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PIOUHYG / Chapter 2 - 2

Chapter 2 - 2

12

절벽 아래 도사린 놈을 보자마자 난 욕을 참을 수 없었다. 저게 귀여워? 넓은 공동을 가득 채운 거대한 덩치에 돌연변이 바퀴벌레처럼 생긴 저 모습이?

저놈이 500년 전의 대악마, 다이모니온. 무저갱의 괴물들이 애벌레 수준의 징그러움이라면, 놈은 바퀴벌레처럼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것도 암컷 바퀴벌레, 등에 알을 잔뜩 달고 나온.

놈을 보자마자 속이 울렁거리며 신물이 올라왔다. 세상 가장 역겨운 존재를 마주했다. 난 빨리 쌍둥이들이 저놈을 죽이길 바랐다. 대악마라고 해도 쌍둥이가 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최대한 빨리, 내게 아무런 피해 없이 싸움이 끝났으면 좋겠다.

난 심호흡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가 나설래?"

우샤스 누나가 말했다. 쌍둥이들은 저 바퀴벌레 대악마조차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라니스타 놈이 검을 어깨에 걸치고, 대단히 오만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벤다."

그때, 멜리사 누나가 반발했다.

"내가 할래. 물러나 있어."

"거절하마. 오랜만에 쓸 만한 걸 베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제안한 게 아닌데? 표준치가 필요해. 놈은 내가 잡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라니스타 놈과 멜리사 누나는 자기주장이 강했다. 4년 전에도 그랬지. 솔직히 저 셋이 지금까지 싸우지 않고 레인버그 공작가의 형제자매로 남아 있는 게 용하다고 느꼈다. 모두 자신이 태양보다 높게 떠 있다고 생각하니, 남의 말을 들을 위인들이 아니다.

라니스타 놈의 검날이 아래로 향하고, 멜리사의 아홉 꼬리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졌다. 저들끼리 싸운다면, 휘말리기 전에 나는 차라리 바퀴벌레의 먹이가 되겠다.

"삼극합일력공으로 정해."

다행히 우샤스 누나의 제안으로 분위기가 풀렸다. 이상하게 셋째 누나의 말을 잘 듣는 것 같다니까.

삼극합일력공, 쉽게 말해 가위바위보였다.

놈들은 왕국을 멸망시킬 뻔한 대악마를 앞에 두고 싸울 순서를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뭔 지랄들인지.

"하! 제법이군."

"다시 해."

라니스타 놈과 멜리사의 가위바위보는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둘은 똑같은 것만 계속 냈다. 가위면 가위, 바위면 바위. 스무 판이 넘어갈 때까지 결과는 같았다. 내 눈에는 보였다. 손을 내는 잠깐 사이, 상대방에 맞춰 무수하게 변화하는 손을. 저럴 거면 가위바위보에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후두두!

그때였다.

쌍둥이들이 지랄하는 사이 절벽 아래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진동의 여파로 천장이 흔들려 흙먼지를 내뿜었다.

불안하다.

위이잉-!

연이어 들려오는, 마치 헬리콥터 프로펠러의 모터 소리.

난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난다!"

모터 소리의 정체는 거대 바퀴벌레의 날갯짓 소리였다.

놈은 하늘을 날 줄 알았다. 바닥을 기어 다녀도 세상 끔찍한 바퀴벌레가, 감히 하늘을 날아다니니 전생을 통틀어도 가장 역겹고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500년 전 쿤칸 왕국은 놈에 의해 멸망할 뻔했다. 짐작건대 대부분 놈의 역겨움에 맞서지 못하고 도망치느라 피해가 더 컸을 것이다.

"난다고!"

고막에서 수백 마리의 벌이 날아다니는 듯한 굉음이었다. 놈의 왕성한 날갯짓에 거대한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조선만 한 크기의 바퀴벌레. 검붉은 키틴질 등딱지는 반들반들했고, 벌레의 검은 눈은 소름 끼치고 무수한 털이 달린 뾰족한 다리는 정말 끔찍했다.

위이잉-!

마침내 놈이 날아올랐다.

난 놈의 움직임을 끝까지 주시했다. 살기 위해선 저 혐오의 온상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벌레 특유의 불규칙한 비행으로 날아오른 놈은 기어코 공동의 천장을 부수었다. 이곳은 무저갱, 바다 아래의 깊은 구덩이. 무너진다면, 살 길이 없다. 적어도 나는.

적은 진동에 흙먼지를 내뿜는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다이모니온의 박치기에 천장은 맥없이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천장의 잔해는 산사태처럼 순식간에 우릴 덮쳤다.

쿠르릉-!

머리 위로 내리는 바위 소나기에 피할 곳은 없었다. 생매장당할 위기에서 내가 한 판단은 쌍둥이와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멜리사와 라니스타는 심지어 지금도 가위바위보를 끝내지 못했다. 황급히 달려간 난 멜리사 누나의 꼬리를 붙잡았다.

"히익!"

멜리사 누나가 기겁하며 날 돌아보자 결국 가위바위보는 라니스타 놈의 승리가 되었다.

라니스타는 웃었다.

생매장당할 위기에서, 거대한 바퀴벌레, 대악마 다이모니온을 앞에 두고.

"보아라, 제자야."

그는 뜬금없이 날 불렀다.

"벨 수 없는 건 없느니라."

일순간, 그의 뒤로 붉은 용이 솟구쳤다.

천안통으로 보자 해일처럼 밀려드는 엄청난 정보량에 기절할 뻔했다.

라니스타 놈은 베었다.

무너지는 천장을, 바위를, 무수한 돌멩이를, 모래를, 그리고 대악마를.

베고 베고 또 베었는데,

단지 베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에게 시간은 무의미했다. 몇 초에, 몇 번을 벤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검을 휘둘러, 모든 걸 베었고.

대악마마저 일도양단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놈의 말대로 벨 수 없는 건 없었다. 한순간에 라니스타는 자신이 베고 싶은 걸 모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저 미친놈이 주변을 마구잡이로 베어 버린 탓에, 공동이 무너져 지반이 폭삭 내려앉기 시작했다.

무너진다.

필사적으로 멜리사 누나의 꼬리를 붙잡았다.

"거기 잡지 마!"

그런데 멜리사 누나는 날 망설이지 않고 발로 찼다.

떨어진다.

저마다 살길 찾아 공중을 나는데, 나는 날지 못했다.

멀어진다.

"살려 줘!"

안간힘을 써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놈들은 보는 척도 안 했다.

나쁜 새끼들.

처음부터 악마와 쌍둥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악마와 악마의 싸움에 낀, 불쌍한 인간이 나였던 것이다.

난 무저갱보다 더 깊은 곳을 향해 하염없이 떨어지고, 떨어졌다.

쿵-!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지 못했다.

아득해지는 정신,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쌍둥이 새끼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 * *

눈을 뜨자 주변이 캄캄했다. 다행히 어둠은 내게 제약이 아니다. 숨을 들이마신다. 숨 쉬는 것엔 크게 문제가 없다. 공기가 있다. 폐가 다치지도 않았다. 바위 잔해에 깔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떨어진 곳도 입자가 고운 모랫바닥이다. 몸은 타박상을 입었다. 지끈거리긴 하나 움직일 만했다. 그동안 라니스타 매타작에 단련되어서인지 버틸 만하다. 만약 남쪽 섬에서 지내던 몸 상태였다면 죽었을지도.

소매를 찢고 무릎 보호대를 떼어 발바닥에 둘렀다. 신발보단 불편해도 뾰족한 바위에 발 가죽이 찢기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공기는 넉넉하다."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난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판단했다. 내가 14살의 레인버그 공작가 막내아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결국 죽었겠지만, 전생에 난 멸망하는 지구의 방위본부 소속 첩보원이었다. 보호받는 위치였다고 하더라도, 극한의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건 아니다.

"길은 어디지?"

게보린이 없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길이 있다면, 보이겠지.

적어도 쌍둥이들이 날 구하러 올 때까진 버틸 수 있을 거야.

난 바라봤다.

날 이끄는.

날 향하게 하는.

그 무언가를.

* * *

보이는 대로 가는 것,

그것이 내 활로였다.

천안통은 종잡을 수 없는 힘이다. 사람들이 신안이라 불리며 경외시한 건, 믿을 수 없는 비논리의 기적 같은 무언가마저 내 눈엔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활로다. 길을 잃어버리면 길을 찾는다. 첩보원으로 혹은 헌터들의 길잡이로, 그리고 최후의 작전에도 나처럼 약한 놈을 꼭 참가시켰던 이유다. 나는 내가 길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향해 걸었다.

무저갱에서 무너져 내려, 한층 더 내려간 지하에도 길이 있었다. 난 아지비카교의 창조설화가 어쩌면 진짜 사실이 아닐까 했다. '태초에 공동이 있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지하 세계가 그 증거가 아닌가?

무너진 잔해를 넘고, 미로 같은 길을 지났다.

개미굴처럼 복잡했지만 난 보이는 대로 발길을 향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체력이 있기에 다행이다.

두려움에 삼켜지지 않고, 난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다.

"39, 40...."

입으로 시간을 새어 가며 걸어갔다.

* * *

"삼천… 이십이 초."

마침내 길의 끝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난 출구를 원했으나, 내 눈이 보여 준 건.

"시발."

검은 연기.

휘몰아치는 검은 연기, 불쾌하고 꺼림칙한 연기다.

저런 걸 본 적이 있다.

현생이 아닌 전생에서.

전쟁터의 한가운데. 멸망한 도시의, 파묻힌 사람들의 무덤 위에서.

"악령."

급히 등을 돌렸을 때, 검은 연기는 내 앞에 있었다.

* * *

"끄억."

구역질을 해도 나오지가 않는다.

"꺼억!"

되레 트림이 나온다.

마치 소화라도 된 듯.

"우에엑, 구에엑!"

억지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토를 유발해도 신물만 올라올 뿐이다.

눈물이 줄줄 날 만큼 헛구역질했으나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뭐하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둘째 누나가 옆에 있었다.

난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왜 날 버리고 갔어."

누나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미안. 너 혹시 이게… 아니야. 가자."

너무나 쉽게 누나는 이곳을 탈출했다.

왔던 것과 같이, 그저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내 방으로 향하는 구멍이 생겨난 것이다.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난 푹신한 소파에 앉아 물을 마셨다.

벌써 네 통째, 목구멍 끝까지 물이 찬 듯한 기분이지만 난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삼키다니."

아직도 생각났다.

"악령을 먹은 거야?"

검은 연기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그때의 감각.

희미하게 느껴지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쓴맛.

악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이 났다.

세상에나.

* * *

검은 연기, 악령을 삼켰음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무저갱에서 돌아온 이후 쌍둥이들도 퀄츠 성에서 보이지 않았다.

난 평소처럼 행동했다. 아침 훈련이 끝나면 아로니아를 갈아 마시고, 침대에서 낮잠을 잔 후 주방장에게 주문한 특선 요리를 방에서 혼자 맛봤다.

레인버그가의 공자라는 지위에 비하여 한량 같은 삶이지만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도 차기 가주가 되라는 발언 이후 잠잠했다. 아마 열 살 때부터 시작된 4년 동안의 도피 생활은 공작가에서 내 기대치를 제로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 듯싶었다. 위의 세 명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더 관심이 없기도 하고.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지만, 상관없다. 물론 백조가 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난 무저갱에서 겪은 일의 여파는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날따라 눈이 너무 간지러웠다. 안대를 끼고 잠을 잤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일 리가 없다. 밀려드는 피곤함에 두 눈 꾹 감고 잠을 청했으나, 점점 개미가 기어다니 듯 간지러움이 심해졌다. 버티지 못하고 안대를 벗고 눈을 뜬 난, 머리맡에 두둥실 떠다니는 검은 연기를 보고야 말았다.

"끄악!"

기겁해서 소리 질렀다. 예전부터 공포 영화는 질색이었다. 빌어먹을 귀신 놈들이 실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눈이 간지러웠던 이유는 검은 연기가 사다코의 긴 머리처럼 늘어나서 내 눈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발작하듯 침대에서 일어나 검은 연기를 피해 달아났다. 방문을 열자마자 비명을 듣고 몰려온 경비병들과 마주쳤다.

"공자님?"

당황하는 경비병 뒤에 숨어, 난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저저저! 저것 좀 어떻게 해 봐!"

그들은 황급히 내 방을 수색했으나, 검은 연기 쪽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다. 난 점점 의아해하는 경비병들의 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지네가 나왔거든. 벌레는 질색이야. 어여 일들 봐."

안 그래도 나쁘던 인식이 더 나빠지게 된 날이었다.

경비병이 어떻게 할 사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난 쉽사리 방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검은 연기가 스르르 빠져나와 내 곁에 서자 이 빌어먹을 현실을 인지했다.

귀신 붙었네, 시발.

13

"도련님, 가져왔어요!"

아침이 되고 햇볕이 비추자 검은 연기는 사라졌다. 밤새 한숨 못 잔 난 아침 종이 울리자마자 걸시를 불렀다. 걸시는 내 요구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재료를 구해 줬다.

"잘했어."

난 걸시가 준비한 돼지머리와 사슴 피, 그리고 놋쇠 종을 탁상에 놓았다. 전생에서 간혹 귀신 들렸을 때, '무당' 일을 하는 사람이 자주 내게 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귀신이 거짓말처럼 달아났는데, 대충 하는 방법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밑져야 본전, 난 기억을 더듬어 '굿'을 하기 시작했다.

"나가 있어, 걸시."

우선 걸시를 내보냈다. 탁상에 돼지 머리를 중앙에 놓고, 사슴 피를 뿌렸다. 위령제는 다양하지만, 사슴 피로 부정을 씻는 건 강력한 방법이다. 마법도 존재하고, 악마도 있으며, 귀신도 있다. 이 의미 모를 행동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사실, 난 알고 있다.

쥐뿔도 효과가 없겠지.

잠을 자지 못해 판단력이 흐려졌다.

쨍! 쨍! 쨍!

난 놋쇠 종을 울리며 귀신을 위로했다.

이왕 준비한 거, 해 보기나 하자.

무당의 춤을 흉내 내며 덩실덩실 놋쇠 종을 울렸다.

까아아악!

효과가 있나? 비명이 들리기에 혹했으나 이내 깨달았다.

"도련님이 이상해!"

종소리에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달려온 걸시가 깜짝 놀라 자빠져 있다.

걸시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고 입을 쩌억 벌린 채 몸을 달달 떨었다.

"히익! 악마 숭배!"

"아니야, 걸시."

난 놋쇠 종을 내려놓고 걸시에게 말했다.

"춤 연습하고 있었어. 곧 내 생일이잖아? 파티에서 선보일 춤을 연습 중이었지."

"아, 그런 거였어요? 근데 왜 돼지머리를...."

"춤추다 배고프면 먹으려고."

"어머, 생으로 먹으면 안 돼요. 삶아 올까요?"

새삼 걸시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 * *

그날 밤.

해가 지자마자 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목격했다.

난 가만히 서서 놈을 노려봤다. 내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다니지만, 내게 어떤 해를 끼치고자 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귀신은 소문처럼 흔한 존재가 아니다. 아주 깊고 강력한 원한이 있기에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본 귀신들은 그랬다. 악령은 전쟁터 혹은 멸망한 도시에서 한둘 나타났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곤 했다. 귀신이 되어 산사람에게 붙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 날 제외하고.

"뭐가 문젭니까, 당신은."

이럴 때 필요한 건 진솔한 대화다.

무저갱의 지하에서 악령과 마주했다. 놈은 보자마자 내게 덤벼들어, 내 목구멍을 타고 사라졌다. 악령을 먹어 버린 이후 놈이 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저갱의 지하의 악령, 악마에게 죽은 아지비카교의 사제들인가? 잠깐, 그러면 굿 한 게 오히려 심기를 거스른 거잖아. 독실한 아지비카교 사제의 유령에 이세계 굿판을 벌였으니.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니죠?"

검은 유령은 말없이 내 주변을 유영했다.

계속 말을 걸었으나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원하는 게 뭔데요."

악령은 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멈추어 섰다.

내가 놈을 쳐다보고 있을 때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눈을 감거나 안대를 쓰면 슬며시 다가와 눈을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이 닿는 감촉이라서 엄청나게 소름 끼쳤다.

"시발!"

결국 발차기를 날렸으나 검은 연기는 가뿐하게 피해 냈다.

* * *

며칠 동안 지켜봤다. 놈은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악령이 곁에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뒤틀려 갔다. 젠장, 처음이 아니더라도, 귀신에게 이처럼 오랫동안 시달린 건 처음이었다. 무서웠다. 평생 저놈과 같이 지내야 하나.

악령은 사악하다. 그러니 '감정'이란 게 있다. 원한을 풀기 위해선, 산자의 목숨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놈은 달랐다. 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를 황혼이 되자, 오른팔을 붙잡고 내 손안에 흑염룡이 있다고 소리 질렀다.

미친 짓을 해서 악령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점점 놈이 악령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제법 굳건하게 단련해 온 내 정신도 점점 한계치에 다다랐다.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원한을 풀어 줄 수 없다면, 사라져라, 귀신 놈아.

* * *

마침 우샤스 누나가 돌아왔다. 평소였으면 절대 엮이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이번엔 스스로 누나의 방으로 찾아갔다. 밤이 되자,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그때에 맞추어 우샤스 누나를 만났다. 하지만 누나의 방문을 열자마자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폴스타?"

지금까지 날 괴롭히던 검은 연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난 우샤스 누나의 백골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어딜 봐도 악령은 없다.

"이 새끼, 난 안 무섭고 누나는 무섭더냐?"

도발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샤스 누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맞다, 이해가 간다. 악령보다 그녀가 더 무섭다. 누나는 날 보며 혀를 찼다.

"폴스타, 난 의사가 아니야. 정신 상담은 의료 병동으로 가렴."

난 두려움을 꾹 참고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나 귀신 들렸어."

"귀신?"

우샤스 누나의 눈빛이 순간 번득이는 것 같았다.

"아주 독한 귀신이야.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누나는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했다.

"영적인 존재를 없애기 위해선 스스로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폴스타, 날 믿고 잠시 죽어 있을래?"

난 웃음으로 대답하고, 살며시 문을 닫았다.

* * *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악령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우연하게 전지훈련에서 복귀하는 라니스타 놈과 청늑대 기사들을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악령은 곧바로 꽁무니를 뺐다.

"이익!"

악령이란 놈이 줏대가 없다. 사람 가리는 악령이라니, 개 같은 놈이 붙었다.

* * *

오늘 밤에도 악령과 눈싸움을 할 때였다.

"얘."

무저갱 이후 감감무소식이던 멜리사 누나가 내 방에 찾아왔다. 악령은 곧바로 사라졌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쌍둥이들 탓에 악령이 쓰이게 되었다. 멜리사 누나가 날 발로 차지만 않았다면, 무저갱 지하에 처박힐 일도 없었을 텐데.

보통 쌍둥이들을 대할 땐 호의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번엔 내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 줬으면 했다.

대답 없이 뚱한 표정으로 앉자 있자 멜리사 누나가 내 곁에 앉았다.

"달라졌구나."

"뭐가?"

"왜 숨겼어. 네 안의 무언가가 있는데?"

누가 구미호 아니랄까 봐.

"그날 지하에서, 뭘 잘못 먹었거든. 악령인지 뭔지 하는 건데 괜찮아. 살 만해."

"오."

멜리사 누나는 이유 모를 감탄사를 내뱉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피처럼 붉은 보석이었다. 크기는 동전보다 약간 컸는데, 보자마자 평범한 보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석은 광채를 가진다. 하지만 저 보석은 달랐다. 내가 보기에,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보석을 보여 주며 누나가 말했다.

"무저갱에서 찾은 보물이야."

그날, 놈들이 날 버리고 저마다 급히 어디론가 갔던 이유.

한 시간이나 날 내버려뒀던 이유.

"달랑 이거 하나였지, 붉은 보석. 구조가 기이해서 기대했지만, 별 쓸모는 없었어."

"이거 때문에 내가 무저갱에 떨어지든 말든 무시한 거구나."

"그래."

너무 쉽게 인정을 한다.

"녀석들보다 더 빨리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급히 움직여야 했거든."

요즈음 며칠 동안 쌍둥이들과 지내며, 그래도 전생의 소문에 비해서 그나마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믿을 놈들이 아니다.

개미 눈곱만큼 쌓인 정도 뚝 떨어졌다.

"이게 무저갱의 보물이야? 별거 없는데."

멜리사 누나는 궁금하면 만져 보라며 붉은 보석을 건넸다. 난 한숨을 내쉬며 보석을 건네받았다. 그 순간, 멜리사 누나에게 겁먹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검은 연기가 갑자기 생겨났다.

악령이 보석에 반응했다.

더군다나 모습조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에너지 반응이잖아?"

멜리사 누나는 보지 못했다.

"폴스타, 네 눈엔 보이는구나."

나는 점점 검은 연기에서 뚜렷한 윤곽을 갖추는 악령을 노려봤다.

예상대로다.

악령은 아지비카교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사제의 원혼이 쌓여 악령이 되었던 건가.

"이 새끼."

놈을 노려볼 때였다.

갑자기 돌멩이같이 탁하던 보석이 광채를 발하더니,

아지비카교의 사제복을 입은 악령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발, 고스트버스터즈도 아니고 웬 악령 퇴치?

"강력한 반응이야. 재밌어."

마침내 보석은 악령을 삼켰고, 조금 전과 달리 찬란할 만큼 엄청나게 광채를 내뿜는 보석이 되었다. 그 모습에 멜리사 누나는 아홉 개의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며 흥미를 드러냈다.

* * *

악령을 삼킨 붉은 보석이 영롱하게 빛난다.

"악령이 어떻게 생겼지?'

멜리사 누나가 물었다. 난 아지비카교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뜻밖의 상황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없다. 무저갱의 보물이 악령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멜리사 누나라면 알 것이다. 애초에 목적이 이거였는지도.

"대악마를 봉인하기 위해서 아지비카교의 사제들은 스스로를 희생했다. 하지만 500년 동안 결계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아마도, 흐음."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멜리사가 누나가 붉은 보석을 쥐고 입꼬리를 올렸다. 흥분에 찬 미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꽤 즐거워 보였다.

"봐라, 폴스타. 아무런 힘을 담지 못하고 껍질만이 남아 있던 보석이 에너지를 흡수해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원래 보석의 것이었던 힘의 본질이 영적 에너지와 뒤섞여 있던 건가? 아지비카교의… 전설… 500년 전, 사제들의 희생. 그걸 가능케 한...."

멜리사 누나는 불현듯 표정이 밝아지더니 아홉 개의 꼬리가 동시에 바짝 섰다. 그녀는 순식간에 보석을 챙기고 말도 없이 뛰쳐나갔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꼴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는 듯 무언가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잘 가, 누나."

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쨌든.

악령이 사라졌다.

* * *

얼마 뒤, 멜리사 누나가 다시 내 방을 찾았다.

악령이 사라진 후 만족하고 있던 난 누나의 재방문이 달갑지 않았으나 궁금하긴 했다. 무저갱의 악령, 보물로 남은 붉은 보석, 그리고 그녀가 말한 500년간 대악마를 봉인한 결계가 유지되고 있던 이유. 나와 하등 상관 없는 주제라도, 인간은 호기심의 생물이다.

"뭔가 알아냈...."

누나는 오자마자 내게 붉은 보석을 던졌다.

얼떨결에 잡자마자.

갑자기 멜리사 누나의 꼬리가 움직였다.

"잠깐!"

그 후 곧바로 일을 터졌다.

무저갱에서 봐서 안다. 멜리사 누나는 마법을 사용하기 전 꼬리가 움직인다. 혹시나 싶었으나 갑자기 날 향해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화살을 쏘았다. 난 날아오는 화염을 멍하니 바라봤다. 빌어먹게 성능 좋은 개눈깔 때문에, 화염의 마법이 날 직격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확인할 수 있었다. 멜리사의 마법의 위력을 무저갱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비록 저건 그때에 비하여 약한 수준이지만, 맞으면… 난 로스 구이가 될 것이다.

"악!"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비명만 내질렀다.

콰아앙-!

마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내 침대를 폭발시키고, 방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유리창을 모두 박살 내고 옷가지들을 모두 불태웠다.

"어...."

하지만 난 살아 있다.

폭발의 중심에서, 난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호오, 역시."

대뜸 마법을 날린 멜리사 누나는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난 말문이 턱 막혔다.

무례하고 생각 없는 것도 정도껏 하지, 이게 뭔 개지랄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랄하게 욕설을 내뱉진 못했다. 어쨌든 날 죽이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기에, 난 화를 삭이며 침착하게 질문했다.

"이건 무슨 실험이야, 멜리사 누나?"

"쥐는 것만으로도 항마력이 생겼다. 의심했으나 전설은 사실이었다. 흥미로워, 요마계의 신물 같은 영험한 도구가 이 세상에도 존재하는구나. 하지만 왜 너에게만...."

누나는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혼잣말을 연신 하는 누나에게 난 버럭 소리 질렀다.

"누님! 제발 설명 좀 해 주세요!"

물론, 목소리만 높을 뿐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멜리사 누나는 여전히 흥분했다. 분명 그녀는 대단한 존재이나 꼬리는 정직했다. 멜리사 누나와 지내며 난 그녀의 아홉 개의 꼬리가 강아지나 고양이의 꼬리처럼 자신의 감정을 의지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내비친다는 걸 눈치챘다. 저렇게 빳빳하게 꼬리가 서 있다는 건 몹시 흥분했다는 증거.

멜리사 누나는 손을 휘둘러 내 방에 번져 가는 불길을 가볍게 없앴다. 소동에도 경비병이 오지 않는 걸 보니, 사전에 들키지 않게 다른 마법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누나는 마치 진찰하듯이 내 몸을 구석구석 매만졌다. 불쾌했지만 참아야 했다. 흥분한 멜리사 누나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

"완벽한 항마력 반응이야."

"항마력?"

14

드디어 멜리사 누나의 주둥이가 올바르게 작동했다.

"붉은 보석은 아지비카교의 성물이다."

"성물? 잠깐, 그만 되묻게 알기 쉽게 설명해 줄래."

누나가 말했다.

"아지비카교엔 열두 가지 성물이 존재한다. 그들의 교리에 각각 대응하는 열두 가지의 성물."

설명은 길고, 복잡했다.

"영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득(得) ·실(失) ·고(苦) ·낙(樂) ·생(生) ·사(死). 아지비카교는 12개의 개념이 만물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교리가 늘 그렇듯, 전설로만 생각했지. 하지만 어쩌면… 성물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개념이 탄생한 게 아닐까? 열두 가지 교리는 추후에 탄생한 것일 수도."

멜리사 누나는 500년 전, 아지비타교의 사제들이 대악마를 봉인할 수 있었던 게 성물의 힘이라고 유추했다. 난 누나의 설명이 얼추 이해가 갔다. 직접 악령을 봤기에 알았다.

악령의 정체는 아지비카교의 사제들이 맞았다. 성물의 힘을 빌린 사제들. 그래서 죽어서도 원혼으로 남아 500년간 무저갱의 지하에 존재했던 것이다.

"악령을 삼켰다고 했지."

"어...? 어."

"그 때문일지도 몰라. 아지비카교의 성물이 너에게만 반응한다. 앞서 '실험체'들에게 실험했으나, 모두 너처럼 항마력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어. 흥미로워, 성물이 스스로 힘을 줄 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나는 기쁜 것 같았다.

이 세상의 비밀을 조금 더 알아냈다며 즐거워했다.

"응… 그래, 축하해."

하지만 난 어안이 벙벙했다. 아지비카교의 열두 가지 성물 중 하나가 이 붉은 보석이라는 거잖아. 게다가 나에게만 반응해서 힘을 준다고? 항마력이니 뭐니 하는 힘을?

내게 아지비카교는 쿤칸 제국의 국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열두 가지 교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멜리사 누나는 나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멜리사 누나에게 물었다.

"항마력이 뭐하는 힘인데?"

누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공(空)의 힘이겠지."

아지비카교의 사제들이 결계의 힘을 다루는 건 유명하다. 그들은, 때론 그 힘을 공(空)이라고 불렀다. 공은 비었다는 것, 없다는 뜻이다. 검은 사제들은 악마들을 결계의 힘으로 잡았다. 또한 미친 마법사들을 포박할 때도 검은 사제들이 활약하기도 했다.

누나는 항마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줬다.

가장 쉽게 말해, 마법을 없애는 힘이라고 했다.

마법을 없애는 힘.

난 붉은 보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멜리사 누나를 노려봤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하?"

멜리사 누나는 곧바로 내 시선을 눈치챘다. 멜리사 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눈치 하나는 구미호답게 엄청나게 빨랐다.

"아서라, 뒤지기 시르면."

"내가 뭐했다고...."

"내 마법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어디 한번, 또 시험해 볼까?"

아홉 개의 꼬리가 움찔거리자 난 고개를 숙였다.

"아니, 누가 싸우재. 아니야, 그런 거."

* * *

멜리사 누나는 곧바로 날 상대로 실험을 시작했다.

아지비카교의 성물이 왜 내게만 반응하는가.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연히 악령이 보이는 '눈'이 내게 있었고.

또 내가 악령을 삼켰기에.

누나는 열성적이었다.

한 시간마다 내게 마법을 사용했다.

점점 강력한 마법을 사용했는데, 무슨 마법을 사용했는지 격한 소동에도 아무도 우릴 찾는 자들이 없었다.

다섯 번의 시도에서 난 죽을 뻔했다.

항마력이 발동하지 않았다.

결국, 실험은 더 길어졌다.

삼 일 밤낮을 샜다.

대충 결과는 나왔다.

아지비카교의 성물, 붉은 보석은 항마력을 지녔다.

발동에는 제한이 있다.

기준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하루에 네다섯 번.

누나는 열성적인 학구자 타입이었다. 지치지 않고 날 괴롭혔다. 저러니 지구를 멸망시켰지.

마침내 멜리사 누나가 됐다고 말했다.

피곤함에 쓰러졌지만, 침대가 불타 없어서 맨바닥에 누워야 했다.

"아지비카교의 성물의 보유자가 됐네. 축하해."

"어?"

난 당연히 멜리사 누나가 아지비카교의 성물을 가져가는 줄 알았다.

재빨리 고개를 들어 누나를 쳐다보자, 멜리사 누나는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기뻐하는?

아니, 비열한 웃음 쪽에 가깝다.

"날 줘도 괜찮은 거야?"

"그래."

"…왜?"

"널 사용하는 게 합리적일 것 같거든."

호의가 아니다.

오히려 악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재밌었어. 성물이라, 문헌엔 열두 가지가 있다고 했으니 다른 열한 개의 성물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 아, 즐겁다. 이 세상은 알수록 더 마음에 든다니까."

난 붉은 보석을 들어 올렸다.

이 빛나는 보석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의 성물.

잃어버리거나, 검은 사제들에게 들통이라도 난다면 큰일 나겠네.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넌지시 물어봤다.

멜리사 누나라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먹어."

대답은 듣지 못한 걸로 하자.

"먹으라고."

하지만 멜리사 누나는 진담이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먹어?"

"그래."

"먹어도 되는 건가?"

"아마도."

아마도.

애매한 대답.

난 망설였다.

아무리 봐도 먹으면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데.

"붉은 보석은 성물의 힘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해. 유령, 영적 에너지에도 힘이 옮겨 갔으니 살아 있는 육체에 성물의 힘이 깃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릇과 힘, 둘이 합쳐진 영물을 삼키면 힘이 온전히 이동될지도. 그러나 확답은 못 해."

멜리사 누나는 친절했다. 적어도 날 속이진 않았으니까.

"그러니 너로 연구해 봐야지."

요새 들어, 결정력이 늘어났다.

고민하며 미루어 봤자, 어차피 난 보석을 삼켜야 하기에.

애써 꿉꿉함을 참아내고 붉은 보석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으엑."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쾅!

성질 급한 여우가 마법을 날렸고, 항마력이 날 지켜 줬다.

"좋은 실험체가 될 것 같아."

"왜 계속 실험체라고 하는 거야. 듣는 입장도 생각해 줘."

"무어라 하든, 네가 실험체라는 건 달라지지 않잖아?"

어쩌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멜리사 누나가 다른 쌍둥이에 비하여 착한 편이라는 건.

사실 가장 악독한 년은 멜리사일지도.

* * *

"그래서, 결국 무저갱엔 왜 간 거야?"

쌍둥이들은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무저갱으로 향했다. 그 빌어먹을 맹세 때문에 내가 휩쓸렸고. 얻은 게 있는지 궁금했다. 소외자가 되고 싶다고 해도, 일단 휘말렸으니 알 건 알아야지.

"넌 우리가 왜 쌍둥이로 태어났을 것 같니?"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들을 겨냥한, 뼈를 심은 말이었으나 멜리사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필연이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거지. 이 세계가 우리의 힘이 필요로 해서, 아니면 우릴 죽이기 위해서."

섬뜩한 말이다.

"미리 위협을 판단하는 건 나쁘지 않지."

"위협… 위협이 될 만한 게 있다고 생각해?"

멜리사 누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직은."

어련하시겠나.

4년 전에는 그저 쌍둥이들이 무서울 뿐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그들은 나와 달리, 진심으로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고 있다.

붉은 보석이 공의 힘을 지닌 아지비카교의 성물이라는 걸 알아낸 것도 그동안 많은 걸 경험하고, 알아내고자 노력했기 덕분이겠지.

"누나는 어떻게 이런 걸 잘 알아?"

멜리사 누나는 갑자기 화를 냈다.

"게으른 건 너뿐이다, 멍청아."

누나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난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게으른 건 나뿐이라고."

석연찮은 기분이었다.

무저갱.

결과만 본다면, 결국 그들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하지만 난 아지비카교의 성물을 얻었다.

다른 이가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나처럼 담담한 게 이상하지.

마법을 없애는 힘, 검은 사제들의 힘을 공짜로 쓰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석연찮았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이 모든 게 다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지비카교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열두 가지의 본질.

지(地) · 화(火) ·풍(風) 수(水).

고(苦) ·낙(樂) ·생(生) ·사(死).

공(空) ·득(得) ·실(失).

그리고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 * *

그 방에선 항상 오래된 책의 낡은 냄새와 향기로운 꽃의 향기가 났다.

드넓은 꽃밭과 달리, 텃밭보다 작은 방에선 자칫 여러 냄새가 뒤섞여 지독해질 수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항상 꽃의 냄새는 봄날 싱그럽게 핀 꽃처럼 향긋했다. 쿱쿱한 책 냄새와 향기로운 꽃 냄새가 공존하는 그 방은, 내겐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의 그리움이었다.

"…그렇게 세 신神은 열두 가지 교리를 남겨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고 해."

수업이 끝났다.

"오늘도 즐거웠어요"

난 웃으며 말했다.

"잊지 말렴, 폴스타. 신은 언제나 북극성처럼 널 지켜볼 거란다."

"네, 어머니"

엄마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와서 기쁘구나. 일찍 방황했으니, 네 길은 더 굳건해질 거야."

따뜻했다. 오래 있고 싶었으나, 정해진 면회 시간을 어길 수는 없었다.

난 엄마의 손등에 입맞춤하고,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푸른 빛을 내뿜는 넝쿨이 방문을 감싼다.

아버지의 힘이다.

부정한 걸 밀어내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영수의 힘.

엄마는 우릴 낳고 난 후 항상 이 특수한 방에서 지내고 있다.

데메니아 쿤칸 왕녀,

혹은 레인버그 공작 부인.

또한 내 어머니.

엄마는 꽃과 책.

이 방의 모순적인 두 냄새와 닮은 사람이었다.

쿤칸은 제국이며, 쿤칸의 핏줄을 황족이라 부르지만, 데메니아 쿤칸은 왕녀라 불렸다.

그녀는 으레 왕가의 버림받은 자식이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삶을 지냈다. 돌아가신 할머니. 즉, 쿤칸 여왕의 배를 가르고 나왔을 때부터 데메니아는 모든 이들이 증오하는 저주받은 아이였다.

하지만 스스로 운명을 벗어나, 한계를 넘고, 길을 개척하여.

지금은 꺾이지 않는 꽃 혹은 쿤칸의 현자이자 유일한 '왕녀'라 불리며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꺾이지 않는 꽃이란 별호가 정말 어울린다. 그녀의 굳건한 신념은 고통스러웠던 제 어린 시절마저 품었다. 현재 쿤칸은 제국 황실이지만 엄마는 계속 자신이 버림받았던 당시, 쿤칸 왕실의 이름을 계승해서 이어 나갔다.

마음이 아프다.

그런 사람이, 우리 때문에 갇혀 지내야 했다.

네 쌍둥이를 낳은 이후 엄마의 몸은 급격히 나빠졌다고 들었다.

당시 아이를 받았던 산파의 말을 들어보면 출산은 기적이었다고 했다.

노련한 산파마저 포기했으나,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 악마 같은 전생을 지닌 쌍둥이들이 비교적 얌전한 건, 10년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갓난 아이 때의 기억은 생각나지 않지만, 둘의 희생으로 자식과 부모의 연은 분명 이어졌다.

자주 뵙지 못해 일주일에 한 번, 교육을 핑계로 만나는 게 다였다.

내게 있어 엄마는 언제나 그립고, 아픈 사람이었다.

4년 동안, 가장 후회한 일이 있다면 역시.

"누나."

복도에서 우샤스 누나와 마주쳤다.

쌍둥이들은 나와 달리 몹시 바쁘게 지낸다.

하지만 엄마의 편지에 의하면, 4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본가에 들렸다고 했다.

"엄마의 몸 상태는...."

"내가 바보로 보이니?"

우샤스 누나는 한마디로 대답을 일축했다.

고칠 수 있었으면, 진작에 고쳤다는 거겠지.

불효자는 나였다.

15

"벌써 사냥제 기간인가."

레인버그가의 신성한 축제, 아르테미스 사냥제를 앞두고 기사들이 분주해졌다. 퀄츠 성의 가솔들은 바삐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영지의 가신들도 제 기사들을 우선 보내 사냥제 축제를 준비시켰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 나만 멀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이런 날 보고 가주가 되라고? 4년 뒤, 레인버그 가주님의 단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연병장에서 기사들이 제식훈련을 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전생을 떠올린 후 쓸모없이 이어진 버릇 중 하나다. 사람 많은 곳은 싫다. 여러모로 말이다.

혼자 방에서 멍하니 엄마가 준 '아지비카교의 성인'이라는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라니스타 공자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기사 한 명이 내 방을 찾아왔다. 라니스타 놈이 부른단다.

호출呼出.

레인버그 공작가에서 내 위치를 잘 말해 주고 있는 단어다.

난 누군가 불러야 움직이는 게으름뱅이 공자다.

하지만 라니스타 놈은 하필 제식훈련이 있는 날에 날 연병장으로 불러냈다.

고민했다.

가지 않아서 생기는 일,

가서 생기는 일.

둘 중 여파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눈이 많았다.

청늑대 기사들은 라니스타 놈과 내 대련을 익히 보고 있는 터라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연병장엔 제법 모르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라니스타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날 가르치려 했다.

여전히 무공은 배우기 버거웠다.

그놈의 내공.

이곳에선 비슷한 종류로 기사들의 오러가 있으려나?

쌍둥이의 훈련으로 육체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으나 아직 내공은 전혀 쌓이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이 가진 편견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곳의 사람들도 호모사피엔스 인류는 아니다. 겉모습은 같아도 유전적으로 엄밀히 조사하면, 분명 무언가 DNA 구조가 다른 외계인으로 나오겠지. 물론 그렇게 따지면 나도 외계인이니 이 기괴한 힘을 배울 수 있겠지만 오러라는 것 또한 재능이었다. 모든 이가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는 재능이 없었다.

라니스타 놈은 자신의 교육이념에 따라, 이번에도 역시 마지막은 실전 싸움으로 끝이 났다. 첫째 공자와, 4년 동안 은거하던 게으름뱅이 공자의 대결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내 승리를 기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난 왠지 배알이 꼴렸다.

한 대만.

한 대만 치자.

대련이 시작되었다.

난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뚫어지게 노려봤다.

흔한 표현으로 눈에서 광선이 나갈 만큼 매섭게 라니스타 놈을 노려봤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숙취보다 울렁거리는 멀미가 순식간에 날 덮쳤다. 두통약을 먹지 않으면 온종일 고생하겠지만, 이번엔 고통을 감수하고자 했다.

내 눈은 때론 수만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 무수한 사진 중에서 몇 장을 골라 낼 수 있다.

정적에서 동적으로 변하는 순간의 움직임.

두드러지는 혈관, 근육의 미세한 수축.

라니스타 놈은 특히 난해하다.

평범한 자의 움직임을 만 장으로 보면, 같은 시간에 놈은 수십만 장을 찍어 낸다.

천안통으로 보지 않으면 차이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차이에 반응할 수만 있다면.

라니스타 놈이 움직였다.

순간, 머리에 격통이 심해 눈을 감을 뻔했다.

그가 평범하게 휘두른 봉이, 내겐 주위를 에워싸는 수천 군대의 격동적인 행군처럼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반격을 위해 나는 고통을 참으며 기다렸다.

한 장.

단 한 프레임의 여유.

보고, 보고, 본다.

라니스타 놈의 봉이 자비 없이 내 복부를 강타하기 직전.

한 장면이 보였다.

놓치지 않고 느슨하던 근육을 긴장시키고, 똥꾸멍에 힘을 빡 줬다.

"합!"

난 한계를 넘는 고통에 눈을 감으며 전력으로 봉을 휘둘렀다.

라니스타 놈이라도 절대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이 한 방이 성공하면, 열 배로 처맞겠지만.

난 손바닥에 전해질 통쾌한 감각만을 기다리며 히죽 웃었다.

쿡!

그때 내 배를 찌르는 봉의 감촉.

아프진 않았다. 그저 살짝 밀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눈을 슬며시 뜬 채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낄낄 웃어 대는 라니스타 놈을 바라봤다.

"피했어?"

대체, 어떻게?

모든 근육의 움직임이 앞으로 쏠렸었다.

사람의 몸이면, 그 순간에서 피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난 당황스러웠다가, 곧바로 흥분한 마음이 차게 식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반격할 수 있다고 믿은 내가 선을 넘은 거다.

괴물 같으니.

이제 구타만이 남았다.

역시 레인버그가의 막내아들은 별거 없다며 욕하겠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내 앞에 놓인 괴물은 니들이 한 트럭 몰려와도 고함만으로 죽일 수 있을 괴물이라는 걸.

자포자기하며 겸허하게 구타를 기다렸다. 하지만 라니스타 놈은 봉으로 내 머리를 살짝 치고는 등을 돌렸다. 평소처럼 날 의료병동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만을 남겼다.

"잘했다."

처음 받는 칭찬이었다.

* * *

사냥제 전날, 축제에 참가한 귀족들을 대접하는 저녁 만찬 사교 자리에서 레인버그가의 공작은 파격 발언을 해 버렸다. 그는 갑자기 가솔들과 사냥제가 참가한 귀족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큰 목소리로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이번 사냥제는 그대들끼리 하시오."

그리고 곧바로 내게 오더니 깊은 보조개가 인상적인 미소를 지었다.

"여행 가자, 아들아."

난 방금까지 닭다리를 뜯으며 몹시 행복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예의를 지키지 않고 멍청하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어디요?"

"아르테미스의 성지로 갈 것이다."

오늘 만찬 자리엔 노련한 귀족들도 많이 참가했다.

그들은 수많은 사교 파티에 참가하며, 때론 귀족들의 정신 나간 짓을 목도하기도 했었을 테지. 하지만 제국의 공작 직위에 있는 양반이, 가문의 축제를 앞둔 전날에 대뜸 막내아들에게 여행 가자고 소탈하게 말하는 건, 틀림없이 처음 겪는 환장 파티일 것이다.

공식 석상이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는 건 보기 좋지 않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몹시 어색해진 분위기다.

결국 선택권은 없었다.

알겠다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만족한 듯 자리로 돌아가 만찬을 즐겼다.

* * *

"이 무슨 돼먹지 못한 공작 가문이래."

아버지는 여행을 간다며 내게도 짐을 싸게 했다. 그 어떤 귀족이 가문의 축젯날, 자식을 데리고 단둘이 여행을 갈까. 제국의 공작이라는 양반이, 그것도 배낭여행을! 보는 눈이 많아서 수락했긴 했으나 무척이나 가기 싫었다. '아빠 싫어!'를 외치는 사춘기 소년이라서가 아니다. 나이로만 본다면 사춘기겠지만, 내 정신은 겁많은 아저씨다. 무슨 목적으로 날 아르테미스의 성지로 데리고 가는지 알기에 두려웠다.

아르테미스의 성지는 퀄츠 영지의 동쪽 끝. 아인들의 땅과 맞닿는 국경에 존재하는 성지다. 위로는 아인들의 땅과 대협곡이 있는 데다가 대수림의 중심에 숨겨져 있어 '영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이라고 한다.

영수는 때론 정령이라고 불리며, 대자연의 화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의 단짝 푸른 늑대 '맥'도 호수의 영수였다. 하지만 아르테미스의 성지에는 아버지가 '영수들의 보금자리'라 불릴 만큼 무수한 영수들이 존재했다.

전설에 의하면, 모든 영수의 어머니인 '아르테미스'가 이 세상에 강림한 지대라고도 했다.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날 그곳에 데리고 가는 이유는 명백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날 영수술사로 만들 생각이었다.

분명 내 개눈깔은 영수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호감을 얻는 힘은 없다. 오히려 날 물어뜯어 죽이려고 하는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간다는 건 무저갱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뭐, 아버지가 있으니 크게 위험할 것 같진 않다만.

"고집을 누가 꺾어."

아버지의 행동은 귀족의 규범과 크게 어긋났다. 하지만 가신들은 아무도 그의 행동을 지적하지 못했다. 다른 귀족들과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출신도, 가풍도, 아버지 본인도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자들과 많이 달랐다. 그러니 막내아들과 단둘이 배낭여행을 가는 거겠지.

"다 됐어요, 도련님!"

걸시가 짐을 다 쌌다.

난 묵직한 가방에서 프라이팬과 주먹밥, 솜 베개와 찻주전자를 뺀 후 어깨에 짊어 멨다.

"걸시, 풀, 불꽃, 물 중에 뭐가 좋아?"

"네에?"

"뭐가 더 좋냐고."

"음, 걸시는 뜨거운 게 좋아요."

레인버그 공작께서 친히 오박사 역할을 해 주시겠다면, 기대에 부응하는 게 인지상정.

영수 중에도 찌질하고 멍청하고 겁 많은 애 한두 마리쯤은 있을지 모른다.

영수들의 보금자리라 불리는 아르테미스의 성지라면 날 미워하지 않는 영수를 한 마리 꾀어 낼 수 있을지도. 솔직히 푸른 늑대 맥을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은 굉장히 멋있었다.

"좋아. 되도록 불타입 포켓몬, 아니 불의 힘을 지닌 영수를 데리고 올게."

"와, 멋있어."

난 힐끔 걸시를 바라보곤 솜 베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 * *

새벽녘에 출발하기로 했다. 새가 지저귀기 시작하자, 난 방에서 나와 아버지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저택 3층, 왼쪽에서 일곱 번째 방이다. 퀄츠 성은 아버지가 성주로 군림한 후로 신비롭고 기괴한 성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 일곱 번째 방은 평소엔 감춰져 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버지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열자, 그는 곧바로 영수의 힘을 사용했다. 퀄츠 성에는 성 바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 땅의 영수의 힘으로 만들어진 터널로, 위치는 레인버그의 핏줄을 이은 자들만이 알고 있다.

"가자꾸나."

아버지의 힘이 닿자 일곱 번째 방에 지하 통로로 향하는 입구가 생겨났다.

아버지는 익숙하게 지하 통로를 통과했는데 아버지는 자주 이런 방법으로 성 밖을 나갔다 온다고 했다.

조용히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얼마 걷지 않아 마을 어귀에 말 두 마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뜸 여행이 시작되었으나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쌍둥이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다.

난 말에 올랐다. 승마는 귀족의 기본 교양이다. 예전에 배운 적이 있었다. 모습은 엉성했으나 훈련된 말이라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아버지는 능숙하게 말을 다뤘다. 그는 아르테미스의 성지까지는 말을 타고 삼 일이면 도착한다고 했다.

느긋한 여행길이었다.

점점 외진 곳으로 들어서자 간혹 작은 영수들도 보였다.

토끼, 다람쥐같이 조그마한 놈이었는데, 언뜻 보면 산짐승이나 자세히 보면 생물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 몸은 유리병처럼 매끈하고 투명했는데, 숲이 있는 곳의 영수들은 초록빛을 띠었고, 연못의 영수들은 물처럼 새파랬다.

녀석들은 아버지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쫄래쫄래 다가왔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달아나거나 심지어 공격까지 하려 들었다. 친하게 지내자고 웃으며 손을 내밀어도 도망가기만 했다. 서글펐다. 길고양이를 위해 편의점에서 사료를 샀지만 하악질만 당하는 기분이다.

"영수들은 왜 아버지만 좋아할까요?"

성 바깥이라 아버지와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격식을 차리는 걸 싫어했다.

아버지는 어깨에 올라탄 다람쥐 영수를 쓰다듬었다.

"영수들이 내게 친절한 건 친구가 되고 싶어서다."

다람쥐 영수는 그의 손길이 좋은 듯 보였다.

"친구요?"

"그래. 우리처럼 영수를 보는 자들은 극히 드물어. 강력한 마법사보다도 희귀하지. 내가 별달리 강한 힘을 지녀서 영수들이 따르는 게 아니란다. 그저, 그들이 보이기 때문에 영수들은 기꺼이 힘을 빌려주지."

아버지는 자신이 최고의 영수술사가 된 이유를 그저 많은 영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의 존재인 영수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으로 형태를 얻고, 교감을 나누는 것으로 감정을 공유하고, 생명을 얻는다."

내가 손을 뻗자 다람쥐 영수는 황급히 모습을 감추더니, 나무 위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니 네 힘의 진가를 이제 알겠느냐? 넌 그저 보인다고만 했지. 그래, 그게 중요한 거야! 그저 보는 것. 영수는 강력한 존재일수록 볼 수조차 없다. 내가 맥을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십 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넌 그저 보이잖느냐. 넌 모든 영수의 힘을 빌릴 수 있어. 네 눈에 담긴, 모든 영수를 말이다!"

아버지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짜증 났는지 내게 버럭 소리 질렀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다람쥐 영수가 도망치는 걸 봤는데도 저러네.

"날 싫어한다니까요."

"아르테미스의 성지에선 알 수 있겠지. 영수들이 널 싫어하는지, 네가 영수들을 싫어하는 건지."

물려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16

이대로라면 편안한 여정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한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었고,

그게 연이 되어 마을에 약탈을 일삼던 도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 * *

난 아버지에 대해 한 가지 몰랐던 게 있었다.

그가 어떻게 평민의 신분으로 쿤칸 제국의 푸른 기둥이자 드넓은 영지를 지닌 퀄츠 성의 성주, 레인버그 공작이 되었는가. 단지 그가 지닌 강력한 능력 덕이라고만 생각했다.

"네놈들의 죄를 퀄츠 성의 단두대에서 묻도록 할 터이나, 약탈한 물품을 모두 돌려주고 주민에게 두 배의 배상금을 준다면 사형은 면하도록 하겠다."

그 일면에는 괴팍한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들린 산속의 외진 마을이 도적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아버지는 자신이 '레인버그 공작'이라고 외치며 도적들을 모두 잡아주겠다고 소리쳤다. 당연히 마을 주민들은 믿지 않고 경계했으나, 아버지는 영수의 힘으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도적 무리의 본거지를 찾아내고, 수십 명의 도적을 한순간에 제압하고 포박해 버렸다.

영수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곁에서 보니 왜 영수술사가 마스터급의 기사나 대마법사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는지 알겠다. 만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적이라면 추적, 제압이라면 제압, 혼자서 모든 걸 해냈다.

아버지는 레인버그를 믿으라며 마을 주민을 안심시켰다.

이런 외진 곳의 화전민마저 아버지의 명성을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대전쟁 때도 아버지가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을 도와줬다면, 국가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떠받들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날 밤, 잠은 마을 화전민의 낡은 집에서 잤다.

"넌 이런 곳에서 잔 적이 없어 불편하겠구나."

전생에선 더 심한 곳에서도 자 봤다. 거대 몬스터의 내장 안이라던가.

"등만 붙일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아버지는 잠자리가 불편한 아들이 걱정돼서 말을 건 게 아니었다.

"오늘 이 아비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수십 명의 산적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 불능으로 만들던 거?

감히 다른 마음 품지 못하게 도시의 경비대가 올 때까지 가시넝쿨로 가둬 버린 거?

"멋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내 한 번의 호의가, 마을 주민에겐 비참한 삶의 구원이 되었지."

그는 강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라고들 하지. 군자는 권력을 가질수록 겸손해져야 한다고들 해. 맞는 말이야. 하지만 힘을 감추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들아. 힘을 숨기지 말아라. 드러내고 당당히 맞서. 그리하여 누군가의 영웅이 되는 거야. 네 작은 호의가 누군가의 구원이 될 수 있게."

평민으로 공작의 지위에 오른 남자의 신념이다.

하지만 내 삶과는 정반대의 이념이다.

난 이 세계에 대단한 혁명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지구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목격했다.

저마다 영웅이 되고자 한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 * *

마침내 달과 사냥 그리고 영수의 신인 아르테미스가 강림했다는 성지에 도착했다. 성지는 아마존 같은 대수림의 중심에 있었는데, 성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영수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영수들의 힘도 강력해서, 토지신이라 불리는 영수들도 종종 보였다.

내 예상대로였다. 이곳은 무저갱만큼 위험했다.

만약 아버지가 없었다면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난 아버지 옆에 찰싹 붙어서 뒤를 따라갔다.

"아르테미스의 성지라는 게...."

"멋있지 않느냐?"

깊은 정글,

드높은 거목에 둘러싸인 아르테미스의 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힐끔 '절벽'을 내려다봤다.

"숲속의 숲."

마치 거대한 크레이터 안에 숲이 생겨난 것 같았다.

크고 깊은 구덩이 안에 있는 숲이라니, 정말 경이로운 광경이다.

"아르테미스 님이 강림하였을 때 생겨난 구덩이라고 한다. 무저갱만큼 깊은 구덩이지만 텅 빈 곳이 아니라 상록의 숲으로 가득 차 있지. 어떠냐, 이 신비로운 숲이야말로 아르테미스 님이 실존한다는 가장 큰 증거가 아니더냐?"

아버지는 절벽 아래의 저 숲은 이 세상의 생태계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저곳에 '생물'은 없으며, 오로지 영수들만 존재하고 자연의 힘이 풍부하여 온갖 귀중한 약재들과 광석이 나지만, 숲에서 벗어나면 모두 환상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아르테미스의 성지라기에 신비로운 숲을 예상했지만, 구덩이 안의 숲이라니.

이 정도로 기괴할지는 몰랐다. 절벽 아래 숲이라 내려가는 것도 고역인데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도망칠 수 없잖아.

"전 여기서 구경만...."

아버지는 곧바로 내 허리를 붙잡고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영수의 힘으로 안전하게 착지하겠지만, 깜빡이는 켜고 들어오지.

* * *

아르테미스의 성지는 기괴하고 괴상한 숲이었다. 마치 공상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외계행성의 숲 같다. 나무들은 불타거나 때론 얼어붙어 있었으며, 스스로 가지를 움직이거나 열매를 흩뿌리기도 했다.

풀 한 포기마저도 평범하지 않았다. 알록달록 무지개색의 꽃도 보았고, 용암과 물이 같이 흐르는 냇가도 보였고, 얼음으로 뒤덮인 빙산의 옆엔 새하얀 모래 언덕이 있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태계가 뒤섞인 듯한 혼란스러운 이곳은 아버지의 창궁관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너무 많은 영수가 보였다. 토지신급의 영수들이 무수히 있다. 그 영향으로 이 기괴한 자연환경이 만들어졌겠지. 영수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오다가 날 보며 으르렁거렸다. 아버지는 좋아했지만 난 싫어했다.

어느 한 놈, 다른 새끼가 없었다.

아버지는 교감을 시도해 보라고 했으나, 손을 내밀면 물려고 하고. 인사를 하면 도망가기에 바쁘니 점점 짜증이 났다.

"아버지, 그만 나가시죠."

"좀 더… 교감을 해 보아라."

"아버지도 보고 있잖습니까. 이놈들, 아버지만 없으면 날 죽일 놈들입니다."

미련이 남았는지 조금 더 지켜보자는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한숨을 쉬더니, 안타까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밀어붙여 얻는 게 뭐가 있겠느냐. 기대했거늘, 하아. 내 뒤에 붙어 따라오기만 해라."

"다른 볼일이 있습니까?"

"겸사겸사 널 데리고 온 것이다."

아버지는 사냥제가 끝나면 항상 아르테미스의 성지를 찾는다고 했다. 풍만한 자연의 힘을 느끼며 교감력을 높이고, 아르테미스 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나.

숲의 길은 몹시 험했다. 시시각각으로 환경이 변하여, 방금까지 걸어온 길이 늪지대가 되거나 딱딱한 바위가 녹아내려 모래가 되기도 했다. 체력을 길러놓지 않았다면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난 땀을 닦으며 투정했다.

"후우, 현기증 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영수의 숲에선 길을 잃는다."

재빨리 아버지 옆으로 붙었다.

"하하. 걱정 말거라. 최고의 영수술사가 누구더냐? 이 아비가 있는데 길을 잃어버릴 일은 절대 없지. 혹시 영수의 장난에 휩쓸려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마. 이 녀석들 모두 내 친구와 다름없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네."

믿음직한 아버지였다.

* * *

지랄 맞은 아버지였다.

얼마 걷지 않아서 길을 잃어버렸다.

아니, 어느샌가 아버지가 사라진 것이다.

넝쿨에 걸려 넘어져서 흙을 털고 일어난 그 짧은 시간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던 아버지의 호언과 달리, 앉은 자리에서 십 분이 넘게 기다려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천안통으로 봐도 온통 영수들 천지라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는 점점 영수들이 많아졌다. 덤벼들진 않았지만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듯 내 주변으로 모이는 게 몹시 불안했다.

"아버지! 아버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고 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X 됀 거지? 영수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암 지대의 붉은 도마뱀, 나무 위의 고릴라, 모래의 두더쥐, 얼음 위에 여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내게 다가오자 내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갔다.

"뭐 시발, 뭐!"

위협하며 쫓아내려고 했으나 영수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이 새끼들 설마."

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었나? 아니, 없다.

영수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해친 적은?

많다.

난 종아리에 힘을 줬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자, 날 쫓아온다.

등을 돌려 달렸다.

그래도 쫓아왔다.

갑자기 이렇게 생존 서스펜스 영화를 찍는다고?

이제 전력 질주로 도망갔으나 놈들은 끈질기게 쫓아왔다. 심지어 지나가는 곳마다 영수들이 튀어나와 날 방해했다. 언덕에서 자빠지고, 굴러떨어지고, 늪지대에 빠졌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달렸다. 시발, 전생의 그 치열했던 순간이 현생에서도 되풀이될 줄이야.

난 눈을 부릅뜨고 달렸다. 몬스터에게 쫓겨 본 적, 많다. 언제나 난 살아남았다.

무수히 많은 영수가 도사린 숲이지만 도망칠 길은 있었다.

길이 확실하게 보였다.

난 그 길을 달렸다.

활로.

길을 달리자, 영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시발."

어느 정도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유인당한 거야."

이 새끼들, 교묘하게 날 이 길로 유인했던 거다.

난 급히 다른 길을 찾았다. 위험한 길, 영수들이 득실거리는 길.

하지만 난 이미 놈들의 함정에 걸린 뒤였다.

쿵!

땅이 진동했다.

순식간에 솟아오른 놈은, 코끼리를 닮은 거대한 땅의 영수.

놈의 발구름은 지진처럼 땅을 가르기 시작했다.

피할 새도 없이 난 크레이터로 굴러떨어졌다.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흙처럼 달라붙은 작은 영수들이 날 구덩이로 빠트리고 있었다. 저항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자, 난 두 눈만을 크게 뜰 뿐이었다. 무엇이, 왜? 영수가 날 이곳에 빠트린 거지?

쿵!

바닥에 몸을 처박고 나서야 내 몸에 달라붙었던 영수들이 달아났다.

난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구덩이 안의 공기가 스산했다. 단지 흙구덩이라서가 아니다. 무겁고 불쾌하고 차가운 공기는,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 겪는 게 아니었다. 오한이 돋았다. 내 눈에 담기는 존재가 부디 그것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전생이나 현생이나, 세상은 엿 같았다.

"왜...."

아르테미스의 성지 깊은 구덩이 아래,

그곳에서 난 놈과 마주쳤다.

쌍둥이에 이끌려 간 곳, 무저갱의 지하.

그곳에서 보았던.

"악마가."

끔찍한 괴물이 있었다.

구덩이 아래, 빛은 없다.

하지만 내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어둠에 숨은, 두려운 악마가.

놈은 붉은 눈을 가진 검은 늑대였다.

* * *

그림자에서 기어 나온 듯 새까만 털을 지닌 늑대였다. 놈의 눈은 붉은빛으로 번득였다. 으르렁거리는 낮은 울음은 고막을 잘게 찢어 놓는 듯했다. 굶주린 늑대는 들짐승 특유의 움직임으로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맴돌았다. 날 탐색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먹어 치우기 쉬운 먹잇감이라는 걸 깨달을 것이다.

악마의 모습을 한 늑대인지, 늑대의 모습을 한 악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든 아니든 강인한 포식자다. 늑대는 강인한 턱과 살점을 찢는 날카로운 이를 지녔다.

놈은 보통의 회색 늑대보다 몸집이 더 크다. 분명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들 것이다. 덤벼드는 걸 허락한다면 내 힘으론 뿌리칠 수 없다.

한 번의 상처는 죽음이다. 살아난다고 해도 목덜미에 난 깊은 상처는 많은 피를 가져갈 테고, 놈은 내가 죽어 가는 꼴을 지켜보다가 기운을 잃고 쓰러졌을 때 비로소 여유롭게 날 뜯어먹을 것이다.

두려움이 몸을 집어삼킨다. 두 다리가 달달 떨렸다.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며 목덜미에 흐르는 메마른 땀은 몹시 차가웠다. 온몸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냉정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포기하고 아버지가 구하러 와 주길 기다린다든가,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악마를 만났다고 억울해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낭에 달아 놓았던 단검을 뽑았다. 야영을 대비하여 준비한 작은 칼로,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는 용도이지 무기는 아니다. 하지만 칼날은 날카롭다.

윗옷을 벗어 한쪽 팔에 감싸고 배낭에서 솜 베개를 꺼냈다. 그리고 밧줄로 팔에 베개를 묶었다. 걸시가 쓸모없는 걸 챙겼다고 생각했다. 젠장, 살아남는다면 돌아가서 칭찬해 줘야지. 지금 상황에선 큰 도움이다. 프라이팬도 챙길 것 그랬나.

그러는 와중에도 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늑대는 약자를 공격한다. 시선을 피하면, 먹잇감임을 인정하는 거다.

놈은 나만큼, 갑자기 등장한 날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에서 가장 큰 변수는 놈이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었다. 첫 고비는 넘겼다. 이제 놈의 송곳니가 가죽을 덧댄 질긴 윗옷과 솜 베개를 한순간에 뜯어 버리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크르르...!

마침내 탐색을 끝낸 검은 늑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17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놈은 조심스러웠다. 싸움이 아닌 사냥이었다. 늑대는 사슴의 뿔에 찔리는 걸 막기 위해 등 뒤를 노린다. 놈은 사슴의 뿔처럼, 내가 손에 쥔 뾰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섣불리 움직이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 것이다.

난 두 눈을 부릅떴다. 뇌를 혹사시키는 천안통의 부작용은 생사의 기로에 선 내게 어떤 고통도 주지 못했다. 죽음보다 비참한 건 없다. 삼십 년 가까이, 멸망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가슴에 새겨진다.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을 저절로 알게 된다.

쇠고랑으로 머리를 쥐어짜는 아픔을 느낄수록, 점점 놈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천안통은 초인이 보는 광경을 내게 선사했다. 라니스타 놈처럼 코앞에서 전력으로 휘두른 무기를 피할 만큼 난 민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빨리 놈의 움직임을, 놈이 그렇게 움직이고자 생각한 그 순간에 맞추어 동시에 간파할 수 있다면.

놈이 뒷다리를 굽혔다. 균형이 뒤로 쏠렸다. 찰나의 순간에 난 판단했다. 놈이 쇄도를 준비하고 있다. 놈은 정면으로 달려들어 내 목을 물어뜯을 생각이다. 섣불리 피해선 안 돼. 만약 첫 번째 쇄도를 피하더라도, 놈은 네 다리를 사용해서 나보다 훨씬 빨리 균형을 잡고 다시 덤벼들 것이다.

라니스타처럼은 하지 못한다. 결국 난 희생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늑대의 입이 벌어졌다. 한순간에 놈은 폭발적인 도약으로 먼 거리에서부터 뛰어들어 내게 덤벼들었지만, 난 이미 동작을 예상하고 옷으로 두껍게 감싼 한쪽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손에 쥔 단검을 내려찍었다. 난 두 눈이 보여 준 '그림'을 믿었다.

푹!

놈의 아가리가 팔을 물자마자, 난 칼로 놈의 코를 정확히 내려 찔렀다. 먹잇감의 '뿔'에 찔리자, 당황한 놈이 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난 있는 힘을 다해 밀어냈다. 일부러 주둥이에 팔을 물리게 했다.

성난 놈이 사납게 내 팔을 물어뜯었다. 늑대의 본능대로, 팔을 뜯어내기 위해 고개를 휘저으며 이를 박아넣는다. 가까이 붙은 상황에서 늑대의 민첩함은 둔해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난 코와 눈을 계속해서 내려찍었다.

진득한 피가 뿜어져 얼굴을 적셨다. 따뜻하지 않은, 몹시 차가운 피였다. 늑대는 앞발로 날 긁어 댔다. 살점이 찢겨 가슴팍이 피로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내 피는, 놈과 달리 따뜻했다.

푹! 푹! 푹!

생과 사의 싸움에서, 고통은 잊어 갔다.

난 계속해서 칼로 놈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찔렀다.

쿵!

결국 꼬리를 보인 건 놈이었다.

놈은 입안에 확실히 들어온 먹잇감을 버리고 도망을 택했다. 솜 베개와 질긴 가죽옷, 요대까지 갈기갈기 찢겨 엉망이 되었다. 이제 다시 공격을 받으면 내 팔을 뜯기겠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

어둠이 주는 공포.

늑대는 두 눈을 잃었다. 포악스런 얼굴이 너덜너덜해졌다. 핏물에 젖은 코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놈은 두 개의 감각을 소실했다. 도망친 놈은 날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았다.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난 들키지 않게,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방금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덩치 큰 늑대의 공격을 인간의 몸으로 받아내며 큰 상처를 입혔다.

내가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일어나지 않아 생긴 기적과도 같았다.

전생과 달랐다. 내 몸은 허약했던 인간의 몸이 아닌 단련된 전사의 몸이었다.

천안통으로 놈의 공격을 받아낸 것은 둘째 치더라도,

라니스타 놈과 우샤스 누나의 '담금질'이 아니었다면 내 팔은 맥없이 뜯겨 나갔을 것이다. 격전 속에서 칼을 휘둘러 두 눈과 코를 잘라 버릴 힘과 체력이 없었다면 결국 늑대의 이는 내 목을 부러트렸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저 두 명이 고마웠다.

게다가 무엇보다, 놈이 비교적 '약한' 악마라서 다행이었다. 무저갱에서 보았던 꺼림칙한 악마 중 한 놈이었다면, 난 대처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늑대와 다름이 없어서 다행이다.

첫 다툼은 내 승리였다.

하지만 놈은 죽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두 눈과 코를 잃었지만, 이빨이 날카롭지 않은 건 아니다.

어떻게 놈을 죽이는가.

지금 놈도 사냥이 아닌 생존을 위한 발악으로 변했다.

발악하는 적을 죽이는 건 전보다 더 힘들 것이다.

결국 답은 내 두 눈에 의지하는 것밖에 없었다.

좀 더 깊이, 좀 더 많은 걸, 좀 더 확실한 걸.

보는 것.

놈의 새까만 털 한 올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어느 순간보다 더 깊이 천안통의 힘을 끌어 올렸다. 두통이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파져 올 때, 나는 전에 보지 못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늑대의 배 부근에 무언가 있다. 빛이 나고 있다. 반딧불이를 삼킨 듯, 놈의 배 안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기에, 이리 깊이 집중해야 보이는 거지?

크르르!

그때였다. 상처 입은 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눈을 잃은 늑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건, 놈의 입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붉은 화염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악마.

예상하지 못한, 첫 번째 변수가 발생했다.

쿠오오오-!

놈이 불길을 토해 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사방을 불태우고자 고개를 돌리며 활활 타오르는 화염 줄기를 여기저기 뱉어 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로 순식간에 이 구덩이 안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불태우는 불꽃, 피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난 문득 기괴한 힘을 마주하고 나서야 떠올리게 되었다.

시발, 너만 쓰냐.

내게도 있다.

불가사의한 힘이.

난 믿고, 불길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웅!

예상대로였다.

불길이 날 강타했으나, 내 몸을 감싼 붉은빛이 순식간에 화염을 모두 없앴다.

아지비카교의 성물, 공(空)의 힘이다. 항마력, 마법과 악마의 힘을 없애는 공의 능력을 가진 성물을 난 삼켰었다. 이 힘은 무시무시한 멜리사 누나의 마법마저 막아 냈다. 공의 힘이 발휘되는 건 두세 번이 한계였으나, 그건 방을 폭발시키던 멜리사 누나의 마법에 한한 것이다. 악마의 불은 폭탄 같던 멜리사 누나의 마법에 비하여 모닥불처럼 따뜻한 수준이다.

난 검은 늑대에게 걸어갔다. 불길을 내뿜는 탓인지, 두 눈을 잃어버린 탓인지 놈은 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내 놈의 등 뒤에 선 난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제야 난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끝이다, 댕댕아."

푹! 푹! 푹!

목덜미를 여러 번 찌르자 검은 늑대는 쓰러졌다.

* * *

늑대는 죽었다.

난 가만히 놈을 관찰했다.

끔찍하게 생겼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놈은 악마다. 시꺼멓고 차가운 피를 내뿜는 악마.

목덜미에 깊숙이 박힌 검을 뽑던 난 놈의 이마에 '글자'같이 보이는 게 있음을 알아차렸다. 검은 털 속에 감춰져서 못 보던 것이었다. 악마의 몸에 새겨진 글자라.

"펜릴?"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내가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난 악마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가 '펜릴'이라 읽혔으며, 그로 인해 이 악마가 펜릴이란 악마라는 걸 유추했다. 당황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천안통의 또 다른 효과겠지. 시발, 이놈의 개눈깔은 못 보는 게 없어.

가장 무서운 순간은 아니었다.

쌍둥이들의 정체를 처음으로 알았을 때가 가장 무서웠다.

하지만 분명 방금의 싸움은 현생 14년을 살며 가장 치열하고 격렬했던 순간이었다.

내겐 쌍둥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전생 짬밥이란 게 있다. 열네 살의 폴스타가 아니라 스물아홉 살에 죽은 창식이가 해냈다. 굳이 따지면 이 육체가 없으면 못했겠지만.

"후우."

미묘한 상실감이 들었다.

이 지랄 맞은 구덩이에서 벗어나기 전에, 난 잠시 지친 몸을 뉘었다.

다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 늑대의 주검을 봤다.

빛.

뱃속에서 점점 찬란해지는 푸른 빛.

다아! 다아!

소리.

빛에서 나는 소리.

황급히 일어나, 칼로 놈의 뱃가죽을 찔렀다.

그 순간이었다.

눈이 멀어 버릴 만큼, 그러니까 이 개눈깔로도 버티지 못할 빛이 악마의 뱃가죽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이건,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상상을 뛰어넘은 변수에 난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아아악! 아?"

다아?

멍청히 녀석을 바라봤다.

늑대의 뱃가죽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모이더니 하나의 형태가 되었다.

악마의 시체는 그와 동시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녀석이 영수라는 건 알겠다.

근데 왜 악마의 뱃속에 있었던 것이며.

왜....

"뭐냐, 넌."

저렇게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는가?

* * *

녀석은 어린 사슴의 모습이었다.

투명한 몸체에 푸른 빛을 머금은 어린 사슴.

영수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과 달랐다.

너무나 뚜렷했다.

푸른 빛을 머금은 가죽, 몸에는 반달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

새초롬하게 난 작은 뿔이 귀여운 어린 사슴, 달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녀석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귀엽네, 저놈.

마치 생긴 게… '밤비'와 닮았다.

다아!

희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영수는 보통, 자연 상태에선 '소리'를 잘 내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은 분명 사슴의 울음소리가 아닌 이상한 울음을 냈다.

"밤비?'

게다가 녀석은 다른 영수들처럼 날 미워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되레 날 지그시 쳐다보더니, 갑자기 달려오기 시작했다.

녀석은 앙증맞은 뿔을 내 다리에 비비적거렸다.

얼떨결이지만 어쨌든 내가 녀석을 구해 줬다.

그래서 이렇게 고맙다고 친한 척하는 건가?

"영수라...."

난 손을 내밀었다.

"나랑 친구 할래?"

쬐그만한 다람쥐 영수는 기겁하며 도망갔었다.

하지만 녀석은 네 다리로 폴짝폴짝 뛰더니, 내민 손에 자신의 뺨을 비벼 댔다.

촉감이 묘했다. 마치 영수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체온이 따뜻했던 것이다.

"불 타입은 아니지만...."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내 거야, 달비."

다아?

달 모양의 문신, 밤비 닮은 외모.

그래서 달비라 부르기로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 * *

[기록일지 #56]

데메니아 쿤칸 조사, 기록, 배포.

아르테미스의 전설.

세 명의 신이 지옥 위에 세상을 창조할 때, 여파에 휩쓸려 떨어진 별의 신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그녀는 무저갱으로 떨어져 대악마 펜릴과 싸웠다. 수천 년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펜릴의 힘은 약해져 갔으나 그녀의 몸 또한 조각나 세상에 흩뿌려졌다.

전설에 불과하나, 악마의 서에 기록된 짐승의 왕, 펜릴의 흔적이 무저갱 그 어디에도 볼 수 없었음을 감안한다면 몹시 흥미로운....

18

땅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흔들리며 벽이 쩍쩍 갈라져 흙더미를 토해 냈다. 악마의 농간인가 싶었으나 다행히 매장당할 걱정은 없었다. 이내 천장이 갈라지고 구덩이가 솟아오르며 날 바깥으로 밀어 낸 것이다.

순식간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난 찡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숲에는 영수들이 모여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더는 내게 덤벼들지 않았다. 마치 할 일을 끝낸 것처럼 가만히 앉아 날 바라봤다. 난 달비를 쳐다봤다. 녀석은 기쁜 듯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영수들은 제 친구가 악마에게 잡아먹혔다고 내게 구해 달라고 한 건가? 그렇다면 못된 새끼들이다. 시발,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왜 내게 지랄인지.

긴장이 풀렸다. 마른기침이 계속해서 나왔다. 목이 타는 것 같다. 탈수 증상, 갈증이 몸을 더 지치게 했다. 다리를 움직일 힘도 없었다. 난 바닥에 누워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직도 두통이 심했다. 퀄츠 성으로 돌아가면 며칠 동안 뻗어 있을 것 같다.

첨벙!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물소리가 들리더니, 내 옆에 웅덩이가 생겨났다. 물웅덩엔 작은 개구리가 있었다. 녀석은 웅덩이에서 나와 날 빤히 바라봤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웅덩이까지 기어가서 머리를 처박았다. 차가운 물이 달아오른 뺨을 식혀 줬다. 목구멍을 적시는 물은 아로니아 음료보다 더 달콤했다.

"하아."

물을 마신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누웠다. 흙바닥은 차가웠다. 그때, 등을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깜짝 놀라 허리를 들었다. 그러자 나뭇잎 날개를 한 나비들이 땅에서부터 날아올랐다. 나비 영수들의 날갯짓에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낙엽이 쌓이더니, 푹신한 침대가 되었다.

"니네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병 주고 약 주냐."

짜증 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수들의 호의가 나쁜 느낌은 아니다.

주변을 폴짝 뛰어다니던 달비가 내 곁으로 달려왔다.

녀석은 내 겨드랑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난 손으로 느적느적 달비를 쓰다듬었다.

아버지가 영수를 친구라고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늑대 맥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늑대를 탄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이제야 60대 노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당황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버지는 곧 누워 있는 날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와 날 안으려고 했다.

"아픕니다."

늑대의 발톱에 찢긴 상처가 몹시 쓰라렸다. 그는 황급히 피로 엉망이 된 팔과 가슴팍을 보더니 손바닥으로 상처를 감싸고 영수의 힘을 불어넣었다. 우샤스 누나처럼 상처가 회복되진 않았으나 상처 부위가 깨끗해져 갔다.

아버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엉엉 울며 하소연하기엔 내 정신은 너무 커 버렸다.

난 담담히, 날 걱정했을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이 상처는...."

"자빠져서 굴렀습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악마와 마주친 일은 말하지 않았다. 굳이 죄책감의 짐을 얹어 줄 마음도 없었고, 악마에 대해 논의할 대상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해 캐묻다 보면, 아자비카교의 성물이니 뭐니 할 얘기가 많아진다. 난 쌍둥이의 맹세를 지키기로 했다. 아버지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으나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 순간에 가장 중요한 건 레인버그가의 막내아들을 잃어버릴 뻔했다는 것이다. 그는 날 푸른 늑대 맥의 등에 태우려고 했다. 맥은 탐탁지 않아 했다.

다아!

그 모습을 마치 꾸짖듯 달비가 소리 질렀다. 우스운 꼴이다. 이 한입거리도 안 될 작은 사슴이 호수의 영수, 맥에게 대들었다. 하지만 같은 영수라고 봐주는 건지, 맥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무릎을 굽혔다. 달비가 먼저 폴짝 뛰어 맥에게 올라탔다.

"제법인데, 너."

난 피식 웃으며 맥의 등에 탔다. 항상 날 보며 으르렁거리던 놈이 이번엔 내가 다쳤다고 봐주나 보다. 아버지는 곧바로 아르테미스의 성지를 벗어났다. 맥은 말보다 훨씬 빠르고, 강인했다. 순식간에 숲을 가로질러 절벽을 타고 올랐다. 떨어질 걱정도 없었다. 맥의 털은 물처럼 출렁거렸는데 강한 흡입력이 있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맥을 타고 오지 그랬나.

"미안하다. 이 아비의 괜한 욕심에 널 잃어버릴 뻔했구나. 영수들이 널 그렇게… 싫어할 줄은 결코 몰랐다."

가는 길에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렸다.

"그래도 영수를 얻었잖습니까? 맥처럼 강한 녀석은 아니지만 제법 귀여운 녀석을요."

맥이 멈췄다. 아버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영수?"

"여기 있잖습니까."

난 내 품에 안긴 달비를 가리켰다.

아버지는 맥에서 내려,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달비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달비는 혀를 날름거리며 아버지의 뺨을 핥았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반응은 이상했다. 무언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뺨을 만지더니, 내게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수가 있다고 했느냐."

"여기 달 문양, 귀엽지 않습니까? 이름은 달비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그는 갑자기 두 손을 추켜올려 만세 자세를 취하더니, 맥의 등을 세게 툭툭 두들기고, 축구의 결승골을 넣은 공격수처럼 팔을 흔들며 세레모니 비슷한 행동까지 했다. 내가 이 작은 사슴 영수라도 길들인 게 몹시 기쁜 듯 보였다.

"하하하!"

이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계속해서 웃었다. 눈가에 눈물마저 맺히도록 웃어 댔다.

아버지에게 표현하기엔 무례하지만, 정말 미친 놈 같았다.

한참 뒤에야 진정한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장하구나."

"뭐, 이 정도로...."

"아니다. 정말 대견해.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넌 최강의 영수술사다, 폴스타."

달비를 내려다봤다. 달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날 올려다봤다.

이 녀석이 맥하고 싸운다면.

캐터피와 망나뇽의 싸움 정도?

난 아버지가 유난히 내 일과 관련되면 야단법석을 떤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심했다. 최강의 영수술사라니, 아무리 그래도 아무 근거 없이 날 이렇게 비행기를 태워 우주까지 날려보내는 건 아닐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악마의 뱃속에 있던 것부터가 수상했다. 이 녀석, 사실 전설의 포켓몬이냐?

* * *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극도로 집중하여, 모든 힘을 쏟아부은 후에야 희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전율이 일었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영수는 단 하나의 존재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 신이시여.'

믿었다.

그리고 기대했다.

그래서 아르테미스의 성지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상처를 입고 지친 아들을 봤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했다.

욕심에 아들을 잃어버릴 뻔했다.

더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폴스타는 그의 형제자매와 달리 가장 유약하기에 가장 마음이 쓰이는 자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안심했다.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사랑하는 아들은 놀랍게도 기대의 한계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달의 아이는 네 명이었다.

'아르테미스'는 전설이지만, 라이베라는 굳게 믿었다.

그는 대전쟁의 전란에 휩쓸려 간 곳, 아인들의 땅 깊숙한 외지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강력한 영수, 수백의 토지신들마저 거느리며 산 전체를 움직이던, 믿지 못할 신수神獸를.

단 한 번 보았고, 그 뒤로는 보지 못했다.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만 아르테미스의 성지에 기도를 드릴 때마다 희미하게, 실낱처럼 느끼기만 했다.

영수들의 들끓음 속에, 분명 이곳에 신수가 잠들어 있음을.

'폴스타가 신수를 깨어나게 했다. 40년 동안,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단 한 번에....'

조금, 아주 조금 열등감을 느꼈으나 이내 불쾌한 감정마저 행복함으로 변해 갔다.

아들은 최강의 영수술사다.

자신이 닿지 못한 곳에 당당히 올라갈, 최강의 영수술사!

* * *

시발, 몸 상태가 엉망이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지쳐 쓰러졌다. 걸시가 냄새난다고 무어라 했지만, 녀석이 챙겨 준 짐들 덕에 살았으니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의료동의 치료사들이 오기 전까지, 잠시 눈이라도 붙이자.

"뒤질 것 같다. 윽, 속 쓰려."

이번 생에선 이런 X 같은 거, 겪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개 같네."

개간네?

"엉?"

난 멍청하게 달비를 바라봤다.

개간네? 개간네?

잠깐, 영수가 원래 말을 하던가?

* * *

치료가 끝나고 며칠 동안 방에서 요양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날 찾아왔다.

난 그에게 '말하는 영수'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날 비행기를 태웠다.

영수는 교감한 자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니.

말을 하는 건 교감의 극에 다른 것으로 토지신 이상의 영수들만이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술사에게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다더니, 그걸 하루 만에 해내다니 넌 역시 최강의 영수술사의 자질을 지녔다더니.

애석하게도 달비는 '개간네' 말만 할 줄 알았다.

첫말을 이상하게 가르쳤다.

* * *

아르테미스의 성지에서 겪은 일을 알려야 했다.

난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쌍둥이들을 방으로 초대했다.

침대에서 누워 자던 달비는 벌떡 일어나더니, 쌍둥이를 보고 소리 질렀다.

개간네! 개간네!

"응, 그래그래. 저 사람들이 원래 그래."

다행히 날고 기는 쌍둥이들도 영수는 보지 못했다.

* * *

솔직히 내가 살짝 기대했던 면도 있었다.

지금까지 항상 쌍둥이들이 일을 저지르면 그것에 휘말리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쭉정이처럼 지낸 게 다였지 않는가? 최대한 엮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해도, 결국엔 나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흥미로워."

하지만 아르테미스의 성지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 과장 보태서 영웅담처럼 그들에게 설명하자, 돌아오는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멜리사 누나만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입버릇처럼 하는 '흥미로워' 한마디만 해 줬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분한 느낌이다.

"악마 놈 목덜미에 '펜릴'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더라고. 아마 놈의 이름인가 봐."

"악마어를 읽었다고?"

"읽었다기보다… 그냥 나한테는 보이거든."

대화가 무미건조했다. 아버지처럼 열렬한 반응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뭐....

"다른 용건은?"

"어? 그게 단데."

라니스타 놈이 먼저 일어났다. 놈은 내 뒷머리를 기분 나쁘게 살짝 치고 나갔다. 멜리사 누나는 내게 관심도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우샤스 누나가 나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혼자 방에 남은 난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하, 시발. 이걸 뭐라고 하더라.

개간네! 개난네!

난 침대 아래에 숨어 있다가 쌍둥이들이 가자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내가 가르쳐 준 욕을 서투르게 하는 달비를 바라봤다. 영수는 술사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지?

19

멜리사 누나의 꼬리는, 그녀의 입버릇을 빌리자면 '매우 흥미로웠다.'

아르테미스의 성지에서 돌아온 이후 쌍둥이들은 일주일 뒤, 생일 파티가 열릴 때까지 퀄츠 성에서 지냈다. 그동안 난 쌍둥이들의 버릇이나 '습성' 등을 관찰했다. 우선 전부터 신기하다고 여겼던 멜리사 누나의 아홉 개의 꼬리에 대해서다.

마법을 사용할 때 꼬리가 움직였다. 내 방을 불태웠던 화염 화살을 사용할 땐 한 개의 꼬리가 움직였고, 무저갱의 악마를 학살할 땐 두 개의 꼬리가 움직였던 걸로 기억한다.

몇 번 지켜본 게 다였으나, 합당한 추리를 해 보자면 아마 마법의 위력은 사용하는 꼬리의 개수에 따라 다를지도 몰랐다.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두 개의 꼬리만으로 무저갱의 수십 악마를 학살했었다. 세 개, 네 개, 그리고 아홉 개의 꼬리를 모두 사용하면 그녀는 과연 얼마나 강한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외에도 흥미로운 점은 많았다.

천안통으로도 난 쌍둥이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처럼 자세히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멜리사 누나는 꼬리의 행동들로 감정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양이나 개는 자신의 꼬리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마치 짐승처럼!

누나는 먹는 걸 좋아했다. 특히 내가 주방장에게 특선 요리를 주문할 때마다, 어느 순간 나타나 음식을 뺏어 먹었다. 멜리사 누나의 꼬리는 맛있는 걸 먹자 살랑살랑, 마치 간식을 먹는 강아지처럼 흔들렸다. 꼬리의 감정은 멜리사 누나의 오두막집에서 나와 '실험'할 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내 눈으로 '악마어'를 읽는 실험을 할 때였다. 멜리사 누나는 내가 악마어를 읽을 때마다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실험을 마치고 헤어질 때면꼬리가 축 처지기도 했다.

"재밌네."

어떤 실험에선 멜리사 누나는 내 눈에 자신의 어디까지 보이느냐고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물어보는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혐오스러운 무언가와 마주한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난 담담히 누나의 꼬리가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꼬리가 전에 없던 반응을 보였다. 아홉 개의 꼬리가 모두 숨으려고 하는 듯,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것이다.

"앞으로 보지 마."

"뭐?"

"보지 말라고."

"그냥 보이는데 어떻게 안 봐."

누나는 꼬리가 안 보이도록 열심히 연습하라며 윽박질렀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날의 실험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홉 개의 꼬리는 멜리사 누나의 가장 큰 약점일지도 몰랐다.

무저갱에서 떨어질 때 난 멜리사 누나의 꼬리를 잡아챘다. 그러자 누나는 망설이지 않고 날 발로 차 버렸다. 단지 보물을 먼저 쟁취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꼬리를 만지는 게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쌍둥이 중 가장 관찰이 필요한 건 우샤스 누나였다.

우샤스 누나는 퀄츠 영지의 외진 마을에서 '자애 활동'을 펼쳤다.

이 세계는 신비로운 힘이 무수하다. 영수들의 힘, 마법사들의 힘, 마스터들의 힘, 그리고 아인들의 땅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온갖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힘. 그러나 당연 쿤칸 제국에서 가장 기적처럼 여겨지는 힘은 하나였다.

우샤스 누나의 치료의 힘이다.

산골 마을에 수많은 신자가 몰렸다.

모두 우샤스 누나의 세례를 받고자 모인 것이다.

걸인과 병자들에게 둘러싸인 우샤스 누나는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었다. 그녀는 모든 이를 평등하게 보았다. 간혹 어디에서 굴러왔는지 돈 좀 있어 보이는 부르주아, 서민 귀족도 보였다. 하지만 예외 없이, 누나를 만나려면 기나긴 신도의 줄에 동참해야 했다.

구경하던 난 몹시 소름이 돋았다.

누나는 그들의 메시아였다. 하지만 내 눈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가련한 자들로 보였다. 대전쟁 이후 권력을 쥔 건 공작 가문만이 아니다. 악마의 존재가 알려지며 급격하게 성장한 교황청의 권력은 현재 쿤칸 황실을 압도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본래 교황청은 레인버그가를 몹시 견제했다고 들었다. 예전엔 영수의 힘을 사교도로 지정하려 들었다나. 하지만 지금은 기묘한 상생 관계에 있었다. 아지비카교는 누나를 성녀라고 여겼다.

나는 누나가 저 성녀라 불리우는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세계정복 정도인가?"

이 세계의 정치 구도는 지구와 달리 몹시 기묘했다. 인간의 사회가 철저한 강자존의 서열이다. 개인이 지닌 무력이 만인을 압도한다. 그러니 권력의 중심인 쿤칸 제국의 '네 기둥' 공작가의 가주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최강자라 불리는 자들이겠지.

황제는 허울뿐이다.

지금도 퀄츠 영지에선 황제를 연호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실상 공작령은 독립된 국가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지도.

그런 점에서 우샤스 누나의 저 기이한 능력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시체가 축복을 내리네."

우샤스 누나의 선도가 내 눈에는 두렵기만 했다.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치료된다.

칼 한 자루로 산을 베는 마스터의 힘보다 더 무섭다.

생명의 가치마저 우롱하는 느낌이다.

"어?"

착각인가.

아니, 천안통은 착각하지 않아.

상처를 치유하고 세례를 내리던 우샤스 누나의 등에서, 순간 새하얀 날개를 보았다.

찰나였으나 천안통은 잘못 보지 않는다.

누나는 저 끔찍한 몰골로, 전생이 '천국'의 천사라고 했었다.

"신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누나는 흔한 선도의 말을 끝으로 자애 활동을 멈췄다.

세례를 받지 못한 많은 이들이 실망했지만 누나는 지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우샤스 누나의 능력도 한계가 있다.

정말 다행히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한계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신으로 불렀을 것이다.

누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갈 때였다.

군중 속에서 꾀죄죄한 몰골의 늙은 남자가 갑자기 누나에게 달려들었다. 한쪽 팔이 없는 외팔이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나무 수액을 채취할 때 쓰는 날카로운 송곳이 들려져 있었다. 아무런 호위가 없던 누나는 속수무책으로 늙은 남자의 송곳에 어깨가 찔렸다. 새하얀 사제복이 붉게 물들어 간다. 남자는 광기에 물든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괴성을 질렀다.

"왜! 왜! 내 팔은 안 돌려줘!"

순식간에 마을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건장한 남자들이 분노하며 남자를 때려죽이고자 달려들었다.

하지만 누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아무렇지 않게 움직여, 외팔이 남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신은 '우리'를 용서하실 겁니다."

광기에 찬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이 눈물로 번져 간다. 송곳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 용서를 빈다. 누나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의 죄를 사했다.

"시발."

지금 벌어진 일들이 난 몹시 무서웠다.

역시 쌍둥이 중 가장 무서운 건 악독한 우샤스 누나다.

뭐가 용서야?

피 흘리는 어깨는 누나에겐 아무런 상처도 아니다.

"연기잖아."

내 눈에는 보였다.

음흉한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득하고 냄새나는 무언가가.

많은 군중이 뒤섞여 있어 아마도 나만 눈치챘을 것이다.

둘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그는 이제 금화 한 닢을 받을 것이다.

아니면 소리 소문 없이 죽을지도 몰랐다.

비열함에 난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다아....

달비도 무서운지 내 곁에 달라붙어 벌벌 떨었다.

* * *

라니스타 놈은 고양이를 좋아했다.

나도 고양이는 좋아하지만, 라니스타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좀 역겨웠다.

퀄츠 성을 자유롭게 뛰어노는 고양이들은 모두 라니스타 놈의 고양이다.

그 덩치에, 캣 대디다.

사자라도 키우면 몰라, 우연히 고양이랑 정겹게 노는 모습을 보고 난 충격을 먹었다.

카악 퉤, 눈 버렸네.

* * *

"달비, 네가 그렇게 대단한 영수라며."

밤에 몰래 연병장으로 나왔다.

달비의 힘을 알고 싶었다.

영수는 자연의 힘을 가진다. 아버지의 푸른 늑대 맥은 순식간에 거대한 물웅덩이를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하다. 물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의 수둔을? 수준이다. 다른 영수들도 저마다 각기 자연의 속성을 지녔다. 토지신들은 대지를 변화할 힘을 지녔기에, 토지신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영수는 술사의 힘에 따라 많은 걸 할 수 있다. 식물의 성장, 기의 나눔, 마른하늘에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몸에 둘러 외부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지내면서 느낀 건데, 달비는 도통 어떤 성질을 가진 영수인지 알 수 없었다.

"힘 써 봐, 힘."

달비는 그저 새파란 보름달을 보며 신나서 방방 뛰기만 했다. 난 계속해서 녀석을 설득했다. 하지만 달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힘도 펼치지 않았다.

"뭘 할 수 있냐, 넌."

개간네?

"욕 말고."

개간네! 개간네!

젠장.

난 달비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고 손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이 작은 사슴이 대단한 영수라고 해도, 난 녀석의 힘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녀석을 구해 준 게 인연이 되었지만, 결국 난 아버지처럼 영수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여우면 됐지."

날이 추웠다.

난 미련 남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달비야."

연병장에서 나와 저택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지나갈 때였다.

쿵-!

갑자기 들려오는 폭발음에 난 급히 뒤돌아봤다.

연병장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달비가 없다.

난 급히 연병장으로 달려갔다.

연병장에는 달비가 제 뿔로 무언가를 툭툭 건드리며 놀고 있었다.

연병장 중심에는 폭발의 흔적이 보였다. 깊게 파인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다아!

난 그걸 주워들고 자세히 바라봤다.

돌이었다.

못생긴 하얀 돌.

돌을 주워들고 천천히 크레이터로 걸어갔다.

연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크레이터로 내려가서 주변을 살폈다.

크레이터의 중심은 깊게 파여 있다.

중심에서 외곽으로 갈수록 파인 흔적이 작았다.

이 흔적은 누가 봐도....

난 멍청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다.

"이거, 네가 떨어트린 거니?"

달비는 방방 뛰며 돌을 달라고 애원했다.

돌을 던지니, 지가 무슨 개도 아니고 폴짝폴짝 뛰어가 돌을 잡았다.

"에이, 이게 뭐야."

아버지의 호들갑이 살짝 이해가 가는 밤이었다.

* * *

열 살 때까지 내게 있어 '그것'은 고대하는 가장 큰 축제였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내게 있어 '그것'은 필사적인 변명이었다.

아버지가 올해는 전에 없던 가장 큰 성대한 파티를 열 거라며,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해도 된다고 말했다.

마침내 올해도 돌아왔다.

14살의 생일 파티.

레인버그가에는 전통적으로(우리 세대부터) 형제자매끼리 생일을 기념하여 직접 선물을 준비하는 가풍이 있다. 나도 아홉 살 때까지는 그랬다. 서투른 솜씨로, 엉성한 선물을 줬었다. 하지만 올해는.

난 넌지시 뭘 받고 싶은지 물어봤다.

"대해의 수신 레비아탄의 가죽이면 돼."

"아인들의 땅에 재밌는 소문이 돌더군. 천둥을 뿌리는 새가 있다던데, 놈의 부리로 만든 칼은 과연 어떨까."

시발, 선물 난이도가 이상하잖아.

20

며칠 뒤면 도련님의 생일이다. 정말 기쁘다! 도련님의 이번 생일은 퀄츠성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시던 우리 도련님, 한때는 남쪽 섬에서 매일매일 아로니아만 갈아 마시며 항상 먼바다만 쳐다보시기에 어찌 될런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지셨다.

아침마다 큰도련님의 지옥 같은 훈련을 받으시고, 마님에게 책을 빌려 지식을 쌓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 난 요새 너무 행복하다. 어르신께서도 우리 도련님을 제일 아끼시는 것 같다. 모두 라니스타 도련님을 장차 퀄츠의 성주가 될 차기 가주로 여기지만, 나는 우리 도련님이 레인버그가를 이끄는 가주가 되었으면 했다. 그럼 내 출셋길도 활짝 열리겠지?

도련님이 말씀하시길, 전에 없이 성대한 생일 파티가 열린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하녀들은 파티 준비로 너무 바빴다. 며칠 전부터 온갖 산해진미 식재료들이 퀄츠 성으로 들어와 부엌이 엉망진창이다. 난 하우스 메이드가 아니라 고귀한 공자님의 훌륭한 시종이지만, 어쩔 수 없이 부엌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오늘도 부엌으로 나와 양파껍질을 벗겼다.

"그거 들었니?"

이런, 이번에 새로 들어온 어리숙한 하녀들인가? 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하녀들을 피해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같이 양파를 벗기던 하녀들은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함부로 열기 시작했다.

"레나가 글쎄 정원에서 뭘 봤느냐면...."

퀄츠 성의 괴담.

너무 유명한 얘기들이다.

하지만 난 절대 레인버그가에 흠집을 낼 이야기들을 하지 않는다.

잠깐, 잘 안 들리잖아.

조금 더 가까이 가 봐야겠다.

난 양파껍질을 까며 어리숙한 하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험담은 금물! 하지만 가끔 서브홀의 집사와 부엌데기의 사랑 이야기처럼, 재미난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에 들을 만하긴 했다. 킥킥, 집사장 아저씨 대머리인 거 이제 알았나? 어머! 랄시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음란해!

"라니스타 공자님은 정말 멋있어. 벌써 제국 십 대 기사로 불리우신대!"

"모두 대단하시지. 어떤 가문의 자제님들이 레인버그의 '달의 아이'만큼 뛰어날까? 퀄츠 성으로 들어온 게 정말 자랑스럽다니까."

"봉급도 두둑하고."

"얘는 참. 뭐… 근데 폴스타 도련님은 조금… 그렇지?"

난 웃음을 멈췄다.

어리숙한 신입 하녀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기 시작했다.

감히 레인버그가를 욕보이는 것이다.

화가 났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라이베라 저하께선 너무 심성이 고우셨다. 어디서 저런 근본도 없는 년들을 하녀로 받아 주시다니 말이다. 후우, 어릴 적부터 레인버그를 모셔 온 내가 참아야겠지요.

"막내 도련님은 거의 없는 취급을 받으시니까… 몇 년 동안 별장에서 요양하셨다며?"

"응. 그때 따라간 하녀는 걸시밖에 없었지."

"걸시? 그 애. 좀 정상이 아니던데? 맛 간 아이 같더라."

나는 결국 참을 수 없었다.

이 시발련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난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내가 있는 줄 몰랐는지, 하녀들은 깜짝 놀라며 양파가 담긴 그릇을 엎었다. 그게 더 짜증이 났다. 어떻게 깐 양파들인데.

"개 같은 년들!"

난 그대로 그년들의 뺨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걸시의 주먹은 맵다.

양파보다 더.

* * *

집사장님이 나만 벌줬다. 억울했다. 내가 먼저 때렸긴 했지만 난 혼자였고, 그년들은 두 명이서 싸웠다. 하지만 내 모습은 멀쩡하고, 그년들의 뺨은 퉁퉁 부어올랐다는 이유만으로 대머리 집사장은 나만 징벌을 받을 때까지 벌을 서라고 했다.

"짜증 나."

저택의 1층 로비에서 물 양동이를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어차피 '징계'는 받지 않겠지만, 굴욕이다. '마님'께서 아신다면 꾸짖으시겠지.

그래도 난 고자질은 하지 않는다. 도련님을 욕했다는 게 알려지면 두 명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아무리 레인버그가라고 해도 귀족 뒷담은 큰 죄다. 근본 없는 년들이라고 해도, 난 같은 하녀로서 유도리를 발휘하기로 했다.

팔이 후들후들 떨려올 때였다.

"걸시."

앗, 도련님이다.

"들었어. 한바탕 싸웠다며."

"네에...."

부끄럽다. 난 도련님의 시종, 도련님 얼굴에 먹칠해 버린 게 되잖아!

"이겼냐?"

"네에?"

하지만 도련님은 날 꾸중하지 않으셨다.

"이겼냐고."

역시 우리 도련님.

"네!"

"혼자서 두 명을 팼어?"

"네!"

"14살의 어린 네가, 다 큰 여자 두 명을?"

"네!"

흠씬 두들겨 패 줬지.

"좋아, 잘했어."

도련님은 내가 뭣 때문에 하녀들과 싸웠는지 물어보지 않으셨다. 대신, 내게 방 청소를 부탁하셨다. 집사장은 곤란해했지만, 공자님의 명령을 거스르진 못했다. 하하, 어쩌냐 대머리. 방 청소는 이미 아침에 다 끝냈는걸.

도련님은 멋진 분이시다.

라니스타 도련님이 차기 가주가 되시면 분명 레인버그가는 번성하겠지.

하지만 난 역시 도련님이 가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침내 도련님의 생일이 되었다.

도련님과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나, 시종 걸시.

생일 선물을 가장 먼저 줄 특권을 누리는 건 마님에게 죄송했지만, 난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도련님! 열네 번… 어라?"

지금은 아침 종이 울리기 직전, 도련님이 부시시한 얼굴로 일어날 때다.

하지만 도련님이 보이지 않았다.

욕실을 둘러봐도.

침대 밑을 봐도.

옷장 안을 살펴봐도.

폴스타 도련님이 보이질 않았다!

* * *

"술, 아니야. 옷은 진부해. 화장품은… 좋아할 위인들이 아닌데."

생일 전날까지 결국 난 선물을 정하지 못했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무공을 배웠다. 아지비카교의 성물을 받았다. 상처를 치료받았다. 그러니 받은 게 있으니 준다. 하지만 그 어떤 선물을 준비해도 쌍둥이를 만족시킬 순 없을 것이다. 젠장, 문득 쌍둥이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는 내가 처연하다고 느껴졌다. 이러면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것마저 쌍둥이의 눈치를 보는 것 같잖아.

"걸시, 종이랑 붓 좀 가져다줘."

뭘 준비해도 안 될 거면 대충 의미 있는 걸 주자.

쿤칸의 사람들은 '글'을 선물 받는 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아지비카교의 종교적 교리의 영향인데, 쌍둥이들에겐 쥐뿔도 상관없겠지만, 적어도 축하 파티에서 명분은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난 쌍둥이를 관찰하며 떠오른 감상을 퀄츠산 푸른 종이에 적어 갔다.

그럴싸한 켈라그라피다.

* * *

"폴스타!"

침대에 누워 있던 난 곧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쌍둥이들에게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생일이구나!"

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쌍둥이들이 전생을 알게 된 후로, 난 이들과 처음 생일을 맞이한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어떤 관습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자정이 되자마자 생일을 축하하는 맹세라고 했나?

"생일이네."

"축하한다."

"축하해."

"…축하합니다?"

당황스러웠다.

난 쌍둥이들이 훈훈하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 그럼 선물을 교환하자."

솔직히 선물 교환식의 전통도 지키는 게 우스웠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탁상 위에 놓인 세 장의 종이를 바라봤다.

"지금 줘?"

"미리 준비했나 보구나. 폴스타, 넌 뭘 받고 싶니?"

"그냥 알아서 줘."

"그래, 그럼 구하러 가 볼까."

"구하러? 젠장."

나는 전과 달리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인지했다. 급히 옷을 주워입고 신발을 신었다. 며칠 전, 가지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봤을 때 심해의 괴물과 대협곡의 천둥새를 말할 때부터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멜리사 누나가 내 방문을 열자 그때처럼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도라에몽이냐?

"선물의 위치는 다 파악해 놨지."

"미리 준비하면 신선도가 떨어지니까."

"정겹구만. 하하!"

정말 대단한 플렉스Flex다.

부자들은 종종 생일 파티 때 범인들을 상상도 못할 과시를 부린다.

플렉스, 이건 그들만의 플렉스인 것이다.

생일날, 괴수 때려잡기.

* * *

신선도가 중요한 선물이란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우선 가장 먼저 간 곳은 대협곡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 떨어지면 세상의 끝으로 나와 결국 우주로 떨어진다는 대협곡은 아인들의 땅과 쿤칸 제국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인들의 침범을 막을 수 있지만, 제국은 이곳에 그 어떤 군대도 주둔시키지 않았다. 전선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엔 괴물들이 산다.

아인도, 제국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괴물들이.

그런 대협곡에서, 라니스타 놈은 활발히 뛰어다녔다.

대협곡의 주인들도 라니스타 놈에겐 야생 동물과 다름없었다.

무시무시한 덩치의 기괴하게 생긴 괴물들이 덤벼들지만, 라니스타 놈은 검 한 자루로 모두 베어 버렸다. 결국, 그는 대협곡에서 '천둥새'를 잡아냈다. 부리로 번개를 뿜는 강력한 괴물이 라니스타 놈의 선물 재료로 전락했다. 그는 부리를 잘라서 가지고, 천둥새의 사체는 우샤스 누나에게 선물했다. 멜리사 누나의 마법이 있으니 선물의 부피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린 곧바로 '녹해의 신'을 잡으러 갔다. 동대륙보다도 더 먼 바다, 외해라 불리는 정복되지 못한 미지의 바다까지 나갔다. 온갖 바다 괴수들이 득실거리는 녹해라는 곳에서, 라니스타 놈은 그곳의 왕 '레비아탄'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천둥새, 레비아탄 모두 전설로 남은 괴수들이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괴물 따위가 전설로 남았다는 건, 강력한 마법사와 마스터들도 여태까지 죽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라니스타 놈은, 그저 즐거운 듯 괴물을 도륙했다.

레비아탄은 바다뱀이었다.

문제는 대형 범선보다 더 큰 뱀이라는 것.

라니스타 놈은 레비아탄을 죽이고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멜리사 누나에게 선물했다.

나한테는 레비아탄의 비늘 하나를 줬다. 뱀 비늘 하나라지만, 크기는 내 몸을 가릴 만큼 컸다. 라니스타 놈은 괴물의 피에 젖어 광기에 찬 얼굴로 말했다.

"좋으냐?"

"고맙읍니다."

하루에 걸친 '선물' 사냥이 끝났다. 지금쯤 퀄츠 성은 난리가 났겠지. 하지만 파티에 초대받은 레인버그가의 손님들이 화를 내든 말든 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발, 피에 젖은 생일이라니.

성으로 돌아오자, 마침 자정을 알리는 종이 은은하게 울렸다.

멜리사 누나는 레비아탄으로 만든 마법 도구들을 선물로 약속했다. 우샤스 누나는 쿤칸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예술가의, 돈 주고도 못 산다는 미술 그림들을 선물했다. 공물로 받았다고 한다. 팔면 저택 한 채는 살 수 있겠지.

이제 내 차례다.

시발, 시발, 시발.

난 머뭇거리며 종이를 매만졌다.

별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선물의 수준이 너무 나니까 민망했다.

"이거."

난 각자에게 글귀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라니스타 놈은 글귀를 읽더니, 피식 웃었고.

멜리사 누나는 글귀를 읽다가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우샤스 누나는.

오늘 하루 정말 진귀한 경험을 했다. 대협곡에서 천둥새를 잡고 외해에서 레비아탄을 잡았다. 그 누가 이 해괴하고 두려운 경험을 하루 두 번씩이나 경험할까? 정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경험이었다.

하지만.

난 우샤스 누나의 반응에, 앞서 경험한 오늘 하루의 일들이 모두 부질없으며 하찮고,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 어? 왜 그래? 무섭잖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수준이 아니다.

나는 우샤스 누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상상도 못한 행동을 마주했고, 이 순간이 마치 꿈처럼 변해 가는 걸 느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오감마저 퇴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우샤스 누나의 두 눈에는 물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고민해도, 저건 눈물이었다.

우샤스 누나가 내 선물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고?

왜? 대체 왜?

난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 *

사자를 시기하는 자들은 모두 물려 죽는다.

함부로 여우의 꼬리를 밟지 마라.

천사의 날개는 바래졌다.

21

달의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에 쿤칸 제국 권력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레인버그가를 따르는 퀄츠 영지의 가문들은 물론, 아지비카교의 추기경들과 아카데미의 교수, 그리고 마탑의 칠색 탑주들까지 찾아왔다. 단순히 레인버그 가문이 쿤칸 제국을 양분하는 권력의 중심이라서가 아니다.

그것보다 '달의 아이'들의 힘에 반한 자들이 저마다 야욕을 품고 온 것이었다.

가장 화려한 파티였다.

쿤칸 황실의 연회도 이처럼 많은 권력가가 모이지 않을 것이다.

레인버그가와 대적하는 붉은 기둥 솔가르 가문과 거악의 기둥 루차콴에선 공작이 직접 달의 아이를 축하하기 위해 먼 거리를 행차했다. 실은 달의 아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건, 쿤칸의 귀족 중에선 모르는 이가 없었다.

태청의 기둥 마테란드 가문까지 사절을 보냈다.

더없이 빛나는 파티.

"정말 괜찮겠소?"

"괜찮아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꺾이지 않은 꽃, 공작부인이 십수 년 만에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주인공들만 나타나면 파티는 완성된다.

레인버그 공작은 곧이어 파티를 뜨겁게 할 '이변'을 생각하며 속으로 히죽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변은 레인버그 공작의 예상보다 더 빨리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뭐? 사라져?"

집사장의 다급한 전언.

"다 찾아봤나?"

"멜리사 공녀님의 정원까지 찾아봤습니다."

"허."

기껏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건만, 정작 당사자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쌍둥이들이 작정하고 모습을 숨기면 자신이라고 해도 찾을 방도가 없다.

"젠장."

이 사실을 이 자리에 모인 권력가들에게 어떻게 알릴까.

"풉."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공작부인이 웃음을 터트린다.

"당신이 욕을 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욕이 안 나오게 생겼소? 망할 녀석들, 자기 생일에 모습을 감추는 게 무슨...."

공작부인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하하. 원래 그런 아이들이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콜록.

웃던 부인이 기침하자 레인버그 공작은 급히 영수의 힘을 불어넣었다.

"젠장,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녀석들은 안 올 거예요."

공작부인은 샴페인 잔을 들고 일어나, 권력가들에게 외쳤다.

"달의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며!"

모든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될 때.

"형제자매의 우애가 너무 깊어 자신들만의 파티를 연 것 같으니, 달의 아이의 생일 파티는 우리끼리 즐겨야겠군요! 아하하!"

레인버그 공작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젠장."

한 움큼 빠져나오는 머리카락.

영수의 힘도 탈모는 막지 못했다.

* * *

그날 이후, 생일 파티는 이틀 뒤에 다시 열리기로 했다. 무진장 혼났으나 아버지의 노발대발하는 외침도 내겐 잘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계속해서 생각났다. 우샤스 누나의 눈물의 의미를 아직 잘 모르겠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악마들이야.]

"씹."

천장에 새겨지는 글씨.

공포영화의 한 장면과 다름없다.

순간 몸이 굳었던 난 이내 뺨을 긁적였다.

"이건 또 무슨 짓이야."

멜리사 누나의 마법이다.

[악마가 어디 살게?]

"…무저갱?"

[무저갱의 악마는 봉인되어 있거나 '약한 놈'들이지.]

약해? 그게 약해?

당신 입장에선 약하지, 무저갱의 악마가 제국에 나타나면 적어도 기사단은 출동해야 할걸.

"용건이 뭡니까."

상념을 방해하는 멜리사 누나가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저갱은 '비어 있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난 천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벽에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비어 있다고?"

[아직 확신할 순 없어. 분포도를 작성하고 있거든. 하지만 지금까진 다이모니온의 무저갱을 제외하곤 모두 무저갱은 비어 있었어. 무슨 뜻인지 알아?]

알 것 같다.

하지만 모른 척해야 한다.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악마들이 무저갱에서 나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야. 지하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이 땅을.]

대전쟁에서 제국은 큰 피해를 입었다. 악마와 아인 그리고 분열된 군벌 세력에 의해서다.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건 악마들이었다. 정작 악마의 수는 손에 꼽을 만큼 작았음에도.

멜리사 누나는 대전쟁에서 있었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니, 써 줬다.

[악마는 인간의 모습과 다름이 없어 육안으로는 절대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해.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바로 옆에서 자고 있던 연인이,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악마로 변해 인간을 잡아먹었지.]

악마는 두 부류라고 했다.

거대한 바퀴벌레 악마 다이모니온처럼 파괴의 화신 혹은 '위장자'라 불리는 인간의 가죽을 쓴 비열하고 사악한 악마.

[당시, 높으신 분들은 마녀사냥 등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이 사실을 철저하게 감췄다더군.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을 낳았어. 결국 몇 명의 악마에 의해 제국이 분열될 만큼 큰 상처를 입고 말았어.]

관심 없는 척했으나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다.

난 벽에 새겨지는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

[이제 교황청의 권위가 높아진 이유를 알겠지. 아직도 권력가들은 위장자를 두려워하는 거야.]

위장자는 특별한 방법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

신의 계시를 받은 검은 사제들만이, 엄밀한 관찰과 의식으로 위장자를 가려낸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도 네 쌍둥이가 불길하다고 여겨 악마가 숨겨 놓은 '위장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검은 사제가 파견되었다고 들었다. 굴지의 권력을 지닌 공작과 왕녀의 자식들을, 교황청은 쉽게 감금했다. 그만큼 위장자는 두려운 존재다.

난 멜리사 누나의 설명을 들으며 슬슬, 내게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네 기이한 눈이라면.]

생각해 보면 쌍둥이들, 의외로 무능력하지 않을까 싶었다.

날 이렇게 필요로 하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위장자를 구별해 낼지도 모른다.]

난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느냐, 그 잘난 마법으로 어떻게 알아서 해 봐라.

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멜리사 누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글씨가 환하게 빛나더니 점점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내 뭉친 글자는 점이 되고, 점은 커져서 구멍이 되었고, 벽면에는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큼 큰 공간이 생겨났다.

그 너머, 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서 있는 멜리사 누나가 손짓했다.

"레비아탄의 사체를 미끼로 악마일지도 모르는 놈을 찾았다. 심혈을 기울인 마법으로도 단지 의심만 할 뿐이야. 네 눈이 필요하다, 폴스타."

불쑥 멜리사 누나의 팔이 튀어나와 날 이끌고 갔다.

새삼 느끼는 건데, 마법사면서 힘은 라니스타 놈과 비슷하잖아.

* * *

그곳은 온통 금박 장식들이 가득한 휘황찬란한 집이었다. 지붕부터 천장까지 온통 금칠하고 도자기 같은 장식들도 금색이 빠지지 않았다. 바닥에는 호랑이 가죽이, 벽에는 매머드의 머리가 박제되어 걸려 있었다. 누가 봐도 졸부집 같았다. 난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놈이 누군데."

멜리사 누나는 평소 입던 옷이 아닌 특이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터번과 비슷한 모자에 사막 지역에서 주로 입는 실크 옷 그리고 뾰족한 구두. 쿤칸 제국의 복장은 아니다. 슈테르닐 왕국 서쪽 지역에서 주로 입는 복장 같은데.

누나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실험이, 그녀에겐 몹시 기대되고 흥미로운 것 같았다.

"왕국의 노예 상인."

역시나 슈테르닐 왕국인가.

"안디 아지즈, 수백 명의 노예가 거래되는 노예 시장의 우두머리. 지독하고 악독한 놈이지. 악마가 아니더라도 죽일 '가치'가 있는 악인이다."

죽일 가치라니.

"놈이 악마인지 아닌지 구별만 하면 되나?"

나는 내 눈이라면 충분히 위장자를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개눈깔은 안 보이는 게 없거든.

멜리사 누나는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을 듬뿍 담아서.

"기특한 녀석."

"뭐."

"위장자인 걸 알아내면 신호를 주렴."

"만약 아니면?"

"하하."

왜 불길하게 웃고 지랄일까.

난 전에 무저갱에서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 세상은 쌍둥이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죽이려고 하는가.

"놈들이 '원인'일까?"

"글쎄.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얼마 뒤, 금박을 한 거대한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를 호위하는 전사들이 먼저 들어와 주변을 경계하고,

뒤이어 묵직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

어쩜 저럴까.

포악한 노예상인, 어렴풋하게 떠오른 이미지와 똑 닮은 놈이었다.

놈은 100kg은 훨씬 넘어 보이는 뚱뚱한 몸에 목에는 여러 겹의 금목걸이를 두르고, 손가락마다 세 개의 반지를 낀 중년 남자였다. 걸을 때마다 비계에서 육수가 흘러나왔다. 땀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뿌린 모양인데, 냄새가 뒤섞여 더한 악취가 되었다.

그는 우릴 보더니 활짝 웃으며 뒤뚱뒤뚱 걸어왔다.

"반갑소! 이곳의 주인, 안디 아지즈라고 하오."

악수를 건넸으나 나도, 누나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무안하게 내민 손을 접었으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허허, 인사치레를 싫어하시는 분들이군요. 좋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계약서로 보였다.

"300명을 산다고 들었소."

누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유목민의 생활을 견딜 강인한 체력의 성인 남자들로 간추렸다오. 그리고… 흐흐. 아시다시피 우리 시장의 남자 노예들은 모두 다른 일도 몹시 잘한다오."

난 누나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다행히 아직 참을 만한 듯 보였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어허?"

"추가로 열 명을 더 사지요. 어린 소년으로."

멜리사 누나는 오히려 밀리지 않고 능청스럽게 연기를 했다.

난 둘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시선을 눈치채고, 그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분은?"

"족장님의 아들입니다."

"허허, 위대한 전사의 자제분이라서 그런지, 시선이 몹시 따갑군요."

나는 위장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악마가, 어떤 생김새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알 수 있었다.

저 돼지머리에 감춰진 무언가가 악마라는 걸.

개눈깔은 알고 있다.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말하면 난 분명 앞으로 귀찮은 일에 휘말린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크흠, 뭘 원하는지 알겠소이다. 좋소, 덤입니다. 이분을 위해서 어린 소녀 두세 명 정도는 더...."

악독한 노예 상인.

"어때?"

누나가 내게 묻는다.

노예 상인의 말에 대한 대답을 묻는 게 아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노예 상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뒤져."

쿵!

누나의 꼬리 세 개가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해머로 내려친 듯,

악마는 순식간에 편육이 되었다.

위장자의 껍질은 순식간에 벗겨졌다.

인간의 가죽 안에는, 곤죽이 된 붉은 피부의 악마만이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 노예상인의 전사들이 덤벼든다.

"있나?"

"저들은 아니야."

누나는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퀄츠 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22

차가운 물을 머리에 둘러썼다.

아직 추운 날씨다. 냉수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난 지금 일생일대의 길로에 서 있다.

"되돌릴 수 없어."

전생과 다른 평안한 삶, 행복한 삶.

"망해 가는 지구에서 기껏 때깔 나는 삶으로 환생했는데."

전생의 나는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개눈깔 하나로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죽었다.

"예전 삶이 되풀이되는 건가."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이 세계에서 놈들의 쌍둥이로 태어난 이유.

전생과 같다. 개눈깔로 해 왔던 일들, 첩자를 가려내는 건 내 특기다.

시발, 내가 무슨 지들 옵저버냐?

위장자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게 알려졌으니,

더 이상한 사건에 휘말릴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명백해졌다.

지금까지 목표가 너무 미적지근했다.

단지 4년을 버텨서 가주가 되면 달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쌍둥이들과 보다 직접 엮였으니.

단검 한 자루로 검은 늑대와 치열하게 싸웠듯이.

궁지에 몰린 난 물어뜯어야 했다.

전생과 달리 평안한 삶을 누리겠다는 건 애초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투쟁이다.

쌍둥이들은 파도다.

막으려고 해도 계속 몰아치는 큰 파도.

휩쓸려서 부말처럼 사라질 바에야, 살아남기 위해선 파도를 먹어 치워 몸집을 키워야 했다.

그렇담 내가 얼마나 강해져야 할까?

"세계 최강자 정도면 가능할지도."

곰곰이 생각했다.

열두 개의 아자비카교의 성물, 라니스타 놈의 무공 수련, 강력한 힘을 숨긴 영수 달비.

그리고.

천안통.

전생에선 천안통 하나만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난 많은 걸 해냈다.

이번엔 강해질 재료가 충분하다.

난 차가운 물을 머리에 둘러썼다.

"시발, 존나 춥네."

* * *

다음 날, 멜리사 누나의 선물이 도착했다.

"으, 무거워."

걸시가 들고 온 나무 상자 안에는 쪽지 한 장과 빛이 닿지 않아도 푸른 빛깔을 내뿜는 근사한 비늘 갑옷이 있었다. 난 박스를 내려놓고 쪽지를 읽었다.

[어제 일은 고마워, 폴스타. 이 갑옷은 레비아탄의 역린으로 만든 거야. 웬만해선 부서지거나 찢어지지 않지. 하지만 방심하지는 마. 강력한 힘, 예를 들어 마스터 수준의 검사의 공격은 버티지 못할 거야.]

마스터 수준의 검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뭐.

[충격은 '라니스타'의 조언대로 고스란히 전해지게 만들었어. 몸 단련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전해주라나.]

시발 라니스타 놈.

[대신 특별한 마법을 걸어 놨어. 무슨 마법이냐면....]

* * *

쪽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단순한 갑옷을 선물 받은 게 아니다.

난 곧바로 상자 안에서 비늘 갑옷을 꺼냈다. 중량감은 있지만, 기사의 갑옷보다 훨씬 가벼웠다. 5kg 아령을 든 것 같다. 난 멜리사 누나가 남긴 쪽지를 따라서 행동했다. 마법은 과학과 다르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쪽지에 적혀진 방법을 차근차근 따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갑옷을 입자 저절로 내 체형에 맞춰 갑옷이 늘어났다. 난 팔을 휘두르다가, PT 체조를 실시했다. 비늘 갑옷임에도 면티를 입은 듯이 활동하기가 편했다. 하지만 갑옷으로서 효용성은 떨어질 것이다. 라니스타 놈의 괜한 참견 때문에, 이 갑옷은 충격을 막아 주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칼에 베이면 자상은 막을 수는 있지만, 고통은 느끼겠지. 방검복의 개념인가. 입고 다니면 치명상은 막을 수 있겠지.

이 비늘 갑옷의 진짜 힘은 따로 있었다.

사실, 갑옷으로 부르기에도 애매한 물건이다.

다용도 맥가이버칼이 본질에 더 가깝달까.

난 쪽지에 적혀진 대로 마도구의 '각인 의식'을 치렀다. 방법은 쉽다. 스마트폰의 지문 인식과 비슷하다.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갑옷에 피를 흘러 넣는 것으로 각인이 끝났다. 내 피가 닿자 레비아탄의 비늘이 더욱 푸른 빛을 내뿜었다.

점차 빛이 가라앉자,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멜리사 누나는 이 마도구가 다루기 힘들 거라고 했다.

그녀가 건 마법은 물건의 형태를 변환하는 마법.

[네 상상력의 부스러기를 먹고 변화하는 형태 변환 마법이다. 방패, 검, 창 따위로 변하기는 쉽지만 그 이상은 연습이 필요할 거야. 사람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빈곤한 편이거든.]

난 갑옷을 벗고, 안쪽에 새겨진 문양에 손바닥을 올렸다.

누나는 연습이 필요할 거랬지만, 나는 이 마도구의 성질이 금방 적응했다.

곧바로 갑옷의 형태가 바뀌며 내 상상대로 움직였다. 방패, 칼은 물론, 밧줄, 효자손, 골프채로 변했다. 심지어 유연함과 단단함의 강도까지 바뀌었다. 하지만 질량을 초과하는 건 불가능했다. 더 큰 방패, 더 큰 효자손으로는 바뀌지 않았다.

이처럼 내가 쉽게 마도구를 다루는 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

개눈깔이다.

별 해괴한 것들도 보는 마당에, 내가 상상한 무언가를 뚜렷하게 '보는 것' 정도야.

물론 상상을 현실에 대입하여 곧이곧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기이했지만, 천안통이 규정이 불가능한 힘이라는 건 전생에서부터 수도 없이 느껴 왔다.

"괜찮은데."

대부분의 물건은 단지 형태가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이건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마도구다.

라면을 먹고 싶은데 냄비가 없으면? 등을 긁고 싶은데 효자손이 필요하면? 코르개 마개를 따야 하는데 오프너가 없다면?

물론 그러라고 준 마도구는 아니겠지만.

형태는 물론, 강도와 탄성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마도구.

단순해 보여도 이 마도구의 힘은 제국 십 대 기사들도 탐낼 만하다.

이런 생각은 정말 하기 싫었다.

젠장, 쌍둥이가 잘나가니 떨어지는 콩고물은 좋네.

"라… 멜… 스타."

위대한 기사들이 자신의 무기에 이름을 붙이듯, 나도 이름을 지었다.

이 마도구의 이름은 라멜스타다.

* * *

이미 한번 파투 났던 생일 파티였지만 아버지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저녁, 퀄츠 성의 연회장에서 벌어진 생일 파티는 규모가 엄청났다.

생일 파티의 수준은 축하하러 온 손님들의 수준에서 판가름 난다. 안 그래도 요 며칠 퀄츠 영지가 시끄럽더라니, 난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버지, 기대하라는 게 이런 말씀이셨습니까.

쿤칸 제국의 내로라하는 권력가들은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이번엔 제멋대로 사는 쌍둥이들도 모두 연회장에 얼굴을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가할 모양이었다.

연회장은 중앙을 비워 두고 여러 개의 긴 식탁이 둘러 있었다. 연회장의 상석 자리에는 아버지와 쌍둥이들이 앉았다. 엄마는 안타깝게도 참가하지 못했다. 며칠 전의 외출로 몸이 더 안 좋아지신 것 같았다. 살짝 죄책감이 든다.

권력가들이 모인 사교 자리는 몹시 날이 서 있었다.

퀄츠 음악대의 흥겨운 연주가 시작되나, 경직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생일 파티가 아니라, 견제와 음모가 가득한 비열한 정치판이다. 특히나, '붉은 기둥' 솔가르 가문의 졸개들과 레인버그가의 가신들은 결코 같은 식탁에 앉는 법이 없었다.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왼쪽에는 레인버그가를 따르는 자들이, 오른쪽에는 솔가르 가문과 루차콴 가문의 귀족들과 그들을 따르는 가신들이 앉았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자는 남쪽 바다를 수호하는 마테란드 가문의 사절들밖에 없는 듯했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난장판을 벌였을까.

공작가 자제들의 생일이지만, 우린 아직 14살이며 작위를 받지도 않았다. 그저 가문의 식솔들과 생일 파티를 열어도 충분했다. 초대를 받은 저들도 축하의 의미는 개뿔,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서 왔을 것이다.

잠시 후, 드디어 음악대의 연주가 잔잔한 음악으로 바뀌고 만찬 음식들이 식탁에 나열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귀족 연회는 어떤 목적이든 간에 음식의 질이 가장 중요했다. 생일 파티라지만, 음식이 형편없으면 레인버그가의 위상이 떨어질 것이다.

다행히 퀄츠 성의 주방장들은 대륙 최고의 요리 실력을 지녔다.

남쪽 섬에서부터 내가 특선요리 등으로 철저하게 교육한 주방장이 퀄츠 성으로 오고 난 뒤부터다.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미미美味에 대한 내 식탐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황실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요리들이 만찬을 장식했다.

권력가들도 혀는 솔직하군.

난 가만히 앉아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장 신경 쓰이는 놈들은 붉은 기둥, 솔가르 가문의 자식들이었다. 레인버그의 아이들은 몹시 어린 편이었다. 아버지 연세 쉰 살에 아이를 낳았으니 말이다. 반면 솔가르 공작의 자식들은 모두 성인이었고, 장남은 나이가 사십에 이르렀다. 4년 전에 듣기로, 피를 피로 씻는 형제싸움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이지.

솔가르 가문은 정통성만큼은 레인버그가와 비견할 바가 아니다.

몇백 년 전부터 시작된 가문이다. 제국에서, 그들의 입김에 닿지 않는 곳은 없다. 퀄츠 영지만 뺀다면.

놈들은 교묘하게 감췄으나, 항상 시선을 우리에게 뒀다. 견제하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평민에 불과하던 아버지가 공작에 오른 후, 황제로부터 퀄츠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퀄츠 영지는, 사실 솔가르 가문의 영지였다. 퀄츠 영지에서 자생하는 적목이 솔가르 가문의 상징이자 '붉은 기둥'이라 불리던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건재하는 한, 놈들은 함부로 야욕을 드러내지 못했다.

아마 저 늙은 염소 솔가르 공작은 자신의 세대에 겪었던 치욕을 제 자식들의 세대에서 청산하고 씻어 내려고 할 것이다. 어림도 없지, 쌍둥이들이 있는데 뭔 걱정이야.

불쌍한 녀석들.

레인버그 가문이 특별했다.

솔가르 가문뿐만 아니라, 제국의 귀족들은 선민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뭐, 당연한 건가. 이 세계는 혁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이라서 많은 걸 가졌다기보다, 저 위치에 오를 힘들을 지니고 있기에 귀족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마스터 수준의 기사가 수십 명의 기사를 도륙하니 혁명이 일어날 리가. 그러니 아버지가 더욱더 '영웅'이라 불리는 거겠지.

작은 정치판, 신기하고 재밌고 역겨운 곳, 귀족들은 제법 구경할 맛이 났다.

쌍둥이들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솔가르 가문의 자식들이 노려본다고 벌떡 일어나 뺨을 후려갈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들도 나름 적응을 한 것이다. 파격적인 행보이나 어쨌든 지금의 삶에 어울렸잖아. 삶이 바다라면 그들은 큰 파도다. 나는 지금까지 물거품 수준이었지.

"흐음."

노골적이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내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뒀다.

적대 혹은 호의.

그러나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권력가들이 모인 자리라도 파티의 식순은 간결했다.

축하가 시작되자 하인들이 선물들을 소개했다. 쌍둥이를 위해 어디 광산에 나는 값진 다이아몬드라니, 수해림에서 어렵게 구한 희귀한 늑대의 가죽이라니. 나도 선물은 있었다. 그저, 공작가의 자제니까 어쩔 수 없이 주는 듯한 수준의 선물이. 라니스타 형이 황금 늑대의 가죽을 선물 받으면, 난 슈테르닐 왕국의 비단을 선물 받았다.

존경받는 자들의 축하사.

추기경의 축복.

지루했다.

선물 공개가 모두 끝나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티 내내 아버지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그리고 각오도 되어 있었다.

"라니스타 퀄츠 레인버그는 투신 밴베르의 환생이라 일컬어질 만큼,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업적을 세웠다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아버지는 쌍둥이들을 거론하며 그들을 칭찬하고 추켜세웠다. 신의 환생이라고 표현했지만, 모든 이들이 전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못마땅해하는 자들도 보였으나 대부분 '달의 아이'에게 크나큰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는 쌍둥이들의 행보를 일거했다. 14살에 달성한 업적들이, 마치 한 분야를 몇십 년 동안 연구한 교수급이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니스타.

마탑의 사랑을 받는 자, 멜리사.

그리고.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큰 이목을 집중시킨 '성녀' 우샤스.

모두가 납득했다.

문제는 아버지의 마지막 발언이었다.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

표정에서 다 드러나잖아.

아버지는 웃음을 참는 듯 뺨이 실룩거렸다.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남쪽 섬에서 홀로 지낸 건 유명한 일이지요."

먼저 치부를 드러낸다.

그리고.

"하지만 그가 필사적인 수행을 해 왔다는 건 다들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포장한다.

"마침내 그가 카락시아의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알에서 웅크려 있다가 수백 년이 지나 마침내 황금 날개를 펼치고 부화하여 세상에 길운을 퍼트린다는 전설의 괴조, 카락시아.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레인버그가의 쓸모없는 막내아들을 칭찬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말했다.

"폴스타는 내 뒤를 이어, 아니 날 뛰어넘어 달을 계승할 유일한 영수술사가 될 것입니다."

23

영수는 아무나 볼 수 없다.

적어도 이곳에 모인 자 중에서, 영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영수술사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분위기가 싸늘하다. 여태껏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날 난도질하는 무수한 시선을 느꼈다.

대륙 최강의 영수술사의 발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축하사가 끝났으나 박수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옆에 앉은 멜리사 누나가 키득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어쩔래?"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자가 있었다.

키가 2미터가 넘고, 갈색의 근육질 피부에, 검은 망토를 입은 자였다.

억세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행동에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루차콴 공작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수업에서 제국의 역사를 흥미롭게 들었었다.

루차콴 공작과 그가 다스리는 산악 지대는 본래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대전쟁 때, 북동 산악민의 군대를 포섭하기 위해 솔가르 가문의 주도로 산악 부족의 족장을 제국 귀족으로 임명하여 산악 지대를 품었다.

대전쟁을 막기 위해 변방의 야만인을 사용한 고육지책이었다. 사용하면 버려질 터였다. 허나 산악 부족의 족장은 예상보다 수완이 뛰어났다. 그는 솔가르 가문의 충실한 종이 되는 것으로 명맥을 이었으며 황실의 권력이 약해진 지금에 이르러선 4대 공작 가문 중 하나로 불렸다.

물론, 여전히 솔가르의 충실한 개였고.

족장의 아들, 제국의 공작, 루차콴.

그가 큰 목소리를 냈다.

"먼저 축하를 드리고 싶소. 레인버그가에 산의 위엄과 영광이 깃들길!"

솔가르 공작이 먼저 천천히 박수를 치자, 그제야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루차콴은 그 뒤로도 사탕발림으로 칭찬하더니,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모두 달의 아이가 대단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소."

뻔히 눈에 보이는 연극.

"하지만 폴스타 공자가 영수술사라니, 정말 감탄했소이다. 제국 제일의 영수술사이신 레인버그 공작께서 보장하시니, 제국을 지탱할 새로운 기둥이 될 거라 한 점 의심치 않지. 안 그렇습니까?"

씁, 지랄도 작작하지.

"그러니 감히 실례가 안 된다면 카락시아의 날갯짓을 지금 여기서 보여 주시면 어떻겠소?"

그의 행동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레인버그가를 따르는 가문들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루차콴 공작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뒷배에 솔가르 공작이 있다는 걸 과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영수의 힘이 그리 경이롭다는데,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소? 우릴 '두 번' 발걸음하게 한 보상으로 말이오."

우리들은 생일 파티를 한번 파투 낸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뜻하지 않은 심리전이었다.

아니, 의도한 건가?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빙판처럼 굳어졌다.

나는 아버지를 힐끔 쳐다봤다.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을 저질러 놓고 내게 선택을 맡긴 것이다.

쌍둥이를 보고, 귀족들을 보고, 천장을 바라봤다.

달비는 연회장의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저 새끼, 왜 저기 있어.

달비가 내 시선을 느끼고, 나한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개간네?

"…물거품이 될 바에야."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명해 보이지요."

마침 달이 휘영청 뜬 밤이었다.

달비는 똑똑했다.

녀석은 천장에서 내려와 내 곁에 섰다.

그때는 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옆에서 보자 몹시 경이로웠다.

달비의 몸에 새겨진 달 모양의 문양이 점점 반달 모양에서 보름달 모양으로 차올랐다.

달비의 달빛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눈이 하늘을 향한다.

"하늘을 보십시오."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다. 파도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온다.

이러면 마치 내가 '쌍둥이'가 된 것 같지만, 시발 먼저 깽판 친 건 루차콴이다.

파도에 휩쓸려 물거품이 될 바에야, 나는 폭풍이 되겠다.

귀족들 중 먼저 눈치챈 건 아버지였다. 순간 몸을 움찔거리시더니, 영수 맥이 아버지 곁으로 달려왔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내 시선을 느끼고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작게 속삭였다.

"첫걸음이 정말 화려하구나."

이내 라니스타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날 보더니 낄낄 웃었다.

개간네!

달비의 외침.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공기를 찢는 파열음.

다른 이들도 이변을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아앙-!

달비가 떨어트린 '월석'이 연회장의 두꺼운 지붕을 깨부수고 터트렸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지붕이 맥없이 무너졌다. 건물 전체가 흔들렸으나 '맥'의 힘으로 붕괴는 하지 않았다. 창문이 우수수 부서지며 유리조각을 사방팔방 내뿜고, 무너진 천장이 귀족들을 덮친다.

하지만 잔해에 휩쓸려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없었다.

무너지는 지붕을 라니스타가 검을 한 번 휘둘러 모두 잘게 잘라 냈고, 파편들은 저절로 움직여 바깥으로 날아갔다. 멜리사 누나의 마법이겠지.

다아....

달비는 피곤한지 내 품으로 파고들더니 눈을 감았다.

"고생했어."

녀석의 빛이 희미해졌다.

몸의 달 문신도 이젠 초승달 수준으로 작아졌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만, 날 위해 힘을 써 준 게 고마웠다.

난 천천히 연회장을 돌아봤다.

아마도 이게 쌍둥이들이 받고 있던 '시선'이겠지.

과시, 우월, 두려움.

취할 것 같다.

물거품이 아닌 폭풍이라.

병이 옮은 게 분명하다.

쌍둥이들과 다니면서 지랄 맞은 일들을 겪어 보니, 이런 미친 짓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난 당황한 루차콴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루차콴 공작님."

생일 파티는 와장창 엔딩으로 끝이 났다.

* * *

생일 파티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손님들이 모두 달아난 빈 연회장에서, 난 멍하니 뚫린 지붕을 바라봤다. 달빛은 환했고, 달비는 신나서 뛰어다녔다. 지붕을 무너트린 건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꽤 기분은 좋았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은 '과하다는 게' 없었다. 천안통은 많은 걸 보여 준다. 내 목숨을 앗아갈 위험까지도. 하지만 결국 허무하게 죽는 건 똑같았지.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오늘부로 네 삶의 길이 달라졌구나."

배웅을 끝낸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는 내 곁에 앉았다.

"하하. 부서진 지붕이 마치 카락시아가 날아오르기 위해 부순 알껍데기와 같구나."

그리고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했다. 부서진 연회장을 수리하기 위해선 골치가 꽤 썩겠지만 아버지는 되레 기뻐하는 듯 보였다.

"널 따르는 영수는 내가 아인들의 땅에서 보았던 신수의 조각일 것이다. 아니, 그 태산 같던 영수가 조각일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옛날, 아인들의 땅에서 봤다던 영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 줬다. 수많은 영수를 이끌고 태산 같은 몸을 지녔으며 대지가 그를 떠받들고, 하늘이 보살피는 영수, 신수. 아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힘을 모두 되찾는다면, 달조차 떨어트릴지도 모르지."

그리고 날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자상하고, 포근한 웃음이었다.

"고맙다, 폴스타."

전생의 기억과 합쳐 살아온 시간을 따진다면, 나도 나만 한 아이를 가졌을 나이다.

하지만 부모다운 부모를 만난 건 14살의 폴스타의 삶뿐이었다.

"아버지."

물거품처럼 허무한 죽음은 겪어 봤다.

폭풍처럼 살다가 언젠가 죽는다면, 그 죽음은 허무할까, 아니면....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달비는 신나서 방방 뛰었다.

* * *

돌아가는 길에, 난 보름달을 뻔히 바라봤다.

"달비야."

아버지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

"아빠가 그러는데, 네가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래."

개간네!

"그럼 너 지금 저거 떨어트릴 수 있냐?"

달비가 깡충 뛴다.

개간네!

나는 달비의 언어 패턴을 파악했다. 녀석은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마다 '개간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녀석이 쌍둥이를 싫어하듯 부정적인 마음이면, 개간네라고 말한다. 반면, 긍정적이며 기분이 좋을 때엔 '다아'라고 외친다.

"흐음. 그럼 힘을 모두 되찾으면?"

다아! 다아!

…문득 달이 떨어지면 쌍둥이들이 막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 * *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푸른 빛깔의 새벽,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어제 일이 내게 무언가 깊은 활력을 준 게 분명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가라앉길' 기다린 뒤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몸을 가르면 내장이 쏟아지겠지만, 우습게도 지금까지 난 텅 빈 몸이었다. 목적이 있다는 건 생동성과 연관이 있구나. 더는 아로니아 셰이크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옷만 입고 방에서 나왔다. 아침 종이 울리지 않은 저택은 고요했다. 난 컴컴한 저택의 긴 복도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복도 끝의 어둠에서 검은 늑대의 붉은 눈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짐승은 약한 이를 잡아먹는다. 난 먹잇감이 될 생각은 없다. 어제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약해서 잡아먹히기 전에 몸을 부풀리고 과시하는 게 낫다. 점점,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전생의 내가, 왜 방위군에 지원했더라?

연병장에 도착했다.

땀내가 풀풀 나던 곳이, 텅 비어 산산한 아침 바람의 냄새만 풍겼다.

난 '라멜스타'를 벗어, 긴 봉으로 만들었다. 라니스타가 처음 가르친 무공, 타구봉법을 펼쳤다. 라멜스타는 철봉보다 다루기가 어려웠다. 집중력이 흩어지면 갑옷 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공 수련에는 더 적합한 무기라는 생각이 되었다.

몇 번 휘두르지 않아 라니스타가 연병장에 나타났다.

저놈은 이미 마스터 검사를 넘어, 이 세상에 대적할 자 없는 천하제일의 무인이다.

그러나 놈은 나보다 항상 먼저 연병장에 와 있었다. 언제 출석하나 궁금했는데, 이런 이른 새벽부터 나왔구나. 저 정도 경지에서, 혼자 더는 배울 게 뭐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난 그를 존경한다. 인성은 둘째치고, 그는 단련된 강철보다 굳건한 사내였다.

"깨달았느냐?"

라니스타가 대뜸 내게 말했다.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는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아마 '내공심법'일 것이다. 단전에 기를 쌓는 무림인들의 기이한 힘.

몇 달 전, 4년 만에 퀄츠 성으로 돌아온 내게 라니스타는 무기를 들라고 했다.

'무공을 가르쳐 주마.'

이제 내가 라니스타에게 말했다.

"무공을 가르쳐 줘."

사자 같은 눈이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무기를 들어라."

기꺼이.

향상심向上心에 불씨를 태우며.

* * *

난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천안통으로 그의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았지만, 머리는 곤죽이 되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본다고 하여 얻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난 허벅지에 멍이 들고 발목이 꺾여 욱신거려도,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힘을 얻겠다고 하더라도, 방식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안타깝게도 혼자 지랄발광해 봤자 절대 쌍둥이를 넘지 못한다. 그러니 되레 그들과 부딪혀서 날 연마해야 했다.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빨아먹어야 했다. 과거의 악연 따윈, 하찮기만 하다.

"큭!"

라니스타는 봐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거세게 덤벼들수록, 그는 거칠게 날 두들겨 팼다. 난 봉을 들었고 그는 맨손이었지만, 그에게 무기의 길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먼저 봉을 놈의 가슴에 찔러넣었다고 생각했으나, 어느샌가 주먹이 내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카악, 퉤!"

침과 뒤섞인 피를 뱉었다.

예전이라면 이쯤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포기를 강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또다시 봉을 움켜쥐었다. 내게 필요한 건 필요 이상의 무모함이었다. 천안통이 보여 준다. 난 절대, 결코 라니스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이건 진실이다.

하지만 난 '전생'에서 겪었듯이, 사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타구봉법의 일곱 번째 자세를 따라 했다. 봉을 힘껏 휘둘러 라니스타의 팔을 부순 후에, 끈질긴 뱀처럼 놓치지 않고 머리와 명치를 찌르고자 했다. 그러나 내 눈엔, 나보다 훨씬 더 빠른 몸놀림으로 얼굴을 향해 뻗어지는 놈의 주먹이 보였다. 저건 위험해. 맞으면 내 다른 어금니들이!

개간네!

그때였다.

몸은 반응하지 못해도, 내 눈은 착실히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봤다.

순식간에 나타난 달비가 라니스타의 주먹과 내 얼굴 사이를 가로막았다.

라니스타의 주먹이 닿자 달비가 풍선처럼 터져, 흩어졌다.

즉시 목소리를 내뱉었으나, 내 입은 한참 뒤에야 비명을 질렀다.

"달비!"

24

다아?

"어...."

내 발치에 앉은 달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영수는 영수, 라니스타 놈이라고 해도 주먹 한 방에 죽지는 않는구나.

라니스타는 행동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난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얼굴이 너무 험악해서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 무언갈 알아내려는 듯,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던 라니스타가 마침내 움직였다.

"따라 해라."

라니스타는 정좌를 했다.

난 잠자코 놈을 따라 했다.

그는 허리를 곳곳이 펴고 눈은 감았으며 목은 자연스레 숙였다. 또한, 왼손바닥은 위로, 오른손바닥은 아래로 향하게 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기이하게도 동시에 '편안한' 자세기도 했다.

"계속 유지하거라."

아픈데 시원한 느낌, 도수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잖아. 모순적인 느낌이 들 때였다.

다아.

달비가 오더니 정좌를 하고 앉은 내 가랑이 사이에 들어왔다.

마치 새의 둥지처럼, 달비는 편하게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가랑이 사이로 느껴졌다.

생전(전생과 더불어) 처음 겪는 기이하고 놀라운 경험에 난 눈을 번뜩 떴다.

그러자 라니스타의 귀가 얼얼한 호령이 떨어졌다.

"이어라!"

난 얼른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멈췄던 기이한 감각이 다시 느껴졌다. 이상했다.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 감각은 분명 존재하는데, 형체가 없는 무언가였다.

따뜻한 물인 것 같기도 했고, 공기 같기도 했다. 놀라운 건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면 피부에 가로막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의 난, 바람이 마치.... 피부를 넘어 몸 안을 휘감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정말 요상했다. 땅 아래에 지렁이가 기어 다닌다. 하늘은 파랬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된다. 난 땅 아래를 훔쳐봤다. 하늘에 오르기도 했다. 내 몸은 바로 연병장에, 가만히 앉아 있다. 하지만 난 더할 나위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해방감이 황홀했다. 어쩌면, 몸은 감각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난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라니스타는 짜증까지 부렸다.

"계획이 어긋났다만."

날 제자로 삼은 라니스타는 자신의 정진을 위해 무공을 가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저 꼴을 보니,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이 방법은 나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이다."

천하제일인이 모르는 방법이라, 불안했지만 그의 판단을 믿을 수밖에 없다.

"자연지기는 타고난 선천지기나 수련과 정진으로 갈고닦는 후전지기와도 다르다."

또 시작되었다. 무림인만의, 무림인들만이 아는 개소리가.

"자연지기는 인간이 품을 수 없다. 자연의 기는 순리를 따르니, 단전에 쌓이지 못하고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사 놈들은 흩어지는 자연지기 속에서도 한 움큼, 작은 기를 몸에 씨앗처럼 박아넣는 법을 깨달았지. 정말 쓸모없고, 형편없다. 그리하여 신선이 되는 자들도 극히 드물며, 신선이란 놈들도 결국 내 앞에선 호랑 말코에 지나지 않았지. 하지만 단 하나, 기의 정순함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내가 정점에 올라 깨달았던 만류귀종을 놈들은 처음부터 행하고 있었으니."

라니스타는 어쩔 수 없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지난 몇 달 동안 천하제일이 알고 있는 강력한 내공심법을 배웠으나, 난 단전에 기가 쌓이기는커녕 '내공'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느꼈던 그 기묘한 감각이 자연지기라면, 이 방법은 통하고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네게 잠은 사치다."

"뭐요?"

"잘 시간에, 가르쳐 준 도사놈들의 수양 자세를 취해라. 게을리하면 소용이 없다. 도사놈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실시하거라. 이 세계의 기묘한 존재, '영수'라는 것들이 네 몸에 무슨 수작을 하는 모양이니 어디 한번, 결과를 지켜보자."

"만약 성공하면, 강해지는 거요?"

"신선의 몸이 무인의 무공을 다루는 것이다. 질알같은 일이지. 강해진다라,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될지, 자연지기를 내공으로 하여 끝도 없는 힘을 지닌 천하제일인이 될진 어떤 씨발놈이 알겠느냐?"

라니스타는 몹시,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오늘 훈련은 끝났다.

예상치 못한 수확… 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방에 돌아온 난 다시 한번 '도사의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방금처럼 몸을 휘감는 기이한 바람은 느낄 수 없었다.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라니스타 말처럼 쉽게 쌓이지 않는 힘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내일 새벽에 다시 해 봐야겠어.

이 방법이 통한 건 달비의 도움 덕이다.

"달비야."

자연지기라는 걸 전기라고 쳐 보자.

달비는 충전기다.

그것도 나 같은 고물폰도 충전시킬 수 있는 만능 단자를 가진 충전기.

배터리의 1%를 채우기도 힘들지만, 중요한 건 '채워진다는 것.'

난 나아가고 있다.

* * *

며칠 동안 알아낸 게 있었다.

라니스타 '형'이 알려 준 도사의 자세는 새벽녘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다. 자정이 지나고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녘, 그때 도사의 자세를 취하고 집중하자 바람이 몸을 간지럽히는 기이한 감각을 다시 경험했다. 더는 느껴지지 않을 때 눈을 뜨면 서너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낮에는 효과가 보이지 않았다. 난 두 시간을 자고, 네 시간을 명상에 빠졌다. 그러나 잠이 부족해서 피곤하진 않았다. 되레 명상이 끝나면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아졌다. 하지만 내공이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의외의 효과를 발견했다. 천안통을 사용하면 후유증이 생긴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듯한 두통과 더불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압박감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검은 늑대를 죽였을 때처럼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면 어느 정도 버틸 순 있으나 한계를 넘진 못한다. 선을 넘으면 죽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지기라는 걸 몸에 모으게 된 이후부터 난 아주 미세한 차이를 느꼈다. 천안통을 전생에서부터 몇십 년을 써 왔던 나였다. 단지 아주 미미한 고통의 완화, 조금 덜 심한 멀미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확실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명상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라니스타 형과 무공 수련을 했다. 그의 방식은 점점 더 규칙적으로 변했다. 무공의 시연이 끝나면, 난 그를 따라 하면서 연습한다. 형은 내 자세를 봐주고 고쳐 주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려 준다. 여기까진 평범한 수련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의 발현으로 넘어갈 때면 어김없이 나는 죽을 쒔고, 라니스타는 화를 내며 '실전' 연습으로 넘어갔다.

"…무기 들까?"

이번에도 난 내공을 발현하지 못했다. 점점 굳어지는 라니스타 놈의 얼굴에 난 알아서 행동했다. 라멜스타를 봉 형태로 바꾸고, 무기진열대에서 철봉을 한 개 들고 와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라니스타는 표정만 구긴 채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금방 알아차린 난 싸늘해지는 등골에 오한이 돋았다.

이번엔 어떤 지랄을 할지.

좋아, 바라던 바다.

부딪히며 연마한다.

이해도 못하는 무공을 수련할 바에야, 오히려 실전 연습이 더 낫다.

"그렇군."

그때 라니스타가 몸을 움직였다. 난 선빵필승의 각오로 라멜스타를 냅다 휘둘렀다.

퍽!

마치 바위를 내려친 듯 손바닥에 전해오는 딱딱하고 묵직한 감각.

내가 먼저 쳤으면서, 난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라니스타는 피하지 않았다. 첫 유효타이나 되레 난 내가 휘두른 봉이 그의 머리를 강타한 사실에 두려움이 치솟았다. 왜 피하지 않았지?

라니스타는 머리를 맞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틀에 갇혀 있었구나."

그때였다.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미친놈이 가장 무서울 때가 언제인가?

정색할 때도, 화낼 때도 아니다.

이유 없이 박장대소를 할 때다.

부딪히며 연마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자에게 뜯어먹히는 건 연마 따위가 아니다.

놈의 웃음소리가 사자의 포효로 느껴졌다.

"혀, 형님? 스승님?"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에 주춤주춤 뒷걸음질칠 때였다.

하하!

라니스타가 말했다.

"깨달았다."

"뭘… 말입니까?"

"네겐 무림의 방식이 되레 방해였구나. 이런 짓, 관둬야겠다."

라니스타의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명 처음엔 원해서 한 무공 수련은 아니다. 하지만 뒤늦게 전생의 비참함을 잊고 쓴 약을 삼키며 다시 한번 도약해 보려고 하는데, 이제 와서 그가 관둔다고? 나는 지금, 그의 가르침이 간절한 제자가 되어 라니스타 스승님에게 간청했다.

"스승님의 경지면 베풂으로 앎을 깨닫는다고 하셨잖습니까. 혹시 얻는 게 없어서 그렇습니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 되면 더...."

"쯧, 말을 끝까지 들어라."

라니스타 놈은 내 말을 끊었다.

그러곤 내 두 눈을 뻔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네 눈, 무공의 증진에는 오히려 방해된다."

천안통이? 그럴 리가.

이 개눈깔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무공의 자세만큼은 쉽게 터득한 것도 개눈깔의 힘이었다.

"무공은 천마의 신공조차 세 가지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큰 위력을 발휘한다. 심, 기, 체다. 강인한 육체라도 기가 없으면 한계를 못 넘고, 기가 있더라도 마음이 나약하면 광인이 되거나 주화입마에 걸려 둘 다 잃어버린다. 바다 같은 기氣가 있어도, 심心이 없으면 담지 못하고 체體가 약하면 바닷물을 바가지로 퍼내는 꼴이니, 반드시 심기체의 조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라니스타는 내 눈을 가리키며 뺨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네 눈깔은 천인륜의 법도마저 무참히 짓밟는다."

"알기 쉽게 설명 부탁합니다."

"심기체가 모두 한계를 넘어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였을 때 비로소 초인의 눈이 개안된다. 체의 진화이자 극의 발현이다. 하지만 넌 새알심보다 작은 마음과 기에, 닭모가지처럼 약한 몸으로, 이미 초인의 눈을 지니고 있으니 네 눈깔은 그 존재만으로도 부조화의 극치이자 혼돈의 산물인 것이다."

"음, 한마디로, 개쩐다는 거죠?"

라니스타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난 설명이 끝나기 전까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심지어 초인의 눈이라 명명한 것조차 과소過少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봉황의 시선으로 어떻게 굼벵이처럼 기는 것부터가 가능하겠느냐? 그렇다고 날갯짓을 가르치자니 조화가 어긋나 아무런 소용이 없고, 내공이 쌓일 때까지 담금질하자니 신선의 자연지기가 아니면 느끼지도 못하니."

내가 무공을 못 배우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둔재라서가 아니었네.

"너같이 무공과 거리가 먼 놈은 처음 보는구나. 네가 배울 수 있는 무공은, 대천림신서관의 모든 무공서를 읽어 본 내가 장담하건대, 단 하나도 없다. 억지로 배운다고 해도 몇 년이 지나도 허탕일 것이다."

"하지만...."

"말 끊는 버릇을 고쳐 주랴?"

라니스타가 으르렁거렸다.

아니, 난 끝난 줄 알았지.

"계속하세요, 교수님."

라니스타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허나 내가 누구더냐? 무신은 유일이 내게만 허락된 칭호다. 소림의 저명한 대승조차 포기했을 널 가르치기 위해, 난 부단히도 고심했지. 하지만 결국 나조차 '무공'이란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답은 쉬웠다. 무공을 배워 심기체를 단련하는 게 아니라, 심기체를 단련하며 무공을 배우는 것이다."

순간 말을 끊을 뻔했다.

'시발, 그게 그거 아닙니까?'

"수많은 강줄기는 결국 바다로 모이니, 무공의 길로 또한 마찬가지다. 무공의 형태에 연연하지 않고 무공을 배운다. 네 눈이 보는 '세계'를 심기체가 따라잡을 수만 있다면 천하신공이 부럽지 않을 것이며, 결국 그 길 또한 무인의 길로라는 것이다."

난 가만히 그의 입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아무래도 할 말은 다 끝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네게 수련은 필요 없다. 무기 다루는 것 정도야 금방 배우니 하루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럼...."

"실전이다."

"실전이요? 지금까지 해 오던 것도 실전 아닙니까?"

"아니, 그건 비무였다."

라니스타는 단호하게 말했다.

"됐다."

라니스타가 허락하자 난 눈을 떴다.

방금까지 새벽녘에 어두컴컴했는데, 벌써 날이 밝았네.

댕! 댕! 댕!

아침 종이 울렸다.

두 시간은 지나야 울릴, 아침 종이.

라니스타가 말했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반나절이 지났다."

"말도, 안 돼."

달비가 하품을 하며 내 가랑이 둥지에서 일어났다.

"이건 무슨 무공이야? 내공심법?"

"아니, 내공심법이 아니다. 그저...."

라니스타는 못마땅한 얼굴로 날 봤다.

"도사 놈들이 등선을 한답시고 설칠 때 하는 것이다."

"…도사 놈들?"

"자연지기를 모으는 수단에 지나지 않지. 단전에 쌓기도 힘들뿐더러 품으면 흩어지고 달아나는 자연의 기운을 말이다. 망할 놈, 신선이 되려고 하느냐?"

25

날 두들겨 패고, 어금니를 뽑고, 뼈를 분지른 게 모두 실전 감각을 키우는 대련이었을 뿐이라고.

"내가 말하는 실전은."

라니스타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먼 거리에 있던 무기진열대에서 저절로 검 한 자루가 날아서 놈의 손바닥에 척 달라붙었다.

"죽음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드는 극도의 실전. 죽음은 심기체를 단련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지."

미친놈이 가장 무서울 때엔, 미친놈처럼 웃을 때,

라니스타가 낄낄 웃기 시작했다.

"하, 좋군. 더는 정진할 길이 없다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는 좆됐음을 느꼈다.

"사마골의 우괴협이라는 자가 있다."

"무슨...."

"내가 검을 쥔 후 처음 죽인 놈이지."

그가 전생을 말하고 있어.

"삼류 무사에 지나지 않으나, 이곳에선 평기사 수준은 될 것이다."

라니스타가 검을 쥐며 말한다.

"놈을 흉내 내, 딱 그만큼의 힘만을 내겠다."

라니스타가 직접 극도의 실전이라 언급했다. 놈은 내 팔을 기꺼이 자를 놈이다. 목이라도, 어쩌면....

"이겨라. 사마골의 우괴협을 꺾으면, 넌 분명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점점 강해지는 '상대'와 싸워라. 내가 승리했던, 구백아홉 명의 무인들과 모두 싸워서 이긴다면 넌 내 바로 아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입술을 꾹 깨물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자신하십니까?"

"그럼."

"날 강하게 만들 거라고 약속해 주십시오."

"맹세하마, 제자야."

난 낄낄 웃었다.

"좋소, 덤비시오. 우괴협."

* * *

그가 먼저 움직였다. 땅을 박차고 달려오더니 가속을 줄이지 않고 검을 쥔 손을 뻗어 찌르기를 가했다. 라니스타 놈이 움직이면, 천안통으로도 보기 벅찼다. 수천 명의 군대가 돌진하는 것 같은 압박감을 받았었다. 허나, 지금은 황소 한 마리가 날뛰는 것 같았다.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난 몸을 돌려 옆으로 피했다. 그의 공격은 단조로웠다. '우괴협'이 누구인진 몰라도, 라니스타는 확실히 낮은 수준을 보여 줬다.

놈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에 쥔 검은 날 향해 겨누었다. 놈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황소처럼 돌격했다. 검을 쥔 손을 쭉 뻗고 달려들었는데, 성난 황소의 박치기와 같았다. 이번엔 난 피하지 않았다. 라니스타 놈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산봉우리라서 오를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면, 우괴협을 흉내 내는 지금의 라니스타는 바로 앞에 놓인 장애물이었다. 넘어야 하는 것이며,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움직임은 뻔히 보였다. 난 기회를 노려 봉을 휘둘렀다. 검날을 쳐 내고 그 틈을 타 일격을 먹여 줄 요량이었다.

챙!

검을 쳐 내는 것까진 성공했다. 뿔을 잃은 황소는 공격 수단을 잃었다. 난 그가 검을 고쳐잡기 전에 재빨리 봉을 휘둘러 라니스타의 머리통을 깨부수려고 했다. 허나, 놈의 뒷짐에 숨긴 왼손이 이미 날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 난 순간 번득이는 검날을 보았고, 다급히 허리를 숙여 피해 냈다.

간발의 차로 검날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라져, 나풀나풀 떨어진다.

언제 숨겼는지, 라니스타 놈의 왼손에는 검이 들려져 있었다.

난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라니스타를 번갈아 봤다.

"날 죽일 생각이야?"

"생과 사를 오고가는 실전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판단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잘리는 건 내 마빡이었어.

라니스타 놈은 다시 한번 황소의 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한 손이 아니라 양손을 모두 앞으로 뻗었다. 외뿔의 황소보다 더 사나운 기세가 느껴졌다. 검을 쳐 내는 건 지금 내 수준에서 알맞은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난 놈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그러니 필요한 건 투우사의 간결한 움직임이다. 난 봉 형태의 '라멜스타'를 다른 형태를 바꿨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개눈깔이 보는 세계에서 '무공의 형태'를 따라 하는 건 부적합하다. 지금까지타구봉법을 몇 달 동안 배웠으나, 난 지금 천안통이 보는 더 나은 방법을 택했다.

"호오."

라니스타는 흥미로워하며 말했다.

"검이라, 재밌구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의 검.

내게 있어 '봉'보다 파괴력, 길이, 숙련도, 모두가 부족한 무기.

하지만 단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

* * *

"시발, 존나 힘드네."

상스러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침대로 돌아오자마자 난 뻗고 말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긴장되어 경직된 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는 생겼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여태까지 한 라니스타 놈과의 수련 중에서, 오늘이 가장 힘겨운 고난이었다. 단순히 처맞는 것보다 배는 힘들다. 아직도 손가락의 감각이 저릿하다.

개간네?

"개 같아."

달비가 배 위로 깡충 올라오더니 지가 고양이도 아니면서 꾹꾹이질을 했다. 마사지라도 해 주는 거냐? 난 침대에 누워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라니스타 놈이 흉내 내던 '우괴협'을 이겼다.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건 빠른 움직임을 취할 수 있는 적당한 길이의 무기였다.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놈을 피할 수는 있으나 반격하기엔 부족했다. 황소의 뿔을 쳐 낼 힘이 없으니 난 천안통으로 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예상해서,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옆구리에 칼을 쑤셔 박을 생각이었다. 봉을 휘두르면 늦고, 찌르기엔 위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알맞은 길이의 검을 사용했다.

결과는 옳았다.

난 우괴협을 죽였다.

물론, 라니스타는 죽지 않았다.

옆구리에 분명 칼이 푹 들어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것도 목격했다. 하지만 라니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합 한 번에 지혈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었다.

'잘했다.'

난 설마 진짜 라니스타가 상처를 입을 줄 몰랐다. 당황해서 괜찮으냐고 했더니, 자신도 생과 사를 돌아보는 격렬한 실전을 다시 한번 겪고 싶다고 말했다. 미친놈은 대단했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내 옆구리에 저렇게 구멍이 뚫려 피가 철철 났다면 당장 우샤스 누나를 부르며 처절한 비극을 맞이했을 거라는 것이다.

죽음이 걸린 실전은, 비무에 비하여 상처가 적을지라도 피로도가 비교되지 않았다.

우괴협은 가장 약한 놈이자, 라니스타 놈이 일곱 살에 죽인 놈이라고 한다.

일곱 살, 난놈은 난놈이네.

삼 일에 한 번, 라니스타 놈과 실전을 벌인다.

그러니 난 적어도 삼 일에 한 번씩 죽이거나 살해당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같이 미적지근한 생각은 접어뒀다. 라니스타 놈이 날 죽이지 않더라도, 내가 그런 안일한 마음을 품으면 언제라도 이 치열한 실전을 관둘지도 모른다.

"걸시!"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뜨거운 목욕이 절실했다.

댕댕댕!

난 종을 세차게 울리며 걸시를 호출했다.

하지만 기다려도 걸시는 오지 않았다.

"또 뭐하는 거여."

남쪽 섬에서부터 가끔씩 걸시는 모습을 감추곤 했다.

작업 때 도망친 말년 병장처럼 웬만해선 그냥 넘어가 주나, 이번엔 걸시의 행방이 궁금했다. 몸의 흥분과 긴장이 쉽사리 풀리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소엔 귀찮아서 놔뒀지만, 이번엔 몸을 움직일 의욕이 생겼다.

나는 걸시를 찾았다.

걸시의 흔적을 '보고', 걸시가 어디로 갔는지 유추하면서.

"음."

내가 머무는 층에도 없다.

하녀들이 생활하는 곳에도 없다.

부엌도, 수리 중인 연회장도, 로비홀도.

하지만 난 알아차렸다.

개눈깔은 냄새를 잘 맡는다.

눈으로 보이는 흔적은 추적의 증거다.

괜히 전생에서 쥐뿔도 없는 평범한 몸으로 이곳저곳 불러 다녔던 게 아니다.

"이상한데."

걸시의 흔적은 있어선 안 되는 곳까지 연결되었다.

퀄츠 성엔 비밀이 많다. 몇백 년 된 고성에는 비밀을 감추고 싶은 귀족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아버지가 만든 외부통로 혹은 전대 주인인 솔가르 가문이 감추어 놓은 몇 개의 숨겨진 방. 걸시의 흔적이 이어진 곳은 그중 가장 음흉한 비밀이 숨겨진 퀄츠 성의 지하였다. 감옥, 지금은 없는 처형인의 숙소 또한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것 없는 것들을 처리하는 곳이 성의 지하다.

"경비병이 없어."

걸시의 흔적은 복잡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천안통을 발휘해야 간신히 쫓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알지 못하던 성의 지하 통로로 향했다. 그곳은 경비병조차 없었다.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린 난 한숨을 내쉬며 발을 내디뎠다. 뭔 놈의 인생에 이리 비밀이 많은지.

3층 정도 깊이의 많은 계단을 내려가자 짧은 복도가 나왔다.

컴컴하고 습기가 차서 축축했지만, 벽면에는 금방 불을 붙인 듯한 남포등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걸시의 흔적이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퀄츠 성의 경비병도 모르는 지하 통로에 내 시종이 있네.

복도의 끝은 막혀 있었다. 하지만 인상을 쓰며 집중하자 벽면에 기이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나타난다. 이 벽은, 아마도 비밀의 문이겠지.

아버지는 영수의 힘으로 문을 감췄다. 이건 아버지가 한 게 아니다. 마법인가? 멜리사의 장난?

쿠르릉!

흔적을 둘러보던 난 벽이 진동하기 시작하자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벽은 저절로 움직였다.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벽돌이 밀려나며 문을 만든다. 마법보다 기계공학에 가깝다. 문 너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문 너머로 보이는 저 방은 책들로 가득한 서고처럼 보였다.

쿠르릉-!

그 방에서 걸시가 나왔다. 걸시는 익숙한 듯 방에서 나와 문을 조작해서 다시 벽으로 감췄다. 녀석의 손에는 두 권의 책이 들려져 있었다.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낡은 책이다.

"걸시?"

난 걸시를 불렀다.

"으엥?"

걸시의 어깨가 순간 들썩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뒤돌아본다.

끼에에에에엑-!

살면서 그렇게 우렁차고 괴상한 비명을 처음 들어봤다. 걸시는 화들짝 놀라 뒤로 발라당 자빠지더니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표정이 가관이다. 눈코입이 서로 중앙에 만나기 직전까지 도달했다. 지하 복도가 걸시의 비명으로 메아리쳐서 귓구멍이 쓰라렸다.

"뭐하냐."

"도, 도련님? 으흑, 하아, 하아."

걸시는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걸시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가슴을 두들겼다. 그 와중에도 두 권의 책은 놓지 않았다. 마침내 진정된 걸시가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는 아직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난 넌지시 질문했다.

걸시가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마님의 서고에요."

"엄마의?"

"심부름을 받아서...."

걸시가 책을 들어 보였다.

난 가만히 걸시를 노려봤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걸시, 내게 뭐 숨기는 거 있지."

슬금 떠볼 생각이었다. 걸시는 내 말에 고뇌에 찬 표정을 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고 굳은 눈빛으로 날 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도련님. 사실 걸시는요...."

'비밀'에 대해선, 열 살 때 워낙 지랄 맞은 일을 겪은 탓인지 웬만해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쌍둥이들만 해도 벅차다. 난 걸시의 비밀을 담담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걸시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자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걸시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걸시는 사실...."

걸시가 비장하게 말했다.

"똑똑해요."

"어?"

"똑똑해요."

걸시는 큰 비밀을 말했다는 듯 홀가분해 보였다.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