 가며 검을 부딪힌다는 소문이었다.
처음엔 비교적 화목한 가풍의 레인버그가에 일어났기에 괴소문이라고 치부되었지만, 직접 목격한 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소문은 진실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달의 아이라고 칭송받는 게 못마땅해했던 권력가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공자를 권력을 탐하는 미친 공자라고 폄하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형제의 불화가 레인버그를 무너트린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정작 레인버그 공작과 레인버그를 따르는 가문들은 잠잠했다. 소문을 막고자 하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레인버그 형제의 싸움을 잠깐 지켜본다면, 둘이 서로의 목숨을 끊고자 발악하는 광인들이라고 생각했다. 형제의 정, 귀족의 체면은 없었다. 우연히 형제의 싸움을 목격한 루차콴 공작은 둘을 피에 굶주린 살인마와 같다고 모욕했다.
퀄츠의 기사들은 연병장을 두 달 동안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형제는 시녀가 가져다준 밥이 도착하면 싸우다 말고 서서 먹었으며, 잠을 자는 모습은 본 적도 없고, 연병장에서 자리를 비우지도 않았다.
라니스타에 대한 경외심을 지닌 기사들은, 라니스타가 보인 행보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초인에 맞서는 레인버그 막내 공자는 그들의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싸움은 언제나 라니스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막내 공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덤벼든 것이다.
그 모습을 누구는 악귀와도 같다고 말했다. 오르지 못할 산을 계속해서 오르는 건 미련하고도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손발이 닳아도 계속해서 오른다.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그는 미약하게나마 산을 오르고 있다.
기사들은, 나중엔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을 반성하며, 라니스타가 없어도 지옥 훈련을 스스로 수행했다.
형제의 싸움은 변화를 일으켰다. 외부적으론 미친 공자들의 혈투로 불렀지만, 퀄츠 성에선 감히 둘의 싸움을 권력을 탐하는 소인배들의 알량한 결투라고 부르지 않았다. 칼을 든 자들은, 형제의 싸움을 전사의 숭고한 싸움이라고 여겼다.
마침내 두 달에 걸친.
전설로 기록될 무수면 결투가 끝이 났다.
놀랍게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을 지켜본 기사들은 장엄한 결투의 끝을 모두 공통되게 묘사했다.
형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놓았다고.
* * *
베렝 산맥의 신성한 언덕에 도착한 난 잠시 멈추어 서서 오래된 수도원을 구경했다. 백 년 전에 지어진 수도원이라, 과연 베렝 산맥의 거친 산세와 어울리는 고즈넉한 건물이다. 현 교황이 일 년에 두 번, 미사를 지내는 카클레앙 수도원이다.
아지비카교의 성지지만 베렝 산맥에 흉악한 소문이 돈 이후부터 신도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갈대밭에 둘러싸인 수도원은 을씨년스러웠다.
"여기까지 피비린내가 나."
수도원에 도착하여 난 찌푸린 인상을 펴고 힘차게 문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끼익-!
잠시 후,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얼마나 사용하지 않았으면, 수도원 대문의 녹슨 경첩을 그대로 둘까. 열리던 문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의 틈만 남기고 멈췄다. 쇠고리를 걸어둔 것 같았다.
"누, 누구시오?"
문틈 사이로, 늙은 수도승이 보였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수염도 깎지 않아 너저분했고 입은 생기 없이 퍼랬다. 난 싱긋 웃으며 수도승에게 말했다.
"검은 사제입니다."
"오, 사제님.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검은 사제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수도원의 문을 열 수 없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길."
"당신의 두려움을 이해합니다, 가녀린 자여."
난 품에서 마법사의 돌을 꺼냈다. 본래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력 경지를 확인하는 용도지만, 검은 사제들이 사용하면 돌은 은은한 빛을 품는다. 난 수도승이 보이도록 돌을 쥐고 문틈 사이로 넣었다. 놀란 수도승이 뒤로 물러났다.
우웅-!
공의 힘을 사용하자, 돌은 빛을 내뿜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찌푸린 수도승은 이내 화색하며 쇠고리를 열었다.
"검은 사제님!"
그동안 얼마나 두려웠는지 날 구원자로 여기는 수도승이었다. 난 합장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과 기도원을 같이 겸하는 카를레앙 수도원, 아지비카교의 삼신을 숭배하는 곳답게 수도원 곳곳에 신을 상징하는 문양과 석상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신성하진 않았다. 피 냄새는 더 진해졌고, 돌기둥과 바닥에는 겹겹이 쌓인 악기가 넘실거렸다.
피 냄새는 '아래'에서 풍겨왔다.
"사제님, 베렝 산맥에 악마가 나타난 게 틀림없습니다. 오, 삼신이시여."
"자세하게 들려주십시오."
난 수도사가 기거하는 2층으로 안내받았다. 방은 여러 개였으나, 사용하는 방은 늙은 수도승의 방 하나밖에 없었다. 수도승은 부끄럽다고 말했다.
"신앙을 잃은 어리석은 자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저와 사제님만이 수도원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어리석긴, 현명한 거지.
수도승이 마시는 녹차를 마시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몇 주 전에 일어난 참사부터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피 냄새는 더 진해졌다.
* * *
교황의 미사가 끝난 직후.
수많은 신도가 험난한 베렝 산맥의 수도원으로 순례를 왔다.
하지만 수도원에 도착한 신도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베렝 산맥에서 실종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사라지자 영주가 조사단을 파견했으나 산맥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악마의 짓이라고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실종된 신도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오십 명이 넘자, 이제 아무도 수도원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과연, 피 냄새는 그 때문이었군.
"…그 일이 발생한 건 성인 베프레를 기리는 의식이 끝났을 때였습니다. 어두운 독방에서 기도를 드리던 수도사 몇 명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마치 악마에게 삼켜진 것처럼. 남은 수도사들은 겁에 질려 도주했고, 이제 수도원엔 저와 베네 사제님만 남아 있습니다."
"베네 사제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용감하신 분입니다. 며칠 전 직접 식료품을 조달하러 산맥 아래의 마을로 내려가셨습니다. 아아, 악마가 농간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제 곧 돌아올 때인데...."
"그래요, 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앙-!
그리고 방에서 나와 철문의 경첩을 망가트리고 문짝을 발로 찼다.
"사제님!"
"잠시 계십시오. 금방 끝날 겁니다."
두꺼운 문이니, 영양실조에 걸린 늙은 남자가 열진 못할 것이다.
* * *
"베콜 수도자님!"
쾅, 쾅.
"포도주를 얻어 왔습니다. 저번처럼 한 병을 그대로 마시지 마시고… 어라?"
문을 열어 줬다.
꽤 젊은 사제가 포도주를 꺼내어 건네다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척'했다.
"베네 사제님?"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아, 혹시 검은 사제님이십니까? 복장이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네요. 그렇군요. 좋아요, 드디어 카를레앙 수도원에 사제님이 오셨군요."
베네 사제는 날 지나쳐 들고 온 식료품들을 단상에 놓고 내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에 닥친 위기를 교황님께서 알아봐 주셨군요. 다행입니다, 저 혼자선 '산적 떼'들을 차마...."
"산적 떼? 이 산에 산적이 있답니까?"
"요 근래 일어난 실종 사건들이 악마의 소행이라는 헛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신도들은 안타깝게도, 산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사제님, 우선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으시고 내일 본청으로 가서 성기사들을 파견 요청하시는...."
"지랄."
"…네?"
난 기다란 봉을 그에게 보여 줬다.
"이게 뭔 줄 아십니까?"
당황하던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지팡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난 봉을 들어 올렸다.
"천벌입니다."
휘익!
봉을 내려쳤다.
그 순간, 악마는 눈치챈 모양이지만 도망가진 못했다. 그가 어떤 힘을 지닌 악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위장자는 단 일격에 '뭉개졌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짓뭉개지며 순식간에 푸른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난 라멜스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귀찮다."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까지 걸어가기가 싫었다.
난 봉을 다시 높이 들고, 아래로 내리꽂았다.
콰앙-!
사고방식이 달라졌다.
지름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
43
돌바닥이 내가 지나갈 공간만큼, 깔끔하게 무너졌다.
지하로 내려간 난 끔찍한 악취에 코를 막았다.
개간네!
달비는 내려오지 않았다. 녀석에게 이곳은 똥오줌이 가득한 진창보다 더 더러운 곳이다.
본래 수도원의 지하실은 포도주를 저장하는 창고 등으로 사용하지만, 악마는 이곳을 자신의 취미실로 꾸민 듯싶었다.
난 지하실을 둘러보며 역겨움을 참았다. 두개골이 가득하다. 개수로 보아하니, 수도원을 찾았던 신도들의 것이다. 해골이 가득 쌓인 지하실에는 우물도 있었다. 하지만 물이 아니라, 피로 채워져 있다. 난 우물 곁에 그려진 '문장'을 확인했다.
"벌써 세 번째인가."
악마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곳은 어김없이 악마가 존재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특별히 더 심각했다.
증거가 나왔다. 악마가, 악마를 숭배한다는 증거가.
악마에게도 서열이 있는 게 밝혀졌다.
"젠장."
게다가 악마는 아지비카교의 사제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번엔 멍청한 놈이라 쉽게 악행이 드러났지만, 똑똑한 놈이었으면 못 찾았을지도. 이건 단순히 악마가 귀족으로 위장한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우샤스 누나를 만나야겠어."
* * *
아지비카교의 사제로 위장한 악마.
만약 아지비카교가 이미 악마에게 넘어갔다면 검은 사제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이 일은 함부로 알려선 안 될 극비다.
이번엔 우샤스 누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난 지하실에서 나와 수도승을 만났다. 문짝을 뜯어내자 수도승이 기겁하며 따졌다.
"허억, 대체 무슨 짓입니까! 윽, 피비린내가...."
"종이와 펜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채, 책상 옆에 있습니다. 아니, 검은 사제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뭐가 부서진 건가요?"
"조언 하나 하지요. 당장 수사복을 벗고 산을 벗어나, 북쪽으로 계속 걸어가세요. 쉬지 말고, 누군가 말을 걸거든 무시하고, 사람 많은 길을 따라서. 아, 절대 지하실에는 내려가지 마시고 바닥에 난 구멍도 보지 마세요."
당황한 수도승이 머뭇거릴 때 난 고함을 질렀다. 유약한 아저씨다. 깜짝 놀라 허겁지겁 방에서 도망쳐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비명이 들려왔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보지 말래도. 이윽고 녹슨 경첩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난 그가 부디 마을까지 무사히 도망가길 바랐다.
"어디 보자."
난 펜촉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세 글자를 썼다.
그리고 곱게 접어, 촛불에 태웠다.
마른 종이가 타올라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종이가 모두 타자 순식간에 연기는 창밖으로 날아갔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법은 참 편해."
이건 마법이라기보다, '요술' 쪽에 가깝나?
* * *
이틀이 지난 밤.
저주받은 카클레앙 수도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투닥거림은 끝났니?"
우샤스 누나는 날 보자마자 '형제의 싸움'을 언급했다. 난 고개만 끄덕였다. 두 달간에 걸친 싸움. 끝은 나지 않았지만 이제 '남은 놈'들은 무작정 부딪힌다고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
"피비린내잖아."
"그러니까."
멜리사와 라니스타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우샤스는 아직 정체 모를 괴이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우샤스 누나는 성큼성큼 지하실로 내려갔다. 백골이 쌓인 더러운 곳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며, 피로 채워진 우물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악마 의식이네."
"악마가 악마를 숭배하는 걸까?"
"이상할 것도 없지. '신'들조차 서열을 나누는데."
마치 신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잖아?
누나의 얼굴이 가관이다.
시체의 얼굴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수도원에 악마라, 수상하지 않니?"
우샤스가 말했다.
"교황청에서 검은 사제를 파견하기는커녕, 안건조차 올라오지 않았지."
누나가 손을 뻗어 백골을 만졌다. 그 순간, 마치 오랜 세월에 풍화된 것처럼 백골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백골이 모두 흩어지고, 우물에 담긴 피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증발했다.
"몇 년 동안 아지비카교를 지켜봤어. 이로써 주교급 이상의 고위 성직자 중에, 악마이거나 악마숭배자가 있는 건 분명해졌네."
우샤스 누나는 은밀한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속삭였다.
"열흘 뒤, 교황령에서 세상 창조를 기리는 삼신의 의식이 개최돼. 대주교, 추기경, 교황까지 모두 모여. 그날, '우린' 알아볼 수 있겠지. 어떤 자가 종의 탈을 쓴 악마인지."
"…알아보면? 그 뒤엔?"
누나가 웃자 난 숨이 턱 막혀 왔다. 이제 어느 정도 쌍둥이들의 사고를 이해하게 된 난, 그날 누나가 저지를 대륙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예상이 갔다.
"진심이야?"
"오, 이런 나약한 동생아. 우리에겐 무모함이 축복이라는 걸 언제 깨닫겠니? 혼란은 적이 아니란다. 조심해야 할 건 무지無知, 아는 이상 무엇이 두려울까?"
혈연과 권력 그리고 종교.
가장 경계해야 할 금기의 영역.
하지만 우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기를 가뿐하게 어기고자 했다.
"음."
무모함이 축복이라.
어찌나 오만한 발언인가?
무모하게 저지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너 때문이야."
"으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이편이 나아. 적어도 날 탓하진 않잖아?"
퍽 우습다. 전생에서, 오히려 난 그들처럼 무모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난 누나에게 말했다.
"계획을 말해 줘."
거울을 본다면, 지금 내 얼굴도 우샤스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
* * *
걱정되는 건 아버지의 계획에 차질이 가는 것이다. 15년 주기로 돌아오는 국경일에, 대부분의 귀족이 모인 그날, 아버지는 일을 치르고자 했다. 미리 아지비카교의 악마를 솎아 내는 게 잘한 짓일까? 아니, 어차피 현 상황에 검은 사제들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우샤스 누나는 이번 일이 전초전이 될 거라고 했다.
"라이베라의 계획은 대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졌지. 하지만 그때와 달라. 우리에겐 네 눈이 있지. 주도권은 악마가 아닌 너에게 있다."
국경일에 제국의 모든 귀족을 황성에 모은다.
그 후 내가 악마가 누구인지 구별하는 방법.
아버지가 은밀히 추진하던 계획이다.
하지만 우샤스 누나의 생각은 달랐다.
'미리 알려 두는 것'이 추가된 것이다.
숨기지 않고 국경일에 악마를 구별한다고 선언한 뒤.
모이지 않는 귀족들은 악마로 판단한다.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건 위장자들이 숨어서 제국을 좀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내 힘을 아버지의 예상보다 더 믿어 줬다. 우샤스는 '우리가' 있으면, 후자의 계획이 악마를 섬멸하는 데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단언했다.
"이 계획을 과연 황제와 다른 공작들이 찬성할까?"
문제는 정치다. 이 계획은 레인버그 가문이 주도한다. 허수아비 황제는 그렇다 쳐도, 다른 공작가는 노발대발하며 반발할 텐데.
"걱정하지 마. 그들은 '이번 일'은 순순히 따라 줄 테니까."
우샤스 누나는 다 계획이 있구나?
* * *
생각해 보면 교황령만큼 악마들이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은 없다.
분리된 권력과 황실을 뛰어넘는 권한을 지녔다. 검은 사제들이 지키고 있으니 감히 악마가 숨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 젠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샤스 누나의 도움으로 난 손쉽게 정체를 숨기고 '삼신의 날' 의식제에 참가했다. 아지비카교가 모시는 세 명의 신이 악마의 무저갱 위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신화, 그날을 기리는 아지비카교 최고 축일이다.
교황을 비롯한 아지비카교 최고 사제들은 물론, 황제와 제국 대신들도 참가했다. 하지만 제국의 '기둥'인 공작들은 참가하지 않고 대표 사절단만 보냈다. 제국의 권력 구도를 엿볼 수 있다. 현 황제는 제국 역사상 가장 약한 왕권을 가졌다. 괜히 허수아비 황제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황실이 참여한 종교 행사에 공작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해, 공작들은 아지비카교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으나 황제는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교황령의 광장에서 종교 행사가 벌어졌다. 광장 중앙에 마련된 제단에는 삼신에게 바치는 공물이 하늘 높이 쌓여 있다. 제단 아래에는 권력가들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상석에는 교황과 추기경이 앉았고, 황제와 측근들은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지구의 부활절 축제처럼 개방적이지 않았다. 엄숙한 종교 행사다.
사제들이나 초대받은 신도들은 무대 아래서 행사를 지켜봤다. 삼신의 의식은 간결했다. 제단 가득 쌓인 공물, 비단이나 금화, 곡식과 귀한 목재들을 불태우는 것이다. 돈 지랄이 따로 없어.
둥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기도했다. 고개를 추켜든 자는 나밖에 없었다. 군중 속에 숨은 난 임무를 상기했다. 아지비카교의 고위 사제 중 악마를 찾아내는 일이다. 난 인파를 헤집고 무대 가까이 갔다. 눈을 번득이며 무대 위에 앉은 고위 사제들을 관찰했다.
"…시발."
누가 악마인가, 누가 인간인가?
애초에.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악마를 확인한 난 몸이 굳어 갔다. 천안통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혹시라도 틀렸을까 눈을 비비며 재차 놈들을 바라봤다. 착각은 없었다. 뒤통수가 뻐근하다. 내 눈에 담긴 진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확인했니?"
로브를 뒤집어쓴 우샤스 누나가 어느새 내 곁에 있었다.
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국가 반역급이야."
"흐음?"
"한두 명이 아니라고."
난 다시 한번 무대 위를 둘러봤다.
주교, 대주교, 추기경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띤 채 기도를 드리는 백발의 노인.
마티오 3세.
난 역겨움을 간신히 참아냈다.
"전부."
"전부?"
"무대 위에 오른 모든 사제가 전부 악마다. 추기경과 교황마저. 모두, 그것도 상당히… 끔찍한 악마야."
신을 믿지 않는 나 또한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악마를 견제하며 세력을 키운 아지비카교가, 사실은 악마의 온상지였다.
대체 언제부터 '악마'였을까? 제국의 국교이자 수백만 신도를 거느린 아지비카교. 종교를 움직이는 수장이 인간을 잡아먹는 위장자들이었다니.
"그렇구나."
나와 달리 우샤스 누나는 태연했다.
"놀라지 않네. 예상했던가?"
누나는 오히려 피식 웃었다.
"놈들은 '때'를 기다린 거야."
"무슨...."
"히히히."
순간 눈에 참을 수 없는 격통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우샤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 간신히 참으며 난 우샤스를 살폈다. 누나는 광기에 찬 얼굴로 웃었다.
"수십 년간, 히히히! 참아왔겠지. 히히! 마치 성인의 고행처럼. 하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처음이었다. 천안통이 '경고'하는 것 같다. 쳐다보지 마, 고개를 돌려, 감히 그녀를 바라보지 마.
"모두."
우샤스 누나는 로브를 벗었다.
"이곳에서."
난 그녀의 등 뒤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아홉 쌍의 하얀 날개를 보았다.
"멸하리라."
저 모습이, 누나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시체와 다름없던 평소와 달리 거룩한 날개를 펄럭였고, 살점은 빛처럼 환했고, 눈동자는 태양처럼 타올랐다. 나는 마치 태양을 마주 본 것 같았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다.
"천사...?"
그 순간,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사제와 신도들이 동시에 쓰러졌다. 아지비카교 기사단처럼 강한 자들도 마찬가지로 맥없이 쓰러졌다. 황제와 측근들도, 황제를 지키던 황실 기사들도, 지위와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 공평했다. 북적거리던 광장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서 있는 건 나와 무대 위의 악마밖에 없었다. 난 급히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숨을 쉬지 않았다. 모두 죽었다.
누나의 날개는 더욱더 찬란하게 빛이 났다.
"걱정하지 마렴."
난 그녀를 가장 두려워했다. 단지 시체 같던 외형 때문이 아니다. '천안통'이 보여 줬기 때문이다. 라니스타처럼 강한 육체도, 멜리사처럼 뛰어난 마법도 없는 우샤스가 가장 두려운 존재라고.
"잠시 '빌렸을' 뿐이니까."
생과 사.
목숨과 죽음.
우샤스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이자 감히 다룰 수 없는 금기의 힘을 지녔다.
"천국의...."
4년 전, 그녀가 했던 어처구니없던 말이 떠올랐다.
"천사."
지상에 '태양'이 뜨자.
위장자들은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저마다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들은 공포가 형상화된 두려운 존재다. 아지비카교에 숨어 군림하던 악마들은 한 놈 한 놈이 모두 악몽처럼 강했다. 그러나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둠은 감히 태양에 닿지 못하리라.
"이번 한 번만 빌려줄게."
누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불타는 고통과 더불어, 몸을 채우는 강렬한 힘을 느꼈다. 자연지기, 내 안에서 불어오던 바람과 물, 대지의 힘. 아니, 이건 태양의 힘. 만물을 보살피며, 천하를 불태우는 지고한 힘이다.
다아아!
태양의 힘에 달비도 영향을 받았다.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커졌다. 어린 사슴에서 성체가 되어 갔다.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힘이야. 하지만 조금이나마 '예전 힘'을 흉내 낼 순 있겠지."
"뭐? 달비를 알아?"
우샤스 누나는 웃었다.
"악마들이 도망가네, 가서 죽이렴."
난 재빨리 뒤돌았다. 강력한 악마들이 '도망'을 택했다. 난 '달려가서'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달리고자 마음먹은 그 순간 내 몸은 어느새 악마의 곁에 있었다. 이 몸, 마치… 라니스타 같잖아.
쉬익-!
베었다. 한 번을 베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너무 느릿해서 수십 번을 베었다.
악마는 그대로 조각나서 죽었다. 도망치는 악마. 달비가 뛰어갔다. 녀석은 발굽으로 악마를 짓뭉갰다. 다리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찬란한 빛을 내뿜어 악마를 불태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악마가 하찮게 느껴졌다.
단 한 번, 다이모니온의 무저갱에서 본 적이 있었지.
'무의미한 시간.'
천안통이 볼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했던 라니스타의 검격.
시간이 무의미하게, 그는 짧은 시간에 수천 번 검을 휘둘러 무너지는 천장과 돌의 잔해들을 베어 냈다. 라니스타는 잘 '봐 두라고' 했다. 하지만 그땐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뜻하는 대로 검을 둔다."
그러나 지금의 난.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느릿한 시간.
나는 베고, 베고, 또 벴다.
무아지경.
검을 멈췄을 때야 시간은 다시 흘렀다.
난 죽은 열일곱의 악마들을 바라봤다.
"시발, 끝내주는군."
시야가 흐릿해졌다.
끈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불가항력이야.
눈을 감자마자 난 기절하리란 걸 알았다.
온 힘을 다해, 기절하기 직전, 난 우샤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44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팀원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그는 항상 전투에 나서기 전, 수호천사 기도문을 읊었다.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소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지금까지 외울 지경이다.
"아멘."
눈을 뜨자 우샤스 누나가 보였다. 송장 같은 얼굴로 돌아왔으나, 난 문득 우샤스 누나를 보며 수호천사 기도문이 떠올랐다. 누나는 내가 정신을 차리자 따뜻한 물을 건넸다.
"일어나자마자 헛소리야?"
"며칠이 지났어?"
"하루."
"하루 만에 퀄츠 성까지 왔다고?"
난 퀄츠 성의 내 방, 내 침대에서 깨어났다. 적어도 일주일은 기절했나 싶었다. 교황청과 퀄츠 성까지 거리만 해도 말을 타고 며칠을 가야 했다. 잠시 의문을 가졌던 난 이내 깨달았다. 멜리사가 도와줬구나.
"윽."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을 진창 마신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물잔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느리게 떨어져서, 이불보를 적시기 전에 다시 잔을 잡을 수 있었다. 이상해. 세상이 조금, 느려진 것 같은데.
"우엑."
내가 헛구역질을 하고 몸을 허우적거리자 우샤스 누나가 내 몸을 살폈다.
"네 눈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우샤스 누나가 말했다.
"뭘 기억해?"
"넌 잠시나마 초월자의 육체를 가졌었지. 지금은 힘이 돌아왔으나, 흔적은 계속해서 남아 있는 거야."
"흔적?"
"한순간 섭리를 벗어났던 기억. 보통 인간은 초월자가 되어도 힘이 다하는 순간, 육체는 초월자가 되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 하지만 네 눈은 달라.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처럼, 계속해서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어."
"젠장, 뭐가 됐든 끔찍한 기분이야. 눈이 제멋대로 움직여. 세상은 왜 이렇게 느려? 혼자 고장 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
"결국 네 나약한 육체를 위해서 감각은 돌아올 테지만, 이 순간을 기억해 두렴. 만약 다시 한번 네 스스로 섭리를 초월할 수 있으면, 그땐 처음이 아니니까 적응하기 수월할지도 모르잖니?"
난 몇 시간 동안 끔찍한 멀미를 느끼며 느릿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허덕여야 했다. 다행히 점차 예전 감각이 돌아오며 세상의 시간이 평범하게 흐르기 시작했지만, 이젠 오히려 기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 * *
주교와 추기경, 교황마저 죽었다.
하지만 누나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우샤스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위장자들은 꼭두각시 인형, 조종하는 자는 그림자 뒤에 있어."
우샤스 누나는 '성녀'로서 제국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전염병에 걸린 병자들의 마을과 산사태가 집어삼킨 도시, 괴물의 습격이 번번한 영지까지 제국의 가장 '아픈' 곳에 가, 기적의 힘으로 사람들을 치유했다.
그런 그녀가 말해 줬다.
"대전쟁 이후 교황청의 권위가 높아졌지. 제국은 겉으론 태평성대를 지내고 있어. 하지만 실상은 통제되고 있는 거야. 고통도, 두려움도."
우샤스 누나는 제국에 유행하는 전염병과 문둥병, 서식지를 벗어난 괴물,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들이 악마가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처를 내서 신을 찾도록, 아지비카교의 뿌리가 제국 깊숙이 박히도록.
"고위 사제가 모두 악마라는 건 꽤 놀랐어. 어쩌면 대전쟁도 악마의 수작이었는지도."
"대전쟁마저? 악마들이 일부러 패배했다는 거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나가 말하는 때라는 게 대체 뭔데?"
우샤스 누나는 악마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숨어지내며 '때'를 기다려 왔다고 했다.
모든 건 '그들', 형용할 수 없는 악마의 강림을 위해서.
"다이모니온처럼?"
심해의 무저갱에 잠든 바퀴벌레 악마, 제국의 반을 궤멸시켰다던 다이모니온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누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이모니온은 주인을 잃은 짐승에 불과하다고 했다.
"숨어 있던 놈들이 지난 몇 년간 모습을 드러낸 건,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악마가 숭배하는, '무언가'의 강림이."
* * *
우샤스 누나는 꼭두각시들이 모두 죽었으니, 그들이 나설 거라고 했다.
아지비카교의 고위 사제들만 아는, 숨겨진 존재들.
누나가 말하길, 베다의 복음자들.
아지비카교의 오래된 성전에선 '칠악'을 두려워하라고 했다. 하지만 현재의 아지비카교는 칠악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악마들이 고의적으로 삭제한 것이다. 우샤스 누나는 '칠악'이 악마가 숭배하는 악마라고 짐작했다.
"그러니까 베다의 복음자들이라 불리는 악마 새끼들이 교황과 고위 사제들을… 위장자를 내세워서 아지비카교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는 거야?"
"잘 이해했어."
교황이 악마라는 것에 누나가 놀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연기 같은 자들이라 여태까지 확신할 수 없었어. 고위 사제들 사이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도리어 확신하게 됐지. 그들은 드러나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라니스타와 멜리사 누나는 이 사실을 알고?"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비밀을 알아내고 있지. 하지만 이제 곧 힘을 합칠 때가 오고 있어."
복잡한 사정이 얽힌 모양이지만 이해하긴 쉬웠다.
한마디로 아자비카교를 조종하는 악마들이 있고.
베일에 감춰진 놈들이 이제 흔적을 드러내면 족치면 그만이라는 거다.
다아-!
대화가 지루한지 곁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달비가 하품을 하며 투정 부렸다. 며칠 동안 놀아 주지 못했으니, 불만이 쌓인 듯싶다. 난 달비를 쓰다듬어 주다가, 문득 우샤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누나는 달비를 알고 있지?"
"자세한 건 몰라. 다만 그녀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것만 알지."
우샤스 누나는 달비 쪽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하지만 정확히 달비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지 시선은 맞지 않았다.
"영수, 기이한 힘이야. 이 '지옥'과 어울리지 않은 존재.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서 악마들을 억눌렀지. 그녀가 한 일이라면 아마 대단한 신일지도 몰라."
개간네에!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달비지만 유독 쌍둥이들은 싫어했다. 달비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우샤스가 싫은지 연신 화를 내며 발을 세차게 굴렀다. 난 달비를 안았으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 * *
누나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교황을 비롯한 아지비카교의 고위 사제들이 한순간에 죽었으나, 정작 아지비카교는 잠잠했다. 교황은 아무런 힘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사실을 은폐해도 어떤 반발도 남지 않았다. 아지비카교는 아직 악마의 손아귀에 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늦은 밤에 아버지가 방으로 찾아왔다.
"누워 있거라."
아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날 만류하며 곁에 앉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샤스 누나가 설명한 뒤였다.
"네게 조사를 부탁했거늘,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났을 줄이야."
라니스타와 두 달에 걸친 대련이 끝난 후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내게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불과 올해 초만 해도 난 게으름뱅이 공자였지만, 아버지는 내게 일어난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사랑하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는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악마를 구별할 수 있는 눈과 악마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자 곧바로 '조사'를 맡겼다.
아버지는 단순히 조사만을 지시했으나, 난 능력을 발휘하여 악마들을 처단했고, 그렇게 카를레앙 수도원의 악마까지 죽이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설마 교황이 악마였을 줄은.... 하아, 악마의 세례를 받았구나."
우습게도 우리가 태어날 때 아지비카교에서 네 쌍둥이가 '악마'로 의심된다며 검은 사제를 보냈었다. 그땐 위장자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었는진 몰라도, 참 기구한 운명이다. 아버지는 잠시 말없이 날 바라봤다. 난 그의 갈색 눈을 마주했다. 전생이 기억났어도 난 그의 갈색 눈과 머리카락을 이어받은 레인버그의 아들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있을 국경일.
"막중한 책임이 네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그의 눈에서 걱정과 안쓰러움이 보였다.
"괜찮겠느냐?"
내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날 꽉 안았다.
"미안하구나, 폴스타. 난 이런 일이 일어나길 결코 바라지 않았어."
진심 어린 걱정을 받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날 탓하며, 내 '눈'을 걱정하던 머저리들은 전생에서 수도 없이 만나 봤지만.
난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어느 순간 나타난 달비가 품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푸른 늑대 맥이, 무심하게 내 어깨에 앞발을 올렸다.
* * *
공작가를 포함하여 제국의 귀족들은 레인버그 문장이 찍힌 한 장의 공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제국은 레인버그 공작의 파격적인 발언에 들끓기 시작했다.
교황령에서 일어난 '악마 습격'을 예시로 들며 국경일에 위장자들을 구별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레인버그 공작은 그날에 일어난 일을 조작했다. 교황, 추기경, 고위 사제들이 악마라는 사실은 숨긴 채 그들을 죽인 범인이 악마라고 공표한 것이다.
레인버그 공작의 발언은 파장이 컸다. 우선 레인버그 가문이 독자적으로 아지비카교의 유례없이 중대한 일을 조사하여 교황청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점, 그리고 레인버그 가문이 위장자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국경일에 참가하지 않는 자들은 악마라 규정짓는다고 했다. 이는 귀족의 체면과 명예를 무시한 발언이었다. 황제가 말했다고 해도 어불성설이라 여겼을 터, 레인버그 가문은 제국의 국교 아지비카교와 제국의 주체인 황실을 모두 무시한 걸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쟁영웅 레인버그 공작의 발언은 과연 무게감이 달랐다. 싫은 티를 내는 귀족들도 국경일 행사는 모두 참가하기로 했다. 이는 놀랍게도 레인버그를 가장 견제하는 붉은 기둥 솔가르와 거악의 루차콴이 고분고분하게 레인버그 가문의 지시를 따른 덕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다른 목적과 생각을 품고, 다가올 국경일을 기다렸다.
* * *
"거, 반갑소."
"꺄! 오랜만에 봬요, 공자님!"
카주웨아는 안다.
나머진 다 모른다.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찾은 영수술사라는데.
이제 와 굳이?
난 연병장에 모인 그들을 둘러봤다.
참 다양한 인간들이 모였다.
어린아이도 보이고, 백발이 지긋한 할아버지도 보이고.
공통점이 있다면, 이곳에 모인 일곱 명의 사람들 모두 저마다 곁에 영수들을 두고 있다는 점과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제 영수하고 대화하기만 바쁘다는 것이다.
"롯소, 빨리 집에 가고 싶다아."
열 살쯤 됐을까, 어린 남자아이가 투정을 부린다.
녀석의 옆에는 소를 닮은 영수가 녀석을 핥아 주고 있다.
"허허, 과거의 연을 봐서 도와주긴 하겠다마는, 폴스타 공자. 정말 영수술사가 맞소? 우리 페네리가 공자를 몹시 싫어하는데."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는 그나마 날 보고 대화했다. 그의 곁엔 독수리보다 큰 나방 영수가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난 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기 싫었다.
"당신들의 임무는 아시오?"
아버지처럼 늑대 영수를 다루는 남자가 대답했다. 그의 늑대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붉은 털을 지녔다. 그는 젊고, 자신감 넘치고, 잘생겼고, 싸가지가 없었다.
"악마들을 죽이는 거요? 레인버그 공작님이 우리가 희망이라던데."
난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그냥 내 명령을 따르는 피고용인에 불과하오."
"에이, 공자님. 전 대등한 관계를 원한다고요. 제 힘을 빌리실 거면 명령보다 부탁이란 개념으로...."
"악마를 만나 보기나 했소?"
남자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카주웨아와 노인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
"전 슈테르닐 왕국의 고아 사막 출신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사막 괴물들과 싸우면서 컸는데 뭐, 악마라고 해도 괴물에 불과하잖아요? 자신 있습죠."
난 그를 무시하고 카주웨아를 보면서 얘기했다.
"누구는 출세를 위해서. 혹은 과거의 인연으로. 아니면 알량한 영웅심으로 이곳에 있겠지. 어수룩한 태도로 임하면 당신들은 죽을 거요."
내 경고에도 그들은 시큰둥했다.
난 뺨을 긁적였다.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 역시 연좌제다."
영수술사의 도움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각오 없이 휘말렸다가 괜히 '날 탓하면' 역겨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니 영수가 대신 벌을 받아야지."
오러를 발현한 이후로, 영수들이 날 대할 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예전에는 날 싫어하거나 도망치기 바빴지만,
이젠 날 무서워하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헤쳐 모여."
일곱 영수술사의 영수들은 첫말에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지기를 내뿜자, 녀석들은 어느 순간 내 앞에 일렬종대로 모였다.
영수술사들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의 영수와 날 번갈아 바라봤다.
난 줄지은 영수를 향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달비야, 빠따 쳐라."
카주웨아가 급히 소리쳤다.
"앗, 다람아! 공자님, 우리 다람이도요?"
"음, 넌 열외."
달비의 빠따질.
사실은 그저 노려보며 발굽으로 꾹꾹 누르기.
하지만 달비의 꾹꾹이에 당한 영수들은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45
영수술사는 모두 남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모두 같은 대답을 건넸다.
"페네리가 공자를 돕길 원하는군."
"롯소의 부탁이니까요...."
"공자님, 저 또한 미숙한 각오로 임한 게 아닙니다. 이 녀석도 타오르고, 저도 타오르고 있다고요!"
'영수'가 도와주길 원하니, 도와주겠다는 단순한 대답.
영수와 술사는 감정을 교류한다.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양방향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 점이 어쩌면 영수술사들이 적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수를 부하처럼 여기거나 자신의 힘처럼 생각하지 않고, 진정 감정을 교류하는 친구로 생각하는 '선량한 인간'들이 드물어서.
영수술사들이 작전에 합류했고, 이들을 이끄는 대장은 내가 되었다.
"별동대 취급인가?"
카주웨아가 제안했다.
"그래도 레인버그 가문의 깃을 달고 특무대가 결성되었는데, 지칭할 명칭은 있는 게 좋겠어요."
그녀의 말이 맞다. 난 쌍둥이들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달비와 연관이 있었네. 내심 라니스타의 청늑대 기사단이 부럽기도 했었던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르테미스의 사냥개들."
"으엑, 구려."
카주웨아가 질색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노인이 제안했다.
"쉽게 공자의 이름을 따, 북극성대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으엑, 고리타분해."
역시 카주웨아가 반발했다.
"그럼 넌 뭐로 하고 싶은데?"
"스타폴 기사단."
"으엑, 구려. 내 이름 반대로 한 거잖아. 그리고 기사도 아닌데 뭔 기사단이야?"
"칼베인에서 공자님이 보여 줬던 그 힘! 가장 어울리잖아요? 게다가 앞으로 위장자들과 부딪힐 텐데 악마가 어떤 놈으로 위장할지 모르잖아요. 귀족 놈들 앞에서 무게 좀 잡으려면 기사단 정돈 돼야죠. 안 그래요?"
남은 영수술사에게도 물어봤으나 '정열의 기사단'이니, '세계최강 영수기사단'이니 하는 헛소리만 나왔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아버지에게 건의하자, 카주웨아의 의견이 채택되어 스타폴 기사단이 정식 명칭이 되고 말았다.
* * *
국경일 전날.
퀄츠 성에 모이는 제국의 중추 세력.
벌써 어수선한 분위기다.
난 엄마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는 엄마의 몸 상태를 걱정하여, 모든 일을 비밀로 했다. 회복실에만 지내는 엄마는 바깥의 상황을 모른다. 나 또한 알릴 생각은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악마, 위장자, 국경일, 심지어 카를레앙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까지도. 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으나, 난 왠지 수긍이 가 놀랍지도 않았다.
"이제 '시작'이란다, 폴스타."
엄마는 내게 열쇠를 건넸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열쇠였다.
"명심하렴. 폴스타. 내가...."
그날, 난 엄마가 감춰 왔던 비밀을 들었다.
* * *
15년 주기로 돌아오는 국경일. 이례적으로 퀄츠 성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백작급 이상의 직위를 지닌 39명의 귀족과 그들의 후계자, 중요 가신들이 행사에 참석했다.
뒤늦게 황제와 황실의 핏줄들도 모두 퀄츠 성에 도착했다.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러나 행사는 단촐하고 수수했다.
형식적으로 마련된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는 자는 없었다. 단순한 사교 행사가 아니었다. 전장처럼, 긴장감이 돈다. 날 세운 강자들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미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서로를 견제한다. 물론 가장 경계하는 건, 이 자리를 마련한 레인버그겠지. 하지만 제국의 기묘한 권력 구도 때문에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가장 큰 권세를 지닌 건 황제가 아닌 솔가르 공작과 루차콴 공작을 필두로 그를 따르는 가문들. 하지만 그들 연합도, 서로에 대한 희미한 '경계심'이 '보인다.'
분열, 위장자의 공포를 아직 잊지 않기에 확실해질 때까지 같은 편조차 믿지 않는다. 상석에 자리한 황제는 이 모든 일을 좌시하고만 있다. 그의 얼굴은 언뜻 무심해 보여도, 실상은 무력함으로 얼룩진 나약한 표정이다.
반면 레인버그 가문 쪽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결의에 찬 슈바르젠 백작이 무서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가장 큰 차이점은 레인버그가 '위장자'를 구별할 수 있다는 점.
그런가, 이 상황 또한 누나가 원하던 상황이구나.
백작은 날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위장자를 구별할 수 있는 자가 나밖에 없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아들 사건 때문에 백작과 아버지만 알고 있다. 여태까지 사실을 숨긴 게 좋았다. 다른 자들이 알았다면 난 성가시고 귀찮은 일에 휘말렸을 테니까.
보기 싫어도, 보이니까 저절로 알게 되는구먼.
사실 이곳에 모인 자 중에서 위장자를 선별한다는 건 그다지 실효성이 없다.
확실한 지표로 삼기에 인원이 턱없이 모자라다. 지금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이날 이후로 위장자들이 행동에 나서거나 하녀나 집사로 위장하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면 그만이다.
다 솎아내는 건 불가능.
이번 국경일은 일차적인 '소독'에 불과하다. 위장자가 나타났음을 경고하고, 레인버그 가문이 위장자를 구별할 수 있음을 '위시'하는 것이다. 우샤스 누나는 이번 국경일을 기회로 여겼다.
"같은 편인 게 다행이지."
아니, 어쩌면 더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몰랐다. 우샤스 누나는 '지구'에서, 수많은 신봉자를 이끌고 인간 사회를 교란하고 붕괴시킨 전적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 쿤칸 제국은 쉬운 먹잇감이다. 악마는… 단지 훌륭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제국이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나도 눈치챈 사실을 정치를 업으로 삼는 귀족들이 모를 리가 없어.
난 힐끔 솔가르 공작과 그의 측근들을 살펴봤다.
"너무 조용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국경일 행사가 순탄하게 개최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때다 싶어 반발하고 물어뜯고 잡아먹으려 할 텐데.
왜 이렇게 잠잠하지?
대체 어떤 공작이 오고 갔는지 짐작도 못 하겠다.
아무래도 우샤스 누나는 제국을 집어삼킬 모양인가.
* * *
협조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가 구석에서, 조용히 모인 자들을 살피기만 하면 됐다.
초대받은 귀족 중에서 불참한 이는 없었다. 모두 모였다. 난 빠짐없이 그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명단에 적힌 귀족들을 모두 확인했을 때 나는 허탈함을 느꼈다.
"없잖아."
난 라니스타에게 가서 말했다.
"위장자는 없어."
왜지? 당연히 제국 중추 세력에 숨어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불참한 이도 없다. 참석한 자 중에서도 위장자는 없다.
처음부터 놈들은 제국의 권력가로 위장하지 않았던 거야.
하하하-!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라니스타가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미친놈인 건 잘 알고 있었기에 난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왜?"
라니스타가 저렇게 웃는 건 딱 한 가지의 상황밖에 없다.
싸울 때다.
"서로 함정을 팠다고 생각하는 꼴이 우스워서 그렇다."
"함정?"
"과연, 미끼를 덥석 물었구나."
어리둥절할 때였다.
쿠쿠쿠쿠쿵-!
갑작스럽게 지진이 발생했다. 땅이 격하게 흔들려, 평범한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넘어졌다. 유리창이 일제히 부서지고, 샹들리에가 끊어져 연회장을 덮쳤다. 라니스타의 웃음이 짙어질수록 지진은 더 거세졌다. 마침내, 지진을 일으킨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르릉-!
연회장의 중앙,
땅이 부자연스럽게 무너져 직경 30M의 넓은 구멍이 생겨났다. 천안통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깊은 구덩이는 마치 무저갱 같았다. 지진으로 지반이 무너진 게 아니다. 마치 기계로 파낸 듯 말끔하게 잘린 구덩이는 몹시 괴상했다. 저건 땅을 파서 생긴 게 아니다. 마법처럼, 이지를 벗어난 현상이다.
황실 근위대가 급히 나서서 황제를 보호하고, 힘에 자신이 있는 자들은 구덩이를 경계하며 약한 자들은 뒤로 물러나 겁에 질렸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으나, 과연 제국 귀족들인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구덩이를 주시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 국경일에 벌어진 괴현상을 경계했지만, 라니스타 혼자만 잇몸이 드러날 만큼 히죽 웃었다.
그제야 난 라니스타가 한 말이 이해가 갔다.
함정, 미끼.
저 구멍은 무저갱 '같은 게' 아니다.
지옥의 통로, '무저갱'이다.
쉭쉭-!
무저갱에서 들려오는, 생물이 낼 수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
이윽고 바깥을 향해 뻗는 악마의 공포스러운 '손'. 검붉은 피부, 4미터를 넘는 거체, 도깨비같이 일그러진 얼굴, 피가 말라붙어 더러운 사형 도구를 짊어지고, 무저갱에서 기어 나오는 악마.
한 마리가 아니다.
계속해서 무저갱에서 악마들이 기어 나왔다.
거체의 붉은 악마들은 모두 톱날, 단두대, 부지깽이, 채찍 등 고문과 사형에 사용되는 거대한 기구들을 들고 있었다. 사람의 공포를 한계 너머까지 자극하는 외형, 본능에 각인된 공포다.
"…다이모니온급이잖아."
대악마라 불리는.
과거 아직 쿤칸이 왕국이었던 시절에, 영토 절반을 궤멸시켰다는 악마 다이모니온. 난 놈을 본 적이 있다. 비록 수백 년 동안 봉인당해 힘이 약해졌더라고 해도, 뿜어지는 흉악함은 대단했다. 난 그때 다이모니온에게서 느꼈던 두려움을 놈들에게서도 느꼈다.
넓은 연회장은 그들에게 좁기만 했다.
콰으으-!
놈들 중 한 명이 톱날을 휘둘렀다. '아는 이'들은 모두 나처럼 경악했다. 지근거리에서 휘둘러진 톱날이, 수십 미터 너머의 벽을 난도질한 것이다. 다행히 놈과 정면에 있던 자들은 검술 가문의 무인, 간신히 피했으나 연회장의 벽이 무너질 만큼 큰 충격이었다.
"오러를 사용해? 악마가?"
"하하하! 저게 내공처럼 보이느냐, 제자야. 그저 악기를 담아 내뿜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대체 뭐야, 시발."
악마의 공격이 신호탄이 되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강자들의 지시하에 사람들은 대피했다.
합리적인 판단. 악마의 힘을 가늠할 수 없으니 전력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이곳엔 합리적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장 '불합리한' 자들이 나섰다.
"공작님의 아이들이...!"
"놔두거라. 당할 녀석들이 아니야. 피신에 전력을 다해!"
사람들이 부르길.
"솔가르 공작님! 당장 피하셔야...."
"기다려라. 소문으로만 듣던 달의 아이, 내 눈으로 직접 볼 기회잖느냐?"
달의 아이들.
난 피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꼿꼿하게 섰다.
"익숙해, 이젠."
라니스타의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악마들은 사람들이 도망치는 데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움직임을 멈춘 것으로 보이겠지만, 내겐 훤히 보였다. 멜리사 누나의 마법이 악마들을 억제하고 있음을.
무저갱에선 계속해서 악마들이 기어 나왔다.
난 이 와중에 팔짱을 끼고 사태를 관망하는 우샤스 누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X 같은 웃음이었다.
46
무저갱에서 기어 나온 악마들은 세계가 겪어 본 적 없는 재앙이었다.
쿤칸은 악마의 공포를 겪었다고 생각했으나, 그저 악몽의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대전쟁 때 상대했던 자들은 '전초병.'
악마의 이름을 지닌 자 중에서도 가장 나약한 힘을 지닌,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를 짓밟기 위해 지옥의 통로를 지나는 악마들은 전투병, 철저하게 살육을 갈망하며 공포를 전파하는 악의 신도들이었다.
규모로 보자면 대전쟁 때의 수십 배, 두려움을 질적으로 나누자면 그야말로 멸망의 도래.
인간의 생명을 갈취하는 지옥병들이 끔찍한 고문과 사형 도구를 휘두르기 위해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맞서, 제국 제일의 무인들만 모인다는 황실, 황제의 근위대가 나섰다. 황실 근위병은 황제를 지키는 자들이자 황실 무력의 상징이다. 감히 인간이 지닌 무력의 대표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이는 명백했다.
거체의 붉은 악마의 포악한 일격을 막아 내는 자가 없다. 악마를 겨눈 근위대의 미늘창이 떨린다. 무의 극치라 일컫던 오러가 맺힌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삼키고 악마에게 덤벼든다. 그리고 허무하게 창이 부러지고 단련된 육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존재의 격차.
고수의 반열에 오른 인간들조차 '집행자'에겐 짓뭉갤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바위를 깨부수는 미늘창의 일격이 운 좋게 악마의 살점을 꿰뚫어도, 순식간에 상처는 아물고 공격한 자는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근위대와, 알량한 긍지를 품고 악마와 맞서고자 남았던 인간들은 이내 깨닫는다.
세 마리의 악마가 수십 명의 근위대를 압살하는 도중에도, 시커멓게 열린 무저갱은 끊임없이 악마를 토해 내고 있었다.
"…쿤칸은 끝이다."
황제의 탄성.
그는 의자에 앉아 악마를 허무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권력의 정점에 선 자.
그러나 발악은 없다. 오히려 기꺼이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제국은 멸망하리라."
어느 순간 악마들의 움직임이 멈췄으나 이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악마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해도, 제국의 앞에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변함없다.
"공작님!"
근위대가 모두 당하자, 솔가르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확인'하고자 했으나, 상황은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그들을 투입해야...."
"필요 없다."
"예?"
"우린 솔가르로 돌아가, 전쟁을 준비한다."
급히 달아나던 솔가르 공작은 아직도 우두커니 서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제안은 거짓이었을까.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솔가르 공작은 자신을 가장 믿는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파할 수단이 보이지 않자, 재빠르게 '제안'을 무시하고 두 번째 계획을 위해 자신의 견고한 요새, 솔가르로 돌아갔다.
악마들은 어느덧 수십 마리가 기어 나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행동이 기이했다. 근위대와의 첫 번째 격돌을 끝으로, 악마들은 모두 행동을 멈추고 이글거리는 증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만 한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던 황제는 담담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들의 짓인가?"
이 자리에 남은 유일한 인간, 레인버그 가문의 자식들에게 말했다.
황제, 어린 나이에 황제에 즉위한 이후로 그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 중반을 넘었으나 새장에 갇힌 새에 불과했다. 하지만 갇혀 있어도 왕관은 쓰고 있으니, 제국의 귀족이라면 응당 예를 표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레인버그의 어린 자식들은 모두 황제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재차 물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절망적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얼 할 것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가만히 네 쌍둥이들을 지켜봤다.
"근위대들이 모두 죽었어."
황제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레인버그의 막내 공자, 폴스타. 제 아비의 힘을 이어받아 영수술사가 되었다고 했던가?'
"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
수십 악마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형제자매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참으로 대담한 자라고 생각했다.
"아직 때가 이르다."
라니스타 퀄츠 레인버그.
황제의 귀에도 수없이 들려온 불세출의 천재 검사.
그의 입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은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자로군. 무엇이 즐거운 거지?'
"뭐?"
폴스타의 되물음에 답한 건 멜리사였다.
"멍청아. 희망을 줘야 모습을 드러내지."
'마탑의 귀인, 멜리사. 대체 왜 웃는 것이냐?'
멜리사의 요사스러운 웃음을 황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우샤스에게로 향했다.
'데메니아의 딸, 과연 닮았구나. 하지만 저 웃음은....'
제국의 최후, 멸망의 날에 막내 공자를 제외하고 모두 웃고 있었다.
* * *
폴스타는 악마에게 희망 타령을 하는 형제자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놈'이 무저갱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폴스타는 곧바로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저놈을 기다렸군."
직경 30M의 거대한 무저갱을 가득 채운 놈의 '얼굴'.
꿈틀거리는 혈관과 수천 개의 눈으로 덮인 끔찍한 악마의 얼굴이 무저갱의 밑바닥에서 서서히 기어 오고 있었다. 붉은 악마들이 우습게 보일 만한 크기. 얼굴의 크기가 저 정돈데 숨겨진 몸이 모두 드러나면 얼마나 거대할까, 폴스타는 진절머리가 났다.
쿤칸 제국이 세워지기 훨씬 전.
'고대'라 불릴 만큼 아득한 옛날에 쿤칸 제국보다 융성한 제국이 있었다.
뛰어난 기술력과 끝이 없는 탐욕으로 인간의 금기마저 넘나들던 그들은 심지어 악마와 거래까지 하게 이르렀다. 그들은 대가를 주고 악마의 힘을 빌렸다. 그러나 이윽고, 그들은 악마를 제 수하로 둘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먹잇감'의 오만이 도를 지나치자, 벌을 내렸다.
거신병.
그 크기는 태산과 같으니, 발자국에 빗물이 고이면 호수가 되고, 휘두른 주먹은 천둥벼락보다 큰 상처를 남긴다. 고대 제국은 거신병이 강림하여 하룻밤 사이에 멸망했다.
위장자를 구별하기 위해 모인 제국의 요인要人.
악마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거신병을 강림시켜 고대 제국을 멸망시켰던 것처럼, 제국을 하룻밤 사이에 멸망시키고자 했다. 그건 불확실한 계획이 아니라 가혹한 형벌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고, 맞설 수도 없는, 감히 '그때'가 오기 전에 원대한 필연을 어긋나게 하려는 오만한 인간들을 향한 형벌. 이날, 본래 악마의 뜻대로 쿤칸 제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혜안慧眼을 지닌 악마조차 알지 못했던 게 있었다.
우샤스는 무지를 두려워했다. 심지어 '벌레'들의 꿈틀거림조차 경계했다. 무지가 낳은 무수한 죄악을 우샤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대륙을 들썩이게 했던 달의 아이들의 활약은 사실 힘을 숨기려는 방편이었다. 우샤스의 제안으로 멜리사와 라니스타는 자신의 힘을 몹시 제한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날 들여다본다. 악마들을 감시하는 동안, 악마도 자신들을 지켜본다는 걸 쌍둥이들은 알았다.
그들이 힘을 감춘 채 악마에게 건넨 건 '희망'이었다.
누굴 향한 희망인지, 악마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악마.
생명을 유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무저갱과 이어진 통로는 '이 세상의 바깥'이다.
그들이 강림하면, 지상의 생명을 불태우고 무저갱을 통해 바깥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바깥, 그곳에서도 정점에 선 이형의 존재들이 도리어 '악마의 세계'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거신병의 머리가 무저갱을 지나 지상으로 나오자 들끓는 악의로 퀄츠 성의 모든 나무가 일제히 시들었다. 거신병의 수천 개의 눈알은 무엇을 보는가? 파멸의 거인은 오로지 한 남자를 바라본다.
"제자야, 보아라."
그 남자는 라니스타.
혹은 아수라의 정점에 선 자.
"벨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남자가 검을 뽑았다.
평범한 철검이었다.
"정하는 건 손에 쥔 검이 아니라."
그는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느릿하게 휘둘러진 검은 볏짚도 베지 못할 것 같았다.
"검을 쥔 자의 마음이니라."
단 한 번의 출수.
라니스타의 검이 천천히 휘둘러져 다시 검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 누구도 라니스타가 베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돌려 폴스타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한 거야?"
폴스타의 물음에 라니스타는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보고도 모르느냐, 하하."
콰직!
그때였다.
시작은 돌이 부서지는 파열음이었다.
쾅!
그 후 발생한 무수한 소리는 하나가 되어 마치 폭발음처럼 들려왔다.
멜리사는 짧게 감탄했다.
"어머, 무서워라."
황제의 근위대를 압살했던 붉은 악마.
그리고 악의만으로 대지를 오염시킨, 파멸의 거신병.
일제히 '산산조각'이 났다.
거신병은 드러난 머리뿐만 아니라, 무저갱에 숨겨진 몸마저 한순간에 수천, 수만 조각으로 조각났다. 갈가리 찢긴 조각은 계속해서 잘려 나가 이내 가루가 되어 허망하게 흩어졌다. 폴스타는 믿기지 않았으나, '보이는' 현실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식은 간단했다. 그저 베고, 베고, 벤 것이다.
검이 느릿하게 보이던 그 짧은 순간에 거신병과 악마들을 가루가 될 만큼 베었다. 라니스타는 경악한 폴스타의 머리를 검자루로 살짝 때리며 말했다.
"끝에 이르러 마음먹은 대로 벨 수 있으니, 난 심검의 경지라 부른다. 하, 어떠하냐, 대단하지 않더냐?"
폴스타도 우샤스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초인의 감각, 세계에 흐르는 시간을 역행하고 홀로 다른 시간대를 가졌던 순간을.
하지만 격이 달랐다.
"스, 스승님."
사실,
폴스타는 보았다.
정확히는 보았으나, 곧바로 잊어버린 것이다.
라니스타가 다른 시간대에서 날뛰던 모습을 그는 두 눈으로 놓치지 않고 봤으나, 육체와 뇌는 받아들이지 않고 기억을 소거했다. 몸의 방어기재였다. 만약 그 모습을 기억했더라면, 폴스타의 뇌는 터졌을 것이다. 폴스타는 진심으로 존경을 담아 라니스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개간네!
달비는 심술 난 얼굴로 폴스타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 *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황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야말로 눈을 깜빡한 사이에 악마들이 모두 부서져 흩어졌고.
레인버그의 자식들이 무어라 말하더니 갑자기 무저갱 너머로 몸을 던진 것만 보았다.
"엄마...."
홀로 남은 황제는 눈물을 훌쩍였다.
* * *
라니스타와 멜리사가 무저갱으로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다.
아, 그런가.
처음부터 우샤스의 목적은.
마지막으로 우샤스 누나가 무저갱으로 뛰어들기 전, 내게 말했다.
"이 너머에 베다의 복음자들이 있어."
누나는 내게 제안했다.
"어쩌면 거신병보다 더 두려운 악마들이야."
젠장.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도 그곳에 있지. 잘 선택하렴, 귀여운 동생아."
우샤스 누나가 무저갱 너머로 사라진다. 경계에 선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한 걸음을 내밀었다. 전생에서부터, 내게 필요한 건 이 '한 걸음'이었다.
다아?
달비가 날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알아. 병신 같지."
끝없이 떨어지는 지옥의 통로에서, 난 왜인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47
부유하던 감각이 사라졌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마침내 바닥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떨어질 땐 어둡기만 했다. 그러나 바닥에 도달하자 서서히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피, 붉은 피가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사람의 피부를 종이로 벤 상처처럼, 핏방울은 송골송골 맺혔다.
이곳은 사각의 방이다. 무저갱의 바닥은 기껏 서른 평이나 될법한 작은 방이었다. 벽과 천장에는 핏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내 천장에 고인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난 목욕탕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생각났다. 수증기가 물방울이 된 것뿐인데, 우연히 몸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소름이 끼쳤었다. 하물며, 핏방울인데.
"별 X 같은...."
어느덧 어둠은 피로 물들었다. 핏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끈적한 감촉과 피비린내가 역겹다. 난 급히 달비를 찾았다. 하지만 녀석의 하얀 털은 보이지 않았다. 난 지금, 악마와 마주한 것이다. 이 기괴한 방은 모두 악마의 소행이다. 침착하게 라멜스타를 검으로 변형시켜 기습을 대비했다.
끼이익-
핏물이 무릎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사각의 방, 정면의 벽에 문이 생겨났다. 문 너머로 축음기로 튼 듯한 질 나쁜 음악이 들려왔다. 따라라, 따라라. 난 이 불쾌한 소리를 알고 있다. 동네의 허름한 놀이공원, 그곳에서 들었던 적이 있다.
쿵!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사각의 방이 한순간에 변했다. 마치 꿈처럼 주변이 비틀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녹이 슬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옛 놀이공원, 회전목마의 앞에 와 있었다.
낡은 목마들이 기분 나쁜 음악 소리와 함께 돌아간다. 마차 안에는, 놈이 타고 있다. 빨간 코의 광대였다. 내 앞에서, 저 꼴로 나타나다니.
놈이 악마다. 어떤 힘을 지녔는진 몰라도, 놈은 내 어린 시절의 악몽을 재현했다. 열네 살까지 광대를 무서워했다. 그가 날 납치하려 했던 정신병자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빨간 코에 기괴한 분장을 한 광대는 역겹기만 존재였다.
"수작 부리지 마."
난 달려가 광대를 죽였다. 어릴 때와 달리, 난 저항할 수 있었다.
광대를 베고, 회전목마를 부수었다. 광대는 머리가 잘려 나가는 와중에도 낄낄 웃었다. 답례로 놈의 머리를 잘게 잘라 줬다.
놈이 흘린 핏물은 다시 뭉치더니, 안경을 쓴 늙은 할머니로 변했다. '원장님'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놀이공원에서 '시설'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난 이때를 무서워했구나.
하지만 지금은 난 그녀가 두렵지 않았다. 검을 휘둘러 목을 잘랐다.
이후 핏물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모습을 변화했다. 우습지, '빨간 마스크'라니. 보이고 난 뒤부터, 끈질기게 괴롭혔던 악령들도 있다. 역시, 무섭지 않았다.
나중에 가선 본격적인 그리고 실질적인 공포가 등장했다. 처음 내게 깊은 중상을 입힌 녹색 괴물, 고블린과 날 제외한 수색대 전원을 몰살시킨 이계의 광인, 그리고 날 탓하며 날 죽이려 하던 동료와 친구라고 믿었던 자, 사랑을 미끼로 접근해 날 이계 상인에게 팔아넘기려던 배신자.
모두 죽였다.
한때,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자들이나 이젠 더는 무섭지 않았다.
"보인다, 네놈."
공포를 거듭할수록.
그리고 극복할수록.
나는 점점 놈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베다의 복음자.
그중 발람은 공포를 숭배한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파고들어, 공포의 감정을 지배한다.
발람의 지배는 피할 수 없으며, 두려움을 숨길 수도 없다.
하지만 간혹 공포를 극복하는 자들도 있었다. '형태'의 공포, 인간이 직접 경험한 것들로 인하여 생겨난 공포다. 공포를 극복하는 자들은 자신의 삶에 깃든 공포를 극복해 낸 것이다.
하지만 발람이 숭배하는 공포는 개인의 극복을 넘어, 만물의 두려움을 조율한다. 공포의 유형은 다양했다. 열등한 생명부터, 깨달음을 얻은 '신'조차도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잡아먹히는 두려움, 굶어 죽는 두려움, 상실의 두려움, 열등감, 고독, 무지.
형태의 공포는 바다의 수면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바다의, 더 깊은 곳. 깊어질수록 근원적인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발람은 공포에 메말라 가는 인간을 가엽게 지켜봤다. 이지를 지닌 존재는 설령 신이라고 해도 두려움을 느끼니, 결코 공포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검은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공포가 속을 채울수록 인간은 메말라 갔다. 그의 감정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어떤 감정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다.
심장이 멈출 때까지 두려움에 떨며 서서히, 익사한다.
발람은 두려움에 떠는 영혼을 즐겨 먹었다. 그는 곧 인간이 익사를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닫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열여섯 개의 촉수를 지닌 악마, 발람이 외눈을 번득이며 인간의 눈을 마주 봤다.
발람의 눈을 마주한 자는 모두 남김없이 영혼이 빨린다. 가장 깊은 바다의 두려움까지 도달한 자, 탐스러운 먹잇감에 발람은 서둘러 백 개의 이빨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눈이로다.]
그는 영혼을 잡아먹기 전, 인간의 눈에 새겨진 두려움을 만끽했다.
수천 년 동안 그가 잡아먹은 어떤 영혼보다도, 고결한 눈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공포… 두려움이 맺혀 찬란하게 빛나게 있구나.]
발람은 끓어오르던 식욕이 사라졌다. 그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만 봤다. 인간의 몸을 짓누르던 열여섯 개의 촉수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백 개의 이를 지닌 입을 다물었다. 그저, 인간의 눈을 지켜본다. 눈에 깃든 두려움과 공포, 그 너머. 무언가가, 자신을 황홀하게 유혹하는 무언가가 있다.
문득, 발람은 깨달았다.
[저건 공포인가?]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다.
[아니다. 저건 이자의 공포가 아니다.]
깨달았으나, 발람은 인간의 눈을 보는 걸 그만두지 못했다.
[저건....]
발람은 보았다.
[나의 공포이니라.]
인간의 눈에 맺힌 공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찬란한 눈은 거울, 자신의 공포를 비추어 주고 있음에 불과함을, 발람은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공포를 숭배하는 악마가 자신의 공포를 깨닫자, 도리어 검은 바다의 해일이 그를 집어삼켰다. 공포가 두려움을 느꼈다. 불이 타오르지 못하고, 물이 흐르지 못하며, 바람이 불지 않는 것과 같았다. 공포가 근본을 잃자 그의 몸은 덧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푹-!
근본을 잃은 악마의 몸은 몹시 약했다. 폴스타가 휘두른 검에 베다의 복음자, '그들'의 사도가 허망하게 잘려 나갔다. 정신을 차린 폴스타는 발람의 타액을 닦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별 한 개짜리."
그의 검이.
공포를 찌른다.
"X 같은."
공포를 숭배하는 발람이.
도리어 공포에 사로잡히니.
"공포 영화였다, 씹새끼야."
베다의 복음자, 수천 년간 공포로 군림하던 발람은 허망하게 죽었다.
* * *
아마도.
놈은 공포를 다루는, 뭐 그런 악마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나만큼 '공포'를 자주 경험한 인간은 없을 거야. 어릴 때부터 개눈깔은 많은 걸 봤다. 평범한 사람은 몰라도 되는 걸 나는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공포는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를 이겨 내면 항체가 만들어지듯이, 어릴 때부터 무수한 공포를 경험한 난 공포에 대한 면역력이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무모해진다는 건 아니다.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공포스러운 상황 자체를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쌍둥이들과는 지독히도 휘말리게 되었다.
뭐, 쌍둥이들이 광대처럼 '공포의 대상'으로 나오진 않았으니 이젠 나도 그들을 무서워하진 않는 모양이지만.
"X밥 새끼."
이놈이 베다의 복음자인가?
생긴 건 발 여러 개 달린 거대 문어다. 하지만 보기와 달리 약하다.
갑자기 스멀스멀 기어와 몸을 움켜쥘 때만 해도 아, X 됐다 싶었다.
그러나 내 눈을 마주치더니 겁에 질려선 공격을 쉽게 허용했다.
아마도 이놈은 우샤스 누나가 말한 '베다의 복음자'는 아닐 것이다. 대악마가 얘처럼 허접할 리 없겠지.
끼이-
악마를 죽이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저 너머는 지옥.
뭐, 이제 와서 대수냐.
난 망설이지 않고 문을 넘었다.
"뭐야, 여긴."
개간네!
어느 순간, 달비가 곁에 나타나 화를 내더니 내 손가락을 핥았다.
* * *
베다의 복음자들은 감히 요람을 침범한 어리석은 인간들을 벌주고자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 그들을 초대했다.
* * *
멜리사.
그녀는 요마계의 괴왕이자 이십팔수성의 우두머리다.
이십팔수성은 삼라만상 가장 위대한 짐승.
각 7수를 거느리며.
각수부터 기수까지, 두수부터 벽수까지, 규수부터 삼수, 정수부터 진수.
삼라만상 존재하는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가 되어.
괴왕의 세력은 능히 천신의 목을 겨누니.
"백귀야행, 마음껏 포식하렴."
무수한 괴이의 짐승들이 식욕의 사도를 뜯어먹는다.
요마의 마법은 자격일 뿐.
멜리사는 이십팔수성의 위대한 우두머리다.
* * *
아수라장阿修羅場.
아수라의 왕이 제석천과 싸운 마당에는 시체들이 산을 이루니.
아수라장에서 홀로 남은 아수라는 능히 전신戰神이라 불리니라.
분노를 숭배하는 사도 또한 귀신의 먹이일 뿐.
여섯 마리의 거신병은 그의 걸음을 멈추지도 못하였다.
* * *
간절하게 비는 악마가 있다.
찢긴 머리에 붉은 뇌가 요동친다.
"제발, 죽여 줘. 제발...."
그 악마는 혜안의 악마.
무지를 퍼트리는 어리석은 자들의 여왕.
"아직 멀었단다, 아이야."
여왕이 간곡하게 요청한다.
제발, 더는 가져가지 말아 줘.
하지만 빛바랜 날개는 거두지 않는다.
수십 개의 깃털이 악마의 뇌를 찌른다.
악마는 절규하고, 천사는 웃는다.
* * *
방을 나가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수백 마리의 '학살'당하는 악마와 '학살'하는 쌍둥이들이었다. 예전 다이모니온의 무저갱에서 봤던 '신전'들이 줄지어 세워진 이곳은 아마도 지옥이라 불리는 곳. 그러나… 악마들이 도리어 학살당하며 절규하고 있으니 이건 뭐.
"둠가이도 울고 가겠다."
가세하려고 했으나 압도적인 전투라서 금세 끝이 났다. 악마들의 피가 대지를 적신다. 방금 공포의 악마를 죽이고 온 주제에, 난 살짝 오금이 저려졌다. 난 악마를 여유롭게 학살한 뒤 주변을 둘러보는 쌍둥이들에게 다가갔다.
"왔니?"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물어보네.
"여긴 어디야?"
우샤스 누나가 대답했다.
"무저갱의 끝, 지옥."
"진짜 지옥이라고?"
"무저갱은 '통로'에 지나지 않아. 대부분 끝이 막혀 있으나 이곳은 열려 있었지."
우샤스 누나가 설명했다. 지옥은 지상과 달라서 '하나의 지옥'만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곳은 베다의 복음자들이 다스리는 지옥. 비유하자면 악마들의 도시다.
열린 무저갱으로만 갈 수 있으며, 자체가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 한다.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은 피처럼 붉었고, 땅도 적토였다. 바람은 습했고, 수백 마리의 악마(이었던 것)가 보인다. 건물이라고는 크고 작은 신전들만 줄지어 세워진 삭막한 도시, 과연 지옥처럼 보인다.
"그래서 베다의 복음자들은 어딨는데? 벌써 다 죽인 거야?"
멜리사가 대답했다.
"그래. 너도 한 놈 죽였잖아."
"뭐? 그 X밥 새끼가 베다의 복음자였어?"
우샤스 누나에게 설명만 듣기로.
수십 년간 아지비카교를 내세워서 제국을 주물러 온 흑막이라기에 강한 악마인 줄 알았는데. 역시 지레 겁먹는 건 나쁜 습관이야.
우샤스 누나는 악마의 도시에서 가장 크게 지어진 신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 네가 원하는 게 있단다, 폴스타."
48
겉모습은 옛 그리스에서나 볼 법한 신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신전 안으로 들어오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법당이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천장에는 짙은 색채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둥근 원에 수백 마리의 악마가 있고, 그 위에 세 명의 거인이 원을 바라보는 모습의 기괴한 벽화였다. 기둥에도 벽화가 새겨져 있는데, 언뜻 봐도 악마를 묘사한 것 같았다.
긴 복도를 지날 동안, 난 신전에 칠해진 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술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범인인 내가, 우습게도 지옥의 악마가 기거하던 신전에서 평론가라도 된 것인 양 감상에 젖었다.
벽화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뭘까? 벽화라고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밖에 모르는데, 벽화의 그림을 어디서 본 것 같아. 그럴 리가 없다. 악마의 그림을 어떻게 내가 알아? 하지만 계속해서 기시감을 느꼈다. 젠장.
신전의 끝에서 난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이젠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지비카의 성물."
아지비카교의 흑막인 악마가 성물을 가지고 있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짙은 와인색의 보석은 악마 석상의 왼쪽 눈에 박혀 있었다. 악마 석상의 주위에는 여덟 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무수한 바늘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을 그린 벽화가, 왼쪽 벽화에는 끓는 가마솥에서 녹아내리는 인간들, 오른쪽 벽화는 철판 위에 누워 악마에게 쇠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인간들.
여덟 점의 벽화 모두 고문당하는 인간들을 그린 것이다. 난 그제야 익숙한 느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옥도."
벽화는 모두 지옥을 그린 거였다.
그것도 '지구인'인 내게 아주 익숙한 '지옥도'다.
"고(苦), 괴로움의 성물."
멜리사 누나가 말했다.
"극복하지 못하면 널 영원히 괴롭힐 힘이다."
"이번엔 독이 든 성배야? 그래, 누나. 누나가 보기엔 내가 극복할 것 같아?"
처음이었다. 멜리사 누나가 염려하며 꺼린 것은.
"난… 모르겠어. 그냥… 포기해도 괜찮아, 폴스타."
다른 쌍둥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니스타를 쳐다봤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선택할 문제라는 뜻이다. 우샤스 누나는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누나가 말한 '내가 원하던 것'. 망설이고 있자 누나가 재촉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괴로움을 두려워하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해. 아아, 넌 이미 알고 있잖아, 폴스타? 네가 원하는 게 눈앞에 있다는 걸."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담담히 걸어가서 석상의 눈을 뽑았다. 공과 득의 성물과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성물은 축복과 힘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끔찍한 느낌, 불길한 예상.
"한 걸음."
난 입을 벌려 고의 성물을 삼켰다.
* * *
그 후.
벌어진 일들은 인생사 괴로움을 요약하여 영화로 틀어놓은 것 같았다.
나는 세상에 태어났고, 그리하여 처음 괴로움을 느꼈다.
탄생은 축복이 아니다. 괴로움이다.
나는 늙어 갔다. 막을 수 없는 노화는 날 괴롭게 했다.
나는 병에 걸렸다. 병마가 날 갉아먹는 괴로움을 느꼈다.
늙고 병든 난 죽을 때가 왔다. 죽는 것,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이자 괴로움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느꼈다.
또한 미워하는 자와 살아야 했고, 그리움에 괴로움은 배가되었다.
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해서 괴로웠다.
나는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여 괴로웠다.
"뭐야."
평소와 보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잖아?
난 멀찍이 서서 온갖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누군가'를 지켜봤다. 영화는 끔찍이도 재미없었다. 시종일관 고통스러워하는 자들만 나와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절규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수없이 봐 온 것이다. 다행히 여덟 번의 '상영'이 끝나자, 난 지루한 영화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 * *
"어우, 어지러워."
고의 성물을 삼킨 후 강제적으로 봐야 했던 불쾌한 영화.
정신을 차렸으나 아직도 눈이 시큰하고 멀미가 났다.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날 황당하게 보는 쌍둥이들이 보였다. 꼴이 이상했다. 멜리사 누나는 아홉 개의 꼬리 모두 말려 있고, 악마를 일격에 도륙 내도 숨이 흐트러지지 않던 라니스타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우샤스 누나는 평소보다 얼굴이 더 송장처럼 변했다. 해골과 다름없잖아.
고의 성물을 삼킨 건 나인데, 오히려 그들이 힘들어한다.
"왜? 뭐?"
내가 기절한 사이 무시무시한 악마라도 습격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만 짐작할 뿐이다.
"하아, 하아. 화안금정인가?"
숨을 고르던 라니스타가 갑자기 내 눈을 보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토끼 눈처럼 빨갛네."
이어 멜리사 누나도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둘 다 내 눈을 보고 얘기하고 있었다. 난 라멜스타를 변형시켰다. 청동처럼 반짝이는 레비아탄의 비늘이 내 얼굴을 거울처럼 비춘다.
개간네!
달비가 소리쳤다.
"흐음."
레인버그의 핏줄은 모두 갈색 눈이다. 모세혈관이 터졌거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내 눈은 아마 계속해서 이 상태일 텐데, 그래도 뭐. 외관상 크게 나빠 보이진 않는다.
"붉은 눈도 잘 어울리네."
다행이다. 전생의 김창식이 붉은 눈이었다면 큰일이었을 텐데.
고의 성물을 삼킨 뒤로 눈이 왜 시뻘건 동공으로 변했는지 알 수는 없다. 처음부터 멜리사도, 우샤스도 고의 성물이 가진 힘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어처구니없게도 단지 눈을 붉게 물들이는 '패션' 성물일지도. 허허, 천안통의 힘도 그렇고, 눈도 붉으니까 왠지 '탈주 닌자'가 생각이 나네.
으으-
갑자기 우샤스가 쓰러졌다. 난 크게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쓰러져? 걱정이라기보다, 반쯤 호기심으로 헐레벌떡 우샤스 누나에게로 뛰어갔다.
"괜찮아?"
"큭, 당했어."
우샤스 누나는 분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팔고의 업을 나눠 주고, 방관만 할 줄이야."
"뭔 소리야."
라니스타가 끼어들어서 대답했다. 그도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씨발놈. X 같은 일은 우리에게 시키고, 알맹이는 네놈이 훔쳐먹었다는 것이다."
"응?"
날 탓하는 쌍둥이들.
억울함에 되물어보려던 난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경우는 과거에도 몇 번 있었지만, 일시적 현상이었는데.
내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난 양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보는 '저건' 대체. 그들이 왜? 보이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리고 도대체 왜 날 '저렇게' 생각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우리들이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난 그들의 전생을 안다. 십여 년의 짧은 삶이 그들의 본질을 바꿔 놓을 리가 없어. [난 적이 아니다 폴스타.], [넌 지구인이니까.], [깐따삐아에서 왔다며?]
문득,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고(苦)의 성물의 힘일까.
이젠 뚜렷하게 보인다.
입안이 메말랐다. 침을 삼켜도 목마름은 심해진다. 괜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삼켜야 할 의문일지도 모른다. 무슨 대답이 들려올지 두려웠다. 하지만 난 타는 듯한 갈증으로, 답을 갈구했다.
난 다시 한번 쌍둥이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영혼마저 들여다볼 만큼 난 내 모든 힘을 집중했다. 그들이 내뿜는 '색채'는 여전했다.
내 눈은 그들의 마음을 봤다. 마음은 그릇, 감정은 물감. 사람은 감정을 쉽게 숨길 수 있다. 참지 못할 강렬한 감정은 새어 나오지만,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마음을 쉽게 들키지 않는다.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지금까지 그들의 감정을 볼 수 없었다. 천안통은 변덕이 심했다. 가끔, 사람의 마음에 담긴 감정을 보여 주나, 내 뜻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확연하게 보이고 있다.
난 그들의 감정을 봤다. 마음에 담긴 색채를 허락받지 않고 몰래 훔쳐본다. 관심이 없다면 색채는 연하다. 짙을수록, 강렬하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이 그러했다.
자식을 잃은 슈바르젠 백작의 절규는 피보다 새빨갰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슈바르젠 백작의 감정만큼 강렬한 색채를 지녔으면서도 증오는 아니었다.
난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차마 무어라 불러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켜볼수록 난 점점 깨달았다.
시발. 말이 되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깊은 정만큼.
그들이 날.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감히 사랑이라 부를 만큼? 악마보다 더 악마 같던 자들이 우애를 느껴?
어이가 없다.
난 기묘한 기분에 휩쓸렸다. 배신당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들이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랍도록 역겨웠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전생부터 쌓아 온 '잣대'가 평가하고 있는 걸지도.
"당신들은."
난 그들에게 물었다.
누나, 형, 라니스타, 멜리사, 우샤스.
친근하게 부르던 평소와 달리, 난 그들을 당신이라고 불렀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난 '폴스타'가 아니었다.
전생의 지구인, 김창식이 묻는다.
"왜 지구를 침략한 거지?"
그 순간, 세 명의 색채가 동시에 사라졌다.
숨긴 건가.
이제 와서.
만용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편해져서, 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함부로 역린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의… 한 걸음이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대답했다.
'우린'.
지구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 * *
대전이 현상.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이계'의 습격은 인류를 순식간에 몰락시켰다. 침략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날 죽일 뻔한 녹색 고블린처럼 끔찍한 괴물들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악마'라고 불릴 만한 존재들도 있었다. 온갖 기괴한 존재가 지구를 습격하고, 인간에게서 무수히 많은 걸 빼앗아 갔다. 인간의 목숨은 가장 하찮은 거래 화폐였다.
그리고 많은 침략자 중 인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 자는 삼흉이었다. 인류가 쌓아 올린 '무기'를 한순간에 파괴한 마녀, 새로운 저항의 상징이 된 능력자들을 죽이고 다닌 광인, 그리고 인류의 결속을 무참히 찢은 성녀.
난 삼흉이 인류를 멸망시킨 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은 단지 휘말린 것뿐이라고 한다.
항상 궁금했으나.
두려워서 감히 물어보지 못했었다.
그들은 왜 지구를 침략했지?
쌍둥이들은 협조적이었다.
마치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라니스타부터 우샤스까지, 그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야기는 길었다.
우린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난 침착하게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며 일일이 따졌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은 각자 달랐다.
전체적인 '틀'은 같았으나, 세부적인 기억은 네 명 모두 다르게 기억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그들의 기억은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멜리사가 기억하는 전생에선, 반대로 지구가 자신의 세계를 침략한 것이었다.
서로의 기억을 대조하던 난 큰 괴리감을 느꼈다.
내 기억은 전생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전생에선 지금처럼 그들과 만나서 대화한 적이 없었다.
모든 건 듣고, 보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마저도 사람의 미숙한 기억에 불과하다면.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것, 감춰진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의 기억은 쉽게 잊히고, 변형된다고 한다.
과연 내 기억이 믿을 만한가?
"내가 지구인인 건 어떻게 알았지?"
우샤스 누나가 말했다.
[천사가 인간을 못 알아볼까?]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으나 그렇다고 치자.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
"쯧, 도망간 건 너잖아. 바보야."
"굳이? 네게?"
자매의 일침에 난 고개를 숙였다.
이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
거짓말은 아니다. 굳이 내게 사실을 감출 이유가 없다. 정말 내가 기억하는, 지구를 침략한 악마들이라고 해도 달라진 건 없기 때문이다. 젠장, 그래서 더 이상하다. 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자들이, 왜 나 따위를 아껴 주는 거지? 단지 형제자매라서?
"기억나지 않아."
라니스타가 말했다. 내가 무엇을 자극했는지,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 죽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얼마나 굴욕적인 최후란 말이더냐? 끝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 감히! 감히 누가 날 죽였단 말이더냐!"
"지, 진정하십시오, 스승님."
우샤스 누나는 기억이 불확실하다는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각자 자신이 기억하는 '대전이가 발생한 년도'를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즉, 쌍둥이들이 지구를 침략한 년도다.
대답은 놀라웠다.
2009.
1999.
2099.
그리고.
어찌 잊으랴.
광화문 광장에 열린 '틈'에서 기어 나오던 '괴물'을.
그해 연도는 2019년.
내가 기억하는 첫 전이가 일어난 해.
하지만 쌍둥이들은 저마다 다른 연도를 말하고 있었다.
가장 빠른 년도, 라니스타가 기억하는 1999년도.
우샤스 누나는 2099년도라고? 말이 돼?
"이제 알겠니?"
내 곁으로 다가온 우샤스 누나가 하얀 손을 내밀어 뺨을 툭툭 두들겼다.
"우리가 어떤 장난에 휘말렸는지."
라니스타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게 익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감히. 누가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날 우롱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신이든, 악마든 모조리 죽여서...."
"어머, 무슨 재주로? 죽은 건 당신이잖아?"
"여우가 짖는구나."
뜬금없이 서로 싸워 대면 어쩌자는 걸까.
그래, 본래 저들은 형제자매든 뭐든 서로 엮일 존재들이 아니었다.
각자 너무나 강한 힘을 지녀서, 굳이 동료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쌍둥이들은 알고 있었다.
공공의 적에 맞서서 힘을 합할 수밖에 없음을.
라니스타가 욕을 퍼부었으나 멜리사는 무시했다.
"대전이를 일으킨 것도, 우릴 죽인 것도, 그리고 이 세계에 쌍둥이로 태어나게 한 것도 같은 놈의 소행일지도 몰라. 솔직히 말할게. 끔찍해. 신조차도 이런 짓은 하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래서 뭐? 저 녀석과 힘을 합한 것도 의견은 일치했거든. 감히 우릴 장난감처럼 다룬 빌어먹을 새끼의 거시기를 뽑아다가...."
한참 동안 멜리사는 욕을 했다.
"전생을 물어본 건 너 또한 각오가 되었다는 거겠지. 이번 기회에 다시 물어볼게. 폴스타, 넌 어떻게 생각하지? 빌어먹을 새끼를 찾아서 거시기를 뽑...."
"거시기는 안 뽑아도."
한 걸음 내밀려다가 수백 걸음을 지나쳐 온 듯한 느낌이지만.
"복수는 찬성이야."
사실 난 쌍둥이만큼 복수심에 불타진 않았다.
하지만 더욱더 궁금해졌다. 과연 누가 저자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던 거지?
나도.
쌍둥이들도 자기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확실해.
내가 강해질수록, 천안통의 능력도 강해지고 있어.
만약 천안통의 모든 능력을 다룰 수만 있다면 무리도 아니다.
이 눈은 신이 보는 것조차 볼 수 있다.
미래 혹은 과거.
그리고 잊힌 기억까지도.
퀄츠 성으로 돌아온 난 몸을 짓누르는 피곤에도 침대에 눕지 않고 곧바로 신선의 자세를 취했다.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쌍둥이들과 대화를 나눴지만, 아직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기억이 없다는 건, 기억이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답을 알기 위해.
난 강해져야 했다.
* * *
고의 성물.
그것의 효과는 천천히 나타났다.
이 힘을 사용하면 내 눈은 악마처럼 붉게 물든다.
사람들 앞에서 사용할 힘은 아니다.
대상의 '감정 상태'를 보는 눈이라, 천안통으로도 가끔 감정을 볼 수 있었지만 내 뜻대로 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젠 자유자재로 힘을 다룰 수 있었다.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아도 여러모로 쓸만한 힘이 되겠어.
* * *
악마 습격의 파장은 컸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될 때까지 난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상황이 급작스럽게 변했으나 이변은 없었다.
우샤스 누나의 예상대로, 3개월 안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아지비카교였다.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모조리 죽어 체계를 잃었고, 신도들도 영향을 받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세력은 약해져도 분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교황령의 검은 사제들이 대거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샤스 누나의 짓이다. 사실상 아지비카교는 그녀의 손에 넘어갔겠지.
솔가르 가문의 활동은 눈에 띄게 뜸해졌다.
악마 습격 이후로, 제국 귀족들은 축제를 자주 열었다. 불안을 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솔가르 가문은 사교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무슨 모략을 꾸미고 있는 듯싶지만, 뭐 중요한 건 아니다. 레인버그 가문의 기세가 이제 솔가르를 뛰어넘는다고 평가받으니 발등에 불 떨어졌겠지.
난 영수술사로 이루어진 스타폴 기사단을 이끌고 악마 사냥에 나섰다. 잔당 처리다. 황제의 명으로, 제국 어느 곳에서나 악마를 수색할 권리를 얻었다. 레인버그와 적대하는 귀족 가문조차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평소라면 정치적인 이유로 황제의 명령에도 반발하며 절대 불가능했겠지만, 연회장에서 일어난 악마 습격이 큰 충격이었던 듯싶었다.
몇 번의 악마 사냥에 성공하자, 난 점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느새 스타폴 기사단은 영수 기사단이라 불렸고, 난 쌍둥이보다 더한 위명을 얻게 되었다. 아버지가 대전쟁 이후 영웅 소리 듣던 게 이십 대 중반이었나?
"남부까지 다 돌았네요."
"집으로 가자, 카주웨아."
남부 지방은 마테란드 공작가를 제외하고 모든 영지를 돌아다녔다.
몇 달 동안의 악마 사냥이 베테켄 백작의 저택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고, 공자!"
마차를 준비하는데 베테켄 백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뒤로 마부가 작은 짐차를 몰고 온다.
"먼저 가 있어, 카주웨아."
난 눈치를 채고 백작이 '편하게' 대화하도록 혼자 남았다.
베테켄 백작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네가 해 준 게 있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지. 별거 아니나...."
염소수염의 백작은 생긴 것만큼이나 음흉했다. 그는 짐차를 감싼 허름한 천을 살짝 들어, 내게 보였다. 천으로 감춘 건 은 식기와 서대륙에서 가져온 값비싼 도자기였다.
"에헤이, 백작님. 뭘 이런 걸 다 주십니까."
난 손사래 치며 극구 사양했다.
베테켄 백작은 쩔쩔매며 당황했다.
"어, 어… 더 필요한 게 있는가?"
이곳, 물 좋고 산 좋은 영지에서 일어난 악마 사건은 농밀한 치정 사건이었다. 악마 중에서 서큐버스라고 불리는 음녀들이 있다. 위장자처럼 인간으로 변할 수 있으나, 다른 점은 특정한 사람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저 아리따운 여자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 염소수염의 음흉한 아저씨는 서큐버스를 첩으로 삼았다.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멍청하게도, 서큐버스가 제 영지에서 어떤 일을 벌이고 다녔는지도 몰랐다.
이 수레 가득 담긴 보물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입막음의 대가다.
난 인상을 찌푸렸다.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아직 직위도 없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 미안하오. 생각이 짧았소."
그가 짐차를 무르려고 하자, 난 급히 그를 만류했다.
"아니, 아니. 난 필요 없는데 우리 애들 수고비라는 명목으로, 네, 아시죠?"
눈을 끔뻑거리던 백작이 내 속내를 알아차리고 웃었다.
"아, 내가 배려가 정말 없었소. 그러고 보니 먼 거리를 가시는데 식량을 준비하지 않았군. 짐차 한 대를 더 보내드리겠소."
"하하, 감사합니다, 백작님. 네네, 그 제스처는 뭔가요? 뭘 비밀로 해 달라는 거죠? 무슨 일 있었던가요? 하하하."
뇌물을 받은 난 돌아가는 길에 카주웨아를 시켜 백작의 만행을 아버지에게 고했다.
49
악마 사냥은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과 같았다.
제국에 침투한 굵직한 바퀴벌레 집은 모두 불태웠지만,
끈질긴 생명력의 악마들은 시궁창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수법도 수십 전 일어난 대전쟁보다 더 교묘해졌다.
지도층에 숨어 있는 위장자들은 솎아 냈지만 수천만 명의 제국 시민들을 모조리 검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쿤칸 제국은 이미 홍역을 한번 치렀는데도 이 모양이다.
대전쟁을 겪지 않은 곳, 서대륙과 그 너머의 대륙, 당장 슈테르닐 왕국의 동쪽 지방만 해도 얼마나 많은 악마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분명 다른 국가들은 더 심한 상황.
"다음엔 외교 문제인가."
퀄츠 성까지 돌아가는 길에 악마에게 손해 입은 마을마다 들러서 백작의 보물을 베풀었다. 물론, 레인버그의 폴스타가 주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건 잊지 않았다.
* * *
악마 사냥에 가담했던 영수술사들은 악마의 최우선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기꺼이 스타폴 기사단에 남길 희망했다.
난 울타리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 스타폴 기사단이 단지 이름뿐만 아니라 정식 기사단으로 승격하길 원했다.
가문의 정식 기사단이 되기 위해선 황제의 승낙이 필수였다. 그리고 신청서를 내자마자, 며칠 뒤 스타폴 기사단이 레인버그의 정식 기사단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난 스타폴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마음에 드니?"
개간네!
"깐깐하네."
기사단의 휘장과 깃발도 하사받았다.
스타폴 기사단의 표식은 달비를 닮은, 사슴을 형상화한 문양이었다.
하지만 달비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가 내민 휘장을 발굽으로 무참히 밟았다.
마음이 아팠다.
다아!
달비는 내가 시무룩하자 깃발의 천을 등에 두르더니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다아다아!
흐뭇했다.
* * *
그날 아침,
며칠 내내 내리던 겨울비가 그쳤다.
오랜만에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했다.
상쾌한 아침이다. 왠지 오늘 하루는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침조회가 끝난 후.
내 마음에 비가 내렸다.
신년 행사 준비로 떠들썩하던 퀄츠 성은 그날부터 일주일간 집집마다 창가에 천으로 만든 조화를 걸고 조의를 표했다. 비가 내리던 나날보다, 더 우울하고 적막했다. 슬픔은 살바람보다 차가웠다.
난 퀄츠 성에 피어오르는, 잔잔한 물결 같은 애도의 '색채'를 멍하니 바라봤다. 눈물이 마르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저처럼 물결같이 뻗어 나간다. 물결이 모여 넘실대는 파도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슬퍼하고 있으리라.
꺾이지 않은 꽃이 시들었다.
우샤스 누나가 말했다. 고통스러운 죽음은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도, 나도 죄책감이 들었다. 쌍둥이들은 그녀에게 존경과 경의를, 그리고 사랑의 숭고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릴 태어나게 해 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푼 건 그저 부모 자식의 연이라는 하나의 이유뿐이다.
쿤칸의 성을 지녔으나, 황실의 예를 따르진 않았다.
장례는 그녀의 바람대로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졌다.
육신을 남기지 않는 건 쿤칸인들이 가장 꺼리는 작고의 방법이었다. 아버지 또한 온전히 황실묘에 안치하길 원했지만, 생전 그녀의 삶처럼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정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우릴 임신하기 전, 꽃을 좋아한 엄마가 자주 찾았다던 정원이었다. 지금은 멜리사 누나의 귀곡산장이 되었으나 오늘만큼은 예전 정원처럼, 화사한 꽃들이 만발한 평범한 정원이 되었다.
"겨울에 꽃밭이라...."
멜리사 나름대로 배려겠지.
아버지가 직접 의례를 진행했다. 꽃으로 장식한 관에 엄마가 누워 있다. 데메니아 쿤칸, 향년 예순을 조금 넘긴 나이에 서거하다. 난 손에 든 바람이 꽃을 만지작거렸다. 회복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바람이 꽃은 줄기가 꺾여도 몇 달 동안 향기와 색을 잃지 않았다.
푸른 늑대 맥은 슬프게 울부짖었고.
아버지는 천천히 엄마의 얼굴을 어루어 만졌다.
언뜻 보아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나.
내 눈엔 견딜 수 없이 막대한 슬픔이 보였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물에 빠진 듯 답답했다. 아버지는 깊은 물에 빠진 채 필사적으로 슬픔을 견디고 있었다.
멜리사가 말했었다.
엄마가 고칠 수 없는 병을 얻은 건 우릴 낳느라 근원적인 생명력이 약해진 탓이라고.
엄마는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가며 아이를 낳고자 했다. 젠장, 기구한 운명이잖아. 엄마는 왕녀라고 불렀다. 역아逆兒로 태어난 엄마는 힘들게 태어났으나, 쇠약해진 여왕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타계했다. 그 때문에 엄마는 제 아비의 분노를 사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왕실이 사라지고, 쿤칸을 계승한 황제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엄마는 여전히 쿤칸 왕실을 계승하여, 자신을 왕녀라 자칭했다. 여왕의 핏줄을 계승하고, 자신을 버린 황제를 거부한 고고한 신념이다.
난 엄마가 날 낳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작별의 시간.
엄마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난 한참을 바라보다가 바람이 꽃을 품에 올려놓았다.
그때였다.
바람이 꽃에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꺾은 지 몇 달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풍성한 향기였다. 꽃향기는 따뜻했고, 행복했다. 마치 날 어루어 만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고, 괜찮다며 머리를 토닥거리고, 사랑한다며 지그시 안아 준다.
"아아...."
나는 보았다.
삶의 마지막, 그러나 엄마의 미소는 행복했다.
향기는 퍼져 나가, 쌍둥이들을 품었다. 그들은 나처럼 보지 못해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푸른 늑대 맥이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으로 향기는 아버지 곁에서 오래 머물다가 이내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 * *
일주일의 의례 기간이 끝나고, 난 퀄츠 성의 비밀스러운 지하로 향했다.
엄마가 건넨 열쇠는 전에 발견했던 지하 서고와 관련이 있었다. 그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엄마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내게 열쇠를 주며, 자신이 죽는 날 서고의 가장 비밀스러운 책을 꺼내어 펼쳐 보라고 했다. 나라면 그 책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지하 서고를 열자 오래된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번에 왔을 땐 자세히 보지 못했었다. 서고는 내 생각보다 더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엄마는 제국의 현자라 불릴 만큼 박학다식했던 지식인이다. 하지만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고의 벽면에는 기관 장치들로 감춰진 비밀의 방이 있었다. 뛰어난 눈썰미가 없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테지만, 천안통의 힘에는 열린 문과 다름없었다.
여섯 개의 벽돌을 빼자 벽면의 틈으로 열쇠 구멍이 보였다. 난 엄마가 준 열쇠를 꽂았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알맞게 꽂힌 열쇠를 천천히 돌리자 감춰진 문이 열리며 엄마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겼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열쇠를 건네며,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안해, 폴스타.]
[천근의 바위보다 무거운 짐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건넸어. 난 못된 엄마야.]
[무시해도 괜찮단다. 아니, 무시하렴.]
[하지만… 만약에 감춰야만 했던 비밀이 두렵지 않다면....]
평소와 달리 엄마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고 불안한 모습이었지.
[네 눈이 정말 '그것'을 볼 수 있다면....]
[나의 고집으로 멈춰선 안 될....]
[폴스타. 네가 평범한 아이였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넌 분명....]
[오,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횡설수설하던 엄마가 딱 한 번, 내 눈을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며 얘기했었다.
[그 책이 비밀을 알려 줄 거야, 폴스타.]
* * *
그로테스크하다.
유리병에 담긴 '조각'들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사람 손처럼 생겼으나 검은 털이 수북하고, 손톱이 단검보다 길고 날카로워 보인다.
유리병을 올려 둔 나무 선반에는 '늑대 인간'이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었다.
기괴한 물품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피처럼 보이는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유리병에는 '흡혈귀'라고 적혀 있었다. 비밀의 방에는 온갖 괴물의 표본이 있었다. 현자라 불리던 엄마의 지식 탐구는 어두운 곳까지 도달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엄마가 '악마'까지 연구했다는 것이다.
악마상, 마법진, 피, 황동 그릇. 완전히 악마숭배의 현장이잖아.
난 책상에 놓인 낡은 책을 펼쳤다.
[522년 6, 14일.]
-네 번째 기록. 고렌테나의 흔적을 따라서 악마의 침소를 조사하던 중에 자신을 악마사냥꾼이라 칭하는....
낡은 책은.
데메니아 쿤칸, 엄마의 일기장이었다.
* * *
난 일기장을 읽었다.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써진 일기장은 엄마가 숨긴 비밀이자, 그녀의 삶 일부였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나 또한 전생을 기억한다는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엄마가 젊었을 적 해 왔던 악마 연구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내가 봐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만큼 엄청난 모험을 하셨다.
일기장의 내용은 흥미진진했다. 마치 '툼 레이더' 같다고 생각했다.
일기장을 거의 읽었을 즈음에, 단서가 될 만한 일기를 발견했다.
[며칠인지… 알 수 없음.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국 얻었다. 이 기괴한 마술서를 원주민들은 세페르 라지엘 혹은 라지엘의 서라고 불렀다. 목숨을 대가로 세상의 비밀이 새겨지는 저주받은 책이다. 추장은 세페르 라지엘에 새겨진 글들은 오직 혈족들만이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난 이 책이 악마에 대한 비밀이 기록된 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작은 희생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혈족이라니! 설마 아이라도 낳아야 할까? 절대 싫어.]
그 뒤로 쓴 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이었다.
음음, 이래서 아버지랑 사랑에 빠졌구나.
엄마는 일기를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가, 무려 몇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이의 아이를 임신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 찾아왔으나, 이내 과거의 책임이 내 발목을 사로잡았다. 어찌해야 할까.]
라지엘의 서, 엄마가 말했던 책.
몇 달 뒤 쓴 일기는 엄마의 바뀐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안 돼. 미루자. 적어도 내 아이가 자라서,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싶어.]
[손주를 낳을 때까지만.]
[내가 죽으면 그이와 내 아이들은 슬퍼하겠지.]
[…내 가족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
* * *
일기장을 덮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부터 뚜렷한 '빛'을 발하는 곳으로 향했다.
검은 천으로 감쌌지만, 너무 눈이 부셔서 방에 들어올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난 천을 벗겼다.
새하얀 책, 그 오랜 세월 낡은 방에서 잠들어 있었음에도 먼지 한 톨 묻지 않고 깨끗한 책이었다. 이 책이 악마의 비밀이 쓰인 마술서, 라지엘의 책이다. 책 사이에 낡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쪽지를 꺼내 읽었다.
[내 작은 희생이, 사람들의 구원이 되길.]
책을 넘기자, 핏물이 스며든 종이가 보였다.
아마 엄마의 피겠지. 수십 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고 방금 흘린 듯 붉었다.
다시 한 장을 넘기자.
엄마가 갈구했던 '비밀'이 드러났다.
"엄마의 말대로야. 이 책은...."
쉽게 말하자면.
'악마 사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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