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EHMDHR / Chapter 2 - 2

Chapter 2 - 2

셰인은 오랜만에 복도를 걸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다지 연상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조직에 있었을 당시 봤던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니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는 기억이었다.

[야, 나보고 널 지원하라는데?]

[그런가.]

[그런가? 그런가아? 제길, 내가 니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우리 쪽 애들 방패막이로 세운 뒤에 그 더러운 시체로 일으켜 세울 작전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나는 상부에 그런 지시를 바란 적이 없다.]

[지랄하지 마! 왜 우리 우월한 지하인들이 너처럼 시체나 가지고 노는 음침한 새끼 밑에서 굴러야 하는데? 됐고, 네가 위에다 말해라. 내가 말해도 알아 처먹질 않으니까.]

[원한다면 그리 해 주지. 어차피 결과가 달라질 거 같진 않지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모든 조직원들은 죽으면 내 군단에 소속된다. 네가 어딜 가든, 너희 지하인들이 전선에서 죽는다면 내 휘하로 온다는 말이다.]

[이 새끼가!]

참, 여러모로 트러블이 많았던 사이였다.

애당초 7대 죄악에 속하는 군단장들 모두 서로 사이가 좋은 일은 드물었지만.

특히나 셰인과 3군단장과는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질투를 담당하고 있는 셰인과, 교만을 담당하고 있는 디라일라가 어떻게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상극 중에서도 상극.

인류의 배신자 디라일라는, 전생의 셰인과 더 없는 물과 기름에 속한 인물이었고.

[야. 시체박이야.]

[날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말도록.]

[그럼 날 인류의 배신자라느니 그딴 명칭부터 좀 치우지?]

[난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다만.]

[그럼 네가 밑에 것들한테 명령하든가. 니 명령이면 애새끼들이 깜빡 뒤지드만.]

[뭐 하러 그런 귀찮은 일을 하나.]

[망할놈.]

서로에 대한 혐오가 확실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이기도 했다.

[인류의 배신자는 무슨 헛소리 하고 앉았네. 애초에 같은 인간 취급을 해 준 적도 없었으면서....]

언젠가 디라일라는, 마셔봐야 취하지도 않을 술을 머금으며 셰인의 고성 꼭대기에서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니 당시의 디라일라과 지금의 디라일라를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상념에 잠시 잠겼던 셰인은 어느새 도착한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이곳입니까?"

"맞네, 아카데미의 아티팩트 저장고일세."

아티팩트 저장고.

그리 대단한 물건이 잠든 곳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급하게 올 이유는 없었으나.

디라일라를 보며 동시에 떠오른 이 시기에 있었던 어느 한 사건이 떠올라, 이곳에 찾아오기로 했다.

'조금 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군.'

생도 5년차 초기.

당시 디라일라는 소리 소문 없이 아카데미에서 사라졌었던, 그때는 금방 사그라들었던 작은 사건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5화

15화 괴물 사냥(1)

아카데미의 아티팩트 저장고는 굉장히 넓었다.

겉으로 보던 것과는 다르게 공간확장 마법이 펼쳐져, 아카데미 내부의 도서관만큼이나 넓은 공간.

그곳에는 하나하나 귀중해 보이는 아티팩트들이 투명한 유리 보관함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쭉 훑어보던 셰인은 벤자민을 향해 말했다.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게. 물론 하나만 골라야 하니 제법 고민을 해 봐야겠지만 말일세."

"예."

이곳에 찾아올 생도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아티팩트 전시장 아래에는 해당 아티팩트의 사용처까지 적혀 있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아티팩트들은 그리 대단한 성능의 물건들은 아니다.

평범한 생도들이 사용하기에 과분한 정도는 맞으나, 그렇다고 제국이나 왕국의 저장고의 수준보다는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딱 생도들에게 생색내기 좋은 수준.

애초에 그 이상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셰인은 실망하는 기색 하나 없이 천천히 훑어봤다.

'굳이 아티팩트만 고를 필요는 없겠군.'

다양한 무기와 방어구, 혹은 부적이나 착용하는 액세서리 등이 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셰인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설마 그걸 고를 생각인가?"

그런 걸 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벤자민의 표정이 애매해졌지만.

셰인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예.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며칠 전에 봤던 보랏빛 돌멩이.

마력의 근원이라 불리는 돌이었다.

몬스터에게는 천고의 비약이라고 불리는 돌.

그러나 반드시 몬스터에게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정령에게도 이 마력의 근원은 말할 필요가 없는 영약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마력의 근원을 보는 셰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벌레들을 처리할 때 쓸 만하겠군.'

적어도 이 아티팩트 저장소에 있는 대부분의 아티팩트보다 확실한 성능을 보여 줄 터였다.

* * *

디라일라는 눈앞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문을 볼 때마다 살짝 기가 죽었다.

'좀 거시기하네.'

연합국의 중심에 있는 도시의 집인만큼, 내부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 또한 제법 명망 높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 집은 별장으로 사용되고 있던 터라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다.

3층 높이의 건물.

디라일라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는 이제 겨우 10살이나 됐을 법한 소년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디라일라를 반겼다.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소년은 지난달부터 디라일라가 과외를 봐주고 있는 어느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아주 옥이야 금이야 키워진 것인지 겉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소년이 마중을 나오는 게 디라일라에게는 퍽 어색했다.

평소에 자신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한가득인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자신을 보는 눈에는 흥미가 가득하다.

때문에 수업을 진행하려 해도 영 수다스러운 성격 때문에 진행이 더뎌질 때도 있었다.

"오, 왔구먼. 디라일라 양. 어서 오게."

그런 소년의 뒤로 한 남성이 나타났다.

"넵. 안녕하셨나요, 가주님."

"무얼. 그리 딱딱하게 굴 것 없네. 하하, 오늘도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아, 알겠습니다."

귀족의 자제가 아닌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의 자리.

아무래도 인간들의 권위적인 성격을 많이 봐 온 디라일라의 입장에서는 영 부담스러웠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번 달 연구비를 얻으려면 어쨌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생활비나 등록금 같은 것은 전부 아카데미 측의 지원을 받아 해결하고 있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는 디라일라에게, 그것도 이종족이라는 꼬리표를 붙은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귀한 차를 얻었네. 이따 한 번 맛이라도 보겠나?"

"네? 아휴, 괜찮습니다."

"하하, 사양은 사양하도록 하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주가 자리를 비웠고, 그 뒤로 평탄하게 수업이 진행됐다.

"선생님, 선생님. 있잖아요~ 지난주에 제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고장 나서요... 아버지한테 막 혼나고 그랬어요."

"아하하, 그랬군요...."

물론, 도중 아이의 수다가 이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곧 새 장난감이 생길 거라고 기대하라고 하셨어요! 헤헤."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

본래라면 모성애라도 일으킬 만큼 귀여운 그 미소에서, 갑자기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디라일라는 방금 떠올린 기묘한 감상을 빠르게 털어 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이빨을 남들에게 보이기 어려웠다.

* * *

아카데미의 늦은 밤.

셰인은 조용히 언덕 나무 위에 앉아 그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봤다.

연합국의 중심인 아르젠티아 수도는 언제나 밝다.

다섯 국가의 중진들이 모여 만든 국가이고 그런 국가의 수도이니만큼 발전의 속도가 여타 다른 도시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빠르다.

야심한 밤하늘.

어느 누군가에게는 이 밤이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셰인은 잘 알고 있다.

이 도시의 지하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벌레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 벌레들은 연합국의 밑바닥부터 갉아먹으며, 다섯 국가의 연합에도 자신들의 더러운 이빨을 들이밀 것이다.

훗날, 그게 자신들에게 어떤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채로.

'어차피 훗날 모두 죽을 벌레들.'

그렇다면 미리 정리해 주는 게 맞지 않겠나.

셰인은 당장 이 평화로운 시기에 찌들어 아카데미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양지에서의 신분을 만들기 위한 행위일 뿐.

음지에서는 또 다른 신분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밤의 어둠보다 훨씬 어두운 기운이 셰인의 생각에 호응하듯 그런 그를 에워쌌다.

곧, 일말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이 언덕 아래.

어느 한 저택을 향해 내려갔다.

* * *

중년의 귀족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차를 한 입 머금었다.

고급스러운 차라는 명성에 걸맞게, 혀를 감미롭게 감싸 오는 향이 중년의 귀족에게 퍽 마음에 들었다.

"아쉽구나. 많이 마시지 못한다는 게."

"...건강에 해롭습니다."

중년의 귀족 바로 앞에 선 기사가 충직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항상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은 맛이 좋길 마련일세. 나는 참을성이 없어서, 간간이 이렇게 맛이라도 봐야 하는 편이지."

"...."

기사는 귀족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당장 중년의 귀족이 마시고 있는 차는, 마화초라는 식물의 잎사귀를 재료로 쓰는 차였다.

이름에 걸맞게 마력에 양의 기운을 주입하는 식물이지만, 그 독기가 강해 음용자의 마력이 꼬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향이 좋은 터라 귀족들에게 이따금 기호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장난감은 어찌 됐나?"

"예, 제압해서 지하실로 옮겼습니다."

"그렇구먼. 정말 운이 좋았지. 안 그런가? 그리도 튼튼한 이종족이라니. 쉽게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야."

"그래도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카데미의 생도에다가, 그녀의 뒤에는...."

기사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지만, 중년의 귀족은 그가 무얼 걱정하는지 이미 파악했다.

"무얼.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애초에 아카데미는 어디까지나 그녀를 보조해 주는 것뿐이지, 보호의 명분까지는 있지 않으니까. 더욱이 아카데미의 바깥에서는 말이지. 오히려 사라지면 더 좋아하지 않겠나? 귀찮은 돈벌레가 없어졌다며 웃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그렇습니까."

"그래. 어차피 그 장난감의 뒷배도 이쪽 세계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하하, 자네는 언제나 진지한 게 문제일세. 그래도 다행이지. 저번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아들 녀석이 심심하길래 좀 가지고 놀라고 했더니 그새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나?"

"제대로 도련님을 보필하지 못한 제 죄입니다."

"이런, 그게 어디 자네 잘못인가? 심지어 자네에게 맡겨 둔 일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튼튼한 장난감이니, 저번처럼 아들 녀석에게 망가지진 않겠지."

그러면서 귀족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옮겼다.

"그보다, 오시기로 했던 손님은 어떻게 됐나?"

"예.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하십니다."

"역시 바쁘신 분들이란 말이지. 그래도 소중한 고객이니, 우리가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

"일단 상품만 보여 드리고, 교육은 따로 시켜야 할 걸세. 자네가 좀 바쁘겠어."

"가주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언제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하하, 알겠네. 역시 자네만큼 믿음직한 기사가 얼마나 있겠나. 슬슬 손님 맞을 준비를 해 두지."

"예, 알겠습니다."

* * *

셰인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타락?

조직의 무력?

둘 다 아니다.

셰인은 이제 타락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고, 조직의 무력 또한 군단장의 지휘에 앉아 본 경험이 있으니 대비가 가능하다.

그러나 단 하나.

셰인조차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인류의 타락이다.

전생에 인류가 조직에 의해 무너진 것은, 조직에서 보인 말도 안 되는 무력도 큰 존재감을 차지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제국을 포함한 다섯 국가가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년이 안됐다.

그중에 첫 번째 조직의 침공으로 무너진 왕국은 일주일조차 걸리지 않아 왕의 목이 성벽에 걸렸더랬지.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왕국이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년.

남은 제국과 하나의 국가만이 4년하고도 반년을 채워 조직에게 맞서 대항했으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 나갔고, 모든 국가가 멸망에 이르렀다.

훗날 남은 인류를 그러모아 당시의 1황녀가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기 전까지, 인류에게는 일말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래라면 조직의 무력으로도 모든 국가를 무너뜨리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연합국의 존재가 바로 조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터.

그러나 조직은 그 사실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가며 연합국에 암세포를 퍼뜨렸다.

그 끝에 조직이 등장할 무렵, 연합국의 존재 의의는 무색해졌고.

이는 인류의 멸망을 보다 빠르게 다가오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이 암세포들만큼은 당장의 셰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 암세포가 이 시점에서 너무 많이 퍼져 버린 까닭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박멸해야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들을 하나하나 색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당장 놈들을 모두 불살라 버릴 능력조차 셰인에겐 없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의 사이사이에 연결된 신경 세포 정도는 한 번이라면 정리해 볼 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풍경의 저택을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계속 날 감싸고 있어라.'

[예, 주인님.]

셰인의 주변으로 그 어떠한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그 영혼에게만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가 존재했다.

어둠의 정령.

아카데미에 오기 전, 셰인에 의해 소멸된 썩은 나무 정령의 남은 찌꺼기.

너무도 하잘것없는 존재감이라 셰인조차도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는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며칠 전, 실기시험을 끝마치고 자신의 방에서 심상세계를 살피고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저 찌꺼기에 불과했기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성장조차 노릴 수 없는 하찮은 존재였으나.

셰인이 가지고 온 마력의 근원을 먹이며 다시금 어둠의 정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셰인에 의해 한 번 소멸된 탓에 과거의 기억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이미 종 자체가 썩은 나무 정령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그저 어둠 덩어리.

셰인은 녀석에게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았다.

거창하게 정령이 불리고 있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녀석은 통로였다.

셰인의 내면에 깃든 어둠을 물리적으로 현현하도록 만드는 통로.

그 어둠을 통해 몸을 숨기고 저택 내부로 들어온 셰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겨운 냄새로군."

저택 내부의 창고.

귀족이 머무는 저택치고는 경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쉽게 들어왔으나, 셰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러운 취미를 가진 귀족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노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던가.

당장에도 셰인의 코에 냄새 따위는 그저 창고의 먼지와 나무상자의 냄새뿐이었지만.

보다 깊은 지하 밑으로 음습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느껴졌다.

종류는 아주 다양했다.

죽음, 절망, 저주, 증오, 포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희열.

누군가의 희열이었다.

이러한 감정들만 보더라도 셰인은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암세포다운 취미로군."

현재의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바로 이종족이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과거 아카샤에 의해 봉인되었고, 지금은 던전에서만 볼 수 있는 이들.

그러나 아카샤의 대봉인이 끝나기 전의 인류는 이종족들 사이에서 벌레 이하의 삶을 살아갔다.

그랬기에, 이제는 힘을 갖추기 시작한 인류는 그런 이종족들을 혐오했다.

회귀 전, 디라일라가 괜히 조직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종종 대봉인의 봉인에서 풀려나온 이종족이 보였고, 과거에는 그들을 노예로서 부려 먹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제국의 입장이 달라져 이종족들의 독립된 나라를 인정하고, '이종족 노예제도'를 폐지했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본래 하지 말라는 짓을 하면 거기에 더한 쾌감을 느끼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극히 일부 그러한 쾌감만을 쫓아가는 삶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들이 만들어 낼 풍경이야 뻔했다.

다시 한번 어둠에 감싸인 셰인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늘 낮에 봤던 구릿빛 피부의 소녀가 쇠사슬에 걸린 채 체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발, 진짜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본다, 정말."

걸쭉한 욕 한마디.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는 셰인이 과거에 알던 그 자존심 가득한 목소리도, 현재의 활기찬 목소리도 아닌.

무언가를 포기하기 직전인 것처럼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셰인은 이런 형태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인류의 배신자는 무슨 헛소리 하고 앉았네. 애초에 같은 인간 취급을 해 준 적도 없었으면서....]

오크조차도 한 잔에 별나라로 보내 줄 독한 술을 병째로 입에 들이부으며 자신의 삶을 한탄했던 어느 날 고성의 밤. 한 여인의 목소리와 지독하게도 닯아 있었다.

"디라일라."

아무런 무늬도 없는 동그란 가면 너머로, 셰인은 전생의 자신이, 그리고 자신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어느 한 소녀의 이름을 아무런 감정 없이 불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6화

16화 괴물 사냥 (2)

"디라일라."

"...뭐야, 이 가면남은."

셰인의 부름에 디라일라가 답했다.

두 눈에 힘을 부릅뜬 채 애써 자신을 노려보는 디라일라의 모습에 셰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전생에 셰인이 디라일라를 봤을 땐 이보다 더한 눈빛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으니 저런 눈빛은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곳에 가둬져 있으니, 그녀의 성격상 없는 용기라도 쥐어짜며 저렇게 상대방을 위협하는 게 최선일 터.

"그리 볼 것 없다. 널 해치러 온 건 아니니."

"뭐? 이딴 곳에 사람을 가둬 놓고 하는 말이 그거냐? 장난해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털을 한가득 세운 고양이처럼 디라일라가 으르렁거렸지만 셰인은 개의치 않았다.

"널 가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위쪽에 있는 놈들이다."

"위쪽이라면... 살리에르 백작을 말하는 거냐?"

범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디라일라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살리에르 백작은 이 별장의 주인이자, 오늘까지 웃는 낯으로 디라일라를 맞이해 준 사람이었다.

"맞다. 그 괴물이 너를 이곳에 가둔 것이지."

"...."

거기까지 듣던 디라일라의 눈빛이 조금은 바뀌었다.

괴물.

자신을 이곳에 가둔 백작을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괴물이라 부르고 있었으니.

어쩌면 아까 자신을 해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럼, 그놈이 왜 나를 이곳에 가둔 건데?"

"간단하다. 연합국의 지하도시에선 네 몸이 어마어마한 상품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하도시...."

디라일라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연합국의 어딘가, 거대한 지하도시가 존재하고,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고 알려진 블랙마켓이 존재한다는 것.

당연히 없는 걸 만드는 곳이다 보니,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흉악하기 이를 데가 없는 수준이다.

과거 생체 실험의 선두주자였던 흑마법사들의 주된 거래처였다고 할 정도이니.

그 외에도 도박 투기장을 운영한다는 등, 좋지 못한 소문이 가득한 장소였다.

"살리에르는 그 지하세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나름의 거물이라 보면 된다. 주로 이종족 노예를 수집하는 수집가들의 입맛에 맞도록 교육시키고 파는 역할을 하고 있지."

"...."

"가끔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종족을 데려와 손수 채찍을 든다더군. 자기 아들이 갖고 놀기 딱 좋은 장난감으로 만들려고."

"...그만."

"차라리 교육되어 끌려간 녀석들의 처지가 나을 수도 있겠군. 어찌 됐든 수집가들의 입맛에만 맞는다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한 악의에 노출되면 어떻게 될지는...."

"그만-!"

디라일라의 절규 섞인 비명이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둘을 합한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도 그럴 것이, 디라일라는 이 지하실의 피해자들이 겪은 감정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오늘까지 디라일라의 학생이었던 백작의 아들이 장난처럼 휘두른 채찍에 비슷한 또래의 이종족 소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또 누군가는 울음을 그치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눈알이 뽑혔다. 실은 손님의 취향을 위해 행한 일일 뿐이었다.

디라일라처럼 욕설을 퍼붓던 어느 엘프는 혓바닥이 잘렸다.

이 역시 말 못하는 노예가 필요하다는 손님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이 이루어졌으나, 피해자들이 남긴 감정만큼은 통일되었다.

고통과 절망.

그들의 피와 눈물, 고통 어린 땀을 머금은 벽과 바닥은 디라일라에게 그들의 감정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마치, 너라도 이런 우리들의 기억을 알아 달라는 듯.

그들의 감정은 디라일라가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더 강해져만 갔다.

"외면과 도망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그 무엇도 없다."

"...뭐?"

"앞으로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바란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돼."

"...."

"지금 겪고 있는 그 감정들을 잘 기억해 둬라. 그래야만 너 자신을 지킬 수 있을 테니."

"도대체... 인간들은 왜 이러는 건데? 왜 이렇게 잔인한 건데?!"

디라일라는 더 이상 눈을 부릅뜨며 셰인을 위협하지 못했다.

대신 눈물로 얼룩진 표정이 되어 셰일을 바라볼 뿐.

그리고, 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두려워하니까."

"...뭐?"

"인간에게 이종족은 두려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피식자의 본능이 남아 있으니."

기원전.

고대 신 아카샤의 대봉인에 의해 이종족이 던전에 봉인되기 이전의 시대.

인류는 전 종족 중 최하위 피식자의 자리에 있었다.

당시의 인간은 지금처럼 마력을 쓰지도 못했고, 엘프처럼 숲을 다루지도, 드워프처럼 뛰어난 무구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뿐이던가.

수인족보다 신체 능력은 월등히 떨어졌고, 무엇 하나 다른 종족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피식자였고, 아카샤의 대봉인 이후에도 인간들은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을 뼛속 깊은 곳까지 새기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이들이 고통받는 순간을 보며 느끼는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모든 인간이 그러지는 않겠으나.

인류가 기본적으로 이종족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본능에 새겨진 그 인식을 바꾸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한 종족에 새겨진 본능을 바꾼다는 것.

그런 일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셰인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황제는 인류가 가진 이종족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알고 있었다. 황제는 전 인류의 정점.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가 이종족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종족의 노예화를 폐지했지. 이종족에 대한 겁박은 자신들의 공포에 의해 기인한 것이었으니."

"...."

"하지만 제국은 지금도 연합국의 지하도시를 방치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이해득실은 풀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럼, 백작은? 살리에르 백작은!"

셰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디라일라가 숙였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물범벅인 그 눈동자에는, 어느새 독한 원한의 편린이 보였다.

자신을 이렇게 가두고 끔찍한 고문을 행했을 살리에르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당장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는 땅의 기억들이 그녀의 원한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그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가할 순 있겠지만, 실상 큰 피해는 주지 못할 거다."

"뭐야, 그럼 나한테는... 희망이 없다는 거잖아...."

디라일라는 허탈함에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도망친다 한들, 살리에르 백작은 살아 있는 증인인 디라일라를 살려 둘 리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는 아카데미에 기댄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살리에르 백작이 지난 부과 권력, 그리고 그와 얽힌 고위층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결국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확실히. 기본적인 승산은 무에 가깝다 봐야겠지. 애초에 그 괴물이 만나고 있는 자는, 네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인물일 테니까."

"뭐?"

"그래서 내가 이곳에 온 거다. 애초에 정리할 수 없는 실타래는 쓸모가 없으니."

"그게 무슨...."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

셰인의 말을 디라일라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지하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쥐새끼가 숨어들었군."

지하실에 들어온 인물은, 살리에르 백작의 충직한 기사, 워나드였다.

* * *

"이거...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여유로운 듯한 얼굴을 한 살리에르 백작이었으나, 그의 내심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방금 전.

그의 오랜 지기이자 믿음직한 기사인 워나드가 들렀다 나갔다.

지금처럼 중요한 손님을 맞이할 때 들어오는 일이 없던 워나드였지만, 이번만큼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침입자의 등장.

여태껏 지하 세계의 한 축을 주름잡던 살리에르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해 온 일들은 대놓고 알려져선 안 되는 극비리의 일이었다.

그러니만큼 언제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지도 몇 년이 지났건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이 별장에 침입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별장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가.

"허허. 아닙니다. 오히려 여태까지 조용했던 게 다행인 일이지요."

한편, 살리에르의 맞은편에는 그런 살리에르에게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짓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오늘 살리에르가 애타게 기다리던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방금 나간 기사는 4품의 엑스퍼트, 그것도 마스터에 다다른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닙니까? 실력도 좋고 노련하니, 금방 해결되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미소로 넘겼지만, 살리에르는 그럴수록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자가 어떤 사람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였지만, 정말 그를 좋은 사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잔혹하기로 따진다면 그는 애초에 살리에르조차 비빌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실상 살리에르 백작이 지하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도, 그곳에 기반을 잡고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던 이유도 전부 눈앞에 있는 이 중년의 남자 때문이 아니던가.

수십 년 전에 겪었던 흑마법사들과의 전쟁 당시보다 지금 이 순간이 살리에르에겐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남자조차도 뒤에 배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정체를 떠올려 보면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라는 그 이름 높은 백사자의 갈기.

'저지먼트' 기사단의 일원, 어먼스 J 다이라니까.

* * *

침입자, 셰인을 바라보는 워나드의 눈빛은 결코 곱지 못했다.

응당 그 눈빛은 침입자에게 보내야 할 당연한 시선이었지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워나드의 속 또한 그의 주군 살리에르만큼 새카맣게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현재 위층에서 자신의 주군과 마주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던가.

그 위명 높은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지 않은가.

황실의 제일 날카로운 검이자,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인정(人情)을 도려낸 말살자들.

그런 황실의 검이니 만큼 이는 현재 살리에르 백작이 하고 있는 일이 저 드높은 황실과 매우 연관이 깊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칫 여기서 그들의 눈밖에 나는 일이 벌어졌다간....

저 감정 없는 검이 어디로 향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눈앞의 적을 처리하고 이 사건을 그저 작은 일로 치부해야만 했다.

"너의 배후가 누구인지 말하고 싶어서 빌게 만들어 주지."

문답무용.

대답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워나드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세는 과연 심상치 않았다.

엑스퍼트, 그것도 4품 끝자락에 다다른 마력이 셰인의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그때 상대했던 트윈 헤드 오우거보다는 강하겠군.'

아카데미의 휴식기가 끝나고 돌아오던 당시 작은 마을에서 마주했던 트윈 헤드 오우거.

비록 썩은 나무 정령에 의해 움직이던 시체였지만, 워나드는 간소한 차이로 그런 트윈 헤드 오우거보다 우월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당시에는 가문의 기사들이 앞에서 시간을 끌어 둔 덕에 마법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는 상황.

거기다 이렇게 좁은 지하실은 마법사보다 기사가 월등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로군."

물론, 셰인 또한 준비한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미숙한 척 흔적을 남기며 워나드를 이곳으로 유인한 게 바로 셰인이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담담한 셰인의 반응에 워나드가 미간을 좁히는 사이.

셰인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네 유용함을 보여 봐라."

그 말은 앞에 있는 워나드도, 뒤에 묶여 있는 디라일라에게도 한 게 아닌.

여태껏, 이 지하실에 녹아 있는 고통과 절망을 닥치는 대로 씹어먹던 어느 한 존재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7화

17화 괴물 사냥 (3)

뭇 사람들이 듣기에 당연한 소리지만, 기사와 마법사의 일대일 전투는 대부분 기사가 유리하다.

특히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기사라면 상대가 뭘 하기도 전에 목을 베어 버릴 정도.

"헛."

그러나 워나드의 검은 통념과는 다르게 셰인을 꿰뚫지 못했다.

"정령... 이로군."

낮은 침음을 뱉으며 워나드가 검을 갈무리했다.

정령이 어떤 존재던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워나드조차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문 존재들이지 않나.

'정령술사를 상대한 적은 거의 없는데.'

게다가 어둠의 정령이 인간과 계약을?

워나드의 내면에서 방심이라는 단어가 지워졌다.

"정령이라. 거기다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인가? 처음 보는 경우군. 그런데 과연 이 일격도 흡수할 수 있을까?"

워나드는 과연 노련한 기사였다.

고작 그 한 번의 충돌로 셰인이 가진 정령의 힘을 파악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에 대한 대비책까지 떠올렸다.

그의 말처럼, 어둠이라는 속성 자체가 가진 능력은 '흡수'.

방금 워나드의 검을 막았던 것 또한 어둠의 정령이 워나드의 검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흡수한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워나드는 이 전투를 길게 끌고 가는 것보다, 단기간에 온 힘을 담아 단기결전을 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훌륭한 판단이군.'

셰인의 감상에 맞추듯, 워나드의 자세가 바뀌었다.

왼쪽 팔을 뒤로 빼고, 오른손으로만 검을 쥔 워나드의 찌르기 동작은 펜싱의 에페(Epee).

"하앗!"

워나드의 기합과 함께 그의 손에서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셰인의 심장에 검이 닿으려는 찰나.

'...무슨?'

워나드는 어느새 단검으로 스스로의 손을 베고 있는 셰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워나드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물러가고, 발광석에 의해 지하실이 다시 밝아질 때쯤.

"...뭐였지?"

먼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워나드는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깨닫곤 의아해했다.

도대체 방금 전 있었던 일은 뭐란 말인가.

'놈은?'

그렇게 워나드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귓가에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워, 워나드으...."

"...?!"

그곳에는 귀족 차림의 한 소년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워나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뒤로는, 단검을 든 채 소년의 목을 겨 두고 있는 셰인이 워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 도련님?!"

아니, 잠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충성을 간직해 온 기사인 워나드는 순간적으로 주군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상대는 정체모를 힘을 사용하는 자다.

거기에 어둠의 정령과 계약한 것을 보면, 정신 계열의 공격을 해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것이 환영으로 만들어진 도련님이라면?

감히 이따위 짓을 저지른 놈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리라.

워나드의 마력이 지하실을 메우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마력을 분석했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워나드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어, 어떻게?"

워나드의 기감에 걸린 도련님에게서, 그가 평소 느껴 왔던 마력과 동일한 사람의 마력이 느껴졌다.

여태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던 워나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워나드으으... 나, 무서워... 여, 여기 너무 차가워...."

"네노오오옴!!"

포효와 같은 워나드의 목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메우자, 그제야 셰인이 입을 열었다.

"참 재미있군."

"뭐라?"

셰인의 말에 워나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고작 이목구비의 형태가 다르단 이유만으로 이종족들을 벌레 이하 취급하며 물건처럼 부숴 버린 네게도 아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으득-

셰인의 말에 워나드가 이빨을 부서져라 갈았다.

감히 그딴 더러운 쓰레기들과 도련님을 비교하란 말인가?

이따위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도련님이 놈의 손에 있는 동안에는 이쪽이 철저한 '을'이었으니.

챙그랑-

워나드의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짓씹듯 내뱉는 항복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셰인의 대답은 무감정하기 그지없었다.

"없다."

"뭣...?"

워나드의 반응이 채 끝나기도 전에, 셰인은 손에 들린 단검으로 소년의 목을 그어 버렸다.

"크이익--!"

피와 함께 목에서 터져 나오는 공기 새는 소리가 기형적으로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소년은 피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워나드를 바라보던 끝에 두 눈이 뒤집혀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으, 으아."

그 모습을 본 워나드는 다리가 풀린 듯 휘청거리며 자신의 도련님이었던 것을 향해 걸어갔다.

"아아, 아아아아!"

천진한 웃음으로 언젠가 자신처럼 기사가 되고 싶다며 웃던 도련님의 얼굴이 워나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흐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을 시작으로 도련님과 관련된 기억들이 머리를 헤집고 들어오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워나드를 덮쳐 왔다.

고통, 절망, 비탄.

온갖 감정들이 그런 워나드의 내부를 채우기 시작하자 이는 겉잡을 수 없이 거대한 칼날이 되어 그를 헤집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들어 도련님의 원수를 죽음보다 더 한 고통에 처하게 하고 싶었으나.

워나드의 육신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붉은빛으로 물들며 점차 어둠이 그를 잠식해 갔고.

그 끝에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다.

* * *

"뭐, 뭐야...."

워나드가 들어온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디라일라는 현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둠으로 가득 채워졌던 지하실에 다시금 빛이 들어올 무렵.

디라일라는 아찔함을 느꼈다.

어둠이 사라진 자리에서 셰인은 옆구리가 거의 뜯겨져 나가다시피 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그러나 그런 디라일라의 걱정은 기우라는 듯 셰인은 멀쩡히 서 있었고.

오히려 그런 셰인보다는 그와 마주하고 있던 워나드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쟤,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디라일라의 말대로 워나드는 혼자 서 있다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얼굴에 선명한 긴장이 떠오르고, 이후에는 미친 사람처럼 처절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흐허허허헝!"

"흐아, 흐아아아!"

"아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디라일라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씨발, 무섭게 왜 저래...."

"잡아먹힌 거다."

어느새 지혈을 마친 셰인이 답했다.

"잡아 먹혀...? 당신이 부리던 그 정령한테?"

"아니.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에 먹히고 있는 거다."

"뭔 소리야, 얘는 도대체."

셰인은 거기서 더 설명을 이어 가지 않았다.

겉보기엔 여유 있어 보였으나, 셰인은 스스로의 부상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위험했군.'

확실히 워나드는 위험한 적이었다.

제아무리 셰인이 전생에 조직의 제1군단장이었다 한들, 당장의 몸으로는 저만한 기사를 마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거기에 워나드가 구사한 섬광과 같은 찌르기는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놈이 가진 능력은 속성변화능력이었다.

워나드의 검은 마치 용수철처럼 그 찰나의 찰나밖에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바닥과 벽, 천장을 튕기며 셰인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만약 두 눈에 마력을 중첩시켜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고작 옆구리가 뜯겨 나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Krrr... 죄송합니다, 주인님....]

데미지를 입은 것은 셰인뿐만이 아니었다.

소환된 정령도 꽤나 지친 듯해 보였다.

이 지하실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했던 존재감은 온데간데없어졌을 정도.

어둠의 정령은 셰인의 내면에 있는 어둠을 현실로 형상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

그 어둠을 극히 일부 외부로 끌어낸 것만으로도 어둠의 정령은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보였다.

"상식적으로는 이 이상 전투를 이어 가기엔 무모한 일이겠지만...."

셰인은 시선을 지하실의 출입구로 향했다.

그곳에서부터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고전하며 상대했던 워나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

상대방 쪽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디라일라조차도 그 흉흉한 기세를 읽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뭐야. 지금 뭐가 오고 있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디라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 셰인은 부상을 입었고, 자신 또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지금 다가오고 있는 존재에게 도주는 불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과연 디라일라가 알까.

지금 다가오는 이 존재로 인해, 오히려 셰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는 것을.

* * *

전생의 셰인은 이따금씩 자신의 성으로 찾아오는 디라일라가 반갑지 않았다.

"왜 자꾸 여기에 찾아오는 거냐."

"그야, 여기에는 술이 넘쳐나잖아?"

멸망한 제국의 황성.

우습게도 이곳에는 디라일라의 말처럼 최고급 술들이 넘치도록 많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고, 그런 곳이니만큼 와인 저장고에서 실시간으로 술이 제조되던 장소였으니 말이다.

디라일라는 이따금 이곳에 찾아와 이렇듯 고래처럼 술을 빨아들이며 주사를 부리기 일쑤였다.

당시의 타락한 셰인은 그런 디라일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취할 수도 없는 육체를 망가뜨려 취하려는 모습은, 쓸데없는 자해로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푸하! 근데, 그것도 있지만 그냥 여기 오면 뭐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무슨 말이냐."

딱히 그녀의 술주정 따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단 1도 없었지만, 괜히 그녀가 취해 이 고성에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이후 그녀가 돌아가면 술 창고를 죄다 부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셰인은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저 엿 같은 사자상 말이야."

"사자?"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제국의 상징인 백사자의 동상이 여기저기 부서진 몰골로 흉물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걸 보면 내가 인간들한테 처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르거든. 그때 저 고양이 새끼들 중 한 놈을 봤었지."

"...."

"참, 그땐 그 새끼가 지옥에 올라온 괴물 새끼처럼 보였는데... 꿀꺽, 꿀꺽."

"...."

"퍄! 근데 웃기지 않냐고. 그렇게 괴물 같은 놈들이, 실은 이 손에 그리 쉽게 찢겨져 나가는 반푼이들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리 말하며 디라일라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표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의 셰인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들이 쓰는 힘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병신 새끼들... 그마저도 그 힘이 온전치 않다는 것도 모르는 그따위 반푼이들한테 두려움을 느꼈다라... 여길 오면 그때가 떠올라."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일 텐데 왜 여기까지 와서 그걸 상기시키려 하는 거지?"

셰인의 물음에 디라일라가 푸흐흐- 공기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그 거지 같은 것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증거잖냐."

"...."

그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디라일라는 고개를 푹 숙였고, 셰인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게, 전생의 셰인이 마지막으로 본 디라일라의 모습이었다.

* * *

"아무래도 직접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헛. 다이라 님께서 직접?"

황실에서 온 손님, 다이라의 목소리에 살리에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예.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가는 길이 마음 편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끄응... 이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살리에르의 충성스러운 기사, 워나드가 지하실에 내려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다이라는 그럼에도 직접 움직이고자 했다.

그러자 살리에르의 속만 바짝 타올랐다.

가능하면 이 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게 일이 끝나길 바랐건만.

그래도 워나드가 직접 일을 해결한다면, 그걸 다이라가 직접 본다면 그나마 떨어진 신뢰를 조금이나마 되찾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살리에르는 앞장서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반면, 다이라는 겉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것과 다르게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쯧, 제국에 인재가 없군.'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살리에르를 보며 다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살리에르에 대한 인상은 좋은 편에 속했지만, 아직도 지금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랬다.

워나드가 지하실로 내려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전투가 일어났으면 이미 진작에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이 됐음에도 지하실에서 느껴지는 기색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저택의 주인도 알지 못하는 이가 가장 비밀스러운 지하실에 찾아왔음에도 이렇게나 조용하다?

이 노쇠한 황실의 기사는 그게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직까지 워나드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죽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그리 평탄하게 흘러가진 않고 있다는 반증일 터.

'뭐, 반대로 생각하면 침입자 놈들을 잡아 심문할 기회가 될 수 있겠다만.'

적어도 자신의 눈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그럼 침입자를 놓치는 일은 없을 테니.

'쯧. 아무튼 일이 끝나면 저자에 대해서 단장님께 말씀드려야겠군.'

그래도 이번 일은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다.

당장 살리에르를 내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꼬리를 자를 준비를 하게 될 터.

그러나 다이라의 그 생각은 곧 쓸데없는 고민이 되고 말았다.

지하실의 문이 열린 순간 날아든 검은, 다이라의 '인식 범위' 안에 있었음에도 막아 낼 수 없던 것이었으니까.

"어어...!"

퓨슉-!

그리고 다이라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찰나의 순간.

날카롭게 날아온 누군가의 검이 살리에르의 미간을 꿰뚫으며 나는 파육음을.

지하도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황실의 기사들이 십수 년간 갖은 노력을 하며 만들어 온 거물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다.

"...!"

그리고 살리에르의 미간에 검이 꽂히기도 전에 발검한 다이라는 볼 수 있었다.

새까맣게 물든 눈동자에 증오를 가득 채운 워나드가, 어느새 풀린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피와 뇌수를 줄줄 흘리고 있는 살리에르를 바라보는 모습을.

"주... 군...?"

짝- 짝- 짝-

그리고 그런 지하실 안쪽.

불길한 어둠으로 몸을 감싼 가면의 남자가 천천히 박수를 치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비극적인 연극이로군. 과연, 옛말 중에 틀린 게 없단 말이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느긋하게 치던 박수를 멈춘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 멀지 않음에도 이는 충분한 희극이지 않나. 그렇지? 제국의 고양이."

그 말에 다이라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백염과 같은 오러를 폭사하며 지하실 내부를 가득 채웠을 뿐.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8화

18화 괴물 사냥 (4)

"후우.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구먼."

찬란한 백염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다이라의 말이 지하실 안에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 말도 안 되는 무게감에 짓눌린 걸까.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디라일라가 혼절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셰인은 그런 디라일라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이라가 뿜어내는 기세는 어마어마했으니.

아직 내적으로 채 성장이 다 되지 않은 디라일라가 감당하기엔 힘든 적임이 분명했다.

"감히 고양이라는 말을 내뱉다니, 실력이 제법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우리의 정체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

"되다 만 쓰레기 냄새를 풀풀 풍겨 대는 놈들이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지."

"허허허, 되다 만 쓰레기라... 자네, 도발을 제법 잘하는군. 내 앞에서 그딴 말을 내뱉는 이들이 언제 마지막으로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아."

"늙은 고양이 앞에서 무얼 겁먹겠나."

"그럼 어디 이 늙은이의 검을 받아 보게. 부디 살아남기를 바라지. 자네에게 들어야 할 말이 많을 것 같거든."

이만큼 열이 뻗치게 만드는 상대가 얼마만이던가.

비단 셰인의 도발에서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지하도시를 길들이기 위해 키워 왔던 살리에르가 허망하게 죽었다는 것.

그로 인해 지하도시가 얼마큼의 격동을 겪을 것인가.

제국이 지하도시를 방치하고 있던 것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중 큼지막한 지분 하나가 무참히 박살이 나 버렸다.

그 사실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다이라는 시작부터 전력으로 백사자의 오러를 끌어올렸다.

이내 그의 온몸에서 분출되던 백염의 오러가 손에 쥔 검으로 옮겨가더니, 어느 순간 한곳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끔찍할 정도로 정제된 에너지.

아마 저 일검에는 이 저택조차도 단번에 날려 버릴 힘이 담겨 있으리라.

하지만.

셰인은 그런 가공할 힘 앞에서도 태연했다.

오히려 백염의 빛이 비추는 가면 너머의 눈빛엔 탐욕이 가득했다.

"타다 남은 찌꺼기 같은 오러지만, 그래도 거기에 담긴 파괴력만큼은... 그래. 가지고 싶군."

"...?!"

셰인이 말을 내뱉은 순간.

다이라는 한평생 느껴 본 적 없던 거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는 그저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을 때의 긴장감이 아니었다.

아예 검을 휘두르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고는 그의 삶을 통틀어 처음이었으니까.

적의 빈틈이 보이지 않아서?

아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는 3품의 마스터에 이른, 그야말로 초인(超人).

상대의 움직임에 섞여 있는 허와 실 정도는 간단히 구분하고도 남는 실력자다.

그럼에도 그의 본능은 말 그대로 검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정확히는 눈앞에 있는 존재에게 자신이 가진 백사자의 오러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라는 자신의 본능보다 자신이 겪어 왔던 수많은 경험을 믿었다.

'무슨 사술을 부리는지는 모르겠다만... 허튼 수작일 뿐이다.'

그래, 이건 사술일 뿐이다.

황실의 기사로 살아오며 무수한 적들을 처리해 온 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술을 부리던 이들을 봐 왔고, 매번 본능의 경고를 느껴 왔었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적들을 분쇄할 수 있던 것은 이 백사자의 오러와 자신의 검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이윽고 다이라의 검에 모든 에너지가 응축되었을 때.

"...?!"

태산의 일부마저 가를 수 있을 그 막대한 힘은 마치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다이라의 얼굴에 충격이 떠오르고, 셰인은 가면 너머로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 * *

회귀 후, 셰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스스로의 내면을 관조해 왔다.

그러는 이유는 타락을 경계함과 동시에, 전생에 조직이 써 왔던 타락의 힘을 자신이 써먹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내면을 관조한 셰인은 제법 그럴듯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타락에 대한 원리를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타락의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사람이 가진 감정 자체에 '자의식'을 부여하는 것.

'나 같은 경우는 몸에 질투의 화신을 만들어 낸 격이었지.'

그렇게 감정이 부여된 자의식은 감정 자체에 물리력을 부여해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감정의 힘.

셰인이 '오리진'으로 명명한 이 능력은 통념적으로 알려져 있는, 마력을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능력이었다.

게다가 마력이 아닌 감정을 힘의 원천으로 이용하는 것인 만큼, 해당 감정이 존재하는 한 제약도 한계도 없는 힘이었다.

'그래서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타락의 힘에 대한 원리를 파악한 셰인은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셰인이 타락의 과정을 건너뛰고 감정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선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감정에 물리력을 담아 외부로 분출할 통로의 부재, 다른 하나는 오리진으로 쓰일 감정 그 자체의 안전성 문제였다.

그리고 셰인은 장고 끝에 두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통로의 경우에는 타인의 감정을 먹고 그것으로 힘을 키우는 특성을 지닌 어둠의 정령이 훌륭한 대체재 역할을 했다.

셰인에 의해 소멸된 썩은 나무 정령의 흔적.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가지고 온 '마력의 근원'.

두 재료를 통해 만들어진 정령은 오로지 셰인에 의해, 셰인을 위해 탄생한 정령이었기에, 셰인의 감정을 외부로 분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 오리진에 담길 감정은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질투의 힘.

다른 군단장들이 지닌 감정과는 다르게, 셰인이 가진 '질투'는 독보적인 위력을 지녔으나 반대로 안정성이 불안정했다.

육체의 주인인 셰인의 의식마저 질투하여, 죽기 직전까지 본래의 의식을 배제시켰을 정도가 아니던가.

'무턱대고 질투를 썼다간 잘못하면 정령이 삼켜지는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클라인을 향한 질투를 모두 없애 버린 지금의 셰인으로선 굳이 그 감정을 되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다른 감정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데....'

셰인의 내면에 여러 감정이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수많은 상념과 고민 끝에, 한 가지의 감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투에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당장 셰인의 부족한 힘을 채워 줄 격렬한 감정.

바로 '탐욕'이었다.

* * *

"무, 무슨...."

"음, 과연."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다이라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검을 휘두르려는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다.

저건, 무엇인가.

"이빨...?"

지금 있는 이곳이 지하실이란 건 똑같다.

하나, 지하실이 지하실이 아니게 되었다.

평범한 벽돌로 쌓아 올려진 벽은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과 꿈틀대는 혀로 들어차 있었고, 바닥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 늪처럼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혐오스럽고 괴이한 광경에 얼이 빠지기도 잠시.

다이라의 귓가에 셰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족스럽진 않다만, 그래도 지금으로썬 이 이상은 과욕이겠지."

셰인이 보란 듯이 한쪽 손을 들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들어 올린 셰인의 손 위로는, 다이라가 평생을 갈고닦아 왔던 순백색의 오러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다이라가 봐 왔던 그 어떤 오러보다 찬란한 빛을 띄우며!

"말도 안 돼...."

그런 오러를 잠시 바라보던 셰인은 주먹을 쥐어 힘을 갈무리하고는 다시금 다이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세상에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이라.

그런 그에게, 셰인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다 만 쓰레기라지만, 그나마 써먹을 구석은 있었군."

"뭐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황망해하기도 잠시, 어둠으로 가득했던 바닥에서 거대한 입이 아가리를 벌려 왔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다이라가 오러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아, 아니! 왜 오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백사자의 오러.

항상 자신의 의지를 따라 움직여 왔던 오러가 이제 와서 배신하다니?

절망에 빠질 틈도 없이, 거대한 입이 순식간에 다이라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 * *

"으헉?!"

언제 정신을 잃었던 걸까.

발작을 일으키듯 눈을 뜬 디라일라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천장의 무늬 하며 미묘하게 부드러운 침대.

이곳은 영락없는 자신의 기숙사 방이었다.

"꿈... 이었나?"

"그럴 리가 있나."

"히에엑!!"

들려오는 목소리에 디라일라는 다시 한번 발작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주변을 훑어봤다.

이내 한 인영이 창가 너머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는!"

"정신이 좀 들었나?"

"꿈이, 아니었구나."

일렁이는 어둠 속에 서 있는 가면의 남자, 셰인을 마주한 디라일라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런 일을 겪고도 꿈일 거라 생각할 정도로 어수룩한 건가. 아니면 그 일이 꿈이길 바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현실을 도피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지."

"큭...."

다짜고짜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디라일라가 신음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다.

디라일라는 그 일이 꿈이길 바랐다.

적어도 인간들의 그런 어두운 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자, 잠깐.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탈출한 거지? 분명 거기에...."

"잡종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었지."

"마, 맞아! 그거, 저지먼트 기사단 맞지? 황실 소속 기사단!"

"맞다."

"어떻게 도망친 거... 예요?? 그 말도 안 되는 괴물한테서...."

"도망칠 필요까지야."

"예?"

"그런 잡종 하나 정리하지 못할 거였으면 애초에 널 구하러 가지도 않았을 거다."

"...도대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뭐란 말인가?

디라일라는 혼란스워졌다.

저지먼트 기사단.

이는 제국에서 신성시 되다시피 하는 이름이다.

대전쟁 당시에 수많은 위기에서 제국을 지켜 냈으며, 황제의 오른팔로 칭송받는 기사단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힘은 일반적인 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단적인 부분이 바로 오러.

그들의 오러는 하나같이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같은 3품의 마스터라도 일반 3품의 기사와 저지먼트 소속의 기사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아득한 힘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존재를 죽였다고?

"믿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

이 이상 물어봐야 별 소용이 없겠다 싶어, 디라일라는 주제를 옮겼다.

"그럼 그 저택의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이제 이 세상에는 없다."

"아...."

그러자 디라일라가 무언가 걸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그 꼬맹이도, 죽었겠죠?"

"...재미있군. 그놈이 무슨 짓을 행해 왔는지 알고 있음에도 걱정을 하는 건가?"

"걱정하고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말이죠."

어린아이였다. 물론 디라일라 또한 그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수업했던 그 아이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때문에 디라일라가 살리에르 백작의 아들에게 동정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린아이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익히 알던 아이였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오는 근본적인 씁쓸함이었으니.

실상 셰인이 저택에 들어가 가장 먼저 죽인 존재가 바로 살리에르 백작의 아들이었다.

녀석을 죽여 영혼을 회수하는 것으로 셰인은 워나드의 정신을 무너뜨렸던 것이니까.

"...여러모로 같군. 그때와."

"예?"

"아무것도 아니다."

회귀 전의 디라일라는 숱한 배신을 당하고도 다른 존재를 믿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비단 인간이 아니더라도, 다른 종족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셰인은 그런 나약한 모습의 디라일라가 마냥 싫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의 디라일라는 인간의 적이 아닌, 인간의 편에서 싸워야 했으니.

"저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왜 저를,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구해 주신 겁니까?"

"너한텐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가치...?"

"언젠간 알게 될 거다. 너는 아직 네가 가진 재능이 뭔지 모르니."

"...."

재능.

디라일라는 과연 자신에게 있다는 재능이 무엇일지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눈앞의 존재가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본인의 재능이라면 본인 스스로가 깨달아야 할 테니까.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다. 그때까지는 처신을 잘하고 있도록."

"다시요? 아니 그런데."

"뭐지?"

"한심한 말이겠지만... 제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그 물음에 셰인은 디라일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당장은 괜찮은 듯 보였지만, 그녀는 방금 막 납치를 당했다.

그것도 지하실에 남아 있는 그 끔찍한 감정들을 공유한 채로.

아직까지 인간에 대한 증오에 다다르진 않았으나, 불신은 뼛속까지 새겼을 것이다.

디라일라는 여전히 혼자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나약한 소녀에 불과했으니.

"남을 믿지 못하겠으면, 찾아야지."

"예?"

"네가 스스로 판단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의 두 눈이 커졌다.

어찌 보면 식상할지도 모르는 말이겠으나, 이는 디라일라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디라일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너희 모두 알고 있겠지만, 4개월 뒤 계급심사가 있다."

지휘학과 수석교수인 벤자민의 말에 생도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계급심사. 제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급인 품계(品階)를 두고 하는 심사다.

20살 이후, 혹은 아카데미 5년차에 들어서부터 신청할 수 있는 이 심사는 당연하겠지만 모든 생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품계가 곧 사회의 계급이었으니.

"외부의 계급심사와 다르게 아카데미에서의 계급심사는 학과점수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본인의 적성에 맞는 시험도 따로 봐야겠지만 말이다."

특히 지휘학과에서의 점수는 계급심사에서 고득점으로 취급되기에, 정작 시험의 필기 부문에서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평가 점수가 아득히 높아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괜히 아카데미에서 가장 엘리트들만 모이는 학과가 아닌 셈이었다.

"그러니 던전 능력 평가 점수를 위해 앞으로 함께할 동료를 구하는 건 당연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지휘학과에 들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던전에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 말인즉 본인의 탐험대를 꾸려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에 마음이 함껏 부푼 생도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대답했고, 셰인은 그 가운데서 홀로 계산을 시작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9화

19화 메자이아 대수림 (1)

클라인은 굉장히 흐뭇한 눈빛으로 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팀에 넣어 달라는 건가?"

"엉. 안 될까?"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에서 흔히 요즘 애들의 말로 '아싸' 중의 아싸로 취급되는 자신의 형에게 팀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한편, 셰인은 셰인 나름대로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디라일라였으니까.

"...왜지?"

지금은 셰인이 디라일라를 구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비록 필요로 인해 디라일라를 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디라일라와 접촉하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경계심이 많은 디라일라의 성격상 천천히 관계를 쌓아 나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디라일라가 셰인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셰인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최근에 좀 거시기한 일을 당했잖아."

한창때의 소녀가 거시기라는 말을 한다는 게 심히 유감스러운 부분이었으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셰인이 아니라 옆에 있던 클라인이었다.

"아... 그랬지요. 살리에르 백작. 그자가 그런 짓을 일삼는 사람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지먼트 기사단의 일원마저 한 분 희생됐다 했죠?"

"어, 어. 그치. 응."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그러했다.

디라일라가 구출된 새벽이 지난 다음 날 아침.

세간에는 대대적으로 특종 기사가 터졌다.

바로 살리에르 백작이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지하도시의 한 축을 주름잡던 일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의 냄새를 맡은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차에 전투가 발생.

그 자리에서 살리에르 백작과 그런 백작의 수호기사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저지먼트 기사단원은 그 과정에서 독에 중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에는 아카데미 소속의 이종족 생도가 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까지 기사에 면밀히 드러났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 빨리 알려진 거지?'

물론 디라일라는 하루아침에 사방에서 이어지는 관심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기사의 내용대로였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살리에르 백작에게 납치되어 감금됐었고, 그 여파로 기절한 상태였다고.

저지먼트의 기사단원이 희생된 일이다.

당연히 황실 직속의 수사관이 등장했고, 디라일라는 잔뜩 기가 죽은 채로 그런 그들의 수사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는 디라일라의 기억을 읽는 마법을 펼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는 아카데미 총장에 의해 무산되었다.

타인의 정신에 얽히는 마법은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물론, 그 모든 것을 꾸민 이는 셰인이었다.

연합국의 유명 신문사에 어느 정도 날조한 내용을 풀어낸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정보를 알리면 황실측에서도 디라일라를 해코지하지 못할 테니까.

거기에 아카데미에서도 이번 일을 상당한 스캔들로 보고 있었다.

감히 연합국 아카데미에서 보호하고 있는 이종족 생도가 납치를 당했다니!

아카데미에서 황실 직속 수사관으로부터 디라일라를 보호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아, 아무튼 그때 그 일로 좀... 아무한테나 기대기가 어렵더라고."

"이해합니다. 분명 힘드시겠지요. 하지만 인류에는 그런 말종과 같은 인간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라일라 양."

그러면서 클라인은 안타깝다는 눈동자로 그런 디라일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이에 사방에서 느껴지는 눈총!

"헉."

그 순간 디라일라는 아카데미 여생도들에게 위험도가 격상됐다.

"그런데 그게 나를 찾아온 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게, 들어 보니까 넌 사람들한테 영 무관심한 거 같고... 그게 이종족이든 사람이든 똑같을 거 같아서. 그리고 너 실력도 대단하다고 들었고."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셰인에 대한 이미지는 제법 나아진 상태였다.

물론 여전히 동생을 질투했던 적이 있는지라 사람들의 눈빛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지만.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인 연합국 아카데미에서, 엘리트만 모인다는 지휘학과 1등을 차지한 사실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받게 된 것이다.

"사람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셰인에게 있어서 이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일단 디라일라는 훗날 셰인에게 있어 중요한 일을 해 줘야 할 인물이었으니 가까이 있을수록 좋았다.

"오케이, 그럼 앞으로 너랑 같이 던전 가는 거지?"

잠시 고민하는 척 연기를 하며 끝내 디라일라를 받아들이자, 그녀가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지었다.

디라일라는 디라일라대로 셰인의 뒷배는 믿음직스러웠으니 말이다.

연합국에서 셰인과 클라인의 가문, 클레이튼 가문은 모든 상인들이 한 다리씩 거쳐 가는 거대 귀족가이지 않나.

이미 앞서 살리에르 백작에게 한 차례 데이기도 했고, 저지먼트 기사단원인 다이라의 충격적인 정체도 봤던 터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색안경을 끼고 봤다간 어느 누구 하나 믿을 수 있겠냐.'

물론 여전히 인간에 대한 불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걸 내색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저지먼트 기사단원의 희생이라니. 아마 그래서 요 며칠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겠지요, 형님?"

"음. 아마도."

클라인의 물음에 셰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을 보이지 않다니? 누구 얘기하는 거야?"

셰인의 팀에 들어가게 된 게 확정되면서 디라일라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네이스 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아."

아네이스.

저지먼트 기사단의 전대 단장의 딸.

그녀는 며칠 전,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도 장례식장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일 터.

셰인은 그 얘기를 듣고 있는 중에도 얼굴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우리가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음, 냉정하게 말하면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하."

그 말에 클라인은 씁쓸하게 웃었고, 디라일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네이스는 디라일라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대화도 주고받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디라일라에게 아네이스는 나름 괜찮은 사람에 속했다.

적어도 자신을 색안경 끼고 보는 일은 없었으니까.

만약 지난 사태가 없었더라면, 디라일라는 한 번쯤 그녀의 팀에 들어가 보기 위해 찔러 봤을 터.

그러나 디라일라는 이후 그녀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애초에 그리 친하지도 않았지, 참.'

그래, 깊이 생각할 거 없다.

디라일라는 그리 단정 짓고 비 내리는 창가를 바라봤다.

* * *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아네이스의 몸을 차갑게 만들었음에도, 아네이스는 자신의 발 아래 있는 무덤을 바라봤다.

이로써 두 번째 이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이스는 이 감정이 도저히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인은 독살...."

백사자의 오러라면 어지간한 독은 대부분 막을 수 있을 터였으나, 정체 모를 독에 당한 다이라의 시신은 마치 온몸의 수분을 전부 빼앗긴 듯 비쩍 마른 미라 같은 상태였다.

아네이스는 다이라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아네이스는 저지먼트 기사단원들과 관계가 깊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검을 배울 때면 기사단원들은 거기에 껴서 그녀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모두 피가 이어진 이들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그녀에게 삼촌이요, 오빠였고, 가족이었다.

그랬던 이 중 다이라는 마치 나이 많은 큰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허허로운 말투 하며, 그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언제나 그 특유의 말투처럼 여유가 묻어나오곤 했었다.

그런 그가, 정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정의롭게, 죽었다고."

아네이스는 장례식 도중에 줄곧 들어왔던 그 말을 떠올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정의를 위해 죽은 다이라에 대한 믿음을 보였으나, 아네이스는 줄곧 가지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정말 정의를 위해서였나요?"

차마 다른 이들에게는 물을 수 없던 그 물음을, 이제는 땅 아래 묻힌 다이라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 *

"마력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답해 볼 사람이 있습니까?"

지휘학과 교수 자하드의 물음에 생도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답했다.

"마력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입니다."

"그리고요?"

"마력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일차원적으로는 물, 불, 바람, 흙이 됩니다."

"또?"

"어... 그리고 그러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환경은 던전의 불가해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자하드의 말에 일어선 생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방금 생도의 말처럼 마력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소입니다. 때문에 우리 지휘자들은 모두 마력에 정통해야 하지요."

전쟁이 목표인 지휘자와, 던전을 탐험하는 지휘자는 결이 다르다.

둘 모두 적을 상대해야 함은 맞으나, 던전은 거기에 환경적 요소가 추가된다.

"자, 방금 말한 생도의 대답을 인용해서... 그 불가해한 환경을 지닌 지역을 꼽자면 어디가 있겠습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입니다!"

생도 중 한 명이 그리 답하자, 대부분의 생도들이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예. 메자이아 대수림.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요람 중 하나죠."

그러면서 자하드는 칠판에 마법도구를 활용하여 몇 가지 영상을 재생시켰다.

"보다시피, 메자이아 대수림은 어마어마한 우기로 인해 토벌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죠."

현 인류는 마력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능을 손에 쥐었다.

때문에 고작 '비'라는 환경 하나만으로 던전의 공략이 완전히 막히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던전 토벌에 애를 먹는 이유는, 그 비가 평범한 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강산성의 비가 내리거나, 혹은 맞는 것만으로도 신체를 무겁게 만드는 비, 영하의 온도를 지닌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모두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다.

영하로 내려가면 우박이 내려야지, 왜 비가 되어 내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 불가해한 일들은 모두 마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지휘자들은 그러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도 재빠른 대처를 할 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때, 생도 한 명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럼 그러한 환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를 데리고 다니면 되지 않습니까?"

"좋은 질문이군요. 확실히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홀로 할 수는 없는 존재지요. 하지만 지휘자의 판단 일분일초에 따라 전장의 상황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직접 상황을 인지하고, 파악하고, 결론을 낼 수 있어야 하죠."

탐험가의 지휘자는 단순히 지휘 하나만 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부터라도 던전에 대한 기본적인 마력과 구조 이해가 필요로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생도들 대부분이 마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력이 있는 이들이다.

그런 실력마저 없었으면 이 지휘학과에는 발도 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자하드는 한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어느 한 생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예를 들면 이번 시험에서 오스튼 생도와 셰인 생도처럼, 던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면 팀을 꾸릴 때보다 높은 수준의 팀원을 끌어들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모험단에서 스카우트, 또는 협업 제의가 올 수도 있죠."

그러면서 자하드는 셰인을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고.

'마력과 던전의 고찰'의 교수, 자하드가 셰인을 따로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교수님."

"아, 셰인 생도. 어서 오세요. 일단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야겠군요."

"축하 말입니까?"

"예. 일단 이것부터 한 번 읽어 보시죠."

자하드의 개인 연구실에 도착한 셰인은 그가 건네는 서류를 보고 읽었다.

"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협업 제의.

아까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처럼, 이따금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생도들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협업 제의를 받기도 한다.

최근 셰인이 시험에서 낸 짧은 논문은 메자이아 대수림 지역의 대우기에 관한 내용이었고, 아무래도 모험단 중 하나가 이런 셰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왔군요."

"아무래도 상대측에서 그만큼 조급하다는 거겠죠. 어떻게, 한번 만나 보겠습니까?"

자하드의 물음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자이아 대수림.

5대 요람 중 하나에 포함되는 그곳에는 셰인도 빠른 시일 내에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0화

20화 메자이아 대수림 (2)

"단장,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지휘학과에 들어간 생도를 데리고 가겠다는 건...."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자신의 단원의 말에 타오르듯 붉은 단발의 여인, 라비아타는 손에 들린 종이를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 메자이아에는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글을 쓴 거라고. 너, 가보지도 않은 던전에 이 정도 수준의 논문을 쓸 수 있겠어?"

"그거야 물론 아닙니다만...."

"나도 이런 생각은 못해 봤어. 세상에, 드래곤 하트라니!"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상물림이 생각한 공상 이론 아닙니까. 이걸 믿고 그대로 데리고 가자는 건!"

"물론 그렇지. 그런데 그걸 확인하려고 가는 거 아냐. 어차피 우리도 가야 하는 길이고."

"끄응...."

라비아타의 말에 모험단원, 제임스는 눈가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비아타의 말처럼 이 논문은 그저 공상이라고 낮잡아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특정 불가능한 패턴의 대우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발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상은 인지 외에서 일어나기에, 괴현상이라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꼬맹이가 그래서 낸 결론이 드래곤 하트란 말이지...."

드래곤 하트.

차갑게 식은 모험가의 심장마저 뜨겁게 달굴 단어.

고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섰다는 위대한 존재의 심장은 마력의 원천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정순한 마력이 가득하다고 한다.

얻는다면 어디 불로불사로 끝날까.

인간들의 기준으로 신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될 터.

셰인의 논문에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대우기가 일어나는 이유를 드래곤 하트에 있다고 판단했다.

정확히는 그곳에 드래곤의 사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은 것이다.

"여기에 적혀 있다시피 아예 공상라고만은 할 수 없어. 고대 문헌에 따르면, 드래곤이 죽은 곳 부근에는 드래곤 하트에 깃든 마력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 다양한 괴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하니까. 당시에는 마력 패턴을 짤 기술이 없어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만약 이 논문에 적힌 것처럼 드래곤... 그것도 장로급 드래곤의 사체가 봉인됐다면 그 괴현상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논리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그랬다.

셰인이 한 것은 이미 세간에 퍼져 있는 메자이아 대수림에 대한 논문에 힘을 실어 줄 가상의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거기에 여기 보면 그 이유까지 적혀 있잖아."

[만약, 드래곤이 죽기 직전에 아카샤의 대봉인이 이루어졌다면 메자이아 대수림에 끝없이 펼쳐진 마력의 파장에 대한 정의가 가능해진다.

대봉인으로 인해 만들어진 던전은 '멈춰진 세계'이기 때문에, 마력 또한 가둬진 채로 세계의 의지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당시의 현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비록 세계의 의지에 의해 마력이 봉인되었다고 하지만, 마력이란 본래 세상을 이루는 요소. 세계의 의지에 완벽히 저항하진 못 했으나, 자신들로 인해 망가진 자연을 되돌리고자 끊임없이 자신들의 원소를 바꾸는 것이다.]

논문에 나타난 이 가설은, 여러 학파에 속한 학자들이 과거 자신들이 냈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논문을 끄집어내 교차 검증하는 등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물론 아직 던전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지금은 시작 단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학자들만큼 불타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은 학자들만큼 뛰어난 지식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말하길,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죽은 드래곤의 사체가 잠들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는 단숨에 모험가뿐만 아니라 귀족들조차도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니 남들이 선점하기 전에 우리가 데려가야지.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다는 거 아냐."

"후.... 그럼 하다못해 시험은 치러 봐야겠습니다. 그 5대 요람 아닙니까. 그곳에 데려가는 만큼 최소한 자기 몸을 지킬 수준은 되어야겠죠."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언제 내 멋대로 한 적 있나."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만?"

그렇게 둘이 한참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방문을 열리며 다른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지휘학과 교수 자하드라고 합니다."

"여, 자하드! 오랜만이야?"

젋은 축에 속하는 자하드 교수는 라비아타의 인사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예. 오랜만입니다."

"참나. 딱딱한 건 여전하네. 그래도 같은 동기인데 말이야."

"라비아타의 공주님 아니십니까. 예의를 지켜야지요."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그 이동국가 라비아타라.'

지금은 사라진 헤르메스 모험단과 동격을 이루고 있는 라비아타 모험단.

소수정예의 모험단으로 '이동국가'라는 이명을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지닌 존재들.

실제로 그들은 아직 7대 요람이 자리하고 있을 적, 첫 번째 요람과 두 번째 요람의 토벌 작전에 큰 기여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라비아타가 드래곤 하트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은 전생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하니 처음부터 이동국가가 직접 나설 줄은 셰인조차 생각지 못했다.

"하여튼 그게 딱딱하다는 거야. 그래, 저 무표정한 녀석이 소란의 주인공인가?"

"맞습니다. 셰인 생도. 인사하세요. 이쪽은 이동국가 라비아타 모험단의 주인인 라비아타 클로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클레이튼 R 셰인입니다."

셰인이 앞서 얌전히 인사하자 라비아타가 흥미를 보였다.

"이야. 소문으로 듣던 거랑은 다르네. 게다가 클레이튼이면 꽤 유명한 가문인데... 예의도 바르고."

자신을 만나기에 앞서 먼저 조사를 했다는 걸까.

셰인은 굳이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답했다.

"메자이아 대수림 탐사의 협업과 관련돼서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라비아타도 씩 웃었다.

라비아타는 다른 국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신분이랄 것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이동국가 라비아타의 주인을 감히 누가 얕보겠냐마는, 귀족의 신분도 아닌 자가 귀족을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는 셰인을 기꺼이 본 것이다.

그만큼 이쪽 세계의 기본은 알고 있다는 의미였기에.

"음, 본론부터 꺼내는 것도 내 성격하고 맞고. 좋아, 우선 네가 말한 용건으로 찾아온 거야. 당연하지만 이 논문 때문이지."

"당연히 메자이아 대수림까지 동행하겠군요."

"잘만 계약이 된다면 요람 안에서 활약할 기회도 생기겠지."

라비아타는 스스로가 갑의 위치에 있음을 잘 아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 셰인이 제아무리 연합국의 거대 상단의 집안이라고는 해도, 라비아타쯤 되는 모험단을 압박했다간 전 국민에게 배척당하게 된다.

연합국에게 있어 모험가란 반쯤 신성시되는 존재들이었으니.

셰인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대로 얌전히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어떤 조건인지 봐도 되겠습니까?"

"성격 한 번 마음에 드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모험단이 아직 내 독단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어서. 제임스!"

라비아타의 부름에 여태 옆에 서 있던 청년이 앞장섰다.

"안녕하십니까. 라비아타 모험단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아르디아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셰인도 똑같이 인사를 하자, 제임스가 설명을 이었다.

"알다시피 메자이아는 그 험난한 자연재해에 걸맞도록 위험한 몬스터들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무력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습니까."

"예. 앞서 알아본 바, 셰인 생도의 실전 평가는 작년까지 그리 좋은 평은 받지 못하고 있더군요."

맞는 말이다.

회귀 전, 이 시기의 셰인은 클라인에게 압도되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잔뜩 위축된 상태였고, 마법사에게 그런 심리 상태는 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어떤 대련을 하든 쉽게 당황하고 감정의 컨트롤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평가 점수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을 터.

"물론 어느 정도 평균은 됩니다만... 솔직히 이 정도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진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 판단됩니다."

제임스의 표정에는 별다른 악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눈에서는 스스로의 주제를 알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스스로의 주제를 알아야, 본인이 나설 때와 그러지 않을 때를 분간할 테니까.

실제로 제임스는 여전히 셰인과의 협업은 시기상조라고 보는 입장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싹이 명예에 취해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이 먼저 협업을 하자고 요청해 놓고 이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예의와 거리가 멀었지만.

"자자,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고──."

"테스트가 제게 필요하다면 치르겠습니다."

"응?"

반대로 셰인과의 협업을 원하던 라비아타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할 때, 셰인이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먼저, 계약 조건부터 듣도록 하죠."

그러면서 셰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제임스를 바라봤다.

"...이건 제 실수로군요. 인정하고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셰인의 눈빛에 제임스가 먼저 한 발 물러섰다.

그 이름 높은 라비아타 모험단의 회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셰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만한 명성을 지닌 모험단이었기 때문이다.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 앞에서는 언제든 예의를 잃을 수 있었지만, 계약 하나만큼은 반드시 절차를 따라야만 했다.

당장 제임스는 셰인에게 계약내용도 보여 주지 않고 다짜고짜 테스트부터 봐야 한다 주장했으니.

이는 명백히 모험가로서의 기본 질서를 지키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제임스는 스스로의 행동에 일말의 변명도 없이 깔끔한 사과를 내놨고, 셰인도 조용히 받아들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라비아타와 제임스의 내면에 셰인에 대한 점수가 조금 올라갔다.

적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는 아니겠구나.

"흠...."

건네받은 계약서를 바라보며 셰인은 찬찬히 읽어 나갔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테스트는 어떤 식으로 진행됩니까?"

"던전의 진행은 앞서 아카데미의 시험으로 충분히 봤으니, 순수한 무력을 볼 예정입니다. 간단한 대련입니다. 저하고의 대련을 통해, 제 몸에 손이 닿는 것을 셰인 생도의 승리 조건으로 정하겠습니다."

거기에, 자신은 마력을 쓰지 않겠다는 제임스의 덧붙임까지.

비록 그는 라비아타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등급 모험단의 어지간한 베테랑보다도 강한 무력을 쥐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라비아타 모험단의 재산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

그러나 셰인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제임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조건에 불만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해야...."

다시 한번 셰인이 말을 끊었다.

"추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찾아간 게 아닌, 라비아타 측에서 저를 찾아왔으니 한마디 말해 볼 위치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건 셰인이 아니라 저쪽이라는 말이다.

제임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진 몰라도,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라비아타의 체면이 있었다.

"...좋습니다. 무엇입니까?"

"대련에서 승리 시, 계약에 변경 사항과 추가 사항을 넣고 싶습니다. 대신 대련 상대를 바꾸겠습니다. 제 대련 상대는."

그러면서 셰인의 시선은 제임스에서 뒤쪽 소파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던 라비아타가 있었다.

"엥. 나?"

물론, 그 웃음이 황당함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셰인 생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조건이 있어도...."

"조건이 그것뿐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셰인의 말에 자하드가 침음을 내뱉었다.

실제로, 이번 대련은 솔직히 말해 대련이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힘들 정도로 셰인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만들어졌다.

제한 시간은 총 10분.

10분 안에 셰인이 라비아타의 신체에 물리적 접촉을 하지 못하면 테스트는 탈락이고 동행은 무산된다.

물론 라비아타의 무력이 무력인 만큼 그녀는 대련이 시작되고 5분 동안 일정 구역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페널티를 가지고 있으나.

아무리 마력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라비아타쯤 되는 인물에겐 그까짓 마력이 없다 하더라도 셰인 정도의 무력을 짓밟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터.

말이 10분이지 5분 후 라비아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셰인이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수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거기에 상대할 방법도 미리 생각해 뒀습니다. 그리고, 테스트에 실패한다 해도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물론 그 유명한 라비아타 모험단과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은 아쉬울 테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셰인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비단 라비아타 모험단만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제가 더 이상 참견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자하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셰인은 이내 아카데미 내에 마련된 대련장에 도착한 라비아타와 마주섰다.

"자, 준비는 됐겠지?"

"예."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간단한 준비 동작조차 없이 라비아타는 대련장 한가운데 서서 셰인을 바라봤고, 셰인은 기다릴 것도 없이 양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라비아타가 셰인의 손에 마력이 집중됐다는 것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파앙-!

주먹만 한 마력탄이 라비아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1화

21화 메자이아 대수림 (3)

마법사의 캐스팅 속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오가고 있다.

그야 던전은 항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고, 그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캐스팅이 전제되어야만 마법사들도 안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마법사는 메모라이즈 마법으로 미리 준비하고.

또 어떤 마법사는 스크롤을 마련해 두고 위험에 대응하기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즉발 캐스팅이다.

아무런 전조 없이 검사가 검기를 뽑아내듯 곧바로 마법을 쏘아낼 수 있는 능력.

많은 탐험 마법사들은 그러한 경지를 꿈꾸지만, 실상 그 경지에 다다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라비아타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

그녀의 주변에서도 즉발 캐스팅을 하는 마법사가 없던 것도 아니거니와, 더불어 이런 걸로 놀라기엔 그녀는 너무 많은 상황을 겪어 왔다.

파앙-!

간단히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셰인의 마력탄이 조각나 사방에 퍼졌다.

물론 셰인 또한 라비아타가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하진 않으리라 예상했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호."

즉발 캐스팅을 할 수 있는 마법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듯 1초에 수차례 가능한 마법사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잠깐 사이에 바람처럼 날아오는 6개의 마력탄이 다양한 곡선을 그리며 동시에 날아왔다.

"흡."

그 파괴력 하나하나가 묵직한 돌덩이를 날린 것과 같아, 잘못 맞으면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질 만한 것들이었지만.

라비아타는 한 차례 숨을 들이마시고는 순식간에 모든 마력탄을 주먹으로 때려 부숴 버렸다.

"후. 알아본 거랑 진짜 많이 다르네?"

"...."

라비아타는 나름 진심을 담아 칭찬을 했지만, 셰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다중 캐스팅을 이루어 낼 뿐.

다시 한번.

"오? 또 있어?"

이번에는 셰인도 가만히 서서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라비아타를 중심으로 외곽을 돌면서 마력탄을 소환하는 좌표를 지정.

이번에는 앞뒤로 마력탄이 날아들며 사방을 포위하듯 날아왔다.

라비아타의 눈에 경탄의 빛이 어렸다.

단순히 마력탄을 많이 소환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마력탄은 느리게, 어느 마력탄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제각각의 속도 차를 그리며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외곽을 도는 셰인의 움직임은 상대의 주의를 이끌면서 거리를 벌리는 역할까지.

철저한 심리전을 구상해 두고 이뤄지는 대련은 평범한 아카데미 생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노련했다.

마치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 많은 경험을 가진 것처럼.

그 점이 다시 한번 라비아타에게 옅은 재미를 선사했다.

이런 타입의 인재는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에.

"하압!"

또 한 번 짧은 기합과 함께, 라비아타의 주먹이 뻗어 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력탄을 동시에 터뜨렸다.

그렇게 마탄 세례가 끝났음에도, 셰인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후우...."

아직 뭔가 더 보여 줄 게 있는 걸까 싶어 라비아타가 숨을 고르는 셰인을 보기 무섭게, 다시 한번 마력탄이 방출되었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 봐 왔던 공격이었던 만큼 슬슬 지겨워지려던 찰나.

방출된 마력탄은 이번엔 라비아타를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

한 번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마력탄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는가 싶더니, 마력탄들이 벽이나 천장에 부딪치며 그 경로가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한 것이다.

기이하게도, 마력탄은 부딪힐 때마다 터지기는커녕 속도를 더해 갔다.

이내 상황을 지켜보던 자하드조차도 눈으로 쫓기 힘들어질 속도가 되어 대련장 내부를 질주했고.

그러던 어느 순간.

벽과 천장, 바닥에 튕겨지던 마력탄은 일제히 라비아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이, 이야...."

노련함에 더불어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한 마력 제어 능력.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이 공격에 분명 허를 찔렸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에서 수많은 적들과 얽히며 몬스터의 움직임을 읽는 데 도가 텄던 라비아타의 동체 시력을 속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는지.

라비아타는 재미있다는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전방위로 덮쳐오는 마력탄을 거의 동시에 주먹으로 쳐 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내뻗은 주먹에 터진 마력탄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과연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의 움직임.

하나 라비아타는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태연히 셰인을 바라봤다.

"진짜, 대단해, 진심으로 감탄했어. 이 정도면 난 합격이라고 보는데? 솔직히 처음 공격들은 파괴력이 낮아서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았는데, 마지막 건 좋았어."

제법 주먹이 얼얼했다고, 라며 라비아타가 박수를 쳤으나.

셰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라비아타를 바라봤다.

그렇게 다시 한번 셰인의 손에 마력이 모이는 것을 느낀 라비아타는 이쯤해서 그만 끝낼까 마음을 먹었다.

그때.

"그래도 발버둥 친 보람은 있군요."

"응?"

"시야는 확실히 돌릴 수 있었습니다."

"...?!"

아주 은밀하게.

허공에 수놓인 거미줄처럼.

그간 라비아타에 의해 터져 나가 바닥에 흩어져 있던 마력탄의 흔적들이 가느다란 선을 만들며 이어지는 것을 본 직후, 셰인이 주먹이 앞으로 나아갔다.

* * *

룬어를 기반으로 다루는 마법의 대표적인 장점은 바로 범용성에 있었다.

수많은 수식으로 마력이 통하는 길을 만드는 일반적인 마법과 다르게, 룬어는 그 자체만으로 마력을 담고 있기에 숙련만 된다면 굳이 시동어가 없더라도 바로 쓸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마법과 다르게 알고 있는 룬어만 많다면 다양한 조합 또한 가능했으니.

조금만 집중한다면, 지금의 여기에 펼쳐진 현상처럼 만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멀리서 둘의 공방을 지켜보며 감탄하기 바빴던 자하드 교수는 방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질 못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지만, 마력현상을 연구하는 자하드조차도 단번에 알아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눈으로 관측된 것은 단순히 셰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천천히 주먹을 내지른 것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라비아타의 앞에 있었으니까.

마치 셰인이 서 있던 공간 자체가 이동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라비아타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하... 하하...."

순간 현기증을 느끼기도 잠시.

어느새 셰인의 주먹이 자신의 배에 닿아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블링크?'

최소 6서클의 마법사가 쓸 수 있다는 그 마법?

아니.

아니다.

라비아타는 여태껏 수많은 마법사를 봐 왔고, 실제로 그녀의 모험단에도 블링크를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지만 다르다.

단순히 블링크뿐이라면 지금 자신의 현기증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방금 막 일어난 사태를 천천히 되감아 보았다.

여태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마력탄의 조각들이 마력으로 만들어진 실에 연결되는가 싶더니 공간이 팽창했다가 단숨에 쪼그라들었다.

"...?"

수많은 던전을 다니며 다양한 괴현상들을 직접 목격해 온 라비아타조차 대응할 수 없을 정도의 이상 현상.

물론 마력을 쓸 수 있다는 전제하였다면 그 전조를 놓쳤을 리 없었으나,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것은.

"수고하셨습니다."

테스트에서 셰인이 통과했다는 것이었다.

* * *

"흐음...."

방금 막 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셰인은 정신적 피로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전까지 라비아타에게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냐며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마법사에게 비전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제임스가 나서서 그녀를 극구 말렸지만 말이다.

자하드 교수 또한 마력을 탐구하는 이로서 내심 궁금한 듯 보였으나 마찬가지로 라비아타를 말리면서 후해진 조건으로 계약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더구나 방금의 대련은 육체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옆구리에 난 상처는 여전히 정령으로 틀어막은 채 회복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뛰어다니며 마력탄을 쏟아붓고 다니면서도 다중 캐스팅을 했던 것도 몸에 무리를 줬다.

셰인은 마력탄을 처음 쏘아낸 순간부터 다른 한쪽으로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는 삼중 룬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셰인이 펼친 룬 마법에 들어간 룬어는 '팽창'과 '굴절', 그리고 '수축'.

공간을 찰나의 찰나에 팽창시켰다가 복구하는 것으로 공간 자체에 유연성을 추가시키고, 거기에 굴절로 부드러움을 넣었으며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수축시켜 셰인과 라비아타의 거리를 줄여 버렸다.

말하자면, 공간 자체를 뒤틀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라비아타가 현기증을 일으켰던 이유였고.

그때까지 셰인이 마력탄을 날렸던 것은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한 밑 작업임과 동시에 라비아타가 캐스팅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든 눈속임이었다.

그렇게 방금 전 대련에 대한 간단한 복기를 마치고 있을 때, 클라인이 다가와 어정쩡한 얼굴로 셰인을 맞이했다.

"아, 형님!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적당히 잘 끝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예. 아버지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 셰인은 클라인과 함께 통신 수정구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잠시 후, 연결됐던 수정구로부터 아버지, 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 시간은 좀 되느냐.

"예."

-이제 너의 나이가 몇이지?

갑자기?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

아버지가 아들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셰인은 그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이건 지난 생에 없던 일인데.

"열여덟입니다."

-그렇군. 슬슬 너도 가문의 사람으로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질 나이가 됐구나.

"혹시."

-그래. 너와 관련해서 약혼 제의가 들어왔다.

"예?!"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셰인이 아니라 클라인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2화

22화 무아지경

"클레이튼 백작이라. 과연 우리 말에 순순히 따르겠나?"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의 물음에 부하로 보이는 이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클레이튼 백작이라면 살리에르 백작의 공백을 메꾸면서도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내가 알기론 클레이튼 백작은 돈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상인이던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최근에 보인 행보를 보면 금전적 이득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는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남자, 올리버 G 대니얼은 부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합국의 시장에서 클레이튼 가문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결코 낮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군 또한 클레이튼 가문과 선이 연결되길 바라고 있을 정도였으니.

"좋다. 한데, 정치적 움직임이라는 건 무엇이냐. 그 치는 어느 조직에도 후원을 하고 있지 않을 텐데?"

클레이튼 백작은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돈자루를 푸는 가문이 아니었다.

간혹 뿌린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건 공공의 이익이나 거래의 성사를 위해서지,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아직 후원처럼 대놓고 행동은 하고 있지 않으나, 최근 들어 귀족들의 연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흠... 그 클레이튼이 그렇단 말이지."

연회가 단순히 먹고 노는 장소가 아닌 만큼,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는 귀족계의 분위기를 염탐하고 있는 것이라 봐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아네이스의 나이가 올해로 몇 이었지?"

"열일곱입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클레이튼 가문의 천재 또한 같은 나이라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로웰 가주의 성격은 굉장히 신중한 편입니다. 그 정도의 이름을 날리는 아들의 혼사 문제는 꽤나 신중하게 나서지 않을지요."

"그렇다고 우리 저지먼트 기사단의 딸이란 이름이 결코 작지는 않을 터."

아니, 오히려 이름값만 따진다면 클레이튼 가문은 저지먼트 기사단에 미치지 못한다.

일개 상단 가문과, 대전쟁 때부터 황실을 보좌해 온 기사단의 이름값이 어찌 같을까.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귀족들의 순혈주의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쯧. 그놈의 순혈주의자들."

그러나 현재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아네이스는 전 단장,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친딸이 아니었으니.

서로의 이름값은 부족하지 않으나, 이쪽에서 명분이 부족한 것은 맞았다.

"로버트여. 그대의 충심은 결국 죽어서까지 나를 귀찮게 하는군. 가는 길에 자식이라도 하나쯤 남기고 가지 그랬나."

지금도 그 큰 등이 떠오른 대니얼은 잠시 주먹에 힘을 쥐었다 풀었다.

"그럼 머저리라 불리는 첫째도 괜찮을 테지. 들어 보니 최근 철이 든 것 같다고 하던데."

"예."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와 약속을 잡게. 내 직접 나설 테니."

"알겠습니다."

부하가 방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대니얼은 한쪽 테이블에 위치한 사진을 바라봤다.

자신과 저지먼트 기사단원들, 그리고 전 단장 로버트와 아직 한참 어린 아네이스가 찍힌 단체 사진이었다.

사진 속 자신은 웃고 있었으나, 대니얼은 잘고 있었다.

저 웃음 속에 얼마나 더러운 감정이 가득했던가.

그 더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단장직에 올라왔음에도, 여전히 대니얼의 가슴속에는 질투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자리에 서 있으니....

"네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군."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 * *

"야, 약혼 말입니까? 형님의?"

"그래."

수정구로 통신이 끝난 뒤, 클라인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형님이... 약혼을?

물론 그들도 귀족인 만큼 약혼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것은 맞았지만, 여태까지 둘의 아버지인 로웰이 약혼과 관련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형님이 약혼이라니....

최근 셰인이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줬다지만, 한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게 잘 상상이 가지 않는 클라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면 형님도 지금보다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클라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반면, 셰인은 전생과 달라진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네이스라....'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 유명한 저지먼트 기사단의 딸.

심지어 학과시험에서도 3등을 차지한 우등생이다.

안 그래도 아네이스에게는 한 번 접촉할 기회를 엿보고 있긴 했다.

그녀 또한 전생에 셰인이 기억할 정도로 우수한 인간이었으니.

그런데 그런 그녀와 약혼으로 이어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살리에르, 그 벌레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속셈인가.'

셰인의 정체를 알고 접촉해 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셰인은 그 자리에 단 하나의 증거도 남겨 두지 않았으니.

다만 저지먼트가 섬기는 주인에게 살리에르 백작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결코 작지 않았던 만큼, 하루 빨리 그의 빈자리를 채울 궁리를 하고 있었을 터.

셰인은 오히려 이 일이 기껍게 다가왔다.

'오히려 써먹을 수 있겠군.'

아직은 이야기가 오가는 정도니 셰인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보다 클라인."

"예?"

"아직 팀은 안 구했지?"

여기서 팀이란, 지휘학과 생도라면 반드시 해야 할 팀 구성이었다.

지휘학과 생도들은 각자 자신의 팀원을 구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예. 아직은 이론적으로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모집은 미뤄 두고 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구나."

"...?"

"내 논문으로 인해 라비아타 모험단 쪽에서 협업 논의가 들어왔다."

"라, 라비아타 말입니까?"

오늘 따라 놀랄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라비아타의 위명은 클라인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헤르메스 모험단과 더불어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던가!

"학과 시험에 제출한 내 논문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구나. 함께 메자이아 대수림에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세상에! 축하드립니다, 형님!"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클라인.

하나 그것도 잠시, 제 형이 제출한 논문의 내용을 떠올리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이면... 명색이 5대 요람 중 하나 아닙니까."

"그렇지. 많이 위험할 거다."

"끄응...."

만약 메자이아 대수림의 원정을 무사히 다녀온다면 셰인의 명성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것이지만.

반대로 얻는 명성만큼이나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을 터.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클라인. 함께 가지 않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그래."

클라인의 능력은 그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은 몬스터보다 환경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클라인이 곁에 있다면 위험할 일도 없을뿐더러... 클라인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거기에 5대 요람에 들어가는 만큼, 클라인이 직접 구성한 팀이 아니라 하더라도 학과 점수를 얻을 수 있을 테고.

한편 클라인은 내심 큰 감동을 받고 있었다.

형님이 자신을 믿고 이런 제안을 해 준 것일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짐을 하며, 클라인은 셰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다만 그런 클라인의 생각과 다르게 아카데미에 퍼진 소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야, 클라인. 너 라비아타랑 협업하기로 했다며? 진짜 대단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알 로스의 말에 클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맙긴 한데, 내가 하는 거 아냐. 우리 형님이 하신거야."

"어? 그래? 그거 진짜였구나?"

"응?"

설마하니 당사자가 소문을 모르고 있냐며 알 로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임마, 아카데미에 지금 너 형님 관련해서 소문 싹 퍼졌어."

"...? 뭐라고?"

"네가 라비아타하고 협업하는 거에 너희 형님이 숟가락만 쓱 얹었다고 하던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본래 라비아타 정도 되는 수준의 명성을 지닌 존재가 움직이다 보면 소문이야 금세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거기에 라비아타도 관련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분명 클레이튼 R 셰인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건만.

왜 소문이 그런 식으로?

"쯧... 너희 형님, 보기에 많이 바뀌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보였나 봐."

"...."

친구의 설명에 클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형님을 지켜드릴 수만 있다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일어나다니.

"안 되겠다. 어서 빨리 내가 협업에서 빠진다고 공표해야...."

"머리도 좋은 애가 오늘따라 왜 이래? 네가 빠진다고 해서 저런 소문이 없어지겠어? 오히려 너희 형님이 성과를 혼자 독식하려 한다고 욕만 더 먹을걸?"

평민 출신인 알 로스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를 뻥 차 버리려는 클라인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극구 말렸으나, 클라인의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확실히, 이제 와서 빠진다고 하면 정말 로스의 말처럼 될지도 몰랐다.

"하아.... 이걸 어쩌지."

그렇게 고민이 이어지고.

수업이 끝나고 셰인을 만날 때까지, 클라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클라인, 표정이 왜 그러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형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소문?"

주변 소문에 관심이 없던 것은 셰인도 마찬가지였던지라, 클라인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셰인에게 소문에 대해 말했다.

어지간하면 셰인의 열등감을 부추기고 싶지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이 형님의 기회를 빼앗는 것보다는 차라리 형님께 미움을 조금 받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그런 걸 또 신경 쓰고 있느냐."

"예? 하지만 이건 엄연히 형님 혼자서 하신 일이잖습니까."

"클라인."

"...예."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소문에 휘둘리는 머저리들을 상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지키고 있다. 너는 어떠하냐."

"...."

클라인은 올해 아카데미에 막 들어왔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때로는 너의 그런 시선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 두거라. 나는 불쌍하지 않으니까.]

무심코 또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형님이 걱정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는 엄연히 형님이 이겨 내야 할 일.

클라인은 스스로의 태도를 반성했다.

'맞다. 형님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시는데 내가 먼저 설레발 치는 것도 웃긴 일이야.'

실제로 클라인은 형님이 과거처럼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이내 스스로의 내면에 숨겨진 진실을 깨달았다.

'그랬구나. 겁을 먹은 건 오히려 나였어.'

생전 처음으로 형님이 자신에게 잘해 주고 있다.

말투도 이상하게 고풍스러워진 걸 제외하면 주변인들에게 가시 돋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직 한 명 뿐이지만, 형님에게 직접 팀원이 되겠다는 사람까지 생겼다.

모든 것이, 과거의 형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기에.

혹여 형님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진 않을까, 또다시 마음의 상처가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클라인은 마치 스스로의 내면이 맑게 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라인의 내면에 있던 망설임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클라인이 서 있는 상태로 눈을 감으며 몸을 옅게 떨었다.

'무슨?!'

한편, 그걸 지켜보고 있던 셰인은 속으로 작은 경악을 터뜨렸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이따금 하나의 일에 극도로 몰입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고 그 하나에만 정신을 집중한 상태.

그저 많이 집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아지경은 스스로의 내면에 어지러이 퍼진 탁한 기운을 소멸시켜, 존재의 격이 올라가는 현상이었으니.

대부분의 경우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드물게 이런 경험을 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커다란 성장을 맞이하게 됐다.

한데 클라인은....

'고작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무아지경에 이르다니?'

셰인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래야 내 동생이지.'

그리고, 셰인은 용사의 형으로서 더 어울리는 미래를 떠올렸다.

'육체적 성장은 충분한 것 같군. 그럼 이제....'

전투에 익숙한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을 다질 차례였다.

'던전을 가야겠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3화

23화 준비(1)

"약혼, 이요?"

아네이스의 물음에 현 저지먼트 기사단의 단장, 올리버 G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네이스, 너도 알겠지만 다이라의 희생으로 인해 내부에서 말이 많더구나."

"...."

"때문에 폐하께서 우려가 크시다. 지하도시의 벌레들이 힘을 비축하는 것이 장차 인류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지."

그게 약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어른의 사정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아네이스는 일단 잠자코 들었다.

"그에 우리는 직접 지하도시에 간섭하기 위한 첩자를 심어 두기로 했다."

"그래서요?"

"그게 바로 클레이튼 가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대상회를 이끌고 있으니만큼, 지하도시에 적잖은 영향력을 펼칠 수 있으리라 보고 있지."

"네...."

"하지만 아무리 클레이튼 가문이라지만,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다. 때문에 필요한 게 바로 약혼이지."

"아."

그제야 어른의 사정을 이해한 아네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것도, 정의를 위해서 인가요?"

"그래. 또한, 대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

"...알겠어요."

아네이스는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관심이 없었으나.

정의를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그녀가 납득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조건이면 충분했다.

정의와 대의는, 언제나 희생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저지먼트 기사단 또한 위대한 정의와 대의를 위해 스스로의 피를 흘리고 희생하지 않던가.

'그래도, 아쉬워.'

자신의 작은 아버지, 대니얼의 선택이 아쉽다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이 약하다는 것.

절대불변의 막강한 힘이 있었더라면 굳이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결국 아네이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약혼이 확정된 날 바로 셰인을 찾아갔다.

* * *

"그런 이유로, 임시나마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가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됐다."

"으에엑!"

갑작스러운 아네이스의 등장에, 팀원들 모두 놀랐으나 역시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디라일라였다.

아네이스.

그녀가 적을 두고 있는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얼마 전 디라일라의 납치와 관련된 인물이었기에,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그 인물이 디라일라 앞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아, 아니 좀 이상한데? 왜 이 팀에 지휘학과 생도가 이렇게 많아?"

디라일라의 당황도 당황이지만 그녀의 말 또한 타당했다.

본래 지휘학과 생도들은 타 전투학과의 생도들과 팀을 꾸리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팀장으로서 점수를 가장 많이 받는 지휘학과 특성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네이스의 선택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딱히. 왜 이상해?"

"어, 그야 넌 지휘학과잖아!"

"별로. 지휘학과라도 이 팀에 들어올 이유는 충분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다름 아닌 5대 요람 중 하나인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당연히 따라올 점수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요, 다름 아닌 라비아타 모험단과 협업을 했다는 것은 그 어떤 모험가에게도 대단한 명성이 될 테니.

굳이 학과를 따질 것도 없이, 이번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셰인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생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셰인이 모두 무시로 일관하자 그 뒤로 귀찮아지던 것은 클라인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약혼자가 있는 팀을 한번 보러 온 것뿐. 그리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어, 그래? 아, 아니. 잠깐 약혼?"

디라일라가 뭐라 의문을 더 표하기도 전에 셰인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무튼 아네이스도 이번 협업까지는 임시로 함께할 예정이다. 이제부터 들어갈 던전에 대해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끄으응... 오케이."

어쨌든 임시라는 소리에 디라일라가 자리에 앉았다.

굳이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으나, 가능하다면 아네이스와 최소한으로 엮이길 바라는 게 디라일라의 입장이었다.

"최대한 메자이아 대수림과 비슷한 환경의 던전으로 골랐다. 여기서 너희들은 각자의 제약을 건 상태로 토벌에 임하게 될 거다."

"제약 말입니까?"

클라인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메자이아 대수림은 마력을 사용하는 데 많은 제약이 있는 장소다."

셰인의 말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은 몬스터보다는 환경이 위험한 장소다.

여러 던전 관련 수업에서도 들었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은 기우 문제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요람이 전체적으로 마력 불안정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곳에서 마력을 다시금 쌓기 위해서는 위험도 위험이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마력적응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괜찮겠으나, 적어도 지금 우리가 논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셰인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 불안정 현상은 룬어와 관련이 높은 존재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었으니.

남들보다는 제약이 덜한 편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열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던전에 각자 제약을 걸 거다."

"어떤 제약입니까?"

"먼저 클라인. 너는 신체강화에 필요한 마나를 제외하고는 일체 마력을 쓰면 안 된다."

"으음...."

신체강화는 마력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기초적인 전투법이다.

막대한 마력을 무기삼아 싸우는 클라인에게는 큰 제약이나 다름없었다.

"디라일라는 이걸 받아라."

"어, 이건 뭐야. 흙?"

셰인이 건넨 주머니를 열어 보니, 한 줌의 흙만이 담겨 있었다.

"이걸로 뭐 하라고?"

"넌 그 흙만을 무기로 사용해라."

"엑?"

지하인인 디라일라는 굳이 따지자면 대지 속성의 마법사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고작 저 정도의 흙만 있더라도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겠으나.

그건 디라일라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도 대량의 흙을 이용해 질량으로 승부를 보기 때문이다.

"너무 정교하게 다루면 머리 아픈데...."

"참아라."

"끄응...."

일단 팀에 들어오면 어지간해서 팀장의 말을 듣는 게 맞다.

실제로 이렇듯 모험단의 리더는 동료의 실력향상에도 많이 관여를 하는 편이기에.

이어서 아네이스가 셰인을 바라봤다.

"나는?"

"음."

아네이스의 말에 셰인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애초에 아네이스는 셰인이 생각하고 있던 전력이 아니었기에.

물론 그녀도 미래에는 중요한 인물이 될 테지만, 아직까진 접촉할 예정이 없던 인물이기도 했다.

아네이스는 이후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클라인만큼 많은 역경을 겪긴 하지만, 그거야 셰인이 알 바 아니었다.

클라인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챙겨 줄 필요가 없었고, 디라일라처럼 아예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경우도 아니었으니.

"너도 클라인과 비슷하게 신체강화만으로 마력을 쓰도록. 그리고 하나 더."

"응."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러라."

"...? 알았어."

셰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아네이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셰인은 본격적으로 훈련에 필요한 던전에 대해 설명했다.

"던전의 타입은 숲과 동굴, 그리고 땅굴이 포함된 다중 던전이다. 크기는 중형이지."

"생각보다 크군요."

"난이도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주요 몬스터는 랫맨과 트롤, 워 보어와 매스 고블린, 레더 코볼트 정도다."

다중 던전은 셰인이 말한 것처럼 여러 몬스터가 아울러 지내는 던전을 뜻했다.

이런 던전의 클리어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은 두세 팀의 모험단이 들어가 각자의 영역을 맡고 클리어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다.

그 외에는 지금의 셰인처럼 독식 형태로 던전을 클리어하는데, 이럴 경우 던전에 머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지며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도 독식하게 되겠지만.

"시작은 땅굴이다. 그다음으로 동굴이고, 그 앞에 숲이 우거져 있다고 하는군."

앞서 탐사 전문 마법사가 자신의 소환수를 다루는 패밀리어 마법으로 알아낸 정보였다.

그 외에도 던전의 특징, 몬스터의 습성 등을 한 번씩 훑어 준 셰인이 다시금 말했다.

"비록 제약을 걸긴 했으나,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즉시 제약은 신경 쓰지 말고 토벌에 임하도록, 이상. 질문 있나?"

그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디라일라였다.

"근데 넌 제약 같은 거 없어?"

"난 항상 제약을 걸고 싸운다."

오리진의 힘을 주로 다루는 셰인은 지금의 신분으로 그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니 이게 제약이 아니면 뭐가 제약일까.

하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디라일라가 얼굴에 연신 물음표를 띄웠으나 셰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던전의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 * *

죽은 몬스터가 다시 살아나고, 파괴된 지형이 복구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

던전은 중추가 파괴되지 않는 한 끝끝내 재생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마법사가 던전의 기현상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매달렸지만, 여태껏 뚜렷하게 밝혀진 건 없었다.

이는 신으로 추앙받는 아카샤가 행한 봉인으로 만들어진 환경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셰인 일행은 연합국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푸른 파수꾼의 숲]이라는 던전에 도착했다.

"역시 눅눅하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디라일라가 평한 환경이었다.

셰인의 앞서 했던 말처럼, 던전의 도입부는 눅눅한 땅굴에서부터 시작됐다.

동시에 셰인은 품에서 꺼낸 동그란 마공학품에 자신의 룬어를 더했다.

"우와. 이게 그 듣기만 했던 마도촬영기인가 그건가? 대박. 혼자 떠다니네."

마력을 주입시키면 내부에 저장된 마력 회로에 따라 영상을 기록하는 마도촬영기.

던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혹은 전투를 복기하고 실력을 키우는 데 쓰이는 유용한 물건이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바로 가격.

어지간한 모험단이라 해도 구매를 망설일 가격이기도 하거니와, 내구성까지 보장된 상등품은 과장을 더해 한 개 모험단을 꾸릴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던전을 잡은 것과 그에 필요한 비용부담은 모두 셰인과 클라인의 가문, 클레이튼 가에서 지불했다.

로웰의 성격상 이렇게 퍼주지 않았으나, 다름 아닌 라비아타하고의 협업, 그리고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향한다는 말에 로웰치곤 드물게 둘을 크게 칭찬하며 이러한 지원을 보내 왔다.

"보다시피 이걸 통해 앞으로의 전투를 기록하고, 틈이 날 때마다 전투를 복기할 예정이다. 그러니 적당히 할 생각은 버리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으아, 이거 잘못하면 흑역사가 영원히 기록되는 거 아냐?"

"...."

'부유'와 '추적'의 룬어를 적은 마도촬영기가 둥둥 떠다니며 일행의 뒤를 따라왔고, 이어서 첫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의 첫 신호탄이 된 몬스터는 랫맨.

성인 크기에 이족 보행을 하는 쥐 형태의 몬스터다.

교활하기로는 고블린에게 견주고, 경계심은 코볼트 저리 가라 할 정도이기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고블린 정도의 지능을 가졌으며 코볼트처럼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면 그저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힘이 센 수준에 불과한 어중간한 몬스터라는 뜻과 같았다.

통로를 통해 나타난 랫맨의 수는 총 다섯 마리.

이쪽의 수는 고작 넷.

수적 우위에 있기 때문일까?

랫맨은 찌찍 웃으며 거리를 좁혀 왔다.

본래의 랫맨이라면 잘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기본적으로 코볼트만큼 경계심이 많은 놈들이니.

'하지만 여기선 던전의 특성이 발휘되지.'

던전 내의 몬스터는 어지간해서 인간들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법이 없다.

굳이 그러한 상황이 있다면 불리할 때 다른 동료를 부르거나 함정으로 유인할 때뿐.

수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몬스터의 행동을, 자신들을 봉인시킨 아카샤를 향한 증오, 즉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를 향한 증오심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녀석들의 지식 수준은 던전이 봉인된 그때 그대로 멈춰져 있으니.

당시의 인간들은 마력이라는 이 세상의 기본적인 힘조차 쓸 줄 모르는 하등 종족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카샤에 의해 봉인되어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은 랫맨들에게, 눈앞의 인간들은 힘없는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물론, 랫맨도 상대를 보는 눈은 있기에 마냥 눈앞에 있는 적의 수가 자신들보다 하나라도 더 많거나 장비가 월등히 뛰어나다면 망설임 없이 도망쳤겠지만.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클라인. 네가 먼저 실력을 보여 봐라."

"알겠습니다, 형님."

이에, 클라인 또한 전투에 임하는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어 앞으로 향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4화

24화 준비 (2)

클라인의 검술은 본능을 기반으로 한 변칙적인 검이다.

과거, 처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클라인은 어떻게 검을 잡아야 밸런스가 깨지지 않는지, 검의 경로를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이 내린 축복.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천재 중의 천재.

그런 클라인에게 검술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마력 감응력이었다.

클라인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마력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클라인의 파괴적인 마력에 대항할 자는 그리 많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클라인의 검술은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멈추고, 압도적인 마력을 보조하는 식으로 격하되기 시작했다.

셰인은 바로 그 점을 콕 집었다.

분명 클라인의 마력은 대단하나, 그게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는 법.

훗날 클라인이 성검을 얻기 전까지, 셰인은 클라인의 검술을 보다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끼익!

선두에 선 덩치 큰 랫맨이 먼저 달려들었다.

놈들은 성인만 한 덩치도 위협적이지만, 강철과도 같은 내구성을 지닌 손톱 또한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놈이 먼저 손톱을 휘두르며 클라인에게 공격을 가했다.

클라인은 그런 랫맨의 공격을 뒤로 물러나 피하고 일격에 랫맨의 심장을 꿰뚫었다.

-찌직?!

무리 중에서 제법 덩치가 큰 녀석이 한 번에 죽은 것을 보고 남은 네 마리의 랫맨이 움찔거렸으나, 이내 동시에 공격해 왔다.

두 마리는 사족 보행으로 몸을 낮추고, 벽과 천장을 타며 달려들었고, 다른 한 마리는 아까처럼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에 클라인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최소한의 마력으로 강화된 다리에 힘을 싣고 단숨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최소한의 마력으로 강화할 수 있는 것으로는 랫맨의 동체 시력을 속이기 힘들었다.

-끼이익!

잠깐 당황한 두 랫맨이 위아래로 손톱을 휘둘러 오는 것을, 클라인은 벽을 타는 것으로 회피하고 그대로 정면에 있는 랫맨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우와. 화려하네."

디라일라의 말처럼 클라인은 화려한 동작으로 랫맨을 넘어뜨림과 동시에 검으로 놈의 심장을 꿰뚫고 그대로 뒤돌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자신들의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남은 두 마리가 서로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쳤으나, 그들의 뒤에는 셰인과 일행이 있는 상황.

이에 두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클라인은 어렵지 않게 한 마리의 목을 베며 공격을 회피했으나.

-찌지직!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랫맨이 울었고, 클라인의 검에서 살아남은 랫맨도 함께 울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를 선택했다.

이미 다섯 마리의 동료 중 셋이 당한 상황.

랫맨은 여기서 모두 죽기보다 다른 동료들을 더 불러 온다는 선택지를 택한 것이다.

-찌직?! 케헥!

그러나 그걸 지켜보고 있을 셰인이 아니었다.

어느새 소환된 마탄이 두 랫맨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고, 놈들은 눈을 까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클라인."

"예, 형님."

"형편없구나."

"...!"

클라인의 가슴에 그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반나절 정도 이어진 토벌 이후, 일행들은 그럭저럭 쓸 수 있는 안전지대를 발견한 뒤에야 전진 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는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마친 후에야 셰인의 입이 열렸다.

"우선, 클라인. 너부터 시작해야겠다."

"...예."

셰인의 말에 일행들은 그가 꺼내는 마도촬영기를 바라봤다.

셰인이 마도구에 마력을 부여하자, 마도구 위로 입체영상이 떠올라, 오는 길에 치렀던 클라인의 전투를 투영했다.

"여기서 클라인의 문제를 파악한 사람이 있나?"

"어... 잘 모르겠는데. 잘한 거 아냐? 전부 일격에 깔끔하게 죽였는걸. 도중에 몇 마리 놓치기는 했지만."

디라일라의 평가였다.

그녀의 말처럼, 클라인은 일검에 적을 죽이며 조금의 빈틈도 없이 적을 상대했다.

때문에 아까 셰인이 클라인에게 형편없다 말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편, 클라인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이어서 아네이스가 입을 열었다.

"상냥하네."

"엥?"

"검이 상냥해."

아네이스의 말에 디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냥해?

적을 일격에 죽이는 검의 어디가 상냥하다는 말인가.

"마치, 몬스터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반드시 일격에 죽이려고 고집하고 있어. 그게 아니었다면 저렇게 놓치는 랫맨도 없었을 거야."

추가적인 아네이스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디라일라 또한 그 말을 알아들었다.

"엑. 그래서 상냥하다는 거야? 뭔 비유가...."

좀 고통스럽더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디라일라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클라인. 너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니 굳이 더 설명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팀에 얼마나 위험을 끼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이는 클라인의 착한 심성에서부터 나오는 나쁜 버릇이다.

"비단 팀에 위해를 끼치는 것뿐만이 아니다. 너의 검에는 망설임이 있어. 그 망설임이 있는 한 너는 육체적 혹은 마력이 성장하더라도 검술에 있어서는 더 이상 진보할 가능성이 없다."

"...."

"나는 내 동생이 그런 반푼이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아."

물론,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전생의 클라인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지지는 않았으나, 반대로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았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그러한 망설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겪었기 때문이다.

셰인은 굳이 그 지경이 되어서야 클라인이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아네이스. 너도 클라인만큼 문제가 심각하다."

"...내가?"

마도촬영기에서 나오는 영상이 이번에는 아네이스의 전투를 보여 줬다.

아네이스의 전투는 말하자면, 예술에 가까웠다.

아네이스의 검은 상대를 일격에 죽이기보단, 틈을 만드는 데 특화됐다.

적에게 빈틈이 나오면 굳이 죽이기보다는 부상을 입혀 전투에서 배제시키고, 다음 행동으로 빠르게 이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덕분에 클라인과는 다르게 놓치는 랫맨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클라인의 눈에는 그녀가 가진 문제가 여실히 보였다.

"클라인의 검이 상대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면, 너의 검에는 생각이 많다."

"...."

셰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알아차린 아네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인의 말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평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확실히, 그 덕분에 네 검술은 '예지'에 가깝다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게 과하다는 말이다."

"동감하지 못하겠어."

그저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에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셰인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일단 이 전투 장면부터 보도록 하지."

셰인이 보여 준 영상은 처음 클라인의 전투에서처럼 다수의 랫맨을 상대하는 아네이스의 모습이었다.

랫맨은 맨손으로 싸우지만, 그 손톱으로 흙벽을 파고 달리며 다방면에서 공격을 가해 온다.

아네이스는 그런 랫맨들의 전투방식을 금세 습득하고, 다양한 패턴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상대했다.

검을 크게 휘둘러 벽과 천장에서 오는 랫맨들을 경로를 파괴한다.

경계심이 많은 랫맨은 단순히 자신들의 이동경로에 검이 훑고 지나갔다는 것만으로 움직임이 느려졌고,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간 아네이스가 정면의 랫맨 두 마리의 다리와 얼굴을 베고는, 동시에 뒤로 몸을 돌렸다.

마력이 실리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라 방금의 공방에서 죽은 랫맨은 없었으나, 아네이스는 차질없이 움직이며 랫맨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도주에 방해가 되는 상처들이었다.

다리를 베거나, 발목을 베거나, 얼굴을 베어 앞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클라인의 전투와 다르게 혈향이 땅굴 내부에 진동했고, 영상 속 디라일라는 속이 안 좋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끝내 아네이스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랫맨은 없었다.

"음, 내가 봐도 깔끔하기만 한데?"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이건... 제가 펼치기엔 힘든 검술이로군요."

본능에 맡기듯 검을 휘두르는 클라인과 다르게 아네이스는 정교한 검술을 선보였으니, 디라일라나 클라인이나 또 다른 천재를 보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네이스, 너의 검은 정교하다. 지금 본 것처럼 약한 상대가 너를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할 거다. 하지만 너와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겨루게 된다면 네가 질 확률이 높아지지. 왜 그런지 아나?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

"아직 그런 경험이 없기에 이런 검술을 펼쳤을 거다. 보다 강한 적이 나타나면 그저 보다 강했기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었을 것이고, 약한 적에게는 기술을 고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아."

셰인의 말처럼.

아네이스는 여태까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적을 상대한 경험이 없었다.

저지먼트 기사단의 일원들은 그야 다들 강한 게 당연했고, 반대로 아카데미에서는 아네이스와 견줄 정도의 상대는 없었다.

몇 번은 클라인과 대련을 한 적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클라인의 마력은 아네이스도 어쩔 방법이 없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네이스는 여태까지 자신과 동등한 상대와 싸워 본 적이 없었고, 보다 자신의 명확한 한계를 깨닫는데 어려움이 있던 것.

그 말을 들은 아네이스는 뭔가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 던전에 괜찮은 상대가 있더군. 녀석과 겨뤄 보고, 클라인과 대련을 펼쳐 봐라. 마력을 쓰지 않은 상태로. 그럼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알았어."

아네이스는 순순히 셰인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팀에 들어온 이상 리더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맞았고, 아네이스가 듣기에도 셰인의 판단이 아예 틀렸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기에.

"그럼, 디라일라."

"윽."

한편, 디라일라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다는 듯 셰인의 시선을 피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영상을 보며 이래저래 참견하긴 했지만, 실상 여기서 가장 무력이 뒤처졌던 것은 바로 디라일라였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도 옷 여기저기 구른 흔적으로 인해 흙투성이가 된 상태였고.

"굳이 영상을 보기보다 스스로가 잘 알겠지만, 그래도 일단 봐 보도록 하지."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그래도 봐라. 직접 보는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니까."

"끄응...."

이어서 마도촬영기에서 디라일라의 모습이 비춰졌다.

-이런 씨발!

"크흠!"

시작부터 디라일라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랫맨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전투에선 감정이 격해지기 마련이니 욕을 한다는 것 자체로 뭐라 하진 않아. 하지만 적에게 눈을 떼고 저렇게 구르는 건, 그것도 다대일 전투에서 저러는 건 자살행위다."

클라인과 아네이스하고는 다르게 디라일라에게는 전술적으로 해 줄 조언이 많았다.

어쨌든 셰인 또한 마법사였고, 기본적으로 디라일라도 셰인처럼 시동어 없이 마법과 비슷한 이적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기에.

"한 줌의 흙을 사용해 랫맨의 내부로 침투시키고 안에서 헤집는 것은 좋은 공격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대일 전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전투법이다."

셰인의 말처럼 영상 속 디라일라가 조종하는 한 줌의 흙이 랫맨의 입과 코에 들어가 내부를 헤집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디라일라가 이어지는 다른 랫맨의 공격을 대응하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게 된 것이다.

"전사도, 마법사도 둘 다 멀티태스킹이 중요하지. 전사는 전투 중에도 외부의 위험요소가 없는지 미리 파악해야 하고, 마법사 또한 비슷하게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위험이 없는지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전사는 가능하고 마법사가 불가능한 이유를 아나?"

"어, 모르겠는데."

"전사와 다르게 마법사는 제5감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5감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감이다."

누구나 한 번쯤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시선에는 그 어떠한 물리적 법칙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 타인의 시선을 눈치챌 수 있을까?

바로 인간이 타고난 다섯 번째 감각, 기감 때문이다.

"전사는 최전방에서 타인의 기감에 가장 많이 노출된다. 때문에 살기에 민감하지."

하지만.

"후방에서 마법을 쏘는 마법사는 그 기감이 무딘 편이다. 그 차이가 전장에서 생과 사를 가르지."

그러면서, 셰인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디라일라를 바라봤다.

"그러니, 몸소 살기를 느껴 보고 그 편린을 기억해라."

"아...?"

그 직후 디라일라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움직임이 멈췄다.

손과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은 묵직한 돌덩이라도 올려 둔 듯 자유롭지 못 했다.

숨 한 번도 들이쉬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상황.

그리고 그 현상이 어디로부터 발생됐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셰인에게서부터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살기라는 거다. 지금 느끼는 그 감각을 잘 새기도록."

"흐극."

'잘 새기라고? 이런 미친!'

이건 뭐라 해야 할까.

새기고 싶지 않더라도 알아서 세포 단위로 새겨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과도한 공포에 몸이 경직되고, 그로 인해 도망치라는 뇌의 명령을 다리가 거부한다.

절대적인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의 감각.

그렇게 30여 초 더 지속되고 나서야 셰인은 살기를 거뒀고, 디라일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았다.

"시, 씨발...."

"디, 디라일라 양?"

그 사이, 아네이스와 검과 관련해 대화를 주고받던 클라인이 당황하며 다가왔다.

아네이스 또한 무슨 일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디라일라를 바라봤다.

고작 30초.

그사이 디라일라의 구릿빛 피부가 창백해지고, 어마어마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으, 씨발! 지릴 뻔했잖아!"

"지, 지리다니 그게 무슨...."

그 말에 클라인이 얼굴을 붉혔으나 디라일라에게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방금 네가 느낀 것 보다는 미약하지만, 전방의 전사들은 그러한 기감을 느낀다. 그러니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고."

"으...."

그러자 디라일라는 클라인과 아네이스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

쟤들은 이런 걸 경험하면서 산다고?

물론, 방금은 셰인이 디라일라에게 살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새기기 위해 과하게 선보인 것이지만, 최전선의 전사들은 적과의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며 천천히 그 살기에 익숙해지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 살기를 사람이 뿜을 수 있다는 것도 경악할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지릴 뻔했다는 게 더 빡쳤던 디라일라가 외쳤다.

"이씨.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야! 그럼 너는? 말로만 보여 주지 말고 실천으로 해 봐!"

그 말에 클라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셰인을 바라봤고, 아네이스는 대놓고 디라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의 말은 따르긴 따르겠자만, 그래도 뭐 하나 보여 줘야 보다 믿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분명 형님을 존경하는 클라인이었지만, 적어도 팀장이 됐다면 다른 팀원들에게 그 부분을 납득시켜야 하는 것은 분명했기에.

클라인 또한 셰인을 바라봤다.

"리더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그런 디라일라의 말에, 셰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소화나 시킬 겸 보여 주도록 하지. 따라와라."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5화

25화 준비 (3)

준비를 마친 셰인은 일행들과 함께 임시 캠프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 수십 차례나 토벌된 던전이었기에 길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셋 모두 어려운 제약을 걸고 싸웠으니, 나도 거기에 맞게 제약을 추가하도록 하지."

그러면서 셰인이 스스로에게 내건 조건은, 1서클 마법만 사용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물론 거기에 룬어도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저 평범한 1서클 마법.

그 정도면 랫맨 소굴의 정리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 * *

셰인의 뒤를 따라 움직인 경로는 거대한 돔 형태의 땅굴이었다.

천장에는 대형 야광석이 박혀 내부를 간신히 알아볼 정도는 됐을 정도였고, 그 아래로 랫맨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땅굴 내부를 순찰 중이던 랫맨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행이 공동에 들어서자마자 십수 마리의 랫맨들이 각자의 울음소리를 내며 일행을 향해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 이게 살기인가?"

아까 셰인의 진득하고도 농후한 살기를 맛본 디라일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헷갈렸기 때문이다.

셰인과는 다르게, 십수 마리의 랫맨이 뿜어 대는 살기는 비유를 하자면 칼로 찔린 것과 뭉툭한 젓가락으로 콕콕 찔린 수준의 차이였던 것이다.

"형님, 한 번에 상대하기엔 적의 숫자가...."

1서클의 마법이라고 해서 살상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도 적이 무방비할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그 말에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보기나 해라. 먼저 디라일라."

"응?"

"한 줌의 흙이 얼마나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마."

셰인이 시동어도 없이 1서클 마법, 바람 칼날을 일으켰다.

다른 마법과 다르게 비교적 쉬운 1서클이었기에 가능했다.

"바람 칼날? 그런데 그게 바람 칼날이 맞나?"

셰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마력 패턴을 보고 금방 알아차린 디라일라였으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라일라가 알기에 바람 칼날은 꽤 훌륭한 절삭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유지력이 부족해 희미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마력이 담기지 않은 검에도 손쉽게 유지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근데 왜 저렇게... 두껍지?"

디라일라의 말처럼, 셰인이 소환한 바람 칼날은 그녀가 알던 마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일반적인 바람 칼날은 길어야 50cm 정도인데, 셰인이 소환한 바람 칼날은 말 그대로 검처럼 생겼으니.

"무릇 마법사란 상식에 갇혀서는 안 된다. 디라일라. 왜 너는 너의 흙에 마법을 곁들이려 하지 않지?"

"어?"

디라일라는 지하인이다.

선천적으로 흙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들의 시점에서 그것은 마법과 유사성이 짙어 그녀는 인간들의 사회에서 마법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라일라에게 흙을 다루는 것은 이적에 가까운 힘이지, 마법이 아니다.

때문에 정작 디라일라는 마법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그걸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번거로운 일보다, 단숨에 땅을 뒤흔들고 거대한 성벽을 만들 만큼 디라일라의 능력은 뛰어났으니.

셰인은 그 점을 집어 말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흔히들 정해진 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 막힌 길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선지자라 말하지. 하나 틀렀다."

그러면서, 셰인은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랫맨을 향해 바람 칼날을 날렸다.

"마법사에게 정해진 길따위는 없다. 어느 길에 서 있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하지.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마법은 어디까지나 '걷는 법'에 불과할 뿐, 길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달려드는 랫맨의 손톱이 바람 칼날을 파훼하기 위해 휘둘려졌으나, 바람 칼날은 유려한 움직임으로 랫맨의 공격을 피해 놈의 옆구리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정말 바람 칼날의 절삭력이 맞는 걸까 싶은 위력이었다.

그럼에도 바람 칼날은 조금도 그 형태를 잃지 않고 다음 사냥감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 칼날 또한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하나의 '걷는 법'에 불과하지."

바람은 결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러나 바람 칼날은 그런 바람의 결을 통제해 파괴력이 줄어들었다.

그러는 편이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초보 마법사들이 속성을 다루는데 어려움을 덜 겪을 것이고.

하지만 셰인은 그 뻔한 길을 걷지 않았다.

바람을 통제하기보다 인도했고, 그로 인해 바람의 결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셰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람에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마법에 의지를 불어넣는 것.

마치 검사가 자신의 검에 의지를 불어넣어 검이 홀로 떠다니듯.

셰인 또한 자신의 의지를 바람 칼날에 불어넣은 것이다.

고위 마법사가 이것을 봤더라면 경악에 빠졌을 것이다.

마법사는 마력을 다루는 자이지, 의지를 다루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검사처럼 신체 내부의 우주를 다루는 것이 아닌, 신체 외부의 우주를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그럼에도 셰인은 손쉽게 마력과 의지를 접목시켰다.

단순히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뻗게 할지 선택한 결과였다.

그 광경에 디라일라가 뒤늦게 셰인의 마법에 대해 이론적으로 어설프게나마 이해를 마쳤고, 경악한 표정으로 그런 셰인을 바라봤다.

"마법사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개척자이자 선지자다. 정해진 마력 패턴 따위를 읊고 끝내는 걸로 마법사를 칭할 것이었다면, 모든 도서관의 사서들은 대마법사가 됐겠지."

"미친...."

그 말에, 디라일라는 경악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재정립했다.

셰인의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힘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에서의 마법은 그저 점수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당연했다.

인간들의 마법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지 않으면 지금 자신이 흙을 다루는 수준보다 한참이나 뒤떨어졌고.

설사 시간을 들여 대마법사가 된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면 디라일라 또한 자신의 능력을 보다 개화했을 테니.

한편, 경악에 빠진 것은 디라일라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인과 아네이스.

둘 또한 셰인의 바람 칼날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도,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어느새 소환된 또 하나의 바람 칼날.

두 개가 된 바람 칼날이 유유히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보이는 검로는 마치 클라인과 아네이스.

그 둘이 이 던전에 들어와서 펼쳤던 검술과 흡사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유려하고 아름다운 선을 보이며, 그 안에서 랫맨들의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으니.

둘의 경악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몸을 쓰는데 있어, 나는 클라인 너와 같은 자질은 타고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력을 다루는데 있어서까지 밀리는 것은 아니지."

마력을 이론적 바탕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셰인 본인이 가진 능력.

적어도 이론의 영역에 있어서는, 결코 클라인이 가진 본능의 영역에 밀리지 않는다.

이는 지난 삶에서 타락으로 인해 내면에 갇히며 긴 시간 동안 셰인이 갈고닦아 온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으니.

"잘 보거라. 이게 전장에 있어서 가져야 할 전사의 검이다."

그러니,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펼치는 검술을 이론의 영역에서 파악하고, 분석하고 펼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보다 진보하는 것은 셰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