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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UH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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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1

레인버그 공작가에 큰 축복이 찾아왔다.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 공작과 데메니아 왕녀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20년 만에 잉태의 축복이 내린 것이다.

레인버그 공작이 다스리는 퀄츠 영지에선 266일간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다. 제국의 푸른 기둥, 레인버그 공작의 후계자가 탄생한다는 소식은 제국을 넘어 전 대륙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덕망 높은 제국 귀족이자 대륙 최고의 영수술사 레인버그 공작을 축하하기 위하여 많은 자가 퀄츠 성을 방문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천하의 레인버그 공작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유독 부인의 부풀은 배가 다른 임산부와 비교하여 두 배는 컸기에 불상사를 염려하여 영수의 가호와 더불어 뛰어난 신의를 초대하고, 신부의 축복 아래 출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애타는 공작의 마음을 비웃듯, 출산일이 지나도 축복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266일이 지나고, 300일이 넘어갈 때였다.

점점 레인버그가에 불길함이 감돌기 시작할 때.

마침내 다행스럽게도 공작부인의 산통이 시작되었다.

레인버그 공작은 체면을 세우라는 가신들의 요청을 무시하고 산모의 곁에서 출산을 지켜보며 고통을 나누고자 했다.

아아악-!

제국의 왕녀이자 꺾이지 않는 꽃이란 별명을 지닌 데메니아. 굳건하고 강인했던 그녀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른다. 삼십 년을 알았다. 항상 당당하던 그녀였다. 레인버그 공작은 처음 보는 부인의 약한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아요, 레인버그! 우리의 아이가 얼마나 말썽꾸러기가 될런지 벌써 하아,하아. 어미를 괴롭히… 아악!"

"부인, 다름 아닌 우리의 아이잖소. 제국 제일의 영수술사와 현자의 아이이니 틀림없이 제국의 별이 될 것이오. 아아, 내가 당신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어머니가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난...."

"그런 생각 하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레인버그 공작이 아직 평민 출신의 영수술사에 지나지 않았고, 데메니아 부인이 제국의 왕녀이자 여왕을 죽이고 태어난 자식이라 손가락질당할 때부터 둘은 사랑을 나누던 사이였다. 수십 년간 둘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

레인버그 공작은 불안했다.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불행의 아이'라는 꼬리표가 그녀를 괴롭히는 걸 알기에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않았었다. 불행은 이어진다는 건가?

'저승에서 듣고 계신다면 부디 용서해 주시오. 그녀는 아이를 가질 자격이 있소!'

공작은 부인의 손을 꽉 붙들고 초월의 짐승, 영수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여왕이 제 아이를 증오하고 있다면 부디 노여움을 풀기 바랐다. 만약 그녀를 죽음으로 데리고 간다면, 저승까지 쫓아가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까지 했다.

산통은 하루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공작부인은 수차례 정신을 잃었으나 공작의 정성에 눈을 떴다. 노련한 산파들이 산모와 아이의 죽음을 예상할 때, 공작은 부인을 살리기 위해 제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하루 사이에 초월의 짐승을 다루는 제국 제일의 영수술사인 그마저 며칠을 금식한 수도승처럼 메말라 갔다.

"레인버그...."

"데메니아."

"아이가…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요."

둘의 정성에 하늘이 감복했을까,

추운 바람이 불던 을씨년스러운 새벽녘에, 기적이 일어났다.

"산파!"

두 명의 산파가 아이를 받기 위해 달려왔고, 문밖에서 기다리던 사제는 기도문을 읊고 신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약을 꺼내기 시작했다.

잠잠했던 산모의 배가 아이의 몸부림으로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부인은 가진 힘을 모두 쏟아내고, 레인버그 공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절실하게 희망을 바랐다.

마침내 산파의 손에 갓난아이가 들려졌다.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남아입니다."

응애!

"흐윽."

산모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원망마저 느끼던 공작은 우렁차게 우는 아이의 울음에 눈물을 흘렸다. 산파는 깨끗한 담요에 감싼 아이를 조심스레 부인의 품으로 건넸다.

"내 아이. 사랑스러운 아가야."

"어미를 그리 괴롭히더니, 이 녀석. 내가 본 아이 중에 가장 크게 태어났어. 대장부가 되려고 하나 보오."

데메니아가 자애로운 미소로 아이를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굳는다.

산파 또한 이변을 눈치채고 외쳤다.

"아직 잉태의 축복이 가시지 않으셨나이다."

유독 컸던 배는 쌍둥이의 징조였나.

레인버그 공작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으나 둘째의 출산은 순조로웠다.

"오오, 축하드립니다. 건강히 태어난 여아이옵니다."

공작은 이젠 진심으로 기뻐서 웃었다. 그리 속을 애태우더니, 복이 겹겹이 들어오는구나! 하지만 부인의 굳어진 표정이 여전하며 산파가 바삐 움직이자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아아악-!

그때 귀를 찢는 듯한 산모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산파가 허겁지겁 움직였다.

"세,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여아이옵니다."

기뻤다. 분명 기쁘고, 기특하고, 아름답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젠 슬슬 다른 감정 또한 느껴졌다.

의아함.

세 쌍둥이라고?

그때, 공작의 얼을 빠트리는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응애! 응애!

"네 번째 아이는 남아입니다."

"산파, 네 쌍둥이를 본 적이 있나?"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십 년 동안 산파를 해 왔으나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레인버그 공작가에 네 쌍둥이가 태어났다.

* * *

제국의 긴 역사를 통틀어 봐도 전무후무한 네 쌍둥이의 출산이 알려지자 교황청에서 검은 신부를 레인버그가에 파견했다. '4'는 제국에서 가장 불길한 수를 상징했기에 네 쌍둥이 중 악마의 자식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레인버그 공작 부부는 정중히 교황청의 조사를 거절했으나 교황청은 재차 허락을 요구했고, 아무리 제국의 기둥 레인버그 공작가라고 해도 왕권을 앞서는 교황청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독단적인 행동을 제한다는 조건하에 네 쌍둥이는 검은 신부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난 아기들은 매일 아침 성수로 목욕하고, 은십자가를 곁에 두고 지냈으며, 하루 한 시간의 면회를 제외하곤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공작부인마저 마음대로 아이를 품지 못했다.

네 쌍둥이는 레인버그 공작이 수십 년 만에 얻은 축복의 아이들이다. 귀중한 아이들이 악마의 아이일지 모른다며 의심받는 상황에 레인버그가의 가신들과 공작 본인의 참을성이 점점 한계에 이를 때쯤이었다.

다행히 검은 신부의 감시가 끝났고, 악마의 증거인 붉은 피부와 검은 뿔은 아이들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저녁 만찬에서 신부의 증언으로 네 아이 모두 특이한 버릇을 지녔음을 알게 되었다.

검은 신부가 레인버그 공작에게 말하길.

첫째 아이는 이제 뜨기 시작한 눈이 붉게 충혈될 만큼 자신을 노려봤고.

둘째 아이는 마치 말을 하는 듯이 쉴새 없이 멈추지 않고 옹알이를 했으며.

셋째 아이는 성수로 목욕하거나 차가운 십자가를 몸에 대어도 절대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참 대단하군요!"

신부는 자신을 푸대접한 공작에게 불편함을 선물하려고 한 발언이었으나, 공작 부부는 되레 비범한 아이들이라며 기뻐했다.

"막내 아이는 별다른 버릇이 없었습니까?"

심지어 막내 아이도 특별하길 바라며 신부에게 되물었다.

검은 신부는 해맑은 공작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막내 도련님은 평범한 아이와 같았습니다."

신부는 문득 생각이 나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이상한 버릇이 있긴 있었지. 젖병을 물 때도, 기저귀를 갈 때도 항상 중지를 치켜든 채 날 쳐다보던데. 묘하게 기분 나쁘더란 말이지.'

공작가의 막내 도련님의 버릇이 기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 *

우리 네 쌍둥이는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했었다. 물론 네 쌍둥이의 존재 자체가 특별하긴 했지만 우리가 무언가 비범한 힘을 지녔다든가, 특출난 재능을 가진 건 아니었다. 네 쌍둥이의 소문도 시간이 지날수록 대수롭지 않아졌다. 악마의 자식이 숨었느니 마니 하는 악명은 사라졌고, 그냥 '레인버그 공작가엔 네 쌍둥이의 후계자가 있다' 정도로 평범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전까진 우리 모두 특별하더라도 상식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동대륙에서 가장 융성한 제국 쿤칸의 공작 가문이자 '영수'라는 신비한 힘을 다루는 영수술사 가문, 레인버그 공작가의 막내아들이란 타이틀은 특별하긴 해도 상식적이다.

하지만, 사실 막내아들이 전생에 '지구'라는 행성의 군인이자 기이한 힘을 지닌 능력자였으며, 전생의 기억을 모두 떠올렸다는 건 특별하면서도 상식의 선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다.

이제부터 선을 넘은 비상식의 영역이다.

전생을 기억하는 한 사람만으로도 벅찬데, 사실 쌍둥이 모두 전생을 기억하고, 심지어 그 힘을 휘두르기까지 하는 괴물들이라면, 이제 되레 '네 쌍둥이'와 '레인버그 공작가'의 존재가 평범해진다.

"작은 도련님! 큰 도련님께서 찾으시는...."

"나 없다고 하랬잖아!"

"네에? 여기 계시잖아요?"

"멍청한 하녀!"

레인버그 공작가의 네 쌍둥이는 사실 전생을 기억한다.

* * *

레인버그 공작가는 다른 귀족 가문들과 달리 유서가 깊지 않다. 초대 가주이자 시조가 내 아버지, 전쟁영웅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 공작이었으니까.

가문의 가신들도 모두 아버지가 직접 임명한 대전쟁의 수훈자들이었으며, 기사들 또한 대부분 평민 출신이라 공작령을 지닌 공작 작위의 대귀족치고 제국의 정치와 가장 관련이 없는 가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천시받는 가문은 아니다. 거대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국을 구한 대영웅이자 지금도 그 힘을 과시하고 있는 영수술사 레인버그 공작의 존재만으로 감히 무시하는 자들은 없었다.

뭐, 말이 공작이지 사실상 변경백과 다름없긴 하지. 공작령인 퀄츠 영지는 아인俄人들의 땅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제국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덕분에 가풍이 자유롭고 너른 편이라 난 나름 열 살 때까진 행복하게 지냈다. 날 포함하여 형제자매들도 그땐 제정신이었고,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잘난 가문의 막내아들, 아마 후계자 다툼도 없을 자유롭고 여유로운 가풍, 귀찮은 일 없이 공작령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이변은 '아르테미스의 의식'을 앞두고 발생했다.

'영수'라는 초월적인 존재, 특별한 힘을 지닌 짐승의 힘을 다루는 레인버그 공작은 사냥의 신이자 영수의 신인 아르테미스를 달래는 감사제를 매년 개최했다. 어린 난 감사제에 참가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열 살이 되어 아르테미스의 의식에 참가할 자격을 얻자 신나서 사냥을 연습했다.

한참 활을 쏘는 법, 사냥감을 쫓는 방법, 흔적을 찾는 법 등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난 별안간 깨달았다.

전생에 내가 무엇이었는지를.

정말 뜬금없어서 전생을 떠올렸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아, 기억났다. 29살의 김창식."

* * *

징조가 없었던 건 아니다.

말을 배우고 어느 정도 대화를 구사할 수 있을 때부터 난 문득 쿤칸제국에는 없는 '단어'가 생각나곤 했다.

쿤칸어로는 발음조차 어려운 '라면', '찌개' 같은 단어가 떠올랐고, 놀랍게도 그게 음식이라는 것도 알았다.

더 어렸을 때는 내가 습관적으로 사람만 보면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세웠다고 들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전생을 떠올린 건 열 살, 사냥제를 앞두고였다.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하던 우리가 갑자기 변한 것도 이때였고, 내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도 이때였다. 아마 다른 쌍둥이들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전생을 떠올렸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내가 도출한 결과는 간단했다.

숨기는 것.

전생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것도 아주 기깔나는 귀족의 삶을.

되려 전생에서 겪었던 역겹고 더러운 일들을 떠올리자 현재의 삶이 더 소중히 느껴졌다.

별문제는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

젠장, 이럴 수가 있나.

* * *

난 비밀을 숨긴 채 감사제에 참가했다.

아무리 공작가의 자식들이라고 해도 아직 열 살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무리한 사냥은 하지 않았고,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멀리서 활이나 찍찍 쏘다가 우연히 잡은 사냥감으로 기뻐하는 게 다였다.

"첫째 공자님이 사라졌습니다!"

"뭐? 사라져? 호위 기사들은 뭐하고?"

토끼를 잡고 아버지에게 쫄래쫄래 다가가 자랑을 하던 순간에, 갑자기 첫째 형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저렇게 말했다. 이때부터 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서서히 느꼈다.

공작가의 장남이 가문의 축제 기간에 사라졌다. 큰 소동이 벌어지자 사냥제는 중단되고, 기사들은 물론 영수술사인 아버지도 형을 찾아 나섰다. 뜻하지 않게 가문의 수색이 시작되었으나 그 규모는 과히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빈틈없는 수색에도 연약한 열 살의 남자아이는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사태는 심각해져 축제를 틈탄 아인족의 납치설까지 제기될 때였다.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홀로 사냥에 나섰다고 하셨는데 그게… 흰 점박이 매머드를 잡아 오셨습니다."

"뭐? 매머드? 매머드으?"

미아가 되었던 형이 몇 시간 후에 제 발로 돌아오더니, 흰점박이 매머드를 잡아 왔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아버지는 곧장 형을 만나러 갔고, 나도 급히 뒤따라갔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사냥터의 천막에서 또래답지 않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우릴 기다리고 있던 형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난다. 갑자기 말투도 바뀌었었지. 몇 시간 동안 가문의 수색을 피해서 사냥을 하고 온 열 살배기 남자아이는,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으나 작은 상처조차 없었다. 형이 증거로 내민 매머드의 상아의 크기는 내 키보다 더 컸다.

"다, 다친 곳은 없, 구나. 하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겠느냐?"

"별일 아닙니다. 사슴을 쫓던 중 거슬리는 놈이 있어서 잡아 왔을 뿐입니다."

"매머드가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냐?"

감사제가 열리는 동안 공작령의 사냥터는 완전히 통제된다.

절대 아인족의 땅에 서식하는 매머드같이 흉포한 짐승은 들어오지 못한다.

첫째 공자의 말에 사냥터 통제를 담당한 기사들은 질색하며 변명에 나섰다.

"사냥터는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북쪽의 땅에 사는 매머드가 사냥터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영부영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조사를 지시해야 제대로...."

"아닙니다, 아버지. 정말 사냥터엔 매머드가 없었습니다."

형은 씩 미소 지으며(전에 볼 수 없던 여유로운 미소로) 말했다.

"사냥터에는요."

열 살의 아이가 홀로 오러를 익힌 기사들도 버거워하는 매머드를 잡아 왔다.

당연히 아버지를 비롯하여 모두가 기절초풍 놀랐다. 상식을 완벽히 뭉개 버린 어나더 레벨의 비상식적인 일이다. 만약 형이 제국의 괴물, 레인버그 공작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더 심각한 일이 발생했겠지. 교황청에서 검은 신부들이 나와 형을 해부한다든가, 그런 일들이.

모두 심각하게 첫째 공자의 말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고민할 때였다.

이젠 둘째 영애의 호위 기사들이 몰려와 정신을 못 차리는 아버지에게 고했다.

"둘째 영애께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 새끼들이. 외부 공작이 의심된다고 그리 일렀건만! 네놈들이 그러고도 공작가의 기사들이더냐?"

"변명하옵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말이 돼? 열 살 여자아이가 수십 명의 기사의 시선을 피해 사라졌다고?"

첫째의 매머드 사냥은 전설의 시작에 불과했다.

연달아 둘째 누나도 사라지더니, 이젠 한 시간 만에 '네론강 악어'라는 거대 악어를 잡아 왔다. 놀라운 건 사냥터에서 말을 타고 가도 몇 시간은 걸리는 네론강에서만 서식하는 포식자 악어를, 어떻게 했는지 열 살의 여자아이가 잡아 온 것이다. 게다가 매머드의 상아만 들고 온 형과 다르게 그녀는 거대 악어를 통째로 잡아 왔다. 네론강에서 휴식터까지 거대 악어를 대체 어떻게 옮겼는지 아직도 가문의 미스터리로 화자되곤 했다.

아버지는 악어를 잡아 온 둘째 누나에게 어떻게 잡아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듣기에도 무서웠을 것이다. 대신 왜 먼 곳의 거대 악어를 잡아 왔느냐고 물었고, 누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저놈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그날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비상식을 연달아 선보인 공작가의 자식들과 믿지 못할 상황에 온화한 인품의 아버지가 버럭 성질까지 내던 그날, 요절복통 대환장 축제의 피날레는 셋째 누나가 장식했다.

첫째와 둘째와 달리, 셋째 누나는 갑자기 사라지거나 거대한 짐승을 잡아 오진 않았다. 하지만 레인버그 가문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산책하듯 사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냥감을 구해 왔는데 문제는....

"으아, 셋째 영애께서 지금 사냥터의 짐승들을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

"데리고 와? 짐승들을?"

수십 마리의 토끼, 사슴 그리고 멧돼지들이 그녀를 뒤따라왔다는 것이다.

멀쩡히 살아서, 마치 셋째 누나를 주인처럼 여기듯 자연스레.

짐승들에게 둘러싸인 채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신성하기까지 했다.

"다, 달의 가호를 받은 아이들이다! 오오, 아르테미스시여!"

미신을 신뢰하던 늙은 하녀 장의 외침.

'달의 가호를 받은 네 쌍둥이(난 꼽사리에 불과했지만.)'의 전설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개뿔, 정체를 알았다면 그딴 소리는 못 했을 거다.

세계를 멸망시키려던 악인들이 달의 가호는 무슨.

2

아침 일과는 아로니아 쉐이크를 마시면서 시작된다. 매일 아침마다 하녀가 밭에서 갓 따온 신선한 아로니아를 꿀과 요거트와 같이 같아서 대령하면 난 쉐이크를 마시며 창밖을 여유롭게 바라본다.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밤새 꿨던 악몽이 금세 진정이 된다. 이곳은 퀄츠 영지의 남쪽 섬에 있는 요양 별장. 지랄맞은 쌍둥이가 없는 나만의 천국이다.

쉐이크를 다 마시면 욕실로 향한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욕조에는 꽃잎들이 물에 둥둥 떠다닌다. 피부에 좋은 약초들이다. 난 가운을 벗고 미리 하녀가 데워 놓은 목욕물에 발을 담그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가운을 걸치고 하녀를 부른다.

"걸시! 목욕물이 뜨겁잖아!"

내 고함에 재빨리 하녀가 뛰어온다. 그녀의 이름은 걸시, 어릴 때부터 지내 온 내 시동이자 전담 하녀다. 걸시가 목욕물에 손가락을 담가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붉게 익은 손가락을 털어 낸다.

"어? 정말이네."

걸시는 착하다.

"드디어 네가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 내가 삶은 닭처럼 되길 원하니?"

"어머머, 아니에요. 전 아직 도련님이 좋은걸요."

"싫으면, 진짜 죽이게?"

하지만 멍청하고 눈치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쫓겨났어야 했지만, 난 그녀를 내 전담 하녀로 거두었다. 내겐 똑똑하고 말 많은 하녀보다 멍청하고 눈치 없는 하녀가 필요했다.

"아! 다친 덴 없으세요?"

걸시는 아직도 뜨거운지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일찍도 물어보네. 다리가 익어서 육수가 나올 지경이다."

농담도 이해 못 하는 걸시가 내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려고 하자 물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설명까지 해야 했다. 그러자 걸시는 감탄하며 말했다. 만약 내가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걸시는 곤장을 수백 대는 맞았을 것이다.

"대단하셔! 도련님은 어떻게 매번 손가락을 적시지도 않고 으뚜추워, 따뜻해를 딱딱 맞추는 거예요?"

온도라는 단어도 몰라서 으뜨추워, 따뜻해라고 말하는 얘를 혼내 봤자 뭘 할까.

"다 보이거든."

"네?"

"뭐하니. 찬물 안 가져오고."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밥상이 차려져 있다. 서니 사이드 업으로 익힌 달걀과 모서리를 잘라 구운 식빵, 달지 않은 사과잼과 깊은 풍미의 아라키아산 원두커피. 내 취향을 고려한 완벽한 아침 식사. 전생에서 누려 보지 못한 사치다. 난 이 삶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똑똑!

느긋하게 식사를 하던 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돈 집사의 목소리다. 그는 요양 별장을 관리하는 자인데 특별한 용건이 아니면 날 찾아오지 않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맛이 확 달아났다. 그가 싫은 게 아니라, 그가 전해주는 소식이 싫은 것이다. 난 포크를 내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단순한 아침 문안이길 바랐다.

"도련님, 본가에서 온 서신입니다."

대답하지 않자 돈 집사가 다시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젠장, 난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 줬다. 늙은 집사의 손에는 붉은색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퀄츠 나무로 만든 종이로 레인버그 가문을 상징하는 종이기도 했다. 돈 집사는 우중충한 얼굴의 늙은이다.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내게 서신을 주고 돌아서는 노인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았다. 집사의 표정만으로 서신의 내용이 뭔지 알 것 같다.

받은 서신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그릇을 정리하러 온 걸시가 친절히 편지를 주워서 내게 건넸다.

"뭐."

"안 읽으셨어요!"

"알아."

"읽어 드릴까요?"

"글자도 모르잖아."

"폴… 스… 타 퀄츠 레인… 버… 그는 당장 가문의 의… 무?"

"알았어. 글자 읽을 줄 아네. 그래도 멋대로 읽지 마."

역시 서신의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벌써 요양 별장에서 지낸 지도 4년이 다 되어 간다. 몇 년 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젠 한계인지 최근에 닦달이 심해졌다.

"돌아오라는 서신이 서고에 잔뜩 쌓였어요! 언제 돌아가실 거예요?"

"가기 싫어."

걸시는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했다.

"이틀 전에는 어르신께서 도련님을 데리러 마차도 보내셨잖아요. 어르신께서 노하실 거예요!"

"난 아직 아프단 말이야."

"네에? 멀쩡하시잖아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파."

눈치 없는 걸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신을 내게 건넸다.

"이번엔 마님께서 보내신 편지예요. 읽어 보시겠어요?"

"엄마가?"

이번엔 나도 머뭇거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전생의 기억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엄마는 엄마다. 생각하면 애틋해지는 가족이다. 나도 엄마는 보고 싶다. 그러나 그 빌어먹을 쌍둥이들이 있는 본가에는.

"그래도 안 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 * *

기어코 사달이 났다. 서신을 받은 지 며칠 후 별장에 아버지가 직접 찾아왔다. 오직 날 본가로 데리고 갈 목적으로 수행원도 대동하지 않았다.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 공작, 제국 최강의 영수술사이자 네 개의 기둥 중 한 명으로, 인외마경 아인들조차 벌벌 떤다는 대륙 최강자 중 한 명. 그런 그가 손에는 무언가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나이는 중년을 넘어 노년기에 들어섰지만 짙은 갈색머리와 주름 하나 없는 그의 모습은 삼십 대처럼 보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눈과 마주한 순간,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몸은 괜찮으냐."

영수의 힘을 다루는 아버지에게 아픈 척은 소용이 없다. 이미 그는 내가 요양 별장으로 갈 때부터 꾀병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들고 온 온갖 귀중한 약재들을 보며 약간 마음이 시큰해졌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이전에 그는 제국의 공작이다. 응접실이 아닌 내 방으로 직접 찾아온 것도 날 배려한 것이다.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에 완강하게 거절하려던 난 살짝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유를 말해다오."

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강직한 시선으로 날 보며 얘기했다.

"형제자매 때문이더냐?"

정곡을 찔렀다. 대답하지 않자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한숨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유를 '열등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하찮은 이유였다면, 난 이곳까지 도망쳐 오지 않았다.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의 자식이 모두 지구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악인들이래요! 그리고 난 지구의 사람이고요. 어떻게 말하는가?

어색한 침묵이 계속될 때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자상한 버릇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내 손을 잡고는 영수의 힘을 자주 불어넣어 주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날 격려하듯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돈다.

"벌써 4년이나 지났다. 항간에는 내가 널 내쳤다는 소문까지 돌더구나."

아버지의 눈빛과 마주친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아들아, 넌 긴 시간을 홀로 보냈지. 지금까지 널 부르지 않은 건 무관심이 아니었음을 알아다오. 그저 너 스스로 귀족의 의무와 명예를 깨달았으면 했다."

열 살에 전생을 깨달아도, 그 이전의 삶이 도망간 건 아니었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아.

아버지는 내 손을 꼬옥 붙잡고 얘기를 이어 갔다.

"이 아비는 평민이었다. 그러나 수천 명이 하룻밤 사이 허무하게 죽어 가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사랑을 쟁취하여 기어코 천성을 극복하고 공작의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의무에 대해서 더 절실히 깨닫고 있지. 우린 위에 서는 자들이 아니다. 짊어진 무게를 생각하거라. 레인버그가 무너지면 아인들의 침략을 누가 막아 내겠느냐? 다시금 수천 목숨이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명예만을 아는 귀족은 생명의 귀중함을 알지 못한다. 벌써 열넷의 나이다. 이제 곧 성인식을 치러야 할 터인데 지금의 넌...."

노블레스 오블리주. 준비해 온 대사인가? 날 설득시키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은 아버지였다. 혜택엔 의무가 따른다, 좋은 말이다. 현대인인 내가 모를 리 없지. 하지만 세상엔 막강한 힘을 지녔으면서 의무는커녕 제 욕심을 위해 한 국가를 무너트리는 악마들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세 명이고, 그 악마들은 내 쌍둥이기도 했다.

"아버지, 전...."

난 내가 이곳으로 도망치게 된 4년 전의 사건들을 떠올렸다.

* * *

감사제 이후로 우리는 쌍둥이로 태어났을 때처럼 다시금 모략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열 살의 어린아이다. 검술과 마법의 천재아도 아니다. 이제 사냥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 노련한 사냥꾼 여럿이 붙어도 사냥하기 힘들다는 매머드와 네론강 악어를 잡았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사건은 꽤 파문을 낳았던 걸로 기억한다.

레인버그 가문은 소문을 숨기려 급급했으나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 제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동안 레인버그가에 일어난 감사제에 떠들어 댔고, 기어코 달의 아이들이라는 명칭까지 붙였지.

시간이 지나 소문은 잠잠해졌으나 그들은 결코 자신의 비범함을 숨기지 않았다.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자는 첫째 공자였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검술 수업에서 사건은 발생했다. 레인버그가는 검으로 유명한 가문이 아니었고, 검술은 귀족의 교양 과목으로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열 살의 난 이제 목검을 휘두르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으며, 첫째도 나와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르는 것도 벅차하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감사제 이후 첫 검술 수업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을 가르치던 교관을 두들겨 팼다.

검을 가르치는 교관이 엉성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연병장에서 훈련하던 레인버그가의 일등 기사단인 청늑대 기사단은 어린아이가 휘두른 검에 교관이 비명을 내지르는 걸 목격했다. 이때 그는 또라이 짓을 시작했다.

"어, 저기...."

난 멍청하게 서서 상식 개변의 황당한 상황을 지켜봤다. 육중한 덩치의 기사들을 반타작이나 될 법한 작은 어린아이가 두들겨 팼다. 기사들은 어린아이를 제압하지 못했다. 오히려 검을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맞고 기절까지 했다.

기사들은 추후에 "첫째 공자라서 반격할 수 없었다."라는 변명을 하지만 직접 그날을 겪은 난 알고 있다. 나중에는 청늑대 기사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덤비기 시작한 것이다.

레인버그가 아무리 검의 가문이 아니라고 해도 기사들이 만만한 검사라는 건 아니다. 중년의 기사들은 수십 년 전 발생한 최악의 대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전쟁영웅이었고, 그들의 실전적인 검술은 다듬어지고 계승되어 다른 검술 명가의 기사단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강한 기사들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목검이나 휘두르던 첫째 공자가 그들을 압도했다.

평범한 열 살의 아이가 휘두른 목검은 사과라도 쪼갤 수 있을까?

열 살의 그가 휘두른 목검은 훈련받은 기사의 머리를 쪼갰다.

그의 움직임을 난 볼 수가 없었다. 기사들을 유린하는 발재간은 사자보다 빨랐다.

기어코 연병장에 있던 기사들을 모두 기절시킨 아이는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이 세계의 검사들은 몹시 약하군."

그 순간, 감사제 사건 때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의심은 이제 확신하였다.

시발,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고? 저렇게 대놓고 자기 존재를 피력한다고?

그도 나처럼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

"너."

순식간에 레인버그가의 자랑, 청늑대 기사단을 궤멸시킨 어린아이는 갑자기 날 보며 눈을 번득이더니 검을 쥐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내 생존의 역사는.

* * *

이날, 난 갈비뼈가 부러졌고, 양쪽 다리에 금이 갔으며, 어금니도 한 개 잃어버렸다. 어린 몸에 흉악한 상처가 새겨졌으나 두 가지 큰 소득은 있었다.

첫째 형도 나처럼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전생은 빌어먹을 '무림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득은 내가 그를 무림인이라고 확신하게 한, 전생의 내 힘이 각성했다는 것이다.

"천안통이 열렸어."

전생의 능력이 현생으로 답습되었다. 지구를 침략한 이계인과 유일하게 맞설 수 있다고 평가받던 능력 중 하나, 신의 눈이라고 불리던 천안통天眼通이.

3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 왔다. 난 혀로 잇몸을 훑었다. 어금니가 없는 잇몸의 빈자리가 공허하다. 빠진 어금니는 쌍둥이들의 지랄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된 귀중한 상처다. 내가 갑자기 몸을 떨자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날 꼭 데리고 가려고 하는 모양이니, 난 진심을 다해 설득하고자 했다.

"제가 없어도 레인버그 공작가는 찬란… 하게 빛납니다, 아버지. 전 그냥 아픈 손가락으로 남겠습니다. 어차피 형제자매의 후광에 묻힐 바에야 조용히 없는 듯 지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네 형제자매는 그저 일찍 빛났을 뿐임을 왜 모르느냐. 아들아, 너 또한 빛나지 않으리라고 어찌 확신하느냐? 넌 아직 어리다. 이런 곳에서 늙은이처럼 평안을 추구하기엔 너무 어려! 섬으로 내려올 때 네 나이가 열 살이었다. 어찌 이리 어리석으냐, 아들아. 이 아비는 도둑 마을에서 태어나 얼마나 많은...."

아버지의 말을 끊는 건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날 설득하기 위해 보낸 서신마다 빠짐없이 서술했던 '흙수저 성공 스토리'는 이제 지겹다. 난 재빨리 선수를 쳤다.

"비교 대상이 격이 다르잖습니까. 듣기로 라니스타 형의 기사단이 대륙 제일기사단에 뽑혔다죠? 14살의, 가장 어린 기사단장이 훈련시킨 기사들이요. 멜리사 누나는 마법의 귀재라 불리며 입학도 전에 아카데미에서 월반을 제의했다고 들었습니다. 칭찬에 인색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누나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찬양한다던데, 14살의 누나를요. 우샤스 누나는… 말이 더 필요 없겠죠. 아버지."

그래, 그들의 소문은 별장까지 들려왔다.

파격적이다 못해 전설을 써 내려가는 쌍둥이들, 열 살 공자의 기사단 궤멸 사건은 감사제 이후 발생한 괴상하고도 파격적인 변화에 첫 단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난 4년 전에 겪은 다른 사건들을 떠올렸다. 쌍둥이들의 정체가 밝혀지던 그 무시무시한 상황을 어찌 잊을까.

* * *

천안통을 개안한 건 굉장한 일이었다. 나의 생존 가능성을 배로 높여주는 대단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도 빌어먹을 수뇌부의 무리한 작전에 휩쓸리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인간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일렀다. 더 큰 문제는, 내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로 전생의 능력을 각성했다는 것이다. 첫째 형이 기사들을 때려눕히던 강렬한 모습은 굳이 유추하지 않아도 그가 '무공'을 사용하는 걸 알게 했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 누나는, 아주 은밀하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내 상처가 완치될 때쯤, 저녁 만찬에서 있었던 일이다. 둘째 누나는 갑자기 아버지에게 성의 정원을 자신의 완전한 사유지로 바꿔 달라며 요청했다. 거절할 것 없던 아버지가 승낙했고, 며칠 뒤 퀄츠 성에는 비명이 끊이지 않는 공포의 정원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연히 헛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정원을 소유한 뒤로 밤마다 성에선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시녀들은 눈이 여섯 개 달린 개가 복도를 뛰어다닌다며 벌벌 떨었고, 정원사는 갑자기 나무가 고함을 지르더니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했다며 일을 관두기도 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누나에게 이유를 묻자, 누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마법인데요."

이날, 레인버그 공작가의 둘째 영애가 마법사라는 게 알려졌다.

* * *

언급하는 것조차 역겹다.

사악한, 불길한, 역겨운, 끔찍한, 혐오스러운.

아마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붙여도 어울릴 만한 자였다.

레인버그가의 셋째 영애, 우샤스 퀄츠 레인버그는 다른 쌍둥이들과 달리 힘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명한 건 매한가지였는데, 열 살의 어린 나이에 '꺾이지 않는 꽃'이라 불리던 데미니아 왕녀의 뒤를 이어 대륙 제일 절세 미녀로 슬금슬금 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감사제 이전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평범했던 외모가 하루아침에 절세 미녀라니.

그러나 나는 그녀의 본모습을 안다.

천안통이 개안되면서부터 난 가끔 셋째 누나의 본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땐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며 끔찍한 악몽을 꿨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얼굴을 마주 보기까지 몇 달이나 걸렸다. 다른 이의 눈엔 절세 미녀라도, 내 눈엔 가장 역겹고 사악하고 꺼림칙한 것들이 뭉쳐 탄생한 괴물로 보였다. 쌍둥이들은 모두 지랄맞지만 지금도 가장 엮이기 싫은 자는 그녀였다.

형제자매들이 이상하다.

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확신하게 되었다.

'절대 엮이면 안 돼.'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남쪽 섬 요양 별장으로 도망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첫째 형도 그날 이후 날 건드리지 않았고, 다른 쌍둥이들도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눈칫밥만 먹으면서 조용히 살려고 했다. 어쨌든 전생에 비하여 현생은 천국이었으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자. 위험은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누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전생을 기억하는 지구인이라는 걸 모를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비밀은 내 바람과 달리 무척이나 이른 시기에 풀리게 되었다.

감사제가 끝난 지 6개월이 흐른 후였다. 쌍둥이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레인버그가에 충격을 선사했지만, 저녁 만찬은 항상 가족끼리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했다. 평민이었던 아버지의 유일한 철칙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밥은 같이 먹자.

그날따라 저녁은 맛있었다. 또한 분위기가 기이했다. 평소에도 제 존재를 과시하고 다니던 쌍둥이들이지만 부모 앞에선 나름 얌전했다. 하지만 그날은 마치 거사를 앞두고 기대하는 총각처럼 쌍둥이들 모두 흥미로운 표정으로 밥을 먹었다.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난 재빠르게 판단했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먼저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호오."

"와우."

"으흠."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자마자 세 쌍둥이들이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찔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이 기이한 분위기의 원인은 뭐지? 어색하게 행동하지 말자. 난 태연하게 내 방을 향해 걸어갔지만, 등 뒤에서 날 따라오는 세 명의 발소리를 들었다. 글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무서웠던 느낌은 아마 '안달'이었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게 확실하니,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등록금을 떼먹고 차를 산 걸 들켰던 대학 시절이 생각나는, 그 안달감.

그들은 자연스레 내 방까지 날 따라왔다.

그래, 우린 이렇게 자주 놀곤 했으니까.

네 쌍둥이들은 우애가 깊다. 전생을 떠올렸지만, 지금까지의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다. 혹시 이들도 그 시절이 그리운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그때의 난 머저리 짓을 했다. 태연하게 트럼프를 꺼내어 세 명의 악마들에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말한 것이다.

"우리, 카드 놀이할까?"

그때였다.

첫째 형이 급발진했다.

"그대들도 나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모양이로군."

시발, 좆 됐다 싶었지.

* * *

그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난 드디어 악마들이 연기를 멈추고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위장이 비틀리고 목 뒤가 뻐근했다. 내 방은 차가운 겨울날, 저녁 공기보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기껏해야 열 살의 아이들, 하지만 난 살인마들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두려움과 당황 속에서 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새끼였다. 무슨 말이냐고 차마 되물을 뻔뻔한 용기가 그때의 내겐 부족했다.

반면, 다른 세 명은 태연했다. 그들도 나처럼 형제자매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놓고 존재를 과시했으니 당연히 알았겠지. 하지만 그들과 난 엄청난 입장 차이가 있었다. 포식자와 피식자, 잡아먹는 놈과 잡아먹히는 놈.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은 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뒤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림인이었다."

그건 경고였다.

"정체를 말하는 건 신뢰를 얻기 위해서다. 같은 둥지에서 살며, 새끼 새처럼 싸우고자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 신뢰의 방식을 무시한다면,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저게 열 살의 주둥이에서 나올 말이던가. 무림인이라면 치가 떨린다. 전생, 지구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나같이 또라이였다. 편견은 나쁘다지만 그 역시 또라이 같았다.

"히히."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첫째 형이 가장 또라이인 줄 알았다. 누나들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도 착한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첫째 형의 경고에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둘째 누나의 모습에 깨달았다.

"협박은, 귀엽네."

누나는 웃고 있었으나 눈빛엔 광기가 그득했다.

"무시하면? 마치 네놈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과연 어떨까?"

주변 공간이 일렁거렸다. 그녀가 내뿜는 기가 방을 뒤덮는 걸 보았다. 천안통은 볼 수 없는 걸 보게 한다. 난 순간, 누나가 등 뒤에 솟아오른 아홉 개의 꼬리가 보였다.

"하! 괴력난신인가. 감히. 더 자라기 전에 지금 서열을 정해 두는 것도 좋겠군."

그에 맞서 첫째 놈이 힘을 발휘했다.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그저 방에서 투닥거리는 열 살 꼬맹이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엔 똑똑히 아로새겨졌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점점 붉은 용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경험은 귀중하다. 전생에서 겪었던 수많은 위기의 경험으로 보아, 난 지금이 인생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생사의 기로라는 걸 느꼈다.

"이, 이...."

개새끼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어차피 뒤질 거면 욕이라도 신랄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셋째 누나의 말이 더 빨랐다. 두 괴물의 기 싸움에도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여기서 싸우면 공작가는 무너져."

열 살의 다툼에 제국의 푸른 기둥, 레인버그 공작가가 무너진다.

전혀 농담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셋째 누나의 말에도 두 또라이는 여전히 한바탕할 모양이었다. 마침내 둘의 힘이 격돌하려고 한다. 휘말리면 죽는다. 젠장, 망할.

"개쉐이...."

그때였다.

"어머니가 슬퍼하실 거야."

어머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남매는 힘을 거뒀다. 활활 타오르던 화산이 순식간에 휴화산으로 변했다. 방금까지 서로 죽자고 싸우려던 게 거짓말 같았다. 그 모습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한순간에 전생을 떠올려 사람이 바뀌었어도 효심은 있다는 건가? 난 내뱉던 욕을 멈췄다. 감정을 담아 찰지게 하려던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동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텐데 확실히 해 두는 게 낫겠지. 난 너희에게 관심 없어. 더 중요한 게 있거든."

"기묘해. 신은 무슨 뜻을 두었을까. 운명, 결말이 궁금해."

역시 이해하기 버거웠다. 또라이들은 서로 통하는 게 있단 말인가? 세 명은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더니, 어느새 나름의 협정을 맺은 모양이었다. 이젠 멀뚱히 상황을 살피던 내게 화살이 향했다.

"누구였나, 넌."

누구냐, 넌. 올드보이 납셨네.

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둘째 누나가 웃었다. 재밌어서 웃은 건 아니다.

"숨길 수 있을까?"

말을 보태는 첫째 놈.

"정체를 말한 건, 감출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상황이 몹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왜 갑자기 다들 고해성사를 하고 지랄들인지. 한 가지 확신한 건 이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난 뱀들의 시선 속에서 대답을 해야 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올바른 선택지가 아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첫째는 무림, 둘째는 요마, 셋째는 천국(진짜?). 내 차례다. 놈들이 전생에 씹고 뜯고 맛보던 지구의 인간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해서도 안 돼. 내가 침략자들과 대적하던 방위군의 첩보원이라는 사실은 당연하고. 아마 그때 내가 한 대답은 당황과 두려움 속에서 버리지 못했던 내 하찮고 같잖은 유머 감각이 문제였을 것이다. 셋째 누나가 밝힌 전생의 출생지가 천국이라는 말에 속으로 피식 웃던 난 이렇게 말했다.

"깐따비아."

다행히 더는 캐묻지 않았다.

* * *

그 이후로 벌어진 상황을 난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혼돈의 연속이었던 것만 알고 있다. 절치부심, 도원결의, 지식 탐구? 구구절절한 이야기들. 마지막은 피의 맹세로 끝났다. 형제자매는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환생하여 같은 뱃속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기묘한 일을 밝히는 것엔 도움을 보탠다. 싸우지 않는다. 맹세를 어기면 보복이 따른다. 그러나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쌍둥이의 모든 동의하에 결투를....

지랄이다, 지랄.

난 절대 맹세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왜 형제자매로 태어났는지 궁금해했지만 난 알 것 같았다. 끼리끼리 뭉친 것이다. 사탄이 있다면, 이 세상이 X 돼 보라고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들은 멸망의 씨앗이다. 문제는 왜 내가 그들과 같이 태어났느냐는 것이다. 선량하고 착한 내가.

맹세 이후 서로 옥신각신 대화를 나누던 놈들은 제 정체에 대해서 전혀 숨기지 않았는데, 난 대화를 들으며 놀라운 그리고 불행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단순히 전생을 기억하는 미친놈들이라면 난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

첫째 라니스타 퀄츠 레인버그.

전생은 무림인 그리고 지구를 침략한 흑천맹의 수장, 괴마천왕 대흑천.

마교와 혈교, 일월신교,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모두 통일한 무림 고금 제일최강자.

S급 헌터 수십 명 도륙으로 유명, 지구멸망급 재해.

둘째 멜리사 퀄츠 레인버그.

요마계의 마녀, 요괴. 가장 오래된 문명보다 오래 살았다고 전해짐. 지구를 침략한 요괴들과 이십팔수성의 우두머리이자 꼬리 아홉 개의 구미호. 온갖 환술과 마법을 다루며 열병기의 천적. 군대가 이계의 침략자들에게 졌던 중요한 패배 요인. 핵병기가 무용지물이 되자 인류는 '능력자'에 의존하게 됨.

셋째 우샤스 퀄츠 레인버그

천국 출신? 이계의 침략자 중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가장 큰 피해를 준 이계의 괴물로 평가. 능력자들의 각성으로 한 개인의 능력에 국가의 존망이 걸리게 됨. 하지만 국가 그리고 인간을 등진 배신자들이 발생. 연합군 와해. 종교전쟁 발발. 하나의 적에 맞서 단합하던 인류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됨. 원인은 '성녀'의 등장. 사랑받는 자, 천사 혹은 여신.

공통적으로 지구를 침략한 이계인들 중, 인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줬으며 끔찍한 파멸을 몰고 온 악인들이라는 것이다. 나만큼 그들을 잘 아는 지구인은 없다. 그리고 너무 잘 알았기에 더 큰 절망을 느꼈다. 전생의 난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던 동아시아 방위군의 첩보원이자 능력자였다. 전생의 기억에서 놈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가 났다. 이상하게도 전생에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분명 놈들하고 연관이 있을 것이다. 무리한 작전에 강제로 참가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음.

뭐, 솔직히 이제 와서 원한이랄 것도 없었다. 전생의 난 고아였고, 친구나 연인도 없고, 지금처럼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던 남자였다. 복수심을 느낄 만큼 거창할 게 없다는 거다. 그저 원하는 건, 이왕 공작가의 막내아들로 화려하게 태어난 거 전생과 달리 평안하게, 행복하게 만수무강하고 싶었다.

4

그런데 놈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사사건건 놈들을 방해하던 능력자, 그것도 인간 중 가장 큰 피해를 선사했던 첩보원이라는 걸 들킨다면? 숨어 살자, 쥐 죽은 듯이. 피의 맹세를 했으니 내 안락한 삶을 방해하진 않을 거야. 적어도 이 세계가 멸망하기 전까진.

* * *

하지만 그날 이후, 그들은 날 가만히 놓아주지 않았다. 피의 맹세는 지랄이었다. 결국, 비등한 힘을 지닌 강자들의 법이었던 것이다. 점점 전생의 힘을 되찾아 가는 그들은 비범함을 뽐내며 날 상식개변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붉은 기둥' 가문과 전쟁이 벌어질 뻔했을 때, 난 깨달았다. 레인버그 공작가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 추운 겨울날, 난 몸살감기를 핑계로 남쪽 섬 휴양 별장으로 내려갔다. 우습게도 '천안통'의 부수적인 힘 덕에, 나도 남들이 보기엔 공작가에 '달의 아이' 중의 한 명으로 비추어졌다. 특히 아버지가 좋아했다. '재능'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한 아들이었고 내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설마 몰랐을 것이다. 감기 때문에 내려간 자식이 4년 동안 처박혀 있을 줄은.

난 이런저런 갖가지 핑계를 대며 14살까지 버텼다. 그러나 이제 곧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을 실시하는 15살의 나이가 되어 가자, 더 이상 핑계가 통하지 않았다.

* * *

그날을 떠올릴수록 더욱더 내 의지는 굳건해졌다.

난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본가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 부디 소자의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너에겐 재능이 있어."

"그 알 수 없는 재능, 이 아름다운 섬에서 스스로 개화시켜 보겠...."

그때였다. 내 몸에 불어넣던 영수의 기운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내 피부에서 밧줄이 돋아났다. 밧줄은 순식간에 내 몸을 칭칭 옭아맸다. 젠장, 처음부터 이럴 수작이었나.

"가기 싫다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가마."

"하지만 아버지!"

"아님 파문이다. 골치 아픈 녀석아."

파문이라니.

"입꼬리가 올라가는구나. 정정하마. 넌 절대 내 손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적어도 성인식을 치를 때까진 어미 새의 마음으로 꽉 붙들고 놓아 주지 않을 거야."

내 힘으로 아버지의 영수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다. 난 상황을 금방 이해했다. 그래, 며칠만 참자. 야반도주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 * *

레인버그 공작령, 퀄츠 성으로 돌아온 지 하루 뒤였다.

"작은 도련님! 큰 도련님께서 찾으시는...."

"나 찾으면 없다고 하랬잖아!"

"네에? 여기 계시잖아요?"

"멍청한 하녀!"

첫째 놈이 날 호출했다. 자기 방도 아닌 연병장으로.

어금니의 빈자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난 걸시에게 신경질을 냈다. 눈치가 없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역시 단점이 더 많다.

"네. 그럼 안 계신다고 말씀드릴게요!"

"잠깐, 걸시. 형이 물었을 때 도련님은 방에 있다고 말했을 거 아니야."

"네. 도련님."

"하하, 걸시 넌 정말 토끼 같아."

"어머, 고맙습니다. 토끼는 귀여워요."

토끼가 더 똑똑할지도 몰라.

"내가 갈게. 그냥 가만히 있어."

4년 전에도 기사들을 가지고 놀던 놈이다.

더 무시무시해졌겠지.

난 마음을 가다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으로 양쪽 눈을 지그시 누르며 눈의 피로를 풀었다. 저번처럼 다치지 않기 위해선, 이 눈의 힘이 꼭 필요해. 나라고 해도 4년 동안 잠만 잔 건 아니다. 남쪽 섬의 광활한 바다를 보며 '연습'했다. 더는 어금니가 부러지는 건 사양이다. 하나만 피하자. 아구창만 보호하면 돼. 이 눈이라면 놈의 움직임도 보일 테니까.

* * *

드넓은 연병장엔 한 명의 남자만이 서 있었다. 그 누가 저자를 14살의 소년으로 보겠는가? 같은 나이, 심지어 쌍둥이지만 내 몸의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구나. 레인버그 공작의 피를 물려받아 우리들은 모두 갈색 눈과 갈색 머리를 타고났다. 분명 4년 전만 해도 비슷하게 생겼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니 쌍둥이라고 부르기에도 이상했다. 떡 벌어진 어깨, 굵직한 얼굴선, 잘생겼다기보다 남자답게 생긴 얼굴. 무엇보다 사자의 눈빛을 닮은 저 눈깔을 보라.

"오랜만이구나, 폴스타."

난 주춤주춤 연병장으로 걸어갔다. 우린 피의 맹세 이후로, 예전처럼 형제자매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날 동생이자 폴스타로 불렀고, 난 그를 형이자 라니스타로 불렀다.

"라니스타 형."

"무기를 들어라."

걸음을 멈췄다.

"…왜?"

뒷걸음질을 쳤다.

"무공을 가르쳐 주마."

어젯밤에 도망가야 했는데.

* * *

사람이 잡아먹힌다는 느낌을 받는 건 쉽지 않다. 사자의 눈이 보는 난 사슴일까? 아니면 개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라니스타 놈은 단지 눈을 번득이며 쳐다만 봤지만 난 금방이라도 놈에게 심장이 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하는 무기가 있느냐?"

놈이 움직였다. 연병장의 구석에 자리한 무기고로 향한다. 4년 전엔 검과 방패, 창이 다였지만 지금은 무기 만국박람회다. 쿤칸 대륙에서 쓰는 일자 장검이나 대방패 외에도 아인들이 쓰는 곡도, 월도, 만도에다가 폴암이나 언월도처럼 서쪽의 기사들이 쓰는 무기와 교황청 중2병 사제들이 애용하는 채찍과 메이스도 보였다. 심지어 대륙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의 무기도 있었다. 휘어지는 검, 연검. 순식간에 여섯 개의 암기를 방출하는 건틀렛과 못이 흉악하게 달린 낭아봉 등. 베테랑 기사들도 모르는 무기지만 나는 안다. 무림의 무기다.

"고르거라."

라니스타 놈의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제안은 독이 든 술을 건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덥석 받았다가는 죽는다. 나는 침착히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때려죽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거절하자. 대수롭지 않게, 평범한 형과 아우처럼.

"괜찮아, 형."

"제안이라고 생각했느냐?"

하, 시발.

"아니, 난 정말 좋은데 무공이란 게 함부로 배울 게 아니잖아. 형처럼 심기체가 뛰어난 사람이 수련해도 배움에 끝이 없다는데, 나 같은 게 어디 감히 발을 들이겠어. 무공이 슬퍼할 거야. 어디서 저딴 놈에게 날 가르치느냐고."

무림인은 자존심이 세다. 난 그의 프라이드를 자극했다. 라니스타 놈은 입버릇처럼 수련이 부족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물론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검 한 자루로 제국의 황성을 무너트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무림인답게 무공을 신성시 여긴다. 난 자기혐오까지 선보이며 그를 설득하고자 했다.

"하!"

내 말에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제 딴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14살 또래 중 가장 사악한 웃음이 아닐까 싶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내 말에 공감하는 걸까?

"하하하. 멍청한 녀석, 무공은 지성이 없다. 슬픔을 느낄 리가 없잖으냐? 하하하."

4년이 지나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놈은 농담이란 개념이 없다는 걸.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가르치니 너 같은 놈이라도 앎을 터득할 것이다."

저놈이 무공을 가르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제 설득하기엔 너무 늦었다. 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았다. 시발, 4년 만에 나타난 겁쟁이 동생에게 대체 왜 뜬금없이 무공을 가르치는가?

"알았어, 형. 근데 왜 굳이… 날? 형의 자랑스러운 기사단의 재능 넘치는 인재들을 놔두고?"

"무림 선배들의 무공을 함부로 내설할 순 없잖느냐?"

최후의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두들겨 맞을 가능성이 높다. 각오하고, 라니스타 놈에게 말했다.

"형. 솔직히 말할게. 난 무공이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하다."

"응?"

"입신의 경지에 오르면 베풂에 앎을 깨닫는 경우가 더러 있다.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역근세수경을 창제한 건 승려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지. 너 같은 자를 가르치는 것조차 수련이라니, 재밌지 않으냐?"

"근데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자세가...."

쿵!

꼬박꼬박 토를 달던 내가 못마땅했는지 형이 발을 굴렀다. 기껏해야 70kg쯤 보이는 소년의 발구름에 연병장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저 발에 사커킥을 맞으면 내 머리는 무회전으로 남쪽 섬까지 날아갈 것이다.

"허, 말이 많구나."

난 입을 다물었다.

"기연이라고 생각하거라. 아무리 혈연을 맺었다고 하나, 천하제일인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다. 제자의 예를 다해 절을 올려."

얌전히 절을 했다. 누가 봤다면 쌍둥이 동생이 형에게 절을 하는 굴욕적인 광경이겠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절을 하고, 두 번 절을 하려고 하자 형이 다시 발을 굴려 내 균형을 잃게 하였다. 무림인도 두 번의 절이 죽은 자에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나? 어쨌든 난 깐따비아 출신이니 몰랐다고 하면 된다.

"무기는 무엇으로 하겠느냐?"

재차 묻자, 난 무기고로 걸어갔다.

안 아파 보이는 거, 안 아파 보이는 거.

난 퀄츠 성의 붉은 나무로 만든 봉을 집어 들었다.

역시 맞으면 아프겠지만, 날붙이 무기보단 나을 것이다.

"호오."

내가 봉을 들자 라니스타 형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순간, 난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고 다른 무기를 고르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마치 자석처럼 날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라니스타 놈의 앞에 내동댕이쳐진 난 봉을 들고 히죽 웃었다.

"이걸로 할게, 형."

"제법 보는 눈은 있구나. 봉술은 배우기도 쉬우며, 경지가 오를수록 그 어떤 무구보다 생사여탈이 용이하다. 괜히 미후 놈이 봉을 주로 쓴 게 아니지."

또, 또. 지만 아는 얘기를 씨부렁거리는 라니스타 놈이었다.

* * *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10살의 나이에 골절, 발치, 전신 타박상의 상처.

같은 장소에서, 날 그렇게 만든 놈과 같은 상황이 되어 마주 보니 두 다리가 달달 떨려 왔다. 난 봉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서 그를 노려봤다. 이번엔 다르다. 천안통이라면 다 보여. 내 몸이 반사 속도를 따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기를 쌓고 혈을 뚫으며 단전에 혼과 심을 담는 기초적인 운용을 가르쳐 주마."

다행히 이번엔 전과 달리 구타가 아니라 교육이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난 최대한 그의 명령을 들어주고자 노력했다. 라니스타 놈의 말을 따라 난 정좌로 앉았다.

"기를 유도하여 단전에 쌓는다. 심법의 묘리이며, 천하의 신공과 저작거리 무사의 무공도 이 묘리를 따른다. 하지만 마교의 심괴들은 보다 폭리적인 흐름을 얻기 위해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그리고 그의 개소리를 얌전히 들어줬다. 내공, 단전, 심법? 괜찮다. 들을 만하다. 표천묘리, 제후상해, 대골만리? 뭔 개소리인가 싶다. 라니스타 형은 자기만 아는 개소리로 날 가르치려 들었다. 소귀에 경 읽기와 다름없다는 걸 왜 알지 못할까.

사실 전생에도 무림에서 온 미친놈들은 저랬다. 우리는, 지구인들은 무림의 무공을 배울 수 없었다. 검을 휘둘러 산을 베는 신적인 강함, 그 힘을 터득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들었다. 칠칠찮은 무림인들은 간혹 지구인들과도 친구로 지내며 기연이니 뭐니 해서 비급서를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다른 이계의 문물과는 다르게 무공은 비교적 접하기 쉬웠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들은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

무림비급서도 지구인의 눈엔 개잡소리 모음집에 지나지 않았다. 학문으로서 이해하자니 단지 철학적인 요소만이 있을 뿐이었고, 곧이곧대로 무공을 따라 하니 우스꽝스러운 묘기에 불과했다. 저 모습을 보라, 내공 운용을 보여 준다며 갑자기 공중부양을 하는 라니스타 놈의 모습을. 봐도 이해가 안 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으면 노력이라도 했지.

"왜 따라 하지 못하느냐. 곤축의 혈을 지그시 누르고 상화와 화마의 경계를 오고 가면 저절로 혈이 뚫려 단전에...."

뭐? 어쩌라고?

"하, 답답하구나. 괴천의 심법을 터득하기 위하여 천마마저 죽였었다. 이 귀중한 가르침을 어미 새처럼 떠먹여 주겠다는데 왜 받아먹질 못할까!"

"…안 먹고 싶어서?"

한 번의 말대꾸였다.

"하하하, 망설을."

갑자기 그의 태도가 변했다.

"이리 오너라, 내가 직접."

달달달, 다리가 떨리다 못해 휘청거린다.

"몸에 새겨 주마."

놈이 달려왔다.

4년 전과 마찬가지로.

* * *

난 약을 바르러 온 하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미셀."

의료동의 하녀들은 나와 친했다. 4년 전,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렸으니 친할 만도 하지.

"첫째 공자님도 너무하세요. 오랜만에 폴스타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는데, 정말...."

하녀들은 내 편이었다. 라니스타 형은 어린 나이에 기사들의 스승이 되었으나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금도 기사들이 쓰는 옆 건물의 의료동은 환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들었다.

"아프다."

결국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구타로 끝났다. 나는 4년 전처럼 개 맞듯이 맞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과 달리 겉 상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뼈도 부러지지 않았다. 비록 고통은 뼈가 부러진 것과 흡사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고통이 덜한 거 아니었다. 속은 피멍이 들었다. 이번에 새겨진 상처는 어금니와 또 다른 교훈을 선사했다. 마치 경고 같잖아. 증거도 남기지 않고 날 죽일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

"뭔 속셈인지."

구타가 끝난 후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게 라니스타 형은 갑자기 다정다감하게 물었었다.

[그래, 넌 4년 동안 뭘 준비하고 있었느냐.]

난 고통 때문에 사리 판단이 어눌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멍청하게 대답했다.

[뭘 준비해?]

[난 이 세계를 '무림'의 방식대로 이해하고자 태평의 걸음을 내디뎠다. 자매들도 마찬가지지. 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난 이유의 답을 얻고자 해. 그래서, 넌 뭘 하고 있었느냐?]

[난....]

니들 피해서 숨어 있었다고 못 말하지.

[숨기고 싶더냐. 그래, 상관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필히 우리가 형제자매로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힘을 기르거라. 그리고… 겁먹지 마. 난 너의 적이 아니니까.]

왠지 마지막 말이 너무 따뜻해서 속아 넘어갈 뻔했지.

이제 와 생각하니 채찍과 당근이었다. 두들겨 패더니, 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형의 말에 공감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힘을 기르는 것.

"보이긴 보였으니...."

"네?"

천안통은 비유하자면 신의 세계를 본다.

만약 라니스타처럼 육체적인 힘만 따라 준다면.

"무리도 아니야."

"공자님."

미셀은 진통제를 건넸다.

* * *

'이만하면 되었나.'

연병장, 홀로 남은 사자.

아니, 젊은 소년.

'그때의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절대 피할 리 없는 검로를 피했다.

비록 아무런 힘이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건 그도 마찬가지.

"재능이 없다라, 하!"

그는 웃었다.

즐거웠다.

입신의 기를 감히 간파하듯, 바라보는 불길한 눈이 자꾸만 생각났다.

더군다나, 그 눈을 바라볼수록 점점 더 떠올랐다.

전생, '그때'의 기억들이.

"정말 섬뜩한 눈이로다."

5

밤이 되자 라니스타 놈에게 당한 상처가 더 심해졌다. 피멍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부위가 부항을 뜬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더니 혈관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올 만큼 부풀어 올랐다. 시발, 이거 왜 이래. 내 몸이 토마토처럼 붉고 통통하게 변해 가고 있다. 일어나려고 해 봐도 몸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라니스타 놈, 젠장!

난 라니스타 놈이 무림인이란 걸 상기했다. 놈은 켄시로다. 사람을 몇 시간 뒤에 터져 죽게 할 수도 있다.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난 급히 고함을 질렀다. 포악한 라니스타 놈의 짓을 알려야 한다.

"으… 으!"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도 신음만이 나왔다. 심장이 철렁거렸다. 라니스타 놈은 알고서 이 짓을 저질렀다. 목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술수를 썼어! 마음은 다급해졌으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부풀어 올랐다. 전생에도 이런 해괴하고 끔찍한 상처는 당한 적이 없다. 부풀어 오른 피부는 붉고 검은 진물을 송골송골 내뱉기 시작했다. 썩은 토마토보다 냄새가 더 역겨웠다.

"시이발."

있는 힘을 다해 외쳐도 목소리는 잠꼬대처럼 작았다. 아랫배에 생겨난 상처는 이내 내 머리통보다 더 부풀어 올랐다. 마치 '플라이'의 파리인간이 되어 가는 세스 브런들처럼 몸이 곤죽이 되어 가잖아. 속이 울렁거려 신물이 올라왔다. 썩은 토마토가 되어 죽어? 이 무슨 끔찍한 최후야.

누가 봐도 상처는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희한하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끔찍하게 아팠다면 정신을 잃었을 텐데. 라니스타 놈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죽을 때 최소한 고통스럽지 않게 죽으라는 건가.

한참 진물을 쏟아내던 상처에서 이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미 죽어 있다. 저 빛은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불처럼 환상이겠지. 난 은은한 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생과 현생, 두 삶의 기억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젠장, 전생이나 현생이나 가장 영향을 미친 건 세 놈밖에 없구나.

"시발, 부모가 잘못 키웠어. 가정교육부터 어긋났을 거야."

라니스타 놈의 알지도 못하는 부모를 욕하던 그때였다.

아랫배에 살살 느낌이 돌아오더니,

"악!"

사상 처음 겪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고통이 복부를 강타했다.

* * *

따뜻한 햇볕이 눈을 간지럽혔다. 정신을 차린 난 슬며시 눈을 떴다. 죽지 않았다.

"시발."

목소리도 나온다. 몸도 움직여졌다. 난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배를 내려다봤다. 밤에 벌어진 일들이 악몽이었던 것처럼,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끔찍한 악몽 따위가 아니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더불어 침대보를 물들인 검붉은 진물들이 밤의 일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슬쩍 진물을 만져 봤다. 기름처럼 미끄럽고, 설탕 시럽보다 끈적거렸다. 으엑, 역겨운 악취는 덤이다. 이 재떨이에 고인 담뱃물처럼 끔찍한 게 어떻게 내 몸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거지?

대앵-! 대앵-! 대앵-!

종이 세 번 쳤다. 아침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의료동의 미셀이 도착하기 전에 난 급히 진물이 묻은 침대보와 이불을 걷었다. 차라리 대공작가문의 막내아들이 14살의 나이에 오줌으로 지도를 그린 게 설명하기 편하다. 난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재빨리 의료동에서 나갔다. 이불은 걸시에게 처리하라고 하면 될 것이다.

"대체 뭔 짓을 한 거지?"

복도를 뛰는 걸음이 가벼웠다. 어제 빌빌거리던 상태가 아니다. 몸도 개운하다. 활력이 어찌나 도는지 바지가 팽팽해진 탓에 뛰기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상한 몸 상태, 라니스타 놈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건 분명하다. 무거운 이불보가 손수건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밤새 겪은 괴기한 상황이 영향을 미친 건 확실한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의료동에서 내 방까지 높은 계단을 네 번이나 올라가야 했으나 숨은 전혀 가쁘지 않았다.

* * *

썩은 토마토가 되었던 그날 이후, 난 아침마다 연병장에 훈련을 나갔다. 라니스타 놈은 퀄츠 성 부근의 베모니아 도시로 등청을 나가고 없었다. 14살의 나이에 벌써 가문의 업무를 보는 놈이다. 본가의 자리를 자주 비우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공자님, 괜찮겠습니까?"

"힘드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기사들에게 난 연약한 막내 도련님이었다. 괴물 같은 첫째 형에 비하면 확실히 X밥이긴 하지. 그래도 훈련이라고 해 봐야 체력 단련 운동이었다. 난 기사들과 나란히 서서 퀄츠 성 외곽을 뛰어다녔다. 기사들은 치안 유지 겸 체력 단련으로 아침마다 퀄츠 성을 순찰했는데, 뛰는 거리가 40km는 넘는다. 남쪽 섬의 별장에 있을 때도 기초 체력은 꾸준히 단련했다. 전투 훈련을 받는 기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체력은 나름의 자신이 있다.

연병장에서부터 퀄츠 성을 지나 적색 숲을 지났다. 초소가 있는 곳까지 쉬지 않고 몇십 분을 뛰어야 했다. 초소에서 기사들이 아인을 감시하는 보초병들의 보고를 받을 때가 쉬는 시간이다. 그 후, 서민의 거리를 돌아보고 외곽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퀄츠 성으로 돌아온다.

아침마다 마라톤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본적으로 이곳의 사람들도 '지구인'과 달리 무척 강인하기에 공작가의 기사 정도면 이 정도 체력 단련은 기본이라고 들었다. 연병장으로 돌아오자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기사들도 지쳤다. 점심밥을 먹고 오후에 다시 훈련을 나가겠지.

"독대 전까지 한 바퀴 더 뛰어 볼까?"

이건 갑질이다. 처음에 날 걱정해 주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당황하며 날 걱정해 주는 척 말렸으나 막무가내로 뛰어가자 어쩔 수 없이 날 뒤따랐다. 막내 도련님이 뛰겠다는데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엔 쉬지 않고 달렸다. 뜀걸음을 하다가 전력 질주도 했다.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왔을 때 기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휴식하라고 말하자 철퍼덕 누워서 가쁜 숨을 헐떡인다. 하지만 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걸로 호흡이 정리되었다. 땀도 잘 나지 않았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한다고 해도 기사들의 체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 시간만 뛰어도 지쳐 나가떨어졌을 텐데.

"내 몸에 뭔 짓을 한 거야."

지치질 않아.

병상에 누워 있던 놈이 더 건강해졌다.

라니스타 형의 말이 생각났다. 몸에 직접 새겨 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지가 무슨 도수치료사도 아니고, 몇 번 주먹질하더니 몸을 고쳐 놨다.

난 땀범벅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면 일부러 맞을 만하네.

* * *

오늘은 아버지와 독대가 있는 날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서재나 응접실도 아니고 날 창궁관으로 호출했다. 그는 제국의 공작이자 푸른 기둥, 전쟁영웅이었고, 창궁관은 그가 허락한 소수 인원만이 출입할 수 있는 퀄츠 성의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곳이다. 안부 인사나 하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느낌이 안 좋아."

처음부터 망나니 아들이었으면 좋았다. 4년 전, 천안통이 열린 후 난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천재인 줄 아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귀족 가문의 비정한 아비들보다 정이 많았으나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다. 내가 쓸모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쪽 섬 별장에서 지내도록 놔뒀을 텐데.

"빛을 따라가세요, 도련님."

하녀장의 안내를 받으며 창궁관의 문턱을 넘었다. 퀄츠 성의 모든 잡무를 관리하는 하녀장도 창궁관만큼은 출입을 불허했다. 난 홀로 창궁관의 복도를 거닐었다. 창궁관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변했다. 고풍스러운 퀄츠 성의 인테리어에서 점점 나무뿌리와 꽃들로 뒤덮인 숲길이 되었다.

어느새 길조차 잃어버릴 만큼, 완전한 숲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창궁관은 영수의 보금자리, 영수의 힘의 영향을 받아 공간 자체가 변해 버렸다고 들었다. 퀄츠 성 안에 생겨난 울창한 숲과 다름없다. 난 하녀장의 말대로 식물의 뿌리가 발하는 은은한 빛을 따라갔다.

"신기한 힘이야."

한참 동안 숲을 걷다가, 마침내 길의 끝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초월의 짐승, 영수를 다루는 자.

제국의 푸른 기둥이자, 대전쟁의 영웅.

제국의 모든 이가 존경하며 아인들의 땅을 넘어 다른 대륙까지 위명을 떨치는 강자.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 그가 창궁관에 뿌리를 내린 거목의 가지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뭐하시고 계세요?"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영수와 교감 중이지. 잠시 기다려라, 곧 끝내마."

그는 위명과 달리 몹시 괴짜이기도 했다.

* * *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를 지칭할 때, 최고의 영수술사이자 제국의 공작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륙 제일의 애처가라는 별명이 남는다. 아버지는 신분을 초월한 결혼으로 유명했는데, 신분 사회인 쿤칸 제국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무려 왕녀와 결혼한 유일한 남자였다. 물론 여러 요인이 뒷받침됐긴 했지만, 대단한 집념이긴 하다. 아버지가 반발하는 귀족들에게 외친, '왕녀라서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한 사람이 왕녀였다.'의 말은 지금도 귀족 영애들의 마음을 불태운다나, 멍청한 놈들이다.

어쨌든 그만큼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제국의 전란을 제압한 전쟁영웅이자 이미 한번 무너졌던 제국을 일으켜 세운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업적, 그래서 평민임에도 공작의 작위에 올랐고, 그때부터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실한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나무에서 내려온 아버지가 손을 휘두르자, 나무뿌리가 저절로 움직이더니 마치 의자처럼 변해 갔다. 두 개의 의자, 아버지가 앉자 나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잘 지내?

"형한테 두들겨 맞았다고 하녀장이 말 안 했답니까?"

"하하, 모름지기 형제는 싸우면서 커 가는 것이다."

할 말이 많았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설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아버지는 날 살갑게 대했다. 불편한 게 없는지, 원하는 게 있는지 물어보며 날 배려하고자 했다. 하지만 격려가 본론이 아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아버지가 은근슬쩍 물어봤다.

"영수와의 교감은 어찌 되었느냐?"

영수靈獸는 초월의 짐승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힘이다. 전생에서 보았던 수많은 이계인들의 괴상한 힘들과도 다른 오직 이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특별한 힘이며, 강력한 힘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영수의 힘을 빌려 제국을 구했다. 영수는 때론 마법이며, 무력이자 군대였고, 재해였다. 영수술사의 힘을 일인군단으로 칭하며 마법사들보다 높게 쳐 주는 이유였다. 날 묶었던 질긴 밧줄도 영수의 힘이었지.

특별한 힘이니 만큼 영수술사는 몹시 희귀했고, 아버지만큼 대단한 경지에 오른 자는 대륙의 역사로 봐도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아버지가, 우습게도 날 자신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여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안통이 열린 뒤, 쌍둥이들을 피해 별장으로 내려가고자 마음먹었을 때.

난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창궁관에 들어갔다. 영수라는 존재에 대하여 워낙 알려지지 않다 보니 그때의 난 그가 최강의 영수술사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궁관에 보이는 수많은 영수들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직접 말해 버린 것이다. '아버지, 기괴한 짐승들이 많이 보입니다.'라고.

뒤늦게 알았지만 강력한 힘을 펼치는 영수靈獸일수록 감응이 힘들어, 영수술사라고 해도 대부분의 영수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난 한 번에 아버지의 영수들을 다 봐 버렸다.

감응이 아니다.

그저 보였기에 보였다고 했다.

천안통.

신의 눈 혹은 개눈깔이라 불리는 능력 때문에.

그날, 난 아버지가 '달의 아이' 사건 때보다 더 놀라서 뒤로 자빠지는 광경까지 목격했다.

6

난 보이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걸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걸 볼 수 있는 능력.

천안통天眼通.

사실 방위 본부에서 요원의 명예를 위해 거창하게 천안통이라 명했지, 그전에는 난 이 눈을 개눈깔이라고 불렸다. 사람의 눈이 동영상처럼 편집해서 사물을 볼 수 없듯이, 천안통을 지녔어도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볼 수는 없었다.

가끔 귀신도 보이고, 숨겨진 것도 보이고, 갯가재의 눈처럼 편광을 구분하기도 하며, 색을 보고 물 온도를 구별하고, 심지어 감정感情의 색도 보였다. 게다가 간혹 헛것이 보이기도 했는데, 대부분 쓸모가 없으나 간혹 데자뷰처럼 '일어날 일'들이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능력들이 알려지자, 능력자들은 내 눈깔을 신의 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단점도 많았다. 받아들이는 정보를 구별할 수 없다. 원하는 걸 볼 수 없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능숙하지 않았을 땐 천안통을 사용하면 보이는 정보가 너무 많아 뇌가 버티지 못하고 기절까지 한 적도 많았다. 내 뇌의 전산처리능력이 1기가라면, 천안통의 정보는 순식간에 몇백 기가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오래 사용하면 머리통이 터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는 것'만이 유일한 힘이기에, 전생에서 난 전투에 나서 본 적도 없다. 정보부 소속의 첩보원이었고, 팀에서도 하는 일은 단지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 요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천안통으로 얻은 정보를 알려 주는, 살아 숨 쉬는 인간계측기였다.

무림의 진법, 요마들의 환상 마법, 변신술사를 간파할 수 있었으나 정작 싸움은 좀비화가 진행된 웰시코기 한 마리도 못 이겼다.

그래서 마지막 임무 때 난 죽었다. 죽음이 기억나지 않아도 첩보원이 적진의 한가운데에 침투했으니 예상하기 쉬운 결말이지, 시발.

"아버지. 그때는 요행에 불과했다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정말 느껴지지 않습니다!"

결국 영수들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영수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완강한 대답에 점점 표정이 굳어지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기어코 일을 벌였다. 고요하던 창궁관이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듯 격변하기 시작했다. 나무 덩굴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주변을 빡빡하게 채우고, 은은한 빛을 발하던 뿌리는 형광등보다 더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곳에선 물웅덩이가 고이고, 다른 한곳에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생겨났다. 때론 천둥이 치더니, 창이 없는 건물 안에 몸이 들썩거릴 만큼 강력한 돌풍이 불어오기까지 한다.

격렬한 외부의 자극에 방어기제처럼 눈에 힘이 들어갔다. 뜻하지 않게 저절로 발동되자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무언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느냐?"

아버지가 재차 묻는다.

"아뇨, 보이질 않습니다."

난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간 새하얀 백사를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날 나무랐다.

"녀석 참, 거짓말만 늘어선. 영수들이 알려 주니 감추지 말아라. 호수와 수해, 번개와 화산의 영수들은 모두 자연을 조율하는 토지신들이지."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두려움에 몸이 굳어 갔다. 토지신이라는 놈들이,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아버지가 없으면 날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였다.

"그들은 아무나 볼 수 없다."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를 이어 나갔다. 어쩌면 협박일지도 모른다. 아빠가 영수들에게 명령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자식을 협박해?

"토지신은 깊은 신앙을 지닌 무녀가 천 번의 공양을 바쳐도 볼 수 없다고 하지. 하지만 아들아, 넌 어떠냐! 정성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이렇듯 많은 토지신들을 훤히 보고 있지 않으냐! 내 장담한 건데, 감응 능력은 이미 가르칠 게 없을 정도니 영수 교감만 할 수 있다면 몇 년, 아니 몇 달 안에 날 뛰어넘을 수도 있을게야."

설교를 하다가 흥분하며 목에 핏대까지 세우는 아버지다. 저런, 연세도 있으신데 자중하시지.

"맥!"

아버지가 외치자 거목에서부터 푸른 늑대가 나타났다. 온몸의 털과 눈동자가 새벽녘의 달빛처럼 새푸른 늑대는 어슬렁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는데, 토지신이라 불리는 영수들조차 늑대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맥이라 부르는 영수다. 쿤칸 제국의 가장 넓은 호수에서 태어난 영수라고 했었나? 맥은 아버지가 다루는 가장 강력한 영수이자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가 제국의 푸른 기둥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푸른 늑대는 천천히 제 위세를 과시하며 다가왔다. 난 다급히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는 날 응원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기만 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푸른 늑대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날 파악하려는 듯 냄새를 맡으며, 날카로운 두 눈은 날 직시했다. 덩치는 황소보다 컸고, 눈은 라니스타 놈처럼 무서웠다. 젠장, 뒷걸음질 치던 난 종아리에 힘을 주고 제자리에 섰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4년 전과 달리 성공할지도 모르지.

사실 영수의 힘은 몹시 탐났다. 아버지만큼 강해진다면 더는 쌍둥이들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4년 전에 난 아버지의 지시대로 영수와 교감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땐 처참한 결말이었으나, 이번엔 다를지도 모르잖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난 아버지의 곁에 선 푸른 늑대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나비족이 신경 다발을 내밀듯 천천히, 지우가 말 안 듣는 피카츄를 꼬셨듯 정성스럽게. 손끝에 모든 감각이 집중되어 간다. 손을 내밀자 맥도 관심을 보였다. 녀석도 천천히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마침내 영수와 접촉을 앞둔 그때였다.

으르릉-!

"악, 시발!"

갑자기 광견병 걸린 개처럼 맥이 이를 드러내며 덤비려고 들었다. 급히 내밀었던 손을 거둔 난 뒤로 발라당 자빠지고 말았다. 적의를 힘껏 내비친 맥은 으르렁거리며 날 경계하다가 아버지의 명령에 거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섬뜩한 시선을 보내는 놈이다.

난 놀란 가슴을 쓸어 담고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하하. 아버지. 영수들은 제가 맛있는 먹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4년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절 뜯어 먹고 싶어 하는군요."

"맥이 널 무서워한 것이다. 한 번만 더 교감을...."

"어휴, 그만하십시오. 아버지. 방금 넘어진 탓에 발목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용건이 끝나셨으면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방금 모습을 보고도 미련이 남았는지 안타까워하는 얼굴이다.

내가 가려고 하자 아버지는 영수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래, 미안하구나. 아직 일렀던 건가."

그리고 날 의자에 앉히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널 부른 건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다."

발목을 쓰다듬던 난 이어진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들아, 난 널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다. 레인버그가의 차기 가주는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가 될 것이야."

이건 또 뭔 지랄 같은 상황이래?

* * *

장난이 아닐까 싶었다.

현재 쿤칸 제국의 권력도를 그리자면 황제보다 높이 있는 세력이 세 군데가 있다. 과거, 제국의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발발한 대전쟁에서 권위를 지켜내지 못한 쿤칸 황실은 예전의 영광을 잃었다. 대신 교황청과 두 곳의 가문이 제국의 권력을 나눠 가지게 된다. 제국의 붉은 기둥이자 쿤칸이 왕국이었을 시절부터 오랫동안 대가문으로 명맥을 이어 오던 검술 명가, 솔가르 가문과 제국 백성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푸른 기둥, 레인버그가다.

비록 유서는 깊지 않지만 레인버그가의 가주라는 직책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단지 권력이 있다고 하여,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의 아들이라고 하여 오를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다. 레인버그가는 북방의 아인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방책이자 가주는 제국의 방패다. 그런데 방패가 녹슬고 부서진다면 다른 귀족들과 제국의 백성들은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레인버그가가 유지되는 건 순전히 아버지의 능력이다.

"어찌 제가 제국의 방패가 될 수 있겠습니까."

"넌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격이 없습니다."

"충분하다."

"많은 자가 반발할 겁니다."

"평민의 신분으로 퀄츠 성의 영주가 되었을 때, 정작 황제마저 날 믿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들의 폄하는 네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로 보는 아버지가 사실 60살을 훌쩍 넘긴 노인이라는 건. 아버지는 일선에서 물러나 그만 쉬고 싶다고 했다. 전쟁영웅 라이베라, 그 노년의 꿈은 소박했다. 햇볕이 따뜻한 남쪽의 섬에서 엄마와 단둘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젠장, 엄마의 얘기가 나오자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레인버그가의 가주는 내가 추구하는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생각해 보면 반발만 하는 못된 자식이지만, 이번엔 물러날 수 없었다.

"전 이룬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겁쟁이 막내인 저보다 라니스타 형이 가주에 훨씬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라니스타를 거론하자 아버지의 표정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라니스타 놈의 포악함을 제외하고, 그의 활약만 본다면 내가 아비라도 자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완고했다. 여전히 날 후계자로 만들겠다고 하자, 난 라니스타의 포악함을 상기시키고자 말했다.

"후계 다툼이 일어날 겁니다. 형이 날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

으하하!

어이가 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식들의 우애를 의심해선 안 되지. 네 쌍둥이잖느냐?"

그게 뭔 이유야, 시발. 옆 동네 공작가문은 벌써 후계 다툼에 네가 죽니 내가 죽니 한다더만.

"무엇보다 라니스타 형은 또라… 괴짜지만 실력만큼은 굉장하지 않습니까? 벌써 가신들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최연소 대륙 제일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하죠. 그만큼 레인버그가의 가주로 어울리는 인물은 없습니다."

난 아버지가 저런 발언을 하기 전까지 당연히 라니스타 형이 차기 가주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장남에다가, 요 며칠 사이 느낀 건데 가신들과 잔뼈 굵은 기사들마저 형에게 꿈쩍도 못 했다. 14살에 이미 가문을 휘어잡고 있다. 다른 자들도 라니스타 형이 가주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무림도 일통한 괴물인데 공작가 정도야.

내 거듭된 설득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제자매는 저마다 걸출한 재능이 있지. 내 자식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녀석들은 장차 아비를 뛰어넘어, 대륙 최고 제일의 인물이 되겠지."

아니면 세계 멸망의 주범이 되던가.

"하지만 네겐 라니스타에게 없는 게 있단다."

"영수를 본다고 하여 가주가 되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영수의 힘을 그들은 전혀 다루지 못했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전생의 힘을 모두 되찾으면 제국, 아니 이 세계에서 그들을 막을 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쯧, 스스로도 모르니 어찌 알려 준다고 하여 깨닫겠는고."

아버지는 꼰대였다.

내가 계속해서 반발하자 이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설전은 됐다. 얌전히 후계자 교육을 받아."

"아버지."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다. 뭐라고 하든 넌 레인버그가의 차기 가주다. 그리고… 가주가 되면, 다시 가주를 임명할 수 있지."

아버지의 말이 미묘하게 변했다.

"승계식을 치를 18살의 나이까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후계자 교육을 받아. 그리고 내 뒤를 이어 가주가 되면, 네 마음대로 하거라. 라니스타를 가주로 임명하든, 가주직을 버리고 도망가든 난 절대 신경 쓰지 않으마."

가주가 되자마자 다시 가주를 임명하라고?

자세히는 몰라도 한 가문의, 그것도 공작가문의 승계가 무슨 온라인 게임의 칭호처럼 손쉽게 갈아 끼울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긴 해요?"

아버지는 꼬장을 부렸다.

오랫동안 귀족으로 지냈지만, 확실히 달랐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지?

"어떤 놈이 뭐라 할 거야? 황제 놈이? 매부리코 공작 놈이? 국륜이 뭐가 중요해?"

그는 화를 내다가 갑자기 내 머리를 헝클리며 얘기했다.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진 도망치지 마."

생각해 봤다.

아버지는 아마 날 계속해서 괴롭힐 모양이다.

남쪽 섬으로 도망가도 쫓아오겠지.

라니스타 형과의 대화도 생각났다.

난 너의 적이 아니다.

"아버지."

괜찮다. 방법은 많다. 4년, 4년만 버티면 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 약속하십시오."

"아르테미스 님의 은혜와 내 혼에 걸고 맹세하마."

* * *

아들을 보낸 후 레인버그 공작은 맥을 불렀다.

"괜찮아."

그는 겁먹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멀리 갔단다. 괜찮아."

몸을 바들바들 떨던 푸른 늑대는 레인버그의 손길에 점점 안정을 찾았다.

'알 수 없는 힘이야.'

공작은 주위를 둘러봤다. 맥뿐만이 아니라 토지신들도 겁에 질렸다.

오랫동안 영수와 교감을 나눴던 레인버그 공작이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던 영수들이 녀석을 두려워하다니.'

7

영수는 섭리를 어긋난 존재, 물질과 영혼의 경계에 선 초월의 짐승이다.

그들은 마법 같은 기적을 일으키고, 천재지변을 조율하며, 교감한 자에게 강력한 힘을 선사한다. 또한 영수는 감정을 느끼는 생명이기도 했다. 고결한 자존심은 굴복하지 않으며 교감을 나눈 자와 장난을 즐기고, 기쁨을 느껴 춤을 추거나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교감을 나눈 자의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다.

영수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두려움이란 죽음이 허락된 생명의 전유물이다. 영수들은 죽지 않기에, 그들의 삶은 영원하기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다.

최고의 영수술사인 레인버그 공작조차 아직도 영수의 변덕에 애를 먹었다. 두려움이 없는 존재들이기에 오로지 깊은 교감으로만 영수를 다룰 수 있었다. 항상 귀를 기울여야 했고, 이해해야 했으며, 존중해야 했다. 그렇기에 레인버그 공작은 기라성 같은 자식 중에서, 막내아들의 재능을 가장 눈여겨 봤다. 아직 개화되지 못한 재능이라고 생각했기에, 다른 자식들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다. 단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넘어서 영수술사로서 안타까웠기에 더욱더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만약 폴스타의 능력이 각성한다면.

영수들의 두려움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영수와 친구 같은 관계의 자신과 달리, 아들은 주군과 신하의 주종관계조차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처음 마주친 토지신들의 힘조차 빌릴 수 있으며, 자연을 조율하는 영신들마저 고고한 자존심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감만 있으면 날 뛰어넘을 영수술사가 될 터인데. 쯧, 안타깝구나.'

레인버그 공작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마침내 퀄츠 성의 성주가 되던 날, 증오로 일렁거리던 수십 개의 시선. 원망의 불씨는 지금까지 꺼지지 않았다. 몇 년 전, 솔가르와 루차콴 공작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준비하고 있었다.

레인버그의 가주가 노쇠하여 약해질 때를.

대를 이어온 분노의 불씨를 마침내 불사를 기회를 얻고자.

레인버그 공작이 막내아들에게 힘을 강요하는 이유였다. 황제가 평민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공작이란 작위를 내린 것도, 국륜을 어긴 파격적인 임명을 다른 공작가들이 용납한 것도, 모두 전쟁영웅으로 불리며 민중의 지지를 받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걸.

레인버그 공작은 자신이 노쇠하여 힘을 잃으면 공작가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했다. 울타리가 되어 주기엔 자신은 너무 늙었다. 무엇보다 자식을 전란과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뜻하지 않는 축복이 찾아왔다. 기뻤으나 두렵기도 했다. 잉태를 축하한다는 핑계로 축제를 열어, 적과 아군을 구별했다. 전쟁영웅이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축제를 성대하게 벌렸다. 영수의 힘을 과시하며 적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레인버그 공작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퀄츠 성에 노쇠한 영주의 소문이 퍼지는 날, 피비린내 나는 전란이 시작되리란 걸.

마침내 출산일이 되었다. 처음엔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여 반기지 않았으나, 막상 마주친 생명의 고동은 몹시 벅차고 감격스러웠다. 그는 전력을 다해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고자 했다. 영수의 힘을 쏟아 내어 자식과 아내를 살렸다. 그렇게 레인버그가에 네 쌍둥이가 태어났다.

처음엔 공작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나날이 걱정도 커져 갔다.

그러나 사냥제에서 네 쌍둥이가 달의 아이라 불리게 된 그날,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네 쌍둥이의 재능.

믿을 수 없었다. 깊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자식이지만, 가끔 괴물 같다는 생각조차 했다. 천하의 정점에 설 재목이 무려 넷이나 태어났고, 그 넷이 모두 레인버그가의 핏줄이다. 열 살 때 나뭇가지같이 여린 팔로 오러를 사용하는 훈련된 기사들을 때려눕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공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말괄량이 딸이 타고난 마법사임이 밝혀지자 공작은 껄껄 웃었다. 수줍은 많던 딸이 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되었고, 가장 걱정되던 막내아들은 자신을 뛰어넘는 교감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공작은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증오의 불씨가 산불이 되어 퀄츠 성을 불태우는 날, 네 쌍둥이들은 제국의 기둥을 모두 무너트릴 것이다. 제국의 내전마저 녀석들에겐 하찮기만 할 테지. 그리고 분명 그 중심엔, 녀석이 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만간 달의 성지에 데리고 가야겠어. 그곳이라면 녀석과 어울릴 수 있는 영수를 만날지도 모르지.'

당분간 그는 폴스타 퀄츠 레인버그를 가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이어 갈 것이다.

* * *

베모니아 도시에서 돌아온 라니스타 형이 오자마자 날 연병장으로 호출했다. 그의 도수 치료가 아프긴 해도 엄청 대단한 효과를 준다는 걸 알기에 이번엔 굳게 마음먹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하루만 참으면, 막강한 힘을 얻으리라.

"기초적인 몸을 만들었으니, 이제 무공을 가르쳐 주마."

똑같이 개소리로 시작해서 구타로 끝날 줄 알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개소리를 생략하고 본격적으로 무기를 쥐는 법부터 알려 준 것이다. 라니스타놈은 두 개의 기다란 봉을 들고 오더니 직접 내 손가락을 움직이며 봉을 쥐는 법을 가르쳐 줬다. 저번처럼 도수 치료는 받지 못해도 이것도 나름대로 큰 도움이다. 내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검 한 자루로 콘크리트 건물을 싹뚝 베어 내던 무림인처럼만 될 수 있다면.

"봉을 두 번 휘두르고 옆구리에 붙여."

따라 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왼발은 바닥을 훑고 봉을 쥔 손은 아래를 찌른다."

라니스타형이 보여 주는 대로 따라 했다.

쉬웠다.

"그 상태로 힘껏 밀어서 때려라."

콰아앙-!

세 번째 동작을 따라 하던 난 멍청하게 서서 라니스타 놈을 바라봤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다음 동작에서 갑자기 연병장의 돌바닥을 숟가락으로 짓뭉갠 푸딩처럼 박살 내는 건데?

탁.

혹시나 싶어 따라 해 봤으나 역시 내가 찌른 봉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것처럼 돌바닥에 노크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라니스타 놈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내게 다가와서 또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개방의 방장에게 배운 타구봉법이거늘, 네놈 손에선 노인의 지팡이 질과 다름없구나."

내 말이.

그 뒤에도 수차례 동작을 가르쳐줬으나 형이 연병장을 박살 낼 때, 난 땅을 가볍게 두들길 뿐이었다. 결국엔 봉을 부러트린 형은 날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가르치는 건 도움이 되는구나. 인내심을 길러 평정심을 얻도다."

"사실 형이 못 가르치는 거 아니야?"

놈이 다가온다.

저번과 같다.

어쨌거나 목적은 달성했다.

난 놈에게 개 맞듯이 맞았으나 다음 날 강해질 내 모습을 고대하며 참을 수 있었다.

* * *

"아파."

저번처럼 썩은 진액을 내뿜는 토마토처럼 될까, 의료동이 아닌 내 방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온몸이 욱신거리기만 할 뿐, 썩은 토마토처럼 변하지 않았다. 시발, 이래선 일방적으로 처맞기만 한 거잖아.

끙끙거리며 고통을 참을 때였다.

끼익-

"걸시?"

방문이 열렸다.

욱신거리는 목을 간신히 돌려 열린 문을 확인한 난, 문을 연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사람이 왜 내 방으로 찾아왔지? 순식간에 상황이 스릴러로 바뀌자 고통마저 뒷전이 되었다.

"우샤스 누나."

레인버그가의 셋째 영애.

우야스 퀄츠 레인버그.

병을 치료하는 기묘한 힘이 알려진 후 14살의 나이에 북쪽 전선지대의 간호 장교로 근무 중. 별명, 성녀. 대륙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치유의 힘에 교황청의 견제를 많이 받고 있다고 들었다.

"언제 왔어?"

하지만 전생은 지구 사회를 와해시킨 악녀다.

"동생이 돌아왔다는데 와 봐야지."

그녀는 태연하게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곁에 의자에 앉았다. 난 누나의 친한 척이 당황스러웠다. 4년 전엔 날 봐도 무시했던 자다. 저 악독한 년이 왜 갑자기 저러지.

"저런, 괜찮니? 심한 상처구나."

"아, 응. 괜찮아.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누나는 내 몸을 둘러보더니 꺼림칙한 웃음을 지었다.

"며칠은 고생할 거야."

"괜찮아. 진짜."

"괜찮기는. 치료해 줄게. 아픔이 금방 가실 거야."

"왜?"

"동생이 아픈데 누나로서 당연하잖아? 이게 '일반적인 감정'이라고 들었는데."

당연히 내가 정말 걱정돼서 치료해 주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녀에게 이 행동들은 모두 연극이었다. 누나로서, 동생이 아프면 어떻게 할까? 그 답을 그저 행동으로 하고 있다. 그렇담 나도 연극에 동참해야 한다. 그녀의 평범함을 연기하는 누나의 연극에 어긋난 등장인물이 되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난 두려웠다.

"고마워."

허락하자 우샤스 누나는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와 웃옷을 벗겼다. 손이 내 상처를 어루어 만진다. 따뜻한 빛이 스며들더니, 상처가 아물어 간다. 손길은 모든 상처를 매만졌다. 난 배꼽 아래로 향하는 손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거긴 됐어, 누나."

우샤스 누나는 멈추지 않았다.

"왜?"

뭔 개지랄을.

난 연극을 멈추고 외쳤다.

"당신네 세계에선 어떨지 몰라도 내가 살던 깐… 따비아 별에선 이런 거 용납 못 해."

아무리 그래도 선은 지켜야 했다. 두려움에 잡아먹혀 수치심 없는 짐승이 되지는 말자. 내 발악적인 외침에 누나는 피식 웃더니 내 배꼽 아래에서 손을 멈췄다.

우우웅!

누나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천천히 내게 스며들었다.

배꼽 아래, 라니스타 놈이 말해 줬던 '단전'이란 곳인가.

스며든 빛이 단전에서부터 시작하여 몸 전체를 순환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욱신거리던 고통이 멎고, 피멍이 든 상처가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난 힐끔 빛을 불어넣는 누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시발, 존나 무서워.

난 쌍둥이 중에서 우샤스가 가장 무섭다.

라니스타 놈이 날 두들겨 패긴 했어도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가진 능력도 그렇고, 전생도 그렇고, 지금 현재 모습까지 모두 무섭고 역겹기 짝이 없다.

우샤스 누나는 벌써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뽑힌다. 경국지색, 절세 미녀의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공작 영애면서 격전지에서 활약하여 천사 같은 이미지까지 있다. 엄마의 제국의 꺾이지 않는 꽃이라는 별명까지 이어받았다.

하지만 본모습은 전혀 아니다.

사람들은 속고 있다.

내 눈엔 그녀의 본모습이 보인다.

차라리 아홉 꼬리 달린 여우 요괴가 낫다.

내가 보는 누나의 모습은 반쯤 썩어 백골이 드러난 시체다.

마치 지옥의 사신이자 방금 무덤에서 뛰쳐나온 좀비 같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조차 혐오스럽고, 역겹다.

힘겹게 두려움을 참아내고 있을 때였다.

빛을 불어넣던 누나가 넌지시 물었다.

"4년 전엔 우릴 피했지."

"피했다기보다 그냥...."

"이해해. 넌 지구인이니까."

토가 나올 것 같았다.

8

난 뱀 앞에 놓인 쥐새끼였다. 우샤스의 기이한 힘에 상처는 아물지만 공포는 더 커져 간다. 덜컹거리는 심장을 주워 담고 용기를 내 백골의 눈을 바라보나 일 초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찌 반응해야 할까. 아니, 이미 늦었다. 대답이 유예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우샤스의 전생은 인간 멸종의 선구자다. 내가 기억하기로 성녀는 도시를 파괴하기는커녕 인간을 죽인 적도 없었다. 속사정은 몰라도 들려오는 소문만은 그러했다. 다만 성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정신병을 옮기는 질병을 살포한 듯 순식간에 인간들을 미치게 했다. 수천 년간 이어온 종교가 허물어지고, 국가와 가족의 개념조차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성녀의 편에 섰다. 그녀의 종이 되어 동족 말살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지 않는 이상 어찌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을 멸시하는 자가, 내가 지구의 인간임을 알고 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비굴하긴 싫다.

하지만 놈들 앞에선 난 안위와 생존을 위해 언제나 자존심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누가 태풍 앞에 놓인 촛불이 발버둥 치는 걸 무어라 할까. 상식을 넘어선 악마들에게 굴복하는 건 먹이사슬의 당연한 이치일 뿐이다.

"살려 주세요."

자기 합리 끝에 내린 결론은 진심을 담아 요청하는 것이었다.

후후.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 어떤 의밀까.

방심할 수 없다.

"걱정 말렴."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

"관심 없으니까."

내 전생이 지구인이든 아니든 관심 없다고 했다. 이유가 뭘까, 지금 당장은 내가 레인버그가의 막내아들이라서? 전생은 우샤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우샤스 누나는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눈빛을 빛내는, 마치 '넌 내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확신하는 흑막들의 미소였다.

"지금 당장은."

훗날, 각오하라는 듯 기어코 쿠키 영상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저거다. 저거 때문에 난 쌍둥이 중에서 그녀가 가장 무서웠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선 누나는 태연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상처는 다 치료했어."

연기가 시작된다. 난 꺼림칙함을 애써 지우고 다시 누나의 동생이 되어 대답했다.

"고마워, 누나."

고비는 넘겼다. 난 다음에 보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침대에 누워 머리까지 이불을 덮었다. 연기하고 있으니 우샤스 누나는 곧 내 방에서 나갈 것이다. 젠장, 어쨌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전생이 들통났어. 셋째 누나만이 알고 있을까? 4년을 버티겠다는 일념이 점점 사라지는데.

"…누나?"

생각에 잠긴 난 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자 넌지시 누나를 불렀다.

"왜?"

시발, 안 나갔잖아.

난 덮은 이불을 슬며시 내린 채 고개를 돌렸다. 나가기는커녕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는 누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방금 내가 한 행동이 축객령이란 걸 알 텐데.

"안 바빠? 진짜 나 보러 온 건 아닐 거잖아."

"추기경이 초대했어. 이제 교황령으로 가 봐야 해."

"응. 그럼… 잘 가."

이건 쉬운 난이도의 문제다. 아무리 사이코패스라도 잘 가라고 인사를 했으면 방에서 나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누나는 여전히 나가지 않고 날 쳐다보기만 했다.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거늘, 또다시 고비가 시작되었다.

"왜?"

"여긴 천국 따위가 아니야."

"뭐?"

"비밀을 알려 줄까?"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샤스 누나는 무슨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려고 뜸을 들이는지, 의자의 등받이에 턱을 괴고는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결국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듣고 싶다고 말하고 나서야 흑막의 미소를 다시금 짓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곳은 지옥이야."

순간 울컥해서 속마음을 얘기할 뻔했다.

네 면상이 지옥이다, 악독한 년.

* * *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질러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누나는 기억나? 전생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금기와도 같은 질문이다. 괴물 같던 놈들이 대체 어떻게 죽어서 나와 네 쌍둥이로 태어났는지 정말 궁금했으나, 난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되묻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억나진 않아도 이런저런 대답을 하다 보면 내가 지구인임이 들통 날 게 뻔했다. 하지만 우샤스 누나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우샤스 누나는 내 질문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안 나."

거짓부렁이든 아니든 기억이 안 난다는데 내가 어찌할 방법은 없다.

대화는 끝났고, 우샤스 누나는 나갔다.

"폴스타."

하지만 누나는 문고리를 잡곤 다시 뒤를 돌아봤다.

"돌아온 기념 선물이야, 잘 써."

"응, 고마워."

상처를 치료해줬다고 엄청 생색 내네. 난 다시 고맙다고 말했다. 드디어 우샤스 누나가 문을 닫고 나갔고, 난 그제야 속으로 시부렁거렸다. 속마음으로 하는 욕조차 면상 앞에선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놈들이라면 속마음도 읽을지도 몰라.

그나저나 잘 쓰라니, 표현이 이상한데.

* * *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폭신한 이불과 로즈베리 향기에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대체 언제부터 알았을까? 내 전생이 지구인이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했다면, 그것 나름대로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전생을 알아냈는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왠지....

"기깔나네."

배를 문질렀다. 방금까지 피멍이 들어 부어오른 상처들이 멀쩡하다. 찢긴 상처도 없어졌고, 피부는 원래대로 깔끔하게 돌아왔다. 흉터도 없다. 물리적인 치료의 개념이 아니다. 마법보다 기이하고 굉장한 힘이었다. 상처를 치료하다니, 세상에나.

둘째 누나가 퀄츠 성의 성벽을 날려 버렸을 때보다 오히려 이 힘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상처를 내는 건 쉬우나 치료하는 건 어렵다. 하물며 그녀처럼 순식간에 상처를 치료하는 힘이라니.

"이게 무슨 느낌이었지."

난 우샤스 누나의 손길이 닿은 부위를 천천히 매만졌다. 착각인가? 포근한 요람과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 아니, 그보다 더한 따스함, 마치 새하얀 천사의....

"어?"

새하얀 빛이 몸에 스며들던 그때의 감각을 떠올릴 때였다. 갑자기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매끈하던 배가 동산처럼 부풀더니 팔과 다리까지 풍선처럼 커져 갔다. 화난 해리포터에게 당한 더즐리 부부처럼 내 몸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게 선물이라고? 역시 방금 느낌은 착각이었다. 우샤스 퀄츠 레인버그는 악독한 년이다.

"시발."

몸이 부어올랐으나 크게 당황스럽진 않았다. 우샤스 누나가 날 죽이고자 했으면 이미 짧은 인생은 하직했다. 더군다나 라니스타 놈에게 당한 일이 있기에 이번엔 나름 침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점점 붓기가 빠졌다. 저번에는 썩은 토마토가 되더니, 이젠 마인부우냐? 악마들은 악취미를 공유하나 보다.

똑똑!

"도련님."

"걸시."

걸시가 문을 열고 방 청소를 시작했다. 난 붓기가 빠질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했다. 가만히 누워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는 걸시를 바라봤다. 걸시는 세탁물을 정리하고 나서야 뒤늦게 날 봤다. 그리고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넌 또 왜?"

결국 걸시는 엉엉 울며 서럽게 외쳤다.

"도련님이 못생겨지셨어!"

"소감은 그게 다니?"

걸시는 힘겹게 일어났다.

"흑흑, 도련님. 호박차라도 끓여 올게요. 이제 짜게 먹지 마세요."

이 모습을 보고 짜게 먹어서 부었다고 생각한다.

걸시가 내 시종인 이유였다.

귀찮게 하는 것보다 멍청한 게 낫다.

요즘 들어 살짝 심하다곤 생각했지만 뭐.

* * *

정원을 거닐던 우샤스는 바닥을 기어가던 애벌레를 발견했다.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곁에 있다. 하찮은 애벌레에게 땅은 위험한 곳이다. 결국 나무에 오르지 못하고 딱정벌레들에게 뜯어 먹히거나 개미 떼에게 사로잡혀 여왕의 비료가 될 것이다. 단지 작은 바람, 부러진 나뭇가지가 애벌레의 삶을 결정했다.

우샤스는 몸을 숙여, 조심스러운 손길로 애벌레를 손등에 올려놓았다.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바라보던 우샤스는 다시 나뭇가지에 애벌레를 놓았다. 이번엔 바람에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잎이 많은 나뭇가지였다. 하지만 애벌레는 기뻐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터져 죽고 말았다. 우샤스는 그 모습에 기뻐서 웃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정원. 죽은 줄 알았던 애벌레의 몸이 변화했다. 아직 부화가 이르건만, 번데기도 되지 않는 애벌레의 몸에서 너울 같은 날개가 피어오른다. 반딧불이처럼 빛이 나는 날개는, 서서히 굳어지며 하늘을 날 만큼 튼튼한 날개가 되었고, 더러운 노란 애벌레는 새하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 * *

"바로 훈련에 나가시는 거예요?"

"그래. 밥은 나중에 방으로 가져다줘."

걸시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머머, 도련님이 달라지셨어!"

"너, 날 뭐로 생각했어. 내가 망나니야? 아침 훈련 나가는 걸로 달라졌다고 하게? 운동은 예전에도 자주 했잖아."

"하지만 그 '사자도련님'의 훈련이잖아요! 잔뼈 굵은 기사님들도 벌벌 떠는, 극악무도 제국 최악의 훈련이요!"

걸시의 호들갑을 무시하고 가죽으로 덧댄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난 몸이 낫자마자 연병장으로 나갔다. 이번엔 스스로 사자의 입에 뛰어든 것이다. 며칠 사이 느꼈다. 목적은 알 수 없어도, 라니스타 놈은 내가 강해지길 원하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놈을 쪽쪽 빨아먹을 것이다. 만수무강 호의호식을 위해서라면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투쟁은 전생에서 끝나지 않았어. 이번 생도 난 싸워야 한다. 우습게도 투쟁의 대상이 날 가르치나.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라니스타 놈이 언제 변덕을 부릴 줄 몰랐다. 난 놈의 전생을 상기했다. 악인이기 전에, 무림의 최강자였다. 놈에게서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난 천안통을 완벽히 제어할 힘을 얻을지도 몰랐다. 최강 성능의 소프트웨어에 하드웨어까지 탑재한다면 쌍둥이들을… 이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처럼 마냥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 4년 남았다. 가주가 되어, 라니스타 놈에게 레인버그 공작가를 맡기고 유유낙낙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난 살아남아야 했다.

실제 퀄츠 성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내 몸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비록 두들겨 맞은 게 다였지만 어쨌든 성장하고 있다.

"오호."

연병장으로 나가자 라니스타 놈이 훈련하던 기사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날 번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할 마음이 들었느냐?"

라니스타 놈이 무기를 던졌다.

이젠 목봉이 아니라 철봉이었다. 발 앞에 떨어진 봉을 주워 들었다. 무게가 몇 배 이상 무거웠으나 오히려 처음 봉을 들었을 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가르쳐 주십시오, 사부."

"하!"

라니스타 놈은 날 가르치는 이유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미적지근한 태도로 나서서 아무런 성장을 보이지 않으면 금방 흥미가 식어 관둘 게 뻔했다. 기연이라고 생각하라고? 확실히 받아먹어 주마.

"타구봉법은 변화가 난무하여 위력이 각기 다르다. 같은 동작임에도 뱀처럼 교사스러울 때가 있지만, 범처럼 맹렬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따라 해라, 십이로부터 보여 주마."

난 악착같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비록 여전히 그의 말은 개소리로 들렸고, 단전을 움직이는 '내공'이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멍청한 놈."

몇 번 가르치던 라니스타 놈은 또 폭력을 사용했다. 휘두른 봉에 맞고 몇 바퀴 굴렀으나, 난 벌떡 일어났다. 전보다 아프지 않다. 이 또한 성장의 증거, 모든 건 만수무강 호의호식을 위하여!

"더 가르쳐 주십시오! 사부!"

라니스타 놈이 '사부'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냈다. 강자에 대한 아부를 잊지 않으며 계속 무공을 배웠다. 맞아도 일어났다. 셋째 누나가 준 '선물'일지 몰라도, 기이하게도 전엔 끙끙 앓던 상처들이 이번엔 크게 아프지 않았다.

"좋은 자세다."

뭐가 그의 마음에 들었는진 몰라도 평소엔 두들겨 패고 끝내던 수련이 계속 진행되었다. 난 삼십육로타구봉법(三十六路打狗棒法)이라 불리는 무공의 자세는 외우기 쉽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공심법은 터득하지 못했다. 대체 단전에 기를 어떻게 쌓으라는 건데?

이제 라니스타 놈과의 수련이 일과가 되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지 않는 날에는 항상 무공을 배웠고, 그가 없는 날에도 혼자 봉법의 자세를 복습했다.

9

퀄츠 성은 평안했다.

라니스타 놈은 청늑대 기사단을 이끌고 대협곡의 죽은 땅으로 전지훈련을 가고, 악독한 년은 추기경의 초대를 받아 교황령으로 떠났다. 사악한 악마 두 명이 사라진 덕일까, 퀄츠 성의 햇볕이 유난히 따사로운 날이었다. 오늘 나는 마음껏 귀족 공자의 호강을 누리기로 마음먹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좋은 점 중 하나가, 원한을 씻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계 침공으로 서글픈 생존의 나날 속에서 내 젊음은 하찮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특히 맛있는 걸 먹지 못한 게 큰 한으로 남았다. 항상 맛없는 군용 옥수수죽이나 처먹었으니 오죽할까. 공작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호화스럽게 살아왔다고 해도 전생을 떠올린 순간부터, 내 한은 이어진 것이다.

퀄츠 영지는 추운 지역이나 산림 자원이 풍부해서 질 좋은 식재료가 많다. 특히 해안 도시인 베모니아 도시로부터 공수되는 풍부한 해산물이 굉장하다. 난 주방장에게 기름기가 잔뜩 오른 방어 요리와 대게찜, 그리고 양고기 스튜와 절인 배추 등을 주문했다.

"소주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

식당에는 나밖에 없었다. 일부러 가신, 가솔들이 한참 공무를 보는 늦은 점심때를 골랐다. '밥은 같이 먹자'라는 아버지의 가훈이 있지만, 우습게도 '배고프면 참지 마라'라는 가훈도 공존했다.

널널한 가풍의 레인버그 공작가는 귀족 공자라고 하더라도 원할 때, 언제든지 식사를 할 수 있다. 다른 귀족 가문은 식탁이 전쟁터인 줄 안다. 예법을 지키며 정세에 대해 논하고 수련을 보고하지만, 레인버그 공작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

절인 배추로 입맛을 돋우고 쫀득한 방어회를 먹었다. 초고추장이 있으면 좋겠지만, 마늘 소스도 나쁘지 않다. 불우한 전생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쌍둥이들은 절대 모를, 이 식음의 기쁨이란.

마침내 하이라이트, 버터를 넣고 찐 대게찜이 나왔다.

난 곧바로 게딱지를 뜯어 볶은 쌀에 내장을 비볐다.

밥 6, 내장 소스 4 비율. 버터의 고소한 풍미와 쌀의 달달한 냄새가 뒤섞여 그야말로 미미美味의 냄새를 풍겼다.

맛있게 비벼졌다.

침이 고여 흐를 지경이다.

정성껏 숟가락에 가득 퍼담아, 입으로 향한다.

"이게 뭐야? 맛있냐?"

그때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숟가락을 뺏어 가는 자가 있었다. 난 침을 꼴깍 삼키곤 멍청하게 멀어지는 숟가락을 바라봤다. 그자는 내 것이었던 게딱지비빔밥을 먹고는, 맛있다고 소리 지르더니 이제 접시에 있는 것까지 몽땅 뺏어 먹었다. 하지만 난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나 혼자 있던 식당이었다. 어느 순간 유령처럼 나타나, 내 만찬을 방해하는 저 여자.

4년 동안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아홉 개의 꼬리는 여전했다.

나만 보이는 여우의 꼬리다.

그녀의 전생은 여우 요괴이며, 요마들의 여왕이었고.

지금은 레인버그 공작가의 둘째 영애이자 현 마탑의 촉망받는 마법사다.

"멜리사 누나."

14살이 된 네 쌍둥이는 모습이 너무나 달랐다. 첫째 라니스타 놈은 성인을 압도하는 육체를 지닌 머슬맨이 되었고, 셋째 누나는 내 눈엔 괴물이었으나 어쨌든 절세미녀라고 소문이 났다.

난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둘째 누나는 갈색 머리와 눈을 제외하면 사실 생김새는 레인버그가의 핏줄과 가장 거리가 멀었다. 멜리사 누나는 모든 게 컸다. 키도 형하고 비슷하고, 아무튼 모든 게 컸다. 제법 미녀라고 소문난 모양이지만 사실 당연했다. 속은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니까.

"탑에서 언제 왔어?"

힘이 약한 게 이처럼 분할 수가 없었다. 난 내 음식을 남김없이 뺏어 먹는 여우를 보고도 애써 담담한 척했다. 멜리사 누나는 마법사인 게 들통난(스스로 알린) 이후부터 파격적인 행보 끝에 14살의 나이에 마탑에서 중요한 직위까지 올랐다고 들었다. 저 멜리사가 퀄츠 성에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탑? 시시해서 관뒀어."

이 망할 쌍둥이들은 대체 목적이 뭘까?

마탑의 권위에 대해선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다. 마법이란 신비로운 힘을 다루는 마법사들의 성지이자, 왕국의 영토에 있으나 독립적인 지위와 영지로 분류되며, 사실상 마탑은 한 국가의 권위와 맞먹는다고 했다. 그런 마탑에서 어린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올랐다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아버지와 맞먹는 권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쿤칸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도 유능한 영재들이 모이는 마탑인데 관둔 이유가 명쾌하다. 시시해서 관뒀단다.

내가 먹었던 방법대로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으며 멜리사 누나는 정말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흥미로워. 내장 소스라, 네가 살던 세계의 방법이니? 이 세계는 문화 수준에 비하여 요리의 질이 낮지. 재밌겠네. 네 요리 지식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까? 귀족들의 식생활을 뒤바꿀 수 있을까? 어쩌면 조리 방법이 발달하지 못한 건 문명의 역사가 짧아서 그럴지도 몰라. 이 세계는 이미 혼잡해. 요마계와 비슷하지만, 더 개별적이지. 악마들뿐만 아니라 아인, 심지어 날개 달린 짐승까지 저마다 개체의 특성을공유하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 있어. 인류의 종마저 나뉘어 있으니 기묘하지. 하지만 위협적인 건 그다지 없어. 마도 위계도 제법 재밌긴 하지만, 내 마법엔 한참을 못 미쳐."

멜리사 누나는 말이 많다.

보통 많은 게 아니라 정말 말이 많다.

오죽하면 태어나자마자 옹알이를 끊임없이 했다고 전해질까.

아가리에 6기통 모터를 달고 나와서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걸 좋아했지만 레인버그가에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말이 많았으나 쾌활했고 명랑했으며, 레인버그 공작가의 유일한 마법사이기도 하여 모두가 그녈 좋아했다.

나도 멜리사 누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전생을 몰랐다면,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가장 유명한 호칭은 미국을 이긴 여자, 핵미사일을 한데 모아 우주 바깥에서 터트리던 신위는 인류 멸망의 신호탄이었다.

난 멜리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세계의 마법 등급 기준인 서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

그러다가 질문을 받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난 마법사가 아닌데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그야,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빨리 그녀가 떠나면 대게찜 한 마리를 더 시킬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멜리사의 말에 식욕이 확 다 달아났다.

"위대한 마법사들의 나라, 깐따삐아에서 왔다고."

도우너 이 새끼, 마법사였나?

* * *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깐따삐아는 허구다.

"깐따삐아의 마법은 이세계의 마법과 전혀 달라. 난 잘 모르겠는걸."

난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맞장구쳤다. 이번엔 우샤스 누나 때처럼 긴장해서 변명을 유예하진 않았다. 하지만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이 들진 않았다. 상황이 너무 다르다. 애초에 주제가 내가 깐따삐아에서 왔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깐따삐아는 허구의 세계, 80년대 한국 만화주인공 '도우너'의 행성이다.

내 대답에 멜리사 누나가 웃었다.

순박할 만큼 활짝 웃었으나, 눈빛만은 교묘해서 요상한 미소였다.

멜리사는 여우다. 절대 우샤스 누나보다 만만하지 않다.

"그러니? 재밌네. 다른 마법이라, 더 자세히 들려주라."

"위대한 마법사들의 나라, 깐따삐아를 모른단 말이야?"

"있다고만 들었지. 위대한 마법사들의… 나라가."

섬뜩했다.

멜리사는 깐따삐아 행성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대화를 계속하길 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장단을 맞춰 주는 것밖에 없었다.

"깐따삐아의 마법은… 대마법사 도우너 님을 빠트릴 수 없지. 나도 몇 번 본 적 있는데 정말 굉장했었어."

"도우너? 신기한 이름이네. 강한 마법사야?"

"엄청난 마법사야. 노랑머리 빨간 코가 나타났다고 하면 모든 이들이 벌벌 떨었다니까."

"어떤 마법을 사용했대?"

"깐따삐아에선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을 사용해. 도우너 님의 박치기는 태산을 갈랐다고도 하고… 음, 정말 궁금하면 나중에 내가 글로 정리해서 보내줄게."

"흥미가 가시잖아. 지금 듣고 싶어."

난 도우너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지어 냈다. 어릴 적 보았던 역겨운 빨간 코의 둘리 친구가 내 주둥이를 통해 대마법사로 둔갑했다. 이야기의 바탕이 될 주제가 있는 덕에 나는 말이 술술 나왔지만, 대부분 개소리이자 횡설수설이었다.

"마법으로 몸을 강화하는 건 흔하지 않지. 쓸모가 없기 때문이야. 아무리 마력을 둘러도 처음부터 체기지선을 단련한 무인들을 이기진 못해. 깐따삐아인들의 육체는 다른가 보지? 마력흡수 체질을 타고난 건가?"

진지한 멜리사 누나의 태도에 이제 내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날 놀리는 것치고는 너무 깊게 들어오잖아.

"응. 대마법사 도우너 님은 소드마스터 고길동마저 줘 팼거든. 무인들을 뛰어넘는 육체강화마법인 거지."

멜리사 누나는 흥미롭게 경청했다. 순수하게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탓에 마치 아이들에게 지어낸 동화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내 주둥이를 계속 나불거린다.

"재밌긴 한데 별거 아니네. 더 대단한 마법은 없냐?"

심지어 도우너를 대변하기까지 했으니, 시발.

"깐따삐아인들은 '타임코스모스'라는 시간을 넘나드는 마법 도구까지 만들어 냈대. 난 본 적이 없지만, 아니 허구일지도 몰라. 시간을 넘나들다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하하...."

계속 개소리에 맞장구쳐 주던 멜리사 누나는 이번엔 조용했다. 변한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던 그때, 그녀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난 본능적으로 포크를 움켜쥐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악수를 나눌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누나가 히죽 웃었다.

"넌 뭔 마법 쓰냐?"

처음부터 멜리사 누나가 날 놀린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마법을 못 쓴다'라고 말하면, 분명 저 여우는 태도를 돌변하여 자기를 놀렸다며 길길이 화를 낼 것이다. 억울하더라도 약자인 게 죄다. 처음부터 마법을 못 쓴다고 할걸, 괜히 아는 척을 했나. 아니, 어차피 여우가 날 놀리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어떤 반응을 보여도 결국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내 마법은 여기서 못 보여 줘."

기다렸다는 듯, 누나가 내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손이 얼마나 억센지 라니스타 형과 비견될 만큼 악력이 셌다.

"정원으로 가자."

잔뜩 꼬였다.

마치 희동이 인성처럼.

* * *

퀄츠 성엔 금지가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대륙 제일의 영수술사이자 레인버그가의 가주, 푸른 기둥, 제국공작 라이베라 퀄츠 레인버그의 창궁관이었고, 다른 한 곳은 퀄츠 성 뒤뜰, 우뚝 솟은 성벽 아래 펼쳐진 대정원이다.

아인들의 침략을 대비하여 퀄츠 성의 성벽은 높고 넓다. 그래서 성의 뒤뜰이라곤 하나 웬만한 숲 크기 정도는 된다. 예전에는 정원으로 사용했지만, 멜리사 퀄츠 레인버그, 공작 영애가 소유권을 얻은 후로 금지의 숲이 되어 버렸다.

그곳은 레인버그가의 식구라면 절대 얼씬도 하지 않는다. 혹시나 어린 시녀가 길을 잃어버릴까, 무수한 경고 표지판이 숲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뭣 모르는 손님들이 퀄츠 영지의 붉은 나무에 감탄하여 숲으로 들어가면, 보통 죽지는 않으나 한 달에서 두 달이 지난 후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발견되곤 했다.

공작가의 뒤뜰에 금지의 숲이 있는 게 우스꽝스러운 꼴이지만, 적어도 그 숲에서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을 본 자들은 함부로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멜리사 누나가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레인버그 공작가가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검은 사제들이 퇴마 의식을 거행하러 몰려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나를 따라 금지의 숲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으나, 울창하게 자라난 적목의 숲에 발을 디디자마자 꺼림칙한 어둠이 순식간에 주변을 채웠다. 공기도 무겁고 습했다.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간헐적으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의 소리라기엔, 너무나 선명한 웃음소리였다.

히히히, 호호호.

나는 눈을 감았다.

다른 이들은 그저 희미하게 보일 '그것들'이 분명, 내 눈엔 선명하게 보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멜리사 누나의 옷깃을 잡고 걸었지만, 그녀는 무어라 하진 않았다. 마치 내 꼴이 놀이공원 공포의 집에 들어갈 때 누나 손 꼭 붙잡고 들어가는 어린애 같았지만, 괴물들과 귀신들을 마주치는 것보단 부끄러운 게 더 나았다.

부스럭-!

탁, 탁, 탁. 틱!

휘릭, 콰직!

눈을 감자 이제 귀가 말썽이다. 보이지 않자 저절로 청각에 집중했는데, 숲속에선 들려선 안 될 효과음들이 우후죽순 들려왔다. 상상은 내 간담을 찌르는 창이 되어 쿡쿡 찔러 댔다. 금지의 숲의 괴담, 밤에 창문을 두들기는 노파가 있었는데 3층 창문이었다더니, 부엌에서 발견한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이 숲까지 이어진다더니, 도깨비불 수백 개가 행렬하는데 그 선두에 선 자가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자라더니,

그래, 괴담이 아니라 다 사실이겠지.

"눈 떠도 돼, 겁쟁이 동생아."

금지의 숲, 여우의 오두막에 도착하자 난 슬며시 눈을 떴다.

다행히 주변에 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두막은 마녀의 집이었다. 온갖 고서적들로 가득해서 오래된 책의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고, 선반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선 어떤 마법이라도 사용해도 돼."

멜리사 누나는 여전히 날 놀릴 마음이었다. 마법을 보여 주지 않으면, 저 오두막 바깥의 기괴한 괴물들에게 내 살점을 맛보게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언제나 난 쌍둥이들이 과격하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재빨리 다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누나에게 말했다.

"가마솥 안에 깨진 유리, 의자 아래에 찢어진 종이, 그리고… 함(函) 안에 고양이?"

윽,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빌어먹을 개눈깔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급히 써서 내가 무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법은 이거야. 보이는 거. 하지만 사용하면 너무 진이 빠져. 우에엑! 토할 것 같다. 그만 가 봐야겠어."

"잠시만."

멜리사 누나는 천천히 가마솥 안과 의자 아래, 그리고 함을 열어 확인했다.

"없잖아?"

유리나 종이, 고양이는 없었다. 시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오호, 뭔 의미지?"

천안통은 규정짓지 못하는 힘이다. 능력을 가진 나조차 어떤 게 보이는지, 그 한계가 어딘지 모른다. 단지 보여서 보이는 것, 장금이가 홍시 맛을 홍시 같다고 하여 홍시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름의 변명거리를 찾던 난 오두막 창문 바깥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생물의 움직임이라기엔 너무나 기괴했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 저주받은 오두막집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나도 몰라. 그냥 보인 거야. 깐따삐아 마법은 지 마음대로거든. 그만 가 봐도 될까? 머리가 너무 아파서. 윽윽."

"나랑 얘기하기 싫구나? 뭐, 그래. 나중에 봐~"

오두막집을 나서던 난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배웅… 해 줄래요, 누나?"

혼자 가기엔 너무 무서운 숲이다.

* * *

새하얀 나비를 쫓아 고양이가 오두막집 창문으로 들어왔다.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비는 고양이의 추격에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선반 위에 올라간 고양이는 나비를 쫓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잘못 휘두른 앞발로 둥근바닥 플라스크를 쳐 버렸다. 플라스크는 아래의 가마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큰 소리에 깜짝 놀란 고양이가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발톱으로 찢었다. 찢긴 종이가 힘없이 의자 아래로 나풀나풀 떨어진다.

고양이는 그제야 오두막집이 빈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무서운 여우가 있다. 잡아먹히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발버둥 치며 달아나지만 들어왔던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결국, 선반에서 굴러떨어진 고양이는 운이 나쁘게도 열린 함에 빠졌고, 충격으로 뚜껑이 닫혀 함에 갇히고 말았다.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멜리사는 점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요놈 봐라?"

가마솥 안에는 깨진 유리, 의자 아래는 찢긴 종이, 그리고 함 안에 고양이.

함을 열자 고양이가 황급히 달아났다.

10

퀄츠 성에서 지내는 짧은 시간 동안 쌍둥이들과 모두 마주쳤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내가 남쪽 섬에서 돌아오자마자 놈들이 나타났다. 견제와 관심일까? 난 놈들이 날 대하는 방식에서 한 가지 공통된 점을 알아냈다. 이 새끼들, 교묘하게 날 실험하고 있다. 라니스타 놈은 수련을 핑계로 내게 무공을 가르쳤고, 우샤스 누나는 상처를 치료해 주며 내 몸에 어떤 짓을 해 놨다. 어제는 멜리사 누나가 교묘하게 내 힘을 확인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며칠 사이 기사들과 비견될 체력과 라니스타 놈의 매타작을 버틸 근육이 생겼다. 모두 내가 노력했다기보다 썩은 토마토와 마인부우 등 쌍둥이들의 실험동물이 된 결과였다. 처음엔 놈들이 날 재단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생각할수록 쌍둥이들이 내게 힘을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걸까? 내가 강해지면 놈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고민해 봤자 선택권은 없다.

주니까 받아먹는다.

난 아침마다 무공을 수련했고, 가끔 멜리사 누나의 마법 실험을 도와줬다. 그러다 심한 상처를 입고 입원해 있으면, 어느샌가 우샤스 누나가 돌아와 기이한 힘을 부려 날 치료하고, 부풀어 오른 찐빵으로 만들었다. 그럴수록 내 몸은 점점 평범함을 벗어났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에 비하여 힘은 약하더라도 체력만큼은 엇비슷해졌다.

전생과 비교하면 어떨까, B급 헌터 정도는 넘지 않을까?

물론 놈들에 비하면 조족지혈 수준도 안 되겠지.

놈들은 격이 달랐다. 이 세계에도 아버지처럼 강자들은 존재했지만, 쌍둥이들의 전생을 생각해 보면 감히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다. 다행인 건 아직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14살의 쌍둥이들이 쌓은 업적은 대륙 역사를 통틀어도 전에 없던 파격적인 행보지만 가진 힘에 비해선 얌전한 편이다. 어쩌면 개과천선하여, 나처럼 현생에 만족하는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당분간 조용히 지내고자 할 것이다.

4년 전, 내 방에서 놈들은 목적을 밝혔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쌍둥이로 태어났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확실히 네 쌍둥이는 내가 생각해도 우연이 아니다.

저 세 명까진 신의 천벌이라고 여기면 되겠지만, 나까지 덤으로 태어나 버렸다.

그러나 몹시 궁금하긴 해도 그들처럼 혈안이 돼서 알아낼 마음은 없었다.

힘든 일은 쌍둥이에게 맡기고 난 공작가 막내아들의 호화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싶을 뿐이었다.

"4년만 버티자."

괴물처럼 보이는 쌍둥이들도 사실은 14살의 소녀 소년들이다.

아직 몸이 다 성장하지도 않았다.

믿기지 않아도 라니스타 놈이 말한 걸로 보면 전생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쿤칸인이 성장을 멈추는 나이인 18살, 그때까진 큰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지구처럼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해도 힘은 모두 되찾은 뒤에 하겠지.

....

그럴 줄 알았다.

난 놈들의 포악한 성정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 * *

침대에 앉아 여유롭게 다과를 즐기고 있던 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먹던 비스킷과 홍차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누워 이불을 덮었다. 숨을 곳은 없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하는 게 최선이다.

처음에 난 멜리사 누나가 밤중에 찾아왔기에, 이번에도 내 '마법'을 실험하고자 온 줄 알았다. 저번 오두막 때 이후로 멜리사는 내게 자주 지근거렸다. 자는 척이 통하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내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셋째 누나, 우샤스를 확인하고 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단번에 눈치챘다.

심지어 문을 닫은 건 라니스타 놈이었다. 세 쌍둥이가 모인 걸 보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방광이 저릿거릴 만큼 엄청난 전율이 일었다. 4년 전처럼 쌍둥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 방에 모였다. 14살 소년소녀처럼, 파자마 파티나 하자고 모인 건 아닐 거다. 복장 또한 라니스타 놈은 청늑대 기사복, 둘째 누나는 마법사들의 로브를 입었고, 셋째 누나도 쿤칸의 국교인 아지비타교의 사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드디어 쌍둥이들이 세계정복 시나리오를 실행하는 건가? 무서우면서도 궁금했다. 대체 뭐 때문에 작당 모의를 해? 이불은 머리까지 덮었지만, 귀는 쫑긋 세우고 쌍둥이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우샤스가 준 정보는 진짜였어."

우샤스? 셋째 누나가 준 정보?

멜리사 누나의 말이 시작되자 다른 두 명도 맞장구를 쳤다.

물론 난 전혀 모르는 얘기였다.

"하! 드디어."

"그렇다면...."

"그래. 해독된 문헌에서 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가 보니, 입구가 아지비타교의 온갖 결계들로 감춰져 있더군. 추기경의 서고에서 발견한 문헌이니 확실하겠지. 다이모니온의 구덩이가 분명해."

놈들이 날 제외하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 대화를 유추해 봐도 보통 비범한 게 아니다. 추기경의 서고? 아지비타교의 결계? 우샤스 누나가 요근래 교황령을 자주 왕래했던 이유인가? 무엇이 되었든 몹시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쌍둥이들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출발은 언제 할래?"

라니스타 놈은 심지어 신나 하는 목소리였다.

"지금 당장. 머뭇거릴 이유가 있나?"

듣다 보니 이제 곧 놈들이 갈 것 같다. 난 이불에 숨어 쌍둥이가 당장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일을 꾸미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알아보고 싶진 않았다. 대체 왜 내 방을 작당모의 장소로 사용하는진 몰라도, 다행히 나한텐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넌 잠옷 차림으로 갈 거냐?"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둘째 누나가 내게 물어봤다.

난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도 가?"

"그럼 안 가게?"

"응, 안 갈려고."

멜리사 누나는 농담하지 말라며 키득키득 웃었다.

"미안한데 대체 뭔 얘기들 하는 거야? 이 밤중에 어딜 간다고?"

대답은 우샤스가 했다.

"무저갱."

처음이었다.

우샤스 누나의 면상보다 그녀가 내뱉은 단어가 더 무섭게 느껴진 건.

* * *

무저갱.

바닥이 없이 깊은 구덩이라는 뜻이다.

쿤칸 제국에선 이 세계를 흑구黑球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지비타교의 창조설화의 영향이다. 창조설화에 따르면 세상은 원래 어둡고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는데, 그곳에서 사악한 악마들이 서로의 살점과 피를 뜯어먹으며 무한 영겁의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모습을 딱하게 여긴 아지비타교의 신이 그 위에 땅을 세우고 씨앗을 심었으며, 자신의 눈물을 뿌려 초목을 성장시켰다고 한다. 바다는 신의 눈물이 고인 것이며, 공동 위에 세워진 땅은 우리가 사는 대지가 되었다나.

무저갱은 신이 차마 메꾸지 못한 구멍이라고 여겨졌는데, 어둡고 거대한 공동空洞으로 향하는 깊은 구덩이라고 불렸다. 제국을 넘어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이러한 무저갱이 발견되었고, 아지비타교의 영향을 받는 국가뿐만 아니라 동대륙과 미지의 땅, 아인들의 대륙에서조차 무저갱은 공통적으로 공동空洞으로 향하는 통로라고 알려졌었다.

악마들이 사는 지하세계로 통하는 곳.

세계의 역사를 배울 때 몹시 신기하다고 여겨졌다.

분명 무저갱에 무언가 있기에, 국경과 문화를 넘어 공통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저갱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무저갱에 대해 떠도는 소문 중엔 구덩이 깊숙한 곳에는 반드시 보물이 존재하나, 보물로 유혹하여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도 있다고 했다.

실제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 황실에서 쿤칸 제국의 무저갱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결국 모든 무저갱을 조사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여파로 악마와 아인들까지 엮인 대전쟁과 내전을 겪어 풍비박산이 났으니, 국가 단위의 힘으로도 쉽게 조사할 수 없는 곳이다.

"난 안 가."

그런 곳을, 저놈들은 네 명이서 가자고 한다.

절대 가선 안 되는 곳, 특히 저 악마들하곤 더욱더 가면 안 되는 곳이다.

단호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다.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맹세를 잊었느냐."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강자의 편이었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쌍둥이는 언제나 힘을 합한다고 맹세했지."

라니스타 놈이 눈을 번득였다. 놈은 4년 전에 지들끼리 한 맹세를 들먹이며 날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맹세를 어기면 어찌 되는지 확인시켜 주랴?"

난 다른 두 명을 바라봤다. 둘째 누나는 깔깔 웃으며 자신도 확인시켜 줘도 되냐며 말을 보탰고, 셋째 누나는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젠장.

악마가 사는 곳에 악마들과 간다.

좋게 생각하자.

정말 무저갱에 악마가 있어도… 1대3이잖아?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쓸만한 건 가죽을 덧댄 천옷밖에 없었다.

시발, 풀 플레이트 갑옷으로 무장해도 모자랄 판인데.

"엄마에게 보고를...."

마지막 카드를 꺼냈으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지금 바로 간다니까?"

멜리사 누나가 앞장 서서 방문을 열자, 문 너머로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퀄츠 성 대저택의 고풍스러운 복도가 아닌 짠바람이 부는 바다였던 것이다.

* * *

그저 내 방의 문턱을 넘었을 뿐인데 어딘지도 모르는 바닷가다. 방금까지 침대에 있던 난 지금, 새하얀 빛깔의 모래사장을 밟고 있다. 부드럽고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산란하는 거북이들도 보였다. 드넓은 바다는 색이 밝고 맑았다. 쨍쨍한 햇볕에 유릿가루를 뿌려 반짝이다 못해 눈부신 바다였다. 퀄츠 영지의 해안가 마을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무엇보다, 퀄츠 성은 지금 밤인데 여긴 대낮이잖아. 대체 어디야?

"신발 안 신었어."

"문 닫혔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난 문득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멍청하게도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간단한 것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멜리사 누나에게 말했으나 이미 쌍둥이들이 모두 문을 넘은 뒤였다. 닫힌 문은 온데간데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내가 넘어왔던 곳을 향해 손을 휘적거렸지만 문 따위는 없는 허공이었다. 일단 신발은 놔두고,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멜리사 누나? 공간이동도 할 수 있어?"

공간 이동.

흔하진 않지만, 아예 불가능한 능력은 아니다. 실제로 방위 본부에서도 한두 명, 공간이동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짧은 거리를, 혼자만 이동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만 해도 특등급 능력으로 국가재산 취급 받았었는데.

멜리사 누나는 순식간에,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을 먼 거리를, 이처럼 간단하게, 그것도 여러 명을, '공간 이동'했다.

"아니, 바보야. 이건 공간 회귀잖아."

멜리사 누나는 내 말을 정정했지만, 회귀나 이동이나 무슨 차이인가 싶었다. 그녀가 지금 선보인 공간 마법은 수많은 마법이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도 분명 특별하고, 귀중한 마법이다. 하지만 날 제외하고 다른 쌍둥이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모두 방문을 열고 공간을 뛰어넘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구니까 내 호들갑도 우스워졌다. 난 결국 그러려니 하고 질문했다.

"여긴 어딘데?"

"슈테르닐 왕국의 어느 섬."

"…적지잖아?"

슈테르닐 왕국. 전신은 대전쟁 때 제국에 반기를 든 소도시왕국 연합. 역사가 짧지만, 대부분 제국을 향한 증오의 역사다. 휴전이라지만 적지다. 게다가 시차가 날 만큼 먼 거리의 대륙 반대편이잖아.

사실 내가 호들갑을 떨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쌍둥이들에게 적지로의 공간 이동은 중요한 게 아니다. 놈들의 목적은 무저갱이며, 그 외의 것은 일반인이 보기에 기겁할 일이라도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다. 그 사실을 일찍 받아들인 난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발언권이 없으니 주둥이에 힘을 줄 필요가 없다.

"느껴져, 깊은 악기惡氣가."

"하! 저기로군. 고약한 냄새로다."

"재밌겠어. 대악마의 본신과는 첫 대면, 과연 위협적일까? 흥미로운 표본이야. 무저갱의 존재에 붉은 끈은 과연 이어질지."

역시 당황한 건 나밖에 없었다. 쌍둥이들은 흥분했다. 내겐 적나라하게 놈들의 날뛰는 감정이 보였다. 우샤스 누나는 침착해 보여도 백골이 번득였고, 라니스타 놈은 벌써 장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멜리사 누나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즐거워했다.

휘말리지 않게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난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쌍둥이들이 저마다 바다로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라니스타 놈은 공중을 발로 박차며 허공을 뛰어갔다. 저게 말로만 듣던 무림인의 허공답보인가? 셋째 누나는 어느샌가 등에서 뼈다귀 날개를 펼치더니, 지옥에서나 볼 법한 악마처럼 날아다녔고, 둘째 누나는 마치 공중을 유영하듯 날았다.

꺼져라, 악마들.

적지에 홀로 남겨지는 게 더 나았다.

제발 뒤돌아보지 마라.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거북이의 등껍질 뒤에 숨기까지 했다.

위잉-!

"시발."

몸을 감싸는 푸른 빛깔의 무언가.

아마 마법이겠지.

거북이 등껍질을 잡았으나 부유하는 몸은 멈추지 않았다. 불쌍한 거북이의 껍질을 놓아주자 내 몸은 둥둥 하늘을 날았다. 모습은 날아다닌다기보다 하늘에게 먹살이 잡힌 꼴이지만. 저항은 소용이 없었다. 난 저절로 공중에 뜬 채 놈들에게로 날아갔다.

"귀찮은 동생이야. 하늘도 못 날다니."

멜리사의 짓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게 이상하지.

아니, 놈들에겐 이상한 게 아닌가.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하늘 정도는 날아 줘야 되나 봐.

하늘을 나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적어도 스스로 하늘을 날았으면, 더 신났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법에 이끌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드넓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건 안전벨트 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불안하고 무서웠다. 난 자포자기했다. 옆을 지나가는 갈매기떼들과 인사하며, 파닥파닥 물 위를 뛰어다니는 소금쟁이들을 노려봤다. 바다소금쟁이다. 새삼 이 세계가 지구와 생태계가 몹시 다름을 느끼는구나.

11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슬슬 두려움이 한계치를 넘어갈 때쯤.

"저기가 입구야."

쌍둥이들이 멈추어 섰다. 멜리사 누나가 어떤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저갱의 입구, 확실히 요상했다. 바다의 축구장만큼 넓은 부분이 근처 바닷물의 색보다 훨씬 짙었는데, 푸른 물로 가득 찬 게 깊은 동굴처럼 보였다. 바다의 블루홀인가? 내해의 얕은 바다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망망대해에도 있구나. 저게 정말 무저갱의 입구라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다. 대체 저런 곳을 어떻게 찾았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이미 놈들이 마음먹은 순간, 나는 일절의 기회도 없이 무저갱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저 깊고 어둡고 무서운 심해의 구덩이에도.

"결계가 막고 있군."

내 방에서, 분명 그런 말을 들었다.

아지비타교의 결계가 있다고.

귀족들이 검은 사제들을 두려워하는 건 그들이 권력을 쥔 종교 세력이라서가 아니다. 사제들의 힘은 실존하는 힘이며, 결계같이 신비한 힘도 지니고 있었다.

채앵-!

그러니 라니스타 놈이 장검을 뽑아 휘두를 자세를 취하는 건 분명 결계를 부수기 위해서다. 난 깊은 바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확실히 무언가 있었다. 철렁이는 물살이 부자연스럽게 부서지는 곳, 마치 투명한 유리벽을 세운 듯 블루홀을 감싸고 있는 무형의 무언가가.

"벤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검으로 벤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라니스타 놈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검을 휘두르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강한 힘을 지녔다는 건 안다. 이 먼 거리에서, 검을 휘둘러 저 결계를 부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쉽사리 그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대체 어떻게 벤다는 거지?

그때였다.

라니스타 놈이 벼락같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내가 한 온갖 상상은 현실에 비하면 같잖기만 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딱히 무언가 특별한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것. 간결한 휘두름이다. 내게 무공을 가르칠 때도 자주 보여 줬고, 기사들을 훈련할 때도 저렇게 검을 휘두른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와 결과는 달랐다.

정말 무시무시했다.

콰아아앙-!

라니스타 놈은 단 한 번, 검을 휘둘러 결계를 파괴했다.

처음엔 귀가 먹먹할 만큼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후 결계는 반으로 갈라져 서서히 사라졌다. 내가 천안통으로도 간신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은, 그저 결계가 부서지기 전, 붉은빛이 아른거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검 한 자루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지구멸망의 주범, 괴마천왕 대흑천의 진정한 힘.

결계가 부서지자 격변이 일어났다.

바닷물이 하늘로 치솟는 용솟음이 수십 차례 일어나더니, 주변 바닷물이 빨려 들어가며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거대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쿠오오오오-!

자연의 대격변, 경이로운 광경이지만 흡사 바다의 좌변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참 물 한번 잘 내려가네.

마침내 심해에서부터 무저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동굴은 괴물의 아가리처럼 공포스러웠다.

꺼림칙했다. 난 애써 눈을 돌렸다. 더 지켜보면, 보면 안 될 무언가가 보일 것 같았다. 심연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하하!"

시작은 라니스타 놈의 호쾌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무저갱을 향해 달려갔다.

누나들도 뒤이어 무저갱으로 들어간다. 나와 달리 두려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잠깐, 타임. 형제자매들."

심연은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당연히, 거기에 쳐들어가는 것도 안 된다.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몸을 맡겼다.

깊이, 깊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난 심연의 구덩이에 낙하했다.

* * *

슬며시 눈을 뜬 난 심장이 멎을 뻔했다.

무저갱은 어두웠다. 문제는, 개눈깔은 어두울수록 괴물을 더 잘 본다는 것이다.

"시발!"

천안통의 진가가 뜻하지 않게 저절로 발휘되었다. 나는 무저갱 깊숙한 곳까지 환히 보였고, 무저갱에 존재하는 수백 마리의 괴상한 생김새의 괴물들 또한 보고 말았다. 무저갱의 소문은 진짜였다. 아니, 오히려 소문은 축소된 거다. 악마 한 놈만 있다며, 왜 수백 마리나 되는 악마소굴인 건데? 퀄츠 성에선 세 악마들이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날 지켜 줄 수 있는 건 자랑스러운 내 형제자매들밖에 없다.

"형님 누님들. 살려 주세요."

우샤스 누나가 다가왔다.

저 끔찍한 면상도, 무저갱의 괴물들에 비하면 선녀로 느껴졌다.

"엄살은. 뭐가 보이니?"

누나가 내 곁에 있었으나 안심할 순 없었다. 애초에 우샤스 누나는,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이 무섭지, 다른 쌍둥이에 비하여 힘이 강한 건 아니다. 등골이 서늘해서 얼음을 넣어 놓은 것 같았다. 쌍둥이들은 저 무저갱의 괴물들을 상대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저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괴물들과 곧 마주칠 테고, 이들은 격렬한 싸움을 벌일 텐데 날 지켜 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기나 할까?

벌벌 떨며 다시 구덩이 아래를 힐끔 바라봤다.

"아악! 더 가까워졌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더 처절한 비명이 되었다.

구덩이의 벽을 타고 심연의 괴물들이 올라오고 있다. 괜히 사제들이 이 무저갱을 막기 위해 결계를 쳐 놓은 게 아니었다. 괴물들의 생김새는 끔찍했다. 머리가 여섯 개 달린 놈, 얼굴 가죽이 벗겨진 놈, 손가락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팔다리가 거미처럼 많은 괴물도 있다. 하나같이 인간을 뜯어먹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괴물은 익숙했다. 전생에서, 헌터들이 잡아온 이계의 몬스터들도 자주 봤었다. 모두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었지.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생물의 기준점에는 부합했다. 하지만 저 무저갱의 괴물들은 살육을 위한 생체병기다. 생물의 형태를 넘었다. 대체 왜 손가락에 집채만 한 가위가 쳐 달린 건데, 시발.

우글우글 거리는 괴물에 난 당장 무저갱 바깥으로 나가자고 소리 질렀지만, 쌍둥이들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유일하게 우샤스 누나만이 내 귀에 대고 말을 속삭였다.

"말했잖니?"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이곳은 지옥이라고."

마침내 괴물의 생김새가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가까워졌다.

"저런 걸 베긴 싫군."

"내가 하지, 뭐."

쌍둥이들의 대화.

난 괴물 떼의 습격을 앞두고, 과감히 고개를 돌려 멜리사 누나를 바라봤다.

"누가, 힘을, 빌려, 줄래?"

아홉 개의 꼬리.

그중 하나가 마치 답하듯 움직이고.

"에잇!"

멜리사 누나가 괴물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펼치자.

콰르릉-!

순간, 무저갱이 환해질 만큼 번쩍이는 빛과 더불어 고막이 터질 뻔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평범한 사람의 눈이라면, 분명 까맣게 태워 버렸을 청록의 빛줄기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아마, 번개라고 생각한다. 수백 마리의 괴물들을 한순간에 불태운 건 벼락의 한 줄기.

"귀찮게 말이야."

난 눈을 끔뻑였다.

깊은 구덩이였으나, 그 끝조차 내 눈엔 보였다.

하지만 괴물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모두 사체도 남기지 않고 타 버린 것이다.

"하하, 누님 나이스 샷."

난 이번 상황을 교훈을 얻는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너무 익숙해지면 간혹 기어오르기도 한다.

잊지 말자.

그들은 이런 존재다.

* * *

무저갱의 지하, 가장 깊은 구덩이의 바닥까지 도달했다.

지옥의 통로라 불리는 무저갱의 바닥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난 천안통이 발휘되는 동안 무저갱의 본연을 눈에 담았다. 광활한 넓이의 지하세계는 공허하고 황량했으나 깎아내린 듯한 벼랑의 벽면에는 정교하게 지어진 신전이 존재했다. 신전의 입구는 여러 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거대한 외벽이었는데, 흡사 로마시대의 바알베크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생김새였다.

무저갱의 깊은 지하에,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신전이 존재했다.

놀라운 건 신전의 생김새가 지구의 문화와 흡사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문명이 지구와 매우 흡사하다는 건 전생의 기억이 돌아온 이후부터 쭉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무저갱, 괴물들이 득실거리던 지옥의 구덩이에서 로마 시대의 건축물을 마주한 건 불쾌함이 느껴질 만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내 시선은 신전 너머, 깊숙한 곳을 향했다. 저곳에 무언가 있다.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라봤지만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흥미로워. 정말 재밌는 세상이야. 안 그래, 폴스타?"

한 점 빛도 들어오지 않아 새까맣던 세상이 멜리사 누나의 마법에 환해졌다. 환하게 본 신전의 생김새는 더 기괴했다. 신전을 지은 재질이 청동과 비슷한 금속이었던 것이다.

"대체 누가 저딴 걸 만들었대?"

우샤스 누나가 대답했다.

"무저갱은 만들어진 게 아니란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지옥은 원래 존재했어. 후후."

뭐가 웃긴지.

그나마 멜리사 누나가 도움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곳에 다이모니온, 대악마가 봉인되어 있다더군."

"다이모니온이 뭡니까, 설명 부탁합니다."

말 많은 누나가 이럴 땐 좋았다. 라니스타 놈과 우샤스 누나는 기다리지 않고 신전으로 걸어갔다. 멜리사 누나는 열심히 설명했는데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가 높았다.

"500년 전쯤 나타난 대악마야. 아지비카교의 성인聖人이 태어난 날, 그를 잡아먹기 위해 다이모니온이 나타났다. 쿤칸 왕국은 성인을 지키기 위해 일곱 개의 기사단을 파견했으나 모두 잡아먹히고 말았다. 다이모니온은 왕국의 절반을 썩게 했다. 아지비카교의 검은 사제들이 희생하여, 다이모니온을 왔던 곳으로 도로 봉인하는 것에 성공했다. 재밌지 않니? 문헌에 따르면, 놈 때문에 왕국이 멸망할 뻔했어. 하하하."

설명을 듣던 난 얼굴 근육에 점점 힘이 풀려 갔다. 껄껄 호탕하게 웃는 멜리사 누나는 그저 신나 보였다. 나 혼자만 심각한 건가? 왕국을 멸망시킬 뻔한 대악마란다. 아니 시발, 그런 곳의 봉인을 풀었다는 거잖아.

"다이모니온이 정말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누나."

"죽여야지."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죽여야지. 못된 놈은 죽여야 해"

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쩌겠어.

보통 14살의 소년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아마 능력의 증명, 명예, 그리고 이성 관계 정도일 것이다. 난 달관해야 했다. 14살의 나이에 대악마를 잡으러 온 규격이 다른 문젯거리에도, 난 익숙해져야 했다.

* * *

멜리사 누나를 뒤따라 신전의 입구를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괴했다. 신전은 절대 자연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어떤 이가 만든 건축물이다.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무저갱에, 그것도 지구의 건축을 본떠서.

습도가 높아 피부가 끈적거렸다.

난 여러모로 불쾌함을 느끼며 입구를 지나 통로를 걸었다.

깊은 지하였으나 숨이 답답하지 않았다. 안쪽에서부터 바람도 불어왔다. 스산한 바람이었다. 미지의 두려움이 발을 무겁게 한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게 무섭다. 멜리사 누나는 옆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동등한 입장이었으면, 닥치라고 말했을 것이다.

"라니스타 형?"

얼마 걷지 않아 드넓은 공동이 나왔다. 길의 끝은 절벽이었는데 라니스타 놈과 우샤스 누나는 벼랑 끝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 걸까. 불길한 미래가 저절로 그려진다.

"꼬리가 꼭 호지자胡枝子처럼 생겼군."

"귀엽게 생겼네."

둘의 대화만 들어보면 저 절벽 아래, 피카츄라도 있는 줄 알겠다.

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밑을 내려다봤다.

"시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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